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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M3000 1-1

2017.11.13 조회 5,245 추천 37


 <RPM 3000> 1권
 
 
 목차
 프롤로그 기적을 만나다!
 1장 골동품 EEB 야구게임기
 2장 switched body
 3장 빅 유닛으로 Rebirth
 4장 때려죽여도 야구!
 5장 매직 Zone―1
 6장 잠재력 폭발
 7장 메이저 레전드의 코칭
 8장 Only 포심!
 9장 핵 타선을 깨다
 10장 파죽지세
 11장 거침없이 결승까지
 
 
 
 프롤로그 기적을 만나다!
 
 
 
 삐빗삐빗~
 
 “게임 결과에 따라 플레이어의 능력 향상 스킬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안타는 아이템 하나, 2루타는 둘, 3루타는 셋, 홈런은 네 개의 옵션까지 선택이 가능합니다. 플레이하시겠습니까?”
 30년도 더 된 낡은 EEB(Epoch Electronic Baseball) 야구게임기. 삐빗거리는 게임기의 On 버튼을 누르는 순간, 시들어가던 후보 투수의 삶에 기적의 불이 들어왔다.
 삐빗삐빗~ 삐빗!
 
 
 
 1장 골동품 EEB 야구게임기
 
 
 
 2013년 공주 구장.
 8회 말 투아웃 만루. 게임 스코어 2 대 3. 한 점 뒤진 상황에서 볼카운트 투 앤 투. 상대가 전통의 강호 북인고인 걸 감안하면 어마무시한 선방이다. 9회 초 역전도 노려볼 수 있는 순간, 승우가 뿌린 슬라이더가 통타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빠악!
 네 번째 투수로 올라온 승우였다. 선발로 나온 3학년 강철욱이 모처럼 6과 3분의 2이닝 1실점으로 선방했지만 이후에 나온 남재와 벙구가 문제였다. 결국 8회를 넘기지 못했다. 볼넷 세 개와 안타 하나로 한 점을 더해 만루를 허용하고 승우에게 마운드를 넘긴 것이다.
 소방수라서 투입된 게 아니었다. 남은 투수 중에서 그나마 제구가 되는 건 승우뿐이었다.
 “와아아!”
 북인고 더그아웃의 함성과 함께 공은 잘도 뻗어나갔다. 함성은 공을 계속 밀어 보냈다.
 공이 펜스 하단을 때렸다. 수비 커버를 위해 달려온 중견수가 잡았지만 한 번 더 더듬어주시는 통에 타자는 3루로 치달았다.
 “홈! 홈!”
 북인고 수비 코치가 풍차처럼 팔을 돌렸다. 그제야 공이 중계되었다. 타자는 그라운드 홈런을 만들고 홈에 안착한 후였다.
 “홈인!”
 심판이 두 팔을 날개처럼 파닥이며 콜을 외쳤다.
 “와아아!”
 함성 속에서 그라운드는 두 개의 세계로 나뉘었다. 4점을 쓸어 담은 북인고와 추격의 의지가 무너지는 소야고의 한숨.
 “괜찮아! 다시 시작해요!”
 승우가 두 팔을 뻗으며 외쳤다. 파이팅 기백으로는 초고교급 투수가 되고도 남을 승우. 하지만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6번 타자는 내야플라이로 잡았다. 구위가 좋은 게 아니라 단지 앞선 타자의 영향으로 스윙이 너무 큰 덕분이었다.
 “가자, 역전! 아자아자!”
 9회 초 마지막 공격. 승우는 대기 타석에서 악을 썼지만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세 타자가 내리 아웃을 당하고 말았다. 상대는 역시 북인고, 공비고와 더불어 지역의 맹주이자 전국에서 초상위권을 다투는 학교다웠다.
 “스뚜우악 아웃!”
 게임의 끝을 알리는 심판의 마지막 포즈는 잔인하도록 박력이 넘쳤다. 그제는 공비고에 7회 콜드게임 패, 오늘은 북인고에 7 대 2 패배로 후반기 주말 리그 지역 예선전 6패. 충남 소야고등학교가 연습 경기 포함, 28연패를 당하는 순간이자 후반기 주말 리그를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28연패.
 ‘쉿!’
 승우의 입에서 쇳소리가 나왔다. 고교 입학 후 세 번째 등판이었다. 스피드는 없지만 손가락 감각이 좋아 변화구를 잘 구사하는 승우였다. 제구력만큼은 박 감독의 수제자로 불렸다. 하지만 그것 하나로 경기를 압도하는 건 불가능했다.
 교장이 슬쩍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교감도 그 뒤를 따랐다.
 “수고했다.”
 박 감독이 말했다. 호투한 강철욱도 격려했다. 오늘 안타를 두 개나 쳐낸 소야고의 투타 대표 철욱.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야고 안에서의 일이었다.
 부상으로 일찌감치 현역에서 물러나기 전, 제구력의 달인으로 불렸던 박 감독은 창단 3년 내 전국 우승을 목표로 취임하였다.
 창단 첫해에 전국 4강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그해의 전지훈련장에서 악마를 만났다. 공들여 스카우트한 에이스와 포수가 사고를 당해 야구를 접게 된 것. 이후 내리 두 해를 망치게 되자 중학교 우수선수들의 지원이 끊겼다.
 당연한 일이었다. 정신 제대로 박힌 선수와 부모라면 소야고를 쳐다볼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신입생 대다수는 다른 학교에서 쳐다보지도 않는 후보 출신들. 박 감독은 이제 고개도 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허튼짓 말고 월요일에 보자!”
 감독의 말과 함께 선수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지는 데 이골이 난 팀이었기에 익숙한 풍경이다.
 ‘완전 개꿈이었네?’
 지난밤의 꿈을 떠올렸다. 마음은 빅 유닛인 승우. 그러나 실제 키는 크지 않아 땅콩 빅 유닛으로 불렸다. 그 빅 유닛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꿈을 꾸었다. 훌쩍 커진 키로 타자를 압도한 것이다. 꿈에 그리던 세 타자 연속 삼구 삼진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삼구 삼진? 꿈은 꿈일 뿐이다. 그것도 앞에 ‘개’ 자를 붙이고 싶은.
 빵빵!
 기적 대신 아빠 똥차의 경적이 울렸다. 저만치에서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아빠의 만물상 행상 트럭이 뒤뚱뒤뚱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꿀꿀해서 그런 걸까? 아빠의 차가 무브먼트를 일으키는 포심처럼 보였다.
 아, 저런 공을 던질 수만 있다면.
 
 “괜찮아. 이제 1학년이잖아. 아직 창창하다.”
 방파제에서 낚싯대 릴을 감던 아빠가 말했다.
 “무려 28연패걸랑!”
 승우도 낚시를 풀었다.
 “우리 빅 유닛이 앞으로 28연승, 30연승 하면 되지.”
 “손가락만 빅 유닛, 현실은 땅콩 유닛!”
 “Slow and Steady! 잊은 거 아니지?”
 “누가 잊어? 훈련은 Slow and Steady, 실전은 Fast and Strong!”
 “그래 봬도 앞의 말은 그 유명한 괴테의 좌우명이다.”
 “기왕이면 메이저 레전드의 좌우명으로 알려주지.”
 “네가 레전드 되어서 하나 만들면 되잖아.”
 “이 키로?”
 승우가 까치발을 들며 작은 키를 강조했다.
 “월척 잡아서 배 터지게 먹자. 그럼 키가 쑥쑥 클 거다.”
 “첫 승 올리면 잡아준다는 대물이나 잡아줘. 아무래도 그거 미리 먹어야 할 거 같아.”
 “No. 그렇게 중요한 건 아껴둬야지.”
 아빠는 바로 능청이다. 말은 월척이지만 아빠의 미끼를 문 건 손바닥보다 작은 노래미들이었다. 그사이에 승우의 낚싯대에 감이 왔다. 제법 큰 우럭이 나왔다.
 “이만하면 됐지 않냐? 배고플 텐데 썰어볼까?”
 10여 마리가 모이자 아빠가 칼을 빼 들었다. 승우는 간이 테이블을 펼쳤다. 만물 트럭을 등지니 훌륭한 바람막이가 되었다.
 “이거 받아라.”
 휴대용 도마를 꺼낸 아빠가 뭔가를 던졌다.
 “······?”
 허공에서 받아 든 승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만물 트럭 찜 쪄 먹고도 남을 정도로 낡은 게임기였다.
 “이게 뭐야?”
 “보면 몰라? 국보급 게임기지.”
 “아빠!”
 “아빠가 애지중지하던 건데 신혼 초에 사라졌거든. 어제가 엄마 생일이라 덕적도 가는 길에 소야도 엄마 묘지에 들렀는데 묘지석 뒤에 있더라? 그렇게 찾아도 없던 게 하늘에서 떨어진 건지, 아니면 엄마가 꿍쳐뒀다가 돌려준 건지······.”
 “엄마 생일이었어?”
 “그래. 제사 말고.”
 “그런데 왜 얘기 안 했어?”
 “짜샤, 넌 시합 때문에 바빴잖아.”
 “그래도······.”
 “아무튼 이상해서 만지다 깜빡 졸았는데 비몽사몽 중에 엄마가 나타나잖아? 그러면서 너 꼭 가져다주라는 거야. 그래야 네 소원이 이루어진다나?”
 아빠는 ‘꼭’을 강조했다.
 “진짜?”
 “오냐. 그 게임기가 보통 게임긴 줄 아냐? 그거 네 할머니가 쌈짓돈 털어서 사주신 거다.”
 “얼마 줬는데?”
 “그게 중요하냐? 중요한 건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거지.”
 “무슨?”
 “수학 100점. 그것도 찍어서.”
 “헐!”
 “그러니 네 소원도 들어줄 거다.”
 “수학 시험은 찍기라도 한다지만 빅 유닛은 어떻게?”
 “아, 짜식, 그래도 엄마 말은 믿지?”
 “아빠도 엄마 꿈꿨어?”
 “너도?”
 “난 개꿈이던데? 소원 들어준다길래 오늘 역사적인 1승을 하나 했는데 결국 졌잖아. 내가 패전투수는 아니지만.”
 “얌마, 1승이 소원이면 너무 쪼잔하지. 앞으로 프로에서 100승, 200승 올릴 투수께서.”
 “이거 안 되는데?”
 게임기의 스위치를 누르던 승우가 고개를 들었다.
 “알아.”
 “응?”
 “내가 해봤거든.”
 아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원래 천성이 저렇다. 승우 역시 그 유전자를 물려받아 끝장 낙천왕이긴 하지만.
 “아빠!”
 “네가 어디다 수리 맡겨봐. 엄마가 설마 거짓말하겠니?”
 “아빠는 하지.”
 “어허, 독자들 보는데 대놓고 인신공격이네? 그거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잖아?”
 “빈도가 잦으니까 하는 말이야.”
 “알았으니까 이거나 먹고 있어라.”
 아빠가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둔 냄비 뚜껑을 열자, 고소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계란 프라이? 왜 이렇게 많이 했어?”
 승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구라쟁이 아빠는 통도 크다. 적어도 20개는 투입한 포스이다.
 “야, 네 눈엔 그게 계란으로 보이냐? 사내 녀석 배포가 밴댕이 소갈딱지 같으니까 빅 유닛이 못 되는 거야.”
 “유전자 때문이 아니고?”
 “얌마, 엄마하고 나는 또래 중에서 큰 편이었어. 그리고 고1 때부터 큰 선수들 많다, 너. 내 친구는 군대에서도 10센티미터나 컸다니까.”
 “방위 나왔다면서?”
 “얌마, 그냥 방위가 아니고 특공방위야. 그거 현역보다 군기가 더 세거든.”
 “됐고, 계란이야, 오리 알이야?”
 “땡!”
 “둘 다 아니야?”
 “무려 타조 알이시다!”
 “타조 알?”
 “저 아래 타조 농장이 있는데 주인이 소야도 바지락 맛에 뻑 갔지 뭐냐. 바지락 배달해 주고 요리한 거 좀 얻어왔다.”
 “뽀린 건 아니고?”
 “이 녀석이 아빠를 뭐로 보고.”
 “쏘리. 진짜 타조 알이야? 먹어도 되는 거야?”
 “너 지상에서 시력이 가장 좋은 동물이 뭔 줄 알아?”
 “매?”
 “천만에. 매는 타조에 비하면 우주 앞의 지구, 메이저 선수 앞의 싱글 A 꼴이다. 매의 시력은 꼴랑 9지만 타조는 무려 25야, 25!”
 “정말?”
 “아, 짜식이 속고만 살았나? 검색해 보든가.”
 아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우의 손은 스마트폰 스크린 위를 날아다녔다. 이번에는 구라가 아니었다. 타조의 시력은 25.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존을 한 천 개 정도로 쪼개 볼 수도 있다는 건가?
 “먹고 팍팍 커라. 타조야말로 새알의 빅 유닛이니까.”
 타조 알 프라이 옆에 회도 준비되었다.
 빅 유닛 타조 알.
 진심 인정이다. 타조 알은 정말 새알 중에서 독보적이었다. 이 정도라면 공룡 알로 불러도 될 수준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데 카톡이 왔다. 승우와 배터리인 세형이었다.
 ―월척 잡았냐?
 ―짭짭하고 계신 중이다.
 ―왕 부럽다.
 ―너는?
 ―엄마, 아빠랑 대게 먹고 있는 중.
 ―푸헐, 이게 어디서 염장질?
 ―많이 먹고 키 좀 커서 와라, 땅콩 빅 유닛 님!
 ―뒈질래?
 전화기를 던져 버린 승우는 주린 배를 타조 알로 채웠다.
 빅 유닛!
 그건 승우의 꿈이다. 랜디 존슨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 때문이기도 하다. 둘 다 야구를 좋아했다. 잠시 야구 선수도 했다. 아빠는 리틀 야구단에서 투수를 했다. 엄마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여자 야구 동호회에서 투수를 맡았단다.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아빠는 생애 통산 2승이 전부였고, 투수가 멋져 보여 투수 포지션을 맡은 엄마는 후보였기에 딱 한 경기에 나가 볼넷 세 개만을 기록했다.
 ―투수라면 랜디 존슨 정도는 되어야지. 폼 나잖아?
 어린 승우가 야구를 좋아하자 둘은 신화를 심어주었다. 야구를 시작한 초등학교 때는 빅 유닛의 가능성이 충분했다. 반에서 제일 큰 승우였다. 그때는 야구 유망주로 꼽히기도 했다.
 미래의 랜디 존슨.
 승우의 꿈은 중학생 때 무너지기 시작했다. 입학 때 169를 찍은 키가 하나도 자라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승우의 키는 정확하게 169센티미터이다. 170을 앞두고 마의 아홉수에 걸린 모양이다.
 그래도 손재주 좋은 엄마를 닮아 센스가 있었다. 손가락까지 길어 변화구는 제법 구사하지만 패스트 볼이 겨우 120킬로미터 초반. 연습 벌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필사적인 노력을 했지만 구속은 붙지 않았다.
 너무나 평범했기에 가까운 곳의 인전고, 둥산고, 고래고, 대물포고는 물론 그 어느 고등학교 야구부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특히 인전고와 둥산고의 무시는 사무치고 사무칠 정도였다.
 그나마 소야고등학교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아빠의 읍소 때문이었다. 날마다 박 감독 아파트에 횟감 생선을 잡아다 준 것이다. 아빠는 그런 성의 때문에 입학이 허락된 것으로 알지만 감독 말은 좀 달랐다.
 ―집에 비린내가 나서 살 수가 있어야지!
 쉿, 아빠는 모르는 비밀이다.
 
