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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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계곡 1-1권

2017.12.18 조회 605 추천 1


 # 프롤로그
 
 용사 무리는 모두 15명이었다.
 
 딴에는 지상에 현현한 마왕을 무찌르네 하는 대의명분을 앞세우지만, 내 입장에선 단순한 주거침입자들일 뿐이다.
 
 “놈들의 공격이 제법 거셉니다. 지상에 있는 오크 100인대와 트롤 특공대까지 쳐부수고 지하 1층까지 돌입한 상탭니다!”
 
 검은 날개를 달고 있는 악마, 바르샤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부관으로 데리고 있는 녀석 중 가장 충성스러운 놈이긴 한데, 지나치게 걱정이 많아 탈이다.
 
 “리치들은 모두 어디 갔나? 얼른 죽은 오크든 좀비든 스켈레톤이든 부활시키라고 해!”
 “그게······ 지난번 대침공 때 부상을 입고 동면에 들어간 상탭니다. 뱀파이어라도 출격시킬까요? 녀석들의 흡혈 능력이면 상당한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던전 방어진만 복구된다면 놈들은 죽은 목숨입니다.”
 
 방어진. 그래 방어진이 문제였다. 원래 나의 던전은 각종 휘황찬란한 마법의 결계가 쳐져 있었다. 수준 낮은 모험가라면 진입도 전에 전멸할 정도.
 
 그러나 최근 적들의 잦은 공격으로 던전을 둘러싼 마법 결계가 손상된 상태였다. 한참 보수를 하던 차에 또다시 지긋지긋한 용사무리가 쳐들어온 것이다.
 
 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다. 주제를 모르는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말리라.
 
 “됐다. 그냥. 내가 직접 가겠다.”
 “발락투스 님께서 직접요?”
 “그래.”
 
 나는 마계 서열 78위의 마왕이자, 지상계 침공의 선봉에 선, 잔 리오릭 발락투스 2세!
 
 과거에 ‘잔’이라는 이름의 인간이었으며 후에 마왕 발락투스의 후신으로 그의 자릴 계승한 사내다. 미들 네임 '리오릭'은, 나에게 네크로멘시의 능력을 하사한 해골왕 리오릭을 기려 붙인 것이다. 미들 네임까지 있으니 왠지 귀족 같지 않은가? 하하
 
 “괜찮으시겠습니까? 동쪽의 다크 엘프 무리를 쓸어버리고 복귀하신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바르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검은 날개를 퍼덕였다. 이럴 때의 그녀는 몹시 사랑스러워 보인다. 주군의 안위를 걱정하는 여자 악마라니······.
 
 “됐어. 끽해야 소드 마스터 몇 놈에 5서클의 마법사, 그리고 고위 신관 정도겠지. 놈들에게 마왕의 무서움을 직접 깨닫게 해줘야겠다. 그래야 한동안 잠잠할 거 아니야? 허구한 날 원치도 않는 가정방문은 이제 지긋지긋해.”
 
 바르샤는 한숨을 크게 내뱉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법 지팡이를 이용해 순간이동진을 개방했다. 곧 호수 표면처럼 생긴 둥그런 차원문이 나타났다.
 
 “그럼 놈들이 있는 던전 1층으로 연결하겠습니다. 다른 부하들도 소환할까요?”
 “아냐. 걸리적거려. 그냥 나 혼자면 충분하다.”
 
 나는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차원문으로 향했다.
 
 마왕이 되면 조금 편할 줄 알았는데······. 하여간 전임자의 꼬드김에 빠지는 게 아니었다. 악마 같은 놈 같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인수인계 안 받는 건데······.
 
 아참. 악마한테는 욕이 아닌가?
 
 
 # 탈출
  
 정오가 한참 지나서야 하루가 시작된다.
 사실 더 늦게 일어나도 할 일 없긴 마찬가지다.
  
 일이라는 것도 서 있는 게 전부다. 경비? 그래 경비에 가깝다.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지금처럼 아무 생각 없이.
 
 무슨 일 하느냐고?
 
 사람들은 나를 사창가 건달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론 ‘기도’.
  
 난 사창가에서 행패 부리는 인간들을 처리한다. 돈 내고 몸을 취하다 보니, 돈 받는 쪽이 하찮아 보이나 보다. 거나하게 취해 와서 습관처럼 손찌검을 하는 놈들이 등장하면, 비로소 내 일이 시작된다.
  
 오입질 중이던 사내놈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온다. 사람이란 발가벗겨진 채로 밖으로 나오면 수치심과 추위에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그때 다짜고짜 밟아 버린다.
  
 사장님 말마따나, 아가씨들은 우리 상품이다. 그것도 닳아지는 소모성 상품. 상품을 함부로 다루는 놈들에겐 우리도 함부로 다루어준다. 물건을 아껴 쓰는 법을 몸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단, 상대가 용병이나 군인이라면 이야기가 또 다르다. 그런 놈들은 애초에 목숨을 내놓고 사는 놈들이다.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 놈들은, 잘못 건드렸다가 나까지 위험해진다. 난 고작 애들 좀 팰 줄 아는 동네 건달일 뿐이니까.
  
 그때를 대비해 우리 가게에도 해결사가 하나 있다. 바로 지금 나에게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저 녀석 말이다.
 볼프강 더 몬스터. 물론 귀족이 아니니만큼 뒤에 붙은 건 단순한 별명이다.
  
 “젠베르, 뭘 쪼개고 있냐.”
 “쪼개긴요. 그냥 있는데?”
  
 교묘하게 존대와 반말을 섞어 보지만 뒤통수로 날아오는 손바닥을 보니 딱 걸린 모양이다. 잽싸게 고개를 숙이며 실실 웃어본다.
  
 “여어 형님, 기분 안 좋은 일 있습니까? 대낮부터 아우한테 폭력을 휘두르시네?”
 “네가 구타를 유발하고 있네. 말 짧은 새끼야.”
 “하하 설마요.”
  
 볼프강은 한참 열 내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용건을 말했다.
  
 “근데 젠베르, 너 용돈 좀 벌어 볼래?”
 “뭔데요?”
  
 난 돈이라면 환장한다. 솔직히 사창가 기도 짓도 돈 벌려고 하는 거지, 장래희망은 아니잖은가?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는데 하야트 씨가 괜찮은 일거리 하나 생겼다는구나. 적당한 놈으로 두 놈만 더 구해 오란다.”
  
 하야트? 아. 그 돼지.
  
 “그 돈 짜게 주기로 유명한 흥신소 사장?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
  
 우리 영지에서 자질구레한 청부를 알선하는 하야트는 평이 좋지 않다. 게다가 제 몸도 못 가누는 돼지라서 더 싫다.
 
 “성질 급하기는······ 일당이 쏠쏠해.”
 “얼만데요?”
 “딱 오늘 하룻밤. 두당 30마르크. 어때? 구미 당기지 않냐? 내가 사장한테 말해서 너 비번으로 돌려놨거든, 그니까 여기 일 신경 쓰지 말고.”
  
 뭐? 30마르크라고? 그것도 하룻밤에? 한 달을 일하면 누나들 팁 빼고 70마르크 겨우 받는 나에겐 적지 않은 돈이다. 하지만 곧바로 태도를 바꾸면 사람이 없어 보이니 딴청을 피워본다.
  
 “근데 내가 할 거라고 확답도 안 한 판에 왜 사장한테 미리 말하는 건데?”
  
 볼프강은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미친. 젠베르, 네가 돈 좋아하는 건 세상이 다 알지. 그리고 모르는 줄 아나 본데, 너 요새 ‘다나’인가 하는 계집애한테 완전 푹 빠져가지고 돈 꼴아 박는다는 소문이 파다······ 읍!”
  
 누가 들을 새랴 손으로 볼프강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 쫌!”
 “야! 안 치워? 더러운 손을 어디다 대?”
 “그니까 조용히 좀 하라구요.”
 “아무튼 너, 하는 거지?”
  
 젠장, 볼프강은 그 일은 어떻게 안거야? 썅! 내가 기둥서방 해주는 거 비밀로 하재니까······ 아랫입이 싸니까 윗입도 팔랑팔랑하는구만. 이래서 내가 창녀들을 못 믿는다.
  
 “정확히 무슨 일인데? 왜 그렇게 많이 줘? 설마 누구 죽이라는 건 아니지?”
  
 볼프강은 자신의 교섭이 성공한 것을 기뻐하며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아니 그런 건 아닌 거 같더라고. 나도 살인 청부 같은 건 질색이걸랑. 일단 하야트 씨한테 가서 자세한 이야기 좀 들어보자.”
 “근데 두 명 더 구한다면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은 구했어?”
 “가보면 있어.”
  
 ***
  
 하야트는 상의를 홀딱 벗은 채, 옆에 붙어 있는 계집의 수박 같은 젖가슴을 주무르며 말을 마쳤다.
  
 “뭔 소린 줄 알아들었지? 그러니까 너희들은 적당히 두들겨 맞다가 뒤로 내빼면 되는 거야.”
  
 들어보니 기가 차게 황당한 일이다.
  
 하야트는 흥신소 외에도 주점도 하나 겸하고 있다. 그 주점에 자주 드나드는 귀족 새끼가 한 명 있는데, 이름하야 “리오”.
 
 흥청망청 돈이나 쓰는 버러지같이 사는 한량인데, 아비를 잘 만나 그렇단다. 영주직속 근위대장이 자기 아버지라나?
  
 하여튼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이어 기사 작위를 물려받았음에도 여성편력이 심해 양아치마냥 이리저리 쑤시고 다닌단다.
 
 그놈이 이번에 예쁜 아가씨 하나를 알게 됐는데, 어찌나 콧대가 높은지 어지간해선 꿈쩍도 안 하더란 말이다.
 세상엔 돈으로 안 되는 여자도 가끔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그 꼴통 새끼가 짜낸 아이디어가······.
  
 “그러니까. 우리가 그 귀족 새끼한테 가서 두들겨 맞으란 겁니까? 그럼 그 새끼는 위기에 처한 아가씨를 구한 정의의 기사로 둔갑하고요? 근데 그 새끼 주먹이나 좀 쓴답니까? 이 짓도 손발이 맞아야 해 먹지.”
  
 가장 어처구니없어 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레미’라는 녀석이었다. 이놈은 나와 동갑인데 사실 그리 친하진 않다.
 오히려 사이가 안 좋다고 해야겠지. 레미랑 같이 일하는 건 줄 알았담 첨부터 거절할 걸 그랬다.
  
 “별 거지 같은 일을 다 보겠네. 그놈은 좋은 밥 먹고 무슨 공부를 했길래 대갈빡에서 그런 생각을 한 거랍니까?”
  
 귀족들이 뭐 다 그렇지.
  
 난 유치한 짓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일단 돈이 걸렸다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레미에게 쏘아붙였다.
  
 “야. 하기 싫으면 빠지면 될 거 아냐. 일당 30마르크면 너 말고도 일할 사람 쫙 깔렸으니까.”
 “뭐야!”
 
 레미는 당장이라도 한판 붙을 것처럼 으르렁댔다. 지켜보던 하야트 씨가 불편한 표정으로 심하게 인상을 구긴다.
 
 저래 보여도 하야트 씨는 뭐랄까, 이쪽 청부업계에선 꽤 날리는 인물이다. 지금이야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지만 젊었을 땐 잘나가는 해결사였다나 뭐래나?
 
 레미도 하야트 씨에게 찍혀서 좋을 건 없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내리깔면서도 못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왜 시비야 이 새끼는.”
  
 왜긴 임마. 난 네 면상만 봐도 속이 뒤틀리거든.
  
 분위기가 경직된 걸 풀어 보려고 그랬는지 볼프강이 내 뒤통수를 빡― 소리 나게 때리며 하야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존나 아프네. 왜 근데 나만 때려?
  
 “아이구~ 죄송합니다. 동생들이 어려서 그런지 어르신 앞에서 재롱을 다 피우네요. 그래도 요 두 놈이 애들 중에선 가장 날고 긴다는 놈들입니다. 제가 책임지고 임무를 완수하겠으니 맡겨 주십쇼.”
  
 하야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침대 머리맡 주머니에서 은색 동전 3개를 허공에 뿌렸다. 볼프강은 번개처럼 손을 놀려 동전을 모두 낚아챘다. 은화 3개니까 30마르크군.
  
 “자네, 애들 교육 좀 똑바로 시켜. 난 앞에서 애들 조잘대는 거 굉장히 싫어하니까.”
 “네. 아무렴요.”
 “아무튼 볼프강 자네 믿고 맡기는 거니까 그리 알아. 일단 선수금으로 10마르크씩 주고, 일이 완료되면 잔금을 주지. 리오 경의 종자놈이 구체적인 장소와 일시를 알려 줄 거야. 이번일은 우리 애들 맡기기 민망해 중개만 해주는 거니까, 당사자끼리 알아서들 하라고. 그럼 가봐.”
  
