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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개정판] 신룡무 [E]

[개정판] 신룡무 1-1권

2018.06.26 조회 8,444 추천 91


 # 1화. 신룡대
 
 내가 처음 신룡대(神龍隊)에 차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신났었는지 모른다.
 무림맹주 직속의 기밀 임무 수행 단체.
 신룡대를 최대한 짧게 설명하자면 그쯤 되겠다.
 멋지지 않은가?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맹주님의 직속 수하로서 비밀 지령을 수행하며 강호를 위해 헌신하는 특별한 삶이라니.
 아, 참!
 신룡대를 더 잘 설명해주는 표현이 하나 더 있다.
 현 강호 최강의 소수 정예 비밀 조직.
 내가 신룡대원이라서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신룡대의 위상이 그렇다.
 그 유명한 천마신교의 흑풍대조차도 신룡대라는 이름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줘야 하는 게 이 강호의 현실이니까.
 그런 엄청난 곳에 차출되었다니 어찌 기쁘지 않겠느냔 말이다.
 실제로 높은 급료는 물론이고, 거기에 생명 수당과 작전 수당까지 더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 순간만큼은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 마음을 그대로 담아 맹주님에 대한 충성 서약서도 쓰고 대원의 의무에 대한 서약서도 썼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다.
 신룡대가 비밀 조직이라는 점에 대해.
 그 유명한 신룡대의 조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몇 명인지, 누가 신룡대원인지에 대한 정보가 왜, 이 강호에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는지에 대해······.
 
 그렇다.
 신룡대는 모든 게 기밀인 조직이다.
 심지어는 본인이 신룡대원이라는 사실 자체가 기밀이다. 지금도 어머니와 처자식조차 내가 신룡대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건 허풍이 아니다.
 서약서에 지장 찍고 맹주님 앞에서 맹세한 내용이라 밝힐 수도 없고 들켜서도 안 된다.
 그렇기에 신룡대원들은 늘 위장 신분으로 살아간다.
 이중 신분은 기본이고 상황에 따라서 삼중, 사중 신분이 될 때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위장 신분은 수시로 바뀐다.
 위장 신분의 행정적 절차에 대해서는 맹에서 알아서 처리하니 우리는 때때로 인피면구만 바꿔 써주고, 필요에 따라 가명을 만들면 된다.
 어차피 우리의 정체에 관한 자료 자체가 극비이니 그냥 본명을 쓰는 경우도 많다.
 처음에는 내 정체를 감추고 위장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 멋있고 재미있는 일일 줄만 알았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재미있는 일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답답할 때가 더 많다.
 아니, 그 유명한 신룡대의 일원이면 뭐 하느냐는 거다.
 사람들이 내가 신룡대원이라는 걸 모르는데.
 내가 밝힐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위장 신분뿐인데.
 그렇기에 신룡대원으로 살면서 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서약서에 명기된 기간만 만료되면 무조건 이놈의 신룡대를 때려치우겠노라고.
 높은 급료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이제부터는 고수로 대접 좀 받으며 어깨에 힘 좀 주고 살겠노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 신룡대에 남아 있다.
 벌써 서약서의 기한을 세 번이나 갱신했다. 아마 이다음에도 기한을 연장할 것 같다.
 맹주님께는 송구스럽지만, 맹주님에 대한 남다른 충성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무림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한다는 사명감 때문도 아니고, 높은 급료에 길들여져서도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조장님 때문이다.
 신룡대는 오색인 청, 적, 황, 백, 흑으로 구성된 다섯 개의 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섯 개의 조를 대표하는 다섯 명의 용(龍)이 있다.
 그중에서 우리 조장님은 흑을 상징하는 묵룡(墨龍)이다. 묵룡은 다섯 용 중 신룡대 최고의 고수로 통한다. 무림의 주요 인사들 정도 되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강호에서 그의 이름이나 정체에 관해서 아는 사람은 맹주님과 우리 묵룡조원을 포함해도 채 열 명이 안 된다.
 단유소.
 그게 바로 내가 존경하는 우리 조장님의 이름이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 우리 조장님을 내가 그토록 존경하는 이유는 비단 그 불가사의한 무공 실력 때문만은 아니다. 조장님이 내 목숨을 여러 차례 구해줬기 때문도 아니다.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장님은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틈이 많은 사람이다. 또한, 전장에서 피범벅을 하고 싸우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다.
 그게 참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조장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다.
 그게 바로 나를 포함한 묵룡조원들이 신룡대에 계속 남아 있는 이유다.
 
 “부조장님.”
 아, 참!
 여태까지 내 소개를 안 한 것 같다.
 내 이름은 진평. 신룡대 묵룡조의 부조장이다.
 묵룡조 안에서의 짬밥으로만 따지자면 가장 오래된 사람이 바로 나다. 심지어는 조장님보다 오래됐다. 내가 묵룡조에 들어오고 나서 약 일 년 후에 조장님이 들어왔으니까.
 어쨌거나 이곳은 현재 묵룡조가 사용하고 있는 안가.
 무창에 있는 무림맹의 본맹 근처에 위치한 곳이다.
 뒤뜰에 다가와서 내게 말을 건 청년의 이름은 서백풍으로 녀석 또한 우리 조원이다.
 훤칠한 미남인 서백풍은 아직 젊지만 고수다. 참고로 신룡대원들 대다수가 무림맹에서 키워낸 젊은 고수들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백풍이 옆에 앉았다.
 그에게 말했다.
 “월향루. 자시초(子時初, 밤 11시)부터 인시정(寅時正, 새벽 4시)까지. 아주 신나게 달리셨다지? 그것도 기녀들을 양옆에 끼고.”
 “헉!”
 내 말에 녀석이 깜짝 놀라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빠르게 내게 물었다.
 “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야 이 자식아, 지금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해?”
 “하여간 귀신이셔.”
 서백풍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 쓰레기 같은 것아. 인간적으로 문 소저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문주란 소저는 녀석의 연인이다.
 외모도 참하고 성격도 좋은 여인인데 서백풍에게 콩깍지가 쓰인 것 말고는 흠잡을 데가 없는 여인이다.
 서백풍은 그런 문주란 소저 몰래 허구한 날 기방에 들락거리는 거고.
 얼굴값 한다고, 녀석이 딱 그렇다.
 참고로 쓰레기라는 표현을 쓴 건, 내가 녀석과 워낙 친하기 때문이다.
 “건전하게 놀았어요.”
 녀석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에 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서백풍을 쏘아보자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던 녀석이 자진해서 혐의를 시인했다.
 “아니 뭐······, 아주 건전하지는 않았을 수도······.”
 “적당히 좀 해 인마. 내가 아주 문 소저 볼 때마다 속으로 미안해 죽겠으니까. 그리고 그놈의 천박한 아랫도리도 간수 좀 잘하고.”
 “알았어요. 알았어.”
 대답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나는 녀석의 말을 믿지 않는다.
 조용히 먼 하늘을 바라보던 녀석이 말했다.
 “오늘이죠?”
 오늘이 조장님의 임무 완료 예정일이다.
 대부분 임무는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친 후, 가장 알맞은 시기를 거사일로 잡는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바로 오늘, 환락마종이라 불리는 색마는 죽을 것이다.
 놈은 어린 소녀들을 납치한 후 사이한 술법으로 색공을 익힌,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쓰레기다.
 문제는 놈이 의외로 강하다는 점이었다. 정사마를 불문하고 고수들 여럿이 이미 당했다.
 그 이후로 무림공적이 되어 수배령이 떨어졌는데 결국 무림맹에서 먼저 찾아냈다. 그래서 그를 확실히 제거하기 위해 조장님이 투입된 것이다.
 “조장님이 직접 가셨는데 그놈 처리하는 일쯤이야 뭐.”
 서백풍이 걱정도 안 된다는 투로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정작 신경 쓰이는 건 역시, 나흘 후에 있을 조장님의 주선연이네요.”
 주선연(周旋聯).
 남남이었던 청춘 남녀가 지인을 통해 소개로 만나는 일을 요즘은 그렇게들 부른다. 주선자가 연결해주는 만남이라 해서 주선연이라나 뭐라나.
 언젠가부터 강호에서 먼저 쓰이기 시작한 말인데 근래에는 일반인들에게까지 퍼진 것으로 안다.
 집안의 어른이나 매파를 통해 이뤄지는 맞선은 서로에게 어렵고 부담스러운 자리일 수밖에 없다. 집안과 집안의 체면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주선연은 부담이 훨씬 덜하다.
 당사자들끼리 마음에 들면 계속 만나면서 연인으로 발전해갈 수도 있지만,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중하게 거절하면 되는 식이니까.
 서백풍의 말마따나 나흘 후가 바로 조장님의 주선연이다.
 생사가 걸린 조장님의 싸움은 전혀 걱정이 안 되는데, 조장님이 여자를 소개받는다니 걱정이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조장님이 무공은 고수지만 연애 쪽으로는 전무후무한 하수이기 때문이다. 그게 조장님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뭇 여인들 앞에서는 유쾌하고 활달한 사람인데, 연애 감정이 생긴 여인 앞에서는 그 특유의 장점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조장님이다.
 외모라도 볼품없으면 말도 안 하겠다.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연애에는 그 모양이니 곁에서 응원하는 우리가 다 애처로울 지경이라는 거다.
 상황이 그러하니 묵룡조에서 짝이 없는 사람도 조장님이 유일하다. 조원들은 모두 혼인을 했거나 최소한 연애라도 하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제발 좀 잘되셨으면 좋겠네요. 우리 앞에서 외롭지 않은 척하는 조장님 모습, 갈수록 처량해 보여서 마음만 아프니까. 요즘 들어 상대적 박탈감을 더 느끼시는 모양이더라고요.”
 서백풍의 말마따나 나도 안쓰럽다.
 “절강 쪽에 사는 처자랬지?”
 “예. 승추 녀석이 신경 많이 쓴 모양이던데.”
 곽승추도 묵룡조의 조원이다. 지금 조장님과 함께 임무에 투입되어 있다.
 이번 주선연의 주선자가 바로 곽승추다. 무림맹 절강지부 쪽의 지인을 통해 주선했다고 들었다.
 “뭐 하는 소저라든? 승추한테서 들은 거 없어?”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그쪽 무슨 상단에서 일하는 소저라던데.”
 “그건 괜찮네. 일단 강호의 여인은 아니니.”
 참고로 우리 조장님의 꿈은 평범한 연애를 하다가 평범한 가정을 꾸려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연애를 해도 강호의 소저보다는 민간의 평범한 소저들과 하고 싶어 한다.
 강호의 여인을 만나면 자신이 신경 써야 할 강호도 그만큼 넓어질 수밖에 없는데, 평생 사람 상대로 칼질하며 살기는 싫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의아했었다. 그 대단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 평범한 삶을 꿈꾼다니. 무공이 아깝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장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신룡대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보다 깊숙이 보고 겪은 이 강호는, 적어도 내 자식에게도 추천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곳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내 자식이 무림인으로 살겠다면 반대하고 싶은 강호니까.
 “외모는?”
 “승추 녀석 얘기로는 상대 쪽 주선자의 안목도 믿을 만하다던데, 저야 모르죠. 조장님이 문제죠. 너무 참하고 다소곳한 느낌만 좋아하시니까.”
 녀석의 말이 맞다.
 조장님의 이상형이 솔직히 고지식하긴 하다.
 “그렇지. 여자는 자고로 성격인데 말이야.”
 “아니죠. 여자는 자고로 몸이 칠(七)이고 얼굴이 삼(三)이죠.”
 “예라이! 너 같은 종자들이나 그렇지 이놈아!”
 “제가 조장님한테 지속적으로 조언을 해드렸다니까요? 근래 들어서는 조장님도 제 의견에 납득하는 분위기셨고요. 그러니 이번엔 잘되실 거예요.”
 “이 중요한 시점에 그 한심한 소리를 또, 전해드리기까지 했어? 잘한다, 아주.”
 그러자 놈이 자리를 뜨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조장님은 여자를 보는 안목뿐만 아니라 여자를 대하는 마음가짐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 이번엔 잘될 거라니까요.”
 그래, 네놈의 그 시답잖은 조언이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우리 조장님 이번만큼은 잘되셨으면 좋겠다.
 
