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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붉은마왕의 전설 [E]

붉은마왕의 전설 1권 (1)

2018.05.24 조회 273 추천 3


 아르테미어 황가에 그가 태어났다
 1
 
 
 
 
 
 
 
 
 1,000년 동안 다진 반석 위에 다시 1,000년의 기둥을 세우고 그렇게 지어진 제국이라고 할지라도, 무너지는 건 100년이 채 걸리지 않는다.
 2,000년 동안 이어진 제국의 역사에 비하면 100년은 정말 찰나의 시간. 그토록 단단하던 제국이 어찌 찰나에 산산조각 부서질 수가 있는가.
 그게 가능했다.
 황제가 미치면!
 
 황제는 사람이 아니다.
 황제는 전지전능한 신의 대리자이며, 황제는 마음이 없는 괴물이고, 황제는 제국에 의해서 움직이는 인형이고, 황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배덕자이며, 황제는 피를 뒤집어쓴 살인마다.
 신은 미치지 않는다. 괴물도 미치지 않고, 인형은 감정이 없고, 배덕자에게는 고민이 없고, 살인마는 그 자리를 즐긴다.
 황제에게 광기는 일어날 수 없는 사치!
 그러나 진실로 이야기를 하면······.
 
 황제도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이었다. 사랑은······ 황제마저 미치게 만들었다.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다!
 정말 그 사랑을 가지고 싶다!
 미치도록 그 사랑을 가지고 싶다!
 너를 가지기 위해서 피를 뒤집어쓰고 모두를 죽여서라도, 그 사랑을 내 것으로 하고 싶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누구도 너를 가질 수 없다!
 누구도 너를 볼 수 없고.
 누구도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너의 삶을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너의 죽음이라도 가지겠다.
 
 기사의 나라, 카일라스 제국의 황궁.
 제국의 그 어떤 장소보다 높은 곳에 황제의 권좌가 있었다. 어떤 산도, 어떤 건물도, 황제의 권좌보다 높을 수는 없었다.
 좌측에는 5미터의 검이.
 우측에도 5미터의 검이.
 거대한 황제의 권좌에 상징으로서 방패 따위는 없었다.
 열 개의 높은 계단을 내려오면 거대한 대전이 있고, 저 뒤로 높이 10미터의 검은 철문이 보인다.
 카마쉬 덴 카일라스 라파엘.
 황제는 거대한 권좌에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숨을 쉬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동도 없었다.
 그는 이 정적을 즐긴다.
 이 어둠을 즐긴다.
 그리고 지금처럼 혼자만의 외로운 ‘결단’의 시간을 즐겼다.
 ‘그녀를 가지겠다!’
 구우우우웅.
 거대한 철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노쇠한 노인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서 권좌가 있는 계단 아래에 섰다. 고개를 한껏 쳐들고, 저 위에 있는 황제를 쳐다본 후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 대전 회의를 소집했사옵니다.”
 “알겠다. 시종은 물러나라.”
 조용하고 중후하며 묵직한, 황제의 위엄이 잔뜩 묻어 절로 사람을 짓누르는 음성이 늙은 시종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시종은 20년 동안 지금의 황제를 모셨다.
 감정의 기복이 없는 황제의 음성이었지만, 시종은 황제의 목소리로 황제의 감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오늘······ 대전에 피가 튈지도 모르겠구나.’
 황제는 10년 동안 너무 조용히 지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벌써 지금의 황제가 어떤 전쟁을 치르고 황제의 권좌를 차지했는지 잊어버렸다.
 그 당시를 여전히 가슴 깊이 각인한 시종은 그래서 대전 회의를 소집할 때마다 혼자서만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시종은 다시 종종걸음으로 대전을 벗어났고, 육중한 철문은 지옥의 울음을 내면서 닫혔다.
 구우우우우우우우······ 덜컹.
 
 오십여 명의 귀족들이 양쪽으로 나뉘어서 늘어섰다. 영주의 대리자인 남작과 황궁의 귀족인 자작, 백작 그리고 좌우에서 황제의 권좌로 오르는 계단 바로 아래에 선 두 명의 공작.
 그들이 한꺼번에 큰 목소리로 황제를 부르면서 허리를 숙였다.
 “황제 폐하!”
 “모두 일어나라.”
 황제의 육중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리자 깊이 숙여졌던 귀족들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카일라스 황제는 형형한 안광으로 귀족들을 훑어봤다.
 귀족들 사이에 기품이 어린 신관 하나가 보였다. 신전에 속한 머큐리의 대신관이었다. 황제의 인상이 약간 굳었다.
 황제는 신의 대리인이다. 권좌에 앉기 위해선 신전에서 신의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이러니 신전의 신관은 황제에게 항상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떤 나라에 가더라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머큐리의 대신관은 이곳에 어인 일이신가?”
 황제의 안광은 불쌍한 노인을 산산조각 부숴 버릴 정도로 사납게 빛났다.
 “하늘 아래에서 가장 강하게 빛나는 모든 신들의 검, 카일라스 황제 폐하! 11신들이 내린 마지막 신탁이 나타났음을 알려 드립니다.”
 마지막 신탁?
 신전에서도 신탁의 기둥이 빛나고 나서야 2,000년 전에 새겨졌던 마지막 신탁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신전의 모든 역사 서적들을 뒤졌다. 이러니 카일라스 황제가 마지막 신탁에 대해서 알 리가 없었다.
 “붉은마왕이라는 폭풍의 신, 전쟁의 신, 모든 신들의 파괴자, 전신 마르둑이 나타났습니다. 신탁에서 이르기를, 열두 번째 천신인 마르둑이 모든 신들의 왕이 될 것이며, 그의 뇌전에 모두가 부서지고 그의 천둥에 모두가 두려움에 떨 것이라 하옵니다.”
 신탁!
 아주 오래된 역사, 신화, 전설에나 나오는 말이었다. 지난 2,000년 동안 신탁은 단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다.
 황제가 우측에 위치한 공작을 내려다봤다.
 카라만 가문은 대대로 학식이 풍부한 집안이었다. 검술보단 전략과 전술, 외교에 뛰어난 가문이었으며, 풍부한 지식을 겸비한 무장이 바로 카라만 공작이었다.
 “황제 폐하, 2,000년 전에 그런 신탁이 하나 내려왔는데, 흔히 마지막 신탁이라고 부릅니다. 그 신탁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거짓된 신탁 혹은 머큐리의 장난이라고도 불립니다.”
 “카라만 공작, 그럼 지금 이 신탁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카일라스 황제가 물었다.
 그러나 카라만 공작은 ‘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답한다면 앞으로 일어날 사태의 모든 책임을 그가 져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신전에서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하옵니다.”
 신탁과 관련된 것이다. 신관 외의 사람이 그 진실 여부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대신관, 카라만 공작의 말대로라면 그 신탁은 신전에서 알아서 판별하고 처리해야 할 문제인데, 왜 본 황제에게 그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오?”
 황제의 말에 카라만 공작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속으로 정말 능구렁이 같은 황제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가장 꺼림칙하게 여기는 사람이 바로 카라만 공작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꼭 필요하면서도 가까이 두기 어려운,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다.
 반면에 카라만 공작의 반대편에 선 에쉬람 공작은 좀 다르다. 그의 가문은 타고난 무장이었다. 오직 검술밖에 모르는 기사의 가문이었다.
 황제의 검술은 그런 에쉬람 공작보다 뛰어났다. 확실히 황제는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이러니 황제는 에쉬람 공작을 꺼림칙하게 여길 필요가 없었다.
 “하늘 아래에서 가장 단단하게 빛나는 모든 신들의 방패, 아르테미어 황제에게서 마지막 아들이 태어났다 하옵니다. 그의 이름이······!”
 대신관은 여기까지 말한 후 입을 다물었다.
 
 
 
 처음 역천의 마황공을 익혔을 때, 그는 재능이 뛰어났음에도 평생을 수련해서 겨우 3성에 달했다.
 그리고 다음 생에서 15세 때 전생을 각성했다.
 다시 역천마황공에만 평생을 매달렸다. 그건 마치 자신의 의무처럼 여겨졌다. 전생을 각성한 이유가 바로 뇌리에 각인된 역천마황공 때문이었으니, 이걸 완성해야만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도 있었다.
 3성에 달했고, 4성을 넘지 못했다.
 다시 모든 전생을 각성하고, 역시 3성에 달했다.
 열 번의 전생 각성을 통해서 겨우 4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 후 다시 태어나고, 각성, 각성, 각성, 각성······!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역천마황공에만 매달려서 결국 완성을 넘어 완전무결의 완벽을 의미하는 12성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는 역천마황공을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익힌 유일한 한 사람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그리고 그 책임에서 벗어났다. 심리적인 압박에서 자유를 되찾았다.
 2,000년의 긴 시간에서 최초로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는 마황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르테미어 제국.
 대륙에 단 하나 있는 마도제국답게 황궁의 크기는 엄청났으며 매우 복잡하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황궁의 지리를 모두 외우는 사람은 아마도 황제의 오래된 시종이 유일할 것이다.
 하라궁.
 황제의 일곱 번째 황비가 머무는 곳이다.
 제7황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엘린느’는 이빨을 꽉 깨물고 힘을 주고 있었다. 그녀의 시녀장과 산파는 엘린느와 함께 혼신의 힘을 다했다.
 벌써 하루 온종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아기는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쑥, 아기가 꿈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산고는 어머니도 힘들지만 아기 역시 힘들다. 그걸 하루 종일 참았으니 아기도 참을 만큼 참은 건지 스스로 나온 거였다.
 시녀장과 산파는 말도 못 하고 붕어처럼 눈만 끔벅였다.
 아기는 울지도 않고, 크게 기침을 했다.
 산파는 급하게 탯줄을 자르고, 아이의 숨통을 터뜨리기 위해서 엉덩이를 두드렸다. 그러나 아이는 크게 기침만 하다가 숨통이 트였는지 새근새근 숨을 내쉬었다.
 엘린느는 눈을 꼭 감았다.
 아기가 울지 않는다.
 사산일 것이다.
 황후와 다른 황비들의 수작이 분명히 있었을 거였다.
 그러나 곧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분명히 산파의 목소리였다.
 “황, 황비마마, 왕자님이십니다.”
 “아, 아이가 살아 있나요?”
 “예, 아주 건강하십니다.”
 아이는 독을 먹고도 지나치게 건강했다. 산파도 시녀장도 황비도, 아이가 분명히 사산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왜? 이게 뭐지?’
 눈앞이 뿌옇게 잘 보이지 않았다. 귀가 윙윙거리며 시끄러웠다. 아이는 자신의 몸을 느꼈다.
 다시 태어났다.
 왜?
 ‘15세에 각성을 한 것도 아니고, 죽음과 동시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가 있지? 아니, 이건 말도 안 된다. 나는 역천마황공의 의무를 끝내고 각성의 굴레에서 벗어났단 말이다.’
 2,000년의 삶을 모두 기억한다.
 오로지 역천마황공에만 의무적으로 매달렸던 긴,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그에게 삶이란 너무나 지겨운 것이었다. 한데 그런 지겨운 삶을 다시 시작하라면서 모든 전생을 기억한 채로, 누군가 세상에 자신을 내동댕이쳤다.
 차라리 평범하게 보통의 인간처럼 새로운 생을 시작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거다. 한데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2,000년 삶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이 지겨운 삶을 이어 가야 하다니!
 
