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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어둠의 힐러 [E]

어둠의 힐러 1권 (1)

2018.12.26 조회 1,795 추천 21


 1. 부캐를 키우자
 
 
 
 -로미오 님.
 -로미오 님.
 -안녕하세요, 로미오 님.
 파란 하늘, 하얀 구름 그리고 넓은 초원이 보이는 커다란 성 그 꼭대기 층 대영주의 저택.
 접속하자마자 들려오는 귓속말과 길드 창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인사말.
 그들에게 간단하게 대답한 후 천하에 할 짓 없는 맥스 폐인 로미오는 한숨을 쉬었다.
 “뭐하지.”
 로미오.
 실시간 감각접속 게임 ‘대륙전기’의 그 귀하다는 400만 렙 유저이자 3대길드 중 하나인 장미 길드의 길드장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무력을 가진 기사이자 수많은 유저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자, 하여간 좋은 수식어란 수식어는 다 달고 다니는 폐인계의 지존.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할 게 없다.”
 맑은 하늘을 보면서 할 말이 그것뿐이라는 것이 서럽기는 하지만 그건 맞는 말이었다.
 할 것이 없다.
 장비는 소위 말하는 지존 또는 본좌급, 레벨은 만렙의 400 달성. 그런 그였기에 이 세계에서는 이제 할 것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폐인 짓을 하지 말걸.”
 그의 나이 고작 21세.
 사실 그 나이에 이 정도 레벨을 올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간부터 게임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물론 집에서는 게임만 한다고 구박이 말도 못 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현실과 다를 바 없는 이 세상이 그가 살아가야 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사람을 만나고 길드를 만들고 타 길드와 전쟁을 하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대륙전기의 3대길드. 무와 예를 숭상하면서 정의를 추구하는 판타지 세상에 딱 어울리는 이미지를 가진 길드.
 물론 그 때문에 크게 싸우기도 했고 심지어 그가 아끼던 접속기를 어머니가 부수려고까지 했다. 그 사건 이전에는 말이다.
 삑삑.
 “여보세요.”
 대륙전기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세계라 비상시 연락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만든 통화 시스템. 물론 내부에서 내부로는 연락하지 못하지만 지정된 번호의 경우 통화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 번호는 강제로 지정된 번호다.
 “오호호. 아들, 출근했니?”
 “네.”
 “그래, 오늘도 열심히 일하려무나. 아버지랑 엄마는 바나나 보트 타러 간다.”
 뚝, 뚜뚜뚜.
 ‘크흑, 어머니.’
 전화가 끊어지는 순간 그는 눈물을 흘렸다. 정확하게 6개월 전 접속기를 부수려는 어머니의 만행을 막기 위해서 결국 절대적 협상을 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장미 길드는 대륙전기의 최고 길드로, 세금과 기타 비용으로 엄청난 양의 골드가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는 길드장이자 영주로서 그걸 관리한다.
 물론 길드 관리 비용이나 각 지역별 또는 모임별 정모 등에도 지원해 준다. 그 지원이라는 것을 골드로 지급하는데 각 모임장은 그걸 팔아서 현금으로 쓰든 아니면 그냥 모임원들과 나누어 먹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워낙 큰 길드고 수입이 많다 보니 잉여 수입이 쏠쏠했고, 그 덕에 그는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골드가 많았다.
 그때 그는 어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소유로 된 골드의 일부를 판매하는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현질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화가 난 어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내보인 통장에 들어 있는 2억의 돈. 물론 쉽게 번 돈은 아니다. 하지만 그 정도 수입이 있기 때문에 대륙전기에서 지존이 되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그도 사람이다. 가끔은 쉬기도 하고 다른 데도 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날부터 꼬박 꼬박 출근 확인 전화를 하는 어머니를 피하기가 힘들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문제는 이제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로미오 님, 오늘도 신수가 훤하시네요.”
 영주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세턴이 싱글벙글 웃었다. 제3방면대 사령으로, 현재 부길드장 중 한 명이었다. 그렇지만 성격은 소위 말하는 행동대장.
 “무슨 일이야, 이렇게 일찍?”
 “오늘 레이드 있지 않습니까. 본드래곤 레이드. 처음 가는 애들도 몇 명 있는데 미리 준비 좀 해 놔야지요.”
 “본드래곤? 흠, 그래? 그거 나도 같이 갈 수 있을까?”
 “프헤헤, 농담도 잘하셔.”
 “어? 으, 응.”
 농담이라고 받아치는 세턴의 말에 로미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미오가 본드래곤을 잡은 횟수는 대략 200회. 본드래곤은 대륙전기의 최강 몬스터이자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잡기는커녕 얼굴조차 보지 못한 최강의 몬스터다.
 물론 200회 잡는 동안 먹을 아이템은 다 먹어서 이제는 먹을 것도 없었다. 물론 그가 가면 사냥이 한결 쉬워지기는 한다. 그가 강한 만큼 사람들은 편하니까. 하지만 그러면 다른 누군가가 빠져야 한다. 문제는 오늘이 길드 레이드라는 것이다. 즉, 길드끼리 가는데 자기가 심심하다고 길드원을 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그가 빠진다고 본드래곤 레이드의 성패가 바뀔 만큼 약한 멤버들도 아니다.
 “크흑. 할 게 없다.”
 이 레벨이면 던전에 가도 경험치 먹는 빨대 소리나 들을 테고 필드에서 솔로잉을 하자니 의미가 없다. 하루에 들어오는 세금만 몇만 골드인데 잘해야 몇 골드인 푼돈을 주울 수도 없고 길드장의 품위가 있지 잡템 주워 팔고 다닐 수도 없고, 왕따도 아닌데 혼자서 허허벌판에서 사냥할 수도 없고.
 “내 더러워서 부캐 키우고 만다.”
 그는 이를 까득 갈았다.
 
