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장
어둠이 내린다.
그리고 한 인간 아이가 그 중심에 서 있다.
조금도 특별해 보일 것이 없어 보이는 나약한 존재. 하지만 그 존재가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뿜고 있다.
생명력.
나, 펠릭스가 온몸을 떨고 있을 정도로, 가슴 설레는 생명력의 힘찬 움직임.
바로 저 조그마한 인간 아이가 내뿜고 있는 것이다.
처음 저 아이를 보았을 때, 전에도 인간을 보았을 때면 늘 그랬듯, 곧 죽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검과 방패로 철저히 무장한 용사들도 버티지 못하는 팔란드 산맥의 특성상 아무런 힘도, 의지할 것도 없는 아이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다른 인간들처럼 힘을 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일까?
사 년.
인간들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 흘렀다.
더군다나 팔란드 산맥에서의 사 년은 저 조그만 인간 아이에게는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기나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 꺼질 듯 위태해 보이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생명력.
운명의 정령, 샤렌이 저 아이에게 어떠한 운명의 씨앗을 심어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만 아이는 드래곤인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생명의 불꽃을 활활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팔란드 산맥이라는 상황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저 아이의 생명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저렇게 거세게 타오르는 생명력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저 아이를 저렇게 지탱하고 있는 것일까?
샤렌.
당신의 생각은 알고 싶지도, 알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어떠한 운명의 씨앗을 저 인간 아이에게 심어 놓았는지 알고 싶어지는군.
그리고,
왜 나에게 보냈는지도 말이야, 후후.
# 소년, 기사를 만나다
“나한테 말한 거냐, 꼬마야?”
펠란의 기사, 제론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물었지만, 소년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사 아저씨들처럼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소년의 또랑또랑한 대답에 제론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거지 행색의 소년이 느닷없이 튀어나와서는 강하게 만들어 달라니 말이다.
“헛, 참나.”
옆에 있던 동료 기사 베켄도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아저씨는 펠란의 기사님이시잖아요.”
“그래서?”
“펠란의 기사는 아주 강하다고 들었어요.”
제론이 동료 기사 베켄을 마주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고 서 있자, 소년은 조바심이 났는지 자꾸 채근했다.
“저는 꼭 강해져야 한단 말이에요! 네?”
이제 소년은 간절히 애원하는 표정으로 제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녀석아! 우리는 바빠서 너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 꺼져!”
부러 우악스런 표정을 지은 베켄이 나서서 소년을 야단쳤다. 그럼에도 소년은 절대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제발 부탁드릴게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소년이 막무가내로 매달리자 베켄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이거 완전히 고집불통일세.”
어리지만 않았다면 손찌검이라도 해서 쫓아버릴 텐데 펠란의 기사인 자신들이 조막만한 꼬마애를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꼬마애와 실랑이를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꼬마야! 정말 강해지고 싶으냐?”
베켄의 은근한 목소리에 꼬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네!”
“좋아! 그럼 방법을 말해주마.”
“이, 이봐······ 베켄!”
제론이 그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듯 외쳤으나 베켄은 손을 내젓곤 말을 이었다.
“강해지려면 우리한테 이러지 말고 팔란드 산맥에 가거라!”
그 말에 제론의 안색이 급변했다.
“이봐, 베켄!”
베켄이라 불린 기사는 동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년을 향해 할 말을 다하고 있었다.
“거기에 가면 아주 강해질 수 있단다. 우리 펠란의 기사들보다도 더.”
소년의 눈에 강렬한 불꽃이 일었다.
“정말, 기사 아저씨들보다도 더 강해질 수가 있어요?”
베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다만······.”
“다만······?”
소년의 동그래진 눈을 쳐다보던 베켄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괜히 말해서 귀찮아질 것을 염려한 그는 거기서 입을 닫고 말았다.
“아니다! 하여간 강해지는 법을 알려줬으니 더 이상 우리에게 매달리진 마라.”
소년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섰다. 뿐만 아니라 두 기사에게 깍듯이 인사까지 하는 것이었다.
“펠란의 기사님들! 감사드립니다.”
그 모습에 베켄은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말았다. 귀찮게 하기에 떼어 놓으려고 말은 했지만 팔란드 산맥이 어디던가 말이다. 어른들도 가기가 힘든, 아니 가기를 꺼리는 곳에 소년은 당장이라도 달려갈 태세였다.
“이봐,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제론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베켄은 얼굴을 굳혀 대답했다.
“설마하니 이 꼬마가 거길 가겠어? 거리가 얼만데. 그리고 기왕 엎질러진 물, 일단 귀찮은 혹은 떼었으니 그만 아닌가 말일세.”
찜찜한 마음을 애써 지운 베켄은 지금도 감사를 표하고 있는 소년에게서 몸을 돌렸다.
“자, 어서 가자고. 이러다간 점호 시간을 놓치겠어.”
“후우!”
한숨을 푹 내쉰 제론이 베켄을 따라 몸을 돌리다 말고선 품을 뒤졌다. 몇 푼의 동전이 손에 잡혔다. 겨우 빵 몇 조각 사 먹을 수 있는 푼돈에 지나지 않았지만 찜찜한 기분을 덜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에 움켜쥐었다.
“자, 받거라.”
소년은 몸을 돌리던 기사가 불쑥 주먹을 내밀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얼마 되진 않는다만 보태어 쓰거라. 그리고······.”
말을 하던 제론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이런······!’
낯선 까만 눈동자. 말로만 전해 들었던 동방 대륙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년은 동방계 아이란 말인가? 꽉 눌러 쓴 낡은 후드 속에는 검은 머리칼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이봐 제론! 서둘러!”
베켄의 재촉 소리에 소년의 후드로 향하던 제론의 손이 멈추어졌다. 고개를 한번 흔든 제론이 나직이 말했다.
“그나저나 몸조심해라.”
소년의 조막손에 억지로 동전을 쥐어준 기사는 훌쩍 몸을 돌려 동료 기사를 따라가 버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길 저만치 가고 있는 기사의 뒤를 향해 소년은 낡은 후드가 펄럭이도록 몇 번이고 거듭 인사를 하고 있었다. 후드의 나풀거림 사이로 언뜻 언뜻 드러나는 머리칼이 저녁 햇살 아래서 까만빛을 발하고 있었다.
***
초가을의 따가운 햇살 속에서 아홉 살 난 소년은 산길을 걷고 있었다. 소년은 모든 정경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마를 가르며 한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웬일인지 얼굴 위로 푹 뒤집어 쓴 후드는 좀처럼 벗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동방계라는 것을 애써 감추려는 것인지······.
“아직 멀었을까?”
소년은 길을 걷다가 지쳤는지 길 옆 바위 위에 걸터앉으면서 중얼거렸다. 벌써 반나절동안이나 길을 걸어온 것이다.
“휴우······.”
소년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신발을 벗고 발을 주물렀다. 발 전체가 부어올라 처음에는 맞았던 신발이 아주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주무를 때마다 부은 발에서는 통증이 일었지만 소년은 이를 앙다물고 참았다. 예전 같으면 당장 눈물을 뿌리며 응석을 하고 있었을 터인데.
“발이 많이 아픈가 보구나?”
가만히 앉아서 발을 주무르고 있던 소년에게 느닷없이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소년이 깜짝 놀라 그 쪽을 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20여 세 정도로 보이는 금발의 청년 하나가 싱글거리며 서 있었다.
“······?”
“가만있어 봐라.”
금발 청년은 어깨에 메고 있던 자루를 풀더니 그 속에서 푸른 풀잎을 몇 개 꺼내 들었다. 그리곤 바위에 놓고 짓이겼다.
“이거 한번 붙여봐. 발이 부었을 때 꽤 좋다구.”
금발 청년은 파란 즙이 흘러내리고 있는 뭉개진 풀잎을 소년에게 내밀었다.
“······.”
소년은 쭈뼛거리면서 약초를 받아들었다. 약초 특유의 쌉싸름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년은 약초를 가만히 펴서 부어올라 있는 발바닥에 조심스레 붙였다.
“으으······.”
약초의 효능 때문인지 부은 발에서 살을 에는 듯한 느낌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시원한 감이 느껴졌다.
“후우······.”
소년은 저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약초를 붙이고 나자 청년의 말대로 꽤 시원했기 때문이었다. 부어올라 있던 발도 금세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좀 괜찮으냐?”
청년은 소년의 옆에 걸터앉아 다정하게 물어왔다. 소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은 다시 한번 씨익 웃었다.
“그렇게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으면 덥지 않냐?”
무더운 여름이 지나갔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낮에는 더위가 극성인 때였다. 그런데 자그마한 꼬마애가 온몸을 뒤덮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안 더워요.”
소년이 약간 경계하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청년은 가볍게 웃으며 허리춤에서 물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소년에게 건넸다.
“자, 마셔. 여행할 때는 물이 없으면 굉장히 힘들지.”
“예.”
소년은 계속되는 청년의 호의에 멈칫거리면서도 손을 내밀어 물병을 받아들었다.
꿀꺽.
마침 목이 말라 있었던 참이라 소년은 물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옆에서 소년의 모습을 지켜보던 청년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윽고 소년이 물을 다 마시자 물병을 건네받고는 말했다.
“어딜 가고 있는 거지?”
그 말에 소년이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자 청년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걱정할 거 없어. 너 같은 꼬마애를 어떻게 하진 않을 테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청년이 웃으며 말하자 소년은 그제야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팔란드 산맥요.”
순간 청년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그만큼 ‘팔란드 산맥’이라는 지명이 가지는 의미는 실로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 팔란드 산맥?”
소년은 청년이 갑자기 표정을 굳히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였다.
“팔란드 산맥을 아세요?”
청년은 소년의 말에 표정을 굳히고 있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보고는 깨달았다.
‘어? 이 녀석, 동방계 아이로군.’
청년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으음, 너 그곳에는 왜 가려 하는 거냐?”
소년은 그 물음에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이 가야하는 이유를 밝혔다.
“강해지려고요.”
“강해지려고?”
“예.”
“나 원!”
청년은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대륙 간 교류가 거의 없던 동방계 아이가 이곳에 있는 것도 굉장히 이색적인 일인데다, 그 아이가 ‘죽음의 계곡’으로 알려진 팔란드 산맥으로 간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이유가 ‘강해지기 위해서’라니.
잠시 뒤 청년은 의문을 띤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너 보아하니 동방 대륙에서 온 것 같은······?”
그때서야 소년은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돌리고 후드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동방계라는 것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다. 나는 네가 동방계이든 서방계이든 신경 안 쓰니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동방계 아이라면 팔란드 산맥에 대해서 잘 모를 텐데 어떻게 그곳에 가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냐는 것이다. 아니, 누가 네게 그곳을 알려주더냐?”
청년의 물음에 소년은 이내 대답을 하지 못했다. 펠란의 두 기사들에게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팔란드 산맥’이라는 곳을 굉장히 두려워하면서 꺼려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 말을 하지 못하던 소년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펠란의 기사님들이 알려 주셨어요.”
“펠란의 기사? 훗!”
청년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표정에는 조소(嘲笑)가 어려 있었다.
“······?”
소년은 청년의 의외의 반응에 놀라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소년이 알기에는 펠란의 기사들이라고 하면 서방 대륙 최고의 기사단이었다. 그러니 그런 그들이 설마 자신에게 나쁜 것을 가르쳐주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펠란의 기사는 무슨······. 지금 있는 그 쓰레기들이 펠란의 기사들이라고? 웃기지도 않는군.”
청년의 얼굴에는 분노마저 살짝 어려 있었다.
