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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 건물주 1-1

2018.08.08 조회 6,279 추천 40


 마계 건물주 1권
 
 목차
 
 프롤로그
 1장 마계 건물주가 되다
 2장 초보 건물주의 다사다난한 하루
 3장 기념할 만한 첫 번째 세입자
 4장 1차 시제닐 요새 공방전
 5장 전쟁도 돈이 된다
 6장 갑질이 아닌 정당한 권리 수행
 
 
 
 프롤로그
 
 
 
 마계는 살벌한 곳입니다.
 언제 어디서 내 등을 노릴지 모르는 적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덮쳐 오는 몬스터들.
 거기에다 심심하면 벌어지는 전쟁에 나도 모르게 맺어지는 원한 관계까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내일 뜨는 달을 무사히 보고 싶으십니까?
 그런 당신에게 시제닐 요새를 소개합니다!
 명실상부 마계 최강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난공불락, 시제닐 요새!
 소정의 보증금과 월세를 지불하는 것만으로도 시제닐 요새가 당신의 집, 혹은 사업 공간까지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시제닐 요새에서 안전한 마계 라이프를 누리세요!
 
 
 
 1장 마계 건물주가 되다
 
 
 
 계약서
 
 본인은 마계 공작 로이니스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로이니스가 남긴 시제닐 요새의 주인이 되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성심성의껏 요새를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유성훈은 눈앞에 놓인 계약서를 새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꿈이라면 지금이라도 깨길 바랐지만, 살결을 수없이 꼬집어도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통증만 전해질 뿐이었다.
 ‘마계 공작 상속자’
 ‘요새의 주인’
 ‘맹세’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대한민국의 일개 청년으로 살던 성훈에게 이 따위 계약서를 들이미는 건 다짜고짜 UFO를 타고 은하 횡단 여행을 떠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오늘 하루 연명하기 위해 알바를 하러 가는 길에 웬 여자에게 붙잡혀 어디에 끌려왔는가 싶더니 바로 이 꼴이다.
 그런 성훈의 사정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성훈의 왼쪽에 있던 여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서명 부탁해요. 도련님.”
 역시나 그런 사정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성훈의 오른쪽에 있던 여자가 차갑게 말했다.
 “어서 서명하십시오.”
 “······.”
 성훈은 대답 혹은 서명 대신 좌우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좌우에 시립한 채 무언의 압박을 보내오고 있는 두 여자. 분명 왼쪽의 이름이 안나, 오른쪽은 레지나라고 했다.
 일단 외모만 따지면 두 여자 모두 뛰어났다.
 안나는 짙은 갈색 피부에 치렁치렁한 검보랏빛 생머리, 길고 뾰족한 귀가 돋보이는 미인이었다.
 안경을 낀 덕분인지 눈빛은 지적이면서도 순해 보였고, 가슴이 깊게 파인 붉은 원피스 아래에 슬렌더의 정석을 보여주는 멋진 몸매 라인이 뚜렷이 보였다.
 확실히 굉장한 미인이기는 했지만 역시나 길고 뾰족한 귀가 좀 거슬렸다. 인간과는 다른 ‘마족’이라는 종족의 상징이라던가.
 왼쪽의 레지나는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 귀밑까지 오는 짧은 붉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평범하게 생긴 귀가 보였다.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반팔 셔츠에 가죽 바지, 튼튼한 부츠는 전투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드러난 팔은 언뜻 가늘어 보여도 꽤 근육이 잡혀 있는 게 운동과는 거리가 먼 성훈의 눈에도 뚜렷이 보였다.
 유독 커다란 가슴과 길고 멋지게 뻗은 두 다리도 눈에 잘 띄었다. 안나처럼 귀 모양이 특별하지도 않았다. 이쪽은 인상이 좀 날카롭기는 해도 마족인지 뭔지 인간과 다른 존재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두 미녀를 좌우에 낀 채 계약서에 서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게 나쁜 상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훈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눈앞의 계약서는 단순히 알바 전 작성하는 근로계약서 따위가 아니었다.
 “저기··· 일단 한 번만 더 확인을 하고 싶은데요.”
 안나가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나는 원래 인간이 아니라 마족인지 뭔지 하는 종족이고, 내 아버지는 죽은 로이니스 공작이라는 사람. 아니, 마족이라고요?”
 “그래요.”
 “내가 어제까지 지구에서 살던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라 아버지가 날 피난시키려고 보낸 것이었고요? 그리고 이곳은 지구와는 쌩판 다른 마계라는 세계이고요?”
 “말씀대로에요.”
 “결국 아버지는 적이란 놈한테 죽었고, 유일한 혈족이 나라서 아버지의 유일한 유산인 이 건물, 그러니까 시제닐 요새를 상속해야 한다고요? 여기에 서명하면 그 절차가 끝이 난다는 거죠?”
 “제대로 이해하셨네요.”
 “만약에 내가 상속을 거부하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섬뜩한 쇳소리가 울렸다. 레지나가 등 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은 것이다.
 레지나는 성훈에게 검을 겨누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을 베고 새로운 상속자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
 생각 같아서는 귀에서 돌연변이 현상이 일어난 여자와 거대한 칼을 든 미친년이 자신을 해코지하려 든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고를 하려 해도 당장 스마트폰이나 하다못해 유선 전화기가 없다.
 그 전에 경찰도 없었다. 아니, 이곳은 대한민국은 고사하고 지구도 아닌, 세계 자체가 다르다고 하지 않는가.
 신고를 포기한 성훈은 자신이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천장도, 바닥도, 벽도 하나같이 우람한 돌을 쌓아 만들어 척 보기에도 튼튼해 보였다.
 천장 곳곳에 박힌 진홍빛 샹들리에. 벽에 줄지어 빛나는 촛불 램프. 바닥에 일정 간격으로 새겨져 있는 음란한 여자 누드 조각까지 뭐 하나 평범한 게 없었다.
 열린 창문 밖으로 바깥 풍경도 보였다. 캄캄한 밤하늘에 달이 무려 네 개나 뜬 것이 보였다.
 거기에다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괴이한 모양의 식물이나 가끔 날아다니는 ‘몬스터’ 역시 지금껏 세상에서 본적이 없던 것이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리얼한 감각으로 보건대 꿈은 절대로 아니다. VR로 보는 가상현실 따위도 아니다. 분명 현실이었다.
 지구상의 어떤 장소도 이런 풍경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곳이 마계라는 이름의 다른 세계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계.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 보이는 세계다. 사실 이곳에 온 과정부터가 무서웠다.
 ‘누구세요? 헉!’
 ‘저를 따라오십시오.’
 ‘아니, 대체 사람에게 칼을 들이대고 뭐 하는······.’
 ‘따라오시지 않으면 당신을 베겠습니다.’
 살고 있던 원룸에 웬 여자가 찾아와 문을 열었다. 찾아온 것은 레지나였고, 그녀는 조금 전처럼 검을 뽑아 성훈을 협박했다.
 진지하게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에 성훈은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따라온 결과 이 마계라는 곳에 와 계약서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서 서명하십시오.”
 레지나가 다시 한번 서명을 재촉했다. 안나 역시 반대편에서 무언의 압박으로 서명을 재촉해 왔다.
 
 [본인은 마계 공작 로이니스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로이니스가 남긴 시제닐 요새의 주인이 되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성심성의껏 요새를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다시 봐도 비범하기 그지없는 계약서다.
 이제야 깨달은 것인데 계약서에 적힌 글자는 한글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글인데도 그 내용이 원어민 수준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순식간에 외국어 하나를 마스터했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봐도 비범한 수준을 넘어 너무나도 수상한 계약서에 강제로 서명을 하게 된 판이다.
 이런 계약서에 서명했다가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아직 20대 초반 애송이에 불과한 성훈이었지만 사회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때문에 계약서라는 것에 함부로 서명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훗날의 뒷감당보다는 눈앞의 미친 여자의 칼이 더 두렵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성훈은 이 계약서에 별다른 법적 구속력 따위는 없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볼펜이라도······.”
 “일반 펜으로 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그럼요?”
 “이걸 쓰세요.”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안나가 펜을 내밀었다. 나무 같은 재질로 깎아 만든 몸에 금속 펜촉이 달린, 일종의 만년필 비슷한 물건처럼 보였다.
 상당히 고풍스러운 물건이라 생각하며 성훈은 펜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글씨를 쓰는 자세를 취한 순간, 손끝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으악! 이건 뭐야?”
 하마터면 펜을 놓칠 뻔 했지만 긴장한 덕분에 손에서 힘이 빠지지는 않았다. 아픈 곳을 자세히 살피니 펜을 쥔 엄지손가락 부분에 가시가 튀어나온 게 보였다.
 엄지에서 흘러내린 피는 펜대를 흘러내려가 정확히 펜촉으로 흐르고 있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피가 일종의 잉크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뭐야? 이거··· 혹시 피?”
 “피의 서명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피의 서명은 절대로 어길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어길 경우, 당신의 육체와 영혼 모두 지옥의 업화에 타 사라져 버릴 겁니다.”
 “······.”
 레지나의 친절한 설명에 성훈은 서명할 생각이 싹 가셨다.
 계약을 어기면 법적으로 손해를 본다는 수준을 넘어 화형을 당한다는 사실을 믿는 건 둘째 문제다.
 무엇보다 계약서에 피로 서명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미친 짓이다. 요즘 세상에 대한민국의 어느 누가 피로 서명하는 일 따위를 시킨다는 말인가.
 다시 성훈이 주저하자 레지나가 다시금 검에 손을 가져갔다. 거부하면 칼을 맞을 분위기다.
 ‘이런 씨발······.’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성훈은 별 수 없이 서명을 했다.
 윤성훈.
 성훈이 피로 자기의 이름을 서명한 순간, 갑자기 계약서가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성훈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 몸뿐만이 아니라 몸속의 영혼까지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으윽.”
 짧은 단발마와 함께 성훈은 탁자 위에 엎어지며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런 성훈을 내려다보던 레지나가 말했다.
 “한심하군. 자신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가지는 것도 이렇게 망설이다니.”
 안나가 쓰러진 성훈을 대신해 변호해 주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지금까지 인간으로 살아오셨으니.”
 “이렇게 못 미더운 남자를 요새의 상속자로 삼아도 괜찮은 건가?”
 “일단은 법도를 지켜야지. 주인님은 돌아가셨고,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 저분이니.”
 “그렇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
 
