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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게임으로 억만장자! 1-1권

2018.12.06 조회 4,400 추천 32


 # 프롤로그
 
 이건은 두려움에 떨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숨 막히는 정적이 이건이 탄 SUV를 지배하고 있었다.
 
 “건아.”
 
 “네, 감독님.”
 
 한성 그룹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팀을 맡은 최동진 감독이 이건을 지그시 응시했다.
 
 “많이 떠는구나. 무섭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이 사람들은 뭡니까 대체?”
 
 덩치 큰 사내들이 이건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다. 이건이 날뛰지 못하도록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금방 끝나.”
 
 전혀 안심이 되지 않는 최동진 감독의 말.
 
 이건을 태운 SUV는 강원도 깊은 산골에 있는 어떤 산장 앞에서 멈추었다. 얼른 내리라는 말에 이건은 주눅이 들었다.
 
 “어서 들어가자.”
 
 최동진 감독은 안타까운 표정이었지만 단호했다.
 
 산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무것도 없는 휑뎅그렁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감독님, 아무것도 없는데요.”
 
 “당연히 없지.”
 
 철컥.
 
 차가운 총구가 관자놀이를 겨눈다. 이건의 심장이 철렁했다. 총을 겨눈 사내들은 냉정한 태도를 유지했고, 최동진 감독은 한숨을 길게 토했다.
 
 “휴! 건아, 미안하다.”
 
 “맙소사. 왜 이러는 겁니까? 무슨 몰카입니까? 돌발 상황을 만들어서 날 놀라게 하는 뭐 그런 거···.”
 
 “그런 거 아니다. 우린 진지해.”
 
 썰렁한 아재 개그도 안 치던 최동진 감독이다. 이건은 진짜 총이라는 것을 알고 하얗게 질렸다.
 
 대체 최동진 감독이 왜 이런 짓을 한다는 말인가? 이건을 죽여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VIP의 뜻이란다.”
 
 “VIP라면···.”
 
 한성 그룹의 총수였다. 이건의 팀을 뒤에서 지원하는 진짜 실세. 따지고 보면 최동진 감독도 그의 손발이었다.
 
 “···총수가 왜 저를 죽이려는 겁니까?”
 
 “그건 직접 물어봐라.”
 
 최동진 감독이 신호를 보내자 사내들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다.
 
 [여어, 오랜만이다. 이건.]
 
 “서태석···!”
 
 “이 건방진 새끼!”
 
 ‘퍽!’ 소리가 났고, 이건은 부지불식간에 무릎을 꿇었다.
 
 “큭!”
 
 [존칭을 담아 불러야지, 이놈아. 그동안 키워 준 은혜는 까맣게 잊었냐?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라니까?]
 
 “시발, 은혜? 지랄하고 자빠졌네. 날 죽이라고 시킨 게 너라며!”
 
 [응, 맞아.]
 
 담담하게 인정하는 서태석. 이건은 기가 막혀서 물었다.
 
 “왜지? 왜 날 죽이려는 거야!”
 
 [네가 배틀스타 4강에 올랐기 때문이지. 내 개인 정보를 써서 만든 캐릭터로.]
 
 이건은 충격에 휩싸였다.
 
 배틀스타는 볼텍스 그룹이 만든 최초의 가상현실게임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볼텍스 그룹을 이끄는 총수, 카일 S. 로드리게스가 폭탄선언을 터뜨렸다.
 
 ―분기마다 플레이어의 업적점수에 순위를 매겨서, 상위 열 명에겐 억 소리 나는 상금을 주겠다.
 
 배틀스타의 플레이어는 3억 명.
 
 그중 상위 열 명에 드는 것은 밤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다.
 
 문제는 이건이 정말로 상위 열 명에 든 것도 모자라, 최후의 4강까지 올랐다는 것.
 
 그리고 4강에 오른 플레이어들은 볼텍스 그룹의 초대를 받아 그들이 준비한 공간에서 생활하며 최후의 일인을 가린다는 것.
 
 [근데 너는 내 개인 정보를 썼지.]
 
 이건의 실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을 만큼 뛰어났지만, 아이디를 만들었을 때의 개인 정보는 서태석의 것이었다.
 
 그게 계약조건이었다.
 
 한성 그룹은 매년 이건에게 막대한 연봉을 지급하고, 이건은 서태석의 개인 정보로 만든 캐릭터를 플레이한다.
 
 계약 당시 서태석은 “가끔 고렙 캐릭터로 배틀스타를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고 만 말했다.
 
 상금은 서태석이 받지만, 한성 그룹이 지급하는 연봉이 훨씬 컸기에 이건은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4강에 오른 게 화근이었다. 볼텍스 그룹의 주식을 상금으로 받은 것이다.
 
 게다가 볼텍스 그룹이 4강의 플레이어를 본사로 초대하기까지 했으니, 이건이 가면 야바위가 들통날 게 뻔한 노릇.
 
 [이제껏 했던 것처럼 고스트 플레이어로 남았다면 이런 일도 안 했겠지. 하지만 사정이 바뀌었어. 네가 죽어야 내가 온전히 ‘워커’가 된다.]
 
 “개자식! 워커는 내 캐릭터다!”
 
 [하하, 무슨 소리야? 내 개인 정보로 만든 캐릭터인데. 당연히 내 거지.]
 
 “빌어먹을!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냐?”
 
 [···나처럼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은 일반인이 못 구하는 고급 정보도 쉽게 접하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냐고? 맞아. 4강에 오른 플레이어가 로드리게스 회장의 주식을 일부 양도받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 지라시가 돌고 있었으니까.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지만, 만약을 위해 너에게 투자한 거다. ‘푼돈’으로 볼텍스 그룹의 대주주가 된다면 남는 장사거든. 뭐, 설마 4강에 올랐다고 본사로 부를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이건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길, 구린 냄새가 났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누굴 탓하랴. 돈에 눈이 멀어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인데.
 
 [최동진 감독, 할 말이 남았나? 이건이 애송이였을 때 발굴해서 키운 게 당신이라며.]
 
 “아뇨. 없습니다.”
 
 씁쓸한 얼굴의 최동진 감독이었지만 고개를 저음으로써 죄책감을 털어 냈다.
 
 [하하! 불쌍하구나, 이건. 다음 생은 나 같은 금수저로 태어나길 바란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소음기를 장착한 총이 이건의 뒤통수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큭, 서태석! 최동진! 이 개씨발새끼들아! 죽여 봐! 나 죽이고 잘 먹고 잘사나 저승 가서 똑똑히 봐 주마!”
 
 “말이 많아.”
 
 타앙!
 
 나직이 울리는 총성.
 
 이건의 머리통이 고꾸라졌다. 의식과 함께 생각도 끊긴다. 배틀스타의 톱 플레이어로서 쌓은 화려한 위명에 비하면 초라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이건도, 최동진 감독도, 사내들도 몰랐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건에게 기적이 임했음을.
 
 죽은 이건의 시간이 거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2020년 서울 광화문.
 
 이건은 최근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볼텍스 스토어를 방문했다.
 
 “이벤트에 도전하겠습니다.”
 
 
 # 제1장. 다시 시작
 
 볼텍스 스토어.
 
 광화문에 입점한 이곳은 붐볐다. 신상품인 볼텍스 기어가 어마어마한 히트를 친 것이다. 세계 최초의 가상현실게임 배틀스타 때문에.
 
 당연하지만 볼텍스 기어의 가격은 결코 싸지 않았다. 웬만한 소형차 뺨치는 가격. 하지만 그런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리는 볼텍스 기어였다. 볼텍스 스토어는 그 기세를 더욱 살리기 위해 대대적인 이벤트를 계획했다.
 
 ―광화문 본점에 모이신 분들 중, 가장 처음으로 튜토리얼 헬 모드를 공략하는 분께 볼텍스 기어 S3를 무료로 드립니다!
 
 볼텍스 기어 S3!
 
 웬만한 외제 차 한 대와 맞먹는 가격을 자랑하는 최신형 모델이었다. 그걸 공짜로 주겠다는 광고가 사람들의 욕망을 부채질한 것은 당연한 일. 이벤트가 열리는 날, 현장은 수많은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대기표를 뽑고 줄을 선 사람들은 시선을 멀리 향했다.
 
 야외에 설치된 대형 화면에 1레벨 플레이어가 동굴을 헤매며 몹(mob)과 싸우는 장면이 생중계되고 있었던 것.
 
 ‘제발 공략에 실패하기를!’
 
 모두가 한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찰나였다.
 
 [크억!]
 
 화면 속의 플레이어가 후방에서 날아온 슬라임의 몸통박치기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게임 오버!]
 
 완벽한 게임 오버.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감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앞선 사람들이 성공한다면 이제껏 줄을 섰던 게 헛고생이 됐을 것이다.
 
 그렇기에 앞선 사람들은 실패하기를, 오직 자신만 성공하기를 간절하게 기도했고, 한편으로는 불안감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헬 모드가 어렵다고 듣긴 했지만, 한 사람도 성공하지 못하다니···.’
 
 ‘난이도 미쳤네, 미쳤어. 이걸 어떻게 공략하란 거야?’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화면으로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수백 명이 도전했는데 성공한 이가 없었다.
 
 초보자의 실력으로는 몇 번을 도전해도 공략할 수 없는 튜토리얼 헬 모드.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볼텍스 스토어의 직원들이 히죽 웃었다. 사실 그들도 공략하는 사람이 나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모두가 실패해도 상관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도전에 실패한 사람들이 아쉬운 마음에 할부로라도 볼텍스 기어를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니까. 이미 잘 팔고 있지만, 더 많이 팔고 싶은 게 장사하는 사람들의 심리였다.
 
 ***
 
 ‘예상대로군.’
 
 큰 키와 탄탄한 체형,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를 가진 청년. 기다란 줄 중간에 선 그는 팔짱을 낀 채 차분한 얼굴로 도전자들의 플레이를 감상했다. 실패한 도전자들은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지만, 사실 실패는 당연한 것이었다. 튜토리얼 헬 모드는 랭커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깰 수 없는 난이도니까. 심지어 랭커들조차 막 배틀스타에 발을 들였을 시절에는 깨지 못했다. 완전 초보자가 튜토리얼 헬 모드를 공략한 예는 배틀스타가 서비스되고 난 이후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
 
 ‘워커로는 도전하지 말아야겠어. 나중에 한성 그룹이 만든 길드 놈들을 잔뜩 괴롭혀 줄 텐데, 내 정체가 노출되면 안 되지. 아쉽지만 유령 캐릭터를 만들 수밖에···.’
 
 청년의 이름은 이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서 배틀스타에서 가장 강한 네 명의 플레이어 중 한 명에 선정되었고, 그로 인해 비참하게 살해당한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총을 맞아 죽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5년 전의 과거로 회귀했다!
 
 최동진 감독이 접근하기 몇 달 전의 과거로. 한성 그룹과 비밀계약을 맺은 과거도 없었던 일이 돼 버렸다.
 
 다시 이용당하면 내가 미친놈이지. 전생엔 돈에 눈이 멀어 앞뒤 재지 않고 비밀계약을 했지만, 이번 생에선 자신의 이름으로 만든 캐릭터로 플레이해서 당당히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노라고 결심했다.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2년 늦게 배틀스타가 서비스되기 시작했으니까. 국내 게임사들의 로비를 받은 정치인들이 가상현실게임이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리며 결사적으로 반대한 탓이다.
 
 그러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볼텍스 그룹의 로비력이 국내 게임사들보다 더 강했기에, 결국 한국에도 배틀스타가 서비스되기 시작했다. 만약 몇 년만 더 과거로 회귀했다면 아예 외국으로 이민 가서 배틀스타를 했겠지. 물론 죽음을 피해 과거로 돌아온 것도 엄청난 행운이니, 더 바라는 것은 과욕일 것이다.
 
 “다음. 144번 나오세요!”
 
 마침내 번호가 호명된 이건이 앞으로 나섰다. 번호표를 받은 직원은 그것을 옆에 있는 통에 넣고, 투명한 룸에 있는 기계를 가리켰다.
 
 “가운데 보이시죠? 저기에 있는 볼텍스 기어에 앉으세요. 조작하는 방법은 설명서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설명서는 아까 나누어 드렸는데 보셨나요?”
 
 안 봤는데. 하지만 읽지 않아도 내용은 다 안다. 가장 구식인 볼텍스 기어. 최신형 모델인 S3에 비하면 로딩이 버벅거리고 그래픽도 별로였다. 지금은 중고 시장에 내놔야 하는 낡은 기계.
 
 구성은 간단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몸을 뉠 만큼 커다란 의자(바X 프렌드 닮았다). 부속 장치는 헬멧과 모니터. 헬멧은 신경과 감각을 가상현실에 연결해 주고, 모니터는 가상현실의 영상을 송출했다.
 
 [아이디를 입력해 주십시오.]
 
 헬멧을 쓰고 몇 초가 지나는 순간 의식이 붕 떴다. 이건은 가상현실에 들어온 것을 실감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전생에 썼던 워커는 이미 만들어 두었지만,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이번엔 유령 캐릭터로 플레이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닉네임 또한 대충 지었다. 이름의 앞글자 이니셜을 따서 LG(Lee gun).
 
 [배틀스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직업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배틀스타의 기본 직업은 전사, 도적, 마법사, 성직자다. 이 네 가지 직업 중에서 하나를 고르면, 세부적인 능력치를 배분한다. 전투 스타일을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사를 선택했다고 치면, 근력을 중시하는 전사와 속도를 중시하는 전사 양쪽으로 나뉜다. 전자는 공격력과 방어력이 뛰어난 탱커, 후자는 공격력과 속력을 두루 갖춘 딜러가 되는 셈이다.
 
 이건은 스펙을 폭풍 같은 속도를 자랑하는 속도형 전사로 맞추었다. 무기는 시미터.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가끔은 이런 별미도 나쁘지는 않겠지. 관중들에게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 줄 수도 있고. 기왕 공략할 거, 화려하게 하는 게 낫지 않은가?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난이도를 선택해 주십시오.]
 
 당연히 헬 모드지!
 
 [헬 모드를 선택하셨습니다.]
 
 튜토리얼의 무대는 난이도마다 달랐다. 헬 모드의 무대는 회색의 종유석과 석순이 가득한
 석회암 동굴. 곳곳에 설치된 화로가 동굴의 어둠을 물리치고 공기를 따뜻하게 데웠다.
 
 이건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오른손에 든 시미터가 날카로운 기운을 흩뿌렸다. 조작법에 대한 설명이 지나가고, 본 게임이 시작되었다.
 
 헬 모드의 몹은 총알 슬라임.
 
 공격할 땐 총알처럼 빨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런 놈들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와, 코앞까지 닥쳤을 때 느닷없이 기습한다. 어디까지나 게임이라서 고통은 대부분 차단되지만, 속사포처럼 빠른 몸통박치기를 맞으면 누구나 움찔했다.
 
