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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1화

2018.09.05 조회 1,115 추천 9


 
 
 결혼
 
 
 
 “잘했어. 엄마.”
 
 그렇게 말하는 오민지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봄이다. 올해도 옆쪽 산기슭의 개나리 때문에 봄을 실감한 셈이었는데 감동은 없다. 그러고 보면 이곳 일산의 전원주택으로 이사 온 3년 동안 꼭 봄은 찾아 먹었다. 개나리, 지금은 3월이지만 작년은 4월, 그 전은 몇 월에 봄을 느꼈는지 모른다. 개나리를 본 순간에 “아, 봄이구나” 했으니까. 어머니가 가만히 있었으므로 오민지가 창에서 시선을 떼었다.
 
 “환영이야, 엄마.”
 
 “그런 얼굴이 아닌데.”
 
 “내가 포커페이스인 줄 알잖아.”
 
 오민지가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웃어볼까? 그러면 엄마는 귀신 본 것처럼 놀랄걸?”
 
 “시끄러.”
 
 어머니의 어깨가 조금 늘어졌다. 40대 후반의 나이지만 어머니 박희선은 아직 탄력 있는 몸매에다 30대의 감성을 갖추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올해로 10년, 그동안 어머니는 그 몸과 용모로 큰 사고 없이 둘만의 생활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작년 겨울부터 남자가 생긴 것이다. 남자 이름은 정명식. 나이는 어머니보다 다섯 살 위인 53세이며 현재 중견 건설회사의 부사장이다. 정명식은 6년 전에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고 혼자 살고 있었는데 그도 역시 소생은 아들 하나뿐이다. 어머니가 정명식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다이야기해 주는 바람에 오민지는 그의 식성까지 안다.
 
 “민지야, 정말 괜찮지?”
 
 어머니가 다시 확인하듯 물었으므로 오민지는 정색했다. 지금 어머니는 정명식과의 결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결혼은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거야. 그걸 잊고 있는 것 같아. 엄마는.”
 
 오민지가 말을 이었다.
 
 “나두 5년쯤 후면 결혼하게 될 것이고 그때 엄마는 어떻게 할래? 그때도 나만 바라보고 살래?”
 
 어머니의 시선을 받은 오민지가 입술 끝을 조금 올리고 웃었다.
 
 “그것도 원인이야. 엄마 좋고 나 좋은 방법이라구. 엄마는 이제 제2의 인생을 즐길 때가 됐어. 그럴 자격도 있고.”
 
 “같이 사는 거야.”
 
 다시 어머니가 말하더니 탁자 위로 상반신을 조금 굽히고 오민지를 보았다.
 
 “약속하지? 넷이서.”
 
 “그래.”
 
 짧게 대답한 오민지가 머리를 돌려 다시 개나리를 보았다. 개나리는 열흘쯤 전부터 만개한 상태였는데 오늘은 날씨가 흐린 때문인지 더 선명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머니가 가늘게 숨을 뱉었다.
 
 “언제 그 사람 한번 만나볼래? 그 사람도 널 보고 싶다던데.”
 
 “나중에. 시간 있지 않아?”
 
 “그 사람 아들.”
 
 다시 긴장한 듯 어머니의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오민지에게로 향해졌다.
 
 “지금 군에 가 있는데.”
 
 “나보다 세 살 위이고.”
 
 “이제 넉 달 있으면 제대한대. 가을 학기에 복학하면.”
 
 “나하고 같은 학년이 되겠지. 엄마가 까먹은 모양인데. 전에 다 말해줬어.”
 
 “아니, 그게 아니라.”
 
 답답한 둣 어머니가 손까지 저었다.
 
 “내가 먼저 만나 볼까? 그 사람하고 같이 면회를 가서.”?
 
 “그 아들을?”
 
 오민지가 머리를 조금 비틀고는 어머니를 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고 조금 엷은 듯한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머니 박희선보다 더 섬세하면서 뚜렷한 윤곽의 미모였다.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차갑다. 어머니의 시선을 받은 오민지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엄마, 그래야겠지.”
 
 “그 사람도 틈틈이 내 이야기를 했단다.”
 
 “잘 어울리는 짝이야, 엄마하고 그 분.”
 
 말을 그친 오민지가 다시 머리를 돌렸다. 이제 곧 정명식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것이었다. 그때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어머니가 말했다.
 