 따뜻한 고깃덩이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가득 감싸고 있는 느낌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불쾌함에 성훈은 반강제로 의식을 되찾았다.
 “으음······.”
 의식을 되찾으면서 주변의 불쾌한 느낌이 또렷이 전달되었다. 눈을 떠 보았지만 무언가 온몸을 감싸고 있는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씨발!”
 성훈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며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던 고깃덩이 같은 것들은 쉽사리 놔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성훈은 몸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기운이 솟아오르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 결과,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성훈을 감싸고 있던 고깃덩이들이 쪼개졌다. 동시에 성훈의 몸은 아래로 낙하했다.
 “푸아앗! 이건 또 뭐야!”
 다행히 낮은 곳에서 낙하한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불쾌한 느낌은 사라지고 상쾌한 바깥 공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성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고치였다. 지름만 해도 5미터는 넘어 보이는 데다 기분 나쁜 검붉은 빛을 하고 있어 실로 그로테스크했다.
 그로테스크함을 더해 주는 것은 고치 한가운데가 갈라져 있는 것이었다. 그 사이로 피인지 체액인지 모를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 정체불명의 고기 조각 따위도 흩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런 고치를 본 성훈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팬티 한 장만 걸친 나신의 몸뚱이. 곳곳에 붉은 액체와 고기 조각 같은 것이 묻어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저 정체불명의 고치 안에 있던 게 바로 자신이었던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황망해하던 성훈의 머릿속에 의식을 잃기 전 일들이 기억났다.
 분명 마계인지 뭔지 하는 세계에 와서 강제로 수상한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그 다음에······.
 ‘응?’
 생각하던 성훈은 무언가를 느꼈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었다.
 귀로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촉각으로 느낀 게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 다가오는 느낌 자체는 확연히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 새로운 감각이 생겨난 느낌이었다.
 “깨어나셨습니까. 주인님.”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곧 누군가 나타났다. 그 ‘누군가’ 의 모습에 성훈은 기겁했다.
 “이건 또 뭐야?”
 인격체에게 ‘이거’라 지칭하는 것은 무례한 태도다. 하지만 나타난 것이 살도 근육도 없이 뼈다귀만 남은 채 움직이는 해골이었기에 성훈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성훈을 보는 해골의 두 눈구멍이가 번쩍였다. 말 그대로 눈구멍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는 것이 실로 기괴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주인님.”
 해골은 성훈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나마 대한민국에서 사회생활을 해 본 적 있는 성훈이라 그럭저럭 상황 파악은 빨리 할 수 있었다.
 저 해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인격체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정중한 태도를 취해준다. 고로 적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데 상대가 예의를 차린다고 이쪽에서 무례하게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아, 네. 반갑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해골에게 고개를 숙였다. 새삼 성훈은 자기가 미친 게 아닌가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행동하는 게 정답일 것 같았다.
 “······.”
 그런 성훈의 태도에 해골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번쩍였다.
 얼굴 근육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채 뼈다귀만 남아 있는 면상이라 대체 이 해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부터가 의문이었다.
 보통 해골만 남아 있는 건 생명체도 아니고 그냥 시체가 아닌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착 깔린 목소리로 해골이 대답했다.
 그제야 깨달은 것인데 해골의 말은 성대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주변 공기가 울려서 저절로 말을 하는 듯 이상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해골이 시킨 대로 성훈은 얌전히 기다렸다.
 얼마 후, 해골은 여자 두 명을 데리고 왔다. 안나와 레지나였다.
 “깨어나셨어요? 도련님, 아니, 이제부터 주인님이라 불러야겠지요. 주인님.”
 상냥한 표정의 안나가 인사했다.
 그렇잖아도 노출도가 높은 복장을 한 데다 빼어난 미모, 상냥한 표정까지 더해지니 굉장한 색기가 흘러나왔다. 성훈은 잠시 자기 처지도 잊고 그런 안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런 성훈을 진정시킨 건 말없이 그를 지켜보는 레지나였다.
 레지나 역시 가벼운 복장에 미모나 몸매는 떨어질 게 없었고, 가슴 크기는 오히려 안나보다 위였다. 하지만 등에 큰 칼을 찬 여자가 무섭게 바라보고 있으니 색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
 성훈은 안나와 레지나를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이런 경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성 교제 경험이라도 있었다면 확실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풋풋한 학창 시절의 이성 교제든, 아니면 사회인의 어른스러운 이성 교제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성훈은 어느 쪽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학창 시절은 왕따가 아닌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편의점 알바니 공장 버튼맨이니 하는 것으로 입에 풀칠하며 살았다. 그러니 이성 교제 경험이라곤 전무했다.
 거의 없다시피 한 지식을 짜내 본 결과, 그래도 하나의 답을 찾을 수는 있었다.
 안나든 레지나든 아직은 낯설다. 그렇다면 역시 큰 칼을 찬 무서운 여자보다는 상냥한 여자 쪽에 먼저 말을 거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지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안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상냥함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주인님을 ‘각성’ 시켰어요.”
 “각성?”
 “그래요. 주인님은 인간들만이 존재하는 이계에 살기 위해 마족으로서의 본성을 모두 봉인시킨 채였지요. 그렇기에 마족으로서의 힘도 거의 다 봉인된 채의 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고요. 하지만 이제부터 주인님은 이 요새의 주인으로서 마계에서 살아가실 몸. 주인님의 봉인을 풀고, 마족으로 각성시켰어요.”
 여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은 이야기였다. 그나마 전혀 낯선 이야기는 아니라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네.”
 “그러니까 전에는 그래도 인간 비슷한 거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란 거고요?”
 “말씀대로에요.”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예요?”
 안나는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성훈의 전방 공간이 빛나는가 싶더니 이내 허공에서 주변 풍경이 반사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거울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뭐지··· 이건 무슨 마술인가.’
 이미 놀랄 일은 질리도록 겪었다. 이 정도 마술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나타난 거울에는 낯이 익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근육질 수준은 아니지만 제법 탄탄한 몸뚱이에 길게 늘어진 보랏빛 머리카락. 얼굴은 평범한 편이나 유독 돋보이는 진홍색 눈동자.
 성훈이 눈을 깜빡이자 거울에 비친 남자도 눈을 깜빡였다. 손을 들자 역시나 남자도 손을 들었다.
 “이게··· 나야?”
 분명 비치는 건 성훈인데, 기억과는 많이 달랐다.
 과거 성훈은 일단 몸매부터가 소위 ‘멸치’ 소리를 들을 만큼 마른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비치는 몸은 보디빌더 수준까지는 아니라도 꽤 근육이 잡힌 탄탄한 몸이었다.
 거기에다 생전 염색이란 것을 해 본 적 없어 언제나 검정색이었던 머리는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그냥 검은 색이던 눈동자도 진홍색으로 번득이는 게 마치 핏빛을 연상시켰다.
 성훈이 자신의 외모를 확인하자 안나가 다시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허공의 거울은 역시나 마술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아시겠지요?”
 “······.”
 확실히 외모가 변했다. 그것도 성형수술이나 분장 같은 상식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변화다.
 지금까지 겪은 일들도 충분히 비상식적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변화는 그 이상으로 비상식적이었다. 이런 비상식의 연속은 성훈으로 하여금 지금 상황이 꿈이 현실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복잡한 성훈의 속내를 읽은 듯 레지나가 말했다.
 “현실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
 “당신의 그 보랏빛 머리와 핏빛 눈동자는 마족의 상징입니다. 오직 순수한 마족만이 그 보랏빛 머리와 핏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귀?”
 거울을 볼 때는 미처 자세히 보지 못했다. 성훈은 자신의 귀를 만져 보았다. 그러자 ‘평범한’ 귀보다 좀 더 길고, 위쪽 끝이 뾰족해진 형상이 만져졌다.
 “이건······.”
 “마스터에게 걸려 있던 봉인은 마족으로서의 힘은 물론, 외모까지 인간처럼 보이게 하는 봉인이었습니다. 그것이 풀렸으니 귀 또한 변한 것입니다.”
 “······.”
 “아직도 못 믿겠다면 느껴 보십시오. 당신의 힘을.”
 “힘?”
 “마족은 인간보다 마나를 훨씬 잘 다루는 종족입니다. 이미 한 번 자신의 마나를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만.”
 마나.
 성훈으로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짐작 가는 곳이 있었다.
 저 기분 나쁜 고치에 갇혔을 때, 분명 무언가 몸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끓어올랐었다. 그리고 고치를 갈랐을 때 그 힘의 도움을 받은 것도 같았다.
 그 힘이 바로 마나가 아닐까.
 확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 여긴 성훈이 물었다.
 “조검 전에 무언가 힘 같은 게 끌어 오른 거 같기는 한데··· 그거 말하는 건가요?”
 “맞아요. 주인님.”
 안나의 칭찬에 이어 레지나가 다가와 성훈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일단 마나를 끌어 올리겠습니다.”
 성훈은 몸속에서 무언가가 끌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 느꼈던 힘과 같았다.
 전통 무술이나 한의학 같은 데서 말하는 ‘기’라는 게 딱 이런 느낌일까. 기인지 마나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실존하는 건 분명하는 힘이 손을 통해 바깥으로 튀어나가려 아우성을 쳤다.
 “마나를 분출해 보십시오.”
 다시 레지나가 말했다. 확실히 이 기운을 ‘분출’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성훈도 가능할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분출이 되려는 손을 레지나가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분출했다가는 레지나가 조금 전 갈라진 고치 꼴이 되는 건 아닐까.
 “그쪽이 다칠 지도 모르는데.”
 “걱정 말고 마나를 분출시키십시오.”
 될 대로 되라. 그런 심정으로 성훈은 다시 한번 마나를 분출시켰다.
 레지나가 붙잡고 있던 손을 통해 짙은 보랏빛 기운이 폭풍처럼 튀어나왔다. 코앞에서 그 기운을 정면으로 받은 레지나의 몸이 몇 미터나 튕겨 나갔다.
 보통 인간이라면 최소 중상. 심지어 사망까지 걱정이 될 충격이다. 그렇지만 레지나는 뒤로 날아가다 기막힌 낙법으로 몸을 바로잡았다. 아마도 상처 하나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성훈은 두 가지에서 크게 놀랐다. 자신이 마나인지 뭔지 하는 힘을 실제로 썼다는 것. 그리고 레지나가 보여준 강건함과 체술이었다.
 몸을 수습한 레지나가 다시 다가와 말했다.
 “이제 당신이 마족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
 확실히 몇 가지 물증이 생긴 이상 더 믿지 못하겠다고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훈은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는 것 같았으니까.
 “아, 네.”
 그러자 다시 안나가 나섰다.
 “다행이에요. 계약서도 쓰셨고, 또 각성도 하셨으니 이제 주인님은 명실상부한 저희들의 주인님. 그리고 이 요새의 주인님이세요.”
 “그, 그런가요.”
 “그럼 가실까요? 주인님의 요새를 보여드릴게요.”
 안나와 레지나가 함께 요새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
 
