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재벌 작가 [E]

재벌 작가 1-1

2018.04.24 조회 4,839 추천 35


 재벌 작가 1권
 
 목차
 1장. 프롤로그
 2장. 달동네 숙제 담당Ⅰ
 3장. 달동네 숙제 담당Ⅱ
 4장. 봄맞이 공모전
 5장. 달동네 아이들Ⅰ
 6장. 달동네 아이들Ⅱ
 7장. 역주행
 8장. 6년 뒤
 9장. 볼 빨간 누나Ⅰ
 10장. 볼 빨간 누나Ⅱ
 11장. 그래, 넌 그래도 돼
 
 
 
 1장. 프롤로그
 
 
 
 뷔페 연회장에서 돌잔치가 한창이었다.
 떡, 과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돌 상’ 앞에서 자그마한 아이가 방긋방긋 웃었다.
 박은영이 우민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우리 우민이 뭘 집으려나.”
 “아빠 닮았으면 당연히 이거지.”
 굵은 턱 선을 자랑하는 선한 인상의 이철기가 만 원권 지폐를 집어 들었다.
 찌릿.
 옆에 앉아 있던 박은영의 눈에서 광선이 쏘아졌다.
 이철기가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우리 아들이라면 다, 당연히 페, 펜이지.”
 박은영이 우민을 보며 말했다.
 “옳지, 옳지 잘한다!”
 엄마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우민의 손이 천천히 펜으로 향했다.
 덥썩.
 결국 우민이 펜을 집어 들었다.
 “잘했다, 잘했어. 우리 아들 판, 검사 되겠어.”
 “우민아, 씩씩하게 잘 자라야 한다.”
 박은영도 마음에 드는지 한층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끌어안았다.
 응?
 아이가 잡고 있던 펜에 모두의 시선이 쏠려 있던 그때, 이철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꺄앙. 꺄아.”
 우민이 다른 손을 뻗어 앞에 놓여 있던 만 원짜리 지폐를 집어 들었다.
 초록색 배춧잎 한 장을 들고 맑게 웃어 보이는 우민를 향해 이철기가 호쾌하게 웃어 보였다.
 “우하하하, 역시 내 아들이야! 내 아들!”
 박은영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는 타협점을 찾았다는 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 우리 아들 공부 잘해서 부자 되자∼”
 우민이 펜과 지폐를 집어 들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것으로 돌잡이를 마치겠습니다.
 ‘돌잡이’가 끝났다는 사회자의 말에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이 다시 수저를 움직였다.
 연회장 문이 벌컥 열리며 검은색 정장을 입은 일련의 사람들이 난입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이철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내 돈 떼먹고 밥이 넘어가냐? 저 새끼 잡아!”
 순식간에 이철기는 양팔을 구속당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박은영도 아연실색하여 우민을 꼭 껴안을 뿐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최, 최 사장님,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습니까. 돌잔치, 오늘 돌잔치만 끝나고 바로 찾아가겠습니다.”
 “돈도 없는 새끼가 돌잔치는 무슨. 끌고 가!”
 아무리 반항해도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지 이철기가 가족들을 향해 소리쳤다.
 “거, 걱정하지 마, 여보. 잘될 거야. 먼저 집에 가 있어. 곧 갈 테니까.”
 모두 이우민의 돌잔치 때 벌어진 일이었다.
 
 2장. 달동네 숙제 담당Ⅰ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고 했던가?
 헛소리.
 채 1년도 되지 않아 집에는 차압 딱지가 붙었고, 우민의 가족은 서울 외곽으로, 더 외곽으로 쫓겨났다.
 사업의 부도로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은 이철기는 어떻게든 재기를 해보겠다며 대리 운전을 시작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교통사고.
 남은 건 박은영이 보고 있는 한 장의 가족사진밖에 없었다.
 “여보, 오늘이 우리 우민이 초등학교 입학하는 날이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하늘나라에서 잘 보고 있지?”
 주름이 가득한 손이 낡아빠진 나무 액자를 쓸어내렸다. 액자는 비록 낡았지만 평소 얼마나 깨끗이 닦았는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우민이 옛 추억에 잠겨 있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 늦었어. 이제 가야 돼.”
 “그래. 가자, 우민아. 그런데 오늘 정말 엄마랑 같이 안 갈 거야?”
 “내가 앤가. 나도 벌써 8살이야. 옛날 같았으면 농사 도울 나이에 입학식은 무슨.”
 박은영이 그런 우민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우민아.”
 “응?”
 “엄마한테는 육십 넘어 환갑이라도 애다. 알았지?”
 “에휴, 알았어. 알았으니까. 오늘도 힘내서! 몸 건강히! 아자 아자 화이팅!”
 겨우 8살의 아이가 자신을 위로해 주겠다고 작은 손을 쥐며 외치는 소리에 박은영은 처연하게 웃었다.
 “그래, 파이팅이다.”
 박은영이 바삐 신발을 신고 반지하 월세방을 나섰다.
 
 ***
 
 얼굴에 1/3은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큰 눈.
 체리보다 붉은 입술.
 오뚝하게 솟은 코.
 티끌 한 점 보이지 않는 피부.
 우민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은 꼭 뒤돌아보게 만들 만큼의 준수한 외모를 자랑했다.
 거기에 초등학교 일 학년치고는 꽤나 큰 키인 140㎝를 자랑하는 신체까지.
 외모로만 보아서는 이런 달동네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우민의 주변을 몇몇 중학생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야. 진짜 쩔더라, 네가 준 대로 내니까. 이번 독후감 수행평가 만점 나왔어.”
 “형, 제가 뭐라고 했어요. 박미영 선생님은 전체적인 줄거리를 잘 요약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여기 천 원.”
 중학생 아이가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감사합니다. 언제든 불러만 주세요.”
 그러고는 받아 든 돈을 노란색 병아리가 그려져 있는 가방 속에 고이 접어 넣었다.
 그 모습을 얼떨떨하게 지켜보던 옆에 있던 다른 중학생이 물었다.
 “나도 이거 써서 내야 되는데.”
 함께 내민 공책에는 중학생 필독 도서 중 하나인 ‘갈매기의 꿈’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몇 장인데요?”
 “두 장.”
 “선불로 하면 오백 원 깎아드리는데. 어떻게 하실래요?”
 “선불?”
 우민이 답답하다는 듯 고사리 같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형, 선불 몰라요? 돈 먼저 주는 거요. 먼저 주면 천오백 원에 해드린다고요.”
 이미 수행평가에서 만점을 받은 친구가 옆에 있어서일까. 우민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중학생들이 너도나도 돈을 내밀었다.
 
 등굣길.
 가뿐히 거래를 마치고, 한껏 밝은 표정의 우민이 교문을 들어섰다.
 “미래초등학교. 바로 옆에 글꽃중, 고등학교가 있다는 게 참 마음에 든단 말이야.”
 입학식 때문인지 수많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부모님의 손을 잡고서 초등학교 정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우민은 등교하고 있는 중, 고등학교 학생들을 살피고 있었다.
 “음, 좋아. 아주 좋아. 미래의 고객분들이 꽤 많이 보이네.”
 ―입학식에 참석하시는 부모님 및 학생 여러분은 강당으로 모여주십시오.
 ―다시 한번 안내 말씀드립니다. 입학식에 참석하시는 부모님 및 학생 여러분은 강당으로 모여주십시오.
 안내 방송 소리를 들은 우민이 강당 쪽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엄마나 아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모습에 괜스레 심통이 났다.
 ‘쳇, 괜히 혼자 온다 그랬나. 엄마도 진짜 일하러 가버리고. 나도 흥이야!’
 의자에 앉아 괜히 바닥을 툭툭 쳐보았다. 그래도 엄마에 대한 섭섭함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우리 딸. 입학식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아들! 이제 초등학생이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야 돼.”
 주변에서 들리는 말들 때문인지 섭섭한 마음이 오히려 더 커지기만 했다.
 우민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병아리가 그려져 있는 노란 가방 속에서 파란색 공책과 펜을 꺼내 들었다.
 
 토해내고, 게워내도. 계속 채워진다.
 
 한 문장을 적고는 우민이 잠시 눈을 감았다. 초등학생이 적었다고 생각하기 힘든 문장.
 하지만 우민은 아무렇지 않게 다음 문장을 이어나갔다.
 
 감정의 찌꺼기를 배설하기 위한 도구조차 없었다면 내 삶의 안위로움이 지켜질 수 있었을까.
 
 ‘감정’, ‘찌꺼기’, ‘배설’, ‘삶’, ‘안위’. 초등학교 일 학년이 썼다고 믿기에는 힘든 단어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오늘 엄마랑 밥을 먹었다. 참 맛있었다.
 
 이 정도의 문장도 쓰기 버거워하는 게 일 학년이다.
 
 나눈 아늘 어마라 바 머겄다.
 