 
 # 2화. 단유소
 
 슈슈슈슈슉―
 곽승추의 창이 다섯 개의 백광을 쏟아냈다.
 날카로운 창기(槍氣)가 환락마종의 좌측 요혈들을 빠르게 찔러갔다.
 촤악―
 그와 동시에 환락마종의 우측에서 연소운이 검기를 떨쳐내었다.
 환락마종의 육중한 몸이 환영을 만들어내듯 빠르게 움직였다. 동시에 그의 양손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퍼버버버벙!
 기운과 기운이 격돌하며 강력한 폭음을 만들어냈다.
 척! 척척!
 세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거리를 벌리고 섰다.
 환락마종이 한쪽에, 묵룡조원인 곽승추와 연소운이 반대편에.
 “후우, 후우, 후우······.”
 “헉, 헉, 헉, 헉······.”
 곽승추와 연소운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후임인 연소운 쪽의 숨소리가 더 거칠었다.
 곽승추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연소운은 이미 무복의 목 주변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환락마종이 조소를 머금었다.
 “무림맹도 한물갔구나. 겨우 이 정도의 애송이들로 하여금 이 어르신을 상대하게 했다니.”
 곽승추는 대꾸하지 않았다.
 환락마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어르신이 유명한 사람들 몇을 황천으로 보냈는데 무림맹에서는 그것도 안 가르쳐주더냐? 아니면 알고 있었는데도 객기 한번 부려본 게냐? 도대체 무림맹이 등신인 게냐, 네놈들이 등신인 게냐? 아니면 둘 다냐?”
 최대한 호흡을 안정시킨 곽승추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볼 때 등신은 당신이야. 확실해.”
 “어린 것의 주둥이가 참으로 방자하구나. 내 친히 네놈의 주둥이부터 찢어주마.”
 “우리 뚱땡이 형님이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그럴 일 안 생긴다니까.”
 “뚜, 뚱땡이? 형님?”
 환락마종의 투실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보다 나이 많으니까 형님이라고 한 거지. 그리고 형님이 뚱땡이인 건 본인도 알잖아. 내가 틀린 말 했어?”
 그 말에 환락마종의 붉어진 얼굴이 일그러졌다.
 “격장지계를 쓰려던 의도였다면 성공했다. 허나, 덕분에 네놈은 더 잔인하게 뒈질 것이다.”
 말을 마친 환락마종이 막 움직이려던 찰나였다.
 곽승추가 한 손을 뻗으며 외쳤다.
 “형님! 잠깐!”
 환락마종이 움직이려다 말고 곽승추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곽승추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우리 뒤에 서 있는 분 말이야. 아까부터 서 있었잖아?”
 환락마종의 시선이 곽승추와 연소운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건방진 두 애송이를 따라서 들어왔던 자였다.
 그다지 신경 쓰이는 자는 아니었다.
 그는 한 번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두 애송이가 자신의 수하들을 모조리 쓰러트릴 때에도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을 뿐이었고 자신이 직접 전투에 참여한 후에도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왜 저러고 있는 건지 잠깐 의아하긴 했지만, 곧바로 두 애송이와의 싸움이 시작되었기에 그 후로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네놈이 시간을 벌고 싶은 모양인데 그것도 성공했구나. 그래, 저놈은 뭐 하는 놈인데 저기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것이냐? 연락책이냐? 네놈들이 이 어르신한테 죽으면 얼른 가서 알리는 역할인 게야?”
 “어어? 형님, 정말 못 느끼겠어? 내가 확신하는데 저분이 형님보다 훨씬 강하거든. 그런데 형님은 지금 전혀 못 느끼는 것 같네?”
 그 말에 환락마종의 양 눈썹 사이가 좁혀졌다.
 훨씬 강하다고?
 환락마종이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두 애송이 너머의 인물을 살폈다.
 그는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강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조금도. 전혀.
 “허! 허허!”
 이제는 헛웃음만 나왔다.
 애송이들에게 한 번 더 놀아나긴 했지만, 이제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더 놀아날 수는 없으니 빨리 끝내버려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숨만 붙여놓고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주리라.
 이 와중에도 애송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주둥이를 나불거리고 있었다.
 “진짠데. 안 믿네.”
 환락마종이 전신의 기운을 잔뜩 끌어올렸다.
 그의 장포가 세차게 펄럭였다.
 곽승추를 향해 막 보법을 펼치려던 환락마종의 눈동자가 갑자기 부릅떠졌다.
 주변에 떨어져 있던 모든 검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싸우다가 죽은 수하들의 검이었다. 거의 스무 자루였다.
 그 모든 검들이 땅바닥에서 수직으로 서서히 떠오르는 광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아마도 계속해서 감탄하고 있었을 것이다.
 허공에 떠오른 검들의 검극이 모두 환락마종 자신에게 향해 있지만 않았다면.
 더 큰 문제는 검 하나하나마다 담긴 기운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는 점이었다.
 “마, 말도 안······.”
 환락마종은 채 말을 끝맺지도 못했다.
 허공에 떠 있던 약 이십 개의 검이 일제히 튕기듯 그에게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크으으윽······.”
 환락마종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그 비대한 몸에 십수 개의 검이 꽂혀 있었다. 검이 꽂힌 자리에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애초에 그 많은 검들을 다 막는다는 게 무리였다.
 환락마종이 막거나 피해낸 것은 겨우 다섯 개에 불과했다.
 환락마종이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청년에게 말했다.
 “너······, 너는 누구냐.”
 그의 입가를 타고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단유소.”
 짧은 대답이었다.
 “단유소······. 뭐 하는 놈이냐? 무림맹에 너 같은 젊은 고수가 있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신룡대.”
 괴로워하면서 어렵게 말을 이어가던 환락마종의 말을 자른 사람은 곽승추였다.
 환락마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중에서도 우리 조장님이 바로 묵룡이야, 형님.”
 “묵룡······!”
 신룡대라든가 묵룡이라든가, 그 모든 게 무림맹에서 전략적으로 흘린 허상이라고 여겼었다. 소문일 뿐이라고 치부했었다.
 실제로 정파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신룡대고 나발이고 직접 본 적도 없고 겪은 적도 없으니까.
 그런데 진짜로 존재한다니.
 게다가 이런 괴물이라니.
 곽승추가 다시 말했다.
 “조장님은 우리 키워주시려고 억지로 보고만 있으셨던 거야. 부하들 경험 쌓으라고. 형님 같은 고수를 직접 상대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잖아.”
 “허허······!”
 그 말인즉 전투 중에 애송이들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는 처음부터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정도의 고수를 자신이 전혀 못 알아봤던 거고.
 내가 등신인 거, 맞구나.
 환락마종이 실소를 지을 때, 곽승추가 옆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며 마지막 말을 했다.
 “뚱땡이 형님, 지옥에 가서도 벌 받아. 다음 생애에도 벌 받으며 살아. 아무리 적이라도 죽는 마당에는 좋은 소리 해주는데 그게 안 되네. 형님은 너무 악질이거든.”
 곽승추의 검이 환락마종의 두꺼운 목으로 떨어졌다.
 
 “수고들 했다.”
 “수고는 조장님이 하셨죠.”
 곽숭추의 말에 단유소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돌파하면서 모든 적들을 처리한 건 곽승추와 연소운이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이미 수십 명의 만만치 않은 적들을 상대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수인 환락마종까지 상대한 것이다.
 그게 부하들을 단련시키는 단유소의 방식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도 고수를 상대하게 하여 최악의 상황에서도 스스로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것이다. 물론 단유소가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였다. 오늘이 그랬다.
 단유소가 연소운에게 물었다.
 “소운이는 어때? 좀 나아졌어?”
 그러자 연소운이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아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까도 긴장이 너무 돼서······, 많이 떨었습니다.”
 현재, 몇 안 되는 묵룡조원 중에서 무공 실력이 가장 처지는 조원이 바로 연소운이었다. 물론 묵룡조원들 사이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연소운도 고수라고 불리기에 손색없는 충분한 실력자였다. 괜히 신룡대원이겠는가.
 다만 연소운의 문제점은 성격이었다.
 그는 섬세하고 배려심이 많았지만,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성격을 지니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 고수 앞에서 너무 겁을 먹고 얼어붙기 일쑤였다. 그러니 가진 실력을 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때문에 연소운 본인의 고민이 매우 컸다. 조원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 같다며 늘 미안해했다.
 실제로 묵룡조원들도 연소운에게 신룡대 말고 다른 진로를 찾도록 조언도 했었다.
 무엇보다 연소운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니까.
 그가 헤쳐 나가기에 신룡대는 너무 위험한 곳이니까.
 그런 상태였던 연소운을 신룡대에 잡아놓은 건 단유소였다.
 연소운 본인에게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며 극복해보자는 식으로 말한 모양이지만, 다른 조원들에게만 따로 얘기한 바는 달랐다.
 “소운이는 뛰어난 무인이 될 거야.”
 그 후로 연소운은 벌써 이 년간 묵룡조원으로 살고 있다.
 “아까 보니까 많이 좋아졌어. 잘하고 있으니 지금처럼만 하면 돼.”
 단유소의 말에 연소운의 표정이 환해졌다.
 “예, 조장님!”
 그러자 단유소가 곽승추와 연소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가자. 가서 천망단에게 알려야지. 그러고 나서 거하게 한잔하자.”
 천망단은 무림맹 본맹 외의 각 지부에 배치된 무사들로 조직되어 있었다. 지부의 일 외에도 무림맹 본맹에서 협조 요청을 보내오면 돕게 되어 있었다.
 신룡대가 임무를 마치고 나면 뒷수습을 맡는 것도 바로 천망단이었다.
 곽승추가 단유소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그건 소운이에게 맡기시죠. 서둘러 가셔야 합니다.”
 “아, 맞다! 조장님 주선연 잡혀 있으셨죠? 얼른 가보셔야죠.”
 옆에서 연소운도 한마디 했다.
 그러자 단유소가 여태까지와는 달리 난감함 가득한 기색을 보이며 곽승추에게 말했다.
 “그거······, 꼭 가야 하나? 갑자기 별로 안 땡기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한테 주선연 자리 만들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신 분이 바로 조장님이십니다. 이미 잡힌 약속입니다. 제 지인에게 어렵게 부탁해서 성사된 일이라고요. 그 사람한테 저는 뭐가 됩니까.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모시고 가야겠습니다.”
 곽승추가 단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연소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천망단에는 제가 가서 알리겠습니다. 승추 형님이 조장님 모시고 얼른 출발하세요.”
 연소운까지 거들고 나서자 단유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놈의 술이 웬수지. 그때 술기운에 괜히 감성적으로 돼갖고선. 어차피 해봐야 십중팔구는 안 될 게 빤한데. 괜히 시간 낭비에 돈 낭비인데.”
 “거, 말씀 한번 잘하셨습니다. 일단 십(十)이 있어야 그중 팔구(八九)가 안 된다는 것도 알 수 있고 일이(一二)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겠죠. 이번 소저는 느낌이 좋다니까요? 지인이 믿어보라고 했다고요. 그러니 다른 말씀 마시고 얼른 가시죠.”
 “졌다. 내가 졌어.”
 단유소가 결국 항복했다.
 
 ***
 
 나흘 후. 절강의 여수현.
 굽이돌아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다루의 이 층 창가에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단유소였다.
 곽승추의 도움을 받아 머리 모양도 깔끔하게 정리했고 의복도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들로 사 입었다.
 상대가 상단 쪽에서 일하는 소저이니만큼 최대한 ‘있어 보이게’ 꾸며야 한다는 게 곽승추의 의견이었다.
 오늘 나오는 여인은 과연 어떤 여인일까?
 곽승추도 무림맹 절강지부의 지인을 통해 일을 성사시킨 것이라, 오늘의 주선연 상대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절강지부 지인의 말에 따르면 충분히 괜찮은 소저라고 했단다.
 외모나, 능력이나, 성품이나.
 주선연을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믿어보라는 주선자의 말을 진짜로 믿었다간 큰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체험적 결론이다.
 어차피 오늘도 낭패를 볼 가능성이 크다.
 ‘설령 마음에 안 드는 소저여도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해주고 가자. 승추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래야겠지.’
 속으로는 계속해서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일말의 기대감을 계속해서 갖게 되는 이 간사함이라니.
 단유소가 창밖을 바라보며 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 실례합니다만······.”
 문득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단유소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이십 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단유소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살짝 커졌다가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최익 대협의 소개로······.”
 그 말에 단유소가 얼른 의자에서 일어서며 대꾸했다.
 “아! 소저가 바로······!”
 