 볼프강은 보기 민망할 만큼 굽신거렸다. 나와 레미가 멀뚱히 서있자 그는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내리누르며 인사를 종용했다.
 
 저런 돼지한테 인사하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참았다. 뭐 참지 않으면 별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우! 돈이 뭐라고.
  
 ***
  
 우리가 하야트 씨 사무실에서 나오자 복도 쪽 의자에 한 소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군데군데 덧댄 허름한 옷에 신발도 밑창이 다 떨어졌다.
 종자라 부리면서 실제론 노예 취급인 게로군.
 
 계집질할 돈으로 종자 옷이나 좀 사 입히지 쓰레기 같은 놈. 소년은 우릴 보더니―아니 정확히 말해서 볼프강을―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제 봤던 볼프강 아저씨 맞죠?”
 “그래. 리오 경께서 시간과 장소를 가르쳐 주시더냐?”
  
 볼프강과 소년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옆에 서 있던 레미가 어깨를 툭― 부딪히며 나에게 눈치를 보냈다. 창밖으로 고개를 까딱까닥 젖히는 폼이 필시 나와 몸으로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는 모양이다. 아까 열 받았다 이거지?
  
 “볼프강.” 
 “짜샤! 형이라고 부르랬지! 왜?”
 “그래 프강이 형. 잠깐 레미랑 뒤 공터에서 이야기 좀 하고 올 테니 정리되면 나중에 알려 주라고.”
 “알았어. 그리고 니들 적당히 해. 친구끼리”
 
 적당히라. 글쎄 내 주먹은 자비를 모르는데······. 
 
 ***
 
 하야트 씨의 사무실은 주점 3층에 있었다. 먼저 내려가 기다리고 있던 레미는 뒤따라 내려오는 내 모습을 확인하더니 다시 뚜벅뚜벅 걸어갔다. 우린 사람들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공터 쪽으로 자릴 옮겼다.
 
 “젠베르. 저번에 무승부로 끝난 거 이번에 마무리해야지?”
 “무승부라니. 네가 나한테 정확히 3대 더 맞았잖아.”
 “넌 싸우는데 때린 횟수가 중요하냐!”
 
 말을 마치자마자 레미가 기습적인 발차기를 날렸다. 약은 수작이다. 놈의 발차기를 웅크려 피한 후, 놈의 다리가 내 머리 위를 휭하고 지나가는 순간 개구리처럼 벌떡 몸을 솟구치며 녀석의 아래턱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완전히 젖혀진 레미가 붕 떠올라 날아갔다. 캬, 손끝에 제대로 걸린 것 같은데 잘하면 한 방에 끝날지도 모르겠군.
 
 바닥에 뻗어 하늘만 쳐다보는 레미. 보통 아래턱을 저렇게 맞으면 뇌가 흔들려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난 항상 오른손에 가죽으로 된 반장갑을 끼고 다닌다. 주먹질이 직업이기도 하지만, 상처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어때? 세상이 핑 돌지 않냐? 이제 까불지 마라.”
 
 내 말에 발끈했는지 레미가 복부 반동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벼락같이 나에게 태클을 걸어왔다. 워낙 순식간이라 피하지 못하고 그 녀석의 머리가 내 가슴을 들이받는 걸 지켜봐야 했다.
 
 “억―!”
 
 갑작스런 태클에 숨이 턱 막혔다. 우린 그대로 땅바닥에 포개 쓰러졌다. 내가 밑에 깔리자 레미가 연이어 파운딩을 먹였다. 나는 가드를 올려 막으면서도 가드 사이로 놈의 주먹을 끝까지 노려보았다. 여기서 눈감으면 싸움에 진다.
 
 상위 포지션을 점하자 레미의 동작이 커져 갔다. 망치처럼 내리꽂히는 파운딩에 팔목이 슬슬 아려왔다. 하지만 기회는 분명 올 것이다.
 
 “으아압!”
 
 지금이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허리를 들어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 순간 레미의 주먹이 빗나가며 바닥을 내리찍었다.
 
 “으악! 돌!”
 
 에라이 병신. 그사이 나는 옆으로 몸을 굴려 레미에게서 빠져나왔다.
 
 일어서 보니 왼손으로 오른손을 부여잡고 낑낑대고 있는 레미가 보였다. 머리를 확 걷어차 줄까 하다 불쌍해서 가만히 지켜봤다.
 
 “야. 이쯤 하자. 좀 더 패주고 싶지만 부상자를 때리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이, 이 새끼 아파 죽겠는데 자꾸 놀리는 거냐!”
 
 사실 레미랑 전력으로 맞붙는다면 지난번처럼 둘 다 망신창이가 될 때까지 끝도 안 날 것이다. 우리 둘 다 사냥개처럼 물고 늘어지는 스타일이다.
 
 한번 시작하면 끝도 없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그건 너무 피곤하다. 고통이 좀 가신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는 레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넌 아직도 허드렛일이나 하며 사는 거냐? 차라리 그 솜씨로 건달패라도 들어가지. 가오 떨어지게.”
 “미친 새끼. 포주 밑에서 개처럼 사느니 차라리 막노동을 한다.”
 “크크. 난 말이지. 개처럼 살아도 너같이 하루하루 근근하진 않거든? 듣자하니 홀어머니 모시고 산다던데 빨리 돈 벌어야지 않겠어?”
 “내가 막노동을 하건 말건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난 영주근위병이 될 거야. 깡패 따위의 이력을 남길 수 없지.”
 
 푸하하. 근위병? 그니까 공무원 하겠다고?
 
 “미친놈. 그럼 이번 일은 왜 하는 건데? 이 짓도 양아치 짓은 마찬가진데? 모순된다고 생각 안 하냐?”
 “볼프강 형님 말이 사람 죽이는 일도 아니고 패는 일도 아니고 단지 그냥 맞기만 하면 30마르크 준다길래 하는 거야. 너처럼 아무 일이고 닥치는 대로 하진 않는다고. 게다가 일이 잘되면 근위대장의 아들이라는 놈이 나를 추천해 줄지 아냐?”
 
 그랬다. 맞다. 기억났다. 내가 왜 이 녀석을 싫어했는지를.
 
 난 저 녀석이 가진 꿈이 부러웠다. 나는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했는데, 불우한 환경이긴 마찬가지인 저 녀석은 아직도 꿈을 꾸며 살고 있었다.
 
 뭐 영주근위병이라고?
 
 나와 다르게 녀석은 꿈을 버리지 않고 산다는 게 너무 싫었다. 게다가 녀석이 싸움을 하는 경우도 동네 양아치들이 행패 부리는 걸 참지 못해 손을 쓴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정의감 넘치는 녀석을 볼 때마다 솔직히 내가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녀석의 존재는 내 타락의 당위성을 단지 나의 개인적인 문제로 증명하는 것 같았다.
 
 난 그게 싫었다. 그래서 레미가 싫었다.
 
 “볼프강 형님? 푸하하, 그 새끼가 왜 형님이냐? 그 새낀 우리보다 단지 몇 년 더 밥을 처먹고 몇 년 더 똥이나 퍼지른 것뿐이야. 똥으로 산을 쌓았다면 저기 보이는 산 높이만큼 쌓았을걸? 워낙에 먹어대니까.”
 
 퍽―!
 
 난 눈알이 튀어 나올 만큼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이런 박력의 소유자. 역시 볼프강밖에 없다.
 
 “이 새끼가 꼭 매를 벌어요. 내가 누차에 걸쳐 말하지만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냐 안 했냐? 레미 봐. 얼마나 예의 바르냐? 하여간 양아치 새끼, 뒤에서 몰래 남의 흉이나 보고 말이야. 인성이 글러 먹었어 너는, 새끼야.”
 “큭― 그래도 내가 쟤보단 세거든?”
 
 레미가 발끈하며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한 판 더 해보자는 거냐?”
 
 볼프강이 레미를 만류했다. 물론 볼프강은 나와 레미 둘이서 덤벼도 감당 못 할 만큼 강하다.
 그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라니까? 볼프강 더 몬스터!
 
 “이제 그만들 좀 해. 잠깐 저기 앉아서 작전회의 좀 하자.”
 
 볼프강을 사이에 두고 왼쪽엔 레미 오른쪽엔 내가 앉았다. 레미와 둘이 있을 땐 서로 으르렁대면서 서열 싸움을 했는데 볼프강이 오자 한 방에 위계가 잡혔다.
 
 이렇게 셋이 모이면 당연히 볼프강이 리더가 된다.
 
 볼프강은 정말 용력이 뛰어난 천하장사 같은 타입이다. 그와 알게 된 지는 포주 밑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니까 대충 3년 정도 전인데, 한 번은 시비가 붙어 대거리를 했다가 단 두 방에 기절해 버린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명치 쪽을 가격했는데 그게 슬쩍 비껴서 맞은 거다. 근데 내 생각엔 내가 잘못 때렸다기보다 볼프강이 순간적으로 몸을 틀었던 것 같다.
 
 전력을 다해 내지른 주먹에 꿈쩍도 안 하는 그 맷집하며, 왼손 복부 한 번, 오른손 안면 한 방으로 10m는 날려 버리는 그 파괴력이란!!! ······과장이 심했나? 그래도 5m는 됐던 것 같다. 그때 정신이 끊기는 바람에 기억이 영 가물가물하다.
 
 암튼 내가 보기엔 볼프강은 타고난 사람이었다.
 얼핏 듣기로 다른 나라 용병단에서 활약하다가 사고를 치고 도망쳐왔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 말이 증명하듯 우연히 그의 방구석에서 장검처럼 보이는 물체를 본적이 있었다. 물론 그가 칼을 빼들고 싸운 적은 아직까지 없었지만.
 
 과거가 미심쩍은 볼프강이 입을 열었다.
 
 “종자 녀석 말로는 오늘 저녁쯤 그 아가씨가 마을 예배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돌아온다는 거야. 항상 규칙적인가 봐.”
 “형님, 그래도 귀족가 아가씨라면 당연히 호위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저희 셋이서 무장된 호위무사를 상대하기는 너무 벅찬데.”
 “그건 걱정할 거 없어. 알고 봤더니 귀족은 아니고 아랫동네에 오래된 목욕탕 있잖아. [월계수의 폭포]인가 뭔가. 거기 가게 딸이라는구만.”
 “귀족이 아니였네요?”
 “맞아. 집에 돈이야 좀 있겠지만 딸에게 호위무사를 붙일 정도는 안 된다는 거지. 아마 그 집 하녀 한 명만 따라다닌다는 거 같은데 그쯤이야 뭐.”
 
 볼프강이 가운데 앉아 레미하고만 이야기 하자 들러리가 된 기분이었다. 이건 뭐 나는 생각도 없이 몸만 움직이란 소린가? 좀 기분이 상해서 툴툴거렸다.
 
 “에이 씨······ 작전구상이라면서 지들끼리만.”
 
 볼프강은 내가 씨부렁거리자 아차 싶었는지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려서 씨익 웃었다. 제발 그 콧수염이랑 턱수염은 좀 밀어 버려 이 몬스터야!
 
 “젠베르, 네가 빠져서 되겠냐. 난 살면서 너처럼 연기 잘하는 녀석은 본 적이 없어.”
 “웬 아부셔.”
 “네가 술 취한 척하고 먼저 시비를 거는 역할을 꼭 해줘야겠거든.”
 
 술 취한 척? 에이 젠장 술이나 취할 만큼 사주고 그러든가.
 난 좀 냉소적으로 말했다.
 
 “근데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어디서 덮칠 건데? 오솔길 쪽이면 사람도 많을 텐데 쪽팔릴 일 있어?”
 
 볼프강 건너에 앉아있던 레미가 빈정댔다.
 
 “쪽팔릴 얼굴은 아직 있는 거냐? 온갖 악행은 다하고 돌아다니는 망나니 놈?”
 “이 자식이 아까 돌 찍은 손이 이제 안 아프지?”
 “뭐야!”
 
 나와 레미가 다시 한 판 붙으려 하자 볼프강이 두 팔을 벌려 제지했다. 볼프강만 아니었어도 저걸 그냥.
 
 “야! 너희들 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려! 승냥이 같은 새끼들! 아무튼 우리가 취객처럼 접근해서 시비를 걸고 있으면 거기서 대기타던 리오가 우릴 적당히 손봐주고 여잘 데려가는 거야. 특히 젠베르 너, 몇 대 맞는다고 반격할 생각은 꿈에도 마라. 자존심 다 버리고 일하는 게 우리 같은 녀석들이야. 레미야 알아서 잘 하겠지만······.”
 “흥 당연하지. 저 새낀 밸도 없는 놈이거든.”
 “야!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아가리 놀리다간 강냉이 날아가는 수가 있다!”
 
 나는 일부러 겁먹은 척 굽신굽신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구 미래의 근위병님,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그저 저 같은 양아치는 조신하게 살아야죠.”
 “이!”
 “그만! 그만! 해산! 레미는 오늘 저녁 5시 예배당 앞 나무에서 보는 걸로 하자. 그리고 젠베르 넌 나랑 같이 좀 가. 버릇 좀 고쳐야겠다. 왜 맨날 레미만 보면 시비야? 엉?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거야?”
 
