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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超越者) -1-

2013.08.08 조회 6,857 추천 41


 초월자, 이계(異界)로 가다
 
 
 
 
 
 프롤로그
 
 세상은 인과율이 지배하는 평범한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로 나뉜다. 그 평범하지 않은 세계를 초월의 세계라 하고, 그 세계의 존재들을 초월자라고 부른다.
 
 “풍백…… 저것만 손에 쥐고 단군이 남긴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노부나가는 많은 초월자들이 힘을 잃고 쓰러져 있는 가운데 조용히 외쳤다.
 철혈의 패왕!
 일본의 전국시대를 질타했던 패왕 오다 노부나가는 이렇게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초월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 모두 자기 뜻대로 될 리는 없는 법. 그의 눈앞에는 아직 쓰러지지 않은 초월자가 하나 남아 있었다.
 “노부나가, 너무나 허황된 꿈이다. 초월자의 정점에 오른다고 모든 것이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아서라. 난 애초에 이 분쟁에 관심도 없었고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너를 상대하는 거지만 적어도 너처럼 허황된 꿈은 꾸지 않는다.”
 강철민, 회색의 초월자.
 고려시대의 용장 강감찬 장군의 막내아들로 역사에서 잊혀진 채 중국의 고대무림을 평정하고 초월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세계 7대 초월자 중 일인, 철저히 중도(中道)를 걷는 초월자, 일명 투신(鬪神)이라 불리며 강자와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특이한 존재.
 “강철민, 네 녀석이 내 앞을 막을 줄은 몰랐다. 비록 모든 초월자들이 노리던 풍백이지만 너마저 노릴 줄은 몰랐다.”
 노부나가는 정말 의외라는 표정으로 철민을 바라보았다.
 “후훗, 하긴 나도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얼떨결에 강제소환? 당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세상의 모든 초월자가 모인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멀쩡히 서 있는 것은 너와 나. 이제 마지막으로 바닥에 누울 사람을 결정해야겠지?”
 파지지지직
 화르르르륵
 철민은 조용히 양손에 초월의 힘, 진뇌력(震雷力)과 신화력(神火力)을 집중시켰다.
 “건방진 놈!”
 고오오오오오
 이에 질세라 노부나가 역시 자신이 가진 초월의 힘, 군패력(君霸力)을 끌어올렸다.
 파츳
 꽈과광
 패왕과 투신의 대결!
 최후의 생존자가 남을 때까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월자들 간의 대격돌은 서서히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파파파팟
 철민은 새하얀 광휘를 느끼며 잠시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은 물론이고 육감까지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물론 철민의 느낌에 잠시라는 것이지 실제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철민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 색조차 표현이 불가능한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하얀색? 아니 무색?
 어떤 색으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광휘의 공간은 묘한 마력이 느껴졌다.
 “뭐지, 여긴…….”
 철민은 노부나가와의 혈투 끝에 그를 바닥에 눕히고 봉인되어 있던 풍백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곧바로 흰빛과 함께 신비한 공간으로 이동되어버렸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공간이동.
 철민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강철민…….”
 공간을 울리는 기이한 목소리.
 철민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며 마력의 실체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저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존재. 그렇게 찾는다고 찾아지는 게 아닙니다.”
 의도를 훤히 꿰뚫고 있는 듯한 목소리에 철민은 더욱 당황했다.
 “무슨…… 말장난이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철민은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렀다.
 “강철민, 초월의 의지를 넘어 선택의 자유를 얻은 자…….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
 “나는 강철민 당신이 알고 있는 존재로 치자면 풍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백……. 너는 단순히 단군님의 힘을 담은 증표가 아니었나?”
 거의 모든 초월자들은 풍백을 사라진 초월의 왕 단군이 남긴 힘의 증표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풍백이 이지를 지닌 일종의 생명체라는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저는 단순한 초월의 영(靈)일 뿐입니다. 그리고 단군님의 힘을 조금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 힘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힘이 아닙니다. 저의 힘은 바람의 힘. 바람을 도구 삼아 임의의 존재를 공간이동시킬 수 있는 미약한 힘이라고 할 수 있죠.”
 풍백은 조용히 자신이 가진 힘과 정체를 밝혔다.
 “그렇군. 그래서 초월자인 나를 이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소환할 수 있었군.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 단군님의 심복이라 해도 나를 소환한 타당한 이유를 들어야겠어. 내가 강철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나의 별호인 회색의 초월자도 알고 있겠지? 나는 나를 귀찮게 하는 것들에게 그리 관대하지 못한 편이야.”
 철민은 갑자기 강제소환을 당한 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평소에도 자신을 귀찮게 하는 존재들을 가만두지 않았기에 당연한 일이다.
 “소환당한 것은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초월자는 이번 대혈투에 소환했습니다.”
 “뭐야! 도대체 의도가 뭐지? 이제 와서 초월자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머릿수를 줄여보겠다는 심산인가?”
 철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습니다. 초월자들이 다소 희생당한다 해도 중요한 것은 현실입니다.”
 풍백은 철민의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답했다.
 “현실? 그 현실이라는 것을 듣고 다음 행동을 결정하면 되겠군.”
 철민은 풍백이 말하는 현실에 흥미가 생겼다. 풍백이라면 절대 장난 따위를 칠 존재가 아니다.
 “당신은 초월자라고 불리는 존재. 그렇다면 초월의 공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뭔가를 설명할 것처럼 굴던 풍백이 오히려 질문을 던지자 철민은 당황했다.
 “초월의 공간이란…… 초월자들의 공간, 즉 초월의 세계를 말하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틀립니다.”
 “무슨 말이지?”
 “태초에 초월의 공간이 생길 때 이곳은 초월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확장할 수 있는 권한을 초월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럼 이 공간은 초월자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이겠습니까? 아니면 원래 있던 공간을 초월자들이 잠시 빌려 쓰는 것이겠습니까?”
 이번 질문은 상당해 난해한 문제였다. 철민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풍백은 그의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정답은 둘 다 ‘맞다’입니다. 태초에 창조주는 한없이 넓은 밖의 공간을 만들어 이 세계에 덮어놓았습니다. 결국 초월자들을 위한다고 한 일이지만 실상은 다른 이유였죠.”
 “다른 이유?”
 “예, 다른 이유가 있죠. 간단히 말하자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초월자에게 제약을 걸었고, 그것이 바로 현재의 세상을 덮고 있는 초월의 공간이죠. 창조주님은 초월자들이 지닌 가능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초월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초월자들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진정한 힘을 깨달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어놓은 것이지요.”
 “제약이라……. 대체 진정한 힘이 무엇이기에 창조주가 직접 제약까지 걸어놓은 거지?”
 “창조주가 두려워한 초월자들의 진정한 힘. 그것은 바로 창조의 힘입니다.”
 “창조?”
 철민은 흠칫 놀랐다.
 창조라니. 초월자가 엄청난 힘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능력까지는 없다.
 “놀라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분명 초월자들은 창조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초월자들 사이에서 신(神)의 경지라 불리는 무(無)의 경지에 다다르면 확실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의 경지…….”
 의(意), 염(念), 정(情), 심(心), 무로 이어지는 초월자의 경지.
 현재 철민은 정의 경지를 넘어 심의 초입에 다다른 절정의 초월자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경지에 오른 여섯 명의 또 다른 초월자가 있으니, 그들을 세계 7대 초월자라고 한다.
 무의 경지도 아닌 심의 경지 초입에 다다른 철민은 무의 경지라는 것이 얼마나 까마득한 경지인 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제가 말하자고 하는 현실이 시작됩니다.”
 “무슨……?”
 “초월자들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저는 확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초월의 공간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
 초월의 공간이 무너진다는 것은 상당히 큰일이다. 세계는 알게 모르게 초월의 공간의 힘에 영향을 받고 있기에 이것은 세계를 이루고 있는 중심축이 무너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알고 계시듯 초월의 공간이 없어지면 초월자는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소멸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군님이 오래전에 예상했던 일입니다.”
 “단군님은…… 단군님은 예전부터 알고 계셨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단군님은 해결책을 만들어낸 것인가?”
 철민은 초월의 왕 단군이라면 능히 해결책을 만들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답은 ‘예’일 수도 있고 ‘아니오’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둘 중 하나의 대답을 결정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강철민 당신입니다.”
 “내가?”
 철민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단군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초월의 공간에 이상이 생겼는데도 자신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자신이 떠나면서 남긴 미약한 차원의 경로를 따라 초월자를 보내라고. 초월자들 중 최후의 생존자, 강력한 초월의 힘을 지닌 존재를 보내라고.”
 “하하, 뭐야! 그럼 지금 날더러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단군님을 찾아가란 말이야?”
 철민은 어이가 없는 듯 말했다.
 “네, 그것이 강철민…… 회색의 초월자라 불리는 당신의 사명입니다.”
 “웃기지 마! 누가 내 사명을 만들었는데? 난 애초부터 그런 것들에 관심도 없었어. 내가 최후의 하나가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네가 나를 이곳으로 소환했기 때문이라고!”
 철민은 철저한 방관자였다. 다른 초월자들이 나름대로 사명을 가지고 활동했다면 그는 철저히 중도를 걸었을 뿐이다.
 “정말로 당신은 스스로의 의지도 없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까?”
 “……!”
 “잘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운명의 흐름을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굳이 부인하지 마십시오.”
 “젠장! 빌어먹을!”
 철민은 반박할 수 없었다. 풍백의 말처럼 수많은 초월자들 사이에서 최후의 하나로 남을 때까지 싸우면서 이미 미묘한 운명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자신에게 내려질 것 같은 사명 따위?
 때문에 최후로 남는 순간 풍백을 집은 것이고, 그래서 풍백의 이끌림을 따라 이 공간으로 들어온 것이다.
 “…….”
 “좋다. 좋아. 결국 이것이 내가 기다리고 있던 임무인 건가? 후훗, 재미있군. 세상을 구한다? 좋아, 한번 해보겠어. 이것이 정녕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한번 따라주겠어. 하지만 기대는 말라고. 난 변덕이 심해서 나중에 또 어떻게 나올지 잘 모르거든.”
 철민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얘기했다. 생각을 많이 하는 타입이 아니기에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당신의 선택은 그것인가요?”
 풍백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렇다. 영웅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운명이 나에게 영웅이 되길 강요한다면 굳이 마다하지는 않겠다.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지?”
 “미약하게 이어진 공간의 끈, 그것을 따라 다른 세계로 가면 됩니다. 그 세상은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을 가진 이계입니다.”
 풍백은 이계(異界)로의 차원이동을 말하고 있었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 그곳에 단군님이 계시다는 건가?”
 “예, 그곳에 계십니다. 그곳은 단군님이 창조하신 세계. 단군님은 스스로가 창조한 세계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고 계십니다.”
 “재미있군. 단군님이 창조한 세계라……. 후훗, 그래. 가자! 그 세상이 어딘지는 몰라도 한번 가봐야겠어!”
 철민은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했다. 초월자에 이른 그에게 다른 세상에 대한 공포 따위는 없다.
 그가 결정을 내리자 풍백은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차원이동의 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정했군요. 어쩌면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외의 운명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새로운 운명을 찾아 떠나지만 그곳에서 눈물을 흘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선택, 당신의 결정, 당신의 의지. 당신의 여정에 축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스팟
 풍백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주변이 온통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민은 뭔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감각이 사라져갔다.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
 철민은 그렇게 지구에서 사라졌다.
 
