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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도구천 1

2017.11.14 조회 820 추천 4


 패도구천 1권
 서장
 
 
 너무 늦게 알았다, 열심히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걸.
 
 ***
 
 <본명
 
 도장경 刀長烱
 
 별호
 
 폭뢰창爆雷槍
 
 이력
 
 십 삼세 천황맹天皇盟 입룡관入龍館 입관.
 십 오세 비룡관飛龍館 입관. 입관 사유 입룡관주 추천.
 십 칠세 질풍조疾風組 조원 차출. 차출 사유 비룡관주 추천.
 십 팔세 질풍조疾風組 조장 임명. 임명 사유 전 조장 추천.
 십 구세 수라대修羅隊 대원 차출. 차출 사유 지부장 추천.
 
 
 기타 이력
 
 참가 전투 전회 선봉先鋒
 근무중 무단 이탈 전적 무無
 기방 출입 전적 무無
 뇌물 수수 전적 무無
 
 총평
 
 무공武功 상上
 근골筋骨 상上
 공력功力 상上
 협의俠義 상상上上
 지모智謀 중中
 
 일류一流.
 
 .
 .
 .
 
 발령 추천인
 
 천황맹 예주지부장 공문찬
 
 추천 사유
 
 실적 과다.
 협의 과다.
 자질 과다.>
 
 “새끼······. 더럽게 열심히 살았네.”
 문사는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내려놓고는 붓을 들었다. 거칠게 움직이는 붓이 종이의 밑에 몇 개의 글자를 만들어냈다.
 
 <위험도 일급. 필 좌천.>
 
 
 1장 특진, 섬마단원 도장경
 
 
 1.
 
 
 “새끼······. 정말 더럽게 열심히 살았네.”
 천황맹 예주지부 군사 양서문은 발령서를 내려 놓으며 뇌까렸다.
 수많은 무인들의 신상명세를 읽어 왔지만 이렇게 이력이 깨끗한 자는 처음이었다.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천룡맹이 낳은 기재 백위 안에는 들어갈 만한 인물이다.
 하지만 양서문의 눈빛은 결코 밝지 않았다.
 “백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천하를 호령했을 것을.”
 짜증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지금 같은 시대에 태어난 기재의 운명은······.
 똑똑!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양서문은 발령서를 덮으며 말했다.
 “들어오게.”
 드르륵-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이 열렸다.
 ‘과연.’
 양서문의 눈이 번뜩였다.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화려한 이력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외모의 청년이었다.
 중키에 적당한 체구. 선 굵은 얼굴과 높은 콧대, 굳게 다문 입술은 과묵한 인상을 주었다. 두 눈도 호수처럼 맑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 절로 신뢰를 주는 눈빛이다.
 “도장경?”
 “예.”
 양서문의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서문은 입맛을 다셨다.
 “그렇구만.”
 순간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까라면 깔 수밖에.
 “실적이 좋구만.”
 “감사합니다.”
 절도있는 대답.
 양서문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승진일세.”
 “감사합니다.”
 “그것도 특진일세.”
 “감사합니다.”
 “섬마단(殲魔團)으로 가게.”
 “감사합······.”
 목소리가 칼로 자른듯 끊어졌다.
 그 자리를 무거운 침묵이 대신했다.
 양서문은 도장경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큰 표정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눈에 핏발이 서는 것 까진 어쩔 수 없던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섬마단이라는 이름을 들었으니.
 도장경의 입에서 처음으로 긴 말이 튀어 나왔다.
 “······납득 할 수 없습니다.”
 나 같아도 납득 못할걸세.
 양서문은 고개를 주억이며 우수를 털었다.
 푸드득!
 미리 준비 해 둔 전서구가 소매에서 튀어 나갔다.
 도장경은 뒤로 한걸음 물러나 섰다.
 표정에 결연한 의지가 비췄다. 납득하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
 양서문은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시선이 전서구가 사라진 창밖으로 향했다.
 ‘내가 저 전서구가 되고 싶구만.’
 
 
 “납득 할 수 없습니다.”
 도장경은 그 어느때보다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표현이었다.
 “그렇구만.”
 건너편에 앉은 이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답했다.
 불혹을 갓 넘긴 듯한 장년인. 예주지부장 공문찬이었다.
 그는 메기처럼 기른 수염을 베베 꼬며 말을 이었다.
 “어떤 면이 납득 할 수 없다는 겐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말투.
 도장경 조차도 ‘내가 억지를 부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이건 부당하다.’
 다시 한번 생각해도 결과는 같았다.
 섬마단이라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또 있으랴.
 왜냐하면······.
 “섬마단은 남······.”
 “남황南荒에 있는 곳이지. 이미 알고 있구만 그래.”
 쐐기를 박는 말. 게다가 뻔뻔하기 까지 하다.
 “제가 그곳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도장경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물었다.
 공문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나. 유명한 곳이 아닌가.”
 유명한 곳이긴 했다.
 막장으로.
 “특진일세. 대주를 거치지도 않고 바로 단원이 되지 않았나?”
 특진이긴 했다.
 이게 마지막 승진이겠지만.
 “가는 길도 편할걸세. 마차를 대령해 줌세.”
 가는 길은 편할 것이다.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연달아 터진 충격발언에 도장경은 뒤통수가 뻐근해 지는 것을 느꼈다.
 공문찬은 다시 메기 수염을 꼬고 있었다.
 더 할 말 이라도?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꾸욱-
 도장경은 주먹을 움켜 쥐었다.
 부당하다. 그의 인생에 이토록 부당한 처사를 받아 본 일이 없었다.
 적어도 이런 결정이 난 이유라도 알 수 있다면······.
 “특진 사유는 무엇입니까?”
 우뚝!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염을 꼬던 공문찬의 손길이 멈췄다.
 그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눈꺼풀 사이로 안광이 번뜩였다.
 낚였구나!
 눈빛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단도직입 적으로 말하지.”
 공문찬은 양 손을 깍지껴 턱에 괴며 말했다.
 “자넨 너무 설쳐.”
 “······!?”
 도장경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 떴다.
 그게 무슨?
 “자네가 벤 마두의 숫자가 몇 인지 아나? 소탕한 산채와 도적들의 숫자는? 쫓아낸 흑도인들의 숫자가 몇인지는?”
 “······.”
 “자네 덕에 예주는 가장 깨끗한 곳이 되었네. 다들 할 일이 없어질 정도로.”
 “······.”
 도장경은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게 어째서 섬마단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공문찬이 쏘아붙이듯 말을 이었다.
 “그 뿐인가. 상부에서도 본 지부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네. 당연하지. 작년 한해 전 지부 최고 실적을 올렸으니까.”
 공문찬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최고 실적이라니! 정말 생각 할수록 화가 치미는군.”
 ······그게 어째서 화가 날 일이란 말인가?
 “다 자네가 설치고 다닌 덕분이지. 고맙구만 그래.”
 전혀 고맙지 않은 말투라는 것은 도장경도 느낄 수 있었다.
 공문찬을 길게 한 숨을 내 쉬었다.
 한 서린 한숨이었다.
 “아직 천무대전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자네도 알겠지.”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내년에 중원의 패권을 둔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리란 소문이 돌고 있다네. 바로 내년에 말일세.”
 도장경도 스치듯 들은 적이 있었다.
 천황맹과 무천련武天聯간의 전쟁. 내년에 그 결판이 나리라는 것이다.
 그때 천황맹 무인들의 선봉에 서 마인들을 도륙하리라, 협의의 기준을 다시 세우리라 다짐했었다.
 “······이대로라면 우리 예주지부의 무인들이 선봉에 서게 생겼단 말이야!”
 공문찬은 쾅! 소리가 나게 책상을 내리쳤다.
 도장경으로선 그게 어째서 문제가 되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특진의 이유라는 것들이 죄다 납득 할 수 없는 것들 뿐이지 않은가!
 “자네 때문에! 네 놈 때문에!”
 공문찬은 뿌드득 소리가 나게 이를 갈며 도장경을 노려 보았다.
 도장경은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방귀 낀 놈이 성 낸다더니 딱 그 짝이 아닌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흥분을 가라앉힌 공문찬이 말을 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나?”
 “······?”
 “중간만 가는 것일세.”
 공문찬은 더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봉의 운명은 정해져 있지. 개죽음. 나는 내가 공들여 키운 수하들이 그리 되는 꼴을 좌시 할 수 없네. 그건 다른 지부도 마찬가지 일게야. 그러니 가시게. 자네만 없으면 모든게 해결 될 테니까.”
 “······.”
 도장경의 눈이 멍하니 풀려갔다.
 지금까지 들은 중 가장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공문찬의 말인 즉슨, 그가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좌천 시키겠다는 것이 아닌가.
 “더 할 말 있는가?”
 공문찬의 물음에 도장경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이건 말도 안된다.
 협의를 숭상하는 천황맹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협의를 따랐기에 버린다니.
 ‘그래. 동료. 동료들이라면.’
 도장경의 눈이 번뜩였다.
 그와 같은 꿈을 꾸는 동료들.
 그들이라면 그의 뜻을 알아 줄 것이다. 이 부당한 처사에 함께 대항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의 귓가로 공문찬의 말이 이어졌다.
 “참. 깜빡하고 있었군. 받게.”
 “······?”
 도장경은 그가 건내준 천 쪼가리를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창 날을 감싸놓는 창갑槍鉀이었다.
 창갑 구석에는 축 특진, 이라는 글귀가 요란스런 금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
 글귀를 읽어 내려가던 도장경의 눈이 찢어질듯 커졌다.
 그 아래에 조그맣게 새겨진 수라대 일동. 이라는 글귀를 보았기 때문이다.
 부르르-!
 손을 떠는 도장경의 귓가로 공문찬의 목소리가 날아 들었다.
 “자네 동료들이 전해 달라더군.”
 “······.”
 도장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 축하한다는 말도 잊지 말고 전해달라 하더구만.”
 툭.
 쐐기를 박는 한마디에 도장경은 기어코 창갑을 떨어 뜨리고 말았다.
 
 
 2.
 
 
 -큰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희생해야 하는 작은 것들도 있는 법이다.
 
 
 -입룡관 수석이라지? 그곳에서 수석이라 해서 강호에서까지 그리 되리라 생각지 마라. 어리석은 놈.
 
 “······!”
 도장경은 퍼뜩 눈을 떴다. 이마에 땀이 축축했다. 결코 듣고 싶지 않던 목소리를 꿈에서 듣다니. 악몽이었다.
 ‘왜 하필 그런 꿈을······.’
 기억을 털어내기 위해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긴 그는, 곧 암담한 표정이 되었다.
 마차 밖은 후텁지근 했다. 햇빛은 쨍쨍하고 공기는 눅눅했다. 중원의 풍경이 아니다.
 비로소 그가 처한 현실이 피부로 와 닿았다.
 마차에 오른지 보름 째.
 예주지부에서 남황까지 보름이 걸린다 했다.
 남황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절로 눈이 감겼다.
 ‘어찌들 그럴수가.’
 보름 전의 풍경이 떠올랐다. 방금 전에 일어난 것 처럼 생생한 풍경이다.
 떠나는 길.
 좌 우를 가득 매우고 마중 나온 수라대원들.
 그리고 그들의 외침소리.
 
 “승진 축하하네! 잘 가시게! 껄껄!”
 “꿈에서 보세나! 잊지 못할 악몽이 되겠군!”
 “거 친구, 특진인데 표정이 왜 그러나?”
 “그러게 말이야. 나라면 춤이라도 추었을 텐데! 크하하!”
 