 타조 알이 들어가고 회가 들어가자 포만 게이지가 만땅을 찍었다.
 “마셔라. 만능 회복 포션!”
 아빠가 후식으로 내놓은 건 박카스였다.
 “그건 술에 찌든 아빠 몸에나 그렇지.”
 준비한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스프는 버리고 대신 고추장을 한 숟가락 푸는 승우. 이건 승우만의 열정 보충 레시피였다. 때로는 애정 보충도 가능했다.
 “짜식, 아직도 그렇게 먹냐?”
 지켜보던 아빠가 핀잔을 작렬했다.
 “쳇, 시작한 사람이 누군데?”
 “얌마, 그때는 내가 속이 쓰려서 풀려고 그랬지.”
 “줘?”
 승우는 고추장으로 비벼낸 컵라면을 들어 보였다.
 “그거 말고 회복 포션으로 딱 한 잔만 마시면 안 될까?”
 “아빠!”
 “야, 한 잔은 음주 측정에 안 걸려. 너하고 약속도 잘 지키고 있고.”
 “양심껏 해. 하루 석 잔 이상은 금지니까.”
 “그래도 고맙다.”
 “뭐가?”
 “잔 크기까지는 정해주지 않아서.”
 “아빠!”
 “아, 짜식, 진짜 아들 하나 달랑 있는 게 마누라보다 더해요.”
 “나도 엄마 있으면 그런 거 참견 안 해.”
 “허얼, 핑계는 100마일짜리 돌직구로구나.”
 “이거나 마셔.”
 승우가 박카스를 밀었다. 실은 콧등이 시큰해져서 고개를 돌린 것이다. 어제가 엄마 생일이었다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거 싫으면 만물 트럭에서 아무 거나 골라 먹든가.”
 “거긴 야채하고 과일뿐이잖아.”
 “알았다, 알았어. 진짜 대물 포인트로 가는 길에 휴게소가 있으니까 거기서 네가 원츄 하는 거 사거라. 나도 아랫배에 살살 신호가 오는 것 같아서 밀어내기도 해야겠고.”
 부릉!
 시동이 걸렸다.
 아빠의 입에 이문세의 노래도 걸렸다. 애창곡인 ‘휘파람’이다. 말만 애창곡이지 ‘그대는 휘파람 휘이이’ 할 때면 거의 공해 수준이다.
 어스름이 내린 도로에 올라서자 비가 내렸다. 소나기로 보였다. 한때는 비도 많이 맞았다. 비를 맞으면 키가 큰다는 수위 할아버지의 말 때문이다. 할아버지 말도 구라였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휴게소에는 사람이 많았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갑자기 옆자리가 답답해졌다. 고개를 드니 남학생이다. 승우 또래 같은데 머리 두 개는 더 있어 보였다. 소변을 보던 학생이 승우를 내려다보았다. 두 눈이 승우와 마주쳤다. 이질적이지만 왠지 친근감도 느껴지는 마스크. 난생처음 느끼는 기분이다. 기분이 묘했다.
 남학생은 배구 선수인 모양이다. 발길이 배구 선수단 버스로 향하고 있었다.
 ‘봉래고등학교?’
 소야고에서 가까운 학교이다. 최근에 고교 배구의 강자로 떠오른 학교이다. 봄철 전국 대회 우승이라는 현수막도 본 차였다.
 “존나 부럽다.”
 승우는 혼자 중얼거렸다.
 “우승한 거 말고 네 키 말이야.”
 핵심어도 잊지 않았다.
 츄러스를 샀다. 엄마가 좋아하던 과자이다. 그래서인지 츄러스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났다.
 ―먹고 키 좀 크려고.
 그때마다 그 말을 핑계로 댔다. 하지만 키는 더 자랄 것 같지 않았다.
 만물 트럭으로 돌아오자 조수석 옆에 찔러둔 게임기가 보인다. Epoch Electronic Baseball 게임기.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무려 30년이 넘은 제품이다.
 푸헐!
 ‘이런 걸로 무슨 게임을······.’
 스위치를 눌러보지만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개고물이 분명했다.
 
 “응?”
 돌아온 아빠가 고개를 빼 들었다.
 “왜?”
 “차 뒤에 뭔가 있는 거 같아서··· 윽?”
 말을 하던 아빠가 인상을 찡그렸다.
 “또 왜?”
 “나이 먹으니 똥꼬 조이는 힘이 떨어져서 그런가? 밀어내기가 깔끔하게 안 끝나네? 나 한 번 더 갔다 올게.”
 아빠는 배를 잡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응?’
 막 츄러스를 먹으려는 참이다. 백미러에 뭔가 희끗한 게 보였다.
 ‘뭔가 있는 것 같다더니······.’
 승우는 차에서 내렸다. 아빠가 전에 어린아이를 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다. 없는 게 없는 트럭이다 보니 아이들의 시선을 끄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다시 차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까 운동장에서처럼. 눈을 비비고 끔뻑거리자 차가 다시 보였다. 패배의 후유증이야. 승우는 고개를 저었다.
 꼬꼬댁!
 뒤로 돌아가자 장닭이 소란을 떨었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가 나더니 닭이 범인이었다. 또 누가 특별한 부탁을 한 모양이다. 닭 때문이었나 하고 돌아서려는데 오만 가지 물건들 사이에서 흰빛이 아른거렸다. 차분히 보니 여섯 살쯤 된 여자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이 옷차림이 복고풍이다. 시골 아이인가? 아니, 그보다 더 이상한 게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라는 거.
 누굴까?
 낯은 익은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았다.
 아빠가 숨겨놓은 동생?
 ‘큭큭!’
 혼자 상상하고 혼자 웃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저번에 주장 강철욱이 데리고 온 꼬맹이 여동생?
 아니, 주장하고는 하나도 안 닮았다.
 “너 누구야? 왜 여기에 있어?”
 승우가 물었다.
 아이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이 츄러스에 닿았다.
 “달라고?”
 승우의 말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시선이 너무나 진지해 츄러스를 주고 말았다. 마치 최면에 걸린 기분이다. 아이가 츄러스를 물자 그 몸이 푸른 형광빛으로 감싸였다. 하르르 피어난 빛이 밀려와 게임기에 닿았다.
 ‘응?’
 승우 시선이 게임기로 향했다. 스크린이 켜진 건가? 그럴 리 없잖아? 화면이 있는 게임기도 아닌데.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드니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츄러스만 먹고 튄 모양이다.
 당했구나.
 쓸쓸한 기분이 뒤통수를 후려칠 때 게임기에서 삐삣삐빗 하는 시작 음이 들려왔다.
 ‘응?’
 시선을 맞추자 그라운드의 포지션들이 붉은 불빛과 함께 신호음이 높아졌다.
 삐삣삐삣삐비빗!
 ‘이거 왜 이래?’
 소리가 한 덩어리로 합쳐지나 싶더니 기묘한 빛으로 변했다. 그 빛 사이로 파도 소리를 닮은 멘트가 나왔다.
 “21세기 ‘첫’ 이벤트 게임을 시작합니다!”
 이벤트 게임?
 ‘울라? 이거 소리도 나오네?’
 “플레이어 곽승우 맞습니까?”
 ‘응? 내 이름도 알아?’
 “타격 성적에 따라 플레이어의 능력 스킬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안타는 아이템 하나, 2루타는 둘, 3루타는 셋, 홈런은 네 개의 옵션까지 선택이 가능합니다. 플레이하시겠습니까?”
 멘트는 중간중간 늘어지면서도 용케 이어졌다.
 ‘뭐야? 겉보기만 이런가? 새로 나온 변신형 게임기야?’
 신기한 마음에 게임기를 살폈다.
 “타격 기회는 세 번입니다. 안타 이상을 치면 스킬 생성 퀘스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소중한 기회이니 신중하게 플레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죠.’
 승우가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삐빗, 삐삐삐이 하는 소리와 함께 빨간 점이 홈으로 날아왔다.
 스트라이크!
 첫 공은 놓쳤다. 척 봐도 어이 상실급의 원시적 게임기. 그것 하나 못 치고 나니 은근히 화가 났다.
 ‘다음!’
 두 번째 공이 날아왔다. 타이밍을 맞춰 배트를 휘둘렀다. 이번에도 빨간 점은 홈 플레이트를 유유히 지나갔다.
 ‘허얼!’
 마지막 기회만 남았다. 이벤트고 나발이고 북받친 핏대가 상한선을 찍었다. 9회 말, 한 점 차 뒤진 상황에서 투아웃에 주자 2, 3루. 그 비장한 심정으로 피처를 주시했다.
 삐삣삐!
 투구 음과 함께 빨간 점이 튀어나왔다.
 ‘오냐, 이번에는······.’
 공이 오는 타이밍을 계산해 재빨리 버튼을 눌렀다. 맞췄다. 빨간 점이 유격수를 지나갔다. 2루타였다.
 “플레이어 곽승우, 2루타 기록입니다. 스킬 선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원하시면 배터 버튼의 센터를 세 번 눌러주세요.”
 ‘세 번?’
 승우는 가이드에 따랐다. 그러자 게임기 위로 홀로그램처럼 아슴아슴한 영상이 투영되었다.
 
 스킬1: 타조의 신성 시력 부여
 스킬2: 기적의 30% 체력 회복력
 스킬3: 컴퓨터 제구력 30% 향상
 스킬4: 거미줄 수비망 30% 확장
 스킬5: 순간 파워 홈런 20% 증가 옵션
 스킬6: 찰고무 민첩성 20% 향상
 스킬7: 골리앗 장타력 20% 향상
 스킬8: 치타의 순간 주력 20% 향상
 스킬9: 용수철 점프 능력 20% 옵션
 스킬10: 빨랫줄 도루 저지력 20% 향상
 세부 스킬1: 플라라니아 옵션―(Next)
 세부 스킬2: 포지션 전향 옵션―(Next)
 세부 스킬3: One+One 옵션―(Next)
 
 ‘이건 또 뭐야?’
 스킬 문자를 읽어본 승우가 소스라쳤다. 일본 만화 같은 데서 보던 주인공의 희망 사항들이다. 게다가 열 번째 이후의 스킬은 희미하게 깜빡거린다. 곧이어 부연이 따라 나왔다.
 “1번 스킬은 타자용, 투수용으로 나뉩니다. 선호하는 포지션에 따라 선택하세요. 타자는 선구안, 투수는 스트라이크존 투시 능력을 갖게 됩니다.”
 타자는 선구안!
 투수는 타자의 장단점 코스 투시 능력!
 그야말로 초능력이다. 그제야 짐작이 되었다. 이건 아빠의 이벤트였다. 오늘 또 질 것을 예상하고 기분 전환을 시켜주려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름까지 입력되었겠지. 그러니까 뭔가 급하다고 핑계를 대며 화장실로 사라진 것이다.
 “단 각 스킬은 True와 False로 구분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False를 뽑으면 찬스를 상실합니다. 둘 다 True를 뽑으면 다음 Tree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선택하세요.”
 “1번 스킬, 투수, 2번 스킬!”
 귀찮아서 앞쪽에서 골라 버렸다.
 “제1 스킬로 타조의 신성 시력, 제2 스킬로 기적의 30% 체력 회복력.”
 삐빗삐비빗!
 소리와 함께 두 스킬에 녹색 불이 들어왔다.
 “축하합니다. 둘 다 True가 나왔습니다. 이 스킬은 ‘경기’ 중에만 발현됩니다. 즉 타자의 경우 타석에서, 투수의 경우에는 마운드에서 주로 발현되지만 경기장 안에서는 부수적인 주변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2번 스킬 역시 경기장 안에서만 유효합니다.”
 “······.”
 “다음 과정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도전에 성공하면 세부 스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승우가 손을 저었다.
 “게임 중단을 선택하셨습니다. 매년 오늘, 다음 과정 도전권을 한 번 행사할 수 있습니다. 동의하시면 배터 버튼의 왼쪽을 세 번 눌러주세요. 오늘 획득한 스킬은 당신의 의식 인벤토리에 저장되며 다음 도전권 때까지 계속 유효합니다.”
 “옛썰! 명심하지요.”
 승우는 공손하게 고개까지 조아렸다.
 “설정이 끝났습니다. 확인하세요.”
 ‘확인?’
 승우는 생각을 더듬었다. 그러자 의식 속에 두 개의 큐빅이 보였다. 신성한 빛으로 반짝거린다. 하지만 큐빅은 비어 있었다.
 “스킬은 24시간 후에 장착됩니다. 장착과 동시에 사용 가능합니다. 이상입니다.”
 “24시간 후?”
 멘트와 함께 다시 게임기의 포지션마다 붉은빛이 반짝거렸다. 각각 세 번씩 빛을 뿜더니 게임기는 낡은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뭐야?’
 눈자위를 구기는 순간 아빠의 솥뚜껑만 한 손이 날아와 승우의 등짝을 강타했다.
 “뭐 하냐?”
 “아빠!”
 “혼자 잘도 노는구나. 나는 또 친구라도 만난 줄 알았네.”
 “뭐야? 장난은 아빠가 치면서.”
 “내가 뭘?”
 “게임기 말이야. 여기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말소리도 나던데.”
 “되냐?”
 “아빠!”
 “되냐니까?”
 “아빠!”
 “너 오늘 졌다고 충격 많이 먹었구나? 말소리라니?”
 말하는 아빠 표정이 망둥이를 닮았다. 진심으로 승우를 걱정할 때 짓는 표정이다.
 “진짜 아니야?”
 “약 사다 줄까?”
 “아빠!”
 “비도 완전히 그쳤구나. 가자. 이제 곧 물 들어올 시간이다. 아까 거기는 잔챙이 포인트지만 이번 포구에서는 진짜 월척 잡아야지. 세숫대야만 한 광어나 우럭으로.”
 아빠가 먼저 돌아섰다. 표정을 보니 헷갈린다. 장난이라면 저렇게 진지할 수 없다. 그럼 방금 들은 건 뭐람? 다시 게임기를 켰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트럭 안도 살폈다. 장닭만 꾸꾸거릴 뿐 여자아이 그림자는 없었다.
 “······!”
 젠장, 난생처음 타조 알을 먹었더니 타조 귀신이 쓰였나?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옆에 서 있는 버스 안이다. 아까 화장실에서 본 그 꺽다리 배구 선수였다. 손에 핸드폰이 들려 있다. 저 자식, 내 행동을 다 보고 있었나? 내가 뻘짓하는 걸? 설마 찍지는 않았겠지?
 푸허얼, 괜히 화딱지가 났다.
 