 이건은 잘 대처했다. 얼굴을 노리고 짓쳐들어온 슬라임 한 마리를 시미터로 양 등분한 것도 모자라서, 다른 슬라임들의 몸통박치기를 왼손에 착용한 방패로 막았다. 그래도 숫자가 많아서 조금씩 밀렸지만.
 
 화면으로 이건의 플레이를 본 관중들은 이번에도 실패할 거라며 낙관적으로 웃었다. 사회자를 맡은 직원도 쯧쯧 혀를 차며 이건의 HP가 0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줄곧 밀리기만 했던 이건의 움직임이 반전됐다. 슬라임이 뒤를 기습할 수 없는 막다른 곳까지 가더니, 갑자기 춤추듯이 경쾌한 움직임으로 놈들을 묵사발 내 버렸다. 칼과 방패, 심지어 몸까지 써서 슬라임을 썰고, 으깨고, 짓뭉개 터뜨렸다. 그리고 번쩍! 타이밍 좋게 뻗은 시미터에 슬라임들이 꼬치구이처럼 줄줄이 관통당했다.
 
 관중들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이건은 슬라임들이 드랍한 아이템을 줍고,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띠었다.
 
 헬 모드 공략을 도와줄 아이템. 생각보다 빨리 얻었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인가 본데.’
 
 ***
 
 “우와아아아아!”
 
 관중들이 함성을 터뜨렸다. 이건은 경쟁자였지만, 절로 감탄이 나오는 플레이를 보여 주었다.
 
 볼텍스 스토어의 딜러, 윤상현도 감탄했다.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플레이. 무엇보다 빈틈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대단했다. 한꺼번에 슬라임을 칼로 꿰뚫었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말았다.
 
 ‘이게 전부가 아니겠지? 밑천을 꺼내 봐!’
 
 윤상현은 눈을 부릅뜨고 이건의 싸움에 열중했다. 이건이 더 대단한 것을 보여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이건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저건 또 뭐야!”
 
 깜짝 놀라 소리를 꽥 질렀다. 이건이 동굴을 내달리며 어그로를 끌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일부러 슬라임들을 끌어모으는 건가?
 
 실로 아찔했다. 몇 번이나 위험한 장면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치명타만큼은 확실하게 피한 이건이었다. 히트 앤드 런으로 착실하게 경험치를 벌고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화면에 울려 퍼지는 맑고 감미로운 여성의 목소리. 동시에 이건의 속도가 가일층 빨라졌다.
 
 ‘확실히 움직임은 좋아. 싸우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레벨 좀 올린 걸로는 헬 모드를 공략 못 해.’
 
 윤상현은 생각하면서 턱을 어루만졌다. 레벨만 높다고 공략할 수 있었다면 수많은 도전자들이 이미 성공했을 것이다. 실력 좀 있다고 자랑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신중하게 플레이하지 않으면 공략은 물 건너갈 텐데···.
 
 윤상현이 걱정스럽게 보고 있을 때, 이건은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는 입구로 쏙 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움직였을 리는 만무하고, 분명 맵(Map)으로 지형을 파악하고 이동했을 텐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때 윤상현의 눈이 커졌다. 관중들도 술렁였다.
 
 이건이 통과한 입구는 좁았다. 위에서 보면 중간이 움푹 들어간 표주박 같은 지형이다. 입구는 좁고, 그 너머의 공간은 넓은 구조였다.
 
 뒤따라온 슬라임들은 입구에서 뒤엉켰다.
 
 ‘그렇구나! 서로 들어가려고 하면 막힐 수밖에 없지!’
 
 그때 이건이 벼락처럼 튀어 올라 천장의 종유석을 비스듬히 잘랐다. 일반적인 게임이라면 플레이어가 천장에 칼 좀 휘둘렀다고 종유석이 잘리진 않겠지만, 배틀스타에서는 가능했다. 지형지물도 벨 수 있었다.
 
 그렇게 떨어진 종유석이 뒤엉킨 슬라임들을 짓눌렀다. 다 죽지는 않았지만, 입구 아래쪽은 종유석 때문에 막혀 버렸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슬라임들 입장에선 난데없는 장애물을 마주친 격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윤상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이건의 진짜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막다른 공간 한편에 숨겨진 보물 상자. 눈에 띄지 않는 틈 깊숙한 곳에 있어 찾기 힘들었다. 원래부터 알고 있지 않은 이상은 찾아낼 수도 없는 장소였다. 이건은 인벤토리에서 열쇠를 꺼내 보물 상자의 열쇠 구멍에 꽂았다.
 
 ‘허, 열쇠가 저런 용도였나?’
 
 윤상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틀스타는 몇 번 해 봤지만 저곳에 보물 상자가 있다는 것도, 슬라임을 죽이면 간혹 드랍되는 열쇠가 저 보물 상자를 여는 용도라는 것도 까맣게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이건의 보물 상자가 열렸다.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헬 모드를 공략했습니다.]
 [업적점수 100점을 지급받았습니다.]
 
 “휴우!”
 
 이건은 심호흡을 하며 땀을 훔쳤다. 공략법을 알고 있기에 성공을 확신했지만, 낮은 능력치로 곡예 같은 움직임을 무리하게 이어 나간 탓에 정신적으로 지쳐 버렸다.
 
 ‘역시 헬 모드. 다시 해도 어렵구만.’
 
 어그로를 끌어 유도를 하고, 좁은 골목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화면으로 볼 땐 쉬워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삐끗했어도 사방에서 육탄 공격을 맞고 무너졌을 터.
 
 그럼에도 성공했다. 이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템의 도움도 받았고 말이다.
 
 시미터의 가드에 박힌 붉은 보석.
 
 한가운데 흰색으로 룬 문자가 박힌 보석은 보물 상자에서 얻은 아이템, ‘최하급 화염의 룬 스톤’이었다. 무기에 장착할 수 있는데, 공격력 옵션을 3~4씩 올려 주고, 추가로 화염의 속성력까지 부여한다.
 
 어쨌든 이로써 최신형 볼텍스 기어 S3를 공짜로 얻은 셈. 이건의 만면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넋을 놓은 직원을 향해 씩 웃어 주고, 그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왔다.
 
 “우, 우승자가 정해졌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
 
 직원의 뒤늦은 선언에 울려 퍼지는 뜨거운 함성. 그만큼 이건의 플레이는 대단했다. 질투도 나지 않을 정도로.
 
 ‘그래, 저런 사람이라면 볼텍스 기어를 공짜로 가질 만해.’
 
 오죽하면 다들 이런 생각을 할까.
 
 진짜로 헬 모드 공략에 성공한 사람이 나올 줄 몰랐던 볼텍스 스토어의 직원들만 당황했고, 서둘러 자리를 마련했다.
 
 “공략 축하드립니다. 사실 저희도 이렇게 빨리 공략하실 분이 나올 줄은 예상 못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
 
 윤상현이라고 이름을 밝힌 직원이 이건을 테이블까지 안내했다.
 
 이건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윤상현이 직접 탄 아이스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흥분은 금방 가라앉았다. 헬 모드라고 해 봤자 결국 튜토리얼 아닌가. 보물 상자의 위치는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건이 처음 발견한 셈이지만, 대단하다고 할 건 못 되었다. 어차피 곧 있으면 발견될 것을 이건이 먼저 선수 쳤을 뿐이었다.
 
 “기어 배달은 얼마나 걸립니까?”
 
 “섬에 사시는 게 아니라면 사흘 내로 받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설치하는 기사님 비용까지 저희가 대 드리지는 못합니다.”
 
 “설치는 저 혼자 해도 되니까, 스펙 좀 빵빵한 걸로 보내 주시죠.”
 
 전생 때 하도 볼텍스 기어를 만지다 보니 혼자서도 척척 설치할 수 있는 이건이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멋진 플레이를 보여 주셨으니 S3 중에서도 가장 빵빵한 스펙을 가진 녀석으로 보내 드리죠. 그리고···.”
 
 뒷말을 붙인 윤상현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이건 씨의 플레이 영상을 저희 SNS에 올리려고 하는데, 그래도 될까요?”
 
 이건이 피식 웃었다. 오늘 만든 세컨 캐릭터로 활약할 일은 앞으로 없을 테니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괜찮습니다. 편집만 멋지게 해 주신다면.”
 
 “이건 씨가 저희 광고모델이나 마찬가진데, 당연히 멋지게 편집해 드려야죠. 대신 앞으로도 저희 매장을 종종 찾아 주셨으면 합니다.”
 
 거래는 성사됐고, 이건은 윤상현과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며칠 뒤, 매끈한 광택을 자랑하는 검은색의 볼텍스 기어 S3를 택배로 받았다.
 
 이건은 흡족한 마음으로 볼텍스 기어를 작동시켰다.
 
 ***
 
 이건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 집을 전전하며 자랐다.
 
 양육비라는 명목으로 부모님의 유산을 야금야금 빼앗긴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집문서만큼은 꼭 지켰는데, 지금 이건의 집이 바로 부모님이 남겨 주신 집이었다. 집의 거실에 설치된 볼텍스 기어에서 이건이 배틀스타에 접속했다.
 
 ‘오랜만이다, 워커(Walker).’
 
 워커. 전생에선 서태석의 개인 정보로 만들었고, 때문에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없었던 캐릭터. 이번 생에선 온전히 자신의 캐릭터였다.
 
 190센티의 장신과 균형 잡힌 근육질 몸매. 우묵한 눈매와 높은 콧날, 날렵한 턱선이 인상적인 검은 머리의 사내.
 
 배틀스타의 전설인 워커.
 
 이건의 또 다른 모습이 다시 배틀스타에 발을 들였다.
 
 볼텍스 기어를 공짜로 받기 위해 세컨 캐릭터로 도전했을 때는 속도를 중시하는 전사로 맞추었지만, 워커는 달랐다. 근력과 속도가 6 : 4. 무기도 크고 무거운 양손검이 주력이다. 당연히 싸우는 스타일도 달라졌지만, 이쪽 형태가 더 익숙했기 때문에 먼젓번보다도 수월하게 튜토리얼 헬 모드를 공략하고 룬 스톤을 손에 넣었다.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헬 모드를 공략했습니다.]
 [업적점수 100점을 지급받았습니다.]
 
 튜토리얼도 일종의 퀘스트였다. 사상 최초로 어려운 퀘스트를 공략한 플레이어에게는 큰 업적점수가 주어지며, 그다음으로 공략한 플레이어에게는 그보다는 조금 낮은 업적점수가 주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일정해졌다.
 
 튜토리얼을 통과한 이건의 눈앞에 중세를 재현한 듯한 도시의 전경이 펼쳐졌다.
 
 [시작의 도시, 아델에 도착했습니다.]
 [아델이 귀환 포인트로 설정되었습니다.]
 
 배틀스타의 세계관은 총 여섯 개의 대륙으로 구성되며, 플레이어가 처음 입성하는 시작의 도시들은 제1대륙에 몰려 있었다.
 
 아델은 한국 플레이어들을 위해 제작된 시작의 도시.
 
 배틀스타가 한국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인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건은 당분간 아델에 눌러앉을 생각이었다. 1차 전직을 하기 전에 포석을 쌓기 위함이었다. 워낙 노가다라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중도 포기하는 퀘스트.
 
 아델의 남쪽 구역에 있는 전사훈련소의 훈련 퀘스트였다.
 
 “모험가여, 어쩐 일로 왔는가?”
 
 교관 NPC의 날카로운 눈빛. AI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생생했다. 이건은 차분한 태도로 준비된 멘트를 읊었다.
 
 “훈련을 받고자 합니다.”
 
 “훈련소를 이용하려면 날마다 20실버를 내야 하네.”
 
 “내겠습니다.”
 
 튜토리얼 헬 모드에서 슬라임을 죽이고 루팅한 돈을 건넸다.
 
 “따라오게.”
 
 교관이 안내한 곳은 평평하게 땅을 고른 훈련장이었는데, 열 명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 호기심에 온 듯 훈련은 안 하고 관광만 하고 있었다.
 
 교관은 플레이어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은 플레이어를 공격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이 뭘 하든 알 바 아니었다.
 
 “무기를 꺼내 내려치기를 연습하도록. 만 번은 연습해야 하네.”
 
 내려치기만 만 번!
 
 순수하게 배틀스타를 즐기기 위해 접속한 플레이어라면 질려서 그만둘 수밖에 없는 무식한 노가다다. 그러나 이건은 묵묵히 검을 꺼내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휘둘렀다. 허공에 붉은색의 선이 있었는데, 이 선을 따라 검을 휘둘러야만 훈련으로 인정되었다.
 
 [내려치기 : 1/10,000]
 
 무거운 양손검이 붕, 하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매서웠다. 교관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검을 배웠나?”
 
 “옛날에 조금 배웠습니다.”
 
 단순히 매뉴얼대로만 플레이하는 것으로는 상위 랭커에 들지 못한다고 생각했기에, 전생 때 실전 검도를 배운 적이 있었다.
 
 “자네는 뛰어난 전사가 될 자질을 갖춘 것 같군. 태만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게나.”
 
 “감사합니다.”
 
 그러나 같은 동작을 만 번 반복하는 것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배틀스타에 고통을 차단하는 설정이 있어서 망정이지, 없었다면 진즉 팔다리에 쥐가 났을 터.
 
 [내려치기 : 10,000/10,000]
 
 내려치기 퀘스트를 끝내기까지 꼬박 14시간 동안 검을 휘둘렀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온종일 검만 휘두른 셈. 그러나 의미 없는 짓은 결코 아니었는데, 레벨업을 안 했는데도 능력치가 소폭 올라갔다.
 
 [근력이 1 올랐습니다.]
 [체력이 1 올랐습니다.]
 
 물론 투자한 시간에 비해선 없는 거나 다름없는 효과였다. 차라리 레이드를 뛰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이 훈련소 퀘스트는 1차 전직을 위한 포석. 당장은 뒤처질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훨씬 유리하다. 15레벨이 되고 1차 전직을 할 때, 다른 플레이어들은 할 수 없는 직업을 고를 수 있다는 것은 큰 이득이다.
 
 “열심히 훈련하는 모습이 보기 좋군! 내려치기 만 번을 했으니, 이제 옆으로 휘두르기를 만 번 해 보게!”
 
 “알겠습니다.”
 
 다시 검을 휘두르는 이건.
 
 그 모습을 흘깃 본 다른 플레이어들이 질렸다는 얼굴로 수군거렸다.
 
 “저 자식 또라이 아냐? 고작 검 휘두르는 것 배우려고 비싼 돈 주고 볼텍스 기어를 샀나.”
 
 “그러게. 게다가 웃고 있잖아?”
 
 “뭐야, 저 인간. 무서워···.”
 
 이건은 그들이 하는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묵묵히 검을 휘두르면서 퀘스트를 수행할 뿐.
 
 ***
 
 한 달이 지나 이건은 아델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별종으로 소문났다. 레벨업은 하지도 않고, 무식한 훈련만 하는 인간이 있다고.
 
