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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놀이 1-1권

2017.12.04 조회 1,454 추천 14


 # 까마귀
 
 강노리.
 18살의 고등학생은 그 나이 대에 어울리지 않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다.
 어머니가 그를 낳으시다가 돌아가시고, 중학생이 되던 해, 누나는 횡단보도에서 자신을 살리고 차에 치여 즉사했다.
 그때쯤, 아버지가 다니던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해 생계가 어려워졌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식새끼를 위해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시다가 추락사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둘씩,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것으로 저주와도 같은 일은 끝나지 않았다.
 이젠 죽음의 그림자가 그에게도 드리워져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십년지기 친구인 강덕구가 소위, 일진들에게 찍히는 일이 발생했다.
 그 뒤로 지속적인 시달림에 강덕구가 자살을 했고 그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 길로 그는 학교 일진들에게 대항하다가 학교 뒤뜰로 조용히 끌려나왔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날린 낡은 의자에 뒤통수를 가격당하고 죽어버렸다.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며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그는 이게 죽음인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도 더 빨리 다가온 것은 신기한 현상.
 마치 게임 시스템창처럼 생긴 것이 정면에 떡 하니 나타났다. 다른 지형지물은 뿌옇게 변해서 분별이 어렵지만 시스템 창만은 그 부분만 닦은 것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부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기회를 잡으시겠습니까?]
 [대답을 하지 않고 10초가 흐르면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 저승으로 가게 됩니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간신히 입을 오므렸다 펴면서 발음을 했다.
 “그···, 래.”
 ‘살고 싶다.’
 띠링!
 그의 뇌 속에 정확히 입력되는 글자. 의식이 옅어지고 있는데도 그 글자들은 또렷이 기억에 새겨졌다.
 
 ====================
 인간, 강노리에게 부활의 기회가 주어진다.
 잠에서 깨어나면 그때부터 신세계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완전히 살아난 것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닌 삶이 시작된다.
 살아나려는 자여, 부활의 무게를 견뎌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든 상관없다.
 일단 살아남아라, 계속해서 살아남는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요, 예전의 삶을 누릴 수 있을 터이니.
 신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
 
