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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더 캅스[E]

더 캅스 1권(1)

2018.02.26 조회 1,000 추천 8


 #꿈꾸는 소년
 
 
 
 “휴······ 데런 넌 도대체 이런 데가 뭐가 좋다고 매주 오는 거냐?”
 사방이 온통 책으로 가득한 고서점 특유의 쾌쾌한 책 냄새가 코를 마비시킬 정도였다.
 “그러게 짐, 누가 너보고 따라오래? 올 때마다 그런 소리 하는 것도 이제 지겨울 때가 됐잖아?”
 바로 이웃에 살고 있었고 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함께 뛰어 논 불알친구인 짐이 짜증을 부림에도 불구하고 데런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아예 서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책에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한데 그 자세가 책상다리를 하고 허리를 곧게 편 상태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시선은 책에 두며 호흡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것이 마치 정해진 뭔가에 따르는 것 같았다.
 그런 데런의 모습을 본 짐이 조급은 다급한 표정이 되어 말하였다. 이미 10년을 넘게 온갖 짓을 해 온 친구였기에 지금 데런이 취하는 자세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알기도 하였으며 지금 그가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조금은 데런을 자극하는 투로 말하였다.
 “흥! 데런. 넌 뭐가 문제인지 알아?”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심드렁히 말하는 데런의 행동이 짐을 더욱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아무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이긴 하여도 지금처럼 제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면 친구건 뭐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것만큼은 좀처럼 참아 주기 힘들었던 것이다.
 “난 네가 원할 때 늘 네 곁에 있었는데 넌 네가 좋아하는 일에 빠지면 내가 아무리 부탁을 해도 모른 체하는 것이라고. 알겠어?”
 짐의 말처럼 가장 오랜 친구이면서 또한 가장 친한 친구이고, 무엇보다도 짐은 정말로 자신이 그를 필요로 할 때면 그가 무엇을 하고 있든 꼭 달려와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 친구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데 더 이상 모른 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후······ 아까부터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도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은 너라고! 마지막으로 묻겠어. 만약 이번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알지, 너도? 내가 좀 지랄맞은 성격이라서 한 번 안 한다고 하면 안 하는 것 말이야.”
 “헤헤. 잘 알지.”
 겉보기에도 그렇고 평소에 하는 행동을 보아도 데런은 나이에 비해 상당히 진중한 성격이었다. 아마도 한학자이신 할아버지의 엄한 가정교육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성격이었고 그런 성격이 그대로 외형으로도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일리노아.”
 “일리노아? 내가 알고 있는 그 일리노아를 말하는 거야?”
 14살짜리 소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은 막 넘쳐흐르기 시작하는 남성호르몬을 어떻게 하면 발산할 수 있을까가 아닐까? 짐 또한 다르지 않아 그는 친구인 데런과 함께 태권도 도장에 나가는 것과 같은, 잔뜩 땀을 흘리는 스포츠와 여자에게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 일리노아 말이야.”
 “그 아이가 왜?”
 일단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수다쟁이가 되어 끊임없이, 지치지도 않고 사람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수다쟁이가 되었다.
 “네가 볼 때 그 아이 어때? 너무 예쁘지 않아?”
 ‘후······.’
 아무리 호르몬이 지나치게 분비된다고 해도 이건 정말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짐이 말하는 일리노아가 확실히 또래의 다른 여자애들에 비하면 발육 상태가 지나치게 좋아 벌써부터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학교 전체의 남학생들이 그토록 일리노아에게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일리노아는 얼굴 또한 상당한 미인이었으며 그녀의 학업 성적 또한 늘 최상위권 1% 안에 들어갈 정도로 똑똑했다. 거기에 성격마저도 좋아 그녀는 사람을 가려 사귀지 않았으며 늘 약자를 보호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런 일리노아 주변에는 무수한 사내들, 학교의 거의 모든 남학생들이 그녀의 눈길을 받기 위해 그녀 곁을 맴돌았다.
 친구인 짐 또한 그런 일리노아에 푹 빠져 있는 남학생들 중 한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다른 친구들에 비해 유리한 점이 있긴 하였다.
 3개월 전 일리노아의 가족이 짐의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뭐 다시 말하자면 일리노아의 집은 비단 짐의 옆집일 뿐만 아니라 데런의 옆집이기도 한, 그러니까 두 불알친구의 집 사이에 낀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물론 일리노아도 집이 이사를 온 때문에 다른 학교에 다니다가 이들 두 불알친구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고 그녀가 전학 온 첫날부터 학교의 모든 남학생들은 사랑의 열병을, 그리고 여학생들은 한편으로는 그녀를 경계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묘한 이중적인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다.
 어쨌든 일리노아를 향한 열병을 그 누구보다 먼저 앓기 시작한 짐에 대해 데런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일리노아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고 또 모든 이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데 그것이 선천적인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매우 능숙하였지만 정작 그녀가 상당히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 데런의 판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짐! 짐! 기저귀까지 나눠 찼던 나의 오랜 친구인 짐! 너의 가장 친한 친구인 내 말 좀 들어 볼래?”
 상당히 희극적인 어투로 막 수다를 시작할 짐을 가로막았다. 데런이나 짐 모두 엄마가 커리어 우먼이었기 때문에 둘의 아버지들은 육아 부분에 있어서도 상당 부분 아내들을 도와주어야 했는데 간혹 미리 준비해 놓은 기저귀가 떨어질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서 부족한 것을 빌리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두 집안은 이 두 사춘기 소년들뿐만 아니라 부모들, 그리고 조부모들까지도 친한 친구가 되어 버렸다. 아니 형제라고 해도 이들 이웃들처럼 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흠! 흠! 뭔데?”
 “그만둬.”
 앞뒤 말을 모두 잘라 버리고 알맹이만 이야기하는 직접적인 어법은 데런이 자주 사용하는 어법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가 이런 어법을 사용할 때면 그것은 절대불변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 왜 그만둬야 하는데? 너도 알잖아! 일리노아가······.”
 “그래서 그만두라는 거야. 괜히 너만 상처받아.”
 아마도 학교 전체를 열광하게 만드는 일리노아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단 한 명의 남학생을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데런이었다.
 그가 무슨 이유로 학교의 메이퀸인 일리노아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데런만이 유일하게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지금은 자신에게도 그러지 말 것을 강력하게 권하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데런이 이런 식으로 무엇인가를 권하였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최소한 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 또한 짐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친구로만 만나. 그 아일 뭐 어째 보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후······ 데런. 너 그거 알아?”
 “뭘?”
 “네가 그렇게 정색을 하고 말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널 무서워하는지 말이야.”
 “큭! 행여나 그러겠다.”
 “어라? 넌 이 친구의 말을 안 믿는 것이냐?”
 “짐. 내 이런 성격이 너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것 몰라?”
 “그게 왜 내 탓이야?”
 “어려서부터 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녀석이었다는 것 잘 알지?”
 “내가 무슨······.”
 “부정하고 싶다고? 흐흐. 내 앞에서 말이지?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칫!”
 때로는 너무 잘 알고, 너무 많이 안다는 것이 불편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랬다. 다른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님이나 형제들조차도 모르는 것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친한 데런은 모두 알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하는데 그만둬. 그게 너한테 좋을 거야.”
 “음······ 정말 그렇게 아니냐?”
 나이는 14살에 불과하였지만 데런의 판단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비단 판단력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미 모든 고등교육 과정을 끝마치고 대학에 입학할 정도의 학력 수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할아버지 명의로 주식 투자를 하고 있고 그것도 자신들 나이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규모의 거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곁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1년 전. 데런은 대학 진학을 위해 조기월반을 하려 하였는데 그런 데런이 결국 그것을 포기한 이유는 짐이 눈물로써 애원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친구인 데런과 떨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 없던 짐은 갑자기 친구인 데런이 월반을 하고 대학에 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고는 더럭 겁이 났고 울며불며 애원을 하여 친구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이후 짐은 자신 때문에 데런이 스스로의 꿈을 늦출 수밖에 없게 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되었고, 그 뒤부터는 가급적 데런의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네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아이가 문제야.”
 “일리노아가? 걔가 뭐가 문제인데?”
 “차가운 성격이야.”
 “차가워? 일리노아가?”
 전혀 의외의 말에 짐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데런을 바라보았다. 하긴 누구도 차별을 두지 않고 친절하게 대하며, 학생들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왕따 같은 것도 일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에 왕따를 당하던 아이들까지 곁에 둠으로써 그녀 스스로 자신의 자애로움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차가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데런의 말은 아무리 그가 자신의 입장에서는 대단하다 하더라도 영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설명하기 힘들어. 하지만 내 말이 그리 틀리진 않을 거야.”
 뭐 친구인 짐을 무시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설명을 해 봐야 알아듣지 못할 확률이 100%였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설명을 하느라 힘을 빼고 싶지는 않았다.
 “뭐야. 그럼 단지 네 감이 그렇단 말이야?”
 “뭐 그렇다고 해 두지. 그래도 내 말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잖아?”
 “하긴······ 쩝!”
 데런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리노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영 달갑지 않았다. 물론 이어진 데런의 결정적인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짐은 일리노아를 포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잔머리 굴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린다. 그리고 어차피 내 충고를 듣지도 않을 거라면 다음부터는 물어보지 말라고. 알았지?”
 대충 이야기를 끝낸 데런이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주자 뿔이 난 짐이 한마디 했다.
 “냉정한 놈.”
 “넌 지나치게 뜨거워.”
 “노인네!”
 “넌 너무 어리고 말이야.”
 “잘난 체하기는!”
 “잘났다는 것은 너도 인정하잖아?”
 “쳇! 내가 말로 널 어떻게 당해 내겠어!”
 “그러니까 너도 책 좀 읽으라고. 네 머리는 스프레이를 뿌려서 멋만 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말자. 말을 말아!”
 “큭큭!”
 “큭큭큭!”
 거의 동시에 데런과 짐이 큭큭거렸다. 이런 말장난 또한 둘이 하는 여러 장난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태권도 수련이 끝나자 서둘러 집에 돌아가려는 아이들로 인해 도장이 잠시 소란스러워졌지만, 데런은 오늘도 도장의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 홀로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데런 나 먼저 갈게. 오늘은 엄마가 집에 일찍 와서 동생들 좀 봐 달라고 했거든.”
 “그래. 그럼 먼저 가.”
 늘 함께 다니긴 하였지만 아직 나이 어린 동생들이 있는 짐은 일주일에 두 번은 동생들을 돌봐 주는 것으로 용돈을 벌곤 하였다. 경우에 따라 그 횟수가 늘어날 때가 있었고 오늘이 바로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이따가 올 거지?”
 “어. 이따가 갈게.”
 “좋았어! 그럼 먼저 간다!”
 짐이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먼저 돌아가고 홀로 남은 데런은 천천히 품새를 시현하기 시작했다.
 가장 기본적인 품새인 태극 품새 1장부터 8장까지. 이어서 고려와 금강. 그리고 태백까지 한 동작, 한 동작을 정성을 다하여 시현하였다.
 보통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의 경우 품새를 등한시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범들의 경우에도 테스트를 할 때가 아니면 구태여 아이들에게 품새를 가르치거나 복습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데런 또한 다르지 않아서 할아버지한테 크게 꾸지람을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른 아이들처럼 품새 같은 것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가족 전체가 한국에서 이민을 오기 전 한국에서도 꽤 저명한 한학자이셨던 할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이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는,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최고의 선이라 여기시는 분으로 손자인 데런에게도 늘 이 점을 강조하였다.
 그런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처럼 펼치던 태권도였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손자의 재롱에 가까운 태권도를 보시고는 그야말로 눈물이 쏙 빠지도록 크게 혼을 내셨는데 근본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비록 당신께서 태권도를 직접 배워 보신 적은 없지만 한국 사람치고 태권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듯이 태권도에는 품새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품새야말로 태권도의 모든 사상과 동작이 집약되어 있는 태권도라는 무술의 시작이자 또한 끝이라고 생각하시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품새라는 것이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어린 손자의 재롱에 가까운 품새였지만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옳지 않다 여기시고는 엄하게 꾸짖은 다음부터는 아예 태권도 품새를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구해 당신이 직접 손자가 올바른 동작으로 품새를 배우고 익히도록 엄격하게 감독하였던 것이다.
 그 덕분인지 데런은 도장에서도 교본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든 동작이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특히 품새에 관한한 사범들조차도 데런에게는 더 이상 지적할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완벽한, 아니 완벽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을 정도의 수준에 올랐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데런!”
 “예? 예, 사범님.”
 “잠깐 사무실로 오렴. 관장님께서 네게 할 이야기가 있으신가 보다.”
 “예, 사범님.”
