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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닉군주 1-1권

2017.12.12 조회 8,554 추천 55


 # 1. 죽음 그리고 테아도르의 세계
 
 프롤로그.
 
 로또를 수도 없이 사보았지만 여태껏 한 번도 당첨되지 않았다.
 
 나는 그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웃고 말았다.
 그리고 항상 낙첨된 용지를 준비해둔 봉투에 넣으며 나는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빌었다.
 
 엄청난 행운이 내게 오지 않는 만큼 더 이상의 불행도 찾아오지 않길 바라면서 말이다.
 
 정행운.
 내 이름이다.
 작명에 이골이 나신 보육원 원장님 성씨가 정씨여서 내 성씨는 정씨가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불행은 없길 바란다면서 이름은 행운으로 지어주셨다.
 
 나는 내 이름이 좋았다.
 
 누군가 나를 ‘행운아~’라고 불러주면 기분 좋아 돌아보며 웃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 이름처럼 행운이 가득했냐고 묻는다면 결코 아니었다.
 
 부모님이 누군지 또 살아 계신지도 모르고 보육원에서 자랐다.
 내 외모는 평균 이하였다.
 키도 조금 작았고 얼굴도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다.
 
 여자아이라면 입양되어 좋은 양부모 밑에서 행복하게 자라는 경우가 있었지만 내게 그런 행운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18살이 되던 해 지원금 500만 원을 받아 보육원에서 나왔다.
 어렵게 아르바이트하면서 경기도의 한 공고를 졸업하고 용접기능사와 금형기능사 자격으로 공군기술병으로 입대했다.
 
 고등학교에서 따놓은 자격증이 있어서 기체정비병을 선택했고 그렇게 군 복무를 했다.
 
 고아는 군대에 입대하지 않아도 되지만 나는 좋은 직장을 구한답시고 지원해 입대한 것이다.
 군대 동기들은 날더러 미쳤다고 했다.
 
 “백을 써서라도 빠지려는 게 군대인데 여기가 어디라고 일부러 입대하냐?”
 “왔으니까 너도 만났잖아!!”
 “넌 있던 행운도 발로 차냐?”
 
 그랬다.
 군복무 안 해도 된다니까 더 해보고 싶었다.
 어디에서나 소외되는 것이 싫었다.
 
 군 생활은 내게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때가 바로 군복무 시절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갖가지 책을 읽을 여유도 많았다.
 성질 고약한 고참이 별로 없었던 탓에 독서하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없었다.
 소설과 책을 좋아하던 나는 기지도서관을 자주 이용했고 항상 책을 끼고 살았다.
 
 하지만 군대에서 익힌 여러 가지 기술들이 사회에 나와선 그다지 쓸모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춘천의 남면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자란 보육원이 그쪽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 공장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해 춘천의 중소기업인 세인 철공소에 취직했다.
 열심히 일하며 돈도 착실하게 모았다.
 착실하게 돈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큰 사고 치지 않았고 돈 쓸 일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돈을 잘 모은 이유는 모두 내 외모 때문이었다.
 
 보통 체격인 데다 약간 찢어진 눈매 덕택에 그렇게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여자를 만나 돈 쓸 일도 없었고 옷을 잘 입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출퇴근복과 작업할 때 입는 작업복 한 벌이면 내게 충분했다.
 게다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다 보니 더더욱 돈 쓸 일은 없었다.
 
 말년병장 때에는 외출 나가는 것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것과 TV를 보는 것 말고 내가 가진 손재주로 조그만 주머니칼을 만드는 게 취미였다.
 가끔 친하게 지내던 보육원 출신의 형제들과 함께 모여 축하할 일이 생기면 만들어놓은 것을 하나씩 선물해주기도 했다.
 일부 같은 걸로 만들어달라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취미로 할 뿐 판매까지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받아본 지인들은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데다 돈을 받고 판매하는 것보다 더 우수하다며 좋아해주었다.
 그런 취미 생활을 하면서 도검과 무기에 관심이 많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보고 정말 재미없이 산다고들 했다.
 내가 생각해도 재미없는 삶이었다.
 
 이름은 행운이지만 로또가 당첨되는 행운도 없었고 여자를 사귀는 행운도 끝까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상을 살다가다가 29세가 되던 어느 겨울날 나는 죽고 말았다.
 
 춘천의 남면 근처 다리를 건너던 나는 깨진 얼음 속에서 허우적대는 초등학교 남자아이 둘을 발견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유속이 있는 지류의 가운데 쪽은 얼음이 얇게 언다는 사실을 모르고 들어간 듯 보였다.
 
 “살려주세요!!”
 
 다리를 건너던 나는 깨진 얼음을 붙잡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헉!! 이런!! 이런 날씨에······.’
 
 아이들이 얼음 위로 올라타려고 할 때마다 자꾸 얼음은 여러 개로 쪼개졌다.
 
 “얼음 밑으로 밀려가면 위험한데······.”
 
 아이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내게 지혜롭지 못했다고 말하겠지만 얼음 아래로 흘러 들어가면 정말로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아이들을 구해줄 만한 긴 끈이나 나무 막대조차 없었다.
 빠질 것을 각오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벼운 몸이었지만 어른의 몸무게였으므로 여지없이 얼음이 깨지면서 차가운 물 온도가 느껴졌다.
 
 “조금만 기다려 애들아······.”
 “살려주세요. 빨리요.”
 
 아이들은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한 나는 물에 흠뻑 젖었고 몸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아이들을 두껍게 언 얼음 위로 들쳐 올렸다.
 두 번째 아이까지 위로 올려 보내고 나니 온몸의 힘이 빠져버렸다.
 
 나는 이를 부딪치며 추위를 참으면서도 아이가 얼음 위를 기어 나가는 동안 함께 올라타지 않았다.
 함께 올라가면 얼음이 깨지기 때문에 아이들이 중간 이상 나가도록 기다렸던 것이다.
 
 “정말··· 미치게 춥구나······.”
 
 온몸을 찌르는 듯한 차가운 물속에 심장마저 얼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아이들이 다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도 얼음을 붙잡고 오를 힘이 없어졌다.
 이미 생각마저 얼어가는 것 같았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이라도 좀 할걸······.’
 
 몸이 차갑게 식어가면서도 빨리 나오라며 울며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에 대답을 못 했다.
 
 “아저씨!! 나오세요. 얼른요!!”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다가 어느 순간 감각이 없어졌고, 힘없이 얼음판 아래로 몸이 밀려 들어갔다.
 
 ‘두 아이를 살렸으니··· 잘한 거야······. 지금껏 내게 행운은 없었지만 아이들에게 행운을 선물했으니 정말 잘한 거야······.’
 
 그렇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며 무의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았다.
 
 ***
 
 반쪽은 흰색 나머지 반쪽은 검은색의 긴 옷을 입은 사람이 나와 금발의 어린 소년을 함께 세워두고 서류를 넘겨보고 있었다.
 
 “가이아 출신의 정행운. 국적은 대한민국이고 나이 29살. 아이들 두 명을 구해내고 얼음물에 빠져 죽었고······.”
 
 노인은 나를 흘끔 보고는 읽었던 흰색 서류를 내려놓고 다음은 검정색 표지의 서류를 들어 올렸다.
 
 “또 어디 보자··· 에린국 출신의 이리엘 투아다. 나이 15살. 문제를 일으키고 말을 타고 도망가다가 낙마해 다리 아래로 추락, 익사했군.”
 
 나는 나보다 한참 어린 금발의 서양 아이와 나를 함께 세워두고 서류를 읽어 내리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여기가 바로 심판대인가?’
 
 그때 서류를 읽던 노인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가만······. 이게 뭐지?”
 
 두 서류의 맨 마지막 장을 번갈아보던 그가 낭패라는 표정으로 허탈해했다.
 
 “두 평행관이 바뀌었잖아!!”
 
 반반이 옷을 입고 두개의 서류를 몇 번이고 확인하던 노인은 무척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짓도 그만둬야하나? 이런 실수를 하다니······. 두 사람의 운명이 뒤바뀌어 세계를 잘못 태어났군. 크흠!! 음··· 음.”
 
 기묘한 옷을 입은 노인이 나와 금발의 청소년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뭐가······. 잘못되었나요?”
 “미안하네. 두 사람은 서로 평행관으로 이어진 서로 다른 세계의 존재인데 태어나는 세계가 잘못 바뀌었다네.”
 
 그는 내게만 미안한 듯한 표정이었다.
 
 “바뀌다니요? 세계가 바뀐다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가 관리하는 세계는 여러 개가 있지. 그중 두 사람은 테아도르 세계와 가이아 세계에서 각각 태어날 운명이었는데 이게··· 그만 실수로······.”
 “그럼, 저 아이와 제가 같은 존재라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네. 사실 자네가 테아도르 세계의 투아다 공작가 차남 이리엘 투아다가 되어야 했고 저놈이 자네로 태어나야했지.”
 
 그는 착오로 우리가 서로의 운명이 뒤바뀌어 태어났다고 했다. 그리고 테아도르 세계의 1년은 가이아의 2년에 해당한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서 나와 그 아이의 나이가 약 두 배 차이가 났던 것이다.
 
 “이러니 한쪽은 개망나니였지만 행운을 누리고 살았고 자네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지만 불행의 연속만 있었을 것이네.”
 
 이곳에서 내 인생의 의문이 조금 풀렸다.
 잘못된 세계에 태어난 내 인생이 꼬여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이례적으로 선택권을 주겠노라 말했다.
 
 노인은 제법 중후한 목소리로 자신에게는 그럴 권능이 있다는 듯 말했다.
 
 “특별히 자네에게 선택권을 주겠네. 테아도르 세계에서 무작위로 새로운 인생을 얻을 텐가 아니면 이리엘 투아다로 인생을 이어 살 것인가 말이야.”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새로운 인생을 선택하게 되면 최하 평민부터 왕족까지 신분이 무작위로 태어날 것일세. 반면 이리엘 투아다의 이름으로 인생을 이어간다면 살아버린 약 15년의 세월은 제외하고 남은 세월은 에린국의 공작가 차남으로 살아가게 될 걸세.”
 
 그제야 그의 말이 이해되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은 먼저 살아버린 이리엘 투아다 나이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자네가 선택하는 대로 해주겠네.”
 
 잘 생각해야 했다.
 항상 운이 없었던 나는 공작가 차남이 훨씬 더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던 판타지 소설에서도 왕가나 귀족의 신분을 가진 사람은 소수였다.
 
 
 # 2. 누구세요?
 
 노인이 입고 있는 옷처럼 반반의 확률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새로운 인생을 선택한다면 십중팔구는 평민으로 태어날 확률이 높을 것이었다.
 
 “그냥 이리엘 투아다의 이름으로 이어서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잘 선택했네. 항상 불행이 겹쳤던 자네 과거를 조금 보상하는 의미로 자네 인생에 다른 이들보다 더 높은 행운을 선물하겠네.”
 “그게 정말 가능하다면······. 감사합니다.”
 “지금 자네의 선택으로 테아도르 에린국에 이리엘 투아다로 깨어날 걸세. 과거와 현재의 기억은 모두 사라질 것이야.”
 “어르신··· 잠깐만요. 그럼 저 친구는 어떻게 되나요?”
 “그건 자네가 걱정할 바는 아닐세.”
 
 세계가 다르지만 나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정말 잘생긴 녀석인데 무서워 덜덜 떨고 있었다.
 
 “어르신 가능하시다면 저 친구에게도 저처럼 선택권을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태어날 세계는 우리가 정해주지만 각자 자유의지대로 살아간다네. 저놈은 누릴 만큼 누렸고 못된 짓만 골라한 놈인데 굳이 그렇게 해줄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의 실수로 잘못된 세계에 태어난 이유 때문에 그랬다면 어떨까요? 꼭 저 아이의 잘못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노인은 순간 찔끔하는 눈매를 보이다가 고개를 숙여 한참 동안 고민을 하는 듯 보였다.
 
 “음······. 알겠네. 특별히 자네 부탁이니 저놈에게도 가이아의 세상에서 자기 덕을 충분히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네.”
 
