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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1-1권

2018.11.19 조회 682 추천 6


 프롤로그 (대우전을 쓰는 기병)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장익환이 투덜거렸다.
 “괜히 체탐군으로 지원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 거 사람 말 많네. 빨리빨리 움직이쇼! 여진 놈들이 오고 있다고!”
 세 명의 인물들이 만주 땅에서 열심히 남쪽으로, 두만강을 향해 뛰었다.
 이들은 6진의 회령도호부 소속 군사들로 회령 근처 마을에서 조선 사람들이 몇 명 사라지자, 여진족들의 부락으로 체탐(정찰)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여진의 기병 4기와 마주쳤다.
 ‘에이, 시펄.’
 장익환의 왼손에 든 팽배(방패)가 무거워 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사형이었기에 버릴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최전방을 담당하는 팽배수라 입고 있는 경번갑(쇠미늘과 쇠고리를 서로 연결하여 엮어 만든 갑옷)과 첨주투구(챙이 달린 무쇠투구)는 매우 무거웠기에 걷는 것이 여간 힘들었다.
 그렇게 뒤처진 그를 재촉하는 이극환과 일추는 사수들로 각자 지포엄심갑(종이로 만든 흉갑)에 벙거지(돼지털을 눌러 만든 챙 달린 모자) 쓰고 있어 그보다 매우 가벼웠다.
 “아군 부대랑 합류만 하면······.”
 말발굽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안색이 극도로 창백해진 그는 허리춤에 찬 환도를 뽑았다.
 “글렀어! 효시를 쏴!”
 그는 몸을 돌렸다.
 4기의 여진 기병이 그의 정면으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제대로 들었다면 근방에 대기 중인 엄호부대가 곧바로 이곳으로 올 것이다.
 활을 꺼내 든 일추가 그들 중 하나를 노리고 활을 조준해서 발사했다.
 화살은 그대로 맨 앞으로 달리던 여진 기병의 흉부 중앙에 맞았고 그자는 말에서 떨어졌다.
 여진인들은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충분한 살상이 가능했다.
 그다음으로 이극환이 활을 당기려는 순간 진기병 두기가 그들을 향해 활을 쏘았다.
 장익환은 이를 악물며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오는 화살을 팽배로 막았다.
 하지만 두 번째 화살이 일추의 목을 명중시켰다.
 “흑!”
 바람이 빠지는 듯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일추는 쓰러졌다.
 이극환이 고함을 지르며 활을 쏘았다.
 하지만 활은 여진 기병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고 그들의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려는 순간 여진 기병들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들은 20보(대략 25m) 이내로 접근하지 않은 채, 그들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포위해서 쏴죽일 속셈이었다.
 “이런 난장 맞을!”
 장익환과 이극환은 서로 등을 붙인 채, 가만히 있었다.
 3기의 기병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계속 돌았다.
 “끝이군.”
 ‘내게 활만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 텐데.’
 이극환이 활을 쏘았다.
 그와 동시에, 여진 기병이 활을 쏘았다.
 “크윽!”
 화살은 그대로 이극환의 흉갑에 적중했고 이극환의 화살은 여진 기병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오살할 놈들! 원군은 언제 오는 거야?”
 “크윽!”
 이극환은 활을 뽑으려고 했다.
 엄심갑 덕분에 화살이 깊게 박히지 않았다.
 “그대로 누워있어!”
 이극환이 눕자, 장익환이 그 위에 서서 여진 기병들이 도는 만큼 계속 몸을 움직였다.
 한 번에 2발의 화살이 날아왔고, 그는 팽배로 화살을 막았다.
 “이 개자식들아! 와서 덤벼!”
 그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여진 기병들이 와서 공격할 리 만무했다.
 그는 몸을 팽배를 고쳐 잡고 그들에게 달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죽게 되는 거라도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진 기병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가 달려들자 여진 기병들의 입이 이빨이 보일 정도로 웃음으로 번졌다.
 그들에겐 그저 저런 돌격은 후퇴하고 좌우로 흩어지면 그만이다.
 그들이 고삐를 당겨 흩어지려는 순간, 화살 깃이 큰 화살이 여진 기병의 머리에 박혔다.
 “뭐야?”
 달리다 멈춘 장익환이 중얼거렸다.
 남은 두 기가 화살이 날아오는 쪽을 보았다.
 갈색의 말을 타고 검은 두정갑을 입은 기병이 그들을 향해 활을 겨누며 달려왔다.
 그자의 투구 또한 드림이 달린 무쇠로 된 첨주투구였고, 동개일습(활을 넣는 동개와 화살을 넣는 주머니인 시복 주머니를 일컫는 말)과 허리에 찬 환도가 눈에 띄었다.
 다른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 것을 봐서 궁기병이 분명했다.
 그자는 동개궁(마상에서 쓰기 편하게 만든 작은 활)에 두 번째 화살을 먹여서 당겼고, 화살은 두 번째 기병의 말에 맞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병이 그 기병에게 활을 조준했는데도 그 기병은 그대로 달려들었다.
 “위험해!”
 장익환이 외쳤지만, 여진 기병의 화살이 먼저 날아갔다.
 하지만 화살은 투구의 측면을 맞고 그대로 옆으로 비켜 나갔다.
 그사이 검은 두정갑을 입은 기병의 오른손에 환도가 잡혀 있었다.
 그것을 본 여진 기병이 급히 칼을 뽑으려고 했지만, 그자의 칼과 말이 더 빨랐고 단번에 목이 잘려나가 굴러갔다.
 “워~ 워.”
 조금 달리다 말을 천천히 정지시킨 그 기병이 말머리를 돌렸다.
 말이 죽은 덕분에 살아남은 여진 기병이 그대로 몸을 돌리고 도망을 쳤다.
 그것을 본 그자가 환도를 버리고, 화살을 꺼냈다. 역시 화살 깃이 큰 화살이었다.
 ‘대우전이군.’
 큰 화살 깃 덕분에 100보(약 125m) 이내에 좋은 명중률을 자랑하는 그것은 기병용 화살이기도 하지만 큰 화살 깃 덕분에 바람의 저항이 심해 멀리 날아갈 수 없어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화살이었다.
 그자가 활을 당겼고 곧바로 쏘았다.
 대우전은 그대로 수평으로 날아가 도망치는 여진 기병의 등을 맞췄다. 훌륭한 솜씨였다.
 그는 말을 앞으로 천천히 몰았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물었다.
 “저 친구 좀 봐줘.”
 장익환이 그렇게 말하며, 환도를 도로 꽂았다.
 그는 버려진 말들의 고삐를 잡았다.
 잘 길들어진 덕분인지 사람을 보고 그 말들은 피하지 않았다.
 다들 하나같이 큰 말들이었다.
 “여진 놈들 말들은 하나같이 크지.”
 활에 맞아 죽은 1마리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사이 두정갑을 입은 기병은 말에서 내려 이극환의 상처를 보았다.
 “활이 깊숙하게 박히지 않아서 잠깐 붕대로 감으면 될 것 같습니다.”
 “고마워, 내 전대(폭이 좁고 얇은 포목제 허리띠) 좀 풀어줘.”
 화살을 뽑자 피가 나왔다.
 이극환은 자신의 엄심갑을 벗었다.
 그자가 전대를 풀어주자 이극환은 자신의 전대로 상처를 두르고 지혈을 위해 세게 묶었다.
 “정말 고마워, 자네가 내 목숨을 살렸어.”
 이극환이 자리에서 일어서 그에게 살짝 묵례를 하였다.
 “전리품이 많은데?”
 장익환은 여진 기병들의 시신들을 뒤졌다.
 여진족들은 항상 자신의 몸에 전 재산을 가지고 다녔기에 잡았을 때 수익이 대단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만큼은 별것 없었다.
 장익환은 그들의 무기와 두 장의 사슴 가죽을 찾아냈다.
 “오호라!”
 사슴 가죽이 무두질이 안 된 것이 기병들이 잡아서 가지고 돌아가던 길이 분명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몰래 자신의 품속에 넣은 뒤 다시 뒤졌다.
 다른 여진족의 품속에서 말린 고기를 찾아냈고 그것을 먹었다가 곧바로 뱉어냈다.
 “이거 완전히 썩은 고기 맛이잖아!”
 침까지 뱉어낸 그는 허리춤에 찬 조롱박 물병을 꺼내서 물로 입안을 헹구고 뱉었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 저는 그러니까······.”
 검은색 두정갑을 입은 기병이 떨떠름한 표정이었기에 한 말이었다.
 “뭐야, 너 설마 국경을 넘은 거 이번이 처음이냐?”
 “예.”
 장익환과 이극환은 서로를 보았다.
 “그럼······.”
 “방금 그게 첫 전투였습니다.”
 첫 전투치고 아주 잘했다.
 그런데 이런 햇병아리에게 목숨을 구원받다니.
 6진의 국경에서 평생 생활하던 그들로서는 운이 좋다고 봐야 했다.
 거기에 여진족이 활을 조준하는데 그대로 달려드는 담력을 보건대 제대로 배운 것이 분명했다.
 사실 이들이 자신들을 구해준 이 친구에게 자연스레 반말한 이유도 수염이 조금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단한 것치고 나이가 어렸다.
 “장익환이다.”
 그는 허리를 살짝 숙여서 인사했다.
 “덕분에 살았어.”
 “시류입니다.”
 시류도 살짝 묵례를 했다.
 그는 투구끈을 풀어 벗었다. 앳된 얼굴에, 댕기 머리를 한 잘생긴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제 부임한 양계갑사(국경을 지키는 직업 군인의 일종)입니다.”
 갑사라면, 무과만큼은 아니더라도 시험을 통해서 들어왔을 것이다.
 게다가 말투가 곱상한 것이 도성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장익환은 무례인 줄 알면서도 그를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검은색 두정갑, 예전부터 있긴 했지만, 야인들의 갑옷에서 전래한 거라 잘 입지 않는 갑옷인데 겉감을 보건대 명주였다.
 명주는 비단만큼은 아니지만 무명보다는 비싼 직물이다.
 또 움직일 때마다 찰그랑거리며 소리가 살짝 나는 것이 안에는 가죽편찰이 아니라 철편이 분명했다.
 그리고 허리에 갈색의 사슴가죽요대에 동개일습과, 환도를 차고 그 위로 푸른 전대를 찬 모습이었다.
 동개일습의 가죽이 사슴 가죽에 자수가 놓여 있다던가, 환도를 보건대 투박해 보이지만, 고급소재로 된 것이 분명했다.
 집안이 부자이거나, 양반의 자제······. 아니, 양반이라면 무과를 통해 관직에 나갔을 테니, 갑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즉.
 ‘서자 놈이군.’
 확신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측은함이 들었지만, 동정하진 않았다. 양반가의 서자라도, 양민인 장익환보다는 상전이기 때문이다.
 “미안한데, 올해 나이가?”
 “19세입니다.”
 장익환은 24세였다.
 “얼씨구? 장 형, 이놈 보소. 댕기 머리를 하고 있잖아.”
 결혼을 안 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갑옷이 검게 물들어 있어 검은 댕기 머리 또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건상투(결혼하지 않는 자가 상투를 트는 것)라도 틀고 전투해. 그러다가 댕기 머리를 적에게 잡히면 어떡하려고?”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인데······. 우리는 영안도 토병(일정지역의 토박이들로 구성된 지방군사)이야. 갑사는 토병보다 품이 높으니까. 굳이 존대를 안 해도······.”
 “아닙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존대를 사용하겠습니다. 갑사라도 관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장익환은 시류가 마음에 들었다.
 만족스러운 눈이 어느새 시류의 허리춤에 고정된 은으로 된 사발과 나무통이 몸체로 된 나팔을 발견했다. 그건 대각이었다.
 “다른 군사들을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너 혼자 오지 않았을 거 아냐?”
 “아, 이런.”
 작게 중얼거리며 시류는 대각을 꺼냈다.
 효시 소리가 난 곳을 찾기 위해 흩어졌던 나머지 기병들이 그 소리를 듣고 찾아올 것이다.
 장익환은 그것을 지켜보다가 죽은 동료의 시신에 몸을 돌렸다.
 허리를 숙여 내려 보니 그 친구는 눈을 뜬 채 죽어있었다.
 “미안하구만.”
 그는 일추의 눈을 덮어주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요즘은 쓰지 않는 대우전을 쓰는 기병이라니······.
 그는 죽은 여진족들에게서 화살을 뽑아내었다. 화살촉은 착전(적의 갑옷을 뚫기 위해 고안된 송곳모양의 화살촉)의 그것과 같았고 일반 화살보다 조금 무거웠다.
 ‘살이 무겁기에 이런 위력을 낼 수 있군.’
 화살을 돌려주기 위해 그는 몸을 움직였다.
 시류는 자기가 마지막으로 쏜 여진족을 내려 보고 있었다. 그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왜 우리 조선 사람을 납치한 거지?
 장익환은 잠시 멈칫거렸다. 그가 못 알아듣는 여진의 말이었다.
 -네······. 네놈······. 어떻게 우리말을······.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우리도 대식국(조선에 대한 외국의 별칭)처럼 농사를 짓고 산다······. 하지만 우리는 농사기술이 부족해. 아이들이 굶고 여자들도 굶고 전사들도 굶는다. 사냥만으론······. 부족해. 그래서 너희가 필요했던 것······.
 그자는 그렇게 절명했다.
 멀리서 말발굽의 소리가 들려왔고, 대각의 소리가 울렸다. 시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살구꽃
 
