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마지막 골프
“다녀오세요. 선배.”
골프가방을 메고 나가는 내게 20대 초반의 인턴기자 두 명이 인사를 한다.
“기사는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어뷰징에 신경 써.”
“네 선배.”
내 이름은 조준. 올해로 딱 쉰 살.
인터넷 연예신문 <팩트 연예패치>의 대표이사 겸 편집국장이다.
말이 좋아서 연예신문 대표이사 겸 편집국장이지 <팩트 연예패치>는 월급을 삼분의 일만 주는 인턴기자 두 명이 전부다.
연예종합정보신문이라고 우기지만 실상은 수익모델 없는 구멍가게다.
연예인 파파라치 사진을 찍어서 팔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외국처럼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몰래 촬영한 파파라치 사진이 고가에 거래되지 않는다.
잘못 촬영하면 대중에게 지탄받기도 하고 고소 고발로 이어져 곤욕을 치르기 일쑤다.
소송비용이 더 들어간다.
대부분의 연예 관련 인터넷 매체가 그렇지만 인턴기자는 3개월마다 갈아치운다.
월급을 모두 주면서 정직원으로 뽑을 수도 없고 기사작성의 A부터 Z까지 가르치며 그들을 기자로 트레이닝 할 선배 기자도 없다.
기사를 쓰는 건 나 혼자다.
인턴은 열심히 어뷰징하기 바쁘다.
(어뷰징 : 언론사가 온라인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제목이나 내용을 바꿔가며 같은 내용을 반복 송고하는 행위, 기사의 무단 전재 및 복제, 배포를 말함.)
말이 어뷰징이지 모든 기사가 복사 붙이기다. 그래서 오·탈자까지도 그대로 기사화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교정을 볼 사람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
열정페이를 지급하는 인턴기자를 3개월마다 갈아치우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연예기자라는 직업은 사양직종이다.
장래성이 없다는 표현보다 미래가 없다는 표현이 더 맞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래도 없고 현실도 없다.
어쭙잖은 기레기로 인생을 살아가게 하느니 3개월 인턴기자 생활을 끝내고 잘리는 게 그들의 인생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물론 3개월 이상 열정페이를 지급하기에는 내 양심이 찔려서이기도 하다.
***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골드 마이다스 CC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디엠 기획 김동문 회장과 유재두 사장 그리고 나. 바로 옆 홀의 몇 사람뿐이었다.
[딱!]
“사장님 나이스 샷!”
내가 스윙을 하자 캐디의 나이스샷~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의 워터 해저드에 공이 빠질 지경인데도 말이다.
(워터해저드 : 골프장의 인공연못)
“조 편집장님 요즘 취재 안 하시고 골프만 치셨나 봅니다.”
“다 회장님 덕분이죠. 가수건 배우건 잘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디엠 기획 소속 아닙니까? 디엠 기획 사옥 출근해서 기사 한두 꼭지 쓰면 일이 끝나니 골프에 매진 좀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내 골프 실력을 칭찬하는 디엠 기획 김동문 회장이나 골프에 매진했다고 뻔뻔하게 말하는 나.
모두 연예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김동문 회장은 건달 생활을 하다 나훈아의 이미테이션 가수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하지만 연예 매니지먼트 시장의 발전 가능성을 엿보고 1990년대 초 매니저로 돌아섰다.
그는 주먹구구식으로 매니지먼트를 하던 대부분의 연예기획사와는 달랐다. 연습생 발굴부터 교육, 관리까지 체계적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도입했다.
‘아이돌’이라는 개념의 보이 그룹과 걸 그룹을 우리나라 최초로 방송가에 론칭시켰고 초대박을 냈다.
이후로 많은 연예기획사가 체계적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도입하고 따라 했지만, 디엠 기획의 발끝도 쫓아오지 못했다.
디엠 기획은 주식 시가총액에서도 제일 컸고, 연예인과 연예인 지망생이 제일 선호하는 종합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도약했다.
덕분에 연예계 파급력으로도 지상파 방송사를 압도할 만큼의 연예권력이 됐다.
그 위에 김동문 회장이 있다.
“공 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워터해저드 쪽으로 갔다.
공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댔지만, 같이 필드에 나온 김동문 회장, 그의 오른팔 유재두 사장과 조금이라도 시간을 덜 보내고 싶어서였다.
‘에휴. 저런 양아치 새끼들 똥 닦아주려고 기자가 됐던 게 아닌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그들이 갑이다.
***
난 언론사 입사가 고시라고 할 정도로 어렵던 1990년대 초에 언론사 시험을 치고 당당히 <스포츠 한성>에 입사했다.
인생의 어느 한 지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그 시절로 가고 싶다. DBC 방송 기자로도 합격했지만, <스포츠 한성>을 선택한 그때로 말이다.
당시 기자 지망생들 분위기는 신문 매체 기자를 방송사 기자보다 더 쳐줬다. 그래서 가장 열독률과 구독률이 높았던 <스포츠 한성>에 입사했다.
그게 패착이었다.
방송사 기자는 아직도 기자로서 대접받고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스포츠 연예신문은 증권사 찌라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
기자는 파파라치 취급이다.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인 기레기로 불리는 게 더 익숙할 때도 있다.
그래도 기자가 돼서 처음 몇 년은 괜찮았다.
연예계의 불합리한 관행에 관한 특집기사를 쓰며 연예계의 고질적, 구조적 비리를 척결하는 데 앞장섰다.
조준 기자가 정조준하면 연예계의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지 못할 게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까.
보람도 있었다.
기자들의 월급이란 것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었다.
촌지 받고 기사를 쓰고, 촌지를 바라는 구악(舊惡) 기자들이 있었지만 그건 일부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초고속 인터넷 보급은 미디어 생태계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정보는 빠르게 퍼졌다.
1인 미디어와 각종 온라인 매체가 생겨나며 기레기가 탄생됐다.
기레기는 맞춤법을 틀리고 문장을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더라도 기자라는 칭호를 쓰면서 얼마든지 기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오보를 내도 상관없다. 사람들은 금세 잊으니까.
정확한 기사보다는 속도와 양이 중요했다.
선정적인 기사 제목으로 포털 사이트에서 눈길을 끌고 기사 트래픽만 끌어올리면 되는 게 지금의 언론이 처한 환경이다.
기레기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됐다.
한글만 알면 누구나 기레기가 될 수 있고, 그 기레기들이 기존의 언론과 미디어가 지배하고 있던 판을 뒤집었다.
그래서 나 역시 기레기가 됐다.
좋아서 된 건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에 맞춰 입에 풀칠은 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제 기레기 생활도 끝이다.
<팩트 연예신문>의 대표이사 겸 편집국장 생활이 끝이란 말이다.
다음 달이면 대한민국 굴지의 매니지먼트사 디엠 기획의 홍보 부사장이 된다.
일은 일대로 죽도록 했지만, 빚만 늘어나게 한 <팩트 연예신문>은 폐간할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창간한 <팩트 연예신문> 때문에 스트레스로 위암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조기발견이라 수술하면 금세 좋아질 수 있다고 한다.
오늘 골프회동이 끝나면 계약서에 사인할 것이다.
디엠 기획의 홍보 부사장으로 간다는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사이닝 보너스를 받는다.
그 돈으로 수술하고 다음 달부터 건강한 몸으로 출근할 것이다.
***
“조 편집장님 뭘 그렇게 오래 공을 찾으세요?”
3번 홀에서 김동문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조 편집장님이라며 깍듯하게 존칭하지만,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그에게 반말은 기본이고 정강이 까일 각오를 해야 한다.
“예! 곧 갑니다.!”
그래도 난 운이 좋은 편이다.
<스포츠 한성> 이 한창 잘나가던 시절 매니저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대부분의 선배 기자들은 아파트 수위 자리를 알아보며 지내고 있다.
예전의 나라면 나 역시도 김동문 회장 같은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우리나라 연예산업에 체계적인 매니지먼트의 뿌리를 내리게 하고 산업의 형태로까지 끌어올린 장본인이라는 건 맞다.
하지만 그에게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연예인 노예 계약 파문과 무혐의로 종결됐지만, 연습생 강간, 미성년자 연예인 지망생 추행 사건 등 추잡한 스캔들도 많았다. 하지만 모두 묻혔다.
결코, 죄가 없어서 묻힌 게 아니다.
그는 기자들과 검사들을 다루는데 능했다.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고 여론을 유리하게 몰고 갈 수 있도록 기자들을 돈으로 관리했다.
자신과 디엠 기획 소속 연예인이 사고를 치면 무마하거나 무혐의로 해결할 수 있도록 검사들을 관리했다.
사법연수원과 초임검사 시절부터 물질적으로 그에게 지원받은 검사가 전국 지청에 한두 명씩은 있었다.
검사와 기자관리의 꼭대기에는 디엠 기획 사장 유재두가 있다.
“조 편집장님 무슨 공을 그렇게 오래 찾으세요? 혹시 저희랑 같이 있기 싫어서 일부러 워터 해저드로 공 치시는 거 아니세요?”
눈치 빠른 새끼.
검사 출신인 사장 유재두는 초임검사 시절부터 김동문 회장에게 돈을 받아 쓴 전형적인 김동문 키드다.
내가 디엠 기획의 홍보 부사장으로 가게 된 것도 김동문 회장의 비리를 캐던 나를 유재두 사장이 품자고 했기 때문이다.
적을 제압할 수 없다면 친구가 되자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검사였던 그의 주변에는 일반인보다 조폭, 건달이 더 많다.
검사가 건달 성향이 있는 게 아니라 조폭이 공부를 잘해서 검사가 됐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재수 없고 인격적으로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유재두 사장은 내게 은인 같은 사람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난 <팩트 연예신문>와 함께 장렬히 산화했을 테니까.
사실 김동문 회장의 비리를 캘 때는 사실 이판사판이었다.
<팩트 연예신문>을 운영하느라 누적된 빚이 오랑캐처럼 몰려오고 신용불량자까지 됐다.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이 없었다.
크게 특종을 해서 <팩트 연예신문>의 신뢰도를 쌓고 찌라시 이미지를 벗어난다면 회사를 팔고 빚을 정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전까지 썰로만 떠돌던 김동문 회장의 비리를 캐기 시작했다.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대로 살게요.”
“굳이 지금 와서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 않아요.”
예상대로였지만 떠돌던 썰은 사실이었다.
그에게 강간당하고 추행당한 뒤 연예인의 꿈을 접은 피해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모두 나서기를 꺼렸다.
거대 연예권력이 된 그에게 함부로 맞서기 쉽지 않아서였다.
그는 엄청난 재력과 사회 각층의 힘 있는 사람들과 끈끈한 네트워크가 있다.
실체를 밝힌다고 해도 큰 타격을 입지 않을 확률도 높았다.
“조 편집장님 우리 회사 홍보 부사장으로 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던 차에 유재두 사장이 제안해왔다.
디엠 기획 홍보 부사장.
처음에는 떨렸다.
내가 그렇게 비열하게 생각하는 김동문 회장의 밑에서 일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제안은 달콤했고 현실은 팍팍했다.
유재두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아야 하니까.
앞으로 김동문 회장이 더는 나쁜 짓 못하게 하면 된다.
“확인했습니다. 이제 갈게요!”
워터 해저드 근처에 있는 공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순간 옆 홀에서 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딱!]
순간 머리에 묵직한 충격이 왔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눈 뜬 채로 그대로 쓰러졌으니까.
관자놀이 부근이 뜨거워졌다.
# 2. 또 다른 조준
“어머! 어떡해! 공에 맞으셨어요!!”
사장님 나이스 샷!을 외치던 캐디의 목소리였다.
“어머 어떡해!!”
그녀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놀란 그녀에게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몸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저 사장님 머리에서 피가 솟구쳐요! 어머 어떡해!!”
피가 솟구치는 건 나였다.