 이건의 행동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따라 해 보는 플레이어들도 있었지만, 금세 흥미를 잃고 훈련을 그만두었다.
 
 “에이, 검을 휘두를 시간에 레이드를 뛰는 게 더 낫지.”
 
 훈련소 퀘스트를 마쳤을 때 어떤 보상을 받는지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사실 한국보다 2년 앞선 외국의 플레이어들도 훈련소 퀘스트는 대충 하고 끝내는 추세였다. 즐기기 위해 게임하러 왔는데 고작 훈련소에서 한 달 동안 발을 묶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뭐, 난 순수하게 게임 즐기는 놈은 아니니까.’
 
 작게 “상태창 온”이라고 속삭이자 빛의 화면이 떠올랐다. 오직 당사자만 볼 수 있는 상태창이었다.
 
 ====
 [플레이어 상태창]
 ―이름: 워커(남)
 ―레벨: 3
 ―직업: 전사
 ―근력: 50
 ―속도: 28
 ―명중: 20
 ―정신: 33
 ―체력: 51
 ―마력: 17
 ―업적점수: 150
 
 [업적]
 ―튜토리얼 헬 모드(100점): 튜토리얼 헬 모드를 공략했습니다.
 ―훈련 이수(50점): 전사훈련소의 모든 훈련을 마치고, 교관의 추천장을 받았습니다.
 ====
 
 훈련이 끝나고 교관은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자네는 이제껏 내가 훈련한 모험가들 중에 가장 성실했네! 보상으로 이걸 주지. 나중에 ‘전사의 사원’에 갈 때 그쪽 사람에게 이걸 보여 주면 자네에게 큰 혜택을 줄 걸세.”
 
 “예. 지금껏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자네의 무기가 많이 닳았군. 혹시 예비 무기는 달리 없는가?”
 
 “없습니다.”
 
 “그럼 내가 잘 아는 공방에 가 보게. 아델의 동쪽 상업 구역에 있는데, 내가 보내서 왔다는 말을 하면 기꺼이 무기를 줄 걸세.”
 
 [교관이 플레이어 워커를 호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친절을 베풉니다.]
 [퀘스트 ‘완고한 드워프 장인의 인정을 받아라!’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연계 퀘스트로군. 이런 식으로 받을 줄은 몰랐는데.’
 
 수락하지 않는 게 바보짓이었다. 드워프 장인의 무기라면 최소 유일 등급. 그러나 이건이 아는 한 20레벨 이하의 저레벨 구간에서는 유일 등급을 못 구한다.
 
 다만 완고한 드워프라는 게 마음에 걸리는데··· 배틀스타의 드워프들이 완고한 부분이 있긴 해도 수식어로 특별히 완고하다고 써 줄 정도라니. 대체 누구길래 이러나?
 
 
 # 제2장. 연계 퀘스트
 
 이건은 드워프 장인을 만나는 퀘스트의 이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단 성공만 하면 공격력과 내구력이 높은 드워프제 무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격력이 높으면 대미지가 잘 나오고, 내구력이 높으면 수리비를 아낄 수 있었다.
 
 실물을 받아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정말 성능이 뛰어나기만 하다면 20레벨까지는 무기를 바꿀 필요가 없을 터. 다만 드워프 장인의 이름이 마음에 걸린다.
 
 ‘젠장, 하필이면 락켄이라니.’
 
 락켄. 전생에 배틀스타를 했을 때도 태도가 중구난방이라서 논란이 됐었던 NPC다.
 
 어떤 플레이어에게는 흔쾌히 자신이 만든 무구 아이템을 내줬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았다. 게다가 아이템을 주는 조건이 매번 달라졌기에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복불복인 것이다.
 
 쉬운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건은 동쪽의 상업 구역에 있는 락켄의 집을 찾아갔다. 동쪽 구역에서도 외진 곳에 있어, 초행인 사람은 맵을 봐도 찾기 어렵지만, 이건은 전생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헤매지 않았다.
 
 탕탕탕!
 
 철문을 두들겼지만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NPC가 장소를 이탈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일부러 안 열어 주는 것이리라.
 
 “영감님, 전사훈련소 교관님의 소개로 왔습니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며 외친 말에 그제야 문이 삐거덕 열렸다. 갈색 수염이 풍성한 땅딸막한 드워프. 그가 경계의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누구 소개로 왔다고?”
 
 “전사훈련소의 교관님입니다. 영감님이 무기를 만들어 주실 거라 하던데요.”
 
 “흠, 별로 강해 뵈지는 않는데. 그 친구가 추천을 해 줬다고?”
 
 이건을 위아래로 훑어본 락켄의 얼굴엔 불신이 그득했다.
 
 “교관님 훈련을 모두 이수했습니다.”
 
 “허, 그 무식한 훈련을 이수했어? 요즘 모험가 애송이들은 인내심이 없어서 도중에 때려치우던데 말이야.”
 
 락켄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물론 이건이 사기를 쳤다면 AI의 시스템상 바로 알아차리고 호통을 쳤겠지만, 진실 아닌가.
 
 “그런데 애송아, 내 무기를 주기엔 네가 너무 약하구나. 내 인정을 받고 싶다면 능력을 증명해라. 방법은··· 음, 그래! 정화의 꽃 스무 송이를 따 와라!”
 
 “그거면 됩니까?”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쉬웠기에 이건이 놀랐다. 이것보다 훨씬 어려울 거라 생각했었는데.
 
 “엥? 이놈 보게. 정화의 꽃을 따는 게 쉬운 줄 알아? 정화의 꽃은 남쪽의 발탄 숲에 있어! 마물들이 득실대는 곳 말이다!”
 
 “잘 압니다.”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 전생에 많이 따 봤으니까. 정화의 꽃이 자라는 위치는 지금도 기억한다. 찾아가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퀘스트, ‘완고한 드워프 장인의 시험’을 수락했습니다.]
 
 기왕 할 것, 발탄 숲에서 해결할 수 있는 퀘스트도 다 받아서 가는 게 좋겠지.
 
 아델을 한 바퀴 돌며 퀘스트를 받은 이건은 총 여섯 개의 퀘스트를 받았다. 누군가 앞서 공략한 것도 있었고, 아닌 것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먼저 공략했다고 해도 업적점수를 못 받는 건 아니었다. 단지 처음 공략한 사람에 비해 덜 받을 뿐이지.
 
 첫째, 정화의 꽃 스무 송이 채취.
 둘째, 고블린 서른 마리 처치.
 셋째, 고블린의 뿔 열 개 노획.
 넷째, 고블린 전사 다섯 마리 처치.
 다섯째, 고블린 주술사 세 마리 처치.
 여섯째, 홉 고블린 처치.
 
 락켄에게 받은 퀘스트를 제외하면 다섯 개 모두 고블린을 때려잡는 퀘스트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열심히 레벨업해야 한다. 그렇기에 겸사겸사 퀘스트를 받은 것.
 
 값싼 장비와 포션을 사고 남쪽 성벽을 넘어 발탄 숲에 들어갔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피부를 할퀴었다. 고통을 차단하지만 추위까지는 차단하지 않기에, 이건은 본능적으로 옷을 여몄다.
 
 그리고 그때 놈들을 발견했다.
 
 고블린들. 작고 말랐지만, 성질이 흉악한 놈들.
 
 놈들의 머리 위에 하얀색 글씨로 고블린이라 써 있었는데, 색은 난이도를 암시한다. 하얀색은 잡을 수 있다는 뜻.
 
 이건이 인벤토리에서 짧은 검과 방패를 꺼냈다. 몸집이 작은 고블린 상대로 크고 무식한 양손검은 비효율적이다.
 
 마침 놈들도 이건을 발견했다.
 
 이건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한 달 동안 훈련소에서 신물 나도록 훈련한 검술을 휘둘렀다.
 
 은색의 검광이 무모하게 달려든 고블린의 심장을 갈라 버렸다.
 
 게임이기 때문에 심장을 베었다고 바로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크리티컬은 가능. 고블린의 HP가 0까지 바닥났다. 빛의 입자로 변해 사라졌다.
 
 동족의 죽음에 고블린들이 한순간 움찔했지만, 협력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모습에 이건은 짧게 코웃음 쳤다.
 
 저렙 몹들의 한계였다. HP가 낮고, 힘도 약하고, 반응 속도가 느리다. 협력도 할 줄 모르고.
 
 “일대일로 덤벼 주면 나야 고맙지.”
 
 쉬아아아아악. 푹.
 
 고블린이 죽은 자리, 그곳엔 돈과 아이템이 떨어졌다. 어차피 몹을 죽인 당사자만 가져갈 수 있기 때문에, 사냥이 다 끝난 다음 회수해도 상관없었다.
 
 [고블린의 뿔 3/10]
 
 레벨이 올랐다는 알림창이 뜨고, 이건은 드랍된 고블린의 뿔을 루팅했다. 그리고 시선을 멀리해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락켄이 요구한 정화의 꽃은 고블린 군락 근처에 자생했고, 고블린 군락은 저 산등성이 너머에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발탄 숲의 지리가 손에 잡힐 듯이 떠올랐다. 기억과 다른 부분이 자잘하게 있었지만, 맵을 띄워서 오차를 수정했다.
 
 쉬지 않고 산등성이로 향하는 거친 산악길을 올랐다. 현실에서였다면 금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겠지만, 높은 능력치 보정을 받는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100미터쯤 걸었을 무렵.
 
 “응?”
 
 문득 길바닥에 난 발자국을 발견한 이건이 이채를 띄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고블린 사냥을 왔다는 뜻.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배틀스타 같은 인기 게임에 사람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문제는 몇 명이 왔냐는 건데···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대충 네 명쯤. 배틀스타의 파티 인원은 4인~6인이니 한 개 파티만 온 셈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6시지.’
 
 빛의 입자로 피를 대신했지만, 직접 몸을 움직여 싸우는 특징 때문에 국내에선 ‘청소년 이용 금지’가 붙은 배틀스타다. 성인층이 주 이용자인데, 아침 6시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당연히 사람이 적을 수밖에.
 
 뭐, 인던도 아니고 필드 사냥터다. 경쟁할 각오는 하고 왔다. 먼저 왔다고 전세 낸 것도 아니고.
 
 대신 충돌은 조심해야겠지. 만약 경쟁자들의 성격이 안 좋다면 위해를 가하려고 들 수도 있다. 물론 저쪽이 먼저 덤빈다면 반격할 것이다. 먼저 덤빈 놈은 게임 오버를 시켜도 정당방위니까. PK(Player Kill)가 성립하지 않는다.
 
 “근데 저것들은 뭐야.”
 
 고블린 군락.
 
 목적지로 간 이건은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절찬리에 펼쳐지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살려 줘! 살려 줘!”
 
 사색이 되어 도망치는 플레이어 남녀. 게거품을 물고 미친 듯이 맹추격하는 고블린들.
 
 이건은 어떤 상황인지 이해했다. 배틀스타가 현실감이 높다 보니, 아직 익숙하지 않은 플레이어들은 종종 현실과 착각해서 겁을 먹곤 한다. 호러 영화를 보고 깜짝깜짝 놀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남녀만 남은 것을 보면 다른 파티원들은 당한 것 같다. 도망치기까지 했으니 사냥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 고블린을 죽여도 새치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다른 플레이어 구해 주는 취미는 없지만.”
 
 돌멩이를 줍고, 투수처럼 던질 자세를 취한다. 참고로 돌멩이도 공격력 옵션은 달렸다. 명중 수치가 높지 않아 플레이어 남녀를 맞출 수도 있겠지만.
 
 “본인 운이 없는 걸 탓해야지.”
 
 퍽! 소리와 함께 고블린 한 마리가 고꾸라졌다. 관자놀이에 박혀 대미지를 입혔다.
 
 깜짝 놀란 플레이어 남녀가 이건을 돌아보았을 때, 또 다른 돌멩이가 날아왔다. 다른 고블린의 안면에 정통으로 꽂혔다. 끼이익, 끼이익 동요하는 고블린들. 그러나 이건은 지척까지 치달아, 돌을 맞은 고블린 두 마리를 연속으로 베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조금 더 파워풀해진 움직임. 이건은 방패를 들어 고블린들의 나무 몽둥이와 돌도끼를 막았다.
 
 “조심해요!”
 
 플레이어 남녀의 경고.
 
 평범한 고블린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고블린 전사가 일도양단의 기세로 칼을 휘둘렀다.
 
 쩌어엉!
 
 검과 칼이 부딪치고, 이건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고블린 전사를 유도했다. 놈이 한순간 균형을 잃도록. 그리고 비틀거린 고블린 전사의 몸통에 칼을 꽂아 놈을 절명시켰다.
 
 “헉.”
 
 플레이어 남녀가 뒤에서 헛숨을 삼킨다.
 
 그것을 한 귀로 흘려버리면서, 이건은 재차 전진했다. 당황한 고블린들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놈들 중 하나를 인질로 잡았다. 고기 방패로 써먹을 생각인 것이다.
 
 “고블린은 훌륭한 고기 방패지!”
 
 붙잡힌 고블린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고, 다른 고블린들은 주춤했다. 마치 진짜로 감정이 있는 것처럼 두려워한다.
 
 NPC와 몹이 감정을 가진 것처럼 행동해야 현실감이 넘친다는 운영진의 철학 아닌 철학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때, 저 멀리서 시퍼런 빛의 광구가 날아와 이건에게 꽂혔다.
 
 ‘마법?’
 
 이건의 눈썹이 치켜떠졌다. 고통은 없지만, HP는 깎였다. 체력 능력치가 높아서 피해는 미비하지만, 조금 전의 마법을 계속 쳐 맞으면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다.
 
 이건은 누가 마법을 쐈는지 파악했다. 작고 꾀죄죄한 헝겊을 두른 고블린 주술사였다. 마법의 위력은 보잘것없지만 근접전투를 하는 이건에게 원거리 딜러는 성가셨다. 그 원거리 딜러가 다수의 호위병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더더욱.
 
 그리고 그 너머.
 
 고블린 전사보다도 더 큰, 거의 이건만큼이나 크고 단단한 체격을 가진 홉 고블린이 팔짱을 낀 채 이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 위의 글씨는 주황색. 현재 이건의 레벨로 잡기는 까다롭다는 뜻. 그러나 이건은 씩 웃으며 놈을 도발했다.
 
 “숨지 말고 그냥 나오지 그래?”
 
 숨 고르기를 할 시간도 없이, 바로 땅을 박찼다. 부딪치는 무기와 방어구에서 불똥이 튀었다.
 
 발탄 숲의 고블린 전사와 고블린 주술사는 10~13레벨 사이의 플레이어들이 주로 잡는 몹이다. 즉, 4레벨인 이건은 잡기 힘들다. 그러나 훈련소에서 근력과 체력 능력치를 올렸기 때문에 해 볼 만한 싸움이 된 것이다.
 
 “우와. 저 사람 대단해!”
 
