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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스케일이 계속 커져! 1-1권

2018.06.21 조회 11,552 추천 64


 # 돈 버는 스케일이 계속 커져! ― 1
 
 내 인생 첫 번째 터닝 포인트는 그렇게 시작된다.
 
 터닝 포인트
 
 직업반에 오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물론 집안 형편과 상관없이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어서 직업반을 선택한 애들도 없지 않았지만, 의외로 학업 성적은 좋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보다는 기술을 익혀서 일찍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인하가 직업반 두 달 만에 다시 원래 다니던 학교로 돌아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녀석은 직업반을 다니게 되면 여자들과의 판타지가 펼쳐질 거라 기대를 했었던 게 분명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나와 인하의 기대와는 다르게 직업반을 선택한 아이들 대부분의 눈빛은 무척이나 진지했고, 성숙했었다.
 
 일반 학교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절실함을 느끼게 된 계기였다고 할까?
 난 단지 공부가 하기 싫어서 선택했던 피부미용이 누군가에겐 꿈이었고, 도전이었다.
 
 그런 진지하고 성숙한 눈빛을 가진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부턴가 공부가 하기 싫어서 직업반을 선택했던 나의 선택에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수능준비에 한창일 다른 녀석들의 삶이 부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지레 겁을 먹고 직업반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지만 피부미용은 내가 할 수 있는 선택 중 하나일 뿐이었지, 내가 원하는 선택은 아니었다.
 
 다시 돌아갈까?
 
 이미 늦었다.
 인하 같은 경우는 원래 학업 성적이 바닥인 녀석이었다.
 공부가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하는 개념이 없는 녀석이 바로 인하다. 인하의 관심사는 오로지 재미였다. 학교가 재미가 있느냐, 아님 직업반이 재미가 있느냐. 직업반 두 달 동안 인하는 특별한 재미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원래 다니던 학교로 다시 돌아갔던 것뿐이다.
 인하에 비해 나의 관심사는 체면이었다.
 직업반을 선택하는 순간 이미 난 돌아갈 수 없었다.
 무엇 하나 진득하게 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그 결정을 또 바꾼다는 아버지의 잔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고, 돌아가서 다시 수능을 준비해본들 내 성적에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반면 일형이의 모의고사 성적은 매번 눈에 띄게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두려웠다.
 나와는 다른 길을 가는 일형이었지만, 일형이의 모의고사 성적이 올라가는 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두려웠다.
 난 내가 생각을 해봐도 확실히 성격이 이상하다.
 친구가 좋은 성적을 받으면 함께 좋아해 줘야 하는 게 정상일진대, 일형이의 성적이 올라가는 건 내게 그리 듣기 좋은 소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가진 운을 녀석에게 빼앗긴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인하는 여전히 여자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나이트를 다니며,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들어내는 인하.
 그런 인하의 생활 역시 부러웠다.
 
 일형이와 인하에 비하면 난 뭐든지 어중간했다. 확실하게 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마음을 다잡고 뭔가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난 직업반에서 여전히 학교에 남아있는 일형이와 인하에 대한 소식을 접하며, 녀석들에 대한 자격지심을 키워가고 있었다.
 
 바뀌고 싶었다. 아니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은희를 만나기 전으로.
 만약 그때 은희를 만나지 않았었다면, 은희가 준 연락처로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렇게 은희를 원망하면서도 여전히 은희가 그립고 은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
 
 일형이가 수능에서 대박을 쳤다. 제발 꿈이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르겠다. 360점. 사실 일형이의 1학년 성적을 생각해 보면 녀석이 지난 2년간 얼마나 혼자 노력을 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축하해줘야 할 일이었지만, 나의 솔직한 속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일형이의 수능 성적 360점은 말이 안 되는 점수였다.
 그러면서도 앞에서는 진심인 척 축하를 해주고 있었다. 역시 일형이라며, 넌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말만 몇 번을 되풀이했었는지 모르겠다.
 일형이의 수능 성적이 부럽다는 생각보다는 얄밉다는 생각이 더 앞섰고, 일형이가 수능 360점을 받은 것보다 더 날 힘 빠지게 만들었던 건 수능 130점으로 4년제에 합격을 한 인하의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자기가 4년제에 합격을 한 걸 본인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지원한 전문대 몇 군데를 다 떨어진 후, 4년제에 붙어버렸다. 이건 기적이 아니라 사기다.
 물론 아무도 모르는 학교다. 그런 학교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을 정도로 낯선 이름의 학교였지만, 어쨌든 4년제다. 예비번호 1,200번. 그 예비번호 1,200명이 다 빠지고 인하에게 기회가 왔던 것이다.
 인하는 4년제에 입학을 했다는 이유로 집으로부터 차를 선물 받았다.
 처음 인하네 어머니는 인하가 4년제에 붙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하를 때리셨다.
 이제는 하다 하다 가족들한테까지 사기를 치느냐고 말이다.
 그 정도로 인하의 4년제 합격은 불가사의한 부분이 많았다.
 
 ***
 
 일형이는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공대에 진학을 했다. 성적에 맞춘 소신지원이라며 겸손을 떨었지만, 난 녀석의 그 겸손이 더 싫었다.
 인하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집에서 선물 받은 차를 끌고 다니며 여자들을 꼬셔댔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으면, 녀석들은 결코 먼저 날 찾아주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만 빼놓고 둘이서 따로 만나는 건 아니었다.
 일형이는 일형이대로, 그리고 인하는 인하대로 각자의 새로운 환경에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녀석들에게 난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혼자서 참 많이 했었다.
 녀석들이 과연 날 친구로 생각하기는 하는 것일까?
 
 ***
 
 피부미용학과가 있는 대학이 아직은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
 그 학과가 있더라도 아직은 그 인식이 대학에 왜 피부미용학과가 있어야 해? 하는 정도로 무시를 받던 시절에 난 전문대 피부미용학과에 진학을 했다.
 사실 강의를 받는 나 자신도 이게 왜 대학 과정에 있는 것인지 헷갈렸었다.
 이미 고3 직업반에서 다 배운 내용들이었고, 실습과정만 놓고 보면 어쩌면 직업반의 내용이 훨씬 더 알찼다.
 직업반 1년 동안 했던 과정을 대학 2년에 걸쳐서 다시 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해야 했다.
 이미 일반 헤어 미용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던 난, 최대한 빨리 군대를 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군대에 있는 동안 손은 굳게 된다. 손이 생명인 직업이 아니던가.
 빨리 군 문제를 해결해놓고, 다시 복학해서 손을 푼 다음 사회에 나가는 게 현명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형이와 인하가 자유로운 캠퍼스 낭만을 즐기고 있을 때, 난 이미 현실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병대를 지원했다.
 이유는 하나. 나의 망쳐버린 3년 때문이었다. 돌이킬 수 없다면, 되풀이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난 의지도, 의욕도 없는 상태였는데 해병대를 다녀오면 좀 변화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해병대를 지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난 후회할 선택만 하는 불운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해병대는 내게 의지와 의욕이 아닌, 이상한 성격만 만들어줬다. 해병대 입대와 동시에 흔히들 말하는 해병대 곤조가 생겼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엔 얌전하면서도 술만 마시면 목소리가 커지고, 괜히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러다 스물네 살. 가장 마지막으로 군대를 전역한 인하의 전역날에 일형이에게 말 그대로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맞게 된다.
 
 시내의 한 술집이었는데, 옆 테이블에서 자꾸 째려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술이 조금 취한 상태였는데 겁 없이 옆 테이블에게 시비를 걸었다.
 뭘 째려보느냐고, 쌍욕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다.
 옆 테이블에서 동시에 우르르 일어섰고, 일형이가 그들을 향해 허리까지 숙여가며 사과하고 말렸다.
 친구가 술이 많이 취했다고,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던 일형이의 모습은 내가 기대하는 남성고 통 장일형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더 화가 났었는지 모르겠다.
 들고 있던 소주잔을 있는 힘껏 바닥에 집어 던지며 다른 테이블 사람들에게 이리 오라고, 와서 나랑 붙자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 순간 일형이가 나의 뺨을 때렸다.
 야차처럼 변해있던 일형이의 얼굴은 아직까지 잊혀지지가 않는다.
 
 “이런 개새끼를 봤나···.”
 
 다시 한번 나의 뺨을 때렸던 일형이는 내가 뭔가 저항을 하기도 전에 나의 멱살을 잡고 술집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시내 한복판에서 한 손으론 나의 멱살을 잡고, 다른 손으로 계속해서 나의 뺨을 때렸다.
 
 “정신 차려.”
 “놔!”
 “정신 차리라고 했어.”
 
 차가워진 목소리로 일형이는 내가 얌전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나의 뺨을 때리며 정신을 차리라는 말을 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그랬다. 난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결국 나이 스물넷에 또다시 일형이에게 지고 만 것이다.
 이기고 싶다. 정말 한 번 정도는 이겨보고 싶다!
 
 다음 날 일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일형이에게 기억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난 그 모든 장면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
 
 스물다섯에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체인 미용실이었는데 월급 40만 원을 받으며 흔히 말하는 <시다>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주 6일에 40만 원.
 그게 나의 가치일 리가 없다는 생각에 난 점점 더 우울해지고 있었다.
 손님의 머리를 감겨주고, 커트하는 자리의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쓸어 담으며, 내가 이걸 하려고 직업반에서 미용사 자격증을 따고, 2년간 전문대를 다녔나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간 사느라 잊고 지냈지만, 사실은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던 은희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티브이 브라운관에서 말이다.
 경쾌한 대학 생활을 그리고 있는 시트콤 속 은희는 비록 단역으로 시작했지만, 그 단역의 비중을 매주 조금씩 키워나갔다.
 인터넷에서 그 이름을 검색하면 올라오는 프로필 속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졸업이라는 문구가 날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인생이 정말 좆같다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
 
 녀석들과 술을 마시며, 은희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억울하다고, 정말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꼬여버린 건지 모르겠다는 신세 한탄을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했다.
 하지만 일형이와 인하는 만날 때마다 버릇처럼 해대는 친구의 넋두리에 더 이상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일형이는 대기업 취업에 모든 신경이 쏠려있는 상태였고, 인하는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참 살다 살다 별 거지 같은 소리를 다 듣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하가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는 내게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일형이는 인하의 도전을 응원하는 입장이었다.
 이미 우리 셋은 생각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져 있었다.
 결국 인하는 그다음 해에 나와 일형이의 예상을 뒤집고 정말로 유학길에 올랐다.
 
 “난 돈을 많이 벌고 싶지는 않아. 힘들잖아. 너희도 알다시피 난 치열하게 살고 싶은 마음 1도 없는 사람이야. 난 그냥 돈이 많고 싶어.”
 “무슨 수로? 우리 같은 놈들이 돈 안 벌고 무슨 수로 돈이 많을 수가 있어?”
 “여자를 잘 만나야지.”
 “참 너다운 발상이다. 돈 많은 여자가 눈알이 삐었냐, 너 같은 놈을 만나게.”
 “어허이, 참···. 그래서 유학을 가겠다는 거 아냐. 업그레이드. 따라 해 봐. 업그레이드. 난 지금 업그레이드를 하기 위해 유학을 가는 거야.”
 “여자를 꼬시려고 유학을 간다고?”
 “그냥 여자가 아냐. 돈 많은 여자지. 돈 많은 여자를 만나기 위해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뭔가 스펙이 필요한 거 같아. 그냥은 힘들어. 차별화된 뭔가가 필요하단 말이지. 유학 딱 다녀와서, 제대로 꼬신다. 잘 봐. 형이 어떻게 돈 많은 여자 꼬시는지.”
 
 그렇게 인하가 돈 많은 여자를 꼬시기 위해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고 난 후, 일형이는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
 그사이 내가 한 발전이라고는 월급 40만 원이 60만 원으로 올랐다는 정도? 디자이너를 대신해 염색과 스트레이트 파마를 할 수 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여자들뿐이었던 그 미용실에서 난 나보다 나이 어린 여자 스탭들의 계급장 놀이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여자들의 계급장 놀이는 군대보다 더 빡빡했다.
 
 “민준 씨, 바닥 한번 쓸어야 하지 않을까요?”
 “민준 씨, 염색 솔 좀 가져다주세요.”
 “민준 씨, 저 손님 샴푸 좀 부탁해요.”
 “민준 씨, 나 손님 밀려있으니까 이 손님 드라이 한번 해드리고 제품 좀 발라줘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죠?”
 
 민준 씨, 민준 씨, 민준 씨···!
 
