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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야 1

2018.05.09 조회 355 추천 3


 흑야 1권
 서장 발단(發端)
 
 
 좌도어사께 이 패도(佩刀)를 가져다 드리게.
 황태자께서 태자 보위에 오르실 때 사용했던 기물이니 소중하게 다루어 신속하게 다녀오도록 하게.
 사흘 후, 황태자께서 황상(皇上)으로부터 중원의 통치를 맡기시는 의식이 치러질 때 갑주(甲胄)와 함께 착용하실 중요한 물건이니 서둘러 주게나.
 
 
 1장 즉위 이십 년 성하(盛夏)
 
 
 담운량(潭雲亮).
 역모(逆謀)!
 그건 담운량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사가 다 그런 것이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러나 자신이 역모의 한가운데로 말려 들어가게 되리라고는 정말 생각지 못했었다.
 건청문(乾淸門)을 거쳐 자금성에 들어섰을 때, 담운량은 한동안 정신이 산란스러움에 현기증을 느꼈다.
 명색이 오군도독부 휘하의 장수라고는 하지만 금릉(金陵)에서 북경(北京)으로 이동해 온 지도 반 년이 넘지 않았고 더구나 자금성(紫禁城)이 건립되기 시작한 뒤로는 북경이 처음이었다.
 담운량이 기억하는 북경은 북경이 아니고 북평(北坪)이라는 이름을 지닌 조그만 시진이었다. 북평이 북경으로 이름을 바꾸고 명조(明朝)의 황도가 되었지만 담운량은 여전히 북평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듣기는 했지만 이 넓은 곳에서 도찰원(都察院)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군.”
 담운량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목동으로 빈한하게 살았었고 결국은 승려의 몸으로 천하를 떠돌았던 주원장이 명교(明敎)를 이끌고 분연히 일어나 명의 기치를 내건 지 육십 년이 넘었다.
 오랫동안 명조는 건국의 기틀을 다지고 내치를 하느라 세월을 잊고 살았다.
 새로운 황조가 들어설 때마다 민초(民草)들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쓸려 다니기에 정신이 없기 마련이었다. 명조가 만들어지고 주황실(朱皇室)이 들어섰다고는 하나 초부들에게는 이전의 어떤 황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바랄 것이 뭐 있겠어?”
 “그거야 다 높은데 있는 사람들 이야기지······. 우리 같은 촌부들이 뭐 아는 것이 있겠어.”
 “뭔가 달라지려나.”
 원을 몰아내고 중원민족의 국가를 세웠다고는 하지만 초민(草民)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그들에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주황실(朱皇室)이 들어섰다고 해서 세금이 줄어들거나 노역이 주는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국경을 강화하고 새로운 역사(役事)를 일으킨다는 구실로 노역이 늘기도 했다.
 건국 초에는 완벽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아 원말(元末) 보다도 더욱 혼란스러웠다. 태조가 임의대로 책봉(冊封)한 번왕(藩王)들의 세상이었던 관계로 원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민초들도 적지않았다. 번왕들은 한때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만 급급해 민초들을 더욱 괴롭히기도 했다.
 “뭔가 달라지겠지.”
 “성군(聖君)이 나와야 돼. 그래야 우리 같은 힘없는 민초가 살지.”
 빛바랜 건국의 신화를 뒤로 한 지 이미 오십 년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세월의 격동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또 무너지고 흩어졌다.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명을 건국한 이후 세 번이나 황상이 바뀌었다. 무려 일곱 번에 이르는 황자의 난이 있었고 수없이 많은 군신들과 초부들의 목숨이 초개(草芥)처럼 쓰러졌다.
 명의 삼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가 보위에 오른 원년이 아득한 듯한데 이미 이십여 년이 바람처럼 흘렀다.
 패기만만했고 영민하였으나 형제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황상에 올랐다는 영락제의 허물도 오랜 시간과 함께 퇴색되어 버렸다. 중원천하는 이미 영락제가 혈육을 죽이고 황제에 등극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잊혀지고 그의 탁월한 통치와 신민위안(臣民慰安)을 화제로 삼을 정도였다.
 땅땅땅!
 여기저기에서 망치 소리가 한창이었다.
 “어여차! 어이 여차!”
 목대를 메고 돌을 나르는 석공들의 모습에서 자금성이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육 년에 걸친 황도(皇都)의 건설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황도를 옮긴 지도 이미 일 년 반이 지났지만 황궁의 터에는 아직도 나날이 건물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터가 빈터로 남아 있었다. 오래지 않아 모두 건물이 들어찰 공간이었다. 곳곳에는 목재와 돌이 쌓여진 채로 방치되어 있어 흉물스러운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곳곳에 쌓인 건축자재가 완벽하게 치워졌을 때가 되어야 자금성의 본 모습이 드러날 것 같았다.
 “북평이 이리도 변하다니 삼 년만에 돌아온 고향이지만 놀랄만한 일이다.”
 담운량은 진정으로 놀랐다.
 북평이 고향인 그는 오 년 전에 고향을 떠나 무과(武科)를 보았고 군문(軍門)에 들어 장수가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남만(南蠻)의 정벌(征伐)에 몸을 던져 혁혁한 무명을 쌓았고 삼 년 전부터는 외국을 정벌하는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의 장수가 되었다. 그 삼 년 동안 변방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한 그에게 북경과 같이 거대한 시진은 그다지 어울리기 힘든 곳이었다. 다행한 것은 북경이 그의 고향이라는 사실이었다.
 북평이 북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고 남경에서부터 궁궐이 옮겨오리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토록 빠른 변화를 보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였다. 심지어는 오 년 전 담운량이 나귀를 타고 늘 걷던 길이 사라졌는가 하면 추억이 서린 강가나 너른 초원도 사라지고 없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황궁이 들어섰다는 것과 놀랄 만큼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졌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남만(南蠻)의 정벌에서 돌아왔을 때 이미 황도는 금릉(金陵)에서 북경으로 옮겨진 후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도 급격한 변화였다.
 변화는 황도를 옮긴 것에 그치지 않았다. 사람에게도 마음의 평화를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만의 정벌에 목숨을 걸었던 오군도독부 소속의 모든 장군과 관군은 중원에 들어와서야 황도가 북경으로 옮겨진 것을 알 정도였다. 남만의 정벌에서 돌아온 오군도독부는 처음에는 당연하게도 금릉으로 귀환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사라진 황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오랫동안 중원에서 북평은 버려진 시진이었다. 중원인들이 생각하는 이민족(異民族)들과 맞닿아 있는 곳이기도 했고 만리장성과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몽골 민족과 가까운 지역이라는 것이 중원인들에게는 북평이 멀게 느껴지게 했었다.
 특히 북평은 중원으로 들어오는 여덟 개의 관문중 하나인 팔달령(八達嶺)과는 너무도 가까웠다.
 명대 이전에도 북평은 이민족을 막는 시진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북평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은 명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몽고를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군사적으로 북평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천 년의 고도 북평은 북쪽 지방의 방어진지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특히 명대에 들어서도 북평은 몽고인들이 물러가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들의 문화와 적지않은 후예들이 남아 있기도 한 지역이었다.
 “이것 참으로 난감하구나. 워낙 넓은 지형이라 건물이 없어도 찾기가 힘들 터인데.”
 담운량은 난감하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사방에 전각이 들어서고 파헤쳐져 방향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북평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지대라서 눈에 보이는 곳도 막상 다가가 보면 먼곳인 지형을 지니고 있었다. 평원의 기슭에 자리잡은 북평은 황도가 남경에서 이동하며 북경으로 이름이 변했다. 황도가 들어서며 북경의 산과 들을 마구 파헤쳐지고 있었다.
 북경의 중앙에 성곽이 새로이 만들어졌다. 인공호수가 파여지며 고루거각이 세워지자 아무리 오랫동안 북평에서 살았던 그라 할지라도 사방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하더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군.”
 허탈한 목소리로 무심코 중얼거리던 담운량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의 눈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주위의 경물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한시라도 눈을 멈추면 주위의 경물이 변할까 두려워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길을 잃은 어린아이의 심정과도 같은 모습이 담운량의 두 눈에 깊게 침잠(沈潛)되어 있었다.
 “너무나 변했어.”
 이미 오래 전에 원의 잔당이 물러갔다고는 하나 늘 북방이 불안했던 영락제는 북평을 북경이라 칭하고 황경(皇京)을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사실 황궁의 모든 것이 옮겨졌고 마지막 남은 마무리와 육부(六部)를 비롯한 관료들의 업무를 돕기 위한 부속건물을 만들고 있었다. 북경성의 팔 할 이상이 지어졌고 마무리가 한창이라 할지라도 이 년 이상은 공사를 해야 완벽한 궁성을 갖출 것 같았다. 오랫동안 변방에서 난전(亂戰)을 치르고 돌아온 담운량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도통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으니······ 나 원!”
 담운량은 혀를 찼다.
 나름대로는 북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갑자기 바뀌어버린 후라 예측도 가능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변해버린 북경은 담운량에게 너무나 새로운 곳이 되어버렸다.
 북경은 그가 생각했던 고향의 정경과 동떨어진 듯한 착각과 막막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담운량이 이 거대한 구릉의 이름이 북경으로 바뀌기 전의 북평에서 살 때는 모든 것을 한눈에 기억할 수 있었다. 북경은 드넓은 구릉에 드문드문 낮은 전각과 초민들의 초가로 만들어진 시진이었고 시진의 한복판에는 연왕(燕王)의 왕성이 서 있었다. 왕성 주변으로는 연왕이 직접 기른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간혹 몽고의 기병이 밀려내려와 소란을 피우기는 했어도 북경은 평안하고 조용한 시진이었다. 변방의 시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북평을 통치하던 연왕은 때때로 무인들을 끌어 모았다. 그들은 연왕의 사병으로 육성되었고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를 아우르는 막강한 사병으로 키워졌다. 연왕 휘하에 모여든 군사들은 사병이었고 몽고인들이 적지않았다. 몽골로 귀환하지 않은 기병들로 이루어진 그들로 인해 한때 북평은 몽고의 초원 같아 보이기도 했었다.
 도지휘사사가 이끄는 오천육백 명의 관군과는 별도로 북평에는 연왕을 따르는 삼만 명의 기병이 있었다. 그들은 원의 잔당으로 빠르고 용감했다.
 “그들은 나의 수족이다. 누구도 나에게 그들을 초원으로 돌려보내라 명할 수 없다.”
 건문제가 몽고족으로 이루어진 기병을 해산하라 했을 때 연왕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부했다. 그것이 건문제가 연왕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최초의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연왕의 힘은 몽고족으로 이루어진 기병에서 나왔다.
 연왕을 따르던 그들은 연왕이 건문제를 죽이고 황제의 위에 올랐어도 연왕 좌하(座下)라 불렀다. 영락제도 그들이 부르는 것을 용납했고 그들에게 늘 아량을 보였다.
 북평이 북경이 되어도 부당하다 말하는 사람이 없듯 그들이 연왕이 영락제가 되었어도 폐하라 부르지 않고 연왕 좌하라 부르는 것에 대해 부당하다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영락제에게 신임을 얻고 있었고 대를 이어 충성하고 있었다.
 “시간이 바쁜데······ 이것 참!”
 담운량은 발을 굴렀다.
 오래전 기억으로 자금성이 세워진 벌판은 이끼가 자라고 관목이 무성하기만 하던 숲이었다. 숲이라고 부르기도 어울리지 않지만 듬성듬성 호수가 있고 잡풀이 우거져 목부(牧夫)들이 풀을 베던 벌판의 언덕에 궁궐 공사가 한창이었다.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디에도 그가 기억하는 흔적이 보이지 않자 담운량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난감해 했다.
 “이곳이 사람 사는 곳으로 변하다니······ 잡초 무성한 호수와 날짐승으로 뒤덮였던 이곳이 황궁이 자리하는 명당자리라고 할 수 있다니······ 생각했던 것 이상이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불러 다가온 듯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눈앞을 막아왔다.
 초부들이 풀을 베며 콧노래를 부르고 지팡이로 돌을 두드리며 한때를 지내던 구릉은 이미 사라지고 눈을 씻어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늘을 가릴 듯 솟아오른 마천루(摩天樓)뿐이었다.
 딱! 딱! 딱!
 이미 지어진 내정(內庭)은 단아하게 단청까지 입혀져 있으나 외조(外朝)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난감하군. 도찰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군.”
 담운량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너무나 변해버린 모습에 잠시 정신을 놓고 보니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금성이 어떤 모양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자금성에 들어오기 전에 구조에 대해서는 대도독과 도독동지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다만 그가 잠시 자금성(紫禁城)의 지리를 잊었을 뿐이었다.
 “아!”
 한참을 서성거리던 담운량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한곳을 향해 달려갔다. 사람의 키를 넘기지 않을 담이 쌓여져 있고 휘 늘어진 유엽목(柳葉木)이 서 있는 그늘 방향이었다.
 한 명의 관원이 휘적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찰원으로 가려면 어찌합니까?”
 마침 관복을 입은 관원이 다가오기에 담운량은 달려가 물었다. 흉배나 관복의 색으로 보아 그가 그리 높지 않은 한림원(翰林院)의 하급 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담운량은 안심했다. 한림원의 학사라면 늘 황궁에 머무는 내정의 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운량은 손을 가지런히 하고 관원이 알려주기를 기다렸다.
 “어디라고 하셨지요?”
 관원의 목소리가 심드렁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도찰원을 찾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여서야 관원은 말귀를 알아들은 듯 보였다. 관원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담운량을 바라보았다. 담운량은 무감각하게 그가 말해주기만을 기다렸다.
 관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목을 돌렸다. 마치 목에 붙은 파리라도 쫓으려고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관원은 어디인가에 대해 가리키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담운량은 관원의 얼굴에서 귀찮아 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저리로 가보시구려.”
 관리는 목을 저어 턱을 내밀듯 한 방향을 가리켰다. 담운량은 갑자기 가슴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관원의 모습이 담운량의 비위를 건드렸다.
 ‘익!’
 목구멍에서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자신이 할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있었기에 침을 삼키며 치밀어올라 울대에 머무는 화를 삼켰다. 생각 같아서는 붙잡아 놓고 매를 때려서라도 거만한 버릇을 고쳐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오랫동안 죽음의 고비를 넘겨온 그에게 문신이라는 자들은 눈에 거슬렸다. 안일하고 거드름 피우는 모습이 비바람을 맞는 무장들에게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저쪽 새로 짓는 전각을 지나가면 되오이다.”
 하급관원은 담운량이 대답하지 않자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목만 돌려 입을 열었다.
 관원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바람소리가 나게 관복을 저으며 제갈길을 갔다. 서둘러 가는 모습이 마치 다시 묻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는 듯 허둥거리는 것 같아 담운량은 주먹에 힘이 들어갈 지경이었다.
 “이런······ 제길!”
 저절로 입에서 욕설이 밀려나왔다.
