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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강호 1권 (1)

2018.09.11 조회 652 추천 5


 #零
 
 강해지고 싶다.
 주먹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더라도 강해지고 싶다.
 이유 따위를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사내가 강해지고 싶은 데 이유가 있을 리 없다.
 누구나 인정하는 가장 강한 사내··· 매력적인 유혹이다.
 무공을 배우고 싶다.
 강한 사내로 가는 확실하고 유일한 길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무공이란 무엇인가?
 그걸 모르겠다.
 무武는 술術이라고도 하고, 예藝라고도 하며, 도道라고도 한다.
 역시 모를 소리다.
 그러나 궁금한 건 그게 아니다.
 지상에서 가장 강한 무공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알고 싶었던 건, 단지 그뿐이었다.
 
 
 
 
 #무강武剛
 
 
 
 
 
 아스라한 능선을 따라 잡목림雜木林이 펼쳐져 있다. 울긋불긋 현란하게 수놓인 숲에서는 가을의 정취가 물씬 묻어난다. 아름답지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험준함이 그곳에 있었다.
 우령산優靈山. 산세가 험하기로 길림성吉林省에서 손꼽히는 산이다.
 곳곳에 솟아 있는 까마득한 암벽岩壁은 인간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았다. 인간을 향한 우령산의 경고.
 그런데 버르장머리 없게도, 경고의 상징과도 같은 암벽을 태연하게 기어오르는 녀석이 있었다.
 “웃차!”
 거친 손끝이 갈라진 바위틈에 밀어 넣어졌다.
 작지 않은 틈이지만 손가락 세 개가 간신히 들어갔다. 송진을 바른 손가락은 두텁고 단단했다. 훅 하며 뜨거운 입김이 뿜어졌다. 손과 손목, 팔과 어깨로 이어지는 근육에 힘줄이 불끈 솟아오르며 근육질의 거구가 쑥 하고 올라왔다.
 신장은 거의 육 척尺, 단단하게 뭉쳐진 백오십 근斤의 근육질. 그것이 손가락 세 개에 아무런 저항감 없이 끌어 올려졌다.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뛰어난 균형 감각, 유연성, 일정한 힘을 유지하는 지구력, 발밑으로 구름이 보일 만큼 높은 절벽 한가운데임을 고려한다면 엄청난 대담성과 집중력까지 요한다.
 한두 해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녀석의 얼굴은 아직 소년이었다. 어른조차 입을 쩍 벌릴 만큼 건장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소년의 얼굴. 현무강, 녀석의 이름이다.
 “후, 이제 겨우 반 올라온 건가··· 어?”
 힘차게 팔을 당기던 무강이 휘청거렸다.
 땀에 젖은 한쪽 손이 미끄러졌다. 간담이 서늘해질 상황이지만 무강은 얼굴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체중을 분산시키며 금세 균형을 잡았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엉뚱한 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깜짝이야! 놀랐잖아, 똑바로 못하냐!”
 무강의 등에는 지게가 지워져 있었다. 그 위에 밧줄로 몸을 꽁꽁 묶고 걸터앉은 서생 차림의 소년이 불만을 터뜨렸다.
 “안 말릴 테니까 불만이면 내려, 임마.”
 “싫다, 임마. 고락을 함께하는 벗에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그 무슨 막말이냐? 성격 나쁜 걸 꼭 그렇게 티 내야겠냐?”
 “고락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게 친구를 탈것처럼 쓰는 녀석이 할 말이냐?”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네가 떨어지면 나라고 무사하겠냐? 이거야말로 동고동락同苦同樂을 넘어서 동생동사同生同死하는 친구 사이가 아니겠나. 이런 친구 아무 데서나 만날 수 있는 거 아니야. 자, 친구가 돼 줘서 감사합니다 해 봐.”
 “놀고 앉았다, 정말. 입에 침이나 바르고 떠들어라. 그럼 내려 달라고 울고불고 생난리를 쳤던 놈은 너하고 닮은 딴 놈이었냐?”
 “글쎄, 무슨 얘길까나? 날씨가 꽤 덥군.”
 서생은 부채를 흔들거리며 의뭉을 떨었다.
 반 시진이 넘도록 암벽을 오르는 친구의 입에서 단내가 풍기든 말든 까마득한 절벽에서 위태위태한 상황이 연출되든 말든,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히죽거리는 서생의 이름은 서윤. 무강과는 화죽당花竹堂에서 십 년 가까이 동문수학해 온 단짝이다.
 무강은 입술을 댓 발이나 내밀며 툴툴거렸다.
 “젠장, 이렇게 높은 곳을 좋아하는 녀석인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꼬이는 게 아니었는데.”
 “내 괴벽怪癖이 제 탓인지는 아니 다행이군.”
 “말이나 못하면······.”
 “어디서든 벽돌을 져 날라서라도 먹고살 너와는 다르지. 나처럼 글밖에 모르는 고매한 서생이 입 떼 놓고 나면 뭐가 남겠어?”
 “적당히 해라, 응? 자꾸 맥 빠지는 소리 하면 정말 같이 떡이 되는 수가 있어.”
 “그건 곤란하지. 난 독자獨子라고.”
 서윤은 실실 웃으며 부채를 팔랑거렸다.
 그 여유는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강을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떨어질 리가 없다. 무강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만, 때때로 확 떨어져 친구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헥헥거리며 암벽을 기어오르는데 등 뒤에서 한가롭게 시조나 읊조리고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아, 물론 그러고 싶어질 때가 있다는 얘기다.
 아무리 불평을 늘어놓고 아옹다옹해도 둘은 가장 친한 친구다. 또한 수련에 도움이 될까 싶어 먼저 꼬인 것도 무강이었다.
 서윤은 흔쾌히 허락했다. 비록 익숙해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믿음과는 별개로 누군가에게 생명을 맡긴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무강 역시 서윤이라면 생명을 맡길 수 있었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서윤이 새삼스럽게 물었다.
 “그럭저럭 오 년은 돼 가지?”
 “음.”
 무강은 짧게 대답하며 다시 한차례 몸을 끌어 올렸다.
 이름 모를 작은 새가 스치듯 날아간다.
 “아직 할아버님은 별말씀 없으셔?”
 “알면서 뭘 물어? 쳇, 그놈의 할방구! 오 년째 똑같은 말만 하고 있어. 아직 무공을 익히기에는 이르다는 둥, 준비가 안 됐다는 둥하면서 매일 암벽이나 타라잖아. 대체 뭐가 이르냐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도 못 하면서.”
 “뭔가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방귀나 픽픽 뀌어 대는 노인네가 무슨 생각이 있겠어? 그냥 가르쳐 주기 싫어서 핑계 대고 있는 것뿐이야. 쩨쩨한 할방구 같으니!”
 “어쨌든 암벽을 타기 시작한 뒤로 몸이 좋아지기는 했잖아.”
 “난 강해지고 싶어. 그냥 힘이 세지는 게 아니라 진짜 강해지고 싶다고.”
 “그게 그거 아냐?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서윤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무공 말이야, 무공. 나는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무림인처럼.”
 “무공이라면 배운 게 있잖아. 그··· 양권良拳이라고 했던가?”
 “그런 건 무공이 아니야.”
 불만을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목소리다.
 “그건 꼬맹이들이나 배우는 장난질이야. 내가 말하는 무공은 뭐랄까··· 좀 더 근사한··· 슈욱! 하고, 파악! 하는··· 그러니까······.”
 “강호객江湖客 같은?”
 ≪강호객≫은 근래 들어 저잣거리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무협지다. 서윤도 읽었고, 무강도 읽었다.
 “맞아, 그런 거야. 그게 진짜 무공이라고!”
 “정말 그런 무공을 배울 수 있다면 굉장하긴 하겠지.”
 서윤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지만 네가 말하는 그런 무공을 정말 네 할아버님이 익히고 계시기는 한 거야? 힘이 세신 건 사실이지만 한 번도 무공을 보여 주신 적은 없잖아. 솔직히 나는, 할아버님께서 강호객처럼 대단한 무공을 익히고 계시다는 게 믿기지 않아.”
 “나도 강호객처럼 대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건 정말 대단하니까.”
 무강은 뭔가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짜 무공을 익히고 있는 건 확실해.”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 * *
 
 오 년 전이었다.
 길림성에서도 벽지에 속하는 여문餘聞. 무강과 서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 무렵, 여문에 일단의 무인들이 흘러 들어왔다. 자칭 장강오괴長江五怪라던 그들은, 하북河北 지방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던 오인조 악당이었다. 강호에서 뭔가 사고를 치고 명문 정파의 눈을 피해 도망쳐 왔다 했다.
 비록 도망쳐 온 몸이었지만 이들은 강했다.
 그래서 때때로 마을에 내려와 행패와 약탈을 일삼았지만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향장鄕長을 포함한 관군 서른 명이 토벌에 나섰다가 고작 서너 명만 살아 돌아왔을 정도였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향장은 인근 마을의 무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조차 장강오괴의 무공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한 무인이 여문에 나타났다. 반년이 넘도록 장강오괴를 쫓고 있던 자라 했다.
 장강오괴가 우령산 기슭에 자리 잡은 무강의 집을 찾아온 건 그 무렵이었다. 그들은 모두 조금씩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여기 적힌 약초를 내놓아라.”
 두목으로 보이는 털보가 검으로 위협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할아버지는 평범한 약초꾼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고분고분 약초를 내주었다. 털보는 돈과 쌀 따위도 요구했고, 그 또한 군말 없이 내주었다. 살인을 밥 먹듯 하는 놈들이다. 당시 열 살이었던 무강은 이불까지 뒤집어쓴 채 두려움에 떨었다.
 다행히 장강오괴는 물건만 챙기고 급히 떠나갔다.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 그때였다.
 “내 잠시 나갔다 오마.”
 “어, 어딜 가세요? 무서운 아저씨들이 또 오면 어쩌라고요?”
 “쫓기는 듯했으니 다시 오진 않을 게다. 금방 다녀올 테니 꼼짝 말고 예 있어라.”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그 악당들을 만나 봉변을 당한 건 아닐까?
 걱정은 점점 불안으로 바뀌었다. 결국 무강은 이불을 걷어치우고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익숙한 산길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어디선가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찾아 나선 그 행동이, 인생을 결정짓는 운명으로 이어질 줄은······.
 부랴부랴 달려간 무강은 곧 운명과 대면했다.
 무인과 무인의 생사결生死決!
 도刀, 검劍, 편鞭··· 장강오괴는 갖가지 무기를 휘두르며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상대는 단 한 명. 놀랍게도 할아버지였다.
 어린 무강이 보기에도 장강오괴의 무공은 실로 대단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쭉쭉 뻗어 나왔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베일 듯 날카로운 기운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온몸이 떨렸다. 두려움과, 그 이상의 강렬한 전율이 온몸을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하, 할아버지······!”
 뒤늦게 무강을 발견한 한 사내가 구절편九節鞭을 휘둘렀다. 폭풍을 일으키며 날아오는 구절편에 무강은 눈을 질끈 감고 주저앉았다. 그러나 구절편은 도중에 멈췄다.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보니 할아버지가 한 손으로 구절편을 휘어잡고 있었다.
 그 순간 할아버지의 몸이 갑자기 몇 배는 커진 듯이 보였다. 느낌만은 아니었다. 낡은 소맷자락이 길게 찢어지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근육이 드러났다. 등판이 찢어지며 상처 가득한 등 근육이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 기묘한 형체가 일렁거린다.
 장강오괴가 경악스러운 눈빛을 지었지만 입을 열 새는 없었다.
 이어지는 일격. 두 번의 공격은 필요 없었다.
 바람을 찢으며 날아간 주먹에 적중된 자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다섯 번의 주먹에, 몇 달이나 여문을 공포로 물들였던 장강오괴는 사라졌다.
 “하, 할아버지······.”
 무강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순간 할아버지는 무강의 입을 틀어막으며 엄청난 속도로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라보니 장강오괴를 쫓아 여문에 왔다는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장강오괴의 시체를 살피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어느 고인이십니까?”
 대답은 없었다. 무인은 이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신분을 밝히기 꺼리시는 듯하니 실례를 무릅쓰고 물러가겠습니다.”
 무인은 그렇게 물러갔고, 여문에는 그가 장강오괴를 처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강에게도 할아버지의 입단속이 있었던 까닭이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무강은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난생처음 본 무인들의 결투. 거기에서 느꼈던 전율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인이 다름 아닌 할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강호객≫ 같은 무협지를 읽으며 막연하게 꿈꿔 왔던 무인이 바로 옆에······!
 장강오괴는 인근 무인들도 당해 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인근에서 제일 강하다는 뜻이 아닌가? 그 순간 무강의 목표가 정해졌다.
 무강은 할아버지를 달달 볶았다.
 할아버지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무강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제대로 밥도 안 먹고 학당學堂도 안 나가고 졸졸 따라다니기를 보름, 결국 할아버지는 한발 물러섰다.
 “맨손으로 저 암벽을 오를 만큼 힘을 기르면 생각해 보마.”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무려 십여 장에 달하는 암벽을 보며 무강은 질려 버렸다. 열 살짜리 아이가 무슨 수로 십여 장이나 되는 암벽을 오른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따졌으나 할아버지는 더 이상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무강은 이를 악물고 암벽 오르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정상에 오르기까지 일 년, 밧줄을 벗어 던지기까지 다시 이 년.
 무려 삼 년 만에 무강은 십여 장짜리 암벽을 정복했다.
 “꽤··· 꽤 대견하구나.”
 말과는 달리 할아버지는 꽤나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약속대로 무공을 가르쳐 주시는 거죠?”
 “안 돼.”
 “에? 왜요!”
 “사실 깜빡했는데 그냥 암벽을 오르는 게 아니었다. 음, 맞아. 넉넉잡고 한 시진 안에 오를 수 있어야 무공을 익힐 수 있다. 대개 강호의 기준이 그래. 맞아.”
 “거짓말, 그런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어요! 방금 생각해 낸 거죠?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오르기만 하면 무공 가르쳐 준다고 했잖아요!”
 마당에 드러누워 발광을 했지만 할아버지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싫으면 관둬라.”
 “좋아요,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요.”
 “그래, 잘 생각했다. 공부나 열심히 해.”
 “흥, 여문에 가서 장강오괴에 대한 일을 모두 까발리겠어요.”
 “뭐, 뭐야? 이, 이놈··· 지금 할애비를 협박하는 거냐?”
 “손자를 속이는 게 더 나빠요!”
 “그, 그래 봤자 할애비는 죄지은 거 없다. 오히려 향장이 고맙다고 인사하러 올걸.”
 그렇게 말하면서도 할아버지는 매우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잘됐네요. 그럼 다녀올게요.”
 결국 할아버지는 백기를 들어 올렸다.
 “알았다, 알았어. 망할 놈 같으니··· 좋다, 한 시진 안에 암벽을 올라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까지의 노력이 가상하니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 그럼 됐지? 대신 장강오괴에 대한 일은 두 번 다시 꺼내지 않는 거다?”
 그렇게 공갈 협박을 무기로 배우게 된 게 양권이다.
 양권은 간단한 토납술吐納術과, 모두 합해 서른 가지도 채 안 되는 간단한 동작을 반복하는 권법이었다. 그래도 꿈에 그리던 무공이다.
 무강은 신 나서 매일 쉬지 않고 연습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뒤 친구들을 통해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양권은 문자 그대로 양권良拳.
 본래 양권은 무공이 뭔지도 모르는 아주 어린 아이들이 장난삼아 배우는 권법이었다. 들어 보니 동전 한 닢만 주면 길거리 거지에게서도 배울 수 있단다. 아니, 귀찮아하며 대충 가르쳐 준 할아버지보다 더욱 친절하게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
 그때 느꼈던 배신감이란······. 그러나 할아버지는 뻔뻔했다.
 “약속은 지켰다. 어떤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정말 이러실 거예요?”
 “더 배우고 싶으면 한 시진 안에 올라가든가.”
 할아버지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거리낌 없이 손자에게 사기를 치는 할아버지의 태도에 열통이 터졌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정말 한 시진 안에 암벽을 오르면 제대로 가르쳐 주실 거죠?”
 “할애비는 한입 가지고 두말하지 않는다.”
 억울했지만 무강은 다시 암벽을 탔다. 그렇게 다시 일 년. 무강은 목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곡괭이질도 사 년쯤 계속하면 달인이 되는 법이다. 암벽등반이라고 다를 것 있겠는가? 무강은 저절로 요령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에, 어떻게 힘을 집중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불필요한 동작을 없애는 법도, 또한 사물을 보는 안목도 생겼다. 눈앞의 편한 길만 봐서는 끝까지 오르지 못한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보다 넓고 길게 봐야 절벽을 오를 수 있음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몸에 익혔다.
 가끔 서윤을 지고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목표인 한 시진에 가까워질 뿐, 다다를 수는 없었다.
 무강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어느 날 암벽을 오르다 보니, 항상 이용하던 돌부리들이 중간 중간 부서져 있었다. 이상했지만 처음에는 별 의심 없이 익숙한 길을 포기하고 한참이나 더 걸리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그러나 다시 그 길에 익숙해질 때가 되면 어김없이 중요한 길목의 돌부리가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같은 일이 일 년간 반복되자 암벽은 거울처럼 반들반들해졌다. 이쯤 되면 바보라도 누구의 짓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치사하지 않아요?”
 “어라? 내가 뭘?”
 곰 같은 덩치로 여우 짓을 하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방해 공작은 그뿐이 아니었다. 암벽을 타기 전에 산길을 반 시진 넘게 달리라고 하질 않나, 멀쩡한 나무를 두드리며 주먹 단련을 하란다. 그렇게 힘을 쭉 빼 놓고 팅팅 부은 손으로 암벽을 오르면 제 속도를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정말 하나뿐인 손자가 추락사라도 해 주길 바라는 걸까?
 그리고 근사치에 가까워진 작년부터는 사실 반 시진이었다면서 우겼다.
 “네가 잘못 들은 게다. 흠흠, 맞아. 그런 거야. 천지신명께 맹세하건대 할애비는 틀림없이 반 시진이라고 했다.”
 이게 정녕 어른의 태도란 말인가.
 그래도 한 시진이라고 했을 때는 나름대로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거울처럼 반들반들해진 암벽을 반 시진 안에 오르라니? 설사 십 년을 더 해도 불가능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공을 가르쳐 줄 생각이 없는 거다.
 힘을 키우고 주먹을 단련하는 건 좋다. 하지만 무문武門에서 무공을 가르치기도 전에 그런 것부터 시킨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강호객≫ 같은 무협지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오 년······.
 무공을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참고 버텨 온 인내심도 슬슬 한계에 달해 있었다.
 