 이 짓도 못 해 먹겠단 생각으로 불만이 가득해진 그 시점에 난 인생의 두 번째 터닝 포인트를 만나게 된다.
 미용실에서 일을 하다 보면 염색약이나 새로 나온 제품들을 영업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일했던 체인 미용실 같은 경우는 본사에서 지정해주는 거래처가 있기 마련이다.
 시세이도 제품을 취급하던 회사의 한 영업직원과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비록 미용실에서 만날 때엔 우리가 갑이지만, 현실적인 부분에서는 그 형님이 나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도상운. 미용 영업 업계를 내게 소개해준 인물이다.
 
 유학을 떠난 인하와 대기업에 취직을 해서 주말도 없이 월화수목금금금을 하고 있는 일형이의 빈자리를 사회에서 만난 상운이 형이 대신 채워주기 시작했다.
 
 나의 현 상황에 대한 넋두리를 한참 동안 들어주던 상운이 형이 말했다.
 
 “그럼 그만둬. 차라리 우리 회사로 들어와.”
 “형네 회사로요? 자리는 있어요?”
 “우리야 언제나 사람이 부족한 상태지.”
 “잘나가는 회사라면서요. 그런데 왜 사람이 부족해요?”
 “그건 네가 이쪽 바닥을 잘 몰라서 그래. 이직률이 높아. 하지만 본인만 열심히 하면 꽤 괜찮은 직업이기도 하지.”
 
 그 당시 상운이 형은 회사가 준 영업 차량을 타고 다녔는데, 그 차가 꽤 부러웠다.
 월급도 월 200 가까이 받는다고 했다.
 만약 그 회사에 취직을 하면 나도 형처럼 차를 받느냐고 물어봤더니 웃으면서 영업직원한테 차는 발과도 같은 존재인데, 당연한 거 아니냐며 만약 차가 없다면 차를 지원해주고 내가 차를 산다면 기름값으로 하루에 얼마씩을 지원해준다고 했다.
 
 그렇게 난 미용을 접고, 미용 영업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미용을 접고 영업 쪽 일을 해보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더 이상 내게 그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으셨다. 부모님이 보내는 실망감의 무게감을 안고서 그렇게 난 미용 영업계로 들어섰다.
 
 
 # 돈 버는 스케일이 계속 커져! ― 2
 
 상운이 형은 술만 마시면 여자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상운이 형. 여자친구도 없는 주제에 혼자 산다.
 부모님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원룸을 잡아서 독립을 한 상태였는데, 아마도 집에서 주는 결혼에 대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따로 나와서 사는 모양이었다.
 
 형은 혼자 사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술만 마시면 여자가 필요한 것으로 봐서는 혼자 사는 삶이 편할지는 몰라도 외로운 건 분명했다.
 
 서른넷. 상운이 형에 따르면 형의 친구들 대부분은 결혼을 했고, 가장 빨리 결혼을 한 친구의 딸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본인 역시 결혼을 하고 싶기는 한데 모아놓은 돈 한 푼 없는 자기에게 어느 정신 나간 여자가 시집을 오겠냐며 술만 마시면 신세 한탄을 했다. 그 신세 한탄의 끝은 결국 노래방으로 이어지게 된다.
 노래방에서 아가씨들을 불러놓고 이런저런 농담 따먹기를 하며 회포를 푸는 것으로 현실을 회피하는 게 버릇이 된 형이었다.
 아가씨들의 허벅지 살을 주무르며, 그녀들의 깊게 파진 셔츠 속으로 은근슬쩍 손을 넣고, 그러다 속된 말로 삘이 꽂히면 내 지갑 다 털어가라! 하는 식이 되어버리는 형이다.
 
 처음엔 형이 소개해준 그 세계가 마냥 신기하고 흥미로웠는데, 언제부턴가 유흥에 들어가는 금액이 부담스러워지자, 형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게 점점 무서워졌다.
 월급은 미용실에서 나이 어린 디자이너들의 보조 일을 했을 때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 월급이 지출을 커버하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상운이 형에게 여자친구를 하나 소개시켜주게 된다.
 술만 마시면 연애를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상운이 형. 형에게 여자친구가 생기게 되면 의무적으로 함께 놀아주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개인 시간이 늘어나게 될 거라 믿었던 것이다.
 
 미용 영업. 그중에서도 미용실, 즉 샵에 들어가는 제품을 영업하는 회사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알고 지내는 디자이너들이 제법 많았다.
 
 그 당시 내가 커버해야 했던 미용실이 서울 시내에 백여 곳 정도가 되었는데, 사실 말이 영업이지 실제로 하는 일은 할당받은 거래처에 제품들을 배달해주는 게 나나 상운이 형이 하는 일이었다.
 오픈을 준비하는 샵에 찾아가서 우리 회사가 취급하는 제품들을 이용해주십시오, 하는 식의 진짜 영업을 하는 팀은 따로 있었다. 나와 상운이 형이 했던 일은 그들이 뚫어놓은 미용실을 상대로 그들이 던져주는 주문을 받아서 기계처럼 제날짜 안에 제품들을 배달해주는 게 전부였다.
 
 물론 실적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지만, 실적에 대한 부담감이 없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 숨은 뜻은 영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전혀 구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일에 무척이나 만족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들어온 주문만 다 쳐내면 내가 할 일은 끝이 나는 것이다. 퇴근 시간도 자유로웠고, 일하는 방식에 대해 누구 하나 터치를 하지 않았다.
 거기다 언제 손님이 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해하며 미용실 한쪽의 쪽방에서 커튼을 치고 밥을 먹지 않아도 됐고, 나이 어린 여자들의 계급장 놀이의 희생양이 되지 않아도 됐다.
 
 업무에 대한 만족도가 얼굴에 그대로 비춰졌던 모양이다.
 내가 맡고 있는 대부분의 샵 실장이나 디자이너들은 내게 호감을 보였다.
 날 남자로 봤다기보다는 풋풋함이 어려있는 동생, 혹은 아직 미용 업계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업직원 정도로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귀엽게 봤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단편적인 증거는 바로 커피였다.
 어느 샵을 가나 커피 한잔 하고 가라는 말을 꼭 들었다.
 
 그 업계를 잘 몰랐던 난 그게 거래처 영업직원에 대한 매너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내가 미용실에서 디자이너 보조로 일을 할 당시 그곳 실장이나 디자이너들은 결코 제품 영업직원들에게 커피를 대접하지 않았었다.
 
 하루는 상운이 형에게 물어봤다. 술자리에서 아주 짧게.
 
 “혹시 형도 제품 배달 가면 커피 마시고 가라는 말 들어요?”
 “커피? 누가?”
 “아, 아니에요.”
 
 ***
 
 나은진.
 나의 두 번째 연애가 시작된다.
 은희와 헤어진 이후로 여자를 한 번도 안 만나봤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교제를 전제로 여자를 만난 건 은희 이후 처음이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아무도 모르는 학교에 홀로 외롭게 복학을 했을 때 오빠, 오빠 하며 졸졸졸 따라다녔던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희미해진 추억일 뿐이다.
 나름 애교와 끼가 다분한 여자아이였는데, 내겐 말 그대로 아이였다.
 첫사랑이 연상이어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 그 아이는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날 좋다고 하니까, 거기다 혼자 다녀야 하는 학교생활이 무미건조하기도 했기에 한 몇 번 데이트를 하긴 했었는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좋다며 매달리는 여자로부터는 큰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첫사랑이었던 은희 같은 경우는 비록 은희가 먼저 다가왔었지만, 사귀는 내내 내가 매달리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애가 끓고 불안했었는데,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내가 좋다며 뭐든 내게 맞추려고 했던 그 여자아이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게 그저 꼬마에 지나지 않았다.
 대학 시절 내내 적극적이든 우회적이든 내게 다가오는 여자들이 제법 있었던 거 같다. 뭐, 나만의 착각일지도.
 어쨌든 여자와는 아예 담을 쌓고 지내다가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와서 처음 만난 여자가 바로 은진이었다.
 
 은진이 역시 공교롭게도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거래처 미용실의 세컨드 디자이너였는데,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바닥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간 꽤 근성 있고 자기 목표가 뚜렷한 실력 있는 디자이너였다.
 헤어 디자이너가 여자친구이면 좋은 점. 아니, 혼자 사는 여자친구가 헤어 디자이너이면 좋은 점.
 머리를 집에서 직접 잘라준다.
 쉐이빙 거품을 어설프게 묻혀서 해주는 면도는 서비스다.
 은진이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은진이가 해주는 면도 서비스를 처음 받았을 때, 몇 년 만에 죽어있던 연애세포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첫 만남부터 느낌이 조금 이상했었다.
 생각해보니 첫 만남에서부터 다 죽어있던 연애세포가 꿈틀거리는 느낌을 받았던 거 같다.
 남자 손님 커트를 하고 있던 은진이는 주문받은 제품 박스를 안고 샵을 찾은 내게 아주 차갑게 굴었다.
 
 “거기 놔두세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거울을 통해 날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본능적으로 은진이의 전신을 훑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롱스커트 원피스 아래로 통굽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몸매가 여실히 드러나는 그 소화하기 힘든 복장을 무척이나 세련되게 소화하고 있었기에 눈길이 한 번 더 갔었던 거 같다.
 거울을 통해 본 은진이의 얼굴을 정면에서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은진이는 손님에게 집중하느라 내게 자신의 세련되고 이지적인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짧은 쇼트커트였는데, 귀 옆으로 깔끔하게 빗어 넘긴 옆 라인이 예술이었다.
 
 그곳의 또 다른 디자이너가 새로 온 영업직원이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커피를 한잔하겠냐고 하는 것이다. 이미 몇 군데에서 충분히 얻어먹은 커피였지만,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그리고 이것저것 새로 나온 제품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또 다른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커트를 끝낸 은진이가 몹시 피곤한 얼굴로 보조 스탭에게 손님의 샴푸를 부탁한 후, 내게 다가왔다.
 
 별말 없었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인사를 건네는 게 전부였다.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최대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깊게 숙였는데, 그 모습을 본 은진이는 피곤한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띄웠다.
 그렇게 몇 차례 그 샵을 더 방문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됐고, 아주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물어봤다.
 그리고 알게 됐다. 은진이는 첫 이미지와는 달리 무척 밝고 장난기가 많은 개구쟁이라는 걸. 첫 만남 때의 쌀쌀함은 전날 술을 죽을 때까지 마신 후 아침부터 밀려있는 예약 손님을 쳐내느라 몸이 말이 아니어서 표정관리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은진이의 성격이 첫사랑이었던 은희와는 달리 밝고 경쾌하다는 사실에 호감도는 이미 컨트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직 상승하고 있었다.
 
 “언제 같이 소주 한잔 해요.”
 “그게 언제일지 누가 알아요? 할 거면 오늘 하고.”
 “오늘이요?”
 “바쁘면 말고.”
 “아뇨, 전 괜찮은데··· 몇 시에 마치세요?”
 “보기보단 적극적이네?”
 “네?”
 “오늘 말고 저 수요일에 쉬니까 다음 주 화요일 저녁에 한잔하죠. 죽을 때까지.”
 
 난 그래도 첫 데이트이기에 스파게티나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실 계획을 잡았다.
 하지만 은진이는 스파게티는 무슨 스파게티냐며 돼지 껍데기로 시작해서 오뎅바에 잠시 들러 휴식을 취한 다음 과일 안주로 깔끔하게 끝을 보자고 했다.
 공식처럼 정해진 자신만의 코스가 있으니 따라만 오라는 것이었다.
 
 “자신 있어요?”
 “무슨 자신이요?”
 “술 좀 마셔요?”
 “어디 가서 못마신단 소리는 안 들어요.”
 “그 정도론 감당이 안 될 텐데··· 뭐 일단 가죠. 민준 씨 주량은 제가 체크해가며 감안해서 마시면 되는 거니까.”
 “술 좀 마시나 보네요?”
 “많이 마시죠. 이슬은 사랑이니까.”
 
 사랑. 물론 아무렇게나 한 표현이었겠지만, 사랑이라는 그 단어가 던져주는 설렘은 꽤 파장이 컸다.
 
 3차. 과일 안주에 소주 3병을 끝내고 나서도 나와 은진이는 멀쩡했다.
 다른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고, 딱 소주 한 잔 정도만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 상황에서 은진이가 말했다.
 
 “생각보단 잘 마시네?”
 “말뿐인 줄 알았는데, 제법인데?”
 
 어색한 침묵. 소주 한 병을 더 시키자니 남은 안주가 너무 부실했고, 자리를 옮기자니 배가 너무 부른 상태였다.
 
