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천마십위(天魔十衛) [E]

천마십위 1-1권

2018.09.19 조회 4,490 추천 19


 # 서장
 
 내 기억의 시작은 내가 갇힌 이 석굴이었다. 이전의 기억이 나에겐 없었다.
 당연히 내가 왜, 어쩌다가 여기에 갇혔는지 모르며,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도 난 모른다.
 석굴에는 나 혼자였기에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내가 갇힌 이 석굴에는 장정 다섯이 한꺼번에 지나도 될 만큼 커다란 출구가 있지만, 난 나갈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몸으로 부딪혀도 보이지 않는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간혹 그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갈 때면 소리쳤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꺼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 외침에 반응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벽은 소리마저도 가두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갇힌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난 벽에 몸을 부딪치지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외치지도 않았다.
 그냥 벽 앞에 앉아 바깥의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면서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내가 한 번 자고 일어날 때마다 밖의 광경이 변해 있는 것이다.
 저 멀리 보이던 커다란 바위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울창했던 숲이 불에 탄 것처럼 황량하기 그지없다가 다음 날에는 다시 울창한 숲이 되어 있는 식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나가는 것에만 신경 쓰느라 그런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왜 그럴까 생각도 했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귀찮아져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갇힌 지 백 일하고도 보름째 되는 오늘, 난 언제나처럼 출구 앞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았다.
 “앗!”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에 먼지가 석굴 안으로 들어와 내 눈을 덮쳤다.
 나는 눈을 비벼 간신히 먼지를 제거했다.
 “잠깐, 먼지가 들어와?”
 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 동굴 밖으로
 
 사내의 팔은 석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오른손에 햇빛의 온기가 느껴졌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사내는 왼손으로 볼을 꼬집었다.
 고통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야. 진짜로 벽이 사라졌어. 근데, 갑자기 왜···?”
 사내는 이런 의문을 품으며 석굴 밖을 나왔다.
 강렬한 빛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지만, 따뜻한 햇볕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좋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사내의 얼굴이 근심이 서렸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밖으로 나오면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다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생각에 잠긴 사내는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근처 마을로 가볼까? 어쩌면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막 출발하려는 순간, 사내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로 가면 되지?”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사내는 잠시 어느 방향으로 갈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의 귀에 말발굽 소리 등이 들렸고,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칠십 명쯤 되는군. 말은 대략 서른 필, 수레는 일곱, 아니면 여덟.”
 순간, 사내는 흠칫 놀랐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리고 일각 뒤, 사내는 자신 앞에 나타난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들 중 몇이 들고 있는 깃발이었다.
 ‘만리표국(萬里鏢局)? 표국이 뭐지?’
 기억을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부 지식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중에 표국에 관한 건 없었다.
 이윽고, 사내는 행렬의 규모를 살폈다. 조금 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것과 거의 흡사한 규모였다.
 ‘···이런 걸 두고 귀가 밝다고 하는 건가?’
 그 순간, 사내는 그 안에 있는 십사오 세 정도의 소년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순간, 표행이 멈췄고, 표사 다섯이 앞으로 나와 병기를 꺼내 사내에게 겨눴다.
 하지만, 사내는 여전히 소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멈춰라.”
 다섯 표사 중 한 명이 적의를 드러내며 말했지만, 사내의 귀에 그것은 들리지 않았다.
 경고에도 사내가 멈추지 않자, 결국 다섯 표사는 사내에게 빠르게 접근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들의 검은 사내에게 닿지 않았다. 출수한 순간, 갑자기 사내의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그들을 지나친 것이다.
 다섯 표사는 물론, 다른 표사들도 놀랐다.
 ‘고수!’
 다섯 표사는 곧바로 마음을 추스르고 몸을 돌려 사내의 배후를 노리려고 했다.
 “그만!”
 그때, 만리표국의 국주인 주화문이 말에서 내려와 명령을 내리자, 표사들의 검이 멈췄다.
 그는 표사들로는 역부족이라는 판단을 내려 직접 막으려고 했다.
 주화문은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추게.”
 그러나 이미 소년에게 완전히 홀린 사내는 그런 주화문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주화문은 사내의 몽롱한 얼굴에 그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일단 정신을 차리게 해야겠군.’
 주화문은 사내를 툭 건드릴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사내의 오른손이 주화문의 왼쪽 손목을 낚아챘고,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꽉 쥐었다.
 이와 동시에 주화문의 오른손이 사내를 향해 나아갔다.
 ‘이런.’
 주화문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출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출수한 장법을 거둘 수는 없었다. 대신, 힘을 최대한 거두려고 했다.
 한편, 사내는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 내가 왜···?’
 그리고 곧바로 주화문의 장심이 사내의 가슴팍에 닿았다.
 툭!
 사내의 신형이 그대로 무너졌고, 죽어도 놓지 않을 것 같았던 주화문의 왼손을 놓아버렸다.
 당연히 주화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힘을 거두어 위력을 줄였는데, 사내가 이렇게 맥없이 쓰러질 줄은 몰랐다.
 물론, 사내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이 결과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분명 조금 전 그 움직임은 고수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주화문은 사내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고, 잠시 후 사내가 갇혀 있었던 석굴을 발견할 수 있다.
 “저기서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하지. 우선, 이자부터 안으로 옮겨라.”
 표국 사람들은 곧바로 주화문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그사이 한 사내가 주화문에게 다가가 작게 말했다.
 “형님, 어차피 삼십 리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오는데, 굳이 여기서 쉴 필요가 있습니까?”
 조창, 만리표국의 표두로 사적으로는 주화문의 의형제이기도 했다.
 “최근 이 부근에 마적 떼가 출몰한다고 한다. 그놈들이 나타날 수 있으니 미리 힘을 비축해야지.”
 “그럼, 저자가 마적일 수도 있겠군요.”
 “확실한 건 저자가 깨어난 다음에 심문을 해봐야겠지.”
 이윽고, 모든 짐과 사람이 석굴 안으로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주화문과 조창이 그곳으로 향했다.
 “근데, 형님. 여기에 이렇게 큰 석굴이 있었습니까?”
 “···없었던 것 같은데?”
 “마적 떼와 관련이 있을까요?”
 “그것도 알아봐야지.”
 
 ***
 
 ‘이들은 누구지?’
 사내는 처음 보는, 그러나 왠지 낯설지 않은 사내 아홉 명과 함께 어울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들을 보니 왠지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누구지? 내 가족? 아니면, 벗?’
 사내는 그것을 묻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설마, 꿈?’
 꿈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기억을 잃은 이후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에 사내는 신기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단순한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술을 마실 때, 그 화끈함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꿈이 아니면 뭐지? 혹시, 내 기억?’
 사내는 다른 이들을 살피고 싶었다. 그러나 몸은, 신체는 묵묵히 술만 마셔댔다.
 사내는 귀를 기울여 이들의 대화라도 듣고 싶었다.
 “하하하하.”
 뭐가 그리 좋은 이들은 크게 웃고 있었다.
 ‘그만 웃고 어서 대화를···!’
 그때, 사내의 염원을 마치 이들이 알기라도 한 듯, 호탕한 웃음이 끝나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참,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호에서 우리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강호? 그럼, 내가 강호인?’
 “그건 나도 들었어.”
 “어? 난 못 들었어? 뭐라고 하는데?”
 “바로···.”
 그 순간, 사내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귀가 먹먹해졌다.
 사내는 중요한 말을 듣지 못한 채 현실로 돌아왔다.
 
 ***
 
 “그러니까,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조창의 질문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고, 조창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곧바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어디서 거짓부렁이냐? 사실대로 말하면 목숨은 살려주마. 너 마적이지?”
 ‘마적이면, 말 타고 다니면서 약탈하는 놈들인데···.’
 순간, 사내는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내가 그딴 쓰레기들과 어울릴 사람으로 보이나?”
 “근데 이 자식이 왜 갑자기 반말이야?”
 “누가 사람을 쓰레기 취급하래?”
 사내와 조창은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때, 뒤에서 가만히 있던 주화문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적 같지는 않군.”
 “다행이오. 그래도 한 명이라도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이가 있어서.”
 사내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고, 조창은 못마땅한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주화문이 물었다.
 “그래, 언제 기억을 잃은 것인가?”
 “···넉 달 정도 된 것 같소.”
 사내의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럼, 넉 달 동안 떠돌아다닌 건가?”
 “아니오. 여기에 갇혀 지냈소.”
 “···여기에?”
 주화문의 반문에 사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보이지 않는 벽에 관해 전부 말했다.
 “흐음, 보이지 않는 벽이라? 게다가 소리까지 막는다?”
 “그렇소.”
 조창이 끼어들었다.
 “그거 기문진(奇門陣) 아닙니까? 한데, 그런 기문진이 있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나도 처음이다. 최근에 만들어졌거나, 혹은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근래에 누군가가 복원한 거겠지.”
 무호가 물었다.
 “내 기억도 혹 그 기문진 때문이오?”
 “그럴 수도 있지만, 다른 요인 때문일 수도 있네.”
 주화문의 말에 사내는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해도 최소한 날 여기에 가둔 자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않을까?’
 이윽고, 주화문이 물었다.
 “그래, 여길 나온 이후에 무얼 하려고 했었나?”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소. 해서,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아가려고 했는데,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잠깐 고민하다가···.”
 “우릴 만난 거군.”
 “맞소.”
 주화문은 사내와 대화하는 내내 그를 자세히 살폈다. 거짓을 말하는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전부 진실인가?’
 “흐음, 여기서 삼십 리 정도만 더 가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오네. 우리도 거길 지나니, 같이 가는 것이 어떤가?”
 “···폐가 되지 않겠소?”
 “자네가 혼절한 건 내 탓도 있으니 응당 책임을 져야지. 다행히 심각하게 다친 건 아니니 한 시진 뒤에 출발하도록 하겠네.”
 주화문의 말에 사내는 잠시 고민한 뒤에 입을 열었다.
 “고맙소. 대신, 내가 폐가 된다면 언제든 말하시오. 바로 떠날 테니.”
 ‘···남의 도움을 받기 싫어하는 성격이로군.’
 “알겠네.”
 잠시 후, 주화문과 조창은 사내 곁을 떠나 석굴 출구로 향했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정체를 모르는 자와 같이 움직이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어쩌면 기억을 잃었다는 말이 거짓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내 보기엔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뭐, 형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조창은 더 이상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한 시진 뒤, 만리표국은 표행을 재개했고, 거기에 사내가 합류했다.
 대략 십 리 정도 이동했을 때, 주화문이 오른손을 들었고, 곧바로 행렬은 이동을 멈췄다.
 “전투 준비.”
 그리고 곧바로 표사들이 전면에 나서 병기를 꺼냈고, 쟁자수들은 수레 옆에 꼭 붙었다.
 잠시 후, 전방에 먼지 바람이 일어났고, 그 안에 백에 가까운 인마(人馬)가 있었다.
 최근 이 부근에 자주 출몰한다는 마적 떼였다.
 표행 가운데 표사의 수는 대략 절반, 마흔에 조금 못 미치니, 수적으로는 만리표국이 열세였다.
 더 큰 문제는 무공을 모르는 쟁자수들이다.
 짐을 옮기고, 나르는 이들이기에 대부분 힘이 세지만, 그게 잘 싸운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보다 힘이 약한 파락호들에게 지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러니 무공을 익힌 자들을 상대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즉, 표사들은 그런 쟁자수들을 지키면서 싸워야 하는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화문은 쟁자수들에게 짐과 함께 뒤로 피신하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남은 표사들과 함께 마적 떼를 향해 돌격했다.
 쟁자수들 곁에서 싸우면 그들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주화문과 만리표국의 표사들은 두 배가 넘는 적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건 역시 국주인 주화문이었다.
 만리표국의 근거지가 있는 악양 내에서 주화문은 제법 이름을 떨치는 고수였다.
 그런 주화문의 검은 인마를 가리지 않고 베었다. 가끔은 통째로 베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마적 떼 두목이 나서면서 그의 활약은 중단되었다.
 두목의 실력은 주화문보다 아래였지만, 그는 수하들과 함께 싸웠기에 주화문은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실력을 드러내야 하나?’
 주화문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 순간, 스물의 인마가 표사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그중 열은 표사들의 배후를 노렸고, 남은 절반은 쟁자수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에 주화문은 더 고민하지 않았다.
 그의 검에 서슬이 퍼런 검기가 운용되었고, 검은 빠르게, 그리고 어지럽게 움직이면서 두목과 그 수하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빼앗았다.
 직후, 주화문은 검기를 날려 마적 몇을 더 죽인 다음, 곧바로 주인을 잃은 말에 올라탔다.
 “조창! 네게 여길 맡긴다. 그리고 실력을 감추지 말고 전부 드러내도록.”
 주화문의 명령에 조청과 표사 일곱 명의 눈빛이 변하더니, 마적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강호에 이름난 일류고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실력을 뽐내며 말이다.
 한편, 말을 타고 급히 쟁자수들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간 주화문은 잠시 후, 그들이 있는 곳에 당도했다.
 쟁자수 중 넷은 그들의 칼에 당했는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빠드득!
 이 광경에 이를 간 주화문은 곧장 안장 위에 올라서더니 힘차게 그것을 박차 경공을 펼쳤다.
 순식간에 간격을 좁힌 주화문은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 검을 몇 번 휘둘렀다.
 후방에서의 공격이었고, 또 워낙 빠른 공격이라 마적들은 그것을 막지 못했다.
 주화문이 땅에 착지한 순간, 마적 열이 동시에 말에서 떨어졌다.
 그는 곧바로 쓰러진 쟁자수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넷 모두 목숨을 잃지 않았다. 부상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툭! 툭! 툭! 툭!
 주화문은 그들의 혈도를 점해 일단 출혈을 막았다.
 “금창약을 발라주게.”
 남은 쟁자수들에게 그렇게 말한 뒤, 곧장 사내에게 다가갔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부상이 너무 심각했다. 다른 쟁자수들보다 훨씬 더 말이다.
 ‘최대한 빨리 의원에게 데려간다면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주화문은 곧바로 점혈로 출혈을 막은 뒤, 사내의 옷을 벗긴 뒤 금창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사내 곁에 주저앉아 울먹거리던 천유현은 소매로 눈물을 훔친 다음, 그런 주화문을 돕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쓰러져 있던 마적 중 한 명이 기습을 가했다.
 주화문이 본능적으로 옆으로 피하자, 천유현이 마적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주화문은 속으로 아차, 하면서 곧바로 손을 뻗어 천유현을 낚아채려고 했다.
 그 순간,
 탁!
 사내가 마적의 손목을 잡았다.
 빈사 상태나 다름없던 그가 움직인 것에 주화문과 천유현은 놀랐다.
 이와 동시에 사내는 빠른 속도로 몸을 일으켰고, 곧바로 마적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그러자 마적의 머리가 터지면서 피와 육편(肉片), 골편(骨片)이 주위로 퍼졌고, 사내의 얼굴과 몸에도 일부 닿았다.
 사내가 마적의 손목을 놓자, 시신은 힘없이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본 쟁자수 몇이 토악질을 해댔고, 천유현은 창백해진 얼굴로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주화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리가 안쪽부터 터졌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그 위력을 고스란히 내부까지 전달한 기법이 더 대단했다.
 ‘명문의 무공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야. 대체 어디 출신이지?’
 주화문이 잠시 이런 생각에 빠진 사이, 사내는 그런 천유현에게로 몸을 돌렸고, 곧바로 그에게 다가갔다.
 천유현은 겁에 질린 얼굴로 엉덩이를 질질 끌며 그에게서 멀어나려고 했다.
 상념에서 벗어난 주화문은 분노로 가득한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현이가 위험할지도···.’
 곧바로 사내의 앞을 가로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내가 천유현과의 간격을 줄였다.
 사내는 천유현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몸을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이때, 사내를 향한 천유현의 두려움이 사라졌다. 여전히 사내는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천유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사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일어나려는 찰나, 갑자기 사내가 그대로 철퍼덕 쓰러졌다.
 
