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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화다 1권 (상)

2017.10.24 조회 2,268 추천 22


 내가 영화다 1권
 글드림 현대판타지 장편소설
 
 차례
 
 제1장 내게 생긴 능력
 제2장 영화사에서 첫걸음
 제3장 강렬한 인연
 제4장 프리 프로덕션
 제5장 메인투자
 제6장 로즈 엔터테인먼트
 제7장 영화 촬영 현장에서
 제8장 감독과 제작실장
 제9장 시사회
 제1장 내게 생긴 능력
 
 
 
 
 
 “휴······.”
 
 신사동의 한 빌딩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24살에 공모전에 입상한 이후 매년 2편씩 내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사에 들고 갔는데 번번이 까였다.
 이번에야말로 될 것 같았는데······.
 
 내 시나리오를 읽는 영화사 제작부장의 표정이 처음엔 좋았는데 중반쯤에서부터 심드렁했다. 각색 좀 도와달라고 전화를 해 댈 때는 간이라도 빼 줄 듯하더니, 원안만 들고 가면 대놓고 귀찮은 표정을 짓는 인간이다.
 
 지난 1년 동안 시나리오 작가로서 번 돈은 달랑 600만 원.
 각색 두 번 참여해서 받은 돈인데 두 영화 모두 엎어졌다. 엎어질 수밖에 없는 작업을 하니까 엎어지는 거다.
 작년엔 더 심했다.
 계약금 천만 원에 선금 300을 받고 기획 단계에서부터 들어갔는데, 그 작품 완성하는 데 열 달이나 걸렸다.
 고쳐 쓰기만 무려 12번.
 초보 각색 작가에 감독까지 머리를 싸매고 겨우 완고를 냈으나, 결국 캐스팅 불발로 투자가 무산되어 영화가 엎어졌다.
 
 시나리오는 분명 좋았다.
 영화사도 쌈마이 소리나 듣는 듣보잡은 아니었다.
 한데, ‘책’이 배우들 소속사에 들어가기만 하면 깜깜무소식이다.
 매니저들이 까내기 때문이다.
 배우가 읽기라도 해야 뭐가 되도 되는 거지.
 젠장.
 그 영화 엎어지고 정말 고민 많았다.
 나이는 차지, 입봉은 못하지.
 무명 시나리오 작가의 미래라는 게 뻔하지 않나.
 출판사에 들어갈까? 아니면 다 접고 일반 기업에 취업이나 할까? 아니면 조금 더 시도해 볼까.
 이런저런 고민이 앞다퉈 밀려왔다.
 
 내 나이 29세.
 1년만 더 지나도 취업하기 어려워지는 나이다. 출판사에 들어가는 것도 그렇다.
 원래, 감독이 꿈이었다.
 영화가 좋아서 시나리오를 썼던 것이지, 글 자체가 좋아서 글쟁이가 된 게 아니다. 학교도 방송영화제작과를 나왔고.
 그러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했다.
 
 살해 위협을 받아가며 정·재계의 유착 비리를 파헤치는 열혈 기자이야기.
 현실에선 보기 어려운 진정한 기자상을 그려 보고 싶었다.
 동문 선배인 사진 기자 형 덕분에 취재도 많이 했다.
 
 흥행 포인트는 분명히 있었다.
 사회 고발 메시지도 있었다.
 주인공 성격도 거침없고, 신문사 데스크가 정부와 싸우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선 내가 봐도 감동이었다.
 그렇게 영화사 다섯 곳을 돌았는데 반응이 비슷했다.
 
 ‘위험부담이 크다.’
 
 싸게 쓸 만한 각색 작가가 낙심할까 봐 말을 돌리긴 했지만 결국 그 말이었다.
 어떤 PD는 국정원이 압박을 넣을 거라는 말까지 했다. 현 대통령이 집권하는 이상 그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면서.
 그냥 재미없다거나, 천만 원이나 주고 살 시나리오는 아니라고 하면 될 것을 엉뚱한 핑계로 까는 거다.
 
 “하······.”
 
 그때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취업을 해야 하나 싶었다.
 이른 나이에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된 것이 결국 독이 되었다.
 당선이 안 되었으면 연출부로 갔거나, 취업 준비를 했을 텐데.
 공모전 당선 당시엔 내가 좀 자만한 것도 있다.
 꿈이 곧장 실현될 줄로 착각했다.
 시나리오 작가로 우선 입봉하고, 메이저 영화사에서 작업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대박 영화에 타이틀을 올리면 영화감독도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영화감독은커녕 작가 입봉도 못했다.
 메이저는 고사하고 삼류 영화사, 신생 영화사, 투자자 등쳐먹는 쌈마이들과만 전전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세상을 모르고, 영화판을 몰랐으니까.
 영화판도 결국 명문대와 연극영화과 인맥이 주류였다. 영화가 극장에 걸려야 잔금이라도 받지. 늘 선금만 받고 고생만 하다가 영화가 엎어졌다.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또 뭐 이리 맑은지.
 
 “후······.”
 
 나지막이 숨을 내뱉었다.
 지금은 연출부에 들어가기에도 늦었다.
 연출부든 제작부든 막내 대부분이 25살 이하다.
 여러 회사에 과 후배들도 있고.
 
 하··· 어쩐다.
 영화 일은 하고 싶은데 시간은 재촉하고.
 여기서 더 버티면 인생 망칠 것만 같고.
 전화를 꺼내 친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업해요?”
 -아니. 어제 각색 하나 넘기고 누워 있다.
 “홍대에서 술 한잔하죠?”
 -무슨 일 있어?
 “예. 인생 상담 좀 합시다.”
 -뭔지 알 거 같네. 먼저 가 있어.
 
 전화를 끊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이번에 내리실 역은······.”
 
 달리는 지하철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멍하게 생각에 빠진 내 표정이 안쓰러웠다.
 옛날 교수님이 술자리에서 술주정처럼 한 말이 있다.
 영화는 천재만 해야 한다고.
 정말 그런 걸까.
 난 천재는 아니어도 창작력과 미학적 감성은 남보다 낫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아니었다.
 사실 서른다섯 정도는 되어야 세상 보는 눈도 생기고, 글도 좀 달라질 것 같긴 하다. 한데 그 나이의 선배들 태반이 지금 내 위치와 별 차이가 없다.
 
 시나리오 작가로 살 것인가. 다른 삶을 살 것인가.
 내게 정말 어려운 문제다.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 * *
 
 홍대 삼겹살집에 가서 소주부터 주문해서 한 잔 마셨다.
 
 “크.”
 
 오늘은 왠지 소주가 달게 느껴졌다.
 그렇게 삼겹살을 굽고 있을 때 시간 맞춰서 선배가 왔다.
 
 “오셨어요?”
 “어, 그래. 빨리 왔네?”
 “네, 앉으세요.”
 “그래.”
 “이모, 여기 잔 하나만 더 주세요.”
 
 선배에게 소주를 따라주었다.
 
 “각색은 잘 됐어요?”
 “아직 몰라. 3고 끝내고 그냥 넘겼어. 천 받고 6개월이나 잡혀 있었는데 엎어지면 잔금 날아가는 거지 뭐.”
 “계약금이 얼마였는데요?”
 “각색 3고 조건으로 천오백. 양 실장이 엎어져도 잔금은 준다고 했는데, 이 바닥 붙어 있으려면 안 받는 게 나아. 잔금 악착같이 받는 놈이라고 찍히면 일만 안 들어와.”
 
 선배가 그제야 한 잔 들이켰다.
 
 탁-
 잔을 내려놓은 선배가 날 보더니 물었다.
 
 “넌 작품하고 있어?”
 “각색 하나 끝내고 내 작품 썼죠.”
 
 내 대답에 선배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 잘나가는 선배들도 못 팔고 있는데, 그게 되겠냐.”
 “일단 하는 거죠 뭐. 형은 아주 포기했어요?”
 “영화는 감독 예술이잖아, 감독 예술. 작가 예술 아니라고.”
 
 선배의 말이 비수처럼 꽂히는 느낌이다.
 형 말대로 작가가 쓴 작품은 작은 영화사에서나 봐주지 메이저에선 취급도 안 한다.
 제작부 직원들이 굴러다니는 시나리오를 우연히 발견한 뒤, 유명 감독을 섭외해서 영화가 제작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전부 감독이 쓴 작품이거나, 영화사에서 기획한 작품이다.
 영화사는 시놉시스를 기획한 뒤, 작가와 감독을 섭외해서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혹은 감독이나 작가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함께 시작하거나.
 
 여기서 나와 선배가 갈린다.
 난 3류급이나 신생 영화사에서 기획 초기에 섭외하고, 선배는 메이저에서도 간간이 섭외한다.
 그러나 선배가 작업한 영화도 절반 이상은 엎어진다.
 선배가 1년에 버는 돈은 약 2천.
 10년이나 일했는데도 일반 기업 연봉에도 못 미친다.
 
 이런 이유로 영화판에는 전업 작가가 많지 않다.
 거의 모든 작가가 입봉을 못하고 사라지거나, 입봉해도 유명 작가가 되지 못해 메이저 언저리를 전전하다가 사라진다. 억대를 버는 유명작가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잠시 생각에 잠긴 나를 본 선배가 말했다.
 
 “너 고민 많구나.”
 “예. 이번엔 정말 접을까 싶어서요.”
 
 선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같은 고민을 선배도 했고, 다른 작가들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 접으려면 지금 접는 게 낫다. 나야 이젠 발을 빼기 어렵지만 넌 아직 이십 대 아니냐. 접기엔 좀 이르긴 해도 더 버텨 보라고 말을 못하겠다···”
 
 잠시 말을 끊은 선배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네 인생 책임질 것도 아니고. 생각해 둔 건 있고?”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출판사나 광고업체에 들어갈까 싶네요.”
 “취업하려면 영화사가 낫지 않아?”
 
 선배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메이저에 들어가기엔 제 스펙이 좀 그렇고, 마이너는 작가나 별 차이 없잖아요. 스태프 막내가 저보다 어리기도 하고.”
 
 선배가 술을 털어 넣고는 웃으며 말했다.
 
 “너, 제작부 일해볼래?”
 “계약직은 좀 그런데······.”
 “계약직 아니야. 지금 대표님만 계시거든. 어때?”
 
 제작부 스태프가 아니라 직원이라는 의미다.
 대표만 있는 영화사의 제작부라······.
 흔치 않은 기회이긴 한데.
 
 제작부 일을 해 보라는 선배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시나리오야 나중에 얼마든지 쓸 수 있으니까.
 선배가 내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찍어 주었다.
 
 “이갑성 대표라고, 10년 전까지 뉴월드 총괄 프로듀서로 계시던 분이야. 형수님과 사별하고 일 그만두셨는데 다시 영화 하고 싶으셨나 봐. 직원은 경리 아가씨밖에 없어. 마이너야 어차피 다들 영세하니까.”
 “10년 전이면 지금은 인맥이 없을 텐데요?”
 “그 양반 영화판에서 20년이나 있었던 분이야. 신생이라도 그 형님 이름값이 어디 가겠냐. 너도 알다시피 신생 영화사가 처음에 필요한 인력이 작가 아니냐. 시나리오부터 개발해야 그다음도 진행할 수 있으니까. 직원 없을 때 네가 가면 딱이다.”
 “생각 좀 하고요. 영화 자체를 접을 생각도 했거든요.”
 “그래.”
 
 나도, 선배도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제작부.
 일 자체로는 흥미롭다. 경험을 쌓으면 프로듀서가 되고, 인맥만 넓히면 영화사도 설립할 수 있다. 영화사 자체는 자본금이 많이 들지 않는다. 시나리오를 잘 뽑아서 투자받으면 그 돈을 회사 운영 자금으로 쓸 수 있다.
 
 일단 제작 일을 배운 뒤 독립 영화라도 찍어 볼까.
 사실 여건만 되면 누구든 감독이 될 수 있는 시대다.
 
 “형은 감독 준비 안 해요?”
 “천만 관객 작가 타이틀은 있어야 어디 가서 연출한다고 말이나 하지. 내 필모가 종잡을 수가 없잖아. 최고 기록이라 해 봐야 600만. 망한 작품도 몇 개 있고. 누가 날 믿고 투자 하겠냐. 어떤 미친 톱스타가 내 작품에 홀딱 반하면 몰라도.”
 “저예산 영화를 찍는 건 어때요?”
 “돈 있으면 당장 찍지. 단편 말고 장편.”
 “스릴러나 공포물로?”
 “당연하지. 돈 적게 들고, 대박 가능성도 높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도 선배처럼 독립 장편 영화를 찍어 볼까 생각도 했다.
 극장에 거는 영화가 아니라 인터넷이나 VOD용으로.
 평이 좋으면 작가로서도 이름이 좀 알려지지 않을까 싶다.
 
 한데 독립영화라 해도 1억 이상이 들어간다.
 배우와 스태프 전원을 학교 후배로 써도 차비와 수고비에 술값, 밥값이 천만 원 이상이고, 차량과 촬영장비 사용료도 수천만 원이다. 영상 보정, 녹음, 편집, 타이틀 그래픽에 들어가는 비용도 상당하다.
 선배가 술을 마시며 말했다.
 
 “그나마 넌 결정할 시간이라도 있지. 지금 내가 다른 일 할 수 있겠냐. 기술도 없고, 장사할 돈도 없고.”
 
 선배의 말에 동의하긴 어려웠다.
 
 “선배는 그래도 풀린 케이스잖아요.”
 “풀리기는 개뿔. 네 나이 때 한 선배한테 그랬어. 나 재능이 없는 거 같은데 계속해야 하냐고. 그때 선배가 그러더라. 이 바닥에서 한 10년만 버티면 중간은 간다고. 그거보다는 낫겠지 하면서 왔는데, 지금 내 위치가 딱 그 정도인 거야. 지금이 내 전성기일까 봐 무섭다 후···”
 
 선배가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뭐, 더 나빠지면 나중에 박 선배 꼴 나는 거지.”
 “박 작가님은 요즘 어때요?”
 “그 형 쌈마이 다 됐어. 영화사 차리더니 본인이 욕하던 인간들 따라 하고 있더라. 쌈마이가 뭐, 처음부터 쌈마이였겠냐.”
 
 일명 쌈마이.
 영화 잘 모르는 부자들 유혹해서 투자받은 뒤 제작하는 척하다가 튀는 인간들.
 형의 말이 이어졌다.
 
 “감독 섭외가 안 된다. 배우 캐스팅이 안 된다 하면서 가짜 서류 만들어서 투자금 빼돌리고 있더라고. 그러면서 계속 투자해 달라고 요구하는 거야. 돈을 받으면 또 그 돈 삥땅쳐서 투자자들 속 타게 하고 말이야. 쌈마이들 때문이 투자가 안 된다. 투자가.”
 
