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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검제 1권 (1)

2018.11.08 조회 815 추천 4


 #서序
 
 
 
 해남파海南派 개파장문開派掌門 검제劒帝.
 그의 검은 귀신같이 빠르고 파도처럼 거침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비무에서 패한 적이 없어
 오 년 만에 검제란 존칭을 얻게 되었다.
 이 기록은 절대 거짓이 아니다.
 
  - 무당파 검존열전 중 검제록
 
 
 #일필도一筆島
 
 
 어릴 때 난 무협 소설을 즐겨 읽었다. 같은 방을 쓰던 작은 아버지가 무협광이라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무협 소설에 나오는 무림인들은 초인적인 능력, 즉 내공과 외공, 암기와 신물 등을 가지고 험난한 강호를 누볐다.
 내게 그런 무림인들은 항상 영웅이었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가고 싶었다. 그들의 강함을, 그들의 정의로움을 조금이라도 나눠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기를 다룬다는 단학선원에 다니기도 했고, 검도, 유도, 펜싱, 가라데, 무에타이, 태극권 등 각종 무술에 심취하기도 했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래도 나았을 텐데······.
 나는 내 무공을 사용해 보기 위해 뒷골목 싸움에 끼어들었다. 불량배들을 물리친다는 의협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내 강함을 시험해 보자는 마음이 더 컸다.
 얼굴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 친구들도 멀어져 갔고, 성적도 곤두박질쳤다. 그래도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다. 부모님의 걱정 섞인 한숨 소리를 듣고 후회했을 때는 벌써 시간이 꽤 지난 뒤였다.
 대학 입시가 시작될 쯤 나는 내가 무림인들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몸에는 심오한 내공도 기이한 내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때 나는 뒷골목에서 떠나 격투기를 배우고 있었는데 지역 대회에서 나보다 덩치가 크고 기술이 좋은 아이들에게 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내공심법을 익혀 다른 아이들보다 빠르고 강하다고 자부했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승리의 요건은 내공과 외공이 아니라 배우고 익힌 기술과 단련된 힘 그리고 경험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해도 TV에 나오는 격투가들 이상은 될 수 없었다.
 내가 바라던 것들······.
 그러니까 하늘을 날거나 허공을 격하고 벽을 부순다거나 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뭐,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나는 이때부터 공부에 매진했고 간신히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때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무협 소설에서 말하는 내공과 기가 몸을 튼튼하게 해 주는 것에 불과하고, 수많은 격투기가 목전의 상대를 이기게 해 주는 데 급급하다 해도······.
 그것들은 내 삶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한마디로 말해 아련한 추억인 것이다.
 
 하늘을 날고 허공을 격한다.
 물 위를 걷고 돌을 꿰뚫는다.
 
 그렇다.
 소년의 꿈은 깨어진 지 오래다.
 후, 그래도 가끔 이런 생각은 한다.
 과거의 무림인들은 지금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을까?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맑은 기운이 있어 사람들의 잠재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지 않았을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예언과 예상이란 빗나가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삼 년 전 피서차 해남도에 왔던 난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을 만나고 말았다.
 돈에 눈이 멀어 예보를 무시하고 출항한 선장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부정확한 일기예보 때문이었는지 감춰진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탄 배가 난파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난 간신히 목숨을 건져 해변에 올랐다.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리고 난 그 덕분에 해변에서 진짜 무림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딱 잘라 말해, 그들은 내가 상상하던 무림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허술한 옷차림에 꼬질꼬질한 얼굴들. 가끔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미 만나고 말았다.
 배가 난파되어 도착한 새로운 세계, 이곳은 바로 무림이었다.
 난 처음 이곳을 중국의 변두리 해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주민들을 향해 나는 한국인이며 관청에 데려다 주면 후하게 사례하겠다고 온몸으로 설명했다. 며칠을 고생한 끝에 그들은 내 말을 알아들었고, 난 그들과 함께 관청을 찾아갈 수 있었다.
 한데······ 관청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공산당원들이 없었다. 넓은 현청에는 큰 모자를 눌러쓴 현령만이 앉아 있을 뿐.
 ‘뭔가 잘못되었어.’라고 소리를 지르던 난 곤장 두 대를 맞고 관청에서 쫓겨났다.
 퉤, 사람을 제멋대로 때리다니. 소리 좀 지른 게 큰 죄란 말인가?
 결국 돌아온 곳이 일필도, 내가 난파된 후, 처음으로 발을 내디뎠던 섬이다.
 아직도 이곳의 정체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다. 우리가 살던 시대에서 육백 년 정도 전의 과거인지, 아니면 단지 소설 속의 무협 세계인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에는 전기도, 가스도, 휴대폰도, 자동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 *
 