 ***
 
 사내는 조금 전 기억에서 본 아홉 명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주위에 족히 천이 넘어 보이는 시신이 있는 평원이었다.
 바로 곁에 시신이 있는데도, 비릿한 혈향이 코를 찌르는데도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이것도 내 기억인가? 아쉽군. 그 꿈이 이어지면 좋았을 텐데···.’
 게다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는 것에 아쉬움은 더해졌다.
 하지만, 역겹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식사를 거의 마칠 때쯤, 갑자기 어느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는 이들 곁에 앉았고, 역시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사내는 다른 아홉 명이 중년인을 보며 미소 짓는 것을 보았다. 또한,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굴까?’
 반가운 기분을 들게 해준 중년인, 사내가 그를 궁금해한 순간, 다시 눈앞에 뿌옇게 흐려졌다.
 잠시 후, 눈앞이 다시 선명해졌고, 사내는 자신이 누워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깨어났군.”
 때마침 주화문이 곁에 있었다.
 “몸은 괜찮은가?”
 사내는 곧장 상체를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딱히 아픈 구석은 없었다.
 “괜찮은 것 같소.”
 사내는 분명 사경을 헤맬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겨우 몇 시진 만에 멀쩡해졌다.
 이미 의원으로부터 사내가 괜찮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직접 사내가 움직이는 것을 보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자연 치유력을 높여주는 무공을 익힌 모양이군. 회복이 빠른 걸 보면 그 성취가 제법 높을 것 같은데···.’
 “다행이군.”
 “그런데, 대체 어찌 된 것이오?”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가?”
 “마적들이 나타나 공격하려고 한 것까지.”
 주화문은 잠시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들의 공격을 대신 받아낸 건?”
 그는 쟁자수들에게서 상황을 들었다. 그나마 그들의 피해가 적은 사내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소년. 그들 중 한 명이 소년을 공격하려고 했을 때, 나도 모르게 앞으로 튀어 나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오. 그 소년은 괜찮소?”
 “왼쪽을 보게.”
 주화문의 말에 사내는 곧장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천유현을 볼 수 있었다.
 “다행이오.”
 “자네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저 아이의 목숨을 구해 주었네.”
 “두 번?”
 “두 번째는 적이 날 공격했는데, 내가 무심결에 피하는 바람에 유현이가 위험한 지경에 처했지. 그런데, 갑자기 자네가 움직이더니 그를 일격에 죽였어. 기억 안 나나?”
 잠시 생각하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네. 그 일격에 상대의 머리가 부서졌거든.”
 주화문은 일부러 상황을 설명하고는 사내를 살폈다.
 “그랬소?”
 사람을 죽였다는 말에도 사내는 담담했다.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살인한 것이라 무감각한 걸까? 아니면, 과거에 많은 사람을 죽여서 사라진 살인의 거부감이 기억을 잃은 지금도 여전히 없는 걸까?’
 이윽고, 상념에서 벗어난 주화문이 말했다.
 “이곳은 자네가 갇혀 있던 석굴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네. 일단 자네 초상화를 그려 개방(丐幫)에 건넸네. 아, 자네 개방은 알고 있나?”
 “거지들이 모여 만든 조직 아니오? 그 정도는 기억하고 있소.”
 사내가 기억하는 것 중에는 다행히 개방도 있었다. 겨우 그 한 문장이 다지만.
 “뭐, 틀린 건 아니지. 아무튼, 이곳에 자넬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하더군.”
 주화문의 말에 사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천하에 기문진을 펼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오?”
 “꽤 되지. 알려지지 않은 술사도 적지 않고. 그들을 일일이 찾으러 다닐 생각인가?”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는 넓다네. 죽을 때까지 돌아다녀도 그들 전부를 다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설령, 운이 좋아 도중에 자넬 가둔 이를 만난다고 해도, 과연 그가 순순히 인정하겠나?”
 “그럼, 어찌하란 말이오?”
 “개방에 범위를 넓혀 달라고 하면 되네. 그렇게 해서 자네 신분을 찾으면, 그것을 토대로 자넬 가둔 자 역시 알아낼 수 있어.”
 “···하지만, 난 돈이 없소.”
 “그건 걱정하지 말게. 돈은 내가 낼 테니. 그러니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만리표국에서 느긋하게 지내게.”
 이에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폐가 되지 않겠소?”
 주화문이 껄껄 웃었다.
 “하하, 뭘 제안하기만 하면 다 폐라고 여기는군. 이번에도 폐가 되지는 않네. 자네 덕분에 사람도, 표물도 무사하니까. 난 그 은혜를 갚는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말게.”
 “···그래도 왠지 그냥 받기만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소.”
 “흐음, 정 그렇다면 가끔 표국의 일을 도와주겠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겠소.”
 이에 주화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사내는 다시 침상에 누우려는 찰나, 의자에 앉아서 조는 천유현을 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침상에서 내려와 천유현을 들어 침상에 살포시 눕혔다.
 그리고 잠시 침상 옆에 서서 천유현을 내려다보았는데, 조금 전 그 중년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아직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군.”
 사내가 고개를 몇 번이나 흔든 뒤에야, 천유현의 얼굴에서 중년인이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조창은 밖에서 사내와 주화문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
 그리고 주화문이 밖으로 나온 순간, 그에게 물었다.
 “형님, 정말로 저자를 표국으로 데려가실 겁니까?”
 “왜? 넌 싫으냐? 저자의 성품 때문에?”
 “모난 성격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저자의 무공 때문입니다. 일격에 머리를 산산조각냈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그게 마공이라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습니까?”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본능적으로 현이를 구했으니 악인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하지만, 그의 무공은 충분히 마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만일, 도 대주가 그 사실을 알고 트집이라도 잡으면···.”
 “내가 도상찬과 앙숙이기는 했지만, 그건 우리가 정협맹(正俠盟)에 있을 때 이야기지.”
 사대세가를 필두로 조직된 정파무림의 연합체, 정협맹.
 주화문과 조창, 그리고 만리표국의 표사 열 명은 과거 정협맹 소속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그들이 정협맹 최고의 특작부대인 무영대(無影隊) 출신으로, 정협맹 내에서도 그 신분이 기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앙숙이었던 것도 사실 대주 자리 때문이었지, 그거 외엔 딱히 원한이 있는 건 아니야.”
 한때 주화문과 도상찬은 무영대의 부대주로, 대주의 자리를 두고 경쟁했었다.
 그러나 칠 년 전, 주화문이 갑자기 무영대를 그만두면서 도상찬은 손쉽게 무영대주의 지위를 차지했다.
 무영대에 몸담았던 시절, 주화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다 처리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정파무림의 안녕을 위한 것으로 애써 자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자신이 하는 일에 회의감이 들었고, 나중엔 그 일들이 정협맹이 아닌 권력자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결국, 주화문은 무영대를 떠나 본가인 만리표국으로 돌아갔고, 그를 따르던 조창 등 몇몇 대원은 끝까지 주화문을 따랐다.
 “이제 무영대주를 넘어 정협맹 요직을 노리는 도상찬이 일개 표국의 국주가 된 나를 신경이나 쓰겠어?”
 “그렇다면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설령, 그런 일이 생겨도 쉽게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보다 표사들 입막음에 신경 써. 잘못했다가 우리 실력 알려지면 꽤 골치 아파질 테니까.”
 표국은 상계와 강호, 그 양쪽에 속한 조직이다. 그래서 상계나 강호의 이해관계에 얽히는 일이 허다했다.
 문제는 이해관계가 워낙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자칫 실수 한 번에 망할 수도 있다.
 그러한 일에 휘말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보잘것없는 곳으로 가장하여, 큰 관심을 받지 않는 것이다.
 “안 그래도 벌써 다 하고 왔습니다.”
 “역시 내 아우답네. 그럼, 이제 하나만 하면 되는 건가?”
 “하나요? 그게 뭡니까?”
 “그자, 이름을 지어줘야지. 뭐가 좋을까?”
 