 넋을 놓고 싸움을 보고 있던 플레이어 남녀 중 여자가 감탄했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십여 마리의 고블린들에게 둘러싸여도 물러서지 않는 이건이었다. 오히려 미소를 띠면서 진심으로 싸움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즐겁다.’
 
 실제로 이건은 즐거워서 웃고 있었다. 싸움이 재밌냐고? 그렇지는 않다.
 
 다만 배틀스타에 오면 현실의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으니까.
 
 그래, 이것은 일종의 해방감이었다. 배틀스타야말로 숨 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를 얻는 드넓은 세상이다. 현실에서는 별 볼 일 없어도 배틀스타에서는 능력 있는 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
 
 쐐애애애애액!
 
 검의 내구성이 다해 이가 빠지는 순간, 이건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버렸다. 그걸 보고 눈을 빛내는 홉 고블린. 이미 고블린 전사와 고블린 주술사는 죽어 버렸다. 이건을 쓰러트리려면 놈이 직접 나서야 한다.
 
 찰나, 간격이 확 줄어들었다.
 
 이건의 손에 쥐어진 크고 무거운 양손검. 서슬 퍼런 칼끝은 홉 고블린의 심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홉 고블린이 지팡이를 꺼내고, 주문을 외워 마법을 완성했다.
 
 퍼어어어엉!
 
 한 줄기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자욱한 흙먼지가 눈앞을 가렸다. 하지만 이건이 흙먼지를 뚫고 돌파, 한순간에 거리를 좁혔다. 이건의 몸에서도 빛의 입자가 폭포처럼 쏟아졌지만,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기회는 한 번.’
 
 HP는 체력 곱하기 10이다. 4레벨에 오른 이건의 체력은 52. 총 HP는 520이다. 고블린들 무리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싸운 탓에, 그리고 조금 전에 홉 고블린의 마법을 맞은 탓에 HP는 불과 80밖에 남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마법을 맞으면 게임 오버.
 
 당황한 홉 고블린이 지팡이를 높게 쳐들었다. 접근하는 타이밍에 맞춰 골통을 부술 생각이겠지. 이건은 차가운 웃음을 입가에 긋고, 지금껏 숨겨 두고 있던 비장의 한 수를 꺼냈다. 전사 직업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가속 스킬 ‘대쉬(Dash)’.
 
 3미터 이내의 적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에 지금껏 쓰지 못했다. 쓰려면 어떻게든 접근해야 하니까. 하지만 쓰고 나면, 이제까지의 속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빨라졌다.
 
 바람처럼 빠르게.
 
 아니, 바람보다 빠르게!
 
 이건이 휘두르는 양손검에 불이 붙었다. 튜토리얼 헬 모드를 공략하면서 얻은 최하급 화염의 룬 스톤의 효과. 그 때문에 홉 고블린은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짓이겨지는 소리가 겹쳤다. 아직 도망치지 못한 플레이어 남녀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홉 고블린의 지팡이가 이건의 어깨를 강타한 것을 본 것이다.
 
 내려앉은 침묵. 이건도, 홉 고블린도 말없이 서로를 노려본다. 그리고···.
 
 쿠웅!
 
 홉 고블린이 뒤로 넘어갔다.
 
 “주, 죽은 거야?”
 
 “그런가 본데?”
 
 얼떨떨해하는 플레이어 남녀가 본 것은 심장에 양손검이 박힌 홉 고블린의 시체였다.
 
 그 앞에서 이건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긴장감을 내려놓았다. 만약 타이밍이 어긋나서 홉 고블린의 지팡이가 머리를 강타했다면, 그 시점에서 게임은 끝났으리라.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홉 고블린 처치 1/1]
 [홉 고블린의 목걸이를 획득했습니다.]
 
 ====
 [아이템 정보창]
 ―이름: 홉 고블린의 목걸이
 ―분류: 장신구
 ―등급: 레어
 ―제한: 없음
 ―효과: 장착 시 마력 3 증가
 ―설명: 발탄 숲의 홉 고블린이 대장의 증표로 찬 목걸이. 장착하면 당신에 대한 시작의 도시 아델의 NPC들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
 
 ***
 
 쏴아아아아아!
 
 수증기가 자욱하게 오른 화장실. 샤워기에서 떨어진 물이 이건의 몸을 맞고 튀었다. 이건은 생각을 정리할 겸 한동안 물을 맞은 채 가만히 있었다.
 
 ‘첫 단추는 잘 끼웠어.’
 
 훈련을 마치고 받은 교관의 추천장, 락켄의 퀘스트, 홉 고블린의 목걸이··· 이 중 락켄의 퀘스트를 제외하면 모두 예상대로 됐다. 유일하게 예상을 벗어난 락켄의 퀘스트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퀘스트 조건인 정화의 꽃 스무 송이는 고블린 처치 퀘스트를 완수한 이후 전광석화처럼 해치웠다. 다시 아델을 들락날락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니까. 훈련소에서 한 달이나 쓴 만큼, 최대한 시간을 아껴 쓸 생각이었다.
 
 거울에 낀 뿌연 김을 지운 이건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차갑고 단단한 인상에 독기가 서렸다. 배틀스타를 플레이할 땐 온몸의 행복회로가 고장 날 만큼 즐겁지만, 한편으론 빌어먹을 얼굴들이 떠올랐다.
 
 서태석. 최동진.
 
 전생의 원수들. 자신을 배신하고 죽인 놈들.
 
 배틀스타가 한국에서 정식으로 런칭된 이상 놈들도 움직일 터. 전생의 기억에 비추어 보면 기간은 넉 달이 남았다. 지금쯤이면 한창 유망주들을 찾고 있을 때였다.
 
 ‘프로게이머들.’
 
 전생에서도 그랬다. 이건을 제외한 한성 그룹의 비밀팀은 전원이 프로게이머 출신이었다. 게임엔 이골이 났다.
 
 한성 그룹의 비밀팀 중 프로게이머가 아닌 사람은 이건이 유일했다.
 
 최동진 감독에게 발탁됐던 것은 우연의 산물이었다. 막 배틀스타를 플레이한 초보자 시절에 한성 그룹 비밀팀의 프로게이머와 만났고, PVP를 벌였다.
 
 레벨은 이건이 조금 더 뒤졌지만 이겼다.
 
 적어도 배틀스타에 한정해선, 이건의 플레이 감각은 현역 프로게이머들 이상이었다.
 
 ‘너는 원석이다. 우리와 함께하면 너는 배틀스타 최고의 플레이어로 클 수 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귓가를 맴도는 최동진 감독의 말. 그때는 그 말이 얼마나 기뻤던지···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만 같았다.
 
 ‘부질없는 감정이지.’
 
 그래, 지금은 부질없다. 서태석과 최동진 감독은 자신을 버렸다. 방해되니 제거한 토사구팽. 지금은 자신의 존재도 모르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복수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복수는 피해자인 자신의 권리니까. 이번엔 자신이 놈들을 이용할 것이다.
 
 ‘일단 놈들이 관심을 가질 만큼 강해지는 게 우선.’
 
 샤워를 끝내고, 배틀스타에 접속했다. 다시 한번 워커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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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어 상태창]
 ―이름: 워커(남)
 ―레벨: 8
 ―직업: 전사
 ―근력: 55
 ―민첩: 28
 ―명중: 24
 ―정신: 36
 ―체력: 56
 ―마력: 20(+3)
 ―업적점수: 250
 
 [업적]
 ―고블린 서른 마리 처치(10점)
 ―고블린의 뿔 열 개 노획(10점)
 ―고블린 전사 다섯 마리 처치(20점)
 ―고블린 주술사 세 마리 처치(30점)
 ―홉 고블린 처치(5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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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퀘스트 경험치를 끝내고 받은 경험치까지 합쳐서 8레벨에 올랐다. 락켄에게 정화의 꽃만 넘겨주면 된다.
 
 그러나 락켄의 공방에 간 이건은 당황했다. 공방은 텅텅 비었던 것이다. NPC가 야반도주를 한 것도 아닐진대 아무도 없다니?
 
 물론 NPC인 락켄이 죽을 리는 없다. 운영진이 락켄을 없애기로 한 게 아니라면. 하지만 이건은 불길한 상상에 휩싸였다.
 
 ‘설마 유동 퀘스트?’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커뮤니티에 누군가 쓴 글을 봤었다.
 
 암흑가의 의뢰를 받아 락켄을 납치하는 퀘스트가 있다고.
 
 즉, 또 다른 플레이어가 락켄을 납치하는 퀘스트를 받았다. 그래서 이건 자신은 닭 쫓던 개가 돼 버렸다. 황당한 일이다. 그러나 배틀스타에선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유동 퀘스트.
 
 일반적인 게임의 NPC들은 고정된 역할밖에 못 하지만, 배틀스타의 NPC들은 세계관을 살아가는 주민으로 취급된다. 때문에 서로 다른 퀘스트를 수행하는 플레이어들끼리 충돌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하필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전사훈련소의 교관이 오고 있습니다. 현 장소에서 대기하십시오.]
 
 허공에 뜬 알림창을 보면서 이건은 얼굴을 찡그렸다. 전사훈련소의 교관이 오는 것이 락켄의 납치와 무관할 리 만무했다.
 
 ‘젠장, 변수가 너무 많아.’
 
 전생의 기억이 있다지만 배틀스타의 모든 걸 알지는 못한다. 특히 유동 퀘스트는 더더욱 그렇다. 변수가 너무 많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전생의 기억을 잘 활용하면서 돌파할 수밖에.
 
 “내가 너무 늦었군.”
 
 문득 등 뒤에서 탄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전사훈련소의 교관이 엉망이 된 락켄의 공방을 보며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네가 나보다 먼저 왔구만. 자네가 왔을 때도 이런 꼴이었는가?”
 
 이건은 한 번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군. 그랬어. 안 그래도 요새 락켄 그 영감님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들려서 걱정이 돼서 왔는데···.”
 
 “어떤 소문입니까?”
 
 “크흠, 락켄 영감님이 암흑가의 조직에게 돈을 꿨다는 소문일세.”
 
 역시나.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군.’
 
 락켄이 사채를 빌렸고, 못 갚았다. 그래서 암흑가의 조직에게 납치당했다. 대강 이런 스토리 아니겠는가.
 
 “락켄 영감님이 일부러 돈을 안 갚았을 리는 없네. 필시 암흑가 놈들의 음모에 빠지셨겠지. 평소부터 놈들이 락켄 영감님의 실력을 탐했던 만큼, 빚을 구실로 납치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네.”
 
 “그렇군요.”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락켄 영감님을 구해 주지 않겠는가? 마땅히 내가 할 일이나,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네.”
 
 은근한 얼굴로 제안하는 교관. 이건은 즉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글쎄요. 암흑가와 부딪치는 건 제게도 큰 부담입니다만··· 드워프제 무기가 탐나긴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얻어야 할 만큼 절실하진 않군요.”
 
 다른 게임이었다면 선택지가 제시되었겠지만, 배틀스타엔 그런 거 없다. 한마디로 주관식인데, 방금 대답이 정답일지는 이건도 몰랐다. 만약 교관이 “아, 그런가? 그럼 다른 사람을 알아보겠네.”하고 돌아서 버리면 큰 낭패다. 하지만 퀘스트인 만큼 그냥 떠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렇게 넌지시 운을 떼면 보상에 대한 말이 나올 터.
 
 “휴우, 어쩔 수 없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밑천을 아낄 때가 아니니까. 전사 스킬을 한 가지 가르쳐 주겠네.”
 
 마침내 이건이 원한 대답이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이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교관의 인정을 받아 락켄을 소개받은 것과 퀘스트’와 ‘암흑가에 의해 락켄이 납치되는 퀘스트’가 우연한 타이밍에 겹치지 않았다면 기회를 놓쳤겠지. 지랄 맞은 유동 퀘스트라고 욕했던 과거를 반성하자. 유동 퀘스트 만만세다.
 
 “스킬의 이름은 ‘강철주먹’이라네. 검을 다루는 자네에겐 불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익혀서 나쁠 것은 없을 걸세.”
 
 “강철주먹 말입니까?”
 
 이건이 깜짝 놀랐다. 불필요하기는커녕 오히려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스킬이었다. 만약 전투 중에 무기를 내던지거나 내구도가 다해 잃어버리면? 만약 그때 마땅한 무기가 없다면? 적이 방심했을 때 역전의 한 수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장웨이, 그놈의 간판 스킬이었지.’
 
 전생에서 이건이 죽기 전, 24위의 랭커에 올랐던 중국인 플레이어. 강철주먹은 놈이 즐겨 썼던 스킬이다. 하지만 어떻게 얻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놈, 한국 유학생 출신 아니었나?’
 
 장웨이는 귀국해서 중국 4대 길드 중 하나에 들어가, 한국의 길드들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던 놈이다. 이건 자신과도 많이 충돌했었다. 그런데 놈의 간판 스킬인 강철주먹의 원산지가 아델이었다니.
 
 “혹시 제가 익히면 다른 사람도 익힐 수 있습니까?”
 
 “아니네. 이건 오직 한 명에게만 가르치기로 결심했지.”
 
 그렇다면 다행이다. 장웨이 그놈이 강철주먹을 익히는 걸 미연에 방지한 셈이니까. 만약 이건이 먼저 얻지 않았다면 국부(?)가 유출되지 않았겠는가?
 
 모든 롤플레잉 게임의 주요 콘텐츠는 레이드다. 몹을 사냥하고, 레벨업을 하고, 아이템을 얻는다.
 
 배틀스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업적점수 때문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퀘스트.
 
 인공지능이 관장하는 배틀스타에서 퀘스트는 고정적이지 않다. 반복되는 퀘스트가 많지만, 우연한 조건들이 맞물려 새로운 퀘스트가 탄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스킬 ‘강철주먹’을 학습했습니다.]
 
 강철주먹을 배우자마자 이건은 바로 암흑가로 향했다. 아델의 암흑가는 상업 구역인 동쪽과 남쪽에 걸쳐 형성되었는데, 플레이어들에겐 기피 지역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구린내와 지린내. 아닌 게 아니라 벽과 바닥에 토사물과 배변의 흔적이 즐비했다. 이런 건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좋을 텐데··· 이게 다 배틀스타 운영진의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선 뭐든 한다!’는 철학 때문이다.
 
 [암흑가에 들어왔습니다. 불한당들의 표적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암흑가가 플레이어들의 기피 지역이 되는 이유 또 하나. 암흑가는 도시 안에 있는데도 일종의 필드 사냥터로 취급받는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 모두가 적. 다시 말해 인간의 모습을 한 몹이다.
 
 “어이, 옷 잘 입은 잘생긴 형씨. 가진 거 싹 내놓고 가면 살려는 드릴게.”
 
 “큭큭큭!”
 
 들어오자마자 시비가 걸린 상황. 이건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뭐, 게임이란 것을 알고 있어도 당황할 판국이니.
 
 ‘그러고 보니 나도 옛날엔 좀 당했었지?’
 