 “그 사람 아들, 성품도 착하고 대담하다고 했어. 너한테 좋은 오빠가 될 거야.”
 
 “······.”
 
 “그리고 잘 생겼더라, 내가 며칠 전에 사진도 보았어.”
 
 
 
 면회실로 들어선 정기훈은 안쪽 철제의자에 앉아 있는 정명식을 보았다.
 
 “아버지.”
 
 “어, 정 병장.”
 
 경례를 올려붙인 정기훈을 향해 정명식이 손을 내밀었다.
 
 “제대 말년이라 신수가 훤하구나.”
 
 “체중이 조금 불었어요.”
 
 정기훈은 서부전선 근처에 위치한 보병 사단 소속이라 소속을 보고하려면 사단, 연대, 대대, 중대, 소대, 분대까지 길게 간다. 한마디로 말단 소총분대원이다. 토요일 오후여서 면회실 안은 활기 띤 분위기였는데 옆쪽 자리에서는 음식을 싸온 어머니가 일등병 아들에게 자꾸 먹이는 중이었다. 정명식도 처음 한 번은 저랬지만 요즘 군대생활은 전과 다르다는 정기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만두었다.
 
 “아버지, 요즘 어떠세요?”
 
 불쑥 정기훈이 웃음 띤 얼굴로 묻자 정명식이 정색했다.
 
 “뭐가?”
 
 “사업 말입니다.”
 
 “회사야 잘된다.”
 
 “아버지도 참.”
 
 쓴웃음을 지은 정기훈이 정명식을 은근한 시선으로 보았다.
 
 “작업이라고 해야 이해하실라나? 아니면 청춘사업?”
 
 “이 짜식이.”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본 정명식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 일로 이야기할 것도 있어.”
 
 “그 일 때문에 오신 것 같은데.”
 
 “임마, 까불지 마.”
 
 정색한 정명식이 정기훈을 보았다. 스물여덟에 정기훈을 낳았으니 이제 스물다섯이 된 아들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자주 정명식은 정기훈이 제 나이보다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는다.
 
 “내가 결혼을 해야 될 것 같은데, 5월쯤 해서 말이다.”
 
 “5월 말입니까?”
 
 이제는 정기훈도 정색했다.
 
 “그럼 두 달 남았네.”
 
 “네 제대가 7월이지?”
 
 그러자 정기훈이 머리부터 저었다.
 
 “제 제대는 염두에 두지 마세요. 아버지 결혼하고 어떤 상관도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네가 참석을 해야.”
 
 “휴가 받으면 돼요”
 
 자신 있게 말한 정기훈이 정명식을 향해 웃어 보였다.
 
 “5월이면 언제든 휴가 나갈 수 있어요. 말년인데다 제가 중대장의 신임을 받고 있걸랑요.”
 
 “7월 이후로 늦추려고 했는데 그 사람의 하나밖에 없는 언니가 미국에서 형부하고 5월에 나온다고 해서 말이다.”
 
 “5월에 하세요, 아버지.”
 
 “그럼 그렇게 하지, 그리고는 정명식이 길게 숨을 뱉었다.
 
 “고맙다, 기훈아.”
 
 “아버지도, 참.”
 
 정기훈이 다시 웃음 띤 얼굴로 정명식을 보았다. 짙은 눈썹 밑의 두 눈이 또렷했고 굵고 곧은 콧날 밑의 입술은 다부졌다. 선이 굵으면서 뚜렷한 용모에다 정명식보다 10센티미터는 더 큰 1미터 87의 신장이다.
 
 “새어머니 되실 분한테 제가 축하한다는 말씀 전해 주세요.”
 
 “결혼 전에 같이 면회를 올 테니까. 그 사람도 같이 오자고 하더구나.”
 
 “그러실 필요 없는데, 5월에 만나면 될 걸요. 뭐.”
 
 “아니야, 그게 도리야.”
 
 그리고는 정기훈이 문득 시선을 들었다.
 
 “그 사람 딸 말이다.”
 
 “예, 아버지.”
 
 “가능하면 같이 데려올게. 이무래도 결혼 전에 만나 두는 것이 낫지 않겠니? 어색하지 않게 말이야.”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머리를 기울인 정기훈이 정명식을 보았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지, 그러시면 더 어색해져요. 그런 일은 우리들한테 맡겨 두세요.”
 
 “야, 그래도.”
 
