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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의 검제 1권 (1)

2018.12.05 조회 6,283 추천 48


 # 프롤로그
 
 어둑한 감옥의 한 철창 안.
 햇빛도 들지 않는 음침한 이곳에 곰팡이 냄새 대신 피냄새가 물씬 풍겼다.
 
 “······!”
 
 전신이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는 청년.
 그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감옥에 갇힌 것도 모자라 전신이 사슬로 묶여있는 것일까?
 오른 손은 손목에서 잘려나가 피만 뚝뚝 떨어지고 있고, 왼손은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고 있지만 살가죽이 완전히 다 벗겨져나가 허연 뼈만 드러나 있었다.
 수십 가닥이나 되는 가느다란 실같은 사슬이 청년의 살뿐 아니라 뼈까지 뚫어 놓은 상태였다.
 
 “지독한 놈! 저 꼴을 하고도 신음 한번 안 지르는군.”
 “으으! 저 눈빛을 좀 보라고. 꿈에 볼까 무서운 놈이야.”
 
 청년이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어둠 속에서 새하얀 안광이 번쩍였다.
 소름끼치도록 사악해 보이는 눈빛.
 저게 대체 인간일까?
 청년은 마치 악마와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허억!”
 “놈이 우릴 노려본다!”
 
 청년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은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몸을 떨었다.
 
 “바보같은 놈들! 저 놈의 몸이 묶여있는 데도 무얼 그리 무서워하는 거냐?”
 
 그때 싸늘한 음성과 함께 훤칠한 체격을 지닌 청년이 나타났다.
 잘생긴 얼굴이지만 눈매가 매우 날카롭고 음침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흠이었다.
 그를 본 무사들은 깜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물러나 있어라. 저놈을 손 좀 봐야겠으니까.”
 “하오나 어차피 내일 아침 참수할 놈인데······.”
 
 어차피 내일 죽을 놈인데 굳이 오늘 또 고통을 줄 필요가 있느냐 말하려던 무사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대공자가 싸늘히 그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번뜩이는 소름끼치는 안광은 마치 악마와도 같았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아닙니다. 대공자님 뜻대로 하십시오.”
 
 무사가 두려워 떨며 물러나자 대공자는 청년의 앞으로 걸어갔다.
 
 “말해라. 어디에 있느냐?”
 
 무엇을 묻는 것일까?
 그런데 청년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대공자의 인상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놈이 감히!”
 
 그는 청년의 살과 뼈를 뚫고 있는 사슬을 마구 휘저었다.
 
 촤악! 촥!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뼈가 극극 긁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주변을 울렸다.
 
 “끄으윽!”
 
 그러자 청년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 신음을 흘렸다.
 대공자가 키득거리며 쇠사슬을 더욱 빠르게 휘저었다.
 급기야 그는 가는 송곳과 같은 꼬챙이로 청년의 팔과 다리에 드러난 뼈를 마구 긁어댔다.
 
 “끄으으! 끄아아악!”
 
 결국 청년도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청년의 두 눈은 대공자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분하다······. 내 손에 검만 쥐여져 있었더라도.’
 
 청년이 원통스러운 것은 고문을 당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저 가증스러운 대공자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족을 죽이고 그의 사랑하는 연인까지 겁탈해 죽인 사악한 존재에게 이토록 무력하게 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원통했다.
 
 “말해라! 무극마검경(無極魔劍經)이 어디 있는지.”
 
 그러자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문을 당하면 당할수록 청년의 눈빛은 무심하면서도 차가워졌다.
 
 “말해! 어서 말하란 말이다!”
 “크으으윽! 크아아아악!”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청년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대공자의 고문은 밤새도록 계속 되었다.
 그러나 날이 밝을 때까지 대공자는 청년에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지독한 놈 같으니!”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마교 십대무공 중 하나인 천혈마검식이 저놈에게 무참히 깨졌다. 저놈이 익힌 무극마검경만 얻을 수 있으면 내가 무림을 제패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건만.’
 
 그때 무사들이 다가와 말했다.
 
 “대공자님, 저놈을 데려가 참수하라는 문주님의 명령이십니다.”
 “데려가라.”
 
 대공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저주받은 마공은 저놈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묻히겠군.’
 
 청년은 참수를 위해 형장으로 끌려갔다.
 여전히 그의 몸은 사슬에 묶인 상태였지만, 감방 안에 있을 때처럼 완전히 사슬에 둘러싸인 것은 아니었다.
 이는 그가 사실상 시체 상태나 다름없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이제야 발뻗고 잘 수 있겠군.”
 “맞아. 이놈과 눈빛이 마주쳤던 날은 밤에 꼭 악몽을 꾸었어.”
 
 무사들은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있어 이 청년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단전이 파괴되고 사지가 다 절단 난 상태나 마찬가지이지만, 이 청년에 의해 무림 사대 마문 중 하나인 아수마문(阿修魔門)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무림 사대 마문 중 최강이라 불리는 천혈마문(天血魔門)에서 청년을 제압했다. 정면승부가 아닌 가족들을 볼모로 해 스스로 검을 내려놓게 만들었던 것이다.
 
 “근데 이놈 이미 죽은 것 같은데?”
 “어젯밤 그토록 지독하게 당했으니 죽을만도 하지.”
 “어서 가서 목만 잘라내자고!”
 
 그런데 전신이 피투성이 상태로 질질 끌려가던 청년의 두 눈에 살짝 이채가 번쩍였다.
 그를 끌고 가는 무사의 허리에 꽂힌 검.
 왼팔을 뻗으면 간신히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오른 손은 잘려서 사라졌고, 왼손은 뼈만 남아 있는 상태지만.
 
 ‘큭! 죽기 전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인가. 좋아. 모조리 끌고 지옥으로 가주마.’
 
 청년은 마지막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파괴된 단전에서는 아무런 내공도 끌어올릴 수 없었지만, 그와 상관없이 얼마의 내공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손에 검만 쥘 수 있다면 말이다.
 
 청년은 사력을 다해 팔을 움직였고 그렇게 무사의 허리에 차여있는 검까지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피로 범벅된 하얀 뼈의 손이 검을 쥐는 그 순간.
 
 “크아아악!”
 “으아악!”
 
 그를 끌고 가던 두 명의 무사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언제 베었는지 그들의 가슴에서 피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를 가로막는 모든 이들의 몸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저럴 수가! 저 놈이 어찌?”
 “저놈을 죽여라!”
 
 처음에는 수십 명의 무사들이 달려왔다가 모두 쓰러졌다.
 그러자 수백 명의 무사들이 그를 포위해 죽이려 했지만, 그들 모두가 시신이 되어버렸다.
 
 “으으! 저놈은 대체 뭐냐?”
 “악마다!”
 
 급기야 천혈마문의 최수뇌부들이 나타났다.
 천혈마문의 열두 호법들이 몰려와 청년을 공격했지만 그들 또한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그들과 함께 청년을 공격했던 수천의 무사들도 모두 죽었다.
 
 청년은 쓰러질 듯 위태해 보이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천혈마문의 문주가 청년의 검에 처참히 목이 잘려죽었고, 밤새 청년을 고문했던 천혈마문의 대공자는 수십 토막으로 잘려 바닥에 널브러졌다.
 어느 순간 천혈마문의 담장 안에 살아있는 이는 청년 외에는 없었다.
 
 ‘이제 끝인가······. 모조리 죽였으니 여한은 없다.’
 
 청년은 희미하게 웃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 *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공간.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편안한 공간.
 
 ‘여기는 어디?’
 
 그는 분명 죽었다.
 그런데 어떻게 깨어난 것일까?
 그러던 그는 이곳이 바로 여성의 자궁 속 태(胎) 안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놀랍게도 그는 지금 태아 상태인 것이었다.
 
 
 # 1장. 무극지체로 태어나다
 
 ‘설마 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인가?’
 
 틀림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그는 모친의 태에서 나가 아기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뭔가 가슴이 뛰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했다.
 
 ‘환생같은데 어째서 기억이 유지되고 있는지 모르겠군.’
 
 환생하면 전생의 모든 기억이 사라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전생의 그 무거웠던 삶이 그대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는 불행했던 전생의 기억 따위는 잊고 싶었다.
 끔찍한 재앙에 가족들과 연인이 죽고, 그 역시 마지막에는 수많은 사람을 죽인 살귀로서 인생을 마감했으니까.
 
 ‘이번 생에는 결코 손에 검을 쥐지 않을 것이다.’
 
 검을 쥐면 전생의 불행했던 순간들이 떠오를 것 같아서다.
 결코 무극마검경과 같은 저주받은 검법을 펼칠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놈들이 우리 가문을 건드리지만 않았더라면 결코 그런 저주받은 마공이 생겨나지는 않았을 텐데.’
 
 무극마검경은 본래 무극검경(無極劍經)을 변형시킨 것이다.
 무극검경은 그의 가문의 비기로 전해왔던 것으로, 무극신공(無極神功)과 무극검법(無極劍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극검법은 무극신공을 익혀야만 펼칠 수 있는 검법!
 
 문제는 무극신공이 그 오의가 무척 난해하고 익히기도 까다롭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10단계에 이르면 신선이 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전설이 있지만, 가문에서 2단계까지 이른 이도 거의 없었다.
 
 평범한 머리로는 무극신공의 오의를 이해하는 데만도 수십 년.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 십수 년으로도 가능하다지만, 오의를 모르고서는 무극신공의 연공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그 기간 동안 그저 학문을 하듯 진결을 이해하는 데만 몰두해야 했다.
 
 그렇게 오의를 깨닫고 나면 비로소 무극신공의 요체라 할 수 있는 무극심법(無極心法)을 운공할 수 있게 되는데, 단전에 무극지기(無極之氣)라는 신비한 기운을 생성할 수 있게 되기까지 다시 십 년의 세월이 소요된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무극신공의 1단계에 이른 것이며, 그 이후 다시 수십 년은 무극심법을 운공해야 무극지기를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2단계에 이르게 되고, 비로소 제법 강력한 수준의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쯤이면 백 세를 훌쩍 넘기게 되고 만다.
 그러다 보니 그의 가문의 인물들은 대부분 무극신공을 익히는 걸 포기하기 일쑤였다.
 
 일단 그 무극신공을 수련하게 되면 2단계에 이르는 그 시간 동안 평범한 인간들과 다를 바 없었다.
 평생 동안 무공은 수련하지만 2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삼류무사 하나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허접한 수준으로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극마검경이 나왔지.’
 
 무극신공을 속성으로 수련해 단기간에 5단계까지 이를 수 있게한 것이 바로 무극마검경이었다.
 물론 이미 무극검경의 오의를 이해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러나 그 부작용은 엄청났다.
 무극마검경의 무공을 펼치면 펼칠수록 악마처럼 되어버린다는 것.
 심성뿐 아니라 외모까지도 끔찍한 악마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그의 가문이 마교에 의해 겁난의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면, 결코 무극마검경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지난 일. 지금 생각해서 뭐할 것인가.’
 
 이제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려 하니 전생은 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잊으려할수록 그때가 생각났다.
 가족들과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이.
 그 기억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다보니 그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심법을 떠올렸다.
 무극신공의 요체인 무극심법!
 
 ‘잡념을 없애려면 그것만한 것이 없지.’
 
 그는 무극심법의 오의를 모두 터득한 터라 지금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운공이 가능했다.
 본래는 이 심법으로 무극지기를 모으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는 그보다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자 펼친 것이다.
 
 ‘전생의 나는 죽었다. 지난 삶은 잊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겠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 그는 너무 어이없는 일이 벌어져 황당해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벌써 무극지기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무극신공의 오의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해도 십 년 이상 무극심법을 꾸준히 운공해야 무극지기가 생성된다.
 그런데 태아 상태인 지금 무극신공 1단계에 이른 것이다.
 
 ‘하긴 지금은 모든 혈맥이 막 생성되고 막히지 않았으니 따로 환골탈태를 하지 않아도 심법과 무공을 익히기 최상의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기적이 벌어진 것이 분명해.’
 
 그저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다지기 위해 무극심법을 운공했는데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러나 그가 놀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태아 상태에서 무극신공이 1단계에 이르며 무극지기가 생성되자, 그의 몸과 골격이 무극지기를 흡수하기 가장 이상적인 신체인 무극지체(無極肢體)로 자연스럽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그가 모친의 태에서 지낸 마지막 날이었다.
 
 * * *
 
 “축하드립니다, 영주님. 둘째 공자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산파의 말이었다. 그러자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인상 강한 사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것이 정말이냐?”
 “예. 아주 건강한 공자님이십니다.”
 
 브리나 왕국 서부에 위치한 영지 일리오스.
 사내는 영주(領主)인 파울 드 일리오스 자작이었다.
 오늘 그의 아내인 실비아가 둘째 아들을 출산한 것이다.
 