 혼horn.
 뿔의 모양을 의미하며, 영광 혹은 힘의 상징 그리고 신성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아르테미어 제국에선 황가의 혈통을 의미했다.
 마르둑 혼 아르테미어는 1세 때 걷기 시작했고, 2세 때 말문이 트였으며, 3세 때 글자를 익혔다.
 하라궁 안에서는 천재로 인식되었다.
 아르테미어 황제는 마지막으로 태어난, 엘린느의 아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찾아보지도 않았고, 이름도 지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엘린느는 이미 아들의 이름을 ‘마르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엘린느는 마르둑을 잉태하던 날 꿈속에서 천신을 보았다. 그는 뇌전과 천둥을 몰고 엘린느에게 다가와서 그녀를 범했다. 그 후 떠날 때 말하기를, 아들의 이름을 ‘마르둑’으로 한다고 했다.
 이렇게 그녀가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마르둑은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오직 하라궁 안에서만 생활했고 그곳에서만 천재로 통했다. 하지만 실상을 따져 보면, 마르둑은 지독히도 게으르고 무기력한 천재였다.
 마르둑에겐 목표 의식이 없었다.
 삶이 무기력했다.
 전생에서는 각성하자마자 의무적으로 바로 역천마황공의 수련을 시작했다. 결국 12성 완벽을 달성한 후 편안히 죽었다.
 이번 생에는 불만이 무척 많았다. 자신이 왜 전생을 모조리 기억한 채로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마황공의 굴레에 사로잡혔다.
 수련을 바로 시작했다.
 한데 마르둑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마치 처음부터 마황공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마황공은 영혼에 각인되는 무공이었다. 그래서 전생을 각성하기 시작한 거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발전했던 거다. 이번에는 완벽한 마황공이 영혼에 각인되었기 때문에, 각성한 상태로 태어났던 거였다.
 이미 완벽한 마황공이 영혼에 각인되었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는 쉽게 12성에 이를 것이다. 하면 그 후 다음 생에서도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뭔가 다시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 후로 마르둑의 마황공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의 가장 중요한 사실!
 마황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첫 단계가 있는데, 바로 기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다른 무공처럼 기초적인 호흡으로 기운을 믿는 게 아니라 육체적으로 실제로 기를 느끼는 기감을 말한다. 마르둑은 이 가장 어려운 단계를 역시 쉽게 해냈다.
 한데 이곳에는 기가 없었다!
 항상 기를 이용해서 마황공을 연성했는데, 여긴 기가 아닌 이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기는 차갑고 조용하게 세상에 머무는 기운이었다. 한데 이곳의 기운은 뜨겁고 역동적이며, 흐름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움직였다.
 이건 기가 아니다!
 마황공을 익힐 수가 있을까?
 처음에는 기가 아니니 단전을 개방할 수나 있을까 하고 마르둑은 생각했다. 그러나 마황공을 오직 기만으로 익혀야 한다는 건 마르둑의 오인이었다.
 ‘마나, 이건 이 세계에서 말하는 마나로군!’
 기와 마나가 같다고, 지칭하는 용어만 다르다고 생각했다. 한데 세계가 다르기 때문인지, 기와 마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기운이었다. 마르둑은 기가 아니라 마나로 마황공을 새롭게 익혀야 할 사태에 직면했다.
 2,000년 동안 마황공을 익혔고, 점점 완성하면서 그 굴레를 벗어났다고 여겼다. 한데 그냥 마황공을 익히는 것도 아니고 마나라는 새로운 기운으로 새롭게 수련을 시작해야 하는 상태였다.
 절로 ‘빌어먹을!’이라는 욕설이 나왔다.
 마르둑이 삶에 무기력하고 나태하게 변한 건 이 사실에 의한 반항적 의미가 컸다. 열심히 수련해 봤자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고 다른 세상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열심히 할 필요가 없는 거였다.
 인간의 정신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오랜 세월을 기억하기 때문에 삶에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전생에서 대부분 나태했다. 삶을 대하는 자세가 그러했다. 단 하나, 마황공의 수련만 제외하고는! 이런데 이제 마황공의 수련마저 의미 없음을 깨달았으니, 당연히 그는 게으른 당나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관성이라는 게 있기 때문인지, 습관적으로 마황공을 수련하기는 했다. 그리고 사실 마나에 대해서 호기심도 있었다.
 그래서 수련을 하고 있는데, 세상이 그의 수련을 도와주지 않았다.
 “황자 저하! 황자 저하! 마르둑 황자 저하!”
 ‘크으······ 저 빌어먹을 잭!’
 잭은 15세 정도의 잘생긴 소년으로, 마르둑의 전담 시종이었다. 그는 마르둑이 하라궁 내의 어디에 숨었든지 귀신처럼 찾아냈다. 복잡한 황궁의 지리를 가장 잘 아는 건 시종들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마도 하라궁에서 자란 잭의 경험도 작용했을 테다.
 콰당!
 작은 창고의 문이 열렸다.
 “황자 저하, 왜 또 이런 곳에 계십니까? 선생님께서 찾으십니다.”
 “아, 귀찮아. 몰라, 몰라, 몰라, 안 들려, 안 들려!”
 마르둑은 선생님이라는 사람을 보기 싫었다.
 수많은 황자들 중에서 한 명일 뿐이지만, 황제의 관심도 없었지만 어쨌든 황자였다. 배울 게 엄청나게 많았다. 황가의 역사와 법도, 세계의 정세나 신화, 다른 국가의 역사, 기타 등등. 게다가 아르테미어 제국은 마도제국이었기 때문에 마법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만 했다.
 마르둑은 실제로 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있고 열심히 하는 척만 해도 될 것이다. 한데 문제는 그 선생이라는 사람이, 아니 하라궁의 모든 사람이 그를 천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다.
 마르둑은 3세 때 글자를 깨쳤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확실히 천재가 맞았다. 하지만 마르둑에게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그가 좀 머리가 잘 굴러가기는 하지만 천재적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전생을 기억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의 사고를 했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글자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열심히 익혔고, 호기심에 책을 몇 권 봤을 뿐이다.
 한데 천재라니!
 선생부터가 그렇게 생각하며 마르둑을 교육시키니, 마르둑은 자연히 그 선생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이자 제국의 제7황비인 엘린느가 거금을 들여서 초빙한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에 대해선 흥미가 좀 있었다. 아니, 마나에 대해서 흥미가 있다고 해야 옳았다.
 하지만 이것도 참 거지 같은 게, 하나의 마법을 공부하기 위해서 그 전에 엄청난 양의 지식을 먼저 공부해야 했다. 세상의 법칙이니 자연의 운행 원리니 천문, 물리, 기타 등등! 엄청났다.
 2,000년 동안 마르둑이 점점 게을러지긴 했지만, 그도 공부한 가락이 있었다.
 문제는 전혀 다른 세상이기 때문에 기본을 이루는 지식조차 다르다는 것이다. 천문이나 자연 운행에 대해선 조금 이해를 하겠지만, 우주의 법칙이니 별의 운행이나 물리에 대해선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그냥 마황공만 열심히 수련할 때가 좋았네, 좋았어.’
 그의 나이 이제 겨우 4세.
 15세인 잭의 힘을 당해 내긴 어려웠다. 게다가 잭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마르둑의 시종이었지만 엘린느의 특명을 받은 사람이었다. 마르둑을 선생에게 데려가지 못한다면 엘린느 황비에게 엄청나게 혼날 거였다.
 미공자인 잭이 섬뜩하게 미소했다.
 “마르둑 황자님! 숨어 봐야 제 손바닥 안입니다. 어서 가시죠!”
 “잭! 넌 내 시종이야, 내 시종. 내가 가자고 할 때만 내 뒤에서 날 따라오는 거라고.”
 “에이, 황자님도 제 사정 잘 아시면서. 선생께서 황비 전하께 이르시면 황비 전하는 쇠몽둥이로 절 때리고, 또 전 아버지께 혼나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엄청난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고요. 대신 황자님은 선생님 앞에서 공부하는 척만 하시면 되잖아요.”
 어차피 마르둑은 잭의 마수를 피할 수 없다는 걸 오늘도 역시 깨달았다. 조용히 따라가느냐 아니면 잭의 손에 끌려가느냐, 그 차이인데!
 “그래, 가자, 가.”
 “헤헤헤헤, 초코 우유 대령할까요?”
 전생에서는 절대로 먹어 본 적도 없고 비슷한 맛을 내는 걸 본 적도 없는, 그런 음식이 몇 개 있었다. 마르둑은 그중에서 커피라는 것과 초코 우유를 가장 좋아했다.
 “커피 많이 마시면 밤에 잠 안 와요. 그럼 키가 안 크고, 전 또 혼난단 말이에요.”
 “그래, 초코 우유 대령해라.”
 마르둑은 말로 잭을 이기려는 생각을 1년 전부터 이미 포기했다.
 
 아르테미어 제국의 황제는 가장 강력한 마법사였다. 황가는 가장 권위 있는 마법의 가문이고,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을 소유했다. 여타 지식이나 황가의 일원으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한 공부 또한 해야 마땅하다.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법의 공부였다.
 한데 황제는 마르둑에게 마법을 공부하게 하지도 않았다.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엘린느는 어떤 의문도 없이 바로 알아서 선생을 초빙했다. 마르둑은 이 노인에 대해서 잘 모르나, 소문에는 세간에서 현자라고 불린다고 한다.
 현자는 마법사와 비슷하지만 좀 다르기도 하다. 마법사에서 발전한 지류의 하나였다.
 검을 익히는 자들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카일라스 제국의 황제다. 그는 검의 황제 혹은 검의 마스터라고 불린다. 흔히 소드 마스터라고 칭한다.
 이 단계에 오르면 기사는 후광처럼 보이는 아우라를 내보이면서 블레이드라는 강력한 기술을 사용한다고 한다. 소드 마스터 중에도 레벨이 존재하는데, 카일라스 제국의 황제는 가장 높은 레벨에 도달했다.
 익힌 종류의 검술에 따라서 소드 마스터의 성향이 정해진다고 한다.
 마법사는 거대한 아우라를 내보이면 강력한 마법을 부릴 수 있으며, 이 단계의 마법사를 특별히 마도사라고 부른다. 마법은 굉장히 방대하며 복잡하기 때문에 기사보다 성향이 더욱 다양하다. 아르테미어 황제는 이런 마도사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었다.
 마도사와는 다른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현자’라는 사람이다.
 이들은 마법보다는 그것의 기반이 되는 지식과 지혜로 세간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마도사보다는 급이 떨어지지만 일반적인 마법사보단 더 뛰어나며, 아는 게 많아서 선생으로서 가장 적당했다.
 지금 마르둑의 눈앞에 보이는 이 꼬장꼬장한 노인 역시 그런 현자 중의 한 명인데, 마르둑이 보기엔 꼭 사기꾼처럼 생겼다.
 “어휴, 황자 저하! 기억력은 좋은데 어찌 이해력이 이리도 부족하신지요? 마법을 공부하기 위해선 사실 기억력보단 이해력과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기억력이야 책을 의존하면 될 일이지만, 이해력과 통찰력에선 의존할 게 없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선생님! 제가 말을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전 이제 4세입니다.”
 “헐헐헐, 이미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하시던데 뭘 그리 겸손한 말씀을······!”
 “그럼요! 저희 황자님이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죠. 3세 때 글을 줄줄 읽기 시작해서, 예, 뭐, 그렇다는 말입죠.”
 마르둑이 째려보자 잭은 횡설수설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마르둑은 잭의 저런 얄미운 말보단 선생에게 동의하는 저 태도가 더 싫었다.
 “혹시 혼돈과 혼원, 일원, 음양, 태극으로 발전하는 이론에 대해서 아십니까?”
 마르둑이 물었다.
 저 잘난 체하고 남을 비꼬기 좋아하는 선생에게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성격이 좋아진다거나 머리가 점점 발전한다거나 신통력을 가진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게을러질 뿐이었다. 마르둑의 성격도 게을러서 표시 나지 않을 뿐이지, 사실 그리 부드러운 건 아니었다.
 “흘흘흘, 혹시 전에 황자 저하께서 말씀하신 그 우주의 생성 이론을 지칭하는 용어입니까? 사실 우주의 생성에 대해선 많은 이론이 있습니다. 신전에선 여러 신들이 우주와 별을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최근 마법의 세계에선 좀 다른 그럴듯한 이론이 있지요. 태초에 우주는 단지 하나의 점이었습니다.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뭐 사실 점이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냥 존재하는 거였지요. 그러다가 큰 폭발이 일어났고, 우주가 만들어지고 별이 만들어졌고 에너지는 관성을 가지고 흐르게 되었습니다. 이걸 저희 마법 학계에선 빅뱅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태초의 에너지는 마나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었고, 어떤 마법 학파의 근본적인 목적은 그 태초의 에너지를 찾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학파에선 마나보다 더욱 근본적인 그 힘을 에테르라고 합니다만, 밝혀진 건 없습니다.”
 “하아아암······!”
 마르둑은 길게 하품을 했다.
 “잭, 커피 한 잔 타 와라.”
 “황자 저하, 커피 많이 마시면 뼈 녹습니다. 얼마 전 흐느적거리며 찾아온 시종장님 보셨죠? 젊을 적에 커피를 하도 즐겨 마셔서 뼈가 녹아서 그렇답니다.”
 마르둑은 잭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보통 4세의 아이에겐 저런 위협이 통하겠지만, 잭은 정말 자신의 저 서툰 거짓 위협이 마르둑에게 통한다고 여기는 것일까?
 “잭! 나도 한 잔 부탁하네. 역시 황궁의 커피는 질이 좋다니까. 더욱이 자네의 커피 타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네.”
 잭의 불만은 단 한 가지였다. 바깥에 시녀들도 있는데 왜 시종인 자신이 커피까지 타야 하느냐! 이거였다.
 그래도 시키면 하는 게 시종의 임무. 잭은 커피를 가지러 공부하는 방을 나갔다.
 “황자 저하, 한데 혼돈에서 발전하는 우주의 이론을 어디서 본 겁니까? 저도 나름 학식에는 자신이 있습니다만 처음 듣는 용어도 나오더군요. 혼원이란 무엇입니까?”
 선생이 이해할 수 없는 용어는 혼원과 태극이었다. 다른 것이야 마르둑이 이 세계의 말로 그대로 단어로 만들 수 있었지만, 혼원과 태극은 가장 복잡하고 고상한 용어였기 때문에 완벽히 대체할 수가 없었다.
 혼돈에서 질서로 그리고 조화로 나아가는 우주의 법칙을 설명한 용어였다. 그 복잡한 이치를 어찌 간단히 말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게 있습니다.”
 마르둑은 얼버무렸다.
 “뭐,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주는 결국 태초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지금의 질서까지 이어졌습니다. 과거는 중요한 게 아니지요. 현재의 질서를 제대로 파악하고 미래를 연구하는 게 마법사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둑은 마법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 선생은 당연히 마르둑이 마법을 배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르테미어 황가는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의 가문이었으니, 이건 당연했다. 이 혈통은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잭이 커피포트와 찻잔 두 개를 가지고 왔다. 하는 행동은 치기 어렸지만 그래도 섬세함을 가진 시종인지, 그는 아주 기품 있는 시종의 모습으로 찻잔에 커피를 따랐다.
 쪼르르르······!
 검은색으로 은은하게 색다른 향기를 내는 커피였다. 마르둑이 이 커피를 유독 설탕도 없이 좋아하는 이유는, 그 씁쓸한 맛이 차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반 정도는 커피를, 반 정도는 홍차를 즐겨 마셨다.
 “흐음, 역시 황궁의 커피는 그 향이 기가 막히도록 좋군요.”
 “흐흐흐, 당연하죠! 황궁의 마법사분이 직접 커피 원두를 제조하십니다. 다른 곳의 커피가 우리 황궁을 따라올 수는 없죠.”
 잭은 본인이 만든 커피도 아니면서 잘난 체를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기는 했다.
 세상에서 뛰어난 마법사들이 모조리 아르테미어 황궁에 모여 있었다. 이러니 이곳에는 다른 황궁, 왕궁, 영주성에서 볼 수 없는 게 많았다. 게다가 마도제국답게 곳곳이 아름답다. 이런 장소에서 티타임이란, 정말 행운이었다.
 선생은 찻잔과 받침을 함께 들었다. 그리고 찻잔을 한 바퀴 천천히 돌리면서 향기를 음미하며 정확히 수평으로 입으로 가져갔다.
 소리 없이 살짝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받침 위로 찻잔을 놓은 후, 받침을 탁자 위로 내렸다.
 교양 있게, 혹은 기품 있게 차 마시기였다.
 귀족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행동이었다. 여유와 기품, 자신감, 너그러움, 위엄, 이 모든 게 차를 마시는 동작 하나에 깃들어야만 한다.
 반면에 마르둑은······?
 잭은 이 순간 부끄러워서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자신이 저리 기품도 품위도 위엄도 없는 황자를 모신다는 게 사실 조금 민망했다.
 ‘아니지! 황자 저하께서 저러시는 건데 내가 왜 민망해? 난 시종의 본모습을 갖춘, 태어나면서부터 시종이라고.’
 마르둑은 한 손으로 찻잔을 잡고 대충 가져와서, 후루룩 한 모금 마셨다. 게다가 찻잔 옆으로 커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자, 혓바닥으로 그걸 쓸어 올리며 핥았다.
 자세는 또 어떤가?
 허리를 곧게 세워 바른 자세를 유지한 선생과는 다르게, 엉덩이를 앞으로 빼고 등을 뒤로 기댄 완전 푹 퍼진 자세였다.
 “왜?”
 “아닙니다.”
 “잭, 초코 쿠키가 먹고 싶은데.”
 지금은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라 먹는 시간인가? 시작하면서 초코 우유 세 잔을 마시더니 이젠 커피에, 초코 쿠키까지 원한다. 게다가 그걸 함께 즐기는 저 선생은 또 뭔가? 이런 교양 없는 행동을 말려야 할 게 아닌가! 잭은 잠시 선생을 째려봤다.
 ‘하긴······!’
 잭도 금방 수긍했다. 아르테미어 황궁에서 만든 쿠키가 보통 맛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디 화덕에서 구운 바깥의 일반적인 쿠키와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
 잭은 쿠키를 준비하기 위해서 다시 나갔고, 이곳은 공부가 아니라 마치 귀족 자제들의 다과회 같은 분위기였다.
 