 
 
 
 
 
 봄이 되면 회령의 산맥들은 백살구의 꽃향기로 가득해졌다.
 오직 회령에서만 생산되는 백살구의 하얀 꽃잎과 노란 암술과 수술은 매우 화사했다.
 그 진한 향기는 두만강 너머 만주 땅에도 퍼지게 되는데, 회령도호부의 최전방인 풍산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풍산보 주변 지형은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고 평평한 땅이 많은 데다 두만강의 수위 또한 낮아, 여진족의 잦은 침입로였로 쓰였다.
 그랬기에 풍산보는 방어를 위해 석성(石城)으로 쌓았다.
 성의 높이가 12척(약 3.7m) 둘레가 4천 89척(약 1km)으로 전체적으로 ㅁ 모양으로 된 성이었고, 모든 성벽에 성첩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 어느 정도 방비가 되는 데다 북문과 서문 쪽은 두만강이 감싸고 있고 남쪽은 무산이, 동쪽은 회령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 작지만 공격하기 힘들었다.
 주둔하고 있는 병력은 갑사 30명, 토병 30명, 부방(다른 지방의 병사가 서북 변경의 국경지대에 파견되어 방위 임무를 맡은 일)으로 배치된 정군(징집병) 50명으로, 총 110명의 병사가 주둔했으며, 이들 중 기병은 갑사 전원이었다.
 시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켰다.
 살구꽃의 향기가 크게 맡아졌다. 그는 이제 올해 20세가 되었다.
 지난겨울은 추위가 매우 혹독했지만 눈이 그다지 많이 내리지 않아 봄에도 가뭄이 들어 두만강의 수위가 많이 내려갔다.
 조정에서 여진인들의 침입을 방비하라고 특별히 전교하였고 회령도호부에서 이총통(二銃筒) 4자루와 다섯 명의 화포군을 딸려 보냈던지라 풍산보 만호 이덕수는 근래에 신경질적으로 변해버렸지만, 시류에게는 딴 나라의 이야기와도 같았다.
 칼바람 같은 겨울의 삭풍 속에서 견디다가 이렇게 따뜻한 꽃바람이 부니 몸이 저절로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번차(당직근무기간)도 이제 두 달밖에 남지 않았던지라 기분이 좋은 것도 한몫했다.
 “너무 딴 생각하지는 말어.”
 옆에서 창을 들고 서 있던 장익환이 말했다.
 “작년에 체탐했을 때, 여진 놈들은 흉년이었어. 어찌어찌 버텨서 올겨울은 넘겼는지는 몰라도 놈들은 이제 양식이 얼마 없으니 이리로 올 거야. 상거래로는 식량 수요를 채우긴 힘드니까. 놈들은 반드시 올 거야.”
 “여진이요?”
 시류가 물었다.
 “그래, 야인, 여진, 되놈, 노적이라 불리는 놈들.”
 다시 한 번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속에 살구꽃 향기가 맡아졌다.
 “뭐, 그래도 은서피는 싼값에 잘······.”
 “쉿!”
 장익환이 낮게 말했다.
 장익환은 지난번 체탐 때 몰래 챙겨놓은 사슴 가죽을 팔아서 그것으로 보리쌀 2석을 샀고, 여진인들과 밀거래로 은서피(족제비 가죽)를 샀다.
 “그거 여기서 말하면 안 돼.”
 “뭐 어때요? 공공연한 비밀인데. 그래서 갖옷은(모피 옷) 다 지어가요?”
 “아니, 아직.”
 장익환의 표정이 침울하게 변했다.
 장익환은 어머니께 드릴 갖옷을 장만하려고 은서피를 계속 수집하고 있었는데 저고리 한 벌 만드는데도 은서피가 족히 40장은 필요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만든다고 한 것이, 결국에는 겨울이 지났지만, 그래도 이제 10장만 있으면 돼.”
 마지막 말에서 생기가 돌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침울했다.
 “너는 어때? 번차 기간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음 번차 때까지 뭐 하게?”
 “회령으로 돌아가야죠. 회령에 집이 있으니까요.”
 회령이라는 말과 동시에 시류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장익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장 형은요?”
 “토병이 무슨 번차가 있어. 우리는 계속 여기 있는 거지. 우리 집도 풍산보 안에 있고.”
 장익환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여차하면, 우리 집에서 계속 살아라.”
 “예?”
 뜻밖의 제안이었기에 시류가 되물었다. 그는 장익환의 배려로 군영이 아니라, 장익환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너 혼자 산다고 했잖아. 혼기도 놓인 남정네가 혼자 살면 별로 보기 좋지 않으니까. 게다가 넌 풍산보로 배치되었으니까. 다음 번차 때까지 그냥 여기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아뇨, 그 말씀은 고맙지만······.”
 시류가 말끝을 흘리자 장익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나중에 생각나면 찾아와라. 칠석날에 찾아와도 좋고.”
 “예, 그러죠.”
 종소리가 울렸다.
 “신시(3시~5시)다! 당직 교대!”
 당직 군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흐암! 끝났다!”
 장익환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당직 교대자들이 갑옷과 동개일습, 환도를 찬 채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들 중에 한 명은 이극환이었다.
 시류와 장익환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창을 넘겨주었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우리 집에서 한잔할래?”
 장익환이 시류의 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구기자주가 아직 있지. 활쏘기 내기하면서 먹으면 되겠군. 어때?”
 “장 형, 잘 쏘지도 못하면서 뭔 활쏘기요?”
 이극환이 웃으며 물었다.
 “활도 못 쏘는 양반이 착호갑사(국가에서 운영하는 호랑이 전문 사냥꾼부대)가 되겠다고 죽궁하나 들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지만······.”
 “아, 시끄러!”
 장익환의 고성에 이극환 일행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장익환은 팽배와 환도, 그리고 창을 잘 다루었다. 그러나 활은 잘 쏘지 못했고, 마상에서는 더욱 형편없었다.
 그 덕분에 착호갑사를 뽑는 취재에서 여러 번 낙방하였고, 토병으로 징발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활을 잘 쏘는 시류를 만나게 되자 그와 활쏘기를 하면서 활 쏘는 법도 배우고 있었고 나중에 친하게 되자 시류의 말을 빌려서 기사(騎射:마상 활쏘기)를 배우기도 했다.
 물론 그 대가로 콩이나, 조를 한 되 정도 그에게 주거나, 반찬거리를 주었다.
 “뭐 어때? 익환이는 부지런한 사람이고 장사이니 범이를 잡는 착호갑사가 딱 맞지.”
 군관 이철민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당직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의 투구를 벗었는데, 무쇠로 된 데다 드림이 있는 첨주투구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장익환은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토병들은 군역을 지고 있긴 하지만은, 군영에서 생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집에서 생업을 종사하며 지낼 수 있었고 장익환 또한 자신의 생업을 종사했다.
 그는 5경(밤 3시~5시)에 일어나, 진시(7시~9시) 때까지 일을 하는데 하는 일은 조밭과 콩밭을 가꾸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녀온 후 소를 위해 쇠죽을 끓이는 일이었다.
 사시(9시~11시) 때부터 오시(11시~13시) 때까지는 군영으로 나와 훈련을 받았고, 미시(13시~15시) 때는 당직을 서다가 퇴근하는 방식이었다.
 그 후 유시(17시~19시)까지 다른 소일거리를 하다가, 초경(대략 밤 7시~9시 해 떨어지는 시간)에 잠을 잤다.
 이러한 생활을 그는 16세 때부터 해왔고, 풍산보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힘이 장사라고 소문이 났다.
 또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있는 효자이기 때문에 전임 만호의 추천으로 조정에서 군기시를 통해 양계지역의 군인들에게 갑옷을 하사할 때 특별히 경번갑과 투구를 하사받을 정도였다.
 “착호갑사들은 마상에서도 큰 각궁에 표창(투창)을 잘한다던데.”
 “표창은 잘하는데, 그놈의 활이······. 저도 잘하게 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장익환이 그렇게 말하는 사이 시류는 두만강 너머를 보았다.
 방금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보았지만, 반짝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 반짝이는 것은 마치······.
 ‘검광(劍光) 같았는데.’
 “시류, 뭐 해? 그래서 할 거야?”
 “아, 예 당연하죠. 해야죠. 구기자주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강물의 물결에서 반사된 빛이었나 보다 어림짐작한 그는 얼른 장익환을 따라 성 아래로 내려갔다.
 
 ***
 
 그들은 장익환의 집의 앞마당에서 총 6순(30발)을 쏘았다.
 각자 차례대로 1순씩 쏘는 것이었고, 3판 2선승이었다.
 그리고 시류가 이겼다.
 시류는 모든 화살을 과녁의 정중앙에 꽂았지만, 장익환은 6발이나 빗나갔다.
 “제길!”
 
