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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 1

2017.12.27 조회 23,905 추천 189


 전능의 팔찌 1권
 독자 제위께
 
 
 안녕하신지요?
 전능의 팔찌는 전작인 신화창조가 지지부진할 때 심기일전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글입니다.
 온갖 과학적 근거 자료와 각종 사료, 그리고 확인된 군사 무기 체계뿐만 아니라 다방면의 통계 자료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뒤져가며 써야 하는 신화창조와는 달리 조금 자유스런 글을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공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어찌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구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마법사!
 그것도 상당히 고위 마법사가 된다면 나는 이 세상을 어찌 살까 생각해 보니 흐뭇하더군요.
 처음엔 유치한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투명 마법을 써서 여탕을 기웃거리는 것 등이겠지요. 그러다 마법으로 세상을 좀 더 평화롭고 정의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다른 세상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첨단 과학 기술 문화를 어찌 경험하고 느끼는지를 쓰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습니다.
 전능의 팔찌를 가진 주인공은 이전의 판타지 소설처럼 궁정의 암투나 대규모 전투 같은 걸 별로 하지 않게 됩니다.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모아 읽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느낌을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현대로 되돌아와서는 작은 부분부터 점차 큰 부분까지 다시 한 번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전능의 팔찌는 그냥 많고 많은 퓨전 소설 가운데 평범한 하나가 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단순한 읽을거리로 남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정부패와 부조리, 그리고 온갖 불편부당한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글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거나 부당한 일이 있다면 당연히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국민의 역량은 높지만 위정자들의 역량은 기대 이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법은 멀지만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세상을 살아보니 우리나라의 법은 힘 있고 돈 있는 자들만을 위한 법입니다. 그래서 마법이라는 주먹으로 못된 짓 하는 힘 있는 놈들을 깨부수는 글을 쓰려 합니다.
 응원해 주십시오. 금과옥조는 못 되더라도 여러분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글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성하에······.
 김현석 배상
 
 
 1장 태백산맥에서 길을 잃다
 
 
 “헉헉! 헉헉! 여긴 대체 어디지?”
 현수는 흘러내리는 구슬땀을 소매로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시선은 그리 멀지 않은 산봉우리들로 향해 있다.
 짐작이 맞는다면 촛대봉, 향로봉, 미륵봉, 양터봉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봉우리들일 것이다.
 원수 같은 저것들을 찾아내느라 헤맨 것만 벌써 세 시간째이다. 그래서 간신히 이들이 보이는 곳을 찾기는 했다.
 그런데 어떤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제대로 가늠을 해야 오늘 안에 산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찌는 듯이 더웠던 8월이 아니다.
 초여름부터 북적이던 피서지의 인파가 99%쯤 사라졌을 9월 하고도 4일이다.
 그리고 이곳은 태백산맥의 주능선인 덕항산(1,072m, 강원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서 갈라진 곳에 위치한 이름 모를 산의 등성이이다.
 피서철이 끝나서 그런지 현수는 오늘 하루 단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물론 산행 중 길을 잃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을 헤맸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어젯밤 마신 술 때문인지도 모른다.
 준비해 왔던 술은 알코올 도수가 제법 높은 양주였다. 그것도 작은 병이 아니라 큰 병이다.
 그런데 그걸 다 마셨다. 홧김에, 그리고 시름에 잠겨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한 병을 다 비운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입에서 심한 술 냄새가 났다.
 라이터를 당기고 숨을 내쉬면 어쩌면 불이 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이다.
 그리곤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몇 시간쯤 잔 것 같다.
 하나 결코 숙면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술을 마시는 동안 해가 떨어졌다.
 산이라 그런지 금방 어두워졌다. 경험 많은 등산가도 텐트를 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텐트를 요 겸 이불 삼아 대충 둘둘 말고 잤다.
 그러니 어찌 숙면을 취할 수 있었겠는가!
 땅바닥에 박힌 돌덩이들 때문에도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게다가 모기들이 엄청나게 달려들어 회식을 했다.
 그래서 몇 시간을 잤지만 피로를 몰아낼 만큼, 술기운을 날려 버릴 만큼 깊은 잠은 자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강렬한 햇빛을 이기지 못해 눈을 떴지만 비몽사몽인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거듬거듬 텐트를 걷었다.
 아무래도 무작정 출발한 것이 문제가 된 듯하다.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길을 잃었고, 오전 내내 이 계곡 저 계곡을 헤맸다.
 그러다 오전 10시쯤 허기진 속을 채우기 위해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런데 속에서 받질 않는 모양이다.
 더부룩하고 불편하다.
 먹은 지 두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그런 걸 보면 혹시 체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도 불지 않아 덥기는 엄청 덥다.
 구슬땀이 흘러내려 앞섶을 흠뻑 적셔놓았다. 손수건으로 닦아내기엔 너무 많은 양이라 닦는 것도 포기했다.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려는데 문득 매미 울음소리가 강렬해진다.
 맴, 맴, 맴, 맴, 맴······!
 “매미는 왜 이렇게 시끄럽게 우는 걸까?”
 못해도 이륙 중인 비행기 소리인 100데시벨쯤 되는 듯하다. 이쯤 되면 소음 공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휴, 시끄러워! 야, 이 빌어먹을 매미새끼들아! 여긴 대체 어디냐? 맴맴거리지만 말고 나와서 말 좀 해봐! 길 좀 가르쳐 주란 말이야!”
 현수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 시끄럽던 매미 울음이 잠시 멈춘다. 하나 그도 잠시뿐, 10초도 지나지 않아 매미들의 합창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맴, 맴, 맴, 맴, 맴······!
 “에이, 빌어먹을 놈의 매미들! 니들은 지치지도 않냐?”
 투덜거린 현수는 곁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수통의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셨다.
 갖고 왔던 생수는 벌써 다 마셔서 계곡물을 담아둔 것이다.
 어쩌면 오염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체에 해로울 수 있고, 물속의 기생충을 몸 안으로 불러들이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근데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숨을 내쉴 때마다 술 냄새가 나는 상황이다.
 모르긴 해도 속에 있던 알코올이 기화되어 입 밖으로 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기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캬아! 시원은 하네.”
 입가에 묻은 물을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그리곤 새삼 사방을 둘러보았다.
 우거진 초목들이 저마다의 생명력을 내뿜고 있다.
 이제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되어버릴 잎사귀들이 맹렬한 기세로 광합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구에 다가올 추운 겨울을 대비해 착실하면서도 악착같이 준비를 하는 중이다.
 “으음, 나무들도 이러는데 난 뭐지? 휴우!”
 나직이 중얼거린 현수는 한숨을 쉬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 때문에 답답한 것이다.
 “제기랄, 학교 선생들, 그리고 학원 선생들. 뭐? 공부만 열심히 하면 이다음에 잘살 확률이 높으니 죽어라 공부하라고? 그래서 정신 차려서 했잖아. 근데 이게 뭐야? 에이, 쓰벌! 퉤에에!”
 현수는 있지도 않은 가래침을 뱉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갑갑한 심사가 풀릴 것만 같다는 본능 때문이다.
 
 현수는 도급 순위로만 따지자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천지건설(주)의 자재과 신입사원이다.
 입사한 지는 8개월 되었다. 이제 겨우 맡은 업무를 당황하지 않고 처리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 된 셈이다.
 이 회사에 입사하기까지 현수는 84번 입사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다.
 간신히 그걸 통과해도 필기시험, 또는 면접에서 탈락되곤 하였다. 이는 현수가 다닌 학교와 전공 때문일 것이다.
 현수는 서울 소재 삼류 대학 수학과 4년을 졸업했다.
 수학이 좋아서 이걸 전공한 건 물론 아니다. 고등학생 때 이미 수학이라면 질색할 정도로 질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학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수능 점수 때문이다.
 현수의 점수는 서울 명문대는 들어갈 수 없지만 지방에 있는 괜찮은 대학에는 들어갈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가정 형편상 지방 대학은 가기가 어려웠다.
 서울에 비해 등록금은 싸겠지만 하숙비 내지는 기숙사비, 또는 왕복 교통비 등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대학 중에서 고르라고 했다. 그것도 가급적 집에서 가까우면 좋겠다고 하셨다.
 교통비 때문일 것이다. 하여 담임과 상의한 끝에 1지망과 2지망, 그리고 3지망 원서를 냈다.
 그리곤 다 떨어졌다. 2, 3지망은 대기 번호도 못 받았지만 1지망에서 196번이라는 번호를 받기는 했다.
 결국엔 다 떨어졌구나 싶어 낙망했다. 그런데 등록 마감 마지막 날 기적적으로 연락이 왔다.
 하여 하루 만에 부랴부랴 등록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현수가 마지막 대기자였다. 결국 꼴찌로 입학한 셈이다.
 어쨌거나 대학에서 4년 동안 수학을 배웠다.
 집합론, 정수론, 선형대수, 현대대수학, 해석학, 위상수학, 해석기하, 벡터해석, 미분기하학, 확률과 통계, 이산수학, 논리학 등을 배웠다.
 고등학교 때의 수학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상당히 많이 다른 것들이다.
 어쨌거나 4년 내내 머리에 쥐나는 줄 알고 살았다.
 가정 형편상 유급을 하면 부모님을 뵐 낯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 기를 쓰고 어떻게든 학점을 따려 노력했다. 덕분에 뇌에 부하가 심하게 걸린 기분 속에서 살았다.
 4년 동안 남들 다 하는 연애 한 번 못했다.
 유급만은 결코 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졸업 후 어떻게 해서 간신히 서류 전형을 통과하여 면접을 볼라 치면 면접관들의 질문은 모두 같았다.
 “흐음! 수학을 전공하셨군요. 우리 회사는 김현수 씨가 전공한 수학과는 별 연관이 없는데 어떤 동기로 입사를 지원하셨습니까?”
 현수는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꿰어 맞히려 노력을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다.
 그게 떨어졌다는 뜻이라는 것을.
 천지건설(주)에 입사한 것은 시험을 봤는데 그 점수가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아서가 아니다.
 또한 전 학년 평점이 훌륭해서도 아니다. 간신히 C를 넘겼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재벌인 천지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천지건설(주)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군대 후임을 잘 둔 덕이다.
 
