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신검무황 [E]

신검무황 1

2018.03.22 조회 533 추천 0


 신검무황 1권
 서장 1 다섯 장의 용연서지(龍連書紙)
 
 
 백지(白紙).
 그 하얀 종이 위에, 처연히 얽힌 연풍(戀風)의 사연들······.
 도합 다섯 장이었다.
 금빛 용(龍)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두 장의 서지(書紙)와 화려한 연꽃이 그려진 세 장의 서지.
 허나, 무척 오래된 듯 누렇게 탈색되었고 피묻은 지문(指紋)에 더럽혀지고 구겨진 서지(書紙)였다.
 누가 누구에게 보내려 했는지 알 수 없게 희미해진 글씨들······.
 그러나 누가, 항차 이 중원대륙에 휘몰아칠 가공할 혈전사와 사랑의 일대광주곡(一代狂奏曲)이 되는 이 아픔의 사연들이 거기 있음을 알 것인가?
 대륙(大陸)이 있기에 중원(中原)이 있었고, 야망(野望)이 있음으로 해서 처절한 전쟁(戰爭)이 존재한, 그리고 애증(愛憎)이라는 갈등 속에 찬연히 피어난 사랑의 이야기가 적힌 다섯 장의 용연서지(龍蓮書紙)를!
 
 ***
 
 書(一)
 <전 아직도 당신이 타인(他人)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제가 처음으로 사랑했고··· 지난날 하늘처럼 위대하게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당신이었기에 저의 모든 영혼(靈魂)을 당신 앞에 바쳤었는데······. 결국 버림받은 꼴이 되었군요! 그러나 후회하지 않아요. 그래도 당신만이 내 인생에 있어 유일한 가장 인간다운 사람이었으니까요.
 ― 태창제(太昌帝) 칠 년(七年) 당신의 사랑.>
 
 書(二)
 <아(雅)! 어느 날인가 당신이 내게 욕심이 너무 많다고 물은 적이 있을 것이오. 이제 그 욕심이 천하(天下)라는 단 하나의 목적뿐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늦게 답해주는 것 같구려. 아(雅)! 전쟁(戰爭)이 시작되었소! 이 땅에 무림이 생긴 이래 이런 대전은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난세전(亂世戰)이 될 것이오. 그리고 아무도 이 전쟁을 막지 못하오. 황제(皇帝)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번 전쟁을 일으킨 나조차도 종식시키겠다는 일념(一念)뿐 중단시킬 수 없다는 얘기요. 아(雅), 내가 왜 이런 길을 택했느냐고 묻지 마시오! 당신도 나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을 운명처럼 간직한 채 서로 헤어진 것이라 믿기 때문이오! 며칠 후 나는 사천성(四川省)에 있게 될 것이오. 기억하오?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났던 구유신사(九幽神祠)가 있는 곳을······.
 ― 성하지절(盛夏之節) 호남성(湖南省)에서.>
 
 書(三)
 <당신이 이 글을 받아볼지 의문이군요. 이제 당신이 그 끝없는 전장(戰場)을 누빈 지 십여 년······. 헌데, 당신은 자신의 야먕(野望)을 얼마나 이룩했나요? 제 귀에 당신의 그 위대한 이름이 종종 들려오곤 하지만 그것이 이 대전쟁을 일으킨 결과로 얻어낸 소산인가요? 실망이군요! 저는 지금 당신의 그 천하최강이라는 백색태양군단(白色太陽軍團)을 열흘이면 충분히 초토화(焦土化)시킬 수 있는 위치에 올라와 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실 거예요. 어쨌거나 우리가 헤어질 때 약속한 대로 제가 이긴 거예요. 당신과의 시합에서······. 그래요. 당신은 자신의 야망을 앞으로 오 년(五年) 이내에 이룰 거예요. 아니, 그보다 더 빨리 달성할지도 모르죠. 당신의 힘은 신(神)마저 두려워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때론, 당신이 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죠. 그래서 두렵기도 해요. 벌써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지금껏 있어 왔던 그 어느 때의 전쟁보다 아니, 과거의 모든 전쟁사(戰爭史)를 모두 합한 것보다도 많은 생명들이 당신의 야망 아래 죽는다는 사실이 갑자기 피곤해지는군요. 두서 없는 글이었어요.
 ― 천계제(天溪帝) 초춘(初春) 자금성(紫禁省)에서.>
 
 書(四)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는구려. 당신과 타인이 되었던 이십여 년 전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진 않소! 오히려 기쁘다고나 할까? 당신은 황궁(皇宮)을··· 나는 중원무림(中原武林)을 장악했으니······. 만일, 우리가 지금도 부부(夫婦)였다면 천하를 거머쥐고 있을 텐데 말이오! 허허허······. 아(雅), 당신에게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중원 땅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지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안타깝소. 당아욱(唐雅郁)빛의 사향초(麝香草)가 널려 있는 푸른 대초원(大草原)과 끝없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大商)과 낙타 떼들의 행렬······. 그리고 회갈색 대지 위에 세워진 거대한 황금사원(黃金寺院)의 탑(塔)이 존재한다는 것을······. 헌데, 당신의 소식이 끊어진 지 벌써 십 년이 넘는구려. 허허허! 이 나이에 남의 아내가 되어 있을 당신에게 무리한 요구임을 알면서도······.
 ― 숭정제(崇貞帝) 원년(元年).>
 
 書(五)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서찰이면서도 왜 이렇게 눈물이 나도록 서러워지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한(恨)과 분노(憤怒)의 그것임을 아시나요? 나의 이 사무치는 분노를 당신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산처럼 부른 배를 끌어안고 전쟁의 폐허 속을 뒤지는 내겐 정말 도움이 필요했죠. 그러나 아무도 나에게 힘이 되어줄 수가 없었던 세상······. 바로 당신이 만든 지옥(地獄)이 아닌가요. 온 육신이 찢겨져 나가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성장했을 어린 시절만큼이나 혹독한 시련 속에 자라났어요. 그리고 시시각각 찾아드는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나의 목숨을, 자식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힘겨웠던 그런 하루하루가 지나고, 당신은 믿기 어려울 테지만 그 아기가 커서 분명 당신의 손자(孫子)를 낳았다는 사실이에요. 헌데, 바로 당신이 만들어낸 세상이 그 자식과 며느리를 죽였고 이제 또 잃어버린 나의 손자(孫子)까지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단 말이에요! 그것이 바로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이었나요? 당신··· 당신의 힘은 생각한 이상으로 거대하더군요. 그러나··· 과신하지 말아요. 절대로······. 아직은 내가 살아있고 또······. 문득, 사랑은 감정의 장난이 아니라는, 당신이 떠날 때 남기고 간 말이 생각나는군요. 돌이켜 생각하니 우스워요. 당신은 이제 영원히 나와는 남인 것을······. 그리고 당신의 심장에 칼을 들이밀지도 모를 그런 우리 사이가······.
 ― 아방화원주(阿房花園主).>
 
 ***
 
 사연이 많은 밤이 길게 느껴지듯, 두 이름 모를 사랑했던 이가 이십여 년이란 긴 공간을 두고 남긴 다섯 장의 사연······.
 그러나 애절한 연풍(戀風)의 사연처럼 보여진 그것이 엄청난 비극(悲劇)을 잉태하니······.
 그것이 바로 용연서지(龍蓮書紙)로 시작되는 전쟁(戰爭)이었다.
 
 
 서장 2 살인십전신가(殺人十戰神家)
 
 
 <선대살인전신(先代殺人戰神)의 지혜에 대하여 나의 감사하는 마음은 그대의 자식들, 그리고 그 후예(後裔)들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전해질 것을 하늘의 신(神)과 위대한 대지(大地)에 맹세하노라!>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차고 냉정(冷情)하며 비정(非情)했던 인간들의 피의 맹서(盟誓)이자, 무참히 찢겨진 영혼(靈魂)을 가진 고독한 인간들의 절규(絶叫)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를 전신천맹(戰神天盟)의 서(誓)라 했다.
 전신천맹(戰神天盟)!
 언제부터인가, 무림이란 인간세계(人間世界)가 첫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 전투적(戰鬪的)이고도 비인륜적(非人倫的)인 맹서는 시작되어 왔고 그것이 바로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 살인전신(殺人戰神)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살인전신(殺人戰神)!
 들어보았는가?
 오직 죽음만을 찾는다는 인간들을······.
 이 하늘 아래 최초로 죽음의 신화(神話)를 창조했고 그 대지 위에 어떠한 힘으로도 깨뜨릴 수 없다는 불멸(不滅)의 가문(家門)을 세운 전설자(傳說者)들을······.
 분명 존재하나, 그 신기루(蜃氣樓)의 환상(幻想)과도 같은 살인전신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중국오천년전사(中國五千年戰史)가 만들어낸 가공할 살인(殺人)의 지혜(智慧)를······. 어떻게 익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그들이 지닌 한 자루의 검(劍)과 그리고 도(刀)······. 도저히 파해(破解)할 수 없는 실전적(實傳的)이라 했다!>
 살인전신!
 전설은 있으되 아무도 그 신비를 풀지 못한 사상최고최극강(史上最高最極强)의 인간들······.
 그들은 일백 년(一百年)을 주기로, 오직 한 명의 전신(戰神)만이 설북(雪北)으로부터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어 남하해 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전쟁(戰爭), 살육(殺戮)의 전장(戰場)을 찾는다는 것뿐······.
 그렇다.
 이름이 알려지고 명성(名聲)을 얻는 그 순간 그들은 홀연히 사라졌다.
 허나, 그들은 결코 중원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저 넓디넓은 대륙의 어디선가 황혼(黃昏)을 바라보며 자신의 후손이나 후예에게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들려주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또 하나의 신비가 되어 강호상에 떠도는 이야기가 되었으니 세월은 무심히 흘러 지난 구백여 년 동안 십 인(十人)의 살인전신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중원을 떠날 때 그 자신들의 후예와 함께 중원인들로 하여금 영원히 뇌리에 기억케 한 무서운 일맥(一脈)을 남겼으니, 세상은 그 열 개의 맥문(脈門)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살인십전신가(殺人十戰神家)!
 기억할 필요는 없다!
 수천 년 무림사 이래 이들처럼 완벽히 중원을 장악한 가문(家門)은 없었으니까.
 그들은 나서는 법이 없다.
 지배자(支配者)를 움직여 천하를 움직인다.
 통칭, 이렇게 이야기되는 살인십전신가의 무서운 힘!
 그것은 그때까지도 없었던 전혀 새로운 체제의 경이적이며 완벽한 지배방식(支配方式)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남이 가진 비밀(秘密)을 캐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당금 황제의 전신에 몇 개의 크고 작은 점들이 있는가 하는 것까지도 말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가진 값진 비밀을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희열(喜悅)을 느끼는 기인(奇人)이기도 했다.
 한데 어느 날, 그는 몹시 두려움에 싸인 얼굴로 이런 말을 해댔다.
 ― 나, 나는 그들을 보았다!
 살인십전신가 중 최후의 모습을 보였던 천기도문(天機道門)을 비롯해 정체미상(正體未像)의 구 인(九人)이 회합하는 신가대회동(神家大會動)의 순간을······.
 너무도 무섭고 전율스러웠다.
 그들은 지금껏 어느 패자(覇者)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지배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철저하리만치 완벽하다는 것이다.
 나는 장담하건대, 이후 중원은 어떠한 힘으로도 그들을 와해시키거나 붕괴시킬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늘의 힘을 갖기 위해 무려 천년 동안 체계적인 안배를 준비해 왔고 이제 그것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 하늘과 땅은 이제 그들의 것이다.
 영원히··· 아무도 손댈 수 없는······.
 허나, 세인들은 그의 말을 비웃었다.
 결국 두려움에 횡설수설한 천재의 말은 미친 자의 말만큼이나 하찮게 여길 수밖에 없었고, 그로부터 열두 시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세인들은 두 번 다시 그 천재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왜나햐면, 그는 죽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집 우물에 머리를 처박고 죽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발견한 동네 아낙의, 미친 자의 죽음은 화장(火葬)을 해야 한다는 말에 결국 흔적 없는 재로 화(化)해 버리고 말았다.
 어느 말하기 좋아하는 한 천재의 타살사건(打殺事件)과 더불어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전연(戰煙)이 가득한 혈육난비(血肉亂飛)의 전장을 누비는 신(神)의 모습을, 그리고 사나이의 끓는 피로 적셔지는 이 땅의 신화(神話)를 그리고 있다.
 