 장익환은 제 성을 못 이겨서 땅바닥을 마구 밟아댔다.
 도자기로 된 호리병은 시류의 차지가 되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하지만 술은 더 있었기에 얼마 안 가서 두 사람은 탁주 2병과 미나리나물을 안주 삼아 마셨다.
 “난 왜 이리 활을 못 쏘는지 모르겠어.”
 장익환은 그리 말하며 탁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근거리와 원거리에서 활을 조준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것에 익숙하지 않으시니 그런 것입니다.”
 얼굴이 달아오른 시류가 장익환의 잔에 탁주를 따랐다.
 “근거리나 원거리나 맞는 게 똑같으니 문제지. 자세가 잘못된 것도 아닌데.”
 “쏘다 보면 저절로 늘어날 것입니다.”
 방문이 열리면서 쑥떡 4개가 담긴 접시가 나왔다.
 “익환아, 이거 먹으려무나.”
 익환의 어머니 덕봉이었다.
 장익환의 집은 3칸짜리(방 2개, 부엌 1개) 초가집으로, 방 하나는 덕봉의 방, 두 번째는 장익환과 시류의 방이었다.
 “언제 이런 걸 준비했데요?”
 장익환이 그것을 받으며 말했다.
 시류는 툇마루에서 일어나 덕봉에게 절했다.
 “안에 계신 줄도 모르고······.”
 “되었어, 되었어.”
 덕봉은 손을 저었다.
 그녀는 말없이 장익환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언제 혼례를 올리려나······.”
 그 말에 장익환의 얼굴이 시뻘게졌고 도로 문이 닫혔다.
 그의 나이 올해 25.
 이미 결혼적령기는 지나도 한참 지난 상태였다. 무안해진 장익환은 헛기침하며 떡을 집어 들었다.
 “낮에 산에 가서 캐셨나 보군. 확실히 봄이 오긴 왔어. 살구꽃 향기도 그윽하고.”
 그는 떡을 입안에 넣었다. 그것은 크기가 컸지만, 그의 입안에는 쉽게 들어갔다.
 “먹어.”
 시류도 그것을 집어 들어서 입안에 넣었다.
 삶아서 갈은 팥을 꿀을 섞어 반죽해서 만든 소가 들어있어서 달콤했다.
 쑥 향기가 매우 좋았다.
 떡이 목구멍 너머로 사라질 때쯤 하늘의 구름이 걷히면서 보름달이 드러났다.
 운치가 있었다.
 그 달을 보던 장익환은 문뜩 오래전부터 품은 의문이 생각났다.
 “항상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넌 왜 이곳에 온 거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처럼 사민(남쪽 지방 백성들을 양계지역으로 강제 이주하는 정책)으로 온 것은 아닐 테고. 네가 가진 그 군장들을 보면 흔한 집안도 아니지. 그 철편이 달린 두정갑이며, 환도와 동개궁을 보면 투박해 보이지만 고급 재료던데. 그 정도 재력이면 부잣집이거나, 양반 가문일 거야.”
 두 번째 떡을 들려다가 시류는 내려놓았다.
 “양반들은 갑사로 들어오지 않아. 들어온다고 해도 최소한 경갑사(서울지역에 복무하는 직업 군인의 일종)에 가거나, 겸사복(왕의 근접경호부대)이나 내금위(왕실호위군)로 가거나 무관이 되었겠지.”
 시류는 말없이 탁주를 들었다.
 “······사연을 말하자면, 길죠.”
 “그럼 역시······.”
 “역시 알고 계셨군요. 예, 맞습니다. 서자죠.”
 “역시.”
 서자들은 관직에 나갈 수 없다. 그래서 갑사로 온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말이 안 돼. 양반가의 서자라도, 겸사복에는 들어갈 수 있을 텐데.”
 “겸사복은 아무나 들어가나요?”
 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겸사복은 양반과 천민 등 반상의 구분 없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뽑는 최고의 무사 집단이기에 그곳에 들어가기엔 매우 힘들다.
 “네 정도 실력이면 될 듯싶은데······. 최소한 이 양계지역이 올 필요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야. 왜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느냔 말이야.”
 “말하자면, 깁니다.”
 시류는 말없이 탁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숨을 크게 마셨다.
 살구꽃의 향기가 맡아졌고, 달은 구름에 의해 가려지자 주변이 많이 어두워 보였다.
 “사실······.”
 태평소 소리가 크게 울렸다.
 “뭐야?!”
 시류와 장익환은 저도 모르게 일어섰다.
 방문이 열렸다.
 “익환아!”
 “어머니, 집안에 계세요!”
 장익환은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갑주와 환도, 투구를 꺼냈다.
 태평소는 각 부대 지휘관들을 소집할 때 쓰는 악기였지만, 성문에서 불렀다는 것은······.
 “군사들을 부르는 거야!”
 멀리서 두두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말발굽 소리였다.
 “여진족이다!”
 말을 탄 기병이 소리치며 집들 사이를 지나갔다.
 다시 한 번 태평소 소리가 들렸다.
 “류야! 너도 빨리 갑주를······.”
 “아, 예!”
 시류도 방에 들어가서 두정갑을 입었다.
 두 사람의 갑주는 포형태(일종의 코트)를 입고 투구를 쓰면 되었다.
 시급했기에 시류는 비갑(팔뚝을 보호하는 갑옷)을 차지 못했고 장익환도 호항(목을 보호하는 갑옷 부속구)을 차지 않은 채, 팽배만 들고 나왔다.
 둘은 전대는 매지 않고 가죽 요대만 매었다.
 “북문으로! 지금 당장!”
 군관 이철민은 갑주를 입지 않고 환도만 가지고 나왔다.
 “여진 기병들이야! 밤새 두만강을 넘었어!”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푸른색 철릭 위로 검은색 가죽 찰갑을 입은 이가 왔다.
 풍산보 만호 이덕수였다.
 그 또한 급히 나왔는지 투구를 쓰고 있지 않아 상투가 보였다.
 그 뒤로 군영에 있던 정군들과 화포수들이 보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이총통은 기다란 포신 뒤로 막대를 꽂아서 화살이나 탄환을 쏘는 병기였다.
 “전령은 갔는가?”
 군례를 받을 새도 없이 그가 이철민에게 물었다.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방금 나온지라······.”
 그는 말에서 내렸다.
 “그대가 내 말을 타고 회령도호부로 가게! 여진 기병 수천이 두만강을 건넜다고! 한시가 급해. 빨리!”
 “예!”
 이철민이 말을 타는 것도 보지 않고 이덕수는 환도를 뽑았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예!”
 시류와 장익환은 군례를 하였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태평소 소리가 들렸고 지찰갑을 입은 취라치(군악대)가 보였다.
 “그만 불어!”
 이덕수는 신경질적으로 그자에게 소리를 지른 직후, 북문의 누각으로 올랐다.
 화살이 산발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여진 기병들은 말을 타며 활을 쏘았다.
 그 숫자가 어림잡아서 1천은 족히 넘을 정도라 앞이 매우 바글바글했다.
 “여진 기병 수천이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상황은?”
 당직 군관 조혁이 가볍게 묵례를 했다.
 “놈들이 우리 성벽을 몰래 넘으려는 것을 초병이 발견했습니다. 그 뒤론 말을 타고 이리저리 다니며 계속 성벽에 활을······.”
 장익환이 앞에 서서 팽배로 활을 막았다. 노리고 쏜 것이었다.
 “횃불을 꺼라! 놈들이 불빛을 보고 쏘는 것이야!”
 “예!”
 횃불이 금세 꺼졌고 어두워지자, 눈이 먼 화살들이 가끔 날아오는 것을 제외하고,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줄어들었다.
 “화포 장전!”
 “예!”
 총통수들이 장전에 들어갔다.
 시류는 누각에서 내려와 근처 성첩에 기댄 채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그의 옆에서 화포수가 이총통을 장전했다.
 심지를 넣고, 화약과 탄환을 넣는 것이 보였다.
 그자는 탄환을 많이 넣었고, 마지막으로 토격이라 불리는 진흙을 넣었다.
 “이걸 넣어야 단단히 고정되거든.”
 시류가 그것을 신기하게 보자 그자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 17살이 되어서 토병(土兵)으로 징발된 병사는 코를 훌쩍였다.
 “여진 놈들은 한번에 30 이상 몰려서 나온 적이 없는데······.”
 “조용히 해라.”
 군관 조혁이 말했다.
 누각에 있던 이덕수가 반대편으로 가서 그 밑에 있는 취라치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취라치, 탁(鐸).”
 작은 종소리가 울리자 조선군은 침묵 속으로 빠졌다.
 말발굽 소리와 말이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가까워졌다.
 “북과 소각을 준비하라. 내 신호에 맞춰서.”
 말발굽 소리는 계속 가까워졌고 찰그랑거리는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적들의 갑주 소리였다.
 갑옷을 입고 왔다는 것은 저놈들이 작정하고 온 것이라 생각하며 시류는 몸을 숙였다.
 총안을 통해 밖을 보았지만, 구멍이 작고 달도 뜨지 않는 밤인지라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어스레하게 무언가 꾸물거리는 것이 보였고, 이내 그것이 말과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그는 말없이 활을 당겼다.
 “공격!”
 그와 동시에 장익환이 팽배를 들었다.
 만호 이덕수의 목소리를 노리고 눈먼 화살들이 날아왔다.
 시류는 활을 당기고 쐈고 옆에서 부싯돌의 칙칙거리는 소리와 함께 심지가 타들어 갔다.
 “비켜봐.”
 총통수가 시류를 밀치고 성첩 가운데 가장 큰 총안에 포신을 넣었고 나무 자루로 조준했다.
 이윽고 심지가 다 타들어 가는 순간, 굉음과 함께 섬광이 울리면서 말과 사람의 비명이 울렸다. 이와 같은 소리는 4번 이루어졌다.
 시류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뭐해? 안 쏘고.”
 정신을 차린 시류는 얼른 옆에 있던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서 동개궁에 화살을 먹이고 쏘았다.
 여진인들은 말을 잘 다루고 화살을 잘 쏘지만, 공성전에는 많이 취약했다.
 이들은 갈고리와 줄을 걸고, 성벽을 타고 넘는 것을 시도하면서 뒤에서는 활로 엄호를 했지만, 조선군은 성첩 덕분에 몸을 안전하게 숨길 수 있었고, 총안을 통해서 화살을 쏘아서 피해가 전무했다.
 걸리는 갈고리 또한 빠르게 손도끼와 환도로 잘라냈다.
 시류가 40번째 화살을 당길 무렵 대각의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
 만호 이덕수가 물었다.
 “저희가 아닙니다!”
 취라치 쪽에서 대답이 왔다. 그들은 계속 소각과 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장군! 서문입니다! 서문에서!”
 “조군관! 1개 대(25명)를 이끌고 가 봐!”
 “예!”
 조혁은 시류를 포함해서 군사들의 어깨를 일일이 두드려 선택했다.
 “너, 너! 너. 날 따라와!”
 시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동개궁을 활집에 넣었고 환도를 뽑았다.
 여기서 서문까지 성벽으로 족히 1리(약 400m)나 되었기에 무거운 두정갑에 첨주투구를 입고 달리기엔 힘들었다.
 두 명의 팽배수가 팽배를 앞세우고 앞장섰다.
 전투 소리를 뒤로하고, 그들의 헉헉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이윽고 서문 쪽에 당도했다.
 서문은 불빛이 없었고, 인기척도, 그리고 대각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야?”
 그들이 누각에 당도하려는 순간, 수십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되놈들이다!”
 화살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왔다.
 팽배수들이 팽배로 막았지만 팽배 사이로 화살 몇 개가 들어오면서, 시류 바로 옆에 있던 창수의 지포엄심갑에 2대의 화살이 박혔고, 팽배수 사이에 있던 조혁의 미간에 화살이 박혔다.
 조혁이 쓰러지자, 주변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시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원 정군이었다. 그렇다면 지휘관은······.
 모두 시류를 보았다. 이들은 시류보다 나이가 많았고, 시류는 지휘해본 적이 없었다.
 “쳐라!”
 그가 망설이는 사이 보다 못한 나이 많은 팽배수가 팽배를 앞세우며 달려들었다.
 시류도 그자를 따라 달렸다.
 여진족 쪽에서도 기다란 곡도를 뽑아 들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누각 안으로 들어온 시류는 자신의 어깨를 베려는 칼을 옆으로 피한 후 상대방의 옆구리에 환도를 박았다.
 그자는 갑옷을 입었지만, 시류의 환도는 3척(93cm)밖에 안 되는 짧은 칼(그나마 환도치고는 긴 편이었다)이었다. 그 덕분에 찌르기엔 매우 좋았다.
 찌른 상태에서 상체를 밀어 그자를 넘어트린 그는 환도를 뽑았다.
 뒤따르던 팽배수가 여진족의 턱주가리를 팽배로 쳤다.
 소나무 판자에 쇠로 된 태를 두르고 소가죽을 입힌 거라 턱뼈가 박살난 여진족 병사가 그대로 쓰러졌다.
 보법을 잘못한 바람에 자세가 기울어진 팽배수를 노리고 칼이 내리쳐지는 순간 창수가 여진족의 배를 창으로 찍어 밀어냈다.
 “모두 비켜!”
 총통수가 심지에 불을 붙인 채, 주변 인물들을 밀치며 소리쳤다.
 누각의 반대편에서 여진족들이 몰려들었고 그에 맞추어 이총통이 발사되었다.
 총알들이 무더기로 박히면서 여진족들이 쓰러졌다.
 “갈고리를 잘라!”
 누군가 그렇게 소리쳤고 시류는 누각에 걸려있던 갈고리 줄을 잘랐다.
 밑에서 쿵 하는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올라오다가 성 아래로 추락한 듯싶었다.
 사수들이 자리를 잡고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여진족들에게 화살을 날렸다.
 “주변을 정리······.”
 끼익하는 경첩의 비명이 들렸다.
 성문이 열렸다. 말발굽 소리들이 울렸다.
 말을 탄 여진족들이 성안으로 봇물이 터지듯이 들어왔다.
 “성문이 열렸다!”
 “도로 닫아야 해! 활을 쏴!”
 평정심을 찾은 시류가 소리쳤다.
 사수들이 활을 꺼내 들었고 환도를 버린 시류도 얼른 동개궁을 꺼내서 대우전을 장전했고 여진족의 등을 노리고 쏘았다.
 하지만 여진족들을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 어찌합니까?”
 사수가 시류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류도 막막한 지경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징을 발견했다.
 “일단 징을 쳐라! 만호 나리께 알려야 한다! 세 명을 만호 나리께 보내!”
 그 말을 듣고 가장 뒤에 있던 세 명이 아까 갔던 길로 달려갔다.
 여진족들이 칼을 들고 성벽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시류의 활이 그쪽으로 조준되었다.
 두 명이 쓰러지고 시류는 다시 환도를 주웠다.
 “성문을 닫자! 가자!”
 팽배수 두 명이 앞장섰다.
 그들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여진족 두 명을 팽배로 밀어내었다.
 성문 안으로 계속 여진 기병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팽배수 두 명이 나타나 막아버리자, 말이 놀라 앞발을 들고 멈추었고 말들끼리 부딪치는 일도 벌어졌다.
 성문이 두 사람이 지나갈 만큼 좁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화포!”
 총통수가 심지에 불이 붙은 이총통을 가지고 조준했다.
 그와 동시에 사수들이 활을 쏘았다.
 이윽고 총통이 발사된 직후 여진 기병들이 물러났다.
 “성문을 닫아라!”
 팽배수 두 명이 달려들어 성문을 닫았다. 그런데 빗장이 부러져 있었다.
 “그 창 좀 가지고 와 줘!”
 창수들의 창 3개를 받아서 빗장을 걸었다.
 밖에서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들렸다.
 징 소리가 울렸다.
 북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저쪽에서도 여진족이 성안으로 들어온 것을 눈치챈 듯했다.
 “관아로 가자!”
 성안은 이미 아비규환으로 변하고 있었다.
 여진족들은 민가에 불을 지르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끌어내었고 곡식과 옷가지 같은 것들을 약탈했다.
 시류는 그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지금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성의 중앙에 있는 관아로 향했다.
 적들이 민가를 약탈하느라 정신이 없어 관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관아의 문 앞에 당도하기 무섭게 만호 이덕수와 군사들이 당도했다.
 “조 군관은?”
 시류는 고개만 숙였다.
 “적들이 성안으로 들어왔느냐?”
 “그렇습니다. 저희가 성문에 당도했을 때 성문이 열렸습니다. 놈들과 교전하여 다시 성문을 닫고 빗장을 잠갔지만, 이미 성안으로 들어온 숫자는 약 100기 조금 넘습니다. 전원 말을 탄 기병이었고, 지금 민가를 약탈하고 있사옵니다.”
 그러자 군사들이 술렁거렸다.
 특히 토병들이 그랬다.
 “우리 어머니는?”
 장익환이 물었다.
 “장 형, 못 봤습니다.”
 “당장 구해야 합니다.”
 “아니 된다. 관아 안에 무기고가 있다. 그걸 빼앗기면 더 위험해진다. 성문을 잠갔지만, 놈들이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관아를 지키고 회령부사께서 군사를 일으키고 오실 때까지 버텨야 한다.”
 “성안에 있는 백성은 다 우리 가족이란 말입니다!”
 저쪽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관아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사태를 눈치채고 관아로 몸을 피신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사또! 서문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관아 안으로 들어갔다.
 “관아에서 싸운다. 모두 들어가라!”
 “하지만!”
 이덕수가 환도를 뽑았다.
 “명을 어길 것인가!”
 장익환이 다급함에 무릎을 굽혔다.
 시류는 혹여나 해서 그의 옆에 섰다.
 “이렇게 빌겠습니다. 집에 노모가 혼자 계십니다. 혼자라도 다녀오게 해주십시오!”
 “그럴 수 없다! 너 하나만 보내면 다른 토병들도 가고자 할 것이다. 잘못하다 너희도 죽어! 이놈을 잡아!”
 장익환이 달려드는 것을 주변에 있던 군사들이 양팔을 붙잡았다.
 “끌어내라!”
 “나리! 만호 나리!”
 “안으로 들어가! 들어가라고!”
 관아의 내삼문이 닫혔고 무기고가 열렸다.
 만호 이덕수의 명령에 따라 무기고가 열리고 원래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보관해 두었던 마름쇠를 꺼내서 관아의 돌담 밖으로 뿌려놓았다.
 내삼문의 빗장이 믿음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아의 모든 가재도구를 꺼내서 문을 보강하고, 담장은 사람의 목만큼 높았지만, 여진인들이 말을 타고 넘어올 수 있을 것 같아 그 아래에 개다리소반이나 의자, 기타 집기들을 쌓아 두고 그 위에 사수들을 배치했다.
 관아로 백성들이 조금씩 들어왔고 그들이 올 때마다 오른쪽 문을 열어서 안으로 들여보냈지만, 숫자가 10명밖에 안 되었다.
 “장 형······.”
 시류는 담장 아래에서 얼굴을 감싼 채 좌절해있는 장익환을 조그맣게 불렀다.
 시류가 위로의 말을 생각할 무렵 다시 고함이 들렸다.
 “되놈들이 온다!”
 “공격하라!”
 이덕수가 환도를 휘두르며 독려했다.
 장익환과 시류는 담장 쪽으로 갔다. 상황이 다급했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장익환이 팽배로 시류를 보호하는 동안 시류는 화살을 당기고 적을 조준하고 쏘았다.
 말을 타는 여진족들은 마름쇠 때문에 접근을 못 하자, 말을 타지 않은 자들이 창대로 빗자루를 쓸 듯이 마름쇠를 치워버리고, 담장으로 접근했다.
 거기에 통나무 하나를 통째로 깎아서 소달구지에 묶은 후 팽배를 씌운 조잡한 충차까지 나타났다.
 ‘언제 저것을 만들었단 말인가?’
 “저것을 부숴!”
 마름쇠 때문에 여진족들이 접근을 못 하는 것이지 저것으로 문을 치면, 반드시 열릴 게 뻔했다.
 시류는 총통수들이 주머니에서 상당히 큰 화살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
 일반 화살이라고 보기엔 굵었고, 화살 깃이 가죽이었다.
 이들은 화약과 격목을 넣고 다진 후, 그것을 집어넣었다.
 끝이 둥근 원뿔 모양의 촉이 포구 밖으로 나왔다.
 이윽고 불을 붙인 총통수가 시류의 옆에 서서 충차의 바퀴를 조준했다.
 그 순간 그자의 목에 화살이 박혔고 컥컥거리는 신음과 함께 총통수가 쓰러졌다.
 “어, 어?”
 깜짝 놀란 시류와 장익환은 말없이 이총통을 보았다.
 장익환이 얼른 이총통을 집어 들어 다시 수레를 조준하는 순간, 이총통이 발사되었고 화살이 날아갔다.
 잘 못 잡고 있었던 장익환은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고, 그것에 걸려 시류도 넘어졌다.
 수레의 바퀴에 화살이 관통되면서 그 충격으로 수레가 부러져 넘어졌다.
 그것을 밀던 여진족은 다른 화살들이 팽배를 관통하는 바람에 쓰러졌다.
 여진족들이 등을 돌리고 도망치자 환호성이 울렸다.
 하지만 여진족들은 전의를 잃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
 장익환이 담장을 넘으려고 고개를 내민 여진족을 향해 환도를 내리쳤다.
 하지만 운이 안 좋았다. 그 여진인은 강철로 된 투구를 쓰고 있었다.
 있는 힘껏 내리치는 바람에 환도의 칼날이 이가 빠지고 칼이 휘어버렸다.
 내리치는 칼을 팽배로 막아낸 장익환이 팽배를 치우자 활을 당겨놓았던 시류가 바로 앞에서 화살을 쐈다.
 여진인은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장익환은 이총통을 들었다. 하지만 쏘는 법을 몰랐다.
 “이거 어떻게 쏘는 거야?”
 “그건 저도 잘······.”
 다른 담장으로 여진족들이 넘어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빨리 장전 좀 해봐!”
 시류는 얼른 죽은 총통수에게서 화약과 화살들을 꺼냈지만, 여진족은 이미 담장을 넘었다.
 “이놈이!”
 장익환은 그것을 그대로 휘둘러서 그자의 머리를 박살내 버렸다.
 그는 그렇게 담장을 넘으려는 다른 여진족의 머리를 향해 이총통을 도깨비방망이처럼 내리쳤다.
 그것을 본 여진족이 기겁한 나머지, 칼을 머리 위로 올렸지만, 칼은 부러지고 그자의 머리가 투구째 으깨졌다.
 그는 여진족이 올라오려고 하면 계속 내리쳤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지자, 여진족들이 물러났다. 하지만 반격할 수 없었다. 여전히 놈들은 숫자가 많았다.
 여진족들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놈들은 백성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갔다.
 따라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시류는 이를 악물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진족들은 관아를 포위한 채, 조금이라도 고개를 내밀면 활을 쏘았다.
 여진족들이 활을 자꾸 쏴대자, 조선군들은 담장 아래로 몸을 낮춰야 했다.
 세 명의 병사가 고개를 내밀다가 머리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은갑(水銀甲)
 