 그에게 새로운 인물로 지구에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노인은 우리를 천국과 지옥 중 어디로 보낼지에 대한 판결을 보류하고 다시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진행을 시켰다.
 
 안내를 받아 각자 기억이 사라지는 문 앞에 섰다.
 여태 겁에 질려 있던 금발의 이리엘 투아다는 옆에 선 나를 바라봤다.
 
 “이제부터는 좋은 일하고 착하게 살아라.”
 “고맙습니다.”
 
 어린 소년은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심판소의 안내자를 따라 기억이 사라지는 문을 건너 커다란 문을 통과했다.
 
 앞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아주 조그만 흰색의 점이 눈앞에서 조금씩 커졌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노인의 말대로라면 내 기억은 사라지고 이리엘 투아다라는 아이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야 맞는 것이었다.
 
 ‘뭐지? 반반이 복장 노인이 또 실수를??’
 
 노인은 내게 전에 없던 행운을 더해주겠다는 말을 했었다.
 혹시, 그의 능력이 이런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우는 목소리로 이리엘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정행운이라는 이름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다.
 
 ‘눈을 뜨면 자연스레 잊힐려나?’
 
 전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이 잘된 것인지 아님 그렇지 않는 것이 잘된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과거 내 이름이 생각난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흐흑!! 내 아들 이리엘······. 제발 눈 좀 떠보렴. 나 엄마야, 흐흑!!”
 “부인, 당신도 좀 쉬어요. 이리엘은 의식이 없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잖소.”
 “제가 지금 잠이 오겠어요? 흐흑.”
 “이놈은··· 끝까지 속을 썩이는군······.”
 “당신은 지금 의식도 없는 애 앞에서 그게 할 소리예요? 항상 큰애만 편애하니까 애가 엇나가는 거 아니에요.”
 “후우~”
 
 여자의 울음소리와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내 몸은 가위 눌린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계속 몸은 무겁고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나는 일어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조금씩 감각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몸에 열이 느껴지고 누운 등이 땀으로 축축해지는 느낌이 서서히 돌아왔다.
 
 ‘조금만······. 가위 눌린 듯한 이 상황을 이겨내면 될 거야!!’
 
 손발을 움직이거나 소리를 지르려고 애를 쓰다가 아주 조금 미세한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끄··· 응!!”
 “이리엘!! 이리엘 정신이 드니?”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리엘!! 눈을 떠봐 나 엄마야.”
 
 천천히 되돌아오는 정신으로 물에 빠져 늘어졌던 내 팔다리에 조금씩 힘이 돌아오고 눈을 뜰 수 있었다.
 
 “오~ 깨어났구나!!”
 “공작 전하 다행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렌스터 경.”
 “이리엘 이 애비를 알아보겠느냐?”
 
 나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대답하는 것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들이 더 신기했다.
 지쳐 있어서 얼른 대답조차 할 수도 없었다.
 
 높고 아름다운 문양의 조각들이 이어진 천장이 먼저 보였다.
 흐릿하게 나를 에워싼 사람들이 보였다.
 방 안에 사람들 모두는 생소하게 생긴 의복들을 입고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바지만 우스꽝스러운 타이즈 같았다.
 아무튼 중세 유럽풍의 의복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가만··· 내 이름이······. 정행운!! 어?? 다 기억나네?’
 
 설마 하는 내 생각이 진짜가 되어버렸다.
 눈을 떴지만 나를 바라보는 12명 사람들의 낯선 복장보다도 내 기억이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이리엘··· 아버지가 물으시잖아······.”
 
 더 신기한 것은 그들이 하는 말은 분명 한국말이 아닌데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 손을 쥐고 있는 중년의 여자는 머리에 잘 접은 화려한 수건을 둘러쓰고 띠를 두르고 있었다.
 
 “아버지??”
 “그래, 나다.”
 
 이리엘이라는 이름은 반반이 복장 노인에게 들어서 알지만 그 이상은 나도 전혀 모른다.
 그들의 이름도 모르고 정확히 말해 아버지라는 사람의 얼굴조차 모르는 게 사실이다.
 
 머릿속에서 뭔가 뒤죽박죽된 듯했다.
 이리엘 투아다의 기억은 없지만 그가 본능적으로 익혔던 언어는 내게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소설책에서 봤던 이계의 세계인가? 마법도 존재하나??’
 
 아버지를 보면서도 낯설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혹시 아버님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이보게 의원,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는가?”
 
 입고 있는 옷과 말투로 봐서는 그가 아버지이며 공작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습니다.”
 “응?? 이리엘··· 너 아버지 이름이 생각 안 나는 거야?”
 “아무것도 생각 안 납니다.”
 
 또다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개망나니 둘째 아들이 물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났지만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그날 밤 그런 내 모습을 본 어머니 핀 아네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버지 샤를드 투아다 공작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낭패감에 빠졌었다.
 
 
 의식이 들면서 느끼는 사실인데 공기 냄새가 지구와 많이 달랐다.
 약간 더 맵다고 할까?
 공기를 구성하는 물질이 지구와 조금 다르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의식이 돌아왔지만 몸에 열이 나면서 곧바로 활동할 수 없었다.
 메이드 복장의 여자들이 자주 내 방을 드나들면서 수발을 들었다.
 
 “도련님 거기에 볼일을 보시면 됩니다.”
 “저기··· 죄송한데요. 조금만 나가 계시면 안 될까요? 사람이 보고 있으면··· 볼일을 볼 수 없는데요.”
 “예전에는 그냥 보셨는데······.”
 
 제법 살집이 있는 중년의 하녀는 별일 아니라며 자기가 등을 돌리고 있을 테니 손잡이 달린 도자기에 소변을 보라는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지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지키고 있는데 오줌이 나올까 싶었다.
 결국, 철공소 밥집아줌마 또래의 하녀를 방 밖으로 내보내고서야 소변을 볼 수 있었다.
 
 “귀족 생활이 얼른 적응 안 되는군.”
 
 3일째 되는 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고 누워만 있었더니 답답했었다.
 지난 3일 동안 어머니 핀 아네트는 내 기억을 떠올릴 만한 내 물건들을 가져와 보여주곤 했었다.
 내게 기억 자체가 없는데 없는 기억이 돌아올 리는 없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하나씩 다시 배워야겠구나.”
 “죄송합니다. 어머니.”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나는 부모가 어떤 느낌인지 잘 몰랐다.
 망나니로 소문나 있던 이리엘을 어머니의 이름으로 이렇게 챙겨주는 걸 보면 어머니는 좋은 존재가 맞는 것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방 밖을 나와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녔다.
 여자 하인들은 나를 무척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3일째 되는 날 나는 그들에게 어떤 적의도 없었고 특별한 사고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들도 점차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경계를 늦추는 것 같았다.
 나를 보면 항상 먼저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공작가에 소문이 돌았다.
 온갖 말썽은 다 일으키던 둘째 도련님이 변했다는 소문이었다. 그것도 온순하게 말이다.
 
 
 오늘은 4살 형인 하니엘이 수도에서 돌아온다며 어머니께서 옷가지를 꺼내 오셨다.
 
 “어머니, 옷이 너무···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워요.”
 “호호호, 우리 이리엘이 예전엔 촌스럽다며 더 고급을 원하더니 별일이구나!!”
 “제가 그랬었나요?”
 “그래··· 오늘 네 형이 수도 아그란에서 돌아올 거야 최소한의 복장은 갖추고 있어야지······. 네가 먼저 형을 알아봤으면 좋겠다만······.”
 “제게 형이 있었군요.”
 “휴우······. 그렇단다.”
 
 친형의 기억마저 사라져버린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시지만 예전과 다르게 차분하게 말하는 나를 무척이나 기특하게 생각하셨다.
 
 정행운이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잘나고 능력 많은 아버지와 예쁘고 자상한 어머니까지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그런데 친형까지 있다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내게는 보육원의 형제들보다 낯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넘긴 때 수도 아그란에서 급히 돌아온 하니엘 형님은 영지 안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지 한 시간만에 내성 안 공작가 저택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사람이 내 형인가 보네?! 허얼······.’
 
 올해 나이 19살인 그는 외모와 생김새부터 남달랐다.
 키가 190cm에 이르고 늠름하며 잘생기기까지 했다.
 
 깨어날 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형만을 편애한다며 핀잔의 말씀을 하셨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집에서 일하는 하녀들까지 형 하니엘의 모습을 보기 위해 기웃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 배우 뺨치게 잘생겼네.’
 
 그가 말에서 내려 뚜벅뚜벅 내게로 걸어왔다.
 
 “이리엘? 나 기억나냐?”
 “죄··· 송합니다.”
 “허!! 세상에 말투나 표정까지 모두 딴사람처럼 바뀌었군!!”
 
 뒤에 우아한 자태로 서 있던 어머니가 한 걸음 나오셨다.
 
 “하니엘 어서 오렴. 오느라고 수고했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어머니.”
 “그래, 얼른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께 인사드려라.”
 “네, 어머니. 이리엘!! 아버지 집무실 앞에서 기다리거라. 인사 여쭙고 나올 테니.”
 “네, 형님.”
 “허~참!! 네 입에서 형님이라는 말도 들어보는구나!!”
 
 하니엘이 들어가고 나서 옆의 시종장인 렌스터에게 물었다.
 
 “저기 렌스터 경, 전에는 제가 형님을 어떻게 불렀나요?”
 “음··· 무시하거나··· 곧바로 이름을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아~”
 
 대강 이해가 갔다.
 버릇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싸가지가 바가지였다는 말이다.
 그 녀석과 심판대에서 헤어질 때 딱밤 한 방 쳐줄걸 그랬나 싶다.
 
 
 # 3. 개망나니의 개과천선
 
 “하··· 하······. 지금의 도련님의 모습이 훨씬 더 기품 있고 좋아 보입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래요. 렌스터 경.”
 
 그는 입가에 미소를 보이며 앞장섰다.
 축구장 4배가 넘는 정원길을 따라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현관문 앞에서 마주친 20대 하녀 둘이 탐프레트라 불리는 수건을 쓰고 치맛자락을 움켜잡아 올리며 내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들.”
 “도··· 도련님!!”
 
 내가 인사를 건네자 당혹스러워하며 고개를 더욱 숙였다.
 귀족이 하인들에게 먼저 인사말을 건네는 것은 이곳에선 일반적으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인들이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말을 함부로 거는 것까지 금기시했다.
 그런데도 그녀들의 인사를 친절하게 받고 인사말까지 건네자 당혹스러워하는 것이었다.
 렌스터 경이 조용히 말했다.
 
 “도련님, 아랫것들의 인사는 그냥 눈만 깜빡이셔도 됩니다.”
 “아~ 네······. 아직 익숙지 않아서······.”
 
 29세가 되는 올해 초까지 알은 척해주는 여자도 없었다.
 그녀들은 비록 하녀였지만 일반 평민가에서 골라서 뽑은 여성들이었으므로 한눈에 봐도 예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가 인사말을 건넸다고 그리 당혹스러워할 줄은 몰랐다.
 
 공작가에서 하녀로 일하면 받는 돈도 꽤 크기 때문에 그들 나름 경쟁도 심하고 자부심도 있었다지만 이리엘 투아다는 그녀들이 겁내는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회랑을 지나면서 벽에 걸린 가족들의 초상화가 보였다.
 오래전 조상들의 그림은 그저 평범한 복장이었지만 4대를 거치면서 점차 귀족으로 성공한 듯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기사 갑옷을 입은 그림이 많았다.
 조상은 전장에서 무공을 쌓았고 그런 덕분에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매끄러운 돌바닥에 미끄러지는 가죽 신발 소리가 ‘끽끽’거리며 회랑 안을 울렸다.
 
 걸어가면서 2층, 3층에 위치한 방들의 통로가 보였다.
 대체 그 많은 방은 몇 개나 되는 것이며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알 턱이 없었다.
 
 아버지인 샤를드 공작의 집무실 앞으로 다가가자 문을 지키는 병사 둘이 비스듬히 세운 창을 바로 세웠다.
 병사들이 아버지의 방 앞을 지키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음··· 미늘창이군. 예상보다 훨씬 크네?? 무게는 얼마나 될까?’
 