“예?”
소년은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진정한 펠란의 기사대는 벌써 십여 년 전에 해체되었다. 그들의 긍지 높은 검은 더 이상 볼 수가 없단 말이다. 지금 있는 것들은 죄다 쓰레기지. 어떻게 하면 출세해 볼까 하는 어중이떠중이들. 쳇!”
청년의 얼굴 위로 떠오른 분노의 표정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앞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음, 어쨌든 팔란드 산맥에는 가지 말아라. 죽을 수도 있다. 너에게 그곳을 알려준 자들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팔란드 산맥에 가면 안 된다.”
“그치만······!”
“강해지고 싶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은 내가 떠돌이 신세라 어떻게 도와줄 수는 없다만, 다른 방법을 찾아 보거라. 살고 싶다면.”
청년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는 처음의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자, 만나서 반가웠다. 나는 셸라인 케너드라고 한다. 너 같은 꼬마애를 혼자 놔두고 가야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나도 쫓기는 몸이라서. 나중에 우연히라도 만나면 인사나 하자꾸나. 꼭 강해지렴.”
소년도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손을 마주잡았다. 셸라인이라고 자신을 밝힌 청년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아, 네 이름은 뭐냐?”
소년은 조그맣지만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조윤이라고 합니다.”
셸라인은 손을 내밀어 조윤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더니 살짝 미소 짓고는 말했다.
“조심하거라, 조윤. 세상에는 죄다 못 믿을 놈 투성이니까. 나만 빼고. 하하하!”
“예? 예······.”
“그럼,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조심해라!”
셸라인은 몸을 돌려 조윤이 왔던 방향으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조윤은 멍하니 멀어지고 있는 셸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자신을 향해 미소 짓던 그의 모습이 잊히지 않고 있었다.
‘팔란드 산맥을 가야만 하는 걸까?’
아홉 살 소년, 조윤은 아까부터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었다. 팔란드 산맥이 위험한 곳이라는 것은 펠란의 기사들의 행동과 아까 길에서 만난 셸라인이라는 청년의 말로 짐작할 때 확실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매우 강해질 수 있다는 펠란의 기사들의 말이 자꾸 생각이 나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고작 아홉 살짜리 소년이 결정하기에는 사실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꼬르륵.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던 조윤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펠란의 기사들을 만나고 나서부터 아무런 것도 먹질 못했었다. 오로지 팔란드 산맥에만 가면 강해질 수 있다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 서둘러 걸어왔기에 미처 밥을 챙겨먹지 못한 것이었다. 배가 고파진 소년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아까 셸라인과 만났던 숲길은 지나왔고 이제 자그마한 마을로 접어드는 길이라 밥 먹을 수 있는 곳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어디에서인가 음식을 하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조윤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제론이 준 동전들을 만져보았다. 비록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나마라도 있는 것에 마음만은 든든했다.
“어디지?”
조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이윽고 음식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냈다. 마을 초입에 허름해 보이는 이 층짜리 여관에서였다.
다행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윤은 여관으로 급히 걸어갔다. 문 밖에서도 맡을 수 있는 고소한 음식 냄새가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
“우하하핫!”
식당을 겸한 여관이어서 그런지, 점심때인 지금 여관 안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윤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관 안에는 나무로 된 테이블들이 열댓 개 놓여 있었고, 테이블마다 억세 보이는 사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하하핫!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그래서 말이지! 내가 그 관리인 녀석을 혼쭐나게 패주었지! 복면을 하고 있으니 누구한테 맞는지도 모르고 그 관리인 녀석은 죽는 소리를 하더군. 제발 살려달라고, 우하핫!”
아홉 살의 소년에게 여관 안의 풍경은 두렵기까지 한 것이었다. 저마다 몸집이 커다란 사내들이 테이블을 점거하고 우악스럽게 음식을 먹는 모습이라든지, 험상궂은 표정으로 떠들며 웃는 모습들은 어린 소년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무슨 일이냐, 꼬마야?”
조윤이 가만히 서서 여관 안을 둘러보고 있자, 어디선가 말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니 그곳에는 말라 보이는 사내 하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무슨 일로 왔어?”
사내는 조윤이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며 서 있자 다시 물었다.
“식사를 하고 싶어서요.”
조윤은 주머니 속의 동전들을 구세주라도 되는 양 무의식적으로 만지면서 대답했다.
“식사? 돈은 가지고 있어?”
“예, 여기······.”
조윤은 주머니에서 동전들을 꺼내 주인에게 보여주었다. 한 끼 식사는 해결될 만한 동전들이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었다. 주인은 그 동전들을 보자 한쪽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 그럼 저기 앉아 기다리거라. 다른 손님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그럼 곧 음식을 가져다 줄 테니.”
“예······.”
조윤은 주인이 가리킨 한쪽 구석 테이블에 가서 다소곳이 앉았다. 근처에 있던 사내들이 혼자 있는 조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사내들의 시선을 받자 조윤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달그락.
잠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조윤의 앞으로 음식이 날라져 왔다. 따뜻하게 김을 피워 올리고 있는 귀리죽 한 그릇과 작은 빵 조각, 물 한 잔이 전부였지만 지금 조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음식이었다.
배가 고팠던 조윤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이 미소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구나.”
“예? 예.”
조윤은 음식을 열심히 먹으면서 주인의 말에 대답했다. 몸집이 작은 조윤이었지만, 금세 귀리죽이 바닥나고 말았다. 그것을 본 주인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호오, 이 녀석, 정말 잘 먹는군. 좀 더 줄까?”
주인의 상냥한 말에 조윤은 잠시 주저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은 그런 조윤이 귀엽다는 듯 한번 싱긋 웃어주고는 빈 그릇을 집어 들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조윤은 속으로 감사함을 느끼면서 남아 있던 빵을 조금씩 뜯어먹었다.
“자, 가져왔다. 많이 먹어라.”
예상보다 빨리 귀리죽을 그릇 가득 담아온 주인 사내가 그것을 조윤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감사함을 표한 조윤은 귀리죽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주인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꼬마야, 너 혼자 여행하는 거니?”
상냥하게 물어오는 것이라 조윤도 별다른 생각 없이 대답했다.
“예.”
“음······ 그래?”
순간적으로 주인의 눈이 번뜩였지만 음식을 먹는 데 열중해 있던 조윤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디에 가는 거냐?”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던 주인은 다시 물어왔다. 조윤은 그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앞서 만났던 셸라인이라는 사내의 말이 괜히 마음에 걸려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조윤은 솔직히 대답했다.
“팔란드 산맥에 가요.”
“뭐? 팔란드 산맥?”
역시 주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담담한 표정이 되더니 물었다.
“거긴 왜 가려는 거지?”
“강해지러요. 저는 강해져야 해요.”
조윤은 귀리죽을 먹으면서 대답했다. 조윤의 얼굴에는 아홉 살다운 천진난만함이 가득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해지러? 흐음······ 강해지러라······.”
주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로군, 이 녀석.’
옛적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팔란드 산맥에 가면 강한 힘을 얻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힘의 원천은 다름 아닌 팔란드 산맥 깊숙한 곳에 있다는 아카드 대륙의 수호 드래곤, 펠릭스였다.
하지만 그 힘을 얻으러 그곳에 가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고, 혹여나 돌아온 자들도 정상이 아니어서 평생 미쳐서 살거나 자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주인은 조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이답지 않게 후드를 깊게 눌러 썼지만, 언뜻 언뜻 보이는 까만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그것을 보고 주인은 속으로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왜 팔란드 산맥이라는 곳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동방계 녀석이었군! 그럼 그렇지.’
주인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다시 조윤에게 말을 걸었다. 얼굴에는 어느새 예의 상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너, 팔란드 산맥이라는 곳이 얼마나 먼지는 알긴 아는 거냐?”
조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펠란의 기사들도, 셸라인도 그곳이 먼 곳이라고는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
“그것도 모르면서 그곳에 가려한 거냐? 나 원, 간도 큰 아이로구나.”
주인은 혀를 쯧쯧 찼다.
“사실 그곳에 가서 강해진 사람들이 있긴 하다. 지금 우리 아르바스 왕국의 대왕이신 록 웰 전하께서도 거기서 힘을 얻으셨다고 하고, 지금도 그곳에서 수련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하더라.”
주인이 워낙 태연하게 말했고, 조윤 역시 원하는 것이 ‘강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주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말이다, 문제가 하나 있다. 그곳에 가려면 돈이 많이 든단다. 멀기도 하거니와 노상에서 노숙을 하는 것은 갈수록 위험하거든.”
많은 돈이 든다는 얘기에 조윤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돈이 많이 드나요?”
“어림잡아서 한 육백 페른쯤은 들지 않을까?”
“예? 육백 페른요?”
육백 페른이면 네 식구가 한 달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큰돈이긴 했지만, 힘을 얻는 대가로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금액이었다. 고작 육백 페른으로 팔란드 산맥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누구나가 다 그랬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나 많이 들어요?”
물정을 모르는 어린 조윤으로선 그 말에 금세 울상이 되었다. 그저 그에게 육백 페른이라는 돈은 너무도 커보였기 때문이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주인은 그런 조윤을 바라보면서 짐짓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뭐,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만······.”
주인이 일부러 던진 말이었지만 방법이 있다는 말에 조윤은 금세 기대에 찬 얼굴이 돼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후후. 걸렸군, 이 녀석.’
주인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서방 대륙에서 보기 힘든 동방계 아이라면 꽤 비싼 가격에 팔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만 해도 돈이 굴러오는 듯한 기분에 만면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지만, 조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에 얼른 표정을 고쳤다.
“뭐, 우리 집에서 한 일 년 동안만 일한다면 내가 그곳을 가는 방법을 알려줄 수는 있다. 돈도 돈이지만 나를 통한다면 쉽게 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사이 너도 어느 정도 자랄 테고, 일손이 모자란 지금 네가 일해주면 나도 좋고. 그게 서로 좋지 않겠니?”
“예······?”
주인의 말에 조윤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일 년이라면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갈 길이 막막하기만 했던 조윤으로서는 그리 나쁜 조건도 아니었다. 조윤은 그저 그곳에 갈 수 있다는 말에 쉽게 결정하고 말았다.
“예!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꼭 거기에 갈 수 있게만 해주세요!”
조윤의 씩씩한 대답 소리에 주인 사내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그 후드는 벗는 게 좋을 거 같구나.”
게오르그(George)라고 자신을 밝힌 주인이 조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일을 하려면 후드는 거추장스럽기 마련이었고, 특히 이런 여관에서는 더욱 그랬다. 누가 칙칙한 후드를 뒤집어 쓴 종업원을 보려고 하겠는가. 아직 어린 나이라 서빙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네가 동방계라는 것을 숨기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여기는 작은 마을이라 상관없다.”
“예······.”
조윤은 마지못해 후드를 벗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후드를 잘 개어놓았다. 더러운 후드를 정성스럽게 개는 모습을 보고 게오르그는 눈살을 잠시 찌푸렸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후드야 어떻게 되었든, 그에게는 조윤이 동방계 아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게오르그는 조윤이 후드를 다 개고 자신을 쳐다보자 말을 이었다.
“음, 네가 처음 할 일은 매일 아침 물을 길어오는 것이다. 시작은 힘들겠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다. 여봐, 밀턴!”
“예!”
게오르그는 안쪽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고, 연이어 그곳에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근깨가 얼굴 가득한 소년이었는데, 조윤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였다.
“자, 오늘부터 여기서 일할 아이다. 네가 잘 가르치도록 해.”