 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서 후다닥 앞으로 달려나갔다. 물론 돌아보며 한마디 쏴줬다.
 
 “시발 오크 새끼,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나는 쇄도하는 볼프강을 피해 밑창이 닳도록 뛰어야 했다.
 
 아참, 달리기도 내가 지는구나. 제길.
 
 ***
 
 작전시간.
 
 성당의 종이 6번 울렸다. 첨탑 끝에 매달린 커다란 종은 술 취한 사람마냥 좌우로 몸을 흔들어 댄다.
 
 저녁 미사가 6시까지라니 슬슬 사람들이 예배당에서 나올 시간이다.
 
 몇몇은 배가 고팠는지 부리나케 예배당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갈 거면 뭐하러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걸까? 저런 놈들은 며칠을 굶겨놓고 빵이냐 종교냐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종교를 가져 본 적 없다.
 
 어떤 이들은 신관이나 사제가 되어 놀라운 신의 권능을 부릴 수 있다고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신앙심이 투철해야 가능한 일이다. 평소 사상이 비관적이고 의심이 많은 내가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믿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월계수의 눈물인지 콧물”인지 하는 목욕탕집 아가씨가 나오길 기다리던 차였다.
 
 “저기에요. 저기 베일 쓴 아가씨 보이죠? 저 사람이에요.”
 
 종자 놈이 손을 들어 한 여자를 지목했다. 소년은 주인에게 단단히 교육을 받은 모양인지 예배당 종이 울리기 전부터 뚫어져라 나오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종자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가니 부근에 베일을 쓴 여자가 다섯 명도 넘게 있었다.
 
 베니스 교 여신도들은 일주일에 1번 있는 예배주일은 꼭 베일을 쓰고 다니도록 되어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네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들었다.
 
 사창가 포주의 하수인으로 일하고 있는 나로서는, 저렇게 정숙한 처녀들을 보면 마치 다른 세상에 와있는 느낌이다. 확실히 여자는 성경험의 유무 하나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법이지.
 
 “새꺄, 죄다 보자기를 쓰고 있구만 대체 누구란 말이야? 얼굴을 보고 하는 말이냐?”
 “제가 그 집 하녀 얼굴을 알거든요. 저기 흰 치마 입은 누나에요.”
 
 아무리 말해도 도무지 모르겠는데 옆에 있던 레미가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천천히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곤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젠베르, 발견했다. 내가 뒤따를 테니 넌 합류장소에 미리 가 있어.”
 
 이 새끼 봐라? 어디다 대고 명령이야?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작전은 작전이니까 일단 오솔길을 앞질러 뛰어갔다. 5분쯤 헉헉댈 정도로 달려가니 숲 속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젠베르, 여기다.”
 “레미가 뒤따라오고 있어. 내가 뛰어와서 이 정도라면 아마 10분 이상 걸릴 거야.”
 “수고했다. 아참 젠베르, 인사드려. 이 분이 리오 경이시다.”
 
 볼프강의 떡대에 가려져 몰랐는데 뒤에서 붉은 망토를 두른 장발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 꼬락서니 하고는. 난 건들건들 거리며 대충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요 나리. 어떻게 맞아드릴깝쇼?”
 
 리오 경은 내 말투가 거슬렸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볼프강을 쳐다봤다. 뭐하는 새낀데 이렇게 건방지냐는 표정이었다. 내가 원래 좀 싹수가 노랗긴 하지.
 
 “야 임마. 리오 경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아이구,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맞는 연기도 미리 각본이 있어야 자연스러울 거 같아서요.”
 
 얼렁뚱땅 둘러대자 리오 경이라는 사람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너희들은 그냥 닥치고 맞기나 해. 때리는 건 내가 알아서 한다.”
 
 순간 뭔가 울컥 올라왔지만, 남은 잔금 20마르크를 생각하며 비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비굴한 것 같다.
 
 “헤헤헤. 여부가 있겠습니까, 크게 안 다치게 잘 좀 부탁드립니다.”
 
 리오라는 놈은 나를 아예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볼프강만 쳐다보면서 말했다. 건방진 귀족 새끼. 여자 하나 후리지 못해서 유치한 연극이나 벌이는 놈치곤 몹시 건방지군.
 아! 출연진인 내가 할 소린 아닌가?
 
 “이봐. 그럼 난 저쪽 나무 뒤에 숨어 있을 테니 시작되면 잘 좀 하자고. 혹시나 그 아가씨 몸에 손이라도 댔다간······ 알지?”
 
 볼프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뒷덜미를 붙잡고 오솔길 옆으로 끌고 갔다. 손아귀에 힘을 들어간걸 보니 방금 전의 내 태도에 대해서 주의를 주는 것이리라. 아흑, 괴물 같은 녀석, 목 떨어지겠다! 아우, 내 신세야 돈이 웬수지. 이 좋은 저녁에 여기 숨어 뭐하는 걸까? 여자꽁무니나 뒤쫓고 있는 레미도 그렇지만 다들 불쌍한 인생들이군.
 
 이렇게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때,
 
 “저기 온다. 레미다. 여자를 앞질러서 왔나 보군. 이제 도착할 것 같으니 준비해라 젠베르.”
 
 레미는 우리가 숨은 위치를 찾지 못하고 바로 앞까지 당도해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볼프강이 다시 손가락을 구부려 입속에 넣어 “휘익―” 하는 휘파람 소리를 냈다. 레미는 소릴 듣고 얼른 뛰어왔다.
 
 “형님 1분 뒤면 여자가 올 것 같습니다. 근데 좀 문제가 생겼는데요.”
 “뭔 문제?”
 “그 여자 뒤로 농부처럼 보이는 두 명이 따라오던데, 어떡하죠?”
 
 불청객이군.
 볼프강은 잠시 생각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괜찮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넌 신경 안 써도 된다. 나랑 젠베르가 처리할 테니까.”
 
 곧 돌아오는 길목에서 흰 베일을 쓴 여자가 보였다. 나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타입이라 대뜸 뛰쳐나갔다. 여자 옆에는 못생겨 보이는 하녀 한 명이 바싹 붙어 있었다.
 
 “아가씨, 제법 예쁜데?”
 
 상투적인 대사는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지만 건달 특유의 말투가 입에 붙은 지 오래라 나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내 뒤로는 레미가 따라 붙었다. 볼프강은 어디갔지? 옆에 있던 하녀는 불쑥 숲에서 뛰쳐나온 나를 보더니 놀라 소릴 질렀다.
 
 “뭐, 뭐에요! 당신들! 강도야?”
 
 뭐? 강도? 연쇄살인범같이 생긴 게 확 그냥.
 나는 일부러 색골 영감 같은 얼굴로 능글거렸다.
 
 “뭐긴 뭐겠어? 날도 슬슬 어둡겠다, 피 끓는 청춘 아랫도리 묵직해지는데 옆에 여자가 없으니 적적해서 말이야.”
 “꺄악! 도와줘요!”
 
 여자 둘이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때 볼프강이 갑자기 등장하며 퇴로를 차단했다. 역시 볼프강! 후진입 센스보소?
 
 “흐흐흐~ 어딜 도망가시나 귀여운 아가씨들.”
 
 와! 저런 변태 같은 웃음이라니······ 저건 연기가 아니잖아? 언제 준비했는지 복면까지 쓰고 있어 더욱 음침해 보였다. 다들 맡은 바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데, 레미 혼자 살짝 떨어져서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오호라? 추잡한 일은 우리가 다하고 돈만 쏙 받아먹겠다 이거냐? 이 자식이 돈 쳐 받았으면 말로 희롱이라도 하란 말이야! 내가 눈을 부라리며 쏘아보자 그도 일말의 책임을 느끼는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예, 예쁘시네요.”
 
 이 병신! 데이트 나왔나?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던 하녀와 베일 쓴 아가씨도 좀 어이가 없었던지 일순 조용해졌다. 저 녀석이 애써 조성해둔 공포 분위기를 다 망쳐 놓는군.
 
 나는 다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기 위해 여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하녀가 아가씨 앞을 가로막았다.
 
 “꺼져, 양아치 같은 새끼야!”
 
 뭐야 이 메주 같은 애는. 주군에 충성하는 기사들 이야기를 너무 많이 보다가 머리가 돌아버린 걸까?
 
 “뭐 양아치? 야, 네 쌍판을 보고 말해. 좆같이 생겨가지고······ 난 씨발 무슨 얼굴에 좆 달고 다니는 줄 알았네? 존나 식겁했다 이년아. 대체 쌍판에 무슨 짓을 하면 그렇게 되냐? 엉? 그딴 걸 면상이라고 쳐 들고 다님서 사람들에게 피해 줘야 쓰겠냐. 이 씨버럴년아!”
 
 내 앞을 막아선 하녀에게 “씨버럴년아!” 하는 소리에 맞춰 복부를 밀어 찼다. 하녀는 한 방에 나자빠졌다. 흰 베일의 여자가 와들와들 떨면서 도망치려 했지만 덩치 큰 볼프강이 뒤를 떡하니 막고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울먹였다.
 
 “사, 살려주세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재미가 들린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이러긴 뭘 왜 이래? 말만 한 처녀가. 크크, 하긴 처년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볼프강 뒤편에서 낯선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비명소리가 나던데?”
 “아니 새파란 새끼들이 길가에서 여자를 희롱을 해?”
 
 아까 레미가 말했던 농부들인 모양이다. 40대 중년으로 보이는 아저씨들은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실력 없는 정의감이란 개나 줘야 하는 법이다. 볼프강이 재빠르게 뒤를 돌며 주먹으로 다짜고짜 한 아저씨의 복부를 올려쳤다. 내장 파열될지도 모르겠군, 저 아저씨. 나도 뒤질세라 여자를 지나쳐 5미터를 도약해 날아차기로 나머지 한 명을 고꾸라뜨렸다. 크크. 정의의 사도치곤 형편 없구만?
 
 아재요! 꼬추도 안 서는 나이면 적당히 찌그러져 있어야 될 것 아녀? 그러게 나서길 어딜 나서? 중년의 아저씨들을 물리치고 뒤를 돌아보니 여자는 도망가려다 레미에게 붙잡혀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나와 볼프강은 서서히 거리를 좁혀가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마음에, 그녀의 베일을 확 들추었다.
 
 베니스 교의 베일이 중요한 종교적 의미가 있다는 건 대충 알았지만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막말로 희롱하려는 여자가 어떤 얼굴인지는 알고 해야지, 대체 얼마나 예쁘길래 귀족 새끼가 이런 유치한 짓을 꾸몄던 걸까?
 
 오!!!!
 
 레미나 볼프강 역시 나처럼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겁에 질려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예뻤던 것이다. 눈이 커다랗고 피부가 덜 익은 복숭아처럼 뽀얀 귀여운 아가씨였다.
 
 우리 가게 최고 미녀라고 불리는 다나보다 훨씬 예쁜 거 같았다. 이 정도 얼굴이었으니 돈 들여 이 지랄을 떤 거구나.
 
 베일의 여자는 자기의 얼굴이 노출된 게 부끄러웠는지 눈을 콱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면서도 손가락 틈 사이로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 제법 흉흉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무섭다는데 이거 겁나는군.
 
 그때 모든 상황을 지켜봤을 게 뻔한 리오 경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스 타이밍! 사전연습도 안 했는데 손발이 척척 맞는구만?
 
 “이봐. 너희들!”
 
 볼프강은 멀리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리오를 보자마자 이 연극의 계획자답게 우악스럽게 팔뚝을 걷어붙이며 맞섰다.
 
 “너는 또 뭐하는 자식이야.”
 
 붉은 망토의 리오는 살짝 긴장된 표정이었다. 하지만 또박또박 말하는 폼이 배에 힘을 잔뜩 준 모양이다.
 
 “이놈들!!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무슨 짓이냐! 그 더러운 손 떼지 못할까!”
 “하하하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놈이 어디서 감히!”
 
 그렇게 대꾸한 볼프강은 내가 봐도 지나치게 느린 동작으로 리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팔에다 20kg짜리 모래주머니를 채워도 저것보단 빠르게 휘두를 수 있겠다.
 
 이에 기사 리오는 뒤로 물러서며 느린 주먹을 피한 뒤 팔꿈치를 크게 휘둘러 볼프강의 관자놀이 부위를 호되게 후려쳤다. 회피와 반격에 이르는 합이 생각보다 깔끔한 걸 보니 제법 수련을 한 모양이다. 아 맞다. 아버지가 영주의 근위대장이랬나? 기사수업 받았을 가능성도 있겠군.
 
 평소 맷집이면 그 정도 팔꿈치공격이라도 이 한번 악물고 버텼을 볼프강은, 덩치가 아까울 정도로 아픔을 호소하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댔다. 그러니까 저건 연기다.
 
 “어이쿠 내 머리야! 어이쿠!! 나 죽네!!”
 
