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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리얼 랜서 1-1권

2018.11.19 조회 5,967 추천 59


 프롤로그
 
 
 
 
 
 
 기병과 포병과 보병의 조합은 성삼위일체, 성삼위께 영광을!
 -황제 페로우
 
 
 제국력 6년, 제국 동부 최전선, 바르딧슈 지방.
 ‘제기랄.’
 레흐는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단지 10미터 거리를 두고 적들은 방진을 완성했다. 고작 200명이서 방진이라니.
 방진의 크기는 매우 작았지만 병사들의 대오가 매우 두꺼웠다.
 방진이 아닌 밀집대형이라고 봐야 할 정도였다.
 그의 애마 샤롯데가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레흐는 애마의 목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불만을 위로해 주었다.
 목표를 잃은 창끝이 하늘을 향해 뻗었다.
 “방진에서 물러나! 저들이 사격하기 전에 물러나!”
 소령이 그렇게 소리를 쳤지만, 레흐는 조소를 머금었다.
 패잔병들이 도망가느라고 바쁘지, 무슨 수로 머스킷을 장전했겠는가?
 대개 겁먹은 패잔병들은 추격하는 기병을 보면 유효사거리에 들어오기 전에 머스킷을 쏴 버렸다.
 하지만 그의 애마의 머리는 방진의 반대로 향하고 있었다.
 머스킷을 쏘지 않아도 총검 바늘로 가득한 선인장에 돌진하고 싶지도, 그의 애마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방진에서 대략 60미터 이상 떨어진 후 동료들과 함께 방진의 주변을 맴돌았다.
 사실 말을 탄 기병에게는 60미터도 그리 안전한 거리는 아니었지만(기병은 매우 큰 표적이니).
 레흐를 포함한 그들은 전공을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조금 있으면 말 여섯 마리가 이끄는 8파운드짜리 무게의 포탄을 쏘는 기마포가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머스킷볼 50발이 깡통 포장된 산탄이 발사될 것이며, 저들의 방진 일부가 무너지면 단숨에 그곳으로 밀고 들어가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일 것이다.
 방진을 도는 내내 창기병들의 흥분은 고조되었고 말과 기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갔다.
 말 땀 냄새가 진동했다.
 그것은 마치 벌거벗은 미인이 침대에 누워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데도 침대로 달려들지 못해 애간장이 타는 것과 같았다.
 ‘적절한 비유군.’
 레흐는 미소를 지었지만, 먹이를 사냥하는 부엉이처럼 방진 쪽으로 차가운 시선을 고정했다.
 저들의 가장 바깥쪽 열은 총검은 내민 채 접근을 방지했지만, 뒤쪽과 안쪽 열들은 열심히 머스킷을 장전하는 것이 보였다.
 “레흐, 너무 접근하지 마!”
 제로스 소위가 소리쳤다.
 정말로 참견 많은 엘프 녀석이다. 자신의 말에 유니콘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주제에······.
 유니콘은 근래에 보기가 힘든 순백의 비단처럼 아주 아름다운 백마였지만, 그의 샤롯데보다 느린 녀석이었다.
 그렇지만 레흐는 공적을 놓칠까 조바심이 났다.
 저기 있는 저놈들을 몰아세우느라고 다른 놈들을 이미 놓쳤고 다른 기병연대 녀석들의 제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놈들은 놓친다면 영관급 장교로 진급할 수 있는 필수 아이템인 명예 훈장을 받지 못한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머스킷의 총격과 함께 그는 모자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총알이 그의 모자를 뚫고 지나간 것이었다.
 짜증이 난 그는 말고삐를 방진 바깥쪽으로 몰았다.
 그가 맞아도 상관은 없지만, 그의 샤롯데가 다치기라도 하면 치료비가 감당이 안 될뿐더러 죽기라도 하면 대체할 말을 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애초에 그가 창기병대에, 그것도 소위라는 신분으로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배운 훌륭한 승마술을 더해 그가 말을 끌고 와서 자원입대하였기 때문이다.
 방진에서 간헐적인 사격이 계속 이루어지자 그의 동료들도 방진과 조금 더 멀어졌다.
 “왜 이제 와?”
 “빨리 저것들을 날려 버려!”
 이제야 도착한 기마포병대에 레흐의 동료들이 야유가 섞인 환호성을 보내왔다.
 최대한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그들은 방진 50미터까지 접근했고 창기병들도 방진의 시야에서 대포가 안 보이게 그들을 가렸다.
 “산탄을 장전하라!”
 대포를 지휘하는 소위는 놀랍게도 여자 엘프······.
 아니, 하프 엘프였다.
 일반 엘프들보다 귀가 상대적으로 아주 짧았다.
 레흐는 가냘프다 못해 너무나도 호리호한 그녀의 몸매를 잠시 구경했다.
 꽉 조이게 입는 군복 때문에 신체 굴곡이 여실 없이 드러났다.
 ‘사교계에서나 어울리는 몸매군.’
 말과 대포가 분리되고 포병들이 산탄이 든 깡통을 쑤셔 넣는 것을 본 레흐는 대포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재수 없게 조금 앞에 있다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산탄에 맞으면 매우 불쾌할 것이다.
 대포를 조준하는 여소위의 눈빛은 매우 신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손으로 저 견고한 방진을 무너트린다면 그녀 또한 전공을 세우는 게 아니겠는가?
 조준이 끝나자 여소위는 송곳으로 점화 구멍을 쑤시고 물소 뿔로 만든 화약통으로 점화구에 화약을 채웠다.
 불붙은 화승이 매달린 T자형 막대를 가진 포병이 대기하고 있었고 화승의 끝에서 작게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발······.”
 적들의 방진에서 폭발과 함께 불길에 휩싸였다.
 지옥과도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갑작스러운 폭음에 놀란 말들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뭐?”
 레흐는 원인을 찾아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대포의 반대편에 보라색 견장을 단 장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히죽거리는 미소는 너무나도 불쾌했다.
 “제기랄, 마법장교 녀석이야!”
 낙마를 겨우 면하고 놀란 유니콘을 겨우 진정시킨 제로스 소위가 욕설을 퍼부었다.
 마법의 폭발과 기병들이 고작 50미터밖에 안 떨어진 상태였다.
 무리하게 마법을 시전한 마법장교 때문에 기병 중대 전체가 불길에서 레어로 구워질 뻔했기에 기병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불길 속에서 마치 콩을 볶는 것처럼 요란하게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죽은 적병들의 탄약 가방에서 탄약포가 폭발한 것이다.
 “저 썩을 놈이 전공에 눈이 멀어서······.”
 허탈감에 제로스 소위는 자신의 창을 땅에 박았다. 팔에 힘이 들어가기는커녕 저렸다.
 창촉이 녹슬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레흐 또한 허탈감에 손에서 힘이 빠질 지경이었다.
 “저 개자식!”
 포병 여장교도 욕을 퍼부었다.
 레흐는 본대로 복귀하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것이다.
 이제는 인간을 장작 삼아 불이 타올랐다.
 시체들의 기름이 섞이면서 작은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제길.”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훈장이 눈앞에서 날아갔다.
 “꺄악!”
 날카로운 여성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대포와 말을 다시 고정을 하려는 포병들에게 경기병 3기가 달려들었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는 몰라도 그것들은 가공할 속도로 말을 몰아서 대포에 매달리던 포병들을 베고 지나갔다.
 여장교는 몸을 날려 대포 밑으로 숨어서 목숨을 보존했다.
 휘하의 병사들이 쓰러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대포 아래에서 호신용 권총을 꺼내 경기병에게 쏘았고 1명은 거꾸러트렸다.
 레흐는 박차를 가했다.
 샤롯데는 주인의 뜻을 알아들었고 최고 속도로 달렸다.
 그는 능숙하게 창의 중간을 잡고 창대를 겨드랑이에 끼워 고정했다.
 겨드랑이가 아플 정도로 매우 강하게 눌렀다.
 다시 대포에 달려들기 위해 경기병들은 말의 속도를 줄였고 이쪽을 보지 않아 완벽하게 방심했다.
 순간, 그는 비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조준을 잘못할까 걱정했다.
 빗물이 속눈썹에 걸려 눈앞을 흐리자 그는 눈을 찌푸렸고 먹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움직이는 부엉이처럼 돌진했다.
 창촉은 정확히 그들 중 하나의 등에 작렬하였다.
 묵직한 느낌이 들기 무섭게 레흐는 겨드랑이의 힘을 빼고 손에 힘을 더욱 주어 창을 빼려고 했다.
 그 순간 엄청난 반동이 오자 그는 미련 없이 창을 버렸다.
 레흐는 경악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남은 적 경기병들을 지나 그대로 말을 몰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기병도를 뽑았다.
 동료를 잃은 경기병은 돌격 자세를 취했고 말의 속도를 높였다.
 레흐는 거칠게 말머리를 옆으로 돌렸고 이에 샤롯데가 불만 섞인 투레질을 했다.
 “금방 끝날 거야.”
 그는 나직하게 속삭이며 박차를 가했다.
 그러곤 상대방의 흉부를 향해 쭉 뻗은 돌격 자세를 취했다.
 2명의 기수는 말들이 점점 빨라지면서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레흐는 초조해졌다.
 ‘이대로 횡격막을 찌를까? 아니, 저놈이 내 말보다 먼저 달려서 속도가 빠르다. 그렇다면······.’
 그는 돌격 자세를 포기했다. 그리고 칼끝을 그의 왼팔로 향하게 했다.
 상대방은 역시 그의 횡격막을 노리고 들어왔다.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그는 죽는다.
 ‘지금!’
 그는 오른팔을 크게 위로 휘둘렀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나면서 상대방의 기병도 도신이 목표를 잃고 어지럽게 위로 올라갔다.
 레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는 상대방의 마지막 얼굴을 보고 상체를 왼쪽으로 틀고 위로 올라간 오른팔을 내리쳤다.
 내리치는 그의 팔 위로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그것은 화승 막대가 아닌 그의 몸에서 나는 것이었다.
 지친 샤롯데가 천천히 멈추었다.
 말은 급발진과 급정지가 힘든 동물인지라 속도가 느려지는 데 오래 걸렸다.
 “수고했어.”
 레흐는 애마에서 내려 소금기가 가득한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꽤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성공했다.
 요즘 그가 가진 자질이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이런 근접전에서는 여전히 우위를 차지했다.
 그는 척추까지 잘려 나간 상대방의 시신을 뒤로하고 말을 포획했다.
 제대로 된 준마를 두 마리나 포획했으니 포상금으로 금화 20닢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세 달치 가까이 되는 공돈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좋은 와인 한 잔 살 수 있겠군.’
 훈장을 얻을 기회를 날려 버린 그의 허탈감은 비 맞은 눈처럼 사라졌다.
 말을 포획한 레흐는 말고삐를 자신의 말고삐에 묶은 후 손수건을 꺼내 기병도 도신을 닦아 준 후 칼집에 집어넣었다.
 포병 중 살아남은 자는 여장교 혼자였다.
 그녀는 상황이 끝나자마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레흐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포와 말을 연결하기 위해 혼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아무리 비교적 가벼운 경포라고 할 수 있는 8파운드 포라고 해도 무게가 1.5톤이나 나가는지라 혼자서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레흐는 말에서 내렸다.
 “도와드릴까요, 소위?”
 “그것참 빨리 말하는군요.”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말하는 것치고는 매우 쌀쌀맞았다.
 그녀는 낑낑거리며 탄약 상자를 옮겼다.
 레흐는 아주 손쉽게 포가의 끝을 잡아 올려 말에 연결하자 여 소위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레흐를 보았다.
 “기사의 자질이군요?”
 그 말에 레흐는 피식 웃었다.
 기사의 자질,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의 자질과 다른 능력이었다.
 마나를 체내에 축적하고 운용할 수 있는데, 마나를 사용 시 일반인 이상의 능력을 쓸 수 있는 괴력을 사용할 수 있다.
 게다가 신체의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고 몸속의 있는 마나를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다.
 특히 칼에 마나를 옮기면 잘 부러지지 않으면서 면도날보다 날카로운 예리함을 가질 수 있는 칼로 운용할 수 있고, 특징으로는 마나를 운용 시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과거,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중요한 고급 인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화기의 발달로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어도 또 매우 뛰어난 무력을 가져도 권총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일반인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그저 그런 능력자였다.
 게다가 지금은 아예 기사라는 계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젠 쓸모없지요.”
 그 말에 여소위는 콧방귀를 뀌며 나머지 탄약 상자를 들었다.
 그 덕분에 레호는 그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멀리서 볼 때보다 더 깡말랐고 안색이 창백해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는 손바닥을 털었고 레흐에게 악수를 청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죽은 제 부하들 좀 옮기는 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러죠.”
 레흐와 여소위는 각자 시신들의 팔과 다리를 잡아 탄약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몇몇 뚱뚱한 인물들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일을 마쳤을 때쯤에는 여소위의 얼굴은 땀으로 가득해졌다.
 안색은 더더욱 창백해져 곧장 쓰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날씨가 덥고 게다가 비가 오고 있어 매우 습한 나머지 마나를 사용하는 레흐 또한 땀이 많이 났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레흐, 레흐입니다.”
 “레흐라······. 특이한 이름이네요. 제 이름은 루이즈예요. 나중에 구해 주신 은혜를 보상해 드리죠.”
 말을 마친 후 루이즈 소위는 말을 몰았다.
 레흐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자신도 복귀하기 위해 말을 움직였다.
 
