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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십지제일신마 1

2018.03.05 조회 719 추천 3


 구천십지제일신마 1권
 1장 대폭풍(大暴風) 1
 
 
 숭산(嵩山) 소실봉(小室峯).
 중원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少林寺)가 존재함으로 인해 이 무림 최고의 성역(聖域)이자 영원한 정의(正義)의 가람으로 손꼽히는 곳.
 어두컴컴한 실내를 흐릿하게나마 밝혀 주는 것은 한쪽 벽에 걸린 작은 유등(油燈)이었다.
 기름이 다했음인지 가물가물 타오르는 유등(油登)의 불꽃은 금세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은 지난 백 년 이래 그 누구의 발길도 막아 왔던 소림제일의 금역(禁域) 조사동(祖師洞)에 있는 한 밀실이었다.
 일과(日課)의 시작을 조사동 참배로 일관해 온 소림사는 무엇 때문에 조사동을 절대금역(絶對禁域)으로 선포했을까?
 그 이유를 알리는 말은 백 년 이래 단 한 마디도 강호에 흘러 나오지 않았다.
 다만 소림이 조사동(祖師洞)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림의 생명(生命)!
 그것은 곧 소림사의 모든 힘을 의미한다.
 정신이 나갔거나 미친 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 힘에 맞서려는 자는 이 무림에 아무도 없었다.
 유등의 불꽃이 갑자기 환하게 피어오르면서 실내가 아까보다 훨씬 밝아졌다.
 밝아진 불빛을 빌어 한쪽 구석의 돌 침상 위에 뼈에 껍질을 발라 놓은 듯한 앙상한 체구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한 노승의 모습이 보였다.
 일신에는 낡아빠진 마의승포(麻衣僧袍)를 걸쳤고 특이하게 자색(紫色)을 띤 눈썹은 관자놀이까지 늘어져 있어 나이를 추측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장님인 듯 자미노승(紫眉老僧)의 두 눈은 기이하게도 허연 흰자위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돌 침상 아래 한 장발(長髮)의 중년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물처럼 고요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다.
 대략 서른두세 살 남짓 보이는 청수하고도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상이었다.
 그의 전신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인자하고 장엄한 기운이 서기(瑞氣)처럼 배어 있었다.
 어쩐지 음울하고도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치지직······ 치직······
 조용한 침묵 속으로 심지가 타 들어가는 소리가 스며들면서 실내가 한층 환하게 밝아졌다.
 저 빛이 사그라지면 유등은 곧 꺼질 것이 분명했다.
 갑작스레 밝아진 불빛 탓인지 밀납처럼 창백한 자미노승의 얼굴에도 한 줄기 불그레한 홍조가 피어 올랐다.
 자미노승의 그런 변화를 살펴보던 중년인의 두 눈에는 짙은 슬픔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저 홍조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무껍질처럼 말라비틀어진 자미노승의 입술이 힘겹게 떼어졌다.
 “혜인(慧人)······ 네 손을 다오······.”
 이미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배인 황량한 음성이었다.
 유등의 불꽃이 흔들렸고 덩달아 중년인의 어깨도 짧은 순간 경미한 흔들림을 보였다.
 중년인은 그러나 이내 흔들림을 가라앉히고 두 손을 천천히 자미노승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자미노승은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앙상한 손으로 그의 두 손을 감싸쥐며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따뜻하구나··· 너의 손··· 너무 따뜻해······.”
 “······!”
 자미노승은 두 눈을 스르르 감으며 감회 서린 음성을 흘려냈다.
 “혜인······ 네가 소림에 입문(入門)할 때 세 살이었으니 지금 너의 나이가 꼭 서른셋이겠구나!”
 중년인 혜인의 눈꼬리에 가는 경련이 파문처럼 일어났다.
 이어 무슨 말인가를 하기 위해 입술을 떼려는 순간.
 “혜인······ 듣기만 해라.”
 “······!”
 자미노승은 혜인의 말문을 막으며 엄숙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꼭 백 년 전(百年前)······ 구천십지만마전의 대마종(大魔宗)인 구천십지제일신마(九天十地第一神魔)는 정도무림의 태산(泰山) 소림에게 일천 년을 두고도 씻을 수 없는 최대의 모욕을 안겨 주었다. 아느냐?”
 “압니다.”
 “그 모욕을 견디다 못해 장문사형은 조사동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일천 제자 중 절반이 통분을 못 이겨 스스로의 혀를 깨물었다. 아느냐?”
 “압니다.”
 자미노승의 자색눈썹이 바람도 없는데 파르르 떨렸다.
 “붉은 피(血)가 소림을 적시던 그 날······ 노납은 결심했다. 구천십지제일신마······ 그에게 도전하겠노라고······!”
 “······!”
 “그로부터 칠십 년······ 노납은 천 년 전의 달마조사(達魔祖師) 이래로 그 누구도 연성할 엄두조차 못 내었다는 달마역근세수경(達魔易筋洗髓經)의 가장 심오한 무공인 수미타여래신공(須彌陀如來神功)을 익히기 위해 모든 피와 땀을 쏟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자미노승은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수미타여래신공을 익히기 위한 연성 조건이 무척 까다롭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세 살을 넘어서 시작하면 안 되고······ 세 살 이전에 백 년 수위의 내공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후로는 최소한 백 년 이상의 공력을 지닌 십팔 인(十八人)의 도움을 필수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수미타여래신공이지······.”
 달마조사 이래 아무도 연성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수미타여래신공이다.
 그 이유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노납은 그래서 혜인 너를 택했고 네가 세 살이 되던 해······ 너에게 노납의 사 갑자 내공을 모두 물려주었다. 그리고 지난 삼십 년 동안 백년 공력을 지닌 십팔나한(十八羅漢)이 모두 희생됨으로써 수미타여래신공을 극성(極盛)까지 연마하는 데 성공했다.”
 “······.”
 “혜인,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미노승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두 눈은 무섭도록 텅 비어 있었다.
 자미노승은 혜인을 향해 텅 빈 눈에 초점을 모았다.
 “소림의 복수······ 부질 없는 것이다.”
 “······!”
 “천하 억조창생을 위해······ 너 혜인은 노력해야 한다······.”
 치지직······
 심지가 타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실내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자미노승은 문득 두 눈에서 하얀 광채를 뿜어내며 엄숙하게 말했다.
 “네가 갈 곳은 구천십지만마전! 너는 소림을 나가는 그 순간부터 천하의 대마황(大魔皇)으로 변신해야 한다······!”
 “······!”
 “잔인 무도한······ 그리하여 구천십지제일신마조차도 치를 떨 만큼 흉악한 대마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구천십지만마전에 들 수 있고······ 그 목적의 달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지난 삼십 년간······ 너를 위해 소림제자 일 백인(一百人)은 모든 준비를 완료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혜인의 손을 움켜 쥔 자미노승의 두 손이 부르르 경련했다.
 혜인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정시했다.
 자미노승은 다시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이어 그는 말할 수 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혜인······ 너는······ 누구냐······?”
 실내가 어두워졌다.
 춤추던 유등의 불꽃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먹물처럼 번져 오는 어둠 속에서 혜인의 두 뺨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사백조님······ 소실봉을 벗어나는 그 순간부터······ 소림제자 혜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미노승은 웃었다.
 “헛허······ 나 자미성불(紫眉聖佛)······ 이백 년 이상을 살았으나······ 오늘······ 가장 보람되도다······.”
 혜인은 자미성불의 손에 힘이 풀려 나가는 것을 느끼자 가슴이 철렁했다.
 “사백조님······!”
 “석존(釋尊)께서 말씀하셨느니······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들어가리······.”
 갑자기 노승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혜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사백조님!”
 “······.”
 아무 대답이 없다.
 침묵은 죽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므로.
 순간 한 소리 격렬한 울부짖음이 혜인의 입술을 꿰뚫고 터져 나왔다.
 “사백조님―!”
 그 날 이후 자미성불과 혜인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소림의 조사동에 있었던 이 한 토막의 이야기가 장차 무림천하에 얼마나 무서운 피의 폭풍을 가져올지 짐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장 대폭풍(大暴風) 2
 
 
 1
 
 
 전진파(全眞派)를 아는가?
 ― 율법(律法)에 있어 정통도문(正統道門)과 그 맥(脈)을 달리하며, 중원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 신비도문(神秘道門).
 이것이 무림인들이 전진파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일설에 의하면 천이백 년 전(千二百年前) 천축(天竺)의 기인(奇人) 달탄(達呑)이 천산(天山)에서 수도할 무렵 그의 밑에서 수련하던 황엽풍(黃葉風)이란 도인(道人)이 깨달은 바가 있어 세운 것이라고 전해 오나 그 역시 확인된 바 없다.
 문파내력(門派來歷)이나 무학근원(無學根源) 등이 일체 신비에 싸여 있는 전설(傳說)의 도문(道門), 전진(全眞).
 그 이름을 중원에 처음으로 터뜨린 사람은 무당대조사(武當大祖師) 장삼봉(張三峯)이었다.
 장삼봉은 운명 직전에 수제자 십 인(十人)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 제자들이여! 언제라도 도학(道學)과 무공수련에 허(虛)를 보이지 말라!
 전설의 전진(全眞)은 언제 등장할 지 모른다.
 전진 도가의 학문은 무당보다 높으니 너희들이 수련을 게을리하여 그 힘을 후대(後代)서 퇴락 시킨다면 언젠가는 전진도가에게 크게 당하게 되리라!
 ― 대사존이시여, 전진은 대체 무엇을 일컬음입니까?
 ― 전진은 대저 도(道)와 사(邪)와 신(神)의 최고봉을 일컬음일지니···!
 장삼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전진의 이름은 이렇게 강호에 알려졌다.
 도(道)와 사(邪)와 신(神)의 최고봉― 전진도가(全眞道家)!
 과연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2
 
 
 어느 황폐한 산봉우리.
 정상에는 말라 비틀어져 고사(枯死)한 나무들이 둥글게 돌려서 있었다.
 그 중앙에는 커다랗고 둥근 분지가 움푹 파여 있었다.
 과거에는 호수였던 것 같으나 지금은 물이 바짝 말라 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었다.
 그 분지 중앙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갓 마흔이나 되었을까?
 극히 청수한 얼굴에 짧게 자란 검은 수염이 무척 고귀한 느낌을 자아내는 모습이었다.
 중년인은 오른손에 쥐어진 섭선을 유유히 흔들며 바닥을 지그시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미간에는 어두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중년인의 입 밖으로 나직한 음성이 새어 나온 것은 그로부터 거의 한 식경이 지나서였다.
 “일천이백 년(一千二百年)의 전진도가(全眞道家)와 함께 하던 이 청심호(靑心湖)가 이렇듯 순식간에 말라 버리다니······.”
 그는 허공으로 눈길을 옮기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가뭄이 심하다고 하나 천이백 년 동안 이보다 심한 가뭄에도 청심호는 마르지 않았었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깨끗했다.
 “그 푸르던 나무들도 모두 말라죽었으니······ 이제 전진의 맥(脈)이 끊기려 함인가······?”
 이게 무슨 말인가?
 전진의 맥(脈)이라니!
 중년인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기이한 광채가 흘러 나왔다.
 “전진은 그 동안 너무 폐쇄적이었다······.”
 섭선을 모으며 그는 결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대사형(大師兄), 용서하십시오! 백년지약(百年之約)에는 아직도 삼 년(三年)이 더 남았지만 나 추풍소요자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는 시선을 다시 바닥으로 향했다.
 “전진의 뿌리를 중원에 내리겠습니다. 대사형!”
 중년인 추풍소요자의 동공에는 굴강한 의지의 빛이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이미 천인합일신공(天人合一神功)과 이의이기비천어검(以意以氣飛天馭劍)도 극성까지 연마했습니다. 당금무림에 소제의 적수가 있으리라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거의 광언(狂言)이나 다름없다.
 이 무림에 누가 있어 감히 이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을까?
 추풍소요자는 우수(右手)를 가슴 앞에 수직으로 세우고 바닥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량수불······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도호(道號)입니다.”
 자세를 바로 하며 허리를 쭉 폈다.
 그러는 순간 그의 두 눈에서는 벼락불같은 관망이 무섭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제······ 추풍소요자라는 이름은 이 청심호처럼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럼 이만······.”
 순간 그의 모습이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놀랍게도 그는 이미 광음(光陰)보다 빠른 속도로 허공 까마득한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추풍소요자가 하늘과 땅사이에서 사라진 것은 실로 눈 한 번 깜박거리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추풍소요자가 사라진 직후였다.
 뭉클······ 뭉클······
 핏빛보다 붉은 운무가 바닥의 틈사이로 꾸역꾸역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핏빛 혈무 속에 한 인영의 형체가 흐릿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드러난 그 모습이란 섬뜩하기 그지 없었다.
 붉은 도포에 도관(道冠)······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썹······ 붉은 두 눈······
 따지고 자실 것도 없이 모조리 핏빛 일색(一色)이었다.
 마치 방금 핏구덩이에서 건져올린 듯한 그 소름끼치는 모습이며 숨막히는 사기(邪氣)를 무슨 말로 형용하랴!
 혈인(血人)은 무서운 혈광(血光)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추풍소요자가 사라진 방향을 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량수불······ 훌륭하다. 셋째 사제, 너의 완성을 축하한다.”
 무량수불?
 이렇게 가슴 떨리게 하는 혈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 나와도 되는 것일까?
 “대사형은 도문(道門)을······ 나 적혈자(赤血子)는 사문(邪門)······ 너는 신문(神門)을 이루었으니······ 이제 전진(全眞)은 선대(先代)의 염원을 완벽하게 달성한 것이다······.”
 도문(道門)!
 사문(邪門)!
 신문(神門)!
 장삼봉의 말을 되새기게 하는 순간이 아닌가?
 자신을 적혈자라고 밝힌 괴인은 혈안(血眼)을 바닥으로 향하며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대사형, 나는 사문(邪門)의 종주(宗主)로서 당금천하를 장악하고 있는 구천십지제일신마와 대결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천하제일위(天下第一位)를 노리는 헛된 야욕이 아니외다. 나는 단지 진정한 마종(魔宗)이 누군지 가려내고 싶을 뿐입니다.”
 선렬한 핏빛 혈무는 더욱 두텁게 적혈자의 전신을 휘감아 갔다.
 “대사형, 백년지약의 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번― 쩍!
 놀랍게도 그 토록 음산하게 일렁이던 핏빛 혈무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적혈자의 모습도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추풍소요자!
 적혈자!
 전진도문의 대사형!
 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또한 백년지약이란 무슨 말인가?
 확실한 건 하나도 없다.
 단지 전설의 도문 전진이 천이백 년의 긴 침묵을 깨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밖에는······!
 