 현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에 입대했다.
 아버지가 혹시라도 직업을 잃게 되면 등록금을 대줄 수 없으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현수 아버지는 귀금속 세공 공장에서 일을 한다.
 사실 공장이라 하기엔 규모가 작다. 그래서 공방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이곳은 분업화되어 있는데 광(연마), 조립, 주물 주조, 사출, 조각, 도금 등으로 나뉘어 있다.
 이 밖에 원본기사도 있다. 원본기사의 경우엔 기능장 정도의 경력을 인정받으면 많은 급료를 받게 된다.
 현수의 아버지는 이 가운데 기계를 이용하여 보석을 깎아내는 보석연마사이다. 많은 급료를 받지 못하는 직종이다.
 그나마 언제 잘릴지 모른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얼마라도 돈을 버는 동안 학교를 다니라고 했던 것이다.
 아무튼 가정 형편상 알바는 필수였다.
 등록금은 부모님이 대주시지만 용돈은 없다. 그러니 책값, 교통비 등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입학으로부터 졸업까지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처음엔 약국 알바를 했다.
 처방전 접수하고 전산 입력만 하는 업무였다. 힘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월급날을 제대로 지켜주지 않았다.
 하여 집 근처 여자 대학교 앞 카페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곳에 4년 정도 붙박이로 붙어 있었던 것은 제 날짜에 또박또박 페이를 지급해 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배울 것이 많다 생각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수가 처음 이곳에서 알바를 시작했을 땐 홀 서빙이 주 임무였다. 그러다 차츰 주방 쪽으로 접근했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 몸은 더 고될지 모르지만 고픈 배를 어느 정도는 달랠 수 있을 것이란 얄팍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 2년 동안 감자와 양파 껍질을 벗겼고, 설거지를 했으며, 걸레질을 했다. 화장실 청소도 했다.
 성실성을 인정한 주방장은 주방 보조 자리가 비자 현수를 추천했다. 덕분에 페이도 올라갔고, 간단한 요리까지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토스트나 샌드위치를 능숙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
 또한 빵 굽는 기술까지 배워 마늘빵, 모카빵, 바게트, 소보로 등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히야신스(Hyacinth)’란 이름을 가진 카페의 사장은 현수가 졸업 때까지 계속 알바하기를 바랐다.
 주방장 보조, 바리스타 보조, 설거지, 홀 서빙, 청소 등 일인 다역을 하는데다 성실하고, 붙임성이 좋았던 때문이다.
 나중엔 사장의 배려로 운전면허증을 땄다.
 장사가 잘되어 옆 가게가 비자 그것을 얻어 확장한 이후 손님들의 차를 주차장에 넣었다 빼주는 것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날엔 대리운전 기사 노릇까지 했다. 약간의 수고비를 받기는 했다. 하나 남들이 버는 만큼 받은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카페는 나날이 번창했다. 술에 취하면 안전하게 운전까지 해서 귀가시켜 주니 왜 안 그렇겠는가!
 사장이 괜히 운전 학원비를 내준 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신장 184㎝, 몸무게 76㎏이다.
 마르지도 찌지도 않은 적당한 체격이다.
 게다가 잘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서글서글한 마스크를 지녀 제법 많은 여학생들이 좋아했다.
 현수를 보기 위해 히야신스에 죽치는 죽순이들까지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바쁘게 오가며 빵도 굽고, 요리도 하며, 때론 바리스타(Barista) 대신 에스프레소도 만들어냈다.
 바쁠 땐 홀 서빙도 했다.
 그러다가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앞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전공 서적을 펼쳐 들고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려고 애를 썼다.
 그 모습이 보기에 좋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 회사에 지원 서류를 제출했지만 모두 물먹었다. 이때까지의 전적은 53전 53패였다.
 실망스러웠다. 하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삼류 대학 수학과 출신의 취직이 잘될 것이라곤 생각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춘천에 있는 102보충대였다. 여기서 신병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배치 받은 곳이 화천에 소재한 27사단 이기자 부대였다. 대한민국 육군 가운데 훈련 많기로 소문난 바로 그 부대이다.
 어떤 이들은 해병대와 맞먹을 만큼 힘들다고 하기도 했다.
 진짜 훈련에 훈련이 거듭되었다. 눈을 뜨면 훈련이고, 밥을 먹고 나면 훈련이었다. 어떤 날엔 밤에도 훈련을 했다.
 현수는 낙오하여 다른 병사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다른 것들은 다 평범했지만 딱 한 가지만은 다른 병사들과 달랐다. 그것은 사격이다.
 주간 사격은 25m 영점 사격과 100m, 200m, 250m 사격으로 분류되어 있다. 야간 사격은 50m 사격이다.
 주간 사격은 20발 중 18발 이상, 야간 사격은 10발 중 9발 이상 명중해야 특등 사수가 된다.
 그런데 현수는 20발이 아니라 200발을 쏴도 모두 명중했다. 이는 야간도 마찬가지였다.
 이병 말에 사단에서 저격 교육을 이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또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니 원래 있던 수색대가 아닌 다른 곳으로 파견 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간 곳이 국방과학연구소 소화기 개발 연구팀이다.
 이곳은 K―2를 개발해 낸 곳이다.
 가보니 시험장이 있는데 현수의 임무는 총을 쏘는 것이었다.
 새로 개발되는 것의 시험 사격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사용되는 소총과 권총으로 하루 종일 사격만 했다.
 덕분에 청력에 문제가 생긴 듯하다. 가끔 이명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럴 때면 골치가 아프곤 한다.
 어쨌거나 그러다 제대를 했고, 그때부터 입사지원서를 작성하느라 애를 썼다.
 매번 물을 먹어 부모님을 뵐 낯이 없는 나날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후임을 길에서 만났다.
 현수가 제대할 때 갓 일병을 달았던 친구가 휴가를 나온 것이다. 제대 후 처음 만나는 후임인지라 한걸음에 다가가 와락 껴안았다.
 같이 있는 동안 현수는 후임을 잘 대해줬다.
 때리지도 않았고, 얼차려를 시키지도 않았다. 못되게 굴지도 않았으며, 갈구지도 않았다.
 진심 어린 대화를 통해 인간관계를 돈독히 했을 뿐이다.
 후임 역시 진심으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왜 대낮에 직장에 안 있고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느냐며 웃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예쁜 아가씨가 붙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만 후임의 데이트를 망친 기분이었다. 하여 대강 얼버무리고 나중을 기약하려 했다.
 그런데 후임이 여자친구에게 내일 만나자고 하고는 돌려보냈다. 그리곤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다.
 그래서 같이 술을 마셨다.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졸업 전인 후임을 위해 직업 구하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우니 지금부터라도 잘 준비하라는 조언을 했다.
 후임은 알았노라고 대답하며 웃었다. 그리곤 헤어졌다.
 다음날, 후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문을 보니 천지건설(주)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광고가 있다면서 지원했느냐고 물었다.
 현수가 다닌 학교의 졸업생은 거의 뽑지 않는 것이 재벌사들의 공통점이다.
 일류 대학 출신들도 취직이 어려울 정도인데 굳이 삼류 대학 출신을 뽑아서 쓰려 하겠는가!
 천지건설(주)은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천지그룹의 계열사라 광고를 보았지만 원서를 쓰지는 않았다.
 보나마나 떨어질 것이 뻔하다는 느낌이 든 때문이다.
 그래도 후임은 제법 많은 인원을 뽑으니 미친 척하고 지원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현수는 관심을 가져주어 고맙다고 말하고는 머뭇거리다가 지원 서류를 제출했다.
 안 되도 할 수 없고, 되면 좋은 거 아닌가!
 왕복 차비와 사진 한 장 손해 볼 셈 친 것이다.
 며칠 후, 서류 전형을 통과하였다는 문자를 받았다.
 필기시험은 며칠 후에 본다고 한다. 시험 과목은 영어와 일반 상식, 딱 두 과목이다.
 상식이야 그간 여러 번 시험 보는 동안 쌓일 만큼 쌓였지만 영어가 문제였다. 토익을 준비하느라 몇 달간 학원엘 다녔는데 아직 한 번도 700점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필기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지원자들의 스펙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때문이다.
 그들 거의 대부분이 일류 대학 출신들이라 하였다.
 아무튼 시험을 보러 갔다.
 그런데 문제가 지금껏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영국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의 끝부분에 있는 재판 과정이 지문이다.
 그런데 한 줄 건너 하나씩 빈 줄로 되어 있다. 이것들을 채워 넣는 것이 문제이다. 단어가 아닌 문장을 써 넣는 것이다.
 현수는 사상 최초로 영어 시험을 보면서 눈빛을 빛냈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리포트 알바를 한 바 있다. 그것은 베니스의 상인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 것이었다.
 모 대학 영문과 2학년의 과제였다. 당연히 본문은 영어로 되어 있었고, 리포트 역시 영어로 써야 했다.
 현수는 모르는 단어와 숙어를 찾아가며 본문을 해석했다.
 해석이 안 되는 것은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 소설책을 참고했다. 그 덕에 간신히 리포트를 작성할 수 있었다.
 받은 돈보다 들인 수고가 훨씬 더 많은 알바였기에 기억에 남는 일이다.
 아무튼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후반부 재판 과정에 있다. 그렇기에 상당 부분이 기억난다.
 하여 나름대로의 정답을 써 넣었다.
 다시 며칠 후, 필기시험마저 통과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당연할 것이다. 현수의 답안은 거의 원본과 같았던 것이다.
 남은 것은 면접시험이다.
 긴장되었지만 면접 보는 날 현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면접관이 묻는다.
 “흐음! 그러고 보니 수학을 전공하셨군요. 우리 회사는 김현수 씨가 전공한 수학과는 별 연관이 없는데 어떤 동기로 입사를 지원하셨습니까?”
 어떻게 면접관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할까?
 현수는 내심 이번에도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나 나름대로 논리적인 대답을 했다.
 사흘 후, 놀랍게도 최종 합격하였다는 통보를 받았다.
 확인하러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았다.
 중간쯤 김현수라는 성명 석 자가 보였다.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하마터면 PC방에서 눈물을 보일 뻔했다.
 자세한 내용을 보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 12박 13일 예정으로 신입사원 연수 교육이 준비되어 있다. 현수는 남들보다 부족함을 알기에 열심히 교육을 받았다.
 연수를 마치고 배치 받은 곳은 자재과였다.
 현수는 자신의 사수라 할 수 있는 곽인만 대리의 조수로서 공사 현장에서 사용될 각종 자재에 대한 검품을 하러 다녔다.
 예전 같으면 뇌물과 리베이트가 성행했을 곳이 자재과이다. 하나 이젠 다르다.
 실수하면 본사 홈페이지에 항의하는 글이 올라간다. 그러면 감사팀에서 즉각적인 조사를 한다.
 그래서 예전과 달리 목에 힘을 주는 게 아니라 아주 공손한 태도를 일관하여야 한다.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이 상부의 지시였다.
 그렇게 회사를 다니다가 우연히 업무지원팀 강연희 대리를 보게 되었다. 입사는 2년 선배이지만 나이는 한 살 어리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현수는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찰랑찰랑한 생머리, 갸름한 얼굴, 오뚝한 콧날, 사슴의 그것 같은 눈망울, 야리야리한 입술, 불룩 솟은 가슴, 잘록한 허리, 거기에 쪽 뻗은 각선미가 한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그냥 섹시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아하고 청순하며, 고고하며 백치미까지 엿보인다.
 자신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모르는지 강 대리는 동료와 대화하며 현수의 곁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때 향긋하면서도 그윽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텔레비전을 켜면 수많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런 그녀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미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연희 대리는 천지건설(주) 최고의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회사를 광고하는 CF를 찍기도 했다.
 당연히 수많은 늑대들의 목표물이다.
 그 가운데 가장 설치고 다니는 놈은 입사 4년차로 곧 과장 진급을 한다고 소문난 박진영 대리이다.
 박 대리는 실력을 인정받아 직급은 대리이지만 구조계산팀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또한 실세인 전무이사의 아들이기도 하다.
 박준태 전무이사는 회장 부인인 박금순 여사의 동생이다. 다시 말해 천지건설(주) 회장과 처남 매부 사이이다.
 박 대리는 회장의 처조카인 것이다.
 그런 그가 강연희에게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어 다른 사원들은 강 대리에게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현수는 업무 때문에 강 대리가 소속된 업무지원팀을 가끔 방문한다. 그런데 현수의 사수인 곽인만 대리는 기혼자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강 대리의 협조가 필요할 때면 늘 현수를 보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현수는 영화나 한 편 볼까 싶어 극장을 찾았다. 그때 우연히 강연희 대리를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고, 둘은 같이 영화를 봤다. 그리곤 식사를 하면서 가볍게 술을 한잔 마셨다.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강 대리는 현수가 일하던 히야신스 앞 여대 출신이었다. 덕분에 화제가 풍부해졌다.
 그 다음 주 주말엔 북한산 등반을 같이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엔 청계산을 올랐다.
 그렇게 관악산과 삼각산, 운악산과 화악산까지 점령하는 동안 둘이 연애한다는 소문이 났다.
 산행을 하다 우연히 같은 회사 직원들을 만난 결과이다.
 연희의 속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수는 강 대리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
 연희는 얼굴이 예쁘고 몸매만 좋은 게 아니다.
 대화를 해보니 진솔하고 상냥하다. 게다가 예의 바르고 착하기까지 하다.
 이런 여자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괜히 천지건설(주)의 비너스라는 소문이 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둘은 연애하는 것이 아니다.
 등산을 좋아하는데 혼자서 하기 두렵다기에 동행해 주는 것뿐이다. 일종의 보디가드 역할을 한 것이다.
 둘은 ‘강 대리님’이라는 호칭과 ‘김현수 씨’라는 호칭으로 서로에게 깍듯한 존칭을 사용한다.
 세상에 이런 연인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소문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수는 박진영 대리의 방문을 받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좋은 일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박 대리는 얼마 전 납품을 결정한 자재에 대해 따질 것이 있다고 한다. 물어보니 구조계산팀에서 요구한 강도에 훨씬 못 미치는 제품인데 왜 그걸로 결정했느냐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현수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사수인 곽 대리가 나름대로 고심 끝에 낙점했던 것이다.
 현수는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나 박 대리는 물고 늘어졌다.
 검품 업무를 맡은 곳이 자재과이며, 현수는 현장 직원이므로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 납품 건으로 문제가 발생될 경우 사직서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겁박을 주었다.
 그 주 주말, 현수는 연희와 더불어 양평의 용문산에 다녀왔다. 이미 약속되어 있던 것이다.
 월요일 오후가 되자 박 대리가 호출한다.
 구조계산팀에 가보니 결정된 자재에 대한 여러 가지 시험이 진행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겉보기엔 그럴듯하지만 품질 면에서 뒤떨어지니 납품 결정을 취소하라는 것이다.
 즉시 사수인 곽 대리에게 보고를 했다.
 그런데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현수는 자칫 징계당할 수 있으니 납품업체를 변경하자는 의견을 꺼냈다.
 그러자 곽 대리는 구조계산팀과의 힘겨루기에서 져줄 마음이 없으니 예정대로 진행하라고 하였다.
 둘 사이에 끼었다고 느낀 현수는 궁여지책으로 납품하기로 한 자재회사를 방문했다.
 그리곤 제품의 질을 높여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자 곤란해하더니 납품 단가를 올려달라는 요구를 한다. 아니면 계약서에 기록된 대로 납품하겠다고 한다.
 현수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여름휴가 시즌이 다가왔다.
 하나 현수는 휴가를 떠날 수 없었다. 박 대리가 으르렁거리고, 곽 대리가 튕기는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2장 9월에 받은 여름휴가
 
 
 진땀 나던 휴가 시즌이 모두 끝나 회사 분위기가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그제야 곽 대리가 휴가를 써먹으라는 말을 했다. 그렇기에 9월 초에야 여름휴가를 낸 것이다.
 휴가를 떠나기 전 곽 대리는 박 대리의 견제가 자신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현수를 겨냥했던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번 휴가 때 혹시라도 현수가 연희와 같이 휴가를 갈까 싶어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다.
 배알이 틀렸다. 차라리 대놓고 강 대리에게 집적거리지 말라고 했다면 알았다 하고 물러났을 것이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엄연한 선배 사원이 아닌가!
 그녀에게 호감은 있지만 대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런데 박 대리는 치졸하게도 업무를 핑계로 속을 긁을 대로 긁었다.
 사실 이번 일로 현수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여 날마다 신문 광고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잘리면 갈 곳을 미리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휴가가 결정된 날 현수는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유념하면 좋은 글귀라 생각합니다.
 휴가 잘 보내길······. ―구조계산팀 박진영.
 