  * * *
 
 다음 날 그는 여고에 다니는 동생에게 달라붙었다. 일단 부캐를 키우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륙전기는 철저하게 1인 1계정 1캐릭터를 원칙으로 한다. 말로는 캐릭터를 향한 애정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너도 나도 캐릭터를 만들면 그 수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단일 서버라는 미친 짓을 선택한 대지 소프트에는 어쩌면 필수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아무리 슈퍼 서버라 해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현필은 벌써 만렙이다. 지금에 와서 그걸 지우는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혜원아.”
 “응?”
 “뭐 필요한 거 없냐?”
 “오라버니가 갑자기 왜 이러실까?”
 그의 동생 혜원은 난데없이 친한 척하는 현필을 보면서 경계심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구구절절하게 서로를 챙겨 주는 오누이는 아니었다. 서로를 애틋하게 챙겨 주는 그런 오누이는 소설 속에나 있는 법.
 “사실은 말이다, 내가 부캐를 키우고 싶은데······.”
 “그럼 키워.”
 “계정 하나만 만들어 주라.”
 “기존에 있던 거 지워.”
 “날 죽일 셈이냐?”
 기존에 있던 로미오를 지운다는 것은 직장인 입장에서 보면 억대 연봉 자릴 때려치우는 일과 같다. 그 돈으로 6개월 로열 선박 관광 코스를 떠나신 부모님이 아신다면 그는 소위 말하는 척살이다.
 “하나만.”
 “나도 대학에만 들어가면 하려고 하는데.”
 “거짓말하지 말고 하나만······.”
 그렇게 애원하면서 그는 동생의 가증스러운 거짓말에 치를 떨었다. 사실 그의 동생인 혜원은 특이 체질이었다. 물론 병약한 미소녀 또는 안경 쓴 귀염둥이 등의 체질은 아니다. 도리어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건강한 여고생의 표본이다.
 다만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는 울렁증 환자였다. 소위 말하는 3D 게임류만 하면 채 30분을 못 넘긴다는 체질의 소유자. 그 탓에 그녀는 실시간 감각접속 게임이 주류인 이 시대에도 여전히 2D를 고수했다. 그런 그녀가 대륙전기를 한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부탁 좀 하자. 내가 들어가서 할 게 없어서 그래.”
 “음······ 그럼 뭐 해 줄 건데?”
 “밥 사 주마.”
 “그만둘래.”
 “그럼?”
 “삐에루 가루탱 가방.”
 “콱! 여고생이 무슨 삐에루 가루탱이야. 눈퉁이를 밤퉁이로 만들어 버릴라.”
 “싫음 말고. 흑흑, 돈 많은 오빠에게 버림 받은 불쌍한 여고생은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겠지. 그러다 보면 성격이 소심해질 테고 사회에 불만을 품게 될 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가출. 하지만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은 곳. 청순한 미소녀를 노리는 수많은 악의 손길에 그 여고생은 천천히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겠지.”
 가방 하나 안 사 준다고 신파극을 쓰는 혜원을 보면서 현필은 누구를 닮아서 동생이 저렇게 문학적 기질이 풍부한지 알 수 없었다.
 “알았다, 알았어. 하나 사 주마. 대신 부모님한테는 비밀이다.”
 “아싸! 절대 충성!”
 