 “실비아, 정말 고생 많았소.”
 
 그는 먼저 침상 위에 누워있는 그의 아내의 손을 잡고 따스하게 말했다. 실비아가 미소 지었다.
 
 “카론을 어서 안아보세요.”
 “물론이오. 하하하! 어디 한 번 안아보자. 카론!”
 
 파울은 아기 카론을 조심스레 안아들고 크게 웃었다.
 
 “기억해라. 네 이름은 카론 드 일리오스다.”
 
 순간 아기 카론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카론 드 일리오스? 이게 나의 이름인가?’
 
 그는 이곳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부친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웃으며 하는 말을 듣고 막연히 자신의 이름이라 추정했다.
 
 ‘이름이 아주 특이하군.’
 
 그래도 어쨌든 새로운 인생에 주어진 새 이름이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는 카론 드 일리오스라는 이름에 맞게 이곳에서의 삶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보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아기라는 건 참 불편한 노릇이구나.’
 
 말을 하려고 해도 아기의 옹알거리는 소리가 났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꿈틀거리기만 했다.
 그 모습을 부친 파울과 모친 실비아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 * *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어느덧 카론이 태어난지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무극지체인 그의 몸은 알아서 무극신공을 운공하며 무극지기를 체내에 쌓고 있었기에, 그가 따로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생각보다 무극지기가 빨리 쌓이고 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십 년 이내에 무극신공이 이 단계 경지에 이르는 것도 가능할 거야.’
 
 열 살 정도면 되면 무극지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다는 뜻.
 그때는 무극검법뿐 아니라 어떤 무공이든 무극지기를 이용해 펼칠 수 있게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백 세 정도에 이를 수 있는 경지.
 전생에서 천재적 자질을 가진 그였지만, 이십대 후반이 되어서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무극마검경으로 눈을 돌려야 했는데.
 
 ‘이대로라면 삼십 세 이전에 오 단계가 가능할 지도 모른다.’
 
 전생에서 그는 아수마문과 천혈마문을 멸망시켰다.
 무극신공 5단계는 그때와 비슷한 수준.
 그것을 30세 이전에 이룰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더구나 전생에서는 무극마검경을 수련한 것이라 부작용이 극심했지만, 무극검경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나저나 무슨 사람들이 이리 몰려온 건가.’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카론이 일 년을 무사히 생존한 것을 기념하는 날임과 동시에 카론이 마나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날이니까.
 
 성의 연회장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영주 파울이 카론을 안아들며 말했다.
 
 “카론! 이제 너의 마나 재능을 알아볼 것이다. 네가 나를 닮았다면 전사의 기질을 타고 났겠지. 아니면 마법사가 될 재능이 있다면 더욱 좋겠구나. 우리 영지에는 마법사가 한 명도 없으니 말이야.”
 
 검사와 마법사!
 어느 쪽이든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야 대성할 수 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파울은 특별히 마탑에서 마법사를 한 명 초청한 터였다.
 
 “먼스 경, 이리 와서 카론의 마나 재능이 어떤지 살펴보게나.”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뿔테 안경을 낀 날카로운 인상의 40대 마법사가 다가오더니, 들고 있던 자그만 수정구를 카론에게 비췄다.
 
 화아악!
 
 수정구에서 환한 빛이 일어나 카론을 감쌌다.
 순간 카론의 두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태어난지 일 년.
 그 사이 그는 따로 배운 건 없지만 말은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로인해 자신이 귀족이자 영주의 둘째 아들이란 것도, 이곳이 전생에 그가 있던 무림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도 대략 알았다.
 따라서 당연히 지금의 상황도 이해했다.
 
 ‘이곳에서는 내공을 마나라 부르는가 보군. 저런 수정구로 미리 내공에 대한 재능을 알 수 있다니 신기하구나.’
 
 이전에 있던 세계에서는 없던 물건이었다.
 그러다 보니 카론은 이곳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특히 그 마나로 검술 뿐 아니라 마법이라는 것도 펼칠 수 있다고 하니, 그에 대해 관심이 생기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무극지기는 저런 수정구로 간파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닌데.’
 
 무극지기는 오직 무극신공을 연공한 자만 알아볼 수 있는 기운이다.
 카론의 몸은 그런 무극지기가 전신을 감싸고 있는 무극지체다.
 따라서 마나의 재능을 알아보려 한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마나에 대한 아무런 반응도 얻을 수 없을 테니까.
 
 역시나 마법사 먼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파울이 물었다.
 
 “말해보게. 카론의 마나 감응력은 어떤가?”
 “뭔가 이상합니다.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먼스는 다시 수정구를 비춰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죄송하지만 카론 공자님의 마나 감응력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마나 수정구에 전혀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게 정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다시 한 번 살펴보게.”
 
 카론보다 세 살 위인 장남 레온은 마나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전사로서의 자질도 충분했다.
 차남인 카론 역시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파울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틀림없습니다. 이 수정구는 아모스 마탑 본부에서 가져온 것으로 마나 재능을 측정하는 데는 완벽한 정확도를 자랑합니다.”
 
 먼스는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카론 공자님은 마나에 대한 재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일단 마법사가 되기란 불가능합니다.”
 
 만약 마법사의 재능이 있다면 마탑에서 모든 원조를 아끼지 않고 카론을 마법사로 키울 것이다. 먼스가 하는 일 중 하나가 이런식으로 미래의 마법사가 될만한 재목을 발굴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먼스가 볼 때 카론이 마법사가 되는 건 불가능했다.
 
 “또한 검술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나를 다룰 수 없으니 평범한 수준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수가!”
 
 먼스는 카론을 슥 바라보고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카론 공자님은 매우 총명해보입니다. 따라서 뛰어난 전략가나 혹은 행정관 쪽으로 진로를 잡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런 것인가.”
 
 파울뿐 아니라 실비아도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미 재능이 뛰어난 장남이 있기 때문이다.
 카론은 그저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만 하면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마나 재능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카론.”
 “이 총명하게 반짝이는 눈빛을 보세요. 카론은 머리가 아주 좋아보여요. 분명 훌륭한 전략가가 되어 형 레온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거예요.”
 
 카론 또한 그들을 향해 웃어 주었다.
 
 ‘건강하게 자랄 테니 염려마세요. 그리고 영지에 한 명도 없다는 마법사가 되어 드리지요.’
 
 그렇게 카론은 마법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마법이 흥미로워보이기도 했지만, 마법사가 되면 손에 검을 쥐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 * *
 
 세월이 흐르고 카론은 어느덧 열두 살이 되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매우 잘생긴 얼굴이지만 체격은 보통의 열두 살보다 훨씬 장대했다.
 남색의 머리카락은 사자갈기처럼 거칠었고 눈매는 매우 강인하면서도 날카로워 보였다.
 
 그냥 눈빛만 마주쳐도 사람이 움츠러들게 만드는 살벌한 분위기.
 그 누가 봐도 전사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났지만, 카론은 육체 단련보다는 그저 서재에서 책만 읽기를 좋아했다.
 
 ‘시간도 빠르군. 내가 새로운 삶을 산지 벌써 십이 년의 시간이 흘렀구나.’
 
 일리오스 영지의 영주성인 로단 성.
 성의 중앙에 위치한 일리오스 자작가의 저택.
 카론은 각종 두꺼운 책들이 꽂힌 서재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대략 1천여 권의 책들은 정치, 경제, 역사, 회계를 비롯한 온갖 분야가 망라되어 있었는데, 이 중 카론이 읽지 않은 책은 없었다.
 
 ‘다 아는 내용들을 몇 번씩 읽는 것도 지겨운 일이야.’
 
 카론을 위해 매 달 수십여 권씩 새로운 책이 들어오고 있지만, 대부분 이튿날이면 끝이었다.
 물론 카론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일리오스 영지의 재정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카론을 위해 매달 수십여 권의 책을 사준다는 건 부친인 파울 자작이 그만큼 크게 신경을 써준다는 얘기이니까.
 
 ‘그나저나 무극신공이 벌써 오 단계에 이르렀다.’
 
 예상보다 무려 5년이나 앞당겨져 5살 때 2단계에 이르렀다.
 7살 때 3단계를 돌파했고, 9살에는 4단계, 12살인 지금 5단계가 되었다.
 불과 12세의 나이에 전생의 수준에 이른 것이다.
 그로인해 그의 단전에는 내공이나 마나보다 훨씬 더 강력하면서도 근원적인 기운인 무극지기가 충만해 있었다.
 
 따로 수련을 하지 않아도 그의 육체는 매일 피나게 단련을 하는 것보다 강인해졌다.
 단전에 쌓인 무극지기와 별도로 그의 순수한 힘과 체력이 대폭 증가하는 것.
 이 또한 무극지체가 가진 신묘한 위력 중 하나였다.
 
 ‘이대로라면 전설로만 말하던 십 단계를 노려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
 
 이는 그가 무극지체 상태로 태어난 덕분이었다.
 그러나 카론은 이전에 작정한 대로 사람을 죽이는 살귀(殺鬼)로서 살고 싶지 않은 터라 무극지기를 다른 곳에 활용하고 싶었다.
 
 ‘이걸로 마법도 충분히 펼칠 수 있을 텐데.’
 
 무극지기는 마나보다 상위의 기운이니 마나로 할 수 있는 건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법서만 구할 수 있다면.’
 
 카론은 마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럴 기회가 없었다.
 영지에 마법사가 한 명도 없는 이유도 있었지만, 기초적인 마법서라 해도 시중에서 돈을 주고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모두 마탑들이 취급하고 있는데, 마탑의 일원이 아니면 공유하지 않았다.
 
 똑똑.
 
 그때 누가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카론, 이곳에 있었냐?”
 
 십대 중반의 예쁘장한 소년.
 카론보다 세 살 많은 형 레온이었다.
 그는 엄마 실비아를 똑 빼닮아 얼굴만 보면 마치 아름다운 소녀를 보는 듯했다.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 아래 커다란 두 눈.
 서늘하면서도 담담하게 빛나는 홍채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후후, 카론? 내가 무슨 흥미로운 소식을 가져왔는지 알고 있니?”
 “글쎄! 또 성내 상업 지구의 술집에 예쁜 여급이라도 나타났다는 얘기라면 그만 둬. 난 그런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다고.”
 
 카론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레온은 흠칫했다.
 
 “어떻게 그것을?”
 “형에게 흥미로운 얘기라는 건 뻔하잖아.”
 
 그동안 한두 번 들은 게 아니니까.
 
 “흐흐, 그럼 내가 그 여급의 가슴을 만졌다는 얘길해도 관심을 두지 않을 거냐?”
 “형, 지금 내가 몇 살인지 알아?”
 “열두 살이잖아. 내가 동생 나이도 모르겠니?”
 “그럼 형이 지금 무슨 엄청난 짓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겠군.”
 “엄청난 짓은 무슨.”
 “아무리 그래도 열두 살 동생에게 여자 가슴 만졌다는 얘기를 하는 건 좀 그렇잖아.”
 
 레온이 히죽 웃었다.
 
 “뭐 어때? 난 네 나이 때부터 이쪽에 관심이 아주 많았어.”
 “난 아직이야. 그런 건 나중에 좀 더 나이가 들어서 관심 가져도 돼.”
 “어휴! 이럴 때 보면 네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다니까.”
 
 그 말에 카론은 뜨끔했다.
 육체적 나이야 당연히 카론이 어리지만, 정신적인 나이로 따지면 형 레온의 삼촌뻘은 된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나가줘. 난 책이나 읽을 테니까.”
 
 그러자 레온이 씩 웃었다.
 
 “녀석! 설마 내가 고작 술집 여자 가슴 만진 얘기나 하려고 왔겠냐?”
 “그럼?”
 “영지에 고대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고대 던전이라고? 그게 정말이야?”
 
 책을 넘기고 있던 카론의 손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레온을 향했다.
 레온이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알다시피 고대 던전은 매우 위험한 곳이지만 그곳을 잘 공략하면 값진 보물들을 얻을 수 있지. 우리 영지가 최근에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는데 던전에서 마정석이라도 몇 개 발견하면 모든 게 해결될 수 있다는 뜻이야.”
 
 카론이 눈을 빛냈다.
 
 “잘됐으면 좋겠네.”
 “잘 될 거야. 아버지께서 직접 기사들과 함께 던전을 탐사하신다고 하셨거든.”
 “그래도 위험할 수 있으니 마법사라도 한 명 고용하는 게 좋을 텐데.”
 
 고대 던전에는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
 던전 내부에 마법 트랩 같은 것이 있으면 전사들로만 이루어진 탐사단은 낭패를 당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레온이 미소 지었다.
 
 “걱정 마. 고대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모스 마탑에서 마법사들을 지원 보냈어. 물론 고대 던전에서 마법 관련 물품이 나오면 그들이 우선적으로 매입할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조건이지만,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잘 된 거야.”
 “마법사가 왔다니 조금 안심이 되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모스 마탑에 한 가지 조건을 더 요구했어. 그게 뭔 줄 알아?”
 
