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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혈옥검 1

2018.01.26 조회 197 추천 0


 별혈옥검 1권
 서장
 
 
 천하무림(天下武林)에 어느 때부터인가 이런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천하(天下)의 갑부(甲富)가 되려면 벽도(碧島)로 가라고.
 그 소문은 천하무림인은 물론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꿈을 꾸는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나, 그 누구도 벽도(碧島)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마음은 온통 벽도에 가 있었다. 그것은 비단 일반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의를 내세우는 무림까지도 은근히 그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 사(邪)와 마(魔)의 인물들은 그 보화를 가지고 천하를 지배하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로 인해서 언제부터인가 무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일들이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었다.
 복룡보(伏龍堡)!
 그들은 무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집단이었다.
 허나, 벽도(碧島)라는 보물섬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순식간에 그들은 무림을 장악해 버린다.
 그것도 아주 잔악한 방법으로······.
 그러나 항상 하늘은 정의의 편이었다.
 소웅(小熊) 오일웅(吳一熊)!
 그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그가 어느 누군가에 의해 인간의 가죽이 벗겨지고 대신 곰의 가죽을 뒤집어쓴 작은 소흑웅(小黑熊)이라는 것밖에는······.
 그가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복수를 위해, 무림의 평화를 위해!
 
 
 1장 소흑(小黑), 네가 정말 사람이라구?
 
 
 호북성(湖北省) 유가촌(柳家村).
 산간에 세워진 고을이라 주민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허나, 장이 서는 날이면 제법 북적거렸다.
 시장이 서고 있는 한쪽으로 팽공묘(澎公廟)가 있었는데 그 앞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 떠돌이 재주꾼들을 에워싸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팽공묘 앞에서 재주를 보여주고 있는 사람은 사십대의 우락부락하고 체구가 우람한 사내였다.
 그와 한패거리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자색이 고운 편인 서른쯤 되어 보이는 여인과 스물이 못되는 젊은이 세 사람, 십 사오 세쯤 되는 한 쌍의 소녀, 그리고 두 마리의 원숭이와 한 마리의 새끼 곰이었다.
 지금 새끼 곰이 도구를 넣는 상자 위에 서서는 징을 치고 있었다.
 그 모양이 우스꽝스러워서 사람들은 입을 헤 벌리고 구경을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중년의 대한은 사람들이 거의 모여든 것을 보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큰소리로 곰에게 명했다.
 “소흑(小黑), 이제 아저씨와 형님들이 모두 모이신 듯하니 징을 그만 치고 재주를 한번 넘어보아라.”
 소흑이라고 불린 작은 곰은 징을 놓고 허공으로 뛰어올라 재주를 한번 넘더니 땅 위로 내려섰다.
 곰은 원숭이와 자리를 같이하고 싶지 않은지 원숭이들이 묶인 곳으로 가지 않고 젊은이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는 사람이라도 찾는 듯이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진정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곰을 불러 상자 위에서 내려오게 한 중년의 사내는 한복판으로 나서더니 왼발을 올려서는 슬쩍 구부렸다. 그리고는 발끝을 땅바닥에 대고는 두 손을 맞잡고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사방의 구경꾼들에게 인사를 했다.
 “여러분, 집에서는 부모형제에게 의지하고 밖으로 나오면 친구에게 신세를 진다고 했습니다. 불초 후방(候方)은 강호에서 밥을 빌어먹고 있는 처지인데 오늘 이곳으로 와서 여러 부로(父老)들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청을 돋구려는 듯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오늘 불초의 얄팍한 재간이나마 구경하시고 눈에 거슬리지 않으시면 엽전이나마 몇 닢 더 던져주시고 돈이 없으시면 손뼉이라도 쳐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방에 대고 다시 한 번 절을 한 후에 새끼 곰에게 눈짓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여러 나리께서 기다리기도 지쳤을 테니 다시 한 번 재주를 넘어보아라.”
 이윽고 조금 전의 그 곰이 줄타기를 시작했다.
 줄을 타는 것이 평소 훈련을 쌓은 사람들보다도 잘 타는 편이었다.
 곰은 구경꾼들 앞에 나서더니 패거리의 두목 격인 중년대한이 하던 양으로 사방에다 절을 하고는 곧장 몸을 뽑아 올려 허공에 매달린 줄 위에 서는 것이었다.
 줄의 높이는 적어도 땅에서 일 장하고도 두세 자는 됨 직했다. 보통 경신법을 연마했다는 사람들도 가는 줄 위로 올라서기가 뭣한데 우둔하기로 이름난 곰이 해낸 것이다. 구경꾼들은 잘한다고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 곰은 줄 위에서 수레바퀴 모양으로 몸을 둥글게 하고서 구르기 시작했다. 이쪽 줄 끝에서 저쪽 줄 끝으로 연신 재주를 넘으며 굴러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좀처럼 볼 수 없는 곡예였다.
 아차 하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곰은 점점 더 속도를 빨리 해서 줄 위를 왔다갔다하는데 나중에는 팔과 다리를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강서성(江西省)으로 통하는 관도 저쪽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사람들이 모여 서 있는 팽공묘 앞으로 다가왔다. 걸음은 매우 느릿한 것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꾼들 곁에 이르러 있었다.
 곧이어 은방울 굴리는 듯한 아름다운 음성이 들려왔다.
 “할아버지, 저것 보세요. 곰이 너무 재미나요.”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 두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열 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백발노인은 매우 풍채가 뛰어나 보였다. 이런 한적한 고장에서는 여간해서 만나볼 수 없는 의젓한 노인이었다.
 소녀는 더 말할 나위 없이 귀여웠다. 정말 금과 옥으로 다듬어놓은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머리는 두 가닥으로 땋았는데 말을 할 적마다 흔들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노인을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 곳으로 잡아끌었다.
 백발노인은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싫은 듯 제지했다.
 “능(菱)아, 반나절을 걸어왔는데 피곤하지도 않느냐?”
 소녀는 노인을 끌어도 끌어당길 수가 없자 대뜸 입을 내밀고 말했다.
 “능아는 피곤하지 않아요. 능아는 구경을 해야겠어요. 저 곰 좀 보세요. 얼마나 귀여워요, 할아버지! ”
 노인은 손녀딸의 고집을 꺾기가 어려운 듯 손녀를 이끌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꽉 둘러서 있었는데도 노인이 손녀딸을 데리고 들어서자 모두들 스스로 길을 비키는 듯 좌우로 갈라서는 것이 아닌가?
 삽시간에 노인과 손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사람들 틈을 헤치고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설 수 있었다.
 노인과 손녀딸이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을 때 두 소녀가 각기 이 장이나 되는 기둥 위에 올라가 있었다.
 십 사오 세쯤 되는 두 소녀는 다리를 횡목에 건 채 거꾸로 매달린 자세였고, 곰은 두 소녀의 손에서 이리 던져지고 저리 던져지곤 했다.
 정말 잽싸고 날렵한 동작이었고, 우둔한 곰이 그와 같은 재주를 피우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헌데, 곰은 그냥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재주까지 한바퀴 넘고서 상대방 소녀의 손을 잡곤 했다.
 이와 같은 재주는 곰은 말할 것도 없고 몇 십 년 간 경신법을 익힌 사람도 제대로 못하는 곡예였다.
 본래 노인은 재주라고 해야 기껏 강호에서 흔히 보는 잔재주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재주에 노인은 흥미를 느낀 듯 곰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였다.
 곰이 소녀의 두 손을 붙잡지 못하고 아래로 뚝 떨어졌다. 모두들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앗!”
 능아라는 소녀는 발을 굴렸다.
 “할아버지, 빨리 구해줘요!”
 그러나 노인은 조금도 놀라워하는 빛이 없었다.
 바로 그 순간, 곰은 이미 반쯤 떨어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을 움츠렸다가 벼락같이 펼치면서 요자번신(搖子 身)이라는 일초를 펼쳤다.
 곰이 허공에서 몇 자 떨어져 있는 기둥으로 날아가 매달리는 것이 아닌가?
 다음 순간, 곰은 날아간 기운의 여세를 몰아 빙글빙글 기둥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몇 바퀴 돌던 곰은 기둥을 잡은 두 손으로 기둥을 와락 밀쳤다. 그러자 그의 몸은 다시 비스듬히 위로 날아 횡목에 매달려 있는 소녀 앞으로 솟아올랐고 곧 소녀의 손을 붙잡게 되었다.
 모두들 정신이 반쯤 빠져서 멍하니 서 있다가 절정의 순간을 고비로 재주를 끝낸 곰이 소녀와 함께 기둥을 타고 내려올 때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듯 우레와 같은 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박수와 갈채를 보내고 있던 구경꾼들은 너나할것없이 한두 푼의 엽전을 마구 던졌다.
 그야말로 엽전이 곰의 주위에 우박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곰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갈채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사람처럼 포권을 하고 구경꾼들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구경꾼들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구경거리가 다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이 남아 좀처럼 팽공묘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한참 후에야 그들은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능아는 얼굴 가득 기이한 빛을 띠고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저 곰이 너무 귀여워요. 저 곰을 사주세요.”
 노인은 손녀딸의 어리광을 듣지 못한 듯 흰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거 이상하군. 요자번신(搖子 身)에 운룡질전(雲龍疾轉)의 신법은 대단한 경신법이라 할 수 없지만 뛰어난 천품을 타고난 사람만이 연마할 수 있다. 그런데 저 곰이 그토록 익숙하게 익혔다니 이상하지 않는가?”
 능아는 노인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힘주어 그를 끌어당기더니 뾰로통해져서 말했다.
 “할아버지, 이 능아의 말이 들리지 않으세요. 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곰을 팔지 않겠느냐고 말이에요.”
 노인은 그때서야 깊은 생각에서 정신을 차리고 손녀딸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천진난만한 태도를 본 그는 흐뭇한 듯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 이 할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해보지. 내 꼭 너를 위해 저 곰을 사주마. 능아야, 이제 되었지?”
 능아는 천진스러운 웃음을 얼굴에 띠었다.
 “할아버지가 제일이야!”
 노인은 일부러 눈을 흘겼다.
 “이 녀석, 너 편할 때만 이 할애비가 제일이군.”
 그리고 노인은 능아의 손목을 잡고 중년의 대한 앞으로 다가갔다.
 “이것 보시오, 형씨. 저 재주를 피우던 곰이 너무 귀여워서 손녀가 갖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는데 실례지만 우리 손녀딸의 소꿉친구가 되게 양보해 주실 수 없겠소이까?”
 중년의 대한은 그 말을 듣자 안색이 홱 변했다.
 “팔지 않소. 팔지 않아!”
 노인은 그렇게 나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듯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다시 말을 꺼냈다.
 “물론 나는 당신들에게 손해를 보이지 않을 작정이오.”
 그리고 그는 품속을 더듬더니 옥으로 된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서 한 알의 광채가 찬란한 명주구슬을 꺼내 손바닥에 받쳐들고 대한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자, 이 구슬과 곰을 바꾼다면 당신들은 손해를 보지 않겠지요?”
 그러자 대한 곁에 서 있던 중년의 여인이 반짝하고 눈빛을 빛냈다. 그녀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구슬을 노려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아! 야명주(夜明珠).”
 그녀가 놀라 부르짖는 바람에 도구들을 챙기던 세 젊은이와 두 소녀까지도 일제히 노인의 손바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노인의 손에 들린 구슬은 진귀하기 이를 데 없는 야명주였다.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소이다. 이것은 매우 값비싼 야명주로 곰과 바꾸어도 당신들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오.”
 중년의 대한은 야명주를 두어 번 바라보더니 노인을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눈동자에는 허락하는 빛을 띠고 있었으나 무엇이 주저되는 듯 망설일 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노인은 구슬 한 알로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고 즉시 옥갑 속에서 똑같은 모양의 야명주를 다시 꺼내들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이 늙은이의 손녀딸이 너무나 곰을 좋아하니까 두 알의 야명주를 드리기로 하지. 그러면 당신들은 이 강호에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오.”
 중년의 대한이 대답하기 전에 중년의 부인이 말을 받았다.
 “그럼요. 안될 것 없죠.”
 그녀는 중년대한을 슬쩍 바라보며 눈짓을 했다.
 중년대한은 노인과 손녀딸을 살펴보았으나 그들이 어떤 무공도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님의 뜻이 정 그렇다면 곰을 양도해드리지요. 사실 바른말이지만 한 알의 구슬이면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탐욕스럽게 노인의 손바닥에 놓인 두 알의 구슬을 노려보고 있을 뿐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노인은 그들이 인사치레의 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즉시 그 말을 받았다.
 “아니오. 이 곰은 정말 귀여워서 두 알의 야명주를 주어도 비싼 셈은 아니오.”
 그리고 그는 한 손에 곰을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능아를 잡고서 중년부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객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노인의 품속에 안긴 곰은 뜻밖에도 몸을 돌리고 중년부인에게 원망에 찬 시선을 던졌다.
 마침 중년대한 역시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곰이 던지는 시선과 마주쳤다.
 순간 중년대한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어떤 결정을 내린 듯 중얼거렸다.