 
 3장 대폭풍(大暴風) 3
 
 
 사막(砂漠).
 태고 이래 철저히 생체(生體)를 거부해 온 천형(天形)의 땅.
 앞 뒤 어디를 봐도 수목 한 그루 풀 한 포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곳은 영겁(永劫)의 형상을 보여주듯 사구(砂丘)의 구릉 또한 끝이 없었다.
 헌데 그 중 한 커다란 모래언덕 위에 언제부터인지 한 사나이가 바위처럼 우뚝 서 있었다.
 가마솥처럼 끓어오르는 열사(熱砂)의 땅을 밟고 뼛속까지 태워 버릴 듯한 폭양(暴陽)을 고스란히 맞고 서 있으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이 사나이.
 어깨는 하늘을 받치고 철탑같은 두 다리는 온 땅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그 당당한 웅풍(雄風)이며 낡은 파의(破衣) 사이로 드러난 딱 벌어진 구리빛 체구는 말 그대로 철인(鐵人)을 연상케 했다.
 만약 이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이 사나이를 지적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평생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처럼 꽉 다문 입술에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부리부리한 호목(虎目), 거기다 우측 뺨에 비스듬히 새겨진 한 줄기 검흔(劍痕)은 이 사나이의 강렬한 인상에 또 하나의 매력을 더해 주고 있었다.
 사나이는 오른손에 한 자루의 부러진 도(刀)를 움켜쥔 채 타는 듯한 시선으로 사막 저쪽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휘이이잉······.
 날이 어두워지면서 조금씩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밤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바람이다.
 사막의 밤은 춥다.
 얼마나 추운지 겪어 보지 않는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휘우우우웅!
 후우웅!
 바람이 드세어지면서 싯누런 황사(黃砂)가 살갗을 파고들 듯 휘날렸다.
 그러나 사나이는 눈 한 번 끔벅거리지도 않고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어찌 보자니 마치 그 상태 그대로 숨이 끊어진 게 아닌가 의심이 갈 만큼 사나이는 도대체 미동도 할 줄 몰랐다.
 그 부리부리한 한 쌍의 호목에 불현듯 한 줄기 횃불같은 광채가 번쩍 피어오른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콰우우우우······.
 사나이의 시선이 끝닿은 저쪽에서 말할 수 없이 거대한 돌개바람이 무서운 속도로 밀려오고 있지 않은가!
 콰우우우우웅!
 가슴 떨리게 하는 굉음과 더불어 천지를 집어삼킬 듯 밀려오는 그 사납고 엄청난 기세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평생 웃는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사나이의 얼굴에는 언뜻 흐릿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용권풍(龍卷風)······ 드디어 나타났구나······.”
 용권풍.
 그것은 사막의 대상(大商)들이 가장 만나기 두려워하는 것으로 인간의 육신을 흔적도 없이 분해해 버리는 건 물론이고 사막의 지형까지 뒤바꿔 버린다는 죽음의 돌개바람을 일컬음이다.
 또한 천지(天地)를 온통 박살낼 듯한 기세로 무섭게 휘몰아쳐 오는 이 거대한 바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콰아아아아!
 용권풍이 가까워지면서 사나이의 옷자락은 거센 바람에 휩쓸려 찢어질 듯 펄럭였다.
 사나이는 부러진 도를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구천십지제일신마······ 네가 설마하니 용권풍보다 강하겠는가?”
 사나이는 돌연 부러진 도를 번쩍 치켜들면서 한 소리 천둥같은 외침을 토해냈다.
 “벽력일섬단혼도(霹靂一閃斷魂刀)―!”
 그것이 마지막 음성이었다.
 콰콰콰콰콰콰―!
 용권풍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사나이의 전신을 휘감아 버린 것이었다.
 순식간에 사나이를 집어 삼킨 용권풍은 그 기세를 몰아 하늘까지 집어 삼키려는 듯 수십 장 높이로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실로 장관이었다.
 이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오오, 보라!
 놀랍게도 그 거대한 용권풍이 마치 선(線)을 그어 놓는 듯이 두 개로 쫙 나누어지는 것이 아닌가?
 헌데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개로 나뉘어진 용권풍 사이에 그 사나이가 우뚝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콰콰콰콰콰콰!
 물살처럼 갈라지는 두 쪽의 용권풍과 그 사이에 부러진 도를 비스듬히 치켜든 채 천신(天神)처럼 우뚝 서 있는 사나이!
 그 모습은 억겁의 세월을 풍우와 싸워 이겨온 태산(泰山)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옷은 걸레처럼 갈가리 찢겨져 나갔고 전신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나이의 얼굴에는 용권풍을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욱 짙은 미소가 가득 번져 있었다.
 승자(勝者)만이 가질 수 있는 환희의 미소였다.
 웃으면서 사나이는 중얼거렸다.
 “대막(大漠)의 영광이여! 다시 한 번······.”
 
 
 4장 대폭풍(大暴風) 4
 
 
 1
 
 
 이 하늘 아래 가장 오만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하늘조차 거부하고 딛고 선 중원십팔만리조차 비좁다고 입버릇처럼 떠들어댔다.
 또한 이 땅이 만들어 낸 가장 잔인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자신을 받드는 자에겐 천귀영화(天貴榮華)를 주었으나 거역하는 자는 육신을 갈라 그 피를 들이켰다.
 이렇듯 오만하고 잔인했던 인물이 백이십 년 전의 무림에 존재했다.
 단천양(端天亮).
 이 사람은 구천십지만마전의 제 칠대(第七代) 제일신마(第一神魔)로 구천십지만마전의 수백 년 역사가 탄생시킨 제일신마 중 가장 무서운 인물로 평가된다.
 하늘과 땅 사이에 단 한 명의 적수가 존재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인물이 바로 단천양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어느 날 추상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 구천십지만마전에 대한 거역이나 불경(不敬)은 곧 역천(逆天)의 뜻!
 지난 육백삼십 년 동안 본전(本殿)을 거역한 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광오하게도 본좌에게 그 역천의 뜻을 비친 자가 있다.
 당연히 구천십지만마전은 발칵 뒤집혔다.
 ― 구천마제(九天魔帝)와 십지마황(十地魔黃) 및 전 고수에게 명(命)하노니,
 잠마혈문(潛魔血門)의 삼족구문(三族九門)을 멸하고 조상 십대의 묘지를 파헤쳐 역천에 대한 대가를 지불토록 하라!―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지상 명령과 함께 단천양은 한 장의 서찰을 꺼내 수하들에게 펼쳐 보였다.
 서찰의 내용인 즉 이러했다.
 <구천(九天)이 넓다 하나 하늘을 모두 덮지 못하고 십지(十地)가 크다 하나 대지의 전부는 아니다.
 만마전의 고수가 아무리 많다 하나 천하마종(天下魔宗)의 전체를 관장할 수는 없는 것이니······ 본 잠마혈문(潛魔血門)은 구천십지만마전의 권위를 부정하며 참배 또한 거부할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노라!>
 명백한 도전(挑戰)!
 만마전의 전 고수들이 서릿발같은 분노를 안고 모조리 만마전을 박차고 나갔다.
 그후 십 년에 걸쳐 구천십지만마전과 잠마혈문의 싸움은 하루도 거름 없이 계속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무림천년사혈전록(武林千年史血戰錄)의 첫 장을 기록하는 역천(逆天)의 혈전(血戰)이었다.
 잠마혈문.
 스스로 삼천 년 역사를 이룬 마교(魔敎)의 단맥(斷脈)임을 주장하는 신비마문(神秘魔門)이며 오 만(五萬)의 일급 고수와 수많은 대마황(大魔皇)을 끌어들여 그 세력을 비밀리에 확장해 온 죽음의 문파!
 그 힘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영원한 마도(魔道)의 불멸혼을 기원하며 세워진 지상 최강의 단체 구천십지만마전이었다.
 십 년에 걸친 역천대혈전은 끝내 잠마혈문이 붕괴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문주(門主)인 잠형천존(潛刑天尊) 사도무기(司道武琦)는 단천양에 의해 황산의 고혼(孤魂)이 되었고 그 수하들은 모조리 씨가 말랐다.
 완벽한 패배였다.
 단 한 번 하늘을 기웃거린 대가치곤 너무 엄청난 것이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 단천양은 제 팔대 제일신마를 그의 아들에게 계승하고 이승을 떠났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무림인들은 누구나 잊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구천십지만마전에 대항했던 유일한 문파!
 죽어 가는 순간까지 오 만의 수하 중 단 한 명도 구천십지만마전에 그 오만한 허리를 굽히지 않았던 그 잠마혈문을······!
 