 
 
 
 
 
 풍산보에 있었던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이 났다.
 전체 병력 110명 중에 11명이 전사하고, 아홉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들 중 세 명은 부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상대가 중과부적이었다.
 여진족의 기병 2천 기에, 500명이 조금 넘는 보병들이 성을 공격했기에 그 정도로 끝난 것이 매우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고 관아와 그 안에 든 무기고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성안의 20가구, 성 밖의 주면 마을을 포함해서 30가구, 다 합쳐서 189명의 백성과 말 3마리, 소 10마리가 끌려가는 것은 막아내지 못하였다.
 풍산보 만호 이덕수는 아침에 여진족들이 철수하는 기색이 보이자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여진족들을 추격하여 다섯 명의 목을 베고 두 명을 사로잡았다.
 백성 12명을 구출했지만, 잃은 것에 비해 너무 보잘 것 없었다.
 장익환의 집은 비교적 멀쩡했다.
 주변에 있는 집들은 불이 붙어 전소가 되었지만 장익환의 집은 반쯤 탄 상태에서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고, 여진족들이 광을 뒤져 옷가지와 이불, 곡식 등을 약탈했지만, 그가 가장 아끼고 몰래 숨겨두었던 갑옷은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잃었으니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망연자실한 채 오열하는 장익환에게 시류는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이 집은 이제 버려야겠습니다.”
 장익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회령부사 허환은 이덕수를 구속하고, 조정에 이 일을 보고한 직후 심문을 위해 사로잡은 여진족 두 명을 한양으로 보내고 처분을 기다렸다.
 그리고 군사들을 시켜 성벽을 보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 때문에 시류는 매우 바쁜 시간을 보냈다.
 무너진 성첩을 다시 복구하고, 방어용으로 뿌려놓았던 마름쇠를 수거하고, 불탄 집들의 잔해를 치우고 시신들을 치우는 작업이 끝날 때쯤 드디어 번차가 끝이 났다.
 장익환과 시류는 가재도구를 챙긴 직후 회령으로 건너갔다.
 마침 회령부사 허환이 풍산보에 남은 백성들을 회령으로 데려간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회령으로 갈 수 있었다.
 시류가 회령에 지내면서 여러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정에선 여태껏 여진족들과 많은 교류를 했기 때문에 난데없이 이렇게 대규모 침입을 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주가 흉작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지 않았지만, 이 정도 대규모 침입을 할 정도면 그 정도의 재력이 있어야 하기에 앞뒤가 안 맞았다.
 조정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사로잡은 여진족들을 심문한 결과, 그자들이 풍산보의 지형과 무기고에 대해서 소상히 조사했고, 무기고를 갈취하는 게 목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작정하고 풍상보를 공격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추장인 아쿠타가 조선의 백성들을 납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의도적인 침공인 게 분명했다.
 조정에서는 모든 여진족과의 교류를 금지했다.
 그 덕분에 여진족과의 거래를 위해 열리던 회령의 장터는 썰렁해졌다.
 그 후 조정에선 북정(北征)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회령으로 전해진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
 