 이 시제닐 요새라는 곳이 상당히 거대한 건물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성훈이 생각하는 보통 건물보다 두 배는 높은 천장에 언뜻 봐도 넓어 보이는 내부 공간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제대로 안내를 받으며 다녀 보니, 시제닐 요새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곳이었다. 건물 안에서 한참이나 걸은 뒤에야 밖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보였다.
 사실 출입문이라기보다는 성문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사람 열 명이 일렬횡대로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했으니까.
 단단한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출입문은 곳곳에 해골과 가시덩굴이 장식되어 있어 꽤나 불경한 디자인이었다. 일반적인 미닫이문이 통짜로 된 문이 아래위로 오르내리며 여닫히도록 되어 있었다. 지금은 문 전체가 내려와 있어 누구라도 출입할 수 없을 듯 했다.
 “문을 열어야지요.”
 성훈의 말에 안나가 말했다.
 “이제 이 요새는 주인님의 것. 문을 열고 닫는 것도 주인님이 하셔야 해요.”
 “···나더러 저 무식한 문을 열라고요?”
 확실히 마족으로 각성인지 뭔지를 하면서 몸도 예전보다 건강해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무식하리만치 거대한 요새 문을 힘으로 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주인님의 마법으로 문을 열 수 있습니다.”
 레지나가 설명했다. 마법이라면 확실히 그 마나인지 뭔지로 쓰는 힘을 말하는 것일 테다.
 “어떻게요?”
 “문이 열리기를 바라면서 힘을 분출시켜 보십시오.”
 마나를 분출시키는 것 자체는 이미 해 본 일이다. 성훈은 시킨 대로 요새 문이 열리기를 바라면서 힘을 분출시켜 보았다.
 곧 검푸른 기운이 문 쪽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자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문에 연결된 기계장치가 움직이며 거대한 요새 문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
 정말 자신의 힘으로 저 거대한 요새 문이 열렸다. 성훈은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제야 자신이 요새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무식하게 큰 건물이 내 거가 된 거란 말이지? 나··· 괜찮을까?’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요새.
 마계라는 낯선 세계.
 이 세계에서 정말 자기가 요새 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나쁘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건물 하나가 자기 소유로 굴러들어 온 셈이니까.
 어제까지 가난한 알바생으로서 코딱지만 한 원룸에서 살던 신세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생 역전이라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거대한 건물이 자기 것이 되었다면, 그 대가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성훈은 불안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요새 구경은 계속되었다.
 거대한 요새 건물과 요새 문이 끝이 아니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거대한 요새 건물이 우뚝 선 가운데 주변에 높은 성벽이 둘러친 게 보였다.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높이에 육중한 두께는 성벽 또한 매우 튼튼하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주인님. 일단 공중에서 요새를 감상하세요.”
 말과 함께 안나가 무어라 짧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퉁겼다. 대체 공중에서 감상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를 물을 틈도 없이 성훈, 그리고 안나와 레지나까지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성훈이 어어 하는 사이에 세 명의 몸은 안전장치 하나 없는 채로 높이 치솟았다. 언뜻 눈대중으로 봐도 상공 수백 미터는 되는 듯 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공중부양이라는 것인가.
 자칭 교주나 자칭 정치인이 공중부양을 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있다. 물론 성훈은 그런 류의 이야기는 죄다 뻥이라고만 여겼다.
 그 뻥이 눈앞에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 이거 괜찮은 거예요?”
 레지나가 대답했다.
 “안나가 공중 부양을 실패할 만큼 마법에 서투르지는 않습니다.”
 “그, 그렇군요.”
 이미 수백 미터 공중에 떠오른 상태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이제 놀라운 일들에 많이 익숙해 진 성훈은 생각보다 빨리 안정을 찾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제닐 요새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22세 청년으로서 군사적인 지식은 거의 없는 성훈이 보기에도 실로 난공불락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요새는 깎아지른 절벽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높이만 해도 수백 미터에 달하는 절벽에 오직 요새 남쪽에 산길이 나있을 뿐이었다.
 그 외의 방향은 말 그대로 수직 절벽이라 지금처럼 하늘을 날지 않는 한 출입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남쪽의 산길 또한 상당히 험준한데다 급경사 길이었다.
 또 요새가 험준한 지형만 믿는 것도 아니었다. 10미터도 넘어 보이는 성벽으로 요새 전체가 감싸여져 있었고, 성벽 곳곳에 망루 등 방어 시스템이 갖춰진 것도 보였다. 그 안에 또 튼튼한 요새 건물까지 2중 구조를 갖추었다.
 먼 거리에서 미사일이나 포를 쏘거나 공중 폭격이라도 하지 않는 한 이곳을 점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말 그대로 난공불락 그 자체였다.
 “정말 대단하군요.”
 순수하게 성훈이 감탄했다.
 “돌아가신 공작님은 이 요새를 튼튼히 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셨어요. 덕분에 시제닐 요새는 마계 최고의 난공불락 중 한 곳으로 꼽히고 있지요.”
 “공작, 아니, 내 아버지는 이런 요새가 멀쩡히 있는데도 죽었다고요?”
 “네. 요새 안이 아닌 외지에서 변을 당하셨거든요.”
 ‘역시 집 밖은 위험한 것인가······.’
 이불 밖은 위험해.
 집 밖은 위험해.
 백수들의 주 레퍼토리가 머릿속에서 흘러나왔다. 마계에 오기 전 몇 달 간 알바도 거의 끊겨 반 백수 생활을 했던 성훈에게도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그런 성훈의 눈에 성벽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성벽 여기저기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요새를 지키는 병사 같은 것인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뜨니 먼 거리지만 하얀 뼈다귀 같은 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움직이는 뼈다귀. 확실히 비슷한 것을 조금 전 본 적이 있다.
 “저기 움직이는 것 말인데······.”
 “스켈레톤 병사입니다. 현재 이 요새의 주력군입니다.”
 “저 살아 있는 뼈다귀들 이름이 스켈레톤이군요.”
 자세히 보니 성벽 곳곳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죄다 스켈레톤이라는 이름의 살아있는 뼈다귀들이었다. 인간만 한 사이즈부터 시작해서 보통 인간의 배는 되어보이는 거인 뼈다귀까지 다양하게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얼마간 요새 감상을 마친 세 명은 곧 지상으로 내려왔다. 비행할 때처럼 안나의 손가락 튕기기 한 번에 세 명의 몸은 마치 깃털처럼 천천히 바닥에 안착했다.
 세 명이 내린 곳은 요새 성벽의 성문이었다. 성문은 조금 전 성훈이 연 요새 문보다도 두 배는 거대한 금속 덩어리였다.
 “이 문도 내가 열 수 있어요?”
 “물론이지요. 주인님.”
 “······.”
 성훈은 누가 시키기도 전에 스스로 닫힌 성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 전 그랬듯 몸속의 마나라는 것을 분출시키자 손에서 검푸른 기운이 뻗어나가 성문을 지나쳤다.
 곧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성문을 향해 걸어가자 스켈레톤 병사 몇 마리가 세 명에게 다가왔다.
 “······.”
 스켈레톤 병사들은 뼈다귀 맨몸에 창이나 칼 등을 든 채였다.
 금방이라도 세 명에게 달려들 기세였지만 그것도 잠시, 뻥 뚫린 눈구멍으로나마 세 명을 알아본 듯 무기를 거두었다. 심지어 꼿꼿이 선 채 무기를 바닥에 박으며 예를 갖추는 자세까지 취했다.
 “당신이 새로운 주인임을 알아 본 겁니다.”
 요새뿐만이 아니라 저 뼈다귀들 역시 이제는 성훈의 것이 된 것이다.
 이제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할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이 요새는 성훈의 것이 되었고, 책임 또한 성훈의 몫인 것이다.
 다시 요새 건물로 돌아온 세 명은 요새 중심으로 향했다. 요새 중심에는 이 요새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이 두 개 위치해 있었다.
 “이곳이 알현실이에요.”
 넓게 펼쳐진 공간 끝에 몇 개의 계단이 놓여 있고 그 위에 화려한 의자 하나가 자리 잡은 게 보였다. 어지간한 1인용 소파보다 훨씬 큰 크기에 거대한 팔걸이까지 달린 의자는 그저 의자나 소파가 아니라 옥좌라고 부르는 게 어울렸다.
 저 도에 지나칠 만큼 으리으리한 의자도 이 요새의 주인인 성훈의 자리일 것이다.
 아무래도 이 알현실이라는 곳은 사극이나 미드에서 자주 보던 ‘높은 곳에 앉아 아래에 서 있는 인간들을 좌지우지 하는 곳’ 인 모양이었다.
 “이제 갈 곳은 마나 하트입니다.”
 알현실과는 달리 이름만으로는 어떤 곳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마나 하트는 알현실의 의자 뒤에서 좁은 통로를 통해 나선형 계단을 타고 한참이나 아래로 내려간 뒤에야 나왔다.
 널따란 알현실과는 달리 마나 하트는 꽤나 좁았다. 단칸방 수준의 공간에 검붉게 타오르는 불덩어리 같은 것이 떠 있는 것이었다.
 “이게 뭐에요?”
 “요새의 중심인 마나 하트입니다. 주인님의 마나가 아닌 요새 자체가 사용하는 마나는 모두 마나 하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상 요새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이라 할 수 있어요. 조금 전 주인님께서 본 것처럼 요새 문이나 성문을 여닫는 것, 요새의 방어 장치와 마법 장치, 기계장치. 그리고 요새의 주 병력인 언데드들까지 모두 마나 하트를 통해 움직이니까요.”
 성훈은 간단히 이해했다.
 ‘그러니까 발전기 같은 건데 이 발전기가 나가면 요새가 완전히 정전된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이어 성훈은 요새 곳곳을 둘러보았다. 킹사이즈 침대 네 개를 가로세로로 이어 붙인 듯 엄청난 크기의 침대가 돋보이는 침실. 약간의 금은보화가 쌓여 있는 요새 창고와 금고 등을 구경했다.
 이어 세 명은 요새 지하로 향했다. 요새 지하에는 감옥, 고문실 등의 섬뜩한 공간들이 가득했다.
 마법 실험실이라는 곳도 있었는데 바로 성훈이 처음 본 ‘눈구멍 번쩍이는 해골’이 있는 곳이자 성훈이 각성인지 뭔지 해서 깨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요새 전속 마법사, 벨로크입니다.”
 “바, 반가워요.”
 벨로크라는 이름의 해골은 아무래도 스켈레톤이라는 뼈다귀들과 같은 존재가 아닌 듯 했다.
 스켈레톤이 일종의 꼭두각시처럼 보였다면, 눈앞의 벨로크는 분명 스스로 의지를 가진 존재로 느껴졌다.
 “저기, 실례가 아니라면 당신이 어떤··· 그러니까 뭐 하는 해골. 아니, 아무튼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저는 리치입니다.”
 “리치?”
 생소한 단어에 성훈이 되묻자 갑자기 벨로크가 해골을 딱딱거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성훈은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행동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안나가 나섰다.
 “벨로크. 주인님께 무례하면 안 돼요.”
 “······.”
 해골을 딱딱거리던 벨로크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마 무례를 사죄한다는 제스처 같았다.
 그 광경에 성훈은 안나의 위치가 벨로크보다 높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안나는 성훈에게 존댓말을 쓰며 주인님이라고 깍듯이 대했다. 결국 성훈이 가장 높은 것이다.
 문득 성훈은 의문이 들었다.
 일단 안나든 레지나든 자신을 그럭저럭 윗사람 취급해 주고 있다. 한국에서 자신을 데려올 때 검을 들이댔던 레지나마저 성훈이 각성한 이후로는 한 번도 검에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둘이 정말 자기를 주인님인지 뭔지로 여기는 것일까. 겉으로만 자기를 높여줄 뿐, 뭔가 허수어비 비슷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닐까.
 ‘사극에서 비슷한 거 봤어. 부하들이 앞에서는 예의를 차리면서 뒤로는 호박씨 까고 음모를 꾸미는······.’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가 사극과 자기 인생을 동일시하는 건 망상이다. 하지만 지금 성훈의 인생은 이미 평범과는 억 만 광년 수준으로 멀어져 버렸다.
 마계에 온 뒤 처음으로 성훈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정신만은 확실히 차리기로.
 때마침 안나가 말했다.
 “오늘은 이만 보시겠어요? 아직 요새에 대해 아셔야 할 게 많지만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보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확실히 생각을 정리할 필요를 느낀 성훈은 찬성했다.
 “그렇게 해요.”
 