 
 2
 
 
 서릉협(西陵峽).
 저 유명한 무산삼협(巫山三峽) 중의 하나이며 천길 낭떠러지로 둘러싸인 그 험준절악함은 나는 새조차 지나칠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죽음의 험협(險峽).
 쏴아아아······
 억수같은 장대비가 서릉협을 온통 희뿌연 우막(雨幕)으로 뒤덮고 있었다.
 우기(雨期)도 아닌데 연 사흘째 계속되는 이 폭우는 멈출 기미는커녕 갈수록 기승을 더해갔다.
 사위는 먹물을 풀어놓은 듯 어둡고 서릉협의 물결은 폭우와 어울려 미친 듯이 광란한다.
 콰르르릉― 쿠콰콰콰―
 뇌성같은 굉음을 울리며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급류(急流)와 폭발하듯 퉁겨 오르는 엄청난 물보라!
 그 모든 자연의 조화는 섬뜩하기보다는 차라리 장엄했다.
 번쩍!
 돌연 몸서리쳐지도록 시퍼런 뇌광(雷光) 한 줄기가 어둠을 찢었다.
 꽈르르르··· 콰콰쾅!
 곧이어 대기를 찢어발기는 천둥소리에 온 산하가 뒤흔들렸다.
 폭우는 광란하는 천둥과 번개를 타고 더욱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헌데 저게 무엇일까?
 백사(白蛇)같이 새하얀 섬광(閃光)이 작렬한 때마다 희끗희끗 드러나는 그것은 글씨였다.
 풍상에 씻겨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그것은 분명히 글씨였고 그 글씨가 새겨진 곳은 마치 도끼로 내려친 듯 양쪽으로 쩍 갈라져 있는 단애(斷涯)의 중턱 부근이었다.
 <잠마(潛魔).>
 글씨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무슨 뜻일까?
 그리고 어떤 할 일 없는 위인이 저런 곳에 글씨를 새겨 놓았을까?
 번― 쩍!
 희다 못해 처절하도록 새파란 섬전 한 줄기가 서릉협으로 내리 꽂혔다.
 그 위치는 공교롭게도 글씨가 새겨진 바로 그 단애였다.
 콰콰쾅!
 요란한 폭음이 터지면서 글씨가 새겨졌던 석벽이 시퍼런 불꽃에 휩싸여 산산조각 박살났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부서져 나간 석벽 속에서 또 한 줄기 섬광이 하늘로 번쩍 치솟는 것이 아닌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번개는 있어도 땅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번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개는 분명히 땅에서 하늘로 솟구쳐오르고 있었으며 놀랍게도 백여 장 높이에 이르러선 우뚝 멈추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곧이어 그 정체도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것은 사람이었다.
 머리는 제멋대로 풀어헤쳐져 있어서 용모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것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쪼개진 절벽 속에서 사람이 솟구쳐 나오다니··· 실로 괴사(怪事) 중의 괴사가 아닐 수 없었다.
 허공을 평지처럼 밟고 우뚝 선 괴인의 입에서 돌연 천둥을 방불케 하는 쩌렁쩌렁한 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핫······ 드디어 터득했다! 마교최대(魔敎最大)의 비예(秘藝), 천섬마형뢰(天閃魔形雷)를······ 크하하핫······.”
 한바탕 떠들썩하게 웃어제낀 괴인은 광란하는 암천(暗天)을 향해 미친 듯이 부르짖기 시작했다.
 “아버님! 당신은 잠마혈문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나를 이곳에 가두어 내 생명을 보존시켰소!”
 이게 무슨 말인가?
 잠마혈문이라니······
 “천섬(天閃)의 뜻을 알기 전까지 이곳을 나오지 말라 하신 당신의 뜻을 나는 충실히 지켰소!”
 하늘을 무너뜨릴 듯한 굉렬한 외침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그 토록 광란하던 천둥과 번개가 멎고 폭우마저 그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이 아들······ 백이십 년 전 당신이 나를 이곳에 남겨두고 떠날 때 흘린 그 뜨거운 피눈물의 의미를 똑똑히 기억합니다!”
 백이십 년 세월을 운운한다는 건 이 괴인의 나이가 이미 백이십 살을 훨씬 넘었다는 얘기다.
 독백은 피냄새가 물씬 풍기며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잠마혈문은 다시 세워집니다! 그런 다음 단천양의 묘를 파헤쳐 그 시신을 당신 앞에 무릎 꿇리고 구천십지만마전을 지상에서 영원히 없애 버릴 것입니다!”
 엄청난 말이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구천십지만마전을 지상에서 영원히 없애 버린다니!
 누군가 옆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 했으리라.
 “와하하핫핫······.”
 또 한 번의 광소(狂笑)를 끝으로 괴인의 신형은 섬전보다 빠른 속도로 서릉협을 향해 내리 꽂혔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콰르르릉!
 쏴아아아···
 서릉협은 그저 미친 듯이 광란하고 폭우는 원래의 힘을 되찾고 있었다.
 
 
 3
 
 
 소림(少林)의 혜인(慧人).
 전진도문(全眞道門)의 삼 인(三人).
 대막(大漠)의 괴인.
 잠마혈문(潛魔血門)의 마인(魔人).
 대폭풍의 불씨를 안고 일제히 준동한 이들 네 명이 훗날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노리는 목표는 한결같이 구천십지만마전이라는 사실이다.
 위대한 마도의 불멸혼을 추구해 온 구천십지만마전의 절대 권위를 넘보는 네 명의 이단자가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가운데 천하의 네 군데에서 거의 비슷한 시각에 발생한 일들이었다.
 
 
 5장 귀곡천류하의 잠룡
 
 
 천간산(天干山).
 수백의 봉우리가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방패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명명된 하북성(河北省) 북방의 명산(名山).
 그 깊숙한 곳에 들어가면 거센 급류가 무섭게 굽이쳐 흐르는 하나의 물줄기가 있다.
 물결이 거세기로는 저 유명한 무산삼협(巫山三峽)의 그것에 버금갈 정도이며 그 흐름의 소리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 하다 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귀곡천류하(鬼哭天流河)라 불렀다.
 초봄의 훈훈한 양광(陽光)이 잘게 부서져 내리는 오후 무렵.
 한 소년(少年)이 귀곡천류하의 상류로 이어진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거의 흠잡을 곳이 없는 절세의 미소년이었다.
 넓고 반듯한 이마에는 성스러운 정기(正氣)가 은은히 서려 있고 콧날은 깎아 빚은 듯 높지도 않게 우뚝 솟아 있었다.
 거기다 단아하게 맞물린 주사빛 입술, 차라리 여인의 그것과도 흡사했다.
 소년은 푸른빛이 감도는 낚싯대 하나를 어깨에 걸친 채 유유히 걷고 있었다.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할까?
 깨끗한 백의(白衣)를 표표히 휘날리며 내딛는 걸음 하나 하나가 그렇게 품위있고 멋들어지게 보일 수가 없었다.
 콰콰콰콰······
 귀곡천류하의 상류에는 뇌성같은 굉음을 울리며 거대한 물기둥을 무섭게 내리꽂는 거대한 폭포가 있었다.
 폭포 아래에는 넓고 맑은 소(沼)가 이루어져 있었다.
 바닥이 환히 들여다 보일 정도의 맑은 소(沼)였다.
 소년은 소(沼) 근처에 이르러 주위를 대충 한 차례 둘러본 다음 옆의 한 바위 위에 턱 걸터앉았다.
 그리곤 능숙한 동작으로 낚싯대를 귀곡소에 드리웠다.
 미끼도 없이 낚시를 하려는 자세다.
 소년은 가을 호수처럼 맑고 잔잔한 눈빛을 낚싯대의 끝에 고정시켰다.
 그리곤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시간이 물처럼 흘러갔다.
 소년은 그때까지도 털끝만큼의 미동도 없었다.
 그저 물같이 고요한 눈빛을 낚싯대의 끝에 못박고 있을 뿐이었다.
 휘익!
 돌연 하늘에서 한 줄기 흑영(黑影)이 아무런 파공음도 없이 소년의 등 뒤에 환영(幻影)처럼 나타났다.
 대략 칠순이나 되었을까?
 깡마른 체구에 먹물같은 흑포를 헐렁하게 걸쳤고 쭉 찢어진 사목(蛇目)에 예리한 콧날을 가진 강팍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소년은 그의 출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담담한 표정 그대로였다.
 흑의 노인은 그 자리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겁천독후(劫天毒侯) 천예사(千芮査)가 만독(萬毒)의 제왕(帝王)께 인사드리옵니다······.”
 마치 천자(天子)라도 대하듯 지극히 공손하고 경건한 태도다.
 헌데 만독의 제왕이란 또 무슨 말인가?
 만독은 제쳐 두더라도 이제 기껏 십오륙 세 남짓한 소년에게 제왕이란 거창한 명호를 함부로 갖다 붙혀도 되는 걸까?
 소년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거니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겁천독후 천예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떼었다.
 “태상(太上)······.”
 “천예사.”
 그제야 소년의 입술이 떼어지며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천예사는 순간 콧등이 휘어지도록 얼굴을 바닥에 파묻었다.
 “말씀하십시오. 태상!”
 소년은 여전히 낚싯대 끝을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도 낚시가 하고 싶은 거요?”
 “예?”
 천예사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지금 낚시를 즐기고 있소.”
 “······!”
 “낚시란 매우 즐거운 것이오. 여가를 보내기에도 더할 수 없이 적합하고······.”
 그 말에 천예사의 눈빛이 가벼운 흔들림을 보였다.
 천예사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문득 조심스런 음성을 흘려 냈다.
 “태상, 당금의 천하는 지금 엄청난 격동의 회오리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
 “태상,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움켜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거늘 어찌 그러한 낚시의 한가로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만약 노태상(老太上)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지하에서나마 크게 개탄······.”
 천예사는 말을 잇다 말고 안색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느새 소년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못박혀 있었다.
 소년은 천예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천예사.”
 천예사는 황급히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말씀하십시오, 태상!”
 “차후 내 앞에서 노태상의 이야기를 두 번 다시 거론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천예사의 몸이 바람도 없는데 부르르 떨렸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이마와 콧등에서 배어 나오는 건 식은땀이다.
 소년은 다시 낚싯대 끝을 바라보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강태공처럼 고기나 세월을 낚는 것도 아니고 전성공처럼 운명을 낚는 것도 아니오. 나는 다만 이 낚시를 통해 바로 나 자신을 낚으려는 것뿐이오.”
 “······?”
 천예사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스쳐 갔다.
 나 자신을 낚는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생각을 이어갈 겨를도 없다. 소년의 음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과거 백 년 전 노태상이 서두르지만 않았다면 최소한 천하의 삼분지 일은 얻었을 것이오.”
 “······.”
 “천예사.”
 “말씀하십시오. 태상!”
 “당신은 즉시 독형제신궁(毒形帝神宮)으로 돌아가시오.”
 “예?”
 천예사는 하마터면 또 고개를 쳐들 뻔했다.
 “천하의 패권(覇權)을 얻고자 도모함에 있어 십 년 세월도 짧은 것··· 당신은 독형제신궁의 궁주인 만큼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하였으리라 생각하오.”
 천예사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했다.
 “이 천예사의 우둔함을 나무라십시오. 아직 태상의 심중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허나 태상은 곧 저의 하늘! 목숨으로 명(命)을 받들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예사는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소년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워낙 잘생기다 보니 찌푸린 얼굴조차 아름답다.
 “천하제일독(天下第一毒)······ 독공(毒功)으로는 천하 최강이나. 저 급한 성격으로 언젠가는 크게 당할 날이 있으리라······.”
 천하제일독(天下第一毒)은 지금 막 사라진 겁천독후 천예사를 일컫는 말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천하제일독으로부터 만독의 제왕으로 불리는 소년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소년은 천천히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쾌청했다.
 소년의 두 눈에 기이한 광채가 떠올랐다.
 “짚어 본 천기(天機)에 의하면 오늘밤 해시(亥時) 경 나는 이곳에서 일 년간 기다린 보람을 찾는다.”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소년은 그 나이에 벌써 천기를 헤아리는 능력까지 지녔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천하의 운명(運命)은 나 혁련소천(赫蓮 天)에 의해 완전히 뒤바뀌게 되리라······!”
 문득 소년 혁련소천의 두 눈에 실낱같은 섬광(閃光)이 스쳐 갔다.
 동시에 낚싯대를 쥔 그의 손이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워낙 찰나지간이었기에 처음부터 아예 그런 일이 있은 것 같지도 않았다.
 거의 때를 같이해서 혁련소천의 바로 옆에 한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그가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저 불쑥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던 것처럼······.
 일신에 허름한 마의(麻衣)를 걸친 꽤 준수한 삼십대 중반 가량의 중년인이었다.
 전체적으로 무정(無情)한 분위기를 지녔으면서도 왼쪽 뺨에 비스듬히 그어진 검상(劍傷)이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모습이었다.
 헌데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다.
 놀랍게도 중년인의 손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이 쥐어져 있었으며 그 검은 혁련소천의 목덜미에 바짝 들이대어져 있었다.
 중년인의 모습도 놀랍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혁련소천이다.
 검이 목덜미에 닿아 있다면 당연히 안색이 변한다거나 놀라는 기색이 떠올라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년은 털끝만치의 변화도 없었다.
 낚싯대 끝을 응시하던 처음의 자세를 그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년인은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댄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혁련소천이 조용히 말했다.
 “빠르군. 일 년 전보다 최소한 두 배는 빨라졌어.”
 중년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 갔다.
 “이것이 바로 초형일섬(超形一閃)의 최고 경지입니다, 대영주(大令主)님.”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헌데 대영주란 호칭은 또 웬 것인가?
 중년인은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번엔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 대영주님!”
 혁련소천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확실히 나는 피할 틈이 없었다.”
 중년인은 씩 웃었다.
 “그렇다면 이제 검주령(劍主令)을 건네주시는 것이······.”
 “아니.”
 “예?”
 혁련소천은 나직하게 웃었다.
 “후후후······ 그대가 아직 나를 이겼다고 말할 수는 없지.”
 “무, 무슨 말씀이신······?”
 “안 보이는 모양이군. 그대의 검과 내 목 사이에 가로막힌 물체가······.”
 “······!”
 중년인은 흠칫 그의 목언저리를 쳐다보았다.
 순간 중년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밀납처럼 창백해졌다.
 “이··· 이것은······!”
 검(劍)과 목 사이가 하나의 낚싯줄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중년인의 검은 혁련소천의 목덜미가 아닌 낚싯줄에 닿아 있는 것이었다.
 혁련소천의 조용한 음성이 중년인의 고막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또 한 가지······ 그대의 거궐혈(巨闕穴)에는 나의 낚시바늘 하나가 꽂혀 있을 것이네.”
 “······!”
 중년인은 크게 놀라 황급히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거궐혈(巨闕穴)은 약간의 충격에도 그 즉시 숨통을 끊어주는 치명적 사혈(死穴)이다.
 그 거궐혈에 낚시바늘 하나가 꽂혀 있는 걸 보는 순간 중년인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그는 불신과 회의에 찬 눈빛으로 가슴과 혁련소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혁련소천의 시선이 처음으로 중년인의 얼굴을 향했다.
 “검주령에 대한 세 번의 도전 자격을 그대는 이번으로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
 “이제 그대를 비롯한 검천(劍天)의 오 인(五人)은 무조건 내 명(命)에 따라야 한다. 맞나?”
 중년인의 전신이 폭풍을 만난 듯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는 혁련소천에게 들이댔던 검을 맥없이 늘어뜨리며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맞습니다.”
 “그대는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검(劍)으로만 논한다면 확실히 나보다 한 수 위다.”
 “······!”
 중년인은 씁쓸한 고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혁련소천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나직하게 말했다.
 “냉유성(冷流星), 일 년 후 그대는 사형제와 더불어 황산(黃山)에서 나를 만나도록 하라.”
 음성는 나직했지만 거기에는 태산처럼 장중하고도 항거키 어려운 위엄이 실려 있었다.
 중년인 냉유성은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영주님의 명(命), 어김없이 받드오리다······!”
 번쩍!
 하늘로 솟았는가 땅으로 꺼졌는가?
 말끝의 여운은 아직도 공간을 맴돌건만 냉유성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좋군. 그 정도 검법이라면 무림사를 통틀어 오 인(五人) 이상 없을 것이고 쾌검(快劍)으로 치면 단연 으뜸으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혁련소천은 만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진심에서 우러난 감탄이다.
 그러나 그 말을 자세히 음미하면 실로 엄청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까막눈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을 수 없고 벙어리가 시(時)를 읊을 수는 없는 법이다.
 바꿔 말해서 혁련소천이 천하의 모든 검법에 두루 통달해 있지 않고는 절대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고기를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이 고기 맛을 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때 허공 어딘가에서 한 줄기 창노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만약 냉유성이 대종사(大宗師)님께 더 이상 무례를 범했다면 노부가 그를 죽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는데 이 음성은 어디서 흘러 나온 것일까?
 거기다 대종사란 호칭은 또 무슨 말인가?
 혁련소천은 이미 그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환사유풍(幻邪幽風), 그런 말은 마음 속으로만 접어 두는 것이라오.”
 “그, 그렇습니까?”
 혁련소천은 낚싯대를 거두어 들였다.
 “환사유풍!”
 “말씀하십시오, 대종사님······!”
 “제갈천뇌(諸葛天腦)는 어찌 되었는가?”
 그 말에 환사유풍이라 불리운 암중인(暗中人)은 지체없이 대꾸했다.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아무 염려 말라는 소식이 조금 전 일곱째에게 전해 왔습니다.”
 “좋아.”
 혁련소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사유풍, 그대의 칠 형제는 지금부터 내 곁에서 사라지도록 하시오.”
 “지, 지금 무슨 말씀을······?”
 “지금 즉시 모두 내 곁에서 떠나라 하였소.”
 “아니됩니다! 저희 칠 형제는······.”
 “이제 나 혁련소천은 그대들의 도움이 없어도 모든 일을 충분히 처리할 능력이 있소. 내 말을 믿지 못하겠소?”
 환사유풍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어, 어찌 감히······!”
 혁련소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억하시오.”
 그는 낚싯대를 어깨에 걸치며 무겁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 이름은 영호풍(令豪風)이오. 무공을 모르는 백면서생이며 신분은 금릉(金陵) 대장군부(大將軍府)의 셋째 아들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스스스슷!
 혁련소천의 바로 옆에 있던 바위가 갑자기 기체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다면 그 바위가 곧 환사유풍이었다는 얘기 아닌가!
 환사유풍이 사라지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이번에는 귀곡소의 수면이 소리없이 갈라지며 그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번뜩 솟구쳤다.
 아니, 솟구쳤다 싶은 순간 그 빛은 이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혁련소천은 허공의 어느 한 방향을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수라마영(修羅魔影)······.”
 이번에는 뒤쪽의 땅 속에서도 경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단지마(寒斷地魔)도 떠났군.”
 혁련소천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폭포를 바라보았다.
 쿠쿠쿠쿠쿠!
 육중한 물기둥을 쏟아내는 폭포의 물안개가 바람에 실려 혁련소천의 얼굴에 와 닿았다.
 산뜻한 감촉이다.
 어쩐지 오늘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6장 거대한 운명(運命)
 