  * * *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서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무공을 익히셨다면 굳이 가르쳐 주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나쁜 짓도 아닌데.”
 “심술이지! 망할 할방구! 그 외에 뭐가 있겠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끝마다 재능이 없다고 하지. 가르쳐 주지도 않으면서 그걸 어떻게 알아?”
 “그 말은 내가 생각해도 좀 억지 같다.”
 “몰라.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해도 관심 없어. 어쨌든 더 이상은 못 참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판을 내겠어. 으라차차차!”
 무강은 이를 박박 갈아붙이며 몸을 끌어 올렸다.
 십 장 암벽의 끝, 정상이었다. 무강은 서윤을 내려놓고 대 자로 누워 길게 숨을 불어 냈다.
 “후아! 오늘은 어때?”
 “음··· 한 시진 반 정도?”
 무강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젠장, 또 중요한 길목의 돌부리가 부서져서 한참을 헤맸어. 용케도 알아챈단 말이야. 이대로라면 평생이 걸려도 한 시진 안에 오르는 건 무리야. 빌어먹을 할방구! 못됐어!”
 “쉽지는 않겠지.”
 “쉽지 않은 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라니까.”
 한참을 툴툴거리던 무강은 곧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조절했다.
 양권과 함께 배운 토납술이다.
 서윤은 피식 웃으며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펼쳤다. 암벽을 오른 뒤 장대하게 뻗은 우령산을 바라보며 무강은 양권을 하고, 서윤은 책을 읽는 것도 이제 일상이 되었다.
 우직한 건지 착실한 건지. 무강은 입으로는 욕하면서도 할아버지에게 배운 토납술과 양권을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연습했다. 무공도 아니라면서 왜 열심히 연습하냐고 묻자 무강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다니까.
 
 조바심이 일어 뭐든지 하지 않으면 불안한 모양이다.
 그만큼 무공에 대한 열정이 강하다는 뜻이리라.
 휘익-! 휘익-!
 얼마나 지났을까? 귓가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 소리에 서윤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무강이 웃통을 벗어 던진 채 양권을 연습하고 있었다.
 비록 단순하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지만 뻗는 주먹이 시원스럽다. 상완근上腕筋에서 대흉근大胸筋, 다시 배근背筋에서 목 근육으로 이어지는 형태는, 힘 그 자체를 형상화시켜 놓은 듯한 박력이 넘친다. 단순한 동작이기에 오히려 더욱 힘이 넘쳐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바위처럼 단단한 질감의 근육은 거저 생긴 게 아니다. 쉬지 않고 암벽을 오르며 깎이고 다듬어져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졌다. 무강의 생각과는 달리 암벽을 오르는 일이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할아버님은 무강의 어디가 부족하다고 하시는 걸까?’
 서윤의 나이 열다섯. 무강 역시 열다섯이다.
 그러나 무강의 덩치는 서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쓸모없는 살점 따위는 조금도 없고 모두 탄탄한 근육뿐이다. 힘도 또래들 사이에서는 단연 으뜸이다.
 작지 않은 덩치의 서윤을 등에 지고 십여 장 암벽을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어른 중에도 흔치 않다. 여문에서 무공을 배운답시고 거만 떠는 녀석들도 무리일 게다.
 실제로 무강은 또래라면 무관武館을 다니는 아이들에게도 져 본 적이 없었다. 서너 명이 덤벼도 이기지 못했다.
 물론 싸움과 무공은 다르다. 무공을 모르는 서윤도 그 정도는 안다. 그러나 무강에게 무공의 재능이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재능이 있다고 믿었다.
 ‘무강의 말처럼 할아버님은 정말 무공을 가르쳐 주기 싫은 것뿐인가? 어째서지? 무공을 익힌 사람은 제자를 찾아 나설 정도로 무공을 가르쳐 주고 싶어 한다던데······.’
 참으로 모를 일이다.
 
  * * *
 
 “더 이상은 못 참아요.”
 무강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단단히 벼른 눈치다.
 “측간에 가거라.”
 “똥 얘기가 아니에요.”
 “아니면?”
 “제 나이가 벌써 열다섯이에요.”
 “많이 컸구나.”
 “그런 얘기가 아니라니까요!”
 “고 녀석 참 시끄럽네. 그래,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무강의 할아버지는 곰처럼 커다란 체구에, 몸에서는 언제나 약초냄새가 풍겨 향웅香熊이라고 불렸다. 그 별명처럼 툇마루에 누워 귓구멍을 후비적거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가을볕에 털 말리는 곰이다.
 “시치미 떼지 말아요!”
 무강은 손바닥으로 툇마루를 탕탕 치며 고함쳤다.
 “말해 봐요. 대체 언제 제대로 된 무공을 가르쳐 주실 거예요?”
 “말했지 않느냐? 반 시진 안에 암벽을 오르면 가르쳐 주겠다고.”
 “틀림없이 한 시진이라고 했잖아요. 왜 말을 바꿔요? 아니, 그건 좋다고 쳐요. 할아버지가 방해만 하지 않았으면 이미 반 시진 안에 올라갔을걸요.”
 “방해? 무슨 말이냐?”
 향웅은 툇마루에서 뒹굴뒹굴하며 의뭉을 떨었다. 곰의 탈을 쓴 여우 같으니!
 무강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한참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말해요. 처음부터 무공을 가르쳐 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죠?”
 “그럴 리가! 나는 절대 한입 가지고 두말 않는다. 약속은 지켜. 암!”
 “우와! 그런 말을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아요?”
 “뭐라고? 이거 참, 귀가 어두우니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할아버지가 또다시 애먼 귓구멍을 후비적거린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정말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열다섯이면 무공을 시작하기에 이미 늦은 나이라는 것쯤은 저도 알아요. 할아버지에게 정말 무공을 가르쳐 줄 마음이 있었다면 벌써 가르쳐 줬겠죠. 가르칠 마음이 없는 거예요. 제가 자포자기하기를 바라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죠?”
 “아니라도 그러네. 말했듯이 나야 가르칠 마음이 넘치지만 네게는 아직 일러.”
 “뭐가 일러요? 이래 봬도 누구하고 싸워서 져 본 적이 없어요.”
 “잘됐구나. 그럼 무공을 안 배워도 되겠네.”
 “정말 이러실 거예요? 자꾸 이러시면 저도 생각이 있다고요.”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때려치워라. 말린 적 없다.”
 향웅은 아예 돌아누워 버렸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해가 중천이다. 징징거리지 말고 늦기 전에 학당이나 갔다 오거라.”
 그러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중얼거린다.
 무강은 이를 빠드득빠드득 갈다가 거칠게 몸을 돌려 버렸다.
 오 년간 수없이 생각하면서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암벽을 타는 일이나 주먹 단련이, 결과적으로는 무공 수련의 일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확신할 수 있다.
 할아버지에게는 무공을 가르쳐 줄 마음이 전혀 없다.
 그리고 이제 기다릴 시간도 없다.
 
  * * *
 
 집에서 여문의 학당, 화죽당까지는 십 리 길이다.
 무강은 여섯 살 때부터 혼자 그 길을 통학했다. 여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고래 등 같은 저택이 서윤의 집이다. 새삼스럽지만 서윤은 여문 제일 부상富商의 외아드님이시다. 그러면서도 결코 뽐내지 않고 씀씀이도 소박한, 밥맛없는 놈이다.
 재수 없는 놈이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아침부터 왜 그렇게 우거지상이냐? 꼴 보기 싫게.”
 “젠장, 뻔하지 뭐. 할방구밖에 더 있어?”
 “새벽 댓바람부터 한판 했냐?”
 서윤은 휘적휘적 소맷자락을 흔들며 대로大路의 정중앙을 걸었다. 무강은 느린 걸음으로 뒤따르며 돌부리를 걷어찼다.
 “역시 할방구는 무공을 가르쳐 줄 생각이 손톱의 때만큼도 없었어.”
 “또 그거냐?”
 “또가 아냐. 이제 더 이상 심술맞은 할방구에게는 부탁하지 않겠어.”
 “뭐? 그럼 무공을 포기하기로 한 거야?”
 굉장히 의외인 듯 서윤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돌아보았다.
 “천만에.”
 “그럼? 무관이라도 들어가게?”
 “헷, 누가 이런 시골 무관 따위······.”
 무강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할 때, 몇몇 소년들이 알은척하며 다가왔다. 무강은 나중에 얘기하자며 고개를 돌렸고, 둘의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본격적으로 가옥들이 몰려 있는 거리로 들어서자 일부러 기다린 듯 다가오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다. 한편으로는 멀리서 알아보고 슬금슬금 물러나는 아이들도 있었다.
 무강과 서윤은 여문에서, 적어도 또래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이었다.
 여섯 살, 처음 학당을 다니게 됐을 무렵 무강과 서윤은 꽤나 눈에 띄었다. 무강은 덩치가 크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어 찍혔고, 서윤은 키만 크고 허약한 체질이라 악동들의 목표가 되었다. ···실수한 거다.
 무강은 악동들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그리고 서윤은 지독했다.
 먼저 걸진 않아도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시작하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 두 팔 두 다리로 못 당한다면 짱돌을 던져서라도··· 도망을 갈지언정 최소한 지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모로 다른 무강과 서윤은 이런 사고방식에서만큼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리고 둘은 실제로 수많은 싸움을 하면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힘이 부족해 얻어맞으면 허벅지를 물고 늘어져서라도 상대를 굴복시켰다. 몰매를 맞으면 어김없이 하나씩 찾아가 아작을 냈다.
 혼자도 지지 않았지만 둘이 모이면 무적이었다. 그렇게 열두어 살이 되자 여문의 소문난 악동들도 이 두 꼴통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그쯤에서 무강과 서윤은 길이 갈렸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얌전하게 공부에 매진한 서윤과 달리, 그 무렵 장강오괴와 할아버지의 사투를 보게 된 무강은 무공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이다. 덕분에 현재는 덩치와 힘이 되는 무강이 혼자 골목대장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무강이 보기에 서윤의 꼴통 기질은 여전했다. 친구의 등에 올라타 십여 장 암벽을 오르는 녀석이 정상일 리 만무하다. 평소에는 얌전한 척하는 것뿐이지.
 어쨌든 이제 여문에서 이 둘에게 시비를 걸 만큼 용감한 녀석은 없었다. 딱 한 녀석을 빼고······.
 “흥, 아침부터 개떼처럼 모여 다니긴··· 사내들이 볼썽사납게.”
 화죽당 앞에 도착하자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강의 가슴팍에도 오지 않는 계집애가 빗자루를 들고 떡하니 팔짱을 낀 채 흘겨보고 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가에 주근깨가 자글자글한 게 꽤나 귀여운 얼굴이다. 그러나 흘겨보는 눈매는 여간 야무진 게 아니다.
 무강은 한숨을 푹 불어 내며 파리 쫓듯 손을 휘저었다.
 “나 지금 기분 안 좋거든? 건들지 마라, 응?”
 “나도 기분 안 좋거든?”
 계집애가 턱을 바짝 치켜들었다.
 “어제 내가 시장에 같이 가자고 했잖아.”
 “시장이고 자시고, 내가 왜 너하고 같이 다녀야 하는데?”
 “당연히 오빠가 날 보호해 줘야 하니까. 내가 좀 예뻐? 내 미모에 홀린 사내들이 험한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오빠랑 다니면 안심이지.”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냐?”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여자들의 정체 모를 자신감은 정말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리고 그런 일이라면 윤이도 있잖아. 집도 가깝고.”
 계집애의 눈이 슬쩍 돌아가자 서윤이 움찔하며 고개를 저었다.
 “윤이 오빠는 안 돼. 실격이야.”
 “고맙다.”
 서윤은 근래 들어 가장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오늘은 나하고 같이 시장에 가야 해. 알았지? 또 새면 죽는다.”
 “됐어. 내가 왜··· 으악!”
 딱!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말이 많아! 오빠는 내가 하라면 하는 거야. 또 약속 어기면 잔뜩 때려 줄 테다!”
 계집애가 양손으로 빗자루를 흔들어 대며 깔깔 웃는다. 웬일로 기특하게 아침 댓바람부터 빗자루를 들고 나왔나 했더니 이런 용도였던 모양이다.
 젠장, 이 녀석이다!
 꼴통으로 소문난 무강과 서윤조차 두 손 두 발 다 들어 버린 진정한 꼴통. 여문 골목의 암중 지배자! 그 정체는 글 스승인 유서평의 손녀로, 소청이라는 들짐승이다. 일찍이 십여 세의 나이로 여문을 평정한 무강과 서윤도 세 살이나 어린 이 녀석만큼은 도저히 어떻게 손써 볼 도리가 없었다.
 “너 정말 혼나 볼래?”
 무강이 주먹을 올려 보이자 소청은 잽싸게 학당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버럭 따라 들어가려던 무강은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찔끔하며 멈춰 섰다. 그 모습에 학사건學士巾을 쓴 부드러운 인상의 노인이 가볍게 웃었다.
 여문의 이괴二怪 중 하나인 화죽당의 주인, 유서평이다.
 이괴란 바로 향웅과 유서평을 가리키는 별명이다. 향웅은 평범한 약초꾼이면서도 엄청난 덩치와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유서평은 과거 황궁에서 큰 벼슬까지 지낸 사람이 이런 별 볼일 없는 촌구석에서 학당을 하고 있어서 괴짜라고 불리는 것이다.
 더구나 큰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향웅과 유서평은 각별한 친분이 있어서 한데 묶여 이괴로 불리게 되었다. 약초꾼의 손자에 불과한 무강이 학당에 다닐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는구나.”
 “스승님, 안녕하셨어요?”
 “음, 할아버지는 편안하시냐?”
 “너무 편안하시죠. 곤란할 정도예요.”
 “조손祖孫이 여전히 사이가 좋은가 보구나.”
 “이가 갈릴 정도죠.”
 무강이 심통 난 표정으로 대답하자 유서평이 껄껄거렸다. 그때, 소청이 유서평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있잖아요, 무강 오빠는 매일 저만 따돌려요.”
 “허, 그건 섭섭하지.”
 “아니, 스승님. 그게 아니라······.”
 “무강아, 바쁘더라도 청이와도 좀 놀아 주려무나. 네가 도망치면 이 늙은이가 고달프단다.”
 “네······.”
 이거다. 소청에게 맥을 못 추는 이유는.
 존경하는 스승님에게서 어떻게 저런 괴물 같은 계집애가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약속했지? 약속했지? 오늘도 내빼면 거짓말쟁이다!”
 소청은 든든한 할아버지의 등 뒤에 숨어 혀를 날름거렸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루빨리 여문을 벗어나지 않으면 복장이 터져 죽을 거야.’
 이것도 확신이다.
 