 현수는 부화가 치솟았으나 어쩌겠는가!
 박 대리는 엄연한 상사이고, 나이도 많다. 그렇기에 이를 악물었을 뿐이다.
 내심 포기하고 있던 휴가였기에 현수에겐 계획이 없었다. 하여 원룸에서 뒹굴었다.
 현수는 취직을 해서 독립한 것이 아니다. 군대를 다녀와 보니 살던 집이 재개발된다고 헐렸다.
 현수네는 전세를 살았었다. 보증금은 돌려받았지만 인근에서 세를 얻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갑작스레 살던 집들이 사라졌으니 수요가 많아진 탓이다.
 게다가 돌려받은 보증금 가운데 일부는 현수가 학자금 융자받았던 것을 상환하는 데 썼다고 한다.
 하여 경기도 김포시에 소재한 조그만 연립주택 지하 셋방으로 이사하였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9평이 조금 안 된다고 한다.
 세 식구가 살기엔 집이 너무 좁다.
 또한 출퇴근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하여 할 수 없이 회사 근처에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만 원짜리 원룸을 얻었다.
 이 집 역시 좁다. 게다가 햇볕도 잘 들지 않고 바람도 잘 통하지 않는다. 하여 덥고 짜증이 났다.
 마음 같아선 에어컨을 펑펑 틀고 싶지만 전기 요금 고지서가 두려워 하루에 고작 두어 시간 트는 게 전부였다.
 나머진 뜨뜻한 바람을 뿜어내는 선풍기가 담당했다.
 이럴 때 예쁜 각시라도 있다면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화채라도 만들어 더위를 식히도록 했을 것이다.
 하나 불행히도 현수는 곰팡내 나는 무적의 솔로 부대원이다. 그래서 주말만 되면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렇게 빈둥거리던 중 문득 태백산맥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시원하게 땀이라도 흘리고 나면 꽉 막힌 심사가 스르르 풀어질 것만 같아서이다.
 그리고 어제, 그러니까 휴가 둘째 날 덕항산 초입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그 결과 이처럼 이름 모를 산등성이에 조난당해 앉아 있는 것이다.
 “휴우! 복권에 당첨되거나 하늘에서 금덩이 같은 게 툭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럼 빌어먹을 회사 때려치우고 만날 산이나 타게. 쩝, 그나저나 비가 오려나?”
 구름이 점점 진해진다는 느낌에 현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산이 없으니 비 피할 곳을 강구하기 위함이다.
 덕항산 초입에서 보았던 관광 안내판엔 근처에 여러 동굴들이 있다고 되어 있었다.
 환선굴, 대금굴, 대이동굴, 관음굴이 그것이다.
 찾기만 하면 비를 피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러려면 먼저 여기가 어딘 줄 알아야 찾아갈 것이 아닌가!
 현재로선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흐음, 일단 골짜기로 내려가 볼까? 아냐. 비가 오면 골짜기의 물이 불어 위험할 수도 있어.”
 홀로 중얼거린 현수는 무작정 앞으로 나아갔다.
 태백산맥이 크기는 하다. 하나 웬만해선 한여름에 조난당해 죽을 일은 없는 곳이다.
 호랑이, 곰, 늑대 같은 흉포한 산짐승은 오래전에 멸종당했을 것이니 똑바로만 가면 큰일은 겪지 않을 것이다. 무협 소설에 종종 나오는 절벽도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십여 분 정도 전진을 했다. 길이 없기에 나뭇가지에 긁히기도 하였지만 생채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툭! 툭! 투툭! 투투툭! 투투투툭······!
 “으윽! 비?”
 모자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낀 현수는 재빨리 전후좌우를 둘러보았다. 첫 빗방울이 굵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피하지 않으면 물에 젖은 생쥐처럼 팬티까지 몽땅 젖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재 현수가 있는 곳은 아주 좁은 협곡의 산허리 부근이다.
 그렇기에 우거진 녹음 사이로 옆 봉우리까지 살필 수 있는 위치였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중 눈에 뜨이는 곳이 있다.
 “아! 저기!”
 바로 옆 봉우리 아래쪽 계곡 부근에 계류가 흐르고 있다.
 그러다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옆이 움푹 파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투툭! 투투투툭······!
 금세 빗방울이 조금 더 굵어진 느낌이다.
 하여 얼른 발을 놀렸다. 서두르느라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인적이 드물어 그런지 부드러운 부엽토가 땅거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현수가 언뜻 본 것은 진짜였다. 오는 내내 울창한 수림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동굴이 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짐을 느끼고 서둘러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면서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쏴아아아아아아······!
 “휴우! 하마터면······.”
 10초만 늦었어도 속옷까지 모두 젖을 엄청난 폭우다.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쉰 현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곡 물이 불어 안으로 물이 들이치면 재수없게도 산속에서 익사하는 경우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동굴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위쪽으로 경사져 있다.
 이 정도면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물에 잠기는 일은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그러고 보니 달려오느라 땀이 났는지 젖은 느낌이 든다. 하여 옷을 살펴보니 벌써 반 이상 젖어 있다.
 체온이 떨어지면 감기에 걸릴 수 있으므로 수건을 꺼내 닦고는 얼른 갈아입었다. 그러면서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생각을 했다. 별로 비를 맞은 것 같지 않았는데도 상당히 많이 젖었던 것이다.
 잠시 후, 현수는 버너에 불을 붙였다. 또 라면을 끓이려는 것이다. 그리곤 새삼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없이 이어졌으면 좋았을 동굴은 애석하게도 그 길이가 불과 30m를 넘지 않았다.
 석순이랄지 기타 기기묘묘한 암석이 있거나 호수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흙이 움푹 파여 있는 정도이다.
 별다른 흥미를 못 느낀 현수는 라면 하나를 뚝딱 해치웠다. 그리곤 남은 물을 끓여 커피 한 잔을 만들었다.
 그리고 보니 줄기차게 울어대던 매미라는 놈들의 합창 소리가 뚝 끊겨 있다.
 “짜식들, 쌤통이다. 후후!”
 비에 젖어 꼼짝도 못하고 있을 매미를 떠올린 현수는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물끄러미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폭우다.
 “조금만 늦었으면 이 비를 다 맞았을 거 아냐? 진짜 다행이네. 그나저나 언제 그치지? 설마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 설마가 사람을 잡을 모양이다.
 시간이 흘러 오후 7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빗줄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해가 떨어질 것이다.
 현수는 편평한 바닥을 찾아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이동할 수 없으니 하룻밤 잘 생각을 한 것이다.
 텐트는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쳤다.
 부드러운 흙을 골고루 펼쳐 놓았기에 오늘은 어제 같이 등이 배겨 잠 못 자는 고생을 하진 않을 것이다.
 저녁 식사는 또 라면이다.
 뜨거운 국물을 훌훌 불어 마시니 그제야 속이 풀리는 것 같다. 어제 마신 술로부터 이제야 해방된 것이다.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할 일이 없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잠이나 일찍 자자는 생각에 몸을 뉘였다.
 한데 잠이 오질 않는다. 너무 시끄럽기 때문이다.
 빗소리와 폭포 쏟아지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데 어찌 잠이 오겠는가!
 “젠장, 빌어먹을 비는 밤새 오려는 모양인가?”
 나직이 투덜거린 현수는 가스 랜턴을 꺼내 불을 밝히곤 배낭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김현석 작가가 지은 ‘신화창조’라는 소설이다.
 현수는 못 배운 부모를 만나 평생 동안 가난하게 살았다. 그래서 못해본 거, 못 먹어본 것, 못 가본 곳이 너무나 많다.
 스키장은 물론이고 눈썰매장도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이태리 식당이나 프랑스 요리를 하는 레스토랑은 가본 적도 없다.
 그나마 일식은 천지건설(주)에 입사한 후 접대를 받느라 두어 번 가보았다. 그때마다 회를 먹었는데 매양 먹던 것이 아니라 그런지 비린내가 느껴져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몇 번이나 가보았을 제주도도 한 번 못 가보았다. 뿐만이 아니다. 서울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설악산, 지리산, 속리산, 내장산도 아직 한 번도 못 가봤다.
 그런 데 놀러 갈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수는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이 늘 불만족스러웠다.
 돈이라는 것이 없어서 늘 욕구를 억눌러야 했으니 어찌 만족스러웠겠는가!
 그런 그에게 있어 신화창조라는 소설은 대리만족 내지는 심리적 충족감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하여 읽고 또 읽고 하는 중이다.
 인터넷에서 신화창조의 텍스트를 불법 다운로드를 받아 핸드폰에 넣고 다닐 수도 있다.
 하나 그러지 않았다.
 작가도 먹고살아야 하는 사회의 구성원인데 그가 애써 써내려 간 것을 공짜로 읽는 게 결코 바람직스럽다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마음 먹고 전질을 샀다. 덕분에 한 달 용돈의 절반이 후딱 날아갔다.
 아무튼 신화창조는 현실에선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종의 기적 같은 이야기이다.
 현수도 다른 사람들처럼 기적을 좋아한다.
 게다가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도 김현수이다.
 그렇기에 읽을 때마다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너무도 좋다.
 그런데 이제 너무 많이 읽었나 보다.
 아무 데나 펼쳐 들었는데도 그다음 내용이 뭔지 떠오르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펼쳤던 책을 도로 접고는 또다시 멍한 시선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어둠이 다가왔는지 밖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다.
 “로또 복권은 아무리 사도 당첨되지 않고······. 제기랄!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하나?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오로지 일, 일, 일! 평생 일만 하면서······.”
 나직한 투덜거림에 이어 또다시 중얼거린다.
 “에이, 하늘에서 금덩이라도 확 떨어졌으면 좋겠네. 그럼··· 헉! 이, 이건 대체 뭐지?”
 갑자기 눈앞의 공간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인다. 술도 마시지 않았기에 자신의 눈이 잘못되었나 싶어 눈을 비볐다. 그런데도 공간이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시킨 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순간, 무언가가 일렁이던 공간을 통하여 빠져나왔다.
 땡그랑 ! 떼구루루!
 “······!”
 무언가가 떨어지자 일렁이던 공간의 움직임이 사라졌다.
 현수는 얼른 가스 랜턴의 조절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실내가 금방 대낮처럼 밝아진다.
 “이, 이건 뭐지?”
 조심스럽게 집어 든 것은 폭이 5㎝, 직경은 15㎝, 두께는 1㎝ 정도 되는 속이 빈 원통형 물체이다.
 안과 밖에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고, 빨강과 검은색 보석 비슷한 것이 한 개씩 박혀 있다.
 이것들은 지름이 약 1㎝ 정도 되었다.
 가운데엔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모두 보석 비슷한 것이 박혀 있었던 자리처럼 보인다.
 랜턴에 비춰 보니 삼각형과 사각형, 원과 타원 등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그리고 처음 보는 문자 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흐음, 이게 뭐지? 머리에 쓰는 건 아닌 것 같고··· 팔찌인가? 아냐. 그러기엔 너무 굵어. 혹시 발에 끼우는 건가?”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용도를 알 수 없다. 그러던 중 저도 모르게 왼쪽 팔을 그것에 넣어보았다.
 그 순간이다!
 스르르르릉 !
 지금껏 멀쩡하던 팔찌 비슷한 것이 갑작스레 줄어든다.
 빼려고 했으나 어느새 팔뚝 굵기에 근접해 빠지지 않는다.
 “어어! 이, 이거 왜 이래?”
 화들짝 놀란 현수는 얼른 배낭을 뒤졌다. 비누를 찾기 위함이다. 의도한 것이 손에 잡히자 즉시 밖으로 향했다.
 빗물을 받아 비누 거품을 만들 요량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사방이 환해진다.
 번쩍 !
 콰쾅! 콰콰콰콰쾅!
 “으윽!”
 동굴 바로 곁에 있던 고목에 벼락이 떨어졌다. 그리곤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온다.
 화들짝 놀란 현수는 후다닥 동굴 안으로 몸을 피했다.
 또, 그 순간이다.
 번쩍 !
 콰아아앙!
 우지지지직 ! 콰아앙!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은 섬광에 이어 또다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동굴 앞 고목이 반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곤 거대한 동체가 쓰러진다.
 동굴 입구 쪽으로 팽개쳐지듯 떨어져 내린 고목이 내는 굉음에 놀란 현수는 조금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착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전 떨어져 내린 벼락이 안으로 흘러든다고 느낀 때문이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텐트의 폴대에서 방전 현상이 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벼락은 연속해서 세 번이나 더 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친 듯하다.
 계곡의 물이 불어난 듯 폭포에서 나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하나 현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너무도 굉렬했던 벼락 소리 때문이다.
 그렇게 10분쯤 지났다. 그동안 현수는 꼼짝 않고 숨만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비가 와서 그러는지 조금 춥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배낭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벼락 맞을까봐 겁이 난 것이다.
 그렇게 이십여 분을 더 떨었다.
 “으으! 더럽게 춥네. 안 되겠어.”
 현수는 후다닥 내려가서 배낭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옷을 껴입었다. 그래 봐야 얇은 바람막이이다.
 팔뚝에 돋은 소름을 쓰다듬던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응? 근데 그건 어디 갔지?”
 그러고 보니 저절로 줄어들어서 팔뚝 속으로 파고들까 싶어 겁먹게 했던 팔찌 비슷한 물건이 보이지 않는다.
 놀라서 피하는 동안 빠져나간 모양이다. 하여 랜턴을 들어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지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흐음, 어딘가에 빠진 건가? 보이질 않네. 으으, 그나저나 더럽게 춥네. 으으! 추워. 안 되겠다.”
 덜덜 떨던 현수는 얼른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너를 켰다. 그리곤 배낭을 뒤적여 팩 소주 두 개를 꺼냈다.
 안주는 대강 익힌 소시지였다.
 자기 전에 세수하는 것과 이빨 닦는 것은 포기했다. 씻고 자려다 벼락 맞아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제기랄, 비가 왔으니 내일 산행은 더 어렵겠군.”
 맨땅도 젖으면 미끄럽다. 산은 더 그렇다. 그렇기에 비 오는 날의 산행은 만전을 기해야 한다.
 안 그러면 발목이 접질리거나 삐게 된다. 재수없으면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불운을 겪을 수도 있다.
 “으음! 내일은 길을 찾아야 할 텐데······.”
 현수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 9시를 넘어 사방이 깜깜해진 후엔 랜턴도 껐다. 자칫 산짐승을 불러들이는 역할을 할까 싶어서였다.
 너무 추워 결국 침낭 속으로 파고들었다. 얼마 후 현수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짹짹! 째째째짹 !
 “으음! 끄으으응! 흐어엄 !”
 산새들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 현수는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하품을 하며 눈곱을 떼어냈다.
 불어난 폭포수 인근에서 세수를 하고 머리도 감았다.
 그리곤 아침 식사를 했다. 물론 라면이다.
 오후 3시쯤 되어서야 현수는 제대로 된 등산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곤 곧장 하산했다.
 