 수많은 목소리들이 귓가를 메아리쳤다.
 부르르-
 도장경의 주먹이 떨렸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바르게 살아왔다. 그 어떤 부정에도 눈돌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 왔다.
 그 결과가 이곳, 남황이라니.
 꿈이라면 정말 지독한 악몽이었다.
 그 순간 마차가 멈췄다.
 “다 왔수다.”
 마부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장경은 눈을 떴다.
 제기랄.
 악몽보다 더 지독한 현실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
 도장경은 마차 밖으로 나섰다.
 뜨거운 햇살과 펼쳐진 초원이 그를 맞이했다. 눈 앞으로 완만한 내리막 길이 펼쳐져 있었다.
 “저쪽으로 가쇼.”
 마부가 짜증이 역력한 몸짓으로 손을 뻗었다.
 도장경의 고개가 손가락 끝을 따라 움직였다.
 언덕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크지 않은 마을이다.
 그 옆에 오층 높이의 전각이 우뚝 솟아 있었다.
 아마도 천황맹 남황지부 지관이리라.
 예주지부에 비하면 턱도 없는 크기.
 하지만 그나마 형식이라도 갖춘 지부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고마웠소.”
 “잘 사쇼. 젠장, 언제 또 돌아가나.”
 마부는 짜증스레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도장경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서 있었다.
 잘 사쇼, 하는 말이 폐부를 찔렀기 때문이다.
 “섬마단······”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도장경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백가촌白家村이라 쓰인 이정표를 지났다.
 천황맹 남황지부 건물이 십여장 앞으로 다가왔다.
 전에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었다.
 지금도 가슴이 뛰긴 했다. 다 부숴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뛰는 것이긴 했지만.
 “후아- 좋다-”
 그 때, 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장경은 고개를 돌렸다.
 불혹不惑은 되어 보이는 추레한 몰골의 사내가 술동이를 품에 안고 비틀대고 있었다.
 대낮인데도 벌써 얼큰하게 취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손에 쥔 표주박을 멈추지 않았다. 술을 마치 물처럼 들이키고 있었다.
 “흐흐- 한시진은 마시겠구만.”
 사내는 연신 히죽대며 걸음을 옮겼다.
 도장경은 사내가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장원이었다. 천황맹 건물에 가려져 언덕 위에서는 보이지도 않았었다.
 촌이라 거렁뱅이들도 많은 모양이었다.
 ‘남황이구나. 남황.’
 도장경은 새삼 실감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아직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호랑이 굴에 떨어졌어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지 않던가. 결코 이런 곳에서 남은 생을 보낼 수는 없었다.
 ‘기필코 다시 돌아가리라.’
 도장경은 몸가짐을 정돈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멈추슈.”
 계단을 오른 도장경이 막 대문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문지기가 긴 창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뉘슈?”
 말이 짧다. ······남황이니까.
 “예주지부에서 차출된 도장경이오.”
 “도장경?”
 문지기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도장경을 아래위로 훑었다.
 “발령 예정자는 없었수다. 돌아가슈.”
 그럴 리가.
 “확인해 보시오.”
 “확인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바보인줄 아슈? 일년에 한명 오면 많이 오는거요. 오늘은 그 날이 아니고.”
 그럴 리가!
 “틀림없이 오늘 자로 배정을 받았소.”
 “제기랄. 없다는데 왜 자꾸! ······아. 혹시.”
 문지기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짚이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섬마단이요?”
 드디어!
 “그렇소.”
 문지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불어 표정이 요상하게 변해갔다.
 방금 전 까지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면, 지금은 측은한 눈빛이다. 복날에 끌려가는 개를 보는 듯한······.
 “잘못 찾아왔수다.”
 그럴 리가?
 도장경은 벌써 몇 번째 인지 모를 말을 뇌까리며 문지기를 바라 보았다.
 문지기는 손을 뻗었다.
 “댁이 가야 할 곳은 저기요.”
 거긴 정 반대 방향인데?
 도장경의 고개가 문지기가 가리킨 방향으로 느릿느릿 돌아갔다.
 이내 그의 눈이 커졌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동자에 선 핏발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했다.
 “설마 저걸······ 말하는 것이오?”
 “저 근처에 건물이 저거 밖에 더 있수.”
 “그럴 리가······.”
 “다들 그렇게 말 하더군. 근데 저거 맞수다.”
 “······.”
 그럴수가.
 도장경은 참담한 심정으로 몸을 떨었다. 눈 앞이 캄캄하다 못해 멀어버릴 지경이었다. 섬마단에 배정 받았을 때 보다 더한 절망감이 온 몸을 엄습했다.
 조금 전 술주정뱅이가 들어갔던 낡은 장원.
 경비병이 가리킨 섬마단 거처가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장원의 모습은 처참했다.
 처참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거지도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귀신이라 한들 저 곳에 머물고 싶을까?
 하지만 정말 참담하고 처참한 것은 장원의 정경이 아니라 그 내부였다.
 내부의 겉 모습도 물론 좋지 않았다.
 폐가에 대충 탁자와 의자만 가져다 놓은 형국.
 하지만 그 안에 위치한 것들에 비하면 그 정도는 양반이라 할 수 있었다.
 “푸하- 좋구나. 좋아.”
 단급 이상의 단체에만 지급되는 봉황의鳳凰椅.
 아까의 주정뱅이가 그 위에 걸터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암담할진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방 한 구석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
 기함을 하며 고개를 돌린 그 곳에는 창백한 안색의 여인이 미동도 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독사 같은 눈빛이었다.
 도장경은 주정뱅이와 독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느 쪽도 쉽지 않았다.
 이런걸 진퇴양난이라 하던가?
 그의 걸음이 한참만에 주정뱅이에게로 향했다.
 “수라대에서 섬마단으로 발령을 명 받았습니다. 도장경입니다.”
 “엥?”
 표주박의 술을 핥고 있던 주정뱅이가 고개를 돌렸다.
 어리둥절한 눈빛이 도장경에게 쏟아졌다.
 그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신참?”
 아, 정말 섬마단원 이었군.
 짐작했지만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예.”
 주정뱅이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크하하하!”
 이내 그의 입에서 대소가 터져 나왔다.
 “좋아! 일단 앉게!”
 그는 재촉하듯 팔걸이를 두들겼다.
 도장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봉황의는 본래 단주가 앉는 자리다. 하물며 발령 인사도 끝내지 않고서야.
 “거 참. 앉으라니까. 환영주는 해야지!”
 하지만 주정뱅이는 그리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장경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술은 마시지 않습니다.”
 “뭐라고?”
 주정뱅이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반응이다.
 “술을 안 마신다고?”
 “예.”
 “말도 안돼! 네 녀석, 중이냐?”
 “아닙니다.”
 “고자냐?”
 “······아닙니다.”
 “그런데 술을 못마셔? 대장부가?”
 “술은 무인의 적이라 배웠습니다.”
 “뭐-라고?”
 주정뱅이의 한쪽 눈썹이 이마 끝까지 치켜 올라갔다.
 그는 이내 자기 이마를 후려 쳤다.
 “아, 대쪽 같은 녀석이 하나 들어왔군.”
 탄식 할 쪽은 그쪽이 아닐텐데.
 도장경은 숨을 고르며 물었다.
 “단주는 어디 계십니까?”
 “단주? 글세······.”
 가관이다. 이마까지 찡그리며 고민하다니.
 “기방 어딘가에 찌그러져 있지 않을까?”
 기방이라고?
 “껄껄! 뭐, 기다리면 언젠간 오겠지!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언젠가는?
 사지가 후들거렸다.
 억장이 무너지고 따위의 단계는 이미 지났다.
 불과 반시진 사이에 십년은 늙은 것 같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섬마단의 저력이구나.
 “그러고 보니 내 소개도 안했군. 추백광鰍伯曠일세.”
 사실 그의 이름이 어떻건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저 쪽에 선 미녀는 사화린獅花璘. ······별명은 사마녀巳魔女. 어때? 잘 어울리지?”
 어울리긴 했다.
 사화린의 눈이 살기로 번뜩이자 도장경은 잽싸게 시선을 돌렸다.
 추백광이 껄껄 웃으며 술동이를 들었다. 동이에 남은 술이 모조리 그의 입으로 흘러 들었다.
 “다른 선배님들은 어디 계십니까?”
 도장경은 조심스레 물었다.
 당연한 물음임에도 두려웠다.
 “글세······.”
 추백광은 말꼬리를 흐렸다.
 “차근 차근 알아가게.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되잖아? 첫날부터 많은걸 알려고 하는구만.”
 대답을 피하고 있다는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절차······입니다.”
 “빡빡한 친구로군. 젊어서 각박하게 살면 늙어서 고생한다네.”
 이런 식의 여유는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도장경이 굽히지 않고 바라보자 추백광의 미간이 좁아졌다.
 “포기를 모르는 친구로군. 그걸 지금 알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나? 차근차근 알아가도 될 것을 굳이······.”
 되도 않는 소리를 늘어 놓던 추백광의 목소리가 사그라 들었다.
 도장경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할 즘이었다.
 “······오!”
 추백광의 입에서 짤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동자가 생기로 번뜩였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이 시간에 나타나다니.”
 영문 모를 소리.
 추백광은 언제 짜증을 부렸냐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이제 보니 자네가 운이 좋은 모양이야!”
 반어법일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이냐고?”
 추백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이 도장경의 등 뒤를 가리켰다.
 “단주가 왔다네.”
 “······!”
 도장경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단주. 이 두글자가 이토록 두려운 것이었다니.
 도장경이 고개를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추백광이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이제 마음껏 물으시게.”
 울컥!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사람 부아를 뒤집을 줄 아는 작자였다.
 그래, 이미 볼만큼 봤다. 여기서 더 나락으로 떨어질 일이 뭐가 있으랴.
 끼이이-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도장경은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쏴한 주향과 함께 피곤해 보이는 인상의 미공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이립而立이나 되었을까? 단주라기엔 꽤나 젊어 보였다.
 단주의 시선이 장내를 훑었다. 도장경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된 순간, 단주가 한 팔을 휙 내 저었다.
 “하던 일들 계속 해. 낮잠 자러 왔으니까.”
 멋들어진 첫 인사.
 도장경은 그 순간 깨달았다.
 진짜 난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아. 신참이었군. 어쩐지. 못 본것 같더라니.”
 단주도 추백광 못지 않은 작자였다.
 이어진 말은 더욱 좋지 않았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온걸 환영한다.”
 도장경은 화를 다스리느라 주화입마에 빠질 지경이었다.
 “강호에 이토록 살기 편한 곳은 드문데, 자넨 복 받은 거라고.”
 심지어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 같았다.
 “무튼 반갑다. 나는 섬마단주 신자량信慈量이다. 꽤 오랜만의 신입이군.”
 “잘······ 부탁드립니다.”
 도장경은 간신히 답했다.
 신자량은 손사래를 쳤다.
 “부탁은 무슨. 쨌든 수고하라고. 보다시피 좀 피곤해서 말이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다간 아무 말도 못할 판이다.
 도장경은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물었다.
 “다른 선배들은 어디 계십니까?”
 “······앙?”
 반쯤 감겼던 신자량의 눈이 다시 뜨였다.
 “선배라니?”
 “으음······.”
 도장경은 말 대신 장내를 둘러 보았다.
 이 넷이 전부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는 의미였다.
 신자량도 그 의미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아. 이 녀석들 말고도 셋이 더 있지.”
 아. 역시 셋이나 더 있었구나······ 뭐라고?
 도장경의 눈이 커졌다.
 셋? 고작 셋이라고?
 “······그렇게 보지 않아도 아네. 명색이 단인데 일곱이 전부라서야 말이 안되지. 하지만.”
 신자량은 싱긋 미소 지었다. 그 와중에도 멋들어진 미소였다.
 “여긴 남황일세. 우린 섬마단이고.”
 왠지 그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아. 이렇게 말 하면 이해하기 힘들겠군.”
 충분 하다니까.
 “이상하게도 여기 온 녀석들은 대부분 얼마 버티지 못하더라고. 자결하거나, 탈주하거나. 폐인이 된 녀석도 있었지.”
 도장경은 남 일 같지 않아 몸을 떨었다.
 더 섬뜩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녀석들도 단원 명부에서 지워지지 않더군. 위에서 누군가가 섬마단을 위해 손을 써주고 있는 모양이야.”
 섬마단은 결코 해체 되지 않는다. 도장경에게는 그 어떤 것 보다 가슴을 후려 치는 이야기였다. 죽는다 해도 유령 단원으로 명부에 남게 되리라.
 섬마단이 왜 달리 불귀단不歸團이며 나락단奈落團이라 불리는지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단면이었다.
 도장경은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하면······. 나머지 세 선배는 어디 계십니까?”
 신자량은 입맛을 다셨다.
 “나도 궁금하다네. 대체 어디로 간 건지.”
 “······.”
 더 이상 어떤 생각을 하는 것 조차 지칠 지경이다.
 “보다시피 할 일이 워낙에 없어서 말이야. 없어도 별 상관은 없다네.”
 신자량의 눈이 조금씩 감겼다.
 “죽지는 않았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언젠간 다들 되돌아 올 테니까.”
 걱정은 무슨. 차라리 돌아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불과 반나절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도장경은 모든 것을 포기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충분히 들은 겐가?”
 가만히 지켜보던 추백광이 입을 열었다.
 도장경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침착하려 해도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근무지를······ 알려 주십시오.”
 “어렵지 않지.”
 추백광이 사화린에게 시선을 던졌다.
 사화린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귀신처럼 미끄러지듯 걸었다.
 도장경은 침을 꿀꺽 삼켰다.
 걸음을 멈춘 그녀가 도장경을 돌아 보았다.
 “······따라와.”
 “예.”
 잘 벼려진 칼날 같은 차갑고도 섬뜩한 목소리.
 도장경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탁!
 두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추백광의 술독 두드리는 소리와 신자량의 숨소리만이 장 내에 번져 나갔다.
 한참만에 추백광이 입을 열었다.
 “안 자는거 아니까 자는 척 그만 하슈.”
 “······귀식대법이라도 쓰고 있을 걸 그랬군.”
 신자량이 거짓말 처럼 눈을 떴다.
 추백광이 껄껄 웃었다.
 “사기꾼 같으니라고!”
 “칭찬 고맙구만. ······그런데 네가 보기엔 어때?”
 “저 꼴통?”
 “그것만 들어도 충분히 알겠군.”
 “단주가 보기엔 어떻소?”
 신자량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글세. 꽤나 대쪽 같은 친구 같더군. 보기 드문 유형이야.”
 “아닌 척 하면서 볼 건 다 보셨구만. 클클.”
 추백광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이제 어쩔거요?”
 “글세. 반나절 만에 뭘 알겠나. 좀 더 지켜 보자고.”
 “좀 희롱 하면서?”
 “그건 네가 알아서 하시고.”
 신자량이 다시 눈을 감았다. 추백광이 비로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악동 같은 미소였다.
 “그 말을 기다렸수다. 클클.”
 