 
 
 2장 switched body
 
 
 
 “저런 미친놈!”
 얼마나 지났을까? 교각 위를 달릴 때 옆 차선을 달리던 외제 자가용이 돌연 끼어들었다. 놀란 아빠가 핸들을 꺾어 위기를 면했다. 자가용은 순식간에 배구 선수단이 탄 버스를 추월했다.
 “괜찮아요?”
 승우가 아빠에게 물었다.
 “그래. 하여간 도로에 나오면 정신 나간 놈 천지라니까. 목숨이 몇 개씩 되는 줄 아나.”
 아빠의 말을 흘리며 게임기를 보았다. 톡톡 건드려 보았지만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가만히 옆에다 내려놓았다. 역시 착각이었다. 미련 같은 건 일찌감치 접는 게 옳았다. 그때 핸드폰에 카톡이 들어왔다.
 ‘세형이 짜식.’
 보나마다 짝꿍 세형의 회 좀 가져오라는 부탁 카톡일 것이다. 핸드폰을 확인하려는 순간, 앞쪽 어둠 속에서 뻥 하는 충격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아빠의 비명이 이어졌다.
 “어, 어어!”
 쾅!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충격음이 이어졌다. 앞차와 추돌한 만물 트럭을 뒤의 차가 받아버린 것이다. 승우 옆에 놓아둔 게임기와 핸드폰이 튕겨 나가는 게 보였다. 승우 역시 게임기와 동일 선상에 떠버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게임기에서 신기한 빛이 보였다. 그 주변만 유난히 밝았다. 마치 게임 속의 투명 실드처럼.
 왜 이러지?
 세상이 느리게 느껴졌다. 빠르게 달리던 차량들도 슬로우 비디오처럼 움직였다. 꿈속인가? 손을 뻗는 순간, 한 번 더 쾅 하는 충격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천둥소리보다 더 컸다.
 번쩍번쩍!
 요란한 사이렌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승우는 바닥에 떨어진 게임기를 주웠다. 무게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몸도 함께 가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왜 차 밖에 있는 거지?’
 의식이 작용하자 아빠 생각이 났고, 저만치 하천 바닥에 추락한 만물 트럭이 보인다. 엉망이다. 트럭에서 쏟아진 물건들이 전장의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아빠 몸이 움직였다. 그 모습은 마치 종잇장 같았다. 아빠가 피투성이가 된 채 꿈틀거렸다.
 “여기요!”
 승우가 구급대원을 향해 소리쳤다. 전복된 버스 쪽에 있던 그들은 듣지 못했다. 다른 구급대원을 불렀다. 마찬가지였다.
 ‘뭐지?’
 이상했다. 뭔가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았다. 고민하는 사이에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다. 차고 시린 검은빛 네 줄기였다. 사람들이 빛을 향해 걸었다. 승우도 그랬다. 아빠 생각이 났지만 몸이 저절로 끌려갔다. 배구 선수들도 있었다.
 ―줄을 서거라!
 앞쪽에서 장엄한 메아리가 울렸다. 이질적이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권능이었다. 사람들이 군소리 없이 줄을 섰다. 승우가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구조대원과 경찰들은 자기 할 일에 열중이다. 순식간에 세상이 두 개로 나뉜 것 같았다. 이쪽과 저쪽, 저쪽과 이쪽.
 빛이 다가왔다. 스산한 빛에 감싸인 네 사람은 관복에 칼을 차고 검은 광택의 장부를 들고 있다.
 저승사자!
 아뜩함과 함께 본능으로 감지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줄을 선 사람들이 혼이라는 걸. 가만히 몸을 바라보는 승우.
 달랐다. 승우의 몸에는 질량감이 전혀 없었다.
 아!
 내가 죽었구나!
 덜컥 절망이 달려들었다.
 ―김한울, 장태광, 한득구······.
 감제사자가 나서서 명부의 이름을 대조했다. 줄을 선 차례대로였다. 서릿발 같은 호명이 끝나면 직부사자에 의해 월직사자에게 인도되었다. 거기까지 이른 사람은 파리한 빛이 나오는 호리병 속으로 명멸해 갔다. 감제사자의 호명이 승우의 앞까지 도달했다.
 ‘아빠!’
 이제야 돌아보았다. 먼 길을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빠 얼굴을 보고 싶었다. 헐렁한 것 같지만 마음은 따뜻한 분. 지상 최강의 낙천주의자인 척하지만 속마음은 여린 분.
 그런데 승우의 눈에 들어온 건 아빠가 아니라 여자아이였다. 츄러스를 받아 간 그 아이였다. 아이는 조수석이 뭉개진 만물 트럭 앞에 흰 발을 드러낸 채 둥둥 떠 있었다. 아빠와 트럭, 소녀가 하나로 겹치니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먼 옛날부터 아는 얼굴 같았다.
 “너?”
 “······.”
 “너도 죽은 거니?”
 승우가 묻는 순간 감제사자가 다가왔다.
 ―네가 마지막이구나?
 “······.”
 ―어디 보자. 네 이름은··· 곽······.
 막 이름이 호명되려는 때였다. 트럭 안에서 장닭이 튀어나오며 홰를 쳤다.
 꼬끼오! 꼬끼오!
 장닭이 감제사자 코앞까지 날아오르며 울었다. 감제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가 싶더니 승우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른 사자들도 그랬다. 순식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당혹스러운 승우 앞에 소녀가 다시 나타났다.
 “뭐야?”
 승우가 물었다. 소녀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녀가 가리킨 건 사망자들의 시신이었다. 승우를 포함해 족히 십여 명 정도 되었다.
 “몸으로 들어가라고?”
 끄덕!
 소녀가 고갯짓을 했다.
 “이미 죽었는데?”
 다시 묻지만 소녀의 손가락은 거둬지지 않았다. 더는 말하지 못했다. 파리하던 빛이 격렬하게 출렁거린 것이다. 승우는 자신의 육체 앞으로 걸어갔다.
 “······!”
 걸음을 멈췄다. 엉망이다. 차마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지고 뭉개진 육체.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드는 사이 소녀가 등을 밀었다.
 꼬끼오!
 다시 장닭이 울었다. 아까는 뭔가에 놀라서 운 울음이고 이번이 진짜 홰치는 소리였다. 참혹한 사고 현장 위로 어스름이 벗겨지고 있었다.
 
 “승우는요?”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승우 아빠가 간호사에게 물었다. 병원은 아수라장이었다. 느닷없이 쏟아진 비로 인한 수막현상. 외제 차를 피하려던 트럭이 옆 차를 들이박으면서 일어난 사고는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엄청난 참사를 불러왔다.
 사망 아홉 명에 부상자 20여 명.
 사망자가 많은 건 장소 탓이었다. 하필이면 다리 위였다. 승우네 트럭과 배구단 버스를 비롯해 여섯 대가 추락했다. 사고를 유발한 외제 차 운전자 역시 물속에 떨어져 제일 먼저 황천길에 올랐다.
 “승우는요? 제 차에 타고 있던 제 아들 말입니다.”
 “그게······.”
 간호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잘못된 겁니까?”
 “······.”
 결과를 짐작한 아빠가 일어섰다.
 “이봐요,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간호사가 말렸지만 아빠는 기어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손목에 걸린 링거는 직접 손으로 걷어냈다. 아빠는 복도로 나왔다. 아비규환이다. 인근에서 가장 큰 병원이라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한꺼번에 실려 왔다. 거기에 보호자와 취재진, 사고 대책 위원회 공무원들까지 섞여 일대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곽승우는 어떻게 됐습니까?”
 대책위 책상 앞에 선 승우 아빠가 물었다.
 “어떻게 되시는지요?”
 관계자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버지입니다.”
 “······.”
 “이봐요.”
 “그게··· 즉사입니다.”
 “······?”
 “안치실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빠가 돌아섰다. 안치실 역시 사람이 많았다. 거기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박 감독과 야구부 선수들이다.
 “승우 아버님!”
 박 감독이 소리쳤다. 세형이는 울먹이느라 인사도 겨우 해왔다. 묵례를 한 아빠가 안으로 들어섰다. 눈물바다가 보인다. 배구 선수들과 학부모들, 그리고 다른 희생자의 가족들이 사체를 확인하며 오열하고 있었다.
 “곽승우 아버지입니다.”
 직원에게 신분을 밝혔다. 마스크를 쓴 직원이 3번 칸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막 관을 꺼내려는 순간,
 쾅쾅쾅!
 어디선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쾅쾅쾅!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어딘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문도 아니고 바깥쪽도 아니었다.
 “여기 같아요!”
 소리의 위치를 잡아낸 건 주전 포수 한용규였다. 그가 가리킨 곳은 6번 사체 칸이었다. 직원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욱 부서질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직원이 서둘러 6번 칸을 당겼다. 사체 칸이 완전히 드러나자 그 안에 누워 있던 사체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으악! 얼어 죽는 줄 알았네!”
 배구 선수였다. 화장실에서 승우가 본 그 꺽다리 배구 선수.
 “······!”
 제일 먼저 직원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사망 선고를 받은 육신이 일어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멈춰 버렸다. 사체 칸에서 사람이 일어서고 있지 않은가?
 “운비가 살았어요!”
 외침은 배구 선수들 가운데서 나왔다.
 “운비야!”
 뒤이어 가족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운비야!”
 가족들이 통곡을 하며 황운비를 끌어안았다.
 “의사 선생님 좀 불러주세요! 죽은 사람이 살아났어요!”
 직원이 복도를 향해 소리쳤다. 그사이에 승우 아빠는 3번 칸을 바라보았다. 살짝 당겨진 칸을 마저 당겼다. 그 안에 승우가 있었다.
 ‘욱!’
 아빠는 사체 칸을 잡고 휘청거렸다. 대충 수습된 까닭에 시신이 엉망이었다. 머리가 깨지고 어깨가 부러진 승우는 마치 폭격을 맞은 꼴이었다. 옆 칸에서 일어난 회생의 기적.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고 있던 승우 아빠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순간, 누군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
 “아빠······.”
 그리고 듣고 싶던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승우 아빠 곽민규가 파뜩 고개를 들었다.
 “······!”
 승우 아빠의 시선에 닿은 건 회생한 배구 선수 황운비였다. 알몸을 가린 그가 눈물을 그렁거린 채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저예요.”
 “······?”
 아빠가 고개를 들었다. 대충 보아도 190이 넘어 보이는 키. 확실하게 승우는 아니었다.
 “운비야!”
 그의 뒤에서 시원한 마스크의 여자가 운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운비의 누나 황윤서였다.
 “아빠, 뭐 하세요? 운비 안정시켜야죠.”
 윤서가 부모를 재촉하는 사이에 운비는 선 채로 정신을 잃었다. 의료진이 달려왔다. 운비를 침대에 싣고 달렸다. 그 바람에 의사들이 사체를 전부 재점검하게 되었다. 그러나 승우의 칸만은 열기 무섭게 외면해 버렸다. 승우의 사체는 기적을 바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승우야.’
 아빠는 승우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너저분해진 어깨도 정리했다. 국가 대표를 꿈꾸던 어깨이다. 빅 유닛이 되어 메이저리그 마운드까지 밟겠다던 어깨이다. 어쩐 일인지 중1 때부터 자라지 않은 키. 그 탓에 평범한 투수로 머물렀지만 컨트롤과 기백만큼은 이미 메이저를 밟은 승우.
 ‘이제 푹 쉬렴.’
 아빠는 얼룩진 손으로 승우의 이마를 쓸었다.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그때는 빅 유닛이 될 수 있을 거야.’
 눈과 코, 목구멍이 빡빡하게 미어질 때 직원이 아빠를 위로했다.
 “힘내세요.”
 직원의 목소리와 함께 아빠의 시야에 안개가 차올랐다. 서해 소야도의 안개처럼 자욱하게.
 철컹!
 3번 사체 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안개가 풀썩 사라졌다. 아빠는 병실에서 내려온 간호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안치실을 나왔다.
 
 삐빗!
 승우야!
 이상한 신호음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느낌으로 오는 소리였다.
 놀라지 말고 내 말 잘 들어.
 너, 몸이 바뀌었어.
 네가 들어간 몸, 다른 사람 몸이야.
 일이 그렇게 되었어. 그냥 두었으면 너도 죽고 그 몸도 죽었을 거거든.
 너, 빅 유닛 되는 게 소원이었지?
 그 아이 육체는 아주 우수해. 네가 적응만 잘하면 멋진 결과를 얻을 거야.
 하지만 다른 아이의 몸이니 조금 혼란스러울지도 몰라.
 그렇다고 죄책감 같은 건 갖지 마. 그 아이의 목숨은 딱 거기까지였어.
 힘들겠지만 현명하게 대처하길 바라.
 잘 참고 있으면 여름에 귀인이 나타나 큰 도움을 줄 거야.
 그때까지 현명하게 대처하면서 네 꿈을 이루렴.
 엄마는 언제나 네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거 잊지 말고.
 우리 아들, 잘할 수 있지?
 엄마는 승우 믿어.
 믿어.
 삐빗!
 
 신호와 함께 소리가 끝났다.
 느낌이 멀어졌다.
 아주 멀리 멀어졌다.
 “······!”
 승우는 눈을 떴다. 시야에 사람의 형상이 맺혀왔다. 아빠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다.
 뭐지, 방금 전 그건?
 어떻게 된 걸까? 기억을 더듬어 처음 깨어난 때를 생각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승우는 추웠다.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손으로 더듬으니 맨살이 닿았다. 주변을 파악했다. 차가운 상자 안이었다. 일어설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소리도 치지 못했다. 목이 잘 열리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손이 닿는 대로 두드렸다. 그저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마침내 빛이 들어왔을 때 승우의 눈에 사람들이 보였다. 배구 선수들이었다. 낯선 사람들도 있었다. 멍한 정신이 살짝 수습되려 할 때 아빠가 보였다.
 “운비야!”
 사람들이 부른 승우의 이름이다. 내 이름은 승운데? 잘못 들은 걸까?
 혼란 속에서 허벅지를 꼬집었다. 얼어가던 살이지만 통증은 전달되었다. 죽은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주변 풍경이 왜 이럴까? 울부짖는 여자는 미인이지만 낯설었다. 그녀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도 그랬다. 무엇보다 아빠와 박 감독, 친구들이 이상했다. 사고를 당한 승우. 다시 깨어났는데도 다들 데면데면한 눈치라니. 특히 세형이 녀석, 승우와 최강(?) 배터리 단짝이면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미친 듯이 울어야 정상일 그 녀석이.
 그래서 아빠 곁으로 다가갔다. 승우가 이상한 건지 사람들이 이상한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다 의식이 아뜩해지면서 정신을 잃은 승우.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예쁜 아가씨와 그녀의 부모. 시야를 살짝 돌려보지만 아빠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운비야!”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예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걸 신호로 그녀의 부모가 눈물을 쏟으며 다가섰다.
 “누나 안 보여? 알아보겠으면 말 좀 해봐.”
 “운비야!”
 여자 둘이 합창으로 울먹거렸다. 이 여자들, 뭐래? 시선을 돌렸지만 중년의 남자도 다르지 않았다. 그도 돌아선 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벽면에 거울이 보였다. 세 사람 사이로 침대가 보인다. 침대에 누운 자신의 모습도 보인다.
 “······!”
 그걸 본 승우는 벌떡 일어섰다. 아팠다. 큰 외상은 없었지만 찰과상과 타박상이 만만치 않은 상황. 전신에 통증이 번진 것이다.
 ‘응?’
 겨우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거울에 비친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그 배구 선수?’
 사고가 나기 전 화장실에서 마주친 얼굴이 스쳐 갔다. 이상한 소녀와 만나고 난 후 버스에서 다시 본 눈빛도 떠올랐다.
 “조금 비켜줄래요?”
 승우는 예쁜 여자를 밀어냈다. 이윽고 거울 안에 승우 얼굴만이 들어찼다.
 “······!”
 승우의 호흡이 멈췄다. 그대로 일어섰다. 예쁜 여자가 말렸지만 그냥 전진했다. 거울 앞에 섰다. 거기 한 남자가 있다. 승우가 아니라 그 배구 선수였다. 커다란 키에 시원한 얼굴. 손으로 거울을 짚었다. 문질러도 보았다. 형상은 변하지 않았다. 승우는 없고 배구 선수만 보인다. 하지만 생각은, 의식은 분명 승우의 그것이었다.
 “악!”
 거울을 보던 승우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까지 달랐다.
 꿈결 같은 소리로 전해온 엄마의 말. 그것은 사실이었다.
 
