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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백작 리카이엔 1-1권

2018.06.22 조회 17,762 추천 113


 # Prologue
 
 
 
 
 
 확실히 내 인생은 꼬였다.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재수 없을 수는 없다.
 내 아버님이 나에게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군으로 들어가 공을 세워 가문을 일으키는 것. 겨우 철이 들 무렵부터 아버님이 나에게 한 이야기는 그것밖에 없었다.
 누군가 들었다면 왜 자식에게 그런 것을 강요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나 역시 바라던 바였으니까.
 어쨌든 나는 어려서부터 군으로 들어가 공을 세우고 관직을 높여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 그 외에 나에게 주어진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군문을 두드렸다.
 마침 황제 폐하께서 북정에 열을 올리는 시기. 무려 네 차례나 친정을 하신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지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인생이 탄탄대로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다.
 선황 폐하께서 진중에서 병으로 붕어하셨다.
 그리고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셨다.
 바로 홍희 원년. 내 인생이 꼬인 것도 이때부터다. 황제 폐하께서 북으로 파견한 군대를 철수시킨 것이다.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내 인생의 기록 역시 거기서 끝이 났다.
 전쟁이 멈췄으니 공을 세울 기회가 없다. 그렇다고 관직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전시만큼 많은 기회가 오지 않는다.
 백호(百戶).
 모두 백십이 명으로 구성된 백호소(百戶所)의 지휘관으로 품계는 정육품.
 그것이 나의 마지막 관직이었다.
 세습으로 받는 관직, 즉, 세관도 없고 재산도 없는 내가 병졸로 시작해 이룬 쾌거였다. 그것도 그나마 과거에 꽤 이름을 날렸던 조상님까지 들먹인 덕분에 얻은 관직이었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쾌거라고 할 수 있는 결과였다.
 물론 내 생각에는 전혀 훌륭하지 못한 성과다. 정6품 따위는 내 목표의 반의반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니까.
 남자가 야망을 품었다면, 군문으로 들어가 야망을 실현시켰다고 말하려면 최하 정이품 도지휘사(都指揮使)쯤은 되 줘야 모양새가 좀 나지 않겠는가?
 설마 나를 배포 없는 놈으로 생각하지는 않겠지? 도지휘사는 어디까지나 최하한선이다. 나의 진짜 목표는 정일품 좌우도독(左右都督)이었다.
 재수 없는 번개에 맞아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웬 녀석을 가만히 보고 있다.
 결론이 뭐냐고?
 끝까지 재수 없다는 거지 뭐.
 
 
 
 
 
 # Chapter 1. 친구
 
 
 
 
 
 분명히 나는 죽었다.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내 몸이 반투명한 상태로 보일 리도 없고, 살아 있는 사람이 내 몸을 통과할 리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확실히 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꼬이고 꼬인 인생이라 그런 걸까? 기억을 되살려 보니 분명히 그런 것 같다. 아마도 번개에 맞았던 그 순간, 시야가 온통 새하얗게 탈색되었던 그때였다.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는데 머릿속은 이상하게도 맑았다. 그리고 그렇게 맑은 머릿속을 가득 메운 오직 한 가지 감정은 바로 허무함이었다.
 그렇게 기가 막힌 방법으로 별 볼일 없는 인생을 마무리했으니, 감흥이 생긴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원통하고 억울해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허탈할 뿐이다.
 뭐 아무튼.
 나는 죽으면 천당이나 지옥, 둘 중 한 군데로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는 천당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다. 아주 낯선 장소, 아주 낯선 얼굴의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흐윽, 으으윽!”
 아, 또 시작했다. 제길, 저 자식은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침대에 누워서 지내고, 그중 절반의 시간 동안 저렇게 앓는 소리를 낸다.
 이곳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이름은 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저 녀석의 부모가 와서 이름을 부르니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다.
 리카이엔.
 ‘리크’라고 부르는 것도 들었지만, 아무튼 대부분은 리카이엔이라고 부르니 그게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난 리카이엔 저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냐고? 궁금하다면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저 녀석은 남자인 내가 봐도 참 잘생겼다. 차가운 느낌의 은발 머리에, 강렬하고 붉은 눈동자, 오뚝한 코 그리고 큰 키와 탄탄한 어깨, 아주 훌륭하게 자리 잡은 근육.
 외모만으로 따졌을 때, 저놈을 보는 여자는 백이면 백 전부 넘어가게 생겼다. 이런 말하기는 기분 참 더럽지만 내가 여자였다고 해도 넘어 갔을 거다.
 그런데 그렇게 건장하고 튼튼해 보이는 놈이 하루 종일 누워서 저렇게 앓아대니 마음에 들 리가 있나? 사내자식이 저게 도대체 뭐냐고!
 그럼 안 보면 되지 왜 계속 보고 있냐고?
 사실은 그게 내가 정말 재수 없는 이유야.
 못 떠나.
 이상하게도 리카이엔을 중심으로 이 장 이상 벗어나지를 못해.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혀 있는 느낌이랄까? 저 자식이 움직일 때 가만히 있으면 그 보이지 않는 벽에 떠밀린단 말이야.
 그래서 만날 저 자식한테 끌려 다닌다는 말이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장이라는 거리가 있으니 저 자식 똥 누는 것까지 구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
 한 번 상상해 봐. 튼튼하고 잘생긴 놈이 하루 종일 끙끙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의 심정······. 아, 나는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지?
 어쨌든 나는 매일매일 죽을 맛이라는 걸 잘 알아둬.
 그놈의 번개만 안 맞았어도······. 휴우~ 정말이지 이놈의 꼬이고 꼬인 인생······.
 어라? 저 자식 그새 잠들어 버린 모양이다, 조용한 걸 보니. 결국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망할 자식. 그러고 또 잠이 오냐?”
 물론 내가 투덜거린다고 누가 듣기나 하겠느냐마는.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고역스러운 일이 또 있다.
 잠이다.
 귀신이 되니 잠이라는 걸 안 자게 되었다. 이게 뭘 뜻하는지 알아? 하루 열두 시진 동안 뜬 눈으로 저 자식 앓고 자는 걸 봐야 한단 뜻이야.
 듣고만 있어도 죽을 맛이겠지?
 정답이야.
 