 “한잔 더 할래?”
 “배 안 부른 안주로 골라. 배 터질 거 같으니까. 배불러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겠어.”
 “보통 이 정도 마시면 계란 후라이를 먹어야 되는데.”
 “반숙?”
 “통했어!”
 “여긴 계란 후라이를 해줄 것 같지가 않은데···.”
 “···우리 집 갈래?”
 
 코끝에서 종이 타는 냄새가 느껴졌다. 그 냄새는 마치 섯다를 할 때 잡은 장땡을 보며 맡아본 냄새 같았다. 짧은 찰나였지만, 내가 맡고 있는 그 냄새를 은진이도 맡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날 난 버젓이 잘 살아계시는 상운이 형의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들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함께 일하는 상운이 형을 판 것이다.
 상운이 형을 실제로 본 적은 없으시지만, 이직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준 형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고, 그래서 어머니 역시 상운이 형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계신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상운이 형!
 
 “어쩌다가?”
 “몰라요. 저도 회사 사람들이랑 술 마시다가 갑자기 연락을 받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느 병원인데?”
 “아, 그걸 안 물어봤네. 다시 전화해서 물어봐야겠어요. 아무튼 엄마, 오늘 저 집에 못 들어갈 거 같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운이 형 아버지잖아요. 옆에서 도와야 할 거 같아요.”
 “···그래, 알았어.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바깥에서 전화통화를 마치고 과일 안주에 소주를 마셨던 그 호프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사이 은진이는 계산을 끝내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가자.”
 
 경험이 많은 척,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한다고 했는데, 그 모습이 우스웠던지 은진이는 콧등에 주름을 만들어내며 미소 지었다.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서 이슬 몇 병과 감자칩, 그리고 땅콩을 산 뒤 은진이가 혼자 사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사실 촌스럽게 이것저것 해명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말이야.”
 
 은진이가 말했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이야. 나 집에 남자 데리고 가는 거 네가 처음이야.”
 “혹시나 실망할까 봐 하는 말인데, 나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처음 가봐.”
 “어째 내가 하는 말 안 믿는 눈치다?”
 “왜, 내가 하는 말 거짓말처럼 들려?”
 “아니다. 됐다. 그냥 들어가자.”
 
 주방 맞은편으로 위치해 있는 아일랜드 테이블 위로 편의점에서 사 온 술과 안주들을 준비하는 동안 은진이는 화장실로 들어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속옷 라인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핑크색 트레이닝 바지 위로 목이 한쪽 어깨로 걸쳐질 정도로 상당히 늘어난 면티 차림이었다. 그 면티엔 펄럭이는 치마를 요염하게 붙들고 있는 마릴린 먼로의 전성기 모습이 프린팅되어 있었다.
 
 소주 한 병을 따서 종이컵에 부은 다음 완벽한 테이블 세팅을 끝내는 동안 은진이는 계란 후라이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은진이가 정말로 계란 후라이를 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
 계란 후라이를 안주 삼아 소주 반병을 비웠다. 더 이상 술을 마시는 건 무의미했다. 하지만 숨 막히는 그다음 상황을 진행시킬 용기가 나지 않았던 난 또다시 비어있는 종이컵에 의미 없이 술을 부었다.
 
 
 # 돈 버는 스케일이 계속 커져! ― 3
 
 “난 그만 마실래. 피곤해서 안 되겠어.”
 
 은진이는 마지막 잔을 비운 다음 그만 마시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안주도 먹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가 칫솔을 입에 물고 다시 나왔다.
 
 “생각해보니까 너 칫솔 없지? 아까 편의점에서 샀어야 했는데···. 새 칫솔은 없고, 휴대용 칫솔이 있는데, 몇 번 안 썼어. 쓸래?”
 
 생각 없이 받아든 은진이의 칫솔. 은진이는 양치질을 하면서도 꽤 정확한 발음으로 테이블 위로 어질러 놓은 것들은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치우자며, 그대로 놔두라고 했다.
 
 “내가 먼저 씻을게.”
 
 은진이가 샤워를 하는 동안 고리타분하게도 난 나의 행동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나의 행동이 아닌 영업직원으로서 거래처 디자이너와 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관계를 가진 뒤 나와 은진이의 관계는 정확히 어떻게 정의되는 것일까?
 연인 관계로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라면 감정에 솔직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불현듯, 당사자인 은진이가 그걸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일회용 인조이 상대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샤워기 물줄기 소리가 멈췄다. 그와 동시에 내 심장도 덩달아 함께 멈추는 착각이 들었다.
 
 수건 속에 숨어있던 올림머리를 풀어헤치며 다시 등장한 은진이는 촉촉이 젖은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로 모두 넘겨놓고 화장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 아무 말 없이 그런 은진이를 바라만 봤다.
 스킨으로 화장솜을 적시던 은진이가 거울을 통해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거기 앉아서 뭐 하고 있느냐고, 안 씻을 거냐고 말이다.
 
 “조금 촌스러운 질문인 건 알지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나 지금 최대한 경험 많은 척 연기하고 있는 중이야.”
 
 얼굴에 크림을 바르며 은진이가 말했다.
 
 “사실은 술집에서부터 쭉 쿨한 척 연기하고 있는 중이었어. 뭘 물어보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나서 해도 되는 질문이라면 촌스러운 그 질문 나중에 해주면 안 될까?”
 
 자세히 보니, 비록 거울을 통해서이긴 했지만 날 바라보는 은진이의 두 눈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은진이가 썼던 칫솔로 이를 닦고 평소보다 꼼꼼하게 몸을 씻은 후 화장실을 나왔다. 은진이는 이미 침대 속으로 들어가 고개만 살짝 빼놓고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어색해진 공기. 만약 티브이 소리까지 없었다면 무척이나 어색했을 것이다.
 
 방에 불을 끄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 나란히 누웠다. 부끄러워서였을까, 은진이는 날 등지고 돌아누웠다.
 피곤하다며, 자야겠다는 은진이. 그 말은 마치 지금부턴 네가 좀 알아서 리드해 줘, 남자답게··· 라고 하는 말 같았다.
 티브이를 껐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의 주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난 똑바로 누운 상태에서 가슴 앞으로 두 손을 포개어 놓고 천장을 바라봤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뭔가를 하긴 해야겠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다.
 
 “안 할 거야?”
 
 돌아누운 상태에서 은진이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 베여있는 답답함은 목소리의 주인이 아닌 나의 몫이었다.
 난 용기를 내어 은진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와 동시에 은진이도 꿈틀거리며 날 바라보고 돌아누웠는데, 그 순간 은진이와 나의 얼굴 사이 간격은 내가 조금만 용기를 낸다면 입술을 곧바로 훔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뭐야?”
 “뭐가?”
 
 은진이의 두 눈엔 장난기와 함께 호기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피곤하다며, 자야겠다던 사람의 눈 치고는 무척 쌩쌩한 눈이었다. 비록 불이 꺼진 어두운 방 안이었지만, 난 은진이의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촌스러운 질문. 해 봐, 지금.”
 “나 지금 무진장 떨리거든? 하고 나서 들어도 된다면,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은진이는 말없이 콧등에 주름을 만들어내며 미소 지었고, 그 미소에 용기를 받은 난 드디어 천천히 은진이의 입술을 훔칠 수가 있었다.
 침대가 좁아서 더 좋았다. 간헐적인 숨소리는 결코 인위적인 게 아니었다.
 열심히 서로를 탐했고, 솔직히 서로를 안았다.
 
 “하아···.”
 
 뜨거웠지만 무척이나 향긋하고 포근했던 가는 숨이 귓가에 와 닿을 때마다 온몸의 신경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지만 갑작스럽게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
 나의 모든 걸 숨기고 싶고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 싶은, 하지만 상대에 대해선 뭐든 다 알고 싶고 내 안에 숨어있는 변태적인 욕망은 영원히 숨겨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난 은진이를 통해 나의 모든 걸 들키고 싶고,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으며, 내 욕망의 민낯을 솔직하게 고백해도 웃으며 전부 다 받아줄 것 같은 기분을 받았던 거 같다. 그리고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사랑의 진짜 모습이었단 걸 알았다.
 엄마 품에 안긴 젖먹이 아이처럼, 난 그렇게 은진이의 품에 안겨서 거칠어진 숨을 연거푸 토해냈고, 은진이는 그런 나의 등을 말없이 쓰다듬어줬다.
 
 “처음이라서 그래. 처음이라서 긴장해서···.”
 “괜찮아. 너무 좋았어.”
 “다시 하면 정말 잘할 수 있어.”
 
 은진이가 웃었다. 웃는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내 등을 쓸어주는 그 손길에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제 해 봐, 촌스러운 질문.”
 “우리 사귀는 거야?”
 “그걸 물어보고 싶었어? 그런 질문은 촌스러운 게 아니라 멍청한 거지.”
 “그럼 우리 지금부터 1일이야.”
 “이건 유치한 거고.”
 “한 번 더 하고 싶어.”
 “음··· 이건 좀 쓸 만한 거고.”
 
 사랑, 연애. 그리고 결혼···.
 
 매주 화요일은 출장을 가는 날이다. 매주 화요일에 아들은 부산으로 출장을 간다. 그래서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고 난 매주 화요일마다 은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가급적이면 은진이가 마치기 전에 일을 모두 끝내놓고, 회사 차로 은진이가 근무하는 샵 근처 커피숍 앞에서 은진이를 기다렸다.
 은진이가 오면 그때부터 아이디어를 짜내기 시작한다.
 영화를 봐도 좋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도 좋다. 드라이브를 하거나 어떨 땐 상운이 형 커플과 만나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매일매일이 행복과 만족, 설렘의 연속이었다.
 하루 외박으론 그때의 연애세포를 모두 잠재울 수가 없었다.
 연박을 해야 하는 출장 스케줄을 만들어서 주 5일 근무 중 이틀은 부산에 내려가야 한다고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늘어난 하루의 시간만큼 사랑에 충성했고, 충성의 대상이 원하는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스물일곱. 조금 이른 나이기는 했지만, 난 은진이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고, 소개까지 시켜줬다.
 
 “결혼이 어디 뭐 마음만 있다고 해지는 거야?”
 
 아버지는 은진이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말씀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으셨지만, 은진이와의 관계를 가볍게 치부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셨다.
 굳이 결혼을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 어떤 도움도 기대하지 말라시는 아버지. 어이가 없었다.
 처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꺼냈을 때, 은진이에 대해 어머니 못지않게 관심을 보이셨던 아버지. 뭐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강남에서 잘나가는 헤어샵의 세컨드 디자이너라고 설명드렸더니 언제 시간을 만들어서 집에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아직 은진이의 가족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던 난 여자친구를 집으로 한번 데리고 와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다.
 아직 그럴 단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요하셨고, 결국 난 은진이가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조심히 은진이에게 의사를 물어봤다.
 집에서 널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한다고, 하지만 내키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은진이는 흔쾌히 인사를 드리러 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은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소개를 시키기 전에 내가 먼저 은진이에 대해 공부를 하고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그걸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돌아가셨어요.”
 
 거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은진이의 아버지가 재혼을 해서 아버지와 새엄마 사이에서 동생이 태어나고, 배다른 동생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된 그 가정에서 눈치를 살피며 지내야 했던 은진이의 성장 과정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은진이를 만나기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되는 시점이었다. 남자친구로서의 무관심이 아니었고, 남자친구였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은진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어때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버지의 위선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안 계신 게 어디 은진이 잘못도 아니고, 젊은 나이에 사별을 했으면 재혼을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난 오히려 은진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가엽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는데, 아버지는 그런 배경을 가진 은진이가 아들의 여자친구인 게 싫은 눈치셨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버지와 등을 지고 살게 된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아직까지 은진이를 만나냐고 물어보셨다.
 무슨 뜻이냐고 되물어봤다. 아직까지 만나냐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아버지는 어디 눈을 똑바로 뜨고 아버지를 노려보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난 아버지께 어쩜 그리도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자식에게 들킬 수가 있느냐고 대들었다.
 우리 집은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아버지가 대기업에 다니고 계신 거, 그거밖에 더 있느냐며, 그마저도 따지고 보면 일개 영업 대리점의 점장일 뿐 아니냐고.
 
 “단 한 번이라도 은진이 자체만 놓고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사람들이 알면 비웃어요, 아버지. 은진이는 저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에요!”
 “나가. 너 그냥 나가. 꼴도 보기 싫어!”
 “나가는 건 문제 없는데, 아버지. 제발 그러지 좀 마세요. 제가 다 부끄러워요.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저희 집 뭐 있는 줄 알겠어요. 저희 집 뭐 있어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나가라고 이 새끼야!”
 “그 성격 안 죽이면 나중에 외로우실 거예요.”
 “뭐,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건강하시라고요.”
 