 “흥, 담이 적으면 군자가 아니고 독기가 없으면 대장부라 일컫지 못한다고 했다. 너희 몸에 한 상자의 구슬이 없다 하더라도 너희들을 처치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한편 노인과 손녀는 천천히 영흥(永興)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조그만 곰은 여전히 그 노인의 품속에 안겨 있었다.
 곰의 태도가 매우 온순하여 마치 오랫동안 그들이 키워온 것 같았다.
 노인과 손녀는 한동안 걸었으나 만나는 행인은 없었다.
 그들은 어느덧 황량한 숲 속에 들어서게 되었고 유가촌과 상당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별안간 노인의 품속에 있던 그 검은 곰이 노인의 품속에서 나와 땅위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노인과 손녀에게 큰절을 하듯 넙죽 엎드렸다.
 동시에 그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우우! 하는 소리를 부르짖었다. 억울한 사정이라도 하소연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노인과 손녀는 이 돌연한 광경에 깜짝 놀라 어리벙벙해지고 말았다.
 능아는 더욱 커다란 눈을 뜨고 어리둥절하여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는 노인에게 매달리며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할아버지, 저 곰이 어떻게 된 노릇일까요?”
 노인은 경험이 풍부했다. 그런데 노인 역시 어리둥절해서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이상하구나. 저 조그만 곰에게 무슨 억울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 조그만 곰은 확실히 비범한 데가 있었다. 절을 한 뒤 노인과 능아의 경악해하는 모양을 보고는 무슨 깨달은 점이 있다는 듯이 우우! 하고 다시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켜서는 앞발로 길옆에 떨어진 한 조각의 작은 돌을 들더니 길 위에다가 그리듯 글을 쓰기 시작했다.
 노인과 손녀는 곰이 쓰는 글씨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조그만 곰은 글을 쓸 줄 알았다. 이는 정말 천하에 들어보지 못한 기문(奇問)이었다.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글을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 글은 다음과 같은 다섯 자로 되어 있었다.
 <나는 사람입니다.>
 이를 본 노인과 손녀는 놀라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한참 후에 약속이나 한 듯 부르짖었다.
 “아! 뭐라고······? 네가 사람이라구?”
 그들의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길 옆 숲 속에서 별안간 부엉이 같은 괴소가 들려왔다.
 곧이어 휙휙! 하는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숲 속에서 연달아 몇 사람이 뛰어나왔다.
 바로 팽공묘 앞에서 곰에게 재주를 부리던 중년 부부와 그들이 거느리고 있던 젊은 세 사람이었다.
 그 중년의 대한은 노인을 노려보더니 음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그 곰은 사람이오. 이 나리도 저 곰이 글을 쓸 줄은 미처 몰랐군. 하마터면 나의 비밀을 누설시킬 뻔하지 않았는가? 흐흐흐······.”
 그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갑자기 뚝 그치고 입을 열었다.
 “본래 이 나리는 늙은이 품속에 있는 구슬만 전부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려 했는데 이제 이 나리의 비밀을 알게 된 이상 목숨마저도 내놓아야겠다.”
 그 조그만 곰은 중년의 사나이가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서 노인과 손녀 곁으로 다가가 그들에게 매달렸다. 그리고는 온몸을 벌벌 떨었다. 매우 두려운 듯한 모양이었다.
 능아는 그들의 길을 막고 선 다섯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듯 고개를 숙이고 귀여운 손으로 검은 곰의 털을 어루만지며 무척 측은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소흑! 겁을 내지 말아요. 할아버님과 능아가 이곳에 있어. 그 누구도 털 한 가닥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중년의 사나이는 능아의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양을 보고는 그만 크게 울화가 치미는 듯 꽥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흥, 계집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군. 너의 조그만 목숨도 유지하지 못할 터인데 곰의 목숨까지 지키겠다고?”
 이어 그는 곰의 몸을 낚아채려 하면서 호통을 내질렀다.
 “이 녀석! 글을 쓰는 재간을 숨기고 있었겠다. 이제 너를 용서할 수 없다. 너를 처치하고 말 테다.”
 그러나 능아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의 손이 곰의 몸에 닿기 전에 가볍게 팔을 움직였다. 기묘하기 이를 데 없이 곰을 한쪽으로 끌어간 것이다.
 그리고는 자그맣고 귀여운 손을 내밀었다.
 대한은 어떻게 된 노릇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철썩철썩 두 대의 따귀를 얻어맞고 말았다.
 이 느닷없는 따귀에 그만 그 흉악한 뺨이 반치나 부풀어오른 대한은 격렬한 통증에 소리내어 부르짖었다.
 “너 같은 조그만 계집애가 몇 수 할 줄 알다니! 이 최명귀(催命鬼) 후방(候方)이 너의 가죽을 벗겨놓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능아는 얼굴 가득히 비웃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과 같이 보잘것없는 자들이 이 아가씨 앞에서 큰소리를 치다니! 이 아가씨가 당신들로 하여금 기어서 가게 만들지 않는다면 재간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오.”
 그녀는 아직 나이가 어렸지만 말투나 태도는 노련한 강호인 못지않았다.
 대한은 울화통이 터져서 죽을 지경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는 일성을 대갈하며 손을 들어서는 중년에 접어든 그의 안사람과 세 제자에게 명했다.
 “미양, 당신과 무창(武昌)은 저 검은 곰과 영감탱이를 요절내시오! 이 조그만 계집애는 내가 처치를 하지!”
 그는 손을 허리로 가지고 가서 휙! 하고 한 자루의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맹렬한 기세로 덮쳐오면서 역벽화산(力璧華山)이라는 일초로 능아를 후려쳤다.
 미양이라고 불린 중년의 부인과 그의 세 제자는 동시에 각자가 잘 쓰는 병기를 뽑아들고 최명귀 후방의 뒤를 따라 다투어 노인과 검은 곰 쪽으로 급히 달려들었다.
 능아는 이와 같은 모양을 보자 냉소하며 호통을 쳤다.
 “흥! 그렇게는 잘 안될걸.”
 그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섯 사람은 똑같이 능아의 손이 자기의 가슴팍과 선기혈을 향해 후려쳐 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 다섯 사람들은 거의 약속이나 한 듯 놀라 아! 하고 부르짖으며 황망히 뒤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일초에 그들을 물리친 뒤 즉시 뒤쫓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입을 열었다.
 “흥! 그까짓 잔재주로 감히 길을 막고 사람의 재산과 목숨을 빼앗으려 하다니!”
 일이 이렇게 되자 최명귀 등은 호랑이 등에 탄 격으로 그만둘 수가 없게 되었다.
 능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최명귀는 고함을 쳐서 응했다.
 “이보게들! 상대방의 손발이 나는 듯하니 우리들 어깨를 나란히 해서 싸우세. 먼저 작은 사람을 요리한 뒤 늙은 것을 처치해도 늦지 않을 것이야.”
 말이 끝나자 그는 먼저 검을 흔들며 재차 달려들었다. 오강벌계(吳剛伐桂)라는 일초를 펼쳐 능아의 허리를 내리쳤다.
 나머지 네 사람 역시 달아나지 않고 에워싸듯 일제히 무기를 휘두르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검광과 검의 그림자가 빗발치듯 사면팔방에서 능아의 몸을 향해 떨어졌다.
 능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미 계획이 서 있는 듯 나직이 소리내어 웃더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동작은 처음 보기에는 신속하지 않은 것 같으나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다섯 사람의 무기는 그녀의 옷자락 하나 다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만 지칠 대로 지쳐서 헐레벌떡 숨을 가쁘게 몰아쉬어야 했다.
 결국 중년의 대한은 두려움에 찬 어조로 부르짖었다.
 “상대방이 너무나 강한 듯하니 역시 물러서야겠네.”
 그러나 그와 같은 말이 떨어지는 순간, 능아의 몸이 거의 배 이상으로 빨라졌다.
 그녀가 테두리 안에서 한번 빙글 돌았다.
 다섯 사람은 별안간 사면팔방에서 능아의 그림자가 압박해오는 듯한 감을 느끼고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들의 귓가에 능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도망치려고? 그렇게 쉽지는 않을걸. 이 능아는 아직 다 놀지 않았어요.”
 최명귀는 강호에서 삼류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껏 이와 같은 희롱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성깔은 더욱 거칠었다.
 “이런 천한 계집애 같으니! 차라리 죽이려면 일찍 죽일 것이지 이와 같은 희롱을 하다니!”
 능아는 갑자기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음성으로 꾸짖었다.
 “네가 감히!”
 곧이어 최명귀 등 다섯 사람은 뒤가 서늘해지는 느낌과 동시에 한 가닥 냉풍이 벼락같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대뜸 그들은 한결같이 입을 쩍 벌리면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 보기 드문 싸움에 사람이라고 스스로 일컫는 곰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눈초리에는 놀람과 의아함, 그리고 부러운 빛이 서려 있었다.
 노인은 그저 뒷짐을 진 채 그들이 하는 양을 바라볼 뿐 입 한번 열지 않았다.
 마치 미리 이와 같은 일을 내다보고 있었다는 듯했다.
 능아가 싸움을 끝내자 그때서야 노인은 다가오는 능아를 덥석 껴안았다.
 그리고는 껄껄 소리내어 웃는 것이었다.
 “능아야, 대단하구나. 이제 대영웅이 되었구나.”
 능아는 다시 그 천진난만한 태도를 되찾고서 노인의 품속에 머리를 묻고서는 마구 비벼대었다.
 “할아버님이 또 사람을 놀리시는군요. 며칠 전 할아버님께서 선기표묘보(璇璣飄渺步)를 가르쳐주시지만 않았더라면 저는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을 거예요.”
 노인은 다시 소리내어 웃더니 능아의 조그만 손을 잡고 기절해 쓰러져 있는 다섯 사람 곁으로 다가가더니 입을 열었다.
 “자, 능아 네가 이 사람들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 말해보아라.”
 능아는 갑자기 할아버지의 손에서 빠져 나오더니 짐짓 뽀로통해져서는 입을 열었다.
 “그들은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구슬을 탐내어 나타난 것이니 할아버님께서 처리해야지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곰 곁으로 다가가서는 곰의 손을 잡고 한쪽으로 가버렸다.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능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후 다섯 사람은 땅바닥에서 어기적어기적 일어났다.
 그때 그들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어서 싸움에 진 수탉 같은 모습으로 맥이 풀려 있었다.
 중년 사나이는 두 눈에 악독한 빛을 띠고 능아를 흘낏흘낏 훔쳐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도 강호에서 밥을 빌어먹는다면 이름을 대시오. 이 최가는 배운 재주가 모자라서 오늘 당신들 손에 졌으니 죽이든 살리든 아무 말 하지 않겠소. 그러나 오늘 만약 우리들을 살려준다면 언제든 이 원한을 갚을 것이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노인의 얼굴에 위엄이 서려 있는 표정과 형형한 안광이 떠도는 눈동자를 보고는 그만 부르르 몸을 떨고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인은 눈을 한번 부릅떠본 후 두 눈에 서린 형형한 눈빛을 거두고는 품속에서 하나의 조그마한 옥패를 꺼냈다. 그 옥패에는 몇 송이 흰 구름이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다섯 사람은 그 옥패를 바라보더니 즉시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중년의 사나이는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제 끝났구나. 악을 원수와 같이 미워하는 이 늙은이를 만났으니 오늘밤 살아날 가망은 없겠다.’
 그러나 사람은 살아나고 싶은 욕심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이 노인의 수단이 대단히 잔인해서 여간해서는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희망을 품고 일제히 땅에 엎드려서는 절을 하며 애걸을 했다.
 “노선배님, 어르신네께서 바로 무림삼수 가운데 운수 노선배님이시라는 것을 몰라 뵈었습니다. 만약에 알았더라면 아무리 간이 크기로서니 어르신네의 위엄을 거슬렸겠습니까? 아무쪼록 소인들의 목숨을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그와 같이 가련한 모습에 노인은 그만 몇 번 냉소를 흘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2장 저 곰을 어떻게 해야만 좋지요?
 
 
 “간악한 놈들. 이십 년 전의 성질대로 했다면 벌써 깊은 산골짜기에 빠뜨려 늑대의 먹이가 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근 이십 년 간 노부는 너무나 살계를 많이 벌였던 것을 자책하여 부처님 앞에서 다시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오늘 너희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겠다. 모두 왼쪽 귀를 베어서 저지른 바를 뉘우친다는 표시를 해라.”
 다섯 명은 목숨을 살려준다는 말에 각기 자기의 왼쪽 귀를 잘라서는 땅에 던지고 초상난 집의 개처럼 급히 도망을 쳤다.
 삽시간에 다섯 사람은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노인은 그때서야 얼굴에 웃음을 띠고 손녀와 곰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능아와 곰은 길가에 웅크리고 앉아 각기 조그만 돌멩이를 들고서 땅바닥에 글을 써가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따라서 노인이 다섯 사람을 처치한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노인은 그와 같은 모양을 보고는 고개를 흔들며 일부러 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짐짓 괴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봐! 어디서 온 말썽꾸러기인데 이 어르신네가 가는 길 앞에다 쓸데없는 그림을 그려놓았단 말이냐?”