 아예 맞춤법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우민은 거침없이 기적을 써나갔다. 집중력 또한 또래 아이들과는 비교를 달리하는지 근 20여 분을 꼼짝하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 글만 적어나갔다.
 “흐음······.”
 기침 소리를 몇 번 낸 우민이 고개를 들며 기지개를 켰다. 글을 다 썼다는 신호였다.
 그제야 앞에 와 있던 박은영이 우민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 이제 다 썼어?”
 “어, 엄마!”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한층 동그랗게 변하며 눈물이 살짝 차올랐다.
 아직 엄마의 품이 그리운 초등학생 일 학년이다.
 “서프라이즈! 설마 엄마가 정말 일 간 줄 알았어?”
 박은영의 한 손에는 ‘아이언맨’이 그려진 파란색 가방이 들려 있었다.
 가방을 본 우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자꾸만 눈에서 뭐가 나올 것 같아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우민아, 유치원 때 쓰던 가방은 이제 그만 벗자.”
 “이, 이런 거 안 사도 된다니까.”
 “요 애늙은이야! 이럴 땐 그냥 엄마 고마워요, 하면서 볼에 뽀뽀해 주는 거야.”
 “흥! 내가 무슨 앤가.”
 “에구, 엄마가 졌다, 졌어. 그러니까 어서 가방 벗고 이거 메어봐.”
 우민이 지금까지 메고 있던 노란색 가방의 한가운데에는 ‘한마음 유치원’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유치원 가방을 받아 든 박은영의 시선은 우민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공책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
 
 어린아이들 속에서 우민의 외모는 독보적이었다.
 입학식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부모님들도 힐끔거리며 우민을 쳐다보았다.
 우민은 그런 시선이 익숙한지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로지 뒤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박은영에게만 신경이 쏠려 있었다.
 ‘이런 거 안 사도 된다니까. 괜히 사 와서는······.’
 우민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발끝에 놓여 있는 가방을 쓰다듬었다. 그냥 유치원 때 쓰던 가방을 사용하겠다고 몇 번을 말했다.
 그게 어머니의 고단함을 보는 것보다 백 배는 마음이 편했다.
 ‘몇만 원은 할 텐데··· 이걸 어떻게 메우지······.’
 일순 우민의 시선이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처럼 변했다.
 ‘이제 초등학교까지 입학했으니 고등학생 형들 숙제까지 확대해 봐야겠어.’
 유치원 때부터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생 형의 숙제를 도와주고 과자를 얻어먹었다.
 그래, 이거다.
 우민은 본능적으로 돈이 된다는 걸 깨닫고 형들의 글쓰기 과제들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이어온 인연이 벌써 2년이 넘었다.
 ‘고등학생 형들이 돈도 더 많을 테니까.’
 입학식을 하는 내내 우민의 머리를 사로잡고 있는 생각이었다.
 
 ―이것으로 입학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각 담임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인솔해서 교실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에 우민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우민의 담임은 얼굴에 핏기가 없어 약간 병약해 보이기까지 하는 남자 선생님.
 이름이······.
 “앞으로 함께할 남일원 선생님이에요. 일 학년 삼 반! 어린이들은 잠시 앉아 있어요. 선생님이랑 같이 이동할 거니까.”
 우민이 재빨리 뒤돌아 입을 뻥긋거렸다.
 ‘끝났으니까. 어서 일하러 가요.’
 우민의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박은영이 검지와 엄지를 오므렸다.
 우민이 담임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올라갈 때까지 박은영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봐 주었다.
 
 ***
 
 꺄아아아.
 아아아앙.
 으아아앙.
 잠시 쉬는 시간. 초등학교 일 학년 교실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혼돈.
 참을 수 없는 소음에 우민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럴 때는 뭔가 집중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 우민은 가방에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꺼내 들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명작 노인과 바다.
 그것도 초등학생용 요약본이 아닌, 국내 최대 출판사 중 한 곳인 믿음 출판사에서 나온 완역본이었다.
 또다시 특유의 집중력으로 한창 독서에 매진하고 있을 때, 우민에게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이름이 모야?”
 우민은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랑 말하기 시러? 소미 유유야.”
 여자아이는 인터넷 용어인 ‘ㅠㅠ’를 말 그대로 표현했다. 하지만 우민은 일체 반응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앙!”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화가 났는지 여자아이는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우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책에 집중했다.
 우민이 반응이 없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한층 커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앙!”
 그제야 담임인 남일원 선생이 우민에게 다가왔다.
 “소미야, 뚝. 그리고 우민아, 친구가 말을 걸면 대답을 해줘야지.”
 우민이 조용히 보고 있던 책을 한 장 넘겼다. 남일원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우민아, 선생님이 말하면 들어야지.”
 우민은 한 점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눈은 책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남일원이 할 수 없다는 듯 보고 있던 우민의 책을 집어 들었다.
 우민이 고개를 들었다.
 헉.
 남일원이 일순 멈칫했다. 옆에서 울고 있던 여자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우민을 바라보았다.
 외모에서 마치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한번 책을 보기 시작하면 주변 소리가 잘 안 들려서요.”
 빠르게 정신을 차린 남일원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민아, 선생님한테 거짓말하면 못 써요.”
 꺄아아앙.
 여기저기서 들리는 아이들의 소란에 교실이 난장판이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심심해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불러도 못 들을 정도의 집중력?
 39살.
 10년 정도 경력을 지닌 남일원에게는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책을 볼 때나 글을 쓸 때면 종종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한 점의 거짓도 보이지 않는 순수한 얼굴이었다.
 휴우.
 우민을 보고 있던 남일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아이들을 많이 봐왔다. 보통을 넘어서는 영특, 아니, 영악함을 가진 아이들이 있었다. 이런 아이들을 초반에 잡아놓지 않으면 일 년 내내 힘들어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딩동댕동.
 쉬는 시간도 끝났다. 여기서 더 이상 말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알았다. 그럼 우민이는 끝나고 잠시 남거라. 선생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다.”
 남일원이 뒤돌아 자리로 돌아갔다. 우민은 다시 고개를 숙여 책에 집중했다.
 울고 있던 여자아이는 여전히 우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입학식이라 점심시간이 끝난 후 아이들은 모두 하교했다. 오로지 한 아이.
 이우민.
 생활 기록부를 확인해 보니 편모 가정이었다. 더구나 적혀 있는 주소지의 마지막에 적혀 있는 단어, 지하 1층.
 대충 집안 환경이 짐작되었다.
 우민에게 다가간 남일원이 타이르듯이 말했다.
 “우민아,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정직하게 말하면 집으로 가도 좋다.”
 도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건가.
 수차례의 질문에 우민은 살짝 짜증이 솟아올랐다.
 “선생님, 잘못한 게 없어도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나요?”
 반발하는 기색을 읽은 남일원이 할 수 없다는 듯 A4 종이 한 장과 펜을 내밀었다.
 “그럼 아까 읽었던 책에 대한 독후감을 한번 써볼까?”
 남일원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마 펜을 잡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잘못했다며 집에 가겠다고 ‘떼’를 쓸 것이다.
 그게 어린이고, 초등학생 일 학년이다.
 지금까지 남일원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랬다.
 “네. 선생님.”
 우민은 아무렇지 않게 펜과 종이를 받아 들었다. 우민이 약간은 포동포동해 보이는 손으로 펜을 꽉 쥐었다.
 제일 먼저 제목과 저자를 적었다.
 
 제목: 노인과 바다.
 저자: 어니스트 헤밍웨이.
 
 남일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자?
 초등학교 일 학년이 쓰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저 책의 제목이라도 맞춤법에 틀리지 않고 쓰면 다행이다.
 우민이 쓰고 있는 독후감에는 많이 써본 것 같은 ‘경험’이 묻어나 있었다.
 저자까지 적은 우민이 잠시 펜을 멈추었다.
 ‘이거 지난번 중학생 형들 숙제 대신 해줄 때 썼던 대로 해야 하나··· 아니면 정말 내가 느낀 대로 해야 하나.’
 우민이 저자까지 쓰고 나서 손을 움직이지 않자, 이제 포기했다고 생각한 남일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민아, 고집 부리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에요. 우민이가 이렇게 계속 억지를 부리면 선생님도 그에 합당한 ‘벌’을 줄 거야.”
 그 순간에도 우민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과제도 아닌데, 내가 느낀 대로 쓰자.’
 결심을 마친 우민이 펜을 움직였다.
 첫 문장을 쓰는 순간 남일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열심히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잘하는 게 중요하다.
 
 그 뒤에 쓰인 글에 남일원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잘 태어나는 것이다. 노인이 멕시코가 아닌 미국 월스트리트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이렇게까지 고생했을까?
 고통이 반복되는 삶이 진리라면 왜 TV에 나온 강남의 건물주들은 고통이 아닌 만족의 삶을 매일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했다.
 
 거기까지 쓴 글을 보는 순간, 남일원은 알 수 있었다.
 이 아이, 뭔가 특별하다.
 
 
 3장. 달동네 숙제 담당Ⅱ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민이 쓴 글을 꼼꼼히 읽어본 남일원 선생은 굳은 표정으로 한마디 남겼다.
 
 “내일 꼭 학교로 어머님 모시고 오너라.”
 
 그 말 한마디로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휴우, 이걸 어쩐다.”
 우민은 혹시나 자신이 ‘뭘 잘못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히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에잇, 모르겠다.”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 일이 아니다. 우민은 고민을 멈추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도서관이었다.
 