 담운량은 관원을 쫓아가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쫓아가서 귀라도 후려갈겨야 마음이 풀릴 것 같았지만 너무도 어이가 없었기에 오히려 맥이 풀렸다. 또한 쫓아가본들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담운량이었다.
 담운량은 씁쓰레한 웃음을 흘렸다.
 담운량은 입술에 침을 축이며 관원이 목을 돌렸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꺾었다.
 “아서라!”
 다투어야 좋을 것이 없었다. 어차피 자금성을 오가는 오만여 명에 이르는 황족과 궁궐 내부의 관원들과 사사건건 다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과 다투어서도 안될 일이지만 다툰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황궁 내에서 큰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지켜져 내려오는 예의였다. 오로지 황제만이 큰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상장군(上將軍)들은 부장들을 이끌고 궁궐에 들어올 때는 절대 목소리를 크게 내지 말라 주의를 주고는 했다. 담운량도 귀가 따갑게 들은 소리였다.
 역겹기가 귀속으로 연기가 날 지경이었지만 담운량은 참기로 했다.
 “에잉!”
 찍!
 그는 몸을 돌리고 목을 외로 꼬며 입술을 오므렸다 벌렸다. 입에서 침이 뱉어졌다.
 불쾌함의 표시였다.
 담운량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불쾌감을 잊어버리고자 애써 다른 뜻으로 생각했다. 그가 몸이 아팠거나 하는 등으로 입을 열기가 수월하지 않았겠지 하고 자신을 위안하는 생각이었다.
 날씨가 뜨거워서인지 머리가 지끈거렸고 담운량의 눈은 하늘에 머물렀다.
 “태양이 뜨거워서였겠지.”
 말을 하다말고 자신의 모습을 둘러보며 담운량은 피식하고 실소를 뿌렸다.
 한낮에는 열풍이 몰아치는 뜨거운 여름이었지만 담운량은 두터운 갑주를 입고 있었다. 보갑(保匣)까지 걸치고 투구까지 눌러쓴 그의 모습은 마치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전장으로 나가는 장수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리 잘 보아주려 해도 궁궐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 복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기이할 것도 없지만 문신들은 무신들을 경멸했고 무신들은 문신들을 업신여겼다. 정도가 심하기로는 문신들이 더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피해의식을 지니고 살아오고 있었다. 무신들이 문신들의 입장을 모르지는 않았다.
 조금 전 그의 물음에 고개만 돌려 턱짓으로 방향을 알려준 자의 복장으로 보아 한림원의 학사라고 자처하는 자라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할 것이었다.
 일반 관원과는 달리 한림원의 학사들은 더욱 무인들을 경시했다. 학문이 국가의 기초라 믿는 그들에게 무력을 사용하는 무장들이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사실 눈에 드러나도록 심각한 문무반의 대립은 태조이래 계속되어온 일이었다.
 영락(永樂) 원년(元年)으로 들어선 이후부터 정도가 더욱 심해 눈에 보였고 문무반(文武班)은 시시각각으로 암투를 벌였다. 심지어는 모함을 하기도 하고 무관들은 문신들을 죽여버리기도 했다. 황제의 진노가 있고 수십 명이 처참하게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한 후에야 수그러드는 듯했으나 암투는 계속되고 있었고 애꿎은 문무관은 언제든지 목이 날아갈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참자! 어차피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담운량이 피식하고 웃음을 던지며 몸을 돌렸다.
 건국을 한 태조로부터 영락 이십 년이 넘도록 황제들은 문신들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 일례로 명예만을 지니고 있는 정일품(正一品)의 삼공(三公)이나 종일품(從一品)의 삼고(三孤)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명예뿐인 관작(官爵)임에 비해서 군사를 관할하는 대도독(大都督)은 정일품에 해당되는 관작을 받았다.
 문신으로 가장 권세를 누리는 자가 정이품 육부의 상서(尙書) 정도였으니 그 차별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육부의 최고 관작인 상서라 해도 상장군에 드는 장수들이 정일품인데 반해 겨우 정이품에 불과했다. 대소사를 처리하는 실질적인 관료인 시랑(侍郞)이라 해도 겨우 정삼품에 머물러 있었다.
 태조 주원장이 건국 초부터 일관적으로 유지해 온 무관 우대의 정책은 삼대가 되는 영락제에 들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영락제에 들어 그 정도가 심해졌다 볼 수도 있었다.
 그 일례로 주원장은 건국 초 유신(儒臣) 유기(劉基), 송렴(宋廉) 등을 통치의 고문으로 기용했지만 그 직위는 극히 미미했다. 유기라 하면 주원장을 도와 명을 건국했다는 칭송을 받고 있는 유학자임에도 그에 대한 주원장의 후사(厚謝)는 거의 없었다. 또한 주원장은 명대를 통치함에 있어 유신보다는 실무관(實務官)을 기용했고 우대했다.
 실무관보다도 더욱 우대를 받은 것이 바로 무인이었다. 그러한 무인우대의 통치관념은 후대를 거듭하며 더욱 강해졌다.
 주원장의 곁에 머물며 최고의 군사를 지냈던 유기! 명대 건국의 최고 충신이라 칭해지던 유기의 봉록은 겨우 백미 이백사십 석에 불과했다.
 유신의 대우가 그토록 보잘 것 없었으나 실무가는 그 대우가 놀라웠다. 실무가로 대신들 중 가장 우위를 점했던 좌승상 이선장(李善長)은 사천 석의 봉작을 받았으며 그보다 못한 우승상 서달(徐達)은 무장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천 석의 봉작을 받았다.
 담운량은 일찍이 무를 숭상하기보다는 문을 통해 일신의 양명을 꿈꾸었던 사람이었는지라 문무관의 차이와 차별에 대해서는 익히 아는 바가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문사차림의 관복을 입은 자가 그토록 무례하게 자신을 대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참! 시간이 다 되었을지 모르니 그만 서둘러야겠다.”
 담운량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를 팽하고 풀며 문사가 가리켜준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러 채의 누각이 흉물스럽게 뼈대를 올리고 있는 방향이었다. 기둥과 대들보만 서 있는 사이로 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
 “이쪽으로 가라 했지.”
 담운량은 좌우를 둘러보며 어림짐작으로 방향을 잡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관원이 고개를 돌려 알려준 곳이었다. 그곳에는 세 개의 길이 열려 있었으나 가장 넓은 곳으로 보이는 좌측의 길로 들어섰다.
 얇게 깎여진 돌로 바닥을 깐 길에는 여러 곳에서 공사를 하고 있음에도 잘 다듬어져 있었다. 담운량은 자신이 길을 제대로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도찰원을 찾아야 하니 서둘러야겠다. 늦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뚝― 타― 탁!
 담운량이 걸어가는 앞쪽에 삼층 누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황궁의 역사에 노역(勞役)으로 불려온 목수들과 도편수들이 부지런히 나무를 깎고 나무못을 박고 있었다. 뼈대만 올라간 건물에서는 진한 송진 냄새가 났다. 굵기만 보아도 수백 년은 족히 자랐을 것 같은 나무들이 기둥으로 변하고 대들보로 변해 거대한 누각을 만들고 있었다.
 황궁의 건물들은 한결같이 돌과 나무만을 이용해 축조를 하고 있었다. 철제의 못이나 철골은 생각도 할 수 없었기에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예로부터 황궁은 철제를 사용하지 않고 목재를 짜 맞추어 건물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 철제나 강편(鋼片)을 사용한 건물보다 오래가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슈아아― 아앙!
 “으헛!”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담운량은 바람을 불어내며 몸을 퉁겨 뒤로 물러섰다. 자세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담운량을 향해 커다란 물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기에 감히 막을 엄두를 낼 겨를이 없었다.
 담운량이 물러서자 커다란 물체는 담운량을 스치듯 방향을 틀어 다시 앞으로 날아갔다.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일어난 일이라 담운량으로서는 날아든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위험합니다. 피하십시오.”
 “저런!”
 “헛!”
 머리 위에서 놀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매우 다급했는지 여기저기에서 놀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들이 다급하게 울렸지만 물체보다는 느렸다. 만약 담운량이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참혹했을 것이다.
 담운량은 몸을 바로 세우며 스치듯 날아간 물체를 바라보았다. 담운량은 눈을 들고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전면을 바라보며 자신을 향해 날아든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찾으려 했다.
 “뭐가 지나간 거지?”
 십여 보 앞에 사람의 허리보다 굵어 보이는 목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네모반듯하게 다듬어진 목재는 고루거각의 기둥이나 대들보 위의 용골(龍骨)에 들어가는 재료인 듯 굵었고 길이 또한 눈에 뜨일 만큼 길었다. 그것이 대들보라면 건물은 상상할 수 없으리 만치 넓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재의 한 단면에는 용사비등(龍蛇飛騰)의 필체로 무엇인가 쓰여져 있었다. 담운량은 눈을 크게 뜨고 눈에 보이는 물체를 주시했다.
 ― 진천하(震天下) 만사형통(萬事亨通) 여의만대(如意萬代).
 목재의 양쪽 끝에는 마삭(麻索)으로 묶었던 듯 보이는 밧줄이 보였는데 너풀거리는 수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위로 올리던 중에 끊어진 것 같았다. 성벽을 지을 때 돌을 올리는 질기고 튼튼한 밧줄이 끊어진 것으로 보아 나무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큰일 날 뻔했다. 나에게 흑심을 품은 자는 없겠지만 하마터면 명을 채우지 못할 뻔했구나.’
 담운량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담운량이 피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십여 보 전방에 떨어져 몸에 피해는 없었을 테지만 만약 몸에 맞았다면 가장 경한 상황으로 보아도 압사를 면치 못할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담운량이 느끼기에는 피하지 않았다면 몸의 일부가 목재에 부딪쳤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담운량의 등으로 차갑게 식어버린 땀이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지······. 이곳에서 나를 위험에 빠뜨릴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데.”
 담운량이 눈을 들었다.
 이층 전각 위에서 일을 하던 도편수들이 몸을 일으키고 서서 담운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미안함이 마구 엉킨 감정이 물들어 있었다.
 “장군님! 저리 돌아가십시오. 잘못하면 들보가 머리 위로 떨어집니다.”
 몸에 걸친 갑주와 허리에 걸린 도를 보았는지 대들보 위에서 부지런히 나무못을 박던 도편수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담운량이 장수라는 것을 알아본 것 같았다. 그들은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허리를 접었다폈다 하기를 반복했다.
 ‘왠지 기분이 좋지는 않군.’
 담운량은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둘러보았다.
 과연 마삭에 들어올려진 들보 하나가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조금 전 담운량의 앞에 떨어진 것과 크기가 비슷해 보이는 목재기둥이었다. 만약 목재에 깔린다면 설사 코끼리라 하더라도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이것 참! 재미없군.”
 담운량은 나무가루가 날리는 곳을 피해 물러나 멀찍이 걸음을 옮겼다. 나무가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설사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나무들이 매달린 곳에 들어가기는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갑자기 몸에서 땀이 흘렀다.
 마치 살기를 느끼며 협곡을 지나는 듯한 느낌에 등줄기가 후줄근해지는 것이 식은땀이었다. 적진을 돌파하는 것보다 힘이 들자 담운량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 감정의 기복은 적에게 포위 당했을 때의 기분이었다.
 “이건 숫제 적으로 둘러싸인 천라지망(天羅之網) 같은 느낌이 드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군.”
 담운량은 일련의 감정들을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감정의 앙금으로만 치부했다.
 사람에게 있어 사소한 느낌의 변화는 늘 있기 마련이었고 담운량은 자신의 마음에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감정의 편린(片鱗)이라고 생각했다.
 담운량의 마음은 곧 안정이 되었다. 담운량은 스스로 감정의 변화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 덮다.”
 날씨는 더웠다.
 염천의 더위에 무복을 입고 가슴을 보호하는 흉갑을 차고 팔다리를 보호하는 보갑을 차니 몸이 무거울 지경이었다. 그것은 몸 속에 진한 땀을 나게 했다. 한바탕 놀라고 나니 땀이 물처럼 흘러 몸을 적셨다.
 어깨에 걸친 귀면갑(鬼面甲)과 팔목에도 보호갑(保護甲)을 차고 머리에 투구까지 쓰고 나니 몸에 난 가는 골을 타고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땀이 난다고 아무 곳에서 갑주를 벗을 수도 없었다. 벗고 다니는 것보다는 땀이 나더라도 입고 다니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담운량은 자신에게 최면을 걸기라도 하려는 듯 일부러 큰소리를 뱉어냈다.
 “아주 익혀 버리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로군. 북쪽 국경에는 겨울처럼 추운 날씨가 갑자기 밀려들어 모두 얼어 죽게 되었다는 소문이 있더니만······.”
 담운량은 투구를 벗어 들었다.
 이마에 투구가 눌려 파란 선이 파이고 움푹 들어간 자국이 생겨났지만 담운량은 알지 못했다.
 가죽을 덧댄 투구의 안쪽에서는 땀과 섞여 땡볕에 말리다 만 생선에서 나는 듯한 비릿한 냄새가 났다. 담운량은 투구를 허리까지 끌어내리며 코로 스며드는 역겨운 냄새를 애써 외면했다. 그렇다고 코로 스며드는 냄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기분이 조금 나아졌을 뿐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북평에서 살았지만 이토록 더운 날씨는 처음인 것 같군.”
 담운량은 들려있던 목갑(木匣)을 바닥에 내려 허리에 지탱하듯 세운 후 손을 들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땀을 닦자 손에 들린 투구가 움직였고 투구에 삐죽하니 솟아오른 창모(槍矛)가 붉은 수실을 몸살나게 흔들었다.
 담운량은 잠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명의 황실이 되다니······.”
 명 황실이 남경에 있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담운량은 북경에 살았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담운량의 본가는 북경 외곽의 팔달령 부근에 있었고 아직도 부모와 형제들은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장수의 길에 들어선 지도 어언 오 년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짧은 세월이지만 열일곱에 집을 나선 그로서는 출세한 일이라 할 수도 있었다. 한때 명조에서는 북평 출신의 등과를 허락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몽고족의 피가 섞였을지도 모른다는 속설때문이었다. 그러나 영락제가 황제의 위에 오른 후부터는 북방 지방의 많은 무인들이 등과(登科)하게 되었다. 북경에서 오랜 세월을 지낸 영락제 스스로의 연왕시절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었다.
 “고향으로 오니 이곳이 황궁이라 해도 기분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닌 것 같군.”
 오랜만에 돌아오니 기분이 좋았다.
 사문(師門)도 가까이 있었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도 감회가 새로웠다. 불만도 있었다. 북경으로 돌아온 그였지만 고향집에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도 못했다. 한 번쯤 기회를 틈타 고향의 집에 가볼 수도 있었으련만 사정이 여의치가 못했다. 마음뿐으로 언젠가는 부모를 뵈러 본가에 가보아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소속된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는 매우 중요한 일을 맡고 있었고 남경에서 북경으로 군문이 이동한 지 육 개월이나 지났지만 군문(軍門) 밖을 나가보지 못했었다. 장수와 군병을 모두 포함하여 군문 밖으로의 출입이 허락된 것은 불과 사흘 전부터였다.