 
 1
 
 
 술시(戌時).
 해시(亥時)까지는 아직 한 시진이 남아 있었다.
 삼월(三月) 십오야(十五夜) 해시 정각!
 천하무림의 흐름을 송두리째 뒤바꾸게 되는 그 시각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다.
 
 
 2
 
 
 두두두두두!
 천간산에서 얼마 멀어지지 않은 관도(官道) 위를 자욱한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질풍처럼 치달리는 십기(十騎)의 인마(人馬)가 있었다.
 마상(馬上)에는 모두 건장한 체구의 산뜻한 경장 차림의 무사들이 타고 있었다.
 그 중 한 무사의 손에는 금빛 찬란한 깃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깃발에는 금박의 글씨가 힘찬 필체로 수놓여 있었다.
 <장군부(將軍府).>
 이 하늘 아래 사는 사람치고 그것이 금릉 대장군부를 상징하는 깃발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은 바로 금릉 대장군부의 무사들이었다.
 맨 앞에는 전신에 흑포를 걸치고 우람한 체구에 구레나룻을 무성하게 기른 중년인이 타고 있었다.
 일견키에도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용맹한 기운을 전신으로 뿜어내는 호걸풍의 모습이었다.
 사도진악(司徒震嶽).
 장군부 주인인 영호대인(令狐大人)이 가장 신임하는 심복 중 한 사람이며 어려서부터 무가(武家)에서 자란 전형적인 무인(武人)이지만 그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영호대인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
 사도진악은 지금 영호대인의 셋째 아들인 영호풍을 맞이하러 가는 중이었다.
 원래 영호풍은 타고난 체질이 병약하며 태어난 이래 하루도 질병이 떠날 날이 없는 선천적인 약골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영호대인에게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영호풍이 세 살 때의 어느 날 영호대인은 한 명의 중(僧)이 장군부 근처를 지나치는 것을 목격했다.
 현자(賢者)는 현자(賢者)를 알아본다고 한 눈에 예사 중이 아님을 감지한 영호대인은 즉시 그 중을 장군부로 불러들였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본 결과 영호대인은 그 중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능력을 갖춘 고승(高僧)임을 확신했다.
 영호대인은 그에게 영호풍을 맡아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고승의 뛰어난 불력(佛力)을 빌어 영호풍의 체질을 바꿔 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다행히 중은 영호대인의 부탁을 받아들였으며 스스로 천계(天戒)라 칭한 그는 영호풍을 데려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 십삼 년 후, 천간산 불영암(佛影庵)으로 오셔서 영식(令息)을 데려가도록 하시오.
 두두두두두······
 사도진악 등 십기(十騎)는 어둠을 가르며 쉴새없이 질주해 갔다.
 달리면서 사도진악은 힐끗 하늘을 쳐다보았다.
 휘황한 만월이 하늘 한복판을 덩그라니 차지한 채 은가루같은 달빛을 온 누리에 뿌려 내고 있었다.
 “한 시진 전이다! 좀더 서둘도록 하라!”
 사도진악과 수하들은 말의 복부를 더욱 힘차게 걷어찼다.
 두두두두두두······
 바로 그 시각.
 만월을 응시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선비 기질이 엿보이는 매우 준수한 용모의 은의(銀衣)중년인 이었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칼과 세 치 가량이나 뻗쳐 간 은빛 눈썹이 그의 인상을 매우 독특한 분위기로 특징 짓고 있었다.
 그는 만월을 응시하며 계속 오른손을 흔들고 있었다.
 짤랑······ 짤랑······
 그가 손을 흔들 때마다 쇳조각 부딪치는 음향이 규칙적으로 흘러 나왔다.
 “한 시진 후면 해시다.”
 오나가나 해시 타령이다.
 도대체 오늘밤 해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단 한 치의 허점도 용납될 수 없다!”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중얼거리는 중년인의 두 눈은 확고한 신념의 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 제갈천뇌(諸葛天腦)는 제 이(第二)의 영호풍을 탄생시키기 위한 이번 일에 모든 총력을 기울였다.”
 제갈천뇌라면 혁련소천의 입에서도 한 번 거론되었던 이름이다.
 중년인 제갈천뇌는 문득 흔들던 손을 멈추고 신중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손바닥에는 일곱 개의 동전이 기이한 형상을 이루며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제갈천뇌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하늘이 돕는다! 그렇다면 실패는 없다!”
 그는 다시 주먹을 꽉 쥐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남은 것은 여섯째 형 백변귀천(百變鬼天)의 능력 여부에 달려 있다.”
 