 세상에는 미운 정이라는 게 있다.
 또 누군가는 그 미운 정이 참 무서운 것이라 말한다.
 그 말,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다.
 이곳에 온 지도 어느새 두 달. 오늘 나는 검술 수련 하던 리카이엔이 풀썩 쓰러지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녀석을 부축하려고 달려갔다. 물론, 나는 귀신이니 부축도 일으켜 세우지도 못하지만.
 그러고 보면 이상한 것이, 아파서 빌빌거리는 놈이 검술 하나만큼은 훌륭하다는 거다. 검이라는 무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눈에 훌륭하게 보일 정도면 정말 아주 훌륭한 거다. 그래서 녀석이 더 이상하다. 그 정도 검술을 익힐 정도면 몸도 건강해야 되는 거 아닌가?
 어쨌든 내가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게 문제다.
 내가 저런 재수 없는 자식을 걱정하다니.
 제길, 뭔가 억울하다.
 이건 절대 내가 성질이 더러운 게 아니라, 상황이 나를 억울하게 만드는 거다.
 사실, 그렇잖아? 가문을 위해 군에 들어가 제대로 실력을 보이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고, 재수 없이 번개에 맞아 죽은 내가 저런 재수 없는 놈을 안쓰러워하는 건 아주 웃긴 상황인 거잖아.
 그러니 억울한 거다.
 “에이, 재수 없는 놈!”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한소리 지르고 말았다. 물론 내 말은 못 듣겠지만.
 “헉!”
 또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리카이엔과 또 눈이 마주친 것이다. 물론 나를 보는 건 아니겠지만, 요즘 들어 이런 상황이 꽤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어쨌든 두 번 다시 저 녀석을 걱정하지는 않을 거다. 뭐, 내가 걱정한다고 뭔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억울해 하는 것도 좋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런 다짐은 불과 열흘이 가지 못했다.
 “크허억, 끄윽!”
 당연히 침대에서 들리는 소리다.
 그리고 그 소리는 물론 리카이엔의 신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르다.
 평소에는 아무리 신음을 흘리고 비명을 질러도 얼굴은 멀쩡했다. 누차 말하지만 녀석의 몸은 아픈 사람답지 않게 아주 건장했다. 얼굴 역시 조금도 병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다.
 단 열흘 사이에 핼쑥해진 얼굴이 내가 보기에도 안타까울 지경이다. 아니, 안타까울 지경이 아니라 진짜 안타깝다.
 “야, 이 재수 없는 자식아! 너 같은 놈이 뭐가 아쉬워서 아프고 지랄이야?”
 “내가 그렇게나 재수가 없나?”
 음? 지,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자기가 그렇게 재수가 없느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이건 분명 내가 쓰는 그 말인데? 여기에 중원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니, 그전에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이상한 건가?
 아니, 아니! 그보다 도대체 누가 말한 거야? 설마 여기에 나 말고 다른 귀신이 있다는 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려온 쪽.
 “으음······.”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게 신음이라면······. 맞다. 내가 흘린 신음이다.
 리카이엔.
 중원의 말로 나에게 물어본 건 분명 저 리카이엔이었다. 사실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고 있었다. 귀신이 된 후 줄곧 저 녀석 주위만 맴돌았는데 그 목소리를 못 알아듣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다만,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던 것뿐이다.
 아주 정확하게 내 눈을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제길! 너 처음부터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었던 거냐?”
 “그렇다네, 친구.”
 “친구? 지랄. 날 언제 봤다고 친구야?”
 “두 달은 넘었지.”
 음, 생각해 보니 여기에 온 지 두 달. 처음부터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었다고 했으니, 두 달 동안 날 본 게 맞다. 물론 그렇다고 친구가 맞다는 말은 아니지만.
 음? 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잖아.
 “가만, 그렇다는 건 내가 니 주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도 너하고 관계된 거냐?”
 내 물음에 리카이엔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그대를 불렀으니까.”
 어라? 이 자식 대뜸 반말······. 아, 나도 반말했었군.
 “지, 진짜냐? 그럼 설마 내가 벼락을 맞은 것도······.”
 “아, 그런 오해는 사양하지. 그대가 죽은 건 어디까지나 명이 다한 거니까.”
 음, 이건 결국 내가 오지게 재수 없다는 소리잖아. 쳇.
 “아, 아무튼 그래서 날 왜 부른 거냐?”
 내 물음에 리카이엔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이야기하려면 그전에 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다네. 한 번 들어볼 텐가?”
 음, 뭔가 심상찮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더군다나 녀석은 귀신이 된 나를 여기로 불러냈다고 하지 않았던가. 평범하지 않은 놈이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는 건, 당연히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겠지?
 “뭐,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후후, 안타깝군. 나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는데 말이야.”
 “뭐? 시간이 없다고?”
 “아,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이제부터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게.”
 “좋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철퍼덕 자리에 주저앉자, 리카이엔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내 소개부터 해야겠지? 내 이름은 리카이엔 프로커스라네. 리카이엔이 이름이고, 프로커스가 성이지. 자네가 사는 곳과는 정반대일세.”
 성과 이름을 반대로 쓰다니 참 희한하다. 이쪽은 자기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우리 집안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되겠군. 우리 집안은 프로커스 백작가일세. ‘백작’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꽤 높은 신분이라는 정도만 알아두면 될 걸세.”
 역시, 이 자식은 잘나고 재수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신분만 높을 뿐, 우리 프로커스 백작가는 몇 대 전부터 침체일로를 달려왔지.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거의 몰락한 상태가 되어 가진 거라고는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줄어든 영지와 이 성뿐일세.”
 몰락한 가문이라······. 어째 우리 집안이랑 상황이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가문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네.”
 어라? 비슷한 부분이 점점 더 많아진다. 나도 모르게 녀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난 자에게 주어지는 의무감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니까.
 “그런데 난 어렸을 때부터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네.”
 “신비한 능력?”
 “바로 영혼을 불러들이는 능력이라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자기가 불렀다고 말을 했었다. 흐음, 지금에서야 떠오르는 거지만 영혼을 불러들인다니! 확실히 신비하다 못해 괴이한 능력이기는 하다.
 “아주 어렸을 때, 우연히 한 영혼을 불러냈고 그 영혼과 함께 놀았다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놀고 있는 사람이 한 인간의 영혼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지. 그렇게 유년 시절을 보내고, 점점 세상에 대해 알게 될 무렵 나는 능력을 이용해 가문을 일으키는 데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네.”
 영혼을 불러내는 능력으로 가문을 일으켜 세운다니······. 점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흠, 도대체 어떻게 그걸 이용하겠다는 거지?
 “나의 영혼을 불러내는 능력은 단순히 무작위로 누군가를 불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을 갖춘 영혼을 불러내는 것도 가능하다네. 예를 들면, 훌륭한 검술을 가진 기사의 영혼을 원한다면 그에 맞는 영혼을 부를 수 있다는 말이지.”
 “음? 그러니까 영혼들을 불러서 그들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그런 말이냐?”
 “꽤 눈치가 빠르군. 그렇다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많은 영혼들을 불러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지. 참고로 내 검술 스승의 이름은 ‘이율’이라네.”
 음? 이율?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헉! 서, 설마 북진무사 이율?”
 “아는 모양이군.”
 “모를 리가 있나! 금의위 사상 가장 뛰어난 기재였다는 사람인데! 하지만······.”
 “그래. 정쟁에 휘말려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맞으셨지.”
 이런 부러운 놈!
 북진무사 이율이라면 군문에서는, 아니, 대명천지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황제 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로서, 지략이면 지략, 무공이면 무공, 뭐하나 꿀리는 게 없던 최고의 기재였다.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고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쨌든 그 대단한 인물을 스승으로 모시다니. 거듭 말하지만 나는 검이 싫다. 그런데도 그에게 검술을 배웠다고 하니 부러워 죽을 거 같다. 제기랄!
 “참고로 내가 자네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그분께 중원의 말을 배운 덕분일세.”
 “그랬군. 그런데 그런 대단한 놈이 왜 이렇게 빌빌거리는 거냐? 보는 내가 갑갑해 죽을 지경이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할 예정이었다네. 영혼을 불러내는 나의 능력은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야 하는 나에게는 말 그대로 하늘이 주신 행운이었다네. 그 능력의 폐해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일세.”
 “폐해? 설마 지금 아픈 게······.”
 내 말에 녀석이 갑자기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알고 보니 그 능력은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네. 한 번 영혼을 불러낼 때마다 내 영혼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갉아먹는 저주스러운 능력.”
 “혹시 몸이 그렇게 좋아 보이는데도 아픈 게 영혼의 힘이 다했기 때문이라는 거냐?”
 “그렇다네.”
 “그걸 알았으면 안 해야지.”
 “물론 알았다면 그랬을 걸세. 하지만 영혼이 깎여 나간다는 것은 외적으로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다네. 영혼이 가지고 있는 한계선을 넘기 직전까지는 말일세.”
 “그, 그럼 그걸 알게 된 건 언젠데?”
 “불과 석 달 전일세.”
 석 달 전? 내가 오기 얼마 전이라는 말인데?
 “그럼 지금처럼 몸이 아프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
 “그렇지.”
 거참. 세상에 이렇게 재수 없는 놈도 다 있군. 그런 짓 안 해도 충분히 뭔가 할 수 있는 놈인 것 같은데······. 쯧쯧.
 “석 달 전, 갑자기 쓰러지던 그날 알 수 있었다네. 내가 곧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일세. 하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네. 내가 죽게 되면 프로커스 백작가의 부흥은 두 번 다시 생각할 수 없게 되니까 말이야.”
 그러고 보니 녀석은 이 집안의 유일한 자식인 것 같았다. 즉, 리카이엔이 죽게 되면 가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대가 끊어질 거라는 말이다. 저 몰골로 결혼을 할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설사 결혼을 하더라도 밤일이나 제대로 하겠는가.
 한 없이 부러웠던 놈이 점점 불쌍해 보인다.
 “그래서 그때부터 생각을 했다네. 내가 죽더라도 프로커스 백작가를 부흥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말일세. 그리고 한 달여를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 자네를 부르는 거였다네.”
 “응? 나를 부르는 게 너희 가문을 되살리는 방법이라고?”
 “그렇다네.”
 이 자식 너무 몸이, 아니, 영혼이 너무 아파서 머리가 돌아 버린 게 아닐까? 날 부르는 게 자기네 가문을 되살리는 방법이라니.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녀석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결국 궁금증을 해결하는 방법은 물어보는 것뿐.
 “도대체 어떻게?”
 “자네가 내 몸을 쓰는 걸세.”
 후우, 오늘 아무래도 이상한 이야기를 너무 들었더니 귀가 이상해진 모양이다.
 “뭐라고? 내가 니 몸을 써?”
 “그렇다네.”
 “말이 되냐?”
 “된다네.”
 음, 내 귀가 이상해 진 게 아니라 녀석의 정신이 이상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던 녀석은 계속 설명을 이어 갔다.
 “하루는 한 영혼을 불렀는데, 그 영혼이 갑자기 내 몸에서 내 영혼을 밀어내고 내 몸으로 들어오려고 한 적이 있었다네. 말 그대로 내 육체를 차지하기 위해서 말일세.”
 이거 아무래도 이야기가 너무 진지하다.
 “그리고 실제로 아주 잠깐이지만 내 육체를 뺏기기도 했었다네. 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자네를 부를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라네.”
 아, 아무리 들어 봐도 미친놈이 하는 말이라기에는 너무 앞뒤가 잘 맞아떨어진다. 물론, 그 근거가 좀 황당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저, 정말 그런 게 가능하냐?”
 “물론일세. 아무튼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영혼을 불러냈다네. 나와 비슷한 나이에 실제로 전쟁을 겪어 본 영혼을. 그래서 온 것이 바로 자네일세.”
 “그, 그럼 왜 지금까지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야 했거든. 내 육체를 받으면서 꿈까지 함께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뒤늦게 충격이 몰려온다. 몸뚱이도 없는데 온몸을 쇠망치로 두드려 맞은 기분이다.
 그리고 충격이 지나간 후 왠지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온몸을 휩쓸었다.
 나도 안다, 몰락한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나 가문의 염원을 한 몸에 짊어진 기분을. 그것을 이루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느끼는 그 허탈함과 비통함을. 그 뒤에 다가오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지금 녀석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녀석의 심정이 어떤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내가 겪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왠지 내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영혼이라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울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와 녀석은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녀석의 눈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다 리카이엔이 힘겹게 물었다.
 “자네가 나의 몸으로 들어와 내 꿈을 이루어 주지 않겠나?”
 녀석의 얼굴에 떠오른 간절함을 보니 뭔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입을 열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직 내 이름도 말을 안 했군. 내 이름은 장윤명이다. 우리 집안도 한때는 병가에서 알아주던 가문이었지. 당연히 지금은 몰락했지만. 어쨌든 나 역시 너처럼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고 군문으로 들어갔던 몸이다. 하지만 지지리 복도 없는지 허무하게 전쟁은 끝났고, 나는 벼락을 맞아 죽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지금 네 기분이 어떤지 충분히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 말에 녀석이 나를 향해 기대감이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왠지 입이 잘 떨어지지가 않는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지금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자면 귀신이 된 내가 리카이엔의 몸에 씌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 번 녀석의 눈을 보았다.
 후우,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눈빛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대로 끝내기에는 억울한 감이 없지 않다. 그렇게 기를 쓰고 노력을 했는데, 제대로 전쟁을 해보기는커녕 벼락에 맞아 죽지 않았는가. 누구라도 한이 남을 상황이라는 말이다.
 우리 장씨 집안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한을 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나도 사내다.
 한 번 목표로 정한 일을 못하고 죽었다는 생각을 하니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리카이엔도 사내다.
 한 번 목표로 정한 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렇다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좋다.”
 “고맙네, 친구!”
 “친구 사이에 낯간지럽게 ‘친구’라고 부를 건 뭐냐? 그냥 이름 불러라. 내 이름 말해 줬지?”
 “물론일세, 윤명.”
 “좋아, 리카이엔. 넌 오늘부터 내 친구다.”
 그 말에 녀석이 갑자기 서글픈 미소를 짓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뭐,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겠지만······.”
 젠장, 분위기라는 걸 모르는 녀석이다. 이럴 때는 얼른 말을 돌리는 게 최고다.
 “그런데 날 정말 믿는 거냐?”
 “물론이지.”
 “어떻게?”
 “지난 두 달간 자네가 무심코 흘렸던 말을 들었기 때문이지.”
 으음, 뭔가 이상하다. 지난 두 달간 녀석에게 좋은 말을 한 기억은 전혀 없는데. 그런 내 의문을 알아채기라도 했다는 듯, 녀석이 설명을 덧붙였다.
 “자네는 내가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했던 말들일세. 즉, 그 말은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그렇게 자네가 했던 말들 속에서, 나는 어떠한 악한 품성도 느끼지 못했네.”
 “흐음, 하지만 말이야. 견물생심이라고 사람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거든. 막상 내가 네 육체를 받으면 뭔가 다른 마음을 품을지도 모르는 거란 말이야.”
 그러자 리카이엔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그것도 사람을 잘못 본 내 탓이니 어쩔 수 없지 않겠나?”
 “허허, 대책 없는 친굴세.”
 그리고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이번에는 서로 할 말이 없어 찾아오는 정적. 누구나 겪어보면 알겠지만 아주 어색하고 답답한 순간이다.
 리카이엔 역시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한참을 고민하더니 뭔가 생각난 듯 얼른 말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재수가 없었나?”
 “말이라고 하냐?”
 