 사실 근 육 개월간 담운량이 몸을 담은 오군도독부는 새로운 출정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새로이 병기를 장만하고 군량미를 추징(追徵)하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았다. 육 개월 동안 모든 출정준비를 했다는 것이 달리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있다.”
 장군들이 본가에 돌아가 쉬기를 원할 때마다 대도독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어버렸지만 오군도독부의 장졸들 중 자신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장수들이 스스로 군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군졸들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사흘 후면 오군도독부는 또다시 기약할 수 없는 먼 출정을 떠나게 되어 있었다.
 영락제가 몽고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모았고 오군도독부는 중군(中軍)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사실 정벌이나 출정이 있을 때마다 오군도독부는 늘 선두에 섰다고 볼 수 있었다. 오군도독부가 정벌을 위해 만들어진 군벌(軍閥)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명나라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군역에 차출된 사람들은 변방에 수비군으로 나가는 것보다 오군도독부에 배속(配屬)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특히 이번 몽고의 정벌에는 오군도독부가 중군을 맡게 되었다. 중군이라 함은 황제를 모시고 전장에 나가는 막중한 임무를 맡는 군사였으므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어야 했다.
 일반 장수나 병졸들이 타는 마차와는 달리 사방을 철갑(鐵甲)으로 두른 마차도 필요했고 황제를 호위하기 위한 일단의 호위근위병단(護衛近衛兵團)도 필요했다. 모두 오군도독부의 대도독이 할 일이었다. 그럼으로써 좋아지는 것은 다른 군벌보다 보급이 좋아진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보급이 좋다는 것은 매우 기분이 좋은 일이었고 군사의 사기를 앙양(昻揚)한다는 측면에서는 더 이상 좋을 일이 없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군.”
 담운량은 자신에게 실소를 터트렸다.
 과거 같으면 북평 어디라 해도 찾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오 년 동안 북평은 너무 변해 있었다. 북평에서 북경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단지 느낌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담운량이었다.
 세상이 변했다.
 일국의 황도가 되고 보니 과거의 초부가 길을 가고 목동이 말을 몰던 곳이 아니었다.
 이제 어디서고 죽마(竹馬)를 타는 어린아이를 볼 수가 없었다. 죽마를 타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진 자리에는 관원들이 말을 타거나 마차를 타고 바삐 움직였고 초부들이 풀을 베던 자리에는 군문(軍門)이 들어섰다.
 과거 유생의 몸으로 걸음을 옮기고 사매(師妹)의 집으로 가기 위해 말을 달리던 거리는 이제 고관대작의 등과로(登科路)가 되어버렸고 초목이 우거져 목부들의 놀이 장소였던 숲길은 언제부터인지 장사치가 우글거리고 금전장(金錢莊)이 들어서 있었다. 그야말로 눈이 팽팽 도는 번잡한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마 이쯤 어디라고 했던 것 같다.”
 어림짐작으로 도찰원의 위치를 생각하고 모퉁이를 돌았다. 여전히 나무에서 나는 송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런!”
 모퉁이를 돌아서던 담운량은 실색을 했다.
 역시 건물을 짓는 무수한 도편수들과 석공들만 보일 뿐 도찰원이라 쓰여진 편액은 보이지도 않았다. 잡초가 어우러진 언덕 위에 잡석(雜石)과 전(塡)의 형태로 잘린 돌, 목재들이 어지러이 널려 산란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두름이 침착함보다 못하다 했거늘!”
 담운량은 자신을 책망했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 되었지만 애초부터 도독동지가 알려준 것처럼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왔어야 하는데 그만 궐문(闕門)을 잘못 들어온 것이 길을 헤매게 된 것 같았다. 그래도 도독동지는 그가 북경이 고향이라는 것을 알고 귀한 보물을 전달하라는 명을 맡겼다.
 도독동지도 대도독에게 명령을 받았을 테지만 그가 담운량을 선택했으리라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황태자에게 전하는 물건을 호송하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누구나 해서도 안 돼는 일이었지만 담운량이 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신임의 반증이었다.
 어이가 없는 일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것도 정백호(正百戶)에 불과한 담운량에게 일이 맡겨진 것은 누가 들어도 고개를 저을 일이었다. 황궁의 물건을 나른다는 것이 정백호에 불과한 관직을 가진 담운량에게는 과분한 일이었다.
 “어디를 찾으십니까? 장군!”
 느닷없는 목소리는 등뒤에서 들려왔다.
 담운량은 급히 몸을 돌렸다. 허리에 끼고 있는 목갑을 놓치지 않으려 힘을 주었다. 그의 허리에 들린 긴 목갑에는 귀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목갑은 학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명주비단으로 만든 넓은 천에 싸여 있어 누가 보아도 함부로 소지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학이 수놓아진 사이에 박차고 오를 것 같은 한 마리의 오조룡(五爪龍)이 수놓아져 있어 어렵지 않게 황실의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담운량도 몰랐다. 도독동지는 패도가 들어있다고 했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도독께서는 그에게 망연하게 귀한 보물이 들어 있다고만 말을 했다. 그것이 황태자의 책봉 시에 사용했었다는 물건이라는 것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막상 물건을 호송하는 담운량으로서도 그것 이상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만약 자신이 들고 있는 기물에 손상이 간다면 구족(九族)을 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도독동지도 절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재차 당부했었다.
 “누구신지요?”
 몸을 돌리고 보니 머리를 단정하게 갈무리하고 관을 쓰고 있는 학사였다. 가슴의 흉배(胸背)에 학이 그려진 관복을 단아하게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문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관 중에서도 학문의 깊이를 추측하기 어렵다는 한림원 학사중의 한 명인 것 같았다. 흉배의 색과 조화, 손에 들린 홀(笏)로 보아 그는 한림원에서도 정오품 이상의 관직을 지닌 자 같았다.
 “누구?”
 눈이 마주쳤다.
 담운량은 학사의 눈이 맑다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학사였지만 여러 번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하! 육상서와 닮았군.’
 학사는 놀랄 정도로 육상서를 닮아 있었다. 얼굴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주는 느낌이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육상서는 육부의 최고인 이부상서 육극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담운량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육상서는 딸이 담운량과 혼약을 한 문관으로 곧 장인이 될 사람이었다. 담운량은 학사를 보며 불현듯 육극환 상서를 생각하며 웃음을 머금었다.
 “저는 오군도독 휘하의 정백호 담운량이라 합니다.”
 학사는 담운량의 눈을 빤하게 바라보았다.
 담운량은 갑자기 자신의 내면(內面)이 들여다보이는 기분에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죄가 있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음모를 꾸미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을 바라보는 학사의 눈이 너무도 맑기 때문이었다.
 “그러셨구려. 오군도독부가 오랜 출정에서 돌아왔다는 소리는 익히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담운량의 말에 학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문을 연구하며 경서를 정리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고 하루를 정리하는 한림원의 학사들은 황궁의 여타 관인들과는 달랐다. 그들이야말로 공정한 품성(品性)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간혹 젊은 학사들이 자신들의 학문을 믿고 거드름을 피우기는 했지만 불과 몇 사람에 불과했고 나머지 학사들은 학문의 깊이만큼이나 정심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지고한 학문을 지닌 학사로구나.’
 담운량은 괜히 자신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정백호라는 자신의 직책과 학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사가 담운량보다 관직이 높아서가 아니었다.
 학사는 한림원 소속으로 정오품의 관직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황제의 직속이며 장상(將相)의 임명에 대한 문서를 기초하며 특히 황궁의 기밀사항을 취급하는 자들이었고 무공은 지니고 있지 않아도 절개가 굳은 자들이었다.
 그에 비해 담운량의 관직이랄 수 있는 정백호라는 것은 관군에서도 미관말직(微官末職)에 해당하는 장수였다.
 비록 담운량이 총기(聰旗) 이 인을 거느리고 보군(步軍) 구십 팔 인을 거느리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군문의 일일 뿐 그의 직위는 정구품에 해당하는 지위였다. 정백호의 직위는 어느 곳에나 있는 흔한 장수의 서열이라 생각해도 틀림없었다.
 “아하! 오군도독부의 장군이셨구려.”
 “그렇습니다.”
 “근래, 남경에서 북경으로 오군도독부가 이동해 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소. 얼마 전에 대도독을 만나뵌 적도 있었지요.”
 학사는 일반적으로 문인들처럼 무인들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군도독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호감을 지니고 있는 듯도 보였다. 그것은 그가 담운량에게 알려주는 말투에서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궁내부(宮內部)에 출입하는 문무관은 늘 서로를 비방하고 언성을 높이지만 주로 외국정벌에 출정하는 오군도독부는 궁궐 내부에 들어설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기이하리 만치 오군도독부는 자금성을 출입하는 문신들에게도 호감을 받고 있었다. 위지휘사사의 무반(武班)들이나 도지휘사사의 무반들이 황궁의 문관들과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과는 그 격이 다르다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대도독이 사심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학사는 생각이 넓은 것 같군.’
 담운량은 감격했다.
 명대에 들어서기 이전부터 국정을 수립하고 천자에게 조언하며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문신들이었다. 군문에 몸을 담은 장수들은 주로 정책이 수립되면 나아가 싸우는 역할을 맡아왔었다. 그러나 명초에 들어와서는 무신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명대에 들어서 황제가 무신들을 우대했으니 버젓이 활보했을 뿐이지 만약 문신우대의 관작(官爵) 수여였다면 아마도 담운량과 같은 백호소(百戶所)의 지위는 정구품에 불과한 미미한 것으로 함부로 앞에 나서기조차 어려운 일이었음을 담운량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장군께서는 어디를 찾으려 하시는지요?”
 사순(四旬)은 넘어 보이는 학사가 입을 열었다. 나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의바름이 온몸에 철철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그가 어느 정도의 인품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관직이 인품을 대신하는 것이 관리들의 생리라면 정오품의 관직을 지닌 학사가 정구품의 장수에게 하대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학사는 달랐다. 오랜 경험으로 담운량이 지닌 관직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담운량이 걸치고 있는 갑주만 보더라도 그가 군문에서 어떤 직위를 지니고 있는지는 능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사순은 넘기고 오순(五旬)에는 미치지 못하는 나이를 지닌 고매한 인상의 학사였다. 담운량은 감격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도찰원을 찾는 중입니다.”
 “도찰원이요?”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문(四門)안이 처음이라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현재 여러 곳에서 공사중이라 혼잡하기는 하지만 이쪽 길을 따라 직선으로 가시면 새롭게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건물이 있습니다.”
 “온통 새로 지은 건물이라서······.”
 “건물에는 중화전(中和殿)이라 쓰여 있을 것입니다. 태화전(太和殿)을 지나면 일직선으로 바로 나타나지요. 내정의 정문인 건청문(乾靑門) 방향입니다. 태화전 다음의 건물이지요. 다행히 태화전은 황제의 집무처이니 찾기가 쉬울 것입니다. 지금 태화전에는 긴한 회의가 한창이니 무조건 빨리 지나치시도록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학사님!”
 담운량은 고개를 숙이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어 군례(軍禮)로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예를 받고 두 손을 올려 모음으로써 마주 예를 올린 학사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한 모습으로 바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걸이가 그토록 단정해 보일 수가 없었다. 담운량은 한참동안 굳은 듯 서서 멀어지는 학사의 등을 바라보았다.
 
 ***
 
 학사가 일러준 길을 따라 서둘러 발을 옮기니 중화전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태화전과 중화전은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고 뒤로는 보화전(保和殿)이라 쓰여진 편액이 보이는 건물이 기와를 얹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도편수들이 얼굴의 땀을 닦아내며 부지런히 기와를 올리고 건물의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었다. 불과 수삼 일이면 건물은 완성이 될 것 같았다.
 “이곳이로군. 과연 큰 건물이다.”
 담운량은 코를 벌름거렸다. 태화전을 지나치며 언뜻 보이는 건물이기는 했지만 막상 다가서보니 규모며 화려함이 극치에 다다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중화전을 향해 다가서자 건물을 지은 지가 오래 되지 않아 보였다. 새로 지은 건물에서 풍겨 나오는 진한 향은 거북하지 않았고 오히려 심신을 가라앉혔다. 담운량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중화전으로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거대한 건물의 위용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아름답게 지어진 건물이다.”
 중화전에서도 진한 송진 냄새가 났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건물이 완공된 지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목재가 몽산(蒙山)에서 생산되어 황제께 진상되는 종이처럼 밝은 빛을 반사시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정은 거의 공사가 마무리 되어 가는 것 같았다. 태화전에서 중화전, 보화전에 이르는 일직선상의 거각(巨閣)들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세 개의 건물은 내정(內庭)의 중심을 이루는 건물들이었다. 건물주위는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축대와 새로이 옮겨 심은 수목 외에는 잡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넓은 뜰은 깨끗하게 손질이 되어 있었다.
 자금성은 내정과 외조(外朝)로 이중의 궁궐을 만들고 있었다. 모두가 영락제의 명이었다. 천도가 시작되기 이전에 내정은 거의 완비가 된 상태였다.
 황궁의 내부에 다시 성벽을 올리고 황제의 가족과 인척이 사는 몇 개의 전각을 묶어 내정이라 불렀다. 특히 내정은 고급 관료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궁궐의 내부에 출입할 수 있거나 황궁을 지키는 관병이라 해도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함부로 출입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화전은 내정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전각이었다.
 “화! 멋있군.”
 돌로 쌓은 석축(石築)을 올라 나무로 만든 두 개의 계단을 오르며 담운량은 폐부에서 밀려나오는 감탄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눈에 드는 건물이었다. 규모도 그러하거니와 풍겨나오는 위용도 사람을 주눅들게 했다.
 오군도독부의 대도독을 따라 금릉의 주군(主軍)으로서 생활을 했었고 천하를 누비기 시작한 지 삼 년이 지나가지만 북경에 새로이 짓는 궁궐만큼 화려하고 거대한 규모의 건물과 축성을 본 적이 없었다.
 담운량이 소속된 오군도독부가 육 개월 전까지 주둔하고 있던 금릉성 외곽에서 바라보는 남경의 황궁도 북경에 짖고 있는 자금성에 비하면 감히 비교를 할 수 없는 규모였다. 영락제가 북경에 쏟고 있는 정성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삐이이익!
 삐걱!
 담운량은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아직 사람의 출입이 많지 않았던 듯, 목재의 색이 바래지도 않은 중화전의 이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층을 둘러보고 이층으로 향해 놓여진 나무계단을 바삐 올랐을 때 아직 건물을 축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리를 잡지 못한 마루바닥이 몸서리를 치며 울었다. 발바닥이 마루바닥에 붙는 듯 가라앉는 감촉이 밀려왔다.
 “조심해야겠군. 너무 새 건물이라 흔적이 남겠다. 별로 좋은 일이 아니지.”