 
 # 무호(無號)
 
 다음 날, 막 진시가 되었을 때 천유현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누운 상태에서 기지개를 활짝 켜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어? 내가 왜 여기 누워있지?’
 천유현은 곧바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에 사내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설마, 내가 잠결에 침상에 누웠고, 은공께서 비켜주신 건가? 그래서 지금 의자에 앉아 주무시는 거고?’
 사내가 마적을 죽일 당시만 하더라도 천유현은 그를 두려워했지만, 그 이후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그를 보며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사내를 은공으로 여겼다.
 그런 이에게 결례를 범했다는 생각에 천유현의 얼굴은 당혹감이 서렸고, 조심스레 침상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왼쪽 다리가 침상을 빠져나와 바닥에 닿은 순간,
 “일어났나?”
 사내가 눈을 떴다. 그는 자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저 눈을 감고 지난 두 번의 꿈을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천유현은 다급하게 침상을 내려와 사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은공, 죄송합니다. 제가 은공의 침상을 빼앗는 결례를···.”
 “난 괜찮으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사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라. 난 괜찮다.”
 “···예, 은공.”
 천유현의 답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폈다. 그리고 곧바로 화제를 바꿨다.
 “궁금한 게 몇 가지 있다.”
 “제가 아는 거라면 전부 답하겠습니다.”
 “표국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곳이지?”
 사내의 질문에 천유현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그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표국은 의뢰받은 물건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운송해주는 일을 합니다.”
 “···어제처럼 물건을 강탈하려는 자들 때문에 표국이라는 게 생긴 거로군.”
 “네.”
 그러면서 천유현은 표사와 쟁자수에 관한 설명도 추가했다.
 “그럼, 넌 쟁자수로구나.”
 “음, 그렇기는 한데, 실제로는 잔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표행을 따라다니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왜 이런 어려운 일을 하는 거지?”
 사내의 질문에 천유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뛰어난 표사가 되려면 무공도 출중해야 하지만, 표행에도 익숙해야 하거든요. 이게 다 나중을 위한 연습 같은 거죠.”
 사내는 천유현의 미소에 숨겨진 슬픔을 보았다. 하지만, 그걸 캐묻지 않았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바꿨다.
 “그럼, 앞으로 같이 다닐 일이 많겠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도 앞으로 만리표국에서 일하기로 했다. 국주라는 사람도 허락했고.”
 “아! 그럼, 은공께선 표사가 되시겠네요.”
 “그건 잘 모르겠다.”
 “왜요? 은공께선 무공이 고강하시잖아요?”
 천유현의 말에 사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공도 잊어버렸거든. 어제는 몸이 기억해 어찌 펼친 것 같기는 한데, 나중에 위급한 상황에서 그와 같은 우연이 또 있다고 할 수 없으니, 오히려 표사가 되면 짐이 될 수도 있다.”
 “그럼, 나중에 무공을 기억하시면 표사 일을 하실 건가요?”
 “쟁자수보다 표사가 더 도움이 된다면.”
 사내의 답에 천유현은 우물쭈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은공. 그럼, 혹시라도 무공을 기억하시게 되면 제게 조금이라도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 대신, 은공께서 표국에서 불편함 없이 지내실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보필할게요.”
 사내는 천유현에게서 왠지 모를 절박함을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고, 그것이 얼굴에 드러났다.
 이상한 건 화가 나는데도, 왠지 화가 나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둘로 나누어져 한쪽만 화를 내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사내가 자신의 상태를 궁금해하는 사이, 천유현은 사내가 화난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해서는 안 될 부탁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천유현의 사과는 사내를 더욱 화나게 했다.
 사내는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절반으로 화를 내는 절반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나가라.”
 “···예, 은공.”
 천유현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밖을 나갔고, 그가 사라지면서 사내의 화가 조금씩 사라졌다.
 
 ***
 
 표행이 다시 출발하려 할 때, 주화문이 사내에게 다가가 말했다.
 “무호(無號).”
 “···나한테 한 말이오?”
 “자네가 이름을 찾을 때까지 당분간 자넬 무호라고 부르겠네.”
 이에 표사 몇이 너무 대충 지은 거 아니냐며 말했지만, 정작 사내는 마음에 들었다.
 ‘무호. 진짜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 이름이 생긴 건가?’
 주화문은 자신이 지어준 이름을 몇 번이나 외며 미소를 짓는 사내, 무호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굳이 지금부터 일할 필요는 없네.”
 표행 도중에 부상자가 생겼다고 표행을 멈출 수는 없다.
 해서, 보통은 의방에 맡긴 뒤 복귀하는 길에 데려가곤 하는데, 부상자가 생기면 그만큼 표행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단, 예외가 있다.
 지금 만리표국처럼 복귀와 운송을 동시에 할 때는 중상만 아니면 함께 데려간다.
 일반적으로 표국이 표행을 마치고 복귀할 때 그냥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곳에서 표국과 가까운 곳으로 운송하는 계약을 맺는다. 조금이라도 이문을 더 남기기 위해.
 규모와 상관없이 목적지에 따른 것이기에 대부분 표물의 양은 적었다.
 만리표국의 이번 표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레에 전부 실어도 될 정도로 규모가 작았기에 쟁자수이 짐을 짊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전날 마적단과 싸우면서 부상자가 생겼고, 그들을 수레에 태워야 했다.
 당연히 그만큼의 양을 쟁자수들이 나눠서 들어야 했다.
 “아니오. 몸도 성하니 지금부터 일하겠소.”
 이때, 조창이 다가왔다.
 “이봐, 무호. 이제 만리표국의 사람이 되었으니 최소한 국주님께만은 예를 갖춰 존대하게.”
 “···그게 뭔데?”
 조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도 몰라?”
 “모르니까 묻지, 아는데 묻겠나?”
 이에 조창이 뭐라고 하려는 순간, 주화문이 나섰다.
 “존대가 무엇인지는 차차 알려줄 테니, 일하게나.”
 “알겠소.”
 무호는 곧바로 다른 쟁자수들과 함께 일을 했다.
 잠시 후, 빈 수레 두 대에 부상자들을 눕힌 다음에야 이들은 악양을 향해 출발했다.
 
 ***
 
 악양으로의 여정은 평탄했다. 길은 험하지 않았고, 표물을 노리는 마적 등도 없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안심하지 않았다. 사고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생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양까지 약 오십 리 남았을 때, 표물을 노리는 복면인들이 나타났지만, 이들은 곧바로 진형을 갖추었다.
 적의 수는 고작 스물이지만, 개개인이 뛰어난 실력자라는 것을 간파한 주화문은 표사 대부분을 쟁자수와 짐을 지키게 했고, 조창 등 무영대 출신 표사들만 데리고 그들과 싸웠다.
 그리고 잠시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만리표국의 국주가 악양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고수라고는 들었지만, 실력을 꽤 숨기고 있었군. 이 정도면 거의 악양에서도 손에 꼽히지 않나?”
 주화문은 적 수장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세를 점하기는 했지만, 승기를 잡지는 못했다.
 상대의 실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표국의 국주가 된 이후 제대로 싸운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실전 감각이 떨어진 것이다.
 반대로 상대는 자신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실전에 매우 능숙한 고수였다.
 ‘게다가 이자의 수하들도 뛰어나다.’
 무영대 출신인 조창 등은 일류고수라 해도 손색이 없는 실력을 지녔다.
 비록, 수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해도 그런 조창 등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싸웠다.
 ‘평화가 우리의 칼을 무디게 했군.’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힘들겠어.”
 그의 손짓에 조창 등과 싸우던 복면인 셋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도록 하지.”
 수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편, 무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살폈다.
 쟁자수들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심지어 표사들 중에서도 겁에 질린 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다 무호의 눈길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천유현에게 향했고,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또 화가 나는 거지?’
 이성을 유지하는 절반 덕분에 무호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설마, 녀석의 두려움이 날 분노케 하는 건가?’
 이와 동시에 천유현이 사라지자 화가 누그러졌던 때를 떠올린 무호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았다.
 그러자 복면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빠드득!
 절로 이가 갈렸고, 주먹이 쥐어졌다. 화가 더 커진 것이다.
 ‘천유현의 두려움이 내 분노의 원인이라면, 천유현이 두려워하지 않으면 내 분노도 사라지지 않을까?’
 남은 이성으로 가설을 세운 무호는 짐을 내려놓고 곧바로 싸움터로 향했다.
 다른 이들이 그를 제지했지만, 무호는 그것을 무시했고, 어느새 싸움터에 당도했다.
 복면인 중 하나가 무호를 발견하고 그에게 출수했다.
 무호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피하자, 그는 곧바로 이격을 준비했다.
 그 순간, 무호의 주먹이 복면인의 오른쪽 어깨를 강타했다.
 마적의 얼굴을 쳤을 때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복면인의 오른팔은 충격에 잠시 멈췄다.
 표사 한 명은 이것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그의 목을 베었다.
 그사이, 무호는 다른 복면인에게 접근했다.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엔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출수하기 전에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기는 실리지 않았지만, 상대의 몸이 잠시나마 허공에 뜰 정도의 위력은 지녔다.
 이내 복면인의 양발이 다시 땅에 닿았을 때, 다른 표사가 그의 목숨을 끊었다.
 겨우 두 명이 죽은 것에 불과하지만, 복면인들은 무호로 인해 전황이 바뀔 수도 있다고 여겼고, 곧바로 넷이 무호에게 향했다.
 표사들 역시 같은 생각을 했고, 뒤늦게 무호를 보호하기 위해 같은 수의 표사가 움직였다.
 복면인 넷은 무호를 사방에 가두고 동시에 공격을 시도했다.
 그 순간,
 파악!
 무호를 앞으로 몸을 날리며 팔꿈치로 상대의 얼굴을 가격하며 너무나 쉽게 포위에서 벗어났다.
 남은 복면인 셋이 무호의 뒤를 따라 움직였지만, 어느새 표사들이 그들의 배후에서 공격해 목숨을 끊었다.
 무호의 팔꿈치에 맞아 땅에 쓰러진 자 역시 뒤이은 표사의 공격에 죽었다.
 이윽고, 무호는 고개를 돌려 천유현을 바라보며 그의 떨림이 조금 전보다 약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무호의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내 생각이 맞았어.’
 예상이 맞은 것에 기뻐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했다.
 ‘왜 유독 천유현이 두려워하는 것에만 화를 내는 걸까?’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다. 상대의 공격이 너무 훤히 들여다보였다.
 ‘강호인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대체 난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주화문이 싸우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역시나 조금 전처럼 복면인들을 공격해 그들의 움직임을 잠시나마 멈추게 했다.
 하지만, 주화문이 적의 수장과 싸우느라 그 틈을 제대로 노리지 못했다.
 그나마 주화문을 공격하던 복면인 중 한 명을 무호가 맡으면서 그의 사정이 조금은 나아진 것이 다행이었다.
 무호는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 간간이 반격하기는 했지만, 그의 주먹으로 적을 완전히 끝낼 수는 없었고, 나중에는 그냥 피하기만 했다.
 그러면서 도중에 다른 이들을 살피는 여유를 보였다.
 조창 등은 무호 덕분에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어느새 여섯 명밖에 남지 않은 복면인을 완전히 포위했다.
 ‘저긴 되었고.’
 무호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주화문을 바라보았다.
 적의 수장은 수하 두 명과 함께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그는 조창 등이 개입하기 전에 주화문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화문은 쉽게 당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주화문을 사로잡기도 전에 조창 등이 남은 복면인 여섯을 완전히 제압한 다음, 주화문에게로 향했다.
 이에 수장은 이를 갈며 후퇴하기 시작했고, 그를 돕던 두 명과 무호를 공격하던 이 역시 그를 따라 물러났다.
 주화문은 소매에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낸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바로 표사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죽거나 중상을 입은 자는 없었다.
 그런 다음, 주화문은 무호에게 다가갔다.
 “어디 다친 곳 없나?”
 “없소.”
 “다행이군.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피해가 커졌을 뻔했어.”
 전투에 참여한, 그리고 그것을 본 표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적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죽이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니 말이다.
 “나도 이제 만리표국 사람 아니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오.”
 “하하, 그렇군.”
 주화문은 호탕하게 웃은 뒤, 이내 그것을 지우고 조창 등이 사로잡은 복면인들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조창이 바짝 옆에 붙었다.
 [안 보이는 곳에서 심문할까요?]
 [···왠지 좀 껄끄럽군. 그냥 용검방(龍劍幫)에 맡기자.]
 악양에는 여러 문파가 있고, 그 정점 중 하나가 바로 용검방이다.
 과거에는 만리표국과 용검방은 꽤 돈독한 사이였다.
 하지만, 강호의 일에 얽히고 싶지 않은 주화문이 국주가 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나마 상납금은 계속 주었기에 두 곳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이럴 때를 위해 그들에게 계속 돈을 준 것이니, 그들에게 넘기자.]
 [예, 형님.]
 