 카론이 고개를 흔들자 레온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널 아모스 마탑의 초급 마법 학교에 입학시키는 조건이야.”
 “뭐라고?”
 
 카론은 깜짝 놀랐다.
 아모스 마탑의 초급 마법 학교.
 마법의 기초가 되는 곳을 가르쳐주는 곳으로 이곳을 졸업하면 초급 수준의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부유한 귀족의 자제들 중에 마나에 대한 재능이 있는 이들만 입학이 가능하다.
 반드시 부유해야 하는 이유는 마법 학교의 입학금과 등록금이 상당히 비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뿐이 아니야.”
 “또 뭐가 있어?”
 “놀라지 마. 아모스 마탑에서는 초급 마법 학교에 한해서지만 입학금과 등록금 전액을 면제해주겠다고 했다.”
 
 입학금과 등록금의 면제.
 그것은 꽤나 파격적인 조건이지만, 사실 마나의 재능이 없다고 알려진 카론을 마법 학교에 입학시킨다는 것 자체가 훨씬 파격적인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만큼 일리오스 영지에 생겨난 고대 던전의 가치가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카론은 씁쓸했다.
 
 “나 때문에 아버지께서 고대 던전 발굴에 대한 많은 권리를 아모스 마탑에 넘겨주신 건 아닌지 몰라.”
 
 그러자 레온이 고개를 흔들었다.
 
 “대륙의 수십 개도 넘는 마탑들이 이번 던전 발굴에 참여하고 싶어 했어. 아모스 마탑은 우리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라서 입학 정도는 그냥 부가적인 조건으로 수용한 것뿐이야.”
 
 그러던 레온은 돌연 한숨을 푹 내쉬더니 카론의 어깨에 손을 대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재능없는 마법에 관심을 갖는 것보다 그냥 손에 무기를 쥐면 나보다 훨씬 강할 것 같다만.”
 
 레온은 체격을 보나 눈빛을 보나 타고난 전사인 카론이 마법사가 되겠다는 것이 영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더구나 그는 동생 카론의 힘이 상상초월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전 카론이 주먹으로 커다란 바위를 후려쳐 부순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레온도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검에 마나를 주입해 휘두른다면 모를까, 맨손으로 바위를 무슨 수로 부순다는 건가.
 그 정도 힘이면 굳이 마나에 재능이 없어도 엄청나게 강해질 수 있다.
 대검이나 중검을 한손으로 쥐고 휘두르는 괴력의 검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형! 그 얘기는 다시 하지 말라고 했잖아.”
 
 카론이 난색을 표했다.
 그때 그는 산책 중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벌레 한 마리가 다가와 무심코 후려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바위가 부서질 줄은 몰랐다.
 힘조절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형 레온에게는 부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염려 마. 아무에게도 얘기 안했어. 네게 그런 괴력이 있는 줄 알면 아버지께서 널 검사로 키우려고 하시겠지.”
 “그러니까 절대 말하지마. 난 검을 쥐고 싶지 않거든. 난 꼭 마법사가 될 거라고.”
 
 그러자 레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가 그렇게 마법사가 되고 싶어하는데 도와줘야겠지.”
 “고마워 형.”
 
 카론은 미소지었다.
 
 * * *
 
 아모스 마탑 소속 초급 마법 학교는 브리나 왕국의 왕도(王都)인 라고스에 위치해 있었다.
 카론은 일리오스 영지를 떠나 멀리 왕국의 왕도로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엄마 실비아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론은 이제 고작 열두 살이예요. 그 어린 아이를 혼자서 왕도로 떠나보낸다고요?”
 “떠나보내는 게 아니라 마법 학교에 입학시키는 거요. 마법 학교에서는 마법만 배우는 게 아니라 각종 학문도 깊게 배울 수 있다 들었소. 도서관에 책이 수두룩하다고 하니 카론에게는 매우 잘 된 일이 아니겠소?”
 
 그 말에는 실비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에는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으니 그곳에 가면 카론이 좋아하겠군요. 그건 그렇지만, 마나에 대한 재능도 없는데 카론이 가서 괴롭힘 당하거나 무시받지는 않을지 걱정이예요.”
 
 실비아의 걱정은 그것이었다.
 왕도에 있는 아모스 마법 학교는 명문으로 소문난 곳이다.
 상급 귀족의 자제들도 오는 곳이니 그곳에서 혹시라도 카론이 기죽으며 지내지 않을까 말이다.
 
 “아모스 마탑에서 각별히 카론을 신경써 준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 마시오. 그리고 카론은 어디 가서 괴롭힘 당할 녀석은 아니라오.”
 
 파울은 사실 모른 척하고 있을 뿐 카론이 가진 엄청난 괴력을 이미 알고 있었다. 카론의 주먹질에 거대한 바위가 무참히 부서지는 장면을 그 역시 멀리서 봤기 때문이다.
 
 ‘걱정할 필요 없지. 그놈은 맨손으로 오우거도 때려잡을 놈이니까.’
 
 그런 괴력이면 마나고 뭐고 다 필요없었다.
 대검이나 중검을 들고 제대로 된 검술을 펼치기만 하면 가히 무적이 될 테니까.
 
 비유를 들자면 오우거가 절제된 검술을 구사하는 것과 흡사한 것이다.
 그냥 오우거도 만만치 않은 상대인데, 오우거가 검술을 구사하면 소드 마스터라 해도 당해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파울이 볼 때 카론은 그런 무시무시한 검사가 충분히 될 수 있었다.
 
 ‘마법 학교에 들어가보면 그 녀석도 자신의 한계를 느낄 것이다. 마법사가 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그렇다. 그는 카론을 검사로 만들기 위해 나름 머리를 쓴 것이었다.
 
 ‘고집이 워낙 강한 아이라서 강제로는 불가능해. 스스로 마법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 외에는 없다. 일 년 정도면 충분하겠지. 녀석이 마법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시간이.’
 
 파울은 아모스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간절히 부탁해두었다.
 카론에게 마법사의 재능이 없으니 그 길을 깨끗이 포기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설득해달라고 말이다.
 이 사실은 파울과 아모스 마탑의 일부 마법사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 2장. 마법 학교의 특이한 입학생
 
 일리오스 영지의 고대 던전.
 그곳은 로단 성 북쪽 안개의 숲이라 불리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항상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어 안개의 숲이라 이름지어진 숲인데, 그만큼 지형도 험악하고 음침해 실종 사건도 많이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이곳에 고대 던전이 있었을 줄이야.
 안개 숲 절벽 아래 시커멓게 모습을 드러낸 던전의 입구는 그야말로 음산해 보였다.
 
 “기운을 보니 제법 강력한 마물이 던전을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던전의 봉인을 해제하면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모두 조심하십시오.”
 
 아모스 마탑의 최상급 전투 마법사인 르카엘의 말에 파울 자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뒤로는 영지에서 검술 좀 한다는 기사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또한 절벽 위와 아래로 1천여 명의 병사들이 널따랗게 포위망을 형성해 놓은 터였다.
 혹시라도 마물을 놓친다 해도 마을이나 성으로 그것이 들어가지 않도록 대비해 놓은 것이다.
 파울이 말했다.
 
 “어떤 마물이 튀어나온다 해도 우린 자신있으니 염려 마시오. 당신들은 그놈들이 마법만 쓰지 못하게 막아주시오.”
 “알겠습니다.”
 
 르카엘 또한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의 뒤에 서있는 세 명의 상급 마법사들도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캐스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려르려으 루그오드······!”
 
 그때 르카엘이 뭐라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안개의 숲 전체가 살짝 흔들렸다.
 동시에 던전 입구에 펼쳐졌던 고대 마법의 봉인이 풀렸다.
 
 “끼이익!”
 “끼이이이이!”
 
 곧바로 동굴 밖으로 튀어나오는 시뻘건 박쥐들.
 그 각각의 크기가 어지간한 어린아이만 했다.
 그것을 본 파울이 다급히 외쳤다.
 
 “모두 활을 쏴라! 한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 순간 르카엘을 비롯한 마법사들의 스태프에서 화염이 쏟아져나가 박쥐들을 태워버렸다.
 
 화르르르르!
 
 화염이 마치 분수처럼 전방으로 쏟아져나가 박쥐들을 태워버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과연 마법사들이로군.”
 “대단하군요!”
 “활을 쏠 필요도 없겠습니다.”
 
 파울과 그의 기사들이 감탄했다.
 이대로라면 그들이 손쓸 것도 없이 박쥐들은 모조리 재로 변해 흩어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크크크큿!”
 “우후후훗!”
 
 곧바로 들리는 음침한 웃음소리들과 함께 나타난 존재들.
 그들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웃고 있는 입술 사이로 시뻘건 송곳니가 돌출되어 있었다.
 이에 파울이 깜짝놀라 외쳤다.
 
 “흡혈귀들이다!”
 “모두 저놈들을 죽여라!”
 
 르카엘 등도 깜짝 놀라 화염을 날렸지만 흡혈귀들은 박쥐와 같은 거대한 날개로 몸을 휘감아 화염을 튕겨버렸다.
 최상급 화염 마법을 막아내는 날개라니!
 르카엘은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엄청난 마물들이로군.’
 
 그는 위기를 느끼면서도 감탄했다.
 만약 저 날개를 이용해 방어구를 만든다면 매우 강력한 대마법 방어구가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흡혈귀들이 마법을 튕겨내자마자 그 즉시 반격을 해왔기 때문이다.
 
 “키키킥!”
 
 그 중 시커먼 흑발에 붉은 눈을 가진 남자 흡혈귀가 마치 바람처럼 르카엘의 전면으로 쏘아져 오며 손을 뻗었다.
 손톱이 길게 늘어나며 칼날처럼 변했고 그것이 그대로 르카엘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카아앙!
 
 바로 그 찰나 파울의 검이 기적적으로 손톱을 쳐냈다.
 이에 르카엘이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 계시오. 이놈들은 우리가 상대하겠소.”
 
 그와 함께 파울은 폭풍처럼 검을 휘둘러 흡혈귀를 몰아붙였다.
 흡혈귀는 양손의 손톱들을 검처럼 사용해 파울의 공격을 받아냈지만, 파울의 검에서 오러가 피어나는 순간 기겁하더니 그대로 달아났다.
 
 “어딜 달아나느냐?”
 
 파울이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 번쩍 따라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촤악!
 
 강한 오러의 기운으로 뭉친 파울의 검이 흡혈귀의 왼팔을 날려버렸다.
 
 “쿠으윽!”
 
 그러나 흡혈귀는 그것을 무시한 채 그대로 까마득히 솟아오르더니 멀리 로단 성 쪽을 향해 날아갔다.
 
 “이런!”
 
 파울은 탄식했다.
 동굴에서 튀어나온 흡혈귀 중 가장 강한 녀석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다른 흡혈귀들은 그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협력해 상대하고 있었다.
 
 ‘성 쪽으로 갔다. 빨리 가서 그놈을 처치하지 않으면 끝장이다.’
 
 흡혈귀에 물리면 흡혈귀가 되고 만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초래하는지 파울은 모르지 않았다.
 실제로 어떤 왕국의 영지에서는 고대 던전을 발굴하다 흡혈귀에게 밀려 영지 하나가 초토화되었다는 소문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일리오스 영지에 그런 재앙이 벌어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곳을 정리해주시오, 르카엘. 난 달아난 흡혈귀를 뒤쫓겠소. 제딘, 펄크! 자네들은 나를 따라와라.”
 
 파울은 마법사들과 기사들에게 던전을 맡겨두고는 재빨리 말을 타고 로단 성을 향해 질주했다. 그의 뒤를 기사 제딘과 펄크도 말을 타고 따라갔다.
 
 그때 로단 성을 향해 날아갔던 흡혈귀는 성에서 가장 화려한 저택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먹잇감을 물색했다.
 인간의 피를 마시면 잘린 팔이야 금방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택에는 경비병들이 적지 않게 있었지만 그는 그림자처럼 홀연하게 저택의 2층 창문 중 하나로 접근했고 그대로 그것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앗!”
 “꺄악!”
 
 그 방에는 파울의 아내인 실비아와 시녀들이 있었다. 흡혈귀가 재빨리 접근해 그녀들을 기절시켰다.
 동시에 입을 쩍 벌려 송곳니로 그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목을 깨물려는 순간.
 
 “감히! 사악한 흡혈귀 따위가!”
 
 날카로운 은빛의 검신이 흡혈귀를 향해 날아들었다.
 미소녀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소년.
 다름아닌 레온이었다.
 그가 검을 쥐자 그 분위기는 칼날처럼 매서웠다. 은빛 검신에서는 은은하게 오러도 피어나 있었다.
 이에 흠칫 놀란 흡혈귀가 실비아를 내팽개치고 레온과 전투를 벌였다.
 
