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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게이트 1-1권

2018.02.19 조회 6,856 추천 61


 # chap 1. 헬게이트
 
 “들으라! 이제 이 자리에 10만의 영웅이 섰으니! 우리의 영웅을 경배하라!”
 높은 단상에 선 사람의 외침에 그를 바라보던 모두가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10만 영웅은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눈앞에 일렁이는 검은 구멍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인원이 무려 20만이었다. 케샤 왕국을 무너뜨리고 어둠에 빠뜨린 마물 군단과 싸운 병력이 고스란히 이곳에 모인 것이다.
 케샤 왕국을 지배하던 마물 군단은 이제 대부분 정리되었다. 마물이 비록 강하긴 하지만 인간 역시 만만치 않았다. 대륙 통합군은 100만에 달하는 병력을 희생시킨 끝에 여기까지 왔다.
 이제 남은 건 마물을 끊임없이 토해내는 헬게이트를 부수는 것뿐이었다. 그걸 부수기 위해 무수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곳에서는 부술 수 없다고 말이다.
 헬게이트를 부수기 위해서는 게이트를 연 매개체를 없애야 하는데, 그건 게이트 안쪽, 즉, 마계에 존재했다.
 그러니 게이트를 없애기 위해서는 게이트로 직접 들어가야만 했다.
 어차피 온 대륙이 헬게이트 때문에 손을 잡았다. 아마 이런 일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마물 군단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게이트가 이대로 계속 유지되면 아마 모든 대륙에 어둠이 깔릴 것이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게이트 원정군 소속의 카이엔은 굳은 표정으로 헬게이트를 노려봤다.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추측만 할 뿐이었다.
 솔직히 가기 싫었다. 아니, 영웅이라고 한껏 치켜세워주지만, 이곳의 10만 명 중 저 안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이 자리에 선 사람은 다들 카이엔과 비슷한 경로를 밟았을 것이다.
 카이엔은 백작가의 서자였다. 후계자 싸움에 끼기는 어렵지만 불씨가 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존재 말이다. 그렇기에 헬게이트 원정대에 지원하라는 가문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출정 준비!”
 카이엔은 이를 악물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끝장이다. 저 안에는 어쩌면 우리가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마물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진군!”
 명령이 떨어졌다. 카이엔은 심호흡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쿵! 쿵! 쿵!
 발걸음 맞춰 진군하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불길함을 사정없이 내뿜으며 검게 일렁이는 헬게이트가 10만이나 되는 사람을 차근차근 삼켰다.
 그렇게 헬게이트 원정군이 마물의 대지인 마계로 들어갔다.
 남은 20만의 병력은 한동안 그곳에 서서 10만의 원정대를 삼킨 헬게이트를 바라봤다. 어차피 이곳을 떠날 수도 없었다. 원정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게이트가 토해내는 마물을 처리해야만 했다.
 당장 움직여 진지를 구축하고 앞으로 이곳에서 지낼 준비를 해야 했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자들도 다 알고 있었다. 헬게이트 원정대는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을.
 게이트의 매개체를 부수고 나면 게이트가 닫힐 것이다. 마계와 이곳을 이어주는 통로가 사라질 텐데, 득실득실한 마물을 처리하면서 게이트로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촉박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서서 애도를 표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이다. 10만의 영웅이 원정에 성공하기를, 되도록 살아서 돌아오기를.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게이트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젤리를 이리저리 주무르는 것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 하며 일렁였다.
 그 모습에 다들 당황했다.
 “자리를 지켜라! 폐하를 보호하라!”
 마물 퇴치군 사령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곳에는 오직 출정식에 연설하고 진군 명령을 내리기 위해 참석한 사람이 있었다. 케샤 왕국과 국경을 마주한 니젠 왕국의 국왕이었다.
 제일 발등이 뜨거운 사람이었고, 이번 원정의 성공을 가장 원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마물 퇴치군에게 지워지는 책임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전군 공격 준비! 안에서 마물이 나오려는 모양이다! 긴장해!”
 그렇게 요동치던 헬게이트가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안정을 되찾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러더니 크기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게이트가 사라지려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다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게이트에서 뭔가가 휙 튀어나왔다. 새까만 몸에 키가 3미터는 될 법한 거인이었는데, 머리에 뿔이 세 개나 난 마물이었다.
 “크워어어어어어!”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마물이 포효하며 손을 휘둘렀다. 그렇지 않아도 새까만 긴 손톱이 더욱 까맣게 물들었다. 손의 궤적을 따라 새까만 채찍이 손톱에서 쭉 뻗어 나갔다.
 촤촤촤촤촤촤촥!
 그 일격에 앞에 선 수백 명의 병사가 두 동강 나서 쓰러졌다. 실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참혹함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막아! 뭣들 하나! 방패조 앞으로! 창조는 창을 던져! 화살조 장전! 기사들 준비해!”
 사령관은 그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저런 강력한 마물은 기사가 나서지 않으면 이길 수 없었다.
 방패를 든 병사들이 단단하게 몸을 받치고 전진했다. 하지만 강철 방패도 방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크워어어!”
 마물이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아악!
 방패병과 창병은 물론이고 뒤에서 출진을 준비하던 기사단의 절반이 그 일격에 사라져 버렸다. 마물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모든 마물을 다 합해도 이 마물 하나를 당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크아아아아!”
 마물이 다시 한 번 포효했다. 그리고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다.
 다들 멍하니 빠르게 하늘의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마물을 바라봤다.
 “대,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물이라니. 게다가 강하긴 또 얼마나 강한가. 저런 마물을 상대하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할지 생각만 해도 암담했다.
 “게, 게이트가 닫힌다!”
 그제야 모두의 시선이 게이트로 향했다. 그래서 미처 생각지 못했다. 마물의 태도가 왠지 도망치려는 것 같다는 것을 말이다.
 게이트가 줄어드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러더니 이내 사람 머리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그 순간, 그 안에서 뭔가가 또 툭 튀어나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것처럼 다들 화들짝 놀라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하지만 헬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것은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누, 누구냐!”
 거의 넝마가 되다시피 한 가죽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구멍에서 나온 사람은 그 질문에 얼른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점점 사라져가는 헬게이트를 쳐다봤다.
 우우웅.
 나직한 진동과 함께 헬게이트가 완전히 닫혀 버렸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헬게이트가 사라졌지만 누구도 그걸 기뻐하지 못했다. 그저 게이트에서 마지막에 나온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애썼다.
 머리도 다 헝클어지고 가죽갑옷으로 추정되는 옷은 걸레나 다름없게 변했기에 누구도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기사 한 명이 상대의 정체를 물어보기 위해 다가가려는 순간, 사내가 위로 훌쩍 뛰었다.
 “어어?”
 다들 고개를 뒤로 젖혔다. 사내가 엄청나게 높이 뛰어오른 것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이 말이다.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나, 날아가?”
 사내가 새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중얼거렸다.
 “저쪽은 마물이 날아간 방향인데······ 설마······.”
 공허한 중얼거림이 허공에 흩어졌다.
 
 * * *
 
 콰득!
 “크워어어어!”
 카이엔은 발버둥치는 마족의 목을 꽉 밟았다. 마족이 도망가려 마구 손발을 휘저었지만 그걸로는 카이엔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그저 카이엔이 입은 옷만 찢어지고 헤질 뿐이었다.
 “그만해라. 더 심하면 옷 망가진다.”
 카이엔의 말은 나직했지만 어조에 담긴 살기는 단숨에 마족의 발버둥을 잠재울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크으으으. 억울하다!”
 카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넌 억울하겠지. 안 들키고 도망칠 수 있었는데 말이야.”
 그는 헬게이트 안에서도 상당한 지위와 힘을 보유한 마족이었다. 헬게이트 안쪽 마계에도 엄연히 질서가 있었고, 나라가 존재했다.
 “씨프로가 도와달라는 말만 안 했어도 아마 널 발견하지 못했을 거야. 인정해.”
 씨프로는 인간계에 헬게이트를 연 마왕이었다. 그리고 카이엔의 발밑에서 발버둥치는 마족, 딜룬은 공작의 지위를 가진 마족이었다.
 이름을 가진 마물은 각자 고유한 능력을 가지며 마족이라 불린다. 딜룬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건너뛸 수는 없지만, 일단 그림자 속에 숨으면 설사 마왕인 씨프로조차 그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은밀했다.
 그래서 억울했다. 힘으로 상대가 안 된다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림자 속에 숨기만 하면 도망치는 건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한데 들킨 것이다. 씨프로가 도와달라고 외치는 소리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모를까 카이엔이 일단 신경 써서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는 순간 딜룬의 기척을 감지해냈다.
 딜룬은 특유의 빠른 속도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카이엔이 작정하고 날린 공격을 완벽히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한 방에 거의 빈사 상태에 가까운 상처를 입었다.
 그렇게 상처를 입어 약해지지 않았다면 헬게이트를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대한 힘을 지닌 채로 헬게이트를 통해 인간계로 넘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가능하게 할 방법은 헬게이트에 보내는 힘을 대폭 증가시키는 것뿐이었는데, 그 일을 하던 도중에 인간의 군대가 게이트를 통과해 넘어온 것이다.
 “크으윽.”
 딜론은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몸이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카이엔에게 제압당하는 바람에 심한 고통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그의 눈에는 삶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나, 날 죽일 건가?”
 “그래야겠지?”
 카이엔이 딜룬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손바닥에 붉은빛이 어른거렸다.
 그 빛을 본 딜룬이 다급히 외쳤다. 저 빛에 휩쓸리면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말 것이다.
 “자, 잠깐만 기다려!”
 카이엔의 손에 어린 빛이 점점 짙어졌다. 그럴수록 딜룬의 표정은 더욱 다급해졌다.
 “정보를 줄 수 있다!”
 “정보?”
 정보라는 말에 빛이 조금 약해졌다. 하지만 언제든 튀어 나갈 것처럼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날 살려주면 아마 큰 도움이 될 거야. 솔직히 날 그냥 놔줘도 별로 위협이 되지도 않잖아.”
 “위협은 안 되지만 귀찮겠지. 그것도 제법.”
 카이엔의 손에 어린 빛이 다시 짙어졌다. 딜룬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계, 계약을 하자! 계약을 해서 제약하면 되잖아!”
 “계약? 헬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수백 명을 잘라버린 너랑 얽히면 기분만 나쁠 것 같은데?”
 딜룬이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렇지 않아! 그건 그저 본능 같은 거였다고! 당황해서 그랬어! 너도 알잖아!”
 “앞으로도 당황하면 다 죽이겠지.”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계약을 하자고! 계약을 하면 제약을 걸 수 있잖아!”
 카이엔도 마족과의 계약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헬게이트 원정대 중에는 마족이나 마물과 계약을 시도해서 수족처럼 부리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그 마족의 경우는 지능이 낮은 하급 마족이었다. 이렇게 공작이라는 작위까지 가진 마족과 계약을 하는 건 누구도 해본 적이 없었다.
 카이엔의 손에 어린 붉은빛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걸 본 딜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너 정도 되는 수하라면 제법 쓸모가 있겠지.”
 카이엔은 여전히 딜룬의 머리를 향해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딜룬도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계약을 진행하자고.”
 “그, 그 상태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딜룬이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문제가 될 리 없었다. 그저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카이엔은 마족들 사이에서 검은 악마라고 불린다. 그와 마주하고 살아남은 마족이나 마물은 존재치 않았다. 지금 계약을 통해 살아나면 딜룬은 카이엔에게 죽지 않은 최초의 마족이 되는 셈이었다.
 “자, 그럼 시작하겠다.”
 계약은 마족이 주도해야만 한다. 마족과의 계약이라는 것 자체가 대가를 약속하고 마족이 계약자에게 종속되는 형태이니 당연했다. 마족이 먼저 자신의 속을 열어 보여야 계약이 가능했다.
 딜룬의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여전히 카이엔의 발이 목을 누르고 있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건 별 상관없었다.
 정확히 두 배로 커진 딜룬의 머리가 불그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부가 투명해졌다. 투명해진 머리를 통해 그의 두뇌가 고스란히 보였다.
 이것이 계약의 최소조건이었다. 이제부터는 각자 조건을 말하고 계약을 진행하면 된다.
 “내 진실한 이름인 딜룬의 종속을 대가로 내 생명을 원한다. 너도 이름을 걸어라.”
 카이엔이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딜룬을 아쉬로 바꾸고, 한 번의 목숨으로 바꾸면 응해주지.”
 그 말에 딜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 상대가 자신의 진실한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그걸 어떻게······!”
 “역시 마족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카이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목에 채워진 팔찌에서 빛나는 조각들이 튀어나왔다.
 철컥! 철컥! 철컥!
 조각들이 맞물리며 카이엔의 손목 주위에 커다란 띠가 생겨났다. 그 띠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빨간 빛을 뿜어내며 꿈틀거렸다.
 “서, 설마 종속의 고리? 아, 안 돼!”
 딜룬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눈가가 살짝 찢어져 피가 흘러나왔지만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어쨌든 날 믿어줘서 고맙군.”
 카이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목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던 띠가 빠르게 날아가 딜룬의 머리를 감쌌다. 마치 머리에 띠를 두른 모양이 되었다. 그 띠는 그대로 머리를 파고들어 두뇌를 감싸 버렸다.
 번쩍!
 강렬한 섬광과 함께 딜룬의 머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카이엔은 그제야 딜룬의 목에서 발을 뗐다. 하지만 딜룬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새파란 하늘이었다.
 “딜룬이라 불러줄까? 아쉬라 불러줄까?”
 카이엔의 질문에 딜룬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카이엔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딜룬이라 불러주십시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더없이 공손했다. 그 모습을 본 카이엔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네가 말해 주려던 정보를 거짓 없이 읊어봐.”
 카이엔의 명령에 딜룬이 즉시 대답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헬게이트로 인한 마계와 인간계의 시간차이가 있습니다.”
 “시간 차이?”
 “주인님께서는 그곳에서 30년 정도를 보내셨지만, 실제로 이곳에서 흐른 시간은 1시간 30분에 불과합니다.”
 카이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그리고?”
 딜룬은 거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카이엔의 말투에 움찔 놀랐다. 하지만 어차피 종속의 고리에 붙잡힌 이상 주인이 자신을 해칠 이유가 전혀 없기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헬게이트는 하나가 아닙니다.”
 