 
 1장 아방화원(阿房花園)의 여인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대명제국의 하늘이 여기에 있으며 모든 권력의 핵(核)이 모여 있는 곳이다.
 따라서, 그 절대권력을 감싸고 있는 성(城)인 북경성(北京城)은 결코 예사롭게 지어진 것이 아니다.
 연회백(軟灰白)의 운남대리석(雲南大理石)으로 만들어진 자금외성(紫禁外城)의 길이가 백팔십오 리(百八十五里).
 그리고 통칭, 자금성(紫禁省)이라고 부르는 북경대성(北京大城)의 화려함이란 글자 그대로 자의관복(紫衣官服)을 입은 자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금역(禁域)의 성(城)일진대, 그 방대한 화려함을 어찌 필설로 다 설명하랴.
 자금성(紫禁省).
 그 자줏빛 현란한 대성(大城)의 겨울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낮았다.
 함박눈이라도 곧 퍼부을 듯한 회색 빛이었다.
 서서히 그림자 없는 어둠이 자금성 위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둥둥둥!
 어디선가 유시(酉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성내의 전역을 고요히 뒤흔들었다.
 근황문(槿皇門).
 자금성의 구중궁문(九重宮門) 중 가장 안쪽에 위치한 절대금문이다.
 바로 천자가 계시는 천황전(天皇殿)과는 낮은 담 하나를 둔 금역이기도 하다.
 별유천지(別有天地)라 불러도 좋을 만큼 숲과 숲으로 둘러쳐진 그 속에 문득 아름다운 장원(莊院)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장원 깊숙한 심처.
 장원의 정취에 어울리는 아담한 소축 하나가 희미한 어둠 속에 반쯤 드러나 있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
 소축의 만자창(卍字窓)을 통해 새어나오는 불빛을 등에 진 한 여인(女人)이 어둑한 회색하늘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아아··· 녀석은 ··· 그 녀석은 나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후회인가?
 여인의 애절한 탄식이 밤의 찬 공기 속에서 공허하게 들려왔다.
 “만천하인(萬天下人)의 생사여탈권(生死如奪權)을 가진 이 어미가 너 하나를 살리지 못하고··· 이제는 손자(孫子)의 생명까지도 책임지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라!”
 창가에 비스듬히 기댄 채 슬픔에 찬 고뇌의 음성을 뇌까리고 있는 이 여인은, 한마디로 아름답다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성스러운 모습이 아닌가?
 전신에 칠흑 같은 흑의궁장(黑衣宮裝)을 걸친 육순(六旬) 가량의 노부인(老婦人)은 희끗한 반백의 머리칼과 다소 창백하고 메말라 보이는 얼굴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주름살들이 그녀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곱게 늙은 노부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저 어둠을 안고 선 부인의 고요한 자태를 무엇으로 표현할 텐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염의 신비로운 기운이 전신을 타고 흘렀고 특히, 지난 과거의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경세적인 미안(美顔)과 연륜의 완숙함이 탈바꿈되어 흐르는 심오한 눈빛이 거기 있었다.
 헌데, 지금 흑의노부인의 눈가에 언뜻 아롱져지는 저 이슬은 또 무엇인가?
 “지하에서 원혼(怨魂)을 달래고 있을 며늘아기와 너의 소원을 기필코 풀어주리라!”
 노부인의 눈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암, 내가 누구더냐? 당금 천자의 대모(代母)요, 십만자금화군위(十萬紫禁花軍衛)의 대총수(大總帥)가 아니더냐?”
 순간 그녀의 노안(老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차디찬 빛을 발했다.
 “만일··· 내 손자의 몸에 한푼의 상처라도 가했다면··· 그 일에 관련된 모든 무림인들을 찾아내 주살(誅殺)하고 말리라!”
 그녀의 눈길에서 마치 얼음이 얼 듯 차디찬 폭광(暴光)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 아이에게 어떤 변고라도 발생했다면··· 천하를 움직여서라도 무림인의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
 살기(殺氣)였다.
 피내음으로 울컥 토할 것 같은 죽음의 살기.
 도대체 이 노부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자칭 당금 황제의 대모이며, 대명의 힘으로 지칭될 수 있는 십만자금화군위의 총수라고 말하는 이 여인은······.
 “중원무림······. 지난 삼십 년 간 내가 그토록 경멸해 왔어도 결코 손대려 하지 않았었다. 너로 인해 난 위대한 남편과 헤어져야 했고, 사랑하는 자식과 며느리마저 잃고 말았어도 말이다.”
 흑의노부인의 주름잡힌 노안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헌데, 이제 또다시 내 마지막 혈손(血孫)까지 위태롭게 만들고 있구나!”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닌가?
 그녀의 신분으로 자신의 혈육을 돌보지 못했다함은 무엇이며, 그토록 경멸해온 무림에 대한 그녀의 한(恨)서린 사연은 또 어떤 것이기에······.
 그때 노부인의 입에서 자르는 듯한 냉혹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손을 댈 것이다. 나 아방화원주(阿房花園主)의 분노가 얼마나 전율스러운 것인지를 보여주리라!”
 듣고 있는가?
 한 노부인의 한(恨)이 저토록 뼈에 사무쳐 있음을.
 “그리고 너희들의 두 무릎이 피로 적셔질 때까지 철저히 지배하리라!”
 흑의노부인, 그녀는 분명 그럴 힘을 충분히 가진 여인이었다.
 당금 천자(天子)이신 숭정제(崇貞帝)의 대모로서, 만조백관을 이끌고 천황제 때부터 대명의 정치를 섭정해 온 이 시대의 걸녀(傑女)가 아닌가?
 서숙희후(西肅姬后) 소아(小雅)!
 황궁의 근황문에 마련된 아방화원(阿房花園)에 기거하며, 천자를 앞에 두고 당당히 천하를 호령해 온 여황제(女皇帝)!
 허나, 이것만은 기억하자.
 아방화원주(阿房花園主)!
 항차 중원무림의 대신녀(大神女)라 일컬어지며, 명실공히 유사최극강(有史最極强)의 세력으로 제이차 중원흑난세(中原黑亂世)를 가져오게 되는 이 흑의노부인을······.
 한 대의 칠채묵향교(七彩墨香轎)를 몰고, 흑막(黑幕)을 드리운 채 중원을 질타하게 되는 이 아방화원주를······.
 
 ***
 
 한 사람이 소리 없이 들어섰다.
 그러나 그가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의 존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그의 행동은 신비스럽도록 민첩한 것이었다.
 “······.”
 핏빛 적포(赤袍)를 발끝까지 드리운 중년의 사내.
 그는 표정 없는 냉막한 눈길로 흑의노부인 즉 아방화원주의 뒷모습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헌데, 적포사내의 그러한 두 눈은 핏물에 잠기듯 뿌옇게 흐려 있지 않은가?
 그 때문인가?
 고요하기 짝이 없는 실내에 시리도록 사이(邪異)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한동안 말없는 침묵이 계속되자, 적포사내는 약간 지루하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아가에 대한 소식은?”
 창 밖의 눈 덮인 매화나무를 오래도록 주시하던 아방화원주의 입에서 나직한 물음이 흘러 나왔다.
 “아직······.”
 조용히, 그리고 유령처럼 서 있는 적포사내의 입에서 지극히 짧은 대꾸가 이어졌다.
 아방화원주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리고 또다시 긴 적막이 두 사람 사이를 흘러갔다.
 그저 한두 마디의 대화에도 무겁도록 진중한 분위기였다.
 어느 한순간이었다.
 줄곧 어둠의 창 밖만을 주시하던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듣기로··· 당금 천하에 그대와 같은 류(流)의 사람이 아직 둘이나 더 있다고 하던데······.”
 찰나지간이었다.
 적포노인의 두 눈이 가늘게 파동 쳤다.
 “그렇소!”
 그가 이내 냉막한 눈빛으로 되돌아와 대꾸하자 비로소 그녀가 신형을 천천히 돌리며 물었다.
 “혈유(血儒)··· 그들의 능력은 어떠한가?”
 부드럽고 담담한 물음이었다.
 허나, 적포사내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순 아방화원주의 고운 아미가 살짝 접혔다.
 “나는 그들로 하여금 나의 손자를 찾고자 하네.”
 “······.”
 “지난 칠 년 동안의 연속적인 탐문 탐색에도 불구하고 손자를 찾지 못한 것은 그 방면에 유능한 인재가 없기 때문이라 믿고 있네.”
 “그렇다면 원주(園主)의 말뜻은?”
 그녀는 미소를 머금었다.
 “혈유··· 그대가 그 일을 주선해 준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보네.”
 다음 순간, 혈유의 딱 부러지는 대꾸가 뒤따랐다.
 “그건 불가능하오!”
 “······?”
 “그들은 결코 원주의 바람이나 나의 부탁 따위로 움직일 사람들이 아니오!”
 “······.”
 “설혹, 황제의 어명(御命)이 있다고 해도······.”
 혈유는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저 노부인의 따가운 시선을 슬며시 외면한 채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때였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방법은 있겠지.”
 몹시 자신에 찬 음성이 혈유의 귓전을 때렸다.
 “원주··· 내가 당신과 계약한 것은 원주의 정적(政敵)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것일 뿐이오. 그 외의 어떠한 일도 나는 하지 않을 것이오!”
 “물론 나도 알고 있네. 그러나 계약이란 때론 수정(修正)할 수도 있음이지······.”
 여운을 남기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
 “나 아방화원주가 그대와 약속한 십 년의 기한 중 이년(二年) 정도 앞당겨준다면 어떨까?”
 일순간, 설야(雪夜)의 어둠 속에 시선을 묻고 있던 혈유의 혈안(血眼)이 일렁였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이 두 사람의 관계.
 결코 주종관계도 아니요, 오가는 대화로 보아서 서로가 필요에 의해 일종의 계약을 맺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그때였다.
 “그들은 내 손자가 살아 있다는 것과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면 되네. 그 이후에는 내가 직접 찾아 나설 테니까.”
 “······.”
 “이 일은 자네에게도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겠나?”
 문득 혈유의 눈 속으로 흰 백매(白梅)가 꽃잎 하나를 떨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혈유의 입술이 달싹이며 느릿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오 년(五年)이라면······.”
 그녀의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한마디했다.
 “앞으로 오 년 후 우리의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자네는 역대제국의 모든 힘이 응집되어 있는 장군신마총(將軍神魔塚)에 들어가는 유일한 인간이 될 것일세!”
 “먼저 일러두겠소! 그가 당신을 대신한 나의 부탁을 들어주든 아니 들어주든 당신과 나의 계약은 정확히 그 날 끝날 것이오.”
 “자네는 틀림없이 그들의 승낙을 받아 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그리고 내가 주선할 인물은 한 명뿐이오!”
 “그 인물의 이름은?”
 “없소! 하지만 원주도 한번쯤 귀에 익은 사람이오. 크고 작은 두 개의 검(劍)을 사용하며 아직껏 아무도 살아서는 그의 검을 막은 자가 없다고 알려진 인물······.”
 “광(狂)··· 전(戰)··· 사(士)! 그가 바로 자네의 사형제(師兄弟)?”
 “십 년 전이었다면 분명 그렇게 불렸었지······.”
 “만일 그대와 비교한다면?”
 “서로가 두려워하는 존재랄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의 살예(殺藝)는 가장 실전적(實戰的)이라고 할 수 있소!”
 “······.”
 “특히 그의 추적술(追跡術)은 신(神)이 존재하는 곳까지 알아낼 만큼 극히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소.”
 “······.”
 “어쩌면 그만이 원주의 희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오!”
 “잘됐군!”
 “글쎄, 지난 십여 년 간 무림을 떠나 한인(閑人)으로 숨어 지낸 그가 다시 검(劍)을 잡기 전에는 장담하기 어렵소!”
 