 카캉! 카앙!
 
 레온의 검술은 뛰어났지만 흡혈귀는 매우 노련하게 그를 압박했다.
 왼팔이 잘린 상태에서도 오른 손만으로 레온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더니 급기야 검을 날려버렸다.
 
 카앙!
 
 검이 바닥에 꽂히고 레온은 빈손이 되었다.
 
 “으!”
 
 그는 낭패한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큰일이다.’
 
 자신이 한낱 흡혈귀 따위에게 죽게 생긴 것도 문제지만, 이대로라면 그의 모친 실비아도 꼼짝없이 이 흡혈귀에게 죽임을 당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기세등등하던 흡혈귀가 무엇 때문인지 몸을 흠칫 떨었다.
 그것도 잠시.
 그의 몸이 그대로 경직되더니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그대로 두 쪽이 난 채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흡혈귀가 그대로 두 동강나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쓰러진 흡혈귀의 뒤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카론이 서 있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에 꽂힌 형 레온의 검을 쥐어들고 그대로 흡혈귀를 베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검을 쥔 카론의 눈빛이 얼마나 섬뜩하게 느껴지는지 레온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악마가 눈 앞에 서있는 듯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간신히 소리쳤다.
 
 “카론!”
 
 그러자 카론이 흠칫하며 재빨리 손에 쥔 검을 바닥에 다시 꽂았다.
 무극마검경의 부작용은 현생에서는 작용하지 않는다.
 검을 쥐기만 하면 계속 전생에서의 일이 떠올라 마음이 극도로 차가워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날 뿐.
 
 “형, 괜찮아?”
 “나야 괜찮긴 한데······.”
 
 레온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방금 전 카론이 보여준 검술은 그가 흉내도 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검이 움직이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빛만 번쩍였을 뿐.
 그런데 흡혈귀가 두 쪽 났다.
 
 보통 검으로 인간의 몸을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반쪽 단번에 반쪽내는 건 어지간한 수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흡혈귀의 경우 매우 질긴 가죽 방어구까지 입고 있었다.
 레온이 혹시나 싶어 검으로 힘을 주어 베어봤지만 오러를 피워내고도 잘 잘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카론은 그것까지 종이 자르듯 잘라버린 것이다.
 상상도 못한 신비한 검술.
 
 “대체 그 검술은 뭐냐?”
 
 검술에 미쳐있는 레온답게 이 와중에도 무슨 검술이냐고 묻고 있었다.
 
 “검술은 무슨. 그냥 휘둘렀더니 이놈이 죽은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이른 나도 못이기는 마물이었어. 그런 무서운 놈을 그냥 검 한 번 휘두르니 죽였다고?”
 
 사실 레온의 자질도 천재적이었다.
 불과 십오 세에 검신에 오러를 피워내는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경지에 이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레온으로서도 카론의 검술은 흉내를 낼 수 없었다.
 무극검법의 초식이었으니 당연한 일.
 카론이 어색하게 웃었다.
 
 “형도 알다시피 내가 힘이 좀 세잖아. 최대한 천천히 휘두르려고 했는데 검을 쥐는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전력을 다하고 말았어.”
 “힘이 세다고 그런 검술을 펼치기란 불가능해. 적어도 수십만 번은 검을 휘둘러본 솜씨같았어. 넌 검술 수련도 한 번 한 적 없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레온은 기막힌 듯 카론을 쳐다봤다. 그 사이 카론은 바닥에 쓰러진 실비아를 침대에 눕히고 시녀들도 옆의 소파에 눕혀 놓았다.
 
 “다행히 모두 무사해. 엄마도 잠시 후면 깨어나실 거야.”
 
 그 말에 레온도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카론. 그보다 역시 넌 검사가 되어야 해. 너는 검술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이 있어.”
 “그냥 운이었을 뿐이야. 그러니 오늘 일은 비밀로 해줘. 이놈은 형이 죽인 거야, 알았지? 난 마법사가 되어야 해.”
 “이런 엄청난 검술을 펼쳐놓고도 지금 마법사라는 말이 나와?”
 
 레온은 당장 마법사 따위는 때려치우고 무조건 검사가 되라는 말을 하려했지만 이내 멈추고 말았다.
 카론의 눈빛이 뭔가 어둡고 슬퍼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레온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딴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젠장! 알았다. 알았으니 그런 표정 짓지마라.”
 “고마워, 형.”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뭔데?”
 “일단 이 시체부터 치우고 얘기하자.”
 “그래.”
 
 실비아 등이 깨어나서 흡혈귀의 시체를 보면 기겁할 것이다.
 
 “그런데 이건 웬 보석이지?”
 
 흡혈귀가 죽으면서 떨어뜨린 붉은 보석.
 섬뜩한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레온은 그것을 들고 살펴보다 카론에게 건넸다.
 
 “이거 딱 봐도 비싸 보인다. 가지고 있다가 왕도에 가서 처분하면 제법 큰 돈을 받을 거야.”
 “아버지께 드려야지.”
 “던전에서 보석들은 충분히 나올 거야. 이건 비상금이라고 생각하고 넣어둬.”
 “그럴까?”
 
 카론은 붉은 보석을 챙겼다.
 곧바로 레온은 집사와 경비병들을 불러 흡혈귀의 시체를 정원으로 옮긴 후 불로 소각시켰다.
 바로 그때 집으로 파울 자작과 기사들이 다급한 기색으로 나타났다.
 
 “레온! 지금 무엇을 태우고 있는 것이냐?”
 “집 안에 갑자기 웬 흡혈귀가 나타나 해치웠습니다. 그대로 두기 찜찜해서 불로 태우는 중입니다.”
 “혹시 그 놈 왼팔이 잘려있지 않았더냐?”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아버지께서 그놈을?”
 
 레온의 말에 파울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는 십년 감수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다. 고대 던전에서 튀어나온 녀석이었지. 나에게 왼팔이 잘린 후 이곳으로 도주했는데, 네가 해치웠다니 천만다행이구나. 혹시 누구 다친 사람은 없느냐?”
 “어머니께서 놀라 기절하시고 시녀들도 기절한 상태인데, 그 외에는······.”
 “그 우라질 놈이 감히 실비아를 해치려 했다니!”
 
 파울은 순간 목 뒤가 뻗뻗해졌다. 소름이 쫙 끼쳤던 것이다.
 만약 레온이 적시에 나타나 흡혈귀를 해치우지 않았다면 지금 그는 어떤 참상을 목격하고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와 레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훌륭하다, 레온. 그놈이 아무리 한 팔이 잘렸다 해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야. 이는 네가 그간 검술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겠지. 그간 네 녀석이 술집이나 들락거린다는 말에 걱정을 했다만 이 아비를 실망시키지는 않았어.”
 “하하, 아직은 한참 부족합니다.”
 “아니야. 넌 이제 좀 더 강도 높은 수련을 할 때가 되었다. 이번 던전 발굴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특별 수련을 해보도록 하자꾸나.”
 “윽! 그것은······.”
 
 레온은 울상을 지었다. 사실은 카론이 죽였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레온은 약속을 지켜야 했다.
 
 잠시 후 저택의 서재.
 레온은 카론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때문에 난 이제 두 배는 더 강력한 수련을 하게 생겼다. 어떻게 할 거냐? 나의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나는 흡혈귀를 네가 죽였다고 말할 거야.”
 “그러니까 원하는 조건이 뭔데?”
 
 카론이 묻자 레온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내 조건은 두 가지다.”
 
 사실 검술 수련의 강도가 높아진다는 말에 레온은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말로만 엄살을 피울 뿐 레온은 검술에 미쳐있는 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짐짓 죽을 상을 하는 건 이번 일을 빌미로 카론에게 뭔가를 요구할 작정인 것이다.
 
 “어서 말해 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 테니까.”
 
 그러자 레온이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런 식으로 나와야지. 네가 마법사가 되느냐,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검사가 되어야 하느냐는 다 내 입에 달렸다는 걸 잊지 마.”
 “치사하게 그러지 말고 어서 조건이나 말해.”
 “일단 아까 그 검술! 네가 쓸 거 아니면 내게 알려줘.”
 
 카론은 사실 레온이 이 부탁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런 부탁이 아니어도 아버지와 레온에게 줄 검결을 챙겨뒀다.
 그들이 강해야 자신에게 검을 쥘 일이 생기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무극검법은 100년도 넘게 걸릴 거라 불가능하고, 천룡검법 정도면 충분해.’
 
 천룡검법(天龍劍法)은 전생에서 카론이 우연히 얻었지만 무극검경을 수련하느라 그냥 기억만 해둔 것이다.
 무극검법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이지만, 일리오스 가문의 검술에 비하면 열 배는 더 강한 검술.
 
 “그렇지 않아도 검결을 적어뒀어. 아버지께도 보여드려.”
 
 두루마리를 받아 검결을 읽어본 레온은 깜짝 놀랐다.
 언뜻 봐도 상상을 초월한 위력의 검술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엄청난 검결을 얻은 거냐?”
 “꿈이라면 믿겠어?”
 “꿈이라고?”
 “별로 유쾌하지 않은 꿈이었지만 검결은 생생하게 기억 나.”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믿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믿어야지. 내 동생 말인데. 그런데 아버지께서도 믿으실지 모르겠군.”
 “형이 꿈을 꿨다고 해. 내가 줬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고.”
 “녀석! 다 내게 떠넘기는 거냐?”
 
 레온은 씩 웃더니 검결 두루마리를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좋아. 두 번째 조건도 들어준다면 네 뜻대로 하마.”
 “뭔데?”
 “이제 네가 갈 왕도 라고스에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나 야릇한 그림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단 말이야.”
 “흥미로운 책과 야릇한 그림?”
 “그거 있잖아.”
 “그거?”
 “짐작하고 있으면서 뭘 묻는 거냐?”
 “설마?”
 
 카론은 어이가 없다는 듯 레온을 노려봤다. 레온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임무는 그걸 구해서 주기적으로 나에게 보내주는 거야.”
 “그게 지금 마법 공부하러 가는 동생에게 형으로서 할 부탁이야?”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이 검결은 물론이고 흡혈귀도 네가······.”
 “알았어. 보내줄게.”
 
 카론은 한숨을 내쉬었고 레온은 활짝 웃었다.
 그렇게 두 형제의 비밀 계약은 체결되었다.
 
 * * *
 
 일리오스 영지의 고대 던전 발굴은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입구를 지키던 흡혈귀들과 흡혈 박쥐들이 사라지자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들은 없었으니까.
 제법 강력한 마물들이 지키고 있었던 만큼 던전에는 꽤 많은 보물이 나왔다.
 특히 고대의 마법서를 두 권 발견한 건 큰 쾌거였다.
 아모스 마탑에서는 그 책들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 각 권 당 1만 골드씩 도합 2만 골드를 주고 매입했다.
 또한 파울 자작은 그밖의 보물들을 처분해 수만 골드를 더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일리오스 영지의 재정 상황은 크게 호전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무더운 여름이 한참인 7월 중순.
 브리나 왕국의 왕도인 거대 도시 라고스.
 아모스 마탑의 마법 학교는 라고스 동쪽 편에 위치한 마탑 본부 근처에 있었다.
 
 수십 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진 마법 학교.
 이곳은 초급, 중급, 상급 과정으로 나뉘었다.
 초급의 과정을 무사히 수료하면 초급 마법사로 인정 받아 중급 과정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급 과정을 이수하면 중급 마법사가, 상급 과정을 이수하면 상급 마법사가 되는 식이었다.
 물론 단순히 수업만 듣는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터라 초급 과정조차 통과하기 쉽지 않았다.
 
 초급, 중급, 상급 마법 학교는 각각의 교사(校舍)들이 다 분리되어 있었는데, 각 학교에 소속된 학생이 다른 학교의 건물로 이동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다만 도서관만은 예외였다.
 마법 학교의 도서관은 거대한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엔 초급, 중급, 상급 학교의 학생이면 누구나 이용이 가능했다.
 
 아모스 초급 마법 학교의 본관.
 십여 명의 초급 마법 학교 교수들이 오늘 한 명의 특별한 입학생을 바라보며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열두 살 소년답지 않은 커다란 신장에 전신은 단단한 근육질.
 소년의 눈빛은 칼날처럼 예리해보이고 꽉 쥔 주먹은 강철 같아 보였다.
 남자가 볼 땐 멋있어 보이고, 여자가 볼 땐 잘생긴 미소년.
 그러나 그 특유의 살벌한 분위기가 문제였다.
 그 분위기는 말로 쉽게 표현하기 힘들지만, 그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뱀과 마주친 개구리의 심정을 느끼게 한달까?
 쉽게 표현하자면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거나 두렵게 만드는 위압감과 비슷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소년의 눈빛을 정면으로 쳐다보기 힘들 것이다.
 