 ***
 
 그날 밤, 용검방 부방주 육대원은 인근의 작은 주루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방갓을 쓴 사내 넷이 주루에 나타났고, 그중 셋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한 명은 육대원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방갓을 벗었다.
 “대체 어찌 된 것인가?”
 육대원은 그를 보자마자 대뜸 화부터 냈다.
 “제대로 처리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실패한 것도 부족해 사로잡히기까지 해? 선풍도(旋風刀)란 무명은 허명이었군.”
 선풍도 이곽, 항주제일의 낭인으로 그 뛰어난 실력 때문에 항주의 문파들이 그를 포섭하려고 했다.
 다만,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어디 한 곳에 얽매이는 걸 싫어해 전부 거절했다.
 “실패한 건 전적으로 그대 책임이니 내 탓 하지 마시오.”
 “뭐?”
 “주화문, 그자의 실력이 제법이니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하지 않았소?”
 이곽의 말에 육대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아니란 말인가?”
 “나보다 강했소. 한 수,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오.”
 악양에는 많은 고수가 있지만, 이곽만한 고수는 찾기 힘들다.
 당연히 그보다 한 수 위의 고수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게다가 몇몇 표사들도 일류고수로 봐도 무방한 자들이었소. 그러니 애초에 만리표국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쪽 잘못 아니오?”
 “···책임을 회피하고자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보시오. 참, 그나저나 언제 우리 애들 빼내 줄 거요?”
 “그냥 풀어줬다가는 만리표국에서 이상하게 여길 테니, 사흘 뒤에 데려가게. 경계는 최소한으로 해두지.”
 이곽은 육대원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바로 그것을 거두었다.
 “내일 데려가겠소.”
 육대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일러.”
 “하루라도 빨리 항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이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참, 선금을 돌려주게. 어쨌든 실패하지 않았나?”
 역량이 부족해 실패한 것이라면 선금을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나, 이번 경우는 의뢰인이 잘못된 정보를 주어 실패한 것이다.
 “이번 일로 죽은 내 형제들 목숨값을 내놔도 모자랄 판국에 선금을 돌려받으시겠다?”
 “본 방에 자네 수하들이 붙잡혀 있다는 걸 잊은 모양이지?”
 “협박하는 것이오?”
 육대원은 어깨를 으쓱했고, 이곽은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이내 그는 품에서 전낭을 육대원 앞에 툭 내던졌다.
 “가져가시오.”
 육대원은 곧바로 전낭을 풀어 살피더니, 이내 그것을 품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루를 나갔다.
 잠시 후, 이곽의 수하 셋이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너희 먼저 항주로 가야겠다.”
 “가서 뭘 하면 됩니까?”
 “공금을 나눠 죽은 형제들 가족에게 나눠줘. 그런 다음, 당분간 몸을 숨기고.”
 “그럼, 형님 혼자 용검방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아니. 누굴 좀 데려갈 생각이다.”
 
 ***
 
 주화문은 따로 거처가 없는 무호에게 표국의 객방 하나를 내주었다.
 무호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으로 추정되는 꿈을 꾸었다.
 새벽녘에 깨어난 무호는 잠시 꿈에 대해 생각하더니, 이내 처소를 나와 표국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어떤 소리가 무호의 귀를 간질였고, 무호는 거기에 이끌렸다.
 잠시 후, 그는 표국의 연무장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목검을 휘두르는 천유현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연무장 구석에 있던 표사가 손뼉을 한 번 치자, 천유현은 목검을 멈췄다.
 “그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네.”
 “네, 하루도 빼먹지 않았습니다.”
 “그럼, 다음 초식을 알려주마.”
 그러면서 표사는 자신의 검을 뽑으며 휘두르기 시작했다.
 천유현은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같은 것을 보던 무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검을 왜 저렇게 휘두르지?’
 무호가 조금 전까지 본 기억의 꿈은 동료들끼리 대결하는 것이었는데, 무호는 그중 검을 쓰는 자와 겨뤘다.
 그의 검은 간결했다. 쓸데없는 변화를 버리고 실용적인 변화에만 초점을 맞췄다.
 반대로, 표사의 검은 쓸데없는 변화가 너무 많았다.
 물론, 무호도 그 대부분이 적을 속이기 위한 허초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너무 많았다.
 ‘게다가 고수에겐 통하지 않아.’
 화려하기만 하고 실속은 전혀 없는 허초는 고수에게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쉬운 먹잇감이 될 뿐이다.
 고수의 눈을 속이려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진짜 같은 허초를 펼쳐야 한다.
 기억에서 본 그자의 검처럼 말이다.
 잠시 후, 표사의 검이 멈췄다.
 “다 기억했느냐?”
 “네.”
 그러면서 천유현은 곧바로 표사가 알려준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처음 펼치는 것인데도, 천유현의 동작에 어색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변화나 검에 실린 위력이 표사의 것보다 훨씬 약했지만, 일단 동작은 정확했다.
 표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대단하구나.”
 남들이 봤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겠지만, 표사는 이미 천유현의 이런 천재성을 여러 차례 보았기에 익숙했다.
 “당분간 변화에만 초점을 맞춰서 수련해라. 위력은 나중에 저절로 붙게 될 테니까.”
 “네.”
 천유현이 힘차게 대답했다.
 잠시 후, 표사가 연무장을 떠났지만, 천유현은 이곳에 남아 계속 검을 휘둘렀다.
 무호는 그런 천유현에게 다가갔다.
 “어? 으, 은공.”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무호가 화를 내면서 천유현은 다시 그를 두려워했다.
 당연히 무호는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도 다행히 화가 치밀어 오르지는 않았다.
 무호는 천유현에게 다가가 말했다.
 “네가 수련하는 걸 봤다. 대단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구나. 하지만, 허점이 너무 많아.”
 “허점이요?”
 천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걸 알려줄 테니, 날 공격해봐.”
 천유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무호를 향해 목검을 겨눴다.
 “하앗!”
 우렁찬 기합과 함께 천유현의 목검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호는 거기에 현혹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천유현만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목검이 무호를 노리자, 무호는 우측으로 비켜서면서 검을 피했다.
 뒤이어 무호의 왼발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 천유현의 배에 꽂혔다.
 퍼억!
 천유현의 몸은 직각으로 꺾였고, 이내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무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살살 찼다. 엄살 부리지 마라.”
 “···네.”
 천유현은 목검을 지팡이 삼으며 간신히 일어났다.
 “다시.”
 천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목검을 들었다. 여전히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이를 꽉 깨물며 견뎌냈다.
 이에 일그러진 무호의 얼굴은 조금 펴졌다.
 ‘좋은 자세다.’
 천유현은 조금 전과 다른 초식을 펼쳤지만, 역시나 무호는 현혹되지 않았다.
 이번엔 허초를 펼치는 도중에 손을 뻗었다.
 어지럽게 움직이는 목검을 피하면서 말이다.
 천유현은 빠르게 다가오는 무호의 손을 보며 순간,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무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고, 그의 손은 천유현의 얼굴 앞에 멈췄다.
 “적을 앞에 두고 눈을 감아?”
 무호의 노기를 띤 언성에 천유현은 움찔하며 그제야 눈을 떴다.
 “앞으로는 절대 눈을 감지 마라.”
 “···예, 은공.”
 이윽고, 무호는 화를 가라앉히고, 손을 거두면서 말했다.
 “첫 번째 허점은 검법에 있다. 쓸데없는 변화가 너무 많아.”
 “그건 상대를 속이기 위한···.”
 “속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나처럼.”
 천유현은 반박하지 못했다.
 “두 번째 허점은 너한테 있다. 동작이 너무 커. 그래서 그만큼 예측하기도 쉽고, 빈틈도 많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검이 약해집니다.”
 “아무리 위력적인 공격이어도 상대를 맞추지 못하면 소용이 없어. 어차피 넌 성장기니까 더 자라면 위력은 저절로 붙게 돼. 그러니까 일부러 동작 크게 하지 마라. 그거 습관으로 굳혀지면 나중에 큰 낭패를 보게 돼.”
 천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은 네 유약한 성격이다.”
 조금 전에 추가한 것이다.
 무호의 답에 천유현은 생각에 잠겼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제가 노력해서 제가 고치겠습니다. 그런데, 검법은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쓸데없는 변화를 줄여.”
 “어떻게요?”
 천유현의 질문에 이번엔 무호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천유현으로부터 목검을 건네받았다.
 ‘조금 전에 본 그자의 검이면 될 것 같은데···. 과연 내가 그걸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
 무호는 이런 생각을 하며 동료의 검을 떠올리며 그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되네.’
 걱정이 무색할 만큼 무호는 기억의 꿈에서 본 검을 쉽게 펼쳐냈다.
 ‘혹시 나도 이 검법을 익힌 건가?’
 이윽고, 무호의 시연이 끝났다. 애초에 많은 초식을 본 게 아니었기에 더 보여줄 게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천유현에게는 충분했다.
 무호는 다시 목검을 건넸고, 천유현은 곧바로 그 초식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동작은 정확하게 따라 할 수 있었지만, 검의 미묘한 변화까지는 역부족이었다.
 “···어렵네요.”
 그때,
 “네 오성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방금 그건 아무리 너라도 한 번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건 무리다.”
 주화문이 연무장에 들어섰다.
 무호와 천유현은 즉시 주화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주화문이 가까이 다가갔다.
 “현이는 여전히 열심히 하는구나.”
 “헤헤, 그래야 저도 빨리 표사가 되죠.”
 천유현의 웃음에 주화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윽고, 무호에게 말을 걸었다.
 “일찍 일어났군. 혹, 잠자리가 불편했나?”
 “아니오. 그냥 눈이 일찍 떠졌소.”
 이에 주화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유현이 물었다.
 “근데, 국주님께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나도 수련하러 왔다.”
 “전용 연무장이 따로 있잖아요?”
 “식구들이 곤히 자고 있는데, 괜히 나 때문에 깰까 일부러 여기로 왔지. 자,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마저 하게.”
 천유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전 표사에게서 배운 검술을 무호의 가르침대로 연습하기 시작했다.
 주화문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역시 수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반격을 하기도 전에 꿈에서 깨어난 터라 정작 자신의 무공을 보지 못한 무호는 연무장 구석에 있는 목검을 가지고 동료의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역시 익숙해. 아무래도 나도 이 검법을 익힌 것 같아.’
 꿈에서 본 동료의 검보다는 못했지만, 무호는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세 사람이 떨어져서 무공을 수련한지 대략 반 시진이 지났을 때, 연무장에 표사 한 명이 들어왔다.
 “국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이 시간에? 누구냐?”
 “스스로 선풍도 이곽이라고 했습니다.”
 “···항주의 그 선풍도?”
 “예.”
 주화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곽의 주 활동지역은 항주와 그 인근 지역이다.
 무영대에 있었던 시절에는 여러 번 그곳에 간 적이 있지만, 딱히 이곽과 얽힌 일은 없었다.
 게다가 만리표국으로 돌아와서는 한 번도 항주로 표행을 간 적이 없다.
 “일단, 이곳으로 안내해라.”
 보통 손님을 연무장에서 맞이하는 건 결례지만, 그가 선의로 오지 않았다면 자고 있는 식구들이 위험할 수도 있기에 주화문은 결례를 범하기로 했다.
 표사가 이곽을 데리러 떠나자, 주화문은 무호와 천유현에게 말했다.
 “자리를 피해 주게.”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무장으로 향하는 표사와 이곽을 보았고, 그 둘을 지나쳤다.
 순간, 무호가 발걸음을 멈추고, 이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설마?’
 “은공?”
 “···아무래도 연무장에 가봐야 할 것 같다.”
 “그럼, 저도 같이···.”
 “아니, 위험할 수 있으니 넌 가지 않는 게 좋아.”
 무호는 천유현을 두고 다시 연무장으로 향했다.
 