 나무를 깎아 만든 복도는 윤기가 흘렀다. 해송(海松)을 다듬어 넓고 두터운 판자를 만들고 그 위에 콩을 삶아 자루에 넣고 문질러 윤기를 낸 모습이 역력했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얼굴이 반사될 것 같은 윤기가 흘렀다.
 발을 헛디디면 미끄러질 만큼 바닥은 미끄러웠다. 만약 담운량이 신고 있는 혁피화(革皮靴)에 먼지나 흙이라도 묻어있다면 흔적이 남을 것은 불문가지였다. 왠지 흠집을 내는 것 같아 담운량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대단하다. 이런 건물을 짓기도 어렵지만 오랫동안 유지하기에도 여간 힘이 들지 않을 것이다.”
 담운량은 건물의 관리에 감탄을 토하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발을 세워 뒤를 들고 걷자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혁피화의 코가 바닥에 스치듯 조심스러운 걸음걸이였다. 마치 적을 찾아 추적하는 추적술사의 발걸음처럼 조심스러웠다. 담운량은 서서히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도찰원이 이곳에 있기는 한 모양인데······ 어딘지 알 수가 없군.”
 당연한 일이었다.
 불과 백인호에 불과한 보군(步軍)의 장수로서는 중화전 같은 건물은 처음이기도 하려니와 무려 이십여 개가 넘을 듯 보이는 문을 지니고 있었다. 설사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도 출입이 없었던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이한 것은 건물마다 지키고 있어야 할 황궁 내부의 황군(皇軍)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정상적이라면 각 건물의 요소요소에는 무장한 황군들과 내관들이 있어야 했고 금의위의 밀직사(密直司)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담운량은 구태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마치 찍어놓은 것 같이 똑같으니 두 번 온다 해도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아.”
 담운량의 중얼거림대로 복도의 좌우로 닫혀진 문은 한결같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고 문 위에 어떤 표식도 달려있지 않았다. 설사 처음부터 다시 돌아온다 해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담운량은 사방을 둘러보며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들어선 건물이 중화전이 틀림없는 이상 처음부터 더듬어 찾아볼 생각이었다. 학사가 알려준 도찰원이 중화전에 있다면 이미 찾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찌되었든 들어가 보자.”
 담운량은 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삐익!
 복도가 다시 몸서리를 쳤다.
 “이크!”
 갑자기 들려온 소리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담운량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이내 복도에서 들려온 소리라는 것을 알아채고 마음을 놓았다.
 뒤를 돌아보던 담운량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첫번째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방부터 들여다보아야겠다. 어딘가는 있겠지!”
 드르르르르―
 담운량은 무심히 문을 밀었다. 첫번째 방의 문이었다. 문은 크기가 작지 않았으나 기름을 발라놓은 듯 작은 힘을 사용했으나 쉽게 열렸다. 육중해 보이는 문이 미세한 소리와 함께 열리자 방의 내부가 드러났다.
 “말씀 좀 여쭈어······.”
 입을 열던 담운량은 쑥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입을 다물었다. 얼굴을 디밀고 내부를 둘러보았으나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대전이었는데 텅텅 비어 바람만이 감돌고 있었다. 담운량은 깊이 생각지 않고 대전의 내부를 휘휘 둘러보았다.
 “멋지게 꾸며 놓았구나. 이것이 황궁의 모든 건물이라면 정말 대단하다.”
 몸을 뒤로 빼려던 담운량은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천장의 높이가 만만큼 않았고 단아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너무나 단아한 모습과 웅장한 모습이 눈에 얽혀들었기에 담운량은 자신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한동안 대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부님의 서가(書家)보다 단아한 방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담운량은 대전이 규모에 비해 너무도 단아하게 보이는 구조를 지녔다는 것을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규모가 크면 단아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대전은 이상하게도 단아한 모습으로 눈에 불쑥 다가왔다.
 그가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사부님의 방은 늘 침묵과 항거할 수 없는 은밀함이 흘렀었다. 사부가 승려였기 때문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방에 그려져 있던 불화(佛畵)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담운량이 수없이 많은 대전과 누각, 정복한 곳의 여러 곳을 보았으나 사부님의 방을 따라갈 수 있는 만큼의 단아한 곳을 보지 못했었다.
 소림의 말사(末寺) 중 한 곳을 관장하는 방장으로 제법 큰 규모의 절을 거느리던 사부님의 방은 흙벽으로 발려져 있었고 아무런 치장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늘 경건한 느낌을 주었었다. 담운량은 그런 사부를 더욱 존경했었다.
 중화전의 정실은 달랐다.
 불화도 걸려있지 않았고 묵향(墨香)도 피어오르지 않았다. 다만 단정하게 정돈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규모에 비해 너무나 확연한 정돈이었다. 황궁의 고루거각들이 어떻게 정리되고 다듬어져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좋은 곳이다. 다만 너무 크다는 것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군.”
 반쯤 열려진 창으로 양광(陽光)이 은파(銀波)처럼 부서져 들어오는 방에는 원탁과 화려한 색으로 칠해진 몇 개의 의자와 서가가 보이기는 했으나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창으로 들어온 빛이 마루바닥에 동그란 점을 만들었다. 물살에 이는 동심원(同心圓)처럼 동그란 점이었다.
 담운량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삐이이이―
 미세한 소리가 들리기는 했으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였다. 담운량은 가볍게 어깨를 추슬렀다.
 “황궁이 좋기는 하구나. 그렇지만 모두가 이런 식이라면 흠이 생길까 두려워 사용하지도 못할 것 같군.”
 담운량의 감탄은 당연했다.
 군문에 몸을 담은 장수의 몸인 그는 하루도 편한 잠을 자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중화전과 같은 건물을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이 화려한 방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잠은 말 등이었고 급조(急造)한 군막이었다.
 “이번에도 사람이 없나.”
 스르르르르―
 담운량은 두번째 방의 문을 열었다.
 문은 역시 첫번째 문과 다름없이 귀를 거슬리는 소리도 없이 열렸다. 마치 물이 갈라지듯 빈틈도 없는 문이 열리자 담운량은 오히려 가슴이 덜컥했다.
 ‘제길! 이런 일은 좀더 직위가 있는 장군들에게 시킬 일이지 하필 나에게 시킬 것이 뭐야!’
 모든 것이 의아하기는 했다.
 오군도독부의 휘하에는 명조의 전 관병들이 사시사철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장수들은 놀라운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출정을 위해 대도독이 황경(皇京)의 근처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로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군도독부에는 적어도 삼만 명을 헤아리는 군사와 수십, 수백 명의 장수가 있었다. 삼만 명의 장졸들 중에서는 정일품의 품계를 가진 대도독에서부터 모든 품계에 해당하는 장수들이 있었다.
 실질적으로 장군의 직위에서 백호소, 담운량의 관작인 정백호는 가장 낮은 지위였다. 굳이 더 낮은 관작을 찾으려 한다면 부백호 정도랄까?
 또 있다.
 아무런 관직도 가지지 못한 병졸들이야말로 가장 낮은 직위의 무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해 그들은 관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군역(軍役)을 마쳐야 하는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그나마도 재산이 있는 자들은 군역대신 조세(租稅)를 내고 몸을 뺏다.
 아무런 직위도 관직도 없는 군졸들이야말로 힘없고 황법의 그늘에 가려진 백성들인 것이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일을 맡기에는 부담스러운 일이 틀림없어.”
 황실의 물건을 움직이는 것이 담운량처럼 불과 백인호에 불과한 보장(步將)에게 맡길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황태자의 일에 관계된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다. 정백호 정도의 관작으로는 감히 황태자의 얼굴을 마주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명군에 정구품의 관작을 지닌 백호소의 장군은 모래알처럼 많았다. 정구품의 장수가 황궁의 일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보아 그것은 일반적인 통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정일품인 오군도독이 불과 삼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어 약해 보이기는 하나 정이품의 도지휘사와 정삼품의 지휘사(指揮使)가 불과 육천 명에서 만여 명의 부하들을 거느린다고 생각할 때, 삼만 명의 부하는 적은 수가 아니었다.
 특히 번왕의 몸으로 조카를 치고 황위찬탈(皇位簒奪)을 이룬 영락제는 특히 군사의 수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모든 군사의 명령은 황제가 직접 내린다. 이것은 국시로 정하는 바다.”
 영락제는 황제의 위에 오르자 태조와 건문제가 중원을 통치하던 방법을 뒤집었다. 그는 중원천하를 십삼 개의 행성과 삼 개의 직예주(直隸州)로 나누었다.
 그는 중원을 십삼 개의 행성으로 나누어 승선포정사사(丞宣布政使司)와 제형안찰사사(提形按察使司)를 두어 시정을 운영하게 하고 전 중원을 십삼 행성과 요동, 대령, 만전 등으로 나누어 총 열여섯 명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를 두었다. 도지휘사사는 지방의 행정군(行政軍)과 같았다.
 도지휘사사와는 별도로 곳곳에는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를 두었다. 위지휘사사는 황제의 명에만 움직이는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위지휘사사를 가리켜 황군이라 칭하게 되었다. 위지휘사사는 곳곳에 진을 설치하고 황제의 명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사기를 앙양시켰다.
 북경에도 위지휘사사가 설치되어 지휘동지(指揮同知)라는 정일품의 관직을 지닌 장수가 오천육백여 명의 병졸들과 장수들을 거느리고 외곽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문을 통과하는 자들까지도 일일이 간섭할 수 있는 의무와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오군도독부를 위시하여 도지휘사사와 위지휘사사!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전투군을 이끄는 장수들이었다. 아무튼 명군의 총 숫자는 팔십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누구도 사병(私兵)을 거느릴 수가 없다.”
 영락제가 북평으로 추방되다시피 했던 연왕에서 일약 힘을 얻어 조카를 폐위하고 황제가 된 이래 그가 제일 먼저 행했던 일이 누구도 사병을 소유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자신이 사병을 키워 황위를 찬탈했던 전례로 비추어 누구라도 음모를 꾸밀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은 영락제였다.
 한때, 번왕들은 무려 십만에 육박하는 사병들을 거느린 적도 있었다. 연왕의 경우만 하더라도 북평에 삼만의 사병을 육성했고 그들은 몽골의 후손들이었다.
 원나라가 망하고 주원장의 명대가 이어지자 몽골의 군사들은 초원으로 퇴각했으나 많은 수의 몽골군사들은 중원에 남아 있었다. 연왕은 그들을 모아 북평에 거대한 사병을 조직했고 결국 그는 그들의 힘을 이용 건문제(建文帝)를 폐하고 황위를 찬탈했다. 영락제는 자신이 거느린 힘을 숭배하면서도 매우 놀랐다.
 “이대로 두면 나에게도 언젠가는 칼을 들이대는 자가 생길 수도 있다.”
 영락제는 냉철하게 판단했다. 문제는 사병의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군사를 지니지 못한 번왕(藩王)이나 토호(土豪)는 감히 천자에게 대들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영락제는 결정을 내렸다.
 “번왕의 군사력은 궁병(弓兵) 이천으로 제한한다. 단 친위호위를 둘 수 있고 그들은 사병(射兵)을 제외한 냉병기나 장병기를 사용할 수 없다.”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번왕이 사병을 거느리는 것을 제한한 영락제는 황권의 안정을 꾀하고 과거 자신의 왕부가 있던 북평을 북경이라 칭하고 황도를 옮긴 것이다.
 이제 번왕들은 불과 이천여 명 정도의 사병 외에는 거느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접전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보병들, 그 중에서도 궁시만을 지닌 궁병과 힘으로 노역을 하여 군병의 기간을 채우는 차역(差役) 뿐이었다.
 
 
 2장 음모의 목소리
 
 
 사시(巳時).
 “이제 모든 준비는 되었겠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담운량은 걸음을 멈추었다. 단 한 번들은 목소리였지만 위엄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매우 조심스러워 누군가 들을까 일부러 목소리를 낮춘 것 같았다. 어디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인지 방향은 불분명했다. 담운량은 화들짝 놀랐으나 궁금증이 앞섰다. 아직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서 들렸지?’
 담운량은 목소리가 울려나온 곳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분명 그가 찾고자 하는 도찰원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어렵게 찾은 도찰원이라 담운량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렵지 않게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겨드랑이에서 땀에 젖은 목갑을 바싹 껴안았다.
 “어! 이곳인 것 같은데······.”
 방문을 더듬어가던 담운량은 걸음을 멈추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을 찾았던 것이다. 담운량이 목소리를 들었던 곳에서 멀지 않은 방문이었다. 크기가 모두 비슷비슷한 방문이었지만 다른 문보다는 한 치 정도가 큰문이었다. 두터운 나무로 만든 문은 온갖 치장이 화려했다.
 ‘이곳에서 들려온 모양이다.’
 설사 그곳이 도찰원이 아니라 해도 상관은 없었다. 담운량은 문을 열고 자신이 찾는 도찰원의 좌도어사(左都御使)가 머무르는 거처를 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담운량은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또다시 은밀하지만 위엄이 깃든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담운량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거사일은 이틀 후가 좋을 것 같소.”
 “좋아. 그날 오시에 몽고정벌을 위해 태자에게 옥새위임(玉璽委任)이 있으니 참으로 좋은 기회요.”
 “이번 기회에 영락과 황태자까지 아예 쓸어버리고 우리의 세상을 만듭시다.”
 “허허허! 이토록 뜻이 통하니 기분이 흡족하오.”
 흠칫!
 담운량의 몸이 번개를 맞은 듯 잔떨림을 일으켰다. 자신이 들어서는 안될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환청(幻聽)같이 들리는 소리였기에 담운량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되짚어 생각해 보니 자신이 들은 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한 목소리였고 문 너머에는 사람도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문으로 다가서던 담운량은 걸음을 멈추었다.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언뜻 들었지만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담운량이 들은 이야기는 국정을 흔들고도 남음이 있는, 있어서는 안될 이야기였다.
 담운량은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이 안정이 안 되어 연속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자 겨우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뭔가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영락제가 건문제를 폐위(廢位)시키고 등극한 지 어언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조용하기만 하던 황권이 문 뒤의 인물들에 의해 논의가 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올 것이 분명했다.
 태조로부터 영락제에 이르기까지 명조의 문무관을 더듬어 황권찬탈의 와중에 목숨을 잃은 자는 부지기수였고 그 처참함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렇습니다. 누대(累代)의 업을 종식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이제 눈앞에 있습니다.”
 “그대들의 힘이 크오.”
 “다행히도 이번 준비는 철저했습니다. 태조의 순사(殉死) 이후 가장 큰 회오리가 불게 될 것입니다.”
 목소리는 은밀했다. 간혹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가 작아지기도 했고 다시 커지기도 했다. 어찌 말하든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이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이었다. 혹시 누가 들을까 저어하였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지기도 했다.
 그들의 말대로 태조 주원장이 명을 세우자 두려운 순사를 수도 없이 일으켰다. 토사구팽( 死狗烹)이라 했던가?