 미련 곰탱이 같으니. 티 좀 안 나게 하지. 오버하기는.
 
 볼프강이 쓰러지자 이번엔 기다렸다는 듯이 레미가 나섰다. 베일의 여자를 슬쩍 쳐다보니 두려움과 기대감이 뒤섞인 얼굴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아가씨 참 순진도 하구만. 딱 봐도 짜고 친 걸 모르겠어?
 
 아까랑 싸우는 폼부터 다르잖아? 그러면서도 내 시선을 느끼자 역시 죽일 듯한 눈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유후~ 아가씨 성깔 있는 게 맘에 드네.
 
 난 일부러 혀를 빼서 윗입술을 핥아 보였다. 낼름―
 
 레미는 제법 발차기를 하는 편인데 일부러 동작만 큰 뒤돌려차기를 하다가 낭심을 걷어차이는 비참한 연기를 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저 리오라는 녀석, 좀 사정없이 때리네?
 
 레미의 불알 두 쪽이 부디 무사하길 빌며 이번엔 내가 걸어나갔다. 아참, 정해진 대사를 쳐줘야지. 난 볼프강 말마따나 이 유치한 연극의 주인공이거든.
 
 물론 악당 중에서.
 
 “넌 뭐하는 새낀데 난봉꾼 3형제에게 덤벼드는 것이냐!”
 
 아이고. 이런 너절한 작명센스라니. 참고로 난봉꾼 3형제는 볼프강 머리에서 나온 작품이다. 단 1g도 내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
 
 리오가 붉은 망토를 과장되게 펄럭이면서 대사를 읊듯이 말했다.
 
 “나는 영주님의 직속 근위대장인 르카르도 자작의 첫째 아들 리오다!”
 
 미친놈이 이 상황에서 왜 아버지 이름을 들먹여? 또라이냐? 자작 아들의 유치한 자작극을 들키기 전에 빨리 이 엿 같은 연극을 마무리 지어야할 것 같았다.
 
 “빌어먹을 귀족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난 얼굴을 정면으로 들이대면서 한 대 때려줍쇼 하고 달려들었다. 무방비다 정말, 난 원래 이렇게 닥돌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퍽―!!!
 
 순간 눈앞에 별이 보였다. 리오녀석이 별안간 내 머리통을 두 손으로 감싸 쥐더니 오른 무릎을 빠르게 들어 올려 내 턱을 찍어 버린 것이다.
 
 니킥 작렬!
 
 뇌가 흔들리는 건 둘째 치고, 예상도 못했던 공격에 혀를 깨물었는지 혓바닥이 불로 댄 것처럼 따끔하면서 비린 맛이 느껴졌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아파서 나는 길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으악!! 제길, 혀 깨물었어, 악”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한 대만 때리던 리오가 갑자기 땅바닥에 데굴데굴하는 내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는 게 아닌가? 뭐라드라 이걸? 싸커킥?
 
 퍼억!
 
 “으악!!”
 
 입에서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오면서 입안에 고였던 피와 침이 뒤섞인 액체를 내뱉었다. 몸으로 돈 번다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 그래도 두 대 맞고 20마르크라면 100마르크까진 참아 주지.
 
 쓰러져 있는 내 뒤로 리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나쁜 놈들은 모두 처치했습니다. 제가 댁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계획상 이쯤 상황이 진행되면 볼프강이 우릴 수습해서 “제길! 무지막지하게 강한 놈이다. 애들아 튀자!” 할 타이밍이다.
 
 “제길! 무지막지하게 강한 놈이다. 애들아 튀자!”
 
 볼프강은 레미를 일으켜 세우고 나에게 손짓했다. 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진짜로 아파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뒤에서 아가씨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새끼! 저놈이 가장 악질이에요. 저놈이 내 얼굴을 들쳐봤어요. 아 아까 받은 모욕을 생각하면······!!”
 
 지금 나를 말하는 거겠지? 왠지 뒤통수가 따가운데?
 좋지 않은 예감이 불쑥 든다.
 
 “야, 너 거기서!”
 
 떨리는 리오의 음성이 나를 멈춰 세웠다. 도망가려던 볼프강과 레미도 뜨악하며 뒤를 돌았다.
 
 이게 아닌데? 작전계획이 틀어지고 있다.
 
 “그래. 건방진 놈, 너 말이다.”
 
 가격을 당해 깨문 혓바닥에 피가 흘러나왔다. 오른손으로 입 주변을 거칠게 닦으며 리오와 여자를 동시에 노려보았다.
 
 베일 뒤로 얼굴이 가려졌지만 분노가 담긴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 한 번 본 게 그렇게 대수인가? 짜증이 확 솟구쳤다. 참았으면 됐는데, 지랄맞은 입이 가만있질 못했다.
 
 “좆나! 이쁘지도 않은 얼굴, 드러내고 다녀도 별일도 없겠구만 뭘 가리고 지랄이야! 지랄은!”
 
 난 일부러 화를 돋았다. 사실 좀 열 받기도 했다. 리오에게 필요 이상으로 두들겨 맞은 것도 짜증이 나던 차였다. 같은 돈 받고 연기하는 건데 나만 왜 두 대냐고.
 
 녀석도 보통은 아니라지만 나 역시 길바닥에서 10년 구른 몸이다. 내가 호구로 보이나?
 
 맨손 격투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일은 드물었는데 이렇게 얻어터지고 보니 순간적으로 꼭지가 돌아버렸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대놓고 무시하자 리오 역시 발끈해 소리쳤다.
 
 “무례한 양아치 녀석! 당장 그 말 사과해!”
 
 어느새 내 뒤에 바짝 다가온 볼프강과 레미가 양 어깻죽지에 손을 넣고 끌고 가려고 했다. 볼프강이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 젠베르 임마! 이성을 찾아. 일을 다 망칠 셈이냐? 이쯤에서 도망가자.
 
 볼프강의 말을 들으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지만 애써 수습하며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베일을 뒤집어쓴 계집애가 갑자기 처량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흑. 오늘 받은 모욕은 정말 견딜 수 없군요! 그냥 저들을 보내면 평생 한이 되고 말 거예요. 기사님! 제 명예를 되찾아 주세요!”
 
 아니 이게 무슨 황당한 경우인가? 사과 정도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리오도 사태가 점점 엉뚱하게 번지자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명예를 되찾아? 지금 결투라도 해서 내가 죽어야 끝난다는 거야! 리오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 경험이 많은 볼프강이 선수를 치고 나섰다.
 
 “아이쿠! 저희가 술에 취해가지고 귀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아름다운 레이디, 다시는 얼씬도 안 하겠으니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정말로 죄송합니다.”
 
 볼프강의 임기응변에 리오도 얼씨구나 장단을 맞췄다.
 
 “흥! 이제야 너희들의 죄를 알겠는가! 어서 썩 꺼져라! 한 번만 더 수작 부린다면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기사님!!! 저는 복수를 원한다구요!”
 
 세상에! 알고 보니 저 여자는 얼굴만 예쁘지 완전 표독스러운 승냥이 같은 년이었구나!
 
 이봐! 3 대 1이란 말이야, 너를 구해준 그놈이 정말로 우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착각하는 거야?
 
 물론 놈이 칼을 차고 있긴 하지만······ 칼?!
 
 좋아하는 여자의 간청에 리오가 고민하는 눈으로 우리와 그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니 지금 뭘 고민하는 건데? 이 귀족나부랭이 새끼야!
 
 정말로 동업자에게 칼을 뽑겠다는 거냐? 레미도 볼프강도 일순 긴장한 눈치.
 
 3 대 1이라지만 칼을 든 상대는, 게다가 폼이 아니라 정식으로 검술을 배운 상대에겐 동네 양아치건 뭐건 어림없었다. 더구나 우리 쪽은 무기도 하나 없다.
 
 이럴 때일수록 흥분해선 안 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저놈은 우리랑 한패다. 이 연극을 폭로할 위험이 있는데 우리에게 칼을 뽑아들 이유가 없다. 아무렴 당연하지.
 
 심장의 박동 소리가 귓속까지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기사가 장갑을 벗어 상대방 얼굴에 던지면 결투가 성립한다는데, 그럴 경우 한쪽이 죽는 순간까진 끝나지 않는다.
 
 난 지금 무기도 없고, 아참 난 귀족이 아니잖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공포심에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건가?
 
 “야, 튀자!”
 
 머뭇거리는 틈을 타 레미가 소리쳤다.
 
 생각해 보니 저 아가씨가 뭐래든 말든 우린 튀면 그만 아닌가. 왜 그렇게 간단한 생각을 못 했지? 볼프강과 나는 먼저 등을 돌려 도망가는 레미를 뒤따랐다.
 
 “봐요! 저것들 도망가잖아요! 기사님! 어서 쫓아가서 죽여 버려요!”
 
 등 뒤에서 마녀 같은 계집년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찔러왔다. 죽어 버리라고? 초면에 말이 심하구만!
 
 퍽―
 
 그때 뭔가 무거운 것이 내 왼 어깨를 강타했다. 난 신음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내 몸을 맞고 튕겨져나간 주먹만 한 돌덩이가 보였다.
 
 뭐야! 누구지? 돌의 방향을 추적하니 저만치서 아까 쓰러진 농부 한 놈이 나를 보며 통쾌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제길 아까 날아차기 할 때 사정을 봐주지 말것을!
 
 내가 쓰러지자 볼프강이 급히 일으켜 세웠다.
 
 “젠베르, 아파도 조금만 참고 얼른 도망가자! 일이 꼬이고 있다.”
 “기사님 어서요! 기회에요! 얼른 가서 내 명예를 더럽힌 놈에게 복수해 주세요!”
 
 저쪽에선 목욕탕집 딸이 리오를 일방적으로 떠밀고 있었다. 저 여잔 “악당을 물리치고 아름다운 레이디를 구하는 젊은 미남 기사의 이야기”책을 수십 번도 더 본 미친년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은 바에야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리오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자기도 모르게 칼자루를 붙잡고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완전 최악이다. 뭐 어쩌자는 거야! 진짜 해보자고?
 
 “이 불한당 같은 녀석들! 각오해라!”
 
 다친 왼쪽 어깨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지만 달려드는 리오가 더욱 빨랐다. 리오는 나를 보호하려고 막아선 볼프강에게 검을 휘둘렀다. 볼프강은 두 팔을 교차시켜서 검을 막았다. 그러나 팔이 베이지 않은 건 리오가 검집 째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녀석도 우릴 죽일 생각이 없는 건 확실했다.
 그럼 저 행동은 연기군. 내가 이렇게 안도하고 있었는데,
 
 “아니 이 새끼가 감히 우리 형님을!!!”
 
 나보다 먼저 앞서 달려 나가던 레미는, 멀리서 리오가 볼프강에게 검을 휘두르는 걸 보고 미친 듯 달려와 날아차기를 해버린 것이었다. 벼락같은 기습에 리오는 가슴팍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퍽······!
 
 다시 날아온 돌이 이번엔 레미의 뒷통수를 정통으로 강타했다. 레미가 비명을 내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손아귀 사이로 흠뻑 피가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농부 놈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야이 개새끼들아! 도망가는데 왜 돌을 던져! 레미 괜찮냐?”
 
 레미는 신음소릴 내면서 죽을 듯 고개를 처박고는 계속 뒤통수를 감싸 쥐고 있었다. 머리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완전히 찢어지지 않고는 저런 출혈이 나올 수 없다. 레미는 중상이었다. 볼프강이 그런 레미를 들쳐업으려고 무릎을 낮춘 채 내게 말했다.
 
 “안 되겠다. 젠베르, 내가 업고 뛸 테니까 너는 따로 도망쳐! 나중에 거기서 합류하자.”
 
 거기서라는 말은 우리 아지트를 말하는 것이다.
 
 일어선 농부들이 돌팔매질을 계속하는지 우리 주위로 주먹만 한 돌들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정확하게 날아오는 것은 없었다. 볼프강이 레미를 업는 걸 내가 도와주려고 할 때였다.
 
 “네까짓 평민 새끼가 감히 나를 차!”
 
 살기 어린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몸을 일으킨 리오가 장검을 뽑아들고 반쯤 들쳐 업혀진 레미에게 검을 찌르는 중이었다.
 
 “아!, 안 돼!!!”
 
 ***
 
 아직도 칼에 베인 옆구리가 시큰거린다.
 
 “자기 깼어?”
 
 악몽을 꾸고 일어난 나에게 같이 침대에 누워있던 유이가 말을 걸었다. 나는 지금 숨어있는 중이다. 유이는 예전에 우리 가게에서 몸 팔던 창녀였는데, 나이를 먹고 은퇴한 뒤 사창가에서 식모일을 하는 30대 중반의 노처녀였다.
 
 잠을 자면서 제법 뒤척였는지 옆구리의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와 붕대 바깥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시트도 자국이 남았다.
 
 그러나 육체의 쓰라림은 정신적인 아픔에 비할 바 아니다.
 