 
 
 
 1장
 
 
 
 
 
 
 레기움 제2제국, 새로 개국된 지 6년밖에 안 된 신생국가이자 레흐의 새로운 조국이었다.
 과거 15년 전 까지만 해도 제1대 제국이 있었지만, 붉은 10월 혁명으로 공화정이 생기면서 11년간 공화국으로서 주변의 모든 왕정 국가의 적으로 전투(제1, 2, 3차 대[對] 레기움 동맹이 이때 속했다)를 벌였다.
 6년 전 전쟁 영웅이자 공화국의 종신 통령, 공화국의 수호자라 불리던 페로우 황제, 당시 장군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대관식을 치르고 레기움 제2대 제국을 선포했다.
 당연히 다른 유서 깊은 국가들은 페로우 황제를 ‘찬탈자’라고 부르며 제4차 대레기움 동맹을 결성하여 제국을 향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황제는 그 원정군을 간단히 물리치고 울름 원정을 통해 동맹군 중 가장 강력한 국가의 하나였던 루벤 제국의 주력 병력을 전멸시키고 대레기움 동맹에서 탈퇴하게 했다.
 전력의 커다란 축이던 루벤 제국의 탈퇴 이후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고 국지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황제 페로우는 제4차 레기움 제국 동맹(레기움이 제국이 되었기에) 수뇌부에 제국으로 향한 원정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대대적인 인구 조사를 단행했다.
 그리고 징병제를 통해 명목상 100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징병하기 시작했고 새로 군단 체제를 만들어 개편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레흐가 속한 5군단은 레기움 제국 동부 바르딧슈 지방에 주둔 중이었다.
 제국 동부에서 침입하는 적들의 소규모 국지 도발을 방어하는 것이 주 임무였고.
 얼마 전에 벌였던 전투도 그 임무 수행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지 3일 후 레흐는 오랜만에 포식했다.
 오리 통구이에 돼지고기가 들어간 약간 매콤한 스튜, 1킬로그램짜리 덩어리 빵, 치즈, 꽤 마음에 드는 레드 와인과 포트와인(와인을 발효시킬 때 브랜디를 섞어서 숙성시킨 독한 와인).
 그리고 럼주까지 이 모든 것을 그날 입대 동기 장교 2명과 함께 점심으로 먹었다.
 100만 대군이라는 엄청난 머릿수 때문에 예산은 빠듯했다.
 그 탓에 특히 장교들의 월급은 예전과 다르게 반수 이상이나 줄어들었고.
 과거에 있던 제도, 장교의 개인 사환 같은 제도는 사라졌으며, 장교들 공동 회비로 장교 식당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매우 비싼지라 소위, 중위같이 월급이 빠듯한 장교들은 엄두를 못 냈다(돈 많은 집안 출신이면 집에서 용돈을 부쳐 줬다).
 그나마 월급이 괜찮은 대위들부터 쓸 수 있는 전유물이 되었다.
 5군단은 일반 시가지가 아닌 야전에서 근무하기에 그들은 건초로 대충 만든 움막에서 생활 중이었다.
 행군 속도를 중시하는 황제의 명령으로 천막을 소지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여장교랑 거사일은 언제인데?”
 레흐의 설명을 들은 제로스 소위가 물었다.
 움집에 셋이 들어가지긴 하지만, 매우 작아 둘은 발을 문밖으로 뻗은 채 쿠션 삼아 놓은 건초 더미에 편안히 누워 음식을 먹고 있었다.
 “거사 일은 무슨, 소속 부대도 어딘지 모르고 그 뒤로 만난 적도 없는데.”
 “난 지난번에 제17경기병 연대 리나 대위랑 치렀는데.”
 칼 중위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작게 자른 빵 조각을 집어서 입에 넣었고 포트와인도 한 모금 마셨다.
 “넌 나보다 잘생겼으니 잘 먹힐 텐데?”
 실제로 레흐는 상당히 잘생긴 편에 속했다.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몸매.
 넓게 벌어진 어깨와 잘빠지고 말처럼 근육이 탄탄한 다리.
 황금빛이 감도는 붉은색 머리카락에 갸름한 볼살과 날렵한 턱선.
 오뚝 솟은 코와 차분하게 다물어진 입술.
 조금 작지만 총명하게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
 작고 매끄러운 이마와 강한 의지력과 추진력을 보여주는 짙은 눈썹.
 사실 그의 눈썹 안쪽 부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아래로 내려가 있어 무표정인데도 약간 화난 사람 같아 보이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그는 전형적인 잘생기고 날렵해 보이는 기병장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가 창기병이 아닌 가장 멋있다고 평이 자자한 경기병의 제복을 입었다면 더욱 돋보였을 거라 생각이 드는 레흐의 동료들이었다.
 “그 머리카락······. 폴카 출신 사람의 특징이었지?”
 다민족 국가인 레기움 제국에서도 빨간 머리는 그리 흔한 색이 아니었기에 그의 외모가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정확힌 우리 아버지 머리카락이야. 우리 아버지가 20살 때 제국으로 이주 오신 거거든.”
 “폴카 왕국이 언제 멸망했지? 한 40년 됐나?”
 “이제 딱 40년이군.”
 레흐는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조국······.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가 14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그를 낳고 죽었기에 아버지의 조국에 대해 들은 것이 없었다.
 그는 레기움 제국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공화정 때 보냈으며 레기움 제국 말만 쓸 줄 알지 폴카 언어를 전혀 몰랐다.
 그의 아버지는 폴카 왕국의 귀족이었다고 하던데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아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여튼 운도 좋아. 레흐 덕분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니까.”
 제로스 소위는 자신의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서 그 마법의 물을 맛보게 해 줘, 레흐. 이제 남은 것은 그 럼주뿐이니까.”
 레기움 제국군은 럼주를 마법의 물이라 불렀는데, 그 기원은 알 수 없었다.
 제로스 소위의 말에 레흐는 2리터짜리 럼주병과 1리터짜리 물병을 꺼내 들었다.
 오리와 돼지고기는 다 먹었지만 빵과 치즈는 아직 남았으므로 안주는 충분했다.
 “크흠.”
 독한 럼주의 향이 움막을 가득 채우자 칼 중위와 제로스 소위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럼주는 4분의 1만 따르고 물에 타서 마시는 건 어때? 대신 남은 것은 모두 공평하게 나누자고.”
 이미 와인과 포트로 얼굴이 달궈진 상태인지라 레흐의 제안에 모두 찬성했다.
 그것보다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와 술 덕분에 조금 더 아껴 먹고 싶었던 것이었다.
 “자네는 정말 운이 좋아. 자네 휘하 창기병들도 똑똑하고 내 부하들이 그러는데 네 부대는 염장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칼 중위가 럼주를 한잔한 후 빵조각을 입에 넣었다.
 염장 쇠고기와 염장 돼지고기는 군대에서 보급품으로 주는 고기들로 소금을 엄청 넣어서 만들기 때문에 매우 질기고 딱딱한 데다 엄청 짜다.
 게다가 만든 지 1, 2년이 지나면 아무리 염장이라도 상하거나 곰팡이가 피기 때문에 맛은 보장 못 했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염장 고기보다는 민간의 싱싱한 고기를 가장 좋아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달’했다.
 “맞아. 우리 12창기병 연대 2중대 3소대 애들은 신의 축복을 받았는지 항상 와인과 간식을 풍족하게 가지고 있더라고. 매일 아침 3소대의 야영지는 베이컨과 달걀부침 냄새가 진동하지.”
 제로스 소위도 거들었다.
 이에 레흐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확실히 그의 휘하 소대원 30기들은 걸리지 않고 자주 근방에서 먹을 것을 조달했었다.
 “다 내가 잘 가르쳤기 때문이야.”
 “하여간, 잔머리 하고는······. 걸리면 사형 아니면 벌당직을 서야 하니까 주의 좀 시켜. 요즘 헌병단에서 자네 소대를 감시 중이니까.”
 “알았어.”
 기분 좋게 술을 마신 후 그들은 아직도 남은 빵을 먹고 물을 마시며 잡담에 들어갔다.
 “드리지아군이 군복 색을 검정으로 바꿨다지?”
 “우리 경기병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죽였으니 복수하고 싶었겠지.”
 전투 도중 호위대와 떨어져 혼자 있던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경기병이 칼로 찔러 죽인 것은 매우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러면 우리 군은 다시 한 번 북쪽으로 가는 걸까?”
 “아니, 아직 군대를 재편 중이라서 당분간은 힘들 거야. 아마 5년 정도는 이렇게 국지전만 벌어질 것 같던데? 어디 100만 명이나 되는 군대를 단기간 안에 편성한다는 것이 쉬운 줄 알아? 거기에 그것들을 쓸 만한 병사들로 만들려면 시간이 더욱 걸릴 것이고. 그리고 이건 확실한 것이 아닌데, 3군단과 7군단 그리고 근위군단이 남동부로 배치되었다는군.”
 레흐의 말에 제로스 소위가 고개를 들었다.
 제국 남동부에 있는 국가는 로마니아 왕국이었다.
 1개의 국경에 2개 이상의 군단이 배치된 적이 없었으니 명백히 원정을 갈 것이 분명했다.
 “근위군단까지? 황제가 친히 로마니아로 출정 가는 건가?”
 “아니, 황제는 이번에 출정하지 않는다는데 아마 데네브 원수가 직접 원정을 떠날 거야.”
 데네브 원수는 2년 전에 복직한 전직 레기움 제1제국 근위 여단의 여단장이었던 사람이었다.
 한때는 영웅으로 불리던 남자였지만, 지금은 잊혀진 노병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가 활약할 때는 레흐는 어린 아기였으니 그와 동시대의 장교들은 그를 낙하산 인사쯤으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그의 인사 발령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그것도 근위대의 수장이니) 황제와 친분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가 원정을 준비하는 것이면 그 원정은 매우 위험하겠군.”
 “우리는 뭐, 5군단이니까 전혀 상관없지.”
 “그래, 그러니까 이번 원정을 떠나는 그들에게 명복을 빌어 주자고.”
 그들이 킥킥 웃으며 럼주를 들이켜는 사이 경기병 하나가 그들의 움막 앞에 말을 세웠다.
 “실례하겠습니다.”
 상병의 계급장을 가진 그가 움막 쪽으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들이밀자 레흐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뭐야?”
 레흐는 자신의 작은 만찬에 불청객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불쾌감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그 탓에 겁먹은 상병은 당혹감에 어쩔 줄 몰랐다.
 “죄송합니다, 소위님. 혹시 레흐 소위님이 여기 계십니까?”
 “어? 난데?”
 레흐는 잔을 든 손을 들어 보였다.
 “군단 사령부에서 명령입니다. 지금 즉시 가장 좋은 구두와 제복으로 갈아입고 군단 사령부로 오시라는 전갈입니다.”
 안에 있는 세 사람은 명한 표정을 지었다.
 “군단 사령부에서 나를?”
 “예, 그렇습니다.”
 “나만?”
 “예, 그렇습니다.”
 “왜?”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군단장님과 대면이 있을 예정이라는 것만······.”
 “이런 젠장! 제로스! 실과 바늘 좀!”
 레흐는 움막에서 나와 상의를 벗었다. 그의 제복은 겨드랑이 쪽이 터져 있었다.
 “칼, 내 모자 깃털 장식이랑 밧줄, 리본 장식 좀 확인해 줄래? 아, 고마워. 빌어먹을! 군단 사령부에서 날 왜 찾는 거지?”
 “드디어 네 소대원들이 군단장의 개인 식량까지 훔친 거 아냐?”
 제로스 소위는 레흐의 바지에 묻은 짚단을 털어내고 손가락으로 일일이 잡아서 떼어내 주었다.
 “그럴 리가? 만약에 그랬다면 헌병대 놈들이 들이닥쳤겠지. 칼, 내 모자 손질 끝났어?”
 “방금 시작했다.”
 “거기 모자 조금 찢어진 데도 손 봐줘.”
 레흐가 바느질을 다 마칠 무렵 칼 중위도 그의 모자 손질을 마쳤다.
 “제로스, 구두약 좀 빌려줄 수 있어?”
 “나도 별로 없어. 나중에 동화 5닢 줘.”
 “이런 빌어먹을 자식을 보았나? 오늘 처먹은 거 다 내놔!”
 “농담이야, 농담.”
 자신의 단화를 다 닦은 후 레흐는 자신의 온몸을 살펴보았다.
 “나 어때 보여?”
 “더러워. 그 제복 세탁을 마지막으로 한 지 얼마나 된 거야?”
 군데군데 꿰맨 자국과 오래된 얼룩, 불에 그슬린 자국, 바래다 못해 색이 검은 놋쇠 단추, 그리고 보풀이 있는 그의 제복은 전형적인 야지에서 뒹구는 돈 없는 장교의 옷 같았다.
 “다니엘 군단장은 기본 군기를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돈 없는 하급 장교에게 사령부로 오라고 했으니 군단장도 이해해 줄 거야.”
 레흐는 자신의 애마 샤롯데의 등에 안장을 올리고 올라탔다.
 “가지.”
 레흐는 말을 몰았다.
 상병은 앞장서서 그를 선도했다.
 말과 함께 리듬을 맞추면서 레흐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왜 나를 찾는 거지? 그것도 하필 이렇게 기분 좋게 점심을 먹었을 때 찾는단 말인가? 무슨 일이지? 혹시 정말로 우리 부대원이 군단장의 식량을 훔치려고 했나? 아니면 어디 송아지라도 훔쳤나?’
 