어쩐지 관자놀이가 뜨겁더라.
‘아! 씨발’
옆 홀에서 친 공이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홀 간격이 좁고 마주 보고 있어서 일어난 사고다.
간혹 골프장에서 공에 맞는 사고가 일어나지만 그게 나일 줄이야.
“뭐해? 빨리 구급차 불러!”
캐디가 어디론가 황급히 갔다.
유재두 사장이 달려왔다. 하지만 김동문 회장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옆 홀에서 공을 친 사람도 달려왔다.
공을 친 사람은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놀란 얼굴이 아니다.
‘어? 뭐지?’
그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구급차 오기 전에 골로 갈 겁니다. 형님. 이 정도면 뇌동맥이 작살난 것이거든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는 유재두에게 형님이라고 했다.
게다가 내가 곧 죽는다고 말하고 있다.
뭔가 큰 음모에 걸려들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길래 적당히 해야지. 찌라시 기레기 새끼가 감히 누굴 캐고 다녀?”
유재두가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 뒤편으로 멀리 김동문 회장이 담배를 물며 미소 짓는 모습이 보였다.
난 유재두와 김동문의 비열한 음모에 빠진 것이다.
“회장님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놈이 부사장으로 오란다고 냉큼 오겠다고 하니? 넌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어. 하긴 염치가 있으면 찌라시 기레기가 아니지.”
유재두의 말은 일리 있었다.
그의 제의를 호의라 생각하고 믿었던 내 잘못이다.
제안을 받아들이고 타협할 게 아니라 끝까지 김동문의 비리를 밝혔어야 했다.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깨끗하게 마무리 잘해”
“네”
유재두가 가자 공을 친 사람이 깍듯하게 인사한 후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길래 왜 욕심을 부려? 그냥 기레기로 살지 말이야.”
발로 지긋하게 내 목을 밟았다.
‘으으으윽 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기랄! 이렇게 죽는구나!’
순간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름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다.
적당히 좋았고 적당히 행복했지만, 막판에 빚에 쫓기며 더럽게 인생을 마무리한다.
그것도 비열한 놈들의 음모에 빠져서.
[삐~~뽀~~삐~~뽀]
구급차의 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들렸다.
‘씨발놈들 두고 보자!’
***
“씨발놈들 두고 보자!”
“준아! 준아! 일어나! 곧 촬영 끝날 거 같아”
“어? 어.”
배우 유재영의 로드 매니저 한재일이 깨웠다.
“도대체 두고 볼 놈들이 누군데 잠만 자면 맨날 그렇게 두고 보자고 그래?”
“어? 몰라. 꿈을 꿨나?”
꿈이 아니다.
전생의 기억을 꿈을 통해 다시 한 번 복기하는 것이다.
지금은 1992년. 내 이름은 조준. 22살이다.
전생에서는 2017년 쉰 살의 나이에 디엠 기획 김동문 회장과 유재두 사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번 삶은 22살의 디엠 기획 로드 매니저 조준이다.
이름만 같을 뿐 전생의 조준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죽는 순간의 억울한 외침을 들은 신의 배려랄까.
나는 디엠 기획 소속 여배우 공희영의 로드 매니저 조준으로 다시 살게 됐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이번 삶을 새롭게 살게 됐다는 걸 알았을 때 쉰 살의 정신연령을 가진 내가 22살의 로드 매니저 조준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했다.
기우였다. 내 적응력은 놀라웠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쉰 살의 기레기 조준이 아닌 22살의 로드 매니저 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됐다. 22살로 삶을 살면서 쉰 살의 관록을 가졌다는 건 축복이었다.
하지만 이번 삶을 살아가는 날이 많아질수록 전생의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그래서 김동문과 유두열에 대한 복수의 의지를 다지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꿈을 꿀 때마다 전생을 복기했고 그들에게 당했던 것들을 메모로 꼼꼼하게 남겼다.
이번 삶은 신의 가호가 있었음이 확실했다
지금은 김동문이 디엠 기획을 설립하고 3년 차다.
한창 회사의 사세를 확장하며 업력을 쌓고 내실을 기하는 시점에 난 그의 회사 로드 매니저로 다시 살게 됐다.
차근차근 힘을 키워 디엠 기획이 국내 최고의 종합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될 때 김동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
그의 인생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게 가장 처절한 복수가 될 테니까.
“빨리 나가자. 배우님들 촬영하시는데 로드가 차에서 까져 자고 있었다고 벼락 맞을라.”
밴에서 나가 촬영이 끝난 스태프와 이현수 감독에게 인사를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독님! 조감독님!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한재일과 촬영장에서 보이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인사했다.
로드 매니저는 촬영이 끝나면 감독과 조감독, 촬영감독, 조명감독, 오디오 기사 등에게 90도로 인사하기 바쁘다.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를 때는 무조건 인사부터 하고 본다.
하지만 촬영장에서는 그 누구도 로드 매니저의 인사에 답하거나 눈을 마주치며 화답하지 않는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한다.
고된 촬영의 종료를 알리는 세리머니니까.
매니저가 사람 취급을 받으려면 로드 매니저는 벗어나 실장급은 돼야 한다.
“자네는 언제나 활기차서 좋아”
하지만 DBC 드라마국의 윤수일 위원은 언제나 내 인사에 답을 해줬다.
윤수일.
그는 한창 드라마를 연출할 시절에는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허접하지도 않은 일반적인 DBC 드라마국의 감독이었다.
“감사합니다. 위원님. 필요하시다면 제 젊은 기를 모두 드리겠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마우이. 나중에 필요할 때 부탁하겠네.”
지금은 외주제작이 활성화된 시기가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상파 방송사 드라마 PD들은 연출로서 잘 나갈 때 계속해서 작품을 연출한다. 그리고 흥행에 대한 감이 떨어지고 나이가 들면 CP와 차장, 부장, 국장을 거쳐 위원이 된다.
위원은 촬영 현장에서 후배 연출자에게 선배 연출자로서 경험이나 제작 노하우를 전수하는 게 일이다. 하지만 실제 촬영 현장에서는 잘 나가는 후배 연출자들에게 퇴물 늙은이 대접을 받을 뿐이다.
현직 연출이나 잘 나가는 연출자가 아니면 옆집 아저씨만도 못한 대접을 받는 게 방송드라마 촬영 현장이다.
한마디로 위원은 하는 일 없이 시간만 죽이다 퇴직하게 되는 힘없고 유명무실한 직책이었다.
촬영장에서 윤수일 위원과 대화를 하는 사람은 나와 내가 맡은 여배우 공희영이 유일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공 배우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거 같아. 어떻게 20대 초반 배우보다 더 예뻐
“감사합니다. 윤 위원님도 제가 데뷔했을 때랑 변하신 게 없어요.”
“변한 게 왜 없어? 공 배우 데뷔했을 때는 현직에서 연출하던 PD였고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뒷방 늙은인데”
“뒷방 늙은이라뇨? 앞으로 임원도 하시고 사장도 하시고 또다시 연출도 하실 텐데요”
“허~ 난 이래서 조군 자네가 좋아. 어쩜 그렇게 내가 좋아할 말만 그렇게 하나? 말만이라도 기분이 좋네. 하하하”
인사치레가 아니다.
전생에서 그는 공전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사극 한류를 이끈 <대장군과 대장금>, <야사 고려왕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등을 연출한 사극 전문 연출가다.
남들이 한창 잘 나갈 30, 40대에는 평범한 연출가였지만 퇴직을 앞둔 50대 후반에 연출한 <대장군과 대장금>이 전 세계적인 히트를 하며 사극 한류를 이끈 장본인이었다.
지금은 DBC 드라마국 위원으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뒷방늙은이다. 하지만 몇 년 후에는 사극 전문 연출가로 최고가 될 그였다.
앞으로 잘 나갈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퇴물 취급 받는 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동병상련이랄까.
나도 지금은 어디서나 홀대받고 천대받는 로드 매니저다.
“그럼 윤 위원님 저희 가볼게요. 준아. 이거 의상팀에 반납해. 가채 떼고 메이크업 지우고 올 테니까 바로 가자.”
“네.”
***
공희영을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의정부 DBC 사극 세트장에서 나와 서울 신내동과 태릉을 거쳐 그녀가 사는 동네인 연희동으로 향했다.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드라마를 촬영했다.
피곤할 법도 한데 공희영은 잠을 자지 않았다.
“누나 좀 주무세요 피곤하실 텐데”
정신연령은 쉰 살이지만 33살 먹은 공희영에게 누나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누나라고 부르는 것이 뭐가 어렵겠나?
“괜찮아.”
창밖을 보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도 근심이 많아서 일 것이다.
그녀의 로드 매니저로 이번 삶을 살면서 한 달째 지켜봤지만, 촬영이 끝난 후 잠자는 걸 본 적 없다.
‘곧 세 번째 결혼할 텐데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겠지’
공희영은 미인대회 출신으로 19살에 데뷔했다.
얼굴, 몸매, 성격, 연기력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았지만, 이전 삶에서는 이혼을 세 번 했다.
21살에 10살 연상의 준 재벌가 출신의 사업가와 결혼했지만 6개월 만에 이혼, 26살에 40살의 국회의원과 결혼해서 4년 만에 이혼, 32살인 지금 또 한 번 결혼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이혼할 것이다.
내가 죽기 직전에 네 번째 결혼한다는 말이 있었으니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으로는 할리우드 셀럽 급이었다.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녀는 이미 마음을 정했을 것이다.
난 그녀를 맡은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로드 매니저다.
그녀에게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이전 삶에서 그녀는 세 번째 남편에 대해서 철저히 숨겼다.
세 번째 결혼이기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매체에서도 그녀의 세 번째 결혼이 기삿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취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세 번째 남편에 대한 정보는 내 기억에 없었다.
“누나 무슨 걱정 있어요?”
“걱정은 무슨. 너도 피곤할 텐데 내가 자면 운전하는데 졸릴 거 아니야? 내 안전을 위해서 안 자는 거야.”
마음씨도 고왔다.
핑계였지만 실제로 내가 졸릴까 봐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다.
룸미러로 보자 그녀가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 준이 피곤하지? 누나 때문에 고생이 많다.”
“고생은요.”
그녀가 뒤에서 내 어깨를 주물러줬다.
뭉친 어깨가 시원했다.
부부간의 문제는 알 수 없다지만 두 달 동안 지켜본 그녀는 성격이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싹싹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성격이었다.
세 번 이혼한 여자에 대한 세간의 선입견을 갖기에는 성격이 너무 좋았다.
“난 너가 참 희한해”
“누나는 내가 뭐가 그렇게 희한하다고 맨날 그렇게 희한하다고 해요?”
“희한하지. 육사를 2년 다녔고, 연대까지 다니는 애가 뭐가 아쉽다고 매니저를 하니?”
사실 지금의 매니지먼트 업계 분위기로는 그녀의 말이 맞다.
깡패, 건달이거나 아니면 사기꾼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게 매니지먼트사였다.
# 3. 내 배우 공희영
한마디로 매니저라고 하면 일수 가방 같은 돈 가방을 들고, 쫄티에 문신, 굵은 금목걸이를 차고 후진 말투와 험했던 인생의 흔적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번 삶의 난 매니저를 할 사람이 아니다.
난 육사를 다니다 전방십자인대 파열로 퇴교한 후 연대 건축과에 다시 들어가 2학년을 휴학 중이다.
아버지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조철수 지검장이며 어머니는 이대 교수다.
나도 처음에는 22살의 조준이 뭐가 아쉬워서 로드 매니저를 하고 있나 의아했다. 하지만 22살의 조준은 애초에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관심이 많았다는 걸 알았다.
“매니저 일이 어때서요?”