 지난 삼 년간 난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마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심으로 나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다. 잘해 냈다고, 잘 살아남았다고······.
 생각해 보라, 말도 통하지 않는 섬에 난파된 한국인.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얼마나 많은 위기를 겪었을까?
 작은 항아리 모양의 섬 일필도, 이곳의 현재 도주는 바로 나 한영운이었다. 나는 모든 고난을 넘어 삼 년 만에 섬의 주인이 된 것이다.
 딸칵.
 목판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섬의 주인인 날 만나고 싶어 한다는 신호였다.
 나는 문밖을 향해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았다.
 “누구인가?”
 이렇게 말을 하면 아주 조금일지라도 말에 무게가 더 실렸다. 유치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도주는 이런 식으로라도 무게를 잡아야 한다. 그게 도주인 것이다.
 잠시 뒤 내 목소리보다 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도주님, 남궁학입니다.”
 나는 느릿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음? 용건은?”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습니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필도 총관 남궁학.
 그는 내가 아끼는 무인 중 으뜸이었다. 남궁학은 다른 제자들보다 총명했으며, 특히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의지가 강했다. 이런 제자는 언제나 스승의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
 나는 열한 살이나 많은 제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만해서가 아니었다. 도주이며 사부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곧 가겠네.”
 자리에서 일어선 후,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구리로 만든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짧지만 멋들어지게 길러진 턱수염과 짙은 눈썹. 말끔하게 다듬어진 흑포 장삼과 흑 옥을 얹은 패관. 어느 것 하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흠······ 나이가 조금 어린가? 이건 옥의 티로 해 두자. 세상에 완벽한 남자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내 나이 스물여덟, 소림이나 무당같이 이름난 문파가 아니라도 일파의 장문인이 되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위아래로 수십 명의 사람을 다스리려면 적어도 불혹은 넘기는 것이 좋았다. 그래야 장문으로서 위신이 섰다.
 생각해 보라,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장문을 모시는 자신을······.
 그건 좋은 느낌이 아닐 것이다.
 정원에 깔린 청석을 따라 명량관으로 들어가니 주방장을 비롯한 명량관 제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일동 도주님을 뵈옵니다.”
 어이, 그렇게까지 인사할 필요는 없다고. 난 손을 흔들어 그들의 인사를 받은 후, 가장 넓은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아주 도주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각자 할 일들을 하게.”
 도주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은 이곳 해남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도주들은 보통 자신의 방에서 필요한 사람들만 불러 식사를 하곤 했다.
 하지만 난 갑갑한 방이 싫었다. 젊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혼자 식사를 한다는 것이 처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난 매일 명량관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오늘은 조개로 국물을 낸 소면입니다.”
 남궁 총관의 설명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면이라······. 좋지.”
 먹음직스러운 소면 한 그릇이 쟁반에 담겨 나왔다. 굵은 면발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아나는 것이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오늘은 괜찮군.”
 일필도에서 가장 먹을 만한 음식을 하나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이 굵은 소면을 꼽을 것이다. 일문의 문주가 즐겨 먹기에는 조촐한 음식이었지만, 이곳 해남에는 그래도 이 소면이 제일 맛있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나 하나뿐일 테지만······.
 나를 제외한 해남의 평범한 사람들은 해물을 넣은 볶음이나 도미를 넣은 탕을 좋아했다.
 해남에서 산 지 삼 년이 넘었건만 해남도 사람들이 즐겨 쓰는 향신료에는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향신료를 많이 쓰는 육류나 해물 볶음은 웬만해서는 입에 대지 않았다.
 환경에 적응을 하는 사람의 능력도 이런 부분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았다.
 조개 국물로 맛을 낸 소면은 예전에 먹던 칼국수와 비슷해 다른 요리들에 비하면 거부감이 훨씬 덜했다. 소면을 맛본 그날 나는 처음으로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상아로 만든 젓가락을 들어 소면을 몇 가닥 들어 올렸을 때였다.
 덜컥!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명량관 정문이 열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식사할 때는 예의를 좀 지키란 말일세.
 정문이 열리자마자 검과 도를 허리에 찬 십여 명의 사내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심각했다.
 선두에 선 남자는 약탈선의 지휘를 맡고 있는 금룡추.
 나는 미간을 좁혔다.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금룡추.
 그는 내 손에 죽은 전 도주 반포석의 애제자로, 내가 도주가 된 이후, 줄곧 나를 미워해 왔다. 그가 단단히 무장한 부하들을 이끌고 여기 나타났다면 목적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일필도 총관 남궁학이 쓴 표정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를 책망하는 눈빛이었다. 그는 속삭이듯이 내게 말했다.
 “반란입니다.”
 남궁 총관, 그쯤은 나도 알고 있네. 내게도 두 눈이란 것이 있으니까.
 남궁학은 오래전부터 금룡추를 제거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전 도주 파벌을 내리누르기 위해서, 반란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리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 그를 제거하지 않았다. 약탈과 살인에 익숙한 해남 무림인들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사람의 목숨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이곳 해남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기 위해서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였다.
 그것은 절대 옳은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상대가 내 원수이거나 지독한 악한이거나 혹은 내 목숨을 빼앗으려 들려 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이상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아주 쉽게 사람을 죽이곤 했다. 그들은 심지어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도 사소한 이유로 무기를 휘둘러 댔다.
 금룡추도 그런 전형적인 해남 무인들 중 한 명이었다.
 “검추劒醜 한영운은 들어라!”
 검추?
 추악한 검객이란 소린가? 아니면 추악한 검을 쓴다는 것인가?
 어쨌거나 내 별호는 검추가 아니다.
 내 별호는 검으로 으뜸이라는 검패劒覇.
 물론 이 별호보다는 일필도주란 공식 명칭이 더 많이 사용 되었지만······.
 금룡추는 아마도 내 별호를 모욕함으로써 심리적으로 우위에 서려는 것 같았다.
 후······ 난 그런 하찮은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이런 도발에 욱할 정도로 단순했다면 도주가 되기 전, 그러니까 섬에 난파된 삼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느릿한 손놀림으로 상아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금룡추, 용건이 있어 찾아왔다면,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도주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자네는 예의에 대해 배운 것이 없는 것인가?”
 금룡추의 이마에 지렁이가 나타났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태연한 내 태도에 화가 끓어오른 것이리라.
 하하······ 이거 참, 도발을 해 온 사람이 오히려 화를 내다니.
 역으로 멋지게 걸려들었군.
 그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그래, 딱 잘라 말해 성난 멧돼지. 멧돼지란 녀석은 화가 나면 옆으로 가는 것을 잊어버린다. 남는 것은 오직 앞을 향해 돌진하는 것뿐.
 “이 녀석.”
 금룡추의 눈빛이 흔들린다. 상대에 대한 분노가 이성을 앞서고 있는 것 같았다. 사소한 도발로 저렇게 흔들리다니.
 한심했다.
 무릇 반란을 꿈꾸는 자라면 냉철한 판단력과 흔들리지 않는 결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란을 성공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봐도 그렇다.
 윗사람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냉철한 판단력과 시운이 필요하다. 그러나 금룡추에게는 그 두 가지 모두가 없는 것 같았다.
 “폐륜아 따위가 도주를 들먹이다니!”
 스르릉!
 금룡추의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는 검으로 나와 승부할 생각인 것 같다.
 검으로 으뜸인 남자 검패, 검을 잘 쓴다고 해서 전 도주가 내게 준 별호였다. 그런 내게 그는 검으로 승부하려 하고 있었다.
 금룡추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실력으로 나를 제압해 도주의 자리를 되찾겠다? 아니면 전 도주에게 배운 검법으로 날 이겨 해남검법의 위대함을 재확인하겠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의 실력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남궁 총관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어떠한가 하면 실력으로 남궁 총관의 사부가 된 남자다. 당연히 남궁 총관이나 금룡추보다 강했다.
 내가 금룡추였다면 검으로 맞대결을 하는 대신, 독을 쓰거나 뒤에서 암격을 가했을 것이다. 그편이 훨씬 승산이 높았으니까.
 하지만 금룡추는 그러지 않았다.
 왜일까?
 금룡추가 좌우에 선 부하들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렇군. 그랬었군.
 그의 움직임과 표정으로 그가 검을 들고 앞에 나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부하들을 선동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한영운의 검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일 검을 휘두르면 한영운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고꾸라질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 나를 믿고 한영운을 타도하자.
 허풍이든 어쨌든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는다면 부하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반란의 실패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보다 강하다. 그래서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부하들 가슴에 공포를 심는 꼴밖에는 안 된다.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강한 쪽에 붙게 되어 있다. 공포가 퍼져 한 사람이라도 배신을 하게 되면 그걸로 끝이었다.
 결국······ 여기 모인 자들은 금룡추의 감언이설에 놀아난 것인가?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금룡추는 검으로 나를 이길 수 없다. 내 검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나는 며칠 전 일필쾌검을 완성시켰다. 내가 지난 이 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시킨 이 검법은 해남의 그 어떤 검법보다 강했다.
 후······ 금룡추는 아주 때를 잘못 고른 것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 반란을 일으키다니.
 나는 소매를 흔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식사도 제때에 못 하게 만드는군.”
 일이 이쯤 되면 상대를 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서 검을 뽑아라!”
 검을 든 금룡추의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심하게 떨리는 눈동자.
 방금 전보다 흔들림이 심했다. 승리에 대한 확신 없이 감정만 내세우는 자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눈이었다.
 비무를 거듭하면서 나는 이런 눈을 몇 번이나 만났다.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에게 검을 겨누고 이길 수 있다고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최면을 걸어 봐야 실력이 늘지는 않는다.
 나는 검을 뽑기 전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후회하지 않겠는가?”
 금룡추의 반응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개소리하지 마라!”
 독한 군자라면 굴욕을 참고 견뎌 낼 줄도 알아야 하건만······.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그러질 못한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자존심과 비극적인 운명만을 강조한다. 그것이 삶에서 멀어져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삼 초 양보를 바라는가?”
 상대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하기 위해서 내뱉은 한마디였다.
 금룡추는 아마도 냉소할 테지. 내게 삼 초를 양보받는다면 그야말로 씻을 수 없는 치욕일 테니까.
 격분한 금룡추가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건방진 녀석! 네 녀석이 아니라 내가 삼 초를 양보해 주마!”
 금룡추는 어리석다 못해 무모했다.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난 검객에게 삼 초를 양보하려 하다니. 한심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나는 그에게 삼 초를 양보받지 않을 것이다.
 후후······. 설마 그가 내 이런 속마음을 꿰뚫고 그런 발언을 한 것일까? 격분한 그의 얼굴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의 기세를 부풀리기 위해서 내뱉은 말이다.
 “마지막 기회를 차 버리다니. 쯧쯧쯧······.”
 금룡추의 목소리가 더 격해졌다.
 “헛소리하지 말고 검이나 뽑아라! 단칼에 베어 줄 테니까!”
 우리는, 기세는 대단하나 실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의 발언을 허세라 말한다. 금룡추의 방금 한마디는 바로 그 허세였다. 이런 허세는 이야기꾼이 많은 찻집에서나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검과 검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허세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심호흡을 가볍게 하고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르릉.
 “후회하지 마라.”
 검을 천천히 뽑는다고 해서 내 검이 느릴 거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검이란 검을 쓰는 방법에 따라 속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난 검을 뽑기 전 이미 검이 가야 할 길을 읽은 터였다.
 상대의 검을 바라보며 그때그때 대응하는 것과 미리 검이 가야 할 길을 알고 검을 쓰는 것.
 어느 쪽이 더 빠를 것 같나? 이것은 결국 선수의 문제였다.
 상대와의 거리는 다섯 발자국, 허리를 굽힌 채 검을 뻗으면 두 발만 앞으로 나가도 표적에 닿는다. 다시 말해 상대가 내 검세 안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아직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모르는 것 같았다. 간격과 상대의 검세도 읽지 못하면서 검을 쓰려 하다니. 한심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간격을 좁혀 들어갔다. 자세를 잔뜩 낮춘 후 오른발을 쭉 내밀자 상대와 급격히 가까워졌다.
 금룡추는 깜짝 놀라면서 자세를 가다듬으려 했다.
 “이런!”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설프게 올라간 그의 검을 제치고 해남에서 가장 빠른 검이 쏟아졌다.
 일필쾌검!
 한 자루의 붓을 쓰는 것처럼 빠르고 날렵한 검, 중원의 검법과 완벽히 다른 이 검법은 내가 십오 년 전 배운 펜싱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해남에 와서 가장 크게 놀란 것은 형편없이 낙후된 검법이었다.
 무협 소설에 나오는 검술은 간혹 산을 자르기도 하고 사람과 말을 형체도 없이 날려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해남도의 검법은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찌르고, 베고, 자르는 기본적인 동작에 동물들의 움직임이 간신히 접목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런 검법을 익힌 채 중원의 실전검법과 마주하면 당연히 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해남도의 검법을 배우지 않았다. 아니, 배웠지만 곧 잊었다.
 격렬하게 흔들리던 검이 상대의 몸을 관통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손에 닿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묵직한 타격감. 아마도 뼈를 찌른 모양이었다.
 살을 찌르는 것과 뼈를 찌르는 것, 두 가지 모두 상대에게 타격을 준다.
 하지만 검은 찌르는 부위에 따라 상대에게 줄 수 있는 타격의 정도가 다르다.
 뼈를 찔렀을 경우 뼈를 부수거나 관통하지 못하면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없었다. 내장과 심장에 치명상을 주기 위해서는 살을 뚫고 검을 안으로 들이밀 필요가 있었다.
 물론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검도 있다. 바로 내 직검이 그런 검이었다. 직검은 대개의 경우 뼈를 찔러도 이를 쉽게 부수거나 관통했다. 이번에도 손목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지만 검은 상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직검이 마주친 뼈를 부숴 버린 것이다.
 “크헉!”
 처음 금룡추의 자세는 전혀 방어적이지 못했다. 삼 초를 양보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구식인 해남검법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일까?
 어느 쪽이 되었든 한심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싸우기 전에 상대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손자병법의 한 구절을 꼭 인용하지 않아도 그것은 검을 다루고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그런데 금룡추는 그 상식을 무시했다. 그의 실력은 몇 달 전에 비해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부족한 실력을 만회할 어떠한 대책도 없이 검을 휘두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죽고 말았다.
 상대를 꺾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약하디약한 적을 하나 꺾은 것뿐이다. 기뻐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내가 섬을 완벽히 지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섬의 주인이 된 뒤로, 매일매일 격무에 시달렸다. 어떻게 하면 섬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힘을 키워서 마교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루도 편하게 쉬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부하들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난 헛된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붉은 피를 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한심한 일이다.”
 한심한 일. 한심한 검법. 한심한 야망. 한심한 사람들······.
 문득 땅에 떨어진 금룡추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한심한 검.’
 해남 무림인들을 상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들은 실전적인 것보다 지나치게 외형적인 것을 중시했다. 바닷물고기의 움직임이나 치어를 노리는 새의 움직임 등을 바탕으로 한 검법이 바로 그 증거였다.
 육식동물들은 최고의 포식자이며 사냥꾼이다. 하지만 그러한 동물들의 움직임을 단지 따라 하기만 해서는 좋은 검법이 나올 수 없었다. 인간의 근육과 골격은 동물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해남의 검법들은 인간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단지 강한 야수들처럼 강해지고 싶다는 그들의 욕망만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내가 일필쾌검의 기초로 사용한 펜싱은 서양에서 이천 년이 넘게 개량되어 온 검법이다. 이 펜싱에는 인간과 검에 대한 오랜 이해가 집적되어 있었다.
 어느 자세에서 어떻게 검을 뻗어 올리고 근육이 어떻게 이완되고 수축되는지가 명확했다. 펜싱은 해남검법보다 훨씬 세련되어 있었다.
 “와아!”
 탄성이 터져 나오고 붉은 피가 바닥에 뿌려졌다.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의외로 큰 감흥이 나질 않는다. 그저 큰 상처를 입고 쓰러졌구나 하는 정도다. 현상을 관찰하는 사람의 눈이란 겨우 이런 수준이다.
 나는 검을 뽑은 후, 한 번 더 금룡추의 몸을 찔렀다. 반드시 상대를 죽여야 하는 경우 확인 사살은 필수였다. 어쭙잖은 동정심으로 상대를 살려 두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나는 적어도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상대는 반드시 죽인다. 그것이 검패 한영운의 검이었다.
 남궁 총관이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도주님이 이기셨다!”
 나는 남궁 총관과 함께 승리를 기뻐하는 대신 금룡추의 부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슬픔보다는 당혹감, 그보다는 좌절감이······. 그들은 떨고 있었다.
 다 죽여 버릴까? 그러기에는 수가 너무 많았다. 일필도의 무사들은 겨우 사십 명 정도······. 이들을 모두 죽이게 되면 한 축이 무너져 버린다.
 그렇다고 저들 모두를 용서할 수도 없다. 주도자는 반드시 처벌할 필요가 있었다. 금룡추 혼자서 모든 일을 꾸민 것은 아닐 테니까.
 검을 회수한 후, 사내들에게 말했다.
 “아직도 금룡추와 뜻을 같이하는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와라.”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못할 것이다. 전 도주의 제자들 중 가장 강했던 금룡추도 나와 일 초식을 겨루지 못했다. 실력이 떨어지는 다른 제자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앞으로 나선다는 것은 죽음을 뜻했다.
 “앞으로 나설 용기도 없이 역모를 꾀한 것이냐? 과연 소인배의 풍모로군.”
 명량관 안으로 속속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나와 금룡추의 비무 사실을 전해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모양이었다.
 상황이 완전 역전되었다. 도주의 부하들이 명량관을 완전히 포위했고 그들은 안에 갇혀 버렸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남궁 총관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도주 앞에서 잘못을 저질렀으면 마땅히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직도 무릎을 꿇지 않고 무엇을 하는가?”
 남궁 총관의 한마디에 사내들의 얼굴빛이 변했다. 금룡추가 패한 후, 그들은 의지할 데 없는 반역도가 된 것이다.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명량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여기에서 싸우다 죽든지 도주인 내게 용서를 구해 목숨을 구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들은 아마도 용서를 구할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내게 달려들 용기가 있었다면 여섯 달씩이나 거사를 미루지 않았을 테니까.
 “제자들이 도주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 둘 내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제발 벌을 내려 주십시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나는 코웃음 쳤다.
 “후후후······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다고?”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하겠다. 이것은 생에 대한 의지를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쉽게 내뱉는 말이다.
 한마디로 입에 발린 말.
 여기서 모든 것을 용서해 주고 과거를 묻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지도자다. 나는 그런 어리석은 지도자가 아니었다.
 “금룡추와 함께 일을 주도한 자가 누구냐? 그자를 너희들 스스로 제거하면 내가 너희들을 용서해 주겠다.”
 용서해 주겠다. 즉 살려 주겠다는 한마디의 말이 사내들의 눈빛을 바꾸었다. 이들은 이제 살아날 방법을 알게 되었다. 도주가 가장 미워하고 있는 자를 이 자리에서 찔러 죽이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죄를 한 사람의 피로써 씻는다. 해묵은 방법이지만, 죄책감을 씻어 내기 위한 방법으로는 최고였다.
 스르릉! 스르릉! 철컥!
 사내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 중 한 사내가 밖으로 내몰렸다.
 그는 금룡추의 사제인 공영충이었다. 공영충은 눈이 가늘고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모사형의 인간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 읽은 삼국지에도 저런 인간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동탁의 모사 이유, 공영충은 그 이유와 흡사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들이 일제히 공영충을 향해 검을 날렸다. 당황한 공영충은 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검은 발보다 빨랐다.
 푹!
 붉은 선혈이 다시 명량관의 바닥을 더럽혔다.
 