 ***
 
 이윽고 레흐는 마들렌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군단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지역 유지의 저택이 5군단장 다니엘 원수의 숙소이자 지휘소였다.
 “원수님을 만나면 가장 큰 목소리로 경례를 하도록.”
 살이 찐 원수의 부관이 동그란 안경을 반짝이며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초리는 진흙이 묻은 레흐의 단화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두꺼운 입술과 볼살이 심술궂게 뒤틀렸다.
 이는 레흐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상대방은 대위였기에 그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대위와 비교해 매우 더러워 보였으니까.
 “따라와.”
 그를 따라서 레흐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고 어떤 방에 도착했다.
 방 안에는 웃음소리가 들려왔기에 레흐를 더욱 긴장하게 했다.
 “잠깐만 기다려.”
 부관이 문을 두드리곤 안으로 들어갔다.
 방음이 잘되어 있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조금 뒤 문이 열리고 부관의 투실투실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들어오도록.”
 레흐는 깊은 한숨을 토해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작은 만찬이 열리고 있었다.
 다니엘 원수 말고도 근위대의 제복을 입은 남자, 같은 제복을 입은 여자, 그리고 지난번에 보았던 포병 소위가 앉아 있었다.
 근위대 제복을 입은 남자가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고 다니엘 원수는 그다음 자리였다.
 그들의 만찬은 막바지였는지 접시마다 음식 부스러기밖에 보이지 않았다.
 근위대 제복을 입은 남자가 마침 꿀 복숭아 껍질을 벗겨 입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레흐 소위입니다!”
 레흐는 발뒤꿈치를 부딪치고 거수경례를 했다.
 “오, 자네인가?”
 근위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복에 화려한 포도 넝쿨 금실 자수가 있는 것을 봐서 장군이 분명했다.
 그는 상당히 덩치가 큰 남자였지만 나이에 비교해 이마의 주름이 깊었다.
 또 왼쪽 볼에 깊은 흉터 자국 때문에 마치 인상이 험악한 죄수와 같았지만, 눈빛은 아주 선했고 총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짝였다.
 레흐의 머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그의 목덜미 살이 살짝 접혔다. 그 근위대 장군은 키가 매우 컸던 것이다.
 “이분은 근위군단의 군단장이신 데네브 원수이네.”
 다니엘 원수의 말을 레흐는 부동자세로 들었다.
 ‘데네브 원수? 근데 이자가 나를 찾은 건가? 무슨 이유로? 그런데 왜 우리 군단장이 이자에게 경어를 쓰는 거지? 아, 다니엘 원수는 제1제국 시절 근위대 출신 장교지.’
 “아니야, 편히 있어. 그것보다 내 딸을 구해 줘서 고맙네.”
 “딸 말씀입니까? 저는 따님을······.”
 레흐의 눈동자가 데네브 원수와 루이즈 소위 양쪽으로 왔다 갔다 했다.
 루이즈 소위의 머리카락은 원수와 같은 검은색이었다. 거기에 루이즈 소위의 얼굴은 뒤에 있는 엘프 여장군(그녀 또한 제복에 금실 자수가 있었다)의 얼굴과 닮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순수 엘프였고 루이즈 소위의 검은 머리는 데네브 원수의 머리색과 닮았다.
 “설마······.”
 “그래, 루이즈는 우리 부부의 둘째지.”
 데네브 원수는 루이즈 소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레흐는 엘프 여장군께 인사를 안 했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 순간 여장군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자신의 군도를 뽑아 달려들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군도를 잡아 레흐의 목을 향해 반원으로 크게 휘둘렀다.
 왼손으로 군도의 칼집을 잡은 레흐는 오른손으로 칼을 뽑았다. 하나 완전하게 빠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반쯤 뽑은 군도로 그는 자신의 목을 노리는 칼을 막았다.
 여장군의 군도와 레흐의 기병도가 부딪치면서 칼날에 깊은 톱니가 생겨났다.
 “역시······.”
 여장군의 작은 목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감미로운 목소리였지만, 그것을 감상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
 그녀가 부드럽게 손목을 돌려 군도를 바로잡는 사이 레흐는 기병도를 완전히 뽑아 그의 정수리를 노리고 내려오는 공격을 견제하기 위해 여장군의 얼굴을 향해 찌르기를 시도했다.
 그는 마나를 몸속에서 끌어올렸다.
 상대도 그와 같은 기사의 자질이었다.
 그녀의 견장 위로 아지랑이가 미약하게 피어오르는 것이 예리한 그의 눈에 띄었다.
 하지만 찌르기를 시도하는 그의 손목은 심하게 오른쪽으로 뒤틀렸다.
 레흐의 도신이 여장군의 군도와 수직으로 맞닿더니 레흐의 왼쪽으로 돌았다.
 그 힘에 레흐는 상체까지 한쪽으로 쏠리고 말았다.
 찌르기를 할 때 급한 나머지 안정적인 자세를 취할 수 없던 것이 화근이었지만, 엄청난 괴력이었다.
 자연스럽게 다시 손목을 돌린 그녀는 부드럽게 오른쪽으로 궤적을 그렸다.
 그대로 상체를 숙여 그것을 피한 레흐는 기병도를 뒤로 거두었다.
 ‘끝이다!’
 그는 흔히 부드러운 아랫배라고 불리는 하복부를 노리고 찔렀다.
 그의 머릿속은 그녀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로잡혔다.
 오랜 전장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아랫배가 완전히 비었고 자신의 기병도가 여지없이 그것을 가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희망 사항이었다.
 여장군은 그대로 자신의 손목을 돌려 군도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레흐의 군도 끝을 쳐낸 것도 모자라 그대로 한 바퀴 더 돌려 그의 손에서 칼이 빠져나갔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떨어져 나간 기병도는 도신이 정확히 절반으로 잘려 나갔고, 검 끝은 다니엘 원수의 접시 바로 옆에 박혔다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손잡이가 달린 부분은 벽면으로 부딪쳐 나뒹굴게 되었다.
 “······소개하지, 내 아내이자 참모장이기도 하면서 원수 호위대장인 마리 대장일세.”
 오랜 침묵을 깨고(목숨의 위협을 느낀 다니엘 원수의 얼굴은 창백했고 콧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데네브 원수가 말했다.
 하지만 레흐는 여전히 자신의 부러진 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군도를 칼집에 집어넣은 마리 대장은 흥미롭게 레흐를 보고 있었고, 루이즈 소위는 멍한 표정이었다.
 “레흐라고 했지?”
 마리 대장이 다시 한 번 침묵을 깼다.
 “루벤과 오스티아, 수보로프에 의해 3분할이 된 옛 폴카 왕국의 사람들, 그 사람들은 붉은 머리가 특색이지. 그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말을 타는 풍습이 있어서 기마술이 매우 능하다고 들었는데, 창기병인 것으로 봐서 맞는 것 같군. 폴카 왕국은 역사적으로 창기병으로 유명한 나라이기도 하고.”
 “제가 폴카인의 피가 섞인 것은 맞습니다.”
 레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제국에서 태어났고 저희 아버지가 폴카에서 제국으로 이주를 오신 것입니다. 저는 제국 사람입니다.”
 레흐의 말에 약간 속상한 감정이 담겨 있자 당황한 마리 대장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미안하네.”
 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고개를 숙여 사과하자 오히려 레흐가 당황했다.
 “검술은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건가?”
 “검술보다는 창술을 배웠고 특히 마상 창술을 배웠죠.”
 “그래서 검술이 뭔가 부족했군.”
 레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는 제국 근위대 대장이었고, 그가 검술을 깊이 배우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창기병이 칼을 쓸 일은, 한심하게도 창을 못 써서 이거나 난전이 벌어져 어쩔 수 없이 근접전을 위해 칼을 뽑을 때나, 아니면 창이 너무 깊숙하게 박힐 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창을 잘 사용하는 창기병은 칼을 쓸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레흐는 창술을 익혀 왔지 검술은 익히지 않았다.
 “자네와 한번 대련해 보고 싶군. 기사의 자질을 가진 창기병이라······. 호승심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참다못한 데네브 원수의 말에 마리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레흐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검이 부러진 것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 딸을 구해 준 것에 대해 매우 감사를 표하면서 내가 어떤 무언가를 보상해 주고 싶어서 여기에 부른 것이네. 난 자네를 중위로 진급시키고자 하는데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레흐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저, 전······.”
 레흐는 바로 ‘물론입니다.’라고 하려다가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진 다니엘 원수와 눈이 마주치고는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레흐가 우물쭈물하자 기회를 잡은 다니엘 원수는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희 군단 인사권은······.”
 “물론 자네에게 있지.”
 데네브 원수는 가볍게 그의 말을 자르고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받게나. 금화 50닢이야.”
 레흐의 눈이 터질 듯이 커지자 데네브 원수의 얼굴에 만연하게 미소가 감돌았다.
 “와인도 한 상자 주겠네.”
 “와인까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니엘 원수는 기분이 매우 안 좋아졌다.
 데네브 원수는 그가 젊은 장교 시절, 그가 매우 존경하던 군인이었고 그의 사령관이기도 했다.
 하지만 말도 없이 마리 대장과 함께 불쑥 찾아와 혼자 오찬을 즐기던 그의 즐거움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일개 소위를 데리고 오라고 하고 또 마음대로 진급을 시켜 주겠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방금 전에 죽을 위기에 처한 것도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존경하는 군인이라고 해도 이건 해도 너무했다.
 거기에 저 빌어먹을 소위 자식. 지금 눈앞에 있는 이익 때문에 아부하는 꼬락서니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 녀석은 눈치 없게도 데네브 원수가 새로 칼을 장만해 준다고 하자 허리를 연신 90도로 숙이고 있었다.
 게다가 저 해진 군복은 뭐란 말인가?
 거기에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럼주 냄새가 났다.
 대낮부터 술이라니!
 저 자식은 만취가 분명했다.
 ‘진급하고 싶단 말이지? 그래, 그러면 진급시켜 주지.’
 