 “······!”
 승우는 혼자 있었다. 의사의 진찰이 끝난 후 모두 내보낸 것이다. 사고 대책 본부에서 높으신 분들이 위문을 온다는 것도 사절했다. 천장을 보았다. 형광등 빛이 파리해 보인다.
 소녀를 생각했다. 그녀가 문제였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뭔가가 승우의 등을 밀었다. 그래서 방향이 바뀌었다. 배구 선수의 몸으로 들어간 것이다. 체인징이 아니라 ‘환신(換身)’이었다. 그 역시 죽은 몸. 그러나 들어간 사람은 승우였기에 빈집을 차지한 꼴이 되었다.
 빈집.
 다행히 운비의 몸에는 큰 부상이 없었다. 사고로 심장이 멈추면서 숨이 멎은 것. 팔다리와 얼굴, 몸통 여기저기에 찰과상과 타박상의 통증이 있었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오른손을 보았다. 크다. 손가락 한번 길쭉하다. 끝마디에 봉긋한 볼륨감이 독특하긴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일어나 앉았다. 앉은키가 세형이와 비등할 정도이다. 그 키를 지탱하는 허벅지는 대리석 기둥처럼 보인다. 침대에서 내려서니 키 또한 마음에 들었다. 승우가 그토록 바라던 빅 유닛의 하드웨어가 거기 있었다. 그러나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원하던 하드웨어는 이루었지만 승우가 아닌 것이다.
 ‘황운비?’
 환자 카드를 보니 환자 이름이 황운비였다. 승우는 이 믿기지 않는 사건을 정리해 보았다.
 
 ―사고가 났다.
 ―황천으로 영혼 전송이 되기 직전에 저승사자들이 사라졌다.
 ―승우만 남았다.
 ―소녀 귀신인지 뭔지가 육신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돌아가려고 했지만 방향이 바뀌었다.
 ―배구 선수 황운비의 몸으로 들어왔다.
 결론1: 곽승우는 육체가 죽고 황운비는 정신이 죽었다.
 결론2: 승우는 살아났지만 황운비의 육체를 빌리게 되었다.
 
 ‘콜라보?’
 거기서 소녀의 기억을 불러냈다. 소녀는 하나의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임사 체험이었을까? 아니다. 그녀는 사고가 나기 전부터 등장했다. 게다가 그 게임기.
 ‘응?’
 옆을 더듬던 승우가 동작을 멈췄다. 이 현실, 그러니까 황운비 몸을 차지한 게 현실이라면 게임기의 스킬 이벤트도 환상이 아닐 터였다.
 ‘큐빅.’
 이벤트에서 들은 단어를 생각했다. 24시간 후에 장착될 거라던 스킬 두 가지.
 “······!”
 승우는 다시 기절할 뻔했다. 정신을 집중하니 의식 속에 큐빅이 보인 것이다. 홀로그램처럼 선명했다. 마침 들어서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여기 뭐 보이세요?”
 허공을 가리키며 물었다.
 “······?”
 “안 보여요?”
 “좀 더 쉬세요. 지금은 충격을 받아서 헛것이 보일 수 있거든요.”
 그녀는 담요를 덮어주고 병실을 나갔다.
 안 보인다는 말이다.
 “······!”
 승우는 고개를 저었다. 큐빅 안에 스킬이 있었다. 게임 이벤트에서 말하던 그 스킬. 승우에게만 또렷이 보이는 큐빅.
 
 스킬1: 타조의 신성 시력 능력 부여.
 스킬2: 기적의 30% 체력 회복력.
 
 스킬은 신성한 빛으로 일렁거렸다. 어떤 능력인지 실감은 나지 않지만 장난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럼 대체······.’
 승우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다시 형광등 빛과 마주친 채 뒷말을 중얼거렸다.
 ‘소녀의 정체는 뭐야? 엄마가 보낸 혼령인가?’
 그러기에는 낯이 익었다. 너무 평범해서 그럴까, 아니면 진짜 어디서 본 소녀일까?
 눈을 감았다. 생각을 모을 때는 눈을 감는 게 최고였다.
 누구냐, 너는?
 시간의 태엽을 되감았다. 현재부터 쭉 과거로 달려갔다. 그러다 어느 한 지점에서 생각이 멈췄다.
 윽!
 ‘엄마의 어릴 적 모습?’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승우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어깨와 등짝, 허벅지가 결렸지만 참았다.
 “운비야!”
 예쁜 여자가 소리쳤다. 이제부터 승우의 누나가 될 여자이다.
 “저기··· 우리 아빠··· 아니, 곽승우 아빠··· 어느 병실에 있죠?”
 “곽승우?”
 “야구 선수 말이에요.”
 “아래층 6호실일걸? 그런데 그건 왜?”
 “나 잠깐만 다녀올게요.”
 “얘, 운비야!”
 “걱정 말아요. 금방 돌아올게요.”
 승우는 돌아서 걸었다. 복도 끝에서 한 여학생이 아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해당화처럼 물든 볼이 예뻤다. 그래도 한눈팔지 않았다.
 그사이에 화장실에 들른 운비 엄마가 돌아왔다.
 “쟤 운비 아니야?”
 “아래층에 잠깐 간다네요.”
 “잡지 그랬어?”
 “저 덩치를 내가 어떻게 잡아요?”
 “그나저나 얘가 좀 이상하지?”
 “많이 이상하죠. 머리털 나고 나한테 존댓말 하는 게 처음이에요.”
 “그래도 머리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라니······.”
 “제가 따라가 볼게요. 엄마는 병실에 들어가 계세요. 운비 학교 교장 선생님하고 감독님이 오신다고 했어요.”
 운비의 누나가 발길을 재촉했다.
 
 아빠는 4인실에 잠들어 있었다. 예상대로 병문안을 온 사람은 없었다. 하늘 아래 승우와 둘뿐이던 아빠. 대한민국 섬 여자 전부가 애인이라더니 그 또한 구라가 맞았다. 승우는 살며시 칸막이를 둘러쳤다. 그런 다음 환자 사물함을 열었다. 거기서 아빠의 지갑을 꺼냈다.
 맨 앞에 가족사진이 있다. 그 안쪽을 뒤졌다. 낡은 사진 두 장이 더 나왔다. 첫 장은 빛바랜 여고생 사진이다. 바로 엄마의 어린 시절. 그 뒤의 사진을 빼자 모든 게 명쾌해졌다. 엄마의 더 어린 시절로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의 사진이다.
 ‘아!’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승우는 이 사진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어릴 때 아빠 지갑을 가지고 놀다가 안에 든 물건을 다 꺼내놓은 것이다.
 “누구야?”
 묻는 승우에게 아빠가 말했다.
 “네 엄마 어릴 때란다. 귀여워서 마스코트로 가지고 다닌다.”
 마스코트.
 여섯 살. 어린 소녀.
 사진에 소녀의 얼굴이 겹쳤다. 완벽하게 같은 사람.
 엄마였다.
 이해도 안 되고 이해할 수도 없지만 어쨌든 일어난 일이다. 엄마는 죽은 지 딱 3년이 되는 해의 생일 다음 날에 승우를 찾아온 것이다.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3년.
 그제야 생각났다. 엄마의 약속 아닌 약속. 승우와 아빠에게 용기를 주려 한 것으로 알았던 그 말.
 ―할 수 있지?
 병실 안에 엄마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죽기 직전에 엄마가 남긴 말이다. 엄마는 그때 울지 않았다. 하얀 메밀꽃처럼 하얗게 웃었다.
 3년 정도만 버티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엄마가 없는 세상도.
 그때 불시에 확인하러 올 거야. 아빠랑 너랑 약속 잘 지키며 살고 있는지.
 약속 잘 지키면 엄마가 상 줄게.
 하느님께 졸라서라도 상 가져다줄게. 엄마 믿지?
 ‘엄마······.’
 사진을 보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 약속, 승우가 어찌 잊을까? 엄마를 위해서도 울지 않았다. 찡그리지 않았다. 고교에 진학해 선배들이 갈구어도 웃었다. 다른 학교 선수들의 냉소와 업신여김도 흘려들었다. 약속이었다. 엄마와의 약속.
 엄마, 그 엄마가 왔다. 낡은 게임기에 마법을 담아 심어주고 황천으로 가는 승우를 구하기 위해서. 덕분에 승우는 살았다. 믿기지 않지만 빅 유닛의 꿈도 이루었다. 엄마가 주는 상이었다.
 미안해, 엄마.
 승우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엄마를 못 알아보다니······.
 용서해.
 떨어진 눈물이 아빠의 볼을 때렸다. 그 바람에 아빠가 눈을 떴다.
 “응?”
 “······.”
 “너는 죽었다 깨어난 배구 선수?”
 “······.”
 “네가 왜 여길······?”
 “저기······.”
 “응? 나를 보러 온 거야?”
 “예.”
 “왜?”
 “······.”
 “나한테 할 말 있니?”
 “네.”
 “무슨?”
 “잘 계시라고요.”
 “응?”
 아빠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승우가 돌아섰다.
 아빠, 나예요. 나 안 죽었어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살아요. 괜히 저 핑계로 술 많이 마시지 말고요.
 원래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다. 될 수만 있다면 아빠 옆 침대에 눕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었다. 병실로 들어선 윤서 때문이다. 꿈결처럼 전해진 엄마의 말도 떠올랐다.
 현명하게 극복하렴.
 그래서 돌아섰다. 승우 자신도 잘 믿기지 않는 이 일, 아빠라고 믿을까? 오히려 아빠를 혼란 속에 빠뜨릴 게 틀림없었다.
 됐어. 아빠도 살았으니까.
 전화번호도 알고 집도 아니까.
 나중에 기회되면 그때 설명하자.
 그때까지 아빠, 잘 살고 있으세요.
 진짜 빅 유닛이 되어 돌아올게요.
 병실 앞에서 승우는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뭐야? 사체 보관실에서도 저러더니 머리에 이상이라도 생겼나?’
 아빠의 눈에 어린 의아함이 가시지 않았다. 움찔 움직이자 가슴팍 부분에 놓인 사진 한 장이 보였다. 엄마의 어린 시절 사진이다.
 ‘이게 왜··· 누가 꺼내놓았지? 지갑에서 빠졌나?’
 아빠의 시선이 사진에 박혔다. 콧등이 금세 새큰하게 아려왔다.
 당신이 나를 구했어?
 사진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아빠.
 기왕이면 승우를 구해주지 그랬어.
 톡!
 이번에는 아빠 눈물이 엄마의 볼에 떨어졌다.
 
 
 
 3장 빅 유닛으로 Rebirth
 
 
 
 “운비야!”
 병실로 들어선 노은상 감독이 승우를 끌어안았다. 아니, 이제는 운비였다. 겉모습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따라야 했다. 이 사람이 배구 감독인 모양이다. 감독들은 외모만 봐도 대략 견적이 나온다.
 “교장 선생님이 네 걱정 얼마나 한 줄 아냐? 하늘이 무너졌다가 다시 메워진 기분이란다.”
 감독이 옆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교장인 모양이다. 아직 운비의 일상을 모르는 입장이기에 가볍게 묵례로 때웠다.
 “진짜 천운이다. 너라도 살아났으니······.”
 교장도 한껏 비장했다.
 “그럼요. 이런 인재는 죽음도 비껴간다니까요. 다른 애들이 안됐긴 하지만.”
 감독은 고개를 떨구었다. 배구 선수 두 명이 사망자 명단에 있었다. 감독 역시 천행으로 살아났지만 마음이 좋을 리는 없었다.
 “아무튼 큰 이상은 없다니 잘 치료하거라. 일단 장례부터 치르고 향후 일정을 알려줄 테니.”
 “예.”
 “그럼 어머니, 운비를 잘 부탁합니다.”
 감독과 교장은 운비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갔다.
 “저기······.”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운비가 고개를 들었다.
 “왜?”
 어머니 방규리가 바로 대답했다.
 “장례식은 언제죠?”
 “오늘인데, 왜?”
 “저도 가보게요.”
 “너는 절대 안정을 해야······.”
 “엄마, 가게 해줘. 친구들이 마지막 가는 길인데.”
 옆에 있던 누나 윤서가 운비 편을 들었다. 얼굴만 예쁜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아들. 혹시라도 충격을 받아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걱정 말아요. 저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운비는 환자복의 단추를 풀었다.
 합동 발인은 복잡했다. 자치단체가 끼어들면서 보상 문제는 수월해지고 액수도 늘었지만 격식이 생긴 것이다. 운비가 들어서자 선후배 배구 선수들이 모여들었다.
 “운비야!”
 다 같이 지옥에서 돌아온 선수들. 그러나 운비는 사망 선고를 받았다가 깨어났기에 그들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운비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모든 선수에게 향해서이다. 누가 동급생인지, 누가 선배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 친구가 어깨를 치며 딴죽을 걸었다.
 “야, 나한테까지 왜 이래?”
 일단 동급생 한 명은 파악되었다.
 사망한 배구 선수는 두 명. 학교 관계자들과 선수들을 따라 분향을 했다. 그 후에 운비의 발은 저만치 끝에 자리한 승우의 사진 앞으로 옮겨갔다. 장례식이 키 순서도 아니건만 맨 끝이다. 그 앞에 승우의 아빠 곽민규와 박 감독이 있다. 야구부 선후배들도 제법 슬픈 표정으로 도열했다. 소야도에서 온 남 선장도 보였다. 승우에게 수영과 낚시를 알려준 낚싯배 아저씨.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박 감독에게는 자동으로 인사를 했다. 습관이다. 주장 강철욱에게도 그랬다. 주장은 뭐야 하는 표정으로 운비를 훑어보느라 바쁘다.
 경건한 애도(哀悼).
 세형이도 그렇고 벙구와 강돈이 형도 그랬다.
 촐랑거리던 부원들까지 단체로 심각하니 웃음이 나올 뻔했다. 어쨌든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만년 꼴찌로 불리는 소야고등학교 야구부였다. 거기서도 1학년인 승우였다. 하지만 승우는 팀의 에이스였다. 야구 실력으로서가 아니라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에이스. 그렇기에 동급생과 선배들의 지지를 받던 몸. 그렇기에 저렇게들 죽상이 되어 애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세형이와 형도의 표정이 볼 만했다. 어울리지 않게 콧물까지 훌쩍거린다. 하긴 울 만도 했다. 형도는 타격의 달인이었다. 아, 한 단어를 빼먹었다. 타격 ‘부진’의 달인이었다. 그 역시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타격이 좋았다. 하지만 부상 이후로 1할대의 빈타 슬럼프에 빠졌다.
 승우가 특타 훈련에 도움을 주었다. 박 감독의 수제자라는 별명답게 제구력만은 스트라이크존 아홉 개에 자유자재로 꽂아 넣던 승우. 밤늦도록 공을 던져준 것이다. 덕분에 지난번 지역 예선에서 3할을 쳤다. 그건 형도가 2년 반 만에 세운 대기록(?)이었다.
 “너?”
 사진 앞에 있던 아빠가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승우의 유니폼, 글러브와 낡은 게임기, 기념품으로 산 명화 손수건 등이 함께 놓여 있었다.
 “······.”
 “원래 우리 승우랑 아는 사이였냐?”
 “잘 알죠. 너무나······.”
 얼떨결에 대답해 버렸다. 당장은 그게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왜 몰랐지? 배구 선수 친구라······.”
 “······.”
 “분향하려고?”
 “예.”
 “고맙구나.”
 “저도 이제부터 야구할 거예요.”
 “야구?”
 느닷없는 말에 아빠가 고개를 들었다.
 “빅 유닛 좋아하시죠?”
 “빅 유닛?”
 “승우가 그랬어요. 엄마, 아빠의 희망이 자기가 빅 유닛이 되는 거라고.”
 “······?”
 “제가 승우 대신 빅 유닛 되어드릴게요. 승우랑도 약속했거든요.”
 “······?”
 “저 게임기와 유니폼, 글러브는 태워 버릴 건가요?”
 “왜?”
 “저 주시면 안 돼요? 제가 간직하고 싶어요.”
 “······.”
 “부탁입니다.”
 “승우 친구라고?”
 “예.”
 “그러렴.”
 “고맙습니다.”
 운비는 게임기와 야구 물품 등을 챙겼다. 이 체구에 맞을 리는 없지만 간직하고 싶었다. 게임기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에 아빠가 건네주는 국화를 받았다.
 하얀 국화.
 그리고 검은 리본 안의 액자에 든 승우 얼굴.
 두 개의 미스 매칭에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곽승우.’
 고개를 반듯하게 든 운비, 사진을 바라보며 비원을 이어놓았다.
 넌 죽지 않았어. 알고 있지?
 이제부터 진짜 빅 유닛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그러니까 잘 지켜봐. 내가 나태해지면 마구 채찍질해 주고.
 운비가 꽃을 놓았다. 육체와의 안녕이다.
 