 
 제1화 검은전사 그레이
 
 1
 
 어두운 공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공간이다.
 꿈틀
 어둠의 움직임.
 어둠 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기보다는 어둠 자체가 움직였다고 할 수 있었다.
 슈우우욱
 어둠이 뭉쳐 만들어지는 괴상한 존재.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도 힘든 괴기한 존재였다.
 〔시작되었다.〕
 그 존재가 말을 했다. 아니, 말이 아니라 괴상한 의지를 뿜어냈다고 하는 편이 옳다. 검은 괴물체로부터 뻗어 나오는 음산하고 칙칙한 의지의 울림.
 〔운명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절망의 시간이 다가온다.〕
 우르르르르
 끝없는 어둠.
 그 어둠들은 괴물체의 의지에 응답이라도 하듯 조용히 울리기 시작했다.
 〔인과율에서 벗어난 자, 인과율을 지키는 자 그리고 파멸을 갈망하는 자.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진행되리라.〕
 우르르르르
 더욱 심해진 어둠의 울림!
 〔일어나라, 운명의 그림자들이여. 일어나라, 절망의 그림자들이여. 일어나서 임무를 시작하라.〕
 우르르르르
 한층 심해진 어둠의 울림은 공간 자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뜻대로!〕
 쩌저저저정
 꽈광
 산산이 부서지는 어둠의 공간.
 그렇게 어둠보다 더 어두운 공간의 파편들이 세상에 뿌려졌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공간의 뒤틀림과 함께 찾아온 강력한 차원의 파장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루만시아 제국 북부 죽음의 사막 입구에 있는 사리스 마을에 언젠가부터 뛰어난 능력을 지닌 용병이 나타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말이 없고 조용했지만 능력만큼은 확실했다.
 보통 뛰어난 용병들이 포스를 느끼는 단계라는 포스유저 정도인데, 그는 적어도 포스유저 상급 이상, 잘하면 포스를 다루는 경지라는 포스익스퍼트도 될 거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포스익스퍼트 최상급에서 포스월(Force Wall)이라 불리는 절대 벽을 넘어야만 도달하는 꿈의 포스마스터(Force Master)는 아닐지라도 포스익스퍼트급 용병이라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물용병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일명 검은전사라 불리는 그 용병에게 의뢰를 하기 위해 앞 다투어 몰려들었고, 심지어 현재 검은전사가 앉아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싸우고 있는 두 상인처럼 서로 의뢰를 맡기겠다고 충돌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야, 이거 왜 이래! 나는 아까 검은전사님이 나오기 전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어허, 무슨 소리! 내가 왔을 때는 당신 여기 없었잖아?”
 뚱뚱하고 홀쭉해서 구분하기도 쉬운 두 남자는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뚱뚱한 남자는 정말 답답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잖아. 방금 화장실 갔다 왔다고.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뚱뚱한 남자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짜증난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홀쭉한 남자는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아, 글쎄! 나는 당신이 화장실을 갔다 온 것인지 지금 막 온 것인지 모르겠다니까? 당신이야말로 답답하구만!”
 두 남자는 서로 자신의 의견만 내세우며 목소리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편 그런 두 남자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사내가 있었다. 바로 그 두 남자가 의뢰를 맡기려고 하는 검은전사였다.
 “휴, 이제 여기도 그만 떠야 하나? 저런 사람들이 부쩍 늘었네.”
 검은전사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반년이면 너무 오래 있었다. 이제 돈도 웬만큼 모였고, 어느 정도 이곳 물정도 익혔으니 그만 떠나는 것이 좋겠구나. 그렇지 레드야?”
 레드!
 검은전사는 분명 레드라고 말했다. 붉은 참새 레드는 지구라 불리는 세상에서 활약하던 회색의 초월자의 분신이다.
 중급 요마였던 혈조(血鳥)를 친구로 받아들여 오랜 세월 세상을 떠돌았기에 회색의 초월자가 나타나는 곳에는 언제나 거대한 붉은 새가 나타난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레드가 지구가 아닌 전혀 다른 이세계에 나타나났다는 것은 레드의 주인인 회색의 초월자가 이곳에 있다는 소리고, 당연히 레드를 품고 있는 남자는 회색의 초월자 강철민이었다.
 철민이 새로운 세계, 즉 가이아 대륙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세계는 바로 초월의 공간과 유사한 세계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철민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화력과 진뇌력이 아무런 무리 없이 느껴졌다. 품 안에 있는 레드 역시 마력을 느끼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듯 보일 정도였으니 지구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죽음의 사막이라 불리던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도 가볍게 걸어서 횡단했다.
 그렇게 온갖 마물과 자연의 변덕을 마력을 이용해 가볍게 처리한 철민은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마을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철민은 처음 사막에서 마물들을 상대할 때만 해도 ‘이 세상에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지성체가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었지만, 막상 마을에 도착해 여러 군데를 둘러본 결과 지구의 옛날 모습을 보는 듯한 풍경들과 많은 인간들을 볼 수 있었고, 그제야 그런 의문을 지울 수 있었다.
 마을에 도착한 그가 처음 파악한 것은 이 세계의 언어였다. 당연히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언어였지만 그 뜻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아니라도 말속에서 의지가 조금씩 느껴졌기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표현은 할 수 없었다. 결국 철민은 몸짓손짓을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고, 이런 상태는 한동안 계속되다가 언어를 배우면서 차츰 나아졌다.
 언어 다음으로 파악한 것은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 같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들이었다.
 철민이 대략 파악하기로는 이 세계는 옛날 중세시대의 사회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전반적인 사회체계 같은 것은 비슷했지만 중세시대에는 없었던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많이 달랐다.
 철민은 나름대로 그 이유를 파악해보았다.
 ‘이곳은 지구와 매우 흡사한 상태로 창조되었고, 단지 지구와 달리 초월의 공간은 느껴지지 않았다. 현실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힘의 흐름은 초월의 공간이 현실세계에 녹아든 것 같은 느낌이다. 아마도 그래서 생겨난 것들이 마나를 이용하는 마법사들이나 포스를 이용하는 전사 혹은 기사들일 것이다. 포스나 마나는 일종의 마력으로 지구에서는 초월의 공간에 존재하던 마력들이 세분화되어 여러 형태로 존재했다면 이곳의 마력은 포스와 마나 그리고 마기(魔氣)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되고, 그 중 마기는 몬스터 같은 생물을 만들어낸 기운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은 많은 차이가 있어 지구에서 20년도 안 지난 창세의 일(단군 실종사건)이 이곳에서는 벌써 만 년이 넘은 일로 바뀌어 있었다. 이것은 두 공간의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얘기고, 그래서 단군을 찾는 데 다소 여유가 생겼다.’
 이 정도가 철민이 파악한 가이아 대륙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은 간단하면서도 핵심적이었다. 사실 그의 말은 대부분 정확했고, 지구와 다른 세계인 이곳은 확실히 신비한 힘이 많이 존재하는 환상의 세계였다.
 초월의 공간과 현실이 뒤엉켜 있는 세계.
 철민이 도착한 세계는 그런 혼돈이 함께하는 이세계였다.
 그렇게 언어를 익히며 이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용병일을 시작한 철민은 어느새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검은전사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철민은 명성보다는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반년이라는 세월은 기초적인 언어능력과 기본적인 생활상식을 얻기에 충분했고, 덤으로 돈도 생겼다.
 그러나 철민이 이곳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단순히 명성을 얻고 돈을 벌어 편안하게 사는 게 아니다. 이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 즉 지구라는 세상의 일그러짐을 막기 위해 단군을 찾아야 하는 일이 그가 진정 원하는 일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아직 꽤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한 철민은 조급함을 버리기로 했다. 조급증을 부려 일을 망치는 것보다는 느리지만 좀 더 확실하게 해결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차근차근 기초지식을 쌓은 지 반년.
 이제는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뚱뚱이와 홀쭉이의 코미디 같은 말다툼을 지켜보고 있을 때 두 남자 뒤로 고급스러운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마차 문에 새겨진 문양은 철민도 익히 보았던 것이다. 단지 지금까지 그 문양을 본 것이 저런 고급스러운 마차가 아니라 소박한 마차였을 뿐이다.
 그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의뢰를 맡겼고, 그 의뢰는 다른 의뢰들보다 어려운 점이 많았다. 물론 철민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주위의 평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만큼 돈도 많이 주었다.
 철민이 돈을 밝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그도 언젠가부터 은근히 그 문양을 달고 오는 사람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문양은 바로 대륙의 5대 상가 중 하나인 제니온 상가의 것이었다.
 덜컹
 고급스러운 마차의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사내는 처음 보는 자였다. 지금까지 주로 왔던 제니온 상가 시리스 마을 지부장이 아니라 새로운 인물이었다.
 아니, 시리스 마을 지부장도 있기는 했다. 그는 새로운 사내 앞에서 문을 연 채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라플토님, 이곳입니다.”
 지부장의 목소리는 자로 잰 것처럼 깍듯했다.
 “으음, 이곳이 검은전사가 있다는 곳인가. 오, 저기 앉아 있군.”
 새로운 사내도 그동안 찾아왔던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철민에게 용무가 있는 것 같았다.
 한편 그들의 출현에 홀쭉이와 뚱뚱이는 긴장했다. 자신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만 같은 남자, 특히 제니온 상가의 문양을 단 고급마차를 본 순간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응? 자네들은 뭐지? 혹시 검은전사에게 용무가 있나?”
 라플토가 두 남자에게 물었다.
 그의 말투에서는 ‘너희들도 검은전사에게 용무가 있다면 좀 곤란한데’라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왔고, 뚱뚱이와 홀쭉이도 당연히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라플토가 누구인가! 대 제니온 상가의 수석총관, 그것도 제이온 상가의 총수가 가장 총애한다는 총수의 오른팔이 아닌가!
 라플토의 눈 밖에 났다가는 의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렵다는 것쯤은 두 남자도 잘 알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저희는 친구인데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서 이러고 있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친구야, 이거 얼마만이냐? 가자, 오늘은 내가 쏘마!”
 뚱뚱이와 홀쭉이는 진짜 코미디를 하는 것처럼 오버까지 해가며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고, 결국 어깨동무를 한 채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후훗, 재미있는 친구들이군.”
 라플토는 두 사람의 진실쯤이야 훤히 알고 있었지만, 그런 두 사람을 저렇게 만든 주범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에 슬쩍 웃고 말았다.
 그렇게 두 남자를 조용히 보내버린 라플토는 철민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검은전사인가?”
 당당하면서도 활기가 느껴지는 라플토의 목소리.
 철민은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말을 쉽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언어구사 능력이 많이 부족해서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고개만 끄덕이는 철민.
 어떻게 보면 상당히 건방져 보이는 행동이다. 특히나 라플토 정도의 인물이라면 웬만한 영주들도 예의를 갖추는데 아무리 명성을 얻은 용병이라만 너무 건방진 태도였다.
 챙챙
 “이놈이……!”
 철민의 행동에 라플토의 두 가디언이 즉시 검을 뽑았다.
 그것은 당연했다. 제니온 상단의 얼굴이랄 수 있는 라플토가 이렇게 취급받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아아, 그만! 됐어. 너희들은 마차에 가 있어라.”
 하지만 라플토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오히려 가디언들을 마차로 보내버렸다.
 처음에는 위험하다면서 남아 있겠다고 했지만 라플토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가디언들은 별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하하, 실례했습니다. 원래 좀 과격한 애들이라…….”
 “별로……. 괜찮다.”
 철민은 어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적당한 대우를 해준다. 그렇기에 아직 높임말이나 어투가 완벽하지 않지만 애써 입을 열어 대답했다.
 “호오, 벙어리는 아니셨군요.”
 라플토는 철민이 반말을 하든 어투가 어눌하든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철저한 상술에서 나온 조작된 미소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보기는 좋았다.
 “나를 찾은 이유는?”
 철민은 라플토가 의뢰를 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예의상 이유를 물었다.
 “당연히 의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의뢰라도 받는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그렇다. 의뢰내용은?”
 라플토는 역시 철민에게 뭔가 의뢰를 맡기려고 했다.
 “흐음,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괜찮겠습니까?”
 라플토의 말을 들은 철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래 걸리는 의뢰라…….
 아무래도 먼 곳에 가서 처리해야 하는 의뢰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이곳을 떠나려고 했던 철민이기에 내심 반가운 일이었다.
 “괜찮다. 의뢰내용은?”
 철민의 대답을 들은 라플토는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역시 시원시원하군요. 의뢰내용은 별것 없습니다. 한 사람을 지정한 장소로 호위하여 데리고 가주시면 끝입니다. 일종의 단기 가디언이죠.”
 철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시리스를 떠날 때가 되었으니 이번 의뢰는 일석이조였다. 당연히 철민은 의뢰를 수락했다.
 라플토는 그런 그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일까지 시리스 마을에서 얼마 멀지 않은 미녹시의 제니온 상단으로 와달라고 했다.
 결국 반년 만에 시리스 마을의 명물로 떠올랐던 검은전사는 처음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실종에 강한 의문을 품었는데, 혹자는 의뢰를 실패하여 죽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어느 기사단에 기사로 들어갔다고도 했다.
 물론 제니온 상단에서는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소문낼 정도로 입이 가벼운 사람은 없었다. 그 결과 검은전사의 실종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2
 