 사흘 뒤 레흐 소위에게 명령서가 전달됐다.
 중위 진급과 함께 로마니아 왕국으로 원정을 떠나는 3군단으로의 전출 명령서였다.
 
 ***
 
 바솔로뮤 지방.
 레기움 제국 남동쪽의 지방으로 사시사철 온화한 날씨로 포도와 감귤류 과일, 무화과, 올리브기름이 특산품으로, 포도가 가장 유명했다.
 한 용기병(dragoon)이 포도 농장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농장의 언덕에 말을 탄 그 용기병은 동쪽 지평선 너머 일어나는 낮은 흙먼지를 보고 혀를 찼다.
 3군단의 행군 속도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기병인 그가 일주일 전부터 따라가기 위해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제3군단은 하루에 평균 45킬로미터라는 경이적인 행군 속도로 로마니아 왕국을 향해 행군 중이었다.
 3군단의 위치를 확인한 그는 수통의 마개를 열고 안의 내용물을 들이켰다.
 질이 낮은 럼이나 진이 아닌 근처 농장에서 구한 화이트 와인이었다.
 귀농한 전직 용기병 대령이 그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서늘한 지하 와인 저장고에서 꺼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칼칼한 목을 축이는 데 아주 좋았다.
 입안 가득 자두의 향이 퍼지면서 혀가 달짝지근해지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피곤함에 찌든 몸에 원기가 돋자 애마 샤롯데에게 박차를 가했다.
 샤롯데는 박차를 가한 고통에 불만을 가득 담아 투레질했지만, 속도를 높였다.
 녹색의 제복과 황동으로 만든 말갈기 장식이 있는 투구, 안장 우측에 놓인 기병총, 좌측 허리에 걸어 놓은 중기병용 외날 검, 그는 여지없이 용기병이었다.
 그는 한때 창기병 소대를 이끄는 장교였지만, 용기병으로 보직이 바뀌며 1계급 진급을 했다.
 23살인 그가 중위 계급을 단 것은 그의 나이 또래보다 1, 2년 정도 빠른 것이지만, 그 대가로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덕분에 고생 중이지.’
 그는 말을 타고 있는 와중에도 가래침을 뱉었다.
 다니엘 원수,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치졸한 자식이었다.
 무려 1시간 가까이 말을 탄 레흐는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걸었다.
 개인용 짐이 많아서 오랫동안 말을 타는 것은 무리였다.
 그 뻔뻔스러운 자식은 보기 좋게 자신을 골탕 먹였다.
 그가 군복을 다시 사게 했고 잘 쓰던 창을 보급소에 반납해야 했으며 사관학교에 들어간 이래로 같이 해온 기병도(마리 대장 때문에 이미 부러졌지만)는 용기병 복장 규정(곧게 뻗은 외날기병검을 착용해야 한다) 때문에 바꿔야 했다.
 그래도 데네브 원수 덕분에 다니엘 원수는 마지못해 무기상에게 소개서를 직접 써 주었고, 레흐는 매우 싼 값에 좋은 기병검을 살 수 있었다.
 길이 113센티미터, 무게 1.42킬로그램, 약간 무거운 감이 있지만, 검 끝은 갈수록 폭이 좁아 찌르기에 매우 좋았고 무게중심이 알맞아 손목 피로가 덜했다.
 그리고 두 줄 홈이 파인 검신, 그나마 이 홈으로 들어가는 쇠의 양이 줄었기에 가벼웠다.
 검 손잡이는 검은색으로 칠한 상아를 몸체로 회오리 모양으로 홈을 파고 놋쇠줄로 감아 놓은 장식이었는데, 손에 잘 잡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끄럼 방지도 되어 좋았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손목 가드였다.
 세 갈래의 바구니 포도 넝쿨처럼 휘어진 장식이 달린 가드는 은백색의 빛을 띠었다.
 그건 미스릴로 철보다 매우 구하기 힘든 광석 중에 하나였다.
 일반 철보다 매우 단단하지만 같은 질량에 비해 5분의 1 수준으로 매우 가벼워 무기를 소지하는 사람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들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근래에 들어 그것으로 머스킷총이나 대포를 제작하는 데 미스릴을 사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얼마 안 가 사라졌다.
 무게가 문제였다.
 가령 12파운드짜리 장거리포를 만든다 치면 대포의 무게는 포신만 1.6톤이었다.
 이것을 순수 미스릴이 아닌 합금으로 대포를 만든다고 해도 1톤짜리 대포가 만들어지는데, 이 대포는 너무 가벼워 대포를 쏠 때마다 반동이 심해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그 심각한 반동으로 조준을 아무리 잘해도 형편없는 명중률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미스릴 생산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가격이 비싸 군에 납품하는 단가가 맞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총포류 무기에는 각광받지 않았지만, 여전히 도검류 무기엔 여전히 각광받는 미스릴은 특유의 은백색 광택 덕분에 장식용으로서도 매우 훌륭했다.
 검신에 미스릴이 들어갔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검정과 은백색이 섞인 그의 기병검은 매우 아름다웠고 누구나 탐낼만한 무기였다.
 물론 심란한 그의 마음이 좋은 검 하나 가지고 좋아지지는 않겠지만.
 그는 사관학교에서 창기병 병과로 마상 창술은 열심히 배웠지만 용기병으로서 중요한 검술과 특히 사격술은 영 젬병이었다.
 한적한 가로수 길에 들어서고 얼마 안 가서 작은 역관이 나타났다.
 역마차가 잠시 쉬었다가 가는 곳이었는데, 장사가 시원찮은지 역관의 여주인(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이 손짓하며 살짝 윙크했다.
 하지만 레흐는 그녀의 팔짱에 끼워진 빵이 가득 담긴 빵 바구니보다 그녀의 가슴 쪽 리넨천 안에다 숨긴 2개의 크림빵에 관심을 가졌다.
 “오늘 구운 빵이에요. 양고기도 있어요.”
 레흐가 접근해 오자 여주인이 빵 바구니를 내밀었다.
 창문을 통해서 오븐 속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양고기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레흐가 자신의 투구를 벗자 황금빛이 살짝 감도는 붉은색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그는 땀에 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사관학교의 그의 동기 중 그보다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경기병 다음으로 가장 멋지다는 용기병 제복을 입으니 인물이 살아났다.
 “쉬어 갈 수 있을까요, 아가씨?”
 멍한 표정으로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한 여주인은 화들짝 놀랬다.
 “얼마나 쉬어 가실 건가요?”
 “오늘 밤이요.”
 어차피 오늘 저녁은 여기서 보내야 한다.
 여기 말고 가까운 곳에 지붕이 있는 숙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여주인은 팔짱을 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큰 가슴이 더욱 도드라지게 솟아올랐다.
 “흐음, 식비랑 숙박비는 비싼데······.”
 “아름다운 레이디가 운영하는 곳이라면 수도의 호텔보다 편할 거요.”
 레흐는 자신이 한 말에 약간 역겨움을 느꼈지만, 사실 이것이 먹히는지라 어쩔 수 없었다.
 그 증거로 그의 말을 들은 여주인은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래요. 그러면 쉬어 가세요. 오늘 손님이 없으니 편히 쉬게 해 줄게요.”
 여주인은 안으로 들어가고 레흐는 자신의 애마 샤롯데를 묶은 후 역관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밤은 아주 편하게 보낼 것이다.
 