 한참 홀로 품새를 반복하여 수련하고 있는 중에 관장인 박태산이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자신을 보고자 한다는 사범의 말에 곧바로 수련을 멈추고 관장실로 갔다.
 “부르셨습니까, 관장님?”
 발음에 문제가 있기는 하였지만 데런은 분명한 한국말로 인사를 하였다. 데런이 한국말을 사용할 때는 단 두 가지 경우였다. 하나는 집에서였고 또 다른 하나는 도장에서 관장이나 한국인 사범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뿐이었다.
 “어, 그래. 잠시 들어와라.”
 “예.”
 “거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렴, 이것만 끝내고 이야기하자.”
 “예, 관장님.”
 서류 작업을 하던 모양인지, 아니면 세금 계산을 하는 것인지 제법 긴 시간을 끙끙거리더니 결국 손을 들어 버린 채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소파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관장님.”
 언제나 곧고 단정한 자세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말투 또한 정중하고 예의발랐다. 그런 모습이 때론 데런이 14살이라는 것을 가끔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오늘 이렇게 보자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네게 평원을 가르쳐 주기로 해서란다.”
 “예? 하지만 평원이라면 4단 때부터 배울 수 있는 품새 아닌가요? 전 3품을 딴 것이 이제 2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맞다. 하지만 일에는 늘 예외라거나 특별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 가령 월반 제도 같은 것 말이다.”
 “······.”
 “넌 왜 단을 따는 데 시간을 두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건 충분히 숙련을 하라는 의미에서 아닙니까.”
 “그래. 바로 네 말대로다. 무술은 춤이 아니지. 아니 설사 춤이라고 하더라도 그 동작이 제대로 나오기 위해서는 수도 없는 반복을 통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아름다운 춤사위가 나오는 것이지. 같은 의미로 승단을 하는 데 시간을 두는 것도 모두 숙련을 위해서지.”
 “······.”
 “그런 의미에서 넌 충분히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걸어 다니는 교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데런의 동작은 매우 정확하였다. 관장인 박태산 자신이 똑같은 품새를 한다 하더라도 그만큼 정확하고 깔끔하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다만 너무 깔끔하고 정확하다는 것이 문제겠지.’
 모든 것이, 아니 덩치를 빼고는 또래의 소년들에 비해 월등히 우월해 보이는 데런이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치명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약점이 분명 있었다.
 바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너무 바르다는 것이다. 사실 데런이 시현하는 품새는 완벽할 정도였지만 그것을 보고 있자면 절제된 춤사위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태권도는 무술이고 무술은 격렬해야 한다는 것이 박태산의 평소 지론이었다. 때문에 그는 대련 시에도 늘 적극적인 공세를 요구하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데런은 화산처럼 폭발력을 갖춘 무술이 아니라 잔잔하게 고여 있는 물과 같이 침착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이 선악을 따질 일은 전혀 아니었지만 나이에 비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침착한 데런의 성격이 때로는 성장을 더디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경험했듯 미친 듯이 몰입하는 것이야말로 성장을 촉진시키는 가장 확실한 동력이라는 것을 데런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태권도 수련에 있어서만큼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내심 안타까울 정도였다.
 ‘공부를 할 때에는 주변에서 난리굿을 해도 모를 정도로 몰입한다는 녀석이 왜 유독 수련을 할 때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인지······.’
 데런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박태산이 가장 공들여 키우고 있는 또 한 명의 제자인 짐의 말에 따르면 데런은 한번 몰입을 하면 옆에서 전쟁이 나도 모를 정도로 몰입을 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더욱 데런이 수련에서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그저 속이 탈 뿐이다.
 “어쨌든 내일부터 너와 짐에게 평원 품새를 가르쳐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관장님.”
 품새의 동작은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도장의 사범들이 그를 위해 직접 시범을 몇 차례 보여 주었고 데런의 비상한 기억력은 그들이 보여 준 품새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4, 5단의 사범들이 보여 주는 품새의 동작들과 관장처럼 8단의 고수들이 보여 주는 품새의 동작은 확실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젊은 사범들은 품새를 가르쳐도 그 동작 하나하나의 의미까지 전달해 주기보다는 전체적인 품새의 동작만을 가르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박태산 관장은 품새를 가르칠 때 정확한 동작과 함께 왜 그러한 동작들이 모여 품새를 이루고 있는지까지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사실 품새는 고도화된 실전 동작의 집합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품새가 단지 실전과는 동떨어진, 보여 주기 위한 것 정도로 가볍게 보고 있었다.
 도장에서도 품새에 공을 들여 수련하는 수련생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어쨌든 자신에게 이러한 배려를 베풀어 주는 박태산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는 데런의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하나 가득이었고 그 표정을 보니 비로소 14살 소년다운 모습이 보였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거라.”
 “예, 관장님.”
 관장실을 나오니 다음 타임의 수련생들이 사범의 지도하에 수련을 하고 있었다. 데런은 그들의 수련이 방해되지 않게 한쪽 구석진 곳에서 그가 스스로 정한 하루의 수련 양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금 수련을 시작하였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
 수련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아직 아버지와 엄마가 올 시간은 아니었고 할아버지는 거실 소파에서 꼿꼿한 책을 읽고 있다가 그를 반겨 주었다.
 “오냐. 오늘 하루도 잘 보낸 것이냐?”
 손자인 데런을 바라보는 명국의 눈빛은 자애로움 그 자체였다.
 “예, 할아버지.”
 “그럼 먼저 씻도록 하렴.”
 “예.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오냐.”
 샤워를 하고 편안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아버지가 막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그래. 오늘 하루도 잘 보냈니?”
 “예, 아버지. 씻고 나오세요. 그사이에 제가 저녁 준비를 할게요.”
 오늘은 엄마가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는 날이었기에 남자들끼리 저녁식사를 해야 했다.
 데런이라고 해서 음식을 할 줄 아는 것은 아니고 이미 아침에 그 바쁜 와중에도 미리 준비해 놓은 국과 반찬 같은 것들 중 데울 것은 데우고 그냥 꺼내 놓아도 되는 것은 꺼내 놓으면 되는, 해야 할 일이라고는 상을 차리는 것과 쌀을 씻어 밥을 짓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 또한 적당히 물만 제대로 잡아 밥솥을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한참 저녁상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부엌 쪽에 난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낯익은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제이미?”
 갑자기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짐의 여동생, 제이미였다.
 “안녕, 데런?”
 수줍은 듯 미소를 띤 채 인사를 하는 제이미의 모습은 한마디로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물론 부모나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이다.
 “어. 한데 어쩐 일이야?”
 “저기······ 짐이 라면 좀 있음 달라고 했어.”
 “라면을?”
 “어.”
 할아버지인 오명국을 포함하여 데런의 가족들 모두가 라면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늘 라면을 사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라면이라는 것이 상당히 중독성이 강해서 일단 맛을 들이고 나면 좀처럼 끊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친구인 데런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함께 식사를 할 때도 많다 보니 자연 짐도 라면을 자주 접하게 되었고, 비단 짐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모두가 라면에 중독되어 있었다.
 “알았어. 몇 개면 되니?”
 “5개.”
 “5개? 잠시만.”
 찬장을 열어 라면 5개를 꺼내서는 그것을 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고마워, 데런.”
 “어. 그래.”
 라면을 받아 든 채 생글생글 웃으며 고맙단 인사를 하고 난 이후에도 제이미는 여전히 돌아가지 않고 데런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또 무슨 볼일 있어?”
 “응? 아, 아니.”
 “한데 왜 그러고 있어?”
 짐의 성격이라면 이미 렌지에 물을 올려놓고 제이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이미? 너 여기서 뭐 해?”
 “어? 왜 왔어?”
 “무슨 소리야? 왜 오기는! 물 끓고 있는데 네가 라면을 가지고 오지 않으니까 와 본 것이지.”
 “칫! 곧 갈 거였다고!”
 “이 꼬맹이가?”
 “꼬맹이라니! 나도 9살이라고!”
 “어이구. 그러셔요? 참 많이도······.”
 “어이! 어이! 싸우고 싶으면 너희 집에 가서 싸워. 왜 여기서 그래?”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나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짐?”
 “몰라서 물어? 제이미 이 꼬맹이가 널······.”
 “꺄악!”
 짐이 말을 하려는 중간에 여자아이 특유의 날카로운 비명이 끼어들었다.
 “이 바보! 멍청이! 짐!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왜? 내가······.”
 “왜 이리······ 어? 짐. 너 왔구나? 제이미도 있네?”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부엌에서 시끄러운 소란이 일자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들어온 토니가 짐과 제이미를 보자 먼저 알은체를 하였다.
 “아! 안녕하세요,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래. 한데 데런을 만나기 위해 온 거니?”
 “하하. 그게, 집에 어른들이 안 계셔서 라면 좀 빌리려고요.”
 “아, 그랬구나. 한데 제롬은 어쩌고 온 것이니?”
 “아 차!”
 그제야 막냇동생인 제롬이 생각났다는 듯 짐이 인사도 없이 달려 나갔다.
 “저, 저도 이만······ 안녕히 계세요, 아저씨.”
 “그래······.”
 인사도 다 끝내기 전에 다람쥐처럼 후닥닥 달려 나가는 제이미의 모습에 토니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이제 곧 다 차려지니 말이에요.”
 “하하. 그래.”
 저녁식사를 마치고 뒷정리까지 끝낸 데런은 약속대로 숙제와 공부를 같이하기 위해 짐의 집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아! 왔니? 짐은 지금 자기 방에 있구나.”
 짐의 엄마인 로라가 데런을 반기며 아들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올라가 있으렴. 내가 조금 후에 간식을 만들어 가져다주마.”
 “하하. 감사합니다, 아줌마.”
 데런보다는 머리 하나 정도 큰 키를 지닌 짐은 덩치도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당당했고 그런 체격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먹는 것을 찾았다.
 그에 비해 체구도 그리 크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체격이 그리 큰 것도 아닌 데런 또한 만만치 않은 대식가였다.
 “나 왔어.”
 “왔냐?”
 “그래. 그럼 시작하자.”
 “쳇! 뭐 그리 급해서 오자마자 그래? 잠깐 쉬다가 하자고.”
 이미 12학년 전 과정을 독학으로 끝낸 데런은 친구인 짐의 공부를 돌봐 주고 있었다. 다른 것은 다 잘하는데 유일하게 못하는 것이 바로 공부였고 간신히 낙제를 면해 오고 있었다.
 “아 참! 관장님이 나랑 네게 내일부터 평원 품새를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어.”
 “평원 품새를? 하지만 그것은 4품 이상이어야만 배울 수 있잖아?”
 “어. 한데 나랑 네게 특별히 가르쳐 주시는 거라고 하셨어.”
 “야호! 정말이지?”
 “어.”
 4품 이상은 되어야 배울 수 있는 품새를 미리 알려 준다는 것부터가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일이었기에 당연히 기뻐하는 것이었다.
 사내로서, 아니 굳이 사내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능력을 인정받는 것만큼 기쁜 일이었다.
 “이야아! 이얍! 하하하!”
 “······.”
 친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로써 네 꿈이 실현될 날도 머지않았네?”
 “그렇지.”
 “쨔식. 공짜로 네 고향인 한국에 가려는 계획을 세우다니.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넌 참 머리가 좋아. 하하하.”
 “훗!”
 부모님의 이야기로는 자신이 1살일 때 이민을 왔다고 한다. 이후 데런, 아니 한국 이름으로 준혁은 단 한 번도 자신이 태어난 곳인 한국에 가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한국에는 고모가 살고 계시긴 하지만 그 고모 또한 지금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좀 더 어렸을 때에 왜 고모가 한 번도 미국에 오지 않느냐고 묻자 아버지는 고모님 댁의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미국에 오긴 힘들다고 씁쓸하게 말씀하신 일이 있은 후부터는 데런은 더 이상 고모에 대해 묻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당시 고모에 대해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표정이 무척이나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데런의 집안 또한 경제적으로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풍족한 것도 아니었다.
 데런이 그동안 용돈을 아끼고 또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주식 투자를 위한 종잣돈을 마련한 것도 자신이 태어난 한국이란 곳을 자신의 힘으로 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의 힘으로 대학에도 다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할아버지도 기꺼이 자신의 명의를 빌려 주었던 것이다.
 한데 이 두 가지 일 중 한 가지는 돈이 필요치 않아도 가능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태권도였다. 데런의 태권도 실력은 3품이었지만 대련에 있어서는 확실히 친구인 짐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실력이었다.
 대신 품새에 있어서만큼은 도장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평소 관장이나 사범들로부터도 품새의 동작을 그렇게 정확하고 깔끔하게 시현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매년 세계태권한마당이 국기원에서 열리고 있었고 그곳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실력자들이 모여 품새와 대련, 격파와 같은 각종 경연을 하게 되는데 그곳에 대표로 뽑혀 나간다면 자신이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한국을 다녀올 수 있는 일이었기에 더욱 열심히 품새에 공을 들이는 것이었다.