 ***
 
 성훈과 안나, 레지나는 알현실로 향했다. 성훈이 상석에 앉고 아랫자리에 안나와 레지나도 앉았다.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기 무섭게 안나가 말했다.
 “그럼 주인님. 일단 이 요새에서 하셔야 할 기본적인 일들을 말씀드릴게요.”
 “그래요.”
 “일단 말투부터 고치셔야 할 것 같아요.”
 “내 말투요?”
 “네. 아무에게나 존댓말을 쓰는 것은 이 요새의 주인이자 공작님의 후계자로서 좋지 못한 일이니까요. 부하에게는 언제나 하대하세요.”
 간단히 말해 반말을 쓰라는 것이다.
 본래 예의를 갖추는 것보다 무례한 것이 쉬운 법이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다.
 무엇보다 날카로운 눈매에 등에 큰 칼을 차고 있는 안나를 보고 있으면 어지간한 분노조절장애 환자라도 절로 존댓말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물며 성훈은 분노조절장애 따윈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알바생으로서 언제나 ‘을’의 입장이었기에 남에게 예의를 차리고 존댓말을 하는 게 익숙했다.
 그렇지만 성훈은 이 또한 일종의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사극에서도 소위 말하는 ‘주군’은 부하에게 하대를 하는 것 같았다.
 지금 상황이 그렇다면 따르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알았어. 안나.”
 “네. 주인님.”
 “그리고 레지나.”
 “네. 마스터.”
 다행히도 상냥한 안나뿐만이 아니라 레지나도 하대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마스터’라는 호칭이 ‘주인님’에 비해 덜 정중해 보였지만 그것까지 지적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앞으로 계속 반말을 쓰면 되는 거야?”
 “네. 주인님. 조금이나마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부하에게는 항상 하대하도록 하세요.”
 “알았어요··· 아니, 알았어.”
 그러는 사이 식사가 나왔다. 열 개가 넘는 접시에 각기 다른 요리들이 차려져 보기만 해도 푸짐했다.
 문제가 있다면 요리를 가져오는 게 죄다 해골들이라는 것. 그리고 요리 상태가 성훈의 눈에는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이 육류 요리라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저쪽 세계에서도 성훈은 돈이 없어 고기를 자주 못 먹었을 뿐. 고기 자체는 좋아했으니까.
 문제는 육류 요리들이 죄다 흔한 소, 돼지, 닭 따위가 아닌 머리가 둘 이상 달렸거나, 팔이 다섯 개거나, 얼굴이 녹아내린 듯 흉측하거나 하는 식이었다.
 본래 그렇게 생긴 생물이라 해도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면 모르고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리가 죄다 ‘재료의 본래 형체가 잘 보이는 방식’인 탓에 원재료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너무나도 잘 볼 수 있었다.
 “······.”
 아무리 배고픈 가운데 고기가 눈앞에 있다지만 도저히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성훈은 별 수 없이 자기 접시에 샐러드만 덜었다.
 “주인님. 입맛이 없으세요?”
 안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반면에 레지나는 뭘 좀 아는 눈치였다.
 “마스터께서도 익숙해지는 게 좋을 겁니다. 마계의 요리는 대부분 그렇게 생겼으니까.”
 확실히 그렇다면 익숙해 질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닌 듯 했다.
 결국 성훈은 팔자에도 없는 채식주의 식단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반대로 안나와 레지나는 소름 돋는 비주얼의 고기 요리도 잘 먹었다. 둘 다 익숙한 게 분명했다.
 ‘참 익숙해 져야 할 게 많겠구나······.’
 아무튼 혐오 요리 외에는 별 문제 없이 식사가 끝났다. 그리고 레지나가 입을 열었다.
 “마스터.”
 “으응?
 “이 요새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무슨 생각이냐니?”
 “시제닐 요새의 주인으로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 드셨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진장 튼튼하고 잘 만들어진 곳 같았어.”
 “말씀 대로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제닐 요새가 난공불락이라고 해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스터께서 이 요새의 주인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확실히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이 정도 건물의 주인이 되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는가.
 비록 원해서 받은 건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건물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것 정도는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건물의 주인으로서··· 건물 주인··· 건물주······.’
 생각하던 성훈은 문득 자신에게 꿈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수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을 꿈.
 바로 건물주였다.
 목 좋은 곳에 빌딩 하나 세워놓고, 건물주로서 평생 편하고 안정적으로 사는 꿈.
 흙수저 출신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 성훈으로서는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이룰 수 없는 꿈이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사라지지 않은 채 성훈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었다.
 예상치 못한 형태이기는 했지만, 바로 지금 그 꿈을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비록 ‘편하고 안정적’ 인 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말이다.
 “시제닐 요새는 비록 마계의 변방에 위치해 있지만 마계에서도 손꼽히는 난공불락입니다. 이 요새를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마스터의 지위를 높이거나, 아예 마왕 자리를 노릴 수도 있을 겁니다.”
 자기 생각에 빠진 성훈의 귀에 레지나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마계에서 건물주······.”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건물주.”
 “건물주··· 라고요?”
 “그래. 나 그냥 건물주 하고 싶은데.”
 안나든 레지나든 성훈이 말하는 건물주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주인님?”
 “말 그대로야. 건물주 몰라? 건물 주인.”
 “확실히 주인님께서는 이 요새의 주인이기는 하세요. 건물 주인이시지요.”
 “그런 거 말고. 이 건물 무진장 크잖아. 보니까 빈방도 많은 것 같더만. 그러니까 그런 데를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매달 월세를 받고 살고 싶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안나와 레지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이 마계라는 세계에는 지구에서 말하는 ‘건물주’라는 개념 자체가 희귀하거나 아예 없는 모양이었다.
 성훈은 자기가 아는 모든 상식과 경제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건물주’의 개념에 대해 설명했고, 한참 뒤에야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요새를 바탕으로 마계에서 세력을 키우시는 게 아니라 그 보증금과 월세라는 것을 받으며 지내고 싶다는 말씀이세요?
 “바로 그 말이야.”
 마계 건물주.
 성훈이 품은 웅대한 뜻을 알게 된 안나와 레지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여자의 복잡 미묘한 표정을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성훈의 뜻에 찬성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둘 다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 라는 표정도 아닌 것 같다는 데 위안을 두어야 할까.
 “진심이십니까? 마스터?”
 “그런데. 뭐가 이상해?”
 “이상하다기보다는··· 대체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레지나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듯 했다. 반면에 안나는 비교적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주인님이 바라시는 건가요?”
 “맞아.”
 “세력을 키우거나 마계를 정복해 마왕이 되시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은 위험해 보이는 걸··· 이런 건물을 받았다고 꼭 그렇게 살라는 법 있어? 좀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살면 안 되는 거야?”
 “확실히 그런 법은 없어요. 서명하신 계약서 역시 요새를 상속하고 지킬 것만 명시하고 있으니까요. 마계 정복을 노리시든, 말씀대로 건물주를 하시던 주인님 마음대로이지요.”
 “그렇지? 역시.”
 “하지만 정말로 독특한 소견을 가지고 계시네요.”
 “독특해? 나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건물이나 땅이 있으면 건물주부터 생각하는 법이었거든.”
 “그러셨군요.”
 “아무튼 건물주가 되어서 내가 말한 대로 살면서 이 건물을 지키고 산다. 이런 게 안 되는 건 아니지?”
 “네. 요새를 저버리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쓰는 지는 주인님의 뜻에 달린 것이니까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셔도 좋아요.”
 안나가 생각보다 쉽게 동조해 버리자 레지나가 당황한 그대로 말했다.
 “진심인가?”
 “물론. 주인님의 뜻이잖아.”
 “아니··· 다른 마족들이 그런 것을 용납하겠나? 마족이 아닌 내 귀에도 황당하게 들리는데, 하물며 마족들은······.”
 “다른 마족의 뜻과는 상관없어. 주인님의 뜻이고, 아무튼 요새를 지키신다면 우리는 그에 따라야만 해. 아니면, 설마 계약을 저버릴 셈이야?”
 계약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레지나가 조용해졌다. 그 광경을 본 성훈은 레지나 또한 무언가 ‘계약’에 얽매인 동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군다나 자신은 마족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 귀 모양도 각성인지 뭔지 후 마족이 되었다는 자신과 안나에 비하면 확연히 인간다웠다.
 안나와 레지나는 처지가 다른 게 분명했다. 지금은 그것을 물을 때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 목표는 마계 건물주야. 그걸로 된 거지?”
 “네. 주인님.”
 먼저 안나가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레지나도 결국 똑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마스터.”
 