 ***
 
 하루가 지난 후 새벽, 3군단 소속 메를린부르크 사단의 병사들은 기상을 알리는 나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수가 끝난 밀밭에서 수백의 인물들이 일어나 모포를 동시에 접는 것은 장관이었다.
 낮에는 무더웠지만 밤에는 찬바람과 한기가 땅바닥에서 올라와 다들 이를 딱딱거리며 점호를 받았고 당직 사령은 초병들로부터 안전 점검에 임했다.
 이윽고 점호가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급식소로 향했다.
 아침은 여느 때처럼 딱딱한 건빵에 따뜻한 멀드 와인(향신료를 넣지 않고 설탕만 넣은 것)과 옥수수나 콩가루로 만든 수프가 전부였지만, 뼛속까지 차가워진 몸을 데우기에는 좋았다.
 따뜻한 멀드 와인은 감기 예방에도 아주 좋았다.
 각자 넘칠 듯이 가득 담긴 수프와 멀드 와인을 들고 겨드랑이에 작은 접시 크기인 평평한 건빵을 끼우고 자리로 이동하여 아침을 먹을 무렵, 말을 탄 한 용기병 장교가 후방에서 나타났다.
 보초를 서는 병사들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구역 당직 사관과 간단히 이야기한 후 통과시키자 관심을 끄고 식사 교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그들을 지나가며 용기병 장교는 치즈와 얇게 썬 양고기를 사이에 끼운 빵조각을 베어 먹었다.
 빵을 다 먹자 그는 탄약 가죽 주머니에서 삶은 오리 알을 꺼내 투구에 부딪쳤다.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다.
 오리 알이 깨지자 그는 흰색 가죽 장갑을 벗어 껍질을 벗기곤 한입에 입속으로 쑤셔 넣었다.
 “루헬 여단은 어디 있으려나?”
 입안 가득 누린내를 풍기며 그는 길 좌우에 앉은 병사들을 가로질러 갔다.
 루헬 여단은 기병여단으로 레흐의 새로운 부대였다. 생각보다 루헬 여단을 찾는 게 힘들었다.
 3군단은 제국을 지키는(재편 중이지만) 11개의 군단 중 가장 규모가 큰 15만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약 1시간을 헤맨 끝에 기병여단을 찾을 수 있었다.
 약 1,500기. 기병여단이 확실했다.
 그는 그들 중에 용기병 연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의 제복과 레흐가 입은 제복이 같았기 때문이다.
 레흐는 식사 중이던 중위에게 연대 본부가 어디 있는지 물은 후 그곳으로 갔다.
 천막에 앉아 있던 용기병 대령에게 경례하곤 명령서를 전달했다.
 베스라이다우 대령은 매우 덩치가 큰 호감 가는 남자였다.
 비록 그의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구였지만, 순박한 얼굴로 물끄러미 그를 살펴보는 눈동자는 호감으로 가득했다.
 “레흐 폰 레오폴트 소위라······. 창기병인 그대가 왜 여기에······. 음, 5군단장님이 특별히 천거했으니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순진한 걸까? 멍청한 것인가? 아니면 선천적인 낙천주의자인가?
 레흐는 아무런 의심 없이 말하는 그를 내리깔고 보았다.
 베스라이다우 대령이 작게 한숨을 쉬며 ‘이런 인재를 그런 곳으로 보내야 하다니······.’라고 작게 중얼거렸지만, 레흐는 듣지 못했다.
 명령서를 한쪽으로 밀어 놓은 대령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레흐에게 식사를 권했다.
 “아침은 먹었나? 아직 아침 안 먹었으면 같이 식사하지.”
 ‘고맙습니다만, 괜찮습니다.’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마침 대령의 사환이(돈이 있는 장교는 여전히 사환을 두었다) 가져온 커피와 베이컨, 그리고 베이컨 기름으로 튀긴 반숙 계란 프라이. 그것도 뒤집지 않고 노른자를 살려 둔 걸 보는 순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함께 근사한 아침 식사를 하며 베스라이다우 대령은 레흐에게 루헬 여단에 소개해 주었다.
 여단 병력 1,900명.
 상당히 많았다.
 용기병 연대가 7백 기로 가장 많았고 흉갑기병 연대가 3백 기, 창기병 연대가 3백 기, 경기병 연대가 4백 기 기마포병 연대가 6파운드 포 20문 2백 기였다.
 “기병여단이 포병도 운용합니까?”
 “우리 루헬 기병여단은 전위 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지. 그렇기에 전장에 유리한 고지에 미리 점령을 하고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요하지.”
 냅킨으로 입을 닦은 대령은 보기보다 우아하게 식사를 마쳤다.
 레흐는 포크로 베이컨을 3개 집어 한입에 넣었다.
 그는 이미 베이컨을 10개 먹었고 대령은 24개나 먹었다.
 “하여튼 잘 왔네. 로마니아 왕국 놈들은 우리의 밥이니까 비교적 안전하게 전공을 세울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대령의 가슴에 명예 훈장이 유독 반짝여 보였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지원할 오스티아 제국이거든. 들리는 정보에 따르면 그놈들이 로마니아 왕국을 지원하기 위해 20만이 넘는 대군을 파견할 예정이라는군.”
 “20만 대군이면 많은 거 아닙니까? 3군단과 7군단 근위군단의 숫자를 합치면 30만 명이긴 하지만 로마니아 정규군 또한 30만 명이지 않습니까? 예비역들이나 동원령까지 내린다면 훨씬······.”
 “그래그래, 그들만의 숫자를 합치면 족히 50만에서 60만은 족히 모이겠지. 로마니아 왕국은 그리 작은 나라가 아니거든.”
 “그런데 이 위험한 원정을 복직한 지 얼마 안 된 원수에게 맡긴단 말입니까?”
 근위 군단장인 데네브 원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베스라이다우 대령은 불편한 듯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단단히 미······.”
 레흐가 반역의 죄를 범하려는 순간 거친 말의 투레질 소리가 났다.
 발버둥 치는 발굽과 익숙한 울음소리를 보아서 그의 애마 샤롯데가 분명했다.
 레흐는 무슨 일인가 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남자들의 웃음소리와 그의 애마 옆에 끙끙거리며 누워 있는 한 남자, 상황을 이해한 그의 얼굴이 벌게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레흐는 평소답지 못하게 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분노로 인해 그의 볼살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얼른 애마의 고삐를 잡아 목을 쓰다듬어 주며 귓속말로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샤롯데가 넘어진 자를 뒷발로 차려고 했기 때문이다.
 주인이 아닌 자가 자신의 등에 탄 것 때문에 화가 난 샤롯데에 의해 넘어진 듯했다.
 “하하, 역시 폴카의 말답게 주인을 가리네.”
 넘어진 자는 레흐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밀짚을 털었다.
 “폴카?”
 레흐는 눈을 치떴다.
 ‘이 자식이 그걸 어떻게 알지?’
 폴카는 둘째 치더라도 그 지방의 말은 이 제국에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
 “색상은 검정에 네발에 흰색 털이 자라나는 것이 특징이고 몸집이 큰 준마와 같은 키지만 다리와 목, 몸통 머리가 좀 더 가늘고 날렵하게 생겼지. 몸무게는 고작 350에서 400까지밖에 안 되고, 아무거나 불만 없이 잘 먹고, 최고 속도는 일반 준마들에 비교해 느린 75킬로미터지만 3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거뜬히 달릴 수 있고, 평균 순항 속도는 시속 35킬로미터. 내 말이 맞지?”
 그렇게 말하는 그 용기병 소위의 말에 레흐는 아무 말 없이 노려보았다.
 그는 매우 부자로 보였다. 그의 제복은 일반 울이 아닌 매우 비싼 비단으로 제작된 제복이었다.
 “전 그런 거 잘 모릅니다.”
 “내가 말에 대해서 조금 박식하거든. 하여튼 네 말을 함부로 타서 미안해. 내 이름은 다니엘, 다니엘 폰 루드비히야.”
 그는 악수를 청했다.
 깨끗하고 흰 손이었다.
 한없이 선량해 보이는 그 눈동자에 심지어 상관에게 함부로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사과를 하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가 싶었지만, 이내 다니엘이라는 이름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악수를 받아 주었고, 다니엘 소위의 얼굴은 홍조로 밝게 물들었다.
 “하지만 책으로만 보던 말을 보게 될 줄이야! 내가 장담하건대 이 말은 제국에서 하나뿐인 말이야! 남의 말을 타는 것은 매우 못되고 무례한 짓인 것은 알지만 참을 수가 없었어.”
 호들갑을 떨며 그의 애마를 칭찬하는 다니엘 소위의 말에 레흐는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그러나 그의 말에 마음속에 있던 분노가 누그러지면서 눈빛이 매우 부드러워졌다.
 “미안. 내가 실례했군. 귀하의 성함이?”
 “레흐, 레흐 폰 레오폴트 그리고 이 녀석은 샤롯데.”
 샤롯데는 레흐의 말에 작게 투레질했다.
 “또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켰군, 소위.”
 베스라이다우 대령은 느릿하게 말했지만 비꼬는 억양이 가득했다.
 그는 다니엘 소위를 매우 싫어하는 눈치였다.
 “1대대 2중대 2소대로 그를 데리고 가 부대를 소개해 주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불쌍하다는 듯이 레흐를 보았다.
 레흐는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반면 다니엘 소위의 얼굴이 매우 환해졌다.
 “2중대 1소대원들이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그 녀석들 장교 없이 전투를 치를까 봐 조마조마했거든요.”
 “전투는 언제 벌어지는지 아는가?”
 레흐의 물음에 다니엘 소위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마 내일이면 전투에 참여할 것입니다. 내일부터 국경을 넘을 테니까요.”
 그 말에 레흐는 잠시 멈칫거렸다.
 ‘내일? 내일이라고? 생판 처음 보는 부대원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야 한단 말인가?’
 “그리 큰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2소대는 평판이 그리 좋은 부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겁쟁이들은 아닙니다. 소위님이 없는 사이 클린든 중사가 소대장 업무를 대신 수행했었는데 이왕이면 그에게 적잖은 치하를 해 주십시오. 클리든 중사가 고생했거든요.”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1중대 2소대에 도착했다.
 레흐는 자신의 짐을 내리고 제복을 말끔히 정리했다.
 이미 그가 도착했다는 것을 대대장과 중대장이 알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인사드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행히 대대장인 크라우츠 소령과 중대장인 요들 대위는 그렇게 나쁘게 생긴 사람이 아니었고 그들은 진심으로 그를 반겼다.
 하지만 대대장인 크라우츠 소령은 약간 의심스러운 투로 말했다.
 “기마포병 연대에 새로 들어온 여장교도 그대와 같이 5군단 출신이라는데 왜 자네는 그 여자보다 이틀이나 늦었나?”
 “예?”
 레흐는 어리둥절했다. 그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단 말인가?
 “서로 따로 왔으니 그건 그렇다 치고, 하여튼 그대는 부대원들을 잘 관리하게.”
 어깨를 두드려 주는 크라우츠 소령 뒤로 레흐가 경례했다.
 레흐는 잠깐 그 포병 여장교에 대해 생각했지만 이내 지워 버렸다. 그의 부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2소대 집합!”
 다니엘 소위의 고함에 몇몇 용기병들이 마치 좀비처럼 어기적어기적 걸어왔다.
 레흐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색이 바래다 못해 검게 변한 황동 투구, 대충 아무렇게 걸친 군복, 더러운 오물이 묻은 장화, 심지어 몇몇은 무기까지 휴대하지 않았다.
 “수고하십쇼.”
 레흐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사라지는 다니엘 소위에게서 웃음 참는 소리가 들렸다.
 레흐는 말을 열지 못했다.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베스라이다우 대령이 왜 자신에게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여단에게 가장 문제가 많은 소대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그는 다니엘 소위에게 한 방 날려 주고 싶어졌다.
 그 자식은 이 모든 것을 알고서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행동했으니 그를 엿 먹인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수고하십쇼라니? 건방진 소위 새끼 같으니······.
 “중사 클리든입니다.”
 수염이 듬성듬성 난 뚱뚱한 남자가 경례했다.
 “이게 무슨······.”
 레흐는 너무나도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소대의 숫자는 그와 클리든 중사를 제외하고 30명이었다.
 제대로 갖춰 입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클리든 중사도 그랬다.
 “클리든 중사.”
 “예.”
 “이게 전장에 나가는 군인들이 맞는가?”
 사실 그가 예전에 지휘하던 창기병 소대도 그리 군기가 잡힌 부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막무가내인 부대는 아니었다.
 그들은 할 때만큼은 확실하게 하는 부대였고, 무구 또한 언제든지 정비해서 사단장의 시찰이 와도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는 부대원들이었다.
 “아마 맞을 겁니다.”
 레흐는 눈을 부릅뜬 채 클리든 중사를 노려보았다.
 뻔뻔한 작자였다. 오히려 ‘네가 뭔데 우리 애들 가지고 뭐라 하는 건데?’라는 도전적인 표정이었다.
 레흐는 분노로 인해 얼굴 볼살이 실룩거렸다.
 “1시간 뒤에 다시 정렬하는데 이와 같은 모습이 한 번 더 내 눈앞에 펼쳐진다면 그 뒤로 그대의 안전을 장담 못 하네.”
 레흐는 이런 부류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자는 사회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게으르고 스스로 자립하려는 부류가 아니었다.
 이자는 군대에 들어오지 못했다면 지독한 무기력증, 도박에 빠져 술집을 기웃거리는 술주정뱅이로 살거나(레흐가 오기 전까지 술을 마신 게 분명했다) 도박이나 하는 백수건달이었을 것이다.
 아마 소 대신 말로 밭을 갈던 아버지의 밑에서 말을 몇 번 타 본 재주로 운 좋게 기병이 된 것이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레흐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지었다.
 그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말이었던 마렉(수놈)과 카밀라(암놈)를 이끌고 쟁기로 여러 번 밭을 갈고 감자와 밀을 심고 농사를 지었다.
 그 녀석들은 늙어 죽었고, 자신은 새끼인 샤롯데를 이끌고 기병이 된 것이다.
 레흐는 그를 한동안 쏘아보고 난 후(그는 무슨 이유인지 여유만만이었다) 애마를 이끌고 머물 자리를 골랐다.
 그는 공병대 장교(그는 마음씨가 좋았다)를 통해 작은 굵기의 통나무를 구해 기둥과 대들보를 만들고 얇은 널빤지를 덮고 그 위에 풀이 깔린 흙을 그대로 덮었다.
 그 혼자 잘 곳이기에 크기가 작아 공사가 간단했고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활용한 것인지라 시간은 고작 1시간도 안 걸렸다.
 1시간이 지난 것을 회중시계로 확인한 레흐는 다시 그들이 도열한 곳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명백한 명령 불복종 행위였고 소대원들 전체가 사보타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겨우 병사들 따위에게······.’
 화가 난 레흐는 근처에 지나가던 하사 1명을 불렀다.
 “클리든 중사는 어디 있나?”
 “저쪽 호두나무 밑에서 자고 있습니다.”
 레흐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 하사 말대로 클리든 중사의 튀어나온 배가 하늘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레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그대로 쇠징이 박힌 장화를 신은 오른발로 그 빌어먹을 돼지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커억!”
 비명 소리와 함께 그는 약 1미터 정도 옆으로 나뒹굴었다.
 “일어나라, 중사.”
 레흐의 왼손이 기병검의 검집을 잡았다.
 “시발, 뭐야?”
 아직 선잠이 덜 깼는지 클리든 중사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일어나라, 중사.”
 어디서 났는지 몰라도 독한 럼주의 냄새가 레흐의 코를 찔렀다.
 클리든 중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분노 담긴 눈동자가 레흐를 응시하자 분노가 끓어올랐다.
 부사관 나부랭이 따위가 장교에게 대놓고 대들다니?
 “난 너에게 1시간 안에 병사들이 복장을 갖춰 입고 도열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더군. 그리고 명령을 이행할 네 녀석은 여기서 쳐 자고 있고.”
 “중위님, 우리끼리 있을 때는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고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왜 중위님 혼자 나서서 그러십니까?”
 레흐는 기가 막혔다.
 그렇다. 이 녀석들은 어찌나 한심한지 장교들이 포기한 부대였던 것이었다. 이런 자들을 데리고 과연 전장에 데리고 갈 수 있을까?
 마주 보고 있는 적병들이 과연 뭐라고 비웃을까?
 폐잔병과 다를 바 없는 저 상태를?
 이 녀석들은 위생 관념도 없어 보였고 규정은 그저 허울뿐이었다.
 “중사,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명령을 이행하라.”
 “아, 시발.”
 클리든 중사는 위협적으로 근처에 있던 양동이를 집어 던졌다.
 그것은 바닥에 튀면서 아주 요란한 소리가 났고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무슨 일인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사관학교를 졸업한 어린 장교들이라면 몰라도 이미 전장에서 5년이나 보내 잔뼈가 굵은 레흐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것이었고, 오히려 레흐의 화만 돋웠다.
 “중위님은 전장에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클리든 중사의 말에 레흐는 잠시 머뭇거렸다.
 전장에서 난전이 아니고서야 죽을 일은 없다.
 그런데 저렇게 나온다는 것은 뒤에 있는 아군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명백한 협박이었다.
 “적어도 게으르고 무능하고 똥배가 튀어나온 술에 취한 멍청한 자식에게 죽을 일은 없지.”
 “내가 한마디만 하면······.”
 그는 이런 부류를 잘 알았기에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그래서 그의 주먹이 그의 턱을 가격했다.
 클리든 중사는 보기 좋게 옆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몰라도 일단의 용기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레흐의 소대원들이었고 무기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기를 쓰지 않으리라는 것은 레흐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인다면 그들은 전부 교수대로 끌려갈 테니까.
 아마 옷을 입는 부분만 집중적으로 구타할 것이다.
 장교가 병사들에게 얻어터진 것은 명예가 추락하는 것은 둘째 치고 장교로서의 지휘력이 형편없다는 걸 증명한다.
 무능한 장교 낙인이 찍히기 때문에 구타당한 장교는 절대로 자신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이놈들은 아마 그것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죽······.”
 “덤벼라.”
 레흐의 몸에서 자그마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뇌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심장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했으며 흰색 가죽 장갑을 낀 주먹이 으드득 관절음이 날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자, 잠깐!”
 사색이 된 클리든 중사가 허둥지둥했지만 레흐는 이미 가장 가까이 있는 병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
 