 짐 또한 가장 친한 친구인 데런이 태어난 나라인 한국에 같이 가 보고 싶었기에 자신의 장기인 대련에 참가하기 위해 열심히 수련을 하였고 지역 선발전에서 이미 우승을 차지하였고 소년부 미국 대표 선발전을 준비 중에 있었다.
 “어쨌든 내일부터는 또 죽어라고 수련을 해야겠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한데 지금은 공부할 시간이야. 너 그러다 낙제당할 수 있어.”
 “아! 어떤 미친 인간들이 공부라는 것을 만들어서 날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 것인지······.”
 “큭! 하나도 신파적이지 않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어서 오기나 하라고.”
 “매정한 놈. 친구가 힘들어하는데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다니.”
 “훗! 어제 오늘 안 것도 아니면서 뭘 그래? 어쨌든 시작하자. 나 오늘은 일찍 돌아가야 해.”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뭣 좀 하려고.”
 “뭔데? 너 이 자식! 지금 너와 나 사이에 비밀을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비밀은 무슨. 할아버지가 오늘부터 정인공正人功 4단계를 가르쳐 주신다고 하셔서 말이야.”
 “윽! 그 나무토막 기술을?”
 데런과 짐이 5살 때부터 수련을 한 것은 태권도가 전부가 아니었다. 정인공이라는 매우 특이한 기술을 하나 더 배웠다.
 이를 두고 짐이 나무토막 기술이라고 하며 치를 떠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인공은 조선시대 최병기라는 사관史官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기공氣功이었다.
 사관이라는 직책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간혹 사극을 보게 되면 임금과 신하가 함께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는 반드시 참석하여 무엇인가를 열심히 기록하는 자들을 보았을 것이다.
 이들은 역사 기록을 담당하며 초고를 작성하는 관리들로 이들이 기록한 역사가 바로 실록實錄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기록들이었다.
 문제는 이처럼 임금과 신료들이 국정을 논할 때나 6조에서 국정을 논할 때 반드시 참석시켜야 하는 사관들이었고, 사관들은 그 자리에서 오가는 모든 대화를 기록해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짧게 끝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까? 즉 모든 사관은 장시간 동안 빠르게 오가는 대화 내용 전체를 곧바로 기록을 해야 하는 매우 고단하면서도 고도의 집중력과 암기력이 필요했다.
 집중력뿐만 아니라 암기력이 필요한 것은 기록할 내용에 빠지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나중에 추가로 사초에 오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별도의 기록을 남겨두는 것 또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의 임무이기 때문이었다.
 정인공은 바로 그러한 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기공으로 자세를 바로하고 호흡을 통하여 뇌의 기능을 최대한 개발하는 것이 목적인 그러한 무공이었다.
 여기에 부가적으로 장시간 한자리에 앉아 기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강해야 했고 그러한 부분까지도 보완해 주는 것이 바로 정인공이었다.
 정인공이란 이름에는 임금과 신료들 사이에서 늘 곧은 자세와 집중력으로 직무를 수행하여야 했으니 정인이요, 사관으로서 언제나 사실만을 기술하며 임의로 내용을 첨삭하지 않아야 하니 그러기 위해서는 곧은 의지가 있어야 하기에 정인이었으며, 그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아야 하는 단심丹心이 있어야 하니 정인이었다.
 이런 정인공은 모두 5단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1단계는 입식立植의 단계라 하여 자세를 바로 하는 단계인데 사람이 취하는 거의 모든 자세, 심지어는 잠자는 자세까지도 바른 자세를 만드는 단계이다.
 2단계는 입아立芽라고 하여 호흡법과 마치 태극권처럼 부드러운 108개 동작을 통해 체력을 단련하는 단계였으며 3단계로는 집중력과 암기력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단계인 염장鹽藏이라는 단계였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정인공이라는 이름도 그렇고 각각의 단계마다 별도로 붙어 있는 이름들 또한 극악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염장이라는 것도 쉽게 표현을 하자면 ‘소금에 절인다’라는 뜻으로 숙성의 한 방법이라는 뜻인데 집중력과 암기력을 높이는 것이 마치 소금에 절여 숙성을 시키는 것 같다 하여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았다.
 어쨌든 데런은 지금 정인공의 3단계의 성취를 보였고 이제 4단계인 일관一貫이라는 단계로 넘어가려는 것이었다.
 이 일관이라는 단계는 앞서 수련하였던 세 단계를 융합하는 과정이었다. 그동안은 각 단계별로 서로 상이하다 싶을 정도로 다른 수련 과정을 거쳤는데 이것을 하나로 융합하기 위해 정인심법正人心法이라는 것을 수련하게 된다.
 오늘은 바로 그 정인심법을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받는 날이었다.
 “너도 참 대단해. 그 이상한 것을 지금까지 하다니 말이야.”
 “뭐 그 대가도 크다는 것을 너도 알잖아?”
 “하긴. 너의 그 괴력은 물론, 이상하리만치 대단한 집중력과 암기력이 그 덕분이라는 것을 잘 알지.”
 단순하게 힘만을 놓고 본다면 데런에 비해 체격이나 체구가 모두 큰 짐이 더 강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로 데런이 월등히 더 힘이 강했다.
 물론 덩치가 크고 작고가 힘의 크기를 정하는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체격과 체구가 큰 쪽이 힘도 더 강한 편이다. 한데 데런의 경우에는 정인공을 3단계까지 수련하면서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암기력과 집중력 또한 그러했다.
 물론 이러한 데런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두 사람으로 정인공을 전해 주고 있는 할아버지 오명국과 친구인 짐뿐이었다.
 처음에 정인공을 함께 배웠던 짐은 첫 단계인 입식의 단계에서부터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지만 간혹 데런의 그 뛰어난 능력이 정인공의 결과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러게 너도 중간에 그만두지 않았다면 좋았잖아?”
 “쳇! 그런 소리 말라고. 난 그 첫 번째 단계조차도 견디지 못해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는 것을 네가 잘 알잖아? 어쨌든 벌써 4간계로 간다니 너도 참 대단하다.”
 “훗! 내가 어디 못 하는 것이 있어야 말이지. 크크크!”
 “아주 매를 버는 소릴 하는구나? 응?”
 “훗! 어쨌든 오늘은 내가 빨리 가야 하니까 어서 공부나 시작하자고.”
 
 “4단계인 정인심공의 구결이다. 지금부터 내가 읊어 주는 것을 모두 기억해야 한다.”
 “예, 할아버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오명국은 그때부터 무려 1만 8천 자나 되는 정인심공의 구결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기억하겠느냐?”
 “예, 할아버지.”
 정인심공의 구결을 모두 기억했다는 손자의 말에 오명국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단 한 번 1만 8천 자에 달하는 구결을 읊어 주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억하겠냐고 묻는 사람이나, 그것을 모두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하는 데런이나 보통의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둘 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럼 읊어 보거라.”
 “예.”
 잠시 기억력을 더듬던 데런이 이후 일사천리로 1만 8천 자에 달하는 정인심공의 구결을 단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채, 그리고 단 한 번의 막힘이나 주저함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읊었다.
 “잘했구나. 하면 이제 그 구결의 진의眞義를 전해 주도록 하마.”
 “······.”
 정인공에 관련된 모든 기록은 한자漢字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제대로 해석하지 않으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었다.
 오명국이 처음부터 정인공과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정인공과 인연이 닿은 것은 40년 전쯤이었다. 우연히 고서점에서 정인공의 책을 발견하였던 것이 정인공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하나 이미 장년의 나이에 접어들 무렵 맺어진 정인공과의 인연은 시기적으로 너무 늦은 인연이었다. 정인공은 그 시작이 바른 몸가짐부터였다.
 따라서 이미 좋지 않은 습관이 배어 버린 오명국에게 있어서는 그 시작 단계부터가 큰 난관이었다. 때문에 오명국은 정인공을 자신의 아들인 토니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토니 또한 짐처럼 1단계에서부터 이를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명국과 토니는 심각한 부자 갈등을 겪어야 했고 결국 토니가 자살 소동까지 벌인 후에야 더 이상 토니에게 정인공을 전해 주는 것을 포기한 오명국이었다.
 어떻게 하든 정인공의 끝을 보고 싶었던 그는 손자인 데런에게 이를 전하기 위해 또 한 번의 도전을 시작했고 많은 난관 속에서 4단계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실상 오명국은 정인공의 숙련도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들쭉날쭉하였다. 너무 늦게 인연을 맺게 된 때문이었다.
 그나마 뒤늦기는 했어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절반을 정인공을 수련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기에 그나마 큰 오류 없이 데런에게 정인공을 전수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오명국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는, 무리하게 정인공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나 기계라고 해도 흐르는 세월은 막지 못하는 법. 이미 여든의 나이에 가까운 오명국 또한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집중력이나 암기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나이가 한 살, 한 살을 더해 갈 때마다 집중력과 암기력이 떨어지는 속도는 빨라졌고 잃어 가는 기억은 더 많아졌다.
 오명국은 오늘을 위해 지난 반년 동안 무리하게 정인공 3단계를 사용하였고 그동안 많은 예행연습을 통해 정인심공의 1만 8천 자에 달하는 구결과 그 구결의 해석을 온전하게 기억할 수 있는 오늘, 데런에게 그것을 전해 주려 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같은 정인공을 수련하고 있었고, 사물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는 나이 때부터 오명국에 의해 정인공을 수련해 온 데런은 그 누구보다 할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지금 오명국이 정말로 무리를 해서 자신에게 구결과 그 해석을 전해 주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더욱더 오명국이 전해 주는 내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하였다.
 ‘녀석······ 정말 대단하구나. 정인공을 수련한 지 이제 불과 9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이 정도라니. 어쩌면 너는 정인공이 없어도 천재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한 아이일지도 모르겠구나.’
 5살 때부터 정인공을 수련을 한 때문에 그로 인해 남들보다 비상한 집중력과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지금도 오명국은 데런이 정인공 때문에 이 정도로 빠르게 성장을 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정인공이 없어도 지금과 같은 능력을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군.’
 고도의 집중력과 암기력을 발휘한다는 것 자체가 뇌를 그만큼 많이 사용한다는 것으로, 체력적인 문제 말고도 과도한 뇌의 사용으로 심한 두통이 생기는 경우가 잦았다.
 지금 오명국이 그러한 상태로, 무리하게 정인공을 사용한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심한 두통이 오기 시작하였다.
 오명국은 데런이 기역을 반추反芻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신비한 경험
 
 
 
 “안녕!”
 “안녕!”
 등교 시간이 되면 학교는 마치 도떼기시장처럼 소란스러워진다. 오늘도 데런과 짐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나란히 등교하였고 둘을 아는 친구들이 서로 인사를 해 왔다.
 어떤 의미에서 데런과 짐은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학생들이었다. 짐은 훤칠한 키와 뛰어난 태권도 실력, 거기에 워낙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여 주변에 늘 친구가 넘쳐 났다.
 문제는 그 친구들의 절대 다수가 남자들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과 놀기를 좋아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능 스포츠맨이라는 것도 그의 주변에 여자가 아닌 남자들을 모여들게 만들었다.
 거의 모든 것을 함께하지만 듣는 수업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짐은 학업 성취도가 떨어지는 편이었기에 데런이 듣는 수업들과는 다른 수업을 들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럼 이따가 점심시간 때 보자.”
 “그래. 제발 농땡이 피우지 말고 집중하라고. 알았지?”
 “쳇! 잔소리는. 네가 내 엄마라도 되냐?”
 “크크! 아줌마보다 내가 널 더 많이 알잖아? 어쨌든 이따가 점심시간에 보자.”
 “그래.”
 수학 수업을 듣기 위해 교실에 들어가 대체적으로 그가 늘 앉곤 하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우등생들이 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받는 수업인지라 교실 분위기는 마치 수도승들이 교리를 공부할 때처럼 엄숙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 아이가 교실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는, 학교의 모든 남학생들, 심지어는 남자 선생님들까지도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매혹적이면서도 지적이기까지 한 일리노아가 교실에 들어올 때까지 말이다.
 그녀가 교실에 들어오자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도원처럼 조용하기만 하던 교실이 일순간에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데런만은 그녀의 출현을 힐끗 한번 바라본 후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쳐 들고는 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안녕, 데런?”
 데런의 옆자리에 앉은 일리노아가 데련에게 인사를 해 왔다. 다른 모든 학생들은 이처럼 먼저 그녀가 데런에게 인사를 하는 것조차 부러워할 정도였지만 데런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저 이웃이며 동급생인 친구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안녕, 일리노아.”