 루만시아 제국 북부의 미녹시는 꽤 큰 도시다. 산이 많은 북부지역의 특성상 광산업이 발달했기에 많은 부가 몰렸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되었다.
 형식상 모든 광산은 국가와 지방영주의 소유물로 되어 있지만, 사실상 관리는 상단이나 개인이 맡아서 하고 있다. 영주와 국가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대리임무를 맡긴 것이다.
 복잡한 상거래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이익만 챙기는 자리.
 보통 귀족들이 좋아하는 자리다.
 당연히 미녹시의 많은 광산들은 영주와 국가에서 위탁관리를 맡겼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녹시에 몰릴 요건이 되었다.
 하지만 미녹시는 그것 하나로 전부가 아니다. 바로 대륙 최고의 상가 중 하나인 제니온 상단의 본가가 있는 것이다.
 원래 제니온 상가는 약간 큰 규모의 대장간을 하는 집안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약 300년 전 드니로 제니온이라는 사람이 대장간을 해서 모은 돈으로 광물매매업에 뛰어들어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그렇게 몇 대를 거치며 광물매매업을 하던 제니온 집안은 꽤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또 때마침 터진 대륙전쟁은 제니온가를 단번에 대륙의 4대 상가와 어깨를 겨눌 수 있는 위치까지 올려주었고, 결국 200년 전부터는 대륙 5대 상가라는 이름으로 대륙 4대 상가와 동일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광물매매업 말고도 여러 가지 일을 하지만, 아직도 주수입이 광산에서 나오는 온갖 광물들을 가공하여 파는 일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어쨌든 제니온 상가는 미녹시의 자랑이자 미녹시의 힘이다.
 어떤 마을이나 도시에 대규모 상단의 본가가 있을 경우 그 마을의 상거래 규모는 다른 상가의 지부만 있는 마을보다 몇 배는 많은 게 보통이다.
 보통 상단의 본가만 해도 그 정도인데 대륙의 5대 상가 중 하나인 제니온 상단이 미녹시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그것은 돈으로 계산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래서 미녹시의 사람들은 제니온 상단의 본가를 볼 때마다 언제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이 습관이 될 정도다. 그러니 제니온 상가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제니온 상가의 네 개의 정문 중 제4정문.
 행인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이른 새벽이지만, 그곳을 지키는 경비원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경계에 여념이 없었다.
 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제니온 상가의 경비무사로 뽑힌 잭은 대 제니온 상가의 경비무사라는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엘리트 경비 잭의 눈에 이상한 물체가 감지된 것은 근무교대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으스스한 새벽안개를 뚫고 나온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잭을 향해 똑바로, 아니 제니온 상가의 제3정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잭은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살며시 잡았다. 물론 옆에 같이 근무를 서는 동료가 있지만 잭은 2대 1이라는 숫자만 믿고 방심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검을 잡은 것은 단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것이지 사내를 대하는 행동과 말은 손님을 대하듯 부드러웠다. 이것은 제니온 상가의 경비무사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기본교육의 성과다.
 “어서 오십시오. 제니온 상가의 제4정문 경비무사 잭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잭은 최대한의 예의와 최대한의 경계를 동시에 실현하며 검은 옷을 입은 사내를 맞이했다.
 “라플토……. 그가 불러서 왔다.”
 비록 발음이 약간 이상했지만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이기에 잭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 네! 라플토라는 사람을 찾아왔다고요? 라플토라…… 라플토……. 헉! 수, 수석총관님의 손님이십니까?”
 제4정문은 주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예를 들면 제니온 상가의 평직원들이나 그들에게 용건이 있는 사람들이나 출입하는 곳, 정문이라기보다는 조그만 쪽문이라고 보는 게 더 어울리는 곳이다.
 당연히 중요한 손님은 올 리가 없고, 잭도 처음 라플토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설마 수석총관의 손님이 이쪽으로 올 거라는 생각은 못했기 때문에 그 라플토라는 인물이 수석총관을 지칭하는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잭이 제니온 상가에서 일한 지 어느덧 5년. 본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당연히 라플토라는 이름을 검색해본 결과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수석총관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었고, 그래서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 같더군.”
 “허억!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잭은 다급해졌다. 만약 정말로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가 수석총관의 손님이라면 자신은 아주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 되고, 그 실수는 5년간의 화려한 엘리트 경비생활의 마지막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다.
 잭은 일단 사내의 얼굴에서 화가 났다거나 짜증이 난 것 같은 표정은 보이지 않아 안도하며 재빨리 본가로 뛰어 들어갔다. 한순간이라도 빨리 확인하여 문밖에 서 있는 사내를 편하게 해주는 것만이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필사의 노력 덕분일까?
 철민은 생각보다 빨리 제니온 상단의 본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비록 너무 이른 새벽이라 접견실에 앉아 조금 기다려 달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도 자신이 너무 일찍 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으리으리하군.’
 접견실이지만 화려했다.
 철민은 지구의 중세문화를 거의 모르지만 분명 이곳의 문화가 그보다 더 화려할 거라고 생각했다. 중세문화가 마력이라는 절대적인 힘이 배제된 채 발전한 문화라면 가이아의 문화는 마력의 힘이 작용하여 더 화려하고 더 강력했다.
 똑같은 중세양식의 건물일지라도 마력이 작용한 가이아 대륙의 건물이 뭔가 더 화려해 보인다고나 할까?
 철민은 항상 쓰고 다니던 검은 후드를 내렸다.
 그동안 검은 후드를 내리지 않은 것은 이곳 사람들의 용모가 자신과 많이 달라 꼭 지구의 서양인들 용모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백로들 사이의 까마귀라고나 할까? 검은머리에 검은 눈동자, 거기에 피부색도 약간 달라서 너무 튀어 보였다.
 철민은 당연히 그런 튀는 외모를 가려야 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검은색 후드였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혼자 있을 때는 주로 후드를 벗고 있었다.
 “휴, 역시 답답한 것은 별로야.”
 철민은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접견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분명 평범한 접견실은 아니었다. 귀빈을 모시는 곳 같았다. 일개 용병, 그것도 신원조차 불확실한 자신을 이렇게 환대하고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철민은 그런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무슨 다른 의도가 있다 해도 자신이 할 일만 다 하면 끝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품고 있는 그는 앞으로 맡게 될 임무만 생각했지 그 뒤에 숨은 속사정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륙의 5대 상가 중 하나라던데……. 상당히 조용하군.”
 지금 철민이 와 있는 곳은 제니온 상가의 친족과 핵심간부들만 모신다는 비밀접견실이다. 당연히 제니온 상단의 본가 중에서도 가장 심처에 위치한 곳이고, 그런 곳에서 시끄러운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철민은 쥐죽은 듯 고요한 이곳이 의아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합, 합, 핫!”
 너무나 조용해 지루하기까지 하던 철민은 갑자기 들려온 기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응?’
 접견실 근처에서 들려오는 기합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방문을 살짝 열고 나가보았다. 접견실로 안내한 사람도 꼼짝 말고 앉아 있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한 남자, 아니 소년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은 사람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소년의 검은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강하고 빨랐다. 멀리서 보기에도 상당히 위력적이었다.
 검에서 포스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포스유저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았지만, 열다섯 살도 안 되어 보이는 나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엿보이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철민의 이런 예상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
 소년의 검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검은 점점 위력적으로 변하면서 조금씩 포스가 느껴졌다. 이 정도면 가능성이 아니라 상당히 뛰어난 실력이다.
 ‘호오, 대단하군. 저 나이에 마력을 느낄 수 있다니. 아, 여기서는 포스유저라고 하던가? 하여튼 상당하군.’
 철민은 소년의 칼끝에서 느껴지는 상당량의 마력, 즉 포스에 감탄했다.
 지난 반년 동안 가이아 대륙에서 지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저 정도 나이에 포스를 다루는 이는 처음이다.
 오히려 나이가 많은 용병이나 기사들도 포스를 모르는 상태로 지내는 것을 많이 보았기에 소년의 경지가 특출나다는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감탄하며 한동안 소년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소년은 철민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일단 수련에 너무 집중한 상태였고, 철민이 마력을 숨긴 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이상 소년이 그를 파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철민도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가 소년에게 신호를 보내주었다.
 짹짹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수마(睡魔)의 삼매경에 빠져 죽은 듯이 있던 레드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눈치도 없이 울어댄 것이다.
 ‘이런……!’
 철민은 아차 했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진 후였다.
 “누구냐!”
 소년이 큰 소리로 외치며 철민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옷에 검은머리, 검은 눈동자를 지닌 낯선 사내.
 소년에 눈에는 당연히 침입자처럼 보였다.
 “미안해. 일부러 훔쳐본 건…….”
 철민은 잘 하지도 못하는 말로 사과하려 했지만 미처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약간 미숙했지만 분명 포스를 담고 있는 소년의 진검이 자신을 향해 휘둘러졌기 때문이다.
 ‘죽겠네!’
 철민은 그냥 접견실에 앉아 있을 걸 하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일은 터진 후였다. 자신이 실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날아오는 검을 그대로 맞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철민은 마력을 끌어올려 살짝 뒤로 물러났다.
 휘잉
 검이 허공을 가르자 미약한 포스의 잔영이 퍼져나갔다.
 “잠시 내 말 좀…….”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소년은 막무가내였다.
 “경비병!”
 소년은 경비병을 부르면서도 연신 검을 휘둘렀다.
 철민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소년의 태도나 말투로 보아 예사 신분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러다 의뢰가 취소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사실 소년의 검이나 경비병들이 몰려오는 것쯤은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은근히 큰돈이 생길 것 같은 의뢰가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아쉬웠다.
 ‘아, 그냥 가만히 있을걸. 레드, 두고 보자!’
 소년의 검을 가볍게 피한 철민은 성급하게 움직인 자신과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울어댄 레드를 탓했다.
 제니온 상가의 경비병들은 확실히 돈을 많이 받는 만큼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소년이 소리쳐 부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어느새 소대 규모의 경비병들이 사방을 포위했다.
 “제니온 상가를 우습게 봤구나!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소년은 경비병들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이곳에 용무가…….”
 “하란, 저놈을 당장 제압해!”
 철민의 대화시도는 또다시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년이 한 사내에게 그를 제압할 것을 명령했고, 경비대장 하란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경비대를 이끌고 철민을 압박해들기 시작했다.
 ‘슬슬 열받는군. 이것들을 확 정리하고 그냥 사라져버려?’
 강압적이고 건방진 소년에 태도에 철민은 서서히 부아가 났다. 원래 강한 사람한테는 강하고 약한 사람한테는 약한 것이 특징인 철민은 소년처럼 스스로가 지닌 힘만 믿고 남의 사정은 헤아리지 않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휘잉
 아무런 경고도 없이 경비대의 창이 철민을 향해 날아들었다. 위력이나 노리는 위치를 보니 살상의 목적보다는 생포가 목적인 창들이지만, 살상이든 생포든 귀찮은 건 마찬가지였다.
 째재재쟁
 철민은 오른손의 진뇌력을 이용해 창들을 간단히 튕겨냈다. 물론 그에게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몇 자루의 창을 손짓 한 번으로 튕겨낸 모습에 경비병들은 깜짝 놀랐다.
 “이러지 말자. 난 라플…….”
 창을 쳐낸 철민이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 그의 입을 막은 것은 소년이 아니라 경비대장의 검이었다. 그 검은 지금까지의 어떤 공격보다 강력한 포스를 담고 있었다.
 쌔애애액
 까강
 그러나 경비대장은 스스로도 완벽하다고 생각한 공격이 침입자의 왼손에 저지당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포스유저 상급에 이른 그의 검에는 포스가 가득 담겨 있었건만, 신화력의 의가 운용되고 있는 철민의 왼손에 타격을 주기엔 무리가 있었다.
 “……!”
 맨손으로 검을 막는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포스가 깃든 검을 단순히 손으로 막는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경비대장이 강한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뒤에서 중년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제니온 상가의 두뇌로 알려진 라플토 수석총관이었다.
 