 
 
 루인 혼 아르테미어 황제.
 완전한 9클래스에 도달한 마도사 중의 마도사이며, 아르테미어 제국의 주인이었다. 또한 카일라스 제국의 카마쉬 덴 카일라스 라파엘의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했다.
 카일라스 제국은 기사도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상하의 관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충성에 의해서 강력한 황권을 가졌다. 그에 반해서 마법사는 꽤나 자유롭다. 하지만 마법사는 상위 클래스의 마법사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아르테미어 제국의 어떤 마법사도 루인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르테미어 제국은 자유로우면서도 힘의 종속 관계에 얽매였고, 어떻게 보면 카일라스 제국보다 더욱 상하 관계가 분명하며 명확했다.
 마법사들은 감히 아르테미어 황제와 독대하지 못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한 사람의 현자가 마도사 루인 혼 아르테미어 황제와 독대하고 있었다.
 그는 ‘무명의 현자’라고 불린다. 또한 마르둑 혼 아르테미어의 선생이기도 했다.
 아르테미어 황제와 독대하면서도 긴장하지 않는 걸 보면, 이 무명의 현자도 무척 특이한 사람이었다. 아니면 특별하든지!
 “엘린느의 아들은 어떤가?”
 마르둑에 대해서 뭘 묻는 건가? 보통 황제와 독대를 한다면, 이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 후 황제의 의중을 헤아리면서 대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명의 현자는 그냥 본인이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걸 말했다.
 “멍청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많은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그렇게 게으르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는 처음입니다.”
 무명의 현자는 황제의 바로 코앞이 아니라, 카일라스 제국에서 타국의 황자를 욕하는 것처럼 걸쭉한 입담을 자랑했다. 하지만 황제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마음이 단단하고 마도사답게 냉철하며, 사실 마르둑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아니, 마르둑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관심이 없었다!
 무명의 현자는 행동거지가 현자답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이 방면에서 꽤나 유명 인사였다. 그런 사람이 황제의 의중을 간파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치고 빠지는 머리싸움이 시작된다.
 황제는 단번에 스트레이트를 훅 날렸다.
 “그래, 나하고 닮았던가?”
 “글쎄요······! 엘린느 황비 전하를 완전히 빼다 닮았더군요. 커서 여자들 많이 울리게 생겼습니다. 허허허허, 저도 그런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무명의 현자는 황제의 손을 쳐다봤다. 그의 오른손이 무릎을 꾹 힘주어서 쥐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이 미묘한 행동으로 그는 황제가 심적으로 약간 동요하고 있다는 걸 파악했다.
 9클래스의 마도사!
 이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자식을 잡아먹는 파충류보다 더한 냉혈한이 바로 마도사이며 황제였다. 심적인 동요가 거의 없다는 거다.
 이런 강철과도 같은 황제가 동요를 보인다?
 ‘호오······! 뭔가가 있긴 있군. 뭘까, 뭘까? 이거 오랜만에 내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문제가 나타났어.’
 사랑······!
 고금을 막론하고 냉혈한의 강철과도 같은 심장에 꽂을 비수가 될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가장 약하면서도 또한 가장 강력한, 세상의 가장 오묘한 인간의 특징이었다.
 무명의 현자는 아르테미어 제국의 제7황비 엘린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봤다.
 그녀는 서쪽의 카일라스 제국과 동쪽의 아르테미어 제국 사이에 위치한 하라인 왕국 태생이었다. 이 하라인 왕국은 지난 세월 두 제국의 완충제 역할을 한, 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의 왕국이었다.
 ‘카마쉬 덴 카일라스 라파엘······! 도대체 뭐가 있었을까? 크흘흘흘, 사랑이란······ 아무리 강철과 같은 심장을 가진 사내라도 광기에 빠져들게 만들 수 있지. 그래서 신과 황제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곤 하지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될 일인가?’
 무명의 현자는 황제가 약간 노려보자 이 발칙한 자신의 상상과 추리를 그만뒀다. 9클래스의 황제가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름이 마르둑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엘린느와 나의 아들인데 멍청하고 나와 닮지도 않았다! 이런 말인가?”
 아르테미어 황제의 성격인지 아니면 황제의 자리에 있기 때문인지, 그의 질문은 아주 직설적이었다. 하긴 아랫사람에게 전전긍긍 마음을 빙빙 돌려서 질문할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머리 좋기로 유명한 현자였다.
 “헐헐헐헐, 그리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황제 폐하! 마르둑 황자 저하는 게을러서 멍청하고, 엘린느 황비 전하를 거의 90% 닮았습니다. 아직 어려서 황제 폐하와 어디가 닮았는지 제가 알 수는 없습니다. 황제 폐하의 어린 모습을 알고 계시는 선황 폐하라면 또 모를까······!”
 “끄응······!”
 무명의 현자는 아르테미어 황제의 반응에 사실 어떤 의문을 약간 품고 있었다.
 그에겐 여덟 명의 부인이 있었고, 마르둑 황자는 스물한 번째 아들이었다. 사실 마르둑 황자가 그의 친아들인지 아닌지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닐 거였다.
 자그마치 스물한 번째가 아닌가!
 한데 왜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며 물어보는 것일까?
 그가 아무리 현자이지만, 가장 어려운 건 바로 인간의 심리였다. 우주의 운행보다 더욱 복잡한 게 바로 인간의 심리 혹은 정신이었으며, 그것에는 숨겨진 부분이 무척 많았다. 더욱 큰 문제는 그런 완벽히 숨겨진 부분조차 인간의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은근히 미친다는 거였다. 보통 그런 걸 ‘본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혹시 사랑의 삼각관계인가? 아니, 그것보다는 카일라스 황제에 대한 경쟁 심리라고 해야겠지.’
 “그만 나가 보게.”
 “예, 황제 폐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무명의 현자가 나갔다.
 루인 혼 아르테미어 황제는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빠졌다.
 요즘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엘린느의 아들이 과연 나의 아들일까?’
 
 아름다운 엘린느!
 이 대륙에서 하라인 왕국의 엘린느 공주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수식어였다. 간혹 고결한 엘린느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그녀의 미는 고결함을 넘어섰기에 결국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엘린느’라고 불리게 되었다.
 수많은 음유시인들이 그녀의 미모를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수많은 방랑 기사들이 하라인 왕국을 방문했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청혼 혹은 구애의 의미로 장미꽃과 보석을 건넸다.
 아르테미어 황제도, 자신이 붉은색 보석으로 만든 장미꽃을 그녀의 머리 장식으로 꽂아 줬을 때를 아직도 기억했다. 그녀는 정말 말로 어떻게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보석?
 그녀의 미모는 보석보다 더욱 환히 빛났기 때문에 보석이 거추장스럽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특히나 아름다운 엘린느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수줍은 듯 환한 미소였다.
 그리고 엘린느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빌어먹을 카마쉬! 미친놈! 개새끼! 줏대도 없는, 황제 같지도 않은 멍청한 칼잡이!’
 카일라스 제국의 카마쉬 황제와 엘린느의 일화는 아직도 유명했다. 지금도 음유시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다. 아르테미어 제국의 황궁 근처에선 그 노래를 부르지 못했지만 말이다.
 
 기사 카마쉬, 결국 아름다운 엘린느에게 무릎을 꿇었네
 그는 황제의 옷을 벗고, 검을 무릎 위에 올렸네
 그는 맹세를 했다네
 가 검에 맹세한 삶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오
 죽음의 강을 건너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오
 기사 카마쉬, 결국 아름다운 엘린느에게 고백했다네
 기사는 그녀를 사랑했네
 기사는 그녀를 사랑했네
 
 이 노래로 만들어진 연극을 보면 기가 막혔다. 후반부에서 아르테미어 황제가 엘린느를 강제로 데려가는 사악한 사랑의 방해꾼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떠나기 전 엘린느는 기사 카마쉬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노라고 고백하는데······! 그녀의 마음은 처음부터 유일했다고 고백하는데!
 이건 두 명의 황제와 한 명의 공주를 등장시킨, 각색된 연출의 연극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아르테미어 황제는 이것을 그냥 연극이라고만 치부할 순 없었다. 그러기엔 그의 마음이 용납하지 못했다.
 그는 황제다!
 마도사이다!
 그가 가진 것은, 모든 점에서 온전히 그의 것이어야만 했다.
 2
 
 
 
 
 
 
 
 
 황궁의 환경은 마르둑이 조용히 수련하기에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항상 시종인 잭이나 유모가 붙어 있었고, 그 시간을 제외하곤 어머니인 엘린느 황비와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것도 아니면 두 명의 호위 검사가 붙어 있든지.
 아르테미어 제국은 마법사가 세운 마도제국이기 때문에 기사가 없다. 검을 사용하더라도 절대로 기사라고 부르지 않고 검사라고 불렀다.
 이건 기사를 무시하고 마법사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제국의 방침이었다. 게다가 기사의 나라인 카일라스 제국과 적대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명칭이었다.
 그렇다고 검사를 아주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기사를 무시하는 거였다. 이건 바로 결국 기사들이 외치는 ‘기사도’를 무시하는 정책이었다.
 뭐, 이런 황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어쨌든 아르테미어 제국의 황궁에서 ‘기사’라는 단어는 금지어였다.
 “잭, 우리 황궁에 기사는 없어?”
 “쿨럭! 황, 황자 저하!”
 “뭐야, 잭! 지금 감히 내 귀에다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냐?”
 잭은 속으로 지금 상황을 짐작했다.
 ‘당했다.’
 잭은 마르둑이 오늘 하루 이것을 핑계로 자신을 압박할 거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머리싸움에서 며칠 정도 잭은 마르둑을 잘 압박해서 선생에게 데려갔다. 한데 오늘 잠시 방심한 틈에 당해 버린 거였다.
 “황궁에서 시종이 뛰거나 크게 소리치는 건 안 되는 거 아닌가? 아잉, 어마마마께 물어봐야겠다.”
 “마르둑 황자 저하! 헤헤헤헤, 어디 조용한 곳에라도 갈까요?”
 “아니, 그럴 필욘 없고. 벌을 받아야 하니까 넌 여기서 저녁까지 꼼짝 말고 손들고 있어. 한 발자국만 움직였단 봐!”
 마르둑은 잭에게 경고한 후 어디 조용한 곳을 찾아 나섰다. 새로운 장소가 필요했다. 잭도,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최초의 비밀 장소.
 ‘지금쯤이면 단전을 개방해야 정상이잖아! 바빠서 도통 수련할 짬이 없어.’
 무공의 수련이란 한번에 훅 몰아쳐서 한다고 발전하는 게 아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수련해야 발전한다. 그래서 단련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하룻밤 만에 강해지는 원리는 절대로! 없었다!
 기연?
 그거 믿고 날뛰다가 죽은 놈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공만 몇 갑자 가진다고 무공의 고수가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힘센 바보 아이가 되는 거라서 상대하기 더 쉬운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꾸준한 단련만이 강해지는 비결이다. 두들기고 또 두들겨서 단단하게 만들어야 명검이 되는 거였다.
 한데 꾸준히 무공을 수련할 시간이 없으니.
 그래서 게으름을 부릴 시간도 없었다. 남이 보기에는 마르둑은, 이미 충분히 게으르지만.
 ‘어디가 좋을까?’
 이미 하라궁의 창고란 창고는 모조리 섭렵했다. 궁이 아무리 복잡하고 넓지만 이젠 더 이상 하라궁 내에선 적당히 숨을 곳이 없었다.
 하라궁의 담을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마르둑은 망설였다. 이곳의 담을 넘어가는 건 엘린느가 명한 금지 사항이었다. 게다가 잭도 없이 맘대로 황궁 내를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도 드물었고, 그는 황궁의 구조도 제대로 몰랐다.
 ‘가출이라도 해 버려야 하나? 아니지······!’
 고아에 거지 같은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마르둑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것저것 하라고 시키는 게 많아 귀찮아서 그렇지 사실 여기만큼 몸이 편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마르둑은 다시 궁 안으로 들어갔다.
 네 살의 아이가 어른처럼 거만하게 팔자걸음으로 걸었지만, 지나가다 간혹 보이는 시녀들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사실 하라궁에선 인원수가 극히 부족해서, 지금처럼 바쁜 시간에는 복도에서 마주칠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흐흐흐흐, 잭도 내가 설마 방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하겠지? 이게 바로 등잔 밑이 어둡다고 말하는 거겠지.’
 마르둑은 수련할 생각보단 우선 푹신한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어기적거리며 일어나서 바닥에 정좌했다.
 마황공!
 최고이기 때문에 최악인 무공이었다. 재능 있는 사람이 평생 수련해서 겨우 3성을 익힐 수 있는 엄청난 무공이었기 때문에, 최고이면서도 최악이고, 최강이었다.
 그의 현재 경지는 1성도 아닌, 기초 중에서도 기초인 기감을 느끼는 단계였다.
 보통 몇 번의 전생을 각성하면서 영혼에 각인된 마황공으로 인하여 기감을 느끼는 데 하루를 소모한 후 다음 날부터 바로 마황공의 수련에 들어갔었다. 한데 이번에는 아무리 게으르다고 하더라도, 마르둑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마나를 느낀다!
 기라는 게 마치 물속에 있는 것 같다면, 마나는 사막의 바람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한없이 가볍고 계속 움직이는 바람을 무슨 수로 붙잡을 것인가!
 분명히 방법이 있기는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세계에 마법사가 있을 리가 없다. 이 기운을 붙잡아서 사용하지 못한다면 마법사가 무슨 수로 마나를 이용해서 마법을 부릴 수가 있겠는가.
 ‘마법 중에서 마나의 수련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수련법을······ 마황공에 적용해야 해. 그래야 시작이라도 할 수 있어!’
 하지만 마법을 무슨 수로 배워야 할까.
 마르둑이 살펴본 바로 이곳에서 마법은, 무공보다 더욱 비밀스럽게 전승되는 힘이었다. 도서관에 난무한 책들은 그냥 마법의 현상에 대한 설명일 뿐이지 수련의 방법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마르둑은 황제에게서 아르테미어 황가의 마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아직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에게서 황가의 마법을 배우겠는가.
 결국 혼자서 마나를 연구하고 수련해야 한다는 거였다.
 못 할 건 뭔가?
 어차피 최초에 마나를 발견하고 마법을 만든 사람도 지금의 마르둑처럼 혼자서 연구하고 수련했을 거였다.
 하지만 그는 마르둑과는 비교를 할 수 없는 천재였던 게 분명했다. 아니면 신화대로 신이 가르친 힘일 수도 있었다.
 “에잇!”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포기가 빠른 게 아니라, 마르둑은 그동안 오랜 시간 마황공을 수련한 경험으로 이렇게는 확실히 안된다고 판단했다.
 마르둑은 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나왔다.
 게으른 그였지만 하려고만 한다면 폭풍처럼 몰아쳐서 할 수 있다.
 “잭! 잭! 잭! 잭!”
 마르둑이 잭을 불렀다.
 바로 그때 나타나라는 잭은 나타나지 않고 천상에서 내려온 것 같은, 궁장의 미부인 한 명이 나타났다.
 “허억! 어, 어, 어머니가 무슨 일이세요?”
 “어마마마!”
 “예에, 그러니까 어마마마께선 여기에 어쩐 일이시옵니까?”
 마르둑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팔뚝에 두드러기가 나고 손가락에 발가락까지 오그라질 것만 같았다.
 아무리 황궁의 예법이지만 말투가 너무 징그럽지 않은가. 이것도 어색하고 저것도 어색했다. ‘엄마!’라고 부르는 게 정상이었지만, 마르둑에겐 애교를 부리면서 그렇게 부르는 것보단 차라리 어마마마라는 단어가 덜 어색했다. 단지 이 황궁의 예법에 따른 말투는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잭이 식당 옆에서 벌을 서고 있더구나.”
 “크흠, 황궁의 법도에 어긋나게 크게 소리를 지르기에 제가 벌을 좀 줬사옵니다.”
 “그래, 선생께서 오실 시간인데 어디를 가는 게냐?”
 “에······ 그러니까, 잭을 데리러 가옵니다. 아무래도 수업을 하려면 시종이 있어야 할 듯해서······!”
 “그래? 그럼 어서 가 보도록 해라.”
 엘린느는 두 명의 시녀를 거느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선생, 마나란 무엇입니까?”
 황궁의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보다, 그래도 현자에게 묻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서 시간도 절약할 겸해서 마르둑은 지금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허허허허, 마르둑 황자 저하, 마나에 대해서 알기에는 시기가 너무 이릅니다. 게다가 마법에 대해선 제가 가르쳐 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어허?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쩨쩨하게 왜 이러십니까?”
 펍에 맥주라도 한잔 마시러 온 용병 같은 마르둑의 말투에, 잭은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도대체 마르둑이 저런 이상한 흉내를 어디서 배웠는지 잭은 의문이었다.
 “허허허허, 아르테미어 황가는 마법보단 마나의 이해와 수련법으로 더욱 정평이 났는데 도대체 제게서 뭘 얻어먹으려고 이러십니까? 전 현자입니다! 평범한 마법사보단 낫지만, 마도사에 오르지 못하고 낙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기웃거리다 보니 아는 게 많아지고, 세간에선 그런 사람을 현자라고 부르지요.”
 마르둑은 선생의 말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마법과 마나의 수련은 명확히 다르게 경계가 있다는 거였다.
 하긴 사실 마법사만 마나를 익히는 게 아니다. 기사도 마법사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마나를 익히기 때문에 아우라를 내뿜고 블레이드를 사용하는 거였다.
 정말 특별하게 정령사라는 자들도 있었다.
 주술사도 정말 간혹 있었고.
 이들이 제각각 다른 힘을 익히겠는가? 아니다! 모두 마나를 익힌다. 이 세계엔 마나가 유일한 기운이었다.
 이러니 사실 마법보다 더욱 중요하고 근본적인 게 마나의 수련법이었다. 이건 가장 비밀스럽게 전승되는 기술이었다. 이러니 무명의 현자가 어찌 황자라도 마르둑에게 마나에 대해서 일언반구라도 전할 수가 있겠는가.
 “황궁 도서관에 가면 많은 책이 있지 않습니까! 글도 읽으시면서. 모든 길은 책에 있습니다.”
 마르둑이 계속 요구하려고 하자 무명의 현자는 이렇게 거절하면서 다시 완강히 마르둑의 무언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런데 내 진작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선생은 왜 이름을 버렸습니까?”
 “글쎄요. 아마, 부끄러워서 제 이름을 지운 모양입니다.”
 “그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관성적인 흐름을 가진 마나를 어찌 제 몸에 머물 수 있게 합니까?”
 “흘흘흘흘, 글쎄 말입니다. 그게 마나 수련의 기초이자 기본이며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어떤 마법사는 마나석과 마법진을 이용하고, 또 어떤 마법사는 명상과 정신력을 이용합니다. 검사는 검술의 수련을 이용한다고 하더군요. 모든 마법사나 검사의 학파 혹은 가문마다 제각각의 방식이 있습니다.”
 중요한 비밀처럼 들리면서도 사실 알고 보면 그냥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결국 비전이기 때문에 마나의 수련에 대해선 조금도 말해 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각 마법사마다 마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것 역시 마나 수련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니 무명의 현자가 입을 꾹 다무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황자의 스승이 아니다. 단지 일반적인 지식과 예법을 가르치는 선생일 뿐이었다. 마르둑도 이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를 압박하지는 못했다. 뭐, 4세 아이의 모습으로 압박해 봤자 얼마나 큰 위협이 되겠냐마는.
 “크흘흘흘, 아르테미어 제국의 역사가 2,000년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마법사들이 황궁의 도서관을 이용했지요.”
 “쯧······!”
 마르둑은 혀를 찼다.
 도서관에 마법과 마나의 서적이 있어 봤자 저잣거리에서 파는 무공서 정도일 것이다. 진짜 누구나 알 수 있는 기초이거나 아니면 엉터리일 게 분명했다.
 간혹 진짜가 나오기도 하지만, 이게 바로 기연인 거다. 기연은 아무나에게 찾아오나?
 게다가 마법사처럼 냉철하고 이기적인 자들이 허투루 심득을 도서관 따위에 남겨 놓을 리가 없잖은가!
 ‘아니지! 마법사 중엔 좀 미친 놈들도 있다니까 혹시······ 모르잖아!’
 “잭, 준비해라. 황궁 도서관으로 가겠다.”
 “흘흘흘, 나중에 가시지요. 저도 돈 받고 하는 일인지라 하루 분량 정도는 채워야 됩니다. 그보다, 잭! 커피 한 잔 더, 그리고 초코 쿠키 좀 부탁하네.”
 무명의 현자는 이제 공공연히 하라궁의 재산을 탐내고 잭을 마치 자신의 시종인 것처럼 부려 먹는다.
 