 형이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곤 다시 말했다.
 
 “영화 잘 만드는 척하다가 결정적으로 거액의 투자금을 요구하는 거지. 투자자가 망설이면 예산 문제로 제작이 어렵다는 말을 슬슬 꺼내는 게 순서야. 그러다 투자자가 손 떼면 영화가 엎어지는 거고.”
 
 나도 대충은 알고 있다.
 사기꾼들은 있지도 않은 직원 월급과 진행비. 감독과 배우 접대비. 시나리오 개발비, 부풀린 감독 계약금 등등으로 돈을 빼돌린다.
 무명작가에게 달랑 300주고는 이중 계약서엔 2,000만 원을 준 것으로 속인다. 유명 작가 계약금이 5,000만 원쯤 되니까.
 
 “크.”
 
 형이 소주 반 잔을 마저 마시곤 말을 이어갔다.
 
 “부동산 사업이나 하던 투자자들이 영화를 알겠냐고. 돈만 대면 극장에 걸리는 줄만 알지. 쌈마이들은 애초에 영화를 찍지도 않지만 찍어도 극장 개봉 못 하잖아. 거대 투자 배급사들이 개봉관을 독점하는데 무슨 수로.”
 
 이 모든 현실을 영화판에 들어와서야 알았다.
 지금도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 대다수가 잘 모르고 이 바닥에 뛰어든다.
 영화를 하고 싶으면 연출, 촬영, 조명, 제작 등을 해야지 시나리오 작가는 답이 없다. 연출을 위해 시나리오를 쓰면 모를까.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갑성 대표님 밑에서 일 배워 봐. 시나리오 보는 안목이 있는 분이니까, 작가로 잘 풀릴지 누가 알아.”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만나 보기는 할게요.”
 “그래.”
 
 둘이서 소주 세 병을 마시고 선배와 헤어졌다.
 집으로 오는 내내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제작부로 전향해서 다시 시작해 볼 것인가.
 아니면 아예 손을 뗄 것인가.
 
 캔맥주 네 개를 사 들고 집으로 향하는 골목을 걸었다.
 막상 시나리오를 접으려고 하니 미련이 밀려온다. 포기하려면 지금이 딱 좋은데, 몇 년 더 하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어서.
 
 생각에 빠진 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중국집 배달원 하나가 난폭하게 골목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승용차가 들이받을 듯 달려오고.
 빵빵-
 
 “야, 이 새꺄! 거기 안 서!”
 “어휴! 저 또라이 새끼!”
 
 도로에서 시비라도 붙은 건가.
 벽에 붙은 채 뒤를 보며 걸었다. 당연히 오토바이가 그냥 지나쳐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오토바이가 과속방지턱을 넘는 순간 휘청거리더니 내 쪽으로 확! 들이닥쳤다.
 뭐하는 거야!
 
 “으악! 비켜!”
 
 황급히 피하려 했지만 늦고 말았다.
 벽을 옆으로 들이받은 오토바이가 그대로 내게 덮쳐들었다.
 
 퍽-
 
 오토바이 운전자가 내 몸을 들이받는 순간.
 내 몸이 공중에 뒤집힌 채 떠올라 있었다.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흘렀다. 죽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게다가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것 같았고, 밤인데도 뒤집힌 세상이 환하게 보였다. 정신을 잃는 그 짧은 순간에 그것만은 분명히 보았다.
 
 * *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날 친 놈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벽에 긁힌 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오토바이가 날 치고는 벽을 긁으며 나아갔다가 자빠진 듯했다.
 
 진짜 어이가 없네······.
 그 자리에 앉아 헛웃음만 지었다.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약간 어지럽고, 눈알이 돌아가기라도 했는지 눈의 초점이 좀 안 맞았다.
 다친 덴 없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옆구리와 다리가 좀 욱신거릴 뿐 부러진 곳은 없었다.
 병원에 갈까, 경찰서에 먼저 갈까 하다가 관두었다.
 주변에 CCTV도 없고. 경찰에 신고하자니 딱히 외상도 없고. 사실 좀 귀찮은 마음도 들어서 내일 아침에 몸 상태가 안 좋으면 그때 신고할 생각이었다.
 
 * * *
 
 집에 들어와서 한숨만 뻑뻑 쉬며 맥주를 마셨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일이 다 생긴다.
 머릿속에 빛이 터졌는데 그건 도대체 뭘까?
 
 이마를 만져 보자 혹이 났다. 정확히 미간 가운데.
 오토바이 운전자의 헬멧이나 어깨가 내 이마를 들이받은 모양이다. 그래서 눈알이 제 위치에서 돌아간 듯.
 지금은 시야가 정상이다. 아직 어지럽긴 했지만.
 설마 뇌를 다친 건 아니겠지.
 
 맥주 4캔을 모두 비운 뒤 씻고 침대에 누웠다.
 시나리오는 잠정적으로 접기로 했다. 이갑성 대표라는 분을 만나 보고 인연이라 느껴지면 그분 밑에서 일하기로 했다.
 그렇게 만취 상태로 잠이 들었는데.
 
 밤새도록 두통에 시달렸다.
 뇌와 눈이 타 버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었다.
 흡사 뇌세포가 모두 녹아내리는 것처럼.
 
 길고 긴 밤을 지나고 새벽이 되어서야 통증이 가라앉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야 뇌세포가 녹아내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반대였다. 뇌세포가 모두 깨어난 느낌이 들었다.
 
 멍하게 천장을 보았는데, 천장의 벽지 무늬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착시가 아니라 진짜 그랬다. 이게 뭐지 싶어 한참이나 천장을 보았다.
 내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린 건가.
 그러다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시야에 희한한 환상 같은 게 보였다. 사고 후유증인가 싶어 머리를 흔들어 환상을 떨쳐내자 사라졌다. 그러곤 아무 이상이 없어서 습관처럼 포털 뉴스를 보았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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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G전자 : SG그룹의 대표 기업으로 휴대폰···]
   ↑
 [SG전자] [SG건설] [SG생명] [SG물산] [SG···
 [SG그룹 : 한국의 대기업으로 2016년 영업매출···]
   ↑            ↱ [출석 : 어떤···]
 【SG그룹 이상진 회장이 검찰에 출석.】
        ↓    ↳ [검찰 : 범죄의 수사···]
      [이상진 회장 : SG그룹의 회장. 나이···]
      [형제 이상신] [형제 이상희] [부친···]
          ↓
        [이상신 : SG물산의 사장. 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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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털의 한 줄 뉴스와 연관된 데이터가 갑자기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뉴스 하나의 창이 관련 정보의 창을 만들고 그 창이 또 다른 정보의 창을 만든다. 처음의 뉴스와는 다른 정보가 갈수록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그 정보는 내가 알고 있던 정보가 아니었다.
 마치 하나의 정보와 연관된 맵을 보는 것 같았다. 머리에 무슨 장치를 넣은 것처럼 입체 영상 같은 것이 정보의 창을 형성하며 끝없이 가지를 치며 이어진다.
 
 놀랍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인가 싶던 그때.
 
 “읔!”
 
 머리가 지독하게 아파졌다.
 
 하나의 정보에서 파생된 정보가 수백 개로 확장되어 복잡한 그물처럼 엮여 있었다. 지금도 세부 정보가 확장되고 있다.
 내 두뇌가 처리할 수 있는 용량 범위를 넘어서자 두통이 발생한 거였다.
 뇌세포가 모두 깨어난 게 아닌 건가?
 
 극심해지는 두통에 몸부림치다가 좀 전처럼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떨쳐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정보의 지도가 사라졌다. 두통도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가시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 머릿속에 뭔가 생겼다.
 정보를 분석하는 뭔가가.
 
 * * *
 
 아인슈타인이 뇌를 10% 정도 활용했다던가.
 내 뇌는 최소한 그 이상은 쓰게 된 것 같다.
 몇 차례 실험을 통해 뇌의 능력을 확인해 보았는데 정말 세상 모든 것을 분석할 수가 있었다.
 
 사고의 일시적인 후유증인지, 극히 희박한 확률로 뇌세포가 각성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원래 인간에게 있던 잠재 능력이 우연히 개방되어 버린 것인지.
 뇌의 활용도가 어마어마하게까지는 아닐지라도 높아진 것은 확실했다.
 
 그 불운한 사고가 내게 기이한 능력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이게 행운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도 놀랍고 신기해서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눈에 보이는 사물을 분석해서 시야가 몹시 어지러웠는데 분석을 차단하자 사라진다.
 
 마치 뇌가 하나 더 생긴 느낌.
 기존의 뇌가 내 자아이고, 마우스라면.
 새로 생긴 뇌는 자아의 통제를 받는 인공지능 같은.
 
 놀라운 것은 기이한 능력만이 아니었다.
 기존의 뇌와 새로 확장한 뇌가 완벽하게 구별된다는 점이다. 주인은 확실히 기존의 뇌였다. 기이한 능력을 내 의지로 통제할 수가 있으니 기존의 뇌라고 따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 없이 머릿속에서 확장되며 퍼지는 정보를 차단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다. 밥을 먹을 때도 식단에 대한 정보가 뜰 지경이다.
 천만다행이었다. 내 의지로 꺼 버릴 수 있으니.
 
 시험 삼아 하나의 정보를 가지고 계속 연관 정보를 확장했더니 정보의 창이 수도 없이 만들어져갔다.
 다만 여지없이 두통이 발생해서 더 진행할 수가 없었다.
 
 머리만 아프지 않다면 정보가 무한대로 확장될 것만 같았다. 그만큼 머릿속에 들어차는 정보의 총량도 어마어마하게 커질 테고.
 
 뇌가 정보 네트워크 세계에 들어갔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뇌가 실제로 네트워크에 접속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전혀 모르는 정보들이 뜨고 있었으니.
 
 정보 확장이 1분을 넘어가면 두통이 시작된다.
 머리가 아플 즘에 확장된 정보의 창은 약 200개.
 기존의 내 뇌활용도라면 첫 몇 단계도 못 넘고 머리가 터져 버렸겠지.
 
 “후··· 이거 완전 대박이긴 한데.”
 
 깊은 한숨을 쉬며 능력을 차단했다.
 이 특별한 능력이 두려웠다. 뇌세포를 너무 활용해서 혹시 단명하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면 뇌에 이상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 분명 오토바이에 치여서 머리를 다친 후에 이런 능력이 생긴 거니까.
 
 그래서 늦은 아침을 먹고 종합 병원으로 갔다.
 MRI도 찍고 피검사도 하고 그랬는데 뇌에 이상한 점이 있기는 했다. 출혈이나 종양은 없었다. 다른 환자의 뇌 사진보다 밝다는 차이가 있었다. 어두운 영역도 있으나 일반인보다는 약간 밝았다.
 어두운 부분은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영역인가.
 
 검사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으니 나이가 지긋한 의사가 내게 찾아왔다. 젊은 의사들까지 대동해서.
 
 “혹 두통이 심하거나, 환각 증세가 있지는 않나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능력에 대해 말해 줄 수도 없고.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숨기고 싶었다.
 
 “딱히 두통이 있진 않아요.”
 “음··· 워낙 특이한 경우라 여러 선생이 확인해 봤는데 특별한 징후는 찾지 못했어요. 두통이나 이상 증상이 없다고 하니 건강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네요.”
 “뇌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라는 거죠?”
 “소견으로는 그렇습니다. 혹, 학회에 발표해도 되겠습니까?”
 
 능력이 밝혀질까 봐 걱정되는 마당인데 학회에 보고라니. 이리저리 불려다닐 게 뻔하다. 능력을 안 써도 두통이 생기고 그러면 모를까.
 
 “문제가 생기면 몰라도 지금은 거절하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석 달에 한 번 정도 내원해서 경과를 봐야 합니다. 혹 이상이 생기면 바로 병원에 오시고요.”
 “예.”
 
 의사가 날 설득하려는 느낌이 들어서 서둘러 병원에서 나갔다. 뇌 의학 학회에서 뭔가를 발견하는 바람에 내 이름이 세계적으로 팔리는 건 정말 사양이다.
 
 * * *
 
 집에 돌아온 뒤에는 내 능력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에 돌입했다.
 
 보면 볼수록 놀랍기 그지없는 능력이었다.
 뇌의 능력인지, 뭔지는 몰라도 정보 분석의 지도는 내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했다. 게임의 정보창 형태로도 볼 수 있고, 책을 보듯 문장 형태로도 본다.
 
 처음에 지도처럼 보였던 건 정보를 인식하는 내 첫 의식이 그런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다음 입체 영상으로 보였던 것도 한 차원 높은 방식으로 보려 했기에 그렇게 변한 거고.
 
 텍스트로만 보면 두통이 별로 없고, 입체 영상으로 보면 금세 머리가 아파진다. 텍스트라고 해도 범위가 상당히 확장되면 틀림없이 두통이 생긴다.
 
 홀로그램 같은 영상이 눈에 보이는 것은 뇌가 그렇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나만 보이는 도우미 같은 걸 만들어도 된다. 실존하지 않는 홀로그램처럼 내 뇌가 도우미를 만들어 내고, 나만 그걸 인식할 수 있으니까.
 좀 무섭긴 하지만 다중인격체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그걸 시험했다가 정말 기절할 뻔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여배우 정효주.
 그 아름다운 정효주가 순간 내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내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채.
 물론 뇌가 인식하는 허상이다.
 
 “이름이 뭐지?”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효주잖아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한 꼴이다.
 정확히는 새로운 뇌가 알아서 대답한 거다.
 
 이걸 컴퓨터로 치면 더블 코어라고 해야 하나.
 기존 코어는 386인데 새 코어는 인공지능 급.
 물론 그 인공지능의 메모리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뇌가 어디까지 인지하는 걸까.
 
 정효주를 만져 보자 따뜻한 살의 촉감이 느껴졌다.
 실제로는 없는데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다니.
 뇌의 착각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 난다. 허상이라고 인지하면 손이 정효주의 몸을 관통하여 허공을 휘저을 뿐이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러다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몰라.
 환상에 빠져 허우적대기 전에 정효주를 지워 버렸다.
 
 시나리오를 보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제목과 관련한 숱한 단어들이 스스로 지도를 그리며 확장되어 갔다.
 처음엔 제목의 뜻과 의도가 줄줄이 생겨나더니 그걸 지우고 다른 제목을 생각하자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제목들이 떴다.
 
 원래 제목은 ‘주 기자가 간다’였다.
 그 제목 주변에 다른 제목들이 떴는데 새로 뜬 제목이 더 나았다. 마치 ‘이 제목이 훨씬 더 낫다!’라고 알려 주는 것처럼. 아주 단순했지만 핵심을 찌른다.
 그 중 하나를 선택했다.
 