 설마 도시 내에서 몹들이 삥을 뜯고 다닐 줄 누가 알았겠는가. 뭐, 어찌어찌 해치우고 탈출하긴 했지만 그때는 정말로 황당했었다.
 
 “벙어리냐? 왜 아무 말도 안 해?”
 
 불한당이 인상을 쓰며 손을 뻗자 이건의 허리춤에서 빛살이 튀어나와 그 손을 잘랐다.
 
 “으아악! 내 손이!”
 
 피 대신 빛의 입자를 뿌리며 불한당이 악다구니를 쳤다. 그 소리가 듣기 싫은 이건은 불한당의 목을 꿰뚫어 버리고, 엉거주춤 서 있는 다른 놈들까지 해치웠다.
 
 “온 김에 청소나 좀 하고 갈까?”
 
 어차피 시간 지나면 몹은 다시 나타나겠지만 락켄을 구하기 전에 레벨업을 할 필요가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이는 족족 시비 걸린 불한당들을 해치우니 금세 경험치가 쌓여 10레벨이 되었다.
 
 이제 락켄을 구할 차례다. 교관이 락켄이 끌려갔을 거라고 추측한 조직의 위치가 맵에 표시되었기에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멈춰라. 여긴 우리 조직의 구역··· 컥!”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건의 검이 입구를 지키는 조직원들을 훑고 지나갔다.
 
 동료들이 순식간에 당하자 조직원들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일부는 빨리 종을 쳐서 경보음을 울리고자 했다.
 
 “그렇겐 못 하지!”
 
 대쉬를 쓴 이건이 한달음에 뛰어들어서 막 종을 치려고 한 조직원을 날려 버렸다.
 
 “이 자식, 어디에서 온 놈이냐? 다른 조직이 보낸 암살자냐!”
 
 “등신들아. 암살자가 이렇게 당당하게 오는 거 봤냐?”
 
 이건이 입구 근처에 매복하고 있던 조직원들을 다 찾아내 처리하기까지 20분이 걸렸다.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쯤이면 AI의 시스템상 플레이어가 습격했다는 것을 알고 대비를 했을 터. 일일이 상대하자니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땐 가장 쉬운 길로 가야겠지?
 
 이건은 인벤토리를 열고 수납공간을 차지한 드럼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기름을 콸콸 붓자 독한 냄새가 사방을 진동했다.
 
 “쇼 타임이다. 내 NPC 납치한 개자식들아.”
 
 최하급 화염의 룬 스톤을 발동시키니 기름이 뿌려진 바닥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화마가 순식간에 온 건물을 집어삼켰다.
 
 이건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 광경을 즐겁게 구경했다. 팝콘이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팝콘만 있었다면 완벽한 불구경이 됐을 텐데.
 
 ‘슬슬 나올 시간인데.’
 
 과연, 아예 건물이 전소해 버릴 지경에 처하자 안쪽에서 사람들이 탈출하기 시작했다. 락켄의 납치를 사주한 조직원들과 놈들에게 퀘스트를 받은 플레이어 일당이었다.
 
 “우와악! 죽는 줄 알았네! 게임인데 건물이 불탈 수도 있었어?!”
 
 “으윽, 쓸데없이 현실적이야, 이 게임.”
 
 콜록 기침하면서 입 안의 침을 퉤퉤 뱉는 플레이어 일당. 이건이 자세히 들여다보자 시야 한쪽에 그들의 닉네임과 레벨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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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어 상태창]
 ―이름: 하르켄
 ―레벨: 11
 
 [플레이어 상태창]
 ―이름: 죠이
 ―레벨: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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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은 이건보다 조금 위다. 때마침 두 플레이어도 이건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자식 플레이어 맞지?”
 
 “맞네. 혹시 저놈이 불낸 거 아냐?”
 
 이건을 보는 두 플레이어의 눈빛에 차가운 살기가 깃들었다. 그러나 이건은 그들을 보지 않는다. 조직원들이 거꾸로 매달아서 데리고 온 락켄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이놈! 네놈이 우리 조직을 깡그리 불태웠느냐!”
 
 플레이어들에게 퀘스트를 준 조직의 두목이 방방 뛰며 노호를 질렀다. AI의 시스템에겐 거짓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은 깔끔하게 방화 사실을 인정했다.
 
 “드워프 영감을 받으러 왔다.”
 
 “놈을 죽여!”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두목의 말에 조직원들이 냉큼 움직였다. 플레이어들은 아직 자기들이 나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 팔짱을 낀 채 수수방관했고. 하지만 여유롭게 감상하는 것도 잠시, 이내 깜짝 놀라면서 초조하게 싸움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놈?”
 
 “저거 위험하겠는데···.”
 
 그들은 이건의 이름을 몰랐다. 이름 대신 워커라는 닉네임만 봤고, 최근에 왠지 들어 본 것만 같다는 기시감을 느꼈을 따름이다.
 
 “아! 그놈이다.”
 
 “그놈이라니?”
 
 “왜, 그 있었잖아. 레벨업은 안 하고 훈련소에서 죽어라 훈련만 한다는 놈. 얼핏 듣기로 한 달이나 거기 있었다고 하던데?”
 
 “뭐? 그럼 저놈이 그놈이라는 거야? 우리하고 레벨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하르켄과 죠이, 그들은 형제였다. 그리고 한 달 전에 볼텍스 기어를 사서 배틀스타의 플레이어가 되었다. 기본적인 조작법을 숙지하자마자 열심히 레벨업을 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딴짓거리를 한 워커가 자기들 턱밑까지 레벨을 올리다니?
 
 ‘설마 훈련소에서 훈련하면 빠르게 레벨업을 할 수 있는 보상이라도 받는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형제의 머릿속을 스치고 갔지만, 형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그들은 국내는 물론 외국 커뮤니티까지 돌며 배틀스타의 정보를 수집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완벽하게 정보를 수집한 건 아니지만, 외국의 플레이어들도 훈련소는 등한시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럼 저놈은 뭐야?’
 
 이건이 전생에 배틀스타를 플레이했고, 그 때문에 조작법은 어느 누구보다 빠삭해서 적응할 시간도 필요 없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형제였다.
 
 그리고 그때쯤, 이건이 달려들었던 조직원을 깡그리 죽였다.
 
 “뭘 하는 거요! 저놈을 죽이지 않고!”
 
 조직의 두목이 방방 뛰며 닦달하자 형제는 서로를 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조직을 지키라는 퀘스트를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서야 했다.
 
 “씨발, 저 건방진 새끼! NPC 주제에 까불고 있어. 확 죽여 버릴까?”
 
 “참아. 죽이지도 못하잖아.”
 
 죽인다고 해도 부활하는 것이 배틀스타의 NPC였다. 뭐 스토리상 설정으로는 신의 축복이 어쩌고 하는데 별로 관심은 없다.
 
 형제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퀘스트 보상을 받기 위해선 이건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하르켄 형제, 이제 기억나는군.’
 
 이건은 혀를 내둘렀다. 이 인간들을 이제야 기억하다니, 자신의 기억력도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르켄과 죠이 형제.
 
 본명은 김명수, 김명진으로 현실에서도 쌍둥이 형제다. 본업은 따로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뭘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건이 두 형제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암흑가의 의뢰로 락켄을 납치하는 퀘스트. 커뮤니티에 그 퀘스트에 대한 글을 올렸던 아이디가 형인 하르켄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
 
 ‘도깨비 길드.’
 
 하르켄 형제는 SG 그룹의 후원을 받는 도깨비 길드의 일원이었다.
 
 SG 그룹은 한성 그룹에 필적하는 재벌 그룹이었고, 사업 영역도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주력인 전자제품 영역은 상대방에게 매출로 패할 경우 임원들이 갈려 나간다는 소문이 돌 만큼 빡센 경쟁을 자랑했다.
 
 두 그룹의 사이가 나쁜 만큼, 자연히 두 그룹의 후원을 받는 길드끼리도 사이가 나빴다. 대놓고 말만 안 할 뿐 안 보이는 곳에서는 PK도 불사했다.
 
 ‘한성의 군주학살자 길드에 있었을 때 봤던 것과는 좀 다르게 생겼지만··· 그놈들이 확실해.’
 
 하르켄 형제는 이건이 4강에 올랐을 때도 나름 이름을 떨친 랭커들. 그때와 같은 수준은 아니겠지만 만만히 볼 수 없었다.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라도 할까? 난 하르켄이고 이 녀석은 내 동생인 죠이다. 당연히 본명은 따로 있지만 게임이니까, 그냥 닉네임으로 퉁치련다.”
 
 동생인 죠이는 고개만 까딱 움직였다. 이건은 대답하지 않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것을 긴장이라고 여긴 하르켄의 입가에 비웃음이 감도는 찰나.
 
 [퀘스트 충돌에 의하여 ‘플레이어 하르켄’, ‘플레이어 죠이’ vs ‘플레이어 워커’의 PVP가 시작됩니다.]
 
 이건이 먼저 움직였다.
 
 탐색전 따위는 없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 대쉬를 써서 간격을 좁히고 검을 찔러 넣었다.
 
 “이크크!”
 
 “큰일 날 뻔했네!”
 
 큰일은 개뿔이. 하르켄 형제의 입가엔 여전히 비웃음이 진득하게 걸려 있었다. 이길 자신이 있는 것. 그리고 형제의 자신감이야말로 이건이 의도한 바였다.
 
 양손검이 하르켄의 주먹과 충돌했다. 하르켄은 맨손 격투를 주특기로 삼은 전사. 주먹으로도 능히 검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다.
 
 쩌저적! 주먹을 맞은 양손검에 균열이 그어졌다. 너무 험하게 굴린 나머지 내구도가 다했다.
 
 “바보냐? 아님 기본도 모르는 거냐? 무기는 내구도가 0이 되면 끝장이야!”
 
 장신구를 제외한 모든 착용 아이템은 내구도가 20%로 줄어들면 성능이 떨어지며, 0%에 이르렀을 때는 완전히 사라진다. 내구도를 회복하려면 공방에 들러 수리를 해야 하는데, 이건은 그리하지 않았다.
 
 이건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하르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놈은 내구도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온 게 틀림없다. 수리만 했어도 무기를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형! 놈이 단검을 숨겼어!”
 
 “뭐?”
 
 죠이가 외치는 순간이었다. 일부러 죠이를 등지고 단검을 꺼낸 이건이 스핀을 돌며 죠이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하르켄을 구하기 위해 경고를 한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설마 하르켄을 노리는 척하면서 죠이를 공격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으악!”
 
 “이 자식!”
 
 죠이의 경고를 듣고 엉거주춤하게 방어 자세를 취했던 하르켄이 노여움을 토했다.
 
 그러나 하르켄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안면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 정체가 주먹이란 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퍼억!
 
 호쾌한 강철의 주먹이 안면을 강타했다. 고통은 없지만, 놀란 하르켄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이건이 곧장 달려들어 강철주먹을 연달아 꽂은 것이다. 하르켄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게임 오버!]
 
 마침내 HP가 0까지 떨어진 하르켄이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졌다. 두고 보자고 상투적인 경고를 남긴 것은 덤.
 
 “으윽, 이 자식!”
 
 어깨에 꽂힌 단검을 뽑아낸 죠이가 치를 떨었다.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걸 알아도 실제로 단검이 꽂혔을 땐 아찔했다. 그들 형제도 플레이어와 싸운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죠이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들의 상대는 경험이 풍부했다. 게임이라고 해도 사람에게 주먹과 검을 꽂는 것을 주저하지 않은 게 증거. 어쩌면 PVP는 물론 PK까지 두루 겪지 않았을까?
 
 ‘이 새끼 이거 세컨 캐릭터 아냐?’
 
 이건이 들었다면 헛짚었다고 말해 주었겠지만, 입 밖으로 낸 말이 아니므로 대답 또한 없었다.
 
 ‘망할! 너무 쉽게 생각했어.’
 
 아무리 게임이라도 다른 사람과 실제로 싸운다면 나름의 각오를 다졌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레벨이 높고, 두 명이서 싸운다는 것 때문에 그 점을 간과하고 말았다.
 
 물론 지금이라도 고치면 되겠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하르켄을 게임 오버 시키면서 이건의 레벨이 한 단계 상승했다. 하르켄과 똑같은 11레벨이 돼 버렸다. HP와 MP도 회복했다. 레벨은 여전히 죠이가 1이 더 높지만,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봐줄래?”
 
 “싫은데.”
 
 대답하며 달려드는 이건이었다. 어쩔 수 없이 죠이도 대응했다. 형인 하르켄은 맨손 격투를 선택했지만 그는 철퇴를 선택했다. 철퇴는 짧은 무기지만 그래도 맨주먹인 이건보다는 훨씬 리치가 길다.
 
 그러나.
 
 “야, 이 개자식아! 기만술 좀 작작 해라!”
 
 죠이의 울상 어린 항변이 끝나기도 전에 소름 끼치는 파육음이 퍼억! 울려 퍼졌다.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양손검을 꺼낸 이건이 대쉬를 써서 빠르게 접근, 철퇴보다 한발 앞서 죠이를 꿰뚫은 것.
 
 “으윽, 아이고···!”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은.”
 
 코웃음을 친 이건이 신음하는 죠이를 걷어차서 날려 버리고, 양손검을 하늘 높이 던졌다. 풍차처럼 회전한 양손검이 죠이의 가슴팍을 향해 뚝 떨어졌다. 그것으로 끝.
 
 양손검을 회수한 이건이 락켄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두목은 이미 내빼 버리고 락켄만 남아 있었다. 어차피 두목은 죽여봤자 나중에 다시 부활할 게 뻔하니까, 이건은 미련 두지 않고 락켄에게 집중했다.
 
 “안 다쳤습니까?”
 
 “응? 아, 무, 물론이지! 내 몸은 멀쩡하고말고! 허허! 허허허!”
 
 “잘됐군요. 여기 받으시죠.”
 
 “으응? 이건?”
 
 이건이 내민 꾸러미를 풀러 본 락켄의 눈에 경악이 맴돌았다. 다름 아닌 정화의 꽃이었던 것이다.
 
 “허, 이렇게 빨리 구해 올 줄은 몰랐는걸? 하루 안 봤더니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구만.”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공방에 돌아갑시다. 시간 없으니 검을 빨리 만들자구요.”
 
 “으음, 그리 서두를 필요는 없다. 검은 이미 만들어 놨으니까.”
 
 새로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기성품을 주는 거였다니? 이건의 얼굴에 김샜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락켄은 발끈했다.
 
 “어허, 실망하긴 이르다! 내 일생의 역작이라고!”
 
 “뭘 잘했다고 역정입니까? 난 영감님 구하느라 온갖 고생을 했구만.”
 
 찌릿하게 노려보자 민망해진 락켄이 먼 산을 보면서 딴청을 피웠다.
 
 “어험험! 그러니까 내 일생의 역작을 주겠다는 것 아닌가?”
 