 “확실하게 처리했나?”
 제니온 상가의 제10대 임시가주 펠레치 제니온의 목소리에 궁금증이 가득 묻어났다.
 “예, 마음 놓으십시오.”
 가주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수석총관 라플토는 언제나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자네가 하는 일이 확실하긴 하지.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중요해. 잘못하면 내가 평생을 투자한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어.”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에 제가 직접 개입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마음 놓고 푹 쉬시면 됩니다.”
 라플토는 계속 불안해하는 펠레치를 안심시켰다.
 “휴우, 어쨌든 자네만 믿네. 참, 그런데 아까 그 검은머리의 사내는 어디서 구했나? 실력이 상당해 보이던데…….”
 “아, 그 검은전사…… 그레이라는 사람 말씀이군요. 우연히 시리스 마을에 신원은 불분명하지만 쓸 만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제가 직접 가서 데리고 왔습니다.”
 철민은 가이아 대륙에 넘어오면서 ‘철민’이란 이름을 그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레이(Gray)’라는 새 이름을 지었다. 이쪽 세계의 사람들이 강철민이라는 단어를 발음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이름이다.
 “맞아, 그레이인가 하는 그 건방진 용병나부랭이……. 근데 그놈의 실력이 너무 뛰어나거나 재수가 좋아 빠져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펠레치는 소심한 사내였다. 하지만 장사수완은 꽤 좋아 일단 그가 투자한 일에서 적자를 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타고난 장사꾼.
 이것이 딱 펠레치의 이미지다.
 “흐흐, 걱정 마십시오.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포스익스퍼트 하급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번에 준비한 것들은 포스익스퍼트 상급이 덤벼든다 해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한마디로 그놈이 아무리 용쓰는 재주를 지녔다 해도 이미 게임은 끝났다는 것이죠.”
 라플토는 이번 일을 위해 지난 1년간 준비한 것들을 떠올렸다. 들어간 돈도, 시간도, 인력도 모두 최고였기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이번 일을 성사시킴으로써 제니온 상가의 완벽한 2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어떤 일보다 심혈을 기울였다. 가뜩이나 완벽의 극치라 불리는 냉혈의 상인 라플토가 최선을 다했으니 어쩌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물론 결과는 나와 봐야 아는 거지만, 어쨌든 현재 상황으로는 성공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정말인가? 하핫, 역시 라플토 자네는 믿을 만해. 내 약속하지. 이번 일만 성사되면 자네를 부가주로 임명하겠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플토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확실히 제니온 상가의 부가주라는 자리는 굉장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 특히 일개 지부 소속의 직원으로 처음 일을 시작한 라플토에게는 생애 최대의 목표였다.
 깊은 어둠 속에서의 대화.
 그들은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세상일은 흔히 엉뚱한 곳에서 어긋나게 되어 있다.
 