 [저널리스트.]
 
 이 얼마나 쌈박하고 명료한 제목인가.
 왜 이 제목을 생각 못했을까.
 영화를 보고 난 뒤 저널리스트란 과연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제목이다. 바로 표지 제목을 바꾸었다.
 
 이어 제1신부터 읽어 나갔는데 보이는 문장이 많다 보니 정보의 확장이 너무도 빨랐다. 단어와 문장에 관한 정보와 분석이 무수히 가지를 친다. 멀미가 날 정도로.
 
 그래서 제한했다.
 스토리와 연관된 정보만 뜨는 것으로.
 그랬더니 정확하게 스토리와 관련한 정보만 떴다.
 더구나 정보 탐색 범위가 좁아지면서 두통도 별로 없었다.
 쉬지 않고 시나리오를 쓸 수 있다는 뜻!
 이건 뜻밖의 선물이었다.
 
 먼저 첫 신은 신문사 사무실에 들어가는 장면.
 머릿속 인공지능이 이 작품을 빠삭하게 분석이라도 한 듯 다른 대안이 줄줄이 떴다. 나무뿌리처럼 정보들이 뻗어 나가는지라 이 홀로그램 역시 간략화했다.
 
 기본 맵은 상하 좌우에만 뜨고, 분석한 정보는 한 단계만.
 세부 정보나 가지 치는 정보도 한 단계씩만 확장.
 그렇게 정해 두고 분석한 첫 단계를 보았다.
 장면 하나를 두고 네 개의 창이 상하 좌우에 뜬다.
 
 왼쪽 - 같은 장면에 더 나은 행동과 대사.
 위쪽 - 다른 장면에 같은 행동과 대사.
 아래쪽 - 같은 장면과 유사한 다른 장면.
 오른쪽 - 모든 것이 다른 장면.
 
 왼쪽 창을 선택하자 제2신이 달라졌다.
 세부적으로도 수많은 경우의 수가 나타났다.
 기존 제2신으로 갈 것인가, 기존 제2신에서 다른 내용을 선택할 것인가. 아예 다른 장면으로 갈 것인가. 기존과 유사하지만 더 나은 장면으로 갈 것인가.
 
 무한대로 이어지는 경우의 수다.
 첫 단계로 돌아가서 오른쪽에 있는 [모든 것이 다른 장면]을 선택해 보았다. 생각지 못한 제1신이 떴다.
 이 작품의 내용상 첫 장면으로 가장 나은 것.
 그냥 신문사에 출근하는 장면이 아니었다.
 
 출근하기 전 아침.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인사들의 멘트를 따려고 사생결단으로 들이대는 장면이었다.
 몸싸움. 고함. 터지는 플래시. 악다구니. 그리고 대기업 인사를 당혹하게 만드는 주인공의 질문!
 
 주인공의 성격. 앞으로 보게 될 주인공의 행보.
 사건의 소개.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 영화의 주제.
 기업인과 검찰의 위선. 블랙코미디. 몰입감 등등.
 
 이러한 것들이 첫 장면에 다 들어 있었다.
 이걸 영상화로 돌려 보는 건 어떨까.
 한 배우를 머리에 떠올린 뒤 이 장면을 영상화로 돌리자 마치 그 배우로 영화로 찍은 듯한 영상들이 전개되었다.
 정효주를 만들어 내 실존하는 것처럼 보인 것과 같이 영화 그대로의 화면이 보였다.
 
 롱 테이크로 약 3분간 벌어지는 장면.
 영상이 끝나자 내가 구현한 배우가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인터뷰를 끝냈다. 증인과 참고인이 모두 검찰 청사로 들어간 뒤 물러서는 그 표정에 다양한 감정이 실렸다.
 만족감. 허탈감. 의구심. 체력부족. 짜증. 희열 등.
 배우가 제대로 연기했을 때 나올 명연이었다.
 
 영상화로 돌려 본 이후 엄청난 두통에 시달렸다.
 3분 동안 능력을 썼는데 무려 6시간이나 누워 있어야 했다.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능력을 쓰는 시간이 길어지면 회복도 길어진다는 걸.
 제2장 영화사에서 첫걸음
 
 
 
 
 
 내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영상을 여러 번 보았다.
 영상구현은 뇌의 능력을 풀 가동하는 수준이며, 두통은 30초 만에 찾아온다.
 풀 가동 시 회복이 더딘 마지노선은 1분.
 그 이상 가면 몇 시간 동안 앓아누워야 한다.
 
 그렇게 쉬기를 반복하면서 같은 장면을 조금 다르게 편집해 보고, 더 나은 장면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영상을 두 손을 휘저어 가며 편집했는데, 실제로는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다 기자와 검찰 직원들의 몸싸움과 아우성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점에서 슬로 모션을 걸었다.
 기가 막히다!
 
 노멀 모션에서 슬로 모션으로 바꾼 것만으로도 검찰 포토라인에서 벌어지는 아우성이 세상의 부조리를 제대로 부각하고 풍자했다. 세상 잘 돌아간다며 절로 혀를 찰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이 장면은 영화 ‘살인의 추억’ 중 논에서 벌인 살인 현장 검증 풍경과 유사했다.
 롱 테이크로 가면서 엉뚱한 사람을 용의자로 몰아 난리법석을 떨던 장면이다.
 후반부터 슬로 모션으로 전환되면서 메시지를 극대화했다.
 
 이 영상은 누가 연결해 준 정보가 아니다.
 엄연히 내 머릿속에서 나왔다. 내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었지만 내가 발견하지 못한 가장 좋은 첫 장면.
 이 작품과 관련한 모든 것을 분석한 뒤 뇌가 스스로 도출해 낸 장면이다.
 
 물론 내 의지로 머리를 쓴 건 아니다.
 뇌가 스스로 작동해서 결과를 내놓았을 뿐.
 머리가 아픈 것으로 보아 내 뇌가 아닌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이제 완벽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다.
 그 시나리오를 알아주는 사람만 만나면 된다.
 다른 분야에도 얼마든지 능력을 쓸 수 있다.
 주식 종목을 보면 주가를 예측하지 않을까?
 
 기업 정보를 통해 가장 합당하고 예측 가능한 분석을 조건으로. 기업의 허위 공시나 변수는 제외하고.
 아니, 허위 공시와 변수도 잡아낼 것만 같다. 공개된 정보에 허점이 있거나 네트워크에 있는 모든 정보와 연동하여 어떤 조짐을 예측한다면. 단, 내 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영화도 그렇다.
 흥행을 저해할 요소를 미리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사람을 분석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러면 내가 천재가 된 것인가.
 
 아니다.
 난 여전히 보통 사람이다. 능력을 차단하면 그냥 나다.
 능력을 발휘할 때도 체감 상으론 다를 게 없다.
 
 능력을 자주 쓸 수도 없다.
 너무 혹사하면 정말 단명할 것만 같다.
 과부하라도 걸리면 한순간에 백치가 될지도 모른다.
 애초에 머리를 다쳐서 이 능력이 생긴 거 아닌가.
 
 사흘 동안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 보니 내게 일어난 충격적인 일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괴현상을 분석하고 정리하자 더는 신기하지도 않을 만큼 편해졌던 거다.
 그렇게 실험을 한 뒤 모두 10개로 정리했다.
 
 하나. 확장된 뇌를 코어라 부른다.
 둘. 내 의지로 코어를 통제하며 능력을 차단할 수 있다.
 셋. 코어의 정보 탐색은 무한에 가깝다.
 넷. 정보의 분석과 결과는 그 어떤 형태로도 구현한다.
 다섯. 기본으로 인지할 정보 창은 텍스트다.
 여섯. 첫 번째 정보 탐색은 한 단계로만 확장한다.
 일곱. 정보 분석의 첫 결과는 상하 좌우로만 뜬다.
 여덟. 광범위 정보 탐색은 1분 이내로 한다.
 아홉. 코어의 레벨을 1이라 한다.
 열. 그 누구에게도 코어의 존재를 말하지 않는다.
 
 모든 뇌세포가 다 열리진 않은 것 같다. 기존의 뇌에 비해 뇌활용도가 무지막지하게 높아졌을 뿐.
 그래서 현재 각성한 뇌 상태를 코어라 부르기로 하고, 레벨 1로 정했다.
 정보가 광범위로 확장해도 머리가 덜 아프면 뇌 활용도가 높아졌다는 의미일 터다.
 코어를 완전히 가동하면 1분 만에 두통이 온다. 그게 2분 후에 오면 레벨 2라 해도 되겠지.
 
 일단 지금은 간단한 정보 분석이나 시나리오 쓰는 데에만 쓸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정한 것처럼 정보 분석을 1단계 확장으로 정해 놓으면 몇 시간이 지나도 두통이 안 생겼으니까.
 
 지난 며칠 동안 실험으로 두통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욕심부리다 머리 아파 죽느니 그냥 느긋하게 가련다.
 자주 쓰다 보면 언젠가는 코어 레벨이 오르겠지.
 광역 분석은 레벨이 몇이나 되어야 할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때는 다른 일에도 써 볼 참이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건 시나리오 쓰기.
 창작 능력이 생겼으니 제작을 배우는 거다.
 3일 만에 집에서 나섰다.
 
 * * *
 
 논현동의 한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이 건물에 이갑성 대표의 영화사가 있었다.
 6층 복도로 들어가 한 사무실 앞에 섰다.
 어?
 
 [신성영화사]
 
 놀랍게도 내 이름과 영화사 이름이 같았다.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와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흰머리가 많은 50대 남자가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그 앞에는 앳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앉아 있고.
 
 “저, 어제 연락드린 최신성이라고 합니다.”
 “이갑성입니다.”
 
 이 대표와 악수를 했다.
 아가씨는 눈치가 빠른지 얼른 일어나 차를 타러 갔다.
 
 “식사 안 하셨으면 하나 시켜드릴까?”
 “아니요. 먹고 왔습니다.”
 “그럼, 난 식사마저 하고요.”
 
 경리가 내미는 녹차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직원을 뽑을 생각이 없는 건가.
 영화사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사무실이 작았다.
 대표 책상 하나. 캐비닛 하나. 경리가 일하는 기다란 책상 하나. 그리고 가운데에 소파와 유리 탁자.
 내가 입사하면 경리와 마주 보고 일할 것 같다.
 
 실례를 무릅쓰고 코어 능력을 발동했다.
 사람을 상대로 한 번은 확인하고 싶었다.
 사물을 분석했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 대표님을 중심으로 수많은 창이 생겨났다.
 마치 스캔한 것처럼 신체 정보를 비롯해 착용한 옷과 시계 따위의 정보가 증강현실처럼 다닥다닥 들러붙었다.
 거기에다 붉은 사인펜으로 획획 갈겨쓴 메모. 탁자의 서류 정리. 사무실 환경과 대표님의 인상과 눈빛 등으로 성격까지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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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갑성 : 신성 영화사의 대표.]
 [나이 : 54세.]
 [키 : 168cm] [몸무게 : 72kg]
 [인상 : 온화함. 깔끔함. 날카로운 눈빛.]
 [성격 : 검소함. 꼼꼼함. 강인함. 단호함. 너그러움.]
 [신뢰도 : 87% 긍정적.]
 [지혜 : 일반 이상의 통찰력. 현명함.]
 [이력 : 베테랑 영화인. 약 25년 경력.]
 [능력 : 풍부한 영화 제작 경험. 수준 높은 안목.]
 [잠재력 : 영화계 유력인사가 될 확률 95%.]
 [정장 : 맨체스터. 30만 원대. 약 10년 착용.]
 [시계 : 불가리아. 160만 원대. 약 15년 착용.]
 [구두 : 바크. 50만 원대. 약 7년 착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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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다한 것까지 뜨자 창을 지웠다.
 다른 걸 떠나 이 대표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다. 영화계 유력인사가 될 확률이 매우 높은 것도 놀라웠다. 헛돈 쓰는 사람이 아니며 룸살롱 출입할 분도 아니다.
 물론 이 결과는 추정일 뿐이다.
 
 어떤 사람인지 대충 감을 잡았다.
 이번엔 경리.
 어린 아가씨가 왜 이 영화사에서 일하나 했다.
 이 대표의 조카인 듯. 얼굴이 닮았고, 아버지뻘과 단둘이 있는데도 편해 보인다.
 이 대표를 보며 생글생글 웃기도 하고.
 식사를 마친 이 대표가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한번 보세요.”
 “시놉시스네요.”
 “기획안인데··· 오랜만에 하려니 잘 안 풀리네요.”
 
 7페이지 분량의 기획안을 읽어 보았다.
 저예산으로 제작이 가능한 치정 스릴러였다.
 신생 영화사의 첫 작품으로 가장 적당한 영화.
 에로티시즘과 스릴러를 부각하면 흥행 가능성이 있다.
 
 주인공은 속물 변호사다. 아내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좀 있으나, 아내의 집안 재산을 보고 결혼했다. 결혼 생활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살인사건의 변론을 맡는다.
 
 사건 피해자는 재벌가의 외동아들.
 피고인은 피해자의 아름다운 아내.
 
 검찰은 피고인이 유산 상속을 노리고 남편을 살해한 것으로 보고 불구속 기소했다. 정황은 틀림없어 보이나 결정적인 살해 증거가 부족하여 판결을 통해 유무죄를 가려내야 한다.
 
 그런데 이 피고인의 캐릭터가 관능적이면서도 독특했다.
 이 미모의 피고인이 주인공을 유혹하면서 주인공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악마의 홀림에 빠진 듯 주인공은 갈수록 이성을 잃어 가고 피고인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상태가 되어 간다.
 
 그 무렵 아내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다 주인공이 피고인과 사라진 아내, 죽은 피해자가 삼각 관계였음을 알아낸다.
 그때 주인공은 이미 피고인에게 영혼이 사로잡힌 상태였다. 재판이 불리해지자 아내를 찾아내 죽인다. 그리고 아내가 피해자를 살해한 죄책감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위장한다.
 
 재판은 무죄 판결이 나고 주인공과 피고인은 유유히 해외로 도피한다. 재벌가의 유산을 노린 피고인과 변호인의 범죄가 성공하나 싶었으나 여행 중 주인공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거액의 유산을 상속한 피고인에게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원초적 본능 느낌인데 다소 약하고 밋밋한 결말이다.
 내 표정을 본 이 대표가 웃어 보였다.
 
 “허허, 실망한 표정이 보이네요. 이걸로 열심히 굴려 봐야죠. 안 나오면 다른 거 찾으면 되는 거고.”
 “반전을 넣으면 될 것 같습니다.”
 “반전이라··· 어떤 반전으로?”
 