 주원장은 명대의 기반을 닦는다는 미명하에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살업을 일으켰다. 조그마한 일에도 사람을 죽이기를 소나 돼지를 도살하는 듯한 참혹함을 지니고 있었다. 도주하는 자라해도 국경 끝까지 추적해 몰살을 시켰다. 이국으로 도피해 넘어간 자에 대해서는 밀정을 보내어 그 끝을 보았다. 심지어는 타국의 도적들과 거래를 하여 타인의 손으로 죽이거나 살수를 보내었다.
 태조 주원장이 자신의 의도로 국정을 휘두르려 할 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다. 특히 문신들의 주장은 때때로 주원장의 의도를 반하는 것이었다. 문신들은 유치(儒治)를 주장했으나 주원장은 그들로 인해 모든 것을 손아귀에 잡지 못했다 생각했다.
 결국 주원장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개국공신들을 참살하기 시작했다. 한결같이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개국공신들은 제거되었다. 오랫동안 계속된 순사는 무려 오 년 동안 계속되었다. 오 년이 지났을 때 개국공신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은밀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우리도 언젠가는 몰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오. 태조의 과(課)를 따르는 영락제가 결코 성덕만을 베풀지는 않을 것은 명백한 일이요.”
 “물론이요. 우리가 먼저 서둘러야 하오.”
 “그래서 우리가 모인 것이지 않소.”
 목소리는 여럿이었다. 돌아가며 목소리를 죽인 채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은밀하게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자세하게 듣지 않는다면 그저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 낮은 음색이었다.
 ‘이건 역모다.’
 담운량의 다리는 얼어붙은 듯 옮겨지지 않았다. 마음은 앞서 목소리의 주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발은 바닥에 아교를 붙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 안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담운량의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고 손에는 끈적거리는 땀이 배어 나왔다.
 ‘이건······ 현실이다.’
 담운량의 몸이 얼음조각처럼 굳어버렸다.
 몸을 움직이고자 했으나 호흡이 거칠어지고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등을 타고 흐르는 전율이 나중에는 이마로 솟구쳐오르고 머리털을 세웠다. 다리마저 마치 얼음에 붙어버린 것 같아 담운량은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갑자기 사방이 노래지는 착각에 젖어들었다.
 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지며 가슴의 기복이 심해졌다. 담운량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막힌 듯 쉽게 숨이 들이쉬어지지도 않았고 내뿜어지지도 않았다.
 입안에서는 침이 고였고, 침을 삼키려고 했으나 목이 막힌 듯 고통스러웠다. 담운량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오른손으로 호두 씨처럼 튀어나온 목젖을 쓰다듬었다. 그제야 침이 넘어가며 막힌 듯 답답했던 목이 자유를 찾았다.
 ‘으읍! 이런 비사(泌事)를 듣게 되다니······.’
 담운량은 가슴이 떨리는 것을 진정하기 어려웠으나 조심스럽게 방문으로 다가가 손으로 문을 밀었다. 몸은 경직되었지만 손은 조심스러웠다. 미세한 소리가 울리기는 했지만 안에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이 열려진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무언가 있다.’
 담운량은 열려진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넓은 대전이었다. 대전의 중앙에는 원탁으로 보이는 둥근 물체가 보였고 의자들과 탁자의 다리가 사람의 다리와 마구 엉킨 듯 보였다. 희미하게 보이는 여러 개의 그림자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안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한눈에 보아도 의도적이었는지 사방의 벽으로는 휘장이 내려져 있었고 희미한 향촉(香燭) 한 자루만이 사람들의 호흡을 따라 간간이 몸을 비틀고 있었다.
 둥글게 마주 앉아 있는 그들을 모두 판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어둡기도 했거니와 서로 머리를 맞대 얼굴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담운량의 눈에 보이는 자들은 모두 여섯, 그들 중 얼굴을 볼 수 있는 자들은 불과 세 명에 불과했다.
 열려진 문틈으로 보는 것이기에 그들 외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원탁이 여러 개 있거나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긴 의자들이 있어 사람들이 앉아 있어도 문틈이 너무 작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저들이 누구일까? 저들만 있는 건가?’
 담운량이 욕심을 내어 문을 열 수도 있을 테지만 문을 열지는 않았다. 들킬 것을 염려한 것이 아니라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담운량이었다.
 아무튼 눈으로 보이는 자는 모두 여섯이었다. 그들은 담운량이 문을 밀었음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깊은 숙의(熟議)에 빠져들어 있었다.
 ‘저자는 환관(宦官)의 복장을 하고 있군. 이마에 점이 있는 것이 눈에 보이니 나중이라도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겠다.’
 과연, 정면에 보이는 자는 환관의 복장이 틀림없었다. 흉배가 없는 관복이 그러했고 나이를 먹었어도 매끈한 피부가 여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특이한 것은 그의 허리에 한 자루의 패도가 걸려 있다는 사실로 보아 그가 황제의 주위에서 번(繁)을 서는 환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황제의 침실에서 번을 선다는 숙(塾) 중의 한 명이다.’
 환관은 특이한 존재였다.
 늘 궁녀(宮女)들 사이에 살면서도 그들은 남성의 권위를 찾지 못했으나 기이하도록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 특히 영락제가 즉위하며 환관의 세상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그의 주위에는 늘 환관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명을 세운 주원장은 원이 환관으로 인해 기초가 흔들렸다는 것을 깊이 생각했다. 그들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하고 황권을 강화하겠다는 생각으로 환관의 행동을 단속하고 억압했었다. 그는 궁문에 철패(鐵牌)를 세우고 ‘내신(內臣)은 정사에 관여할 수 없다. 관여하는 자는 참(斬)한다’라고 새겼다.
 내신은 환관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주원장은 황궁에 환관의 수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황궁의 내부에 백 명 이하의 환관만을 기거하게 하고 봉록을 박하게 했다. 또한 그 지닌 자의 지위를 낮추었다.
 건문제도 다를 바가 없어 그도 환관을 벌레처럼 취급하는데 있어 부친인 주원장에 뒤지지 않았다. 따라서 환관들은 건문제에게 앙심을 품었었고 연왕이 물밀듯 밀려오자 연왕과 내통하여 금릉성의 문을 열어주었다.
 영락제는 달랐다.
 영락제는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아 문관들과 무관들을 완벽하게 신임하지 않았다. 무관들은 역모를 꾸밀 수 있다고 생각했고 문관들은 문서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락제는 자신이 지닌 권력의 기반을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밀정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들 모두가 환관이었다. 심지어 환관에게 정삼품의 벼슬인 공공(公公)까지 봉록으로 격상시켰다. 자신의 침실 주위에도 수없이 많은 환관들로 하여 번을 세워 일신의 안위를 구했다.
 ‘나를 지킬 수 있는 내신을 키워야겠다.’
 영락제가 그리 생각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영락제는 북경에 도읍을 옮기자 수천 명이나 되는 환관을 양성했다.
 근래 궁중에는 환관 자치의 거대한 세력이 형성되었고 그들은 황궁과 행성의 제도를 본따 십이감(十二監), 사사(四司), 팔국(八局)으로 나뉘어지고 합쳐지기를 반복하여 이십사오문(二十四澳門)이라 불리어지게 되었고 막대한 권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사내답지 못한 놈이로군.’
 담운량은 침을 삼켰다.
 무관들에게 있어 사내구실을 하지 못하는 환관은 조롱거리였다. 그들은 무관처럼 용맹스럽지도 못했고 목소리마저 가냘퍼 여인들의 모습에 근접해 있었기에 조롱을 받는 것은 일견 당연하게도 생각되었다.
 담운량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젠가는 저놈들에 의해 시끄러워질 것이다.’
 무관 중의 누군가가 환관들을 가리키며 했던 말을 생각하며 담운량은 깊은 숨을 몰아쉬며 귀를 기울였다.
 영락제는 환관의 무리를 총애했다.
 태조나 건문제가 원대의 후기에 국정을 어지럽혔던 환관들이 원을 무너지게 만든 요소 중의 하나임을 알고 환관을 억압했다면 영락제는 그 반대였다.
 “내 수족을 만들어야 한다.”
 영락제는 공공연하게 말했고 환관들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후대했다. 그것이 문무관의 감정을 상하게 했지만 영락제는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영락제 자신이 건문제를 폐할 때, 궁문을 열었던 자들이 환관들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우대를 해주었다.
 황궁 내부에 환관을 육성하여 십이감을 최고의 우두머리 조직으로 만들었다. 십이감 중에 한 명을 대례감(大禮監)으로 인정하여 우두머리를 태감(太監)이라 불렀다. 태감에게 정삼품의 작위를 준 것도 북경에 천도를 한 후의 일이었다. 태감은 다른 궁인이나 나인들에 의해 공공이라 불렸다.
 영락제는 환관을 자신의 심복이라 생각했다.
 모든 비밀을 환관들과 조율했고 조언을 받았으므로 그들에게도 문학적 기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영락제 이전의 환관들에게는 학문의 기능이 주어지지 않았었다.
 영락제는 환관들을 중용하기 위한 방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환관들이 학문을 익힐 수 있도록 황궁 내부에 문서방(文書房)을 설치해 주었다.
 영락제는 환관을 더욱 아껴 군사의 감찰기능도 주었다. 위지휘사사나 도지휘사사 아래는 감군(監軍)이라 부르는 감찰을 두었는데 그들 모두가 환관이었다.
 영락제는 동창(東廠)에도 환관을 기용했다. 동창의 수반인 시랑을 감찰하는 밀정으로도 환관이 기용되었고 제독동창 이하의 밀정까지 환관들이 기용되었다. 그래서인지 문관들보다 무관들이 더욱 환관들을 경멸했다.
 “무슨 소리인지 들어보기나 하자.”
 담운량은 몸을 기울여 밀담을 들었다.
 비록 자신이 싫어하는 환관이라도 그가 누구인지 더욱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가능하면 모두를 파악하면 더욱 좋았다. 더구나 역모에 대한 밀담이 아닌가?
 모름지기 자신의 생각에 빠지면 사람은 주변에 대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습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담운량이라 해서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자신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담운량이었다. 자신이 바쁘다는 생각도 잠시 머리에서 떠나 있었다.
 담운량은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더욱 깊숙하게 빠져들었다. 한동안 그들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있던 담운량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소! 이틀 후 묘시(卯時)에 황제가 황태자에게 옥새를 맡기고 몽고정벌을 떠나는 위양과 출정식이 있을 것이오.”
 환관의 목소리가 바람에 바르르 떠는 문풍지처럼 날카로워졌다. 원래 날카로운 음성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목소리가 격양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잠시 서로의 의견이 충돌하는지 소란스럽지만 낮은 음성들이 섞여 들렸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난삽(難澁)하게 들려 담운량은 목소리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변동은 없을 것 같소?”
 나직한 목소리가 환관의 말을 잘랐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계획된 일이오. 차질 없이 진행이 될 거요.”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요.”
 말을 한 자는 학사차림의 복장을 갖춘 자였다. 이마에 벽옥(碧玉)이 박힌 건을 쓰고 학이 나는 흉배를 단 것으로 보아 근래 힘을 얻기 시작한 대학사(大學士)가 분명했다.
 원대(元代)의 중서성(中書省)을 폐하고 주원장이 새로이 세운 대학사는 나날이 힘을 얻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특히 황제의 국정 고문을 수행하는 대학사는 정오품의 미미한 관직을 지니고 있었지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대학사라 명명되어진 기관에는 수십 명의 학사들이 머물렀고 그들은 한결같이 대학사라 불렸다.
 ‘저자는 한눈에 보아 대학사에서도 높은 직위에 있는 자다. 또 다른 저자는 장군도를 찼군. 장군도를 찰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는 가볍지 않은 관직을 지닌 자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군?’
 담운량의 눈에는 장군도를 지닌 장수의 모습도 보였다. 자세하게 바라보려고 열려진 문틈으로 눈을 들이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수의 모습을 확연하게 인식(認識)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해.’
 담운량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장수의 얼굴이 강하게 밀려왔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뚜렷하게 생각나지 않았다.
 담운량은 가슴이 마구 쿵쾅거려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다는 것이 어렵기는 했으나 오래지 않아 가슴이 진정되었다. 가슴이 진정되자 담운량은 더욱 용기가 생겼다.
 ‘저들이 누구인지 좀더 자세하게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역모를 꾸미는 놈들이라면······.’
 담운량은 자신이 알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이 역모사실에 대해 알면 알 수록 깊이 빠져들게 된다는 것을 알 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궁금증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도찰원이나 동창에 밀고를 하겠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다만 호기심이 깊을 따름이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담운량의 호기심은 점점 극으로 달려 자신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저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지켜보아야겠다.’
 담운량은 눈을 더욱 문틈으로 밀착시키며 귀를 열었다. 휘장이 내려져 희미하던 어둠이 점차 밝아지며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한결 맑아졌다.
 오랫동안 회의가 진행되었는지 사람의 몸에서 뿜어지는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냄새였지만 담운량으로서는 가릴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준비가 끝나 있소이다. 언제든지 몸을 움직일 수 있소이다.”
 “허허허. 우리도 마찬가지요. 우리보고 십상시(十常侍) 어쩌고 하는 눈꼴사나운 놈들을 이 기회에 모두 제거해버릴 것이오.”
 장수의 호탕하지만 나직한 목소리에 이어 환관이 주먹을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필요 이상으로 환관의 목소리가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담운량은 귀를 더욱 가까이 밀착시켰다. 담운량은 귀에 힘을 주고 그들이 하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몰입(沒入)해 들어갔다고 해야 옳았다.
 ‘장군들과 환관들이 힘을 모았다. 그런데 이들의 총수는 누구지?’
 담운량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갑자기 다가온 눈앞의 현실에 어안이 벙벙하고 알 수 없는 전율이 몸을 감아올 뿐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어떤 비밀을 알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고 과거에도 수없이 일어났었다는 역모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알 수 없는 전율이 몸으로 다가오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 대사(大師)에게도 연락을 취했는가?”
 “물론입니다. 대사께서는 언제든지 호응을 하시겠다 하시는 연락을 보내셨습니다.”
 “내일까지는 오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대사께서는 이미 북경에 도착해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사께서는 스스로가 원하실 때 얼마든지 제재를 받지 않고 황궁에 발을 들이실 수 있는 몸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빨라졌다.
 아마도 그들의 긴밀한 회의는 종국(終局)을 향해 치닫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머리는 더욱 깊숙하게 숙여졌고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담운량은 호흡이 가빠졌다.
 ‘대사라면 승려가 아닌가? 승려까지 이 일에 관련이 되어 있다는 말인가?’
 담운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이미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대사라는 자까지 관련이 되어 있다면 적지않은 자들이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외부의 세력까지 황궁에 끌어들이는 것이라 쉽게 생각할 수 있으나 여반장(如反掌)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외부인까지 개입되는 일이었다니······.’
 그가 생각하기에도 여간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언뜻 들어도 역모에 개입되어 있는 자들의 숫자는 적지 않아 보였다.