 
 
 
 
 # Chapter 2. 계승
 
 
 
 
 
 리카이엔 프로커스.
 죽어서 귀신이 된 나를 여기로 불러낸 자식. 그리고 이제는 친구가 된 놈. 또, 제 몸을 나에게 주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녀석.
 이러한 내용들만 보아도 리카이엔이 평범한 놈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한 마디 더 붙일 생각이다.
 ‘절대’ 평범하지 않은 놈. 혹은 ‘절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놈. 아니면, ‘정말 단단히’ 미친 놈.
 지금 내 눈앞에서 리카이엔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안다면 분명 내 말에 동의를 할 것이다.
 녀석이 뭘 하고 있느냐고?
 검술 수련하고 있다.
 영혼의 병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는 놈이, 혼자 검술 수련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뭐, 수련이야 하면 할수록 좋은 거다. 이해의 깊이도, 몸의 숙련도도 올라가니까.
 하지만 녀석은 스스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 같으면 검술 수련을 할 시간에 부모님 얼굴이라도 좀 더 볼 거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 놓고 죄다 해 보고 죽을 거다.
 젊은 나이에 죽는 것도 억울한데 하고 싶은 것도 못 해 보고 죽으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될 게 분명하니까.
 그런데 저 자식은 왜 저러고 앉아 있는지······.
 “커허어억! 쿨럭, 쿨럭!”
 헉! 저, 저건!
 내 눈앞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는 저건······.
 피다.
 수련을 하던 녀석이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피를 한 사발이나 토했다.
 “괘, 괜찮냐?”
 깜짝 놀라 다가가 물었지만, 녀석은 좀체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쉴 뿐이다. 몸만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들쳐 업고 방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다.
 “허억, 헉!”
 한참을 그렇게 숨을 몰아쉬던 리카이엔이 조금 진정이 됐는지 고개를 들더니 나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인다.
 뭐가 좋다고 웃냐, 이 자식아!
 나는 속으로 그렇게 구시렁거리며 입을 열었다.
 “넌 살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놈이 왜 이러고 있냐?”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생각에 참고 있었지만, 더 이상 두고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녀석의 대답이 가관이다.
 “검이라는 것은 하루를 쉬면 열흘을 퇴보하는 법 아니겠나? 이제 곧 윤명 자네가 내 몸을 쓸 텐데 검술이 퇴보된 상태가 된다면 미안한 일 아닌가?”
 “이 미친 새끼! 그렇게 해 주면 내가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것 같냐? 내가 병신 핫바지로 보여? 이래 봬도 대명제국 정육품 백호였던 몸이다. 아래로 백여 명이나 되는 수하를 거느렸고, 전장에 나가서는 단 한 번도 작전을 실패한 적 없던 몸이라 이거야! 그깟 검술 며칠 안 한다고 내가 그걸 못 가눌 놈으로 보여? 에이, 씨펄!”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씨펄, 몸만 있었으면 죽도록 패고 열두 대 더 패줬을 거다. 정신머리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기에 저따위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음······.
 보통은 이렇게 한소리 해 주고 딴 데로 가 버려야 되는데······. 제길, 나는 리카이엔 주위를 벗어날 수가 없는 상태잖아.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네.”
 뭐? 이 자식 지금 또 뭔 헛소리야?
 “고, 고마워?”
 거듭 강조하지만, 리카이엔 이놈은 절대 제정신이 아닐 거다. 욕해 줬더니 고맙다고?
 “그렇다네. 내가 죽은 이후라도 내 몸을 받아 제대로 써 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망할,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 놈이다. 더군다나 난 이런 때에 무슨 소릴 해 줘야 하는지 정말 모른다. 결국 또 찾아왔다, 어색한 침묵의 순간이.
 제길.
 “피나 닦아, 이 자식아.”
 
 “도대체 저 자식 뭐야?”
 참다 참다 결국 물어보고 말았다. 어지간하면 리카이엔이 살아 있는 동안은 녀석의 생활이나 삶 아무튼 그 모든 것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응? 로테즈 말인가?”
 “저 자식 이름이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저기 저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저 자식 말이다.”
 “그래 저 친구가 로테즈일세. 무슨 문제라도 있나?”
 리카이엔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물론 그럴수록 나는 속이 더 갑갑해질 뿐이었지만.
 “뭐하는 놈이냐?”
 “프로커스 백작가의 행정관일세. 도대체 왜 그러나?”
 “마음에 안 들어.”
 “응? 뭐가?
 “저놈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저런 눈빛 가진 놈들은 꼭 사람 뒤통수를 치거든.”
 난 정말이지 심각하게 말했다. 내가 비록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많은 사람을 겪어 봤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거다. 저놈의 눈빛은 분명 사람 뒤통수 칠 준비를 하고 있는 눈빛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우리 집안 재산을 절반이나 해먹고 토낀 유굉 그 자식과 똑같은 눈빛이니 확실하다.
 “하하, 하하하······.”
 이, 이게 뭐하는 짓이지? 남은 심각하게 말하는데 웃어? 이게 죽을라고, 콱! 아, 곧 죽을 놈이지. 쩝······.
 “우, 웃지마 인마. 내가 지금 장난치는 걸로 보이냐?”
 “하하! 아, 아닐세.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네. 자네가 한 말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어허, 있을 수 없기는 왜 없어?”
 “그는 대대로 우리 프로커스 백작가의 가신인 보운 가문의 자식일세.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는가?”
 “어이구, 답답한 인간아. 오히려 그런 놈이 뒤통수를 치는 법이다.”
 “걱정 말게. 그의 아버지는 백작가를 위해 기꺼이 재산을 내놓았을 정도로 그의 가문은 충신들일세.”
 애비는 애비고, 자식은 자식이다. 부모가 아무리 공을 들여도 자식은 그 바람대로 크지 않는다는 걸 이 자식은 왜 모르는 거지?
 “니가 딴 데 볼 때마다 그 자식 눈빛이 어떻게 변하는 지 못 봤으니 하는 말이겠지. 진짜라고!”
 그때였다.
 쿠우웅!
 “헉! 야, 야! 자, 장난 치지마!”
 나도 모르게 얼른 몸을 굽혔다.
 “이익!”
 하지만 나는 쓰러진 녀석을 일으켜 세울 수 없는 귀신이었다.
 “제기랄!”
 내가 어쩌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와장창!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평소 리카이엔의 시중을 들던 시녀 하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산산조각이 난 쟁반과 찻잔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리카이엔의 시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리카이엔을 몇 번 흔들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더니 급히 바깥쪽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물론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잠시 후, 건장한 체격의 하인 두 명이 뛰어들어 오더니 재빨리 리카이엔을 들쳐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리카이엔의 주위를 벗어날 수 없는 나 역시 함께 끌려갔다.
 하인들이 리카이엔을 그의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잠시 후, 그의 부모가 달려왔고 이내 방 안은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리카이엔의 어머니는 그의 손을 꼭 쥔 채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연달아 쏟아 냈고, 아버지는 그 뒤에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내 부모님도 내가 죽은 후에 저렇게 하셨을까?
 아마 그랬을 거다. 그랬으리라고 기대한다. 자식에게 가문의 부흥이라는 큰 짐을 떠넘긴 아버지지만, 늘 자신의 친구 아들과 나를 비교했던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내 부모님이었으니까. 결코 자식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의 상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지금 저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답답했다.
 저들이 하는 말을 알 수 있다면, 조금 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내가 리카이엔의 몸을 받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녀석이 나에게 기대를 걸고 맡겼고, 나 역시 녀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생각이니까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이곳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가 아닌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 세계의 정치가 어떤 방식인지도 모르고, 군사 체계, 정계의 상황, 세계의 정황이 어떤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몸만 받아서 뭘 어쩌자는 거지? 저 자식은 똑똑한 놈이 왜 그것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흐음, 이거 난감한데?”
 아니, 난감한 정도가 아니다.
 리카이엔의 몸을 받아서 눈을 떴는데 누가 말을 걸어도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면? 거기에 더해서 여기 사람들은 아무도 못 알아들을 중원 말을 내뱉는다면?
 틀림없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거다.
 “도대체 뭐가 그리 난감하다는 건가?”
 문득 누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나한테 말을 걸 사람이라면 단 한 명밖에 없다.
 “어? 이, 일어났냐?”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내가 안 보이는데, 대뜸 허공에 대고 말을 거는 리카이엔을 본다면? 그 역시 미쳤다고 여길 게 뻔하니까.
 “걱정 말게. 방금 다 내보냈으니까.”
 얼마나 깊게 생각을 했는지 녀석이 깨어나고 사람들을 내보내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아무튼 뭐가 그렇게 난감하다는 건가?”
 “나 여기 말을 모른다.”
 “그렇지.”
 “그리고 여기가 어떤 동네인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심각해 죽겠는데 녀석은 왜 저렇게 편한 거지? 분명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어우, 이 답답한 인간아. 내가 니 몸을 쓰는 것까지는 뭐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여기 말도 모르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냐?”
 “훗!”
 이, 이게 또 웃어?
 “이, 이게 미쳤나······. 지금이 웃을 상황이냐?”
 “설마 내가 그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런 건 걱정하지 말게.”
 “뭐? 그럼 무슨 방법이 있는 거냐?”
 나는 잔뜩 기대한 채 물었다. 하지만 리카이엔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 지금 장난하냐?”
 “아닐세.”
 “그럼 방법도 없는데 걱정하지 말라는 건 뭔데?”
 “알아서 해결될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라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알아서 해결된다니?
 “도대체 어떻게?”
 “잊었나? 자네는 내 몸을 가질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 걱정하고 있는 거지 인마!”
 그러자 리카이엔이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친다.
 “그, 그게 뭐하는 거냐?”
 “내 몸을 갖는다는 건,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을 가진다는 말일세. 기억에서부터 지식, 지금까지의 나의 성장과 내 생각까지 모두.”
 “으, 으음······. 그, 그건 그러니까······.”
 “내 몸으로 들어오는 순간, 모든 걸 알게 되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일세.”
 “망할, 그런 건 미리 말을 해 줘야지!”
 사람 어정쩡해지는 건 정말이지 한순간이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저분이 바로 내 아버님이신 데인 프로커스 백작님이시라네. 그리고 그 옆에 계신 분이 내 어머님이신 힐더 프로커스 백작 부인이시지.”
 리카이엔이 창가에 서서, 정원에 있는 두 사람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나는 물끄러미 그곳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부모님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름은 오늘 처음 듣는다.
 “내 아버님은······. 늘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시려 노력하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을 성공해 보신 적이 없다네. 너무 인자하신 성격이라서 말일세.”
 잠시 말을 끊은 리카이엔이 서글픈 표정으로 제 아버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나는 녀석처럼 차분하게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생각은 몰라도 그 심정은 어렴풋이 느껴진다.
 “내 어머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네. 그리고 이 세상 그 어떤 여인보다 현명하신 분이시지.”
 세상의 어떤 어머니가 그렇지 않을까?
 후우~ 왠지 녀석의 표정을 보기가 힘들어진다.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던 녀석의 얼굴에 떠오른 서글픈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해질 정도였다.
 이럴 때는 얼른 화제를 돌리는 게 좋다.
 “아, 그런데 말이야······.”
 하지만 녀석은 화제를 돌리고 싶은 내 시도를 단칼에 잘라 버리고는 또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다네.”
 “음?”
 이건 금시초문이다. 이 성 어디에서도 녀석의 여동생으로 보이는 여자는 본 적이 없다.
 내 의아한 표정을 읽었는지 리카이엔이 설명을 이었다.
 “나와 두 살 터울인데 지금은 수도에 있는 왕립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네. 겨울이 되면 성으로 돌아올 테니 조만간 볼 수 있을 걸세.”
 “그, 그렇군.”
 “그 외에 이 성에 있는 시녀들이나 하인들, 관리들은 모두 임금 하나 받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일세.”
 “음?”
 “모두 우리 백작가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말일세.”
 흐음, 그게 사실이라면 리카이엔의 말대로 그의 아버지는 상당한 인망을 얻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일해 주고 있다는 이들 또한 상당히 의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보통, 착한 사람을 보면 대부분은 이용해 먹으려고 하지 도와주려고 하지는 않으니까.
 아, 아니군. 적어도 한 명, 그 행정관 로테즈라는 놈은 분명 뒤통수를 칠 것 같지만······. 뭐, 아무튼.
 음, 가만? 그러고 보니······. 이거 뜬금없지만 지금 생각난 김에 물어봐야겠다.
 “야, 리카이엔.”
 “왜 그러나?”
 “갑자기 생각난 건데 말이야. 처음에 니가 날 불렀을 때 전쟁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했었잖아?”
 “그랬었지.”
 “그건 뭔가 이유가 있는 거냐?”
 “뭐 자네도 대충 짐작하고 있겠지만, 전쟁 경험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당연히 전쟁을 겪어야 하기 때문일세.”
 물론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알고 싶었다.
 “현재 이곳 베루스 대륙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화로운 곳이라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것은 말 그대로 겉으로만 보이는 평화일 뿐. 그 속으로는 지금까지 얽혀 왔던 갈등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네. 이대로 간다면 적어도 2, 3년 내에 전쟁이 일어날 걸세. 말 그대로 아직 불씨를 당기지 않은 마른 장작더미 같은 상황이라네.”
 “마른 장작더미라······.”
 “중요한 건 2, 3년 내에 전쟁이 터질 거라는 것이네. 자세한 내용은 조만간 알게 될 테니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겠지?”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나저나 갑자기 가족들 이름은 왜 가르쳐 주는 거냐? 나중에 다 알게 된다면서?”
 “물론 그렇겠지. 다만······.”
 리카이엔은 말끝을 흐리더니 뭔가 아련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네가 좀 더 알아주었으면 해서 이야기하는 걸세. 저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 이후 자네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이 될 것인지를······.”
 이 자식··· 아무튼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 하나는 탁월하다.
 “아, 알았어, 인마. 내가 약속 하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는 놈이다. 그러니 안심하라고.”
 “후후, 당연하지.”
 그날부터 리카이엔은 눈에 보이는 것은 죄다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눈동자는 점점 탁해졌다.
 