 평소 무기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경비병 가까이 다가갔다.
 힙 벨트에 비스듬히 찬 약 1미터 길이의 롱 소드와 30cm에 이르는 대거까지 내 눈에 들어왔다.
 
 손잡이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고 칼집은 사용한 지 오래되었음을 나타내듯 흠집이 나 있었다.
 내가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가자 경비병은 무척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알았는지 그는 칼집의 고리가 칼의 손잡이에 잘 걸려 있는지를 손으로 더듬어 재차 확인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것을 빼 들고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표정 같았다.
 
 ‘하긴··· 이리엘 그놈이 워낙 망나니였으니 저럴 만도 하겠다.’
 
 무기에 관심이 많던 나는 경비병에게 물었다.
 
 “미늘창이죠?”
 “네, 작은 도련님.”
 “안 무거워요?”
 “숙달되면··· 괜찮습니다.”
 “음··· 차고 있는 롱 소드는 베기에 특화되어 있군요.”
 
 그때 뒤에 서 있던 렌스터 경이 놀라는 듯 내게 물었다.
 
 “작은 도련님이 검에 대한 내용은 기억이 나십니까?”
 
 ‘아차··· 실수다.’
 
 순간 마니아 근성을 발휘하고 말았다.
 
 “평소 검술 수업 때는 그렇게 지겨워하시더니.”
 “제가 검술 수업을 들었나요?”
 “대부분은······. 수업에서 뵐 수 없었지만요.”
 “아~”
 “하하하. 이제라도 제대로 배우시면 분명한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요. 렌스터 경.”
 
 ‘으흠··· 검술 수업이라······. 이거 재밌겠는데?’
 
 수업도 빼먹고 어디를 그리 쏘다니는 망나니였는지 내가 더 궁금했다.
 
 “렌스터 경, 형님은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요?”
 “하하하. 모르긴 해도 아마 기사단장 알브레드와 맞먹을 것입니다.”
 “네? 기사단장??”
 “투아다 공작가의 기사단장 에딘 알브레드 생각 안 나십니까?”
 “전혀······.”
 “그는 과거 마상 창술시합 우승을 3번이나 한 최고의 기사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럼 형님이 그 정도 실력이라는 거예요?”
 “큰 도련님은 이제 황실 기사아카데미 졸업반입니다. 머지않아 에린 황실기사단 장교로 복무하실 것입니다.”
 “좋은 건가요?”
 “황실기사단은 로열기사단이라고도 하지요. 에린국 최고로 기사 집단입니다. 그 아래로 붉은 사자 기사단과 황금 매 기사단이 있지만 평민 출신의 기사들이어서 로열기사단으로 올라가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죠.”
 “신분에 의한 구분이군요.”
 “뭐 그런 셈입니다만······.”
 “실력으로 평가받아야죠. 신분으로 나누는 것이 뭐가 중요한가요?”
 “맞는 말씀입니다만······.”
 “적의 무기는 신분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 우리 작은 도련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줄 몰랐습니다. 하하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대사다.
 아버지 집무실에 들어간 하니엘 형님이 문을 열고 나오다가 웃고 있는 렌스터 경을 보며 물었다.
 
 “렌스터 경 뭐가 그리 유쾌하신가요?”
 “아··· 죄송합니다. 큰 도련님 작은 도련님께서 멋진 말씀을 하셔서······.”
 “그래요?”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서인지 아버지인 샤를드 공작이 집무실 밖으로 나오셨다.
 경비 둘은 창을 미간으로 세워 부동자세를 취했다.
 
 “이리엘 너는 하니엘 형을 따라 어딜 좀 다녀오너라.”
 “네, 아버님.”
 “하니엘, 애비 일인데 네게 좀 부탁하마.”
 “네, 아버님 걱정하지 마세요.”
 
 샤를드 공작은 렌스터 경에게 자신의 마차를 내어주라고 했다.
 공작의 마차는 왕가 다음으로 화려한 것으로 신분과 지휘를 나타내는 의전용이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마차 준비해 오겠습니다.”
 
 렌스터 경은 빠른 걸음으로 공작집무실 로비 문밖으로 나갔다.
 
 “아~ 하니엘 잠깐만 기다리거라.”
 “네, 아버님.”
 
 아버지는 집무실로 걸어들어 가 조그만 자루를 들고 나와 하니엘 형에게 쥐여주었다.
 
 “돈이 부족할지 모르니 더 가져가는 게 좋겠구나.”
 “제게도 쓰고 남은 돈은 있습니다. 충분합니다.”
 “아니다. 모리안 님께는 금화 몇 닢 더 드리고 오너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렌스터 경이 문을 열고 로비로 들어오며 말했다.
 
 “큰 도련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고마워요. 렌스터 경. 이리엘 가자.”
 “네, 형님.”
 
 내성과 외성 게이트에 공작의 마차가 통과한다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비교적 잘 닦인 돌길이었지만 마차는 제법 덜컹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형님 우리 어디에 가나요?”
 “음~ 너도 알아야겠지? 근데 사고 친 거 기억 안 나지?”
 “대강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기억이······.”
 “하하하, 정말로 기억 안 나는 거야?”
 “네······.”
 
 사고라는 게 예전 이리엘이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다 낙마해 물에 빠졌다는 말만 들었다.
 어디에 뭐 하러 가는지는 전혀 몰랐다.
 
 “그럼, 내가 들은 대로 말해줄게!!”
 
 형님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내용을 내게 알려주었다.
 영지의 서쪽 구석에 스카하라는 조그만 마을에 양을 치는 여자애가 있었다고 했다.
 예전 이리엘은 그 여자아이를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여자아이도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던 것 같았다.
 말을 타고 와서 괴롭히는 이리엘에게 목동 지팡이를 휘둘러 막았고 그 덕분에 이리엘은 말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이리엘은 작정하고 기사갑주를 훔쳐 입고는 그 여자애가 양을 치는 들로 달려가 양들을 죽이며 기사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아~ 진짜 그 자식!!”
 “너 뭐냐? 네가 아닌 것처럼?? 덕분에 그 여자아이의 양이 4마리나 죽었다더라.”
 “하아······.”
 
 이리엘 그 자식은 사고를 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다가 다리에서 봉변을 당해 죽은 것이다.
 
 ‘하아~ 그 새끼 진짜 그때 알았다면 확······.’
 
 “근데 너 플레이트에 익숙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스파이크 때문에 말에서 낙마했을 거야.”
 “스파이크요? 그게 뭔데요?”
 “기사들의 신발 뒤축에 쇠꼬챙이··· 기억 안 나니? 플레이트 기사들은 모두 그걸 달고 있잖아.”
 “아~”
 
 박차를 말하는 것 같았다.
 
 “다리를 건널 때 말이 놀랐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그것 때문 같더라. 사람들이 가까이 있어 넌 천만다행이었다. 플레이트 무게 때문에 물속으로 가라앉았는데 다행히 사람들이 널 구해준 거야.”
 “그··· 그랬군요.”
 “먼저 양을 4마리나 잃은 여자애 집에 가는 중이야”
 “정말 부끄럽네요. 형님”
 “하하하, 예전 같았으면 네가 뭘 잘못했는지도 몰랐을 텐데.”
 “부모님께도 면목 없고 형님에게도 죄송해요.”
 “다행이다. 나도 그렇고 아버님도 네가 물에 빠진 뒤로 개과천선했다며 좋아하시더라. 하하하.”
 
 개과천선이 아니라 이게 원래 나였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누가 믿어주겠는가?
 
 마차를 타고 간 지 한참 만에 내성 밖 산이 보이는 양치기 소녀 집에 도착했다.
 형의 부름에 노인 부부가 나왔다가 공작의 마차가 허름한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그러나 공작의 장남과 차남이 함께 찾아오자 처음엔 안절부절못하더니 형님의 유순한 말투와 죽은 양에 대해 배상해준다고 하자 오히려 고마워하는 것이었다.
 
 “노인장 일전에 동생의 무례함을 용서하길 바랍니다. 아버님께서도 이번 일로 피해를 끼친 점을 양해 구하셨습니다. 약소하지만 죽은 양 값보다 조금 더 넣었으니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아~ 네, 네, 도련님. 저도 무례했던 제 손녀를 혼쭐을 냈습니다.”
 
 그때 내가 나서며 노인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르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같이 간 형님은 물론이고 노부부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냐는 듯 경계하는 눈빛이 강했다.
 
 “다른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안심하십시오.”
 “아~ 아이구··· 작은 도련님 아닙니다. 저희야 다 공작님 은혜로 먹고사는데요.”
 “손녀 되시는 분께도 직접 사과하고 싶습니다. 어딜 가면 만날 수 있나요?”
 
 노인은 다시 내 눈치를 살폈다.
 마치 ‘왜, 또 보복하려고?’ 하는 불길한 표정이었다.
 
 “지금 양을 치러 나갔으니 저녁쯤에나 돌아올 것입니다.”
 “그럼, 다음에 찾아와 사과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작은 도련님 절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괜찮으니 절대 오지 말라는 말로 들렸다.
 노인들의 집에서 나와 다시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자 집밖으로 나온 두 노인은 머리에 쓰는 모자를 손에 쥐고 마차가 출발할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
 
 마차가 출발하고 노인들이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즈음이었다.
 
 “푸하하하. 야~ 이리엘, 너 진심으로 사과한 거냐?”
 “네, 형님 정말인데요?”
 “크흐흐. 네가 사과하러 다시 온다니까 노인들이 공포에 질려하는 모습 봤어?”
 “전 진심이었다니까요.”
 “네가 변한 것은 당연히 모를 테고 다시 찾아오겠다니 기겁을 했을 거야. 하하하.”
 “창피하니까 웃지 마세요. 형님”
 “그래··· 암튼 나도 못 알아보는 너였지만 지금이 훨씬 낫다. 앞으로 사고 치지만 않으면 됐지 뭐.”
 
 피를 나눈 형제여서인지 과거에 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막 대했다던 동생이지만 모두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 같았다.
 
 
 # 4. 멈추지 마라
 
 마차의 방향은 집을 향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다른 곳에도 들르나요?”
 “응, 아까 아버지께서 모리안 님을 찾아뵈라고 하셨잖아.”
 “그분이 누군데요?”
 “드루이드 모리안 님이 기억이 안 나?”
 “네··· 전혀요. 근데 드루이드??”
 
 판타지 소설에서 나오는 그 드루이드를 말하는 건가?
 드루이드는 캘트 신화에 나오는 왕을 능가하는 제사장이나 신관의 위치에 있는 신분이었다.
 
 
 “아버님께서 모리안 신관님께 네 기억이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인지 알아보라고 하시더라.”
 “아··· 네······.”
 
 오크 신목을 숭배하며 점술과 제사를 담당하는 드루이드가 이곳에 존재한다니 내가 마치 판타지의 세계에 뛰어든 느낌이었다.
 
 허름한 나무집은 은퇴한 노인이 제법 나이 있는 제자 하나를 데리고 지내는 곳이었다.
 그는 대머리에 흰 수염이 났고 옷도 허름했지만 눈빛 하나 만큼은 반짝였다.
 그는 나와 형님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너라. 샤를드 공작께서는 평안하시냐?”
 “네, 신관님 건강하시죠?”
 “공작께서 둘만 보내셨구나?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냐?”
 
 나는 점치는 사람이라면 왜 우리가 왔는지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따져 묻고 싶었다.
 
 “신관님, 며칠 전 이리엘이 사고로 기억을 잃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기억이 되돌아올 수 있을지 궁금해하셨습니다.”
 “으음······. 그래서 저놈이 나를 보고도 영감탱이라고 하지 않았구나!!”
 “푸흡, 크~흠··· 그렇습니다.”
 “어디보자······.”
 
 삼각 주사위처럼 생긴 오크나무 토막 세 개와 짐승 뼛조각 그리고 이빨 등을 다양한 문양이 그려진 오크나무 판에 뿌리고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저래서 뭐가 보이나? 이 시대에도 사람을 현혹하는 가짜 점쟁이들이 판을 치나 보군.’
 