 * * *
 
 원룸은 여전히 덥다. 서울엔 비가 오지 않은 때문이다.
 배낭과 등산화, 코펠과 버너 등을 대강 정리하고 누운 현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휴우!”
 내일이면 휴가가 끝나니 회사에 복귀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가 싫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무리 싫어도 가기는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출근을 하면 앞으로 최소 30년 동안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일 아침엔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입사한 회사이던가!
 84번의 입사원서를 쓴 끝에 간신히 들어왔다. 그러니 나가면 하늘의 별 따기인 재취업에 성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백수가 된다. 수입이 없어지니 원룸을 비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포 부모님 댁으로 가면, 너무 좁다.
 “제기랄! 내 팔자도 참. 에이, 잠이나 자자.”
 현수는 얇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리고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보름이 지난 지 닷새밖에 되지 않아 그런지 오늘 따라 달빛이 휘영청 밝다.
 현수는 마음속으로 양을 천 마리쯤 세다 잠이 들었다. 그리곤 꿈나라로 접어들었다.
 
 “인연자여, 인연자여, 나를 보게나.”
 
 현수가 꿈에서 만난 사람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이다. 하얀 것 같기도 하고 뿌연 것 같기도 한 담요 비슷한 걸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이다.
 모자도 달려 있는데 현수도 즐겨 입는 후드 티는 아니다. 거의 종아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노인은 백인인 것 같다. 살빛이 창백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거의 2m 50㎝ 정도 되는 긴 지팡이를 쥐고 있는데 왠지 장엄한 느낌이 든다.
 “인연자여, 인연자여, 어서 나를 보게나.”
 나직이 중얼거리는 노인은 슬픈 눈빛으로 현수를 바라만 볼 뿐이다.
 “저어··· 죄송하지만 누구십니까?”
 “인연자여, 나는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라 하네.”
 “네? 뭐라고요? 죄송하지만 제대로 못 들었네요. 한 번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현수는 익숙하지 않은데다 길기까지 한 이름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지. 나는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라 하네.”
 “네에, 이름이 길군요.”
 “그런가? 그럼 자네 이름은 무엇인가?”
 “네, 저는 김현수라 합니다.”
 “킴혀언수?”
 “킴혀언수가 아니라 김현수예요.”
 “흐음, 낯선 형식의 이름이군. 그 이름이 이곳에선 보편적인 것인가?”
 “네, 대부분 성이 한 글자이고 이름은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지요. 근데 그건 왜 묻습니까?”
 멀린은 현수의 물음에 대답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는 듯 제 할 말만 했다.
 “그럼 잉글랜드가 아니군. 여긴 어디인가?”
 “네······? 방금 뭐라 말씀하셨는지요?”
 “이곳이 지구의 어느 나라인가를 물었네.”
 “아······! 여긴 대한민국이라는 곳이에요.”
 “대한민국······?”
 “네, 영어로는 Republic of Korea라 하지요.”
 “흐음, 코리아라······.”
 노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가 기억을 더듬는 듯하다.
 현수는 예의 바르게도 노인의 사색을 끊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을 뿐이다.
 “흐음! 할 수 없지.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네? 뭐라고요?”
 “아닐세. 방금 한 말은 나 혼자 중얼거린 말이네.”
 “아! 그렇군요.”
 “그나저나 자네에게 도움을 청하네. 도와줄 수 있겠는가?”
 “네에?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고요?”
 “그렇다네. 자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네. 도와주겠는가?”
 ‘아아, 이건 꿈이구나. 하긴, 내가 이렇게 영어를 잘할 리가 없으니······.’
 현수는 문득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자각을 했다.
 삼류 대학엘 간 것도 영어 때문이다. 국어는 1등급, 수학은 2등급, 과학탐구는 3등급을 얻었다.
 이것만 보면 꽤 괜찮은 점수이다.
 여기에 영어마저 2∼3등급을 받았다면 소위 준 명문이라 불리는 대학을 졸업했을 것이다.
 한데 어이없게도 영어는 7등급이었다. 나머지 과목이 아니었다면 삼류 대학에도 못 들어갈 뻔했던 것이다.
 취직을 위한 필기시험에서 줄줄이 낙방한 것도 거의 모두 영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외국인과 아무런 어려움 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 이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는 결과가 자연스레 도출된 것이다.
 노인은 말없는 현수를 잠시 살펴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가? 도와줄 수 있겠는가?”
 현수는 노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몹시 늙어 나이를 가늠키 어렵다. 그런 노인이 도움을 청한다. 그런데 현재 꿈꾸는 중이다.
 무언들 못하겠는가!
 “네, 그러죠.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죠?”
 “아아! 고맙고 또 고맙네.”
 “고맙긴요. 어르신께서 도움을 청하셨는데 기꺼이 도와드려야죠. 말씀만 하십시오.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반드시 보답을 받을 것이네.”
 “아이구, 아닙니다. 보답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어르신께서 도움을 청하셨으니 당연히 도우려는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
 노인은 잠시 말없이 현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심성이 바른 청년이군. 고맙네. 그럼 이제부터 잠시 잠을 자게. 고요한 밤의 꿈속으로······. 슬립!”
 노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간다. 그리곤 잠이 들었다.
 현수는 꿈속에서 또 잠을 자는 희한한 경우를 맞이했다.
 잠시 후, 현수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혼이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는 바로 그 광경이다.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고, 움직이려 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노인은 그런 자신의 육체 주위에서 지팡이로 허공에 그림 비슷한 것을 그리며 무언가 주문을 외우고 있다.
 잠시 후, 노인의 손으로부터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동시에 자신의 몸으로 영혼이 빨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고맙네. 노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줘서.”
 “저어, 어르신, 어르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나······? 혹시 대마법사 멀린이라고 하면 아는가?”
 “네에? 멀린이라면··· 혹시 아더왕의 궁정 마법사였다는 그 마법사 멀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허허, 아는구먼. 그래, 예전에 잠시 아더를 도왔지.”
 “네에? 영국의 왕 아더··· 그러니까 요정으로부터 얻었다는 성검 엑스칼리버(Excalibur)의 주인, 그 아더왕을 도우셨다고요? 진짜요?”
 “허허, 놀랐는가?”
 “네에, 전 마법사가 실존했다고 생각지 않고 있었거든요.”
 “엑스칼리버를 안다니 그 검의 검집이 어떤 효능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아는가?”
 “물론이에요. 엑스칼리버의 검집은 주인이 어떤 상처를 입어도 즉시 치유되는 기능이······. 혹시 그게 어르신께서 검집에 새겨 넣으신 마법이었습니까?
 “허허! 허허허! 잘 아는구먼. 그건 컴플리트 힐(Complete Heal)이라는 7써클 마법이었네.”
 “세상에나! 맙소사! 내가 대마법사 멀린을 만나다니! 반갑습니다. 아니, 영광입니다. 세, 세상에나, 맙소사!”
 현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횡설수설하였다.
 “허허허! 그렇겠지. 이 세상엔 마법사가 없었으니.”
 “네에? 이 세상엔 없었다니요?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젊은이, 아니, 김현수 군.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네.”
 “네에, 그러시겠지요. 영국의 전설인 아더왕은 6세기 경의 인물입니다. 어르신께서는 같은 시기에 활동하셨으니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겠지요.”
 현수는 멀린이 귀신, 또는 영혼이라 생각해서 한 말이다. 하나 멀린은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 자네 말대로 돌아왔지. 원래 내가 있던 이 세상으로 말일세.”
 “저어, 죄송하지만, 멀린 대마법사님!”
 “흐음! 거기선 나를 멀린이라 불렀지만 지금부턴 아드리안이라 불러주게.”
 “네, 아드리안 대마법사님.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 가운데 어디에 계신가요? 개인적으로 마법사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거든요.”
 “허허! 자넨 내가 죽은 걸로 생각하는구먼.”
 “네에? 그럼 아직 돌아가신 게 아니란 말씀이세요?”
 “허허, 허허허! 잘 듣게. 여긴 지구가 아니라네. 내가 있는 이곳은 카이엔 제국이라는 곳이네.”
 “네에? 카이엔 제국이요? 그런 나라도 있나요?”
 처음 듣는 명칭에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취직을 위해 일반상식 책을 여러 번 섭렵한 바 있다. 그런데 한 번도 카이엔이란 명칭을 본 바 없기에 물은 것이다.
 “흐음!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다간 너무 오래 걸리겠군. 잠시만 기다리게.”
 말을 마친 노인은 손을 내밀어 현수의 머리 위에 얹고는 뭔가를 중얼거린다.
 