 그렇게 난 집을 나왔고, 은진이와 동거를 하게 된다.
 은진이에겐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왔다는 걸 말하지 못했다.
 분명 이것저것 아버지와 싸우게 된 이유를 물어볼 것이고, 그 상황에서 내가 만일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은진이는 상처를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냥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다.
 너와 함께 살고 싶어서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독립을 했다고.
 그날 은진이는 그동안 내가 본 모습 중 가장 행복해 보였다. 늦은 시간까지 나와 함께 마트에서 신혼살림을 장만하듯, 이것저것 새 살림살이를 쇼핑했고, 팬시점에서 산 노트에 가계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은진이가 행복해 보여서 덩달아 행복했다.
 하지만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아빠 한번 만나볼래?”
 “···.”
 “우리 아빠도 너희 부모님께서 날 예뻐해 주시는 것처럼 틀림없이 널 좋아할 거야.”
 
 그랬다. 은진이는 그때까지 우리 집에서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내가 한 거짓말 때문이었는데, 나라고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 했겠나?
 우리 집에서 널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거 같다는 말을 무슨 수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무슨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 돈 버는 스케일이 계속 커져! ― 4
 
 주유소 두 개를 운영하고 계시는 은진이의 아버지.
 비록 동네의 작은 주유소라도 주유소를 두 개 정도 가지고 있으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며 상운이 형은 은진이를 꼭 잡으라고 했다.
 상운이 형 역시 은진이의 아버지가 주유소를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처음 내가 은진이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꽤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수긍을 하기 시작했다.
 
 “하긴, 생각을 해보면 현재 너희가 살고 있는 그 오피스텔 월세가 아무리 은진이가 돈을 많이 받더라도, 세컨드 디자이너 월급으로 감당할 수 있는 월세는 아니야. 근데 걔는 왜 그런 걸 숨겼대? 집에 돈이 있는 게 숨길 일은 아니잖아.”
 “숨긴 게 아니라 제가 안 물어봤던 거예요.”
 “서로 그런 이야기도 안 하고 서로의 집에 인사를 갔던 거였어?”
 “그런 게 중요해요?”
 “친구 집에 인사드리러 갔던 거 아니잖아. 결혼을 전제로 상대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던 거잖아. 그럼 최소한 서로의 집안에 대해서 당사자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어야지.”
 
 상운이 형은 답답하단 투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은진이 아버지 인상은 어떠셨어?”
 “좋으셨어요. 좋은 분 같아 보였어요.”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 같아 보였어?”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재혼을 하셨잖아요, 은진이가 어렸을 때. 그러다 보니까 딸한테 미안한 부분이 많으신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그냥 제 기분에 딸이 결혼할 상대라고 소개를 하니까 당신을 대신해서 딸을 챙겨줄 사람이 생겼다는 생각에 마냥 제가 고마우신 것 같았어요.”
 “그러시겠지. 그나저나 넌 진짜 집에 안 들어갈 거야?”
 “그냥 아버지와 마주치고 싶지가 않아요. 만나면 싸우기만 하는데, 굳이 같이 살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빨리 결혼을 해. 나와서 살더라도 그렇게 해서 나와 살아야지···.”
 “형은요?”
 “난 나이가 있잖아. 하긴 내가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닌 거 같긴 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서 집에 제사가 있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어머니가 전화로 제사를 언급하시며, 제사에는 빠지지 말라고 당부를 하셨다.
 그날 제사를 끝내고 밥을 먹는 자리에서 작은아버지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시는 바람에 식사자리가 길어졌다.
 내가 나와서 산다는 걸 어디서 들으셨던지, 굳이 그 자리에서 하지 않아도 될 은진이의 이야기를 꺼내셨던 것이다.
 
 숙모님께서 옆구리를 치며 눈치를 줬음에도 작은 아버지의 오지랖은 멈추지 않았다.
 
 “괜찮아. 이렇게 가족들 다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거지. 안 그래요, 형님?”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그래서 그 집 부모님은 만나봤어?”
 “···네.”
 
 아버지는 말없이 식사에만 집중하셨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시면서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셨다.
 
 “아버지 하시는 일은?”
 “주유소를 운영하시더라고요.”
 “주유소?”
 
 아버지의 표정을 곁눈질로 살짝 훔쳐봤다. 역시나 조금 당황한 기색이셨다.
 
 “네, 국회 의사당 근처에서 주유소 두 개를 운영하고 계신다고 하더라고요.”
 “운영을 한다는 게, 주유소 두 개가 그 집 소유란 말이야?”
 “뭐 그렇겠죠?”
 “어유···. 주유소 두 개 정도면 꽤 괜찮지. 자식은 네 여자친구 하나고?”
 “아니요, 새어머니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는 모양이에요.”
 “나중에 하나씩 맡아서 하면 되겠네. 미용하는 아가씨라고 했지?”
 “네.”
 “돈은 좀 있는 집 같으니까, 결혼해서 아기 낳고 살기 시작하면 그 집에서 미용실 하나 차려주지 않겠어? 뭐 그렇게 살면 되겠다. 형편대로 사는 거지, 뭐. 네 이야기 들어보니까 조카며느리 자리가 꽤 괜찮은 거 같은데···. 본인만 좋으면 되는 거야. 안 그래요, 형님?”
 “···뭐 어쩌겠어, 본인들이 하겠다면 시켜야지.”
 
 그리고 다음 날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께서 은진이를 다시 한번 봤으면 하신다며, 집으로 다시 데리고 오라고 하시는 거다. 뭔가 기분이 찜찜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결혼이라는 건 당사자들만의 약속은 아니기에, 며칠 뒤 다시 은진이를 데리고 집을 찾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난 내 아버지란 사람에 대해 실망을 너무 크게 하게 되는데, 정말 마음 같았으면 아버지란 존재 자체를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단 생각까지 해봤다.
 
 “언제부터 혼자 나와서 살았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미용실에 취직한 뒤로 쭉 혼자 살았습니다.”
 “그게 얼마나 되지?”
 “칠, 팔 년 정도 되는 거 같습니다.”
 
 난 시한폭탄 하나를 가슴에 품고 인내했다. 하지만 그 시한폭탄은 언제 터져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상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은진이에게 불편한 질문들을 쏟아내셨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난 은진이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내 아버지란 사람의 존재가 부끄러웠다.
 당황한 은진이는 몇 번이나 젓가락질을 하다가 음식을 식탁 위로 떨어뜨렸고, 떨어뜨린 음식을 입에 넣어야 할지, 아니면 한곳으로 버려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상황까지 되게 된다.
 난 재빨리 크리넥스 티슈 한 장을 접어서 은진이의 옆으로 올려주며 그곳에 은진이가 떨어뜨린 음식물을 올려놓았다.
 
 “다 큰 여자가 혼자 살면 아무래도 생활 자체가 조금···.”
 “그만하세요, 아버지.”
 
 난 테이블 위로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아버지를 쏘아봤다. 당황한 어머니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난 은진이의 기분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차가워진 아들의 음성에 적잖게 당황한 표정이셨다.
 
 “할 말만 하세요.”
 
 얼음. 모두가 얼음이 되는 순간이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할 말만 하시라구요.”
 
 아버지께서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을 연출하신다. 컵에 든 물을 아들에게 끼얹으셨다. 그 물은 아들의 얼굴에 그대로 촤악 하고 뿌려졌고, 아들 옆에 앉아있던 은진이에게도 꽤 많이 튀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여전히 얼음이다.
 곧 아버지는 그 컵을 식탁 위로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를 일어나셨고, 난 식탁을 뒤집어 버렸다. 접시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연거푸 부르시며 왜 그러냐고 비명 아닌 비명을 지르셨고, 내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로부터 물세례를 함께 맞아야 했던 은진이는 여전히 얼음 상태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악! 씨발 진짜 이 좆같은 집구석, 다시 오면 내가 사람이 아냐! 뭐해? 얼른 일어나.”
 
 거기서 난 결코 해선 안 될 실수를 하고 만다.
 집을 나와서도 여전히 오들오들 떨고 있던 은진이에게 운전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다.
 상황이 그 지경으로 치닫기 전, 식사를 하며 아버지로부터 소주 몇 잔을 반주 삼아 받았었다. 최대한 안 마시려고 했지만, 한사코 권하셨던 아버지. 은진이는 자신이 운전을 하면 되니까 편하게 마시라고 했다.
 며느리로서 아버지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와 싸우고,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집을 나와버리니까 사랑받는 며느리의 생활은 힘들 것 같다는 걸 눈치채서였을까 은진이의 상태는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아니었다.
 본인 역시 아직까지 손발이 너무 떨린다며, 아무래도 운전은 무리일 것 같다고 했다.
 대리를 불렀어야 했는데···.
 뭐에 홀렸었던 모양이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난 그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게 된다.
 사실 취한 건 아니었다. 소주 몇 잔에 취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스스로 했던 약속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처음 회사 차로 운전을 시작하면서, 그 어떤 상황에도 음주운전만큼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스스로 했었다.
 하지만 그날 그 약속을 깨게 된다.
 운전대를 잡았고, 역시나 오피스텔로 향하는 도중에 음주단속에 걸리게 된다.
 저 멀리 음주단속을 하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차를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재빨리 차 안에 들고 다니던 껌을 씹었다. 딱 두 잔 마셨다. 설마, 설마···.
 아니나 다를까 설마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면허취소. 그리고 벌금 300.
 
 되는 일이 없다. 아버지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영업을 뛰는 사람에게 있어 면허취소는 실직이나 다름없는 구형이었다.
 벌금이야 뭐 그렇다 치더라도 면허를 취소당한 난 스스로 회사를 나와야만 했다.
 회사가 나가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회사는 그냥 스스로 나가게끔 할당된 구역에 추가 거래처 몇 군데를 더 안겨줄 뿐이다.
 결국 개인적인 이유로 퇴직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나오게 된다.
 
 그래도 그 회사가 인간적이었던 것이 나의 상황을 알고 마지막 달 월급을 고스란히 담아서 퇴직금 정산을 정말 칼같이 빨리해 줬다.
 2년 조금 안 되게 일을 했었는데, 마지막 달 월급에 퇴직금 정산까지 받으니 대충 오백만 원 정도의 목돈이 생기게 됐다.
 그걸로 음주운전 벌금을 내고 평소 모아두었던 돈을 보태서 은진이와 함께 3박 4일로 태국 코사무이로 바람을 쐬러 갔다.
 은진이 역시 첫 해외여행이었다.
 그 당시 난 은진이를 제외한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런 날 위해 은진이가 휴가를 신청하고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내서 해외여행을 계획했던 것이다.
 정말 땡전 한 푼 남지 않은 상황.
 은진이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아직 우린 젊고, 자신의 벌이가 적지가 않으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고민을 해보라고 했다.
 돈은 자신이 벌어올 테니, 조금만 아껴 쓰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며 날 위로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난 은진이에게 항상 감사했다. 하지만 그때엔 몰랐다. 백수 생활만큼 관성이 빨리 붙어 버리는 생활도 없다는 것을.
 말이 자숙의 시간이지, 말 그대로 백수 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인하가 스위스에서 돌아왔다.
 1년 전 인하가 첫 스위스 생활을 하고 돌아왔을 때 보고 처음 만나는 일형이.
 그랬다. 한때엔 평생 함께 갈 줄 알았던 고등학교 친구가 어느새 나이가 들다 보니, 일 년에 한 번 보는 것도 어려워진 것이다.
 사실 인하라는 매개가 없었다면, 일 년에 한 번도 만날 일이 없을 정도로 나와 일형이는 그 관계가 소원해진 상태였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먹고 살기에 바빴고, 서로 직장 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친구보다는 회사 사람, 혹은 회사 일로 엮여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더 편하고 말이 잘 통했으며, 거기에 여자친구까지 생겨버리니 좀처럼 여유를 내기가 힘들어지게 된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가 외국에서 외롭고 힘들게 일을 하다가 휴가를 받아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갑이 너무 가볍다. 아무리 지갑이 가벼워도 맛있는 밥 한 끼 정도는 사주고 싶었다.
 은진이에게 돈을 받아서, 지하철을 타고 공항까지 마중을 나갔다.
 일형이는 회사일 때문에 저녁에나 합류가 가능한 상황.
 면허만 취소가 되지 않았다면 은진이의 차를 끌고 나가서 마중을 해줬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더 불편했다.
 출국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인하의 모습이 보인다.
 반가웠다. 같은 대한민국 하늘 아래 살지만, 서로 사는 것이 바빠서 일 년에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일형이. 하지만 이렇게 때만 되면 의무적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우리 셋이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기회를 제공하는 인하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소형 냉장고 크기만 한 대형 슈트케이스를 끌고 출국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인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이, 서제비! 여기야, 여기!”
 “뭐야, 이 너구리 같은 새끼는···. 나오지 말라니까.”
 “이렇게 누구 하나 나와서 손이라도 흔들어줘야 한국 들어오는 맛이 날 거 아냐. 살 좀 쪘냐? 작년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더 좋다?”
 “꽃길만 걸으니 얼굴이 좋아질 수밖에.”
 “거기서도 막 여자들 꼬시고 다니고 그래?”
 “내가 꼬시고 싶어서 꼬시는 게 아냐. 거긴 그냥 삶 자체가 작업인 거야. 꽃밭에 사는데 꽃향기를 피할 방법이 있나. 난 그냥 열심히 일만 하는 일벌일 뿐이야. 그런데 꽃들이 막 자기한테 와서 꿀을 빨아달라고 하잖아? 그러니 어떻게 해? 빨아달라면 빨아줘야지.”
 “그놈의 허세는. 아무튼 수고 많았다. 가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나이트클럽 과일 안주가 먹고 싶어.”
 “참 어지간하다, 너도. 헛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 돈 버는 스케일이 계속 커져! ― 5
 