 “흠~ 지금 이대로가 좋을 것이라는 말씀만 드려라.”
 “네?”
 “예전 이리엘의 기억은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오! 어르신!! 뭘 좀 아시네요? 대단하다~!!’
 
 나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조용히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나를 돌아보더니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이리엘······. 힘들어도 멈추지 말거라.”
 “네??”
 
 ‘뭐야? 무슨 말을 하시려고······.’
 
 뭐가 힘들고 뭘 멈추지 말라는 말인지 몰랐다.
 드루이드이며 신관이라 불리는 노인네는 그 말만 해주고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모리안 신관님.”
 
 하니엘 형님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주머니에서 금화 몇 닢을 꺼내 노인의 나무 그릇에 넣어주었다.
 
 “하니엘, 공작께도 안부 전해드려라.”
 “네, 신관님.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나도 얼떨결에 인사하고 형님과 함께 마차로 되돌아왔다.
 그가 힘들어도 멈추지 말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내 정체를 알아본 거 같아 신기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날 일은 잊어버렸다.
 
 “이보게 마부, 돌아가세 말을 좀 빨리 몰게나!!”
 “네~ 도련님.”
 “가자~ 이랴!!”
 짝~ 짝~
 
 네 마리 말이 끄는 대형 마차가 마을길을 빠르게 지나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지면을 울리며 뛰는 말발굽 소리 때문에 누구의 마차인지 사람들은 금방 알아봤다.
 
 샤를드 공작의 마차라는 것을 안 그들은 길을 걷다가 길 양쪽으로 나눠 서서 마차가 지나갈 때까지 예를 갖추고 서 있었다.
 
 달리는 마차 창문의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봤다.
 어른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조그만 아이들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누가 탔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들 중에는 땟국이 흘러 꼬질꼬질한 아이들도 있었고, 대부분이 먹고살기 팍팍한 얼굴을 하고 있는 평민들이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신분의 높고 낮음이 결정되는 것에 억울해할 것이다.
 나도 그걸 느껴봤으니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형님, 이곳 주민들은 먹고사는 게 풍족한가요?”
 “그나마 아버님께서 선정을 베푸시기 때문에 다른 영지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지. 아버지는 수확의 4할만 거둬 가시거든.”
 “4할이요?”
 “그래··· 다른 곳은 농사지은 것의 6할을 거두는 곳도 많단다.”
 
 거둬들이는 입장에서는 4할도 적은 것이라 말하지만 바치는 입장에서는 4할이면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과거 대한민국에서 물건값에 붙어 있는 부가가치세 10%도 부담된다며 욕했었는데 40%를 세금으로 낸다니 속으로 얼마나 욕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반이 노인의 배려로 공작가의 둘째 아들이 되어 호의호식하게 된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오늘 저 때문에 수도에서 돌아오시자마자 사고 처리하는 일부터 하셨네요. 많이 피곤하시죠?”
 “아니다. 너 땜에 많이 웃었다. 그리고 훌륭한 기사가 되려면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체력을 요구한단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네··· 그렇군요.”
 
 형은 이제 19살밖에 되지 않았으면서도 아버지의 공무를 대신하며 공작가 장남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 명확한 목표가 있는 듯 보였다.
 거기에 비하면 이리엘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동생이었던 것 같다.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가 달라도 이리 달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차가 내성으로 진입하자 마차가 도착했다는 문지기의 나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저택 앞마당에 마차가 도착하자 렌스터 경과 하녀 몇이 나와서 마차를 맞이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련님.”
 
 렌스터 경의 인사를 고개를 끄덕여 받은 형님에게 홍조를 띠며 인사하는 예쁘장한 하녀가 있었다.
 
 “어서 오세요. 큰 도련님.”
 “아~ 로이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네, 도련님.”
 
 예쁘장한 하녀가 밝은 웃음으로 형님을 맞이했다.
 형님과 무척 친해 보이는 하녀였다.
 형님 나이 또래라 나는 그런가 보다 했다.
 
 집안의 젊은 하녀들은 모두가 형님을 보면 미소를 잃지 않고 좋아하는 얼굴들이었다.
 
 ‘역시··· 남자도 잘생기고 봐야 해.’
 
 “이리엘 아버지께 보고드리고 올 테니 피곤하면 먼저 가서 쉬어라 그리고··· 로이 가슴 만지면 안 된다?!”
 “네?? 제··· 제가요?”
 “너 하녀들 가슴 만지는 게 취미였잖아. 하하하.”
 
 ‘허~얼!! 그··· 그래서 다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여태껏 나와 마주치는 하녀들의 눈빛이 긴장하고 경계했던 것이다.
 정말 말이 나오지 않았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씨······. 쪽팔려!! 이리엘, 개자식!!’
 
 나는 뭉크의 절규를 연상케 하는 자세가 되었다.
 반반이 옷 노인을 다시 만난다면 그 자식을 지옥으로 직행시켜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돌아버릴 것 같은 빡침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점잖은 척 행동하던 내가 얼마나 가식적으로 보였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성추행은 큰 범죄에 속한다.
 파렴치범이라고 해서 주어지는 벌보다 쪽팔림이 더 큰 것이었다.
 머리를 쥐어뜯는 것처럼 보이는 내게 렌스터 경이 다가왔다.
 
 “도련님!! 편찮으십니까??”
 “아··· 아니에요. 후우~”
 “작은 도련님 피곤하시면 휴식을 취하십시오. 차와 간식을 준비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아야 했다.
 마음 같아선 내 방으로 돌아가 이불킥 시전이라도 해야겠지만 그전에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렌스터 경,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작은 도련님”
 “공작가의 기사들이 머무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들의 숙소는 마상장이 딸린 내성 동쪽에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보시겠습니까?”
 “네, 어떻게 가는지만 알려주시면 제가 찾아갈게요.”
 “그럼 말을 대령토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아··· 네.”
 
 말은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얼떨결에 말을 가져오겠다고 했을 때 걸어가겠다는 말을 못했다.
 
 ‘그냥 타보지 뭐.’
 
 잠시 후 렌스터와 함께 마부 한 명이 윤기가 흐르고 깔끔한 백마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눈부시게 멋진 백마였다.
 
 ‘이리엘 그 자식 보는 눈만 높았나 보군.’
 
 그때 마부가 내 앞에 엎드리더니 등을 밟고 올라가라는 듯이 있었다.
 예전에는 당연히 그러했다는 듯 말이다.
 
 “저기 마부 아저씨 등자를 밟을 때 몸만 잡아주세요.”
 “네? 도··· 도련님 예전에는······.”
 “지금은 그게 더 편해요.”
 “아··· 네네.”
 
 마부는 내가 말에 올라앉도록 몸을 잡아주었다.
 막상 말위에 올라앉으니 몸이 기억을 하는 듯 편한 느낌이었다.
 기사갑주를 훔쳐 입고 양들을 죽이며 기사놀이를 했다고 하니 말을 못 타거나 칼을 못 쓰는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말에 올라타자 마부는 나를 보며 예전과 다르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렌스터 경이 알려준 곳 가까이 가면 말 뛰는 소리와 기사들의 훈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마상장은 규모가 커서 금방 찾을 수 있었고 그 옆의 숙소에 걸린 문장은 불을 뿜는 용과 검을 쥔 붉은 사자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넓은 마상장과 군사 훈련장 그리고 실내 연무장이 보였다. 거기서는 훈련하는 소리와 병기 부딪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똥 냄새가 강하게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챙!! 채챙!!
 “흐~아압.”
 
 실내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자 검과 방패가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멀리 마상장에서 훈련하는 무리들은 말을 타며 타격 무기를 이용해 허수아비들을 치고 달아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또깍 또깍.
 연무장 쪽으로 말을 타고 가자 발굽에 채워놓은 말발굽 쇠의 소리가 독특하게 바닥에서 울렸다.
 내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투핸디드소드와 라지실드를 들고 훈련하던 기사 몇이 동작을 멈추었다.
 대기하던 종자들은 스승인 기사들이 움직임을 멈추자 달려 들어가 수건을 건네고 무기를 받아 들었다.
 
 그들은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소문난 사고뭉치였으니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내게 형식적인 예만 갖췄다.
 건성으로 인사하는 척했다는 말이다.
 
 “수고하십니다.”
 “작은 도련님께서 어인 일로 여기에······.”
 “평소 때는 플레이트 갑옷을 입지 않고 훈련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도련님, 몸은 좀 나아지셨는지요? 소문 들었습니다.”
 “이젠 괜찮습니다.”
 
 그들은 내가 물에 빠져 죽다 살아났다는 것을 아는지, 날 상대하는 남자 뒤에 땀을 닦고 있던 한 무리의 기사들이 내 쪽으로 시선을 모아주고 있었다.
 
 기사들은 평민들과 달린 영주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공작가의 아들이 어렵긴 하지만 하인들이나 평민들처럼 설설 기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의 방문이 별로 반갑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들의 플레이트메일을 훔쳐 입고 기사놀이하며 양을 죽였다고 했으니 나를 곱게 볼 리는 없을 것이다.
 
 “지난번 허락 없이 갑옷을 가져간 것은 사과하고 싶네요.”
 “작은 도련님께서도 기사놀이를 좋아하는지 그때 알았습니다. 사과하셨으니 사용료는 받은 것으로 치겠습니다.”
 
 뒤쪽에 기사들이 키득거리고 웃었다.
 플레이트를 훔쳐간 주인공이 물에 빠져 죽다 살았다는 내용을 알고 있을 테니 사용료는 비웃음으로 톡톡히 받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미 큰 거 한 방 치르고 난 뒤라 더 쪽팔릴 것도 없었다.
 말에서 익숙하다는 것을 알고는 가볍게 뛰어내렸다.
 15살이지만 이리엘의 키는 한국의 정행운과 비슷하거나 더 큰 것 같았다.
 
 
 # 5. 무기 마니아
 
 나는 무기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중세 시대의 다양한 무기에도 관심이 많았고 철공소의 장비만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정 길이 이상의 무기를 만들었다간 법에 저촉이 되기 때문에 실제로 시도하지는 않았다.
 
 무기마니아인 나로서는 중세무기 전문가인 기사들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그들이 히죽거렸지만 화를 내거나 대꾸하지도 않았다.
 
 “저기 플레이트에 신발에 박힌 스파이크를 볼 수 있을까요?”
 “네?? 그건 왜?”
 “그것 때문에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 박차는 신발에서 분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처음 나를 맞은 사내가 갑옷 보관실에 들어가 그것을 들고 왔다.
 
 건네받은 나는 뾰족한 끝을 확인했다.
 말의 옆구리를 찌르면 피가 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깜짝 놀라게 만들만큼 제법 뾰족한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중세 초기의 박차 모양이었다.
 서구 유럽의 기사들이 중세 후반기가 되어서야 별 모양의 박차로 바꾸어 사용했다.
 그게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창끝처럼 뾰족한 것으로 찌르는 것보다 별 모양으로 회전하며 긁는 것이 기사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하는 말에게 스트레스를 적게 주는 것이었다.
 
 꼭 기사가 아니더라도 말이 놀라 앞발을 들고 뛰면 탑승자가 낙마하는 사고가 비일비재했다.
 
 플레이트메일에 대한 오해를 하지 않아야 했다.
 중세 기사들의 플레이트가 무거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 군인 보병의 무장을 합치면 40kg에 육박한다.
 그에 반해 기사들의 갑주 30kg 온몸에 고루 퍼져 무게가 분산되어 있다.
 가벼운 무게는 아니지만 정말 힘들게 만드는 것은 더운 여름에 전쟁을 치러야 할 때였다.
 살이 갑옷에 끼지 않도록 통풍도 안 되는 가죽옷 위로 플레이트메일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땀이 범벅이 되고 금방 지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무거워서라기보다 전쟁이 많았던 여름철에 더워서 지친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
 
 어찌되었건 기사가 넘어지면 곤란했다.
 갑옷 중량이 30kg 이외에도 주 무기와 보조 무기, 방패까지 무게가 더해진다면 50kg에 육박하기 때문에 신속히 일어나기 쉽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낙마에 의한 데미지는 무시하더라도 빨리 일어나지 못하면 적 다수의 보병들에게 날카로운 도구로 눈이나 목이 찔려 죽거나 말에 밟히는 등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말이 종종 놀라는 이유 중 하나가 스파이크 때문이죠?”
 “네, 그래서 플레이트를 입었을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전시에 낙마하면 살격을 당할 수 있죠?”
 “네, 그렇습니다. 도련님께서도 그런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응, 무기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역사 정도는 알아야 했으니까.’
 