 
 
 
 #세상 밖으로
 
 
 
 
 “젠장, 망할 계집애······!”
 이리저리 시장을 끌려 다니다가 조금 전에야 간신히 풀려났다. 서윤의 저택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때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치사한 놈, 혼자 날아?”
 “그게 다 네 복이지. 뭘 남 탓을 하고 그래?”
 서윤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대꾸했다.
 “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재앙이다, 재앙!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무강은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 그건 네 죄가 많아서라고 치고. 할 얘기가 뭔데?”
 툭 던진 질문에 무강이 벌떡 일어나더니 바짝 다가왔다.
 “나 결심했다.”
 “그러니까 뭘?”
 “떠날 거다.”
 “에?”
 “떠난다고. 집을··· 아니, 여문을 떠날 거야.”
 “아아, 그러냐? 잘 다녀와라. 선물 잊지 말고.”
 “뭐야? 무슨 반응이 그래?”
 무강이 개구리처럼 볼을 부풀리자 서윤은 한숨을 푹 불어 냈다.
 때때로 무강은 덩치에 안 어울리는 짓을 한다.
 거리에서 싸울 때나 암벽을 기어오를 때 보면 정말 귀신같다. 뭔가 목표를 정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야 만다.
 그런 점은 확실히 어른스럽지만, 때때로 지금처럼 지나칠 정도로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다. 솔직히 그런 의외의 구석 때문에 서윤이 무강을 더욱 좋아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서윤은 항상 이 혈기 넘치는 친구에게 충고하는 일은 자신의 몫이라고 여겨 왔다.
 서윤은 일일이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재작년에 두 번, 작년에 세 번. 무슨 횟수인지 알지?”
 무강이 가출한 횟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출했다가 잡혀 온 횟수였다.
 무강이 가출 얘기를 꺼낸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무공을 배우고 싶어 할아버지를 볶아도 봤고 삶아도 봤다. 그러나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약속을 들먹이며 콧방귀도 뀌지 않자 생각해 낸 방법이 가출이었다.
 
 흥, 무공 가르쳐 줄 사람이 할아버지밖에 없는 줄 알아요?
 
 꽤나 도발적인 쪽지만 남기고 집을 나간 횟수가 무려 다섯 번.
 그러나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다. 가출 최장 기간은 고작 사흘, 나머지는 대부분 이틀 안에 잡혀 와 죽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두들겨 맞았다. 어두운 과거다.
 막상 돌이켜 보니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틈틈이 폭행까지 일삼는 할아버지 밑에서 용케 삐뚤어지지 않은 게 대견스러울 정도다. 어쨌든 일단 과거는 묻어 두고······.
 “이번엔 달라.”
 “흠, 어떻게 다른데?”
 서윤은 꽤나 불량스러운 자세로 되물었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에는 여문. 아니, 길림성을 벗어나 정말 멀리 떠날 거야. 대단한 문파에 들어가 굉장한 무공을 배울 거야. 잘난 척하는 할방구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어.”
 “뭐? 너 설마······?”
 그제야 서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지금까지의 가출 실패는 향웅의 재주가 신통해서만은 아니다. 가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나왔지만 사실은 정말 가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정답이다.
 무강은 바보가 아니다. 정말 가출할 생각이 있다면 여문의 도장이나 기웃거리고, 기껏 여문을 벗어나서도 유서평이나 동문同門들의 눈에 띌 만한 장소에서 꼼지락거릴 이유가 없었다. 가출이란 할아버지를 향한 반항, 혹은 공갈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영리한 서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길림성을 떠날 결심을 했다면 얘기는 다르다.
 “너,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물론!”
 “친구로서 말하는데, 한때의 기분으로 결정한 일이라면 그만둬.”
 “그런 게 아니야. 모르겠어? 정말 많이 생각했어. 역시 결론은 같아.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못된 할방구는 몇 년이 지나도 제대로 된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을 거야. 분명해.”
 “그래도 좀 더 기다려 보는 편이 좋지 않아?”
 “이제 시간이 없어. 너나 나나, 벌써 열다섯이라고.”
 무강은 조바심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무문에서는 늦어도 열 살에는 무공에 입문한다. 무공이란 오늘 배워서 내일 쓸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공부가 아니다. 적어도 이십 년은 수련해야 무공의 본뜻을 깨친다고 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열 살에 시작해도 서른은 되어야 성취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좁은 여문에서 자랐지만 무강 또한 그 정도 상식은 알고 있었다.
 무강의 나이 이미 열다섯. 무공에 뜻을 뒀다면 지금도 꽤나 늦은 나이다. 그것이 조바심의 정체였다.
 “더 늦으면 기회는 없어.”
 서윤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이러면 어때? 네가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일단 여문의 무관에 입문해라. 돈이 문제라면 내가 아버님께 말씀드려서 어떻게든 융통해 볼게.”
 “몇 번을 말해야 돼? 나는 진짜 무공을 배우고 싶은 거야.”
 “대체 네가 말하는 진짜 무공이라는 게 뭐냐?”
 이해할 수가 없는 듯, 서윤은 묘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진짜 무공이라는 것도, 네가 갑자기 무공에 목을 매는 이유도. 옛날에는 매일 치고받으면서도 딱히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 강호객처럼 강호에 이름이라도 날리고 싶어진 거야?”
 “그런 이유도 있지.”
 “다른 이유도 있다는 말이군.”
 “이유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나는 강해지고 싶어.”
 “그런 이유라면 더 납득이 안 가는걸. 너는 이미 충분히 강해. 여문에서는 당할 자가 없잖아. 지금의 너라면 아마 우리 집에 드나드는 표사鏢師와 겨뤄도 지지 않을 거야.”
 “···너는 아마 설명해 줘도 이해 못 할 거야.”
 무강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무강의 의식은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던 오 년 전 그때, 그 장소를 향해 있었다. 장강오괴와 할아버지의 사투···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싸움 이상의 무엇이었다. 단순한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넘어선 그 어떤 힘의 충돌.
 무강이 말하고 싶은 강함이란 그것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것이 존재하는 곳은 진정으로 강한 자들의 세계, 무림이다. 무공은 그 무림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을 서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당부 때문이 아니라, 범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그 힘과 투쟁을 맹목적으로 원하는 스스로의 감정을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여문의 무관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강호에서 도망쳐 온 장강오괴조차 당하지 못했던 실력이라면 무강이 상상하는 무공과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할아버지, 아니면 혼자서 장강오괴를 도망치게 만들었던 그때의 무인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죽자 사자 할아버지에게 매달린 이유다.
 그러나 요즘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 진짜 강호라면 할아버지도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니리라. 강호에서도 통할 무공을 익혔다면 약초나 캐고 있을 리가 없다. 도망쳐 온 장강오괴도 마찬가지.
 아마도 어렸을 때 봤기 때문에 상황이 조금 과장되었으리라.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 갇힌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거야.’
 할아버지보다 강하고, 장강오괴를 벽지로 도망치게 만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
 ‘강호로 나가자!’
 이 같은 결론에 도착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무武보다 문文에 뜻을 둔 서윤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모르겠다. 왜 그렇게까지 강해지고 싶어 하는지.”
 “남자니까.”
 “뭐?”
 “이유를 대라면 그 말밖에 해 줄 수 없어. 남자니까 강해지고 싶은 거야.”
 서윤은 무강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역시 모르겠어. 하지만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는 않군.”
 “너라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이해한 게 아니야. 포기한 거지.”
 “지금은 그거면 돼.”
 “좋아. 그보다, 그렇게 오래 생각했다면 뭔가 대책은 세워 놨겠지? 길림성을 빠져나가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어설프게 가출했다가는 반나절도 못 가서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올걸. 무슨 말인지 알지?”
 “알지.”
 사실 가출의 가장 큰 걸림돌은 할아버지보다 유서평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유서평은 굉장히 훌륭한 유학자다. 여문은 물론, 길림성 곳곳에서 유서평의 수업을 듣겠다고 찾아오는 유생은 한둘이 아니다. 말하자면 무강의 동문 선배들인 셈인데, 이들이 명성이 자자한 화죽당의 꼴통을 몰라볼 리 만무하다.
 가출 경력이 만만치 않은 무강이 여문 밖에서 얼쩡거리면 틀림없이 유서평의 귀에 들어갈 테고, 할아버지가 따라붙으면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아니, 잘나신 선배들께서 직접 몽둥이를 들고 상습적으로 가출을 일삼는 후배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너무 훌륭한 스승님을 둔 게 꼭 좋은 일만도 아닌 것이다. 덕분에 막강한 인맥을 뚫고 길림성을 빠져나가는 일은 이미 가출이 아니라 탈출에 가깝다.
 그러나 무강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너만 내 편이면 돼.”
 서윤의 얼굴색이 안 좋아졌다.
 “눈빛이 수상한데?”
 “들어 봐.”
 무강이 구체적인 작전을 설명하자 서윤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결국 나에게 몽땅 덤터기 씌우고 도망가겠다는 거 아냐?”
 “그냥 모르는 척 오리발만 내밀면 돼.”
 “그게 먹히겠냐?”
 “넌 전과가 없으니 먹힐걸.”
 “썩을 놈, 전과 많은 게 자랑이냐? 좋아.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자. 그다음은? 길림성을 나가면 뭔가 대책은 있는 거야?”
 “어떻게 되겠지. 강호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모래알처럼 많다잖아.”
 “대책 없는 놈 같으니! 나도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해.”
 서윤은 욕설을 내뱉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솔직히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다만 도와주지. 대신 두 가지만 약속해. 반드시 성공해라. 어디에 있든 내게는 꼭 연락을 보내고. 친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해 줄 수 있어?”
 “물론이지.”
 무강도 열다섯, 서윤도 열다섯.
 아직은 어리고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나이였다.
 