 “······!”
 세 사람의 눈동자가 한쪽으로 쏠렸다. 운비의 아빠 황금석과 엄마 방규리, 그리고 누나 황윤서의 눈이다. 그중에서 황금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배구를 그만두겠다고?”
 “예!”
 운비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퇴원하자마자였다. 집에 돌아와 자기 방에도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 앉은 운비.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말임을 알고 있었다.
 “운비야!”
 방규리와 윤서의 시선에도 우려가 가득했다.
 “좀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
 황금석이 말했다.
 “아닙니다. 저 야구할 겁니다.”
 “야구?”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 한번 요동을 쳤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의 연속이다. 중학교를 평정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한 운비. 비록 신입생이지만 장신의 하드웨어와 벼락같은 스파이크로 청소년 대표에 오른 마당이다. 지난번 결승에서도 그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전국 최강으로 꼽히는 고등학교를 상대로 무려 28득점을 올린 운비였다.
 게다가 사연도 있었다. 엄마 방규리 때문이다. 그녀는 배구 선수였다. 배구 선수로서 장신은 아니지만 레프트 공격수로 준수한 성적을 남겼다. 그러나 당시 그 포지션에 좋은 선수가 많아 국가 대표가 되지 못했다. 운비는 엄마가 못다 한 꿈을 이어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렇게 잘나가던 운비. 비록 불의의 사고로 충격을 받았다지만 이 무슨 기상천외한 선언이란 말인가?
 “갑자기 웬 야구?”
 다들 얼이 빠져 있는 틈으로 윤서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냥요.”
 그 한마디에 윤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또 존댓말이 나왔다. 다소 까칠하지만 부모 말은 거역하지 않던 운비. 누나 윤서와는 아직도 안고 뒹굴 정도로 살뜰한 사이였다. 그런데 사고 이후로 태도가 변한 것이다. 기존의 까칠한 태도에 비하면 바람직하지만, 사고 때문이니 하나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냥이라······.”
 황금석이 한숨을 쉬었다. 황천길에서 돌아온 아들을 다그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건 아니? 너희 학교에는 배구부밖에 없다는 거.”
 “저쪽에 있는 소야고등학교에서 하면 됩니다.”
 “운비야, 힘들면 천천히 생각하자. 아직 시간은 많아.”
 윤서가 끼어들어 운비의 손을 잡았다. 운비는 움찔 놀라며 손을 뺐다. 맹세코 이렇게 예쁜 여자와 스킨십을 한 적이 없는 승우였다. 운비가 정색을 하자 부모님과 누나의 시선에 뜨악함이 스쳐 갔다. 윤서와의 스킨십은 일상의 장난 정도로 여기던 운비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는 야구할 겁니다. 이제 배구는 안 해요.”
 한 번 더 강조하고 일어섰다. 그러나 몇 걸음을 옮기다가 멈췄다. 갈 곳이 없었다. 거실까지는 함께 들어왔지만 운비의 방을 알 리 없는 승우이다.
 어쩐다 싶을 때 윤서가 도움말을 주었다.
 “올라가 네 방에서 쉬어. 피곤하면 한잠 자고.”
 그 말에 따라 계단을 올랐다. 2층짜리 저택. 아주 넉넉한 집이었다. 우아하면서도 편안한 가구만 봐도 그랬다. 소야도에 있는 승우의 집이나 박 감독의 냄새나는 아파트 내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운비는 2층의 첫 번째 문 앞에 서서 그 문을 열었다.
 “······!”
 순간 얼른 닫아버렸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한숨이 나왔다. 윤서의 방이다. 놀란 것은 수영복 때문이다. 갖가지 수영복이 떡하니 시선을 끈 것. 운비는 당연히 그녀가 영어 잘하는 외국인 전문 수영 강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두 번째 문을 열었다. 거기가 황운비의 방이었다. 방 안에는 배구공이 뒹굴고 유명한 배구 선수들의 브로마이드가 가득했다. 트로피와 상장도 많았다. 최우수선수에 수훈선수상, 공로상······. 승우는 중학교 때 딱 한 번 받아본 상장. 운비에게는 차고 넘치도록 있었다.
 ‘열라 부럽네.’
 침대에 앉았다. 장신에 알맞게 널찍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텔레비전도 극장만 하고 컴퓨터도 데스크 탑과 노트북까지 갖춰져 있는 방. 좋긴 하지만 중요하지는 않았다.
 ‘전략이 필요한데······.’
 배구공을 만지며 상장과 트로피를 바라보았다. 남의 몸에 들어왔다. 보통 학생도 아니고 잘나가는 배구 선수의 몸이다. 게다가 수준 높은 부모님까지 있다. 매사가 운비 마음대로 결정될 게 아니었다. 최고의 문제는 배구 감독. 이런 유망주라면 헐렁하게 내놓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선수는 일반 학생과 달라 멋대로 거취를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운비의 본색은 승우이다. 메이저리그의 빅 유닛을 꿈꾸던 차였으니 배구에는 관심도 없었다. 하루빨리 마운드에 서서 하드웨어에 적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자면 일단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그다음이 배구 감독의 허락, 전학의 순이다.
 그나저나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던 운비는 바뀐 몸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이제 이 몸의 주인이 되었으니 구석구석 확인하려는 것이다. 일어나 옷을 벗었다. 모두 벗었다. 거뭇한 거웃 아래 늘어진 물건도 육체의 크기만큼이나 큼지막했다.
 하지만 운비의 관심사는 오로지 손가락과 손목, 나아가 어깨와 허벅지였다. 거시기 따위야 크면 어떻고 작으면 어떻단 말인가? 고추 크기로 방어율 성적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할 때 문득 기척이 느껴졌다.
 “악!”
 운비는 비명을 지르며 가운데를 가렸다. 윤서였다. 그녀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연 것이다.
 “어, 미안. 빨리 입어라.”
 그녀는 그저 먼 산을 바라볼 뿐 나가지 않았다.
 “저기요······.”
 운비가 진땀을 흘리자 옷이 날아왔다.
 “충격받은 건 알겠는데 너답지 않잖아? 그리고 너, 왜 자꾸 존댓말 쓰는데? 내가 누나 대접하라고 할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
 “이건 어디 둘까?”
 윤서가 가방을 들어 보였다. 운비가 챙겨온 승우의 물건이다. 게임기와 글러브, 그리고 유니폼 등등.
 “거기 두세요.”
 “거기 두세요?”
 “예.”
 “알았으니까 빨리 입고 여기 앉아. 진짜 머리에 이상이 생긴 건지 아닌지 내가 체크 좀 해야겠어.”
 윤서의 목소리가 당차게 들렸다. 운비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황운비!”
 “예?”
 “황운비!”
 “예.”
 “너 진짜, 황운비!!”
 결국 빽 소리를 지르는 윤서.
 “응?”
 그제야 눈치를 깐 운비가 반말로 대답했다.
 “이제야 말이 통하네. 너 아픈 데 있어?”
 “아뇨!”
 “야!”
 “아니.”
 “그런데 왜 생뚱맞게 야구야? 너 야구할 줄 알아?”
 “예!”
 “뭐?”
 “야구할 줄 알아요. 나 투수······.”
 제대로 질러가던 운비는 현실을 깨닫고 궤도 수정에 돌입했다.
 “···하고 싶어.”
 “투수? 온 배구계가 너를 기대하는데 갑자기 웬 투수?”
 “누나.”
 “왜?”
 “나 실은······.”
 운비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어쨌든 설득해야 할 세 사람. 집 분위기를 보아하니 누나를 먼저 구워삶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죽었었잖아?”
 “응.”
 “그때 이상한 계시를 받았어.”
 운비는 죽었다가 깨어난 사실을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 그 방법이 가장 호소력이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계시?”
 윤서가 조금 다가앉았다. 전략이 먹히고 있었다.
 “비몽사몽 중에 저승사자를 만났는데 야구하래. 아니면 다시 데리러 온다고.”
 “어머! 정말?”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줘요. 난 야구를 해야 해.”
 “너 혹시 저 야구 선수 귀신이 쓰인 거 아니야?”
 윤서가 승우의 물건을 가리켰다.
 “아니야. 진짜 친구라니까.”
 “나도 모르는?”
 “응. 나도 비밀이 있어.”
 “운비야······.”
 “도와줄 거죠?”
 “하지만 이제 와서··· 야구의 야 자도 모르는 너잖아?”
 “잘할 수 있어요. 아니, 죽기 살기로 해야죠. 다시 죽을 수는 없잖아요.”
 “······.”
 “그리고··· 저승사자 말이 나한테 야구 재능을 줬다고 했어. 대성할 수 있대. 그러니 내 말 좀 믿어줘.”
 “정말?”
 “응!”
 “그래, 나는 믿어줄게. 그런데 노 감독님도 그걸 믿을까?”
 “노 감독님?”
 “너희 감독님 말이야. 너를 앞세워서 고교 배구계를 평정하려는 분인데··· 그분이 너를 어떻게 데려갔는지 알지?”
 “돈 받았어?”
 “야, 우리 집이 뭐가 아쉬워서. 특별장학금 준다고 하는 걸 아빠가 거절했잖아? 대신 너를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달라고··· 그래서 너만을 위한 트레이너도 따로 영입했고······.”
 “그래도 할 수 없어. 나는 야구를 할 거니까.”
 운비는 단호하게 매듭을 지었다.
 “운비야.”
 윤서가 다가와 운비를 품었다. 운비는 앉아 있고 윤서는 선 상황. 그녀의 젖무덤이 적나라하게 얼굴에 느껴졌다. 엄마의 젖무덤 외에는 처음 느끼는 여자의 가슴. 심장이 덜컹거리는 바람에 윤서를 밀어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이지 심장이 다시 멎을지도 몰랐다.
 ‘왜 이래? 저 여자는 네 친누나야.’
 화장실로 자리를 피한 운비가 거울을 보며 상황을 각인시켰다. 찬물로 세수를 하니 두근거리던 가슴이 진정되었다. 변기는 최신 비데였다. 소야도 집에도 없고 합숙소에도 없는 비데. 교사용 화장실에서 몇 번 보긴 했지만 이렇게 좋은 건 처음이다.
 쏴아아!
 물도 시원하게 내려갔다.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 방으로 돌아온 운비가 승우의 소지품에서 찾아낸 것이다. 고흐의 명화 손수건이다. 오래전 엄마와 함께 간 전시회에서 산 기념품. 그때 승우는 명화 속의 별이 야구공으로 보였다. 신기한 건,
 “엄마도 그런데.”
 엄마의 느낌도 승우와 같았다는 것. 손수건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늘 그랬듯이.
 