 어머니가 식당에서 퇴근하는 저녁 시간까지 어차피 집에 가봐야 할 일이 없었다.
 우민은 저녁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들 숙제 해줄 것만 빌려 가면 되겠다.”
 보고 있던 책을 덮고 일어난 우민은 제 키에 두세 배는 넘어갈 듯한 책장 사이를 오가며 세 권의 책을 뽑아 들었다.
 갈매기의 꿈.
 로빈슨 크루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아침에 만났던 중학생들에게 받은 숙제들이었다.
 두 장씩 써주기로 하고 선불로 받아 총 4,500원을 벌었다. 거기에 후불로 계산받은 것까지 합치면 오천 원이 넘어간다.
 엄마한테 받는 하루 용돈이 500원이니 10일치 용돈은 번 셈. 우민은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들고 대출 담당자 앞으로 다가갔다.
 우민을 본 대출 담당자가 대뜸 손가락으로 문 바깥쪽을 가리켰다.
 “꼬마야, 여기는 어른들 오는 데란다. 저쪽 어린이 자료실 보이지? 책 놔두고 저쪽으로 가야 해.”
 “저, 여기 와도 된다고 했어요.”
 “부모님이 잘못 알려주셨나 보구나. 어린이는 저쪽으로 가야 해요. 알았지?”
 우민이 난감해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누나!”
 그러고는 한쪽에 앉아 있는 여자 직원을 불렀다. 한창 일을 하던 직원이 그제야 우민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직원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민이 왔구나. 우와, 우민이 오늘도 이렇게 책 많이 빌렸어?”
 “네. 그런데 여기 형이 책 못 빌려 간다고 해서요.”
 여직원이 대출 담당자를 웃으며 쳐다보았다.
 “제가 미처 말씀을 못 드렸네요. 여기는 우민이라는 친군데, 몇 년 전부터 성인 자료실도 출입할 수 있게 도서관장님이 특별히 허락하셨어요.”
 “아······.”
 “어린 친구가 보통 독서광이 아니에요. 나는 어렸을 때 뭐 했나 반성하게 된다니까요.”
 지켜보고 있던 우민이 빠르게 한마디 끼어들었다.
 “대신 누나는 예쁘잖아요.”
 “뭐? 요 녀석이!”
 여직원이 싫지 않은 듯 웃으며 우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사탕 하나를 건네주었다.
 “자, 집에 가서 책 보면서 먹어요. 먹고 꼭 이 닦고.”
 “네. 알았어요, 누나.”
 대출 담당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우민을 바라보았다.
 “하하, 자. 여기 책 대출 처리됐다.”
 우민이 직각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아이구, 귀여워. 나중에 나도 우민이 같은 아들 생겼으면 좋겠네.”
 연신 귀엽다는 감탄사를 남발하는 여직원을 보며 대출 담당자는 왜인지 모르게 소악마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집에 도착하니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식당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는 10시가 넘어야 집으로 오신다. 우민은 익숙하게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까지 마쳤다.
 두 손을 걷어붙이고 한바탕 청소까지 하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이제 형들 숙제를 해볼까.”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조그만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읽어나갔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우민이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왔다.
 시끄러운 교실에서보다 집중이 더 잘되는지 책 한 권을 다 볼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두 권째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엄마!”
 우민이 재빨리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박은영의 한 손에는 검은색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짜잔, 입학 기념으로 엄마가 우민이 좋아하는 딸기 사왔지!”
 “비쌀 텐데, 뭘 이런 걸 샀어.”
 박은영이 우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들은 그런 걱정 안 해도 돼요.”
 딸기를 받아 든 우민이 방 한구석에서 운동화 박스 하나를 꺼내왔다.
 “이건 내가 엄마한테 주는 입학 기념 선물이야.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민은 운동화 박스를 내밀며 배꼽 인사를 했다. 박은영의 눈이 요동쳤다. 울컥거리는 마음이 떨리는 목소리에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이, 이걸 네가 어떻게 사.”
 “그냥 용돈 모으고 동네 형들 숙제해 주고 받은 돈으로 샀어. 엄마 신발 다 떨어졌잖아.”
 우민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박은영의 신발을 가리켰다. 검은 때가 꼬질꼬질 묻어 있었고, 앞부분은 해져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아들 앞에서 못난 꼴 보이기 싫었는지 박은영이 우민을 안았다.
 “우민아······.”
 잠시 엄마의 품에서 온기를 느끼던 우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마, 그리고 나 할 말이 있는데··· 선생님이 내일 엄마 모시고 오래······.”
 “뭐? 왜 무슨 일인데! 싸웠어?”
 걱정이 가득했다. 우민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게······.”
 우민의 설명을 해나갈수록 화등잔만 하게 커졌던 박은영의 눈이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에는 마치 올 게 왔다는 표정이었다.
 “그랬구나. 잘했다. 우리 아들, 항상 그렇게 당당하게 행동해야 해. 알았지?”
 “응!”
 우민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은영을 바라보는 우민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
 
 박은영은 검은색 숄더백에 주스 한 박스를 들고 교무실을 찾았다.
 “저기, 남일원 선생님······.”
 입학식 때 봤던 기억을 더듬어 유난히 핏기가 없고, 마른 체형의 선생님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자리에 앉아 있던 남일원도 박은영을 발견하고는 일어났다.
 “우민이 어머님 되세요?”
 “네. 맞습니다, 선생님.”
 남일원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보니 우민이가 어머니를 닮았군요.”
 오뚝한 콧날, 큰 눈을 빼다 박았다.
 “그런가요. 어릴 때는 아빠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남일원은 생활기록부에 적혀 있던 편모 가정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이내 어색하게 웃고는 의자가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하하, 일단 여기 앉으세요. 우민이 관련해서 드리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자리에 앉은 박은영이 메고 있던 가방에서 파일첩을 하나 꺼내 들었다.
 “혹시 이것 때문인가요?”
 건네받은 파일첩을 살피던 남일원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어, 어머님도 아셨군요.”
 “우민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특별하다는 걸 말하는 거라면, 네.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으니까요.”
 “크, 크흠······.”
 남일원이 나지막이 침음성을 흘리며 파일첩을 마저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우민이 어린 시절부터 끄적여 온 글들이 차곡차곡 모여 있었다.
 박은영은 차분히 옛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의 첫마디부터가 남일원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처음에는 귀머거리인 줄 알았습니다.”
 손에 펜을 쥐고 있을 때면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흔들거나, 펜에서 손을 떼고 나서야 자신을 보며 방긋 웃었다.
 
 “엄마!”
 
 그럴 때마다 수없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슴 졸이는 시간들을 지나 박은영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우민의 집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파일첩 세 번째 장을 보면 나무라는 글이 있을 겁니다.”
 남일원이 황급히 파일첩을 펼쳤다.
 “그걸 5살 때 썼다면··· 선생님은 믿으시겠습니까?”
 
 제목: 나무.
 
 남일원이 천천히 수필을 읽어 내려갔다.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글에 중독되어 정신없이 읽어나가다 마지막 마침표를 눈에 담았을 때, 투명한 물방울이 파일첩 비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설마, 나도 모르게 운 건가······.’
 당황스러움에 서둘러 눈을 훔치려 하자 휴지 한 장이 훅 들어왔다.
 “감수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비슷한 반응이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아······.”
 “언어를 다루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랬군요······.”
 남일원은 천천히 ‘나무’라는 글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았다. 처음처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아도 여전히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은유법, 직유법, 대유법 등의 수사법 사용을 본능적으로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건 차치하고, 자꾸만 자신의 심장을 건드렸다.
 39살.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쳐 오며 이제는 제법 초등 교육에 자신이 있었지만 이 아이를 앞으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아이들을 바른길로 인도해야 할 자신이 우민의 글을 보며 삶의 방향성을 고민했다.
 어제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답은 하나다.
 “영재가 확실하네요.”
 이제는 우민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
 
 박은영이 돌아가고, 선생님들도 하나둘씩 퇴근했다. 저녁 7시가 넘어가자 슬슬 해가 지며 밤이 찾아왔다.
 남일원은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쉴 새 없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교사 관련 카페들에서 정보를 뒤지고, 영재 관련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곳들을 찾아보았다.
 서울에서 문예 창작 관련 영재 교육원은 딱 두 군데밖에 없었다.
 그나마 초등학교 일 학년은 아직 받아주지 않았다.
 영락없이 일 년 동안은 자신이 맡아서 가르치는 수밖에 없다.
 “차라리 몰랐으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아무리 어머님이 괜찮다고, 그저 보통 아이들처럼 대해 달라고 했어도······.”
 교사로서의 사명감이 용납하질 않았다. 어쩌면 미래에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도 있는 아이다.
 그런 아이를 어찌 그냥 방치한단 말인가.
 가르치려면 뭐라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남일원은 일단 학교에 있는 글쓰기 관련 책을 집어 들었다.
 
 다음 날.
 밤새 고민을 거듭했는지 남일원의 눈 밑에 깊은 다크 서클이 생겨나 있었다.
 “남 선생님, 오늘 괜찮아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이네.”
 “하하, 괜찮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책을 보다 늦게 자서요.”
 교무회의를 위해 앉아 있던 교감 선생님이 남일원을 바라보았다.
 “역시 우리 남 선생이 항상 열심히 하다니까.”
 남일원이 부끄럽다는 듯 작게 손사래를 쳤다.
 “하하,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까지 오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봄철 황사 주의 사항에서부터 이번에 새롭게 입학한 초등학생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회의 안건으로 다뤄졌다.
 밤샘 고심의 여파 때문인지 남일원은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려는 눈꺼풀을 겨우 붙잡고 있었다.
 어서 회의가 끝나고 교실로 올라가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은 생각만이 가득했다.
 “자, 마지막 안건입니다. 어제 서울시 교육청에서 공문이 도착했어요. 서울시 교육청배 봄맞이 창작 대회를 개최하겠다고 합니다.”
 이제 막 단잠에 빠져 고개가 밑으로 떨어지려고 하던 남일원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이거야!”
 “나, 남 선생, 지금 뭐 하는 건가.”
 “아··· 죄, 죄송합니다, 교장 선생님. 제가 평소 생각하고 있던 기획안과 너무 똑같은 내용이라 놀라서 그만.”
 “알았으니까. 그만 자리에 앉게.”
 남일원이 민망함에 빠르게 자리에 앉았다. 표정에는 흥분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공모전.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지금 글쓰기를 공부해서 가르친다고 해서 우민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차라리 교육청이나 여러 기관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커리어를 쌓고, 유명 작가들의 심사평을 들어보는 것이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빨리 가서 이 사실을 말해줘야 되는데······.’
 이미 잠은 달아났다. 어서 빨리 교실로 올라가 우민이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마 작품을 출품하는 족족 금상이나 대상, 최소한 장려상은 탈 것이다.
 어쩌면···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지도 모른다.
 ‘기다려라, 우민아! 선생님이 간다!’
 교무회의가 끝나자마자 남일원은 빛보다 빠르게 교실로 올라갔다.
 