 
 3
 
 
 사찰(寺刹).
 말이 사찰이지 그것은 조그만 암자에 불과했다.
 아마도 무척 오래 전에 지어진 듯 기왓장 하나 담을 쌓은 벽돌 하나 하나에서도 짙은 고풍(古風)이 느껴진다.
 나이를 짐작키 어려운 노승(老僧) 한 명만이 살고 있는 이곳의 입구에 세워진 바위에는 세 치 깊이의 글씨가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다.
 불영암(佛影庵).
 스스로 천계(天戒)라 칭한 고승이 살고 있다는 문제의 그곳이었다.
 향냄새가 짙게 풍겨나는 그리 크지 않은 선방에는 지금 잿빛 가사를 걸친 한 노승이 묵묵히 차를 마시며 방 중앙의 포단 위에 앉아 있었다.
 눈썹은 서리같이 희어 귀 밑까지 늘어뜨렸고 허연 수염이 가슴을 완전히 뒤덮고 있어 전체적으로 인자하면서도 중후한 기품이 느껴지는 노승이었다.
 이 노승이 바로 천계선사(天戒禪師)였다.
 “오늘쯤이면 장군부의 사람이 오겠군.”
 천계선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노안에 문득 우울한 그림자가 깔렸다.
 “헛허······ 풍아 그 녀석과도 꽤 정(情)이 들었거늘······.”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미타불······ 아직도 수양이 모자라는 도다.”
 천계선사는 탄식 어린 불호를 읊조리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때 문 밖에서 맑고 낭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선사님!”
 천계선사는 번쩍 눈을 떴다.
 “풍아냐?”
 “그렇습니다.”
 천계선사는 빙그레 반색의 미소를 떠올렸다.
 “들어오너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며 한 소년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일견키에도 무척 준수한 미소년(美少年)이었다.
 다만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하고 어쩐지 병약해 보이는 게 흠이었다.
 바로 장군부 영호대인의 셋째 아들인 영호풍이었다.
 영호풍은 문을 닫고 천계선사의 맞은편에 가서 조용히 앉았다.
 천계선사는 한동안 영호풍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씁쓸한 고소를 떠올렸다.
 ‘쯧쯧··· 십삼 년 동안 노력했지만 저 미간 사이의 검은 그늘만은 없애지 못했으니······.’
 아닌 게 아니라 영호풍의 미간에는 거무스름한 그늘이 깔려 있었다.
 ‘허나 어쨌든 고질병은 치료했으니 최소한 칠십 세까지는 살수 있을 것······.’
 헛고생을 한 건 아니다.
 나름 대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래 무엇을 하고 왔느냐?”
 영호풍은 씩 웃었다.
 “책을 좀 읽었습니다.”
 “녀석······ 몸이 허약할진대 매사에 무리가 없도록 하여라.”
 “명심하겠습니다.”
 천계사는 웃음띤 얼굴로 자상하게 말했다.
 “손을 다오.”
 “······!”
 영호풍은 그런 일이 몸에 밴 듯 지체없이 소매를 걷어 붙이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천계사는 묵묵히 그의 맥문을 짚어 보았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진맥을 시작했다.
 잠시 후 천계선사는 영호풍의 손을 놓으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허(虛)한 기운은 여전히 남아 있구나. 앞으로 풍아는 내가 가르쳐 준 불문토납진기(佛門吐納眞氣)를 매일같이 수련토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천계선사는 거기까지 말한 뒤 찻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풍아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글씨만 보아라.>
 “······?”
 영호풍은 의혹 어린 눈으로 천계선사를 쳐다본 뒤 다시 바닥을 응시했다.
 천계선사의 손가락은 빠르게 움직였다.
 <천기를 짚어 본 즉, 오늘 밤 네 신변에 극히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것을 감지했다.>
 영호풍은 흠칫했다.
 “노선······.”
 천계선사의 손가락 하나가 번개같이 영호풍의 입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글씨를 쓰던 그의 손가락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네 뒤쪽 벽의 족자를 밀치면 통로가 나타난다. 그곳에 가면 옷과 인피면구가 있을 것이니 그것으로 네 모습을 변장하고 직접 혼자 장군부로 가거라.>
 천계선사는 영호풍의 표정을 힐끗 살펴본 후 다시 글을 이어갔다.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즉시 실행토록 해라. 이것은 천기에 따르는 대응책인 즉, 네게 닥칠 화를 미연에 방지코자 함이니라.>
 천계선사는 거기까지 쓰고 바닥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영호풍은 심각한 표정으로 천계선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더니 돌연 영호풍의 얼굴에 갑자기 괴이한 미소가 씨익 피어올랐다.
 “일곱 째의 말대로 제법 하는 중놈이었군.”
 천계선사의 눈이 아연 휘둥그래졌다.
 “푸······ 풍아야, 너 지금······.”
 “풍아? 제법 똑똑한 중놈인 줄 알았더니 형편없는 돌대가리군 그래!”
 순간 천계선사는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호풍의 신형이 앉은 자세 그대로 붕 떠오름과 동시에 그의 우장이 벼락치듯 허공을 갈랐다.
 천계선사의 동작도 빨랐지만 영호풍의 동작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헉!”
 천계선사는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반사적으로 일장을 뻗어 냈다.
 꽝!
 두 사람의 장력이 부딪치면서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욱!”
 천계선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그러나 그는 미처 신형을 가다듬기도 전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영호풍의 손이 그의 완맥을 갈고리처럼 움켜쥔 것이었다.
 영호풍은 그의 코 앞에 우뚝 선 채 차갑게 내뱉았다.
 “항마금강력(抗魔金剛力)인가? 이제 보니 아미(蛾嵋) 출신의 중놈이었군.”
 천계선사의 눈은 더할 수 없이 확대되었다.
 “시······ 시주는 누구시오?”
 “백변귀천(百變鬼天), 그렇게만 알아라.”
 “백변······ 그렇다면 풍아는······.”
 “잘 모셔 두었다. 그리고 너와 영호풍은 이 시각부터 오 년 동안 이 세상에서 사라져 줘야만 되겠다.”
 천계선사의 얼굴이 온통 경악과 불신으로 뒤덮였다.
 “도대체 당신이 영호풍의 모습을 어찌 그렇게······.”
 그 말에 백변귀천은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어리석은 중놈아, 자고로 진정한 변장의 대가들은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심지어는 관상까지도 똑같이 하는 법이니라.”
 “······!”
 “천하에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나 백변귀천을 제외하곤 단 한 분밖에 없지.”
 영호풍, 아니 백변귀천은 신비스런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비록 네가 천기는 바로 짚었으나 그것까지 짚은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천계선사는 그 말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짚은 천기를 누군가 역으로 다시 짚었다고······?’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다급히 물었다.
 “누, 누가 천하에 누가 그런 능력을 지녔단 말이오?”
 백변귀천은 괴소를 발했다.
 “후후······ 나의 아우 천우신기(天羽神機) 제갈천뇌와 또다른 한 분이시지.”
 “또 다른······?”
 “나 백변귀천과 같은, 아니 나보다도 한 수위의 변장 능력을 지닌 그 분.”
 이때였다.
 “천계대사 계시오?”
 문 밖에서 돌연 찌렁찌렁한 음성이 들려왔다.
 천계선사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장군부에서 왔구나!’
 백변귀천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비웃듯이 말했다.
 “흥분되는 모양이군, 땡초!”
 천계선사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놀랍게도 백변귀천은 온데간데 없고 그의 앞에는 또 한 명의 천계선사가 우뚝 서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다른 점은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설사 쌍둥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똑같을 수는 없다.
 갑자기 섬뜩한 예감이 천계선사의 머리 속을 스쳐 갔다.
 ‘음모(陰謀)! 이건 무서운 음모다!’
 내심 부르짖는 그 순간 그는 목덜미와 허리 부근이 뜨끔해짐을 느꼈다.
 아혈(啞穴)과 마혈(痲穴)이 동시에 제압된 것이다.
 “죽기 싫으면 숨도 크게 내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땡초!”
 백변귀천은 속삭이듯 으름장을 놓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곤 문 밖을 향해 조용히 말하는 데 목소리며 그 모습이란 천계선사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미타불······ 누구시오?”
 천계선사는 아예 넋을 잃고 말았다.
 문 밖에는 십 기(騎)의 인마가 달빛 아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었다.
 바로 사도진악을 위시한 장군부의 무사들이었다.
 천계선사가 문 밖을 나서자 사도진악 등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섰다.
 사도진악은 천계선사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장군부 사도진악, 선사께 인사드리오.”
 백변귀천은 합장하며 인자스런 웃음을 흘려냈다.
 “허허······ 어서 오시오. 사도시주!”
 “제가 온 것은······.”
 “허허허······ 알고 있소이다. 풍아는 귀곡천류하에서 밤낚시를 즐기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 보시오.”
 “선사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리오.”
 사도진악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훌쩍 말 등에 올라탔다.
 백변귀천은 웃음띤 얼굴로 말을 건넸다.
 “영호대인께 전해 주시오.”
 “무슨······?”
 “빈승은 곧 불영암을 떠나 천하를 주유할 예정이니 훗날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잊지 않고 전해 드리겠소. 그럼······.”
 사도진악은 다시 포권을 취한 뒤 말고삐를 힘껏 거머쥐었다.
 이어 막 말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사도시주!”
 “······?”
 사도진악은 멈칫하며 천계선사를 돌아보았다.
 사도진악을 바라보는 천계선사의 두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해시까지는 풍아를 만나게 될 것이니 밤길에 너무 서두르지 말고 조심해서 가도록 하시오.”
 사도진악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 갔다.
 백변귀천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사도시주께서는 풍아의 모습을 알고 계시오?”
 “그건······.”
 “인중용봉의 소년이 푸른 낚싯대를 들고 있으니 그가 바로 풍아외다.”
 “거듭 감사드리오.”
 사도진악은 짤막한 대답과 함께 힘껏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말들은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을 토하며 힘차게 앞발을 내딛었다.
 두두두두두······
 사도진악을 비롯한 십 기의 인마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4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
 신태비범한 한 황의노인(黃衣老人)이 우뚝 서 있었다.
 송충이처럼 짙고 시꺼먼 눈썹에 횃불같이 타오르는 한 쌍의 호목(虎目)에서 항거할 수 없는 위엄과 냉오한 기질이 엿보이는 인물이었다.
 일견키에도 절대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옷은 걸레처럼 찢어지고 전신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첫눈에도 악전고투를 치렀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주위는 전신을 먹물같은 흑포로 휘감은 십 명의 복면인들에 의해 둥그렇게 에워싸여 있었다.
 전광(電光)처럼 번뜩이는 눈빛과 유연하게 빠진 몸매들이 결코 예사 고수들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끔찍한 광경인가?
 놀랍게도 사방에는 최소한 백오십여 구는 됨직한 시신들이 산처럼 쌓여 있지 않은가?
 보이느니 시체의 산이요 밟히느니 피의 강이라!
 지옥(地獄)이 따로 없었다.
 비릿한 피냄새로 가득 찬 공간 속으로 황의노인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흐흐······ 이 무림에 나 철장마제(鐵掌魔帝) 감천곡을 이렇듯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자가 있었다니······.”
 피냄새만큼이나 비릿한 음성이었다.
 철장마제 감천곡은 소름끼치도록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주위를 쓸어 보았다.
 “대체 네놈들의 정체는 무엇이냐? 누구의 사주를 받고 나 감천곡을······.”
 파파파팟!
 위이이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십 명의 복면인들이 아무 소리도 없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劒), 도(刀), 편(鞭), 장(掌) 등의 공세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감천곡의 눈에서 시퍼런 불똥이 피어 올랐다.
 “크흐흐흐······ 좋아 좋아! 나 감천곡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다음 순간 그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며 천둥같은 대갈을 터뜨렸다.
 “내관(內官), 외관(外觀), 소부(少付), 합곡(合谷), 철(鐵)의 기운을 오지(五指)로 모은다!”
 그의 다섯 손가락이 찰나지간에 시꺼먼 쇳빛으로 변했다.
 찌르르르릉!
 괴이하게도 고막을 찢을 듯한 쇳소리가 그의 손에서 뇌성처럼 터져 나왔다.
 한창 기세 좋게 덮쳐 들던 복면인들은 갑자기 귀청을 감싸쥐며 일제히 멈칫했다.
 감천곡의 입 밖으로 날벼락같은 광소가 터져 나온 것도 그때다.
 “와하하하······ 구철마수(九鐵魔手)의 제 일식(第一式) 철륜풍(鐵輪風)!”
 츠파파파팟!
 쉬아아앙!
 고막을 찢는 파공성과 함께 철편(鐵片)같은 강기( 氣)가 사방으로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광섬(光閃)을 방불케 하는 그 엄청난 속도!
 피하고 말고 할 생각조차 할 겨를도 없이 철편같은 강기는 복면인들의 머리, 목, 배 등을 사정없이 앞뒤로 관통시켜 버렸다.
 열 명의 복면인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것은 완전히 한순간이었다.
 구철마수(九鐵魔手)!
 공포(恐怖)의 신기(神技)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열 명의 복면인은 죽는 순간에도 비명을 내지른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한 사실은 감천곡에게도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이놈들은 대체······.”
 그는 한 시신에게 다가가 복면을 홱 낚아챘다.
 감천곡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복면 속에 나타난 그것은 도저히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제멋대로 짓뭉개진 그 얼굴은 잘 다져진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감천곡은 눈살을 찡그리며 시신의 입을 벌렸다.
 입 안에는 마땅히 있어야할 혀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바로 나다!”
 “······!”
 감천곡은 대경하여 빙글 돌아섰다.
 언뜻 만월 속에 하나의 금빛 그림자가 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본 것은 그것뿐이었다.
 꽝!
 감천곡은 미처 영문도 알기 전에 전신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우― 욱!”
 그는 피분수를 내뿜으며 뒤로 거세게 퉁겨 나갔다.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이 음산한 한 줄기 음성이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잘 가라, 감천곡! 구천십지만마전의 구천마제(九天魔帝) 중 제일 먼저 죽는 것이다!”
 번― 쩍!
 눈이 멀어 버릴 듯한 금광(金光)이 무서운 속도로 감천곡을 덮쳐 왔다.
 막 신형을 가다듬던 감천곡은 찢어져라 눈을 부릅떴다.
 “대력금황기(大力金皇氣)!”
 놀라는 바람에 그는 피할 여유를 놓치고 말았다.
 꽝―!
 “크아아악!”
 감천곡의 앞가슴이 종잇장처럼 터지면서 낙엽처럼 휘날려 갔다.
 멀찌감치 날려 가는 그의 발 밑으로 끝을 알 수 없는 천길단애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단애는 감천곡의 몸과 비명을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스윽!
 한 인영이 흡사 환영처럼 절벽 끝단에 떨어져 내렸다.
 일신에는 화려한 금의(錦衣)를 걸쳤고 얼굴에는 같은 색의 복면을 목덜미까지 덮어쓰고 있었다.
 그는 잠시 절벽 아래를 응시하더니 문득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하······ 두고보라! 구천십지만마전! 늦어도 오 년 이내에 너는 내 것이 되고 말리라!”
 그리곤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해시(亥時)를 정확하게 일각 남겨 둔 시각이었다.
 