 3
 
 강철민, 아니 그레이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으로 마차지붕에 누워 있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잽싸게 도망갔어야 했는데…….’
 그레이는 그날 아침 제니온 상가에서 라플토가 도착하기 전에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물론 곤란했던 상황은 라플토가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바로 라플토가 말했던 의뢰가 그레이의 인상을 잔뜩 찌푸려지게 만든 것이다.
 그레이의 엉덩이 밑에 깔려 있는 마차는 평범한 마차였다. 하지만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그리 평범하지 않다.
 듀크 제니온!
 제니온가의 하나뿐인 적통이다.
 현재 제니온가의 내부사정은 약간 복잡하다. 듀크 제니온의 아버지인 드미트리 제니온은 듀크가 한 살 때 불의의 사고로 죽고, 그로 인해 듀크의 삼촌인 펠라치 제니온이 듀크 대신 제니온 상가를 임시로 맡게 되었다.
 원래는 듀크의 어머니가 맡아야 정상이지만 그녀는 듀크를 낳다가 죽어버려 어쩔 수 없이 하나 남은 일가친척인 삼촌이 맡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효력은 듀크가 16세가 될 때까지였다. 당연한 것이고, 상가의 모든 원로들이 합의한 내용이었다.
 듀크의 현재 나이 14세. 이제 2년만 더 지나면 제니온 상가의 제11대 가주직에 오르는 대단한 신분의 소년이다.
 하지만 그런 대단함도 그레이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단지 그 듀크라는 소년이 아침에 자신과 대치했던 그 소년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비록 오해였다는 것을 알고 끝낼 수 있었던 대치였지만, 그 대치로 듀크는 그레이를 수상하고 믿을 수 없는 불한당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레이에게 좋을 말이나 행동이 나올 수 없었고, 그것이 불편한 그레이는 마차지붕까지 기어 올라가게 된 것이다.
 ‘에잉, 여기도 나름대로 좋네. 바람도 솔솔 불고 잔뜩 찌푸린 그 녀석 얼굴 안 봐도 되고. 계속 여기 있어야겠다.’
 그레이는 마차지붕이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달리는 와중이고, 그 속도로 인해 생긴 시원한 바람이 그의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이대로 잠이나 자면서 갈 수 있으려나.’
 그레이는 왠지 성가신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대륙 5대 상가의 작은 주인을, 그것도 꽤 먼 거리를 가는데 아무런 신원확인도 안 된 떠돌이 용병에게 모든 호위를 맡긴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신분을 들키면 안 되는 비밀행차라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호위의 기본은 지켜야 한다.
 구린 냄새가 솔솔 풍기는 의뢰…….
 하지만 그레이는 그런 것을 다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 어차피 복잡한 배경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그로서는 장애물이 있으면 뚫고 나가면 그만이라는 단순무식한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투신(鬪神) 그레이의 사고방식이다.
 ‘나와도 조금만 나와라. 귀찮게 하지 말고.’
 미녹에서 문글로우까지 보름간의 여정. 결코 짧지 않은 일정이기에 귀찮은 일이 생기기 시작하면 한없이 귀찮아질 수 있었다.
 “맞다. 야, 레드!”
 성가신 일들이 얼마나 생길까 하고 생각하던 그레이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품속의 레드를 불렀다.
 그러나 묵묵부답.
 “이게 꼭 부를 땐 무시하고 부르지도 않을 때는 시도 때도 안 가리고 울어대요. 레드!”
 그레이는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자신의 품속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째애액!]
 푸다다닥
 그러자 레드는 놀랐는지 그레이의 품속에서 뛰쳐나와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쭈, 도망가? 야, 좋은 말로 할 때 내려와라.”
 그레이는 아침에 그 소란을 일으킨 주범인 레드에게 정신교육을 시키기 위해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하루 이틀 같이 지낸 게 아닌 레드가 분위기를 파악 못할 리 없다.
 레드는 특유의 쇠귀에 경 읽기 전법으로 유유히 허공을 맴돌았다. 아무리 입 아프게 떠들어대도 레드가 일단 저 모드로 들어간 이상 그레이의 승리는 날아간 것이나 다름없다.
 “으으, 차마 마력을 써서 끌어내릴 수도 없고…….”
 그레이는 레드의 능글맞은 태도에 속이 타는지 손으로 가슴을 쳤다.
 “정말 너는 웬수다, 웬수!”
 그레이는 이번에도 레드에게 판정패를 당하며 총 전적 414전 4승 2무 408패를 기록했다.
 그레이와 레드의 414번째 대결과 전혀 상관없는 듀크는 마차 안에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이루고자 했던 것들 중에 못 이룬 게 거의 없는 그로서는 상당히 열받는 일이 오늘 아침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돈이면 돈, 능력이면 능력, 타고난 머리와 운동신경 그리고 가문까지 거의 모든 것이 최상급이었던 듀크에게 이루지 못한 일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수상하고 마음에 안 드는 불한당을 가디언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막는 것은 실패했다.
 별것도 아닌 가디언 선정에 자신의 의견이 철저히 무시당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거기에 생긴 것은 우라노스 대륙의 사람처럼 무식하게 생겼고 직업은 미천한 용병인 주제에 이유 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자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레이가 경계를 한답시고 슬그머니 마차지붕으로 올라가버려 그나마 화가 가라앉은 것이지 아니었으면 정말로 폭발할 뻔했다.
 “꼴에 용병이라고 눈치는 있군. 쳇, 숙부님은 도대체 저런 놈을 가디언으로 삼은 이유가 뭐야? 아무리 내 신분을 속이고 후계자 인증수업을 거치기 위해서라지만 저런 삼류 불한당 같은 놈은 좀 너무하잖아.”
 듀크는 숙부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그레이가 가디언으로 선택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숙부의 오른팔인 라플토 수석총관의 말로는 최상급 용병을 어렵사리 구해왔다지만 듀크는 믿을 수 없었다. 워낙 라플토라는 인간이 싫었던 듀크는 그가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버릇까지 생기게 되었다.
 “라플토…… 건방진 놈! 숙부님의 총애를 좀 받는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 놈. 내가 상가를 이어받기만 하면 제일 먼저 네놈의 모가지부터 쳐주마.”
 듀크는 2년 후 라플토를 어떻게 괴롭힐지 생각하며 씨익 웃었다.
 2년 후 그가 제니온 상가의 가주가 되는 순간 라플토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그런 분명한 운명이 싫어일까?
 정해진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라플토의 노력은 실로 대단했다.
 그리고 그 노력의 첫 번째 결과물이 지금 듀크의 마차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흠칫!
 마차가 대도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숲속으로 들어섰을 때 그레이는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까지 가이아 대륙에서 사용되는 여러 마력, 즉 포스와 마나의 종류를 완벽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포스와는 약간 다른 마나의 파동인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불규칙한 폭발의 위험이 보이는 마력의 파동이었다.
 ‘폭발하는 건가?’
 그레이는 재빨리 마부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의 진로와 속도라면 곧 마나가 불규칙하게 폭발할지도 모르는 지역을 지나갈 것 같아 일단 마차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마차를 멈출 수 없었다. 마차는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마부가 죽어 있었다. 그것도 깔끔하게 외상도 없는 상태였다.
 마부를 잃은 말들은 자신들을 제어하는 손길이 없자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다.
 “젠장, 독이군.”
 미리 치밀하게 계산된 함정임이 분명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마부가 한순간에 독으로 사망하고, 거기에 발맞춰 마차의 진로에 폭발 위험이 있는 마나의 파동까지 느껴진다는 것은 우연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말이라고는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그레이에게 남은 방법은 마차를 포기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혼자서만 마차를 포기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또 한 사람이 마차 안에 있었다.
 “쳇, 시작부터 장난이 아니군.”
 많이 귀찮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출발한 지 하루도 안 돼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느낌이고 일은 일이다.
 콰드드득
 그레이의 마력이 담긴 손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마차의 상판을 뜯어내버렸다. 한 사람이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는 그 구멍 밑에 영문을 모른 채 그의 행동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듀크가 앉아 있었다.
 “너…… 뭐야!”
 듀크는 당황하여 외쳤지만, 그레이는 차근차근 설명할 시간조차 없다는 듯 재빨리 구멍 안으로 뛰어들어 듀크를 번쩍 들어 어깨에 올렸다.
 “조용! 빠져나간다.”
 꽝
 듀크를 어깨에 걸친 그레이는 곧장 마차 문을 박살내고 꽤 빠른 속도로 달리던 마차 밖으로 몸을 던졌다. 재빨리 진뇌력을 양발로 이끈 그는 가까워지는 나무를 향해 오른발을 뻗었다.
 꽈광
 우지지직
 진뇌력의 강한 자기장 탓인지 나무는 그의 발이 닿지도 않았는데 부러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생긴 반발력으로 그레이가 날아가는 속도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꽈광꽈광
 우지지직
 그렇게 몇 그루의 나무를 더 쓰러뜨리자 완전히 속도를 줄일 수 있었고, 무사히 숲속에 착지할 수 있었다.
 그레이와 듀크가 이렇게 무사히 위기를 벗어날 즈음 그들의 마차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꽈과과광
 화르르륵
 길 한가운데서 갑자기 일어난 폭발은 말들과 마차 그리고 죽은 마부의 시체까지 한순간에 재로 만들어버렸다. 4서클의 파이어월과 6서클의 익스플로우전이 한꺼번에 가동된 고급 마법트랩이었다.
 4, 5서클의 마법트랩만 해도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 웬만한 부자들도 벌벌 떨면서 가장 아끼는 물건을 지킬 때만 설치하는 것을 감안하면, 아무도 다니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외진 길에 4서클과 6서클의 마법트랩을 설치했다는 것은 과한 정도를 넘어 황당하기까지 한 일이다.
 하지만 이곳의 마법체계나 마법무구를 잘 모르는 그레이는 단지 ‘폭발성 마력으로 함정을 만들었군’하는 정도였다.
 만약 그가 진짜로 최상급 용병이라면 지금쯤 이 일에서 손을 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진짜 최상급 용병이 아니다.
 이 사실은 펠레치와 라플토에게는 천추의 한이 되었고, 반면 듀크에게는 일생일대의 행운이 되었다.
 듀크는 화려하게 폭발하는 마차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쪽 세상의 물정에 어두운 그레이가 대충 마력의 폭발로 치부했던 그것이 듀크에게도 단순한 폭발 정도로 보이지는 않았다.
 평소 여러 가지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듀크는 방금 전의 폭발이 마법트랩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적어도 5서클 이상의 마법트랩이라는 것도 눈치 챘다.
 5서클 마법트랩만 해도 국가차원에서만 관리되는 중요한 전쟁도구인데, 그런 위력을 보여주는 마법트랩이 자신이 지나가는 길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은 다분이 의도적인 것이었다. 바로 듀크 제니온 자신을 없애고자 하는 의도!
 “마부는 죽었고, 우리는 이제 걸어가야 한다.”
 그레이는 어색한 단어조합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이제 말도 마차도 없으니 다음 마을이 나올 때까지 걷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
 하지만 듀크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라. 다음 마을까지 3일이다.”
 그레이는 어느새 지도를 꺼내어 보며 듀크의 걸음속도를 감안하고 대략적인 소요시간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듀크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안 했다.
 “…….”
 그레이는 그런 소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전형적인 도련님 스타일의 듀크에게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자신을 해하려 한 적이 없었고, 따듯하게 보살펴준 숙부와 자신을 하늘처럼 받들어 모시는 제니온가의 사람들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 한 번의 위협으로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공황상태에 휩싸여버린 듀크.
 “돌아가나?”
 그레이는 듀크가 그냥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듀크에게 암살의 위협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기에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본가로 돌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듀크가 이번에 본가를 떠나 몰래 문글로우로 가는 이유는 제니온가의 오랜 전통인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때문이다.
 본래 대장장이 가문이었던 제니온가에서는 14세 정도의 나이가 되면 어른이 되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 가문의 전통이었다. 2, 3년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16세가 넘어서 돌아오면 진정한 가문의 어른으로 인정받고, 그때부터 제니온이라는 성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반면, 만약 그 여행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일찍 복귀하는 자는 가문에서 철저히 배척되고 무시당한다.
 300년이 넘는 가문의 역사에 그 여행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사람은 방계 쪽에서만 몇 명이 있다고 전해진다. 직계후손들에게는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초기에는 여행 자체가 그리 위험하지도 않았고, 나중에 대상(大商)의 가문이 되었을 때는 실력 좋은 가디언을 한 명씩 붙여주어 위험요소를 없앴기 때문이다.
 듀크가 이번에 떠난 여행이 바로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적인 과정이다.
 이제는 형태가 많이 변질되어 단순히 본가 밑의 대형지부 한 군데서 2년 동안 후계자 수업을 받는 게 전부인 것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전통은 전통이다.
 전통을 중요시하는 원로원에서조차 그런 형태의 변화는 애써 모른 척 눈감아주는 것이 현실이지만, 어른이 되기 위한 여행의 수행 여부에 관해서는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
 사실상 가문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있는 듀크라고 할지라도 이번 여행을 무사히 마치지 못한다면 제니온 상가를 이어받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 그건 안 돼!”
 듀크는 그레이의 물음에 강경하게 반대의사를 표현했다. 누가, 왜 자신을 노리는지는 몰라도 일단 여행을 시작한 이상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험한 것이 많다. 그래도 괜찮나?”
 “젠장, 네가 내 가디언이잖아! 네가 위험한 것은 다 제거해! 밥값을 제대로 하란 말이야!”
 듀크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그레이에게 풀어냈다. 마음 같아서는 숙부에게 돌아가 자신을 노리는 놈들을 모조리 없애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 짜증났다.
 “알았다.”
 그레이는 더 이상 말하기도 싫은지 간단하게 대답하고 뒤돌아섰다. 그리곤 자신이 가진 지도와 현재의 위치를 비교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가늠해보았다.
 ‘고집이 세네. 모르겠다. 그냥 빨리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겠지.’
 그레이는 듀크의 속사정은 모른 채 단순히 소년이 고집을 부린다고만 생각했다.
 “어떤 놈인지 이번 일은 결코 잊지 않겠다.”
 으드득!
 듀크는 자신의 목숨을 노린 자들을 향해 분노를 불태웠다.
 하지만 그를 노리는 자들은 그런 분노 따위는 겁내지 않고 있었다.
 