 또르르릉! 또르릉!
 스마트폰 알람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강노리는 잠결에 듬성듬성 땅을 짚다가 액정을 건드렸다.
 툭.
 알람을 끄고는 무거운 머리를 들었다.
 그러고선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눈곱 때문에 흐릿했던 시야가 차츰 뚜렷해졌다.
 앞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본 그는 황당함에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학교 운동장?’
 익숙한 잔디와 철봉, 농구대, 축구골대. 자신이 다니고 있는 그리고등학교임이 틀림없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내가 왜 여기?’
 스스로에게 묻자마자 답이 나왔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 못할 공간에서 누군가의 음성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들었던 내용 중 한 구절을 읊조렸다.
 “살아나려는 자여, 부활의 무게를 견뎌라······?”
 그 말을 하고나니 죽었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렇다.
 분명 일진들에 의해 머리를 가격당해 죽어버렸다.
 그런데 난데없이 살려준다는 문자가 뜨고 거기에 동의를 했지.
 직후의 기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학교 운동장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되돌려 봐도 믿기지 않은 일이지만.
 확실히 그는 죽었고, 또다시 살아났다.
 ‘숨도 쉬고 시각, 후각, 촉각도 전부 생생하니까.’
 혹시 말로만 듣던 가상현실, 자각몽이 아닐까 싶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한들 깨어날 방법도 모르고,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자살행위를 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일말의 호기심으로 자칫 목숨을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살아났긴 하지만 앞으로의 삶이 결코 예전과 같은 일상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러기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들었던 말들이 꽤나 무게감 있었으니까.
 “어라?”
 이 운동장에 본인 혼자 있는 게 아니란 걸 인지했다. 주위가 굉장히 소란스럽다는 것도.
 “내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어떻게 된 일이야?”
 저들의 대화로 추정컨대, 이 황당한 일은 그만 겪은 게 아닌 듯싶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돌아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급히 스마트폰을 톡톡 건드렸다. 어느새 밝아지는 화면, 그 상단이 오전 6시 14분을 나타냈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평일 오전 6시에 고등학교 운동장에 100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다.
 아니, 백번양보해서 시간은 논외로 쳐도 날짜가 표시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던 방식으로는.
 [A.01.01]
 월, 일은 나타나지만 몇 년도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년도의 자리에 A라고 되어 있지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잠시 날짜에서 시선을 거두며 주위를 살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운동장에 포진되어 있었다. 학생, 배가 부른 임산부에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네까지.
 몇몇 사람들은 이런 상황조차 모른 채 여전히 자고 있었다.
 또 다른 몇몇 사람들은 한데 모여서 뭔가 심각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대해 강노리도 하고픈 말이 많았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일어나려는데.
 뚜둑. 뚝뚝뚝.
 콧잔등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위를 쳐다보자 온 하늘이 밤처럼 검게 물들었다. 먹구름이 급속도로 모였고 이윽고 소나기가 내렸다.
 “저게 뭐지?”
 “어, 뭐야.”
 “새?”
 “새 같은데?”
 비로 인해 시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학교 본관 위, 수백 마리의 검은색 물체가 날아다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정체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날씨가 날씨인지라 어두워서 물체의 분간이 명확하지 않았다.
 한 청년이 허공을 가리키며 외쳤다.
 “까마귀!”
 새까만 털이 난 까마귀가 날고 있는 게 아닌가.
 하나의 덩어리로 보일 만큼 거대한 까마귀 떼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까악, 까악!”
 불길한 소음을 냈다.
 거대한 까마귀 무리는 운동장 상공 30m 위에서 두 바퀴를 정신없이 돌더니 지상을 쳐다보았다.
 그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덩치 큰 까마귀가 선두로 지상으로 낙하했다.
 휘이이익—
 그 뒤를 따라 나머지 까마귀 무리가 내려 왔다.
 그들은 어느 정도 내려오더니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스으윽. 숙, 스슥 슥!
 동, 서, 남, 북 사방으로 일사불란하게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더니 한 마리씩 사냥을 하듯, 사람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저, 저것들은··· 저것들은 뭐야!”
 예상치 못한 야생동물의 습격.
 혼란에 빠진 대중들은 까마귀가 채, 공격하기도 전에 알아서 자폭했다.
 방황하며 넘어지고 밟히고 뒹굴기까지.
 안락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해왔는데 느닷없이 펼쳐진 지옥도에 기민하게 대처할 리가 없지.
 뚝, 뚝···두두두두둑!
 빗줄기는 갈수록 굵어졌고 천둥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천둥소리에 묻혔지만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절망에 가까운 그 얼굴만은 흐린 날씨도 가리지 못했다.
 강노리는 똑똑히 보았다. 까마귀의 날카로운 부리를.
 녀석들은 사람들을 쪼아대고 살점을 파헤치고는 심지어 내장을 뜯어먹고 있었다.
 “시발.”
 심연의 공간에서 들은 음성, 그 음성이 말했다.
 일단 살아남으라고.
 강노리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였다. 살아남을 길을 찾아야 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쿵쿵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상황을 관조하려 애썼다.
 예사 까마귀가 아닌 줄은 눈치챘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당장 내가 죽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 내 차례가 올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타닷.
 일단 운동장 정 가운데를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가운데에 있으면 포진된 사람들로 인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외진 곳으로 피신하여 안전을 도모해야 했다.
 넘어져서 발이 삐끗한 아무개는 영락없이 까마귀의 날카로운 부리를 보며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돌아버리겠네.’
 그는 까마귀가 가까이 오자, 무의식적으로 냅다 달렸다. 전직 육상 꿈나무로서 발군의 달리기 실력을 뽐냈다.
 그러나 하늘을 비행하는 까마귀의 적수가 되진 못했다. 까마귀는 얼마 안 가 막다른길에 다다른 그를 향해 기쁨의 울음소리를 내었다.
 ‘저것들 뭐야. 왜 저렇게 빨라!’
 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이거다!’
 발부리에 걸린 돌. 그걸로 다가오는 까마귀의 머리통을 아작 내기로 마음먹었다.
 쉬이익.
 까마귀가 날카로운 발톱을 내밀며 접근했다.
 그것이 코앞까지 오는 순간.
 슈우욱.
 민첩하게 상체를 숙여 발밑에 있는 돌을 잡았다.
 타앗!
 그가 상체를 숙이면서 생긴 공백으로 인해 까마귀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전열을 가다듬고선 아래에 위치해 있는 그의 등을 부리로 쪼기 위해 하강했다.
 강노리는 앞으로 한 바퀴 굴러 까마귀의 공격을 피했고 자세를 잡아 손에 집어든 돌멩이를 강속구로 날렸다.
 퍼억!
 거리가 가까워 피할 새도 없이 까마귀의 앞머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까마귀는 돌을 맞은 즉시 땅으로 추락했다.
 피를 철철 흘렸다. 사람으로 치면 뇌진탕에 걸려 숨 넘어 가기 직전일 터.
 “어어어!”
 푸드드덕, 푸드덕!
 최소 행동불능일 거라 여겼던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였다. 그러고선 도움닫기를 몇 번 하더니 다시 허공으로 비상했다. 멀리 간다 싶더니 다시 강노리 쪽으로 증오의 눈초리를 쏘아 보내는 게 아닌가.
 ‘해보자 이건가?’
 까마귀는 상당히 집요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크게 다쳤다.
 그렇다면 일단 도망치고 볼 일 아닌가.
 그러나 까마귀는 도망대신 공격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새대가리는 아닌가?’
 화가 나서 무작정 돌진할 법도 한데 침착하게 빈틈을 노리는 듯했다.
 강노리 주위를 빙빙 돌았다.
 까마귀의 움직임을 잠시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도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일반적으로 까마귀가 저렇게 떼로 쳐들어와서 사람을 공격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분명 조종을 당하거나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
 까마귀의 행동을 주시하며 강노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살다 살다 까마귀와 이렇게 싸우다니.’
 겪어봐야 알겠지만 저 까마귀는 강노리를 어떻게 해볼 심산이었다. 그러지 않고선 이리도 끈질기게 따라붙을 수가 없으니까.
 진심으로 그에게 해를 끼치려 하고 있다. 극단적으로는 살기를 띠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설사 까마귀가 본인을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강노리 입장에선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임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는 어떤 것이 되던 용납할 수 없으니.
 “돌, 돌!”
 피를 흘리는 까마귀를 보며 잠시나마 측은지심을 품었던 자신을 꾸짖었다. 이제 두 번 다신, 적어도 까마귀를 상대로 그런 선한 감정을 가질 일은 없을 것이다.
 시선은 빠뜨리지 않고 까마귀로 고정한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돌멩이를 하나 집었다.
 척.
 돌멩이를 또 하나 집어 왼손과 오른손에 균형 있게 분배했다.
 둘 다 아까 전 것과 비슷한 크기.
 ‘정통으로 맞히기만 하면 조질 수 있다.’
 대가리에 치명상을 입었던 탓일까.
 까마귀는 극도로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노리와 일정간격을 두며 호시탐탐 기회만 엿볼 뿐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꽤나 현명한 판단.’
 설령 노리가 돌멩이를 던져서 맞힌다고 해도 장거리였기에 까마귀는 크게 다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맞힌다는 보장이 없다. 하늘이란 공간은 그에게 주무대였으니까.
 그 이후로 강노리와 까마귀는 장시간 대치했다.
 그러는 사이, 주변에선 사람들이 까마귀와 치고받고 하는 혈전을 펼쳤다.
 누가 이기든 벌써 결판이 난 쪽도 있었고 일방적으로 한쪽이 당하는 쪽도 있듯 다양한 양상이 그려졌다.
 휘익—
 돌멩이를 있는 힘껏, 최대한 정확하게 까마귀를 향해 날렸다.
 “아, 씨.”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까마귀는 날개로 돌멩이를 쳐냈다. 이정도야 딱히 피할 필요도 없었다는 듯한 오만함이 뿜어졌다.
 ‘짜증나네.’
 그는 주울 수 있는 모든 돌멩이를 한 아름 안았다. 그리고 숨 쉬듯이 그 돌멩이를 하나씩 집어던졌다.
 그러다가 변칙적으로 네다섯 개를 왕창 집어 허공에 훌뿌리듯 날려 보냈다.
 ‘하나만 걸려라.’
 그 심정으로 한 것인데,
 퍼억!
 재수 좋게 정말로 하나가 얻어걸렸다.
 까마귀의 다리 쪽에 돌멩이 하나가 살짝 스쳐 지나간 것이다.
 푸드드덕.
 표현으로는 스쳐 지나갔다고 할 정도로 낮은 공격이었음에도, 까마귀는 비행을 중단하고 지상으로 휘청거리며 떨어졌다.
 퍽.
 그러나 정신을 잃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행동능력을 상실한 것도 아니다. 단지 다리에 조금 충격을 받아서 보인 움직임이었다.
 까마귀의 낮아진 높이와 머뭇거림.
 ‘해볼 만하겠다.’
 제법 큼지막한 돌을 까마귀에게 날렸다. 즉시 유효타가 터졌다.
 하긴, 이보다 높은 곳에서 설쳤을 때에도 영향을 끼쳤는지라 더 낮아진 까마귀는 비교적 맞히기가 쉬웠다.
 퍼퍼퍽!
 대가리보다 약간 아래, 목을 강타하는 돌멩이. 그로인해 까마귀는 본래 날개가 없었던 것처럼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터억—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날개를 두어 번 퍼덕이더니 살며시 눈을 감았다.
 [식인 까마귀 사냥(완료)]
 [축! 대장 식인 까마귀를 처리했습니다.]
 “아까 그 녀석이 대장이었다고?”
 하도 많은 까마귀 중 하필 대장과 맞붙었다니.
 재수 더럽게 없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어쩐지 상대하기 버겁더라니.’
 띠링!
 [까마귀의 존경심을 얻었습니다.]
 “흐음······?”
 이제껏 살아오면서 사람은커녕 키우던 강아지에게도 존경을 받아본 적이 없던 그였다.
 그런데 첫 존경을 까마귀로부터 얻는다? 전 세계를 찾아봐도 유례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아, 아니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까마귀와 지고지순한 우정을 나누었다면 몰라도 까마귀 우두머리를 쳐 죽였지 않은가. 동족을 죽인 자에게 존경을 표할 수 있단 말인가.
 굉장히 낯설면서도 어색했다.
 한편, 그 문구가 적힌 알림창이 점점 옅어지면서 뭔가가 생겨났다.
 “저건, 생고기?”
 느닷없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그것.
 붉은 육질과 마블링을 보아하니, 생고기가 분명했다. 어느 짐승의 것인지는 자세한 명칭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까마귀 고기(1인분)]
 까마귀 고기는 언제까지고 허공에 떠 있지 않았다.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오기에 넘어질 기세로 달려가 받아냈다.
 손바닥 위에 고기가 얹어지자 이에 대한 설명이 자동으로 새겨졌다.
 ====================
 << 까마귀 고기(200g) >>
 [고기를 먹은 사람의 기억의 일부를 삭제할 수 있다.]
 [고기를 먹은 직후, 15초간 숨을 참으면 능력 발동]
 * 고기를 반드시 다 먹일 필요는 없다.
 * 기억을 전부 지울 수는 없다.
 ====================
 “무···, 무슨!”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처럼 까마귀 고기를 얻은 자가 있는지 살핀 것이다.
 “열심히··· 싸우네.”
 아직 까마귀를 처리하지 못한 자들이 수두룩 빽빽 했다. 그러니 까마귀 고기를 얻었느냐 아니냐는 그들에겐 먼 미래의 얘기겠지.
 다시 시선이 손바닥 위의 고깃덩어리로 향했다.
 ‘설명이 사실이라면······.’
 어디에 쓰이든 요긴하게 쓰일 터.
 투툭, 투투투.
 어디선가 들리는 날갯짓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강노리는 까마귀를 처치했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고생들 하시네. 난 좀 쉬어야겠다.”
 오랜만에 팔을 휘젓고 다녔더니 뻐근해졌다. 가까운 벤치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쉬려고 벤치에 앉기는 했지만 안전하다고 단언하지는 못한다.
 언제 까마귀가 습격해올지 모르는데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불안한 기색으로 벤치에 앉아 있은 지 몇 분이 흘렀을까.
 다행히 추가적으로 까마귀가 그를 노리고 오는 일은 없었다.
 그때였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귓전을 퍽! 때리는 구조요청.
 소리의 근원지를 보자 다섯 살 난 꼬맹이가 세 마리의 까마귀에게 습격을 받는 중이었다.
 “와! 저것들, 1 대 1이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굉장히 비겁하네.”
 자신이 한 마리의 까마귀에게 공격을 당했던 게 행운이었던 모양.
 휘이익—!
 우선, 큼지막한 돌멩이를 그들에게 던졌다.
 파라라락.
 돌멩이를 피하기 위해 까마귀 세 마리가 동시에 꼬맹이로부터 멀어졌다.
 빠지직.
 길쭉한 나뭇가지를 하나 뽑아 씩씩대며 꼬맹이 쪽으로 걸어갔다.
 “야, 괜찮아?”
 “고···, 고맙습니다.”
 꼬맹이의 팔에는 여기저기 할퀴어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지간히 까마귀들이 괴롭힌 모양.
 “이제 괜찮을 거야. 저것들 나한테는 다가오지 않네.”
 세 마리의 까마귀들이 어중간한 거리를 두며 이쪽으로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당분간 내 옆에 붙어 있자. 너 보호자는 없어?”
 “네. 엄마 아빠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제가 여기 왜 있는 건지도······.”
 “그건 나도 그래 인마. 일단 상황이 어찌될지 모르니까, 지켜보자.”
 그가 꼬맹이를 데리고 벤치로 돌아가려는데.
 띠링!
 [이득 없는 선행을 하였습니다.]
 [수명이 1년 깎였습니다.]
 [*주의 : 남은 수명이 1년 이내일 경우, 즉사하게 되니 주의 바랍니다.]
 “뭐라고?”
 순간적으로 꼬맹이의 손을 휙 놓아버렸다.
 그 반동으로 꼬맹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혀···엉?”
 저 형이 돌연 왜 저러나? 싶은 듯한 아이의 표정.
 강노리가 관자놀이를 살살 긁었다.
 “아, 미안······.”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걸 아이가 잡으려고 하는데 휙, 손을 거두는 강노리.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해 안 되는 행동을 하자, 아이도 살짝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스스로 일어나며 말도 걸지 않고 어딘가로 휙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씁쓸히 바라보는 강노리.
 차마 넘어진 아이를 도울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방금 그 행동도··· 작지만 선행은 선행이니까.”
 다른 것도 아닌 목숨이 걸린 일. 내 목숨 값을 내면서까지 아이를 도와줄 필요는 없어보였다.
 “휴우······.”
 평소에 누굴 자주 도와주거나 하는 편은 아니다.
 이번 건도 몇 년 만에 있는 일. 그마저도 괜히 했다가 불미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차라리 애초에 아이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런 찝찝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동시에 눈이 녹듯이 서서히 까마귀의 형체가 녹아내려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물처럼 증발했다.
 까마귀가 사라지는 것도 상당히 이상했다. 보통 생명체가 죽자마자 거품처럼 사라지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썩고 닳아서 흙에 파묻혀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한 단계로 생략 해버렸다. 이치에 어긋나는 현상.
 ‘까마귀 고기는 나타나지 않는구나.’
 아무래도 대장을 쓰러뜨려서 얻은 희귀한 아이템인가 보다.
 쭉 주위를 관찰해보니 상황이 거의 종결되어가는 듯했다.
 까마귀 울음소리도, 허공에 날아다니는 녀석들의 수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괜히 나서지 않고 쭉 사태를 관망하려는데.
 ‘저 사람들은······’
 까마귀에게 대응 하지 못하는 몇몇의 사람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대개 어린아이나 휠체어에 탄 노인네였다.
 특히 휠체어에 탄 노인네는 팔만 이리저리 휘저을 뿐 까마귀에게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저것마저 도와주지 못하다니.’
 이쯤 되자 왈칵 짜증이 치솟았다.
 평소 이타심을 베푸는 성격이 아니지만 저런 꼴을 보고도 무시할 만큼 무뢰배는 아니다.
 그러나 분하지만 한 발자국도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목숨까지는 아니지만 수명이 걸려 있으니까.
 남의 돈 천만 원보다 내 돈 천 원이 아까운 법.
 괜히 나설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이때 옆에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봐.”
 나이가 얼추 비슷해 보이지만 자신보다 많아 보이는 얼굴.
 그도 휠체어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게 아닌가.
 “너도 수명 깎일까봐, 저 노인네 못 도와주는 거지?”
 강노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예······.”
 “내가 봤을 때, 좀 이기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차라리 저 노인네는 저렇게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막말이 너무 심했다. 저렇게 되는 걸 두 손 놓고 보고 있는 것도 안타까워 죽겠는데 굳이 사서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의식 잃었을 때 너도 꿈 같은 걸 꿨지? 거기서 생존을 하라고 했어. 내 생각엔 이런 일이 이번 한 번만으로 그칠 것 같지 않거든?”
 그건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괴상한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 같단 말이야. 그렇게 되면 저 노인네는 지금보다 더 비참한 꼴을 면치 못할 거야. 그럴 바엔 일찍 봉변당하고 세상 하직하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는 거지. 매정해 보여도 어쩔 수 없어.”
 “······.”
 “이득 없는 선행을 하지 말라는 그 말, 반대로 말하면 이득 있는 선행은 할 수 있다는 거잖아. 근데 막말로 저런 연약한 자들을 살려줘 봤자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어.”
 “······.”
 이건 좀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도와줬을 때 이득이 있고 없고를 떠나 내 수명이 깎이지만 않는다면 저분은 도와줬을 거다.
 “그 말뜻은 그냥 남 돕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하라는 게 아닐까? 이 판은 일종의 거름망인 거지.”
 “거름망?”
 “앞으로 있을 일들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자격 시험인거야. 이 거름망을 찢지도 못하고 걸릴 정도라면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낫다 이거지. 재수 좋게 저 노인네가 살아나봤자 가족도 아닌데 누가 옆에서 일일이 휠체어를 끌어주면서 도와줄까?”
 상대가 문득 통성명을 하자고 했다.
 상대의 이름은 김성남, 23살의 백수란다.
 결국 휠체어를 탄 어르신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까마귀의 수가 점차 불어나더니 수 마리의 공격에 의해 살갗이 뜯기도 찢겨져 과다출혈로 사망에 이르렀다.
 나머지 어린아이나 지팡이를 쥔 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강노리의 눈길을 끄는 자가 있었다.
 “아, 아니!”
 방금 전, 그가 목숨을 구해준 꼬맹이였다.
 “저, 저게. 기껏 살려놨더니······.”
 까마귀를 해치는 행위 자체가 위험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행위를 타인을 위해 행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꼬맹이와 까마귀의 대치를 지척에서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소녀. 아마도 꼬맹이는 저 소녀가 까마귀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일 터.
 “저걸 왜 도와줘, 멍청하긴······.”
 김성남이 혀를 차며 쓴 소릴 해댔다.
 “하긴, 한창 영웅놀이에 심취해 있을 나이긴 해.”
 강노리는 김성남과 꼬맹이를 번갈아보며 발을 동동 굴렸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야, 선심 써서 도와주었지만 다 알게 된 지금은 감히 도와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 저 꼬맹이 봐라.”
 김성남이 중계진이 된 듯 상황을 설명한다.
 “이쪽으로 오는데?”
 꼬맹이가 까마귀와 실랑이를 벌이다 말고 소녀를 데리고 이리로 오고 있다. 그의 망막에 맺힌 자는 다름 아닌 강노리.
 “너랑 아는 사이야?”
 영문 모를 표정으로 강노리와 꼬맹이를 보던 김성남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이대로 있다간 이 일에 말려들까봐 겁이 났던 탓이었다.
 그때, 꼬맹이가 부리나케 뛰어오며 소리쳤다.
 “도, 도와줘요.”
 강노리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꼬맹이가 와락 달려들었다.
 “뭐, 뭐, 뭘!”
 옷자락을 꽉 잡으며 꼬맹이가 왔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7마리나 되는 까마귀떼가 몰려오는 중이었다.
 꼬맹이가 옷자락을 그리로 잡아끌려고 한다.
 “아까 도와줬잖아요!”
 “지랄하지 마! 씨발!”
 꼬맹이고 나발이고 발로 차서 떨어뜨려 놓으려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도와줬지. 무슨 물귀신도 아니고!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그전에 까마귀떼가 목전에 당도했다.
 그 틈을 타 꼬맹이가 소녀와 함께 급히 강노리의 뒤로 숨었다. 그가 뒤로 쳐다보려 해도 허리 쪽 옷자락을 부여잡고 떨어질 생각을 안 하니 보기도 힘들다.
 “야야! 도와주려해도 철거머리처럼 들러붙으면 못 도와주잖아! 떨어져! 떨어지라고!”
 “아, 아아. 알았어요! 알았어.”
 꼬맹이가 뒤늦게 옷을 놓아주었다.
 ‘튀어야겠다.’
 이대로 까마귀를 제거해주면, 꼬맹이뿐만 아니라 소녀까지 도와주게 되는 셈.
 아까는 수명이 1년 깎였지만 이번엔 얼마가 더 깎일지 모른다. 여러 까마귀를 상대하고 두 명 구해줬다면서 더 많이 빼앗아갈지도 모를 일.
 주변에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자들의 시선이 따갑다.
 ‘시발, 니들이 떠맡든가. 그따위로 쳐다보냐?’
 뒤에서 뒷담 까면서 수군대더라도 도망부터 치기로 했다.
 그렇게 발을 옮기려 하는데.
 “저거, 뭐야!”
 “이상한데?”
 주변 사람들이 까마귀떼를 가리키며 쑥덕거렸다.
 강노리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리로 옮겨졌다.
 까마귀떼가 날아오다 말고 그의 면전에서 지상으로 사뿐히 착륙한다. 그리고 대가리를 숙인다. 마치 인사를 하는 것처럼.
 ‘뭐지?’
 여태껏 까마귀가 지상에 내려온 적도 없을뿐더러 공격적인 성향을 감추고 저리 얌전하게 있는 것도 처음 본다.
 예기치 못한 진풍경에 사람들이 강노리를 이상한 시선으로 본다. 까마귀와 무슨 관계라도 되냐는 듯한 표정.
 “지금 저 애한테 인사하는 거 맞지?”
 “새대가리인데 저런 예의를 갖추다니.”
 “까마귀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그제야 강노리는 까마귀의 이상행동이 뭘 뜻하는지를 파악했다.
 ‘존경?’
 대장 까마귀를 처리 하고나서 뜬 문구에 분명 까마귀의 존경을 받게 된다고 했다.
 그게 뭔 소린가 싶었는데 이런 뜻이었다니.
 보통 존경하는 자가 앞에 있으면 평소 까불던 사람도 얌전해진다. 이게 딱 그 꼴이다.
 “아!”
 망치에 뒤통수를 가격당한 것처럼 짧은 외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퍼뜩 이 상황이 그리 좋게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득 없는 선행······.’
 의도치 않았지만 그로인해 꼬맹이와 소녀는 무사하게 되었다.
 그의 표정이 싸악 변했다.
 또다시 수명이 깎이면 어쩌나 걱정하는 한편.
 난데없이 떠버린 반투명한 직사각형 알림창.
 [일곱 마리의 하급 까마귀가 당신을 존경합니다.]
 [하급 까마귀를 키우시겠습니까?]
 이를 보며 눈을 멀뚱멀뚱 뜰 뿐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다가온 김성남이 어깨를 툭 쳤다.
 “이봐, 뭐해?”
 퍼뜩 상념에 깬 강노리가 얼떨결에 말했다.
 “어? 어? 그게······.”
 [! 하급 까마귀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뭐지.”
 의문형이었는데 그걸 글자그대로 해석한 모양이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하급 까마귀라는 것의 주인이 되었다.
 눈앞의 까마귀 떼가 갑자기 허공에서 뿅, 하고 사라져버렸다.
 “뭐야.”
 주위 사람들이 보기엔 계속 혼잣말을 웅얼거리는 걸로 보일 터. 그걸 뒤늦게 알아챈 강노리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무마하려 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증발한 까마귀에 대해 여러 근거 없는 소문을 내는 사이.
 [튜토리얼 - 까마귀 사냥(完)]
 [까마귀 사냥에 성공했습니다.]
 [성공 보수로 3,000링(공통)을 얻었습니다.]
 —이라고 파란색 네모난 창이 떠올랐다.
 그리고 초록색 네모난 창이 추가로 떠올랐다.
 [최초의 사냥꾼, 강노리에겐 추가로 5,000링이 주어집니다.]
 ‘알림창의 색깔이 다르네?’
 그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일찍이 시선을 거두어들인 걸로 보아 마지막 문구는 그 혼자만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링 어디 있다는 거지?”
 저마다 공통으로 얻은 3,000링의 소재를 찾고 있는데—
 퍼퍼퍼펑!
 먼발치서 걸쭉한 괴음이 났다.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그 소리가 컸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모여들었다. 몇 사람들은 그리로 거동을 했다.
 강노리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웬 짜리몽땅한 연필 같은 통짜 몸매의 남성이 다 낡아빠진 챙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서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사람들이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강노리도 숨을 훅 들이마시는 바람에 기침을 연발했다.
 “사람이 아니잖아.”
 사람인 줄 알았던 상대는 칙칙한 초록빛 피부에 얼굴 곳곳에 돌기가 나 있어 흉측한 괴물 같았다.
 그가 자신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둘러싼 사람들을 보며 인사를 했다.
 “인간! 인간! 다들 초면이군요. 반가워요!”
 지하100미터에서나 울려 퍼질만한 저음과는 상반된 말투였다.
 “전 고블린, 블링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기본적인 생존방침! 첫 번째 놀이! 담당하게 되었죠!”
 스으윽.
 누군가 한 명이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남성으로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평소 헬스깨나 다닌다는 듯 몸이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인상이 험상궂은 것이 한 번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그가 대뜸 블링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다른 사람들이 왜 저러나, 하며 구시렁대는 한편.
 블링이 경고투로 말했다.
 “인간! 인간! 전 앞이 막혀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답니다. 당장! 비켜주세요!”
 남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저리 고개를 휘저으며 블링을 살펴보았다.
 “이게 진짜 말로만 듣던 고블린이라고? 어디 보자.”
 기어코 블링이 쓴 모자까지 벗겼다.
 돌발행동에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악어처럼 쩌억 입을 벌렸다.
 급작스런 행동의 탓도 있지만 고블린의 외모를 보고도 무신경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머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탈모증세가 심해져 있는 블링. 머리카락이 몇 올만이 외로이 뒤통수에 솟아나 있을 뿐이었다.
 “이···, 인간!”
 블링이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턱을 쳐들었다.
 이에 남성이 한 발자국 뒤로 후퇴했다.
 “제가! 경고! 했나요? 안 했나요!”
 블링이 남성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 무게감을 못 이기고 남성이 뒤로 넘어갔다.
 콰당.
 복부 위에 올라탄 블링이 뒷주머니에서 단도를 끄집어냈다. 햇빛을 받아 날붙이가 반짝거렸다.
 “자, 잠깐만···, 잠깐—”
 남성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방어자세를 취하려 했다. 그렇게 단도를 막으려 했지만.
 휘리릭—
 블링의 손이 한발 빨랐다. 그의 단도가 위에서 아래로, 남성의 복부로 향했다.
 푸—슈우욱. 콰아악.
 “제가! 경고! 했죠?!”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하며 블링이 남성의 배를 사정없이 쑤셔댔다.
 콰직, 콰콱.
 남성은 무어라 웅얼거렸지만, 그 내용을 알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입안을 가득 메운 핏물이 입을 열 때마다 용암이 분출하는 것처럼 뿜어져 나왔기 때문.
 휙.
 블링이 남성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고개를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휙휙 돌렸다.
 조그마한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고 손은 살점과 피로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다.
 마음속으로나마 그를 귀엽거나 만만하게 봤던 이들도 그 생각을 빨리 고쳐먹었다.
 흔히 판타지 소설에서 엑스트라한테 발리던 고블린에 대한 편견은 온데간데없어진 지 오래.
 처어억!
 단지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그 살기어린 눈초리에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멈춰! 멈춰! 다들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만 더 물러서면 죽습니다! 죽어요!”
 투 투툭.
 말 잘 듣는다.
 사람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누가 보면 지뢰라도 심어놓은 줄 알 정도로.
 “휴우.”
 블링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올라탔던 남성의 배 위에서 폴짝 뛰며 내려왔다. 남성 시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등신처럼 죽고 싶은 사람은 없겠죠?”
 블링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분명 웃음이긴 한데 아주 교활하고 사악해 보인다.
 “······.”
 그 누구도 대답은커녕 입술을 떼지 못했다. 그 삭막한 분위기를 몸소 느낀 블링이 활짝 웃었다.
 “좋아요! 좋아요! 이제야 제 얘기를 경청할 자들만 남게 되었군요!”
 블링이 터덜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길은 홍해의 기적처럼 자동으로 양 갈래로 갈라졌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재미있는 놀이를 함께할 거랍니다.”
 블링이 대중을 둘러보며 히죽 웃었다. 하나같이 사색이 된 얼굴들이다.
 “아, 다들 긴장을 푸세요. 누가 놀 때 잔뜩 겁먹은 상태로 놉니까? 즐겁게 놀아야죠. 아, 방금 그 일 때문에 시무룩해진 걸까요? 걱정 마세요. 아까 그 등신처럼 무례한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제가 칼을 들일은 없을 거랍니다!”
 블링이 마저 설명을 이었다.
 “대망의 첫 번째 놀이를 곧 하게 될 겁니다. 그 놀이의 시작은······!”
 그가 단도를 든 손을 앞으로 내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 단도의 일직선 방향으로 향했다.
 거기엔 웬 문이 있었는데 일반 가정집에서 문 부분만 똑 떼어 온 것 같은 외견이었다.
 놀라운 점은 그 문이 운동장 한가운데에 붕 떠 있다는 점이었다.
 “저 문 안에서 펼쳐집니다! 여기까지, 질문 있으신 분?”
 이때부터 눈치를 살살 보다가 한 명이 용기 내어 손을 들었다. 블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 혹시 저 방에서도 누군가 죽나요?”
 “글쎄요. 그때그때 달라요! 놀이가 과격하다면 죽을 수도 있겠죠?”
 그 말에 다들 기겁을 했다.
 저 괴물이 말하는 놀이란, 결코 인간들이 평소 즐기던 놀이가 아니다. 정반대의 개념의 미친 짓거리지. 일전의 까마귀처럼 또 다른 괴물과 싸워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척.
 힙합모자를 둘러쓴 한 여성이 손을 들었다.
 “우리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아아! 좋은 질문이에요! 아주 좋아요! 똑똑해요!”
 “······.”
 여성은 때아닌 칭찬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블링이 말을 덧붙여나갔다.
 “매 놀이마다 살아남아서 끝까지 가는 거예요! 그것 외에 여러분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요!”
 옆에서 안경 낀 아저씨가 말했다.
 “저 문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놀이가 시작되겠네?”
 “정답! 정답이에요! 와우! 정말 똑똑하시네요!”
 블링이 방방 뛰면서 좋아했다. 이럴 때에는 꼭 어린아이 같았다. 하는 짓이 말종 그 자체여서 그렇지.
 “저 방에선 무슨 놀이를 하는 거죠?”
 “그걸 지금 말하면 재미없죠? 나중에 여러분의 담당자가 설명을 해줄 거예요!”
 그가 귀엽게 윙크를 하자 바닥에서 펑 하는 소리가 났다. 옅은 연기가 걷어지면서 웬 보물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커덩.
 보물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속에는 종이쪽지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자! 놀이에 들어가기에 앞서 제가 선물을 나누어드리겠습니다. 다들 나와서 쪽지를 하나씩 집어 가세요!”
 “뭐, 뭐지?”
 다들 경계심 어린 눈빛을 번뜩였다.
 이젠 블링이 코를 파도 의미 있는 행위로 볼 지경이 되었다.
 “쪽지에는 초능력이 담겨 있답니다.”
 “뭐? 초능력?”
 강노리가 상자를 뚫어져라 보았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얼마 안가 그 생각을 싹 고쳐먹었지만.
 사람들은 블링과 까마귀를 떠올렸다. 이런 비상식적인 것들이 출몰하는데 초능력이 나온다고 해도 어색할 건 없어보였다.
 그리고 거짓말이든 아니든 일단 가지는 게 신상에 좋을 것 같았다. 괴물을 상대하는데 맨몸 보다는 초능력 하나라도 있는 게 나을 테니까.
 사람들은 믿음과 불신이 공존하는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상자로 다가갔다.
 각자 쪽지를 집어가기 시작했다. 줄을 서지 않았기에 무질서하게 상자로 몰려들었다. 그 꼴이 꼭 좀비 떼 같았다.
 처억.
 강노리도 쪽지 하나를 집고선 복잡하게 둘러싼 대열을 빠져나갔다. 한적한 곳에서 홀로 사등분으로 접힌 쪽지를 열어보았다.
 [오십보백보]
 하얀 바탕에 검은 잉크로 적힌 글씨.
 명칭만 보고선 어떤 능력인지 확 와 닿지 않았다.
 쪽지의 하단부분에 개미만 한 크기로 자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었다.
 