 능아는 갑자기 호통을 치는 말에 깜짝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곰의 팔을 붙잡고 몸을 날려서는 일 장 밖으로 날아갔다.
 이어 몸을 돌리는 순간, 호통을 친 사람이 자기 할아버지인 것을 알고는 그만 입이 뾰로통해져서는 발을 굴렀다.
 “할아버지는 미워요. 왜 깜짝 놀라게 하는 거예요.”
 노인은 두 손으로 능아의 작은 손을 붙잡고는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가지고 무공을 연마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누가 너의 곁에 갈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다니 만일 그 사람이 적이었다면 너는 어떻게 했겠느냐?”
 능아는 그때서야 할아버지가 자기를 위해 그렇게 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 자기의 귀를 감싸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조금 전에 입을 열자마자 제가 단번에 몸을 날려 일 장 밖으로 피했잖아요.”
 노인은 능아가 고집이 대단한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더 입을 열지 않고 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능아야, 조금 전 곰과 땅바닥에 무엇을 그렸느냐?”
 능아는 할아버지가 묻는 말에 눈을 돌려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초조한 듯 할아버지에게 되물었다.
 “할아버지,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사람들은 벌써 내가 놓아 보냈다. 이제야 경각심을 돋우었다고 큰소리치지 못하겠지?”
 능아는 그 말을 듣자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큰일났어요! 저 곰은 그들이 주는 벙어리 약을 먹었으니 어떻게 하지요. 할아버지도 참, 그와 같이 나쁜 자들을 그렇게 빨리 놓아주면 어떻게 해요?”
 그러더니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기쁜 빛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중은 도망쳐도 절간은 옮길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아마도 팽공묘로 되돌아갔을지 몰라요. 우리들이 길을 돌려 쫓아간다면 되지 않겠어요. 그들에게 해약을 얻어서 곰에게 먹이면 말을 할 수 있으니 되지 않겠어요?”
 노인은 이미 생각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도 바보는 아닐 것이다. 어째서 그곳에 멍하니 있으면서 너 같은 소살성이 찾아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느냐? 더구나 너의 아버지는 며칠 안으로 폐관에서 나올 것 같으니 즉시 돌아가 시중을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능아는 그 말을 듣자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그 일도 지체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고 만약 적이 아버님에게 방해를 놓아 주화입마라도 된다면 큰일이 아닌가?’
 그녀는 그만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른다는 듯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는 측은한 시선으로 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저 곰은 어떻게 해야만 좋지요?”
 노인은 능아의 초조한 모습을 보고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부처님을 놔두고 화상 찾는 격이구나. 이 할아버지가 그 점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그들을 그렇게 쉽게 놓아보내겠느냐?”
 능아는 그 말을 듣자 얼굴빛이 환해져서는 말했다.
 “그렇다면 곰의 벙어리 병도 할아버님이 고칠 수 있겠군요?”
 노인은 능아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곰의 손을 잡더니 느릿한 어조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아, 사방을 좀 둘러봐라. 이곳이 어떤 곳인데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냐? 빨리 가자. 오늘은 영흥으로 가서 객점에 묵어야겠다. 객점에 든 후 내가 즉시 너의 곰을 치료해주지. 그러면 되었겠지?”
 그는 능아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갔다.
 길에는 행인이 없었다. 걸음을 좀 빨리 한다 하더라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노인은 둘의 손을 붙잡고 경신법을 펼쳐 길을 재촉했다.
 길을 재촉한 지 얼마 후 이삼 백 리 길을 후딱 지난 그들은 해가 서산에 기울기 전에 영흥현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한 객점에 묵게 되었다.
 노인은 잠시 사환들에게 방해를 하지 말라고 이르고는 방문을 꼭 닫았다.
 그리고는 곰의 탈을 쓴 어린애의 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 노인은 곰의 탈을 쓴 어린애가 글만 쓰고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은 천잔초(天殘草)라는 독물을 먹었기 때문에 배가 부어 올라 벙어리가 된 것임을 알아내었다.
 그에게 해독영단(解毒靈丹)을 한 알 먹이고 거기다 자기의 내가진력으로 약 기운을 성대가 있는 부위에 집중시켜 독을 제거하면 즉시 나아진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런데 그가 손을 뻗쳐 곰의 탈을 쓴 소년의 전신골격을 만져보았을 때 노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업보로군! 정말 업보야. 이 아이의 골격이 이토록 훌륭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무래도 장래 사문의 커다란 뜻은 이 애의 몸에서 이룩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더니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애처로운 듯 다시 계속해서 말했다.
 “아! 벙어리 병은 결코 어렵지 않은 병이지만 이 몸에 걸쳐진 곰의 가죽은 최명귀가 어떤 방법을 써서 그랬는지 몸뚱이와 한 덩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구나. 곰의 가죽을 벗기려면 매우 힘들겠다. 둘째 아우의 기술이 신통하니 무슨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다.”
 능아와 곰의 탈을 쓴 소년은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라 그저 우두커니 두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노인은 그들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설명을 하고 싶지 않은 듯 능아에게 분부했다.
 “능아야! 이 할아버지가 즉시 이 곰의 벙어리 병을 고쳐주어야겠는데 그 동안 네가 조심을 해주어야겠다. 나쁜 사람이 뛰어들지 않도록 해라. 알겠느냐?”
 그녀는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안심하세요. 능아는 결코 사람이 한 발짝도 못 들어오게 하겠어요.”
 그녀는 허리에 두르고 있던 연검을 뽑아서는 손에 들었다.
 노인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곰의 탈을 쓴 어린아이에게 입을 열었다.
 “우선 네가 검은 곰의 탈을 썼으니까 소흑(小黑)이라고 불러두자. 노부는 너의 천부적인 재질이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네가 무공을 연마할 수 있도록 그 바탕을 열어주고자 한다. 잠시 후 네가 고통을 느낀다 하더라도 참아야지 움직여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그와 같은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다면 노부는 너를 위해 무공의 바탕을 열어주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너의 벙어리 병만 고쳐주겠다.”
 곰은 그 말을 듣고 즉시 결의에 찬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감격한 시선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연달아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그때서야 곰을 안아 침대 위에 옮겨 가부좌를 틀고 앉게 하고서는 자기의 몸에서 자그마한 두 개의 양지옥병(羊脂玉甁)을 꺼내 하나는 붉고 하나는 검은 두 알의 환약을 곰에게 내주었다.
 “이 두 알의 알약은 나의 둘째 아우가 근 이십 년이란 세월을 두고 만든 것이다. 한 알은 백독을 해소시킬 수 있는 청녕단(靑寧丹)이고 한 알은 무공의 공력을 증진시키는 옥액소환단(玉液少還丹)이다. 즉시 이것들을 함께 먹어두도록 해라.”
 곰은 그 두 알의 환약을 받아서는 입 속에 넣었다.
 이때 노인이 그의 맞은편에 단정히 앉아 운기조식하기 시작했다.
 향 반 개피가 탈 무렵이 지나자 곰은 자기의 단전에서 한 가닥 커다란 기운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울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노인에게 이것이 약 기운이 퍼지는 현상인가 눈으로 물어보려고 했다.
 그때 노인은 어느덧 눈을 번쩍 뜨더니 그가 물어보려는 말을 막았다.
 “주의해라. 노부는 곧 내가의 진력을 너의 몸 안으로 주입하게 된다. 이후에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진기를 돋우어서 손바닥을 뻗쳐서는 곰의 정수리를 내리눌렀다.
 삽시간에 작은 곰은 한 가닥의 뜨겁기 이를 데 없는 기운이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에서 곧장 아래로 쏘아져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기운은 단번에 단전으로 내려가서는 즉시 들끓는 뜨거운 기운을 감싸더니 기경팔맥(奇經八脈)을 따라 침투되어 갔다.
 뜨거워서 입술이 바싹 마르고 혀가 타 들어가는 것이 몸이 화로 속에 놓인 듯했다.
 그 고통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다시 반 개피의 향이 타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자 뜨거운 기운은 점차 감퇴되어갔다.
 그러나 온몸이 매우 간지러웠으며 은연중 마비되며 시큰한 감마저 느끼게 했다.
 그 상태는 마치 무수한 벌레나 개미들이 몸을 기어다니고 물어뜯는 듯했다.
 그러나 곰은 여전히 그대로 버티어 나갔다.
 이와 같은 인내력을 가진 자는 억만 가운데 한 사람 찾아내기조차 힘들었다.
 노인은 곰의 그와 같은 모습을 보고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토록 간지럽고 마비되었던 느낌이 점차 감소되었다.
 그러자 곰은 생사현관이 있는 곳에서 그르륵그르륵! 하는 소리가 나고 대뜸 비린내와 고약한 냄새가 나는 기운이 목구멍으로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왁! 하고 검은 빛깔의 핏덩어리를 급히 뱉어내었다.
 순간 그는 하늘이 빙그르르 돌고 땅이 흔들리는 듯한 감을 느꼈다. 끝내 견디어내지 못하고 기절을 해버렸다.
 그러나 그의 자세는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세 그대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 무렵 노인 역시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많은 땀을 흘렸다.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곰의 정수리에서 거두어들였다.
 그리고는 스르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듯했다.
 잠시 후 노인의 안색이 점점 불그레해졌다. 운기가 회복된 것이다.
 노인은 검은 곰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매우 칭찬하는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말 기재다, 기재야. 어찌되었든 나는 이 애를 도와 곰의 가죽을 벗겨서 나의 전인(傳人)이 되게 해야지.”
 그는 곰을 몇 번 더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돌리고 손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능아야! 이제 검을 거두고 좀 쉬도록 해라.”
 능아는 그 말을 듣고 긴장된 자세를 거두었다.
 동시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할아버님, 조금 전에 어찌해서 곰의 가죽을 벗긴 후여야만 제자로 거두어드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노인은 빙그레 웃고 입을 열었다.
 “남들이 이 운수의 제자는 사람이 아니고 미련한 곰 새끼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체면이 손상되겠느냐? 그러나 설사 곰 가죽을 벗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에게 무공을 전수할 것이다. 다만 나를 스승으로 삼지 않고 본문의 몇 가지 절기를 전수하지 않을 뿐이란다.”
 능아는 그때서야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잠시 후 본래 사람인 곰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그가 눈을 뜨고 침대에서 내려섰을 때 상실했던 목소리도 완전히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전신도 날렵하고 시원하기 이를 데 없음을 느꼈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즉시 노인과 그 손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큰절을 했다.
 “운공과 소저께서는 이 웅아(熊兒)의 큰절을 받으십시오. 이후부터 이 웅아의 몸은 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음성이 또렷할 뿐만 아니라 조리가 있었다. 더구나 글을 배운 듯 의젓하기까지 했다.
 노인과 그의 손녀는 그에 대해서 더욱 더 기쁨을 느꼈다.
 노인은 재빨리 그를 땅바닥에서 부축해 일으키며 물었다.
 “남자는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되느니라. 우리 무림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그와 같은 속된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자, 너는 앉아서 천천히 얘기해 보도록 해라.”
 웅아라고 말한 곰은 한참 동안 격동되어 입을 열지 못하더니 곰의 탈을 쓰게 된 경위를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호남성 영주(永州) 소수하(簫水河) 가에 커다란 장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실 이 장원의 주인은 영주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선비 오천행(吳天行)이었다.
 오천행은 대대로 고결한 가풍이 전해 내려오는 선비의 집안이었다.
 이 집안에서는 벼슬에 관심을 두지 않아 고고한 인품으로 유명했으며 지방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오천행이 바로 곰의 탈을 쓴 오일웅의 부친이었다.
 어느 날 저녁, 정청(正廳)에서는 등불이 대낮과 같이 밝혀 있어서 술을 청하는 소리가 한창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주인이 커다란 연회를 베풀어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별안간 사람의 넋을 빼앗을 것 같은 음탕한 웃음소리가 크게 일었다.
 곧이어 젊은 부인의 코 먹은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공자 나리께서 이 자리를 빛내주시니 무어라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몸 동은화(童銀花)는 사의를 표하는 뜻에서 일찍이 훈련을 시켰던 애들에게 노래를 시킬까 합니다.”
 젊은 부인이 그 누구에게 꼭 껴안긴 모양으로 나직이 숨막히는 듯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곧이어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싫어요. 공자 나리, 이러시면 안 돼요. 이러다 오천행이라도 들어오면 어쩌시려구?”
 그러나 입맞추는 소리와 함께 젊은 사내의 자신에 넘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천행이 돌아오기만 하면 친위무사(親衛武士)들을 시켜 죽이던가 사로잡으면 모든 일이 끝나는 거지!”
 “공자, 그 말을 믿어도 되겠지요?”
 “그럼, 그럼! 쪽!”
 “아이, 여기서는······.”
 이어 두 남녀가 안방으로 사라지는 기척이 있다.
 알고 보니 이 커다란 장원의 주인 오천행은 먼 여행길을 떠나간 모양이었다.
 집에 그와 같이 음탕한 여인을 홀로 놓아둔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랄까?
 그때 정청과는 상당히 떨어진 뜰 한 모퉁이에 있는 개집에서는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개집에서는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얼굴이 더럽혀진 소년이 고개를 힘없이 내밀었다.