 40분쯤 시간이 지난 것을 회중시계로 확인한 레흐는 피로 검붉게 물들어진 흰색 가죽 장갑을 벗었다.
 그의 주변에 31명의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 화가 더 났지만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이 나았다.
 그는 투구를 벗고 땀에 젖어서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가지런히 넘기려고 했지만 머리에 바르는 기름이 없어서 머리가 불꽃처럼 솟아올라 보였다.
 그러나 이마를 머리카락으로 가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죽지 않고 뼈가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했다.
 물론 멍과 내상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지만, 장교가 병사들을 구타하는 것은 용인해 주는 것이 레기움 제국군이었기 때문에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부에선 병사들의 인권 존중을 위해서 구타를 없애자고 하지만 레흐는 말을 안 듣는 놈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클리든 중사.”
 “예······.”
 레흐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지방 덩어리의 옆구리를 발로 툭툭 건들었다.
 단추가 뜯어져 나간 제복 안에 입은 하얀 셔츠는 땀으로 젖어 살이 다 비쳐 보였고 그곳을 발로 건드니 진흙과 피가 섞인 오물이 도장처럼 선명하게 찍혔다.
 더위에 그는 빳빳하게 솟은 카라를 묶는 작은 고리를 풀고 넥클로스(남성의 장식용 목도리로 폭이 넓은 스카프 모양의 천 조각)를 풀었다.
 넥클로스는 목을 완전히 둘둘 감는 것이기 때문에 더운 날에는 매우 답답했다.
 “내가 말할 때는 항상 크게 대답해! 알겠어?”
 목소리에 마나를 담고 귀에 바짝 대고 말하자 지방 덩어리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미 이 일은 유명해져서 주변에 다른 소대들도 심지어 다른 중대, 대대들도 구경하는 중이었다.
 “총원, 기상! 기상! 제2소대! 기상! 3열 횡대! 움직여! 빨리!”
 정신을 차린 소대원들이 움직였고 화가 바짝 난 레흐는 더 큰 소리로 악을 썼으며 목에 핏대가 섰다.
 “대답 안 하나? 이 쓰레기들아!”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도열했고 레흐는 다시 한 번 마나를 움직였다.
 “제2소대! 보고!”
 “총원 차렷! 중사 클리든 외 30명! 도열하였습니다! 총원 31명 부재 무! 현재원 31명!”
 “소대 그대로 들어! 1시간 후 다시 도열한다. 그때까지 복장 확실하게 하고 씻은 다음 무구를 확인한다. 이번에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의 안전은 장담 못 해!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정확히 1시간 20분 후 레흐는 복장이 완벽하게 갖춰진 자신의 소대원들을 사열할 수 있었다.
 레흐는 병사들의 따귀를 때리고 복부에 주먹을 갈기면서 그들의 복장 상태를 일일이 지적했다.
 “이게 면도한 거야? 듬성듬성하잖아! 장화의 광택이 이게 뭐야? 다시 닦아! 크로스 벨트도 마찬가지! 이거 원래 흰색 아냐? 백토로 문질러서 하얗게 만들어! 너도! 너도! 네 투구 상태가 이게 뭐야? 깃털 장식, 말갈기 장식 다시 해놔! 너, 그 칼 마지막으로 뽑은 게 언제야? 한번 뽑아봐! 이봐, 내 말 안 들려?”
 그날 연대에서 레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많은 이들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 후 그가 속한 1대대에서 신임 용기병 중위가 엄청난 실력을 갖춘 자라는 소문이 났다.
 