 
 3장 대마법사 멀린
 
 
 대마법사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은 나이 600에 이르러 자신의 마법을 집대성한 마법서를 저술해 냈다.
 그리곤 「이실리프」라는 이름을 붙였다. 카이엔 제국의 말로 표현하자면 ‘위대한 마법사의 생애’라는 뜻이다.
 지금 그것에만 기록되어 있는 마법이 실현되는 중이다.
 이실리프를 보면 8써클 마스터가 되어야 비로소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다. 이 마법의 정식 명칭은 위즈덤 트랜스퍼(The Wisdom Transfer Magic)이다. 다시 말해 지식 전이 마법이다.
 이것은 시전자의 의도에 따라 전체, 또는 부분의 지식을 상대에게 넣어주거나 상대에게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선별적으로 지식을 이전시켜 주는 마법이다.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은 왕국 간의 전쟁으로 여덟 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보살펴 주지 않아 억척스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흉포한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산에서 목숨 걸고 약초를 캐어 간신히 먹고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 올랐다가 심각한 부상을 당한 마법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심한 상처로 실혈이 심한 상태였다.
 5써클 마법사 브리앙은 마탑의 명령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어린아이들을 잡아 시험 재료로 쓰던 흑마법사를 발견하였다.
 그를 공격하여 아이들을 구하려다 반격을 당해 절벽 위에서 떨어진 뒤 빈사지경에 처했던 것이다.
 아드리안은 서둘러 입고 있던 넝마 같은 옷을 찢어 붕대를 만들었다. 그리곤 지혈에 효능이 있는 약초를 붙이고 그것으로 상처를 감았다.
 다행히 지혈은 되었지만 브리앙은 깨어나지 않았다. 부상 정도가 너무 심한 때문이다.
 또한 너무나 많은 실혈을 한 때문이었다.
 하여 원기 회복에 좋은 약초를 찾아 그것을 먹였다.
 아드리안의 정성 덕분에 정신을 차린 마법사 브리앙은 도움을 청했다. 하여 어린 아드리안은 온 힘을 다하여 브리앙을 부축했다.
 간신히 부축하여 자신의 오두막에 당도한 아드리안은 정성 들여 구완을 하였다. 하지만 써클 붕괴 현상이 빚어진 브리앙은 불과 1년 반 만에 생애를 마쳤다.
 그가 죽었을 때 아드리안은 1써클 마법사였다. 브리앙이 자신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마법을 가르쳐 준 덕이다.
 유품을 정리하던 아드리안은 브리앙의 마법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적지 않은 돈과 마법서가 들어 있었다.
 아드리안은 아무도 찾지 않는 오두막에서 마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70년이 흘렀을 때에 비로소 5써클이 되었다.
 빠르고 쉬운 길을 가르쳐 줄 스승이 없어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다. 그때의 나이가 80이었다.
 아드리안은 더 이상의 마법을 원했지만 마법서가 없었다.
 하여 마탑을 찾았다. 한때 브리앙이 몸담았던 곳이다.
 당시의 마탑주 헬리온은 7써클에 이른 자로 권력과 재물에 욕심이 많은 자였다.
 그는 6써클 마법서 한 권에 10만 골드를 요구했다.
 여섯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60만 골드가 있어야 6써클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7써클 마법서는 일곱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권당 50만 골드씩 달라고 했다. 350만 골드를 요구한 것이다.
 그럼 8써클 마법서는 얼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권당 200만 골드씩 1,600만 골드를 내란다.
 내친김에 9써클 마법서의 가격을 물어보았다.
 9써클은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권당 3,000만 골드씩 9,000만 골드를 내라고 했다.
 6∼9써클에 이르는 마법서를 모두 사느니 차라리 왕국 하나를 통째로 사는 편이 더 빠를 것이다.
 아드리안은 비싸도 너무 비싸다는 생각을 하곤 마법서를 얻는 다른 방법을 물었다.
 그랬더니 6써클 마법서 한 권을 얻으려면 마탑 화장실 청소를 100년 동안 하라고 했다.
 알고 보니 영광의 탑이라 불리는 마탑이 소속없는 마법사라고 냉대하고 조롱한 것이다.
 분노한 아드리안은 노구를 이끌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마법 주머니엔 보존 마법이 걸린 음식이 잔뜩 들어 있었다.
 50년 정도 시간이 흘러 나이 132세가 되었을 때 아드리안은 7써클의 깨달음을 얻었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성취한 것이다.
 덕분에 아드리안의 마법은 다른 마법과 상당히 달랐다. 마나를 배열하는 순서도, 시동어의 길이도 매우 짧았다.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인가를 따진 때문이다.
 아무튼 깨달음을 얻는 순간 아드리안은 신체가 재구성되는 기연을 만났다.
 덕분에 이십대 후반처럼 보이게 되었다.
 세상으로 나온 아드리안은 드래곤이 유희하듯 용병 등록을 하곤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청년을 발견하였다. 카이엔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알렉산더 폰 카이엔이 바로 그였다.
 아드리안은 그를 도와 카이엔 제국이 성립되도록 도왔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다.
 작위를 제수받으면서 봉토로 받은 나이젤의 영주 멀린 아드리안이라는 뜻이다.
 아드리안은 대공 또는 공작이 될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목숨을 세 번이나 구해냈다. 그것도 거의 죽을 뻔한 상황에서 구해낸 것이다.
 따라서 누가 뭐라 해도 가장 빛나는 전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평민 출신이라 후작에 머물렀다.
 그가 세운 공을 아는지라 황제는 거듭해서 대공, 또는 공작의 작위를 주려 했으나 그때마다 정중히 사양하였다.
 하여 제국엔 두 개의 공작가와 세 개의 후작가가 존재하게 되었다.
 계급상 공작이 후작보다 상위에 있다. 하나 어느 누구도 아드리안 후작의 비위를 거스르진 못했다.
 먼저 7써클에 이르러 똑같이 후작위를 제수받은 마탑주 헬리온 드 스타이발조차 멀린의 앞에선 설설 기었다.
 같은 7써클이라도 아드리안의 마법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독자적인 마법으로 일가를 이룬 결과이다.
 다시 말해 같은 7써클 마법이라도 헬리온에 비해 아드리안이 펼치는 것은 세 배의 위력을 보였다.
 미안해진 황제는 아드리안에게 반지 하나를 하사했다.
 제국에 대한 반역만 아니라면 어떠한 죄라도 사면받을 수 있는 절대사면 반지였다.
 이는 본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아드리안이 요구하면 누구든, 어떤 죄를 지었든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횟수의 제한도 없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효력이다.
 다시 말해 ‘제국의 모든 죄수를 풀어주시오’라고 요구하면 반역죄를 지은 자를 제외하곤 모두 풀어줘야 하는 것이다.
 이 반지는 후손, 또는 후계자에게 넘겨질 수 있으며, 카이엔 제국이 존재하는 한 영구한 효력을 지닌다.
 아무튼 아드리안은 봉토 나이젤로 돌아가 영지 개발에 힘쓰는 한편 상위 마법을 개발하기 위한 박차를 가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탑에는 7써클 이상의 마법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을 알게 된 뒤 아드리안은 헬리온에게 정중한 내용의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언제고 얼굴을 마주치는 날이 있으면 그날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이다.
 이것을 받고 헬리온 드 스타이발 후작은 무려 20년 동안이나 연구를 빌미로 마탑에 처박혀 있었다.
 걸리기만 하면 뼈도 못 추릴 게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피폐하고 낙후된 영지 나이젤을 위해 애쓰는 동안 이웃 영지의 카세리온 백작이 가족과 함께 방문하였다.
 이 당시 아드리안은 영지 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얻기 위한 아티팩트 제작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최대 50m쯤 몸을 피할 수 있게 하는 블링크 마법이 새겨진 반지가 있다.
 홀드 퍼슨(Hold Person) 마법이 새겨진 반지도 있다. 이것이 시전되면 대상은 약 5분 정도 발을 뗄 수 없게 된다.
 두 시간 정도 효력이 유지되는 아이스 포그(Ice Fog)를 만들어내는 목걸이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일정한 범위에 작은 폭발을 일으키는 파이어 버스트(Fire Burst)가 시전되는 마법검들을 제작하였다.
 주로 위급한 순간을 모면하도록 돕는 것들이 많았다.
 실제로 이것들은 흉포한 몬스터들을 만났을 때 도움이 된다. 하여 만드는 족족 비싼 가격에 팔려 나갔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주로 3써클 마법이 시전된다는 것이다.
 사실 드래곤을 만나지 않는 이상 이것보다 상위 마법은 별로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딱 하나, 고위 마법이 새겨진 반지를 제작한 바 있다.
 무려 8써클에 해당되는 앱솔루트 배리어를 다섯 번 발현시킬 수 있는 반지가 그것이다.
 이는 초대 황제의 생일날 아드리안이 선물로 만들어준 것이다. 현재 카이엔 제국 황실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아티팩트란 마법사가 아닌 사람이라도 특별한 마법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는 마법 기물을 뜻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투명 망토 역시 아티팩트이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반지 역시 아티팩트의 일종이다.
 어쨌거나 아드리안 후작이 만드는 아티팩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것들 가운데 하나를 살 겸, 부쩍 살기 좋아졌다는 나이젤 영지를 구경할 겸 카세리온 백작 일가가 방문한 것이다.
 백작에게는 혼기를 훌쩍 넘긴 딸이 하나 있었다.
 프리실라 에미앙 드 카세리온이 그녀이다.
 눈이 높아 웬만한 사내는 발톱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던 프리실라이지만 아드리안을 보곤 한눈에 반해 버렸다.
 키 크고 잘생긴데다, 돈도 잘 벌고 고위 귀족이다. 게다가 허우대 멀쩡하고 능력까지 있는 마법사이다.
 그러니 어찌 반하지 않겠는가!
 하나 겉모습만 20대이지 나이 130이 넘은 아드리안에게 있어 연애란 사치스럽고 거치적거리는 감정일 뿐이었다.
 하여 아무리 접근해도 넘어가지 않자 프리실라는 급기야 꾀를 냈다. 아버지 카세이론 백작과 멀린 후작이 마시는 술에 ‘실프의 눈물’이라는 최음제를 탄 것이다.
 사내끼리 마시는 술에 최음제가 섞여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게다가 카세리온 백작과의 관계는 돈독 그 자체이다.
 그날 아드리안은 술에 취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겼다. 물론 프리실라의 적극적인 유혹이 있었던 때문이다.
 카세리온 백작이야 부인과 같이 있었으니 별 탈 없었다.
 다음날 아침, 아드리안은 같은 침대에 있던 프리실라를 보고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둘은 결혼을 했다. 곧 임신을 하였고, 차례로 세 아들을 두어 단란한 한때를 보냈다. 일생 중 가장 행복한 때였다.
 영지 발전의 틀이 잡히자 아드리안은 다시 마법에 몰두하였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가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하나 집안일 때문에 자주 연구에 방해를 받았다.
 결국 성을 떠나 바세론 산맥의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갔다. 프리실라가 울며불며 말렸지만 그곳에서 딱 1년 간만 연구하고 오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었다.
 남편의 마법에 대한 열정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속에 머무는 동안 나이젤 영지에 전염병이 돌았다. 그 결과 프리실라와 두 아들을 잃었다.
 아들들도 마법을 익히긴 했으나 발병되면 하루 만에 죽음에 이르는 급성 전염병을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도 평화스런 시기였기에 이웃 영지의 공격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때이다. 하긴 누가 있어 대륙 최고의 대마법사가 다스리는 영지를 공격하겠는가!
 제아무리 기사가 많아도 8써클 마법 블레이즈 템페스트1)와 버금갈 파이어 스톰2) 한 방이면 대충 전장이 정리된다.
 그런데 아드리안은 이런 파이어 스톰을 연속해서 30회 이상 시전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도면 기사단 50개 정도는 찜 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드리안은 연구에 방해받지 않으려 통신 수정구를 가져가지 않았다.
 하여 프리실라와 두 아들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일 년 후, 하산한 아드리안은 아내와 아들의 무덤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어쩌겠는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은 이미 매장이 끝난 상태였다.
 한동안 시름에 잠겨 있던 아드리안은 다시 바세론 산맥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8써클이 아니라 죽은 아내와 아들들을 다시 살려내는 리절렉션3)을 익히는 것이 목표였다.
 이는 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10써클 마법이다.
 그리고 10써클은 인간이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다. 뿐만 아니라 마법의 조종이라 할 드래곤조차 이 수준에 올랐다는 기록이 없다.
 아드리안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익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병마에 시달리다 죽어버린 프리실라와 두 아들을 위해 남은 여생을 걸기로 한 것이다.
 아드리안은 큰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곤 급한 일이 있으면 알리라고 통신 수정구를 남기고 떠났다.
 20년이 지났다.
 각고의 노력 끝에 아드리안은 8써클을 거쳐 9써클에 도달하여 두 번의 신체 재구성이란 기연을 만났다.
 덕분에 이십대 초반의 용모를 갖게 되었다. 아울러 엘프도 부럽지 않을 긴 수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 10써클은 요원했다.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는 나날을 보내는 동안 낙담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숨을 쉬던 중 문득 기분 전환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하여 로브를 걸친 채 대륙을 활보해 보았다.
 그런데 한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재미가 없었다.
 드래곤을 제외하곤 아드리안을 쩔쩔매게 할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흑마법사 여럿을 작살냈다.
 스승이라면 스승인 브리앙 마법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를 물어 보이는 족족 죽여 버린 것이다.
 아드리안 덕분에 세상엔 흑마법사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99%쯤 제거한 탓이다.
 물론 그들의 마법서들 역시 모두 재가 되어버렸다.
 아무튼 그러던 중 천재적인 발상으로 게이트 오브 디멘션(Gate of Dimension)이란 마법의 공식을 완성시켰다.
 이는 다른 차원으로 오갈 수 있는 마법이다.
 그리하여 아드리안은 여러 차원을 두루 다녀보았다.
 그의 방문지 가운데에는 지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구 역사로 6세기 경이다.
 지구는 마나의 양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은 곳이다.
 하여 9써클 마법을 시전해도 겨우 4써클의 위력밖에 나지 않았다.
 그래도 4써클 이상은 써본 적이 없다. 그걸 사용하면 무적임은 물론이고, 신으로 추앙받게 됨을 알기 때문이다.
 하여 주로 1∼2써클 마법만을 사용하며 유람하였다.
 이때 사용했던 유희명이 바로 멀린이다.
 그러다가 카이엔과 비슷한 성품을 지닌 아더라는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건국된 나라가 영국이다.
 아더 역시 왕이 된 이후 카이엔처럼 작위를 주려 하였다. 하나 멀린은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음을 깨닫고 있었다.
 하여 카이엔 제국의 바세론 산맥으로 되돌아온 멀린은 심기일전하여 마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기존에 없던 새로운 마법들이 상당히 많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마법의 창시자쯤 된 것이다.
 그럼에도 10써클 리절렉션은 요원하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멀린은 두어 번 하산하여 세상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동안 나이 600이 되어 저술한 것이 이실리프이다.
 심혈을 기울였기에 이것을 만드는 데 30년 정도 걸렸다.
 이것을 만드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멀린은 자신의 마법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었다.
 어쨌거나 모든 작업을 마치고 나니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프리실라와 두 아들이 죽은 지 500년 가까이 되었다.
 따라서 이젠 리절렉션 마법이 완성된다 하더라도 이루려던 바를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뼈까지 진토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인간으로서의 욕구들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그의 나이 662세가 되었을 때 아드리안 후작가로부터 긴급한 연락이 왔다.
 
 * * *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 후작이 자리를 비운 동안 후작가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아드리안의 후손 가운데 하나가 드래곤 레어를 발견하면서 막대한 금은보화와 신병이기들을 얻은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인류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된 검신 라플로니안의 검법서를 얻었다.
 알고 보니 검신으로 추앙받은 라플로니안은 이미 마나의 품으로 돌아간 블랙 드래곤의 유희명이었다.
 멀린 아드리안 후작의 마법이 터무니없이 강한 이유는 극도의 효율성 때문이다.
 기존 마법과 달리 시전되는 마나의 배열이 지극히 간단명료하다. 다시 말해 현란한 수식어는 빼고 본론만 직접 말하는 것처럼 용건만 간단한 마법이 바로 멀린의 마법이다.
 그렇기에 적은 마나로도 시전되는 마법이 많고 위력이 강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아드리안가에 지극히 강력한 검법서까지 부가되었으니 어찌 발전하지 않겠는가!
 멀린이 아더와 지구를 유람하는 동안 카이엔 제국은 인근의 두 제국에 의해 침공을 받았다.
 라이셔 제국과 크로완 제국이 바로 그 나라들이다.
 그들이 연합하여 공격한 이유는 무역 불균형으로 인한 재정 손실 때문이었다.
 카이엔 제국은 비옥한 농토가 많아 곡물의 수확량이 엄청나다. 반면 라이샤 제국은 오래전 빙하가 땅거죽을 휩쓸고 지나가 농사에 적합하지 않다.
 크로완 제국의 경우는 한때 바다였던 땅이 융기한 곳인지라 염분이 많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태반이다.
 그러다 보니 식량이 부족하다.
 따라서 이들 두 나라는 매년 카이엔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곡물을 수입했다.
 이렇게 하여 자금이 풍부하여지니 카이엔 제국은 점점 번성했고, 문물도 발전되어 갔다.
 필요한 것은 거의 모두 자급자족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광산도 많아 필요한 자원은 국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수출은 있으되 수입은 없는 나라인 것이다.
 팔기만 하고 아무것도 사지 않으니 두 제국의 금은보화는 모두 카이엔 제국 쪽으로 흘러들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재화를 주느니 차라리 공격하여 농토를 반분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 두 제국의 뜻이었다.
 전화에 휩싸인 카이엔 제국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였다. 너무 오랜 태평성대를 지냈는지라 군사력이 약해진 탓이다.
 그냥 놔두면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당할 상황이었다.
 이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인물이 있었다. 아드리안 후작가의 가주 애버튼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 그이다.
 강력한 마법으로 수많은 전공을 쌓은 애버튼은 결정적인 순간 어쌔신의 공격으로부터 황제의 목숨을 구했다.
 뿐만 아니라 두 제국의 황태자를 생포하는 공을 세웠다.
 그 결과 전쟁은 끝났고, 라이셔와 크로완 제국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내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애버튼 아드리안이 전쟁을 끝낸 것이다.
 덕분에 후작가는 공작가로 승차되었다가 곧바로 대공가로 격상되는 경사를 맞았다.
 그래서 나이젤은 더 이상 카이엔 제국의 영지가 아니다.
 주변에 있던 다섯 개의 영지까지 흡수하여 아드리안 공국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제 아드리안 공국은 위로는 카이엔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좌측으로는 카이엔 제국으로부터 제후국 대우를 받는 미판테 왕국과 쿠르스 왕국을 두고 있다.
 남쪽과 동쪽은 바다와 접해 있다.
 어쨌거나 아드리안 공국은 주변 영지를 흡수한 덕에 웬만한 왕국과 크기가 비슷하다.
 