 안녕역(安寧驛)은 회령에 설치된 역관으로, 역관은 지방에 공무가 있는 관리나, 조정에 급한 장계를 보낼 때 쓰는 전령들을 위해 상시로 역마를 배치하였다.
 또 투숙을 할 수 있도록 객사도 마련된 곳이었다.
 이곳에 두 명의 말을 탄 인물이 도착했다.
 정확히는 두 명의 남녀와 그들이 타고 있는 말, 그리고 복마(짐말) 한 마리였다.
 말을 타고 앞서 나가는 인물은 하늘색 도포에 말총으로 만든 갓을 썼는데 갓끈이 자수정과 흰 옥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도포에 붉은색 술띠를 묶은 것을 보아 지체 높은 양반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자는 허리에 환도를 차고 있었는데, 구하기 힘든 가오리 가죽을 희게 물들이고 도금한 마무리 장식하며, 붉은 술이 딸린 띠로 장식된 것이 진귀한 보검이 분명했다.
 또 남자의 얼굴은 매우 희고 갈색빛이 도는 검은 수염을 목까지 기르고, 이마와 눈가에는 주름이 없었지만, 팔자(八) 주름이 깊었기에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여인은 남자보다 매우 어려 보였다(끽해야 17살 정도).
 말군(부녀자들이 말을 탈 때 입는 바지)에 배까지 내려오는 명주로 된 저고리를 입고, 삿갓과 너울을 썼지만, 양반가의 부녀자는 아닌 것 같았다.
 양반 여자들이 자주 하는 가체(가발)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복마에는 3개의 작은 항아리와 천으로 묶은 짐 꾸러미, 그리고, 천으로 감싼 기다란 무기, 월도(月刀)가 보였고, 나무상자까지 보였다.
 상당히 짐이 많았기에, 그들을 따라오는 복마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매우 애처로워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양반가의 남자와 그의 첩 혹은 몸종으로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안녕역, 그러니까 여진족과 자주 치고받고 싸우고, 북정이 있을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 마당에 회령으로 놀러 오는 양반이 어디 있겠는가?
 역졸은 그렇게 생각하며 역리에게 무관이 한 분 온 것 같다고 말을 했다.
 “무관이라고? 올해 부임하시는 나리들은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역리가 되묻자 역졸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도포에 환도를 차고, 월도가 보였습니다.”
 시국이 흉흉할 때에 그런 사람이 오자 역리는 이것을 회령부사께 알려야 하는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역리가 고민하는 사이에 그들의 말이 역관 안으로 도착했다.
 역리는 남자의 술띠가 붉은색이라는 것을 알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역졸은 무식해서 그게 그저 그런 양반의 장식이라 알고 있었지만, 역리는 붉은색 술띠는 오직 당상관만이 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마를 바꾸고자 하는데, 괜찮겠느냐.”
 자연스레 하대가 나왔기에 역리와 역졸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예, 지금 말이 있사옵니다.”
 “지금 데리고 있는 복마는 풍산역에서 데리고 온 말이니, 잘 먹였다가 풍산역으로 보내면 될 것이야. 어디 보자, 마패를······.”
 “아니, 아닙니다.”
 남자가 소매에 손을 집어넣자, 역리가 손사래를 쳤다.
 “풍산역에서 복마를 빌리셨다는 것은 마패가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복마를 내어오겠습니다.”
 그의 눈짓에 역졸이 얼른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내 말과 저 말에도 마죽을 쑤어 주게. 콩도 넣어주고.”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나으리, 회령부사께 기별을······.”
 “기별은 할 필요 없네.”
 남자의 얼굴이 엄해졌다.
 “내가 부사에게 기별하지 않고 왔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 말에 역리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나으리.”
 “마죽이나 쑤게나. 난 갈 길이 멀어.”
 “예이.”
 여인도 말에서 내렸고 역졸들에 의해서 안장이 내려졌다.
 두 사람이 탄 말은 검은색 털에 이마와 다리 끝이 흰 오명마(五明馬)로 다리가 굵고, 어깨 높이가 4척 1권(대략 130cm)으로 고작 3척 조금 넘던 조선의 다른 말들과 다르게 키가 큰 준마였다.
 명마로 소문난 군마이기도 했지만, 명나라에 자주 진상되어 정작 조선에서 보기 힘든 말이었는데, 그 말을 눈앞에서 보자 말들을 이끌고 마구간으로 데리고 가던 역졸은 혀를 내둘렀다.
 ‘이런 명마를 고작 아녀자 따위에게 태우다니. 그것도 양반네 여자가 아니라 잘해봐야 첩, 아니면 몸종 따위가.’
 역리 또한 그 말이 매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속으로 둔 채 남자에게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저쪽 대청에 모시겠습니다.”
 비단으로 된 방석이 깔렸고 남자와 여자가 방석 위에 정좌하고 앉았다.
 여자가 대청에 앉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역리는 지금 곳간에 있는 재료들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술상을 내어오리까? 아니면 다담(茶啖)을 내어오리까?”
 “그냥 냉수 한 그릇 가지고 오게. 갈 길이 바쁘니 마죽은 그리 많이 주지 말게. 말들은 배가 너무 부르면 둔중하니까.”
 “예이.”
 역리의 명령에 역관에 소속된 몸종이 커다란 부채를 가지고 왔고 그들에게 부채질을 해주려고 하였다.
 “덥지 않다. 치우거라.”
 “예.”
 몸종이 떠났고 말들이 마죽을 먹고 역졸이 가장 좋은 복마를 대령했다.
 사발에 담긴 청정수를 마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은 다 묶었는가?”
 “그렇습니다.”
 “내 다시 말하는데······.”
 남자의 말이 낮아졌다.
 “절대로 부사에게 말하지 말게. 다 때가 되면 찾아갈 것이야.”
 “아, 알겠사옵니다.”
 일행이 다시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역리는 역졸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서 부사 나리께 지금 말씀드려라.”
 “예? 하지만······.”
 “이놈아! 저런 분이 오셨다는 것을 부사 나리께서 모르시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 우리가 치도곤을 맞는 게 아니야?! 미리 알고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겠느냐?!”
 역졸이 얼른 도호부로 달려갔다.
 
 ***
 
 회령에 있는 시류의 집은 장익환의 집보다는 컸다.
 5칸 정도 되는 그 집은 마구간과 부엌, 정주간(일종의 거실) 그리고 2개의 방이 있는 집이었다.
 원래 다른 방은 시류의 갑옷과 무구를 두는 일종의 곳간으로 사용했지만, 지금은 장익환이 거기서 기거하였고, 시류는 자신의 방에서 살았다.
 번차 기간 동안 집안을 관리하지 못해 집안이 더러웠지만, 두 사람이 같이 청소를 하고 살림을 차리자, 어느 정도 번듯해졌다.
 관아에서 여러 번 순시를 해준 덕분에 잃어버린 것도 없었다.
 번차 기간이 끝난 시류가 봄, 여름 동안 과수원에서 일하고, 뒷마당에 식물(食物)을 기르는 동안 장익환은 나무를 하는 등 지냈지만, 어머니를 잃었단 상심이 큰 나머지 그는 거의 아무런 말도 없었다.
 무구 또한 손질하지도, 활을 다시는 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면 말없이 어머니께 드리려고 했던 갖옷을 보며 방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나설 수도 있었겠지만, 풍산보의 전투 이후 국경의 방비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도저히 나갈 방도가 없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는 허송세월을 보내는 중이었다.
 대청에 앉아서 환도를 닦으던 시류는 문이 닫힌 장익환의 방을 보면서 한숨을 쉬다가 밖에서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리자 환도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
 “누구요?”
 문을 여는 순간, 시류의 움직임이 바로 멈추고 말았다.
 “오랜만이구나.”
 “영감마님이 아니십니까?”
 시류가 공손하게 손을 모은 후 고개를 숙였다. 그가 바로 시류의 아버지인 시무선(施茂宣)이었다.
 기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 때문에, 시류는 대접해드릴 것이 별로 없었다.
 시무선은 한성부판윤(지금의 서울시장 겸, 서울중앙법원장 겸 서울지검검사장)으로 서울에서 근무를 하기 때문에 이런 먼 변경으로 올 이유가 없었다.
 마침 시간이 정오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류는 낮것상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움직이려고 하였지만, 시무선이 막았다.
 “계집종을 데리고 왔으니 네가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방에서 담소나 나누자꾸나. 사랑비야, 낮것상을 내어 오거라.”
 “예.”
 그전에 방에 틀어박혀 있던 장익환이 얼른 방에서 나와 시무선에게 절을 했다.
 “장가(家) 익환이라 합니다.”
 “류와 같이 사는 건가?”
 “그렇습니다.”
 시무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내 짐 좀 옮기는 것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시무선의 손짓에 시류는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럭저럭 사는구나.”
 방 안을 둘러보며 그가 말했다. 그러다가 그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하지만 지붕이 썩었군.”
 1년 가까이 방치한 덕분에 보릿짚으로 된 지붕이 잿빛으로 썩어있었다.
 “번차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관아에 방직 기녀(房直妓女)라도 한 구 달라고 하지 않았냐?”
 그 말에 시류는 얼굴을 붉혔다.
 방직 기녀는 국경을 방비하는 군관들을 위해서 마련된 현지 첩으로, 집을 자주 비우는 군관들의 살림살이를 도맡으면서 밤 시중까지 해주는 기녀들이었다.
 “소인은 군관이 아닙니다.”
 “아, 그렇지. 갑사였지.”
 시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풍산보에 있었다고 들었다. 저 건넛방 사는 놈도 풍산보에서 근무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풍산보에서 살던 토병으로 지난 전투에서 어미를 놈들이 끌고 갔습니다.”
 “저런.”
 그의 표정이 애틋해졌다.
 “어찌 안색이 좋지 않더라니······.”
 그는 시선을 돌렸다.
 “내가 왜 이곳에 온 것 같으냐.”
 “소인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시무선의 눈가가 잠깐 파리해졌다.
 “성상께서 나를 북정도 원수로 임명하셨다.”
 시류의 온몸이 잠시 부르르 떨렸다.
 “북정이 사실이었습니까?”
 “그렇다. 서울에서 경군 기병 6천과 보병 4천이 준비 중이고, 영안대로(지금의 함경도와 도성을 이은 길)의 각 역관마다 군사들이 먹을 군량미를 모으고 있다. 영안도 소속 군사들도 징발해서 1만 6천의 병사들과 2만의 각도 정군들을 차출할 것이다.”
 시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시무선이 북정도 원수가 되었으니, 그럼 번차 기간이 끝난 본인도 분명 징발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비밀로 하여야 하는데 왜 그것을 자신에게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와 함께 만주로 가겠느냐?”
 시무선의 말에 시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소인도 북정에 참가하지 않겠습니까?”
 “군관으로 내 곁에서 참가하여라. 종사관이 같이 가겠지만, 내 곁에서 같이 참가하였으면 한다.”
 군관이라는 말에 시류의 몸이 다시 떨렸다.
 “소인은······.”
 “자꾸 소인이라고 하지 마라!”
 시무선이 역정을 내었다.
 “넌, 내 아들이다.”
 정좌하고 있던 시류의 두 손이 흔들거렸다.
 “소인은······. 서출입니다. 영감, 아니 대감마님.”
 시무선의 품계가 올랐기에 시류는 얼른 정정하였다.
 “네 어미가 비록 첩이었다고 해도 넌 내 아들이다.”
 시무선의 말에 시류는 고개를 숙였다.
 “네 어미의 묘소는 잘 가꿨느냐?”
 “지난번에 김매기를 하였습니다.”
 “그래, 잘했다.”
 “대감마님.”
 문밖에서 여종 사랑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것상을 준비하였습니다.”
 “들여라.”
 개다리소반을 들고 여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류는 몸을 돌렸다가 여종과 눈을 마주쳤다. 체구가 아담하고, 눈매가 크고 동글동글한 여자였는데 댕기 머리를 한 덕분에 이마가 시원하게 드러나 있었고 머리의 가르마가 보였다.
 얼굴이 말랐기에 턱선이 날카롭게 보였지만, 보기 싫지는 않았다.
 그 여자는 개다리소반에 2개의 밥그릇과 데친 나물, 그리고 된장이 담긴 종지를 가지고 왔다.
 “어찌 겸상을······.”
 부자 관계라도 겸상을 하지 않는 것이 법도였는데 하물며 서출인 시류와 겸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자간에 거의 1년 만에 편지도 없이 만난 것인데. 겸상 정도는 괜찮다. 어차피 상은 한 개뿐이지 않으냐?”
 시무선의 말에 시류는 어쩔 수 없이 수저를 들었고 조밥을 먹었다.
 낮것상이었기에 밥이 많지 않았고, 그들은 조밥을 먹고 나물을 된장에 찍어 먹었다.
 시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밥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시무선은 사랑비가 상을 치우자,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어미에게 가자꾸나.”
 “예, 알겠습니다.”
 “사랑비야, 술병을 가지고 오너라.”
 “예.”
 사랑비가 백자로 된 술병을 가지고 왔다.
 오래 묵은 술이 분명했다.
 “가지고 따라오거라.”
 “장 형, 잠시 나갔다 올게요.”
 갑자기 높으신 분의 출현에 어안이 벙벙한 장익환에게 그리 말한 시류는 뒷짐 지고 앞서 걸어가는 시무선을 따라갔고, 그를 산으로 안내했다.
 시류의 어머니, 송하랑의 묘지는 걸어서 한 식경이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주변은 시류가 신경 쓴 덕분에, 풀이 짧게 잘려있었고 비석도 깨끗했다.
 시무선은 봉분 앞에서 두 번 절을 하더니, 봉분을 끌어안듯이 봉분 위에 누웠다.
 “나 왔소.”
 그는 눈을 감은 채, 잠시 그러고 있더니 술병을 열었다.
 붉은색 빛깔이 돌고 한약 냄새와 독한 술 냄새가 나고 붉은빛이 도는 것이 홍주가 분명했다.
 시무선은 홍주를 봉분 위에 조금씩 부었다.
 시류는 그것을 말없이 보았다.
 정확히는 시무선의 가증스러움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잠시 동안 시무선은 봉분의 곁에 앉아 말없이 한 식경 정도 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원망스러우냐?”
 방에 앉자마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고 자신의 분노가 시무선에게 전해진 줄 알고 시류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아닙니다.”
 변명하였지만,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덕분에 시류의 당혹함이 시무선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미안하구나. 난 네 어미를 살리고자 노력하였다.”
 “한 달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으면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어차피 엎질러진 물, 시류는 입을 열었다.
 “아니다. 나는······.”
 시무선이 입을 다물었다.
 “그럼 어째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오셨단 말입니까?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부터 대감마님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대감마님은 코빼기도 보이시지 않으셨죠. 연통을 넣었고 직접 대감 님 댁에 찾아갔었는데도 대감마님은 집을 비우셨다고 할 뿐 보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어머니를 장지로 모신 직후에 추한 몰골로 찾아오셨죠. 갓끈은 끊어지고, 옷은 군데군데 찢어진 것이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걸인과도 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시무선은 고개를 떨구었다.
 “······다 내 잘못이다.”
 두 사람 사이에 작은 침묵이 감돌았다.
 “앉아라.”
 시무선의 말에 시류는 그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편히 앉아라.”
 시류가 양반다리로 앉는 동안 시무선은 잠시 갈등의 시간을 가졌다.
 “모든 것을······. 언젠가 모든 것을 설명할 때가 올 것이야. 그때는 너도 이해해줄 것이라고 난 믿는다.”
 시류는 코웃음을 칠 뻔했다.
 그는 눈을 내리 깐 채 그의 말을 들었다.
 “네 어미 송하랑의 이름은 내가 지어주었다.”
 시무선의 말에 눈을 내리깔던 시류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회령에서 권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네 어미를 처음 만났다. 두만강 소나무 아래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던 네 어미를 처음 본 것은 네 나이 때쯤이었지. 네 어미는 재가승 마을(조선에 귀화한 여진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여자였어. 야인들의 복장에 머리를 엉덩이까지 늘이고, 그것들을 일일이 작게 땋은 것이 밤하늘 아래의 물결처럼 아름다웠지. 그래서 송하랑(松下浪)이라 지은 것이다. 원래 여진족의 이름이 있었지만 네 어미는 나와 혼약하면서 그 이름을 버렸다.”
 시무선은 새로운 병마개를 열었고 홍주를 주둥아리 채 대고 마셨다.
 “네 어미는 홍주를 좋아했지. 자기가 좋아하는 석류랑 닮았다면서 말이야. 네 이름도 네 어미가 좋아하는 석류가 익는 계절에 태어났다고 해서 류(榴)라고 네 어미가 지은 것이다.”
 그는 홍주를 단번에 다 마셨다.
 “네 어머니는······. 여진족이었지만, 내 사랑이었고 내 아내였다. 하지만 집안에선 인정하지 않았지. 내가 서울로 올라갈 때 집안에서 이미 혼인할 여자를 미리 점찍어 놓았지.”
 “그리고 대감마님께선 우리 모자를 버리셨지요.”
 “내가 너희를 버렸으면, 너희 살림을 도왔겠느냐?”
 시무선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매달 식물과 곡식을 보내고 옷감을 보내고 그러지 않았느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랬겠느냐?”
 “덕분에 저는······. 소인은, 서출로서 지내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양인들도 관직에 나갈 수 있는데 저는 서자라는 이유로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갑사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
 시무선은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대감마님만 믿고 따라갔는데, 대감마님은 어머니를 버리시고 첩으로 만드셨지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애타게 대감마님을 찾으실 때 대감마님은 행적을 보이시지 않으셨지요. 그러셨던 분이 이제 와서 넌 내 아들이라 하시니. 소자는 황망하기 그지없습니다. 말씀해주십시오. 영감마님, 도대체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날 한 달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시무선은 고개를 돌렸다.
 “말할 수 없다.”
 “언젠가 말씀해주신다는 것입니까? 그때가 언제이옵니까?”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 단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일이 있었고, 지극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미지의 일들도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지금 저를 놀리시는 것입니까?”
 “아니다. 나는······. 미안하다. 날 용서해다오.”
 시무선이 엎드렸다.
 시류는 그가 갑자기 이렇게 나오자 당혹감에 어쩌지 못했다. 갑자기 그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그는 시무선의 유일한 자식이었고, 남자였기에 가문의 대를 이으려면 그가 필요했다.
 서자이지만, 적자로 고치는 것은 간단했다.
 호적과 족보만 바꾸면 된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아닌 시무선의 본부인 김 씨의 아들로 입적해야 했다.
 그러나 시류로선 절대 그럴 수 없었고, 이는 시무선도 잘 알고 있었다.
 “왜 갑자기 제게 이러십니까?”
 “널 아끼기에 그러는 것이다.”
 “제가 왜 회령으로 온 것인지 알지 않습니까? 제가 갑사로 회령으로 온 것은 어머니의 묘소 곁에서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저보고 만주 땅의 전쟁터로 가라고 하시면서 절 아낀다고 말씀하시옵니까?”
 “이건 기회다.”
 시무선이 상체를 세우며 말했다.
 “이번 북정에서 네가 공을 세운다면, 너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는 군관도 될 수 없는 몸······.”
 “아니다.”
 시무선이 시류의 말을 잘랐다.
 “성상께서, 귀하든 천하든 글을 쓰고 군 경험이 있는 높은 자가 있다면, 군관으로 뽑아 군을 지휘하게 하라 하셨다. 네가 적자가 되기 싫더라도 네가 아무리 서자라도 이젠 관직으로 나갈 수 있다. 내가 널 그렇게 하겠다.”
 시류의 몸이 천천히 떨렸다.
 “네게 기회다. 관직에 나갈 기회란 말이다. 군관으로서 전공을 세우고, 나의 후광을 등에 업는 다면 금방 관직에 오를 것이야. 평생 이곳에서 갑사로서 보낼 생각이냐? 관직에 올라, 가문을 빛내고 부모에게, 네 어미에게 효도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
 