 기사들 간의 싸움에서도 살격(殺擊, 건틀렛을 낀 손으로 칼을 거꾸로 잡아 칼막이(날밑)로 내려찍는 공격)을 당하면 플레이트메일 안에 체인메일을 입어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여자들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는 걸로 유명한 공작가 망나니가 제법 진지하게 대화를 꺼내자 처음엔 키득거리고 웃던 그들도 내 말에 조금은 더 집중해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놀랐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나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스파이크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박차를 뾰족한 모양 말고 이렇게 별 모양으로 만들면 불필요하게 말이 놀라는 일은 적어질 거예요.”
 
 별 모양의 박차가 회전하도록 만들면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 설명했다.
 
 “호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기사들은 그런 모양새를 처음 보았는지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숙소로 들어가 천조각과 목탄을 가져왔다.
 
 “도련님, 여기에 다시 그려주시겠습니까?”
 
 나는 비교적 자세히 그림을 그려주며 박차를 굴려 자극을 주는 것이라 말했다.
 전쟁에 나가는 기사들은 장구의 좋고 나쁨에 따라 목숨이 오고 가는 상황에 도달한다.
 그들에게 더 효과적이고 좋은 장구는 항상 바라던 사항이었다.
 
 “대장장이에게 부탁해 이렇게 바꿔 장착하시는 게 도움이 될 듯싶네요.”
 “일단 검증은 거쳐야겠지만 훌륭한 생각 같습니다. 먼저 기사단장님께 보고하고 허락이 떨어지면 제작해봐야겠네요.”
 
 대다수 기사들은 흉폭하고 무식했다는 중세 시대의 보고서가 있었다. 그러나 내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그는 무식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제가 기사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나요?”
 “모르실 것입니다. 아주 어릴 때 외에는 이곳에서 마주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경의 이름이??”
 “엘틴 마가하입니다. 엘틴이라 불러주십시오.”
 “반가워요. 엘틴 경.”
 “네, 도련님 저도 반갑습니다.”
 
 그의 눈매가 처음과 달리 부드러워졌다.
 그는 거칠거나 무례하지 않았다. 기사 직위인 자신에게 경을 붙여가며 부르는 것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봉건사회에서 영주들에게 기사들은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기사가 전쟁에 나가 사망을 하면 일반 군인 50명에 해당하는 손실과 같다고 했다.
 
 그만큼 기사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컸고 실제 위력도 대단했다.
 적들의 무수한 공격을 뚫고 돌파하는 탱크 같은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일반 대열을 이루고 오는 보병 한 부대보다 창을 들고 돌진하는 기사 20명의 위력이 훨씬 강했던 것이다.
 
 아버지 샤를드 공작은 40명에 이르는 기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막강한 전력에 해당되는 셈이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서려다 그들이 가진 다양한 검들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내 본심을 드러냈다.
 
 말에 오르려다 말고 고개를 돌리고 다시 그를 불렀다.
 
 “엘틴 경, 롱 소드 구경 한번 해도 될까요?”
 “그러시렵니까?”
 
 생소한 모양의 박차를 그려준 내게 비웃던 그들의 모습은 사라졌고 자신의 소드를 검집에서 꺼내 들려주었다.
 
 밀리터리 마니아인 내가 실제 검을 만져보는 것은 묘한 흥분이 되었다.
 내 신분에서는 무기를 만들거나 갖는 것에 큰 제약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전쟁 휴전국가이지만 국민들의 총기와 도검류 소지가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었지만 만약, 미국처럼 대한민국도 총기소지가 허가되었다면 비리가 많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 있었다.
 
 기사 엘틴이 건넨 검은 검신의 길이가 85cm에 손잡이까지 약 110cm에 이르는 롱 소드 같았다.
 
 검신의 폭이 넓은 걸로 봐서는 단조가 아닌 거푸집에 넣고 형태만을 부어낸 다음 열처리기술들을 이용해 강화시킨 초기 형태의 검이 틀림없었다.
 
 철이 탄소 함유량이 높으면 단단하지만 잘 부러지고 함유량이 적으면 깨지지는 않지만 휘어지는 성질이 있다.
 따라서 두 가지의 성질을 함께 담으려다 보니 검날의 폭이 넓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받아 든 검을 눈앞에 대고 더 자세히 봤다.
 
 ‘어라? 이게 엉망이네??’
 
 영화나 게임에서만 보던 매끈한 검이 아니었다.
 어디에 강하게 부딪쳤는지 휘어졌던 검을 대강 망치로 벼려 형태만 잡은 듯했고 날은 다시 세우지 않아 일그러져 있었다.
 
 ‘하긴 갑옷을 뚫지 못하면 몽둥이로서의 역할이라도 해야 할 테니······.’
 
 사실, 현대강으로 만든 주방용 칼을 이 시대로 가져온다면 신검 수준의 칼이 될 것이다.
 
 “엘틴 경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네”
 “이 검으로 상대 기사를 죽여본 적 있나요?”
 “네? 하하하.”
 
 그가 웃자 다른 기사들도 따라 웃었다.
 
 “도련님, 일반 병사는 가능하지만 기사들은 쉽게 죽일 수도 또 죽지도 않습니다. 그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기사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말했다.
 
 “하지만 무게가 나가는 둔기, 석궁이나 머스킷에는 맥을 못 추죠.”
 “흠··· 석궁과 머스킷은 공식 전쟁에서 금지되어 있는 무기입니다. 도련님.”
 “그런가요?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전쟁에서 무기를 가려가며 싸운다는 것이 참 우습네요.”
 “······.”
 
 나는 검을 되돌려 주며 엘틴에게 말했다.
 
 “이 검은 틀어져 있고 무게중심도 위쪽에 있군요. 차라리 몽둥이로 쓰는 게 더 나을 듯싶네요.”
 “아직 손질을 못 해서······.”
 “군인은 항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기는 자기 생명이며 애인처럼 소중하게 다뤄야 하구요. 빨리 손질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엘틴 경.”
 “아··· 네, 도련님.”
 
 내가 한 말은 한마디도 틀리지 않았다.
 대한민국 군대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망나니 철부지에게 한 방 먹은 얼굴이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주인을 물에 빠뜨렸던 백마에 올라타 옆구리를 살짝 쳤다. 그러자 말은 순순히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처음 이곳에 등장했을 때 나를 보며 비웃는 모습이었다가 떠나는 내게 그들은 웃음기 싹 가신 얼굴로 예를 갖췄다.
 
 ***
 
 동생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내려온 형님과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그런데 무슨 놈의 식탁이 이리도 큰지 아버지는 강 건너 계시는 것 같이 멀었다.
 게다가 젓가락에 익숙했던 나는 아랫사람이 고기의 가장 좋은 부위를 잘라서 윗사람에게 건네는 것이 에티켓임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걸 알려주시는 어머니께 요리된 양고기를 잘라드리려고 했지만 칼은 무딘 데다 톱니도 없었다.
 돈가스 먹던 실력으로 고기 정도는 자를 수 있었지만 칼 모양새도 뾰족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긴 여기에 빅토리아 여왕 시대가 없었을 테니··· 식기도구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고기를 자르다 말고 칼을 들고 촛불에 날을 비추어 보았다.
 
 “이리엘··· 식사 때 칼을 쳐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칼이 마음에 안 들어요. 어머니.”
 
 허리를 숙여 팔을 뻗어도 닫지 않을 거리의 하니엘 형님이 웃으며 말했다.
 
 “칼은 사용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훌륭한 도구가 되는 법이야 칼을 쥐는 법과 자를 때 어디에 힘을 줘야 하는지 알아야지.”
 “그래, 이리엘, 네 형 말이 맞다.”
 “네, 아버님, 그런데··· 이거 날 앞쪽에 조그만 톱니를 만들어놓으면 덜 불편할 거 같네요.”
 “뭐? 톱니? 푸하하핫.”
 
 아버지는 어이없어하는 웃음을 웃었다.
 형님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들고 나가서 칼싸움 몇 번하면 톱니는 자연스럽게 생긴단다. 하하하.”
 
 ‘에이~ 진짜! 내가 직접 만들고 만다.’
 
 뭘 알고나 웃으시는 것인지 모르겠다.
 써레이션 나이프의 유용함을 모르니 날 비웃는 것이다.
 하긴 지금 딱딱한 빵을 자를 브레드 나이프도 없는데 다른 말 해서 뭘 하겠는가 싶었다.
 
 “저기 형님 성내에 대장간이 어디쯤 있나요?”
 “기사들의 숙소 뒤로 가면 공작가 직속 대장간이 있고 영주민을 위한 대장간은 각 마을이나 장터 중간쯤 있단다.”
 
 성내에 공작가 직영 대장간 말고도 일반 대장간은 각 마을마다 하나씩 있다고 했다.
 
 “그중 규모가 제일 큰 곳이 공작가 직속 대장간이다.”
 “내성 동쪽에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아까 네가 거기 갔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었냐?”
 “박차 모양이 너무 무식해서 다른 걸로 바꿔보라고 알려줬습니다.”
 “응? 스파이크 말이냐?”
 “네, 그거 말 입장에서 찔리면 무지 아프거든요?!”
 
 아버지는 한심한 듯 보셨다.
 
 “그걸 아는 녀석이 목동들의 귀중한 재산인 양을 죽이고 다녔던 것이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 내 잘못이 되었다.
 자기 양이 당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소녀는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이 되었다.
 
 
 # 6. 삐뚤어진 이유
 
 본인에게 사과하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여보~ 이리엘은 기억이 없잖아요. 이리엘,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면 된다.”
 “네, 어머니.”
 
 사경을 헤매다 깨었을 때는 야단치지 못했다가 말 이야기가 나오자 아버지는 한마디 하신 것이다.
 피의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야~ 이리엘··· 그러면 박차 모양을 어떻게 바꾸라고 했는데?”
 “별 모양이 회전하게 만들라고 했습니다.”
 “별 모양이 회전하게?? 그래서 말에게 무슨 자극이 되겠냐?”
 “충분이 자극이 됩니다. 게다가 말의 시야각은 상당히 넓어요. 자신의 배를 찌르려는 스파이크를 반사된 물에서 보았다면 미리 놀랐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에 빠졌을 수도 있구요.”
 “응??”
 
 내 대답에 아버지와 형은 의외라는 표정이셨다.
 
 “그런 속담 있죠? 가려는 말에 박차를 가하지 말아라!!”
 “그··· 그런 속담이 있었냐?”
 “네, 형님.”
 
 Do not spur a willing horse.(쓸데없는 참견하지 말라.)
 이래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이다.
 
 식탁에 앉은 식구들은 식사하다 말고 기억을 잃었다던 둘째 아들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
 
 한국에서처럼 나는 근면 성실한 직장인의 기상 시간을 지켰다.
 일어나 준비된 옷부터 갈아입고 받아놓은 도자기의 물로 세수를 마친 다음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말을 마구간에 넣어두며 마부에게 말 이름을 물었더니 실버스타라고 했다.
 가만 보니 이리엘 녀석은 똥폼 잡는 데만 열을 올린 듯싶었다.
 
 여기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얻었고 남들과 다른 신분까지 얻었다.
 궁금하고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아 온몸이 근질거렸다.
 늦게까지 이불에 누워 있는 것은 게으름이요, 사치라 여겼다.
 일찍 일어난 나 때문에 나를 돕는 하녀들이 정신없이 바빠졌다.
 