 * * *
 
 브리케 백작가의 저택 앞에 선 카이엔은 높이 솟은 정문을 바라보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현실 시간으로는 고작 수개월에 불과하겠지만 카이엔 입장에서는 30년 만에 돌아온 집이었다.
 “어? 저분 둘째 도련님 아냐?”
 정문을 지키는 병사가 카이엔을 발견하고는 동료에게 물었다. 동료 병사도 카이엔을 확인하고는 눈이 커다래졌다.
 “마, 맞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병사들이 놀랄 만도 했다. 카이엔은 헬게이트 원정군에 참여했다. 아직 헬게이트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어떤 경우든 둘째 공자가 다시 돌아온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서, 설마 원정군에서 도망친 건가?”
 병사가 사색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동료도 기겁하며 말했다.
 “헉! 그럼 큰일이잖아. 이거 정말 괘, 괜찮은 걸까?”
 “내가 당장 달려가서 백작님께 보고할 테니까, 자네가 둘째 공자님을 모시고 슬쩍 자초지종을 물어봐.”
 “알았으니까 서둘러!”
 동료가 다급히 달려가자, 병사가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카이엔에게 다가갔다.
 “저······ 두, 둘째 공자님?”
 카이엔은 병사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고스란히 들었다. 생각해보니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했다. 확실히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카이엔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음······ 그러니까······.”
 카이엔은 자신에게 다가온 병사의 이름을 기억하려 애썼다. 얼굴이 낯익은 걸 보면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다.
 ‘하긴 고작 석 달 정도니 당연한가?’
 카이엔이 집을 떠난 지 3개월쯤 지났다. 원정군에 합류해 헬게이트까지 가는 데 두 달이 걸렸고, 게이트에서 나와 집까지 오는 데 한 달이 걸렸으니까.
 “아! 한스?”
 카이엔의 말에 한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게 제 이름입지요.”
 한스는 어떻게 사람이 고작 석 달 만에 몇 년을 함께한 사람의 이름을 잊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다.
 둘째 공자인 카이엔에게 자신이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한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쩝. 그래도 나름대로 둘째 공자님께 잘해드린 것 같은데······.’
 한스는 그래도 브리케 백작가에 있는 사람 중, 카이엔을 깍듯하게 모시는 축에 속했다. 가끔은 그냥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조차도 카이엔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한스 정도면 정말로 잘 대해준 셈이었다.
 카이엔은 그런 한스의 표정 변화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왜 그래? 섭섭해?”
 카이엔의 물음에 한스가 흠칫 놀라 표정을 수습했다.
 “아, 아닙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카이엔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한스를 보고 있으니 예전 기억이 아주 조금씩 떠올랐다.
 무려 30년 동안이나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가문의 일을 기억해낸 자체가 사실 대단했다. 그만큼 카이엔도 한스를 특별히 여겼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널 보니 집에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카이엔의 말에 한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실례가 되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카이엔의 얼굴과 몸을 요모조모 뜯어봤다.
 그가 아는 둘째 공자님은 절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묘하게 달라지신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좀 밝아지셨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건 아닌가?’
 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때, 안쪽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노옴!”
 안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호통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브리케 백작가의 후계자이자, 카이엔의 배다른 형인 플리게가 정문을 뛰쳐나왔다.
 플리게는 카이엔을 발견하자마자 그대로 몸을 날려 발로 가슴을 밀어 찼다.
 당연히 그걸 그대로 맞아줄 이유가 없는 카이엔이 몸을 옆으로 돌리며 허공에 뜬 플리게의 발목을 툭 건드렸다.
 쿠당탕탕!
 플리게는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었다. 겁나게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보다는 화끈거리는 얼굴이 더 문제였다. 아픈 것도 잊을 정도로 쪽팔렸다.
 “이놈이 감히 피해!”
 카이엔은 플리게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 뒤를 이어 나온 가문의 기사들을 쭉 둘러봤다.
 이름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낯익은 느낌은 있었지만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카이엔 공자,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하시오.”
 기사 중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그들에게는 큰 문제였다. 국왕령에 의해 원정군에 보냈는데, 이렇게 도망쳐 왔으니 자칫하면 백작가에 큰 불이익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원정이 끝나서 왔다. 더 할 말 없으면 비키도록. 어머니를 뵈어야 하니까.”
 카이엔은 그 말을 남기고 기사들 사이를 지나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길을 막고 서 있던 기사들은 순간 당황했다. 설마 둘째 공자가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시하다니, 너무 당황해서 카이엔이 옆을 지나치는데도 그저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뭐, 뭐지?”
 “공자! 거기 서시오!”
 기사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서서 카이엔을 불렀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섰을 때는 이미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벌써 저택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이이······!”
 기사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브리케 백작은 둘째 공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그 외에 별다른 지시사항이나 주의할 사항은 없었다. 명령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혹시 약간의 불상사가 벌어진다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해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가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플리게는 이를 갈며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으득! 이 개자식!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는 한스 혼자 남아 있었다. 한스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둘째 도련님 이제 어쩌지?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것 같지가 않은데······.”
 