“어떻다는 게 아니라 학벌 좋아, 인물 좋아, 집안까지 빵빵한 애가 굳이 매니저 같은 일을 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
아버지에 대해서는 직업 특성상 사업하는 분이라고 둘러댔지만, 어머니가 이대 교수며 압구정동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공희영은 내가 집안이 빵빵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매니저는 주로 사장님 같은 사람이 많이 하잖아”
“전 김동문 사장님을 존경해요.”
김동문 회장. 아니 지금은 사장인 김동문은 주먹구구식의 매니지먼트가 아닌 체계적 트레이닝으로 실력 있는 연예인을 키워낼 시스템을 만들 것이다.
매니저로서 앞날을 내다보고 업계의 파이를 키운 그의 능력은 높이 산다. 하지만 그는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다.
힘을 키워 철저히 부숴버리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래. 알았어. 너가 매니저 일이 좋다는데 내가 이렇다 저렇다 할 게 아니지. 집안 좋고 똑똑한 앤데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제가 이 일 안 하면 죽을 때까지 누나같이 예쁜 여자를 한 번이라도 볼 수 있겠어요? 전 누나 처음 봤을 때 정말 천사인 줄 알았다니까요”
“어머 얘 봐라? 이런 말도 안 되는 구라 치는 거 보니까 매니저 잘하겠네.”
“구라가 아니라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니까요? 어쨌든 전 제대로 일을 배워서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사 사장이 될 거예요”
당연했다.
우리나라 초고의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된 디엠 기획을 김동문에게서 빼앗을 거니까.
“그래 그렇게 되면 나 인기 떨어지고 늙었다고 구박하지 말고 잘 봐줘야 해.”
“당연하죠.!”
“호호호. 말이라도 고맙다. 준아. 나 여기서 내려줘”
연희동 집 앞이 아닌 남가좌동의 홍남교(橋)와 연희동 사잇길이었다.
“또 여기서 내려요?”
“응. 촬영 때문에 운동도 못 하는데 몸 관리하려면 좀 걷는 게 좋아”
“그래요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녀의 집은 전직 대통령이 두 명이나 사는 연희동에 있다.
아직 한 번도 집 앞까지 가보진 않았지만, 그녀는 저택에서 살 것이다.
원래부터 부자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번의 이혼으로 꽤 많은 위자료를 받았을 것이다.
“그럼 푹 쉬세요.”
***
공희영을 내려준 뒤 5분이나 지났을까.
연희 삼거리를 지나는데 이상한 진동소리가 들렸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무슨 소리지?”
차의 결함으로 인해 나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뒷자리에서 나는 소리였다.
삐삐였다.
공희영이 삐삐를 빠뜨리고 내린 것이다.
“오랜만에 보네. 삐삐.”
이번 삶을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삐삐 진동 소리다.
지금은 핸드폰이 대중화되기 전이다.
삐삐는 항상 몸에 휴대해야 하는 필수품이었다.
“칠칠찮게 흘리고 갔네.”
빨리 차를 돌려 그녀를 내려준 곳 근처로 가면 삐삐를 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어?”
삐삐 액정에 181818 이 찍혀있었다.
181818은 굉장히 화가 나서 상대를 막 보거나 상욕할 때 쓰는 삐삐 암호였다.
“누군데 이렇게 예의 없이 상욕을 보내지?”
누군지는 모르지만 빨리 응답하지 않으면 공희영은 더 욕을 얻어먹을 것이다.
삐삐를 전해주기 위해 차를 돌렸다.
***
“분명히 보여야 하는데”
그녀가 연희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가좌동 홍남교에서 연희동을 넘어가는 작은 고개를 지나야 한다.
저택이 즐비한 연희동으로 가려면 그 길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부우우우웅~ 부우우우웅~]
다시 진동으로 삐삐가 울렸다.
- 82828282 -
- 18181818 -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삐삐치는 사람은 공희영의 연락을 기다리다 매우 화나 있는 상태임이 분명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1분이 멀다 하고 1818과 8282를 보냈다.
차를 세워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
신선도가 떨어진 식품을 떨이로 파는 마트에서 나오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손에 떨이 식재료가 들어있는 비닐 봉투를 잔뜩 들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는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모자를 눌러써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체격과 옷차림이 공희영과 똑같았다.
‘공희영이 떨이 마트에서 장을 볼 리가 없는데’
유심히 지켜봤다.
밴 옆을 지나가는 그녀를 확인했다.
공희영이 맞았다.
순간 그녀의 집은 연희동 저택이 아니고 이 근처 다세대 촌 어딘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삶에서부터 몸에 배어있는 연예부 기자의 촉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매번 연희동과 남가좌동의 경계에서 내린 것이다.
어떤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직감이 왔다.
모른 척하고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부우우우웅~]
계속해서 181818 이 찍힌 삐삐가 왔기 때문이었다.
창문을 내리고 그녀를 불렀다.
“누나 이거 놓고 내렸어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나를 발견한 그녀는 멍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
공희영은 마트 벽에 붙어있는 주황색 공중전화에서 삐삐에 남겨진 음성을 확인했다.
그녀는 핸드폰이 없었다.
그녀 정도면 꼭 필요해서라기보다 연예인으로서 과시용으로 가지고 다닐 만했다.
사치스럽거나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알았다. 말 못 할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공중전화에서 삐삐 메시지를 확인한 그녀가 밴으로 왔다.
“가자.”
“어딜요?”
“우리 동네 왔는데 소주 한잔하고 가야지. 대리비 줄 테니까 한잔 마시고 가. 내일 촬영도 없잖아.”
누구이길래 181818 이라는 문자를 계속해서 보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난 지금 로드 매니저다.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을 지나야 맡은 배우와 개인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실장급 매니저가 된다.
***
남가좌동과 연희동의 경계에 있는 실내 포장마차에 왔다.
단골인 듯했다.
그녀는 떨이 마트에서 산 명태포를 주인아줌마에게 줬다.
“이건 적당히 구워서 마요네즈랑 청양고추 넣은 소스랑 같이 주시고요. 계란찜 푸짐하게 하나, 오돌뼈는 너무 맵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소주 한 병도요.”
“그래 맛있게 해줄게. 그런데 오늘은 손님이 오셨네.”
“네 제 일 도와주는 친구예요.”
“난 청년이 훤칠해서 애인인 줄 알았어. 귀티도 나고. 그런데 애인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린 것 같아서 어떤 사이인가 했지. 자 여기.”
주인아줌마에게 소주를 받은 공희영이 뚜껑을 따서 첫 잔을 조금 따라 버렸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지금은 소주를 따서 윗부분의 아주 적은 양을 버리는 문화가 있다.
오래전 소주 뚜껑이 코르크였을 때 뚜껑의 가루가 부스러져 소주 윗부분에 뜨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화학 소주의 나쁜 성분이 윗부분에 뜨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불필요한 행동이다.
소주는 아주 위생적인 시설에서 만들어지니까.
단지 술꾼들 사이에서는 음주를 시작할 때 행하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받아.”
“네.”
“캬~”
그녀는 내게 소주를 따라준 후 직접 자신의 잔에 따라 건배도 없이 첫 잔을 들이켰다.
“짠도 안 하고 혼자 마실 거면 전 뭐하러 데리고 오셨어요? 혼자 드시지.”
“그런가? 혼자 마시던 버릇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호호호호. 그냥 너 마시지 마라. 안주 나오면 거기다 밥이나 먹어.”
***
그녀의 말대로 안주에다 밥만 먹었다.
나는 밥을 먹고 그녀는 혼자 술을 따라 마시면서 일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왜 자신이 항상 연희동 집이 아닌 남가좌동 홍남교(橋) 앞에서 내렸는지, 떨이 마트에서 식재료를 샀는지 말하지 않았다.
이전 삶에서 연예부 기자생활을 할 때는 항상 계획적인 질문을 했었다.
취재의 목적이나 내가 알고 싶은 것에 대한 대답이 나올 수 있도록.
상대방이 말하고 싶지 않아도 내 질문에 답을 하려다 보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질문과 대화유도.
그게 연예부 기자로서 몸에 밴 습관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굳이 알 필요 없다.
난 연예부 기자가 아닌 로드 매니저니까.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야 한다.
“내가 왜 매번 여기서 내렸는지 안 궁금하니?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물어봤을 텐데 안 물어보네.”
“말을 할 만했으면 누나가 먼저 말했겠죠. 일에 관계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물어볼 필요 없는 것 같아서 안 물어봤어요.”
“맞는 말이네.”
공희영은 소주를 들이켠 후 말했다.
단숨에 들이켜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지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넌 이럴 때 보면 스물두 살이 아니라 마흔네 살은 된 것 같아. 좋은 집안에서 자라서 그런가? 네 또래랑은 달라. 매사에 여유가 있는 것 같아.”
당연하지. 쉰 살이 넘었으니까.
김동문과 유재두의 비열한 배신으로 죽고 나서 다시 사는 삶이다. 살아가면서 웬만한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급할 게 없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당연히 20대 또래의 젊은이들과는 느껴지는 게 다를 수밖에 없다.
“나 사실 이 동네 살아. 여기서 나가면 저 골목길 끝에 있는 원룸 다세대 주택.”
취기가 올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까 떨이 마트에서 신선도가 떨어진 식재료를 산 그녀를 발견했을 때 이미 어느 정도 사연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이쯤 되면 왜 이 동네에 사느냐고 묻지 않아도 그녀가 술술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두 번 결혼했다 이혼한 건 알고 있을 테고. 그냥 길게 얘기하지 않을게. 두 번 결혼한 남편의 빚을 모두 내가 갚고 있어.”
그녀가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의외였다.
첫 번째 결혼은 준 재벌가 남자였고 두 번째는 국회의원과 결혼했다.
남편이 남긴 빚을 갚고 있다는 건 이해 가지 않았다.
“누나 준 재벌가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았었어요?”
“첫 번째 남편은 준 재벌가 사람이라고 알려졌지만, 준재벌이 되고 싶은 허세 가득한 사람이었어. 사기로 감옥에 갔는데 나 몰래 내 이름으로 대출을 잔뜩 해 놨더라고.”
이전 삶에서부터 연예부 기자일 때 알고 있던 것과 너무 달랐다.
사실 연예인의 결혼은 상대가 일반인일 경우에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기사를 쓰는 경우가 많다.
연예인이 일방적으로 언론에 하는 말을 그대로 기사화했다.
일반인인 그들을 직접 따 볼 이유도 없으니까.
대중의 관심은 연예인이 결혼할 상대가 재벌가냐? 준 재벌가냐? 직업이 무엇이냐? 돈을 잘 버는 사람이냐? 정도에만 관심이 있다.
결혼 후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다는 건 관심 밖이다.
공희영도 비슷한 경우였다.
누구와 결혼했다는 것만 알려졌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결혼 후에 둘이 어떻게 사는지 알려진 것 없이 이혼 소식만 알려졌다.
# 4. 배우 지키기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은 공희영을 자신의 선거유세에 이용하고 선거자금까지 그녀의 이름으로 대출했다.
“두 번째 남편은 선거 때 유세를 도우라고 하더라고. 열심히 도왔지만 낙선했어.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이 사람도 내 이름으로 대출을 잔뜩 했더라고.”
낙선 이후에 알코올에 의존했고 툭 하면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 년 넘게 쉬었군요.”
“응”
두 번째 남편에게 맞아 코뼈가 부러지고 광대뼈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다리 인대도 끊어졌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신혼생활이다. 뭐다 해서 깨가 쏟아져서 활동을 안 하고 매체에도 노출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활동할 수가 없었던 거야.”
얼굴 재건성형과 끊어진 다리 인대 수술 후 재활하느라 2년의 공백이 있었던 것이었다.
“차라리 이혼을 여러 번 한 잘나고 도도한 여자가 낫지 결혼할 때마다 사기당하고 남편에게 맞은 이미지는 대중 앞에 서는 사람으로서 좋지 않은 거 같더라고.”
연예인은 이미지가 중요하다.