 
 제2화 철부지의 가디언
 
 1
 
 “제1단계 작전, 실패했습니다.”
 어둠 속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어둠 그 자체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그는 그렇게 어둠에 동화된 채 제니온 상가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라플토에게 보고했다.
 “쳇! 듀크 이놈, 재수가 좋군. 나름대로 돈을 좀 썼건만……. 그나저나 그 용병은 도망가지 않았소? 일부러 빨리 도망치라고 선금을 반이나 책정해서 준 건데.”
 “아직 같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멍청한 놈! 그 정도의 돈을 받고도 도망가지 않다니. 그냥 떠돌이 용병인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자긍심이라도 가지고 있는 놈인 건가? 크으…….”
 라플토는 내심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던 그레이가 아직 듀크의 곁에 남아 있다고 하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투덜거렸다.
 “확실히 보통 용병은 아니었습니다. 거의 최상급 용병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어둠 속의 남자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레이의 활약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보통 용병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괴력을 발휘하며 마차에서 탈출하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젠장! 듀크 이놈, 재수도 좋군. 하지만 거기까지다. 앞으로 남은 것들은 그렇게 쉽게 도망갈 수도 없는 것들이니까. 크크, 준비는 다 되었소?”
 “예, 그동안 마법암시장에서 키메라란 키메라는 거의 모조리 긁어모아 40마리 정도를 지정된 장소에 배치해 놓았습니다. 제2차 암살작전은 명령만 내리시면 바로 실행이 가능합니다.”
 어둠 속의 사내는 자신이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덤덤하게 말했지만, 마법암시장의 키메라란 것은 그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흑마법사들이 주로 만들어낸다는 키메라는 위력이 강력하지만 반면에 위험성이 너무 커 거의 모든 나라에서 만들고 연구하는 것 자체가 불법으로 되어버린 상태다.
 그러나 아무리 불법이라 해도 그 강력한 힘의 유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법이 되면서 그 수가 적어지자 은밀히 거래되는 키메라의 가격은 몇 배로 뛰었다.
 결국 키메라는 어둠의 세계에서는 필수존재가 되었고,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키메라의 가격은 상당히 비싸기 때문에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략 중급 키메라 한 마리의 능력은 동급 용병의 능력을 상회한다.
 40마리의 키메라, 그것도 상급과 중급이 섞여 있는 무리라면 일개 기사단과도 승부가 가능할 정도의 전력이다.
 “크크, 좋군. 듀크, 너의 운명도 여기서 끝이다. 2차 암살작전을 실행하시오.”
 라플토는 듀크의 비참한 최후가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암살작전의 실행을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사내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어둠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역시 최강의 암살길드 크로우즈, 일을 깔끔하게 진행하는군. 뭐, 그만큼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지만……. 그러나 듀크가 제거되고 제니온 상가가 우리 손에 넘어오면 별로 큰돈도 아니지. 크크, 듀크 제니온! 너는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크크크크!”
 라플토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서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라플토의 마수는 또다시 듀크를 향해 조여가고 있었지만, 정작 그 대상은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투덜거리며 ‘침묵의 숲’을 걸어가고 있었다.
 “야, 길이 이게 뭐야? 제대로 된 길로 좀 가자고!”
 듀크는 어제부터 계속된 숲길 행군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그가 불만을 가진다고 제대로 된 길로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어제 있었던 폭발로 침묵의 숲을 끼고 돌아나가는 길이 무너져 내렸고, 어쩔 수 없이 침묵의 숲으로 뛰어든 듀크와 그레이로서는 숲을 횡단하여 파푸아 마을 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 길뿐이다.”
 때문에 듀크의 불평에 언제나 같은 말로 대답하는 그레이였다.
 “으윽, 계속 그 대답이네. 어떻게 숙부님은 언어능력까지 떨어지는 이런 삼류용병을 붙여주신 거지?”
 듀크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레이가 싫어졌다. 일단 첫인상부터가 별로 안 좋았고, 자신을 무시하는 말투와 가이아 대륙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생김새 또한 마음에 안 들었다.
 사람이 한번 마음에 안 들면 그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해도 밉다는 말처럼 듀크도 그레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무조건 마음에 안 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듀크가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을 때 그레이는 소년의 불평 정도는 가볍게 흘려들으며 정확한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들고 있는 지도의 정확성을 믿을 수 없었던 그레이는 레드를 날려 하늘에서 방향을 살폈고, 그 결과 현재 자신들이 향하는 방향이 파푸아 마을로 가는 최단거리임을 알 수 있었다.
 [삐이이익!]
 ‘흐음, 뭔가 있나?’
 레드가 평소와 달리 길게 울면서 그레이에게 이상 징후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잠깐.”
 그레이는 레드가 발견한 게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또 뭐야? 길도 없다며! 빨리 마을에 가서 쉬어야 할 거 아냐!”
 듀크는 그레이가 걸음을 멈추자 그것이 또 불만이라는 듯 투덜거렸다.
 그레이는 그 불만을 또 한 번 가볍게 무시하고 마력을 집중하여 전방의 숲속을 주시했다.
 ‘흐음, 상당히 특이하군. 마력은 마력인데……. 하급마귀에서나 느껴지는 마기 같으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엥?’
 마력을 개방하고 조심스레 탐색하자 전방에 있는 몇몇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존재들의 마력을 분석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마력의 존재감에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뭐야, 한둘이 아니라 적어도 30개의 마력이 느껴지잖아?’
 숲속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지만 확실히 많은 숫자의 마력이 느껴졌다. 대충 파악한 것만 30개를 넘어섰고, 그 숫자는 조금씩 더 늘어났다.
 ‘이거 또 시작인가? 낭패로군.’
 “야, 왜 계속 서 있는 거야? 넌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은 거야?”
 듀크는 그레이가 침묵을 지키자 길길이 날뛰었다.
 그레이는 그런 소년을 슬쩍 쳐다보며 도대체 저 건방진 꼬마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까 하고 생각했다.
 “조용. 앞에 적이 있다. 뚫고나가야겠다.”
 그레이는 이번에도 정면돌파 후 도주를 선택했다.
 30여 개를 넘어서는 마력을 가진 존재들과 싸움을 벌이는 것은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니다. 어차피 목적은 문글로우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기에 이번에도 최대한 신속하게 빠져나가 도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는 재미없는 싸움은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자는 것이 생활신조다.
 “뭐, 뭐? 또 나를 노리는 놈들이 있단 말이야?”
 듀크는 잠시 잊고 있던 암살의 공포가 다시 떠올랐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마라.”
 그레이는 듀크가 낼 수 있는 전속력의 속도로 한 번에 정면돌파할 생각이었다. 적들이 있는 곳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때문에 그레이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접근한 다음 한 번의 충돌만으로 적들을 돌파해버리고 전속력으로 숲에서 벗어나는 작전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레드, 내려와라. 이번에는 너도 같이 좀 도와라.”
 그레이는 최대한 빠른 돌파를 위해 레드까지 이용하려 했다.
 가이아 대륙으로 넘어오면서 사냥꾼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기 때문에 레드가 힘을 모두 개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야,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이상한 말로 떠들지 말고 좀 집중해서 나를 지키란 말이야.”
 듀크는 그레이가 이상한 말로 중얼거리자 더 불안해졌는지 벌컥 화를 냈다. 그만큼 14세 어린아이에게 찾아온 죽음에 대한 공포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듀크는 나름대로 총명한 아이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도 충분히 뛰어난 소년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한다.
 미녹시에 있는 시립학술기관 소년부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수석으로 졸업했고, 미녹시가 주최한 소년부 검술대회에서도 압도적인 능력으로 1등을 차지한 것으로 보아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소년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뛰어난 능력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엘리트 교육만 받으며 숙부의 따뜻한 보살핌과 아랫사람들의 깍듯한 대우 속에서 자라온 온실의 화초인 듀크에게 이런 위협이 닥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듀크는 언제나 당당했고 용감했다. 그러나 막상 주위의 도움은 모두 사라지고 크나큰 위협이 눈앞에 닥치자 그동안 알지 못했던 공포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고 똑바로 걸어.”
 그레이는 그런 소년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너…… 너, 소리 지르지 마. 걷고 있어. 자꾸 나한테 명령조로 말하는데, 그러면 가디언이고 뭐고 다 엎어버릴 테니 주의해.”
 그레이는 ‘제발 엎어라’하는 마음이었지만 차마 말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의뢰에 대한 책임감으로 듀크를 보호하고 있지만, 만약 정말로 소년이 계약을 파기한다면 언제든 깔끔하게 떠날 수 있다. 그에게 소년의 미래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다.
 “빠르게 뚫고 나간다. 준비해.”
 그레이는 소년의 말은 무시하고 계속 명령조로 대했다.
 듀크도 나름대로 사정이 안 좋다는 것을 느꼈는지 굳이 또 화를 내지는 않았다.
 침묵의 숲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아주 조용한 숲이다. 보통의 숲과 달리 산짐승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길게 뻗은 나무들만 덩그러니 숲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숲속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사라진 침묵의 숲.
 그곳의 모든 것들은 소리를 잃은 채 침묵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혹자는 고대의 대마법사가 숲 전체에 사일런스(Silence) 마법을 걸어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하고, 혹자는 침묵의 숲을 지키던 숲의 정령 리에틸렌이 신의 저주를 받아 소리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숲의 소리가 모조리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 채 오랜 세월 침묵을 지켰다.
 어쨌든 그렇게 소리가 사라져버린 저주받은 숲에서 오랜만에 소리라는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숲속 여러 군데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뭔가가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였다.
 [키에에엑!]
 [크르르륵!]
 도저히 정상적인 생물의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흑마법 중에서도 이단이라 불리며 경시받는 키메라, 그 저주받은 생명체였다.
 보통의 키메라들은 한 가지 목표를 주입하면 그 목표만을 위해 행동한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누가 건드리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주입하면 주인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 물건을 못 건드리게 하는 것이 키메라의 단순한 행동양상이다.
 가끔은 폭주하여 주인마저 못 알아보는 키메라도 있지만, 지닌 힘의 강력함에 어느 정도의 위험성은 감수하는 것이 현실이다.
 키메라들은 서로의 존재를 느끼면서도 사고체계에 주입된 목표인 전방에서 접근하는 두 사람을 죽이라는 간단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동료들을 무시한 채 목표를 향해 움직여갔다.
 그렇게 그레이와 듀크를 향해 좁혀드는 키메라들의 포위망은 크로우즈 암살자들이 계획한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쳇, 좁혀 들어오는군.’
 그레이는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점점 압박해오는 포위망을 느끼며 좀 더 속도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면돌파의 의미가 무색해질 것 같아 지금이라도 빠르게 전진하여 뚫고나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이었다.
 “더 빨리! 놈들이 다가온다.”
 그는 듀크에게 속도를 더 낼 것을 종용했다. 어느 정도 포스를 느끼는 단계까지 수련한 소년이라면 충분히 따라올 수 있을 정도의 속도였다.
 “왜, 왜 이렇게 빨리 달려!”
 듀크는 영문도 모른 채 전력을 다해 달렸다. 비록 공포로 인해 정신적인 부분은 많이 약해졌지만 아직 육체적인 능력은 또래의 능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사사사삭
 그레이는 빠른 속도로 나무들이 없는 최단거리의 길을 잡아 달렸다. 그가 대충이나마 만들어놓은 길로 듀크가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한편 레드는 그레이의 머리 위에서 저공으로 비행하며 언제라도 마력을 뿜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그레이 일행은 결국 크로우즈의 예상을 벗어난 지점에서 처음으로 키메라들과 맞닥뜨렸다. 아직은 포위망이 완벽하게 구축되지 않은 반 정도의 포위망이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레이의 앞을 처음으로 막아선 놈은 3미터가 넘는 트롤의 몸에 곰의 손발을 지닌 중하급 키메라였다.
 ‘뭐야, 이 괴물은!’
 그레이는 지난 반년 동안 가이아 대륙에서 용병일을 하면서 많은 몬스터들과 산짐승들을 봤지만 저런 생물은 본 적이 없다. 트롤처럼 생긴 몸체에 손발은 난폭하기로 소문난 그레이트 그리즐리베어의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눈앞에 있는 생물은 곰도 트롤도 아닌 괴물이 확실해 보였다. 괴상한 것은 단지 괴상함으로 끝났을 뿐이다. 생김새가 아무리 이상하다 해도 그로 인해 그레이의 평정심이 무너지는 일은 없다.
 [키에에엑!]
 빠지지징
 키메라는 그레이와 듀크를 목표로 인식했다. 목표가 인식된 후 키메라가 취할 만한 행동은 당연히 한 가지! 바로 공격이다.
 하지만 그레이는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항상 자신을 가로막는 존재들에게 파멸의 손길을 내려주었던 힘, 세상에 존재하는 자연계열 마력 중 가장 강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진뇌력과 신화력이 순식간에 생성되었다.
 어느새 그레이의 손에는 진뇌력을 의의 수준까지 끌어올려 만들어낸 진뇌권(眞雷拳)이 형성되어 있었다.
 꽝
 키메라는 두 개의 거대한 양손을 이용해 그레이를 공격했다. 3미터가 넘는 허공에서 내려찍히는 양손의 위력은 바위도 깰 수 있을 만큼 강력했지만 진뇌력이 운용된 그레이의 손에는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그레이는 키메라의 양손공격을 오른손으로 막아낸 후 곧장 달리던 탄력을 이용하여 왼쪽 어깨로 놈을 들이받았다. 물론 어깨에는 이미 신화력이 운용되어 그 강력한 신화력에 멸(滅)의 마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퍼퍼퍽
 꽈과광
 어깨를 이용한 신화력의 위력은 엄청났다. 신화력은 끊임없이 베고 잘라도 계속 재생된다는 트롤의 몸체를 거의 걸레쪽으로 만들면서 5미터 밖으로 튕겨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달려오던 속도의 몇 배로 튕겨나간 키메라는 몇 번 꿈틀거리다가 뻗어버렸다.
 즉사(卽死)!
 신화력 멸의 마력 앞에서는 트롤의 재생력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2
 