  * * *
 
 꼬르르르륵.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아도 배 속에 들어 있는 알람 시계는 정확하게 울린다.
 금룡추 덕분에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해 허기가 느껴졌다. 피를 본 날은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기가 힘들었다. 난 일필도의 다른 사람들처럼 사람을 죽인 뒤 아무렇지 않은 듯 음식을 식도로 넘길 수가 없었다.
 “도주님, 운유雲遊 도주와의 약속은 뒤로 미룰까요?”
 남궁 총관의 말에 손을 흔들었다.
 “그럴 필요는 없네. 금룡추의 일은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내 말에 남궁 총관이 머리를 숙였다.
 “역시 도주님이십니다. 금룡추는 이대제자 중 실력이 가장 뛰어난 이였습니다. 그런 자를 단 일 초식으로 제압하실 줄이야.”
 “칭찬은 됐네. 난 동탁이 아닐세. 귀가 간지러운 말을 많이 듣게 되면 어느 날 목이 잘려서 해변에 나뒹굴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일세.”
 금룡추의 실력이 이대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이것은 흐뭇한 일이 절대 아니었다. 이건 바로 일필도가 직면한 큰 문제점들 중 하나였다. 정말 한 소리 해 주고 싶을 만큼, 일필도의 제자들은 서툰 해남검법을 썼다.
 제자들의 검법이 이렇게 된 것은 전 도주의 가르침 때문인데, 난 그 가르침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 내가 가진 이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지난 이 년 동안 쭉 발전시켜 온 일필쾌검은 나만의 검법이어야 했다. 이 검법을 섬의 모두가 알게 되면 분명 나보다 뛰어난 자가 나올 것이다. 그런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도주보다 뛰어난 검사. 그건 곧 하극상의 원인이 된다. 내가 전 도주에게 암살을 당할 뻔한 것도 내가 도주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묵묵히 일필쾌검을 수련하고 있었을 뿐인데 도주는 날 죽이려 했다. 난 결국 살아남기 위해 도주를 죽이고 그의 자리를 빼앗았다. 강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피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전 도주를 죽인 후,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살인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자신의 하찮은 이익 때문에 그것을 실행에 옮겼을 때다. 자신이 지나친 일을 했다고 느낀 그 순간 죄책감이 드는 것이다.
 물론 천성이 악하고 남을 해하길 좋아하는 자들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여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난 이곳 해남에서 그런 사람을 제법 많이 만났다. 오늘 만나야 하는 운유도주도 그런 자들 중 하나였다.
 운유도주 정충삼.
 전 도주와 친분이 두텁기로 유명한 사내. 그는 해남의 도주들 중에서도 포악하기로 유명했다, 아침에 일어나 한 명, 저녁에 잘 때 또 한 명, 하루에 두 명을 죽여야 마음이 편하다고 해서 별호조차 일일이사一日二死였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창으로 가시겠습니까?”
 남궁 총관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오늘 만나기로 한 곳은 이곳이 아닌가? 내가 그를 마중 나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가?”
 정충삼과 같은 사내는 되도록이면 짧게 만나고 싶다. 그는 얼굴만 봐도 구역질이 올라오는 인물이다. 그런 남자를 선창까지 가서 환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남궁 총관은 정충삼의 본성이 포악하니 그의 기분을 맞춰 주지 않으면 이곳에서 사고를 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대처하면 된다. 그의 성격이 더럽다고 해서 굽실거린다면 마교나 다른 큰 섬의 도주들은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자네가 가서 데려오게.”
 남궁 총관이 걱정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남궁 총관이 물러가자 약재상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며칠 전 이들을 불러 한바탕 훈계를 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약재상들은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내민 서류를 뒤적이면서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섬에서 나는 약재가 고작 이것뿐인가? 이것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산나물에 불과하지 않은가?”
 약재상들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도주님.”
 “섬이 작아 더 이상은 무립니다.”
 “저희들도 최선을 다한 결과입니다.”
 현대와 수백 년의 문명 차가 나는 곳에서 생활할 때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건강이다.
 이곳의 한의학을 현대의 한의학과 같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일필도에는 화타 같은 신의나 허준 같은 명의가 없다.
 아프면 돌팔이 같은 약재상들에게 약을 받아 달여 먹은 후, 나을 때까지 참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곳에서 복개 수술이나 진통제를 이용한 각종 치료 요법을 바랄 수는 없다. 그들은 그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약초나 의술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들을 이끌고 이 시대의 의학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으련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일필도에 오기까지 내 직업은 입시 전문 학원의 강사였다. 내가 알고 있는 의학 지식은 전부 상식에 지나지 않았다.
 “고명한 의원을 찾아오라는 지시는 어떻게 되었는가?”
 약재상들이 이번에는 머리를 진짜로 땅에 부딪쳤다. 툭툭 하는 소리와 함께 아주 우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남의 여러 섬에 명의를 수소문해 보았으나 성과가 없었습니다.”
 “흥!”
 나는 냉소했다.
 그게 아니겠지. 정말로 뛰어난 명의가 나타나면 너희들이 누리고 있는 독점권이 무너지니까 도주의 명을 무시한 것이겠지.
 이런 녀석들은 정말로 싫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밑천 삼아 부를 쌓으려 하는 자들······. 이들은 형편없는 약재를 아주 잘 듣는 진통제라 속인다.
 관아에서 곤장을 맞고 일필도에 돌아온 그날부터 난 심한 감기를 앓았다. 이윽고 내 건강을 걱정한 마을 사람들이 이들에게 약을 받아 왔고, 나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그것을 먹었다.
 그리고 감기는 잊혔다. 극심한 설사 때문에 감기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잠도 자지 못한 채 탈수증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때까지 나는 뒷간과 방을 오가야만 했다.
 이 돌팔이들이 만든 약은 의학 서적에도 수록된 적이 없는 것들뿐이다. 그때 생각을 하면 이 자리에서 목을 날려도 시원치 않았지만, 난 그들에게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은자 오십 냥을 주겠다! 해남 밖으로 나가 고명한 의원을 초빙하라! 만약 찾지 못한다면 다시는 섬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마라.”
 단호한 명령, 관아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필도에서 도주의 명령은 황제의 그것과 같다.
 그러나 약재상들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계산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호통을 치는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떠나라! 대답은 듣지 않겠다! 어서!”
 도주의 통렬한 한마디에 약재상들이 몸을 일으켰다.
 “도주님의 명에 따르겠나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도주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아마도 괜찮은 의원을 데려오지 않을까 싶다. 아니, 꼭 그래야만 했다. 이 돌팔이들마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일필도에는 약을 쓸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될 테니까.
 우수한 의원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애써 키운 고수가 싸우기 전에 들어 눕는다면 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진통제를 먹여서 싸움터로 내보낼 것인가? 아니면 상대에게 며칠만 싸움을 미루자고 편지를 보낼 것인가?
 의학 기술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시대에서 병마란 가히 절대적이다.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는 병들이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앗아 간다. 황궁의 황제도 소림사의 방장도 병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간혹 내공이나 내단으로 불치병을 치료한다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난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살았던 시절에도 그런 소리를 하면서 신자들을 모으고, 부를 축적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둘러대서 얻는 이득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물론 참선과 선도가 건강에 아주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마음을 맑게 하면 스트레스가 줄어들어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내공과 내단으로 상처를 아물게 하고 몸에 들어온 병원균을 찾아 죽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호흡법이나 명상을 위주로 한 내공은 의학의 예방 요법이라는 보조적인 역할은 할 수 있을지언정 치료라는 주가 될 수는 없었다.
 내가 약재상들을 몰아세우는 것은 보다 현실적인 치료 방법과 치료약을 구하기 위함이다.
 단순히 폼만 잡는 그런 지도자가 되길 원치 않는다. 한 번 도주가 되었다면 전체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지 않겠는가?
 딸칵! 딸칵!
 평소와는 다르게 목판이 빠르게 부딪쳤다. 나를 찾는 이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난 도주다. 어떤 상황에서든 의연함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낮고 느리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누구냐?”
 그러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영입니다.”
 감영이라면 지난달 약탈선의 새로운 약탈조장으로 임명된 자였다. 이자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 두 자루의 도를 자유자재로 쓰는데, 그 솜씨가 대단했다. 금룡추 같은 어설픈 검객보다는 이자가 훨씬 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식 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약탈선에서만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약탈조장이 다급하게 나를 찾는다면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이리라.
 약탈을 나간 약탈선이 침몰했다든가, 아니면 관아의 토벌에 전멸을 당했다든가, 하는 우울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컸다.
 내가 미간을 좁히자 감영이 허리를 굽히면서 대답했다.
 “운유도주 정충삼이 마교의 사자들과 함께 섬에 올랐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해야 할까?
 “뭐? 마교?”
 마교라면 해남삼십육도를 다스리는 흉악한들이 아닌가? 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꽤나 귀찮은 녀석들이 섬에 나타난 것이다.
 마교의 정식 명칭은 일월신교,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이다. 하지만 하는 짓은 무협 소설에 나오는 그들과 많이 달랐다.
 이들은 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마치 관처럼 굴며 재산을 모으고 힘을 키웠다. 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해남삼십육도는 이들의 좋은 자금 공급원이었다.
 마교의 고수들은 해남도주들을 차례로 굴복시킨 후, 이들에게 상납금과 상납품을 받았다.
 그것이 벌써 오십 년이 넘었다고 한다. 난 도주가 된 이후, 과감히 상납금을 거부했다. 일월신교란 자들이 해남의 섬들을 정벌했다고 해도 그건 오십 년 전 일이고, 최근에는 오직 몇몇 사자들을 보내 상납금을 걷어 갈 뿐, 큰 힘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그들의 힘과 의지를 의심했다. 과연 그들이 해남삼십육도에서 매년 상납금을 걷어 갈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가? 오십 년 동안 그 힘이 줄지 않았단 말인가?
 그리고 정보를 수집했다. 수집한 정보들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해남에 상납금을 걷으러 오는 자는 열 명 안팎, 배도 작은 돛배 한 척이 전부였다.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겨우 그 정도 인원으로는 일필도를 정벌할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이 일필도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것도 골치 아픈 정충삼과 함께 말이다.
 “상납금을 내지 않아 직접 걷으러 왔단 말인가?”
 두 주먹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몇이나 왔더냐?”
 “여덟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셋, 제자로 보이는 자가 다섯입니다.”
 정보대로 숫자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정충삼과 같이 왔다면 무시할 수는 없다. 정충삼 일행을 포함하면 적어도 스무 명은 되겠지. 마교의 고수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일필도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숫자였다.
 “검은 옷이 셋이라. 그럼 마교의 고수는 셋이란 말이군.”
 마교의 고수, 예상대로라면 그들은 제법 검을 잘 다룰 것이다. 마교의 세력은 작았지만 마교라는 이름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딘가 뛰어난 점이 있었기에 그들이 이름을 이곳 해남까지 떨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해남도에서는 내 검을 받을 자가 없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중원 무림의 고수들이라면 다를 수도 있다.
 중원 무림 고수와 싸운 경험이 없기에 이번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중원의 고수들은 얼마나 강할까? 중원의 이름 없는 검객들과 두 번 정도 싸워 봤지만 그들은 허무할 정도로 약했다.
 솔직하게 말해 그들은 금룡추보다 못했다. 이래서는 참고 대상조차 되질 못했다.
 그렇다면 중원에서 온 마교 검객들은 어떨 것인가? 무협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내 눈이 크게 뜨일 만큼 훌륭한 검법을 사용할까?
 아니면 금룡추보다 약간 나은 그저 그런 수준의 검을 쓸 것인가?
 기대와 걱정이 반반 내 가슴을 덮었다. 나는 감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제자들을 준비시켜라! 내가 직접 가겠다.”
 “예! 알겠습니다.”
 감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 크게 한번 놀아 보겠는걸.”
 