 어제 식사 후 어머니에게 부탁해 은화 몇 개를 받아놓았다.
 어머니 핀 아네트는 귀족가 출신답게 아들이 달라는 대로 묻지 않고 돈을 쥐여주셨다.
 이리엘이 버릇없어진 것이 어머니의 습관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어머니 입장에선 은화 몇 개는 푼돈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걸로 해야 할 게 몇 가지 있었다.
 왕가 다음으로 잘사는 공작가 자식이 되었지만 돈을 허투루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공작가 저택을 나와 어제 마차를 타고 갔던 목동 소녀의 집을 향해 말을 달렸다.
 영화처럼 신나게 달리는 게 아니라 말의 종종걸음보다 조금 빠른 속도였다.
 매연도 없고 오염시킬 만한 것이 없어 공기가 무척 맑았다.
 코가 매콤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니었나 싶었다.
 내성 저잣거리에는 영주민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각자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개망나니 공작 아들이지만 거리를 지나자 그들은 잊지 않고 예를 갖췄다.
 
 “모두들 안녕들하세요~”
 “잉??”
 
 따그닥 따그닥······.
 
 내 뒤로 그들이 하는 말이 들렸다.
 
 “어이~ 내가 잘못 들은 거야?”
 “우리한테 인사하는 거 같은데?”
 
 나는 영지 서쪽에 있는 스카하 마을로 말을 달렸다.
 눈썰미가 있어 마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이지만 길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일찍 양 치러 나갈 것을 예상하고 서둘러 출발한 것이다.
 어제 왔었던 노부부의 집에 도착했다.
 
 똑똑똑.
 
 “누구세요?”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허름한 집의 문이 삐걱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히~익!! 도··· 도련님!!”
 
 숨을 들이키며 깜짝 놀라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밝은 갈색의 머리와 주근깨가 살짝 보이는 빼빼한 소녀였다.
 
 “놀라지 말아요. 해코지하러 온 거 아니니까요.”
 “······.”
 “디나, 이 시간에 누구시냐?”
 
 손녀에게 묻고 문밖으로 나온 노인은 공작가 둘째인 것을 알아보고 긴장하는 얼굴이었다.
 
 “본인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것 같아 양 치러 나가기 전에 미리 찾아왔어요.”
 “정말··· 이세요? 도련님?”
 “맞아요.”
 
 아직 어려 보이는 이 소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들어서 알겠지만 물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는데 기억을 잃었어요. 그래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요.”
 “정말로 기억이 안 나요? 또 저 괴롭히려고 그러시는 거 아니죠?”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요.”
 
 그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신분의 차이를 알아서인지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어르신, 아침 일찍 실례가 많습니다. 늦게 오면 만나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아··· 아닙니다. 도련님, 사실 손녀에게 정말로 사과하러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가족처럼 여기는 양이 죽어 나가는 걸 지켜보는 심정이 어떠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철없고 생각 없는 제 행동을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정신을 차렸으니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디나라는 여자애는 눈물이 글썽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 통한 것인지 모르겠다.
 
 “네, 도련님께 무례하게 대한 저도 잘못이 큽니다. 저도 용서를 구할게요.”
 “그런데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무엇 때문에 디나 양을 괴롭혔나요?”
 “그게··· 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셔서인지 얼른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노인들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제가······. 남자 아니냐며······.”
 “네? 남자 아니냐며?”
 
 ‘설마··· 가슴 만져보자고 했던 건 아니겠지?’
 
 “가··· 슴을······.”
 ‘개새끼······. 있어도 없을 것 같은데 뭐 하러······.’
 
 “차라리··· 묻지 말걸 그랬네요.”
 
 그녀는 일할 때 치마보다는 남자 복장이 더 편해 예전 아버지 옷을 줄여 입었다고 했다.
 여자라고 말해도 믿기지 않는다며 몇 번이나 그런 짓을 하려다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것이다.
 
 “후~우······. 아무튼 미안하게 됐어요. 디나 양.”
 “아니에요. 그땐 정말 미웠는데······. 도련님, 이제 마음속의 원망은 없습니다.”
 
 어머니에게 받는 은화 중에서 몇 개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네요. 받아줘요.”
 “이··· 이렇게 큰돈을······. 보상은 어제 충분히 받았습니다.”
 “디나 양, 저도 털고 홀가분하게 지내고 싶어 그래요. 넣어두세요.”
 “네······.”
 “이쪽 스카하산과 숲에 대해 도움받을 일이 있을 땐 저 좀 도와주세요.”
 “네, 도련님 언제든지 말씀만 하세요.”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도련님”
 
 그녀와 노인들에게 인사하고 다시 집을 향해 달렸다.
 그렇게라도 미안하고 무거웠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털어낼 수 있었다.
 
 이곳의 언어는 캘트어였고 나는 필요상 영어로 이해하고 표기할 것이다. 길이단위는 피트를, 무게는 파운드를 쓰지만 이것 역시 cm와 kg으로 내 전기를 기록할 것이다.
 이리엘도 신분 교육 때문에 읽고 쓰기와 같은 기본적인 학문은 배웠던 모양이다.
 
 화폐단위는 쿠퍼, 실버, 골드 그리고 큰 단위는 약속어음으로 거래되고 있었으며 약속어음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동전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꽤 큰 부피의 천 두루마리를 사 왔다.
 어머니께서는 공부에 필요하다면 아버지의 양피지를 마음껏 가져다 쓰라고 하셨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도 공무에 관한 집행서나 계약서에만 양피를 쓰실 뿐 대개는 마섬유질로 만들어진 천에 글씨를 쓰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표백된 천에 잉크를 사용하면 약간 번지기는 했지만 글을 쓰는 데는 큰 지장은 없었다.
 
 천 두루마리와 필기도구에 관계되는 것을 사서 말 뒤에 싣고 오자 내 담당 하녀가 얼른 나와 물건을 받아 들었다.
 
 “도련님, 이리 주세요.”
 “괜찮아요. 로렌 아줌마 제가 들게요.”
 “아··· 아닙니다. 이건 저희들의 일입니다. 도련님.”
 
 그녀들은 내게서 뺏다시피 물건을 받아 들고 내 방 앞으로 함께 왔다.
 방 앞의 복도에서 천 말이를 로렌 아줌마에게 건네받고 식사 부탁을 했다.
 
 “로렌 아줌마 아침 식사는 제 방으로 가져와 주세요.”
 “네, 도련님.”
 
 그때 복도 끝에서 렌스터 경이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오면서 나를 불렀다.
 
 “이리엘 도련님, 아침 식사도 거르시고 어디를 다녀오신 건가요?”
 “아~ 렌스터 경, 좋은 아침이에요!!”
 “음?? 미술공부를 하시려는 건가요?”
 “아니에요. 필요한 것들을 기록하고 그림 그리려고요.”
 “호오~ 이제 공부에 취미를 두시려는 건가요?”
 “필요하다면 공부해야죠.”
 “그렇지 않아도 어제 말씀드린 무술수업 때문에 도련님을 찾았었는데 안 보이셔서 걱정을 좀 했었습니다.”
 “그래요? 수업은 언제인가요?”
 “식사를 마치시고 소화되실 즈음 저택 뒷마당에서 뵙겠습니다.”
 “기대됩니다. 그런데 무술 선생님은 누구신가요?”
 “바로 접니다.”
 “엥? 렌스터 경이요?”
 
 그는 턱을 끌어당기면서 세련된 자세로 자신을 다시 소개하듯 했다.
 
 “공작 전하께서 제게 자작의 직위를 하사하기 전에 제 직업은 기사였습니다. 참고로 큰 도련님께서도 제게 무술을 배우셨다는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아~ 그랬었군요!!”
 
 그냥 집안의 일을 돕는 집사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원래 두 형제의 무술 선생과 예절 교육 선생으로 아버지께서 자작의 지위를 주셨다는 것이다.
 기사들보다 더 높은 대접을 받고 계신다고 했다.
 
 “잘됐네요. 렌스터 경, 저 식사하고 잠깐 대장간 들른 다음 수업하겠습니다.”
 “오~ 작은 도련님 드디어 무술수업을 참여하시는 건가요?”
 “해야 한다면서요??”
 “원래, 귀족 가문의 장남 아래는 각자 자기 먹고 살길을 위해 기사가 되거나 자기 직업을 가져야 옳습니다. 작은 도련님께서는 하니엘 도련님만 공작의 신분과 영지를 물려받게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 화를 내시고 무술수업을 참석하지 않으셨죠.”
 “그랬군요.”
 
 나는 남의 이야기처럼 대답을 했지만 이리엘이 왜 삐뚤어졌는지 이해가 되었다.
 
 현재, 에린국의 작위는 세습체재였다.
 왕가 다음으로 큰 귀족 가문의 영지와 영지 주민을 다스릴 권한이 형님 하니엘에게 물려지면 이리엘은 따로 독립을 해야 했다.
 때문에 이리엘은 넓은 영지와 대저택에서의 편리한 삶에서 손을 떼야 했던 것이다.
 
 ‘짜식이 그걸 알고는 엇나간 모양이군.’
 
 렌스터 경은 이리엘이 삐뚤어진 이유를 아는 듯했다.
 교육을 담당하는 그로서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다시 한 번 알려줘야 할 내용이었을 것이다.
 
 “제가 그 이유 때문에 형님에게 함부로 대했었다는 것인가요?”
 “네······.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만······.”
 
 그가 내 눈치를 살폈다. 또다시 개망나니 모드로 변신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작은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전통적인 작위 계승 제도인데 괜찮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오히려 홀가분할 수 있죠.”
 “아~ 그렇게 생각하시군요. 다행입니다.”
 
 그는 내 앞에 웃어 보였지만 살짝 등을 돌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자식들은 재산의 일부를 분배받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재산이나 작위와 영지의 통치권은 장자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야 어차피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다.
 귀족 가문의 차남이 된 것도 큰 행운이라 생각했다.
 마을을 지나며 평민들의 노곤한 일상을 잠깐이나마 지켜봤다.
 지금 내가 귀족이 되었다고 해서 더 욕심내고 군림하려는 생각을 가질 만큼 악한 인간은 되지 말아야 했다.
 
 권리는 항상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게 된다.
 그것을 잘 해내지 못하면 백성들로부터 끌어내림을 당하는 모습도 봤었다.
 
 
 # 7. 베일 속의 과거
 
 흠뻑 젖은 복장으로 저택 안으로 걸어갔다.
 덥혀놓은 물로 몸을 씻고 꺼내놓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에 물기를 닦고 배가 고픈 채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갔다.
 아침 겸 점심이라 생각하며 먹었던 음식은 이미 소화되었기 때문이다.
 
 “야~ 이리엘!! 너 검술 수업했다며?”
 “네, 형님.”
 “기특하네. 내가 알기론 너 2년 가까이 검술 수업 빠졌다고 들었다.”
 “그랬군요. 근데, 형님은 어디 다녀오세요?”
 “응, 에딘 알브레드 경을 만나고 오는 중이었다.”
 “기사단장님 말씀이시군요?”
 “너 그분은 기억나니?”
 
 형님이 놀라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뇨, 렌스터 경에게 형님의 검술 실력을 물었더니 그분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말씀을 들어서요.”
 “내가? 그건 렌스터 경이 과대평가하신 것 같다. 얼른 식사나 하러 가자.”
 “네, 형님 배가 고프네요.”
 
 커다란 가족 식당 문 앞에 도착하자 복도 끝에서 아버지와 뒤따르는 한 무리의 수행원들이 모습을 보였다.
 먼저 들어가지 않고 앞에서 기다렸다.
 
 “이리엘은 아침 식사도 거르고 어딜 다녀온 게냐?”
 “필요한 물건이 있어 시장에 다녀왔습니다.”
 “하인들 시켜도 될 일을··· 또 사고치는 거 아니지?”
 “아닙니다.”
 “허허허. 그래, 어서 들어가자.”
 
 식당 문 쪽으로 걸어오시면서 말하는 소리가 복도를 묵직하게 울렸지만 아버지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계셨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머니가 아버지와 우리를 맞이하셨다.
 하녀들이 놋대야에 물을 부을 때 손을 씻는다.
 그리고 나면 다른 하녀가 마른 수건을 건넸고 손을 닦고 다시 건넨 다음 식탁에 앉았다.
 
 주방장이 종을 흔들면 완성된 요리들을 줄을 지어 들고 들어온다.
 다 먹지도 못하고 남기는 것들은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누어 먹고 처리한다고 했다.
 