 ***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우민은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펜을 잡고 있었다.
 ‘역시.’
 남일원은 교탁으로 걸어가 날뛰는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자, 이제 그만 모두 자리에 앉자.”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우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늘 첫 시간은 바른생활 시간이니까 모두들 교과서를 책상 위에 꺼내놓도록 하자. 선생님이 먼저 교과서를 잘 가져왔는지 검사부터 할 거야.”
 남일원은 수업을 진행하면서 곁눈질로 우민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수업은 잘 듣고 있는지, 다른 친구들과는 보통 아이들처럼 어울리는지를 중점적으로 보았다.
 우민의 어머니 박은영이 특별히 부탁까지 하고 갔다.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지 선생님이 잘 지켜봐 주세요.”
 
 우민이 가진 재능이 다른 친구들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되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했다.
 아직 입학하고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걱정이 현실화될 조짐이 보였다.
 다른 아이들이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며 가까워지고 있을 때 우민이 앉아 있는 곳은 마치 외딴섬처럼 보였다.
 ‘이거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었어.’
 똑똑하고 싸가지 없게 클 것인가.
 똑똑하고 친절하게 클 것인가.
 어떻게 크던 자신의 책임이다. 교사로서 이 정도의 책임감도 없다면 교대에 진학하지도 않았다.
 수업을 하는 내내 남일원의 고민도 깊어갔다.
 
 ***
 
 종례 시간.
 남일원이 아이들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평소 글쓰기나, 그림 그리는 것에 흥미가 있는 친구는 손 들어보세요.”
 “저요!”
 “저도요, 선생님!”
 한 아이가 손을 들자 너도나도 따라 손을 들었다. 우민은 그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공모전이라··· 그림은 못 그리니 글쓰기로 한번 나가볼까. 그런데 초등학생 공모전은 상금이 적을 것 같은데··· 1등 해도 문상 10장 이렇게 주는 거 아냐.’
 문상. 즉 문화상품권 한 장에 오천 원이니, 10장이면 오만 원이다. 1등을 한다는 보장도 없는 마당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시간을 빼앗길 바에, 중학생 형들 과제 하나 더 해주는 게 나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살피던 남일원이 임시 반장을 불렀다.
 “참가하고 싶은 친구들은 반장에게 말하고, 반장은 명단 적어서 선생님한테 가져와요. 그리고 우민이는 잠깐 선생님 따라서 교무실로 와. 반장 인사.”
 “차렷, 경례. 선생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남일원이 담임이 되면서 가장 먼저 정한 인사말이었다.
 
 ***
 
 남일원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으, 응?”
 “상. 금. 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우민은 상금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다시 물었다.
 “아, 사, 상금. 그렇지, 상금도 중요하지. 어디 보자······.”
 남일원이 마우스를 움직여 서울시 교육청에서 내려온 공문을 다시 살폈다.
 눈은 모니터를 향해 있었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방금 상금이 얼마냐고 물어본 게 맞지?’
 우민의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공문을 확인한 남일원이 말했다.
 “1등을 하면 오십만 원이구나.”
 헉.
 이번에는 우민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신이 생각했던 금액의 10배다.
 ‘오십만 원이면 내 천 일치 용돈이잖아.’
 욕심이 불끈 솟아올랐다. 숙제를 대신 해주는 것에 거의 100배가 넘는 금액이다.
 우민이 고사리 같은 손을 말아 쥐었다. 이 정도 금액이면 엄마한테도 큰 도움이 되리라.
 “선생님, 꼭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말인데··· 혹시 제가 나갈 수 있는 다른 공모전도 있을까요? 단, 상금 10만 원 이상짜리로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부탁에 남일원이 일순 멍해졌다. 저 조건은 또 뭐란 말인가.
 상금 10만 원 이상이라니······.
 “그, 그렇지 않아도 다른 공모전도 나가보는 게 어떨지 말하려고 했는데 잘됐구나.”
 남일원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무슨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는데 중복 참가도 될까요? 보니까. 운문, 생활문이 있는데 제가 두 가지 다 자신이 있어서요.”
 운문은 시 부문. 생활문은 경험을 드러내는 글이라면 어떤 종류든 상관이 없다.
 “그, 그 부분도 선생님이 알아보고 알려주마.”
 우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가 알려주신 대로 가지런히 두 손을 배꼽에 모았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오늘부터 남일원은 우민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마냥 어리게 대했다가는 내가 큰코다치겠어.’
 여러 면에서 남다른 친구였다. 약간 돈을 밝히는 것 같아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글쓰기에 자신 있다고 말하는 모습이 어린아이의 치기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
 
 태권도학과를 졸업해 딱히 특별한 기술도 없는 박은영이 일할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더구나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라 치면 어떻게 알았는지 사채업자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이철기가 죽고, 법적인 채무 관계는 끝났으나 사채업자들은 막무가내였다.
 처음에는 경찰을 부르고, 대들기도 해보았다.
 하지만 경찰은 돌아가면 그만이었고, 사채업자들의 집요함은 박은영의 억척스러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도망치듯 이사를 다니는 것도 이제는 지겨웠다.
 우민이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박은영은 이곳에서 우민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여기 순댓국 두 개요.”
 손님의 주문에 박은영이 재빨리 움직였다. 구슬땀을 흘리며 순댓국을 날랐다.
 32살에 우민이를 낳았으니 이제 40살.
 고된 노동과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아 많이 퇴색되긴 했지만 아직 소싯적의 청초한 미모가 살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런 데서 일할 분이 아니란 말이야. 아줌마, 내가 좋은 일자리 소개시켜 준다니까.”
 “아저씨나 좋은 일자리에서 돈 많이 버세요.”
 박은영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타고난 미모 덕분인지 과부가 된 박은영에게 검은 유혹들이 손길을 뻗쳤다.
 술 한 잔 따르고 입가에 웃음 한 번 머금으면 여기 순댓국집에서 한 달 일했을 때 월급이 손에 들어온다.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하지만 이렇게 참기 힘든 순간들이 온다.
 턱.
 박은영이 자신의 엉덩이 쪽으로 다가오는 손을 빠르게 낚아채 반대 방향으로 꺾어버렸다.
 “손 잘못 놀리시면 손모가지 날아가요.”
 여리여리하게 보여도 대학 때까지 태권도를 했던 박은영이다. 웬만한 성인 남자는 가볍게 제칠 수 있다.
 “아하하하, 자, 장난이지. 장난. 이, 이러다가 부러지겠어.”
 박은영이 잡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놓았다.
 딸랑.
 문에 달린 방울이 울리자 박은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하지만 들어오는 손님은 없었다. 3월 초겨울의 찬바람이 가게 안을 휘저어 박은영은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문을 열다 말고 도망치듯 순댓국 집을 빠져나온 우민은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상을 책으로 경험한 우민이도 방금 전 어떤 상황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욕’ 나오는 상황이다.
 “시······.”
 입가를 비집고 새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겨우 목구멍으로 삼켜 넘겼다.
 