“예, 아저씨.”
밀턴은 조윤을 무표정한 얼굴로 흘끗 쳐다보았다. 왠지 접근하기가 어려운 인상이었다.
“나는 밀턴이라고 한다.”
“응, 나는 조윤.”
밀턴이 손을 내밀어오자 조윤도 마주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조윤, 네가 생활할 방은 삼 층에 있는 다락방이다. 밀턴도 처음에는 거기에서 시작했으니까 불만가지지 않도록 해. 그럼, 밀턴. 먼저 물을 긷는 법부터 가르치도록 해라. 나는 카운터에 나가볼 터이니.”
“예.”
말을 마치자 게오르그는 발소리를 거칠게 내며 사라졌다. 밀턴이 조윤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저기 있는 물통 두 개를 들고 날 따라와.”
밀턴이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나무 물통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조윤같이 조그만 꼬마가 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지만, 밀턴은 그 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꽤나 딱딱해 보이는 아이였다.
조윤은 물통 두 개를 끙끙대며 들고 그 뒤를 따랐다. ‘하얀 집’이라는 여관에서의 첫날이었다.
***
우물은 마을을 가로질러 서쪽 끝에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이끼가 잔뜩 끼고, 나무 도르래도 꽤나 위태위태해 보이는 우물이었다. 우물가에는 조윤보다는 나이가 많거나,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물을 긷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물을 긷는 것은 아이들이 도맡아서 하는 듯했다.
밀턴이 우물가에 오자 안면이 있는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아는 척했지만 밀턴은 그저 무뚝뚝하게 한번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지 다시 물을 떠서 물통에 퍼 담고 있었다.
“난 여기에 있을 테니까, 네가 한번 물을 떠봐. 저 아이들이 하는 것 잘 보고.”
밀턴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우물가 근처의 널찍한 바위에 앉아 팔짱을 꼈다. 조윤은 그의 말에 따라 물통 두 개를 들고 동네 아이들 뒤로 가서 섰다. 새로운 아이라 그런지 밀턴의 눈치만 슬금슬금 보던 동네 아이들은 조윤에게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너 오늘 처음 왔니?”
키가 크고 꽤 순진해 보이는 소년 하나가 조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조윤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앞에 선 아이들이 물을 어떻게 뜨는지 관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와! 얘 머리카락 좀 봐. 되게 까맣다!”
동방계 아이를 처음 보는지라 아이들은 저마다 탄성을 발했다. 한동안 그렇게 떠들썩하게 조윤을 둘러싸고 재잘거리던 아이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친구가 신기하긴 했지만, 각자 할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꽤나 길었던 줄도 어느새 줄어들고, 조윤의 앞에는 셋 정도만 남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윤도 눈 여겨 보았던 도르래 사용법을 가만히 되새기면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나와! 나와!”
뒤늦게 도착한 덩치 큰 녀석이 앞에 선 아이들을 제치고 새치기를 하려 했다. 인상도 사납게 생긴 것이 힘이 꽤 세어보였다.
“어, 어어······ 조지! 내 차례야!”
앞에 선 아이들이 항변했지만, 조지라고 불린 덩치 큰 녀석은 눈알을 부라렸다.
“이 자식들! 맞을래?”
나이도 많아보였고, 인상도 험악했는지라 항변하던 아이들은 주춤거렸다. 대신 간절한 눈빛으로 바위에 앉아있는 밀턴을 흘끔거렸다. 하지만 밀턴은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할 수 없이 아이들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자 조지는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조지의 횡포에 뒤에서 가만히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조윤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예(禮)를 중요시하는 동방 대륙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면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조윤은 앞으로 걸어 나가 조지의 등을 두드렸다.
“이것 봐.”
조지는 누군가 자신의 등을 두드리자 인상을 팍 쓰며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보다 조그만 꼬마 아이가 올려다보고 있자 코웃음 치며 말했다.
“하핫! 네가 날 불렀냐?”
덩치로 봐서는 도저히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기에 조지는 으스대며 말했다. 하지만 조윤은 별로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차례는 지켜야 되잖아.”
조윤은 조지의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당당히 말했다. 동네 아이들은 그저 숨죽이며 둘의 신경전을 지켜볼 뿐이었다.
조지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감히 자신에게 조그만 꼬마 아이가 덤비고 있는 것이었다.
“이 자식이!”
동네 아이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체면을 구길 순 없었다. 조지는 화를 버럭 내며 주먹을 들어 조윤을 내리쳤다.
휙.
하지만 분명히 맞을 것 같았던 조지의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믿을 수 없게도 조윤은 조지의 꽤 날렵한 주먹을 피해냈던 것이다.
“어?”
조지는 한순간 당황한 표정이 되어 조윤을 쳐다보았다. 조윤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조지를 마주보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조지가 다시 조윤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황소 같은 힘이 조윤을 눌러죽일 듯 뻗어져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조윤은 아슬아슬하게 그 주먹을 피해냈다. 그 모든 것은 그가 어린 나이임에도 가문의 운신법(運身法) 기본은 익혔기에 가능한 동작들이었다.
“이 쥐새끼가······.”
다시 한번 자신의 주먹이 어이없게 빗나가자 조지는 소리를 지르며 조윤을 잡으려 덤벼들었다.
퍽.
하지만 다음 순간, 지켜보던 동네 아이들은 놀라운 장면에 입을 쩍 벌려야 했다. 가만히 바위에 앉아 보고 있던 밀턴이 어느새 내려와서 조지를 후려갈겼던 것이었다. 덩치가 작은 밀턴의 주먹에 맞은 조지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밀턴은 조지를 눕히고 나서 싸늘히 조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쓸데없이 나서지 말고 물이나 얼른 떠.”
그 말만 남기고는 밀턴은 다시 바위 위로 올라가 벌렁 드러누웠다. 밀턴의 무서운 기세에 아이들은 주춤주춤 물을 뜨고는 사라졌다. 조윤은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자 두레박으로 펀 물을 물통에 담았다. 물을 다 뜨자 지켜보고 있던 밀턴이 바위에서 내려왔다.
“물통 들고 따라와.”
커다란 물통을 번쩍 들고는 밀턴이 말했다. 조윤도 끙끙대면서 무거운 물통을 들었다. 어린 그가 들기에는 무척 무거웠지만, 조윤은 있는 힘을 다하여 물통을 들고 밀턴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 조윤이 끙끙대건 말건 밀턴은 물통을 한쪽 손에 들고 자기 갈 길만 갈 뿐이었다.
“자, 여기다 부어.”
녹초가 된 모습으로 조윤이 물통을 들고 오자 밀턴이 말했다. 여관 주방에는 커다란 욕조 비슷한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다가 물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저수통은 꽤 커서, 조윤은 나무 상자를 하나 밟고서야 겨우 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끙!”
조윤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무거운 물통을 들어올렸다. 눈높이까지 무거운 물통을 들어 올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쏴아아아.
조윤은 겨우 물통에 들어있던 물을 저수통에 붓고는 땀을 닦았다.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였지만,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조윤이 물을 다 붓자 옆에 있던 밀턴이 말했다.
“다음부터 혼자 할 수 있겠지? 나도 할 일이 많아서 너 따라 다니면서 가르쳐줄 수 없으니까 다음부터는 혼자서 해.”
조윤은 헉헉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밀턴은 저수통에 새겨진 눈금을 가리켰다.
“저 눈금 보이지? 저 눈금 아래로 물이 내려가면 안 돼.”
밀턴의 말대로 저수통의 물은 그 눈금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응.”
“그리고 밥은 알아서 챙겨먹어. 아저씨도, 나도 바빠서 챙겨주지 못하니까. 주방에 와서 밥 달라고 하면 줄 거야.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다락방에 가서 쉬고 있어.”
밀턴은 자기 할 말만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조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다락은 꽤 잘 정리가 되어 있었고, 한쪽에 나 있는 쪽창으로는 한줄기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짚으로 만든 침대도 한쪽 구석에 있어서, 조윤은 그곳에 풀썩 드러누워서 생각에 잠겼다.
“휴······.”
아직 갈 길은 멀었다. 그리고 일은 무척 힘들었다.
“그래도······ 해낼 거야.”
조윤은 결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직은 힘들지만 앞으로 차차 괜찮아질 테고, 그러다 보면 팔란드 산맥으로 가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었다.
***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다.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게만 느껴졌던 물 뜨는 일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요령이 생겼다. 여전히 힘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훨씬 쉬웠다.
그런데 조윤은 오다가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우물을 가기 위해 마을을 가로지르다 보면 광장을 지나가게 되는데, 그곳에 웬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네가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곤 했다. 머리는 도대체 언제 감았는지 부스스했고, 온통 꾀죄죄한 모습을 한 노인네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곳을 지나다닐 때마다 코를 막거나, 혀를 차댔다. 간혹 가다가 동전이나 조그만 빵조각을 던져주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그럴 때면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노인은 눈을 번쩍 뜨고는 허겁지겁 빵조각을 집어먹곤 했다.
그런 광경을 여러 차례 목격한 조윤은 그 노인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윤은 큰맘을 먹고 자신의 식사로 나오는 빵조각을 조금씩 떼어내 모아서 노인에게 다가갔다. 아직은 물을 길어오기만 하면 됐기에 시간은 많았다.
“저······.”
노인에게서 나는 악취가 이만저만이 아닌지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애써 표정을 밝게 하려 애썼다. 조윤이 말을 걸자 노인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저기, 할아버지. 이것 좀 드셔보세요.”
조윤은 모아놨던 빵을 노인에게 건넸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굶고 사는 노인에게는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노인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재빨리 빵을 낚아챘다. 그리고 얼른 입에 넣고 우걱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빨리 먹지 않으면 빼앗길까봐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조윤은 물을 떠서 노인에게 건네줬다. 목이 막힐까봐 걱정되어서였다.
“천천히 드세요. 물도 드시구.”
조윤이 깨끗한 물을 건네자 노인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상외의 친절에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조윤이 노인을 안심시키려 방긋 미소지어 보이자, 노인은 무서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시, 싫어. 너, 너도 내 힘을 빼앗으려고 온 거지?”
뚱딴지같은 소리에 조윤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예?”
“너, 너도 똑같아!”
노인은 갑자기 화를 버럭 내며 물을 떴던 바가지를 빼앗아 조윤에게 집어던졌다. 미처 피할 틈이 없었던 조윤은 그대로 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때 아닌 봉변에 조윤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노인은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깔깔! 내 힘을 빼앗으려고 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 깔깔!”
조윤은 어이가 없었다. 그저 불쌍해 보이기에 빵이나 몇 조각 나눠주려고 온 것뿐인데······.
“어? 야, 너 여기서 뭐해?”
그때, 옆을 지나가던 동네 소년 하나가 조윤을 발견하고 다가와서 말했다. 그리고 한번 훑어보더니 대충 상황을 눈치챈 듯 조윤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야, 미친 늙은이 상대할 필요 없어. 이리 와.”
조윤은 어이없이 당한 것이 화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물통을 들고 소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미친 노인이 안 보이는 곳으로 데려간 소년이 조윤에게 말했다.
“저 미친 늙은이한테 신경 쓰지 마. 굶어죽든 말든.”
“왜?”
“아직 모르는구나. 저 늙은이, 자기가 드래곤 펠릭스 님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 자신한테 접근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소년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깐 잘 해줄 필요 없어. 괜히 가봐야 오늘처럼 당할 뿐이야.”
“으음······.”