 -환영해주는 분위기는 아니군요.
 카이엔의 그림자 속에 숨은 딜룬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림자 속에 숨은 딜룬의 목소리는 오직 카이엔에게만 들렸다.
 “그래도 걱정해주는 사람이 최소한 하나는 있잖아.”
 -그나저나 처음에 지옥의 불구덩이인 줄도 모르고 뛰어든 놈이 형입니까?
 “글쎄. 그런 모양인데?”
 카이엔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배다른 형인 플리게는 카이엔보다 5살이나 위였다. 언제나 카이엔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사사건건 괴롭혔다. 물론 기억은 아주 희미했지만.
 -어머니는 어떤 분입니까?
 “좋은 분이셨지.”
 딜룬은 카이엔의 말투에서 상황을 순식간에 유추해냈다. 잠시 후, 카이엔은 저택 뒤편에 있는 문을 통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브리케 백작가의 저택 뒤에는 가산이 있었고, 그 가산에는 카이엔 모친의 묘가 있었다. 카이엔의 모친은 카이엔이 10살 때 돌아가셨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순간만은 똑똑하게 기억한다.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묘는 초라했다. 당연했다. 카이엔의 모친은 평민이었다. 저택에 고용된 시녀였는데, 브리케 백작과 눈이 맞아 카이엔을 낳은 것이다.
 카이엔은 어머니가 핍박받는 무수한 모습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 모든 것을 꿋꿋하게 이겨냈다. 오직 카이엔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조금만 더 버티셨으면 좋았을 텐데.”
 카이엔의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하지만 만일 지금까지 버티셨다면 카이엔이 어떻게든 고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카이엔에게는 충분히 그럴 힘이 있으니까.
 카이엔은 묘비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기억이 물밀 듯 밀려왔다. 카이엔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맴돌았다.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짓지 않았던, 아니, 지을 수 없었던 미소였다.
 -마족들이 이 모습을 보면 다 기절할 거야······.
 검은 악마 카이엔이 저런 미소를 짓다니.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딜룬은 오히려 그 모습이 어색해서 무서웠다.
 -이제 그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심이······.
 카이엔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단지 그것 하나만으로 웃음에 어린 따스함이 짓궂음과 섬뜩함으로 바뀌었다. 딜룬이 당황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크억!
 카이엔의 발이 자신의 그림자를 지그시 밟고 있었다.
 “이런, 실수로 발이 미끄러졌네?”
 그림자 속에 숨은 딜룬에게 충격을 주려면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밟아야 한다. 당연히 실수일 리가 없었다.
 “앞으로 조심할게.”
 -넵! 알겠습니다!
 카이엔이 조심한다고 말했지만 딜룬에게는 앞으로 알아서 조심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나저나 슬슬 몰려오는군.”
 카이엔이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다. 다섯이나 되는 기사가 뛰어오고 있었다. 제법 단련이 되었는지 경사가 낮지 않은 산을 뛰어 올라오는 데도 숨이 조금도 거칠어지지 않았다.
 “카이엔 공자, 이게 무슨 짓이오. 가주님의 명을 무시하다니!”
 선임기사의 말에 카이엔이 그를 슬쩍 쳐다봤다. 그 서늘한 눈빛에 선임기사가 움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무슨 놈의 눈빛이······.’
 선임기사가 당황한 눈으로 카이엔을 바라봤다.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는 걸 방해하고 싶은 건가?”
 “그, 그건······.”
 선임기사가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솔직히 3개월 전만 해도 이런 일이 있으면 강제로 목덜미를 쥐고 힘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마, 마저 하시오.”
 카이엔이 무심한 눈으로 선임기사를 쳐다봤다. 선임기사는 왠지 모르지만 계속 식은땀이 흘렀다.
 “플리게한테도 그따위 말투를 쓰나?”
 “카이엔 공자! 그게 무슨 말이오!”
 선임기사를 제외한 나머지 네 기사가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화를 냈다. 카이엔이 플리게를 함부로 부른 것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고, 자신들을 하대한 것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 집의 개들은 버릇이 없군요. 제게 맡겨주시면 말 잘 듣는 얌전한 개로 만들어 바치겠습니다.
 딜룬의 어조에는 진득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이번 기회에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겠다는 속셈이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카이엔은 대답 대신 그림자를 지그시 밟았다.
 -크억! 구경만 하겠습니다!
 사실 딜룬에게 맡겨도 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딜룬이 나서서 활동이 가능하려면 모습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는 약간 시간이 필요했다.
 “아래에서 기다려라.”
 카이엔은 그렇게 말하고 발을 들어 선임기사의 배를 쭉 밀었다.
 “으, 으허헉!”
 “뭐, 뭐야!”
 그저 단순한 발길질 한 번이었는데, 다섯 기사가 서로 엉키더니 한 덩어리가 되어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다섯 기사는 산 아래에 그대로 널브러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나름 힘조절을 해서 크게 다치지 않게 조심하려고 했지만, 아직 그 부분은 서툴렀기에 확인이 필요했다.
 “딜룬.”
 -옙! 맡겨만 주십시오!
 딜룬이 카이엔의 그림자에서 쑥 빠져나갔다. 마치 그림자가 둘로 분리되는 것 같더니 떨어져나간 그림자가 위로 쑥 올라와 딜룬의 형체로 변했다.
 딜룬의 모습은 헬게이트를 나올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3미터에 이르는 새까만 몸에 3개나 되는 뿔을 달고 있었다.
 순간이동을 하듯 사라지자마자 산 아래에 나타난 딜룬은 기사들의 상태를 힐끗 살피고는 입맛을 쩍 다셨다.
 그리고 그 순간 선임기사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딜룬과 눈이 마주친 선임기사의 몸이 바짝 경직되었다.
 하지만 딜룬의 모습은 그 순간 그대로 사라졌다. 카이엔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선임기사는 자신의 눈이 잘못된 거라 여기고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허공을 바라보는 일을 반복했다.
 “쯧. 빨리 몸을 만들어줘야겠군.”
 카이엔의 중얼거림에 딜룬이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필이면 그때 깨어나다니······.
 그 말에 카이엔이 피식 웃었다. 몰랐을 리가 없었다. 카이엔은 딜룬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딜룬은 카이엔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종속의 고리를 걸고 있는 이상, 딜룬은 절대 카이엔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는 사실을 감추는 건 가능했다.
 카이엔이 정확히 집어서 질문하면 똑바로 대답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판단으로 숨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족의 본능이자 본질이었다.
 그 부분만 조심하면 딜룬은 정말로 유용한 카이엔의 종이 될 것이다. 그 어느 마족보다 더 쓸모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까.
 카이엔은 어머니의 묘를 바라봤다.
 “일단 좀 더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카이엔이 무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목에 있는 팔찌에서 빛 조각이 후두둑 튀어나왔다.
 철컥! 철컥! 철컥!
 조각들이 조립되어 큰 띠를 만들었다. 그 띠는 손목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종속의 고리와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띠에 새겨진 문양이나 색깔이 완전히 달랐다.
 위이이잉!
 고리가 날아가 무덤을 감쌌다. 그리고 그대로 스며들었다. 무덤에서 마치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근처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함이 느껴졌다.
 딜론은 그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보호의 고리! 그걸 고작 무덤에 쓰다니! 마왕의 불길도 막아낼 수 있는 방어구인 보호의 고리를! 고작 무덤에!
 고작 무덤이라는 말을 들은 카이엔이 그림자를 지그시 밟았다.
 -끄아아악! 살려주세요!
 “잘해. 혹시 마력의 고리라고 들어봤어?”
 -마, 마력의 고리! 마계를 통틀어 3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도구! 단숨에 마족의 등급을 하나 올려주는 전설의 마도구! 서, 서, 서,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마도구를 가지고 계신 겁니까!
 “잘해.”
 -잘하겠습니다!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마력의 고리를 제게 하사해 주십시오!
 “하는 거 봐서.”
 -잘하겠습니다! 더 보실 필요도 없습니다! 종속의 고리까지 찬 몸 아닙니까! 제가 강해져서 절대 손해날 일 없을 겁니다.
 카이엔은 씨익 웃으며 산 아래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묘를 바라봤다.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면서도 처연한 미소가 카이엔의 얼굴에 떠올랐다.
 -잘하겠습니다! 더 잘하겠습니다! 최고로 잘하겠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딜룬의 목소리를 즐기며 카이엔이 산 아래로 내려갔다.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 chap 2. 브리케 백작가
 
 브리케 백작은 눈앞에 앉은 카이엔을 노려봤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데로 도망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건 잘했다. 덕분에 수습할 시간은 벌었구나.”
 브리케 백작은 심호흡을 해서 화를 한 번 더 다스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들어보자. 그래, 왜 돌아왔느냐?”
 카이엔은 솔직히 말했다.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원정이 끝났습니다.”
 브리케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단 말인가. 원정을 떠난 지 이제 고작 석 달이었다. 한데 뭐? 원정이 끝나?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생각해낸 것이냐?”
 카이엔은 브리케 백작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했다. 어쩌면 이제 제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너무나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자, 브리케 백작의 노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 대체 이 가문의 수치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단 말인가.
 그가 화를 폭발시키려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브리케 백작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하지만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왕궁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브리케 백작은 흠칫 놀랐다, 왕궁의 전령이라니. 하면 벌써 이 일이 왕궁에 알려졌단 말인가? 브리케 백작이 카이엔을 노려봤다.
 “도망쳐 올 거면 몰래 올 것이지! 뭐가 그리 당당하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면서 왔느냐!”
 그렇게 소리친 브리케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궁의 전령이 만일 국왕의 전언이라도 가져왔다면 더 기다리게 해선 안 된다. 그건 국왕에 대한 불경이 될 수도 있었다.
 브리케 백작이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갔다.
 “네 방에 가 있어라! 한 발짝도 밖에 나오지 말고!”
 쾅!
 집무실 문을 세차게 닫고 나가는 브리케 백작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엔이 피식 웃었다.
 “결국 오직 가문의 안위만 걱정하는군.”
 -원래 인간이란 그런 존재 아닙니까.
 딜룬의 말에 카이엔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인간인데 말이야······.”
 -잘하겠습니다!
 카이엔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이놈이 이렇게 재미난 놈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잡아다가 종속시킬 걸 그랬다.
 “우리는 아무래도 너무 늦게 만난 모양이야.”
 -그, 그 무슨 망발을······! 아차! 더 잘하겠습니다! 최고로 잘하겠습니다!
 “이미 늦었다.”
 카이엔이 그림자를 꾹 밟았다.
 -끄어어억! 이놈의 입!
 카이엔은 즐거운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딜룬 덕분에 기분이 좀 풀렸다.
 어쨌든 당분간은 가문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분위기를 좀 더 파악한 다음 일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헬게이트를 남겨둘 수는 없지.”
 
 * * *
 
 국왕의 전언을 들은 브리케 백작은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저······ 백작님?”
 보다 못한 전령이 나서서 백작을 불렀다. 그제야 백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미, 미안하군. 워낙 충격적인 일이라서······.”
 “예. 충분히 이해합니다.”
 전령은 어색하나마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 귀족이 제법 많았다.
 “어쨌든 헬게이트가 닫혔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원정군은······.”
 “원정군을 삼킨 상태로 닫혔다니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없겠군.”
 “예. 그렇습니다.”
 전령은 공손히 대답하며 브리케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아들 중 하나도 이번 원정에 참여했다. 명단을 가지고 있고, 몇 번이나 확인했기에 이름도 외우고 있었다.
 ‘카이엔이라고 했지?’
 크리베 백작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모르지만 어쨌든 아들을 잃었으니 백작도 심경이 복잡할 것이다.
 “국왕 전하께서 원정에 도움을 준 가문에 포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전령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전 아직도 들러야 할 곳이 많아서······.”
 보통 왕궁의 전령이 오면 며칠 정도 대접을 해서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이번은 사안이 사안이고, 또 일이 많이 밀린 만큼 시간이 촉박했다.
 “다음에 꼭 다시 들러주시게.”
 왕궁의 전령은 권력에 상당히 근접한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브리케 백작은 이번만큼은 그 말을 하기 싫었다.
 ‘미치겠군.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지?’
 그렇다고 애써 돌아온 아들을 죽여서 묻을 수도 없지 않은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전령이 저택에서 나가자, 브리케 백작은 카이엔의 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더 정확한 사실을 알아야 대처를 세울 것 아닌가.
 꽝!
 거칠게 문을 연 브리케 백작이 방안을 둘러봤다.
 “이놈! 어딜 갔느냐!”
 카이엔은 방에 없었다. 아니, 아예 방에 들어간 흔적조차 없었다. 자신의 말을 아예 무시해 버린 것이다.
 “뭣들 하느냐! 가서 당장 찾지 않고! 찾아서 데려와!”
 백작의 명에 수행하던 기사와 문관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각자의 방법으로 카이엔을 찾아다녔다.
 브리케 백작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집무실로 향했다.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다시 돌아온 것도 문제인데 사고까지 쳤으니 울화가 가슴을 꽉 메웠다.
 