 아버지 샤를드 공작이 식사를 시작하고 어머니와 형님이 나이프와 포크를 들자 나도 식사를 시작했다.
 
 “이리엘, 오늘 기사단장이 별 모양의 박차를 새롭게 제작하게 해달라는 요구서를 받았다. 이리엘 네가 말한 그 박차 모양을 봤다. 정말 네가 그린 것이냐?”
 “네, 아버님.”
 “음··· 기사단장 말로는 매우 유용해 보인다고 하더구나.”
 
 하니엘 형님이 놀라는 눈으로 물었다.
 
 “에딘 경이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응, 그랬단다.”
 “오~ 이리엘, 네 대단한데??”
 “이리엘 네가 원한다면 그 디자인의 소유를 네 앞으로 해주마.”
 “정말이세요?”
 “그래, 우선 우리 공작가 식구들을 먼저 바꾸고 확실하게 가치가 인정되면 외부 판매도 고려해보자 수익의 30%는 네 앞으로 해주마.”
 “감사합니다. 아버님.”
 “아이구~ 내 아들 정말 잘했다.”
 “이리엘 너 새로운 재능을 발견했나 보다??”
 
 어머니와 형님이 나를 기특하다며 칭찬해주셨다.
 하지만 전체 장구 중 박차가 차지하는 가격이 비싸면 얼마나 비쌀까 싶었다.
 기사들에게 하나 정도 갖게 하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고 판매 수익금의 30%는 그저 푼돈 정도로 여겨졌었다.
 
 ***
 
 다음 날 오전에 대장간을 찾아갔다.
 맡긴 두 가지 나이프를 찾기 위해서였다.
 
 “작은 도련님 오셨습니까? 부탁하신 식기는 만들어놓았습니다.”
 그가 식기를 가져와 보여주었다.
 식기에서는 은의 비율이 너무 높으면 백색을 띠면서 변색이 잘 된다. 그래서 구리나 다른 금속을 첨가해 강도를 높이고 변색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공작가의 식기답게 손잡이 장식에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아름다운 꽃무늬와 잎사귀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빵칼은 반쪽만 날을 세우도록 만들었으므로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그런데 고기용 칼날의 톱니는 내가 원하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작은 톱니 모양이 너무 둔해 보이는군.”
 
 ‘가져가서 내가 따로 손을 좀 봐야겠다.’
 
 “도련님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 아니에요. 그런데 혹시 세공도구를 구할 수 있을까요?”
 
 그는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 가공도구 세트는 만들어 파는 곳이 있다고 했다.
 내성 장터에 가보면 식기와 함께 공구를 파는 곳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배가 나온 대장장이는 천으로 식기를 감싸서 내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들고 대장간을 나와 말에 오르려 할 때였다.
 
 “도련님······.”
 “응? 너는······.”
 “에반입니다.”
 “그래 에반, 무슨 일이야?”
 “도련님께 이거 누나가 전해드리랍니다.”
 
 에반은 조그만 천 쪼가리를 접어 내게 건네고 대장간 안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뭐지?”
 
 나는 별생각 없이 천 쪼가리를 열어보았다.
 
 [집으로 와주세요. 소문 때문에 데블린과 처크의 행동이 수상합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식기를 감싸 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에반의 말대로 에밀은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단순히 그녀의 가슴을 만지려고 괴롭히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야 이리엘. 또 가슴 만지기 말고 다른 일을 꾸미기라도 한 거야?’
 
 생각해보니 이리엘이 되고 나서 너무 쉽게 이리엘의 과거를 받아들인 것 같았다.
 나쁜 짓을 일삼기는 했지만 상속에 관한 내용 때문이라면 이리엘이 욕심이 많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말을 타고 내 방으로 돌아와 찾아온 식기를 올려놓았다.
 톱니를 살짝 더 다듬는 것은 무술수업이 끝나고 상점에 가서 세공도구를 구해서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에반이 건네준 천 쪼가리에 쓰인 글이 계속 신경 쓰였다.
 그러다가 이리엘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그가 쓰던 책상과 책상 서랍을 하나씩 뒤지기 시작했다.
 책상 서랍을 열고 보니 값나가는 액세서리와 귀중품들이 꽤 있었고 잡동사니들도 많았다.
 큰 서랍 안쪽에 돌 쪼가리가 들어 있었다.
 
 ‘이게 다 뭐지??’
 
 그리고 맨 아래쪽 마지막 서랍 하나가 열리지 않았다.
 열쇠로 잠긴 듯했다.
 
 ‘서랍 열쇠가 어디 있을까?’
 
 이리엘은 개망나니치고는 책상 위와 서랍이 깔끔한 편이었다.
 그때 나는 차분하게 이리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봤다.
 15살, 한국 나이로는 16살의 청소년이다.
 그러다가 문득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책 세 권이 보였다.
 
 “왕국의 지리와 역사, 채광기술서?? 꿈의 해몽??”
 
 사고뭉치 이리엘과 어울리지 않는 주제의 책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방금 책상의 큰 서랍을 열어 봤던 돌 쪼가리와 관계가 있나 싶었다.
 ‘가만··· 지리와 역사 그리고 채광기술서라······.’
 
 책을 하나씩 꺼내봤다.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던 녀석이 이런 책을 보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책은 종이가 아닌 아마천으로 된 것으로 표면에 활석처리가 되어 손으로 잘 기록한 필사본이었다.
 
 “그런데 꿈의 해몽??”
 
 앞선 두 책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책이었다.
 꿈의 해몽이라는 책을 꺼내 들고 두꺼운 앞표지를 열었다.
 
 땡그랑!
 
 조그만 열쇠였다.
 틀림없이 서랍 열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이 제법인데?’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쇠를 집어 들고 맨 아래 서랍의 자물쇠 구멍에 넣고 돌렸다.
 딸깍!
 
 “역시······.”
 
 서랍을 열었더니 두꺼운 수첩 하나가 나왔다.
 그 수첩을 꺼내 들고 펼쳤다.
 
 에린력 562년 12월 20일 출 2마, 7골드
 합계 389골드 580실버
 ······.
 ······.
 에린력 563년 2월 14일 출 5마, 35골드
 합계 430골드 860실버
 
 “대체 이게 뭐지? 무슨 장부 같은데??”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숫자가 적힌 내용이었다.
 
 똑똑똑.
 “도련님~ 무술수업 시간입니다.”
 “알았어요. 곧 나간다고 전해드려요.”
 “네, 도련님.”
 
 문밖에서 남자 하인의 부름에 대답하고 두꺼운 수첩을 덮어 다시 서랍에 넣으려는데 서랍 바닥에 돌이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큰 서랍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백색 돌이었지만 느낌이 달랐다.
 꺼내서 확인해보니 금가루가 박힌 석영석 같았다.
 
 “설마······??”
 
 일단 그걸 붙잡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돌과 수첩을 맨 아래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근 다음 열쇠는 다시 꿈의 해몽이라는 책에 넣고 책꽂이에 밀어 넣었다.
 
 무술 선생인 렌스터 경이 기다릴 것이다.
 궁금한 것은 이따 오후에 알아보기로 하고 후다닥 뛰어나와 저택 뒤의 연무장으로 힘껏 달려 나갔다.
 
 “선생님, 늦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도련님, 어제보다는 조금 빠른 시간에 나오셨군요?”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인들과 종자가 달려들어 어제와 같은 가죽옷과 갑옷을 내게 입혔다.
 
 “오늘은 어제 배운 동작을 연습하고 상대와 바인드 상태보다 더 가까운 근접전(Krieg) 소드 응용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네, 선생님.”
 
 근접전에서 주도권 유지를 구현하는 기술이라고 했다.
 빠르고 철저한 연공으로 상대를 수세로 몰아가는 기술이라는 말이었다.
 
 “자신의 검신은 방어를 취하지만 검의 끝은 항상 상대의 급소를 향하도록 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 이렇게요.”
 
 턱!!
 
 “억!!”
 
 렌스터 경의 검 끝이 내 미간을 노리는 것 같더니 어느새 그의 검 끝이 내려와 내 복부를 ‘푹~’ 찌르는 것이다.
 만약 갑옷이 없거나 검 끝이 연습용으로 무딘 것이 아니었다면 복부를 뚫고 들어올 정도의 강도였다.
 
 “도련님께서 해보세요.”
 “네.”
 
 그와 검을 섞고 주도권을 잡으려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힘껏 찔러 넣었다.
 하지만 블라카트(Plackart)라 불리는 흉갑 옆으로 흘러버렸다.
 
 “아······.”
 “집중하세요. 찌를 땐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네, 선생님.”
 “적이 찌르도록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상대와 검을 들고 겨눈 상태라면 목숨을 빼앗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를 죽여 나중에 지옥에 가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꼭 살아남아야 합니다. 도련님.”
 “네!!”
 “다시!!”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투 시에 나약하게 있다가는 적에게 목숨을 바치는 꼴일 것이다.
 
 ‘명색이 군대를 다녀온 내가 이런 자세를 보여선 안 되지······.’
 
 교차된 검 끝을 빠르게 전환시켜 흉부 플레이트를 찔렀다.
 
 “하아~압”
 
 텅!!
 
 “그렇죠!! 잘하셨습니다. 도련님.”
 “네, 헉··· 헉······.”
 
 듀플리에렌(감아들어가기)와 뮤티에렌(감아넘기기) 동작까지 빈덴의 일종으로 검을 감아 급회전시키는 공격기술을 익혔다.
 이미 배웠다고는 했지만 렌스터 경은 어제보다 더 혹독하게 수십 번씩을 반복해가며 동작을 익히도록 했다.
 
 “헉··· 헉··· 쿨럭··· 쿨럭··· 헉······.”
 
 땀을 흠뻑 흘리며 검술에 집중하면 잡념이 사라지고 그곳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집중력 하나만큼은 다른 이들에게 뒤지지 않았던 나였다.
 
 중학교 때 내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인문계로 진학 못 하는 나를 두고 담임선생님은 무척 아쉬워하셨다.
 부모 있는 학생들도 비싼 납부금을 내고 대학에 다니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보육원 출신의 형들 말로는 농어촌 진학 티켓을 부여받는 것과 장학제도가 있긴 하지만 그거조차 쉽지 않다고 했었다.
 그런 형편을 잘 아는 나로서는 취직이 우선이었고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옳았다.
 
 숨은 헐떡이지만 진지한 자세로 수업에 임하는 나를 보던 렌스터 경도 최대한 자세히 그리고 성의껏 가르치는 것이었다.
 호흡이 안정되자 아까 궁금했던 이리엘의 수첩 내용도 내 머리에서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떠올랐다.
 
 ‘빨리 밥 먹고 에밀이라는 여자애를 찾아가 봐야겠다.’
 
 
 # 8. 필요는 복제의 어머니?
 
 오늘의 무술수업은 끝이 났다.
 두 번째 훈련을 끝냈지만 어제와 다름없이 힘들었다.
 남자 하인들과 렌스터 경의 종자가 장구와 가죽옷을 벗겨내자 시원함이 밀려왔다.
 
 “작은 도련님, 이렇게 연습하시면 내년에는 형님처럼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아카데미 입학이요?”
 “네, 도련님 16살이 되면 입학 자격이 주어집니다.”
 “아~ 그렇군요.”
 
 그때 하니엘 형이 롱 소드 한 자루를 메고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여어~ 이리엘, 아주 흠뻑 젖었구나?”
 “형님, 오셨어요? 검까지 차시고 어딜 다녀오세요?”
 “나도 쉬는 동안 훈련을 해야지. 끝내고 나오는 길이다.”
 “아~”
 “어서 오십시오 큰 도련님.”
 “고생이 많습니다. 렌스터 경.”
 
 하니엘 형은 내가 든 연습용 철검을 들더니 손잡이를 잡아 튕기듯 검을 회전시켰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슉!!’ 하는 소리와 함께 완성된 찌르기 동작으로 멈췄다.
 검이 튕겨 전동드릴처럼 회전하는 것을 보는 찰나 번개처럼 빠른 찌르기를 한 것이다.
 
 “와~”
 
 렌스터 경은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잡은 검의 날이 수직으로 일치되게 손에 쥐어졌고 군더더기 없는 쾌속의 찌르기였다.
 