 녀석들과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꼈던 하루였다.
 1년 만에 휴가를 받아서 한국으로 들어온 인하에게 내가 사줄 수 있었던 건 학창시절 녀석이 좋아했던 닭갈비 철판 볶음밥과 후식으로 테이크어웨이 커피 한 잔이 전부였는데, 저녁 늦게 합류한 일형이는 나와 인하를 데리고 120g에 48,000원 하는 최고급 한우 암소집을 선택했다.
 물론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일형이에게 그 한우 암소집은 오버다. 아무리 대기업을 다닌다고 해도 마음이 없으면 선뜻 데리고 가기에 부담스러운 식당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음이 있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난 마음이 있어도 못하는 걸 일형이는 할 수 있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린 건지, 아님 그 나이에 그런 대화 주제가 당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녁 식사 자리에서부터 시작된 돈과 성공, 그리고 연봉에 대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긴 맥줏집에서까지 계속되었다.
 
 찬란했던 학창시절 이야기를 제외하면 우리 셋이 함께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 주제가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갈라진 우리 셋.
 그랬다. 우린 더 이상 여자 이야기와 싸움 이야기만으로도 날밤을 새울 수 있는 이팔청춘이 아니었다.
 
 난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는데, 나에게 그 시절 찬란함을 보여줬던 인하와 일형이는 더 이상 그 시절을 추억하려 하지 않았다. 녀석들에겐 지나간 그 시절보다 지금 이 순간이, 그리고 다가올 내일이 더 중요한 거 같아 보였다.
 
 “그래서 너 지금 면허취소 당한 거야? 그럼 회사는?”
 
 난 오후 내내 인하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일형이에게 해줘야 했다.
 현재 면허가 취소되는 바람에 회사를 관두고 여자친구 오피스텔에서 잉여 인간 짓을 하고 있다고. 그 여자친구를 아버지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계셔서 아버지와의 관계 역시 뒤틀릴 대로 뒤틀려진 상태라고 말이다.
 기분 탓이었을까.
 일형이는 친구의 불운 앞에 자신의 현 상황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눈치였다. 어차피 스위스에 직장을 잡은 인하와는 연봉에서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 상황.
 인하를 통해 받은 위화감을 나를 통해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괜찮다. 그래도 친구니까.
 
 직장을 잃고 여자친구에게 용돈을 타 쓰는 백수 친구는 대기업에서 월화수목금금금 미친 듯이 일만 해야 하는 또 다른 친구에게 네가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말했다.
 
 최소한 넌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며, 무슨 수로 이번 달 휴대폰 요금을 내야 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며, 넌 너의 회사가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라고 말하지만, 이미 지옥을 살고 있는 내게 그 전쟁터는 그래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니까, 사람이 살 수 있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며 내 앞에서 우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말이다.
 
 “인간적으로 남자들끼리 마시니까 분위기가 너무 칙칙해. 안 그래? 나가자. 자리 옮겨.”
 
 인하는 1년 전 한국에 들어왔을 때 아는 사람과 함께 갔었는데, 꽤 괜찮았던 기억이 있다며, 청담동에 위치한 고급 멤버십 라운지로 나와 일형이를 데리고 갔다.
 입이 떡 벌어지는 라운지였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차들부터가 달랐다.
 술을 마시러 온 사람들이 끌고 온 차일 리는 없겠지만, 마세라티와 벤틀리가 그 멤버십 라운지 담벼락에 앞뒤로 세워져 있었다.
 
 들어가기도 전에 주눅부터 들게 만드는 그곳 앞에서 나와 일형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인하는 주눅이 들어있는 나와 일형이를 향해 피씩하고 미소를 지은 뒤, 따라오라는 말을 남기고 라운지 입구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안내직원으로 보이는 우리 또래의 남자 직원 한 명이 라운지 입구 앞에 설치된 안내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인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예약자 이름을 물어봤다.
 인하는 예약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내 직원은 침착하게 멤버십 카드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와 일형이를 훑어보는 눈길이 거슬렸다. 거슬렸다고 하기보다는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까 염려가 됐던 게 아니었나 싶다.
 인하는 멤버십 카드 대신 지갑에서 꺼낸 명함 한 장을 그 안내직원에게 전달했고, 곧 안내 직원은 귀에 꽂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이용해 어딘가로 연락을 시도했다.
 
 “작년에 한성의 강성진 이사님과 함께 왔었던 이쁜이라고, 스위스에서 왔다고 하면 아마도 기억을 할 거예요.”
 
 잠시 후, 안내직원은 명함을 다시 인하에게 돌려준 뒤 조금 더 정중해진 태도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 시상식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아슬아슬한 드레스 차림의 여자 한 명이 한 손에 이브닝 백을 들고 나타났다.
 
 “오기 전에 전화라도 한 통 해주지.”
 “이제 막 한국 도착했는데, 전화할 정신이 어딨어요?”
 “오늘 온 거예요?”
 “오는 내내 비행기 안에서 수진 씨 보고 싶어서 혼났네.”
 “수현이거든요?”
 “이름은 또 언제 바꿨어요?”
 “푸훗, 여전하시네요. 친구들?”
 “삶이 너무 진지한 놈들이에요. 간만에 만나는 친구 앞에서 술 마시는 내내 꿀꿀한 이야기만 하잖아요. 수현 씨가 좀 희석을 시켜줘요, 이 녀석들의 진지함을.”
 “그건 또 제가 전문이죠. 들어가요.”
 
 5성급 호텔의 로비 라운지를 연상케 하는 고급스러운 라운지였다.
 그곳에서 인하는 말 그대로 VIP 대접을 받았다.
 예약을 하지도 않았고, 멤버십으로 운영이 되는 그곳의 멤버십 카드도 없었지만 수현이라는 여자는 친구를 데리고 온 인하의 체면을 위해 없는 룸까지 억지로 만들어서 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없는 룸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곳 홀 직원들을 다그칠 정도로 수현이라는 여자는 그곳에서 꽤 파워가 있는 모양이었다.
 마치 카지노의 블랙잭 테이블처럼 생긴 특이한 모양의 테이블 하나가 정 중앙에 덩그러니 위치해 있는 좁은 룸이었다.
 수현은 그 테이블의 서비스 자리에 앉아서 마치 카지노 딜러가 선수들에게 카드를 서브하듯, 그렇게 우리 셋을 혼자서 상대했다.
 여자 몇 명이 동시에 들어와서 남자들의 초이스를 기다리는 싸구려 룸싸롱과는 차원이 다른 신세계였다.
 
 그곳에서 인하는 가장 친한 친구들을 위해 한 병에 백만 원이 넘는 고급 양주를 주문했다.
 인하는 분명 그 자리에서 나와 일형이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나 잔인한 우정이었다.
 차라리 동네 룸싸롱을 갔었더라면, 도우미를 부를 수 있는 노래방을 갔었더라면, 나이트클럽을 갔었더라면 녀석들과의 괴리감을 그렇게 크게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엔 한 병에 백만 원이 넘는 양주 앞에 겁을 집어먹고 있던 일형이 녀석도 금세 수현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리에 익숙해졌다.
 
 “스위스 한번 놀러 오라니까 그러네. 그때도 온다고 해놓고 이렇게 또 1년을 보냈잖아요. 언제 놀러 올 거예요?”
 “놀러 가면 재워줘요?”
 “아기야? 누가 재워줘야 잠을 자게. 자장가를 불러줘야 되나?”
 “말도 안 통하는 거길 혼자서 무슨 수로 가요.”
 “내가 있잖아요. 내가 호텔 잡아줄 테니까 비행기 표만 끊어서 와요. 가이드까지 책임지고 해줄게요.”
 “나 혼자 호텔방에서 잠 못 자요.”
 “내가 같이 잘 건데 무슨 걱정? 혼자라는 생각 하지 말아요. 수현 씨 곁엔 언제나 내가 있잖아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나 잠버릇 완전 고약해요.”
 “잘 수나 있겠어요? 내가 옆에 있는데.”
 “인하 씨처럼 센 척하는 남자치고 제대로 여자 만족시키는 남자 못 봤어요.”
 “수현 씨처럼 도발 심한 여자치고 나중에 안 매달리는 여자 못 봤어요.”
 “점점 더 궁금해지는데, 이거?”
 “정 그렇게 궁금하면 마치고 따로 나랑 둘이서 한잔 더 해보든지.”
 “그러려면 일단 이거부터 다 비워야겠죠? 잠시만 기다려요. 과일 안주 좀 새로 내오게.”
 
 과일 안주를 새로 내오겠다며 수현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일형이가 인하에게 이런 고급 라운지를 누구와 함께 왔었냐며 물었고, 인하는 어깨에 힘을 넣고서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작년에 나한테 3억짜리 시계를 사 갔던 손님이 하나 있었어.”
 “3억?”
 “뭘 그렇게 놀라냐? 더 비싼 것도 널리고 널렸어. 아무튼 3억 정도 되면 사실 살 수는 있어도 들고 들어오기가 어려워. 세관에서 걸린단 말이지. 그걸 내가 작년에 한국 들어올 때 대신 가지고 들어와서 전해줬었어. 고맙다고 여길 데리고 오더라?”
 “아니, 돈이 얼마나 많으면 3억짜리를 사서 그걸 처음 본 직원한테 한국 들어올 때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을 하냐? 아닌 말로 안 좋은 맘 먹고 들고 튀면 어쩌려고.”
 “돈이 돈 같지 않은 사람이지.”
 “그 정도 돈 많은 사람이면 한국에서 사지 왜 굳이 스위스까지 가서 사?”
 “이 사람이 시계 광이야. 한 마디로 시계에 미친 놈이지. 한국에는 없는 물건이거든. 그걸 사겠다고 스위스까지 왔다니까? 한성그룹 있지? 그 그룹 차남이야. 자기가 들고 들어오면 이것저것 귀찮아지는 일이 생길 게 분명하니까 그걸 나한테 부탁을 했던 거야.”
 “거기 있으면 그런 손님 자주 만나겠다?”
 “솔직히 드물지, 그런 경우는. 그래도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 건 사실이야.”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술잔만 기울였던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입을 열었다.
 
 “야, 거기 나 좀 취직시켜줘라. 나도 너처럼 돈 많은 사람들 사는 세상에서 돈 좀 벌어보자.”
 “진심이야?”
 
 인하는 의외로 진지하게 물었다.
 
 “너 정도 얼굴이면 에이스지. 거기다 내가 말빨 조지는 거 한 몇 달 특훈시키면 틀림없이 탑 에이스로 거듭날 수 있을 거야.”
 “네 여자친구는?”
 
 일형이가 말했다.
 
 “네 여자친구 놔두고 갈 수 있겠어?”
 
 그랬다. 어쩌면 그 순간이 내게 있어 인생의 세 번째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었는데, 난 그 터닝 포인트 앞에서 은진이를 놓칠 자신이 없었다.
 웃으며 그냥 해본 소리라고 말했지만, 사실 은진이만 없었다면 인하가 말하는 그 세계로 뛰어들어보고 싶었다.
 인하가 말하는 그 세상이 인하의 허세가 아닌 현실이라면 말이다.
 
 그날 인하는 수현과 따로 한잔을 더 했을 것이다.
 다음 날 출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먼저 들어가 봐야 한다는 일형이. 일형이는 눈치 없는 내게 들어가는 길에 태워줄 테니, 함께 택시를 타고 가자고 했다.
 그 순간 술자리에서 인하와 수현이 나눈 대화가 그냥 하는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게 나와 일형이는 그 고급 라운지에 인하만 홀로 남겨두고 먼저 자리를 일어났다.
 