 
 # 용검방(龍劍幫)
 
 이곽과 그를 안내한 표사가 연무장에 들어선 직후에 무호 역시 연무장에 도착했다.
 할 일을 마친 표사는 곧장 정문으로 돌아간 뒤, 주화문은 무호를 보며 물었다.
 “왜 다시 온 것인가?”
 무호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이곽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곽은 그런 무호의 눈길이 신경 쓰였는지 그를 힐끔 쳐다보았고, 무호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전날 일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만리표국의 전력이 예상보다 강해서가 아니었다.
 ‘이자가 개입하면서부터 모든 게 틀어졌지.’
 아마 무호만 아니었어도 피해를 보았을지언정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 네놈이었군. 동료들의 복수를 하러 온 것인가?”
 무호가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자, 이곽은 속으로 뜨끔했다.
 “아는 자인가?”
 주화문이 묻자, 무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제 그자들 중 한 명이오. 복면을 쓰고 나타났던.”
 순식간에 주화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사실이오?”
 이곽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주화문은 그를 향해 검을 겨눴다.
 “아, 난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이곽은 이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도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럼, 왜 온 것인가?”
 “내게 그 일을 시킨 자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소?”
 “···선풍도는 실력만큼 신용도 뛰어나 절대 의뢰인에 관한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그 의뢰인이 상도덕을 어겼다면 예외요.”
 주화문은 천천히 검을 내리며 물었다.
 “누가 의뢰했지?”
 “용검방.”
 이곽의 답에 주화문은 코웃음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미동도 없는 그의 눈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증좌는?”
 “오늘 밤 난 용검방에 들어가 내 형제들을 데리고 나올 작정이오. 이미 육대원 부방주와도 이야기를 마쳤소. 경계를 최소화할 테니 와서 데려가라고.”
 “그래서?”
 “나와 같이 갑시다. 그래서 두 눈으로 직접 보시오.”
 “···왠지 다른 꿍꿍이도 있는 것 같군.”
 이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대단하오. 맞소. 다른 꿍꿍이도 있소.”
 “뭐지?”
 “용검방이 살인멸구(殺人滅口)를 시도할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오.”
 남은 형제들을 먼저 보낸 것도 사실 그것 때문이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이미 용검방에 갇힌 자들이 죽었을 가능성도 있을 텐데?”
 “아직 죽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소. 살아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구해낼 것이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되지?”
 “멀리서 지켜보다가 놈들이 정말로 살인멸구를 할 것이라면 내가 미끼가 될 테니 형제들을 데리고 빠져나가 주시오.”
 ‘만일, 이것이 날 죽이려는 함정이라면?’
 주화문은 이 가능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난 네 원수나 다름없는데 왜 그런 걸 부탁하지?”
 “복수보다는 일단 산 놈들부터 구해내는 것이 우선이니 그런 것이오. 게다가 그대 외에 딱히 날 도와줄 사람도 없을 것 같고.”
 “···생각은 해보지.”
 “오늘 자정에 움직일 것이오. 올 거라면 그전에 용검방 인근에 있는 선화객잔 뒤편으로 오시오.”
 그리고 이곽은 몸을 돌려 나가려는 찰나, 잠깐 멈추고 무호를 바라보았다.
 “날 어떻게 알아본 거지?”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똑같아서.”
 “이상한 일이군. 난 계속 기운을 감추고 있었는데 말이야.”
 이곽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연무장을 나갔다.
 그가 떠난 뒤, 무호가 주화문에게 물었다.
 “함정일 수도 있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정말로 용검방이 배후에 있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네.”
 주화문은 이미 가기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물론, 혼자 갈 생각은 아니었다.
 조창을 비롯해 무영대 출신 표사들과 함께 갈 생각이었다.
 설령, 함정이 있어도 그들과 함께라면 쉬이 나올 수 있을 테니까.
 “나도 가고 싶소.”
 그런데, 무호에게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들었다.
 “자넨 안 돼.”
 무영대 출신 표사들은 이미 숱한 작전으로 잔뼈가 굵은 자들이다. 칠 년이나 현장을 떠나 있었지만, 그 경험만큼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웬만큼 위험한 지경에 처하지 않으면 몸을 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무호는 아니었다. 그가 무공을 익힌 강호인이고, 어느 정도 무공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상황대처능력은 다른 이들에 비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자네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어. 그럼, 자넨 죽어.”
 “날 돌볼 필요 없소. 아니, 절대 그러지 마시오.”
 “···어째서인가?”
 “무공 때문이오.”
 빈사 상태에 빠졌을 때, 무호는 마적을 단 일격에 죽였다.
 하지만, 전날 이곽 등과 싸울 때 그의 주먹은 무공을 모르는 사람의 것처럼 평범했다.
 무호는 그 이유를 고민했고, 한 가지 가설을 내렸다.
 “위험한 상황에 닥쳐야만 제대로 무공을 펼칠 수 있는 모양이오.”
 “···목숨을 걸고서라도 무공을 되찾고 싶은 것인가?”
 “그것도 있지만,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오.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또 위기의 순간에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말이오.”
 주화문은 무호의 결연한 표정을 보며 그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두고 가도 따라올 것만 같군.’
 “좋아. 대신, 두 가지 조건이 있네.”
 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일부러 위험한 상황에 빠지려고 하지 말게. 자칫하면 자네는 물론, 나와 다른 이들의 목숨도 위험해지니까.”
 “알겠소.”
 “둘째, 이 일은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이 관건이야.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내 이목에 걸리지 않고 내 등에 손을 대게. 해낸다면 자넬 데려가도록 하지.”
 무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무장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이틀 전의 꿈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주 커다란 전각 안을 은밀히 돌아다니던 꿈이었다.
 지키는 자들이 많았지만, 그 누구의 이목에도 걸리지 않았다.
 비록 꿈이지만, 당시의 감각을 고스란히 느꼈던 무호는 그것을 떠올리며 최대한 비슷하게 움직이려고 했다.
 잠시 후, 무호가 세 걸음을 걸었을 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아니야.’
 이후, 무호는 연무장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오직 그것에만 매진했다.
 시간이 흐르고 정오가 되었을 때, 무호는 연무장을 나왔다.
 연무장에서 수련하던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말이다.
 