 
 #마교의 사자들
 
 
 남궁 총관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마교의 사자들에게 질려 있는 것 같았다. 이래서는 싸워도 이길 수 없었다. 어려운 상대와의 대결이라면 자신감이 더더욱 중요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마교 고수들과 정충삼에게 다가갔다.
 “먼 길 오셨습니다.”
 넓은 청석판 위에서 포권을 취하자 마교의 세 고수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이 참 멀더군.”
 상대가 포권을 취하면 같이 포권을 취하는 것이 무림의 법도다. 그런데 이들 마교 고수들은 그런 법도를 완전히 무시했다.
 과연 마교라 불릴 만했다.
 높고 오만한 목소리가 삐쩍 마른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대가 한영운인가?”
 아······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나를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일필도는 촌구석 객점 정도에 불과하리라.
 “그렇습니다만, 딱히 제게 하실 이야기라도 있습니까?”
 비딱하게 대답을 했다. 오늘은 어차피 좋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교 고수들 뒤에 선 정충삼은 언제 길렀는지 턱수염을 가슴까지 내리 기르고 있었다. 평소 제멋대로 날뛰곤 했던 그였는데 오늘만큼은 조련사 앞의 사자처럼 조용히 서 있다. 그는 마교의 세 고수가 상당히 두려운 듯했다.
 정충삼마저 떨게 만든 마교의 고수. 그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시끄러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일필도주는 일월신교 매화당 당주인 가운학, 가 당주님께 무릎을 꿇어라.”
 “무릎을 꿇어라.”
 “꿇어라! 꿇어라!”
 마교 제자들의 호통에 기가 막혔다.
 여럿이 목소리를 높이면 무릎을 꿇고 순순히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까?
 그건 심각한 오산이다. 난 검패 한영운이다. 쉽게 무릎을 꿇는 사나이가 아니란 말이다.
 보란 듯 무릎을 꿇지 않았다.
 내가 무릎을 꿇지 않자 가운학의 눈빛에 살의가 감돌았다.
 “본당주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오만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어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당주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느냐?”
 처음부터 이자는 내게 반말을 하고 있다.
 흥! 해도 해도 너무하는구나. 오십 년간 너희들 밑에서 빌빌댔던 해남도란 말이지?
 그러나 오늘은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나 한영운은 보통 해남도주들하고는 심각하게 다르거든.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르침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남궁 총관이 다급하게 외쳤다.
 “도주님!”
 마교 고수와의 충돌을 피해 보려는 필사적인 시도다. 그러나 난 이들을 무사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 상납금을 거부한 순간부터 이런 날을 예상해 왔다. 비록 그들과의 충돌이 예상보다 빠르긴 했지만, 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남궁 총관의 외침을 뒤로한 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가 당주, 말씀해 보십시오. 어떻게 가르침을 베푸시겠습니까?”
 가운학의 양쪽 미간에 힘줄이 솟았다. ‘정말로 버릇없는 도주구나.’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도 기분이 꽤 나쁘단 말이다. 처음 보는 네 녀석에게 한껏 무시를 당했으니까.
 “한영운, 넌 목숨이 몇 개라고 생각하느냐? 네게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마. 지금 즉시 잘못을 사죄하고, 상납금을 열 배로 늘려 바쳐라. 그럼 본당주가 네 죄를 용서해 주마.”
 이들 마교 고수들에게 상납금 거부는 큰 문제일 것이다. 상납금 거부 문제를 소홀히 했다가는 다른 섬으로 상납 거부가 확산될 테니까.
 열 배의 상납금, 일필도의 경제력으로는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열 배의 상납금을 내면 파산이다.
 제길, 그들은 상납금이 아니라 날 파멸시키려고 온 것이군.
 말썽을 일으킨 도주를 처리하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새 도주를 임명하면 모든 것이 깨끗이 끝나겠지.
 흠, 그러고 보니 금룡추가 저 못된 정충삼하고 친교가 있었던가?
 그래! 일이 그렇게 된 것이로군.
 마교의 가운학은 아마도 정충삼과 금룡추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금룡추가 도주가 되고 싶다면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한영운이라는 녀석의 목을 베어 놓아라. 그러면 내가 그에게 도주의 자리를 내릴 것이다.’
 금룡추에게는 무리한 일이었지만 마교의 고수 가운학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했을 것이다. 금룡추는 자신의 실력이 내게 미치지 못함을 알고도 가운학의 엄명이 있었기에 독약을 마시듯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불쌍한 금룡추······.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난 금룡추를 위해서 속으로 잠시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금룡추를 위해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어 가운학을 노려보았다.
 “자! 어느 분부터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가운학은 내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말을 하자,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다.
 “건방지구나.”
 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린 어차피 주먹과 칼로 밥을 벌어먹는 처지가 아니겠습니까? 입으로 말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요. 자, 어서 몸을 풀어 봅시다.”
 내 상대가 될 마교의 세 고수는 셋 다 삐쩍 마르고 키가 작았다. 체형으로 미뤄 보아 몸동작이 날렵하고 손이 빠를 것 같았다.
 이런 자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상대하면 승산이 적었다. 일필쾌검을 쓴다 해도 한두 명, 세 명이 되면 수법이 읽힐 가능성이 컸다. 각기 다른 방법을 사용해 물리치는 것이 좋았다.
 “세 분이 한꺼번에 덤비시지는 않겠지요?”
 고수가 하수를 상대로 여럿이 손을 쓴다는 것은 마교와 정파를 막론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결코 나를 상대로 셋이 동시에 손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내 한마디에 가운학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정말로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녀석이구나. 목가청! 그대가 저 버릇없는 녀석에게 일월의 가르침을 내려라!”
 세 명 중 가장 오른쪽에 서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검은 얼굴에 삐쩍 마른 몸, 나이는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정도? 원숭이처럼 날쌔고, 족제비처럼 빨라 보였다.
 난 허리에 찬 직검 세 자루를 끌러 땅에 던졌다.
 “우리 손으로 한번 붙어 봅시다. 처음부터 피를 보면 서로 간에 의가 상하지 않겠습니까?”
 목가청이 웃음을 터트렸다.
 “의? 하하하······.”
 자신들의 실력이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한 이들은 내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싸우든 내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름 없는 일필도 도주에게 진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 본 일이 없을 것이다.
 후······ 그렇다면 꿈을 꾸게 해 줘야 하겠지.
 “검이 없어 걱정이 되십니까?”
 목가청이라 불린 사내가 양미간을 꿈틀거리면서 말했다.
 “걱정? 오냐! 내 응조수로 죽여 주마!”
 응조수? 매의 사냥술을 흉내 낸 금나수인가? 아주 탁월한 선택이다. 난 그의 결정을 지지한다. 금나수를 쓰는 적에게 난 한 번도 져 본 일이 없다.
 내가 살던 시기, 그러니까 현대에서 금나수를 가르치는 곳은 거의 없었다. 태권도, 가라데, 유도, 합기도, 무에타이, 삼보 등등 실전 격투기는 무수히 많았지만, 금나수만큼은 철저히 외면을 당했다.
 왜인 줄 아는가?
 실전에서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동물의 움직임을 본뜬 금나수는 더더욱 그랬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응조수라······. 기대가 큽니다.”
 막 걸음을 내디디려는 찰나 남궁 총관이 다급히 내게 다가왔다.
 “마교와 적대 관계를 맺으시면 안 됩니다. 한때의 굴욕을 참을 줄 아는 것도 군자의 미덕입니다.”
 한때의 굴욕을 참을 줄 아는 자가 군자라. 내가 금룡추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다. 하지만 난 금룡추와 달랐다. 그들이 강하다고 해도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이 귀신처럼 강하다면 내 준비도 무용지물이 되겠지만······.
 손을 들어 남궁 총관을 막았다.
 “남궁 총관,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도주님!”
 남궁 총관은 필사적이다. 평소에 침착했던 사람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자넨 여기서 지켜보고만 있게.”
 남궁 총관을 밀어내고 앞으로 나서자 목가청이 날 비웃었다.
 “유언은 잘 남겼는가?”
 싸우기도 전에 승리를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도발인가? 난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
 “글쎄요? 유언을 남기셨어야 하는 건 그쪽이 아닌가 싶습니다.”
 목가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난 상대가 화를 낼 틈도 없이 자세를 잡았다.
 “시작하죠.”
 목가청이 두 손을 들면서 소리쳤다.
 “좋다! 오늘 정신 번쩍 들게 해 주마!”
 나는 오른쪽 발을 살짝 내디디면서 허리를 굽힌 후, 오른손과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 복싱의 기본자세다. 타격기 중 최고의 기술인 복싱, 관절기를 제외한 순수 타격으로만 싸운다면 복싱을 당해 낼 격투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복싱을 처음 배운 것은 중학교 때, 기간은 겨우 일주일에 불과했다. 의지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 학년 위 복싱부 선배와 대판 싸우지 않았다면 아마도 한 학기, 아니, 한 학년 정도는 배웠을 것이다.
 이후 복싱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기회도 기회거니와 시간도 잘 나질 않았다. 복싱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 것은 군에 입대하고 나서였다. 후에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군대는 내게 정말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게 무슨 권법인가?”
 목가청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림인들에게 복싱이란 생소한 것일 테지. 일반적인 권법보다 높은 자세와 잔뜩 들어 올린 두 팔. 이런 내 자세를 보고 종종 웃음을 터트리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대부분 매서운 주먹맛을 보고는 웃음을 잃어버리곤 했지. 자네도 곧 그렇게 될 걸세. 그러니 조심하게.
 좌우로 경쾌하게 발을 내디디면서 목가청의 물음에 답했다.
 “이것 말인가? 내가 만든 무적권無敵拳이다.”
 그러자 목가청이 냉소했다.
 “무적권이라니. 허풍이 세구나. 무림의 법도에 따라 네게 삼 초를 양보하마.”
 삼 초 양보, 그는 노골적으로 자신이 고수라 밝히고 있었다.
 그래, 오냐. 네가 고수라면 내 일격을 받아 봐라!
 목가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른 주먹을 날렸다. 목가청이 움찔하면서 재빨리 주먹을 피해 냈다.
 마교의 고수답게 순발력은 발군이다. 하지만 무적권은 다양한 연속기가 있다. 첫 일격에 움찔한다면 다음 권은 피할 수 없다.
 퍽! 퍽! 퍽!
 숨 가쁠 정도로 빠르게 내질러진 주먹이 상대의 안면과 복부를 강타했다. 이런 식으로 주먹을 뻗는 권법을 중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목가청은 응조수를 써 볼 틈도 없이 주저앉았다.
 “헉!”
 고수와 고수의 싸움에서 엉덩방아를 찧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치욕.
 당황한 목가청이 고개를 돌려 가운학의 눈치를 살핀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나보다 자신의 윗사람이 더 두려운 것이다.
 가운학의 얼굴은 이미 목석처럼 단단해져 있다.
 “당주님······.”
 가운학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일어서서 싸워라! 치욕을 남기지 말고 싸우란 말이다!”
 가운학의 외침에 목가청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권의 충격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휘청이는 발걸음······ 그리고 반쯤 무너진 자세.
 난 상대가 충격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재빨리 주먹을 뻗었다.
 퍽! 퍽! 퍽! 퍽!
 옆구리와 안면 그리고 흉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연방 주먹을 날렸다.
 결국 목가청은 잠시 비틀거리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이번에는 뒤를 돌아볼 정신도 없어 보였다.
 툭투둑.
 목가청의 머리가 둔탁하게 바닥에 떨어졌다.
 “욱······ 이런 일이.”
 내가 이긴 것이다. 해남도의 이름 없는 섬, 일필도의 도주 한영운이 마교의 고수를 완벽히 제압한 것이다. 모두를 향해서 포효했다.
 “내 주먹을 보았느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번 승리는 의미가 컸다. 금룡추와의 시시한 승부와는 그 무게가 달랐다. 하지만 난 웃지 않으려 애썼다. 어려운 승부는 앞으로 두 번이나 더 남아 있었다. 지금 마냥 웃었다가는 잠시 후에 울게 될 수도 있었다.
 가운학의 탄식이 길게 쏟아져 나왔다.
 “이, 이럴 수가. 이런 한심한 일이······.”
 놀라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려 포권을 취했다.
 “일월신교의 응조수는 참 고명했습니다. 덕분에 이 한 아무개 오랜만에 눈을 밝게 했습니다.”
 가운학의 볼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아마도 쉽게 이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목가청은 단 일 초식도 우위를 가져가지 못하고 패했다. 마교로서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가운학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했다.
 “참으로 괴이한 권법을 쓰는구나.”
 “괴이한 권법이 아닙니다. 검패 한영운이 만들어 낸 무적권입니다.”
 “잘난 척하는 것도 지금뿐이다.”
 가운학이 옆에 서 있는 부당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조 사제,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 자네가 지면 일월신교가 남해 삼십육도 도주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부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가운학 못지않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키가 큰 일필도주는 생전 처음 보는 권법을 사용해 제자인 목가청을 완패시켰다. 목가청은 다른 제자들과 달리 고수 반열에 드는 자였다. 그런 자가 제대로 반격조차 해 보지 못하고 패했다. 상대의 실력은 우습게 볼 그런 정도가 아닌 것이다.
 부당주는 마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신중하게 싸움에 임할 것이 틀림없었다.
 “한 도주, 그대의 뛰어난 실력, 이 조휴도 잘 보았다. 하지만 그대의 탁월한 무공도 일월신교의 위대함에 비한다면 티끌 같은 것이다. 내 지금 그것을 그대에게 알려 주겠다.”
 삼 초식의 양보는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과 동등한 실력자로 여기고 싸움에 임하겠다는 뜻이다.
 “또 응조수입니까?”
 조휴가 자세를 잡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같은 방법을 연속해서 사용한다는 것이 찝찝했지만, 응조수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무적권을 쓰는 것이 제일 좋았다.
 “좋습니다.”
 나는 다시 자세를 취한 후, 좌우로 발을 움직이면서 몸을 흔들었다.
 중원 무림 권법 중 이런 자세를 취하는 권법은 없다. 좌우로 몸을 움직이는 것만 따져도 취팔선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술에 취한 듯 움직이는 취팔선의 그것과 무적권의 보법은 하늘과 땅 차이다. 무적권의 현란한 보법을 어찌 취팔선의 흐느적거림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 움직임은 대체?”
 처음 보는 발놀림에 당황하면 상체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은 무적권을 처음 마주한 자가 흔히 범하는 실수였다.
 퍽! 퍽!
 빠르고 강렬한 주먹이 상대의 안면에 작렬했다. 응조수로는 나의 주먹을 막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
 응조수는 기본적으로 관절기다. 관절기는 거리를 좁힌 후에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내 무적권의 보법은 강호의 권법들보다 빠르고 현란하다. 평범한 무림 고수라면 쉽게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게다가 얼굴까지 올려진 두 손 그리고 상체의 흔들림. 이것에 넋을 잃고 있다가는 방금 전처럼 안면에 일격을 허용하기 일쑤였다.
 검붉은 핏물이 오른쪽 콧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방금 전 일격으로 코피가 난 것이다.
 조휴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코피가 나 자세를 흐트러 트리면 다시 연타를 맞을 가능성이 컸다. 그는 억지로 자세를 유지했다.
 목숨을 건 비무는 복싱 경기와 달리 출혈이 있다고 해서 비무를 멈춘 후 재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휴의 선택은 적절했다. 그는 적어도 목가청보다는 비무 경험이 많은 듯했다.
 하지만 적절한 판단을 했다고 해서 언제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황은 나빠질 만큼 나빠져 있었다.
 “이 녀석!”
 조휴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인다.
 “피를 닦고 다시 싸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물론 그는 피를 닦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피를 닦지 않을 것임을 알고 도발한 것이다.
 “이합!”
 조휴가 기합과 함께 손을 뻗었다. 매의 발톱처럼 손가락 셋을 구부린 채.
 현대의 관절기는 금나수와 여러모로 다르다. 빠르게 상대에게 접근하고 다섯 손가락과 온몸을 이용해 단단히 상대를 옭아맨다. 이것은 실전에서 효과가 좋아 군대는 물론 각종 이종 격투기에서도 무척 중요시했다.
 하지만 마교의 응조수와 해남의 용조수는 겨우 세 손가락이다.
 대체 세 손가락으로 무엇을 하겠단 말인가? 차라리 일반 금나수처럼 다섯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잡는 것이 나을 것이다.
 조휴의 세 손가락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주먹으로 손가락뼈를 부러뜨릴 작정이었다.
 “일권무적一拳無敵!”
 파팍!
 기합 소리와 함께 멋지게 주먹이 명중하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먹과 세 손가락이 부딪쳤으니 이기는 것은 당연히 주먹이다.
 “악!”
 조휴가 손을 움켜쥐자 난 무자비하게 주먹을 뻗었다.
 퍽! 퍽! 퍽! 퍽!
 방금 전과 똑같은 장면이, 아니 더 처참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코피를 줄줄 흘리며 손을 잡은 채 마교 고수가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스르릉.
 검이 뽑히는 소리.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뒤를 돌아 볼 틈도 없이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슈욱!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검이 내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했다. 제때 피하지 못했다면 머리에 쇳조각이 깊숙이 박혔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검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니 가운학이 못 먹을 것을 먹은 사람처럼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조휴의 패배에 분개한 가운학이 검을 던진 것이다. 비무 중인 상대를 기습 공격한다는 것. 명문정파라면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마교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내가 상대하고 있는 자들은 그리 호락호락한 자들이 아니었다.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가운학에게 말했다.
 “비겁하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단지 나약하다고 말하겠습니다.”
 가운학은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그는 제자에게 검을 넘겨받고는 이를 갈았다.
 “건방진 녀석! 네 녀석의 권법은 확실히 대단하다. 하지만 검법은 어떤지 모르겠구나!”
 검법이라면 권법보다도 훨씬 자신 있는 부분이다. 별호조차 검패가 아닌가? 일필쾌검을 사용하지 않고 두 명의 고수를 쓰러뜨린 지금! 승산은 충분했다.
 “남궁 총관!”
 “예, 도주님!”
 남궁 총관의 목소리에도 힘이 담겨 있다. 두 번의 승리로 자신감을 되찾은 것이다.
 부름을 받은 남궁 총관이 재빨리 직검을 던졌다.
 탁!
 나는 가볍게 직검을 넘겨받은 후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검신에 햇살이 번득였다.
 “검으로 싸우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죽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 하지만 가운학은 자신이 패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앞선 두 사람이 진 것은 괴상한 권법 때문이고, 자신의 검법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천방지축 날뛰는구나.”
 “전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낮게 자세를 취하자 가운학이 미간을 좁혔다.
 “또 괴이한 짓이냐? 그런 검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녀석의 수작, 이번에는 안 통한다.”
 직검은 평범한 중원의 검과는 완전히 달랐다. 직검은 그 끝이 뾰족하고 검신이 무척 가늘었다. 펜싱에 적합한 레이피어를 모델로 특별히 제작했기 때문이다. 중원의 검과 비교하면 길이는 약간 더 길고 무게는 조금 가벼웠다.
 “직검이라고 합니다.”
 무림인들은 대부분 갑옷을 입지 않는다. 덕분에 찌르는 검이 이들을 상대로 큰 위력을 발휘했다. 얇은 베나 비단을 뚫고 상대의 뼈와 살을 관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어릴 때 이 년을 배운 검도 대신 펜싱을 비기로 사용하게 된 것도 반쯤은 무림인들의 이런 복장 때문이었다.
 가운학의 복장 역시 무림인들의 일반적인 그것과 같았다. 어느 곳을 봐도 방어력이 형편없었다.
 걸치고 있는 건 비단으로 만든 상하의뿐. 이런 복장이라면 위아래 모두 검으로 쉽게 관통할 수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자극적인 질문을 던졌다.
 “삼 초를 양보해 드릴까요?”
 “크크크, 두 번 이기더니 이제는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가운학은 노련한 마교 고수답게 낮게 으르렁거릴 뿐 광분하지 않았다. 과연 금룡추와는 다르다는 것인가? 이 점은 높이 평가할 만했다.
 “간다!”
 검과 검으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충분해도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권과 권으로 싸울 때는 한 방 정도 큰 것을 맞아도 만회할 수 있다. 하지만 검은 그렇지 않다.
 날카로운 검이 몸속으로 파고 들어오면 그것으로 승부가 나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평생을 검에 바친 마교의 고수. 금나수는 나약했지만, 목숨을 걸고 펼치는 검법까지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일월창천日月蒼天!”
 가운학이 초식 이름을 외치는 동시에 검을 뻗었다. 무림인들이 싸우면서 초식 이름을 외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기합을 넣는 것이다. 기합은 호흡이고 호흡이 자연스러워지면 힘은 배가 된다. 물론 ‘이얍!’, ‘얍!’ 이런 기합을 넣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초식명을 외치는 것이 듣기에 나았다.
 둘째, 상대를 혼란시키기 위함이다. 서로 간의 초식을 익히 알고 있는 상대라면 외친 초식명에 따라 방비를 할 것이다. 그러나 외침과 다른 초식이 손에서 뿜어져 나온다면? 일종의 허초가 되는 것이다.
 난 마교의 검 초식을 전혀 몰랐기에 두 번째 경우는 해당되지 않았다.
 가운학의 선제공격! 과연 빠르고 날카로운 찌르기였다. 난 주저 없이 몸을 낮추고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일필쾌검은 상대의 공격을 피하지 않는다. 상대의 공격을 향해 더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어 상대를 패배시킬 뿐이다.
 내 검이 화살처럼 빠르게 가운학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가운학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는 급히 몸을 틀었다. 검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가까스로 검을 피해 낸 것이다.
 그는 아직 동귀어진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손목을 틀자 자연스럽게 검의 궤적이 바뀌었다.
 “이겼군.”
 나는 손목을 흔들어 검 끝을 현란하게 움직였다. 상체의 어느 곳이든 공격할 수 있다는 위협. 이 기술을 펜싱에서는 ‘아따그’라고 불렀다. 난 아따그라는 이름을 쓸 수 없어 대신 무무진검霧霧眞劒이란 초식명을 붙였다.
 중원에도 내 직검처럼 맹렬하게 흔들리는 검이 있다. 그 검의 이름은 용검龍劍. 하지만 용검은 직검과는 달리 검신이 넓어 그 움직임이 좌우로 편중되어 있었다. 덕분에 용검은 찌르기가 아닌 베기에 유용했다.
 가운학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직검의 화려한 움직임에 뒷걸음질 쳤다.
 펜싱 경기를 자주 본 사람이라면 맥없이 뒷걸음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알 것이다.
 “어림없다!”
 푹!
 가운학의 검세를 뚫고 직검이 쏟아져 들어갔다. 검이 꽂힌 곳은 오른쪽 어깨! 그래도 가운학은 용케 급소를 피했다. 민첩한 움직임이 한순간이나마 목숨을 살린 것이다.
 “악!”
 비명과 함께 가운학의 손에서 검이 빠져나왔다.
 “이것이 검패의 검이다!”
 상대의 몸에 검을 꽂아 넣음으로써 승부가 끝났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크흑, 분하다.”
 투, 투툭.
 붉은 피가 옷과 검신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가운학은 아직 살아 있었다.
 “검!”
 내 외침을 들은 남궁 총관이 다시 직검 한 자루를 던졌다. 나는 가운학의 어깨에 박힌 검을 빼는 대신 새 검을 받아 주저 없이 그의 오른쪽 가슴을 찔렀다.
 ‘확인 사살!’
 가운학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내가 이렇게 빨리 치명타를 가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크윽!”
 완전히 터져 나오지 못한 비명이 가운학의 입안을 타고 맴돌았다. 내가 폐를 찔렀기 때문이다.
 눈의 초점이 흐려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일필도 제자들은 즉시! 침입자들을 포위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삼십여 명의 제자들이 가운학을 제외한 마교 제자들과 정충삼 일행을 포위했다.
 그러자 정충삼의 얼굴이 급변했다.
 “한 도주, 이 무슨 짓인가? 우린 친구가 아닌가?”
 내가 정충삼이라면 어설픈 동정을 구하기보다 검을 뽑아 불완전한 포위망의 한쪽을 뚫고 달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정충삼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그 마지막 기회를 날려 버렸다. 이래서 그는 마교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난 그를 비웃었다.
 “금룡추가 죽은 것을 모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겠지.”
 내 말이 떨어지자 정충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룡추! 그가 죽었단 말인가?”
 “금룡추는 너희가 꾸민 음모를 모두 실토하고는 독약을 마셨다.”
 금룡추는 몇 시간 전 내 검에 죽었지만, 정충삼을 떠보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과연 내 거짓말은 효과가 있었다.
 “멍청한! 그랬군. 역시나 했더니······. 계획대로라면 벌써 네 녀석의 목이 떨어졌어야 했는데. 네 녀석이 독수를 써서 먼저 금룡추를 죽였구나. 금룡추, 이 우둔한 녀석······.”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군. 금룡추가 자네와 결탁했었다니. 솔직히 말하자면 금룡추는 내 검에 바로 죽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네.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지. 그러니······ 자네들의 음모를 실토한 일도 없었다네.”
 정충삼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너, 너, 이 녀석······ 방금 전에 금룡추가 모든 것을 털어 놓고 독약을 먹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검을 회수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살면서 거짓말도 못 하나?”
 