 아드리안의 수정구에 긴급 지원을 요청한 사람은 현재의 공왕인 아민 폰 아드리안이다.
 서쪽의 두 왕국과 남쪽 바다 건너에 있는 엘라이 왕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요청이다.
 아드리안 공국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카이엔 제국은 현재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또다시 무역 불균형으로 인한 두 제국과의 전쟁 중에 있기 때문이다.
 두 제국은 또다시 황태자들이 잡혀가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연합했다.
 아니면 돈이 없어 쫄딱 망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민 폰 아드리안 공왕은 1년 정도는 버틸 힘이 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 견뎌낼 수 없다고 하였다.
 전 같으면 한걸음에 달려가서 10써클에 버금갈 위력을 지닌 마법으로 침략군 전체를 전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도 사람이다.
 9써클 대마법사이지만 사람인 이상 늙으면 죽는 법.
 현재의 나이 662세이다.
 언데드의 군주인 리치라면 몰라도 마법사라 할지라도 사람이 살아 있을 나이는 결코 아니다.
 세 번의 신체 재구성으로 각기 200년의 수명 연장 효과를 보았지만 그 효력이 끝나가고 있다.
 그래서 20대의 외모가 점차 늙어가고 있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쇠약해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아드리안은 자신만의 공간인 바세론 산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레어에 각종 마법진을 그려놓았다.
 아직 못 이룬 10써클을 어떻게든 이뤄보려는 최후의 발악이라면 발악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후손이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레어 밖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체내의 마나가 흩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라면 아드리안 공국에 당도할 때쯤이면 한 줌 마나도 없는 평범한 노인이 될 것이다.
 이는 워프 마법을 실현시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현재로선 허울만 대마법사인 상황이다.
 마음만 급할 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으니 얼마나 다급한 심정이겠는가!
 프리실라와 두 아들이 병마에 고통받다 죽을 때에도 자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려는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이다.
 그런 기분을 알기에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일찌감치 마탑을 세우고 후배들을 양성했다면 그들에게 명령만 내리면 될 일이다.
 하나 아드리안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 성품이다. 그렇기에 단 하나의 제자도 없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제자를 키워 그로 하여금 위기를 모면케 할 방법도 없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만들어진 것이 현수의 눈앞에 툭 떨어졌던 것이다.
 아드리안은 통신을 받자 자신의 거처에 5써클 타임 딜레이(Time Delay) 마법을 걸었다.
 외부와의 시간 비가 180대 1이 되게 하는 마법이다.
 그렇게 하여 아드리안의 레어에서 6개월이 밖에서는 겨우 하루가 되었다.
 그리곤 심혈을 기울여 하나의 아티팩트를 만들어냈다.
 「전능의 팔찌[The Omnipotent Bracelet]」라 이름 붙인 바로 그것이다.
 
 * * *
 
 “흐아아암! 으응?”
 깊은 잠에서 깨어난 현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다 멈췄다. 꿈속의 내용이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이다.
 꿈을 꾸기는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그 내용을 기억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젯밤의 꿈은 생생하다 못해 현실처럼 느껴진다.
 “차암, 별일이네. 헉······! 이러다 늦겠다.”
 시계를 본 현수는 헐레벌떡 일어나 욕실로 갔다. 불과 10분 후 현수는 늘 그렇듯 아침을 굶은 채 출근길에 나섰다.
 현수가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은 전철역 근처이다.
 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눈에 번쩍 뜨이는 인물이 있다. 업무지원팀 강연희 대리이다.
 늘씬한 교구를 투피스로 감싼 그녀는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군중 속에서도 군계일학처럼 빛났다.
 그런 그녀가 곧장 현수 쪽으로 다가온다. 하긴 목적지가 같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 강 대리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어머, 김현수 씨군요. 호호, 휴가 갔다는 말 들었는데, 잘 다녀오셨어요?”
 “네에, 그냥 그렇게······.”
 “어디 좋은 데 다녀오셨어요?”
 나란히 걷게 되자 연희가 묻는다. 마땅히 할 말이 없어 의례적으로 묻는 물음일 것이다.
 “네에, 조금 답답해서 태백산맥 중 덕항산이란 곳을 다녀왔습니다.”
 “어머! 덕항산, 저도 그 산 알아요. 경치도 괜찮고 동굴도 여럿 있는 산이죠?”
 “네, 맞습니다.”
 “좋았겠어요. 아이, 부러워라.”
 “네······?”
 “피서철이 끝나서 사람들이 없었을 거 아니에요.”
 “네, 그렇죠.”
 “이번 휴가 때 전 친구들과 해운대엘 다녀왔는데 얼마나 사람들이 많던지······. 그래서 저도 내년부터는 휴가철 다 지난 다음에 휴가를 가려고 해요.”
 “아······. 그렇군요.”
 현수는 인파로 바글바글거리던 해운대를 촬영한 뉴스 장면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그 좋은 델 혼자 가시면 어떻게 해요?”
 “네······?”
 “호호, 현수 씨, 다음 주에도 덕항산 어때요? 말 나온 김에 거기 한번 또 가고 싶은데······.”
 강 대리는 자신 때문에 현수가 박진영 대리로부터 어떤 견제를 받았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이다.
 아무튼 가지런하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환히 웃는 미인의 청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현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해맑은 미소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내심 혀를 찼다.
 ‘헐······! 내가 원래 이렇게 마음이 약했나? 제길,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까지 들었는데, 쩝. 근데 내가 어디가 어때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되게 기분 나쁜 말이네. 제기랄!’
 현수는 느물느물한 표정을 짓던 박 대리의 얼굴이 떠오르자 입맛이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 대리가 입을 연다.
 “호호, 그럼 우리 언제 출발해요? 덕항산은 멀어서 당일치기는 조금 그런데······. 토요일에 출발했다가 일요일에 올까요? 아님 아예 금요일 밤에 출발할까요?”
 말을 마치는 순간 바람이 불어 생머리가 흩날리자 향긋한 샴푸 냄새가 풍긴다.
 현수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향기가 좋아서이기도 하다. 하나 뇌를 때리는 충격적인 상념 때문이다.
 
 
 4장 꿈속에서 마법 익히기
 
 
 ‘뭐야? 난 남자로도 치지 않는다는 거야? 헐······!’
 남자와 단둘이 숙박하는 여행을 가자는 말을 너무도 서슴없이 한다. 하여 강 대리의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이런 심사를 짐작한다는 듯 생긋 웃음 짓는다.
 “왜요? 가서 자고 오자고 하니까 이상해요?”
 “네······? 아, 아니에요.”
 “호호, 전 김현수 씨를 믿어요. 절대 늑대로 돌변하거나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요. 그러니 가서 자고 와도 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설마 현수 씨도 늑대로 변하거나 그래요?”
 “네에? 아, 아니요. 제가 그럴 리가요. 하하, 저 이래 봬도 참 순진한 늑대, 아니, 참 착한 사람입니다. 절대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그죠? 호호, 거 봐요. 제가 사람 하난 잘 보거든요. 김현수 씬 역시 믿음직스럽고 신뢰가 가는 사람이에요.”
 ‘뭐야? 좋은 대학 나온 걸로 아는데 어휘력이 이것밖에 안 되나? 믿음직스럽다는 거나 신뢰가 간다는 거나 그게 그거 아닌가?’
 현수의 표정을 본 강 대리가 한마디한다.
 “어머나······! 어떻게 해요? 말이 빠져서 그만 이빨이 헛나왔네요. 호호호! 조크였어요.”
 “끄으응······!”
 어르고 뺨을 친다는 느낌이다.
 현수는 희롱당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 밝게 웃는 미인의 얼굴은 그런 걸 싹 잊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호호! 생각해 보니 금요일 저녁이 좋을 거 같아요. 제 차로 가요. 운전은 김현수 씨가 해주실 거죠?”
 강 대리는 빨간색 경차가 있다. 그럼에도 주차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전철을 타고 출퇴근한다.
 그걸 이용하려면 금요일에 같이 퇴근해야 한다. 그리곤 강 대리의 짐을 싣고 자신의 집으로 간다.
 거기서 산행을 위한 자신의 짐을 싣고 출발하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 강 대리가 또 묻는다.
 “그럼 우리 약속된 거죠?”
 “네, 그, 그럼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말을 하는 동안 회사에 당도한 둘은 가벼운 시선 교환으로 주말 약속을 확정 짓고는 각자의 자리로 갔다.
 곽 대리는 휴가를 마치고 온 현수를 위해 상당히 많은 일감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하여 하루 종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이 업체 저 업체를 방문해야만 했다.
 
