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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여자 1화

2018.01.29 조회 802 추천 6


 만남
 
 
 
 KTX가 대전역에서 멈췄을 때 꽤 많은 승객들이 들어왔다. 서늘한 바깥공기가 맡아지면서 특실 안의 정적이 깨뜨려졌다.
 
 “실례합니다.”
 
 맑고 좀 높은, 비음까지 약간 섞여서 그대로 노래 끝에 붙여도 좋을 만한 여자 목소리.
 
 강한이 머리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단발머리, 이른바 쇼트커트, 또렷한 눈, 꾹 닫은 입술, 얼굴형은 갸름, 눈매가 약간 매섭다.
 
 “앉을게요.”
 
 시선이 부딪친 순간은 1초쯤 되었다. 그사이에 훑어본 내용 전개가 길었을 뿐이다. 여자가 옆자리에 앉자 공기가 흔들리면서 열은 향내가 맡아졌다. 화장품 냄새에 우유를 섞은 것 같다고 표현해도 될까? 물론 우유 냄새는 없었다. 우유는 느낌으로 섞었다.
 
 일단 앉았던 여자가 생각난 듯 다시 일어서더니 코트를 벗었으므로 또 향기가 덮여졌다. 이번에는 진하다. 여자는 크림색 코트 밑에 흰 스웨터와 진 바지를 입었다. 바닥이 평평한 단화를 신었는데도 키가 크다. 1미터 70센티미터쯤 될까? 창가에 앉은 강한의 옆에 코트를 거는 바람에 여자의 가슴이 눈앞 20센티미터 거리까지 접근, 가슴의 볼륨은 보통, 드러난 손가락은 가늘지만 단단했고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았어도 분홍빛 손톱은 윤기가 났다.
 
 다시 여자가 자리에 앉더니 어깨를 조금 늘어뜨리면서 가늘게 숨을 뱉었고 강한도 소리 죽여 따라 했다. 그때 KTX가 출발했다. 특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좀 덥네요.”
 
 여자의 세 번째 코멘트. 이번 대사는 지난 두 번과 달리 응대 부담이 5할 정도는 되었다. 강한이 머리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표정은 그대로, 여자의 진갈색 눈동자에 강한의 얼굴이 박혀 있다. 볼록렌즈에 뜬 둥근 얼굴.
 
 “온도 조절이 되고 있으니까요.”
 
 강한의 첫 코멘트. 그대로 여자의 눈동자를 보면서 두 번째
 
 “좀 있으면 시원해질 겁니다.”
 
 “11월인데도 여름 같아요.”
 
 여자가 등받이에 상반신을 붙이면서 계속
 
 “난 겨울이 좋은데.”
 
 “대전이 집이십니까?”
 
 “아뇨, 집은 서울이고······.”
 
 여자의 눈매가 조금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입술도 가끔 벌어졌다.
 
 “대전에 공장이 있거든요. 그래서 자주 출장을 가요.”
 
 “아아.”
 
 강한의 어깨가 희미하게 들려졌다가 내려갔다. 소리 죽인 한숨.
 
 “저기······.”
 
 했다가 여자가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갑자기 그늘에 해가 비친 것처럼 표정이 밝아졌다. 눈도 반달 모양이 됐다.
 
 “비행기나 고속버스를 많이 탔지만 이렇게 옆자리 손님한테 말을 건넨 건 지금이 처음이에요.”
 
 “마찬가집니다.”
 
 강한은 웃지도 않고 동의했다.
 
 “난 기대를 포기한 지 오래되었는데 오늘 이루어지는군요.”
 
 “뭐가 이루어져요?”
 
 “전 강한이라고 합니다.”
 
 대답 대신 강한이 제 소개를 했다.
 
 “조그만 금융 계통 회사에 다니고 있죠.”
 
 “전 이장미라고 합니다.”
 
 여자는 옆에 놓인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내밀었다.
 
 “국일전자 영업2팀 이장미.”
 
 명함에 적혀진 내용이다. 국일전자라면 한국 제일의 재벌회사이며 세계 전자제품 시장 선두 자리를 지키는 회사 아닌가? 국일 전자 입사시험에 합격하면 고시 패스한 것만큼 인정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전 명함이 떨어져서······.”
 