 “흐으윽, 흐윽!”
 하루가 지날 때마다 녀석이 뱉어내는 신음은 더욱 거칠어졌다. 더 이상 수련을 할 수도, 업무를 볼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말 그대로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지는 모습. 나날이 탁해져만 가던 녀석의 눈동자에서도 이제는 완전히 빛이 꺼져 버린 상태.
 말 그대로 죽을 날 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였다.
 새삼 녀석이 미웠다.
 망할 자식. 왜 하필 날 불러내서 이따위로 어정쩡한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거야? 다른 놈들도 많을 거 아냐. 왜 하필 나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 죄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끄으윽!”
 음!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리. 신음이 아니라 비명에 가까운 소리.
 설마 지금이?
 화들짝 놀라 녀석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등이 활처럼 휠 정도로 극도로 긴장된 상태로 굳어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꽉 쥔 주먹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망할 놈!’
 미치겠다. 녀석의 저런 모습, 정말 보고 싶지 않다. 저 끊어질 듯 말 듯한 신음도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곁을 떠날 수 없다. 잠을 잘 수도 없다. 그저 멍하니 녀석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 망할 자식아. 정신 좀 차려라!”
 그때였다.
 “흡!”
 갑자기 나를 향해 뻗어 오는 리카이엔의 두 손. 마치 멱살이라도 잡으려는 듯, 녀석의 두 손이 내 가슴팍에서 그러쥐어 진 채 멎었다.
 이, 이건 뭐하는 거지?
 그때였다.
 녀석이 눈을 떴다. 더 이상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는 녀석의 탁한 눈동자가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저, 정신이 드냐?”
 “해, 해 줄 수 있겠지?”
 녀석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해, 해 줄 수 있느냐니?”
 “내 부탁··· 들어줄 수 있겠지?”
 “다, 당연하지!”
 “배신하지 마라.”
 목소리가 울고 있었다.
 “부탁이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없더라도······. 부디 나의 꿈을 대신 꾸어 줘라!”
 눈이 울고 있었다.
 치가 떨리도록 지독한 슬픔. 그리고 녀석의 얼굴에 떠오른 또 하나의 감정.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 확대와 축소를 반복하는 눈동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
 그것은 공포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
 그제야 그동안 내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망각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녀석은 인간이었다.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나는 이미 죽은 상태니 모르지만,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어찌 죽음이 두렵지 않겠는가? 그것도 천천히 목을 옥죄어 오듯 느리면서도 꾸준히 다가오는 죽음이.
 녀석은 다만 그것을 숨겼던 것뿐이다. 애써 의연한 척한 것뿐이다.
 나를 위해, 나와 자신의 꿈을 위해. 이후에 남겨질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애써 태연한 척했던 거다.
 “부, 부탁이다.”
 리카이엔이 더 이상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나를 버리지 말아다오!”
 울컥!
 또 한 번 속에서 뭔가 치솟는 기분이다. 몸뚱어리도 없는 내가 이렇게 뭔가 울컥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믿어라.”
 격렬하게 떨리던 녀석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나 장윤명, 또 한 번 죽는 일이 있어도 널 배신하지 않을 거다. 또 한 번 주어지는 내 삶은, 전부 너와 나의 목표를 위해서 쓸 테니까! 그러니까 날 믿어!”
 조금은 안심이 된 것일까? 뻣뻣하게 굳어 있던 녀석의 몸에서 천천히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편안하게 감는 눈.
 녀석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믿겠네, 친구.”
 흡!
 이, 이건 뭐지? 녀석의 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못 느낄지 몰라도 귀신인 나는 알 수 있었다.
 녀석이, 리카이엔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뭐하나? 어서 누워!’
 영혼인 나를 온통 뒤흔드는 목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리카이엔의 몸 위에 누웠다.
 순간, 갑자기 온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감각이었다.
 온몸의 신경을 타고 휘도는 그것은 영혼이 된 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살아 있는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느낌!
 그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듯하더니,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무언가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흡! 리, 리카이엔?”
 방금까지 나의 모습이었던, 반투명하여 뒤가 훤히 보이는 영혼의 상태로 리카이엔이 서 있었다.
 “나는 오래 머물지 못할 듯하네.”
 “뭐, 뭐라고?”
 “내 모든 것, 자네에게 주었네.”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카이엔의 영혼이 희미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리, 리카이엔!”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녀석의 영혼은 이미 완전히 흩어진 후였다.
 “고, 공자님!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밖에서 들려온 소리.
 ‘음? 이건?’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알아듣지 못했던 이곳의 말을 지금은 알아듣고 있었다.
 하지만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온몸에 기운이 죄다 빠져나간 듯 더 이상 입을 뗄 기운도 없었다.
 피곤했다.
 하루 종일 전투를 치른 것처럼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저 이대로 자고 싶었다.
 
 
 
 
 
 # Chapter 3. 새로운 삶의 시작
 
 
 
 
 