 “······!”
 월요일 아침, 운비를 마주한 배구의 노은상 감독 역시 황당무계한 표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배구 때려치우고 야구를 하겠다고?”
 감독은 바로 돌직구를 던져왔다.
 “예!”
 운비가 대답했다. 함께 온 황금석과 윤서는 지켜보기만 했다. 실은 황금석이 이미 감독에게 귀띔한 일이다.
 “너, 야구할 줄 모르잖아?”
 “할 수 있습니다.”
 “저쪽 소야고등학교 야구부에 들고 싶다고?”
 “예.”
 “거기서 받아준대?”
 “······.”
 “네가 잠시 머리가 어지러운 모양인데 이렇게 하자. 소야고 야구부에서 너를 받아준다고 하면 내가 한번 생각해 보겠다.”
 “고맙습니다.”
 “대신 안 된다고 하면 바로 컴백이야.”
 “······.”
 “약속해라.”
 “알겠습니다.”
 운비가 대답했다. 노 감독과는 간단하게 정리가 되었다. 이유는 역시 사고 때문이었다. 배구단 버스가 전복되면서 이런 후유증을 겪는 선수가 많았다. 그래서 단체로 심리 치료를 받는 중이다. 더구나 운비는 사체 칸에서 부활한 경우이다. 그 충격으로 생각한 감독이 안정을 찾을 시간을 준 것이다.
 “힘내라.”
 트레이너가 운비의 어깨를 쳐주었다.
 체육관에서 나오는데 복도에 한 여학생이 있다. 병원에서 본 그 여학생이다.
 “아는 애니?”
 윤서가 물었다.
 “아니.”
 운비는 고개를 저었다. 여학생의 눈자위에 스쳐 가는 뜨악함은 보지 못했다.
 끼익!
 봉래고를 나온 벤츠는 오래지 않아 멈췄다. 소야고가 지척인 까닭이다. 운비는 소야고 후문으로 걸었다. 야구장은 후문 뒤의 공터에 있었다. 운비의 손에는 승우의 글러브가 들려 있는데 손에 비해 작아 보였다. 그래서 흐뭇했다.
 나보고 땅콩 빅 유닛?
 이제 다 죽었어.
 히죽히죽 웃음이 절로 나왔다.
 딱!
 따악!
 박 감독의 펑고 치는 소리가 들린다. 선수들은 흙투성이가 된 채로 운동장에 몸을 날리고 있었다. 감독과 선수들 유니폼에 검은 리본이 보인다. 그래도 승우를 잊지 않고 있으니 또 한 번 고마웠다.
 “감독님!”
 옆에서 보조를 하던 투수 이벙구가 감독을 불렀다. 박 감독의 시선이 운비에게로 향했다. 황금석과 윤서 사이에 선 운비는 꾸벅 인사부터 했다.
 “나 보러 온 겁니까?”
 박 감독이 다가와 운비 옆의 황금석에게 물었다.
 “예.”
 “무슨 일로······?”
 “실은 우리 아들이······.”
 “야구하려고 찾아왔습니다.”
 황금석의 말이 나오기 전에 운비가 먼저 말했다.
 “야구? 넌 배구 선수잖아?”
 “이제는 아닙니다.”
 “······?”
 박 감독의 시선이 황금석에게 옮겨 갔다.
 “우리 아이가··· 갑자기 야구를 하고 싶다고······.”
 “배구는 어쩌고요?”
 “그게······.”
 “그쪽 배구단이면 이제 전국 최강급이고 이 친구가 좌우 쌍포에 에이스급인 모양이던데······.”
 “예.”
 “그런데 무슨 야구요? 야구를 해본 적은 있습니까?”
 “있습니다!”
 운비가 또 먼저 대답했다.
 “운비야.”
 듣고 있던 윤서가 말을 막아섰다.
 “해본 적 있습니다.”
 운비는 윤서의 말을 일축했다.
 “포지션은?”
 “투수입니다!”
 “투수? 그러고 보니 그 글러브······?”
 “곽승우 겁니다. 이 학교 투수였죠?”
 “그걸 왜 네가······?”
 “승우랑 친구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승우 아버지께 얻었습니다.”
 “으음.”
 “······.”
 “으음, 사고 때문에 배구에 염증을 느낀 모양인데 투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네. 좀 휴식을 취했다가 스파이크나 때리라고.”
 박 감독은 운비를 외면했다.
 “감독님!”
 “미안하지만 우리 훈련 시간이거든. 그만 가주겠나?”
 박 감독은 단호했다. 그사이에 윤서가 운비를 끌었다. 하지만 운비의 발은 벤츠 앞에서 멈췄다.
 “아버지.”
 “왜?”
 “죄송하지만 누나랑 먼저 가세요.”
 “뭐라고?”
 “저는 테스트 받고 갈 겁니다.”
 “운비야!”
 “시작도 안 해보고 물러설 수는 없잖습니까?”
 “꼭 야구를 해야겠니?”
 “저 농담 아닙니다. 머리가 이상한 것도 아니고요.”
 “좋다, 그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아빠!”
 황금석이 쿨하게 허락하자 윤서가 태클을 걸었다.
 “하고 싶다잖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마. 대신 무리는 하지 말고.”
 “고맙습니다.”
 운비는 인사와 함께 돌아섰다.
 박철호 감독, 그리고 야구부 선수들.
 운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몇 달 안 되지만 한솥밥을 먹은 사이가 아닌가? 그러나 아버지와 누나가 있으면 방해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운비가 맛이 간 줄 알고 충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딱!
 따악!
 박 감독은 펑고를 계속하고 있었다. 운비는 구석진 펜스 앞에서 기다렸다. 한 번 펑고를 시작하면 300개, 500개는 기본인 박 감독이다. 코치도 없이 지치지도 않았다. 멀리 갈매기가 보인다. 바닷바람도 간간이 이마를 쓸며 지나갔다.
 따악!
 마지막 공은 우익수를 향해 날아갔다. 장형도가 점프를 하면서 공을 받아냈다.
 “······?”
 배트를 넘기던 박 감독의 시선이 운비와 맞닿았다.
 “아직 안 갔나?”
 “테스트 부탁합니다.”
 “허얼!”
 “감독님은 투수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저 이래 봬도 제구력 하나는 예술입니다.”
 “예술?”
 “감독님이 특별히 좋아하는 스트라이크존 3, 6, 7, 9번에 꽂아대는 게 제 장점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숫자는 스트라이크존을 아홉 등분한 것으로 7번은 우타자의 바깥쪽 낮은 지점이고, 3, 6, 9는 타자 몸 쪽의 세로 존이다.
 “······?”
 그 말에 박 감독의 눈빛이 변했다. 박 감독이 주야장천 승우에게 강조하던 것이다.
 ‘제구력으로 살아남으려면 존 3, 6, 7, 9번을 장악해라!’
 “연습해라. 연습하는 사람은 살아남는다. 재능은 싸구려다!”
 “······?”
 “제구력의 달인으로 불리던 감독님의 명언 아닌가요?”
 “너?”
 박 감독이 눈자위를 구겼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말. 그걸 낯선 배구 선수가 웅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부탁합니다!”
 운비는 다시 한번 정중히 말했다.
 “좋아, 대신 딱 한 번뿐이다.”
 감독의 허락이 떨어졌다.
 “저거 뭐야?”
 지켜보던 백수찬이 후배들에게 물었다.
 “승우 친구라는데요?”
 “어? 진짜? 그런 말 못 들었는데?”
 야구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은 승우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늘 분위기 메이커였기 때문이다.
 “세형이가 좀 받아줘라!”
 감독이 포수를 불러냈다. 같은 신입생 포수이자 승우의 절친이다. 시작이 좋았다. 선천적 붙임성 유전자로 인해 모든 부원과 친하지만 그중에서도 각별하던 세형이다. 그러나 그건 운비만의 생각이었다.
 현재의 세형은 좋은 눈치가 아니었다. 겨우 끝난 훈련인데 난데없이 나타난 배구 선수. 그 때문에 휴식 시간을 깎아먹고 있으니 누가 좋아할 것인가? 더구나 세형은 운비 몸통에 승우가 들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
 “던져봐!”
 홈 플레이트 뒤에서 박 감독이 콜을 보냈다.
 ‘흐음.’
 공을 받아 든 운비가 심호흡을 했다. 손에 낀 글러브 안에 든 공을 보았다. 하지만 당장 시합을 하는 것도 아니니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공을 꺼냈다. 108개의 실밥을 염주 쓸어내리듯 하나하나 더듬었다. 공이 널널하게 들어오는 운비의 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여러 가지 자세로 그립을 쥐어보았다.
 투심 패스트 볼, 포심 패스트 볼, 커브, 싱커, 슬라이더······.
 안정적이다. 빅 유닛의 하드웨어에 기다란 손가락. 어쩌면 투심이나 포심 패스트 볼도 140은 될 것 같았다. 아쉬운 건 투구 연습을 미리 해보지 못한 것. 배구 선수의 집에는 배구공밖에 없었으니 그걸로 투구 연습을 할 수는 없었다. 몇 번 몸을 푼 운비는 마침내 포수의 미트를 바라보며 투수판을 밟았다.
 감독님, 정신 바짝 차리고 제대로 보세요.
 철욱이 형 말고 쓸 만한 투수 한 명만 더 있으면 전국 4강도 노려볼 만하다고 하셨죠?
 그 투수가 여기 왔습니다.
 ‘큐빅.’
 머릿속을 더듬었다. 그러자 두 개의 큐빅이 신묘한 빛으로 반짝거렸다. 게임기가 준 스킬 아이템은 환상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한 빅 유닛의 하드웨어. 배구의 공격수이니 스파이크를 후려치는 어깨 근육도 나쁘지 않을 터이다.
 곽승우, 그리고 황운비.
 우린 운명적인 콜라보야.
 이제부터 잘해보는 거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거든.
 운비는 세형을 향해 사인을 보냈다.
 검지를 두 번 튕겨주는 것.
 이 사인은 세형이와 둘이 만들었다. 1번 존에서 하나쯤 빠지는 높은 공을 던지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알아먹지를 못했다. 별수 없이 소리를 치고 말았다.
 “1 다시 1 존 변화구!”
 그래도 다르지 않았다. 세형이는 그저 미트를 두어 번 두드린 후 가운데에다 내밀 뿐이다. 잡소리 말고 던져. 녀석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긴 네가 보기엔 내가 옆 학교의 낯선 배구 선수일 뿐일 테니.’
 손을 모으고 와인드업 자세로 들어갔다. 그리고 운비의 일구가 날아갔다. 뒤이어 선수들의 웃음소리가 그라운드에 울려 퍼졌다.
 “아하하핫!”
 “캬캭캭캭!”
 운비는 눈을 의심했다. 공이 빠진 것이다. 살짝 빠진 게 아니라 홈 플레이트에서 어림없이 빗나갔다.
 “······!”
 감독이 눈짓하자 두 번째 공이 주어졌다.
 실수야.
 너무 긴장한 거라고.
 이번에는 직구로 정했다. 일단 감부터 잡아야 할 것 같았다.
 5번 존!
 한가운데 사인을 보냈다. 세형은 여전히 알아먹지 못했다.
 ‘그래, 일단 공이 들어가면 알아먹겠지.’
 어깨의 힘을 빼고 부드럽게 스트라이크존을 향해 자연스럽게 릴리스.
 투구 동작을 그리며 제2구를 날렸다. 허리와 어깨, 등짝이 뻐근했지만 참았다. 사고의 후유증인 모양이다.
 퍽! 퍽!
 이번에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다.
 “와카카칵!”
 선수들이 배꼽을 잡고 뒹굴었다. 바운드 공이었다. 맥없이 날아간 공이 원 바운드가 되면서 포수의 마스크를 때린 것이다.
 “더 할 테냐?”
 참담한 가운데 박 감독이 물었다. 운비의 대답이 늦자 공이 하나 더 날아왔다.
 “이번에도 개판이면 알아서 가주길 바란다. 우리, 청백전 해야 하거든.”
 박 감독이 쐐기를 박았다.
 “걱정 마세요, 3구는 150킬로미터 대포알로 5번 존에 꽂아 넣을 테니까요!”
 운비가 두 손을 불끈 쥐며 호언장담을 했다. 버릇이다. 실수를 해도 기가 죽지 않던 승우. 그 분위기 메이커의 에너지를 작렬했지만 아무도 호응해 주지 않았다.
 마지막 공.
 그걸 만져보았다. 뭐가 문제인 걸까? 몸은 결리지만 참을 만했다. 제구력의 신으로 불리던 승우이다. 그 기억과 스킬은 여전히 머리에 있었다. 거기에 더한 하드웨어와 게임기에게 받은 큐빅.
 ‘큐빅?’
 타조의 신성 시력!
 문득 떠오른 생각에 홈을 쏘아보았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까칠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세형이와 박 감독이 보일 뿐.
 30% 체력 회복력?
 그건 아직 알 수 없었다. 일반인이라고 해도 공 두세 개에 피로감이 오는 건 아니니까.
 ‘역시 사기였나?’
 그렇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았다. 야구 선수로 살면서 그런 건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빅 유닛이 되고 싶던 하드웨어만큼은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운비는 다시 홈을 바라보았다. 세형이 신경질적으로 미트를 흔들었다. 제구력 컨디션이 좋은 날은 저 미트가 세숫대야만 하게 보인다. 타자에게 공이 수박만 하게 보이듯이.
 ‘다른 건 몰라도 제구력은······.’
 투수판에서 물러나 팔을 잠시 풀었다. 그런 다음 로진을 손가락에 묻혔다. 표정은 더없이 진지하게 바뀐 후였다.
 ‘간다!’
 포수와의 사인이고 나발이고 다 생략한 운비가 3구를 날렸다. 온 힘을 쏟은 회심의 포심이었다.
 퍽!
 소리와 함께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 일어나 버렸다. 높은 공이 되면서 포수 뒤에 서 있는 감독의 어깨를 치고 간 것이다.
 “감독님!”
 구경하던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일부는 운비의 멱살을 잡았다. 모였다 하면 감독 흉을 보지만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었다.
 “아아, 그냥 둬라.”
 주저앉은 박 감독이 어깨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모양이다.
 “그냥 갈래, 아니면 야구 배트로 좀 얻어맞고 갈래?”
 감독이 다가와 배트로 가슴팍을 툭툭 건드렸다. 운비는 할 말이 없었다.
 “가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사람은 한길을 파야 하는 거야. 너, 배구 기대주라던데 엉뚱한 생각 말고 배구나 해라. 응? 야구,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감독의 배트가 운비의 어깨로 올라왔다. 그 배트가 마지막으로 가리킨 방향은 출구 쪽이었다.
 꺼져!
 그 말이다.
 “하지만 다시 올 겁니다.”
 운비는 거기에 딱 한마디를 더 보태놓았다.
 “감독님이 받아주실 때까지.”
 