사기 결혼을 당하고 남편에게 맞아 크게 다친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전 삶에서 오랫동안 연예부 기자를 했다.
연예계 돌아가는 사소한 일까지도 대부분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그녀의 이런 사정은 전혀 몰랐었다.
그녀가 안돼 보였다.
“연예인은 대중에게 적당한 환상이 있어야 하잖아. 위자료를 잔뜩 받아 잘 먹고 잘산다고 알려졌는데 굳이 그게 아니라고 밝힌다고 나한테 득 될 것도 없고”
“그렇기는 하죠.”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대중은 연예인에게 환상을 가지고 있다.
환상을 줄 수 없는 연예인은 연예인으로서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물론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함으로 어필하는 연예인도 있지만 공희영은 환상이 있는 연예인으로서 가치 있었다.
그녀가 준 재벌가에 시집가고 국회의원과 결혼한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 대중이다.
“어쨌든 잘 됐다. 연희동 사는 척하는 거 불편했거든. 죄진 것도 아닌데 맨날 네가 안 보일 때까지 집 쪽으로 가지도 못하고 말이야. 호호호.”
그녀는 밝게 웃으며 소주를 들이켰지만, 삶의 무게에 눌려있는 모습을 지울 순 없었다.
‘어? 그럼 혹시!’
순간 181818을 계속해서 보낸 사람이 그녀가 결혼하려는 남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삶에서 그녀는 32살에 세 번째 결혼했다.
세 번째 결혼 후 한 달 만에 이혼했고 어떤 남자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81818을 보낸 사람이 세 번째 남편 될 사람이라면 첫 번째, 두 번째 남편이었던 사람보다 전혀 나을 게 없을 것이다.
“다시 결혼할 생각은 없으세요?”
“왜? 주변에 좋은 사람 있니? 호호호.”
“아니요. 그냥 여쭤봤어요.”
“좋은 사람 있더라도 두 번 이혼한 여자랑 결혼하려는 사람이 있겠어?”
자포자기한 듯 말했지만, 염두에 두고 있는 남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결혼을 서두르지 말라는 얘기를 꺼낼 수 없다.
난 이제 공희영을 맡은 지 얼마 안 되는 로드 매니저다.
좀 더 친분을 쌓은 후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조언하기로 마음먹었다.
더는 그녀가 무거운 짐을 져서는 안 된다.
***
적당히 술을 마신 후 실내 포장마차에서 나왔다.
“니 덕분에 오랜만에 술친구가 있어서 좋았어. 나만 마셨지만”
“다음에 스케줄 빌 때는 같이 마셔요. 저도 차 놓고 올게요.”
“그래 그러자 호호호.”
“타세요. 집 앞까지 모셔 드릴게요.”
“그냥 가. 집 앞 골목이 좁아서 밴이 들어가기 힘들어.”
“괜찮아요. 로드 매니저가 그 정도도 못하면 되겠어요? 저 운전 잘하잖아요.”
“그래. 마트에서 장본 것도 있으니까 그냥 탈게.”
그녀를 태우고 다세대 골목으로 향했다.
다세대 주택이 밀집 지역은 어디나 그렇지만 공희영의 집 앞은 양쪽으로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차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누나 후진으로 들어갈게요. 차 돌려서 나오기 힘들 것 같아서요”
능숙하게 후진으로 골목을 진입했다.
“야! 너 멋있다.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후진하는 거 꼭 보여줘”
남자가 능숙하게 후진하는 모습에서 매력을 느끼는 여자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공희영의 반응을 봐서는 허튼 말이 아니었다.
“고마워 준아”
“네 푹 쉬세요. 모레 모시러 올게요.”
그녀를 내려주고 큰길 앞으로 왔다.
방향 지시등을 켜고 도로로 나가기 위해서 도로의 흐름을 살폈다.
[빠앙~]
도로로 나서려 하자 직진하는 차량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클랙슨을 울렸다. 쌩쌩 지나갔다.
“자식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양보 좀 해 주지 말이야.”
차들이 양보해주지 않아 직진 차선의 신호에 빨간 불이 들어왔을 때 도로로 나서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공희영이 잘 들어갔는지 사이드미러로 그녀의 다세대 집 앞을 봤다.
그녀는 땅에 떨어진 감자, 당근 등의 식재료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어? 넘어졌나?’
아니었다.
그녀 옆에는 인상이 더러운 20대 후반의 남자가 땅바닥에 침을 뱉으며 뭐라고 하고 있었다.
그가 식재료 봉지를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친 것이었다.
행동으로 봐서 그녀에게 상욕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빨리빨리 연락하라고 했어? 안 했어? 술 처먹느라고 내 연락을 또 씹어!”
“씹은 게 아니라고 했잖아. 삐삐를 무음으로 놔서 몰랐을 뿐이야.”
“이게 그래도 꼬박꼬박 말대답하네!!”
“악!!”
남자가 공희영의 뒷머리를 움켜잡았다.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다닐 태세였다.
“놔! 놓고 얘기하라고!!”
“이게 그래도!”
남자가 공희영을 팽개치고 땅바닥에 널브러진 그녀의 목을 발로 밟았다.
“악!”
발에 밟혀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내 목이 졸리는 듯 숨이 막혀왔다.
이전 삶의 마지막 순간에 느꼈던 고통이 고스란히 다시 느껴졌다.
숨이 막히며 맥박이 빨라졌다.
심장이 터질 듯이 흥분됐다.
순간 남자가 누군지 기억났다!!
그는 이전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본 사람이었다.
내 머리를 골프공으로 강타하고 피 흘리며 쓰러진 내 목을 밟아 숨통을 끊은.
절대 그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숨이 끊기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보고 있었으니까.
기억하는 모습보다 25년 젊은 모습이지만 여전히 인상 더럽고 불쾌한 모습이다.
“이런 개새끼!!”
뚜껑이 열리다 못해 날아갈 지경이었다.
본능적으로 후진 기어를 넣고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았다.
[부우우우우웅!]
밴이 굉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후진했다.
양옆에 차가 세워져 있어 잘못하면 골목에 있는 모든 차량을 긁을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지금 급한 건 공희영을 구하는 일이다.
[부우우우우웅!]
빠른 속도로 후진하는 밴을 보고 놀란 남자가 옆으로 몸을 날렸다.
공희영은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끼이익!!]
그녀 앞에서 밴을 멈췄다.
“누나 괜찮아요?”
“으 응!”
밴에서 내려 공희영을 살폈다.
목에 가벼운 찰과상이 있을 뿐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밴의 후진에 놀랐던 남자가 소리 지르며 다가왔다.
“너 뭐야? 이 새끼야!”
“공희영 씨 로드 매니저다. 개새끼야!”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이다.
게다가 이전 삶에서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그와 김동문, 유재두를 저주했다.
원수를 앞에 두고 고운 말을 쓴다는 건 성인군자도 못하는 행동이다.
원수에게는 저주를, 원수에게는 상욕을, 원수에게 받은 고통은 배로 갚아줘야 한다.
물론 용서도 해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당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복수한 다음이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남자가 주먹을 날렸다.
가볍게 피한 후 그의 무릎 안쪽에 로우 킥을 꽂았다.
“악!”
남자의 무릎이 접히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번 삶의 난 키 185센티미터에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다.
육사 생도 시절 축구를 하다 십자인대가 끊어져 퇴교했지만, 기본적으로 우월한 피지컬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주짓수, 태권도, 복싱을 오랫동안 했다.
웬만한 사람 서너 명은 가볍게 해치울 수 있는 인간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악!”
남자는 일어나려다 고통스러운 듯 다시 주저앉았다.
나의 강한 로우킥을 맞고 종아리 근육이 파열됐을 것이다.
로우킥이라는 실전 싸움기술이 알려진 건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이종격투기가 유행하면서부터다.
남자는 건달처럼 거칠어 보였지만 로우킥은 처음 맞아본 것이다.
“이런 개새끼!!”
“개새끼는 너가 개새끼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솥뚜껑만 한 내 손이 그의 볼에 차지게 달라붙었다.
“악!!”
남자는 맞자마자 목이 뽑히는 듯한 충격을 받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마디로 그로기 상태.
연타로 그의 반대 뺨을 다시 후렸다. 짝! 짝!
순식간에 남자의 얼굴에 뻘겋게 손자국이 나며 퉁퉁 부어올랐다.
무릎 꿇고 주저앉아 정신이 나간 그의 눈높이에 맞춰 쳐다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힘없는 여자한테 손찌검하는 새끼가 개새끼지. 너 같은 개새끼 한두 대 후린 나를 개새끼라고 하는 게 아니다.”
단순히 공희영을 괴롭혔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내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어마어마했다.
내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니까.
공희영은 나의 이런 모습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 준아 그만해.”
마음 같아서는 그를 때려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사적인 제재를 가하는 건 불법이다.
잘못한 만큼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순리다.
게다가 그는 이번 삶에서 나에게는 잘못한 게 없다.
“누나 이 사람이랑 어떤 관계에요?”
“그게 그냥···.”
공희영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순간 181818을 보낸 게 바로 이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 남자와 결혼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세 번째 이혼하게 될 것이 뻔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말려야 한다.
“네가 181818 보냈지?”
“준아.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 가봐.”
공희영은 상황이 불편한 듯 가라고 했다.
비록 자신을 패고 거칠게 대했지만, 남자와 매우 친밀한 관계인 듯했다.
남자는 그녀가 결혼을 고민하는 상대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난 이대로 갈 수 없다.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세 번째 결혼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삶을 끝나게 했던 원수가 어떤 놈인지 알아내야 했다.
일단 공희영을 집으로 안전하게 들여보내는 게 먼저다.
“알아서 할 테니까 누나는 먼저 집으로 들어가세요.”
그녀가 머뭇거렸다.
“빨리 들어가세요! 이 사람은 제가 해결할 테니까요. 빨리요!”
“응··· 으응.”
그녀는 여태까지 내게 못 봤던 모습을 봐서인지 군말하지 않고 들어갔다.
그녀가 다세대 주택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남자를 향해 도는데 무엇인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펑!’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남자는 날카롭게 깨진 형광등을 손에 쥐고 있었다.
쓰레기통 옆에 세워져 있던 막대처럼 긴 폐형광등이었다.
순간 이전 삶의 마지막에 골프공을 강하게 머리에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처음에는 아무 느낌 없었다.
# 5. 너 원수! 명우진
재빨리 머리를 만졌다. 다행이었다.
전혀 상처 입지 않았다.
폐형광등이 깨지며 소리만 요란했을 뿐이었다.
“이 새끼 봐라?”
“!”
나의 반응에 당황한 건 남자였다.
형광등에 겁먹을 줄 알았던 것이다. 내가 전혀 겁먹거나 당황하지 않자 오히려 그가 더 당황했다.
사실 형광등은 모르는 사람에게만 공포를 줄 수 있다.
날카롭게 깨진 형광등으로 찌른다고 해도 가볍게 베일 정도의 상처가 날 뿐이지 웬만해서는 피부를 뚫지 못한다.
그걸 모르는 일반인에게만 공포를 줄 뿐이다.
“좋은 말 할 때 그 형광등 내려놔. 너 그러다 손 베인다.”
내 말투는 마치 어른이 성냥불로 장난하는 아이에게 그러다 오줌 싼다며 타이르는 느낌이었다.
“이 새끼가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남자가 깨진 형광등으로 찌르려 달려들었다.
“악!!”
피하면서 긴 다리를 이용해 급소를 걷어찼다.
[퍼퍽!]
남자는 깨진 형광등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지며 쓰레기통 옆에 쌓여있던 연탄재에 얼굴을 처박았다.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며 그의 머리부터 얼굴까지 깨진 연탄재가 묻었다.
순식간에 낮도깨비처럼 됐다.
“너 같은 놈들은 좋게 말로 하면 안 듣더라.”