 “너 내일 출근하려면 많이 피곤하겠다.”
 “기운 내 인마. 왜 이렇게 축 늘어져 있어? 어깨 펴고.”
 “아까 고깃집에서 돈 많이 나왔지?”
 “그 정도는 문제없어.”
 “오늘도 얻어먹기만 했네. 다음에 내가 돈 많이 벌면···.”
 “민준아.”
 “음?”
 “우리 어렸을 때,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땐 네가 다 샀었어. 이젠 우리가 사는 게 맞아.”
 “후우··· 그랬냐? 근데 그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도 한 번 정도는 사고 싶다.”
 
 일형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난 혹시나 은진이가 자고 있지나 않을까 조심히 현관문을 열었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하지만 은진이는 티브이를 켜놓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오네?”
 “2시야, 지금.”
 “난 더 늦게 올 줄 알았지.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니까 어땠어? 간만에 스트레스 좀 풀었어?”
 “나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할까 봐. 더 이상 이렇게 무기력한 생활을 계속해선 안 될 거 같아.”
 “친구들 만나서 무슨 일 있었어?”
 “다들 열심히 앞으로 뛰어가고 있는데, 나 혼자서만 뒷걸음질 치고 있는 기분이었어.”
 “무슨 일 있었구나.”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는데···. 기분이 정말 별로였어.”
 “···.”
 “다들 잘나가더라. 뭐 물론 뭐든 나보다 잘나가는 놈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억울해!”
 
 
 # 돈 버는 스케일이 계속 커져! ― 6
 
 은진이는 내게 멘토 같은 여자였다.
 마음을 잘 잡지 못하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은진이는 항상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나눠줬다.
 
 “모든 건 기싸움이야. 기싸움에서 밀리면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지는 거야. 넌 지금 너 자신이랑 싸우고 있는 중이잖아. 너 자신한테 당당하게 말해. 4년제를 나온 사람들에 비해 2년이나 빨리 사회라는 걸 경험해 보지 않았냐고. 2년이나 먼저 시작했는데, 고작 몇 달 쉬는 게 무슨 대수냐고 말이야. 충분히 쉬어. 넌 그래도 돼. 내가 너 어떻게 일했는지 다 봤잖아. 넌 충분히 쉴 자격이 있어. 그리고 안될 땐 뭘 해도 안 되는 거 같아. 오히려 이럴 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뭘 하려고 하지 말고, 뭔가가 올 때까지 기다려 봐. 뭐가 걱정이야? 네 옆엔 내가 있잖아.”
 
 그렇게 매일같이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며 무기력한 남자친구에게 기를 불어넣느라, 정작 본인은 얼마나 기가 빨렸을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후 늦게 일어나서 버릇처럼 티브이를 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더 이상 볼 프로그램도 드라마도 없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날따라 희한하게도 평소엔 관심도 가지지 않는 교양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걸 교양 프로그램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예능 토크쇼라고 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잘나갔던 9시 뉴스 앵커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거기서 난 이상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유수현.
 잘나가는 토익 강사라고 했다.
 무척이나 사나워 보이는 첫인상. 하지만 멋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혹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나는 모습이었다.
 나처럼 전문대를 졸업하고, 자신의 인생을 재설계하기 위해 젊음을 판돈으로 이길 수밖에 없는 도박을 한 대단한 여자였다.
 정말 별생각 없이 돌린 그 채널에 꽂힌 난 라면을 먹으면서 그녀의 인생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채찍질과도 같았는데, 꼭 내게 하는 채찍질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불편한 진실. 그녀는 내게 오늘을 살아가는 잉여 인간들의 습성에 대해 피를 토하듯 열변을 토해냈다.
 자기 역시도 그랬었다며, 묘한 공감대까지도 형성시켜주었다.
 
 한 번씩 그럴 때가 있다.
 누군가로부터 따끔한 일침을 받고 싶을 때.
 
 내가 사는 삶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딴 식으로 살지 말라는 식의 일격을 받고 싶을 때가 있다. 정신이 바짝 들도록 말이다.
 그런 불편한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그날이 딱 그랬던 모양이다.
 
 그녀는 내게 게으르다고 했다. 그리고 의욕도 없고 목표도 없는 주제에 모두에게 인정받고 성공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고 핀잔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날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말했다.
 
 대충 20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난 마치 내가 처한 갑갑한 상황 앞에 속 시원히 울음을 쏟아낸 듯한 개운함을 느꼈다. 그랬다. 울고 난 후 찾아오는 묘한 상쾌함에 온몸이 전율했던 것이다.
 그 프로그램을 본 후 찾아온 후폭풍은 정말 대단했다.
 난 유튜브를 통해 그녀의 강의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잔소리, 독설, 갈굼, 협박, 저주···.
 하나같이 내겐 주옥같은 멘토링처럼 다가왔다.
 
 갑자기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깔끔하게 샤워를 하고 내가 찾은 곳은 서점이었다.
 마지막 베팅.
 전 재산이 3만 원 정도 있었는데, 그 전 재산으로 난 서점에서 그녀의 책 두 권을 샀다.
 내가 해본 가장 즉흥적이고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책 두 권을 사 들고 지하철을 딱 타는데, 비록 지갑은 가벼웠지만 마음이 어쩜 그리도 든든한지 마치 첫 월급을 탔을 때처럼 설레고 흥분됐다.
 집으로 돌아온 난 은진이가 퇴근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 그녀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퇴근을 하고 돌아온 은진이에게 맛있는 걸 사달라고 말했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아니. 그런데 뭔가 느낌이 왔어.”
 “느낌?”
 “맛있는 거 사줘. 하루 종일 라면 하나밖에 못 먹었어.”
 “뭐 먹고 싶어?”
 “비싼 거. 비싼 거 사줘. 내가 부담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비싼 걸로 사줘. 그럴 수 있어?”
 “···나가자. 얼른 옷 입어.”
 
 그날 은진이는 대게집으로 날 데리고 갔다. 그리고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고 했다. 난 평소와 달리 눈치 보지 않고 배가 부를 때까지 그 비싼 대게를 먹었다.
 
 “내일부터 일할 거야.”
 “무슨 일?”
 “열심히 사는 거 자체가 일이라는 걸 누가 말해줬어. 내일부터 열심히 살아보려고.”
 
 덩달아 힘을 받은 은진이는 소주를 한 병 더 시켰고, 그날 나와 은진이는 소주 3병에 대게 여섯 마리를 나눠 먹었다.
 
 다음 날 인터넷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커피숍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문구를 발견했다.
 월급에 상관없이 집에서 가까우면서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한 일자리를 찾았던 것이다.
 피씨방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아무래도 야간 근무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제외했는데, 사실 피씨방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제외하니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한정되어버렸다.
 커피라···.
 근무 시간대만 괜찮다면 나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커피를 내리는 것 역시 기술일 것인데, 전문적으로 배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건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고, 무엇보다 10시에 출근을 해서 4시에 마치는 근무 시간이 매력적이었다. 4시에 마친 뒤 곧바로 헬스장을 다니며 몸을 만들어보는 것 역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운전면허증을 다시 딸 때까지만 할 일이다. 큰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스마트하게 생각을 하자.
 
 그 당시 내게 필요했던 건 높은 월급이나 안정적인 직장이 아닌, 더 이상 게을러지지 않도록 백수 생활에 젖은 관성으로부터 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도와줄 규칙적인 생활이었다.
 
 시급 4,200원. 동네 자체도 잘사는 동네였을 뿐만 아니라, 사장님 역시 비록 동네 장사를 하고 계시지만 이탈리아에서 직접 커피 사업을 배워서 한국에 프랜차이즈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라 직원들의 대우가 다른 커피숍에 비해 좋은 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커피 쪽엔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었던 내게 인상이 좋고 비록 다른 업계이긴 하지만 직장 생활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세 달째부터는 시급을 4,500원까지 올려주셨다.
 하지만 사장님께서 올려주신 건 시급 300원이 아니라 나의 자신감이었다.
 
 함께 일을 하는 다른 아르바이트 직원들에 비해 비록 300원이지만 그만큼의 인정을 더 받고 있다는 사실에 그간 잃고 살았던 내 속의 자신감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설프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면접을 봤을 때 얼마나 일을 할 계획이냐고 묻는 사장님께 1년을 생각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씀을 드렸었다.
 운전면허를 다시 따게 되면 다시 영업 쪽 일을 시작할 것이라고, 그때까지만 아르바이트로 할 생각이라고 말이다.
 그래서였는지, 라떼를 어느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가장 라떼답게 만들 수 있는 손놀림이 완성된 이후부터 사장님은 날 특별하게 대해주셨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자기 밑에서 전문적으로 커피를 배워보지 않겠느냐며, 조만간 압구정에 1차 프랜차이즈를 오픈할 계획인데, 자신에게 사람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 인생의 3번째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 것이다.
 
 문창식.
 
 나보다 7살이 더 많은 사장님은 언제부턴가 내게 사장님이라는 딱딱한 표현 대신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오른 이탈리아 유학길에서 창식이 형은 커피라는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됐다.
 그 시절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을 정도로 창식이 형의 집안은 꽤 빵빵한 편이었다.
 미술을 접고 커피를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아들을 위해 강남의 노른자위에 커피숍을 차려주실 정도로 깨어있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창식이 형은 내가 가지지 못한 걸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구멍가게 수준의 커피숍이었지만, 그 커피숍을 운영하는 창식이 형의 경영 철학은 분명 배울 점이 상당히 많았다.
 최고의 인테리어는 사람이라는 창식이 형의 철학. 창식이 형은 인테리어에 쓸 돈을 직원들에게 썼고, 비록 아르바이트 직원일지라도 명절이면 일반 회사에서 나눠주는 명절 선물세트를 인원수만큼 준비해서 5만 원권 백화점 상품권과 함께 전 직원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어버이날에는 모든 직원들에게 현금이 든 봉투를 전달하며, 꼭 부모님께 전달하라고 협박을 했다. 그 봉투에 직접 쓴 손글씨가 감동이었다.
 
 귀한 아들 누구누구, 귀한 딸 누구누구를 저희 커피숍에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난 창식이 형에게 사람을 대하는 기본이 무엇인지를 배웠던 거 같다. 창식이 형은 결코 직원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사장이었다.
 뭐라도 하나 더 먹이고, 더 챙겨주는 사장이었기에 개중에 정말 생각 없는 몇몇은 물러터진 사장의 그런 자유분방한 성격과 방관적인 경영 방법을 악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진심으로 창식이 형의 커피숍이 번창하길 바라며 일을 했다.
 
 그렇게 창식이 형 밑에서 커피를 배우며 일을 한 지 8개월.
 드디어 다시 운전면허 시험을 볼 기회가 찾아왔다.
 
 
 # 돈 버는 스케일이 계속 커져! ― 7
 
 “영업 쪽 일을 하려고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창식이 형이 물었다.
 
 “돈이 되잖아요.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스펙으로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쪽이 영업 쪽 일이에요. 저 돈 벌어야 해요, 형. 아무리 은진이가 괜찮게 벌고 있다고 해도 어쨌든 결혼을 하려면 전세방 정도는 구해야 될 건데, 조금이라도 보태야죠. 지금부터 한 2년 죽었다 생각하고 돈을 벌 생각이에요.”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는 창식이 형. 창식이 형은 마치 고작 스물여덟밖에 되지 않은 놈이 꿈을 좇아도 시원찮을 판에 현실을 너무 빨리 알아버려서 마음이 아프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영업 쪽 일은 아무래도 지저분하잖아.”
 “아닌데? 하나도 안 지저분해요.”
 “안 지저분하긴 뭐가 안 지저분해. 거래처 사람들 상대로 접대도 해야 되고, 꼭 접대를 하는 영업이 아니더라도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좀 많아?”
 “제가 예전에 했었던 미용 제품 영업 쪽 같은 경우는 상당히 깔끔했어요. 대부분의 미용실 원장이나 실장은 여자잖아요. 여자들을 상대로 할 접대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냥 뭐 특별한 날 선물 챙겨주는 거 말고는 딱히 접대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그런 영업은 또 돈이 안 될 거 아냐.”
 “뭐 예전에 제가 했던 업무는 인센티브 개념이 없긴 했지만, 거래처를 뚫어야 하는 영업 같은 경우는 특별 수당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어요.”
 “그래? 그쪽은 내가 잘 모르니까 뭐라 할 말은 없다만, 그 특별 수당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고 연륜이 붙어야 기대해 볼 수 있는 거지, 이제 막 시작하는 영업직원이 노려볼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긴 하죠. 그런 쪽은 아무래도 들어가기도 힘들뿐더러, 하는 일 자체도 스트레스가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 말이. 몸 버리고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네 생활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그 영업일을 그게 마치 네 꿈인 양하겠다고 하는 널 이해할 수가 없어. 그냥 내 밑에서 커피 해. 내가 가르쳐 줄게. 미용을 해서 그런지 넌 손 감각이 무척 좋아. 금방 올라갈 수 있다니까?”
 