 소년은 겨우 칠팔 세밖에 되지 않았으며 몸은 수척하여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청수하고 총명한 기질은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전신은 상처투성이였다. 아마도 모진 매를 맞은 나머지 그와 같이 된 모양이었다.
 소년은 개집에서 기어 나오더니 안채에 원한에 찬 시선을 던지더니 힘겹게 뜰의 다른 한쪽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곳은 매우 쓸쓸한 곳이었다.
 정원수 사이로 커다란 무덤들이 몇 개 나열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두 개만은 새 무덤이었다.
 새로 생긴 듯한 두 무덤 앞에 선 소년은 이미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는 흐느끼며 나직이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어르신께서는 정말 계모에게 해침을 받고 돌아가신 것이었군요.”
 그는 흐느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는 이미 몸을 운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입고 말았으니 어떻게 아버님을 찾아가 두 분의 원한을 갚을 수 있지요?”
 그러다 소년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나직이 외쳤다.
 “누구냐?”
 음성에는 공포와 비통함이 서려 있었다.
 그 소리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기척도 없이 나무 그늘에서 톡 튀어나와 미끄러지듯 소년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는 소년 앞에 철썩 엎드리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웅도련님, 접니다. 정원지기인 장의(張義)입니다.”
 소년은 바로 이 장원의 주인인 오천행의 아들 오일웅이었다.
 그가 어찌하여 저 모양이 되었을까?
 당대의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오일웅의 아버지는 십팔 세 때 이운한(李雲閒)이라는 재덕을 겸비한 규수를 아내로 맞아들여 매우 행복한 삶을 누리는 듯했다.
 그러나 오일웅의 어머니 이씨는 오일웅을 낳은 후 이상한 병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일웅의 첫돌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부 사이가 매우 좋았던 오천행은 큰 타격을 받고 매우 우울하게 지내다가 호원무사의 권유로 무공을 익히다가 끝내 무공에 탐닉, 집을 비우기가 일쑤였다.
 오천행의 부친인 오백청(吳百淸)은 아들의 마음을 잡아두려고 동은화라고 하는 규수를 다시 며느리로 삼게 되었다.
 동은화는 상당한 미녀였다. 다만 눈가의 요염한 기운이 너무 지나치다 할까?
 하지만 오천행은 동은화에게 조금도 정을 주지 않았다.
 오천행은 점점 가출할 때가 많았고 끝내는 한번 나가더니 몇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는 것이다.
 동은화는 남편이 없는 집에서 제멋대로 날뛰게 되었고 시부모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게 되었다.
 그녀의 시부모인 오백청 늙은 부부는 집안의 일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며느리의 야료를 못 본 척했으나 며느리의 행패가 더해지자 아예 안채에서 살게 되었고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허나, 좀처럼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두 늙은이는 모든 정을 손자인 오일웅에게 쏟게 되었다.
 다행히 오일웅은 매우 귀엽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총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두 살이 채 되지 못해서 글을 읽고 쓰기 시작했으며 다섯 살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술도 독학하기에 이르렀다.
 동은화는 시부모님들이 항상 눈엣가시처럼만 느껴졌다.
 그리하여 그녀는 친정부모와 음모하여 수대에 걸쳐 오씨 집안에서 일해온 하인들을 쫓아내거나 자기 심복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는 오일웅이 일곱 살 나던 해에 동은화는 음식에 독을 타서 시부모를 살해해 버렸다.
 게다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패의 사람들을 사서 오일웅의 외갓집으로 남몰래 보내어 전 가족을 몰살시켜버렸다.
 처음 동은화는 이웃의 눈이 있기 때문에 오일웅을 너무 지나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네의 여론이 점점 식어지자 태도는 급격히 변했다. 타인보다도 못한 태도에 오일웅은 몇 개월이 못되어 몰골이 말이 아니게 변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동은화의 마음 한구석에 오천행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거리낌이 있었기 때문에 공공연히 오일웅을 해치지는 못한 것이다.
 오일웅은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혜는 어른 못지않았다. 조부모와 외갓집 사람들이 몰살당한 사실에 이미 의심을 품고 알아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는 계모의 하인들이 아무리 구박을 하고 학대를 해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일웅은 계모가 외간남자와 놀아나는 틈을 타서 조부모의 무덤을 찾았다. 자기 자신을 돌봐달라고 기원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순간에 웬 사람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이윽고 오일웅은 나타난 사람이 바로 동씨에게 매수된 장의라는 정원사인 것을 알고 그만 막다른 곳에 이른 듯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장의는 소주인(小主人)의 이와 같은 모양을 보고 오일웅이 땅에 쓰러지기 전에 달려들어 그를 부축했다.
 그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초조하고도 비통한 어조로 나직이 부르짖었다.
 “웅도련님! 이 장의는 결코 은혜를 저버릴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일웅을 자기 무릎에 눕혔다.
 그리고 등에 메고 온 보따리를 풀어 한 병의 금장액을 꺼내 오일웅의 상처에 발라주었다.
 “웅도련님! 당시 제가 그녀에게 매수당한 척하지 않았으면 어찌 목숨이나마 부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점점 정신을 차리고 있던 오일웅은 그의 말투에서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점점 눈동자에 가득 띠고 있던 원한과 증오의 빛을 거두었다.
 장의의 울분에 찬 말이 계속되었다.
 “저는 별 도리 없이 마음을 모질게 먹고 도련님을 돌보지 않았지요. 잘못하다가는 그녀의 의심을 받고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죽음을 당하게 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때서야 오일웅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땅바닥에 단정히 앉으며 말했다.
 “장의, 내가 당신을 괜히 원망했구려!”
 장의는 그 말을 가로챘다.
 “웅도련님, 저는 최근에 또 다른 한 가지의 음모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조금 전 화화태세와 이야기하는 걸 엿들었습니다. 그녀는 두 분 노인을 해치운 후 도련님을 해치려고 했으나 도련님의 부친이 갑자기 들이닥치게 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화화태세의 뒤를 믿고 조만간 손을 쓴다는 것입니다.”
 오일웅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실망하는 빛을 띠었다.
 “그렇다면 곧 나를 해치자고 들 텐데 나는 지금 몸이······.”
 장의는 다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도련님, 그래서 나는 이렇게 몰래 나온 것입니다. 이 장의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반드시 도련님을 구하겠습니다.”
 오일웅은 크게 감동했다.
 “장의, 그대가 나를 구해 아버지를 찾게만 해준다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구천지하에서도 고마워할 거예요.”
 장의는 재빨리 말했다.
 “웅도련님, 오늘밤만 지내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으니 길을 떠나도록 하세요. 제 등에 업히십시오.”
 그는 오일웅을 들쳐업고는 보따리를 들고 살그머니 뒷문으로 집을 나섰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던 오일웅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능아가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웅아우, 그러면 어떡하다 곰의 탈을 쓰게 되었지?”
 오일웅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저에게 의숙(義叔)이라고 할 장의는 저의 상처를 생각해서 수로(水路)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도적을 만나게 되었지요. 의숙은 저를 보호하려다가 한 다리를 잘리고 강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벙어리가 되는 약을 강제로 복용당한 후 최명귀에서 주어졌지요. 그리하여 저는 사람을 짐승이 되게 하는 비방(秘方)의 희생이 되어 곰 모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일웅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능아는 그를 위로하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운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 웅아우가 무공을 알고 있었다면 그런 좀도둑들에게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웅아우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세요, 할아버지······.”
 운수는 이미 그런 뜻이 있었던 터라 즉시 소리내어 웃었다.
 “이 할아비가 우리 손녀의 말을 듣지 않고 누구의 말을 듣겠느냐?”
 오일웅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는 감동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운공, 그리고 소저, 저의 목숨을 구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저에게 무공까지 전수해 주시겠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몸을 일으켜 큰절을 하려고 했다.
 운수는 즉시 손을 들어 한 가닥 장력을 쏟아내어 오일웅이 허리를 구부리는 것을 막았다.
 “웅아,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은공이라고 부르지 말 것이며 조그만 일에 절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도록 해라!”
 오일웅은 다시 의자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어르신이 어떤 분인지도 저는 모르고 있군요.”
 그러자 능아가 즉시 그 말을 가로챘다.
 “할아버지의 아호 말이지? 우리 할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야. 무림에서는 일불, 쌍마, 삼수, 사괴 등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 자, 이들 가운데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맞춰봐?”
 운수는 능아를 흘겨보았다.
 “녀석도! 그렇게 함부로 지껄이다니 남이 들으면 웃겠다.”
 오일웅은 고심한 무공을 연마하지는 않았지만 최명귀 후방을 따라다니는 동안에 많은 견문을 쌓게 되었다.
 그는 이 말을 듣자 뭔가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아! 어르신께서는 당금 무림에서 몇 분 안 되는 절정고수 중의 한 분이시군요. 그러고 보니 어르신은 삼수 가운데 한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능아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째서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삼수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
 오일웅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간단하지요. 절정의 고인들을 제가 만나 뵙지는 못했지만 일불은 틀림없이 출가인이어서 소저의 할아버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거기다가 어르신은 자상한 분이시니 남에게 괴짜나 마인으로 통할 리도 없는 일. 그렇게 볼 때 삼수 가운데 한 분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운수는 오일웅의 분석에 감탄했다.
 “웅아, 너와 같이 어린 나이에 사리를 그토록 분명하게 분석하다니 훌륭하다. 노부는 방진우(方振宇)라고 하며 평소 남보다 빨리 뛰고 또 나잇살이나 더 먹었다고 해서 나를 운수라고 부른다만 대단한 재간은 없다.”
 능아는 오일웅에게 시선을 돌렸다.
 “웅아우, 할아버지가 괜히 그러시는 거야.”
 바로 그때 문밖에서 누가 낮게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 곧 누가 너의 할아버지에게 시비를 걸어올 텐데 큰소리를 치는 것이냐?”
 대담하게도 운수를 상대로 야유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능아는 호통소리와 더불어 몸을 날렸다. 대뜸 창가로 달려가서는 곧 닫혀진 창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그와 함께 번개같이 바깥쪽으로 날아갔다.
 허나, 그녀가 사면을 둘러보았으나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져서 부르짖었다.
 “어머! 도깨비 장난인가?”
 순간 먼젓번의 그 음성이 방안에서 들려왔다.
 “하하하하! 도깨비 장난인가?”
 그 사람은 능아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능아가 창문을 여는 동시에 기척도 없이 방안으로 숨어든 모양이었다.
 능아의 무공으로써 그와 같은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그 사람의 무공이 얼마나 고강한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헌데, 능아는 이번에는 놀라지 않고 창 밖에서 발을 한번 구르더니 방안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할아버지군요! 정말 이렇게 놀리시기예요?”
 원래 그는 잘 아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운수는 누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능아 홀로 창 밖으로 뛰쳐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동정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능아가 방안으로 뛰어들었을 때 붉은 코의 늙은 거지가 운수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늙은이가 하고 있는 꼴을 보면 누구든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키는 작은데 장작처럼 마른 것이 꼭 원숭이를 닮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머리통은 엄청나게 컸으며 눈과 코는 한곳으로 모여 있었다. 정말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었다.
 거기다가 머리칼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그의 등뒤로 붉은 칠을 한 호로가 매달려 있었고,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푸른 대나무가 쥐어져 있었다.
 길을 걷는 것도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걸음이었고 옷은 매우 해졌으나 조금도 더럽지는 않았다.
 능아가 방안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는 운수 곁에 있는 의자에 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 앉기 전에 능아가 그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는지라 부득이 그는 손을 벌려 능아를 얼싸안지 않을 수 없었다.
 
 
 3장 미혼고장!
 
 
 능아는 그의 품속에 뛰어들더니 벼락같이 몇 가닥 남은 노인의 수염을 힘껏 잡아당겼다.
 “거지 할아버지, 이래도 능아를 놀리시겠어요?”
 늙은 거지 노인은 울상을 지어 보이며 그녀를 안은 채 의자에 앉았다.
 “아이쿠! 능아야, 정말 나의 수염을 모조리 뽑을 테냐?”
 능아는 코끝을 찡그렸다.
 “물론이죠. 누가 놀라게 하라고 하셨어요?”
 운수가 이와 같은 모양을 보고 즉시 제지했다.
 “능아야, 함부로 굴면 못 써!”
 능아는 노인에게 혀를 내밀어 보이더니 질풍같이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이었다.
 운수는 능아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입을 열었다.
 “이보게, 취노삼(醉老三). 마침 잘 왔네. 지금 웅아를 둘째에게 보내야 하는데 시간이 있어야지. 마침 자네가 왔으니 이 형을 대신해서 수고를 좀 해주게.”
 거지 차림의 노인은 두 눈을 부릅뜨더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웅아라니? 웅아가 도대체 누구요?”
 운수는 오일웅을 손짓하여 자기 곁으로 불렀다.
 “웅아, 이분은 바로 강호에서 취수(醉手)라고 일컫는 뇌지원(雷志遠) 선배님이시다. 어서 인사를 드려라.”
 오일웅은 운수의 부름을 받고서야 앞으로 다가가 큰절을 했다.