 ====================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오십 걸음이나 백 걸음이나 같다는 뜻으로, 적이 백 걸음을 걸어봤자 자신의 오십 걸음에 못 미친다는 뜻.]
 [사용방법 : 오십 걸음을 걸은 뒤 상대방 지목.]
 [효과 : 상대의 이동속도 두 배의 속도를 낼 수 있다.]
 [* 발동하고 10분간 상대의 이동 여부에 상관없이 효과가 지속된다.]
 [A. 상대가 이동하고 있을 때에만 그 효력이 지속된다.]
 [B. 상대의 걸음이 멈추었을 시, 능력이 중지됨.]
 [C. 다시 능력을 쓰기 위해선 사용방법을 재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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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읽은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뜻이랑 다르잖아······.’
 따져봤자 들어줄 이는 없다. 단 하나 있긴 했는데 하필 블링이다. 그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
 최하단부에 한 줄 더 적혀 있었다.
 [* 초능력을 쓰기 위해선 종이를 삼켜야 합니다.]
 고개를 들어 다른 사람들이 어찌 하는지 지켜보았다.
 저마다의 얼굴에 신기함, 놀람, 심각함이 떠올랐고 몇몇은 쪽지를 다 읽었는지 입안에 구겨 넣었다.
 우물우물 씹고 삼키는 장면까지···, 황당하긴 해도 시키는 대로 하는 모양.
 강노리도 쪽지를 잘게 찢어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침으로 녹이니까 먹기에 불편하지는 않았다.
 ‘싫어하는 음식 먹는 것보다는 종이처럼 아예 무(無)의 맛을 먹는 게 나을 수도······.’
 먹고 나서 이 기술을 한번 써볼까, 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데—
 퍼어어엉!
 귓전을 때리는 폭음이 들렸다.
 절로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가 폭발음이 방금 전 것이 다였다는 걸 알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배꼼이 들어올렸다.
 폭발음의 근원지로 눈이 돌아갔는데 거긴 웬 사람 하나가 대(大)자로 뻗어 있었다. 전신이 화상을 입은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블링이 그자에게 달려가면서 외쳤다. 왠지 아주 신나 보였다.
 “등신 새끼가 한 명 더 있었네요! 여러분! 다들 모여주세요!”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화상 입은 자와 블링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추가적인 폭발이 일어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대중이 어느 정도 모이는 것을 확인한 블링이 입을 열었다.
 “폭발이 무슨 연유로 일어났는지 궁금할 겁니다.”
 그가 화상 입은 자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들어올렸다. 맥없이 들려진 손가락 사이로 재로 변한 쪽지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여러분 제가 보물상자를 열면서 뭐라고 했죠?”
 “쪽지를 하나만 들고 가라고 했습니다.”
 누군가 정답을 말했다.
 몇몇 이들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고작 그걸 안 지켰다고 저리 됐다고?’
 ‘나, 두 개 들고 갈 뻔했는데···, 천만다행이다······.’
 “이 등신은 초능력 쪽지를 두 개나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몸져누운 것이지요. 지금도 고통스럽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고통스러울 겁니다. 이대로 놔둘 거니까요.”
 화상 입은 자의 손을 놓으면서 블링이 일어섰다.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저의 얘기, 혹은 놀이를 하면서 알게 될 규칙, 규정들을 절대로 무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걸 무시하지 않고 숙지하며 철저히 이용한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된다고 희망을 드리고 싶네요!”
 보물상자 속은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탁!
 뚜껑을 닫으며 넌지시 말했다.
 “자, 이제 첫 번째 놀이를 하기에 앞서 여러분에게 조를 만들어드릴 겁니다. 스마트폰에 생소한 앱이 하나 깔려있을 거예요.”
 그 말에 다들 하나같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잠금을 해제하자 바탕에 깔린 이미지 중 낯선 것이 발견되었다.
 손과 손이 맞잡은 디자인인데 이름에 ‘동료 찾기’라고 되어 있었다.
 “앱에 접속하면 나의 동료가 될 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표시해두었답니다.”
 모두 스마트폰 앱을 열어보는 한편, 블링이 추가로 언급했다.
 “각자의 동료를 전원 찾은 뒤, 저 문. 시작의 문으로 들어가면 된답니다.”
 문고리를 칭칭 감고 있던 쇠사슬이 뱀처럼 흘러내렸다.
 스르륵.
 단단히 고정되어있던 자물쇠 역시 풀어졌다.
 툭.
 바닥에 떨어지면서 가루처럼 휘날리며 사라졌다.
 “문은 열어두었고.”
 굳게 닫혔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은 온통 하얀빛만 보일 뿐 어떤 공간인지 유추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최대한 빨리 문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겁니다. 시작!”
 시작이라는 신호에 맞춰 시작의 문 위에 커다란 숫자가 생겨났다.
 홀로그램으로 구성된 숫자는 10.
 다른 숫자로 바뀌지 않고 고정된 채, 떠 있는 걸 보니 시간을 나타내는 건 아닌 듯했다.
 잠시 그걸 쳐다보다가 변화가 일어나지 않자, 사람들이 분주히 제 갈 길을 갔다. 한 손에 든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저 숫자가 의미하는 게 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상, 결국엔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를 일에 매달리지 말고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최선.
 동료찾기 어플에 접속한 사람들이 그걸 바탕으로 운동장을 배회했다.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눈동자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동료를 모으는 것, 문을 통과하는 것이 남들보다 뒤처지면 불이익을 당할 것은 자명한 사실.
 이는 블링의 마지막 발언이 증명해준다.
 — 최대한 빨리 문에 들어가는 게 좋아요!
 툭.
 강노리도 어플을 통해 찾아야 할 동료의 위치를 파악했다.
 앱에는 실시간 gps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지도형식의 바탕에 자신을 나타내는 검은 점과 동료를 나타내는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상단부엔 간단한 설명도 곁들여 있었다.
 