 장익환은 귀를 문가에 더 가까이 두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로서는 피가 끓어오르고 두 손이 떨리는 순간이었다.
 ‘북정이다. 만주로 간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흠흠.”
 약간 높은 헛기침에 장익환은 화들짝 놀라 덩치에 안 맞게 엉덩방아를 찧었고, 뒤에 서 있는 사랑비를 보았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밖에 무슨 일이냐.”
 문안에서 묻는 시무선의 목소리가 매우 부드러웠다.
 “예, 도호부에서 백살구와 서찰을 보내왔습니다.”
 서찰은 보나 마나 찾아뵙겠다는 말일 것이다.
 “이놈의 역리가 말을 듣지 않았군.”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지만, 여전히 기분이 좋은 듯 약간 들뜬 목소리였다.
 “사랑비야, 철릭을 내어 오거라. 곧 있으면 회령부사가 찾아올 듯하니, 찾아오지 못하게 해야겠다. 아니, 그래 갑주(甲冑)도 내어 오거라. 내 저들 앞에 위용을 보이겠다.”
 “예.”
 시류가 방문을 열었고 장익환과 눈이 마주쳤다.
 “장 형, 이제 됐어요.”
 시류의 표정이 밝았다.
 “아주머님을 구하러 만주로 갈 수 있을 것이에요. 갑주랑 무구를 정리하셔야 할 것입니다.”
 “류야, 너도 철릭을 입어라. 너도 같이 가자.”
 “예.”
 사랑비가 궤짝을 꺼냈다. 그녀는 정말로 힘이 좋았다.
 궤짝에서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갑주가 나왔다. 장익환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수은갑(水銀甲)······. 저걸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간주형태의 투구의 이마 가리개는 금빛이었고 가운데 중앙에 원수라는 글자가 조각되어 있었다.
 테두리와 테는 금박을 입혀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이 났고 그 위에 마무리 장식인 개철은 금상감 장식으로 아름다웠다.
 그 위에 달린 삼지창과, 붉은 술이 보였다.
 옆 드림과 뒤 드림은 수은을 입힌 찰편들도 보였다.
 테두리는 검은 가죽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시류가 직접 시무선의 의복을 입히는데 수발을 들었다.
 푸른 철릭을 갖춰 입은 시무선은 갑주를 입고, 앞트임의 가죽 끈을 조였다.
 시류가 검은색 광대(廣帶)로 그의 허리를 둘렀고 뒤에서 묶었다.
 그리고 가죽 혁대와 동개일습과 가오리 가죽을 두른 환도의 고리를 매었고, 그 위에 자색의 전대를 매었다.
 전대에는 황색의 병부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그 후 비갑(팔뚝을 보호하는 갑옷 부속품)을 찬 후에 투구를 썼다.
 시류는 검은색 철릭에 검은 전대를 차고, 전립을 썼다.
 시류의 눈에 테두리 장식이 눈에 띄었다.
 대게 의전용 갑옷은 테두리를 가죽 털로 마감을 하는데, 실전용인 이 수은갑은 갑주 전체 마무리가 검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당초문(唐草文)으로 자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자수가 석류였다.
 “네 이름은 석류에서 따왔고, 네 어미가 석류를 좋아했으니, 석류 무늬를 넣었다.”
 시류의 시선이 조금 어색한지 시무선의 대답이 조금 흔들렸다.
 “다 되었습니다.”
 시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말을 내어오겠습니다.”
 시류는 시무선의 오명마를 내어오고 고삐를 잡았다. 직접 말구종을 할 생각이었다.
 “너도 말을 타고 따라와라.”
 시무선이 문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의 걸음은 무거운 갑주와 무구를 차고 있는데도 매우 가벼웠다.
 그의 나이는 45세이지만, 힘은 20대 장정보다 강할 만큼 장사였다.
 그는 가볍게 안장 위에 올랐고 시류도 자신의 갈색 말을 타고 올랐다.
 “가자.”
 
 ***
 
 회령도호부는 한바탕 혼란이 불었다.
 회령부사 허환은 역리의 의도와 다르게 곧바로 간식과 서찰을 보내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허환이 종을 시켜 간식과 서찰을 보내 의관을 정제했다.
 그러곤 기마병 10기를 이끌고 시무선에게 찾아가려는 순간, 도호부의 정문에 수은갑을 차려입은 시무선이 나타났다.
 그 결과 맨발로 나가 그의 앞에서 절을 해야 했다.
 시무선은 자기 뜻을 어긴 역리를 잡아 와 태형 12대를 내렸고, 아는 척을 했다는 이유로 아랫것들이 보는 앞에서 허환에게 질책하며 망신을 주었다.
 물론 그리 무거운 중죄가 아니었기에 가볍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허환의 얼굴이 벌게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북정도 원수였기에 관아 내부는 매우 어수선했고, 그 덕분인지 시류의 이름이 군관 명부에 오르는 데 별로 큰 어려움이 없었다.
 
 
 
 삭풍 (1)
 
 
 
 
 