 최종 입학심사를 위해 나온 초급 마법 학교의 교장 케인 자작.
 그는 아모스 마탑 소속의 최상급 마법사이기도 했다.
 그런 그조차 소년과 눈빛을 마주친 순간 움찔 했을 정도였다.
 그 사실이 어이가 없어 그는 잠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소년을 쳐다봤다.
 
 ‘피 냄새가 물씬 풍기는 놈이군. 장차 할버드나 배틀엑스를 쥐고 전쟁터의 선봉에 서면 딱일 녀석이야.’
 
 그 누가 봐도 소년은 마법사로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철모르는 어린 아이가 봐도 그는 마법보다는 검을 휘두르는 게 당연하다 할 정도다.
 
 “이름이 카론이라 했나?”
 “예.”
 “열두 살이면 마법을 배우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로군.”
 
 그러자 카론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뭐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거야 마법이 아닌 다른 분야에나 통할 말이지. 보통은 일곱 살쯤에 시작해서 열두 살쯤에는 초급 과정을 끝내고 중급 과정을 밟고 있어야 정상이다.”
 “늦었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케인은 카론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자세는 아주 마음에 드는군. 저런 근성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솔직히 그는 카론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는 카론의 부친인 일리오스 자작과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카론이 마법사가 아닌 검사의 길을 가도록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체격을 보니 검사가 딱 어울리는 데 검술을 익혀보는 게 어떤가?”
 “아니오. 검술은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마법이면 충분합니다.”
 
 카론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케인은 냉소를 지었다.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어야 하지.”
 “마법이야 말로 제게 딱 맞는 옷입니다.”
 “고집이 보통이 아니로군! 비록 카론 군이 특별한 추천을 통해 이곳에 입학했다지만, 시험에 낙제하면 퇴학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카론은 아모스 마탑의 초급 마법 학교 1학년생이 되었다.
 입학식은 네 달 전에 있었다고 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직전에 카론이 갑자기 특별 입학한 것이었다.
 
 “오늘은 새로운 학우를 소개하겠어요. 이쪽은 카론 드 일리오스. 다들 친하게 지내도록 해요. 카론 군, 저쪽에 앉아요.”
 
 초급 마법 학교 1학년 담임 교수인 셰런은 아라스 마탑 소속의 상급 마법사로 2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카론을 간략하게 소개한 후 비어있는 책상에 앉게 했다.
 
 “으! 키 크다.”
 “진짜 무섭게 생겼다.”
 
 카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알아서 숨을 죽였다.
 초급 마법 학교는 대부분 일곱 살이나 여덟살 정도에 입학한다.
 카론처럼 열두 살에 입학하는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그렇게 카론이 나이가 많은 것도 모자라서 그의 분위기가 살벌하다보니 아이들은 당연히 무섭게 생각했다.
 
 심지어 담임 교수인 셰런 또한 카론이 부담스러웠다.
 카론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서늘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상급 마법사인 그녀가 고작 열두 살 소년에게 움츠러든다는 것이 우스웠지만, 정말로 순간 몸을 떨고 말았다.
 
 “모두 주목해주세요. 저기, 모두 학기말 시험은 잘 대비하고 있겠지요?”
 
 공연히 음성이 떨려나왔다. 셰런은 카론이 있는 쪽은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내일 학기말 시험이 있으니 그간 공부한 것 복습 잘하도록 해요.”
 “네.”
 
 그 말에 카론은 어이가 없었다.
 오늘 입학했는데, 내일 시험이란다.
 그런데 잠시 후 셰런이 카론을 따로 불러 말했다.
 
 “내 말 기분 나쁘게 생각 말고 들어요, 카론 군.”
 “네.”
 “카론 군은 굳이 시험을 보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규정상 시험에서 낙제 점수가 나오면 퇴학이지만 카론 군은 오늘 입학했으니 특별히 예외를 둔 거예요.”
 
 그녀는 카론이 시험을 봐봤자 당연히 최악의 점수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굳이 시험을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었다.
 
 “시험은 어떤 걸 보는데요?”
 “이번 학기에서 배운 것들에 대한 필기 시험이예요.”
 
 셰런은 다섯 권의 두툼한 책들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 책들에서 시험이 나온다는 거군요.”
 “어차피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를 테니 그냥 그 책들에 무슨 내용이 있나 오늘은 가서 찬찬히 살펴보도록 해요.”
 
 순간 카론이 슥 셰런을 쳐다봤다. 셰런은 공연히 움찔했다.
 
 “저기, 내 말에 기분이 상했다면······.”
 “그게 아니고 그냥 경험삼아 내일 시험을 보려고 하는데 괜찮겠죠?”
 “물론이에요. 카론 군은 오늘부터 아모스 마탑 초급 마법 학교의 학생이니 당연히 시험볼 자격이 있어요.”
 
 셰런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셰런 교수님.”
 
 카론은 배낭에 책들을 챙겨 기숙사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책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초급 마법 개론
 마나란 무엇인가?
 기초 수학
 고대 카르어
 브리나 왕국사
 
 그 중에서 <기초 수학>과 <고대 카르어>, 그리고 <브리나 왕국사>는 읽을 필요가 없었다. 카론이 이미 이 책들보다 훨씬 방대하고 깊은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초급 마법 개론과 마나란 무엇인가? 이 두 권만 보면 되겠군.’
 
 마법 학교답게 이 두 권의 책이 가장 두꺼웠다.
 
 ‘먼저 초급 마법 개론부터.’
 
 두꺼웠지만 매우 쉬운 내용들이라 가볍게 머리에 기억해 두었다.
 책을 빠르게 넘기며 보다보니 딱 10분 정도 걸렸다.
 
 ‘별거 볼게 없군.’
 
 카론은 다음 책을 집어들었다.
 
 ‘마나란 무엇인가? 그래도 이건 볼 게 있겠지.’
 
 그러나 카론은 1분도 안 되어 그냥 책을 덮었다.
 사실 마법 학교 1학년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이 바로 마나학이지만, 내공과 동일한 힘이니 카론이 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카론은 딱 11분 만에 기말 시험 공부를 끝냈다.
 
 ‘딱히 할 일도 없는 데 나가볼까?’
 
 카론은 기숙사 방을 나섰다.
 힐끗 지나면서 보니 다른 방의 아이들은 내일부터 있을 기말 시험에 대비해 열심히 공부를 하는 듯했다.
 
 ‘도서관이 있다고 했으니 거기나 가보자.’
 
 
 # 3장. 그는 역대급 천재입니다
 
 각 마법 학교의 도서관은 통합되어 있는 터라 기숙사에서 한참을 걸어야 나왔다.
 무려 10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규모였는데, 1층의 입구를 통해 들어가자 온화한 인상을 가진 50대 남자가 카론을 보고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로군.”
 “오늘 입학했습니다.”
 
 카론은 아까 본관에서 받은 학생증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카론이 아모스 마탑 초급 마법 학교 1학년생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이었다.
 카론의 얼굴까지 나와 있으며, 위조도 불가능했다.
 
 “카론 군. 여기는 무슨 일인가?”
 “책을 읽으러 왔는데요.”
 “아, 그렇군. 맞아. 그게 아니라면 이곳에 올 다른 이유는 없겠지.”
 
 사내는 어색하게 웃었다.
 
 ‘맞아. 이 녀석이 바로 케인 교수가 말한 그 아이인가 보군.’
 
 그는 아모스 마탑 마법 학교의 도서관장인 텔라스였다.
 지금은 은퇴하여 조용히 도서관을 지키며 지내고 있지만, 그는 한때 명성을 날리던 최상급 전투 마법사였다.
 
 ‘일리오스 자작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던가. 어떻게 해서든 마법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포기시켜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이런 황당한 경우는 아모스 마법 학교를 통털어 처음일 것이다.
 그런데 텔라스 역시 카론을 보자마자 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검을 쥐고 기사가 되어야 할 녀석이 마법사가 되겠다는 헛된 꿈을 꾸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슨 책을 읽을 생각인가?”
 “처음이라 그냥 닥치는 대로 읽을 생각입니다.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그럼 그렇게 하게. 대신 이곳은 정숙해야 하네. 중급이나 상급 마법 학교의 학생들도 있으니 그들을 방해해선 안 돼.”
 “염려마세요.”
 “그리고 책은 읽고 그냥 그 자리에 두면 알아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지. 굳이 다시 찾아가 꽂을 필요 없다는 뜻이야.”
 “편리하군요.”
 
 카론은 감탄했다. 마법 학교의 도서관답게 그런 신비한 기능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무슨 책이든 읽을 수 있지만 기숙사로 빌려갈 수는 없네. 어떤 일이 있어도 도서관의 책은 외부로 방출이 불가능함을 잊지말게. 이 규정을 어기면 퇴학은 물론이고 엄벌에 처하게 된다네.”
 
 텔라스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해주었다.
 카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도서관은 몇 시까지 운영하나요?”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한 달에 하루 휴관일을 빼고 언제든 이용 가능하지.”
 “잘됐군요.”
 “그럼 들어가보게.”
 “또 뵙겠습니다.”
 
 카론은 공손히 인사하고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책이 정말 많네.’
 
 카론은 언뜻 봐도 수만 권은 되어보이는 방대한 장서들을 보며 가슴이 뛰었다.
 도서관의 형태는 마법 학교답게 매우 특이했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건물의 가장자리가 다 서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중앙은 광장처럼 넓었다.
 그리고 10층 정도 되는 건물이 아래 위로 뻥 뚫려 있는 형태였다.
 학생들은 비행 마법을 펼쳐 서가 높은 곳에 있는 책을 찾아볼 수 있었다.
 마법을 펼치지 못하면 서가 맨 아래에 있는 책들만 볼 수 있다는 뜻.
 
 ‘여긴 완전히 다른 세계 같군.’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서가에 있는 책들을 살피고 있었다.
 또한 책상과 의자가 공중 곳곳에 떠 있었는데, 그곳 또한 마법사가 아니면 올라가서 앉지 못할 것이다. 물론 카론이 작정하면 경공을 펼쳐 날아오르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지만, 기왕이면 마법을 배워 저들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었다.
 
 ‘좋아. 그럼 1층의 책들부터 차근차근 읽어볼까?’
 
 살펴보니 이곳 도서관에는 마법 관련 서적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 경제, 역사는 물론이고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 분야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장서들이 다 모여 있었다. 심지어 검술 교본과 같은 것들도 보였다.
 
 ‘하긴 마법서들만으로 이 많은 서가를 채울 수는 없었겠지.’
 
 물론 마법 학교이니만큼 마법 관련 서적이 무척 많았다.
 카론은 우선 마법관련 서적 위주로 찾아보기로 했다.
 
 ‘마법을 배우러왔으니 마법서 위주로 보고 다른 것들은 시간이 남으면 보자.’
 
 카론은 1층을 빙 둘러보다 눈에 띄는 책들을 발견했다.
 
 <4대 원소 마법의 이해 – 기초편>
 
 물, 불, 바람, 땅의 4대 원소 마법에 대한 기초를 다룬 내용 같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기초편이라는 책이 무려 20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각 권의 두께도 거의 한 뼘에 육박할 만큼 두꺼웠다.
 1권을 꺼내 펼쳐보니 글자 크기도 무척 작았다.
 
 ‘역시 마법이란 대단한 학문이군. 사대원소에 대한 마법의 기초편만 이백 권이라니.’
 
 보통 사람이라면 그 많은 분량에 질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전생에서 난해하기 이를데 없는 무극검경의 오의를 완벽히 터득했던 카론에게는 그저 흥미롭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곧바로 1권부터 5권까지를 빼들고 1층 바닥에 붙어 있는 책상 위에 올려놨다.
 
 ‘오늘은 시작이니 가볍게 다섯 권만 보자.’
 
 그렇게 1권을 펼치는 순간 누군가 다가와서 카론의 어깨를 살짝 쳤다.
 다름아닌 도서관장 텔라스였다.
 그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론 군, 설마 지금 그 책들을 볼 생각인가?”
 “예.”
 
 카론은 보면 안 되냐는 듯 텔라스를 쳐다봤다.
 그러자 텔라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법의 기초를 잡기 위해서라면 그 책은 쉽지 않을 거야. 그다지 추천해주고 싶지는 않군.”
 
 기초편이라고 진열해 놓긴 했지만 이 책을 이해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4대 원소 마법에 대한 내용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마법의 제반 지식까지 모두 망라되어 있는 종합 마법 참고서이기 때문이다.
 그다지 쓰임이 없는 마법들의 내용까지 수록되어 있었고, 그 어떤 부분도 적당히 넘어가는 곳이 없었다.
 