 
 
 루인 혼 아르테미어 황제는 황후와 일곱 명의 황비를 거느렸고, 마르둑을 포함해서 황자만 스물한 명이었다. 제국의 역사에서 이 정도로 많은 황자를 가진 황제는 그동안 없었다.
 당연히 마르둑은 가장 마지막인 21황자였다. 또한 힘이 가장 약하다. 본인도 마찬가지지만 세력도 없었고 엘린느 황비의 힘도 약했다. 엘린느 황비가 마르둑을 하라궁 바깥으로 나돌지 못하게 하는 것도 당연했다.
 제국에 본가가 있지 않기 때문에 어디 크게 도움을 구할 데도 마땅히 없었다. 그녀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적은 황후와 제1황비였다. 1황자와 2황자의 모친이었기 때문이다. 황태자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두 황자였으며, 마법의 재능도 뛰어났다.
 이런데 이 두 명의 여자가 엘린느를 가장 꺼리는 건 무척 이상했다. 질투일까? 엘린느는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나 아름다웠고, 황비들 중에서 가장 젊었다.
 ‘아아, 폐하께선 왜 한 번도 마르둑을 보러 오시지 않는 것일까? 천신의 은총까지 받은 아이이건만.’
 엘린느는 아직까지 소녀와 같은 감성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여전히 공주였다. 제국 황비의 자리에 올랐으나, 독한 황궁 여인들의 암투에는 어울리지 않는 감성을 가진 여자였다.
 공주는 꿈을 꾼다.
 사악한 드래곤에게 사로잡힌 자신을 구하러 오는 멋진 영웅을 꿈꾼다.
 그 멋진 영웅을 만났고 결혼까지 했건만, 그 후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동화가 아니었다. 아마도 이래서 동화책에서도 그 후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거다.
 매일 밤마다 그녀는 홀로 잠들면서, 슬퍼졌다. 매일 거울을 보면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사랑을 구걸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아르테미어 황궁에 온 지가 벌써 5년이 되었지만, 이곳은 하라인 왕궁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답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무시하고 적대했다.
 ‘뭐가 그리도 바쁘실까?’
 엘린느 황비가 쉬고 있는 응접실의 문이 급박하게 열렸다. 하라궁의 시녀장이기도 하며 잭의 어머니이고 마르둑의 유모인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급하게 걸어왔다.
 “황비마마, 황후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황후는 엘린느보다 나이도 제법 많았고, 엘린느를 싫어했기 때문에 사악하고 엄한 계모와도 같았다. 그런 여자가 찾아왔다는데 엘린느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표정을 고쳤다. 제국에 와서 그녀가 가장 열심히 연습한 게 바로 표정 관리였다. 이건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여기서 이리저리 치이고 살다 보니 본능적으로 표정을 관리하게 되었다.
 황후가 들어왔다.
 나이는 마흔 정도로 보인다. 늘씬하고 큰 키의 미녀였지만 얼굴이 표독스럽게 보이는 게 한 가지 흠이었다. 아마 성정 역시 그럴 것이었다.
 “황후 폐하.”
 엘린느는 공경하는 태도로 인사를 했고, 레즈네르 황후는 오만하게 그녀를 위에서 힐끔 내려다보고는 말없이 맞은편에 앉았다.
 황후는 이렇게 불쑥 엘린느를 찾아오곤 했다. 아마도 엘린느에게 불안과 공포라도 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간혹 이유 없이 찾아오는 황후의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엘린느.”
 “예, 황후 폐하.”
 “차가 별로 맛이 없구나. 이렇게 질 떨어지는 차를 도대체 어디서 구했느냐?”
 엘린느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모든 걸 하라궁의 집사라고 할 수 있는 시종장이 알아서 하는데 말이다.
 시종장과 시녀장은 하라인 왕국에 있을 때부터 엘린느와 함께했고, 제국에 올 때도 그녀를 모시기 위해서 함께 왔다. 궁 안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엘린느에게는 유일한 휴식처였으며 가장 믿을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구하신 차와 겨우 이것을, 어찌 비교를 하겠사옵니까.”
 엘린느는 시종장을 탓하지도 않고 자신을 낮추면서 잘 넘어갔다.
 황궁은 무서운 곳이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작은 꼬투리라도 잡혀선 곤란했다. 엘린느에게 여긴 맘 편히 쉬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
 특히나 질투심 강하고 권력을 소유한 황후의 앞에선 입을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그녀를 차라리 마주치지 않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황궁 자체가 황후의 집인데 엘린느가 뭘 어쩌겠는가. 하라궁의 문을 걸어 잠글 수도 없고 말이다.
 “엘린느, 듣자 하니 21황자가 공부를 한다더구나. 현자가 궁을 들락거린다고 하던데. 황궁의 선생을 놔두고 외부의 현자를 초청하다니, 어찌 된 일이냐?”
 이건 참으로 애매한 문제였다. 황제도 황후도 마르둑에겐 관심도 없었고, 엘린느 맘대로 황궁의 선생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무명의 현자를 초청하여 마르둑을 교육시켰는데, 황후는 이걸 어디서 들었는지 꼬투리를 잡고 나섰다.
 황후의 치켜뜬 눈매가 사나웠다.
 엘린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묵언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일관했다. 속으로는 황제를 탓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분명히 황후가 중간에서 큰 수작을 부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겉으로 표현할 용기도 능력도 없었다.
 
 “마귀할멈이 왔었다고?”
 “쿨럭! 황, 황자 저하, 누가 듣겠습니다!”
 “잭, 내가 말했지? 황궁에서 소리 지르지 말라고. 그리고 사람도 없어서 휑한 궁내인데 듣기는 누가 듣는다고 그래.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다고. 너 빼고!”
 퍼억!
 마르둑이 발을 차서 올렸고, 그의 짧은 다리는 수직으로 올라가서 정확히 잭의 엉덩이 사이에 박혔다.
 “응? 너 빼고! 귀찮아서 아주 죽겠어.”
 “마르둑 황자 저하, 제가 없으면 도서관에서 누가 책을 빌려 옵니까. 시종이 필요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옵니다. 제가 바로 황자 저하의 손과 발이며 눈과 귀인 게 아니겠습니까.”
 “말만 잘하지.”
 “그리고 아무 데서나 그렇게 다리를 올리시면 안 됩니다.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큰일 납니다. 여긴 아르테미어 제국의 황궁입니다.”
 마법사는 고상하다. 아르테미어 황가는 가장 고상한 마법사의 가문이었고, 제국의 실세들도 모조리 마법사들이었다. 이런 곳에서 고상하지 못한 행동은 분명히 해가 될 것이다.
 특히 이 행동이 황제의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정말 큰일이 날 터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 황제에겐 아들이 스물한 명이나 있으니 한 명 정도 없어진다고 황가에 무슨 큰 문제가 생기겠는가. 사실 너무 많아서 처치 곤란일 텐데 말이다.
 “하긴 그렇지. 어떤 놈이 마법으로 여길 살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예!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그게 가능한 거야?”
 “예? 그거야 저도 잘 모르지 않겠습니까? 마법사 가문의 자손이신 황자 저하께서 잘 아시잖습니까.”
 “뭐야? 아르테미어 황가가 겨우 마법사 가문이라는 거야?”
 “그, 그게 아니라······. 하여튼 어서 달려갔다가 오겠습니다.”
 잭은 계속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마르둑을 피해서 재빨리 바깥으로 나갔다. 마르둑이 황궁 도서관에서 마나에 관한 책을 빌려 오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마르둑은 무명의 현자를 상대로 일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고 마귀할멈이 여기에 왔기 때문에, 기분이 제법 신경질적이었다.
 ‘그 노인네, 분명히 뭔가가 있는데. 보통 이런 경우 이름을 숨긴 은거 기인 아닌가?’
 마르둑은 선생이라고 부르는 ‘무명의 현자’에게 약간의 의혹을 품고 있었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나?
 ‘헛! 마귀할멈이다!’
 재수 없게 궁을 나오는 황후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몇 개월 전에도 이렇게 마주쳤고, 마르둑은 무척 기분이 더러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후의 저 눈빛이!
 “엘린느만 꼭 닮았구나.”
 황후는 사납게 마르둑을 노려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못된 년이 맘속으로 사악한 일을 꾸미는 것처럼 말이다. 번들거리는 게 뱀 같았다. 먹이를 노리는 뱀.
 저런 눈빛 때문에 마르둑은 더욱 기분이 더러워졌다.
 황제의 관심도 없고, 스물한 번째나 되는 계승 서열의 마르둑이었다. 그는 황후의 저런 적대적인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이 쭉 찢어진 게 못된 심보를 타고났구나.’
 마르둑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황후를 향해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황후는 ‘흥!’ 코웃음을 치면서 휙 지나갔다.
 