 ***
 
 “자, 이게 내 일생의 역작이다.”
 
 ====
 [아이템 정보창]
 ―이름: 서리칼
 ―분류: 무기
 ―등급: 유니크
 ―제한: 10레벨 이상
 ―내구: 3,750/3,750
 ―공격: 100~150
 ―효과: 장착 시 모든 능력치 10 증가, 공격을 명중시킬 때마다 일정 확률로 ‘동상’ 작렬.
 ―설명: 아델의 드워프 장인 락켄이 극지방의 희귀한 금속과 빙결의 정수를 섞고, 여러 금속을 추가해 만든 일생의 역작. 휘두를 때마다 차가운 냉기가 쏟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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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장. 제안
 
 ‘이건 진짜다!’
 
 대태도(大太刀)처럼 완만하게 휘어진 서리칼. 칼자루를 잡는 순간 이건은 소리 없는 환호를 내질렀다. 락켄이 일생의 역작이라고 자신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것은 전생 때는 듣도 보도 못한 유니크 아이템이라는 것이다. 배틀스타의 세계관은 넓고, 그만큼 유니크 등급 이상의 아이템들도 많다. 그러나 다른 곳도 아니고 시작의 도시인 아델에서 얻을 수 있는 유니크 아이템이라면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했다.
 
 ‘장웨이도 서리칼을 못 얻었을까?’
 
 이건의 지난 삶에서 장웨이는 강철주먹을 익혔다. 그렇다면 자신처럼 훈련소를 마치고, 하르켄 형제에게 납치당한 락켄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교관에게 강철주먹을 익힌 것일까?
 
 지금 돌이켜 보면 그건 아닌 듯싶었다. 장웨이가 자신과 똑같은 루트를 밟았다면 훈련소에서 마주쳤을 터였다.
 
 아마 다른 퀘스트를 하면서 배웠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이 먼저 강철주먹을 배웠다는 것이다. 강철주먹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생각은 없다고 교관이 못 박았으니, 장웨이가 무슨 짓을 하든 놈이 강철주먹을 배울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퀘스트 ‘완고한 드워프 장인의 시험’을 완수했습니다.]
 [업적점수 100점을 지급받았습니다.]
 [퀘스트 ‘드워프 장인을 구하라!’를 완수했습니다.]
 [업적점수 300점을 지급받았습니다.]
 
 한꺼번에 400점의 업적점수를 받아, 단방에 총 650점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퀘스트 완수 보상의 경험치도 꽤 짭짤한 편이었다. 레벨이 올랐다는 알림창이 떴다. 서리칼을 장착한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10씩 올랐기에, 능력치만 놓고 보면 22레벨의 플레이어와 엇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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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어 상태창]
 ―이름: 워커(남)
 ―레벨: 12
 ―직업: 전사
 ―근력: 59(+10)
 ―민첩: 30(+10)
 ―명중: 26(+10)
 ―정신: 38(+10)
 ―체력: 60(+10)
 ―마력: 22(+13)
 ―업적점수: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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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의 입가에 후련한 미소가 감돌았다. 퀘스트를 끝내니 속이 홀가분했다.
 
 그때 락켄이 헛기침을 했다. 다시 그에게 의식을 되돌린 이건이 눈빛으로 왜 그러냐고 물었다.
 
 “험험, 다름이 아니라. 혹시 나를 더 도와줄 수 없나 해서 말이다.”
 
 이건이 실소했다. 15레벨이었다면 1차 전직을 해야 한다면서 거절했을 텐데.
 
 ‘운 좋은 줄 아쇼.’
 
 “보상만 빵빵하다면야.”
 
 “당연히 보상은 빵빵하지! 아무튼 받아들인다는 말이지?”
 
 “그러죠.”
 
 “고맙다.”
 
 락켄은 안도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생명이 없는 가짜지만, 묘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은 진짜 생명으로 보일 만큼 생생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그걸 말하기 전에, 내가 정화의 꽃을 구하려고 한 이유를 말해야겠군.”
 
 락켄이 정화의 꽃을 요구한 것은 병에 걸린 아들 때문이다. 아들을 살리려면 정화의 꽃이 필요했다.
 
 락켄이 그러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암흑가의 조직에게 돈을 꾼 것도 아들의 치료비로 쓰기 위해서였다고.
 
 구구절절 애환이 느껴지는 스토리였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눈물 한 방울쯤은 흘렸을지도.
 
 “시간 없으니까 본론만 짧게 갑시다.”
 
 “이놈아! 내 아들 얘기를 들려주는데 본론만 짧게 하라니! 인정머리 없는 거 아니냐?”
 
 “싫으면 그냥 쫑내든가.”
 
 물론 진짜로 쫑낼 생각은 없다. 빨리 퀘스트나 주라고 압박한 거지.
 
 “끙! 알았다. 아무튼 내 아들은 지금 신전에 있는데, 같이 좀 가자.”
 
 “암흑가 조직원들이 아직도 영감님을 노릴까 봐 무서운 겁니까?”
 
 “아니라곤 못 하겠다. 그놈들은 독하니까 나를 다시 노릴지도 모르는 일 아니냐?”
 
 꼭 이러다가 진짜로 습격당하던데. 불길한 복선을 까는 락켄이었다. 저것 봐라. 게슴츠레하게 쳐다보니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는 거.
 
 “커험! 아무튼 할 거냐?”
 
 “합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보상이 짜다면 모를까. 그리고 혹시 신전에서 쓸 만한 퀘스트를 발견할지도 몰랐다.
 
 “잘 생각했다. 그럼 어서 가자!”
 
 너털웃음과 함께 먼저 길을 떠나는 락켄.
 
 그렇게 이건은 락켄을 데리고 신전으로 떠났다.
 
 ***
 
 불길한 예상과 달리 습격은 없었다. 이건은 락켄을 호위하면서 아델 북쪽에 있는 신전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닮은 아델의 신전. 배틀스타의 NPC들은 다섯 명의 오성신을 섬긴다. 흔히 오성신앙이라고 하는데 경전까지 존재했다.
 
 ‘운영진이 쓸데없이 디테일한 걸 좋아한단 말이야.’
 
 신전이다 보니 신관 NPC가 많다. 퀘스트를 줄 수 있는 NPC들은 머리 위에 녹색의 다이아몬드가 표시되는데, 세 명 정도였다.
 
 “앗! 락켄 님, 아드님을 보러 오셨군요?”
 
 제법 예쁘게 생긴 갈색 머리의 여신관이 락켄을 아는 척을 하며 반겼다.
 
 “그렇다오. 정화의 꽃도 따 왔소.”
 
 “정화의 꽃! 고블린들 때문에 따기 힘드셨을 텐데.”
 
 “나야 대장장이인데 고블린 놈들 물리칠 힘이 있나. 이 친구가 나 대신 싸웠다오.”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이건을 팡팡 치는 락켄. 여신관의 눈이 땡그랗게 커졌다.
 
 “정말요? 와, 대단하세요!”
 
 이건은 대답 없이 고개만 까딱 숙였다. 그런 차가운 태도에 여신관이 움츠러들었다.
 
 “신전에 다 왔으니 보상 주시죠.”
 
 “알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앗, 잠깐만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를 도와주지 않으시겠어요?”
 
 퀘스트 하나를 끝내 놨더니 또 퀘스트다. 하지만 나쁠 것도 없다. 어차피 할 만한 퀘스트가 없을까 해서 오지 않았는가.
 
 “할지 말지는 들어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쌀쌀맞은 녀석 같으니. 이놈아, 레이디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다.”
 
 보다 못한 락켄이 툴툴거렸지만 여신관은 눈빛으로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직의 사원에 심부름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전직의 사원은 플레이어들이 1차 전직을 하는 장소. 이건이 가야 하는 곳은 그중 전사들을 위한 전사의 사원이며, 그 외에 도적의 사원, 마법사의 사원, 성직자의 사원이 따로 존재한다.
 
 아마도 이 여신관이 가 달라고 부탁할 곳은 성직자의 사원이 아닐까. 이건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여신관이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성직자의 사원에 계신 윈드레스 님께 전해 주세요.”
 
 퀘스트를 수락하겠냐는 알림창이 떴고, 이건은 하겠다고 선택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전생에선 못 해 봤던 퀘스트니까. 훈련소의 교관이 락켄을 찾아가 무기를 받으라고 했던 퀘스트처럼, 이 또한 연계 퀘스트일 가능성이 컸다.
 
 나쁘지는 않았다. 사냥만 주구장창 뛰는 것보다는,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업적점수를 쌓는 것이 훨씬 이득이니까.
 
 분기마다 업적점수를 채점해 상금을 주는 볼텍스 그룹의 정책.
 
 본디 1위부터 10위까지만 주는 것이 맞지만, 한 가지 예외가 존재했다. 막 배틀스타를 시작한 신인들을 위해 따로 신인상을 만들었다. 본캐와 세컨 캐릭터를 막론하고 아이디를 등록한 지 3개월이 안 되는 플레이어에게만 주어지므로, 이미 고렙 캐릭터를 가진 플레이어들은 이제 와서 세컨 캐릭터를 만든다고 해도 신인상은 주어지지 않는다.
 
 ‘난 받을 수 있지만.’
 
 이건은 다르다. 아이디를 등록한 지 한 달밖에 안 되었으니까. 훈련소 때문에 한 달을 날려 먹었지만,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퀘스트를 먼저 선점하면 업적점수를 한꺼번에 쌓을 수 있다.
 
 신인상의 상금은 3천만 원. 먹고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돈이다. 퀘스트를 받고, 신전을 나오면서 이건은 랭킹창을 띄웠다. 1위부터 10위까지의 서열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쪽은 고렙 플레이어들이 장악했다.
 
 배틀스타를 시작한 지 3개월 이내의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신인상.
 
 이미 랭킹창엔 신인상 후보로 뜬 플레이어들의 목록이 주르륵 나와 있었다.
 
 [1. 루테인]
 [2. 레티시아]
 [3. 제라]
 
 상위권에 든 플레이어들에 비하면 모자란 업적점수. 3위하고만 따져 봐도 아득한 차이가 난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을 활용해서 알짜배기 퀘스트를 완수한다면 이들을 뛰어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다. 반드시 뛰어넘을 것이다.
 
 ‘일단 그 여신관의 퀘스트부터.’
 
 이건이 걸음을 멈추었다. 높다란 벽 너머, 그 위로 첨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성직자의 사원. 전생에서 성직자는 키워 본 적이 없기에 이제까진 인연이 없던 장소였다.
 
 하르켄과 죠이 형제. 이건에게 패한 그들은 정신이 나갔다.
 
 사실 충격이랄 것도 없었다. 배틀스타에서 PVP와 PK는 흔하다. 게임 오버도 처음 한 게 아니었다. 배틀스타를 시작하고 적응 기간을 거치는 동안엔 두 손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이 죽었다.
 
 그럼에도 형제가 정신이 나간 이유는 하나.
 
 둘이 덤볐음에도, 자신들보다 레벨이 낮은 상대에게 털렸다. 비등한 싸움도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속수무책으로 털렸다. 특히 얼음보다 싸늘한 이건의 눈빛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배틀스타엔 그런 놈이 득실거리겠지?’
 
 ‘우리 앞으로도 계속 털리는 거 아냐? 배틀스타 접어야 하나?’
 
 형제가 의기소침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강자들을 만날지, 상상만 하면 눈앞이 아득해졌다.
 
 볼텍스 그룹이 제시한 상금은 안중에도 없었다. 먹고 살 만큼의 돈은 현실에서 벌었다. 배틀스타를 플레이하는 것은 게임이 재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계속 죽는다면 즐거울 리가 만무했다.
 
 [게임 오버를 할 시, 24시간 동안 접속할 수 없습니다. 남은 업적점수의 50%를 지불하면 접속 쿨타임은 즉시 사라집니다. 업적점수의 50%를 지불하시겠습니까? (Y/N)]
 
 업적점수의 절반.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지금껏 개고생한 게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위장이 쓰렸다. 안 그래도 멘탈이 흔들린 형제의 손가락이 멈칫 굳기엔 충분한 경고.
 
 그럼에도 지불하겠다고 누른 것은 원래 이때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쪽지 기능으로 형제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한 사람. 정중하면서도 교묘한 언변으로 형제에게 길드 가입을 권유했다.
 
 “안녕하십니까, 두 분.”
 
 형제가 목을 축이고 있는 펍. 깔끔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형제의 앞에서 예를 표했다. 잠시 서로를 돌아본 형제가 고개를 끄덕이고, 눈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스카우터인가? 도깨비 길드인지 뭔지 하는 곳의?”
 
 “예. 이미 쪽지로도 알려드렸지만 닉네임 우르갈입니다. 도깨비 길드의 인재영입담당이지요.”
 
 
 “거 꼭 영업직이 자기소개를 하는 것 같구만. 그래, 우리를 영입하고 싶다고?”
 
 하르켄이 다리를 꼬며 묻는 말에 우르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야? 우린 10레벨을 막 넘었어. 그런데 뭘 보고 영입을 제안해?”
 
 도깨비 길드라면 형제도 들어 보았다. 최근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길드. 이제 막 시작한 한국의 길드답지 않게, 외국 출신의 고렙 플레이어도 다수 포함되었다. 그런 길드가 정상적일 리는 없었다. 고렙 플레이어가 미쳤다고 스타트업 길드에 의탁하겠는가. 뭔가 뒷거래가 있었겠지.
 
 ‘문제는 우리가 그런 뒷거래를 할 만큼 고렙이 아니라는 건데.’
 
 과연 우르갈도 형제의 레벨이 높아 영입 제안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예, 저는 두 분의 레벨이 높아서 영입을 제안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 때문에 제안을 드렸지요. 바로 잠재력입니다.”
 
 “잠재력?”
 
 “저와 제 부하들은 재능 있는 플레이어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고르고 고른 인재 중 하나지요. 배틀스타에 영상을 촬영하는 기능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대충은. 그 영상으로 우릴 찍은 건가?”
 
 모르는 사람이 자신들을 몰래 찍고 갔다는 말에 불쾌감이 일었지만 배틀스타에서는 초상권이 적용되지 않는다. 본모습이 아니라 커스터마이즈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말로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인재인지 아닌지 알려면 영상은 봐야죠.”
 
 우르갈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지만 정말로 미안해하는 기색은 없다. 하지만 자기 캐릭터 좀 촬영했다고 욕하자니 그것도 참 그렇다. 속이 좁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같지 않은가?
 
 “흐음, 일 얘기로 돌아가서··· 아무튼 두 분의 레이드를 봤는데, 협력해서 싸우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합이 딱딱 맞으시더군요. 전투 센스도 뛰어나시고.”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들보다 레벨 낮은 상대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한 주제에 이런 칭찬을 듣다니. 민망함에 얼굴이 다 뜨거워진다.
 
 “혹시 오늘 싸움도 봤어?”
 