 * * *
 
 뭐가 문제일까?
 집으로 돌아온 운비는 방에 처박혔다. 나오면서 집어 온 연습구 두 개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실밥이 터져 있다.
 둘레 22~23센티미터, 무게는 141~156그램, 8자 모양의 흰색 소가죽 두 장에 방수 처리된 223.5센티미터의 빨간 실로 꿰맨 108개의 실밥. 공은 그대로였다. 바뀐 건 육체뿐.
 거울 앞에 서서 옷을 벗었다. 육체를 바라보았다. 허우대는 멀쩡하다. 어깨가 다른 걸까? 순간적으로 후려치는 스파이크. 그 시스템에 최적화된 어깨라 공을 뿌리지 못하는 걸까? 다행히 사고에서도 치명적인 부상은 없었다. 게다가 배구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십자인대 파열 등의 흔한 부상도 없던 육체. 하지만 직구의 빠르기도 그저 그런 편이었다.
 말도 안 돼.
 고개를 저었다.
 적응 부족?
 응?
 그럴지도.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리 좋은 하드웨어라고 해도 적응이 필요했다. 운비의 몸이 배구 선수이지 야구 선수는 아닌 것이다.
 쉐도우 피칭.
 그게 떠올랐다. 발달된 근육이 다르면 그것부터 적응해야 할 것 같았다. 수건이 필요해 욕실 문을 열었다.
 ‘윽!’
 다시 재빨리 닫아버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누나가 샤워 중이었다. 옷도 입지 않은 우윳빛 전라였다.
 “왜?”
 상반신을 살짝 비튼 윤서가 물었다. 세형이 넋을 놓는 야동의 한 장면인 줄 알았다.
 “예··· 아니··· 응··· 수, 수건이 하나 필요해서······.”
 운비는 멋대로 더듬거렸다. 하얗게 변한 머릿속이었기에 말이 정돈되지 않았다.
 “받아.”
 문이 조금 열리더니 수건을 쥔 손이 나왔다. 고개를 돌린 채 받으려다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걸 주워 들려다 윤서의 가슴 볼륨을 보고 말았다.
 ‘크헙!’
 기다시피 방으로 돌아왔다.
 “후아!”
 겨우 숨을 가다듬는데 운비의 방문이 열렸다. 윤서가 들어선 것이다.
 “미, 미안해요.”
 “뭐가?”
 “욕실 문··· 안에 누가 있는지 몰랐어요.”
 “또 요냐?”
 “······?”
 “철이 든 거야, 뭐야? 언제는 내 몸만 보면 눈 버린다고 난리더니 얼굴까지 빨개졌네? 내가 요즘 좀 섹시해졌나?”
 “죄, 죄송··· 그만 나가줘요.”
 “또?”
 “나가줘. 됐지?”
 “아니, 잠깐만!”
 “······.”
 “핸드폰 어쩔 거야? 아빠가 사주라던데?”
 “핸드폰?”
 “사고 현장에서도 안 나왔거든. 없지?”
 “응? 응.”
 그러고 보니 승우 핸드폰도 없었다. 트럭에서 튕겨 나갈 때 함께 튕겨 나가 박살이 난 것.
 “같이 갈래, 아니면 누나가 만들어다 줘?”
 “누, 누나가······.”
 “네 번호 그대로?”
 “내 번호?”
 “설마 번호도 잊어버린 거야?”
 “아, 아니, 번호 바꿀래.”
 “모델은?”
 “마, 마음대로.”
 승우의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윤서를 밀어냈다.
 “야, 누나 수영 강습 가는데 같이 안 갈래? 잊어버렸는지 모르지만 너 유연성 증강 때문에 수영 배운다고 약속했어.”
 윤서의 목소리가 문을 넘어왔다.
 “미안하지만 나 수영 잘해.”
 “푸훗, 네가? 물에만 들어가면 바로 가라앉는 주제에?”
 “진짜 잘한다니까. 그러니까 어서 가요.”
 “그래, 그럼 쉬고 있어라. 전화는 내일 개통해다 줄게.”
 “후아!”
 다시 숨을 골랐다. 문에 귀를 대보니 기척이 없다. 누나가 있다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더구나 저렇게 예쁜 누나는 말이다. 하지만 수영을 잘한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소야도에서 자란 승우이다. 여름철 밀물이 되면 집 앞 바닷물에서 친구들과 살던 승우이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거울 앞에 섰다. 수건을 들고 와인드업 자세를 취해보았다. 발 자세가 약간 뒤틀렸다. 바로 잡았다. 거울을 향해 투구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 보니 공을 놓을 때의 손목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관절도 빡빡하다. 좋은 투수의 팔은 채찍처럼 휘어진다. 손목이 부드러워야 공을 놓기 직전에 강한 회전을 걸 수 있다. 그래야 타자 앞에서 상하좌우의 무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건 박 감독에게서 배웠다. 그런 팔을 갖기 위해 식초라도 먹고 싶었다. 박 감독은 투수 출신으로 한때는 프로야구 최고의 루키였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고교 시절 에이스로서 혹사당한 게 원인이었다.
 그에게 배운 쉐도우 피칭을 생각했다. 힘을 넣는다고 공이 빨라지는 건 아니다. 체중을 지탱하는 다리, 그 하체의 탄성을 이용해 던지는 피칭. 피칭을 처음 배울 때처럼 하나하나 짚어가며 쉐도우 피칭을 했다. 두 시간쯤 했을까? 겨우 적응이 되는 것 같았다.
 글러브와 공을 챙겨 정원으로 나왔다. 널찍한 게 피칭 연습도 가능해 보였다. 담장 쪽의 목련나무에 가방을 매달았다. 안에 베개를 넣으니 소리도 크지 않았다.
 어깨 힘을 빼고 1구를 던졌다. 빗나갔다. 2구를 던졌다. 또 빗나갔다. 3구가 날아갔다. 이번에는 겨우 타깃에 적중되었지만 느렸다. 100여 킬로미터에 불과한 공이다. 20여 번을 더 하자 겨우 익숙해졌다.
 ‘좋아.’
 이번에는 작심하고 속구를 던졌다. 새 어깨를 확인하고 싶었다.
 패액!
 손을 떠난 공이 가방을 때렸다.
 “······!”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건 잘 나와야 110킬로였다. 다시 회심의 일구를 날렸다. 속도는 더 나지 않았다. 황당했다. 스파이크를 날리는 배구 선수. 후려치는 그 속도도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이렇게 밋밋한 직구? 그럼 이 인간의 하드웨어는 완전 두부살?
 안 돼!
 오기가 생겨 다시 공을 던졌다.
 퍽!
 가방을 맞고 튕겨나는 공은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기를 써도 그 정도가 한계였다.
 ‘미치겠네.’
 머리를 쥐어뜯을 때 윤서가 나타났다.
 “연습 중?”
 그녀가 공을 집어 들었다.
 “응.”
 “잘 안 돼?”
 “······.”
 “밥 먹자고. 그런데 야구는 원래 오른손으로 하는 거야?”
 그녀가 운비를 바라보았다.
 “응?”
 “너 양손을 다 쓰지만 원래는 왼손잡이잖아? 그런데 오른손으로 공을 던지길래······.”
 “······!”
 윤서의 말은 천둥이 되어 운비 머릿속에서 울렸다.
 “황운비, 아니, 내가 원래 왼손잡이였어?”
 “운비야!”
 “아, 알았어! 땡큐, 누나! 정말 고마워!”
 운비 역시 천둥소리를 쏟아냈다. 진짜 누나(?)라면 안고 헹가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왼손잡이!
 그게 이유였다. 그걸 모르고 우투로 공을 뿌린 운비. 그건 마치 오른손잡이 승우가 왼손으로 공을 뿌리는 것과 같았다. 제대로 된 투구나 속도가 나올 리 없었다.
 ‘그러니까······.’
 다시 공을 들고 표적을 노려보았다.
 ‘운비 네가 왼손잡이였단 말이지?’
 시야에 표적이 들어왔다. 포수의 미트처럼 보였다. 왼손으로 투구 모션을 취해보았다. 부드럽다. 오른쪽과 비교하니 한결 자연스러웠다. 일단 하체에 모이는 힘부터 달랐다. 가볍게 공을 놓았다. 공은 가방의 한가운데를 맞추고 떨어졌다. 몇 번 같은 동작으로 투구 모션을 익혔다. 그런 다음 작심하고 공을 뿌렸다.
 뻐억!
 파열음과 함께 두 물체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공과 표적이다. 강력한 속구에 표적을 매단 끈이 끊어지며 사이좋게 흩어진 것이다.
 ‘맙소사!’
 운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람 소리였다. 손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이건 120~130킬로대의 투수들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빅 유닛.
 이제는 빅 유닛을 꿈꿀 수 있어.
 게다가 왼손이다.
 박 감독이 그렇게 원하던 쓸 만한 왼손 투수.
 운비는 윤서 몸매처럼 늘씬한 손가락이 딸린 큼지막한 왼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아!”
 손이 떨렸다. 어깨가 떨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장이 떨렸다.
 “으아아악!”
 운비는 오열했다. 미치도록 감격스러운 절규의 비명이다.
 고맙다. 황운비. 왼손잡이여서. 오늘 박 감독님 앞에서 어리바리하던 거 다 용서해 줄게.
 운비는 왼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4장 때려죽여도 야구!
 
 
 
 다음 날 아침, 운비는 화장실에 있었다. 근사한 비데에 앉으니 엉덩이까지 호강이다. 아니, 이건 운비의 육체이니 호강은 아니었다. 날마다 이런 데서 밀어내기를 했을 몸이시니.
 왼손잡이!
 어젯밤에 확실히 알았다. 운비의 자료 사진과 녹화 파일을 뒤져 확인했다. 확실하게 왼손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그때마다 공이 상대방 코트 위에 떨어졌다. 고1이면서 성공률 50%를 상회하는 초강력 스파이크. 거기에 서브 득점까지 겸비했다. 그 또한 유연하고 강한 손목의 위력 덕분이었다.
 인터넷 기사 등에는 화려한 닉네임도 있었다.
 <초고교급 철견 황운비!>
 <한국 배구의 미래, 퍼펙트 스파이크로 진화!>
 팔과 어깨가 강력하다는 기사들.
 살에 지진이 나도록 고무적이었다.
 마지막 인증은 이 화장실에서 하기로 했다. 세상에는 ‘세’ 손잡이가 있다.
 오른손잡이, 왼손잡이, 앤드 양손잡이.
 문제는 이 양손잡인데, 이들도 결국에는 오른손 아니면 왼손잡이에 속한다. 그 기준은 무엇일까?
 “밑 닦이!”
 이 또한 박 감독의 지론이다. 대변을 보고 어느 손으로 밑을 닦느냐. 그게 그 사람의 진정한 손잡이라는 것. 그러니까 비록 양손을 쓰는 스위치히터라도 밑을 닦을 때 오른손으로 닦는다면 오른손 힘이 더 자연스럽고 강하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냐고?
 운비는 모른다. 하지만 박 감독 밑에서 야구를 배웠으니 그의 이론에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일이다. 마지막 밀어내기에 이어 항문을 조여 끊어내기로 마무리를 한 운비는 앞에 놓인 티슈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왼손이 나갔다. 휴지를 잡고 뒤처리를 했다. 어색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검증에 들어갔다. 오른손 교체 투입이다. 뭔가 좀 어설펐다.
 “나이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화장실이 들썩거렸다.
 너무 흥분했다.
 현관문을 나서니 누나와 아버지가 보인다. 엄마가 운비의 뒤를 따라 나왔다.
 “어디로 갈까?”
 아버지가 물었다. 어제 실격을 당한 야구. 그걸 아는 아버지이기에 배구부가 있는 봉래고로 가자는 말을 돌려 한 것이다.
 “소야고요.”
 그 말을 하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러자 윤서가 막아섰다.
 “넌 조수석이잖아?”
 “······.”
 군소리 못 하고 조수석을 차지했다.
 “또 간다고?”
 아버지의 질문이 이어졌다.
 “예.”
 “······.”
 “······.”
 “감독이 좋아할 거 같지 않은데?”
 “그분 원래 무뚝뚝합니다. 속마음은 따뜻해요.”
 “······.”
 “그냥 제 느낌이······.”
 “그래, 한 번 가지고는 부족하겠지. 지금 결석이 중요한 때도 아니고.”
 “오늘은 잘할 수 있습니다.”
 “그래.”
 부릉!
 시동이 걸렸다. 차는 부드럽게 도로로 올라섰다. 벤츠라 그런지 고물 만물 트럭과는 승차감부터 달랐다. 해변을 끼고 달리는 동안 내내 공을 만졌다. 검지와 중지로 체인지업의 그립도 쥐어보고 슬라이더도 잡아보았다. 두 손가락을 벌려 싱커도 잡고 포크도 쥐었다. 포크볼은 손가락이 짧은 승우가 배우고 싶던 구질이다.
 끼익!
 차가 소야고 후문에서 멈췄다. 차 문을 열기 무섭게 타격 음이 들려왔다.
 따악!
 공이 시원하게 날아가는 게 보인다. 우익수가 전력 질주 해 겨우 잡아냈다. 마지막에 뻗지 못한 공. 그렇다고 해도 배트의 중심에 맞았다는 것. 그 정도의 펀치력이라면 짐작이 어렵지 않았다.
 ‘2학년 수찬이 형, 아니면 덕배 형.’
 고개를 돌리자 수찬이 눈에 들어왔다. 아쉽다는 듯 배트로 땅을 두드리며 돌아서는 수찬. 그 뒤로 박 감독이 보였다.
 “저 자식 또 왔는데요?”
 옆에 있던 세형이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의 눈이 운비에게로 향했다. 운비는 꾸벅 인사를 했지만 돌아온 건 차디찬 외면이었다.
 “한 번만 더 테스트를 부탁합니다.”
 운비가 말했다.
 “······.”
 “어제 연습 많이 했습니다. 오늘은 정말 잘할 자신 있습니다.”
 “어이!”
 그제야 감독이 시선을 맞춰주었다. 맞바람이 불면서 홀아비 냄새가 끼쳐 왔다. 물론 홀아비는 아니다. 당진에 혼자 내려와 홀아비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뿐. 그 냄새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만은 상관이 없는 운비였다.
 “배구 좀 하니까 야구가 장난 같아? 투수가 한두 시간 연습으로 되는 건 줄 아냐고?”
 “······.”
 “장난도 한 번이지 말이야.”
 “······.”
 “이봐요, 이 친구 아버님.”
 박 감독이 황금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 남의 연습 방해하려고 작정한 건 아닐 테고··· 배구 선수 아버님이면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십니까? 내가 저 친구하고 계속 놀아줘야 합니까? 우리도 그 사고로 선수 한 명이 희생되어 분위기 안 좋다고요.”
 “죄송합니다.”
 “데리고 가세요. 야, 투수 교체. 영길이 나가라.”
 감독은 이제 아버지까지 외면해 버렸다.
 “오늘은 안 되겠다. 저 감독님, 성깔 있네. 냄새도 안 좋고.”
 코를 막은 윤서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두 분 먼저 가세요. 저는 테스트 받고 갈게요.”
 운비는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외야 쪽의 소나무 밭으로 걸어가 기댄 것이다.
 “운비야!”
 “걱정 마시고요. 어차피 봉래고등학교도 엎어지면 코 닿을 데잖아요. 여기서 쫓겨나면 거기 가 있을게요.”
 “······.”
 “저 괜찮다니까요.”
 “그래, 그럼 아빠는 계약 문제로 바빠서 먼저 간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하고.”
 “네.”
 밝게 대답하고 손까지 흔들자 아버지와 누나의 인상도 환해졌다. 두 사람은 배기통에서 나온 흰 연기를 남기고 멀어져 갔다.
 따악!
 다시 타격 음이 들렸다. 땅볼이다. 2루수가 알을 깠다.
 “괜찮아, 괜찮아! 기죽을 거 없어!”
 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쳐 버렸다. 승우의 버릇이다. 하지만 운비의 몸이라는 게 문제였다. 2루수가 안구가 터져라 눈을 부라렸다. 슬쩍 외면하며 명화 손수건을 꺼냈다.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 명화에는 오늘도 야구공이 별 대신 찬란했다. 적어도 승우에게는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아직도 그 별은 탱탱한 야구공으로 보였다.
 스윙!
 다음 타자는 삼진이었다. 운동장 밖에서 지켜보니 조금 한심해 보였다. 타자도, 투수도, 수비도 그만그만했다. 28연패가 우연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 걸까? 수찬과 더불어 이따금 한 방을 날리는 3학년 용규 선배가 배트를 제대로 휘둘렀다.
 “홈런!”
 공이 우익수를 넘어가자 용규가 펄쩍 뛰었다. 공은 홈런 선으로 세워놓은 낮은 펜스를 넘어 운비에게로 굴러왔다. 용규는 에러로 나간 주자와 함께 홈 플레이트를 밟았다. 연습 게임이 끝났다.
 “운동장 정리하고 좀 쉬어라.”
 박 감독이 점퍼를 여미며 돌아섰다.
 “어이, 그 공 좀 던져주시지!”
 우익수가 운비에게 소리쳤다. 운비는 코앞까지 굴러온 볼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천둥처럼 소리를 질렀다.
 “박철호 감독님!”
 이동 펜스를 지나가던 감독이 돌아보았다. 외야의 나무에서 펜스까지는 약 120여 미터. 감독의 시선이 사라지기 전에 공을 뿌렸다. 어제와 달리 왼손이다.
 부아악!
 소리부터 마음에 들었다. 그건 분명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다.
 캉!
 공은 그대로 홈 플레이트 뒤의 펜스를 때렸다.
 “······.”
 ‘뭐야?’
 감독은 눈을 의심했다. 공은 다이렉트로 날아왔다. 하지만 사람은 어제 그 배구 선수였다. 스트라이크 하나 못 꽂는 데다 스피드도 없던 어깨. 그런데 오늘은?
 “이세형!”
 감독의 입이 신중하게 열렸다.
 “예?”
 “공하고 배트 가져와라.”
 “예?”
 “공하고 배트!”
 다시 강조하자 감독 손에 공과 배트가 주어졌다. 감독은 펑고로 공을 날렸다. 공이 운비 앞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다시 던져보라는 뜻이다. 공을 집어 든 운비는 보란 듯이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부욱!
 운비의 팔이 한 번 더 바람을 갈랐다.
 “감독님!”
 세형이 다급하게 박 감독을 밀었다. 공은 감독 뒤의 펜스 폴대를 때렸다. 이번에도 다이렉트로 날아온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박 감독은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손 때문이다. 아까는 보지 못한 송구. 이번에는 보았다. 왼손이었다. 오른손이 아니고.
 왼손!
 어제는 오른손으로 던진,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 배구 선수. 그런데 오늘은 손을 바꾸어 박 감독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운비가 마운드를 밟았다.
 “던져봐라!”
 박 감독의 허락이 떨어졌다.
 