  * * *
 
 “할아버지, 윤이네 집에 다녀올게요.”
 “그래라. 서 대인께 폐 끼칠 일은 하지 말고.”
 “내가 어린애예요?”
 “어린애가 아니니까 걱정이지.”
 향웅은 평소와 다름없이 약초를 다듬으며 대꾸했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돌아서려던 무강은 멈칫했다. 천천히 시선이 움직였다. 마당 한편에 놓여 있는 작은 닭장이며 채소밭, 장독 따위가 새삼스럽게 정겹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은 곳은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 툇마루였다. 잠시 눈가에 주저하는 기색이 어렸지만 금세 고개를 저어 버렸다.
 ‘할아버지도 이해해 주실 거야.’
 “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러고 있는 게냐? 안 가냐?”
 “가요. 밥 잘 챙겨 드세요.”
 “쥐약을 처먹었냐? 안 하던 소릴 다 하고.”
 “쳇, 됐어요.”
 무강은 뾰로통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집을 나섰다. 평소 같지 않은 손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향웅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반 시진 뒤, 무강은 여문에 도착했다.
 꽤나 이른 시간인데도 저잣거리는 떠들썩했다.
 내일이 바로 구월 구일, 중양절重陽節이라 거리는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사방에서 폭죽이 터지고 거리는 꽃가루로 가득하다.
 중양절이 다가오면 사흘간 대부분의 점포가 문을 닫아걸고 밤낮으로 축제를 즐긴다. 화죽당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대부호인 서윤의 저택에서는 잔치를 벌였다.
 무강은 해마다 중양절 사흘간은 서윤의 저택에 머물렀다.
 중양절을 가출 결행일로 택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집에도 학당에도 가지 않아도 되니, 서윤만 입을 다물면 사흘간은 누구도 모른다. 그사이 길림성을 빠져나가면 상황 끝이다. 몇 달 전부터 생각했던 계획이다.
 문제는, 유서평의 인맥으로 펼쳐진 촘촘한 그물에 걸리지 않고 어떻게 길림성을 벗어나느냐 하는 것이었다. 선배들의 감시망에 걸려 행로가 들통 나면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최단거리로 길림성을 빠져나가는 방법.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한 끝에 찾은 해답이 바로 서윤이었다.
 대부호인 서윤의 저택에는 매일같이 교역품이 드나든다. 그리고 때마침 중양절 전날, 요령성遼寧省으로 출발하는 짐마차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짐마차에 숨어들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요령성까지 갈 수 있으리라.
 일명, ‘비책秘策! 친구 팔아 요령성에’라는 작전이다.
 무강은 치밀한(?) 작전 수행을 위해 틈틈이 모아 둔 독립 자금(?)으로 준비물을 챙겼다.
 마차로 이동한다고 해도 요령성까지는 닷새 이상의 거리다. 일단 숨어들면 닷새간은 꼼짝도 못 한다는 뜻이다. 가출도 좋지만 마차에 숨어든 채 말라죽을 수는 없으니, 건량이며 물 따위는 기본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준비를 끝마친 무강은 약속한 정오 무렵, 서윤의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저택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후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가까워도 서윤은 나타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큰일인데, 오늘이 아니면 안 되는데······.’
 어영부영 일다경一茶頃이 지나자 슬슬 불안해졌다.
 무강은 안절부절못하며 담장 너머를 흘끔거렸다. 그때, 후문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무강은 재빨리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무강아?”
 후문이 빠끔 열리며 서윤이 얼굴을 내밀었다. 무강은 반색하며 다가갔다.
 “걱정했잖아. 왜 이제야 나온 거야?”
 “그게··· 조금 문제가 생겨서··· 일단 들어와 봐.”
 “문제?”
 “왁!”
 고개를 갸웃거리며 후문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가 툭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간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지레 놀란 눈으로 돌아보니 꼬맹이 계집애였다.
 명절이라 그런지 새 옷 티가 좔좔 흐르는 청삼靑衫에 노리개까지 붙인 귀여운 소녀. 그러나 속으면 안 된다. 보기엔 귀여워도 그 정체는 흉악무도한 무강의 천적天敵, 소청이다. 그녀는 소맷자락을 들어 올린 채 한 바퀴 돌아 보이더니 배시시 웃었다.
 “에헤헤! 오빠, 나 이쁘지?”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서윤이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해. 아무리 말해도 널 보겠다고 떨어지지 않잖아.”
 아아, 두통이 밀려온다. 그러고 보니 중양절 축제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던 녀석이 있다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너 빨리 집에 가!”
 “흥, 나한테 그렇게 얘기해도 될까? 후회할 텐데?”
 “내가 뭐가 무서워서··· 엇? 가만, 뭐라고? 윤이 너 설마······?”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잖아. 어디 내 말이 먹힐 녀석이냐? 시간은 없고 죽어도 안 떨어지니··· 어떻게든 탄로 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서윤은 이제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늘이 노래졌다. 가장 들키면 안 되는 사람에게 들켜 버리다니!
 ‘이제 가출이고 뭐고 다 글렀어! 얼마나 오랫동안 계획한 건데,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 버리다니······.’
 무강은 넋 나간 얼굴로 돌이 돼 버렸다. 괜히 천적이 아니다.
 소청은 떡하니 팔짱을 끼고 흐흐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나 할아버지한테 안 이를게.”
 “뭐? 그, 그게 정말이야?”
 “응. 오빠 돈 벌러 가는 거라며?”
 “돈?”
 영문 모를 소리에 무강이 미간을 찡그리자 서윤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맞아, 내가 말했잖아. 돈 벌러 가는 거야. 하지만 스승님이나 무강이 할아버님이 아시면 허락하지 않으실 테니까 비밀로 해야 하는 거라고. 너도 그 정도는 알지? 무강아, 청이도 이미 다 아는데 새삼스럽게 숨길 게 뭐 있어?”
 “어? 아아, 맞아.”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윤이 저러는 이유가 있겠지. 무강은 얼른 입을 맞췄다.
 소청은 잠시 수상쩍은 눈으로 흘겨보다가 곧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 걸 왜 나한테 숨겨? 진즉 말했으면 청이도 도와줬잖아.”
 “뭐? 네가 왜?”
 “몰라서 물어? 어차피 오빠 돈이 내 돈이 될 건데.”
 “에? 아무래도 좋다만, 내 돈이 내 돈이지 왜 네 돈이야?”
 “아이, 알면서··· 꼭 내 입으로 얘기해야 돼? 어차피 오빠가 데려갈 거잖아.”
 소청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에엑? 뭐, 뭐야? 설마? 으헉! 뜬금없이 무슨 징그러운 소리야?”
 “왜 그런 표정이야? 얘기했잖아. 나 오빠한테 시집갈 거야. 그러라며?”
 “그거야 당연히 농담이지! 너 바보냐?”
 “몰라, 오빠가 한 말이니 책임져. 난 이미 그렇게 정했어. 그러니까 오빠는 그냥 고마워하면 돼. 돈이나 많이 벌어 와. 아니, 돈은 됐다. 빨리나 와. 기다릴게.”
 “얘가 아침에 못 먹을 걸 먹었나? 이제 겨우 기저귀 벗은 꼬맹이가 뭘 안다고 시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냐?”
 “어린애 아니다! 할아버지도 나 시집보내도 되겠다고 하셨다, 뭐!”
 “자꾸 장난치면 오빠 정말 화낸다.”
 “장난 아니야!”
 소청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못됐어! 그럼 나도 오빠 안 도와줄 거야! 소리칠 거야!”
 반쯤은 우는 얼굴로, 반쯤은 웃는 얼굴로 지켜보던 서윤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소청이 왁왁하며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놔! 다 일러 줄 거야!”
 “이크, 깨물지 마! 아니야, 바보야. 무강이 녀석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네 앞에서는 저래도 항상 너 아니면 장가 안 가겠다고 한단 말이지. 얘기했잖아. 돈 벌러 가는 것도 그 때문이야. 일이 년 돈 벌어 돌아올 거야.”
 “너 이 자식, 누구 멋대로 유언비어를! 네가 자꾸 그런 말 하니까 이 녀석이······.”
 서윤이 무강의 귀를 확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이 녀석 성격 몰라? 시간 없어, 멍청아. 곧 마차 출발한다고! 일단 적당히 입 맞춰.”
 “그··· 그래, 서윤이 말이 맞아.”
 무강이 한숨처럼 대답하자 소청의 눈에서 펑펑 쏟아져 나오던 눈물이 순식간에 쏙 들어갔다.
 “정말?”
 “그래그래, 정말이다.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맘대로 해라. 대신 오늘 일은 비밀이야. 알지?”
 “알았어. 할아버지도 가가可可가 하는 일은 참견하는 거 아니라고 했어.”
 “가가······?”
 “자, 그럼 약속. 비밀 지키면 돌아와서 혼인하는 거다?”
 손가락까지 걸어 주자 그제야 배시시 웃는다. 순진한 건지 영악한 건지 모르겠다.
 “남아일언 중천금인 거 알지?”
 문자까지 쓰는 걸 보면 바보는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경우 없는 짓만 골라 하는지 모르겠다.
 무강이 찜찜한 표정으로 투덜대는 사이, 주변을 살펴본 서윤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서둘러. 아까 품목 확인이 끝났으니 곧 마차가 출발할 거야. 준비는 다 하고 온 거지?”
 “응.”
 “자, 이거 받아 둬.”
 서윤은 두툼한 돈주머니를 쿡 찔러 넣어 주었다.
 “돈은 나도 조금 있는데······.”
 “많지 않아. 잔말 말고 받아 둬. 대신 정착하면 꼭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이거도! 이거도! 정표야, 정표!”
 그제야 생각난 듯 소청이 노리개를 뚝 떼어 건네주었다. 하여간 남들이 하는 건 다 하려 든다.
 “자, 내가 표사들을 유인할 테니까 그사이에 들어가. 오래는 못 끄니까 서두르고. 한번 출발하면 좀처럼 마차 안을 살펴볼 일이 없으니 요령성까지는 별문제 없을 거야.”
 서윤은 무강의 손을 꽉 잡고는 대답할 새도 없이 뛰어나갔다.
 마차를 살피던 표사 둘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엇,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짐 옮길 게 있어서 그런데 좀 도와주시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들 바빠서······.”
 “여부가 있습니까. 어디죠?”
 “창고의 큰 술독이에요. 마당까지 옮겨야 하니 두 분 다 가셔야 될 거예요.”
 “하지만 여기를 비워 둘 수는 없는데요.”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가 보세요. 급하다고 하셔서요.”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표사 둘이 창고 쪽으로 향했다.
 주변을 쭉 훑어본 서윤은 적당히 시선을 막으며 등 뒤로 신호를 보냈다. 잔뜩 벼르고 있던 무강은 한걸음에 마차로 뛰어올랐다. 상자 뒤편에 적당한 자리를 찾아 천막을 뒤집어쓰려는데, 쪼르르 따라온 소청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바람피우면 죽는다!”
 
  * * *
 
 덜컹덜컹.
 마차가 위아래로 요동쳤다.
 천막을 뒤집어쓰고 상자 틈에 낀 채 하는 여행은 역시 할 짓이 못 됐다.
 벌써 사흘이 지났다. 흔들리는 마차에 앉아 꼼짝도 못 하니 엉덩이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다. 몸은 뻣뻣하게 굳어 버렸고, 끼니때마다 씹어 대는 건량도 물릴 대로 물렸다.
 그러나 정말 곤혹스러운 건 먹는 문제가 아니었다. 먹고 난 다음··· 누구라도 먹으면 싸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름 주도면밀하게 요강까지 챙겨 왔지만 좁고 흔들리는 곳에서 대소변을 처리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게다가 뚜껑을 덮어도 새어 나오는 냄새란······!
 그러나 누굴 원망하겠는가? 남 것도 아닌 것을······.
 환기라도 시키면 좋겠지만 행여 들킬까 싶어 천막을 걷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숨소리조차 조심해야 했고, 잠시 눈을 붙일 때 외에는 언제나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길림성을 빠져나갈 때까지만 참으면 돼.’
 요령성까지는 닷새가 걸린다고 했으니 이제 하루 남았다. 힘들고 괴롭기 짝이 없지만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그조차 즐거웠다. 대체 무슨 근거에서 그리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산간벽지에 살던 촌놈은 도시에 가기만 하면 무조건 파란만장한 인생이 펼쳐지리라 믿는 경향이 있다. 여문 촌놈인 무강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령성에 도착해 느긋하게 하북성에 입성하면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강호다. 아니, 요령성만 해도 꽤 유명한 문파가 많다고 들었다. 아마도 책에서나 보던 엄청난 무공들이 무강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때가 되면 지금의 고난도 그저 추억에 지나지 않겠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할방구도 지금쯤은 내가 가출한 걸 알았겠지?’
 비록 다부진 각오를 했지만 역시 늙은 할아버지를 홀로 두고 떠나온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금세 고개를 털어 버렸다.
 ‘흥! 못된 할방구 걱정할 필요 없어. 쇠도 씹어 먹는 노인넨데 뭘. 굉장한 문파에 들어가서 한 이삼 년 무공을 배운 뒤 돌아가면 할방구도 뭔가 깨닫는 게 있겠지.’
 무강은 멋진 미래···라기보다는 망상에 젖어 있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아마도 평소라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긴장의 끈이 너무 풀어졌던 모양이다.
 “우왓!”
 마차가 돌부리에 걸려 심하게 흔들렸다. 꾸벅꾸벅 졸던 무강은 옆의 상자에 머리를 찧으며 비명을 질러 버렸다.
 뒤늦게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싸 버린 똥이었다.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마차가 멈췄다. 하나 둘, 표사들이 마차 입구로 모여드는 기척이 들려왔다.
 “누구냐? 다치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나와라!”
 식은땀이 철철 흘러넘쳤다.
 서윤의 저택에 자주 드나들었던 무강은 당연히 표사들과도 안면이 있었다.
 얼굴을 보이면 큰일을 당할 일은 없다. 그러나 상습 가출범으로 알려진 무강을 순순히 놔주지도 않을 거다. 꽁꽁 묶어 여문으로 끌고 가거나, 최소한 연락은 취하겠지.
 그다음은 뻔하다. 할아버지에게 작살이 나고 강호의 꿈도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리라.
 그뿐인가? 두 번 다시 같은 방법으로는 가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애매하게 욕을 먹게 될 서윤에게도 면목이 없다.
 ‘그것만은 안 돼! 맞아 죽으면 죽었지, 여기까지 와서 다시 끌려갈 수는 없어!’
 무강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천 조각을 찢어 내 얼굴을 둘둘 감았다.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떳떳한 놈은 아닌 게로구나!”
 천막 안에서 꿈지럭거리는 모양을 보았는지 누군가 버럭 소리쳤다.
 “허튼수작 부려 봐야 소용없다. 끌어내라!”
 표사 한 명이 마차 위로 올라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잔뜩 벼르고 있던 무강은 돌연 천막을 확 벗어젖히며 몸으로 들이받았다. 굉장한 소리가 울리며 상대는 양팔을 허우적거리다가 마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지금이다!’
 무강은 껑충 뛰어 마차에서 내려섰다. 볼 것도 없이 그대로 줄행랑을 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표사가 무강을 품品 자 형태로 포위한 것이었다. 우두둑거리며 주먹을 벼리는 세 명 모두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얼굴부터 가린 걸 보니 좋은 의도로 숨어든 놈은 아닐 터.”
 뒤쪽에서 약간 뚱뚱한 몸집의 우락부락한 중년인이 다가왔다.
 안면은 없지만 누구인지 짐작은 갔다. 얼마 전 새로 온 표두?頭로, 장경이라는 사내다. 여문 무관 출신인 다른 표사들과 달리 그는 강호에서 제대로 무공을 익혔다고 들었다. 서윤의 아버지가 상당히 큰 돈을 들여 어렵게 데리고 온 팔괘장八卦掌의 고수라고 했다.
 “언제부터 숨어 있었던 게냐?”
 “······.”
 대답할 수 없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알아볼 표사가 있기 때문이다.
 “무시하는 게냐?”
 덕분에 장경은 꽤나 기분이 상해 버렸다.
 “보아하니 좀도둑인 모양인데··· 서가장庶家莊의 물건을 노리다니. 운이 없거나,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온 놈이구나. 이 장경이 서가장에 있음을 몰랐더냐? 당장 복면을 벗고 무릎을 꿇어라. 저항한다면 다치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게다!”
 무강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도둑이 아니다!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이런 의미가 담긴 행동이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과 그만한 교감이 통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아니, 통하지 않는 걸로 끝나면 그나마 낫지만, 의도와는 반대로 장경의 화를 돋우는 결과를 초래해 버렸다.
 장경의 수염이 바짝 치켜 올라갔다.
 “그렇게는 못 하겠다? 이 장경의 이름을 듣고도 그리 나오는 건 뭔가 믿는 재주가 있다는 말이렷다? 좋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재주인지 두고 보자. 여봐라, 당장 저놈의 다리몽둥이를 분지르고 그 잘나신 얼굴을 확인해 드려라. 믿는 게 있는 모양이니 사정 봐줄 것 없다!”
 표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비록 고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싸우는 재주를 팔아 먹고사는 자들이다. 길거리 건달과는 수준이 다르다. 특히 대단한 무공이 없는 만큼, 여럿이서 한 명을 패는 일에는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역시 포위망이 좁혀 오자 상당한 중압감이 느껴졌다.
 “틀림없이 암기暗器를 숨기고 있을 게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장경의 말에 세 표사는 곤棍을 빼 들었다. 자루 끝에 달리 쇠붙이가 살벌하다. 자칫하다가는 정말 꼴사나운 모습으로 귀향할지도 모르겠다.
 ‘젠장, 어쩌지?’
 일대일의 승부라면 표사를 상대로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실제로 겨뤄 본 적도 있었다. 당시 느꼈던 건, 약하지는 않지만 강하지도 않다는 정도였다.
 물론 무관 출신이니 기술은 한참 위였다. 그러나 암벽을 오르고 산을 뛰어다니던 무강보다는 힘이 세지도, 날렵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무강은 싸움에 이골이 난 여문의 꼴통이다. 대련이 아닌 싸움이라면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셋이나 된다면 얘기는 다르다. 싸움에 이골이 났지만, 아니 싸움에 이골이 났기에 혼자서 여럿을 상대하는 게 말처럼 간단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무조건 한쪽을 치고 내빼는 게 최선이야.’
 무강은 망설이지 않았다.
 포위됐을 때는 망설일수록 손해다. 형태를 갖추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무강은 조헌이라는 신참 표사를 향해 와락 달려들었다.
 “엇, 이 자식이!”
 조헌은 기겁하며 곤을 휘둘렀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무강은 온몸을 경직시키며 급제동을 걸었다. 너무 일찍 휘둘린 곤은 허공을 갈랐다. 신참이라 아직 경험이 없는 탓이다.
 ‘미안해, 조헌 형! 날 위해 희생양이 돼 줘!’
 콰직!
 생각과는 달리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지막지한 주먹이 조헌의 얼굴을 후려쳤다. 어려서부터 나무를 후려치며 단련한 철권이다. 얼굴에 박히자 뭔가 부서져 나가는 소리가 울리며 조헌이 털썩 주저앉았다.
 무강은 껑충, 조헌을 뛰어넘었다.
 “저, 저런 쓸모없는 자식! 저따위 애송이에게 당하다니!”
 장경이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뚱뚱한 체구로는 상상도 못 했던 속도였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오더니 일 권을 내질렀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강한 기운이 담긴 주먹이다.
 ‘이런 빌어먹을! 정말 죽일 생각이냐!’
 무강은 반사적으로 한쪽 다리를 축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했지만 양권의 연환퇴連環退를 응용한 동작이었다.
 주먹이 빗나가자 장경의 눈초리가 꿈틀거렸다.
 숨 돌릴 틈 없는 연속 공격이 펼쳐졌다. 주먹을 빨아들이며 발을 차올린다. 이어 한 걸음 내디디며 다시 일 권을 내질렀다. 번쩍이는 손과 발의 움직임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강은 쉬지 않고 연환퇴를 밟으며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오 초招를 펼쳐 낸 장경의 입가에 문득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흥, 뭔가 있는 줄 알았더니 도망가는 잔재주 하나 믿고 까부는 놈이었구나!”
 몇 차례의 공방으로 장경은 무강이 보기보다 강하지 않다고 확신했다.
 도망가기는커녕 장경의 교묘한 수법에 밀려 오히려 궁지에 몰린 무강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죽든 살든 붙어 보는 수밖에 없어!’
 “으랏!”
 무강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장경이 흐르듯 양손을 교차시키자, 무강은 빨려 들 듯 그의 손끝에 걸린 채 끌려 들어갔다. 어어어, 하는 사이에 장경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무강은 다시 주먹을 후려쳤다. 순간 장경의 몸이 쑥 하고 가라앉았다. 그 상태로 빙글 몸을 회전시킨 장경은 힘차게 진각震脚을 밟으며 일 장을 내뻗었다.
 투웅-!
 동시에 무시무시한 충격이 무강의 가슴을 관통했다.
 “커헉!”
 육 척에 달하는 무강의 거구가 수 장이나 날아가 마차를 들이받았다.
 무강은 숨이 턱 막혔다. 때렸다기보다는 쏘았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일격이었다. 사람의 손에서 나온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경악한 표정을 지은 사람은 무강이 아닌 장경이었다.
 “뭐냐, 저놈은? 대체 뭐로 만들어진 몸뚱이이기에 탄경彈經을 맞고도 멀쩡하단 말인가?”
 ‘탄경? 이게 진짜 무공의 힘인가?’
 무강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장경을 바라보았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충격에, 복부에서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만약 찰나의 순간에 반사적으로 몸을 빼지 않았다면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한 방은 견뎌 냈지만 다음 공격까지 버텨 낼 자신은 없었다. 장경을 실력으로 누를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어쩌지? 정말 맞아 죽을지도 몰라. 정체를 밝히는 수밖에 없나?’
 고민하던 무강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묘책이 떠올랐다. 무강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마차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놈,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당장 나오지··· 억!”
 달려들던 장경이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물러났다.
 무강은 한 손을 장경에게 내민 채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왔다. 무강이 다가서는 만큼, 장경과 표사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무서워서가 아니다. 더러워서였다.
 무강의 옆구리 쪽에는 사흘간 사용한 요강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뻗은 손에는 누리끼리한 내용물이 질퍽하게 묻어 국물을 뚝뚝 흘려 댔다. 보기만 해도 역겹다.
 “빌어먹을, 마차 안에 왜 저런 게 들어 있는 거야?”
 “저, 저놈, 미친 거 아냐?”
 “어떻게 좀 해 봐!”
 그러나 누구 하나 앞으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장경 역시 질려 버린 얼굴로 양손을 휘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이, 이봐! 진정해. 흔들지 말··· 어허! 가만있으라니까! 말로 하자!”
 “흐흐흐흐.”
 무강은 똥 묻은 손을 휙휙 휘두르며 슬금슬금 포위망을 벗어났다.
 주먹보다 무서운 게 똥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제, 젠장! 뭘 뻔히 쳐다보고 있는 거냐! 당장 잡지 못해!”
 장경이 버럭 소리치자 그제야 표사들이 와락 달려들었다.
 그러나 무강이 허공에 대고 요강을 확 뿌리자 몇 배나 빠르게 물러났다. 그때, 슬쩍 뒤로 이동한 장경이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뒤로 이동할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무강은 버럭 몸을 돌리며 요강을 있는 힘껏 던졌다.
 “엇? 이놈이!”
 장경은 반사적으로 일 장을 후려쳤다.
 쨍강!
 그리고··· 기어코 사단이 벌어졌다.
 요강이 깨지며 사흘간 쌓이고 쌓였던 그것들이 장경에게 쏟아진 것이다.
 졸지에 똥물을 뒤집어쓴 장경은 멍하니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커서 다리가 풀려 버린 모양이다.
 “장 표두님!”
 “괘, 괜찮으십니까?”
 참으로 민망한 질문이지만, 그것 외에는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저··· 저 자식을 당장 잡아 와! 내···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다!”
 장경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그러나 무강은 정신없는 틈을 타 벌써 산비탈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표사들이 서둘러 뒤쫓았지만 밥 먹고 산 타는 게 일과였던 무강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한 식경가량 뒤쫓던 표사들은 결국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산짐승 같은 놈입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도둑이라 신법身法을 익히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나같이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장경은 시퍼런 눈빛으로 뿌득뿌득 이를 갈아붙였다. 표사들이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물었다.
 “말을 타고 산을 돌아서 추격해 볼까요? 지금 출발하면 앞질러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멍청아, 산으로 도망간 놈이 일부러 길로 돌아오겠냐?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짐이나 조사해 봐. 납품할 품목이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낭패다. 서둘러!”
 표사들이 우르르 마차로 몰려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품목을 맞춰 보던 표사가 안도의 한숨을 불어 내며 보고했다.
 “다행히 상품들은 그대로입니다.”
 “좋다, 그럼 이곳에서 잠시 쉬도록. 나는 냇가에서 씻고 오겠다.”
 “네. 그런데 서가장에는 연락을 취해야 할까요?”
 장경이 우뚝 멈춰 서며 입을 열었다.
 “없어진 물건도 없으니 알릴 필요 없다. 아니, 이 일은 비밀이다. 지금 있었던 일을 입 밖에 내면 누구라도 아가리를 뭉개 놓겠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표사들은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다음 날, 산길을 쉬지 않고 달린 무강은 무사히 요령성의 경계를 넘었다.
 계획했던 바는 아니지만 장경의 함구령緘口令 덕분에, 탈출은 더럽지만 완전범죄로 마무리된 셈이었다.
 