 “아까 같이 오자니까 왜 그랬어?”
 메이퀸답게 그녀를 쫓아다니는 남학생들은 무수히 많았고 그런 남학생들 중 소위 잘나가는 몇몇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차를 가지고 와서는 그녀를 서로 모셔 가려고 하였다.
 오늘도 그녀는 그런 학생들 중 한 명의 차를 타고 학교에 등교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데런과 짐이 막 등교를 하기 위해 막 집을 나서던 차였다.
 그녀는 이웃이자 동급생인 두 사람에게 인사치례로 같이 타고 가자고 제안을 하였지만 그녀를 데리러 온 상급생의 눈빛은 분명히 ‘너희들 내 차에 탔다가는 그때부터 학교생활 조용히 하긴 힘들 거야.’라며 강렬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훗! 그 녀석들 눈빛 못 봤어? 아마 그 차에 나와 짐이 탔다면 내일쯤 나와 짐은 학교 뒷산에서 죽은 채 발견됐을 수도 있다고.”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데런의 짓궂은 농담에 일리노아는 치를 떨었다.
 “어쨌든 이제 곧 수업이 시작하니 준비나 하자.”
 “어? 어······.”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한마디라도 더 나누기 위해 애를 썼는데 정작 이웃에 살고 있는 데런과 짐은 자신을 아는 사람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듯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짐은 한때 다른 남학생들처럼 자신을 귀찮게 굴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제는 짐도 자신에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였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자신이 봐도 반할 정도로 빼어난 외모는 어려서부터 늘 주변에 사람을 몰고 다녔다.
 그것이 또래였건 아니건 그녀의 주변에는 늘 사내들이 들끓었고 그런 사내들을 다루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한번 웃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동성 친구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려웠다. 자신에 대한 질투로 마음의 문을 여는 동성 친구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의 관심을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말은 사람의 관심을 자신에게 머물게 하는 일에도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아니 특별한 재능까지도 필요 없는 일이었다. 사내들을 곁에 두기 위해서는 살짝 웃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듯 여자애들에게는 공통의 관심사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녀는 늘 자신의 주변에 많은 친구들을 둘 수 있었다. 하지만 데런과 짐처럼 자신에게 무관심한 친구들은 지금까지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용기가 없어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한 친구들은 있었지만 그러지도 않은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솔직히 자존심이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상하는 일이었다.
 특히 데런의 경우는 더욱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는데 전학 오기 전에 그녀는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일이 없었다가 이곳에 전학 오게 된 이후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석을 차지한 적이 없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데런이란 존재 때문이었다.
 지금도 데런은 오늘 배울 진도가 나오는 부분을 펴 놓은 채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늘 보았던 것처럼 자세를 바로하고 눈을 감은 채 명상에 빠졌다.
 ‘저게 과연 도움이 될까?’
 명상을 한다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될까 싶어졌다. 그리고 문득 그것이 공부에 도움이 된다면 자신도 한번 배워 볼까 싶어졌다.
 “뭘 그렇게 봐?”
 “아? 아냐. 켈리.”
 잠시 자신도 명상이라는 것을 배워 볼까 생각하던 일리노아는 또 다른 친구인 켈리가 말을 걸어오자 이내 그것을 잊어버리고는 친구들과 수다에 빠져들었다.
 한편 눈을 감은 채 명상에 잠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인공의 4단계인 일관의 단계를 실행하고 있는 상태였다,
 일관이라는 단계는 앞선 세 단계에 비해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바로 일상생활에 늘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사관이라는 것이 딱 정해진 시간만 기록을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든 국가의 중대사가 있어 임금과 신하들이 논의할 일이 있거나 6조에서 국정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불려 가서 기록을 해야 하는 사관들이었기에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앞선 세 단계는 그가 태권도 도장에서 수련을 할 때처럼 별도로 수련을 하기 위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했다. 가령 태권도를 수련하기 위해서 체조나 스트레칭 등으로 몸의 근육들을 풀어 주어야 했고 적당히 몸에 땀도 나게 하여 몸이 놀라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일관의 단계는 생활 그 자체가 바로 수련으로 의식적으로 수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도 그의 뇌가 지속적으로 수련을 이끌어 가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자율신경이 심장이나 폐, 근육 그리고 배 안의 장기 등을 독립적으로 조절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럼으로써 언제든 사관으로서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는 준비 상태로 만들어 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데런이 할아버지로부터 4단계인 일관의 구결을 전해받은 것도 2개월째. 성취도는 논할 단계조차 아니었지만 지난 2개월 동안의 수련이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불과 2개월 정도 수련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취도는 오히려 앞서 9년 동안 수련하였던 세 단계에서 거두었던 성취도에 비해 월등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하나가 바로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되는 부분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었던 부분이 이제는 의식하지 않고서도 그것이 가능해진다면 이전에 의식하여야 했던 그 부분만큼 다른 것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그만큼 더 넓은, 그리고 더 많은 부분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여유와 여력이 생긴다는 것과, 이보다 더 중요한 부분인 무의식의 세계의 영역까지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그 무의식의 부분이 실제로는 의식의 부분일 가능성이 더 높지만 어쨌든 개척되지 않았던 부분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큰 것임에는 분명한 일이었다.
 교실 문이 열리며 수학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들어오는 소리와 아이들이 자신의 자리에 앉는 소리가 들리자 감았던 눈을 떴다. 순간 데런의 갈색 눈동자에서 맑은 빛이 아주 찰나 동안 빛났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야! 데런! 내 말 안 들려?”
 늘 그렇지만 오늘도 수련이 끝난 후에 데런과 짐은 한쪽 구석에서 자신에게 맞는 개인 수련을 하였다. 짐은 주로 대련하는 상황을 가정하여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반면 데런은 주로 품새를 수련하였다.
 이런 개인 수련으로 인해 짐의 경우에는 더욱 빠르고 강한 몸놀림이 가능해졌고 데런은 더욱 정확한 동작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데런이 전혀 지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중간 중간에 여러 차례 물을 마시거나 하면서 휴식을 취하였지만 데런은 지난 2시간 동안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꾸준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몰입되어 있었다.
 “데런!”
 “어?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저기 봐. 쟤가 여기 어쩐 일이지?”
 “무슨 일인데 그래? 음?”
 도장 입구에는 일리노아가 와서 구경을 하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빼어난 외모에 도장의 소년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짐. 아무래도 일리노아가 널 보러 온 것 같은데?”
 “날?”
 데런으로부터 조언을 듣고 난 이후 짐은 정말로 그녀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억눌렀다. 아니 억누르고 있는 중으로 의식적으로 그녀와 부딪치거나 하는 일을 최대한 줄여 나갔다.
 “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무슨······.”
 데런의 말처럼 그녀는 확실히 웃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착각이 아니길 바랐다.
 친구인 데런이 극구 만류하여 애써 그녀에 대한 마음을 다잡아 가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일리노아와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몰라도 더 멋진 남자, 이를테면 5개월 후로 다가온 전미 태권도 소년부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하면 좀 더 그녀에게 멋진 남자로 보이지 않을까 싶어 힘든 것을 참고 맹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데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는 일리노아에게 완전히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안 그런 척하면서도 그는 늘 일리노아가 자신을 볼 수 있는 위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동안 동생들을 봐주면서 번 용돈을 털어 뒷마당에 샌드백까지 설치하였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샌드백으로 두들겼다.
 재미난 것은 샌드백이 걸려 있는 뒷마당은 일리노아의 방에서 바로 내려다보인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짐은 늘 그녀가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행동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모든 행동들은 당연히 일리노아가 자신에게 스스로 다가오기를 바라서였다.
 스스로 다가오는 것이라면 그저 모르는 척하면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고 그것이라면 데런도 뭐라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이 기다리던 그러한 때가 온 것이라고 짐은 생각했다. 데런의 말처럼 일리노아가 자신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뭐 하는 거야! 정신을 집중하지 못해!”
 일리노아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도장 내에 있던 젊은 수컷들이 그녀의 외모에 휘파람들을 불어 대며 소란을 떨자 사범 중 한 사람이 곽 사범이 도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쳐 주위를 환기시키고는 일리노아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로 온 것이지? 입관 신청을 하려는 것이면 저쪽 사무실로 가서 상담을 하렴.”
 “저, 죄송하지만 전 친구를 만나러 왔어요.”
 “친구? 누굴 만나러 온 것이지?”
 “저기 있는 짐을 만나러 왔어요. 한데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가요?”
 “아! 짐을 만나러 온 것이구나. 아니 수련은 끝났고, 늘 수련이 끝난 후에도 저렇게 남아서 개인 수련을 한단다. 잠깐 기다려라. 내가 짐에게······ 훗!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구나.”
 이미 일리노아를 알아본 짐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곽 사범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굳이 자신이 더 이상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응. 실은 널 만나러 왔어.”
 “날? 왜?”
 내심 일리노아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이처럼 직접 도장에까지 찾아온 것도 모자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만나러 왔다고까지 말하는 것이 그동안 꿈꾸어 오던 일인지라 환호성을 질러 대며 발광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짐은 그런 속마음은 꼭꼭 숨겨 놓은 채 수련을 방해당한 것이 조금은 귀찮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일리노아를 상대하였다.
 “그게······ 이 근처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너희가 생각나서 말이야.”
 “아!”
 “다 끝났으면 집에 같이 가자고 하려고.”
 “그렇구나. 한데 어쩌지? 나도 데런도 아직 개인 수련을 좀 더 해야 하는데 말이야.”
 “아······ 그, 그럼 여기서 기다려도 되겠지?”
 “어. 저기 소파에 앉아서 좀 기다리면 돼.”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래, 그럼.”
 일리노아를 방치한 채 몸을 돌려 데런과 함께 개인 수련을 하는 곳으로 조금은 어슬렁거리며 걸어왔다.
 “훗!”
 비단 얼굴 표정을 보지 않아도 그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 하나만으로도 친구인 짐의 감정이 어떤지 데런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충고에 따라 일리노아에게 거리를 두며 애써 무시하는 척하고 있기는 하여도 그의 모든 행동이 바로 일리노아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 정도는 갓 태어난 꼬맹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만 싱글거리고 적당히 기다리게 해.”
 “크크. 오냐. 한데 넌 같이 안 갈 거냐?”
 “난 도서관에 좀 들렀다 갈게. 책 좀 대여할 것이 있어서 말이야.”
 “그래? 그럼 한 20분 정도 더 있다 나 먼저 갈게.”
 “그래.”
 운동을 마치고 땀을 씻기 위해 간단히 샤워까지 하는 데 걸린 시간은 30분 정도였다. 그 시간 동안 일리노아는 체육관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서 짐의 운동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미안, 기다리게 했지?”
 젖은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도 않은 채 나올 정도로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행동했다. 당연히 주변에 늘 사내가 들끓던 일리노아였기에 사내아이들의 그 어설픈 거짓말이나 행동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럴 때 어떤 행동을 하면 사내아이들이 좋아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정답은 그냥 모르는 체하는 것이었다.
 “아냐. 한데 데런은 같이 안 가?”
 “아! 데런은 도서관에 들러서 책을 빌릴 것이 있다고 했어.”
 “그렇구나.”
 “어. 자, 그럼 갈까? 난 자전거를 타고 왔는데 넌?”
 “나? 네 자전거에 같이 타면 안 될까?”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리노아가 자신과 한 자전거를 타겠다고 하다니!
 내심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소리치며 한바탕 난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참고 또 참으며 표정 관리를 했다.
 “어? 그, 그거야 뭐······ 그래. 그렇게 하자.”
 “고마워 짐.”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활짝 웃으며 귓가에 흘러내린 금발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갈까?”
 “그, 그래.”
 역시 여자의 아름다움은 모든 사내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무기였고 짐은 그런 무기에 자신도 모르게 당하고 있었다.
 짐이 열어 준 문을 통해 도장을 빠져나가던 일리노아의 눈길이 잠시 데런에게 향하였다.
 이 일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바로 데런과 짐 사이에 일리노아가 공식적으로 친구로서 함께하게 된 계기 말이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흐른다. 앞에서 보면 언제 그 시간이 갈까 싶다가도 돌아서서 보게 되면 언제 그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점차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간다. 12학년에 올라가는 세 동갑내기 친구들은 이제 많은 부분이 3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빵! 빵!
 “데런! 뭐 해? 이러다가 지각하겠어!”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하던 이들도 나이가 차고 운전면허를 따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용돈과 부모의 도움으로 중고차를 장만하였다.
 물론 연료비를 아껴야 했기에 둘은 번갈아 가면서 차를 운용하였고 오늘은 짐의 차로 학교에 가는 날이었다. 경적을 울리며 데런을 재촉하는 짐의 옆자리에는 이제는 완연하게 성숙한, 과거에도 그 인물이 뛰어나긴 하였지만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섹시함까지 물씬 풍기는 일리노아가 앉아 있었다.