 “네? 아뇨. 며칠 전 것밖에 못 봤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우르갈은 형제가 어디 보스몹이라도 잡았나 하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형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무거운 한숨이었다.
 
 “우리가 졌다.”
 
 “졌다고요?”
 
 “그래. 한 명에게 졌어. 우리보다 레벨이 낮은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털렸어.”
 
 “그놈한텐 제대로 피해도 못 줬지 아마?”
 
 “그놈 페이크에 엿 먹었잖아.”
 
 “사람을 찌르는 데도 망설임이 없었어.”
 
 하르켄과 죠이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탄을 주고받자 우르갈이 아연해했다.
 
 “정말입니까? 그··· 두 분이 한 사람에게 털렸, 아니, 당했다는 게?”
 
 “어. 그러니까 당신이 우릴 칭찬해도 별로 효과가 없어.”
 
 “비아냥을 듣는 기분이거든.”
 
 형제에게 오늘 있었던 싸움의 전말을 들은 우르갈은 기가 막혔다.
 
 ‘거의 갖고 논 건데. 레벨도 낮으면서 그랬단 말이지. 세컨인가?’
 
 형제처럼 우르갈도 이건이 세컨 캐릭터를 썼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본캐든 세컨이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자는 물건이다. 주식으로 따지면 상장만 하면 대박이 터지는 우량주.
 
 ‘우량주가 되기 전에 고꾸라지면 뭐 그뿐이겠지만 그럴 것 같진 않고.’
 
 이 형제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자는 머지않아 고렙 플레이어가 될 것이다. 그런 인재를 찾아 다른 경쟁자들이 침 바르기 전에 미리 찜해 두는 것이 우르갈의 임무였다.
 
 “일단 두 분께 드린 제안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한 번 패했다고 두 분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저희 도깨비 길드에 가입하시면 고렙 플레이어들의 노하우를 전수해 드리고, 공대 사냥에도 두 분을 포함해 드리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폭렙을 하도록 버스 태워 주겠다는 말이었다. 노하우까지 전수해 준다면 길드 가입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참 고맙구만. 실은 배틀스타를 그만둘까 말까 고민했는데.”
 
 “우릴 이긴 놈이 흔한 부류는 아니지?”
 
 “지금이야 두 분의 레벨이 낮으니 이길 사람은 수두룩하죠. 하지만 두 분보다 레벨이 낮은 사람들 중엔 거의 없을 겁니다.”
 
 ‘거의’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미 깨진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형제는 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걱정을 내려놓았다.
 
 “두 분을 이긴 그 사람, 닉네임이 뭐랍니까?”
 
 “워커.”
 
 워커. 우르갈은 그 닉네임을 곱씹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궁금증이 일었다.
 
 ‘한번 만나 봐야겠군.’
 
 ***
 
 성직자의 사원. 중세시대,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를 본뜬 그곳은 농담 아니라 정말 성처럼 넓었다. 건물도 하나가 아니라 작은 건물들이 여러 개 딸려 있었다.
 
 “멈추게. 여긴 외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 보아하니 성직자도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왔는가?”
 
 이건이 들어서자 경비병들이 가로막았다. 이건은 인벤토리에서 여신관에게 받은 하얀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이것은?”
 
 “신전의 여신관이 부탁한 심부름입니다. 윈드레스라는 분께 전해 드리라더군요.”
 
 “윈드레스 님? 잠깐만 기다리게.”
 
 한 명이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와서 통행증을 내밀었다.
 
 “윈드레스 님께 확인받았네. 신전에서 사람을 보낸다더니 자네였군.”
 
 “들어가도 됩니까?”
 
 “통행증은 꼭 달고 다니게. 그래야 조금 전 같은 번거로운 일이 없을 테니까.”
 
 통행증은 배지였다. 그것을 가슴팍에 달고 들어가자 경비병들은 흘깃 보기만 할 뿐 제지하지 않았다. 덕분에 유유히 사원을 구경하면서 윈드레스를 찾아간 이건이었다.
 
 “똑바로 못하나! 훈련에서 흘린 땀 한 방울이 실전에선 피 한 됫박이다! 훈련에서 죽도록 굴러야 실전에서 죽지 않는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목소리가 작다! 뭐라고?”
 
 “알겠습니다아아아아!”
 
 윈드레스, 전성기의 아놀드 슈워제네거처럼 강건한 근육을 키운 거한이었다. 경비병들을 훈련하면서 일갈을 지르던 그는 이건의 등장에 훈련을 잠시 중단하고 몸을 돌렸다.
 
 “이야기는 들었네. 자네가 워커라는 모험자로군. 신전의 편지를 가져왔다지?”
 
 “여깄습니다.”
 
 윈드레스는 봉투를 찢고 안에 든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가끔씩 미간에 주름을 만들거나 무거운 탄식을 흘리는 게, 편지의 내용이 꽤 심각한 듯했다.
 
 “허어, 이거 큰일이로군. 최근 시궁쥐들이 도시를 돌며 전염병을 뿌리는 모양이야. 한시라도 빨리 대처하지 않으면 희생이 커질 거라는군.”
 
 “정말 심각하군요.”
 
 물론 정말로 심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차피 죽어도 다시 부활할 텐데 심각은 무슨. 대놓고 딴죽을 걸면 NPC의 호감도가 떨어지니 적당히 맞장구쳐 줄 뿐이다.
 
 “심각하고말고. 이보게, 나 대신 도시를 돌며 정화부(淨化符)를 거리에 붙여 주지 않겠나?”
 
 그런 건 알아서 ‘작작 하지?’라고 쏘아붙이자니 이것도 다 플레이어를 위한 퀘스트다.
 
 “도시를 다 돌아다녀야 합니까?”
 
 “주요 장소 몇 군데에 가서 정화부만 붙이면 되네.”
 
 그럼 어렵지 않겠지. 이건은 퀘스트를 받고 성직자의 사원을 나왔다. 가장 가까운 곳부터 돌며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퀘스트를 마칠 때쯤, 생각지도 못한 사람으로부터 쪽지를 받았다.
 
 ‘우르갈?’
 
 우르갈. 배틀스타에 역사를 남긴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꿰뚫고 있는 이건에게도 그는 인상적인 플레이어였다.
 
 SG 그룹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도깨비 길드의 스카우터. 우르갈은 유능한 플레이어들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비상하다. 그 재주로 도깨비 길드를 폭발적으로 확장했다.
 
 ‘그런 놈이 연락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리라. 길드 가입. 어떻게 자신을 알게 됐는지 모르지만, 필시 자신을 도깨비 길드에 가입시키려고 할 것이다.
 
 ‘생각했던 시기보다 빠른데.’
 
 도깨비 길드와 접촉하는 것은 조금 더 훗날의 일로 생각했지만, 우르갈과 미리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싶었다.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은 선에서 안면을 트면 되리라.
 
 “처음 뵙겠습니다, 워커 님. 도깨비 길드의 인사담당인 우르갈이라고 합니다.”
 
 우르갈이 우아하게 예를 갖추었다. 하르켄과 죠이 형제를 만났을 때처럼 양복 차림.
 
 ‘자유도시 연합의 카이&메이스 브랜드가 만든 슈트.’
 
 겉으론 평범하게 보이는 우르갈의 양복은 아이템이었다. 서리칼과 똑같은 유니크 아이템. 그러나 레벨 제한은 더 높다. 무려 60레벨 이상만 입을 수 있었다.
 
 ====
 [플레이어 상태창]
 ―이름: 우르갈
 ―레벨: 72
 ====
 
 72레벨! 지금 이건의 힘으로는 죽었다 깨도 이길 수 없다. 레벨 차이가 너무 심해서 플레이 감각이고 뭐고 통하지 않는다. 이건은 우르갈을 쳐 봤자 HP를 1%도 못 깎지만, 우르갈은 한 대만 쳐도 이건을 박살 낼 수 있었다.
 
 ‘외국에서 배틀스타를 했다더니.’
 
 우르갈, 그는 SG 그룹의 해외 지부에 근무하는 직원이었다. 일찍부터 배틀스타를 접했고, 일에 치여 살면서도 72레벨에 도달했다. 물론 이건이었다면 똑같이 일을 끝내고 여가 시간에 게임을 했어도, 우르갈보다는 레벨이 높았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건이기에 가능한 일. 우르갈의 플레이 감각도 나쁘지는 않았다. 전생에 우르갈과 부딪칠 때 그는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여 주었다.
 
 “제 레벨 때문에 놀라신 모양이군요. 이해합니다. 한국엔 얼마 전에야 배틀스타가 들어왔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외국에 살았거든요.”
 
 “지금은 한국에 삽니까?”
 
 “예. 배틀스타가 한국에 들어오기 며칠 전에 귀국했지요.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저희 길드엔 한국엔 없는 고렙 플레이어들이 다수 소속됐습니다. 저희 길드에 가입하시면 그분들로부터 배틀스타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고, 어려운 사냥터를 공략할 때 경험치를 몰아줘서 워커 님이 폭렙을 하도록···.”
 
 “필요 없습니다.”
 
 말을 자르자 우르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이 세컨 캐릭터를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처음의 의심이 퍼뜩 스쳐 갔다.
 
 “···저희 길드의 도움 없이도 고렙에 오를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정말이다. 굳이 도깨비 길드의 도움 없이도, 전생의 기억만 잘 이용해 보상과 아이템을 독식할 수 있다. 서태석에게 살해당했을 당시보다 더 강한 워커를 만들 수 있다.
 
 “음, 자랑처럼 들리시겠지만 저희 길드는 정말 강합니다. 앞으로는 더 강해질 거고요.”
 
 “그렇겠죠.”
 
 SG 그룹의 지원을 받으니까. SG 그룹이 돈으로 포획한 고렙 플레이어들이 도깨비 길드의 성장을 도울 테니까.
 
 “지금은 워커 님의 레벨이 낮아서 힘들겠지만, 저희 길드의 도움을 받으면 앞으로 막대한 돈을 벌 겁니다. 게임 머니가 아니라 현실의 돈 말입니다. 강남의 타워팰리스에 살고, 슈퍼 카를 굴릴 만큼 부자가 될 기회가 눈앞에 열렸어요. 그런데도 거절하겠다고요?”
 
 돈을 주겠다는 말을 들으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우르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몇 번을 물어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No.”
 
 이건은 단칼에 제안을 쳐냈다. 그 대답이 이해되지 않는 우르갈이었다. 자신의 제안을 믿지 않는 걸까? 고작 게임에서 활약하는 걸로 그만한 돈을 벌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외국의 플레이어들을 봤으면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텐데.’
 
 아이템 현거래. 과거 유행했었던 리니지라는 게임처럼, 배틀스타에도 하나가 값비싼 외제 차와 맞먹는 비싼 아이템들이 많다. 유일한 가상현실게임이자 막대한 상금이 걸린 게임이니까, 성능 좋고 희소한 아이템의 수요도 높은 것이다.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외국의 플레이어들 중엔 상금을 노리는 대신 아이템 현거래로 막대한 수입을 버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수영장이 딸린 집을 사고, 람보르기니나 애스턴 마틴처럼 수억 원을 호가하는 슈퍼 카를 산다. 도깨비 길드의 도움을 받으면 그들처럼 살 수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게 이상한데··· 혹시 다른 길드에게 권유받았습니까? 중국의 4대 길드? 일본의 쇼군 연맹? 미국의 뉴 프론티어?”
 
 “왜 군주학살자 길드는 빼놓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우르갈이 허를 찔렸다. 표정이 흐트러졌고, 수습하는 것도 실패했다.
 
 ‘맙소사! 이놈은 뭐지?’
 
 한성 그룹의 군주학살자 길드. 창설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길드였다. 사람으로 따지면 신생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다. SG 그룹의 사람인 우르갈은 군주학살자 길드의 배후에 한성 그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묻지도 않은 군주학살자 길드를 굳이 내 앞에서 먼저 언급했다.’
 
 떠보는 것이 아니다. SG 그룹과 도깨비 길드, 한성 그룹과 군주학살자 길드까지 모두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도깨비 길드원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길드가 SG 그룹의 후원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데, 외부인이 그것을 알아 버렸다. 설마 정보가 샜나? 아니, 보안에 그토록 신중을 기했는데 그럴 리가 없다. 설령 정보가 샜더라도, 우르갈의 앞에서 그걸 말할 이유가 없다!
 
 “이미 군주학살자 길드와 얘기가 끝난 겁니까? 1차 전직을 하면 그들과 뜻을 함께하겠다고?”
 
 길드 가입의 조건은 1차 전직. 전직할 때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한꺼번에 전직 퀘스트에 도전한다. 규모가 큰 길드들은 이때 플레이 감각이 뛰어난 유망주들을 발굴해서 스카우트한다.
 
 우르갈은 그 전에 미리 유망주들을 길드에 가입시키고 싶어 싹수 보이는 플레이어들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은 길드 가입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도깨비 길드의 비밀을 까발렸다. 우르갈의 마음속에서 이건의 위험 순위가 단숨에 3단계 상승했다.
 
 ‘그냥 보내면 안 돼! 어떻게 우리에 대해 알게 됐는지, 정말 군주학살자 길드에 가입했는지 알아내야 한다!’
 
 냉정을 되찾고, 우선순위를 정한다. 힘으로 제압해선 안 된다. 게임 오버를 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해 봤자 적 하나를 만드는 꼴이다. 지금은 어르고 달래서 정보를 캐내야 할 때였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중요한 걸 빼먹은 것 아닙니까?”
 
 “중요한 것?”
 
 “내가 군주학살자 길드원이거나 협력하는 사이라면 SG 그룹의 사람에게 그 사실을 먼저 밝혀서 뭐 하겠습니까. 협박할 것도 아닌데.”
 
 그렇다. 도깨비 길드의 뒤에 SG 그룹이 있다는 것은 협박할 거리도 안 된다. 우르갈은 너무 놀란 나머지 당연한 사실을 깜박한 것이다. 그게 너무 부끄러워 우르갈은 한숨을 지었다.
 
 “이거 참, 얼굴을 들 수가 없군요. 그래, 군주학살자 길드도 아닌데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습니까? 우리도 그렇지만 한성 쪽도 보안은 철통인데.”
 
 “영업비밀입니다.”
 
 “······.”
 
 “그래도 한 가지 더 말하자면, 한성 그룹이 프로게이머 출신들을 끌어들이고 있고, 그 윗선이 E―스포츠의 명감독이라는 최동진이라는 것까지는 압니다.”
 
 “정말 많이 알고 계시는군요. 최동진 감독에 대한 것은 우리도 최근에야 알았는데.”
 
 우르갈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SG 그룹의 정보력이 한 사람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도깨비 길드엔 가입할 생각 없습니다. 도깨비 길드가 아니어도 강해질 방법은 많으니까요. 괜히 가입했다가 길드 스케줄에 휘말리는 것도 싫고.”
 