 ***
 
 3군단은 그날 행군을 개시하지 않았다.
 국경과 고작 3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지만 아직 국경을 넘으라는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3군단은 행군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시간을 하루 더 가질 수 있었다.
 “그러면 수고하십쇼.”
 레흐는 다니엘 소위를 자신의 움집에서 내보냈다.
 다니엘 소위는 겉보기엔 착한 사람 같았지만 자신을 연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본성이 드러나는 순간 특유의 깔보는 듯한, 눈빛과 목소리는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그냥 예의 바른말 같았지만 말꼬리의 톤이 높아 신경에 거슬렸다.
 그가 나가자 레흐의 애마 샤롯데가 투레질하며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지난번에 불쾌한 일을 샤롯데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말은 6개월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데다 샤롯데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기에 다니엘 소위의 시선을 외면했다.
 거기에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다니엘 소위가 레흐의 말을 볼 때마다 탐욕스러운 시선을 감추지 않고 노려본다는 것이었다.
 샤롯데가 앞발을 쳐들고 울부짖었다(위협의 표시).
 “알아. 나도 저 녀석 싫어.”
 레흐는 자신의 애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다니엘이 장교들을 대표해서 장교들의 공동 식당을 사용하지 말 것을 통보했다.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중위님은 창기병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더군요. 그것 때문에 다들 많이 불편해하더군요.”
 일종의 텃새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장교 공동 식당의 회비는 무려 금화 4닢, 그의 월급이 금화 7닢인데 너무나도 비싼 식비에 레흐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그것은 곧 그가 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을 눈치챈 다니엘이 그를 깔보았다.
 속이 뒤틀린 레흐는 병사 1명을 시켜서 보급소에서 식량을 배급받아 오게 했다.
 하루 정도 숙식하는 것 때문인지 보급관은 갓 잡은 수소의 쇠고기 300그램을 보내 주었다.
 내장이나 뼈가 섞인 것이 아닌 순수한 살코기 등심 부위였다.
 그것 말고도 양파와 소금에 절여서 말린 베이컨 조각도 받았고 버터와 감자도 있었다.
 그는 프라이팬을 꺼냈다.
 그는 짐을 지고 다닐 때 프라이팬을 가지고 다녔다.
 샤롯데가 아침에 싸고 낮 동안 말라붙은 말똥으로 불을 피운 그는 프라이팬에 버터를 올렸다.
 프라이팬이 달궈지고 버터가 녹는 사이 그는 감자를 얇게 잘랐다.
 버터가 녹자 감자를 프라이팬에 넣어 구웠다.
 그사이 양파와 베이컨을 매우 잘게 썰었다.
 나이프로 감자를 찔러 감자가 익은 것을 확인한 후 레흐는 양은으로 만든 군용 접시에 옮겼다.
 말똥을 더 넣어 화력을 높이고 쇠고기 덩어리를 그대로 올렸다가 20초 정도에 뒤집었고 다시 20초 뒤에 뒤집었다.
 레어로 구워진 쇠고기는 같은 접시에 옮겨졌다.
 쇠고기 기름과 버터기름이 남은 그 프라이팬에 양파와 베이컨을 올렸다.
 양파와 베이컨을 쪼그라질 정도로 조리한 후 그는 와인 한 병을 땄다.
 데네브 원수가 그에게 선물로 준 마지막 와인이었다.
 ‘이제 남은 건 이거 하나뿐이군.’
 레흐는 와인을 네 잔 정도 되는 양을 프라이팬에 넣고 불의 강약을 조절하며 와인을 조렸다.
 처음보다 반 정도 줄어들자 레흐는 다시 쇠고기를 올려서 익혔다(그는 미디움을 좋아했다).
 고기를 접시에 담고 프라이팬에 남은 소스를 고기에 부어 주었다.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꺼내 들었다.
 “크흠, 맛있는 냄새군.”
 헛기침하며 접근하는 이는 요들 대위였다.
 그의 접시에는 완두콩과 감자튀김, 그리고 찹 스테이크가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재산이 많은 그는 개인 사관을 두고 있었기에 혼자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직접 만든 건가?”
 “예.”
 레흐는 순순히 자신의 작품을 줄 생각이 없었기에 큼지막하게 고기를 썰어서 입속으로 쑤셔 넣었다.
 “어디서 요리를 배웠지?”
 “전 원래 요리를 좋아했고 요리사가 되기 위해 얼마 동안은 레스토랑에서 조수로 일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장교가 된 거지?”
 요들 대위가 물었다.
 “징집관이 왔습니다. 말을 내놓고 병으로 끌려가든지, 말과 함께 지원해서 장교로 임관하든지 두 가지를 선택하라고 하더군요. 저는 어릴 때부터 말을 타 봤고 글을 읽을 줄 알고 수학을 배운 적이 있었던지라 징집관이 눈독을 들였거든요.”
 레흐는 굳이 어릴 때 아버지께 마상 창술을 배웠다는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있네.”
 “말씀하십시오.”
 “되도록 다니엘 소위와 다투지 말게.”
 “예?”
 의외의 말이 나왔던지라 레흐는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다니엘 그 자식은 몰라도 다니엘 폰 루드비히라는 이름의 비중은 매우 강하다네. 루드비히 가문은 신제국을 건설할 때 개국 공신 가문으로 유명하거든. 중앙 정계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후작가라는 직위도 가지고 있지. 그것을 등에 업고 다니엘 소위는 자신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장교들을 가문의 권력으로 한직으로 좌천시키거나 부대 내에서 따돌리는 방식으로 스스로 물러나게 하지. 자네가 데리고 있는 소대원들은 명목상 자네의 부대원들이지만 실상은 다니엘 소위의 휘하 건달들이나 다름없어. 연대장은 모르지만 대대장은 그의 눈치를 보고 그의 명령을 아주 잘 따르지.”
 레흐는 기가 막혀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고생을 전혀 해보지 않은 손이었군요.”
 레흐 본인은 오랜 시간 동안 단련하다 보니 손바닥 가죽이 두껍고 굳은살로 가득했다.
 반면 다니엘 소위의 손은 매우 곱고 귀족 가문의 여식의 손처럼 보드라웠다.
 “루드비히 가문은 과거에는 대부호로 유명했고 지금은 귀족의 직위를 가지고 있으니 그 위세는 아주 대단하지. 분명 다니엘 그놈은 어릴 때부터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만 하고 살았을 거다.”
 “그런데 중대장님, 중대장님께서 왜 이 이야기를 저에게 해 주시는 것입니까?”
 그 말에 요들 대위는 헛기침하며 다른 곳을 응시했다.
 “그냥 자네가 불쌍해서네. 나란 놈은 힘 있는 그놈에게 숙일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저항하고 싶었네. 내 분명 말하지만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서 다니엘 저 자식은 군단장, 사단장은 아니더라도 연대장까지는 30세가 되기 전에 될 것이라 보네.”
 레흐는 말없이 먼 곳을 응시했다.
 누구는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말을 이끌고 농사를 짓다 전장에서 4년 넘게 보내며 이제 겨우 중위가 되었건만.
 누구는 부모 잘 만나 가문과 돈을 이용해 순식간에 고속 승진하고.
 ‘마음에 안 들어.’
 기분이 꿀꿀해진 레흐는 술이나 한잔하고 싶었다.
 그런 레흐의 기분을 아는지 요들 대위 또한 한숨을 쉬었지만, 이내 무엇인가 생각났는지 레흐의 팔뚝을 잡고 흔들었다.
 “내가 깜빡했군. 사실 내가 온 이유는 오늘 저녁에 사관 무도회가 열릴 예정 때문이네. 참가하겠나? 여군 장교들과 근처 지역 유지들의 딸들도 참가한다네.”
 “정말입니까?”
 레흐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럼. 내일 진군을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으니까, 마지막으로 다들 즐기고들 할 거야. 그러니 그대도 준비하게.”
 요들 대위는 그 말을 마치고 자리를 옮겼다.
 레흐는 그사이 다 식어 버린 식사를 마친 후 자신의 제복을 살펴보았다.
 잡풀이 묻은 것 말고는 상대적으로 깨끗했다.
 장화도 그리 더럽지 않았고 박차는 광택이 나기까지 했다.
 그는 근처 개울가로 몸을 움직여서 세수했다.
 잠시 후 개울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이마에 있는 자그마한 여드름이었다.
 여드름이 꼴 보기 싫었던지라 여드름을 짜 버렸다.
 “좋아.”
 레흐는 저녁이 오길 기다렸다.
 
 ***
 
 사관들의 야외 무도회는 의외로 규모가 컸다.
 지역 유지들의 딸 말고도 마을 처녀들도 참가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래서 여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남자를 고르는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다.
 군악대 나팔수가 교전을 알리는 나팔 신호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율동적이고 신나는 왈츠나 캉캉, 마주르카가 연주되었다.
 짝을 이룬 수많은 남녀가 커다랗게 피어오른 모닥불을 중심으로 춤을 추었다.
 “마치 샐러맨더(불의 정령)가 있는 것 같군.”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약해지지 않는 모닥불을 보고 레흐는 중얼거렸다.
 모닥불 옆에 있는 그는 조금 전까지 경기병 연대의 안젤리나 중위와 춤을 추었기 때문에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레흐는 안젤리나 중위를 위해 휴대용 물통에 꿍쳐 놓은 화이트 와인을 잔에 담아서 그녀에게 건네주려고 했지만,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그녀는 다른 장교의 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낙심한 그는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어두운 공터에 앉아 몸을 식혔다.
 그의 얼굴은 원래 잘 먹혀 들어갔지만 남자는 아주 많고 여자는 적은 이런 상황에서는 외모가 엄청 빛나는 것이 아니라면 묻히기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 몇몇 연인들이 주변을 살피며 근청에 있는 떡갈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아마 거기서 몰래 사랑을 치르겠지.
 레흐는 다시 춤을 추기 위해 주변을 살폈지만 한 여자에 그것이 예쁘든 안 예쁘든 적어도 5명 이상의 남자가 있어 흡사 여왕개미를 지키는 병정개미들 같았다.
 “음?”
 레흐의 눈에 한 여장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혼자 달빛으로 독서 중이었다.
 그녀는 바위 뒤에 등을 기대고 있었기에 무도회장에서 교묘하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레흐의 위치가 아니면 볼 수 없었다.
 레흐는 그 여자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춤을 추고 싶으면 저리 가요. 난 별로 추고 싶지 않으니까.”
 루이즈 소위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저 기억 안 나십니까?”
 레흐의 말에 루이즈 소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와 입이 커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 당신은?”
 작지만 고운 목소리가 나왔다.
 “한잔하시겠습니까?”
 레흐가 원래 안젤리나 중위에게 주려고 했던 잔을 내밀었다.
 루이즈 소위는 잠시 경계 어린 눈초리로 그를 보았지만, 곧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은백색으로 빛나는 달을 와인 잔을 통해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 덕분에 가느다란 손목이 드러나고 역시 가느다랗고 기다란 손가락도 눈에 띄었다.
 레흐는 그녀의 얼굴과 몸을 슬며시 살펴보았다.
 맑은 검은색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턱선과 콧날선이 매우 부드러웠고 피부는 더없이 곱고 아름다웠다.
 가느다랗고 수려한 목은 주름이 전혀 없었다.
 조그마한 입술은 더없이 아름다웠지만 미소를 지으면 더더욱 빛을 발할 것 같았다.
 그녀의 어머니 덕분인지 180 정도로 키가 컸는데, 몸이 원래보다 더 가늘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단점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에 비해 발육량이 적어서 감색의 제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일자형 꺽다리 같았고.
 너무나도 혈색이 없는 창백한 피부색과 아름다운 눈동자 아래에 생긴 진한 다크서클은 그녀를 매우 아픈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호오.”
 루이즈 소위는 와인의 아름다운 빛깔에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자 달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복숭앗빛의 파도가 만들어지면서 그 와인 특유의 자두향이 레흐의 코를 간질거렸다.
 루이즈 소위는 잠시 코를 대서 향을 음미하고 입에 댔다.
 복숭앗빛 물결이 계곡물처럼 시원스럽게 흘러 그 작은 입으로 사라졌다.
 “좋은 와인이네.”
 눈을 감으며 그것을 음미한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 뒤 와인 덕분인지 그녀의 양쪽 볼이 불그스름하게 살짝 달아올랐다.
 “정말 좋은 와인이군요, 레흐 소위님. 아, 실례. 중위님이었군요.”
 루이즈 소위는 잠시 당황한 나머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레흐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할 줄은 몰랐기에 절로 흐뭇했다.
 “그런데 왜 당신이 여기에 있죠?”
 레흐는 그녀의 말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앉아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저런, 그게 그렇게 되었군요.”
 루이즈 소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었네요. 대신해서 사과드리죠.”
 “아뇨, 아닙니다.”
 레흐의 손사래에 루이즈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친절하시군요.”
 그 말에 레흐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저는 그렇다 치고 소위님은 왜 이곳에 계신 것입니까?”
 루이즈 소위가 머뭇거리자 레흐는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이내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어머니, 아버지처럼 공을 세우고 싶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쓸쓸하게 느껴졌다.
 “저희 어머니 아버지는 저보다 훨씬 어릴 때부터 군에 몸을 담았고, 수많은 전공을 세웠지요. 그런 어머니, 아버지를 본받고 싶었거든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제가 군에 입대하는 것을 몹시 반대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선천적으로 많이 약했거든요. 입대하려고 운동도 많이 했지요. 그 덕분에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건강하지만······.”
 그래도 레흐는 그녀가 일반인들보다 약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그렇게 사적인 잡담을 나누었다.
 군대라는 특성상 둘이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군대 이야기밖에 없었기에 레흐는 무언가 다른 계기라도 만들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같이 춤이라도······.”
 하지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루이즈 소위는 고개를 저으며 손에 잡힌 책을 흔들어 보여 주었다.
 “전 춤에 관심 없습니다. 춤 쪽은 숙맥이거든요.”
 “아름다운 당신과 춤을 출 수 없다니 아쉽군요.”
 다른 이들에게라면 먹혔겠지만, 그것은 루이즈 소위에게는 먹히지 않는 듯했다.
 레흐는 루이즈 소위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히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입에 발린 아부는 매우 싫어하는 듯했다.
 “전 춤에 관심이 없답니다, 중위님.”
 그 말은 아까 전보다는 쌀쌀맞게 들렸다.
 “중위님은 절 마음에 두고 있으신 건가요?”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말에 레흐는 적잖게 당황했지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재미있으신 분이군요, 중위님은.”
 루이즈 소위가 그 말을 하기에는 대략 2, 3분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전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이랍니다.”
 실망감이 들었다.
 병든 기색이 연연했지만 확실히 아름다운 여인이니 약혼자가 있을 만했다.
 레흐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조금 드러난지라 루이즈 소위는 작게 웃음을 지으며 책으로 입을 가렸다.
 레흐는 그 책의 제목을 볼 수 있었다.
 