 마나는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다.
 마나는 생명의 근원이다.
 마나는 영혼의 안식처다.
 마나는 자연의 근본적 형태다.
 마나는······!
 마나는······!
 “그래서! 마법사나 기사는 마나를 어떻게 수련하냐고!”
 마르둑은 보던 책을 던져 버렸다.
 모조리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내용뿐,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내용은 거의 없었다. 아마 그런 내용은 비전의 마법서에나 있을 거였다.
 하긴 도서관에 마법이나 검술, 마나의 수련에 대한 그런 중요한 책이 한 권 정도는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마르둑의 잘못이었다. 사실은 그런 게 있을 리 없다는 걸 무척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러면서도 마르둑은 한 가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연······! 자신에게 기연이 없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선생의 말대로 2,000년을 이어 오는 제국의 역사이니 마나 수련에 관한 책 한 권 정도는 있으리라 여겼다.
 마르둑은 마지막 남은 한 권의 책을 들었다.
 이곳은 종이가 크게 발달하지 못한 것인지 꽤 두꺼웠고, 그런 이유로 책의 두께도 상당했다. 한데 마지막에 든 책은 일기도 아니면서 책의 두께가 무척 얇았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제목을 쳐다보니 볼텍스에 의한 마나 수련의 고찰, 이런 제목이었다.
 마나의 어쩌고저쩌고, 혹은 우주나 자연에 대한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고찰이 아니다! 마르둑은 처음으로 책의 제목에서 ‘마나 수련’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나에 대해서 좀 더 파악할 길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면 기를 사용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마황공을 이용해서 마나로 단전을 개방할 희망이 보일 거였다.
 ‘좋았어!’
 마르둑은 표지를 넘겼다. 그러자 피로 쓴 걸로 보이는 싸늘한 경고가 있었다.
 
 볼텍스를 사용하여 함부로 마나를 수련하지 마라! 피가 역류하여 죽을 가능성이 높다! 이건 완성된 마나의 수련법이 아니라 단지 가정을 위한 이론이며, 더 나은 수련법을 찾기 위한 고찰이다.
 이미 마나의 수련을 시작한 마법사는 볼텍스를 시도할 수 없다! 명심하라, 이 볼텍스는 아직 단 한차례도 증명되지 않은 나의 관념적인 고찰일 뿐이다.
 
 “허······?”
 시도하지 말라고 하는데, 경고문은 아주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실 이 책은 제국의 황궁 도서관에서 유명했다. 마르둑이 마법사 수업을 받지 않아서 아직 모를 뿐이었다.
 황궁에서만 유명한가?
 다른 마법사의 영지 도서관에도 한 권 정도 있으며, 이 고찰을 이용하여 실험한 기술까지 있었다. 한때 이 고찰을 통해서 보다 효율적인 마나의 수련법을 찾기 위해서 마법사들이 노력하던 때가 있었다. 결론은, 모두 실패였지만 말이다.
 볼텍스는 소용돌이나 회오리, 혹은 와륜을 일컫는다. 마나에 대해서는 소용돌이치는 흐름을 말하는데, 간혹 어떤 지역에서 이런 특별한 마나의 흐름이 발생했다.
 마나는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우주의 운행 원리나 자연의 어떤 법칙에 의해서, 정해진 원칙대로 흘러간다. 물론 마나란 너무 신비로워서 어떤 마법사도 모든 원칙을 알지는 못했다.
 바다나 호수의 소용돌이처럼 몰려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기도 했고, 회오리바람처럼 모여서 거세게 변하기도 했다. 볼텍스는 이 마나의 현상을 처음 연구했던 어떤 마법사의 고찰이었다.
 더 강한 마나를 가지는 것! 모든 마법사의 소망이자 고뇌이지 않은가!
 마법사들이 볼텍스를 연구하고 실험한 게 당연했다. 그러나 심장의 혈류가 역행하고 피를 토하거나 심장이 기능을 멈추거나, 인체의 마나가 모조리 심장으로 몰렸다. 폐인이 되었다. 그 후로 마법사 중에서 어느 누구도 볼텍스를 연구하지 않았다.
 이런 위험한 책이, 마나에 대해서도 마법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마르둑에게 들어왔다. 이건 분명히 신의 농간일 것이다.
 마르둑은 ‘훗!’ 하며 코웃음을 치고 첫 장을 넘겼다. 아마 이 책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절대로 내용을 보지 않았을 테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볼텍스는 바람의 소용돌이를 의미하며, 여기서는 마나의 강력한 와류 현상을 일컫는다. 이 현상은 마나의 어떤 현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마나의 힘을 나타낸다.
 이것을 마나의 수련에 적용할 수만 있다면, 가장 강력한 마나의 힘을 가진 마법사가 될 수 있다. 이것만 있다면 겨우 3클래스의 마법사라도 어쩌면 9클래스의 마법을 힘으로 누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이런 볼텍스 현상을 고찰하는 데 의의를 둔다.
 
 마르둑은 인내했다. 원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았지만, 참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참고로, 이 책은 매우 얇았다.
 다음 장에선 당연히 자연에서 일어나는 마나의 볼텍스 현상의 관찰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어떤 지역에서 이런 현상이 관찰되며 그 원인으로 어떤 것이 ‘짐작’되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런 내용들이 간략하게 기술되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
 마르둑이 원하던 바로 그것! 관성을 가지고 계속 흘러가는 마나를 과연 어떻게 수련하는가!
 
 과연 이 볼텍스의 현상을 어떻게 적용하여 마나를 수련할 것인가?
 마나와 가장 밀접한 장소가 심장이다. 그래서 마법사는 명상에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심장으로 마나를 수련한다. 그러나 볼텍스를 위해선 심장이 아니라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만 할 것이다. 심장은 볼텍스에는 절대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라.
 후대의 마법사들이여!
 볼텍스를 완성하라!
 가장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을 것이다!
 
 끝이다.
 마르둑은 다시 이 책마저 던졌다. 정말 결정적인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러니까! 심장으로 마나를 어떻게 수련하는데?”
 사실 이걸 알기 위해선 마나의 복잡한 원리를 알아야만 했다. 마법사들은 이것을 마나학이라고, 하나의 방대하고 복잡한 학문으로 취급한다.
 ‘심장이 마나와 가장 밀접하단 말이지?’
 이해는 간다.
 기와 가장 밀접한 장소는 바로 단전이다. 그래서 무공의 시작은 바로 단전의 개방이었다.
 마나는 기와 달랐다. 당연히 특성도 다를 것이고, 그래서 심장과 깊은 관련을 가진 모양이었다.
 한데 마황공을 익히기 위해선 단전을 개방해야 한다. 심장이 아니라 단전이었다.
 겨우 이 사실 하나를 알아서, 마르둑은 마나의 수련을 마황공에 적용할 수는 없었다. 좀 더 방대하고 깊은 지식이 필요했다.
 ‘볼텍스란 말이지······!’
 심장이 아니라 다른 장소가 필요한 마나의 수련이라고 했다. 마르둑은 이 볼텍스가 어떤 건지도 모르고, 유일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볼텍스에 흥미를 느꼈다.
 강력한 소용돌이를 생각하며 마르둑은 용권풍이라고도 불리는 사막의 회오리바람을 떠올렸다. 수직으로 하늘 높이 솟구쳐서 사막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날려 버리는 거대한 바람의 기둥.
 ‘흐음, 그런 운용 방식이 있기는 한데, 가능하기는 할까? 그런데 마법사는 심장으로 마나를 어떻게 수련하는 거지? 단전과 심장은 분명히 다를 텐데, 기와 마나가 완전히 다른 종류이기 때문인가?’
 단전은 기를 담는 그릇과 같다. 한데 심장은 기운의 통로인 혈이 아니니 그릇이 될 수 없다. 마황공은 단전을 중심으로 익히는 수련법이었으니 심장에 담는 마나로 단전을 개방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이런 생각을 진행하다가, 마르둑은 한 가지를 더 생각했다.
 ‘마법사는 심장으로 마나를 수련한다고 치자. 그럼 기사라는 놈들은 마나를 어떻게 익히는 거야? 그들도 블레이드라는 걸 사용한다니 분명히 마나의 수련법을 가지고 있을 거 아냐. 심장이 아니라······ 육체로? 흐음······!’
 마나!
 무척 흥미로운 놈이었다.
 ‘이거 오랜만에 불타오르는데.’
 처음 마황공을 익히기 위해서 몇 번 각성했을 그 의욕적이던 당시가 떠올랐다. 아마 1,000년 정도는 마황공을 완성한다면 신과 같은 힘이라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마르둑도 열성적으로 수련을 했다.
 하지만 신과 같은 힘은 개뿔······! 완성에 2,000년이 걸릴 정도로 수련하기는 엄청나게 어려웠지만 실상 무공만 놓고 보자면 그리 강력하진 않았다. 그랬다면 그는 전생에서 벌써 몇 번이나 무림의 황제가 되었을 거지만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조용히 게으른 당나귀처럼 지냈다.
 마나와 마황공!
 간혹 마황공이 기와 너무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수련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갑작스레 마황공이 마나와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흐음, 그러니까 전생은 준비 과정이었단 말이지? 도대체 이 마황공을 만든 놈이 누군지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네. 어떤 미친놈인지!’
 만약 마황공을 만든 사람도 그것을 익혔다면, 그 사람 역시 계속 전생을 각성하면서 마황공을 익히고 있을 게 아닌가. 마르둑이 마황공과 마나의 관계로 이 세계에 태어났다면, 그 사람도 여기 어딘가에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마르둑은 평생 마황공을 수련하는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휴우······! 머리 아프군.”
 갑자기 생각할 게 더럽게 많아졌다. 근본적으로 나태한 마르둑에게 생각할 게 많다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재미라도 있어야지, 재미는 없고 골치만 아플 듯하니 더욱 꺼려졌다.
 “아, 진짜! 나도 몰라! 해 보고, 만약 안되면 말고!”
 
 
 
 카일라스 제국.
 카마쉬 덴 카일라스 라파엘 황제는 고심했다. 고심이란 그와 상성이 맞지 않지만, 중대한 문제는 그가 고심하도록 짓눌렀다.
 그를 모시는 늙은 시종만 전전긍긍이었다. 이 늙은이는 오늘도 피가 튀지는 않을까, 황제가 성나서 아무나 칼로 목을 베진 않을까, 항상 걱정이었다.
 얼마 전에는 머큐리의 대신관이 갑자기 나타나서 황제의 어떤 분노가 유야무야 넘어갔다. 한데 왠지 오늘도 전과 같은 광기를 닮은 분위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황제와 카일라스 제국의 전략가 카라만 공작 그리고 황제의 검인 에쉬람 공작, 머큐리의 대신관이라는 늙은이가 다시 모였다. 그나마 대전 회의보다는 좀 나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늙은 시종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엘린느 7황비의 아들이 마르둑이라고 합니다. 이상하게도 아르테미어 황제의 관심이 전혀 없는 모양입니다. 궁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서 찾는 데 좀 애를 먹었습니다.”
 카라만 공작이 말했다. 머리 나쁜 기사가 대부분인 카일라스 제국의 황궁에서 유일하게 머리가 좋은, 전략·전술의 전문가인 사람이다. 카라만이 정보를 다루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엘린느······?”
 카일라스 황제가 중얼거렸다. 애틋하게, 그러나 뭔가 깊은 분노도 느껴지는 지루한 음성이어서, 광기에 사람의 뒷골을 서게 만들었다. 물론 이건 차를 따르고 있는 늙은 시종만의 느낌이었다.
 “머큐리의 대신관이여, 11신의 대신전에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상대는 아르테미어 제국이다! 그대들은 설마······ 두 제국의 싸움이라도 부추기려는 것인가?”
 카마쉬는 평생 검만 수련한 기사였지만 절대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멍청했다면 10년 전, 황궁을 피로 물들이며 황제의 권좌를 차지하지도 못했을 거였다.
 물론 이건 그의 머리가 좋기 때문이 아니라, 동물적인 본능으로 이런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를 오래 모신 늙은 시종이 느끼는 광기는 아마도 황제의 이런 야수적인 본능이었을 거다.
 황제는 정말 야수처럼 눈빛을 번들거리면서 늙은 대신관을 노려봤다. 문제가 생긴다면 아무리 대신관이라도 이 자리에서 바로 목을 벨 인물이 카마쉬 덴 카일라스 라파엘 황제였다. 그러나 신을 믿는 신관은 이런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카일라스 황제 폐하! 이 세계에 닥칠 위협을, 모든 신들의 검인 카일라스 황제 폐하께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전 단지 신의 전령이며 신탁을 알리는 머큐리의 대신관일 뿐이옵니다. 이 정도면······ 제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군요.”
 “크하하하하, 그런가? 하면 내 좀 더 쉬운 방법을 알려 주겠네. 지금 당장 아르테미어 제국으로 달려가서 루인 황제에게 고하게! 그의 마지막 아들인 마르둑이 열두 번째 파괴의 신이며, 황제의 심장에 칼을 꽂고 아르테미어 제국을 파괴할 운명이라고 말일세. 쉬운 일을 놓아두고 왜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가, 그대는?”
 카일라스 황제는 본래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이 많고 그 후에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하니 지금 그의 말은 분명히 머큐리의 대신관을 비꼬는 거였다.
 “카일라스 황제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현재 대신전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합니다. 신탁이 내려오지 않은 지가 2,000 년입니다. 과연 아르테미어 황제가 제 말을 믿겠습니까? 전 진심으로 두렵습니다! 11신들이 두려워한 열두 번째 신이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카라만 공작!”
 “예, 황제 폐하.”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아 참, 대신관! 만약 아르테미어 제국과 전쟁이 일어난다면 대신전의 성기사단도 본 제국을 도와주겠지?”
 “그건······!”
 성기사단이라고 해 봐야 지금은 유명무실이었다. 신전 자체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데 성기사단이라고 무력이 강하겠는가. 모두 두 제국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다.
 2,000년이다!
 이 긴 시간 동안 카일라스 제국과 아르테미어 제국은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고 적대하면서도 오랜 역사를 유지했다.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신의 가호가······?
 이런 말도 옛말이 되었다. 더 이상 신전의 영향력도 없고, 신의 허락을 얻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형식적인 전통으로 전락한 마당에! 어느 누가 신의 가호를 찾겠는가!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은 없었다. 단지 겨우 신의 그림자만이 신관들을 지켜 주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대신전의 성기사단에서도 출동할 것이옵니다. 그것이 신의 일이라면!”
 “그래, 카라만 공작,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카라만 공작은 속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그는 전략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군주의 믿음 없이 무슨 전략을 내놓을 수가 있겠는가. 설령 그것이 좋다고 치더라도, 군주의 믿음이 없다면 무용일 뿐이었다.
 대답을 하기는 해야 할 텐데,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신에게 이롭기보단 해로울 게 분명했다.
 “우선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머큐리의 대신관이 열두 번째 천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아직 확정적인 것은 없으니, 우리 제국에서 먼저 움직일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카라만 공작의 말은 대신관의 말을 정확히 믿을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러니 대신관의 말이 확정적이라면, 그제야 생각하고 움직일 필요가 있다는 거였다.
 결국 이건 카라만 공작이 다시 대신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말이었다.
 “대신관, 당신은 우선 아르테미어 제국에서 일을 시작하는 게 좋겠소! 당신의 말대로 열두 번째 천신이 정말 그 정도라면 우리가 도울 것이고, 아니라면 아르테미어 제국에서 알아서 할 수 있겠지. 안 그렇소?”
 머큐리의 대신관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2,000년 동안 균형을 유지했던 두 제국이다. 한데 그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아르테미어 제국에 내부적인 문제로 큰 빈틈이 생긴다면, 맹수와 같은 카일라스 황제가 두고만 볼 리가 없었다. 그는 단번에 아르테미어 제국을 물어뜯을 테고, 대륙에는 단 하나의 거대 제국이 탄생하는 거다.
 그러면?
 11신을 모시는 대신전은 겨우 지금까지 이어 왔던 명맥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카일라스 제국의 수족으로 전락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
 제국이 탄생하든지 아니면 갈라져서 멸망하든지 그것은 인간의 일이고, 지금 머큐리의 대신관이 해야 하는 건 신의 일이었다. 신의 수족인 신관으로서, 그는 마르둑에 대한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카일라스 황제 폐하!”
 ‘어쩌면······ 이번 일로 제국이 사라지고 신전의 권위가 부활할지도······!’
 대신관은 카일라스 황제의 두 눈동자 저 뒤에 깊이 숨겨진 본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은 기다리는 중!
 하지만 기회만 온다면 먹이를 놓치지 않는, 본능적인 맹수가 바로 카일라스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야수이며, 혈육을 모조리 죽여 버린 잔인한 황제다.
 3
 