그의 뒷머리를 잡고 끌어올렸다.
“민증 까봐!”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둬야 했다. 원수니까.
하지만 그는 못 들은 척 반응하지 않았다.
“민증 까보라고!”
“좆까!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그는 머리와 얼굴에 묻은 하얀 연탄재를 털며 말했다.
물리적인 힘으로 내게 당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고분고분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해서일 것이다.
양아치의 쓸데없는 자존심
게다가 무차별적으로 내게 싸대기를 맞았고, 급소까지 맞은 후 연탄재에 얼굴이 처박혔다.
모멸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딱 봐도 양아치인 그가 순순하게 주민등록증을 줄 리 없다.
“가만있어!!”
그의 가슴 안쪽에 손을 넣어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그가 누구인지 확인한 후에 돌려보낼 거니까.
― 명우진. 1963년 12월7일. 서울마포구 서교동 34-1번지
“이름하고 주소 다 확인했으니까 앞으로 희영이 누나 앞에 얼씬거리면 모가지 뽑혀서 죽을 줄 알아라.”
남자는 이번 삶의 나보다 8살 많다.
하지만 계속 반말했다. 그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도 쓸데없는 배려다.
“희영이 누나는 너랑 결혼 안 할 거니까 꿈 깨고!”
나를 위해서도 공희영이 이놈이랑 결혼하면 안 된다.
배우 생활에 또 다시 큰 타격이 올 테니까.
이전 삶에서 그녀는 나와 상관없는 연예인이었을 뿐이지만 이젠 나와 함께 연예계 생활을 할 내 배우다.
“자. 가져가”
신분증을 지갑에 넣고 돌려주는데 명함이 떨어졌다.
“명함이 있었네. 백수건달은 아닌가 보지?”
명함을 봤다.
- 디엠 기획 캐스팅 매니저 실장 명우진
그는 디엠 기획의 캐스팅 매니저 실장이었다.
“!”
나는 회사 상사의 싸대기를 후린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회사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명우진은 이전 삶에서 나를 죽였다. 하지만 그는 깃털이다.
김동문과 유재두의 사주를 받은 양아치일 뿐이다.
이번 삶을 살게 되면서 디엠 기획의 로드 매니저로 살게 됐다는 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지검장 조철수의 아들로, 이대 교수의 아들로 태어난 것보다 디엠 기획의 로드 매니저라는 게 제일 좋았다.
원수의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철저히 파악하고 복수하기 수월하니까. 하지만 나는 오늘 디엠 기획의 캐스팅 매니저 실장인 명우진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수월하게 복수할 방법이 날아갈 것이다.
디엠 기획에서 잘릴지도 모른다.
“······.”
멍하게 명우진을 봤다.
지금 와서 죄송하다고 해야 할지, 맡은 배우를 지키기 위해 본의 아니게 때렸다고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사실 뭐라고 한다 해도 이미 일어난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
***
집에 돌아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원래의 계획대로 복수를 실행하기 힘들게 될 것이다.
“명우진도 이상해. 왜 애초에 나한테 말하지 않았지? 내가 공희영 로드 매니저인 걸 뻔히 알았을 텐데”
명우진은 지갑을 돌려주자 말없이 차를 몰고 떠났다.
나 역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게 이상했지만 내가 이번 삶을 살게 된 건 이제 두 달 남짓이다.
공희영의 촬영 스케줄에 따라 종일 운전하고 며칠에 한 번 회사에 보고하러 들어갔을 뿐이다.
이제 일하기 시작한 로드 매니저가 회사 사람이 누가 누군지 다 알 수 없다.
“에이 모르겠다.”
방법이 없을 때는 그냥 생각하지 않는 게 답이다.
회사에 가서 잘리든 욕을 먹든 상황을 보고 판단하는 게 답이다.
[준아! 나와서 밥 먹어라.]
“네 나가요.”
***
식탁에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조철수 지검장과 이대 장식미술학과 김세영 교수가 앉아있었다.
나의 부모님이다.
이전 삶에서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사고로 돌아가셔서 기억에 없다.
어머니는 내 나이 25살 되던 해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게 1992년이었으니까 바로 올해다.
22살의 전혀 다른 조준으로 이번 삶을 새로 살게 됐다는 걸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날짜부터 확인했다.
9월 2일이었다.
어머니는 8월 23일 날 돌아가셨다.
며칠만 더 빠르게 다시 살게 됐더라면 어머니를 먼발치에서라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가호는 내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시 살게 해준 것까지였다.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있는 축복은 없었다.
“안 먹고 뭐 하니? 너 좋아하는 갈비찜하고 뚝배기 계란찜 했는데.”
잠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멍하니 있었나 보다.
“네. 맛있게 먹겠습니다.”
이번 삶의 어머니 김세영 교수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고 기품 있는 분이었다.
젊은 시절 굉장한 미모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일은 할 만하니?”
아버지 조철수 지검장이 물었다.
“네”
“나도 네 나이라면 한번 해보고 싶었을 거다. 예쁜 연예인들도 맨날 볼 수 있고. 하하하.”
아버지는 말해놓고 아차! 싶었는지 어머니의 눈치를 봤다.
“당신은 내가 뭐라고 해요? 왜 내 눈치를 봐요? 당연히 젊은 애들이 무조건 예쁘죠.”
“아니야. 내 눈에는 당신이 최고야. 이미숙, 황신혜를 트럭으로 갖다 줘 봐. 트럭만 갖고 갖다 버리지. 내 눈에는 앞으로도 그렇고 영원히 당신이 최고야”
“이럴 때 보면 당신은 검사 체질이 아닌 것 같아요”
“사기꾼 같다는 말이지? 사기꾼 놈들을 많이 잡아들여서 물들었나? 하하하.”
어머니는 아버지의 립 서비스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지검장이라고 하면 굉장히 딱딱하고 철두철미할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내가 학교를 휴학하고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일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매니지먼트는 미래가 밝은 산업이라며 찬성했다.
물론 아르바이트로 경험 삼아서 해보는 것으로 생각하셨겠지만.
“하 사령관이 이번 국군의 날 장병 위문행사에 네가 부탁한 그룹을 무대에 세우겠다고 하더라.”
“네 고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대답했다.
내가 22살의 조준으로 다시 살기 전에 조준이 부탁한 것인 듯했다.
22살의 로드 매니저 조준으로 다시 살기 시작하면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단은 대답하고 티 나지 않게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아내야 했다.
“나중에 하 장군한테 네가 고맙다고 인사드려.”
“네. 그런데 하 장군님께서는 그룹이 마음에 드신데요?”
아버지는 갈비찜의 살을 발라드시다 뼈를 든 채 물끄러미 쳐다봤다.
“데뷔도 안 한 그룹을 하 사령관이 어떻게 알고 마음에 들어 하겠어?”
“그렇긴 하죠.”
데뷔도 안 한 그룹을 군 장병 위문행사에 세우겠다고 부탁을 한 것이었다. 혹시 걸그룹인가?
“그래도 여자 그룹이라고 하니까 장병들이 좋아할 것 같다고 하던데?”
역시 걸그룹이었다.
이전 삶에서는 군 장병들에게 인기 있는 걸그룹을 ‘군통령’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군 장병들의 반응은 걸그룹이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바로 판단할 수 있는 잣대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데뷔도 하지 않은 걸그룹을 군 장병 위문공연에 보내 반응을 살핀다는 건 생각지도 못하는 시기다.
‘자식 촉이 좋네.’
내가 22살의 조준으로 다시 살기 전의 조준은 매니저로서 촉도 좋았고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다.
‘1992년도 즈음에 디엠 기획에서 데뷔하는 걸그룹이 누구더라?’
1993년 2월에 데뷔한 에코 걸스였다.
에코 걸스는 이전 삶에서 ‘행복한 너에게 나를’ 이란 노래를 남긴 채 사라진 비운의 여성 4인조 그룹이었다.
단 두 번의 방송 후 개점 휴업상태로 있다가 1994년 말에 소리 소문 없이 해체됐다.
‘행복한 너에게 나를 ’은 당시 유행하던 흐름의 노래가 아니었다.
재즈선율이 느껴지는 발라드였는데 시대를 너무 앞선 음악이었다.
2000년대 중반 이수라, 성신경, 신송훈 등 많은 실력파 발라더들이 리메이크하여 노래는 크게 히트했지만 정작 에코걸스의 원곡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콘셉트도 너무 시대를 앞섰다.
정희, 윤서, 인영, 현리 4인조로 구성되어 각각 큐티, 러블리, 그레이스, 뷰티를 담당하는 콘셉트였다. 하지만 콘셉트를 선보일 기회조차 없었다.
네 명 모두 가창력이나 음악적 실력도 뛰어난 편이었다.
음악적으로 볼 때 아쉬움이 많이 남는 걸그룹의 증조할머니 같은 그룹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오늘 캐스팅 매니저 실장 명우진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디엠 기획에서 잘릴 확률이 높다.
에코 걸스는 나와는 상관없는 걸그룹이 되는 것이다.
굳이 아버지가 하 사령관에게 부탁할 이유가 없었다.
***
다음 날 회사에 나갔다.
“어제 잘 쉬었냐? 난 재영이 형 종자 회사 광고 찍으러 김해까지 운전해서 갔다 오느라고 힘들어 죽을 뻔했다.”
배우 유재영의 로드 매니저 한재일이 반겼다.
‘어? 이상한데?’
한재일은 정보가 빨랐다.
어떤 루트로 정보를 입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에 관한 정보는 그가 가장 빠르게 입수했다.
그가 아무 말 없다는 건 내가 명우진 캐스팅 매니저 실장을 묵사발로 만든 게 회사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회사에 별일 없었나?”
은근히 떠봤다.
“일 있을 게 뭐 있나? 희영이 누나 계속 드라마 촬영하고 있지, 재영이 형 지방 광고라도 계속해서 찍지, 특별할 게 없잖아. 왜? 회사에 뭔 일 있어?”
유재영은 눈치가 빨랐다. 내가 자신에게 무슨 일 없냐고 묻는 게 어떤 이슈가 있어서 물어보는 것으로 눈치챘다.
“아니야. 무슨 일이 있긴. 그냥 물어본 거지.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겠니?”
“하긴 그렇긴 하지”
한재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확실히 그는 회사 내에서 가장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루트가 있었다.
“그런데 너 명우진 실장님 어떤 분인지 알아?”
“명우진 실장?”
“응.”
한재영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왜? 잘 몰라?”
“명우진 실장이 누구야?”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아무리 정보가 빠르다 해도 그 역시 일개 로드 매니저일 뿐이다. 충분히 모를 수 있다.
“캐스팅 팀에 있는 실장님 몰라?”
“그런 사람 없어.”
“네가 모르는 거겠지.”
“무슨 소리야? 내가 우리 회사 청소 아줌마 이름까지 다 알고 있는데? 혹시 어떤 놈이 우리 회사 매니저라고 하고 다니면서 사기 치고 다니는 거 아니야?”
순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 아줌마 이름까지 꿰고 있는 한재영이 모른다.
명우진은 디엠 기획 매니저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기꾼일 수도 있다.
연예계 관련 사기 유형 중에 가장 많은 게 유명 매니지먼트사 매니저라고 사칭하는 거니까.
‘괜히 쫄았네.’
마음이 놓였다.
“안녕하십니까!”
그때 한재영이 벌떡 일어나며 누군가에게 인사했다.
회사 현관의 문을 밀고 들어오는 김동문 사장이었다.
그 뒤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볼이 퉁퉁 부었지만, 얼굴이 익숙했다. 명우진이었다.
# 6. 나는 우리 준이다
“안녕하십니까!”
나도 엉겁결에 일어나 인사했다.
“응 그래 수고한다.”
김동문 사장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건성으로 인사한 후 사장실 쪽으로 갔다.
