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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세성존 1

2017.11.27 조회 334 추천 2


 제세성존 1권
 서장
 
 
 수천 년 무림 역사상 일관되게 지켜져 온 원칙은 바로 강자존(强者存)의 원칙이다.
 강자만이 무림을 지배해 왔고, 강자만이 대접을 받는 곳!
 마음이 약한 자는 결코 천하제일인이 될 수가 없는 곳이 바로 비정한 강호무림이었다.
 강자라 불리운 사람들은 매시대마다 있었으나, 서로간의 견제와 시기 등으로 오랫동안 군림하지 못했기에 진정한 강자라 불리우는 무림인의 수효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강호에는 기인이사들이 바닷가의 모래알보다도 많다는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런 기인이사들을 찾으려 눈 씻고 찾아보아도 결코 찾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세속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기에 강호인들을 피하기 때문이다.
 강호에 난무하는 악랄한 음모와 음흉한 암계는 많은 무림인들을 황천으로 보냈으며, 그에 못지않게 많은 기연(奇緣)과 기담(奇談), 기사(奇事)가 벌어지는 곳도 강호이다.
 풍운만변(風雲萬變)이 일어 언제 어떻게 변해 갈 줄 모르는 강호에서 입지(立志)를 하고 입신(立身)을 하는 것을 꿈꾸며 많은 젊은이들이 강호로 흘러 들어오나, 대다수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강호의 수많은 문파의 일개 제자로 자리잡고 마는 곳도 강호이다.
 이런 강호에서 진정한 강자로 불리우는 여덟 명의 무림인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강호팔존(江湖八尊)이라 부른다.
 강호팔존은 각기 다른 시대를 타고 태어나 직접 비무를 한 적이 없지만 구전되어 오는 서열이 매겨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서열이 맞는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구전되어 오는 전설을 토대로 만든 서열이기 때문이다.
 강호일존 신품무제(神品武帝) 제갈천(諸葛天),
 강호이존 천마지존(天魔至尊) 음무외(陰武畏),
 강호삼존 북빙천사(北氷天使) 추혼규(秋?葵),
 강호사존 지옥대제(地獄大帝) 주군량(朱群亮),
 강호오존 철혈무존(鐵血武尊) 도균태(陶鈞邰),
 강호육존 만겁독존(萬劫毒尊) 남추진(南 璡),
 강호칠존 사령인요(邪靈人妖) 유교련(劉嬌蓮),
 강호팔존 사자철검(獅子鐵劍) 구본후(具本候).
 강호일존인 신품무제 제갈천은 대명(大明) 홍무제(洪武帝) 삼 년에서 오 년 사이에 활동했으며 실지 회복을 노리던 외세의 침략을 막아 낸 인물로 그의 성명절기는 뇌정만폭(雷霆滿爆), 천광폭멸(天光爆滅), 빙백천검(氷魄天劍) 검환만리(劍丸萬里) 등이다.
 가장 최근의 인물에 속하지만 무공이 엄청나다는 것 외에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그가 강호에서 활동했던 기간이 짧았을 뿐만 아니라 천하의 겁난을 종식시킨 후 열아홉에 이르는 천하의 미녀들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신품무제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난 후 강호의 모든 문파들이 그의 종적을 찾았으나 지금까지 아무도 그를 찾지 못했다.
 강호이존인 천마지존 음무외는 주나라 목왕(穆王) 때의 인물로서 그는 천마교(天魔敎)를 이끌던 교주였다.
 그는 강호에 산재해 있던 백만 마도를 당당히 일통시킨 후 천하 독패를 꿈꾸며 강호를 겁난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강호를 막 함락하려는 순간에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무공으로는 천마십이지(天魔十二脂)가 알려져 있으나 이 지법은 그가 알고 있는 무공 중에 하류에 속한다고 한다. 당시 무림에서는 그의 삼 지를 제대로 받아 낼 사람조차 없었기에 다른 무공을 펼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강호삼존인 북빙천사 추혼규는 대원(大元) 헌종(憲宗) 때의 인물로 북해빙궁의 궁주였다.
 일 년 사시사철 살을 에일 듯한 삭풍이 불어 오는 곳에 자리잡은 북해빙궁의 전 궁도들을 이끌고 중원 침략에 나섰다가 당시 전 중원의 힘이 응집된 무림맹의 반격을 받고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곡에 떨어져 죽었다고 전해 온다.
 그의 독문무공은 빙백신공(氷白神功)으로 웬만한 열양공(熱陽功)으로는 대적할 수가 없는 음공(陰功)이다.
 당시 중원에서 가장 강한 열양공을 소지했던 사일검법(射日劍法)의 창안자인 사일검제(射日劍帝)를 단 일 장에 꽁꽁 얼려 죽인 일은 두고두고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다.
 강호사존인 지옥대제 주군량은 남송(南宋) 덕우제(德祐帝) 때 인물로 그는 사파를 통합하여 전 중원을 사술로 신음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당시 중원에 산재해 있던 무덤이란 무덤은 전부 파헤쳐져 썩은 시체가 걸어다니는 바람에 중원은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 찼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술에 금제를 당한 여인들이 영기 발랄한 중원의 영재들을 치마폭으로 끌어들여 피골이 상접한 시체로 만들었다. 제자가 스승을, 딸이 부친을, 모친이 자식을, 부인이 남편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친상간과 겁탈, 강간, 윤간이 온 강호를 휩쓸었다.
 다행히 사파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지옥대제 주군량의 종적이 묘연해지는 바람에 강호에 불던 겁풍이 사라졌다.
 지금도 사파에서는 지옥대제의 종적을 찾고 있다고 전해진다.
 강호오존 철혈무존 도균태는 전한(前漢) 태종(太宗) 효문제(孝文帝) 때의 인물이다.
 당시의 무림은 막 태동기를 거쳐 성숙기에 접어드는 기간이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무공의 대부분이 당시에 만들어졌다.
 철혈무존은 타고난 승부사로 그는 자신이 창안한 철혈장법과 철혈검법으로 강호의 명숙들을 찾아다니며 비무를 하였다.
 처음엔 승보다 패가 많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패보다 승이 점점 많아졌다. 그가 은거에 들기 십 년 전부터는 누구도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모두 이천일백여 합의 비무를 하는 동안 갈고 다듬어진 철혈장법과 철혈검법은 그대로 강호의 일절이 되었으며, 당시에는 그가 고금제일인으로 불리었다.
 섬서성에 철혈장이란 장원을 세우고는 봉검의례와 함께 은거에 들었으며, 단맥으로만 그의 무공이 전해져 왔으나 언제부터인가 실전되어 버렸다고 한다.
 강호육존 만겁독존 남추진은 당조(唐朝) 대종(代宗) 때의 인물로 드물게도 남만의 오지에서 성장한 중원인이었다. 남만의 오지에서 성장한 만겁독존은 남만의 독인들에게서 독공을 배웠으나 청출어람(靑出於藍) 청어람(靑於藍)하여 남만인들을 자신의 휘하로 두게 되었다.
 자신이 중원인임을 모르던 만겁독존은 남만인들의 오랜 숙원인 중원 정복의 기치를 내걸고 보무도 당당히 운남성을 시작으로 중원을 침공하였다.
 이미 독중독성의 경지에 올라 있었던지라 많은 중원인들이 그의 독수 아래 고혼이 되었고, 중원은 사상 초유로 정복당하는 듯이 보였었다.
 그러나 중원 침공 과정에서 자신의 피가 중원인의 것임을 안 만겁독존은 남만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뿌리를 파멸시켰다는 죄책감에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다시는 인세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독문무공으로는 파멸독강(破滅毒剛)이 있다.
 강호칠존인 사령인요 유교련은 강호팔존 중 유일한 여인으로 당조(唐朝) 애제(哀帝) 때의 인물이다.
 사파의 거두로 모든 사술에 능통하였으며, 특히 사령술(邪靈術)에 능통하였다. 삼백 년 후 지옥천사가 강호를 휘저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사령인요 유교련의 비급을 우연히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령인요는 천성적으로 음탕한 피를 타고 태어나 많은 강호의 영걸들을 자신의 치마 속으로 끌어들인 후 채양보음대법을 시전해 영원히 늙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반면에 한 번이라도 사령인요와 정사를 나눈 영걸들은 죽을 때까지 그녀를 잊지 못해 폐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무림의 각 문파는 영기 발랄한 제자들과 자식들이 폐인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보다 못해 사령인요를 무림공적으로 지정하고 필사적으로 그녀의 행방을 뒤쫓았으나 신출귀몰한 역용술과 사술로 번번이 위기에서 빠져 나가곤 하였다.
 사령인요 때문에 무림의 원기를 크게 상하는 바람에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섰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많은 영걸들이 사라져 갔으나, 언제부터인가 사령인요의 모습이 인세에서 사라져 버렸다.
 강호팔존인 사자철검 구본후는 서진(西晋) 세조(世祖) 무염제(武炎帝) 때의 인물이다.
 한 자루 사자철검으로 강호를 종횡무진하며 강호상의 마도 인물들과 사파의 인물들을 수없이 베어 넘겨 강호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몸소 실천한 인물로, 그가 베어 넘긴 마도와 사도의 인물이 무려 오천에 달한다고 한다.
 그의 독문검법인 사자검법(獅子劍法)은 검법의 금자탑으로 불리었고, 사자검법에 당한 인물들은 시신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하는 횡액을 당했다고 한다.
 한 가지 그에게 명예롭지 못한 칭호가 더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고금제일색마(古今第一色魔)라는 칭호였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는 수없이 많은 여인들을 취했고, 그에게 당한 여인들은 모두 그를 원망하며 평생을 살다 죽어 갔다고는 하나 자세한 내막은 전해져 오지 않는다.
 강호팔존은 모두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들이며,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그들의 마지막을 본 사람이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강호의 무림인들은 지금도 강호팔존이 어디엔가 남겼을지도 모르는 유학을 얻으려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고 있다. 만일 강호팔존 중 어느 누구의 무학이든 그것을 얻는 자가 있다면, 장차 천하제일인의 칭호를 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제1장 탄생(誕生)
 
 
 1
 
 귀를 에일 듯한 삭풍이 불어 오고 흰 눈이 마치 삼태기로 퍼붓듯 쏟아져 내리는 추운 겨울 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십여 채 초가들의 지붕에는 무려 두 자 두께의 눈이 쌓여 있음으로 보아 제법 오래 전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얼기설기 엮어 놓은 싸리나무로 만든 야트막한 담장에도 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눈보라가 몰아쳐 담장과 지붕에 쌓인 눈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처마에는 길게 굵은 고드름이 달려 있었고, 지붕 한쪽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굴뚝에선 뭉게뭉게 연기가 나와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사람 허리까지 빠질 정도로 쌓인 하얀 눈 사이에 있는 마을에선 인기척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하긴 이렇게 눈이 펑펑 오는 추운 겨울 밤에 누가 나와서 돌아다니겠는가?
 이십여 채의 초가들은 모두 큼지막한 목조건물을 둘러싸고 있어 이 마을을 은연중에 지배하는 인물이 사는 곳인 듯하였다. 목조건물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초가와는 달리 기와를 얹은 지붕을 가지고 있는 듯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도 마찬가지로 두 자 두께의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으며, 처마에는 굵은 고드름이 열을 맞춰 달려 있었다.
 하늘에는 둥근 보름달이 이 자그마한 마을을 비추고 있었고, 간간이 우수수 눈 떨어지는 소리에 개들이 짖고 있었다.
 목조건물의 내부는 단아한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으로 보아 주인의 성품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방안에는 자단목으로 만든 장방형의 탁자가 있었고, 사방은 서가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서가에는 빽빽이 고본진서(古本眞書)들이 채워져 있었다.
 탁자 위에는 읽다가 만 듯한 책이 펼쳐져 있었으며, 한쪽엔 이미 식어 버린 찻잔이 놓여 있었다.
 방안을 서성이며 초조하게 왔다갔다하는 인물은 이제 사십대 초반에 접어든 듯한 청수한 용모를 하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학사로 보였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미간이 약간 찌푸려져 있었으며,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으로 보아 무엇인가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휴! 이 녀석이 얼마나 속을 썩이려고 이렇게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제 어미가 힘든 줄 알면 후딱 나와야 할 텐데······.’
 한편 다른 방에선 연신 여인의 용쓰는 소리가 고요한 겨울 밤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하아··· 하아··· 끄으응······!”
 “마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쓰세요!”
 “끄으으응······!”
 “됐어요!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요!”
 방안은 온통 후덥지근하였다. 방 한쪽에는 커다란 화로가 있었고, 그 안에선 시뻘건 숯불이 이글이글 타올라 방안의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침상 양쪽 기둥에 매어 놓은 굵은 천을 움켜쥐고 산모가 있는 힘을 다해 용을 쓰고 있었다.
 산모는 이제 이십대 후반에 다다른 듯 보였다. 그림 같은 이마와 초생달 같은 아미, 오뚝한 콧날과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미녀로서 이런 한적하고 작은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이마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이를 악물면서 입술도 깨물었는지 입술이 부어올라 있었다.
 방안에는 산모와 두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허름한 옷을 입은 사십대 정도 된 여인들이었다. 차림으로 보아 목조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초가에서 온 여인들인 것 같았다.
 한 여인은 화로 곁에서 물을 데우고 있는 중이었고, 다른 여인은 산모의 발치에서 출산을 유도하고 있었다.
 “마님, 이제 조금만 더 힘을 쓰시면 아기씨가 나올 것 같아요! 조금만 더 힘을 쓰세요.”
 “알았어. 끄으으응··· 끄으으응······!”
 “어머, 나와요! 아기씨가 이제 나오려고 해요. 조금만 더······.”
 “끄으응··· 아아악······!”
 “응애··· 응애··· 응애······!”
 “마··· 마님, 축하드려요. 아들을 낳으셨어요!”
 산모는 말이 없었다. 출산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만 실신을 한 것이었다.
 방안에는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진동을 하고 있었고, 화로 곁에 쭈그리고 앉아 물을 데우던 아낙의 손길이 빨라졌다.
 한편 서실로 보이는 곳에 있던 사십 정도 된 청수한 용모의 학사는 온 집안이 떠나가라고 울어대는 아이의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의 자식이 탄생하였음을 알았다.
 “오, 드디어······.”
 그에게는 태어난 생명이 아들이거나 딸이거나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아이와 산모의 안위가 걱정될 뿐이었다.
 태어난 아이의 부친으로 보이는 사십 정도 된 청수한 용모의 학사는 사십일 세로, 이곳 동정호와 악양(岳陽) 사이에 위치한 행화촌(杏花村)이란 조그만 마을의 정신적인 지주인 유운학사(遊雲學士) 주후연(朱厚?)이었다.
 주후연은 대대로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문사 집안의 후손이었다. 주후연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과는 인연이 없어 십대 조상부터 누구도 관직에 진출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씨 집안은 이 마을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존경을 받아 왔다. 그 이유는, 주씨 가문이 대대로 광명정대하고 온후한 인품을 가져 마을의 대소사를 일관성 있게 처리하였기 때문이었다.
 방금 아이를 출산한 산모는 모란선자(牡蘭仙子) 탁교연(卓嬌姸)이었다. 그녀는 이제 이십팔 세로, 유운학사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십 년 만에 첫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었다.
 모란선자는 십 년 전 기우는 가세 때문에 생긴 부채로 인하여 악양의 쾌활루라는 기루에 팔려 나오는 신세가 되었었다. 우연히 몇 년을 사용할 먹을 구입하러 악양에 나왔던 유운학사가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여 먹을 구입하려던 은자로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유운학사가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았음을 안 모란선자가 은혜에 보답한다며 우겨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부부로 살아오게 된 것이었다.
 십 년 동안 태기가 없어 애를 태우는 유운학사를 볼 때마다 모란선자는 다른 여인의 몸을 통해서라도 대를 이어야 한다며 첩을 얻을 것을 강권하였으나 워낙 모란선자를 아끼는 유운학사는 단 한 번도 다른 여인을 품지 않은 채 지금까지 지내 오다 지난 봄에 태기가 생긴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던 터였다.
 그러나 혹여 늦은 회임으로 아내의 몸에 이상이 있을까를 두려워한 유운학사는 봄부터 지금까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였었다.
 “학사님, 아들입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호오, 그래요? 그래, 산모는 어떻소?”
 “예, 아무 이상 없습니다.”
 “아, 그래요? 수고하셨습니다.”
 유운학사 주후연에게 아들의 탄생을 알리고 여인은 다시 산모가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후후··· 아들이란 말이지? 내 나이 사십일 세에 늦둥이 아들을 보았단 말이지? 후후······!’
 유운학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마님! 경하드려요! 아들을 순산하셨어요.”
 모란선자 탁교연은 눈을 뜨자마자 들려 오는 소리를 듣고 일시에 세상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졌음을 알고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 동안 남들은 다 있는 태기가 없어 혹시 자신이 석녀(石女)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베갯잇을 적시기를 수차례나 하지 않았던가?
 이제 늦었지만 아들을 낳았으니 자신의 모든 할 도리가 다 이루어지고, 그간의 모든 허물이 일시에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산모의 산도(産道)를 빠져 나오는 동안 핏덩어리로 변했던 아이를 깨끗이 씻긴 사십대의 푸짐한 여인이 아이를 얼굴 곁에 들이밀자, 모란선자는 누런 비단에 황룡과 흑룡을 수놓은 포대기의 깃을 살며시 열고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누런 비단으로 만든 포대기는 다소 사치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지난 봄 태기가 생겼음을 알고 남편인 유운학사를 졸라 이곳 유운장(遊雲莊)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물품을 구입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 포대기를 만든 비단이었다.
 비단에 수놓은 황룡은 아이가 자라서 장차 큰 인물이 되라는 의미였고, 흑룡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모란선자가 지난 수개월 동안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수놓은 작품이었다.
 아이의 눈은 새까맸다. 영롱하면서도 고요히 침잠되어 있는 듯한 눈빛은 마치 세상사를 달관하는 득도한 고승의 눈빛처럼 보였다.
 ‘아, 아가야 나는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너무도 기쁘단다.’
 말없이 아이의 장밋빛 뺨을 쓰다듬던 모란선자는 치밀어오르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었고, 노심초사하던 지난날에 대한 눈물이었다.
 “음, 이제 아들을 보았으니 그 녀석의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할 텐데······.”
 유운학사는 탁자에 앉아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의 작명을 고심하고 있었다.
 “음, 그 녀석 목소리가 우렁찼으니··· 호걸로 성장할 조짐이 보이고, 무병장수도 했으면 좋겠고, 이 녀석의 대엔 관직에 오르는 관운도 따랐으면 좋겠는데··· 무어라 지을까? 그래, 천명(天命)이라 짓자. 주천명(朱天命)! 하늘이 주셨으니 하늘의 뜻대로 살라는 뜻으로!”
 