 [만유인력과 자전 원리의 시선으로 보는 현대 탄도학]
 
 그녀가 포병인 것은 알았지만 여자가 탄도학에 대해 이렇게도 심취해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제 목숨을 살려 주신 것도 그렇고 이렇게 전출을 와서도 만난 것을 보니 이것도 인연이라고 하겠죠.”
 그녀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흐도 자리에서 따라 일어났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이제 스물둘입니다.”
 “동갑이군요. 그러면 우리 친구로 지내죠.”
 그녀는 악수를 청했고 레흐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제 반말로 해.”
 “근데 처음 보는 남자와 이렇게 있는 거 약혼남이 싫어하지 않을까?”
 약혼남이 있는 여자와 친하게 지냈다가 권총과 칼을 들며 쫓아오는 약혼남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던지라 레흐의 말은 매우 진지했다.
 그 말은 루이즈 소위가 웃음을 터트리게 했다.
 “글쎄? 내 약혼남은 안 그럴 거야. 마르티네즈(수도)에서 살거든. 하여튼 나에게 허튼 생각 하지 마. 이래 봬도 정조는 지키고 있거든.”
 그 말에 레흐의 얼굴이 빨개졌다.
 무안해진 레흐는 무언가 이야깃거리를 찾으려고 고심하는 순간 아까 책을 보았던 문구가 떠올라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래? 그러면 넌 전장에서 포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녀는 대포를 신봉하는 대포만능주의자였다.
 그날 저녁 레흐는 남들이 다 노는 와중에 그녀와 함께 전장에서 대포의 역할에 관해 매우 진지한 자세로 토론했다.
 
 
 
 
 2장 (1)
 
 
 
 
 
 
 루헬 기병여단을 선두로 제3군단은 로마니아 왕국의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지키는 적 수비대는 보이지 않았다.
 포장된 관도를 따라서 루헬 기병여단은 멜라스로 향했다.
 멜라스는 그저 작은 도시에 지나지 않았지만, 로마니아 북부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서 이곳을 점령해야 전진을 위한 교두보와 보급소, 통신망을 확보하고 남쪽과 동쪽, 서쪽으로 향하는 길목에 진출할 수 있었다.
 레흐는 행군하다가 고개를 돌려 클리든 중사를 보았다.
 뒤가 간지러워 너무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원한 있는 병사가 장교의 뒤를 쏘는 것은 그저 먼 이야기로만 들렸는데, 막상 자기에게 닥치자 너무 신경이 쓰여 제대로 앞을 볼 수 없었다.
 전투 중에 적에게 죽는 것은 그나마 싸운 보람이라도 있겠지만 아군이 쏜 총탄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먹이 떨렸다.
 
 ***
 
 멜라스는 의외로 쉽게 점령되었다.
 수비병이 1천 명이 있었지만, 저항을 포기했다.
 여단은 본대가 올 때까지 멜라스에 대기했다.
 대대장교들은 멜라스의 작은 호텔에서 멜라스를 점령한 기념으로 작은 파티를 했다.
 레흐는 초대되지 않았지만, 그다지 놀라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 당장 돈이 빠듯해서 샤롯데의 말먹이도 사 주지도 못하고 있었기에 체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하여튼 지금 말먹이가 없는 이상 그는 직접 말을 이끌고 나가 멜라스 시내 밖의 목초지에서 샤롯데가 마음껏 풀을 뜯어 먹게 해 주었다.
 ‘제기랄, 다시 5군단으로 가고 싶군.’
 레흐는 풀을 뜯어 먹는 샤롯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5군단에서의 생활도 매우 힘들었지만, 지금 3군단에서 그는 아웃사이더나 마찬가지였다.
 장교단에서 그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요들 대위와 매사에 공정한 베스라이다우 대령을 제외하고는 공적인 말 외에는 아무런 말을 거는 장교가 없었다.
 또 눈치껏 무시하거나 아예 대놓고 깔보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
 거기에 지난번 구타 사건 이후 병사들은 매우 고분고분해졌지만 친해질 기회는 영영 잃고 말았다.
 그들은 레흐에게 군기를 잡힌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언제든 레흐의 눈에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자기들끼리 모여 있다가도 레흐가 근처에 지나가기만 해도 저절로 해산하고 그랬다.
 전에 있었던 창기병 부대의 병사들과는 아주 친했었기에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자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내가 그렇게 패 버렸는데 어떻게 친해져?’
 그렇게 자신의 숙소로 복귀하려는 그의 앞에 다니엘 소위가 나타났다.
 “무슨 일입니까?”
 이미 다니엘 소위에게 좋은 감정이 없는지라 다니엘 소위에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중위님, 제가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다니엘 소위의 뒤에 튼튼한 준마 세 필이 있었는데 키가 크고 근육이 튼실한 것이 세 마리 다 좋은 말들이었다.
 “무슨 제안입니까?”
 “실은 내가 말을 모으는 취미가 있습니다. 우리 집에는 말이 3백 마리가 있고요.”
 “그래서요?”
 레흐는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이 말 세 마리와 중위님의 말 샤롯데를 바꿨으면 합니다. 아, 뭐라 하지 마십시오. 이 말들은 적어도 금화 150닢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말들입니다. 부디 쉽게 생각하지 마시고 신중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샤롯데의 말 고비를 쥔 레흐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전 당신께 선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장교들과 안 어울리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같이 만나서 와인도 한잔하고 휘스트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교들에게 제가 중위님과 친분이 생길 수 있도록 선을 놓아주겠습니다.”
 레흐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들 대위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었다. 게다가 샤롯데는 태어날 때부터 그와 함께했던 말이었다.
 “저 말들은 저와 맞지 않을 것 같군요. 저는 이미 샤롯데와 호흡이 맞거든요.”
 “중위님.”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흐는 샤롯데를 이끌고 자신의 숙소로 움직였다.
 샤롯데를 마구간에 넣은 후 그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200그램짜리 빵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초라한 점심이었다.
 ‘사람을 아무리 무시해도 그렇지 감히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다니.’
 오래 두어 껍질이 딱딱해 그의 이빨들이 아려 왔고, 또 속 또한 질겨서 육포를 씹듯이 빵을 물어뜯어야 했다.
 ‘건방진 자식, 나중에 된통 당해 봐야지.’
 대대 집결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먹다 남은 빵을 주머니에 넣은 레흐는 카빈총(기병용의 짧은 총)을 꺼내 들고 몸을 움직였다.
 “무슨 일이야?”
 “적이 나타났다는군.”
 “조용히 하고 집합!”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안 좋았기에 그의 목소리는 짜증으로 가득했다.
 “대대! 승마!”
 대대장 크라우츠 소령의 갈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흐는 샤롯데의 등에 올라탔다.
 곳곳에서 말의 안장을 걸자 조임쇠의 특유의 금속음이 울렸다.
 “멜라스시 남쪽 둔덕을 점령한다!”
 간단한 명령이 있는 직후 연대장 베스라이다우 대령의 옆에 기병 연대의 깃발을 가진 기수가 따라붙었다.
 “총원, 발검!”
 레흐는 명령을 복창하고 자신의 기병검을 뽑아서 오른쪽 어깨에 칼등을 걸쳤다.
 손과 팔 근육의 피로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용기병 연대가 멜라스시의 대로를 따라 질서 정연하게 지나갔고, 일정한 템포의 말발굽 소리가 레흐의 투구에 울려 퍼졌다.
 검은색 말갈기 장식들이 바람에 나풀거리면서 시야를 어지럽혔다.
 “3열 횡대로!”
 시내를 빠져나가자 다시 일정한 음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연대는 3열 횡대로 넓게 새로 진을 꾸렸다.
 그사이 좌측에는 경기병 연대와 우측에는 창기병, 흉갑기병 연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진격!”
 800여 기의 기마병이 둔덕을 넘기 위해 전진하는 것은 멜라스시의 시민들에게는 엄청난 장관이었다.
 레흐의 소대는 대형의 앞 열 좌측에 있었다.
 둔덕을 넘는 순간 눈앞에 남색의 물결이 나타났다. 로마니아군이었다.
 ‘대략 2만 명 정도군. 1개 사단급인데?’
 레흐는 휘파람을 불었다.
 먼저 나간 흉갑기병 연대는 적의 경기병 부대와 격돌했고 창기병 연대는 적 용기병들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적의 보병 2개 연대급 병력이 대대가 3열 횡대로 8개의 대대가 종열진을 짜고 전진 중이었다.
 “적 기병대는 창기병과 흉갑기병에게 맡기고 우리는 보병대를 저지한다! 부대를 둘로 나눈다!”
 레흐의 소대는 좌측으로 찢어졌다.
 경기병 연대가 선두의 적 보병대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기겁한 대대는 황급히 방진을 구성하고 사격을 가했다.
 적 본진의 진격은 저지되었다.
 적 보병대의 선두가 막히자 뒤에 따라오던 대대들이 우측으로 우회하려고 했다.
 그것을 본 우측으로 빠진 용기병 분대가 달려들었고 차츰 타 대대들도 방진을 구성했다.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마라!”
 레흐가 소속된 분대는 그들의 사이를 누볐다.
 머스킷 사거리에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두고 방진과 방진 사이를 누비며 적 보병대의 사격을 유혹했다.
 레흐의 좌측에 있던 용기병의 말이 비명을 지르며 기수와 함께 넘어졌다.
 레흐는 자신의 애마 샤롯데의 머리를 보았다.
 이 어여쁜 것은 지치지도 않는지 쉴 틈 없이 잘 달렸다.
 레흐는 우측의 분대를 보았다. 그쪽에 다니엘 소위가 있을 것이다.
 ‘네놈이 가진 세 마리 말보다 내 말이 훨씬 낫다.’
 레흐의 시야 좌측에 5대의 포대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 대포를 이끄는 말과 분리를 시켰는지 포병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소대! 나를 따라라!”
 레흐는 말고삐를 좌측으로 당겼다.
 뒤에서 뭐라 소리쳤지만, 그는 말고삐를 왼손에 잡고 기병검을 돌격 자세를 취했다.
 “돌격!”
 레흐의 샤롯데가 선두로 달렸다.
 다른 말보다 더욱 빠른 속도였다.
 그를 발견한 포병들이 대포를 그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장전하는 그들보다 샤롯데가 월등히 빨랐다. 레흐는 2대의 대포 사이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장전 봉을 든 포병이 그것을 휘두르려고 한 순간, 레흐는 자신의 오른팔을 뒤쪽으로 크게 한 바퀴 돌렸다.

댓글(3)

태극산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019.01.01 21:30
스카이76    
일괄구매해도 후회안합니다
2020.09.26 16:45
뿌꾸shkim    
대여 ㅇ...처음엔 재밌는데 뒤로 갈수록 읽기가 좀 힘드네요..전쟁 상황 설명 장황하고 고구마 전개.
2022.09.03 20:11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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