 
 # 3화. 한설연
 
 강호에는 수많은 문파와 단체들이 존재한다.
 각각의 문파나 단체들의 성격도 천차만별이고 추구하는 목적도 천차만별이다.
 그중에서 두뇌의 역할을 자처하는 단체들도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는 전통의 제갈세가를 꼽을 수 있겠다.
 제갈세가는 무림맹이 생겼을 때부터 대대로 문상의 역할을 맡아왔을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강호 최고의 두뇌들이었다.
 모든 세가들이 그렇지만, 세가의 성격은 혈연 중심이며 폐쇄적이다. 그렇기에 뛰어난 두뇌를 자랑하는 다른 인재들이 제갈세가에서 뜻을 함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강호에는 제갈씨 이외의 뛰어난 두뇌들이 따로 모인 단체들이 여럿 존재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곳을 꼽으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한곳을 꼽을 것이다.
 현월곡(玄月谷).
 현 강호상에서 제갈세가만큼이나 유명한 두뇌 집단이 바로 절강의 현월곡이었다.
 제갈세가주와 견줄 만한 지식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 현월곡주라는 사실도 유명하지만, 지금의 강호에서 현월곡이 유명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다.
 강호제일미 한설연(韓雪蓮).
 현월곡주의 셋째 제자인 그녀에 대한 수식은 그 한마디로 정리된다.
 한설연이 유명한 건 단지 그녀가 강호 제일의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학다식한 머리에 수준급 무공 실력.
 현월곡이라는 탄탄한 배경에 고운 심성까지.
 한설연이 그런 재녀이다 보니 그녀는 강호상의 모든 사내들에게 있어 선망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한설연 친위대였다. 그녀를 선망하는 사내들이 일찌감치 모여서 그녀를 지키겠다며 사시사철 현월곡 아래에 머물고 있다.
 오죽하면 현월곡을 지키는 건 현월곡의 무사들이 아니라 한설연 친위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일까.
 
 “뭐어? 주선여어어언?”
 한설연이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그렇게 되묻자 침상에 누워 있던 여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예, 언니······.”
 그러자 한설연이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금영아. 내가 몇 번을 말해. 기본적으로 모든 사내들은 한심하다고. 주선연 같은 거 나오는 사내들이라고 해봤자 더 한심한 인간들뿐이라고.”
 “한심할 거까지 뭐 있어요. 서로가 스스로 인연을 찾지 못하니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좀 받는 것뿐인데.”
 “얘가, 얘가! 그래서 한심하다는 거잖아.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괜찮은 사내면 주변 여자들이 가만히 놔뒀겠어? 주선연 같은 게 필요하겠냐고.”
 “그 말씀은 바꿔 말하면 저도 한심하다는 거네요.”
 “아니지. 넌 다르지! 네가 얼마나 괜찮은 여잔데!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그래서 그런 한심한 사내들 만나지 말라고 이러는 거잖아.”
 한설연의 말에 양금영이 질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양금영에게 있어 한설연은 일생의 은인이었다.
 고아였던 자신을 현월곡으로 데려가 준 사람이 바로 한설연이었다. 현월곡에서도 친자매처럼 대해줬고, 독립할 시기가 되자 일자리까지 구해줬다.
 양금영이 현재 일하고 있는 곳은 여수금장의 총관부였다. 한설연이 오랜만에 놀러 왔는데 마침 자신이 발목을 심하게 삐끗해서 부목을 댄 채 누워 있는 상태였다. 다친 건 어젯밤이었다.
 최소한 이 주 정도는 이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게 의원의 진단이었다.
 양금영이 말했다.
 “알아요. 언니가 저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한설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미소는 따뜻했다.
 “알면 됐어, 요것아.”
 “그래도 어떻게 해요. 당장 오늘 오후가 주선연인데.”
 “나가지 마. 그 몸으로 어딜 가. 미루던가.”
 “이 주간이나 미룰 수는 없어요. 그분도 멀리에서 오셔서 그렇게는 안 돼요.”
 “그럼 취소해.”
 “주선해주신 무림맹 절강지부의 최익 대협은 우리 금장의 중요한 고객이세요. 평소 자주 뵙는 사이고 좋은 분이라서 제가 먼저 주선연을 부탁했었어요. 가뜩이나 그쪽 주선자도 최익 대협의 중요한 지인이라며 제게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아, 정말. 그럼 어떻게 해! 네가 나갈 상태가 안 되고, 그렇다고 누굴 대신 내보낼 수도 없잖아!”
 한설연의 그 말에 양금영이 눈을 번쩍 떴다.
 “언니.”
 양금영의 표정에서 낌새를 눈치챈 한설연이 곧바로 대꾸했다.
 “너, 너어······. 안 돼!”
 “부탁해요, 언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
 “저 때문에 우리 금장에 피해가 가게 할 수는 없어요. 최익 대협이 거래하는 금장이라도 바꿔버리면 저는 정말 장주님 뵐 낯이······.”
 “그만둬, 그러면.”
 “장주님이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어떻게 그래요.”
 하지만 한설연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자 양금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언니가 이런 사람이라는 거,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떨까요? 성품 곱기로 유명한 한설연 소저가 사실은 내숭 고수에, 사내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한설연이 눈을 번쩍 떴다.
 “너어어어!”
 “현월곡 아래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진을 치고 있는 친위대가 알면 또 어떨까요?”
 “너 지금 날 협박하겠다는 거야?”
 그러자 양금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건 협박이라고 하지 않죠. 친한 사이끼리의 애정 어린 부탁이라고나 할까.”
 “이걸 그냥!”
 “게다가 폭력적이기까지 하고.”
 그 말에 한설연이 들어 올렸던 손을 다시 내리며 눈을 흘겼다.
 그러자 양금영이 여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언니는 항상 인피면구 준비해서 다니잖아요. 여기 왔을 때도 쓰고 왔고. 그 인피면구 쓰고 나가면 되겠네. 내 친구라고 해요. 내가 지금 이런 상황이라서 부탁을 받고 대신 나왔다고 하면 될 거예요. 그 인피면구의 모습이면 상대방도 실망하지 않을 거고.”
 “얘가 정말.”
 “언니가 그렇게 한심하게 여기는 주선연, 직접 겪어보고 평가하는 거예요. 언니가 겪어봤는데도 한심하다면 저도 앞으로 주선연 안 할게요. 언니나 곡주님이 맺어주는 사람이랑 혼인하든 하지, 뭐.”
 양금영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언니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잖아요? 현월곡주님의 셋째 제자이자 강호제일미라는 유명인으로 살면서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요? 언니더러 그 사람하고 계속 만나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대신 한 번 나가달라는 것뿐이잖아요.”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한설연은 연신 고개를 젓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그녀의 고운 입에서는 그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중이다.
 아무리 친자매처럼 지내는 양금영의 부탁이었다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결국 자신이 이 한심한 놀음에 놀아나고 있다니.
 주선연에 가기 위해서 호위 무사들까지 따돌리는 수고를 해야 했다. 호위 무사들을 따돌리는 일이야 어차피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현월곡의 영역이니 큰 문제도 없었다.
 “게다가 옷이 이게 뭐야.”
 얼핏 보면 조신한 듯 보이지만 적당히 몸매를 짐작할 수 있는 옷이었다.
 양금영의 성화로 결국은 입고 말았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옷이 예뻐서 못 이긴 척 입은 것이지만.
 “미쳤어. 미쳤어, 내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한설연은 생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사내일까?
 궁금했다.
 양금영에게서 들은 것이라고는 두 가지뿐이었다.
 무림맹 본맹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이름 정도.
 단유소라 했다.
 단유소(端幽嘯).
 그윽한 휘파람 소리라······.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름만큼은 제법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인상이 비호감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기대를 하지 않겠다고 내심 계속 다짐하면서도 일말의 설렘은 존재하는, 이게 주선연에 나가는 사람들의 심정인가 싶었다.
 “언니, 적어도 한 가지는 주의해야 해요. 주선자인 최익 대협의 체면을 생각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줘야 해요. 알았죠?”
 나오기 전에 양금영이 당부했던 말이었다.
 “쳇. 알 게 뭐냐.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사내란 한심한 자들일 뿐이야.”
 그러는 사이, 그녀의 걸음은 어느새 약속했던 다루의 정문 앞에 다다라 있었다.
 
 ***
 
 단유소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일단 상대의 얼굴은 미녀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중(中中)에서 중상(中上) 사이는 되는 것 같았다.
 사실, 여인의 외모를 구등분(九等分)하여 상상(上上)부터 하하(下下)까지로 평가를 매기는 건 바람둥이인 서백풍의 습관이었다.
 왜 갑자기 서백풍의 여분구등법이 떠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눈앞의 여인은 그쯤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여인의 자태였다.
 늘씬한 키에 꼿꼿한 허리.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주는 단아한 목소리.
 조신한 듯 입었지만, 충분히 짐작되는 굴곡진 몸매까지.
 “여자는 몸이 칠이고 얼굴이 삼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조장님.”
 눈앞의 여인을 보고 있자니 서백풍 그 음란한 놈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 진짜!
 근래에 환락마종을 죽이고 왔더니 음란마귀가 씌었나.
 정신 차리자, 단유소.
 이게 웬 추한 생각이란 말이냐.
 그래도 한편으로 서백풍의 그 말 자체가 납득이 가긴 갔다.
 그나저나 뛰는 가슴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주선연에서 이 정도의 여인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일단 앉으시죠.”
 아, 젠장. 말을 더듬어 버렸다.
 초고수와 싸울 때에는 잘도 유지되는 평정심이 왜 이런 때는 전혀 유지가 되지 않는단 말인가.
 “아, 예.”
 여인이 걸음을 옮겨 맞은편에 앉았다.
 그 과정에서 여인이 보인 걸음걸이나 앉는 자세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마음에 들수록 가슴은 더욱 세차게 뛰었다.
 “반갑습니다, 소저. 단유소라 합니다.”
 너무 상투적인 인사로 들리지는 않았을까?
 인사를 건네며 보여준 미소가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을까?
 그런 염려를 하고 있는 사이, 여인이 대꾸했다.
 “안녕하세요, 단 공자님. 그보다······. 제 소개를 하기에 앞서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게 있는데······.”
 “아! 예. 말씀하십시오, 소저.”
 “양해를 구할 일이 있어서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양해를 구한다고 하니 살짝 불안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나?
 그렇다면 뭐가 마음에 안 든 거지?
 차림새인가? 얼굴인가?
 정작 여인이 아직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온통 휘저었다.
 “아아. 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소저.”
 “저는 공자님과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던 양금영이 아니에요.”
 “예?”
 으응? 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저는 금영이 친구예요. 사실 금영이가······.”
 여인이 이 자리에 나온 경위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듣고 나니 상황이 대충 이해가 갔다.
 “아아······. 양 소저께서 다치셨군요.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시라니. 부디 쾌유를 빈다고 전해주십시오.”
 “꼭 전해줄게요, 단 공자님. 어쨌거나 그래서 제가 대신 나왔어요. 제 이름은 한수련이고요.”
 “아, 한 소저시군요.”
 “네.”
 “하. 하하.”
 어색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좀 당황스러우시죠?”
 당연히 당황스럽지요.
 그래도 소인배처럼 보일 수는 없으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했다.
 “아! 뭐, 양 소저의 상황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요. 양 소저께서 낫기까지 제가 기다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요.”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 소저께는 신경 쓰지 마시라고 전해주십시오. 충분히 이해한다고.”
 “예, 그럴게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할 말이 없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한수련이라는 여인도 말이 없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
 이런 식으로 침묵이 계속 이어지니 더 어색했다.
 사실, 한수련이라는 이 여인이 마음에 들지만, 그녀는 주선연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계속 이러고 있기도 애매했다.
 “그럼 한 소저는 양 소저의 상황을 대신 전해주러 나오신 것뿐이니 이 자리는 이만······.”
 어색한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니 입에서 그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 말에 한수련의 미소가 더 묘한 느낌을 담아갔다.
 이윽고 그녀의 고운 입술이 열렸다.
 “단 공자님, 이왕 이렇게 된 거, 차 한잔 마시면서 저랑 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어때요?”
 