 
 
 2장 초보 건물주의 다사다난한 하루
 
 
 
 건물주.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생의 목표로 삼기에 손색이 없는 대단한 존재다. 성훈 역시 가능성은 0에 가까울지언정, 건물주를 수없이 꿈꿔왔다.
 그것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다. 비록 건물이 세워진 곳이 대한민국이 아닌 마계라는 게 문제였지만, 건물 하나가 공짜로 굴러 들어온 건 꿈과 같은 일이었다. 어쩌면 로또 1등 수준의 행운일 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곳은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북유럽이니 캐나다니 하는 잘 살고 사회도 안정된 외국도 아니다.
 마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세계. 그곳에 세워진 건물의 건물주가 되었다. 심지어 마계에는 대한민국에서 흔히 말하는 ‘건물주’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러니까··· 다시 설명하자면 이런 거야. 일단 이 요새에 빈방이 많으니까 그곳을 세를 주는 거야. 일단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보증금을 받고, 또 매달 방세를 받는 거지. 세입자가 방세를 밀리기 시작하면 일단 보증금에서 깎고, 보증금이 떨어질 때까지 안 나가면 경찰을 부르든 심부름센터에 의뢰를 하든 내보내는 거고.”
 성훈이 열심히 설명해 보았지만 레지나의 반응은 이랬다.
 “마계에서 그런 개념이 통하리라고 보십니까? 보증금? 월세? 친하지 않은 누군가의 집에서 살고 싶다면 그런 복잡한 것을 따지느니 그냥 쳐들어와서 주인을 죽이고 빼앗는 쪽을 택할 겁니다.”
 “···이 세계는 그렇게까지 살벌한 곳이야?”
 “물론입니다. 인간계도 크게 다를 것은 없지만, 마계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 힘이 없거나 약점을 보인자는 먹이로 전락할 뿐입니다.”
 “으음······.”
 솔직히 대한민국도 약육강식 사회상을 자랑하기는 했다. 하지만 들어보니 이 마계는 대한민국보다도 더한 모양이었다. 대한민국은 그래도 법치국가라 대놓고 남의 건물에 쳐들어와 죽이고 빼앗는 강도짓은 할 수 없었으니까.
 혹시 이 세계에서 건물주라는 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인 것인가.
 그렇게 성훈이 절망하려는 찰나, 안나가 다른 소리를 했다.
 “그렇게만 생각하실 일은 아니에요.”
 “정말?”
 “네. 아시겠지만 이 시제닐 요새는 마계에서 손꼽히는 난공불락이니까요. 거기에다 변방에 위치한 곳이라 마계 전체가 휘말리는 전쟁이 벌어져도 발을 뺄 수도 있어요. 이런 안전한 거처를 제공한다면, 말씀대로 보증금과 월세라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오려하는 자들은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는 말이지.”
 건물주로 보증금과 월세를 받아서 먹고 산다.
 대한민국에서는 흔하다 못해 국민들의 염원이 된 개념이다. 반면에 이 마계에서는 생소한 개념이다.
 그렇지만 생소하다는 것이 무조건 기피된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마계도 사람 사는 세상, 아니, 마족 사는 세상이 아닌가. 지구에서 검증이 될 대로 된 시스템을 퍼뜨린다면 그 검증된 시스템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 아니, 마족은 분명 있을 것이었다.
 “좋아. 가능성이 있다면 한번 해보는 거지. 실패하면 그때 다른 쪽으로 생각해 봐도 되고.”
 “그렇게 하세요. 다른 의견 없지, 레지나?”
 “···마스터의 뜻이 정 그렇다면.”
 역시나 레지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성훈의 뜻을 거스를 기색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성훈은 아직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안나나 레지나나 자신의 부하를 자칭하고 있지만, 아직 그들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만일 실패가 반복된다면 언제 다른 행동 방식을 보여줄지 모르는 것이다.
 건물주로 평생 편하게 먹고 산다는 일생의 꿈을 위해서라면 지금은 좀 열심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좋아. 그러면 일단 이 요새를 다시 한번 점검하겠어. 세를 줄 만한 방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자.”
 “네. 주인님.”
 자리에서 일어난 성훈은 다시 한번 요새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거대한 요새라 방이나 공간도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절반 이상이 지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텅 빈 공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안에 거주민들도 적은 편이었다. 스켈레톤이라는 뼈다귀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을 뿐더러 거의 꼭두각시나 로봇 취급이라 ‘거주민’이라는 칭호에 부적합했다.
 성훈, 안나, 레지나. 그리고 많이 봐줘서 그 벨로크라는 이름의 해골.
 이 큰 요새에서 거주민이라고 불러줄 수 있는 자는 지금까지 총 네 명만 본 것이었다.
 “이 요새에 다른 사람, 아니, 다른 마족은 없는 거야?”
 성훈이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척 알아들은 안나가 바로 대답했다.
 “네. 지금 이 요새에서 자신의 의지를 가진 존재는 주인님을 포함해서 단 다섯뿐이에요.”
 “그럼 나머지는 그 스켈레톤이라는 해골 수준이고?”
 “그렇지요. 벨로크야 리치지만 그밖에는 스켈레톤이나 좀비처럼 의지가 없는 언데드들 이니까요.”
 “다섯이라··· 그 언데드인지 뭔지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주민이 너무 적은 것 아냐? 요새는 이렇게 큰데 말이야.”
 “선대 주인님께서는 이곳을 세력의 중심이라기보다는 최후의 대피처 정도로 생각하셨어요. 때문에 요새를 튼튼히 짓고 유지비가 적게 드는 언데드 병력을 모아 방비를 갖추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선대 주인님이 남은 모든 병력과 재물을 가지고 이곳으로 피신하는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 진 곳이지요.”
 “말하자면 튼튼하지만 빈집과 다름없는 상태란 말이네?”
 “네. 주인님. 지금 있는 마족이라고는 주인님, 저, 레지나, 벨로크. 그리고 요리사 쉘리브가 있어요.”
 ‘아 그 혐오스러운 폐기물 같은 것을 만든 요리사 말이지?’
 성훈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막 주인이 된 입장에서 굳이 부하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지금 이 요새에는 제정신 박힌 녀석은 그 요리··· 사까지 총 다섯이라는 거군. 나머지는 모두 움직이는 뼈다귀들 수준이고.”
 “네. 주인님.”
 “뼈다귀들에게 넓은 방은 필요 없겠지? 그럼 세 줄 공간은 많겠군.”
 요새를 세밀히 점검한 성훈은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단 요새의 빈 방들 대부분이 각각 별도의 문과 벽으로 구분된 ‘개인 공간’이었다.
 각 방의 크기도 좁지는 않았다. 최소한 예전에 성훈이 살았던 고시원보다는 훨씬 넓었다.
 ‘고시원은 정말 끔찍했지. 방 안에 샤워실도 없고 공동화장실에 누울 공간밖에 없는 교도소 독방보다 작은 사이즈에 바깥 창문도 없고······.’
 고시원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최소한 지금 요새의 빈방들은 예전에 살았던 고시원에 비하면 훨씬 넓게 쾌적한 공간이다. 빌려주고 돈을 받는다고 전혀 양심에 거리낄 게 없었다.
 “여기에 침대나 이부자리를 놓고. 밥이야 지들이 알아서 먹든가 아니면 우리가 밥을 챙겨주는 대신 별도로 돈을 받고. 욕실이나 화장실 같은 건 적당히 개조해서 공용으로 쓰라고 하고··· 내가 보기에는 이래저래 손보면 괜찮을 것 같아.”
 빈방을 둘러보며 이래저래 주절대던 성훈은 문득 벽을 쓰다듬어 보았다.
 개인 공간이라면 역시나 소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고시원에서 살 당시 문제가 되었던 건 층간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이었으니까.
 일단 벽 자체는 두껍고 튼튼해 소리도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자세한 건 두들겨 봐야 할 일이었다. 어차피 자기 건물이겠다, 성훈은 마음 놓고 벽을 힘껏 주먹으로 쳤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이 주먹 깊이로 패였다.
 생각지 못한 결과에 성훈은 크게 당황했다. 돌로 된 벽이 원 펀치에 손상을 입을 줄이야.
 “뭐야, 이거?”
 설마 이 요새, 겉보기만 그럴 듯한 부실 공사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양심상 세를 주기가 난감해진다.
 다행히 안나가 부실공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주인님. 힘을 함부로 쓰시면 곤란해요.”
 “부실 공사가 아니야?”
 “그럴 리가요. 그저 주인님이 강한 것뿐이에요. 지금 주인님의 신체는 전보다 훨씬 강건해지셨다고요.”
 “내가 강해서 벽을 깬 거라고?”
 “그래요.”
 확실히 벽이 약한 건 아니었다. 커다란 돌을 쌓아 만든 벽은 두께가 웬만한 아파트 벽의 두 배는 되었다. 실제로 주먹 깊이만큼의 구멍이 뚫렸음에도 벽이 무너지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큰 교훈을 얻은 성훈은 이번에는 벽을 살며시 쳐 보았다.
 다행히 두꺼운 석재 벽이라 방음 효과도 뛰어난 듯 소리가 크게 새어 나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 이 정도 방이라면 세를 줘도 되겠어. 벽은 수리해야겠지만.”
 다른 방들도 다 비슷했다. 하나같이 분리된 공간에, 두꺼운 벽으로 막혀 있어 훌륭한 개인 생활공간이 될 수 있을 듯 했다.
 모든 것을 확인한 성훈은 다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바로 유지비였다.
 건물주로서 놀고먹으려면 당연히 매달 재정적으로 흑자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수입도 중요하지만 지출도 중요하다. 이 정도 건물이면 유지비로 나가는 비용도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건물 유지비는 얼마나 들지?”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이번에도 안나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금화 기준으로 매달 3만 닢 정도가 들어요.”
 “금화?”
 “네.”
 곧 성훈은 마계의 기본적인 화폐 단위는 금화와 은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략 가치는 이랬다.
 금화 한 닢 = 1만원.
 은화 한 닢 = 천원.
 말하자면 매달 이 요새의 유지비로 3억 원이 든다는 것이다.
 매달 유지비 금화 3만 닢. 원화로 생각하면 대략 3억원.
 무식하게 큰 건물이니 유지비도 많을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듣고 보니 상상을 뛰어넘는 액수였다.
 “더럽게 많이 드네··· 이 세계에도 전기세나 수도세가 있는 거야?”
 “전기세? 수도세?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이 요새의 유지비는 거의 다 마나 하트를 유지하는 데 쓰이고 있어요.”
 “마나 하트라면 그 지하에 빛나던 거? 거기에 3억원, 아니, 금화 3만 닢을 집어넣는다고? 그것도 매달?”
 “네. 말씀드렸듯 마나 하트는 이 요새의 중심이니까요. 마나 하트에서 나오는 마나로 언데드를 유지하고, 요새의 모든 기계장치를 움직이며 문제가 생기면 보수도 하지요. 그 막대한 마나를 생산하기 위해서 드는 유지비도 클 수밖에요.”
 “유지비를 줄일 수는 없고?”
 “지금도 절약하고 있는 거예요. 만일 지금보다 유지비를 줄이면 요새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도 유지비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지금보다 줄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유지비가 매달 최소한 금화 3만 닢. 매달 3억 원의 고정 지출이라고 생각하면 설사 버는 돈이 크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액수다.
 “그럼 지금 우리들의 수입은 얼마지?”
 “0닢이에요.”
 “···진짜? 수입이 완전 제로?”
 “네. 본래 이 요새는 생산적인 기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곳이니까요. 공작님이 건재하시던 시절에는 공작님의 영지에서 매달 큰 수입을 올렸기에 요새 유지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요. 이 요새를 제외한 모든 영지는 적들에게 넘어갔고, 따라서 수입도 전무해요.”
 “그, 그래도 아버지가 저금한 돈 같은 건 있겠지?”
 “음. 현재 요새에 있는 재화를 금화로 따지면··· 10만 닢 정도 되려나?”
 늦게 알았다면 큰일 날 뻔 했다.
 금화 10만 닢 이면 10억 원을 저금한 셈이다. 확실히 액수로만 따지면, 특히나 알바로 연명하던 성훈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많은 액수다.
 하지만 요새 주인의 기준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매달 드는 유지비만 금화 3만 닢이다. 저금한 돈만 믿고 빈둥거리다가는 넉 달 뒤에는 파산이다.
 ‘이거 큰일인데. 그럼 대체 매달 월세를 얼마나 받아야 하는 거야? 세입자 100명을 받는다 해도 매달 월세가 300만원? 이런 미친. 여기가 강남, 아니, 집세가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는 런던이라고 해도 단칸방을 그 돈 주고 묵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어.’
 정신 나간 유지비라는 난관에 건물주의 꿈이 산산조각 나게 생겼다.
 