 그런만큼 저 방대한 200권의 책을 모두 읽고 이해한다면, 4대 원소 마법에 대한 기초는 물론이고, 사실상 모든 분야 마법에 대한 기초를 완벽하게 잡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수준은 초급 마법 학교의 모든 마법 과정은 물론이고 일부는 중급 수준까지 걸쳐있었으니까.
 심지어 마법 학교의 교수들 중에서도 간혹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참고하기 위해 찾아보는 일종의 마법 대백과 사전같은 용도의 책인 것이다.
 
 따라서 마법을 생판 모르는 초보가 읽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중급 과정의 졸업생이나 상급 과정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간 자신이 배운 것을 모두 정리하기 위해서라면 한 번 탐독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지금껏 저 책의 수십 권이라도 읽어나간 이는 거의 없었다.
 이유는 동일했다.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차피 꺼냈으니 일단 읽어보겠습니다. 저는 뭐든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서.”
 “뭐 그럼 마음대로 하게.”
 
 텔라스는 카론이 10분도 지나지 않아 눈을 감고 졸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카론은 매우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기만 할 뿐 졸지 않았다.
 
 ‘쯧, 그냥 책장만 넘기고 있는 것인가?’
 
 텔라스는 카론이 설마 책의 내용을 이해하며 저렇게 빠르게 넘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미 저 책들의 내용들을 모두 알고 있다면 모를까, 처음 보는 인간이 저 속도로 정말 책을 이해해나간다면, 그것은 가히 불세출의 천재일 테니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걸 보니 곧 마법을 포기하고 말겠어.’
 
 가장 쉽게 정리되어 있는 기초 마법서를 봐도 혼자서는 쉽게 이해하지 못할 텐데, 상급 과정의 학생들도 혀를 내두르는 지루한 종합 참고 마법서를 쳐다보고 있으니 결과는 뻔한 것이다.
 
 ‘굳이 일부러 포기시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겠군.’
 
 텔라스는 더 이상 카론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는지 도서관을 나가버렸다.
 
 한편 텔라스의 생각과 달리 카론은 매우 즐겁게 책을 읽고 있었다.
 
 ‘이건 정말 멋진 책이군. 마법을 종합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어.’
 
 4대 원소 마법은 카론이 처음 접해보는 학문이었다.
 만약 쉽게 한 부분만 설명되어 있다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피곤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뭔가 의문이 생길만한 부분은 모두 정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당연히 책이 두꺼울 수밖에 없으리라.
 
 파라라락.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서도 그는 글자들을 모두 훑었고 동시에 이해했으며, 대부분 암기했다.
 전생에서 무극검경으로 단련된 그의 지력은 인간의 범주를 초월해 있는 터였으니까.
 
 어느덧 카론은 1권을 읽고 2권을 펼쳤다. 그런 식으로 도서관 이용이 종료되는 밤 12시까지 그는 20권까지 읽을 수 있었다.
 
 “도서관 이용이 종료되었습니다. 마법 학교의 학생들은 도서관을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까지 남아서 책을 읽던 이들이 질서 있게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카론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왔다.
 곧바로 기숙사로 돌아온 그는 오늘 이해한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갖가지 상상을 통해 응용해본 후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카론은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은 후 수업 시간에 맞춰 1학년 교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담임 교수인 셰런이 들어와 말했다.
 
 “오늘은 기말 시험이 있는 날이예요. 다들 준비는 되었겠죠.”
 “네.”
 
 학생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린 아이들이지만 이번 시험에서 낙제하면 퇴학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시험 두루마리에 문제가 나타나니 정답을 써주세요.”
 
 두루마리 시험지는 카론의 책상에도 놓였다.
 카론은 두루마리를 펴고 문제를 풀어나갔다.
 
 시험은 다섯 과목으로 각 50문항씩 도합 250문항이었다.
 모두 주관식이었다.
 카론이 그 문제를 모두 푼 것은 20분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 단답형이고 서술형은 몇 개 없다보니 그냥 문제를 스치듯 읽으면 답이 나왔다.
 
 “끝났습니다.”
 
 카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험 두루마리를 내밀자 셰런이 잠시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입학한 카론이라면 한 문제도 맞추지 못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시험이 끝나기 전에는 나갈 수 없지만 카론 군은 특별히 봐주도록 하죠. 시험 두루마리를 이쪽으로 주고 나가세요. 오늘 수업은 없으니 내일 출석하도록 해요.”
 “네.”
 
 카론은 곧바로 도서관으로 갔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 책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그를 다급히 찾아왔다.
 
 “카론 군, 여기 있었군요.”
 
 다름아닌 담임 교수 셰런이었다. 카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죠, 교수님?”
 “여기서 말하긴 그러니 잠깐 밖에서 얘기해요.”
 “네. 그러죠.”
 
 카론이 책상에서 일어났다. 셰런은 카론이 읽던 책을 보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가만! 설마 지금 읽고 있는 책이 4대 원소 마법의 이해 기초편인가요?”
 “네, 맞는데요.”
 
 카론은 책의 제목을 보여주었다.
 현재 그는 200권 중 32권을 읽는 중이었다.
 
 “설마 그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 건가요?”
 “물론이죠.”
 “맙소사!”
 
 셰런은 마치 괴물보듯 카론을 쳐다봤다. 카론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보다 제게 할 얘기가 뭐죠?”
 “일단 나가요.”
 
 대화를 오래하면 다른 학생들에게 방해가 된다.
 카론은 셰런을 따라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오늘 기말 시험 결과가 너무 충격적으로 나왔어요. 카론군은 이전에 마법을 배운 적이 있나요?”
 “아시다시피 저는 어제 처음 왔습니다. 마법은 어제 책을 보며 시작했지요.”
 “그런데 어떻게 기말 시험 만점이 나올 수가 있나요?”
 “만점이 대단한 건가요? 문제가 쉬워서 웬만하면 다 만점이 나올 것 같은데.”
 “설마 그럼 하루 공부하고?”
 “마법 빼고 다른 과목들은 미리 공부해둔 거라서 하루라고는 할 수 없겠죠.”
 
 그러자 셰런이 기막힌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마법 두 과목은 하루 공부하고 만점 맞았다는 거네. 이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
 
 아모스 마탑 마법 학교의 시험에는 어떤 과목이든 만점자가 나오기 힘들었다.
 제 아무리 천재적인 학생이라도 풀기 힘든 문제들을 일부 넣어두기 때문이다.
 즉, 100점 만점으로 치면 최고 90점 이상은 나오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이유는 자만하지 않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사상최초로 전과목 만점자가 나온 것이다.
 비록 초급 마법 학교 1학년에서라지만 지금껏 없던 경우이다 보니 부정시험 의혹까지 나왔다.
 특히 시험 하루 전날 입학한 카론이 만점을 맞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도록 하죠. 카론 군은 지금 부정 시험 의혹을 받고 있어요. 나 또한 카론 군에게 문제를 미리 유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고요. 교수 회의에 가서 지금 이 상황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나요?”
 “그야 문제 없죠.”
 
 곧바로 카론은 마법 교수 회의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시험 문제의 각 답안에 대해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막힘없이 설명했다.
 그래도 질문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오자 귀찮아서 그가 벌인 마지막 행동.
 그것이 마법 교수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으니!
 
 “그냥 말로만 하려니 설명이 길어질 것 같군요. 이 정도면 제가 시험 만점을 맞은 것에 대한 증명이 되겠습니까?”
 
 카론이 손을 슥 휘젓자 자그만 불꽃 하나가 소환되더니 화살 모양으로 변해 그의 주위를 빙둘러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불의 화살이고, 이것은 물의 화살입니다.”
 
 이어서 푸른 물줄기가 소환되어 커지더니 화살 모양으로 변해 불화살 뒤를 따라 돌았다.
 
 “그리고 이건 바람 화살, 마지막으로 땅의 화살입니다.”
 
 투명한 바람이 화살모양으로 변해 그의 주위를 회전했고, 이어서 흙더미가 소환되더니 화살로 변해 움직였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카론은 그 네 화살들을 조종해 실내 공간을 누비게 만들었다. 마치 새들이 춤을 추듯 네 개의 화살들이 비행을 하다가 카론이 손을 슥 휘젓자 일제히 소멸되었다.
 
 “세상에!”
 “믿을 수가 없군.”
 
 지켜보던 마법 교수들이 모두 놀라 벌떡 일어났다.
 한 번에 네 가지 속성의 마법 화살을 동시에 생성해내는 건 적어도 상급 마법 과정에 있는 학생 정도가 되어야 시도를 해볼 수 있다.
 그것을 이제 막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카론이 해낸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생성해낸 것이 아니라 네 개의 화살을 동시에 조종해 움직였다.
 그건 상급 마법 학교 학생들도 쉽지 않은 일.
 
 “정말로 어제 마법을 시작한 것이 맞나?”
 “우리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카론 군은 마나에 대한 재능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오는데, 어찌 된 일인가?”
 
 마법 교수들의 질문에 카론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어제 시작한 거 맞습니다. 마나에 대한 재능은 지금 보셨다시피 제가 마법을 펼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죠.”
 
 검술에 대한 재능은 숨기지만 마법에 대한 재능은 일부러 드러낸다.
 이래야 누구든 자신에게 검을 쥐라는 소리를 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모두에게 자신을 마법 천재로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카론은 마법 쪽으로는 두각을 확실히 나타내기로 했다.
 
 * * *
 
 잠시 후 교수 회의실을 나온 카론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아까보던 책을 다시 펴고 독서를 시작했다.
 
 ‘재능을 보였으니 마탑에서도 생각이 있다면 나를 붙잡으려고 하겠지.’
 
 카론의 목적은 아모스 마탑의 주목을 받아 초급 과정이 아니라 중급과 상급 과정까지 모두 이수하는 것이다.
 그래야 아모스 마탑의 일원이 될 수 있고, 마법사들의 꿈이라는 최상급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 도서관에 있는 모든 마법책을 다 본다해도 어차피 상급 마법밖에 펼치지 못한다. 최상급 마법서는 마탑의 비밀 서고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카론은 이곳 도서관의 모든 마법 관련 책을 다 읽어볼 생각이었다.
 지금 읽는 4대 원소 마법의 이해 기초편만 해도 처음 마법을 시작하는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니까.
 
 그리고 사실 독서 외에는 달리 할 일도 없었다.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 터라 수업이 없기 때문이다.
 마법을 배운다는 목적을 떠나서, 아직 읽어보지 않은 수많은 책들이 잔뜩 쌓여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한편 그때 마법 학교의 교수 회의실에서는 심각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초급 마법 학교장 케인이 말했다.
 
 “카론 군이 아까 보여준 마법은 그가 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초급 화염학 교수이자 1학년 담임 교수인 셰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 군은 불과 하루만에 마법서만 보고 4대 원소 마법을 동시에 펼쳐내는 수준에 이르렀어요.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마법 학교 사상 유례없는 역대급 천재가 아닐까 해요.”
 
 셰런 또한 천재로 유명했다.
 초급, 중급, 상급 마법 학교를 모두 수석으로 이수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불과 20대에 마법 학교의 교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카론과 같은 존재는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녀석이 4대 원소 마법의 이해 기초편 200권을 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비웃었소. 그런데 지금 보니 그 녀석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오.”
 
 도서관장 텔라스의 말이었다.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 군이 보여준 마법은 4대 원소 마법의 이해 기초편 17권에 나오는 심화 응용 사례를 다시 응용한 것입니다. 그 사례를 이해한 것도 모자라 창의적으로 응용하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마법이죠. 매우 긴 계산 과정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풀어나가야 하는 터라 상급 과정에 있는 학생들도 쉽게 해내지 못합니다.”
 “나도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소. 아모스 마탑 마법 학교 사상 이런 미친 놈은 처음이오.”
 
 그러자 셰런이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정정해주세요. 미친 놈이 아니라 역대급 천재입니다.”
 
 텔라스가 빙그레 웃었다.
 
 “담임이라고 그 녀석을 감싸고 도는 건가.”
 “당연히 감싸야죠. 제 생애 그런 제자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요.”
 
 셰런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아! 그런 천재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설레는군요.”
 
 그러자 케인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 됐지만 그 설렘은 거기서 접어두는 게 좋겠소, 셀런 교수.”
 “그게 무슨 뜻이죠?”
 “셸런 교수의 말대로 그런 역대급 천재를 초급 학교에 놔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지요. 이미 아까 보여준 능력만으로 초급 과정은 마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소?”
 
 셸런이 흠칫 놀랐다.
 
 “그럼 설마 카론 군을 바로 중급 학교로 올려보낸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설마 상급 학교로?”
 “그래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오.”
 
 그러자 텔라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오. 그런 천재를 초급이나 중급 학교에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 필요는 없소. 설령 모르는 것들이 있어도 그 녀석은 금방 따라잡을 것이오.”
 “문제는 일리오스 자작이지요.”
 
 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텔라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일리오스 자작이 왜 문제라는 거요?”
 