조윤은 노인이 미쳤다는 것을 알자 더욱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해주려고 해도 오늘 같아서는 도저히 잘 해줄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한 얼굴로 있던 조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그래, 조심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인 조윤은 가는 길에 ‘미친 메녹’이라 불린다는 노인을 멀찍이 서서 바라보면서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조윤은 메녹에게 다가들지 않았다. 괜히 좋은 일 했다가 봉변당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메녹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평소에는 늘어진 나무 그늘에 누워있거나 편안하게 기대있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오늘따라 고개를 두 무릎 사이에 묻고는 쭈그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
조윤은 평소와는 다른 메녹의 모습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감히 다가설 엄두가 나질 않았다.
메녹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쭈그린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지?’
조윤은 메녹의 그런 모습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심하리라고 생각하고는 슬며시 그에게 다가섰다.
“끙······ 끙······.”
분명히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지만 신음이 확실했다. 놀라서 가까이 다가서보니 메녹은 아예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조윤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메녹을 흔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지만 메녹은 끙끙거리는 앓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조윤은 다급해졌다. 그래서 앞뒤 잴 것도 없이 그를 시원한 곳에 바로 눕혔다.
메녹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두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엇인가를 잘못 먹고 탈이 난 듯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조윤의 눈에 곰팡이가 피어있는 빵이 눈에 띄었다. 누군가 일부러 곰팡이가 핀 빵을 던져준 듯했다. 먹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입 안에 넣고 보는 메녹은 분명히 그 빵을 먹었을 것이었다.
그것을 본 조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미친 늙은이이긴 하지만, 장난으로 저런 빵을 주다니······. 조윤은 분기가 가득한 눈으로 빵을 쳐다보다가 맑은 물을 한 바가지 떠 왔다. 지금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물 좀 드셔보세요!”
메녹의 머리를 무릎으로 받치고는 물을 먹이려 애를 썼다. 썩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메녹은 정신을 못 차리고 옆으로 물을 줄줄 흘렸다.
“할아버지! 제발 물 좀 마셔요!”
약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예전에 얼핏 ‘좋은 물은 만병통치의 근원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애써 맑은 물을 먹이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조윤은 도움을 구하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람들은 그저 무심히 지나쳐갈 뿐이었다. 미친 늙은이 따위는 언제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인 듯했다.
“이런, 나쁜 사람들!”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 것이 그토록 야속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메녹이 물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쁜 음식을 먹어서 난 탈이라면, 물을 먹여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는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조윤은 메녹을 나무에 기대놓고는 말했다.
“할아버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조금만요!”
메녹에게 다급히 말한 조윤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게오르그에게 돈을 받아서 갚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약을 구해 와야 될 것 같아서였다.
약방을 향해 내달린 조윤은 조심스럽게 약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온 손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던 약방 주인이 갑자기 들어선 조윤에게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아저씨, 배 아픈데 쓸 수 있는 약 좀 주세요!”
“뭐?”
“있잖아요. 배가 아픈데 먹는 약요. 상한 음식 먹고 배탈 났을 때 먹는 거!”
“너, 돈은 있냐?”
늘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조윤은 이런 상황에서도 돈이 있냐고 물어보는 주인이 야속했지만 생각해뒀던 대답을 얼른 했다.
“저, 지금은 없지만 나중에 게오르그 아저씨한테 돈 받으면 드릴게요! 꼭요!”
“지금 돈이 없으면 약 못 준다.”
“아저씨! 꼭 나중에 돈 드릴게요. 사람이 많이 아파서 그래요!”
“안 돼! 돈을 먼저 내라니까!”
이렇게 주인과 조윤이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는데, 먼저 와 있던 손님이 말을 꺼냈다.
“음, 얼마면 됩니까?”
그러자 주인은 금세 고분고분한 표정이 되어서 대답했다.
“한 2페른은 있어야 합니다.”
“2페른? 그건 내가 지불하도록 하지요. 얼른 애한테 약을 주십시오.”
“예? 아, 예.”
주인은 어떻게든 약을 팔면 그만이었다. 조윤은 그 손님에게 감사하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말했다.
“저, 고맙습니다! 성함이라도 알려주시면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하지만 손님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괜찮다. 2페른은 그리 큰돈이 아니니. 그나저나 사람이 아프다는데 빨리 가보도록 해라.”
그때 약방 주인이 기름종이에 싼 약을 조윤에게 건넸고, 조윤은 이제 됐다 싶은 표정으로 다시 한번 넙죽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그러면 나중에 우리 여관에 오세요! 제가 잘 해드리겠습니다!”
손님은 그런 조윤이 무척 귀여웠는지 미소만 지었다. 조윤은 감사 인사도 했고 하니 메녹에게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님은 빙그레 웃고 있다가 약방 주인에게 물었다.
“저 아이가 있는 여관이 어디입니까?”
“음, 저 녀석, 아마 게오르그가 운영하는 하얀 집이라는 여관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보시게요?”
“음, 어차피 묵을 여관도 구해야 하니 잘 되었군요. 오늘은 그곳에서 묵어야겠습니다. 얼마나 잘해주는지 지켜봐야죠, 후후.”
손님은 앞에 놓여 있던 차를 후르르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러면 이곳 아렌에 2퍼센트의 이윤으로 약초를 보급하기로 하지요. 이 정도면 되겠지요?”
약방 주인은 손을 비비면서 황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정도면 정말 감사할 따름이죠.”
“그럼, 나중에 다시 봅시다.”
갈색 머리칼의 손님은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문 밖을 나섰다. 그리고 아까 당돌한 조윤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겨우 약을 구한 조윤이 메녹에게 헐레벌떡 뛰어갔다. 메녹의 안색은 매우 창백했고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굉장히 고통스러운 듯 간간히 끙끙거리는 신음을 내고 있었다.
“할아버지! 약 구해왔어요! 약 드세요!”
조윤이 정신없이 누워있는 메녹에게 말했다. 하지만 메녹이 일어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할 수 없이 알약으로 되어 있는 약을 억지로 메녹에게 먹였다.
아까 한때 정신이 돌아왔던 메녹은 이제 아예 의식이 없는지, 눈을 뜰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난감해하던 조윤은 억지로라도 약을 먹이기로 하고 끙끙대며 그의 입을 벌렸다. 썩은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이런저런 상황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휴······.”
조윤은 메녹에게 약을 먹이는 데 성공하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애를 썼는지 옷이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그래도 일단 약을 먹이고 나니 안심이었다.
“끄으응······.”
약이 들어가자 메녹은 조금 정신이 나는지 신음을 냈다. 그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조윤은 물이 가득 담긴 물통에서 물을 떠 얼굴을 조금씩 씻겨주었다. 진한 땟국물이 흘러내렸지만 조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순한 식중독인지라 약은 즉효를 보였다.
“으으으······.”
메녹이 신음을 내며 눈을 떴다. 조윤은 그가 정신을 차리는 듯하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끄응······.”
하지만 메녹은 대답 대신 신음만 흘렸다. 배앓이를 할 때는 손을 주물러주면 좋다는 말을 기억해낸 조윤은 메녹의 손을 잡고 꼭꼭 주물렀다. 더럽고 미친 노인이었지만 엄연히 살아있는 한 생명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조윤의 행동을 보고 고개를 젓기도 하고, 호기심에 서서 지켜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도와주지는 않았다. 메녹이 너무나 더러운 탓이었다. 한참 만에 메녹은 눈을 떴다.
“으으응······.”
“어? 할아버지! 정신이 들어요?”
약을 먹이고 손을 주물렀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는 메녹을 걱정스럽게 살펴보던 조윤은 그가 정신을 차리자 반색을 하며 말했다.
“으응······ 형아, 고마워.”
메녹이 눈물을 찔끔거렸다. 미쳐있긴 했지만 자신을 구하려 애쓴 조윤에게는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조윤은 메녹이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자 내심 황당했지만 겉으로는 웃음을 띠었다. 어쨌든 고비는 넘긴 듯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속은 괜찮아요?”
“응, 형아. 엉엉엉!”
메녹은 서러웠는지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아팠는지 알게 된 듯했다. 메녹은 발버둥을 치면서 울다가 옆에 있던 곰팡이 핀 빵을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엉엉엉! 이런 거 싫어. 메녹은 이런 거 싫어! 엉엉!”
이미 늙어 머리가 백발인데도 메녹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울었다. 그런 그가 불쌍하게 여겨진 조윤은 다정한 목소리로 메녹을 다독였다.
“할아버지, 오늘은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만 가봐야겠어요. 물도 더 떠야 하고, 게오르그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내일 빵 가지고 다시 올게요. 알았죠?”
하지만 메녹은 두려워하는 얼굴로 조윤에게 매달렸다.
“형아, 가지 마. 형아······.”
조윤은 난감했다. 억지로 떼놓자니 메녹이 불쌍했고,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였다.
“그 노인이었니?”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윤이 놀라서 돌아보자 아까 약방에서 만났던 사내가 서 있었다. 부드럽게 굴곡진 갈색 머리칼이 인상적인 사내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띤 채 조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아저씨······.”
조윤은 놀란 얼굴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아까 아프다는 사람이 그 노인이었구나? 보아하니, 그 노인 갈 곳이 없어 보이는데 맞니?”
사내는 다시 부드럽게 물어왔고, 조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사내의 등장에 메녹은 겁먹은 얼굴로 조윤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조윤과 메녹을 번갈아보던 사내가 부드럽게 웃었다.
“음, 그러면 너희 여관으로 가자. 그 노인도 데리고 가서 좀 씻기고, 뭐 좀 신선한 걸 먹이자꾸나.”
“예?”
조윤은 당황해했다. 사내가 친절하다고는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파격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그렇지만······ 저는 돈이······.”
아까 꾼 돈도 아직 갚지 못했는데 메녹까지 여관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 돈은 내가 내마. 대신, 아까 말한 대로 여관에 가면 잘 해주어야 한다. 알았지?”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는 아렌에 대한 투자 건을 성사시키고 나서 호기심이 생겨서 조윤을 따라왔던 것이었다. 꼬마인지라 걸음이 그다지 빠르지 않아서 금세 따라붙을 수 있었고, 조윤이 하는 양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볼 수 있었다.
조윤은 예상치 못한 일에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가자. 그 노인도 데리고.”
이렇게 해서 조윤과 메녹, 그리고 정체 모를 사내는 다 같이 여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조윤은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
세 사람이 여관에 도착하자 게오르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미친 노인, 메녹을 자신의 여관에 데려오다니! 그는 날카롭게 조윤을 쏘아보았다. 이건 가게 이미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분위기를 눈치챈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여관 주인 되십니까?”
게오르그는 조윤은 잡아먹을 듯 쏘아보고 있다가 탐탁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소만.”
게오르그의 차가운 대답에 사내는 품속에서 번쩍이는 금화 하나를 꺼내 내놓았다. 가치로 따지자면 500페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게오르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이것은 저 노인의 일주일 숙박비입니다. 물론 제 것은 따로 계산하도록 하지요. 저 아이는 제가 저 노인을 데려오는 데 도와줬을 뿐이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하루치 숙박비가 20페른도 안 되니 일주일에 500페른이면 게오르그 입장에서는 굉장한 횡재였다. 여관 주인의 표정이 달라지자 사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자, 그럼 한 가지 더 부탁드릴까요? 저 노인의 목욕물 좀 데워 주시겠습니까?”
결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오르그는 싱글벙글하며 안쪽에다 소리쳤다.
“이봐! 목욕물 좀 받아 놔! 방은 제일 좋은 걸로!”