 시놉시스를 보면서 이미 반전은 나왔다.
 원안이 나쁘지 않아서 코어 능력을 발동할 필요도 없었다.
 이 대표가 보자마자 시놉시스를 내민 것은 내가 시나리오를 얼마나 볼 줄 아는가를 평가하려고 한 것이다.
 난 내 생각을 그대로 전할 생각이었다.
 언짢아하면 독선적인 사람이거나, 삼류밖에 안 되는 사람이니까.
 
 “주인공이 후반에 아내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것까지는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그 지점부터 관객은 주인공과 피고인 사이에서 묘한 기류를 눈치채게 됩니다. 피고인과 변호인이 사건 이전부터 불륜 관계였던 겁니다. 관객을 속이는 거죠.”
 “그 이유는요?”
 “피고인의 남편을 죽인 진범이 바로 변호사인 주인공이었던 거죠. 후반까지 복선만 깔고 관객들은 몰라야 합니다.”
 
 이 대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피고인이 자기 남편을 죽이려고 주인공을 유혹했고, 변호인 선임까지 했다는 거네요. 유산을 상속하면 절반을 주겠다는 식으로 했을 수도 있고.”
 “예. 거기서 반전을 한 번 더 줍니다. 주인공의 아내와 피고인은 친구였어요. 아내가 집을 나간 건 남편인 주인공이 피해자를 살해하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피고인이 공모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내는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을 몰락시키고, 피고인은 유산 상속을 노린 거였죠. 주인공은 두 여자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겁니다. 두 여자가 손을 잡은 원인과 공모를 벌인 이유는 개연성을 설정하면 됩니다. 이 설정에서 아내와 피고인의 성격도 입체적으로 달라지겠죠.”
 “음······.”
 “반전 이전에 나왔던 여러 장면이 사실은 피고인이 설계한 함정들이었다는 걸 주인공도, 관객도 나중에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게 가짜이거나 연기였고, 치밀한 각본이었던 거죠.”
 
 이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실은 나도 주인공이 아내를 죽이는 부분이 좀 걸렸는데, 그런 식으로 가면 괜찮은 마무리네요. 초반에 두 여자의 남편이 악질적인 인간임을 묘사하면 개연성도 생길 거 같고.”
 “예. 두 남편이 악덕 변호사와 재벌 2세니까요. 두 여자의 관계가 동성애 느낌이 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과 피고인이 불륜 관계인데, 아내는 개의치 않아야 하니까요.”
 “좋아요. 벌써 그림이 딱 나오네.”
 
 이 대표가 시놉시스에 메모를 해 나갔다.
 사실 작가도 아닌 이 대표가 이 정도 원안을 쓴 것도 놀랍다. 비록 시나리오가 아닌 시놉시스이지만.
 이 시놉은 꽤 훌륭한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첫째. 빼어난 에로티시즘 영상미를 꼽을 수 있다.
 둘째. 연기자가 욕심낼 만한 배역이다. 남자 배우는 점점 파멸로 치닫는 연기를 보여 줄 수 있고, 여자 배우는 피고인 역할로 색다른 관능미를 뽐낼 수 있다.
 셋째. 이 영화는 추리극 타입이다. 진범은 누구인가. 아내의 행방은? 미모의 피고인은 정체가 무엇인가. 거기에 남자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중심으로 아슬아슬하게 고조되다가 반전이 일어나며, 또 한 번 반전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제작비다.
 주요 로케이션은 재판장. 주인공 집. 피고인의 집. 아내를 찾아 나서는 야외 로케 몇 번이면 충분하다.
 탑 배우가 하겠다고 결정하면 투자는 직행이다.
 
 이런 것들을 주절주절 말하고 싶었으나 이 대표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관두었다. 신생영화사의 첫 작품으로 가장 적합한 소재를 선택했으니.
 신생은 코미디. 공포. 스릴러를 선택해야 안전하다.
 비용 적게 들고 대박은 어려워도 투자비는 뽑을 테니까.
 이 대표가 메모를 다하곤 웃으며 말했다.
 
 “최 작가. 이 시나리오 직접 써 볼래요?”
 “저, 사실 제작 일 배우려고 왔습니다.”
 “그건 아는데··· 다른 작가보다 나을 거 같아서 말이에요. 사실 유명작가 모셔 올 돈도 없고, 시나리오 뽑기 전엔 제작팀도 필요 없고 해서 말입니다.”
 “그러네요.”
 
 하긴 아직 영화사라 부르기도 뭣한 회사에서 시나리오 개발비로 5,000만 원이나 쓴다는 게 부담이 되긴 한다.
 많이 쓰면 천만 원. 그것도 안 되면 500 정도.
 그 예산으로 작업해서 시나리오가 제대로 안 나오면 나 같은 무명 불러서 각색 작업을 하는 거다.
 그러다 영화 엎어지는 거고.
 
 영화의 근간은 시나리오인데 작은 영화사들은 천만 원 쓰기도 아까워서 적은 돈으로 요행을 바라다가 영화를 엎는 걸 되풀이하고 있다. 악순환이다.
 
 내가 돈 때문에 망설이는 줄 알았나 보다.
 이 대표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작가로 천만 원에 계약하지요? 당장 선금으로 오백은 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프리 프로덕션부터 최 작가를 제작실장으로 계약할 겁니다. 제작 일은 전혀 모르죠?”
 “예. 그런데 제가 제작실장 일은 어려울 텐데요.”
 “제작부에 최 작가밖에 없는데 부장이든 팀장이든 뭔 상관이 있겠어요. 제작부원은 한 명만 올 겁니다. 전반적인 일은 나하고 민정이가 처리할 테니까.”
 
 기다렸다는 듯 말을 잇는 이 대표였다.
 날 잡으려는 모습 같아 보여서 기분이 꽤 좋았다.
 이것도 코어 능력이 생긴 덕분일까.
 
 “오늘부터 작업할까요?”
 “책이야 빨리 나오면 좋죠. 집에서 작업하세요? 아니면 호텔이라도 잡아 줘요?”
 “집에서 하면 됩니다. 한 일주일 정도 걸릴 거 같네요.”
 “일주일? 일주일 만에 한 편을 쓴 다고요?”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더 빠를 수도 있고요.”
 
 내 말에 이 대표가 갸우뚱했다.
 보통 초고 작업은 최소 보름은 걸린다.
 내 경우엔 2, 3일이면 될 것 같았다.
 완고 같은 초고를 쓰고 싶어서 며칠 더 여유를 준 거다.
 이 대표가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었다.
 
 “급할 거 없으니까, 천천히 해요.”
 “일주일이면 충분해요. 그동안 대표님은 미리 준비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요? 거 참. 10년 동안 영화판이 변한 건지, 최 작가가 빠른 건지. 알겠어요. 그동안 사람 좀 만나러 다녀야겠네. 민정이한테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 알려 주고 가요. 명함 뽑아야 하니까. 작가 명함으로 할래요? 실장 명함으로 할래요?”
 “둘 다 하죠, 뭐.”
 “그래요. 민정아, 최 작가 명함 1,000장만 주문해라. 앞에는 작가, 뒤에는 실장으로.”
 “네.”
 
 경리의 대답에 이어 내가 물었다.
 
 “1,000장씩이나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기본이 1,000장입니다. 앞으로 쓸 일 많아요.”
 “그럼 전 작업하러 갈게요.”
 “계약 안 하고 작업부터 하게요?”
 “급한 거 아니니까요.”
 “그래요.”
 
 이 대표가 자기 책상으로 가서 봉투에 서류 뭉치를 주섬주섬 넣었다. 그리고 지갑을 열더니 오만 원권 4장을 꺼냈다.
 
 “계약금 아닙니다. 작업 진행비로 써요.”
 “괜찮습니다.”
 “부담 갖지 마요. 최 작가 잡아 놓으려고 뇌물 주는 거니까. 뭐, 나중에 실장으로 오면 월급이 박한 것도 있고.”
 
 한 번 더 마다하려다 월급 이야기가 나오자 그냥 받았다.
 용돈으로 월급을 퉁 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 * *
 
 기분 좋게 신성영화사에서 나왔다.
 코어 능력을 쓰지 않았는데도 시놉을 읽고 바로 수정안을 떠올렸다. 코어가 작동하지 않았음에도 어느 정도는 내 두뇌에 영향을 주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 의지로 코어의 정보를 활성화하거나, 차단하고 있으니 원래는 늘 활성화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전에는 시나리오를 분석할 능력이 없었나.
 그건 또 아니다.
 바로 대안이 튀어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캔맥주 네 개를 사 들고 집에 돌아왔다.
 먼저 이 대표님이 준 서류 봉투를 꺼내 살펴보았다.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이 대표가 모은 자료였다.
 
 대부분 유사 사건의 공판 기록이다. 영화에 필요한 법률 단어 등도 있고. 법이나 재판에 대해 잘 몰랐는데 이 대표가 모은 자료만으로 충분했다.
 신기하게도 한번 죽 훑어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머리에 다 입력이 되었다. 이 또한 놀라운 능력.
 자, 이제 한번 써 볼까.
 
 커피를 끓여 책상에 놓고 의자에 앉았다. 물수건으로 마우스를 닦고, 노트북 키보드를 닦았다. 그리고 노트북 전원을 켠 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할 때 늘 하는 일종의 루틴이다.
 
 노트북 화면이 뜨자 코어 능력을 활성화했다.
 노트북이나 키보드에 관한 정보는 뜨지 않도록 제외했다.
 오직 시나리오에 관한 것만.
 
 한글 프로그램을 띄운 뒤 제목을 적어 넣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연관 검색어가 뜨듯, 제목을 치자마자 시놉시스 내용과 관련한 제목들이 줄줄이 뜬다.
 정말 기가 막힌 장치다.
 
 원래 제목은 가제로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그걸 ‘국경의 끝’으로 바꾸었다.
 여기서 국경은 야망과 본능, 치명적 사랑의 끝을 의미한다. 두 여자가 영화 마지막에 도달하는 인적 없는 바다이며, 남자 주인공이 파국으로 치닫는 막다른 길의 끝이다.
 
 일단 제목을 치고 나서 전체 스토리를 정리하고, 시퀀스도 대략 정했다.
 도입부에 어떤 장면을 써야 몰입감을 높일 수 있는지, 남주와 여주가 처음 만날 때는 어떤 장면이 좋은지.
 
 재판의 진행. 중간의 전환점과 클라이맥스. 갈수록 치달아가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 배우의 연기를 최대한 뽑아낼 수 있는 장면들. 드러난 사건과 숨겨진 사건. 서스펜스를 만들어 낼 영화적 기법과 표현들. 복선과 반전 장치들.
 
 그 많은 것이 머릿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정리가 되어갔다.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정리하자 단숨에 써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자리가 잡혔다.
 큰 줄기를 잡았으니 곁가지는 써 나가면서 직관으로 잡아 나가면 된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첫 장면을 치기 시작했다.
 베드씬이다. 첫 장면에 영화의 복선과 주제를 숨긴다.
 
 격정적으로. 관능적으로. 매혹적으로. 퇴폐적으로.
 미려한 영상에 왠지 모를 위기감이 담기도록.
 
 카메라는 아름다운 여체를 훑고 지나간다. 땀에 젖은 남자의 등과 팔.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 장면에 아내가 나와서 이 여자가 남주의 아내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
 이 여자는 나중에 등장할 피고인이다. 둘이 이전부터 불륜 관계였다는 것은 피고인의 숨겨진 문신 따위로 관객만 알아차리게 한다.
 
 일필휘지로 장면을 적어 나갔다. 내 시야로 수많은 경우의 수가 떠오른다. 가장 나은 것으로 선택!
 미친 듯이 타자를 두드려 나갔다.
 
 * * *
 
 담배를 태우는 것도 잊었다. 두 모금 마신 커피는 식어 있었다. 몰입하여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어느새 늦은 밤이었다. 배가 고프기도 해서 작업을 멈췄다.
 7시간 만에 56 씬까지 썼다.
 시나리오 편집 형태로 38쪽이니 자판을 쉬지 않고 두드리는 물리적인 속도와 거의 같았다.
 정보가 순식간에 확장할 때는 1분 만에 두통이 왔는데 시나리오를 쓸 때는 정보량이 매우 적어서 두통이 별로 없었다.
 
 작업한 결과물을 보고 있으니 기분 좋은 헛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씬 별로 정리하고, 다듬기도 해야겠지만 내일이면 초고 완성이다. 다듬고 수정하는 게 시간이 더 걸리기는 해도 초고는 가능한 한 빨리 쓰는 게 좋다. 작가가 한 번에 빠르게 썼을 때 영화의 흐름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이걸 더 좋게 만들겠다고 추가나 삭제를 하다 보면 원래 흐름이 깨지고 어긋난다.
 글을 쓴 사람은 이미 자신의 글에 적응해서 그 세세한 차이와 감흥을 잊어버리게 된다. 나중엔 처음에 재미있었던 부분에서도 아무 느낌이 안 난다.
 그쯤 되면 자신의 글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볼 수도 없다.
 수정해 봐야 더 나아지질 않으니 다른 작가를 불러서 각색하는 거지.
 이것이 초고가 완고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고, 유명 작가가 돈을 많이 받는 이유다. 초고가 훌륭해야 하니까.
 그런데 이 시나리오를 이틀 만에 쓴다.
 내가 보기엔 지금이 최상의 상태다.
 여기서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글이 망가진다. 흐름의 기조는 반드시 유지하되, 더 나은 대사와 더 나은 장면이 되게 손을 보면 된다.
 
 시나리오 파일을 저장하고 냉장고로 가서 캔맥주를 꺼냈다.
 맥주를 마시면서 내일 써야 할 부분들을 다시 생각했다.
 진짜 전투는 내일이다.
 주인공에게 지옥의 문이 열리는 지점.
 그 터닝포인트를 지나 내일은 클라이맥스로 달리게 되니까.
 
 캔 맥주 두 개를 비운 뒤 씻고 침대에 누웠다.
 두통이 좀 있긴 했는데 맥주 덕분에 통증이 잦아들었다.
 정말 상쾌하고 편안한 잠자리였다.
 내일이 더 기대된다.
 오늘은 기적이 시작된 기념비적인 날이고.
 
 * * *
 
 오전 9시에 일어났다.
 늘 가는 식당에 가서 아침밥을 먹은 뒤 다시 루틴을 했다.
 먼저 인터넷 포탈 뉴스 등을 본 뒤 유튜브에 들어가 화제의 동영상 따위를 본다.
 신곡 뮤직비디오도 챙겨 본다.
 