  * * *
 
 따듯한 햇살이 가득한 광장.
 그곳에 한 유저가 나타났다. 그 유저는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로 시작하는 유저들이 대부분 그런 모습이기에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영 이상한데.’
 로미오, 아니 줄리엔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면서 내심 중얼거렸다. 검은색 단발머리에 뽀얀 피부, 기타 미소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외모가 영 어색했다. 더군다나 그는 게임을 하면서 이런 유약한 모습보다는 좀 더 강렬하고 듬직한 모습을 해 왔다.
 그러나 동생이 자신의 취향을 마음대로 집어넣어서 마구 만들어 버렸다. 그럼에도 찍소리 못 한 현필은 그저 몇 가지 떡밥을 던져서 그나마 보이시하게 만들었다.
 ‘뭐, 상관없겠지, 남자라고 말하고 다녀도. 이런 꽃미남은 별로지만 할 수 없지. 설마 누가 치마를 들칠 것도 아니고.’
 대륙전기는 기본적인 형태의 30%까지 모습을 바꿀 수 있다. 말이 30%지 그 정도면 현실에서 만나면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성별은 바꾸지 못한다. 그런 탓에 가능하면 남자답게 꾸미고 싶어도 한계가 있는 터라 최대한 바꾼 것이 이런 보이시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오누이라고 하지만 비슷한 부분도 있기에 혹시나 알아볼까 했지만 지금의 모습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역시 조용하군.”
 그를 찾는 사람도 없고 길드에서의 시끄러운 소란도 없다. 이게 몇 년 만에 느껴 보는 여유로움이란 말인가.
 로미오를 키울 때만 해도 사람들과 함께 미친 듯이 열렙, 폭렙, 훼인 모드 돌입 등등으로 게임의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는데 저렙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쩐지 세상이 달라 보였다.
 “아, 좋다. 이번에는 미친 듯이 하지 말고 좀 느긋하게 즐기면서 키워야지.”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며 그간 하지 못한 자잘한 퀘스트도 하면서 업할 생각에 그는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사제님, 시간 있으면 저희랑 파티 사냥 하실래요?”
 주변을 둘러보는 그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이들 역시 저렙의 유저들이었다.
 게임의 특성상 사제가 귀하다. 원래 온라인 게임에서는 힐러 계열이 귀한 편인데 감각접속이라는 특성상 전투 계열이 훨씬 재미있다 보니 사제는 더욱 마마 취급이었다. 그러나 줄리엔은 사냥을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 봐야 닥힐에 훼인 모드.
 “아니요, 전 그냥 여기 있을래요.”
 “아, 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유저들이 떠나가자 그는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새롭다는 듯이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 저렙존에 온 게 몇 년 만이지? 3년인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시간.
 그 3년 사이에 이것저것 바뀐 것이 많았다. 가게도 생기고 여러 가지 추가 퀘스트도 생기고······.
 그중에서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광장 한가운데에 붙어 있는 거대한 벽보였다. 거기에는 얼마 전에 생긴 아르바이트라는 특이한 기능이 지원되고 있었다. 전에는 사냥을 통해서만 수입을 얻었지만 지금은 저렙존에서 아르바이트가 가능했다.
 “흠, 아르바이트라······. 좀 해 볼까?”
 줄리엔은 천천히 벽보를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가능한 한 본캐릭터의 도움을 받지 않고 키울 생각이었다. 그러니 초반에 아르바이트로 돈을 좀 벌어 둔다면 사제인 이 캐릭터로서는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널널한 거, 널널한 거.”