 
 
 
 #기회를 주세요!
 
 
 
 
 
 백무련白武聯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 최대 세력이다.
 정식 명칭은 백도 무림연맹. 저 유명한 구파일방을 위시한 백여 중소 문파의 연맹 세력이다.
 연맹이니 문파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무력이나 발언권은 강호에서 비할 곳이 없다. 특히 직계直系 제자弟子에게 전수되는 무공은 당대 최고 최강으로 인정받았다.
 다음이 구파일방九派一幇.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구파일방은 무림 그 자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강호, 특히 무림에서 구파일방이 의미하는 바는 보통 사람들의 상상 이상으로 크다. 강호에서 무명武名을 날리는 고수는 대부분 크든 작든 구파일방과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의 자랑으로 여긴다. 즉, 구파일방에 문제가 생기면 궂은일을 자청하고 나설 사람이 강호에 널리고 널렸다는 의미다.
 그야말로 일성십만一聲十萬.
 종으로 횡으로 강호를 관통하고 있는 이 인맥이야말로 구파일방의 가장 큰 잠재력이다. 실제로 백무련을 움직이는 주축도 구파일방의 인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건 역사도, 덕망도 아니다. 오직 하나, 절대적인 힘이다.
 그 힘은 무공에서 나온다.
 그러나 백무련도 구파일방도 무강에게는 까마득한 별세계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기왕 배울 무공이라면 으뜸이라는 곳에서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가능하다면 백무련이나 구파일방의 무공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강호의 현실이란 그처럼 만만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벽지에서 갓 올라온 사람에게는 더더욱······.
 
  * * *
 
 “하하하하! 백무련! 구파일방이란 말인가?”
 금실로 자수가 놓인 화려한 옷차림의 청년은 폭소를 터뜨렸다.
 무순撫順의 작은 객잔에서 친해진 호탕한 기질의 사내였다. 이름은 보영이라고 했다.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어떤 문파에 몸담고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는데, 절로 호감이 이는 잘생긴 외모에 아는 것도 많았다.
 앞으로의 행로에 막막함을 느끼고 있던 무강이 보영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백무련과 구파일방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묻자 보영은 한참을 웃어 댔다.
 “이보게, 소형제小兄弟는 어디에서 왔는가?”
 “길림성의 여문이라는 곳에서 왔어요.”
 “들어 보지도 못한 이름이니 꽤나 구석에 처박힌 곳인 모양이군. 아무튼 내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 행여 어디 가서 그런 소릴랑 말게나.”
 “왜죠?”
 “누구라도 자네가 촌놈이라는 걸 알아 버리기 때문이지. 강호에서 촌놈티를 내서 좋을 건 없다네. 단지 촌놈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르니까. 무순이 큰 도시는 아니지만, 자네 같은 순진한 사람들을 노리는 몹쓸 놈들은 어디에나 있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구파일방에서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말이 뭐가 이상하죠?”
 “잘 듣게.”
 보영은 엽차를 쭉 들이켜고 흐르듯 입을 열었다.
 백무련을 왜 무림의 정점이라고 하는가? 백무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구파일방의 추천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구파일방에 들어가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인데, 다시 거기에서 기량을 인정받아야 겨우 백무련에 입문할 자격이 생긴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백무련은 고르고 고른 최고의 기재奇才들만 모이게 되어 있다. 그게 바로 백무련이 강호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렇다면 구파일방의 제자는 어떻게 될 수 있는가?
 이 역시 기본적인 구조는 백무련과 구파일방의 관계와 다를 게 없었다. 즉, 구파일방 역시 밀접한 관계를 가진 하부下部 문파門派에서 추천받은 사람만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나름 이름 있는 무가의 혈통이거나, 이미 한 문파에서 수년, 혹은 수십 년 수련을 해 재능을 인정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구파일방에 제자를 추천할 자격을 가진 문파를 구연문九緣門이라고 불렀다. 출중한 제자를 추천하면 인재를 뺏기는 것이고, 나아가 문파의 독문무공獨門武功이 누출될 위험이 있는데도 그보다 구파일방과의 인연을 더욱 중시하는 것이다. 때문에 자각 있는 무림인들은 이들을 속된 말로 속문屬門이라고 비꼬았다.
 어쨌든, 그럼 구연문에 들어가는 것은 쉬우냐? 그것도 아니었다. 구파일방과 연이 닿아 있는 것만으로 적지 않은 위세를 떨치는 구연문 역시 들어가는 조건이 까다롭고 어렵기는 구파일방 못지않았다.
 “결국 연줄과 재능,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선택받은 사람만이 구파일방, 나아가 백무련의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얘기네. 솎아 내고 솎아 내 최고의 기재만을 제자로 받아들이니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강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게지. 듣자니 백무련의 신입 제자는 무림에서 이미 절정 고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라더군.”
 무강은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길은 없나요?”
 “없네.”
 보영은 딱 잘라 말했다.
 “유일하게 연줄이 필요 없는 문파라면 개방쾬幇뿐이지. 거지만 되면 끝이니.”
 그러나 개방은 들어가기가 쉬울 뿐, 무공을 배우기는 다른 곳보다 더욱 어려웠다. 물론 무강은 거지가 될 생각도 없었다.
 “구파일방의 다음으로 치는 것이 오대세가五大世家지.”
 보영은 박식함을 뽐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폐쇄적인 걸로 따지자면 구파일방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걸세. 오대세가는 혈연관계가 이어져 있지 않으면 절대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아. 혈연관계 없는 자가 오대세가의 무공을 배우려면 사위가 되는 수밖에 없지. 그게 제자가 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겠지만······.”
 무강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세 살짜리 코흘리개도 아니고, 그도 밖으로 나오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풀릴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그래도 자신에게는 재능이 있고, 열심히 노력하면 길이 보이리라 믿었다.
 하지만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웠다. 연줄이나 배경은 노력해서 어찌 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보아하니 소형제도 무턱대고 고향을 떠난 모양이군.”
 보영이 혀를 찼다.
 “그런 친구들을 종종 보지. 그러나 강호의 문호門戶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건 이미 옛말이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나, 평화에 익숙해져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이기심과 폐쇄성으로 똘똘 뭉쳐 있지. 그 탓에 소형제처럼 열정이 남다른 젊은이들이 갈 곳을 잃어버리게 됐어. 참으로 딱한 일이야.”
 보영은 꽤나 있어 보이는 말투로 현 강호와 무림을 비판했다.
 “그건 그렇고, 소형제는 약관은 지났나?”
 “올해··· 열다섯입니다.”
 “여, 열다섯?”
 보영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무리도 아니다. 이미 육 척에 가까운 신장, 남들의 배나 될 듯한 근육질. 어느 누가 무강을 처음 보고 열다섯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보영이 약관이냐고 물었던 것도 그 이상으로 보기에는 앳된 구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몸으로만 본다면 스물다섯이라고 해도 의심할 사람이 없었다.
 “잠시 몸을 좀 만져 봐도 되겠나?”
 “네? 네······.”
 무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보영이 성큼 다가와 몸을 더듬었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근육. 오랜 세월 암벽을 오르며 다듬어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몸이다.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보영이 약간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어려서부터 수련한 무공이 있나?”
 “아뇨, 할아버지에게 양권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허어! 양권 따위로 이런 근육이 만들어질 수는 없을 터, 소형제는 타고난 무골武骨이군. 이거 참, 내가 운이 좋은 건지 소형제가 운이 좋은 건지 모르겠구먼.”
 “운이 좋다니요?”
 “소형제, 무공을 배우기 위해 고향을 떠나왔다고 했지?”
 “네.”
 “내가 실은 하북의 비소문匕笑門이라는 문파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네. 비록 강호에 큰 이름을 떨치는 문파는 아니지만 작게는 종남파綜南派의 구연문이고, 크게는 백무련에도 소속되어 있지. 이곳에서 열심히만 하면 구파일방, 나아가 백무련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법이 없지. 어떤가? 소형제가 원한다면 내 문주님께 말씀드려 입문하도록 해 주겠네.”
 “그, 그게 정말이에요?”
 “물론이지. 지금 당장 확답을 주기는 어렵지만 나는 내 안목을 믿네. 문주님께서도 소형제의 재능을 알아보시겠지.”
 무강은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닥없는 늪에 빠졌다가 밧줄이라도 잡은 기분이다.
 그러나 꿀이 있는 곳에는 항상 벌도 있기 마련.
 무강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제게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 거죠?”
 “특별한 이유는 없네. 현 무림의 폐쇄성을 걱정하는 사람으로서, 소형제처럼 자질과 열정이 넘치는 인재가 묻혀 버리는 게 안타까워서 그런 게지.”
 “제, 제게 자질이 있어 보이나요?”
 “자질이 보이지 않았다면 자네가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이런 얘기는 꺼내지 않았을 걸세.”
 난생처음 듣는 칭찬에 무강의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그러나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무강의 대답이 늦어지자 보영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구연문에 들어가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네.”
 “하지만 조금 전에 처음 뵀는데 너무 염치없는 건 아닌지······.”
 “하하하,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사내가 소심하기는······. 그런 걱정일랑 접어 두게. 소형제만 좋으라고 꺼낸 얘기는 아니니까. 내 이래 봬도 손익계산은 빠른 사람이네.”
 “네?”
 “말했지만 강호에서는 인맥이 굉장히 중요하다네. 구파일방의 제자와 인연만 닿아 있어도 누구도 무시 못 하지. 내 보기에 소형제의 자질에, 그만한 열정이라면 비소문을 통해 종남파는 물론, 백무련의 제자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네. 내가 추천한 사람이 백무련의 제자가 된다면 나에게는 든든한 연줄이 생기는 셈이니, 입 가지고 하는 장사치고 이보다 많이 남는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백무련!”
 단지 그 말만으로도 무강의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보영은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그때 가서 이 보영을 모른 척이나 말게.”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평생의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하하하하, 그럼 허락한 걸로 알겠네. 그래도 은인은 낯간지러우니 그냥 호형호제하는 걸로 하세. 아니, 나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니 이참에 의형제를 맺어 두면 어떤가?”
 “저야 좋죠.”
 “시원해서 좋군! 이처럼 장래가 탄탄하고 듬직한 동생을 맞게 됐으니 정말 기쁘구먼. 아, 사내들이 의형제를 맹세하는 자리에 술이 빠지면 안 되지! 어이, 점소이!”
 보영은 크게 웃으며 다섯 근짜리 독한 화주火酒를 두 병이나 주문했다.
 무강은 아직 술을 입에 대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은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또 그간 읽어 온 무협지를 보면 이럴 때는 술잔을 나누는 게 상식이었다.
 결국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화주 열 근이 바닥을 드러냈다.
 동생에게 얻어먹는 건 말도 안 된다며 보영이 계산을 치렀을 때, 무강은 혼자서는 걷지도 못할 만큼 취해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울렁울렁 뒤흔들린다.
 그러나 기분만은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앞길이 막막했는데 이런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오다니!
 이런 걸 두고 기연奇緣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무강은 엄청난 무공을 배워 강호를 호령하는 달콤한 꿈에 젖은 채 깊게 곯아떨어졌다.
 