 * * *
 
 카이엔은 저택의 정원을 거닐었다. 정원 한쪽 구석에 가니 옛날 생각이 났다.
 “여기서 처음 검을 배웠지.”
 -주인님의 천재적인 재능을 꽃피운 곳이 여기로군요.
 딜룬의 아부에 피식 웃은 카이엔은 주변에 서 있는 나무를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어릴 때는 이 나무들이 카이엔의 놀이터였다.
 물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인 10살까지만 그랬다. 그 이후에는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었다. 괴롭힘당하던 장소 중 하나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난생처음 배신이란 걸 당해본 장소이기도 했다.
 “딜룬.”
 -옙! 주인님!
 딜룬은 군기가 바짝 든 척 대답을 했다.
 “배신하지 마라.”
 -헤헤헤. 배신이야 마족의 본능 같은 건데 그걸 어떻게······! 안 하겠습니다! 전 배신이라고는 모르는 순수한 마족입니다!
 카이엔은 어이없는 눈으로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뭐 이런 어설픈 마족이 다 있단 말인가. 게다가 딜룬이 어디 보통 마족인가. 자그마치 공작이었다.
 “너 마족 맞냐?”
 어처구니없는 말투로 카이엔이 묻자, 딜룬의 절망 어린 시무룩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게 다 종속의 고리 때문입니다. 주인님께 거짓을 말할 수 없으니 조금만 긴장을 놔도 머릿속이 활짝 열려버리니······. 이놈의 입을 꿰매든가 해야지.
 카이엔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종속의 고리가 가진 위력이었다. 역시 구해두길 잘했다. 이런 재미난 효능까지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카, 카이엔 오빠?”
 카이엔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17세쯤 된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음······.”
 카이엔은 기억을 더듬었다. 얼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가족은 아니었다. 소녀의 표정과 눈빛을 보면 거북한 사이는 아니었다.
 “이리스?”
 “돌아오셨다는 얘기 듣고 혹시 여기에 가장 먼저 오시지 않을까 하고 왔어요. 정말로 돌아오셨군요.”
 이리스가 다다다 달려서 카이엔의 품에 폭 안겼다. 카이엔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는 걸 보면 친밀했던 관계가 분명한데 왜 기억이 얼른 안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요. 릴리 언니랑 약혼한다는 말에도 안 울었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많이 울었단 말이에요.”
 얘기를 듣다 보니 하나하나 기억이 떠올랐다.
 ‘아, 날 열심히 쫓아다니던 그 꼬맹이로군. 가만, 약혼? 아아, 그거?’
 원정을 떠나기 직전의 일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맞다. 분명히 약혼도 했다. 물론 헬게이트 원정군에 참여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파혼으로 이어졌지만 말이다.
 “자자, 이러면 곤란하지.”
 카이엔은 이리스를 품에서 떼어냈다.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알지만 절대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있는 건 호감만이 아니었으니까.
 이리스는 브리케 백작가가 자랑하는 레드울프 기사단의 단장인 가이츠 경의 딸이었다. 어찌나 예뻐하는지 이리스가 쫓아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카이엔을 못마땅하게 여길 정도였다.
 “카이엔 오빠. 이번에는 제게도 기회가 있는 거죠?”
 이리스의 당돌한 말에 카이엔은 빙긋 웃기만 했다. 굳이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무슨 짓을 하고 무슨 말을 하든 관심이 없었다.
 “당분간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혼자 있고 싶으니 돌아가라.”
 카이엔의 냉정한 말에 이리스가 살짝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카이엔을 바라봤다.
 30년 전이라면 이런 반응을 보이면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안쓰러운 게 아니라, 이 뒤에 찾아올 가이츠 경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는 사람은 딱 질색이다.”
 “너, 너무해요.”
 이리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후다닥 도망치듯 떠나갔다. 카이엔은 달려가는 그녀를 힐끗 한 번 쳐다본 후,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흥이 식어 버렸군.”
 -얼굴은 반반하던데 잠시 즐기시지 그러셨습니까.
 “됐다. 마음은 얼굴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애야.”
 -남 말 하실 처지가 아닌······! 잘하겠습니다!
 “너 속마음 너무 잘 드러내는 거 아냐? 솔직히 말해. 일부러 그랬지?”
 -······예.
 카이엔은 이를 악물고 그림자를 꾹 밟았다.
 -끄아아악!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신이 슬퍼졌다.
 
 * * *
 
 겔트 왕국의 국왕인 트라우엔 2세는 마물퇴치군으로부터 온 보고서를 다시 한 번 샅샅이 읽었다.
 “정말로 이상하단 말이지. 안 그런가?”
 왕국의 총리대신인 바스하이트 후작은 왕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에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원정군을 굳이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쉽습니다.”
 트라우엔 2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보기엔 원정군을 안 보냈다면 헬게이트도 사라지지 않았을 걸세.”
 “그렇게 보셨습니까?”
 “난 보고서의 이 부분이 마음에 걸리네.”
 트라우엔 2세가 짚은 부분은 헬게이트가 닫히기 직전의 일에 대한 보고였다.
 “헬게이트가 닫히기 직전에 튀어나온 사람, 아무래도 원정군의 일원 같지 않나?”
 바스하이트 후작이 공손히 말했다.
 “상식적으로 마법주문도 없이 즉시 날아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하.”
 “그럼 마물이 튀어나오는 헬게이트는 상식적인가? 내 입장에서 보면 그것도 충분히 상식에서 벗어나 있네.”
 “설사 그런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다 치더라도 원정군에는 없습니다. 전하.”
 “그래서 이상하단 거야. 원정군 명단은 확보했나?”
 “여기 있습니다.”
 바스하이트 후작이 미리 준비한 두루마리를 전했다. 상당히 두꺼운 두루마리였는데, 그 안에는 원정군에 참여한 자들의 인적사항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다 읽는 데만도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선수끼리 왜 이러나, 추린 거 있지?”
 바스하이트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일이라 판단해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시간에 목마른지 아시지 않습니까.”
 왠지 후작의 목소리에 날이 서고 짜증이 어린 것 같았다. 하지만 국왕인 트라우엔 2세는 그저 빙글빙글 웃었다.
 “그럼 정식으로 명령을 내려야겠군. 추리게.”
 “전하!”
 바스하이트 후작이 날 선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원정군에 참여했던 자들이 몽땅 죽었으니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재원 마련부터 지급액 책정에 지급 방식까지 바스하이트 후작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일이 처리되지 않는다.
 트라우엔 2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바스하이트 후작 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후작. 이번에도 내 감을 한번 믿어보는 게 어때?”
 바스하이트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트라우엔 2세는 훌륭한 왕이었지만 가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감 타령을 할 때가 있었다.
 문제는 그 감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나쁜 결과를 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이었다. 이쯤 되면 감이 아니라 예지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래서 바스하이트 후작도 국왕의 감이라는 말을 비웃지 못했다.
 “추리겠습니다.”
 “그럼 후작만 믿겠네. 아마 이번에도 제법 재미있을 거야. 내 장담하지.”
 바스하이트 후작은 국왕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얼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의 등뒤에는 불만의 아우라가 넘실거렸다.
 “결국 할 거면서 앙탈은. 크큭.”
 트라우엔 2세는 일국의 왕 답지 않은 경박한 웃음을 지은 뒤,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궁금하단 말이지. 마지막으로 튀어나온 마물, 아무리 봐도 보통이 아닌데, 그게 지금까지 잠잠하단 얘기는 처리하거나 숨었다는 뜻인데······.”
 만일 처리했다면 누가 처리했는지 명백하다. 또, 숨었다 하더라도 누구 때문에 숨었는지도 명백했다.
 트라우엔 2세는 그 누구를 반드시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 * *
 
 “결국 헬게이트가 완전히 닫혔군.”
 음습한 동굴 깊은 곳, 넓은 공동 안 한가운데에 편안히 앉은 사내가 중얼거렸다. 검은 로브에 후드까지 쓰고 있어 턱 윗부분은 아예 보이지가 않았다.
 “이래서야 애써 헬게이트를 만든 보람이 없군.”
 “그러게 말입니다.”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동공으로 걸어 들어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보다 전 마계 쪽이 왜 가만히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시드는 4개나 뿌렸는데, 정작 헬게이트를 연 건 제일 약한 러그바툰 왕국의 씨프로뿐이라니.”
 “나머지는 눈치를 살피고 있는 거겠지.”
 “확실히 그렇겠군요. 그나저나 마계 쪽 상황을 아예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긴 합니다.”
 “마찬가지다. 연락 방법이라도 있으면 안을 한 번 휘저을 수 있을 텐데.”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는 작은 마법진 3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법진이 있었음이 분명한 자리 하나가 흉측한 화상자국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들 멍청하기도 하지. 마계에서 인간계로 헬게이트를 만들 수 있을 거로 생각하다니. 이쪽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아. 큭큭큭큭.”
 “그러게 말입니다. 어쨌든 조만간 전 대륙이 후회하겠지요. 우리를 내친 것을 말이지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절망과 비탄 속에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내 영혼을 걸고.”
 사내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떨렸다.
 “아, 내 정신 좀 봐. 이걸 전해드리러 와서 잡담만 하고 있었으니.”
 복면 사내가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로브 사내는 그걸 받아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의 몸 주위로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이내 회오리치다가 사내의 손바닥으로 남김없이 스며들었다.
 손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광택을 뿜어냈다. 마법진의 힘을 유지하는 특수한 비약이었다.
 “이걸로 몇 달은 괜찮겠군요. 전 대륙의 동태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일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좀 있어서요.”
 그 말을 남기고 복면 사내가 동공에서 나갔다.
 로브를 입은 사내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몸 주변으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움직였다. 이내 동공이 검은 안개로 꽉 채워졌다.
 
 * * *
 
 카이엔이 가문에 돌아온 지 열흘이 훌쩍 지나갔다. 브리케 백작은 카이엔의 존재를 감추려 애썼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감추는 데 전혀 관심이 없는 카이엔 때문에 헬게이트 원정에 나섰던 백작가의 둘째 아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문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뻗어 나갔다.
 당연히 그 소문은 겔트 왕국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의 귀에는 모두 들어갔다.
 그리고 브리케 백작은 오늘 황당한 일을 마주했다.
 “이게 다 무엇이냐?”
 브리케 백작의 물음에 집사가 정중히 대답했다.
 “초대 요청서입니다.”
 “초대 요청서라니.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이딴 게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집사라고 할 말이 있겠는가. 그저 고개만 살짝 조아릴 뿐이었다.
 브리케 백작도 집사의 잘못이 없다는 건 잘 알기에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쌓인 초대요청서를 힐끗 쳐다봤다.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근일 브리케 백작가에서 자신을 초대해 줬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혹시 아는 바가 있나?”
 집사는 즉시 의견을 내놨다.
 “둘째 공자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문을 확인하고자 함이 아닐까 합니다.”
 브리케 백작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카이엔이 돌아온 이후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저······ 백작님. 이번 기회에 그냥 공표를 해버리심이 어떠하십니까?”
 “그걸 누가 감당하라고?”
 “어차피 소문이 파다하게 난 상황입니다. 그냥 쿨하게 인정하고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브리케 백작은 집사의 충고를 가만히 되새겼다. 이렇게 가끔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책이 보이곤 했다. 집사는 나이만큼의 연륜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시면 둘째 공자님의 약혼을 다시 진행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약혼이라는 말에 브리케 백작의 눈이 번쩍 뜨였다.
 대체 그걸 왜 잊고 있었단 말인가. 둘째가 살아 돌아왔으니 다시 약혼을 진행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카이엔과 혼담이 오갔던 상대인 릴리는 에델슈타인 자작가의 여식이었다.
 에델슈타인 자작가는 돈이 많기로 유명한 가문, 그들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브리케 백작가는 날개를 다는 셈이었다.
 “좋아. 파티를 열지. 이 요청서를 보낸 모두를 초대해.”
 “목록을 만들겠습니다.”
 집사가 기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초대 요청서를 몽땅 들고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요청서 안에 왕궁으로부터 온 것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백작가가 발칵 뒤집힌 건 당연지사였다.
 그리고 그 모든 사태의 주범인 카이엔은 자신의 충실한 사기꾼 종인 딜룬의 몸을 만들기 위해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 chap 3. 파티
 
 브리케 백작 저택에 수십 대의 마차가 줄을 섰다. 활짝 열린 정문을 통해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가 끊임없이 들어갔다.
 아침나절부터 시작된 마차의 행렬은 오후가 되면서 조금씩 잦아들었다.
 오늘은 브리케 백작이 주최한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늘 초대받은 사람은 모두 브리케 백작에게 미리 초대요청서를 보낸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왕국의 총리대신 바스하이트 후작도 있었다. 바스하이트 후작은 누구보다 먼저 도착해 어떻게든 먼저 카이엔을 만나고자 했다. 하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저택 내에서 카이엔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가주인 브리케 백작조차도.
 