 오전 11시까지 이것저것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살펴보다가 슬슬 글 쓸 준비를 한다. 점심은 원래 안 먹는다.
 재떨이를 비우고, 커피를 준비한 뒤 물수건으로 마우스와 노트북 키보드를 닦는다. 경건한 의식이다.
 그렇게 다시 ‘국경의 끝’ 파일을 열었다.
 영화 시나리오는 흐름이 생명이기 때문에 작업을 재개하려면 씬 1부터 써 놓은 데까지 영화 보듯 죽 읽어야 한다.
 영화의 톤과 분위기에 서서히 동화되어야 하고, 캐릭터들의 감정에 이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의 흐름에 제대로 이입하면 그때 작업에 돌입한다.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홀로그램 글짓기 장치처럼 이야기를 전개하면 그에 따르는 수많은 전개가 뜬다.
 코어는 가장 효과적인 장면이나, 다음 전개를 미리 알려 준다. 뜻밖의 장면 전환까지도 보여 준다.
 난 선택만 하면 된다.
 코어가 추천한 장면이 아닌, 내 나름의 선택으로 전개가 조금 어긋날 때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긋나지 않은 전개로 이어진다.
 어차피 글쓰기란 선택의 과정.
 장면. 대사. 전개 방식. 분위기 등등 선택할 것투성이다.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를 놓고 작가들은 직관에 따르거나 직관으로 안 풀리면 고민하게 된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어떤 것이 좋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가 대부분은 자신의 직관을 믿고 힘차게 달린다.
 난 코어의 도움으로 빠르게 진행할 뿐이다.
 내가 선택하는 모든 것은 나의 직관이기도 하니까.
 한번 달리기 시작하자 약물에 취해 한 가지에 몰입하는 사람처럼 자판을 두드렸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향하기 때문에 어제보다 몰입이 더 컸다.
 
 * * *
 
 “휴······.”
 
 한동안 숨쉬기를 잊었던 사람처럼 긴 숨을 뱉었다.
 작업한 지 7시간 만에 초고를 끝냈다.
 좀 더 살펴봐야 하지만 이틀 만에. 정확히는 14시간 만에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마지막 씬 아래의 ‘끝’이라는 글자를 보고 있으니 희열이 타올랐다.
 
 121씬. 84쪽. 상영시간 대략 1시간 40분.
 
 다시 코어의 도움을 받아 써도 이보다 잘 나오진 않을 것 같았다.
 남주 여주의 심리 상태가 꽤 다층적이고, 배우라면 시도해 보고 싶을 정도로 강렬한 장면들이 있다.
 좀 앞서 나가는 건지 모르겠으나 영화 주연상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쓰면서 특별한 체험도 했다.
 남자주인공에게 몰입하여 엄청난 압박을 느끼면서 타자를 때려 댔고, 진실을 알았을 때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남자주인공이 폭우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발악하는 그 처절한 장면을 쓸 때는 너무 이를 악물어서 잇몸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마지막 두 여자가 바닷가를 거닐 때는 아련하고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베드씬을 써 나갈 때는 발기까지 했다.
 뭐, 전에는 시나리오를 쓰다가 펑펑 울기도 했으니.
 나만 그런가. 다른 작가도 그런 걸까.
 
 새 커피를 타 와서 초고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시퀀스나 씬을 재배치하는 건 어떨까?
 씬을 축약해서 몽타주 방식으로 전개하는 것은?
 독특한 씬 전환을 해서 강한 인상을 주는 건?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 영화의 주제와 전개에는 맞지 않다.
 잡스러운 기교를 부리거나 영화적 기법에 욕심내면 영화의 톤이 깨진다.
 그냥 시간과 감정의 흐름 순서대로.
 
 두 번째 작업은 편집과 교정이었다.
 씬과 지문. 인물과 대사 사이에 공백을 넣어 가며 교정과 편집을 동시에 진행했다.
 대사를 좀 더 맛깔나게 손을 보고, 장면도 더 디테일하게.
 오타를 바로 잡고 딱히 손 볼 게 없으면 통과.
 좀 더 나은 카메라 앵글이나 시점이 있으면 수정.
 직접적인 설명보다 가능한 한 셔레이드로 표현.
 
 여자주인공이 한 남자의 신발에 발을 넣어 보는 것.
 여자의 은밀한 짝사랑을 표현한 아주 좋은 셔레이드의 예다. 영화에서 셔레이드는 심층 표현의 도구이며, 작품의 수준을 높이는 고급진 기법 아니던가.
 셔레이드가 가능한 장면은 최대한 그렇게 풀었다.
 대사도 압축하고, 씬의 길이도 될 수 있으면 줄였다.
 분석 끝에 씬을 합쳐도 되는 곳은 합쳤다.
 씬과 촬영 장소를 가급적 줄여야 제작비가 덜 든다.
 초고를 쓸 때 이미 최상의 선택을 했기 때문에 고칠 부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빼거나 추가하지는 않고 좀 더 나은 장면으로 만들 뿐이다.
 
 중요한 장면 몇 개와 클라이맥스로 가는 지점에는 지문에 엔터를 많이 쳐서 긴박감이 느껴지도록 강조했다. 씬의 쇼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의도이기도 했다.
 배우의 얼굴을 찍어 감정을 따야 하는데 풀샷으로 찍어 버리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3류 감독은 분명히 그런 짓을 한다.
 누가 찍을지 모르니까 강조는 해 두고.
 
 * * *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시나리오 파일을 저장하고 쉬었다.
 영상화로 한번 돌려 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두통 때문에 3분도 못 보고 다음날 종일 고생할 테니까.
 내일 원고를 들고 가고 싶었으나 이 대표가 의심할 것이기에 약속대로 일주일 뒤에 가기로 했다. 원고는 더 보지 않았다. 욕심을 내서 손을 대면 망가질 것이 뻔하다.
 그 일주일 동안 할 일이 없진 않았다.
 기획안을 작성하면 된다.
 투자하지 않으면 굴러들어온 복을 차 버리는 느낌을 줘야 한다. 흥행 포인트를 강조하고, 시놉시스도 반전만 빼고 간략하게 정리하고.
 투자자에게 보낼 기획안과 투자제안서. 감독에게 보낼 기획안. 배우 기획안도 따로 쓴다.
 각자 목적이 다르니까.
 가장 중요한 건 연예기획사에 보낼 기획안이다.
 영화 제작의 관건은 주연급 연기파나 톱스타가 캐스팅되는 거다. 그러면 감독이고, 투자고 다 된다.
 
 이 작품이면 올해 남녀주연상은 맡아 놨다.
 배우라면 욕심낸다. 기획안만 보고 책은 내던질 매니저도 혹해서 배우한테 건네줄 테고.
 다른 영화사는 기획사에 우편으로 책을 보내지만 난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다. 물론 이 대표님과 함께.
 감독과 주연급 배우가 캐스팅되면 투자가 100% 이뤄지고, 연출과 촬영 등의 스태프도 구성한다. 그때부터 프리 프로덕션에 돌입한다.
 이 작품은 유명 감독은 안 된다. 작품 규모가 작기도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시나리오를 바꿀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인감독이나 재기하려는 감독을 섭외해야 한다. 배우는 연기를 소화할 수 있는 분으로.
 내게 결정권은 없지만 이 대표님에게 그렇게 말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유명 감독은 계약금이 크기도 하니까.
 
 * * *
 
 한가하고 게을렀던 5일이 지나갔다.
 난 출력하여 집게로 집어 놓은 ‘책’과 여러 종류의 기획안이 든 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아침이었다.
 
 * * *
 
 “진짜야? 진짜 끝냈다고?”
 
 이 대표님이 책을 받아들며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를 주고받았고, 주말에는 대표님과 소주도 마셨다. 그날 말씀을 낮춰 달라고 했더니 바로 하대를 하신 대표님이다. 한결 편했다.
 
 “이건 뭔데?”
 “기획안요. 세 종류로 한번 써 봤어요.”
 “기획안? 어디 보자.”
 
 이 대표가 각각 3페이지 분량의 기획안을 살펴보았다.
 시나리오보다 어떤 면에선 기획안이 더 중요하다.
 굴러다니는 시나리오도 대개 기획안은 본다.
 그의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야, 어떻게 이렇게 요약을 잘했지? 배우가 보면 아주 끔벅 죽겠는데? 시나리오보다 이런 걸 더 잘 쓰는 거 아니야?”
 “어차피 글 쓰는 건 같으니까요.”
 
 첫 만남 때와 달리 나도 서글서글해졌다.
 이 대표님이 안경을 쓰고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난 경리가 내준 녹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민정이라고 했지? 경리 일 안 힘들어?”
 
 민정이 배시시 웃는다.
 
 “저 경리 아니에요. 제작부장이랍니다.”
 “아! 미안.”
 
 나이가 어려 보여서 경리인 줄 알았다.
 민정은 킥킥대며 웃기만 했다.
 
 “몇 살이야?”
 “25살요.”
 “진짜 동안이네.”
 
 민정이 그 말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또 웃었다.
 
 “저, 이래 봬도 메이저 영화사 제작부에 있었어요.”
 “제작부장이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데?”
 “이것저것 다 해요. 프로덕션 들어가면 회계와 정산 같은 문서 업무를 주로 보고요. 최 작가님 하는 일이랑 겹치진 않을 거예요.”
 “나도 내가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데?”
 “아마 삼촌이 시키는 건 다하게 될걸요?”
 
 민정이 어째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삼촌 도우려고 여기 온 거야?”
 “네.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제작사지만, 삼촌이 큰 회사로 키울 거예요. 삼촌 믿고 왔죠.”
 
 단지 삼촌을 도우려고 온 건 아니라는 뜻인데.
 내성적이라 그렇지 야무지고 똑똑한 친구 같았다.
 이번엔 민정이가 물었다.
 
 “작가님은 감독이 되고 싶으세요?”
 “대표님이 그래?”
 “예. 연출 전공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왜 제작부 일을 하시려고요?”
 “그냥. 영화에 관한 건 다 해 보고 싶어서.”
 “나중에 영화사 차리시려는구나.”
 “그것도 나쁘지 않지.”
 
 지난 며칠 쉬면서 내게 야망이 생겼다.
 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감독으로 찍은 영화가 흥행도 하고. 경험이 쌓이면 내 영화사도 차리고, 나아가 투자배급사에 극장 체인까지. 거기에다 연예기획사까지 차리면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할 수 있다.
 내 돈으로 영화 찍고, 내 배우들을 쓰고, 내 극장에 영화를 걸고.
 영화계, 아니 연예계의 제왕이 되는 거지.
 정말 야무지게 꿈만 크다.
 이게 허황한 것인지 실현 가능한 꿈인지는 모르겠다.
 그전에 코어 능력이 사라지지나 않았으면.
 
 * * *
 
 이갑성 대표는 정신없이 시나리오를 읽었다.
 최 작가가 일주일 만에 시나리오를 쓸 거라고 해서 기대를 전혀 안 했다.
 이따금 술 한잔했던 김 작가에게 무명인데 잘 쓰는 작가 없느냐고 물었을 때, 김 작가가 추천한 사람이 최신성 작가였다. 그 작가가 난데없이 제작부로 오겠다고 해서 안 그래도 직원이 필요했던 터라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웬걸.
 잘 쓰는 정도가 아니라 기가 막혔다.
 군더더기 없지. 거슬리는 부분 없지. 캐릭터는 살아 숨 쉬지. 씬과 씬의 연결도 영화를 보고 필사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셔레이드 만으로 쌓아 올린 심리 표현은 또 어떤가.
 점점 고조되면서 주인공과 관객을 압박해 가는 치밀한 구성도 놀랍다. 이 정도 시나리오는 최고 수준의 감독과 작가가 적어도 1년 이상은 굴리고 굴려야 나오는 글이다.
 이 대표는 이 뛰어난 시나리오를 단 일주일 만에 썼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만하면 천재인데 왜 그동안 무명이었을까.
 최신성 작가를 놓치면 안 된다.
 내 능력이 닿는 선에서 최대한 대우해 주면 되지 않겠나.
 놀란 내심을 숨긴 채 시나리오를 정독한 이 대표였다.
 
 * * *
 
 탁.
 이 대표가 탁자에 책을 내려놓았다.
 대표님이 삐딱한 얼굴로 날 빤히 보았다.
 
 “이게 자네가 쓴 거 맞아?”
 “그럼요.”
 “누구 도움도 없이 혼자?”
 “시나리오는 협업이 어렵잖아요.”
 “이거 외국 영화 베낀 거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대표님이 시놉을 베꼈으면 몰라도.”
 “허! 이 친구 물건이네.”
 “어때요? 더 손볼 건 없죠?”
 
 대표님이 탁자를 손으로 탁- 내려쳤다.
 
 “됐어. 이걸로 됐다고. 더 손보면 망친다. 교정도 잘 되어 있고, 편집도 이 정도면 훌륭하고. 거슬리는 것도 없으니 더 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 파일 가져왔지?”
 “네.”
 
 대표님에게 작은 메모리를 건넸다.
 대표님이 바로 민정에게 가서 건네주었다.
 
 “인쇄소에 가서 이 시나리오 제본해 달라고 해. 권수는 50권. 표지 시안 나오면 바로 메일 보내라고 하고.”
 “예.”
 
 민정이 메모리를 들고는 사무실에서 나갔다.
 이 대표가 내게 오더니 손을 덥석 잡았다.
 
 “최 작가. 다른 데 가지 마라.”
 “갈 데도 없어요.”
 “자네 이렇게 잘 쓰는데 왜 아직도 입봉을 못했어?”
 “전에는 잘 못썼어요. 아직도 잘 쓰는지는 모르겠고요.”
 “유명작가가 쓴 것에 손색이 없어. 그동안 고생했다고 하더니 이제 꽃을 피울 모양이다.”
 “대표님 만난 덕분일 겁니다.”
 “그러면 나야 좋지. 아, 맞다.”
 
 이 대표가 책상으로 가더니 서류 두 매를 가지고 왔다.
 
 “계약하자. 계약금 2천 어떠냐?”
 “두 배나 주시려고요?”
 “최 작가 말 듣고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일주일 만에 써 왔잖아. 대충 휘갈긴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내 경험으로 보면 분명히 톱스타급이 한다. 일단 오백만 받고 중도금 오백에 잔금 천으로 하자. 메인 투자 되면 한 방에 쏴 줄게.”
 “저야, 고맙죠. 그런데 투자자나 감독님이 수정 요구를 하면요?”
 “투자사가 요구하면 설득해야지 어쩌겠어. 이 책 수정하면 망가진다. 내 영화 인생을 걸고 장담할 수 있어. 감독이 뭐라 그러면 그 인간은 안 봐도 뻔한 거고. 배우도 마찬가지지. 최 작가가 이미 배우 입장에서 최상의 것을 뽑았는데 그걸 못 보면 연기도 못 해.”
 