그리고는 사내를 향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자, 이리로 오시지요. 일단 저 노인부터 목욕시키는 것이 낫겠지요? 조윤, 가서 씻겨드려라.”
고개를 끄덕인 조윤이 메녹을 데리고 목욕실로 향했다. 노인이 단 며칠간이나마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데에 대해서 조윤은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조용히 미소 지으며 조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는 이윽고 게오르그의 안내를 받아 이 층으로 올라갔다.
“형아, 무서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욕실로 들어서자 미친 노인 메녹은 몸을 사렸다. 목욕실 특유의 분위기가 두려운 듯했다. 조윤이 웃으면서 메녹에게 말했다.
“뭐가 무서워요. 이리 오세요. 씻겨 드릴게요.”
하지만 메녹은 겁먹은 표정을 풀지 않고, 더러운 옷을 꼭 감싸 안은 채 구석에서 벌벌 떨기만 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몸 씻겨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조윤은 메녹을 달래면서 옷을 벗기려고 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메녹이 옷을 벗지 않겠다고 앙탈을 부린 것이다.
“형아, 창피해. 창피해!”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메녹이 어린아이 행세를 하는 것이 꽤나 이채로웠다.
“그러지 말고 옷 벗어요. 때 좀 벗기게.”
조윤은 살살 달래가면서 메녹의 옷을 벗기려 했다. 메녹도 처음에는 주저주저했지만 조윤이 편하게 대해주자 주춤거리면서 옷을 벗었다.
언제 빨아 입었는지 옷에서는 온통 썩은 내가 진동했지만, 조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메녹을 목욕통에 데려갔다. 그런데 그 순간 조윤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어?”
그냥 미친 노인인 줄 알았던 메녹의 온몸에 보기에도 끔찍한 상처 자국들이 이리저리 나 있었다. 상흔(傷痕)으로 보아 칼자국이 분명했다. 그것도 동방계에서 주로 쓰이는 도(刀)에 의해서 생겨난 상처.
하지만 그것까지는 알 리가 없는 조윤은 칼자국만 보고도 기겁했다. 그럼에도 메녹이 눈치챌까봐 재빨리 표정을 거두고 태연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따뜻하죠?”
자신이 꽤나 놀랐다는 것을 눈치채면 메녹은 또 징징댈 것이 뻔했기에, 조윤은 표정을 감출 수밖에 없었지만 속으로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 몸에 그렇게 칼자국이 수없이 나 있는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조윤은 메녹이 더욱 더 불쌍하게 여겨졌다. 메녹은 따뜻한 물 속에 들어가자 금세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으으음······.”
제법 운치를 즐기는 듯한 소리까지 내면서 메녹은 눈을 감았다. 가만히 있으면 왠지 고풍스러운 멋까지 나는 노인이었는데 눈만 떴다 하면 완전히 미친 노인네로 둔갑을 해버리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조윤은 살짝 살짝 물을 끼얹으며 메녹의 몸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시커먼 때가 끝도 없이 밀려나왔지만 조윤의 태도에는 정성이 담겨져 있었다.
‘이상하네. 저 상처들은 뭘까?’
보통 험하게 살지 않았다면 저런 상처들이 생겨날 리가 없었다. 뭔가 깊은 내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지만, 조윤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젠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할아버지인걸. 내가 더 잘 돌봐드려야겠다.’
메녹의 과거야 어쨌든, 지금은 힘도 없고 연약한 미친 노인네일 뿐이었다.
물통에 들어간 메녹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 물이 좋았다면 벌써 난리치며 좋아했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잠시 메녹을 지켜본 조윤은 그의 가슴이 일정하게 부풀어 올랐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것을 깨달았다. 숨을 쉬고 있는 것이지만 그 사이가 이상하게 길었다.
조윤은 메녹과 자신의 숨쉬기를 비교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메녹의 숨쉬기는 자신의 그것보다 세 배에서 네 배까지 더 길었다. 조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
그 순간 무예를 익힐 때 들었던 ‘토납술(吐納術)’이 언뜻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혹시······?’
상승무예의 기본이 되는 기초적인 호흡법을 토납술이라고 하는데, 조윤은 그 토납술까지는 제대로 전수받지 못했었다. 그저 무예보다 서책을 더 즐겨 읽었기에 조윤이 배웠던 것이라고는 몸을 재빠르게 놀리는 방법, 즉 운신술(運身術)이 고작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조윤은 곧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메녹은 서방 대륙 사람인데 동방 대륙의 무예를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지워버린 조윤은 다시 메녹의 몸을 열심히 닦았다. 눈을 감고 있는 메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숨만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
“자, 할아버지. 이 새 옷을 입어보세요!”
조윤은 신이 나서 말했다. 아까 밀턴이 메녹이 입을 옷이라면서 새 옷을 전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정체 모를 사내가 안배한 것이었다.
메녹은 새 옷을 입는 것이 영 어색한지, 자꾸 예전의 헌 옷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조윤은 그럴 때마다 따끔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깨끗하게 씻고 또 저런 더러운 거 입으면 안 돼요! 이거 입으세요!”
조윤은 일부러 눈까지 부라리며 말했고, 메녹은 그때마다 쭈뼛거리며 헌 옷에 가져갔던 손을 슬금슬금 거둬들이곤 했다. 하지만 몇 십 년간을 함께 해온 헌 옷과 떨어지는 게 섭섭한지 그의 눈길은 자꾸 헌 옷을 향했다.
조윤은 우여곡절 끝에 메녹에게 새 옷을 입히고는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우와! 할아버지, 근사해요.”
아닌 게 아니라, 몸을 깨끗하게 씻고 새 옷까지 갖춰 입은 메녹은 어느 지방의 영주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쑥한 차림이 되어 있었다.
“형아, 나 멋있어? 정말?”
메녹은 금세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되어 조윤에게 물었다. 조윤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메녹은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자, 이제는 배고프니깐 밥 먹으러 가요. 아마 맛있는 게 잔뜩 있을 거예요.”
그런데 메녹은 그 말에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조윤은 갑작스런 메녹의 표정 변화에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왜요, 할아버지?”
“나 배 아팠어. 형아, 나 배 아팠어.”
메녹이 입술을 비죽 내밀며 말했다. 조윤은 아까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곰팡이가 피어있는 빵을 먹고 메녹은 죽을 고생을 했던 것이다. 또 그럴까봐 메녹은 주저하는 듯했다.
“할아버지,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그리고 지금 차려진 음식은 굉장히 맛있다구요. 먹어도 탈 안나요.”
조윤은 메녹을 달랬다. 아직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밀턴이 말해준 바로는 꽤 성대한 듯했다.
메녹은 조윤이 안심해도 좋다는 말에 다시 싱글벙글하며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보면 인자한 할아버지와 귀여운 손자가 사이좋게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조윤과 메녹은 자상한 손자와 철없는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역시나 식사는 푸짐히 차려져 있었다. 테이블 몇 개를 붙여 만든 커다란 식탁에는 그리 호화롭지는 않지만 평소에는 먹어보지 못할 음식들이 빼곡하게 차려있었다.
갈색 머리의 사내와 게오르그는 자리에 앉아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밀턴과 하녀 메기 등등은 음식을 부지런히 나르고 있었다.
조윤과 메녹은 음식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메녹은 싱글벙글하며 식탁으로 가더니 손으로 아무 음식이나 집어먹으려 했다. 그런 그에게 조윤이 따끔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그래도 손님이 계신데 그렇게 막 드시면 안 돼요. 이리 앉으세요.”
조윤은 시무룩해진 메녹을 한쪽 자리에 앉혔다. 갈색 머리의 사내가 조윤과 메녹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호, 노인장 행색이 영 달라졌구나. 꽤 근사한걸?”
메녹은 자신을 칭찬하는 말에 시무룩해진 표정을 풀고 금세 싱글거렸다.
“아, 소개 먼저 할까? 나는 렌트란 가(家)의 제커드 렌트란이라고 한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상업을 해오던 집안이라서 이곳 아렌에도 투자 건으로 들르게 된 것이란다. 운 좋게도 너같이 착한 꼬마를 만나게 돼서 참 반갑다.”
제커드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윤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예, 저는 조윤이라고 합니다. 저는······ 저는······.”
조윤은 말을 하려다 말고 망설였다. 자신이 왜 서방 대륙에 왔는지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제커드는 그 마음을 읽은 듯 빙그레 웃었다.
“뭐, 밝히기 어려운 것이 있다면 밝히지 않아도 괜찮다. 이름만 알아도 된 것이지, 뭐.”
그때 게오르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 제커드 씨. 차린 것은 얼마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그래도 이런 변두리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음식들뿐입니다요.”
제커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예, 주인장 말대로 많이 먹도록 하지요. 저기 일하는 아이들도 좀 먹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커드는 밀턴과 메기까지 챙기는 자상함을 보였다.
“그럽시다. 밀턴! 메기! 너희들도 여기 와서 음식 좀 먹도록 해라.”
밀턴과 메기를 부른 게오르그는 고개를 돌려 제커드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내면서 물었다.
“그래서, 아렌에도 투자를 하실 계획입니까?”
“예, 이미 약초들은 투자를 하기로 했고. 뭐, 괜찮은 여관이 있으면 그 쪽도 알아보려 합니다. 펠란 시에서 이쪽을 거쳐 가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이쪽에도 투자를 많이 해두려구요.”
여관이라는 말에 게오르그의 눈이 빛났다. 기회라면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조윤을 귀엽게 본 모양이니 어느 정도는 유리한 입장이었다.
“아, 그렇군요. 여관이라······ 휴, 요즘은 여관업을 해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말이죠.”
어른들끼리의 얘기라 메녹은 따분한 모양이었다. 그는 숟가락을 들고 투정을 부렸다.
그것을 눈치챈 제커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이구, 이런. 제가 너무 제 얘기만 했군요. 일단 듭시다. 자, 많이들 들어요.”
그 말에 메녹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조윤 역시 웃으며 메녹에게 음식을 떠 주었다. 일단 메녹과 조윤이 먹기 시작하자 제커드도 스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하긴 아르바스 전체가 내전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져서 말이죠. 걱정입니다. 휴우······.”
게오르그는 짐짓 제커드의 눈치를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아르바스가 다시 일어나려면 우리 같은 상인들도 발 빠르게 뛰어다녀야 하지요. 영리한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게오르그의 말에 답해주면서 제커드는 조윤에게 눈길을 주었다. 게오르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영리한 사람이라······. 걱정이군요. 어디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요?”
아르바스 내전이 오래감에 따라 나타난 폐해는 실로 엄청났다. 그 드높던 긍지의 자존심을 완전히 꺾어버리고 펠란의 기사대가 해체되었고, 수만 명에 달하는 고아들이 생겨났으며 교육기관이란 교육기관들은 대부분 불살라졌다. 은밀히 활동하는 게릴라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억지 추측 때문에 그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은 죄다 불태워졌던 것이다.
그것은 성교회나 수도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지금에 와서는 극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잘만 가르치면 뛰어난 인재가 될 만한 사람들이 많기는 합니다. 다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죠.”
제커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를 보는 게오르그의 마음속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져 갔다.
***
“자, 메녹 할아버지. 저랑 물 뜨러 가요.”
다음 날 조윤은 메녹을 데리고 물을 뜨러 가려고 했다. 메녹을 혼자 놔둬봐야 칭얼대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메녹은 좋다고 따라나섰다. 미친 늙은이와 사이좋게 가는 조윤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조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놀려대도, 함께 지내보니 메녹도 꽤 좋은 노인이었다. 다만 시도 때도 없이 어린아이같이 구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와아아! 미친 메녹이다! 미친 메녹이다아!”