 
 2
 
 
 그토록 매섭게 불어닥치던 삭풍이 겨울 내내 대지를 얼려 버렸고, 사람들의 움직임조차 얼렸는지 지난 겨울 동안엔 아무 일 없이 평화가 흘렀다.
 이곳 행화촌(杏花村)은 지난 겨울 내내 주천명의 성장이 마을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하루하루 쑥쑥 커 가는 주천명이 오늘은 어땠다, 어제는 어땠다가 이들의 관심사가 된 것은 이 마을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 주천명을 제외하고 모두 이십이 넘은 사람들만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주천명의 삼촌이고, 이모이며, 조모이고, 조부였다.
 이십여 가구 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 모두 주천명의 안위를 끔직이도 걱정하여 이제 날만 풀리면 모두가 산으로 올라갈 판이었다. 주천명의 보약을 달이기 위한 약초를 캐기 위해서였다.
 산후 조리를 마친 모란선자는 전보다도 훨씬 따사로운 남편의 손길을 느끼고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맛보고 있었다.
 유운학사 주후연은 주천명에게 가르칠 학문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과급제의 꿈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주천명은 온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을 하여 세 살이 되었고, 부친인 유운학사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주천명에게 글공부를 시키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었다.
 “허허··· 이 녀석이 언제 자라서 공자와 맹자를 배운단 말인가?”
 유운학사의 마음은 너무도 조급하였다. 마음 같아선 빨리 사서삼경과 대학 등을 가르치고 싶은데, 아직도 손가락만 빨고 있는 주천명을 볼 때마다 한숨이 터져 나오고 있었고··· 그것을 짐작한 모란선자는 그런 남편을 볼 때마다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아직은 안 된다며 만류하고 있었다.
 그 동안 행화촌에 변화가 있었다면 세 명의 식구가 늘었다는 것이다. 주천명이 태어나고 봄이 되자 마을에는 근본을 알 수 없는 허름한 옷차림의 남녀가 어디에선가 흘러 들어왔다.
 여인은 남자의 아기를 잉태하였는지 배가 불룩 나와 있었다.
 나무 잎사귀들이 하나둘 떨어져 내리는 가을 무렵에 여인은 마을의 가장 외곽에 허름하게 만들어진 초옥에서 아이를 순산하였는데, 아들이었다.
 그 동안 마을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근근히 풀칠을 하던 부부는 여름부터는 주후연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와 그때부터 비교적 안정적으로 먹을 수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물어 보니 아비의 이름은 석칠(石七)이었고, 어미의 이름은 그냥 소취(小翠)였다.
 아비는 농사를 짓는 석씨 집안의 일곱째 아들이라 석칠이란 이름을 가졌고, 어미는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고아로 떠돌다 우연히 주루에서 점소이 노릇을 하던 석칠에게서 몇 끼의 식사를 얻어먹은 후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함께 기거할 방이 없어 살 만한 곳을 찾아 유랑하다 우연히 이곳 행화촌에 들른 것이었다.
 초가을 무렵에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유운학사가 직접 작명을 하였는데, 아이의 아비와 어미 둘 다 글을 몰라 이름을 지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석추연(石秋然)이라 지었다. 가을에 태어났기에 가을 추(秋)자를 넣었고, 그럴 연(然)자를 넣어 부모와 자식의 인연이 맺어졌음을 의미한다는 유운학사의 말에 아이의 아비와 어미는 사람의 이름에도 뜻이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 정도로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아이는 잘 먹이지도 못하는데 쑥쑥 자라 주천명과 거의 같은 몸집을 가지게 되었다. 주천명과는 거의 일 년이라는 세월이 차이가 남에도 워낙 아비인 석칠의 몸집이 좋아 그 성장 속도가 빨랐던 모양이었다.
 온갖 영약과 보약을 먹으며 자란 주천명과 그 집의 하인으로 잘 먹지도 못하면서 성장하는 석추연의 끈질긴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주천명이 사 세가 되는 해부터 주후연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주후연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위하여 체계적인 글공부 과정을 준비해 두고 있었는데, 요즘은 주천명을 가르치는 일이 그의 낙(樂)이었다.
 주천명은 유운학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그의 학문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혼자 글공부를 하는 주천명의 옆에는 늘 석추연이 자리를 잡았는데, 이는 혹여 주천명이 글공부를 게을리할까 봐 경쟁 상대로 삼으라고 유운학사가 데려다 앉힌 것이었다.
 석추연은 주천명보다 한 살이 어린데다 글공부도 늦게 시작하여 아직은 주천명의 상대가 되지는 않았으나, 다른 평범한 아이들에 비하여 비교적 총명함을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글공부는 십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주천명은 사서삼경은 물론 삼고구류와 제자백가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석추연도 사서삼경을 떼었으나 아직 삼고구류와 제자백가에는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낮에는 주씨 가문의 하인으로 일하고 밤에만 글공부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석추연의 부모인 석칠과 소취도 여전히 주씨 가문의 하인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석칠과 소취 사이엔 더 이상의 아이가 잉태되지 않아 두 사람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각별을 넘어 지극 정성이었다.
 땔감을 구하러 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얻은 약재들을 팔아 고기를 먹이는가 하면, 귀한 약재는 직접 먹이기도 하였다.
 자신들은 한 점의 고기도 먹지 않으면서 고기를 먹는 자식을 보면서 늘 흐뭇한 미소를 짓는 부모의 내심을 짐작한 석추연은 늘 맛있게 먹곤 하였다.
 그러나 밤만 되면 자신에게 지극한 정성을 쏟는 부모가 배운 게 없어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하여 비통한 마음이 들어 늘 침울하게 지냈다.
 석추연은 글공부를 하면서 효(孝)에 대하여 익히 배웠는지라 낮에는 글공부를 중단하고 부친인 석칠을 도와 별의별 일을 다 하고 다녔다. 땔감 준비와 적지 않은 면적의 농토에서의 농사 등은 물론 주씨 집안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러 악양까지 도보로 다녀온 것만 해도 벌써 수십 차례나 된다.
 행화촌에서 악양까지는 대략 삼십 리 정도 된다.
 이제 겨우 열세 살 된 아이가 하루에 다녀오기는 너무도 먼 거리이나, 요즘은 석칠이 땔감을 구하러 산으로 들어갔다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거동이 불편하여 석추연이 대신 악양까지 다녀오곤 하였다.
 갈 때는 빈손으로 가나 올 때는 늘 무거운 물건을 들고 오게 되어 한밤중에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늘 지쳐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석추연은 늘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하곤 하였다. 악양의 문물을 볼 수도 있고, 번화한 풍물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을 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길을 가는 내내 그 동안 유운학사에게서 배운 사서삼경의 내용을 암송하며 걷곤 하였기에 적어도 사서삼경 어디에 무슨 글이 있는지 정도는 훤하게 꿰뚫는 정도의 나이에 비해 높은 학문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심부름을 하다 보면 성격이 명랑하고 쾌활한 석추연을 좋게 보아 푼돈을 쥐어 주는 상인들이 있어, 그 돈으로 악양에 있는 서원에 들러 고서들을 구입해 읽는 재미도 있었다.
 그가 가진 돈이 워낙 푼돈이라 제대로 된 서책들을 구입할 수는 없었고, 서원 한쪽에서 썩어 들고 있는 파본들을 구입해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파본들은 대개 앞이 떨어져 나갔거나 뒤가 떨어져 나가 그 내용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그런 대로 읽을 만은 하였다.
 최근에 읽은 고서의 내용은 무슨 진법에 관한 서적이었다. 전투 중에 군진(軍陣)을 어떻게 하면 어떤 지형에서 득을 볼 수 있다 하는 정도였으나, 그 동안 배운 학문과는 다른 분야의 것이기에 흥미를 가지고 탐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또 하나 석추연에게 떨어지는 명(命)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유운학사가 소장하고 있는 서책들의 제본을 새로 하라는 것이었다.
 주씨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고본진서들은 모두 팔천여 권에 이르는데, 그것들이 마지막으로 손을 본 지가 거의 백 년이 다 되어 책을 묶은 노끈들이 삭아서 요즘 그것들을 모두 새로 묶고 있다. 그 일은 허리를 다쳐 누워 있는 석칠보다는 손이 빠르고 섬세한 석추연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유운학사는 석추연에게 자신의 서실 한 귀퉁이에서 그것들을 새로 묶도록 하여 요즘 며칠 동안은 그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낮에는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중심으로 제본을 하고, 밤에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을 자신의 거처에서 제본하겠다며 들고 가서 은은한 황촉불 아래에서 그것들을 읽는 중이었다.
 석추연은 자신의 부모가 배운 것이 없어 이토록 가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하여, 하나라도 더 읽고 자신의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발버둥치고 있는 중이었다.
 팔천 권에 달하는 장서들 중 대부분은 이미 주천명이 읽었기에 주천명은 석추연이 장서들을 자신의 거처로 가져가는 것에 대하여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내심 자신보다 학문이 떨어지는 석추연에 대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요즘 석추연이 가져가는 삼고구류와 제자백가, 천문지리에 대한 서적을 아무리 가져가도 단 한 줄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석추연의 머릿속엔 이미 팔천 권에 달하는 모든 장서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3
 
 
 “야, 추연아!”
 “예, 공자님! 부르셨어요?”
 잠자리가 엷은 날개를 아래위로 흔들며 한가롭게 날고, 커다란 살구나무에 붙은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한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주천명은 서실의 창들을 활짝 열어젖힌 채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든 청삼을 걸치고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고, 석추연은 여기저기를 꿰맨 허름한 마의를 걸치고 마당을 쓸고 있는 중이었다.
 서실 앞으로 빗자루를 들고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시립한 석추연에게 주천명의 명이 떨어졌다.
 “오늘 악양에 가서 질 좋은 한지를 한 두릅 사 오도록 하여라. 반드시 조선에서 건너온 것으로 구입하여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공자님!”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오시 무렵이라 지금 당장 출발해도 한밤중이나 되어야 돌아올 수가 있는 시간이었으나, 석추연은 악양에 있는 서원에 들를 수 있는 기회가 또 왔다는 생각에 즐겁기만 하였다.
 한지 값을 받아 든 석추연은 나는 듯이 악양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수십 차례나 왕래한 길이기에 어디쯤 가면 구부러진 길이 있고, 어디쯤이면 낭떠러지가 있는 줄 훤히 알기에 머릿속으로 전날 밤에 본 시(詩)를 떠올리고 있었다.
 
 유물선천지(有物先天地)
 무형본적요(無形本寂寥)
 능위만상주(能爲萬像主)
 불축사시조(不逐四時凋)
 장부개유충천지(丈夫皆有衝天地)
 북두남성배면간(北斗南星背面看)
 
 한 물건이 있는데 천지보다 먼저요,
 형상이 없어 본래 고요하도다.
 능히 만상의 주인이 되고,
 사시절을 따라 마르지 않는다.
 장부에겐 누구나 하늘을 찌를 듯한 기대가 있거니,
 북두와 남성을 등을 지고 보거라.
 