 하지만 새로 생긴 아르바이트 벽보판은 썰렁하기만 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몇 개의 전단지가 붙어 있었지만 줄리엔 말고는 보는 사람이 없었다.
 “어디 보자······. 음식점 설거지 담당을 구합니다. 이건 귀찮은데. 서서 해야 하잖아. 잡화점 판매 담당을 구합니다. 이것도 사람들이랑 자주 만나야 하니까 패스, 화장실 퍼 가실 분? 이런 것도 나오네, 거참. 그런데 꺼림칙한데······.”
 한참 이것저것 일자리를 찾아보던 줄리엔은 맨 아래에서 한 장의 종이를 발견했다.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인형 눈 붙이실 분 구합니다. 2주간 근무 가능하신 분, 하루 일당 50실버, 근무시간 8시간. 적당해 보이는데. 8시간이면 현실 시간으로 3시간 정도인가?”
 그래도 길드장이니 가끔 로미오로 접속도 해야 하고 또 이번엔 미친 듯이 업할 생각이 없는 그에게 딱 맞는 일거리였다. 다른 일과 다르게 근무 주기도 정해져 있고, 그 정도면 물약을 사는 데 지장은 없어 보였다.
 “이거나 할까.”
 줄리엔은 어슬렁거리면서 용병 길드로 향했다. 일단 이것도 퀘스트이기 때문에 용병 길드를 통해서 시작해야 한다.
 “아저씨.”
 “아이고, 사제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르바이트하려고요. 저기 인형 눈 붙이는 일요.”
 “아, 그거요? 돈도 얼마 안 되고 도움 될 것도 없는데요. 그 시간에 나가서 고블린이나 몇 마리 잡지 그러세요. 안 그래도 요즘 사제 구하는 파티가 많던데. 그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아르바이트할래요.”
 “뭐, 정 그렇다면야······.”
 용병 길드의 남자는 서류를 뒤적거려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줄리엔에게 넘겼다.
 -아르바이트 퀘스트 ‘인형 눈 붙이기’를 받으셨습니다. 보상은 하루 일당 50실버입니다. 받으시겠습니까?
 줄리엔은 주저하지 않고 그 종이에 사인했다.
 “어디 보자, 저기 공방 4층이네요. 열심히 해 보세요. 그리고 일거리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오세요. 사제님은 항상 환영입니다.”
 “네.”
 줄리엔은 어슬렁거리면서 공방 4층으로 향했다.
 그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형에 눈을 붙이고 있었다. 일단 이 도시의 특산품 중 하나니까. 물론 그것을 사 가는 유저는 없지만 설정은 그렇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유저는 하나도 없었다.
 “무슨 일인가?”
 “아르바이트하려고 왔는데요?”
 “아, 그래?”
 줄리엔은 주저하지 않고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그걸 받아 본 후덕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그를 빈자리로 안내해 줬다.
 “자, 여기 바늘하고 실하고 인형하고 인형 눈. 바느질할 줄 알지?”
 “바느질요? 할 줄 모르는데요.”
 “끙, 원래 이런 기술은 맨입으로 가르쳐 주면 안 되는데.”
 잠시 고민하던 아주머니였으나 결국은 결심했는지 손을 내밀었다. 당장 일이 밀려 죽겠는데 오랜만에, 아니 처음 온 아르바이트생을 이대로 보내 버릴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지. 일단 내가 알려 줄 테니까 배워. 처음에는 좀 힘들 거야.”
 “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바느질을 배웠다.
 -스킬, 바느질을 배웠습니다. 숙련도 초급 0%
 ‘처음 보는 스킬인데, 새로 생긴 건가.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뭐, 상관없지. 사냥 나갈 것도 아니고.’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인형 눈을 들었다. 그러고는 적당한 위치에 붙이기 시작했다.
 “앗! 따가워.”
 -바늘에 찔렸습니다. 1데미지를 입습니다.
 ‘이것도 공격이라 이거냐?’
 바늘에 찔리자마자 뜨는 창을 본 줄리엔은 기가 찼다. 도대체 1 데미지라니, 그건 멍하니 앉아만 있어도 순식간에 차는 정도였다.
 “조심하라니까. 찔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인형에 피 묻으면 일당에서 깔 거야.”
 “네.”
 줄리엔은 조심스럽게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 * *
 