 * * *
 
 “어휴! 피곤해.”
 문을 열고 들어선 현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하게 냉각된 캔 맥주가 보인다.
 원래는 물을 마시려 했는데 금방 마음이 바뀐다.
 딱 !
 꿀꺽! 꿀꺽!
 “캬아아! 시원하다. 아흠, 이제야 살 것 같네. 휴우!”
 오늘 하루 몹시도 더웠다.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무더워 세상이 사우나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 밀고 당기기를 했다. 그래서 몹시 지친 느낌이다.
 며칠 쉬었다 와서 그러는지 더 피곤한 것 같다.
 누우면 바로 잠들 것만 같은 피곤함에 도착 즉시 씻지도 말고 자야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 목구멍을 통과하자 모든 시름이 날아가는 느낌이다.
 또한 하루의 노고가 단번에 풀리는 느낌이다.
 옷을 갈아입고 찬물로 샤워했다.
 그러는 동안 콧노래를 불렀다.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 강 대리와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오늘 저녁 식사는 곽 대리의 일장 훈시를 들으며 돼지갈비로 때웠으니 더 먹을 것은 없다.
 현수는 컴퓨터 전원 스위치를 누르고는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아냈다.
 “흐음, 어디 보자.”
 컴퓨터가 부팅되자 현수는 가장 먼저 증시 현황을 살폈다.
 취직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받은 월급의 50%는 반드시 미래를 위해 투자하라고 충고하셨다.
 그리고 나머지 50%로 살아보라 하였다. 아직 당신이 돈을 벌고 있으니 효도 자금은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하나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현수는 수령액의 20% 정도를 효도 자금으로 송금한다.
 남은 30%로 생활비와 제세공과금을 내고, 그래도 남는 돈을 용돈으로 충당하고 있다.
 물론 쥐꼬리만큼 남는다.
 따라서 비싼 술집에선 제 돈 내곤 술 마실 수 없다. 두어 번만 마셔도 한 달 용돈이 후딱 날아가기 때문이다.
 대신 마트에서 캔 맥주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둔다. 이러면 좋은 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
 술집보다 대형 할인마트에서 사는 게 훨씬 싸지 않은가!
 둘째, 마시고 싶으면 아무 때나 마실 수 있다.
 냉장고 문 열 기운만 있으면 된다.
 셋째, 귀찮게 슈퍼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비가 쏟아지는 밤, 팬티 바람으로 있다가 갑작스레 술 생각이 날 때가 있다.
 하여 벗어놨던 옷 전부 다시 걸치고 슬리퍼 직직 끌면서 슈퍼를 가본 사람들만 이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잘 안다.
 올 땐 왜 그렇게 비닐봉지에 담긴 맥주가 무거운지 손가락도 아프다.
 “이런 빌어먹을······! 왜 또 내 거만 떨어진 거야?”
 요즘 코스피 지수는 매일 조금씩 오른다. 그런데 현수가 유망하다 판단하여 사들이는 종목들은 반대로 떨어지고 있다.
 하여 누군가의 조언대로 아주 견실한 기업, 그러니까 망하고 싶어도 쉽게 망할 수 없는 거대 기업의 주식을 사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들이고 나면 오르던 주가가 떨어진다.
 그러다 원금마저 날릴까 싶어 매도하고 다른 종목을 사면 팔았던 것들이 상한가로 치솟는다.
 그럴 때마다 열을 받는다.
 하여 주식을 때려치우려는 마음을 여러 번 먹었다.
 하나 어디서 고수익을 올리겠는가!
 은행 예금 금리는 물가 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은행에 돈을 저금해 놓으면 이자가 붙기는 하지만 그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그렇다 하여 선물거래를 할 수도 없다. 거래를 위한 증거금만 1,500만 원이 필요한데 그만한 돈이 없기 때문이다.
 “에이, 이걸 확 팔아, 말아? 그냥 팔까? 아냐. 팔고 나면 또 상한가를 칠지도 몰라. 마음 같아서는 확 팔아버리고 싶지만 징크스가 있어서 참는다. 알았어?”
 현수는 모니터 화면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기저기 웹서핑을 하다가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었다.
 이제 눈을 좀 붙여야 한다. 그래야 내일 하루를 버틸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강 정리를 마친 현수는 침대에 누워 얇은 이불을 덮었다. 그리곤 고요히 눈을 감는다.
 그때 문득 드는 상념이 있었다.
 “살기 위해서 회사를 다니는 거야, 아님 회사를 다니기 위해 사는 거야? 아! 증말 싫다. 목구멍이 포도청만 아니면 확 때려치우는데. 에이, 쓰버럴! 잠이나 자자.”
 눈을 감은 현수는 불과 3분 만에 잠이 들었다. 참 건강한 청년이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사람은 손끝이나 발끝을 통해 열을 방산하는 시스템이 작동되면 체내의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서서히 졸리게 된다. 그러다 잠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냉한 체질인 사람, 다시 말해 손끝이나 발끝이 차가운 사람들은 열을 방산하기 어렵기 때문에 불면증에 걸리기 쉬운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정상적이다. 그렇기에 잠이 들면서 서서히 체온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약 1도 정도 체온이 내려가자 왼쪽 손목 부위에 낮엔 보이지 않던 팔찌 비슷한 것이 나타났다.
 은백색인 이것엔 아홉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중 두 구멍엔 붉고 검은 보석이 각각 박혀 있다.
 “인연자여! 이계의 인연자여!”
 “으응? 누구? 아! 멀린 대마법사님이시군요.”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청했고, 자네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하였네. 안 그런가?”
 “네, 그랬습니다. 도와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맙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나.”
 “네, 알겠습니다.”
 “자네 혹시 마나를 아는가?”
 “마나요? 혹시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그 마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자네가 말하는 판타지 소설이라는 것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마나는 마법의 근원이 되는 것이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건 제가 아는 겁니다.”
 현수는 심심할 때 읽었던 판타지 소설들을 떠올리고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멀린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그럼 이제부터 자네에게 마나심법을 가르쳐 주겠네. 내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하게.”
 “네? 마나심법이요? 알겠습니다.”
 대답은 이렇게 하였지만 현수는 내심 웃었다.
 ‘헐! 요즘엔 꿈도 연속극처럼 꾸는군. 그나저나 이거 재밌다. 이걸 확 소설로 써봐? 요즘 작가 되기 쉬운 세상이라고 했는데. 하여간 잘 들어보자.’
 “마법이란 우주의 근원으로부터······.”
 멀린의 설명이 이어졌다. 모든 설명이 끝난 후 현수는 멀린이 시키는 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곤 가르쳐 주는 대로 마나를 느끼기 위해 애를 썼다. 하나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이런 현수를 바라보던 멀린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곤 손가락을 튕기며 무언가 주문 비슷한 것을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현수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팔찌의 검은 보석에서 빛이 났다.
 그 순간 현수는 명문혈로부터 척추를 따라 무언가가 찌르르한 느낌을 주면서 몸 전체로 번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깜짝 놀라 눈을 뜨려는 순간 멀린의 제지가 있었다. 그리곤 또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매일 밤 잠이 들면 멀린이 꿈에 나타났다.
 그리곤 마나심법이 능숙해지도록 자세도 교정해 주고 자세한 설명도 하는 나날이 지났다.
 현수는 나날이 재미있었다. 밤마다 한바탕 연속극이 방영되는데 어찌 재미있지 않겠는가!
 전에는 꿈을 꾸고 나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는데 이번엔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하여 가끔 A4 용지에 지난밤에 배웠던 것들을 끼적거려 보기도 했다.
 써놓고 나면 그럴듯하다. 하여 꿈치고는 참 대단한 꿈을 꾸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이어지는 꿈의 내용에 매우 신기해했다.
 어쨌거나 현수는 하룻밤 자고 일어난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꿈속과 현실 사이에 시간차가 있기 때문이다.
 현수의 하룻밤 꿈은 실제 시간으로 따지면 약 50일에 해당된다. 꿈속에 타임 딜레이 마법을 건 것이다.
 멀린이 이 방법을 취한 것은 현수가 실제 마법을 익히려 할 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멀린은 지구를 방문한 적이 있기에 마나가 매우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현수가 1써클을 이루는 데 걸리는 시간을 최하 1년으로 잡았다. 만약 재능이 없다면 3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시간을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특단의 조치로 꿈속의 시간을 조절하는 타임 딜레이 인 드림(Time Delay in Dream) 마법을 건 것이다.
 이는 온 우주를 통틀어 오로지 멀린만이 시전할 수 있는 신개념 마법이다.
 어쨌거나 시간이 흘러 예정대로 9월 14일부터 16일까지 강연희 대리와 덕항산 산행을 다녀왔다.
 이틀을 자고 일요일에 귀경했는데, 물론 각기 다른 방에서 잠이 들었다. 여행 중에도 연속극은 이어졌다.
 마지막 날 밤, 드디어 써클 형성에 성공했다. 현수가 지구엔 단 한 명도 없는 1써클 마법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현수는 자신의 팔목에 채워진 팔찌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전능의 팔찌는 평상시엔 보이지 않지만 팔뚝에 마나를 모으면 눈에 보이게 된다.
 은백색인 이것엔 현재 두 개의 보석이 박혀 있다.
 빨간 것은 통역 마법이 구현되도록 하는 마법진에 마나를 공급해 주는 최상급 마나석이다. 그래서 현수가 멀린과 아무런 장애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일반적으로 언어를 익혀 대화를 시도했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어찌 며칠 배운 언어로 심오한 내용이 담긴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검은 보석은 마나가 희박한 곳에서도 마나를 느낄 수 있도록 돕는 한편 1써클 통역 마법인 랭귀지 인터프리테이션이 원활히 발휘되도록 마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이제 우주인과도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 일곱 개의 구멍과 상성이 맞는 보석처럼 생긴 최상급 마나석은 따로 준비되어 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선 먼저 1써클을 이뤄야 한다.
 최소한 1써클이 되어야 전능의 팔찌에 걸려 있는 아공간을 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1써클 마나만으로도 열 수 있는 아공간은 6써클 마법 크리에이트 스페이스(Create Space)로 만든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최소 6써클은 넘어야 이것을 사용할 수 있지만 특별히 1써클로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했다.
 강제로 공간을 왜곡시켜 만든 이것의 크기는 마차 열 대 분량의 물품을 넣을 수 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어쨌거나 이것의 안쪽엔 여러 물품이 넣어져 있다.
 보존 마법이 걸려 1,000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음식과 물이 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굶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카이엔 제국에서 사용하는 금화와 은화들이 있다. 그리고 작지만 길쭉한 상자 하나가 있다.
 이것엔 일곱 개의 보석이 담겨 있다.
 그중 노란색은 하부 지름이 약 1㎝ 정도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전능의 팔찌에 끼우면 또 다른 아공간을 열 수 있게 된다.
 9써클 마법 크리에이트 코스모스(Create Cosmos)로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진 아공간이 그것이다.
 규모를 가늠하자면 약 20만㎦ 정도 된다. 이것은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체를 1㎞ 깊이로 파낸 것과 같다.
 실로 광대하며 광활한 크기의 공간이다.
 이것의 안에는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우선 멀린이 저술한 희대의 역작이자 인세에 없었던 절세의 마법서 「이실리프(Yisilipe)」가 있다.
 이것의 표지엔 허락된 자만 펼쳐 볼 수 있다는 경고문이 쓰여 있다. 또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다.
 물에 젖지도 않고 불속에 넣어도 타지 않는다. 당연히 물리적인 훼손이 불가능하다.
 금강석보다도 더한 경도가 부여된 때문이다.
 만일 허가를 받지 않은 자가 이것을 강제로 열려고 하면 라이트닝 퍼니쉬먼트(Lightning Punishment)가 발현된다.
 이것은 9써클 궁극 마법이다.
 온 우주를 통틀어 어느 누구도 결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초강력 살상 마법이다.
 설사 폴리모프를 풀고 본신으로 돌아간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무방비라면 라이트닝 퍼니쉬먼트를 비켜가진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발현되면 이실리프로부터 100m 내의 모든 존재는 소멸된다. 좁은 공간 속에서 수만 번이나 벼락이 치는데 어찌 생물체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뭣도 모르고 이실리프에 손을 대는 순간 본인은 물론이고 동료들까지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쨌거나 거대한 아공간 속에는 금화, 은화는 물론 각종 보석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다.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등등이 그것이다.
 양으로 따지자면 각각 실중량 800㎏을 담을 수 있는 곡물 자루로 하나 가득이다.
 멀린이 9써클을 이루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바세론 산맥 한 귀퉁이에서 대량의 마나 발산 현상이 벌어졌다.
 에이션트 급 드래곤 하나가 마나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흥미를 느낀 멀린은 즉시 그의 레어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양의 보물을 얻은 것이다. 게다가 적은 양이지만 미스릴4) 괴, 아다만티움5) 괴, 오리하르콘6) 괴까지 생겼다.
 뿐만이 아니다. 레어엔 많은 서적도 있었다.
 그 덕에 아공간에 약 5,000여 권의 서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들 대부분은 마법과 관련된 참고 서적들이다. 물론 마법과 관련되지 않은 것들도 있다.
 카이엔 제국의 풍습이 기록된 서적, 몬스터 도감, 각종 도구 제조법 등이 그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이계의 문자 및 역사, 그리고 자연 환경이 기록된 것도 상당수이다.
 현수를 이계에 빨리 적응시키기 위한 배려이다.
 서적 가운데 약 200여 권은 마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6써클 이상의 마법서들이다.
 대부분 드래곤 레어에서 얻었지만 그중 열세 권은 아니다.
 이것들은 6써클과 7써클 마법서로, 용서를 비는 뜻으로 영광의 마탑 탑주인 헬리온 드 스타이발 후작이 자발적으로 바친 것이다.
 아니었다면 영광의 마탑은 오래전에 붕괴되었을 것이다. 멀린은 은(恩)과 원(怨)이 분명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아공간엔 이것 말고도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그중 가치를 따지기 힘들 정도로 귀한 것들이 있다.
 그것은 마법진 발현 등에 꼭 필요한 마나석이다.
 최상급이 127개, 상급은 854개, 중급은 3,625개나 있다.
 하급은 아예 가마니로 일곱 개 분량이나 있다. 멀린이 유희하는 동안 제거한 흑마법사들이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다.
 아무튼 전능의 팔찌에는 아홉 개의 구멍이 있다.
 그중 빨강은 통역 마법을 구현시키는 것이고, 검정은 마나 공급의 효능이 있다.
 노랑은 1써클로도 아공간을 열 수 있는 마법이 발현되는 마법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주황은 멀린이 만든 5써클 마법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Perfect Transparency) 마법진 위에 박히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인비저빌러티(Invisibility) 마법과는 차원이 다르다.
 은신 마법인 인비저빌러티는 보이지만 않을 뿐 기척까지 숨길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체취나 심장의 박동 소리 같은 건 감출 수 없다.
 하나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는 이름 그대로 퍼펙트하다. 숨소리는 물론이고 심장의 박동 소리마저 감출 수 있다.
 5써클 마법이지만 6써클 마법사까지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7써클 마법사라 할지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만 들 뿐이다.
 8써클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지만 미미한 마나의 파동으로 뭔가 확실히 있다고 느낀다.
 다만 9써클 마법사 앞에선 정체를 숨길 수 없다.
 하지만 물속에서 이를 시전하면 9써클 마법사는 물론이고 드래곤이라도 알아채지 못한다.
 문제는 물속에 마냥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초록색 보석은 9써클 마법인 트랜스퍼 디멘션(Transfer Dimension) 마법진 위에 자리 잡게 된다.
 현수를 이계로 불러들이기 위한 차원 이동 마법이다.
 한 번 이동할 때마다 초록색 보석이 가진 마나뿐만 아니라 추가로 최상급 마나석 두 개에 담긴 마나가 모두 소진되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최상급 마나석 세 개에 담긴 마나가 있어야 차원 이동이 가능하다.
 팔찌의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차원 이동을 위해 전능의 팔찌는 표면 거의 전부를 제공해야 했다.
 차원 이동의 확실성과 안전을 위해 수백 개의 마법진이 중첩되어 그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능의 팔찌를 착용한 현수 이외엔 차원 이동이 불가능하다.
 물론 임신을 했을 경우엔 태아까지 가능하지만 현수는 남자이다. 따라서 단 한 명만 차원 이동이 허락되는 것이다.
 이는 이계에 혼란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원 이동 마법이 결코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 이상을 차원 이동시킬 경우 자칫 육체가 융합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이것을 극복할 만한 마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현재 현수의 눈에 보이는 선들은 실제론 선이 아니다. 정교하게 새겨진 룬 문자들이 여러 행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이를 그려 넣기 위해 멀린은 4써클 블로우 업 인라지(Blow up Enlarge) 마법을 걸고 문자를 새겨 넣었다.
 다른 마법사들의 인라지는 1대 10이 보통이다.
 늘 이것을 시전하여 아주 숙달된 마법사의 경우에도 최고가 1대 50이다.
 하나 멀린의 마법답게 4써클 마법이지만 기존 인라지와는 차원이 다른 1대 500까지 실현된다.
 이런 상태로 해놓고 룬 문자로 이루어진 마법진들을 정교하게 새겨 넣은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차원 이동을 위한 팔찌는 거의 승용차 크기 정도가 되었어야 할 것이다.
 파란색 보석은 타임 딜레이 마법진 위에 자리 잡혀야 한다. 이것이 발현되면 시간의 흐름이 느려져 1대 180이 된다.
 밖에서의 하루가 안에서는 6개월이다.
 이 마법의 특징은 배리어 안에서만 작동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정 공간이 마나로 완전히 격리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남색 보석이 박힐 구멍 아래엔 6써클 앱솔루트 배리어(Absolute Barrier)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글자 그대로 완전한 보호 장벽이 발현되는 마법진이다.
 이것은 6써클 마법이지만 8써클 헬 파이어 마법으로도 손상시킬 수 없다.
 물론 멀린의 탁월한 마나 배열 덕분이다.
 이것은 본래 타임 딜레이나 패스트 타임 마법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마법사들의 앱솔루트 배리어에 비해 보호하는 반경이 매우 크다.
 전능의 팔찌를 기준으로 반경 7m까지 장벽이 펼쳐진다.
 넓이로 환산하면 153.86㎡(46.5평)이다. 부피는 약 720㎥이다. 32평 아파트 2층 부피보다도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마법사들의 배리어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다. 물론 멀린이 만든 것이라 그렇다.
 이것의 단점은 마나를 많이 요구한다는 것이다.
 보라색 보석은 타임 딜레이와는 반대되는 패스트 타임(Fast Time) 마법진이 발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마법이 발현되면 시간의 흐름이 빨라진다. 그 비율은 180대 1로 하루 동안 6개월이란 세월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마나로 경계된 안과 밖의 시간이 달리 흐르는 동안 시전자만은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물론 전능의 팔찌 덕이다.
 일곱 개의 무지갯빛 보석들이 박히는 자리 다음엔 두 개의 검은색 보석이 박힌다.
 이것들은 차원 이동 마법인 디멘션 트랜스퍼가 발현될 때 마나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한다.
 어쨌거나 전능의 팔찌에 박힌 보석의 색깔들이 이처럼 다양한 이유는 모양 때문이 아니다. 각각이 발현시킬 마법과 가장 상성이 잘 맞는 것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것들이 가진 마나가 마법진에 공급되는 순간 해당 마법이 구현된다. 그렇기에 평상시엔 접촉이 되어 있지 않다.
 현수가 손으로 마나석을 누르거나 해당 마나석에 마나를 집중시키면 그때 마법이 발현된다.
 현수는 마나를 한 군데 집중시키는 것이 아직 익숙지 않기에 현재로선 손을 대어야 마법이 시행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능의 팔찌 안쪽에도 몇 개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팔찌의 주인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첫째는 컴플리트 힐(Complete Heal) 마법진이다.
 멀린이 아더의 칼 엑스칼리버의 검집에 새겨준 것과 같다. 따라서 상처를 입으면 별다른 조치가 없어도 저절로 아물게 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단, 신체의 일부가 잘리는 경우는 예외이다.
 다시 말해 컴플리트 힐 마법이 시전되더라도 잘라져 나간 부분이 없으면 붙일 수 없다.
 목이 잘리는 경우는 그냥 죽는다.
 둘째는 오토 워프(Auto Warp) 마법진이다.
 팔찌의 주인이 위기를 당해 의식을 잃는 순간 바세론 산맥에 위치한 멀린의 레어로 되돌아오게 하는 기능이 있다.
 만일 팔찌의 주인이 7써클 이상을 이루게 하면 귀착점 좌표를 수정함으로써 원하는 곳으로 장소를 변경할 수 있다.
 셋째는 오토 리차지(Auto Recharge) 마법진이다.
 전능의 팔찌에 있는 마나석들의 마나량이 줄어들면 저절로 충전하게 하는 기능이다.
 넷째는 브레인 리프레쉬(Brain Refresh) 마법진이다.
 팔찌 주인의 뇌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기능이다.
 다시 말해 똑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는 팔찌의 주인이 마법을 빨리 익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배려된 것이다.
 전능의 팔찌가 가진 다양한 기능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빨강:통역 마법(모든 언어 통역).
 주황:투명 은신 마법(안 보이게 숨을 때 사용).
 노랑:1써클에 열리는 아공간(속에 아공간 또 있음).
 초록:차원 이동 마법(지구―카이엔 제국 이동 가능).
 파랑:타임 딜레이 마법(시간을 느리게).
 남색:앱솔루트 배리어 마법(완전한 보호 장벽).
 보라:패스트 타임 마법(시간을 빠르게).
 검정1:차원 이동 시 마나 공급.
 검정2:차원 이동 시 마나 공급.
 컴플리트 힐(Complete Heal):상처 자동 치료.
 오토 워프(Auto Warp):기절하면 이동.
 오토 리차지(Auto Recharge):마나석 자동 충전.
 브레인 리프레쉬(Brain Refresh):현수의 두뇌를 똑똑하게.
 