 
 한양, 도성 지방에서는 서울이라고도 하는 곳에서 고관대작들이 모여 산다는 북촌의 가장 큰집은 순안대군의 집이었다.
 순안대군은 선대왕의 적장자로 왕이 승하할 때 나이가 고작 3살이었고 심신이 약해 병을 앓고 살았던지라, 대비께서 순안대군 대신 서자이자 당시 나이가 12살에 건강하던 인성군을 보위로 올리게 하였다.
 많은 이들은 골골거리던 순안대군이 얼마 안 가 요절할 것이라 여겼지만, 순안대군은 살아남았고, 나이가 점점 차오르자, 왕은 왕실의 내탕금으로 그에게 북촌에 가장 큰집을 지어 주었다.
 덕분에 순안대군은 북촌에서 가장 큰 99칸짜리 집을 가질 수 있었고 왕실의 배려로 부리는 노비의 숫자가 무려 3천 명이나 되었다.
 그 집의 서실(책을 읽는 방)에서 세 명의 인물들이 촛불 하나를 킨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소리가 작고 심각한 것이 중요한 듯했다.
 “주상이 정말 시무선에게 그렇게 말했소?”
 “그렇습니다. 대전 내관이 말했으니 확실합니다.”
 녹색 비단 도포를 입은 이가 흰색 비단으로 된 도포를 입은 순안 대군에게 말했다.
 순안 대군은 도포에 망건만 쓰고 있었고 녹색 도포의 옆에 푸른색 도포를 입은 이도 있었지만, 촛불이 작고 약해 순안 대군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주상이 어찌 우리의 계획을 알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푸른색 도포를 입은 이가 말했다.
 “아니, 아니요. 주상은 의심만 하는 것이지 소상히는 알지 못할 것이오. 주상은 영특한 인물이니 그 정도는 추리할 수 있을 것이오. 괜히 우리 내부를 내사하면 분란과 혼란이 일어날 뿐이니 그러지는 맙시다. 다만 시무선, 그자를 어찌 막을지 생각해 봅시다.”
 “이게 다 아쿠타, 그자 때문입니다. 적당히 공격해서 피해를 보게 했으면 됐을 텐데. 수많은 백성을 끌고 가니 결국 북정을 막지 못했잖습니까?”
 녹색 도포의 남자가 분한지 무릎을 쳤다.
 “아쿠타를 처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자는 우리와의 거래를 소상히 알고 있는 자입니다.”
 “아니, 안 되오. 그렇게 하기엔 우리 손해가 너무 막심하니까. 그건 하지 맙시다. 아쿠타는 죽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이요. 그건 차선책으로 둡시다.”
 푸른색 도포의 말에 순안 대군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쿠타가 시무선에게 잡히면 우리의 일이 밝혀질 수 있습니다.”
 “이참에 우리가 그 예의 거사를 지금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도성에 주둔하던 경군의 대부분이 빠져나갈 것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안 되는 것이 비어버린 도성을 수비하기 위해 이미 각지에서 번상(지방군사가 서울 군영으로 가는 것)을 위한 병력이 출발했소.
 번차가 아닌 금군들도 궁궐로 불러 들어가 숙위를 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고 거기에 별시위(조선 중앙군조직체계 중 용양위에 속한 군사들, 도성의 숙위를 담당한다)들도 전부 소집하였는데, 그렇게 되면 도성과 궁궐 수비 병력이 족히 3천이 넘을 것이오.
 “그렇기에 거사를 하기 힘드오. 게다가 아직 경군은 출발도 하지 않았소. 많은 군사가 모이고 있으니 오히려 도성의 분위기가 흉흉한 상태인데, 괜히 일을 일으켰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니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좋소. 지금은 북정을 막는 계책을 말해주시오.”
 “일단 우리 사람인 강원도 관찰사에게 행군로에 배치된 군량미를 의도적으로 적게 배치하기는 했습니다만, 이건 방해가 될 뿐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도성에서 소집령이 떨어졌고 추수가 끝나면, 군대는 북쪽으로 갈 것입니다. 주상도 이미 더 이상 북정을 반대한 상소를 받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더 이상 북정을 막는 것은······.”
 “대장이 죽는다면?”
 순안 대군이 입을 열었다.
 “대장이 죽는다면 북정이 멈추지 않겠소?”
 “북정도 원수를······.”
 두 명의 인물들이 서로를 보았다.
 “시무선은 주상께 상방 보검을 하사받은 자입니다. 괜히 어쭙잖게 그자를 죽이려고 했다가는 역도로 몰리고 또 우리의 거사가 밝혀질 수 있습니다.”
 “아니, 시무선 그자는 죽여야 하오.”
 순안 대군의 말이 단호했다. 그는 결심한 듯했다.
 “시무선은 조정 내에서 가장 크게 북정을 주장하던 자요. 그자가 죽는다면, 북정을 지지하는 고관들은 구심점을 잃을 테고, 그것을 빌미로 북정을 반대하는 여론이 일어날 것이오. 게다가 시무선에게 밀명을 내린 이는 주상이오. 그것도 은밀하게 내렸으니 그 말고 다른 이에게 명령을 내린 이는 없을 것이오. 또한 시무선은 힘이 장사고, 무반이라 군정은 물론이거니와, 문인으로도 매우 높은 실력을 갖추고 있는 뛰어난 인물인데, 그자가 죽는다면 주상의 날개가 꺾인 것과 다를 바가 없을 터. 그렇지 않아도 그자 때문에 곤란하던 일이 자주 벌어졌으니 이참에 죽여야 마땅하오.”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만······.”
 푸른색 도포가 고개를 조아렸다.
 “시무선은 말씀하신 대로 기골이 장대하고, 힘은 천하장사이며, 학식도 뛰어난 자입니다. 그런 인물에게 어쭙잖게 자객을 보냈다가는······.”
 “누가 자객을 보낸다고 하였소?”
 순안 대군이 붓을 들었다. 그러곤 종이에 빠르게 글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글을 다 쓰자 그는 푸른색 도포를 입은 자에게 그것을 넘겼다.
 “이걸 6진에 있는 그에게 전해주면 될 것이오.”
 
 ***
 
 행영, 함경도 6진의 사이에 있는 병영성(兵營城)으로 각 진과 걸어서 하루거리에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서 병사들이 상시 주둔하고 있다가 여진족들의 침입이 벌어지면, 지원군을 보낼 수 있었기에 영안도를 지키는 북병사(北兵使)가 이곳에서 기거하였다.
 물론 북병사의 본영은 6진에서 멀리 남쪽으로 떨어진 경성(鏡城)에 있었기에, 노적들을 두려워하거나 혹한의 영안도의 추위가 싫은 북병사들은 경성에서 기거하기도 했다.
 영안도 관찰사는 영흥(지금의 함흥)에 기거하였다.
 행영에 들어온 시무선은 각 진의 수령들을 불러 모았고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도성에서의 경군은 추수가 끝나는 대로 올 것이다.”
 시무선이 말하였다.
 그들이 앉은 탁자 사이에, 하얀 백살구들이 먹기 좋게 놓여있었다.
 “영안도의 군사, 6천도 이번 북정에 참가할 것이다. 관찰사(현재 북병사 겸직 중)와 이미 협의가 끝난 상태이니 6진에서 번차가 아닌 병력 중 먼저 지원자를 뽑고, 숫자가 부족하면, 징병할 것이다. 각 진에서 기병 400, 보병 600씩 할당이 될 것이며, 총원 전투 병력으로 뽑을 것이다.”
 “총원 전투 병력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 하삼도와 강원, 경기, 황해에서 징발한 2만의 정군들이 보급부대를 맡을 것이다.”
 그는 종이를 꺼내 들었다.
 “군량미는 조, 콩, 쌀 등을 포함해서 총 4만 8천석, 동원되는 소는 4,321마리, 말은 기병들을 포함해서 14,235마리가 동원될 것이다. 이는 이미 조정에서 결정된 사항이며, 이미 징발되어 이동 중이다.”
 잠시 좌중이 술렁거렸다.
 시무선은 태연하게 살구를 집어 들어서 먹었다.
 “전투 병력은 기병 8,400, 보병 7,600으로 총병력 1만 6천이다. 이들만이 두만강을 넘을 것이며, 보급부대는 일부만 넘을 것이다.”
 “저······ 소관이 여쭙고자 합니다.”
 경원부사 유길주였다.
 “말하라.”
 “이번에 북정을 떠나는 장정들에게 녹봉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중요한 일이긴 했다.
 가뜩이나 농번기인데, 아직 군사들이 출정하지 않았다지만, 군사들이 갈 길목은 이미 보급을 맡은 정군들이 동원되어 군량미를 옮기고 있었다. 즉, 백성들이 곤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체아직을 가진 갑사들은 물론 녹봉을 받을 것이다.”
 한 푼도 없단 소리였다.
 “우리 백성들이 잡혀갔는데, 그럼 가만히 있느냔 말이냐!”
 주변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시무선은 탁자를 손으로 치며 호통을 쳤다.
 “물론 전리품은 각자의 몫이 될 것이다! 수급은 성상께 보내야 마땅하지만 성상께서 전리품은 받지 않을 거라 하시었으니, 모두 노력한다면 크게 성공할 것이다.”
 이야기는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6진의 군사 중 가난하여, 스스로 갑옷을 마련하지 못한 자들이 여럿 있습니다. 공납으로 갑옷을 몇 벌 받아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긴 하였습니다만,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 6진인지라, 현재 번차인 갑사들과 부방하러 오는 군사들에게만 간신히 갑옷을 지급할 지경입니다.”
 “그것은 걱정하지 마라, 조정에서 군기시에서 보관 중인 갑주를 지급하기로 하였다. 하삼도에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군사들의 갑옷을 받아서 올려 보낸다고 했으니, 갑옷이 없어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것보다 납의나 직령, 휘항 등 방한복 등을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최소 70일, 최대 네 달이나 되는 원정이니, 만주 땅에서 겨울을 보낼 듯싶으니까.”
 시류는 이러한 대화를 바로 뒤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일개 군관인 그가 수령들의 회의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시무선 덕분이었고, 시무선의 행동에 토를 다는 수령들은 아무도 없었다.
 시무선은 그가 자신을 따르면서 이 모든 것을 배우길 희망하는 듯했다.
 물론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보고 듣는 것은 시류에게 매우 좋은 경험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 후 회의는 조금 지루했다.
 경군들이 총통과 화차를 끌고 온다는 이야기, 6진에 있는 화약의 양, 총통군의 숫자, 각 진에 보관 중인 화살의 숫자, 무기고의 무기들, 활들의 상태.
 각궁들의 어교가 풀릴 수 있으니, 아랫목에 넣고 이불을 덮어서 점화해놓으라는 섬세한 지시들이 오갔다.
 또한 마의(馬醫)들에게 명해 말들의 전염병에 유의하라 하였으며, 정군들과 백성들을 동원해 경군들을 수용할 군영과 마구간을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전쟁이라는 것이 이리도 힘들구나.’
 시류는 시무선과 수령들이 회의하는 것을 계속 지켜보았고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행영에 소속된 식모들이 정성스럽게 상을 차렸다.
 쌀밥과 함께 삶은 계란, 참나물과 고사리나물, 그리고 꿩편구이와 메추라기로 국물을 낸 된장국이 나왔다.
 구기자 술도 나왔지만, 시무선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내아에 숙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숭늉이 나올 무렵 행영 소속 권관이 고했다.
 “아니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노적들이 알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물론 우리 백성들 또한 알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나는 회령에 있는 집에 기거하고 있겠다. 그러니 그때까지 번거롭게 준비할 필요는 없다.”
 “그러시면······.”
 “지금 바로 회령으로 갈 것이다.”
 “여독도 풀지 않으시고, 하루 종일 회의를 하셨는데······.”
 “피곤하지 않으니 상관없다. 행영과 회령은 그리 먼 곳이 아니니까. 그럼 먼저 일어나겠네.”
 동헌에서 빠져나온 시무선은 오명마에 올랐다.
 “곧 있으면 해가 떨어질 텐데, 그냥 쉬시다가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시류의 물음에 시무선은 고개를 저었다.
 “널 돌봐야 하지 않겠느냐? 갑주와 무구, 그리고 동개일습이 어떤지 좀 보고 싶었을 뿐이다. 더구나, 네 집에 내 몸종이 있으니까.”
 그 말이 어째선지 사랑비가 보고 싶어 얼른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시류였다.
 