 그러니까 이틀 전 늦은 저녁, 사창가에서 제법 떨어진 2층집에 세 들어 사는 유이를 찾아 갔을 때 나는 이미 옆구리가 핏물로 흥건히 젖은 채였다.
 
 이마에선 송글송글 땀이 배어 나오고 입가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으니 그녀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지른 게 무리도 아니었다.
 
 “꺄악!”
 “······유, 유이, 내가 여기 있다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줘.”
 
 아마 그런 말을 한 뒤, 문 앞에서 기절하듯 무너졌던 것 같다.
 
 그것은 사고였다. 이번 일을 유치한 사랑 놀음에 협조하는 연극 정도로만 생각했던 우리는, 완전히 망쳐버린 비극에 희생양이 되었다.
 
 ***
 
 장검을 뽑고 달려드는 리오를 나는 제지할 수 없었다. 죽는 게 두려워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말았다. 시퍼렇게 번뜩이는 1미터 길이의 장검이 눈앞에서 쇄도하는데 이성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살기를 감지한 볼프강이 등에 업은 레미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날카롭게 날이 선 장검이 옆구리를 노출시킨 볼프강의 갈비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박혔다.
 
 뼈와 뼈 사이를 뚫고 들어간 장검은 거의 절반 가까이 몸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장면을 목도하는 순간 세상이 정지된 느낌이었다.
 
 엉겁결에 칼을 내지른 리오는 곧 경악에 찬 표정으로 입을 벌리며 칼자루를 놓았다. 심장까지 관통당한 듯 한순간 절명해 버린 볼프강은······ 아아 나의 친형 같았던 볼프강이 나를 보며 죽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웅크린 나를 보는 그의 눈은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왜 그를 막지 않았는지 원망하면서 그는 죽어 버렸다.
 
 레미가 괴성을 지르자 멈춰진 시간축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레미가 주춤주춤 물러서는 리오를 악귀처럼 노려보았다. 죽여 버릴 기세로.
 
 예전 집안 형편이 어려운 레미 어머님이 병환으로 쓰러졌을 때 볼프강이 모아두었던 돈을 말없이 내준 적이 있었다.
 
 나도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었지만 내가 모아둔 돈이 어디 있겠나? 한동안 레미 얼굴 보기가 뭐해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 볼프강을 레미는, 나 이상으로 생각한 것은 분명했다.
 
 레미가 기사 리오를 향해 말했다.
 
 “살려두지 않는다! 개자식!”
 
 리오도 실수였다.
 
 리오역시 볼프강을 죽일 생각까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있었다 해도 그건 화가 나서 레미를 향해 찌르던 검이었다.
 
 레미 입장에선 볼프강이 자신을 살리다가 칼에 맞은 꼴이 됐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어떻게라도 리오를 제지했다면 그런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가 겁을 먹고 웅크리는 바람에 볼프강이 죽은 것이다. 아아 볼프강, 그 괴물 같던 천하장사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리다니!
 
 그러나 상황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뒤쪽의 농부 두 명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구경꾼들은 우리가 악당이라고 사람들을 선동했다. 어찌 보면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나는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꿈을 꾸는 것처럼 지켜볼 뿐이었다. 레미는 리오를 향해 2~3번의 발차기를 성공시켰으나 곧이어 달려든 다른 주민들의 협공에 금방 수세에 몰렸다. 4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레미를 공격했다.
 
 레미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이제는 목 주변을 축축히 적시고 있었다. 흘린 피의 양이 너무 많았다.
 
 그때 리오가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뽑아드는 것이 보였다. 사태가 꼬이자 입막음을 위해 우릴 죽이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없던 레미의 등 뒤로 돌아가 리오는, 그의 등을 망설임 없이 쑤셨다.
 
 정당방위로 인한 살인은 무죄.
 
 게다가 그는 귀족이었다. 우리 모두를 여기서 죽이더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레미가 부들부들 몸을 떨다 땅바닥에 철퍽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으아아악 레미마저!!
 
 나는 완전히 이성을 놓았다. 무기가 없다. 저 개자식을 죽어야 하는데 당장 무기가 없다. 나는 볼프강의 몸에 깊이 박힌 검을 뽑으려고 했다. 사람들이 나를 붙잡기 위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제길! 검이 뽑히질 않는다. 근육이 수축하면서 검을 붙잡고 있다. 나는 검자루를 단단히 쥔 상태로 한쪽 발을 들어 볼프강의 어깨를 밟아 밀었다. 푸학― 하고 검이 뽑혀 나오면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뽑은 그대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휘둘렀다. 검신을 타고 핏물이 흩뿌려지자 사람들이 기겁하며 도망쳤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치안대에서 병사들이 달려올 것이다.
 
 돌에 맞은 왼쪽 어깨가 너무 아파 오른손으로 검을 들었는데 단검과는 달리 제대로 들고 있기 힘들었다.
 
 내 어설픈 동작을 보고 리오가 괴이한 자세로 단검을 잡고 접근해 왔다. 칼자루를 돌려 칼끝이 바닥을 향하는 역수 자세. 전형적인 군용검술이었다.
 
 저놈은 칼을 다룰 줄 안다. 나는 길이는 길지만 무거운 장검을 한 손만으로 들어야 한다. 제길 여기서 죽는건가?
 
 그렇게 형 대접을 받고 싶어 했지만 일부러 부르지 않았던, 언젠가는 꼭 형이라고 불러주려고 맘먹었던 볼프강.
 원수처럼 싸웠지만 누구보다 좋아했던 레미를 죽인 저 개 같은 새끼손에 나까지 죽는 걸까?
 
 왜 신은 이렇게 불공평하지?
 거지 같은 인생 거의 반 고아처럼 22년을 살아온 나에게 이제는 이렇게 억울한 죽음마저 당하라는 건가?
 
 “우아아아아아!!!”
 
 난 장검을 뒤로 젖히고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죽더라도 너에게 복수는 하고 가겠다. 최소한 자폭이다, 씨발놈아!
 
 미친 사람처럼 검을 내질렀으나 리오는 가벼운 동작으로 피해냈다. 동작이 불필요하게 컸던 모양이었다. 삽시간에 상체를 노출시킨 나에게 그가 단검을 휘둘렀다.
 
 나도 피한다고 피했는데 왼쪽 옆구리를 단번에 내주고 말았다. 급소는 겨우 피했지만 살갗을 후비는 단검의 예리함이 느껴졌다. 불에 덴 듯 고통이 확 밀려 올라왔지만, 난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각오로 녀석의 왼팔을 내리쳤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을 거다.
 
 그런데 힘이 부족했는지 놈의 팔은 절단되지 않았다. 중간에 뼈에 걸려 막힌 느낌이었다. 리오 녀석도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우린 서로 물러서서 아픔을 잊으려 애썼다. 아직 죽을 만큼은 아니다. 지금 무너지면 목을 내줘야 한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했다. 분명히 치안대가 올 것이고, 정황상 나는 현행범으로 사살당할 수도 있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더라도 하야트 씨가 우릴 변호할 리 만무하다. 의뢰인을 지키는 게 바로 청부업자의 임무니까.
 
 나는 어쩌면 감옥에 갈 것이다. 그리고 저 귀족 놈이 뒤에서 수를 쓴다면 감옥에서 평생 썩던지 거기서 소리 없이 뒈질 수도 있겠지.
 
 어쩌면 북극의 유배지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유배 가는 도중 습격당해 죽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시간을 끌면 난 죽는다. 분명히 죽는다. 오늘 밤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
 
 왼 어깨가 저릿저릿했지만 고통을 참고 검을 두 손으로 잡았다. 한 손으로 계속 휘두르는 건 무리였다.
 
 리오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왼손을 축 늘어뜨린 채 역수 자세를 곧추 잡았다. 뒤편으로 몰려든 구경꾼들은 침을 삼키고 우릴 보고 있었다.
 
 그 사이 베일을 둘러 쓴 그녀가 보인다. 나를 죽이라 했겠다? 만약에 내가 여기서 살아난다면 너에게 꼭 되돌려주지. 내가 아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내 시선이 배경으로 옮겨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리오가 달려들었다.
 
 “죽어!”
 
 사선으로 장검을 내리긋는데 리오가 단검을 세워 막았다. 채캉―!
 
 쇠와 쇠와 마주치며 스파크가 튀었다. 리오는 검과 검의 접점에서 갑자기 힘을 빼더니 장검의 검신을 타고 아래로 쓸어내렸다. 내 손목을 노리는 건가?
 
 나는 앞으로 힘껏 검을 집어던져 버렸다. 검을 놓을 줄 예상 못 했던지 검신을 타고 내려오던 그는 순간 균형을 잃고 기우뚱했다. 거의 동시에 상처 입힌 리오의 왼팔을 발로 걷어찼다. 죽을 듯이 아플 것이다.
 
 “우아악!”
 
 베인 살점을 파고드는 고통에 리오가 단검을 떨어뜨리고 상처를 감싸 쥐었다. 정신이 없는 놈이군. 맨손 싸움에서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정면으로 빠르게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퍽! 퍽! 오른쪽 왼쪽으로 녀석의 고개가 한 번씩 돌아갔다. 왼쪽 옆구리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팠지만 이를 꽉 깨물고 참아냈다. 볼프강과 레미의 복수를 끝내야 한다.
 
 발을 걸어 녀석을 넘어뜨린 후 배 위에 올라타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필사적인 파운딩이었다. 녀석의 오른손이 얼굴로 펀치를 막으려고 올라오자 이번에는 아까 칼에 베인 녀석의 상처 부위로 내 손가락을 독수리 발톱처럼 만들어서 후벼 팠다. 동시에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상처 부위를 손으로 휘저었다.
 
 자지러지는 비명이 쏟아진다. 녀석의 고통스런 표정이 보니 가슴 깊은 곳에서 짜릿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놈을 제압했다는 우월감이 나를 고무시켰다.
 
 그때 녀석의 오른손이 갑자기 땅바닥을 주섬주섬거렸다. 아까 떨어뜨린 단검을 집으려 하는 중이었다. 나는 배 위에 올라탄 상태에서 더 위로 올라가서 녀석의 양어깨를 무릎으로 짓눌렀다.
 
 “개 같은 새끼! 지옥에나 떨어져라!”
 
 그리곤 놈이 잡으려 했던 단검을 들고 공포에 젖은 녀석의 목구멍에 쑤셔 박아버렸다. 그 좆같은 느낌이라니!!!
 
 켁켁거리는 녀석의 입속에서 피가 벌컥벌컥 쏟아졌다. 칼이 빠지지 않아 90도로 비틀어서 뺀 뒤 한 번 더 목을 쑤셨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푹―!!
 
 “죽어 새끼야!!”
 
 파닥거리던 녀석의 두 팔이 부르르 떨리더니 땅바닥에 떨어졌다.
 
 마침내 리오가 죽었다.
 내가 사람을 죽인 것이다.
 
 갑자기 확 술에 깬 듯 정신이 되돌아왔다.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슬금슬금 달아나고 있었다.
 
 내가 뭘 한 거지? 내 무릎에 깔려 목에 칼을 박고 나자빠진 이 녀석은 근위대장의 아들이자 기사인 리오였다.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내가 누굴 죽인 거지?
 
 정신이 돌아오면서 아까 베였던 옆구리와 돌에 맞은 왼쪽 어깨가 미칠 것처럼 아파 왔다. 그러나 정신은 자다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완전히 차가워졌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분명히 누가 신고를 했을 것이다. 리오 녀석의 종자 놈이 근위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지도 모른다.
 
 여기 있으면, 난 분명 죽는다.
 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난 미친 듯이 오솔길 사이로 빠져나갔다. 멀리 횃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치안대 소속 병사들이 나를 추격하려는 중이이라. 어쩌다 이렇게 꼬여 버린 거지?
 
 이건 아주 단순한 각본이었다. 정해놓은 결말은 해피엔딩이 분명했다. 그런데 무려 3명이 죽어 나자빠진 살인극으로 돌변해 버렸다.
 
 레미는 혹시 살지 않았을까?
 칼에 찔렸다고 해도 사람이 한순간에 죽지는 않으니까. 아니. 볼프강은 확실하게 절명했을 것이다. 갈비뼈를 뚫고 들어간 칼이 심장에 박혔다.
 
 혹시 내가 죽여버린 건 아닐까? 내가 무리하게 검을 뽑는 바람에 그때까지 살아있던 볼프강이 죽은건 아닐까?
 
 생각해 보니 내가 검을 뽑을 때 약간 신음소리 비슷한 걸 들었던 것도 같다. 설마 내가 죽였나? 리오도 내가 죽였고? 설마 레미도 내가 죽였던가? 그런가? 내가 다 죽였나?
 
 “으아아악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이성이 휘발성 물질처럼 자꾸 날아간다.
 냉정을 되찾다가도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기름 삼아 분노와 슬픔, 두려움이 요동치면서 내 머릿속에 불을 질러댔다. 공포라는 방화범은 온통 내 머리를 하얗게 태워버렸다. 생각이 단순해지고 사고가 편협해 졌다. 도망쳐야 한다는 가느다란 이성의 끈이 나를 마을 어귀로 이끌었다.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피 묻은 나를 놀라서 쳐다봤다. 난 개의치 않고 홍등가로 달렸다. 그곳은 내 일터가 있는 곳이다. 뒷문을 통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들어가 볼프강의 방으로 들어갔다.
 