 그러자 초급 학교 냉기학 교수인 에딘이 말했다.
 
 “그것은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실은 일리오스 자작과는 카론 군이 마법을 포기하는데 협조해주기로 약속을 한 상황입니다. 그는 카론이 마법을 포기하고 검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지요. 그 일에 관해서는 구두 약속뿐 아니라 계약서도 작성한 상태라 자칫 이번에 고대 던전에서 얻은 마법서들을 돌려줘야 할 수도 있습니다.”
 
 텔라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계약서까지 썼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일리오스 자작은 상당히 철두철미한 자입니다.”
 
 사실 아모스 마탑에서는 일리오스 영지의 던전 발굴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인해 카론에게 특혜를 베풀었던 것일뿐, 그가 마법을 잘 배울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마나에 대한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약속을 한 것이다.
 하지만 카론의 마법 재능은 아모스 마탑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천재가 마법사가 되지 않는다면 누가 마법사가 되겠소? 어떻게든 일리오스 자작을 설득해봐야 하오.”
 “그는 카론이 검사로서 천부적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 쉽지 않은 상황이죠.”
 
 케인의 말에 텔라스는 기막힌 듯 껄껄 웃었다.
 
 “일리오스 가문에 괴물이 태어났군. 검술에 천부적 자질을 타고난 것도 모자라 마법에도 역대급 재능이라니 말이오.”
 
 셰런이 말했다.
 
 “중요한 건 본인의 의지가 아닐까요? 제가 볼 때 카론 군은 마법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일단 이 일을 마탑주께 보고 한 후 일리오스 자작을 만나 담판을 지어볼까 합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나도 찬성이오.”
 
 그렇게 마법 교수들의 의견은 일치되었다.
 
 * * *
 
 어느덧 밤 12시.
 그 사이 카론은 4대 원소 마법의 이해 기초편 42권까지 읽었다.
 
 “도서관 이용이 종료되었습니다. 마법 학교의 학생들은 도서관을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내일 다시 와야할 것이다.
 카론은 곧바로 도서관을 나와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밤하늘에는 둥근 달이 떠있었다.
 
 ‘오늘따라 달빛이 아주 밝네.’
 
 잠시 후 기숙사의 방으로 들어와 간단하게 씻고 가방의 물건들을 정리하던 카론은 돌연 그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깜빡했구나. 이게 있었지?’
 
 피처럼 붉은 보석.
 얼마 전 고대 던전에서 나온 흡혈귀를 처치한 후 얻은 것이었다.
 아름답긴 하지만 섬뜩한 느낌이 나는 터라 보통 사람이라면 빨리 팔아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카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들었다.
 흡혈귀가 지니고 있던 보석인만큼 뭔가 심상치 않은 내력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때 기숙사의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보석을 비추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스스.
 
 알 수 없는 음침한 기운.
 갑자기 방안 전체가 요사한 붉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스스스.
 
 붉은 빛은 점점 짙어지더니 카론은 기숙사의 방이 아닌 전혀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붉은 장미들이 가득 차 있는 정원이었다.
 그 가운데 신비한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 서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요?”
 
 그러자 여성이 차갑게 웃었다.
 
 “블러디 스톤을 가지고 있는 자여! 설마 고대의 계약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가?”
 “블러디 스톤?”
 
 카론은 순간 자신의 손에 들린 붉은 보석을 쳐다봤다.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블러디 스톤은 나의 피로 만들어진 계약의 돌. 만월이 뜨는 밤 블러디 스톤을 달빛에 비춘 건 나 아드힐라를 불러내는 의식이다.”
 
 여성의 이름이 아드힐라인 모양이었다.
 
 “이게 그런 식으로 쓰이는 것이었나 보군요. 계약 따위는 모르겠고, 이 걸 가지고 있던 흡혈귀 녀석은 죽었습니다.”
 “블러디 스톤을 누가 가지고 있던 그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인간 네가 그것을 얻었다는 것이지.”
 
 아드힐라의 두 눈에서 신비하면서도 섬뜩한 빛이 번쩍였다.
 
 “머지않아 봉인되었던 세계가 열리고 수많은 고대의 지배자들이 깨어나게 될 거야. 나 또한 그 중의 하나란다.”
 “봉인되었던 세계? 고대의 지배자?”
 
 아드힐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의 계약에 따라 블러디 스톤을 가진 자는 나의 힘을 얻을 수 있다. 너 또한 마찬가지야. 물론 그 대가로 너는 나의 영원한 종이 되어야 하겠지.”
 
 카론이 인상을 굳혔다.
 
 “종이라고?”
 “네게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찮은 인간인 네가 고대의 지배자였던 나 아드힐라의 종이 되었으니 말이야.”
 
 그러자 조금 전까지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카론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난 당신의 종이 될 생각 없으니 그만 물러가라.”
 
 순간 아드힐라의 아름답던 두 눈이 섬뜩한 핏빛으로 변했다.
 
 “의식을 통해 나를 불러놓고 나의 힘을 얻기를 거절한다면 그 대가는 죽음으로 치러야 한다.”
 “마지막 경고다. 당신이 고대의 지배자이건 뭐건 나와는 상관없으니, 날 건드리지마라.”
 
 그러자 아드힐라의 오른 손에 반투명한 빛이 어리더니 그것은 이내 핏빛 검신의 검으로 변했다.
 
 “어리석은 녀석! 실로 가소롭구나!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해주마.”
 
 
 # 4장. 고대의 지배자
 
 일리오스 영지의 고대 던전에서 나온 흡혈귀를 해치우고 얻은 아름다운 보석.
 우연처럼 그것이 달빛에 비춰지자 기숙사의 방에 있던 카론은 알 수 없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아드힐라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매우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겠다. 나의 종이 된다면 너는 살 수 있다.”
 
 아드힐라의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그녀가 핏빛 검을 쥐자 엄청난 기세가 느껴졌던 것이다.
 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카론은 그녀의 노예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난 남의 종이 될 생각 없으니 꺼져라!”
 
 그러자 아드힐라가 가소롭다는 듯 웃더니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후훗, 건방진 놈! 몸에서 피가 철철 나오는데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보겠다.”
 
 파앗!
 
 그와 함께 번개처럼 카론의 팔뚝을 향해 날아드는 검격!
 실제로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급소가 아닌 곳을 노렸다.
 아마도 카론을 겁줘서 굴복시킬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 공격은 빈 공간을 스쳤을 뿐이다.
 카론이 가볍게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카론은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곧바로 그는 오른 손에 쥐고 있던 보석에 무극지기를 주입했다.
 무극신공 5단계에 이른 그는 이런 보석으로도 얼마든지 검술을 펼칠 수 있었다.
 
 츠으읏!
 
 순간 사방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고요해지더니 보석에서 붉은 빛의 광채가 생성되었다.
 검강(劍罡)!
 소드 마스터의 상징이라 불리는 오러 블레이드였다.
 
 ‘말도 안 돼!’
 
 아드힐라가 두 눈을 부릅떴다.
 소드 마스터가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하는 것이야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소드 마스터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을만큼의 수준에 있는 존재이니까.
 
 그러나 같은 오러 블레이드라 해도 지금 나타난 것은 그 차원 자체가 달랐다.
 일단 자그만 보석을 이용해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한다는 것부터가 상식을 초월하는 일.
 게다가 오러 블레이드에서 피어나는 광채가 심상치 않았다.
 광채의 주변 공간이 시커먼 암흑으로 물들어버렸다.
 그 암흑 속에서 광채가 가히 태양처럼 강렬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보통의 검강이 아니었다.
 극검강(極劍罡).
 즉, 인텐스 오러 블레이드였다.
 인간 중 초인이라 불리는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면 생성이 불가능했다.
 
 아드힐라가 물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구나. 너는 대체 누구냐?”
 
 그러나 카론은 말없이 섬뜩한 살기를 피워냈다.
 그를 평범한 소년이라 생각해 손쉽게 노예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아드힐라는 가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보통 놈이 아니야. 설마 내가 전력을 다해 제압해야할 상황이 올 줄은 몰랐군.’
 
 곧바로 그녀의 몸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슷! 스슷!
 
 그녀의 신장이 3미터도 넘게 커짐과 동시에 어깨에서 칼날같은 붉은 날개가 뻗어나왔고, 전신에는 흑색의 비늘이 솟아났다.
 오른 손에 쥐고 있던 검이 쭉 늘어나더니 붉은 빛의 창으로 변했다.
 그녀로부터 피어나는 기세는 아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
 
 그러자 이번에는 카론이 기막혀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아드힐라가 상상 속에서도 본 적없는 흉악스러운 괴수로 변할 줄이야.
 카론은 도무지 지금이 현실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의문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괴수로 변한 아드힐라가 창을 휘두르며 돌진해왔기 때문이다.
 
 “호호호! 죽여주마!”
 
 창날 형상의 시퍼런 광채가 카론을 향해 날아들었다.
 
 파아아앗!
 
 놀랍게도 창날에 극검강의 광채가 피어나 있었다.
 인간도 아닌 괴수가 그랜드 마스터나 가능한 극검강을 자유롭게 펼칠 줄이야.
 
 쾅! 콰아앙!
 
 그러나 카론은 침착하게 창을 받아냈다.
 아드힐라가 휘두르는 창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었지만 창술 자체의 변화는 무극검법에 비하면 가소로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카론은 연속으로 날아드는 창날의 광채들을 검으로 가볍게 흘려버리고는, 그대로 전방을 향해 검을 번쩍 내리그었다.
 
 번쩍!
 
 마치 잘든 칼에 과일이 반쪽이 나듯, 전방의 공간이 그대로 두 쪽 났다.
 그 갈라지는 공간의 끝에 아드힐라가 있었다.
 
 “헉!”
 
 깜짝 놀란 아드힐라는 황급히 창날의 광채를 형성해 방어했다.
 
 콰아아앙!
 
 순간 뭔가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그녀는 뒤로 쭉 밀려나 나동그라졌다.
 
 “으으으윽!”
 
 간신히 일어나 버티고 선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 상태였다.
 방금 전 카론의 공격을 창으로 방어는 했다.
 그러나 가공스러운 압력이 창을 타고 밀려와 그녀의 전신을 휘저었고, 그로인해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터져나갔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으윽! 막지말고 피했어야 했어.’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그 사이 카론이 그녀의 앞으로 번쩍 이동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피해야 해.’
 
 창으로 막아봤자 소용없다.
 암흑 사이로 이글거리는 저 극검강의 광채는 보통의 그랜드 마스터가 형성한 것과 기운이 달랐다.
 
 팟-
 
 그녀는 사력을 다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카론은 마치 그럴줄 알았다는 듯 그녀의 뒤쪽으로 이동한 후였다.
 
 “그만 죽어라.”
 
 그는 그대로 그녀의 몸을 쪼개버릴 듯 검을 내리쳤다.
 아드힐라는 절망의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도저히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다시 눈을 떠보니 극검광의 광채가 그녀의 바로 앞에서 멈춰 있었다.
 
 카론이 그녀를 노려봤다.
 그의 두 눈에서 숨막힐 듯 차가운 안광이 뿜어져 나오자 아드힐라는 감히 시선도 마주치지 못했다.
 
 “으으!”
 
 거대한 괴수같은 몸에서 다시 본래의 인간 여성같은 외모로 돌아간 그녀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카론이 물었다.
 
 “너는 뭐냐?”
 
 어차피 죽일 생각이지만, 그래도 문득 궁금해졌다.
 아드힐라는 카론이 전생에서는 상상도 못해봤던 괴물이니까.
 
 “고대의 지배자라면 혹시 드래곤인가?”
 
 이곳 세계의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각종 전설의 괴물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드래곤이었다.
 진짜로 그것들이 존재하는지는 카론도 알지 못했다.
 그저 책에 적혀있는 허무맹랑한 내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전 아드힐라가 보여준 능력은 그런 드래곤과 같은 존재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힘들었다.
 카론이 무극신공 5단계를 돌파하지 않았다면 이길 수 없었을 테니까.
 
 “말해라. 너의 정체는 뭐지?”
 “나는 이곳 지상 세계가 아닌 지저 세계의 존재다.”
 “지저 세계?”
 
 카론은 지저 세계란 이름을 들어본 적 있었다.
 고대 신화와 전설과 관련된 책에서 봤던 허무맹랑한 세계.
 설마 그곳이 실재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이곳 대륙의 지저에 위치한 또 다른 차원의 세계. 고대의 지배자란 곧 지저 세계의 지배자를 의미한다.”
 