명우진은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지만, 의식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앞만 보고 걸으며 김동문 사장실 쪽으로 갔다.
“너 저 사람 몰라? 저 사람이 명우진 실장이잖아. 캐스팅 매니저 실장”
“아. 저 사람이 명우진이었어? 이름은 몰랐지. 밖에서 캐스팅 매니저 실장이라고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캐스팅 매니저 실장 아니야.”
“그럼?”
“사장님 개인적인 일봐주시는 분이야. 사장님 이미테이션 가수 하기 전에 건달 생활했던 거 알지?
“응”
“그때 알던 동생인가 봐. 아마 명함 한 장은 있어야 하니까 그냥 캐스팅 매니저 실장이라고 파 준 거 같은데?”
다행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개인적인 일을 봐주는 사람이라면 회사 소속 캐스팅 매니저 실장인 것보다 더 김동문 사장과 친밀한 관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다.
***
갑자기 김동문 사장이 정신교육을 하겠다며 회사 대회의실로 매니저들을 불러 모았다.
로드 매니저부터 실장까지 모였다.
‘시간에 쫓기는 로드 매니저들까지 불러서 하는 말이라면 로드 매니저 들으라고 하는 말일 텐데.’
로드 매니저를 깨기 위해서 관리자급인 실장들까지 모이게 한 것 같았다.
군대에서 병장이 직접 이등병에게 뭐라고 하지 않듯이.
실장급에게 로드 매니저를 잘 관리하라는 뜻이었다.
신경 쓰였다.
나와 명우진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사장님께서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어서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먼저 바쁘신 중에도 저희를 위해서 시간을 내주신···.”
“됐어요. 앉으세요.”
김동문 사장이 사회를 보는 매니저 2팀 고재욱 실장의 말을 끊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오늘 갑자기 이렇게 여러분을 모이라고 한 건 다름이 아니고 우리 회사에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서입니다.”
명우진에게 내 얘기를 들은 게 틀림없다.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건 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로드 매니저인 나는 사장의 개인적인 일까지 봐주는 측근인 명우진을 패면 안 되는 거였다.
‘회사에 오래 다니기는 힘들겠네.’
쫓겨난다면 할 수 없이 다른 복수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오늘은 우리가 알~티스트에 대해서 생각 좀 해보자고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김동문 사장은 과도하게 혀를 굴렸다.
원래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과도하게 발음을 굴리는 경우가 많다. 김동문 사장은 유난히 심했다.
어쨌든 그는 디엠 기획 소속 배우나 가수, 연습생까지 모두 ‘아티스트’라고 칭했다.
지금은 연예인을 모두 ‘딴따라’라고 칭하는 시대다.
하지만 그는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그런 면에서 그는 확실히 시대를 읽고 앞서가는 면이 있었다.
“여러분들에게 우리 회사의 알~티스트들은 뭔가요?
뜬금없는 김동문 사장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의 의도가 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서였다.
대회의실에 있는 실장급부터 로드 매니저까지 모두 시선을 아래로 한 채 김동문 사장과 시선 마주치는 걸 피했다.
“우리 회사의 알~티스트 들은 말입니다! 우리한테 쌀과 밥을 주는 분들입니다. 다른 말로는 우리가 팔아먹어야 할 상품이기도 하고요!!”
김동문 사장의 얘기인즉슨 이랬다.
오늘 출근하지 않은 배우 3팀 로드 매니저 최영창이 걸그룹을 준비하면서 연기 트레이닝을 받고 있던 연습생 22살 김유진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임신했고 둘이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김유진은 연예계 데뷔 대신 사랑을 택했고 최영창도 회사를 나가 다른 일을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는 것이었다.
‘건드린 게 아니라 둘이 사랑하는 거 같은데.’
어쨌든 김동문 사장은 매우 흥분해서 말을 계속했다.
“매니저가 자기가 팔아먹어야 할 연예인을 건드려서 되겠습니까? 네?”
김유진은 배우 겸 가수로 김동문 사장이 매우 기대하던 연습생이었다.
이번 삶을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연습생까지 본적은 없지만, 매주 김동문 사장이 정신교육 시간에 여러 번 그녀에 대해 말한 게 기억났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내 얘기는 아니니까.
“잘 들으세요! 앞으로 또 한 번만 이런 일이 생기면 진짜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로드 매니저든 실장이든! 매니저는 절대로 우리 알~ 티스트와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는 사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프로페~셔널이 아니에요!”
한마디로 일 외에는 절대로 사적으로 시간을 같이 보낸다거나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얘기였다.
***
“그럼 오늘 제가 할 말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짝짝짝짝!!]
한 시간가량 이어진 김동문 사장의 정신교육 요점은 한마디로 절대로 회사소속 연예인과 만난다거나 사적인 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러다 발각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에 오늘 정신교육의 방점이 찍혀있었다.
“그럼 그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지난번에 말했던 에코걸스 데뷔전에 설 수 있는 무대 알아본 사람 있습니까?”
실장이고 로드 매니저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도대체 여러분들은 월급 받고 하는 게 뭡니까? 디엠 기획은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해야 하는 거냐? 주인의식을 가지고! 내가 회사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행동할 수 없어?”
김동문 사장은 존댓말로 시작했다 반말로 끝맺었다.
뚜껑이 열린 듯했다.
‘뚜껑 열릴 일이 아닌데.’
많은 오너 사장이 좋아하는 말이 있다.
직원에게 ‘내가 회사의 주인이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직원에게 먹히지 않는 잘못된 말이다.
직원은 직원일 뿐이다.
직원인데 어떻게 주인처럼, 오너 사장처럼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겠나?
직원이 월급 받는 만큼 일하지 못하는 게 문제지 주인의식 없는 게 문제는 아니다.
직원은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면 되는 게 직원이다.
주인이 아니면 절대로 주인의식을 가질 수 없다.
김동문 사장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닐 텐데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강요했다.
“군 장병을 상대로 공연하는 건 어떨까요? 3군 사령부에서는 에코걸스가 공연을 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난 주인의식을 가지고 알아봤다.
디엠 기획을 키워서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됐을 때 김동문에게 뺏어야 하니까.
매니저 실장과 로드 매니저들은 다행이라는 듯 쳐다봤다.
만약 내가 알아보지 않았다면 김동문 사장은 소속 연예인들 스케줄이 펑크 나든가 말든가 계속 붙잡아놓고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3군 사령부에서? 데뷔도 안 할 애들을 공연하게 해주겠대?”
“네. 3군 사령관 하봉윤 중장에게서 확답을 받았습니다.”
김동문 사장의 입이 째졌다.
“자네 이름이 뭐지? 경영기획실 직원인가?”
“공희영 씨 로드 매니저 조준입니다.”
“이거 봐! 이거 봐! 우리 조준 씨 말이야! 알~티스트 공희영 씨 로드 매니저 하느라 잠 잘 시간도 없을 텐데 말이야.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잖아!”
‘당연하지! 내가 키워서 삼킬 회사니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하지만 참았다.
***
“누나 오늘 촬영 끝날 때까지 못 있을 거 같아요. 저 대신 재일이가 누나 댁으로 모셔드릴 거예요.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오늘 갑자기 정해진 일이라.”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 있니?”
“무슨 일은 없는데 사장님께서 오늘 저녁에 운전 좀 해달라고 하셔서요. 직접 누나한테 말씀하신다는데 그냥 제가 말씀드리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김동문 사장의 운전기사가 오늘 나오지 못했다.
저녁에 중요한 미팅이 있는데 미팅이 끝나고 운전해줄 사람이 없다며 나에게 부탁한 것이다.
“너 혹시 사장님 마음에 드는 일 했니?”
“글쎄요. 저번 정신교육 시간에 에코걸스 반응을 볼 수 있는 무대를 알아보라고 하셔서 그거 좀 알아본 것뿐이거든요”
“사장님이 네가 되게 마음에 들었나 보다. 사장님은 운전기사 말고는 다른 사람한테 절대 운전 안 맡기시거든.”
“술 약속 같던데. 돌아오실 때 딱히 운전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대리운전해서 와도 되잖아. 그런데 너한테 운전 좀 해달라고 한 걸 보면 네가 마음에 드신 게 확실해.”
“그래요?”
전략적으로 계획한 건 아니지만 쉽게 김동문의 마음을 얻은듯했다. 만약 그게 맞다면 명우진이 나에게 맞았다며 나에 대해 나쁜 말을 한다 해도 만회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오늘 잘 모셔. 사장님 눈에 들어서 나쁠 것 없잖아.”
“네. 고맙습니다. 누나.”
[삐삐삐삐 삐삐삐삐 삐삐삐삐 삐삐삐삐]
공희영의 모토로라 브라보 플러스 삐삐가 울렸다.
삐삐를 확인한 공희영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명우진인 듯했다.
“그저께 그 사람이죠?”
“응.”
“혹시 그 사람이랑 결혼도 생각해요?”
로드 매니저로서 주제넘은 질문이지만 해야 했다. 어떤 관계인지 알아야 한다.
“그럴까도 했었는데. 사실 잘 모르겠어. 그저께 같은 경우 너무 무서웠거든.”
[삐삐삐삐 삐삐삐삐 삐삐삐삐 삐삐삐삐]
또 삐삐가 울렸다.
“차 세울까요?”
공중전화로 가서 명우진에게 응답해야 하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됐어. 급한 거 아니니까 괜찮아. 촬영하고 있었다고 하면 돼.”
“죄송해요. 누나. 제가 경력이 좀 있었으면 회사에서 핸드폰 지급 받았을 테고 지금 같을 때 삐삐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네가 죄송해? 내가 고현정이나 고소영같이 잘 나가면 말 안 해도 회사에서 너한테 핸드폰 지급해주지 않았겠니?”
확실히 공희영은 현실감이 있었다.
그녀가 회사에 기여 하는 게 컸다면 벌써 핸드폰을 지급했을 것이다.
회사에서 핸드폰을 지급 받았냐 아니냐에 따라 잘 나가는 연예인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했으니까. 이전 삶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타냐 카니발을 타냐에 따라 연예인의 급이 나뉘듯이 말이다.
“누난 곧 핸드폰을 지급 받게 되실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잘나가는 배우가 될 거고요.”
이전 삶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녀는 세 번째 이혼 후에 칩거에 들어가며 완전히 대중에게서 멀어졌다.
명우진과 세 번째 결혼만 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지금처럼 꾸준히 잘나갈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 그녀 나이 또래의 여배우가 얼마 남지 않는다. 모두 은퇴하거나 결혼으로 활동하지 않아서다.
별일 없이 지금처럼만 간다면 나이 들어서까지 주연급 조연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종횡무진 활약할 수도 있다.
그 나이 또래의 여배우 중에 최고가 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와 명우진을 떼어 놓아야 한다.
그녀의 세 번째 이혼을 막고 내가 매니저로 자리 잡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말이라도 고맙다 준아. 넌 어쩜 이렇게 기분 좋은 말만 해주니? 내가 몇 년만 젊었어도 너 같은 남자면 대시 했을 텐데”
공희영은 가끔 주책없을 때가 있다.
물론 그게 매력이기도 하지만 귀에 감기는 달달한 말에 잘 속는 성향 때문에 결혼하고 보니 남편이 모두 이상한 놈이었다.
* * *
공희영의 촬영을 지켜보다 한재일에게 뒷일을 맡기고 강남역 사거리 <강수사> 라는 일식집 앞으로 갔다.
지금 시각은 오후 6시 50분.
7시에 김동문 사장이 도착한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것이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해. 바빴을 텐데 일찍 와 있었네. 우리 준이”
김동문 사장이 직접 차를 몰고 왔다.
이전 삶에서 유재두와 함께 나를 죽인 사람이지만 지금은 ‘우리 준이’라며 내게 호감을 보인다.
‘그래 호감 갖고 아주 많이 좋아해라.’