 
 5
 
 
 “해시다······.”
 보름달이 폭포의 한쪽 절벽 끝에 걸쳐지는 순간 혁련소천의 눈빛이 날카로운 빛을 뿌렸다.
 그는 여전히 귀곡소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낚시는 이미 관심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시꺼먼 물체 하나가 물기둥에 휩쓸려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다!”
 쉬이익!
 낚싯줄이 형용할 수 없는 속도로 떨어지는 물체를 향해 쏘아졌다.
 낚시바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물체의 끄트머리를 꿰뚫었다.
 휙!
 물체는 낚시바늘에 걸려 정확하게 혁련소천의 옆에 떨어져 내렸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 구의 시신(屍身)이었다.
 혁련소천은 시신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더니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됐어!’
 바로 그때,
 “삼공자(三公子)님!”
 한 소리 웅후한 외침과 더불어 십 명의 인물이 혁련소천의 뒤쪽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사도진악을 비롯한 장군부의 무사들이었다.
 그 순간 혁련소천의 눈가로 한 줄기 실낱같은 광채가 스쳐 갔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좋아.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7장 대야망(大野望)
 
 
 1
 
 
 삼월(三月) 십오야(十五夜).
 이곳은 천계선사가 쓰던 불영암 내의 선방이었다.
 방 중앙에는 한 피투성이의 노인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안색은 완전히 잿빛으로 죽어 있고 숨은 쉬는지 안 쉬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워 생사지경(生死之境)을 헤매고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헌데 이 노인이 누군가?
 가슴은 속뼈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깊이 파헤쳐져 있고 두 다리와 왼쪽 팔은 무엇엔가 걸려 찢겨 나가고 없었지만 그는 분명히 감천곡이 아닌가!
 감천곡의 옆에는 푸른 낚싯대 하나가 놓여 있고 낚싯대 옆에는 혁련소천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결론은 하나다.
 혁련소천이 낚싯줄로 잡아당겼던 시신은 바로 감천곡이었던 것이다.
 혁련소천은 감천곡을 쳐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놀랍군, 놀라워······ 이런 상태에서도 인간의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있다니···’
 그 말은 아직도 감천곡이 완전한 시신이 아니라는 말과도 같았다.
 ‘노인장, 당신은 살아야 하오.’
 천하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당신은 반드시 살아나야만 하오!’
 나는 당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도, 회생(回生)시킬 수도 있소. 그러나 그것은 아니되오.
 그렇게 되면 훗날 귀찮은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오.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백면서생이라야만 하오. 그러니까 당신은 반드시 스스로 살아나야만 하는 거요.
 혁련소천은 감천곡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살아나시오.
 당신은 구천십지만마전 구천마제 중 군마천(君魔天)의 천주(天主)인 철장마제(鐵掌魔帝) 감천곡!
 구천십지제일신마를 제외하고 그 누구보다도 강함을 자부하던 당신이 아니오?
 그런 당신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지나가던 개가 들어도 배꼽을 쥐고 웃을 거요.
 일어나시오, 제발!
 혁련소천은 거의 간절한 마음으로 내심 부르짖었다.
 그 정성(?)이 워낙 지극했기 때문일까?
 “으으음······.”
 미약한 신음 소리와 함께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감천곡의 몸이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됐어!’
 혁련소천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것은 한 치의 오차라도 없애려는 내 계획을 하늘이 돕는 것이다!’
 기적(奇蹟)!
 감천곡의 회생은 확실히 기적이었다.
 회생의 확률이 백분지 일도 안 되는 그 처절한 생사의 도박을 감천곡은 승리로써 끝낸 것이었다.
 하늘이 도왔는가?
 아니면 감천곡의 뇌리 깊숙한 곳에 응어리진 처절한 복수심이 꺼져 가던 생(生)의 불꽃에 기름이 되었는가?
 아무튼 감천곡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나서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것은 평생 처음 보는 미소년, 혁련소천이었다.
 그후 감천곡은 자신을 영호풍이라 소개한 이 미소년의 극진한 간호를 받기 시작했다.
 그에 힘입어 감천곡은 차츰 건강을 되찾아갔다.
 그러나 웅후한 본신 내공 탓에 내상치료는 가능했으나 없어진 두 다리와 한 손만은 회복이 불가능했다.
 어느덧 감천곡이 불영암에 머무른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러는 사이에 감천곡은 영호풍이라는 미소년 혁련소천에게 급격한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백이십 평생은 홀홀 단신 제자도 없이 고독한 생을 누려 온 감천곡이다.
 일단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자 둑터진 봇물이었다.
 그 동안 혁련소천은 감천곡에게 의족(義足)을 만들어 달아 주었다.
 유월(六月) 초닷새.
 그 날은 감천곡이 혁련소천을 만난 지 꼭 팔십 일째 되는 날이었다.
 
 
 2
 
 
 초하(初夏).
 이른 아침 산중의 공기는 맑고 신선했다.
 혁련소천은 낚싯대를 둘러맨 채 유유히 산길을 걷고 있었다.
 잔뜩 우거진 신록(新綠)에 흥이 돋워졌는지 그는 연신 콧노래를 흥얼대며 걷고 있었다.
 이때 등 뒤에서 컬컬한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 무척 기분이 좋은 모양이군. 영호공자!”
 “어?”
 혁련소천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에서 감천곡이 웃는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활짝 웃으며 돌아섰다.
 “어르신···!”
 감천곡은 언뜻 보기엔 보통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걸어오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상체가 좌우로 약간 뒤뚱거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 감천곡의 의족은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장삼에 덮여 있어 누가 보면 다리가 약간 불편한 사람이 걷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단지 왼쪽 소맷자락만은 걸음을 떼어 놓을 적마다 공허롭게 펄럭거렸다.
 혁련소천은 다가온 감천곡의 몸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살펴 보았다.
 “오늘은 좀 어떠십니까?”
 감천곡은 기분 좋게 웃었다.
 “허허······ 영호공자 덕분에 무척 좋아졌네.”
 “하지만 이렇게 무리를 하시면······.”
 “걱정 말게. 이젠 거의 완쾌된 것 같으니까······.”
 혁련소천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천운입니다. 처음만 해도 전혀 회생이 불가능한 줄 알았더니만······.”
 감천곡의 동공 깊숙한 곳에 순간 시퍼런 불길이 피어 올랐다.
 그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독백처럼 뇌까렸다.
 “노부는 절대 죽을 수 없다네. 최소한 이번 일을 규명하기 전에는······.”
 혁련소천은 밝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그만 하시기에 천만다행입니다. 소생은 그 동안 얼마나 걱정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혁련소천을 바라보는 감천곡의 눈이 따스하고 부드럽게 빛났다.
 “영호공자는 언제쯤 장군부로 돌아갈 생각인가?”
 혁련소천은 잠시 머뭇거리고 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능하다면 내일쯤 떠나고 싶은 생각입니다만 노인 어른의 건강이······.”
 감천곡은 하나뿐인 손을 황망히 내저었다.
 “노부에 대해선 걱정 말게. 그렇지 않아도 노부가 자네의 갈 길을 막고 있는 듯하여 늘 미안한 생각뿐이었네.”
 “별 말씀을······.”
 감천곡은 인자한 눈길로 혁련소천을 응시하더니 문득 은근한 음성을 발했다.
 “영호공자,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영호공자의 가문은 장군부이니 만큼 무(武)를 지극히 숭상하겠지?”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호공자는 문(文)을 원하는가 무(武)를 원하는가?”
 혁련소천은 싱그럽게 웃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장차 문(文)으로 성공해 볼 생각입니다.”
 감천곡의 눈가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그럼 무(武)에는 전혀 뜻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쯧쯧······ 안타깝군.”
 감천곡은 나직이 혀를 차며 머리를 내둘렀다.
 “영호공자의 체질은 무예를 익히기에 더할 수 없이 특출한 것이라네. 장담하건대 만약 자네가 무예를 익힌다면 몇 년 이내에 뛰어난 절정 고수가 될 것이네.”
 혁련소천은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선천적인 약골에 영락없는 서생······.”
 감천곡은 그 말을 다급히 가로챘다.
 “아닐세. 노부는 노부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네.”
 혁련소천은 씁쓸하게 웃어 보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부는 자네에게 한 가지 선물을 하겠네.”
 “······?”
 “잘 들어보게.”
 감천곡은 혁련소천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천음지양(天陰地陽)··· 건곤일체(乾坤一體)······ 극원흡기(極元吸氣)······.”
 그것은 일종의 내공심법(內攻心法)의 구결(口訣)이었다.
 혁련소천은 자못 신중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구결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거의 한 식경에 걸쳐 구결을 끝낸 감천곡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
 “글쎄요······ 뜻을 새겨 보건대 도가(道家)의 토납법(吐納法)인 듯 한데······.”
 그 말에 감천곡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역시 문(文)에 통달하니 무(武)의 이치도 금방 깨닫는구나.”
 혁련소천의 얼굴이 가볍게 붉어졌다.
 “과찬이십니다.”
 “흠······.”
 감천곡은 대견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시 한 번 들려줄 테니 잘 새겨들었다가 기억하지 못하면 물어 보도록 하게.”
 이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혁련소천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감천곡은 흠칫했다.
 “무슨 말인가?”
 “조금 전에 들려주신 말······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
 감천곡의 눈이 커졌다.
 ‘그럴 리가······? 아무리 기초 토납진결이라도 그 긴 구절을 한 번 듣고 모두 기억한다는 건가?’
 혁련소천은 씩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한 번 읊어볼 테니 틀렸으면 교정해 주십시오.”
 이어 그는 조금 전 감천곡이 들려준 구결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청산유수(靑山流水)!
 도무지 막힘이나 거리낌도 없이 그 긴 구절들이 거침없이 흘러 나왔다.
 감천곡은 입이 딱 벌어졌다.
 백이십 평생을 살면서 지금처럼 놀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그는 아예 넋을 잃고 말았다.
 ‘이 녀석은 신(神)이 내린 귀재다!’
 불현듯 감천곡은 가슴 깊은 곳에서 거대한 욕망이 불끈 치솟는 것을 느꼈다.
 ‘절대로 이 녀석을 놓칠 수 없다!’
 그의 그런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혁련소천은 맑은 하늘을 유유히 감상하고 있었다.
 그날 밤 감천곡은 정확하게 열여덟 번을 까무러칠 듯 놀라야만 했다.
 이유인 즉,
 감천곡은 그날 아홉 가지의 무공 초식을 혁련소천에게 전수했다.
 그런데 이건 어찌된 판인지 혁련소천은 가르치기 무섭게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한 번 본 것을 모조리 기억하는 건 고사하고 직접 시전함에 있어서는 감천곡은 티끌만큼의 틈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혁련소천이 초식을 전개함에 있어 내공이 없는 것이 흠이었으나 감천곡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맙소사! 천하에 이런 신골(神骨)이 있었다니···!’
 이놈은 용(龍)이다!
 그것도 수백 년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감천곡은 완전히 혼(魂)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구천십지제일신마 단우비······ 저 아이는 절대 그의 아래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자질마저 능가할지도 모른다!’
 감천곡은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이 혈관 속을 미친 듯이 뛰노는걸 느꼈다.
 ‘그렇다! 저 아이의 자질이라면 능히 제일신마의 보좌에 오를 가능성도 있다!’
 그날 감천곡은 자신에게 수십수백 번을 다짐하고 맹세했다.
 그 다짐과 맹세가 무엇인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이별은 슬픈 법이다.
 특히 감천곡에게 있어선 백이십 평생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기에 더욱 큰 슬픔으로 와 닿았다.
 혁련소천을 태운 가마는 장군부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감천곡은 가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허공으로 눈길을 옮긴 것은 가마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 였다.
 “맹세하리라······!”
 그의 호목에선 횃불같은 신광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영호풍······ 자네를 제구대(第九代) 군마천의 천주로 삼은 이후 기필코 제일신마의 보좌에 앉히고 말리라! 그리하여 내가 못다 이룬 야망(野望)을 자네를 통해 완성하고야 말리라!”
 뜻을 세우면 그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체질이 감천곡이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지난 칠십 년 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들을 찾아가리라! 그들의 능력이라면 내게, 아니 영호풍에게 커다란 힘이 될 수 있을 것······!”
 