 뭔지 모를 호연지기를 키워 주는 시구 같았다. 전날에 본 여러 시구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시구를 떠올린 석추연은 이 시구처럼 호연지기를 키워 대장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듯이 걸음을 옮겨 악양성 내로 들어갔다.
 악양성은 언제나처럼 시끄럽고 북적대고 있었다. 이곳은 동정호가 가까워 늘 시인묵객이나 유랑하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는 곳이기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들 무엇엔가 들떠 보이는 곳이었다.
 어렵지 않게 조선에서 건너온 질 좋은 한지를 구입한 석추연은 그곳에서 준 푼돈을 들고 서원으로 향했다.
 이제 겨우 십삼 세밖에 되지 않아 아직은 주색(酒色)은 물론 도박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석추연이 늘 가는 서원은 악양성 내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고풍스런 건축 양식을 한 오래된 건물 안에는 두 사람이 겨우 드나들 통로를 빼곤 모두 서가로 채워져 있었다.
 앞쪽에는 최근에 들여 온 서적들이 있었고, 뒤쪽은 비교적 오래된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파지에 가까운 고본들이나 앞이나 뒤가 떨어져 나간 파본들은 모두 지하에 있었다.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할아버지?”
 서원의 입구에 놓인 탁자에 기대어 앉아 졸고 있는 칠십 정도 된 노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자, 흠칫 잠에서 깨어난 노인은 말없이 손짓으로 안으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늘 푼돈만을 들고 와 지하에 있는 파지에 가까운 쓰레기들을 구입해 가는 석추연을 노인은 좋아했다.
 우선 쓰레기를 돈 받고 팔 수가 있어 좋았고, 석추연이 왔다 가면 늘 깨끗이 정리정돈이 되기에 좋아했다. 그리고 허름한 입성으로 보아 부유한 집안의 자손으론 보이지 않으나 늘 해맑은 미소를 짓는 그가 귀여워서이기도 했다.
 그래서 늘 석추연이 가지고 온 돈보다 많은 서적들을 가져가도록 하고 있었다.
 서원의 안쪽으로 들어간 석추연은 곧 어두컴컴한 계단을 딛고 안으로 들어가 파본 더미를 뒤적였다.
 전에 보았던 진법에 관한 서적의 뒤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먼지를 뒤집어써 가며 서적 더미를 뒤지는 석추연의 모습에서 어떤 집념을 볼 수가 있었다.
 
 
 4
 
 
 행화촌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감돌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까마귀들이 날아와 마을의 나뭇가지 위에 줄지어 앉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때아닌 스산한 바람이 불어 와 마을의 나뭇가지를 흔들고, 마을의 개들은 모두 무엇인가에 놀랐는지 맹렬히 짖어 대고 있었다.
 유운학사와 주천명 부자는 서실에서 한창 제자백가와 삼고구류, 천문지리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오가고 있었고··· 모란선자와 소취는 내원에서 남자들의 의삼을 수선하고 있었다.
 석칠은 마을 외곽에 위치한 초옥에서 아픈 허리 때문에 끙끙 앓고 있었고, 나머지 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 모두가 제각기 생업에 매달려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행화촌 내로 언뜻 붉은 그림자가 스치더니 허름한 초옥으로 스며들었다. 적영(赤影)이 스며든 곳은 바로 석칠이 아픈 허리를 부여안고 끙끙대는 곳이었다.
 “연아(然兒)냐?”
 “쉿! 조··· 조용히 하시오! 악적들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니, 어디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없겠소?”
 “누··· 누구시오?”
 “나는 나쁜 사람은 아니오. 그러니 며칠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알려 주셨으면 좋겠소.”
 적영은 원래 백삼을 걸친 오십 정도 된 중늙은이였다. 그는 누군가에게 당했는지 백삼이 온통 피투성이라 붉게 보인 것이고, 지금도 벌어져 있는 상처에선 끊임없이 붉은 선혈이 흘러나와 방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한쪽 팔은 거의 끊어지려고 어깨 부근에서부터 덜렁거리고 있었고··· 가슴과 배, 그리고 허리와 등에서도 선혈이 샘솟듯 솟아나고 있었다.
 온통 피칠을 한 그의 모습은 마치 흉신악살과 다름없이 보였으나 오직 하나, 그의 눈만은 정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저기가 검에 베인 듯 너풀거리는 피에 젖은 백삼을 걸친 그 인물의 손에는 귀해 보이는 패검이 들려 있었는데, 검집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 이곳은 마땅히 숨을 만한 곳이 없는 마을입니다.”
 “그럼 은밀한 동혈(洞穴) 같은 것은 없소?”
 “동혈이라면 뒷산에 있기는 한데, 찾기가······.”
 “거기가 어딘지 알려 주시겠소?”
 방바닥에는 쉼없이 선혈이 떨어져 붉게 물들고 있었다.
 석칠에게서 동혈의 위치를 들은 적영은 곧바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석칠은 방바닥에 흐른 선혈을 닦아 내고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허리가 너무도 아픈 관계로 핏자국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적영이 사라지고 난 뒤 약 일다경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청삼을 걸친 대두도를 손에 쥔 우락부락해 보이는 약 십여 명의 괴한들이 마을로 진입해 들어왔다. 전부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삼인들은 마을 사람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이 집 저 집을 무단으로 침입하여 뒤지기 시작하였다.
 “말하라! 흰 옷을 입고 피를 흘리는 오십 살쯤 된 인물을 보지 못하였느냐?”
 눈에 띄는 마을 사람마다 반말로 물어 보곤 모른다고 대답을 하면 가차없이 대두도를 휘둘러 목숨을 앗아 갔다.
 “못 보았는데요. 으아아아악······!”
 “너도 못 보았느냐?”
 “그··· 그렇습니다. 아아아악······!”
 온 마을이 피투성이로 변한 것은 찰나의 시간에 불과하였다. 이십여 가구 백여 명 중 벌써 구 할이 괴한들의 손에 영문도 모르고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주씨 가문의 목조건물과 석칠이 있는 초옥, 그리고 두 채의 초옥만이 남았을 뿐이다.
 거칠게 문을 여는 바람에 석칠이 있던 초옥의 엉성한 문짝이 떨어져 나가며 괴한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누··· 누구시오?”
 “흰 옷에 피를 흘리는 오십 정도 된 인물을 보았느냐?”
 “모··· 모르오!”
 석칠은 순간적으로 이들이 결코 선량한 인물들이 아니며, 이들 때문에 마을 사람 대부분이 비명횡사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조금 전부터 들려 오던 비명 소리가 귀에 익었기 때문이었다.
 방안을 살펴보던 괴한들은 방바닥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보고는 서로를 마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 방안엔 비릿한 피 냄새가 있었고, 방바닥의 핏자국은 덜 말라 찐득거렸기 때문에 자신들이 추적하는 인물이 이 방에 들어왔었음을 눈치챈 것이었다.
 “흐흐··· 이 방에 들어왔던 그놈은 어디로 갔느냐?”
 “무··· 무슨 말씀을······?”
 석칠은 마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괴한들에게 순순히 말하고 싶지 않아서 짐짓 모르는 척했다.
 “흐흐··· 모르는 척하지 않는 것이 네놈의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이 방바닥에 묻어 있는 핏자국이 아직 덜 마른 것으로 보아 그놈이 여기에 왔다가 간 지가 얼마 안 되었다는 증거이니, 순순히 말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그건 소인이 흘린 핀데요?”
 “흐흐··· 이놈은 순순히 말할 놈이 아니야! 분근착골의 고통을 보아야 입을 열 놈이야!”
 괴한이 허리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반쯤 일어나 앉은 석칠에게 다가가 몇 군데의 혈도를 점하자, 석칠은 온몸을 경직시키며 고통에 찬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으아아악··· 으으으··· 아악······!”
 석칠이 온몸을 뒤틀며 고통에 찬 비명 소리를 지르자, 괴한들은 음흉한 흉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흐흐흐··· 빨리 불수록 네놈의 고통은 줄어들 것이다.”
 석칠은 온몸을 난자당하는 고통과 뼈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가는 고통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생전 처음 겪는 고통 속에서도 결코 아까 만났던 인물이 간 곳을 말하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위를 짐작해 보건대, 자신이 입을 열어 아까 본 인물이 간 곳을 말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물론 온 마을의 목숨들이 결코 부지될 수가 없음을 감지하였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악양으로 주천명의 심부름을 간 석추연의 안위가 걱정될 뿐이었다. 아까 자신에게 와서 억양으로 심부름을 하러 간다고 말하고 떠난 뒤 아직 돌아오려면 멀었기에 마음에 다소 위안이 되었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 주시오.”
 “흐흐··· 그러니까 빨리 말하란 말이야! 그러면 네놈의 고통이 끝나도록 해 주지!”
 “아아악··· 저··· 정말 모르오.”
 “흐흐···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괴한은 말을 하면서 손에 든 대두도를 휘둘러 석칠의 한쪽 팔을 떼어 냈다.
 “아아악··· 내··· 내 팔!”
 석칠은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 자신의 한쪽 팔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 방바닥에서 펄떡이는 것을 보고 혼절했다.
 거칠게 걷어차는 괴한의 발길질에 의하여 정신을 차린 석칠은 전신을 쥐어짜며 찢을 듯한 고통 속에서도 결코 입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다만 전신에 엄습하는 이 고통이 얼른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아아아악······!”
 “흐흐··· 그래도 말을 않겠다는 게냐?”
 “정말 모르오. 아아아악······!”
 괴한들은 석칠이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의 몸에 가해진 분근착골을 거둔 후 축 늘어진 석칠의 몸을 질질 끌고 이제 마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주씨 가문의 목조건물인 유운장으로 향했다.
 이미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황천으로 간 상태이고, 초옥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있었다.
 유운학사 주후연과 모란선자 탁교연 부부와 주천명과 소취는 마을에서 잇달아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에 마을에 변고가 생겼음을 인지하고 유운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웅크리고 있었다.
 유운장의 나무 문이 괴한의 발길질에 부셔져 버리고 그곳을 통하여 십여 명의 괴한들이 기절한 석칠을 개 끌 듯이 끌고 유운장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이제 이곳만 남았으니, 샅샅이 뒤져라!”
 이미 마을에 있던 이십여 채의 초가는 화마가 휩쓸고 가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괴한들의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자의 입에서 유운장을 뒤지라는 소리가 나오자, 십여 명의 괴한들은 집안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우당탕- 퉁탕- 와르르르-!
 집안에 있던 기물들이 쓰러지고 자빠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으나 아무도 찾을 수 없었던 괴한들이 마지막으로 뒤진 곳은 바로 주후연 등이 숨어 있던 작은 건물이었다. 평상시에 이곳은 허드레 물건을 놓아 두는 곳으로, 그 안은 몹시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는 상태였다.
 십여 명의 괴한들의 손에 이끌려 유운학사와 모란선자, 소취가 끌려 나왔다.
 “향주! 이 안엔 이들 셋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흐흐흐··· 그래? 저기 허름한 옷을 걸친 년을 끌어내라!”
 괴한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단번에 소취가 석칠과 부부임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소취가 괴한들의 손에 끌려 나올 때 석칠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니, 여보?”
 소취는 괴한들의 발치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석칠의 모습을 보고 대경실색을 하였다.
 석칠의 모습은 마치 흉신악살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어깨에선 지혈을 하지 않아 아직도 선혈이 샘솟듯이 솟구쳐 나오고 있었고, 튀어오른 선혈로 인하여 얼굴 전체가 뻘겋게 피칠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과도한 출혈로 인하여 안색은 창백한데, 그 위로 시뻘건 선혈이 묻어 있으니 마치 지옥에서나 볼 수 있는 악귀나찰이나 다름이 없었다.
 “으으으··· 여··· 여보!”
 석칠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아아악··· 여··· 여보!”
 소취는 눈앞의 악귀나찰의 모습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낭군임을 알곤 그만 혼절을 하고 말았다. 유운학사와 모란선자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운학사는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보이던 정겨운 초옥들이 모두 한 줌 재가 되어 연기만 뿌옇게 내고 있었고, 그토록 짖어 대던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음으로 보아 마을 사람들은 물론 개들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했음을 알았다.
 유운학사는 자신들이 숨어 있던 곳에 겨우 한 사람 정도 들어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그 안에 주천명을 숨긴 것이 천행임을 알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유운학사가 숨었던 곳은 예전엔 조상들의 위패를 보관하던 사당이었다. 사당엔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각종 집기들을 보관하기 위하여 땅을 파고 만든 보관 장소가 있었는데, 유운학사가 어릴 때 그곳에 숨어서 놀던 기억이 떠올라 그곳에 주천명을 숨긴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황천길로 떠나면서 지른 비명 소리에 겁에 질린 주천명은 아직 어린 소동답게 울음을 터뜨렸고, 자신을 그곳에 숨기려는 부친의 의도를 눈치챈 주천명은 한사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유운장 구석구석을 뒤지며 집기들을 쓰러뜨리는 소리에 자신들이 숨어 있는 사당으로 괴한들이 들이닥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 유운학사는 이를 악물고 주천명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쳐 혼절시킨 후 그를 그곳에 숨겨 놓은 직후 괴한들에게 끌려 나온 것이었다.
 
 
 제2장 행화촌(杏花村)에 불어닥친 겁난(劫亂)
 