 
 2장 남황의 악귀들
 
 
 1.
 
 
 “여기야.”
 물 흐르듯 움직이던 사화린이 마침내 멈춰섰다.
 신묘하고 섬뜩한 보법이었다. 심지어 계단을 오를 때 조차도 몸이 들썩이지 않았다.
 “아.”
 사화린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도장경이 그제야 주위를 둘러 보았다.
 도착한 곳은 이 장 높이의 단상이었다.
 탁 트인 풍광 덕에 이 정도 높이에서도 오십여 장은 너끈히 가늠 할 수 있었다.
 황색 벌판. 제대로 구별하기도 힘든 관도. 저 멀리에 보이는 적진.
 ······적진?
 “무천련.”
 사화린이 짤막하게 덧붙였다.
 도장경은 입을 쩍 벌렸다.
 단주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보다시피 할 일이 워낙에 없어서 말이야.
 
 할 일이 없기는 개뿔!
 육안으로도 적진을 확인 할 수 있는 위치인데 어찌 그리 태평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슥-
 자신의 할 일을 마친 사화린이 몸을 돌렸다.
 도장경은 그녀의 등 뒤에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선배.”
 순간 멈칫 했던 사화린이 다시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하아······.”
 도장경은 비로소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꿈 같은 하루였다. 그 꿈이 악몽이라는게 문제였지만.
 앞으로의 삶이 걱정되었다.
 마인들과 대적하며 생사를 넘나들던 삶을 경험한 그가, 남황 섬마단에서의 무료한 삶을 견뎌 낼 수 있을까. 그의 숙원이, 그가 품은 한과 꿈이 무너지는 것을 견뎌 낼 수 있을까.
 단주 신자량의 목소리가 또다시 뇌리를 스쳤다.
 
 -자결하거나, 탈주하거나, 폐인이 된 녀석들도 있지.
 
 ‘아니! 이 곳에서 멈출 수는 없다.’
 도장경은 으스러져라 주먹을 움켜 쥐었다.
 ‘반드시 살아서, 언젠가 본 단으로 복귀 하리라.’
 
 도장경이 가장 큰 위험 분자를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바로 다음날의 일이었다.
 바로 선배라는 작자 들.
 그들은 ‘신입 감찰’이라는 되지도 않는 이유로 근무지를 찾았다.
 그들이 벌인 행태도 가관이었다.
 추백광이 어딘가에서 술동이를 구해왔다. 신자량이 꼬챙이에 꿴 오리를, 사화린이 땔감을 가져왔다.
 설마?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고소한 오리 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 보인다. 안 들려!’
 도장경은 필사적으로 그들을 외면했다. 이것이 그들이 던지는 미끼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 소리까지 외면 할 수는 없었다.
 “거, 정말 더럽게 열심히 서는구만. 금은보라도 묻어 놓은겐가?”
 “보기 좋기만 하구만. 응원해 주진 못할 망정.”
 “단주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진 않수 흐흐. 장경이 자넨 정말 안 마실겐가?”
 도장경은 물음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추백광은 입맛을 다셨다.
 “거, 정말 금주禁酒하는 모양일세.”
 “뭐라고? 술을 안 마신다고?”
 신자량의 경악한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혹시 저 친구 고자냐?”
 “아니랍디다.”
 “중이야?”
 “것도 아니랍디다.”
 “그런데 술을 안 마셔?”
 “뭐 술은 공력을······어쩌고 하더구만.”
 “허. 정말 대단한 친구였군. 대장부가 술을 참다니. 나나 네 녀석 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인데 말이야.”
 보통 한심스러운 대화가 아니었다.
 도장경은 차라리 귀가 멀어버리면 하고 생각했다.
 그들은 반시진 가량이나 시끄럽게 먹고 마셨다.
 비로소 조금씩 조용해 진다 싶은 순간, 비로소 진짜 도장경의 속을 뒤집어 놓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내기나 합시다.”
 포문을 연 것은 추백광이었다.
 “내기라니?”
 “저 친구가 얼마나 버틸지 말이우.”
 도장경은 꿈틀, 어깨를 떨었다.
 ······얼마나 버틸지?
 “난 보름에 걸겠소.”
 뭐라고?
 “좋아. 그럼 난 한달 보름에 걸지.”
 “······세 달.”
 “화린아. 진심인 게냐? 세 달이라고?”
 “하하. 우리야 좋지. 걸자고.”
 짤랑짤랑!
 그 소리가 무엇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은자까지 걸다니. 저 작자들, 진심이다.
 ‘참자.’
 도장경은 이를 악물었다.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일순간 뇌리를 스쳤지만 떨쳐냈다. 그것이야 말로 저 작자들이 바라는게 아닌가.
 간신히 화를 억누른 찰나였다.
 “이렇게만 하면 섭섭하지. 방식도 정합시다.”
 얼씨구.
 “방식이라.”
 절씨구.
 “난 탈주에 걸겠수.”
 “그럼 나는 주화입마에 걸지.”
 “······자결.”
 도장경은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불난데 기름을 붙고 상처에 소금 찜질 하는 짓거리 들이다.
 게다가 이토록 자연스럽다니.
 문득 그의 뇌리로 자결하거나 폐인이 되었다던 신참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벼락같은 충격이 온몸을 관통했다.
 ‘그들에게도 이런 짓거리를 해 댔구나!’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반응을 보이면 더욱 즐거워 하며 궁지로 몰아 넣었겠지.
 거기에 남황이라는 지리적 요건이 절묘하게 상충작용을 일으켰을 터다.
 이 악마같은 작자들!
 도장경은 그제서야 절감했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나도······!’
 섬마단원들과 생활하는 것이 자신의 생사와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2.
 