 “언제나 욕하지 말거라. 우리 아들이 내뱉은 그 욕이 돌고 돌아 엄마에게 올 수도 있으니까.”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린 자신에게 좋은 것만 보고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지키고 싶었다.
 비록 보이지 않는 곳이라 해도 자신을 위해 고생하고 있는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대신 이가 부서져라 꽉 물었다.
 “우민이 왔니?”
 5살 때부터 도서관을 다니며 이제는 명물이 되어버린 우민이에게 관리인 할아버지가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화가 난 와중에도 우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콧김까지 씩씩 뿜어내며 이를 꽉 물고 있는 모습이 마냥 귀엽게만 보였는지 할아버지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학교에서 친구랑 싸웠나 보구나.”
 “차라리 그런 거였다면 좋겠어요.”
 “허허허, 그럼 뭐가 우리 우민이를 이렇게 화나게 했을꼬.”
 엄마가······.
 엄마가······.
 우민이는 차마 자신이 보았던 상황을 입에 담지 못했다. 건드려서는 안 될 ‘금기’를 건드리는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는 입을 떼지 못하는 우민이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8살 꼬마의 일상적인 투정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년간 우민을 겪은 도서관 관리인이자 도서관장인 고은석은 알고 있었다.
 우민이 말하지 못할 정도의 일이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리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신과 함께 놀며 잠시라도 이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근심을 잊게 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음··· 오늘은 원래 인물 표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려 했는데, ‘빙고’를 한번 해볼까?”
 “빙고요?”
 “단, ‘분노’에 관련된 단어만 적어보는 거야. 할아버지를 이기면 우민이가 좋아하는 햄버거 사 주마. 대신 우민이가 지면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글로 적어줄 수 있을까?”
 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면 분노에 관련된 단어를 수십 가지라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겨서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면, 정신이 ‘멍’해지며 눈앞이 흐릿하게까지 보이는 이 ‘감정’이 조금은 사그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위, 바위, 보!”
 둘 다 묵을 냈다.
 “다시 가위, 바위, 보!”
 이번에는 고은석이 묵, 우민이 가위를 냈다.
 “하하, 할아버지가 또 이겼구나. 그럼 시작한다.”
 “으윽.”
 우민이 이미 졌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겹치는 단어가 있을지도 모르잖느냐.”
 “벌써 두 판짼데 한 번도 없었잖아요······.”
 오판 삼선의 승부. 두 번의 게임에서 우민은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고은석이 부르는 단어는 자신이 적은 것 중에 단 하나도 없었고, 자신이 불렀던 단어는 ‘족족’ 고은석의 게임지에 적혀 있었다.
 “하하, 그래도 할아버지가 우민이보다 몇십 년은 더 살았는데 질 수야 없지.”
 “칫.”
 놀리는 듯한 말투에 우민이 대꾸도 못 하고 애꿎은 게임지만 만지작거렸다.
 머리로는 지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갔지만 가슴이 납득하지 못했다.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분개.”
 “없어요.”
 “부아.”
 “없어요······.”
 우민은 이번 판도 졌다는 느낌에 맥없이 중얼거렸다.
 화나 분노와 관련된 단어가 이렇게나 많은지 처음 알았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 책을 읽으며 꽤나 많은 단어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할아버지, 즉 고은석에게는 도무지 상대가 되질 못했다.
 “분격.”
 “없어요오.”
 “하하, 이거 영 할아버지한테 상대가 안 되는걸?”
 우민이 최후의 필살기로 남겨놓고 있던 애교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입을 삐죽 내밀고,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턱을 뒤로 조금 잡아당기며 혀 짧은 소리를 냈다.
 “히잉, 할아부지이······.”
 “요 녀석, 그래도 소용없다.”
 “쳇.”
 이내 자세를 바로잡은 우민이 게임지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뭘 적어놓았는지 알고 있기라도 하듯 피해 나갔다.
 ‘하긴 할아버지께 글쓰기를 배웠으니 당연한 건가.’
 엄마 손을 잡고 처음 온 도서관은 신세계였다. 독서라는 즐거움에 흠뻑 빠질 때쯤 관리인 할아버지가 독후감을 써오면 과자를 사준다는 것이 인연의 발단이 되었다.
 그 뒤로 할아버지께 글쓰기를 배우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격노.”
 “아싸!”
 우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기쁨의 환호성을 터뜨렸다. 드디어 자신이 적은 단어가 나왔다.
 이제 순서는 자신에게 넘어왔다.
 “그렇게 좋으냐?”
 “흐흥! 할아버지는 이제 펜 놓으셔도 돼요. 제가 끝내 버릴 테니까.”
 고은석이 인자하게 우민을 바라보았다.
 “어디 한번 해보거라.”
 그 뒤로는 우민의 압도적 우세였다.
 빙고!
 첫 판을 끝내고.
 빙고!
 두 번째 판마저 이긴 우민은.
 빙고!
 세 번째 게임마저 빠르게 접수했다.
 고은석은 그저 온화하게 웃으며 희희낙락하는 우민을 바라보았다.
 
 ***
 
 햄버거 집에 도착해 불고기 버거를 한 입 베어 문 우민이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그렇게 맛있느냐?”
 “네. 흐흐, 매일 이것만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맛있어요.”
 “하하, 천천히 먹어라. 누가 안 뺏어 가.”
 “할아버지는 정말 안 드세요? 진짜 맛있는데.”
 “할아버지 나이에 이런 거 먹으면 속이 부대껴서 안 돼요.”
 “부대껴요?”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문 우민의 얼굴에 궁금증이 떠올랐다. 문맥상 ‘좋지 않다’라는 의미는 알 수 있었다.
 그런 우민에게 고은석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사람이나 일에 시달려서 괴로움을 겪거나,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속이 크게 불편해서 쓰리거나 울렁울렁거릴 때 쓰는 말이지.”
 “아∼ 저도 오늘 아이들 속에서 부대꼈어요.”
 “요 녀석. 너도 어린아인데 아이들 속에서 부대끼다니.”
 “헤헤, 저는 어른 같은 아이잖아요.”
 한편으로는 기특하면서, 약간의 쓴맛이 입안에 돌았다. 아직 8살. 무엇이 이 아이를 어른답도록 만든 것일까.
 고은석은 그것이 결코 웃으며 마주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란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른 같은 아이니 오늘 할아버지한테 배운 단어들도 잘 적어놨지?”
 우민이 가방에서 게임지로 사용했던 공책을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자신이 적은 ‘분노’에 관한 단어들만이 아니라 고은석이 말했던 것까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여기 다 적어놨어요.”
 “하하, 잘했다, 잘했어. 글쓰기의 기본 중 하나가 풍부한 단어 사용이다. 언제나 상황에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고민, 또 고민해야 해.”
 고은석은 보면 볼수록 대견스러운 우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음··· 그러면 지금 이 상황에는 비분강개라는 단어가 어울리겠네요.”
 “이 녀석아. 지금은 고마움, 감사,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 이런 말이 어울리지.”
 “할아버지가 일부러 져주셔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거잖아요. 정당하게 했으면 진 게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니 분하고, 그러면서도 햄버거를 먹으려는 욕심에 조용히 있는 제 자신이 슬프니까요.”
 측은함에 고은석이 잠시 말을 잃었다.
 “우민아······.”
 “지금은 괜찮아요. 그런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어요. 헤헤.”
 우민이 밝게 웃어 보였지만 고은석은 가엾은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 정도 욕심은··· 괜찮다. 앞으로 할아버지 앞에서는 언제나 욕심부려도 돼.”
 감자튀김까지 싹쓸이한 우민이 우물쭈물해하며 말했다.
 “그러면··· 하나 더 먹어도 돼요?”
 “어이쿠, 이 녀석이. 이거 내가 우민이에게 한 방 먹은 건가? 더 먹으면 어머니께 이 할아버지가 혼나는데.”
 “히잉··· 방금 욕심부려도 괜찮다고 하셨으면서.”
 “요놈 보게나. 알았다, 알았어. 대신 어머니께는 비밀이다?”
 우민이 알았다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석이 할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햄버거 하나를 더 주문했다.
 
 ***
 
 집으로 돌아온 고은석은 우민이 제출한 과제를 살펴보았다.
 “완급 조절만큼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해.”
 고은석은 우민이 적어낸 과제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소싯적 글 밥을 먹으며 꽤나 이름을 날렸다. 그렇게 얻은 작은 명성 덕분에 도서관장 제의까지 받았다.
 도서관장을 수락한 이유는 단지 편안한 노후를 보장받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매달 들어오는 인세로 이미 먹고사는 걱정은 없었다.
 도서관을 운영하며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던 차에 만난 것인 ‘이우민’. 지금까지 자신이 만난 아이들 중 글쓰기에 가장 재능 있는 친구였다.
 재능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영재, 천재, 신동. 그 어떤 단어로도 우민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신조어를 하나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요즘 말로 세젤글이라고 해야 하나.”
 세상에서 제일 글을 잘 쓰는 사람. 아직 나이가 어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우민이 미래에 한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환갑이 넘은 고은석을 들뜨게 만들었다.
 
 ***
 
 집으로 돌아온 우민이 다용도 밥상을 펼쳐 들었다. 밥상 위에는 중학생 형에게 과제로 받아온 갈매기의 꿈이 올라가 있었다.
 갈매기의 꿈.
 원제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이라는 이름으로 저자는 ‘리처드 바크’다.
 1970년대에 출판되어 전 세계에 6천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로, 꿈을 좇는 갈매기인 ‘조나단’이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고속 비행에 성공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참신한 설정과 간단하고 짧은 내용 속에 묻어 있는 깊은 철학적 색채로 대중들의 인기를 받았다.
 “독후감부터 써볼까.”
 우민은 펜을 잡자마자 무섭도록 집중했다.
 책에서 읽은 활자들이 서로 충돌하고 섞여 화학작용을 거쳐 나오면 하나의 문장이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이 쌓여 문단이 되고, 문단이 쌓여 하나의 글이 되었다.
 써야 할 내용이 절로 떠올랐다.
 그렇게 30여 분이 지났을까.
 A4 두 장 분량의 글을 써낸 우민이 손에서 펜을 놓고 기지개를 쭉 켰다.
 “됐다.”
 어느새 독후감 한 편이 ‘뚝딱’ 완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퇴고 작업이 남았다.
 