 브리케 백작은 고개를 들며 뒷목을 꽉 쥐었다. 혈압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카이엔이 집에 돌아온 이후 하루도 그냥 넘어간 적이 없었다.
 카이엔이 집을 떠났던 시간은 고작 석 달에 불과했다. 한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이 전혀 달라졌다.
 “그래서 방에도 없고, 정원에도 없고, 훈련장에도 없고, 가산에도 없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저택에서 나간 것 같습니다.”
 브리케 백작은 답답했다. 이런 일은 집사와 의논해야 막힌 곳이 뻥 뚫린다. 하지만 지금 집사는 파티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기사단장인 가이츠 경에게 이런 보고나 듣고 있는 것이다.
 가이츠 경은 자신이 내린 결론을 얘기했다.
 “아무래도 부담감을 느껴 도망간 것 아니겠습니까?”
 “부담감? 그놈이 말이오?”
 가이츠 경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둘째 공자는 상당히 소심하지 않았습니까. 실수가 잦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브리케 백작은 가이츠 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50에 가까운 나이를 먹은 노기사의 눈매에는 완고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러니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카이엔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애초에 그게 아니라면 가문의 주인인 자신이 카이엔에게 쩔쩔맬 이유가 없었다.
 원정에서 돌아온 카이엔은 왠지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것은 가문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이츠 경.”
 “말씀하십시오. 백작님.”
 “가서 그놈을 찾아서 내 앞에 대령하시오. 오늘 파티에는 그놈이 반드시 필요하오. 아시겠소?”
 상당히 강경한 태도였다. 가이츠 경은 의외라는 듯 백작을 바라보다가 이내 예를 취했다.
 “명을 받듭니다.”
 가이츠 경은 곧장 뒤돌아 가주의 집무실을 나섰다. 일단 일을 맡은 이상, 전력을 기울여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그 점은 확실히 믿을 만했다.
 브리케 백작은 자신의 둘째 아들을 떠올리며 한숨지었다.
 “후우. 이거 정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구나.”
 솔직히 애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시녀가 낳은 아들을 거둬서 키운 건 외부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래서 방치했고, 헬게이트 원정군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때다 싶어서 냉큼 보내 버렸다.
 한데 그 때문에 일이 요상하게 꼬여 버렸다.
 브리케 백작은 카이엔을 떠올리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혈압이 계속 뒷목과 뒤통수를 두드렸다.
 
 브리케 백작을 한숨짓게 하고, 가이츠 경의 발바닥을 땀으로 적신 당사자인 카이엔은 예상과 달리 저택 안에 있었다.
 저택 지하실에는 브리케 백작도 모르는 비밀통로와 비밀공간이 있었다. 그것은 처음 저택을 설계한 사람만 알고 있는 장소였다.
 브리케 백작가가 이 저택을 구입한 것은 저택이 지어진 지 100년이 넘은 뒤였으니 그 공간의 존재를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카이엔은 그림자 마족인 딜룬의 능력을 이용해 아주 간단히 비밀통로와 비밀공간을 발견했다.
 어둠은 마족에게 최고의 환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계에서 오랫동안 생활하고 힘을 쌓아온 카이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의 비밀방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만든 방과 통로였기에, 비상식량과 약간의 귀중품이 있었는데, 몇 가지를 빼고는 쓸모없었다.
 카이엔이 그 방에서 딜룬의 몸을 만들었다. 그리고 딜룬은 평소와 달리 그림자에서 나와 카이엔을 돕고 있었다.
 -저······ 그런데 정말로 이 몸을 씁니까?
 딜룬은 절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그는 간절한 눈으로 카이엔을 바라봤다. 물론 카이엔의 반응은 그가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어딜 노려봐?”
 -노려보는 게 아니라 원래 눈이 이렇게 생긴 건데요?
 딜룬은 억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화제를 원래대로 돌렸다.
 -정말 이 몸을 씁니까? 예? 정말로요?
 “왜? 싫어? 그냥 평생 그림자 속에서 썩을래?”
 -아니, 그건 아닌데······ 아무래도 이건 좀······.
 카이엔이 만드는 몸에는 아주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다. 뚱뚱했다.
 “왜? 이게 어때서? 주어진 시간으로는 이게 최선이야. 이래 봬도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몸이라니까?”
 딜룬이 울상을 지었다.
 -이런 몸으로는 제 매력을 전혀 어필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정보를 얻으려고 돌아다니다 보면 여자도 꼬시고 그래야 하는데······.
 거기까지 말한 딜룬이 눈을 반짝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러면 어떻습니까? 차라리 몸을 새로 만들지 말고 마법을 이용해 모습을 바꾸죠? 주인님과 제가 같이 힘을 쓰면 웬만한 모습은 다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카이엔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불안해서 안 돼.”
 -예? 뭐가 불안합니까? 어차피 인간 중에서 제 마법을 간파할 수 있을 놈이 있을 것 같습니까?
 “응. 신전 놈들 때문에 안 돼.”
 신전이라는 말에 딜룬이 처량한 표정으로 카이엔을 바라봤다. 어찌나 애처로운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저 흉측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즉시 고개를 끄덕여 뭐든 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엔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몸을 만들어 들어가는 게 확실해. 그래야 뒤탈도 없고, 시간제한도 없거든.”
 -그야 그렇지만······.
 딜룬의 표정이 더욱 애처로워졌다. 그러자 카이엔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임시 몸이니까 조금만 버텨. 설마 내가 계속 이런 어설픈 몸을 쓰게 할 것 같아?”
 그 말에 딜룬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정말입니까? 정말이죠? 맹세하십니까? 영혼에 걸고 맹세를 해주십시오!
 카이엔이 자신의 그림자를 꾹 밟았다.
 -끄어억! 뭐, 뭐야! 난 그림자 밖에 있는데! 으어어억! 살려주세요!
 “설마 몸을 얻어서 휙 도망가면 끝난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딜룬은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만 방심해도 저절로 튀어나오는 말을 막는 건 정말로 힘들고 어려웠다.
 “네가 내 그림자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뭘 했을까?”
 딜룬의 얼굴에 불길함이 떠올랐다.
 -서, 설마······ 포박의 고리를 그림자에 쓰신 건 아니죠? 아닐 거야. 마족을 그림자에 묶어 버리는 그런 잔악무도한 짓을 하셨을 리가 없지. 암, 인간이라면 절대 그럴 수 없지. 제발 아니라고 말 좀 해주세요!
 카이엔은 대답 대신 그저 씨익 웃어주기만 했다. 딜룬은 절망에 찬 눈으로 털썩 무너졌다.
 -어흐흑. 대체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기에 이런 꼴을······ 어흐흐흑.
 “죄야 많이 지었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새 몸에 들어가 봐라. 오늘 파티에 함께 가야 앞으로 내 호위 역할을 하기 편할 테니까.”
 카이엔은 그렇게 말하며 그가 직접 만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실 형체만 갖춰졌지 인간의 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대충 나무를 깎아 만든 듯한 모습이었는데, 재질은 결코 나무가 아니었다.
 -어흐흐흑.
 딜룬은 억울하다는 듯 우는 척을 하며 앞으로 커다란 덩치를 가진 몸 앞에 섰다.
 -저 배 봐. 아마 출렁거릴 거야. 볼은 또 어떻고. 살이 축 늘어지겠지. 아아. 아름다운 레이디들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구나······.
 딜룬은 투덜거리면서 뚱뚱한 몸의 이마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 순간 딜룬의 몸이 순식간에 압축되었다. 이내 작은 콩알만 한 점으로 변한 딜룬의 몸이 새로운 몸의 이마로 쏙 들어갔다.
 콰득! 콰득! 콰드드득!
 콩알만 하게 변한 딜룬이 머릿속으로 들어가자, 몸이 뒤틀리며 변형을 시작했다.
 나무껍질 같던 피부가 인간의 것으로 변했고, 투박했던 몸의 라인이 매끄럽게 변했다. 나무칼로 아무렇게나 조각한 것 같았던 모습이 제법 사람처럼 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라기에는 뭔가가 조금 부족했다. 원인은 생기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기가 전혀 없었다.
 “자, 그럼 마무리를 해볼까?”
 카이엔은 바닥에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를 꾹 밟았다.
 “끄아악!”
 놀랍게도 인간이 된 인형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온몸에 생기가 넘쳐 흘렀다.
 “너무하십니다!”
 “그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딜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카이엔의 말이 옳으니 대꾸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억울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고통이 육체에 영혼을 안착시키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긴 하죠. 네. 젠장.”
 “툴툴거릴 틈 없다. 슬슬 파티가 시작될 시간이 됐어.”
 “파티?”
 딜룬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파티에 함께 가자고 말했었다.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몸을 만들었고 말이다.
 “우헤헤헤. 자자, 뭘 망설이십니까. 어서 가시죠.”
 딜룬은 카이엔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비밀방에서 나가 버렸다. 카이엔은 그런 딜룬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족이라서 그런가? 옷을 안 입었는데도 허전하지 않은 모양이네.”
 잠시 후, 저택 안이 발칵 뒤집혔다. 나체로 활보하는 변태 뚱땡이 때문에 말이다.
 