 
 1
 
 “아악! 이 악적들!”
 혼절에서 깨어난 소취가 자신의 낭군을 그렇게 만든 괴한들에게 달려들며 소리를 질렀다.
 달려드는 소취의 발목에 괴한이 발을 대자 그대로 엎어져 버렸다.
 “으억!”
 “흐흐흐··· 이놈의 네년의 낭군이란 말이지? 좋아, 잘됐어!”
 괴한이 혼절해 있는 석칠의 명문혈 부근을 건드리자 석칠은 혼절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앞에 엎어져 있는 소취의 모습을 본 석칠이 소리를 질렀다.
 “여··· 여보!”
 “흐흐흐··· 좋아. 이제 네놈이 말하지 않곤 못 배기게 해 주지.”
 괴한들의 우두머리가 흉소를 터뜨렸다. 흉소와 함께 괴한들의 우두머리는 소취의 마혈에 지풍을 날려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소취의 엎어져 있는 자세는 얼굴은 석칠 쪽을 향했으나 하체는 유운학사와 모란선자가 있는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두 다리가 약간 벌어져 있는 자세였다.
 “흐흐··· 잘 들어라! 지금이라도 놈이 숨어 있는 곳을 말한다면 단숨에 숨통을 끊어 주겠으나, 만일 계속하여 입을 열지 않는다면 네놈의 마누라는 우리 형제들의 정액받이가 될 것이다.”
 괴한들의 우두머리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들은 괴한들의 얼굴엔 일제히 음산하고 징그러운 흉소가 어렸다.
 괴한들은 엎어져 있는 소취 뿐만 아니라 모란선자의 자태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입맛을 다시기도 하였다.
 유운학사와 모란선자는 눈앞의 괴한들이 무엇 때문에 석칠을 핍박하는지를 전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으나, 모란선자와 소취가 괴한들에게 돌아가며 험한 꼴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절망하고 있었다.
 ‘이··· 이 나쁜 놈들!’
 ‘아, 큰일났다. 오늘 이 자리를 빠져 나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인데······.’
 “크크크··· 이제 말을 하여라! 놈이 숨어 있는 곳을 순순히 대란 말이다!”
 ‘으, 이 나쁜 놈들! 이놈들에게 순순히 말한다 하더라도 오늘의 이 위기를 넘길 수가 없다. 어차피 죽을 거면 말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석칠은 괴한들의 눈에 번득거리는 욕정의 빛을 보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순순히 말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소취와 평소에 존경했던 모란선자가 동시에 괴한들에게 겁간을 당할 것이란 것을 눈치챘다.
 석칠은 물론 유운학사와 모란선자, 소취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유운학사는 그제서야 사태를 짐작하였다. 괴한들이 찾는 어떤 인물을 석칠이 숨겨 주고 있음을······.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아 설사 석칠이 말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괴한들에게 목숨을 잃을 것은 너무도 자명해 보였고, 자신과 석칠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윤간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고통을 감내해 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죽을 거면 차라리 먼저 죽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유운학사가 석칠에게 말했다.
 “이··· 이보게 석칠! 무언지 모르지만 절대 말하지 말게!”
 “아, 장주님······.”
 유운학사의 말에 석칠은 더욱 마음을 다져먹고 소리쳤다.
 “너희 같은 악적들에겐 절대로 말하지 않을 테니, 차라리 나를 죽여라!”
 “호오, 그래?”
 괴한의 우두머리는 다시 지풍을 날려 유운학사의 마혈마저 점해 버렸다. 유운학사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자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진을 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괴한이 그의 아혈마저 점해 말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유운학사와 석칠의 눈은 자신들의 처에게 고정되었다. 그들의 눈에선 어느 새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고, 마주 보고 있는 소취와 모란선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좋아! 네놈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 형제들! 두 년을 마음껏 즐기게.”
 “이··· 이 나쁜 놈들!”
 석칠이 분을 못 이겨 이를 악물자, 입 안에서 어금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눈에서는 붉은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흐흐흐··· 향주님, 고맙습니다.”
 괴한들 중 둘이 걸어 나와 하나는 소취의 옷을 찢듯이 벗겨 냈고, 다른 하나는 모란선자에게 다가가 멍청히 서 있는 그녀의 옷을 위에서 아래로 잡아당겨 찢었다.
 찌이이익··· 쭈아아악······!
 엎어져 있었던 관계로 소취의 등 뒤 의복이 찢어지며 허연 등과 튼실한 둔부가 햇살 아래 노출되었고, 모란선자의 앞섶이 길게 찢어지며 하얀 젖가리개만 남기고 상의가 모두 벗겨져 버렸다.
 여인들의 속살이 노출되자 괴한들의 입에선 음흉한 음소(淫笑)가 흘러나왔다.
 “흐흐흐흐··· 고년, 엉덩짝이 허연 게 맛이 있겠구먼.”
 “크크크··· 서 있는 년은 내가 먼저 맛을 볼 테니, 형제들은 조금 기다리시게.”
 “좋아! 오랜만에 회포를 풀겠구먼.”
 찌이이익··· 찌이익······!
 괴한들은 거칠게 모란선자와 소취의 의복을 찢어 버려 완전한 나신으로 만들었다.
 소취는 엎어져 있는 자세로 있었는데, 괴한이 의복을 찢는 바람에 엉덩이가 하늘로 향하는 민망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모란선자는 완전한 나신이 되어 서 있었다.
 ‘으으, 나쁜 놈들!’
 유운학사와 석칠은 너무도 분해 생각조차 잇지 못하고 자신들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괴한들에 의해 나신으로 변하는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음에 절망하고 있었다.
 소취와 모란선자는 모두 삼십이 되지 않은 나이였으나 각각 하나씩의 자식을 출산한 후 다소 몸이 불어 풍염한 중년여인과 처녀들의 날씬한 몸 사이 정도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유방은 처녀들보다는 약간 크나 아직 하나도 밑으로 처지지 않았고, 유두는 분홍과 자주의 중간 정도 되었다.
 잘룩한 허리와 양지유를 바른 듯한 편편한 복부 한가운데에는 앙증맞은 배꼽이 있었고, 각각 울창한 숲으로 비소를 살짝 감추고 있었다.
 소취는 자신이 취하고 있는 자세 때문에 자신의 비소가 괴한들의 눈에 온통 드러나 있음을 알고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죽을 것 같았다.
 모란선자는 약간 다리를 벌리고 서 있었기에 혹여 괴한들의 시선에 자신의 치부가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에 다리를 모으려고 하였으나 마혈을 제압당해 꼼짝할 수도 없음을 알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크흐흐흐··· 고년들, 제법 쓸 만한 몸매를 하고 있구먼. 좋아, 시작해라!”
 향주의 소리에 소취와 모란부인의 의복을 찢어발긴 두 괴한의 손이 여인들의 유방과 둔부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아아, 이 악적!”
 “아··· 안 돼!”
 여인의 힘없는 저항 속에 괴한들의 손은 분주히 움직여 여인들의 온몸을 더듬었다.
 유운학사와 석칠은 속수무책으로 괴한들에게 당하는 자신들의 아내를 바라보며 뇌 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모란선자와 소취는 괴한들의 징그러운 손길 아래서 자신들의 몸이 서서히 타오르는 것을 느끼고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자신의 몸이 석녀처럼 차갑게 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의 몸으로 태어난 죄 때문에 그녀들의 비소에선 어느 새 애액이 흥건히 흘러나와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괴한들이 하의를 벗자 그 안에선 바짝 곧추선 괴한들의 검붉은 흉기가 튀어나왔다. 한 놈의 것은 어찌나 큰지 마치 우마의 그것과 대동소이했다.
 “크흐흐흐··· 이거 앙탈을 부리지 않으니까 재미가 없구먼.”
 자신의 앞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진 채 엎드려 있는 소취의 비소에 자신의 흉기를 문지르던 괴한이 소취의 마혈을 풀자, 소취는 재빨리 앞으로 기어가 괴한의 손길을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괴한의 우악스런 손에 잡혀 좌우로 둔부를 흔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괴한의 흉기는 소취의 비소에 깊숙이 파고들게 되었다.
 “아악! 아··· 안 돼!”
 이미 소취의 비소는 괴한의 우마의 그것과도 같은 무지막지한 흉기에 꿰뚫려 버린 상태였다.
 소취는 자신의 하체가 온통 파헤쳐지는 듯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소취는 자신과 석칠의 첫 경험에서 이미 파과의 고통을 맛보았으나, 오늘 느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괴한의 흉기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괴한은 마치 마을 어귀에서 홀레를 붙는 개처럼 소취의 둔부를 두 손으로 잡은 채 뒤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새 소취의 비소에선 괴한의 흉기에 연한 속살이 찢어져 붉은 선혈이 허벅지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모란선자는 괴한이 자신의 가슴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러 대자 절망의 눈물을 흘렸다.
 괴한의 손이 자신의 유두를 거칠게 꼬집으며 애무를 하자, 어느 새 자신의 비소가 축축이 젖어 드는 것을 느끼고 낭군 앞에서 다른 사람의 손길에 흥분하는 자신의 몸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저주스러웠다.
 괴한은 모란선자를 안아 눕힌 후 아랫배와 울창한 수림을 더듬으며 그 아래 감추어진 비소를 찾았다.
 모란선자는 자신의 남편인 유운학사도 이 모습을 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너무도 치욕스러워 봉목을 질끈 감아 버렸다.
 “크흐흐··· 아주 홍수가 났구먼. 좋아, 이제 이 낭군님이 네년을 열락의 세계로 이끌 테니까 기대하라고.”
 “······.”
 모란선자는 자신의 남편인 유운학사와도 한 번도 이렇게 민망한 정사를 나누지 않았기에 몹시도 부끄러웠으나, 하체에서 올라오는 쾌감을 이기지 못하여 어느 새 두 손으로 괴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좌우로 둔부를 흔들고 있었다.
 소취는 자신의 등 뒤에서 끊임없이 왕복하고 있는 괴한의 흉기에 의하여 처음엔 자신의 목구멍까지 꿰뚫리는 고통을 느꼈으나 어느 새 고통은 사라지고 강렬한 쾌감이 피어오르자 두 손으로 눈앞의 잡초를 으스러져라 움켜쥐고 있었다.
 유운학사와 석칠은 생전에 이런 치욕스런 모습을 보는 것이 몹시도 안타까웠으나, 자신들은 현재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음을 절감하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모란선자를 희롱하던 괴한의 흉기가 그녀의 밀궁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봉목을 감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소취도 괴한들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몸이 저주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하체에서 전신으로 물밀듯이 밀고 올라오는 쾌감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모란선자와 소취는 무려 한 시진이나 괴한들에게 겁간을 당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그녀들의 몸엔 여기저기 멍 자국이 났으며, 밀궁에서는 괴한들이 남긴 흔적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석칠은 자신의 아내가 눈앞에서 괴한들에게 윤간당하는 모습에 그만 제정신을 잃고 실성하고 말았다.
 “흐흐흐흐·········!”
 눈동자의 초점은 사라졌고, 안광도 나오지 않았다. 입은 벌린 채였고, 무엇 때문인지 안면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유운학사는 눈에서 흐르던 피눈물 때문에 마치 악귀나찰을 보는 듯한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크흐흐··· 이놈에게선 더 이상 알아볼 필요가 없으니, 가자!”
 향주라 불리우던 인물의 손에 들고 있던 대두도가 허공과 함께 석칠의 목을 베어 버렸다.
 석칠은 웃고 있다가 그만 목이 없는 시체가 되고 말았다.
 유운학사의 목도 허공으로 튀어오르고 잘린 부분에선 선혈이 분수처럼 솟아났다.
 “아아악······!”
 누워 있던 모란선자와 소취가 자신들의 낭군의 비명성을 듣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두 명의 괴한이 다가와 대두도를 휘둘렀다.
 “으아아악······!”
 “아아악······!”
 모란선자와 소취는 심장 부위가 베어져 죽었다.
 이로써 행화촌에 살던 백여 명에 이르던 마을 주민 중 주천명과 석추연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한날에 황천길로 간 것이다.
 “아까 이놈을 잡아 왔던 초옥 근처에서 혈흔을 찾아 그놈을 수색하기로 한다! 심한 부상을 당한 몸이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고, 이 근처 어딘가에 은신해 있을 것이다. 자, 이 집에 불을 지른 후 이곳을 떠난다.”
 “예, 향주님!”
 괴한들은 집안 이곳저곳에 불을 놓고 유운장을 떠났다.
 유운장은 금세 화마에 휩싸였다. 목조건물이어서 쉽게 타오른 것이었다.
 주천명이 늘 앉아 글공부를 하던 서실은 물론 수천 권의 장서가 수집되어 있던 유운학사의 서실마저 완전히 화마에 싸여 훨훨 타고 있었다.
 대략 한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유운장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희뿌연 연기만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무림인들의 이해 다툼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양민 백여 명이 황천으로 가 버린 것이다.
 
 
 2
 
 
 소림의 장로인 백운선사(白雲禪師)는 악양을 떠나 동정호로 가고 있었다. 악양에 있는 자신과 동배분의 속가제자인 호운수사(豪雲秀士)의 칠순 잔치에 참석한 길에 오랜 숙원이었던 동정호의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서 가던 중이었다.
 ‘아니, 저기서 웬 연기가 이렇게 나지?’
 백운선사는 악양에서 동정호로 가려면 지름길이 따로 있어 행화촌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으나 초행길인지라 길을 잘 못 잡은 것이었다.
 백운선사는 악양성의 성곽을 막 벗어나자마자 약 삼십 리 밖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발걸음을 빨리했다.
 백운선사가 가고 있는 길은 좁기는 하지만 관도인지라 일반 양민들이 행여 놀랄까 경신술을 쓰지 않고 그냥 발걸음만 빨리한 것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행화촌의 어귀에 도착한 백운선사는 이 작은 마을에 겁난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을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시신들이 하나같이 목이 없거나 깊은 상처를 벌리고 있어 무림인의 소행임을 안 그는 불호(佛號)를 읊을 수밖에 없었다.
 “아미타불······!”
 끔찍한 만행의 현장에서 혹시 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없나를 살피던 백운선사는 안타깝게도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 누가 양민을 상대로 이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시신들의 상처를 살펴보던 백운선사는 시신들의 상흔에서 만행을 저지른 자의 무공이 고수가 아님을 알았다.
 상흔은 단순히 깊고 베어진 면이 거칠어 강호에서 삼류 정도 되는 자들의 소행임은 짐작할 수가 있었으나, 어느 문파의 독문무공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직도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유운장이 있던 자리로 온 백운선사는 비궁에서 피를 흘리고 숨져 있는 모란선자의 시신과 가슴이 베어져 심장을 드러내고 있는 소추의 발가벗은 시신을 보고 또 다른 만행이 있었음을 알고 탄식하였다.
 “아, 도대체 누가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아미타불··· 부디 저승에선 극락 왕생하시길······.”
 소취와 석칠, 유운학사와 모란선자의 시신을 한 곳으로 모은 백운선사는 합장을 하며 이들의 극락왕생을 빌어 주었다.
 이미 마을의 집이란 집은 모두 불타 버려 이들의 시신을 화장할 수가 없음을 알게 된 백운선사는 시신들을 한 곳으로 모아 놓고 장력을 날려 구덩이를 팠다.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의 장로답게 백운선사의 내공은 무려 팔십 년에 달해 쉽사리 구덩이를 팔 수가 있었다.
 퍼어어엉- 파아앙-!
 제법 큰 구덩이가 파지자 백운선사는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그곳에 몰아넣은 후 커다란 봉분을 만들었다.
 “아미타불······!”
 합장을 한 후 봉분을 향해 정중히 절을 한 백운선사가 막 행화촌을 떠나려는 무렵 잿더미가 들썩거리며 약간씩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당의 땅 속에 혼절한 채 있던 주천명이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오려는 움직임이었다.
 사당 역시 화마가 휩쓸었으나 불길이 아래로 향하지 않고 위로 향해 다행히 목숨을 건진 주천명은 있는 힘을 다해 위를 덮고 있는 널빤지를 밀어 보았으나 널빤지 위에 잿더미가 올려져 있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십사 세가 된 주천명이 들어올리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올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 살려 주세요! 아버님!”
 백운선사가 마을의 시신을 모두 모으는 동안에 정신을 차렸던 주천명은 벌써 반식경이나 용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님! 소자, 명아(命兒) 좀 꺼내 주세요! 어머님!”
 백운선사는 잿더미 아래에 아직 소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살아 있음을 알고 장력을 날려 널빤지 위에 있던 잿더미를 한쪽으로 날려 보냈다.
 퍼어어엉-!
 잿더미가 장력에 날려 가자 허공에는 분분한 잿가루가 날아다녔다.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것도 있어 붉은 티가 허공을 나르는 모습은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널빤지의 틈으로 빛이 들어오자, 주천명은 힘껏 널빤지를 밀어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잿가루가 허공에 어지럽게 날리고 있는 중이라 주천명은 곧 재 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아버님! 어머님! 어디 계세요?”
 주천명이 입가에 두 손을 대고 손나팔을 만든 후 소리치는 모습을 본 백운선사의 눈길엔 안타까운 눈물이 맺혔다.
 ‘아미타불··· 아, 저 어린 것을 두고······.’
 허공을 어지럽게 비산하던 잿가루가 가라앉자, 주천명은 마을이 없어진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백미의 노승을 볼 수가 있었다.
 “스님 할아버지! 혹시 저희 부모님을 보지 못하셨나요? 지금 어디 계시죠?”
 “아미타불···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주천명이에요. 저희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죠?”
 백운선사는 주천명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다 시선을 새로 만든 커다란 봉분으로 향했다.
 백운선사의 눈길을 따르던 주천명은 새로 만든 붉은빛이 도는 봉분을 보고 자신의 부모가 모두 악적들의 손에 죽었음을 눈치챘다.
 “으허억··· 어어엉··· 아버님! 어머님! 소자 혼자 어쩌라고······.”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주천명이 말을 잇지 못하고 혼절하자 백운선사는 그의 혼혈을 점했다.
 사람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친인을 잃게 되면 종종 혼절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냥 두면 원기를 크게 상하게 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진정하도록 그의 혼혈을 짚은 것이었다.
 “아미타불··· 이 어린 것을 홀로 두고··· 아, 어떻게 해야 하나?”
 백운선사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주천명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백운선사는 행화촌의 마을 주민 전체가 누군가에게 학살을 당했으나 그 흉수가 누구인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시신에 남겨진 상흔이 너무도 평범하였기 때문이다.
 주천명을 품에 안은 채 마을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아도 흉수의 정체를 밝힐 만한 아무런 단서를 발견할 수가 없었던 백운선사는 주천명을 안은 채 행화촌을 떠났다.
 마을에는 주천명이 기거할 집이 한 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 이제 겨우 십사 세인 주천명이 살아갈 방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운선사는 의지할 곳 없는 주천명을 소림으로 데려가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백운선사가 주천명을 안고 행화촌을 떠난 지 약 한 식경이 지나자 백여 명의 청삼인들이 행화촌에 들이닥쳤다.
 “남 향주 일행이 먼저 이곳에 당도한 모양이다. 너희들은 흩어져 남 향주가 남긴 암호를 찾아보아라!”
 백여 명의 괴한들이 일제히 산개하여 행화촌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청삼인들은 아까 행화촌에 겁난을 일으켰던 십여 명의 청삼인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향주라 불리우던 자의 소매에 금빛 용 한 마리가 수놓아졌던 것을 감안하면 백여 명 중 적어도 십여 명은 향주급의 인물임을 알 수가 있었다.
 소매에 두 마리의 황룡이 수놓아져 있는 인물들이 이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로 보였다.
 삐이익-!
 “우리보다 먼저 누군가가 다녀갔다!”
 행화촌의 구석구석을 면밀히 살피던 무리들 중 한 명이 호각을 불자, 모두들 그쪽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백여 명의 괴한들은 마을 어귀에 새로 만들어진 거대한 봉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음, 누군가가 다녀갔다. 봉분은 만들어진 지 아직 한 식경이 지나지 않아 보인다. 흩어져서 다른 것을 찾아보도록!”
 괴한들이 다시 산개하여 사라지고 약 일다경이 지나 다시 호각 소리가 들렸다.
 삐이이익-!
 “남 향주가 간 방향을 알았다!”
 백여 괴한들의 몸이 일제히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고, 그들의 신형은 더 이상 행화촌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3
 