 “아! 미안! 딴 것 좀 하느라 시간 가는지도 몰랐네.”
 아침 식사도 하지 않았는지 사과 하나를 입에 문 채 허겁지겁 달려 나와서는 차의 뒷문을 열고 올라탔다. 한데 허둥지둥하는 데런의 모습도 상당히 변해 있었다.
 아시아계라고 해서 모두가 덩치가 작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데런의 경우에는 확실히 또래의 아시아계 친구들에 비해서도 덩치는 물론 키도 조금 작은, 외소한 편이었다.
 그런 데런이 지금은 180cm가 넘는 체구를 지닌 한 명의 건강한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안녕, 데런? 네가 늦장을 부리다니 어쩐 일이야?”
 “안녕, 일레인. 미안. 다른 것을 하다 보니 좀 늦었네.”
 일리노아는 데런이 정인공을 수련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짐은 데런이 왜 늦은 것인지 알기에 그저 한번 웃어 보이고는 차를 몰아 학교로 향하였다.
 “한데 너희들 조만간에 대회 나가지 않아?”
 “어. 다음 달에 대회가 시작돼.”
 일리노아의 말에 짐이 대답하였다.
 “이번에는 꼭 선발되길 바랄게.”
 14살 때부터 도전을 하였지만 짐이 4강이나 결승까지 올라가서는 상대에게 결정적인 반격을 당하는 바람에 번번이 대표에 선발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짐으로 인해 데런 또한 이미 두 차례나 대표에 선발된 이후에도 한국행을 포기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해 짐은 데런에게 무척이나 미안해하고 있었지만 정작 데런은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에 갈 기회는 아직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렇게 될 거야, 이번에는. 안 그래, 짐?”
 “물론! 물론이지! 지금 몸 상태라면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나 올림픽 대표 선수로도 뽑힐 수 있다고.”
 괜한 호기가 아니었다. 지금의 짐은 3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조차 없었고, 1년 전과 비교해도 두 배 정도는 실력이 늘어났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짐은 이미 전부터 충분히 대표로 선발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실력만 놓고 본다면 그는 벌써 대표에 선발되고도 남았다.
 다만 그가 번번이 마지막 단계에서 대표로 선발되지 못한 이유는 실력이 아니라 성격이었다. 흥분을 잘하는 짐은 학교에서도 간혹 큰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고가 정의감에 불타오른 나머지 벌어진 정당방위에 속하는 것들이었지만 이미 그로 인해 수차례 경찰 조사까지 받은 일이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지금도 이렇게 버젓이 학교를 다닌다는 것만 보아도 그가 했던 그 행동들이 죄를 지은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일리노아와의 관계가 발전을 하지 못한 채 답보 상태에 놓여 있는 것도 그의 이러한 쉽게 흥분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짐은 분명 여러 면에서 멋진 청년이지만 그것만큼 큰 단점으로 인해 일리노아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데런. 너 루디랑 끝냈어?”
 “뭐 그렇게 말할 단계도 아니었어.”
 일리노아의 말에 데런은 뭐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였다.
 “왜? 루디라면 괜찮지 않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그 애 정도면 말이야. 안 그래?”
 일리노아의 말에 대답을 한 사람은 데런이 아니라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짐이었다.
 확실히 짐의 말처럼 작년에 전학을 온 루디라면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여러 면에서 매우 뛰어난 학생이었다. 외모에서도 학교 최고의 미녀인 일리노아를 능가할 정도였으며, 학업성적 또한 늘 수석을 놓치지 않는 데런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뛰어났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녀의 별명이 얼음공주로 통할 정도로 그녀는 대인관계에 문제가 많은 편이었다.
 그녀가 학교에 전학을 온 이후 그녀와 대화를 한 사람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그녀는 다른 학생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글쎄? 난 별로 관심이 없네.”
 “간혹 말이야. 난 네가 정말 피 끓는 17살 소년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어.”
 “호호. 맞아. 어느 누군 지나치게 혈기가 강한 데에 비해 데런 넌 너무 심할 정도로······ 훗! 알지 내 말?”
 농담처럼 하는 말이었지만 짐이나 일리노아의 말처럼 데런은 여학생들에게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여자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데런도 커플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깝게 지내던 여학생들이 있었다. 다만 그것이 그다지 오래 가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늘 다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쳇! 나도 여자 좋아한다고. 다만 지금은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뿐이야.”
 두 친구의 말에 데런은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널 보면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꼭 수도승 같아.”
 “설마.”
 “일리노아의 말이 맞아. 내가 봐도 넌 점점 더 너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것 같아.”
 “그래?”
 “어.”
 짐과 일리노아가 급격히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데런과는 조금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짐과 일리노아의 사이가 빠르게 가까워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데런은 정인공의 4단계인 일관을 수련하느라 짐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하였다.
 지금도 데런은 두 친구와는 가장 가까운 사이긴 하여도 이전처럼 짐과 거의 하루 대부분을 함께하진 않고 있었다.
 이는 짐과 일리노아와의 관계가 연인이 된 때문이기보다는 데런이 정인공 수련을 위해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만들어진 일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데런은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고 있었다. 독서 또한 데런이 지금까지 해 온 수련 중 하나로 정인공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암기력이었기에 암기력을 쌓는 훈련의 일환으로 많은 책을 읽었다.
 그것이 조금, 아니 상당히 지나쳐 이제는 독서 중독증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데런은 독서광이었다. 오죽하면 도서관 사서는 물론 도서관 직원들 모두가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가 보이지 않을 경우 도서관 아니면 태권도 도장에서 찾아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생활 패턴은 또래의 혈기왕성한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패턴이었고 그래서 친구들은 그런 데런을 두고 수도승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심각하게 보였나?”
 정작 본인은 전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조금은 놀라웠다.
 “그래.”
 “뭐 너희들이 보기에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말은 그렇게 하였어도 데런은 그런 자신을 그다지 걱정하진 않았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나 12년 동안 수련해 온 정인공이 중대 고비를 맞이하고 있었고 그 고비를 제대로 넘기는 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루디와 다시 만날 거야?”
 “만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그동안 너희들이 봐서 알잖아?”
 “하긴.”
 데런의 말처럼 루디와의 관계는 다른 친구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이 똑같이 대하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을 하고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는 동안 또 다른 차가 주차장에 들어서더니 짐의 차 옆에 차를 세웠다.
 “어머! 안녕. 루디?”
 “안녕. 일리노아. 데런도 안녕? 오늘은 기분이 어때?”
 “어 좋아. 넌 어때 루디?”
 단지 인사치례로 한 말이었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늘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루디는 얼굴 하나 가득 미소를 띠운 채 데런에게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도. 한데 데런, 오늘도 도장에 갈 거지?”
 “어. 당연히 가야지. 이제 대표 선발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럼 이따가 내 차로 같이 갈래?”
 “그래. 그렇게 해. 난 오늘 도장에 좀 늦게 가야 할 것 같으니 말이야.”
 주차를 마친 짐이 차에서 내리면서 데런에게 말하였다. 한데 그런 말을 하는 짐의 얼굴에는 조금은 짓궂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안녕, 짐?”
 “안녕, 일리노아. 우린 이만 가자.”
 “어? 어, 그래. 그럼 나중에 봐, 두 사람.”
 “어. 잘 가.”
 데런이 뭐라 하기도 전에 짐과 일리노아는 팔짱을 낀 채 학교 건물 쪽으로 걸어가며 무엇이 그리도 좋은 것인지 키득거리며 서로의 몸을 건드렸다.
 “부럽지 않아?”
 “음? 뭐가?”
 “저 둘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 말이야.”
 전형적인 십 대 연인들처럼 서로 장난을 치며 몸을 부대끼는 모습이었다.
 “훗! 글쎄?”
 “넌 정말 이상해.”
 데런 또한 그 누구보다 건강한 십 대 청소년이었다. 당연히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의 곁에 아름답고 밝은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열정적인 여자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었고, 지금은 그것을 위해 잠시 다른 것들을 미루어 두고 있을 뿐이었다. 하니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이상한 것은 전혀 없었다.
 “내가? 아니. 한데 오늘은 그런 말을 많이 듣네?”
 “너의 가장 친구들조차도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 네게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건 문제가 아니란 것이야.”
 “그럼 뭐가 문제인데?”
 “내게는 더 중요한 다른 일이 있다는 것이지. 그것을 위해 다른 것은 잠시 미루어 둘 뿐이야.”
 “그게 뭔데?”
 “그건 네가 알 필요가 없지 않을까?”
 “······!”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할 의도는 없었지만 어쨌든 말을 해 놓고 보니 상대를 아프게 한 말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데런이 뒤늦게 사과를 하였다.
 “미안해.”
 “못됐어, 넌.”
 “미안해, 루디. 널 아프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어.”
 “정말 내게 미안해?”
 “어.”
 “그래? 그럼 사과하는 의미로 이따가 도장에 같이 가. 내 차로. 어때?”
 이번에는 데런이 당할 차례였다. 만약 데런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았다면 그저 나쁜 녀석이라고 욕을 한바탕 해 주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녀가 아는 데런은 절대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상대하지는 않았다.
 설사 그것이 자신을 무척이나 귀찮게 하는 상대라 해도 말이다. 그녀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데런은 한국계 이민자였고, 매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그는 학업 성취도뿐만 아니라 행동 또한 모두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로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때로는 그것이 지나쳐 사람들이 멀어지게 만들 정도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그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 행동을 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그동안 알아본 결론이었다.
 물론 사람이다 보니 말이나 행동에 실수를 할 때도 있고, 데런도 그런 실수를 할 때도 있지만 그런 자신의 실수를 수습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훗! 꼼짝없이 당했군.”
 “호호.”
 “좋아. 그렇게 하자.”
 “좋았어! 그럼 이제 수업 들으러 갈까?”
 “그래.”
 루딩의 수업 시간표는 데런과 똑같았기에 두 사람은 학교에 있는 동안 내내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서도 아침에 한 약속 때문에 두 사람은 함께 태권도 도장으로 향했다.
 실상 두 사람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지난해에 있었던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겸한 선발전에서였다. 루디는 출전을 한 선수가 아니라 방청객으로 관중석에서 경기들을 지켜보았지만 그녀 또한 태권도 2단의 유단자였다.
 그녀가 데런이 다니는 학교에 전학을 온 그날부터 태권도 도장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데런은 그녀가 처음 도장에 모습을 나타냈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리노아만큼,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미녀가 도장에 모습을 나타냈으니 도장 전체가 한바탕 큰 소란이 일었었다.
 그 이후로 도장의 많은 사내들이 그녀를 연모하기 시작하였지만 데런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살갑게 대하질 않는 그녀의 행동에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도복으로 갈아입고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까진 함께하였지만 그 이후에는 두 사람이 각기 다르게 움직여야 했다.
 이미 4단인 데런은 개인 수련을 하지만 2단인 루디는 다른 사범으로부터 수업을 받아야 했다. 4단이 된 이후에도 그는 품새와 태권도의 각 동작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수련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사람의 몸이란 이런 것인가? 이렇게 서로 각자 다른 조직들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비로소 큰 힘이 만들어지는구나.’
 일관의 단계는 몸의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효용이 있었다. 이는 임금과 다수의 신하들이 나누는 국정의 내용을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되었기에 만들어진 기능이었다.
 원래는 청력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그것이 청력뿐만 아니라 몸의 감각 전체를 발달시키는 것으로 발전한 것이다.
 정인공의 기본은 선도仙道에 두고 있었다. 정인공을 창안한 최병기란 자의 스승이 자운거사로, 선도에서는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고 최병기는 그런 자운거사로부터 모든 것을 전수받은 인물이었다.
 선도의 최대 목표는 신선이 되는 것이고 이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몸을 조화롭게 만들어 가는 것에 주력하였다. 그 방법으로 선도에서는 양생법養生法이 존재하였고 정인공 또한 이러한 양생법을 통해 만들어진 수련법이었다.
 이처럼 몸을 조화롭게 만든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몸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고,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몸이 균형을 이루고, 이를 통해서 조화를 이룰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어떤 스포츠를 배울 때 자세에 대해서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을 통해 더 빠르게 몸을 움직이게 하고, 더 강력한 힘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의도한 것이었든 그렇지 않았든 정인공은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해 유난히 몸의 조화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는데 그 방법으로 몸의 동작, 즉 자세를 바르게 하는 방법을 취했다.
 오죽하면 정인공의 1단계인 입식의 단계에서는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을, 그리고 2단계인 입아의 단계에서 108가지 동작을 통해 체력을 기르는 방법을 별도로 만들었을까.