 “어이~ 형씨!”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로테즈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기며 발을 멈췄다.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 구겨진 얼굴은 어느새 밝은 웃음을 띤 얼굴로 바뀐다.
 로테즈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한 리카이엔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다리는 쩍 벌린 상태로 무릎을 굽히고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고개를 꼬고 있는 모양새에 능글맞은 웃음이 더해지니 영락없는 건달패였다.
 ‘도대체 어디서 저딴 걸 배운 거야?’
 로테즈는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웃음을 지은 채 물었다.
 “아, 공자님. 혹시 지금 저를 부르신 건가요?”
 그 말에 리카이엔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댁 말고 여기 누가 있다고 그래?”
 “아하하, 하긴 그렇군요.”
 로테즈는 당황한 듯 억지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뛰는 걸 보니 뭐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 모양이지?”
 ‘똥 마려운 강아지······.’
 그 말에 로테즈는 더 이상 놀랄 기력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가······.’
 불과 열흘 전의 일이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끙끙거리던 리카이엔이 기적처럼 몸을 회복한 것은.
 그리고 그날부터 리카이엔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리카이엔은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가끔 가슴이 두근거릴, 남자의 외모를 형용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의 말은 찾을 수 없는, 조각이라고 불릴 정도의 아름다움.
 그 어떤 석학과 대화를 해도 막힘이 없는 풍부한 지식과 명석한 두뇌.
 왕국 최고의 검사라는 근위대장 레이론 프로네스 백작이 극찬한 검술.
 그리고 주변에 있는 것이라면 물 한 방울, 먼지 한 조각까지도 고풍스럽게 만들어 버린다는 고귀한 기품.
 그런데 병이 나은 후 그 기품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껄렁한 표정과 건들거리는 언행이었다.
 지난 열흘 동안 보고 들은 탓에 이제는 적응이 좀 될 만한데도 로테즈는 여전히 그런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고, 공자님······.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지금의 그런 말투는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해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품위를 해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에이~ 품위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신경 끄세요오~”
 말 자체는 존대인데 그 특유의 느물거림이 더해지니 아주 격한 빈정거림으로 들리는 말투.
 “아무튼 어딜 그렇게 뛰어가시나~?”
 “아, 예. 백작님께 이번 수확을 통해 거둔 세입을 보고하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리카이엔은 새로운 사실이라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로테즈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라고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빤히 쳐다보면 어지간하면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는 법. 잠시 할 말을 찾아 헤매던 로테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리카이엔의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거, 검술 수련을 하시던 모양이군요?”
 “응? 아~ 네. 그렇지요. 혹시 관심 있으세요?”
 “아, 아닙니다. 다만 이제는 그렇게 수련을 하셔도 될 정도로 건강해지신 듯해서······.”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자, 그럼 하던 일 하세요오~”
 “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공자님.”
 로테즈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듯 황급히 대답을 하고는 곧바로 방향을 돌렸다. 물론 리카이엔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와락 인상을 구겼음은 말할 것도 없다.
 ‘도대체 몇 번째야?’
 특별한 이유도 없으면서 불러 세워 말을 걸고는 저렇게 비꼬듯 한마디 던지고 가라고 한다. 그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시비 혹은 트집이었다. 로테즈는 이러한 상황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겪고 있는 상태였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걷던 로테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설마··· 그 일을 알고 있는 건가?’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오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알았다면 저렇게 할 리가······.’
 로테즈는 애써 머릿속의 생각을 지우면서도 또 한 번 의구심 가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흐음, 저놈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데 말이야······.’
 성큼성큼 걸어가는 로테즈를 보며 리카이엔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접었다.
 그가 방금 한 행동은 로테즈도 알고 있듯이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리카이엔, 그러니까 지금은 리카이엔이 된 장윤명이 중원에 있을 당시 수하들에게 보이던 버릇 중 하나였다.
 뭔가 꿍꿍이를 품고 있는 놈은 그걸 드러낼 때까지 작정하고 집적거리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끊임없는 집적거림을 당하다 보면 사람은 결국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법. 그러면 남은 일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덜미를 잡는 것뿐이다.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낼 때가 됐는데 도통 그럴 기미가 안 보이네?’
 리카이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테즈와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짜식이 지가 내 건강은 왜 걱정하고··· 음?!”
 뭔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전에도 그 소리를 했었는데?”
 아무리 무심코 던진 말처럼 들리고 이유 없이 하는 행동처럼 보여도 그 속에는 그 사람의 본심이 깃들어 있는 법이다.
 지금 리카이엔의 육신에 깃들어 있는 영혼, 장윤명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가 실제 전투를 겪으면서 얻은 것 중 하나가 바로 그러한 부분이다.
 찰나의 순간에도 수많은 목숨이 꺼져 버릴 수 있는 전장은 인간이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장소에서는 모든 언행에 그 사람의 속마음이 여과 없이 묻어나오게 마련이다.
 장윤명은 그러한 모습을 수없이 지켜보았고, 그 후 그것이 굳이 전장이라는 급박한 장소가 아니라 해도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카이엔은 지난 열흘 동안 로테즈와 나눈 대화를 모두 되짚으며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맞아. 놈은 꼭 할 말이 없어지면 그 이야기를 했었어.’
 물론 그렇게 안부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지금 건강해 보인다 해도 리카이엔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지 않은가.
 하지만 리카이엔은 별거 아닌 대화라 해도 그 속에 묻어 있는 감정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아비규환의 전장을 누비며 배운 것 중 하나였다.
 “역시······.”
 가만히 눈을 감고 지금까지 로테즈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던 리카이엔이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부를 묻던 로테즈의 말투 속에 묻어 있는 명백한 악의.
 리카이엔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한 번 더 사경을 헤매야 되나?”
 