 볼프강의 서랍을 몽땅 뒤져 돈을 찾았다. 분명히 3번째 서랍 어딘가에 돈을 모아두었다. 예전에 놀러 왔을 때 우연히 본 기억이 났다.
 
 서랍을 열자 맨 위에 은화 3개가 보였다.
 
 하야트 씨에게 선수금으로 은화 3개를 받았을 때, 나는 볼프강에게 내 몫 10마르크를 먼저 달라고 했다. 그러나 볼프강은 내가 꽁돈이 생기면 곧 탕진해 버린다며 거절했다.
 
 대신 나중에 30마르크를 한 번에 준다 했다. 아무리 떼를 써도 안 주길래 “욕심쟁이!! 니가 다 해쳐먹겠다는 거냐!” 하고 욕을 퍼붓던 게 바로 몇 시간 전이다.
 
 이깟 돈 때문에 모두가 죽고 말았다.
 
 그 아래 나무상자를 여니 금화 5개, 은화 20개가 보였다. 무려 700마르크나 되는 거금이다. 대체 볼프강은 이 돈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던 걸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오면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몸에 오한이 돌며 식은땀이 났다. 열을 빼앗기고 있는 거다. 이러다가 정신을 잃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욱 빨리 움직였다. 금화와 은화를 서둘러 호주머니에 털어 넣고 장롱을 뒤져 검은 천으로 감싼 물건을 찾았다. 당장 나에겐 무기가 필요했다.
 
 볼프강의 방에서 나와 사람들 눈을 피해 유이의 집으로 갔다. 유이는 2년 전 은퇴했는데, 현역시절에 나를 무척 좋아했었다.
 
 사실 나는 그냥 즐기려고 몸을 섞은 건데, 그년은 내가 뭐가 그리 좋은지 나만 보면 얼굴을 배시시 웃으면 팔짱을 끼고 싶어 했다. 요컨대 내가 기둥서방인 셈이다.
 
 ***
 
 유이 집 앞에서 쓰러진 뒤로 정확히 이틀이 지났다. 유이는 내가 하루 종일 쓰러져 신음했다고 전해줬다. 의원에게 데려가지 못한 건, 내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해서였다고 한다.
 
 일하러 나가지 않았냐 하니 어젠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빠지고 하루 종일 나를 간병했단다. 갑자기 심장 한구석이 욱씬거린다. 이 늙다리 창녀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진심이었던 적 없었는데······ 어쩌면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던 것일까?
 
 그녀 말에 따르면 오늘은 좀 차도가 있어 보여 오전에 잠시 일을 다녀왔는데, 사창가에서 근위대 소속 병사들이 나를 찾더라는 거다. 아마 그 종자 놈이 하야트 씨와 거래를 리오의 아버지에게 불어 버린 게 분명했다.
 
 내가 죽인 리오의 아버지는 근위대장이다. 근위대장은 영주의 창과 방패라 불릴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 그만한 권력을 지녔으니 나를 찾으면 기필코 죽이려 들 것이다.
 
 혹여 내막을 알게 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아들이 자작극을 벌이다 죽어버렸다고 어떻게 세상에 알릴 텐가? 그것도 삼류 건달과 싸우다 죽었다고?
 
 이래저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볼프강의 돈을 훔쳐온 건 다른 영지로 도망치든지 최악의 경우 왕국을 탈출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귀족을 죽인 평민은 이유를 불문하고 목이 날아간다.
 
 “자기 사고 친 거야? 나한테 다 말해봐.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어, 오늘.”
 
 유이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침상에 누워있던 내게 물었다. 이런 황당한 사건을 구구절절 말하기엔 너무 기가 막혔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 설명하고 싶은 마음도 안 들었다. 내가 입을 열지 않자 유이가 다른 말을 꺼냈다.
 
 “오늘 보니 곳곳에 수배 전단이 붙었더라고. 현상금까지.”
 
 그건 좀 놀라운 일이었다.
 
 “뭐라고? 죄목은 뭐라는데?”
 “몰라 그게······ 자세히는 안 적혀 있었는데 현상금이 300마르크나 걸렸어.”
 
 근위대장의 지시일까? 하긴 사창가 쪽으로 찾아온 사람은 치안대 조사관이 아니라 근위대 소속 병사들이라 했다. 어쩌면 추문을 감추기 위해 나를 먼저 찾고 있는 줄도 모르지.
 
 난 나를 보살펴준 유이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주머니에서 은화 5개를 꺼내 주었다.
 
 “이건 신고하지 않은 대가로 주는 거야.”
 “세상에! 이렇게 많이?”
 “그리고 위에 걸칠 옷 좀 구해줬으면 해. 참 내가 가져온 물건은?”
 “그 까만 천으로 말려 있던 거? 저기 세워뒀는데. 혹시 저거 무기야?”
 “아······ 아니, 뭐 자세히 알 필욘 없고. 그나저나 배고픈데 먹을 것 좀 없어? 이틀을 내리 굶었더니 뱃가죽이 붙어 버릴 것 같은데······.”
 
 유이는 손에 받쳐 든 은화를 잽싸게 화장대 서랍에 챙겨 넣고는 씨익 웃었다.
 
 “깨어나면 주려고 수프 끓여놨지.”
 
 수프를 허겁지겁 해치우고 붕대를 풀어보니 갈비뼈 근방으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틈이 벌어져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조금씩 피가 배어나왔다. 아파 죽겠군. 유이는 붕대를 새로 갈아주며 자꾸 귀찮게 했다.
 
 “······젠베르, 혹시 돈이라도 훔친 거야? 맞아? 사장님이 볼프강도 같이 사라졌다고 난리던데······ 무슨 일인지 말해주면 안 돼?”
 
 난 자꾸 쫑알대는 유이가 귀찮아져서 바지춤에서 금화랑 은화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래. 나 도둑질 했어. 이것 봐 너한테 50마르크 주고도 이렇게 나 많잖아.”
 
 유이는 처음 보는 거금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겠지. 나도 처음 만져보는 돈인데 한번 몸 팔 때마다 겨우 5마르크 받는―그것도 포주랑 7 대 3으로 나누는― 전직 창녀가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거짓말을 했던 것은 차마 사람을 죽였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두들겨 팬 적은 수도 없이 많았고, 죽일 뻔한 적도 있었지만 진짜로 죽여 버린 건 난생처음이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내가 살인자라니.
 
 “나 아프니까 계속 누워 있어야겠다. 아까 말한 옷 좀 구해다 줘.”
 
 아마 이렇게 2~3일 더 숨어 있다 야반도주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가만히 죽치곤 있다가는 언젠가 발각 되어 사형당하고 말 것이다. 또 내가 여기서 잡힌다면 나를 숨겨준 유이까지 공범으로 몰릴지 몰랐다.
 
 도와준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순 없으니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해야 했고, 필요한 물품들을 유이를 통해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0분 뒤 유이가 허름해 보이는 바지와 상의를 구해왔다. 그런데 표정이 약간 변한 듯 보이기도 하고 내 시선을 피하는 거 같았다. 기분 탓일까?
 
 “이거 시장가서 사온 거 맞아? 왜 이렇게 옷이 헌 옷 같아?”
 “아······ 응 사실 옆집 채소가게 주인 있잖아. 보르미어 씨라고······그 아저씨한테 대충 둘러대고 빌렸거든.”
 
 돈을 줬냐고 하니 평소에 친분(?)으로 빌렸다고 했다. 역시 한번 창녀는 은퇴해도 창녀인 걸까?
 
 안색이 변했던 건 옷을 빌리기 위해서 그 채소가게 주인한테 몸이라도 대줬던 것일 게다. 땀을 흘린 것을 보니 그사이에 일을 치른 게 확실했다.
 
 “근데 왜 그렇게 땀을 흘리는데?”
 
 유이는 내 추궁에 당황하는 듯 화들짝 놀라더니 평소 잘하는 배시시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곤란해지면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자기야, 일단 그 바지 피 묻어서 더러우니 벗어봐.”
 
 끝내 대답을 피한 유이는, 벗긴 내 바지를 옷장 옆에 걸었다. 새 바지를 갈아입는데 갑자기 그녀와 떡치던 생각이 났다.
 
 옆구리가 찢어진 와중에도 그 생각을 떠올리는 걸 보면 나도 참 본능에 충실한 편인 것 같다. 바지를 입혀주던 유이도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피식 웃었다.
 
 “어머 자기 흥분했어? 속옷이 씰룩씰룩하네?”
 
 유이는 바지를 반쯤 입히다 말고 나를 침상 위로 걸터앉게 했다.
 
 “뭐하려는 거야, 이 아줌마.”
 
 유이가 색기 넘치는 얼굴로 윙크를 했다. 유이는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봐줄 만은 했다. 특히 가슴이 큰 것은 꽤나 내 스타일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은퇴하긴 했지만, 그래도 서른 중반이면 일반인으론 한창때나 다름없었다.
 
 “가만있어봐. 내가 입으로 해줄게.”
 “나 지금 환자야. 왜 이래.”
 “흥, 뭐 여기만 괜찮으면 되지?”
 
 ***
 
 유이의 현란한 입놀림에 기분 좋게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그녀가 보이질 않았다. 주변이 어둑해진 걸 보면 늦은 시간 같은데 대체 어딜 간 걸까?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올 기미는 없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 나쁜 감정이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상의를 걸쳤다. 옆구리가 시큰거렸지만 그것을 느낄 겨를도 없이 옷장 옆에 걸려있던 바지 주머니를 황급히 뒤졌다.
 
 없다.
 
 돈이 사라졌다. 600마르크가 넘는 금화와 은화가 몽땅 사라졌다.
 
 이런 젠장!!! 혹시나 하고 이리저리 방구석을 뒤져 보았다. 내가 준 은화를 넣었던 화장대 서랍도 뒤졌지만 그 돈 역시 보이지 않았다.
 
 분명했다. 유이가 내 돈을 가지고 도망친 것이다. 그럼 아까 오럴을 해준 것은 일부러 나를 재우기 위해서였던 거였나? 우발적이 아니라 모든 게 계획적이었단 말이야?
 
 머리통을 해머로 내리치는 충격과 함께 동시에 모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까 옷을 빌려 왔을 때 심상치 않은 표정, 긴장된 얼굴. 그녀는 이미 그때부터 돈을 훔쳐갈 생각을 했던 게 틀림없었다. 씨발!! 나를 속이다니!!! 네까짓 창녀 년이!! 돈에 눈이 뒤집혔다 이거지?
 
 나는 옷장 옆에 세워둔 검은 천을 풀었다. 수수한 검집의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볼프강의 유품이자, 나의 유일한 무기였다.
 
 유이를 당장 찾아 나서려고 했지만 괜히 집 밖으로 벗어났다가 현상금 전단을 본 주민들이 신고라도 하면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춤했다.
 
 그러다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현상금?!
 
 현상금 300마르크! 유이의 부재와 현상금을 연결시키는 순간 소름 끼치는 각본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일전의 실패한 연극이 1장이라면 지금은 대단원이었다.
 
 유이는 도망을 친 게 아니라 현상금 300마르크를 노리고 근위대에 나를 신고해 버린 것이다. 내 돈 700마르크에 현상금까지 받으려고!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것 아닌가? 모두 합쳐 1,000마르크라면, 보통 사람들은 2~3년을 꼬박 일해도 모으지 못하는 큰돈이다.
 
 제길! 유이는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평소에 분명 나를 기둥서방처럼 대했잖아? 방금 전에도 그렇게 사랑스럽게 내 것을 핥아 놓고······.
 
 단지 내 젊음을 원했던 건가? 순수하게 나와 몸 섞는 걸 좋아했던 건 아닐까? 나를 돌봐준 것은 예전의 좋았던 추억 때문이었나? 그러다 내 돈을 보고 훔쳐낼 생각을 한 거지. 현상금까지 붙은 내가 나중에 절대 보복할 수 없을 거란 확신을 갖고, 신고해버리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 틀림없다. 내 추측이 맞다.
 
 나는 대체 왜 그녀에게 돈을 보여 준거지? 혹시 나를 사랑했을 것이란 착각 때문에? 그녀가 끓여준 수프에 감동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다니!
 
 내가 왜 여길 찾아온 거야?
 목숨 걸고 도망쳐서, 제 발로 찾아온 곳이 지옥 입구였구나!
 
 난 장검을 다시 검은 천으로 싸매고 천의 남은 부분을 이용해 등 뒤로 묶었다.
 물론 오해일수도 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더러운 예감은 최악의 경우를 예상케 했다.
 
 아니. 이건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 가장 확률 높은 상황이다.
 