 
 # 4화. 주선연 (1)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알고 싶어요.”
 막상 사내를 보고 나자 양금영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최익 대협이 말씀하시길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했거든요. 평소 최익 대협의 성품을 보면 괜히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은 아니어서요.”
 그 말을 할 때의 양금영은 진지했다.
 “그러니 처음 봤을 때 영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면 언니가 이야기를 한번 나눠봤으면 좋겠어요. 주변에서 만났든 주선연으로 만났든, 괜찮은 사람이면 서로 알아가며 인연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양금영의 맞긴 하다.
 하필 이 시점에 그 말이 떠올라서 마음이 약해진 게 문제지만.
 에잇. 귀찮아서 정말.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소중한 동생인 양금영의 청을 들어주는 수밖에.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있다.
 자신이 직접 겪고 가서 이 사내가 얼마나 한심한지를 전해준다면, 앞으로 양금영도 더 이상 주선연 따위에 혹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차 한잔하자고 한 것이다.
 사실 차 한잔하는 것 정도는 어려울 게 없었다. 진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내의 분위기였다.
 단유소의 눈빛과 표정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자신에게 큰 호감을 갖고 있음을.
 흥! 꼴에 보는 눈은 있어서.
 뭐, 당연한 일이지. 어디 인피면구 따위로 가려질 매력인가? 내 매력이?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사내가 반색하며 물었다.
 이 한심한 남자야. 그렇게 속내를 곧바로 드러내면 상대가 얕잡아 보기 시작하는 거라고! 없어 보여! 표정이나 어조에 좀 더 여유를 가질 수는 없는 거야?
 일단 외모 점수는 사 점.
 하지만 어수룩한 모습에서 삼 점 감점.
 그나마 착해 보이는 인상이니까, 후하게 이 점 추가.
 결국 첫인상 점수는 십 점 만점에 삼 점.
 역시 이게 주선연 같은 데에 나오는 사내들의 수준이라는 거다.
 “단 공자께서 그냥 이렇게 가시면 제 친구 때문에 공연히 헛걸음만 하신 게 되잖아요. 친한 친구의 입장에서 미안하기도 하고, 저도 마침 시간이 좀 있고요.”
 “고맙습니다, 한 소저.”
 사내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좋단다, 아주.
 남의 속도 모르고.
 
 함께 차를 주문하고 나서 한수련이, 아니 한설연이 단유소에게 말했다.
 “옷이 멋지네요. 고급스럽고.”
 이봐요. 주선연 나온다고 비싼 것들로만 골라서 걸친 모양인데 안 어울려요. 자연스러운 맛이 없잖아요. 색깔도 매무새도.
 그래서 옷차림새 점수도 삼 점.
 “아, 그렇습니까?”
 단유소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응? 그냥 웃기만 하고 끝?
 이왕 옷차림 얘기가 나왔으니 상대 여인의 옷차림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줘야 할 거 아냐, 이 한심아.
 눈치 점수, 빵점!
 “단 공자는 뭐 하는 분이세요? 제가 듣기로 무림맹 쪽에서 일하신다는 것 같던데.”
 “아, 예. 들으신 대롭니다.”
 “무림맹이라니 대단하세요!”
 무림맹에 대해서는 한설연 자신이 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억지로 추켜세우는 척해준 것이다.
 사내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 이러면 신나서 더 떠들게 되어 있다.
 “아니 뭐······, 그렇게 대단할 정도는 아닙니다.”
 “무림맹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무인이신가요?”
 무림맹에서 일한다고 해서 모두가 무인인 것은 아니었다. 사무를 보는 사람도,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한설연이 볼 때 단유소는 무공을 익힌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보는 것만으로 무공을 익혔는지 익히지 않았는지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당사자가 내공을 운용하여 기운을 끌어올리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다만 무공을 수준 이상으로 익힌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기세 같은 것은 있는데, 단유소에게서는 그런 게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유소가 대답했다.
 “무림맹 비마대의 외부 업무 지원조에 있습니다.”
 비마대는 쉽게 말하면 무림맹의 수송대였다.
 “비마대가 뭐 하는 곳인데요?”
 물론 알면서도 떠보기 위해 물은 것이다. 허세를 부리는 사람인지 어떤지, 성향을 보기 위해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수송대 같은 겁니다.”
 “마차로 짐 나르고 그러는?”
 “예.”
 “외부 업무 지원조는 뭐 하는 덴가요?”
 “무림맹과 거래하는 상단이나 표국 등을 돌아다니며 수송 업무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입니다.”
 비마대 제30조의 조장이 바로 단유소가 맹 내에서 사용하는 현재의 위장 신분이었다. 묵룡조원 모두가 그곳에 속해 있다.
 때때로 높은 지위가 필요할 때 쓰는 위장 신분은 또 따로 있다.
 단유소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실, 비마대에 필요한 일이면 뭐든 다 합니다. 인력이 부족할 때는 수송 마차도 몰고, 구사(廐舍, 마구간) 일도 합니다. 지원조라는 게 그런 거니까요.”
 “아하. 그런 일을 하시는구나. 그럼 무공은 할 줄 아세요? 무림맹에서 일하는 분들은 왠지 무슨 일을 해도 기본적으로 무공은 할 것 같거든요.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그렇게들 생각하시더군요. 하지만 저는 무공 쪽으로는 그냥 호신술 정도만······.”
 그래. 최소한 말도 안 되는 허세나 부리는 칠푼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정해준다.
 “와! 호신술! 그러면 길거리에서 파락호들이 시비를 걸어오면 혼내줄 수도 있는 거예요?”
 한설연이 약한 척하며 그렇게 물었다.
 물론 길거리의 파락호들 따위는 백 명이 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의 무공을 갖춘 그녀였다. 그렇기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가증스러운 질문이긴 했다.
 뭐, 어때.
 어차피 한수련은 가상의 인물인데.
 게다가 이 사람은 오늘 보고 안 볼 사람인데.
 “글쎄요. 상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오! 자신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런 말씀은 아니고요. 요즘 파락호들 무섭거든요. 그냥,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한둘쯤은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해본 말입니다.”
 일단은 솔직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한심한 사내라는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지만.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단유소는 한수련이라는 여인이 마음에 들었다.
 말투며 표정이며 자세며 손짓이며, 모든 면에서 은은한 기품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총기가 엿보이는 눈동자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적극적인 모습이 좋았다.
 말도 잘 걸어주고, 잘 들어주고 또 호응도 잘해준다.
 설레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주선연 자리에서 이런 여인을 만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극히 적다. 주선연에 제법 많이 나가봤기에 잘 알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한수련과의 이 자리는 주선연이라고 보기 힘들긴 하지만.
 그나저나 한수련이라는 이 여인은 뭐 하는 여인일까.
 문득 단유소는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한 소저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요.”
 “제 얘기요? 뭐가 궁금한데요?”
 “그냥 뭐, 어떤 분인지······.”
 “구체적으로 하나씩.”
 “아, 참. 그렇죠. 하. 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인 단유소는 제법 신중히 질문을 골랐다.
 “한 소저는 몇 살이십니까? 양 소저와 친구 사이시긴 하지만 동갑이 아닐 수도 있으니.”
 “스물셋이에요.”
 “아, 양 소저보다 언니시군요.”
 “맞아요. 단 공자는 스물일곱이시죠?”
 “예.”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단유소가 다시 물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 하시는 일 같은 걸 여쭤봐도······.”
 “직업을 물어보신 거라면, 없어요. 그냥 집안일이나 돕는 정도예요.”
 “아.”
 어떤 집안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준 있는 가풍을 가진 집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을 저렇게 잘 키웠다면.
 “취미는 뭔지요? 그러니까 혼자 있는 시간에 뭘 하시는지.”
 “주로 책을 읽어요.”
 “오오.”
 “안 믿어지나요?”
 “믿습니다. 한 소저라면 왠지 그러실 것 같아서요.”
 그 말에 한설연이 미소를 지었다.
 단유소의 눈에 비친 그녀의 미소는 황홀할 정도로 예뻤다.
 이 여자, 정말 마음에 들어.
 승추야, 고맙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단유소는 한설연에게 점점 더 빠져들었다.
 “단 공자는 꿈이 뭔가요? 어떤 목표를 갖고 있다든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든가. 내지는 어떤 삶을 살고 싶다든가.”
 “사실 제 꿈은······, 평범하게 사는 겁니다. 평범한 가정을 꾸려서, 소중한 사람들과 더불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지요.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그게 꿈이라고?
 물론 그런 생각 자체를 한심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게 가장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래서 어떻게 상대방이 매력을 느끼겠느냔 말이다.
 적어도 마음에 드는 상대 앞에서라면 조금은 더 멋진 꿈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비마대주가 되겠다는 둥 허황된 목표까지는 아니더라도, 비마대 지휘부의 간부 정도는 누구나 충분히 목표로 삼을 수 있으니까.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산다는 생각 자체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단유소가 저렇게 말하니 그저 현실에 만족하고 월봉이나 챙기며 살겠다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어진 상황에서의 야망, 패기, 가능성 등을 통틀어서 모두 빵점!
 하여간 처음부터 끝까지 한심하다니까.
 “소중한 사람들이란 아까 말씀하신 그 동료들인가요?”
 “예. 그 친구들도 포함해서요.”
 “그분들을 많이 신뢰하시나 봐요.”
 “예. 강호에서 쓰는 말로 표현하자면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친구들이거든요. 여러모로.”
 답답하다. 순진해도 정도가 있지.
 이보세요. 강호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답니다. 그래서 초고수들도 아무에게나 등 뒤를 맡기지 않는 거라고요. 그렇게 무작정 믿고 있다가는 등 뒤에 칼 꽂히기 십상이니까.
 어쨌거나 여태까지의 총점은 아무리 높게 쳐줘도 십 점 만점에 일이 점 정도.
 이조차도 그나마 진솔한 면은 있다는 점을 고려해 후하게 점수를 준 것이다.
 금영아, 이 철없는 것아. 알겠니?
 이게 오늘 네가 만나려던 사내의 수준이란다.
 
 이제 슬슬 자리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난 후로 벌써 한 시진(두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주선연은 적당히 경험했다. 양금영에게 체면치레도 충분히 한 셈이다.
 주선연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단유소라는 눈앞의 사내는 한심하기만 했다.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게 재미있지도 않았다.
 결국 사내들이 한심하다는 점과 주선연에 나오는 사내들은 특히 더 한심하다는 점만 확인한 셈이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틈을 타서 한설연이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이제 슬슬 들어가야겠어요.”
 그 말에 단유소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아······!”
 한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단유소도 따라서 일어났다. 단유소가 잔뜩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한 소저.”
 아이고, 그러셨어요?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시간낭비였답니다.
 “저도요.”
 한설연이 생긋 웃으며 대꾸하자 그 모습을 보던 단유소의 얼굴이 붉어졌다.
 “댁 근처까지 배웅해드리겠습니다.”
 “호의는 고맙지만 괜찮아요. 집에 가기 전에 잠시 들를 데가 있어서요.”
 “그, 그럼 이 아래까지라도······.”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미안하지만 난 당신한테 관심 없어요.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그런데 왜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나요?
 “그래요. 그러면 이 아래까지만 부탁드려요.”
 “예, 한 소저. 가시죠.”
 두 사람이 나란히 계단을 내려와 다루를 벗어났다.
 다루 앞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한설연이 말했다.
 “그럼 단 공자님, 건승을 빌어요.”
 “예······, 한 소저도요.”
 
 한설연이 돌아섰다.
 그녀가 막 두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한 소저.”
 한설연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로 돌아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그, 그게, 그러니까······.”
 주저하며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던 단유소가 침을 한 번 삼키더니 말했다.
 “하, 한 소저와······ 계속 만나고 싶습니다.”
 