  * * *
 
 무강은 속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에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 측간으로 달려가 한참을 토해 냈다.
 내장이 몽땅 쏟아져 나올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온갖 찌꺼기에, 누리끼리한 위액까지 쏟아 내자 겨우 속이 편해졌다. 그러나 뒤이어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파 왔다.
 ‘으··· 정말 술이란 마실 게 못 되는구나.’
 비틀거리며 침소로 돌아오자 옆자리가 횅했다.
 ‘머리도 안 아프신가? 어딜 가신 거지? 뭐, 좀 있으면 오시겠지.’
 무강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한층 강해진 햇살에 비몽사몽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정오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보영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어제는 별말 없으셨는데?’
 무강은 부스스한 몰골로 객잔으로 내려와 차를 주문하며 물었다.
 “혹시 저와 함께 묵었던 형님 못 봤어요?”
 “봤소. 이른 새벽에 계산을 끝내고 황급히 나가던데······? 짐을 챙긴 걸 보니 꽤나 멀리 가는 것 같았소. 모르고 있었소?”
 “네? 그, 그럴 리가?”
 무강은 벌떡 일어나 침소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보영의 짐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무강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 대체 왜 아무 말도 없이······?”
 “혹시 시골에서 올라오셨소?”
 뒤따라 올라온 점소이가 대강 알겠다는 듯이 혀를 찼다.
 “네, 그런데요?”
 “이런 딱한 친구를 봤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오? 긴말 말고 일단 전낭이나 살펴보시오.”
 그제야 무강의 머릿속에도 팍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설마 하며 전낭을 뒤집어 보니 동전 몇 개와 소청이 준 노리개 그리고 쪽지 하나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내 말하지 않았나? 강호에는 별의별 놈이 다 있으니 촌놈티를 내지 말라고. 자네 주머니에 있던 돈은 좋은 교훈을 얻은 값으로 치게. 아, 그리고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네. 아무것도 없이 그저 꿈만으로 무공을 배울 수 있을 만큼 강호는 만만한 곳이 아니야. 보아하니 정인情人도 있는 듯하고··· 나쁜 얘기는 하지 않을 테니 고향으로 돌아가게. 그 돈이면 그럭저럭 여비는 될 게야.
 
 다리의 힘이 쫙 풀려 버린 무강은 털썩! 침대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 그럼 비소문은······?”
 “비소문?”
 점소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이 친구 정말 순진해 빠졌군. 비소문이란 문파는 없네. 비소匕笑란 문자 그대로 웃으면서 남을 속인다는 강호의 은어야. 그것도 몰랐나?”
 “비, 비소문이 없다고? 거짓말이라고요?”
 “그래도 계산을 치르고 푼돈이라도 남겨 둔 걸 보면 아주 악질은 아니구먼. 그 정도인 걸 다행으로 여기게.”
 점소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러이 맴돌았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조금 전까지 하늘에서 노닐다가 급격히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기분이랄까?
 구파일방, 백무련··· 모든 것이 그저 망상에 불과했다. 게다가 주머니까지 텅텅 비었다. 대체 이제 어쩐단 말인가?
 넋을 놓고 있던 무강은 와락 점소이에게 달려들었다.
 “어디예요? 그 자식, 어디로 갔어요?”
 “내, 낸들 알 도리가 있나?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컥, 컥! 이것 좀 놓게. 날 죽일 참인가? 무슨 놈의 힘이······!”
 간신히 멱살을 풀어 낸 점소이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이 사람아, 딱한 사정은 알겠지만 생각 좀 해 보게. 놈이 아직까지 근처에서 얼쩡거리겠는가? 설사 있다 해도 패거리와 함께겠지. 행여 찾을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아. 놈의 말처럼 더 늦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이런 곳에서 점소이 노릇을 하다 보니, 때를 놓쳐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봐 와서 하는 소리야.”
 그러나 무강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포기하라고? 말도 안 돼!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서윤은 부잣집 아들이지만 결코 풍족하지 않다. 검소한 부친의 영향이다.
 그럼에도 무강에게 쥐여 준 돈은 적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꽤나 무리해서 마련한 돈이리라. 무턱대고 꿈을 좇겠다는 친구를 위해 어렵게, 어렵게 구한 돈이리라!
 그걸 알기에 무강은 여문을 떠난 뒤로 소면 이상의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가능하면 노숙을 했고, 마차 따위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돈을··· 그 돈을 멍청하게 도둑맞아 버렸다. 멍청하게! 멍청하게! 죽어 버리고 싶을 만큼 멍청하게!
 미친 사람처럼 씩씩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던 무강은 점소이를 와락 밀치며 뛰어나갔다.
 “그 자식, 죽여 버리겠어!”
 무강은 무순의 저잣거리를 미친 듯이 헤맸다.
 식사는커녕 잠도 자지 않고 뒷골목을 샅샅이 훑어 나갔다. 타지 놈이 설치고 다니자 시비를 거는 놈들이 있었지만, 닥치는 대로 싸움을 하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직 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이레, 무강은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다.
 ‘없어··· 벌써 다른 곳으로 도망간 거야······.’
 보영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솔직히 기대하지도 않았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무순에서 얼쩡거리고 있을 리가 없다. 알고 있지만 포기하기 힘들었을 뿐이다.
 무강은 뒷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이를 갈았다.
 ‘이게 강호다!’
 상상으로 그리던 강호는 진짜 강호가 아니었다. 보다 더럽고 보다 위험하다. 촌놈이 힘만 믿고 올라와 쉽게 성공할 만큼 만만한 동네가 아니다.
 생각을 달리해 보자. 만약 보영이 더 독한 마음을 품었다면 자신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래, 보영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한심하고 멍청한 자신이 문제다!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안 남아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대체 무슨 낯으로 서윤을 본단 말인가?
 여문에서 도망치고, 이제 다시 강호에서 도망쳐서 유서평 스승님을, 할아버지를, 학우들을 무슨 얼굴로 대한단 말인가? 차라리 혀를 물고 죽어 버리는 편이 낫다.
 ‘강해져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해지는 수밖에 없어!’
 깨달음의 대가는 스물두 냥이었다.
 
  * * *
 
 “허··· 저 녀석 오늘도 저러고 있네.”
 “놔둬. 저러다 말겠지. 설마 제서 굶어 죽기야 하겠는가?”
 “그야 그렇지만 저러다 괜히 경칠까 봐 걱정돼서 그러지.”
 “별수 있나? 우리가 어찌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요즘에도 저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이 있다니······.”
 이른 새벽, 커다란 장문 앞을 쓸어 내던 일꾼 둘이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 앞에는 한 덩치 큰 소년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옷차림은 꾀죄죄하고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누구의 눈에도 거지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소년은 바로 무강이었다.
 무순에서 보영 찾기를 포기한 무강은 철령鐵嶺으로 향했다.
 보영은 사기꾼이지만, 강호에 대한 말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배경도, 연줄도 없는 무강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들어가는 건 애초에 불가능.
 남은 방법은 구연문에 입문해 기량을 닦으며 기회를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죽어도 강호에서 죽겠다고 다짐한 무강은 무순에서 정보를 모았다.
 사람들은 근방에서 세가 가장 큰 문파로 와호장臥虎壯을 꼽았다. 비연검飛燕劍과 삼괴권三槐拳의 명문으로, 청성파靑城派의 구연문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물러날 곳도 없다.
 무강은 그길로 무턱대고 와호장을 찾았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이렇다 할 배경은커녕 땡전 한 푼 없는, 문자 그대로 거지인 무강을 제자로 받아 줄 리 만무했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금 세례가 이어졌다.
 “별 재수가 없으려니 아침부터··· 에잉!”
 “저는 힘도 세고 기본기도 다졌다고 생각해요. 제발 시험이라도 보게 해 주세요. 기회만 주시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미친놈! 시험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여기에 너 같은 놈이 하루에도 몇 명이나 오는 줄 알아? 제자는커녕 제발 하인이라도 시켜 달라는 놈도 줄을 섰단 말이다. 어디서 거지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괜히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 퉤!”
 거친 욕설과 함께 밖으로 떠밀렸다.
 그 뒤로 무강은 정문 앞에 꿇어앉은 채 며칠을 보냈다.
 쉬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 강호의 명문이라면 쉬워서도 안 된다. 그러나 진심을 보여 주면, 열정을 보여 주면 틀림없이 누군가 관심을 가져 주리라.
 한눈에 자질과 열정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흔해 빠진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보여 줄 기회······.
 그렇게 닷새가 지났다.
 돈이 떨어져 와호장에 오기 전부터 식사도 제대로 못 했다. 그 상태로 닷새를 꼼짝도 하지 않으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직은 시월十月, 그리 추운 때가 아닌데도 뼛속까지 오한이 일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려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려 왔다.
 그래도 참았다. 참아 내야만 했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암벽을 타며, 산을 뛰어다닐 때부터 몸으로 배워 왔던 진리가 아닌가?
 “어라? 이 녀석 아직까지 이러고 있네?”
 다음 날 아침, 파리하게 질린 무강 주위에 아이들이 늘어섰다. 와호장의 제자들이다.
 “이 녀석은 의외로 오래가는걸.”
 “그러게. 벌써 죽은 거 아냐?”
 한 녀석이 발끝으로 쿡쿡 찌르며 히죽거렸다.
 무강의 터지고 갈라진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건들지 마. 너희들에게는 볼일 없어.”
 “어라? 살아 있네.”
 “하지만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이런 놈들은 원래 그래. 가진 게 없으니 독만 남아 있거든. 야, 이 커다란 놈아! 잘 들어. 와호장은 너 같은 거지새끼가 기웃거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좋게 말할 때 꺼져.”
 “너희가 참견할 일이 아니잖아.”
 띄엄띄엄 말하자 한 녀석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무강만큼이나 덩치 큰 녀석이었다.
 “모르겠어? 거슬린단 말이야. 너 같은 새끼가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면 우리 격이 떨어진다고. 무공을 배우고 싶으면 개방에 가면 될 거 아냐? 너 같은 거지새끼들이 모이는 개방. 거기서 몽둥이로 개 잡는 법이나 배우라고!”
 “이거 놔.”
 “뭐?”
 “놓으란 말이야!”
 무강은 버럭 소리치며 놈을 밀어냈다.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못한 손이 하얀 무복에 시꺼먼 자국을 만들었다. 놈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이런 거지새끼가 감히 어디다가······!”
 “나는 거지가 아니야!”
 “거지가 따로 있냐? 너 같은 놈을 바로 거지라고 하는 거야!”
 콰직!
 놈의 발끝이 명치에 박혔다. 피하려고 했으나, 기력도 체력도 남아 있지 않은 몸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무강은 신음을 흘리며 복부를 움켜잡고 쓰러졌다.
 둘러싼 녀석들이 잘근잘근 밟아 댔다. 무강이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고작 고슴도치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고통을 참는 것뿐이었다.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해 대는 놈들의 모습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나는 거지가 아니야!”
 정신이 아득해진다.
 