 30년을 창녀로 살아왔으면서도 제대로 목돈 한번 만져보지 못한 인생 막장의 은퇴한 창녀가, 1,000마르크와 양심을 놓고 저울질을 한다면 불 보듯 뻔한 거 아닌가?
 
 나 지금 뒤통수 제대로 맞았다고!
 
 창가를 내다보니 밤거리에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유이의 집은 2층이었기 때문에 좀 더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계속 안절부절 주시하고 있으니 멀리서 횃불 몇 개가 보였다. 근위대 소속 병사들 10여 명이 충격적으로 나의 시선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지금 꼼짝없이 갇혔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거지 같은 내 성격을 이해해줬던 볼프강, 내가 가장 동경하던 친구 레미를 잃은 게 3일 전이다. 그들을 살릴 수 있었음에도 나는 비겁하게 그들이 죽는 걸 지켜봤다.
 
 끝내 복수는 했지만 덕분에 나는 귀족의 자식을 죽인 살인자가 되었다. 그것도 현직 근위대장의 아들을. 그리고 방금 전까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여인이 배신했다.
 
 내가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에게 큰돈을 준 것은 처음이었다. 그 50마르크는 내 진심의 표시였단 말이다!
 
 어떻게 그런 나를 배신할 수 있지? 방금 전만 해도 나를 사랑한다며 내 상징을 핥았던 그년이 나를 이렇게 처절하게 배신해도 되는 건가?
 
 난 등 뒤에 맨 칼을 뽑아들었다.
 
 장검은 수수하게 생겼는데 양날이 아니라 한쪽에만 날이 선 직도였다. 매우 날카로워 가까이 다가가면 살이 베일 것 같은 예리함이 느껴졌다.
 
 좋다. 이 검으로 너를 죽여 버리겠다! 늙은 암캐 년!
 
 조금 있으면 아까 순찰 돌던 병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죽겠지만, 결코 혼자 죽진 않을 테다.
 
 최소한 그년이라도 죽여야겠다.
 
 그때 1층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였다. 난 문 옆에 바짝 붙어서 2층 방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다가 문 앞에서 멈춰 선다.
 
 “응? 깨어났나?”
 
 분명 유이의 목소리다.
 
 겁도 없는 년! 어디서 나를 유인하려고? 본때를 보여주지.
 
 난 문이 열리자마자 장검을 세워 어리둥절 서 있는 유이의 심장을 향해 검을 박았다. 어찌나 날카롭던지 처음 리오 목을 찌를 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박혀 들어갔다.
 
 “뒈져라, 개 같은 년!”
 
 난 그녀에게 저주의 욕을 내뱉으며 검을 더욱 깊이 쑤셔 넣었다가 뺐다. 유이는 경악에 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뻥긋거렸지만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유이가 허물어지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투툭―
 
 그때 유이의 손에 들린 바구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바구니 속에 든 사과가 데굴데굴 침대 밑으로 굴러들어 간다. 뭐지? 반사적으로 침대 밑으로 굴러가는 사과를 향해 시선을 따라 옮기니 사과가 멈춰선 곳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뭔가가 보였다.
 
 그것은 내 금화였다.
 
 나는 이상한 느낌에 다시 죽은 유이를 쳐다보았다.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천천히 옷을 적시고 있었다. 곧이어 바닥까지 커다랗게 핏자국이 번지기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는 건 경악에 가득 찬, 마저 감지 못한 유이의 두 눈이었다. 유이는 마치 내가 자기를 죽일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무방비로 나에게 심장을 내주었다. 옆구리에 사과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말이다.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가 날 끌어내기 위해 유인하는 거라고 보기엔 너무 상황이 이상했다. 그녀가 정말로 신고를 한 것이라면 지금쯤 근위병들이 들이닥쳐야 되는 거 아닌가?
 
 나는 황급히 창밖을 쳐다보았다. 아까 보았던 근위병들의 횃불은 이제 반대편으로 향해 있었다.
 
 제기랄! 그들은 단순히 순찰을 돈 것이었다.
 
 으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터뜨릴 것 같아 칼을 집어 던지고 내 입을 틀어막았다. 곧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멈출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또 사람을 죽였다. 오해 때문에 그녀를 죽였다. 나를 위해 과일을 사러 다녀온 그녀를 단칼에 죽였다.
 
 자기가 없는 틈에 도둑이 들까 봐 돈을 침대 밑에 고이 감춰둔 그녀의 심장에, 인정사정없이 칼을 찔러 넣은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내가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상처로 벌어진 옆구리가 수백 개의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쑤시기 시작했다. 머리는 불처럼 뜨거워졌다. 이마에서 떨어진 땀이 코끝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톡― 하고 떨어졌을 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난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에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실수로 그녀를 죽였지만 이런다고 그녀가 살아 돌아오진 않는다.
 
 나는 방문 앞에서 쓰러진 유이의 두 발을 잡고 질질 끌며 방안으로 옮겼다. 거대한 밀대로 닦아낸 것처럼, 핏자국이 그녀의 몸을 따라 적색의 궤적을 그렸다.
 
 나는 그녀를 방 가운데까지 끌어다 놓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곤 헝겊에 물을 묻혀 핏자국을 닦았다. 나무로 이루어진 바닥은 이미 핏물이 배어서 피를 한가득 머금고 뱉어내질 않았다.
 
 보이는 부분만 대충 닦은 다음 다시 한 번 유이의 시체로 다가가 경동맥을 짚었다. 혹시 아직 가망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살려내고 싶었다. 그러나 뛰질 않는다. 시체에 얼굴을 가져가 동공을 보니 이미 동공에 내 모습이 비치질 않았다.
 
 확실하게 뒈져버렸다. 즉사다.
 
 시체와 함께 있는 기분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무서워서 이불로 가리자 피가 배어 나온 자리로 이불이 붉다 못해 거무튀튀한 불규칙한 원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저 붉은 피가 계속 이불을 적셔, 언젠가 이불 전체를 물들여 버릴 것만 같았다.
 
 이미 주위는 어두웠다. 그러나 램프에 불을 붙일 생각을 못 한 채, 나는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불을 켜면 그녀의 시체가 일어설 것처럼 두려워하면서.
 
 그래. 내가 실수로 그녀를 죽이긴 했다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나를 오해할 수밖에 없도록 행동했으니까.
 
 왜 남의 돈을 멋대로 침대 밑에 숨겨 가지고 그런 오해를 사는 거야?
 
 이런 미친놈! 레미와 볼프강의 죽음엔 간접적인 책임만 있다고 치더라도 이번 살인은 전적으로 너의 잘못 아닌가? 뭐? 오해를 사?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자수해라. 지금이라도 죗값을 받는 게 양심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야.
 
 미친 소리 마! 개처럼 바둥바둥 살아온 인생인데,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아무것도 못 해보고 감옥에서 썩어 뒈지란 말이냐! 그년은 어차피 잘 죽었어. 밑이 헐어서 창녀 짓도 못 해먹을 년이 결혼을 하겠어, 애를 낳겠어? 거지같이 살다가 결국엔 외롭고 쓸쓸하게 늙어 죽을 년이야.
 
 너는 그냥 그녀의 앞길을 당겨 준 것뿐이야. 혹시 알아? 정말로 베니스 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라는 곳이 있어서 거기 가서 떵떵거리며 잘 살지?
 
 뭐? 난 네가 그렇게 양심이 없는 줄 몰랐다. 이 거지 같은 놈. 단 한 번이라도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살아온 적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생아. 마지막까지 너를 보살펴 주고, 너를 보호해주고, 수프까지 끓여주고, 너 먹으라고 사과를 사온 여인을 일언반구도 없이 죽여 버린 개 같은 새끼.
 
 너 같은 놈은 길가다가 칼을 맞아도 수십 번 맞을 것이고, 벼락을 맞아서 뒈져 버려야 해. 네 심장이 뛴다는 게 믿겨지질 않는다. 네가 사람이냐?
 
 “아아아아악! 나보고 대체 어쩌라는 거야!!”
 
 나는 머리카락을 뽑듯이 움켜쥐었다. 양 팔꿈치를 무릎에 올린 채 그렇게 2시간여를 내 안의 나와 대립했다.
 
 자수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
 
 도망쳐. 대륙은 넓어. 살 곳도 많지. 너라면 어디 가더라도 입에 풀칠할 수 있을 거야.
 
 빨리 자수해. 혹시 알아? 리오를 죽인 일은 정당방위로 인정돼 형을 적게 받을지도? 몇 년 만 빵에 살다가 나오면 되는 거야. 아직 판결을 받은 것도 아니잖아? 왜 지레 겁먹어?
 
 미친놈. 그 근위대장이 퍽이나 널 살려줄까? 넌 잡히면 즉시 죽은 목숨이야. 재판? 기대도 하지 않는 게 좋을걸? 정당방위? 그게 통해? 귀족을 죽인 정당방위? 개도 웃을 소리!
 
 젠베르. 넌 평소 감당 못 할 죄를 지은 사람만이 고통받는다고 했지? 지금 네가 그래. 넌 사람 팬 것까진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람을 죽인 것은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거야. 어디로 도망가더라도 넌 평생을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살 거야.
 
 생각해봐. 넌 착한 아이였어. 불우한 가정환경이 널 삐뚤어지게 했지만, 기억나지 않니? 어렸을 때 넌 상처 입은 개를 보고 마음 아파서 울어 버린 적도 있었잖아. 오! 가엾은 젠베르! 넌 정말 선량한 아이였는데 어쩌다가 이런 큰 죄를 짓게 되었니. 불량하긴 했지만 최소한 악인은 아니었는데!
 
 미친 새끼! 젠베르!!! 정신 차려! 네가 누구야. 우리 영지 최고의 터프가이 아냐? 경험이 없을 뿐이지, 넌 10명을 죽여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강심장이야. 리오 녀석 죽일 때 느꼈지? 그 짜릿한 쾌감! 목덜미를 쑤시고, 후벼 돌리고 다시 박아 넣을 때 너도 느꼈잖아. 바로 그거야. 그 느낌! 너는 타고난 전사야!
 
 어서 이 빌어먹은 시골 영지를 벗어나. 네가 있을 곳은 이런 곳이 아니야. 네가 귀족가에 태어났다면 무명(武名)을 날리는 기사가 되었을 걸? 아니지, 넌 지금이라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용병이 될 수도 있지!
 
 넌 대단해! 너의 인생을 빵에서 썩히지 마! 너의 타고난 재능을 살려봐! 다 죽여 버리는 거야!
 
 “후읍― 후읍―”
 
 난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복잡한 마음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이제는 이불에 덮인 시체 쪽으로 시선을 주는 것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수없이 계속 생각하고 번뇌를 거듭했다.
 
 그러다 마음을 굳혔다.
 
 “······그래. 이렇게 내 인생을 마감할 수 없다.”
 
 나는 선언하듯 내뱉고 침대 밑에서 돈을 꺼냈다. 금화 5개 은화 15개. 정확히 650 마르크다. 그리고 죽은 유이에게 다가갔다. 다시 보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치마 품을 뒤져 돈을 찾았다. 은화 4개와 동화가 수십 개 나왔다. 내가 준 돈으로 사과를 사고 남은 돈이다. 다시 한 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왔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절대 그녀를 죽이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미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돈을 모두 챙긴 다음 다시 검을 집어 들었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무기가 있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아까처럼 검을 등 뒤에 싸매고 떠날 채비를 끝낸 나는,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거리는 조용했다. 드문드문 술집으로 향하는 사람과 횃불을 들고 순찰하는 치안대 병사들만 눈에 띄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 치안대 병사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을 붙잡고 심문하고 있었다. 제길, 이래선 밖에 나가도 바로 검문에 걸릴 판이다.
 
 나는 계획을 세웠다. 유이의 옷장을 뒤져서 모든 옷을 꺼내 침상 위에 어지럽게 흩트려놓았다. 나무로 만든 가구나, 의자들도 모두 침상위에 펼쳤다. 그리곤 램프를 깨뜨려 그 안에 든 기름을 골고루 흩뿌렸다.
 
 성냥을 조심스럽게 켜고 침상 위로 던지자 확 하고 불길이 솟았다. 이제 몇 분 뒤엔 집안이 불길에 휩싸일 것이다. 바닥에 있던 유이의 시체 역시 불에 타서 재가 되겠지. 난 방문을 나서기 전에 유이의 시체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어두웠던 방안은 점점 커져가는 불길에 기괴한 그림자를 출렁이며 밝아졌다. 나는 2층 방문을 닫고 나와 1층 계단에 걸터앉아 조용히 시간을 기다렸다.
 
 10여분쯤 지나자 닫힌 문밖으로 열기가 슬슬 느껴졌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길거리로 뛰쳐나가면서 소릴 질렀다.
 
 “불이야! 불! 도와주세요! 집에 불이 붙었어요! 불!”
 