 ***
 
 성훈은 자신이 아는 상식을 총동원해 보았다.
 확실히 월세를 비싸게 받으려면 일반 주거지 보다는 상가를 주는 게 이득이다. 목 좋은 곳에 위치한 상가는 보증금이 아니라 월세를 천만 단위로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문제는 이 요새의 위치가 ‘목 좋은 상가’라는 전제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계의 변방.
 절벽 위에 위치한 난공불락.
 삼면은 사실상 육상 병력으로는 출입이 불가능한 절벽. 나머지 한쪽 면도 좁고 험한 산길.
 이런 곳에 매달 천만 원 넘는 월세를 주고 상가를 운영할 미친놈이 있겠는가. 기껏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건물의 주인이 되었건만, 진정 건물주의 꿈은 꿈일 뿐인가.
 좌절하던 성훈은 문득 다른 쪽에 생각이 미쳤다.
 이대로 가면 파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하지만 안나나 레지나나 설마 가만히 앉아서 파산을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 다 무능한 족속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언가 대책을 세워두지 않았을까.
 “너희들은 무슨 계획 같은 것 없었어? 돈을 벌 계획 말이야.”
 레지나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그게 뭔데?”
 “병력을 모아 만만한 영지를 공격하여 약탈을 하거나, 아예 점령을 할 계획입니다. 그것이 힘들면 용병 일을 하여 돈을 모을 수도 있습니다.”
 “어이쿠.”
 전쟁, 약탈, 용병.
 어느 쪽이든 편하고 안정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게다가 윤리적으로 생각해도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역시 무식하게 큰 칼을 찬 여자에게서는 저런 발상밖에 안 나오는 것인가. 성훈은 안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의견 없어?”
 “있어요. 주인님.”
 “뭔데?”
 “마계의 유력자나 인간계의 유력자를 납치하여 몸값을 받아내는 것이에요. 실제로 돌아가신 공작님 역시 자금이 부족할 때 애용하셨던 방법이지요. 혹 내놓지 않으면 노예나 마법용 제물로 팔아버릴 수도 있고요.”
 “······.”
 어이가 없는 나머지 볼멘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유괴나 인신매매라니. 이건 ‘무식하게 큰 칼을 찬 여자’보다 더 사악한 발상 아닌가.
 심지어 자기 아버지라는 작자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팍팍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그런 거 말고 좀 멀쩡한 방법을 말해 봐!”
 처음으로 성훈의 언성이 높아졌다. 둘 다 황당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그냥 놀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런 성훈의 반응에 안나와 레지나는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둘 다 진심으로 한 말인 모양이었다.
 ‘그럼 더 문제인데······.’
 성훈이 다시 한번 좌절하는 사이 안나와 레지나가 자기들끼리 말했다.
 “레지나. 뭐 좋은 생각 없어?”
 “약탈, 점령, 용병, 납치. 자기 영지가 없는 마족들은 다들 그렇게 돈을 버는 것 아닌가?”
 “맞아. 그래도 인간 출신이잖아. 인간 세상에서 살다 오신 주인님 구미에 맞는 방법을 뭔가 알고 있지 않아?”
 “더러운 인간들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무언가 허드렛일이라도 찾는 수밖에.”
 “주인님께 허드렛일을 시킬 수는 없지.”
 듣자 하니 저 둘에게서 제대로 된 의견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을 거듭해도 약탈, 점령, 납치 같은 극단적인 무장단체나 할 짓은 못해먹을 것 같다.
 용병이라면 그냥 약탈을 하거나 납치를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언제 칼 맞아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일 역시 사양이다.
 “아무튼 나는 약탈, 점령, 용병, 납치 따윈 사양이야. 그런 거 말고 이 요새를 가지고 온건하게 돈을 벌 방법을 말해 봐. 말했듯이 건물주로서 매달 금화 3만 닢을 벌 방법이 없을까?”
 “음··· 3만 닢 까지는 몰라도 어떻게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월세라는 것을 받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정말?”
 “네. 밤에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기를 원하는 마족들은 많으니까요. 그들의 신뢰를 얻어낼 수 있다면 돈을 받고 방을 빌려주는 일은 가능할 것 같아요.”
 “그래? 계산대로라면 방 백 개를 세놓고, 하나에 금화 3백 닢은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것도 되겠어?”
 “그건 너무 비싼데요.”
 “아, 그래······.”
 결국 평범하게 고시원이나 원룸 같은 것을 운영하는 마인드로는 무슨 짓을 해도 월 3만 닢 이라는 살인적인 유지비를 부담할 수 없을 듯 했다.
 그러자 생각이 다른 데 미쳤다.
 “그러면 요새 유지비를 줄이는 건 어때? 해골 병력을 줄이거나 해서 마나 하트라는 것도 함께 줄인다던가······.”
 “안 됩니다.”
 레지나가 마스터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잊지 마십시오. 비록 이 요새가 마계의 변방이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요새를 공격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이 요새가 난공불락이기 때문입니다. 마나 하트를 약화시켜 요새의 방위력이 떨어진다면··· 내일이라도 어떤 야심가가 요새를 공격해 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그냥 그 야심가란 놈에게 요새를 파는 건 어때? 돈 받고 그걸로 어디 평화로운 곳으로 가서 사는 거야.”
 “계약상 마스터 이외의 주인을 요새에 모시는 건 허락되지 않습니다. 주인님이 머물 다른 요새나 영지가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자에게 요새를 팔아넘기는 건 계약 위반입니다.”
 계약 위반을 말하는 레지나의 눈이 번득였다. 계약 위반은 역시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안나도 거들고 나섰다.
 “계약 위반이 아니더라도 문제에요. 어떤 마계의 야심가든 이 요새를 손에 넣으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먼저 주인님의 목을 벨 테니까요.”
 “이런 망할······.”
 유지비를 줄일 수도 없다. 요새를 팔아넘길 수도 없다.
 갈수록 선택지가 줄어만 갔다. 역시나 전쟁이나 약탈, 납치 따위 짓거리를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만은 피하기 위해 성훈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세 달이라는 기간.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한 뒤 실패하면 다른 것을 시도할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역시나 건물주 노릇을 포기하는 게 아까웠다. 성공만 한다면 앉아서 돈이 굴러들어오는 것이니 말이다.
 “너희들도 생각 좀 해 봐. 대체 어떻게 해야 많은 월세를 받으면서 이 요새를 유지할 수 있을까?”
 잠시 후, 안나가 대답했다.
 “수입은 많지만 안심하고 잠을 잘 곳이 없는 자들이라면 많은 월세를 받아낼 수 있겠지요.”
 “수입은 많은데 잠 잘 곳이 없다? 그게 어떤 녀석들인데?”
 “예를 들면 연금술사, 용병대장, 돈 많은 지명 수배자. 지상계에서 온 도망자들이 있겠어요.”
 “으음.”
 결국 돈 많은 세입자를 받아서 많은 보증금과 월세를 받아낸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단칸방 따위가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좋은 공간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싼 값에 단칸방을 제공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주력은 역시 돈 많은 자들을 노려야 할 것이다.
 일단 건물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개념은 세워진 것 같았다.
 ‘좋아. 열심히 해 보자.’
 상황이 급하다 보니 절로 의욕이 샘솟아 올랐다. 일이 잘 못 되어 죽거나 ‘마계의 극단주의 테러리스트’ 같은 놈이 되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그럼 일단 그것을 1차 목표로 삼자. 돈 많이 버는 녀석들을 불러서 어떻게든 요새 유지비라도 벌어들이는 거야.”
 “네. 주인님.”
 곧바로 대답한 안나와는 달리 레지나는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네. 마스터.”
 
 피곤한 하루를 마친 성훈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다.
 그 시각, 안나와 레지나는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런 남자가 마스터라니······.”
 성훈의 모습이 상당히 실망스러운 듯 레지나는 고개까지 내저었다. 반면에 안나는 태평했다.
 “너는 새로운 주인님이 마왕으로 즉위하기를 기대한 거야?”
 “거기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연약해서야······.”
 “그건 그래. 특히나 전 주인님에 비하면······.”
 안나와 레지나의 전 주인이자 전 마스터였던 로이니스 공작은 마계에서도 유명한 거물이었다. 그만큼 영민했고, 냉정했으며 또 잔혹했다.
 마계를 벌벌 떨게 했던 거물의 아들이 저렇다면 확실히 문제다. 지금의 성훈은 아버지처럼 마계의 패권을 노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목숨과 이 요새를 간수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런데 안나는 그런 성훈에게서 무언가 매력을 느낀 모양이었다.
 “뭐, 지금의 주인님이라고 나쁘기만 한 건 아니지만.”
 듣고 있던 레지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나약한 마스터가 마음에 든다고?”
 “재미있으니까.”
 “재미?”
 “다른 세계 출신인 탓인지 우리들로서는 상상도 못 할 생각을 하셨어. 건물주라··· 정말 재미있는 생각 아니야?”
 “재미있는 생각이 아니라 한심한 생각이다. 이 정도 요새를 가지고 생각 한다는 게 고작······.”
 “일단 지켜보자. 아무튼 주인님은 요새의 상속 받으셨으니까. 그리고··· 머잖아 주인님도 자신의 처지를 확실히 알게 되실 테고.”
 의미심장한 안나의 말에 레지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요새에 찾아온 손님들 말이군.”
 “그래.”
 “그들을 마주하고도 마스터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주인님의 목을 베어야지.”
 순간 안나의 눈에 살기가 흘렀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만큼 살벌한 눈빛이었다.
 그렇지만 살기는 잠시였다. 곧 거짓말처럼 상냥한 눈빛으로 돌아온 안나가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주인님께 좀 상냥하게 대해 드려야지. 너라면 주인님을 좀 더 잘 이해할 테고.”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순수한 마족보다는 인간 출신이 주인님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타락한 인간 성기사님.”
 타락한 인간 성기사.
 그 말을 들은 레지나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라.”
 “후후. 아무튼 열심히 해. 내일 아침 토벌도 말이야.”
 “흥.”
 잠시 그런 안나를 쏘아보던 레지나는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안나가 중얼거렸다.
 “선대 주인님에 그 아드님까지 내 손으로 죽이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말이지······.”
 