메녹을 데리고 우물가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놀라서 분분히 달아났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아이들은 돌 틈에 숨어서 조윤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꽤나 두려운 표정이었다.
조윤은 씁쓸하게 웃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불러 모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둘째 치고 메녹이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여기 가만히 계셔야 돼요. 아셨죠?”
조윤은 메녹에게 다짐을 단단히 주었다. 메녹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윤이 가리킨 곳에 가만히 앉았다. 조윤은 끙끙대며 두레박에 물을 길어 퍼 올렸다.
“끙!”
늘 하는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물통이 꽤 무거워서 조윤은 끙끙대는 신음을 냈다. 메녹은 그런 조윤을 가만히 지켜보며 입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끄으응!”
이번에는 두레박에 물이 더 들어찼는지 팔이 빠질 것 같았다. 조윤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두 개의 물통에 물을 한 가득 퍼 담은 조윤은 물지게를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제는 적응될 만도 하건만 물통이 워낙 무거운지라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는 사이 물통의 물이 넘쳐흘렀다.
“낑낑!”
조윤은 얼굴까지 시뻘게지면서 균형을 잡으려 애를 썼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메녹이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형아, 한 번은 크게, 한 번은 작게. 그리고 후아후아. 한 번은 크게, 한 번은 작게. 그리고 후아후아.”
메녹은 자신의 말대로 한 번은 크게 보폭을 내딛고, 다음은 반보(半步) 가량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지만 메녹은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조윤은 메녹이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않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메녹도 옆에서 따라오며 이상한 걸음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한 번은 크게, 한 번은 작게, 후아후아.”
메녹이 하도 진지했기에 조윤은 자신도 모르게 그 걸음을 따라했다.
“한 번은 크게 걷고, 한 번은 그것보다는 작게.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형아, 형아. 어깨는 쭈욱! 가슴도 쭈욱!”
어깨와 가슴을 쭉 펴라는 소리 같았다. 조윤은 메녹이 말해준 대로 어깨와 가슴을 쭉 폈다. 아까보다는 한결 어려웠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이상하네?’
조윤은 메녹의 말대로 하면서도 이상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거움은 그대로이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메녹과 조윤은 계속 이상한 걸음을 걸으며 집으로 향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둘의 독특한 모습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
갈색 머리칼의 사내, 제커드는 일이 바쁜지 수시로 여관을 들락거렸다. 펠란 시에 갔다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낯선 사람들을 끌어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 층 전체를 전세 낸 제커드는 메녹과 조윤을 그곳에 기거하게 해주었고, 갈 곳 없었던 메녹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제커드 아저씨, 안녕히 다녀오세요!”
여느 때처럼 조윤은 문을 나서는 제커드에게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그래, 잘 갔다 오마!”
제커드는 조윤이 귀여운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관을 나섰다. 메녹 역시 자신을 쓰다듬어 주기를 바란 듯 옆에 서 있었으나, 제커드는 씨익 웃기만 하고 나가버렸다. 메녹의 얼굴에는 실망한 표정이 가득했다.
조윤은 그런 메녹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메녹이 샐쭉한 얼굴로 쳐다봤기에 조윤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오늘도 물 뜨러 가요!”
요즘 들어 걷는 것에 흥미를 붙인 조윤이었다. 몸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메녹과 박자를 맞추며 걷다보면 너무 재미가 있어서 언제 여관에 도착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물 뜨러 가자는 말에 메녹은 금세 표정을 바꾸며 희희낙락했다. 조윤과 물 뜨러 가는 것이 꽤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응응! 형아.”
메녹은 싱글거리면서 조윤을 따라나섰다. 조윤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면 할아버지! 그거 다시 해요! 그거!”
“응, 형아! 한 번은 크게, 한 번은 작게. 그리고 후아후아.”
메녹은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발을 움직였다. 조윤도 옆에서 그와 보조를 맞추었다. 둘은 그렇게 박자를 맞춰가며 우물가로 향했다.
그러기를 벌써 한 달째, 메녹과 조윤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는 물같이 빨라서 금세 석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아렌에는 꽤 많은 변화가 생겨났는데, 제커드의 상업적 능력이 서서히 진가를 드러내면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몇 가지 약초밖에 없던 약방에 갖가지 약초들이 싼 가격에 보급되었고, 생필품 점에도 여러 가지 품목들이 들어섰다. 펠란 시와 가까웠지만 물품이 별로 없었던 아렌에서는 큰 변화였다.
“대단하군요, 제커드 씨!”
하루가 다르게 아렌이 바뀌는 것을 목격한 게오르그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제커드는 그의 말에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때를 잘 만난 것일 뿐입니다.”
“너무 겸손한 것도 안 좋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그려.”
자신의 속내는 둘째 치고, 게오르그는 표면적으로 나타난 아렌의 변화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만 아렌이 발전을 한다면 크게 번화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으음, 그러면 여관업으로는 아직 손을 안 대실 생각입니까?”
조바심이 나 있던 게오르그는 슬며시 제커드의 속을 떠보았다.
“시작해야지요. 이제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힌 듯하니 말입니다.”
게오르그는 기쁜 빛을 애써 감추었다.
“그렇군요. 봐 두신 여관은 있습니까?”
제커드는 게오르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게오르그가 아무리 마음을 숨긴다 해도 제커드는 눈치가 빠른 상인이었다.
“이곳, 하얀 집은 어떻습니까, 게오르그 씨?”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게오르그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흠, 제가 보기엔 이곳이 적격일 듯합니다. 펠란 시에서 다른 도시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고, 생필품 점에서도 가까우니. 다른 곳도 있긴 하지만 이곳만큼 입지가 좋은 곳도 없더군요.”
제커드가 진지하게 말하자 게오르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영광이군요, 이거. 하하하!”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고 싶습니다만.”
“조건······이라니요?”
게오르그가 안색을 굳히자 제커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뭐, 그리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게오르그 씨께는 그다지 큰 것은 아니니.”
잠시 헛기침을 한 제커드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조윤입니다. 그 아이를 저에게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예?”
“몇 달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그 아이를 관찰해왔는데, 심성도 꽤 착하고 무척 성실하더군요. 게다가 영리하기도 하고. 언젠가 제가 말씀드렸던 이야기를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원하는 영리한 사람이란 바로 조윤을 말한 것입니다.”
뜻밖의 제안에 게오르그의 심장은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조윤보다 뛰어난 아이들도 많을 텐데요?”
게오르그는 넌지시 제커드의 속을 떠보았다.
“물론 자질로는 뛰어난 아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살아가고 있는 이쪽 세상에는 자질로만은 안 됩니다. 냉정하고, 차가워야 할 때도 있지만 일단 근본은 ‘인의(人意)’ 입니다. 마음이 올곧게 서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다른 사람들을 짓밟으며 위로 올라서는 자들도 있지만, 결국 그들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조윤은 인의을 가지고 있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윤을 크게 키우시려는 것 같군요.”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게오르그는 제커드의 말을 듣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제커드가 그의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후계자로 키우려고 합니다.”
“예?”
그 한 마디에 게오르그는 완전히 경악하고 말았다. 변두리 마을이기는 하지만 한 마을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는 재력과 능력을 가진 사람의 후계자라니!
“그, 그게 무슨!”
제커드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본래, 렌트란 가(家)는 대대적인 상인집안입니다. 가르시아 가, 샤넬 가를 뒤이은 세 번째로 큰 거상(巨商)이지요.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서 게오르그 씨는 잘 모르셨겠지만, 렌트란 가의 입지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후계자를 물려받고 나서 자식도 없이 아내가 세상을 떠났기에 지금 제 후계자는 없습니다. 상업이란 적어도 이십 년은 배우고 느껴야 겨우 그 꼬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것입니다.”
말을 하는 제커드의 표정이 약간 굳어 있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늙기 전까지 제 후계자를 찾으려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인의가 있으면 머리가 둔하고, 머리가 명석하면 성격이 독사 같더군요. 게다가 내전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되어서 찾아내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윤은 인의가 있으면서 상황을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조윤을 믿고 키워보려 합니다. 물론, 사례는 충분히 해드리지요.”
게오르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론은 금세 나왔다. 렌트란 가가 그 정도로 대단한 재력을 가지고 있다면 떨어지는 떡고물만 받아먹어도 엄청난 것이었다. 게오르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제커드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는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이렇게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극도로 예를 표한 것이었다. 게오르그 역시 당황해서 마주 허리를 굽혔다.
“아이구, 아이구! 잘만 키워주시면 제가 더욱 고맙지요!”
허리 굽혀 인사하는 게오르그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흐흐흐······ 복덩이가 덩굴째 굴러 들어왔군, 그래. 흐흐!’
그런 게오르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제커드는 한껏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끙!”
조윤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 늘 해오던 일이지만,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오늘도 벌써 여섯 번째였다. 요즘 갑자기 더워진 날씨 탓에 여관의 물 사용량이 늘어 그만큼 많은 물을 길어야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물 뜨는 것이 그리 고역스럽지는 않았다.
‘이상하네?’
처음 여관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물 한 통을 드는 것도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익!”
조윤은 물이 가득 찬 물통 두 개를 물지게에 걸고 있는 힘껏 일어났다. 몇 달 전과 상황은 비슷했다. 단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다리가 더 이상 후들거리지 않고 있다는 것뿐.
“후아, 후아.”
어느새 익숙해진 호흡법을 내쉬면서 조윤은 발걸음을 옮겼다. 걸으면 걸을수록 호흡은 편안해졌고, 다리로 몰리던 하중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맨몸으로 걷는 것도 힘들어하던 꼬마가 물이 가득 찬 물통 두 개를 지고도 비틀거리지 않게 된 것이다.
“형아, 집 앞에 누가 있어. 메녹, 무서워.”
어느새 여관에 도착했는지 옆에 있던 메녹이 허리를 꼭 붙잡으며 말했다. 또 특이한 손님이 왔나 싶어 조윤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윤의 표정도 약간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호위 단장 세닐, 인사드립니다, 제커드 님.”
번쩍이는 하프 플레이트를 갖춰 입은 긴 금발 머리의 사내가 제커드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의 뒤로는 일단의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갈색 머리의 제커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세닐의 인사를 받았다.
“수고했네. 그 일은 잘 되었는가?”
“예, 분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역시 제커드 님 말씀대로 로렌시아 가의 소행이었습니다. 소규모 상단을 협박해서 푸이른에서 독점을 했다고 합니다. 가르시아 가와 샤넬 가도 이번 일은 그냥 넘기지는 않을 듯합니다.”
제커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식으로 이윤을 남기는 자는 사라져야 하네. 상인이라면 상도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 법. 그것이 아니라면 사라져야 하는 게 옳겠지.”
고개를 끄덕이던 제커드는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조윤과 메녹을 발견했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 세닐. 안 그래도 소개해줄 사람이 있었는데, 잘 되었군.”
짧게 말을 끊은 제커드는 조윤에게 소리쳤다.
“조윤, 어서 오너라!”
그의 부름에 조윤이 당당한 걸음새로 다가왔다. 조그만 그의 몸 뒤에는 메녹이 자신을 숨기려 애를 쓰고 있었다. 제커드가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무서워하실 것 없습니다. 제 수하들입니다.”
조윤과 마찬가지로 제커드를 잘 따랐던 메녹은 그때서야 두려워하는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금세 거만한 표정이 되었다. 제커드의 부하라니,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세닐, 인사하게. 조윤이라고 하네.”
세닐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조윤을 훑어보았다.