 우민이 서랍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글꽃중학교’ 선생님 목록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
 “선생님 성함이 ‘최성현’이라고 했지. 최성현, 최성현······.”
 가나다라 순으로 정렬된 공책의 페이지를 넘기던 우민이 행동을 멈추었다.
 “역시 내 기억이 맞았어. 이분은 단순히 줄거리를 깔끔하게 요약하는 것보다는 이를 통해 느낀 점을 앞으로의 생활 습관과 연계시키는 글을 좋아하시니까.”
 우민이 대신 해준 숙제들이 처음부터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중학생 수준을 벗어나는 글들이기는 했지만 각 선생님마다의 평가 기준이라는 것이 달라 초반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선생님들에 대한 데이터 수집이었다. 도서관에 과제를 하러 오는 형들에게 묻고 물어 수집한 양이 상당했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발전할 수 있었던 에피소드를 추가하자.”
 기지개를 켜고 목도 두어 바퀴 돌렸다.
 “컴퓨터가 있다면 더 빨리 작성할 수 있겠지만.”
 가격이 최소한 50만 원이 넘어간다. 한 달 일해서 백만 원 조금 넘는 돈을 버는 어머니께 사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공모전만 1등 하면 그 돈으로 사자. 그러면 도서관 정보화 열람실에 가서 하거나, 이렇게 손으로 하는 것도 끝이다, 끝.”
 우민이 다시 펜을 잡고 퇴고에 힘썼다. 그렇게 숙제를 하나 끝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약 한 시간. 어머니 박은영이 퇴근할 때까지 우민은 다용도 밥상 앞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방과 후.
 우민은 중학교 교문 앞에서 형들을 기다렸다.
 “여기에요!”
 며칠 전 봤던 익숙한 얼굴들이 우민에게 다가왔다. 우민은 들고 있던 과제를 하나씩 형들에게 나눠주었다.
 “여기 이건 갈매기의 꿈 독후감. 이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둘에게 과제를 건넨 우민이 잠시 멈추었다.
 “또 이건··· 자유 양식 생활문. 후불로 하셨으니까 계산부터 해주세요.”
 우민이 손을 내밀었다. 짝다리를 짚은 채 우민을 꼬나보던 중학생이 ‘찍’ 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야.”
 “네?”
 “이게 어디서 형들한테 꼬박꼬박 돈 달라 소리야.”
 친구의 돌발 행동에 숙제를 받아 든 둘이 일순 멈칫했다.
 “야. 뭐, 뭐 하는 거야. 어서 돈 주고 가자.”
 “잠깐 기다려 봐. 이 새끼 이거 웃긴 놈이잖아. 어디서 형들한테 눈 똑바로 뜨고. 숙제 맡겨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해야지.”
 우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학생을 노려보았다.
 “후회하실 텐데요.”
 “후회는 무슨, 오늘부터 넌 내 숙제 셔틀이다.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이 시간에 여기서 딱 기다려. 알았어?”
 조용히 노려보기만 하고 있는 우민을 향해 중학생이 주먹 쥔 손을 치켜들었다.
 “이 새끼가. 알았어, 몰랐어. 대답 안 해?”
 “그럼 오늘부터 형은 제 용돈 셔틀이 되겠네요.”
 “이 새끼가 미쳤나. 뭐라는 거야.”
 “매주 이용해 주신다니까. 종신 계약을 하시겠다는 줄 알았죠.”
 상황이 악화되자 이미 숙제를 건네받은 중학생들이 안절부절하질 못했다.
 “빨리 돈 주고 그냥 가자니까. 너, 뭐 하는 거야?”
 “이 돈이면 겜방 두 시간인데, 너네 왜 그러냐. 내가 공짜로 숙제 맡길 수 있게 해준다니까.”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우민은 이미 숙제를 받아 든 둘을 바라보았다.
 “민철이 형, 형네 아버지 잘 계시죠? 아주머니랑 사이는 어떠세요?”
 “더, 덕분에 좋아.”
 “석규 형, 형네는요?”
 “우, 우리도 좋지.”
 “그럼 뭐 하세요. 저 돈 받아야 되는데. 아니면 부모님들께 전화 돌릴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3학년 세찬이 형한테 연락할까요?”
 “아하하. 하하하하하.”
 어색하게 웃던 한 명이 ‘찍’ 하고 침을 뱉던 놈의 양팔을 붙잡았다.
 “야, 뭐야, 너. 왜 그래?”
 또 다른 한 명이 급하게 주머니를 뒤져 우민에게 돈을 건넸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특히나 ‘형’은 앞으로 매주 이곳에서 ‘딱’ 대기하셨으면 좋겠어요.”
 계산이 끝나고 우민이 돌아가자 그제야 두 사람이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도대체 왜 그러냐, 너네. 그리고 세찬이 형이면 3학년 일진 회장 아냐? 저 자식이 그 형을 어떻게 알아?”
 “너 제 별명이 뭔지 모르냐?”
 “그걸 내가 왜 알아야 되는데.”
 “전학 와서 잘 모르나 본데 이제부터 알아야 할 거야. 한마디로 우리 동네 큐피드야.”
 “···뭐?”
 “이혼까지 고려하던 우리 부모님 사이부터 세찬이 형네 부모님, 그리고 지금 세찬이 형이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까지. 모두 쟤가 이어준 거야.”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더 이상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숙제를 가방에 넣고 앞장섰다.
 “야, 가, 같이 가.”
 “그냥 한마디로 쟤 건들면 이 동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돼.”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알아듣게 설명해 주면 덧나냐.”
 설명을 하던 친구가 더 이상 입 아프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며 저 멀리 보이는 우민을 가리켰다.
 “아이고, 우민이 집에 가는 길이니?”
 “어쩜 벌써 초등학교 입학이라니 많이 컸구나.”
 “다음번에 아저씨 가게 오면 공짜로 밥 줄 테니까. 어머니 모시고 한번 오거라.”
 “아줌마가 머리 예쁘게 깎아줄 테니까. 꼭 한번 들러요.”
 우민이 지나는 길 주변의 상점 주인들이 너도나도 아는 척을 하며 반겼다. 우민은 그때마다 꼬박꼬박 배꼽 인사를 했다.
 “이제 대충 감이 오냐? 내가 너, 학교가 아니라 이 동네 전체에서 왕따당할 뻔한 거 구해준 거야.”
 중학생 아이는 여전히 머리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는지 흠칫 몸을 떨었다.
 우민의 모습이 멀어져 이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셋은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끝까지 지켜보았다.
 
 4장. 봄맞이 공모전
 
 
 
 
 남일원은 수업을 진행하며 힐끗 우민을 살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미 동네에서도 유명 인사였다.
 사과할 일이 있을 때나 어버이날 편지를 써야 할 때, 또는 연애가 필요할 때 꽤나 많은 사람들이 우민을 찾는다.
 마치 점집의 무당처럼 우민이 쓴 편지는 상대방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고 했다.
 이혼할 뻔한 사이도, 처음 만나는 풋풋한 사이도, 틀어질 대로 틀어진 부모 자식 간도 우민에게 맡기면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다.
 ‘신기하단 말이야.’
 아무리 봐도 여느 아이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며칠간 관찰한 바에 의하면, 쉬는 시간에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노는 법이 없었다.
 가져온 책을 읽거나 고사리 같은 손을 움직여 글을 썼다. 친구들이 놀자고 다가와도 대충 상대해 주다 말았다.
 저러다 왕따가 되지나 않을지 걱정까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잘생긴 외모 덕분일까.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어디서 들었는지 ‘시크’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여자아이들 속에 쉬는 시간마다 갇혀 있었다.
 
 점심시간.
 우민은 여자아이들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우민아, 책 봐?”
 “보면 모르니? 우민이 책 보는 중이잖아.”
 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마치 보호자라도 되는 양 다른 여자아이들을 쫓아내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민의 시선은 책에만 가 있었다.
 “어, 나도 저거 봤는데. 마법사 해리.”
 마법사 해리.
 전 세계에서 4억 권 이상 팔린 판타지 서적으로, 어린아이에서부터 성인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끈 책이다.
 영화화까지 되면서 발생한 수익만 조 단위를 거뜬히 넘어갔다.
 얼마 전 우민이 도서관에서 빌려 재밌게 읽고 있는 중이었다.
 “나도! 나도! 우리 집에도 있어! 마법사 해리!”
 여자아이의 말에 우민이 고개를 들었다.
 “집에 다 있어? 전권 다?”
 “응! 다 있어. 다!”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 기쁜지 여자아이가 활짝 웃었다.
 ‘정말 전권 다 있는 건가.’
 아이들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우민은 유치원 때부터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아마 한 권만 있어도 다 있다고 할 것이다.
 ‘전권’이라는 말 자체를 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다. 지기 싫다는 듯 다른 아이들도 손을 들었다.
 “나도, 나도 다 있어.”
 “나도!”
 “음······.”
 도서관에서 1, 2권을 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인기가 있는 책이어서인지 전체 6부, 총 32권의 책들이 차례대로 있지 않고 이가 빠지듯 중간중간 비어 있었다.
 겨우 빌린 것이 1부 마법사 해리와 지팡이의 1, 2권. 나머지도 예약을 해두긴 했지만 대여까지 2주를 넘게 기다려야 했다.
 ‘지금 당장 보고 싶은데.’
 우민이 너도나도 책이 있다며 손을 든 여자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그럼 내일 학교에 이거 3, 4권 가져올 수 있는 사람 있어?”
 “나!”
 “아냐, 나! 나!”
 우민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인지 여자아이들이 필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런 아이들을 우민이 한 명씩 가리켰다.
 “그럼 너는 1부 마법사 해리와 지팡이 3, 4권 가져올래? 너는 2부 1, 2권. 그리고 너는······.”
 “그럼 나랑 놀아주는 거야?”
 “나랑도 놀아줘.”
 여자아이들은 마치 병아리가 어미 닭을 졸졸 쫓아다니는 것처럼 우민에게 찰싹 달라붙어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우민이 시크하게 말했다.
 “알았어. 내일 책 가져오면 놀아줄게.”
 “자, 이야기 끝났으면 우민이는 잠시 선생님 좀 볼까?”
 “선생님! 우민이는 저희랑 놀아야 된단 말이에요.”
 “하하, 숙녀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잠시만 빌릴게요.”
 남일원이 여자아이들의 원성을 들으며 우민을 교무실로 데리고 갔다.
 
 교무실로 내려와 자리에 앉은 남일원이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 적혀 있는 게 현재 예정되어 있는 공모전이야.”
 