 강한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하자 여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지금까지 28년을 살아오는 동안 강한은 딱 두 여자를 겪었다.
 
 물론 스치고 지나간 여자는 많았다. 저쪽에서 대단한 비중을 두고 있더라도 이쪽이 아닌 경우 또한 제외. 그 두 여자는 이름조차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모두 강한을 버렸다.
 
 한 여자는 대학 1학년 때부터 2년 동안 사귄 과 동기였는데 입대 후 다른 수많은 커플들처럼 끝장이 났다. 아예 말이나 말지 제 입으로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수백 번 약속을 하며 눈물을 짜내더니 석 달을 못 갔다. 입대 석 달 만에 연락이 끊긴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복학하고 만난 여자. 졸업반이었던 그 여자는 1년 반 동안 머물다가 신한그룹 뉴욕 지사원의 아내가 되어 한국을 떠났다.
 
 첫 번째 여자는 강한이 옆에 없는 사이에 떠나서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여자는 힘들었다. 여자가 여러 가지로 비교를 하는 바람에 강한도 초라한 제 몰골을 되돌아봐야 했던 것이다.
 
 “이제 좀 낫네요.”
 
 스웨터 단추를 두 개나 풀었던 이장미가 단추를 채우면서 말했다. KTX는 터널 속을 달리는 중이었다. 그때 이동매점 종업원이 수레를 밀면서 다가왔다.
 
 “저기, 그거 두 병 주세요.”
 
 이장미가 음료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음료수 병을 받아 든 이장미가 가방에서 돈을 꺼내 지불하더니 강한에게 한 병을 내밀었다.
 
 “드세요.”
 
 “고맙습니다.”
 
 “집이 어디세요?”
 
 병뚜껑을 비틀어 열면서 이장미가 물었다. 시선이 똑바로 향해 있어서 강한은 외면하지 못했다. 이제는 이장미의 눈빛이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깊고 잔잔했다.
 
 “사당동입니다.”
 
 “어머, 저하고 가깝네요. 전 방배동인데······.”
 
 “그런가요?”
 
 병뚜껑을 연 강한이 음료수를 두어 모금 삼켰다. 이장미가 맛있다는 듯이 음료수를 다 마셨으므로 강한도 마저 마셨다.
 
 “저기, 여자 친구 있으세요?”
 
 하고 다시 이장미가 물었으므로 강한은 심호흡을 했다. 꿈속에서는 언제나 멋진 대사를 늘어놓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러나 이때 그런 것을 따질 정신이 있겠는가? 있다면 노련한 탤런트 정도나 될 것이다.
 
 “아직 없습니다.”
 
 “저도 남친 없어요.”
 
 이장미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들렸다. 마치 먼 곳에서 울리는 음악소리 같았다.
 
 “물론 전에는 있었죠.”
 
 KTX 좌석은 등받이의 안정감이 좋다. 특히 강한에게는 머리를 받치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이장미의 말이 이어졌다.
 
 “바쁘다 보니까 어느새 내 옆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뒤늦게 알아채기도 하고······.”
 
 강한은 의자에 머리를 붙였다.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저절로 눈이 감겼다. 이장미가 소곤대듯 말했다.
 
 “어떤 경우에는 약속한 걸 잊어먹은 적도 있어요. 그러니 남자가 참아주겠어요?”
 
 강한은 웃음 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약속을 까먹는 여자. 자존심이 상한 남자라면 펄펄 뛰어야 정상이다.
 
 “때로는 남자 친구하고 여행이나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죠. 아주 멀고 한적한 곳으로······.”
 
 강한은 자신이 이장미하고 멀리 떠나는 장면을 떠올렸다. 눈앞에 넓고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다. 사진에서 본 몽골 초원 같다. 초원에 선 이장미가 웃음 띤 얼굴로 강한을 바라본다. 이장미는 이제 짧은 치마에 반소매 셔츠를 입었다. 예상했던 대로 S자 몸매였다. 섹시하다.
 
 “이리 와요.”
 
 이장미가 손짓으로 불렀다.
 
 “안아줘요. 어서.”
 
 “어서 일어나시라니까.”
 
 하고 남자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렸으므로 강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이제는 거칠게 어깨를 흔들었다. 눈을 뜬 강한은 앞에 선 역무원을 보았다. 이곳은 몽골 초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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