 “뇌선배님, 웅아의 절을 받으십시오.”
 거지 차림의 노인은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일웅은 바로 한 마리의 곰이 아닌가!
 그런데 그 곰이 사람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에서 많은 견문을 쌓은 그였지만 이와 같이 희귀한 일은 처음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고개를 흔들며 운수에게 어리둥절한 어조로 말했다.
 “형님,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오?”
 운수는 오일웅이 절을 하고 자기 곁에 앉기를 기다려서 입을 열었다.
 “셋째, 그는 곰이 아니고 사람이라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일년 열두 달 화북과 중원 일대에서 노니는 자네가 어찌하여 갑자기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가?”
 거지 차림의 노인은 갑자기 얼굴빛을 가다듬었다.
 “아니! 형님은 내가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이 남쪽지방까지 온 줄 아시오? 방금 내가 창문 밖에서 그 누가 형님에게 시비를 걸려고 한다는 말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운수는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셋째, 이십 년 간 나는 강호에 발걸음을 좀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동태를 잘 모르네. 지난 반년 간 어떤 인물이 나타나서 커다란 변화라도 생겼단 말인가?”
 거지 차림의 노인은 암캐 같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운수를 바라보았다.
 “허참, 반년이라는 세월이 짧은 줄 아시오? 백골기(白骨棋)와 색혼령(索魂令)이 다시 나타났단 말이오.”
 운수의 안색이 변했다.
 “뭐라고? 적석쌍마(積石雙魔)는 지난번 심한 중상을 입지 않았는가?”
 거지 차림의 노인은 쓰디쓰게 웃었다.
 “누가 아니랍니까? 지난번 혈투 때 우리 세 사람도 중상을 입지 않았소?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도망치게 내버려두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는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이 이번에 세상에 다시 나올 때는 공력이 전보다 훨씬 뛰어나게 되었을 것이오. 그래서 나는 재빨리 달려와 형님과 둘째에게 소식을 전하려 한 것이오.”
 운수는 얼굴에 수심을 띠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을 제압할 사람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 능아가 음식상을 들고 와 모두 음식을 들게 되었다.
 별안간 거지 차림의 노인이 음식을 들려다가 두 눈썹을 곧추세우며 창 밖을 향해 낭랑히 외쳤다.
 “어디서 온 친구인데 슬그머니 지붕 위에 올라가는 것이오? 빨리 나서지 않으면 이 늙은 거지가 가만히 있지를 않겠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개의 싸늘한 광채를 빛내는 물체가 쏜살같이 두 노인이 앞으로 날아들었다. 동시에 부엉이 울음 같은 괴소가 일었다.
 그때서야 건너편 지붕 위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음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취수라는 늙은 거지의 귀가 매우 밝구나. 우리 형제가 막 이곳에 도착했는데 금방 알아차리다니 무림삼수(武林三手)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구나.”
 그들이 그와 같은 말을 할 때는 이미 싸늘한 빛을 발하는 두 물체가 어느덧 두 노인의 얼굴과 반 자도 안 되는 곳에 이르러 있었다.
 물론 두 노인은 일반강호의 고수들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이 비열한 수단으로 암기를 던진 이후에 말을 한 것이지만 그와 같은 암기를 피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
 두 노인이 막 손을 뻗쳐 그 두 물체를 받으려고 했을 때 한 가닥 부드러운 음성이 나직이 그들의 귀에 들려왔다.
 “입으로 불어내야지 손으로 받아서는 안되오!”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한 그 나직한 음성에는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어 그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노인은 가장 위급한 순간에 고려해 볼 여지도 없이 손을 멈추고 한 가닥 진기를 맹렬히 돋우어서는 날아드는 물체를 향해 휙 불었다.
 동시에 두 노인은 자기들 몸으로 능아와 오일웅의 몸을 막아 그들이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하게 했다.
 두 노인의 단전에서 불어 올려낸 진기는 매우 세찼다. 두 싸늘한 광채의 물체는 두 노인의 얼굴과 한치 정도 되는 곳에서 딱 멈추는가 하더니, 곧이어 날아오던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노인이 불어낸 진기는 촉망 중에 불어낸 것이기에 기운이 분산되어 멀리까지 미칠 수는 없었다.
 두 싸늘한 광채의 물체는 창 밖 일 장도 못 되는 곳에서 기운이 약해져서는 땅바닥 위로 떨어졌다.
 순간 찍!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별안간 불길이 확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땅바닥에서 두 송이버섯 모양의 오색연기가 천천히 지면 위로 확산되어갔다.
 두 노인은 이와 같은 모양을 보고 흠칫했다.
 “아! 미혼고장(迷魂蠱 )!”
 맞은편 지붕 위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두 노인이 손으로 막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 마지않는 듯 고함을 쳤다.
 “너희들이 이 미혼고장을 알아보고 속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도 너희들 명이 다하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만 실례하겠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은 지붕 위에서 몸을 날렸다.
 이어 세 사람의 그림자가 허공으로 뛰어오르더니 쏜살같이 사라져갔다.
 상당한 경신법을 지닌 자들이었다.
 두 노인은 놀란 나머지 쫓을 생각도 잊은 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취수는 발을 구르며 창 밖으로 쫓아가려고 했으나 운수가 그를 말렸다.
 “셋째, 그만두게. 이제 뒤쫓는다 하더라도 늦었네. 우선 저 두 무더기의 독장을 확산되게 내버려둔다면 사람한테 해를 끼칠 것이니 처리를 해야겠네. 그리고 몰래 우리들에게 경고를 해준 고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어 인사를 드려야지.”
 취수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마당에 버섯 모양으로 커지고 있는 오색의 연기는 이제 둥근 탁자의 둘레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집안의 뜰 앞이라 바람이 별로 불어오지 않았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손을 쓸 새도 없이 민가에 퍼지고 말았을 것이다.
 취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고인이 있어 우리들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크게 낭패했을 것이오.”
 그리고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도 이번 역시 공공화상인 것 같구려.”
 말을 마친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두 항아리의 술을 차례로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그는 두 항아리의 술을 비우고 말았는데 그 술은 적어도 한 말은 됨 직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오일웅은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히야, 이 어르신의 배는 굉장히 크구나. 그토록 많은 술을 다 어떻게 마시는 거지?’
 술을 마시고 난 취수는 입을 열었다.
 “형님, 저 독장을 처리하는데는 내가 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더니 그는 입을 벌렸다. 그러자 입 속으로부터 허연 물줄기 아닌 술화살이 벼락같이 바깥쪽으로 뻗어 나가 두 무더기의 독장 위에 떨어졌다.
 버섯 모양의 두 무더기 독장은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술화살에 덮이고 말았다.
 오일웅은 그때서야 그것이 어떠한 재간인가를 알아보고는 속으로 여간 부러워하지 않았다.
 운수도 그와 같은 모양으로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셋째, 술화살의 재간이 이와 같이 증진할 줄은 몰랐군! 이제는 이 늙은 형이 불을 불어야겠지”
 말을 끝낸 운수는 두 손을 한데 모으더니 급히 비비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는 마술을 부리기라도 하는 듯 손을 떼어내는 동시에 앞으로 쳐들었다.
 그러자 한줄기의 불길이 그 손바닥에서 쏟아져 나와 찍! 하는 소리와 함께 곧장 술화살로 덮여 있는 두 무더기의 독장으로 날아갔다.
 취수가 마신 두 항아리의 술은 원래 이 고장에서 으뜸으로 여기는 고량주였다. 거기다가 그가 내력으로 수분을 제거하여 쏟아낸 것이기 때문에 불이 닿자마자 확 타올랐다.
 이어 희뿌연 송이버섯과 같은 독장에 붙어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엷은 남색의 불덩어리가 되었다.
 그야말로 오색 영롱한 것이 개똥벌레가 흐르는 것 같기도 하여 매우 보기가 아름다웠다.
 두 노인은 겨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매우 악독하구나. 그 두 암기 속에 저토록 많은 미혼고장을 숨겨놓았다니!”
 그러면서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능아와 오일웅은 한번도 미혼고장에 대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따라서 능아는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띠고 물었다.
 “할아버지, 미혼고장이 무엇이에요?”
 운수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사람의 살에 그 독균이 닿기만 하면 사람의 본성을 잃게 되고 미혼고장을 편 사람의 명령을 듣게 된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취수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셋째, 좀 이상하다. 이 미혼고장은 백년 전 무림에서 피비린내 나는 액겁을 일으켰던 묘강(苗彊) 땅의 노괴물이 어느 이인에게 상처를 입은 후 강호에 다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고 하지 않던가? 따라서 그와 같이 악독한 미혼고장을 쓰는 방법도 실전되었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백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그는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 전 암기를 던져왔던 세 사람의 음성이 매우 귀에 익으나 금방 생각이 나지 않는데 강호에서 항상 떠돌아다니는 자네도 생각이 나지 않는가?”
 이와 같은 의문은 오일웅과 능아도 똑같이 느끼고 있던 참이라 운수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취수를 바라보았다.
 취수는 취수대로 이와 같은 사실을 상기했던 참이라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쏠리자 즉시 입을 열었다.
 “형님, 조금 전 암습을 가해왔던 세 사람은 말투로 미루어볼 때 진령 일대에서 종횡하던 묘씨삼효(苗氏三梟)인 것 같소. 그들은 이미 쌍마에게 투신했다는데 쌍마가 나의 이번 목적을 알고 몰래 뒤따라와 두 분 형님의 거처를 알자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운수는 갑자기 느끼는 것이 있는 듯 그 말을 받았다.
 “셋째, 조금 전의 그 좀도둑은 틀림없이 묘씨삼효가 틀림없을 것 같네. 이 미혼고장도 쌍마가 그들에게 주었을 것이네.”
 취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쌍마는 죽지 않은 것이 틀림없지요. 따라서 문제가 심각해지는 셈이죠. 아무래도 천하의 동도들에게 연락을 하여 힘을 모아야만 이번의 액운을 해소시킬 수 있을 것 같소.”
 그는 근심의 빛을 얼굴에 나타냈다.
 운수 역시 눈썹을 잔득 찌푸리고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문제는 쌍마보다 그들의 손에 미혼고장이 있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네.”
 취수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 것 같았다.
 “그렇다고 쌍마가 무림창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운수는 그 말을 듣고 더욱 침통한 빛을 띠었다.
 삽시간에 방안은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평소 말썽 많던 능아도 멍하니 앉아 있을 뿐 입을 열지 못했다.
 오일웅은 능아보다 몇 살 덜 먹었으나 능아처럼 어리둥절해하지는 않았다. 대신,
 “자고로 사불승정이라고 했습니다. 역사 이래 포악한 사람들은 결국 좋은 결과를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두 분 어르신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몇 마디 말은 대번에 음침하던 기운을 가시게 해주었다.
 취수는 오일웅을 바라보다 이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핫하하하! 좋은 말을 했다. 오, 정말 너의 생각이 훌륭하구나.”
 그는 운수에게 시선을 돌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우리는 잠시 이 일을 덮어두고 고민하지 않기로 합시다. 때가 되면 일이란 저절로 풀어지는 수도 있습니다.”
 취수는 말을 끝내고 탁자 위의 술항아리를 들었다. 다시 한 모금을 마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세 항아리의 술은 어느덧 텅 비어 있었다.
 취수는 짐짓 우스꽝스럽게 울상을 지으며 큰소리로 투덜거렸다.
 “원! 재수도 없군. 좀도둑놈들 때문에 이 거지가 마셔야 할 맛좋은 술들을 깡그리 낭비하게 되었으니 이번에야말로 목이 말라죽게 되겠는걸.”
 능아는 무거운 분위기에 매우 답답함을 느끼던 차에 취수의 그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보자 대번에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지 할아버지, 그거야 어려울 것 없어요. 능아가 다시 사환에게 항아리의 술을 갖다달라면 될 게 아니겠어요.”
 취수는 그 말을 듣자 실눈을 뜨고서 웃었다.
 “이 녀석아, 그렇다면 빨리 가서 술을 시켜오너라. 결코 너의 심부름 값은 잊지 않겠다.”
 능아는 그 말을 듣고는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그때 운수가 고개를 쳐들고 엄숙한 얼굴로 취수에게 말했다.
 “셋째, 일이란 때가 되면 저절로 풀리는 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세 사람은 백도(白道)의 영도자가 아닌가? 아무튼 노력을 다하고 나서 천명을 기다려야 할 것이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오일웅은 눈을 깜박였다. 무슨 할말이 있는 모양이었으나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마침 취수가 오일웅의 이와 같은 모양을 보고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어서 물었다.
 “이봐,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가?”
 오일웅은 겸연쩍은 듯 말을 더듬거렸다.
 “제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하기는 했습니다만 아마도 두 분 노인께서는 이미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운수는 오일웅이 총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즉시 시선을 오일웅에게 옮기고 격려하듯이 말했다.
 “이야기해 보아라. 잘못 말했다고 해도 관계가 없다.”