 “너무하십니다. 옷도 미리 준비 안 하시다니.”
 “그럴 틈이나 줬어? 그냥 튀어 나간 게 누군데.”
 딜룬은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휙 돌렸다. 물론 그러든 말든 카이엔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복도를 걷다가 만나는 시녀들은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흠칫 놀라고, 그다음에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딜룬을 힐끗거리며 후다닥 지나갔다.
 “저 여자 눈 보셨습니까?”
 카이엔이 대답하지 않자, 딜룬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탁 때리며 항변했다.
 “웃고 있었습니다! 절 보면서 웃고 있었다고요! 대체 이걸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유명해지고 좋지 뭐.”
 “이익!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조용해라. 다들 듣겠다. 그건 그렇고 몸은 좀 어때? 쓸만해?”
 몸 얘기가 나오자 딜룬의 표정에는 감탄이 떠올랐다.
 “끝내줍니다. 뚱뚱한 거 빼면 나무랄 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진짜 제 몸 같습니다. 그리고 왠지 몸에 힘이 넘칩니다. 뚱뚱해서 그런가?”
 “마계 공작쯤 되면 마력의 양이 장난 아니잖아.”
 딜룬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래서 뚱뚱하게 만든 겁니까?”
 “아니면 네 마력을 몸이 견뎌내겠어?”
 “그, 그럼 다른 몸은······ 날씬한 다른 몸은 아, 안 되는 겁니까?”
 “마력 친화적인 소재를 찾아서 더욱 세심한 작업을 거치면 가능해지겠지.”
 딜룬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카이엔의 입만 바라봤다. 그 입에서 제발 자신이 원하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도했다.
 “그러니까 잘해.”
 대번에 말뜻을 알아들은 딜룬이 차려자세로 크게 대답했다.
 “잘하겠습니다!”
 카이엔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이제부터 넌 내 충실한 호위기사다.”
 “그러겠습니다. 뭐, 지킬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곧장 파티장으로 향했다. 딜룬의 옷을 구해 입히느라 제법 지체했기에 제시간에 파티장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만 했다.
 물론 카이엔은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 * *
 
 파티가 시작되었다. 사실 이번 파티의 주인공은 카이엔이었다. 실제로 이곳에 온 손님 대부분이 카이엔을 보기 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헬게이트 원정의 성공을 축하하며 원정에 성공하고 장렬하게 산화한 원정군의 명복을 비는 파티라고 알렸다.
 당연히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은 누구도 파티의 제목이나 의의에 대해서는 요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카이엔이었다.
 그래서 브리케 백작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놈은 아직인가?”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곧? 곧이 언젠데?”
 “그러니까 이제 곧······.”
 시종이 당황해서 뭐라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그때 파티장 문이 활짝 열리며 카이엔이 들어섰다. 뒤에 뚱뚱한 호위기사를 대동하고서.
 브리케 백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뚱땡이는 뭐야?”
 순간 뚱땡이, 딜룬이 고개를 돌려 브리케 백작을 노려봤다. 브리케 백작은 깜짝 놀랐다. 소름 한 줄기가 등을 타고 내달려 뒤통수를 때렸다.
 ‘뭐, 뭐지? 설마 지금 내가 한 말을 들은 건가?’
 우연이 분명하다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섬뜩했다.
 “둘째 공자님의 호위기사입니다.”
 “기사라고? 저 몸으로?”
 기사는 보통 몸을 극도로 단련하기 때문에 뚱뚱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어쨌든 카이엔이 나타났다. 브리케 백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도와 불안감이 적절히 뒤섞인 복잡한 한숨이었다.
 그리고 카이엔의 등장과 함께 파티장의 분위기도 후끈 달아올랐다.
 호기심 어린 눈빛과 조롱 어린 눈빛, 그리고 적의 어린 눈빛이 카이엔에게 집중되었다.
 카이엔은 그 모든 시선을 받으며 씨익 웃었다. 즐거웠다. 이런 건 마계에서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으니까.
 “딜룬. 기대해도 좋아. 오늘 파티는 아주 즐거울 거야.”
 “안 그래도 기대 중입니다. 주인님. 우헤헤헷.”
 딜룬의 경박한 웃음에 카이엔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못 말리는 마족이었다.
 