 ***
 
 회릉촌(會陵村).
 하북성과 하남성, 그리고 동쪽의 산등성이 함께 접한 한 작은 마을이다.
 집이라고는 관도상 양쪽으로 늘어선 서너 채의 주막(酒幕)뿐.
 그나마도 손님이 없는 탓인지 단 한곳을 제외하곤 모두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태양을 가린 구름 탓으로 하늘은 우중충했고 날씨는 뼈를 엘 듯 싸늘했다.
 때문에, 횡막(橫幕)조차 보이지 않는 초라한 주막엔 십여 명의 손님들이 추위를 이기려는 듯 연신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중엔 뜨거운 국수를 말아먹고 있는 마을의 아낙네도 보였고, 탁자 사이로 어린 개구쟁이들이 요란스럽게 뛰어다니기도 했다.
 여타 주막과는 틀린 손님들이 있는 이곳은 바로 이 마을의 유일한 휴식처이기도 했다.
 허나, 이들이 이 초라한 주막에 함께 모여 있는 이유는 또 있었다.
 “와아!”
 “히히히!”
 “키키킥!”
 주막은 일시에 요절복통(腰折腹痛)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주방과 접한 한쪽 구석에, 탁자를 돌려세우고 임시로 만들어진 작은 흑장막(黑帳幕) 안에선 지금 인형극(人形劇)이 한창 펼쳐지고 있었다.
 꼬마신랑 인형과 각시 인형이 끈에 묶여 장막 뒤의 조종자가 움직이는 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두 목각인형의 엎치락뒤치락하는 기묘한 춤놀이가 끝나자, 또다시 제목도 없는 애정극(愛情劇)이 연출되고 있었다.
 “오오··· 그것 참!”
 “히야······.”
 말없는 목각인형의 무언극(無言劇)을 바라보는 손님들은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한 달에 한 번, 이 목각인형극은 변함 없이 이곳에서 열렸다.
 그래서 몇 안되는 마을사람들과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은 늘 이때가 되기를 기다려왔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그들은 돌아갈 때 몇 푼의 은자라도 아낌없이 흑막 속에 던져 넣었다.
 “정말 기막히군!”
 “한데, 저 신랑각시인형을 조종하고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지?”
 “허허. 나도 그게 궁금하다네! 만일 이 인형극을 큰 성(城)에 나가서 한다면 많은 돈을 벌 수가 있을 텐데······.”
 “도무지 모를 일이군. 저토록 훌륭한 솜씨를 지니고 있으면서··· 아까운 일이야······.”
 확실히 두 목각인형은 신기로운 춤을 보였고, 사람들은 조종자의 훌륭한 솜씨를 극찬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도 목각인형들은 또 한차례의 웃음을 선사한 뒤 모두 끝냈다.
 모든 손님들이 돌아갈 때까지 말없는 두 목각인형은 그들의 등뒤를 향해 절을 올리고 있었다.
 대개 모든 손님들이 떠나고 차 한잔 마실 시간이면 인형들도 인사를 그치고 거두어진다.
 한데, 이상한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두 목각인형, 그것들은 벌써 반 시진이 지나도록 예의 인사를 그치지 않고 있지 않은가?
 텅 빈 주막 안.
 주막의 주인마저 이때가 되면 으레 주방으로 사라져 아무도 없건만 목각인형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따릭! 따릭!
 딱··· 딱······.
 괴이한 적막 속에 소음이라고는 목각인형의 발 딛는 소리뿐이었다.
 그때였다.
 스으으으!
 흑막으로부터 약 십이 보 떨어진 탁자 위에 불꽃이 빨갛게 피어오는 것이 아닌가.
 휘류류류!
 돌연 불꽃은 엄청난 속도로 회전했다.
 이어, 어느 한순간이다.
 “크흐흐흐! 삼제(三弟)! 너의 두 아이들은 언제나 인사성이 밝아······.”
 사이한 괴소(怪笑)가 주막을 뒤흔드는가 싶더니,
 파아··· 앗!
 예의 불꽃이 폭죽(爆竹) 터지듯 사방으로 작렬했다.
 홀연, 어느 사인가 빈 의자 위로 핏빛 적포를 걸친 중년의 사내가 내려앉았다.
 몽롱한 혈안의 눈동자와 여유 있는 미소를 발하고 있는 적포사내다.
 그의 표정 없이 냉막한 얼굴에 섞여 입술에 떠오른 미소는 정녕 숨이 막히는 사기(邪氣)였다.
 누구이던가?
 북경 아방화원주와의 조건계약에 따라 문제의 광전사(狂戰士)를 찾아 나선 적포사내.
 혈유(血儒)였다.
 그때, 두 목각인형은 움직임을 멈추고 혈유의 등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오셨소?”
 흑장막 안으로부터 냉막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그 음성은 좌측의 꼬마신랑 인형이 흘려내고 있었다.
 딸그락······.
 그 인형은 한걸음 나서며 허리춤에 양손을 짚고는 혈유를 직시했다.
 “크흐흐흐! 형이 동생을 만나려 하는 것도 안된다는 말투로군!”
 목각인형이 앙증맞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우리 사이엔 이미 지난날의 우정(友情)이나··· 사형제(師兄弟) 같은 구차한 인연은 끊어진 지 오래외다.”
 “······!”
 혈유는 천천히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를 지워나갔다.
 일순, 질식할 듯한 침묵이 주막 안을 휩쓸었다.
 무대 위의 목각인형 역시 저 보란 듯 거만한 자세로 혈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스스로가 살아있는 생명체인 양 흑장막 속의 인물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문득, 혈유의 차디찬 입술 사이로 진중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삼제! 다시 검(劍)을 잡아볼 의향이 없는가?”
 “······.”
 “그 옛날 전장(戰場)을 누비며 투혼(鬪魂)을 불사르던 시절로 되돌아가 볼 생각이 없는가?”
 “······.”
 흑장막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삼제, 내가 이제(二弟)를 마다하고 너를 찾아온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너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너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광전사(狂戰士)로서의 뜨거운 피가 숨쉬고 있다.”
 그 순간, 무대 위의 인형이 손을 들어 혈유의 말을 제지했다.
 이어, 억양 없는 잔잔한 음성을 발했다.
 “혈형(血兄), 지금의 나는 목각인형을 다루는 한낱 예인(藝人)에 불과할 뿐이오!”
 “그래도 절대전사(絶代戰士)의 신분은 버리지 못한다.”
 무슨 말인가?
 흑막 속의 인물을 광전사로 칭했고, 이제 다시 절대전사라 함은?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허나, 십여 년이 흐른 지금의 내 마음은 너무도 식었소. 그리고 광전사란 이름도 잊은 지 오래외다!”
 “과연 그럴까?”
 “그만 돌아가 주시오!”
 목각인형은 등을 돌렸다.
 허나, 혈유는 한차례 혈안을 번뜩였을 뿐 흑장막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목각인형이 내뱉었다.
 “광전사(狂戰士)란 이름도 잊은 지 오래외다!”
 우린 이 이름을 두 번째 듣고 있다.
 혈유가 아방화원주에게 절대전사 중 일 인으로 말한 것과 여기, 흑장막 속의 인물이 스스로 그 자신임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광전사(狂戰士)!
 그것은 벌써 오래 전에 잊혀진 신(神)의 이름이자, 죽음의 대명사가 아닌가?
 십삼 년 전, 난세(亂世)의 천년 전쟁(千年戰爭)이 그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을 무렵.
 그가 검(劍)을 버리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기까지 그의 검날 아래 고혼(孤魂)이 된 자의 수효만도 칠전사백여 구(七千四百餘具)였다.
 세상은 그를 전쟁에 미친 검사(劍士)라 했다.
 어느새 무대 위의 두 목각인형은 거두어졌다.
 이를 응시하는 혈유의 냉막무심한 표정은 굳은 쇠처럼 더욱 침중했고 무거웠다.
 ‘녀석의 마음은 하늘조차 어쩌지 못한다. 그 스스로 심중에 변화를 일으키기 전에는······. 과거 느닷없이 절대전사를 탈퇴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것을 막던 나와 이제(二弟)가 오히려 녀석과 뜻을 같이 하지 않았던가?’
 혈유는 그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녀석은··· 내가 떠나길 바라고 있다. 나에게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얘기로군······.’
 혈유, 그는 문득 시선을 창 밖에 던졌다.
 날이 서서히 어둑해지고 있었다.
 해가 짧아진 탓도 있었지만, 낮게 드리운 구름 때문에 어둠이 일찍 밀려오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일직선으로 길게 뻗은 황량한 관도(官道)가 비쳐들었고, 그 위로 메마른 건초더미가 삭풍에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일순,
 ‘저··· 저것은?’
 돌연 혈유의 혈안에 전에 없던 강렬한 이채가 스치듯 떠올랐다.
 황진(黃塵).
 구름이던가?
 관도 끝 지평선과 하늘가가 맞닿은 그곳에, 무섭게 피어오르며 밀려오는 황색의 거대한 먼지구름이 일어나고 있었다.
 천지를 가득 메운 채 소용돌이치는 황진!
 헌데, 바로 그것이 혈유가 앉아 있는 주막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혈유의 두 눈에 스쳤던 이채가 돌연 야릇한 회심의 미소로 빛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는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황진을 바라보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삼제!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아이는 칠 년 전 어느 날 북경으로 오던 중 하북의 관도상에서 실종되었다!”
 “······.”
 “헌데, 그 후로 일체의 실마리도 없이 아이는 사라지고 말았다.”
 “······.”
 “결국 그 아이를 찾으려 하는 어느 누군가의 부탁으로 너를 찾아온 것이다.”
 그때, 흑장막으로부터 어이없다는 조소가 흘러 나왔다.
 “그래서 나보고 그 아이를 찾는 사냥개가 되란 얘긴가? 왜 당신이 직접 찾지 않소? 그 편이 훨씬 수월할 텐데······.”
 정말 오랜만에, 혈유의 얼굴에 가식 없는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십이 시진 이상 자금성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이유는 묻지 마라! 난 벌써 너에게 매우 많은 비밀을 얘기한 꼴이니······.”
 “······.”
 혈유의 시선이 흑장막으로 향했다.
 “그 아이를 찾아다오!”
 허나, 흑장막의 광전사는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혈형! 나는 오늘 너무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지체했소··· 이만!”
 “거절인가?”
 “잘 아시지 않소!”
 광전사는 차갑게 말을 끝냈다.
 그때였다.
 혈유의 입술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나,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을 텐데······.”
 “······.”
 “삼제, 저것이 보이지 않는가?”
 혈유는 턱 끝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저 거대한 황색의 먼지구름은 지난날 우리가 만들어냈던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지······.”
 “······.”
 “크흐흐! 내가 계속해서 자네의 뒤를 쫓는다면 몹시 귀찮은 일이 되겠지! 저들의 선두를 건드리면서 말이야!”
 “혈형! 나를 곤란하게 만들 셈이오?”
 “아니지,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네! 하지만 저 백색태양군단(白色太陽軍團)은 절대 이 회릉촌을 그냥 지나지는 않을 거란 얘기지.”
 “······.”
 “물론 알고는 있겠지? 그들이 지나는 곳엔 풀 포기 하나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창 밖은 하늘과 땅의 구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대한 황색의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질주해 오는 수백의 백색기마(白色騎馬) 떼.
 그것은 결코 대폭풍의 해일(海溢)도 아니오, 환상 속의 대군도 아니었다.
 오직 죽음만을 몰고 다니는 지상최강(地上最强)의 살인군단(殺人軍團)!
 백색태양군단(白色太陽軍團)!
 그들이었다.
 당금 중원을 장악하고 있는 천기도문(天機道門)의 실질적인 힘으로 평가받고 있는 일천기마군단(一千騎馬軍團).
 일조(一條)에 십기(十騎)씩, 십조(十條)가 합하여 백기(百騎)를 형성하는 태양일군(太陽一軍), 그 열 개의 태양일군이 모여 문제의 일천백색태양군단(一千白色太陽軍團)이 된다.
 그들은 절대 서행하는 일이 없다.
 전투에 임하거나 회군(回軍)할 때도 그들은 질주한다.
 때문에, 그들이 지나는 자리는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두두두두!
 두두두두두!
 지축이 흔들렸다.
 만일 이대로라면 이 허술한 주막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리라.
 아니, 이 회릉촌 자체가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출 것이다.
 혈유는 백색태양군단을 바라보며 태연히 뇌까렸다.
 “삼재, 내가 저들을 유인하겠다.”
 “······.”
 흑장막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신 그 아이를 찾아주는 것으로 피차 진 빚을 갚는 것이다. 어떤가?”
 혈유는 천천히 흑막을 주시하며 일어섰다.
 “그 아이의 나이는 일곱 살 가량··· 그 외에는 어떤 모습이며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나 또한 모른다. 허나, 너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그 아이의 친조모(親祖母)에 의하면 왼쪽 손바닥에 손금을 따라 붉은 실핏줄이 보인고 한다!”
 순간 흑장막이 거센 바람이 분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혈형! 지금 나로 하여금 당신이 던진 미끼를 물라는 얘기인 것 같은데······.”
 광전사의 목소리는 말투와는 달리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천만에, 나는 지금 사실을 말하고 있고 또 그것이 삼제, 자네의 우측 손바닥에 흐르는 똑같은 마홍사선(魔紅死線)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 그럴 리가?”
 무엇 때문인가?
 대체 무엇이 광전사로 하여금 저토록 믿어지지 않는 신음을 흘리도록 만든단 말인가?
 자네와 똑같은 마홍사선임을 지적하고 있다!
 마홍사선(魔紅死線)!
 아는가?
 전설은 그 마홍사선이 새겨진 손을 악마(惡魔)의 손[手], 또는 죽음의 손[手]으로 부르고 있음을!
 마홍사선의 인간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바로 그 존재할 수 없는 법칙을 깨뜨리며 태어나는 천세(天世)의 인간이 바로 마홍사선의 인간인 것을!
 마홍사선의 손!
 그것이 집는 것은 무엇이든지 천하절대절명(天下絶代絶命)의 살인마병(殺人魔兵)이 된다.
 공간을 노니는 그 손은 그 어떤 힘에도 제약을 받지 아니한다.
 천하가 피에 젖으리라!
 만에 하나 그 같은 마홍사선의 손이 나타나면 그가 십 세를 넘기기 이전에 잘라야 할 것이다.
 마홍사선의 손을 가진 인간!
 반드시 무림공적(武林公敵)으로 몰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방법은 없다!
 그저 한 올의 생(生)의 기운이 사라질 때까지 천참만륙(千斬萬戮)의 쇄시를 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광전사는 흑장막 속의 어둠 속에서 거친 흥분으로 격한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정말··· 그 아이에게 아니, 내가··· 내가 바로 마홍사선의 인간일진대, 또다시 태어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바로 그때, 혈유의 여유 있는 음성이 이어졌다.
 “자네 스스로가 잘 알겠군. 마홍사선을 가진 인간은 무학을 배울 필요가 전혀 없음을.”
 “······.”
 “그들은 무엇이든 보는 즉시 기억하며, 그 기억을 단 한 번으로써 완벽히 실사(實事)해내는 경이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혈유는 이어 밖의 상황이 잘 보이는 곳으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광전사의 승낙 여부를 묻지 않았다.
 이미 상대로 하여금 어찌할 수 없는 절대패(絶代牌)를 내보였으므로······.
 그는 여유 있는 걸음으로, 그리고 가장 회심에 찬 사소(邪笑)를 띤 채 멈추어 섰다.
 “삼제··· 나와 같이 한판 멋지게 달려볼 텐가··· 아니면?”
 “혈형! 당신은 반드시 그 아이의 소식을 듣게 될 것이오!”
 단지 그것뿐이었다.
 사르르르!
 그때까지 장막을 형성하고 있던 검은 천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엔 예의 목각인형도 문제의 광전사도 보이지 않았다.
 혈유는 시선을 창 밖에 못박은 채 웃었다.
 ‘크흐··· 녀석이 떠났다. 그 아이를 찾기 위해서··· 크흐흐흐!’
 멀리 그의 시야 속으로 백색태양군단의 번뜩이는 검극(劍戟)이 쏘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2장 전갑소년(戰甲少年)
 
