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래와 과거(1)
[2027년 12월 24일]
“으아아.”
대한민국 금융 일 번지라는 여의도 북단에 자리한 마포대교. 차가운 겨울바람이 다리 위를 매섭게 휘몰아쳤다.
마포대교의 난간에 기대어 한 남자가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60세가량. 희끗희끗한 흰머리에 막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하는, 중년을 갓 지난 남자였다. 비교적 고급 양복을 입은 단정한 옷차림으로 보아 그는 중견기업의 임원처럼 보였다.
밤이 깊어 어둠이 드리워진 마포대교 위는 한산했다. 가끔 지나가는 차들이 있었지만, 예전에 비하면 사실상 매우 적고 활기가 떨어졌다. 연말임에도 불 꺼진 도심, 한적한 거리. 이 모든 것은 대한민국을 덮친 제 이의 외환위기로 인한 현상이었다.
“크흐흐흑.”
사내 유서준은 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리 위에서 울고 있는 그는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때는 크리스마스이브. 하지만 주위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한껏 기분이 들떠 있어야 할 이 시간에 주위는 적막했고 캐럴은커녕 인적도 드물었다.
“내가··· 내가 파산하다니.”
통곡을 하는 유서준의 외침에는 울분이 섞였다. 얼마 전 약 사십 년간에 걸쳐 모은 전 재산을 완전히 날려버린 그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외환위기를 맞은 암울한 사회 분위기와 기약 없는 미래 속에서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자살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흘러가는 시커먼 강물이 흐려진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마치 지나온 긴 시간처럼 강물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지금 강물에 뛰어들어 그 한 많은 생을 마감하려 하는 것이다.
약 이 주일 전, 두 번째 목요일이었던 지난 2027년 12월 9일은 파생상품시장 만기일(주식과 선물 가격을 일치시켜 정산하는 날)이었다. 주가지수 선물을 비롯한 네 파생상품이 주식시장에서 만기일을 맞았다.
만기일에는 각 상품 운용 주체들이 힘겨루기하기에 주식시장이 심하게 널뛰기를 하게 된다. 짧게는 매달, 길게는 3개월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므로 자주는 아니지만 드물지도 않기에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9일은 달랐다. 이날 하루 코스피 종합주가지수는 무려 -18%나 폭락했다. 최근 3일간 하락폭을 모두 더하면 무려 -32%에 달했다. 최근 외국 투자자들과 반대포지션을 고수했던 국내 기관들은 연이은 급속한 하락에 보유한 파생상품 포지션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 여파가 이날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주식시장의 대폭락은 금융 쇼크를 가져왔다. 주식시장에서, 파생상품에서 거대한 규모의 손실을 입은 은행, 증권, 투신사는 이날을 기해 파산 선고가 내려졌다. 그 충격은 고스란히 고객과 국민에게 전해졌다.
잃은 자가 있다면 딴 자도 있다. 기관(은행, 증권 등)과 반대로 주가지수 선물을 매도하고 주가지수 옵션 풋을 매수한 주체는 엄청난 부를 일구었다. 두세 배도 아니고 수십, 수백 배의 수익이 터졌다. 사상 유례없는 대박이 속출한 것이다.
파생상품 시장에서 대박이 속출하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날은 그 규모와 주체 면에서 유달리 특별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날 큰 이익을 얻은 사람이나 기관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수익을 낸 곳은 다름 아닌 LTCM이란 곳이었다. 그 수익금은 수십조를 넘어 백조에 달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연히 그 반대편에 서서 그만큼의 금액을 손해 본 곳은 파산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날 벌어진 금융기관, 특히 은행의 파산은 금융위기를 불러왔고 대한민국은 제이의 외환위기 사태에 빠져들었다. 실업이 속출하고 기업은 부도가 났다. 달러는 폭등하고 원화는 폭락했다. 모든 게 끝이 났다. 자살하는 자가 속출했다.
어찌 보면 유서준 역시 이런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갈길 잃은 희생양에 불과했다.
만기일 전까지만 해도 그는 나름 잘 나가는 금융인이었다. 그가 세운 SJ 투자금융은 작은 투자금융사였지만 내실이 있어 수익이 괜찮았다. 그에게 돈을 맡긴 고객들은 다른 곳보다 우수한 수익률에 만족했다.
이 모든 것이 그날 하루가 지난 후 바뀌었다. 그의 회사는 만기일 날 회생 불가능한 손실을 보았다. 금융사의 모든 자산을 처분하고, 심지어 자신의 집과 재산을 다 팔아치워도 손실은 메워지지 않았다. 고객들은 아우성을 쳤지만, 그로서도 해결방법은 없었다. 자금은 없고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빚만 남아있었다. 그에게 재기란 불가능했다.
유서준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자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었던 그의 삶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결과는 파산이었다.
한때 유능한 금융전문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투자금융사마저 설립했던 그는 결국 이렇게 세상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것을 끝내야 할 시간이었다. 그동안 그의 가슴을 짓이겼던 고통을 마감할 시점이었다.
다리 아래 한강으로 투신하기 위해 난간을 넘어가려는 그를 누군가가 낚아챘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사이로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한 사내를 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구인혁이었다.
“이······ 인혁아. 으흑.”
유서준의 입에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울음을 그치려고 했지만 터져 나오는 고통과 괴로움을 막을 수 없었다.
구인혁이 그의 팔을 잡고 냉랭하게 소리쳤다.
“그렇게 가버리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지 않나? 적어도 그런 행동은 유서준에게 어울리지 않지.”
“그래도 나에게는 방법이 없어.”
유서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한숨을 내쉬면서 구인혁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 만났으니 벌써 40년이 지났잖아. 그 40년 동안 네놈이 이렇게 무기력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으흐흑.”
싸늘한 구인혁의 말에 유서준은 주저앉은 채 한동안 울음을 참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점차 유서준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유서준의 어깨를 토닥거리던 구인혁이 그를 일으켰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잖아?”
유서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몸부림을 치더라도 이 처참한 상황에서 헤어날 길은 없어 보였다. 유서준은 몸을 흐느적거리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한참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구인혁이 결심을 굳히고 그를 이끌었다.
유서준의 귀에 구인혁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자, 갈 곳이 있다. 내 말을 들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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