 중원의 무림인들은 검(劍)이라는 무기를 숭상하는 경향이 있다.
 장윤명은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부분이 궁금했었다.
 검이라는 물건은 도에 비해 가벼우면서도 양날인 무기이기 때문에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 수련을 거듭해야 하는 병기였다.
 흔히 떠도는 백일창(百日槍), 천일도(千日刀), 만일검(萬日劍)이라는 말만 봐도 검이라는 병기가 얼마나 익히기 어려운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런데도 왜 무림에서는 검을 숭상하고 검을 익히는 사람들이나 문파가 많을까? 그것은 심각하지는 않지만 떠오를 때마다 한 번씩은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의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한 부하에게 그것을 물었다.
 ‘무공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깨달음을 얻어 극의에 도달하기 위해 익히는 것입니다. 무림에서 주로 검을 익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그만큼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무림의 가문이나 문파를 흔히 무가(武家)라 부르고 군대에 속해 있는 가문을 병가(兵家)라 칭하는데, 그 대답을 한 부하는 무가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다 들은 후 장윤명은 오랫동안 품어 왔던 궁금증의 답을 알 수 있었다.
 ‘지랄 염병······.’
 무기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 물건에 깨달음이니 자아성찰이니 하는 것이 들어가는 순간, 무기는 그 본질이 훼손된다.
 그것이 장윤명의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 어떤 무기보다 창(槍)을 더 높이 평가했다. 긴 거리를 가지고 휘두르거나 내려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효과를 낼 수 있고, 날이 있기에 베거나 찌르는 것이 가능하면서 다른 것에 비해 배우거나 익히는 것이 비교적 쉬운 무기.
 집단 전투가 주를 이루는 군대에서 이 창만큼 효율성이 높은 무기는 없다. 그리고 장윤명이 실제로 익혔던 무공도 가전무공인 장가창법이었다.
 그 다음은 도(刀)다. 묵직한 무게를 가지고 있기에 어느 정도의 힘만 더해지면 충분히 파괴적인 위력을 낼 수 있고, 창에 비해서는 어렵지만 검에 비해서는 익히기도 쉽다.
 집단 전투를 할 때 난전(亂戰)의 상황은 피할 수 없는 법. 도는 그 난전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다. 장윤명는 검이라는 무기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양날의 무기인데다가 가볍기까지 한 탓에 어지간히 수련하지 않으면 오히려 자기 검에 자기가 당한다.
 돌격전이든 난전이든 그 어느 것 하나 써먹을 데가 없는 무기. 그것이 장윤명의 검에 대한 평가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 검을 들고 있다.
 지난 열흘간 그가 하루 종일 땀에 곤죽이 되도록 휘두른 것은 창이었다. 영혼은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 움직이는 리카이엔의 육체에는 아주 생소한 무기. 그렇기에 그는 창을 수련했다. 검이라는 무기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전생에 가장 손에 익었던 무기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꽤 위태위태했다. 영혼에는 깊이 각인되어 있지만 이 육체에는 너무 낯선 무기이다 보니 제대로 쓰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열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리카이엔의 창술은 꽤 쓸 만한 수준까지 올라와 있었다.
 리카이엔의 몸을 쓰고 있는 장윤명이 워낙에 창술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무공을 수련했던 육체였기에 낯선 창술이라 해도 금방 몸에 익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창술이 완벽하게 몸에 익었다고 여긴 후 처음으로 검을 들었다.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머릿속의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기억이 공존하고 있었다. 하나는 이전 리카이엔의 일생이 담겨 있는 기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장윤명의 전생이 담겨져 있는 기억이었다.
 그중 지금의 리카이엔이 자신의 것처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전생의 기억, 즉 장윤명의 기억이었다. 아무래도 영혼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리카이엔의 기억을 더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자신의 것처럼 자연스럽게 떠올리지는 못한다. 그것은 마치 도서관의 서재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책과 같은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떠올리지는 못하지만 그 도서관의 책을 찾아 펼쳐 보면 기억할 수 있는.
 즉, 지금의 리카이엔이 이전 리카이엔의 기억을 더듬는 것은 원하는 책을 찾아 펼쳐 보는 것 같은 과정이었다.
 지금 리카이엔이 펼쳐 든 책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검술이었다. 리카이엔이 북진무사 이율의 영혼을 불러내 배운 그의 독문무공 혈하(血河)였다.
 ‘혈하라······.’
 자신의 검이 강물을 핏빛으로 물들일 정도로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그것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 했다.
 검을 쥔 오른손에 천천히 힘을 준다. 그러자 단전에 자리 잡고 있던 진기가 마치 아지랑이처럼 천천히 피어오르더니 오른손 장문을 타고 검으로 뻗는다.
 사아악!
 진짜 소리가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카이엔은 검으로 진기가 스며드는 순간 검날이 새하얗게 빛나며 싸늘한 예기가 퍼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검이 움직인다. 잔잔한 파도처럼 천천히, 그러면서도 묵직한 힘을 품은 채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조용히 머물러 있는 바람을 희롱한다.
 느리다. 리카이엔의 손에 들린 검은 한 없이 느리게 허공을 훑는다. 그렇게 느린 흐름을 만들어 내는데도 두터운 바람은 여전히 검신을 타고 흐르며 묵직한 압력을 이끌어 올린다.
 ‘크으윽!’
 리카이엔은 생전 처음 겪는 그 느낌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검은 가벼운 무기였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손에 들린 검은 가벼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깨가 무겁다. 오른팔의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터질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눈동자를 움직여 확인해 보니 팔은 멀쩡하다.
 너무도 색다른 그 감각. 아니, 색다르다기보다는 황당한 감각. 그런데도 감탄을 터져 나온다.
 ‘이것이 검?’
 전생에서 단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병기가 검이었다. 그런데 막상 잡아 보니 검이라는 무기가 가진 가능성은 무한했다. 지금 자신의 손에서 일어나고 있는 조화가 바로 그것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후우, 후우!’
 검의 흐름에 몸을 내맡겼다. 리카이엔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혈하의 검로, 그리고 이미 수천수만 번 그 검로를 그려 왔던 육체. 그 두 가지가 하나가 되는 순간 손을 타고 흐르던 진기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빨라졌다.
 마치 온몸의 기운이 한순간 빨려 나가는 듯한 느낌. 동시에 묵직한 파공성이 주변의 공기를 터뜨렸다.
 파아아앙!
 그 소리를 신호로 리카이엔은 홀린 듯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은 여전히 느렸다. 하지만 그 느린 검로가 갈무리하고 있는 힘은 상상을 불허하는 수준.
 숨이 가빠 오기 시작했다. 온몸에는 비 오듯 땀이 흐르고,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허억, 허억!”
 입에서는 쉴 새 없이 거친 숨소리가 토해진다.
 그러다 한순간.
 콰드드득!
 오른발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발바닥을 통해 타고 오르는 반발력이 다리를 통해 허리와 어깨를 타고 손을 통해 회오리친다.
 소용돌이치는 반발력이 전신의 공력을 한 아름 안은 채 검으로 타고 흐른다. 동시에 검신을 빙글빙글 타고 올라가는 맹렬한 진기.
 쑤욱 뻗어 나가는 검봉이 한 점을 찔러 들어간다.
 모두 열두 개 초식으로 이루어진 혈하의 마지막 절초, 람하(濫河)의 마지막 한 점.
 “타아아앗!”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격렬한 외침.
 하지만 그 순간.
 “끄아아아악!”
 리카이엔이 갑자기 비명을 질러대며 바닥을 굴렀다.
 챙그랑!
 손에 쥔 검은 이미 다른 쪽으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고, 리카이엔은 마치 번개라도 맞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으으윽!”
 참으려 해도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신음. 리카이엔은 입술을 깨물고 격하게 경련하는 근육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제, 제길 쉬운 게 아니군!”
 한참을 부르르 떨던 리카이엔이 겨우 진정이 된 듯 몸을 일으키며 힘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충돌이었다. 영혼과 육체의 충돌. 몸은 혈하의 검로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의 영혼은 그렇지가 못했다.
 지금의 그는 이전 리카이엔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지 못하고, 마치 책을 읽듯 더듬어 떠올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흥에 취해 검을 뻗는 순간 영혼은 혈하의 검로가 아닌 장가창법을 떠올려 버렸고, 그 순간 몸이 아는 혈하의 검로와 영혼이 아는 장가창법의 창법이 충돌한 것이다.
 툭툭.
 리카이엔이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걸 제대로 하려면 어지간히 수련을 해야겠군.”
 검술이라는 것 자체도 익히기가 어려운 것인데 거기에 더해 혈하는 극도로 난해한 검술이었다. 이전의 리카이엔이 이미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많은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지금의 리카이엔이 그것을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후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북진무사 이율이라면 군문의 모든 젊은이들의 동경의 대상. 그것은 중원의 장윤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율의 검술을 제대로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다른 이유로 당장 쓸 수 없게 되니 진한 아쉬움이 몰려 왔던 것이다.
 “뭐, 필요한 건 시간뿐이니까.”
 천천히 익히면 된다. 어쨌든 혈하는 지금 그의 것이었다.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 그때까지는 아쉽지만 당장 편하게 쓸 수 있는 장가창법을 위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당장 편하게 쓸 수 있다고 해서 장가창법이 수준 낮은 창법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장가창법 또한 병가에서는 꽤 유명한 창술로, 한때 무림에서조차 일절로 인정했던 양가창법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무시무시한 창법이었다.
 실제로 장윤명이 병졸에서 백호까지 올라갈 수 있는 밑거름이 바로 이 장가창법이었다.
 ‘쯧, 리카이엔 그 자식이 괜히 호들갑을 떤 건 아니었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리카이엔이 살아 있을 때 쉬면 안 된다며 검술 수련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걸 가지고 욕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리카이엔은 이제는 없는 ‘리카이엔’을 떠올리며 피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마라.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리카이엔의 인사에 티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리카이엔의 아버지인 프로커스 백작과 어머니인 백작 부인 힐더 프로커스였다.
 “오오, 왔느냐? 어서 이리로 앉거라.”
 리카이엔은 반갑게 맞이하는 두 사람에게 웃는 얼굴로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쪼로로록!
 힐더가 직접 찻주전자를 들어 리카이엔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금방 우려냈는지 차의 따뜻한 기운과 함께 짙은 향이 진하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깊이 후각을 자극한다.
 편안한 기분이 온몸을 감싸고 기분 좋은 나른함을 불러온다. 아주 익숙한 자극.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리카이엔은 천천히 기억 속에 있는 책들을 더듬어 그 기억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마주 앉아 있는 어머니를 향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직접 차를 내주신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요.”
 “네가 병이 나은 날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계속 못하고 있었구나. 진작 준비해 놓는 건데······. 향이 괜찮으니?”
 힐더의 얼굴에 아주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들이 중병을 앓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동안의 시간은, 그녀에게는 정말이지 지옥 같은 하루하루였다.
 “물론이죠, 어머니. 저는 세상에서 어머니의 차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아들입니다.”
 그것은 이전 리카이엔의 생각이었지만 지금 리카이엔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전생에 전장에서만 떠돌던 그는 이렇게 질 좋은 차를 맛본 적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몸은 물론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어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런 훌륭한 차는 처음이었다.
 그때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하던 프로커스 백작이 놀란 표정으로 힐더를 향해 물었다.
 “부인, 이 차는 나도 처음 맛보는 차인 것 같구려?”
 “호호, 물론이죠. 리크의 몸이 좋아지면 내어 주려고 올해 봄부터 내가 직접 말리고 보관해 왔던 차니까요.”
 “허허, 내가 어쩌다가 아들놈한테도 밀려나는 꼴이 됐누?”
 프로커스 백작의 농 섞인 말에 힐더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루나도 제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하던데······. 당신 딱해서 어떡해요?”
 “어허~ 이런, 이런! 루나가 정말 그랬단 말이오? 이것이 언제는 아빠가 제일 좋다고 하더니······. 고얀~”
 그 말에 리카이엔이 불쑥 끼어들어 농담을 한마디 보탰다.
 “아버님, 나중에 저에게 잘 보이셔야 되겠는데요?”
 “음? 그래야 하는 게냐?”
 “그렇지 않으면 어머님의 이 차를 다시는 맛보지 못 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어허, 정말 그렇겠구나. 아들아, 나중에도 잘 부탁한다.”
 프로커스 백작이 기꺼운 표정으로 농담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그의 진심이 섞여 있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이대로 건강하게 지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농담 속에 담겨 있었다.
 프로커스 백작 내외와 리카이엔은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한가한 오후의 티타임을 즐겼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힐더가 찻주전자를 만져 보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차가 식었네요. 찻잎도 가져와야 할 것 같고······. 잠시 다녀올 테니 기다려요.”
 그 말에 리카이엔이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어머님, 제가 같이 갈게요. 원래 이런 건 아들이 해 드려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리카이엔은 또 한 번 진심으로 말했다. 부모님과 차를 마시며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처음 겪는 일이지만 아주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는 이런 편안한 시간을 좀 더 기분 좋게 즐기고 싶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전의 리카이엔이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고 싶다는 마음도 함께 들어 있었다.
 하지만 힐더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가 이 어미의 차 보관소를 직접 보려면 아직 멀었다.”
 그리고는 리카이엔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총총 걸어가 버렸다. 딱히 따라가기도 머쓱해진 상황이 된 리카이엔이 하릴없이 자리에 앉자 프로커스 백작이 그를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리카이엔은 그제야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뭔가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기에 어머니가 자리를 피해 준 것이다.
 “리카이엔.”
 “예, 아버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좀 이른 감이 있을 수도 있다마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말을 꺼내는 걸로 봐서는 미리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모습. 리카이엔은 조용히, 그리고 진중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이 아비도 나이가 들었는지 영지를 관리하는 일이 힘에 부치는구나. 그래서 말인데 네 건강도 좋아 졌으니 이번 기회에 작위를 물려주고 나는 네 어머니와 느긋하게 노후를 보내고 싶구나.”
 쿠쿵!
 리카이엔은 심장이 덜컥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위를 승계하라니.
 물론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프로커스 백작은, 아버지는 너무 사람이 좋았다. 물론 그것이 무능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급박한 정세에 비추어 볼 때 그리 좋은 성향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리카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럴 수 없습니다, 아버님.”
 “왜 그러느냐? 나는 네가 영지를 다스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틀린 것이냐?”
 “네, 아버님.”
 “음······. 이유를 알 수 있겠느냐?”
 프로커스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들은 세상 그 누구보다 훌륭한 인재였다. 자신은 절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 그렇기에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아들이 영지를 다스린다면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가문을 키울 수 있을 거라고.
 리카이엔은 잠시 고민한 후 농담을 던지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이 다스리는 이 프로커스 백작령을 좀 더 보고 싶거든요.”
 일단 작위를 물려받게 되면 영지를 비우기가 힘들다. 그러니 아직은 안 된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때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한 말 또한 거짓은 아니다. 이전 리카이엔이 죽기 전에 했던 말처럼,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곳이 이곳 베루스 대륙이었다.
 그때가 오면 아무리 평화롭고 인자하게 영지를 다스리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아버님의 치세를 보고 싶었다.
 ‘으음······.’
 하지만 프로커스 백작은 그 속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이 아이가 언제······.’
 농담하듯 가볍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아들의 두 눈은 말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빛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커다란 야망이었다.
 그러다 금세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더 이상했다. 자신은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정로로 많은 재능을 가진 아이가 아무런 야망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저리 말을 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프로커스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들의 말에 맞추어 농담처럼 가볍게 말을 받았다.
 “후후, 이 늙은 아비에게 계속 고생을 하라고 말을 하는구나. 이 염치도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대신 제가 아버님의 고생을 조금은 덜어 드릴 수는 있을 것 같군요.”
 “어떻게 말이냐?”
 “기사단과 군대를 제가 관리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군권은 행정권과 함께 영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권한 중 하나다. 기사단과 군대를 관리한다는 것은 그 군권을 달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프로커스 백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작위를 물려줄 생각도 했는데 군권이 대수겠는가.
 “하긴 나는 그쪽은 문외한이니 네가 관리하는 것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리카이엔의 말에 백작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런데 요즘 좀 안 좋은 이야기가 가끔 들려오더구나.”
 “안 좋은 이야기라니요?”
 “으음······. 네 언행에 관한 이야기인데······.”
 식솔들 중 몇 명이 와서는 리카이엔이 건달처럼 건들거리는 언행을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넘겼지만 문득 생각이 나 물어본 것이다.
 리카이엔 역시 별일 아니라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가벼운 장난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러리라 생각은 했다만······. 그래도 그런 장난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귀족은 한시라도 그 기품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때 차를 가지러 갔던 힐더가 돌아왔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요?”
 “허허, 너무 늦어서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소.”
 “그렇게 차가 마시고 싶었나 보죠?”
 “그게 무슨 말이오? 부인이 걱정돼서 그랬던 거요.”
 “어머? 그 말을 믿어도 될까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껏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리카이엔은 조금 더 이 나른하고 편안한 기분을 만끽하기로 했다.
 ‘가끔은 이렇게 쉬는 것도 좋지.’
 