 
 # 5화. 주선연 (2)
 
 말했다.
 말해버렸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온 걸까.
 주선연 자리에 많이 나가본 만큼, 그중에는 괜찮은 느낌의 여인들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들에게 이런 말을 해본 적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용기가 없었다.
 거절당한다는 게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여러 여인들을 떠나보냈었다. 바보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바보가 되기 싫었다.
 뒤돌아 걸어가는 한수련의 뒷모습을 보니 그 생각만 들었다. 그녀는 그만큼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이대로 놓치기 싫었다.
 한수련은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눈빛으로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한수련의 입술이 열렸다.
 “미안해요, 단 공자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마음 한구석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한테서 거절당하는 일은,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
 “그럼······.”
 한수련이 살짝 목례한 후 돌아서려 했다.
 “이,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저, 이대로 그녀를 놓치기 싫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그러다 보니 말이 절로 튀어나온 것이다.
 
 이유를 몰라서 물어, 지금?
 충분히 말귀를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참자. 금영이가 당부한 바가 있으니까.
 “저는 애초에 주선연의 당사자도 아니었잖아요. 친구의 상황을 전해주러 나왔던 것뿐이에요.”
 “오히려 그래서 인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정말 왜 저럴까.
 저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건가?
 “여기까지만 해요. 이 정도면 제 뜻, 충분히 전해졌으리라 생각해요. 미안해요, 단 공자님.”
 “한 소저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이 여러모로 부족해 보였을 거라는 점,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보여드린 모습들만이 다는 아닙니다. 더 많은 것들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한 소저께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하, 정말 가지가지 한다.
 차라리 양금영이 다쳐서 못 나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뜩이나 심성 고운 양금영이니 이런 상황이 왔다면 거절도 제대로 못 했을 것이다. 곤란해했을 것이다. 이런 별 볼 일 없는 사내 때문에.
 이쯤 되니 좋은 말로 거절해서 알아들을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공자님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 최대한 좋게 매듭을 지으려는데 자꾸 왜 이러시나요? 그래요. 말이 나왔으니 말씀드릴게요. 알고 보면 더 나은 사람이다. 단 공자께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세상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나요? 게다가 이런 주선연에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평소에도 이런 건 아닌데 제가 긴장을 많이 해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 눈에 비친 단 공자님의 모습이 어땠는지 아세요? 한결같은 답답함뿐이었어요. 인생의 목표도, 남자로서의 자신감도, 청춘의 패기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부드럽거나 자상해 보이지도 않았지요. 시종일관 소극적인 모습으로, 재미가 있거나 유쾌하지도 않았고. 어느 한 부분에서도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요.”
 말이 계속될수록 단유소의 눈동자도 점점 커져 갔다.
 “게다가 단 공자님은 여자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어요. 주어진 상황마다 어떻게 대응해야 여자가 좋아하는지에 대한 감각 자체가 아예 없어요. 그 누구보다 뛰어나야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최소한 평균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단 공자님의 무엇을 더 기대하겠어요? 다시 만난다고 해서 달라질 거라는 확신, 어떤 근거로 갖겠어요?”
 아, 좀 심했나?
 잔뜩 상처 받은 표정의 단유소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방식이 궁극적으로 그를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조금의 미련도 가져서는 안 되니까.
 어차피 한수련이라는 여인은 오늘부로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니까.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하자.
 “게다가 저는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더 이상 저를 피곤하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부디 좋은 분 만나시길 빌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짝사랑이지만.
 “그럼 이만.”
 
 곧바로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던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지막 순간에 왠지 단유소의 눈빛이 확 바뀐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코 절망에 빠진 눈빛도 아니었고 분노로 인해 적대감을 담은 눈빛도 아니었다.
 무심한 눈빛이었다. 좋게 말하면 차분한 눈빛이었다고 할까? 여태껏 충격으로 인해 심하게 흔들리던 그 눈빛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 생각을 하면서 걷던 한설연이 고개를 저었다.
 잘못 본 거야. 착각한 거야.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순식간에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겠어. 그냥 포기한 눈빛이었던 거야. 그 남자에게도 잘된 일이지.
 어쨌거나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주선연은 이렇게 끝났다.
 의도했던 대로 좋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면 홀가분했을 텐데, 결국은 그러지 못하여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됐어.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자.
 “이젠 안녕, 한수련.”
 작게 중얼거린 한설연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매 두 마리가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위를 고고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한수련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 창피하고 자존심도 더 상했다.
 억울하기도 했다. 아직 보여주지 못한 게 더 많다는 말은 진심인데.
 인피면구를 벗고 자신이 묵룡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을 때가 아주 가끔 있다. 항상 생각에서 머무를 뿐이지만 이번도 그런 경우였다.
 한수련은 그렇게 해서라도 잡고 싶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첫눈에 반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믿게 만든 여인이었다.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말들이 더 큰 상처로 다가왔다.
 상처가 큰 만큼 자괴감도 더 크게 몰려왔다. 감정이 생긴 여자 앞에서는 왜 늘 이렇게 한심해진단 말인가.
 매몰차게 거절하는 한수련의 마지막 모습 속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의 가능성도 없다는 확신이 서자 여태껏 보이지 않던 그녀의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 씌었던 콩깍지가 사라지니 초고수로서의 안력(眼力)이 자연스럽게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인의 의지나 마음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녀가 마지막 말을 마치고 돌아서기까지의 짧은 순간 동안 많은 것이 보였다.
 골격, 체형, 키, 팔다리의 길이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얼굴이나 목, 손 같은 곳에 난 미세한 점들의 위치와 개수까지, 그 모든 게 한꺼번에 인식되었다.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 단유소가 정신을 차리듯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상처를 받았어도 이러면 안 되지.
 ‘잊자.’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내내 마음속으로 그 말만을 되뇌었다.
 꿈이었다고 생각하자.
 꾸고 있을 때는 정말 좋았다가 나중에 깨고 나면 슬퍼지는, 간혹 꾸는 그런 꿈이었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한설연의 모습과 그녀가 했던 말들이 계속해서 떠올라 마음만 더 아팠다.
 술 생각이 났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
 
 “아니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어요?”
 단유소에게서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곽승추의 반응이었다. 두 사람이 머무는 숙소에서는 이미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여자 잘못이 아니야. 내가 한심한 탓이지.”
 “아니, 그게 어떻게 조장님 잘못이에요? 결국 그 여자는 처음부터 조장님을 떠보기 위해서 남았다는 뜻이잖아요? 차 한잔 마시자고 먼저 말한 것도 그 여자였다면서요?”
 곽승추가 술잔을 벌컥 들이켰다. 그러더니 분개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애초에 그 여자가 상황만 전해주고 돌아갔으면 다음 기회에라도 양 소저를 만날 수 있는 거였잖아요. 그런데 왜 자기가 나서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느냐고요.”
 “후우······.”
 “마지막에도 그래요. 처음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으면 쉽게 끝났을 일이었잖아요. 굳이 그딴 식으로 싸가지 없는 말을 지껄일 필요도 없었잖아요. 거참 이상한 여자네.”
 벌컥.
 곽승추의 말을 들은 단유소가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솔직히 그 부분은 곽승추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됐다. 이제 끝난 일이야. 그리고 그렇게까지 나쁜 여자는 아니라니까. 내가 한심하기도 했고.”
 “조장님도 참 답답하시네. 이 상황에서도 그 여자를 이해해주고 싶은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니잖냐. 그 여자 말이.”
 “아, 답답해.”
 곽승추가 또다시 술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안 되겠어요. 최 대협한테 가서 한마디 해줘야겠어요.”
 “됐다. 그게 그분한테 따질 일이냐?”
 “답답해서 해본 말입니다, 답답해서. 아! 왜 하필 양 소저는 그 시점에 다쳐가지고. 상황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인담?”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곽승추가 단유소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술 한잔 거하게 드시고 잊으세요. 더 좋은 인연이 생기시려고 이러는 거라 생각하시고.”
 단유소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또다시 술을 털어 넣었다.
 그 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곽승추의 말에 단유소가 대답 대신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일단 복귀.”
 “나는?”
 “이왕 절강에 오셨으니 절강지부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파악하여 특이 사항을 보고하랍니다. 절강지부의 비마대에 파견 근무를 나온 형식이 될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군.”
 일종의 휴가 개념이었다. 장기 임무를 끝낸 후에는 이런 식의 간단한 임무가 주어지곤 했다.
 무림맹 절강지부는 그 유명한 항주에 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항주이니만큼, 경관도 즐기며 충분히 휴식을 취하다가 본맹으로 복귀하라는 뜻이다.
 단유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배려가 고맙긴 한데 이번에는 괜한 배려를 하셨네. 적어도 지금은 절강에 있기 싫은데 말이야.”
 
 ***
 
 사흘 후, 현월곡.
 정갈하게 꾸며진 넓은 방 안에 백발의 노인이 누워 있었다.
 노인의 안색은 창백했다.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상태였다.
 노인의 옆에 백의를 입은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이십 대 중반쯤의 여인이었는데, 선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미녀였다.
 여인이 물에 적신 고운 천으로 조심스럽게 노인의 얼굴을 닦았다.
 노인의 이름은 단목수헌. 바로 현월곡주라 불리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단목수헌이 입을 열었다.
 “늙어지니 병만 늘어나는구나. 늙은 사부 때문에 매번 네가 고생이 많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사부님. 그보다도 얼른 쾌차하셔야죠.”
 그렇게 대답한 여인의 이름은 송채령으로 현월곡주 단목수헌의 둘째 제자였다. 셋째 제자인 한설연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송채령 또한 현숙하고 성품이 곱기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설연이 그 아이가 네 이런 면을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겠구나. 여성스러운 면이 너무 없어서 걱정이야.”
 “사매는 똑똑하고 예쁘잖아요. 그거면 됐죠.”
 “똑똑하고 예쁘면 뭐 해. 사내들 무시하는 그 성격 안 고치면 시집도 못 보내. 시댁 식구들한테 못할 짓이야.”
 “사매도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부님.”
 “에잉, 쯧쯧.”
 단목수헌이 혀를 찰 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있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사부님!”
 한설연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단목수헌이 그렇게 말하자 송채령이 미소를 지었다.
 한설연이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너는 왜 또 그렇게 부산스러워?”
 단목수헌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한설연이 전서를 내밀며 황급히 대꾸했다.
 “사부님, 큰일 났어요! 사형이 위험에 처했나 봐요!”
 