 오일웅은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두 분 어르신! 애당초 두 분과 함께 강호에서 활약하던 분으로 의수선배님이라고 계셨지 않습니까? 의수선배님께서 정말 의술이 신통하다면 해약쯤 조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에 쌍마의 그와 같은 암기를 한 알만이라도 훔쳐서 의수선배님에게 갖다주어 연구케 하시면 해약은 반드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두 노인은 어둠 속에서 밝은 등불을 본 듯 대번에 얼굴에 쌓였던 수심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지, 그래! 우리가 왜 그 생각을 못했담!”
 취수는 더욱 기뻐하며 오일웅을 품속에 끌어안고는 엄지손가락을 꼽아 보였다.
 “정말 자네가 제일이야! 생각하는 것을 보니 우리 늙은 것보다는 한층 더 고명하군.”
 그리고 그는 품속의 오일웅을 한번 내려다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그 일은 덮어두기로 하고 이 소형제가 누구인지, 또 누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형님은 아직 나에게 말씀을 해주지 않았는데 어서 이야기해 주구려.”
 운수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능아가 사환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방안에서 술을 마시고 음식을 들면서 오일웅이 겪었던 일들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게 되었다.
 취수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감개무량한 듯 오일웅을 위로했다.
 “자네의 교성과 지혜를 볼 때 하늘은 반드시 자네와 같은 사람을 파묻어 두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 나는 자네를 데리고 둘째형에게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겠다.”
 이 무렵, 밤은 깊어 어느덧 삼경이 되어 있었다.
 이튿날 아침 취수는 오일웅을 데리고 곧장 구의산으로 출발했다.
 운수는 능아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능아의 부친이 내공수련을 끝내기를 기다린 후 다시 모여 쌍마를 상대할 방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취수와 오일웅은 길을 떠났으나 오일웅의 걸음이 빠르지 못한 것을 본 취수는 오일웅을 아예 등에다 업고 황량한 소로만을 찾아 달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얼마 되지 않아 의수가 은거하고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곳은 구의산 서쪽의 툭 튀어나온 벼랑 위였다.
 사방은 높은 산들이 둘러서 있고, 만 장이나 되는 벼랑 아래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계곡이었다.
 고송 서너 그루가 벼랑 위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는 소리는 사람의 심금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벼랑에 돌출된 바위 둘레는 약 이삼 십 장이나 되었다.
 의수는 벼랑 가에 집을 짓고 나머지 빈터는 마당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집의 모양을 볼 때 바람만 좀 거세게 불어도 날려갈 것 같았다.
 취수가 그 바위 위로 올랐을 때 시골티가 확 풍기는 농부 차림의 키가 작은 노인이 초가집 안에서 벼락같이 뛰어나왔다. 그러나 그는 취수가 나타난 것을 보고는 기이한 동물이라도 본 사람처럼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 셋째! 일년에 한번 모이는 날이 아직 이른데 어찌해서 이곳까지 나를 찾아오게 되었는가?”
 취수는 두 눈을 부릅뜨고 퉁명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모이는 날이 아니면 내가 이곳을 와서는 안 될 일이라도 있소?”
 그리고 그는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자 그 시골 풍의 노인은 황망히 손을 내흔들었다.
 “아니 누가 자네를 환영하지 않는다고 했나?”
 그리고 그는 산봉우리를 향해 부르짖었다.
 “소삼자(小三子), 너의 작은할아버지께서 오셨다. 약은 그만 캐고 빨리 돌아와 맛있는 안주나 만들려무나.”
 그러자 조그마한 그림자가 쏜살같이 봉우리 위에서 달려 내려왔다.
 달려 내려온 사람은 온몸에 흙칠을 한 열다섯 살쯤 되는 키가 매우 작은 소년이었다.
 “작은할아버지! 잠시 후 제가 만든 음식을 잡숴보시고는 감탄하실 거예요.”
 취수는 그의 엉덩이를 치고는 말했다.
 “이 녀석이 몇 년 못 보는 사이에 주둥이를 깠구나.”
 소년은 헤헤 웃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취수는 그제야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둘째형, 적석산의 쌍마가 또 이 세상에 나타났다는구려.”
 농부 차림의 노인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변했으나 곧 침착성을 되찾고는 입을 열었다.
 “셋째, 그렇다면 그들도 구원을 받은 모양이지?”
 취수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구원받은 것은 고사하고 무공 역시 매우 고강해졌지요. 이야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저 애를 먼저 좀 보아주시구려. 지금 쓰고 있는 곰의 가죽을 벗을 수 있는지 의문이외다.”
 그리고 그는 오일웅에게 말을 했다.
 “웅아! 이분은 의수라고 일컫는 왕천풍(王天風) 노선배님이시다.”
 그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노선배님, 웅아가 인사를 드립니다.”
 의수는 의아한 시선으로 취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는 오일웅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겨 전신을 어루만져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이 세상에서 드문 기재로구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곰의 가죽을 둘러쓰고 있군.”
 그는 취수에게 정중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애가 입고 있는 곰의 가죽은 사람의 가죽을 벗기고 곰의 가죽을 둘러 씌워놓았기 때문에 곰의 가죽을 제거하는 건 어렵지 않으나 곰의 가죽을 다시 입혀야 한다네.”
 취수는 매우 실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말 달리 방도가 없겠소?”
 의수는 깊이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사람의 가죽은 벗겨진 후 다시 자라나기 어렵네. 이식이 아니고는 별 방법이 없지. 그러나 천년영지를 구해서는 주과경장(朱菓瓊奬)을 함께 복용하고 다시 천성난엽(天星蘭葉)을 받아 전신에 바른다면 새 가죽이 돋아날 수도 있겠지.”
 취수는 크게 실망을 했다.
 “그렇다면 다 소용이 없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영지와 주과가 그렇게 찾기 쉬운 물건인가?”
 의수는 침착한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마침 이 물건이 나에게 조금씩 있네. 다만 분량이 너무 적어서 기껏해야 앞쪽의 얼굴이나 또는 사지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 온몸의 가죽을 되살리기는 힘든 노릇이지.”
 오일웅은 이 말을 듣고 곧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는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 두 손과 두 발의 본래 모양을 되찾고 싶습니다. 얼굴은 차후문제입니다.”
 취수와 의수는 다시 한 번 오일웅을 쳐다보았다.
 두 노인은 일제히 감탄을 했다
 “너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우리들은 너의 뜻을 따르겠다만 너는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
 오일웅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결코 후회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래 무공을 익히는 것은 의로운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곧이어 이들은 집안으로 들어가 의수의 손자인 왕암이 말들어주는 음식을 들게 되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미혼고장의 해약을 의수가 조제를 할 줄 모르는 것은 상대방의 약성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성을 방지할 약은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두 노인은 약간이나마 안심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튿날 의수는 오일웅이 손과 발 모양을 되찾는데 사용되는 양약과 미혼고장을 예방하는 약을 만드는데 착수하게 되었다.
 약을 만드는 약제가 구비되었다고는 하나 얼마간의 시간은 걸리기 마련이었다.
 그 동안 취수는 할 일도 없고 해서 오일웅에게 내공의 구결(口訣)을 가르치고 왕암에게 몇 수의 초식들을 가르쳤다.
 오일웅은 손발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초식을 익힐 수는 없었지만 왕암이 연마하는 것을 보고 절로 많이 새겨두게 되었다.
 어느덧 닷새가 지나 의수는 약재를 다 만들어 오일웅의 손발을 감싸고 있는 곰의 가죽을 벗기는 작업에 들어갔다.
 의수는 먼저 몇 가지 영약으로 된 환약을 오일웅에게 복용시킨 후 그의 수혈을 짚었다.
 이어 그는 네 치나 되는 은침을 꺼내서 오일웅의 손발에 있는 몇 곳의 혈도를 짚어 피를 흐르지 못하게 한 후 손목과 발목이 있는 곳으로부터 조심스럽게 곰의 가죽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성난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이제 대수술은 끝난 것이다.
 수술이 막 끝났을 때 산 아래쪽에서 연달아 긴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취수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살기를 띠었다.
 “이런 작자를 보았나. 큰 형님의 말이 틀림이 없구나. 정말 이곳까지 냄새를 맡고 찾아왔군.”
 그리고는 서둘러 초가집 밖으로 달려나갔다.
 의수는 이 모양을 보고는 그의 무기인 자금약서(紫金藥書)를 들고 급히 뒤를 쫓았다. 동시에 그의 손자에게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소삼자, 집을 잘 지켜야 하며 웅아를 잘 돌보아야 한다.”
 곧이어 의수와 취수는 석평(石平)으로 급히 뛰어나갔으며 왕암은 집을 나와 문 앞을 지키게 되었다.
 바로 그때 산길 아래로부터 대여섯 명의 그림자가 급히 뛰어 올라왔다.
 나타난 사람은 여섯 명이나 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삼수와 함께 이름을 날렸던 사괴(四怪) 가운데 쌍면염라(雙面閻羅)와 사수추혼(四手追魂), 두 노괴도 있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한 젊은이와 세 사람의 대한이었다. 젊은이는 준수하게 생겼으나 경박한 티가 보였고, 세 장정은 구레나룻에 체구가 우람한 자들로서 한결같이 묘족(苗族)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의수와 취수는 젊은이와 세 장한이 같이 선 것을 발견하고는 모두 강호에 발을 갓 디딘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태양혈이 툭 불거진 것을 볼 때 솜씨는 결코 두 노괴에 못지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그 젊은이는 지위가 두 노괴보다는 더 높은 듯 거만했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그에게 굽실댔다.
 그와 같은 사정을 살핀 의수와 취수는 흠칫했다. 오늘 나타난 적이 얕볼 수 없는 상대들이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노인은 명성을 떨친 지 오래된 사람으로서 전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서도 조금도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취수는 썩 앞으로 나서면서 웃음부터 터뜨렸다.
 “하하하! 난 누구라고? 알고 보니 명성이 자자한 장형과 오형이 아니오?”
 두 노괴는 그 말을 듣고 차갑게 응수했다.
 “흥!”
 동시에 그들은 양쪽으로 피하여 한복판의 위치를 그 젊은이에게 내주었다. 그리고는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분은 적석산 쌍선의 수제자이외다. 비삭영사(飛索靈蛇) 부규(符規)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들은 뒤의 세 대한을 가리키며 소개를 했다.
 “이들 세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쌍선의 친위무사(親衛武士)들로서 묘령삼웅 잠(岑)씨 삼형제이외다.”
 그리고 가슴을 쓱 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적석쌍선은 두 분을 매우 중시하여 곁에 두고 싶으나 시간이 없어서 우리 두 사람에게 모시고 오라고 보낸 것이오.”
 그때 그 젊은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두 분 호법(護法)은 말이 많소? 즉시 나의 사부님께서 그들에게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리고, 만약 귀의한다면 옛날 빚은 없는 것이나 그렇지 않을 때는 그들의 목을 잘라 오게 하였다고 알리면 그만 아니오.”
 너무나 오만하고 무례한 언행이었다.
 의수와 취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취수는 얼굴에 비웃음을 가득 띠고서 냉소했다.
 “둘째형, 나는 적석산에 무슨 쌍마가 나타났었는지 말은 들었어도 쌍선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도대체 그들이 누구라는 말이오?”
 의수도 시치미를 떼었다.
 “아마도 두 마리의 여우가 요정이 된 것이겠지.”
 “알고 보니 여우의 새끼들이 이곳에 나타났군.”
 두 노인이 서로 주고받으며 야유하는 말에 비삭영사라는 젊은이는 얼굴에 노기를 띠며 소리를 내질렀다.
 “닥치시오!”
 그는 두 노괴에게 다시 호통을 쳤다.
 “두 호법은 저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두 늙은이를 잡아 본좌의 명령을 행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 것이오?”
 쌍면염라와 사수추혼은 급히 달려와 한 사람은 취수를, 한 사람은 의수를 공격해왔다.
 두 노괴는 한결같이 기세 등등하게 독수리의 부리 같은 손가락으로 두 노인의 가슴팍을 찍으려들었다.
 취수와 의수는 몸을 흔들 하면서 수월하게 그들을 피해버렸다. 동시에 두 사람은 두 노괴를 향하여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세찬 질풍이 일면서 두 노괴의 허리에 있는 경문, 오추, 거골 등 몇 곳의 혈도를 노리고 날아갔다.
 일초에 상대방의 공세를 해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연신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취수는 손을 쓰면서도 야유를 잊지 않았다.
 “잠깐! 오형과 장형은 쌍마의 호법이 되었다면서 이 거지의 취하도 받지 않고 지옥으로 가려고 서두는 것이오?”
 의수도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정말 괴상한 일도 다 있군. 두 노괴가 쌍마의 호원무사가 되다니!”
 두 노괴는 이와 같은 야유를 받자 그만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추악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일불(一佛), 쌍마, 삼수, 사괴는 동등한 신분의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두 노괴가 쌍마의 수하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여간 창피한 노릇이 아니었다.
 두 노괴는 그만 수치가 분노가 되었다. 더 대꾸도 하지 않고 한소리 미친 듯한 호통소리를 지르더니 두 노인에게 덮쳐오면서 각기 양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두 노인을 박살이라도 낼 것 같은 세찬 장력이 일었다.