 이러한 모든 것이 몸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것이 의도하지 않은 전혀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격렬한 움직임을 가지는 격투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일격에 무너뜨릴 수 있는 빠르고 강력한 힘의 투사였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르고 정확한 자세와 몸의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때였다. 몸이 조화를 이루면 이룰수록 더 빠르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즉 최병기는 사관으로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몸의 감각, 그중에서도 청각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만든 정인심공이 실재로는 그가 의도했던 것 이상의 효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정인공을 만드셨던 그분조차도 정인공에 이런 효능까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셨을 거야. 아니 그분도 정인심공을 만드시긴 하였어도 직접 이것을 수련하시지는 못하셨던 것이 분명해.’
 데런은 그동안 정인공을 만든 최병기라는 자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하였다. 물론 미국에 사는 그가 그 존재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최병기라는 자에 대해 조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이를 위해 관장인 박태산을 통해 사학을 전공한 교수를 소개받았고 그를 통해서 최병기라는 인물에 대해 나름 조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사했다.
 최병기는 문종 때에 사관이 되어 단종 때 그는 사헌부 관리가 되었는데 단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세조를 반대하였다가 세조 즉위 연초에 사약을 받은 인물이었다.
 한데 정인공은 그가 문종 때에 창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오명국이 우연히 고서점에서 발견한 정인공 비급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다.
 결국 최병기는 스승인 자운거사로부터 전수받은 선도를 바탕으로 정인공을 만들긴 하였지만 그 본인이 그 모든 것을 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진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최근 유난히 데런이 정인공 수련에 집중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때문이었다. 4단계인 일관의 단계에 들어서면서 그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과연 그러한 것이 가능할까 싶은 일들을 경험하게 되자 더욱더 그것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정인공이 가져다주는 신비로움에 빠져 수련을 하고 있는 그는 스스로 주변과 완벽하게 차단한 채 자신만의 세상에서 온몸으로 느껴지는 신비로움에 한껏 빠져 있었다.
 물론 그런 그를 도장의 모든 이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평생 저런 모습은 처음이군.”
 관장인 박태산이 태권도을 수련한 것도 어느덧 45년이 돼 간다.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 국기원은 물론, 미국태권도연맹 사람들과 잦은 의견 충돌을 보여 결국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공인 8단인 그는 실력만 놓고 본다면 그를 아래에 두고 있는 실력자의 수가 불과 열 명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다.
 그런 그조차도 지금 데런이 보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할 정도로 데런의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아름다움과 함께 강렬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의 태권도 최고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
 많은 이들이 그런 박태산의 말에 동조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처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데런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 그러한 것이었다.
 “음?”
 호흡을 정리하면서 수련을 마치고 땀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데런은 도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왜들 그러나 싶어졌다.
 “왜들 그렇게······.”
 왜 자기를 그렇게 이상한 눈빛과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인지 영문을 알지 못하는 데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당혹스러움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바로 루디였다.
 “여기. 땀 닦아.”
 “어? 어······ 고마워 루디.”
 “어서 샤워해. 내가 도서관까지 데려다 줄게.”
 “어? 어······.”
 샤워를 마치고 도장을 떠날 때에도 데런은 왜 도장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너 뭐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아까 보여 줬던 그 모습들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이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것이지?”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상태였는지 모를 정도로 그는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던 것이다.
 “정말 몰라?”
 “글쎄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고.”
 여전히 영문을 몰라 하는 데런을 보면서 루디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뭔가 표현을 하고 싶은데 차마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방법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오늘 네가 보여 준 모습은······ 그건······ 그건 정말이지······. 휴, 사실 나도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
 “전부터 너의 동작이 정확하고 그런 만큼 아름답게 느껴지긴 했지만 오늘은 아니었어.”
 “음······ 어땠는데?”
 “이런 표현이 맞는지 솔직히 모르겠어. 하지만 오늘 본 넌······ 모든 것이 살아 있었어.”
 “살아 있었다고?”
 “그래, 그랬어. 네 움직임 모두가 생명이 있는 것처럼 살아 있었어.”
 야구 중계를 보다 보면 투수가 던진 공을 설명할 때 볼 끝이 살아 있다는 표현을 간혹 볼 수 있다. 이는 그만큼 볼의 무브먼트movement, 즉 움직임이 좋다는 것으로 직구의 경우에는 초속과 종속의 변화가 거의 없는 경우를, 그리고 변화구의 경우에는 의도했던 변화 이상의 변화가 옴으로써 타자들이 쉽게 공략하기 어렵게 만들거나 설사 공략을 당한다 하더라도 볼에 실린 힘이나 변화에 압도되어 제대로 된 타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처럼 오늘 데런이 보인 움직임은 정확할 뿐만 아니라 그 동작 하나하나에 생명력이 느껴졌다. 아마 누군가가 그런 데런의 앞에 서 있었다면 그는 분명 데런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면서도 마치 불가항력적인 일을 당할 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관장님께서도 오늘 네 움직임을 보면서 아마 당신조차도 오늘의 널 감당할 순 없을 거라 하셨을 정도였어.”
 솔직히 놀랐다. 자신이 오늘 느낀 그 특별한 느낌이 비단 느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루디의 말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을 하자 데런은 앞으로 남들 앞에서 정인공과 함께 태권도를 수련하는 것을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일종의 러너스하이runner’s high 현상이 아닐까 생각되긴 하지만······.”
 중간 강도의 운동을 30분 이상 계속했을 때 느껴지는 일종의 행복감을 뜻하는 이 말은 사실 데런이 보여 주었던 그 신비스러운 움직임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지만 달리 설명할 근거가 없었다.
 “아무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너란 사람은 볼 때마다 날 놀랍게 만든다는 것이야.”
 “내가?”
 “응.”
 “하하. 놀랄 일도 참 많네. 한데 배고프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지자 엉겁결에 한 말이었다. 한데 막상 말을 해 놓고 보니 정말로 배가 고파져 왔다.
 “배고파? 그럼 뭣 좀 먹으러 갈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좋았어. 그럼 내가 좋은 곳 알고 있으니 그리로 가자.”
 배가 고파 간단하게 핫도그라도 하나 먹을까 생각했는데 이때다 싶었는지 루디는 자신이 잘 아는 곳이 있다며 그리로 가자 했다.
 “좋은 곳?”
 “어. 우연하게 알게 된 곳인데 너도 무척 마음에 들 거야.”
 “그래? 한데 나한테 지금 핫도그 먹을 정도밖에 돈이 없는데?”
 “그럼 이번엔 내가 낼게. 다음엔 네가 내. 어때?”
 간혹 느끼는 것이지만 루디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 이상한 면이 많았다. 입고 있는 옷이나 타고 다니는 차 같은 것은 그저 중산층 정도 가정의 아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투나 어법, 그리고 행동을 보면 그녀가 체계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배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물론 지금은 그래도 그러한 것이 어느 정도 희석되긴 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녀에게서는 특별한 자들만이 접할 수 있는 고급스러움이 몸에 배어 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훗!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그럼 이왕 부탁하는 김에 도서관에도 데려다 줄래?”
 “좋아! 아예 집에까지 데려다 주면 되겠지?”
 “그거 너무 신세를 많이 지는 것 같은데?”
 “호호. 나야 좋은 일이지. 네가 신세 졌다고 생각하면 다음엔 내게 그만큼 더 잘해 주지 않겠어?”
 이러한 점이 루디의 장점이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언제나 당당했으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이처럼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것도 지나치게 되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루디는 그 선을 넘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 그러자고. 다음에 영화 보러 같이 가자. 어때?”
 “좋지. 좋아.”
 “하하.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자.”
 
 한동안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수련을 할 만한 장소를 찾느라 데런은 제대로 수련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지난번 일로 인해 도장에서는 더 이상 정인공과 함께 태권도를 수련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집 뒷마당에서 하기도 그런 것이 뒷마당에는 아버지의 취미인 가구를 만드는 작업장 겸 창고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여유 공간이 전혀 없었다.
 결국 가장 만만한 곳이 그가 지난 12년 동안 다녔던 태권도 도장이기에 데런은 박태산에게 사정을 말하고 도장에서 지낼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때마침 2명의 사범 중 한 사람이 갑자기 생긴 개인사정으로 인해 바로 그만두어야 한다며 사범을 구하기 위한 광고를 내려 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데런이 사범이 되어 2, 3타임을 가르치는 조건으로 도장에서 지내도 좋다는 대답을 들었다. 물론 별도로 약간의 대가도 함께 제안받았다.
 “해서 도장에서 지내겠다 이 말이냐?”
 “예, 할아버지.”
 “이 아빤 반대다.”
 “엄마도 반대다. 이제 앞으로 2, 3년 후면 너도 독립을 할 것이겠지? 그때 해도 늦지 않은데 왜 그렇게 서둘러 엄마 품을 떠나려고 하니?”
 “그게 아니에요, 엄마.”
 “그게 아니면 뭐지? 태권도 수련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니? 난 네가 왜 그렇게 운동에 매달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이 아빠도 같은 생각이란다. 넌 이미 오래 전에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어. 짐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도 굳이 널 나무라지는 않았단다. 친구와 함께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특히 짐 같은 아이라면 말이다.”
 이미 학교 선생님들은 부모님과의 면담을 통해 데런의 학업 성취도가 고등학교 수준을 넘어선 상태라는 것을 설명하고 조기 졸업과 대학 진학을 생각해 보라고 여러 차례 조언하였다.
 하지만 데런이 조기 졸업을 극구 반대한 것이 모두 친구인 짐과 좀 더 소년 시절을 보내고 싶어서라는 것을 알고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뛰어난 성적도 좋지만 좋은 친구, 평생을 함께할 그런 친구를 만드는 것도 좋은 일이겠다 싶어 굳이 강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운동을 하기 위해 집을 나간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구나. 게다가 넌 어차피 짐과 함께 태권도 대표로 선발되어서 한국에 다녀오는 것 정도로만 운동을 할 계획이었잖느냐? 하면 계획을 바꾼 것이냐?”
 “그건 아니지만······.”
 지금도 어렸을 때의 계획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태권도 선수가 되어 공짜로 한국에 다녀오는 것이 그의 삶의 계획의 일부였으며 그 계획이 달성되면 태권도 선수로 활동할 생각은 지금도 없었다.
 다만 아직 그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정인공의 실체와 그 끝을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난 허락하마.”
 “아버님?”
 “아버님!”
 손자인 데런이 체육관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 오명국이 허락을 하자 아들과 며느리는 당연히 이에 반발하려 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이민 온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집안에서는 여전히 오명국이 가장 중요한 결정권자였다.
 “너희들이 준혁이가 나가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아쉬움과 걱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단다. 부모로서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부모이니까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단다.”
 “······.”
 “그건 바로 부모이니까 자식의 장래 또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준혁이가 그동안 너희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을 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더냐?”
 “그건 아니지만······ 하지만 아버님, 준혁이는 아직 부모의 손길이 더 필요한 어린아이입니다.”
 17살이라는 나이가 분명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부모의 보살핌이 좀 더 필요한 그런 나이이기도 하였다.
 “아가. 네 말도 맞다. 하지만 혁이가 이런 말을 할 때에는 나름 많이 생각을 하고 말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먼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하니 허락해 주거라.”
 정인공을 수련하기 위해 그렇다는 것을 잘 아는 오명국은 데런을 위해 이처럼 아들과 며느리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도 자신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정인공의 끝을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많은 것을 손자인 데런을 통해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데런의 부모는 마땅치는 않았지만 그가 도장에서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붕괴
 
 
 
 “이제 다 나른 것인가?”
 짐이라고 해 봐야 사실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간단한 세면도구와 옷가지 몇 벌. 그리고 책들과 컴퓨터 한 대와 자전거 한 대가 전부였다.
 “예, 아버지.”
 비록 집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도장이었지만 그래도 자식을 집에서 내보낸다는 것이 못마땅한 때문에 얼마 되지 않는 이삿짐을 나르는 내내 토니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후······ 잠깐 앉자.”
 “예.”
 짐이 이사를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도 거절케 한 후 직접 이삿짐을 날라 준 토니는 착잡한 마음이 되어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날······ 네 엄마가 많이 울었단다.”
 “죄송해요, 아버지.”
 “아니다. 언젠가 이런 때가 올 것이라는 걸 모든 부모들은 다 알고 있지. 다만 가능하다면 그런 때가 조금은 더 늦게 오길 바라는 것이지.”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워낙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때문인지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는 한국적인 사고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그였다.
 “네가 벌써 우리의 품을 벗어날 때가 되었다니 참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구나.”
 “······.”
 “알지? 이 아빠와 엄마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또 믿는지 말이다.”
 “예. 잘 알고 있어요. 저도 아버지와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잘할게요.”
 “그래. 넌 늘 네가 한 말을 지키려 했지. 아니 지켜 왔지.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널 믿는단다.”