  * * *
 
 “도주님, 모두 지하 감옥에 수감했습니다.”
 “수고했네.”
 남궁 총관의 얼굴은 아직도 어둡다. 도주가 마교의 세 고수를 꺾어 무용을 천하에 과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있을 마교의 보복.
 “세 고수의 관은 준비가 끝났는가?”
 내 물음에 남궁 총관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세 고수의 관이란 말씀은?”
 “내게 패한 두 녀석이 아직 살아 있단 말인가?”
 남궁 총관은 마교의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마교 제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십 년에 걸친 마교의 지배가 그를 소극적으로 만든 것이다.
 “살려 두면 다시 체력과 상처를 회복하고 우리에게 달려들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속히 제거하게.”
 “상처를 입었지만 그들은 마교의 고수입니다. 쉽게 제거하기가······.”
 마교 고수들의 실력이 거품이라는 것은 오늘로써 명백해졌다. 그런데도 남궁 총관은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답답한 나머지 가슴을 두드렸다.
 “남궁 총관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네. 자네는 검을 가지고 있고, 상대는 검을 가지고 있지 않네. 무엇을 걱정하는가?”
 남궁 총관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대답했다.
 “그들은 금나수를 사용합니다.”
 금나수, 두 번 반복해서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나약한 기술. 하지만 남궁 총관은 그 금나수를 두려워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금나수가 무엇이 무섭단 말인가?”
 남궁 총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주님께서는 무적권과 같은 절세신공을 익히고 계시기 때문에 마교의 독이 두렵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저희 제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의 금나수에는 지독한 독이 숨겨져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독?”
 “그렇습니다. 마교 고수들이 세 손가락으로 응조수를 사용하는 것은 중지와 검지 두 손가락에만 독이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손가락에 독이 묻어 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정확히는 손가락이 아닌 손톱 밑이죠. 그들은 검지와 중지 밑에 독을 발라 그곳에 독 기운이 머무르도록 합니다. 오랜 시간 이 과정을 오래 반복하면 독검을 쓰듯 손가락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마교가 달리 마교라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독과 암기에 능할 뿐만 아니라 수단이 악랄합니다. 오늘 도주님께서 그런 독들에 과감히 승부하신 것은 정말로 존경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일반 제자들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니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진리다. 세 손가락만 사용하는 응조수를 형편없다고 무시했지만, 그 응조수 안에는 간악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독, 그것은 실력과 상관없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
 “독을 바른다라? 그런데 어째서 두 손가락이지?”
 “다섯 손가락에 모두 독을 바르면 오른손이나 왼손 어느 쪽으로든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죠.”
 남궁 총관의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섯 손가락에 독을 모두 바른다면 장갑을 끼지 않고는 식사를 할 수 없겠지. 마교라더니, 정말 악독한 수법을 즐겨 쓰는군.”
 “도주님께서는 그들이 독을 쓴다는 사실을 모르셨습니까?”
 딱 잘라 말했다.
 “알았다고 해도 나는 승부했을 것일세. 독에 중독되어 서서히 죽는 쪽이 순순히 검을 받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들의 손톱에 독이 묻어 있다는 것을 몰랐기에 과감히 승부할 수 있었다. 반대로 마교의 고수들은 독에 대한 믿음 때문에 형편없는 응조수를 강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살아남은 두 마두를 따로 가두고, 음식에 독을 먹여 죽이도록 하라.”
 독에 독, 일필도주는 명문정파의 우두머리처럼 정면 대결만을 고집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남궁 총관이 포권을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도주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남궁 총관이 물러간 후, 본당의 지하로 향했다. 이곳은 나와 남궁 총관을 비롯한 일필도 고위층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으로, 주 용도는 무예 수련이었다.
 무림인들의 비무는 단순히 실력을 겨루는 대결이 아니다. 뼈와 살을 자르고 찌르며,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일종의 전투다.
 이런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내 실력과 수법을 숨기고 상대의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때문에 무림인들은 대부분 남의 눈을 피해서 수련을 한다.
 그것은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필도의 도주가 된 다음부터는 이 지하실에서만 무공을 수련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부총관인 마장길이 나를 맞이했다.
 “도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지시한 부검은 해 두었는가?”
 