 
 # 6화. 현월곡
 
 누운 상태에서 꼬깃꼬깃한 전서를 확인하던 단목수헌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언제 도착했느냐?”
 “방금 전에요.”
 한설연이 대꾸하자 단목수헌이 송채령에게 말했다.
 “일으켜다오.”
 송채령이 양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그냥 누워 계시는 게 좋습니다, 사부님.”
 “아니. 일으켜다오.”
 단목수헌의 표정이 심각했다. 결국 송채령과 한설연이 양옆에서 그의 상체를 일으켰다.
 “소학이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 처한 것 같구나.”
 진소학.
 그가 바로 현월곡주의 수제자였다. 세간에서는 현월곡의 대공자라고 불렸다.
 진소학은 세상을 배우겠다며 강호를 주유하는 중이었다. 책에서 배울 건 거의 다 배웠다는 이유였다.
 단목수헌이 송채령에게 전서를 내밀었다.
 전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자신이 커다란 위험에 처해 있으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전서를 확인한 송채령의 커다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분명히 진소학의 필체였다. 그것도 핏물을 이용해 손가락으로 급하게 흘려 쓴 필체였다. 진소학 본인의 핏물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진소학도 고수였지만 그를 수행하고 있는 무인들도 현월곡의 정예 고수들이었다. 그런데도 위험에 처했다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진소학이 현월곡을 나선 후로 두 해가 지나도록 이런 적은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상황이 그만큼 다급했다는 뜻.
 “대, 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송채령이 떨리는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유독 걱정스러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진소학과 그녀가 서로 좋아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곡 내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설연이가 가서 월혼대주와 비월단주를 불러오너라.”
 “예, 사부님.”
 월혼대(月魂隊)와 비월단(飛月團) 모두 현월곡을 대표하는 무력 조직들이었다. 월혼대는 소수 정예였고 비월단은 규모가 컸다.
 잠시 후, 두 명의 무인이 한설연을 따라 들어왔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곡주님! 대공자님은 무사하신 겁니까?”
 강렬한 눈매에 사각턱이 인상적인 사십 대 후반 사내가 황급히 물었다. 비월단주 엄주평이었다.
 그의 옆에 앉은 차분한 인상의 삼십 대 사내는 월혼대주 구홍립이었다.
 “일단 이걸 보시게.”
 단목수헌이 전서를 내밀었다.
 전서를 확인한 두 사람 역시 놀람을 금치 못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엄주평이 결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외쳤다. 진소학이 어렸던 시절부터 조카처럼 아껴줬던 사람이 바로 엄주평이었다.
 그러나 단목수헌은 이미 고개를 젓고 있었다.
 “엄 단주는 곡을 지켜주는 게 좋겠네.”
 “하오나 곡주님!”
 “엄 단주의 실력을 못 믿어서가 아닐세. 지금은 최대한 냉철해질 때야. 최선을 다해 소학이를 지원하면서 곡의 안전도 함께 생각해야 하네. 강호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니까. 엄 단주는 이곳에 남아서 곡을 지켜주는 편이 좋겠네.”
 병색이 완연한 와중에도 단목수헌의 눈동자는 차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구 대주가 월혼대를 이끌고 가주게. 이곳에는 한 개 조 정도의 전력만 남겨두고.”
 “예.”
 “엄 단주는 비월단원 중에서 중상급 고수들을 오십 명 정도 추려주시게. 그들이 구 대주와 함께하게 될 걸세.”
 “그리······ 하겠습니다.”
 “미리 소문나서 좋을 일 없네. 두 사람 모두 일단은 은밀하게 준비하시게.”
 “예, 곡주님.”
 지시를 받은 엄주평과 구홍립이 방을 나섰다.
 한설연은 사부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엄주평이나 구홍립이나 무공 수위 자체는 비슷했다.
 다만 엄주평은 진소학을 매우 아끼는 만큼 중요한 순간에 자칫 판단력이 흐트러질 가능성이 컸다. 그 열성적인 성격만큼이나 물불 안 가리고 진소학만을 위해 움직일 테니까.
 그에 반해 구홍립은 말수가 적고 냉철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한설연 자신이 판단하기에도 이번 임무의 성격상 엄주평보다는 구홍립이 더 적절한 패였다. 사부도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송채령이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사부님.”
 단목수헌이 한동안 조용히 송채령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채령이 너도 안 된다.”
 “사부님······!”
 물론 단목수헌도 진소학과 송채령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네 심정이 어떨지는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가장 효율적으로 소학이를 돕는 일이다.”
 “하오나······.”
 송채령이 애원하는 표정으로 재차 말했지만 단목수헌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잠시 그러고 있던 단목수헌이 말했다.
 “누구보다도 가장 가고 싶은 건 나다.”
 “송구······ 합니다.”
 송채령이 고개를 숙였다. 순간적으로 사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사부의 말이 맞다. 세상에서 진소학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사부일 수밖에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어려운 일이 될 게야. 소학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도 알 수 없고 그 아이가 전서를 보낸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때 한설연이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사부님.”
 단목수헌이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너도 보낼 수 없다. 위험해.”
 “저마저 가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다른 대안은 있으시고요?”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무림맹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긴 해요. 하지만 그들은 사형을 잘 몰라요. 사형은 똑똑한 사람이니 어떤 식으로든 단서를 남겼을 거예요. 그렇다면 사형을 잘 아는 사람이 꼭 필요하잖아요.”
 단목수헌의 양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구 대주님도 사형을 잘 알죠. 하지만 사부님이 말씀대로라면 현장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단서를 찾고 추리를 하며 사형의 행적을 뒤쫓아야 할 거예요. 구 대주님이 그걸 할 수 있나요?”
 단목수헌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이 없었다.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대안, 또 있으세요?”
 “충동적으로 나설 사안이 아니야.”
 “옳은 말씀이세요. 하지만 남 일이 아니잖아요.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친오라비가 위험에 처했는데 누이가 가만히 있어요?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도? 단지 위험하다는 핑계로? 세상 어느 가족이 그래요.”
 단목수헌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설연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다섯 명의 제자 중, 위기가 닥쳤을 때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는 제자는 두 명. 바로 진소학과 한설연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진소학이 더 뛰어나지만 순발력, 응용력, 판단력 같은 부분은 한설연이 더 뛰어났다. 당돌한 면도 있었고 추진력도 있었다. 무공 수위도 진소학 다음이었다.
 문제는 이번 일 자체가 왠지 불길하다는 점이었다. 그간의 강호는 평화로워도 너무 평화로웠으니까.
 ‘결국 보내야 하는가? 저 어린것을?’
 한설연의 말마따나 대안이 없었다. 수제자이자 다음 대의 현월곡을 이끌어가야 할 진소학의 안위가 걸린 문제였다.
 단목수헌의 입이 열렸다.
 “고수가······ 더 필요하겠구나.”
 뜻을 알아들은 한설연이 대꾸했다.
 “반드시 사형을 찾아올게요, 사부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단목수헌이 말했다.
 “은밀하게 움직일 일이다. 네가 나섰다는 사실을 알면 온 강호가 시끄러워질 게야.”
 “알겠어요, 사부님. 사안이 급하고 저도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한설연이 방을 나서자 송채령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을까요, 사부님? 이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사매라는 점이야 저도 백번 공감합니다. 사매는 잘할 거예요. 하지만 저 또한 사매의 안위가 매우 염려됩니다. 사매에게까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러니 무슨 일도 생기지 않게 대비해야겠지. 너도 일단 나가 보거라.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다.”
 “예, 사부님. 필요한 거 있으시면 바로 불러주세요.”
 “무림맹주에게 보낼 전서를 써놓을 테니 일각(15분) 후에 오너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송채령이 방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단목수헌의 입술이 열렸다.
 “석문, 있는가.”
 “예, 곡주님.”
 대답이 들려온 곳은 방 천장 위였다. 짧지만 절도 있는 목소리였다.
 석문은 단목수헌의 수호위였다. 항상 은밀하게 움직이기에 현월곡에서도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들었겠지?”
 “예.”
 “자네가 설연이 그 아이를 좀 맡아줘야겠네. 은월조(隱月組)를 모두 데려가게. 은밀히 따르다가 위험이 있을 때에만 나서면 되네. 알겠는가?”
 “예.”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내게 알려야 하네.”
 “당연합니다.”
 “가서 준비하게. 자네만 믿네.”
 “예!”
 천장을 빠져나가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지만 단목수헌은 석문이 이미 떠났음을 알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던 단목수헌이 이윽고 붓을 들었다.
 먹물을 가득 머금은 붓이 하얀 종이 위를 거침없이 채워가기 시작했다.
 약 일각 후, 무림맹이 있는 무창 방향으로 전서응 한 마리가 힘차게 날아올랐다.
 
 ***
 
 “허어. 진소학이 위험에 처했다니 거참 큰일이구려, 문상.”
 푹신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나른한 어조로 그렇게 대꾸한 중년인의 이름은 백리우(百里雨). 점잖은 인상에 호감형의 얼굴을 지닌 그는 지금 손톱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맹주님, 제가 보고를 드릴 때는 좀 집중해달라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점잖게 타이르는 어조로 그렇게 말한 문사 차림 중년 사내의 이름은 제갈윤(諸葛允). 그가 바로 제갈세가의 현 가주이자 무림맹의 문상이었다.
 무림맹주 백리우가 여전히 손톱에 시선을 둔 채로 대꾸했다.
 “말인즉 현월곡에서 그 일로 도움을 요청해 왔다는 거잖소. 다 듣고 있다니까요. 그러니 개의치 말고 말씀하세요, 문상.”
 무료함이 잔뜩 묻어나는 어조였다.
 “그래도 중요한 보고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해찰은 좀 자제하시는 게······.”
 “허허. 우리끼린데 뭘 그리 딱딱하게 구시오. 그냥 편하게 합시······.”
 “표 호위, 잠시 자리 좀 비켜주겠나?”
 백리우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제갈윤이 허공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표익은 그림자처럼 백리우를 지키는 수호위였다. 고수들이 득실대는 이 무림맹에서조차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허공에서 그의 간결한 대답이 들렸다.
 “충(忠)!”
 그러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백리우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보이며 제갈윤에게 말했다.
 “뭐냐? 이젠 아주 내 수호위가 아니라 니 수호위 같다? 번번이 니 명령을 듣는 쟨 또 뭐고? 쟤는 요즘 아예 내 의중은 묻지도 않고 그냥 사라져버리네? 포섭했냐? 음모 짰냐?”
 제갈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포섭하긴 뭘 포섭해요! 그리고 그 음모 타령은 이제 지겹지도 않아요?”
 그러자 백리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짜식. 맹주 하고 싶으면 음모 짜지 말고 말로 하라니까? 너라면 형이 언제든 물려준다니까. 이십 년간 이 짓 하느라 나도 지쳤다고. 그러니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너 해. 말로 해도 얼마든지 물려줄 수 있으니까.”
 “형님, 쫌! 말이 되는 소릴 하십쇼, 쫌!”
 결국 제갈윤의 언성이 높아졌다.
 백리우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뭘 그리 역정을 내고 그래. 농 한번 해본 거 가지고.”
 “아니, 농을 해도 무슨 그런 농을 해요!”
 “화내지 마. 무서워. 난 니가 화내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아니 너 자체가 제일 무서워.”
 “퍽이나 무서우시겠소! 무림 전체가 덤벼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양반이.”
 “그러니까, 무림 전체보다 니가 더 무섭다는 말이잖아.”
 백리우의 장난기 어린 미소는 여전했다.
 제갈윤이 눈매를 찡그리며 말했다.
 “제발 형님, 무공만 천하제일인 걸로 만족합시다. 말장난까지 천하제일이 꼭 되셔야겠소?”
 “니가 있는 한 그것만큼은 천하제일이 될 수 없지. 나도 내 주제를 안다고.”
 “하아······.”
 제갈윤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도 웃고 있었다.
 