 뭐, 그렇다면 그런 줄 알면 되겠지.
 
 “일단 죽 읽어 봐.”
 
 이 대표님이 싱글벙글 웃으며 계약서 공란을 기입해 나갔다.
 난 계약서를 읽었다.
 이 대표님이 기획한 원안으로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에 제작사 콘셉트의 표준 계약서였다. 작가 콘셉트 계약서와 달리 영화가 엎어지면 영화사가 저작권을 갖게 되는 계약서다.
 내 오리지널이 아니니 당연한 계약이다.
 대표님이 공란을 기입한 계약서를 내게 주었다. 그리고 두 계약서를 나란히 놓고 가운데에 대표님은 도장을, 나는 사인을 했다.
 실질적으로 이틀을 일하고 2천을 벌게 된 셈이다.
 원래 시나리오는 초고를 쓴 뒤 수정하느라고 몇 개월을 보내야 한다.
 대략 6개월이다. 대개는 촬영이 결정되면 중도금을 받고, 크랭크업한 뒤에 잔금이 나온다. 따라서 그 2천만 원은 6개월 치 월급인 셈이다.
 이걸 전에는 300만 원 받고 일했다.
 월급 50만 원.
 영화 제작이 무산되어서 중도금도 잔금도 못 받았으니.
 이번 시나리오는 일단 재고 작업이 없다.
 투자자나 감독이 요구하면 그때 재고 작업이 들어가는데 대표님이 재고는 없다며 단단히 못을 박았다.
 계약한 뒤 대표님이 돈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500 들었어. 세금은 잔금 치를 때 깔 거야.”
 “계좌로 보내지 않고요?”
 “돈은 주고받아야 맛이지. 얼른 받아.”
 “고맙습니다, 대표님.”
 
 돈 봉투를 쥐자 포만감이 몰려왔다.
 역시 돈은 손에 쥐어야 맛이다.
 대표님이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은 네가 쏴.”
 “예.”
 
 받은 돈 500은 대표님 통장에서 뽑은 돈 같다.
 아직 투자를 받은 것 같진 않으니까.
 
 그 길로 빌딩에서 나가 먹자골목으로 들어갔다.
 내가 소고기를 먹자고 했으나 대표님이 소고기는 소화가 안 된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해서 곱창집으로 갔다.
 
 그날 배 터지게 곱창을 먹었다. 소주도 둘이서 4병이나 마시고. 먹고 마시면서 대표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판에서 20년이나 있었던 이 대표님의 경험담은 생생한 교육이었다. 대표님이 추구하는 영화는 철저히 상업영화. 메시지는 보일 듯 말 듯해야 하고 무거운 메시지는 사절이다.
 나도 동감하는 말이었다.
 그놈의 메시지를 담아 보겠다고 하다가 무명으로 6년을 보냈던 거였다.
 기자 이야기를 쓴 것도 바탕은 메시지였으니.
 영화는 예술이지만 비즈니스기도 하다.
 난 그동안 재미있되, 예술적인 측면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예술적 기능을 먼저 추구했다고 할까.
 역량이 안 되는데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 거지.
 어쩔 수 없었다. 영화를 제작하는 업무와 자본에 대해선 별생각이 없었으니까.
 이제부터는 달리 생각한다.
 영화는 비즈니스다. 예술과 메시지는 거들 뿐.
 
 기분 좋게 술을 걸친 뒤 대표님과 헤어졌다.
 남자 주연은 누굴 먼저 찾아갈지, 감독은 누가 하는 게 좋은지 대략이나마 정했다. 다행히 대표님이 신인감독을 찾자는 내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기성 감독은 아무래도 자기 색깔을 넣으려고 할 텐데, 대표님이 그걸 간파하신 거다.
 대체로 대표님과 내 의견에 큰 충돌은 없었다.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 * *
 
 그로부터 5일 후.
 시나리오가 말 그대로 책이 되어 사무실에 배달되었다.
 난 대표님과 함께 배우들이 소속한 대형 기획사로 향했다.
 까일지라도 가장 잘나가는 배우에게 맨 처음 까여야 다음 배우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
 제3장 강렬한 인연
 
 
 
 
 
 대형 배우 기획사인 트윈 브라더스.
 배우만 있는 기획사였다. 배우들에게 서열을 매길 수는 없지만 한국 4대 연기파 배우 중 한 명이 있는 곳이다.
 
 송강석의 HIM 엔터테인먼트.
 김윤호의 트윈 브라더스.
 황정우의 엉클컴퍼니.
 하정민의 판타스타.
 
 꽃미남 배우와 톱스타가 속한 회사도 많지만 현 영화계에서 현역 최고로 꼽는 배우들이다. 지금 가장 인기가 많은 배우라도 경력이나 흥행 성적을 따지면 이 네 배우는 군말 없이 최고로 쳐준다.
 이 대표님과 난 배우 김윤호에게 책을 넣어 볼 생각이었다. 워낙 큰 배우라 저예산 영화를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에 순서라는 게 있기 때문에 우선 찔러 보는 거다. 대배우가 가끔 작은 영화를 하기도 하고
 회사로 들어가자 안내를 해 주는 여직원이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대표님 좀 뵈러 왔습니다. 영화사 신성의 기획 프로듀서, 이갑성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어제 연락 드렸고요.”
 “잠시만요.”
 
 여직원이 전화를 걸어 몇 마디 듣더니 웃어 보였다.
 
 “지금 대표님은 안 계시고요. 본부장님께서 만나 보시겠다고 하시네요. 7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대표님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복도와 엘리베이터에 소속 배우들의 사진이 여럿 붙어 있었다. 영화 일을 하면서 연예기획사에 온 것은 처음이다. 배우가 회사에 출근할 일이 없다고 듣긴 했는데, 로비에도 복도에도 배우는 안 보였다.
 7층 복도 우측에는 사무실이, 좌측에는 임원 사무실과 회의실 등이 늘어서 있었다. 가장 끝에는 대표실이 있었고.
 우린 매니지먼트 본부장 명패가 붙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갔다.
 50대 남자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이 실장님.”
 “예. 좀 쉰다는 게 너무 쉬었네요.”
 
 기획사 본부장과 이 대표님이 친한 척하며 악수했다.
 두 분이 10년 전부터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난 끼어들 위치가 아닌 듯해서 눈인사만 하고 대표님 옆에 앉았다.
 본부장과 이 대표님은 이전에 함께 일했던 일화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 뒤로 요즘 중국 때문에 엔터 사업이 안 좋다는 둥, 신인을 띄워야 하는데 마땅한 작품이 없다는 둥 이야기가 길어졌다.
 
 20분이 지나서야 본부장이 본론을 꺼냈다.
 
 “시나리오는 잘 나왔습니까?”
 “저희는 일단 만족스럽습니다. 읽어 보시겠어요?”
 “책은 우리 직원이 읽어 볼 겁니다. 우리 회사에 온 건 윤호 씨 때문인 거 같은데··· 윤호 씨가 요즘 꽂힌 작품이 하나 있어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해명 씨는 어때요?”
 “지금 예능 하시지 않나요?”
 “그거야 뭐, 이 주에 한 번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 영화는 어떤 내용인데요?”
 “치정 스릴러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본부장의 미간에 찌푸려졌다.
 
 “요즘 애들은 그런 거 안 보는데.”
 “대박은 어려워도 중박 이상은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연기를 돋보이게 한 시나리오라 소속사 배우분들이 보시면······”
 “해명 씨가 치정극에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게다가 신생 제작사라면 투자도 어려울 텐데.”
 “투자사 쪽에는 제가 아는 분들이 좀 계십니다. 해명 씨도 이번 기회에 연기 변신할 수 있고요.”
 
 두 분이 대화하는 동안 본부장 사무실에 붙은 남자 배우들의 면면을 살폈다. 최고는 김윤호이고, 그다음은 유해명이다. 그 외에는 배역에 안 어울리는 젊은 배우이거나 조연급이다. 유해명도 우리 영화에 어울리지 않고.
 어쩔 수 없이 다음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대표님이 뽑아 놓은 리스트에 네 명이 있었다. 차기작을 선택하지 않은 배우 중에 배역에 어울리는 이들이다.
 
 엄아인. 류승렬. 차성원. 송현주.
 
 이 중 우리 영화와 가장 잘 맞는 사람은 엄아인이다. 나이가 조금 젊지만 젊은 변호사로도 가능하다. 상대 여배우는 엄아인 씨 나이에 맞추면 되고.
 사실 김윤호 배우는 언감생심 꿈도 안 꿨다. 김윤호 씨가 본 시나리오라는 소문이라도 나야 하기에 왔을 뿐이다.
 김윤호가 검토한 시나리오라는 말이 나오면 다른 배우들이 관심을 보일 테니까. 유해명 씨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고.
 
 사진을 보다가 코어 능력을 발동했다.
 김윤호나 유해명 사진을 보면 뭔가 뜨나 싶어서.
 뜨긴 떴다. 두 배우에 대한 정보를 제거하고, 우리 영화와의 인연이나 연관성을 보려고 했다. 장점은 연기력 하나 일 뿐이고 단점은 크게 부각되었다. 그 단점이란 에로티시즘의 영상미와 두 배우의 외모가 전혀 안 맞는다는 것.
 즉, 몸매 좋고 잘생긴 연기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대표님. 엄아인 씨로 가야 해요. 그분 지금 쉬고···’
 
 두 사람의 대화 중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말을 하던 이 대표님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이 당황한 얼굴로 날 본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그분도 좋지. 좀 젊기는 하지만.”
 “예?”
 
 대표님이 본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한데 본부장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느냐는 표정이고.
 뭐지? 방금 내 속말이 들렸던 건가.
 혹시나 싶어 입을 가리고 속으로 말했다.
 
 ‘김윤호 씨도, 유해명 씨도 아니에요. 아저씨 몸매로는 유려한 영상이 나올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네. 근육을 만들어도 좀 어색할 것 같고.”
 
 이런!
 설마 했던 것이 맞았다.
 코어 능력을 발동한 상태에서 대상을 향해 속으로 말하면 상대의 머릿속에 들린다.
 본부장은 아직도 대표님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은 얼굴로 보고 있다.
 텔레파시 능력도 있었나.
 뇌파, 혹은 뇌세포의 확장으로 초능력 같은 게 발생한 것 같다. 하기야 정보 분석도 초현실적인 능력이긴 하다만.
 뇌의 영역이 무한하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과거 할리우드 영화에서 뇌를 100% 활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 적도 있고.
 또 다른 숨은 능력이 있는 건 아닐까.
 슬슬 무서워지기까지 하네.
 아무튼 이 자리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
 
 ‘대표님. 이제 가죠.’
 
 “그, 그럴까.”
 
 대표님이 본부장 눈치를 보며 일어났다.
 본부장도 의아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이 실장님 좀 이상하시네. 아까부터 자꾸 혼잣말하시고. 바쁘신 거 같은데 책은 1팀장 책상에 두고 가세요. 책이 좋으면 윤호 씨가 할 수도 있으니까.”
 “예.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대표님과 함께 본부장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곤 사무실에서 나갔다. 대표님의 얼굴이 복잡했다. 왜 그런지는 알 만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대표님이 말했다.
 
 “본부장 앞에서 다른 회사 배우를 언급하면 어떡하나. 게다가 김윤호와 유해명은 이 회사 간판인데 대놓고 아저씨 몸매라고 하질 않나.”
 “죄송합니다.”
 “본부장이 오만하게 나와도 참을 줄 알아야지. 그 양반이 사람이 좋으니 웃고 넘겼지, 다른 회사 임원은 다음부터 보지 말자고 했을 거야.”
 “조심하겠습니다.”
 
 이 대표님은 내가 젊은 혈기에 욱한 것으로 본 것 같다. 본부장이 화를 내지 않았으니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는 거겠지. 본부장에겐 들리지도 않았지만.
 기획사에서 나가 대표님의 낡은 차에 올랐다.
 
 “엄아인이 몇 살이지?”
 “서른한 살일 겁니다.”
 “그나마 이십 대가 아니라 다행이구만.”
 “엄아인이라면 서른 후반도 소화할 겁니다. 좀 더 젊은 여배우로 하면 맞출 수 있을 거예요.”
 “젊은 여배우가 노출 연기를 하려고 할까? 신인이면 몰라도. 피고인 역할은 연기가 돼야 하는데.”
 “노출한 적 있는 연기파도 있죠.”
 “누구?”
 “이유현요. 현재 28세고요.”
 “오, 이유현!”
 
 시대물에 나와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다.
 그 영화의 여주인공이었던 임주연도 좋다. 27살이니 나이도 적당하고.
 제대로 된 배우를 잡지 못하면 아름다운 영화가 아니라 야한 영화가 되고 만다.
 대표님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 세 배우 중 한 명은 반드시 캐스팅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이 대표님과 함께 배우 엄아인의 소속사에 갔다.
 배우가 외국에 있어서 만날 수 없었다. 엄아인의 소속사는 대형회사가 아닌 데다 이 대표와는 안면도 없어서 실장이라는 매니저에게 책만 주고 나왔다.
 그 뒤 낚시를 하는 심정으로 여러 회사를 거쳤다.
 우편으로 보내면 바로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확률이 높기에 우선은 매니저에게 책을 전달하고, 그것도 안 되면 안내데스크에 맡겼다.
 
 소속사 14군데에 책을 접수한 뒤 대표님과 헤어졌다.
 대표님은 투자사에 문서를 보내기 위해 회사로 돌아갔다. 일주일 후부터 엄청나게 바빠질 거라는 엄포를 내리셨는데, 그게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남아서 커피전문점에 들어가 여배우를 검색했다. 바빠지기 전에 미리 캐스팅을 알아볼 셈이었다.
 두 여배우가 안 된다면 차선책이 있어야 한다.
 관능적인 몸매에 야릇한 눈빛을 가진 여배우.
 그녀의 이름을 모르다가 검색을 해서 찾아냈다.
 이얼.
 사진을 보니 팜므파탈의 느낌이 상당히 강했다. 나이도 배역 나이와 같다.
 엄아인보다 연상은 나쁘지 않다.
 고혹적인 여자가 자신이 최고인 줄 아는 남자를 정신적으로 지배해야 한다. 나아가 가지고 노는 뉘앙스가 있어야 한다.
 
 남주 엄아인. 여주 이유현 혹은 이얼. 아내 임주연.
 
 무명 시나리오 작가 주제에, 아직 영화사 제작실장 노릇도 못하는 상태지만 대범하게 가기로 했다.
 이전의 나였다면 그럴 용기도 못 냈을 테지만, 코어 능력이 생긴 후로는 무서울 게 없었다.
 남자는 무기가 생기면 달라지는 법!
 