 이기고 나서 싸움을 복기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입시 학원 강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그것은 효과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알아야 한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학생은 답을 맞히면 그것으로 기뻐하지만 강사는 그래서는 곤란하다. 답은 당연히 맞혀야 하는 것이고 어째서, 왜, 어떻게 하면 그 답이 나오는지 다각적으로 연구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실력 있는 강사가 될 수 있다.
 학원 강사였을 때의 버릇 때문일까? 나는 비무가 끝나면 항상 그것을 복기했다. 내가 쉽게 이긴 싸움이라도 말이다.
 “도주님, 오늘 검은 대단했습니다.”
 흠······ 아첨이군. 마장길은 아첨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 것 같다. 대놓고 상대를 칭찬하다니.
 그러고 보니 그에게 아첨을 받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의 말이 기분 좋게 귀에 감겨 왔다.
 아첨이란 늘 이런 식이다. 상대의 귀에 착착 감겨서 미소가 돌게 만든다. 아첨을 싫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아첨 이야기가 나왔기에 이에 대한 우화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어떤 숲에 왕인 사자가 있었다. 사자는 자신이 현자임을 자처했다. 그러고는 왕으로서 어떠한 아첨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공언했다.
 어느 날 늑대가 찾아와 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께서는 정말로 현명하십니다. 모르시는 것이 없어 사해에 그 현명함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현명하다고 자부한 사자는 크게 화를 내며 늑대를 왕궁에서 쫓아냈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던 여우가 앞으로 나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시 왕께서는 현명하십니다. 간신배 늑대의 아첨에 전혀 흔들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얄팍한 거짓말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이 여우,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자는 여우의 아첨에 매우 흡족하여 그를 신임하고 큰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여우와 늑대의 아첨 모두 사람을 우쭐하게 만든다. 하지만 전자는 너무나 노골적이다. 이래서는 호감을 사기 힘들다. 여우의 아첨과 같이 아첨으로 느껴지지 않는 아첨을 해야 한다.
 물론 마장길같이 아첨이 드문 사내라면 전자의 아첨으로도 내 입가에 미소가 감돌게 할 수 있다.
 “대단치 않은 상대를 이긴 것뿐이네.”
 마장길은 큰 눈을 껌뻑이면서 말했다.
 “검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제가 근거 없이 입에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거라······. 아첨이 아닌 내가 생각지 못한 다른 것이 있는 모양이지?
 “그게 무슨 소린가?”
 마장길이 바닥에서 아주 작게 만들어진 쇠사슬 뭉치를 집어 올리면서 말했다.
 “이건 연위갑입니다.”
 쇠사슬 뭉치가 연위갑? 자세히 보니 마장길이 든 쇠사슬 뭉치는 단순한 쇠사슬 뭉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얇은 링 메일이었다.
 링 메일은 무림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갑옷이다. 난 금룡추가 이 링 메일을 어디서 구했는지 의심스러웠다.
 “연위갑이라. 어디서 난 물건일까?”
 마장길은 짐작 가는 곳이 있다는 듯 바로 대답을 했다.
 “아마도 지난달 오서국 상선을 약탈해 챙긴 물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약탈품이 좀 적었는데, 금룡추가 빼돌린 것 같습니다.”
 금룡추는 약탈선의 대장이었으니, 약탈품을 챙겼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연위갑이라 불린 링 메일을 받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믿고 덤볐단 말이군.”
 링 메일은 찌르는 공격에 상당히 취약했다. 내 일필쾌검의 특성상 이 연위갑을 입는 것은 입지 않는 것만 못했다.
 마장길이 연위갑 아래 있는 구멍 뚫린 가죽 쪼가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금룡추는 연위갑에 얇은 이 가죽 갑옷까지 껴입어 방어력의 극대화를 노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도주님의 일필쾌검은 그야말로 천하무적, 두 갑옷을 모두 꿰뚫어 금룡추의 목숨을 빼앗아 갔습니다.”
 마장길의 설명을 듣고서야 손목이 시큰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게 실력이 뒤진다는 것을 알고 있던 금룡추. 그는 내게 이기기 위해 연위갑과 가죽 갑옷을 이중으로 껴입었고, 내 검이 그 연위갑의 작은 고리 중 하나에 부딪쳤던 것이다.
 금룡추는 이 두 개의 갑옷이면 내 날카로운 공격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대처는 불완전한 것이었고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한심하긴.”
 실전에서 금룡추의 이중 갑옷은 몸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 뿐이다.
 “준비는 했으나 도움이 되지는 않았단 말이군.”
 일을 꾸미는 자가 아무런 준비도 없는 경우는 적다. 금룡추는 내 생각처럼 바보가 아니었고, 어느 정도는 준비를 해 두었던 것이다.
 마장길과 함께 다섯 차례에 걸쳐 비무를 재현해 보았다. 내 공격은 빨랐으며, 금룡추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느렸다. 아마도 두텁게 껴입은 갑옷 때문이리라.
 “이래서 이겼군.”
 “무엇보다도 도주님의 빠른 검 덕분입니다. 저희라면 그렇게 빨리 검을 찌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장길의 눈에 선망의 빛이 감돌았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최고의 검법을 익히고 싶어 한다. 어쩌면 그는 나와 복기하면서 눈으로 내 검법을 훔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때가 되면 내가 일필쾌검을 가르쳐 주겠다.”
 마장길이 포권을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도주님의 넓은 마음에 속하 감복하였습니다.”
 금룡추와의 싸움에 대한 복기를 끝낸 후, 나는 직검을 들었다.
 “부총관, 지금부터는 혼자 연무를 하고 싶다.”
 복기를 할 때는 마장길이나 남궁 총관 같은 경험 많은 무림인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연습할 때는 오히려 그들이 방해가 된다. 지금은 내 편에 서 있지만 언제 어떻게 그들이 나를 배신할지 모른다.
 강호는 차가운 곳이다. 이곳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틈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무공 수련은 혼자 묵묵히. 복기 시에도 의심나는 것만을 물어볼 뿐이다.
 “그럼 속하 마장길, 물러가 보겠습니다.”
 마장길이 밖으로 나가자 정면의 허수아비를 노렸다. 오늘 따라 허수아비의 가슴에 그려진 붉은 점이 크게 보인다.
 “합!”
 직검이 깨끗하게 붉은 점을 관통했다. 마음에 드는 찌르기였다. 금룡추나 가운학을 꺾었을 때보다 빠르고 강했다.
 “좋군.”
 하루에 오백 번씩 난 저 허수아비를 향해 검을 내밀었다.
 내가 도주가 아닌 단순한 호위 무사였다면 난 더 많은 시간을 무공 연마에 투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보다 더 강한 검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주가 된 이후로는 저녁 식사 시간 이후, 짧은 시간만을 투자할 수 있을 뿐이었다. 도주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스물둘! 스물셋! 스물넷!”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나와 눈썹을 타고 흐른다. 전신이 땀에 완전히 젖을 때까지 검을 멈추지 않는다. 땀은 사람을 검과 하나가 되게 만들어 준다. 난 그래서 땀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미래는 땀을 배신하지 않는다.
 
 
 #해남제일검
 
 
 조휴와 목가청은 내 지시에 따라 독살되었다. 그들을 죽인 독은 반찬에 들어 있었다.
 밥에 독을 섞는 것보다 반찬에 독을 섞는 것이 훨씬 성공률이 높다. 이유인즉, 흰 밥에 독을 섞으면 바로 표가 나지만, 반찬에는 각종 향신료가 섞여 있어 독의 역겨운 냄새와 이채로운 색을 가려 준다.
 같은 이치로 독주를 마시고 자살하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독이란 그냥 먹기에는 지나치게 냄새가 나 역하다. 그러나 독을 술에 타면 그런 역한 냄새와 상관없이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도주님께서 알려 주신 방법대로 처리했습니다.”
 “잘 통했는가?”
 “예. 섬에서 보기 드문 진수성찬에 약을 탔더니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대한 만찬을 앞에 둔 두 고수는 마교의 후환을 두려워한 내가 태도를 바꾼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내게 의심을 품고 자신들의 처지를 냉철히 파악했다면, 그들의 마지막 발악에 한두 명쯤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감옥에 갇힌 마지막 순간까지 오만했고, 자신들의 처지를 낙관했다.
 오히려 그편이 내게는 좋았다. 이쪽의 피해 없이 독살에 성공했으니까.
 “나머지 녀석들은 어떻게 할까요? 고문을 해서 죽일까요? 아니면 힘줄을 끊어 노예로 만들까요?”
 무협 소설에는 무공을 폐한다는 말이 자주 나오곤 한다. 실제로 힘줄을 끊어 사람을 불구로 만들면 두 번 다시 예전처럼 강한 근력을 발휘할 수 없다.
 해남도에서는 이 방법으로 노예를 만들었다. 무림인이 무공을 잃고 노예가 되는 것은 치욕 중의 치욕이었다. 마교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만들기에는 아까웠다. 그들은 아직 내게 쓸모가 있었다.
 “내 심문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도록.”
 “예.”
 어제 있었던 격전 탓인지 몸이 찌뿌듯했다.
 “그럼 심문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
 마장길이 물러가자 남궁 총관이 교대하듯 안으로 들어섰다.
 “도주님의 분부대로 독으로 처리했습니다.”
 손을 저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마 부총관이 이미 보고했네.”
 “아, 그렇군요.”
 남궁 총관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아마도 잠을 제대로 못 잔 모양이다. 마교가 그렇게도 걱정이 된 것일까?
 외부 사람인 나와는 달리 남궁 총관은 거의 사십 년 동안 마교의 위압감에 눌려 왔다. 때문에 마교의 힘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쉽게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남궁 총관은 허를 찔린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도주님께 근심을 만들어 드린 것 같습니다.”
 “아니, 섬의 업무를 총괄하는 총관으로서 그 걱정은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 금룡추의 후임은 결정했는가?”
 “감영이 어떻겠습니까?”
 양손으로 쌍도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감영, 그의 무용이라면 약탈대장으로 손색이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표했다.
 “그리하게.”
 “그리고······ 약탈조장으로는 이응을 올리겠습니다.”
 이응? 그게 누구였더라? 나는 기억을 되돌려 보았다. 이응······ 그는 얼굴이 검고 키가 큰 사내였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일필도의 일반 주민들보다 훨씬 키가 컸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몸동작이 느리고 무공이 서툴렀다. 그런 사내를 약탈조장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이응으로 괜찮겠나?”
 “감영이 있으니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무리가 없다는 대답은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과 같다. 기대할 만한 인재가 아닌데 어째서 그를 추천하는 것일까?
 “다른 자는 없나?”
 “도주님께서 혹시 생각해 두신 분이 있으신지요?”
 “아니, 그런 자는 없네. 다만 이응의 실력은 약탈조장이 되기에는 미흡하지 않은가?”
 남궁 총관은 보기 드문 실력 우선주의자였다. 그가 내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것도 내 실력이 자신보다 위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응을 지명했다. 나는 이응에게 숨겨진 실력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실력은 미흡하지만, 도주님에 대한 충성심은 그 누구보다 단단한 사내입니다.”
 “이응이?”
 “그렇습니다. 지위가 낮은 제자들 중 실력이 괜찮은 제자들은 모두 금룡추와 사이가 좋았던 자들뿐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약탈조장에 임명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도주님, 금룡추 같은 이가 다시 반복되면 안 됩니다.”
 남궁 총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론 실력보다 충성심을 우선으로 해야 할 때가 있다. 나도 조직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는지라 남궁 총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상황이 그러하다면 남궁 총관이 알아서 하게.”
 “예. 이응을 약탈조장으로 넣겠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난 일필도 제자들 중 충성심이 높은 자들을 뽑아 새로운 무공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닥칠 싸움에는 나뿐만이 아닌 일필도 전체가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 어디까지 가르쳐야 할 것인가?
 
