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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 1화

2018.08.08 조회 2,004 추천 45


 1.
 
 
 프롤로그
 
 
 나, 헤르만 예거는 아직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용에게 선택받기 전까지는.
 너, 에리히 아벨은 세 자릿수에 달하는 사람을 죽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너는 헤르만 예거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죽였다.
 내가 용에게 선택받기 전까지는.
 
 
 ***
 
 
 1장. 장검의 밤
 
 회색 건물로 가득한 프로이센의 날씨는 우울했다. 마치 앞으로의 일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구름의 그림자는 검은 제복을 입고 도열해 있는 황실 친위대의 군인들을 무겁게 덮는다. 총기와 마법무기를 골고루 장착하고 있는 그들은 섬뜩한 위압감을 주었다.
 친위대는 황태자를 선두로 음울한 낯빛을 띠고 있었다.
 “이놈들부터 일단 총살시켜라.”
 황태자가, 그의 앞에 서서 경례를 올리고 있는 육군 장성의 계급장을 우악스레 뜯어내며 한 말이었다. 황태자 옆쪽에 있던 친위대원이 어리둥절한 그들을 연행해 갔다.
 숙청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잠시,
 ‘헤르만 예거’라는 육신 아래엔 두 가지 영혼이 있다. 손님 에리히 아벨, 주인 헤르만 예거.
 친위대원으로 활동하지 않을 때는 헤르만 예거가 이 몸을 차지하고 에리히는 잠들지만, 친위대원일 때는 에리히 아벨이 주도권을 잡는다. 헤르만은 그저 지켜보는 역이다.
 그러니, 이 황태자의 숙청을 지켜보는 사람은 ‘우리’였으며 실제로 집행하는 자는 에리히 아벨이었다.
 우리는 소집된 육군 장교들을 전부 체포했다. 몇몇은 끝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몇몇은 도망치려 했다.
 “반역자들을 놓쳐선 안 된다! 잡아라!”
 친위대원들은 반으로 나뉘어서 한쪽은 도망친 자들을 추격하고 나머지 반은 그들 외의 ‘반역자’의 집을 급습해 체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그 중 후자였다. 벌써 세 명을 체포한 뒤, 우리는 프로이센 시장의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에 나무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친위대는 원래 황실근위병에서 유래한, 육군과 해군을 포함해 도이체스의 3대 군사력이다. 그러나 앞의 둘과는 다르게, 친위대는 약간 다른 속성도 가지고 있다. 경찰. 물론 일반 경찰조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친위대 비밀경찰은 일반 경찰보다도 더 수사에 우선권을 갖는다. 수도 프로이센에서는 아예 모든 경찰을 친위대원으로 대체했다. 이러한 친위대는 온갖 흉흉한 소문의 진원지였고, 친위대의 부패와 비효율성, 비윤리성은 그 소속인 우리가 가장 잘 알았다. 소문은 대부분 사실이었고, 사실은 더 끔찍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사태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 우리가 체포한 사람 중에 진짜 반역자가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국가가 원한다면 그들은 반역자이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을 바란다면 친위대에서 버티지 못한다. 양심에 눈 돌린 돼지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친위대였다.
 그러나 앞에서 무고한 사람 세 명을 체포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우리는 이번에도 무고한 사람을 체포한다고 여긴 것 같았다. 우리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을 땐 텅 비어 있는 집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푸른색 암석을 보았을 때였다.
 그 암석은 시장저택 2층을 거뜬히 넘어설 정도로 컸다. 바위 주변에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외한의 눈에는 그저 악취미적인 예술품 정도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의 눈에는 다른 게 보였다.
 “리히··· 리베라··· 하흐투··· 미사, 미루, 미테! 전부 나가요! 저건 봉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외친 순간, 문양에서 은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리둥절해서 길을 막고 서 있는 친위대원을 확 밀치고 대문으로 뛰어갔다. 그대로 서 있는 사람이 반, 우릴 따라 뛰어나가는 사람이 반이었다.
 굉음.