 ‘막눈인 내가 봐도 저리 빠른데······.’
 
 “큰 도련님의 쾌속공격은 아주 훌륭하십니다.”
 “멋져요. 형님!!”
 “검술의 가장 기본이다. 너도 렌스터 경에게 열심히 배우면 할 수 있단다.”
 “네, 형님.”
 
 저택 3층과 4층에서 하녀들 몇이 고개를 내밀고 보다가 누군가 박수치는 소리가 났다.
 형님은 고개를 들어 보다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무대인사 하듯 오른손을 저어 허리 뒤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숙녀를 대하는 기사의 행위 같았다.
 
 “멋져요~ 큰 도련님.”
 
 실제 과거 유럽의 기사들의 실생활은 그렇지 못했다고 하지만 내가 본 형님은 아카데미 출신으로 용맹함과 예의를 갖춘 기사였고 귀족에 걸맞는 품위를 지닌 듯 보였다.
 
 누군지 봤더니 형님이 가슴 만지지 말라고 했던 로이였다.
 
 ‘우씨~ 마주치지 말자!!’
 ‘근데 형님이랑 둘이 뭔가 있나? 그럴 수도 있겠지?! 형님은 좋겠다. 크흐흐.’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나도록 배가 고팠다.
 형님과 함께 식사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형님 검 봐도 돼요?”
 “보고 싶어?”
 “네, 형님 궁금해요.”
 
 형님은 자신의 검이 아버지가 기사 아카데미 입학할 때 선물로 주신 것이라 했다.
 쿠아난 장인이 만든 보검이었다.
 
 “전에 봤을 텐데 기억 안 나?”
 “네.”
 
 하니엘 형은 칼집에서 꺼내 내 손에 들려주었다.
 건네받아 들었더니 지난번 엘틴 경의 검과는 사뭇 달랐다.
 무게 중심도 잘 맞았고 나름 신경 써서 제작한 검인 것 같았다.
 하지만 돌로 깎아 만든 거푸집에 부은 다음 정과 망치로 화려한 무늬를 새긴 데다가 무게를 줄이기 위해 검의 안쪽을 바이킹 소드처럼 가운데가 움푹하게 만든 형태였다.
 
 “일반 검에 비해 훌륭하지만 강도와 연성에서는 많이 떨어지겠네요.”
 “이리엘, 이 검은 쿠아난 장인의 검이다. 그분이 들으면 서운해하실 거다.”
 “형님께 좋은 검 하나 제작해드릴게요. 이 검과 테스트해서 어느 것이 더 우수한지 증명해 보일 수 있어요.”
 “뭐? 네가?? 하하하.”
 
 하니엘 형님은 쿠아난 장인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검 제조기술을 전수받아 지난 30년 가까이 검을 제작해온 에린국 최고의 명인이라고 했다.
 
 접쇠방식의 단조기술이 만능은 아니다.
 나는 다마스쿠스의 검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를 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현재 하니엘 형님의 검보다 배는 더 훌륭하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이리엘 요즘 내가 너 때문에 웃는 횟수가 많구나.”
 “웃으면 좋죠. 복이 온다잖아요.”
 “그런 말은 또 어디서··· 하하하.”
 
 나는 목욕을 하고 오겠다 말하고 씻으러 갔다.
 목욕을 빠른 시간에 끝내고 나오면서 아직 마무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찾아온 은제 식기를 내 방에서 가져왔다.
 사용하는 데 지장은 없을 것이다.
 
 “어서 오너라. 이리엘.”
 “네, 어머니.”
 
 어머니께서 먼저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아버지는 완성된 박차를 손에 들고 계셨다.
 
 ‘벌써 완성되었나 보네?’
 
 확실히 가문 내에 직영 제작소가 있어서인지 빠르게 완성시켜 납품한 것 같았다.
 박차는 황금으로 도금시킨 고급으로 보였다.
 하니엘 형님이 그것을 보자마자 신기한 듯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이게 이리엘이 만들었다는 박차인가요?”
 “그렇단다.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에 주려고 특별히 금으로 도금시킨 것이다.”
 “오~ 정말 멋지군요. 정교하면서도 잘 만든 것 같습니다. 아버님.”
 
 형님이 들고 구경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주방장에게 음식을 들여오라고 시켰다.
 아버지는 나를 보시더니 불렀다.
 
 “이리엘 이리 와서 살펴보거라. 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졌는지 말이다.”
 “네, 아버님,”
 
 아버지에게 다가가 황금색 박차를 받았다.
 신발에 차는 것인데 왜 황금색으로 도금을 했는지 나는 이해를 못 했다.
 나는 우선 끝이 살짝 더 무뎠으면 했다. 박차를 손가락으로 살짝 튕겨보았다.
 
 챙 그르르~
 
 예상대로 잘 회전하고 있었다.
 
 “끝만 살짝 무디게 갈면 괜찮겠네요. 대장장이들이 잘 만든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지금 우리 기사들도 하나씩 지급받아서 말을 타고 시험하고 있을 것이다. 반응이 좋으면 아카데미 졸업생들의 기념품으로 황실에 납품하는 것을 생각 중이다.”
 “아~ 아버님, 그게 좋겠네요. 어차피 초임 기사의 징표로 박차를 선물받는 것은 아카데미의 오랜 전통이었으니까요.”
 
 ‘잉? 박차가 기사의 상징이야?’
 
 “에딘 경의 평가대로라면 개당 가격은 2골드 50실버 이상 받아도 불평이 없을 것이다.”
 “네, 아버님. 그 정도면 충분할 것입니다.”
 
 ‘뭐? 뭣이라? 2골드 50실버??’
 
 다자란 암양 한 마리가 큼직한 은화 2개였다.
 엄지손톱 크기의 은화 20개에 해당하고 500원짜리 동전보다 큰 것 10개가 바로 1골드였다.
 박차 하나 값이 어마어마하다는 이야기다.
 
 “박차가 그렇게 비싼가요?”
 “이리엘, 아버님이 말씀하신 박차는 기사로 서임될 때 왕이 직접 하사하시는 것이다. 모두가 금으로 입혀진 것이지. 실제 사용하는 기사의 박차 가격은 1골드도 못 된단다.”
 
 1골드도 비쌌다.
 그런데 2골드 50실버라면··· 그리고 수입의 30%를 인정해준다고 했으니 대강 7~800실버가 떨어진다는 말이었다.
 하나 팔면 다자란 암양 4마리 값이었다.
 
 “형님, 기사 아카데미의 졸업생이 얼마나 되나요?”
 “400여 명 수준이다.”
 
 ‘가만··· 그러면 750 잡고 400이면 7x5=45에다가··· 50을 또 400하고 곱하면 30만 실버?? 헐~ 대박!! 진짜 대박!!’
 
 30만 실버를 골드로 환산하면 3천 골드나 된다. 그중 30%라면 900골드가 내 것이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기뻐하기는 이르다.
 내 과거 인생에서는 김칫국 상황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다··· 그런 로또 상황은 기대하지 말자······.’
 
 항상 꿈에 부풀었다가 ‘그럼 그렇지······.’ 하는 상황을 하도 많이 겪어본 터라 뭔가 되어야 되는가 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식사를 시작하고 나는 깨끗이 씻어 가져온 내 나이프로 고기와 소시지를 자르기 시작했다.
 아직 모습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날은 둥근 형태에 톱니를 새겨놓아 예전보다 쉽게 잘리는 것이었다.
 
 “어머··· 이리엘 이젠 고기나 소시지 잘 자르네?”
 
 서툴게 다루던 칼을 능숙하게 다루자 유심히 보시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칼을 새로 만들었거든요.”
 
 그 말에 아버지와 형님의 눈길도 나와 내가 들고 있는 칼을 주목했다.
 
 “이리엘 너 식기용 나이프를 만들었다고?”
 “네, 이거 보세요. 제가 말씀드린 대로 톱니를 촘촘하게 새겨 넣었잖아요.”
 
 빵칼도 시범을 보였다.
 식구들과 지켜보던 주방장도 처음엔 톱처럼 빵을 자르는 게 이상하다는 듯 지켜봤지만 빵이 부서지거나 눌리지 않고 예쁜 모양으로 잘 잘리는 것도 보여주자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 시대에 나무를 베는 톱이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원리를 식탁에 적용하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 그거 좀 보자.”
 
 내가 설계한 박차를 보신 아버지는 진지한 모습으로 가져다 드린 식기용 나이프들을 이리저리 살펴보시다가 직접 고기를 썰어보시고 빵도 잘라보는 것이었다.
 
 톱니 간격이 정리되지 않아 약간 불규칙했지만 이전에 쓰던 나이프로는 구현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허~ 이 녀석 보게··· 보통이 아니네??”
 
 식기 나이프를 살펴보시던 아버지께서 혼잣말처럼 내뱉으셨다.
 
 “하니엘, 너도 한번 써보거라.”
 “네, 아버님.”
 
 평소 식사 분위기보다 조금 산만해졌지만 식사예절에 어긋난다며 제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형님도 두꺼운 소시지와 고기를 잘라 보였다.
 
 “확실히 깔끔하게 잘리는구나!! 톱의 원리가 적용된 아이디어?? 정말, 대단한데?”
 
 아버지 샤를드 공작과 형님 역시 검이나 무기에 익숙하신 분들이다.
 써레이션의 기능이 얼마나 우수한 것인지를 사용해보고 아신 것이다.
 아쉽지만 그 기술은 내가 창안한 기술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필요는 복제의 어머니’ 정도는 된다고 느꼈다.
 
 “우리 아들에게 이런 재주가 있었다니······.”
 “그래서 쿠아난 장인의 검도 만족하지 못했던 거구나?”
 
 어머니도 만족하신 얼굴이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럴 만했다.
 예전의 사고뭉치보다는 몇백 배는 기특하실 것이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야.’
 
 “이리엘 너 진짜 내 롱 소드 만들어줄 거야?”
 
 형님도 내게 검을 만드는 새로운 기술이 있냐는 듯 물었다.
 그렇게 물어본다면 현재 생산되는 검보다는 품질이 더 좋은 검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해본 적은 없지만 몇 번 시도해보면 완성되지 않을까요?”
 “오~ 너 꽤나 자신 있어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필요는 발명··· 아니, 복제의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이리엘은 자신이 하니엘 형님처럼 공작의 지위나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음을 깨닫고 뭔가를 꾸미고 있었을 것이다.
 
 “나이프 다루는 게 서툰 여성들이나 아이들에게 적당한 듯합니다. 아버님.”
 “그래··· 그렇구나!!”
 “시간이 지나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살던 시대에도 그랬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새로 고안한 디자인에 대해서는 공작가에서 생산하고 판매해 수익금을 나눠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식기는 내가 망치질해서 만드는 것은 아니라 상관없지만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대장장이에게 기술을 알려줘서는 곤란할 듯싶었다.
 
 접쇠방식의 롱 소드가 탄생된다면 많은 것이 바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핏줄인 형님에게는 혹시라도 생길 불상사에 대비하게 만들고 싶었다.
 기존의 구형 머스킷을 신형으로 개조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혹여라도 그걸 만들어놓는다면 전쟁의 판도는 완전히 뒤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까지는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아버지께서는 공작가의 새로운 수입원이 생긴 것을 기뻐하셨다.
 별 모양의 박차에 이어 식기용 나이프와 빵칼 등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자 그것이 틀림없이 높은 수익을 가져다 줄 것을 예상하신 듯했다.
 
 <『메카닉군주』 1-2권에 계속>

댓글(5)

Kevins    
낚였다...사서 읽을 정도는 진짜 아닌데
2017.12.21 13:54
멸단    
하.... 이 책은 돈주고 보고싶지 않다.. 정말심한내.. 아니 이북에 있는책 전부 심하내.. 주인공 설정을 다 이따구로 하는구나.. 한심하다 진짜..
2018.07.06 04:29
피냥    
이름자체가 자신의 행운을 남한테 퍼주는 이름이네
2018.12.12 11:15
미려한    
댓글들이 공감된다.
2020.10.25 19:04
일일야화    
답답해서 댓글보고 나두 요기까징
2020.10.2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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