 ***
 
 자정이 다가오면서 이곽은 야행복을 입고, 복면을 쓴 뒤, 선화객잔 뒤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비슷한 복장을 한 열세 명이 나타났다.
 수가 많기는 했지만, 이곽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일이 잘못될 경우, 지원이 많아야 형제들을 살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크니 말이다.
 주화문은 곧바로 지도 한 장을 꺼냈다. 용검방의 내부를 표시한 것으로, 그가 가끔 용검방을 방문했을 때 봤던 것을 토대로 오늘 만들었다.
 “나와 조창, 그리고 무호는 선풍도와 함께 움직인다. 나머지는 동태를 감시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퇴로를 확보한다.”
 그러면서 주화문은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수하들을 각기 다른 장소에 배치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이들은 곧바로 용검방을 향해 은밀히 움직였다.
 잠시 후, 용검방에 가까이 접근했고, 무영대 출신 표사 중 한 명이 담벼락에 매달려 안의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안쪽에는 사람이 없었고, 그는 곧바로 넘어도 좋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이에 모두가 담을 넘어 용검방에 발을 디뎠다.
 무영대 출신 표사들은 미리 배정받은 곳으로 은밀히 움직였고, 나머지 네 명은 용검방 뇌옥으로 향했다.
 용검방은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한산했기에 이동하는 데 문제가 되는 건 없었다.
 ‘일단, 육대원의 말대로 경계가 약하군.’
 이곽은 안심했다.
 ‘선풍도의 말대로 용검방이 배후에 있는 것인가? 제길.’
 ‘빌어먹을 놈들. 상납금을 그렇게 받아 처먹었으면서 우릴 노려?’
 주화문과 조창은 속으로 분을 삼켰다.
 잠시 후, 이들은 뇌옥에 거의 다 도착했다. 모퉁이만 돌면 된다.
 조창이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고, 뇌옥 앞을 지키는 무사 두 명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품에서 어린아이 주먹 크기의 쇠공을 꺼내 뇌옥을 향해 굴렸다.
 쇠공은 작은 소리를 내며 천천히 뇌옥을 향해 굴러갔고, 이내 횃불의 빛이 닿는 간격 안에 들어선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물체가 빠르게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피하기 마련이지만, 느리게 움직이거나, 혹은 도중에 멈추면 피하지 않는다.
 입구를 지키던 무사 두 명 역시 쇠공을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한 명이 쇠공을 향해 다가갔고, 그것을 주우려는 순간, 주화문과 조창이 움직였다.
 조창은 쇠공을 주우려는 무사에게, 주화문은 입구에 있는 무사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앞에 있는 무사는 두 사람을 보지 못했지만, 뒤에 있는 무사는 둘을 발견했다.
 해서, 그는 곧바로 호각을 꺼내 힘차게 불려고 했다.
 하지만, 호각이 입에 닿기도 전에 주화문은 그에게 다가가 수혈을 짚어 재웠다.
 그리고 이보다 먼저 조창이 쇠공을 주우려는 무사를 기절시켰다.
 이곽과 무호가 뇌옥 입구 앞으로 다가갔다.
 이곽은 곧바로 문을 잡고 당겼다.
 끼이이익!
 순간, 문 틈새로 검이 하나 삐죽 나왔고, 그를 본 이곽은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문이 완전히 열리면서 안에서 서른 명가량이 나왔다.
 그중에는 용검방 부방주 육대원도 있었다.
 “감히 용검방에 침입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놈들이구나!”
 화를 내는 말투와 달리 육대원은 히죽 웃고 있었다.
 용검방 무사들은 무호 등에게만 시선을 주었기에 육대원의 웃음을 보지 못했지만, 무호 등은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육대원!”
 살인멸구를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눈앞에 닥치니 화가 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내 형제들은 어찌했느냐?”
 “형제들? 아, 혹시 이놈들을 말하는 거냐?”
 육대원은 이렇게 말하면서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뒤에서 용검방 무사 아홉 명이 다시 뇌옥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각자 시신을 하나씩 들고 말이다.
 순간, 이곽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만리표국에 사로잡힌 건 여섯 명이다. 즉, 시신도 여섯 구여야 했다.
 그런데 아홉이었다.
 ‘분명, 항주로 떠나는 걸 봤는데, 왜 여기에···?’
 순간, 이곽은 깨달았다. 육대원이 항주로 가던 그 세 명까지 죽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면서 이곽의 눈에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육대원,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새끼! 죽여버리겠다!”
 이곽의 외침에 육대원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이곽 곁에 있는 자들을 보았다.
 ‘근데, 저놈들은 누구지? 선풍도가 따로 고용한 자들인가?’
 육대원은 그들의 정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곽은 도를 들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퍼어억!
 하지만, 이곽은 발을 떼기도 전에 조창의 수도에 목덜미를 맞고 기절했다.
 조창은 축 늘어진 그를 어깨에 걸쳤다.
 주화문은 무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여기서 저들을 막고 있을 테니, 자넨 창이와 함께 먼저 나가게.”
 “내가 막겠소.”
 “기억 때문이라면 그러지 말게. 자네 목숨이 더 중요해.”
 “자칫 그대의 정체가 노출되면 표국이 위험해질 수 있소. 하지만, 저들은 나를 모르니 괜찮을 것이오.”
 “···그럼, 같이 하세”
 이윽고, 상황을 지켜보던 무영대 출신 표사 넷이 나타났다.
 조창은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곽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뭣들 하느냐! 저들을 죽여라!”
 육대원의 명령에 뇌옥 입구에 있던 용검방 무사들이 움직이자, 주화문과 무호가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악양제일을 넘보는 용검방답게 무사들 개개인의 실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작정하고 전력을 드러내는 주화문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무사 일곱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자, 다른 이들이 슬금슬금 그를 피했다.
 이에 육대원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겨우 세 합 만에 상대의 실력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걸 간파한 육대원은 무사 다섯의 도움을 받으면서 겨우 주화문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무호는 스무 명에 가까운 무사들과 싸웠다.
 ‘이상해.’
 그는 꿈에서 본 동료의 검법을 펼쳤다.
 하지만, 무호의 검은 천유현 앞에서 펼쳤을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변화는 매서웠지만, 속도나 위력은 평범한 그런 검이었다.
 당연히 용검방 무사들 가운데 그런 무호의 검에 당하는 자는 없었다.
 ‘내 가설이 틀린 건가?’
 용검방 무사들이 휘두르는 검이 무호에게 다가왔다.
 챙! 챙! 챙!
 무호는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그것을 쳐냈다. 마치 날벌레를 쫓아내듯 말이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가설이 틀린 게 아니라, 나한테 이건 위험한 상황이 아닌 거였어.’
 분명, 처음에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들과 싸우는 지금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호는 시산혈해(屍山血海)가 펼쳐진 평원에서 식사하던 꿈을 떠올렸다.
 그중 무호가 주목한 건 천 구가 훨씬 넘었던 시신의 숫자였다.
 ‘만일, 그들을 나와 다른 아홉 명이 힘을 합친 결과물이라면?’
 처음 그 꿈을 꾸었을 때,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기는 했지만, 바로 배제했다.
 고작해야 열 명이 천 명이 넘는 적을 상대로 싸웠는데도 큰 부상 없이 이겼다는 건 좀처럼 믿기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용검방 무사들에게서 어떤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는 것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들로는 부족해.’
 무호는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에만 집중했다.
 다행히 그의 눈은 무공을 펼치는 것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날카로웠기에 쉽게 이들의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 반 각 정도 지났을 때,
 피유유융! 퍼엉!
 용검방 밖에서 폭죽이 터졌다.
 밖으로 빠져나왔다는 신호였다.
 이에 무호와 주화문은 곧장 뒤로 후퇴했고, 육대원은 저들을 쫓으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은 뒤에 스물이 넘는 무사들을 달고 이동했고, 도중에 여러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창 등이 빠져나가는 도중에 그들을 막던 용검방 무사들의 시신으로, 다행히 조창이나 다른 표사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점점 외곽으로 나갈수록 추적하는 무사의 숫자는 늘어났다. 심지어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요리조리 움직이며 용검방 무사들을 피해 다녔다.
 그리고 담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무호와 주화문은 달리는 상태로 뛰어오르며 담을 넘었다.
 뒤이어 용검방 무사들도 담을 넘었다.
 순간,
 “아아악!”
 그들은 조금 전 주화문이 놓아둔 철질려(鐵蒺藜) 위에 착지해버렸다.
 다행히 뒤에 있던 무사들은 동료들의 비명에 담을 완전히 넘지 않고, 그 위에 올라섰기에 철질려를 밟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상황을 살피는 사이, 무호와 주화문은 이미 점이 되어버렸고, 용검방 무사들은 그 둘을 추격하지 못했다.
 
 ***
 
 “선풍도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깨어나는 즉시 내보내겠습니다.”
 조창의 말에 주화문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 보지 않았나? 복수심에 불타는 두 눈을. 그는 여길 나가는 즉시 용검방으로 갈지도 몰라. 그럼, 죽겠지.”
 “하지만, 선풍도가 여기 있다는 걸, 우리가 그를 도운 걸 용검방이 알면 표국이 위험합니다.”
 이곽은 용검방에 침입했고, 주화문 등은 그를 도왔다. 게다가 용검방 무사들도 여럿 죽었다.
 즉, 용검방이 만리표국을 공격해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용검방이 먼저 이곽에게 만리표국을 공격하라고 한 것을 밝힐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입증할 방도가 없다.
 이곽의 증언만으로는 용검방에게 죄를 물을 수가 없다.
 “그러니 그를 숨겨야지. 소요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까지 말이다. 그사이에 용검방이 우릴 노리는 이유를 찾아야 해.”
 조창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이 년 전부터 노호표국(怒號鏢局)이 악양의 다른 표국들을 흡수해 규모를 키우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혹, 그것과 관련이 있지 않겠습니까?”
 노호표국은 악양에서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하는 표국으로, 용검방주 육진원의 처가이기도 했다.
 “우리 만리표국을 비롯해 몇몇 표국의 견제로 진척이 없으니 용검방이 나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조창의 말에 주화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게 해서 노호표국이 악양을 완전히 틀어쥔다면, 용검방 역시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상납금을 받겠지.”
 “정말 그런 이유라면 앞으로도 용검방은 우리나 다른 표국들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 노릴 겁니다.”
 “만일, 정말 그런 것이라면, 막아야지.”
 “방도가 있습니까?”
 “청월방(靑月幫)을 끌어들인다.”
 용검방이 악양에서 제일 큰 정파라면, 청월방은 악야에서 제일 큰 사파다.
 “사파놈들 밑으로 들어가자는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 단지, 용검방과 노호표국의 계획을 은밀히 알릴 생각이다. 그럼, 청월방이 그걸 막으려고 움직이겠지.”
 용검방과 청월방 사이에 작은 분쟁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것이 전면전으로 변하지 않은 건 두 방파의 전력이 엇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검방이 막대한 자금으로 전력을 더욱 강화한다면 힘의 균형은 무너진다.
 당연히 청월방으로서는 무조건 그것을 막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다른 표국들과 힘을 합쳐 노호표국을 견제하고.”
 이때 무영대 출신 표사가 찾아왔다.
 “국주님, 표국을 은밀히 감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화문과 조창의 얼굴이 굳어졌다.
 용검방에 가기 전까지 감시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용검방에서 그들을 보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그런데, 어떻게 용검방은 이곽과 같이 움직인 이들이 만리표국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놈들이 우릴 알아본 것일까요?”
 “아니, 분명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어. 일단, 선풍도를 더 깊숙한 곳에 숨겨.”
 “예, 형님.”
 
 ***
 
 “대체 네놈은 일을 어떻게 처리한 것이냐!”
 용검방주 육진원은 사촌 동생이자 부방주인 육대원에게 호통을 쳤다.
 “죄, 죄송합니다. 설마, 선풍도 곁에 그리 고강한 고수가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육대원도 어쩔 수 없었지만, 육진원에게는 그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곽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어디냐?”
 “만리표국입니다.”
 이에 육진원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놈이 자기가 노린 표국을 끌어들였다는 말이냐?”
 “어떻게 그것을 해냈는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만리표국이 확실합니다.”
 “어째서냐?”
 “저와 겨뤘던 자는 매우 뛰어난 고수였습니다. 이곽은 그런 자를 겨우 하루 만에 찾아냈으니, 당연히 그자는 악양에 사는 자일 겁니다. 그리고 악양 내에서 그만한 고수는 별로 없습니다.”
 악양의 최고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항상 세 사람이 언급된다.
 용검방주 육진원, 청월방주 마원, 그리고 유정방.
 “그렇다면, 마원이나 유정방일 수도 있지 않나?”
 “마원은 칠 척이 넘는 거한입니다. 하지만, 그자는 육 척에 조금 못 미쳤습니다. 또, 그자가 데려온 자들은 일류고수라 해도 손색이 없었으며, 그 숫자가 십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세력이 없는 유정방이 하루 만에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만리표국이다?”
 “예. 이곽은 주화문이 악양의 삼대고수와 비견될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고 했습니다. 또한, 일류고수나 다름없는 표사들도 여럿 있어서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육진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거기에 있는 게 확실하냐?”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그곳에 무사들을 보냈나?”
 “네, 이곽이 언제 나올지 몰라 감시자를 몇 보냈습니다.”
 “당장 무사들 풀어서 인근 민가를 수색하는 시늉이라도 해. 그리고 선풍도 이곽이 본방에 침입해 무사들을 죽이고 달아났다는 말을 은밀히 퍼트리고.”
 여기까지 들은 육대원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런 다음에 누군가 이곽이 만리표국에 들어간 걸 봤다고 꾸미면···.”
 “만리표국까지 엮을 수 있지. 그러니까 감시하는 녀석들에게 똑바로 하라고 전하고, 표국으로 갈 무사들도 미리 준비해라.”
 “장로들 휘하에 있는 무사들도 데려가시는 겁니까?”
 이에 육진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괜히 그 늙은이들까지 따라오면 골치 아파. 그냥 너와 나, 그리고 우리 휘하에 있는 녀석들만 데려간다.”
 “예, 방주님.”
 시간이 흐르고 정오가 되었을 무렵, 육진원과 육대원, 그리고 용검방의 무사 백여 명이 만리표국을 향해 출발했다.
 
 ***
 
 주화문은 용검방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무영대 출신 표사 둘을 그곳으로 보냈다.
 그래서 육진원 등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주화문은 저들이 만리표국을 수색하려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일부러 방비하지 않았다.
 시간도 부족하고, 감시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데다가, 해봐야 저들에게 이곳에 이곽이 있다는 확신만 심어줄 뿐이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해 육진원이 이곽이 만리표국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 더 낫다.
 해서, 주화문은 평소처럼 집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했고, 표국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 식경이 지나서야 주화문은 용검방이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육 방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화문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조아리며 그에게 포권을 취했다.
 ‘이것도 전부 거짓된 모습인가?’
 육대원으로부터 그가 얼마나 강한지 들은 육진원은 주화문의 이런 모습조차 의심했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간 무탈하셨소?”
 “걱정해주신 덕분에 다행히 큰일에 휘말리지는 않았습니다. 한데, 이곳에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흠, 부끄러운 일이나 전날 밤 본방에 안 좋은 일이 있었소. 혹, 알고 있소?”
 “예. 소문을 들었습니다. 선풍도라는 자가 용검방에 침입해 무사들을 죽이고 달아났다는···.”
 “그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만리표국에 선풍도가 있다는 정황을 포착하여 이리 온 것이오.”
 주화문은 일부러 얼굴을 굳혔다.
 “그러니까, 지금 육 방주께선 만리표국을 수색하러 오신 겁니까?”
 “그렇소.”
 “불가한 일입니다.”
 주화문은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한 번 튕겼다. 그래야 자연스러우니까.
 “지금 표국에는 여러 계약이 진행 중인데, 용검방 무사들이 들쑤시고 다니는 걸 보면, 계약이 성사되겠습니까?”
 실제로 몇몇 계약이 진행 중이다. 해서, 주화문은 이걸 핑계로 삼았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겠소. 그래도 안 되겠소?”
 주화문은 얼굴을 찡그린 채 고민하는 척했다.
 “좋습니다. 대신, 이번 일로 표국에 손해가 생긴다면, 그에 대한 배상을 용검방이 물어주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이에 육진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강하게 나와? 설마, 선풍도를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숨겨둔 걸까? 아니면, 일부러 이렇게 해서 내가 수색을 포기하게 할 셈인가?’
 주화문의 예상대로 육진원은 이곽이 표국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육진원을 돌아가게 하지는 못했다.
 “좋소. 본방이 책임을 지겠소.”
 잠시 후, 육진원은 표국과 계약하려는 자들을 만나 사정을 설명해 그들에게서 양해를 구했다.
 이후, 용검방 무사들이 만리표국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한 식경 정도 지났을 때, 표국의 쟁자수 중 한 명이 주화문과 육진원에게로 달려왔다.
 “국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무호, 그 친구가 용검방 무사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뭐?”
 