 이 세상에서 가족만큼 가까운 사이는 없었다. 흔히 부부 사이를 무촌이라 하여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또한 틀린 말이기도 하다.
 부부 사이가 무촌인 것은 그만큼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며, 부부는 혈연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촌수를 두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부모와 자식 간은 1촌이라는 촌수를 가지고 있다. 즉 혈연관계 중에서는 가장 가까운 존재가 바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
 그런 만큼 부모와 자식은 가깝다는 뜻이고 당연히 모든 부모는 모든 자식들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부모나 가족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사람들은 의외로 그리 많지가 않다.
 가장 사랑하고, 신뢰해야 할 가족들에게서 정작 신뢰받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알수록 그만큼 신뢰를 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런은 가족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 아니 데런을 아는 모든 이들이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네가 그만큼 잘한 것이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는단다.”
 “예.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게요.”
 “그래. 그렇게 하리라 믿으마. 그리고 엄마에게는 자주 연락을 하렴. 약속대로 주말엔 꼭 집에 오고 말이다.”
 “예, 아버지. 그럴게요.”
 “그래.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다. 네 엄마가 또 방에서 울고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야.”
 “예······.”
 “그래.”
 아버지가 돌아간 후에 짐과 일리노아 그리고 루디가 차례로 도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참에 나도 도장에서 지낼까? 어차피 얼마 후면 전미선수권 대회가 있는데 말이야.”
 “아서라. 학교에서 너 보는 것도 이제 슬슬 지겨운 판인데 여기서 아예 같이 살자고? 그건 싫다.”
 “어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친구인 네가 혼자 외롭게 보낼 것이 안타까워 기꺼이 친구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하겠다는 것인데?”
 “웃기고 있네. 너 아주머니 잔소리는 물론 엘리사를 돌보기 싫어서 그러는 것인지 누가 모를 줄 알고?”
 엘리사는 짐의 막냇동생으로 이제 겨우 2살 된 여동생이었다. 유난히 정이 좋은 케인 부부는 이제 2살 된 늦둥이 엘리사를 포함하여 5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자신의 동생들은 사랑하지만 잠시도 소용할 날이 없는 그런 집안 환경은 짐을 무척 화나게 만들곤 한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맞벌이를 하는 부모로 인해 나이 든 할머니는 물론 어린 동생들까지도 돌봐야 했다. 어렸을 때야 그것으로 용돈도 벌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치매기가 있는 할머니와 나이 어린 동생들을 자신이 돌봐야 하는 그런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 때가 많았다.
 “쳇! 알면서 그런 말을 하냐?”
 “어쩌겠어. 지금 네가 돕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잖아?”
 “휴······ 그래. 그렇지. 어쨌든 가끔 여기 오는 것은 괜찮겠지?”
 “뭐 나야 상관없지. 관장님이랑 윤 사범님만 괜찮다고 하면 말이야.”
 “그럼 그래야겠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우리들 중 가장 먼저 독립을 한 널 축하하기 위한 파티를 해야 하지 않겠어? 안 그래?”
 “호호. 맞아. 그건 그래.”
 “맞아. 축하할 일은 축하를 해야지.”
 짐의 말에 일리노아는 물론 루디까지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나섰다.
 “그래. 그러자고. 오늘은 내가 한 턱 내도록 하지.”
 “오호? 우리 짠돌이께서 근사하게 한 턱을 낸다 이거지? 이거 바가지 한번 씌워야겠는데? 하하하.”
 “호호.”
 “그래. 그러자고. 아! 지난번에 갔던 그곳에 가자.”
 “그곳?”
 “어. 루디 덕분에 알게 된 곳인데 한국 식당이야. 맛이 참 좋더라고.”
 인근 지역에 한국 식당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또 그런 곳에 그동안 한 번도 안 가 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번 루디와 함께 간 한국 식당은 최근에 개점을 한 곳이었고 궁중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으로 깔끔한 맛이 일품인 그러한 곳이었다.
 이미 할아버지와 부모에게 대접을 하기도 하였고 다들 음식 맛에 대해 완전히 만족했었다. 다만 가격이 상당히 비싼 곳으로 할아버지와 부모님을 대접하기 위해 그동안 주식 투자로 모은 돈 중 일부를 헐어야만 했던 곳이다.
 물론 이번에도 그래야 하겠지만 데런은 기꺼이 친구들을 위해 그 정도 비용을 치를 생각이었다.
 “오? 언제 둘이서 그런 곳엘 간 거야?”
 “그러게 말이야.”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어서들 이러나자. 아니, 먼저 전화부터 걸어 예약을 해야 하나?”
 “그건 내가 할게.”
 “그래, 루디. 그럼 예약은 네가 하고. 나는 좀 씻고 올게.”
 “그래. 알았어.”
 “어쭈? 두 사람 뭔가 좀 달라졌는데? 그렇지 않아, 일리?”
 “맞아.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은데? 두 사람 그사이에 가까워진 것 같아. 그동안 우리 몰래 많이 가까워진 거야?”
 “글쎄?”
 데런과의 관계에 대해서 두 사람에게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루디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본 후에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쌀쌀거리기는.”
 “정말 어쩔 때는 너무한다 싶어.”
 “그러면서도 데런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참 인연은 인연인가 봐. 안 그래?”
 “정말 그런 것 같아.”
 “자, 우리도 이만 나가서 기다리자.”
 “그래.”
 
 “호! 이런 곳에서 식사를 했단 말이지? 단둘이서?”
 영어로는 Palace라는, 한자로는 궁宮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식 전문 식당은 주로 조선시대의 궁중음식을 다루는 식당인 만큼 상당히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을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자신들 같은 학생들 신분, 아니 설사 성인이라 하더라도 어지간한 벌이로는 가기 힘든 그런 고급 식당이란 뜻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짐한테 이야길 들었지만 데런이 이런 곳에 올 정도로 부자였다니 놀라운데?”
 “일리!”
 “어? 왜?”
 데런이 어려서부터 용돈을 모아 할아버지 명의를 빌려 주식 투자를 해 오고 있다는 것은 데런의 부모조차도 불과 얼마 전에 알았을 정도로 비밀인 이야기였다.
 한데 일리노아가 그러한 비밀을 무심결에 말해 버리자 비밀을 누설한 짐이 당황하여 그녀의 말을 막으려 하였지만 이미 늦어 버린 일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일리노아의 말에 루디가 잔뜩 궁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별것 아니야. 그냥 나중에 대학 갈 때 학비로 쓰기 위해 용돈을 모아서 조그맣게 주식 투자를 한 것이 있어.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야.”
 짐이 그런 이야기까지 일리노아와 주고받은 것에 대해 조금은 실망도 하고 또 화도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황에서 친구인 짐을 무안하게 만들기는 더 싫었기에 적당히 설명을 하였다.
 “주식을?”
 “어.”
 “대단한데? 직접 주식에 투자를 하다니 말이야.”
 대학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식 투자를 하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꽤나 놀라운 일이었는데 상황을 보아하니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 같아 보이자 루디의 눈이 반짝였다.
 “그럴 정도도 아니야. 자! 어쨌든 주문들 하자.”
 “어? 그, 그래.”
 다소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주문할 것을 재촉하였다.
 “어때? 이대로 식사만 하고 끝내긴 그렇잖아? 우리 클럽에 가서 한바탕 놀아 보는 것 어때?”
 짐이 식사를 끝낸 후에 클럽에 가자는 제안을 해 왔다.
 “우린 나이가 안 되잖아?”
 “그렇지. 우린 아직 미성년자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클럽에 갈 수 없지.”
 “그런데 무슨 클럽을 가자고 해?”
 “다 방법이 있지.”
 “방법?”
 “그래. 내게 신분증이 하나 있어.”
 “신분증? 너 설마?”
 위조 신분증을 사용한다는 것은 꽤나 중대한 범죄였다. 자칫 이로 인해 자신의 미래를 망칠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것은 절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와는 달리 자라면서 서로 좋아하는 부분이 달라 함께하는 부분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연스러운 현상 속에서 결국 서로는 어느 정도 소원해지기 마련이고, 그 소원해지는 부분만큼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적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데 데런은 짐이 이처럼 법을 어기는 행동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에 조금은, 아니 상당히 놀랐다.
 “이 자식!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냥 우연히 길에서 주운 것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경찰에 줬어야지.”
 “그럴 생각이야. 다만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이지.”
 “그렇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경찰에 건네주라고.”
 “쳇! 알았다, 알았어. 고지식해 가지고서는······.”
 짐이 투덜거리자 뭐라 한마디 충고를 해 주려 하였지만 그보다는 루디가 좀 더 빨랐다. 그녀는 두 친구의 사이가 불편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지 말고 내가 아는 곳에 갈래?”
 “네가 아는 곳? 어딘데?”
 일리노아도 루디가 두 친구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아 한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내 끼어들었다.
 “괜찮은 곳이야. 가면 재미있을 것이야.”
 “그렇단 말이지? 좋았어! 난 찬성!”
 짐 또한 서먹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짐짓 과장된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세 사람의 시선이 데런에게 향했다.
 “휴······ 그래, 가자. 아직 그런 곳에 가 본 적이 없으니 이참에 한번 가 보는 것도 좋겠지.”
 사실 썩 내키진 않았다. 수련을 한다는 이유로 집이 아닌 도장에서 지내기로 한 것인데 집을 나온 첫날부터 친구들에 휩쓸려 다니면서 그동안 생각하지도 않았던 클럽에 간다는 것도 자신의 독립을 허락해 준 할아버지와 부모님께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불알친구인 짐이 주운 신분증으로 미성년자들이 출입할 수 없는 클럽에 가자고 한 것도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친구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낯선 모습이었기에 마음이 이래저래 편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자리를 끝낸다는 것도 분위기를 망칠 뿐만 아니라 친구 사이도 벌어질 것 같아 결국 데런도 이들과 함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좋아. 그럼 일어나자.”
 “그래.”
 식사를 마치고 루디가 안내하는 클럽에 도착한 세 사람은 놀란 눈빛으로 루디를 바라보았다.
 “이곳이 정말 네가 아는 곳이란 말이야?”
 “어. 왜?”
 “왜? 여긴 이 지역의 최고 부자들만 가는 곳으로 알려진 클럽이라고!”
 짐의 말처럼 루디가 안내한 곳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최고의 부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회원제로 운영하는 최고급 클럽이었다.
 간혹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 클럽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만 그 누구도 클럽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는데, 공립학교에 다니는 중산층 가족인 학생들이 백만장자들이나 그 가족들이 드나들 수 있는 최고급 회원제 클럽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게 뭐?”
 “······.”
 자신은 당연히 이런 곳에 출입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듯 말하는 루디의 행동에 짐과 일리노아는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라기는 데런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데런은 그동안 그녀에게서 무엇인가 자신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았던 것이 있었기에 짐이나 일리노아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그래서였군.”
 “무슨 뜻이야?”
 데런이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루디는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지 의문을 담고 물었다.
 “간혹 네게서 우리와는 다른 위화감? 아니, 이질감이라고 해야겠군. 아무튼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어.”
 “어떤 점이?”
 데런의 말에 루디는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가령 너의 말투나 사용하는 어휘, 그리고 행동들이 말이야.”
 “그런 것이 어땠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네가 사용하는 말투나 어휘들, 그리고 너의 행동들은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전문적으로 배우고 그것이 완전히 몸에 밴 상류층 사회의 사람들 것이었거든.”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 그러질 못했나 보네.”
 여전히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상태였지만 루디의 눈빛에는 데런의 날카로운 관찰력에 대한 약간의 놀라움과 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그 말은······.”
 “맞아.”
 어차피 이곳에 오게 된 이상 더 이상 감출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내 원래 이름은 루디 영이 아니라 린다 피터슨이야.”
 “린다 피터슨? 설마! 그······.”
 피터슨이란 성을 들은 짐이 놀라 제대로 말하지 못한 채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말한 피터슨이란 성은 정황상 미국 내에서도 50대 부자 안에 들어가는 억만장자의 가문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문의 여식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번에는 일리노아가 그런 막강한 집안의 여식이 자신들과 같은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처럼 행세를 하였는지 의문이 들어 물었지만 이내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었다.
 “데런 때문에?”
 전학을 온 이후부터 대놓고 데런을 따라다니던 루디, 아니 린다였다. 그렇다면 억만장자의 딸이 신분을 감추고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처럼 위장을 한 채 공립학교에 전학을 온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었다.
 “맞아.”
 모든 것을 밝힌 린다와 이래저래 많은 일들이 벌어진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짐과 일리노아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데런에게 집중되었다.
 “훗! 억만장자의 딸이 내게 관심을 갖다니 놀랍군.”