 
 
 
 
 
 
 
 ‘마법의 시대’ 이전에 ‘신들의 시대’가 있었다.
 지금처럼 국가나 왕도 없이 오직 신들에 대한 믿음만으로 삶을 살아가던, 아주 평화로운 시기였다.
 신들이란 무엇이냐?
 인간의 바람이며 관념의 형상이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오랜 평화는 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했다. 인간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원했고, 결국 그런 바람 속에서 열두 번째 신인 ‘파괴’가 생겨났다. 또한 이 관념의 다른 이름은 ‘재창조’!
 그 후 ‘신들의 황혼’이라는 시대를 지나 마법의 시대가 나타났다. 신들의 황혼이라는 시기에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났을 것으로 예측되지만, 현재 알려진 건 거의 없었다. 다만 그 시기에 신들과 드래곤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혹자는 마법의 시대를 연 생명체가 드래곤이라고도 한다. 인간이 드래곤에게 마법을 배웠다고도 하는데,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선생, 그런 구닥다리 역사나 신화 말고 우리 마나에 대해서나 이야기를 좀 해 봅시다.”
 “허······? 마르둑 황자 저하, 마나를 마법적 관점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마나는 세상 어디에나 그리고 어떤 생명체에나 존재합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도 존재하지요. 즉, 모든 지식에는 항상 마나의 관여가 있습니다. 마법은 그걸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일 뿐이지요.”
 “혹시······ 마나의 볼텍스에 대해서 아십니까?”
 “볼텍스라······! 마법사 중에서 그걸 모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흔히 죽음의 소용돌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걸리면 어떤 강력한 마법사라도 살아서 나올 수가 없지요.”
 “볼텍스 마나 수련법이라는 게 있다던데······?”
 “허허허허, 황자 저하께서도 그 책을 보신 모양이군요. 간혹 헛된 욕망으로 마나의 볼텍스 현상을 연구하는 마법사가 아직도 있기는 하지요. 한때 유행처럼 그 현상을 연구하고 실험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련하던 마법사는 모조리 폐인이 되었고, 심한 경우 몸이 터지거나 쪼그라들어서 바싹 말라 버린 자도 있었지요. 그 연구로 마나의 수련법이 발달한 건 맞지만, 그 연구를 성공하고 완성한 마법사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위험하고 무모한 시도였지요!”
 무명의 현자는 ‘위험하고 무모하다’는 것을 유독 강조했다. 마르둑이 혹시 그 연구를 시도할까 봐 저어했기 때문이다. 단 1%도 되지 않는 가능성을 믿고 덤비기엔 확실히 너무 무모했다.
 “선생, 듣기로 마법사는 심장으로 마나를 수련하는데 볼텍스에선 심장이 아닌 다른 장소를 권하더군요.”
 “허허, 마르둑 황자 저하께서 마나의 볼텍스 현상을 한번이라도 보신 적이 있다면 감히 관심도 가지지 못했을 겁니다. 인체의 기관 중에서 파괴적인 볼텍스 현상을 견딜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마법사가 심장이 아니라면 어떻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마법사가 검사는 아니잖습니까!”
 백이면 백, 모든 마법사는 무명의 현자처럼 생각할 것이다. 마법사는 심장이 아니라면 마나를 수련할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그건 마법사가 아니라 검사였다.
 “마나와 마법 그리고 심장은 뚜렷한 고리로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라도 끊어지면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지요. 허허허, 곧 황가의 마법을 배우실 텐데 왜 그리 마나의 수련에 집착하십니까?”
 “흥! 가르쳐 주지도 않으면서 뭘 그리 궁금해하십니까? 오늘 수업은 이만하죠.”
 “하긴 황자 저하께서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는 없지요.”
 황자는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일개 가문의 영주보다 못하다. 아르테미어 제국에선 좀 나은 편이겠지만, 나으나 조금 더 나으나 매한가지였다.
 이러니 제왕학이니 정치학이니, 이런 걸 마르둑이 열심히 공부할 필요는 없는 거다. 차라리 전쟁술, 용병술, 전략학, 마법학, 이런 것들을 배우는 게 훨씬 도움이 될 테다. 아니면 상업이라든가!
 스물한 번째 황자라면 황권에서 멀어도 너무 멀지 않은가! 게다가 모종의 이유로 황제의 눈 밖에 난 황자였다.
 
 마르둑은 황궁의 도서관에서 마나에 대한 책을 모두 읽었다. 별로 마나의 실체를 보여 주는 책은 아니었지만, 기와 관련하여 마르둑은 연구를 제법 했다. 이젠 볼텍스를 이용하여 마황공으로 단전을 개방하는 일만 남았다.
 혼원, 일원, 음양, 태극, 삼재······!
 무공을 배우고 기를 익히면, 기를 알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배우는 철학이며 관념이고 또한 기의 실체적인 성향이기도 했다.
 마나에도 이런 것이 있나?
 마나는 나뉘는 게 아니라 흐름이었다. 하면 볼텍스 현상은 어떤 흐름으로 인하여 나타나는가?
 ‘태극과 혼원!’
 기를 아는 사람들은 혼원이나 태극 등등을 따로따로 생각하며, 혼원신공이니 태극신공이니 말하면서 기를 나눈다. 하지만 마황공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였다.
 본질은 하나다! 다만 모습이 변할 뿐이다.
 볼텍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나의 흐름이 잠시 모습을 변화하여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마르둑은 마나를 태극으로 생각했다. 그의 지식으로 우주의 이치를 가지며 자연스러운 흐름을 나타내는 관념은 태극이 유일했다.
 하면 볼텍스는 무엇인가? 태극과 태극이 만난 혼원이었다. 혼란스럽지만 그 현상 역시 마나의 흐름 중 하나였다.
 태극에서 혼원으로!
 ‘문제는 이게 아니잖아! 도대체 수련을 어디서 해야 하는 거야?’
 내공의 수련에서 누군가 건드린다는 건 둘 모두에게 좋지 않다. 하니 마르둑은 마나의 수련을, 마황공의 수련을 위해서 누구의, 특히 잭의 출입이 없는 조용하고 숨겨진 곳을 찾아야만 했다. 아니면 잭을 잘 이용하든가!
 “잭! 잭, 잭, 잭!”
 “황자 저하, 참새가 아니라 잭입니다.”
 “누가 짹짹짹이래? 잭이라고 했잖아. 감히······ 따지는 거냐?”
 “에헤헤헤, 그럴 리가요. 무슨 일이시옵니까? 초코 우유라도 한잔······?”
 “됐어. 나 지금부터 마나 수련을 할 거니까 내가 방에서 나올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마. 너도! 아니, 특히 너!”
 “예에? 언제 마나 수련을 배우셨어요?”
 “흥! 그걸 꼭 배워야 하냐? 너처럼 멍청한 녀석이나 그런 걸 배워야 하지. 온 세상에 가득한 게 마나인데 배우긴 뭘 배워. 어서 나가!”
 “황자 저하, 제가 마법사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보통 처음에는 다른 마법사의 도움이 있어야 마나를 느끼고 그 후에도 안전을 위해서 보조하는 마법사가 있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오, 그런 거였어? 스승이 운공을 도와주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네. 한데 내겐 마법 스승이 없잖아!’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건 좋았지만, 현재의 마르둑에게 크게 도움이 될 정보는 아니었다.
 “그럼 잭, 네가 마법사 하나 좀 구해 줄래? 황궁에 굴러가는 돌멩이처럼 좌르륵 깔린 게 마법사잖아. 그렇지? 그래도 황자님이 마나를 수련하겠다는데 도와줄 마법사 하나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그, 그게······!”
 아르테미어 황궁에 마법사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돌멩이처럼 깔린 건 아니었다. 마법이라는 게 재능이 있어야 하며 배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법사의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한데 겨우 시종인 잭이 가잔다고 해서 따라오겠는가. 아르테미어 제국에는 귀족의 작위가 없지만, 마법사가 바로 귀족이었다. 영주도 마법사였고, 황궁의 주요 관료도 마법사였다. 마법사 외의 인간은 아르테미어 제국에서 크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왜? 못 한다는 거야?”
 당연하지!
 마르둑이 황자라고 하더라도, 여기선 마법에 의해서 힘의 강약과 직위의 고하가 갈린다. 물론 황자이기 때문에 존중을 해 주긴 하겠지만 개처럼 오란다고 올 인간들이 아니었다.
 “잭, 그냥 나 혼자서 마나를 수련할 테니까 넌 뒤처리나 확실히 해. 어마마마께 말하지는 말고! 알겠어?”
 “휴우······ 알겠습니다.”
 잭은 마르둑이 부쩍 마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더니 소용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잭이 마법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지만, 그 수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들은 건 있었다.
 필히 스승이 있어야 한다.
 스승의 도움으로 마나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건 무척 어렵다고 했다.
 그 후에 스승의 도움으로 마나를 수련하기 시작하는데, 도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척 어렵고 위험한 과정이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레 진행된다.
 잭도 마르둑을 이해하긴 했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마도사인 황제를 아버지로 둔 황자인데 아직 마법에 입문도 하지 못했다. 아마 마법을 무척 배우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혼자서 마나를 느낄 수도 없을 텐데.
 “황자 저하, 혹시 어렵더라도 실망하진 마십시오.”
 “뭐야, 지금 날 위로하는 거야? 꺼져!”
 뻥!
 잭은 마르둑의 방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마르둑은 문을 잠갔다. 그리고 바로 바닥에 정좌하고 지금까지 연구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역천의 마황공!
 기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
 마나에 대해서 공부하고 연구했던 지식과, 볼텍스!
 ‘태극과 태극이 만나서 혼원을 이룬다! 이게 바로 마나의 볼텍스 현상이다. 사막의 용권풍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은 거야!’
 그동안 마나로 단전을 개방하기 위해서 수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마나는 기와 다르게 기맥과 연관이 없는 건지 단전이 열리지 않았다.
 마르둑은 심장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단전을 고민했다. 무공과는 크게 연관이 없는 단전인데, 도사들이 기로 내단을 연단하기 위해서 중단전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심장으로 마나를 단련하는 것과 정말 비슷하지 않은가!
 ‘하단전에서 볼텍스를 만들고, 용권풍처럼 바로 중단전까지 수직으로 꿰뚫는다!’
 도사들이 중단전으로 기를 연단한다고는 하지만, 마르둑은 실제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 효과가 과연 어떨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도를 할 가치는 있었다.
 마르둑은 바로 마황공에 돌입했다. 잔잔한 기가 아니라 바람처럼 흘러가는 따스한 마나가 느껴졌다. 역시나 적응되지 않는 기감이었다.
 마황공은 본래 물을 흡수하는 솜처럼 전신으로 기를 받아들여서 내공을 수련한다. 혹자는 빠르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호흡으로 내공을 수련하는 것보다 엄청나게 느린 속도였으며, 흡수되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큰 인내심이 필요했다. 이런 마황공의 특성으로 인하여 마나를 수련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양쪽으로 나누어 마나를 흡수한다. 그리고 단전에서 엇갈리며 충돌을 일으키면 볼텍스가 나타날 거다. 아주 조심스럽게······!’
 당연히! 너무 답답할 정도로 신중을 기하면서 조심스럽게 마나를 다뤄야만 한다. 태극과 태극이 만나서 혼원을 이룬다면, 마르둑도 마나를 완전히 다룰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려웠다.
 마르둑은 서서히 육체로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건 명상의 어둠 속에서 정신의 집중으로 이루어지니, 흔히 상단전이라고 불리는 곳의 힘이었다. 상단전은 영혼의 안식처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마황공의 성취가 영혼에 각인되고 각성을 거듭할수록 그의 마황공이 발전했던 거였다.
 이번에는 상당한 심력을 소모했다. 물속에 빠진 솜처럼 서서히 흡수하는 게 아니라 단전을 중심으로 육체를 반으로 쪼갰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람처럼 몸을 스쳐 가는 마나를 흡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나가 조금씩 번지는 잉크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마르둑은 마나에 집중하느라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그리고 결국 양쪽으로 나뉘어서 들어오던 마나가 단전에서 만났다!
 마나는 일정한 흐름을 가지고 서로 엇갈렸다. 하지만 서로 그냥 지나가지는 않았다. 바람과 바람이 만나서 하나가 되려는 것처럼, 두 길의 마나는 아래위에서 서로 뒤엉키려고 했다. 이런 현상으로 회전하는 회오리로 변하는 거였다.
 태극과 태극이, 그러니까 마나와 마나가 만나서 볼텍스라는 혼원을 이루었다. 이 개념으로 마르둑은 양쪽의 마나만 다룬다면 볼텍스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회전하는 마나의 회오리여서 잘되어 간다고 확신했다.
 단전을 개방한다는 것은, 기가 단전에 머물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마르둑은 이대로 마나가 단전에 머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게다가 하단전이 불가능하다면 중단전도 있었다. 오히려 중단전까지 개방한다면 더욱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완전히 급변했다! ‘서서히’ 마르둑도 알아채지 못하게 변해 갔고, 그가 알아챘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달라진 후였다.
 ‘큭! 뭐, 뭐야?’
 처음에는 흡수되는 두 갈래의 마나로 볼텍스를 다루고 있었다. 한데 이젠 볼텍스가 흡수되는 두 갈래의 마나를 다루고 있었다. 주종의 관계가 역으로 뒤집어진 거다. 이것으로 마르둑은 볼텍스를 다룰 수 있는 수단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그것에 역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마나가 흡수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평소라면 좋은 일이었지만, 마르둑은 다룰 수 없는 힘이 강해지는 건 최악이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절대로 좋아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젠장! 안 돼!’
 마르둑은 억지로 마나의 흐름을 늦추었다.
 왜 마법사들이 볼텍스를 수련하다가 폐인이 된 건지 충분히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단전도 이 지경인데 심장은 더할 거였다. 이대로라면 볼텍스에 의해서 단전이 찢어질 거였다.
 ‘역시 하단전은 아니었어?’
 마르둑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볼텍스를 수직으로 상승시켜서 중단전을 개방할 시도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다행이지만 실패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거였다.
 ‘제기랄! 이미 질주하는 천리마의 등에 올라탄 형국이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마르둑은 마나의 흐름을 억지로 압박하지는 않았다. 대신 볼텍스의 흐름에 동조하면서 마나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볼텍스 현상이 점점 거세졌다. 힘이 압축되고 압축되지만, 또한 이 힘을 배출할 구멍이 필요했다. 용권풍이 사방에서 바람을 빨아들이면서도 수직으로 치솟는 이유이기도 했다. 마르둑은 볼텍스로 소용돌이가 아니라 이런 용권풍을 만들었다.
 마나가 위로 서서히 솟구쳤다.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회전하는 와류였기 때문에, 마나의 볼텍스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기는 기맥으로만 움직이지만 마나엔 그런 게 없었다. 물론 기맥이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혈맥과 신체의 기관 등 모든 것이 마나의 길이었다.
 펑!
 펑!
 펑!
 뭔가가 터졌다.
 기맥의 혈이 터지는 건 마르둑도 알았지만, 다른 건 뭐가 뚫리는지 알지 못했다. 마나는 기처럼 기맥이라는 정해진 길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기맥보다는 차라리 세맥을 따라서 움직이는 듯했고, 마르둑 자신이 마나에 흡수당해 잡아먹히는 느낌이었다.
 주종이 완전히 뒤바뀐다!
 ‘안 돼!’
 마르둑은 마나의 제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나를 가지고 볼텍스와 밀고 당기는 힘겨운 싸움이었다.
 그의 내부에서 뭔가가 연이어 폭발하는 소리가 울렸고, 그의 몸은 들썩였다. 마르둑은 이런 상황에서도 곧은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아랫배에서 위쪽으로 산산조각 뼈가 갈라지는 느낌에 뒷골이 쭈뼛 섰다. 최대한 몸을 편하게 유지하려고 해도, 여러 가지 상황이 마르둑을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았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으로 위험이 사방에서 휘몰아쳤다.
 전신이 산산조각 부서지는 느낌을 참고 견디길 오랜 시간이 지났고, 결국 볼텍스의 흐름을 가진 마나가 중단전까지 솟구쳤다.
 -넌······?
 ‘허······! 뭐, 뭐냐?’
 마르둑은 중단전에 가해질 고통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 과정대로라면 중단전의 고통이 상당할 걸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한데······ 볼텍스 현상으로 솟구치던 마나가 중단전에 와서 사라졌다. 작은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서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볼텍스 현상을 유지하던 마나가 중단전에서 사라지니 이 현상도 자연히 사라졌다. 비록 고통을 주던 현상이었지만 이렇게 뜬금없이 갑자기 사라지니 마르둑은 허무한 감정마저 느꼈다.
 당연했다. 몇 시간의 노고가, 정말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치 대화를 요청하는 것처럼, 마르둑은 환청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중단전! 넌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 이 더러운 새끼······!’
 중단전에 대해서 알려진 건 무공이 발전하기 전의 시기에, 도사들이 기를 연단하기 위해서 수련했다는 거다. 그 목적은 영생에 있었는데, 도사들은 영물을 보고 이걸 창안했다고 전해졌다.
 기로 내단을 연단한다!
 마르둑은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한데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았다. 정신이 혼미하게 어질어질할 정도로.
 열이 확 뻗쳤다.
 ‘어쨌든 중단전은 마나에 반응한다는 거지!’
 하단전과의 반응성은 확실히 달랐다. 하단전이 마나에 무관심했던 것에 반해서 중단전은 확실히 반응을 보였다.
 마르둑은 우선 이것에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고 혼자서 잘난 체를 했다.
 ‘역시······ 난 천재였던 거야!’
 마르둑은 일어나려고 했으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가 평생 했던 게 정좌였는데 다리가 굳었다.
 “으으으, 으아, 으갸갸!”
 마르둑은 뒤로 벌러덩 넘어가서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다리를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렇게 한참 하자 찌릿찌릿하면서 다리에 감각이 돌아왔다.
 휘청휘청 그는 문으로 걸어가 그걸 열었다.
 문 앞에 잭이 서서 열심히 인사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며칠이나 지난 건지 잭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거다.
 인심이 후한 주인이라면 ‘의자라도 하나 가져다줘야 하나?’라며 고민하겠지만, 방금 고통과 허무를 맛본 마르둑이 그럴 리는 없었다.
 “잭!”
 마르둑이 잭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도 잭은 화들짝 놀라기는커녕 잠 오는 얼굴로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흐아아아암! 황자 저하, 이제 끝나셨나요?”
 “배고프다. 가서 초코 우유하고 잘 구운 빵이나 좀 가져와라.”
 “밤이 늦었는데요.”
 “그래, 밤이 늦기는 했네. 그런데 배가 고파.”
 “뭐, 하긴 하루가 지났으니까요, 황자 저하! 이럴 때 인내심을 기르시는 겁니다. 저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런 기회가 자주 찾아오는 건 아니잖습니까. 흐아아암, 전 이만 들어가서 좀 자야겠어요.”
 잭은 좀비처럼 흐느적흐느적 복도를 걸어갔다. 일부러 더 불쌍하게 보이려는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미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진하게 깔린 걸 봤기 때문에 마르둑은 한번 봐줬다. 어차피 지금 시간에 초코 우유를 만들고 빵을 구울 사람도 없었다.
 마르둑이 인심 좋은 황자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았기 때문에 기분이 약간 들떴다.
 새로운 미지의 개척지!
 중단전!
 게으른 당나귀 같던 마르둑은, 처음 마황공을 익히고 각성했을 때처럼 중단전에 작은 호기심을 느꼈다.
 마나가 중단전에서 왜 사라지는지, 중단전은 개방되어 있는 것인지, 그 환청처럼 들린 것 같던 음성은 중단전과 무슨 관계인지!
 그리고 하단전까지 개방하고 마황공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오랜만에 접한 흥밋거리인데 마르둑이 놓칠까. 그는 복도를 걸으면서 히죽 웃었다.
 하라궁의 시녀들은 그날 밤, 이상한 처녀 귀신의 웃음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으흐흐흐흐흐흐흐흐······!
 4
 