 나는 유이네 집 근처를 한 바퀴 돌면서 불이 났다고 외쳤다. 잠을 자던 혹은 막 잠자리에 들던 마을 사람들이 황급히 집안에서 뛰쳐나왔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많아졌다. 2층에 있는 유이네 집은 화염에 휩싸여 창문 바깥으로 검은 연기를 뿜어댔다. 사람들 수십 명이 모여들고, 치안대 병사들도 뛰어왔다.
 
 장비도 제대로 못 갖춘 소방대를 따라, 모여 있던 주민들이 곧 일사불란하게 줄을 지어 진화를 시도했다. 나는 슬쩍 눈치를 살피다가 잽싸게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10분만 달려가면 영주의 사냥 숲이 나올 것이다.
 
 거기까지만 도망치면 일단 몸을 피할 수 있다. 어느새 2층 전체까지 불이 옮겨붙은 유이네 집을 뒤로하고 숲을 향해 달려갔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숲 근처에 이르렀다.
 
 영주의 숲은 사냥기간이 지나면 마을 사람들에게 임산물을 채취할 수 있도록 개방한다. 그런데 입구에 경비병이 서있는걸 보니 내가 그쪽으로 도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그러나 경계 중인 병사들은 전혀 긴장을 하지 않는 눈치였다. 두 병사는 마을 중앙 쪽을 바라보면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불타고 있는 건물을 보며 저곳이 어디쯤인지 추측하는 중인 듯 보였다. 나는 두 병사가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몰래 땅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갔다. 키가 큰 잡풀이 많아서 쉽게 나를 발각하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천천히 몸을 움직여 끝내 숲 속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일단 숲에 들어가고 나서는 나무를 엄폐물 삼아 더욱 빨리 몸을 숨길 수 있었다.
 
 30분쯤 뒤에는 광활한 영주 숲 속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됐다. 성공이다!”
 
 내 계략이 성공한데 쾌재를 부르며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멍청한 것들! 너희들은 날 결코 잡을 수 없어. 그렇게 마음 놓고 숲길을 걸어가는데, 날카로운 금속이 내 목에 다가오면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정지.”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으로 멈춰 섰다.
 
 “네놈이 등에 칼을 뽑는 기미가 보이거나, 도망치려 한다면 즉시 목을 날리겠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차분히 말했다. 어조의 변화가 너무 없어서 일절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다. 목 뒤에 서린 스산한 기운에 놀라 쭈뼛거리자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알아들었으면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무릎 꿇어.”
 
 난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었다. 등 뒤를 완벽히 잡힌 상황이라 어설프게 반항했다간 진짜로 죽을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사내는 내 목에 칼끝을 들이민 채로 반원을 그리며 서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 들어.”
 
 일단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깔끔하게 생긴 20대 중반 남자였다. 긴 흑발에 수염 하나 없이 하얀 피부는 얼굴에 분칠한 여자마냥 깨끗해서 무척 이질감이 들었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예, 아니요 라고만 대답한다. 네놈 이름이 젠베르인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나는 놀래서 거짓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보다 빨리 사내가 덧붙였다.
 
 “이미 알고 묻는 것이니 만약 거짓말한다면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주지.”
 
 나는 서슬 퍼런 그의 단호함에 못 이겨 결국 “예” 하고 대답했다. 녀석은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약간 비웃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뭐야. 싱거운 녀석이군, 수배 전단에 있던 그림과 실물이 달라 긴가민가했더니······ 네놈이 만약 아니라고 했으면 그냥 보내줬을 것이다.”
 
 뭐야!!! 제길! 속은 건가? 수배 전단이라고? 이 녀석 정체가 뭐지?
 
 “젠베르. 네놈 목에는 300마르크가 걸려있다. 난 현상금이 걸린 수배범을 찾아다니는 현상금 사냥꾼이지. 이곳을 경유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던 차에 네놈 수배 전단을 보게 된 게 행운이었군.”
 
 젠장! 이렇게 재수 없을 수가! 난 너무 억울하고 어이가 없어서 녀석을 향해 말했다.
 
 “빌어먹을! 지지리 복도 없군. 겨우 도망쳤다고 생각했더니.”
 
 내 신세 한탄에 녀석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흉내 내기도 어려운 냉정한 어투로 다시 입을 여는 것이었다.
 
 “너, 좀 멍청하군?”
 
 내가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녀석은 역시 뭐라고 항변할 시간도 없이 계속 말을 덧붙였다.
 
 “설마 그럼 내가 금화라도 발견하듯 운이 좋아 도망가는 너를 붙잡은 거 같나? 이 시간, 이 숲 속에서?”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영주의 사냥 숲은 영지 북쪽에 있고, 영지를 경유해 남쪽으로 간다면 여길 지나치는 게 맞지만, 나무에 수배 전단을 붙여 놓지 않는 이상 오는 길에 내 수배 전단을 봤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설마 내 수배 전단이 벌써 다른 지방까지 퍼진 거냐?”
 
 그러자 사내는 더욱 어이없다는 듯 조소했다. 왠지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젠베르, 네놈은 스스로를 굉장히 대단한 놈으로 착각하는 모양이군. 그럴 리 없잖아? 이곳 고모라 왕국에서 전국 단위로 수배가 붙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떠드는 거냐? 고작 300마르크짜리 주제에······.”
 
 “그럼 어떻게 나를 여기서 붙잡은 거지?”
 “그렇게 상상력이 빈곤하니까 잡히는 거야 멍청한 놈. 저기 마을에서 일어나는 불, 네 놈이 지른 거지?”
 “어, 어떻게?”
 
 녀석의 자신의 추리가 맞은 게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왠지 뿌듯해 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역시 범죄자들은 다들 패턴이 뻔하다니까······ 어제 오후에 이곳에 도착해 짐을 풀고 잠시 검을 손질하러 대장간에 들르는 길에 네놈의 수배 전단을 봤지. 죄목은 안 나와 있고 300마르크가 걸려있더군. 언제 붙었냐니까 어제 아침에 막 붙었다는 거야. 그래서 생각했지. 아직은 도망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겠구나 하고 말이야. 사실 이미 도망가 버렸을 수도 있겠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가능성이지.”
 
 설명을 하는 녀석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린 듯 살짝 말이 빨라졌다.
 
 “네놈이 마을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분명 본거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일 테지. 보통 범죄자들이란 겁을 먹으면 심리적으로 익숙한 곳을 향해 움직이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네놈에 대해 조사해 보니 이곳 홍등가에서 기도로 일하는 놈이더군. 그 근방에 숨어 있겠구나 생각하고 영지를 탈출할 시기를 기다렸지.”
 
 나는 귀신같은 그의 추리에 너무 놀라서 연거푸 물었다.
 
 “그렇지만 내가 이 숲으로 탈출할 거란 걸 어떻게 알았지?”
 “그거야 뻔한 거 아닌가? 이 근처에서 다른 방향으로는 도망가 봐야 치안대에 붙잡힐 테니, 인적이 없는 북쪽의 숲으로 도망칠 수밖에······ 몸을 숨기기도 좋고 계속 올라간다면 다른 영지로 숨어들기도 편하기도 하고.”
 “······.”
 “뭐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밤까지 기다리다가 나타나지 않으면 가던 길 그냥 가려던 차였어. 그건 이미 도망쳤거나 내가 잘못 짚었을 가능성이 높은 거겠지······ 하지만 마을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걸 보고 확신했지. 오늘 이쪽으로 오겠구나 하고 말이야.”
 “제길!”
 
 녀석은 내 반응이 재밌는지 재수 없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다시 변화가 없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300마르크면 여행 경비는 충분히 뽑은 셈이군. 안 그래도 칼끝이 무뎌지는 바람에 새로 가느라 돈도 많이 들었는데 말이야.”
 
 칼? 난 갑자기 볼프강의 칼이 생각났다.
 
 “카, 칼이라면 나도 있다. 내 것을 줄 테니 날 풀어줘. 잘은 모르지만 좋아 보이는 칼이야.”
 
 그런데 내 제안에 사내는 더욱 실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하하하. 너 정말로 생각이라곤 있는 거냐? 어떤 칼잡이가 대뜸 남의 칼을 쓰겠나? 나 같은 현상범 사냥꾼처럼 칼 휘두를 일이 많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리 없잖아. 애송이, 칼이라는 건 자기 손에 익히는 데만 수개월은 걸린다. 네놈이 혹시라도 내 것보다 좋을 칼을 쥐고 있다고 해도 나에겐 당장 아무 쓸모없다는 거지. 자, 실컷 떠들었으니 이제 일어섯. 나도 얼른 돈이나 받고 여길 떠야겠다. 갈 길이 바빠서 말이지.”
 
 제길. 여기서 붙잡힐 순 없다. 리오 놈에 이어서 유이까지도 살해한 나였다. 두 명이나 죽인 사람이 어떻게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붙잡히면 그 자리에서 처형당할 것이다. 망나니에게 목이 잘리던가, 어쩌면 중범죄에 대한 본보기로 사지를 찢어 죽일지도 모른다.
 
 난 죽고 싶지 않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내가 계속 고심하면서 제자리에 버티자 녀석이 위협하듯 칼로 내 목을 쿡쿡 찌르며 재촉했다.
 
 이대로는 답이 없다. 승부를 걸어야 한다.
 
 “······잠깐! 제안이 있다.”
 “······?”
 “나에겐 돈이 있다.”
 “그래? 그게 어쨌다는 거냐? 너를 치안대에 데려가면 나도 돈이 생긴다.”
 “아니. 그것보다 더 많은 돈을 내가 너에게 줄 수 있어.”
 
 이것은 모험이다. 속아 넘기느냐 마느냐의 싸움이다. 놈은 잠시 말이 없더니 예의 그 감정 없는 어투로 말했다.
 
 “넌 정말 멍청해서 마음 아플 정도군. 지금 당장 그 돈을 나에게 내놔. 그럼 되겠네. 난 너에게서 돈을 빼앗고, 또 현상금도 챙기는 거지. 바보 녀석”
 
 여기까진 내가 예상했던 부분이었기에 난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건 안 되지. 왜냐하면 내가 지금 현상금이 걸린 이유는 사실 돈을 털었기 때문이거든. 나를 잡으려는 이유 역시 내가 가진 돈을 회수하려는 거지. 현상금에 죄목이 안 적힌 이유가 그것이거든.”
 
 녀석은 무표정하게 가만히 서 있었다. 지금이 녀석에게 승부를 걸 기회다.
 
 “······내가 너에게 현상금보다 많은 400마르크를 주겠다.”
 
 400마르크라는 말에 녀석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현상금 사냥꾼답게 그는 계산에 빨라 보였다. 어차피 치안대도 아닌 이상에야 정의의 실현이고 뭐고 개나 줘버려 하는 존재가 바로 현상금 사냥꾼 아닌가?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유용한 돈이지 쓸데없는 정의감이 아니다. 나는 그가 흔들리는 순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생각해봐. 어차피 네가 날 끌고 간다고 해도 받을 수 있는 돈은 딱 300마르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대신 나를 풀어 준다면 100마르크를 더 벌 수 있는 거지.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것 같은데?”
 “······.”
 
 녀석은 속으로 계속 저울질을 하는 듯 보였다. 나는 좀 더 몰아 붙였다. 어차피 400마르크는 미끼다. 걸리면 좋고, 아니면 더 지를 생각이었다.
 
 “······500마르크 주겠다. 어때?”
 
 그제야 녀석이 검 끝을 살짝 거두었다. 그러더니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상금의 두 배 600마르크.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그때를 전례삼아 두 배로 처리하겠다. 만약 그 정도 돈도 못 치르겠다면 나도 더 이상 봐줄 수 없어.”
 
 좋았어! 협상 성공이다. 나는 깊게 숨을 쉬고 배에 힘을 잔뜩 주었다. 이제 배짱을 부려야할 단계다.
 
 “좋아. 그렇다면 600을 주지. 단 조건이 있어.”
 
 ‘조건’ 이라는 단어에 녀석의 미간이 꿈틀했다. 놈의 신경을 거스른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면서 말했다.
 
 “네 녀석 미쳐버린 거냐? 뭐? 조건? 네놈이 지금 조건을 내걸만한 처지라고 생각하는 건가?”
 
 격렬한 반응에 쫄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나는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태연한 척 말을 했다. 내 연기에 나도 놀라울 정도였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알 수 없는 힘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그냥 나를 근위대로 데려가라. 나를 데려가서 현상금 300마르크 받고 가던 길을 가. 그럼 되겠네.”
 
 이건 도박이었다. 잡혀가면 나는 죽는다. 나는 지금 목숨을 걸고 도박을 벌이는 것이다. 녀석의 자존심과 600마르크의 유혹 사이를 아슬아슬 줄타기 하는 것이다.
 
 놈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바뀌었다. 그는 화가 날수록 오히려 냉정해지는 타입같았다. 그가 한참을 침묵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놈이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되었나 보군. 그럼 이런 것은 어떨까? 나는 너에게서 돈을 빼앗고 그냥 가던 길을 가는 거야. 그럼 나는 600마르크를 벌수 있겠군. 내가 왜 쓸데없는 고민을 해야 하지?”
 
 <『나비계곡』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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