 
 3
 
 
 혁련소천은 흔들리는 가마 속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지금 한 권의 책자가 쥐어져 있었다.
 혁련소천은 눈을 뜨고 수중의 책자를 응시했다.
 그는 천천히 책자의 겉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한 장의 서찰이 끼워져 있었다.
 <이 책자에는 장군부에 관한 모든 것이 적혀 있습니다.
 다 읽으신 후 태우도록 하십시오.>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은 서찰이다.
 혁련소천의 입가에 씩 미소가 번졌다.
 ‘이 책자의 내용은 이미 내 머리 속에 완벽하게 기억되어 있다!’
 푸스스스······
 책자는 순식간에 가루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극상승(極上乘)의 양수공(揚手功)으로 책자를 없애 버린 것이다.
 혁련소천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내 예감이 맞는다면 감천곡은 늦어도 석 달 이내에 장군부로 나를 찾아 온다!’
 한 줄기 거대한 불꽃이 가슴 속 저 깊은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구천십지만마전! 영원한 마도의 불멸혼을 기원한다는 지상 최강의 단체···!’
 거기에 도전해 보리라!
 구천십지만마전을 상대로 나의 능력을 시험해 보리라!
 거대한 야망이 십육 세 소년의 가슴에서 맹렬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때 소용돌이치는 상념의 와중으로 한 줄기 전음이 혁련소천의 귓전에 스며들었다.
 (백변귀천입니다.)
 혁련소천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어찌 되었소?)
 (대종사님의 예상대로 감천곡은 동쪽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
 (그의 친구인 천궁문(天弓文)의 무형천궁(無形天弓) 공손무외(公孫武畏)와 홍의교(紅衣敎)의 홍포구마성(紅佈九魔聖)을 찾아가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눈을 떴다.
 별빛같은 신광이 동공 깊숙한 곳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행적을 절대로 놓치지 않도록 하시오.)
 (흐흐흐······ 염려 마십시오. 당금천하에 넷째형 수라마영의 이목을 벗어날 자는 오직 대종사님뿐이니까요.)
 혁련소천은 빙긋이 웃을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럼 속하는 이만······.)
 백변귀천의 전음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혁련소천은 의자 깊숙이 상체를 파묻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장군부에 가면 한 가지가 문제로군.
 옥산랑······ 영호풍의 약혼녀라 했던가?’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 문제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어쩔 수 없군.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8장 천문(天門)
 
 
 1
 
 
 두두두두두······
 산동성(山東省)의 어느 관도 위를 일진의 기마대가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질주하고 있었다.
 비록 십여 기(騎)에 불과했으나 그 위용은 아마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질주하듯 위풍당당하기 이를데 없었다.
 또한 그들 십 기의 중앙에는 정교하고도 화려한 순금색 팔두마차(純金色八頭馬車)가 미끄러지듯 질주하고 있었다.
 마차에는 금빛 깃발이 양쪽으로 찢어질 듯 펄럭거렸다.
 장군부(將軍府)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천간산을 떠나 온 장군부의 무사들이었다.
 사도진악은 붉은 적토마에 몸을 싣고 마차 옆에 바짝 붙어 달리고 있었다.
 때는 석양 무렵이라 붉게 타오르는 황혼 속에 천지간은 온통 핏빛으로 채색되고 있었다.
 사도진악은 문득 눈을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거대한 산악이 시야에 쏘아져 들어왔다.
 사도진악의 두 눈 깊은 곳에 한 줄기 기이한 광채가 솟아올랐다.
 ‘태산(泰山) 천극봉(天極峯)···!’
 이 무렵 마차 안의 혁련소천은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의 미간에는 어쩐지 착잡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이때 그의 귀로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 왔다.
 (대종사님, 태산의 천극봉입니다.)
 (알고 있소.)
 (어떡하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갔다 올 생각이오.)
 혁련소천은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나의 목적이 모두 이루어질 때까지는 천문(天門)을 철저히 봉쇄시켜야 하니까······.)
 그는 좌측으로 난 창(窓)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지금은 유시(酉時), 한 시진 후 무진현(武進縣) 대성루(大成樓)에서 봅시다.)
 한 쌍의 부리부리한 눈이 창 밖에서 크게 끔벅거렸다.
 (알겠습니다.)
 (한 시진 내에 무진현에 당도하려면 말의 속도를 한 푼 정도 더해야 될 것이오.)
 (알고 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눈은 창 밖에서 사라졌다.
 뒤이어 우렁찬 외침이 천둥처럼 터져 나왔다.
 “모두 말의 속도를 한푼 정도 더하도록 하라!”
 놀랍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은 사도진악이었다.
 혁련소천은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기이체현현도(以氣離體玄玄道)······.’
 내심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순간 그의 감은 두 눈을 통해 한 노인의 모습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양 손, 양 다리와 두 눈마저 없는 마치 뭉퉁한 고깃덩어리와 같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사후(邪侯) 금자생(琴子生)······ 마음만 먹으면 천하를 단숨에 혈해(血海) 속에 처넣을 수 있는 어른······.’
 비록 돌아가셨지만 그 분 금노야(琴老爺)의 모든 것이 내 몸 속에 깃들어 있다!
 부르르······
 혁련소천의 전신이 순간 폭풍을 만난 듯 거센 경련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 토록 준미하던 얼굴이 졸지에 시체처럼 잿빛을 띠었다.
 호흡의 수를 줄인다······.
 전신을 공(空)으로 만들어 이체(離體)의 공(攻)을 돕는다······.
 스스스스······
 혁련소천의 백회혈(百會穴)에서 한 가닥 희뿌연 기체가 스며 나왔다.
 그 희뿌연 기체는 스며 나오기 무섭게 하나의 사람의 형상으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차츰 완연한 형상을 드러내는 그것은 바로 혁련소천의 모습이었다.
 이 무슨 통천경악할 괴사(怪事)인가?
 믿을 수 없게도 인간의 몸 속에서 또 하나의 인간이 탄생된 것이었다.
 분리되어 나온 혁련소천은 앉아 있는 또 하나의 혁련소천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이기이체현현도······ 이것을 익힌 나는 두 개의 목숨을 갖고 있다.’
 내가 죽는다 해도 또 하나의 신체가 있는 이상 나는 재생한다.
 단지 그렇게 되면 두 번 다시 이기이체현현도를 사용할 수 없을 뿐이다.
 혁련소천은 문득 창가를 쳐다보았다.
 창가의 미세한 틈을 통해 그의 신형은 이내 연기처럼 빠져나갔다.
 
 
 2
 
 
 태산 천극봉.
 막 드리워지는 어둠이 그 운자를 조금씩 뒤덮어 가고 있었다.
 그 어둠을 뚫고 비조처럼 천극봉을 향해 날아오르는 한 인영이 있었다.
 유성(流星)이 흐르듯 놀라운 속도로 공간을 압축해 온 인영은 순식간에 천극봉 정상을 밟고 우뚝 몸을 세웠다.
 그는 다름 아닌 혁련소천이었다.
 “사 년 만에 돌아왔군.”
 혁련소천은 감회 서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극봉 정상에 있는 기이한 분위기의 커다란 호수는 푸르다 못해 검게까지 보이는 벽수(碧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순간 호수의 수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파문이 수없이 일고 있었다.
 “녀석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혁련소천은 호수를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문득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두 마리의 거대한 독수리가 어둠을 가르며 힘차게 비행하고 있었다.
 “잘됐어.”
 번― 쩍!
 순간 혁련소천의 소맷자락에서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끄아악!
 기세 좋게 날아가던 두 마리의 독수리는 혈선에 몸이 관통되면서 처절한 괴성과 함께 선후로 호수 속으로 빠졌다.
 다음 순간 독수리가 떨어진 곳에서 시뻘건 핏물이 쫙 번지는가 싶더니 이어 허연 뼈만 드러낸 독수리가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설명은 길지만 이 모든 일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혁련소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려웠다.
 “사망혈리(死亡血鯉)······ 저 놈들에게 걸리면 무쇠 덩어리도 남아나지 못한다.”
 그의 눈에 문득 차디찬 한광(寒光)이 솟구쳤다.
 “두고봐라! 그 일만 규명되면 하토궁(蝦土宮)의 놈들은 모조리 사망혈리의 밥으로 만들어 주리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혁련소천은 대뜸 호수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이 녀석들······ 나 혁련소천의 몸은 너희가 먹기에 너무 질기니 단념하도록 해라······.”
 동시에 그의 신형은 물방울 하나 퉁겨 내지 않고 빨려들 듯 호수 속으로 사라져 갔다.
 