  * * *
 
 “이제 정신이 드냐?”
 초로의 노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항상 문 앞을 쓸던 두 명의 문지기 중 하나라는 걸 기억해 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강은 멍하니 노인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훑었다. 낡은 초막이었다.
 “여기는······?”
 “내 처소다.”
 “할아버지가 구해 주셨군요.”
 “그냥 옮겨 놓은 것뿐이야. 어쨌든 큰일 날 뻔했다. 쯧, 고약한 녀석들. 사람을 어찌 그리도 모질게 때리는지··· 그래도 그 정도로 끝나서 그나마 다행이다. 까딱 잘못됐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몰라.”
 “고마워요, 할아버지. 윽!”
 무강은 몸을 일으키다가 신음을 흘리며 풀썩 쓰러졌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 몸으로 어딜 가려는 게냐?”
 “······.”
 “또 문 앞에 가려는 거라면 아서라. 소용없는 짓이야.”
 “저는 바보라 해 보지 않으면 몰라요.”
 무강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고집스럽게 일어나 신발을 챙겨 신었다.
 노인은 딱한 눈으로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불어 냈다.
 “아직도 모르겠냐? 물론 어린 녀석이 닷새나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틴 건 대단하다. 문지기 생활만 이십 년째지만 너처럼 독한 녀석은 처음 봤어. 하지만 닷새가 아니라 일 년을 버텨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만둬라.”
 “저도 쉽지 않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언젠가는 문주님이나 사범님들의 눈에······.”
 “그 생각이 글렀다는 게야. 문주님이나 사범님들은 문밖의 일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더구나 너처럼 무턱대고 찾아오는 녀석들에게는 더욱. 이십 년 동안 너 같은 녀석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으셨다.”
 “하지만 제게 소금을 뿌렸던 분은 가끔······.”
 “쯧쯧,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그 사람도 사범이 아니야. 그냥 하인에 불과하다. 만약 네가 죽으면 그 사람이 시체를 치우고 그냥 끝인 게다. 여긴 그런 곳이야.”
 무강은 털썩 침대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럼···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거죠?”
 “글쎄다. 잘은 모르겠다만 와호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거지, 너처럼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아니다. 나쁘게 듣진 말거라. 정말 손자 같아서 하는 말이야.”
 노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죽을 끓여 놨으니 요기나 하고 떠나거라.”
 “됐어요. 그만 가 볼게요. 어쨌든 감사해요.”
 무강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초막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시야가 확 밝아졌다. 문지기의 집은 와호장 옆의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십 년을 일해 온 문지기조차 와호장에 들어가는 게 허락되지 않는 걸까?
 무강은 시선을 돌려 아래에 펼쳐진 와호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어려운 건가, 저기 보이는 담장을 넘어가는 것이?’
 불과 일 장도 되지 않는 담이지만 지금 무강에게는 성벽보다도 높고 두텁게 느껴졌다.
 무강은 털썩,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봐 주기만을 바랐다. 단지 그뿐인데! 그것뿐인데! 벽지에서 자란 약초꾼의 손자에게는 그조차도 과분한 기대란 말인가?
 무강이 영양가 없는 절망을 잘근잘근 씹어 삼키고 있을 때였다.
 문득 함성이 들린다 싶더니 능선 너머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은 아는 얼굴이었다. 아침에 무강을 밟아 댔던 녀석들이다.
 그러나 무강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제자들을 질타하는 건장한 중년 사범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한심한 녀석들, 고작 이 정도에 헐떡거려서야 와호장의 무공을 반이나마 배우겠느냐? 서둘러라, 오후에는 바로 검법을 연마해야 한다. 지금 뭐 하는 게냐! 똑바로 못 해? 아침에 가르친 걸 제대로 배우지 못한 놈은 점심도 없는 줄 알아라!”
 무강은 부러운 눈길로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땀범벅이 되어 헐떡거리고 욕을 먹어도, 무공을 배우고 있다. 무공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다. 지금 무강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또다시 화가 치민다.
 잘할 수 있는데··· 몇 년간 수련한 아이들보다 더 빨리 산을 뛰고, 암벽도 오르고, 누구보다 열심히 배울 자신이 있는데 어째서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건가? 왜 그들보다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기회조차 가질 수 없는가?
 너무나 답답하고 억울했다. 기회만 준다면······!
 “아!”
 그 순간 우울함의 바닥을 긁고 있던 무강의 머릿속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맙소사,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방법이 있다! 무강은 벌떡 일어나 문지기의 초막으로 뛰어 들어갔다.
 “할아버지, 저 여기서 한동안 묵어도 될까요?”
 “그야··· 상관없다만······.”
 “고마워요! 아까 죽, 먹어도 되죠?”
 노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끄덕이자 무강은 와락 달려들어 미친 듯이 죽을 쑤셔 넣었다. 게 눈 감추듯 한 그릇을 비워 내고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자 노인이 실소를 터뜨렸다.
 “더 주랴?”
 “네, 헤헤헤.”
 “고놈 참, 넉살하고는··· 어쨌든 웃으니 보기는 좋구나.”
 
  * * *
 
 “으라라라럇!”
 두꺼운 다리가 대지를 박찼다.
 육 척 거구가 날듯이 산비탈을 향해 치달았다.
 상당히 가파르고, 무성한 나뭇가지가 뻗어 있었지만 몸놀림이 거침없었다. 힘과 탄력이 넘치는 몸은 새처럼 빠르고 고양이처럼 민첩했다. 단번에 수십 장을 뛰어오른 그는 사방의 나무를 향해 주먹과 수도를 내뻗었다.
 콰직, 쩍! 우드득!
 나무가 휘청거리며 ‘떵! 떵!’ 하는 울림이 산 전체에 메아리쳤다. 나무를 후려치면 껍질이 떨어져 나갔고 수도를 휘두르면 가지가 떨어져 나갔다.
 초목이 상처를 입는데 살과 뼈로 만들어진 손이 멀쩡할 리 없었다. 주먹에 둘둘 감긴 헝겊은 이미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러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이 느껴지는 만큼 오히려 더욱 세게 후려쳤다. 헝겊이 찢기고 해질 지경이다. 그렇게 쉬지 않고 숲을 내달리며, 나무를 후려치며 산 정상에 도착했다.
 그러나 무강은 아직도 부족했다.
 ‘아직 멀었어. 가능한 더 많은 체력을 회복해야 해!’
 곧바로 자세를 잡고 사방으로 주먹을 내뻗었다.
 주먹을 내칠 때마다 바람이 찢어진다. 두꺼운 근육이 안개 같은 땀방울을 피워 올린다. 어느새 양권을 연습한 지도 이 년이 되어 간다. 그러나 요즘처럼 정신을 집중해 연습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양권 연습은 휘황한 낙조落照가 산 정상을 붉게 물들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후··· 할아버지가 기다리시겠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토납술로 호흡을 정리한 무강은 망탁을 둘러메고 산을 내려갔다.
 초막에 도착하니 문지기가 반가운 기색으로 반긴다.
 “이제 내려오느냐?”
 노인의 이름은 여반강이라고 했다.
 여반강은 이십 년째 와호장의 문지기를 하며 혼자 살고 있었다. 그 생활이 어찌 외롭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무강을 정말 친손자처럼 살갑게 대해 주었다.
 천성이 무던한 무강도 금세 여반강이 좋아졌다.
 “네,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다. 오면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드셔도 되는데. 늙어서 끼니때를 못 맞추면 몸에 안 좋다고요.”
 “예끼, 이놈아! 할아비를 놀려!”
 “에구, 걱정해 줘도 난리네. 늙으면 심보가 고약해지는 건 다 똑같네요.”
 여반강이 작대기를 흔들자 무강은 헤헤거리며 도망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런데 오늘도 약초를 많이 따 왔구나.”
 “네, 여기는 좋은 약초가 많아요.”
 “어린 녀석이 신통하구나. 나는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에게 배웠어요.”
 “음, 그래. 할아버지가 계시다고 했지? 이곳에 있다고 연락은 드린 게냐?”
 “······.”
 할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무강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그리 생각한 여반강은 괜히 너스레를 떨어 댔다.
 “어쨌든 네 덕분에 몸이 많이 좋아졌다. 일전에 가져다준 약재를 먹고는 소 영감도 허리가 많이 나아졌다는구나. 고맙다면서 돼지고기를 몇 근 가져왔다. 허허허, 내 살아서 그 노랭이에게 돼지고기를 다 받아 보고··· 아무래도 내가 복덩이를 주운 모양이다. 대강 삶아 놨으니 어여 먹자.”
 무강은 금세 웃는 낯으로 초막으로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오순도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금세 날이 저물었다. 무강은 잠자리를 준비하다가 문득 여반강을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
 “그냥요. 절 손자처럼 대해 주셔서요.”
 “별소리를 다 듣겠네. 흰소리 말고 자거라.”
 여반강은 핀잔을 주고는 잠자리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무강은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여문을 떠난 지 한 달, 무강은 아무런 수련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반강의 초막에 머물며 다시 한 달, 하루도 쉬지 않고 다시 수련해 지금은 근육이 예전의 힘을 되찾았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내일이 결전이다.’
 어둠 속에서 무강은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가득한 주먹이다. 몇 번이나 굳은살이 박이고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박이기를 반복해 온 주먹. 비록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근력과 주먹의 단단함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 주먹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문득 여반강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뭐 하는 놈이냐?”
 구릿빛 피부에 각진 턱을 가진 중년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곳은 와호장의 제자가 수련하는 곳이다. 외인은 들어올 수 없으니 혼나기 전에 얼른 물러가거라.”
 철진우. 와호장의 수석 사범으로, 삼괴권의 달인이었다. 비록 변경의 구연문에 몸담고 있지만 구파일방의 제자도 한 수 접어줄 정도로 뛰어난 권법가였다. ‘와호장의 와호臥虎는 철진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덩치 큰 소년은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실은 사범님을 뵙고자 찾아왔어요.”
 말투나 목소리를 들어 보니 보기보다 어린 모양이다.
 “나를? 나는 너를 모른다.”
 “아앗, 저 녀석!”
 그때, 제자 하나가 무강을 알아보고 손가락질했다.
 “아는 아이냐?”
 “네, 철 사범님. 얼마 전 입문시켜 달라고 문 앞에서 죽치고 있던 녀석입니다.”
 철진우가 미간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리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현무강이라고 해요.”
 “입문은 내 소관이 아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소관은 아니라도 사범님이시라면 저 하나쯤 받아 주실 재량은 되신다고 생각해요.”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철진우는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무문에 몸담고 있다 보니 이런 녀석은 질리도록 보아 왔다. 무조건 받아 달라고 떼를 쓰거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녀석들··· 이제는 아주 지긋지긋했다. 이놈은 또 얼마나 귀찮게 할까? 벌써부터 짜증이 일었다.
 그런데 무강의 반응은 지금까지 봐 온 녀석들하고는 달랐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무공을 배우고 싶어요. 하지만 와호장에서는 들어 보지도 않고 내치시더라고요. 제 자질이 부족해서라면 모를까 행색이 초라하다고 내치시는 건 수긍할 수 없어요. 그래서 사범님을 찾아뵌 거예요.”
 “그러니까, 그 자질을 봐 달라 이거냐?”
 “네.”
 “호오,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보여 줄 생각이냐?”
 무강의 시선이 스윽 움직여 제자들에게 향했다.
 “사범님 제자들 중 누구하고라도 대련을 하겠어요. 저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운 적이 없어요. 고작 양권을 익힌 게 다죠. 그런 제가 사범님 제자와 겨뤄 이긴다면 증명되는 거 아닌가요?”
 “뭐라고? 대련?”
 제자들은 벌써 수년 이상 무공을 배웠다. 제자도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수련생으로 시작해 이삼 년 기초를 배우고 어느 정도 성취가 보여야 제자가 될 수 있다. 즉, 갓 제자가 된 녀석도 최소한 일이 년 이상은 무공을 익힌 셈이다. 그런 제자를 상대로, 애들 장난질에 불과한 양권을 익혔다는 녀석이 대련을 신청하는 건가?
 농담이라면 꽤나 질이 나쁜 농담이다.
 “네놈이 감히 와호장의 사범 앞에서 삼괴권을 깔보는 게냐!”
 “사범님은 깔보는 무공을 배우겠다고 문 앞에서 닷새나 무릎을 꿇고 청하겠어요?”
 철진우의 호통에도 무강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삼괴권을 깔보는 게 아니라 싸워서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양권밖에 모르지만 단련을 게을리 한 적은 없어요. 사범님의 제자보다 더 빨리 산에 오를 수 있고, 힘도 세요. 싸움도 많이 해 봤죠. 그래도 사범님처럼 삼괴권의 경지에 오르신 분이라면 감히 덤비지 못하겠지만, 제자들도 그런 경지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그렇게 자신 있다면 무공은 왜 배우려는 게냐?”
 “사범님처럼 강해지기 위해서죠. 아니, 그보다 더.”
 “허, 이놈 보게!”
 철진우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당돌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이 아닌가?’
 그러나 그 당돌함이 과히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꽤나 재미있었다.
 자신이나 십여 명의 제자 앞에서 저런 말을 하면서도 뻔뻔할 정도로 자신만만하다.
 그가 가르친 제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그중에 타 문파에 가서 저렇게 당당하게 도전할 수 있는 녀석이 몇이나 있을까?
 철진우는 그런 녀석들이 싫지 않았다. 아니,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당돌하고 건방지다는 건 보는 사람에 따라 패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무인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너무 지나쳐도 곤란하지만······.
 “사범님, 저따위 비렁뱅이는 상대할 가치도 없습니다!”
 “저희들이 두 번 다시 얼씬도 못 하게 아주 혼꾸멍을 내겠습니다.”
 “시끄럽다! 언제부터 내가 말하는 데 끼어들었더냐!”
 철진우가 버럭 소리치자 제자들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한심한 눈으로 제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무강을 향했다.
 “그래서? 네가 이기면 입문시켜 달라, 그거냐?”
 “네.”
 “만약 지면?”
 “두 번 다시 와호장 근처에는 얼씬도 않겠어요.”
 “이기든 지든 딱히 내게 좋을 건 없구나.”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일이 있어도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무강의 당찬 대답에 철진우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어린놈이 제법 흥정도 할 줄 아는구나. 아직까지 그런 전례는 없었다만 날 웃게 해 주었으니 허락하마. 허나 너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 와호장이 어린애를 핍박했다는 말은 듣기 싫다.”
 확인을 받은 철진우는 제자들을 쭉 훑어보았다.
 굳이 사정을 봐줄 이유는 없지만 찜찜한 건 싫다. 철진우는 수련생으로 이 년, 제자로 일 년이 된 녀석을 지목했다. 마침 덩치도 비슷하니 수준을 알아보기에 적당하다.
 “가염, 나오거라.”
 가염이라는 녀석이 동료들의 환호를 받으며 나섰다. 문 앞에서 무강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던 바로 그 녀석이다.
 가염이 굵직한 입술을 실룩거렸다.
 “거지새끼, 이번에는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주지.”
 무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염의 도발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무강은 잔뜩 몸을 사린 채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무강이 겁먹었다고 생각한 제자들은 비웃었지만, 철진우는 내심 작은 감탄사를 발했다.
 ‘허, 혈기가 머리로 뻗친 녀석인 줄로만 알았는데 감정을 추스를 줄도 아는군.’
 긴장하는 것과 집중하는 건 분명히 다르다.
 무공에서 긴장을 푸는 걸 순順이라 하는데, 이는 무턱대고 힘을 뺀다는 뜻이 아니다. 불필요한 힘을 빼고 필요한 곳에 힘을 집중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완벽해지는 단계를 순강順强이라 하고, 무공의 고급 기법의 하나인 경經의 기초가 된다.
 무강의 순은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무공을 못 배웠다고 했으니 아마도 싸움에서 익힌 것이리라.
 ‘반면 가염 녀석은······.’
 가염은 히죽거리며 무강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순을 못할 뿐 아니라, 무강의 순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방심한 탓이겠지만 한심한 노릇이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가염 녀석이 창피를 당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시작하거라!”
 철진우의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무강의 몸이 날았다.
 야생동물처럼 빠르게 오 장 거리를 좁혀 들어간 무강이 주먹을 내뻗었다. 가염은 짧은 비명을 터뜨리며 뒷걸음질 쳤다. 조금 전까지 히죽거리던 면상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무강은 대담하게 따라 들어가며 쉴 새 없이 주먹을 퍼부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 무강은 상대가 깔보고 있을 때, 자세를 갖출 시간을 주지 않고 단숨에 끝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놈, 정식 무공을 배운 사람과 싸워 본 경험이 있구나!’
 보면 볼수록 야무진 구석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가만히 보니 소매나 옷깃 사이로 드러나는 선의 굵기가 실로 범상치 않다. 철진우는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그저 그런 수련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근육이 아니다. 이를 증명하듯 무강은 전력을 다해 주먹을 내뿜으면서도 호흡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허나 이쯤에서 끝날 정도로 허술하게 가르치지는 않았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철진우의 예상은 적중했다. 정신없이 밀리던 가염은 조금씩 여유를 찾아 갔다. 무강의 주먹이 빠르고 강하기는 해도 비교적 단순했기 때문이다.
 곧 가염의 반격이 시작됐다.
 주먹과 발이 교차되며 사각을 노리고 수없이 달려든다. 그 어지러운 허실虛實의 반복이야말로 삼괴권의 정수였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은 허에 놀아나다가 실에 급소를 내주고 만다. 삼괴권의 고급 초식이 연속으로 펼쳐지자 무강은 금세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무강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이렇다 할 공격은 하지 못했지만, 반대로 궁지에 몰리지도 않았다. 몇 번이나 급소를 내줄 뻔하다가도 용케 몸을 비틀어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럴 때마다 야유가 빗발쳤지만 철진우에게는 제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미치겠군. 저런 근육을 키웠는데 유연성과 동체 시력까지 보통이 넘지 않는가? 대체 어떤 수련을 했기에 저 나이에 저런 몸이 될 수 있는 거지?’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내공이다 외공이다 말들이 많지만, 무공을 익히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건 역시 몸이다. 단순히 크고 두꺼운 근육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공에 적합한 근질筋質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예민한, 말하자면 힘과 유연성, 민첩성을 고루 가진 근육이다.
 그러나 근육을 키우면서 이 모두를 고루 갖춘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지간한 문파에서는 아예 양립兩立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무공을 배우지도 못했다는 녀석이 너무나 태연하게 그 모든 걸 보여 주고 있다. 얼마나 무지막지한 수련을, 얼마나 오랫동안 해 왔는지 철진우조차 상상이 안 되었다.
 물론 아직은 미숙하고 거칠지만 그게 또 매력적이다.
 ‘이 녀석, 정말 물건이다!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발견했을지도······!’
 너무나 기뻐 오싹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다.
 그 무렵, 어느 쪽도 승기를 잡지 못하는 상태로 이어지던 대련이 정지했다. 열심히 몸을 움직이던 무강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선 것이다.
 가염은 기회다 싶었는지 주먹으로 무강의 가슴을 후려쳤다.
 콰쾅!
 둔중한 울림이 터졌다. 그러나 뒷걸음질 친 것은 가염이었다. 수련생과 철진우, 심지어 가염까지도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무강을 바라보았다. 무강이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돼?”
 “이, 이 자식이!”
 가염이 다시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무강은 피하지 않았다. 그대로 주먹을 가슴으로 받으며 동시에 가염의 가슴을 후려쳤다. 기술로는 당해 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힘과 힘의 대결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염의 참패였다.
 무지막지한 굉음이 터지며 다시 가염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무강은 어깨를 움찔했을 뿐 오히려 앞으로 걸어 나오며 주먹을 휘둘렀다. 가염이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추켜세웠지만 그대로 몸이 들리며 또다시 뒤로 물러났다. 방어를 생각하지 않고 밀어붙이니 피해 낼 재간이 없다.
 ‘무공을 배우지 못했지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은 이런 상황까지 계산한 것이었나?’
 철진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웃고 있는 것이다.
 ‘우하하하, 멋지다! 이 녀석은 내가 키운다! 누가 뭐래도 내가 키우겠다!’
 “됐다. 이제 그만······!”
 철진우가 중지를 선언하려 할 때였다.
 “이런 쌍! 거지새끼! 죽여 버리겠어!”
 가염이 욕설을 내뱉으며 관수貫手로 무강의 미간을 찔렀다. 대련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살수殺手! 눈과 주변의 혈맥을 한꺼번에 공격하는 잔인한 수법이었다.
 “무슨 짓이냐? 멈추지 못할까!”
 철진우는 버럭 소리치며 몸을 날리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관수가 미간에 적중되려는 순간, 무강의 상체가 바짝 숙여졌다. 이어 팽이처럼 회전하더니 아래에서 위로 주먹을 내뻗었다. 명치에 주먹이 꽂히자 쩍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가염이 한 자가량 떠올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가염은 그대로 게거품을 물고 늘어져 버렸다.
 일순 주위가 갑자기 침묵에 휩싸이더니 제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크게 숨을 불어 낸 무강은 밝아진 표정으로 철진우에게 다가갔다.
 “제가 이겼어요. 약속대로··· 커억!”
 그리고 그대로 허리를 꺾으며 몇 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무강은 괴로운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입가에는 검붉은 피가 맺혀 있었다.
 “왜··· 왜······?”
 “네 이놈! 왜라는 말이 나오느냐? 지금 네가 쓴 기술이 무엇이냐?”
 철진우의 입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양, 양권의 와선격渦旋擊이에요. 저도 모르게 사용했지만······.”
 “감히 누굴 속이려 하느냐? 그 기술은 삼괴권의 맹호격猛虎擊이 아니더냐!”
 “아, 아니에요! 저는··· 삼괴권을 본 적도 없어요!”
 “닥쳐라!”
 철진우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과 분노는 더욱 컸다. 방금 전의 수법은 틀림없는 맹호격이었다. 사범인 철진우가 삼괴권의 기술을 착각할 리 없다. 나이에 안 맞게 기골이 있다 했더니 비겁하게 무공을 훔치다니!
 무공을 훔치는 것, 그것은 강호의 금기 중의 금기였다.
 누구라도 그 사실을 들키면 설사 죽임을 당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어리고, 설사 몰랐다 해도 삼괴권의 기술을 훔친 건 용서할 수 없다.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겠으나 내 네놈의 팔을 분질러 강호의 법도를 가르치겠다!”
 “아니에요! 왜··· 왜 제 말을 믿어 주지 않죠?”
 “네놈이 끝까지······!”
 철진우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기다리시오!”
 그때, 숲에서 한 노인이 허겁지겁 뛰어나와 무강을 감싸 안았다.
 “할아버지?”
 “철 사범, 철 사범! 제발 용서해 주시오! 이 아이는 이제 열다섯밖에 되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오. 와호장의 기술을 훔쳤다면 내 초막에 머물 때 잠시 봤던 게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오. 잘못이 있다면 문지기 역할을 제대로 못한 이 늙은이 탓이니 차라리 나를 벌하시오.”
 “여, 열다섯? 열다섯이라고?”
 철진우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여반강, 자네의 아이인가?”
 “내 아이요, 내 아이야. 그러니 이 아이에게 죄가 있다면 이 늙은이를 벌하시오. 강호의 법도가 아무리 지엄하다 한들, 앞날이 창창한 아이의 팔을 분질러서야 되겠소?”
 “할아버지, 비키세요! 이건 제 일이에요! 그리고 저는 잘못한 게 없어요!”
 “시끄럽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이 나쁜 놈 같으니! 철 사범, 이놈이 이렇게 철이 없는 녀석이오. 제발 이 늙은이를 봐서라도 선처를······.”
 여반강은 무강의 뺨을 후려치며 눈물을 철철 흘렸다.
 철진우는 깊은 한숨을 불어 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벌해야 마땅하나, 어찌 할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손자의 팔을 부러뜨리겠는가?
 한참 동안 무강과 여반강을 바라보던 철진우는 쿵 소리가 나도록 바닥을 밟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물러가시오! 행여 또다시 내 눈에 띄면 결코 용서치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반강은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무강을 끌고 사라졌다.
 분노가 가라앉자 철진우는 가슴이 텅 빈 듯한 아쉬움을 느꼈다.
 ‘열다섯이라고 했는가······?’
 설마 열다섯이라고는··· 물론 열다섯도 빠른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저만한 신체 조건과 재능, 패기라면 결코 늦은 것도 아니다. 제대로 된 스승만 만난다면 필시 대성할 그릇이다.
 그렇기에 위험하다.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열정은 좋다. 그러나 훔쳐서라도 배우겠다는 마음은 곤란하다. 마음이 올바르지 못한 자에게 무공은 독이다. 자신과 남을 죽이는 독.
 ‘아쉽지만 잊는 수밖에.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게지······.’
 씁쓸한 한숨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 * *
 