 두 노인은 오늘 나타난 적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하고 그들로 하여금 헛되이 진기를 소모시키고 마음이 흔들리도록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야유를 퍼부은 것이다.
 두 노인은 두 노괴가 노해 장력을 뻗쳐오자 즉시 몸을 날려 예봉을 피하고 동시에 소리를 쳤다.
 “이 노괴들아, 이십 년 전에 너희들이 우리들을 이기지 못했는데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이길 수가 있겠나!”
 두 노인은 이와 같은 소리를 하면서도 조금도 손발을 늦추지는 않았다.
 삽시간에 손과 발이 오고가는 가운데 십여 초를 교환하기에 이르렀다.
 두 노괴는 양손에 세찬 장력을 일으키면서 공격을 했다.
 그러나 의수와 취수는 여전히 경쾌한 신법을 펼쳐 그들과 지구전으로 맞섰다.
 무공에 있어서는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 가장 요긴한 일이었다. 그러나 두 요괴는 야유를 받은 끝에 크게 격노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심기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때 옆에서 이를 구경하고 있던 비삭영사가 이와 같은 광경을 보고 대갈했다.
 “두 분 호법은 그 늙은 것들의 말을 듣지 말고 심신을 가다듬도록 하시오.”
 두 노괴는 수십 년의 강호 경험이 있는 사람이니만큼 그 말을 듣고는 즉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곧 마음을 가다듬고 날렵한 경신법을 펼쳐 의수와 취수를 상대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두 노괴가 경악하여 경신법 등으로 맞서려고 했을 때 그들의 진력은 이미 삼 성이나 소모된 뒤였다.
 두 노인은 목적을 달성하게 되자 더는 두 노괴와 싸우려는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다.
 취수와 의수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노괴야, 이미 때는 늦었다.”
 곧이어 두 노인은 신법을 일변시켰다. 번개같은 순간에 각자가 칠장팔퇴를 두 노괴에게 퍼부었다.
 두 노괴는 칠장과 팔퇴의 공격을 순간적으로 받게 되자 재빨리 진기를 돋우고 손을 들어 맞서지 않을 수 없었다.
 펑! 펑! 펑!
 몇 번이나 커다란 음향이 울려 퍼지고, 두 노인은 몸을 약간 휘청했다.
 반면 두 노괴는 연달아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간신히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으나 내장은 이미 충격을 받은 후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안색이 크게 변한 비삭영사는 두 노괴의 상처를 돌볼 틈이 없이 허리춤에서 괴상하게 생긴 사두연편을 꺼내들고 날 듯 달려나와 두 노괴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좋다. 두 늙은이에게 이와 같이 고심한 재주가 있었다니 천만뜻밖이군. 이 나리께서는 너희들을 용서할 수 없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사두연편을 휘둘러 온 허공 가득히 뱀 모양의 채찍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는 취수의 몸을 노리고 덮어씌울 듯이 압박을 가해왔다.
 세 묘족 차림의 대한은 비삭영사의 명도 듣지 않고 묘도(苗刀)를 꺼내 의수를 에워싸고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두 노괴는 이 바람에 운기조식을 할 수 있었다.
 취수는 비삭영사가 공격을 해오자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다음 순간, 어깨를 흔들 하더니 어깨에 메고 있는 붉은 호로를 손에 들었다.
 
 
 4장 내가 왜 이곳에 와 있지?
 
 
 그는 한 손으로 호로를 들더니 빙글 돌려서 한 폭의 붉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막았다.
 삽시간에 쨍! 쨍! 쨍! 하는 소리가 급격히 일었다.
 사두연편과 호로가 서로 부딪쳐 일어나는 소리였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는 것으로 보아 호로는 무쇠로 만든 모양이었다.
 곧이어 두 사람은 흠칫하더니 몸을 미미하게 흔들거렸다.
 비삭영사와 취수는 일시에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더욱 취수는 아연실색했다.
 취수는 즉시 상대방을 경시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산도해(移山倒海)라는 일초를 호로로 펼쳤다. 육성의 진기를 돋우고서 번개같이 비삭영사의 앞가슴을 향해 내지른 것이다.
 동시에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좋아! 다시 이 거지 할아버지의 일초를 받아보아라.”
 비삭영사는 냉소했다.
 “흥, 누가 겁낼 줄 알고?”
 그는 조금도 피하지를 않고 십성의 공격을 사두연편에 돋우고 영사패미(靈蛇擺尾)라는 일초를 펼쳐서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맞부딪쳐왔다.
 펑!
 다시 한 번 커다란 울림이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흠칫했다.
 취수는 두 팔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비삭영사는 한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취수는 이를 보고 역시 자기보다는 한 수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그는 손바닥을 홱 뒤집었다. 호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십성의 공력을 돋우고서는 번천복지( 天覆地)라는 일초를 썼다.
 호로는 홱 하니 비삭영사의 머리를 노리고 내려쳐지는데 그 기세가 무서운 파도처럼 거셌다.
 비삭영사는 승복할 수 없다는 듯이 한소리 호통을 내질렀다.
 “얍!”
 동시에 그는 몸을 뒤로 약간 기울이더니 사두연편을 위로 쳐들며 사수앙천이라는 일초를 펼쳐 맞받으려고 했다.
 다음 순간, 쿵 하는 탁한 음향과 함께 취수는 한걸음을 물러섰고, 비삭영사는 비틀거리며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그때서야 비삭영사는 자기의 공력이 취수보다는 한 수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나, 그는 기가 죽지는 않았다.
 “얍!”
 그는 한소리 폭갈을 터뜨리며 몸을 유령처럼 놀려 그가 강호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영사비삭십인편(靈蛇飛索十人鞭)이라는 절기를 펼쳐 소나기처럼 취수의 급소를 노리고 공격을 퍼부었다.
 이 편법은 바로 쌍마가 묘강노괴에게서 얻은 절학 가운데 하나였다.
 과연 이 편법은 무서웠다. 취수는 일시에 채찍의 그림자만이 나부끼듯 자기의 여러 급소를 노리고 동시에 채찍이 덮쳐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더구나 해소시킬 방법도 떠오르지 않자 취수는 가슴이 뜨끔했다.
 부득이 그는 호로곤낭(葫蘆滾浪)이라는 절초를 펼쳤다. 호로를 휘둘러 자기의 몸을 호로의 광막 속에 완전히 감추고 만 것이다.
 두 사람은 조금 전까지 서로 맞받아 치는 수법으로 나아갔으나 이제는 완전히 수법이 바뀌어 속공을 다투어 취하는 결과가 되었다.
 비삭영사는 묘강의 절기에 힘입어 일시 유리한 형세에 놓이기는 했으나 대번에 취수를 이겨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편 의수가 은거하고 있는 석평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번개같이 움직이고 있었고 세찬 바람이 소용돌이를 쳤다. 그리고 사자의 포효 같은 호통소리가 산을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들이 지나는 사이 어느덧 오십 초를 교환하기에 이르렀다.
 취수는 그때서야 비삭영사 부규가 휘두르고 있는 사두연편의 오묘한 공효를 알 수 있었다.
 비삭영사의 손에 들린 그 연편은 무슨 물건으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신축성이 있었다. 손을 쓰는데 따라서 길어졌다가 짧아지곤 했으며,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서쪽으로 날아들어 감기는 것이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연편은 일초에 여러 곳의 급소를 한꺼번에 노리는 이점이 있었다. 아예 초식의 변화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연편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비삭영사 부규의 공력이 그보다 못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취수는 이미 땅위에 나뒹구는 시체가 되고 말았을 것이리라!
 취수는 역시 무림삼수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즉시 몸을 흔들거리며 비삭영사 앞으로 바짝 다가들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두연편은 그 효용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형세는 급전직하, 비삭영사가 오히려 허둥거리는 형세에 놓이게 되었고 취수는 연달아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수는 이와 전혀 달랐다.
 세 묘강의 대한은 중원에 알려지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묘강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지닌 자들이었으며 쌍마의 친신호위가 된 후에는 또 많은 것을 배운 자들이었다.
 이들 중의 어느 한 사람이라면 사괴와 비삭영사보다는 훨씬 떨어지는 인물이었으나 세 사람이 함께 덤비자 상황은 달라지고 말았다.
 더구나 그들 세 사람은 나서자마자 교묘한 배합을 이루어 공격을 해온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이 일거에 삼 초를 펼치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에 의수로서는 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취수와 마찬가지로 상대를 얕보고 싸우지는 않았다.
 그는 그들과 부딪치는 순간부터 서산굴석십오식이라는 절기를 써서 약서로 빈틈 하나 없는 광막을 이루어 자신의 몸부터 보호를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간신히 그들과 맞설 수 있었으나 취수와 같이 말을 할 수 있는 여유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묘강의 세 대한은 모두 벙어리였다. 달려들자마자 무조건 공격만 펼쳤지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간의 싸움은 더욱 긴장된 감을 자아냈다.
 어지러운 약서의 그림자가 허공을 누비는 가운데 의수는 자기의 몸을 거의 짙은 금빛에 가두고 말았다.
 이와 반면 세 자루의 묘도는 어둠 속에 눈부신 광채를 발하고 있었는데 그 모양은 번개가 잇따라 허공에서 번쩍이고 있는 것 같았다. 더욱 그 번개같은 광채가 짙은 금빛으로 이루어진 둥근 광막을 향해 벼락이 치듯이 내려꽂히곤 했다.
 다만 세 대한은 바깥쪽에 있으니까 움직이는 속도가 이쪽보다 몇 배가 더 빨라야 했다.
 그들의 몸은 칼의 광막에 완전히 휩싸여버렸다고는 못하지만 희뿌연 칼의 광막 속에 엷은 연기 같은 자취만이 보일 뿐으로 그들의 형상을 분별하기는 어려웠다.
 의수는 세 사람의 협공을 받고 있기 때문에 피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따라서 그는 약서를 들어 막고 치는 수밖에 없었으며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콩 볶듯이 일었다. 이 소리에 따라 사람들의 가슴도 쾅쾅거렸다.
 삽시간에 이들은 백 수십 초를 싸우게 되었으며, 의수는 점차 두 눈이 충혈되고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숨결도 이미 가빠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초가집 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난쟁이 왕암은 긴장과 초조 속에 놓여 있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긴박감을 느꼈다.
 만약에 그가 평소의 할아버지가 한번 한 말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이미 싸움판으로 뛰어들고 말았을 것이다.
 헌데, 그가 긴장되어 할아버지의 싸움을 주시하고 있을 때 운기하여 내상을 치료하고 있던 두 노괴가 몸을 일으켰다.
 두 노괴는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번 지켜보더니 얼굴에 흉측한 빛을 띠었다.
 그러더니 쌍면염라는 취수에게로 달려가고, 사수추혼은 유령처럼 왕암 앞으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왕암은 즉시 손에 들고 있는 노차( 叉)와 같은 기이한 무기를 흔들며 사수추혼에게 호통을 쳤다.
 “사괴라면 인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당신들도 상당히 비열한 사람들이군. 이 도련님이 당신의 목숨을 빼앗고 말겠소.”
 사수추혼은 그 말에 냉소를 했다.
 “흐흐흐! 풋내기가 제법 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그는 왕암이 앞으로 달려오기도 전에 일장을 들어 한번 후려쳤다.
 그 세찬 장력에 왕암은 무기를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격타를 당하고 말았다. 곧이어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노괴는 그를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화섭자를 꺼내 초가지붕에 불을 당기기 시작했다.
 의수는 그것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아 자기도 모르게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다음 순간, 대한이 묘도를 휘두르며 그의 왼쪽 어깨를 노리고 매섭게 찔러왔다. 의수는 속으로 아차 하며 그 묘도를 막았다. 나머지 두 대한도 번개같이 칼을 휘둘러서는 그의 가슴팍과 허벅지에 각기 반치나 되는 상처를 입혔다.
 헌데, 그의 몸이 미처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불을 지른 사수추혼이 달려오면서 호통을 쳤다.
 “이 늙은 것아! 조금 전의 위풍은 다 어디로 갔느냐? 이제 너도 나의 일장이 어떤지 맛이나 보아라!”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의수는 그가 내지른 일장에 가슴팍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의수는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하며 쓰러졌다.
 취수 역시 비삭영사와 쌍면염라의 공격에 손발이 어지러워진 순간에 쌍면염라가 내지른 일장을 가슴팍에 맞고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손을 멈추어라!”
 벼락같은 호통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뭇 사파의 고수들은 의수와 취수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하다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고개를 들어보기도 전에 그들 눈앞에 한 잿빛 그림자와 한 흰빛 그림자가 번쩍하고 빛났다.
 그리고 두 그림자는 땅에 내려서려는 순간, 벼락같이 한바퀴를 빙 돌았다.
 그러자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가 기척도 없이 그들의 손에서 떠나는가 싶더니, 쓰러져 있던 세 사람도 사라지고 말았다. 곧이어 그들은 눈앞이 훤해진다고 느꼈다.
 어느덧 그들의 앞에는 십 이삼 세 정도의 소녀와 온 얼굴에 주름이 진 노승의 모습을 나타냈다.