“이 아이······ 동방계가 아닙니까?”
“맞네.”
“그런데 어떻게······?”
세닐의 물음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모든 조건에 부합되는 아이일세. 이유는 그것 하나뿐이네.”
세닐은 제커드의 말에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카드 대륙을 손에 쥐고 흔드는 렌트란 가의 후계자가 어떻게 이런 동방계 꼬마가 될 수 있냐는 뜻이었다.
“자네도 일단 지켜보면 알겠지. 먼저 인사를 나누게.”
“예. 세닐이라고 하오.”
세닐이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지만 조윤을 바라보는 눈빛은 곱지 않았다. 조윤은 낯선 사내가 무슨 일로 인사를 하는지, 그리고 왜 제커드가 그런 말을 하는지 얼른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저는 조윤이라고 합니다.”
“나는 메녹.”
메녹이 자신도 인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끼어들었지만, 세닐의 싸늘한 눈빛만 받을 뿐이었다.
제커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 어르신 때문에 조윤과 만나게 된 걸세. 인사하게.”
세닐은 마지못해 다시 손을 내밀었고, 메녹은 반갑다는 듯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자, 인사를 나누었으면 세닐 자네는 아까 지시한 일들을 처리하도록 하게. 필요하면 무력을 써도 좋네. 그럼, 사흘 뒤 보기로 하지.”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세닐은 절도 있게 경례를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의 뒤를 따라 호위단들도 사라졌다.
“조윤, 이 아저씨가 할 말이 있는데 안으로 들어갈까?”
세닐 등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제커드가 조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조윤은 의아해하는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종내 가시지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선 제커드는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조윤도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뒤를 이어 메녹 역시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조윤의 옆에 앉아 제커드를 주시했다.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던 제커드가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윤아.”
고뇌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듣자 조윤은 더욱 더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예?”
“저기 말이다······.”
“예.”
제커드는 눈을 똑바로 들어 조윤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에는 고민의 흔적이 역력히 엿보이고 있었다.
“이 아저씨와 함께 가지 않으련?”
이윽고 제커드는 속내에 있던 말을 털어놓았다. 아무리 게오르그가 허락은 했다고는 하지만, 조윤의 입장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말을 꺼낼까하고 꽤 고심했던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커드 아저씨?”
조윤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사실, 나는 대상인(大商人)이란다. 아카드 대륙 전체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장사꾼이지.”
조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굉장히 능력 있다고는 느끼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뒤를 이을 사람이 필요하단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너를 만나게 되었고, 몇 달 동안 지켜본 결과 네가 내 뒤를 이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어렵겠니?”
강해진다는 것. 그것은 무인(武人)으로서 강해지는 것도 있지만, 상인이 된다면 더욱 더 크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대륙 전체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거상의 후계자라면······.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던 조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뜻밖의 반응에 제커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제커드 아저씨, 저도 아저씨를 따라 가고 싶어요. 하지만······.”
“하지만······?”
긴장하는 제커드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오르그 아저씨와 약속을 했어요. 일 년 동안 일해 준다고. 그 약속은 지키고 싶어요.”
조윤이 똘똘하게 대답했다. 제커드는 그런 조윤을 한동안 놀란 얼굴로 바라보다 이내 얼굴에 미소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미소는 호탕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하하하! 이 녀석! 그런 것이냐?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구나!”
제커드는 속으로 무척 흐뭇해하고 있었다. 장사꾼들이 가장 갖추기 어렵다는 ‘신의(信義)’ 를 조윤이 지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온갖 사기와 모략이 판치는 상계(商界)에서 올곧은 마음과 신의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제커드의 지론이었고, 그 두 덕목을 조윤은 적절하게 갖추고 있었다. 제커드는 허름해 보이는 산에서 금광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다.
“이 녀석, 그런 것이라면 내가 기다려줄 수 있다. 일 년이라고 했니? 이 아저씨가 기다려줄 테니 그동안 생각해 보거라.”
무인이든, 상인이든 자신의 후계자를 잘 만난다는 것은 커다란 복이었다. 그렇기에 조윤이라는 건실한 재목을 만난 제커드는 한껏 웃음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윤은 무인으로서 강해지는 것에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고개를 묵묵히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무인으로 강해지고 싶지만······.’
상인이 된다면 무인으로 강해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조윤을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조윤의 얼굴 위로 착잡함이 더해가고 있었다.
***
“자, 그동안 잘 지냈습니다. 여기 메녹 노인과 조윤의 방세를 놔두고 갈 테니, 제가 돌아올 때까지 맘 편히 지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커드는 밝은 얼굴로 게오르그에게 말했다. 그가 금화 몇 개를 꺼내들자 게오르그는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며 허리를 굽신굽신 굽혔다.
“에구에구, 여부가 있겠습니까? 몸 조심히 다녀오십쇼.”
제커드에게 그간의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게오르그는 비굴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조윤만 제커드의 후계자가 된다면, 자신에게는 평생 놀고먹어도 될 만한 돈이 떨어질 참이었다. 게오르그는 괜히 조윤을 일 년씩이나 잡아둔 것을 후회했다.
‘에이, 미련한 녀석!’
그저 못 이기는 척하고 넘어가줬으면 자신은 벌써 돈방석에 앉아 있을 터인데, 미련해 보이는 조윤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미 반년은 지나갔으니 남은 반년만 여차여차해서 잘 보내면 그 뒤로는 팔자가 확 펴질 터였다.
“아저씨,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조윤은 제커드가 멀리 가는 것이 못내 아쉬운지 아쉬운 표정이었다. 메녹은 그 옆에서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래, 윤아. 너도 몸 건강히 지내고 있거라. 반년 뒤에는 꼭 돌아오마.”
제커드가 조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예······ 아저씨.”
대답하는 조윤의 눈망울에도 어느덧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커드와 깊게 정이 들었던 것이다.
“큰 형아, 잘 갔다 와.”
메녹이 옆에서 두 손을 내밀었다. 제커드는 그 손을 맞잡으면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예. 어르신, 맘 편히 지내고 계십시오. 나중에 윤이와 함께 모시고 가겠습니다.”
“큰 형아······ 흑흑.”
메녹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에 제커드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제커드 님, 준비 다 되었습니다.”
기사단장 세닐이 어느 틈에 왔는지 호위대를 이끌고 정렬해 있었다.
“알았네, 세닐.”
제커드는 다시 일행을 돌아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자, 그러면 반년 뒤에 봅시다. 아, 그리고 게오르그 씨. 두어 달 후면 공사가 시작될 터이니 협조 잘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게오르그는 한껏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제커드는 말없이 조윤을 부드럽게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자, 가세.”
그의 명이 떨어지자 호위대들은 각자 마차를 가운데 두고 정렬했다.
“이럇!”
제커드가 마차에 오르자 마부는 말에다 힘차게 채찍질을 가했다.
“히이잉!”
마부의 채찍질에 말들은 씩씩한 울음소리를 내며 힘차게 앞으로 내달렸다. 제커드가 탄 마차는 순식간에 멀어졌고, 조윤과 메녹은 그 뒷모습을 묵묵히 전송했다.
마차는 이미 사라졌지만 조윤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알 수 없는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제커드가 떠난 후 게오르그는 조윤이 하던 일들을 죄다 밀턴과 메기에게 맡겼다. 조윤이 하던 일들이라 해봐야 물 뜨는 일과 침상을 정리하는 것뿐이었지만, 대륙 3대 거상인 제커드의 후계자가 될 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윤은 난처해져서 자신이 하겠다고 했지만 게오르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행여나 잘못해서 조윤의 몸이라도 상하면 잘 진행되던 일들이 한꺼번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저씨, 물 뜨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메녹 할아버지랑 같이 가면 저도 즐겁고 몸도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허! 너는 몸을 함부로 굴려선 안 된단 말이다. 자칫 잘못해서 다치기라도 하면, 제커드 씨께 어떻게 말을 하란 말이냐! 그건 안 된다.”
게오르그의 속셈은 다른 것이었지만, 겉으로는 조윤을 걱정하는 척하며 말했다.
“그러면 제가 물을 못 뜨게 했다고 제커드 아저씨한테 말해버릴 거예요!”
조윤은 제커드를 들먹거리며 게오르그를 몰아붙였다. 예상대로 게오르그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이 녀석이!”
게오르그는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설마 조윤이 제커드를 물고 늘어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에이 모르겠다.’
머리가 아파진 게오르그는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그러면, 물만 뜨는 거다! 대신 조심조심해서 다니고.”
“예! 아저씨!”
조윤은 금세 밝아진 표정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조윤을 보는 게오르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종내 풀지 못했다.
# 거상(巨商) 제커드 (1)
반년이라는 시간은 생각 외로 빠르게 지나갔다. 게오르그의 걱정과는 달리 조윤에게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건강해져 갔다. 메녹이 가르쳐준 호흡법 덕분이었다.
조윤은 요즘 들어 물통이 상당히 가벼워진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어린아이에게는 크게 작용은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무언가가 조윤의 몸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게오르그의 여관은 대대적으로 개축이 되어서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면모로 탈바꿈했다. 펠란 시에서 나오는 길목에 바로 위치하고 있었기에 손님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많아졌다.
제커드와 약속한 반년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가자, 게오르그는 일하는 아이를 한 명을 더 구했다. 아무래도 여관이 넓어지고 조윤도 떠날 때가 되어가니 일손이 부족했던 것이다.
“자, 에밀리. 형처럼 걸어봐. 자, 한 걸음을 크게 딛고, 그 다음은 작게,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알았지? 너도 열심히 하면 형처럼 튼튼하게 돼.”
조윤은 새로 들어온 에밀리라는 소년을 가르치고 있었다. 메녹 역시 옆에서 거만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는 일 년 전의 조윤처럼 물통 하나를 들고도 비틀거리곤 해서 조윤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숙달되면 재밌어. 그리고 점점 힘들지도 않게 되고.”
조윤은 발갛게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었다.
“으응, 형. 정말 고마워.”
천성적으로 몸이 약한지 항상 헉헉대기만 하던 에밀리는 조윤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긴 뭘······.”
조윤은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기분은 그리 나쁘진 않았다.
“어? 조윤 형, 저기······.”
한참을 조윤이 가르쳐준 대로 걷던 에밀리가 앞쪽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쪽을 바라본 조윤의 눈매도 가볍게 찌푸려졌다.
낭인(浪人). 아렌에서는 보지 못했던 사내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내는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저벅저벅.
사내의 발걸음은 상당히 가벼웠다. 비록 옷은 허름하게 입고 있었지만, 내딛는 발걸음은 거의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사뿐사뿐했다.
사내는 순식간에 조윤의 앞으로 오더니 지그시 조윤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기분 나쁜 눈초리였다.
“꼬마야, 물 좀 주겠니?”
사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조윤은 사내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다가 잠시 후 선선히 대답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견디려 했지만 후드 사이로 언뜻 언뜻 비치는 사내의 눈빛은 조윤을 주눅 들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
조윤은 물통에서 물 한 바가지를 떠서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내의 눈빛은 여전히 조윤에게 차갑게 박혀들고 있었다. 조윤도 지지 않고 눈빛을 마주했지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내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조윤을 향해 씨익 웃었다.
“잘 마셨다. 나중에 보자꾸나.”
‘나중에라니······?’
조윤이 의아해할 틈도 없이 사내는 다시 걸음을 옮겨 사라져버렸다. 조윤은 그런 사내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이네······.’