 카이엔은 파티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어찌나 당당한지 다들 길을 비켜주었다. 카이엔이 향하는 방향에는 브리케 백작이 있었다. 그래서 다들 카이엔이 브리케 백작에게 간다고 생각했다.
 “오, 이거 맛있겠는데?”
 카이엔은 중간에 방향을 휙 바꿔 음식을 늘어놓은 테이블로 갔다. 그리고 먹음직스런 요리 몇 가지를 접시에 수북이 담았다.
 뒤따라가던 딜룬은 카이엔보다 더 먼저 테이블에 달려들어 음식을 휩쓸다시피 했다.
 파티장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특히 카이엔이 자신에게 올 거로 생각한 브리케 백작의 표정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천박하군.”
 “저 돼지는 뭐지? 시종이라면 저런 행동을 못할 테고······ 설마 호위기사인가? 쯧쯧, 저러니 살이 뒤룩뒤룩 찌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지만 카이엔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한데 딜룬은 그러지 못했다.
 딜룬은 슬그머니 접시에 담긴 음식을 다시 되돌렸다. 그리고 빈손으로 카이엔 뒤에 섰다. 음식을 바라보는 딜룬의 눈빛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인간계의 음식인데······. 이제야 맛볼 수 있게 되었는데······ 어흑.”
 “그럼 먹으면 되잖아.”
 “제가 주인님처럼 품위 없는 마족인 줄 아십니까?”
 “아예 마족이라고 종이에 써서 붙이지그래?”
 딜룬은 아차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솔직히 인간을 신경 쓰면서 눈치를 본 적이 한 번도 없기에 이런 일은 정말로 익숙하지 않았다.
 “앞으로 내게 말할 때는 좀 조심해.”
 -알겠습니다.
 딜룬은 진작 이럴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요리에 돌렸다. 입에 침이 고였다. 그대로 조금만 더 지나면 아마 주르륵 흐를 것이 분명했다.
 “돼지 같은 것들. 예의도 모르는군.”
 카이엔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지만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솔직히 이 파티장 안에서 카이엔의 호기심을 자극한 사람은 고작 3명에 불과했다.
 카이엔은 무시했지만 딜룬은 아니었다.
 “돼지?”
 딜룬이 고개를 돌려 사나운 표정으로 다가온 사람을 노려봤다. 하지만 갑자기 입을 열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입안에 고여 있던 침이 그대로 튀었다.
 그 침은 다가온 사내의 얼굴에 철썩 달라붙었다.
 “으아악! 이 더러운 놈! 감히 누구 얼굴에!”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느낌에 팔뚝으로 마구 얼굴을 닦은 사내가 이내 딜룬을 노려봤다.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라. 내 씻고 돌아와서 반드시 응징할 테니까.”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 어딘가로 후다닥 달려갔다. 정말로 견디기 힘든지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지? 고작 침 좀 묻었다고 저러다니. 그럼 똥에 맞으면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딜룬이 어이없는 눈으로 멀어져가는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먹을 거 앞에 두고 똥 얘기하지 마라.”
 카이엔이 그림자를 아주 살짝 밟았다.
 “꾸억! 이건 제 잘못이 아닌데!”
 “닥쳐.”
 딜룬이 억울한 표정으로 카이엔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시선을 피한 곳에는 먹음직스런 요리가 잔뜩 있었다. 딜룬의 입에 침이 자르르 고였다.
 아마 누군가 또 다가와 시비를 걸면 침으로 목욕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카이엔이 음식을 산처럼 쌓은 접시를 들고 적당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보통 이런 파티에는 식사가 준비되긴 하지만 이렇게 먹는 데 집중하거나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친분을 다지는 데 훨씬 큰 비중을 두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카이엔의 모습은 오히려 더 시선을 집중했다.
 하지만 섣불리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다. 카이엔이 워낙 열심히 먹는 것도 이유였지만, 침을 흘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딜룬 때문에 가까이 갈 엄두를 못 냈다.
 왠지 다가가면 아까 그 사내처럼 침 세례를 맞을 것 같았다. 벌써 딜룬의 침이 입가를 타고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실로 이런 귀족가의 파티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심지어 브리케 백작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솔직히 카이엔을 데리고 다니면서 인사를 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백작 옆에는 큰아들인 플리게가 느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이엔이 하는 행동을 보니 더 다가가기 싫었다. 창피했다.
 카이엔이 접시의 음식을 거의 비웠을 때, 침으로 세수를 하고 물러났던 사내가 돌아왔다.
 “아직 도망가지 않고 있었다니 용기가 가상하군. 좋아. 그 용기를 봐서 팔 하나로 용서해주겠다.”
 딜룬이 어이없는 눈으로 그 사내를 바라봤다.
 “주인님. 저 미친놈이 설마 제 팔 하나를 자르겠다는 겁니까?”
 “그런 모양인데?”
 카이엔은 대충 대답한 다음 고개를 돌려 다가온 사내를 쳐다봤다. 왠지 낯이 익었다. 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더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카이엔의 모습에 다가온 사내, 리스틱이 발끈했다.
 “감히 날 무시하는 것이냐!”
 하지만 리스틱은 이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3년 전만 해도 내 앞에서 허리도 못 펴던 놈이 정말 많이 컸구나. 원정군에서도 도망쳐 왔다지? 하긴, 너처럼 덜떨어진 놈이 헬게이트 원정군에 참여한다는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
 그 말에 카이엔이 고개를 슥 돌려 리스틱을 쳐다봤다. 카이엔의 서늘한 눈빛에 리스틱이 흠칫 놀랐다. 순간적으로 너무 무서워서 하마터면 도망칠 뻔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자는 카이엔이었다. 자신이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리스틱은 기억을 토대로 용기를 냈다.
 “그렇게······.”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거냐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공교롭게도 카이엔이 손에 든 포크가 보였다. 그리고 왠지 포크의 날카로운 끝이 자신의 목을 꿰뚫으면 정말로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니 오한이 들어 몸이 절로 떨렸다.
 리스틱은 결국 한발 물러났다. 왠지 지금 카이엔을 건드리기가 싫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딜룬이었다.
 “너······.”
 리스틱이 채 뭐라 말하기도 전에 딜룬이 리스틱의 배에 주먹을 한 방 먹였다.
 뻐억!
 리스틱의 눈이 커다래졌다. 너무 고통스러워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워낙 가까이서 끊어쳤기에 딜룬의 행동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 그놈 조잘조잘 더럽게 시끄럽네.”
 딜룬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교묘하게 가리며 리스틱의 목을 슬며시 쥐었다가 놓았다. 리스틱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어이쿠. 이거 술을 많이 드신 모양인데? 몸을 못 가누시네.”
 딜룬이 리스틱의 몸을 부축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시종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딜룬은 리스틱을 시종들에게 넘기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런데 주인님. 저놈 누굽니까? 보아하니 서로 잘 아는 눈치던데.”
 카이엔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식사에 집중했다. 접시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 좀 살 것 같군.”
 카이엔은 그제야 파티장을 둘러봤다. 여전히 시선을 모으고 있었지만 자신이 관심을 둔 사람 외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드디어 식사가 끝난 건가요?”
 카이엔에게 두 번째로 다가온 사람은 여자였다. 그것도 상당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다만 입고 있는 옷이 문제였다. 그것은 일반적인 예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전의 사람들이나 입는 사제복이었다.
 가슴에 황금빛 태양 문양을 달고 있는 새하얀 가운이었는데, 여인의 아름다운 외모와 어우러져 마치 빛 속에 있는 것 같아 성스럽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보기 좋았다.
 물론 그건 보통 사람이 보는 관점이었고, 카이엔이나 딜룬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일리오스 교단인가?”
 “그렇습니다. 태양의 주인이신 일리오스를 모시는 에르미스라 합니다.”
 “무슨 일이지?”
 에르미스는 카이엔과 딜룬의 태도와 표정을 보고 왠지 교단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심각해졌다.
 “카이엔님께서는 헬게이트 원정에 참여하셨죠?”
 “그래서? 그게 일리오스 교단과 무슨 상관이지?”
 에르미스가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습니다. 카이엔님께는.”
 그렇게 말한 에르미스가 딜룬을 바라봤다.
 “문제는 저분께 있습니다.”
 카이엔이 눈을 빛내며 몸을 돌렸다.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에르미스를 올려보며 물었다.
 “호오. 이거 점점 재미있어지는군. 그래, 우리 호위기사이신 딜룬 경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거지?”
 “딜룬 경이시군요. 우리 일리오스 교단은 딜룬 경이 혹시 마족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놀랄 만한 말이었지만 딜룬은 사기 마족답게 표정은 물론이고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호흡도 멀쩡했다.
 “푸핫! 이거 정말로 재미있군요. 주인님. 그렇지 않습니까?”
 딜룬의 말에 에르미스의 눈이 반짝였다.
 “주인님이라고요? 그럼 만일 딜룬 경이 진짜 마족이라면 카이엔 경은 마족을 소환하신 셈이 되는군요.”
 카이엔이 싱긋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를 지그시 밟았다.
 딜룬은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퉁퉁한 볼살이 살짝 떨렸다.
 -물귀신처럼 날 끌어들여?
 -끄으윽! 그럼 설마 절 버리시려고 하셨습니까? 어흑. 마족보다 더 하시군요. 어찌 우리 인연과 계약을 손바닥 뒤집듯 하실 수 있습니까.
 카이엔이 못 말리겠다는 듯 그림자에서 발을 뗐다.
 에르미스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서서 카이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혹을 해소하지 못하면 결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기세였다.
 “근거는?”
 “우리 일리오스 교단의 정보력은 대륙 최고라 자부합니다. 우리는 헬게이트가 닫히기 직전 고위마족 하나가 게이트에서 탈출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고 원정군 중 한 명이 헬게이트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건 좀 재미있군.”
 카이엔은 하마터면 사납게 웃을 뻔했다. 진득한 살기로 뒤범벅되어 섬뜩한 미소를 본다면 아마 에르미스의 의심은 더욱 깊어지리라.
 “그래서 내가 그 생존자다?”
 에르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마족과 함께 있을 거라고는 저도 예상치 못했습니다만.”
 카이엔은 턱을 쓰다듬었다. 에르미스는 단순히 헬게이트 내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왔을 확률이 높았다. 딜룬을 언급한 것은 순간적인 판단이었으리라.
 “근거가 너무 희박해서 애처롭지만 뭐, 일단 그렇다고 치지. 한데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거지? 내가 헬게이트의 생존자라는 건 둘째 치고, 함부로 멀쩡한 사람을 마족으로 모는 것이 일리오스 교단의 방식은 아닐 텐데?”
 “물론입니다. 제가 그 부분을 시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카이엔이 차갑게 웃었다.
 “불구덩이에 넣고 살아 돌아오면 마족이 아니라느니 하는 허황한 얘기를 하려면 그냥 꺼지고.”
 에르미스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우리 일리오스 교단은 그리 무도한 곳이 아닙니다. 정당한 테스트를 할 겁니다. 이걸로요.”
 에르미스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어른거렸다. 그것이 바로 일리오스 교단 특유의 백색성광이었다.
 “흐음. 고위사제였나?”
 “그렇습니다. 이제 허락하시겠습니까?”
 카이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딜룬을 쳐다봤다. 딜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속으로 들려오는 카이엔의 목소리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걱정할 거 없다. 조금 아프긴 하겠지만. 비명은 무조건 참아.
 딜룬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에르미스의 손에서 터져 나온 새하얀 빛이 딜룬의 몸을 휘감았다.
 어마어마한 성력의 파동이 파티장을 가득 메웠다.
 사람들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광경에 다들 입을 헤 벌리고 구경했다. 그리고 온몸에 차오르는 활력과 기분 좋은 고양감을 느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일리오스 교단의 백색성광다웠다.
 딜룬은 새하얀 빛으로 온몸을 휘감은 채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엔은 딜룬이 고통을 참느라 애쓰는 줄 알았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우힛, 우힛, 우히히힛! 으헤헤헤헤헷! 으아악! 가려워! 주인님! 살려주세요!
 고통이 아니라 간지럼이라니. 카이엔의 표정도 묘해졌다. 딜룬의 몸에 문제가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문제가 뭔지는 몰라도 지금 이 상태라면 그리 나쁠 것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카이엔의 마음이 편해졌다.
 -잘 참아봐.
 -너무해요!
 딜룬의 절규를 무시한 카이엔은 머릿속을 울리는 딜룬의 웃음소리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고로 남이 웃으면 같이 웃음이 나오는 법 아닌가.
 -우헤헤헤헤헷! 우헤헤헤헤헤헷!
 웃음을 억지로 참아내는 딜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 일그러졌다기보다는 미소를 참을 수 없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걸 보는 에르미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럴 리가 없어! 내가 분명히 느꼈다고! 저자의 몸에서 풍기는 어둠과 사악함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는데!’
 믿을 수 없지만 성력의 폭풍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기분 좋아 웃고 있었다. 마족이 저 상황에 처했다면 억지로 웃는 것도 불가능했으리라.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에르미스는 더욱 힘을 내서 성력을 쏟아 부었다. 몸에 남은 마지막 한 톨의 신성력까지 박박 긁어서 딜룬에게 퍼부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악! 하악!”
 결국 백색성광의 폭풍은 끝났다. 에르미스의 신성력이 바닥 난 것이다.
 ‘너무 지나쳤어.’
 그녀의 얼굴은 지쳐 있었다. 아마 최소한 이틀 이상은 신성력을 쓸 수 없으리라.
 “어때? 확인은 됐나?”
 카이엔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에르미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성력이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딜룬에게서 느껴지는 어둠과 사악함은 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에르미스가 입을 다문 채 말을 하지 않자, 카이엔은 느긋하게 앉아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물론 머릿속에 울리는 딜룬의 외침은 훌륭한 반주가 되었다.
 -복수할 거야! 감히 내게 신성력을 퍼붓다니! 아으으! 아직도 가려워 미칠 것 같아!
 -복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고 치면 알지?
 카이엔의 말에 딜룬이 고개를 모로 꼬며 흥흥거렸다.
 -흥! 흥! 종을 가려움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매정한 주인의 말은 안 듣습니다. 흥! 흥!
 카이엔의 발이 슬그머니 그림자로 이동하자 딜룬이 다급히 말을 바꿨다.
 -존경하는 주인님! 제 계획을 들어주십시오!
 카이엔이 딜룬을 힐끗 쳐다보자, 딜룬이 말을 이었다.
 -일단 발 좀······ 헤헤헤헤.
 카이엔이 피식 웃으며 발을 치우자 딜룬이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일단 이 몸의 매력을 이용해서 저 여자를 꼬시겠습니다. 제가 달콤한 말 몇 마디만 하면 아마 넘어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카이엔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저 과도한 자신감은 뭐란 말인가.
 -사랑이 깊어지면 제게 무엇이든 갖다 바칠 겁니다. 원래 사람은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저 여자를 이용해서 일리오스 교단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겁니다.
 딜룬이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카이엔을 바라봤다.
 -어떻습니까? 제 계획이. 당장이라도 일리오스 교단을 손에 넣은 것 같지 않습니까?
 -······ 맘대로 해라.
 카이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실패할 계획, 안전장치만 마련하면 시도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마족의 유혹 같은 거 쓰면 뒤진다. 상대가 고위사제라는 사실을 절대 망각하지 말도록.
 -절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저 수준 있는 마족입니다. 순수한 매력으로 충분합니다.
 딜룬은 자기만 믿어 보라는 듯 당당하게 에르미스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더구나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께서 손수 힘을 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우헤헤헷.”
 마지막 웃음만 아니면 그럴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딜룬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본래 매력이 넘치는 마족은 사소한 말투나 웃음에 신경 쓰지 않는 법. 딜룬은 당당했다.
 “예?”
 에르미스는 당황했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지금 마족이 자신을 유혹하려는 건가?
 ‘설마 날 타락시키려고? 그건 절대 안 되지!’
 그렇게 결심하고 얼굴을 굳히려는 순간, 에르미스의 뇌리 한구석에 뭔가가 번득 스쳐 지나갔다.
 ‘아니지. 이건 저 마족과 가까워질 기회야. 성력을 어떻게 피해 갔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뭔가 약점이 있을 거야. 내가 그걸 밝혀내서 저 가증스러운······ 가면을 벗겨 내고 말겠어!’
 솔직히 가증스럽다기보다는 미련해 보였지만 에르미스는 억지로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어떻습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저랑 저쪽에 가서 우리의 장밋빛 미래에 대해 대화나 나눠 보는 게 어떻습니까?”
 딜룬이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저 딜룬, 그렇게 나쁜 놈 아닙니다. 이래봬도 믿음직스러운 기사거든요. 작위는 안 받았지만.”
 마지막에 작위를 안 받았다는 말은 모깃소리만 하게 해서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딜룬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에르미스를 바라봤다.
 에르미스는 마음을 다잡았지만 바짝 다가오는 딜룬의 얼굴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가씨.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리셨습니까? 진실한 제 눈을 똑바로 보시면 아마 결정에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딜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 에르미스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좋아요. 차 한 잔 함께 하는 정도라면요.”
 에르미스의 대답에 딜룬의 입이 쫙 찢어졌다.
 “우헤헤헤헤헷! 역시 미모에 걸맞게 안목도 탁월하시군요. 이 딜룬을 선택하시다니. 우헤헤헤헷!”
 딜룬은 에르미스에게 팔을 슬쩍 내밀었다.
 “자, 가실까요, 레이디?”
 에르미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딜룬의 팔뚝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었다. 딜룬은 세상을 다 얻은 표정으로 당당하게 에르미스를 에스코트해 파티장에서 가장 외지고 음침한 곳으로 향했다.
 카이엔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설마 성공할 줄이야.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뭐, 취향은 다양하니까.”
 결코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는지라 에르미스도 똑똑히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턱 끝을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일리오스께서 날 시험하기 위해 내리신 시련이야. 반드시 이겨내겠어!’
 당당한 두 사람은 참으로 묘하게 어울렸다. 에르미스가 그 말을 들으면 더욱 깊은 절망감에 빠지겠지만 말이다.
 워낙 폭풍 같은 사건이 후다닥 지나갔는지라 다들 넋 나간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모든 상황이 착착 정리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아아아! 이건 말도 안 돼!”
 “악몽이야!”
 “여신 에르미스님께서 저 추악한 돼지를 따라가시다니!”
 다들 패닉에 빠졌다. 에르미스의 아름다운 미모는 귀족 사이에서 상당히 유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리오스 교단의 고위 사제였기에 함부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한데 출신도 불분명한 뚱땡이 기사가 그녀를 채 가다니. 물론 고작 차 한 잔 마시겠다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그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파티장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해가자, 카이엔이 씨익 웃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딜룬. 잘 해봐라.
 -우헤헤헷! 걱정마십시오. 분위기와 눈빛을 보니 벌써 절반 이상 넘어왔습니다. 제가 어깨만 툭 건드려도 폭 안겨올 것 같은데요? 우헤헤헷!
 에르미스가 들었다면 경기를 일으킬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딜룬의 말에 카이엔은 결국 소리죽여 웃었다.
 그렇게 웃고 있는 카이엔 곁으로 두 사람이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카이엔이 파티장에 들어선 순간 관심을 둔 세 사람 중 나머지 둘이었다. 당연히 다른 하나는 에르미스였다.
 “참으로 재미난 기사를 두었군.”
 카이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가온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잔주름이 진 눈매에 인자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머금은 노인이 서 있었다. 그가 바로 겔트 왕국의 총리대신인 바스하이트 후작이었다.
 그리고 바스하이트 후작을 보호하기 위해 따라온 왕궁 근위기사단장 슈베르트 백작이었다.
 카이엔은 두 사람을 보며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세운 계획의 첫 번째 단추가 지금 막 채워졌다.
 