 ====================
 [동료는 본인을 포함 총 4명으로 구성.]
 [4명의 동료를 모두 찾지 못할 시, 문을 넘을 수 없다.]
 ====================
 
 다다다다!
 강노리는 정신없이 내달리며 동료를 나타내는 붉은 점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헌데, 다가가면 갈수록 붉은 점도 멀어져갔다. 그것도 하필이면 반대방향으로.
 “야 인마! 멈춰 서!”
 소리를 질러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자신을 부르는지 모르는 건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하긴,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에 제대로 들릴지나 의문이었다. 동료 외에 애먼 사람만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으니 이 방법은 좀 다가간 뒤에 써야겠다 싶었다.
 ‘아, 이거 나만 알 수 있는 건가?’
 상대방은 강노리가 동료인 걸 까맣게 모르는 듯했다.
 쌍방향으로 서로의 위치를 안다면 만나는 게 참 쉬울 텐데. 그렇지 않으니 이렇게 멀어져만 가는구나.
 그리고 화면에 떠 있는 점은 본인과 동료 한 명분밖에 없다.
 보아하니, 멀어져 가는 동료도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에 실린 또 다른 동료를 찾으러 가는 듯했다.
 즉, 나머지 동료를 찾기 위해선 우선 자신에게 할당된 동료를 먼저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름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굳이 멀리 갈 것 없이 이름을 불러서 소집하면 될 터.
 그런데 이름이 없는 걸 보니 발에 불이 나게 뛰어서 몸으로 때우라는 것 같기도 했다.
 ‘이름 넣어줘도 될 걸 가지고 참나.’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채 동료를 향해 열심히 내달렸다.
 스마트폰 화면과 정면을 번갈아보고 있는데 좀 짜증이 났다. 자신이 달려가는 만큼 상대도 어딘가를 향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방향도 일치해서 다가가도 붙잡기는 힘들어보였다.
 마침, 유용한 기술이 떠올랐다.
 ‘오십보백보를 써야겠다.’
 상대의 이동속도의 두 배를 낼 수 있기에 무조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술.
 ‘오십 걸음을 걸었으니.’
 기술 사용조건은 충족한 셈.
 자신이 추격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되려나?’
 —하는 의심을 불식간에 잠재우는 현상이 일어났다.
 손끝에서 발사된 붉은 광선이 상대의 등짝에 꽂혔다.
 타악—
 일순, 저 사람이 쓰러지진 않을까 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잘 뛰어간다. 그냥 자신이 한 것은 시각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는 모양.
 타닥. 타닥!
 강노리는 달리면서 뭔가 엄청 빨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스쿠터 속도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목표물보다는 빨라진 셈이니 금방 따라잡을 터였다.
 타닥, 타탓.
 목표물에 거의 다가가고 나서 음성이 닿을 수 있을 만해지자.
 “야, 야! 인마! 이 새끼야 멈추라고!”
 윽박지르듯 소리 질렀다.
 그러자 7미터 전방에서 한 남성이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스마트폰 화면의 붉은 점도 덩달아 이동을 멈춘다. 방금 멈춘 저자가 동료인 것을 증명해주었다.
 강노리는 마저 뛰어가서 상대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내가 네 동료야!”
 그러면서 스마트폰 화면을 내밀었다. 두 점이 딱 달라붙어 있고 주위엔 둘 외엔 아무도 없었기에 믿을 수밖에.
 동료는 강노리의 또래로 보이는데 상당히 준수한 외모와 높은 키를 자랑했다.
 냉큼 그의 스마트폰을 뺏고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유찬돌이라 적힌 이름과 또 다른 누군가의 점이 움직이고 있었다.
 강노리한테 할당된 동료는 유찬돌이란 이름의 청소년이었던 것이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화면에는 강노리라는 이름과 다른 한 명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유찬돌이 찾아야 할 동료만 이름 없이 왔다 갔다 거릴 뿐.
 ‘이런 장난질을 해놓다니.’
 한 명에게 할당된 동료의 위치는 오직 한 명.
 한 사람이 단번에 나머지 동료를 찾지 못하게 주최 측에서 수를 써놓은 것이다.
 그 찾아야 할 사람마저 이름을 모르기에 부르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남지 않는다.
 내가 찾으러 가든가, 아니면 누군가 나를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든가.
 다른 데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찾으러 가는 걸 택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움직이는 쪽이 덜 불안하겠지.
 어쨌든 이 방식은 우연의 일치가 쌍방으로 겹치지 않는 한 육체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어떻게든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행위.
 재수 옴 붙은 경우엔 A가 B를 쫓고, B는 C, C는 D, D는 A를 쫓는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엄청난 시간 낭비를 낳게 될 터였다.
 한편, 멈춰있는 두 사람을 향해 저 멀리서 누군가 또 오는 게 보였다.
 강노리든 유찬돌이든 둘 중 하나가 자신의 동료 찾기 앱에 등록되어 있는 듯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네.”
 강노리가 옆 사람 들으라고 중얼거렸다.
 “저기 봐.”
 유찬돌이 문을 가리켰다.
 문 위의 숫자가 언제부터인지 7로 변경되어 있었다.
 “저 숫자는.”
 때마침 4명의 동료가 완성된 조가 문을 통해 들어갔다.
 그러자 숫자가 6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카운트다운이다.”
 “저게 다 떨어지면 망할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저 고블린은 왜 이런 건 얘기 안 해줬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 그들 조만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사람들이 문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우린 이제 한 명 남았잖아. 저 숫자가 다 깎이기 전에 무사통과할 수 있을 거야.”
 유찬돌이 희망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이, 막 한 사람이 합류를 했다.
 강노리와 유찬돌을 보며 중얼거렸다.
 “야, 강노리. 이렇게 보게 되다니.”
 김성남이 강노리의 어깨를 툭 치며 반가운 표시를 했다.
 강노리는 인사대신 유찬돌의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져라 보았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뭐하는 거지? 김성남한테 와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찾으러 가는 수도 있지.”
 유찬돌이 강노리에게서 스마트폰을 낚아채고선 어딘가로 뛰어갔다.
 “야!”
 유찬돌을 부르면서 문 쪽을 쳐다보았다.
 숫자는 3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노리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큰일 났네. 우린 문 쪽으로 가 있자.”
 김성남이 동의하며 둘이 문 쪽으로 가려는데.
 유찬돌이 간 방향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저···, 저게 다 뭐야.”
 학교 정문에 심상치 않은 무리가 등장했다.
 붉은 안광에 기다란 혀를 내밀고 있는 들개 무리.
 헥헥 대며 정문을 너머 운동장 쪽으로 슬금슬금 발을 들이밀었다.
 날카롭게 삐져나온 송곳니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심을 유발했다.
 그 근처에 유찬돌과 웬 꼬맹이······.
 “아! 쟤는 네가 구했던 애잖아?”
 김성남이 이마를 팍 치면서 인상을 구겼다.
 “저거 완전 암 덩어린데?”
 “도와줘야 해.”
 강노리가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팔을 붙잡으며 김성남이 외쳤다.
 “미쳤냐? 저 들개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봐? 그리고 너도 가지마. 나 혼자 남겠다.”
 “그건 그러네.”
 강노리가 금방 이성을 찾았다.
 침을 질질 흘리며 인근 사람들을 습격하기 시작한 들개를 보며 빠른 포기를 했다. 그렇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것 보다 야. 숫자가 0이다······.”
 얼빠진 표정으로 김성남이 중얼거렸다.
 막 한 조가 문으로 들어가면서 기어코 숫자가 0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조를 이루지 못한 사람의 수가 상당했다. 자신을 비롯한 이들은 다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들개들이 문제였다. 여기저기 사람들을 물어뜯고 헤집어 놓았다. 곧 강노리와 김성남이 있는 데까지 올 기세.
 “야야, 달려!”
 김성남이 서둘러 학교 건물로 달려갔다.
 강노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김성남을 따랐다.
 들개들이 발밑까지 추격을 해왔다.
 돌로 된 계단을 훌쩍 뛰어넘으며 누구보다 빨리 외딴 건물 안으로 들어간 김성남. 얼마 지나지 않아 20명의 사람들도 그곳으로 피신을 하는 데 성공했다.
 초조한 기색으로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강노리에게 손짓을 했다.
 “빨리, 빨리!”
 강노리 그림자까지 바짝 따라붙은 들개.
 그가 채 뒤돌아보지 못하고 손을 뒤로 빼고 아무데나 지적했다. 그러자 붉은 광선이 나오며 들개 중 하나의 다리에 겨우 적중했다.
 [날쌘 들개에게 오십보백보를 걸었습니다.]
 슈우웅.
 마치 날아갈 것만 같은 달리기속도를 자랑하며 강노리가 건물의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슬라이딩을 하여 들어온 그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입구에 섰던 김성남이 바삐 문을 봉쇄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크르르릉!”
 들개 무리도 입구에 당도했다.
 “야! 막아! 막아!”
 “어서!”
 건물 내부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적극적으로 유리문에 몸을 밀착시켰다.
 쿵, 쿵쿵!
 들개무리도 유리문에 몸을 들이 박았다.
 그런다고 깨지기는커녕 금도 가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창이 흔들리는 게 불안감을 조성하기는 딱.
 “막을 거. 막을 거! 아무거나 들고 와!”
 들고 오라 해놓고 기다리기 어려웠는지 본인이 직접 움직였다.
 지척에 있는 휴게실용 8인용 탁자를 움켜잡았다.
 “끄으응!”
 길이도 길이지만 다리부분이 쇠로 된지라 무게가 상당했다.
 옆에 선 40대 중년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 두 명이선 안 됩니다. 도와주시죠!”
 그제야 어정쩡한 자세로 지켜만 보던 사람들이 손을 빌려주었다. 여럿이 모이고 나서야 바닥으로 질질 끌어서 탁자를 입구 앞에 배치할 수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가능한 무게 나가는 것들을 추가적으로 모조리 옮겨놓았다.
 무거운 짐을 옮기느라 힘이 부쳤던 어르신들이 허리운동을 가볍게 하는 사이.
 쿵, 쿵쿵!
 녀석들은 지칠 줄 모르는지 문을 두들겨댔다. 결과적으로는 헛짓거리였지만.
 “휴우.”
 들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쉬는 강노리.
 벽에 몸을 기댄 채 쭈욱 미끄러지듯 내려와 엉덩이에 바닥을 밀착시켰다.
 하도 정신이 없었던 터라 이제야 숨을 돌린다.
 잠시 감았던 눈을 떠 현재 위치를 파악했다.
 ‘매점.’
 외딴 곳의 조그마한 규모의 매점이었다.
 그렇지만 24명의 사람들을 수용하기엔 그럭저럭 괜찮은 편.
 사람들은 저마다 의자나 바닥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정신을 좀 차린 강노리가 일어나 뭐, 먹을 게 없나 다가가는 그때.
 그늘진 곳에서 웬 남성의 음성이 들렸다.
 “어서 오게.”
 “어?”
 매점 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어둠속에서 기어 나왔다.
 다짜고짜 내뱉는 말이—
 “아이템을 사러 왔나?”
 좀 뜬금없었다. 밖에서 짓는 개 소리도 나지 않는단 말인가. 누가 봐도 미친 개를 피해서 안으로 피신을 한 거지, 태평하게 매점 식품 구매하러 온 것은 아닌데 말이지.
 그건 그렇다 치고—
 일순, 강노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이템이요?”
 그동안 숱한 편의점, 마트, 매점을 들렀지만 진열된 물품들을 아이템이라 부르는 자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아이템이란 언급을 한다. 무슨 게임 상점 NPC도 아니고.
 “매점에 온 것이 아이템을 사러 온 것이 아니면 뭐야?”
 입구에 포진해 있던 사람들이 전부 몰려들었다.
 “어? 이게?”
 빵이나 얹어져 있어야 할 곳에 흉악스럽게 생긴 도끼, 예리하게 벼려진 칼, 유려한 곡선의 활이 있는 게 아닌가.
 각 무기 앞에는 조그마한 명찰 비스름한 것이 세워져 있는데 숫자의 끝에는 ‘링’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링은 방금 전 까마귀 떼를 처리한 대가로 받은 것이었다.
 그것으로 이 아이템을 살 수 있는 모양.
 그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네모난 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블링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
 << 공석을 채우는 자 모집 >>
 [시작의 문을 넘어간 몇 조가 사망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공석이 생긴 바, 그 빈자리를 채울 조를 구한다!]
 [단, 이번에는 특별히 인원이 아닌, 시간제한을 두겠다!]
 [A. 오후 1시 10분 - 운동장 정중앙에 문이 생겨남과 동시에 개방]
 [B. 오후 1시 20분. 문 폐쇄.]
 ====================
 