 “내가 네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것이 있긴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날 비난하거나 비꼬진 않았으면 좋겠어.”
 “널 비꼬는 것도, 비난하는 것도 아냐. 단지 영화나 소설에서나 나올 만한 일이 내게 일어나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 뿐이지.”
 린다가 솔직하게 자신의 비밀을 밝힌 것에 대해 데런 또한 다른 친구들처럼 놀라긴 했다. 하지만 데런의 반응은 생각한 것만큼 놀라거나, 화를 내거나 하는 것도,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담담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가 이처럼 담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린다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며, 그것은 설사 그녀가 재벌가의 딸이라 해서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모든 사실을 밝힌 린다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데런의 행동에 놀랍다는 표정이 되었다.
 “훗! 역시 내 친구답다.”
 담담하기까지 한 데런의 모습을 보면서 짐이 데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하였다.
 “루디. 아니 이제는 린다라고 해야겠지? 이게 내 친구인 데런의 진짜 모습이야.”
 “무슨 뜻이지?”
 “보고도 몰라? 이 녀석은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대해 덤덤하다 못해 무관심한 녀석이야. 그리고 이런 말이 네겐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아직 여자로 보이진 않는 것 같다.”
 짐이 데런에게 가지고 있는 불만 중 하나가 지나치게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일에도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절제할 때가 많았다.
 특히 대인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유난하다 싶을 정도로 분명하였는데 이러한 데런의 성격으로 인해 짐과 같은, 아니 짐보다는 덜하다 하더라도 서로 속내를 털어놓는 친구가 몇 되지 않았다.
 “짐.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하면······.”
 “뭐 괜찮아. 나도 데런이 날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으니까 말이야.”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짐의 행동을 나무란 일리노아가 린다의 눈치를 살폈지만 린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하나 그녀의 속마음은 아주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미국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를 그만두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다니는 학교를, 이름은 물론 모든 것을 바꿔 가면서까지 다녔던 이유가 바로 데런 때문이었는데 정작 데런 그 자신은 자신을 그저 또 다른 한 명의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니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주입당한, 가급적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는 교육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데런에게 왜 자신을 친구 이상으로 보지 않느냐는 것인지를 따지든지, 그도 아니면 화를 내거나 매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색하지 않긴 하였지만 가슴 한구석이 옥죄어 오는 것을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지자 다시 한 번 가면을 쓴 표정으로 분위기를 바꾸려 하였다.
 “어때? 들어갈까?”
 “당연하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안 그래, 데런?”
 “훗! 그건 그래. 나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긴 하다.”
 “호호. 그렇다면 들어들 가자고.”
 “한데 여긴 신분증 검사하지 않나?”
 “그거 웃으라고 한 말이지?”
 “아닌데?”
 “호호.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데런. 여기는 경찰 단속이 없는 곳이니까 말이야.”
 하긴 소위 명가나 갑부들만 드나드는 회원제 클럽을 영장도 없이 단속할 경찰은 없었다.
 “그럼······.”
 과연 최고의 부자들만 모이는 곳이라 그런지 클럽의 모든 것이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는 옷도 빌려 줘?”
 “이곳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놀기에 적당하지 않은 옷을 입고 오는 경우가 있거든. 그래서 치수별로 옷을 준비해 놓고 있어.”
 클럽의 지배인이 복장 상태를 지적하면서 미리 구비해 놓은 옷으로 갈아입을 것을 권유하자 이를 듣고 있던 린다가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는 식으로 클럽의 여러 다양한 서비스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남자분들은 이쪽 탈의실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안내를 받아 남성용 탈의실에 들어간 짐과 데런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 이럴 수가! 역시 돈이 대단하네! 데런, 너도 보이지? 여기 있는 이 옷들 말이야! 하나같이 유명 디자이너들의 옷이야!”
 “······.”
 패션에는 문외한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데런도 친구들의 대화 도중에 나오는 몇몇 유명 디자이너나 브랜드를 들어서 알고 있는데 그런 유명 디자이너나 브랜드의 옷들이 종류별로, 그리고 치수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탈의실에는 시계나 목걸이 같은 소품들도 있었는데 그러한 것들 또한 하나같이 유명 브랜드의 진품들이었다.
 “이래서 다들 죽어라고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겠지?”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하니까.”
 “그러게. 후······ 어쨌든 재벌들이란 참······.”
 “부러워?”
 “그럼! 넌 이런 것을 보고도 부럽지 않단 것이냐?”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부럽지. 한데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투지가 생기네.”
 “뭔 또 철학적인 말씀을 하시려고?”
 “큭! 그냥 그렇다고. 이 사람들도 처음부터 이렇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진 않았을 것 아니야?”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 루디, 아니 린다처럼 말이야.”
 “이그. 내 말은······.”
 “알아.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말이야. 내가 그렇게 바본지 아냐? 그냥 장난 한번 쳐 본 것이지. 그리고 또 알아.”
 “뭘?”
 “네가 나 때문에 조기 졸업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 그것 때문에 네가 더 빨리 무엇인가, 그러니까 네가 되고 싶었던 모습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야.”
 “갑자기 왜 그래?”
 뜬금없이 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는 짐의 행동에 머쓱해진 데런이었다.
 “이 세상에서 너란 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야.”
 “훗! 새삼스럽게 왜 그래?”
 “미안해서. 그거 알아?”
 “뭘?”
 “일리노아가 처음엔 내가 아닌 너에게 관심을 더 많이 가졌던 것을 말이야.”
 “그랬대?”
 마치 별것 아닌 일이네 하는 식으로 말하는 친구의 모습에 짐은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건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잖아?”
 “그래, 맞아. 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은 찜찜했어.”
 “마치 내 몫의 파이를 네가 먹어 버린 것처럼?”
 “이런! 아직도 그걸 안 잊었냐?”
 “큭! 너도 알지, 내 기억력이 유난히 좋다는 것을 말이야.”
 “어련하시겠어. 그렇다고 6살 때 일을 아직도 이야길 하는 놈이 어디 있냐?”
 “없었던 일을 만든 것도 아닌데 뭘 그래? 그리고 말이야, 넌 충분히 내 몇 년의 시간을 써도 전혀 아깝지 않은 가장 소중한 내 친구라는 것을 알아 두라고. 알겠지?”
 “쨔식······.”
 “자! 대충 골라 입고 나가도록 하자.”
 “그래.”
 대충 옷을 고르자 탈의실 안에 있던 직원이 그 옷의 치수와 상태에 대해서 기록한 후 옷을 건네주었고 그 옷들로 갈아입은 두 사람이 탈의실을 나갔다.
 “역시 여자들이야.”
 아무래도 남자들에 비해 치장해야 할 부분이 많은 여자들이었기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에 들어간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여자는 나오지 않았다.
 슬슬 기다림이 지루함을 지나쳐 짜증이 나려 하였지만 탈의실을 나온 두 여자의 모습을 본 짐과 데런은 그 기다림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었다.
 “우와! 일리!”
 “······.”
 일리노아는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똑똑한 머리와는 달리 외모에서는 백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린다는 이지적이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녀였다.
 두 소녀 모두 학교 내에서 최고의 미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성숙하면서도 또한 여백이 남아 있는 두 소녀의 출현은 사람들, 특히 남성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야호!”
 본격적으로 놀기 위해 스테이지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 그곳은 또 다른 별천지였다. 현란한 각종 조명과 DJ의 자극적인 멘트와 그에 맞춘 사람들의 원초적인 흥분을 자아내게 만드는 음악들이 벽면이 흔들릴 정도로 울렸고, 한껏 자신을 드러내는 값비싼 옷들을 걸친 남녀들이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며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VIP룸으로 가자.”
 “VIP룸?”
 클럽에도 손님들의 등급에 따라 어울릴 수 있는 자리가 달랐다. 일반적인 손님들은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다 목이 마르거나 쉬고 싶다면 한쪽에 마련된 바를 이용하지만 그보다 높은 등급인 경우에는 스테이지와 가까운 쪽에 마련된 테이블을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VIP회원의 경우에는 클럽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련된 별도의 공간에 마련된 최고급의 룸에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럴 만한 충분한 재력이 있어야만 가능하겠지만.
 “와우! 보여? 여기서는 스테이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신기해하며 둘러보고 환호성을 질러 대는 짐의 행동에 데런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일리? 우리 나가자!”
 이미 잔뜩 흥분해 있던 짐이 일리노아의 팔을 붙잡고 무작정 스테이지로 나가자고 재촉하였다.
 “어? 어······.”
 “너희들도 어서 가자고! 어서!”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일리노아의 팔을 끌며 룸을 나서는 짐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은 어깨를 으쓱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당장 스테이지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나란히 서서 창을 통해 보이는 스테이지를 바라보았다.
 스테이지는 그야말로 광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재미난 것은 클럽 안에는 남자보다 여자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인데 그것도 저마다 섹시함을 뽐내며 파트너의 눈에 들기 위하여 마음껏 끼를 발산하고 있었다.
 “웃긴 것이 뭔지 알아?”
 “뭔데?”
 “여기에 있는 여자들의 거의 전부가 그저 돈 많은 남자들의 눈에 띄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이지. 부나방처럼 말이야.”
 “그래?”
 “그래. 외모가 조금 뛰어나다 해서 그것을 이용하여 어떻게 하든 돈 좀 있는 남자들을 유혹하려고 별의별 짓들을 다 하는 저런 여자들을 보면 같은 여자로서 치욕감을 느껴.”
 마치 몸을 파는 창녀들을 보듯 잔뜩 경멸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경멸할 필요 있을까?”
 “넌 그럼 그런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단 거야?”
 “그냥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
 “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를 부러워해.”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몸을 굴리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야?”
 “아니. 내 말은 그런 것이 아냐. 네가 말한 그런 사람들은 그것이 그들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야. 저들도 자신의 행동이 부나방 같은 부질없는 몸부림이라는 것 잘 알고 있을 거야.”
 “······.”
 “안타깝고 가여운 일이지.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인데.”
 “그래도 그런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야.”
 “그건 저 사람들 각자가 책임져야 할 자신들의 인생이야. 그것을 두고 정당하다고, 부당하다고 평가할 순 없어. 왜냐하면 저들도 벼랑 끝에 선 채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하는 행동들일 테니 말이야.”
 “너······ 저런 사람들을 동정하는구나?”
 “동정이라?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다만 저들이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비난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
 “넌 어때?”
 “뭐가?”
 “너도 그런 기회가 온다면 잡을 거야?”
 “······!”
 두 사람의 눈빛이 얽혀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연인을 대하는 그러한 눈빛도, 욕망을 담은 그런 눈빛도 아니었다.
 한쪽은 생각을 읽기 힘든 무심한 눈빛이었고 또 다른 한쪽은 어떤 대답이 나올 것인지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그걸 기회라 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라면 그걸 기회라 여기진 않아.”
 “왜?”
 “그건 애정 문제일 뿐이니까.”
 ‘훗! 역시.’
 비록 오늘에서야 알게 된 것이긴 하여도 데런은 자신의 신분에 대해 알면서도 이전과 전혀 다르게 자신을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무덤덤하게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내는 그녀가 지금까지 대한 모든 사내들과는 전혀 달랐다.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모르는 사내들의 경우에는 그녀의 이지적이면서도 귀품이 흐르는 미모에 혹해서, 그리고 그녀의 신분을 알게 된 때에는 그녀의 배경을 욕심내서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였다.
 때문에 그녀는 지금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제외한 그 어떤 남자들도 믿지 못하게 돼 버렸다.
 그런 그녀에게 데런은 처음부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연하게 구경 삼아 한 번 간 대회장에서 데런의 모습을 본 그녀는 그의 진지함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결국 신분을 속이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그녀는 데런을 좀 더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데런이 그동안 자신이 생각해 오던 바로 그런 남자라는 것을.
 “우리도 갈까?”
 “그러자.”
 “칫! 아무리 무도회장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곳에서는 에스코트를 해 주는 것이 사내라고.”
 “하하. 그래? 난 이런 곳은 처음이라서 말이야. 자! 그럼 아가씨, 가실까요?”
 “호호. 그럴까요? 호호호.”
 “하하.”
 
 “이봐! 저 애들 어때?”
 스테이지 쪽으로 나 있는 VIP룸 창을 통해 스테이지를 내려다보던 에릭 히긴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누구?”
 “저기! 스테이지의 오른쪽 구석진 곳에 있는 저 두 금발들 말이야.”
 “오호? 둘 다 좋은데? 크크! 역시 네놈은 사냥꾼이야. 크크크.”
 어려서부터 늘 모든 것을 함께해 오던 삼총사 중 한 친구인 더그 맥클레인 또한 친구인 에릭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확실히 다른 것은 몰라도 여자사냥꾼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에릭의 눈만큼은 인정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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