 
 지옥 같은 보름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추백광이 근무지로 찾아 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가벼운 음주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주정으로 변하더니 종래에는 온갖 추태로 화했다.
 어찌나 시달렸던지 악몽까지 꿀 지경이었다. 멀리서 추백광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경기가 났다.
 추백광의 추태는 보름째가 절정이었다. 그가 내기에 걸었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인지, 그의 주정은 광태에 가까웠다.
 그리고 오늘, 십 육일째.
 내기에 건 날짜가 지나갔지만, 도장경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추백광이 내기에서 졌다. 어제의 광태에 가까운 짓거리를 생각했을 때, 오늘은 그보다 더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오시五侍. 근무를 시작한 시점부터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언제 어느때 추백광이 나타날지 모르니까.
 미시未時. 추백광은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하지만 그 작자는 사람 뒤통수 치는 법을 아는 인물이다. 방심 할 수 없었다.
 신시申時. 추백광은 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없다. 문득, 이른 아침부터 추백광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시酉時. 해가 서쪽에 걸렸다. 추백광이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그 작자, 나타나지 않을 참인가?
 술시戌時. 밤이 되었다. 도장경은 비로소 추백광이 오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기분이 날아갈듯 했다. 남황의 허허벌판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해시亥時. 근무는 자시가 되는 순간 끝이었다. 하지만 도장경은 이대로 영원히 서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추백광이 없는 하루가 이토록 평안할 줄이야.
 그리고 자시子時.
 “하아-”
 도장경은 기지개를 켜며 굳은 뼈마디를 풀었다.
 긴 하루였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기분 같아서는 절정고수라도 된 것 같았다.
 매일 오늘만 같아라. 그렇다면 언젠가 본단으로 복귀 하는 것이 꿈은 아니리라.
 도장경은 그렇게 뇌까리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밤하늘의 별이 그에게 웃어주는 듯 했다.
 도장경이 빙긋 미소 지으며 한 걸음을 내딛을 찰나였다.
 바스락-
 풀 스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미세한 소리. 하지만 워낙 주위가 고요해 선명하게 들렸다.
 도장경의 움직임이 석상처럼 굳었다.
 자박- 자박-
 “!”
 도장경은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돌렸다. 무천련 진영 방향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필 오늘!’
 하필이면 오늘처럼 아름다운 날에!
 도장경은 창을 뽑아 들며 단상위로 뛰어 올랐다.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웠다. 도장경은 급히 공력을 끌어 올려 안력을 돋구었다.
 어둠을 꿰뚫고 희미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무천련과의 경계점이 있는 부근이었다.
 인영은 크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롭게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위중한 부상을 입었다.’
 도장경은 그리 판단했다.
 “우웩!”
 인영이 발작하듯 몸을 숙였다. 뭔가를 토해내는 소리. 피를 토한것이 틀림 없었다.
 ‘누구지? 마인인가?’
 도장경은 눈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흐릿하던 인영이 점점 선명해졌다.
 “!”
 이내 도장경의 두 눈이 찢어질듯 커졌다.
 추백광!
 ‘마인에게 당한 것인가!’
 쉬하악!
 도장경은 벼락같이 신형을 날렸다.
 이십장, 십오장, 십장, 오장······ 추백광이 삽시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억?”
 추백광의 모습을 완전히 확인한 도장경이 답지 않은 의문성을 터뜨리며 걸음을 멈췄다.
 조금도 부상을 입은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상은 커녕 작은 생채기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솨아아.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쏴한 주향을 흩날렸다.
 도장경은 그것이 추백광의 몸에서 풍겨 나온 냄새임을 직감적으로 알아 차렸다.
 “히끅!”
 크게 비틀댄 추백광의 입에서 딸꾹질 소리가 세어 나왔다.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걸음을 옮겨서, 이제 도장경의 코앞에 당도해 있었다.
 주향이 코를 찌르듯 했다. 술독에 아예 빠졌던게 아닐까?
 그 순간 마침내 추백광이 주저앉았다. 도장경은 엉겁결에 그의 몸을 부축했다.
 “선배. 괜찮으십니까?”
 “뭐야?”
 추백광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가 번들거렸다.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도장경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추백광이 만들어 놓은 부침개가 질펀하게 널려 있었다.
 ‘피가 아니라······ 토악질을 했던 거였군.’
 도장경은 비로소 추백광이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하루종일 술을 퍼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추백광이 인사불성이 될 정도라면 보통 많이 마신게 아닐 터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도장경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뒤에는 무천련 남황 지단 밖에는 없는데······?
 설마?
 “선배.”
 도장경은 입술을 떨며 추백광을 바라 보았다.
 “으앙?”
 추백광이 흐릿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 보았다.
 “어떤 분들과 술을 마신 겁니까?”
 “뭐어?”
 추백광이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사람이랑 마시지 누구랑 마시겠냐! 히끅! 어디서 산짐승이라도 데려다 마시랴?”
 도장경은 소름이 돋다 못해 까무라칠 지경이었다.
 사람과 술을 마시고 이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그런데 너! 도장경이! 이 개같은 놈아!”
 그 순간, 추백광의 광태가 시작되었다.
 그는 도장경을 죽일 듯 노려보며 욕설을 토해냈다.
 “난 이제 다 망했다! 네 놈 때문에! 내가 내기에 얼마를 걸었는데! 그깟 탈주가 뭐가 그리 어려웠던 게야?”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도장경은 그의 주정에 대꾸할 힘 조차 없었다. 머릿속에 온통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 작자, 마인들과 술을 마신 건 아니겠지?’
 “왜 말이 없느냐 개자식아! 이제 다 늦었다! 뒤늦게 자결하느니 탈주하느니 하면 그땐 정말 내 손으로 죽여 버릴테다! 내 돈이 단주나 혜린이 고 계집 손에 들어가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 알았느냐? 못 본단 말이다!”
 장원에 들어서는 순간 까지도 추백광은 주정을 멈추지 않았다.
 추백광을 간신히 방 안에 밀어넣은 도장경은 비틀대는 발걸음으로 자신의 침소에 되돌아왔다.
 “대체······.”
 그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침상에 걸터 앉았다.
 머릿속으로 온갖 불길한 생각이 휘몰아쳤다.
 “확신 할 순 없다. 아닐거야. 아무리 그 작자라도.”
 도장경은 힘주어 말했다.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래. 아닐게다. 추백광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작자라도 설마 마인과 술을 마셨으랴.
 내일, 추백광이 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의 걱정을 해소해 줄 만한 사실을 털어 놓을 터다.
 하지만 만약 그의 가정이 사실이라면?
 그가 정말 마인과 술을 마시고 온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그 때는 어찌 해야 할까.
 “망할······.”
 도장경은 늦은 밤 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장경이 천황맹 입룡관에 입관할 당시, 협의지도 담당 교관으로 황보선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천황맹의 협객이라면 불의와 부정에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수련생들을 가르쳤다.
 도장경은 옳은 말이라 생각했다. 큰 아픔을 겪은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라, 그 말의 울림이 더욱 컸는지도 모른다.
 그 전, 그가 살아온 세계는 부정과 비리, 귀계와 책략이 난무하는 곳이었으니까.
 황보선은 그에게 큰 가르침을 준 얼마 후,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한 입룡관 후임의 고발로 뇌옥에 투옥되었다. 뇌물수수 혐의였다.
 덕분에 한동안 동기들 사이에서 ‘황 교두야 말로 언행일치의 교두다. 협객이라면 그래야지!’같은 농담이 유행했다.
 도장경이 그 가르침을 오래도록 잊지 않는데에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니 언행일치라는 말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아.”
 도장경은 깊이 한숨을 내 쉬었다. 지금 그가 황보선을 고발한 후임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밤 새 갈등을 하고도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더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도장경의 시선이 방 한 구석으로 향했다.
 탁자 위에 놓인 칙칙한 색의 창이 눈에 들어왔다. 입룡관 시절부터 함께 해온 철창이었다.
 도장경은 철창을 쥐어 들었다. 축 특진 이란 글귀가 수놓인 창갑을 벗겨냈다. 거무튀튀한 창날이 드러났다.
 도장경은 무복을 갖춰입고 창대를 등에 걸쳤다.
 그의 발걸음이 안채로 향했다.
 신자량이 그를 맞이했다
 “오! 웬 일인가? 자네가 이 시간에 이곳을 다 찾고?”
 도장경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
 도장경은 그를 지나쳐 봉황의로 향했다.
 추백광이 그 위에서 자고 있었다.
 주향이 코를 찔렀다. 코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앵란아, 거긴 안되느니라······.”
 잠꼬대까지.
 “선배.”
 도장경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몸을 들썩이던 추백광의 눈썹이 꿈틀댔다.
 “선배. 일어나 보십시오.”
 도장경은 목소리에 내력을 실었다.
 추백광의 한쪽 눈이 가늘게 뜨였다.
 “으앙?”
 “어제 어떤 분들과 술자리를 함께 한 것입니까?”
 이어진 물음. 추백광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깟걸 물으려고 깨운게냐?”
 “말씀해 주십시오.”
 “자네가 알아서 생각하게.”
 추백광이 짜증스레 소리쳤다.
 도장경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무천련 진영에 가셨습니까?”
 제발 아니길.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혹한 법이었다.
 “왜 아니겠나. 그럼 왜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한 게야?”
 아아.
 도장경은 비로소 악몽이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깟걸 물으려고 잠을 깨우다니, 싱거운 놈일세. 거 참. 그게 왜 그리 궁금한게야? 내게 연심이라도······. ······자네, 뭐 하고 있나?”
 투덜대던 추백광이 나머지 한쪽 눈을 떴다.
 도장경이 창을 뽑아들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추백광의 목덜미에 창날을 들이댔다.
 추백광의 눈이 커졌다.
 “추백광.”
 “······잉?”
 “당신은 맹에서 내린 소임을 방만히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음주를 일삼고 집요한 내기로 후배를 핍박했소.”
 도장경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마음의 결심을 내리자 모든 것이 평온해 졌다. 본래 현실이란 받아들이기 전 까지가 힘든 법이다.
 “더불어 마인과 태연히 친교를 맺고 그들과 교류하는것을 서슴치 않았으니, 이는 천황맹 소속의 협객으로서 도저히 좌시 할 수 없는 만행이오.”
 도장경은 창대를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당신의 목을 베 본관에 후송하겠소. 죄목을 인정한다면 순순히 목을 내 놓으시오.”
 “······.”
 추백광의 입이 벌어졌다.
 신자량과 사화린도 멍하니 도장경의 뒷통수를 바라 보았다.
 장내에 질식할 듯한 침묵이 내려 앉았다.
 그리고······.
 “푸하하! 사형! 사형이란다!”
 “으하하하! 지금 뭐라고? 본관으로 후송? 와하하! 아이고 내 배! 내 배 찢어진다!”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추백광은 물론 신자량까지도 바닥을 나뒹굴었다.
 표정 없는 사화린 조차 미소 비슷한 것을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신자량이 눈물까지 찔끔대며 외쳤다.
 “아! 드디어 우리 섬마단에도 걸출한 인재가 한명 들어 왔구나! 푸하하하! 광아! 아무래도 네 녀석, 모가지를 내 놔야 겠다!”
 추백광이 토할듯이 웃으며 받아쳤다.
 “왜 아니겠소! 크크크크! 하극상! 하극상이라!”
 도장경은 미간을 좁혔다.
 즐거워 할 일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추백광의 목을 벨 작정이었다
 “광아 네가 웃을 때가 아니다! 푸하하! 지금 네 목이 떨어질 판인데!”
 이 작자들에겐 말이 통하지 않음을 잠시 잊고 있었다.
 도장경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단전에 잠자고 있던 공력이 불길처럼 전신세맥으로 흘러 들었다.
 우우웅!
 철창이 나지막한 울음을 토해냈다.
 뚝!
 칼로 자른듯 웃음소리가 끊어졌다.
 신자량과 추백광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아무래도 저 친구 진심인것 같지?”
 “그런것 같구만.”
 “별수 없지. 평화를 위해 네가 희생할 밖에.”
 “결국 그 수밖에는 없······. 푸크흐흐흐!”
 짐짓 진중하게 말을 잇던 추백광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천장이 무너질듯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도장경은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창날에 푸른 기운이 맺혔다. 창기槍氣.
 쉭!
 도장경이 팔을 앞으로 찌르듯 내 뻗었다. 푸른 궤적이 그대로 추백광에게 날아 들었다.
 “이크!”
 콰지직!
 봉황의가 반토막이 났다.
 바닥을 뒹군 추백광이 웃음을 지우고 소리쳤다.
 “이 친구야! 정말로 죽을 뻔 했잖나!”
 스윽-
 하지만 도장경은 이미 다음 행동에 돌입하고 있었다.
 머리 위로 치켜든 창에서 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랐다.
 창이 다시금 떨어져 내리려는 그 순간.
 “잠깐!”
 추백광이 득달같이 손을 저었다.
 “나가서 하세. 여길 다 무너뜨릴 참인가?”
 추백광이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도장경은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 보았다.
 신자량과 사화린이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럽시다.”
 도장경은 한숨과 함께 창을 늘어뜨렸다.
 창에 가득 서려 있던 기운이 바람 빠지듯 사그라 들었다.
 도장경이 몸을 돌리자 비로소 신자량과 추백광이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이어진 말에 도장경은 귀 마저 닫기로 마음 먹었다.
 “쫄았네. 길바닥에 나 안게 되는 줄 알고.”
 “그러게 말이오. 여기 아님 갈 데도 더 이상 없는데.”
 “······.”
 마음 같아선 둘 다 베어버리고 싶었다.
 
 
 3.
 