 
 행화촌의 마을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목유산(木乳山)은 산의 초입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나 안으로 들어가면 계곡이 깊고, 절벽이 많으며, 울창한 수림으로 빽빽이 들어차 있는 험준한 산이다.
 석칠이 허리를 다친 곳도 바로 이 목유산에서 였다.
 허리를 다치기 전 석칠은 목유산에 땔감을 구하러 들어갔다가 우연히 석청(石淸 : 산 속의 나무 틈이나 바위 틈에 벌들이 모아 놓은 가장 좋은 꿀)을 발견하고 그것을 채취하기 위하여 절벽을 기어오르다 그만 미끄러져 떨어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친 것이다.
 석청을 채취하여 악양성 내로 가지고 가 팔면 제법 은자를 만질 수 있어, 돌아오는 원단에 석추연에게 새옷 한 벌을 사 주려 하다 다친 것이다.
 목유산에 땔감을 구하러 자주 가던 석칠은 언젠가 광풍폭우가 몰아치는 바람에 산중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적이 있었다.
 낙뢰와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던 석칠은 우연히 작은 동혈을 발견하였다.
 동혈의 입구엔 잡초들이 무성히 자라고 있어 얼핏 보아서는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입구는 사람 하나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으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져 팔 척 장신의 거한도 서서 돌아다닐 만큼 컸다. 바닥에는 짐승들이 물어다 놓았는지 마른 풀들도 있어 비를 피하고 쉬기에 좋은 곳이었다.
 석칠이 자신의 초옥으로 찾아 든 부상자에게 알려 준 은신처가 바로 이곳이었다.
 이 동혈에는 지금 석칠의 초옥을 방문하였던 오십 정도 된 백삼인이 결가부좌의 자세로 운기토납을 하며 내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벗어 버린 상체는 나이답지 않게 탄탄하고 탄력이 있어 보였다. 상체 이곳저곳에는 흉칙한 상흔들이 가득했는데, 질 좋은 금창약이라도 발랐는지 서서히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었다.
 삐이익- 삐이이익-!
 목유산의 이곳저곳에서 호각을 불며 서로에게 신호하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지금 목유산에는 일백십여 청삼 괴한들이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십 정도 된 백삼인이 은신해 있는 동혈은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 앞을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동혈 속에서 내상을 치료하고 있는 인물은 강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신투였다.
 그의 외호는 무령신투(無靈神偸)였다. 나이는 일백여 세 정도 되었으며, 팔십 년 전부터 그가 목표로 한 물건 중 그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무공은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의 장문인과 같은 수준에 있었다. 그는 기관진식과 경공에 일절을 이루고 있으며, 신투술은 그야말로 강호제일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것들을 훔쳐 왔으나 오늘처럼 이렇게 심한 부상을 입은 적은 없었다.
 현재 동혈의 입구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있을 뿐만 아니라 기문진까지 펼쳐져 있어 청삼 괴한들이 그의 종적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혈 부근에서 계속하여 울리던 호각 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것으로 보아, 청삼 괴한들이 목유산의 깊은 계곡 쪽으로 향하는 듯하였다.
 
 
 4
 
 
 석추연은 악양에 있는 서원의 지하에서 한참 동안이나 파지들을 뒤적이다 먼지만 잔뜩 묻은 모습으로 밖으로 나왔다.
 “안녕히 계세요, 할아버지!”
 “엉? 어, 그래. 잘 거거라.”
 서원의 입구에서 침까지 흘리며 잠을 자던 노인이 석추연의 말소리에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지 고개를 수그렸다.
 석추연은 서원 밖으로 나오자 자신이 얼마나 오래 서원의 지하에서 머물렀는지를 알았다.
 들어갈 때는 약 미시 무렵이었는데, 나와서 하늘을 보니 신시가 지나 유시쯤 된 것 같았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걸어도 유운장까진 적어도 두 시진 정도 걸릴 터이니, 해시 무렵이 되어야 당도할 것 같았다.
 “후후··· 오늘도 저녁 먹긴 틀렸군.”
 너무도 늦은 시간에 도착하면 자신에게 밥을 차려 줄 모친인 소취가 피곤에 지쳐 잠들어 있기에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소취를 깨운 적이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한 끼를 굶고 말지, 피곤한 어머니를 깨워 밥을 달란 소리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난 소취는 그때마다 늘 석추연을 나무라곤 하였다.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어도 주천명의 명으로 악양에 다녀오면 꼭 깨워서 밥 달란 소리를 하라는 말을 하였다.
 소취와 석칠은 비록 배운 게 없고, 가진 게 없어도 이 세상의 어떤 부모보다도 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였다.
 자신들이 굶주리더라도 절대 석추연의 끼니를 거르지 않았으며, 맛있는 것이 있으면 감춰 두었다가 꼭 먹이곤 하였다.
 석추연이 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혹여 석추연이 위험한 곳으로 기어가지 않을까 하여 한시도 눈을 뗀 적이 없는 부모였다.
 석추연은 오늘 밤에 모친인 소취를 깨워야 하나 마나 하는 상념에 빠져 유운장으로 향했다.
 석추연이 유운장으로 가는 동안 일몰이 되어 사위가 어두컴컴해졌다. 그 동안은 늘 가던 길이기에 두려움 없이 길을 갈 수가 있었는데, 오늘은 왠지 으시시한 기분이 들어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해시 무렵이 다 되어서야 행화촌 어귀에 도착한 석추연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평상시 같으면 마을 어귀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나면 온 동네의 개들이 맹렬히 짖어 댔는데, 오늘은 너무도 고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응? 이상하네? 왜 이렇게 조용하지?’
 마침 달이 없는 그믐이었기에 사위가 너무도 어두워 앞이 보이질 않았기에 아직 마을 전체가 불타 버린 것을 알지 못하는 석추연은 자신의 부모가 잠들어 있을 마을 어귀의 초옥 쪽으로 향했다.
 ‘응? 우리 집이 왜 저렇지?’
 자신의 집 앞에 거의 다 왔을 때가 되서야 초옥의 윤곽이 이상하게 보였다.
 이상을 느낀 석추연이 한걸음에 초옥으로 가 보니, 초옥은 이미 재가 되어 있었다.
 ‘아, 아니? 집이 홀랑 타 버렸단 말인가?’
 그제서야 발걸음을 빨리해 마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모든 초가들이 잿더미로 변해 버렸고, 마을에 아무도 없다는 것만을 확인하였을 뿐이다.
 “아버님! 어머님! 어디 계세요?”
 자신의 손가락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 일일이 만져 보아야 그게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온 마을을 더듬고 다니며 있는 대로 소리를 쳐도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만 그 전에 없던 커다란 흙더미만 새로 생겨난 것을 알아 냈을 뿐이다.
 밤새 마을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 어느 새 날이 서서히 밝아 오기 시작하였다.
 밤새 돌아다니다 이곳저곳에 긁혀 낡은 마의의 여기저기가 찢겨져 나풀거리고 있었고, 온몸에 재를 뒤집어써 시커매진 석추연은 여명의 빛에 자신이 흙더미라고 생각했던 것이 새로 생긴 봉분인 것을 알았다.
 아직도 흙이 마르지 않아 뻘건 색을 띠고 있는 봉분의 앞에는 누가 세웠는지 한쪽 면이 거칠게 다듬어진 나무가 꽂혀 있었다.
 높이는 대략 오 척 정도 되었고, 베어 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수액이 흐르고 있었다.
 거칠게 다듬어진 면에는 누가 썼는지 형편없는 필체로 글이 쓰여져 있었다.
 
 <여기 무고한 양민들이 의리를 지키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악마의 손길에 스러졌다.
 전 무림인들을 대신하여 이들의 명복을 빈다.
 무령신투(無靈神偸) 읍립(泣立).>
 
 봉분 앞에 박혀 있는 나무는 다름 아닌 비석이었다.
 석칠이 가르쳐 준 동혈에서 요상을 마친 무령신투는 청삼인들이 사라진 방향과 반대인 행화촌을 거쳐 커다란 시진을 이루고 있는 악양으로 잠입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래야 자신의 상처를 완치시키는 시간을 벌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악양에선 은신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었다.
 목유산을 벗어나 행화촌으로 몸을 날리던 무령신투는 행화촌이 있던 자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고 행화촌에 무슨 변고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을 어귀에 있던 석칠이 아픈 허리를 부여안고 누워 있던 초옥은 벌써 잿더미가 된 지가 오래였고, 이십여 채에 달하던 초가들 모두가 더 이상 초가의 형상을 이루고 있질 않았다.
 유일한 목조건물이었던 유운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 한 마리까지 모두 사라진 적막한 행화촌을 둘러보던 무령신투는 마을 어귀에 있는 봉분을 보고 행화촌의 모든 양민들이 이미 죽었으며, 누군가가 그들을 한 군데 몰아놓고 봉분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으, 나쁜 놈들! 이들에게 내 행방을 묻다가 대답을 않자, 모두 죽여 버린 것이구나. 아, 나 하나 때문에 무고한 양민들이 이토록 많이 죽어 갔으니··· 이 업보를 어찌 다 갚으라고······.’
 무령신투는 석칠이 자신이 숨어 있는 동혈의 위치를 말하지 않아 마을 전체가 살해당했음을 알고 분노했다.
 무령신투는 마을 어귀에 서 있던 나무를 베어 한쪽 면을 깎아 내어 그것으로 비석을 대신하여 꽂아 놓은 후 쓸쓸히 악양으로 향했다. 악양까지는 관도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르나 아직 추적을 당하는 몸이라 관도로 가지 않고 숲을 헤치고 갔기에 석추연과 마주치지 않은 것이었다.
 ‘하···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그··· 그럼 어머님과 아버님도?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고 말고.’
 석추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악양에 다녀오는 동안 행화촌의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눈물을 흘리던 석추연은 무엇을 생각해 냈는지 미친 듯이 봉분의 흙을 파헤쳐 내리기 시작하였다.
 머리는 산발하였고, 눈에서는 시뻘건 광기까지 보였다.
 “흐흑··· 아버님! 어머님! 흐흐흑······!”
 봉분을 이루고 있던 흙이 사방으로 흩어져 내렸다.
 여명 무렵부터 파헤쳐지기 시작한 봉분은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봉분의 형체를 잃었다.
 마땅한 연장 하나 없이 맨손으로 흙을 파헤쳤기에 석추연의 손끝은 터져서 시뻘건 피가 흘러나왔다.
 신시 무렵이 되어서야 봉분을 이루고 있던 흙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마을 사람들의 시신들이 아무렇게나 포개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조씨 할아버지! 흐흐흑··· 양씨 할머니! 흐흐흑······!”
 석추연의 손에 의해 마을 사람들의 시신들이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졌다.
 머리와 몸체가 분리된 시신들은 입고 있는 의복으로 짐작하여 머리와 몸통을 맞춰 놓았다.
 주천명과는 달리 자유스럽게 마을의 이 집 저 집을 드나들었기에 어느 집에 무엇이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아는 석추연의 손길은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시신의 몸과 머리, 혹은 팔 등을 맞춰 놓을 수가 있었다.
 백여 구의 시신들이 발굴되고 나서야 발가벗은 모란선자의 시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흐흑··· 마님!”
 모란선자의 시신 밑으로도 몇 구의 시신이 더 있는 것으로 짐작되어 자신의 부모가 이미 비명횡사했음을 감지한 석추연의 두 눈에선 붉은 피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흑··· 아버님! 어머님!··· 소자 혼자 어찌 살라고··· 소자 혼자 어찌 살라고 이렇게 가셨습니까?”
 모란선자의 시신 다음에 소취의 시신이 있었다.
 소취의 시신을 구덩이에서 힘겹게 끄집어 낸 석추연은 한동안을 시신의 배 위에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
 “어머님! 어어엉······!”
 다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석추연은 유운학사의 시신과 부친인 석칠의 시신을 구덩이 밖으로 끌어 올렸다.
 석칠의 시신 아래에 부친의 머리가 있었다.
 부친인 석칠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든 석추연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새벽 여명 때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눈물을 흘렸는지라 더 이상의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눈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점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버님! 소자만 두고··· 소자만 두고 이렇게 가시면··· 어어엉엉······!”
 유운학사와 석칠의 시신을 끝으로 더 이상의 시신은 없었다.
 한참 동안을 석칠의 시신에 엎드려 피눈물을 흘린 석추연은 이를 악물고 일어나 앉았다.
 이미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 일몰이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모친인 소취와 부친인 석칠의 시신 한가운데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석추연의 머릿속으로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꿈이야! 이럴 순 없어······.’
 밤새 한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석추연은 다시 새로운 여명이 밝아 오면서 현실을 깨달았다.
 “흐흐흑흑··· 안 돼! 누가··· 도대체 누가··· 으으으으··· 아아아악······!”
 머리를 감싸쥐고 마을의 밖으로 향해 뛰어나간 석추연은 한동안을 미친 듯이 뛰어갔다.
 목유산의 어귀에 흐르는 계류에 도착한 석추연은 엎드려서 물을 마시고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악양으로 간 사이에 누군가가 마을에 와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도대체 누가 우리 마을 사람들과 원한이 있어 그토록 끔찍하게 죽였을까? 아니야! 마을 사람 전체와는 결코 원한이 있을 수가 없어!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우리 마을은 가난해서 유운장을 빼고는 재물이 있는 집도 없으니, 단순한 도적들의 소행은 아닌 듯한데··· 마을의 다른 아줌마들은 모두 옷을 입고 죽었는데, 왜 어머님과 마님의 옷만 벗겨져 있지? 무령신투란 사람이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듯한데, 무령신투는 누구지? 이름에 훔칠 투자를 넣는 사람도 있나? 무령신투라는 사람을 찾아 그에게 물어 보는 수밖에 없구나.'
 석추연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직 경험이 너무도 없는 어린 소년이었기에 자신의 모친인 소취와 모란부인의 비소에 있는 교합의 흔적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다시 마을로 돌아간 석추연은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면 구한 연장으로 마을 뒤쪽의 아담한 둔덕의 양지 바른 쪽의 땅을 팠다.
 여명 무렵부터 땅을 파기 시작하여 마을 사람들의 봉분을 만들었다.
 봉분마다 조그만 돌들을 힘겹게 주워 와 그것에 봉분의 임자들의 이름을 적었다. 마땅히 적을 것이 없기에 숯덩어리로 썼다.
 석칠과 소취의 묘는 봉분 중에서 가장 볕이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하는 곳을 골라 묻었다. 유운학사 부부의 묘는 석칠 부부의 묘의 바로 곁에 있었다.
 삼 일 만에 오십여 기의 봉분이 생겼다.
 비록 모양이 조악하기는 하나 평소 마을 사람들의 친분 관계를 고려해 가까운 순서대로 묻은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를 땅 속에 묻은 것이었다.
 묻으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마을 사람 일백십구 명 중 주천명만이 없었다.
 주천명의 시신이 없자 다시 구덩이로 돌아가 샅샅이 뒤졌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의 초옥이 있던 자리들도 다 뒤져 보았으나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오십여 기의 봉분마다 돌아다니며 큰절을 하고 명복을 빌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부디 극락 왕생하세요. 내세에 다시 태어나면 연아를 전처럼 귀여워해 주시고요. 아줌마, 아저씨! 극락 왕생하세요. 내세엔 싸우지 마시고 다정하게 사세요.”
 고인들의 혼령들이 극락 왕생할 수 있도록 정성껏 빌어 준 석추연은 유운학사 부부의 묘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장주님, 마님! 공자님은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디 극락 왕생하십시오!”
 유운학사의 묘 앞에 한참을 앉아 있던 석추연은 자신의 부모인 석칠과 소취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 소자 연아가 목숨을 부지한 것은 모두 아버님 덕입니다. 아버님께서 허리를 다치시지 않으셨다면 소자도 아버님처럼 황천으로 향했을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일 겁니다. 소자는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마을의 어르신들을 해친 흉수를 꼭 찾아 원수를 갚아 드리겠습니다. 무령신투라는 사람을 찾아 길을 가려는 소자를 보살펴 주시고 소자의 앞날을 지켜봐 주십시오. 원수를 다 갚은 후 이곳에 돌아와서 아버님 어머님을 모시고 살겠습니다.”
 석추연은 오십여 개의 봉분을 만들면서 시신들의 상흔을 자세히 살폈다.
 석칠의 목뼈는 예리한 칼에 한 번에 베어진 것처럼 매끈하였다.
 모란부인은 예리한 칼로 비소로부터 쑤셔 넣었기에 죽었으며, 소취의 심장도 갈비뼈와 함께 베어진 것으로 보아 도를 사용하는 사람이 흉수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아직 무림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무림인이 어떤 사람들인지조차 모르는 석추연은 막연히 자신이 아직은 원수를 만난다 할지라도 원수를 갚을 수가 없으며, 이 다음에 자신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야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기 위해선 힘을 길러야 하고, 자신도 도와 같은 무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오십여 기의 봉분에 일일이 절을 하고 명복을 빌어 준 석추연은 사 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아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으나 이를 악물고 악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석추연의 품안엔 조선에서 건너 온 질 좋은 한지를 사고 남은 은자가 두 냥 세 푼이 남아 있었다.
 우선은 악양의 객잔에 가서 배를 채운 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5
 