 
 # 7화. 맹주와 문상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백리우가 열한 살, 제갈윤이 여섯 살 때였다. 그때는 백리우의 아버지가 무림맹주였고 제갈윤의 아버지가 문상이었다.
 그 어린 시절부터 무림맹과 제갈세가를 오가며 붙어 지낸 사이였다. 제갈윤이 작년에 사십 줄에 들어섰으니 벌써 삼십오 년이나 지속된 우정인 셈이다.
 그만큼 서로가 편했다.
 그렇기에 둘만 있을 때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백리우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걘 중원이 좁다 하고 잘만 놀러 다니더니 왜 위험에 처했대?”
 “낸들 압니까. 어쨌든 심각한 모양이에요. 진소학이 보낸 전서가 핏물로 쓰여 있었답디다. 그것도 손가락으로 급하게 휘갈겨서.”
 백리우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갈윤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다 형님 때문이에요.”
 “야!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삼 년 전에 소학이 걔, 부문상 자리에 앉히자고 했잖아요, 내가. 정치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그게 제일 좋은 수라고 했잖아요. 걘 능력도 되니까. 그때 아직 너무 어리다고 형님이 퇴짜만 안 놨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닙니까.”
 “이야! 그걸 또 그렇게 엮어서 몰아갈 수도 있구나. 재주다! 재주야!”
 그러자 제갈윤이 은근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다 형님한테 배운 거 아닙니까.”
 백리우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무림맹이 현월곡과 약간 소원해진 것도 다 그때의 일 때문이에요. 이번이 다시 돈독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기회고요.”
 “쩝. 도와달라면 도와줘야지. 현월곡인데. 근데 그런 건 니가 알아서 전력 짜서 지원 보내면 되잖아. 뭘 굳이 그런 것까지 나한테 보고해? 귀찮게.”
 그러자 제갈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은근히 신룡대의 지원을 바라는 눈치예요.”
 신룡대와 관련된 사안은 무조건 맹주의 승인이 필요했다. 괜히 맹주 직속 비밀 임무 수행 조직인 게 아니다.
 그 말에 백리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신룡대애애? 아니, 신룡대가 무슨 동네 낭인 조직이야? 쓰고 싶다고 맘대로 쓰게? 아무리 현월곡이라도 안 돼! 신룡대는 내 거라고! 내 전용이라고!”
 그러자 제갈윤이 무표정한 눈으로 말없이 백리우를 바라보았다. 그 시간이 계속되자 백리우가 흠칫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니······. 무조건 안 된다는 건 아니고······. 하, 합당한 이유 정도는 있어야지. 야, 그보다도 너, 요즘 눈깔에 힘 자주 집어넣는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무섭다고!”
 그러자 제갈윤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요인 호위 때문이랍니다.”
 “요인? 누구?”
 “형님도 아시다시피 현월곡주가 병상에 있잖아요. 그래서 진상을 파악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교월(皎月)이 직접 나선답니다. 그녀가 나선다는 건 아직까지 극비고요.”
 그 말에 백리우가 두 눈을 번쩍 떴다.
 “뭐어? 교월? 한설연? 내가 갈게! 내가 직접 호위해준다고 해! 바로 전서 날려!”
 교월.
 희고 밝게 비치는 달.
 달로 상징되는 현월곡에서도 가장 밝은 달, 즉 한설연을 이르는 말이었다.
 제갈윤이 째진 눈으로 백리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백리우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야, 나도 바람 좀 쐬자, 응? 노상 맹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 지루해 죽겠다고. 의욕도 없고 몸에 기운도 없어. 니가 옆에서 봐왔으니까 더 잘 알잖아. 가뜩이나 요새는 실전을 하도 안 치러봐서 몸도 점점 굳는 것 같고 말이야. 솔직히 내가 천하제일인 자리 못 유지하면 너도 곤란해지잖아.”
 “형님이 한 번 움직이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런 소릴 하십니까? 아니 그 전에, 맹주가 고작 그런 일로 맹을 비우겠다는 발상 자체가 정상이긴 해요?”
 “저, 정상이긴 하냐고? 야! 아무리 그래도 너, 너무 막말하는 거 아냐?”
 그러자 제갈윤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형님이 여태껏 저한테 했던 갖은 막말들, 폭언들, 다 말씀드려봐요? 어처구니없었던 온갖 억지들까지? 그리고 형님이 지금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 많으신 거, 제가 모를 줄 압니까? 제발 좀 말이 되는 소릴 하십쇼.”
 “노, 농이잖아, 농. 뭘 그리 까칠하게 반응해.”
 “농을 해도 좀······. 에휴. 어쨌건 빨리 결정하십쇼. 그 사람들 최대한 빠르게 출발할 모양이에요.”
 백리우의 표정이 또다시 진지해졌다.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이번 일, 뭐일 것 같냐? 진소학이 왜 그렇게 된 것 같아?”
 “아직은 모르죠, 저도.”
 “하긴, 근래 강호가 너무 평화로웠지. 너무 평화로워서 두려울 정도로.”
 평소의 백리우답지 않게 표정이 매우 심각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순한 사고면 좋겠는데.”
 “그러게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면 심각해진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의도적으로 현월곡의 대공자를 건드린 것이다.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진소학이나 현월곡이 이 강호에서 갖는 상징성은 매우 크니까.
 만약 누군가 애초에 그걸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에 시작했다면, 그리고 이게 시작에 불과하다면, 강호에는 한차례 해일이 몰아칠 수도 있다.
 피의 해일이.
 “느낌이 안 좋다.”
 제갈윤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설연이 나섰다는 사실도 결국은 온 강호에 알려지겠지?”
 “그렇겠죠. 기밀 유지도 한때니까요.”
 “한설연이 너무 위험해지겠는데? 사안 자체도 심상치 않은데 강호제일미까지 나섰으니, 숨어 있던 승냥이들도 이때다 하고 달려들 거 아냐.”
 “그렇겠죠.”
 한동안 턱을 괴고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고민하던 백리우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역시 내가 나서야겠는데? 그 고운 아이가 다친다는 건 이 강호 차원의 크나큰 손실이잖아?”
 그 말에 제갈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유, 진짜! 잘 나가다가 꼭······!”
 백리우가 제갈윤의 반응을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는 아마도 제갈윤의 저런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룡대 각 조 상황은?”
 “청, 적, 황, 백 모두 멀리에서 임무 수행 중이에요.”
 “그럼 묵룡조만 임무 대기 중이야?”
 “묵룡조도 이틀 전에 광서 쪽으로 떠났어요. 부조장 진평이 조원들을 이끌고 갔어요. 아! 연소운은 친누이의 혼사가 있다며 고향에 갔고요.”
 “묵룡은?”
 “휴가차 항주에 머물고 있어요. 보니까 근 몇 달간 연달아 임무를 수행했더라고요. 그런데 마침 항주에 있다기에.”
 “절강지부?”
 “네.”
 백리우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상황이 급한데 신룡대 최고 고수가 마침 절강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 운 좋네, 한설연.”
 현월곡도 절강에 있으니 묵룡의 즉시 합류가 가능하다, 그 얘기였다.
 “승인해요?”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일단 절강지부의 천망단에서도 인원 차출해서 묵룡과 함께 보내는 것으로 하면 될 것 같네요. 그다음은 추이를 보면서 대처하고.”
 “그러자고. 묵룡조원들한테도 일단 이번 임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라고 해. 아! 다른 조도 현재 임무가 끝나면 일단 임무 대기 상태로 남겨 두고.”
 그러자 제갈윤이 백리우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눈동자를 빛냈다.
 “이번이 세 번째군요. 형님이 신룡대 전체를 대기시키자고 한 거.”
 “그런 걸 또 세고 있었냐?”
 “그때마다 형님은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항상 그 중심에는 그가 있었죠. 이번 일에서 정작 형님이 지키고 싶은 사람도 한설연이 아니라 그겠죠?”
 “하여간 넌 날 너무 잘 알아. 피곤해, 아주.”
 그 말에 제갈윤이 피식 웃었다.
 “가서 일이나 처리할게요.”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윤이 짧게 목례하고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제갈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리우가 그를 불렀다.
 “윤아.”
 제갈윤이 돌아서서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왜요. 또 무슨 시비를 거시려고.”
 제갈윤의 반응에 웃어 보인 백리우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우리 여태껏 너무 여유 없이 살았지?”
 반백 년 이상 강호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무림맹.
 이 거대한 조직을 이끌고 관리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가뜩이나 조직의 정점에 있는 두 사람이니,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일정이 빽빽했고 삶이 빡빡했다.
 그런 상황에서 툭하면 조직의 어느 부분에 문제가 생기거나 강호 어딘가에서 사건이 터졌다. 예기치 못한 또 다른 문제도 수시로 발생했다.
 그럴 때마다 며칠씩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런 삶의 연속이었다.
 마침 선대의 맹주와 문상이 바로 두 사람의 부친들이었으니, 비교당하며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쉬운 입장이었다. 떠들어대기 얼마나 쉬운가. 역시 아버지만 한 아들은 없다는 식으로.
 그런 소리 듣기 싫어서라도 이를 악물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중압감과의 싸움이었다.
 청춘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고 장년기는 얼굴에 주름만 남긴 채 사라졌다. 앞만 보고 달렸고 서로만을 믿고 의지하며 버텨왔다.
 “그랬죠. 형님 덕분에.”
 제갈윤이 대꾸하자 백리우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 이제 좀 즐기면서 살자.”
 이에 제갈윤이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없이 백리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그렇죠, 형님? 이번 진소학 사건, 결코 느낌이 안 좋은 정도에서 끝날 것 같지가 않죠?
 “그럽시다.”
 웃으며 그렇게 대꾸한 제갈윤이 문을 나섰다.
 혼자 남은 백리우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눈 아래 펼쳐진 정원에는 가을꽃들이 하나둘씩 꽃봉오리를 터트리고 있었다.
 뒷짐을 진 백리우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묵룡과 교월이라······.”
 백리우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구름 뒤에 숨어 있던 달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은근한 달빛이 사방에 깔린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달이 완전히 구름에서 벗어났다.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네 뜻을 지켜주려 지금껏 어둠 속에만 두었는데 빛나는 달이 기어이 너를 세상 앞에 비추려 하는구나.”
 
 ***
 
 해가 서산에 반쯤 걸친 시각, 항주 외곽의 인적 없는 깊은 산속.
 아름드리나무의 굵은 가지 위에 한 청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단유소였다.
 항주에서 보낸 시간은 며칠뿐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를 남겨주었다.
 한수련이라는 여인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상처로 인한 자괴감을 극복하고 그녀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우려 며칠간 술만 마셨다.
 밥 생각도 나지 않았다.
 술만 있으면 되었다.
 억지로 내공을 이용하여 주독을 몰아내지도 않았다.
 그냥 취해서 살았다.
 어차피 휴가 중이고 이곳에서는 신경 쓸 일도 없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곽승추의 말마따나 마지막에는 그녀가 심했던 부분도 있었다. 그녀에 대한 억하심정이 아직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나날들을 보내다 보니 문득 스스로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지 말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곽승추를 보내놓고도 실제로는 이러고 있다는 게 한심했다.
 사랑하다가 헤어진 것도 아닌데.
 고백했다가 차였을 뿐인데.
 그래서 나선 길이었다.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스으으으―
 대라유유선공(大羅流流仙功)을 운용하여 체내의 진기를 회전시키자 단유소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봄바람이라도 만난 듯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전신에서 연무가 발산되었다.
 연무는 곧 살랑이는 바람을 타고 아지랑이처럼 흩어졌다.
 그 현상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며칠간 쌓여 있던 주독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원래 가르쳐줬던 심법을 갑자기 버리라 하고 대라유유선공을 익히게 했던 건 사부였다.
 
 “부드러움 속에 강함을 담는다는 건 말이 쉽지, 실제로 깨닫고 적용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라유유선공이 그 길을 밝혀줄 게야. 일정 경지 이상 익히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게다.”
 
 사부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일단 익히기는 했는데 당시에는 참으로 의아했었다.
 진기의 운행 속도가 너무 느린 데다가 축기(蓄氣)도 더딘, 답답하고 복잡한 심법이었기 때문이다. 들인 노력에 비해 그 효과는 미미한, 그야말로 비효율의 극을 보여주는 심법이었다. 심법 수련의 초중반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그런 생각이 바뀐 건, 심법 수련의 경지가 육성을 넘어섰을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대라유유선공은 여태까지의 비효율을 비웃기라도 하듯 엄청난 효율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줌의 진기만으로도 쉽게 일주천을 할 수 있었고 운기행공에 걸리는 시간도 급격하게 단축되었다. 축기의 양도 늘어났다. 가장 큰 효과를 보일 때는 진기를 다시 회복할 때였다. 그때 채워지는 진기의 양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육성에 진입한 후에 대라유유선공이 보여준 가장 큰 효능은 따로 있었다.
 바로, 자연 치유력의 증가였다.
 
 “대라유유선공은 무위(無爲)에 기반을 둔다. 인위를 최소화하고 천지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려는 성질을 지녔다. 천지자연은 스스로 균형을 찾아간다. 네 안의 소우주도 준비를 마치고 이제 천지자연, 나아가서는 우주만물과 균형을 맞추어가기 시작한 게야. 자연 치유력이 높아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사부의 말마따나 심법을 운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처가 더 빨리 치유된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내상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작은 산새들이 날아와 단유소의 주변에서 놀고 있었다. 두 마리는 아예 단유소의 몸 위를 걸어 다녔다. 한 마리는 허벅지 위에, 한 마리는 머리 위에.
 조화의 묘리를 담은 대라유유선공이 활성화되니 단유소 자체가 자연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라유유선공은 이제부터 내가 네게 전수해줄 심법을 보완해주기 위해 필요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 직후, 사부는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했었다.
 
 “그 심법의 이름은 혼원태극공(混元太極功). 참고로 현 강호의 분류법에 따르면······, 마공(魔功)이다.”
 