 
 도장경이 장원 밖 공터에서 기다리는 사이, 섬마단원들은 바삐 움직였다.
 삽시에 모닥불이 피워지고 술과 고기가 대령되었다.
 “싸움 구경에 고기와 술이 빠질 순 없지. 안그래?”
 “지금 나한테 그 말이 나옵니까?”
 “안 나올건 뭐야?”
 “킁! 내 건 남겨 두쇼. 금방 돌아 올 테니까.”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도장경은 상관하지 않았다. 눈과 귀를 닫기로 했으니까. 저들이 눈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춰도 흔들리지 않을 터였다.
 모든 구경거리 준비가 끝나자 비로소 추백광이 도장경을 마주보고 섰다.
 “술 다 마시지 마쇼!”
 이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일수에 끝낸다.’
 스윽-
 도장경은 창을 치켜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추백광이 감탄했다.
 “호오. 비룡창법이군! 자질이 뛰어난 인재에게만 전수한다던데.”
 주독에 찌든 눈이라도 제대로 보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무기를 드시오.”
 “방금 전엔 그냥 목을 벨 기세더니. 쯧.”
 추백광이 혀를 차고는 품을 뒤졌다.
 이내 그의 손에 호리병이 딸려 나왔다.
 “이걸로 하지.”
 “······.”
 뿌득.
 도장경은 이를 갈았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장난질이라니.
 ‘말려들지 말자.’
 도장경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주위의 공기가 점차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마침내 추백광의 모습만이 남았다.
 도장경은 비로소 신형을 날렸다.
 쉬하악!
 한줄기 날카로운 창기가 추백광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일초식 잠룡개안潛龍開眼이었다.
 “이크-!”
 추백광이 몸을 옆으로 젖혔다. 푸른 궤적이 추백광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장경은 눈을 치켜 떴다. 잠룡개안은 쾌에 중점을 둔 초식. 이미 성취가 팔성에 이른 그의 창은 빛살처럼 빨랐다.
 상대가 절정 고수라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쉽게 피해 버리다니?
 ‘제기랄!’
 도장경은 이를 악 물며 팔을 내 저었다.
 쉬하악!
 푸른 창기가 주위를 빼곡하게 감쌌다. 푸른 색의 비늘이 사방에 만개 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초식 잠룡요동潛龍搖動이었다.
 스파파팟!
 무수히 쏟아지는 창기의 편린을 피하기는 힘들었는지 추백광의 옷깃 이곳저곳이 잘려 나갔다.
 하지만 도장경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결코 옷깃만 스치는 정도로 끝나선 안되는 초식이었기 때문이다.
 ‘고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매일 술독에 빠져 사는 추백광이 대체 어떻게?
 ‘베고 만다!’
 여기까지 와서 돌이 킬 수는 없다. 더욱 전력을 다해 몰아 칠 뿐!
 쉬리릭!
 움켜쥔 창대가 새된 바람소리를 토해냈다.
 ‘이 자식이?’
 한편, 추백광은 도장경의 행태에 눈을 치켜 뜨고 있었다.
 대쪽 같은 녀석이니 그러려니 했다. 목을 베겠다 길길이 날뛸때는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던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도장경의 손아귀에서 회전하고 있는 저 창은 그 허용 범위를 충분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잠룡승천潛龍昇天이라니. 정말 죽일 작정이구만?’
 창대를 타고 흐르는 기운도 제법이었다. 또래의 무인들을 한참 상회하는 수준.
 ‘그럼 어디-’
 추백광의 눈빛이 일순 장난기를 머금었다. 무시 할 수 없는 수준이라 해서, 가지고 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어쩔 테냐?’
 쉭!
 추백광이 손을 뻗자 호리병이 빛살처럼 뿜어져 나갔다. 호리병 표면에 희뿌연 기막이 서려 있었다.
 도장경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당연했다. 잠룡승천이 발출되기 전 도리어 선수를 치는 공격이었으니.
 ‘물러서지 않으면 어깨가 부러질 거다!’
 추백광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다음 순간 사색이 된 것은 도장경이 아니라 그였다.
 콰아아!
 도장경이 날아드는 호리병을 무시한 채 창을 내리 찍은 것이다.
 ‘이 미친놈이?’
 추백광은 재빨리 호리병을 회수하며 몸을 뺐다.
 콰과광!
 그가 서 있던 곳의 대지가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생각 할 수는 있어도 실행에 옮기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 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도장경은 그 말을 몸소 실천해 보이고 있지 않은가.
 ‘이 것 까지 무시하긴 힘들거다!’
 쉭!
 추백광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팔을 내 털었다.
 쉬쉬쉬쉭!
 호리병이 삽시에 수십으로 분해 사방을 빼곡이 매우고 밀려 들었다. 하나하나에 담긴 공력 또한 도장경을 웃도는 수준.
 슥-
 ‘역시!’
 도장경이 몸을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추백광의 눈에 득의양양한 빛이 번져 나갔다. 몸을 숙이고 호신막을 펼쳐 충격을 최소화 하겠따는 속셈이 틀림 없었다.
 쉬이이-
 ‘어?’
 하지만 움추린 도장경의 몸에서 방금 더욱 거센 기세가 전해져 오기 시작하자, 추백광은 눈을 치켜떴다.
 ‘저 미친놈이!’
 추백광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제서야 그것이 단순히 몸을 움추린 것이 아니라, 초식을 펼치기 위한 준비 자세임을 깨달은 것이다.
 등 뒤로 팔을 최대한 젖히고 있던 도장경은 기세가 절정에 이른 순간 전력을 다해 팔을 내 뻗었다.
 쿠와아아-!
 파공음이 고막을 찢을 듯 했다. 창날이 호리병의 장벽 한 복판으로 맹렬히 회전하며 뿜어져 나왔다.
 ‘그대로 뚫을 작정이구나!’
 추백광은 뿌득 이를 갈았다. 이대로 맞부딪친다면 그가 밀리긴 하겠으나, 도장경은 심각한 내상을 입고 말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면 단순한 장난으로 끝나지 않게 된다.
 ‘꼴통에 독종인 녀석이야!’
 결국 추백광은 혀를 차며 공력을 거둬 들였다.
 쉬하아악!
 동시에 몸을 솟구치자, 옆구리로 아슬아슬하게 창대가 스쳐 지나갔다.
 ‘에라이!’
 추백광은 휙 손을 털어 호리병을 내 던지고는 도장경을 노려 보았다.
 “한 숨 자고 일어나서 머리 좀 식히거라. 독종아.”
 그는 손을 힘껏 끌어 당겼다. 팽팽하게 뻗어 있던 끈이 쏜살같이 되돌아 왔다.
 퍽!
 호리병이 도장경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도장경의 눈동자가 대번에 까뒤집어 졌다.
 “제······기랄!”
 그는 간신히 한 단어를 토해내고는 풀썩 허물어졌다.
 “망할. 뭐 이런 독종 자식이 다 있지?”
 추백광은 쓰러진 도장경을 내려다 보며 혀를 찼다.
 그는 휙 손을 놀려 호리병을 회수했다. 호리병에 서려있던 희뿌연 기운이 바스라졌다.
 “옷 다 버렸네. 떠그랄.”
 가뜩이나 걸레같던 옷이 이제는 완전 넝마처럼 되어 버렸다. 왼 팔은 욱신거리기 까지 했다.
 “벌써 끝이야?”
 신자량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럼 하루 반나절이라도 싸울 줄 알았소?”
 “적어도 한시진은 싸워 줄 줄 알았지.”
 “일없수다. 이 맛난걸 놔두고 내가 왜?”
 추백광은 그리 말하며 술독을 들었다. 이내 그의 인상이 구겨졌다.
 “벌써 다 마신거요?”
 “늦게 왔으니 당연하지.”
 “방금 전엔 빨리 왔다더니!”
 “아직 고기가 남았잔나.”
 “썩을. 한합만 더 교환했어도 남은게 없을 뻔 했네.”
 추백광은 고기를 질겅거렸다.
 그가 턱짓으로 바닥에 쓰러진 도장경을 가리켰다.
 “저 녀석, 보통 독종이 아니오. 어깨를 버리고 공격을 택한거 보셨소?”
 “흐음-”
 신자량이 어깨를 으쓱 했다. 추백광이 콧방귀를 끼었다.
 “이제와서 못 본 척 하기요?”
 “내가 뭘?”
 “아까 그 놈이 달려 들 때 눈 번쩍거리는게 여기까지 보이더구만.”
 “뭐 그거야- 나쁘지 않았지.”
 신자량이 미적거리자 추백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뭐요. 단주는 저 꼴통 녀석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특이한 친구니까.”
 “건 맞소.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빨을 드러냈던 놈은 없지. 떠그랄. 그게 하필 나라는게 문제지만.”
 “결단력이 과감해. 뭔가 목표가 있는 눈빛이야.”
 “목표라고?”
 “뭔가 가슴에 품은 것이 있지 않으면 저렇게 독해 질 수는 없지. 뭔진 모르지만, 저 녀석도 꽤나 험한 길을 택했어.”
 “그래서. 결론이 뭐요?”
 “저런 대쪽같은 친구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말이야.”
 추백광이 이마를 쳤다.
 “진심이오? 저 녀석을 거두겠다고?”
 “아닐건 또 뭔가?”
 “끙······. 나도 저 녀석이 싫은건 아니지만, 꼴통들은 지금으로도 충분한데 하나를 더 들이자고?”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아닌가? 그리고 너 만 한 꼴통이 또 어디 있다고?”
 “제기. 그럼 화린이에게 물어봅시다. 화린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멍하니 고기를 오물대던 사화린이 고개를 돌렸다. 무감정한 눈동자가 도장경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추백광이 침을 삼켰다.
 “······찬성.”
 “얼씨구?”
 추백광이 눈을 치켜 떴다. 사실 그녀에게 선택권을 넘긴 것은 노림수였다. 사화린이 지금까지 호의적으로 반응했던 단원은 한명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다니!
 “독종끼린 통한다더니······.”
 “착해.”
 “쯧.”
 할 말 없게 만드는 말. 추백광이 침묵하자 신자량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대일이구만. 어쩔수 없이 받아 들여야 겠어.”
 추백광이 입맛을 다시며 도장경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저 녀석이 우리 쪽으로 쉽게 들어오려 하겠소?”
 정곡을 찔렸는지 신자량이 어깨를 으쓱 했다.
 “글세. 방법 나름이겠지.”
 “하긴, 단주 같은 능구렁이가 옆에 있는데. ······그래도 보통 독종이 아니오. 단주도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요.”
 “그건 그때 가서 보자고. 아, 저 친구 깨어나면 설명도 잘 해 주고. 네가 어째서 고수인지 궁금해 할 테니까.”
 “알겠수.”
 신자량은 마지막 남은 고기를 낼름 집어 먹고는 일어섰다.
 “어디가슈?”
 “어르신들에게도 저 친구를 보여 주려고.”
 씩 웃어보인 신자량이 몸을 돌렸다. 백가촌이 있는 방향이었다.
 “아주 작심을 하셨구만. 안 그러냐 화린아?”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찬 추백광이 고개를 돌렸다.
 “엥?”
 그의 눈이 커졌다. 사화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새 미끄러지듯 장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추백광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뒷정리는 누가 하라고?”
 
 ***
 
 “아······.”
 눈을 뜬 도장경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참담함이었다.
 패했다. 그것도 호리병을 든 주정뱅이에게.
 ‘너무 빨랐어.’
 다음으로 추백광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장경은 틀림없이 전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상대는 여유가 있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추백광은 그보다 고수다.
 ‘어떻게?’
 질문이 따라 붙었다. 무武란 수련이 뒤따르지 않으면 퇴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추백광이 수련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또다시 결론은 하나였다. 추백광은 퇴보해도 고수였다.
 ‘이럴수가······.’
 현실을 인정하고 나자 좌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 순간, 머리맡에서 추백광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 끝났느냐?”
 “헉!”
 도장경은 숨을 들이키며 일어섰다. 추백광이 그의 머리맡에 팔을 괴고 누워 있었다.
 “보고 계셨습······니까?”
 도장경이 씁쓸함에 말꼬리를 흐렸다.
 방금 전 까지 죽이네 살리네 하던 상대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당연했다.
 추백광이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놀랬냐?”
 “예.”
 “껄껄. 당장 내 목을 딸 것 처럼 그러더니.”
 “······.”
 도장경은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추백광에게 얻어맞은 뒷통수가 욱신 거렸다.
 “그런 생각 했지? 이 자식은 수련 하는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센가. 난 대체 어떤 수법에 당했나. 이건 말도 안된다.”
 “······.”
 작두라도 탈 참인가?
 “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하지. 나 같아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어찌······ 된 것입니까?”
 도장경이 용기를 내 물었다.
 추백광은 혀를 찼다.
 “이런 생각 안 해 봤나?”
 “?”
 “분명히 너는 꽤나 잘 나가던 무인이었을 게야. 수라대. 예주에서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지? 그런 곳에서 이 촌구석으로 발령 받았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테지.”
 “그······랬습니다.”
 신내림이라도 받은게 틀림 없었다.
 “와 봤더니 웬 떨거지들이 괴상한 짓거리만 하고. 답답했겠지. 게다가 이 주정뱅이란 놈이 마인이랑 술을 마시고 오네? 딱 걸렸다 했겠지. 안그런가?”
 “······.”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추백광은 목소리를 낮췄다. 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그런 일을 겪은게 비단 네가 처음은 아니라는 게야.”
 뭐라고?
 “이름을 날리던 무인은 너 뿐만이 아니란 말이지.”
 “아!”
 도장경은 그제서야 경악성을 터뜨렸다.
 정수리에 벼락이 내리 꽂혔다.
 당연한 사실을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음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도장경은 너무 잘나서 이곳으로 왔다.
 섬마단은 뛰어난 인재를 폐기 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흐흐. 그래. 다들 한 칼 하던 자들이지. 나도 그렇고.”
 “하, 하지만······.”
 “고수의 풍모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고?”
 추백광은 웃어재꼈다.
 “여기서 한 오년쯤 살면 자네도 이렇게 될 걸세. 다들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변하게 마련이니까. 변하지 못한 자는 낙오 되는 게고.”
 “······.”
 도장경은 입을 앙다물었다. 말인 즉슨 이들처럼 되거나 죽거나가 아닌가. 진퇴양난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이 작자들이 과거 천황맹을 호령하던 협객들이었다니.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로 온 이상, 자네도 다르지 않네. 잘 생각해서 결정 해야 할 게야.”
 추백광이 단언하듯 말을 맺었다. 그의 눈빛이 집요하게 빛났다.
 선택을 강요하는 눈빛.
 도장경은 고민에 빠졌다.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의 이야기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흔들리던 그의 눈빛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도장경은 최대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들을 무시한 것 사과드립니다.”
 “그깟걸 가지고.”
 말과 달리 추백광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하지만.”
 아직 도장경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추백광이 웃던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추 선배의 목을 베려 했던 것은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마인과 어울린 것이 천황맹 협객이 해선 안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허.”
 “또한, 제게 변화를 강요하지 마십시오.”
 도장경은 그 어느때보다 단호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선배님들의 행동에 더이상 관여치 않겠습니다. 단, 제게까지 선배님들의 사고방식을 주입하려 하지 마십시오. 전 선배님들의 뜻을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허······ 그 놈 참.”
 추백광은 진심으로 탄복한 표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굽히지 않는 도장경의 태도가 감명 깊은 모양이었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도장경은 포권을 취하고는 몸을 돌렸다.
 “걸물이야 걸물······. 쩝.”
 추백광은 멀어지는 도장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단주는 대체 저런 녀석을 어떻게 우리 쪽으로 끌어들인 다는 게야? 쯧. 안 될 싹은 미리 뽑아야 하는 법인데. 정이라도 들어 버리면 어찌 잘라내란 말이오?”
 씁쓸하게 뇌까리던 추백광이 문득 눈을 치켜 떴다.
 “맞아!”
 그의 고개가 모닥불 쪽으로 돌아갔다. 난장판이 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녀석에게 이걸 치우라 시킬 생각이었는데!”
 후회했지만 늦은 일이었다.
 추백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 쉬었다.
 “되는 일이 없구만. 되는 일이.”
 