 
 장강(長江).
 광활한 중원대륙의 젖줄이라 불리는 장강 삼만육천 리(三萬六千里)의 뱃길.
 바로 그 풍부한 물줄기를 받으며, 호남(湖南)과 호북(湖北)의 이개성(二個城)에 걸쳐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대지가 있다.
 강가신농주(江家神農州)!
 일명, 안호대평원(安湖大平原)이라 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곡물만으로도 전체 중원인이 반년은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는 대곡창지대(大穀倉地帶).
 때문에, 세인들은 이곳을 신(神)이 선물한 축복 받은 땅이라 했다.
 허나, 수많은 전쟁이 휩쓸고 간 강가신농주 위에 남은 것은 황폐한 땅뿐이었다.
 휘이이이잉!
 매몰차게 몰아치는 차가운 북풍(北風)은 마치 칼날처럼 예리했다.
 그 해 겨울이 다 지나갔건만, 심술궂은 하늘이 강가신농주의 황폐한 대지를 모질게 할퀴고 있었다.
 태양(太陽)!
 마냥 차갑게만 느껴지는 정오(正午)의 태양은 중천(中天)에 높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퇴색한 잡초가 융단처럼 깔려 있는 대지 위!
 아, 눈뜨고 바라볼 수 없는 참상(慘狀)이여!
 어림잡아 일천에 가까운 시체들이 걸레쪽처럼 널브러져 있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두개골들은 피에 젖은 구겨진 종잇조각 같았다.
 거의 모두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치 찢겨져 있었다.
 한마디로 아수라혈옥(阿修羅血獄)이 이보단 낫다고 못하리라!
 하늘은 저리도 맑고 깨끗하건만, 차가운 대지 위에 쓰러져 있는 이들의 죽음은 눈을 돌려야 할 만큼 잔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이들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통곡하는 이 또한 없었다.
 휘이이잉!
 씨이이이!
 늦겨울의 삭풍은 미친 듯이 공간을 회오리치며 저 수많은 주검들이 흩뿌리는 피내음마저 실어가 버렸고, 이제 남은 것은 귀기(鬼氣)스런 적막뿐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
 야트막한 구릉 위에 한 명의 용포노인(龍袍老人)이 깊은 침묵에 잠겨 미동도 없었다.
 노인의 시선은 줄곧 학살(虐殺)의 현장을 묵시(默示)하고 있지 않은가?
 노인의 긴 장삼자락을 휘감고 올라간 한 마리 금룡(金龍)이 무척 이채롭다.
 뿐인가, 희다못해 은빛이 감도는 백발백염(白髮白髥)은 또 어떤가?
 그리고 지그시 반개한 용포노인의 두 눈.
 이토록 신비스런 눈은 처음이다.
 거대한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처럼, 태고의 어둠 속에 홀로 갇혔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단지 들여다보는 순간 심연(深淵)의 무한한 깊이로 빠져버리고 말, 그래서 도저히 헤어나올 길 없는 어둠의 눈이었다.
 때문인지, 그의 눈은 지독히 고요했다.
 천하의 모든 빛을 흡수하고도 남을 흑채 덩어리였다.
 “······.”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수백의 생명이 한낱 파리목숨보다도 하찮게 살육된 저 살인광경을 보며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 것인가?
 “흠···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난 것인가?”
 용포노인의 굳게 닫힌 입술 새로 잔잔한 음성이 계속 흘러 나왔다.
 “내 인생의 절반을 소비한 너무도 깊고 지루한 전쟁이었다. 허나, 우리들의 후세를 위해선 어차피 치러야 할 싸움이었으리······.”
 그의 뇌까림 속에는 알 수 없는 아픔이 어려 있었다.
 그는 문득 눈을 들어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허허! 천하인(天下人)들은 나를 욕할 것이다. 지난 사십 년 간 헤아릴 수 없는 목숨들을 앗아갔고··· 가는 곳마다 폐허(廢墟)의 잔해만을 남긴 나 뇌목후(腦木候)를······.”
 허허로운 웃음이 용포노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왔다.
 그리고는 따스하게 쏟아지는 양광(陽光)을 받으며 오랫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그러한 노인의 뒷모습은 오수를 즐기다 잠에 빠진 것으로 착각할 만큼 평온한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회주(會主)······.”
 용포노인의 등뒤에서 지극히 조용하면서도 온화한 음성이 들렸다.
 “태양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돌아가시는 것이······.”
 그 음성은 용포노인의 귀로(歸路)를 권하고 있었다.
 찰나지간(刹那之間),
 “······.”
 바로 용포노인의 뒤 일 장여쯤에 홀연히 회색도포(灰色道袍)의 노인이 햇살처럼 떨어졌다.
 우선 단아한 풍모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를 좀더 가까이 오래도록 주시하면 할수록 다가오는 이 싸늘한 기운은 무엇인가?
 전에는 결단코 느껴 본 적이 없는 느낌!
 사(邪)도 아니요, 마기(魔氣)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이질적(異質的)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회의노인의 한 손엔 몹시 낡고 두툼한 책자(冊子)가 들려 있는데······.
 그것은 도대체가 이 혈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아닌가?
 그때였다.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던 용포노인이 회의노인을 가볍게 불렀다.
 “요숙(夭叔)인가?”
 회의노인의 쉰 목소리는 오히려 용포노인보다 늙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두 노인간의 엄청난 격차를 어찌 음성이나 모습 따위로 판별할 수 있으리.
 용포노인을 하늘로 비교한다면, 회의노인은 땅과 같은 차이였으니······.
 “보라! 저것이 이 시대의 마지막 전쟁이 남긴 모습이다.”
 “······.”
 “헌데, 그대는 저 피의 대가로 이룩한 중원무림의 안녕과 평화를 얼마나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 순간, 요숙의 음성은 용포노인의 손짓에 중단되고 말았다.
 “나는 그대의 능력을 믿는다. 그러기에 중원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그대도 나도 언제까지나 오래 살 수 없는 것이야.”
 “······.”
 “이제 더 이상의 살육은 없어야 한다.”
 “······.”
 “이유는 없다. 이것으로 모든 것은 족하다.”
 용포노인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어조는 준엄했다.
 요숙은 막 입을 열려다 굳게 다물었다.
 그는 용포노인의 흔들림 없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재고(再考)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내 주장을 내세울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는 떠난다. 이제 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영면의 안식처를 찾기 위해서······.’
 그는 용포노인의 신형에 고개를 조아렸다.
 아니, 의중에도 없는 고개를 숙여가는 그 순간, 그의 백미(白眉)가 꿈틀거렸다.
 용포노인의 어깨너머 저 주검의 현장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한 작은 인영(人影)을 본 것이다.
 “요숙··· 보고 있는가?”
 용포노인의 조용한 물음이 한순간 망연자실(茫然自失)해 있는 요숙의 귓전에 떨어졌다.
 “예······.”
 요숙의 눈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허허허! 그대에게도 실수라는 것이 있는가? 천하최강이라는 백색태양군단을 보유한 마뇌전신(魔腦戰神)께서 손속에 정(情)을 담고 있을 줄은 몰랐군.”
 요숙의 고개가 깊숙이 숙여졌다.
 “회··· 주! 요숙의 죄(罪) 죽어 마땅하오이다!”
 이 사람, 아니 그보다 먼저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의 용포노인.
 그는 누군가?
 천기도문주(天機道門主) 천기전신(天機戰神) 뇌목후(腦木候).
 하늘을 본 것이다.
 전설의 살인십전신가(殺人十戰神家) 중 마지막으로 탄생한 천기도문(天機道門), 그 신가(神家)의 문주(門主)이자, 분명 전신(戰神)의 맥(脈)을 갖고 등장한 이 시대의 위대한 패자(覇者)가 그였다.
 하면, 그에 의해 놀랍게도 마뇌전신(魔腦戰神)이라 불린 요숙, 그는 바로 천기전신 뇌목후가 자신의 후계자(後繼者)로 지명하면서 그가 명명(命名)해준 또 하나의 전신(戰神)이다.
 천기도문주(天機道門主) 마뇌전신(魔腦戰神) 요숙(夭叔).
 하늘이 바뀐 것이다.
 새로운 전신이 탄생한 것이다.
 전신의 맥(脈)이 아니면서 감히 전신(戰神)이란 칭호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된 그, 이제 중원은 그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마뇌전신 요숙, 그는 스스로가 어떠한 실수나 실패도 허락지 않았다.
 완벽 위에 또 하나의 완벽을 쌓아 올리는 인간(人間).
 그는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 죽은 자의 시신을 확인 보고하라! 그리고 한 가닥의 숨이 붙어 있는 자가 있다면 죽음을 재확인하라.
 이 얼마나 잔혹무비(殘酷無比)한 명인가?
 그렇게 해서라도 한치의 실수가 없는 완벽을 추구하려는 이 무서운 생각!
 그러나 그의 상상을 벗어난 돌연한 사태가 터진 것이다.
 생존자(生存者)!
 저 오열팔육(五裂八戮)의 난도질 속에 누군가가 살아 있음이 아닌가?
 