 이유현의 SNS를 훑어 보았다.
 배우들은 소속사에 가질 않으니 집에 있거나 동료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이유현은 스타그램을 주로 했는데 마지막으로 올린 사진이 가로수길 카페였다.
 그동안 올린 사진을 보니 자주 가는 카페였다. 함께하는 이들은 친구이거나 동료 배우다. 임주연도 있었다.
 일단 이유현과 이얼, 임주연의 스타그램을 모두 찾아 팔로우한 뒤 새 사진이 올라오기 기다렸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기로 했기에 일요일까지는 기다려 볼 참이었다. 매니저를 통하면 만나 주질 않을 테니.
 
 * * *
 
 다음 날 오전.
 아끼는 옷을 입고 가로숫길로 향했다.
 이유현이 즐겨 가는 카페의 맞은 편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서 9년을 살았지만 강남에 놀러 온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이 가로숫길은 처음 왔다.
 평일인데도 오가는 미녀들이 많았다. 혹시 브런치라도 먹으러 올까 싶어 기다렸으나 이유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넷째 날에도 같은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유현의 사진이 올라왔다. 가로숫길에서 멀지 않은 신사동의 카페였다. 그 카페도 그녀의 단골집이다.
 그 카페로 달렸다.
 제발 아직 카페에 있으라고 기도를 하면서.
 
 * * *
 
 세 여자가 카페 테라스에서 브런치를 즐기고 있었다.
 등을 돌린 여자부터 보였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 그 여자 맞은편 왼쪽에는 모델로 보이는 늘씬한 미녀. 오른쪽엔 가죽 재킷을 입은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이유현이었다.
 막상 이유현에게 다가가자니 용기가 안 났다.
 배우는 배우였다. 화장을 안 해도 빛이 났으니.
 바로 다가가면 극성팬으로 오해할까 봐 일단 카페에 들어가 파스타를 주문하곤 시나리오 책을 꺼냈다.
 
 먼저 날 의식한 사람은 모델로 보이는 여자였다. 내가 보고 있는 시나리오 때문이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는 내게서 등을 돌린 상태였고, 이유현은 날 힐끔 보긴 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모델로 추정되는 여자만 주로 말하고 두 여자는 반응만 보이며 듣기만 했다. 그러다 날 두고 하는 말이 들렸다.
 
 “저 남자, 영화 하는 사람인가 봐. 내가 말 걸어 볼까? 언니 새 작품 찾고 있잖아.”
 “네가 관심 있는 건 아니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히히.”
 
 뇌 활용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귀에 들렸다.
 어떻게 되나 싶어 코어를 발동했다. 잡다한 정보는 걷어치우고 이유현이 우리 영화가 맞는지만 확인했다.
 역시 예상대로 피고인 역할에는 적역이었다.
 그런데 코어가 이유현의 생각까지 읽는 모양이다.
 노출 영화는 더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정보 분석으로 나타났다. 차기작으로 다른 작품을 거의 결정한 마음도 전해졌고. 이 상태로 노출 영화를 제시하면 틀림없이 거절이다.
 
 나흘간 기다린 보람이 없었다.
 바로 자리를 뜰까 하다가 모델로 보이는 여자를 살펴보았다. 연기가 하고 싶으나 재능이 없다고 믿는 여자였다.
 등 돌리고 앉은 트레이닝복 차림의 여자도 보았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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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미상.]
 [나이 : 25세.]
 [키 : 167cm] [몸무게 : 49kg]
 [인상 :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
 [성격 : 털털함. 내숭. 낯가림.]
 [몸매 : 적당한 S 라인. 유난히 긴 다리.]
 [재능 : 창의적인 표현력. 예술적 감각.]
 [아내 역할 : 92%. 매우 적합.]
 [이력 : 연예인.]
 [능력 : 추정 불가.]
 [······]
 【최종 분석 : 매우 강렬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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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 분석을 그냥 뒀더니 최종 분석까지 떴다.
 아내 역할에 92% 적합하다는 분석에 한 번 놀라고, 나와 매우 강렬한 인연이라는 최종 결과에 더 놀랐다.
 그만큼 나와 인연이 있으니 잡아야 한다는 말인데.
 대체 누구기에? 얼굴을 보긴 했는데 배우는 아니었다.
 정보 분석 결과 이유현은 여배우라고 떴으니까.
 내가 이유현을 알고 있으니 배우라고 뜬 것도 있지만.
 
 내 표정이 희한했나 보다.
 날 보던 모델이 눈치를 주자 그녀가 날 바라보았다.
 이번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야구모자를 쓰고 화장도 안 했지만 정말 예뻤다.
 이유현의 미모가 부족해 보일 정도로.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화장을 안 해서 그런가.
 그 여자는 날 한 번 보고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아내 역의 배우를 찾았다는 기쁨보다는 이상형을 발견한 듯한 설렘이었다.
 
 영화 일을 하면서 여배우와 사랑에 빠지는 망상을 한 적 있다. 코어 능력이 생기면서 그게 헛된 꿈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톱스타와 감독의 사랑. 얼마나 멋진가.
 어쨌든 판단하기 어려운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배우가 될 재목을 찾아서 그런 건지. 매우 강한 인연을 만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지 미모에 반해서 그런 것인지.
 코어를 통해 그 인연이 무엇인지 분석해 보려다 멈췄다.
 그녀에게 대한 선입견이 생길까 봐. 혹은 내 감정이 코어의 결과에 휘둘리게 될까 봐. 다른 건 몰라도 내 감정의 영역에 코어를 동원하진 말자. 감정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니까.
 트레이닝복 여자는 분석대로 25살로 보였다.
 그럼에도 92%로 뜬 건 왜일까. 동안인가.
 세 여자는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자신들을 보는 날 수상쩍어했다. 카페에서 나갈 기미까지 보이자 마음이 급했다.
 
 “저기요!”
 
 뜬금없이 고함을 지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당황하고, 마음은 급하고, 이런 식으로 미인들에게 접근한 적이 없던 터라 오버했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여자 앞에서, 여배우 앞에서도 이런 적이 없는데 오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세 여자가 저마다 다른 얼굴로 날 보았다.
 불쾌한 표정. 황당한 표정. 아무 생각 없는 표정.
 탁자에서 일어나 걸어갔다. 행여나 날 치한으로 볼까 봐 한껏 미소를 담은 채 조심스레 그녀들 앞에 섰다.
 
 “저··· 유현 씨. 사인 좀.”
 
 내 말에 세 여자가 피식 웃고 말았다.
 급히 주머니에서 펜을 꺼낸 뒤 시나리오 뒤쪽 백지를 펼쳐 내밀었다.
 이유현이 거절하기도 뭣했는지 사인을 해 주곤 웃어 보였다. 유현 배우는 인성만큼은 좋은 거 같다.
 그 사인이 적힌 페이지를 북- 하고 찢었다.
 내 행동에 세 여자가 또 놀랐다.
 난 이유현이 사인한 페이지를 서류 봉투 안에 소중히 넣어 담았다.
 사인해 달라는 말이 나온 건 코어 능력이 발동한 결과였다. 세 여자의 경계를 풀 수 있는 추천 행동.
 아직 코어를 끄지 않았거든.
 그러곤 시나리오를 트레이닝복 여자에게 내밀었다.
 내 행동에 세 여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트레이닝복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저도 사인해요? 저, 아세요?”
 “모릅니다.”
 
 그 말에 두 여자의 표정은 굳어졌고, 트레이닝복 여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전혀 모른다.
 
 “그럼 왜?”
 “아내 역할을 맡을 배우를 찾고 있었어요. 그쪽이 가장 잘 어울릴 거 같아서요. 이 시나리오 가져가셔서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배우요? 제가요?”
 
 얼떨결에 책을 받은 트레이닝복 여자는 매우 당황했고, 두 여자의 안색은 금세 풀렸다. 두 여자의 시선이 흡사 동쪽에서 나타난 귀인을 보는 것만 같다.
 내 정체와 영화사의 현실. 투자도 안 된 영화 진행 상황을 알면 날 두들겨 팰지도 모른다.
 이유현이 물었다.
 
 “어느 영화사에서 일하세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세 명에게 한 장씩 주었다.
 
 “신성영화삽니다. 앞으로 영화계의 신성이 될 겁니다.”
 
 세 여자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에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 * *
 
 세 여자는 오늘 여유가 좀 있었다.
 이유현이 트레이닝복 여자를 도울 생각인지 그녀가 주도하여 커피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영화사에 내 이름과 직급을 물어본 뒤였다. 전화는 민정이가 받았고.
 영화사 직원인 것보다 내가 시나리오 작가인 점이 이유현에게는 더 안심되는 모양이었다.
 표정이 달라졌다. 모델은 시종 웃고 있었고, 트레이닝복 여자는 어째 불안한 기색.
 네 명이 어색하게 원탁에 둘러앉았다.
 
 “이거 잠깐 봐도 돼요?”
 “네.”
 
 이유현이 트레이닝복 여자가 들고 있던 시나리오를 펼쳐 보았다. 기획안부터 읽어 나갔다.
 
 조마조마하는 심정으로 지켜보았는데 책을 읽는 이유현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읽는 척을 하는 건지, 노출 영화라 언짢은 건지. 순진한 동생이 노출 영화를 찍는 거라면 바로 거절할 태세다. 다행히 아내 역할은 노출이 없다.
 대충 읽다가 내려놓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유현이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그녀가 책을 읽는 사이 나머지 3명은 여전히 어색한 얼굴로 커피만 홀짝거렸다.
 모델이 물었다.
 
 “새로 생긴 영화사죠?”
 “네. 대표님이 영화계에서 20년 넘게 계셨던 분이세요.”
 “와, 그러면 인맥이 장난 아니겠다.”
 “그럼요. 저 같은 사람을 고용했으니까.”
 
 모델이 피식 웃었다.
 이유현은 듣지도 못했는지 책 읽기에 바쁘고, 트레이닝복 아가씨는 내 명함만 만지작거린다.
 
 “그쪽도 여배우 맞으시죠?”
 
 트레이닝복 아가씨가 입을 떼려다 멈췄다.
 솔직히 말해야 하나, 아니면 그렇다고 해야 하나 망설이는 표정. 영화를 하고 싶은 열망이 있기는 했는데 잘할 수 있을까 두려운 감정도 보인다. 솔직히 말했다가는 오늘 일이 한낮의 소동극으로 끝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걸그룹 제니스 멤버예요. 서연이라고······.”
 “제니스? 아! 5인조 걸그룹?”
 “맞아요.”
 
 트레이닝복 아가씨가 알아봐 줘서 고맙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룹의 지명도가 낮다는 점에 쓸쓸해 보이기도 했고.
 내가 잘 몰라서 그랬는지, 서연이라는 여자가 제 입으로 설명하기가 그랬는지 모델 아가씨가 나섰다.
 
 “제니스 데뷔 3년 차예요. 소속사가 힘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얘네 실력은 진짜거든요. 그런데 얘 연기 전공한 건 어떻게 아세요?”
 “그냥 제가 감이 좀 있습니다.”
 “역시 작가님은 좀 다르나 보다. 서연이 예고에서 연기 전공했고, 연습생 때도 연기 수업받았거든요. 아, 서연이 원래는 대형 소속사에 있던 애예요. 데뷔는 다른 회사에서 했지만.”
 “원래 연기자가 되려고 하신 겁니까?”
 
 서연이 대답했다.
 
 “아니요. 대형 기획사에선 연기 수업도 해요. 그 회사 있을 때 최종 데뷔에서 탈락했어요. 보컬도 좀 약하고 나이도 다른 연습생보다 좀 많은 스물두 살 때라. 그 회사에선 데뷔가 어려워서 다른 회사로 옮겼어요. 바로 데뷔할 수 있는 걸그룹이 있다고 해서 옮긴 건데······.”
 
 말을 흐리는 서연의 얼굴에 후회가 스쳤다.
 바로 데뷔한다고 다 좋은 게 아니었다는 후회.
 대형기획사에 계속 있었어도 후회했을 것 같다.
 모델이 불쑥 나섰다.
 
 “그런데 아내 역할을 하기엔 서연이 좀 어리지 않아요?”
 “몇 살이신데요?”
 “25살요.”
 
 분석이 정확했다.
 아내 역할은 20대 후반에서 서른 초반이 해야 한다.
 코어 능력이 서연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처연한 눈빛 때문인 것 같다.
 현재 그녀가 처해 있는 상황. 미래가 불안한 심리 상태. 데뷔 3년 차인데 아직도 무명에 가까우면 돈도 못 벌고 있겠지. 수익이 안 나면 그룹이 해체될 테고.
 극 중 아내의 복잡한 심리와 통하는 면이 있었던 거다.
 내 뇌가 그녀의 표정과 눈빛을 보고 판단한 것 같다.
 이 상황에서 연기로 전향하면 기회가 된다.
 이유현과 모델 아가씨가 반색했던 이유다.
 걸그룹 출신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니 신인배우로 적합한 사람이긴 하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게 분장하고 엄아인만 캐스팅된다면 둘은 잘 어울린다. 아내 역할은 고도의 연기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두 여자가 동지가 된 이유를 찾다가 과거 여고생이었을 때 같은 상처를 공유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설정했다.
 둘 다 피고인의 남편이자, 피해자인 재벌 2세에게 성적 유린을 당한 것으로.
 그때의 상처가 두 여자에게 트라우마로 남았고, 서로 의지하는 동지가 됐다. 그래서 아내는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세계에 침전하게 되었으며, 피고인은 용의주도한 팜므파탈이 되었다.
 매력적인 여자가 된 피고인은 정체를 숨긴 채 복수를 위해 재벌 2세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그의 부인이 되었다. 피고인은 동지인 ‘아내’가 행복하게 살기 바랐으나 하필이면 아내의 남편인 변호사도 재벌 2세 놈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둘 다 파멸시키기로 공모했다.
 변호사 놈을 이용하여 재벌 2세 놈을 죽이기로.
 
 원안에서 아내와 피고인, 피해자가 대학 동창생이었다는 설정은 삭제했다. 따라서 아내와 피고인의 나이가 달라도 되었다.
 한데 마치 서연을 만날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그런 설정과 전개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뇌가 미래까지 예측하는 건가. 원안대로 동창생이었다면 이미 제본된 시나리오를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나이를 언급하지 않았기에 서연보다 서너 살 많은 이유현이 피고인을 맡아도 된다.
 
 서연이 약간 불안한 눈길로 날 보고 있었다.
 제 나이가 어려서 안 되는 건가요? 라고.
 무표정하지만 감정이 눈에 드러나는 그녀다.
 나만 그 감정이 보이는 건지, 아니면 서연이라는 여자가 특이한 사람인 건지. 혹시 타고난 연기자?
 오바하지 말자. 난 그냥 감정을 읽었을 뿐이다.
 뭐라 말을 하려던 그때였다.
 