 현수는 1써클이 된 후 가장 먼저 아공간을 열어보았다. 대체 무엇이 들었을지 진짜 궁금했던 것이다.
 우선 가르쳐 준 대로 음식을 생각하고 손을 넣어보았다. 문득 배고픔을 느낀 때문이다.
 멀린의 말대로 무언가가 집힌다. 꺼내보니 어떤 짐승의 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익힌 것이다.
 “우와! 이건··· 오리지널 바비큐? 후와, 맛있겠다! 킁킁! 킁킁! 으윽! 근데 냄새가 왜 이래?”
 무의식적으로 냄새를 맡아보았는데 웅취(雄臭)가 난다.
 웅취란 고환이라고도 하는 불알이 있는 수컷의 고기에서 나는 냄새이다. 현대인들이 먹기엔 역한 냄새이다.
 그래서 수소나 수퇘지는 어릴 때 거세를 한다.
 가늘지만 탄력이 좋은 고무줄로 불알의 상부를 조여 놓는다. 그러면 혈관을 통한 산소와 영양분의 공급이 중단되어 결국엔 시커멓게 변했다가 떨어져 나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생식 능력을 잃는다.
 이런 조치를 취해 사육한 수소나 수퇘지의 고기는 웅취의 대부분이 사라진다. 그럼에도 수컷 특유의 냄새가 남아 있어서 사람들은 후춧가루나 녹차 가루 같은 걸 사용한다.
 또는 각종 양념으로 이 냄새를 가리는 조리법을 쓴다.
 
 
 5장 전능의 팔찌
 
 
 현수는 21세기 한국인이다.
 따라서 이런 것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향신료 없는 옛날 방식으로 익힌 고기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러니 순간적으로 역한 기분이 들어 얼른 코를 떼었다.
 처음 보았을 때 먹음직스러워 느꼈던 배고픔은 어느샌가 사라져 버렸다. 토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어휴! 저런 걸 어떻게 먹지? 카이엔 제국이라는 데로 가 음식이 전부 저렇다면 문제인데······. 할 수 없군. 돈이 좀 들어도 후추나 녹차 가루 같은 것들을 종류별로 구해놓아야겠어.”
 나직이 중얼거린 현수는 이번엔 금화를 떠올리며 손을 넣었다. 무언가 딱딱한 것 한 무더기가 잡힌다.
 “이건··· 진짜 금일까?”
 현수가 꺼낸 것은 직경 6㎝, 두께 0.4㎝ 정도 되는 묵직한 주화이다. 이것의 부피는 11.34㎤이다.
 그런데 금의 비중은 0.0518㎤/g이다. 따라서 이 조그만 것의 무게가 무려 218.22g이다.
 이러니 묵직한 기분이 든 것이다.
 현재 3.75g당 약 20만 원 정도 하니 한 개의 가치가 약 1,160만 원이나 된다.
 현수는 현재 1군 건설사의 대졸 신입사원이다.
 업무 특성상 늘 밖으로 나돌아 다녀야 하지만 내근 직으로 분류되어 있다.
 하여 현장 직에 비해 약간 적은 연봉 4,000만 원이다.
 일 년에 400% 보너스가 나오는 월급쟁이로 환산해 보면 월급이 250만 원 정도 되는 셈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아침 7시쯤 출근길에 나서서 밤 10시는 되어야 퇴근한다.
 그나마 요즘 조금 상황이 좋아져 주말마다 쉬지만 9월 중순 이후부터는 주말이란 게 없을 것이다.
 월화수목금금금, 그리고 또 월화수목금금금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다 진짜 어쩌다 하루 쉬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고참들은 연말까지 한 달에 하루 쉬면 성공이라고 했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그야말로 개처럼 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1년 동안 버는 돈이 손에 들린 것과 같은 금화 네 개의 가치보다도 적다.
 아무튼 조금 전 아공간에 손에 넣었을 때 이런 금화가 적어도 100개는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다 팔면 11억 6천 정도 될 것이다.
 현재의 급여라면 29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저축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거금이다.
 “아! 이거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현수는 자신이 꿈꾸고 있는 것으로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하긴··· 꿈이니까 이런 게 내 손에 잡히지, 현실 같으면 이런 걸 구경이나 하겠어?”
 현수는 자조적인 심정으로 금화를 뒤집어가며 이리저리 살폈다.
 카이엔 제국의 상징인 듯한 나무 잎사귀 사이로 한 자루 장검과 마법사의 스태프가 교차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근데 이거 진짜 금일까? 이익!”
 이빨 사이에 끼고 씹어보았다.
 “헉······! 진짜잖아?”
 금화엔 뚜렷한 이빨 자국이 났다. 진짜 순금으로 만든 것인 듯하다.
 “제길, 꿈이 아니라면 이걸 팔면 좋을 텐데. 두 개만 가져가도 일 년은 충분히 먹고살 수 있으니.”
 나직이 투덜거린 현수는 다시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이번엔 은화를 떠올린 것이다.
 “크기는 비슷하네.”
 새로 주조한 듯 깨끗해 보이는 은화 역시 금화와 크기가 비슷했다. 하지만 무게는 금화에 비해 현저히 가벼웠다.
 그도 그럴 것이, 금은 비중이 0.0518㎤/g이지만 은(銀)은 0.0952㎤/g이다. 따라서 부피는 같지만 무게는 절반에 가까운 118g쯤 된다.
 “가만, 은도 요즘 값이 엄청 올랐다고 하던데, 이걸 팔면 얼마나 받을까?”
 시세대로 하면 은화 하나당 가격은 18만 원쯤 된다.
 “근데 이건 몇 개나 들었지?”
 아공간에 손을 넣어 대충 헤아려 본 현수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은화는 1,000개 정도 있다. 그렇다면 1억 8천만 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꿈이라는 것이 또 떠올랐다.
 “제기랄! 이건 그림의 떡, 아니, 꿈속의 보물이군. 그나저나 전능의 팔찌에 끼울 보석함이 있다고 했지?”
 손을 넣으며 이번엔 길쭉한 보석함을 떠올렸다.
 곧 부드러운 벨벳 같은 천으로 싸인 것이 손에 잡힌다.
 “우와아! 이건 뭐··· 예술이군!”
 뚜껑을 연 현수는 감탄사를 먼저 토했다.
 영롱하게 빛나는 여러 색깔 보석이 눈에 뜨인 때문이다.
 아홉 개의 구멍이 있는데 빨주노초파남보, 검정, 검정으로 채워 넣게 되어 있다.
 현재는 맨 위의 것과 맨 아래만 비어 있다.
 “주황과 노랑은 잘 모르겠는데 이건 사파이어고, 이건 에메랄드인 건가?”
 초록과 파란 보석을 부드럽게 만져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색깔은 그것들과 비슷하다. 하나 이것들은 단순한 보석이 아니다.
 최상급 가운데에서도 특급에 해당되는 마나석을 솜씨 좋은 드워프 장인들이 온 정성을 다해 깎아내고 연마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일단 이걸 끼우라고 했지?”
 현수는 조심스런 손길로 보석들을 꺼내 전능의 팔찌에 끼웠다. 접착제도 없건만 가까이 대는 것만으로도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갔다.
 혹시 빠질까 싶어 뽑아내려 하였으나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우와! 이건 진짜 멋있네! 예술이다, 예술이야!”
 각종 보석이 박혀 영롱한 빛을 내고 있는데 그 사이사이에 새겨진 문양에 빛이 스며들자 환상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현수는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며 전능의 팔찌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이때 멀린의 음성이 들린다.
 “아공간을 열어 전능의 팔찌를 완성시켰군. 1써클을 이룬 걸 경하하네. 그간 애 썼네. 하지만 지금부터는 더 열심히 마법을 연마해야 하네. 그리하여 속히 5써클에 이르게. 그래야 자네가 나를 도울 수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지요. 근데 어디에 계십니까? 목소리는 들리는데 이젠 모습이 뵈질 않습니다. 혹시 투명 은신 마법을 쓰셨습니까?”
 “아니네. 이건 채널 어브 디멘션이란 마법으로 차원 간 통신이 가능하게 해주는 마법이네.”
 “아! 그렇군요. 대단하십니다. 차원 간의 통신을 실현시키시다니······.”
 “자네도 9써클 마스터에 이르면 가능하네.”
 “어휴! 제가 언제 그렇게 되겠습니까?”
 “뭐든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되지. 안 그런가?”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앞으론 하루 종일 오로지 마법에만 매달려야 하는데 가능한가?”
 “매일 밤 꿈에서 연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꿈······? 자넨 나와의 대화가 단순한 꿈이라 생각하나?”
 “제가 멀린 대마법사님을 만나는 거 자체가 꿈 아닙니까?”

댓글(22)

반길    
설정집 읽는 느낌인데 편수가 워낙 많으니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ㅋㅋㅋ
2018.02.15 15:13
낭만달봉    
자꾸 옆길로 새는 느낌 ...
2018.10.30 07:10
천개의가면    
참 쓸데없는 데서 별 의미 없는 설명만 늘어 놓았다.
2019.02.14 03:39
n1***************    
역겹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양만 채울려고 글쓰네. 초등학생 독후감보다 못한글
2019.02.15 15:22
(후기)    
이게 겁나 예전건데 오랜만에보내
2019.11.09 04:52
gu*********    
예전에 탄방동에 계시던분이였나....? 맞으면 한번 뵙고싶네용
2021.02.23 11:08
두개의날개    
인류역사상 두번 다시 나오기 힘든 최악의 시궁창 쓰레기 소설... 도저히 사람의 양심으로는 이런 쓰레기 소설을 못 쓴다.. 책분량의 95% 이상 개소리 잡소리로 채워져있다.. 작가야 양심은 안녕하냐?
2021.02.24 00:23
이레몬    
그냥 아무 생각없이 쓴글
2021.02.25 16:54
상상무한    
킬링타임용으로 괜찮음 중후반 가면 편수늘리기가 좀 심하긴함. 이건 장르소설 특성상 인기있는 작품의 숙명 대여점시절에 꽤 잘나갔던 작품임 위에 평가가 다들 박하지만 그래도 십년가까이 된 소설이 세태가 변했는데도 이북에서 중상위권 유지하면서 꾸준히 읽히는건 읽을만 하니까 보는거
2021.04.16 17:42
추천요괴    
대종사 본명인가?
2021.06.2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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