 “그리고 그쪽은 여자라구요. 저하고는 아마 다를 겁니다.”
 
 정기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먼저 그쪽에다 가자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때로는 여자를 가만 놔 둘 때도 있어야 한다구요.”
 
 
 
 “난 7월쯤에 필리핀으로 갈거야.”
 
 김소라가 불쑥 말했으므로 오민지는 읽고 있던 책을 접었다. 시선을 들지 않은 채 읽던 페이지에 메모지 한 장을 끼우고 가방에 넣는 짧은 동안 마음을 정리했다. 김소라는 오민지와 고등학교 동창으로 같은 대학에 과까지 같은 영문과로 진학했으니 단짝이 안 될 수가 없다. 거기에다 역시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사학과에 다니는 박은경까지 셋은 매일 붙어 다니는 멤버였는데 주변에선 그들을 ‘오민지 코드’라고 부른다.
 
 리더 격인 오민지의 비밀스럽고 신비스런 분위기도 작용했겠지만 항상 같이 어울리는 셋의 작당(?)을 오민지 일당이란 뜻으로 붙여진 별명일 것이다.
 
 “필리핀 어디?”
 
 머리를 든 오민지가 묻자 김소라의 얼굴에 수심이 덮여졌다. 동그란 얼굴에 눈도 동그랬고 콧날도 상큼해서 인형같이 귀여운 모습이다. 천성이 밝고 순진해서 꾸밈이 없었지만 머리가 명석 했다. 암기력도 뛰어나 성적은 오민지보다 낫다.
 
 “마닐라대학, 그곳에서 1년만 있다가 돌아올 거야.”
 
 김소라가 앞쪽 잔디밭을 향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럼 그때까지는 이 지루한 전쟁도 끝나게 되겠지.”
 
 같이 잔디밭에 시선을 준 오민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김소라의 밝은 표정 이면에는 가정의 어두운 그늘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수원에서 꽤 큰 전자부품 회사를 운영하는 김소라의 아버지는 지금 어머니와 이혼수속 중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10여년 연하인 유부남과 바람이 났기 때문인데 문제는 재산 분배라고 했다. 전자부품 회사가 김소라의 외할아버지 소유로, 수십 년간 회사를 경영해온 아버지의 지분이 별로 없는 것이 문제였다.
 
 둘의 재산 다툼은 격렬했다. 오후의 봄 하늘은 맑았고 바람도 봄바람이었다. 비린 풀냄새와 함께 서늘한 찬 기운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름 바람은 시원하고 가을바람은 서늘하고 겨울 바람은 차다. 그러면 봄 바람은 뭐라고 해야 맞을까? 앞쪽 잔디 위에 모여 앉은 대여섯 명의 남녀 학생들을 보면서 오민지는 머리를 기울였다. 그때 김소라의 말이 이어졌다.
 
 “아빠가 불쌍해.”
 
 머리를 돌린 오민지의 시선을 볼에 받으며 김소라가 말을 이었다.
 
 “어제는 소식이 없었던 외삼촌까지 나타나 행패를 부렸어. 이젠 그놈하고 외삼촌이 한패가 되었어.”
 
 그놈이란 어머니의 정부를 말한다.
 
 “아빠가 불리해. 간통으로 고소를 한다고 해도 아빠는 회사를 빼앗기게 될 것 같아.”
 
 그리고는 김소라가 심호흡을 하더니 머리를 돌려 오민지를 보았다.
 
 “그래도 내일은 해가 뜨고 어김없이 그날이 찾아오겠지.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숨 쉬는 것을 멈추거나 또는···.”
 
 “시끄러.”
 
 “애나 낳을까부다.”
 
 “뭐어?”
 
 “1년 후에 피부가 새까만 아끼나 하나 들고 귀국할까? 물론 아빠 모르는 사생아여야겠지. 그것을 본 엄마가 뭐라고 할까?”
 
 “술 한 잔 할까?”
 
 자리에서 일어선 오민지가 김소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내가 살게.”
 
 “아이 이름은 라울, 아니 이사벨이 좋겠다. 딸을 낳아야겠어.”
 
 “이 기집애가 왜 연락이 없어?”
 
 휴대폰을 꺼내든 오민지가 버튼을 누르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지금 박은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자.”
 
 끌려 일어섰지만 이제는 김소라가 앞장을 서며 말했다.
 
 “내가 무서운 것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맨 김소라가 정색한 얼굴로 오민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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