 
 
 
 
 
 
 
 오······ 신이시여!
 거짓을 일삼는, 하찮은 이 인간을 용서하소서!
 
 머큐리의 대신관은 신에게 기도를 올리며 이 말을 속으로 몇 번씩이나 되새겼다.
 그 후 아르테미어 제국의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마법사와 신관은 사이가 무척 좋지 않지만, 황궁의 경비들이 머큐리의 신관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다면 신의 저주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법사야 ‘신의 저주? 지랄!’이라고 외치겠지만, 어디 일반 병사들이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급의 신관도 아니고, 신관의 최상위에 있는 대신관이 왔다. 머큐리가 신의 전령 역할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신이었다.
 대신관은 쉽게 황제와 대면할 수 있었다.
 그것도 독대!
 머큐리의 대신관은 긴장했다.
 마법사는 냉철하면서도 동시에 미친 작자들이었다. 루인 혼 아르테미어 황제는 그런 마법사들 중에서도 마도사로 분류되는 사람이며, 그중에서 최고였다.
 얼마나 냉철하고 얼마나 미쳤겠는가.
 사람들은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황좌를 차지한 카일라스 황제를 미쳤다고 욕하겠지만, 실제로 가장 미친 작자는 바로 아르테미어 황제일 것이다.
 “머큐리의 대신관이여, 그대가 마도제국에 발을 들이다니, 신전이 무너지기라도 했는가?”
 “하늘 아래에서 가장 단단하게 빛나는 모든 신들의 방패, 아르테미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쯔읏······!”
 아르테미어 황제는 혀를 찼다.
 신전에서 두 제국의 황제를 형용하는 저 말은, 결국 두 황제가 신의 검과 방패, 즉 종이라는 의미였다. 2,000년 동안이나 이어진 말이었지만 신전의 힘이 약해진 지금까지 저런 말을 듣는다는 게 싫었다.
 그러나 전통성이 있으니 어쩌겠는가? 듣기 싫은 사람이 귀를 막아야지.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독대를 청했으니 당연히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터였다. 아르테미어 황제는 신관과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간략히 말하기를 원했다.
 “아르테미어 제국의 마르둑 황자 저하에 대한 소문이 흉흉하더군요.”
 “소문?”
 “이거, 신관의 입으로 이런 소문을 입에 담는 게 경망스럽지만······!”
 “뭔가?”
 “엘린느 황비마마가······.”
 “엘린느가 뭘 말인가!”
 그녀의 이야기가 나오자 황제 본래의 냉철함에 금이 가고 분노가 표출되었다. 물론 마법사답게 금 간 틈새로 증기처럼 분노가 치익치익 새어 나오는 거였지만.
 “루인 황제 폐하, 혹시 이런 노래를 들어 보셨습니까? ‘기사 카마쉬, 결국 아름다운 엘린느에게 무릎을 꿇었네. 그는 황제의 옷을 벗고 검을 무릎 위에 올렸네. 그는 맹세를 했다네. 이 검에 맹세한 삶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오. 죽음의 강을 건너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오. 기사 카마쉬, 결국 아름다운 엘린느에게 고백했다네. 기사는 그녀를 사랑했네. 기사는 그녀를 사랑했네.’ 음유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라고 하더군요.”
 “푸하하하하! 그래, 그런 노래가 있었던가? 어쨌든 기사 카마쉬가 아니라 내가 ‘아름다운 엘린느’를 차지했네. 그녀는 날 사랑하네. 이 사실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가? 신전에서 남의 애정사에 간섭하다니, 어지간히도 할 일이 없군그래.”
 루인 황제는 머큐리의 대신관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더 지켜보기로 했다.
 “엘린느 황비마마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항간에선 그 아들이 기사 카마쉬의 아들이며 파괴의 화신인지라, 그로 인해서 아르테미어 제국이 파국으로 치달을 거라는 이야기가 자자하더군요.”
 머큐리의 대신관은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야 말았다. 그러면서 스스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리라 여겼다.
 하나 웬걸!
 “뭐? 크하하하하하하하하!”
 루인 황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광소했다. 그는 일부러라도 더 크게, 더 호탕하게 웃는 듯했다.
 “그래, 자네 말은! 엘린느의 아들이, 내가 아니라 카마쉬의 아들이라는 것인가?”
 “허허허허, 그런 소문을 들었습니다.”
 루인은 화가 났지만, 여기서 대신관을 죽인다면 그의 저 말을 바로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는 사납게 대신관을 노려봤다. 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얼굴을 불덩이로 바싹 태워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흐음······ 대신관이라는 작자가 겨우 그런 이야기나 하려고 찾아왔다니.”
 대신관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루인 황제의 말투는 시정잡배처럼 거칠어졌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문에 대한 이야기야 그냥 잡담일 뿐이지요. 황제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머큐리의 대신관은 떡밥을 던졌고, 이제 물고기를 잡을 차례였다.
 “사실 신탁이 나타났습니다. 그 신탁이 황제 폐하의 안전과 관련이 있으니 제가 불원천리 여기까지 달려온 게 아니겠습니까.”
 “신탁? 건국 이래, 아니 건국 이전 신들의 시대가 끝나고 신탁이 내려진 적이 없을 텐데.”
 “신탁의 기둥에 새겨진 마지막 신탁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열두 번째 천신에 관한 신탁입니다. 허허, 저도 그 신탁의 내용을 파악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신들의 시대가 끝난 지가 언젠데 신이 나타난다는 건가?”
 “폭풍을 몰고 오는 파괴의 신입니다. 모든 신들의 적이라고 하더군요. 열두 번째 천신이 손에 쥔 번개와 천둥에 세상이 두려움에 벌벌 떨 거라고 합니다. 신전에선 그 천신을 파괴의 신······ 마르둑이라고 부릅니다.”
 “마르둑······!”
 루인 황제는 이 이름을 말하며 침음을 삼켰다. 어찌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는가!
 “그 천신은 파괴의 상징입니다. 황제 폐하의 심장에 칼을 꽂고 아르테미어 제국의 영광을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믿을 수 없다!”
 대신관의 말에 루인 황제는 크게 외쳤다. 어떤 증거도 없이 그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본래라면 신관의 말이라면, 신관 자체가 진실의 증명이겠지만.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열두 번째 천신은 파괴의 신이며, 그의 이름은 마르둑입니다!”
 신관이 신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니 루인 황제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맹세로 거짓을 말하면, 이 자리에서 신관은 바로 불에 타서 죽었을 테니 말이다.
 