그의 인생 정점에서 처절히 박살 내리라 다시 한 번 다짐했다.
# 7. 마음을 뺏다
“오늘 중요한 손님이랑 미팅이니까 일단 대기 좀 하고 있어.”
“네 사장님.”
김동문 사장은 차 키를 주고 <강수사> 안으로 들어가려다 돌아서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배고플 테니까 들어와서 저녁 식사하고 이걸로 결제해.”
<강수사>는 딱 보기에도 굉장히 비싼 일식집이었다.
로드 매니저가 저녁 먹을 음식점이 아니다.
“괜찮습니다. 사장님 제가 알아서 식사하고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저녁 먹으면서 술을 마실 거야. 언제 끝날지 몰라서 그래.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제일 비싸고 맛있는 거로 먹고 기다리고 있어.”
연습생 밥값 백 원, 이백 원 가지고도 비싼 거 먹였다고 담당 매니저를 나무라는 사람이다.
확실히 그는 내가 무척 마음에 든 게 틀림없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강수사> 정식을 시켜서 먹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보였다. 그는 김동문 사장이 들어간 방에서 나왔다.
<스포츠 한성> 현인기 사장이었다.
이전 삶에서 내가 언론고시를 치고 입사했던 바로 그 신문사의 사장이다.
지금은 <스포츠 한성>의 구독률과 열독률이 우리나라 신문 중에 가장 높다.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어 있지 않은 지금은 언론매체 중에서도 <스포츠 한성>이 연예계에 미치는 파급력은 최고였다.
연예인 한 명 띄우고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흥행도 <스포츠 한성>이 어떻게 기사를 내느냐에 달렸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센 연예권력이었다.
‘중요한 손님이 현인기 사장이었구나.’
매니지먼트 회사를 키우기 위해서는 <스포츠 한성> 같은 스포츠 연예지와 지상파 방송사의 고위임원과 친밀해야 하는 것은 필수다.
김동문 사장은 커지는 디엠 기획의 사세에 맞춰 연예권력에 줄을 대고 친분을 맺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김 사장님 오늘 저녁 잘 먹었습니다.”
현인기 사장이 김동문 사장에게 인사했다.
의례적인 인사였다.
저녁 식사를 시작한 지 30분이 좀 넘었을 뿐이다.
‘오늘 미팅은 완전히 실패인걸.’
술도 한잔 안 하고 나온 걸 봐서는 음식이 맘에 들지 않았거나 김동문 사장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아니면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밖으로 나가 차를 대기시켜야 했다.
밖으로 나갔다.
***
김동문 사장과 현인기 사장도 <강수사>에서 나왔다.
“오늘 아주 즐거웠습니다.”
<스포츠 한성> 현인기 사장의 말은 누가 봐도 빈말이라는 게 티 났다. 하지만 빈말한다고 뭐라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현인기 사장은 빨리 김동문 사장과 헤어지고 싶어 했다.
“현 사장님께서 술을 못 드신다니 더 붙잡을 수도 없고, 제가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 같아서 많이 아쉽습니다.”
“아닙니다. 다음에 또 좋은 자리에서 뵈면 되죠.”
이대로 미팅이 끝난다면 김동문이 현인기 사장을 만날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
순간 이전 삶에서 현인기 사장과 신입기자 환영 회식을 했던 기억이 났다.
1993년.
연남동에 있는 오래되고 허름한 메로구이 집이었다.
“사장님 이런 데를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원래 메로구이를 좋아하는데 우연히 알게 됐어. 몇 개월 전에 일 때문에 어떤 사람이랑 같이 왔는데 너무 맛있는 거야. 그래서 편집장까지 불러서 먹었지. 그 뒤로 거의 이삼일에 한 번씩은 오는 것 같아.”
“정말 맛있어요. 사장님!”
연남동 메로구이집은 아는 사람 아니고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그런 맛집이었다.
그날 나를 포함한 신입기자 모두 현인기 사장과 메로구이에 정종을 마셨다. 필름이 끊길 때까지.
그는 메로구이에 정종을 정말 좋아한다!
“준아 가자!”
김동문 사장이 씩씩대며 차에 탔다.
현인기 사장은 택시를 타고 온 듯했다.
큰길 쪽으로 택시를 잡기 위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에이 까다로운 새끼! 같이 타고 가면 좋잖아. 택시 타고 갈 거면서 말이야. 집으로 데려다주면서 술 좀 먹이고 얘기를 더 해 볼까 했더니 에이!”
디엠 기획을 크게 키울 때까지는 김동문을 도와야 한다.
현인기 사장이 메로구이에 환장한다는 걸 말해주기로 했다.
“사장님 저분 스포츠 한성 사장님 아니세요?”
“맞아. 니가 어떻게 아냐? 아니다. 매니저가 스포츠 한성 사장을 알 수 있지. 근데 왜?”
“지금은 외국 유학 중이지만 제 사촌 형이 스포츠 한성 기자였는데요. 자기네 사장이 메로구이에 정종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나서요”
“진짜야?”
“네. 메로구이에 정종 마시자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깰 정도로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김동문은 희망을 본 듯했다.
“현 사장이 잘 가는 메로구이 집도 알아?”
“그건 모르고요. 아는 사람 몇 명 없는 기가 막힌 메로구이 집은 알아놨습니다. 현 사장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차 세워봐”
차에서 내린 김동문은 택시를 잡고 있는 현인기 사장을 붙잡고 무어라 말을 했다.
잠시 후 현인기 사장은 김동문과 함께 차에 탔다.
“사장님께서 메로구이를 그렇게 좋아하시는 줄 알았으면 진작 메로구이 집으로 갈 걸 그랬습니다. 조준 씨! 나랑 다니던 메로구이 집 기억나죠? 거기로 갑시다.”
“네 사장님.”
은근히 김동문과 호흡이 잘 맞았다.
그는 마치 자신이 잘 아는 메로구이 집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연남동 굴다리 밑에 있는 추억의 메로구이 집으로 향했다.
***
메로구이 집은 이전 삶에서 처음 가봤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낡고 오래된 느낌이 나는 작은 가게 안에는 성공한 듯 보이는 나이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중에 현인기 사장, 김동문 그리고 스포츠 한성 편집장 이만재도 있다.
연남동 메로구이 집은 한눈에 맛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나이 지긋한 성공한 사람들은 절대로 아무거나 먹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한 끼 때운다는 식으로 아무거나 먹지만 나이가 들수록 즐거움은 먹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나이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맛집을 갔을 때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다.
“하하하하!”
“하하하! 김 사장님 정말 재밌으시네요.”
“아닙니다. 사장님과 편집장님께서 제 유머랑 코드가 맞아서 그렇습니다. 하하하.”
스포츠 한성 현인기 사장은 메로구이가 정말 맛있었는지 이만재 편집장을 불렀다.
그는 현인기 사장의 오른팔이었다.
실질적으로 스포츠 한성이 쏟아내는 각종 연예기사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실권자였다.
김동문 사장은 뜻하지 않게 메로구이로 현인기 사장과 이만재 편집장, 두 사람의 마음을 사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전 삶에서 현인기 사장이 우연히 일 때문에 어떤 사람이랑 연남동 메로구이 집에 왔다가 너무 맛있어서 편집장까지 불러서 먹었다고 했었다.
지금 상황과 똑같다!
‘평행이론인가?’
그렇다면 내가 현인기 사장에게 메로구이 집을 알려줬고 이전 삶의 나는 메로구이 집에서 신입기자 환영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혹시 이거 때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걱정은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22살의 동명이인 조준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 자체가 해명할 수 없는 일이다.
***
“오늘 즐거웠습니다. 김 사장님!”
“아닙니다. 두 분 모두 바쁘신 분인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메로구이 집에서의 2차는 성공적이었다.
현인기 사장뿐 아니라 이만재 편집장과도 친분을 맺었다.
셋은 기분 좋게 즐겼다.
앞으로 <스포츠 한성>에서는 디엠 기획 소속 연예인에 관해 우호적인 기사를 쓸 것이다.
적어도 기사로 씹힐 일은 없을 것이다.
세 사람이 헤어지는 분위기로 봐서는 <스포츠 한성>은 디엠 기획 홍보지가 될 수도 있다.
‘어쩐지 디엠 기획 연예인 기사는 좋게 써주라고 하더라.’
이전 삶에서 신입기자일 때 이만재 편집장이 디엠 기획 연예인에게는 이상하리만큼 관대한 기사를 쓰게 했었다.
이제 디엠 기획은 막강한 연예 권력자 현인기 사장과 이만재 편집장을 등에 업었다.
신인들은 얼굴을 알리는 기사로, 중견 연예인과 스타급은 빨아주는 내용이 시도 때도 없이 <스포츠 한성>에서 기사화될 것이다.
“덕분에 이렇게 맛있는 메로구이 집을 알게 돼서 제가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소속 연예인들 기삿거리 있으면 알려주세요. 신경을 좀 쓰겠습니다.”
“아유~ 아닙니다. 제가 꼭 저희 소속 연예인들 잘 봐달라고 모신 게 되네요. 전 이쪽 업계에서 제일 훌륭하신 분들을 모시고 좋은 얘기를 들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김동문 사장은 뻔뻔했다.
누가 봐도 잘 봐달라고 만난 건데.
하지만 말도 안 되는 뻔뻔함이 때로는 진실이 되고, 상대방의 마음을 산다. 그런 면에서 김동문 사장은 타고난 매니지먼트사 사장이었다.
“다음에는 제가 사겠습니다. 김 사장님. 여기 메로구이 집에서요.”
“이십사 시간 주야로 대기하고 있다가 불러주시면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그래요. 그럼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현인기 사장은 이만재 편집장의 차를 타고 갔다.
김동문 사장은 편집장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깍듯하게 인사한 후 차에 올랐다.
“준아!”
“네 사장님.”
“인마 사장님이 뭐야? 사석에서 있을 때는 형이라고 불러라!”
적당히 취하기도 했지만, 김동문 사장은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어떻게 사장님께 형이라고 부르나요.”
방송, 영화, 매니지먼트 등 세칭 연예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친해지면 직급이나 직위로 불리는 것보다 형 동생으로 불리는 걸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다.
김동문 사장도 기분이 좋았는지 내게 형이라고 부르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난 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관계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
특히나 복수하기로 마음먹은 원수와는 더욱더.
“자식 그럼 알아서 해. 어쨌든 오늘 일이 굉장히 잘 풀렸어. 이만재 편집장까지 친분을 맺었으니까.”
“잘됐네요. 사장님.”
“다 네 덕분이다. 내가 스포츠 한성이랑 친분을 맺으려고 정말 공들였었거든. 그런데 잘 안 됐었지. 그런데 네가 메로구이 한방으로 깨끗하게 해결했네. 하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사장님.”
“아니야. 운도 실력이야. 하여튼 디엠 기획에 복덩이가 들어왔어! 에코 걸스 무대도 잡아오더니 스포츠 한성까지 네 덕분에 접수하게 되네. 3군 사령관은 아버지 친구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아주 친한 분인가 봐. 데뷔도 안 한 애들은 그런 큰 무대에 세워주지 않는데. 이래서 매니저도 집안 좋고 학벌 좋은 놈들이 해야 한다니까! 하하하”
적당히 오른 술 탓도 있지만, 김동문은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난 그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았다.
앞으로 내가 하는 말은 웬만해서는 다 듣게 될 것이다.
# 8. 누구의 노래일까
“그런데 준아. 현인기 사장이 메로구이에 정종을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어?”
“매니저를 하게 되면 언젠가 스포츠 한성이나 지상파 방송사 고위임원을 만날 일이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 취향을 알게 되면 꼭 기억해뒀습니다.”
“이야!”
김동문 사장은 감탄했다.
그럴만하다.
22살 남자는 부모에게 용돈이나 타 쓰고 여자친구랑 어딜 놀러 가고 어떻게 스킨십 한 번 더 할까 고민하는 나이다.