 서울시 교육청 봄맞이 글쓰기 대회. 50
 헌법 사랑 글짓기. 30
 아빠, 금연하세요. 50
 벚꽃 나무 공모전. 30
 국군 장병 위문편지. 30
 코이카 글짓기 공모전. 50
 내 손으로 어린이 드라마를! 100
 
 옆에는 친절하게 숫자까지 적혀 있었다.
 “숫자 보이지? 네가 말한 대로 상금 10만 원 이상짜리로만 골랐다. 그리고 서울시 봄맞이 글짓기는 학생당 한 작품으로 한정되어 있더라.”
 우민의 눈은 공모전의 제목보다 숫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만약 전부 대상을 수상한다면 340만 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숫자다.
 기쁨의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입가를 비집고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뛰어난 외모 탓일까. 약간의 미소만으로도 주변이 환해졌다.
 “선생님, 혹시 이런 공모전이 앞으로 더 있을까요?”
 “아마도 그럴 거다. 현재 공고 나온 것만 추린 거니까. 5월이 넘어가면 또 한차례 쏟아지지 않을까 싶은데.”
 우민이 포동포동 살이 올라 있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솟아오르는 흥분에 입술까지 꽉 깨물었다.
 이거다.
 반지하 방을 벗어나고, 어머니가 늦은 시간까지 손이 부르트도록 일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다.
 “꼭 전부 대상 타서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최선을 다해봐. 그러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다.”
 우민은 종이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 달 정도의 기간이 있는 것에서부터 제출일이 채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것도 있었다
 ‘단 하나도 놓칠 수 없어.’
 우민은 다시금 대상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
 
 어두컴컴해진 하늘. 이미 전교생은 하교를 마쳤다. 초등학교 선생을 하며 남일원이 느꼈던 최고의 장점 중 하나가 5시 근방에서의 퇴근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 장점이 많이 퇴색되고 있는 중이었다.
 “휴우··· 오늘도 야근인 건가.”
 남일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민은 공모전 리스트를 받은 후에 조심스럽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선생님, 혹시 리스트에 있는 공모전들의 과거 대상 수상작들을 제가 볼 수 있을까요? 그러면 한결 글쓰기가 쉬워질 것 같아서요. 물론 저도 찾아보겠습니다.”
 
 머리가 영특했다. 미래가 기대되어 심장이 약간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욱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바보였었나. 당연히 생각해야 했던 거 아냐.”
 남일원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하지만 이건 목적성의 차이일 뿐이었다.
 우민은 대회에서의 우승이 목적이다. 이기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려 했다.
 반면 남일원은 교육이 목적이다. 대회에 작품을 내보고 여러 글을 써보며 경험을 쌓아나가게 하려 했다.
 이런 생각의 차이가 방법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아··· 더 분발해야지. 아직 1학년인데 또 담임 맡을 수도 있잖아.”
 남일원은 어쩌다 한두 번 더 담임을 맡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담임을 하게 된다면 아마 과로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살짝 몸을 떨었다.
 
 ***
 
 제목: 우리 집에 찾아올 봄.
 밤늦은 시간까지 어머니가 오질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 종일 멍하니 문만 바라보고 있는 날이 계속되었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저녁 9시.
 아직 퇴근하실 시간이 아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기다리면 어머니가 지친 얼굴로 돌아오신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가장 먼저 나를 들어 올리셨다.
 “우리 우민이, 엄마 기다렸어?”
 “응! 응!”
 한없이 힘들어 보이는 어머니의 얼굴에 자그마한 웃음꽃이 핀다. 그제야 차가운 방 안에 온기가 돌고, 적막감이 서서히 물러가며 우리 집에도 봄이 찾아온다.
 ···중략···
 
 우편과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된 수백 개의 작품들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던 서울시 봄맞이 창작 대회 심사 위원 최준철이 보고 있던 글을 잠시 내려놓았다.
 “음······.”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심사 위원이 최준철을 향해 다가왔다.
 “피곤하시죠? 여기 커피 가져왔습니다.”
 “어, 고마워.”
 “어때요? 괜찮은 게 있나요?”
 최준철이 보고 있던 글을 슬쩍 내밀었다.
 “자네가 이거 한번 보게. 초등학생이라는데······.”
 글을 읽어내린 심사 위원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초등학생이요? 아무리 봐도 초등부에서 나올 글이 아닌 것 같은데··· 학원에서 써준 것 아닐까요? 아니면 부모님이 대신 써주셨나.”
 “···흐음.”
 “요즘 어릴 때부터 스펙 관리한다고 극성인 부모들 때문에 아주 골치예요. 이건 뭐, 학생들 공모전에 어른들이 참가하는 격이니.”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최준철이 다시 한번 ‘우리 집에 찾아올 봄’이라는 생활문을 집어 들었다.
 뭔가 아쉬운 듯 몇 번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직접 쓴 게 아니겠지?”
 “직접 썼다면 충분히 대상을 줄 만한 글이긴 한데··· 확인 작업 한번 해볼까요?”
 “······.”
 최준철이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다.
 글의 흐름이 매끈하고, 문법이나 어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인 점은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잘 드러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공감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일을 나가셨을 때 느꼈던 슬픔, 이후 점차 희망적으로 변해가는 상황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은은히 파고들며 심금을 울렸다.
 ‘글 밥’ 먹고사는 작가가 썼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 높은 글이었다.
 옆에서 글의 출처를 찾아본 심사 위원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초등학생 일 학년이 제출했네요? 이건 좀 너무했다. 고민해 볼 것도 없네요. 반려시키겠습니다.”
 최준철은 아무 말도 없이 또 한 번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읽을 때마다 글이 새롭게 다가왔다.
 누군가 대타로 써줬다고 해도, 그 ‘누군가’를 한번 찾아볼 가치는 충분할 것 같았다.
 
 ***
 
 가장 먼저 발표되는 서울시 봄맞이 창작 대회 발표일이 4월 초. 3월 말부터 우민의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아직 연락이 없나요?”
 남일원이 진정하라는 듯 우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락 오면 선생님이 가장 먼저 알려줄 테니까. 기다려 보자꾸나.”
 자리로 돌아온 우민이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하아, 다른 수상작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맞췄어야 했나.’
 남일원이 찾아준 역대 수상작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처음에는 비슷한 수준으로 글을 완성했다.
 하지만 대상을 수상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인지 계속해서 아쉬운 점들이 눈에 띄었다.
 불필요한 단어들은 쳐내고, 명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문장을 가다듬는 작업을 몇 번 진행했다.
 ‘퇴고를 한 번만 했어야 하는데.’
 그랬더니 처음과는 완전 다른 글이 탄생해 버렸다.
 처음 썼던 글이 과한 양념의 오천 원짜리 왕돈가스였다면, 퇴고를 거치고 나자 수만 원을 호가하는 호텔 돈가스로 탈바꿈했다.
 ‘대충해서 낼걸. 오천 원짜리를 먹고 싶어 하는 사람한테 몇만 원짜리가 팔릴 리가 있나.’
 우민은 그 점이 계속 후회스러웠다.
 
 쉬는 시간.
 생각에 빠져 있는 우민에게 여자아이들이 다가왔다.
 “우민아, 우민아! 오늘 끝나고 뭐 해?”
 “······.”
 “우리 집에 오빠가 사놓은 로봇 있는데 보러 올래?”
 “오늘은 우리 집 차례야!”
 “아니거든! 우민이 우리 집 간다고 했거든. 그렇지?”
 우민은 여전히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 머리 아파. 자기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다간 또 울겠지.’
 3월 초부터 벌써 한 달째. 쉬는 시간만 되면 반 여자아이들이 자신의 자리로 몰려들었다.
 다른 반까지 소문이 났는지 간혹 구경하러 오는 아이들까지 있었다.
 재잘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 한 번 ‘정색’하며 말한 적이 있었다.
 
 “머리가 아파서 그런데 다들 자리로 돌아가 줄래.”
 
 최대한 약하게 얘기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아이들이 바로 울먹거렸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놔둘 수도 없는 일. 우민은 차라리 잠시 피해 있기로 했다.
 “우민아, 어디 가! 나도 갈래!”
 “화장실 가려고.”
 “나도, 나도 갈 거야!”
 “···넌 여자고, 난 남자야.”
 아직 성별에 대한 관념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욕심이 더 커서일까.
 “그래도 갈 거야! 화장실 같이 갈 거야!”
 우민은 한층 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
 
 드르륵.
 문이 열리며 앞머리가 살짝 까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있던 남일원이 벌떡 일어났다.
 “교감 선생님.”
 “아, 남일원 선생. 이 반에 이우민 학생 있습니까?”
 “네. 저희 반 학생인데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꼭 썩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이었다. 교감 선생은 한차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남일원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도대체 학생 관리를 어떻게 하신 겁니까. 방금 교육청에서 이우민 학생이 제출한 작품이 다른 사람 걸 베낀 것 같으니 상황 파악해 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네?”
 남일원이 황당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우민이 제출하기 전에 자신도 읽어보았다.
 충분히 대상감이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는데 ‘표절’이라니.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뚜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일단 이우민 학생 데리고 교무실로 내려와요. 이거 원 참.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있나.”
 남일원이 그럴 리가 없다며 항변하려 했으나 이미 교감 선생은 문을 열고 나간 뒤였다.
 