 창식이 형은 답답하단 투로 입맛을 다셨다.
 내가 만약 자신의 친동생이었다면 두들겨 패서라도 자기 옆에 딱 붙잡아두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 큰 놈을 상대로 꼰대처럼 이것이 진리다 하는 식의 잔소리를 할 마음도 없다며 모든 결정은 본인이 스스로 알아서 내리는 거겠지만, 인생 선배의 말을 조금이라도 새겨듣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을 다시 해보겠다고 말했지만, 창식이 형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운전면허증을 다시 발급받은 날이었다. 그동안 여러모로 많은 걸 가르쳐주셨던 창식이 형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그동안 많은 걸 가르쳐주셔서 감사했다며,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말했었는데, 창식이 형은 일은 언제 그만둬도 좋으니 직장을 확실히 잡게 되면 그때 그만두라고 하셨다.
 사실 커피숍엔 이미 직원들이 충분한 상황이었다.
 일손이 부족해서 날 붙잡아두려는 게 아닌, 말 그대로 내가 여유를 가지고 괜찮은 회사를 구할 수 있게 신경을 써주셨던 것이다.
 면접이 있는 날엔 하루 전에만 말해주면 스케줄을 빼줄 테니, 그냥 노는 셈 치고 취직이 될 때까지 커피숍을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새로운 면허증을 발급받고, 본격적으로 이곳저곳 보수가 꽤 괜찮은 영업 사원 구직란에 이력서를 넣으며 의지를 다잡아가던 어느 날, 생각했던 것보다 면접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조바심에 쫓기고 있던 내게 상운이 형의 전화가 걸려온다.
 
 ―아르바이트 몇 시에 끝나?
 “지금 막 끝내고 헬스장 가는 길이에요.”
 ―저녁이나 같이 먹자.
 “오늘이요?”
 ―운동 마치고 헬스장 나오면 몇 시야?
 “6시 정도?”
 ―대충 나 마치는 시간이랑 비슷하겠네. 할 말이 있어, 너한테.
 “할 말이요?”
 ―만나서 이야기해. 마치고 내가 너희 동네 쪽으로 갈게. 헬스장 이름이 뭐야?
 
 ***
 
 “일당 20만 원이요?”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 괜찮죠. 운전 몇 번 해주고 하루 종일 대기만 해주는 대가치고는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그 당시 상운이 형은 내가 소개시켜준 여자와 결혼을 한 뒤 이직을 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상운이 형의 월급은 혼자서 살 때엔 큰 문제가 안 되었지만,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가지게 되면서부터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 되어버렸고, 결국 이리저리 아는 사람을 통해서 결혼을 한 뒤에 피부미용 의료기기 영업 쪽으로 방향을 바꿔서 이직을 하게 됐다.
 기본급은 미용제품 영업을 할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부가적으로 나오는 수당이 기본급 못지않게 많다는 말에 10년 가까이 해오던 미용 제품 영업 일을 그만두고 피부미용 의료기기 영업 쪽으로 아예 업계를 바꿨던 것이다.
 
 “보통 한 번 오면 오 일 정도 있다가 가거든. 한 팀만 네가 케어해도 오 일이면 백만 원 아냐.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커피숍 아르바이트 한 달 월급은 충분히 나올 거다. 어때? 한번 해볼래?”
 “일거리는 자주 있어요?”
 “자주 있는 정도가 아니라 밀려있는 상황이야.”
 “제가 마음만 먹으면 한 달에 몇 탕까지 할 수 있어요?”
 “최소 3번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너만 괜찮다면 4번도 가능하겠지만, 인간적으로 우리도 사람인데 그렇게 처절하게 일만 할 수는 없잖아.”
 “3번이면···.”
 “삼백이지. 웬만한 대기업보다 나을 거야. 떼는 게 없잖아. 현금으로 바로 받는 거니까 말이야. 거기다 너만 좀 싹싹하게 잘하면 팁도 제법 많이 받을 거야”
 “···.”
 
 상운이 형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돈 버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해외 원정 성형수술.
 피부미용 의료기기를 성형외과나 피부과에 팔기 위해서 상운이 형이 다니던 회사가 했던 영업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한국 성형에 열광하는 부유한 외국 여성들을 해외 현지에서 인터넷이나 여행사를 통해 모집한 다음 한국으로 데리고 와서 럭셔리 관광에 성형 관광을 엮어 병원에 외국 고객들을 패스해주는 일이었다.
 
 “가령 최단기 시술법으로 10분 만에 코를 한 번 세우는 게 한국에선 삼십만 원이야. 그런데 외국인들한테는 칠십에서 백 사이를 받는 거지.”
 “그렇게 바가지를 씌워도 괜찮아요? 그 사람들이 한국 현지 가격을 아예 모르는 바보들도 아닐 텐데.”
 “비싼 게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거기다 안 보이는 등이나, 팔뚝 같은 데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얼굴에다가 하는 시술이잖아. 비싸기 때문에 더 신뢰를 하는 거지. 그리고 우리한테나 삼십과 칠십이 큰 차이가 있는 거지, 그 사람들한텐 삼십이나 칠십은 똑같아. 거기에 서울 시내 투어를 섞어서 수익을 다시 올리는 거지. 우리 회사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성형외과나 피부과에 의료기기를 팔기 위해서 손님들을 보내주는 거고, 손님들을 받는 대가로 병원에서는 우리 회사 의료기기를 사주는 거라고 보면 돼. 그리고 그 사이에 여행사가 끼어서 이리저리 커미션을 챙기는 구조인 거야.”
 “그럼 전···.”
 “엄밀하게 따지면 넌 여행사로부터 일당을 받는 거지. 그런데 이게 그룹 관광이 아닌 삼삼오오 모여서 오는 소규모 그룹이다 보니까 여행사 입장에선 굳이 버스를 준비할 필요도 없어. 그냥 고급 승용차 몇 대 장기 렌트해서 대절시켜 놓고 서울 지리 잘 아는 기사 몇 명만 섭외하면 끝나는 거거든. 가이드는 한국말이 가능한 조선족이 대신 하는 거고, 정해진 일정은 병원예약밖에 없어서 그때그때 가이드하고 네가 조율해서 스케줄을 만들면 그만이야. 포인트는 며칟날 어느 성형외과에 수술이 잡혀 있고, 또 며칟날 어느 피부과에 수술이 잡혀 있다는 것만 기억하고 제시간에 보내주는 거야. 나머지는 상황 봐가면서 하면 되는 거라고.”
 
 그 일을 해보겠다는 말을 곧바로 하지는 못했다.
 뭔가 찜찜했다고 할까? 비록 상운이 형은 국가에서 장려하는 합법적인 일이라고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모르게 함정이 숨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은진이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언젠가 그런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며, 은진이는 장기간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상운이 형 말처럼 절대 불법적인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 신경이 쓰이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게 그 일을 해보란 말 역시 하지는 않았다. 그저 지금 하고 있는 커피숍 아르바이트보다는 괜찮을 것 같다며 잘 생각해보고 판단하라고 말했다.
 
 한 달에 삼백만 원.
 그 일이 어떤 일이라는 것보단 삼백만 원의 가치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삼백만 원이 고스란히 떨어지는 것이다.
 은진이와 함께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월세를 더 이상 은진이의 몫으로 넘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가 낸다. 그래도 이백이십만 원이 남는다.
 괜찮은 신혼 생활의 시작을 위해 악착같이 모은다는 생각으로 이십만 원만 용돈으로 쓰고 나머지 이백만 원을 저금하는 건 어떨까?
 그건 너무 많나? 그래, 지금껏 한 번도 어머니한테 용돈을 드려보지 못했다. 이참에 한 달에 삼십만 원씩이라도 어머니께 용돈을 드려야겠다. 그리고 남는 돈은 저금을 해야겠다.
 밤새 이리저리 뒤척이며 혼자 별의별 계획을 다 잡아봤다. 그리고 다음 날 상운이 형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일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
 
 ―잘 생각했다. 오늘 저녁에 약속 있냐?
 “아뇨.”
 ―그럼 커피숍 사장님한테 아르바이트 그만두겠다는 말부터 한 다음에 다시 전화해. 형이랑 간만에 참치회에 소주 한잔 하자.
 
 ***
 
 창식이 형은 상운이 형이 내게 제안한 그 일이 영 불안한 모양이었다.
 어딘가에 소속이 된 것도 아니고, 언제 갑자기 일거리가 끊어질지도 모르지 않느냐며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미 그 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한 내게 창식이 형은 모든 게 다 경험일 테니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이런저런 경험들을 다양하게 해보는 것 역시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며 말을 살짝 바꿔서 응원을 해줬다.
 
 “연락 자주 하고.”
 “자주 놀러 올게요.”
 “그렇게 말하고 나간 놈들치고 인사 오는 놈 못 봤다.”
 “집이 바로 앞이잖아요. 한 번씩 은진이랑 커피 마시러 올게요.”
 “꼭 은진이랑 같이 와. 혼자 오면 돈 받는다.”
 “형.”
 “왜 인마.”
 “진짜 고마워요.”
 “···.”
 “그동안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르쳐주긴 뭘 가르쳐줘? 난 그냥 주는 월급만큼 일 시킨 거밖에 없다.”
 “월급 줘가며 가르쳐 주셨던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넌 어딜 가나 잘할 거야.”
 “그럴 수 있겠죠?”
 
 창식이 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악수는 무슨···.”
 “그냥 악수가 아니야. 형이 가진 운을 나눠주는 거야. 잡아 얼른.”
 “감사합니다, 형님.”
 “이렇게 또 다 키워놓으니까 나가는구나. 잘 살아 인마. 언제 술이나 한잔하자.”
 
 
 # 돈 버는 스케일이 계속 커져! ― 8
 
 여자 한 명을 데리고 약속장소에 나타난 상운이 형.
 생긴 것만큼이나 입심도 강한 여자였다. 딱 보자마자 이 여자 한 성깔 하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병을 맛깔나게 돌려 따더니 상운이 형의 잔부터 채워놓고 내게 소주병 주둥이를 겨눴다.
 
 “정식으로 인사해요. 문지애라고 합니다.”
 “강민준입니다.”
 
 오퍼레이터. 당사자에겐 이름 뒤에 대리라는 직급을 붙여서 불렀지만 뒤에서 우리끼리 이야기할 때엔 편하게 문 오피라고 줄여 불렀다.
 나이는 서른셋.
 해외 여행객을 국내에 유치해서 핸들링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인바운드 여행사에서 오로지 중국 원정 성형 관광 상품만을 관리하는 오퍼레이터였는데, 그 시장의 성장 가능성에 대해 120퍼센트 확신을 하는 여자였다.
 
 갑 오브 갑
 
 한국 성형 기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성형 원정을 오는 중국인들을 무기로 성형외과, 피부과는 물론이고 상운이 형처럼 피부미용 의료기기 쪽 영업직원들을 상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말 그대로 갑 오브 갑의 위치에 있는 그룹에 소속된 인물이었다.
 
 아직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엄청나게 넘쳐나는 시절이었다.
 성형을 하기 위해 가까운 한국으로 여행을 간다는 게 일반화되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많은 피부, 성형외과에서 그 시장의 미래성 혹은 잠재 가능성에 눈독을 들이고는 있었지만, 그 비즈니스의 루트와 채널을 잡아내기가 무척 힘들었던 시절.
 몇몇의 소형 인바운드 여행사가 그 노다지를 전부 움켜쥐고 병원이나 피부미용 의료기기 회사를 상대로 갑질을 당연하게 해오던 시절에 그 시장에 처음 발을 담갔던 것이다.
 
 “그런데 봄내음 성형외과엔 왜 더 이상 수술일정을 안 주시는 거예요?”
 
 상운이 형이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문 오피는 봄내음이라는 이름 앞에 술잔을 기울이기도 전에 인상을 찌푸리며 술잔을 비웠다.
 