 ***
 
 겨울의 낮은 매우 짧다.
 정오가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하늘은 점차 노랗게 퇴색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 처참히 조각난 일천여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대지 위로 황량한 삭풍만이 똬리를 틀다 스쳐갔다.
 헌데 문득, 그들이 뿌려낸 혈해(血海)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무수한 육편(肉片) 조각을 헤집고 드러나는 그것은, 철갑의(鐵甲衣).
 수많은 도검상(刀劍傷)으로 몹시 찌그러진, 어느 이름 모를 전사(戰士)의 전사갑(戰士甲)이 아닌가?
 주르르!
 흥건히 고여 있던 핏줄이 흘러내렸다.
 헌데, 그 피묻은 전사갑을 헐렁하게 뒤집어쓰고 혈해를 밟고 선 작은 인영(人影) 하나.
 소년(少年)이다!
 일견해 보아도 이제 겨우 칠팔 세쯤 되었을까?
 아직 소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어려 보였다.
 헝클어진 흑발이 소년의 양어깨로 치렁하게 흘러내린 모습은 장엄하다 못해 숙연한 광경이었다.
 생명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있을 수 없는 이 죽음의 현장에, 그것도 일개 어린 소년의 생존(生存)이라니······.
 이때였다.
 “야아!”
 질탕한 피바다 위에 우뚝 선 소년은 돌연 앙증맞은 외침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자세를 약간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허나, 소년의 외침은 곧 엄청난 죽음의 고요 속에 묻혀 아득히 소멸되어 갔고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아무런 반응이 없자 두 눈을 살짝 찡그렸다.
 이어,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소년의 검은 눈동자를 보라!
 한없이 순수(純粹)하고 티 없이 해맑은,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억제하지 못할 사랑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눈을!
 그리고 지금, 그 눈은 무엇인가 찾으려는 듯 떼구르 굴렀다.
 바로 그때,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얕은 구릉 위를 향해 굳은 듯 정지했다.
 “야아아아!”
 또 한차례의 외침이 메마른 삭풍을 타고 길게 흩어져 갔다.
 
 ***
 
 천기전신 뇌목후.
 그는 살며시 반개한 눈을 들어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 마뇌전신 요숙이 기이하게도 눈가에 온화한 빛을 띤 채 소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요숙, 저 아이가 백색태양군단의 살수(殺手) 속에서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
 한순간 요숙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제일의 지혜로써 당당히 전신의 대열에 올라선 자신이지만, 이 눈앞의 인물을 대할 때면 늘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껴왔다.
 ‘무엇을 묻고자 하는가. 아니면 나에 대한 질책인가?’
 허나, 대답은 해야 했다.
 “그것은 요숙의 잘못으로······.”
 “허허허! 그런 뜻이 아니다!”
 뇌목후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시켰다.
 “어쩌면··· 저 아이에게는 생존해야 할 운명(運命)이 주어졌다고 봐야겠지······.”
 “······.”
 조용히 듣고 있던 요숙의 눈언저리에 보일 듯 말 듯 경련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온화한 눈살에 처음으로 떠오른 기현상이었다.
 “또한··· 전쟁과 살인의 외길만을 걸어온 자네와 내게 마지막 인정(人情)을 베풀라는 하늘의 뜻인 것 같기도 하지 않은가?”
 요숙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이럴 수가? 천기전신 뇌목후······. 그가 인정이란 말을 입 밖에 내뱉다니······.’
 적어도, 지금껏 그가 알아왔었고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천기전신 뇌목후는 결코 그런 감상적(感傷的)인 인물이 아니었다.
 저 일천여 시체의 탑을 쌓아올린 장본인이 그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요숙은 무심결에 반문했다.
 “회주의··· 말씀은?”
 그러나 뇌목후의 신영은 이미 소리 없이 허공을 밟으며 떠오르고 있었다.
 “언젠가··· 저 아이가 그대 앞에 의연히 나타날 때를 기다려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 되지 않겠는가? 허허헛!”
 뇌목후의 시원한 웃음이 어느 사인가 아련한 허공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요숙 역시 그의 뒤를 쫓아 허공을 밟아갔다.
 그리고 단 한 번, 그는 혈해의 전장을 마음대로 휘젓고 걸어다니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번··· 쩍!
 한순간 요숙의 두 눈에 무섭게 피어오르는 귀기스런 녹광(綠光)이 스쳤다.
 죽음의 빛이었다.
 허나, 그 빛은 찰나지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요숙의 신형도 저물어 가는 태양 속으로 묻혀져 갔다.
 
 ***
 
 황혼(黃昏).
 붉디붉은 노을이 지고 있다.
 태양의 몰락이 빚어내는 처절한 아픔의 빛이 마치 사자(死者)의 영혼(靈魂)을 화장(火葬)시키려는 듯이 이름 모를 전장 위엔 깊숙한 노을이 깔려오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서 텅 빈 전장 위에 매서운 한풍이 몰아닥쳤다.
 피와 걸레쪽처럼 흩어진 인육도 서서히 얼어 붙어갔다.
 헌데, 그 얼어붙은 대지 위에 걷고 있는 작은 인영 하나.
 어린 소년이다!
 피묻은 전사갑을 어울리지 않게 걸친 그 소년.
 덜그럭!
 전사갑이 땅에 끌리며 소리를 냈다.
 때로는 얼어붙은 시신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소년은 죽음의 대지를 뒤지고 다녔다.
 헌데 문득, 소년의 해맑은 눈동자 속으로 한 줄기 빛이 눈부시게 쏘아져 들어왔다.
 “마(魔)··· 중(中)··· 마(魔)······.”
 소년은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러나 넘어졌다.
 “마중마(魔中魔)!”
 울부짖듯 누군가를 부르며 소년은 일어나 달렸다.
 그 무거운 전사갑을 벗어버리면 빠르겠건만, 소년은 그럴 사이도 없는 듯 구르다시피 달렸다.
 돌연, 쓰러질 듯 질주하던 소년의 신형이 털썩 엎어지고, 바로 그의 머리맡에 한 자루의 백검(白劍)이 깊숙이 땅에 박혔다.
 그리고 그 백검을 중심으로 흩어진 한 육신(肉身)의 조각들, 정확히 열여섯 토막이었다.
 천참만륙(千斬萬戮)의 난자(亂刺)당함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아··· 안돼!”
 소년은 동토(凍土) 위를 기어가며 열여섯 토막난 육신을 쓸어모았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
 한 번 분해(分解)된 육신이 어찌 되살아날 수 있으리!
 극렬한 슬픔에 젖은 소년은 오랫동안 엎드린 채 소리 없이 오열을 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년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전사갑의 매듭을 끌렀다.
 털썩!
 전사갑이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소년은 황혼의 빛을 반사하고 있는 백검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마중마······. 이 검(劍)은 앞으로 내가 가질 테야. 그리고 이것으로 마중마의 원수를 백 배 천 배 갚아주겠소!”
 다음 순간, 소년의 작고 하얀 손은 백검의 검자루를 잡아갔다.
 따앙!
 놀랍게도 명쾌한 소리와 함께 검신 중간이 비스듬히 부러져 나갔다.
 한데 곧이어,
 휘류류류!
 소년의 손아귀에서 멋지게 회전을 일으키던 부러진 반검(半劍)은 어느새 그의 우측 허리에 끼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정녕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일련의 동작이 소년의 손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
 소년의 나이 정도라면 그 정도는 누구나 한다.
 허나, 지금의 이 소년이 감아 올린 검식(劍式)은 일반적인 검기(劍氣)가 아닌, 강호상의 초특급고수(超特急高手)만이 사용한다는 검류(劍流)에 속하는 것이었다.
 소년은 검을 다룬다기보다 이미 완숙한 경지를 터득한 듯했다.
 그는 자신이 마중마라고 불렀던 여섯 토막난 육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양볼에 깊숙한 보조개를 만들어내며 더할 수 없이 냉혹한 한마디를 뱉어냈다.
 “대가는 치러준다! 반드시······.”
 어느덧, 어둠의 땅거미가 죽음의 대지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자 길게 늘어선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소년은 전장을 떠나가고 있었다.
 소년이 엎드려 오열했던 자리엔 작디작은 무덤 하나가 쓸쓸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
 