 언뜻 생각해 보면 일개 백호소인 자신으로서는 황제가 바뀌어도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었다. 기껏해봐야 황족들의 싸움에 화살을 막고 대리전(代理戰)을 치를 수는 있겠지만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하층 계급의 신민들에게 황제가 누가 되든 달라질 일은 별로 없었다. 설사 국가가 바뀌고 황조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으로 고통만 있을 뿐으로 다를 것은 없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들려오는 묵직한 음성이 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 사실을 알고서 알리지 못한다면 불충(不忠)이다.’
 담운량은 급히 몸을 돌리고자 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발이 바닥으로 눌러붙기라도 하려는 듯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호기심과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는 묘한 기대심리가 그의 다리를 붙들고 있었다. 다른 한 가지는 하체의 힘이 빠져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문제가 심각하다. 어서 도독께 알려야 한다.’
 담운량은 급히 물러서려 했으나 다시 들려오는 소리가 귀를 간질여 도저히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담운량의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전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위지휘사사의 군사들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무복을 입고 귀등갑(鬼藤甲)을 걸친 중년의 무장이 호기롭게 외쳤다. 담운량이 본 장군도를 걸친 무장이었다. 눈이 고리짝 같은 얼굴에 수염이 길게 자라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가 호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어랏!”
 담운량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흘렀다. 급히 입을 막지 않았다면 밀담을 나누는 육 인은 담운량의 놀라는 음성을 능히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던 사이라 나직하게 울리는 담운량의 비명에 가까운 경악을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담운량은 눈을 크게 떴다.
 ‘저자는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저자는 위지휘사사의 지휘동지 중 한 명이다.’
 담운량이 본 장군의 얼굴은 얼마 전 오군도독에게 문안인사를 왔던 장군이었다. 처음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으나 스스로가 위지휘사를 거들먹거리자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담운량은 비록 백호소의 보장(步將)에 불과하지만 뛰어난 무위와 충성심으로 도독의 주위에 머무는 호위장군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도독의 밀담에 끼여들 수는 없어도 도독을 만나기 위해 출입하는 문무대신들과 도독의 벗에 대해서는 제법 아는 바가 적지 않았다.
 담운량이 대도독의 휘하에서 오군도독부의 출입자(出入者)를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담운량의 뛰어난 무위와 정대한 마음 때문이었다. 뿐만이 아니라 담운량은 대도독에게 신임을 받을 수 있는 적지않은 일들을 했었다. 그중의 하나가 적진에 갇힌 대도독을 구한 일이었다.
 도독이 그를 도찰원에 심부름 보낸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심복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누구지?’
 돌아앉아 얼굴을 볼 수 없는 삼 인 중 중앙에 앉은 자는 중원 전역에 퍼져 있는 십팔 명의 번왕 중에 한 명임이 분명했다. 위지휘사사의 장군이 전하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도 그가 황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몸에 걸려 있는 온갖 패물과 관복에 걸려있는 흉배며 수놓아진 그림들로 보아 신분이 범상치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가 걸친 조례복(朝禮服)은 일반 관리들이 입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가늘게 떨고 있을 것이다. 목소리의 음파가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가 격동하고 있다는 것을 힘들이지 않고 알 수 있었다. 비록 가늘게 울려나오는 목소리였지만 중후하고 말속에 들어있는 황자의 권위와 그만이 풍길 수 있는 위엄은 여실히 드러났다.
 황권을 잡지 못한 황자들은 늘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태조 주원장이 명을 일으킨 이래로 끊임없이 일어난 황자의 난이 명조 초기를 피로 물들였었다. 태조는 황자들에게 수없이 많은 죽음을 내렸지만 황자들은 꿈을 버리지는 못했다. 담운량의 예상 대로라면 밀담도 역시 그러한 부류 중의 하나에 해당되는 일이랄 수도 있었다.
 “그대들의 공은 내 평생 잊지 않겠소.”
 황자의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격동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감정을 추슬렀는지 중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한 번 들으면 절대로 잊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황자는 담운량의 눈에 등만 보이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유난히 덩치가 크게 보이는 자로 아마도 몸에 걸친 황자의 조례복 때문인 것 같았다. 담운량은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여러 차례 방향을 바꾸어 움직였다.
 황자의 조례복을 입은 자가 누구인지 쉽게 식별을 할 수는 없었다.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그나마 짐작이나 할 수 있을 테지만 그의 몸에서 보이는 것은 등뿐이었고 그나마도 몸을 오른쪽으로 비꼈으므로 몸의 반쪽밖에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신들은 죽음으로써 전하의 등극을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
 모두의 목소리에 기백이 충만했다.
 “하하하! 그동안 노고가 많았소. 이제 사흘이 지나면 영락제는 이 없는 호랑이 신세가 되고 말 것이외다. 아니, 천하의 주인이 바뀌고 말겠군.”
 사흘 후에는 영락제가 몽고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식(出征式)을 치르는 날이었다. 오군도독부 휘하의 일부 도독동지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몽고를 향해 출발한 지 한 달이 넘었다. 십만의 관군이 몽고로 진격해 들어가기 위해 몽고와 인접한 장가구(長家口)에 머물러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밀담을 나눈 자들은 사흘이라는 시간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들은 황제가 북경을 떠나려 할 때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황제를 시해(弑害)하고 천하의 주인을 바꾸려는 것 같았다.
 북경에는 적지않은 군사력이 모여 있었다.
 오군도독부를 비롯해 도지휘사사와 위지휘사사의 일부 관군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습으로 출정을 위해 대기 중이었다. 근래 없이 많은 수의 군사가 북경 전역에 모여 있었다.
 자금성 내부에는 동창과 금의위(錦衣衛)가 항상 눈을 번뜩이고 있었고 황제의 출정식에 참가하기 위해 각 지방에서 북경으로 몰려든 번왕들도 각각의 궁병들과 차역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북경은 그야말로 곧 폭발할 것 같은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이 정쟁(政爭)인가?’
 담운량은 그들이 군사들을 동원해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군사를 동원하게 된다면 북경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영락제는 몇 번의 실정을 했지만 성군(星君)으로서 많은 신하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더구나 담운량이 소속된 오군도독부 같은 가장 막강한 군사력이 영락제를 추종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만약 영락제에게 위해가 가해진다면 오군도독부와 같은 군벌이 가만히 앉아 있을 리가 만무(萬無)였다.
 북경에 모여든 군사들과 고관대작들 중의 일부는 영락제를 따라 남만 정벌에 참여할 계획이었고 일부의 장군들과 고관대작은 정벌을 떠나는 황제를 환송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틀 후에는 황제가 직접 황태자에게 자신이 북경을 비우는 동안 정사를 맡기기 위한 옥새인계가 있을 예정이었다.
 “흠!”
 담운량은 너무 긴장했기 때문인지 낮은 콧소리를 냈다.
 “엇!”
 어디선가 놀람의 음성이 들렸다.
 “뭐냐?”
 “저기에 누가 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다다다다다―
 나무판자를 깔아만든 복도를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담운량은 일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발자국 소리는 순식간에 다가왔다. 담운량은 일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일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어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네놈은 누구냐? 감히 쥐새끼처럼 남의 말을 엿듣고 있다니······.”
 갑자기 담운량의 등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운량은 ‘아차’하는 마음이 들어 부지불식간에 몸을 비틀며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따라 몸을 돌리던 담운량의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이런!”
 담운량은 실색을 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이십여 인이 넘어 보이는 군병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움직임은커녕 숨소리도 들리지 않던 군병들이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군병들 틈에 섞여있는 두 명의 장수도 보였다. 몸에 귀갑(龜甲)을 걸치고 붉은 천으로 만든 보갑대(保匣帶)를 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천호소의 직위를 가진 장수로 보였다. 다시 한 번 그들이 걸친 갑주를 보니 귀등갑(鬼騰甲)이 분명했다. 천호소 이상의 무관들이 걸치는 갑주였다.
 정오품의 천호소 직위를 지닌 장군은 정구품의 백호소와는 그 무공의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담운량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무작정 병기를 겨누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들도 한패다. 저들의 사주를 받는 자들이다.’
 담운량은 긴장했다. 전신의 혈관(血管)들이 아우성을 쳤다. 마치 남만(南蠻)의 밀림에서 물샐틈 없는 포위를 당했을 때와 흡사한 기분이었다. 담운량은 한눈에 그들이 좋은 생각을 지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담운량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담운량을 향한 관병들의 눈은 일순간에 난도(亂刀)를 칠 만큼 흉흉하게 느껴졌다.
 담운량은 눈을 들어 다가서는 관병들과 장수들을 세밀하게 훑어보았다. 만약의 경우 어디론가 돌파를 해야 할 테고 그렇다면 그들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오래토록 접전을 통해 배운 담운량 나름대로의 습관이었다.
 ‘이건 만만큼이 않은 일이다. 잘못하면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담운량의 가슴이 심하게 벌렁거렸다.
 도독이 자신을 가리켜 천호소에게도 뒤지지 않는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한 번에 두 명의 천호소 장군을 상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병졸들도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무공이 날고기는 자라 하더라도 쉽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복도가 그리 넓지 않아 이십 명이나 되는 관병들이 한꺼번에 덤비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빙 둘러싸여 포위를 당한다면 정말로 재미없는 일이었다.
 “쥐새끼가 있었구나.”
 어디선가 분노가 물씬 풍겨 나오는 목소리가 울리고 두 명의 장수와 병졸들이 담운량을 에워쌌다.
 “난······.”
 담운량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담운량은 자신이 중화전으로 오게 된 경위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해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빛으로 보아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추아아아앙!
 천호소 중의 한 명이 장군도(將軍刀)를 뽑자 병졸들이 일제히 장창을 기울여 앞으로 향했다. 명령 한마디면 담운량을 요절낼 듯 다가올 것이 눈에 선했다.
 “놈을 에워싸라!”
 “예, 장군!”
 눈 한 번 깜짝일 사이에 모든 일이 빠르게 진전되었다. 병졸들은 곧 담운량 주위로 몰려들었다. 복도의 양옆을 에워싼 그들의 모습에서 담운량은 살기를 느꼈다. 포박하거나 꿇어앉히겠다는 생각이 아니었다. 무작정 죽이고 말아야겠다는 살의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들은 이유도 없이 나를 죽이려 한다.’
 담운량은 침을 삼켰다. 부득이 위경(危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방법인가를 생각해내야 하는 순간에 몰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담운량은 급히 손을 움직여 허리에 걸린 장군도를 잡아갔다. 막연하게 서서 ‘내 목이 여기 있소.’하고 내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구냐?”
 고함이 터지고 갑자기 대전의 문이 열렸다.
 음침(陰沈)한 구석에 모여 회의를 하던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담운량은 몸을 돌려 문을 여는 자를 바라보고자 했다. 그러나 담운량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도 역모자(逆謀者)들의 얼굴을 보고자 했던 담운량의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이 열렸으나 담운량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문만 열리고 있었다. 담운량은 다시 몸을 돌리고 자신을 에워싼 관병들을 노려보았다.
 주춤!
 관병들은 담운량의 몸에서 퍼지는 위압감을 느낀 때문인지 달리 명령을 받은 것이 없어서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포위망을 구성한 모습으로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놈을 잡아라.”
 중후한 황자의 목소리였다.
 담운량의 귀에 깊이 박힌 조례복의 목소리가 외쳐들었기 때문에 담운량은 경황이 없는 중에도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자 다시 한 번 몸을 돌렸다. 그러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문을 잡은 손이 보였을 뿐이었다.
 손!
 손이 보였다.
 희미하지만 사물을 구별할 수 있는 어둠이 밀리는 복도였다. 희미하게 드러나는 손가락에 하나의 금지환(金指環)이 박혀 있었다. 금지환은 테가 굵은 것으로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는 붉은빛이 도는 보석이 달려 있었고 주변으로는 연꽃문양이 깊게 양각(陽刻)되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금지환이 어둠을 가르고 눈에 투영되는 것이 신기할 만도 하건만 담운량은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반지를 정확하게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신기한 기물이다.’
 흔한 금지환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귀물이었다. 아마도 중원에 오직 하나밖에는 없을 것 같은 금지환이었기에 담운량은 머리 속에 새겨 넣기가 어렵지 않았다.
 “죽여도 좋다.”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담운량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쉬리리리리―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한 자루의 도가 목을 노리고 밀려들었다. 살을 떨리게 하는 거친 바람이 일고 병기보다 살기가 먼저 다가와 목덜미를 따갑게 했다.
 담운량은 급히 몸을 좌로 이동시키며 목으로 파고드는 도의 여력(餘力)을 피했다. 목을 벨 듯 내려치는 도는 빨랐으나 검을 피하는 담운량의 몸짓도 빨랐다. 찌르고 피하는 두 사람의 몸놀림은 전광석화(電光石火)가 따로 없었다.
 핏!
 날카롭게 바람을 가른 도의 그림자는 투구에 딸린 갑주를 스쳤다. 담운량은 갑주가 머리로 떨어지는 도기를 막았다는 것을 알고 내심 가슴을 쓸었다. 만약 투구를 쓰지 않았다면 담운량의 머리가 뇌수(腦髓)를 퍼트리며 흩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담운량이 투구를 통해 느낀 여력은 머리 속을 흔들 정도로 강했다. 투구에 도가 정확하게 부딪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등나무 껍데기와 철을 섞어 만든 갑주를 뚫고 사람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는 무리였다.
 “이유도 없이 사람을 핍박하다니······!”
 츄― 아― 앙!
 담운량은 급히 장군도를 뽑았다.
 관병이 많다는 이유로 핍박당하기는 싫었다. 죄를 짓지도 않고 무작정 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죄를 짓고 있는 자는 담운량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유도 없이 죽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중화전을 벗어나야 했다.
 담운량은 크게 한발을 내디디며 장군도를 반월(半月) 형태로 흔들었다. 두 발은 마보(馬步)의 자세를 만들어 몸의 안정을 취하고 언제든지 뛰어나갈 수 있도록 하체의 힘을 무릎에 모았다. 단전에서는 진기가 끓어올랐다. 장군도가 휘둘러지며 안면과 머리 위에 그물막을 만들었다. 그의 손에서 펼쳐진 도법은 용봉출현(龍鳳出現)의 초식이었다.
 캉!
 가슴을 향해 거칠게 찔러오던 창이 퉁겨지며 허공에 불똥이 튀었다. 담운량의 몸이 급히 움직여 허보(虛步)로 전환하며 허공에 두 겹의 방어막을 일으켰다. 뿌연 도막이 담운량의 몸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가 익힌 도법은 용봉쌍도(龍鳳雙刀)라는 도법으로 소림에서 전해지던 도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흔히 남파소림의 최상승 도법이라 알려진 절기였다. 용봉쌍도는 소림의 검법과 도법을 모아 만든 최고의 정화중 한 가지였지만 속가에 그리 흔하게 전해진 무공이 아니었다.