 고대 전설에 의하면 아득한 고대에 지상 세계와 지저 세계의 전쟁이 있었다.
 지저 세계의 사악한 존재들이 지상 세계를 침공했는데, 드래곤들이 그들과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했다.
 카론이 알고 있는 내용은 이 정도였다.
 그런데 그 허황된 전설에나 있던 지저 세계에서 왔다고?
 그것도 지배자라니!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믿고 싶지 않겠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드힐라는 카론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지상 세계와 지저 세계는 차원의 벽에 가로 막혀 있지만 특별한 계약을 통해 지상 세계로 들어 올 수 있지. 잠들어 있던 나를 깨워 이곳으로 불러낸 건 바로 너다.”
 
 그녀는 뭔가 억울해하는 표정이었다.
 카론은 차갑게 웃었다.
 
 “내가 원해서 널 불러낸 게 아니야. 우연히 그렇게 된 것뿐이지.”
 “이제 나를 어쩔 셈이냐?”
 “죽여야지. 너같이 사악한 존재를 내가 살려둘거라 생각했느냐?”
 
 그러자 아드힐라가 뭔가 안도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럼 빨리 날 죽여라.”
 
 카론은 고개를 갸웃했다.
 
 “죽는데 왜 다행이라는 거지?”
 “계약에 의하면 패자는 승자의 노예가 되게 되어 있다. 후후, 치욕스럽게 너 따위 인간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낫겠지.”
 “노예라고?”
 “마신 아카넬님의 이름을 걸고 한 계약이니 그것을 어길 경우 나는 무서운 저주를 받게 된다. 내가 저주를 피하고자 한다면 너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흥! 난 그따위 짓은 절대 하고 싶지 않으니 빨리 날 죽여······.”
 
 그런데 그 말을 하던 아드힐라의 몸 도처에 시커먼 악창같은 것이 마구 돋아났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전신이 붉은 화염에 마구 구워지는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으으윽! 으아아아악! 자, 잠깐만! 요, 용서를! 으아악! 자, 잘못했어요.”
 
 아드힐라가 갑자기 끔찍한 꼴이 되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거지?’
 
 너무도 고통스러워보이는 모습.
 보고 있는 카론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섬뜩한 광경이었다.
 이대로라면 카론이 굳이 죽이지 않더라도 알아서 죽을 것 같았다.
 
 “자, 잠깐! 제, 제발 저를 노예로 바, 받아주세요······. 흐윽! 흑! 흐으윽! 제, 제발······.”
 
 그때 아드힐라가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통곡하며 카론에게 애걸했다.
 
 “대체 뭐하자는 거냐?”
 “마, 마신 아카넬님의 저주가······. 저는 무, 무조건 당신의 노예가 되어야 해요. 이대로 죽게 되면 저는 영원히 지금과 같은 고, 고통을······ 제, 제발 저를 노예로······. 끄으으으윽! 무, 무슨 짓이든 시키는 일은 다할 테니 제, 제발······.”
 
 아드힐라는 울면서 기어와 카론의 발에 입을 맞추며 애원했다.
 그러고 보니 죽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모양이었다.
 계약대로 카론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그녀는 저 끔찍한 고통을 영원히 받게 된다는 뜻.
 
 “그러게 왜 애초에 그런 쓸데없는 계약을 한 거야?”
 
 다 아드힐라가 자초한 것이었다.
 그녀에게 패배한 존재를 영원한 그녀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 마신 아카넬의 이름까지 걸고 만든 종속 계약!
 설마 그녀는 자신을 소환한 인간에게 패배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흐흑! 흑! 제, 제발!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저를 노예로······. 당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이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아 저는 영원한 저주를······.”
 
 보다못한 카론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일단 고통은 줄여주는 게 인지상정일 테니까.
 
 “좋아. 널 노예로 받아주지.”
 
 그러자 아드힐라의 몸에 생겨났던 끔찍한 악창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또한 핏빛으로 달아올랐던 그녀의 피부도 말끔한 백색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녀는 안심이 안 되는지 카론의 앞에 엎드려 애원했다.
 
 “미천한 종 아드힐라, 위대하신 로드의 은혜를 잊지 않겠사옵니다. 마신 아카넬님께 한 맹약대로 저 아드힐라는 이제 당신의 종입니다.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니 제발 앞으로 백 년 동안은 저를 죽이거나 버리지 말아주세요.”
 “백 년은 또 뭐야?”
 “계약에 의하면 최소 백 년은 무조건 당신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전에 제가 당신에 의해 죽게 되거나 버려지면 종으로서의 계약을 지키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마신 아카넬님께 저주를······.”
 
 하여간 계약에 별 조항을 다 넣었던 모양이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이리라.
 카론은 잠시 침묵했다가 물었다.
 
 “지저 세계의 지배자가 너 하나만이 아닐 테고. 너의 정확한 정체는 뭐지?”
 
 카론이 정체를 묻자 아드힐라가 대답했다.
 
 “저는 고대에 공포의 여왕으로 불렸습니다.”
 “공포의 여왕이라면 설마 흡혈귀 여왕?”
 “네, 그렇게 불린 적도 있었습니다.”
 
 카론의 두 눈이 커졌다.
 고대의 전설편에서 읽어본 적이 있었다.
 흡혈귀 여왕 아드힐라!
 그러고 보니 이름도 딱 맞았다.
 각종 드래곤들과 어깨를 견줄만큼 강한 존재였다고 나왔는데, 설마 그 전설이 사실이었다는 말인가?
 
 그때 아드힐라가 카론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사실 저는 흡혈을 하지 않습니다. 당시 권속들을 좀 더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 흡혈의 저주를 걸었을 뿐이죠. 그러다 보니 그 녀석들이 그들의 힘을 보충하기 위해 흡혈을 했고, 그런 그들을 방치한 건 저의 잘못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흡혈 따위는······.”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카론은 어이가 없었다.
 가만 들어보니 아드힐라야 말로 흡혈귀들을 만들어낸 원조였던 것이다.
 그녀 자신은 흡혈귀가 아니지만, 흡혈귀들을 만들어냈고, 그것들 중 일부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안 되겠다. 너같은 흡혈귀를 노예로 받느니 그냥 죽이······.”
 
 그러자 아드힐라가 움찔하며 말했다.
 
 “자, 잠깐만요, 로드! 제가 뿌린 씨앗 제가 거두겠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흡혈귀들을 모조리 찾아 없애버리겠어요. 모두 저의 권속이라 할 수 있으니 그들을 찾아 없애는 건 쉬운 일이에요.”
 
 그 말에 카론은 잠시 고심했다.
 아드힐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카르 대륙에서 흡혈귀는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로드께서 명하시면 지저 세계의 지배자들이 또 깨어나는지 알아보겠어요.”
 “너 말고도 또 깨어난다는 뜻이야?”
 “고대에 저와 같은 고대의 지배자들은 지상 세계를 공격해 드래곤들과 전쟁을 벌였다가 패배한 후 스스로를 봉인했습니다. 그런데 우연이라도 제가 깨어난 걸 보면 지금쯤 다른 이들도 봉인이 풀려 깨어났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럼 또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겠군.”
 
 아드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들이 아직 살아있다면요.”
 “드래곤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들의 수명도 한계가 있거든요.”
 
 카론은 다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널 죽이는 건 잠시 보류하겠다.”
 
 모든 걸 떠나 아까도 봤듯이 아드힐라는 카론을 배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용가치가 있을 지도 모른다.
 무작정 사악한 존재라고 죽이기보다는 잘 두고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그것 하나만으로 아드힐라를 살려두기는 꺼림칙했다.
 그래서 그는 혹시 몰라 한 가지 조치를 취해두기로 했다.
 
 “나는 이제 네게 하나의 금제를 가할 것이다.”
 
 곧바로 카론은 무극지기를 끌어올려 아드힐라의 몸에 주입했다.
 
 “으으윽! 이, 이건?”
 
 아드힐라는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무극신공을 익히지 않은 자에게 이 기운은 저주와도 같다.
 그녀 스스로 무극지기를 통제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나면 무극지기가 그녀의 모든 육체를 파괴해 버릴 것이다.
 
 “고통은 차차 가라앉을 것이다. 또한 그 기운은 그저 조금 거슬리기만 할 뿐 너에게 어떤 제약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면 폭주하며 너는 죽는다.”
 
 아드힐라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렇게 해서 카론에 의해 죽게 되면, 그녀는 마신 아카넬의 저주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카론은 차갑게 웃었다.
 
 “네가 정말 나의 종으로서 처신을 잘 한다면 한 달씩 너의 생명은 연장된다. 꿈에서도 잊지마라. 내가 널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겠습니다.”
 
 아드힐라는 잔뜩 움츠러든 자세로 대답했다.
 카론이 다시 물었다.
 
 “너처럼 깨어난 다른 고대의 지배자들은 어디에 있지?”
 “솔직히 그들을 찾는 건 쉽지 않습니다. 저를 비롯한 고대의 지배자들은 지상 세계에서는 오직 계약자에게 빙의해서만 제대로 된 힘을 쓸 수 있어요.”
 “빙의라고?”
 “그것을 통해 계약자의 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대의 지배자들과 계약한다는 건 그들에게 몸을 내주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카론도 만약 아드힐라를 이길 힘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그녀가 빙의하도록 몸을 내주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빙의한 상태로 본신의 능력을 쓸 수 있나 보군.”
 “다만 계약자가 가진 육체나 정신 능력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제한은 있어요.”
 “제한?”
 “강한 계약자일수록 제한선이 높아지죠. 소드 마스터급 검사나 마도사급 마법사 정도의 계약자라면 고대의 지배자들이 가진 본신 능력을 다 쓸 수 있어요.”
 “그럼 넌 이곳에서 어떻게 힘을 쓴 거지?”
 “여긴 블러디 스톤의 의식을 통해 저의 본신이 들어올 수 있는 특별한 결계 공간이라 예외적으로 저의 모든 힘을 쓸 수 있었어요.”
 
 카론 역시 이곳이 결계의 일종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계약자들은 고대의 지배자가 빙의해 본신의 능력을 드러낸다면 바로 알아보겠지만 그 전에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 결론적으로 넌 나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겠군. 이대로라면 본신의 힘을 거의 쓸 수 없을 테니까.”
 
 아드힐라는 무슨 말이냐는 듯 약간은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저는 흡혈귀들에겐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모든 흡혈귀들은 저의 명령을 받게 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흡혈귀에게 저의 피를 먹이면 더 이상 흡혈을 하지 않아도 되는 몸으로 변해요.”
 “흡혈귀가 흡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네. 그리고 그렇게 변한 몸에는 제가 잠시 빙의할 수도 있죠. 물론 빙의가 끝난 후 그 권속은 한동안 탈진 상태가 되어 힘을 못쓰게 되지만, 그 사이 저는 또 다른 권속에게 빙의해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럼 강한 권속만 많다면 아드힐라는 불사신처럼 권속들을 옮겨다니며 본신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다는 뜻.
 
 “그렇다 해도 모든 흡혈귀들에게 네 피를 먹일 수는 없겠지.”
 “그랬다간 제 피가 남아나지 않겠죠. 하급 흡혈귀들은 어차피 쓸모가 없으니 발견 즉시 모두 소멸시키고, 소수의 강한 녀석들만 충실한 권속이 되도록 만들겠어요.”
 
 아드힐라는 카론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흡혈의 저주에서 벗어나도 제게 무조건 충성을 바쳐야 하니 로드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에요.”
 “좋아! 그건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이제 세상에서 흡혈귀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소멸되거나 혹은 정상으로 돌아와 아드힐라의 충실한 종이 되어버릴 테니까.
 
 “그리고 이건 로드께 바치는 충성의 표시이니 받아주세요.”
 
 그때 아드힐라가 엎드려 고개를 숙인 그대로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붉은 검신의 검을 내밀었다.
 
 “이 검은 뭐지?”
 “블러디 소드라는 이름의 검입니다. 평상시는 투명한 반지 형태로 착용이 가능하고 언제든 검으로 변형할 수 있어요.”
 
 카론이 검을 받아들자 그것은 신비한 붉은 빛의 보석이 박힌 반지로 변했다.
 
 “그 반지에 마나를 주입하고 저의 이름을 불러주시면 어디서든 저는 로드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죠. 제게 명령을 내리실 때 사용해주세요.”
 
 검을 소지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는데 반지라면 부담이 없었다.
 반지를 손가락에 착용하자 그것은 곧바로 투명하게 변했다.
 
 “일단 너는 브리나 왕국에 있는 흡혈귀들부터 정리해라.”
 “명을 받들겠어요.”
 
 아드힐라가 정중히 엎드려 예를 취하더니 환영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그녀의 붉은 정원 결계가 흐물흐물 흩어지기 시작했다.

댓글(3)

말해뭐해    
2년전 소설을 10프로 할인이라.. 이게 맞아? 문피아님들 이게 맞냐고
2020.11.16 11:21
대여평가원    
근데 대여라 할말이없음 난 10퍼 안해도 질렀음
2020.11.18 10:23
Kolor    
145쪽부터 갑자기 심각하게 망가지는데
2020.11.22 08:45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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