  * * *
 
 나는 지금 고민을 하고 있다. 내 앞에 무릎을 굽힌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소녀가 미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미간을 좁히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소녀 여은원, 해남제일검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해남제일검이라. 듣기는 좋다.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마교의 제자였던 그녀의 아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혹시 말속에 뼈가 있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흠뻑 젖어 있는 깊고 아름다운 눈.
 흔히들 사람의 눈에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한다. 흐릿하고 탁한 눈은 혼란한 마음을, 강하고 선명한 눈동자는 야심을, 흔들리는 눈동자는 상대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각각 담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눈은 무엇을 담고 있을까? 나에 대한 분노? 아니면 경애?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한 호기심?
 시선을 좀 더 넓혀 그녀의 얼굴 윤곽을 보았다. 이곳에 온 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당돌함이 서려 있었다.
 색이 선명한 입술과 갸름한 턱선. 그녀의 표정은 마치 내가 살던 시대의 여성들 같았다. 외모와 성격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면 필시 머리가 아픈 상대일 것이다.
 “해남제일검이라? 내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간악한 매화당 당주 가운학은 자신이 해남삼십육도주들 위에 있어 그 누구도 당해 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오만하게도 해남제일검이라는 호칭을 자처했습니다.”
 턱을 쓰다듬었다. 이 행동은 약간 가식적인 것으로 그녀의 말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군. 해남제일검이라는 말은 이해가 가는데, 어째서 내게 감사를 한 것이지? 넌 일월신교의 제자이고 난 가운학을 죽인 일필 도주인데, 뭔가 앞뒤가 맞지 않지 않느냐?”
 여은원을 심문하기 전 난 세 명의 일월신교 제자를 심문했다. 그들은 모두 해와 달이 언제 어디서든 나를 노려볼 것이며, 일월의 노여움을 산 일필도주는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신벌을 받아 죽을 것이라 저주했다. 그것도 모자라 각자 일월신교 제자다운 악의에 찬 발언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시작부터 내게 큰 절을 올리면서 감사를 표했다.
 다른 제자들과 전혀 다른 반응에 반신반의했다. 내게 접근해서 어떠한 해를 입히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일월신교를 배교하려는 것인지 지금으로써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눈물이란 남자를 상대로 무서운 무기가 되곤 했다. 그건 내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순간이나마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왜 우는 것이냐?”
 묻지 않을 수 없다. 물어 달라고 우는 것일 테니까.
 그러자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는 제게 몹쓸 짓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제 모든 것을 앗아 갔습니다. 순결도, 가족도, 믿음도······. 그래서 전 일월신교라는 사악한 집단에 입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그는 악마였습니다.”
 정말일까? 가운학이 그렇게 나쁜 인간이었을까? 마교라 칭하는 곳의 당주였으니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해남의 여러 도주들만 해도 그녀가 말한 내용쯤은 얼마든지 저지르고도 남을 자들이 많았다.
 그래, 악인이라면 더욱 좋다. 악인을 베었다면 덕을 쌓은 것일 테니까.
 그러나 내 생각이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감옥 안쪽에서 분노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여 사매! 거짓말하지 마라! 해와 달이 두렵지도 않느냐?”
 “꼬리를 친 것은 네가 아니더냐!”
 “당주님을 욕되게 하지 마라! 그분의 동자공을 함부로 모욕하지 마라! 일월을 섬기는 분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감옥 안에서 심문을 지켜보던 일월신교 제자들이 참다못해 노성을 터트린 것이다.
 그럼 그렇지. 간악한 악인을 벨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악인들이란 비겁하고 교활해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에게는 좀처럼 승부를 걸어오지 않는다. 강자가 나타나면 그들은 숨을 뿐이다. 정충삼도 어쭙잖은 친구란 말을 쓰면서 변명을 했지 않은가?
 이런 악인들의 면모를 볼 때 가운학은 완전한 악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숨을 내쉬면서 여은원에게 말했다.
 “배교하기 위해 거짓말하지 않아도 된다. 난 일월신교나 가운학에 대해서 어떠한 증오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그를 벤 것은 그가 단지 내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여은원은 억울하다는 듯 목멘 목소리로 말을 했다.
 “도주께서는 저들의 거짓을 믿지 마옵소서. 가운학은 간악한 자이옵니다. 소녀는 도주님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그녀가 섬의 백성이라면 어깨를 다독여 주면서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교의 제자였다. 오냐오냐했다간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목소리에 가능한 힘을 줘 말했다.
 “자! 말해라. 내가 원하는 것은 너의 과거가 아니다. 내게 협조하겠다는 마음뿐이다. 협조하겠는가? 안 하겠는가?”
 “간악한 자를 베어 주신 은인의 말씀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녕 신벌을 받아 죽고 싶은 것이냐!”
 탕!
 검집으로 쇠창살을 세게 내리쳐서 감옥에 갇힌 신도들의 말을 막았다.
 자신들의 처지가 어떠한지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리석은 자들이다.
 고개를 돌려 여은원을 바라보니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들의 동료였던 자들을 주시하고 있다.
 그들의 격렬한 반응에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 나자 화가 난 듯했다. 아마도 그녀는 기회주의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걸맞은 기회를 주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
 “좋다. 넌 일단 내게 협력할 마음이 있는 것 같으니 기회를 주겠다.”
 여은원을 앞에 두고 남궁 총관을 불렀다.
 “이 아이를 묵림원으로 보내게.”
 “묵림원 말씀이십니까? 그곳은 손님들을 접대하는 곳이 아닙니까?”
 남궁 총관은 배신자에게 손님 대우를 해 줄 필요가 없다는 뜻을 돌려 말했다. 하지만 나도 생각이 있어 지시한 것이다.
 “배교자에게 이 정도 배려는 해야 다른 이들의 마음이 움직일 것 아닌가? 우린 아직 마교의 내부 사정을 잘 모른다. 그들은 소중한 정보원이 될 수도 있다.”
 “그, 그렇다면 고문을······.”
 “그들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고문으로 나온 정보를 순순히 믿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음, 도주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남궁 총관이 고개를 숙이자 여은원이 미소를 지었다. 눈물이 맺혀 있는 얼굴에 미소가 감돌자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미인은 미인이구나.
 “도주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녀가 사뿐히 인사를 하자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편히 쉬도록 하게.”
 여은원, 그녀는 어디 가든 자기 밥벌이는 충분히 할 여자였다.
 “다음.”
 마지막 제자에 대한 심문. 그러나 그는 여은원의 경우를 보고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 당장 죽는 한이 있어도 일월신교에 대한 믿음을 버릴 수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일월신교에서 자신들을 구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 말대로 신앙심이 두터운 것일까? 난 전자라고 생각했지만, 후자 쪽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좋아. 순교하고 싶다면 순교를 시켜 줄 수밖에.”
 긴장한 표정, 아무리 이들의 신앙심이 두텁다고 해도 천 년 전 기독교도들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기독교도들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순교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이들은 어떠한가? 순교란 말 한마디에 얼굴이 차갑게 굳어 버렸다.
 “죽음이 두려우냐?”
 내 질문에 일월신교 제자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두렵지 않다. 해와 달이 항상 우리를 지켜 주기에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다.”
 난 냉소했다.
 “저 세상에도 해와 달이 있을까? 해와 달이 없다면 결국 너희를 지켜 주는 것은 현세에만 해당되는 것일 텐데?”
 그는 지지 않고 맞섰다. 마치 죽음의 공포를 이기려는 듯 악을 쓰면서 말이다.
 “웃기지 마라! 해와 달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어디에나 존재한다라······. 그럼 다시 묻겠다. 너희들은 왜 이곳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느냐? 해와 달이 그토록 영험하다면 어느 곳에서나 너희들을 지켜 줘야 하는 것 아니더냐?”
 그러자 제자가 궁색한 변명을 내뱉었다.
 “해와 달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 곧 우리를 구하기 위해 일월신교의 제자들이 올 것이다. 일필도주는 그때 가서 후회해도 늦을 것이다.”
 일필도는 내 지시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단 하루 만에 가운학이 죽고 일월신교 제자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섬 밖으로 알려졌을 가능성은 낮다.
 일월신교가 아무리 신통해도 지금 이들을 구하러 올 수는 없는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하다고 믿게 하는 것, 그것이 아마도 종교일 것이다.
 흔들리는 제자의 눈빛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일주일의 시간을 주지. 그때까지도 너희들의 교주가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배교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 *
 
 탁. 탁.
 누군가 나를 만나기 위해 목판을 치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손가락으로 오동나무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내 시선은 줄곧 탁자의 물결무늬에 박혀 있다. 고개를 들면 그녀의 눈빛이 내 안에 들어올 테니까.
 미인의 눈을 마주하게 되면 평정심이 흐려진다. 내가 그녀에게 원하는 건 마교에 대한 정보지 두근거리는 마음이 아니다.
 “내가 해치운 자가 해남을 관리하는 매화당주였단 말이지?”
 “그러하옵니다.”
 여은원이 말한 일월신교의 수뇌부는 다음과 같았다.
 
 교주 마검왕 만청.
 총단주 일검신마 유헌교.
 자목단주 영릉객 아필.
 교현단주 무릉십도 금완천.
 이문단주 십검패도 가낙현.
 매화당주 해남일검 가운학.
 이화당주 교지검마 이이선.
 목련당주 육룡수 남궁팔.
 목단당주 비도육선 문정국.
 감국당주 칠필서생 남인.
 
 교주 밑에 총단주와 삼 단, 오 당이 모여 있었다. 단과 당이 갈린 것은 그 크기 때문으로 큰 곳이 단, 작은 곳이 당이라 불렸다.
 “마교의 세가 많이 약해졌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로 작을 줄은 몰랐군. 한 당의 인원이 스무 명 안팎이라 했으니, 단이 더 많다고 해도 오백을 넘기지 못하겠구나.”
 “푸풋······.”
 그녀가 웃었다.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웃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날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솔직한 감정의 표현일까?
 미간을 좁히면서 물었다.
 “웃음이 나오느냐?”
 내가 얼굴을 굳혔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운학을 제압한 일필도주가 전혀 겁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일월신교는 마교가 아닙니다. 해남도에 그렇게 알려진 것뿐이지요. 확실히 이곳은 외진 곳입니다.”
 일월신교가 마교가 아니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녀의 한마디가 내 사고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마교가 마교가 아니라니, 난 네 말을 이해할 수 없구나.”
 “무림십파로 대표되는 정파에서 마교라 부르는 곳은 따로 있습니다.”
 “일월신교가 아닌 다른 곳을 마교라 부른단 말이냐?”
 “그러합니다.”
 머릿속에 예전에 보았던 무협 소설의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불을 받드는?”
 “도주님께서도 광명교를 알고 계시는군요. 그들이야말로 마교라 불리기에 합당한 이들입니다. 무공을 아는 제자들만 전국에 수만, 교주의 한마디면 며칠 안으로 족히 만은 모일 수 있다고 하는 곳입니다.”
 “음······.”
 낮게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역시 마교란 쉽지 않은 상대였다.
 “후후후후······.”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럼 그렇지, 마교의 고수를 무명의 일필도 도주가 이길 리가 없지.
 내가 상대한 일월신교는 진짜 마교인 광명교의 분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분점에 지배를 당한 해남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배를 타고 상선을 습격했지만 실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내세울 것이 없는 데다 서로 간의 협조도 제대로 되지 않는 모래알 같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해남삽십육도란 호칭이 무색할 정도로 한심했다.
 얼굴 표정에 주의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가운학의 실력은 당주들 중 어느 정도였지?”
 “가 당주는 제법 견실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당주들 중에는 그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가운학이 당주들 중 으뜸이라면 일월신교에서 그보다 강한 자는 교주와 총단주 그리고 세 명의 단주를 합해 다섯 명 정도겠지?
 “넌 어찌 그리 소식이 밝더냐?”
 떠보듯 날린 한마디에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소녀는······ 원래 일월신교의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은 멀리 중원에서 왔다는 것밖에는······.”
 “일월신교 자체가 중원에 있는 것 아니더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월국은 이곳에서 먼 곳이 아닙니다.”
 “월국?”
 아마도 전국시대 오와 월을 말하는 듯싶다. 내가 세계사 과목을 가르치는 강사였다면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으련만, 지금은 장강 하류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월국에서 세가 비교적 큰 곳이 일월신교입니다. 교에는 무공이 뛰어난 고수들도 제법 있어 장강의 형산파와는 자주 다투곤 했습니다.”
 형산파라면 정파 중 나름 이름이 알려져 있는 곳이 아닌가?
 이건 의외의 정보였다. 형산파라는 강적이 있다면 일월신교는 함부로 이곳 해남에 고수들을 파견할 수 없을 것이다.
 “형산파라면 정파에서도 이름난 문파가 아니던가?”
 “맞습니다. 무림십대문파 중 하나입니다.”
 이곳 해남의 미인상은 특이했다. 얼굴이 크고 몸매가 통통한 여자들이 미인으로 추앙받았다. 전 도주는 나를 회유하기 위해 저런 여자를 몇 보냈지만, 난 모두 거절했다.
 외모 지상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도저히 내 기준에서는 미인이라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만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소녀는 달랐다. 그녀는 얼굴이 크지도 몸매가 넉넉하지도 않았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 큰 눈망울과 갸름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현대의 미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더욱이 그녀는 이곳의 여성들이 고집하는 전족도 하지 않았다. 전족을 한 여자들의 걸음걸이는 정말로 특이하다. 난 처음 그것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녀들이 전족을 하기 위해 심한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웃음을 지웠다.
 도주가 된 이후, 섬 안에서 전족을 금지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주민들의 사생활에 지나친 간섭은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어 그만두고 말았다.
 “흠흠······. 그들의 적이 형산파라면 우리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저희가 하기 나름이겠지요.”
 여은원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월신교에서 무공이 가장 강한 사람은 교주인 만청이겠지?”
 “보통 제자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전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르게?”
 “교주를 수호하는 오호신들 중에 필두인 쌍륜쾌도 막금이 가장 강한 것 같았습니다.”
 “쌍륜쾌도 막금?”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교주를 수호하는 오호신의 필두라는 말을 그냥 넘겨들을 수는 없다. 교주의 경호대장 같은 것일 테니까.
 “어느 정도로 강하지? 별호가 쌍륜쾌도라 한다면 두 자루의 륜과 한 자루의 도를 쓰는 것인가?”
 “그의 실력은 월국 일대에서는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하루 동안 육현에서 열여덟 명의 해적을 주살한 후, 패강으로 나가 고수 일곱 명을 혼자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무공의 소유자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무기는 한 자루의 도인데, 그 도 끝에 한 쌍의 고리가 걸려 있어 쌍륜쾌도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음, 한 자루의 도라.”
 도라는 무기는 지극히 실용적인 무기였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난 검보다 도를 쓰는 자가 상대하기 힘들었다. 도를 잘 쓰는 자는 내 일필쾌검을 능히 막을 수 있었으며, 내가 당황할 만한 공격도 곧잘 퍼부었다.
 몇 번인가 도법에 위기를 겪은 나는 일필쾌검을 버리고 도법, 즉 내가 오래 배운 검도로 전향을 고려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도에도 약점은 존재했다. 일단 중원의 도는 일본도처럼 길지 않아 거리에 단점이 있었으며, 베는 공격이 주를 이뤄 사슬 갑옷이나 무두질한 두꺼운 가죽 갑옷 같은 것들을 착용할 경우 치명상을 주기 힘들었다.
 게다가 뛰어난 장인이 만든 도가 아니면 쉽게 부러지거나 휘어졌다. 이곳의 야금술이나 제련 기술은 현대의 그것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어 좋은 도를 구하는 것은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어려웠다.
 사실 내가 사용하는 직검의 재질이나 강도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어서 수십 자루를 만들어 둔 후, 싸울 때마다 새것으로 바꾸곤 했다.
 얼마 전 가운학을 죽일 때도 어깨에 박힌 직검을 빼면 빼는 순간, 휘어질 가능성이 컸기에 그대로 두고 다른 검으로 찌른 것이었다.
 “네가 전해 준 정보는 무척 유익하구나. 솔직하게 말해 보아라. 무엇을 원하느냐? 가능한 네 뜻을 들어주도록 하겠다. 돈? 아니면 직위? 그것도 아니면 땅과 시종?”
 “그런 것들은 원치 않습니다. 전 다만 도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해남제일검의 제자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에다.
 “넌 곁에 있던 해남제일검을 잃자마자 곧장 새 해남제일검을 얻으려 하는구나.”
 여은원이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전 강자를 우러러볼 따름입니다.”
 