 
 # 화가 나는 이유
 
 용검방에서 돌아온 뒤, 무호는 거처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채 상념에 잠겼다.
 ‘잠행술은 어느 정도 가능해. 그런데 왜 검법은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거지?’
 무호는 침식도 잊은 채 그 답을 찾으려 끊임없이 생각했다.
 ‘익숙하기는 한데, 분명 익힌 것 같은데, 왜 제 위력을 내지 못하는 거지?’
 한참을 생각하던 무호는 막대기 하나를 들고 그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역시나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속도와 위력은 평범했다.
 ‘왜 이건 안 되고, 잠행술은 되는 걸까?’
 그러면서 무호는 저도 모르게 기척을 지웠다.
 순간, 무호는 몸 내부에서 미세하지만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혹시···?’
 잠행술을 푼 무호는 가부좌를 틀어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 단전 구석에 단단하게 뭉친 기운을 발견했다.
 ‘이게 내 내공?’
 내공을 처음으로 인지한 무호는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운용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내공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땅속 깊이 박힌 천년 거목의 뿌리처럼 단전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상하군. 그럼, 조금 전 그건 내공이 아니었나?’
 무호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잠행술을 펼쳤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꼼짝도 하지 않던 내공이 움직였다. 물론,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경맥을 타고 흘러 무호의 잠행술을 더 은밀하게 해주었다.
 무호는 곧바로 잠행술을 풀고 검법을 펼쳤지만, 내공은 그에 반응하지 않았다.
 ‘꿈에서 잠행술은 내가 직접 펼친 거지만, 검법은 남이 하는 걸 보기만 했어.’
 잠행술을 펼칠 때, 무호는 꿈에서의 감각을 재현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최대한 가깝게 재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검법은 그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잠행술과 검법의 차이는 이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꿈속에서 검법을 펼치고, 그 감각을 현실에서 재현해낸다면, 내공이 반응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한 무호는 곧바로 침상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는 순간,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무호는 상체를 일으키며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건 용검방에서 본 옷인데···. 그리고 천유현? 왜 이 녀석이 저놈과 같이 있는 거지?’
 천유현은 무호를 보며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은공.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천유현은 곧바로 같이 온 무사에게 말했다.
 “무사님, 여기에는 저분 말고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만···.”
 스릉!
 순간, 용검방 무사의 검이 살짝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만 더 수색을 방해하면, 네 목을 베겠다.”
 전날, 조창 등의 뒤를 쫓다가 죽은 자들 가운데 그의 친동생도 있었다.
 그것도 눈앞에서 동생이 죽는 광경을 보았던 터라 무사는 분기탱천한 상태였다.
 해서, 낮게 깔린 무사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했고, 천유현은 저도 모르게 물러났다.
 이에 무호는 침상에서 내려와 용검방 무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무사는 당연히 그런 무호의 눈에 미간을 찌푸렸다.
 천유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은공, 참으세요.”
 하지만, 무호의 귀에는 그런 천유현의 말이 들어오지 않는지, 여전히 용검방 무사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천유현은 몸을 돌렸다.
 “무사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수색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스르릉!
 천유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용검방 무사는 완전히 검을 뽑았다.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거냐?”
 “꺼져. 그럼, 살려는 주마.”
 “이 새끼가···.”
 무호의 말에 무사의 눈이 살기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천유현은 이것을 수습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쿵!
 “무사님!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검을 거둬주십시오!”
 ‘절대 은공이 해를 입어선 안 돼.’
 이에 무호는 이를 빠드득 갈며 그런 천유현의 뒷덜미를 잡고는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함부로 무릎을 꿇지 마라. 특히···.”
 무호는 다시 용검방 무사를 눈에 담았다.
 “저따위 놈에겐 더더욱.”
 순간, 꾹꾹 눌러 담았던 무사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그의 눈에 무호가 동생을 죽인 원수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 새끼! 죽여버린다!”
 무호는 곧장 천유현을 끌어당겨 뒤로 던졌다.
 그리고 천유현이 침상에 안착한 순간, 무호의 주먹이 무사의 배에 꽂혔다.
 퍼어어억!
 몸이 반으로 접힌 그는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격통에 검을 놓쳤고, 이내 기절해버렸다.
 무호가 주먹을 거두자, 무사의 신형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쓰러졌다.
 무호는 그런 그의 머리칼을 잡은 뒤, 질질 끌고 나갔다.
 때마침 다른 객방의 수색을 마치고 나온 용검방 무사 일곱과 밖에서 기다리던 만리표국 쟁자수가 이 광경을 보았다.
 무호는 마당에 그를 휙 내던졌다. 그리고 다른 용검방 무사들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데리고 가라.”
 처음엔 눈에 들어온 광경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있었던 용검방 무사들은 무호의 말 한마디에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그들은 검을 뽑아 무호를 향해 겨눴다.
 “자, 잠시만요!”
 그때, 방 안에 있던 천유현이 달려 나와 그들 앞에 섰다.
 “사, 사소한 오해였습니다. 그러니까···.”
 천유현은 여기서 사태가 더욱 커지면 무호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해서, 저들을 만류하고 싶었다.
 “비켜라.”
 “오해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할 테니 그냥 넘어가 주십시오.”
 천유현은 다시 무릎을 꿇었고, 이를 본 무호는 또 이를 갈았다.
 “이 일로 용검방과 만리표국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면 양쪽 다 피해를 보게 될 겁니다. 그러니···.”
 천유현은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일부러 확대시켰다. 용검방도인 저들이 용검방에 해가 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말이다.
 하지만, 무사들은 천유현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먼저 우릴 건드린 건 너희 만리표국이다. 그리고 감히 만리표국 따위가 용검방의 상대가 될 것 같으냐?”
 그의 말에 다른 무사들이 동조했다.
 “저놈을 죽여도 만리표국은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아. 오히려 지금 네가 그렇듯 국주가 우리 앞에 무릎을 꿇겠지.”
 무사의 검이 천유현의 목 앞에 멈췄다.
 “비키지 않으면 너부터 죽는다.”
 물론, 그는 진짜 천유현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냥 이렇게 겁을 주어 비키게 할 요량이었다.
 “비킬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절 죽이십시오. 아니, 제 목숨으로 이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떨리는 천유현의 목소리에 무사는 피식 웃었다.
 ‘검을 휘두르면 녀석의 본능이 알아서 피하려고 하겠지.’
 이윽고, 무사는 검을 높이 들더니 그대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천유현은 무사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계속 그 검을 본다면 자기도 모르게 피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천유현은 두 눈을 감았다.
 이에 무사의 얼굴이 굳어졌고, 그는 즉시 검을 멈추려고 했다.
 그때, 무호가 천유현 옆에 서더니 그 검을 잡았다.
 주룩!
 날에 베이면서 피가 나왔지만, 무호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더 꽉 쥐었다.
 “감히 누구에게 검을 휘두르는 거냐?”
 살기로 가득한 무호의 목소리에 무사와 천유현은 물론, 다른 용검방 무사들과 쟁자수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전까지 무호는 혼이 둘로 나뉜 듯 화를 내면서도 동시에 이성을 유지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항상 왜 화를 내는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혼이 완전히 합쳐진 듯, 그 이성이 거의 남지 않았다.
 왜 화를 내는지 생각하지 못할 만큼, 진짜 화가 난 것이다.
 검이 악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고, 무호는 곧장 무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은공!”
 분노로 가득했던 무호의 말에 눈을 뜬 천유현은 그가 공격하려는 것을 보았다.
 원래는 참으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적의 머리를 일격에 부쉈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죽이시면 안 돼요!”
 직후, 무호의 주먹이 무사의 얼굴에 꽂혔다.
 무사는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고, 천유현은 그때와는 다른 광경에 안도했다.
 하지만, 다른 무사들이 일제히 무호를 향해 움직이면서 안도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는 싸움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니야. 딱 한 가지 남았어.’
 천유현은 이곳에 있는 다른 쟁자수를 보며 외쳤다.
 “아저씨, 어서 국주님을 모셔오세요!”
 그 외침에 얼이 빠져있었던 쟁자수는 정신을 차렸고, 이내 이곳을 주화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사들은 차례대로 쓰러져 이제 한 명만이 남았다.
 무호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다가갔고, 무사는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무사의 등이 담벼락에 닿으면서 그가 뒤로 물러날 공간이 없어졌다.
 이때 눈앞까지 다가온 무호가 천천히 오른손을 내뻗었다.
 무사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상대를 죽이려는 검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상대가 물러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검이었다.
 하지만, 무호는 그런 무사의 마음이 깃든 검을 왼손 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가볍게 쳐내버렸다.
 타앙!
 이와 동시에 무호의 오른손이 무사의 가슴에 닿은 순간, 내공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행술을 펼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움직임이었다.
 이내 내공 일부가 흘러넘쳤고, 그렇게 나온 내공은 경맥을 타고 빠른 속도로 흐르다가 최종적으로 오른손 장심에 도달했다.
 “커헉!”
 무사는 피를 토했고, 곧바로 그의 몸은 축 늘어졌다.
 무호가 손을 거두자, 무사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천유현이 쏜살같이 다가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이다. 죽지는 않았어.’
 미약하기는 하지만, 숨이 붙어있는 것에 천유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무호는 자신의 손을 의아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왜 죽이지 못한 거지?’
 분명 살의가 솟구쳤고, 죽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다.
 무호가 천유현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 녀석의 말 때문에?’
 “은공, 여긴 제가 수습할 테니 빨리 몸을 숨기세요.”
 원래 천유현은 싸움이 끝나기 전에 주화문이 이곳에 상황을 수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쟁자수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용검방 무사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주화문이 와도 소용이 없다.
 당사자인 무호를 피신시키는 것 외에는 말이다.
 “내가 한 일이다. 당연히 수습도 내가 하는 게 옳아. 그보다 내가 분명 조금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함부로 무릎을 꿇지 말라고.”
 “하지만, 싸움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왜 막아야 하지?”
 “은공을 보호하고, 동시에 만리표국을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으로 날 보호할 수 없다. 저들이 널 무시하면 그뿐이니까. 또한, 네 행동은 만리표국을 약자로 보이게 할 뿐이다. 그리되면 용검방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표국을 먹잇감으로 보겠지.”
 순간, 천유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평생 약자로 살아갈 생각이라면 앞으로도 계속 무릎을 꿇어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함부로 무릎을 꿇지 마라.”
 무호의 말에 천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주화문과 만리표국 표사들, 육진원과 용검방 무사들, 그리고 계약하러 왔던 몇몇 상인들이 이곳에 들어섰다.
 용검방 무사들은 즉시 쓰러진 동료들의 상태를 살폈다.
 이와 동시에 육진원은 무호를 향해 살의를 품으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네놈이 본방의 무사들을 이리 만든 것이냐?”
 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육진원이 곧바로 검을 뽑으려고 했다.
 그때, 주화문이 재빨리 다가와 육진원의 오른팔을 잡아 그의 검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걸 막았다.
 “일단, 어찌 된 영문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다른 상인들이 다가와 그의 말에 동조했다.
 이에 육진원은 어쩔 수 없이 검을 집어넣었고, 주화문은 그의 팔을 놓으면서 무호에게 물었다.
 “왜 이들과 싸운 것인가?”
 “···저들이 먼저 검을 뽑았소.”
 그러면서 무호는 천유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녀석을 죽이려고 한 놈도 있었소.”
 순간, 육진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용검방의 무사가 먼저 검을 뽑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 겨우 열넷인 현이를 죽이려고 했단 말인가?”
 주화문은 일부러 천유현의 나이를 언급하면서 되물었다.
 “그렇소.”
 육진원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고, 상인들은 놀란 눈으로 육진원과 주화문을 번갈아 보았다.
 “육 방주님, 분명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수색은 하되, 표국에 피해가 발생하지 않고, 표국 식구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선에서 하겠다고. 그런데, 겨우 열넷인 소년을 죽이려고 한 것이 선을 넘지 않은 겁니까?”
 용검방은 정파에 속한 방파다. 그런 곳의 무사가 어린 소년에게 먼저 검을 겨누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정파로서의 위신과 명예가 걸린 일, 당연히 육진원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저자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오.”
 여기서 천유현이 무호의 편을 들어도 다들 한통속이라고 우기면 그뿐이면 된다는 생각에 육진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무호의 말에 육진원이 피식 웃었다.
 ‘역시 저 애송이를 끌어들일 셈이군.’
 이윽고 육진원이 미리 준비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려는 찰나, 무호가 천유현 곁에서 멀어졌다.
 ‘뭐지?’
 예상과 다른 움직임에 육진원은 가만히 무호를 바라만 보았고, 이내 무호가 기절한 용검방 무사 중 한 명 앞에 멈춰 선 것을 보았다.
 무사들 가운데 첫 번째로 무호에게 당해 기절했던 자 앞에 말이다.
 무호는 곧장 무사의 배를 가볍게 발로 찼다.
 “무슨···!”
 그의 행동에 곁에 있던 다른 용검방 무사가 따지려는 순간,
 “쿨럭!”
 기절했던 무사가 기침을 하며 깨어났다.
 무호는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그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런 다음, 손을 놓고 말했다.
 “조금 전 방에서 있었던 일,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놔.”
 조금 전 몸소 느꼈던 무호의 실력에 잔뜩 겁먹은 무사는 그의 사나운 눈매와 북풍한설과도 같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 육진원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주 국주, 이 소년이 먼저 수색을 방해한 것이오. 비록, 내 수하가 그에 강하게 나서기는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 이 소년을 죽이려고 했다고는 볼 수 없소.”
 그때, 무호가 말했다.
 “검을 휘두른 건 저놈이지.”
 이러면서 무호는 자신이 두 번째로 기절시킨 자에게 다가가 같은 방법을 깨웠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 솔직하게 말해.”
 그러자 그 역시 조금 전 무사처럼 제정신이 아닌 듯 말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야기를 전부 들은 육진원은 얼굴을 한껏 찡그린 채로 말했다.
 “···검을 휘두르기는 했으나, 죽일 의도가 없었다고 하지 않소?”
 “그건 저자의 주장에 불과합니다.”
 주화문은 조금 전 육진원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하지만, 그 주장을 입증했던 무호와 달리, 용검방 무사는 천유현을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었다.
 검을 멈춘 다음에 무호가 움직였다면 모를까, 그러기도 전에 무호가 검을 잡았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육진원은 입술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주화문은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더 이상의 수색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그의 말에 상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고, 육진원은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싸움을 말리려던 죄 없는 소년에게 검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계속 수색을 강행한다면 용검방의 명예만 더 실추될 뿐이다.
 그것은 곧 지금까지 명예를 통해 쥘 수 있었던 돈과 권력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칫하면 용검방의 실권마저 잃을 수도 있다.
 ‘차라리 사과하고 물러나는 것이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
 