 “저기요.”
 
 이유현이 어느새 시나리오를 다 읽어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 해석하기 어려운 생각이 담겨 있었다.
 
 “우리 서연이, 아내 역할 할 수 있는 거 맞죠?”
 “네. 제가 관철할 겁니다.”
 “감독님은 어느 분이시죠?”
 “아직 찾고 있습니다. 신인 감독님 위주로요.”
 
 원래는 감독부터 계약하고 캐스팅을 진행하는 게 순서다. 캐스팅은 제작자 및 프로듀서와 감독의 권한이니까.
 이유현이 미심쩍어하는 눈치를 보인다.
 
 “남자 주인공은요?”
 “1순위는 엄아인 씨입니다.”
 “그렇구나. 그쪽에서 하신대요?”
 “아직 만나진 못했습니다.”
 
 이유현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해 놓은 게 없는 상태에서 덥석 시나리오를 내밀었으니 황당할 수밖에.
 투자도 안 받았다고 하면 바로 일어날 것만 같다.
 아니, 그녀도 이미 아는 눈치다.
 
 “피고인 역할도 안 정해졌을 테고··· 혹시 이 역할 때문에 저 찾아오신 거예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현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하고는 싶은데 노출 씬 때문에 꺼려지는 기색. 친한 동생을 위해 다시 한번 해 볼까 하는 고민도 보인다.
 
 “여주는 누굴 염두에 두고 있죠?”
 “1순위는 유현 씨. 2순위는 주연 씨. 3순위는 이얼 씨입니다.”
 “주연이는 안 될 것 같고··· 이얼 씨는 의외네요. 저랑 그분이랑 이미지가 비슷한 건가.”
 “생각 없으세요?”
 “전 이미 회사와 얘기해 둔 작품이 있어서······.”
 “시간은 아직 넉넉합니다. 제가 이얼 씨에게도 찾아뵐 생각이긴 합니다만, 하실 생각이 있으시면 미리 연락 좀 주세요.”
 “엄아인 선배님만 캐스팅되면 투자는 문제없을 것 같은데.”
 
 예상대로 그녀는 메인 투자가 안 된 걸 알고 있었다. 감독님이 아직 없다는 것으로 짐작한 모양이다.
 이유현의 얼굴에 갈등이 중첩되는 게 보였다.
 그녀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
 
 “투자사 정해지면 그때 연락 주세요. 가능한 한 하는 것으로 할 테니까.”
 “유현 씨가 꼭 하셨으면 좋겠네요.”
 “단, 조건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제가 하게 되면 서연이는 반드시 아내 역할 확정되어야 해요. 누가 뭐라 해도 그렇게 해 주셔야 합니다.”
 “유현 씨가 이 영화 안 하셔도 서연 씨는 반드시 아내 역할 할 겁니다. 투자사는 제가 끝까지 설득할 겁니다.”
 
 내 각오가 진실 되어 보였는지 이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현이 걱정하는 건 서연이 연기 경력이 없기 때문이다. 걸그룹 멤버라는 선입견도 있고.
 투자사나 감독은 거의 100% 확률로 걸고넘어질 게 뻔했다. 자칫 발연기 때문에 영화가 망할 수도 있다며.
 방법은 있다.
 연기를 보여 주면 된다.
 
 “서연 씨, 이번 주 금요일 스케줄 어떻게 돼요?”
 
 서연이 다소 들뜬 얼굴로 대답했다.
 
 “다음 주에 행사 하나 있는 것 말고는 없어요.”
 
 내 코어가 서연 씨의 스케줄까지 분석했나 보다.
 이래저래 최적의 배우를 찾아낸 것 같다.
 
 “금요일에 저희 사무실로 와 주실 수 있어요?”
 “네. 그런데 왜······.”
 “연기 훈련 좀 하게요.”
 
 말을 하곤 활짝 웃었다.
 나? 연기할 줄 모른다. 가르칠 수도 없다.
 내 코어 능력을 믿을 뿐.
 
 * * *
 
 이틀이 지나고 금요일.
 서연과 약속을 한 그날. 계약금으로 받은 돈으로 DSRL 카메라를 구입했다. 태어나서 처음 써 보는 거금이었다.
 카메라 테스트를 하기 전에 조작법을 익혔는데, 코어 능력 덕분에 30분도 안 되어 기능과 조작을 거의 마스터 해 버렸다.
 거기에다 광화문에 있는 서점에 가서 연기론, 연출론, 촬영과 조명 기법. 영화제작 실무 등에 관한 책을 사들여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내 뇌가 책을 보는 족족 기억해 버렸기에 책을 보는 게 아니라 통째로 외우는 수준이었다.
 눈으로 사진을 찍듯 기억해 버리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들인 장비로 사무실 건물 옥상에 세팅해 놓고 서연 씨를 기다렸다. 장비를 갖추고 연기 훈련을 하는 건 서연 씨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데 익숙해지라는 의도였다.
 
 얼마 뒤 서연이 옥상으로 왔다.
 문자로 아내가 입는 옷을 몇 벌 준비하라고 했는데 하얀 원피스 하나를 미리 입고 점퍼를 걸친 모습이었다. 놀랍게도 밝은 갈색이었던 머리가 검은 생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예상한 아내의 모습 그대로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올 때 춥지 않았어요?”
 “좀 춥긴 했는데 괜찮아요.”
 “소속사에선 뭐래요?”
 “당연히 고마워하시죠. 멤버들도 잘됐다면서 막 비명 지르고 그랬어요.”
 
 극 중 아내는 가련한 여자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청승맞게 아파트 베란다에서 물끄러미 밖을 보는 장면이 꽤 있다. 남편에게 구속된 여자의 심리를 묘사한 장면이다.
 
 지금은 10월 중순. 안 그래도 날씨가 쌀쌀한데 바람까지 부는 옥상에서 연기 연습을 할 생각이다. 청순해 보이고, 불쌍해 보이고, 비밀이 숨겨져 있는 여자를 가장 잘 표현할 것 같아서.
 
 그녀의 손에 시나리오 책이 있었는데 단 이틀 만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이유현의 도움을 받아 캐릭터 연구를 한 모양이다.
 
 난 카메라 뒤에 서고, 서연은 난간에 섰다.
 서연이 긴장하는 게 화면에 보였다.
 
 “무대에서도 긴장해요?”
 “아니요. 잘 모르는 분 앞에서 하는 게 처음이라······.”
 “실제로 촬영하면 회 차 거듭할수록 나아질 거예요.”
 
 아직 촬영 일정이 잡히진 않았지만 서연의 첫 촬영은 집에 혼자 있는 씬부터 찍을 것이다. 그렇게 몇 회 차가 지나가면 영화 촬영도, 스태프 앞에서도 어느 정도는 적응하겠지.
 
 감정이 고조되는 씬은 촬영 후반 마지막 재판 때다. 보조출연자가 많은 장면이라 좀 걸리긴 하지만 그녀가 잘해 줄 거라 믿었다. 이유현이 하게 된다면 의지할 사람도 있을 테고.
 
 “16씬부터 해 봐요.”
 
 서연이 점퍼와 책을 내려놓고 섰다. 바람이 살살 불어와 그녀의 긴 생머리가 얼굴을 간지럽히며 날렸다. 몸이 좀 떨리자 심호흡을 했다.
 
 “그, 그런데 언제 연기해요?”
 “지금 하면 돼요.”
 
 서연이 버림받은 여자처럼 우두커니 서서 허공을 응시했다.
 소파에 잠든 남편을 가만히 서서 보는 장면이다.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에 대한 원망. 남편 몰래 복수를 벌이고 있는 자책감. 자신의 아픈 과거와 현재의 처지 등을 내면 연기로 표현해야 한다.
 
 서연의 눈빛에 그런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 표정으로 연기하려는 게 보였다. 긴장감도 아직 남아 있었고.
 그러나 서서히 몰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이라 잘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5분 정도 지나 입을 열려고 하던 그때였다.
 
 코어를 발동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배역 적합성 상승이라는 단어가 떴다. 일순 그녀가 역할에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화면 상으로는 그리 길지 않았다.
 
 “바로 지금. 지금 상태를 기억해요.”
 
 몰입해 있던 서연이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지금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방금 연기가 제대로 나왔어요. 남편에 대한 원망. 그로부터 이어지는 죄책감. 나아가 서글픈 현실. 자유를 향한 갈망. 그런 감정이 차례대로 이어지면 돼요. 감정들이 섞인 게 아니라.”
 “아!”
 
 서연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는 다시 연기에 들어갔다.
 이유현이 이런 디테일까지는 말해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온갖 감정이 섞이면 무슨 감정인지 알 수가 있나.
 
 그녀가 다시 연기하고 10초쯤 지나자 확연히 달라졌다.
 그래도 좀 모자라긴 했다. 아직 배역 그 자체가 되진 못했으니까.
 신인에게 메소드 연기를 바라는 건 무리지.
 
 “됐어요.”
 
 서연의 점퍼를 들어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 그녀가 어색하게 고마움을 표하며 시나리오를 들어 뒤적여 보았다. 그러곤 16씬 여백에 메모했다. 정확히 어떤 심리를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던 모양이다.
 
 “이번엔 21씬이에요. 아내가 처음으로 쌓인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입니다. 남편과 몸싸움도 하고 뺨을 맞기도 해요. 남편에게 변태성욕자 성향이 있다는 걸 암시하는 장면이에요. 아내는 여기서 정신분열 상태를 처음 보여 줍니다. 원래 좀 이상한 여자이긴 했지만 ‘이건 뭐지?’ 하는 느낌을 관객에게 보여 줘야 하거든요.”
 “네. 유현 언니에게 그 말은 들었어요. 그런데 이거 저 혼자선 어려운데······.”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보조할 수밖에.
 서연이 현관문이라 표시한 부분에 섰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
 
 “슛 들어갑니다. 씬 21. 원 테이크. 레디··· 고!”
 
 막상 연기를 하려니 영 어색하네.
 난 안방에서 넥타이를 매고 나오는 척 연기하며 서연에게 걸어갔다. 서류가방을 들고 나가려는데 서연이 막아섰다. 옆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그녀가 단호한 모습으로 다시 막아섰다.
 
 “뭐 하는 거야? 비켜.”
 
 서연은 말없이 날 쏘아보기만 했다.
 
 “이 여자 왜 이래, 아침부터?”
 
 나가려는 날 다시 서연이 막아섰다.
 
 “비키라고. 나 바빠.”
 
 서연이 갑자기 앙칼지게 소릴 질렀다.
 
 “싫어! 싫어! 싫어!”
 
 내 팔을 잡아 뜯을 듯 악을 써 대는 그녀였다. 내가 확 뿌리치자 서연이 넘어졌다가 내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아, 왜 이래! 저리 가라, 좀!”
 “당신 죽여 버릴 거야! 당신이 내 인생을 망쳤어!”
 “말은 바로 하자. 넌 결혼 전에도 미친년이었어. 아니지. 이혼하려고 미친 척하는 거겠지. 쇼하지 말고 저리 가!”
 
 서연을 밀쳐 버리곤 나가려는데 그녀가 내 등에 매달렸다. 그러더니 내 목덜미를 물었다. 진짜로!
 
 “아아!”
 
 내가 몸부림치며 서연을 떨쳐내려고 하자 그녀가 더욱 매달렸다.
 
 “아, 진짜 물면 어떡해요.”
 
 그제야 서연이 황급히 내 몸에서 떨어졌다.
 
 “죄송해요. 난 연기인 줄 알고··· 괜찮아요?”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씩 웃었다.
 날 막아서는 서연에게서 아내가 보였다.
 어쩌다 얻어걸린 연기가 아니었다.
 
 “괜찮아요. 16씬보다 나은데요?”
 “아무래도 상대역이 있어서 좀 나은 거 같긴 하네요.”
 “좋아요.”
 
 카메라로 돌아가 찍어 놓은 화면을 확인했다.
 내가 제대로 본 게 맞았다.
 서연의 연기가 한결 나아졌다. 몸싸움을 벌이기 직전에는 내가 생각한 아내의 눈빛과 표정 그대로다. 내 연기는 봐주기가 곤란했고.
 
 “어때요?”
 “잘 모르겠어요.”
 “이 정도면 좋은 거예요. 115씬도 외웠어요?”
 “외우긴 했는데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막막해요. 언닌 그냥 담담하게 하라고 하긴 했는데.”
 “담담하게 하면 돼요. 대신 무표정한 얼굴에 목소리 톤만 격양되어야 합니다. 도중에 피고인을 볼 때는 두 여자의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 전해져야 해요. 증거와 함께 폭로할 때는 미친 듯이 대사를 쏟아내며 폭발해야 하고요.”
 “유현 언니는 이 장면에서 아내의 곪았던 상처가 터지는 동시에 상처가 아물고, 관객에겐 메시지를 보여 준다고 했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변호사이자 남편을 향해 오열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 상황입니다. 강렬하게 몰아붙여야 해요. 재판장에 있는 사람도, 관객도 숨이 멎을 정도로.”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연기 연습에 들어갔다.
 가장 중요한 115씬 마지막 재판을 중심으로.
 
 * * *
 
 다음날 토요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월요일부터 제작실장으로서 일해야 하기에 서연을 도와줄 시간은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이 전부였다. 그 뒤로는 그녀에게 맡겨야 했다.
 
 다행히 다음날에는 한결 나아졌고, 발성과 발음도 두드러지게 좋아졌다. 옥상에서 꼬박 5시간을 연습하고 숙소에 가서도 연습하는 모양이었다. 이유현이 도움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토요일 밤에는 연습을 끝내고 가볍게 맥주도 마셨다.
 민정이까지 합류한 술자리였는데, 술이 좀 들어가다 보니 서연과 나 사이의 어색함이 제법 줄어들었다.
 맥주 두 잔을 먹고 혀가 꼬부라지더니 종알종알 떠들어대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특이하기도 하고.
 
 그날 연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각 씬에 대한 설명, 아내 캐릭터의 심리 변화도 자세히 알려 주었다. 서연은 메모하다가 나중엔 폰으로 녹음까지 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술을 먹고 난 다음 날 일요일.
 연습 3일 만에 진짜 연기를 보았다.
 배역 그 자체가 되는 게 무엇인지 서연이 깨달은 거였다.
 아직 신인 특유의 어색한 시선 처리가 있긴 했으나 기술적인 부분은 촬영 회차가 거듭되면 달라질 것으로 보였다.
 
 타고난 연기자.
 그건 진짜였다.
 내 눈앞에서 괴물 신인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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