 이건이 도깨비 길드에 가입하지 않는 이유였다. 우르갈은 이득만 얘기했지만 어디 실제로 그러겠는가? 이득이 있으면 의무도 있는 것이다. 길드에게 지원을 받는 대신, 길드를 위해 해 줘야 하는 일도 많은 것이다. 그것 때문에 기껏 세운 계획을 망친다면? 그런 경우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뭐, 그래도 도깨비 길드엔 호의를 갖고 있으니까. 앞으로 거래를 할 의향은 있습니다. 용병계약 같은 것 말입니다.”
 
 물론 보수는 줘야 한다. 현실의 돈 말고, 게임 머니와 아이템 등으로.
 
 “글쎄요. 당신이 우리와 한성에 대해 정보가 많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우리가 용병으로 고용할 만큼 능력이 뛰어날 것 같진 않군요. 혼자서 플레이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반은 진심, 반은 도발이다. 우르갈은 이건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차 도깨비 길드가 보수를 주면서까지 용병으로 고용할 만큼 폭발적으로 강해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고렙이 된다면 길드의 도움 없이 플레이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면 믿든가.”
 
 앞으로 몸값이 높아질 거라느니, 후회하지 말라느니 하는 유치한 말은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우르갈도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테니까. 1차 전직도 못 한 이때에 말해 봤자 허풍을 친다고 생각할 뿐이다. 물론 이미 허풍을 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이건은 우르갈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도록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용무는 끝났으니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당신에 대한 것은 윗분들께 말씀드릴 겁니다.”
 
 “마음대로.”
 
 말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아마 SG 그룹은 워커의 정체를 알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지만, 그래 봤자 헛수고였다. 국내 굴지의 SG 그룹조차 볼텍스 그룹 앞에서는 구멍가게나 마찬가지다. 볼텍스 그룹의 서버를 해킹하는 것도, 직원을 돈으로 매수해 이용자의 신상 정보를 알아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설프게 시도했다간 되레 역공만 당한다.’
 
 전생에서도 성공한 예가 없었다. 볼텍스 그룹은 플레이어들의 신상 정보를 철저하게 관리한다. 어쭙잖은 수작으로 고렙 플레이어들, 특히 랭커의 신상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면 로드리게스 회장의 분노를 정면에서 받아 내야 했다. SG 그룹의 회장이라고 다를까? 배틀스타의 플레이어를 건드리는 순간, 로드리게스 회장이 만든 배틀스타의 ‘스토리’를 망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 제4장. 머더러
 
 이건의 일과는 단순했다. 규칙적인 생활. 밥을 먹고, 잠을 잔다. 그리고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1시간 동안 운동한다.
 
 그 외의 시간은 무조건 배틀스타에 쏟아부었다. 중독이라고 매도당해도 할 말이 없지만, 후발 주자가 선두 주자들을 앞지르려면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변수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애써 만든 스케줄이 꼬여 바꾸지 않으면 안 될 때.
 
 [아델의 플레이어들께 알려 드립니다. 발탄 숲에 ‘머더러’가 나타났습니다.]
 [머더러 ‘슬레인’은 플레이어 다섯 명을 살해한 극악무도한 자입니다. 머더러 슬레인을 잡으면 현상금으로 200골드, 업적점수 600점을 지급합니다. 여럿이 잡았을 때는 머릿수만큼 공적이 나뉘며, 한 사람이 잡았을 때는 모든 공적을 독차지합니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다.
 
 갑자기 뜬 알림창이 이건이 만든 스케줄을 다 미뤄 놓았다.
 
 머더러.
 
 살인자. 다른 플레이어를 기습해서 게임 오버시킨 PK(Player Kill) 플레이어. 쌍방에 합의가 된 결투인 PVP(Player vs Player)와는 다르다. PVP는 정당한 결투지만, PK는 시스템에 의해 수배를 당한다. 현상금이 걸리는 건 물론이고, 도시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PK를 했다는 표식이 머리 위에 뜨니까.
 
 ‘서둘러야겠어.’
 
 당연하지만 머더러 사냥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정의감 때문이 아니다. PK도 엄연히 배틀스타의 콘텐츠. 진짜 살인도 아닌데 분노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당하는 것만 아니라면.
 
 그럼에도 머더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다름 아닌 보상 때문이다. 머더러가 가진 아이템도 차지할 수 있다.
 
 ‘짭짤했었지. 킬링필드 놈들을 털었을 때.’
 
 전생에서 PK만 저지르는 놈들이 모인 머더러 길드. 뛰라는 레이드는 뛰지 않고, 퀘스트도 뒷전으로 미루고, 언제나 다른 플레이어들 뒤통수를 따는 재미로 게임하던 놈들이었다. 심지어 레벨도 높아서,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을 무렵엔 가장 약한 길드원의 레벨도 50 이상이었다.
 
 결국 킬링필드 길드를 대대적으로 치자는 여론이 일었고, 중국 4대 길드인 천하방(天下幇), 미국의 뉴 프론티어 길드, 유럽의 로젠크란츠 길드가 주축이 돼서 연합을 만들었다.
 
 이건도 연합에 참가했었기에 그때를 기억했다. 배틀스타에서 일어난 숱한 사건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렬한 기억. 이건이 훗날 배틀스타 4강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에는 킬링필드 토벌 사건이 적잖은 역할을 했었다.
 
 길드 마스터와 네 명의 사천왕.
 
 특히 길드 마스터는 너무 많은 플레이어들을 PK해서, 아예 시스템이 ‘마왕’이라고 명명한 놈이었다. 결국 이건의 손에 게임 오버를 당했지만, 이건도 싸우기 전엔 결과를 장담하지 못했을 정도로 강했다.
 
 ‘재밌었지.’
 
 그래, 정말 재밌었다. 마왕이라는 유치한 별명을 달고 있었지만, 놈과의 싸움은 이건의 승리욕을 자극했다. 온몸의 감각이 짜릿해지는 싸움이 어떤 것인지를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다시 싸울 날이 있겠지.’
 
 간만에 나타난 머더러 때문에 잠시 추억에 잠겨 있을 때였다.
 
 “야야! 이것 좀 봐. 전체 알림으로 뜬 글 봤어? 머더러가 나타났다는데?”
 
 “슬레인? 못 들어 본 이름인데. 유명한 놈은 아니지?”
 
 “몰라. 어떻게 알아. 배틀스타에 플레이어가 얼마나 많은데.”
 
 지나가는 플레이어들의 수군거림. 그들의 말을 들은 이건이 상념을 집어던졌다. 저들의 말대로 플레이어들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그리고 앞선 강자들을 추월하려면 멈춰 있을 틈 따위는 없었다.
 
 ***
 
 발탄 숲은 때아닌 플레이어들의 범람으로 몸살을 앓았다.
 
 머더러를 토벌하기 위해 모인 플레이어들. 그들은 각각 파티를 이뤄서 머더러 ‘슬레인’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고블린을 비롯해 본래라면 플레이어들의 목숨을 노렸을 몹들이 도리어 죽어 나자빠졌다.
 
 “머더러는 찾기 쉬워. 머리 위에 붉은색으로 닉네임이 표시되니까.”
 
 15레벨 플레이어, 볼턴이 웃으며 내뱉는 말에 그와 함께하는 파티원들이 덩달아 그와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발견한 사람이 임자인 건가?”
 
 “운도 좋아. 안 그래도 전직하기 전에 할 일이 없었는데 머더러 이벤트라니.”
 
 “누가 아니라냐. 도로에서 차 타고 질주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재밌어.”
 
 볼턴,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플레이어들은 현실에서도 아는 사이였다. 값비싼 슈퍼 카를 몰고 도로 한복판에서 레이싱을 즐기는 동호회. 부모 잘 만난 금수저들.
 
 “저···.”
 
 한 명만 빼고 말이다.
 
 백금발을 기른 소년. 가만히 있어도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가늘 고 여리여리한 미소년이었다. 물론 이 모습은 게임 캐릭터의 외형이니, 현실의 외모하곤 많이 다를 것이다.
 
 소년은 볼턴과 그 친구들이 속한 동호회 소속이 아니다. 친하기는커녕 방금 만나서 실제 이름과 외모도 모른다.
 
 그럼에도 파티에 포함된 것은 오기로 한 도적 플레이어가 급한 일로 못 왔기 때문이다. 세 명 가지고는 불안하다. 사람 많은 파티에게 머더러 사냥을 빼앗길지도 몰랐기에, 그때 같이 다니면 안 되겠냐고 한 소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뭐야?”
 
 “자,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면 안 될까요? 너무 마려워서··· 죄, 죄송합니다!”
 
 볼턴과 다른 파티원들의 얼굴에 짜증이 떠오르자 소년이 급히 사과했다. 하지만 마렵다는데 못 가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씨발, 화장실은 미리미리 가 뒀어야 할 거 아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5분 준다! 넘기면 머더러고 뭐고 그냥 떠날 줄 알아!”
 
 한바탕 화풀이를 한 뒤에야 소년이 로그아웃을 했다. 로그아웃을 해도 바로 파티가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파티장이 쫓아 보내든가, 아니면 스스로 나가겠다는 버튼을 눌러야 풀린다.
 
 “저 새끼 데려온 거 잘한 짓일까? 좀 불안한데.”
 
 아닌 게 아니라 시종일관 산만하게 굴며 짜증을 유발했던 놈이다. 레벨은 그들과 같은 15레벨인데 하는 짓은 영락없이 꼬맹이다. 과연 이런 놈에게 도적 포지션을 맡겨도 되는 걸까?
 
 “놔둬. 이제 와서 다른 놈을 구하지도 못해.”
 
 “왜 못 구해? 도적 말고 다른 직업도 많잖아. 마법사나 전사라도 구해야지.”
 
 이견을 제시하는 말에 볼턴은 턱을 매만졌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백금발의 소년, ‘라몬’은 영 신뢰가 안 간다. 자신들과 같은 동호회 소속이 아니기도 하지만, 하는 짓마다 자꾸 신경에 거슬렸다.
 
 “하지만 혼자 돌아다니는 놈도 없는 것 같은데.”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들 파티로 온 것 같았다. 혼자 다니는 사람은 찾아볼 수도 없다. 그렇게 볼턴이 속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을 때였다.
 
 “야, 저놈 좀 봐라.”
 
 파티의 유일한 성직자인 에세드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에 걸린 것은 혼자 다니는 장신의 플레이어였다. 허리춤에 대태도를 차고 다니는 전사!
 
 “저놈 말야?”
 
 “활도 있어.”
 
 정말로 그러했다. 한쪽 손에 활을, 그리고 등 뒤엔 화살통을 멨다. 전직을 안 한 전사는 칼과 활 모두를 다룰 수 있기에, 여러 무기를 갖고 다니면서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는 사람도 있었다.
 
 ====
 [플레이어 상태창]
 ―이름: 워커
 ―레벨: 13
 ====
 
 “안 돼. 레벨이 낮아.”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여차하면 몸빵용으로 써도 되잖아?”
 
 에시드가 입꼬리를 올려 하얗게 웃는다. 에시드의 뜻을 깨달은 볼턴과 마법사 베포도 좋은 고기 방패가 생겼다는 생각에 따라서 웃었다.
 
 “잠깐만요, 거기 키 크신 전사분.”
 
 “저 말입니까?”
 
 볼턴이 부르자 워커라는 플레이어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볼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혹시 파티를 구하셨나요?”
 
 “네? 아뇨, 그게··· 아직···.”
 
 워커가 민망한 듯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볼턴과 두 친구가 시선을 맞추며 긍정의 사인을 주고받았다. 이놈은 호구다. 몸빵용으로 딱 좋은 호구!
 
 “하하, 마침 저희도 인원수가 부족한데 저희 파티로 오실래요?”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래도. 아까 보니 도적 플레이어도 계신 것 같던데. 제가 괜히 끼어드는 게 아닌지···.”
 
 “그 녀석은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저희가 결정했다고 하면 대꾸도 못 할걸요. 어휴, 애가 얼마나 소심한지 저래서야 머더러 사냥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한순간 워커의 눈이 차갑게 빛났지만, 볼턴은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볼턴의 뒤에 있는 친구들도 호구 하나 낚았다는 생각에 속으로만 시시덕거렸다.
 
 “화장실 급하다고 잠깐 로그아웃했는데, 5분 넘으면 그냥 우리끼리 가자고 했습니다.”
 
 “그럼 같이 사냥하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13레벨 전사 워커라고 합니다.”
 
 “15레벨 전사 볼턴입니다. 저쪽은 제 친구인 베포와 에시드. 각각 마법사랑 성직자입니다.”
 
 베포와 에시드가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이자 워커도 예를 갖추었다.
 
 ‘미끼는 던졌다.’
 
 워커, 아니, 이건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고 있었다. 슬레인이라는 머더러를 사냥하러 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대어를 발견했고, 대어를 낚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었다. 자신을 호구 취급하는 놈들의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은 그에 비하면 간단한 일.
 
 ‘대어와 머더러, 둘 다 잡는다.’
 
 ***
 
 “새 파티원이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이건의 합류 소식을 들은 라몬은 깜짝 놀랐다. 잠깐 로그아웃을 한 사이에 새 파티원이 들어왔다니?
 
 라몬이 이건을 곁눈질했다. 이건은 라몬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락켄의 공방에서 산 수리 도구, ‘숫돌’로 서리칼의 날을 세우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얼음처럼 투명한 칼날이 신기한지 파티원들의 시선이 잠깐 서리칼로 향했지만, 아이템은 잡지 않으면 정보를 볼 수 없다. 이건의 눈길이 향하자 찔끔한 파티원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시 라몬에게 시선을 향했다.
 
 “지금 널 내보낼까 고민 중인데.”
 
 “너도 알지? 다수결로 동의하면 내보낼 수 있는 거.”
 
 볼턴과 그 친구들만 동의해도 라몬은 파티에서 강제로 퇴출당한다. 라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건 안 돼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제가 잘할게요! 잘할 테니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두 손을 싹싹 비비는 라몬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리는 게, 파티와 상관없는 사람이 봐도 동정심이 들 만큼 불쌍했다.
 
 “부탁드립니다! 절대로 트롤짓하지 않을게요!”
 
 아예 허리까지 숙였다. 볼턴과 그 친구들은 라몬의 뒤통수를 내려다보고 저열하게 웃었다. 내보내겠다고 협박은 했지만 실제로 내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협박을 한 것은 반은 재미, 그리고 반은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흐음, 뭐 사람이야 많으면 좋은 거니··· 워커 님은 어떠십니까?”
 
 “괜찮습니다. 저보다 레벨 높은 도적인데 제가 반대할 이유가 있나요.”
 
 이건이 어깨를 으쓱이자 볼턴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지요. 이미 아시겠지만 제가 리더이니 제 말엔 꼭 따라 주셔야 합니다.”
 
 “아무렴요.”
 
 이건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이건이 자신의 말에 불복할까 전전긍긍했던 볼턴은 그 대답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럼 머더러를 잡으러 갑시다!”
 
 <『회귀자, 게임으로 억만장자!』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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