그런 나이의 내가 전략적으로 사람의 취향을 파악하고 기억한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우리 준이는 정말 꿈이 크고 전략적인 사람인데? 그 나이에 그러기 쉽지 않은데. 서른, 마흔 먹은 실장 놈들보다 우리 준이가 훨씬 낫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상대가 기분이 업 돼서 좋을 때는 쓸데없는 겸손은 필요 없다. 오버하는 것 같아도 장단을 맞춰주는 편이 낫다.
“평창동 댁으로 가시죠?”
“응. 오늘 고생했는데 마무리까지 수고 좀 해줘.”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연남동 굴다리를 지나 연희동 사거리를 지나는데 문득 공희영이 생각났다.
오늘 촬영장으로 갈 때도 계속해서 명우진에게서 삐삐가 왔었다.
별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연남동에서 그녀의 집은 매우 가깝다.
평창동 김동문의 집으로 가려면 그녀의 집 앞쪽으로 지나가도 된다.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사장님. 아까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이쪽 길이 도로포장 때문에 막힌다고 합니다. 남가좌동 쪽으로 해서 조금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우리 준이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나에게 친근함을 표현하겠다고 하는 말이겠지만 원수인 그가 ‘우리 준이’라고 하는 말은 왠지 어색했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 준이’라는 말을 듣게 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연희동 고개를 넘어서 일부러 남가좌동과의 경계에 있는 좁은 도로로 들어갔다.
공희영의 집 앞 골목으로 지나가기 위해서였다.
[크허허헉! 크허허헉!]
김동문 사장의 코 고는 소리였다.
차라리 잠든 게 나았다.
깨어있다면 왜 이런 좁은 골목길로 가냐고 할 수도 있다.
도로포장을 피해 가는 길이라고 하기에는 다세대 주택가의 좁은 골목은 말도 안 되는 선택이다.
다행하게도 공희영의 다세대 주택 앞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집도 불이 꺼져 있다. 피곤해서 일찍 잠든 듯했다.
명우진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거나 행패를 부린 것 같지는 않았다.
다시 큰길로 나가 평창동을 향하려는데 골목 끝에서 말다툼하는 남녀가 보였다.
공희영과 명우진이었다.
둘은 차가 다가오는 걸 의식하지 않았다.
“피하는 게 아니라 촬영이 늦게 끝났다니까! 그리고 당분간 오지 말아 달라고 말했잖아. 시간 좀 갖자고”
“이게 진짜!”
명우진은 화가 나는 듯 손찌검을 하려다 말았다.
그의 성격으로 봐서는 곧 공희영을 한 대 칠 것이다.
‘저 새끼가 또!’
당장 달려나가 명우진의 귀싸대기를 후리고 싶었다.
하지만 뒷자리에 김동문 사장이 자고 있다.
그럴 수 없다.
이대로 못 본 척 지나갈 수도 없다.
명우진은 공희영의 머리채를 잡고 목을 밟았던 놈이다.
가만 놔두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아! 그렇게 하면 되겠다.’
김동문 사장은 아침 정신교육 때 연습생 김유정과 로드 매니저 최영창의 결혼 소식을 알리며 흥분했다.
절대로 소속 연예인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지 말라고 강조했었다. 한마디로 그건 회사의 상품인 연예인에게 절대로 찝쩍대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가 명우진과 공희영을 볼 수 있게 잠을 깨우기로 했다.
[끼익!]
일부러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어우!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사장님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와서요.”
일부러 바깥의 소리도 들리라고 창문도 열어 놨다.
“너 씨발 이혼하고 빌빌거리는 년을 김동문 사장한테 말해서 디엠 기획에 꽂아줬더니 이따위로 나와?”
“뭐가 이따위로 나온다고 그래? 촬영 끝나고 피곤하니까 내일 얘기하자고 한 거고. 그리고 당분간 시간 좀 갖자고 한 건데.”
“무슨 시간을 가져? 이제 다시 인기 좀 얻는 것 같으니까 쌩 까겠다 이거 아냐 씨발!”
“이런 개새끼! 그렇게 말했는데도!!”
김동문 사장은 대번에 명우진을 알아보고 밖으로 나갔다.
“야!”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명우진의 귀싸대기를 날렸다
[쩍!]
체중을 실어 날리는 김동문 사장의 불꽃 귀싸대기에 명우진은 담벼락 쓰레기통 옆에 쌓아둔 연탄재에 처박혔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연탄재의 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게 보였다.
“사장님!”
“희영 씨는 가만히 있어! 너 이 새끼 누차 얘기했지? 소속 배우한테 찝쩍대지 말라고!”
“형님! 아니 사장님!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뭐가 그게 아니야 새끼야!”
김동문은 연탄재에 처박힌 명우진을 발로 밟았다.
“악!!”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는다는 게 이런 것일까?
명우진은 절구질하듯이 연속해서 연탄재에 처박혔다.
연탄재 먼지가 햇볕이 쨍쨍한 날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 같이 뿌옇게 날렸다.
두들겨 맞기에 적당한 밤이었다. 사필귀정이었다.
“한 번만 더 소속 연예인한테 찝쩍거리는 거 걸리면 그땐 이 정도로 안 끝난다!”
“네 사장님.”
김동문 사장은 한참을 두들겨 팬 후 명우진에게 다짐을 받았다.
이유를 막론하고 절대 공희영에게 연락하지도,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기로 했다.
***
그날 이후 명우진을 회사에서 보지 못했다.
김동문 사장의 개인적인 일을 도와주는 것까지 그만둔 건 아니었지만 절대로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동문 사장이 공희영과의 만남을 못하게 하고 아예 회사출입을 금지한듯했다.
덕분에 공희영은 명우진과의 관계가 정리됐다.
명우진이 그녀를 김동문 사장에게 소개해 디엠 기획에 들어온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빌미로 공희영에게 감정을 강요하고 결혼까지 요구했었다.
공희영도 처음에는 자신을 신경 써주고 디엠 기획에 들어 올 수 있게 해준 명우진에게 고마웠다. 하지만 그가 감정을 강요하면서부터 힘들었었다.
공희영은 더욱더 연기에 전념할 수 있었고 세월을 역주행하는 젊음의 아이콘으로 <스포츠 한성> 기사가 났다.
<스포츠 한성>현인기 사장과 이만재 편집장의 힘이었다.
“희영 언니 너무 예뻐요!”
“기집애! 보는 눈은 정확하네. 이리 내 사인 해 줄게.”
두 번 이혼한 그녀의 개인사도 드러났지만, 오히려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여성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
회사에서 난 로드 매니저의 탈을 쓴 실장으로 통했다.
김동문 사장이 무슨 일만 있으면 나에게 조언을 구하고 의견을 묻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까불지 않았다. 최대한 겸손하게 행동했다.
어떤 조직에서든 윗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잘나가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하는 건 힘들지만 끌어내리는 건 쉽다.
더욱더 겸손하게 행동하고 조심했다.
***
에코 걸스의 3군 사령부 공연이 다가왔다.
김동문 사장은 실장급 매니저와 시간이 되는 로드 매니저까지 회사 대 연습실에 모이게 했다.
에코 걸스의 3군 사령부 공연 시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공희영의 스케줄이 비어서 나도 대 연습실에 갔다.
“이야! 기대된다. 준아 너 에코걸스 본 적 있어?”
“아니. 넌?”
“나도 없지. 그런데 실장급인 너도 본적이 없으면 사장님께서 정말 신경 쓰는 애들인가 보다.”
회사 돌아가는 모든 걸 꿰고 있는 한재일도 본 적 없다면 에코걸스는 김동문 사장이 기대하는 그룹임이 틀림없다.
“멤버가 누군지도 정확히 모르지?”
“응”
물론 이전 삶의 기억으로 에코걸스가 정희, 윤서, 인영, 현리라는 걸 알고 있다. 각각 큐티, 러블리, 그레이스, 뷰티를 담당하는 콘셉트라는 것까지.
하지만 이번 삶에서는 아직 그들을 본 적 없다.
김동문 사장은 공희영과 김유정 사건 이후에 더욱더 연습생과 매니저의 사적인 접촉을 막았다.
에코걸스는 실장급 중에 최고선임인 최진복 실장이 관리했다.
연습도 회사가 아닌 모처에서 극비리에 진행했고 숙소도 최진복 실장만 알고 있었다.
에코걸스라는 팀이 데뷔를 앞두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회사에서 그들을 본 사람은 실장급 몇 명 말고는 없었다.
“넌 기대되지 않냐? 사장님께서 괴물 신인이라고 극찬하는 애들이잖아.”
“응 나도 기대돼.”
하지만 그들은 대중에게 사랑받지 못할 확률이 높다.
이번 삶을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전 삶에서 일어난 일 대부분이 그대로 일어났다.
그렇다면 에코걸스는 이번 삶에서도 큰 반응을 못 얻을 것이다.
에코걸스의 3군 사령부 공연은 내가 이번 삶을 조준으로 살기 전 오리지널 조준이 벌인 일이다.
김동문 사장이 들어오자 매니저 본부 실장 고재욱이 진행을 시작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우리 디엠 기획의 괴물 신인 에코걸스의 시연을 보기 위해 자리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재욱아 길다. 그냥 바로 들어가자.”
김동문 사장이 말하기 좋아하는 고재욱 실장의 진행 멘트를 잘랐다.
“흐흐흐흐.”
대 연습실에 모인 사람들이 웃었다.
“네 사장님!”
고재욱은 김동문 사장의 핀잔에 익숙한 듯 바로 받아들였다.
“쓸데없이 제가 말이 길었습니다. 바로 보시죠! 디엠 기획의 괴물 신인! 에코걸스!”
고재욱의 소개가 끝나자 주변 조명이 꺼지고 AR로 ‘행복한 너에게 나를’의 반주가 나왔다.
전주가 끝나가자 무대에 스팟 조명이 떨어졌다.
“첫사랑의 이별을 경험하고서 널 만났지. 그래서 우리의 만남이 더 힘들었는지 몰라~”
큐티를 담당하는 정희의 솔로로 ‘행복한 너에게 나를’ 이 시작됐다.
“하지만 서로를 알게 되고 마음을 나누게 되는 건”
러블리 윤서의 귀에 감기는 미성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니가 나의 마지막 사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모르게 이전 삶에서 즐겨 들었던 ‘행복한 너에게 나를’을 따라 불렀다.
“너 이 노래 알아?”
한재일이 귓속말로 물었다.
“아니. 몰라.”
내가 생각해도 뻔뻔스러운 대답이었다.
가사를 먼저 따라 불러놓고 노래를 모른다니. 하지만 아무 말도 안 했다. 설명하려고 할수록 말도 안 될 것이다.
한재일은 어이없는 듯 쳐다보다 다시 노래에 집중했다.
“바쁜 하루 중에서 너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같이 있는 것처럼 너도 느꼈음 좋겠어.”
그레이스와 뷰티를 담당하는 인영과 현리가 번갈아 노래를 불렀다.
멤버 4명이 모두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음악적으로도 그렇고 비주얼로도 안정적인 하모니가 돋보였지만, 매력에 확 빠지기에는 뭔가 1퍼센트가 부족했다.
지켜보고 있는 실장급 매니저와 로드 매니저 모두 비슷한 반응이었다.
큐티, 러블리, 그레이스, 뷰티를 담당하는 네 명의 멤버가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래서 반응이 없었구나.’
에코걸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이 없었다.
이전 삶에서 데뷔곡을 발표하고 개점휴업 상태로 있다가 해체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가수는 많다.
그때였다.
“지금처럼만 너를 사랑할게~ 네 마음만 변하지 않는다면은 내 모든 걸 가질 사람은 너뿐인 걸 난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야”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시원하고 폭발적인 성량의 목소리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무대 위 네 명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스타공장 공장장』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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