 ***
 
 새벽에 눈을 뜬 시류는 목이 말라 물을 마시기 위해 우물가로 갔다.
 우물은 뒷마당에 있었는데, 그가 언제 날을 잡아서 3일간 판 끝에 수맥을 찾아 만든 우물이었다.
 우물물을 마신 그가 세수한 후 몸을 돌리니 집 벽에 바짝 붙은 채, 나란히 서 있는 항아리 단지 3개가 보였다.
 이것은 시무선이 가지고 온 항아리였다.
 호기심이 든 그는 첫 번째 항아리를 열었다.
 검은색 맑은 물이 보이고 짠 내가 느껴졌다. 간장이었다.
 두 번째 항아리를 열자, 갈색의 물체가 보였다. 무언가 푸른 것들과 붉은색 같은 자잘한 것들이 박혀 있었다.
 ‘볶은 된장인가?’
 맛을 보니 마늘과 달래, 파, 부추, 남만초가 약간 들어있는 것이었다.
 시류는 마지막 항아리를 열었다.
 된장 같아 보였는데 검은색 물체였다. 진한 간장 냄새가 나는데, 된장은 아니었다.
 그는 새끼손가락으로 살짝 그것을 떠먹었다.
 엄청난 짠맛에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와 함께 느껴지는 맛은······.
 “고기?”
 “육장(肉漿)입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그는 화들짝 놀라 뒤를 보았다. 사랑비였다.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소, 돼지, 닭, 사슴, 꿩, 메추라기 등 온갖 고기들을 가마솥에 넣어서, 푹 끓인 후에 기름을 걷어내고 고기는 뼈와 살, 껍질을 잘 발라서 살만 걷어 잘게 찢어서 말리고 육수에 진간장을 넣어서 졸인 후 말린 고기와 다시 간장을 더 넣어 푹 끓여 걸쭉할 때까지 만든 후에 식히면, 육장이 되는데 이것만 있어도 고기를 넣지 않아도, 육수를 만들 수 있사옵니다. 옛날에는 천 리를 가도 상하지 않는다 하여, 천리장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시류는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녀자가 이렇게도 발걸음이 조용하다니. 체탐군들처 밑창에 소털 가죽으로 된 신발이라도 신었나?’
 “그럼 아침상 준비하겠습니다.”
 “그, 그래라.”
 사랑비는 뭔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아녀자의 몸으로 쌀 1석을 힘들이지 않고 옮기는 것을 보아 힘이 은근슬쩍 강한 데다 어디서 가지고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찬거리를 가지고 왔다.
 시류가 그녀에게 제공하는 것은 오로지 조와 보리뿐이었다.
 게다가 많이 마른 것이 흠이지만, 미색이 뛰어난지라 여자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던 시류조차 그녀에게 관심이 갈 정도였고, 평소에 잘 씻지 않았던, 장익환조차 자주 세수를 하는 지경이었다.
 “사랑비야, 조두(팥이나, 녹두 등을 갈아서 만든 일종의 가루비누)를 가져오너라.”
 “예, 대감마님.”
 잠에서 깬 시무선이 조두와 세숫대야를 받아서 세수하는 동안, 시류는 장익환의 방으로 가서 병장기와 갑주를 꺼냈다.
 관리한다고 했지만, 자주 하는 것이 아닌지라, 갑주들은 어느 정도 녹이 슬어 있었다.
 특히 가장 관리를 안 하던 장익환의 갑주가 문제가 심각했다.
 “들기름 가지고 왔어.”
 장익환이 기름병을 가지고 오며 말했다.
 두 사람은 정주간에 앉아 녹을 긁어내고, 옻칠하고, 들기름을 유기에 담아, 등불에 끓여 붓으로 발라서 윤을 내는 등, 그들이 하는 손짓은 매우 꼼꼼했다.
 시류는 그 작업을 하면서 아까 봐둔 장독을 생각했다.
 그 정도 양의 장독이면, 시무선은 오래 머물 생각이 분명했다.
 4개월 치라고 하기엔 너무 많아 보였다. 혹시······.
 이들이 하는 일이 다 끝날 무렵 사랑비가 솥뚜껑을 열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보리가 섞인 쌀밥이 나왔다.
 “쌀밥이야?”
 그 냄새를 맡은 장익환이 그것을 보았다가 증기에 얼굴을 데고 말았다.
 그것을 본 사랑비가 고개를 돌려 쿡쿡거리며, 웃었다.
 고봉처럼 솟아오른 밥에, 숙주나물과 육장을 넣은 미역국이 나왔다.
 숙주나물은 들기름에 간장을 넣어서 간을 했다.
 “뭔 집에 침채(김치)가 없느냐?”
 젓가락을 들며 시무선이 중얼거렸다.
 “남정네 두 명이 사는 집인지라······.”
 시류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갈 듯했다.
 “아무리 아내가 없다지만, 장차 무관으로서 나라를 위해 칼을 들 자가 자기 집안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면, 나라를 위해 칼을 들 자격도 없지 않으냐.”
 썩은 지붕을 방치하고 있던 실정이라, 시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내일부터라도 회령도호부에 연통을 넣어, 방직 기녀라도 보내겠다.”
 “아닙니다. 방직 기녀는 필요 없습니다.”
 시무선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원정이 끝나면 이곳에 볼일은 없겠지. 원정이 끝나고 좋은 배필을 맞이하면 되겠구나.”
 그는 잠시 생각을 해본 후 입을 열었다.
 “무구 정비는 끝났느냐?”
 “아직 다 하지 않았사옵니다.”
 “밥 먹고 한번 보자꾸나.”
 식사를 마친 후 시무선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무구를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전투에서 장익환의 환도가 크게 망가졌었고, 그는 그것을 그대로 방치해 두었기에, 수리할 필요가 있었고 대장간으로 보내졌다.
 “나라에서 지급한 갑옷이냐?”
 “그렇습니다.”
 시무선이 장익환의 경번갑을 들어보았다.
 “멋지구나. 필시 네가 뛰어난 무사이기에 지급한 것일 터.”
 그 말에 장익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하지만 나라께서 지급한 것인데 이렇게 방치하다니.”
 그 말에 장익환의 표정이 극도로 좋아지지 않았다.
 그의 갑옷은 확실히 녹이 좀 슬어있었다.
 “네 어미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정비해야 할 것이다. 이번 북정은 붙잡힌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가는 것도 목적 중의 하나이니까. 노적들이 우리 백성을 납치하는 이유는 농사에 밝은 우리 백성을 잡아 자기들 농사를 짓기 위해 두는 것이니 네 어미는 무사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장익환의 눈빛이 달라졌다.
 시무선은 시류의 활을 꺼내 들었다. 활줄은 풀어놓은 상태였다.
 “각궁이 아니야?”
 “녹각궁입니다.”
 시무선은 활줄을 걸었다.
 “전에 주었던 각궁은 어찌했느냐?”
 “여름인지라, 각궁은 따로 두었습니다.”
 “아랫목에 두었다가 점화를 해주거나 쓰기 전에 불에 쬐면 되지 않느냐?”
 시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땔감이 너무 비싸서 밥 먹을 때 외에는 아궁이에 불을 붙이지 않았다.
 사실 여름이니 온돌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시무선은 시류의 녹각궁을 보았다.
 산뽕나무에 사슴뿔을 붙이고, 거기에 쇠심줄을 더한 후 산벚나무에서 벗겨낸 화피를 붙인 후 명주실로 감아, 옻칠한 것으로 동개궁이라 활이 그리 크지 않았다.
 대략 3척 정도의 길이였다.
 시무선은 활을 당겨보았다.
 탄력이 각궁에 비해 좋은 재료가 아니고, 크기가 작은 동개궁이기 때문에, 화살은 그의 턱까지밖에 당겨지지 않았다.
 일반 각궁이라면, 그의 뺨이나 귀까지 당겨졌을 것이다.
 시무선은 그것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앞마당에 시류가 활쏘기용으로 둔 과녁 앞에 섰다.
 전통의 뚜껑을 열었다.
 “동개를 가져오겠······.”
 “아니다. 이거면 된다.”
 그는 숫깍지를 엄지에 끼웠다.
 그러더니 전통에서 화살 10발을 모두 꺼내서 손가락들 사이에 끼워놓았다.
 “뭘 하시려는 거지?”
 따라 나온 장익환이 중얼거리는 사이 시무선은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1발, 2발······.
 절대로 사람이 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고 그는 고작 5초 만에 화살을 모두 쏘았다.
 “속사······.”
 시무선의 장기인 속사였다.
 “전장에선 생각보다 속사가 요구되다 보니 어쩌다가 나도 이렇게 장기를 얻었었지. 오랜만에 쏜 것이지만, 아직은 실력이 녹슬지 않았군. 하지만 궁력이 강하지 않구나.”
 “동개궁이니 당연합니다.”
 시류도 시무선을 따라 그것을 해보려고 했었지만, 생각보다 어렵기에 아직도 하지 못하는 기예였다.
 대신 시류는 대우전을 이용해서 훨씬 더 정확하게 쏘려고 노력했었고, 지금은 누구보다 더 작은 표적을 맞힐 자신이 있었지만, 아직은 자신이 그릇이 작다는 것을 실감했다.
 과녁의 정중앙에 작은 원이 붉게 칠해져 있었는데, 시무선이 쏜 화살들이 전부 거기에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화살을 빨리 쏘면서도 매우 정확하게 맞힌다는 것이었다.
 ‘이놈의 집안은 주몽의 헌신인가?’
 장익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무선이 쏜 과녁에 다가가 입을 딱 벌린 채 보았다.
 아무리 가까이서 봐도 신기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궁력이 어느 정도 되느냐?”
 “34근입니다.”
 “앞으로는 최소 80근짜리 활을 쓰도록 해라.”
 그 말에 시류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최소 80근 말입니까? 그 정도 궁력은 마상에서는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그 정도면 힘이 강해야 할······.”
 “무사는 활과 칼, 창에 통달해야 한다. 앞으로 무관이 될 것이니 병법도 통달해야 하겠지. 넌 이제 단순한 기병이 아니다.”
 시무선의 자신의 활을 꺼냈다.
 그것은 옻칠한 검은 활대가 굵었고 크기도 5척이나 되었다.
 정량궁이 분명했는데 이건 시무선이 전장에서 사용하는 활이었다.
 “이것은 100근짜리 활이다.”
 시류는 그것의 활줄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활줄부터가 두껍고 질긴 비단실이었다.
 “젊었을 적부터 사용하던 것이지. 활줄을 얹어 보아라.”
 될 리가 없었다.
 시류는 한창 건장한 청년이었지만, 활줄을 걸지 못했고, 풍산보에서 장사라 소문이 난 장익환도 활줄을 걸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젊은 것들이······.”
 시무선은 그렇게 말하며 단번에 활줄을 걸었다.
 “어제 점화를 했으니 망가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동개일습에서 화살을 꺼냈다.
 의외로 화살은 일반 유엽전이었다.
 “전장에서 궁력이 강한 활은 자주 필요했지 이것을 사용하면 어느 거리에서도 적의 갑옷을 뚫을 수 있느니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당겨서 이내 과녁에 쏘았다.
 쿵! 하고 묵직한 소리와 함께 과녁이 크게 흔들렸고 화살은 부러지고 말았다.
 활의 힘이 너무 센 나머지 부러지고 만 것이다.
 “너무 가까워서 그런가 보구나.”
 그는 시류에게 그 활을 건네주었다.
 “당겨 보아라.”
 시류는 자신의 깍지가 이것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이윽고 어떻게든 있는 힘껏 당겼지만, 반쯤 당겼을 때 엄지손가락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얼른 멈추었다.
 그 후 장익환이 그 활을 당겨보았다.
 의외로 장익환은 끝까지 활을 당겼지만, 힘이 드는 나머지 얼마 안 가 도로 놓았다.
 “일반 사수들도 이렇게 강한 활을 주로 쓰진 않습니다. 물론 궁력이 강하면 적의 갑주를 뚫을 수는 있지만, 장기전으로 활을 쏠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런 것은 겨우 2순만 쏴도 뼈와 근육이 지쳐 제대로 당기지도 못할 것입니다.”
 장익환이 말했다.
 “그만큼 근력을 늘리면 되지 않겠느냐? 도성에 있는 시위군(侍衛軍)중에 만강대라는 군사들도 있다. 그자들은 120근짜리 활을 자신의 수족을 부리듯이 쓸 수 있지. 그럼 만강대는 천군(天軍)이더냐.”
 그러자 장익환은 입을 다물었다.
 몇 번 활을 계속 당겨본 시무선은 활줄을 풀고 월도를 꺼내 들었다.
 “월도를 사용해 본 적은 있느냐?”
 시류는 시무선의 월도를 보았다. 칼날이 족히 2척이 넘었다.
 “없습니다. 창은 조금 연습을 해 본 적이 있는데······.”
 “월도는 아주 강력한 병장기다.”
 시무선이 월도를 바로잡아 이리저리 휘둘렀다.
 “자루가 길어서 적과 근접해서 싸울 필요가 없으며, 무게가 있기 때문에 적을 깊게 벨 수 있고, 막는다고 해도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러한 힘은 마상에선 더욱 극대화되지.”
 시류는 그것을 받았다.
 무게는 대략 4근 정도 되었는데 의외로 가벼웠다.
 길이는 8척 조금 넘었고 자루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고래 힘줄을 감아 옻칠을 해놓았다.
 “내가 네 나이 때 쓰던 것인데, 앞으로 이건 네가 쓰거라.”
 “어찌······.”
 “난 북정도 원수다. 그런 것을 쓸 일은 없을 터. 내가 주로 쓸 것은 이것이지.”
 그는 자신의 철퇴를 꺼내 들었다.
 2척 5촌(약 78cm)길이의 그것은 무기라기보다는 등채(지휘봉)같았다.
 거기에 은상감으로 장식도 되어 있었다.
 “그것 말고도 전하께서 내리신 보검도 있으니, 이건 필요하지 않다. 네가 그것을 익혀서 사용하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라고 일단 말하긴 했지만, 시류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의 궁술은 감히 말하건대 고수의 경지였다.
 마상에선 20보나 30보 이내에서만 표적을 노리고 쏘는 것이 상책이었고, 근거리서 매우 좋은 명중률을 보이는 대우전을 쓰고 있었던지라, 쏘면 적은 맞았고, 무거운 대우전을 쓰고 있었던지라, 타격력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괜히 더 접근해서 휘둘러야 하는 월도를 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강력한 활을 써야 한다는 시무선의 말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였다.
 마상에서 싸운다고 해도, 항상 근거리 전투가 벌어질 일이 없었으며, 동개궁에 대우전은 일반 각궁보다 사거리가 한없이 짧았던지라, 여진족과의 장기전에서 그가 불리했다.
 “물론 당장 쓰긴 힘들 테니. 가지고 연습을 해보아라. 마상에서 쓰는 법을 내가 가르쳐 주겠다.”
 “예.”
 그들의 대화가 마칠 무렵 장익환은 자신의 팽배를 꺼내서 확인해 보았다.
 테두리를 놋쇠로 한 것이라 녹은 슬지 않았고, 팽배의 치우 그림은 색이 바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대로 써도 될 듯싶었다.
 두 사람은 그 뒤로는 일을 나가지는 않았고 몸을 다시 움직였다.
 근육을 힘들게 하고, 뼈를 고단하게 하여야 단련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시무선이 같이 살았던 관계로 회령부사를 포함해서 각 6진의 관아에서 시무선에게 식물(食物)과 곡식, 특히 고기를 보내주는 덕택에 먹을거리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사랑비가 집안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은 아침에 일어나 땔감을 하고 물을 길어오는 것 말고는 없었고 남은 시간은 몸을 단련하는 데 전부 투자했다.
 그렇게 가을이 찾아오고 추수가 끝날 무렵, 한양에서 경군(京軍)이 출발했다는 소식이 시무선에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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