 봉인을 감싸고 있던 암석이 폭탄 파편처럼 사방에 튀었다. 대기를 덮치는 충격파에 보도블록이 박살나고 나무가 온몸을 떨었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려서 우리는 잠시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시장 저택의 지붕이 박살나서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서진 건물 벽에는 헐벗은 철골이 드러났다.
 그 모든 파괴의 중심에는 흑룡 하나.
 용이었다. 빛이 반사되지 않는 흑단 같은 비늘이 온몸을 감싸고 있다. 집채만큼 커다란 몸통, 유연하게 움직이는 긴 목 위에는 그 어느 파충류보다도 무시무시한 머리가 있다. 악어처럼 쩍 벌린 입 안에는 상아처럼 흰 이빨들, 그리고 선분홍색 혀. 숯처럼 검은 용에게서 새하얀 이빨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수도 프로이센 한복판의 광경이라기엔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태산처럼 거대한 덩치를 올려다보았다. 긴 목이 서서히 움직이며 머리를 낮췄다. 우리는 용의 붉은빛 눈동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붉은 눈동자의 용. 그것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
 광폭화.
 용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고막을 울리는 포효를 내뿜었다.
 “도,도망쳐!”
 패닉에 빠진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친위대원들은 파편을 타넘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들고 있던 소총마저 내팽개치고 허겁지겁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 도망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처럼, 다리 힘이 풀린 사람이라든지.
 용의 이빨 사이로 새하얀 김이 새어나왔다. 푸르스름한 빛이 입 앞에 나타나더니 복잡한 문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문양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비테, 리, 슈마흐, 리비···?”
 용이 사용하는 마법은 거의 대부분이 원소계다. 그러나 저 용이 사용하는 건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푸른빛이 폭발하는 순간, 우리는 저것이 어떤 마법인지 알 수 있었다.
 용과 일직선상에 있는 건물 한 채가 통째로 파괴.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압살한 것처럼 우그러진다. 그것을 본 다른 인간들의 비명소리.
 곧이어 달아나던 친위대의 검은 제복이 공중에 떠올라 용에게 날아갔다. 공중에서 허우적거려 보지만 속수무책. 그렇게 날아간 인간들은 용이 후려치는 앞발에 맞아 망가진다.
 “으아, 으아악! 죽어, 죽어, 죽어!!”
 패닉에 빠진 한 친위대원이 소총을 들어 용을 겨누어 마구 쏴갈겼다. 용이 한 차례 더 포효. 용의 비늘을 간지럽힌 총알은 똑같은 속도로 반대 방향을 향했다. 총을 쏜 친위대원의 손목에 명중.
 누군가 외쳤다.
 “역린을 쏴! 역린을 쏘라고!”
 역린. 용의 비늘 중 유일하게 거꾸로 붙어 있는 비늘. 용의 치명적인 급소다. 광폭화된 용을 사살하려면 역린을 쏘아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가 용에게 총구를 겨눈단 말인가? 눈앞에 있는 것은 재앙 그 자체였다.
 정신을 차린 친위대원들이 소총을 들어 용을 쏘기 시작했다. 번번이 빗나갔다. 애초에, 이런 위치에서 맞출 수 있는 부위가 아니었다.
 간신히 서 있던 우리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이자 같은 친위대원인 폰조는 용의 붉은 시선이 그에게 닿자 비명을 질렀다.
 “주,죽기 싫어! 난 죽기 싫다고! 여자, 누가 여자를 데려와!”
 폰조는 그렇게 말하며 달려 나갔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시민 한 명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폰조는 우악스런 손길로 여자를 잡아끌고 왔다.
 “빠,빨리 저것을 막아! 막으라고!”
 고대부터 용에게 접근할 수 있는 존재는 여자밖에 없었다. 따라서 폰조의 대응은 상식선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보통이라면 가장 정석적인 대응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저 용은 눈동자가 붉다는 것이다. 광폭화된 용을 막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흑룡은 여자를 앞에 내세운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쿵쿵거리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두꺼운 근육에 감싸인 다리가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수직 하강했다.
 “안 돼!”