 강하면 배신하지 않는다. 이것만큼 강자에게 편한 논리는 없다.
 내가 강한 모습을 보여 주는 한 그녀는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자들은 복잡한 속내를 가지고 있는 자들보다 다루기 쉬웠다. 질투나 대의명분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힘을 받드는 자들이다.
 물론 이런 자들에게 헌신적인 노력이나 희생은 바랄 수 없다. 힘을 쫓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힘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힘을 버리게 될 테니까.
 “좋아. 널 제자로 맞이하겠다. 입문식은 내일 오후에 하겠다. 괜찮겠지?”
 “제자, 스승님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여은원은 스승을 대하듯 삼배를 올렸다. 내가 입문식을 하기로 한 것은 다른 마교 제자들에게 배교자의 좋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남궁 총관 같은 이들은 이런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교 제자들의 무공이 특출 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도주께서는 왜 그토록 그들을 회유하려 노력하시는 겁니까?’
 내가 그들을 계속 회유하려는 것은 여은원 한 사람에게 마교에 대한 정보를 의지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비록 내게 충성을 맹세하고 아는 것을 모두 말한다 해도 그녀가 말하는 정보에는 사심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녀가 가볍게 보는 자는 실제보다 저평가될 것이며, 그녀가 친근하게 또는 대단하게 생각했던 자들은 고평가될 것이다.
 이래서는 정확한 정보라 할 수 없다. 일월신교와 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확한 정보가 필수였다.
 
 시험 범위도 모른 채 무작정 공부만 하는 수험생은 절대 좋은 점수를 맞을 수가 없다.
 
  * * *
 
 여은원의 입문식이 끝난 후, 남궁 총관과 부총관인 마장길을 서재로 불렀다. 본격적인 일월신교와의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시중을 드는 시녀들조차 들이지 않은 채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도주인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일월신교의 당주를 죽이고 제자들을 포로로 잡은 내 행동에 놀랐을 것일세.”
 남궁 총관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도주님께서 일월신교에 상납금을 내지 않으신다고 할 때부터 짐작은 했습니다만······ 이렇게 빨리 싸움이 터질 줄은 몰랐습니다.”
 마장길은 무릎 위에 주먹을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도주님께서 절세신공을 익히고 계신데 언제까지 그들 아래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전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일필도가 해남 전체로 뻗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남궁학과 마장길은 내가 일필도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두 사람이다.
 “마 부총관 말대로 난 이번 기회에 다른 여러 섬들을 통합할 생각이네.”
 남궁 총관의 미간에 가는 주름이 졌다. 지나치게 많은 이들을 적으로 돌릴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다른 섬들을 정복하시는 겁니까?”
 “정복이 아닐세. 나는 그럴 힘도 마음도 없다네.”
 “그렇다면······.”
 “해남삼십육도를 하나로 묶어 문파를 만들 생각일세. 힘을 하나로 모으는 맹주가 된다면 굳이 섬들을 일일이 정복할 필요가 없겠지.”
 마장길과 남궁 총관이 서로를 바라보며 크게 놀랐다.
 “삼십육도의 맹주가 되시는 겁니까?”
 “섬들이 하나의 문파가 된다. 그런 것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미 이름까지 정해 놨네.”
 “듣고 싶습니다.”
 “어떠한 이름인지요?”
 몇 달 전부터 난 이 한마디를 하고 싶었다.
 
 “해남파!”
 
 
 #운유도주
 
 
 일월신교의 인원은 약 오백, 형산파를 견제할 인원을 남기면 아마도 백에서 이백쯤은 해남으로 치고 내려올 수 있을 것이다.
 무림 정파들이 백 명 안쪽의 소수 정예를 유지하는 것에 비하면 꽤나 대규모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필도도 숫자를 늘려야 했다. 단순히 지금 있는 제자들의 실력을 증진시키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좋아.”
 쿵.
 묵직한 울림과 함께 돌덩이가 땅에 닿았다.
 내 앞에 늘어선 젊은이들은 일필도와 그 주변 섬에 살고 있는 어민들이었다. 난 이들 젊은이들을 훈련시켜 일필도 제자로 삼을 생각이었다.
 보통 명문 정파에서는 재능 있는 아이들, 그러니까 운동신경이 좋고 머리가 뛰어난 아이들을 뽑아 오랜 시간 가르친다.
 하지만 난 지금 당장 제자가 필요했다.
 “합격!”
 삼십 근짜리 돌덩이를 거뜬하게 들어 올린 젊은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초적인 체력을 갖춘 젊은이들을 뽑아 간단한 무공을 가르치면 쓸 만한 보초가 될 것이다.
 “병사들을 뽑는 것 같네요.”
 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여은원······. 그녀는 당분간은 맡은 일이 없어 날 졸졸 따라다니는 걸로 하루 일과를 대신하고 있었다.
 “기초 체력을 측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지. 무공을 닦기 위한 기반이니까.”
 “기초 체력요?”
 기초 체력이라는 단어는 무림인들에게 생소한 것이다. 난 그녀에게 기초 체력이라는 단어의 뜻을 짧게 설명한 후, 팔짱을 꼈다.
 “기초 체력이 없으면 아무리 무공을 배워 봐야 강해질 수 없다. 은원도 그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야.”
 “제자, 사부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여은원은 파란 저고리에 남색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위아래 모두 처음 보는 옷이었다.
 “그 옷은 어떻게 된 것이지?”
 “아! 남총관께서 주셨습니다.”
 밝게 웃는 모습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남총관이 아니라 남궁 총관.”
 “네. 남궁 총관께서 주셨습니다.”
 흠······. 얼핏 보아도 비싸 보이는 옷이다. 이런 옷을 선물한 것은 어떠한 꿍꿍이속이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남궁 총관은 유부남이 아니던가?
 하긴 이 시대의 일부다처는 평범한 일이다. 남궁 총관이라면 일필도의 이인자. 첩을 한둘 얻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여은원이란 말인가?
 내가 미간을 좁히자 여은원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 옷······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사부에게 건네는 말 치고는 지나치게 부드럽다. 아니면 내가 그녀에게 평균 이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일지도······.
 어쨌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그런데 어째서 눈살을 찌푸리셨어요?”
 이럴 때는 말을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생각을 좀 했단다.”
 “아, 마교에 대한 것이군요.”
 일월신교를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친 그녀, 그녀는 일월신교를 마교라 칭하는 데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원래부터 믿음이라는 것이 티끌만큼도 없었던 것 같았다.
 “매화당의 세 고수가 모두 죽었으니 당분간 마교에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좋겠지만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그 누구도 모르는 법이다. 가능한 할 수 있는 준비를 모두 해 두는 것이 좋았다.
 “도주님! 도주님!”
 먼지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사내. 얼마 전 약탈조장이 된 이응이 아닌가?
 큰 키 덕분에 그는 어디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이응이 숨을 헐떡이면서 대답했다.
 “운유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정충삼의 부하들이 온 것이군.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응이 허겁지겁 달려온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운학을 무찌른 그날 이후, 포구를 지키는 제자를 두 배로 늘렸다.
 마교든 운유도든 우리 쪽을 공격하려면 포구를 거쳐야 했으니까 그쪽을 강화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포구를 지키던 이응이 이렇게 달려와 있다.
 “설마 포구가 뚫린 것은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운유도에서 온 자는 한 명뿐입니다.”
 “한 명?”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뜻인가? 운유도와 일필도의 힘을 대략적으로 비교해 보면 삼 할쯤 우리 일필도가 앞섰다. 힘에서 밀리는 운유도가 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상할 것은 없었다.
 “남궁 총관.”
 제자 선발을 총관리하고 있던 남궁학이 내 목소리를 듣고 가까이 다가왔다.
 “도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운유도에서 사람이 왔다는군. 자네가 한번 만나 보겠나?”
 “도주님 대신 제가 나가도 되겠습니까?”
 “도주가 너무 쉽게 얼굴을 보여 줘도 안 되지 않겠나?”
 “아, 그렇군요.”
 남궁학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응과 함께 포구로 향했다.
 
  * * *
 
 “심지가 굳은 사내입니다.”
 운유도에서 사자로 온 사내는 만금석 홍청화. 그는 운유도의 총관으로 이십 년 이상 운유도에서 사용하는 모든 돈의 관리를 맡고 있는 남자였다. 지난해 얼핏 보았던 기억을 되살려 보면 그는 꽤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다.
 흠······ 가문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노신인가?
 “무조건 도주를 내 달라고?”
 “그러합니다.”
 “말도 안 되는 요구군. 정충삼은 금룡추와 함께 날 죽이려 했단 말일세. 그런 자를 어찌 쉽게 내준단 말인가?”
 마교의 두 고수는 제거했지만 정충삼은 아직 죽이지 않았다. 서둘러 제거해야 할 정도로 위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협적이지 않다고 해서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가운학보다 지은 죄가 많았다.
 “어떻게 할까요?”
 “운유도를 우리 쪽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좋겠지.”
 “편입이라면······.”
 “정충삼을 복종시키든지 새로운 도주를 세우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겠지.”
 남궁 총관은 정충삼을 놓아주는 데 반대했다.
 “복종시키기보다는 새로운 도주를 옹립하는 쪽이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운유도 제자들이 순순히 내 말에 따라 도주를 바꾸고 ‘네,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일 것 같은가? 그건 절대로 아닐걸?”
 남궁 총관은 머뭇거리면서 대답하지 못했다.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남삼십육도의 도주들은 독립성이 강해 다른 섬으로부터 간섭받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들을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시험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지요?”
 “내게 생각이 있네.”
 “그럼, 홍청화는 돌려보내겠습니다.”
 “아니, 그가 이번 시험에 꼭 필요하네. 그러니 돌려보내지 말게. 가능하다면 이번 기회에 그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군.”
 남궁 총관은 눈을 두 번 깜빡이면서 내 얼굴을 주시하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남궁 총관은 내 속을 알 수 없어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알려 주면 재미가 없다.
 
  * * *
 
 “운유도에서 사람이 왔더군.”
 “그, 그들이 내 몸값을 지불할 것이다.”
 잔뜩 지친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혈색이 감돌았다.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한때 하루에 두 명은 꼭 죽인다고 해서 일일이사라는 별호로 불렸던 정충삼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사람을 죽일 수 없었다. 그는 우리에 갇힌 늑대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몸값? 정충삼, 자네는 내가 몸값을 받기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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