 시작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10분.
 거리상으론 매점에서 운동장 중앙까지는 가까운 편.
 그러나 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쿵! 쿠쿵!
 굉장한 근성으로 여전히 유리문에 노크를 하는 녀석들이 문제였다.
 매점 복판에 위치한 아날로그시계는 11시 42분을 향한다.
 약속된 시간이 오후 1시 10분이니 시간적으로는 아직 여유가 있는 셈.
 그 안에 어떻게 들개를 따돌리고 시작의 문으로 갈지 정해야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번엔 인원제한은 없으므로 같은 사람끼리 싸울 일은 없는 듯하다.
 모두가 한곳에 모여 매점 아이템을 바라보았다. 암묵적으로 다들 당장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무기를 사야 한다.’
 맨손으로 들개 무리에 대적할 수는 없는 노릇.
 무엇보다 녀석들은 입구에 붙어서 인간들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리는 형편. 지나가려면 무조건 한판 붙기를 각오해야 한다.
 마침, 까마귀 사냥으로 얻은 링도 있으니 무기를 사는 데 지장은 없을 터.
 저벅, 저벅.
 사람들이 매점 주인 주위로 몰려들었다.
 다짜고짜 강노리가 물었다.
 “혹시 이 학교에 아이템을 살 만한 곳이 더 있나요?”
 “아니. 이곳 매점 말고는 없지.”
 매점 주인이 인자한 미소를 내비쳤다.
 김성남이 우와,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많은 공간 중에서 이곳을 택했기에 들개에게 맞설 희망이 생긴 것이니.
 “자, 각자 무기를 고릅시다!”
 사람들은 각자의 재산 내에서(어차피 대부분 균등하게 3,000링뿐이지만) 무기를 골라잡았다.
 그러고선 각자 구석진 곳으로 가서 무기를 휘둘러보거나 찌르기 등의 공격기를 펼쳤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빠릿빠릿하게 골랐지만 단 한 사람만이 끝까지 남아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뭘 고르지.’
 사실 그는 엄청난 선택장애가 와버렸다.
 칼, 창, 활, 어느 것 하나 다뤄본 적이 없는 물건뿐이다. 개중에서 유일하게 같은 종류의 것을 만져본 것이라곤 칼인데 그것도 커터칼 정도였으니.
 “어?”
 무기들을 살펴보다가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가장 구석진 곳에 홀로 쓸쓸히 버려지다시피 한 아이템.
 칼, 도끼, 창, 등과 같은 무기류 사이에서 유일하게 어울리지 않는 단 하나.
 [물총]
 마침 주인도 그가 물총에 관심을 보이는 걸 눈치챘다.
 보통 손님이 망설이는 경향을 띠면 설명해주려 할 텐데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이건 설명을 해줄 법도 한데 말이지.’
 참다못한 강노리가 말문을 열었다.
 “이 물총은······.”
 “8,000링이네.”
 가격은 묻지도 않았는데 즉각 튀어나온다. 어지간히 팔고 싶나보네.
 “되게 비싸네요.”
 무기가 대체로 3,000링 이하의 가격 선을 유지하는 반면 이건 8,000링이란다. 이깟 물총이 뭐길래 다른 것들보다 그리 비싼지.
 “오늘이 재고정리 마지막 날이라서 파격적인 할인가에 모시고 있어. 특히 그건 여기 있는 분들의 재정 상태를 고려해서 8,000링까지 낮춘 거지. 나도 이만한 할인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네.”
 주인이 하는 말 중에 손님들의 재정 상태를 고려한다는 말이 유난히 거슬렸다.
 “우리들이 얼마 소지 하고 있는지 아시나요?”
 “당연하지. 보통 튜토리얼에선 많이 벌어봤자 8,000링이 고작이니까. 너도 그 이하겠지.”
 “그걸 어떻게.”
 “기본 상식이지. 혹시 8,000링이 있다면 이걸 사는 게 어때?”
 “흠. 싫어요.”
 8,000링이면 전 재산이다.
 이걸로 물총을 사면 왠지 사기를 당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안 사면 땅을 치고 후회할 거야.”
 “이게 살상용이 되나요?”
 디자인이라도 일반 총 같으면 말을 안 하지. 이건 영락없이 유아용 장난감 물총이 아닌가.
 “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가 보군.”
 “그걸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죠. 저 밖에 들개들한테 이따위 게 통하는지 묻는 겁니다. 휴, 저도 제가 뭔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요.”
 새삼 진지한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휙, 휙.
 얼굴을 붉히며 주위 눈치를 살폈다. 물총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따지고 드는 걸 보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들개는 충분히 몰아낼 수 있지. 어차피 문에 가는 게 목적 아닌가? 이것만큼 높은 성공률로 문에 갈 수 있는 것도 없어. 칼이나 창은 아무래도 근접이고 활은 숙련이 돼야 쏠 수 있고 설령 쏘려 해도 한 방에 맞추지 못하거나 하면 그전에 들개에게 물려죽기 일수야. 하지만 이 물총은 달라. 초심자라도 쉽게 다룰 수 있고 업그레이드 시킨다면 화살 이상의 살상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준비된 대본이라도 있는지 물총의 장점만 쏙 끄집어내 술술 털어놓았다.
 솔직히 듣고 보니 혹했다.
 “따라와. 보여줄게 있으니.”
 매점 주인이 물총을 흔들어 보이며 강노리에게 화장실로 오라했다.
 속는 셈치고 따라가 보기로 했다. 매점 주인이 뭘 보여주려나 싶기도 하고.
 
 ***
 
 “샀어?”
 저쪽에서 김성남이 말을 걸어왔다. 그 옆엔 유찬돌, 꼬맹이가 멀뚱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뭘 샀어?”
 “이거······.”
 강노리가 슬쩍 주머니에서 물총의 끄트머리만 꺼내 보여주었다.
 “풋!”
 김성남이 껄껄 웃었다.
 “설마 이걸 돈 주고 산 건 아니지?”
 “맞는데요?”
 “그거 말고 다른 건?”
 “이게 제 무기예요.”
 “······.”
 그 말에 김성남이 뒷골을 잡으며 정색을 했다.
 “와···, 넌 지금 이 상황에 물총싸움이 하고 싶냐? 그 피 같은 돈으로 장난감이나 사고.”
 김성남이 강노리에게 눈을 흘기고는 꼬맹이를 깔보듯 내려다보며 뇌까렸다.
 “암 유발자가 한 명이 아니고 두 명이네.”
 그러면서 유찬돌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인다. 비꼬는 투로—
 “휴, 찬돌아 이제 우리 어떡하냐? 일이 생길 때마다 손수 도와줘야 하는 코흘리개 하나랑, 세상물정 모르는 장애인 새끼 하나를 떠맡았으니.”
 유찬돌이 강노리와 꼬맹이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저기, 그렇게 까지 말하시면 좀······.”
 김성남이 언성을 높였다.
 “뭐?! 내가 어디 틀린 말 했냐? 이것들이 진짜 같은 조만 아니면 아우!”
 그가 주먹으로 벽을 한 대 치면서 씩씩댔다.
 유찬돌이 용기 내어 말했다.
 “저도 물총을 산 게 이해는 되지 않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우리끼리 다투면 안 될 것 같아요. 꼭 저 들개를 죽일 필요는 없고 무사히 문으로 가기만 하면 되잖아요······. 우리끼리 어떻게든 하면······.”
 어째 갈수록 목소리가 줄어드는 유찬돌.
 휙, 김성남이 돌아서며 찡그린 인상으로 유찬돌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그럼, 네가 저것들을 책임질래?”
 “그···, 그건. 그렇지만······.”
 강노리가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 몫은 제가 하겠습니다. 도와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김성남이 피식, 쪼개며 강노리의 멱살을 잡았다.
 “어떻게 네가 네 몫을 할 건데? 그 물총으로 뭘 할 수 있다고? 아까 유찬돌이 저 꼬맹이 살리려다가 뒤질 뻔한 거 알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너 하나 죽으면 끝이 아니야. 우린 조이기 때문에 조원 하나가 뒈지면 나머지 조원한테도 피해가 갈 것 아니야?!”
 “이거···, 이것 좀 놓고 얘기하시죠.”
 강노리가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상대가 이렇게 무례하게 나올 줄이야.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먹을 리 없는 김성남. 손바닥을 쫙 편 채, 팔을 뒤로 꺾었다. 그대로 강노리의 뺨이라도 후릴 기세.
 “안 놓으면, 안 놓으면 네가 어쩔 건데 이 새—”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푸슝, 이라는 소리와 함께.
 부우웅.
 김성남이 몇 번 뒷걸음질을 치다가 꽈당 넘어졌다. 두 눈을 끔뻑이며 자신이 왜 넘어진 것인지 모르는 얼굴을 해보였다.
 “뭐, 뭐냐?”
 김성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푸슝.
 또 그 소리가 났다. 동시에 김성남이 오른쪽 다리가 균형을 잃었고 전신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 주변엔 축축한 물기가 남아 있고.
 그 앞에선 물총을 든 강노리가 서 있었다.
 “뭐, 뭐야!”
 연신 뭐냐, 뭐야만 반복을 하는 김성남이 강노리의 물총의 총구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눈치를 챘다.
 “서, 설마? 그 물총으로?”
 “맞다.”
 “뭐? 맞다? 너 나한테 반말했냐? 내가 너보다 나이가 몇 살이나 더 많은데, 이 새끼가 보이는 게 없—”
 푸슝.
 김성남이 앉은 자세에서 가슴팍에 물줄기를 맞고 뒤로 넘어갔다. 어찌나 세게 넘어갔던지 뒷머리를 시멘트 바닥에 쿵하고 부딪혔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그가 머리를 꽁꽁 싸매며 소리쳤다.
 “씨발! 이 새끼가 진짜!”
 자세를 고쳐 잡으며 김성남이 일어나려 하는데, 강노리가 땅을 지지하고 있는 발목에 물총을 찍 쐈다.
 푸슉.
 김성남의 발목이 물줄기가 닿으며 꺾였다.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은 그가 한쪽 손을 내밀며 다급히 외쳤다.
 “알았어, 알았어. 그만, 그만하자! 내가 졌다, 내가 졌어!”
 “말로 끝날 줄 알았던 건 아니지?”
 강노리가 물총을 김성남의 이마에 겨누었다. 거리로 보나 아까의 수압으로 보나 이대로 물총이 쏘아지면 목이 꺾일 터였다.
 저도 모르게 김성남이 양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완벽하게 항복을 한다는 의미.
 “뭐, 뭐뭐뭐. 어떻게 하면 끝낼 건데.”
 “첫째, 다시는 나랑 이 꼬맹이를 무시하는 언사를 하지 마라.”
 “알았어, 알았다고!”
 “둘째, 앞으로 모든 일은 내 명령을 받고 진행한다.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나에게 발언권을 얻고 나서 입을 열고 말해. 알았나?”
 “아, 알았어! 이제 끝났어?”
 안타깝게도 강노리의 요구는 그칠 줄 몰랐다.
 “셋째. 조원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쓴다.”
 “그, 그것까지······.”
 “넌 형 대접 받을 자격이 없어. 그러니까 우린 너한테 반말을 쓸 거고, 넌 존댓말을 쓰도록 해라.”
 “후우.”
 “왜?”
 “아, 아니야.”
 “넷째.”
 “또? 언제까지 할···, 알았어.”
 김성남이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참자, 참아야 한다.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다. 참아야 해.’
 강노리가 말을 이었다.
 “넷째, 이 꼬맹이에게 무릎 꿇고 진심으로 사과를 해. 그게 끝이야.”
 그 말에 김성남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걸 밖으로 표출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생길 정도였다. 그래도 여기에 대해선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당하게 내뱉지는 못하겠지만.
 “무···, 무릎 꿇는 건···, 좀 심하지 않나?”
 강노리가 허공에다가 찍 하고 물줄기를 짧게 쏘아 보냈다. 그러면서 입꼬리를 쓱 말아 올렸다.
 “더 심한 게 있는데. 볼래?”
 그 말에 김성남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분위기 자체가 강노리 쪽으로 흐르고 있다.
 괜히 오기를 발동해 대들었다간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같은 조이기에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 여기면서도.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서 홧김에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은가.
 가끔 맨손으로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데 손에 엄청난 무기와 명분을 가지고 있다면 못 할 게 무엇이겠는가. 그것도 법과 질서가 없어져버린 이 미쳐버린 이 세상에서.
 ‘후우···, 시발. 시발.’
 김성남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미안함을 표현했다.
 척.
 꼬맹이 방향으로 몸을 틀고서.
 털썩.
 차례대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나머지 한쪽도 똑같이 했다.
 무릎을 꿇고서 양손을 그 위에 얹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입가가 힘겹게 살짝 열렸다. 걸걸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미···, 미안하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신이 비하하고 깔봤던 상대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한다. 이처럼 비참하고 부아가 치미는 상황이 어디 있을까.
 수치스러웠고 쪽팔려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한 수 지고 들어가야 했다. 당장은 사는 게 급선무니까. 살아남아야 나중에 복수를 할 수 있는 거니까.
 얼굴을 내리깐 채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강노리가 고개 숙인 김성남의 정수리를 보면서 일갈을 놓았다.
 “우리랑 같은 조였다는 것에 감사히 여겨라. 같은 조만 아니면 넌 죽은 목숨이었으니까.”
 몇 분 전, 김성남이 했던 말을 되돌려주었다.
 