 
 악양성 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객잔은 악양객잔이었다. 생긴 지가 무려 오백 년이 넘는 악양객잔은 모두 오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층마다 화려한 오색 단청이 현란하게 그려져 있으며 탁자들도 모두 쇠처럼 단단한 흑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웬만한 도검으론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층이 올라갈수록 가격이 많이 드는데, 일층이 가장 넓고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다.
 이층은 주로 상인들과 강호의 무인들, 강호를 유유자적 유람하는 시인묵객들이 사용하고··· 삼층은 관청의 관리들이나 비교적 부유한 상인들과 은자가 두둑한 무림인들이 사용한다.
 사층은 고관대작이나 들 수 있으며, 강호 유수의 방파의 지존들이나 들 수 있다.
 오층은 황족이나 천하에 손꼽히는 재력가들이나 들 수 있는 곳이다. 바닥은 파사국에서나 구할 수 있는 양탄자가 발목까지 푹푹 빠질 정도이며, 특이하게도 오층의 점소이들은 모두 천하절색의 미인들이다. 오층에서 한 끼의 식사를 하려면 한 사람당 적어도 황금 열 냥 이상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황금 열 냥이면 다섯 사람이 이 년 동안 편히 먹을 수 있는 금액이니, 웬만한 사람은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이다.
 이층부터 오층까지는 각기 다른 계단을 이용하게 설계가 되어 있으며, 오층에 오르면 악양성 내의 모든 정경이 한눈에 잡힐 듯이 보임은 물론 멀리 동정호의 망망한 수평선도 보이기에 황실의 황족들이나 재상 정도의 품계를 가진 관리들과 부유한 거부들이 오르곤 하는 곳이다.
 악양객잔은 그 유서만큼 없는 게 없는 객잔이다. 상어 지느러미 요리는 물론 웅장(熊掌)이라 하여 곰의 발바닥 요리와 목사탕이라 하여 모기의 눈에 갖은 양념을 다 집어넣고 볶은 음식도 있다.
 뿐만 아니라 강호에 있는 모든 종류의 술이 다 있었고, 객잔의 후원엔 유랑하던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객방이 즐비하였다.
 객방도 품계가 있어 일급부터 오급까지 구분되어 있는데, 일급의 경우는 하룻밤 유하는 데만 황금 닷 냥이 든다. 반면에 오급은 하룻밤에 은자 한 냥이면 된다.
 악양객잔은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다 쉬고,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된 곳이다.
 그런 악양객잔 앞에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친 석추연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 서 있었다.
 석추연은 행화촌을 떠나 이곳에 오기 전에 목유산 자락을 흐르는 계류에서 깨끗이 목욕을 하고 옷도 빨아서 입었다.
 마을이 모두 불타 버렸기에 다른 의복으로 갈아입을 수도 꿰매 입을 수도 없었기에, 그냥 깨끗이 빨아서 입기만 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십수 차례나 악양성 내로 들어왔었지만 한 번도 객잔에 들른 적이 없는 관계로 이곳에 가면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 알지 어떤 절차를 밟아 안으로 드는지, 그리고 무엇을 주문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깨끗이 목욕을 하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한 석추연은 아직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고 준수한 용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각 층을 오르는 계단을 통하여 오르는 것을 보고 석추연도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일층의 음식값이 가장 싸기는 하나 일층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우선 남 보기에도 초라해 보였고, 악양객잔 일층에 들어가 천대받으며 음식을 먹느니, 차라리 다른 객잔에 가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동등한 대접을 받으며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층을 이용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그곳에 도착한 것이 화근이었다.
 석추연이 무심코 선택한 계단은 오층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힘들여 오층까지 올라가던 석추연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야! 너, 빨리 안 내려와?”
 “저요?”
 석추연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밑에 서 있던 험상궂게 생긴 삼십 정도의 장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로 빨리 내려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석추연이 말했다.
 “저, 나는 여기서 식사를 하려고 그러는데요?”
 “야, 빨리 안 내려와? 빨리 내려오란 말이야!”
 석추연은 장한의 험상궂은 표정에 슬그머니 겁이 나 아래로 내려오며 생각했다.
 ‘왜 내려오라고 그러지? 다른 사람들이 올라갈 땐 아무 소리도 않더니만··· 혹시 내가 너무 어려서 그러는 건가?’
 “야, 이놈아!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올라가? 거렁뱅이 주제에 감히 악양루의 오층을 올라가? 누구 작살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게야?”
 “거렁뱅이요? 아저씨, 나는 거렁뱅이가 아니에요.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으려고 그러는데······.”
 “그래? 그럼 너, 황금 열 냥 있어?”
 “황금 열 냥이오?”
 “그래, 이놈아!”
 “어··· 없는데요! 은자 두 냥 하고 세 푼은 있어요.”
 “은자 두 냥 하고 세 푼? 햐! 이놈 때문에 하마터면 총관한테 뒈지지 않을 만큼 맞을 뻔했잖아? 야! 까불지 말고 배를 채우려면 저리로 들어가!”
 “저리로요?”
 “그래!”
 장한은 험상궂은 인상과는 달리 부드럽게 말했다. 장한이 생각하기에 석추연이 아무것도 모르는 촌 무지렁이라 생각하여 특별히 관대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석추연은 장한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인 후 일층으로 들어가 소면을 주문하였다.
 