 ***
 
 “솔직히 말해야 돼. 이거 정말 네가 썼어?”
 “네.”
 “방금 교감 선생님이 말했지. 솔직히 말해야 한다고. 잘못하면 큰일 날 수도 있어. 정말 네가 쓴 거 맞아?”
 마치 답을 정해놓고 있는 듯한 태도에 살짝 짜증이 났지만 우민은 최대한 성실하게 답했다.
 “제가 쓴 게 맞아요. 제출하기 전에 담임 선생님께도 보여 드리고 확인받았어요.”
 우민이 고개를 들어 남일원을 바라보았다.
 “교감 선생님,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울시 공모전에 낸 글은 틀림없이 우민이가 쓴 게 맞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교감 선생은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았다.
 “하긴 가정 형편도 어려운데 학원에 다니지는 않았을 테고··· 혹시 인터넷 같은 데서 본 걸 가져다 쓰지는 않았니?”
 남일원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교감 선생님!”
 “남 선생, 어디서 큰 소리야. 학교에서 작품을 거르지도 않고 냈다고 서울시 교육청에서 직접 연락이 왔어. 잘못하면 관리 소홀로 자네도 징계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나?”
 “그럴 리가 없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남일원의 일관된 주장에도 교감 선생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지금이라도 말하면 교감 선생님이 용서해 줄 수 있어.”
 “용서는 작품의 ‘저작자’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서울시 교육청이 제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민의 표정은 한층 단호해졌다. 교감 선생은 8살의 치기라고 보는지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허 참. 요새 아이들 되바라진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래, 알았다. 남 선생, 전화 연결해 봐요.”
 남일원이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우민이를 믿지만 한편에 혹시나 하는 ‘의심’이 자리했다.
 심사 위원들이라면 전문가.
 그들이 ‘대필’이라고 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윽고 전화 연결이 되자 남일원이 말했다.
 “미래초등학교 남일원이라고 합니다. 이우민 학생이 제출한 작품에 문제가 있다고 하셔서 전화드렸습니다.”
 ―아, 잠시만요. 저기 최준철 작가님, 이우민 학생 전화입니다.
 전화 연결이 되자 우민이 남일원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제가 통화해도 될까요? 직접 말하고 싶어서요.”
 옆에 있던 교감 선생이 펄쩍 뛰며 말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게 지금 애들 장난인 줄 알아.”
 하지만 남일원의 반응은 달랐다. 말리는 교감 선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민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여보세요? 봄맞이 창작 대회 심사 위원 최준철이라고 합니다.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서 연락드렸는데요.
 “‘대필’이나 ‘표절’에 대해 물어보시는 거라면 아니에요. 정말 제가 직접 쓴 건지 궁금한 거라면 맞아요. 제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신다면 오히려 제가 묻고 싶어요.”
 말을 하기 전 우민이 잠시 뜸을 들였다.
 “제 글을 심사하실 자격은 되십니까?”
 남일원이 황급히 수화기를 뺏어 들었다. 지켜보던 교감 선생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수화기 반대편에 있던 최준철도 일순 말을 잃고 전화기만 붙잡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을 최준철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주변에 있는 선생님들과 말싸움이 벌어졌는지 고성이 오갔다.
 ―이우민!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
 ―저는 착한 사람은 되고 싶지만 ‘호구’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 ‘표절’, ‘대필’이라는 모욕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는 게 웃긴 일이잖아요.
 수화기를 빼앗긴 듯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이내 상황이 정리되었는지 성인 남성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직 어린 친구라··· 의욕이 앞선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우민 학생을 다시 바꿔주세요.”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수화기를 통해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사과하라는 선생님의 질책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
 잠시간의 침묵. 최준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학생도 내 입장이라면 비슷하게 반응했을 걸세.”
 ―최소한 표절이나 대필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을 거예요.
 딱히 틀렸다고 집어낼 부분이 없었다. 초등학생이 썼다고 믿을 수 없었기에 의심한 건 사실이다.
 자신도 한 명의 작가로서 최선을 다해 쓴 글이 ‘표절’이나 ‘대필’이라는 말로 손가락질당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
 “······.”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우민이 쐐기를 박았다.
 ―이 정도의 표현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도저히 초등학생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침착한 대응이었다. 최준철은 이 친구가 쓴 글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 자신감이라면··· 직접 와서 한번 확인해 줄 수 있겠나. 학생이 쓴 글이 맞다는 걸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러네.”
 옆에서 듣고 있던 남일원이 다시 한번 수화기를 뺏어 들었다.
 ―무, 물론입니다. 내일 당장이라도 가겠습니다.
 우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뻣뻣하게 굴었다가는 오히려 기회를 발로 찰 수도 있다.
 자신의 자존심보다는 어머니의 기쁨이 먼저다.
 아들이 글쓰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탔다.
 아마 무척이나 기뻐할 것이다.
 ―그럼 내일 교육청에서 보지.
 전화가 끊기고 남일원이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있던 교감 선생이 우민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만약 네가 쓴 게 아니라고 판명 나면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테니까. 단단히 각오해라.”
 혹여 또다시 불똥이 튀길라 남일원이 서둘러 우민을 데리고 교실로 올라갔다.
 남일원은 교실로 들어가려는 우민을 살짝 불러 세웠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선생님은 너 믿는다. 알았지?”
 우민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우민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지켜보던 남일원도 뒤를 따랐다.
 
 ***
 
 같은 시각.
 ‘내 손으로 어린이 드라마를!’ 공모전 심사 위원인 나진주 PD 역시 최준철과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PD님, 다른 심사 위원분들도 ‘달동네 아이들’을 추천했습니다. 단지······.”
 “초등학생이 쓴 것 같지가 않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네. 정말 직접 썼다면 이거 무조건 뽑아야 합니다. 내용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어린아이들 사이의 갈등 구조도 훌륭합니다. 이야기가 벌어지는 배경이 도심 재개발 지역이라 다양한 소재가 나올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인 것 같아요.”
 앉아 있던 나진주의 책상 위에는 시나리오 한 편이 놓여 있었다.
 
 제목: 달동네 아이들.
 지은이: 미래초등학교 1학년 5반 이우민.
 
 KEBS(Korean Education Broadcasting System)의 드라마 PD 나진주의 시선은 마지막 줄에 있는 지은이에 가 있었다.
 “나도 뽑고 싶은데 이게 진짜 이 친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가 의심스럽단 말이야. 이 정도 수준이면 따로 각색 작가 안 쓰고, 그대로 가도 될 정도야.”
 “일단 확인 작업을 한번 해볼까요? 뭐 손해 볼 건 없지 않겠습니까.”
 “알았으니까. 연락처 구해와 봐. 내가 직접 전화해 볼 테니까.”
 나진주는 다시 찬찬히 시나리오를 살펴보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체가 눈에 익었다. 미사여구가 쫙 빠져 적재적소에 필요한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겨우 초등학교 일 학년의 글에서 자신의 은사님이 보였다. 대학 시절 항상 강조하시던 점들이 잘 녹아들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더 눈이 갔다.
 “어디 도서관장직을 하신다고 했는데··· 오랜만에 연락이나 한번 드려야겠어.”
 시나리오를 내려놓은 나진주가 핸드폰을 들었다.
 
 ***
 
 다음 날.
 우민은 남일원과 함께 서대문구에 위치해 있는 서울시 교육청의 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최준철이 여느 아이들과 달리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불안한 기색도 없이 차분히 앉아 있는 우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아닌 한 명의 어른으로 대해야 할 것 같았다.
 “우민 학생? 반가워요. 아저씨는 최준철이라고 해요.”
 “네. 안녕하세요.”
 우민이 손을 맞잡았다.
 “오는데 힘들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네. 그냥 혹시나 있을 잡음들을 미연에 방지하는 거라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어른들은 쓸데없는 의심과 두려움이 많다고.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고요. 그러니······.”
 옆에 있던 남일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우민의 어깨를 슬쩍 잡았다.
 “아··· 하하. 우, 우민아.”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던 우민이 뒷말을 삼켰다. 다음 말을 최준철이 이어받았다.
 “그리 귀담아들을 필요 없다! 하하, 아저씨의 선생님도 비슷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거 참··· 잊고 있었구나.”
 너무 도발적인 말에 남일원이 슬쩍 고개를 숙여 우민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 우민아, 오늘은 조용히. 알았지?”
 당황한 남일원에 비해 최준철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거 꼭 은사님께서 나한테 호통을 치고 있는 것 같구나.”
 “오후에도 일정이 있어서요. 확인 작업이라는 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최준철이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별것 없다. 여기에 자유 양식으로 글 한 편 써주면 돼. 글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색채가 묻어나기 마련이니까.”
 우민이 앞에 놓인 펜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부터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쉬거나 고민하는 기색도 없었다.
 ‘확실히 달라.’
 글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최준철은 확신했다. 이 아이가 쓴 글이 맞다.
 탁.
 한 시간이 되기 전에 우민이 펜을 내려놓았다.
 “다 썼습니다.”
 
 제목: 나에겐 매일이 밤이었다.
 
 공모전에 제출했던 작품이 슬픔에서 희망으로 변해가는 상황을 노래했다면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오로지 하나, 분노.
 글에서 느껴지는 분노의 감정에 A4용지를 잡고 있는 최준철의 손이 떨렸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활자들이 창과 칼이 되어 뇌를 헤집었다.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열불을 참기 힘들어 앞에 놓여 있던 냉수를 ‘벌컥’ 마셨다.
 자신이 써도 이렇게까지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 자신은 없었다.
 경이적인 재능에서 오는 전율.
 최준철의 떨리는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
 
 등교생 생활 지도에 나와 있던 교감 선생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우리 학교의 자랑, 우민이 오는구나!”
 우민이 자신을 안아 들려고 두 팔 활짝 벌리며 달려오는 교감 선생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 했다.
 “진정해! 진정!”
 교감 선생의 뒤에 서 있던 담임 선생님 남일원이 집게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재빨리 우민의 입을 막았다.
 “네, 안녕하세요.”
 “어제 또 연락이 왔다. 코이카 글짓기 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했다는구나. 벌써 네 번째다, 네 번째.”
 교감 선생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는 처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우민이 대꾸도 하기 전에 교감 선생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교장 선생님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뭐든 필요한 게 있다면 말만 해라.”
 우민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냉큼 답했다.
 “필요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어떤 게 필요하니? 글 쓰는 시간을 보장해 줄까? 아니면 참고할 책이 필요해?”
 “앞으로 졸업할 때까지 남일원 선생님 반으로 배정받고 싶습니다.”
 교감 선생의 표정에도, 남일원 선생님의 얼굴에도 똑같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으, 응?”
 “졸업할 때까지 남일원 선생님께 배우고 싶다고요.”
 “이, 일단 알았다. 교장 선생님과 상의해 보고 알려주마.”
 말을 마친 우민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근래 우민의 매니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남일원이다.
 ‘6년간 야근 확정인가.’
 제자가 자신을 따른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덕분에 늘어날 업무량에 약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