 “그대는 천기도문(天機道門)을 아는가?”
 “아! 그 천기도문 말인가? 암, 알고말고!”
 “그건 나도 알고 있지. 살인십전신가(殺人十戰神家) 중 마지막 열 번째의 신가(神家)가 그것이고, 또 과거 역대전신(歷代戰神) 가운데 처음으로 중원인 앞에 자신의 명호와 이름을 밝혔던 천기전신 뇌목후가 그 문주(門主) 아닌가?”
 “잘 아는군. 하면 그 천기도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글쎄······.”
 “그럼 천기도문이 강호상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알고 있나?”
 “모르네.”
 “그밖에 자네가 천기도문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게.”
 “······.”
 “전혀 없단 말인가?”
 “전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것은 너무도 명백했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중원무림인으로서 당금의 천하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의 소재지 하나 알지 못한다는 사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기도문, 이 전설상의 신가는 지난 수백 년 간 지속되어 오던 무림의 은원을 종식시키는 기적적인 일을 해냈고, 따라서 무림인들은 이제 새롭게 시작되고 있는 평화를 즐기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헌데, 초하(初夏)의 열기(熱氣)가 맹위를 떨치던 어느 여름날.
 천하무림인의 앞으로 한 장의 첩지가 날아들었다.
 <고(告)하노라! 본문(本門)은 올해로써 개파오십기일(開派五十期日)을 맞이하여 여러 중원형제들과 한자리에 모여 의합투신(義合投身)하는 기회를 갖고자 하니, 돌아오는 시월(十月) 십일(十日) 쌍십절(雙十節)을 기해 본문을 여노라! 위대한 중원의 젊은 혼(魂)들과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는 많은 무림명숙(武林名宿)들의 왕림을 바라며······.
 ― 곤륜천령봉(崑崙天靈峯)에서 천기도문주배(天機道門主拜).>
 충격(衝擊).
 그것은 확실히 충격적인 첩지였다.
 중원은 연일 이 천기도문의 화제로 술렁거렸다.
 천기도문이 과연 곤륜대산(崑崙大山)의 천령봉(天靈峯)에 있는 것이 사실일까?
 천기도문주, 그는 왜 문을 개방하는 것일까? 지난 수백 년 간 살인십전신가는 가문의 존재위치를 신비 속에 고수해 오지 않았던가?
 곤륜을 향해 가는 자!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이 초청이 어딘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말이라는 것.
 하기 쉽기에 더욱 많은지도 모른다.
 허나, 호기심이라는 것.
 그건 방안 구석에 처박혀 구들장이나 지고 있으라고 할 때 미치기 일보 직전의 마약(痲藥)과 같은 것이리라.
 무림의 생리(生理), 그것은 알고 보면 무척 흥미롭고 재미가 있을 뿐더러 청개구리의 이야기만큼이나 화딱지 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
 
 때는, 찌는 듯한 열기에 초목(草木)마저 숨을 죽이는 칠월(七月)의 한여름, 땅위로 내리쪼이는 아침햇살조차 폭염(暴炎)을 방불케 했다.
 북경성(北京城).
 이곳 북경의 아침은 대명의 수도답게 이미 새벽부터 깨어 있었다.
 성문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말과 수레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의 내왕이 베를 짜는 실오라기처럼 엇갈렸고 단단한 청석(靑石)이 넓게 깔린 북경대로(北京大路)의 양변에는 장사꾼들이 한창 가게를 벌여놓고 있었다.
 너나할것없이 고래고래 외치는 함성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하여간, 그러한 북경대로를 따라 좌측의 남가(南街)로 빠지자면 그 정면에 황궁에나 있음직한 구 층의 대전각(大殿閣)과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대문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북경대표장>
 대문 위의 황금빛 편액(扁額)을 보지 않아도 안다.
 전국에 걸쳐 아흔아홉의 지국(支局)을 가지고 있으며, 당금 중원에 통용되고 있는 십대전표를 발행하고 있는 열 개의 전장(錢莊) 가운데 무려 일곱 개의 전장을 운영하고 있을 만큼 방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가히 천하제일의 상벌(商閥)이라 할 수 있었다.
 유염!
 그는 사실상 북경대표장의 주인이라 할 수 있었다.
 장주(莊主)인 황금신수(黃金神手) 장가극(張家克)이 한낱 청지기에 지나지 않던 그를 발탁한 이래 지금은 모든 재물을 관리하는 표중주이자, 전국전장(全國錢莊)의 장주(莊主)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도 말하기를,
 “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처자식도 바꾼다!”
 그만큼 그는 냉혈인(冷血人)이었으며, 불필요한 대인관계(對人關係)는 칼로 베어버리듯 과감히 끊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치밀한 두뇌는 감히 범인이 따라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수치(數値)와 수리(數理)에 경이의 능력을 보여, 이제 사십대(四十代) 줄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표장과 칠대전장(七大錢莊)에서 하루에 취급되는 막대한 환전량(換錢量)을 암산(暗算)으로 결산(決算)해내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헌데, 이 냉정한 사나이는 지금 침중한 표정으로 깊숙이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한 장의 장령지(莊令紙)였다.
 열흘 전 내 앞으로 극비리에 수송(輸送)해 달라는 표물이 들어왔소. 대금은 황금(黃金)으로 정확히 두 궤가 계산되어 본장에 배달되어 왔으니 표주께선 아무런 이유도 묻지 마시고 신창(神倉)을 열어주시기 바라오! 그리고 물주(物主)의 부탁에 의하면 표차(車)의 출발시각은 삼 일 후 자시(子時) 정각을 기해야 하고, 장소는 북경동가(北京東街)의 유정원(留情園) 앞에서 시작하여 산해관(山海關), 진가구(陳家口), 항주(杭州)를 잇는 해안을 돌아 내륙의 심양, 무창(武昌), 중경(重慶)의 여섯 성도(省都)를 지나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소. 그 이후의 행로는 중경에서 알려준다고 하오. 나는 이번 일의 중대성으로 미루어 표주께서 직접 나서주었으면 하오. 부디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빌겠소.
 ― 장가극(張家克).>
 유염은 이 쪽지를 한 시진 전에 받았다.
 처음에 그는 몹시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직접 북경대표장을 맡은 이래 장주로부터 표물 운송의 장령지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를 흥분 속으로 몰아간 것은 신창(神倉)을 열라는 장주의 지시였다.
 신창(神倉)!
 북경대표장의 극비창고가 그것이다.
 허나, 유염 역시 자신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신창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황금 두 궤라면 그다지 많은 액수가 아니다. 적어도 신창을 열어야 할 만큼······. 한데도 장주가 그것을 지시했다면······.’
 일순간, 장령지를 거둬들이던 유염의 손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 이것은··· 암호류(暗號流)!”
 유염의 목소리는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파락!
 유염은 장령지를 펴들고 빠르게 훑어갔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천천히 재차 읽어갔다.
 장령지에 적힌 글씨들.
 유염은 바로 그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글씨체는 분명 장주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주의 깊은 판독(判讀) 끝에 그는 장령지에서 기막힌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내용 가운데 여러 곳에서 장주의 필체가 약간씩 휘갈겨 써졌다는 사실이다.
 휘갈겨 쓰여진 글씨.
 유염은 그것만을 추려내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었다.
 유염의 얼굴이 돌연 돌처럼 굳어졌다.
 “마침내 때가 왔는가?”
 그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뇌까렸다.
 허나, 보기에도 그는 격동의 빛을 감추지 못했고, 지나친 격정 뒤에 오는 탈진(脫盡) 때문이었는지 몸을 힘없이 의자에 깊숙이 던졌다.
 “지난 삼십여 년을 하루같이 기다려 왔던······.”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의 깊은 동공 속으로 옛 상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유염! 청지기였던 너를 내 곁에 두려함은 반드시 너의 재능 때문만은 아니다!”
 “······.”
 “고생을 아는 인간···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을 나는 좋아한다.”
 “장주님······.”
 “이러한 인간은 결코 자만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자신이 하려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다!”
 “······.”
 “유염, 너는 바로 그런 인간이다. 내 눈은 한번도 틀려본 적이 없다.”
 “······.”
 “나는 내 아들을 버렸다. 그리고 너를 택했다. 이제부터 내 전 생애를 바쳐 이룩한 중원 최대의 북경상벌(北京商閥)은 네 것이다. 보여줘라!”
 “······.”
 “미천한 청지기의 한(恨)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줘라!”
 “······.”
 “너의 커 가는 모습을 보고 나는 이루지 못한 나의 꿈을 보상받으리라!”
 “장주님······.”
 “말하지 마라! 그리고 앞으로 너는 나 장가극의 모든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나의 손짓 하나 발짓 하나에도 우리들만의 언어(言語)가 통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들만의 언어?”
 “드디어 통하고 있었다.”
 고개를 바로 하며 유염이 흘려낸 말이다.
 툴툴툴!
 돌연 그는 두 눈 가득히 신비로운 웃음을 떠올렸다.
 “반드시··· 이루고 돌아올 것입니다!”
 유염은 일어섰다.
 그는 이제부터 자신이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집무실(執務室)을 빠져 나왔다.
 유염, 그가 떠난 텅 빈 실내엔 덩그러니 놓인 한 장의 장령지가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에 살랑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유염만이 발견할 수 있었던 휘갈겨 쓴 암호의 내용은,
 <니거위진천하이패.>
 가거라! 천하제패의 위업을 향해······.
 