 ***
 
 매점 한쪽에 앉은 강노리. 그는 빨라지는 맥박을 몸소 느끼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이 물은 꼬맹이가 매점에서 직접 링을 주고 산 것이다.
 물을 한 모금 한 뒤, 강노리가 꼬맹이를 보며 말했다.
 “고맙다. 남을 위해서 링을 쓰는 게 쉬운 판단은 아니었을 텐데.”
 손을 세차게 흔드는 꼬맹이.
 “아니, 아니야. 형 덕분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도 다 해보고. 또 그 이전에 내 목숨도 구해줬잖아. 여러모로 신세진 것도 많았으니까. 보답하는 거야.”
 “그, 그건······.”
 뭐라 말을 하려다가 목구멍 뒤로 삼켰다. 구해준 것도 사실이지만 곧이어 후회를 하며 죽든 말든 내버려두려 했던 기억이 났다.
 “휴.”
 강노리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꼬맹이가 의아스러워하며 그 연유를 물어왔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 나도 하면서 내가 맞나 싶었어. 살면서 누군가를 그렇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하도 능숙하게 하니까, 난 형이 전문가인 줄 알았어.”
 “훗, 그래 보였냐? 그땐 나도 꼭지가 확 돌아버려서 가슴에 불이 확 붙더라고. 무작정 들이댔지. 내가 꿀릴 건 없었으니까. 또 하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긴 하더라. 무시했던 상대방에게 그런 수모를 겪었으니 얼마나 기분 더럽겠냐.”
 갑자기 꼬맹이도 푹 숨을 들이켰다.
 “사과는 받았지만······.”
 저 멀리 유찬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성남을 보았다.
 “저 사람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게 영 꺼림칙해.”
 “그건 나도 그래. 뭐 별수 있겠냐. 일단 같은 조니까, 어쩔 수 없잖아. 문에 들어가기 위해선 조가 다 모여야 되니까.”
 강노리가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게 작게 중얼거렸다.
 “방법이 있긴 하지······.”
 둘의 대화가 잠시 멎은 무렵, 김성남 곁에 있던 유찬돌이 이쪽으로 넘어왔다. 다가오는 그를 보며 강노리가 대뜸 물었다.
 “무슨 대화 나눴어?”
 “아, 그게···, 조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하더라고.”
 유찬돌의 말에 꼬맹이가 코웃음을 치며 뇌까렸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야.”
 유찬돌이 놀랐다.
 “왜?”
 “요즘 초딩들은 입이 참 험하네.”
 “그 사람 욕먹어도 싼 거 아니야? 형?”
 “맞아. 그렇지만 네 입이 걸레 같은 것도 사실이야.”
 그 말에 꼬맹이가 머쓱한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강노리가 문득 뭔가 생각이 났는지 추가로 말했다.
 “아, 꼬맹이. 너 이름이 뭐지? 여태 그걸 안 물어봤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름 물어서 뭐해?”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이름이라도 알아둬야지. 뭐, 안 말할 거면 말고. 계속 꼬맹이라 부르면—”
 “아니야, 이름 말할게. 고옹간이야.”
 “이름이 되게 특이하네.”
 이름을 곱씹어보며 유찬돌이 중얼거렸다.
 “인터넷 보니까, 욕으로 된 이름도 있던데 뭐.”
 꼬맹이, 고옹간이 능구렁이처럼 자기변호를 했다.
 
 ***
 
 오후 1시 6분.
 사람들이 모두 매점 입구에 바짝 다가섰다.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책상과 전자레인지 등 잡다한 것들은 치워 놓은 지 오래였다.
 그 외에는 딱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각자 무기를 손에 꼭 쥐고 입구에 대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들개는 어디에 간 거지?’
 어느 순간부터 입구에 어슬렁대던 들개 무리가 사라졌다.
 입구가 조용해졌던 터라 마냥 좋기만 했는데 막상 나갈 순서가 되니 그것들의 행방이 궁금했다.
 “1분 있다가 문을 열겁니다. 다들 준비해주세요.”
 문고리를 양손으로 꼭 붙잡은 아줌마가 속삭이듯 전달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조 위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혼자만 살아선 결코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니까.
 조원이 한 명이라도 잘못된다면 조 전체가 시궁창에 빠진다. 때문에 본인과 조원의 목숨 값은 거의 같다고 보면 되었다.
 다들 마음속으로 1분 초읽기에 들어갔다.
 1분만 있으면 운동장 중앙에 시작의 문이 생긴다.
 1분은 매점에서 운동장 정중앙까지 전속력으로 달린다면 도달할 거라 예측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선두에 선 20대 청년과 30대 아줌마가 각자 좌측과 우측 유리문에 살을 비비고 서 있었다. 그들이 문을 여는 역할을 맡기로 했던 터. 한 차례,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고 나서—
 땡!
 분침이 절도 있게 움직여 9분을 가리켰다.
 “간다, 간다. 간다, 간다······.”
 뒷사람의 염불과도 같은 웅얼거림과 함께—
 예측불허의 환경 속으로 다들 뛰어들었다.
 쿠우웅.
 선두에 섰던 자들의 어깨가 문을 밀쳤다. 좌측과 우측의 매점 입구의 유리문이 활짝 열렸다.
 우선적으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따사로운 햇살.
 그리고 텅 빈 운동장과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온 들개 무리.
 어디 갔나 했더니 역시 먹잇감을 버리고 떠나지는 않은 모양.
 “으어어엇!”
 여기저기서 탄성 섞인 기합이 터져 나온다.
 들개의 깜짝 등장을 막연하게 예상은 했지만 워낙 급작스레 튀어나왔던 터라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나갔다.
 이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이전에 없던 무기를 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 이제 두려울 것도 겁먹을 것도 없다.
 싹 돌변한 태도로 들개와 마주했다.
 몇몇은 긴 창으로 들개를 위협하기까지 했다.
 그자들이 본의 아니게 미끼가 되어주었다.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남기며 강노리가 그 일대를 빠져나왔다.
 “이쪽으로! 이쪽!”
 선두 대열에 들어선 강노리가 고개를 휙휙 꺾었다. 가장 강했기에 조원들을 챙길 의무가 있었으니까.
 유찬돌이 고옹간의 손을 붙잡고 미친 듯이 내달렸고, 그 뒤를 엄호하며 김성남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썩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보였다.
 — 헥, 헤헥. 헥!
 들개 세 마리가 김성남을 추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젠장.”
 현재 이 상황은 혼자만 알고 있다.
 그렇다고 김성남이나 다른 이들에게 알리진 않았다. 괜히 알렸다가 걸음을 멈추거나 뒤를 돌아보았다간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른다.
 파팟, 파팟!
 강노리는 한달음에 조원들의 앞에 도착했다. 아직 들개는 저만치 멀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점에서 나왔을 때, 들개에게 [오십보백보]를 걸어놓았다.
 덕택에 자신보다는 조원들과 들개 사이의 간격이 더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조원을 제치고 들개와 가까이 설 수 있었다.
 당연히 [오십보백보]에 대해 몰랐기에 조원들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강노리와 왔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어, 들개.”
 “큰일 날 뻔했었네.”
 김성남과 유찬돌, 고옹간이 각자 창을 고쳐 잡으며 강노리 곁으로 걸어왔다. 다함께 들개무리에 대적하기 위함이리라.
 그런데 강노리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이동을 정지시켰다. 그러고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들개 무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거기에 있어. 이것들은 내가 처리한다. 그게 안전해.”
 — 크허헝.
 들개들이 홀로 나온 인간을 목표물로 지정했는지 발걸음을 늘어뜨리며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강노리가 물총을 들개에게 겨누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푸슝—
 수도꼭지를 틀었을 때 나오는 굵기의 물줄기가 쏘아졌다.
 콰콰콸!
 한 녀석의 대가리에 적중을 했다.
 고개가 휙 꺾이면서 강풍을 만난 듯 공중제비를 돌면서 10미터 바깥으로 나가떨어졌다.
 깨갱, 거리며 뒤집혀 있는 꼴이 최소한 경상 이상은 입은 모양.
 — 크르릉!
 동족이 당하자, 분개한 나머지 들개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한차례 공격이 퍼부어졌기에 공백이 생긴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그렇지만 달려오는 족족 물살에 튕겨져 나갔다.
 퍽, 퍼퍼퍽. 퍽.
 “물총은 반동이고 뭐고 상관없이 계속 쏠 수 있다 이것들아!”
 물줄기는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처럼 콸콸 쏟아져 나왔다. 주기적으로 방아쇠를 쭉 당겼기에 물 세기가 약해지지도 않았다.
 두 녀석이 물살에 시야가 가려지면서 정신없이 뒤로 날아갔다.
 한 녀석은 퉁 하고 붕 뜨더니 어딘가로 날아갔다.
 재수 없게 떨어지는 데가 정원의 암석이 깔린 곳. 제법 가속력이 붙은지라 암석에 살덩이가 꽂혔다.
 콰직!
 10초도 되지 않아 세 녀석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물총을 거두어들이며 매점 방향을 쳐다보았다.
 조 중에서 문에 당도한 이는 이쪽이 유일했다.
 나머지 조는 들개 무리에 둘러싸여 목숨에 경각에 달해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구하러 갈 수는 없었다.
 내키지 않을뿐더러 괜히 도와줬다간 이득 없는 선행이라며 수명만 앗아갈 테니까.
 이건 역지사지로 입장 바꿔 생각해보아도 마찬가지일 터.
 ‘내가 위험에 처했어도 저들은 외면했겠지.’
 시작의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김성남과 유찬돌, 고옹간도 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미련을 버린 강노리가 읊조렸다.
 “살 사람들이라면 어떻게든 살겠지.”
 이윽고 조원들은 무사히 강노리와 합류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그리고 1분이 지났는지 운동장 한가운데에 뿅하고 시작의 문이 나타났다. 문이 활짝 열리며 전에 보았던 하얀빛을 내뿜었다.
 “들어가자.”
 강노리의 외침에 김성남, 고옹간, 유찬돌이 나란히 문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거의 동시에 강노리도 행동을 옮겼다.
 고옹간은 문턱을 넘으며 살짝 다른 조가 있는 곳을 보았다. 이때까지 있었던 일로 추측건대 그는 다른 조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게 얼마나 조원들에게 피해를 입힐지 알기에 마음을 접은 듯했다.
 슈우우웅!
 
 ***
 
 문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보이지 않았던 내부의 정경이 비쳤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는데 온통 하얀 방에 들어온 것을 알았다.
 몇 걸음 걷다가 멈춰서며 벽을 손으로 짚어보았다. 어떤 질감도 딱히 없는 평범한 벽지에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뭐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반대로 있는 게 하나도 없다니.
 “저기······.”
 유찬돌이 주위를 환기시키는 발언을 했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입구였다.
 “저 문을 닫아야 하지 않을까?”
 운동장에서 봤듯이, 안에서도 바깥이 하얗게 빛이 났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 게 어째 찝찝했다. 혹시 저 문을 닫으면 뭐라도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까, 싶었다.
 “닫으면 되지요. 제가 닫고 올게요.”
 고옹간이 입구로 성큼 다가갔다. 문고리를 잡고 닫았다.
 “어? 안 잠기는데?”
 닫힌 줄 알았는데 손을 놓자 문이 서서히 열리며 원래 자리를 찾아갔다.
 “내가 해볼···, 제가 해볼게요.”
 김성남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급히 대사를 수정했다.
 강노리가 허락하자 당당하게 입구로 가더니 있는 힘껏 문을 쾅 닫았다. 발로 수차례 차기까지 하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관찰했다.
 끼이익.
 바닥을 긁으며 또 문이 열리는 게 아닌가.
 ‘고장이 났나?’하면서 의구심을 갖는 한편.
 “설마?”
 강노리가 불쑥 떠오른 게 있는지 행동에 옮겼다.
 현재 시간을 확인하면서 입구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다리를 들이밀며 수욱 빨려들어 가는 게 아닌가.
 1초나 지났을까. 도로 방으로 돌아와 놓고선 궁금증이 극에 달한 조원에게 설명했다.
 “아직 연결이 되어 있어. 바깥 운동장이랑.”
 유찬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1시 10분에 문을 개방한다고 했고, 폐쇄는 20분에 한다고 했지. 아직 20분이 되지 않아서 그런가본데.”
 블링의 문자를 보고선 그리 추측을 마쳤다.
 문이 닫히지 않는 의문도 풀렸겠다, 여기서 몇 분 때우면 된다.
 그렇게 여기고 있는데.
 수우욱, 수우욱! 수욱! 숙!
 입구를 통해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강노리의 눈썹이 비틀거렸다.
 ‘아까, 들개에게 쫓기던······.’
 문을 건너온 자들이 거의 넘어지다시피 하며 바닥을 슬슬 기었다. 몸에 성치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물리고 뜯긴 상처가 가득했다. 질린 표정으로 강노리 쪽으로 소리쳤다.
 “사, 살려줘!”
 “엥?”
 살려달라는 그 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슈웅, 숭 숭! 숭!
 입구를 타고 넘어오는 또 다른 무리.
 그 무리를 보며 방금 들어온 사람들이 덜덜 겁을 먹으며 벽으로 기어가 붙었다.
 — 크르릉! 킁킁!
 들개 무리가 방까지 넘어와 버렸다.
 하나, 둘, 셋···, 열 마리를 넘어가는 들개 수에 세는 것을 접었다.
 녀석들은 이번엔 작정을 하고 온 것인지 나머지가 올 때까지 멋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천장에 딱 생겨난 문구.
 [들개의 무리가 방에 있을 시, 폐쇄 시간이 되어도 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방 안의 들개를 모두 소탕해야 이 일이 일단락된다.
 퍼뜩 과거의 일부분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매점 안에서 받았던 블링의 메시지.
 — 공석을 채우는 자 모집.
 — 문을 넘어간 몇 조가 사망에 이르렀기에 그 빈자리를 채울 조를 구한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빈자리가 왜 생겼는지가 납득이 갔다.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들개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상세히 들여다보자면 인원제한이 걸려 있었던 것이지 견원제한이 걸린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이번에도 겪었듯이 이 방엔 인간과 들개가 공존할 수 없다.
 들개가 없어야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당시엔 문에 들어가면 끝날 일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방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미처 들개가 쫓아올 것을 예상치 못했는지, 공간적으로 궁지에 몰렸던 탓인지 죽어버렸고 그 기회를 강노리와 사람들이 얻게 된 것이겠지.
 
 ***
 
 방 안에는 12명의 사람들이, 17마리의 들개가 빽빽하게 공간을 채운 상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들개가 사람들을 향해 덮쳤다.
 — 크르릉!
 사람들도 이에 지지 않고 긴 창을 정면으로 내질렀다.
 그러나 한 번 찌른다고 그게 반드시 먹혀 들리는 없는 법. 가뿐히 창을 피하고 사람의 품으로 뛰어드는 녀석이 나타났다.
 푸슝.
 그런 것들의 처리는 강노리가 도맡았다.
 들개는 미처 사람에게 접근도 못하고 천장에 전신이 처박았다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지상으로 떨어진 채 정신을 못 차리는 녀석을 물총을 쏴서 문밖으로 몰아냈다.
 “다들 안심하고 싸워요!”
 강노리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었다.
 창을 사용한 1차 공격이 실패하면 곧이어 들개의 역습이 전개된다. 그 염려를 확실하게 덜어주는 것이 물총의 역할이었다.
 푸슝. 푸슝.
 들개와 사람이 한데 뒤섞여 난전이 일어났다. 그런 까닭에 방금 전 운동장에서보다는 정밀한 조준과 끊어서 쏘는 게 필요했다.
 집중을 조금만 하면 되었기에 들개 무리와의 싸움을 비교적 순탄하게 흘러갔다.
 콰직!
 깊숙이 창에 찔린 들개, 물총을 엉덩이에 맞고 날아간 것을 마지막으로 방 안이 말끔히 정리되었다.
 “문! 문!”
 입구 가까이에 있던 자가 서둘러 문을 닫았다.
 [문이 닫혔습니다.]
 그 문구가 뜨면서 다들 한숨을 돌렸다.
 