 “헉!”
 듀크는 난생처음 보는 키메라에 놀라고, 그런 무시무시한 놈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그레이에게 더 놀랐다. 삼류용병쯤으로 여겼던 그레이가 상당한 능력을 보유한 용병이란 사실은 엄청난 쇼크였다.
 “시간 없다. 계속 뛴다.”
 그레이는 소년의 놀란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진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 챈 키메라들이 계속해서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었기에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철민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다시 달렸고, 듀크도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뛰었다.
 첫 번째 키메라의 뒤를 잇는 두 번째 키메라는 앞이 아니라 왼쪽에서 튀어나왔다. 보통사람보다 몇 배나 큰 7미터 가량의 오거였는데, 특이하게도 머리통이 두 개에 팔이 네 개나 달린 놈이었다.
 그런 변종오거가 튀어나온 위치는 그레이의 약간 뒤쪽으로 듀크가 있는 부근이었다. 만약 놈이 그대로 돌진한다면 듀크는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그레이는 속편하게 혼자서 여행을 할 수 있겠지만 그놈의 책임감이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되도록 방치할 수가 없었다.
 “레드, 보호해!”
 그는 변종오거의 움직임 정도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으며 레드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레드 역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듯 날아가던 방향을 급선회하여 오거를 향해 돌진했다.
 그아앙
 순간 레드의 작은 몸체가 강력한 마력의 파동과 함께 완전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반쯤 봉인하고 있던 레드의 마력은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전신으로 마구마구 퍼져나갔다.
 레드의 전신에 풍기는 핏빛 오러!
 훗날 블러드호크(Blood Hawk)라 불리게 될 레드의 진면목이다.
 쌔애애액
 덥썩!
 레드의 날카롭고 강력한 발톱이 변종오거의 왼팔을 낚아챔과 동시에 완벽하게 부숴버리고 있었다.
 콰드드득
 레드의 양발에 실린 압력은 강철도 휘게 만들 정도다. 아무리 키메라라지만 생물체에 불과한 변종오거가 그 압력을 견딜 수는 없다.
 [끄에에엑!]
 변종오거는 상당한 고통을 느꼈는지 엄청난 괴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레드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너덜너덜하게 부서져버린 오크의 팔뚝을 버리고 곧장 날개를 일직선으로 편 채 이번에는 반대쪽 팔뚝을 향해 비행했다.
 레드의 날개는 그가 지니고 있는 혈마력(血魔力)이 강하게 응집되어 잘 별러진 명검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휘이익
 뎅강!
 레드는 변종오거의 오른팔 부근에서 수직으로 급강하하며 펼쳐진 날개로 썽둥 잘라버렸다.
 촤아아아
 매끈하게 잘린 오거의 팔뚝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끄에에엑!]
 놈은 방금 전에 내지른 괴성의 몇 배로 울부짖었다. 순식간에 네 개의 팔 중 세 개를 잃은 오거는 고통으로 인해 정신마저 붕괴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명색이 중급 키메라였던 변종오거는 그대로 쓰러지지 않았다. 비록 팔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지만 자신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레드를 그대로 놔둘 수 없었다.
 [끄에에에!]
 휘익
 오거는 괴성을 내지름과 동시에 마지막 남은 팔을 강하게 내리쳤다. 놈의 전력이 들어간 최후의 발악이었다.
 그러나 레드가 그런 공격을 그대로 맞아줄 리는 만무했다.
 레드는 놈의 팔뚝을 자르고 다음 공격을 위해 날아오르는 와중에 내려찍기 공격을 받게 되었다. 만약 이대로 맞는다면 아무리 레드라 할지라도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력적인 공격이었기에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자신을 향해 정확하게 돌진해오는 오거의 주먹을 보며 레드는 옆으로 급회전을 시도했다.
 일명 블레이드 토네이도!
 날카롭고 강력한 칼날로 변한 날개를 이용한 회전공격으로 강력한 회전력과 날개의 날카로움이 합쳐져 가공할 절삭력을 자랑하는 공격이다.
 휘이이잉
 쩌적
 당연히 변종오거의 주먹은 레드의 블레이드 토네이도에 의해 반으로 갈라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중급 키메라였던 변종오거가 중급 능력체, 즉 이 세계의 서열로 따지자면 포스익스퍼트 수준에 이른 레드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끄에에엑!]
 휘이이잉
 변종오거의 마지막 남은 팔마저 떼어버린 레드는 이제 끝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놈의 주먹을 가르고도 전혀 위력이 죽지 않은 회전력을 이용해 두 개의 목을 동시에 날려버렸다.
 서걱서걱
 한순간에 두 머리가 날아가버린 변종오거는 괴성과 함께 쓰러져갔다.
 푸드득
 레드는 자신의 몸에 오거의 피가 조금 묻자 몸을 살짝 떨어 털어내버렸다. 그리곤 방금 전에 중급 키메라를 해치운 괴물 같은 새라곤 믿어지지 않는 우아한 비행으로 듀크를 쫓아갔다.
 레드가 변종오거를 해치운 것은 시간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몇 번의 충돌로 가볍게 놈을 처리한 레드를 듀크도 똑똑히 볼 수 있었는데, 정확히 소년이 앞으로 내달리며 잠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전투는 후다닥 끝나고 변종오거는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방금 전에 그레이가 뛰어가면서 키메라 한 마리를 한 방에 처리한 장면이 충격적이었다면, 그동안 그의 애완용 새라고 여겼던 조그만 새가 갑자기 크게 변하며 키메라를 가볍게 요리한 장면은 대충격이었다.
 작은 새가 큰 새로 변하는 것만 해도 놀랄 일인데, 그 새가 괴물을 가볍게 해치워버린다는 것은 듀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 도대체…….”
 너무나 놀라 달리던 속도까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 소년을 그레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 없었다.
 “계속 달려!”
 듀크는 그레이의 호통을 듣고 천천히 움직이던 다리를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분명 레드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지만 여기서 멈춘다는 것은 ‘나를 죽여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군말 없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하아! 이건 꿈일 거야. 저 새도, 저 건방진 용병 녀석도…… 그리고 지금 달리고 있는 내 모습도 다 꿈일 거야.’
 듀크는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일들이 모두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꿈이라고 여길 수 없는 생생한 상황이지만 너무도 충격적인 일들의 연속이라 믿기지가 않았다.
 그만큼 듀크에게 찾아온 현실은 두렵고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 공포의 요소들은 소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들고 있었다.
 앞서 마주친 두 마리의 키메라는 가벼운 신고식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두 키메라에 의해 위치가 완벽하게 노출된 그레이와 듀크에게 키메라 군단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역시 제일 처음 공격을 받은 것은 그레이였다.
 좌우에서 밀려드는 두 키메라의 공격은 생각보다 위력적이었다. 왼쪽은 온몸에 날카로운 가시를 지닌 샤벨타이거였고, 오른쪽은 머리통이 네 개나 달린 커다란 아나콘다였다.
 샤벨타이거는 특유의 송곳니를 이용해 그레이의 어깨를 찍어갔고, 아나콘다는 네 개의 머리통에 달린 주둥이를 이용해 각각 다른 각도로 상대를 물어뜯기 위해 움직여갔다.
 ‘괴물들이 떼거리로 쏟아져 나오는군.’
 키메라는 그레이가 예전에 지구에서 잡던 하급마귀들과 비슷했다. 비록 지니고 있는 힘은 달랐지만 잔혹성과 폭력성은 하급마귀와 거의 똑같았다.
 하급마귀가 생각하는 마물이라면 키메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마물이라는 것만 빼면 두 존재는 근본적으로 마성(魔性)에 물들어 파괴본능이 극도로 발달한 존재라는 점에서 비슷한 존재로 볼 수 있었다.
 하급마귀와 비슷한 행동양식을 지닌 키메라.
 그래서인가? 지구에 있을 때부터 하급마귀를 상대하는 방법을 통달했던 그레이에게 키메라는 일반 몬스터보다 상대하기 쉬웠다.
 물론 상대의 힘을 파악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드는 키메라기 상대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는 몬스터들보다 더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힘이라는 것도 일반적인 통념에 견주었을 때 강한 것이지 상식을 벗어난 존재인 그레이에게는 키메라나 몬스터나 거기서 거기였다.
 아니, 오히려 그가 지닌 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조직적으로 상대하거나 달아나 동료들을 불러오는 몬스터들의 행동이 더 귀찮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상대하기 쉬운 키메라들이지만 숫자가 많아지면 귀찮은 것은 사실이다. 그레이 스스로 힘의 무분별한 소모를 주의하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사실 그가 지니고 있는 신화력과 진뇌력은 가이아 대륙에 속하는 마력이 아니다. 특이하게도 레드가 지닌 혈마력 같은 하급마력은 이 세계에도 비슷하게나마 존재했는데, 그레이가 지닌 대마력 두 가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힘을 사용하고 나면 그 힘을 다시는 보충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며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대신 그레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예전에 지구에서 신화력과 진뇌력을 사용한 방법이 충분한 휴식과 명상으로 소모된 두 마력을 밖의 세계에서 채우는 방식이었다면, 가이아 대륙으로 넘어와서는 소모된 마력을 그가 직접 몸에서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힘의 생성 방법이 변하다보니 좋아진 점도 있고 더 나빠진 점도 있었다.
 장점은 예전에 밖의 세계에서 받아들일 때의 마력보다 지금 스스로 만들어내는 마력이 훨씬 더 그의 의지와 결속력이 강해 의지를 이용한 미세한 움직임이 가능해졌다. 즉, 예전보다 더 효율적으로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력 자체의 위력은 높아졌지만 그렇다고 그가 더 강해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이아 대륙으로 넘어오면서 나빠진 점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신화력과 진뇌력 두 힘을 모으는 데 걸리는 시간이 종전보다 세 배는 더 소요되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그냥 쉬거나 하면 자연스럽게 보충되었지만 지금은 스스로의 의지로 만들어내야만 한다.
 아무래도 스스로 만들어내다 보니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밖에 없고, 힘을 보충할 때 위험에 노출될 우려도 있었다.
 결국 가이아 대륙으로 넘어오면서 달라진 점은 힘의 유지력이 감소되었다는 것이다. 단기간으로 본다면 예전보다 강해진 게 사실이지만 그 힘을 다시 보충하는 데 많은 제약이 따르게 되었다.
 그런 힘의 제약 때문에 그레이는 무분별한 힘의 낭비를 최대한 주의했다. 힘의 낭비 없이 정확한 마력의 분배로 원 샷 원 킬을 노린 다음 최대한 빠르게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원 샷 원 킬!
 그것은 현재 그레이를 향해 돌진하는 두 키메라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화르륵
 파징 파징
 왼손에는 그 무엇도 녹여버릴 만한 온도의 의 경지에 이른 신화력이 불타올랐고, 오른손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게 미세한 스파크를 튕기면서 강렬한 힘을 숨기고 있는 진뇌력이 독아(毒牙)를 번뜩였다.
 [커허허헝!]
 [샤아아아!]
 두 키메라의 공격이 정점에 이르러 가격하기 직전에 그의 양손은 놈들의 공격의지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반격을 가했다.
 퍼퍼퍼벙
 화르르륵
 [크에에엑!]
 [키갸갸갸!]
 왼손에서 뻗어 나온 신화력을 담은 강렬한 불꽃의 그물이 샤벨타이거의 주무기인 송곳니는 물론이고 그 송곳니를 달고 있는 머리통까지 한꺼번에 태워버리고 있었다.
 오른손에서 뻗어 나온 진뇌력은 허공을 가르며 돌진하던 아나콘다의 네 개의 머리통들을 은밀히 사로잡아 강력한 전기공격으로 감전시켜버렸다.
 원 샷 원 킬, 단 한 번의 마력방출로 간단하게 처리해버리는 그레이였다.
 ‘좀 더 빨리 달려야 하나?’
 그레이는 생각보다 키메라들이 잽싸게 움직여 포위망을 구축하자 좀 더 빨리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듀크에게는 지금의 속도도 무리였다. 아무리 단련된 몸이라지만 아직 14세에 불과한 소년이다. 특히 숲을 가로지르며 뛰는 것이기에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결국 그레이는 듀크에게 더 이상의 속도를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쳇!”
 그는 정말 쓰기 싫었던 방법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하기는 무척 싫은 방법이지만 이것을 쓰지 않는다면 더 귀찮은 상황에 빠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3
 