 
 제3장 서원(書院)의 점원이 되어
 
 
 1
 
 따뜻한 국물에 담긴 소면은 그야말로 맛있기 그지없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소면을 먹어치운 석추연의 앞엔 국물 한 방울 남지 않은 텅 빈 그릇만 놓여 있었다.
 사 일을 굶은 후 먹은 첫 음식이니, 맛이 없다면 이상할 것이다.
 은자 한 냥을 내고 일단 배를 채운 석추연은 고개를 들어 내부를 둘러보았다. 일층엔 자신과 불과 두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한 사람은 평범한 양민인 것 같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옷차림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거렁뱅이로 보였다.
 거렁뱅이는 약 칠십 정도의 노인이었는데, 두 눈이 안으로 쑥 들어간 것이 굶는 데는 이력이 붙은 것으로 보였다. 그는 석추연이 들어올 때부터 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석추연이 그릇을 비우고 고개를 드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으나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곧 고개를 돌려 내부를 보고 있는 동안 거렁뱅이가 다가왔다.
 “소형제! 여유 있으면 소면 한 그릇만 시켜 줄 수 있겠는가? 사흘을 굶었더니 창자가 들러붙은 것 같이 속이 쓰려서 참을 수가 없네.”
 거렁뱅이의 염소수염이 바르르 떠는 것이 더없이 불쌍해 보였다.
 석추연은 이미 사 일을 굶어 본지라 굶는다는 것이 어떤지를 절감하고 있었는지라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할아버지. 저에겐 은자가 한 냥 세 푼밖에 없어 한 그릇밖에 시켜 드릴 수가 없어요.”
 “호오, 고맙네. 정말 고맙네, 소형제. 내세엔 틀림없이 복록을 누리게 될 걸세. 이보게, 여기 소면 한 그릇 더 가져오게.”
 점소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면을 가지고 와 탁자 위에 거칠게 놓으며 말했다.
 “에이! 일층엔 거지들만 들어와서 생기는 것도 없고······.”
 점소이는 원래 삼층에 속해 있었는데, 실수를 하는 바람에 일층으로 강등당해 내려온 지가 한 달 정도 되는 자였다.
 삼층에 있을 땐 한 달에 적어도 열 냥 정도의 은자가 생기곤 하여 간간이 기루에 가서 기녀를 끼고 놀고 하룻밤 즐길 수도 있었는데, 일층으로 내려온 후론 아무것도 생기는 것이 없어 짜증이 난 상태였다.
 점소이의 짜증 섞인 말을 듣고도 석추연과 거렁뱅이는 모르는 척하였다. 노인의 입 안으로 소면이 한 가락도 남지 않고 사라진 것은 눈 깜짝할 새였다.
 “아, 정말 잘 먹었다. 소형제, 정말 고맙네!”
 “맛있게 잡수셨어요, 할아버지?”
 “암, 맛있게 먹고 말고.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소면은 처음이네.”
 손가락으로 누런 이 사이에 낀 국수의 면발을 훑어 가던 거렁뱅이 노인이 석추연에게 말했다.
 “이보게, 소형제! 집은 어딘가? 그리고 부모님은?”
 거렁뱅이의 말에 석추연의 어깨가 축 처졌다.
 석추연은 거렁뱅이 노인에게 자신이 지난 며칠 동안 겪은 일들을 소상히 말했다.
 “인세에 이렇듯 천인공노할 놈들이 있나! 그래, 그건 그렇고··· 그럼 소형제는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가?”
 “휴! 사실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요.”
 “······.”
 거렁뱅이 노인은 아무런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남에게 얻어먹는 처지에 선뜻 석추연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기가 주저스러웠던 것이다.
 사실 석추연에게서 소면 한 그릇을 얻어먹은 거지노인은 개방의 악양 분타주인 주호신개(酒豪神 )였다.
 석추연이 혼자서 악양객잔의 일층에 들어와 음식을 주문하는 모습을 보니 아주 무지렁이 집안의 자식 같지는 않고 약간 먹물을 먹은 듯한데, 기이하게도 의복이 남루하기가 거지인 자신보다 더해 호기심을 가지고 본 것이었다.
 석추연에게 다가가 소면 한 그릇을 사 달라고 하였을 때 자신의 주머니에 한 냥 세 푼이 남았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점으로 보아 세파에 찌든 약삭빠른 아이로 보이지 않았고, 배고픈 거지에게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주머니를 털어 소면을 사 주는 것으로 보아 심성이 고운 아이로 보였다.
 주호신개는 석추연을 개방으로 데려가 제자로 삼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였으나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 소면을 먹는 모습을 보니 며칠 굶은 것처럼 보였는데, 개방에 데려가 더 이상 굶는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주호신개의 나이 열다섯 때 주호신개는 청운의 꿈을 안고 개방에 제자로 들어갔다. 당시엔 굶어도 좋다! 다만 강호의 정의가 살아 있는 것을 보이고, 행협을 하여 강호에 큰 족적을 남기려는 이상을 가졌었다.
 그러나 오십오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과거를 되돌아보니 피끓는 젊은 시절엔 대의를 위해 일을 한다며 가정도 꾸미지 못했고, 너무도 많은 날들을 굶주림과 싸웠으며, 거의 매일 객잔의 점소이들과 양민들에게서조차 푸대접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온 과거가 생각났었던 것이다.
 ‘그래, 개방으로 데려다 고생을 시킬 것이 아니라 뭔가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알려 주어야겠다. 차차 커 가는 것을 지켜보고 그 후에 개방에 입문시켜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이보게, 소형제! 얘길 들어 보니 일가친척도 하나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듯한데··· 이렇게 하면 어떻겠나? 여기 악양엔 크고 작은 주루나 객잔, 기원(妓園) 등이 많으니 우선 그런 곳에 취직을 하여 호구지책을 삼음이?”
 “할아버지, 소생이 그런 곳에 취직을 할 수가 있을까요?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는데······.”
 “그런 걱정일랑 말게. 노부가 악양에서만 사십 년을 살았으니, 아마 그런 자리 하나 구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거네.”
 석추연의 낯빛이 약간 환해지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하··· 고맙긴? 소면 얻어먹은 값은 해야지. 그래, 그건 그렇고··· 소형제는 어디에 있을 텐가?”
 “할아버지! 우선 소생은 사해서원(四海書院)에 가 있을 테니, 그곳으로 연락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해서원? 그곳은 어떻게 아나?”
 “우리 공자님의 심부름으로 몇 번 가서 그곳의 할아버지를 조금 알아요.”
 “좋아, 좋아! 그럼 그곳으로 가 있게. 내가 자리가 구해지는 대로 연락을 하겠네.”
 “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석추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주호신개에게 절을 하였다.
 석추연은 악양객잔을 나서 사해서원으로 갔다.
 악양성 내에는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기에 사해서원으로 가는 동안 몇 번이고 저잣거리에 나뒹굴어야만 했다. 아직 나이가 어려 몸집이 작아 사람들과 부딪칠 때마다 넘어졌던 것이다.
 악양객잔에서 사해서원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가는 동안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볼 수가 있었다.
 원숭이나 구렁이 등을 가지고 곡예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산에서 나는 잡풀의 뿌리들을 대단한 효능을 가진 만병통치약으로 파는 자들도 있었다.
 경단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있었고, 만두나 기타 음식물들을 만들어 들고 나와 파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지필묵 등을 파는 곳도 있었고, 질 좋은 비단을 파는 곳 등 그야말로 없는 게 없어 신기해 하였다.
 지금까지는 부친인 석칠이 그려 준 약도를 가지고 사야 할 물건만 사 가지고 돌아갔기에 오늘처럼 여유 있게 저잣거리를 돌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참을 걸어 사해서원에 도착한 석추연이 서원의 입구로 들어오자 졸고 있던 노인이 말했다.
 “어서 오너라! 요즘엔 자주 오는구나!”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오냐! 그래, 이번엔 뭘 사려고 왔지?”
 “저, 할아버지! 오늘은 뭘 사려고 온 게 아니라··· 그냥 여기 좀 있으면 안 될까요?”
 “여기 있다니? 그게 무슨 얘기냐?”
 “사실은 할아버지······.”
 석추연은 사 일 전에 사해서원을 들렀다 행화촌으로 돌아가 보니 자신의 부모와 마을 사람들 전체가 처참히 죽어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하였다.
 “아니, 저런? 쯧쯧··· 불쌍하기도 하지.”
 석추연은 거지 할아버지를 객잔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며, 그가 자신의 일자리를 알아봐 줄 때까지 이곳 사해서원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있는 동안 지하에 있는 파지들을 깨끗이 정리정돈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쯧쯧··· 이 어린 것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라고··· 그래, 당분간 이곳에 있거라!”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석추연은 객잔에서처럼 공손하게 절을 하였다.
 석추연은 만류하는 노인을 뒤로 하고 서원의 지하로 내려가 파지들을 정돈하기 시작하였다.
 석추연이 사흘 동안이나 서원의 지하에 있는 파지들을 정돈하며 기다려도 주호신개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서원의 노인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석추연에게 새로 산 산뜻한 청삼을 사서 입혔다.
 매일 따뜻하고 푸짐하게 식사도 할 수가 있었고, 깨끗한 의복과 따뜻한 잠자리를 얻은 석추연은 진심에서 우러나 열심히 일하였다.
 우선 서원의 서가에 무질서하게 꽂혀 있는 서적들을 시대별, 분야별로 분류하여 정리하였다.
 석추연이 사해서원에 온 지 칠 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도 석추연은 송나라와 당나라 시절에 쓰여진 고서들을 분류하여 정돈하고 있었다.
 한참 서가에 있던 고서들을 끄집어 한 곳에 쌓아 가던 석추연은 서가 뒤에 아무렇게나 접혀져 있는 고서 한 권을 발견하고 고서의 표지에 잔뜩 쌓여 있는 먼지를 털어 냈다.
 “천기기문진해(天機機門陣解)? 이건 무엇에 관한 거지? 온통 과두문(??文)으로 쓰여 있으니······.”
 석추연은 올챙이 수십 마리가 기어가는 듯한 과두문으로 쓰여진 고서의 제목을 간신히 읽어 내려갔다.
 석추연의 학문이 비록 유운장의 팔천여 권에 달하는 장서를 탐독하여 웬만한 서생을 능가한다고는 하나, 아직 과두문이나 쐐기 모양의 상형문자 등을 완전히 해독할 수준이 되지는 않았기에 어떻게 분류를 하여야 할지가 난감하였다.
 “좋아, 오늘 밤엔 이놈을 읽어 봐야지.”
 석추연은 웬만한 수준의 서적들은 눈에 차지 않아 늘 읽을 거리가 곤궁하다고 느끼던 참에 잘되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든 책을 한쪽에 내려놓고 서가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날 저녁 석추연은 과두문을 해독할 수 있는 서적 한 권과 낮에 발견한 천기기문진해라 제목 붙여진 고서를 가지고 자신이 거처하는 허름한 방으로 갔다.
 사해서원 가장 안쪽엔 내원(內院)으로 향하는 쪽문이 하나 있고, 그 쪽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아담한 정원이 있고, 곧이어 사해서원의 주인인 노인 부부와 손녀가 살고 있었다.
 석추연이 사해서원에 드나드는 동안에 단 한 번도 노인의 부인을 본 적이 없으며, 손녀는 더욱 본 적이 없었다.
 사해서원에서의 칠 일이 지났음에도 단 한 번도 노인의 부인과 손녀를 보지 못하였는데, 노부인과 손녀는 열흘 전에 악양 외곽에 위치한 신광사(晨光寺)라는 사찰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고 하였다.
 대대로 이곳 악양에서 사해서원을 운영하며 살던 노인의 이름은 선훈지(宣暈祉)이고, 그의 외호는 무량수사(無量秀士)라고 하였다. 그의 학문을 추측할 수가 없다 하여 그의 친우들이 지어 준 외호였다.
 일찍이 제법 학문에 가능성을 내비쳐 가문에서 촉망받는 문사였고, 자칭타칭(自稱他稱) 악양제일의 문사였으나 썩을 대로 썩어 버린 조정의 매관매직(賣官賣職) 때문에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대과에서 낙방한 후 이곳 악양으로 되돌아온 선훈지는 관직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고 사해서원의 주인으로서 그 동안 생활하여 왔다.
 악양의 유수한 처녀들 중 가문과 미모가 뛰어난 지금의 노부인과 우연히 마주친 후 사랑의 열병을 앓았고, 매파를 놓아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결과 삼 년 만에 그녀와 혼인을 한 후 행복한 생활을 하였었다.
 노부인과의 사이에선 독자밖에 두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노부인이 아들을 순산한 후 얻은 부인병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훈지 부부는 금슬이 매우 좋아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생활을 영위하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순탄하게 성장하여 악양에서 학문이 빼어나기로 유명한 진유학사(眞儒學士) 초군진(草?秦)의 여식인 초진진(草珍珍)이란 아름다운 규중 처자와 가정을 꾸몄다.
 선훈지의 아들 이름은 선규화(宣珪華)였다. 그도 부친의 자질을 이어받아 악양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는 문사였으나, 일찍이 조정의 부패상을 경험한 부친의 충고에 따라 관직에 연연치 않고 유유자적하게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문이 높아 추운석사(秋雲碩士)라는 외호를 얻은 선규화와 초진진의 사이에선 곧 선운지(宣雲芝)가 태어났다.
 선운지는 이제 십삼 세로 석추연과는 동갑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조부와 부모의 영향을 받은 선운지는 나이답지 않게 자신의 부친인 추운석사에 버금가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꾀가 많으며, 아름답기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이곳 사해서원의 내원에서만 성장하여 선운지의 아름다움이 밖으로 소문나지는 않았으나, 가끔씩 방문하는 선규화와 초진진의 친우들에게는 익히 소문이 나서 그녀에게 미수진보(美秀眞寶)라는 별호를 지어 주었다.
 선규화와 초진진 부부는 미수진보 선운지가 일곱 살 되던 해에 불공을 드린다며 길을 나섰다 그만 악양성 외곽을 주름잡는 화적 떼인 홍위단(紅偉團)에게 걸려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한다.
 홍위단은 백여 년 전부터 악양성 외곽에 머물면서 악양성을 드나드는 양민들과 상인들을 상대로 악행을 자행하는 무리들이라 한다.
 홍위단의 무리들은 강호의 삼류무사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 있으나 그 숫자가 무려 오백 정도 되며, 지모가 뛰어난 자가 있어 관군이 그들을 소탕하려고 여러 차례 나섰으나 번번이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
 홍위단에게 걸린 양민들이나 상인들은 가진 재물을 몽땅 털리기 일쑤였으며, 여인들은 그들에게 집단 윤간을 당한 후 멀리 떨어진 유곽에 팔려 갔다.
 최근 백 년 동안 수백 명의 여인들이 홍위단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유곽에서 뭇 남정네들의 정액받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추운석사 부부도 이들에게 걸려 추운석사 선규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 절명하였으며, 초진진은 부려 팔십여 명에 달하는 홍위단의 화적 떼들의 정액을 받은 후 비궁에서 하혈이 멈추지 않아 절명하고 말았다.
 무량수사 선훈지 부부와 진유학사 초군진은 자식들의 죽음에 비통을 금치 못했으나, 슬픔을 떨치고 이제 홀로 남은 선운지의 앞날을 걱정해 그녀를 훈육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선운지와 노부인은 매년 신광사에서 보름 정도를 머물며 비명에 간 선규화와 초진진의 명복을 빌었기에 금년에도 어김없이 신광사에 간 것이었고, 그녀들이 돌아오려면 오 일 정도 더 있어야 했다.
 석추연은 내원 한쪽에 자리잡은 자신의 거처로 들어갔다.
 원래 이곳은 선규화의 서실이었던 관계로 사방에 빽빽이 고서진본들이 꽂혀 있었다. 실내에서는 전 주인의 인품을 말해 주는 듯 은은한 먹향이 감돌았다.
 입구를 제외한 삼면엔 월동형의 창문이 있었고, 서실 한가운데엔 자단목으로 만든 장방형의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지필묵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사방의 벽엔 누구의 작품인지는 모르나 고아한 기품이 배어 있는 매난국죽의 사군자가 멋진 솜씨로 그려진 채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었다.
 서실의 한쪽엔 독서를 하다 잠깐 눈을 붙일 수 있는 침상이 있었는데, 최근 칠 일 간 석추연은 이 침상을 사용하였다.
 어른 팔뚝 굵기의 황촉에 화섭자로 불을 붙이자 방안엔 따뜻한 기운의 불빛이 가득 찼다.
 “음, 천기기문진해라··· 무슨 책인지 궁금하군.”
 석추연은 금방 독서삼매에 빠져들었다.
 석추연의 장점 중에 하나가 바로 무슨 일이든 한 번 집중하면 옆에서 벼락이 쳐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남들이 열 번 보아야 해득할 것을 단 한 번에 이해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유운장의 소공자인 주천명이 은연중에 자신보다 석추연의 학문이 떨어지는 줄 알고 무시하였으나, 사실은 석추연의 학문이 주천명보다 반 보 정도 앞서 있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런 것이었다.
 주천명은 부친인 유운학사의 끊임없는 지도편달이 있었으나, 석추연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었기에 똑같이 교육을 받았다면 석추연이 월등할 것이란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석추연이 과두문을 해독할 수 있는 서적을 뒤적거리며 천기기문진해를 해독해 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분야의 서적이었다.
 천기기문진해는 무려 천 년 전에 쓰여진 작자 미상의 기문둔갑술과 기관토목, 진법, 천기에 관한 서적이었다.
 춘추전국시대에 명성을 떨쳐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제갈공명의 팔진도는 물론 세상에 전해져 오는 거의 모든 진법이 수록되어 있었으며, 자연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그때 그때 변형하여 펼칠 수 있는 진법은 그야말로 진법의 백미였다.
 시진(施陣)은 물론 회진(回陣)을 자유자재로 할 수가 있으며, 천기기문진해만 완벽히 이해하면 나뭇가지 몇 개, 돌멩이 몇 개로도 원하는 대상을 가둘 수 있는 천고의 절진을 펼칠 수 있게 된다.
 “햐! 이건 정말 대단하다. 나뭇가지 몇 개로 하늘을 가릴 수가 있다니··· 내일 한 번 해 봐야겠다.”
 천기기문진해에 수록되어 있는 기관토목술은 세상에 있는 모든 기관토목을 뚫고 들어갈 수가 있는 절묘한 것이었으며, 하늘을 보고 미래를 점치거나 천기를 읽을 수 있었다.
 천기기문진해에는 학문이 아닌 무공도 실려 있었는데, 그것은 완벽한 은잠을 위한 기문둔갑술이었다.
 나뭇가지가 무성한 곳에 있으면 몸 전체는 물론 의복의 색깔까지도 나뭇잎의 색과 동일하게 변하고, 바위의 곁에 있으면 바위와 같아져 범인의 눈으론 식별할 수 없게 되며, 물 속을 헤엄치면 아무리 맑은 물이라 할지라도 그의 신형을 찾을 수 없게 되는 천고의 은잠술이 있었다.
 다만 이를 시전하려면 적어도 일 갑자의 내공을 지니고 있어야 비로소 시전할 수 있다는 단서가 달려 있었다.
 “일 갑자의 내공? 일 갑자는 육십 년을 말하는 것이니, 그것은 알겠는데··· 내공이 뭐지? 다른 것들은 대강 이해를 하겠는데······.”
 석추연의 주변엔 태어나서 지금까지 무예를 익힌 인물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석추연은 무공이 뭐고, 내공이 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석추연이 어릴 적에 가끔 행화촌의 촌노에게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촌노가 그 사람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아마 신선일 거라 말하였기에 그 사람들이 무림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무인들의 세계인 강호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다.
 “내공··· 내공이라··· 뭔가 안에 갈무리를 한다는 뜻인 것 같은데··· 내공이란 게 도대체 뭘까?”
 석추연은 이미 삼경이 지난 시각이었으나 탁자 위에 있던 황촉 하나를 들고 일어서서 사해서원의 서가로 향했다.
 무엇이든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아무도 없는 사해서원의 서가를 뒤져 내공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려 일어선 것이었다.
 사해서원의 서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던 석추연은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사해서원의 지하에서 무슨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엇일까?’
 황촉의 불을 끄고 발뒤꿈치를 들고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사해서원의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던 석추연의 귓가에 누군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엔 없는가 보이.”
 “아니야, 잘 찾아봐! 분명 사해서원으로 배달된 서궤에 숨겼으니까.”
 “이곳으로 배달된 게 분명히 맞아?”
 “글쎄, 그렇다니까! 이렇게 떠들지만 말고 빨리 찾아보게!”
 “알았네.”
 누군가가 사해서원으로 배달된 서궤 속의 어떤 물건을 찾는 듯하였다.
 “이보게, 이곳엔 서궤가 너무도 많아. 그리고 최근에 누군가가 여길 정리한 것 같네. 이렇게 해선 도저히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으니, 여길 정리한 놈을 찾아 족치면······.”
 “맞아, 그러면 지난달 보름에 배달된 서궤가 어떤 건지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네.”
 “누가 여길 정리했는지 어떻게 아나? 빨리 찾기나 하게.”
 “아, 알았네.”
 석추연이 귀 기울여 들어 보니 적어도 세 명 이상은 되었다.
 한참 동안 사해서원의 지하 서고를 뒤지던 무리들이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사라지기까지 대략 반시진 가까이 걸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적으로 했던 물건을 끝끝내 찾지 못하였는데, 보름 전에 사해서원으로 배달되었던 서궤는 석추연이 지하 서고를 왔다갔다하면서 하도 발에 걸리기에 다른 곳에 치워 두었던 것이다.
 난장판이 된 지하 서고를 둘러본 석추연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야말로 난장판 중에 난장판이었기 때문이다.
 “휴! 이걸 언제 다 치우나?”
 석추연은 지하 서고에서 나와 잡학으로 분류하여 정리한 서가로 가서 무공에 관한 서적들을 찾았다. 무공이 아직 뭔지 모르기에 손에 집히는 대로 이십여 권을 뽑아 든 석추연은 서적들을 들고 자신의 처소로 가서 그것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날이 밝기까지 이십여 권의 책자들을 살펴본 석추연은 그것들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였다.
 날이 밝자 석추연은 내원의 정원을 전부 쓸고, 다시 서원의 앞으로 가서 적당히 물을 뿌린 후 앞마당을 쓸었다.
 청소가 끝난 석추연은 엉망으로 변해 버린 지하 서고로 가서 그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휴! 무얼 찾으면 찾는다고 차라리 말이나 하면 찾아나 주지! 무작정 뒤지고 이렇게 해 놓고 가면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걸 다 치우려면 적어도 오 일은 걸리겠다.”
 석추연이 주섬주섬 빈 서궤들을 한쪽 구석에 쌓아 가며 엉망진창이 된 서적들을 분야별로 분류하면서 정리를 하였다.
 석추연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무공에 관한 서적을 혹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층의 서가에는 지난 열흘 동안 대략 정리를 하였기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층의 서가엔 단 한 권도 무공에 관한 서적이 없었다. 그저 논어, 맹자, 제자백가 등 학문에 관한 서적들과 작자 미상의 시집 등이 있을 뿐이었다.
 지하 서고에서는 퀴퀴한 책 썩는 냄새가 났다.
 하루 종일 정리정돈을 한 석추연은 저녁 무렵에 문득 어젯밤의 괴한들이 찾던 보름 전에 배달된 서궤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뒤졌는지 궁금해졌다.
 보름 전에 배달된 서궤도 다른 서궤들과 마찬가지로 지나치는 데 하도 발에 걸려 석추연이 그것을 계단 밑에 가져다 두었기에 어젯밤 괴한들이 미처 그것을 발견치 못했던 것이다.
 계단 밑에서 서궤를 끄집어 낸 석추연이 서궤의 뚜껑을 열자, 맨 위에 한지 한 장이 넓게 펴져 있었다.
 한지엔 서궤의 발송 장소와 서궤 안에 든 서적들의 권수가 명기되어 있었다.
 서궤는 서장에서 배달되어 왔고, 안에는 이백 권의 서적이 들어 있다고 쓰여 있었다.
 서궤 안의 서적들을 모두 꺼내 하나하나 살펴보던 석추연의 눈빛이 반짝 하고 빛이 났다.
 이백여 권의 서적 중 유독 낡아 보이는 서적의 표지에 <만천철경(萬穿鐵經)>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불경(佛經)인가?”
 고서의 책장을 열어 안을 들여다본 석추연은 도대체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책의 내용은 누가 썼는지 지독한 악필에다가 문맥이 이어지는 곳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 글자나 생각나는 대로 적어 놓은 듯 보였다.
 “음, 이게 뭐지? 불경은 아닌 것 같고······.”
 불가(佛家)에서 흔히 쓰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혹은 부처님이라고 쓰여진 구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말이 하나도 이어지지 않으니··· 좋아! 이게 뭔지 시간을 가지고 알아봐야겠다.”
 이백여 권의 서적 중 석추연의 눈에 뜨인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2
 