 ***
 
 방의 문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3개의 낯선 문이 생겨났다.
 각 색깔로 도배된 문, 그 위에는 사람 이름으로 된 명패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A조 : 강노리, 김성남, 유찬돌, 고옹간]
 [방으로 들어가시오.]
 어떤 조는 네 명이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귀신같이 그 문이 사라졌다.
 유찬돌이 강노리의 눈치를 보았다
 “김성남, 열어 봐.”
 “예.”
 김성남이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안쪽은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다. 문을 열고 몇 초 지났지만 짐승이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기색은 없다. 더 기다려볼까, 하다가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저벅, 저벅.
 네 사람은 안으로 들어서며 일렬로 쭉 늘어선 사물을 확인했다.
 셀링라이트의 은은한 조명을 아래, 직육면체의 투명한 유리관이 뭔가를 덮고 있었다.
 내용물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거기엔 낡은 투구, 녹슨 빗살무늬토기, 녹적색의 구슬이 박힌 목걸이 등 다양한 고대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박물관 같은데······.”
 — 하고 김성남이 홀로 중얼거리다가 강노리의 눈치를 보았다.
 강노리가 ‘발언권 얻을 필요 없고 그냥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도록 해.’라고 했다. 김성남이 일일이 발언권을 얻으려 하면 별것도 아님에도 심히 거슬릴 것 같았으니까.
 유찬돌이 유리관에 손을 갖다 대며 고대유물을 들여다보았다.
 반면,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나머지 세 사람은 대충 훑어보며 지나치는 중이었다.
 “대체 뭘 시키려고 하는 걸까요? 순수하게 박물관 견학을 시켜줄 리는 없을 텐데.”
 “흠······.”
 당최 뭘 하려는 건지 일말의 유추도 불가능 했다.
 박물관을 거닐다보면 알려주겠거니 하면서 생각 없이 걸었다.
 한 바퀴 빙 돌아 처음 발을 디뎠고, 봤던 유물 쪽으로 되돌아왔을 무렵.
 그 앞에 정체불명의 단신의 고블린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조명이 비춰진 유물 앞에 있었기에 얼굴 윤곽만 대강 파악이 되었다.
 “인간! 반갑다! 난 너희들의 보물찾기를 담당할 블링 주니어다!”
 적이 아닌 것을 확인한 고옹간이 안심을 하며 물었다.
 “혹시 블링의 아들이에요?”
 “아니! 그것을 어떻게! 인간이!”
 블링 주니어가 방방 뛰면서 놀라워했다. 대충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사실인데 말이다.
 그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김성남이 핵심을 콕 집었다.
 “보물찾기가 우리가 할 놀이? 라는 건가?”
 “맞아! 맞아! 인간이 할 놀이가 맞다!”
 주책없게 소리치며 블링 주니어가 답했다.
 “휴우······.”
 김성남은 고블린의 말투에 영 적응하기 힘든 듯했다.
 대신, 강노리가 추가 질문을 했다.
 “우리가 방금 본 유물들 하고 관련이 있습니까?”
 “그것도 맞다, 맞다! 여기 있는 보물들 중에 하나를 너희가 숨기면 된다. 아주 깊숙하고 은밀한 곳에! 철저하고 신중하게!”
 “지금 숨겨야 하나?”
 “아니, 우선 하나를 고르기만 해라! 그 다음 나한테 들고 오라!”
 강노리와 고옹간, 유찬돌이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한 번 보물을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
 아까 이곳에 첫 방문했을 때 보기는 했으나 그땐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뭘 하려는지 몰랐던 상태였기에 유심히 보지 못했다.
 더군다나 목적을 모르고 본 것과 알고 난 뒤에 보는 것은 엄연히 관점의 차이가 있기 마련.
 그 세 사람이 각자의 방향으로 가는 한편, 김성남은 블링 주니어의 곁에 머물렀다.
 “뭐냐, 인간?”
 블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한 말을 따라 무작정 어디로든 움직이고 봐야 정상이거늘, 옆에 서 있는 이 인간은 망부석마냥 제자리에 서있다.
 뭔가 입술을 움찔거리며 주변 눈치를 보는 꼴을 봐서, 뭔가 용건이 있는 걸로 확신한 블링이 재차 물었다.
 “할 말이 있나?!”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이 놀이에서 조원의 수는 중요한가?”
 “당연하지! 너희들은 초짜이니까, 인원수가 4명이 아니면 상당히 불리해진다.”
 “만약 인원수가 한 명이라도 줄게 되면? 그대로 가나?”
 “줄어든 채로 진행되지.”
 “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없지! 이 조는 보물찾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김성남이 실망감에 짧은 탄식을 토했다.
 거기에 대고 블링 주니어가 결정타를 날렸다.
 “이 조가 마음에 안 드나 본데? 그래봤자 소용없어. 같은 조는 죽일 수 없다.”
 뜨끔한 김성남이 묘한 눈빛으로 블링 주니어를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내가 언제 죽인다고 했냐? 왜 말을 지어내는 거지?”
 “죽일 것 아닌가? 내 감각을 속이려 하지 마라! 인간!”
 아니라고 잡아떼든 아니든 설득당할 고블린도 아니고 해봤자 쓸모없다. 어차피 잠시 보고 말 상대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정보만 얻어 가면 그만.
 “같은 조를 죽일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이지?”
 “역시, 내 감이 맞았군. 인간, 그들을 죽이고 싶은 거지?”
 “묻, 묻는 말이나 대답해! 왜, 왜 못 죽···, 아니 왜 못 건드리는 거지?”
 “그건 나중에 설명한다. 그렇게만 알아둬.”
 블링 주니어가 말을 잘라버리자 김성남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그는 학교 매점에서 그 수모를 당한 그때를 잊지 않고 있었다.
 살면서 그 누구의 멸시도 당해보지 않았기에 그 충격은 배로 커졌다.
 그 이후로 호시탐탐 강노리를 칠 기회만 노렸다.
 그렇지만 그녀석도 그렇고 옆에 딸린 꼬맹이, 고옹간도 심히 거슬렸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녀석이지만 강노리와 협공한다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또한, 어정쩡한 위치의 유찬돌도 마냥 자신을 도와줄 것 같지도 않고.
 이 조에서 김성남의 입지는 매점 사건 이후로 급격히 좁아졌다.
 강노리도 그렇지만 그 사건을 목격한 산 증인인 나머지 녀석들도 영 마뜩치 않았다.
 자신의 치욕적인 장면 자체를 지우기 위해선 그걸 본 것들도 같이 생매장을 시키고 싶은 바람이었다.
 기회가 되면 다 죽이고 새 출발을 하려 했다.
 그런데 그 기회란 놈이 오질 않았다. 시간상으론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적개심이 클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밝은 대낮, 곁에 조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것도 물총을 지닌 강노리라······. 그 혼자선 절대 한 명도 쓰러뜨리지 못할 그림이 그려진다.
 강노리랑 1 대 1로 붙어도 이기지 못할 판에 3 대 1은 어불성설.
 그러다가 마침 조가 단독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어두컴컴한 환경이라 기습공격을 감행하기 제격!
 덧붙여 지형지물로 인해 사각이 넘쳐나니 슬금슬금 몰래 다가가긴 안성맞춤.
 그런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 지금이고, 앞으로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설령 나중에 온다고 확답을 줘도 지금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만큼 절박하게 최단기간 치욕을 씻고 싶었으니까.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니······.’
 그래도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애써 웃음을 띠었다.
 “그럼 언제 건드릴 수 있게 되는 거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은 아닐 거 아니야?”
 블링 주니어가 입가를 쭉 찢으며 웃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인간은!”
 “어서!”
 “보물찾기를 하는 도중에만 조원끼리 공격이 불가능하다. 그 이외에는 또 그때의 규정에 따라 다르지.”
 “혹시 지금 보물찾기를 시작한 건가?”
 “아니, 아직 시작 안 했지. 엄연히 따지면 하기 직전이지!”
 혀를 날름거리며 침을 삼킨 김성남이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를 재차 확인했다.
 “지금은 된다 이거지?”
 그가 얼른 일을 감행하기 위해 발길을 돌리려는데, 블링 주니어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전했다.
 “아니, 넌 못한다. 인간.”
 김성남은 단호하게 자르는 블링 주니어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내가 한다는데 왜 못한다고 하는 거지? 보물찾기 시작 전이면 공격이 허용된다는 것 아닌가?”
 “글쎄. 그건 지켜보면 알 일이지.”
 모호한 대답에 한층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그렇다 한들 상관없다. 어쨌든 지금은 공격이 허용될 테니까, 보물찾기를 하기 전에 죽이면 그만.
 “그럼 지켜봐라. 내가 죽이는지 못 죽이는지.”
 당당하게 그 말을 내뱉고 걸음을 내디뎠다.
 ‘만일 이번에 공격이 실패한다면······.’
 뒷일이 아주 고약하게 엉킬 것이다.
 같은 조이면서도 적대시하게 되는······.
 김성남이 딱 세 걸음 직진했을 무렵, 맞은편에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
 “야! 김성남. 너 여기서 뭐하고 있어?”
 강노리가 나타났다.
 얼른 표정을 싹 고치며 맑게 웃어 보이는 김성남.
 “아, 얘한테 뭘 좀 물어본다고요.”
 “뭘?”
 실제로 일말의 호기심도 없이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강노리의 물음에—
 “아! 이 인간이 너희들을 죽일 거다!”
 블링 주니어가 김성남 대신, 본심을 한 치의 필터링도 거치지 않은 채 실토했다.
 ‘뭐, 뭐야? 이 미친 새끼는······! 다 꼰지를 거라서 아까 나보고 실행에 옮기지 못할 거라고 얘기한 건가?’
 저벅, 툭.
 다가오던 강노리가 멈춰선 채 고블린과 김성남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그 따가운 시선에 김성남이 얼어붙었다.
 “뭐라고?”
 “아, 아, 아니···, 신경 쓸 거 없습니다! 뭔 말도 안 되는 말을 씨부리는 거야, 이 고블린이!”
 바삐 수습을 하기 위해 김성남이 손을 휘젓는데—
 “맞다! 이 인간은 너희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내가 보물찾기 기간 동안에는 서로를 공격하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더니 매우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같은 조원을 치지 못해 안달 난 모습이었고 막 너희들을 죽이려고 발걸음을 옮기던 차였다!”
 블링 주니어가 김성남에게 삿대질하면서 강노리와 유찬돌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혹시 최근에 조원들끼리 마찰이나 다툼이 있었나?”
 강노리와 고옹간, 유찬돌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고블린의 주장에 무게가 실리는 순간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의 표정을 읽으며 김성남이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이 눈치 없는 고블린 새끼가 작정하고 날 죽이려고 하는구나.’
 무표정을 유지하며 강노리가 김성남을 따로 불렀다.
 “잠시 나랑 걸을래?”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나 이 삭막한 분위기에서 탈출할 절호의 기회.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운이 좋다면 강노리를 처리할 수도 있다.’
 “예. 그러죠.”
 김성남이 거절할 리 없는 제안이었다.
 두 사람이 유유히 어딘가로 향하자 뒤늦게 유찬돌이 불안한 투로 말했다.
 “둘만 보내도 되려나?”
 고옹간이 유찬돌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다독였다.
 “살해당할 위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독 대면을 하자고 한 것은 노리 형한테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걸 거예요. 한번 기다려 봐요. 그나저나······.”
 고옹간이 블링 주니어에게 고개를 돌렸다.
 “성남 형의 속셈을 왜 우리들한테 숨김없이 알려준 거예요?”
 알려주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반대로 알려줄 이유 또한 없다.
 오히려 저 괴물의 입장에선 모르는 척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었을 터였다.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낸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만약 보물찾기 도중에 김성남이 깽판을 치면 너희 조는 보물찾기에서 저조한 성적을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지.”
 가감 없이 블링 주니어가 털어놓았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이번엔 유찬돌이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너희들의 보물찾기 성적에 따라 내가 이익을 볼 수 있다! 반대로 너희들이 손해를 본다면 나도 그 불이익을 받게 되지. 그러니 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알려준 거다.”
 “흠.”
 “모두가 다함께 협력을 해도 잘 풀리지 망할지 모르는 놀이에서 한 명이 못된 맘을 품고 있다면 그 조는 높은 성적을 받기 힘들 테니까. 그럴 바엔 한 명이 부족할지라도 마음이 맞는 세 명이서 똘똘 뭉치는 게 나을 수도 있기도 하고.”
 