 # 8화. 임무 수령
 
 단유소가 대라유유선공의 운용을 멈추고 혼원태극공을 끌어올렸다.
 푸드드드득―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심법만 바꿨을 뿐인데도 주변에 있던 새들이 깜짝 놀라서 날아갔다.
 단유소가 혼원태극공을 잔뜩 끌어올리자 그의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리더니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이기 시작했다.
 단유소를 중심으로 강맹한 기류가 회전하며 휘몰아쳤다. 어찌나 강력한지 흡사 폭풍이라도 부는 것 같았다. 대라유유선공을 운용할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혼원태극공은 극강의 파괴력을 끌어내는 심법이었다. 그러나 파괴력이 큰 만큼 위험성도 컸다.
 혼원태극공이 진원진기를 건드리는 무공이기 때문이다. 내공과 진원진기의 공명을 통해 체내의 기운을 폭발시키고 그 힘을 순간적으로 발산해내는 게 바로 혼원태극공이었다.
 진원진기는 인간의 본질적인 생명의 원기이다.
 현재의 혼원태극공은 수많은 보완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의 안전성을 확보했다는 게 사부의 주장이지만, 진원진기를 건드리는 무공인 만큼 당연히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현재의 기준으로 따지면 마공으로 분류된다는 사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부가 혼원태극공을 먼저 가르치지 않고 대라유유선공을 육성까지 익힌 후에 가르친 것도 혼원태극공의 위험성 때문이었다.
 조화의 묘리를 담은 대라유유선공의 자연 치유력을 이용해 혼원태극공의 안전성을 한 번 더 확보하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대라유유선공을 육성 이상 익히지 못했다면 사부는 결코 혼원태극공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예 혼원태극공이라는 무공 자체를 몰랐을 것이다.
 
 “최악 또는 최후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혼원태극공을 쓸 일이 있다 해도, 결코 발출 가용 횟수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 대라유유선공으로 보호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을 때 어떻게 되는지는 굳이 더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이다.”
 
 사부는 비슷한 나이대의 보통 노인들보다 노안이었다. 내공심법의 효과로 무공 고수들이 대부분 동안이고, 사부 또한 고수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훨씬 더 노안이었다.
 단지 외모만 노인인 것이 아니라 신체 기능도 많이 노화된 상태였다. 본인이 직접 혼원태극공을 수정, 보완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이었다.
 혼원태극공을 운용하는 것 자체로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 단지 진원진기와 공명할 수 있는 상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체외로 진기를 발출할 때였다.
 공명으로 인한 순간적인 폭발력으로 강력한 기운을 발출하는 이치이기에 제한이 있는 것이다.
 현재 단유소는 혼원태극공을 삼성까지 익힌 상태였다.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제한 횟수는 아직까지 한 번뿐이었다. 보다 강력한 무공을 사용할수록 회복되기까지의 시간도 더 오래 걸렸다.
 사부는 대라유유선공과 혼원태극공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사용 가능 횟수는 증가하고 회복되기까지의 시간은 감소할 것이라 했다.
 다만 정확히 어느 경지에서 몇 번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누구도 상위 경지를 밟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원태극공을 아는 사람은 이 강호에서 두 사람뿐이었다.
 혼원태극공의 창시자가 사부이기 때문이다.
 고수가 되어 무료한 삶을 보내던 사부가 여러 무공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마공고서에서 실마리를 얻어 창안한 무공이라 했다.
 그런데 사부는 부작용으로 인해 혼원태극공을 아예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단유소 자신이 알아내야 할 문제였다.
 
 스으으으―
 해가 이미 저물어 산바람이 한차례 근처를 쓸고 지나갔다. 마른 나뭇잎들이 바람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기어이 떨어지며 허공에 흩날렸다.
 단유소가 허공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활엽들이 여전히 바람에 휘날리는 가운데, 더 빠르게 낙하하던 마른 솔잎들만이 갑자기 허공에서 정지했다.
 정지한 솔잎의 숫자가 수십 개에 달했다.
 단유소의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싶은 순간, 누런 바늘잎들에 검은 기운이 일제히 담겼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단유소가 내밀고 있던 손바닥을 활짝 폈다.
 정지해 있던 솔잎들이 튕기듯 허공을 갈랐다.
 피비비비비빗―
 순간 수십 개의 마른 솔잎들이 숲 이곳저곳에 깊숙이 박혔다. 일정한 궤적도, 방향성도 없었다. 나무 기둥, 흙바닥, 돌멩이, 바위 등을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나 박혀 있었다.
 “스읍. 후우우우.”
 한 차례 길게 호흡한 단유소가 굵은 나뭇가지 위에서 뛰어내려 땅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던 수십 개의 활엽들이 근처의 땅바닥 위를 뒹굴었다.
 단유소의 시선이 그 활엽들에 머물렀다.
 주위를 뒹구는 낙엽들마다 구멍이 뚫려 있었다. 단유소가 날린 수십 개의 솔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던 수많은 활엽들의 정중앙을 정확히 관통한 것이다. 그가 집중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종종 쓰는 수련 방식 중 하나였다.
 무림맹 절강지부로 돌아가기 위해 단유소가 몇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쉬이이이익―
 해가 저물어 어둑해진 하늘 위에서 뭔가가 단유소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본 단유소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끼이이― 끼이이이―
 날렵한 매 두 마리가 단유소를 향해 일직선으로 하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유소가 한 팔을 뻗었다.
 두 매가 날갯짓을 하며 단유소의 팔 위에 차례로 내려앉았다.
 한 마리는 보통 매였고 나머지는 보라응(甫羅鷹)이었다. 보통 녀석은 깃털이 쪽빛인 수컷이었고 보라응은 깃털이 흰색인 암컷이었다.
 “청비(靑飛), 설화(雪花).”
 단유소가 미소 띤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차례로 매들의 깃털을 쓰다듬었다.
 신룡대원들은 모두 한 마리씩 개인 전서응을 가지고 있다. 연락용이었다.
 무림맹에서 어떻게 훈련시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똑똑했다.
 심지어는 같은 장소에 신룡대원 둘이 같이 있어도 지정된 대원에게만 전서를 전달할 정도였다. 전서응들끼리의 구분 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단유소가 신룡대에 들어왔을 때 분양받은 녀석이 바로 청비였다.
 설화는 자신이 원래 기르던 녀석이었다. 날개를 다쳐서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어린 녀석을 우연히 구해준 데서 시작된 인연이었다.
 단유소가 깃털을 쓰다듬던 중에 청비가 고개를 하늘로 들더니 울음소리를 내었다.
 끼이이이―
 단유소도 고개를 들었다.
 끼이이이이이―
 또 다른 매 한 마리가 긴 울음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빠르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단유소가 안력을 끌어올려서 살펴보니 눈에 익은 녀석으로, 신룡대의 전서응이었다. 녀석 또한 하늘에 떠 있는 청비를 찾아서 날아온 것이다.
 단유소가 다른 한 팔을 뻗자 방금 날아온 전서응이 그 위에 내려앉았다.
 “자, 너희들은 잠시만.”
 단유소가 한 팔을 살짝 털자 청비와 설화가 가볍게 날갯짓을 하더니 땅바닥에 내려앉았다.
 단유소가 전서응의 다리에 묶여 있는 꼬깃꼬깃한 전서를 풀었다.
 내용은 묵룡조원끼리만 사용하는 암어로 적혀 있었다.
 참고로 같은 신룡대여도 각 조마다 쓰는 암어가 달랐다. 그 암어조차 주기적으로 바뀌는 식으로 보안이 이뤄졌다.
 물론 신룡대원 전체가 함께 쓰는 암어도 따로 있었지만, 이번에는 묵룡조원들만 쓰는 암어였다. 굳이 내용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만큼 철저한 보안이 필요한 사안임을 미리 예상할 수 있었다.
 단유소가 무림맹의 전서응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용을 곱씹었다.
 절강지부의 천망단과 함께 움직이며 비밀리에 현월곡의 요인을 호위하라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호위해야 할 요인의 정체가 의외였다.
 한설연이라.
 그 유명한 강호제일미를 직접 호위하게 되는 일이 생길 줄이야.
 어차피 강호의 여인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지만 호기심은 생겼다.
 다른 여인도 아닌 한설연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총명하고 성품 곱기로 유명한, 강호제일미 한설연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호에 퍼진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자신은 순진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임무를 통해 자기가 직접 보고 겪은 유명 인사들의 면면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으니까.
 특히 젊은 유명 인사들이나 후기지수일 경우에는 거의 다 그랬다. 철없고 건방진 애송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신을 얼마나 더 실망시키냐, 혹은 덜 실망시키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한설연이라는 여인이 그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일 것이라는 기대?
 미안하지만, 전혀 없다.
 ‘그나저나 극한 상황에 처했을 시에 호위 대상의 안전보다는 내 안전을 최우선시하라니······.’
 그게 이번 임무의 단서 조항이었다.
 의외긴 했다.
 이런 단서가 붙는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보통은 최악의 상황이 될 것 같으면 우선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임무를 포기해도 좋으니 자신의 안전을 먼저 도모하라고 한 것이다.
 윗선에서 판단한 이번 임무의 성향과 잠재적 위험성을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피곤한 임무가 될 것 같네.’
 생각을 정리한 단유소가 전서응을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고 말했다.
 “수고했다. 이제 가보거라.”
 따로 답신을 보내야 할 경우에는 전서를 작성해서 녀석을 통해 보내야 하겠지만 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단유소가 팔을 힘차게 들어 올리자 녀석이 무림맹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단유소가 쭈그리고 앉아서 땅바닥에 있는 청비와 설화를 몇 차례 쓰다듬었다.
 “자, 너희들도 이제 가서 놀아.”
 그러자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 두 마리의 매가 날갯짓을 하더니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두 녀석의 모습을 확인한 단유소가 꼬깃꼬깃한 전서를 허공에 띄웠다.
 챙!
 슈슈슈슈슈슈슈슉―
 단유소의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싶은 순간, 달빛에 비친 검광이 한동안 춤을 추었다.
 척!
 검이 다시 검집을 찾아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단유소가 분명히 전서를 향해서 검을 오랫동안 휘둘렀는데도 허공에 떠 있는 종이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단유소가 한 걸음을 떼자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전서의 형태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하얀 가루로 변해 그의 주변에 흩뿌려졌다.
 
 ***
 
 때는 인시초(寅時初, 새벽 3시).
 모두가 잠든 시각임에도 현월곡주 단목수헌의 침실 안에는 희미한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촛불은 네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안에 있는 사람은 단목수헌, 송채령, 한설연 그리고 월혼대주 구홍립이었다.
 단목수헌이 염려를 떨치지 못한 표정으로 한설연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이라도 네가 그냥 곡에 남겠다고 해줬으면 좋겠구나.”
 “제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거, 사부님도 이미 아시잖아요.”
 한설연은 행장을 꾸린 모습이었다.
 그녀가 현월곡을 비운다는 사실은 곡 내에서조차 아직까지 기밀로 유지되고 있었다. 언젠가 곡 내의 사람들이 알게 되어도 최대한 그 시기를 늦추자는 게 단목수헌의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한설연은 구홍립과 함께 야음을 틈타 몰래 현월곡을 빠져나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직전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단목수헌이 구홍립에게 물었다.
 “미리 빠져나간 호위대원들에게서 연락은 왔는가?”
 “예, 곡주님. 모두 각자의 합류 지점에서 대기 중이랍니다.”
 월혼대원들과 비월단원들로 구성된 이른바 ‘교월호위대’는 이미 곡을 비운 상태였다. 다수가 한꺼번에 움직이면 이목을 끌 테니 삼삼오오 미리 움직인 것이다.
 “호위 과정은 세인들의 이목을 최대한 끌지 않는 선에서 이뤄져야 할 걸세.”
 “명심하고 있습니다. 곡주님이 말씀해주신 계획대로 움직이게 될 겁니다.”
 단목수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에서도 최대한 협력하겠다는 연락이 왔네. 일단은 근처에 있는 무림맹 절강지부의 천망단에서 정예들을 차출하여 먼저 합류시키겠다고 하더군. 작전 통수권은 우리 쪽에 맡기겠다고 하니 구 대주가 그들과 긴밀하게 협조하여 일을 처리해 나가면 될 걸세.”
 “알겠습니다.”
 구홍립이 대꾸하자 한설연이 물었다.
 “신룡대는요?”
 
 <『신룡무』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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