 ***
 
 건물주를 꿈꿨고, 건물주가 되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아닌 마계라는 세계의 건물주였다.
 마계가 그냥 외국이었다면, 외국의 건물주가 되었다는 식의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마계는 대한민국과는 완전 다른 세계였다. 좋은 의미가 아닌 나쁜 의미로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성훈의 인생이 그렇게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최소한 평화롭기는 했다.
 이번 달 생활비를 걱정하고, 곧 가야 할 군대 걱정을 했지만 그 정도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걱정이니 특별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궁상맞지만 그럭저럭 평화로웠던 삶. 그것이 이 살벌한 마계라는 세계의 건물주보다 못한 것 같지는 않았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잠에서 깨면 어제까지 그랬듯 코딱지만 한 원룸에서 눈을 뜨고······.
 
 “······.”
 눈을 뜬 성훈은 어마어마하게 큰 침대에 누운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동시에 현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계에 와서 마족인지 뭔지로 각성해 마계 건물주가 되었다. 더 이상 피할 수도 물릴 수도 없는 현실이다.
 “젠장··· 그래, 이렇게 된 거. 힘내자, 힘 내.”
 자기에게 다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난 성훈은 방 안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춰 보았다.
 각성하고 나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외모의 변천이었다.
 본바탕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이목구비가 좀 더 뚜렷해진 느낌이라 예전보다는 인물 자체가 더 나아진 느낌이었다.
 거기에다 힘들게 운동 따위 한 적 없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훨씬 강건해졌다. 당장 거울에 비친 몸부터가 전과는 많이 달랐다.
 헬스에 미쳐 사는 근육맨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몸 곳곳에 잡히는 근육의 윤곽은 공짜로 만들어진 것 치고는 굉장히 훌륭한 수준이었다.
 용모와 건강이 업그레이드 된 덕분에 그만큼 자신감도 조금은 생긴 느낌이었다. 사실 건강이라면 예전부터 자신 있었지만 말이다.
 똑똑.
 “들어와.”
 안나나 레지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노크와 함께 들어온 것은 스켈레톤 두 마리였다.
 듣기로 이 요새의 경비부터 온갖 잡일 등은 거의 다 스켈레톤이나 좀비 같은 언데드의 몫이라고 했다. 해골도 많이 본 탓인지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조금은 귀엽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스켈레톤이 가져온 것은 성훈의 옷이었다. 별생각 없이 스켈레톤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입으려던 성훈은 순간 멈칫했다.
 기본적으로 성훈은 싸구려 청바지나 면바지에 역시나 티셔츠나 남방류를 즐겨 입었다. 그야말로 평범한, 아니, 다소 추레한 차림새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지금 스켈레톤이 가져 온 옷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재질부터가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가죽인데다 퇴폐적인 장식등이 잔뜩 붙어 있는 상하의. 거기에다 어깨뽕을 과도하게 집어넣은 보라색 망토 재킷이 눈에 띄었다.
 무슨 의상에 신경 쓰는 락밴드 멤버거나 코스플레이어가 아니고서야 이런 옷을 누가 입겠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 분야와는 안드로메다 거리만큼 떨어져 살아온 성훈으로서는 이런 옷은 입어 본 적도 없었고, 입으리라 생각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옷 입기 싫다고 뺄 분위기는 아니었다. 별 수 없이 얌전히 스켈레톤에게 몸을 맡겼다. 성훈은 스켈레톤의 도움을 받아 가며 갈아입은 옷차림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
 막말로 병신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외모가 업그레이드 된 덕분인지 의외로 지독하게 안 어울리지는 않았다.
 다소 어색한 느낌은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성훈의 생각보다는 어울리는 편이었다.
 “주인님. 옷은 다 입으셨어요?”
 마침 찾아온 안나에게 성훈은 불만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옷이 이게 뭐야?”
 “이제 명실상부한 요새의 주인이 되셨으니까요. 그에 걸맞은 복장을 입으셔야지요.”
 “이런 걸 입고 사람들을 맞이하라고?”
 “네. 인간이든 마족이든 주인님의 위엄을 보여 줄 필요가 있으니까요.”
 “···네가 보기에는 이런 걸 입어서 나님의 위엄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 같아?”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걸요? 입다 보면 조금씩 익숙해 질 테니까요.”
 안나가 보기에도 아직 성훈에게는 제대로 소화하기 힘든 옷이라는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표현은 완곡했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차라리 나았다.
 “이제부터 난 뭘 하면 돼? 정해진 일정이라도 있어?”
 “네. 일단 아침 식사를 하시면서 레지나의 보고를 들으세요. 그리고 오전에는 제게, 오후에는 레지나에게 요새 주인으로서 배워야 할 것을 배우세요. 마지막으로 저녁때는 알현이 있답니다.”
 “알현?”
 “네. 선대 주인님과 친분이 있던 분들이 새로운 요새 주인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셨어요.”
 “내가 직접 사신을 맞이하라는 말이야?”
 “네. 그러니 요새 주인으로서 기본적인 몸가짐을 익히셔야 해요.”
 아무래도 오늘은 힘든 하루가 될 것 같았다. 하기 싫다고 몸을 뺄 수 있는 것도 아닌 듯 했다.
 사신을 알현한다. 알바생 청년 출신이었던 성훈으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확실히 많은 준비가 필요할 일이니 이거저거 배우라는 것도 납득이 갔다.
 하지만 성훈은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하고 싶었다. 일단 목표로 세운 것. 바로 건물주 사업이었다.
 “내가 말한 그 건물주 사업 계획 말인데.”
 “네.”
 “돈도 없으니 빨리 일을 진행해야 하잖아? 그럼 광고라도 내야지. 이 세계에 인터넷은 없는 것 같고, 그러면 전단지라도 뿌려야 하는 거 아니야? <월세. 난공불락 시제닐 요새. 보증금 금화 1만닢 월세 500닢.> 이런 식으로.”
 “전단지요?”
 안나는 ‘전단지’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성훈은 표현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 요새에서 임대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말이야.”
 “그런 말씀이셨나요? 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정보 길드를 통해 알리도록 할게요.”
 안나가 전단지라는 단어를 모르듯, 성훈으로서는 정보 길드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하지만 듣자 하니 인터넷이나 전단지 역할을 할 수 있는 무언가인 모양이었다.
 “그래. 부탁해.”
 확실히 이 마계는 대한민국과 완전히 다른 세계다.
 앞으로 정말 배울 게 많을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앞두고 성훈은 조금 기대했다.
 ‘아침이니까 지난번처럼 그렇게 무식한 혐오 요가 나오지는 않겠지.’
 이런 성훈의 예상. 아니, 바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침 댓바람부터 방사능에 일그러진 형상의 비주얼을 가진, 거기에다 생물 형태가 온전한 수프와 스튜 등이 차려진 것이었다.
 “선대 주인님께서는 항상 아침은 가볍게 드셨어요. 그래서 일단 아침을 가볍게 차리라고 말했답니다.”
 “이게 ‘가벼운’ 음식이라고······?”
 “네.”
 일단 성훈은 스푼을 들어 그나마 가장 비쥬얼상 나은 수프를 한 숟갈 먹었다.
 “···맛은 나쁘지 않네.”
 “그렇지요? 쉘리브가 요리 솜씨와 고문 솜씨는 일류거든요.”
 “고문?”
 무언가 섬뜩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이제는 일일이 지적하는 것도 피곤했다. 성훈은 일단 요리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확실히 요리는 괜찮았다. 수프나 스튜 국물도 맛있는 재료 맛이 깊게 우러난 진국이었고, 눈 딱 감고 먹는 고기도 맛이 없지는 않았다. 마치 아귀를 먹는 것처럼 껍질은 쫄깃하고 속살은 부드럽기까지 했다.
 “매일 먹으면 질리겠지만 가끔 먹기엔 괜찮은 맛이군. 이놈의 비주얼만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만.”
 “쉘리브에게 주인님 의견을 전할게요.”
 “그래. 꼭 좀 부탁해.”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고 발을 뺄 수 없다면 아무튼 차근차근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식사가 마칠 때쯤 업무를 보러 나갔던 안나가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마스터.”
 “그래. 무슨 보고를 할 게 있다고 들었는데······.”
 안나는 큰 접시를 받쳐 들고 있었다. 접시를 본 성훈은 하마터면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
 접시 위에 커다란 머리통이 하나 올려 져 있었던 것이다.
 안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보고 드립니다. 요새 근처에서 암약하고 있던 몬스터 무리를 토벌하고 왔습니다.”
 “보고가··· 이런 거였어?”
 “그렇습니다.”
 스너프 필름은 고사하고 흔한 고어 영화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성훈이다.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괴물 머리통이 보고랍시고 들어온 건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성훈의 반응은 약했다. 확실히 놀라기는 했지만, 이상할 만큼 빠르게 가슴 속 떨림이 빠르게 진정이 되어갔다.
 덕분에 빨리 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이런 것이 보고였다고. 알았어. 그런데 이런 일을 하려면 미리 예고라도 해 주면 안 되는 거야? 말도 없이 괴물 머리통을 들고 오는 것 보다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무릎을 꿇은 채 레지나가 고개를 숙였다. 안나를 돌아보니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 둘을 보면서 성훈은 뭔가 깨달았다.
 ‘이것들이 나를 시험하는 건가?’
 수위가 높은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을 시험하는 일은 대한민국에서도 가끔 있는 일이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사람이든 동물이든 모가지를 잘라 가져오는 일 따윈 없었다. 그런데 마계에서는 그것이 평범한 일일 지도 모른다.
 이런 일까지 적응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역시나 해야만 할 것이다.
 무엇보다 주인님이라고 불리는 주제에 부하들에게 얕보이는 것만은 싫었다.
 “···알았으니까 자세히 이야기 해 봐. 몬스터 토벌이라고?”
 “네. 이 요새 주변 지역의 몬스터 무리는 대부분 우리들의 통제 하에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가끔 토벌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보통 네가 하는 거고?”
 “그렇습니다.”
 보건대 안나와 레지나의 포지션은 딱 문무가 구별되는 듯 했다. 안나는 문(文) 쪽을 주로 맡고, 레지나는 무(武) 쪽을 주로 맡는 느낌이랄까.
 “오늘은 제가 알아서 했습니다만, 다음부터는 마스터께서 명령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저런 괴물 딱지의 목을 따는 것도 건물 관리 개념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말이지.”
 “네. 미리 손봐두지 않으면 가끔 분수를 모르는 몬스터들이 먼저 요새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다음부터는 밥 먹는데 괴물 모가지를 가지고 오지는 마.”
 “명심하겠습니다.”
 성훈은 식사를 마저 했다. 방금 전 잘린 모가지를 본 것 치고는 식욕도 떨어지지 않았기에 무사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
 
 확실히 예전의 자신과는 달랐다. 전 같았다면 방금 전 잘린 모가지를 본 뒤 식사를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도 그 각성이라는 것의 영향일까. 그렇다면 각성으로 인한 다른 영향 또한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성훈은 무사히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스케줄에 들어갔다.
 들은 대로 오전에는 안나에게 여러 가지를 배웠다.
 마계라는 세계의 구성원, 그리고 요새의 주인으로서 익혀야 할 기본 상식들이었다.
 여러 이야기를 들은 성훈은 일단 이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나름대로 요약해 적어 보았다.
 