 담운량 자신이 알기에도 극히 일부의 소림 승려들이 용봉쌍도를 익히고 있었다. 사부는 담운량에게 용봉쌍도를 전수하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었다. 함부로 사용해서 살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용봉쌍도는 불가(佛家)의 무공답지 않게 살기가 강해 소림의 제자들에게도 쉽게 전수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소림의 다른 무공과 달리 방어가 아닌 공격하기 위한 도법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몇몇의 무승들은 전수 차원에서 용봉쌍도를 익히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담운량이 용봉쌍도를 전수받은 것은 행운이었다.
 담운량은 소림의 승려를 사부로 모셨고, 그가 모신 사부는 소림십팔승(少林十八僧)에 드는 고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익힌 무공은 당연하게도 용봉쌍도였다.
 용봉쌍도는 두 자루를 함께 쓰는 도법이었지만 장군도 한 자루만 지니고 있는 그로서는 부득이 왼손에 들린 목갑을 방패삼아 도법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 자루의 도를 휘두르는 것처럼 민활한 것은 그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탓이었다.
 “함부로 사람을 핍박하다니······.”
 담운량의 목소리가 노기를 띠었다.
 쉬리리리리―
 “놈을 산적(散炙)으로 만들어라.”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창들이 밀려왔다. 각각 몸의 상체와 하체를 노린 창술은 이미 그가 잘 알고 있는 군문의 공격법이었다.
 “어림없다.”
 담운량도 이미 오래 전부터 군문의 병법과 투로(鬪路)를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장군도를 휘둘러 날아드는 창을 막아갔다.
 상하체를 향해 날아들던 창을 막아가며 연속으로 두 번을 휘두르고 네 번을 찔렀다.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난 뒤 연속으로 반월을 그리며 장군도를 그어 올렸다.
 차차차차창!
 무려 여섯 자루의 병기가 장군도에 부딪치며 퉁겨져 날아갔다. 담운량은 병기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여력을 이기지 못하고 연속 네 걸음을 물러났다. 그러나 군병들이 찔러온 장창은 그의 몸에 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어물거리다가는 이곳에 뼈를 묻는다.’
 담운량은 마음이 급해졌다.
 “놈을 잡아 죽여라.”
 어디선가 목소리가 울렸다. 조례복을 입은 황자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계집의 목소리처럼 가늘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환관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생각 같아서는 뒤돌아 뛰어가 사내답지 못한 환관을 죽이고 싶었으나 관병들에 막혀 접근할 수도 없었고 그것이 목적이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적을 죽이기보다는 몸을 지키는 것이 먼저였다.
 “물러서지 마라. 놈은 한 놈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을 죽여라.”
 관병들의 뒤쪽에 서서 명령을 내리던 천호소의 복장을 한 무반(武班)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그는 점차 다가서며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장군도가 허공에 희미한 무지개를 그렸다.
 천호소의 목소리가 울리자 담운량의 기세에 밀려 물러섰던 병졸들이 다시 발걸음을 옮겨 다가들었다.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투로를 밟는 관병들의 모습에서 잘 훈련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죽여라.”
 파라라라라―
 장창에 달린 수실이 거칠게 바람을 일으켰다. 두 명의 병졸이 손에 들린 장창을 찌르며 다가왔다. 두 개의 장창은 각각 목과 복부를 노리고 밀려왔다.
 “으헛!”
 담운량은 놀라 가는 헛바람을 불었지만 급히 몸을 낮추어 두 개의 창을 머리 위로 흘러 지나가게 했다. 몸을 땅에 붙일 듯 숙이자 복부를 겨냥했던 창이 어깨를 스쳤다. 담운량은 무릎을 땅에 닿을 정도로 구부렸다펴며 마보를 펼쳤으나 이내 무릎을 다시 숙여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낮추었다.
 담운량은 마치 무릎을 꿇은 듯한 자세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두 명의 병졸이 창을 찌른 상태에서 병기를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병졸들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하나같이 눈은 짙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들의 얼굴과 눈에 나타난 표정은 그토록 신속한 반응과 무릎으로 기어가며 공격할 수 있는 무공이 있다는 사실에 놀랍다는 모습이었다.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병졸들이 주춤하는 기색이 어렸다.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머뭇거리는 병졸들의 다리가 노출되었다.
 “용봉횡단(龍鳳橫斷)!”
 담운량은 급히 장군도를 횡으로 그었다. 단전에서 일어난 대하(大河) 같은 진기가 오른손에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장군도가 허공에 무수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해일(海溢)처럼 일어나는 장군도의 그림자에 놀라 관병들이 주루루 밀려갔다. 담운량은 무릎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자세를 낮추고 장군도를 가슴 높이로 휘두르며 앞으로 기어갔다. 장군도가 반원을 그리며 연속으로 허공을 찔렀다.
 그가 익힌 용봉쌍도에는 없는 초식이지만 임기응변의 한 수였다. 오랜 수련의 기간을 거친 무인만이 펼칠 수 있는 임기응변의 한 초식은 병졸들의 다리에 다가들어 붉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사각!
 “크아아악!”
 “내 다리가······!
 고기를 써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두 개의 다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구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선혈(鮮血)이 바닥으로 뿜어졌다. 화살을 쏘듯 붉은 핏줄기가 쓰러진 관병 다리에서 흘러나왔다. 다리가 베어져 피를 뿌리는 관병이 두 명이나 나타나자 그들과 같이 둘러싸고 있던 주위의 관병들이 크게 놀라 다가들던 걸음을 멈추었다.
 훅하니 비린내가 뿜어져 나오며 숨을 거북하게 만들었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퍽!
 담운량은 앞으로 뛰어나가며 다리가 잘려 비틀거리는 한 명의 가슴을 어깨로 밀쳤다. 이미 중심을 잃었고 심한 상실감에 몸을 흐느적거리던 두 명의 병졸들은 팔다리를 잃은 버러지처럼 버둥거렸다.
 “막는 자는 모두 죽인다.”
 담운량은 놀라 허둥거리는 두 명의 병졸을 향해 목갑을 휘두르고 오른발로 선풍각(旋風脚)을 전개했다. 쓰러지는 동료를 멍청한 눈으로 바라보던 두 명의 관병이 움찔하는 모습으로 움츠리다 비명을 토하며 나뒹굴었다.
 담운량의 몸이 허공으로 두 자를 솟구쳤다. 몸에 걸친 갑주가 오십 근 이상 나가는 무게를 지녔다고 생각한다면 놀라운 도약이었다.
 “피하라. 무서운 자다.”
 천호소의 목소리가 울렸을 때 담운량의 몸은 허공에서 횡으로 뻗어나가며 다리가 가위처럼 벌어졌다. 먼저 왼발이 뻗어나갔고 이어 몸이 반 바퀴 회전했다. 동시에 오른발이 원을 그리며 관군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무서운 위력이 담긴 족기(足技)였다.
 선풍각은 발을 사용해 적을 공격하는 절기중 가장 강한 족기였다. 더구나 선풍각은 일정한 초식에 의하지 않는 외공(外功)이었다. 진기(眞氣)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담운량의 두 발 끝에 묵직한 느낌이 밀려왔다. 손에 들린 장군도와 목갑도 따라서 원을 그렸다.
 빠각!
 “크아아악!”
 비명이 터지며 두 개의 신형이 일 장이나 날아가 널브러졌다. 하나의 신형은 목이 꺾어진 듯 뒤로 젖혀져 있었고 다른 하나의 신형은 팔을 움켜쥐며 날아갔다.
 담운량의 선풍각은 유효적절(有效適切)하게 두 명의 관병을 퉁겨낸 것이었다. 하나의 발은 팔을 부서뜨렸고 다른 하나의 발은 관병의 목뼈를 으스러뜨렸다.
 파직―
 담운량이 착지를 하기도 전에 또다시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담운량은 자신이 들고 있는 목갑을 타고 오는 둔중한 느낌을 받았다. 목갑이 버둥거리는 관병의 이마에 부딪치자 붉은 피와 으깨어진 두부 같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목갑의 네 귀퉁이에는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고 발악처럼 휘두른 목갑이었는지라 감히 몸으로 막을 수 없는 힘이 실려있었다. 더구나 머리에 맞은 부분은 모서리였다.
 “흡!”
 코로 핏방울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담운량은 한순간 코가 찡해졌다. 담운량은 틈이 벌어지자 몸을 멈추지 않고 우왕좌왕하는 관군들을 향해 연속으로 선풍각을 연환퇴(連環腿)의 방법으로 전개했다. 이내 발에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을 받았다. 허공을 선회하듯 몸을 돌려 차는 선풍각에 병졸중의 하나가 또다시 걸려들었다.
 “크아아아악!”
 폐를 찢어내는 듯한 비명이 울리며 눈앞을 막아서던 병졸들이 마른 갈대처럼 무너졌다.
 눈앞이 열렸다.
 ‘기회다. 이곳을 벗어나야 된다.’
 담운량은 그들을 벗어나자 미친 듯 달렸다.
 “막아!”
 등뒤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리고 다시 한 자루의 장도가 예기를 뿌리며 머리를 쪼개들었다.
 “헛!”
 담운량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뜻 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장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호소 이상의 모든 무반에게는 장군도가 주어지고 있었다. 물론 품작에 따라 강도와 길이가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다른 어떤 병기보다 강하고 날카로웠다.
 장군도가 이르기도 전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장군도에 내가진력(內家眞力)이 실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반 관군의 병졸들은 내공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무과에 급제를 한 무장들의 경우는 내공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담운량의 경우만 하더라도 소림의 심공(心功)을 연마해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감히 중화전에 난입하여 설쳐대다니······ 네놈을 죽여 뼈를 발라 줄 테다.”
 천호소 복장을 지닌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에서 공력이 느껴졌다. 그것으로 보아 장군도의 주인은 일반의 병졸들과는 다른 무공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병졸은 군문에서 정한 십팔반(十八班) 병기와 백타(白打)를 배우지만 그것은 획일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군들은 애초부터 무과에 급제한 무인출신들로 나름대로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담운량은 감히 경시하지 못했다.
 “쌍도개산(雙刀開山)!”
 담운량은 황급히 고함을 터트리며 달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장군도를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하늘을 비스듬히 찌르듯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리를 마보의 보법으로 바꾸며 체중을 하체로 내렸다. 마치 엉거주춤 앉은 모양이었지만 떨어져내리는 장군도를 막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방어의 초식이었다.
 마보의 자세를 무너뜨릴 공격법은 그리 흔하지 않았기에 군문에서도 보법을 가르칠 때 제일 먼저 마보부터 가르쳤다. 모든 보법의 기초가 마보였다.
 창!
 “이크!”
 맑은 쇠붙이 소리가 들리더니 도를 잡은 오른손에 시큰한 느낌이 들었다. 팔굽이 울리고 어깨에 충격이 느껴졌다. 그러나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담운량은 급히 몸을 일으켜 발의 모양을 전진식(前進式)으로 바꾸며 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몸이 빙글 돌아가며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담운량의 도가 횡으로 비틀리며 장군의 열려있는 허리를 빠르게 베어갔다. 장군도를 휘두른 자는 담운량의 장군도와 부딪치고 퉁겨져 방향이 바뀐 도를 회수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퍽!
 손에 느껴지는 충격으로 보아 상대의 허리에 장군도가 파고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어어어억!”
 충격이 심했는지 천호소 장군이 비명을 토했다.
 장군도로 갑주를 입은 천호소를 벨 수는 없었다. 아무리 강한 힘으로 장군도를 휘두른다 해도 강한 묵강(墨鋼)과 황동(黃童)을 섞어 만든 천호소의 갑주를 완벽하게 벨 수는 없었지만 충격을 줄 수는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호소의 복장을 한 장군이 심하게 비틀거리며 주춤거리는 모습으로 뒤로 엉거주춤 물러섰다. 인상을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보아 가슴에 충격을 심하게 받은 것 같았다. 자세히 보면 가슴을 가린 흉갑(胸甲)이 반이나 베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육시(戮屍)를 할 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군졸 하나가 크게 한 발 내디디며 장창을 앞으로 내밀어 찔러왔다. 창이 휘어지며 독사처럼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과호식(戈戶式)의 창법이었다.
 담운량은 급히 몸을 좌로 움직여 장창을 겨드랑이 밑으로 지나치게 했다. 이어 장창을 옆구리에 끼는 듯한 모습으로 달려가며 일도를 그어내렸다.
 서걱!
 돼지고기를 써는 육도(肉刀)의 소음 같은 섬뜩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이어 들린 것은 비명이었다. 눈앞으로 붉은 피가 다가들었다. 겁도 없이 장창을 찌른 병졸의 목이 반이나 베어져 있었다. 쩍 벌어진 피부 사이에서 붉은 피가 폭포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뿜어졌다.
 담운량의 안면으로도 붉은 피가 가는 천처럼 넓게 펼쳐지며 날아왔다. 담운량은 피하지 않았다. 얼굴에 피가 덮쳤지만 피하지 않는 이유는 담운량이 오랜 전투경험(戰鬪經驗)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피를 피하다보면 목표를 잃게 되고 곧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담운량이었다.
 “놈이 만만큼이 않다. 어서 죽여라.”
 담운량의 일도에 혼백이 나간 듯 멀뚱히 서 있던 천호소가 고통이 어느 정도 가셔졌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직도 허리에 느껴지는 통증이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듯 얼굴에 고통의 표정이 지워지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눈은 독기로 번들거렸다.
 담운량이 관병의 목을 날리며 몸을 틀다 바라보니 허리를 비스듬히 숙이고 있는 천호소의 입주위가 씰룩거렸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곳에서 머뭇거리거나 푸닥거리를 할 시간이 없다. 머뭇거리다가는 내일을 기약할 수가 없다.’
 담운량은 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앞을 노려 보았다. 좁은 복도의 양옆으로 선 병졸들의 숫자는 이십 명이나 되었고 앞 방향으로는 여섯 명 정도가 서 있었다. 그중의 한 명이 천호소였다. 천호소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었다. 천호소의 눈은 이미 겁을 먹고 있었다.
 팔백 명에서 천여 명의 병졸을 거느리는 천호소는 적어도 사순은 되어 보이는 나이를 지니고 있었다. 고통과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담운량을 노려보기는 해도 두려움의 눈은 감추지 못했다.
 ‘놈을 죽이고 이곳을 돌파해야 하나. 아니면 무작정 피해야 하나.’
 퍽!
 “커으으윽!”
 잠시 생각을 하느라 머뭇거리는 사이 등과 팔 사이에서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갑주 위로 느껴지는 충격이 왼팔을 마비시켰다. 강한 충격이었다. 만약 갑주를 입고 있지 않았다면 팔이 어깨에서 잘려져 버렸을 충격이었다. 다행히도 갑주는 도나 창에 대해서는 강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비명을 토하던 담운량은 등에서 느껴지는 충격으로 몸이 앞으로 쏠리듯 나아가며 기울어졌다.
 “죽여라.”