 휘익
 지칠 대로 지쳐 곧 쓰러질 것만 같던 듀크는 앞에서 키메라들을 처치하며 달리던 그레이가 갑자기 뒤로 돌아 자신에게 달려오자 깜짝 놀랐다.
 “내가 들고 간다.”
 듀크에게 다가온 그레이는 간단한 말과 함께 소년을 번쩍 들어 어깨에 올렸다.
 “뭐, 뭐야!”
 듀크는 영문도 모른 채 그레이의 어깨에 실려 가기 시작했다.
 ‘이 건방진 꼬마를 떠메고 가는 짓만은 안 하려고 했는데…….’
 듀크가 그레이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만큼 그레이도 소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 어린 소년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기고만장하고 건방진 성격은 그가 충분히 싫어할 만했다.
 때문에 그런 소년을 떠메고 뛴다는 것은 정말 싫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듀크를 떠메고 뛰는 것도 싫지만 키메라들과 한바탕 어울리는 것은 더욱 귀찮았기 때문이다.
 “레드야, 속도 좀 올리자.”
 그레이는 본격적으로 진뇌력을 이용했다. 어차피 레드야 힘을 완전히 개방한 채 완전체로 변한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을 따라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파지직
 그레이의 양발에서 진뇌력이 방출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달리던 속도의 몇 배로 쏘아져갔다.
 매우 빠른 속도였지만 아직 키메라의 포위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놈들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는 앞으로 400미터는 더 전진해야 할 것 같았다.
 즉, 아직 몇몇 키메라를 더 해치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 몇몇의 키메라들은 그를 향해 더욱 접근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일곱 마리나 되었다. 앞쪽에서 네 마리, 오른쪽에서 두 마리 그리고 왼쪽에서 한 마리가 나타났다.
 좌우와 전방이 모두 막힌 상황.
 뒤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완벽하게 둘러싸였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만 뚫으면 된다!’
 그레이는 완전히 둘러싸인 상황이지만 동시에 마지막 저지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돌파속도를 볼 때 놈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키메라들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키메라들과의 마지막 결전.
 거기서 듀크의 역할은 단지 그레이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레이는 듀크를 매단 채로 전투에 임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소년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키메라들을 맞이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네놈들에게는 죽음이 축복이겠지.”
 그레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말처럼 키메라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버젓이 살아 숨 쉬고 활발하게 움직이지만 정작 중요한 정신이 죽어 있다.
 자신의 의지나 생각은 사라진 채 오로지 파괴와 살육의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라기보다 죽어서 움직이는 좀비나 강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축복일 수도 있었다. 죽지도 못하고 타인의 의지로 파괴만 일삼는 그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안식을 제공해주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레이와 레드에게 다가오는 키메라들은 대부분 상급이었다. 지금까지 그레이와 레드가 처리한 네 마리의 키메라들이 전부 중급이었던 것에 비해 상당히 능력 차이가 있는 놈들이다. 중급 두 마리와 상급 한 마리의 전투능력이 서로 비슷하니까.
 그 중 다섯은 그레이에게, 나머지 두 놈은 레드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레이에게 접근 중인 다섯 마리의 키메라를 살펴보면 머리통이 세 개에 꼬리는 치명적인 독을 지닌 실버스네이크로 이루어진 사자, 온통 검은색 일색인 다크미노타우르스, 양손은 아나콘다고 다른 부분은 트롤인 변종트롤, 보통의 고블린보다 월등히 커서 거의 오거의 덩치에 육박하는 변종고블린,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거미의 몸체에 오크의 상반신을 지닌 테라틀라 거미였다.
 레드에게 접근 중인 두 마리의 키메라는 두 개의 날개와 두 개의 머리통을 지닌 변종와이번, 보통의 독수리보다 더 커다란 거대한 벌 그레이트비였다.
 “레드야, 한 번에 끝장내자!”
 그레이는 이번 마지막 결전에서 힘을 아끼지 않고 쓸 생각이었다. 어깨 위에 있는 듀크의 안전 때문이기도 하고, 더 이상 키메라들이 몰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삐이이이익!]
 레드도 그런 주인의 뜻을 읽었는지 길게 울어 젖혔다.
 일심동체!
 레드와 그레이는 호흡이 척척 맞았다.
 그렇게 그레이와 레드가 호흡을 맞추는 사이 어느새 키메라들과 둘의 간격이 급속도로 가까워져버렸다. 그 거리는 바야흐로 전투가 시작되는 거리였다.
 전투를 개시하는 첫 번째 공격의 영광은 다크미노타우르스에게 돌아갔다. 강화마법과 약물처리로 강철같이 단단한 피부와 평소보다 몇 배나 뛰어난 완력을 지니게 된 다크미노타우스는 상급 키메라라 불릴 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다.
 두 다리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거칠 것 없는 공격력을 발휘하고, 두 팔은 상대를 분쇄해버릴 정도로 강력한 완력을 자랑한다. 거기에 강철 같은 피부는 어떠한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이 소용없었다. 그레이에게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초월의 힘, 신화력과 진뇌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어어헝!]
 쾅쾅쾅
 다크미노타우르스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머리의 뿔을 앞세운 채 그레이를 향해 돌진했다.
 일단 뿔로 상대를 들이받아 충격을 준 다음 두 팔로 감싸 몸을 부셔버리는 공격양상은 미노타우르스 때나 키메라로 변한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다크미노타우르스의 전략은 그레이의 단 한 번의 내리침으로 좌절되었다.
 “하압!”
 스으팟
 퍼퍼펑
 지구에 있을 때 언젠가 최배달과 함께 생활한 적이 있는데, 그때 최배달이 들려준 황소와의 죽음의 사투를 잠시 떠올린 그레이는 그 옛날 최배달이 성난 황소를 잡을 때 썼다는 두개골 쪼개기를 시전했다.
 단지 다른 것은 상대가 황소가 아니라 미노타우르스라는 것과 두개골 쪼개기에 발휘된 힘이 인간의 힘이 아닌 초월자의 마력이라는 점뿐이었다.
 황소와 미노타우르스가 어른과 아이의 차이라면 보통사람의 힘과 초월자의 마력은 하늘과 땅 차이다. 객관적인 차이만 비교했을 때도 후자의 차이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레이가 시전한 두개골 쪼개기의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오른손에서 방출된 진뇌력은 특유의 강력한 파괴력으로 단단하기 그지없는 다크미노타우르스의 두개골을 한 번에 꿰뚫고 두개골 안에 몇 겹으로 보호되고 있던 놈의 뇌를 걸레로 만들어버렸다.
 폭발한 두개골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사방으로 튀었고, 결국 한 방에 뇌가 곤죽이 되어버린 다크미노타우르스는 즉시 키메라의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키메라가 어디 한 군데쯤 잘려나가도 전투를 멈추지 않는 미친 괴물이라 해도 뇌가 걸레쪽이 된 상황에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불가능했다.
 한 번의 공격으로 상급 키메라를 처리했지만 그리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직 처리해야 할 키메라가 많이 남아 있기에 그레이는 몸에 살짝 튄 다크미노타우르스의 피와 뇌수를 털어내며 다음 전투를 대비했다.
 “쳇, 기분 더럽군.”
 아무리 이지를 상실한 전투만을 위한 괴물이라지만 살아 움직이는 존재를 죽이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분이 안 좋다고 그대로 서서 공격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키메라들에게 죽음의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고, 다크미노타우르스 이후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죽음의 축복을 받을 키메라들이 오른쪽에서 나타났다.
 머리가 세 개 달린 사자는 그레이의 오른쪽 앞에서 그대로 뛰어올라 무시무시한 발톱과 이빨을 한껏 드러낸 채 달려들었다. 그 밑에서는 덩치가 오거보다도 커 보이는 변종고블린이 커다란 나무를 뽑아 휘두르고 있었다.
 공중에서는 지옥의 수문장 켈베로스를 연상시키는 사자의 강력한 발톱과 이빨 공격이, 밑에서는 오거보다 강한 힘과 고블린다운 영악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변종고블린의 아름드리나무 공격이 동시에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쳇, 협공인가!”
 그레이는 키메라답지 않게 협공을 해오자 귀찮다는 듯 투덜거렸다. 영악한 고블린이 의도한 공격이 분명했다.
 그 공격은 듀크를 어깨에 메고 있는 그레이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작업을 강요하는 협동공격이었다.
 “미안.”
 휙
 쿠당
 그레이는 자신의 어깨 위에서 거의 그로기 상태에 빠져 있는 듀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았다기보다는 그냥 슬쩍 던졌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험하게 다루었다.
 그레이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키메라들의 공격을 막고 놈들의 포위망을 뚫어 도주하는 것이지 듀크가 조금 다치거나 힘들어하는 것을 막아주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듀크는 짐짝처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고, 소년은 그런 치욕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듀크도 보는 눈은 있는지라 지금 당장 전투를 벌이고 있는 그레이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단지 무시무시한 괴물들의 공격을 보며 몸을 마구 떨어대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레이는 듀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심심풀이로 하고 있는 용병일과 관련된 듀크이기에 의뢰가 실패한다 해도 실망을 하거나 좌절할 일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군이나 단군의 흔적을 찾는 것이지 용병일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듀크를 지켜오고 앞으로도 지켜내려 하는 이유라고 해봤자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조그만 책임감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때문에 지금 당장 그가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폭주하는 키메라들의 공격에 대한 대비일 뿐이었다. 듀크의 정신적 공포감을 해소해주기 위한 조치 따위는 아니다.
 듀크를 던져버린 그레이는 왼발에는 신화력을, 오른손에는 진뇌력을 집중시켰다.
 그의 의지가 발현되자마자 왼발과 오른손에 두 마력이 의의 경지로 뭉치기 시작했고, 키메라들의 공격이 바로 앞까지 당도했을 때는 완전히 그 경지에 이른 기운이 도도하게 뿜어져 나왔다.
 꽈광, 우지지직!
 우르르릉, 쩌저저적!
 거목을 이용한 변종고블린의 공격은 그레이가 슬쩍 들어 올린 왼발 정강이에 막혀 나무가 박살나는 것으로 끝나버렸고, 거대사자의 공격은 그레이가 진뇌력으로 허공에 펼친 천둥의 막에 박혀버렸다.
 왼발에 뭉친 신화력은 왼발을 어떤 열기로도 녹이지 못하는 강력한 금속처럼 만들어 나무를 박살낼 수 있었고, 오른손에서 뻗어나간 진뇌력은 뢰(雷)의 힘을 이용해 천둥을 이용한 소리의 막을 만들어내 사자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공격을 막아낸 것뿐이었다. 그레이의 역공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일단 그레이는 공중에서 천둥의 막에 막혀 잠시 멈춰버린 거대한 사자를 공격목표로 삼았다.
 파지직
 그가 생각하고 의지를 발현하자마자 진뇌력은 염(念)의 경지에 이른 강력한 전기력을 지닌 뇌력구(雷力球)를 만들어냈다.
 오른손 위에 떠오른 골프공만한 뇌력구!
 그레이는 그것을 공중에 멈춰버린 사자의 입을 향해 쑤셔 넣었다.
 빠지지직
 [크허어엉!]
 뇌력구를 집어삼킨 사자는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강력한 전기의 충격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내부의 장기들이 모조리 터져나가는 극통!
 그것의 끝은 결국 죽음뿐이었다.
 털썩
 거대한 사자를 뇌력구 하나로 처리한 그레이. 이번에는 변종고블린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곧 멈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의뢰인이자 자신이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소년이 위험에 처한 것이다.
 듀크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거대한 아나콘다 두 마리의 입을 보며 처참하게 찢겨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으어어억! 죽기 싫어!’
 진심으로 죽기 싫었다. 자신에게 안겨질 많은 것들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나 듀크는 진짜로 자신에게 남겨진 게 뭔지도 자세히 모른 채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들만 생각하고 있었다.
 제니온 상가, 재산, 수많은 아랫사람들…….
 이런 것들만 떠올리며 죽음을 거부했지만, 만약 그것들이 자신의 소유가 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지금처럼 비참할 정도로 죽기 싫다는 생각을 할지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뭐, 어쨌든 그런 껍데기만 추구하고 있지만 하늘은 아직 그런 소년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하늘이 아니라 그레이가 버리지 않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댓글(2)

하루살이0    
음...이상타..선택지를 정해놓고...당신의 선택. 의지, 결정 이라니..
2014.01.23 14:11
호퓨    
별로 흥미를 못느낌..... 시간만 버린느낌 추천 누르고 도망가야지
2015.05.19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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