 “시술 가지고 장난을 너무 많이 쳤어요. 제 입장에서 눈감아줄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렸죠.”
 “장난이라면···.”
 “욕심을 너무 많이 부렸어요. 감당도 못 할 거면서 물량을 받아갈 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간호사 애들이 시술을 했다고 하더라고.”
 “뭐 쌍꺼풀 정도야 다들 그렇게 하지 않나?”
 “그것도 단가 봐가면서 해야지, 프리미엄 상품을 선택한 VIP라고 보내기 전부터 몇 번을 이야기해 줬는데, 그 VIP를 수술대 위에 눕혀놓고 간호사를 넣었으니 컴플레인이 날 수밖에. 그러니 양아치 소릴 듣는 거 아니겠어요? 이 업계도 엄연히 상도라는 게 있는 건데···. 아무튼 박 원장 그 인간은 업계에서 이미 끝났어요. 도 과장님 업계에서도 이미지 별로지 않나?”
 “쓰레기지. 내가 쉬는 날 울트라 붐 때문에 몇 번을 불려갔는지 몰라요.”
 “울트라 붐이 뭐예요?”
 
 내가 물었다.
 
 “그런 게 있어. 이게 한마디로 지방을 태우는 기계거든. 초음파로 원하는 부위에 기계로 마사지하듯 문질러주면 지방이 타는 거야. 그런 다음에 물을 계속 마시게 해서 소변을 보게 만드는 거지. 그럼 탄 지방이 소변에 섞여서 나와. 그렇게 지방을 없애는 기계인데, 보통은 피부과에서 사용하는 기계야. 하지만 성형외과에서도 시술을 할 수는 있어. 하나에 1억 정도 되는 기계지. 우리 회사 입장에서는 팔 수만 있다면 무조건 파는 게 맞는 기계인데, 이걸 그 병원에 넣고 나서 아직까지 귀찮아 죽겠어.”
 “왜요?”
 “왜긴 왜야, 와서 시술을 대신해달라 그거지.”
 “그게 무슨···.”
 “형 소원이 뭔지 아냐?”
 “뭔데요?”
 “만약 다시 수능을 볼 수 있다면 무조건 미친 듯이 공부해서 지방에 있는 대학이라도 의대에 들어가고 싶어. 안 그런 의사들도 분명 많겠지만 의사들 중에 양아치들이 정말 많거든. 특히나 이 피부과, 성형외과 의사들은 의사가 아니야. 기술자야. 그리고 그 기술자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바로 나같이 피부미용 의료기기 영업직원이고.”
 “형이 의사를 가르친다고요?”
 
 상운이 형은 한숨을 쉬며 술잔을 기울였고, 문 오피는 그 업계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의료기기 사용법을 알아야 시술을 하든 수술을 하든 할 거 아냐. 그런데 그 의료기기 사용법을 의사들이 잘 알겠냐, 아님 의사들한테 그걸 팔아야 하는 나 같은 영업직원들이 더 잘 알겠냐? 특히나 새로 나온 제품 같은 경우엔 우리가 의료기기를 가지고 가서 의사들한테 사용방법을 가르쳐줘야 돼. 한마디로 우리가 더 전문가란 말이지. 최소한 해당 기계에 한해서만큼은 말이야.”
 “아···.”
 “근데 이 울트라 붐이라는 기계는 사실 따지고 보면 너도 사용할 수 있는 기계야. 지금 형이 너한테 그 사용법을 딱 30분 만 가르쳐 주잖아? 그럼 너 내일 당장에라도 손님을 받을 수 있어. 그 정도로 쉬워.”
 “그럼 형, 쌍꺼풀도 할 줄 알아요?”
 “그건 못하지. 그건 말 그대로 손기술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시술인데, 쌍꺼풀을 해주는 기계는 따로 없거든. 근데 그 쌍꺼풀 역시 조금만 배우면 아무나 다 해. 왜 예전에 야매로 엄마들이 목욕탕 같은 데서 싸게 쌍꺼풀을 많이들 하셨잖아. 그게 왜겠냐? 쉬우니까 그런 거야. 아무튼 그 울트라 붐 기계 앞에 사람을 딱 세워놓고 사진을 찍으면 체지방이 바로 다 나와. 그 부위를 보여주고 장사를 시작하는 거지. 이 부위는 얼마, 이 부위는 얼마···. 이런 식으로. 그런 다음 태우고 싶어 하는 부위 위로 마사지하듯 기계만 움직여주면 끝이야. 그러니 일손이 부족하거나 갑자기 시술이 많이 잡혀 있을 땐 나한테 연락을 한다니까, 와서 대신 좀 해달라고. 이게 일하는 날 연락을 받으면 그래도 좀 괜찮아. 그런데 꼭 보면 쉬는 날 불러내서 부탁을 한다니까? 부탁이 뭐야? 거의 뭐 내가 자기 직원이야. 당연하다는 듯이 시킨다니까?”
 “전혀 몰랐던 내용이네요.”
 
 상운이 형은 날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우리 업계는 그나마 나은 거야. 정형외과 쪽 의료기기 영업하는 사람들이 더 대박이야.”
 “수술은 영업직원이 하고 돈은 의사들이 챙기죠.”
 
 비어있는 상운이 형의 소주잔을 채워주며 문 오피가 말을 거들었다.
 
 “관절 쪽 뭐 이쪽은 심한 경우엔 의료기기 영업하는 사람들이 안 오면 수술을 시작하지도 못해.”
 “설마요.”
 “너 형이 헛소리하는 거 봤어?”
 “···.”
 “큰 수술 같은 경우엔 의료기기 영업직원들 스케줄에 맞춰서 의사들이 수술날짜를 잡아.”
 “대박.”
 “대학병원처럼 큰 병원에 영업을 하는 회사 같은 경우엔 말 그대로 일 전문의 일 영업직원 이런 식으로 영업직원 한 명이 전문의 한 명만 전담 서포팅해주는 시스템을 가지고 운영을 하기도 한다니까. 이제 갓 전문의를 단 초짜 의사가 걸리면 죽는 거야. 말 그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야 돼.”
 “실례가 안 된다면 형. 형처럼 의료기기 영업하는 사람들 월급은 어떻게 되나요?”
 “이게 참 뭐 같은 게, 후우···. 수술 같이 들어가 줘, 의사들 뒤치다꺼리 말 그대로 따까리 짓까지 다 해줘, 영업실적 신경 써야 돼. 그러면서도 받아가는 월급은 이백 조금 넘어. 그 기본급에서 인센티브 좀 올려보겠다고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해야 하는데, 그래 본들 인센티브가 많으면 얼마나 많겠냐? 이제 갓 전문의를 단 의사들이 뒤로 챙기는 돈에 비하면 말 그대로 차비 정도 되는 셈인 거지. 아무튼 넌 나한테 평생 은혜 갚아야 돼. 지금부터 네가 하게 될 일이 따지고 보면 그런 의사들이 너한테 잘 보여야 하는 일이거든. 안 그래요, 문 대리님?”
 “뭐 그렇기까지야 하겠어요?”
 
 그리고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우리 민준 씨가 도 과장님 빽 정도는 충분히 돼줄 수 있겠죠?”
 
 ***
 
 다음 날 여행사 사무실을 찾았다.
 비록 여행사 소속 직원은 아니었지만 문 오피가 특별히 여행사 사무실로 날 불렀던 것이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업무에 대해 전달받았다.
 정말 너무 간단해서 굳이 점심까지 함께 먹으며 전달받아야 할 내용일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상운이 형과의 관계가 어쩌다 보니 너무 좋아졌다며, 상운이 형 때문에 특별히 내게 더 신경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보통 운전 가이드와는 따로 만날 일이 없이 문자 메시지로 일정을 주고받으며 스케줄을 조율하는데, 나 같은 경우는 앞으로 다른 운전 가이드들보다 먼저 일정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스케줄 조정에 우선권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곧 첫 손님을 받고 나니, 그게 얼마나 큰 혜택이란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룹 일정표에 <P1>이라고 쓰여 있는 게 있는데, 말 그대로 프리미엄 상품을 선택한 알짜 손님을 그렇게 표기해 놓는다. 이 P1 팀 같은 경우는 한 달에 하나만 받아도 이백은 넘게 벌 수 있었다.
 그리고 P2 같은 경우는 기본 하루 일당 20만 원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팁을 십만 원에서 오십만 원 사이를 받을 수 있었고, S1이나 F1 같은 이코노미 상품은 일당 외에는 거의 기대할 것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S1이나 F1 같은 경우는 한국의 성형 미용 업계에 관심이 많은 그 분야의 종사자들이 체험을 해보기 위해 오는 견학 겸 시술 관광이 대부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정표에 적힌 P1이나 P2의 비율은 거의 압도적이었다. 80퍼센트 이상이 P1이나 P2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특정계층, 어마무시한 재력을 가진 여성들만이 해외 원정 성형을 받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첫 손님을 받은 후 당연히 난 모든 일정을 P1에 맞춰서 스케줄을 잡았다.
 
 P1. 프리미엄 퍼스트.
 
 4번째 터닝 포인트는 그렇게 날 찾아왔다.
 
 정장을 입어야 한다. 유일하게 있는 업무규정이 바로 복장 부분이다.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를 하고, 운전을 할 때엔 흰색 면장갑을 껴야 한다.
 여행사와 전속으로 거래하는 렌터카 사무실을 찾아서 4박 5일간 몰고 다닐 검은색 제네시스에 올라 그 안을 살펴봤다.
 좋다. 뒷좌석엔 고급스럽게 포장된 물수건과 생수, 오렌지 주스, 옥수수 차 등이 이미 손님들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었다.
 
 “트렁크 한번 열어보세요.”
 
 트렁크 안에는 작은 아이스박스가 하나 들어있었는데, 그 안을 열어보니 교육받은 대로 이동을 시작하기 전에 뒷좌석 세팅을 다시 할 수 있게끔 여분의 생수와 음료, 포장된 물수건 등이 충분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렌터카 회사 측에서 준비를 해주는 물품 같았다.
 웬만하면 잘 손을 대지 않는다며, 그래도 이동을 하기 전 항상 체크를 하라고 했었다.
 이 정도는 일도 아니지.
 
 “반납시간 지켜주시고요, 혹시라도 반납이 늦어지게 되면 연락을 해주셔야 합니다. 요즘 배차에 여유가 없어서요.”
 “그런데 이 음료 같은 경우에 만약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처음이세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손도 안 댈 겁니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떨어지면 뭐··· 오세요. 그런데 이 음료 때문에 오실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네, 안전 운전 하세요.”
 
 첫 출근. 이걸 출근이라고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무척 신이 났다.
 고급 세단을 몰고 있다는 사실도 한몫했을 것이다.
 차를 세워놓고 피켓을 챙겨 공항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알았다.
 검은색 정장에 단정한 머리 스타일. 거기에 이십 대 중반에서 삼십 대 초반 사이의 멀쩡하게 생긴 남자들이 피켓을 들고 입국 게이트 앞에 서 있다면 그건 열에 아홉은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광진투어?”
 “네.”
 
 피켓에 붙어있는 여행사 로고로 서로의 출신을 확인하는 그들 사이에서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나 다름없었다.
 비록 처음 만났지만 같은 여행사로부터 일거리를 받는다는 소속감에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이는 남자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처음이죠?”
 “···네.”
 “뭘 그렇게 벌써부터 서 있어요? 이제 막 착륙했는데. 입국 심사하고 짐 찾고 이것저것 다 끝내고 나오려면 아직 이십 분은 더 걸릴 거예요. 담배 펴요?”
 “네, 피웁니다.”
 “나가서 같이 담배나 한 대 피죠. 김진우라고 합니다.”
 
 진우 형과의 첫 만남이었다. 진우 형은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무척이나 넉살 좋게 다가왔다.
 
 “전 명함이 없는데요.”
 “사수가 누구예요?”
 “사수요?”
 “팀장이요.”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요.”
 
 진우 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개해준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아, 그게 문지애 대리님이라고 광진투어 오퍼레이터 하시는 분께서 보내셨어요.”
 “여행사에서 다이렉트로 일을 받았다고요?”
 “네.”
 “그럴 수도 있나? 그럼 일당은 어떻게··· 아니다, 초면에 할 질문은 아닌 거 같네. 아무튼 좀 괜찮은 라인으로 시작하신 거 같긴 하네요. 일단 나가죠. 나가서 담배 한 대 핍시다.”
 
 <『돈 버는 스케일이 계속 커져!』 1-2권에 계속>

댓글(3)

반길    
이북 버전 있는 줄 알았으면 이걸로 볼 걸 그랬네요. 믿고 보는 작가님입니다 ㅎㅎ
2018.11.25 19:43
좋아좋아요    
이거 계속 봐야되나? 스트레스만 쌓이네
2018.12.01 11:27
비글물엇    
친구 인하가 진짜 인하님 같네요 ㅋㅋㅋ 스위스 가서 돈많은 여자 만나서 아니 장인이 돈 많은 집 들어가신거
2021.07.0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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