 몸이 기울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한 명의 병졸이 창을 찔러왔다. 담운량은 달려나가는 속도를 유지하며 급히 몸을 뒤채어 피하며 가슴으로 찔러오던 창을 오른손의 장군도로 막았다.
 차창!
 담운량은 창과 부딪쳐 퉁겨져 되돌아오는 장군도를 감듯이 휘둘러 마루바닥을 찍었다. 이어 팔을 비틀어 마루에 박힌 장군도를 뽑았다. 목갑으로 마루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다가서는 병졸의 몸을 향해 왼쪽 어깨를 밀었다. 어깨는 기민할 정도로 빠르게 흔들려 연속으로 병졸의 어깨를 찍었다.
 퍽, 퍼퍼퍽!
 병졸은 몸에는 갑주가 입혀져 있지 않았다. 같은 힘으로 부딪친다 해도 갑주를 입은 자가 유리했다.
 “크억!”
 병졸의 입에서 고통에 물든 신음이 울렸다. 한눈에 보아도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담운량은 장군도를 휘둘러 비틀거리는 관병의 목을 한칼에 뎅겅 날려버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병졸의 목이 떨어졌다. 잘려진 목은 붉은 피를 뿜어내며 마루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나를 막는 자는 모두 죽인다.”
 분노의 음성을 뿌려내며 다시 두 걸음을 앞으로 전진하자 나무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것으로 보아 조금 전 담운량이 올라온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인 모양이었다. 계단에도 서너 명의 병졸들이 보였으나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회다. 계단만 내려가면 승산(勝算)이 있다.’
 담운량은 장군도를 용봉쌍도의 수법으로 휘둘러 앞을 막아서는 두 명의 병졸을 몰아붙였다. 장군도를 팔방풍우(八方風雨)의 수법으로 그어대자 관병들은 어쩔 도리 없이 뒤로 물러서기 급급한 모습이었다. 횡으로 긋는 용봉쌍도의 수법은 허리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두 명의 병졸은 엉겁결에 물러섰다.
 “어엇! 놈이 공격해 온다.”
 병졸들이 놀라 비명을 토하며 분분히 물러섰다. 담운량은 빈틈을 노리고 다시 한 걸음 전진했다. 계단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반월창(半月窓)이다.’
 과연 계단의 반대쪽에는 반월창이 있었다. 창문 앞에는 천호소의 복장을 한 장군이 장군도를 뽑아 들고 서 있었다. 마치 창문을 통해서는 빠져나갈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 했던가! 어찌되었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된다.’
 담운량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랏! 출마벽도(出馬劈刀)!”
 담운량은 발로 바닥을 찍고 바람같이 달려갔다. 순식간에 네 걸음을 옮겨 천호소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천호소의 움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호소의 눈이 파란 광망(光芒)으로 뒤덮였다.
 광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강한 각오와 함께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담운량이었다.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용기를 내었는지 천호소는 장군도를 횡으로 휘둘러 담운량의 허리를 베어왔다. 곧 강한 기파가 일어나 담운량의 전신을 쓸어왔다.
 “어림없다.”
 담운량은 부르짖으며 몸을 비틀었다.
 등뒤에서도 장창의 기운이 느껴졌다. 계단 쪽에 서 있던 병졸이 찌른 것이 분명했다. 담운량은 계단방향을 등에 지고 창가에 서 있는 천호소를 향해 장군도를 쓸어갔다. 그 틈을 노려 창이 하체를 찔러왔다.
 담운량은 토끼가 제자리에서 뛰듯 껑충 뛰었다. 천호소가 휘두른 장군도가 아슬아슬하게 다리 사이로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창도 스치듯 지나가 오히려 엉거주춤 자세를 돌려세우는 천호소를 찔러갔다.
 “이런! 눈을 어디에 단 거냐?”
 갑자기 장창이 가슴을 찔러오자 천호소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노한 음성을 터트렸다. 부하의 장창이 찔러 들어오자 노한 음성을 뿌린 것이다. 너무도 협소(狹小)한 지역이었기에 병졸이 사용하는 장창은 매우 불편했다.
 휘두르고, 후려치고, 돌리는 수없이 많은 창법 중에서 좁은 지형에서 병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찌르는 방법뿐이었다.
 천호소는 급히 장군도를 회수하며 장창을 피했다.
 “내가 먼저다. 좌봉벽도(左鳳劈刀)!”
 담운량의 입에서 한소리 호통이 밀려나온 것은 바로 같은 순간이었다. 마치 메뚜기처럼 몸을 횡으로 띄웠던 담운량이 떨어지던 힘으로 도를 사선(射線)으로 그은 것이다.
 담운량의 장군도는 천호소의 몸을 둘러싼 갑주가 없는 곳, 목을 향해 그어지며 무찔러갔다.
 “뭐냐······? 크아아악!”
 담운량의 장군도는 순식간에 천호소의 목을 뎅겅 잘라버렸다. 만약 천호소가 투구를 쓰고 있었다면 목이 잘리는 비운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는 전시(戰時)가 아니었기 때문에 투구를 걸치지 않고 있었다.
 파아아아아아―
 피무지개가 피어오를 때, 담운량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반월창으로 몸을 날렸다.
 와장창!
 대나무로 살을 만들고 당지(唐紙)로 발라 만든 반월창은 순식간에 부서지고 담운량의 몸은 이층에서 사라졌다. 너무도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병졸들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동작을 멈추었다. 망연한 표정이었다.
 “어서 쫓아라!”
 “놈을 놓쳐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한다.”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장창을 든 병졸들이 다급히 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어떤 병졸은 부서진 반월창으로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람과 경악이 물들어 있었다. 짧은 순간에 천호소를 베고 사라진 자는 자신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무공을 지닌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몸을 으스스 떨었다. 배변 후에 몸에 이는 것과 같은 전율이 흘렀다.
 “어찌되었느냐?”
 밀실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던 환관이 달려왔다.
 “우공공(右公公)! 놈이 창을 부수고 달아났습니다.”
 남은 천호소가 마주 달려가며 말했다.
 우공공이라 불린 환관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빌어먹을 놈 같으니······.”
 우공공의 불끈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사방을 쓸어보다 쓰러져 뒹구는 병졸들의 시체와 천호소의 목 없는 시체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찾아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가 누구인지······ 어느 소속의 장수인지 찾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천호소는 고개를 숙였다.
 “어서 추적하라.”
 천호소는 주위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때까지 멀뚱하게 서 있던 오륙 명의 병졸들이 숨가쁘게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그가 누구인가?”
 “아직 알지 못합니다. 모두 추적했으니 그가 누구인지, 혹은 시체라도 끌고 올 것입니다.”
 조례복을 입은 황족차림의 사내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꺾었다. 손가락이 꺾어질 때마다 딱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꺾기가 끝나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손톱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들겼다.
 탁! 타타타탁! 탁!
 그의 손놀림에는 일정한 속도와 흐름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놈을 잡아 입을 막아야 한다. 아니라면 최소한 사나흘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억압을 해야 한다. 그후에는 일이 끝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우공공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는 자신의 앞에 앉은 왕야(王爺)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또한 몸서리 쳐지도록 독한 자인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만약 일이 어그러진다면 왕야는 우공공의 목으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것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지만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왕야는 능히 그리하고도 남을 성정(性情)을 지녔다.
 “우공공!”
 “예. 전하!”
 “놈을 죽여라. 어떤 경우라도 놈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우공공은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조례복을 입은 자의 주위에 늘어선 다섯 명의 고관대작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3장 다가오는 위기
 
 
 오시(午時).
 교태전(驕泰殿)에서는 연회가 한창이었다.
 명황조의 연회궁으로 만들어진 교태전은 평상시는 조용했으나 황족의 연회가 벌어지면 늘 떠들썩한 곳이기도 했다. 황족의 풍요함과 즐거움을 보기 위해서는 교태전을 보라는 말이 만조백관의 입에서 돌듯 교태전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연회가 베풀어지는 곳이었다.
 황궁의 북쪽으로 치우쳐져 만들어진 인공호수며 오룡정(五龍亭)이 자리한 북해와 더불어 교태전의 경치는 자금성내에서 으뜸이었다.
 둥둥둥!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은은한 북소리에 맞추어 팔십여 명의 궁녀들이 군무(群舞)를 추고 있었다.
 궁녀들이 추는 춤은 팔일무(八佾舞)라 하는 것으로 원래는 황궁의 제례의식에 사용되는 음악과 춤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곱고 은은한 음률과 고아한 춤으로 인해 궁내 연회의 춤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오죽하면 궁 내부에는 오로지 팔일무를 추기 위한 궁녀들만이 있기도 했다.
 “호호호! 오라버니와 아우님들께서 모두 오셨군요.”
 “존안(尊顔)을 뵙습니다.”
 “근래 더욱 미려해진 것 같습니다.”
 수인사가 지나갔다.
 용화공주(龍華公主)는 기분이 매우 좋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번왕들을 만나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영락제가 건문제를 폐하고 황위를 이은 뒤에는 황족의 일족은 더욱 왕래가 없었다. 영락제가 황권을 잡기 전에는 간혹 황족들간의 연회가 베풀어지고 번왕들도 참가하는 연회가 있었지만 영락제가 천자의 위에 오른 후부터는 왠지 번왕들이 연회에 참가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모두 몸을 아꼈다.
 영락제가 두렵기도 했거니와 영락제 자신은 형제의 의를 그리 강조하는 황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형제들에게 영지를 주고 번왕으로 봉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일설에는 그것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초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난무했다.
 용화공주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남경에 남기를 원했지만 시집을 가지 못한 동생이 너무 불쌍했는지 영락제는 용화공주를 곁에 두고 싶어했다.
 용화공주는 태조 주원장의 열한번째 자식으로 마황후(馬皇后)의 자식이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태조의 네번째 아들인 영락제와는 모친이 달랐다.
 명조를 일으킨 주원장은 처음 거병하여 쫓기다 한때 호주(濠州)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곽자흥(郭子興)의 부하로 투신한 적이 있었다.
 곽자흥은 원의 어지러운 말엽에 천하를 걸고 말을 달리던 십이 명의 세력 중 한 사람인 한림아(韓林兒)의 부하로 군적(群敵) 중의 한 사람이었다. 비록 우두머리는 되지 못했지만 곽자흥은 인품이 있었고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천하를 얻을 수 없을지 모르나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을 볼 수는 있다.”
 곽자흥은 늘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곽자흥은 주원장의 인물됨이 용렬하지 않고 대범한지라 자신의 양녀를 주원장에게 아내로 주었다. 그녀가 바로 마황후였다. 그녀는 후일 주원장이 이끄는 명교(明敎)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게 이미 배화교(拜火敎)에 깊이 심취해 있었고 내조가 뛰어났다.
 “그녀가 있으므로 나는 명을 건국했다.”
 주원장은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아무튼 곽자흥은 주원장의 도움으로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으나 병사하고 곽자흥을 따르던 다수의 부하들은 자연스럽게 주원장의 명교에 포섭되었다.
 곽자흥의 부하들은 배화교도들이었는데 그들이 주원장을 따르게 된 것은 무엇보다 마황후가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주원장은 회수(淮水)에 연한 호주에서 태어나 곽자흥의 힘을 얻어 명교를 부흥시킨 후, 명 황실을 열었던 탓에 마황후의 몸에서 난 용화공주를 매우 아꼈다.
 “하하하하! 열 명의 황자와 용화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 아이는 짐의 행복이니라.”
 주원장은 그렇게 말하며 웃고는 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용화공주의 미색은 뛰어났고 학문의 조예가 깊다는 소문이 있었다. 더구나 무공과 시서화(詩書畵) 또한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그녀가 왜 독신으로 나이가 차도록 출가하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허허허! 아우의 신색이 많이 좋아졌구나!”
 “누님을 뵈오이다.”
 다섯 명의 번왕들은 서로 마주보며 반가워했다.
 용화공주의 곁에 모여든 다섯 명의 번왕들 중에는 용화공주보다 연장자인 오빠는 단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 넷은 모두 아우였다.
 용화공주는 황궁 내에서 살았지만 그녀의 아우들과 오빠는 중원천하 곳곳에 번왕으로 살고 있었다. 번왕이 황궁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의 주인은 용화공주였기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다만 투실해 보이는 몸에 걸친 용잠삼(龍長衫)을 슬쩍 걷어올려 어깨 뒤로 젖힌 뒤 황금색 지환이 끼어진 손을 살짝 들었다 놓았을 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오라버니! 아우들도 어서 오시어요.”
 명색이 번왕의 지위에 있는 아우들인지라 용화공주는 감히 하대는 하지 못했다.
 얼마 후 다섯 명의 번왕과 용화공주는 한 자리에 마주 앉았다. 어찌된 일인지 주변에서 너울거리듯 춤을 추던 궁녀들과 악기를 탄주(彈奏)하던 악사들은 모두 물러간 뒤였다. 그들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모르나 용화공주가 그들을 물러가게 하였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환관들과 기록을 남기는 사관(史官)들도 모두 물러가고 보이지 않았다. 영락제는 늘 황족 주위에 머무는 사관이라도 용화공주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자리를 비워도 좋다는 명을 내려 놓았었다. 그것은 용화공주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고 영락제의 배려였다.
 “네가 어쩐 일로 우리를 다 부른 것이냐?”
 조례복을 입고 허리에는 패검을 찬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그는 용화공주의 오빠였고 모인 황족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자였다. 얼굴은 중후했고 길게 늘어진 수염이 그가 지닌 성정을 더해주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중원의 요충이라 할 수 있는 하남에 왕부를 가지고 있었고 영락제가 가장 신임하는 형제이기도 했다. 그는 제왕(濟王)이라 불렸다.
 그가 제왕이라 칭해지고 형제 중 가장 녹봉(祿俸)이 많이 나는 하남을 영지로 받은 이유는 오로지 영락제와 모친이 같다는 이유였다.
 주원장의 부인이었던 적지않은 황후들이 낳은 황자는 같은 황자의 몸이었지만 모친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금을 긋고 살아가고 있었다.
 “호호호호! 오라버니도 참! 동생이 오빠를 뵙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던가요?”
 “그런 것은 아니다마는······.”
 느닷없는 용화공주의 반응에 제왕이 당황한 음성을 흘렸다. 용화공주는 비록 공주였고, 오빠지만 영락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황궁에 머무는 공주는 번왕보다 더욱 막강한 배경을 가진 것이 되기에 설사 번왕들이라 해도 용화공주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의 비위를 거슬리게 된다면 언제 영락제에게 질책을 당하게 될지 모르기에 제왕은 당연하게도 당황했고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도 오랜만에 형제들을 보게 되어 제가 잠시 놀린 것 뿐이에요.”
 용화공주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이가 사십이 넘었으나 아직까지도 미색이 고운 용화공주였다. 그녀의 웃음은 늘 태조를 흡족하게 했었다. 태조는 명 건국 후에도 전장에 나아갈 때마다 그녀를 데리고 다닐 만큼 귀히 여겼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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