왠지 불안하다는 생각이 조윤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
그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났지만 사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했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제커드와 약속한 날이 삼 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삼 일만 지나면 조윤은 대륙 3대 거상인 렌트란 가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가슴 벅차할 일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조윤은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렌트란 가니 뭐니 해도, 조윤은 그저 제커드와 같이 있는 것만 해도 좋았다.
물론 때때로 무인으로서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단 그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상인이 된다면 무인으로 강해지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틀이 지난 저녁, 게오르그는 내일이면 떠나게 될 조윤을 위해서 성대한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제커드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기정사실이 된 이상, 조윤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 조윤. 보내기 섭섭하지만 가야 하니 어쩔 수 없구나.”
게오르그는 짐짓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속은 달랐다.
‘진작 좀 가지, 이 꼬마 녀석.’
게오르그의 생각을 모르는 조윤은 그저 감사한 표정을 지었다.
“예, 아저씨. 저한테 잘 해주셨는데 떠나려니 저도 섭섭하네요.”
“휴, 얘야, 그 팔란드 산맥일랑 싹 잊어버리거라. 그 제커드 씨만 따라가면 거기 가는 것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단다.”
게오르그는 자신이 했던 거짓말이 들통 날까봐 미리 원천봉쇄를 해두려고 했다. 다행히 조윤 역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예, 아저씨.”
게오르그는 그제야 긴장했던 얼굴을 풀고 웃음을 떠올렸다.
“자, 그럼 많이 먹거라. 밀턴 형이랑 메기 누나와도 인사하고.”
“예, 고맙습니다. 밀턴 형, 메기 누나. 그리고 에밀리. 그동안 고마웠어.”
조윤은 아쉬운 표정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밀턴은 조윤을 흘끗 보더니 관심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가서 잘해.”
밀턴의 말은 그것뿐이었지만, 조윤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응, 형이 없었으면 힘들었을 거야. 고마워, 밀턴 형.”
“윤아, 가서 몸조심해. 나중에 한번 들르고. 응?”
밀턴보다 가깝게 지냈던 메기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자인지라 정을 떼려니 슬펐던 모양이었다.
“응, 누나. 누나도 건강히 있어. 나중에 꼭 보러 올게.”
“조윤 형. 그거 가르쳐줘서 고마워. 열심히 할게.”
조윤보다 두 살 어린 에밀리의 말이었다. 조윤은 에밀리의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응, 에밀리. 이 형이 나중에 꼭 너 보러 올게. 그때까지 건강해야 해.”
조윤은 에밀리가 마음에 걸렸다. 어린 에밀리가 고생할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올 때까지 잘 있어야 해, 에밀리.’
만난 지는 별로 안 됐지만, 에밀리를 보자 자신의 옛 생각이 난 조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자, 오늘 밤은 먹고 마시는 거다! 많이들 먹어라.”
게오르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메녹이 짝짝짝 하고 박수를 쳤고, 분위기는 금세 활기가 돌았다. 조윤 역시 즐거운 표정으로 먹고 마셨다. 오랜만에 하얀 집에 활기찬 기운이 가득했다.
***
조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 하얀 집이라는 여관에 온 지도 벌써 일 년. 조윤의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가득했다. 강해지겠다고 펠란의 기사들에게 떼를 썼던 일, 그리고 팔란드 산맥으로 가기 위해 하얀 집에서 일해야 했던 일, 미친 노인 메녹을 만났던 일. 그리고 제커드를 만나게 된 것까지. 모든 일들이 하나의 추억이 되어 머릿속을 가득 맴돌고 있었다.
‘엄마, 저는 꼭 강해질 거예요. 꼭······.’
홀로 길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엄마 때문이었다. 조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의 파리한 얼굴, 그리고 남겨진 그 한마디.
‘윤아······ 부디 강해지거라.’
엄마의 싸늘한 시신 앞에서 어린 조윤은 오열을 했고, 그 슬픔은 독기로 화해서 강해질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묘하게도 조윤을 아카드 대륙의 거상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엄마······.’
조윤은 가만히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조윤이 깜짝 놀라서 위를 올려다보니, 깜깜한 어둠 속에 누군가가 있었다.
“형아, 잠이 안 와.”
메녹이었다. 속이 철렁했던 조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램프에 불을 붙였다. 주위는 환해졌고, 메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베개를 품 안 가득 안은 채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조윤을 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
조윤은 그 모습이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형아, 메녹 잠이 안 와. 나 팔베개해줘.”
갈수록 태산이었다. 조윤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까부터 누군가 이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느낌이 종내 지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메녹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불안해진 조윤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어?”
창가 쪽으로 시선을 던진 순간 조윤은 엇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낯선 남자 하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사람인가? 근데 왜 이쪽을 바라보지?’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조윤은 남자를 외면하려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과 메녹이 묵고 있는 방은 일 층이 아니라 이 층이었던 것이다.
“누구세요!”
조윤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잘 있었나, 꼬마?”
방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사내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조윤에게 말했다. 조윤은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 당신은!”
사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죽어줘야겠다, 꼬마야.”
사내는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는 비수 하나를 손에 쥐고 조윤에게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보는 상대를 얼려버릴 듯한 싸늘한 눈빛. 조윤은 그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우물가에서 느꼈던 불안한 느낌. 그것은 이제 현실로 변해서 조윤의 숨통을 조르고 있었다. 사내의 발걸음은 소리 없이 조윤을 향하고 있었다.
사내의 발걸음이 한걸음, 한걸음 조윤에게 다가들고 있었다. 좁은 방인지라 조윤은 피할 곳도 찾지 못한 채 그저 가만히 침대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메녹이 옆에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을 빛내고 있었지만 조윤은 그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쨌든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내는 이윽고 조윤의 앞에 서서 싸늘하게 내뱉었다.
“너와는 원한이 없다만 이만 죽어줘야겠다. 날 원망하지 마라.”
사내의 손에 들린 비수는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조윤은 몸이 완전히 굳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어릴 적 가문에서 배웠던 운신법조차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공포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으······.’
무력감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며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얼굴 위로 소름끼치는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사내는 비수를 내리치려는 듯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풍겨 나오는 살기에 조윤은 참으려고 해도 온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사내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사내의 몸이 뒤로 휙 하고 돌려세워졌다. 조윤은 뜻밖의 상황에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하, 할아버지!”
그곳에는 메녹이 두 손으로 사내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잡고 씨익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서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정광(晶光)이 번뜩이고 있었다.
사내 또한 뜻밖의 상황에 매우 놀란 듯했다.
메녹이 사내의 머리를 꽉 붙잡고는 말했다.
“이 녀석, 내 힘을 노리려고? 어림없다!”
메녹의 힘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사내는 손에 쥐었던 비수로 찌를 생각도 못한 채 그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마도 사내는 지금쯤 머리가 깨져나가는 고통에 휩싸이고 있을 것이었다.
메녹은 다시 한 번 사내를 보고 씨익 하고 웃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나의······.”
메녹의 눈이 매서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조윤은 매우 놀라서 그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메녹에게서는 전에 보지 못한 기도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나의 브레스 맛을 봐라!”
메녹은 크게 외치고는 입을 한껏 벌렸다.
“꺼어어억!”
순간, 방 안에는 속이 뒤집힐 만한 악취가 가득 찼다. 조윤마저 코를 감싸 쥘 정도로 독한 냄새였다. 그 트림을 정면으로 받은 사내의 온몸이 휘청거렸다.
“크으윽!”
“깔깔깔! 나의 힘을 노리다간 그렇게 되는 거야! 깔깔깔!”
메녹은 득의양양한지 깔깔대며 웃었다. 긴급한 상황에서 벌어진 어이없는 일에 조윤은 그저 멍청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노인이었다.
사내는 비틀거리다가 재빨리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런 미친 늙은이가!”
사내는 비수를 쥐고 메녹에게 달려들었고, 깔깔대며 웃던 메녹의 얼굴은 삽시간에 공포로 뒤덮였다.
덜컹.
순간, 방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은빛 광채가 방 안을 갈랐다.
카앙.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사내는 비수를 든 손을 아래로 떨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비수는 이미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조윤이 거듭되는 뜻밖의 상황에 놀란 얼굴로 바라보니, 어깨까지 드리우는 금발 머리의 기사 하나가 검을 쭉 뻗은 자세로 서 있었다.
조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세, 세닐 아저씨!”
세닐은 조윤 쪽을 흘끔 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잠시 결례를 범하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말을 마친 세닐은 자세를 바로 잡으며 뚜벅뚜벅 사내에게 걸어갔다.
“애써 달려온 보람이 있었군.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제커드 님께서 꽤 상심하실 뻔했어.”
차가운 목소리였다. 사내는 길게 베인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싸 안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죽을죄를 범한 것은 알고 있겠지? 렌트란 가의 후계자를 암습하려던 죄는 크다.”
세닐은 차가운 검날을 사내의 목덜미에 갖다 대며 말했다.
조윤이 꼼짝 못할 정도로 살기를 뿜어내던 사내는 세닐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조윤은 그 장면을 보고 가슴이 무섭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저것이······ 강하다는 것인가? 정말, 정말 대단해······.’
자신이 추구하던 바로 그것, 그것을 세닐은 눈앞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기회를 엿보던 사내가 한순간 민첩하게 몸을 굴려 세닐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도망치려 했다. 사내의 행동은 무척 재빨라서 지켜보던 조윤마저 ‘아!’ 하는 탄성을 내지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 보여준 세닐의 행동은 아름답다고 해도 될 만큼 숙련된 것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몸을 움직여서 사내의 등 뒤로 다가들어 굵은 팔뚝으로 사내의 목을 꽉 졸랐다. 그리고 날카로운 검날을 사내의 목젖 부분에 갖다 대며 차갑게 말했다.
“죽을죄를 졌으면 죽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차갑게 말한 세닐은 사내가 반항할 틈도 없이 그대로 검을 그어버렸다.
“끄어억!”
사내는 뜨거운 피가 기도로 넘어가는지 쿨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사내를 해치운 세닐은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나서 조윤 앞에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무감정한, 하지만 신뢰를 주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렌트란 가의 호위 무장, 세닐 드와이트가 도련님을 뵙습니다.”
전과 달리 완전한 후계자로 대우를 하는 세닐의 말에 조윤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가주(家主)의 후계자를 대하는 예를 마친 세닐은 조용히 일어나며 말했다. 그의 무감정한 눈길이 조윤에게 조용히 박혀들고 있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이기에 조윤을 보호한다는 듯한 세닐의 물음이었다. 아직 동방계 아이가 렌트란 가의 후계자라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승복하지 못하는 듯했다.
“예······ 세닐 아저씨. 저는 괜찮아요.”
세닐은 묵묵히 조윤을 바라보더니 다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방을 옮기시지요. 아무래도 살인이 난 방에 있으시기에는 꺼림칙하실 테니.”
그리곤 방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뒤로 돌아서 말했다.
“제커드 님은 내일 오전쯤에 도착하십니다. 그럼.”
세닐은 무뚝뚝하게 말하고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후우······.”
조윤은 그제야 한숨을 푸욱 내쉴 수 있었다. 정말 다시 생각하기에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때, 메녹이 조윤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형아, 저 사람 안 일어나.”
사내는 이미 죽었지만 메녹은 장난으로 안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조윤은 메녹을 한번 쳐다보고는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이 탁 풀리고 나니 말을 하는 것도 피곤했다.
“······나중에 일어날 거예요. 지금은 밤이라서 자고 있는 거예요.”
오늘 밤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인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게다가 왜 이런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기도 했다.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한 메녹만이 방바닥에 쓰러진 사내의 몸을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단참괴룡』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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