 ***
 
 한 꺼풀 가죽만 꾸깃꾸깃 붙어 있을 뿐인 손, 그 손은 연속 술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전에는 이런 고급술은 대해 본 적이 없는 듯!
 백옥빛 투명한 술이 술잔 밖으로 출렁거렸다.
 평범한 베옷 차림의 노인이 앉아 있는 이곳은 황궁(皇宮) 깊숙한 어느 내전(內殿).
 그는 약 두 시진 전부터 이곳에 불려 와 있었다.
 내전 안은 쥐죽은듯이 잠잠했다.
 쪼르르르······.
 노인의 술 따르는 소리만이 이따금씩 청량하게 들려왔다.
 “이거야 원. 늙은이를 불러다 놓고 장난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술은 독하기로 소문 난 어하주(御霞酒)였다.
 노인은 약간 취기가 올랐는지 얼마 전 시녀 앞에서조차 황송한 저자세의 자신을 서서히 잊어가는 모양이었다.
 침노인(針老人).
 이 사람처럼 소극적이며, 때론 어린아이보다도 더한 엄살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술만은 좋아해서 북경사람들은 그를 주충노인(酒蟲老人)이라 부르곤 했다.
 주충노인!
 그는 침의(針醫)였다.
 그에게 그 전설적인 침술(鍼術)만 없었다면 그는 한낱 거지주정뱅이로 병들어 죽어갔을 것이다.
 주충노인의 경이(驚異)로운 침술, 그것이 지금 황궁의 깊숙한 내전까지 자신을 모셔가게끔 만든 것이었다.
 언젠가 그는 술에 취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말일세······. 의술(醫術)에 대해서 사실 깡통이라네. 하지만 침(針)! 이 뾰쪽한 침 하나만 가지면 죽어가는 사람도 일각 안에 뛰게 만들 수 있지······.”
 농담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의 침술은 신기(神技)를 보여왔었다.
 “······.”
 저만치 시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침노인은 주름살 가득한 입술을 씰룩거리며 중얼거렸다.
 “헤헤헤! 참으로 고와. 나도 저런 며느리를 얻어 평생 시중이나 받으며 사는 건데······.”
 그는 시녀의 뒤를 따르면서, 줄곧 펑퍼짐하게 솟은 엉덩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걸었다.
 “아냐. 첩(妾)으로 거느리는 편이 이따금씩 재미도 볼 수 있고······. 커험!”
 침노인은 시녀가 약간 붉어진 얼굴로 돌아보자 헛기침을 해댔다.
 그러나 시녀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걸어가며 조용히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약에 노인께서 아씨를 살리시기만 한다면······. 저보다도 아름다운 첩을 백 명이라도 거느리게 될 거예요. 허나, 그렇지 못할 경우 노인께선 아까 마셨던 술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술이 되는 거예요.”
 허나, 노인의 귀에는 그런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험! 기다리고 있으라구,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땐 자네의 품에 안겨서 가게 될 테니까.”
 
 ***
 
 경악(驚愕), 그리고 불신(不信)에 이은 회의(懷疑).
 침노인의 두 눈에 담긴 것은 단지 이것뿐이었다.
 보기에도 안타까우리만치 그의 주름진 이마에선 비 오듯이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털썩!
 그는 의자를 옆에 두고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침노인의 허망하게 떠진 시선이 가 박혀 있는 곳, 거대한 침상 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全裸)의 여인이 누워 있었다.
 하늘하늘한 수발은 고운 어깨를 덮고, 햇살 같은 이마를 곧게 뻗은 성결한 한 쌍의 아미(蛾眉)와, 오똑하고 고즈넉한 코에 붉디붉은 입술의 오묘로운 조화!
 뿐인가, 팔등신(八等身)의 현란한 교구에 솟을 것은 적당히 피어올랐고, 들어갈 곳은 신비를 감추듯 가라앉은······.
 다시 볼 수 없는 완벽지체(完璧之體)다.
 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상태로 이러할진대, 이 전라의 여인이 일어나 그대를 응시한다면, 당신을 향해 손짓한다면, 그대는 그 순간부터 그녀의 노예이며, 하인이 되기를 기꺼워하리라!
 어느덧 창 밖의 달빛은 교교한데, 침노인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무섭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이건 내가 죽인 것이 아니야! 나는 완벽했고··· 죽은 것은 그녀 자신이다. 그녀가 나의 시술(施術)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저 침상 위의 전라여인은 죽은 시체란 말인가?
 전라의 여인, 지금 그녀의 현란한 육체 곳곳에는 무수한 침들이 박혀 있지 않은가?
 “내 실수는 아니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그들이 내 말을 믿어줄까?”
 침노인은 고개를 세게 저었다.
 이것은 믿고 안 믿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얼마 전 그 예쁘장한 시녀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랬어군······. 이건 죽기 아니면 살기인 것을······.”
 이제 어쩔 텐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한순간 침노인의 얼굴에 굳은 결의가 스치고 지났다.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이렇게 중얼거리며 전라여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떨리는 손끝으로 그는 하나씩 주의 깊게 침들을 뽑아냈다.
 그 시간만도 물경 한 시진.
 그의 손안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침이 들려 있었다.
 “휴우!”
 긴 한숨을 내쉬며 땀을 닦는 그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안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침노인은 전라여인의 방에 들어온 지 네 시진만에 당당히 나섰고, 그는 정말로 예의 시녀를 끌어안은 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돌아오는 길에 틀틀틀! 웃음을 마구 터뜨렸다.
 헌데, 그 웃음은 참으로 묘한 것이 마치 미쳐버린 자의 광기(狂氣)! 그대로였다.
 
 ***
 
 “침노, 당신은 참 훌륭하셨어요!”
 “허허허! 그런 건 보통이지.”
 “그런데 당신은 저의 아가씨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나도 줄곧 그것이 궁금했지.”
 “그분은 바로 중원이 낳은 미(美)와 지혜(智慧)의 여신(女神), 용방(龍芳)이에요.”
 “용방······. 용··· 방이라고?”
 “물론이지요! 당금 황제의 외손녀이시자 중원무림의 유일한 여지도자(女指導者)가 되실 중원의 혼(魂)인걸요!”
 “······.”
 “침노?”
 
 
 3장 유성반검(流星半劍)
 
 
 유염은 북경대표장을 나서자 곧장 북경대로를 가로 질러갔다.
 가능한 한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 했으나, 성 내외로 명성이 자자한 그가 지나가자 사람들은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는 인자한 웃음으로 답례를 하며 스치듯 지나갔다.
 허나, 지금 그의 심중은 한 가지 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와 같은 장령지는 처음이었다. 누군가 장주의 신변에 어느 정도 접근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누가, 어떤 힘이 감히 장주로 하여금 그런 암호를 쓰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었단 말인가? 어쨌거나 사람을 시켜 장주의 신변에 이상이 없도록 해야겠군!’
 유염이 이런저런 생각 끝에 다다른 곳은 뒷골목의 어느 골동품 가게였다.
 그늘진 탓인지 가게 안은 몹시 어두웠다.
 허나, 유염은 익숙하게 진열대 사이를 지나 회계대 앞까지 한걸음에 갔다.
 회계대 뒤엔, 약간은 요염기를 머금은 미부(美婦)가 앉아 있었다.
 “어멋! 웬일이세요? 유대인께서 저희 집엘 다 들려주시고······.”
 미부는 가슴을 회계대 앞에 바싹 내밀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과거 작부의 기질이 조금은 남아 있는 듯한 웃음이었다.
 “유선(劉仙), 전에 내가 팔려고 내놨던 물건 있었지? 그걸 도로 가져가야겠어······.”
 유염의 음성은 조용하고 평상적이었다.
 마치 주인과 손님처럼······.
 그러나 지극히 짧은 시간 유선이라 불린 이 미부의 눈빛에 놀랄만한 섬광(閃光)이 지나갔다.
 “아! 그것을 말씀하시는군요. 마침 찾아가시겠다니 잘됐군요.”
 미부는 엉덩이를 흔들며 쪽문을 통해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여기 있어요!”
 “고맙소!”
 “무얼요··· 요즘은 워낙 매기(買氣)가 없어서 잠시 창고에 넣어두게 되었군요.”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가고, 유염이 미부로부터 받아든 것은 검고 긴 보자기 꾸러미였다.
 유염은 지체 없이 돌아섰다.
 헌데, 그는 돌아서 가며 그냥 지나가는 말로 말했다.
 “참! 들은 얘긴데··· 얼마 전··· 천가장(天家莊)에 사둘 만한 좋은 물건이 들어왔다고 하더군!”
 천가장(天家莊)!
 바로 북경대표장의 장주인 황금신수 장가극의 거처이자, 십대전장의 하나로 알려진 그 천가전장(天家錢莊)을 말하는 것이다.
 “아, 고마워요. 유대인! 매번 소식을 줘서······.”
 허나, 미부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유염은 이미 골동품 가게를 나와 저잣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후텁지근한 밤이었다.
 유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월창(月窓) 가까이 걸어갔다.
 잠이 오지 않는 건, 이 찜통 같은 더위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힐끗 그가 돌아서는 침상 위에는 배가 잔뜩 불룩한 한 백의미녀가 잠들어 있었다.
 ‘만삭(滿朔)··· 때가 됐어!’
 유염은 한없이 깊은 애정을 담은 눈길로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늦게 얻은 아내였다.
 따라서, 그만큼 소중하고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나이 사십이 넘어 그 아내가 자식을 잉태했으니 그 사랑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
 지금 그의 눈빛은 깊고 신비했다.
 표중주로서의 냉철함과 차가운 한성(寒星)의 광채는 일체 보이지 않았다.
 유염은 가만히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황금천수(黃金千手)!
 장주인 장가극으로부터 그의 모든 절학을 전수 받은 이래 황금천수라는 장주의 별호를 강호인들이 형형극극(形形極極) 찬양하며 명명(銘名)해준 손.
 손수 하던 강호표행을 그만둘 때까지만 해도······.
 소림의 달마보리수(達磨菩提樹)와 더불어 무림절대이수(武林絶代二手)로 불렸던 손이지만 지금은 진한 애정을 담은 부드럽기만한 손이 되어 있었다.
 “여림(汝林)······.”
 그는 가만히 아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무슨 할말이 있어 보이는 그 눈빛은······.
 ‘나는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을 잊어야 하는 몸이 됐소. 이렇듯 뜻 없이 의미 없이 당신과 앞으로 태어날 나의 이세를 두고 갈 수밖에 없는······.’
 끝내 마음속으로 흘려 볼 뿐이었다.
 ‘여림··· 날 용서해 주시오!’
 그의 눈이 마지막으로 동산처럼 배부른 아내의 배에 머물렀다.
 휙!
 한여름 밤의 유성(流星)처럼, 하늘 높이 흰 사선(斜線)을 그으며 사라져 갔다.
 