 
 
 
 
 # Chapter 4. 기사, 그거 못해 먹겠다
 
 
 
 
 
 ‘쯧······. 이것들도 기사라고······.’
 리카이엔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 기분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표정으로 드러냈다.
 겨우 열 명이 나란히 섰는데 제대로 줄도 맞추지 못하는 놈들을 기사라고 데리고 있는 프로커스 백작령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아니, 줄을 맞추지 못하는 걸로 끝이 아니다. 짝다리를 짚고 서 있거나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삐딱하게 서 있다. 그것도 오늘 아침 프로커스 백작이, 리카이엔이 기사단과 군대를 관리할 것이라고 공표를 했음에도 말이다.
 딱!
 리카이엔이 손에 들고 있던 목봉으로 가볍게 바닥을 찍으며 기사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사들은 고개만 슬쩍 돌릴 뿐 제대로 뭔가를 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느다.
 ‘딱 두 놈 빼고는 전부 갈아 치워야 할 놈들뿐이군.’
 프로커스 백작령의 기사는 모두 열 명. 그중에 제대로 자세를 잡고 리카이엔을 보고 있는 사람은 기사단의 막내인 볼프와 페르온뿐이었다.
 “주목!”
 다시 한 번 말을 해도, 원래부터 바르게 서 있던 볼프와 페르온 두 사람만이 다시 한 번 몸을 꼿꼿이 세울 뿐이다. 그 모습을 본 리카이엔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기사단장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알버트 단장님.”
 그제야 기사단장 알버트가 리카이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도 방금까지 와락 구기고 있던 인상을 활짝 편 채.
 “예, 공자님.”
 어지간히 큰 영지가 아닌 한, 기사 단장은 영지군의 총지휘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커스 백작령은 어지간히 크다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영지.
 지금까지는 당연하다는 듯 기사단장인 알버트가 전체적인 군대를 지휘했었다. 그런데 아침에 뜬금없이 백작의 아들인 리카이엔이 기사단을 관리한다는 말을 들었다. 알버트로서는 자신이 가진 권한을 빼앗긴 셈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방금 보인 기사들의 반항적인 태도는 그러한 알버트의 심기를 대변한 것이다.
 그런데 리카이엔 공자의 입에서 ‘단장님’이라는 존대가 나왔다.
 ‘그러면 그렇지. 공자님, 당신이 아무리 잘났어도 이곳은 이곳의 룰이 있는 법입니다.’
 아주 득의양양한 표정.
 그 표정을 본 후, 리카이엔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한 층 더 심하게 비틀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미치셨어요?”
 알버트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네? 지금 뭐라고 하신······.”
 “아아~ 그냥 죽으시려고요?”
 “그, 그게 무슨······?”
 더 이상 말로 하는 대화는 없었다.
 쉬아아악!
 리카이엔의 손에 들린 봉이 호쾌한 궤적을 그렸다.
 빠아악!
 궤적만큼이나 호쾌한 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진다.
 “고, 공자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단 한 방에 연무장 바닥을 구른 알버트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하지만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리카이엔의 봉이었다.
 퍼어어억!
 또 한 번 바닥을 구른 알버트가 재빨리 일어나 허리에 차고 있던 아밍소드를 뽑아 들었다.
 “저도 참지 않겠습니다!”
 이번에도 리카이엔은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흡!”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알버트가 아밍소드를 휘둘렀다.
 슈아아아!
 리카이엔의 봉은 이번에도 호쾌한 궤적을 그렸다. 그리고 알버트의 아밍소드가 그 궤적을 막아섰다.
 하지만.
 “억!”
 알버트의 입에서 실성이 터져 나왔다. 횡으로 격하게 휘둘러지던 봉이 갑자기 그 방향을 바꿨다. 진로를 막아선 자신의 아밍소드를 유유히 비켜가더니 그대로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알버트는 그런 봉의 움직임이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봉의 움직임보다 자신은 더 느리다는 것.
 빠아아악, 으드득!
 붉은 선혈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으, 으으윽!”
 알버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단번에 코뼈가 으스러졌다.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보다 먼저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고, 공자님!”
 알버트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멈칫.
 리카이엔의 봉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고 알버트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자, 잘못했습니다.”
 그 말에 리카이엔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그래요? 그런데 뭘요?”
 “고, 공자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그럼 잘못했으면 맞아야 돼요, 안 맞아야 돼요?”
 “네? 그, 그게 무슨······?”
 이번에도 대답은 리카이엔의 손에 들린 봉이 대신했다.
 뻐어어억!
 이번에는 입이다.
 “쿠어억!”
 대여섯 개의 이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쌍코피와 입에서 터져 나온 피로 얼굴이 피범벅이 된 알버트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잘모해스니다!”
 이가 부러져 한껏 새는 발음으로 절규하듯 외쳤다. 하지만 리카이엔은 더 이상 입으로 대답할 마음이 없었다.
 “고, 공자님!”
 “참으십시오!”
 보다 못한 나머지 기사들이 리카이엔을 향해 우르르 몰려든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심장이 서늘해 질 정도로 세찬 파공성.
 휘이이잉!
 리카이엔이 봉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자신을 향해 달려온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도 볼프와 페르온은 원래의 자리에 꼿꼿이 서서 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두 놈은 건졌군.’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기사들을 향해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일까요?”
 갑작스럽게 봉을 휘두르는 바람에 멈칫했던 기사들이 천천히 다가서며 말했다.
 “그, 그는 우리 기사단의 단장입니다. 아무리 잘못을 했다 해도 그런 식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수하인 우리들 앞에서는······.”
 확실히 그 말은 맞다. 아무리 잘못을 했다 해도 팰 생각이면 단 둘이 있는 곳에서 하는 게 옳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대로 개념이 박힌 놈들에 한해서지만.
 리카이엔이 다가온 기사들을 향해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하~ 다들 그렇게 생각하신다 이거죠?”
 기사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버트라는 훌륭한 실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리카이엔의 존대가 뭘 의미하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특유의 건들거리는 그 존댓말이 가지는 늬앙스조차 느끼지 못한다.
 빠아아악!
 기사 한 명이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
 “전부 뒈지고 싶으세요?”
 “고, 공자님 그,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기사들이 말을 더듬거리는 사이, 리카이엔이 또 한 번 봉을 크게 휘둘렀다. 시원한 바람이 기사들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리카이엔이 오만한 표정으로 기사들을 노려보며 외쳤다.
 “전부 덤벼!”
 전생에 장윤명이 지휘했던 백호소에는, 지휘관의 말에 토를 다는 수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장윤명이 병사들을 잘 다스렸기 때문이 아니라, 반항기가 있는 병사들은 모두 그의 존대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병신이 된 자들은 모두 존댓말 끝에 반말을 들었다.
 기사들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아니, 실력이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이었다. 날 선 무기를 든 여덟 명의 기사들은 목봉을 들고 있는 리카이엔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연무장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런 기사들을 향해 리카이엔이 말했다.
 “너희는 오늘부로 프로커스 백작령의 기사 자격을 박탈한다.”
 하지만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리카이엔은 더 이상 시선을 주는 것도 아깝다는 듯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연무장 구석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볼프와 페르온을 향해 말했다.
 “이리 와.”
 리카이엔이 기사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본 두 사람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일단 이 놈들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리카이엔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볼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런데 저들의 기사 자격을 정말 박탈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리카이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소화도 못 시키는 뼈다귀를 뺏겼다고 주인한테 짖어대는 개새끼를 내가 먹여 살릴 이유가 있나?”
 “아, 아닙니다!”
 리카이엔의 과격한 표현에 흠칫 놀란 볼프가 악을 쓰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페르온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겨 있었다.
 ‘고, 공자님이 워, 원래 저런 성격이셨던가?’
 그가 알고 있던 이전에 자신의 검술을 단련시켜 주던 리카이엔 공자는 좀 더 기품이 넘치고 점잖으며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너무 아프셔서 성격이 변하신 걸까?’
 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런 생각을 내보이기에는 페르온의 성격이 너무 소심했다.
 두 사람이 말도 못하고 땀만 줄줄 흘리고 있는 동안, 리카이엔은 팔짱을 낀 채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일단 기사들은 처리를 했고······. 다음은 일반 병력들을 다듬어야 되나?’
 사실 그는 오늘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들을 모두 병신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전 리카이엔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기에 영지에 있는 기사들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리카이엔 그놈은 인간이 너무 물러 터졌어.’
 이전이나 지금이나 기사들이 리카이엔을 대하는 태도는 똑같았다. 할 줄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대우는 받으려 하고, 자신들 주군의 아들인 리카이엔을 얕잡아 보았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평가하는 과거의 리카이엔과 지금의 리카이엔의 관점은 극과 극이었다.
 과거의 리카이엔은 그런 기사들에게 얼마 되지도 않는 녹봉을 받으면서도 남아 있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지금의 리카이엔은 실력이 없어서 받아 주는 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빌붙어 있는 버러지라고 평가했다.
 어쨌든 그들에 대한 처리는 끝이 났다. 리카이엔은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그 다음으로 생각을 진행시켰다.
 ‘이놈들을 쓸 만하게 만들어야 된단 말이지?’
 자질이 뛰어난 기사들이지만 성격상 문제가 있으므로 혹독한 훈련으로 정신 상태를 다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전 리카이엔의 평가였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도 그 평가는 정확한 것 같았다.
 짙은 갈색 머리에 예리한 눈매를 가지고 있는 볼프는 너무 자신감이 넘쳤고, 수수한 금발에 축 처진 눈초리가 인상적인 페르온은 심각하게 소심했다.
 ‘그래도 이 두 놈은 제대로 평가를 했네. 두 명이라도 제대로 봤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두 명밖에 제대로 못 봤으니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성격상의 문제를 빼고는 쓸 만한 놈들이었다. 말단이라 그런지 다른 기사들의 나쁜 근성도 배우지 않았고, 군기도 확실하게 들어 있었다.
 ‘일단 가르쳐 보자.’
 그런 다음에 평가해도 늦지 않았다.
 “너희는 오늘부터 완전무장을 한 채 내성 성벽을 따라 백 바퀴씩 뛴다. 알았나?”
 “네, 네?”
 리카이엔의 갑작스러운 말에 볼프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사들의 무장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온몸에 쇠붙이를 두른다는 뜻이다. 그 무게는 어지간한 사람은 걷기조차 힘들다.
 그리고 아무리 단련된 기사라고는 하나 그 정도 중무장을 하고 내성의 성벽을 따라 뛰라니, 그것도 백 바퀴씩이나.
 하지만 리카이엔은 거기에 대답해 줄 정도로 친절한 성격이 아니었다.
 “까라면 까!”
 큰소리는 아니지만 가차 없이 터져 나오는 호통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황급히 자세를 고치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해.”
 리카이엔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그렇게 말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돌리려다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저기 뻗어 있는 놈들은 전부 감옥에 처넣어. 죄명은 하극상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얼른 시작하는 게 좋아. 안 그러면 해 넘어가도 다 못 돌 테니.”
 “예, 공자님!”
 