 “들어올 필요 없다. 그냥 떠나거라.”
 초막으로 돌아온 여반강은 다짜고짜 무강의 보따리를 내던졌다.
 “할아버지, 전 정말······.”
 “됐다. 아무 말도 듣기 싫다. 네가 이곳에 있으면 나까지 곤란해진다. 썩 꺼져.”
 여반강은 확 문을 닫아걸었다.
 억울한 얼굴로 문가를 서성대던 무강은 결국 입술을 질끈 깨물며 몸을 돌렸다.
 “네,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
 분하고, 억울하고, 미안했다.
 하늘에 맹세코 삼괴권을 본 적도 없다. 그저 양권, 그것도 의도하지 않고 몸에 밴 동작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그런데 왜 맞아야 하는가? 왜 비난받아야 하는가? 왜 아무도 내 말은 들어 주지 않는가? 막상 제자가 지니 내칠 핑계가 필요했던 건가?
 ‘그런 곳이라면 내가 거절하겠어!’
 이를 갈아붙이며 와호장에 남아 있던 미련을 모두 털어 버렸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던 무강은 복부의 통증에 잠시 그늘가에 앉았다.
 챙겨 놨던 약초를 뒤적거리는데 문득 낯선 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하고 열어 보니 손때가 꼬질꼬질 묻어 있는 엽전 몇 개가 툭 떨어졌다.
 주머니에는 비뚤비뚤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어딜 가든 건강하거라.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차오른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은 사라지고··· 미안함만 남았다.
 
 
 
 
 #문파에 들어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가을바람에 유운流雲이 흩어진다.
 무강의 신세도 정처 없이 흩어지는 구름이나 다름없었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머물 자리는 없다.
 보영은 강호에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가르쳐 주었고, 와호장은 강호에서 제 한 몸 둘 곳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무공을 배운다는 게 그 두 가지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강호에 나오기만 하면 모든 게 잘될 거라 자신했던 걸까?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새삼스럽지만 이제야 무강은 여문에서 활개 치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게 자신이 잘나서가 아님을 깨달았다. 먹여 주고 재워 주는 할아버지와, 유서평의 보호와, 함께 웃어 주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이 한없이 그리웠지만, 그리웠기에 돌아갈 수 없었다.
 ‘이게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할 상황이라는 건가?’
 무순의 객잔 점소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직은 아니야. 그래, 나는 아직 시작도 못 했어.’
 무강은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처음처럼 대책 없는 자신감은 사라졌지만 무공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 아니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고작 이 정도 고난에 꺾일 것 같았으면 여문을 떠나지도 않았다.
 무강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힘차게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기세와 달리 비어 있는 뱃가죽 속에서는 참으로 옹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꼬르르륵.
 아, 젠장··· 그러고 보니 만 하루를 굶었다.
 무강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손때 묻은 동전, 여반강이 준 돈도 이제 몇 푼 남지 않았다. 간신히 소면 두 그릇이나 먹을 수 있을까?
 무공도 좋지만 그 이전에 뭔가를 하지 않으면 객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은 가을이니 잠은 아무 데서나 자도 좋지만, 먹지 않고는 버티질 못한다. 먹으려면 돈이 필요하고, 당연하게도 일하지 않으면 돈은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이미 십일월 중순, 곧 다가올 겨울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어쩔 수 없이 ‘강호에서 무공을 배운다’에서 ‘강호에서 살아남는다’로 우선 목표를 바꾼 무강은 번화한 저잣거리를 기웃거렸다.
 심양沈陽.
 요령성의 수도이며 교역의 중심지다.
 과연 시장이며 거리의 규모가, 지금껏 보아 왔던 도시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물건이 산처럼 쌓여 있고, 서역인에 북방 이민족까지 정말 사람이고 물건이고 없는 게 없었다.
 일자리를 구하려다가 눈요기만 실컷 해 버린 무강은 늦은 오후가 돼서야 객잔을 찾았다. 소면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문득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소형제는 정말 보기 드문 무골이오!”
 ‘어라? 이 목소리는 설마······?’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무강의 눈이 커졌다.
 “강호를 유랑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 봤지만 소형제 같은 사람은 처음이오. 소형제 같은 사람과 만나 친분을 쌓는데 어찌 인색하게 굴 수 있겠소? 내가 술을 사리다. 아아, 사양할 것 없소. 뭐라고? 허! 소형제 같은 사람이 아직 사문師門을 못 찾았단 말인가? 맙소사, 다들 눈깔을 어디다가 두고 다니는지 모르겠군.”
 ‘···보영!’
 청산유수로 지껄여 대는 허여멀건 낯짝은 틀림없는 보영이었다. 딱 보기에도 촌놈 냄새가 풀풀 풍기는 비쩍 마른 청년에게 무골이 어쩌니 자질이 어쩌니 하며 마구 띄워 주는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두 달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척추를 따라 수직으로 치솟아 올라온 울화가 두개골을 강타했다.
 ‘잘 만났다, 이놈!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무강은 이를 갈아붙이며 슬쩍 보영의 뒤로 다가갔다.
 “보통 이런 말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닌데 말이오, 정말 소형제의 자질이 아까워서 그러오. 실은 말이오, 내가 어떤 문파의 일을 봐 주고 있는데······.”
 “비소문이지.”
 “맞소, 비소문! 아마 소형제는 못 들어 봤을 거요. 비소문에 대해 말하자면······.”
 “웃음 속에 칼이 있다는 말이지. 사기를 친다는 강호의 은어야.”
 “맞소, 맞아. 그러니까··· 에엑? 어떤 놈이 헛소리를······!”
 맞장구를 치던 보영이 와락 인상을 쓰며 고개를 홱 돌렸다.
 무강은 놈의 면상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어금니를 드러냈다.
 “헛소리는 네놈이 하는 말이 헛소리지. 설마 날 잊었다고는 못 하겠지?”
 “이, 이봐! 당신 누구야?”
 “넌 꺼져.”
 맞은편의 청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무강이 살기등등한 눈초리로 쏘아보자 금세 깨갱거리며 꼬리를 말았다. 청년은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아, 그럼 나도······.”
 보영이 청년에게 묻어 슬쩍 물러서려 했다.
 “아니지. 셈은 끝내고 가야지.”
 무강은 와락 멱살을 잡아 올렸다. 두 다리가 달랑 공중에 떠 버린 보영의 안색이 딱할 정도로 핼쑥해졌다. 보영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도, 동생. 진정하시구랴. 하하하,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오해?”
 쾅!
 무강의 주먹이 탁자를 후려쳤다. 두꺼운 나무를 통째로 잘라 내 만든 탁자의 귀퉁이가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소란이 일자 인상을 쓰며 다가오던 점소이가 질겁하며 물러났다. 주변에 있던 손님들도 괜히 불똥이 튈까 분분히 자리를 피했다. 무강은 서슬 퍼런 눈빛으로 주위를 한차례 훑고는 다시 보영을 노려보았다.
 “다시 한 번 지껄여 봐.”
 ‘그때는 네 아가리를 이렇게 만들어 주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뒷말은 자동으로 상상이 되었다. 보영의 턱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 그, 그게··· 그러니까······.”
 “긴말 필요 없어. 돈부터 꺼내 놓고 얘기하자.”
 “알았네, 알았어! 일단 이거부터 좀 놓고 얘기하세. 숨 막혀 죽겠네.”
 “돈부터!”
 무강이 다시 한 번 탁자를 후려치자 보영은 울상을 지으며 소매를 뒤적거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위층에서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끄럽구나! 어떤 멧돼지가 주제도 모르고 객잔에서 떠들어 대는 거냐!”
 “뭐야?”
 무강은 버럭 고개를 들었다.
 이층 난간에서 한 여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첫눈에 예쁘다는 생각이 들 만한 미녀였다. 그러나 눈초리가 바짝 치켜 올라가 꽤나 까탈을 부릴 듯한 인상이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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