 노승의 두 손에는 그들이 방금 잃어버린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노승의 발 옆에는 쓰러진 세 사람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소녀는 몸을 굽히고 세 사람의 상처를 돌보아주었다.
 그런데 노승과 소녀의 뒤로 사람의 키보다도 큰 백학이 앉아 있었다.
 두 노괴를 위시한 사파의 고수들은 이와 같은 광경을 보고는 그만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만약에 지금 나타난 노승이 그들의 무기를 빼앗지 않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다면 그들의 목숨이 붙어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노승은 그들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 시주들, 세상에는 인과응보라는 것이 있는데 당신들은 나중에 받게 될 천벌이 두렵지 않소?”
 그러자 사수추혼이 의심스러운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혹시 대사는 무림에서 일불이라고 일컫는 공공대사가 아니시오?”
 노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공공은 바로 노승의 법호이외다.”
 두 노괴는 그만 가슴이 서늘해졌다.
 공공대사는 그들과 함께 십대고수로 알려져 있지만 공공대사가 무림에 명성을 떨친 것은 얼마나 더 오래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앞선 선배였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그들의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겠는가?
 사수추혼은 슬쩍 비삭영사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소채주(小寀主), 오늘 공공선배님께서 나타나셨으니 이번만은 그들을 용서해 주기로 하지요. 아마 우리가 그냥 돌아간다 하더라도 쌍선께서는 꾸짖지 않을 것입니다.”
 부규는 거만한 자였으나 나타난 사람의 솜씨가 어떻다는 것쯤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두 분 호법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냥 돌아가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는 겸연쩍게 왔던 길을 되돌아서 가며 체면치레의 한마디를 던졌다.
 “노화상, 다음에 만납시다.”
 노승은 그 말을 고깝게 생각하지 않는 듯 빙그레 웃었다.
 “이 무기들은 노승에게 필요 없으니 가져가도록 하시오.”
 이어 그는 손을 가볍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렸던 무기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릿하면서도 날렵하게 주인을 찾아 날아가지 않는가?
 이 놀라운 솜씨에 그들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들은 무기를 받아들고 더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아 걸음을 돌려 나는 듯이 그곳을 떠났다.
 그때 소녀가 세 사람의 상처치료를 끝내고 몸을 일으켰다.
 “사형, 이 상처를 입은 난쟁이 소년이 저의 고종동생일까요? 저는 아무래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고 생각되는군요.”
 노승은 한번 내려다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운수가 의수에게 보내어 치료를 받게 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아마도 수술을 받은 후 모습이 달라졌겠지.”
 그러자 먼저 의수와 취수가 정신을 차렸다.
 몸을 벌떡 일으킨 두 사람은 그들 앞에 노승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즉시 꿇어 엎드리며 큰절을 했다.
 “노선사께서 또 우리를 구했으니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하겠습니까?”
 공공대사는 즉시 손을 뻗쳐 그들이 꿇어 엎드리는 것을 막았다.
 “뇌시주와 왕시주는 어이하여 속된 말들을 하시오? 기실 두 번 다 우연에 지나지 않았소.”
 의수와 취수도 활달한 사람이라 그 말을 듣고는 몸을 바로 했다.
 “그렇다면 후배는 삼가 대사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이때 왕암도 정신을 차리게 되어 몸을 일으키다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는 잽싸게 절을 했다.
 “대사님께서 저의 할아버지들의 절을 받지 않으시겠다면 제가 저의 것과 함께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큰절을 했다.
 노승은 조그마한 그를 주의하지 않았던 탓으로 미처 막지를 못하고 고스란히 그의 절을 받게 되었다.
 이어 노승은 그를 부축해 일으켜서는 의수에게 물었다.
 “시주, 이 애가 혹시 곰의 탈을 썼다던 오일웅이오?”
 그때서야 의수와 취수는 안색이 크게 변해서는 부르짖었다.
 “앗차! 큰일났다. 웅아는 수술을 받고 집안에 있었는데 이제 집이 타버렸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하지?”
 그러자 공공대사와 함께 온 소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뭐라구요? 그럼 웅아우는 불길에······.”
 그리고 울음을 터뜨리며 기절해버렸다.
 노승은 재빨리 소녀를 부축했다. 그러면서 얼굴에 놀라는 표정을 띠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애가 오일웅이 아니라면 누구입니까?”
 의수는 비통한 어조로 대답을 했다.
 “그는 오일웅이 아니고 이 후배의 손자녀석입니다.”
 노승은 그만 침울해졌다.
 “한걸음 늦고 말았군.”
 이윽고 불을 끄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동안 부산하게 움직였다.
 나이가 어린 소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불은 꺼져 있었다.
 그러나 타고남은 재 속에 사람의 뼈라고는 토막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이어 소녀가 백학을 타고 벼랑 아래로 내려가 계곡 밑바닥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바위들이 어지러이 있을 뿐 오일웅의 시체는 영영 찾아볼 길이 없었다.
 오일웅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일이 이렇게 되자 강호의 이인들도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끝내 그들은 집이 불타 없어지고 기거할 데도 마땅치가 않아 바위로 된 땅에 몇 자의 글을 남기고는 비통한 심정을 안고서 그곳을 떠나갔다.
 그러면 오일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무렵 그는 한 널따란 동굴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조용히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일웅이 누워 있는 곳은 바로 동굴 벽 옆에 난 굴 입구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이었다.
 이와 같은 동굴은 산허리 안에 위치해 있었으나 조금도 어둡지가 않았다. 습기도 없었다.
 빛은 바로 천장에 난 동굴에서 비쳐들고 있었다.
 오일웅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이와 같이 기이한 광경이 눈앞에 벌어진 것을 보고는 놀라 중얼거렸다.
 “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내가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 것이지?”
 그러면서 그는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다.
 허나, 그는 곧 어이쿠! 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서야 그는 자기의 손과 발에 두터운 붕대가 감겨져 있고 곰의 가죽 몇 곳이 불에 데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일웅은 의수가 자기를 벼랑 가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서 침대 위에 뉘이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의수는 자기에게 세 알의 환약을 먹인 후 수혈을 짚어 그를 잠들게 했던 것이다.
 헌데, 그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 온몸이 불기에 뜨끔거렸고, 짙은 연기에 눈마저 뜰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집밖에서 연달아 들려오는 호통소리에 어떤 변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사리를 짐작한 그는 불에 타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침대 위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막 수술을 받은 몸이기 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입을 열고 살려달라고 외칠 생각으로 입을 벌리자마자 맵고 짙은 연기가 입 안으로 스며들어와 기침을 하기만도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더구나 바로 문 밖의 왕암이 비명을 내지르지 않는가?
 오일웅은 그만 겁이 덜컥 났다. 의수와 취수도 공격을 해온 적들에게 어쩌면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일웅은 즉시 남에게 구원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라면 자기 스스로 노력하여 이곳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손과 발이 붕대로 감겨져 있었지만 손목 위의 관절은 조금도 이상이 없었다.
 더구나 그는 살아야겠다는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이 무렵 초가집 사면이 불바다가 되었다. 천장에서도 불똥이 떨어지고 있었다.
 오일웅은 사방을 대강 살펴본 후 벽이 전부 가는 나뭇가지로 엮어서 이루어진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누워 있는 침대가 바로 그 벽과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다리를 잔뜩 웅크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부딪치기만 하면 벽이 무너질 것 같았던 것이다.
 이윽고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막 불이 붙기 시작한 벽을 향해 힘껏 발길질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벽은 그의 온몸을 실은 발길질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이 무너지고 말았다.
 따라서 그는 그의 몸도 밖으로 튀어나가게 되었으며 아래로 떨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눈을 뜬 그는 앗! 하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끝났다. 이제는 살아날 가망이 도저히 없구나.’
 그가 무너뜨린 벽 저쪽은 바로 벼랑이었던 것이다. 벽이 무너진 후 그의 몸도 밖으로 나오게 되어 만 장이나 되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강호에서 허공에 매달렸다가 떨어지는 재주를 피워왔기 때문에 침착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냉정함을 잃지 않아야만 벼랑에 나와 있는 풀이라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양쪽의 절벽은 매끄럽기만 했다.
 어느덧 그는 벼랑의 반이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아래쪽은 아득하나마 계곡의 밑바닥이 보였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바위들이 흩어져 있을 뿐 기대를 걸어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그때 한 거대한 무형의 힘이 휙! 불어와 그의 몸을 허공에서 멈칫거리게 만들었다.
 곧이어 그 힘은 그의 몸을 맴돌게 만들었다.
 맴을 돌 듯 그의 몸이 세차게 돌기만 하자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몽롱한 의식 속에 그는 자기가 그 힘에 빨려서 깎은 듯한 절벽 쪽으로 부딪쳐 가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한 널따란 동굴 안이었던 것이다.
 오일웅은 그와 같은 생각이 떠오르자 혹시 자기가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사지와 몸에 느껴지는 고통에서 죽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승에 간 것이라면 육체적인 고통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어 그는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다. 허나, 동굴 안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발견할 수가 없었다.
 사람은커녕 동굴 안은 외부와 통할 수 있는 곳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그가 있는 곳이 천장에 난 동굴의 바로 밑이 아니었던 관계로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팔과 무릎으로 그는 천장에 난 동굴 밑으로 기어갔다.
 그러나 바로 밑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는 순간, 그는 자기가 그 누구에게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굴 입구에는 벌집 같은 구멍들이 벌건 불길에 휩싸여 있어 도저히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총명한 그도 이에 이르러서는 그만 생각이 꽉 막히고 말았다.
 그때였다. 별안간 천장 동굴의 불길이 크게 일었다.
 벌집 같은 구멍에서 이는 불길이 열 배로 불어난 것이다.
 그러나 일순, 오일웅은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불어올 뿐 뜨거운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불길은 점점 더 커지고, 시원한 바람도 더욱더 급해졌다.
 삽시간에 오일웅은 천장의 그 동굴에서 한 가닥 세찬 흡인력이 생겨 자기의 몸을 위로 빨아들일 듯이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의 뇌리에는 자기가 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게 된 원인을 깨닫게 되었다.
 “아, 알고 보니 그랬었구나.”
 그 논리는 간단했다.
 천장 동굴 벽에 난 구멍들에 탈 수 있는 기체가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구멍으로 기체가 뿜어 나오는 순간, 불길로 화하는 모양이었고, 불길이 위로 치솟아 오르며 바람이 뜨거운 기운의 영향으로 위로 치솟게 된 것이다. 따라서 동굴 안의 시원한 바람이 위로 치솟아 공간을 메우게 괴고, 그 공간은 바깥바람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용으로 자연히 한 가닥 기류를 형성하게 되고 벼랑 아래로 떨어져가던 오일웅 역시 그 기류에 휩쓸려 이 동굴 안으로 끌려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무릇 어떠한 물건이라도 맴돌게 될 때 그 선회하는 힘에 따라 직선으로 나아가게 마련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오일웅의 몸은 그 흡인력에 이끌려 들어오다가 그 좁은 굴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옆 동굴에서 지금 오일웅이 있는 동굴로 바람이 들어오는 순간, 동굴의 공간이 커짐에 따라 바람의 힘도 크게 약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오일웅의 몸은 그 무게로 더 날려가지 않고 땅위로 떨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곧장 천장의 굴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면 지금쯤은 아마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더구나 공교로운 것은 이 동굴의 불길이 일정하지를 않고 주기적으로 강해졌다가 약해지곤 한다는 사실이었다.
 오일웅이 바람이 강해질 때 마침 이 동굴 앞에까지 이르지 않은 것이라면 동굴 안으로 날아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우연치고는 너무나 공교로웠다.
 오일웅은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으며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기는 했으나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오일웅은 그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서 동굴 안을 뒤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손과 발을 붕대로 감고 있으니 찾아본다는 것도 문제였다.
 별안간 그의 뇌리에 의수가 먹여준 환약 세 알이 떠올랐다. 영지와 주과 등으로 만든 약이었다.
 그와 같은 물건은 모두 생기를 촉진시키는 진귀한 영약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운기행공하여 그 약 기운이 빨리 체내에서 돌게 한다면 손발의 수술상태가 빨리 호전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그는 즉시 땅바닥에 앉아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렇게 운기조식을 한 지 얼마 후 손발로 새 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불에 데인 곳도 아물고 있었다.
 오일웅은 이와 같은 결과를 보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그가 손과 발의 붕대를 풀 때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여태껏 근심하고 있었던 식량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어떻게 된 노릇일까?
 실은 옆으로 난 동굴 밖으로 새들이 종종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천장 동굴의 불길이 맹렬해질 때 즉시 바람이 이는 작용에 의해 동굴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오일웅이 운기조식을 끝내며 바람이 일었고 크고 작은 새들이 마구 빨려 들어왔다.
 오일웅은 재주를 피우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경신법의 기초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손발에서 곰의 가죽을 벗긴 후라 동작은 곰의 형세를 할 때보다도 더 날렵해져 있었다.
 약간 힘을 주어 뛰어오르면서 손을 내젓자 한꺼번에 몇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새를 날것으로 뜯어먹고 피를 마셨다. 그리고는 동굴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일웅이 살펴본 결과 이 동굴에 도끼자국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누가 동굴을 깎아내고 다듬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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