 ***
 
 블링 주니어가 김성남의 본심을 토로하고 난 뒤, 강노리와 김성남은 박물관을 한 바퀴 빙 도는 중이었다.
 강노리는 일부러 김성남과 5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다. 언제 달려들어도 물총으로 제압이 가능한 안전거리.
 게다가 한쪽 손에 물총을 꺼내든 채, 김성남이 감히 덤빌 수 없는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다.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강노리가 김성남을 주시하며 생각했다.
 매점에서 김성남에게 치욕을 안겨준 뒤, 그가 굽실거리는 태도를 보여주었을 지라도 내심 그게 진실된 모습은 아닐 거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기회만 생긴다면 언제든지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 있다고 여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노리가 김성남을 여태껏 처단하지 않은 것은 비단 같은 편이기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름대로의 해결방안이 있었기에 놔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해결방안을 실시하기에 적당한 시기였다.
 한편, 김성남은 강노리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막상 둘이만 걷자고 제안할 때만 해도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던 그였다.
 그러나 이렇게 거리를 두고 걸으니 어찌 상대를 한단 말인가.
 본인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물총을 쏠 테고 이번엔 저번처럼 같은 편이라도 살려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생기지도 않은 일임에도 괜히 그때 물총을 맞은 어깨뼈가 쑤시는 감이 들었다.
 지나고 나봐야 알겠지만 실질적으론 강노리를 노릴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반쯤 포기한 상태로 강노리의 분위기를 살폈다.
 적개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음에도 그가 왜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나왔는지 그게 궁금해졌다.
 ‘어쩌면 이번에 날 죽일지도 모르겠네.’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 드디어 강노리가 말을 건넸다.
 “자, 이거 먹어.”
 —라는 말과 함께 강노리가 뭔가를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것을 받아든 김성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웬 말린 고기를 주는 게 아닌가. 한 주먹거리는 되어 보이는 것을 먹으라니, 생고기를 주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하는 한편 이걸 왜 먹으라고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가 고기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살피자 강노리가 손을 휘휘 젓는다.
 “독 안 들었으니까, 걱정 말고. 자, 봐봐.”
 안심시키려고 하는 건지 강노리가 자기 손에 들린 고기의 일부분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다. 우물대며 먹는 모습이 정말 맛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저것만 보고 믿으라고?’
 마음만 먹으면 눈속임을 할 수 있는 부분. 멀쩡한 고기는 자기가 가지고 독이 든 고기는 김성남을 줬을 수도 있으니까.
 가장 확실하게 독이든 고기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되돌려 주는 것.
 김성남이 쥐고 있던 고기를 날려 보내면서 한마디 했다.
 “이걸 먹으면······.”
 고기를 낚아챈 강노리가 서슴없이 한입 크게 물어뜯었다. 과한 입모양을 유지하며 씹고선 삼키는 모습까지 여실 없이 보여주었다.
 그제야 김성남이 의심을 덜 수 있었다.
 ‘하긴, 독을 어디서 구하겠어.’
 그는 강노리가 정말 순수하게 먹으라고 고기를 준 것으로 받아들였다. 찜찜하긴 해도 객관적으로 의심할 여지없고 괜히 먹지 않았다간 화낼지도 모르니.
 ‘흠.’
 한입 작게 베어 먹으며 어금니로 씹었다. 닭고기 맛이 나는 것이 제법 먹을 만하다고 여겼다.
 그때였다.
 강노리가 작게 읊조렸다.
 “기억 삭제.”
 이에 김성남이 그를 쳐다보았다.
 맞은편에 서 있던 강노리가 무어라 속삭이듯 말하지 않은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곱씹으려던 김성남은 갑자기 초점이 잡히지 않더니 휘청거리면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강노리는 그걸 보면서 담담하게 서 있었다. 마치 예고라도 된 것처럼.
 [시동어: ‘기억 삭제’를 외쳤습니다.]
 그의 시야에 뜬 문구로 시선을 돌렸다.
 [까마귀 고기를 먹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김성남의 기억에 침투했습니다.]
 [원하는 기억의 파편을 지울 수 있습니다.]
 컴퓨터 폴더 창을 열어놓은 것처럼 수천, 수만 개의 파일이 그를 반겼다.
 빽빽이 세로로 나열되어 있는 파일들을 훑으며 혀를 내둘렀다. 태어날 때부터 현재까지의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파일이다. 그 방대한 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지.
 파일 하나하나가 꽤 기다란 제목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 5살. 놀이공원에서 처음으로 솜사탕을 먹다. (2002.08.29) >
 < 13살. 첫사랑이 이사를 떠나 슬픔에 잠기다. (2010.01.11) >
 솔직히 여기 있는 파일들을 다 살펴보다간 날밤을 새도 모자랄 형국.
 때마침 나타나 준 알림 덕분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날짜, 장소, 핵심사건 & 단어로 분류를 세분화시킬 수 있습니다.]
 ‘나와 싸웠거나 나에게 부정적인 마음을 품었던 모든 부분.’
 마음속으로 부르자 화면에 싹 바뀌었다.
 텅 빈 화면에 달랑 3개의 파일만이 남았다.
 < 학교 운동장에서 타인을 구하려는 강노리를 호구로 보다. >
 < 매점에서의 물총 치욕. >
 < 박물관에서 강노리를 죽일 기회를 엿보다. >
 ‘이 나쁜 기억들만 없애면 김성남은 나를 비롯한 조원들에게 불만이 없을 터.’
 기억이 없으면 그때 품었던 감정도 덩달아 사라지는 셈이다.
 그러면 김성남과는 조 활동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삭제를 하면 용건이 마무리되고 김성남이 일어나겠지?’
 기억 삭제를 하려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칠 세 가지 파일을 삭제하기에 앞서 문득, 김성남의 다른 기억을 살펴보고자 하는 욕구가 솟구쳤다.
 기억이란 그 사람이 행해왔던 삶을 보여주기도 하며, 본인 외에도 그 누구도 알지 못할 정보를 담고 있기도 하다.
 김성남이 타인에게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은, 깊은 걱정거리 혹은 약점, 또는 정보.
 그것들이 김성남의 기억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고 강노리는 그걸 자유자재로 들여다볼 수 있다.
 ‘그것들만 이용한다면 김성남의 목줄을 쥐는 것도 가능하지.’
 그를 수족 부리듯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히죽,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파일을 살폈다.
 자동 검색 기능을 이용해서 어떤 단어를 떠올렸다.
 그렇게 한동안 필요한 것들만 빨대 꽂은 듯 쏙쏙 빨아먹었다.
 일련의 약점 얻기 과정이 끝나고, 애초의 목표로 돌아왔다.
 ‘삭제.’
 < 정말 삭제하시겠습니까? 한 번 삭제한 기억은 되돌아오지 않으며 그로 인해 인격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간혹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
 ‘괜찮아.’
 < 삭제를 진행 중입니다. >
 < 58···, 86···, 97······. >
 < 삭제가 완료되었습니다. >
 컴퓨터에서 파일 휴지통에 보내듯 그렇게 김성남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잠시후, 김성남이 멀쩡하게 의식을 되찾으며 일어났다.
 “제가 넘어졌나요?”
 “어, 그랬지.”
 ‘존댓말은 여전히 쓰는구나.’
 동료들에게 돌아가기에 앞서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생겼다.
 “너 왜 존댓말을 쓰는 거야?”
 “쓰라면서···요?”
 “내가 언제?”
 “저때······.”
 녀석도 잘 기억나지 않는지 관자놀이를 살살 긁어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존대를 쓰라고 한 시점의 바로 직전이 매점에서 치욕을 안겨다줬을 때니까. 그 부분이 지워졌으니 앞뒤 맥락이 맞지는 않는 것이다.
 치욕을 당한 기억이 없음에도 존대를 계속하는 걸 보면, 어색하기는 해도 딱 지워진 부분 외에는 예전과 같다는 의미.
 “내가 너랑 무슨 관계지?”
 강노리가 물었다.
 “보물찾기 동료잖아.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물어보는지.”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반말을 왜 쓰는지 모르겠고 완전 어색해서 미칠 것 같았다.
 보아하니, 강노리보다 자신이 더 나이가 많아 보이니 다시 말을 놓기로 한 모양.
 막상 반말을 하면서 강노리의 반응을 살폈는데 상관없기도 한 듯하고.
 그래도 기억의 일부분이 지워져서일까, 머리가 아픈지 표정이 썩 밝지 않아 보인다.
 ‘인성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입술을 비쭉 내미는 김성남을 보며 강노리가 안타까운 기색을 내비쳤다.
 자신에게 살기를 품었고, 적대적이었던 기억과 감정만 사라졌을 뿐,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선천적으로 성질머리를 타고났다면 어쩌면 기억을 싹 다 지워도 그대로일 수도?
 그러고 보면, 첫 대면에서도 자신에게 그리 우호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특히 꼬맹이, 고옹간을 구해줬을 무렵에는 삭제한 기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을 호구로 지칭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어쨌든 다 지나간 일이야.’
 강노리가 김성남과 함께 블링 주니어와 조원이 있는 곳으로 복귀했다.
 김성남을 놔두고 고옹간과 유찬돌에게는 이 일에 대해 알려주지 않고 대충 화해했고 제약을 걸어 자신들에게 해코지 하지 못하게 했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물론 까마귀 고기에 대한 것은 철저히 비밀로 부친 채 대충 얼버무렸다. 당연히 완벽한 납득을 하진 않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강노리가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을 걸 알기에 두루뭉술하게나마 넘어갔다.
 일련의 일이 마무리되고, 본격적으로 숨길 아이템이 지정되었다.
 유리관에 손을 갖다 대니 물에 손가락 담그듯 유리를 통과하여 보물을 바로 만질 수 있었다.
 [A조의 숨겨야 할 보물을 선정했습니다.]
 [광개토 태왕의 투구]
 망치로 한 대 내려치면 산산조각이 날 것처럼 보이는 낡은 외관. 상당히 조심히 다루어야 할 것 같았다.
 손끝으로 파르르 떨면서 그걸 들어 올리는 걸 보면서 블링 주니어가 미소를 지었다.
 “보기엔 부실해보여도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 안심해도 된다! 그러니 그렇게 소심하게 다루지 않아도 된다!”
 그 말에도 어쩐지 100% 안심이 되긴 어려웠다. 사람은 말보다는 시각에 더 민감하게 작용하니까.
 보호마법은 보이지 않고 바스러질 것 같은 투구는 여전하니까.
 “어?”
 유찬돌이 나머지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쩍 벌렸다.
 0.몇 초 늦게 고옹간이나 김성남, 강노리도 서로의 머리 위를 보며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머리 위에 이상한 게 떴다.”
 사람들의 정수리 위로 A라는 알파벳이 둥둥 떠 있었다. 흔히 영화에서나 보던 홀로그램으로 구성된 것이라 손으로 만지거나 자력으로 없앨 수는 없었다.
 블링 주니어가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너희는 A조! 보물찾기를 하는 동안에는 그게 머리 위에 계속 따라다닐 거다. 그러니 너희들이 어떤 조인지 타인도 한눈에 알 수 있다는 거지.”
 “반대로 우리도 다른 조의 알파벳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네요?”
 고옹간이 말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맞다!”
 김성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우리가 찾아야 할 보물이 다른 조가 숨길 보물인가?”
 “그것 역시 맞다! 또한, 너희가 숨긴 투구도 다른 조가 찾아야 하지!”
 고옹간이 말했다.
 “그럼, 그럼! 우리가 숨긴 보물은 다른 조가 찾지 못하게 방해하고 다른 조의 보물은 찾아야겠네요?”
 “맞다! 너희는 보물을 숨기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보물을 찾아야 한다! 아무 보물이나 찾는 게 아니다. 지정된 조의 보물을 찾는 것이지!”
 “그래서 머리 위에 조를 표시해놓은 거네요.”
 “그래. 자, 이리로 오거라!”
 블링 주니어가 앞장서 어딘가로 인도했다.
 바깥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섰다.
 휙, 블링 주니어가 뒤돌아섰다.
 “이 문을 나가면 보물찾기가 시작된다. 상세히 말하자면 보물숨기기가 가능한 타이머가 작동하는 것이지!”
 “보물 숨기기에 시간제한이 있단 건가?”
 “그렇다!”
 “흠. 몇 시간?”
 “그건 알려줄 수 없다.”
 “왜? 우리가 잘돼야 너도 잘된다면서?”
 “규정이기 때문이지. 나가면 즉시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가 어떤 조의 보물을 찾아야 하는지도 알 수 있지! 다른 조도 다 동일한 조건이니 억울해하지 말도록!”
 투구를 꽉 쥔 유찬돌이 말했다.
 “이 문을 나가면 바로 시작되는 건가요?”
 “그렇다!
 “우리에게 더 알려줄 건 없나요? 팁이라든지.”
 “없다!”
 “우리가 보물을 찾으면 뭐가 좋은 거지?”
 “알려줄 수 없다!”
 “숨긴 보물을 누군가 찾아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좀 닥쳐라! 규정이기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고! 어차피 나가면 다 알아서 가르쳐 준다고 했지 않나! 한 번만 더 쓸데없이 조잘거리면 죽여 버린다!”
 집요하게 파고들었지만 블링 주니어는 시종일관 거부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그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는 없는 모양.
 언급대로 직접 나가서 발품 팔아 놀이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할 성싶었다.
 덜컥.
 문고리를 잡아 틀며 블링 주니어가 네 사람을 쳐다보았다.
 “인간! 부디 살아남아라! 너희들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행운을 빈다! 가라!”
 문이 활짝 열리며 환한 빛을 그들을 맞아주었다. 그리고 블랙홀처럼 네 사람의 발이 바닥에서 뚝 떨어져 빛으로 빨려 들어갔다.
 
 ***
 
 지상으로부터 2미터 위쪽 허공이 쫘악 갈라지면서 네 사람을 토해냈다. 무방비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강노리, 김성남은 특유의 균형감각으로 안전하게 착지했다.
 반면, 고옹간과 유찬돌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내려앉았다. 다행히 그리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게 아닌지라 다친 곳은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공간이동과 바닥으로의 곤두박질이라 정신을 못 차리는 한편, 일찍이 정신을 차린 김성남과 강노리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까 그 운동장.’
 들개 무리에게 쫓겼던 그곳이다.
 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행히 들개는 없지만.’
 까마귀처럼 증발한 듯싶었다. 필요를 다했으니 없어진 거겠지.
 그때, 그들의 눈높이에 알맞은 자리에 알림창이 생겼다.
 [현 시간부로 살인 및 폭력행위 금지.]
 이건 알고 있던 내용. 다시 보니 공식적으로 통보를 받은 것 같다는 기분 외엔 별것 없었다.
 중요한 건 그 아래에 생긴 문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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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찾기 : B조의 난중일기]
 [보물 숨기기 : A조 - 광개토 태왕의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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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노리가 이 창을 보면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투구를 숨겨야 한다면 그건 B조도 마찬가지야. 되도록 숨기기 전에 찾는 게 낫겠지.”
 김성남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만 B조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습니까?”
 “그건 그렇지.”
 제아무리 머리 위에 조 표식이 있다고 한들, 이 넓은 땅에서 B조를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와 마찬가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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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조는 보물을 숨겨라.
 제한 시간은 1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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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의 놀이』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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