 
 3장 섬마단의 비밀
 
 
 1.
 
 
 다음 날부터 도장경의 일상은 완전히 변했다.
 잠을 줄였다. 대신 이른 아침부터 비룡창법의 수련에 매진했다. 단원들과도 일체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수련과 근무. 두가지만 아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자신이 말 한 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섬마단원들도 쏠쏠한 구경거리가 생겼다.
 “그 놈. 더럽게 열심히 하네.”
 “열심히 해야 네 목을 따지.”
 “어이구. 어련 하시겠소.”
 담벼락 위에 나란히 앉은 신자량과 추백광이 말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연무장의 도장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허름한 장원이라도 있어야 할 것은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열흘째 저러고 있지?”
 신자량의 말에 추백광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수다.”
 “그럼 내 놓으시게.”
 “······?”
 신자량이 손바닥을 펼치자 추백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뭘 말이오?”
 신자량이 손을 까딱였다.
 “전표. 내기 잊은건 아니겠지?”
 “아-!”
 그제서야 추백광의 인상이 구겨졌다.
 “망할. 저 꼴통이 온 이후론 이기는 법이 없군.”
 품을 뒤진 추백광이 전표를 신자량의 손에 얹어 줬다.
 “자넨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없어. 저 친구가 고작 열흘에 수련을 관둘 것 같던가?”
 “난 단주 같은 능구렁이가 아니라 잘 모르겠수다.”
 “하하.”
 웃음 짓던 신자량의 눈빛이 일순간 깊어졌다.
 미세한 변화라 하나,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추백광이 아니었다.
 “그런 눈빛 하지 마쇼. 슬슬 그 시기가 되어 간다는거 알고 있으니까.”
 “벌써 그리 되었나?”
 “모르는 척 하긴. 사기꾼.”
 신자량이 피식 웃었다.
 “그 들이 쳐들어 오면, 저 녀석이 살까 죽을까?”
 “죽지 않겠소? 저 녀석도 꽤 재능이 있긴 하지만······.”
 “그렇겠지?”
 신자량의 눈빛이 아릿해졌다.
 추백광도 입맛을 다셨다.
 “아까운 놈인데······.”
 “그러게 말이우.”
 “웬 일로 토 달지 않고 동의하는군.”
 신자량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저 녀석은 쓸만한 재목이야. 잘만 하면······ 어쩌면 저 놈만이 가능할지도······.”
 나지막한 목소리에 음험한 기대감이 묻어 나왔다.
 불길한 예감에 추백광이 몸을 떨었다.
 “그, 그러고 보니 어르신들게 인사 드린다 하지 않았소?”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재빨리 꺼낸 말.
 하지만 그 덕에 신자량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좋아. 결정했다.”
 신자량은 손에 쥔 전표를 흔들어 보였다.
 “오늘은 회식이다!”
 전화위복!
 추백광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마음껏 드시오! 체면과 지위고하를 막논한 자리이니, 아쉬움 없이 보내시길 바라오!”
 “고맙소!”
 신자량의 외침이 끝나자, 장내에 모인 이들이 일제히 술잔을 들이켰다.
 백가촌 최대의 기루 야촉루夜燭樓.
 마을 상인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탁 마다 그득 쌓인 술과 고기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왁자지껄 흥겨운 분위기였다. 주지육림이 펼쳐져 있는데 어찌 즐겁지 않으랴.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전혀 휩쓸리지 않는 한사람이 있었다.
 다름아닌 도장경.
 ‘굳이 내가 필요 한 자리였나?’
 기녀들과 마을의 잡상인들이 흥청대며 곁을 스쳐 지나갔다. 질펀한 농담들이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그 중심에는 섬마단원들이 있다.
 ‘내가 꼭 필요한 자리라더니.’
 부득불 도장경을 끌고 온 신자량이었다. 그가 꼭 필요한 자리라 했다. 덕분에 수련도 포기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또 다시 단주의 수작질에 넘어간 것이리라.
 한숨짓던 도장경의 눈빛이 흐려졌다.
 뇌리에 비룡창법의 초식들이 홀연히 떠오른다.
 ‘진전이 없다.’
 도장경은 씁쓸히 뇌까렸다.
 고작 열흘에 어찌 커다란 진전이 있을까 만은, 그의 비룡창법은 고착되어 버린 듯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
 그의 심상이 점점 더 구체적인 비룡창법의 초식을 그려 나갔다.
 ‘조금 더. 조금 더.’
 도장경은 그렇게 내면의 수련에 빠져 들었다.
 주위 모든 것이 바삐 움직이는데 도장경만이 멈춰 있는 것 처럼 보였다.
 “흐응-”
 신자량은 그런 도장경의 모습에 콧소리를 냈다.
 뭔가에 깊이 빠져 있는 눈빛이다.
 “보통 집념이 아니란 말이야? 고놈 참.”
 신자량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좋아. 여러분!”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곧바로 목청을 높였다.
 중인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본 단에 신입이 들었소이다! 이런 흥겨운 자리에서 그의 춤을 보지 않고 넘어 갈 수 있겠소?”
 “맞는 말이외다!”
 “과연 단주요!”
 중인들이 곧바로 화답했다.
 신자량이 손을 내 뻗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작 지목을 받은 이, 도장경은 그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일어나시게!”
 찌르르-
 신자량이 은은한 공력을 담아 외쳤다.
 “헛!”
 도장경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여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 했다.
 “이리 오라고!”
 신자량이 한켠에 걸린 창을 뽑아들었다.
 긴 주탁이 삽시에 비워졌다.
 턱!
 신자량이 던진 창을 엉겁결에 받아든 도장경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의 창무槍舞를 어르신들이 보고 싶어 하신다네!”
 도장경의 표정이 그제서야 굳어졌다.
 창무라고? 이 자리에서?
 사방에 기대감을 담은 시선이 쏟아졌다.
 ‘이러려고 데리고 온 거였군.’
 이가 갈렸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다. 도장경은 주탁 위로 올라 섰다.
 “도장경입니다.”
 포권을 취해보인 그는 곧바로 창을 내 뻗었다.
 일초식 잠룡개안-
 “잠깐!”
 뻗은 창을 회수하려는 찰나 신자량이 손을 뻗었다.
 도장경은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바라 보았다.
 “창을 뻗기 전에 근육을 수축시켜두게. 다시!”
 갑자기 무슨?
 도장경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그가 시키는대로 창을 다시 내 뻗었다.
 “!”
 도장경의 눈에 경악이 번져 나갔다.
 창의 속도가 비할 수 없이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좋아. 다음에는 왼 발을 반보만 앞으로!”
 이초식을 펼치려는 찰나 신자량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장경은 본능적으로 그의 말을 따랐다.
 휭! 휘잉!
 창이 맹렬하게 허공을 가르고, 또 사방을 수놓았다.
 초식을 펼칠 동안 신자량의 조언은 계속 이어졌다. 숨을 참으라느니, 팔에 힘을 빼라느니 하는 간결한 것들 뿐이었다.
 “후우-”
 마침내 비룡창법 오 초식을 모두 끝마친 도장경이 창을 거뒀다. 그의 눈은 놀라움으로 커져 있었다.
 미세한 교정이 이뤄졌을 뿐인데 초식의 기세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
 장내는 고요했다. 중인들은 모두 도장경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짝짝!
 그 틈을 뚫고 신자량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신입이 비룡창법의 구성지성에 이르렀소! 모두들 박수로 축하해 주길 바라오!”
 “와아!”
 짝짝짝!
 그제서야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도장경의 귀에 그런것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구성!’
 벼락을 맞은 듯 했다.
 고작 그정도 자세교정 만으로 구성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의 시선을 받은 신자량이 미소를 지었다.
 ‘대체 단주는······?’
 도장경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대체 어떻게 그 단시간에 구성지경에 이르도록 한단 말인가?
 “그 느낌을 잊기 전에 계속 하는게 좋을걸세-”
 왁자지껄한 사이로 신자량의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도장경은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창을 쥐어 들었다.
 쉭! 후웅!
 도장경은 그 자리에서 바로 연무에 빠져 들었다. 중인들이 연신 감탄했지만 들리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신자량과 추백광은 물론, 그들의 근처에 있던 상인들도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저리 습득하는 속도가 빠르다니. 재능이 있구만.”
 “보통 노력가가 아니로군. 중요한건 노력이지.”
 상인들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그리 보셨습니까?”
 신자량이 미소 지으며 상인들을 돌아 보았다.
 도장경을 향한 그들의 시선이 호의적임을 느낀 것이다.
 “괜찮은 친구인듯 하군.”
 신자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상인들의 말이 이어졌다.
 “나쁘지 않을 듯 한데 그래. 저 정도라면 말이야.”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알 수 없지. 조금 더 두고 보는것이 어떤가?”
 상인들의 시선이 신자량에게로 쏟아졌다.
 범인은 느끼지 못할만큼 미세한 마기가 그들의 전신에서 피어 올랐다.
 신자량은 연무에 몰두한 도장경을 힐끔 바라보았다.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면······.”
 나지막이 웃음지은 그가 다시 상인들을 돌아 보았다.
 “이렇게 하시지요. 마침 시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 사이에서 살아 남는다면 한 번 포섭해 보는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잠시 서로 눈빛을 교환한 상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세.”
 
 
 2.
 