 
 저녁 무렵 석추연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만천철경의 책장을 넘겼다. 한 시진 가량을 들여다보았으나 도대체 그 내용을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문맥이 전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햐!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썼지? 말도 이어지지 않게 무려 백여 쪽이나 되는 분량을 쓰려면 어지간히 할 일이 없었던 사람이 쓴 모양이구나.”
 만천철경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던 석추연은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석추연은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은 오지 않고 머릿속은 오히려 점점 더 맑아졌다. 누군가가 어떤 의도로든 작성한 만천철경의 비밀이 궁금하여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석추연은 만천철경을 펼쳐 놓은 채 이리저리 궁리를 하였다.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도대체 그 비밀을 알아 낼 수가 없던 석추연이 책장을 덮고 일어서려는 찰나, 그의 눈빛이 번쩍 하였다.
 우연히 책을 덮으며 보았던 단어가 눈에 뜨인 것이었다.
 “무학(武學)?”
 만천철경을 덮으려는 찰나, 맨 앞의 글자인 무자와 두 번째 쪽의 맨 뒤의 글자인 학자가 보였던 것이다.
 다시 만천철경을 펼친 석추연의 눈이 좌우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 동안 그렇게도 문맥이 이어지지 않아 머리를 아프게 했던 만천철경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무학의 길로 일로매진하여 백팔 평생을 바쳐 얻은 심득을 남긴다.>
 
 만천철경은 각각의 쪽에서 한 글자씩 따서 읽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본좌는 강호의 동도들이 사자철검 구본후라 한다.
 서진 세조 무염제 때 운남성에서 태어나 무공을 익힌 이래 구십 년 동안 강호를 종횡하였으나 나의 적수가 없었다.>
 
 “서진 세조 무염제 때 인물이라면 천사백 년 전이잖아? 우와··· 무지하게 오래된 책이네.”
 석추연은 아직 한 번도 강호팔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어 사자철검 구본후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무림인들이 만천철경이 사자철검 구본후의 유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시산혈해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 강호는 전에 없던 대혈겁에 빠져 사형이 사제를 죽이고, 사질이 사숙을 죽이는 패륜이 난무할 것은 뻔한 일!
 만천철경을 익히면 천하제일인이란 칭호는 물론 어쩌면 고금제일인이란 칭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천고의 비급이었던 것이다.
 만일 이 비급이 심성이 곱지 못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천하를 겁난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자철검 구본후는 일부러 해독하기 힘들게 비급을 꾸민 것이었다.
 석추연은 모르지만 사실 만천철경은 지난 일천사백 년 동안 수없이 주인이 바뀌어 왔다.
 수백 명의 손을 거치는 동안 단 한 번도 사자철검 구본후의 진산절학은 해독되지 못한 채 그야말로 강호를 유람하였다.
 지난 세월 동안 수천의 영재들이 비급의 임자에게 불려 가 비급의 비밀을 캐려 노력하였으나 모두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말았던 것이다.
 모두들 비급에 적힌 문자와 문자 사이에 무슨 관련이 없나 하는 것만 보아 왔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문장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물론 문맥은커녕 단 하나의 단어도 완벽하게 해독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석추연이 우연히 비급의 비밀을 풀게 된 것은 그야말로 천고의 기연이었다. 아직 무학이나 무공에 대하여 문외한이기에 비밀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서장에 있던 어떤 사람이 우연히 고서점에서 만천철경을 얻었으나 해독이 되지 않자 자신이 속한 문파의 수장에게 그것을 얻은 경위와 더불어 신비하면서도 이상한 비급이 있다며 전서구로 연락을 취했었다.
 단 한 권의 비급 때문에 주어진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갈 수가 없으니, 악양에 있는 사해서원으로 가는 서궤에 넣어 보내면 그것을 구입하여 해독을 해 봤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석추연이 이곳 사해서원으로 와 있던 지난 칠 일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서원에 왔다가 아무것도 사지 않고 그냥 나갔던 것이었다.
 서원에서 비급을 발견치 못한 사람들이 야음을 틈타 지하 서고로 내려간 뒤 그곳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이었다.
 
 <본좌는 강호에 적수가 없음을 알고, 강호의 통념을 깨고 깊은 산 속이 아닌 저잣거리에 신분을 감춘 채 은거하였다.
 더 이상 검을 들지 않으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본시 본좌의 무학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본좌가 구십 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무인들과 비무하면서 얻은 심득을 사장(死藏)시키는 것은 무림에 대한 보은이 아니라 생각하여 한 권의 비급으로 만들었다.
 본좌의 무학은 모두 무림에서 얻은 것이기에 무림에 돌려준다는 의미로 비급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자칫 악한 자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면 무림을 혈겁에 빠뜨릴 수가 있어 이렇게 만들었다.
 이 만천철경을 해독하는 자의 심성이 곱기를 부디 바란다.>
 
 만천철경의 첫 문장을 해독한 석추연이 비급을 덮고 다음 날 다시 보려 하다가 문득 비급의 표면에 최근에 표시한 듯한 긁힌 자국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으로 살짝 긁힌 자국인데, 마치 네 발 달린 어떤 짐승을 그려 놓은 듯하였다.
 ‘응? 이 책은 분명히 아래쪽에 있어서 긁힐 수가 없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그 생각을 떨쳐 버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제를 마친 석추연이 지하 서고로 들어가서 어제 정리하던 책들을 대강대강 펼쳐 보면서 정리를 할 때 문득 간밤에 보았던 긁힌 자국이 마음에 걸려 굴러다니던 쇠못을 들어 보고 있던 책의 표지에 긁어 보았다.
 도대체 어떤 짐승을 그리려 하였는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 서원 일층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뛰어 올라갔다.
 서원에는 서원의 주인인 무량수사 선훈지와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십 정도 된 장한이 서 있었다.
 “부르셨어요, 할아버지?”
 지난 며칠 사이 식사 때만 만나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는 선훈지와 정이 들어 그를 할아버지라 부르고 있었고, 선훈지도 손녀는 하나 있으나 손자가 하나도 없었기에 석추연을 친손자처럼 대해 주고 있었다.
 “오, 그래. 이 손님을 모시고 지하로 내려가서 지난달 보름에 온 서궤 안의 서적들을 보여 주도록 하여라!”
 “지난달 보름이오?”
 “그래. 왜 서궤 뚜껑에 입고된 날짜가 적혀 있지 않느냐?”
 “예, 알았어요. 저, 손님 소생을 따라오시지요.”
 “흠, 알겠네.”
 사십 정도 된 장한은 검은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가슴에는 한 마리 누런 황룡이 수놓아져 있었다.
 석추연의 안내로 지하 서고에 내려간 장한은 석추연이 끄집어 내어 한 곳에 쌓아놓은 책 더미를 뒤지더니, 이내 표지에 긁힌 자국이 있는 책을 집어들었다.
 그 책은 조금 전에 석추연이 못으로 긁은 책이었는데, 천축에서만 사용하는 범어로 쓰여져 있으며 굉장히 난해한 불경인 것으로 기억되었다.
 “흠, 이 책을 구입하겠소.”
 불경을 대강 뒤적거리는 모습으로 보아 범어는 한 글자도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일층으로 올라가셔서 주인에게 말씀하시지요. 소생은 그 책의 가격을 모릅니다.”
 “흠, 알겠네.”
 장한은 이내 일층으로 올라가 은자 두 냥을 치르고 사라졌다.
 ‘음, 만천철경이 저들이 찾던 책이구나.’
 자신이 무심코 그려 놓은 그림을 보자마자 책의 내용도 살피지 않고 집어드는 장한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였다.
 장한이 사라진 뒤 더 이상 사해서원은 북적이지 않았다.
 석추연은 일과가 끝난 후 자신의 처소에서 다시 만천철경을 펼쳐 들었다.
 
 <사자심법(獅子心法).
 사자심법은 사자검법을 펼치기 위한 기초이다. 사자심법과 사자보법에 능숙치 않으면 사자검법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으니, 이를 유념하라.
 통상의 운기토납은 호흡을 통하여 우주의 기를 단전에 뭉쳐 두었다가 필요 시에 이를 끌어 올려 사용하나, 사자심법은 전신에 있는 모공까지 활용하는 절정의 내공심법이다.
 흔히 정파의 무공은 장중함은 있으나 익히기가 어렵고 시일이 오래 걸리는 반면, 마도의 무공은 단시일 내에 익힐 수는 있으나 그 깊이가 깊질 못하다 알려져 있다.
 사자심법은 이런 정파와 마파의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보완된 심법이다.
 사자심법을 극성으로 익히려면 무엇보다도 소우주에 비견되는 인체의 유기적인 상호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자심법을 익히기 전에 먼저 인체에 산재해 있는 삼백육십 개의 대소혈맥의 명칭과 그 기능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석추연은 만천철경을 읽는 동안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며 읽고 있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몸에 안공(眼功)이 배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만천철경엔 인체의 대소혈맥과 세맥, 잠맥에 관한 언급이 있었고 개개의 혈맥들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명문정파의 운기토납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으며, 방문좌도의 사이한 운기토납법도 설명되어 있었다.
 “흠, 명문정파의 운기토납법으로 내공을 쌓으면 큰 부상을 당한다 할지라도 단전이 파괴되지 않는 한 내공을 잃을 염려가 적은 반면 방문좌도의 운기토납법으로 쌓인 내공은 비록 쌓기는 쉬우나 부상 정도가 크면 쉽게 내공을 잃게 되는 단점이 있구나.”
 의생들에게도 그 기능이 잘 알려지지 않은 세맥과 잠맥에 대한 언급에선 고개를 크게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사백 년 전에 쓰여졌다고 보기엔 너무도 진보적인 발상과 절묘한 조화로 설명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명문정파든 방문좌도든 간에 호흡을 하는 방법은 같았다.
 코로 들숨을 들이키고, 입으로 날숨을 내뱉는다.
 들숨이든 날숨이든 가능한 천천히 잘게 나누어 쉬고, 일단 숨을 쉰 다음엔 참을 수 있는 한도껏 참았다가 다음의 호흡을 하도록 하는 것이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자심법은 입과 코 뿐만이 아니고, 전신에 있는 수십만 개에 달하는 모공(毛孔)과 땀샘(汗泉)으로도 호흡을 할 수 있는 독특한 심법이었다.
 명문정파의 심법과 방문좌도의 심법이 혼합된 사자심법은 다른 사람들이 통상의 심법으로 내공을 수련할 때보다도 다섯 배나 많은 내공을 단전에 갈무리할 수가 있는 심법이었다.
 “우와 대단한데··· 그런데 모공과 땀샘으로 호흡을 하려면 옷을 전부 벗어야 하잖아?”
 사자심법의 특성상 내공을 쌓으려면 의복을 모두 벗고 나신이 되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던 것이다.
 석추연은 이제 경우 십삼 세 된 소년이기에 의복을 모두 벗은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사자심법을 운용해 보았다.
 그러자 서실 안에 있던 우주의 기가 모두 자신의 몸 안으로 소용돌이치며 빨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운기토납을 마친 석추연은 왠지 모르게 자신의 단전 어림에서 무엇인가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와··· 대단하다. 이게 바로 내공이란 것인가 보다!”
 석추연은 일주천의 운기토납만으로도 지난 며칠 동안 누적되어 온 피로가 한순간에 풀리는 기분을 느끼고 기분이 좋았다.
 사자심법은 초보자도 익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기에 쉽게 익혔던 것이다.
 사자심법을 설명한 것이 만천철경의 내용 중 거의 반이나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였던 것이다.
 
 <사자보법(獅子步法).
 무릇 보법이란 공격 시 적절한 힘의 배분과 자세로 공격력을 극대화시키고, 방어 시엔 빠른 동작과 자세로 적의 공격으로부터 피하거나 적의 공격력을 최소화시킴으로서 타격을 덜 받는 데 목적이 있다.
 사자보법은 중원에 산재한 보법들의 묘용 중 장점만을 취해 만든 것으로, 빠르기가 섬전 같아 전진과 후퇴가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내공이 깊을수록 속도가 빨라지고 도약할 때 높이가 높아진다.
 일 갑자의 내공이면 두 개의 잔영(殘影)이, 이 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닌 자가 이를 시전하면 여섯 개의 잔영이 남아 적의 눈에 혼란을 주므로 어느 것이 실체인지 구별할 수가 없는 게 장점이다.
 삼 갑자 이상이 되면 아홉 개의 잔영이 생기고, 사 갑자가 넘으면 열두 개의 잔영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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