 ***
 
 유염이 북경의 밤하늘을 스치고 사라진 그때, 침노인을 비롯한 그의 변변치 못한 식솔들은 두 눈을 있는 대로 까뒤집고 있었다.
 보라!
 천여 평의 저 뜨락에 가득한 수백 개의 궤짝들을······.
 “우아! 저, 저것이 전부 황금과 비단··· 향료······.”
 관부(官府)에서 나온 듯한 사십대의 우직하게 생긴 관인은 잔잔한 웃음과 함께 그들 가까이 서 있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이런 경우는 아니었으리라!
 바로 오늘 낮만 해도 허우대 좋고 입심 세기로 이름난 침노인의 하녀가, “이젠 먹을 거라곤 침노의 그 가죽신밖에 없으니 그걸 팔든가 아니면 굶어요! 병신 쪼다 같은 늙은이! 죽엇!” 하고 아침부터 기방(妓房)으로 직행하는 그의 등짝에다 한바탕 욕지거리를 해댔을 때만 해도 지금과 같은 말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침노··· 자기 멋져요!”
 “뭘······.”
 “당신의 침술은 과연 천하제일······.”
 허우대 좋은 하녀가 기쁨에 넘쳐 와락 전신을 던져 끌어안았다.
 바로 마당에 놓인 궤짝을······.
 헌데, 침노인의 안색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침대인(針大人), 그럼 안녕히······.”
 예의 관인이 인사하고 떠났을 때도 그는 마치 넋이 빠진 얼굴이었다.
 “명심들 하라구! 좀더 오래 살고 싶으면 이것에 손도 대지 말아!”
 이윽고 침노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저게··· 지금껏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기까지 해줬는데······. 주둥일 놀려?’
 이것은 모든 식솔들의 한결같은 마음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독기 서린 눈초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침노인은 슬금슬금 문밖으로 향했다.
 “지금 이 시각에 어딜 가는 거예욧!”
 “응··· 넌 몰라도 돼!”
 “하지만 오늘은 절대 새벽을 넘기지 말아요! 특별히··· 아주 특별히 당신을 위해 목욕준비하고 있을게요.”
 “다 필요 없다!”
 “······.”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침노인은 어둠 저쪽으로 사라지려다 말고 돌아와서는 신신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절대 누군가가 와서 나를 찾으면 없다고 해! 어디 갔는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알겠지? 죽어도 이 말만은 해서는 안돼!”
 하녀는 벌써부터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아이, 노랭이 같은 영감탱이!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이쯤 되면 믿을 수 있다고 느꼈는지 침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하녀를 비롯한 모든 식솔들은 그것이 침노인과의 마지막 대면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으며, 그로부터 채 한 시진도 지나기 전에 그 모든 꿈들이 한순간의 물거품이 되고 말리라는 것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허나, 남들이 소극적이며 치사하리만큼 쩨쩨하다고 놀려댔던 가난뱅이요, 주정뱅이에다 지지리도 재수가 없던 그, 침노인은 그러한 인간들을 비웃으며 떠나려 하고 있었다.
 아주 멀리······.
 
 ***
 
 해시(亥時)가 조금 지난 듯했다.
 유정원(留情園)!
 언뜻 듣기에 조그마한 기루(妓樓) 정도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들어가 보지 않고는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일명, 북경의 환락천(歡樂天)!
 그 환락의 이색지대(異色地帶)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갓 태어난 어린아이 정도일 것이다.
 낮과 밤이 존재하지 않는 곳! 남녀노소 차별하지 않는 곳!
 주루와 기루와 객잔이 함께 뒤섞여 있는,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이 유정원을 애용한다는 말조차 있기도 한 곳이다.
 “와하하하!”
 “킬킬킬! 그 계집년의 아랫도리로 말할 것 같으면··· 킬킬킬!”
 호탕한 웃음소리와, 으레 나오지 않으면 안될 그런 음담패설(淫談悖說)이 난무했다.
 일견 보기에도 황금 몇 냥 정도 가지고는 섬돌에 발도 딛지 못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누각 위에선 한창 취흥이 무르익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헌데, 그 시끄러운 와중에서도 벌써 한 시진째 말 한마디하지 않는 인물이 있었다.
 마치 술하고 풀지 못할 원한이라도 맺은 듯 미친 듯이 술만 들이키는 인물.
 침노인이 아닌가?
 처음 그가 이 누각에 들어섰을 때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오늘밤의 모든 주색비(酒色費)를 내겠다고 선언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가 오늘에서야 진짜 미쳤다고 생각했었다.
 허나, 그로부터 지금 이 시각까지 그는 말 한마디 없이 술과 씨름하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 그의 주사(酒邪)를 아는 사람은 안다. 누구든 그의 주사에 한번 걸리면 그 날로 당장 보따리를 싸서 이사를 해야 할 만큼 떠버리던 주충노인이었다.
 이제 새삼스럽게 더 이상 미쳐 보일 만한 일거리가 없어서 저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연신 왁자지껄하면서도 중인들의 관심은 온통 그에게 가 있었다.
 침노인의 탁자에 놓인 술병은 모두 스물세 개였다.
 허나, 그중 스물두 개는 이미 비어진 듯 쓰러져 있었다.
 탁!
 마지막 술병이 그의 손에 의해 던져졌을 때였다.
 “그때··· 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미 그놈의 마역(魔疫)은 북경성 전체에 퍼지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내 손으로 막기엔 불가항력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거야.”
 술기운이 가득 서린 그의 음성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때문에, 침노인의 떨려나오는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중인들 가운데 아무도 없었다.
 헌데, 마역(魔疫)이라니?
 분명 그 적사병(赤邪病)을 가리키는 것이란 말인가?
 적사병(赤邪病)!
 절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남을 도리가 없다는 무서운 전염병(傳染病)!
 이 역병에 걸린 자는 발병이 되어 피를 흘리고 죽는 것은 불과 다섯 시진 전까지도 아무런 낌새도 차릴 수 없다고 한다.
 전신 팔만사천모공(八萬四千毛孔)으로부터, 시커먼 죽은피가 샘솟듯 흘러 나오고, 그 처참한 고통에 아수라 같은 비명을 동반하는 죽음의 괴질병(怪疾病)!
 헌데, 그것이 북경성에 출현했다는 침노인의 뇌까림은 결국?
 “그녀의 병은 바로 적사병의 직전 증후(症候)였고,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의 시침(施鍼)은 거부반응과 함께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도통 알 수 없는 전문용어를 사용하던 침노인은 문득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부슬··· 부슬······.
 언제부터인가 창 밖에는 빗발이 뿌려지고 있었다.
 비를 보았기 때문인가?
 “이러려고 오늘 한낮 동안 그리도 후텁지근했는가? 빌어먹을······.”
 허나, 다음 순간 그의 투덜거림은 입 속에서만 맴돌 뿐 더 이상 흘러 나오지 않았다.
 등뒤로부터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호! 살인자(殺人者)가 주루에서 우중자작(雨中自酌)을 즐긴다?”
 그의 등뒤에서 싸늘한 코웃음과 함께 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침노인은 고래를 서서히 돌리며 예의 가느다란 눈꼬리를 치켜 떴다.
 “······.”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어느새 주루의 모든 창문 앞에 검은 피풍(避風)을 두른 흑의인들이 가로막고 서 있었으며, 그의 시선 속에 무섭게 쏘아져 들어온 얼굴은, 더 이상 바라볼 필요조차 없었다.
 ‘냉윤(冷胤)··· 이자가 나를 잡기 위해 나섰단 말인가?’
 침노인은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냉윤(冷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러나 신포(神捕)!
 이 명호를 모르는 사람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만큼 너무도 유명한 이름이다.
 신포 냉윤, 그는 원래 무림인이었으나 지금은 관인(官人)이다.
 대명감찰부(大明監察府) 사헌판위별부(司憲判衛別府) 소속 신포중장(神捕重將) 냉윤. 이것이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공식 직위였다.
 따라서 그가 하는 일은 주범죄자를 체포, 또는 상황에 따라 살인도 가할 수 있는 살인면허를 가진 놀라운 신분의 사내였다.
 침노인은 무심코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도 영락없이 흑의무관(黑衣武官)들이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그때 신포중장 냉윤의 굵직한 음성이 그의 고막을 뚫고 들려왔다.
 “네 죄(罪)는 네가 잘 알고 있을 터, 그 자리에 엎드려 오라를 받으라!”
 이 철담강직(鐵膽强直)하기로 이름난 냉윤은 수하들에게 가벼운 눈짓을 했다.
 침노인은 자신을 포박하려고 다가오는 흑의무관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천하제일의 소심장으로 알려진 그가 잡히면 죽음뿐이라는 상황 아래에서도 태연히 쓴웃음만 짓고 있다는 사실을 수많은 중범죄자들을 다루었던 노련한 냉윤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그로 하여금 두고두고 뼈아픈 통한을 남기게 했다.
 “······.”
 무엇을 보았는가?
 돌연, 침노인의 신형이 창 밖을 향해 퉁기듯 폭사되어 나갔다.
 허나, 신포중장 냉윤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튀어봐야 벼룩이지!”
 민첩한 몸놀림과 환상과도 같은 신법(身法), 이것이 지금 침노인의 허공을 타는 모습 그대로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무공을 편다는 것에 놀라기에 앞서, 천지사방(天地四方)을 차단한 채 눌러오는 열여섯 개의 오랏줄과 두 개의 쇠그물망, 그리고 그의 요혈을 절묘한 각도로 찔러오는 삼십삼검(三十三劍)!
 이는 미리 예견하고 안배된 함정이리라.
 “빌어먹을··· 오다가 이 빗물에 빠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침노인은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하기사 그보다 몇 십 배 뛰어난 초절정 고수들도 부지기수로 잡아들인 냉윤의 솜씨 앞에 그의 발악은 한 가닥 기적을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때, 자신을 죄어오는 쇠그물 사이로 하나의 번뜩이는 물체를 뿌려냈다.
 슉!
 어둠의 빗줄기를 뚫고 그것은 일섬(一閃)을 그어대며 유성처럼 지워졌다.
 거의 동시에, 쿵! 침노인의 신형이 돌멩이에 얻어맞은 참새처럼 맥없는 진흙탕 속으로 나뒹굴었다.
 이어, 숙달된 솜씨로 침노인을 마치 미라처럼 칭칭 묶어버린 흑의무관들은 어느새 질서정연한 자세로 주루 위의 신포중장 냉윤을 향해 시립하고 있었다.
 “······.”
 냉윤, 그는 단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으나, 수십 명의 흑의무관들은 신속히 침노인을 안고 빗줄기 속을 떠나려 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르르르― 꽝!
 콰콰콰― 쾅!
 유정원의 입구 쪽으로부터 연속적인 굉음(轟音)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흑의무관들이 흠칫했을 때엔, 그들로부터 불과 십여 장 떨어진 곳의 한쪽 담장이 박살나며 한 대의 마차가 쏘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 이게······.”
 놀랄 사이도 없이 예의 마차에서 삐죽 뛰어나온 좌우 사십사 개(四十四個)의 장창(長槍) 아래······.
 “크헉!”
 “으아아악!”
 “케엑!”
 외마디 단말마가 우중(雨中) 속에 호곡성(號哭聲)처럼 피어올랐다.
 뿐인가?
 몇몇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친 흑의무관들 뒤로 섬뜩한 녹광(綠光)이 불을 뿜고 있었다.
 “크아아!”
 “컥!”
 시커먼 재로 변해 빗줄기 사이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그 가공할 섬광(閃光)의 위력.
 쉬아아··· 아··· 앙!
 고막을 찢을 듯한 속도를 지닌 이 경이의 마차는 순식간에 또 다른 담장을 꿰뚫고 있었다.
 “아··· 안돼!”
 엄청난 공포를 지닌 비명이 들려오고, 막 침노인을 살해하려던 어느 충직한 흑의무관 앞에 보기에도 끔찍한 철귀조(鐵鬼爪)가 날아들어 거세게 그의 머리를 낚아챘다.
 뿌지직!
 뼈와 살점이 뜯겨지며 피보라가 섬연하게 피어올랐고, 다시 선회하며 허공을 찢는 철귀조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침노인의 허리를 가뿐히 낚아 순식간에 마차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가?
 콰콰콰!
 이 홀연히 등장한 마차는 이어 유정원을 겹겹이 싸고 있는 담들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무섭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로 나머지 흑의무관들이 신랄한 공세(攻勢)를 퍼부으며 쫓고 있었고, 이를 당혹스런 눈길로, 그러나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냉윤의 날카로운 검미(劍眉)가 진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흔적(痕迹).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매 일 리마다 흑의무관의 시체가 한 구씩 처참히 뜯겨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