 
 콰아아-
 뜨거웠다. 사방에 너울대는 겁화가 새빨간 혀를 날름댔다. 불길의 장벽 너머로 수많은 그림자들이 일렁였다. 고통에 찬 비명, 공포와 죽음의 소리를 토해내면서.
 문득 불길 사이로 한 여인이 신기루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자애로운 인상의 여인. 가슴이 쥐어 짜듯 먹먹해졌다. 여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장경아 사람의 길을 걸어라······. 너만은 그들처럼-”
 푸화악!
 순간 치솟아 오른 화염이 여인을 집어삼켰다. 팔을 허겁지겁 내 뻗어 불길 속을 휘저었다. 지독한 뜨거움이 전해져 왔지만, 기어코 여인을 움켜 쥐고 말았다.
 불길에서 꺼낸 여인은······ 이미 숯덩이였다.
 “으아아아아-!”
 절규가 허공을 갈랐다.
 도장경은 눈을 뜨고서야 그 절규가 자신의 것임을 깨달았다.
 “하아.”
 그는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눈에 고여 있던 물이 볼을 타고 주륵 흘러 내렸다.
 “또······.”
 도장경은 눈을 훔치며 이를 악 물었다. 잊을 만 하면 다시 찾아오는 악몽. 그것은 그의 혼에 새겨진 낙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선명해 지는······.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아침부터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는 게냐?”
 방 문 너머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장경은 재빨리 표정을 추스르고는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쯧. 그러게 수련도 적당히 해야지. 자네가 하는 걸 보니 몸이 열 개라도 남아나질 않겠더구만.”
 추백광이 혀를 쯧쯧 차며 서 있었다.
 “너무 안 하는것도 문제······.”
 툭 던지듯 뇌까리던 도장경은 미간을 좁혔다.
 추백광의 복장이 평소와 달랐던 것이다. 어디서 훔쳐 오기라도 했는지 붉은색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 박힌 섬殲 이라는 글자를 보고서야 그것이 섬마단 정복임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도장경은 불안감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물었다.
 “있으니까 이 꼴이지.”
 추백광은 아무래도 정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혀를 쯧 차고는 손에 든 의복을 건내 주었다.
 “자네도 입게.”
 “······.”
 정복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가세. 에잉. 더럽게 불편하군.”
 “대체 누가 오는 겁니까?”
 추백광이 걸음을 옮기며 머리를 긁적였다.
 “글세. 쥐새끼들?”
 도장경은 의문에 고개를 갸웃 하면서도 안채로 향했다.
 신자량은 물론 사화린까지도 정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사화린은 머리를 뒤로 곱게 묶은 채였는데, 덕분에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도도하고 싸늘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얼굴.
 “얼굴은 천하절색인데. 쯧.”
 추백광이 혀를 찼다. 도장경도 잠시 놀랐을 뿐, 이내 평소의 표정을 되찾았다. 겉 껍데기에 현혹될 그가 아니다.
 “다 모였군.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기다리고 있던 신자량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섬마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경은 ‘대체 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내를 한 바퀴 훑은 신자량의 시선이 반토막 난 봉황의에서 멈췄다.
 “뭐, 이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도장경은 콧잔등을 긁적였다. 봉황의를 박살낸 것이 다름아닌 그 이기 때문이다.
 “그럼 가 볼까?”
 신자량이 앞서 걸음을 옮겼다.
 도장경은 그 뒤를 따르면서 추백광을 돌아 보았다.
 “뭘 어떻게 하란 말씀이십니까?”
 “간단해.”
 추백광은 비웃듯 말했다.
 “주둥이 다물고 있는거지.”
 “대체 누가 오기에······?”
 도장경의 의문은 일각이 지나지 않아 해소되었다.
 한 대의 휘황찬란한 마차가 뒷산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마차 옆에 펄럭이는 깃발에는 감찰監察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지단의 운영이며 통솔 현황 확인 등의 역할을 하는 감찰부監察府에서 파견된 마차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작자들이라도 겁이 날 만한 일이었다. 한편으론 정말 괜찮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조금의 부정이라도 발견된다면 파문당할 터인데, 남황에 어디 그런 것이 한 두가지 이던가.
 다그닥-
 감찰부 마차가 정확히 신자량이 기다리고 있는 관도 옆에서 멈춰 섰다.
 신자량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어지간한 아첨꾼은 명함도 못 내밀 번지르르한 미소였다.
 “오셨습니까 대인!”
 그가 꾸벅 읍하며 외친 순간, 마차 안에서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인지 돼지인지 구별이 힘들 정도로 살이 뒤룩뒤룩 찐 사내였다. 홍달궁泓達窮. 남황지단의 감찰사였다.
 “음-”
 그는 메기처럼 짧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몸을 잔뜩 부풀린 복어를 연상시켰다.
 “강녕하셨는지요?”
 “그랬다네.”
 거드름 피우는 말투. 그의 시선이 섬마단원들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넷이 전부인가?”
 신자량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두 다 모여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뻗은 손에는 전표가 쥐어져 있었다. 홍달궁은 능청스레 그것을 받아들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래. 모두 잘 모여 있군. 눈이 침침해서 잘 못 본 모양일세.”
 ‘매수 했어!’
 도장경은 눈을 치켜 떴다. 설마 설마 하니 이런 짓거리 들 까지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럼 가 보세.”
 그리고 감찰이 시작되었다. 폐허를 연상시키는 장원 앞에 도착했을 때 또 다시 전표 한 장이 투입되었다. 깔끔한 곳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안채로 들었을 때 또 다시 한 장이 투입되었다. 지단 관리에 상상上上을 받았다. 홍달궁이 반토막 난 봉황의 앞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 거린 덕에 또 한 장. 본 단에 새 봉황의를 마련하라는 청을 넣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남황의 돈을 모조리 긁어갈 속셈이군.’
 그런 일이 몇 차례나 반복되자, 슬슬 도장경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애초에 이런 일을 뇌물로 처리하는 신자량의 행태 부터가 잘못된 것이건만, 얼마 되지 않는 예산을 자꾸 축내는 홍달궁에 그 미움이 모이게 된 것이다.
 ‘그냥 본단에 고해 올릴까?’
 텁.
 도장경이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추백광이 귀신같이 그의 어깨를 움켜 쥐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닥치고 있으라더니······.’
 도장경은 쩝,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감찰은 정오가 조금 지나서야 끝이 났다. 대부분의 평가 항목이 상, 혹은 상상으로 기록 되었다. 수차례 찔러 넣은 뇌물의 힘이다.
 “올 해도 덕분에 힘 들이지 않았군.”
 “이를 말씀이십니까? 본단에 부디 잘 말씀 드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신자량은 손바닥이라도 비빌 기세로 홍달궁을 올려다 보았다.
 “일년에 한 두 번을 제외하고는 평화롭기 그지 없으니,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부디 다른 곳으로 발령나지 않도록······.”
 진심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하긴, 신자량 같은 자에게 이 곳 만큼 어울리는 곳이 또 있으랴. 문제는 덕분에 도장경도 도매금으로 넘어가게 생겼다는 것이다.
 ‘망할.’
 하지만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만 뇌까리는 도장경이었다.
 “흠흠. 여부가 있겠는가. 게다가······ 자네가 아니면 또 누가 이런 일을 하겠나. 잘 지키고 있게.”
 “이를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신자량이 빙긋 미소지었다.
 “하면 살펴 가십시오.”
 “그래. 자네도 수고하게.”
 홍달궁이 다시 마차에 올랐다. 신자량은 마차가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 까지 공손히 마차를 지켜 보았다.
 ‘?’
 그를 힐끔 본 도장경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일순간 신자량의 미소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순한 느낌이었을까? 홍달궁의 말은 틀림없이 뇌물과 관련된 것일 텐데도······.
 ‘대체 뭐지?’
 그의 표정은 단순히 홍달궁이라는 비리 관료를 비웃는 표정은 아니었다.
 도장경이 깊은 의문을 느끼는 사이 신자량의 시선이 단원들에게로 향했다.
 “그럼, 일단 술이나 한잔 할까?”
 그의 표정과 말투는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떠그랄. 일년에 한번이라고 아주 대차게 처먹는군.”
 추백광이 바닥의 돌을 툭 차며 투덜댔다.
 “그래도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있잖냐.”
 “쩝. 그럼 슬슬 가 봅시다.”
 입맛을 다신 추백광이 몸을 돌렸다. 도장경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이미 사화린이 저만치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 보다니요? 남은 것이 또 있습니까?”
 도장경의 물음에 추백광이 콧방귀를 꼈다.
 “한게 뭐가 있다고?”
 “감찰단······.”
 “돼지 새끼한테 똥 좀 퍼준건데 뭘. 내가 아까 한 말 기억 나지 않느냐?”
 도장경은 이마를 긁적였다. 그러고보니, 추백광이 ‘쥐새끼들······’이라고 이야기 했었다.
 ‘들?’
 도장경이 눈을 치켜 뜨는 사이, 그의 어깨를 툭 친 신자량이 앞서 걸어갔다.
 “정신 수습하고 따라 오시게. 곧 무슨 일인지 알게 될 테니까.”
 ‘대체 무슨······?’
 도장경은 깊은 의문과 불길함을 느끼면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 그 불길함은 현실이 되었다.
 
 
 3.
 