 쩔그럭, 쩔그럭!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쇳덩이가 프로커스 백작령 내성 성벽을 따라 뛰고 있었다. 아니, 움직이는 모양은 분명히 뛰는 모양인데 그 속도는 걷는 속도다. 뛰려고 아무리 용을 써도 두 발이 천근같이 무거워 뛸 수가 없었다.
 “크헉, 크허억!”
 입에서 나오는 것은 신음뿐이다. 말할 기운도 없다. 두 발이, 어깨가, 머리가 너무 무거워 죄다 잘라 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다.
 입안에서는 단내가 나고, 벗지도 못하는 갑옷 안에서는 땀 냄새가 가득했다. 쉬지 않고 날카로운 마찰음을 토해 내는 갑옷이 하루 종일 귀를 괴롭힌다.
 그때였다.
 “우웨에에엑!”
 앞서 걷던 볼프가 갑자기 한껏 허리를 굽히더니 뱃속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쇄 반응이 일어났다.
 “웨에에에엑!”
 뒤에서 걷던 페르온 역시 입에서 무언가를 뱉어 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토했었기에 나오는 것은 누런 위액뿐이었다.
 “케켁! 쿨럭, 쿨럭!”
 한참 동안 기침을 한 후에야 어느 정도 목이 진정된 볼프가 힘겹게 허리를 폈다. 하지만 입안에 남아 있는 토사물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물 한 잔으로 입을 헹궈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내성의 성문까지 가려면 아직 절반을 더 돌아야 했다.
 볼프는 힘겹게 무거운 발을 옮겼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땅을 보고 걷던 볼프의 눈에, 바닥에 둥그렇게 모여 있는 토사물이 보였다. 아침에 페르온이 토해 놓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 후, 이번에는 말라붙어 있는 토사물들이 보였다. 어젯밤에 볼프가 토해 놓은 자국이었다.
 더 이상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이대로 기절해 버리면 편안할까?’
 하지만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기절을 할 방법은 없었다.
 철컥, 철컥!
 두 발은 느리지만 끊임없이 움직였다.
 ‘눕고 싶다!’
 정말 간절했다. 하지만 누워서 쉬기 위해서는 백 바퀴를 다 돌아야 했다.
 ‘이제 마흔두 바퀴째던가?’
 해가 중천으로 떴는데 절반도 못 돌았다.
 “후우~ 오늘도 한밤중이냐?”
 볼프는 몰려오는 절망감에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첫날보다는 낫다. 처음 돌기 시작했던 날에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으니까.
 ‘도대체 이걸 왜 시키시는 거지?’
 페르온은 지난 열흘간 수백 번도 더 했던 질문을 또다시 떠올렸다. 물론 이렇게 하면 온몸에 근육이 붙고 힘이 좋아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 하는 것 아닌가?
 계속 이러다가는 근력이 좋아지기 전에 탈진해 죽을 것만 같았다.
 ‘설마 벌을 주시는 걸까?’
 아무래도 그쪽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첫날 기사들이 그 정도로 처참한 꼴이 됐는데 자신들이라고 무사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페르온의 생각은 사실이 아니었다. 지금 두 사람이 하는 것은, 리카이엔이 전생에 익혔던 장가창법의 기초 수련 과정이었다.
 장가창법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바로 근력. 장가창법은 창대까지 쇠로 만들어진 무거운 철창으로 펼치는 창술이었고, 그것을 제대로 휘두르기 위해서는 강철 같은 근육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장가창법이 단순한 외공은 아니다. 수련을 시작하게 되면 근육의 움직임은 공력을 이끈다. 그리고 그것을 거듭하면 할수록 몸속에 기가 쌓이고 결국 공력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바로 외가기공(外家氣功)이다. 장가창법은 외가의 창술인 동시에 일종의 동공(動功)인 셈이다.
 어쨌든 우선 필요한 것은 근력. 그러니 일단은 성벽을 따라 돌아야 했다.
 한참을 철컥거리며 걷다 보니 마침내 성문이 보였다.
 ‘흐윽, 흐윽! 드디어 마흔세 바퀴······.’
 돌아야 되는 숫자가 줄어드는 것에 희열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던 볼프가 갑자기 눈을 좁히며 정면을 살폈다.
 ‘고, 공자님이 왜······.’
 성문 앞에 리카이엔이 팔짱을 낀 채 자신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번이 몇 바퀴째지?”
 “마흔두 바퀴 돌았고, 이제 마흔세 바퀴째 돌 차례입니다.”
 “그래? 그런데 이거 들고 가.”
 리카이엔이 가리킨 것은 물이 가득 담겨 있는 양동이였다. 갑옷만으로도 무거워 죽을 지경인데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고 가라니.
 볼프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야, 양동이는 왜 들고 가야 합니까?”
 ‘아무리 공자님이지만 이거 너무 심하십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나왔지만 그건 억지로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물음에 리카이엔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자기가 토한 건 자기가 씻어라. 이 더러운 놈들아!”
 
 “헉, 헉! 진짜 기사 못해 먹겠네!”
 한 병사가 땀범벅이 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투덜거렸다. 돌덩이를 끈으로 묶어 등에 메고, 양손에는 물 양동이를 하나씩 든 채.
 그 말에 나란히 걷던 병사가-마찬가지로 돌덩이를 메고 양동이를 든-비슷하게 찡그려진 얼굴로 말했다.
 “야 인마, 이거하면 기사 시켜 준다는데 못해 먹겠다는 말이 왜 나오냐?”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열 번 왕복을 하는 게 아닌데!”
 처음 투덜거렸던 병사의 이름은 톰, 그 말에 대답한 병사의 이름은 잭이었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친구였고, 군에 들어온 지금도 친구다.
 이들은 원래 프로커스 백작령의 상비군들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군권을 쥐게 된 리카이엔 공자가 막사로 찾아왔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성 뒤편에 있는 산꼭대기를 뛰어올라 가라는 것이다.
 시키는데 안 할 수 없는 노릇. 말단 병사에서부터 시작해 지휘관급의 장교들까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산꼭대기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산 곳곳에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어쨌든 병사들은 뛰었다. 아침에 먹은 것들을 죄다 게워 내고도 또 토하면서도 산꼭대기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왔더니 한다는 말이 또 뛰란다.
 그날 리카이엔은 무려 열 번이나 산꼭대기를 왕복하도록 시켰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채 다섯 바퀴를 뛰지 못하고 그대로 탈진해 쓰러지고 말았다.
 병사들 중 열 번을 모두 채운 병사는 불과 열 명. 그런데 그 열 명을 향해 리카이엔은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내가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해낸다면 우리 영지의 기사로 임명해 주마.”
 
 대부분 병사들이 자기 볼을 꼬집었다. 심한 병사는 혀를 깨물었다가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만큼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기도 했다.
 병사들은 저마다 꿈에 부풀어 리카이엔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리카이엔은 병사들에게 기사들이 입는 갑옷 무게만큼의 돌을 하나씩 주었다. 며칠 후에는 자기가 토한 건 자기가 씻으라며 양동이도 두 개씩 주었다.
 “웩, 웨엑!”
 그때 뒤따르던 다른 병사가 갑자기 허리를 잔뜩 굽힌 채 속에 든 걸 게워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톰과 잭이 한마디씩 던졌다.
 “난 그래도 아직은 좀 괜찮은데······.”
 “저놈 부럽다. 양동이에 물이 줄어드네······.”
 양동이를 들고 뛰기 시작하면서 생긴 묘한 분위기였다. 힘들어서 토하는 걸 불쌍하게 보기보다는, 양동이 물이 줄어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을 부러워하는 분위기. 특히 체력이 좋아 점점 토하는 횟수가 줄어든 병사들이 심하게 부러워하곤 했다.
 “그나저나 그날 공자님 정말 대단하시긴 했어, 그치?”
 “하긴, 그건 그래.”
 병사들이 산으로 뛰던 날, 리카이엔 역시 병사들과 함께 산을 향해 달렸다. 그것도 가장 나중에 출발해서 모든 병사들을 따라 잡고 가장 먼저 도착하는 신기한 광경을 연출하며.
 잭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열심히 하자, 기사 시켜 준다잖아. 그리고 기사 안 한다고 막사로 가봐야 여기랑 별반 다를 것도 없다.”
 “그건 무슨 소리냐?”
 “어? 너 막사에 안 가 봤냐?”
 기사 수련이라는 ‘돌덩이 메고 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섯 병사들은 기사들의 숙소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야, 성벽 돌고 나면 들어가 자기 바쁜데 거길 어떻게 가 봐?”
 “그랬군. 걔네들은 만날 산꼭대기 뛰기 한다더라.”
 “그, 그러냐?”
 “다만 한 가지 부러운 게 있다면 돌덩이는 안 메고 뛰는 정도? 아무튼 거기나 여기나 힘든 건 똑같아. 그래도 우리는 기사로 임명해 준다니까······.”
 그 말에 톰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야, 근데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우리 같은 것들을 진짜 기사 시켜 줄까?”
 “서, 설마 공자님이 거짓말을 했겠어?”
 “모를 일이지! 귀족들한테 우리가 어디 사람 취급이나 받아? 어쩌면 갖고 노는······.”
 그때였다.
 따악!
 “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 도대체 누구야아······.”
 버럭 소리를 지르며 뒤를 돌아보던 톰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볼프였던 것이다.
 ‘뒤, 뒤에 온 줄도 모르고 공자님을 욕하다니······. 내가 미쳤지!’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얼핏 지금까지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아무튼 이제 이대로 이 세상 하직할 것 같았다.
 하지만 볼프가 톰을 향해 한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잔소리 말고 까라면 까 이 자식아! 우리도 돌고 있는 거 안 보이냐?”
 볼프와 나란히 뛰던 페르온이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놈 점점 공자님을 닮아가는 거 같단 말이야? 그것도 병이 나은 후에 예전과는 달라지신 공자님을.’
 원래도 잘 까불고 겁 없이 나서기를 좋아하는 볼프였지만, 저런 식은 아니었다.
 ‘흐음, 그만큼 공자님이 좋다는 건가?’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자기가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의 말투나 행동 혹은 버릇을 따라하게 되는 사람.
 페르온이 볼 때 볼프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저렇게 노닥거리는 걸 공자님이 보시기라도 하신다면······.’
 생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분명 지금보다 더 혹독한 훈련을 시킬 것이 분명했다.
 ‘음?’
 그렇게 생각하던 페르온이 갑자기 혼자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면 나도 볼프와 다를 게 없군.’
 좋아하는 사람의 행동을 저도 모르게 따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항상 그 대상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페르온이 바로 그중 후자에 속했던 것이다.
 그때였다.
 “이제 농담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된 모양이군.”
 갑자기 들려 온 목소리.
 페르온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 리카이엔이 피식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페르온의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댓글(3)

김영한    
너무 주인공 중심 전개네.. 사이다를 위한 부자연스러운 느낌
2018.08.03 16:28
너솔    
수준이 딱 중딩각
2020.12.21 16:31
물러    
좋은 검술 놔두고 중원 허접쓰레기 가문의 창술수련이라 ..
2022.02.12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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