 나는 잠깐 이 육신의 주도권을 잡은 뒤 짧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여자의 허리를 감싸고 온 힘을 다해 옆으로 굴렀다. 쿵 소리가 나며 방금 전까지 우리와 그녀가 있던 자리가 용의 발밑에 깔렸다. 우리는 독수리의 발톱 같은 용의 거대한 발톱이 꿈틀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분노한 용의 시선이 우리에게 닿는다.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제국에서 가장 부패한 조직에 몸담은 대가를 드디어 치르는 것일까? 그동안 벌인 죗값을 지금 치르는 것일까?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릴 거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악한 짓들을 했나?
 이대로, 『나의 친애하는 적』을 말살하기도 전에 먼저 죽는 것일까?
 순간 나의 머리를 강타하는 ‘이상한 느낌.’ 심장이 전에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고동으로 움직인다. 그러는 동안 흑룡의 비늘 틈 사이로 은빛이 새어나왔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광폭화의 효과가 풀리고 있었다. 용의 눈은 용암이 꺼져가듯이 서서히 붉은빛을 잃어가다가 마침내는 까맣게 변했다.
 광폭화가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우리는 남자다. 용에게 접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품에 안겨 떨고 있는 여자는 날 구해줄 만큼의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용의 머리가 서서히 내려왔다. 아마 우리가 서 있었다면 다리를 미친 듯이 떨었을 것이다. 용은 그런 생물이었다. 마주하는 것조차 엄청난 용기를 품어야 하는.
 용의 까만 눈동자가 우리를 응시했다. 우리는 용의 비늘 하나하나를 볼 수 있었다. 용은 우리에게 점점 다가왔고, 마침내, 우리의 코앞까지 다가와,
 우리를 슬쩍 밀었다.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용 정도의 생명체였기 때문인지 우리는 확 밀려났다. 넘어진 우리에게 용이 다가와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우리는 이 동작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어리광이었다! 용이, 우리에게, 마치 강아지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우리는 용기를 내어, 벌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용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용은 가만히 있었다. 우리가 쓰다듬기 시작하자, 용은 그 손길을 느끼기라도 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주위의 경악한 시선만큼이나 놀라면서 우리는 계속 용을 쓰다듬었다. 비늘은 강철 갑옷처럼 단단했다. 어느새 손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때, 공중에서 포효가 들렸다. 흑룡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도 흑룡의 시선을 따라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용 네 마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용들의 몸통에는 띠가 둘러져 있었다. 안장을 매는 끈이었다.
 세 마리의 용은 공중에 머물렀고 한 마리의 용은 공터에 착지했다. 육중한 무게에 바닥이 쩍 갈라졌다.
 용 위에 타고 있던, 붉은 머리의 여자가 사뿐하게 뛰어내렸다. 육군 정복을 입고 있으며 계급은 중장. 까마득히 높은 사람이다.
 여자는 우리와, 경계하고는 있지만 얌전히 우리 손에 머리를 맡긴 용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세상에, 벌써 광폭화가 끝난 거야? 의식도 안 치른 야생 용과 감응해서?”
 흑룡이 눈을 깜박였다.
 붉은 머리의 여자는 우리 제복과 계급장을 보더니 묻는다.
 “관등성명은?”
 “상급돌격지도자(육군에 대입하면 중위에 해당) 헤르만 예거입니다!”
 “호오, 꽤 사내다운 이름인데?”
 붉은 머리의 여자가 ‘사내다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녀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우리와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났다. 얼굴만 보면 그 나이에 중장까지 올라간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댓글(3)

흙색불사조    
리메이크인가요? 무료일 때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인데,어쩐지 그동안 찾아도 없더라.
2018.08.16 14:28
유진협    
추천글 보고 소재에 끌려 왔습니다ㅎ
2018.08.18 09:18
인산(仁山)    
재밌을 거 같아 왔습니다. 잘 보겠습니다
2018.09.06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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