 
 섬마단원들이 향한곳은 근무지였다. 도장경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익숙하던 풍경이 지금은 더없이 살벌한 위험지대로 느껴졌다.
 “에이. 오늘은 아니군.”
 “······.”
 “왜 그렇게 봐? 너만 시간 낭비했냐?”
 “······.”
 문제는 해가 지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다. 추백광이 퉁명스레 욕설을 토해내고 나서야 도장경은 그들이 허탕을 친 것임을 깨달았다.
 “긴장 말게.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까.”
 신자량이 위로랍시고 말을 건냈다.
 하지만 도장경은 오히려 더욱 불안해 졌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지 않던가. 이대로 불안함에 하루하루를 보내느니······.
 “어휴 떠그랄- 술이나 마시러 가야 겠군”
 추백광이 휘적휘적 몸을 돌렸다. 사화린은 이미 저만치로 미끄러 지듯 멀어진 후였다.
 ‘대체 뭐냐고!’
 도장경은 속으로 버럭 소리쳤지만, 묻는다 해서 답을 들을 수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참. 장경아.”
 몸을 돌리려던 도장경이 신자량의 불음에 움직임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그에게, 신자량이 씩 웃어 보였다.
 “넌 잠깐 남아라.”
 왠지 오싹, 소름이 끼쳤다.
 도장경은 다시 단상 위로 올라 섰다. 신자량은 추백광과 사화린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참이나 말 없이 서 있었다.
 묘한 중압감.
 “왜 부르신 겁니까?”
 도장경은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신자량이 장난스레 웃었다.
 “특훈 하자고.”
 “특훈······?”
 도장경의 미간이 좁아졌다. 갑자기 왠 특훈이란 말인가. 게다가 비룡창법을 구성으로 올려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괜찮지?”
 물론 괜찮았다. 도장경은 재빨리 창을 뽑아 들었다. 비단 특훈 뿐만 아니라······.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쌓인 의구심을 해소하기에도 좋은 기회였으니까.
 “말 해보게.”
 신자량은 올게 왔다는 표정이었다.
 도장경은 창대를 휘휘 돌리며 물었다.
 “대체 왜 그리 남황에 남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자네도 아까 들었잖나?”
 신자량이 의뭉스레 되물었다. 도장경은 미간을 좁혔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건 저도 단주도 아시지 않습니까?”
 “달리 뭐가 있어 보인다?”
 신자량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의미심장한 미소. 도장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에 몸 담은 사람 치고 비밀 한 둘쯤 없는 이는 없지.”
 옳은 말이었다. 저마다의 사연과 상상할수 조차 없는 비밀과 은원이 모인 곳이 강호이니까. 또한 신자량의 눈빛은 너도 그렇지 않느냐? 하고 묻고 있었다.
 도장경의 미간이 좁아지자, 신자량이 어깨를 으쓱 했다.
 “뭐, 말 해 줄 수도 있지.”
 스릉- 그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그러기 전에, 몇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하겠지만.”
 “관문······?”
 “그건 조만간 알게 될 테니까.”
 슥-
 검첨劍尖이 도장경에게로 향했다.
 “시작 하자고.”
 그 관문이라는 것이 지금의 특훈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고개를 끄덕인 도장경이 신자량에게로 달려 들었다.
 특훈은 고됬다. 신자량은 정확히 도장경이 파김치가 될 만큼 그를 몰아 붙였다. 섬마단원들은 매일 근무지에 나왔고, 도장경과 신자량의 특훈을 구경하다 해 질때쯤 돌아갔다.
 그렇게 나흘이 지났다.
 “후우······ 후우······.”
 이른 시간부터 시작된 특훈으로, 도장경은 정오부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신자량은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거, 더럽게 열심히구만.”
 지켜보는 추백광은 입맛을 쩝쩝 다실 따름이었다. 아예 술동이까지 옆에 가져다 놓은 그다.
 “으음?”
 술잔을 입에 가져가던 그의 눈이 가늘어 졌다. 막, 다시 도장경이 신자량에게 달려들려는 시점이었다.
 “그만!”
 그의 한 손이 휙 올라갔다. 맞 부딪치려는 검과 창이 우뚝 멈춰섰다.
 도장경과 신자량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한 쪽은 의구심을, 한 쪽은 기대감을 담은 눈빛.
 씩- 추백광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시작 되었수다!”
 삽시에 섬마단원들 사이에 활력이 돌았다.
 멀뚱히 선 도장경으로선, 눈을 꿈뻑일 따름이었다.
 “시작······?”
 그의 시선을 받은 추백광이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화린의 눈에 살기가 돌고, 신자량이 몸을 돌렸다.
 솨아아-
 때마침 건조한 바람이 단상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기를 은근히 머금은 바람이었다.
 가만, 마기라고?
 “대체!?”
 도장경은 숨을 들이키며 눈을 치켜 떴다.
 새카만 물결이 저 먼 곳에서부터 밀려들고 있었다. 정확히 무천련 남황지단이 있는 방향이었다.
 “마인!”
 물결의 정체를 깨달은 도장경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돼지 새끼 면상보단 훨씬 보기 좋은 풍경이구만!”
 추백광이 단상을 껑충 뛰어 넘으며 소리쳤다.
 도장경은 그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대체······?”
 “쥐새끼들의 연례행사라고 할 수 있지.”
 추백광이 퉁명스레 답했다.
 도장경의 입이 벌어졌다.
 “연례행사 라구요?”
 “뭐, 고양이를 노리는 쥐새끼들이랄까.”
 굉장히 덩치가 크고 많고 기세가 흉흉한 쥐새끼 들이었다. 원한다면 고양이 목줄 정도는 우습게 따 버릴듯한······.
 도장경이 부르르 몸을 떠는 사이, 추백광이 휙 신형을 날렸다.
 “자네도 어서 정신 차리고 따라 오라고!”
 사화린이 그의 뒤를 미끄러지듯 뒤따랐다. 그녀의 입가에는 독사 같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도장경은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쫓았다.
 이쪽은 고작 넷이다. 달려오고 있는 마인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수십. 그런데 이런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오히려 달려가는 저 여유는 뭔가!
 “가자고.”
 신자량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도장경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유는 차후 들어도 늦지 않잖아?”
 “늦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도장경이 단언하듯 말하자 신자량이 혀를 찼다.
 “매 년 이때 쯤에 련에서도 인사이동이 있거든. 저쪽 단주도 뭔가 실적을 내고 싶겠지. 지금까진 다 좌천한 모양이지만.”
 말인 즉슨, 지금 저들은 공적을 위해 눈에 뵈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충분 한가?”
 도장경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야기를 듣고나니 암담함이 더했다.
 그를 보며 혀를 차던 신자량이 슬며시 실눈을 떴다.
 “무공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나?”
 “!”
 도장경의 눈이 커졌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상념이 일순간에 밀려났기 때문이다.
 “첫번째 관문일세. 늦지 않게 따라 오게나.”
 쉭!
 신자량은 느긋하게 말하고는 신형을 날렸다. 태도와 달리 쾌속하기 그지 없는 경공술이었다.
 부르르-
 창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신자량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불을 지폈다.
 성취를 확인하고 싶은 열망이 한없이 피어 올랐다. 도장경도 한 사람의 무인, 어찌 호승심이 일지 않을 수 있으랴.
 우우웅-
 철창이 보채듯 몸을 떨었다.
 어서 가자, 하는 창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도장경은 마침내 화답했다.
 “가자.”
 쉬학!
 도장경의 신형이 바람처럼 섬마단원들의 뒤를 따랐다.
 
 
 도장경이 난입했을 때는 이미 접전이 시작된 후였다.
 섬마단원들은 마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위태로운 상황. 하지만 도장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발견한 마인들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심장이 터질듯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
 도장경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흥분하지 말자.’
 쉭!
 세가닥 검기가 바람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
 도장경은 공력을 끌어올리며 창을 휘저었다.
 쩡!
 창기와 검기가 맞부딪쳤다.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그 사이로 다섯 마인들이 튀어 올랐다.
 ‘선수필승!’
 쉬학!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창이 먼저 뿜어져 나갔다.
 일초식 잠룡개안.
 콰직!
 푸른 궤적이 그대로 마인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창대가 찌르르 떨렸다.
 구성의 잠룡개안은 팔성과는 비교 할 수 없을만큼 빨랐다. 도장경 본인도 일순간 호흡을 멈출 정도였다.
 쉬하악!
 네 방위에서 동시에 검기가 날아들었다. 검붉은 검기에 살기가 가득했다.
 “큿!”
 도장경은 마인의 가슴팍에서 창을 뽑아들며 몸을 숙였다.
 창이 어깨 위를 핑그르 돌았다. 등어름에 푸른 막이 펼쳐졌다. 창막槍膜. 검기가 그 위로 쏟아졌다.
 따다다당!
 콩볶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마인이 튕겨나듯 물러섰다.
 도장경은 창을 고쳐쥐고 주위를 돌아 보았다. 네 마인들이 사방을 점하고 있다.
 심장이 터질듯 두근거렸지만 정신은 더없이 냉정했다.
 창이 이토록 가벼웠던 적이 또 있던가.
 슥-
 그 순간 마인들이 동시에 검을 늘어뜨렸다.
 검붉은 마기가 실오라기처럼 그들의 전신에서 피어 올랐다.
 눈동자가 흰자위 하나 없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도장경은 전신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그 순간 좌 우의 두 마인이 동시에 뛰쳐 올랐다.
 쉭!
 앞 뒤의 마인들도 그를 향해 달려 들었다.
 콰콰콰!
 검기의 장벽이 사방에 펼쳐졌다. 피의 비가 도장경에게 쏟아지는 것 같았다.
 쉬하악-
 도장경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났다.
 창이 부러질듯 몸을 떨었다.
 촤촤촷!
 푸른 창기가 도장경의 주위를 빼곡하게 감쌌다.
 이초식 잠룡요동.
 츠파파팟! 쩌저적!
 창기의 편린과 검붉은 검기의 비가 맞부딪쳤다.
 콰지직!
 푸른 비늘이 검기를 찢어발기며 그들에게 쇄도했다.
 마인들의 눈이 찢어질듯 커졌다.
 카드드득!
 “컥!”
 네 마인들의 몸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단말마의 숨소리를 토해낸 그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하아- 하아-”
 도장경은 숨을 몰아쉬며 죽은 마인들을 돌아보았다.
 ‘약하다.’
 도장경은 짤막하게 그들의 무위를 평가했다. 나쁘지 않은 수준이지만 결코 고수는 아니다.
 그래, 남황지단의 마인들이니 오죽하랴.
 사실은 그들 모두가 일류급 고수였으나 도장경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경지가 일류 후입에 올랐음을 깨닫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쉬하악!
 동료들의 죽음을 목도한 마인들이 검기와 도기를 흩뿌리며 달려 들었다.
 도장경은 그들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불끈!
 철창을 움켜쥔 손에 힘줄이 돋아났다.
 “와라!”
 
 “거 자식, 살벌하네.”
 피를 머금은 도장경의 모습에 추백광이 혀를 찼다.
 그는 미꾸라지처럼 마인들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과연 마인에겐 무자비하구만.”
 신자량도 마인들의 공격을 검면으로 툭툭 쳐내며 감탄했다.
 여유가 넘치는 모습들 이었다.
 “그런데 저 녀석 너무 무리하는데. 저대로는 반 각도 못 버틸거요.”
 “아직 자기 힘에 적응할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고 내달리고 있는거지. 문제는······.”
 둘의 시선이 물끄러미 한 곳으로 모였다.
 혈무血霧 자욱한 전장 한복판에 사화린이 서 있었다.
 그녀의 양 팔 소매가 치렁치렁 늘어져 일렁였다.
 “어이구. 달려 드는 구만.”
 추백광이 한탄했다. 두명의 마인들이 그녀에게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쉭!
 그녀가 양팔을 뻗자 소매가 뻗어나가 마인들을 칭칭 동여맸다.
 카드득!
 뒤이어 팔을 힘차게 당기자 골육이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소매가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쉬릭!
 소매가 회수되자 만신창이로 으스러진 마인들이 털썩 널브러졌다.
 “저쪽도 조만간 발동이 걸리겠구만.”
 입맛을 다신 추백광이 다시 도장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슬아슬 하군. 누가 먼저일까. 내기나 할까?”
 “일 없수다. 건다면······ 화린이 쪽에 걸어야겠지만.”
 콧방귀를 뀐 추백광이 도장경의 움직임을 쫓았다.
 “어어?”
 추백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닌게 아니라 도장경의 움직임이 확연히 둔해 져 있었다.
 “앞뒤 분간 못하고 설치더니······! 저 자식 저러다가 죽겠는데?”
 달려들던 마인들을 단박에 쳐 죽인 추백광이 발끝을 들썩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도장경이 이 곳에서 죽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멈춰!”
 막 달려나가려던 그를 저지한 것은 신자량이었다.
 “엥?”
 추백광이 황당한 듯 바라보자, 신자량이 고개를 저었다.
 “멈춰라. 도와 줄 필요 없다.”
 추백광이 어이 없다는 듯 물었다.
 “단주는 저 녀석 편 아니었소?”
 “저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고 죽는 녀석이라면, 애초에 우리와 함께 하기도 힘들 거다.”
 “끙, 이런 상황에서 조차 시험이라니.”
 추백광은 침음성을 흘리면서도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신자량이 다시 도장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이걸 홀로 이겨 낼 정도는 되어야······ 그걸 맡길 수 있을 테니까.”
 
 ‘자만했다.’
 도장경은 부르르 떨리는 손에 애써 힘을 줬다.
 숨이 턱까지 찼다.
 자신의 경지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끝없이 뿜어져 나올것만 같던 공력은 그 기세가 한결 미약해졌다. 덕분에 체력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조금씩 창의 무게가 느껴졌다.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스윽-
 반면에 마인들은 아직 건재했다. 숫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도장경이 베어 넘긴 마인의 숫자만 아홉. 절정의 고수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대치하고 있을 수 만은 없는 노릇.
 쉭!
 결국 흑의인 다섯이 일제히 솟구쳐 올랐다.
 도장경은 지친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창을 놀렸다.
 따다당!
 도검과 창이 맞부딪쳐 어지러운 궤적을 그렸다.
 무거웠다. 전과 달리 공력이 원활치 못한 까닭이었다.
 몇 합의 공세가 삽시에 오갔다. 마인들도 오래 지나지 않아 도장경이 지친것을 눈치 챘다.
 그들의 기세가 단박에 흉흉해 졌다.
 도장경은 바르르 떨리는 몸을 의지로 억눌렀다.
 ‘와라. 물러서지 않으리라!’
 결사를 각오한 도장경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 순간 마인들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도장경은 남은 내공을 모조리 격발시켰다.
 쩌정!
 폭음이 일었다. 도장경의 창에 맺힌 기운이 급속도로 옅어졌다.
 하지만 도장경은 창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오감이 오로지 창과 검만을 쫓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상대의 공세에 걸맞는 비룡창법의 초식이 펼쳐져 나왔다.
 캉! 카캉!
 창에 맺힌 공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도장경은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둘러싼 다섯 마인들이 조금씩 밀려났다.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도장경 본인은 전혀 알지 못했다. 검의 궤적을 쫓아 창을 놀리는 것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천 수만번 연습했던 초식들이 본능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몇 합이 지나자 자신이 무슨 초식을 펼치고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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