 
 # chap 4. 총리대신과 기사단장
 
 왕국의 총리대신인 바스하이트 후작은 묘한 눈으로 카이엔을 살폈다. 아무리 간담이 크고 당당한 사람이라도 자신 앞에서는 움츠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도 그런 광경만 봤기에 너무나 여유로운 카이엔의 모습은 신선하고 좋았다. 그 여유가 바스하이트 후작으로부터 호감을 끌어낸 것이다.
 “원정군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들었네. 사실인가?”
 “원정군에 참여하긴 했습니다.”
 카이엔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수 있었다. 바스하이트 후작의 표정이 조금 더 묘해졌다.
 “헬게이트에 들어갔다는 뜻인가?”
 “글쎄요. 그 부분에 꼭 대답해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바스하이트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답이었다. 상당히 민감한 주제였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만일 헬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면 비겁한 도망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정치적으로 보면, 카이엔은 사실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거라고 예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왜냐하면, 다들 카이엔이 헬게이트에 들어갔다가 나왔을 리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더 파고들려면 파고들 수도 있었지만 바스하이트 후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충분히 여러 상황을 짚고 파악하면서 천천히 나아가는 편이 나았다.
 “의무는 없지만 의미는 있지 않겠나?”
 “어차피 헬게이트는 닫히지 않았습니까? 한데 다른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바스하이트 후작은 카이엔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헬게이트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사람이 하나 있다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나?”
 “대충 지나가는 말로 듣긴 했습니다.”
 “혹시 그게 누군지 알겠나?”
 카이엔이 빙긋 웃었다. 하지만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게 자신이라고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헬게이트는 대륙 전체의 문제였네. 당연히 원정에 성공했으니 포상금이 있지 않겠나? 그 포상금을 전해주고 싶어서 그러네. 대륙 전역에서 모인 돈이라 액수가 상당하다네.”
 바스하이트 후작은 카이엔의 탐욕을 자극해봤다. 그가 원한 반응이 왔다.
 “오! 대단하군요. 한데 상당한 액수라면 얼마나 됩니까?”
 듣기에 따라서는 천박한 질문이 될 수도 있었지만 바스하이트 후작은 오히려 빙긋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웬만한 영지 서너 개는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네. 솔직히 나조차 욕심이 날 정도라네.”
 “누군지 좋겠군요. 그 정도 돈이면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텐데.”
 “그게 자네가 될 수도 있지.”
 그 말에 카이엔이 자세를 바로 하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호오. 돈을 빼낼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
 카이엔의 반응에 바스하이트 후작은 어이가 없었다. 돈을 빼내다니. 그럼 비리라도 저지르겠단 말인가?
 ‘이건 뭐지? 아무래도 전하의 감이 이번에는 틀린 것 같은데······.’
 너무 전형적인 귀족가의 애송이였다. 게다가 욕심도 많았다. 바스하이트 후작의 저울이 슬슬 한쪽으로 기울었다. 카이엔이 원정군에서 도망친 쪽으로 말이다.
 조금 더 파악해보려고 대화를 시도하려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카이엔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데 뒤에 계시는 분이 혹시 우리 왕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슈베르트 백작님이십니까?”
 “맞네.”
 카이엔은 슈베르트 백작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를 보고 있으니 헬게이트에 들어간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거기서 함께 하던 동료 몇 명이 함께 떠올랐다.
 “왜 그러나?”
 카이엔의 표정이 달라졌음을 느낀 슈베르트 백작이 물었다. 사실 슈베르트 백작은 이곳에 올 때부터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저 사람이 함께 있었다면 많이 달라졌을까?’
 헬게이트 원정군에도 강한 사람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슈베르트 백작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많은 동료가 슈베르트 백작에 관해 얘기했다. 물론 그것 하나만으로 슈베르트 백작을 보고 헬게이트를 떠올린 건 아니었다.
 “혹시 헬게이트 원정에 참여하실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바스하이트 후작이 나서서 카이엔의 말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눈에서 불똥을 튀기며 슈베르트 백작이 나선 것이다.
 “죄송합니다. 후작님. 잠시 저자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바스하이트 후작이 한숨을 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일단 슈베르트 백작이 이렇게 나온 이상, 절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슈베르트 백작은 아무리 총리대신이라도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바스하이트 후작이 인상을 쓰며 카이엔을 노려봤다. 대체 어쩌자고 슈베르트 백작의 역린을 건드려 일을 크게 만든단 말인가.
 사과해도 소용없겠지만 지금이라도 사과를 해서 사태를 좀 진정시키자고 카이엔에게 말하려는 순간, 카이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아무도 찾지 않는 좋은 장소가 있으니 그리로 갈까요?”
 바스하이트 후작이 입을 쩍 벌렸다. 이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단둘이 있으면 슈베르트 백작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누가 뭘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카이엔이 먼저 파티장에서 나가 버렸다. 그리고 슈베르트 백작이 그 뒤를 따랐다. 허리춤에 매단 검 손잡이를 꽉 쥐고서.
 두 사람이 나가는 광경을 파티장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지켜봤다.
 카이엔은 원정군에서 살아 돌아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물론 헬게이트에 들어갔다 나온 게 아니라 중간에 도망쳤다고 인식했지만 어쨌든 이 파티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또한 카이엔과 함께 있던 인물들 역시 엄청났다. 가장 처음 시비조로 접근한 리스틱은 빼고 말이다.
 그러니 시선이 모이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시선 속에서 카이엔과 슈베르트 백작이 파티장을 나섰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감히 슈베르트 백작의 심기를 거스를 간 큰 인물이 적어도 이 중에는 없었다.
 
 * * *
 
 카이엔이 슈베르트 백작을 데려간 곳은 빽빽하게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였다. 저택 근처에 있는 숲 속에 있는 장소였는데,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뭔가 일을 벌이기엔 상당히 좋은 장소였다. 또한 수련하기에도 썩 괜찮은 곳이었다.
 내심 마음에 드는 장소였지만 슈베르트 백작은 그런 것을 표현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직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날 도발한 이유가 뭔가?”
 슈베르트 백작은 카이엔이 일부러 일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걸 정확히 짚었다.
 “궁금한 게 있었거든요.”
 “그게 자네 목숨보다 중요한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카이엔의 말에 슈베르트 백작은 흥분을 잠시 가라앉혔다. 목숨보다 중요한 궁금증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뭔지 궁금했다.
 “뭔가? 얘기나 들어보지. 그게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슈베르트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무조건 검을 뽑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왜 원정에 참여하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알 바 아니다.”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들보다 중요했습니까?”
 슈베르트 백작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방금 카이엔은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렸다.
 “검을 뽑아라.”
 카이엔은 검을 뽑지 않았다. 하지만 슈베르트 백작은 더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가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엄청난 속도였다. 돌진과 동시에 검을 뽑아 휘둘렀다.
 촤아악!
 무시무시한 속도로 짓쳐들어오는 검을 카이엔은 무심하게 쳐다봤다.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않겠지만, 카이엔에게는 검끝이 살짝 흔들리는 것까지 보였다.
 차앙!
 슈베르트 백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카이엔은 검을 뽑지도 않고 손바닥으로 검을 빗겨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크으윽!”
 슈베르트 백작은 검을 쳐내는 힘 때문에 균형을 살짝 잃었지만 그걸 이용해 몸을 회전시키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쉬아악!
 분명히 카이엔이 있는 곳을 베었는데, 검에 걸리는 느낌이 하나도 없었다. 카이엔은 어느새 슈베르트 백작의 뒤에 서 있었다.
 턱!
 카이엔의 손이 슈베르트 백작의 어깨를 쥐었다. 지극히 단순한 그 한 번의 손놀림에 슈베르트 백작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 이럴 수가······.”
 혼란과 경악이 뒤섞인 눈으로 카이엔에게서 멀어진 슈베르트 백작은 검을 늘어뜨린 채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 카이엔은 자신을 그냥 놔줬다. 만일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어깨를 탈골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모든 걸 끌어내야겠군.”
 슈베르트 백작의 검에 푸른빛이 어렸다. 그것은 검의 길 끝에 가질 수 있다는 빛이었다. 닿는 모든 걸 잘라낼 수 있다는 검의 극의였다.
 “이제부터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슈베르트 백작이 다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푸른빛이 검의 궤적을 따라 길게 그려졌다.
 쉬아악!
 거칠게 바람을 찢으며 날아간 검이 카이엔의 몸통을 잘라갔다.
 턱!
 슈배르트 백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 검을 카이엔이 맨손으로 잡아낸 것이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슈베르트 백작의 검에 어린 푸른빛은 닿는 모든 걸 파괴하고 잘라낸다. 한데 한낱 인간의 손에 잡혀 있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에서 넘실거리는 푸른빛이 카이엔의 손 주위에서 일렁였다. 하지만 강철조차 잘라낸다는 그 날카로운 빛은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카이엔은 검을 잡은 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일이 아들보다 소중했습니까?”
 슈베르트 백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손에 힘이 빠졌다. 이내 검을 놓았다.
 툭.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카이엔도 굳이 검을 쥐고 있을 이유가 없어 손을 놓은 탓이었다.
 “전하를 지키는 일은······ 내 전부였다.”
 “솔직히 궁금했습니다. 굳이 아들을 보내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왜 그러셨습니까?”
 슈베르트 백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사람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혼자만 빠질 수는 없었다.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모른다.
 그때 아들이 나섰다.
 “후회한다. 죽도록 후회해.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때는······ 그때는 그랬다.”
 카이엔은 그 말을 들으며 빙긋 웃었다. 내내 궁금했던 것 하나가 풀렸다. 대체 근위기사단장의 아들이 왜 헬게이트 원정에 참여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왜인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리터가 아버지를 정말 닮았군요.”
 슈베르트 백작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경악한 눈으로 카이엔을 바라봤다.
 “서, 설마······.”
 카이엔이 정중히 기사의 예를 취했다.
 “인사드립니다. 리터의 친구인 카이엔입니다. 리터는 원정군에서 가장 기사다웠으며, 최고로 기사답게 죽었습니다.”
 슈베르트 백작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한동안 숲에 오열하는 소리가 울렸다.
 
 <『헬게이트』 1-2권에 계속>

댓글(4)

아르테미나    
그놈의 한스 한스.....판타지 소설작가님들은 한스 좀 그만쓰심 좋을듯
2018.12.21 16:58
니기리    
못 보것다. 젬 없어서 . .
2018.12.21 21:04
f9***************    
이딴 폐기물 돈 내고 보는 놈들도 있냐?
2019.01.01 20:43
f9***************    
그야말로 김강현 소설들의 온갖 단점과 결점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조트망의 결정체. 김강현 최악의 흑역사.
2019.01.01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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