 이름 - 마계
 
 구조 - ‘지상계’라 불리는 위쪽 세상의 지하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나의 대륙으로 구성됨.
 
 거주자 - 마족들이라 불리는 지성을 가진 종족들과 각종 ‘타락’한 종족들이 주 거주자. 그밖에 온갖 몬스터들의 천국.
 
 현황 – 마계를 잠시 통일했던 선대 마왕이 죽은 뒤 분열 상태. 이후 다시 한번 세계를 통일하고 마왕이라는 것이 되겠다고 열 개도 넘는 난투극을 벌이는 춘추전국시대. 죽은 내 아버지도 마왕을 꿈꾸다 통수 맞고 죽었다나.
 
 기타 사항
 
 1. 마계는 제대로 된 법전보다는 약육강식이 진리. 때문에 피의 계약인지 서명인지 하는 강한 구속력을 가진 수단을 동원하지 않는 한 배신, 통수가 일상.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딱 마계가 그런 듯.
 2. 지하인데 달이 떠 있는 게 신기해서 물어봤더니 일종의 마법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개념이라던가. 어쩐지 하늘에 별이 하나도 안 보이더라.
 3. 지상계라는 곳은 인간, 엘프 같은 (안나의 표현을 빌리면) 나약하고 위선적이며 가증스러운 종족들이 산다고 한다. 지상계와 마계를 넘나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때때로 넘어와서 마계랑 연을 맺는 자들도 있단다. 물론 내가 넘어 갈 수도 있다는 것 같다.
 
 성훈이 쓰면서 특별히 숨기지 않았기에 안나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나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것이 주인님 세계의 문자인가요?”
 “그래.”
 “신기한 문자로군요.”
 “한글을 못 알아보는 거야?”
 “네.”
 “나는 마족 문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데?”
 “그건 선대 주인님의 힘이죠.”
 말인즉, 자식이 새로운 모국어를 익히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아버지가 힘을 썼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고맙게 느껴지는군. 그나저나 배운 걸 정리해 봤는데, 결국 이 세계는 완전 살벌하고 약육강식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 세계라는 거지?”
 “정확히 이해하셨군요.”
 “···그게 사실이면 세입자도 신중히 골라야겠어. 진상 세입자만 들어와도 골치 아프다는데 미친놈이 들어오면 보통 일이 아닐 테니까.”
 공부를 마친 성훈은 점심시간을 가졌다. 성훈의 뜻이 제대로 전달된 것인지 전보다는 재료의 본래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게 요리된 요리들이 나왔다.
 그 다음은 레지나의 교육 시간이었다.
 
 요새 훈련장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레지나가 말했다.
 “요새 주인으로서 일정 수준의 실력은 갖추셔야 합니다.”
 성훈이 주변을 둘러보니 벽에 온갖 무기들이 진열된 게 보였다.
 “칼 쓰는 방법이라도 가르쳐 줄 셈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전투 기술입니다.”
 “으음. 그런 것도 꼭 배워야 하나?”
 “배우지 않으면 자객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십니까?”
 “자객······.”
 솔직히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훈 입장에서 전투 기술을 익히는 것은 귀찮기만 했다. 하지만 자객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도저히 귀찮다며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알았어. 그럼 저기 걸린 무기 중에 하나 골라잡을까?”
 “마스터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뭐라고?”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성훈에게 다가온 레지나가 성훈의 양손을 붙잡았다. 덕분에 코앞에서 레지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
 확실히 무시무시한 여자지만,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미인이기도 했다. 거기에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단단한 갑옷을 두른 게 아니라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어 훌륭한 몸매까지 고스란히 보였다.
 레지나는 성훈이 자신을 보는 시선을 모르는 듯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잠시 조용해진 가운데 문득 레지나가 말했다.
 “찾았다.”
 레지나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성훈은 몸속에 무언가가 주입되는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싸늘한 기운이 몸속을 파고들다 성훈의 두 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씨발 뭐야!”
 성훈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갑자기 자신의 양손에서 손톱이 길게 튀어나온 것이다.
 손톱은 두 뼘도 넘는 길이에 대충 보기에도 굉장히 날카롭고 예리했다.
 난데없이 손톱이 늘어나다니, 이 무슨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라는 말인가.
 “···이, 이건 뭐야?”
 “마스터의 무기입니다.”
 “아니, 손톱이 왜 갑자기 튀어나온 거냐고!”
 “손톱이 아닙니다.”
 “뭐?”
 자세히 보니 확실히 손톱은 아니었다. 보통 손톱이 가로 방향이라면, 지금 튀어나온 손톱 비슷한 것은 손가락 끝에서 세로 방향으로 튀어나온 채였다.
 사실 그것이 더 기괴했다. 손가락 끝의 뼈와 살을 뚫고 손톱 모양의 칼날이 튀어나온 셈이었으니까.
 성훈은 찔리지 않게 조심하며 칼날을 다시금 살폈다. 검은 색에 금속 비슷한 질감이 났고, 하나같이 끝은 뾰족한데다 양 쪽에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성훈은 마침 뻗쳐 있던 앞머리를 칼날로 건드려 보았다. 말 그대로 건드려 보았을 뿐인데 앞머리 몇 가닥이 잘려 바닥에 떨어지는 게 보였다.
 수호지 같은 소설에서 비슷한 레파토리를 본 적 있었다. 머리카락을 칼날 위에 놓고 후 불면 쪼개진다는 보검 말이다.
 그런 전설적인 보검이 각 손가락에 하나씩, 총 열 개나 손에 박혀있었던 셈이다.
 분명 지금까지 손에서 칼날은커녕 철사 하나 박혔다는 느낌도 받은 적 없다. 그런데 이렇게 열 개나 되는 칼날이 튀어 나오다니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성훈은 자기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짚을 뻔 했다. 다행히 진짜로 짚기 직전, 스스로 자살 미수 행위를 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내 손에 왜 이런 게 있어?”
 “선대 마스터의 선물이라고 들었습니다.”
 “선물? 사람을 프레디 크루거 꼬라지로 만드는 게 선물이라고?”
 “훌륭한 선물입니다. 특별히 무기를 휴대할 필요도 없이, 필요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무기를 가지고 적과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은 마스터 같은 분께는 굉장한 선물입니다.”
 “······.”
 “더군다나 그 무기는 굉장히 튼튼하고 날카롭다고 들었습니다. 또 파손이 되어도 수리도 가능하고 말입니다.”
 “아아. 그래. 그렇다고.”
 허락 없이 사람을 호러 영화의 살인마 꼴로 만들었다고 따져 봐야 이빨도 안 먹힐 상황이다. 자포자기한 성훈은 강의나 제대로 듣기로 했다.
 “마스터의 선천적인 신체 능력과 마나. 그리고 언제나 휴대 가능한 무기까지, 모두 전사로서 훌륭한 조건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뒷받침 하는 실력이 없이는 아무런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철저히 실전 위주로 전투 기술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곧 교육을 빙자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레지나는 차고 있던 검을 뽑는 대신 검집 째로 휘두르며 성훈을 두들겼다.
 “제대로 방어하십시오!”
 “으악!”
 “상대가 이렇게 틈이 큰 공격을 하면 즉각 반격을 해야 합니다!”
 “으윽!”
 “이쪽이 비었습니다!”
 “꽥!”
 몇 시간 동안 두들겨 맞으며 고통도 적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부상이 없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교육인지 구타인지 애매한 시간이 끝나고, 레지나는 검을 도로 차며 허리를 숙였다.
 “끝났습니다. 그동안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거 참 사과를 빨리도 한다.’
 생각 같아서는 이렇게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비록 마스터를 실컷 두들겨 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나는 부하로서의 예의를 잊지 않았으니까.
 “계속 이 짓거리를 할 건 아니지?”
 “네. 오늘 제가 가르쳐 드릴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거 참 좋은 소식이야.”
 이후로는 골치를 썩이거나 몸이 괴로운 스케줄은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휴식, 그리고 저녁 식사 시간까지 별 일 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공식 스케줄 타임이었다.
 “이제 알현을 받으실 차례에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데?”
 “선대 주인님과 친밀한 관계였던 오크 킹 델로프 님이 사절을 보내셨어요. 주인님의 무사한 상속을 축하하고, 앞으로도 잘 지내고 싶다는 군요.”
 “아버지랑 친했던 분이라······.”
 오크는 인간처럼 지성을 가진 종족 중 하나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몬스터와 지성체의 중간 정도 취급을 받는 종족이며 마계와 지상계 모두에서 번성하고 있어 머릿수로만 따지면 인간에 버금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크 킹은 오크 거대 무리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단어였다. 비록 마계에만 해도 오크 킹이 여러 명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개나 소나 가질 수 있는 명칭도 아니라고 했다.
 한마디로 높으신 분이 보낸 외교사절이다. 그리고 그런 외교사절을 맞이해야 할 성훈 역시 높으신 분 취급을 받는 것이다.
 “외교 같은 것은 전혀 모르는데 괜찮을까?”
 “네. 너무 걱정 마세요. 그저 친교를 나누기 위해 보내 온 사절이니까요. 그저 위엄 있게 앉아서 적당히 받아주시면 되는 거예요. 그러다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지면 침착하게 대응하시고요.”
 “예상외의 상황?”
 “네. 너무 걱정 마세요. 저와 레지나가 주인님을 보좌할 테니까요.”
 마계라는 세계에 온 지 이틀 만에 외교 사절인지 뭔지를 맞이해야 한다.
 당연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피할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이렇게 큰 건물을 상속받은 입장에서 최소한 해야 할 일이라는 의무감이라고 할까.
 곧 성훈은 어깨뽕 가득 넣고 망토까지 걸친 위엄 있는 건물주의 복장으로 알현실로 향했다. 높다란 의자에 앉아 기다리니 해골들이 다가와 줄지어 서는 게 보였다.
 이 요새의 주력군인 스켈레톤 들이었다. 평범한 스켈레톤이 아니라 각각 키 3미터에 자기 몸뚱이만큼 큰 대형 무기를 들고 있는 괴물들이었다.
 그런 괴물들이 두 줄로 알현실 바닥에 늘어선 가운데 안나는 의자 좌측 뒤편에, 레지나는 우측 뒤편에 섰다. 결국 이 알현실에서 앉아 있는 것은 성훈 한 명뿐이었다.
 “집주인의 위엄이라는 건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것은 바로 성훈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게 알현을 맞아들일 준비가 끝나자 비로소 사절들이 찾아왔다. 말로만 듣던 오크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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