 루인 황제는 어둠 속에 침울하게 앉아서 어둠만을 멀거니 쳐다봤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앉아 있었는지 자신도 몰랐다.
 아름다운 엘린느.
 모든 음유시인들이 그녀의 미를 칭송하고 노래를 부른다. 수많은 사내들이 그녀에게 꽃을 주고 명예와 영광을 약속하며 청혼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와 결혼한 사람은 루인 황제였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을까.
 ‘엘린느, 그대는 정녕······!’
 문제가 한 가지 있기는 했다.
 그런 청혼자들 중에서 카마쉬 덴 카일라스 라파엘이 있었다는 거다. 음유시인의 노래였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 루인이 알 게 뭔가. 음유시인이 카마쉬 황제를 빗대서 ‘기사 카마쉬와 아름다운 엘린느’의 노래를 그냥 부를 리는 없지 않은가.
 “레인.”
 루인 황제가 이름을 부르자 어둠 속에서 스르륵 검은색 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분위기가 음침하면서도 날카로운 사내는 감히 황제 앞에서까지 검은색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루인 황제는 그것에 대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레인이라고 불리는 검은색 사내는 대답도 없이 황제 앞에 공손히 시립했다.
 “말해 보라.”
 황제의 말에 검은색 사내는 기계처럼 읊조리기 시작했다.
 “카마쉬 황제는 하라인 왕궁에 머무는 4개월 동안 엘린느 황비와 제법 친하게 지낸 모양입니다. 하라인 국왕은 둘의 관계가 더욱 깊어짐을 저어하여 엘린느 황비를 폐하께 보냈습니다. 그 당시 카마쉬 황제는 하라인 국왕을 압박하고 있었사옵니다.”
 “교활한 늙은이.”
 그 당시 카일라스 제국과 하라인 왕국의 국경에 위치한 광산을, 카마쉬 황제가 원하고 있었다. 하라인 국왕은 카마쉬 황제와 적대하면서 그런 압박을 벗어난 거였다.
 쉽게 상상하기 힘든 전략이었다.
 하긴 두 제국 사이에 위치한 하라인 왕국이었다. 이곳이 있기 때문에 두 제국이 2,000년의 역사를 이어 온 거다.
 하라인 왕국의 역대 왕들은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감각이 가히 탁월했다. 두 제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찌 보면 하라인 왕국이 두 제국을 다루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 정도로 팽팽한 줄타기를 잘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또한 모두의 편을 든다!
 이런 정책으로 하라인 왕국은 두 제국 사이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아마 그 당시 하라인 국왕이 엘린느를 루인 황제에게 보낸 것 역시, 국가정책의 전략적인 부분이었을 것이다.
 정략결혼!
 이게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황제에게 사랑은 사치일 뿐! 황제에게 사랑은 없다. 하지만 루인 황제에게도 사랑이 찾아왔기에, 그는 질투에 눈을 떴다.
 아름다운 엘린느.
 그녀는 사랑의 감정을 모르는 황제마저 사랑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기에.
 사랑에 비례하여 질투가 커지고, 불신과 함께 사랑은 애증으로 변해 갔다.
 “마르둑은?”
 “엘린느 황비께서 천신의 꿈을 꾼 후 천신의 계시에 따라서 이름을 마르둑이라고 지었습니다.”
 “누구의 아들이냐!”
 “알 수······ 없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아기가 1개월 빨리 출산되었기 때문에······!”
 본래부터 1개월 빨리 임신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아기가 진짜로 1개월 빨리 출산된 건지, 검은 사내도 확신하지 못했다.
 “소문은?”
 “장황히 퍼진 소문은 아니나, 그런 소문이 간혹 나도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몇몇 음유시인들이 있습니다.”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의 주축은 음유시인들이었다. 그들은 각지를 여행하며 노래를 부르면서 소문을 퍼뜨렸다.
 “알겠다. 그만 사라져라.”
 검은 사내는 스르륵 어둠 속으로 녹아들며 사라졌다.
 루인 황제는 여전히 어둠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마르둑은 여러모로 보아 일반의 평범한 아이와는 달랐다. 천재라거나 조숙하다거나, 이런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것이, 그는 천재도 아니고 조숙한 아이도 아니었고, 다만 진짜 ‘애늙은이’일 뿐이다.
 아이는 어떻든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이기적이며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특히 ‘싫다’와 ‘좋다’를 분명히 표현한다. 한데 마르둑은 당연히 루인 황제를 처음 대면하면서도 이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흐음······? 이 사람이 내 아버지라고? 닮지 않았군, 전혀 닮지 않았어.’
 루인 황제는 큰 키에 호리호리하면서도 아주 잘생긴 중년의 미남이었다. 하지만 엘린느를 완벽히 빼다 박은 마르둑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마법사란 말이지?’
 호리호리한 체구였지만, 황제에게서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가 가진 마나의 힘 때문일 거였다.
 ‘나랑 전혀 닮지 않았군.’
 루인 역시 마르둑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카마쉬를 닮은 것도 아니고······ 오직 엘린느만을 닮았구나.’
 루인도 성난 야수와 같은 카마쉬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마르둑은 절대로 카마쉬를 닮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을 닮지도 않았다는 거였다.
 네 살, 이제 곧 다섯 살이 된다. 이 정도면 이목구비가 드러날 때였다.
 루인은 이런 상황과 생각이 싫어서 그동안 이곳을 찾지도 않았다. ‘역시나’ 하면서 후회하고, 작은 분노를 속으로 억눌렀다.
 마법사는 소유욕이 강하다. 특히 황제인 루인은 유독 강했다. 이런 그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니 분노가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치면 될 일!
 한데 그러기엔 또 아깝지 않은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다른 이의 것 역시 될 수 없다! 엘린느는 루인이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긴 이 정도이니 모든 음유시인들이 그녀의 미모를 칭송하는 것이다.
 “폐하······!”
 엘린느는 깊고 그윽하게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루인을 쳐다봤다.
 “흐흠, 이 아이가 나와 당신의 아이구려.”
 루인은 마르둑을 요모조모 뜯어봤다. 자신과 닮은 구석이 단 한 군데 정도는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마르둑, 인사 올려야지.”
 “마르둑이옵니다, 아바마마.”
 이것도 좀 웃긴 상황이긴 했고, 마르둑에겐 무척 어색했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야 하는 상황이라니, 좀 무안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 황가의 말투라는 것도 그의 손발이 오그라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바마마라니······ 으윽! 소름 끼쳐.’
 뒷골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소름이 자르르 울리는 게 느껴졌다. 정말 이 단어는 말하는 것만으로도 곤욕이었다. 물론 이런 느낌의 저변에는 루인의 눈빛도 한몫했다.
 마르둑은 싫다와 좋다의 감정만 겨우 파악하는 아이가 아니다. 그는 저 의심과 분노로 가득한 루인의 눈빛을 느끼고 있었다.
 ‘황궁의 권력투쟁이 더럽다고 이야길 듣긴 했지만, 이거 직접 당해 보니 기분 더러운데. 내가 뭘 어쨌다고 날 싫어하는 건데.’
 “내일부터 황가의 선생에게 황가의 예법과 교양, 마법의 기초를 배우도록 해라.”
 황궁의 마법사가 은퇴하면 마법을 수련하거나 제자를 가르치거나 하는데, 황가의 선생은 그런 은퇴한 마법사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마법사는 아는 게 많다. 황가의 자식을 가르치기에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황태자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가 살아 있을 확률은 거의 전무하니, 차후에 혹시 선생에게 휘둘릴 일도 없다.
 어쨌든 아르테미어 제국에선 마법사의 수준이 곧 귀족의 작위와 같은 것이며, 실제로 귀족은 없다. 단지 마법사가 있을 뿐이며, 모든 국가 체계가 마법사 위주로 운영된다. 이건 초대 황제가 만들어 낸 국가의 전통이었다. 실로 마법사를 위한 국가정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런 국가정책상 황제를 제외하고, 황가의 선생이란 자리는 마법사에게 명예였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황가의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 했다.
 ‘에엥? 뭐야! 같은 걸 또 공부하라고?’
 그동안 무명의 현자를 통해서 지겹게 공부를 했다. 한데 그걸 황가의 선생을 통해서 하란다. 황가의 선생인데, 지금처럼 대충대충 공부할 수는 없을 거였다.
 이제 막 수련의 재미와 도전 의식을 느끼고 있는 이 시점에! 마르둑은 이런 귀찮은 일이 딱 질색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상대는 강자이고 본인은 약자였다. 이런 경우를 수없이 당했고, 머리를 숙이는 게 가장 적절한 대처 방법이라는 것을 마르둑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마법의 기초를 가르쳐 준다는 건 꽤나 매력적이었다. 마르둑은 마법은 아니지만 마나에 꽤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애써······!’도 아니고, 마르둑은 그냥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하면 전 이만······!”
 마르둑은 대답과 함께 자리를 빠져나왔다.
 
 “마르둑 황자 저하, 어떠셨습니까?”
 잭이 물었다.
 잭에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했다. 마르둑은 그의 대들보였다. 마르둑이 잘나가야 그도 잘나가고, 마르둑이 시궁창에 빠지면 잭 역시 시궁창을 헤매야 하는 운명이었다.
 “뭐가 어때?”
 “그러니까 황제 폐하 말입니다. 어디 근사한 곳에 영지라도 하나 하사하실 것 같습니까?”
 “영지는 무슨! 저 멀리 어디 유배라도 보낼 분위기던데.”
 “예에? 어하하하하, 설, 설마요······?”
 “잭, 너 혹시 뭐 소문이라도 들은 거 없어?”
 본래 자신에 대한 소문을 본인이 직접 접하기란 무척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마르둑은 혹시나 하면서 잭에게 물었다. 뭔가 이유가 있으니 황제가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겠는가.
 ‘거참! 이번 생에는 태생부터가 복잡한 것 같네.’
 여러 번 각성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아마 그동안은 운이 좋았고, 이번에 악운이 한꺼번에 몰려든 모양이었다.
 “없으면 말고. 문이나 잘 지켜.”
 “황자님, 제가 문 지키는 개입니까?”
 “어허, 무엄하다! 어디 시종이 그런 말투를 사용하느냐!”
 “에휴, 알겠습니다. 한데 정말 마나를 수련하는 건 하시는 것입니까? 보통은 스승이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도와주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네가 모르는 게 있느니라. 내가 이것저것 네게 고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걱정돼서 이러는 거죠.”
 “문 지키며 꾸벅꾸벅 조느라 귀찮아서 그런 거겠지.”
 “아하하, 하하, 설마요. 전 마르둑 황자 저하의 충실한 종입니다요!”
 “지랄!”
 콰당!
 
 길은 뚫렸다.
 단지 육체가 마나의 볼텍스 현상을 견딜 수 있느냐, 이게 문제였다.
 양쪽에서 마나가 들어온다. 그것이 엇갈려서 뒤엉키고, 회전을 만들어 낸다. 볼텍스 현상의 마나는 수직으로 상승한다. 이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하자 마나의 길이 만들어졌다.
 산속에서 짐승이 자주 다니다 보면 산길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마나는 바람과 같아서, 이미 만들어진 익숙한 길을 따라서 중단전까지 상승했다. 그 과정에서 마르둑은 볼텍스 현상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더욱 세게 만들어 냈다.
 마르둑은 긴장했다. 항상 이 과정에서 중단전까지 상승한 볼텍스 현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냥 시도했던 적도 있지만, 마나는 하단전에 머물기만 할 뿐 중단전까지 상승하지 못하고 그냥 자연으로 흩어졌다.
 ‘됐다!’
 볼텍스 현상이 사라질 것처럼 약해졌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마르둑은 마나를 더욱 흡수하려고 노력하면서 볼텍스 현상을 강화시켰다. 그러면서 정신을 중단전에 집중하여 그것의 변화를 관조했다.
 ‘어······?’
 중단전이라는 녀석은 무척 신기한 놈이었다.
 단전이라기에 하단전과 같은 기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은 텅 빈 공간도 아니었고, 탁기가 철벽처럼 꽉 막힌 곳도 아니었다.
 중단전은 하단전처럼 기를 모으는 그릇이 아니라 마나를 흡수하는 하나의 생명체 혹은 심장과 같은 인체의 기관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단전처럼 내공을 쌓는 게 아니었다. 중단전은 마나를 흡수했다.
 ‘보석 같군.’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나를 흡수하면서 중단전은 은은히 붉은색으로 보석처럼 빛을 발산했다. 하지만 중단전에 미치는 마나의 영향은 너무나 미미하기에, 중단전이 각성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다.
 하지만 이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마르둑은 중단전이 마나와 관련이 있으며, 하단전이 아니라 중단전이 마나 수련의 중심이라는 것을 완전히 인지했다. 이 정도 성과만으로도 그는 만족스러웠다. 나머지야 차차 수련하면서 극복하면 될 일이었다.
 ‘확실히 이건······ 너무나 신기하군. 중단전은 마치 본래 마나를 흡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당연히 마나를 흡수한다. 내공을 쌓기 위해서 기로 하단전을 개방하려고 애써 노력하던 내가 우습게 여겨지네.’
 물론 이건 마르둑이 무공을 알고 마황공을 오랜 기간 익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세계의 마나와 중단전은 분명히 관련이 깊고, 그건 기사에게 적용된다. 이 세상의 누구도 중단전의 존재를 모른다. 해서 검의 마스터들도 끝없이 검술을 수련하고 재능을 가져야 중단전을 각성할 수 있는 거였다. 설령 각성한다고 하더라도 중단전에 대해서 인지하지는 못했다.
 기사들은 육체를 단련함으로 인하여 자연히 중단전을 각성시킨다. 반면에 마르둑은 하단전과 중단전의 존재와 위치를 알기 때문에 지름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거다.
 실제로 중단전은 끝없이 육체를 단련해야 마나와 접촉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마법사들이 벌써 심장보다 중단전을 더 빨리 알아채고, 중단전을 마나의 보고로 삼았을 거다.
 지금 마르둑이 행한 마나의 수련은, 기사와 마법사의 마나 수련에 내공심법까지 통합하여 시행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르둑은 중단전이 생명체처럼 마나를 흡수하는 신기한 느낌에 젖어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예의 희미했던 환청이 그의 마음을 완전히 울렸다.
 -넌 누구냐?
 이 부드럽고 기묘한 목소리는 마르둑의 뇌리를 흔들었다. 뭐라고 할까, 따스한 봄바람처럼 아름답고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혼자만의 상상이나 환청이 아니었다.
 마르둑은 이 신기한 일에 약간 흥분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굽니까?’
 대화를 하는 것처럼 속으로 생각을 해 봤다. 그러자 정말 상대방 측에서 반응을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바람의 정령왕······이다.
 ‘바람의 정령왕이 무엇입니까?’
 마르둑이 물었지만 대답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대화를 하는 사이에 마나의 볼텍스 현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카일라스의 카마쉬 황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절대적인 권력과 막강한 무력을 가진 그가 이토록 고민할 일이 뭐가 있는가.
 ‘엘린느······!’
 카마쉬 황제는 머큐리의 대신관이 카일라스 제국을 떠난 후 부하를 시켜서 그의 뒤를 쫓도록 했다. 그렇게 카마쉬 황제는 몇 가지 소문을 알게 되었다.
 ‘여자 하나 때문에 내 마음이 시시각각 변덕을 부리지만, 나로서도 이걸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엘린느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가도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고 또 어떤 때는 그녀를 죽여서라도 가지고 싶었다.
 어쩌겠는가? 이런 변덕스러움 역시 카마쉬 황제의 잔인한 성향 중 하나인 것을.
 ‘신관 주제에 거짓을 만들면서, 잘도 음흉한 모략을 꾸미는구나.’
 “한센.”
 카마쉬 황제가 나직하게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허리춤에 검을 차고 은백색의 가벼운 갑주로 겨우 가슴 정도만 가린 늙은 사내가 철커덩거리면서 황제 앞으로 다가왔다.
 ‘감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기사라지만 황제 앞에 버젓이 검을 차고 나타났으니.
 하지만 한센은 그래도 되는 직위에 있는 사내였다.
 그는 카일라스 제국의 황제를 지키는 로열가드의 수장이었으며, 비밀스러운 시크릿나이츠의 1인이기도 했다.
 시크릿나이츠는 ‘10인의 마스터’라는 말로 불리기도 하는, 카일라스 제국의 전설이었다. 보통 알려져서는 안 되는, 황제의 비밀스러운 명령을 수행한다. 황제라면 이런 비밀의 무력 단체나 내부의 감찰 기관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한센은 과묵한 사내였다. 말도 없이 동상처럼 황제 앞에 서 있었다.
 “두 명의 시크릿나이트를 아르테미어 제국으로 보내라. 엘린느를 만나라. 그리고 그녀가 위험하다면······ 몰래 그녀를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그 후 황궁의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두 명의 늙은 마부가 마차를 몰고 떠났다.
 방향은 동쪽!
 아르테미어 제국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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