 
 3
 
 
 석실(石室).
 사방 넓이가 족히 백여 장은 됨직한 그곳은 차라리 하나의 광장이었다.
 석실의 한 쪽에는 일곱 개의 관(棺)이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관 앞에는 각기 하나의 제단이 세워져 있었고, 그 제단 위에는 위패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혁련소천은 그 중 맨 우측의 위패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첫번째 위패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혈뢰사야(血腦邪爺) 혁련후(赫輦候) 신위(神位).>
 위패에는 그런 글이 쓰여 있었다.
 “사 년 만에 뵙습니다, 혁련노야······.”
 혁련소천은 위패를 바라보며 감회 서린 음성을 말했다.
 “지난 사 년 동안 소천은 무척 바빴습니다. 그 결과 끝내 귀곡천류하에서 멋진 고기 한 마리를 건졌습니다.”
 그의 두 눈에 문득 영활한 빛이 솟아났다.
 “소천······ 아직도 혁련노야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순간 혈뢰사야 혁련후가 입버릇처럼 떠들어 대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혁련소천의 뇌리를 스쳐 갔다.
 ― 교활하라.
 ― 잔인할 정도로 영리하라. 허나 남에게 드러내지는 마라.
 ― 네가 적으로 간주하거나 너를 배신할 자는 두 번 다시 네 앞에 세우지 마라.
 “그리고······ 노야께서 주신 십팔천혈뢰마서(十八天血腦魔書)에······ 거기에 수록된 신계(神計), 귀계(鬼計), 마계(魔計), 악계(惡計), 혈계(血計), 살계(殺計) 등의 마도십팔계(魔道十八計)도 모두 이 소천의 몸에 스며 있습니다.”
 “노야······ 당신과 내가 비록 피는 다를지언정······ 노야는 성도 없는 내게 혁련의 성을 주신 분······.”
 혁련소천은 잠시 무거운 시선으로 혈뢰사야 혁련후의 위패를 바라보았다.
 “노야, 걱정 마십시오. 구천십지제일신마 단우비······ 무림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그에게 저는 도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이 일순 태양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이것은 나 혁련소천의 이름과 전부를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실로 하늘을 허물어뜨리고자 하는 위대한 야망(野望)이 아닐 수 없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발길은 곧 두 번째의 위패 앞으로 향해졌다.
 <앙천묵제(仰天墨帝) 희여송(希如松) 신위.>
 “희노야······ 당신은 말했습니다.”
 ― 소천, 너는 나의 무공을 이어 받았으나 나의 제자는 아니다.
 ― 네가 단우비를 꺾기 위해 마음 먹은 이상 무공이나 배분으로 네 위에 존재할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다.
 ― 누구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마라. 아니, 고개조차 숙이지 마라.
 “당신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소천이 당신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용납치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소천은 무릎 꿇지 않겠습니다.”
 앙천묵제 희여송의 위패를 바라보는 소천의 얼굴에 은은한 흠모의 기색이 떠올랐다.
 “희노야, 당신의 기도(氣度)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것, 허나···솔직히 약간 두렵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는 문득 고소를 지었다.
 “후후······ 만약 제가 단우비를 꺾지 못하면 죽어서 어찌 당신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허나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저를 위해 전신 내공과 심지어 생명까지 버렸거늘······ 그런데도 실패한다면 당신이 제게 물려준 천하제일강기(天下第一 氣) 살인마벽 천하제일강기 살인마벽.”
 세 번째 위패!
 <사후(邪侯) 금자생(金子生) 신위.>
 털썩!
 혁련소천은 그 위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금노야······ 희노야께서는 제가 천하의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지 말라 했으나 오직 두 분 혁련노야와 금노야 앞에서만은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위패를 쳐다보는 그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혁련노야는 제게 성을 주셨고 금노야는 바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문득 그의 두 눈에 뽀얀 물안개가 어렸다.
 “오늘······ 이기이체현현도를 전개하며 금노야를 생각했었습니다.”
 소천의 망울진 눈물 속에 잠시 사지가 없고 두 눈이 없는 참혹한 모습의 괴인이 투영되었다.
 순간 그의 입가가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금노야께서 저술하신 사환천(邪幻天)의 일백팔기비공록(一百八技秘功錄)이 비록 이 세상에서 소멸되긴 했지만······ 그 내용은 이 소천의 머리 속에서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금노야, 욕하실 지 모르겠으나······ 이제 일백팔기비공록에 관한 한 금노야보다 한 수 위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일어섰다.
 이어 그는 세 번째 위패를 향해 마지막 눈길을 던졌다.
 “손녀를 찾아내라 하신 금노야의 마지막 부탁······ 전 중원을 모조리 뒤져서라도 반드시 완수해 드리겠습니다.”
 <무풍마간(無風魔竿) 쌍비람(雙飛藍) 신위.>
 혁련소천은 네 번째 위패를 보며 한 인물을 회상했다.
 쌍비람······ 항상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노인······ 두 눈이 언제나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던 그는 항상 술병과 낚싯대를 쥐고 다녔었다. 그것도 정해진 듯 언제나 왼손에는 술병, 오른손엔 낚싯대를······
 그는 혁련소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혀꼬부라진 음성으로 늘 이렇게 말했었다.
 ― 이놈아, 나 쌍비람이 주정꾼이라고 얕보지 마라.
 ― 내 무쌍마영(無雙魔影)의 경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구천십지제일신마 단가놈에게 두어 수 접어주고도 이길 수 있고······.
 ― 이 낚싯대 하나면 구주팔황(九州八荒)을 통째로 낚을 수 있다, 이놈아······.
 “한 가지 사무치는 한(恨) 때문에 평생을 술과 살아야 했고 무림에 조금의 이름도 남기지 못한 분······.”
 혁련소천의 눈빛이 음울하게 변해 갔다.
 “쌍노야······ 염려 마십시오. 하토궁의 세력이 아무리 크다 하나 소천은 반드시 그 일을 규명해 내고야 말겠습니다.”
 <만독천세(萬毒天歲) 신위.>
 다섯번째 위패 앞이었다.
 혁련소천의 입가에 문득 야릇한 미소가 서렸다.
 “독형제신궁(毒形帝神宮)의 노태상(老太上)어른······ 아직 동정호는 독호(毒湖)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노태상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갔습니다!”
 만독천세 위지태로!
 그는 혁련소천에게 자신의 모든 독공(毒功)을 전수했고, 독형제신궁의 태상(太上) 자리를 물려주어 만독의 제왕이 되게 만들었다.
 ― 동정호가 모두 독(毒)이라면 인생의 진미를 깨닫겠거늘······.
 늘 그렇게 말하며 한숨 쉬던 인물이 바로 위지태로였다.
 그러나 혁련소천이 위지태로에게서 배운 것 중엔 독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태산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초인적(超人的)인 정력(定力)이었다.
 혁련소천은 여섯번째 위패 앞에 섰다.
 <태양검제(太陽劍帝) 용천승(龍天乘) 신위.>
 태양검제 용천승······ 그는 한 마디로 검(劍)에 미친 사람이었다.
 ― 갈대잎 하나면 천 명의 고수를 베고, 썩은 검이라도 한 자루 쥐어 준다면 내일 아침 태양이 둘로 쪼개져 뜨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외치고는 호호탕탕하게 웃던 인물.
 그는 혁련소천에게 천하의 모든 검법을 전수해 줬을 뿐만 아니라, 검주령(劍主令)을 주어 검천(劍天)의 대영주 자리를 계승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혁련소천의 성격 형성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했다.
 ― 소천, 너는 천하인이 존경하는 약자(弱者)가 되고 싶으냐, 천하인이 질시하는 강자(强者)가 되고 싶으냐?
 ― 소천, 천하의 그 누구도 네 위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마라.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여라!
 ― 소천, 네가 얻을 수 없는 것은 천하의 그 누구도 얻지 못하게 하라!
 ― 만약 네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취하라! 그것으로 인해 천하인이 너를 욕한다면 너 역시 천하인을 욕하라!
 소천에게 수시로 한 이 말들처럼 태양검제 용천승은 평생을 그렇게 살다 간 인물이었다.
 혁련소천은 또렷이 위패를 응시하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용노야······ 나는 천하인이 존경하는 약자도, 천하인이 멸시하는 강자도 싫습니다. 나는 그저 위대한 강자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위대한 강자 - 참으로 멋진 말이 아닌가!
 “용노야, 당신의 다섯 제자 검천의 오 형제는 모두 초일급검수들······ 능히 검천을 빛낼 것입니다.”
 혁련소천은 그 말을 끝으로 여섯번째 위패 앞에서 떠났다.
 마지막 위패, 거기에 적힌 인물은 천하에 못하는 것이 없는 천하잡기(天下雜技)의 달인(達人)이었으며,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천하만사무불통지자(天下萬事無不通知者)이기도 했다.
 <천기개천(千技蓋天) 사사무(史査武) 신위.>
 그는 하루에도 똑같은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버릇이 있었다.
 ― 만약 천하가 잡기(雜技)로 통하는 세상이라면 나는 일만 명의 황제를 종으로 부릴 수 있다!
 ― 내가 못하는 것은 하늘도 못하고 내가 모르는 것은 하늘도 모른다.
 사 년 전, 사사무는 운명 직전 혁련소천에게 물었다.
 ― 소천, 너는 나를 얼마만큼이나 알았느냐?
 혁련소천의 대답은 너무도 엉뚱했다.
 ― 사노야, 만약 당신이 살아난다면 나의 다섯번째 수하로 삼을 것입니다.
 그 말에 사사무는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 와하하핫······ 결국 내가 소천의 다섯 단계 아래라는 말! 네놈의 수하가 되기 싫어서라도 죽고 말 것이다!
 그렇게 가장 통쾌하게 웃다가 죽어간 노인······ 천기개천 사사무는 그런 사람이었다.
 “허나 사노야······ 솔직히 나는 아직도 당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사노야는 일곱 노야 중 가장 신비한 분이셨으니까요.”
 돌연 혁련소천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나는 당신의 이름이 사사무라는 것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한참 동안 사사무의 위패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소천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혁련소천은 일곱 개의 위패를 한꺼번에 쓸어 보며 강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들 일곱 분의 노야는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 우리는 한 인간을 상상도 못할 괴물로 만들었다! 저 혁련소천이란 이름의 괴물을!
 “이 괴물은 마지막으로 이곳에 들렀습니다. 이곳의 입구인 천문(天門)을 봉쇄하기 위해서······.”
 두 번째 나온 말 - 천문!
 “이곳의 위치와 이 안의 기관 장치는 너무나 훌륭합니다. 훗날······ 저는 이 노야의 시신을 이용해서 천하를 상대로 한 번 멋지게 써먹을 것입니다.”
 혁련소천은 씩 웃었다.
 “하지만 욕하지 마십시오. 무덤까지 써먹는 나쁜 놈이라고······.”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 끝을 가리키며 짓궂게 미소지었다.
 “후후······ 그러니까 제가 괴물이 아닙니까?”
 짓궂은 표정과는 달리 위패들을 쓸어 보는 소천의 두 눈에 애잔한 그리움이 감돌았다.
 그는 슬슬 뒷걸음질치며 두 손을 장난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일곱 노야, 이제 괴물은 물러갑니다. 그럼······.”
 인사말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소천의 신형이 섬광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후후······ 두고 보십시오. 이 괴물이 천하를 어떻게 요리하는지······.”
 섬뜩할 정도의 자신감이 서린 웃음이 일곱 개의 말없는 위패 위로 메아리쳤다 사라지는 괴물······ 그의 이름은 혁련소천이었다.
 
 
 4
 
 
 대성루(大成樓).
 무진현 내에서 유일한 것이며 객점과 주루를 겸한 곳이었다.
 사도진악이 호위하는 순금색 팔두마차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그 대성루 앞에 멈춰 섰다.
 사도진악은 천천히 하늘을 응시했다.
 ‘꼭 한 시진이 걸렸다!’
 다음 순간 사도진악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서 내려섰다.
 이어 그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마차를 응시하며 말했다.
 “하룻밤 쉬어갈 곳에 당도하였습니다, 삼공자님.”
 사도진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순금색 팔두마차의 문이 활짝 열려졌다.
 이어 말할 수 없이 준미한 절세미소년이 천천히 마차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혁련소천······ 바로 그였다.
 그는 천천히 마차 밖으로 내려서며 공손히 시립해 있는 사도진악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소, 사도총관!”
 순간 허리를 숙인 사도진악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9장 천우신기(天羽神機)
 
 
 1
 
 
 밤은 이미 삼라만상을 짙은 어둠의 장막으로 뒤덮은 지 오래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아한 분위기의 객실 안이 황촛불에 의해 조용히 밝혀지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탁자에 앉은 채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며칠 후면 장군부에 들어가게 된다······.’
 불빛을 받은 소천의 얼굴이 윤기있게 빛났다.
 ‘장군부······ 당금 황실에서 가장 신임하고 있는 천위대장군(天衛大將軍) 영호대인이 가주(家主)로 있는 곳. 그의 말 한 마디면 수백의 맹장(猛將)과 백만(百萬)의 군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문득 그의 두 눈이 신비로운 광채에 휩싸여 갔다.
 ‘후후······ 나 혁련소천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굳이 장군부를 택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위대한 야망(野望)의 성취를 위한 첫번째 포석(布石)!
 허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오직 혁련소천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대종사님!”
 천장 어느 구석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 나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혁련소천은 미동 없이 여전히 찻잔만을 응시한 채 말했다.
 “내려오시오, 제갈천뇌!”
 순간 천장 한 귀퉁이의 미세한 틈이 스르르 갈라지더니 귀신처럼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길게 자란 은빛 눈썹이 유난히 돋보이는 은의(銀衣) 중년인···그는 바로 천우신기 제갈천뇌였다.
 그는 내려서자마자 혁련소천을 향해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종사님을 뵙습니다.”
 혁련소천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내밀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이리 와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제갈천뇌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혁련소천과 마주 앉았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물었다.
 “어찌 되었소?”
 제갈천뇌는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공손히 대답했다.
 “모든 일은 완벽합니다. 굳이 흠이 있다면 너무 철저하게 완벽한 것이 흠입니다.”
 “흠······!”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천천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천뇌, 이제 내가 주의해야 할 점을 말해 주시오.”
 “대종사님께서 주의하실 점은 없습니다. 단지 장군부의 몇몇 인물에 대해선 확실히 알고 계셔야 할 필요가 있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장군부의 인물에 대해서라면 영호대인 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 정도로는 안 됩니다.”
 혁련소천은 흠칫한 표정으로 제갈천뇌를 바라보았다. .
 “그렇다면······ 무엇인가가 또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혁련소천은 검미를 약간 찌푸리며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제갈천뇌의 진중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먼저 영호대인의 출신 내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면밀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영호대인은 열두 살 때 당시 황궁의 대법사(大法師)로 있던 천축(天竺)의 기인 천룡대법사(天龍大法師)의 천거를 받아 황궁무고(皇宮武庫)에 들어갔던 자로 밝혀졌습니다.”
 찻잔을 들어가던 소천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황궁무고······?”
 “그렇습니다.”
 “음······!”
 혁련소천은 자신도 모르게 묵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황궁무고(皇宮武庫)!
 감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일명 천추무상별부(千秋武相別府)라고도 불리는 그곳에는 천하의 무학이란 무학은 모조리 비장(秘藏)되어 있다고 한다.
 허나 어떤 무학이 얼마만큼이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천하무학 전체의 최소한 삼분지 일은 황궁무고에 쌓여 있는 것이라고 하나 그 또한 확인된 바 없다.
 황궁무고는 그저 신비(神秘) 그 자체가 되어 갖가지 소문과 전설만 풍성하게 전해져 내려올 뿐이었다.
 ‘황궁무고가 만들어진 것은 이백 년 전이고 그 동안 그곳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단 세 명뿐이라고 했다. 헌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영호대인이었다니······!’
 혁련소천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영호대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번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갈천뇌는 계속해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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