 세형이 다가와 공을 넘겨주었다.
 “너, 내 공 좀 받아라.”
 운비가 태연하게 말했다.
 “뭐?”
 운비가 고1이라는 걸 알게 된 세형도 반말로 각을 세웠다.
 “내 공 좀 받으라고.”
 운비는 찡긋 윙크로 화답했다.
 “내가?”
 “받아줘라. 야, 용규야, 포수 자리 세형이에게 넘겨라. 저 친구가 세형이 놈이 마음에 든단다.”
 박 감독이 홈 플레이트로 나오는 용규에게 소리쳤다.
 “아, 씨발, 별로 받고 싶지 않은데.”
 세형이 뒷머리를 긁었다.
 “받아. 오늘은 괜찮을 테니까.”
 “괜찮긴, 똥볼이나 던지면서 무슨.”
 “그러는 너는 내 사인을 왜 무시하는데?”
 “사인?”
 “11!”
 “11? 그럼 네가 어제 소리친 게?”
 “그래. 제1 존에서 공 하나 밖으로 빠지는 코스!”
 “······!”
 “벌써 잊어버렸냐?”
 “······!”
 “오늘은 잊지 말아라.”
 그 말과 함께 세형의 어깨를 밀었다. 녀석은 홈으로 가는 중에도 두 번이나 돌아보았다. 고개도 계속 갸웃거린다. 머리가 복잡해진 모양이다.
 세형이 포수 위치에 자리를 잡고 미트를 내민다. 운비는 손에 든 승우의 글러브를 내려놓았다. 오른손잡이 글러브라 쓸 일이 없었다. 게다가 시범을 보이는 것이니 글러브가 없다고 문제될 것도 아니었다.
 로진을 묻힌 운비는 서두르지 않았다. 볼에서 풍기는 소가죽 냄새를 천천히 맡았다.
 마운드.
 장신이 확실히 마음에 들었다. 세형이 유치원생처럼 보였다. 승우일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시야이다.
 “어이, 뜸 그만 들이고 던져!”
 주장 철욱이 소리쳤다.
 마침내 운비의 시선이 투수 미트를 겨누었다. 다시 떠오른 두 개의 큐빅. 그러나 큐빅은 오늘도 별 효력이 없었다.
 상관없어, 그런 환상 같은 건.
 나는 빅 유닛의 육체만으로도 만족하거든.
 척!
 운비가 사인을 냈다. 한가운데 직구이다.
 “배구하면서 어디서 본 건 있나 본데요?”
 주장이 감독 옆에서 중얼거렸다. 감독은 대꾸도 없이 운비만을 노려보았다.
 세형은 운비의 사인을 보지 않았다. 그러다 거푸 사인이 나오자 그제야 미트 위치를 조금 옮겼다. 그래, 그래야지. 꿀꺽 침을 삼킨 운비의 초구가 날아갔다.
 빠악!
 굉장한 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공이 포수 머리 위를 지나 펜스 파이프를 강타한 것. 그 바람에 부근에 있던 선수 몇이 혼비백산하여 주저앉았다.
 “······!”
 감독과 운비의 눈자위가 동시에 일그러졌다. 운비의 입장에서 보면 공이 살짝 빠졌다. 제대로 잡았지만 손가락이 달랐다. 마디의 독특한 볼륨 때문이다.
 마지막 마디에 봉긋하게 솟구친 볼륨감.
 방규리의 손가락이 그랬다. 유전인 모양이다. 그게 방해가 될까 봐 실밥을 비껴 잡다 보니 볼이 궤도를 바꿔 버린 것이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속도 때문이었다. 벼락처럼 펜스까지 날아온 공. 조금 빠진 것 따위는 신경도 가지 않았다.
 
 “뭐 해, 공 던져줘야지?”
 감독이 세형에게 말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세형이 공을 던졌다. 운비는 두 번째 공을 잡았다.
 ‘이번에는!’
 부아악!
 다시 공이 날아갔다.
 뻑!
 이번에도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공은 제대로 날아왔지만 미트에 꽂히는 소리는 아니었다. 속도에 놀란 포수가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공은 포수의 보호 장비를 때려 버렸다.
 “어, 어······.”
 세형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역시 그저 그런 수준의 포수였다. 소야고 최고 투수 철욱의 구속이 130 중후반이니 이런 강속구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결국 포수가 바뀌었다. 세형의 자리에 3학년 용규가 들어섰다. 딴에는 3학년이라고 승우를 무시하던 용규. 그러나 덩치가 더 크니 안정감부터 들었다. 세형이와는 달랑 한 끗 차이지만 의미가 달랐다.
 커브.
 운비는 그 구종을 머리에서 지웠다. 낙차만큼은 제법이던 비장의 무기. 북인고의 막강 클린업트리오들에게도 한 번은 통하던 낙차. 속도까지 붙으면 굉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스트라이크존에 꽂아 넣는 게 필요했다.
 ‘치잇!’
 손가락 끝마디의 도톰한 볼륨감 때문일까? 제구력이 아쉽기는 난생처음이다.
 빠악!
 그나마 3구는 제대로 꽂혔다. 포구한 용규 역시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미트 속에 들어간 공은 약간 높은 스트라이크. 3학년 짬밥이라고 공을 놓치지는 않았다.
 “억!”
 포구한 용규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어이!”
 잠시 숨을 돌린 박 감독이 소리쳤다.
 “사이드암 말고 오버핸드로 뿌려봐라! 이거 말이야!”
 감독은 친절하게 자세까지 일러주었다. 오버핸드. 운비가 모를 리 없다. 그러고 보니 운비의 몸은 빅 유닛. 어쩌면 승우가 익숙하던 사이드암보다는 오버핸드가 나을지도 모른다. 운비는 잠시 돌아서서 투구 폼을 취해보았다. 오랫동안 사이드암으로만 던진 까닭이다. 다시 운비가 마운드로 올라섰다. 그런데 타석에 감독이 들어와 있다.
 “던져봐라.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한가운데다 뿌려.”
 배트를 휘두르며 타이밍을 조절하는 감독. 운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타석에 들어선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닌 까닭이다.
 오버핸드.
 정통파 투수의 원형.
 169센티미터의 변화구 전문 땅콩 투수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던 폼. 운비는 공을 쥔 채 와인드업에 돌입했다.
 ‘가랏!’
 공이 손을 떠났다.
 빠악!
 공은 그대로 용규의 미트로 빨려들어 갔다. 꽤 높은 공으로 볼이었다. 감독의 시선은 공의 궤적에 꽂혀 있었다.
 “한 번 더!”
 ‘잇!’
 다시 직구가 날아갔다.
 빠악!
 공은 스트라이크존에 제대로 꽂혔다. 3번과 4번 존 사이였다.
 “좋았어! 하나 더!”
 감독이 요청하자 운비가 부응했다.
 빠악!
 감독의 방망이가 돌았다. 공은 운비를 지나 중견수 자리로 굴러갔다. 깨끗한 안타였다.
 “다른 거 던질 줄 아나?”
 감독이 물었다.
 “예.”
 운비가 대답했다.
 “그럼 가능한 거 던져봐.”
 가능한 거?
 승우의 주특기는 낙차 큰 커브였다. 속도는 느리지만 낙차만큼은 감독도 인정할 정도였다.
 ‘부탁한다.’
 손가락을 굽혀 커브를 준비한 운비가 공에게 주문을 걸었다. 어느 정도 운비에게 관심을 가진 감독이다. 하지만 아직 입부 허락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와아압!”
 운비는 기합과 함께 공을 뿌렸다. 첫 변화구는 포수 앞에서 원 바운드가 되었다. 역시 손가락 때문이다. 운비의 손가락 끝마디에 도톰한 볼륨감. 그것 때문에 실밥을 어색하게 긁은 것이다.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운비가 말하자 용규가 공을 던져주었다. 운비는 손가락 위치를 제대로 잡았다. 한 번은 실수. 그러나 두 번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와아아압!”
 이번에는 더 큰 기합과 함께 공이 날아갔다.
 따악!
 감독의 배트가 작렬했다. 파울이다.
 “한 번 더!”
 감독의 주문이 이어졌다. 바로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감을 잡은 손가락이 제대로 변화구를 꽂아 넣었다. 헛스윙이 나왔다. 운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트라이크에 가까운 커브가 꽂힌 것이다.
 “직구!”
 추가 주문도 문제가 없었다.
 뻑!
 운비의 직구는 박 감독 가슴 높이에 꽂혔다. 스트라이크존은 벗어났지만 140킬로미터는 찍을 것 같았다. 전력투구가 아니었음에도.
 “너 진짜 야구 처음이냐?”
 감독이 물었다.
 “예? 예.”
 “너 진짜 배구 때려치우고 야구하고 싶냐?”
 “예!”
 “부모님 같이 오셨냐?”
 “아까 먼저 가셨는데요.”
 “진짜 야구할 마음 있으면 다시 모시고 와라.”
 “고맙습니다, 감독님!”
 운비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런데······.”
 운비를 바라보던 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뒷말을 이었다.
 “이럴 때는 꼭 곽승우 같단 말이지?”
 
 * * *
 
 “운비야!”
 저녁의 가족회의, 어머니가 먼저 소스라쳤다. 아버지와 윤서의 표정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충 그러다 넘어갈 것으로 생각한 부모님은 운비가 확정적인 선언을 하자 졸도 직전까지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야구를 해야 해요.”
 “운비야.”
 “죄송하지만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이제 배구는 못 해요.”
 “그러니까 그 이유라는 게?”
 방규리의 시선이 윤서에게 넘어갔다. 운비가 한 말을 공유한 모양이다.
 “······.”
 운비는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말도 안 돼. 네가 배구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리고 엄마랑 한 약속 잊었어? 엄마 대신 국가 대표 달고 올림픽 메달 따준다며?”
 “그 약속을 바꾸겠습니다.”
 “바꾼다고?”
 “야구를 허락해 주시면 국가 대표는 물론 메이저리거가 되어 보답할게요.”
 “메이저리거?”
 “부탁합니다.”
 운비는 단호했다.
 “야구 감독에게는 반허락을 받았다고?”
 관망하던 아버지가 물었다.
 “예.”
 “허어, 이것 참······.”
 “······.”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말씀하세요.”
 “야구를 하겠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네 엄마와 누나까지 정신없기는 마찬가지다만 왜 하필이면 소야고냐? 내가 알아보니 거긴 지역 예선도 통과 못 하는 팀이던데.”
 “······.”
 “어쩌면 그것도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래.”
 “그러니까 더 거기서 하고 싶은 겁니다.”
 “응?”
 “죽었다 살아났잖아요. 게다가 야구는 처음 하는 것이니 가장 어려운 팀에서 차근차근 시작하고 싶습니다. 좋은 팀에 가면 누가 저를 써주겠어요?”
 “······.”
 황금석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운비의 말이 먹힌 것이다. 사실 그건 황금석의 방에 걸린 휘호에서 인용한 것이다. 전도유망한 청소년 대표 배구 선수.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종목으로 바꾸겠다는 말이 쉽게 통할 리 없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휘호에서 힌트를 얻은 운비였다.
 
 어려운 일부터 도전하라!
 
 황금석은 탄탄한 중견 기업의 사장. 그러나 그 시작은 미약했다. 몰락한 집안에 태어나 일찌감치 조실부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남들이 외면하는 일을 파고들었다. 그 결과 지금은 작지만 세계적인 기술을 가진 기업을 일군 나름 입지전적인 사람이다. 그랬기에 그는 운비의 말이 가슴에 닿았다. 철없는 아이로만 알고 있던 열일곱 소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이미 운비의 편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미련은 어머니 쪽이 더 깊었다. 어쩌면 미련이 아니고 촉각이었다. 그녀는 운동선수 출신이다. 지금도 대학에서 배구 강의를 하고 있다. 그렇기에 운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운비가 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건 어제오늘 쌓은 결과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배구공을 좋아하던 운비이다. 유치원 때부터 그랬다. 본격적으로 배구공을 만진 것이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말하자면 배구 인생을 살아온 시간이 10여 년이나 되어가는 운비였다. 그렇게 몸에 익은 배구와 배구에 특화된 몸. 그런데 야구로 전향하다니? 그건 완전히 다른 운동이다.
 “저 잘할 자신 있어요.”
 그렇다고 뜻을 굽힐 운비가 아니었다. 육체를 빌렸다지만 그 몸의 주인은 야구밖에 모르던 승우. 머릿수로는 불리하지만 운비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아들이라는 것. 자식이라는 것.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아들이 원하는 일. 게다가 이렇게 진지하게 나오니 가족들은 다른 도리가 없었다. 희망적인 건 운비가 아직 어리다는 것. 그렇다면 새 출발을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렇잖아도 사례를 찾아본 방규리는 최근 축구에서 전향한 야구 선수가 투수로 각광받고 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다.
 가족의 동의를 구한 운비는 방으로 돌아와 한숨 돌렸다. 왼쪽 근육이 살짝 당겼다. 많이 던진 게 아님에도 달려드는 뻐근함. 배구의 ‘배’ 자를 ‘야’ 자로 바꾸는 것처럼 근육에도 단련과 적응이 필요했다.
 한 고비를 넘긴 운비는 다음 고비를 향해 나갔다. 이번에는 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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