 육진원이 용검방 무사들을 데리고 표국을 떠난 이후, 무호는 방에 틀어박혀 내공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내공은 꿈틀거리기만 할 뿐, 요동치지는 않았다.
 용검방 무사들을 때려눕힐 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수백 번 시도했지만, 가볍게 파문이 일어나는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무호는 일단 그 정도에 만족하고, 곧바로 생각에 잠겼다.
 ‘왜 갑자기 내공이 움직인 걸까? 위험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화가 나서? 하지만, 이전에는 화가 났어도 내공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평소와 달리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화를 냈기 때문일까? 그럼, 왜 이번엔 그 정도로 화가 난 거지?’
 그러면서 무호는 오늘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그렸고, 한 장면에서 멈췄다.
 용검방 무사가 무릎을 꿇은 천유현에게 검을 휘두르는 장면에서 말이다.
 ‘설마, 녀석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난 녀석을 싫어하는데···. 그런 녀석이 죽을 상황에서 놓였다고 내가 화를 낸다?’
 순간, 방문이 열리며 조창이 안으로 들어왔고, 무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슨 일이지?”
 이에 조창은 술병이 가득 들어있는 바구니를 들었다.
 “같이 술이나 하자고.”
 “용검방이 언제 표국을 노릴지 모르는데, 이인자가 술을 마셔도 되나?”
 “그 녀석들, 한동안 바쁠 거야.”
 “무슨 말이지?”
 “일단, 마시면서 이야기하지.”
 이에 무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조창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잔 없이 병째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잠시 후 두 사람은 각자 한 병을 전부 비웠다.
 “크으, 좋다. 청월방이라고, 악양에서 용검방과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동시에 사이가 안 좋은 방파야. 선풍도, 거기로 갔어.”
 “그런데?”
 “용검방이 우릴 노린 이유는 사돈지간인 노호표국을 위해서일 거야. 노호표국이 악양의 표국들을 흡수하면 그만큼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그중 일부가 용검방에 들어가겠지. 선풍도는 그런 사실을 청월방에 알려줄 거야.”
 “···그럼, 청월방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방해를 하겠군.”
 조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것도 대대적으로 말이야. 제아무리 용검방이라도 청월방의 방해 속에서 일을 도모하는 건 힘들어. 아마 용검방은 일단 청월방의 방해부터 해결한 뒤에 다시 일을 도모하겠지.”
 시일이 꽤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는 사이에 만리표국을 중심으로 여러 표국이 힘을 합쳐 노호표국에 대항하면 결국 용검방과 노호표국의 일은 실패로 돌아간다.
 조창의 말에 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무호는 바구니에서 새로 술 한 병을 꺼내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뭐지?”
 “역시, 눈치가 빠르네.”
 조창은 피식 웃으며 역시 바구니에서 술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고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물었다.
 “너, 유현이 싫어하냐?”
 “···그건 왜?”
 “오늘 현이에게 들었는데, 네가 자길 싫어하는 것 같다고 하더군. 그래서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내게 묻더라.”
 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
 “왜 싫어하지?”
 “녀석을 보면 화가 나.”
 “화? 이상하네. 현이가 누굴 화내게 할 녀석은 아닌데···.”
 조창은 고개를 갸웃거린 뒤, 물었다.
 “그냥 보면 무조건 화가 나?”
 이에 무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유현에게 화가 났을 상황들을 떠올렸다.
 그러다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았다.
 “···녀석의 나약한 모습을 보면 화가 나.”
 두려움에 떨거나, 혹은 적에게 무릎을 꿇던 모습에 항상 화가 났다.
 심지어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도, 천유현에게서 나약한 모습에 엿보여 화가 났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만 화가 나.”
 평상시에는 아무렇지도 않다.
 “혹시, 다른 사람들의 나약한 모습에도 화가 나나?”
 “···아니.”
 “그럼, 유독 현이한테만 화가 난다는 건가?”
 조창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이어서 말했다.
 “싫어하는 거 맞아?”
 조창의 물음에 무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현이만 보면 무조건 화를 낸다면야 싫어하는 게 맞을 텐데, 그렇지는 않잖아?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약한 모습에는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내가 왜 녀석의 약한 모습에 화를 내는 거지?”
 “흐음, 현이가 네가 기억을 잃기 전 알던 누군가와 닮은 게 아닐까?”
 순간, 무호는 꿈에서 봤던 중년인과 천유현의 얼굴에 겹쳐 보였던 일을 떠올렸다.
 “어쩌면 넌 그 사람의 약한 모습에도 화를 냈을 수도 있겠지. 현이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그게 아니면···.”
 “아니면?”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네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현이는 그와 달리 자꾸 약한 모습을 보이니 화가 난 거지.”
 꿈에서 그 중년인이 나온 건 지금까지 한 번밖에 없었다.
 시산혈해가 펼쳐진 곳인데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같이 식사를 하던 꿈에서 말이다.
 “···만일, 후자면 그 사람은 내게 뭘까?”
 “뭐, 딱 뭐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네가 그 사람을 좋아했다고는 할 수 있겠지.”
 “좋아했다?”
 조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이에게서 그 사람을 보고 싶은데, 자꾸 그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까 화가 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
 “녀석에게서 그 사람을 보려고 한다?”
 무호가 그 말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생각에 잠긴 사이, 조창은 술 한 병을 또 비우고 새로 꺼냈다.
 그때, 무호가 입을 열었다.
 “만일, 내가 현이를 통해 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내 기억도 돌아올까?”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쉽나?”
 “최소한 녀석의 나약한 모습만 없애준다면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은데···.”
 술병을 입에 대려던 조창은 순간 멈칫한 뒤, 병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어쩔 생각이지?”
 “그냥 녀석을 강하게 만들 요량이야.”
 “어떻게? 기억나는 무공이라도 있어?”
 “무공이 아니더라도 강해질 방법은 있지.”
 무호의 말에 조창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게 뭔데?”
 “실전경험.”
 
 ***
 
 다음 날 새벽, 표국 연무장에 들어선 천유현은 자신을 노려보는 무호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가까이 와라.”
 “···예.”
 천유현은 조심스럽게 무호 곁으로 다가갔다.
 “지난번에 내게 기억을 되찾으면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했었던가?”
 “예? 아, 그건···.”
 “가르쳐주지. 단, 조건이 있다.”
 “···어떤 조건입니까?”
 “네 목검이 내 급소를 치면 돼. 한 번이라도 말이야. 그럼, 가르쳐주지. 할 테냐?”
 천유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시작하지. 자, 공격해.”
 무호의 말이 끝난 순간, 천유현이 목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뒤이어 무호의 오른발이 빠르고 앞으로 뻗어 나갔고,
 퍼억!
 발끝이 천유현의 배를 찔렀다.
 “컥!”
 천유현의 양발은 지면에서 살짝 떨어졌다.
 무호가 발을 빼자, 천유현은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설마, 내가 반격은 하지 않고, 그냥 피하거나 막을 거로만 생각했냐? 일어나!”
 무호의 호통에 천유현은 목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 일어났다.
 “들어.”
 그리고 천유현은 힘겹게 목검을 들어 무호를 향해 겨눴다.
 “공격해.”
 이번엔 무작정 하지 않았다. 무호의 빈틈을 찾는 척하면서 회복을 꾀하려 했다.
 무호는 이런 천유현의 얄팍한 수를 간파했다.
 “네가 공격하지 않으면, 이번엔 내가 먼저 하지.”
 말을 마친 순간, 무호의 손이 빠른 속도로 천유현을 향해 움직였다.
 이에 천유현은 본능적으로 목검을 휘둘러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무호의 손이 목검보다 더 빨리 천유현에게 닿았다.
 내력이 전혀 실리지 않은 순수한 장타(掌打)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천유현은 큰 충격을 받고 또 쓰러졌다.
 
 <『천마십위』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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