 “그거 은근히 힘드네.”
 2주간 바느질만 해 댄 줄리엔은 머리를 흔들었다. 재미 삼아 시작한 아르바이트였는데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시간대 효용에서는 사냥보다 훨씬 못하니 유저들이 하지 않을 만도 했다.
 -바느질 스킬 초급을 마스터하였습니다. 이제 중급으로 넘어갑니다. 천이나 가죽 등 바느질이 필요한 물건에 추가 효과가 발생합니다.
 “수고했다. 일당이다. 오늘이 딱 2주째지? 수고했다는 의미로 오늘 일당은 20실버 더 넣었다. 덕분에 살았어.”
 후덕한 아주머니가 동전이 든 주머니를 내밀면서 씩 웃었다. 2주간의 퀘스트가 끝나고 받은 돈은 의외로 짭짤했다. 이틀에 1골드, 보름간 약 7골드 되는 돈이었다. 물론 사냥에 비하면 턱도 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돈을 처음 벌었다는 것은 새로운 재미였다.
 “감사합니다.”
 줄리엔은 그걸 받아 들고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아, 따뜻하다.”
 나른한 표정으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는 줄리엔. 바느질 아르바이트를 했더니만 온몸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진짜 사냥이라도 나갈까?”
 물약을 살 돈도 넉넉하니 슬슬 사냥을 갈까 생각하는 줄리엔.
 하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곳은 저렙 지역이다. 한데 그의 눈앞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엄청난 고렙. 그래 봐야 로미오보다 아래지만.
 하여간 그런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뿐만 아니라 몇 가지 물품을 집중적으로 사들이고 있었다.
 “전쟁인가?”
 그는 길드 마스터다. 어떤 시기에 이런 모습이 나오는지 대충은 알고 있다. 문제는 상대가 누구냐는 것이다.
 “붕대 삽니다! 붕대 다 사요.”
 “약물 삽니다! 강화 물약, 치료 물약, 마나 물약 다 삽니다.”
 “용병 구해요! 레벨 130 이상 일당 50골드 드립니다.”
 “뭐, 나랑은 상관없지.”
 줄리엔은 갓 레벨 10의 저렙이다. 전쟁에 참가할 만큼 레벨이 높지도 않거니와 이 레벨로 참가해 봐야 사상자를 늘려 주는 것 말고는 의미가 없다.
 “그나저나 뭘 한다······. 사냥을 가? 아니야, 그건 힘들 거 같은데.”
 굳게 닫힌 성문을 보면서 줄리엔은 중얼거렸다. 문이 닫혀 있다고 못 나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가 봐야 사냥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분위기로 봐서는 분명 전쟁이 코앞에 닥친 듯한데 그렇다면 상대가 어딘가에 대기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경험상 전투를 앞두고 대기할 만한 공간은 사냥터. 쓸데없는 전력의 누수를 막기 위해서라도 근처 최하 레벨 지역에서 대기할 것이 확실했다. 그 최하 레벨의 사냥터가 바로 줄리엔이 가야 하는 곳이었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아르바이트하지 말고 렙업이나 할걸.”
 다른 아르바이트를 할까 했지만 벽보판은 썰렁했다. 과거의 바보 같은 인공지능이 아니다. 전쟁의 낌새를 느낀 NPC들 중 전투와 관련이 없는 NPC들은 벌써 대피하고 난 후였다.
 “뭐 할 게 없네.”
 다른 지역의 저렙존까지 가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문제는 돈이다. 이 게임에서는 웹 게이트를 이용하는 데 엄청난 돈이 든다. 물론 그 정도 돈이야 본캐릭터인 로미오에서 조금 가지고 오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그는 그렇게 미친 듯이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본캐릭터에게 도움을 한번 받으면 또다시 그의 폐인 기질이 발동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키우기로 한 결심을 쉽게 꺾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자네, 돈 벌고 싶지 않나?”
 “돈요?”
 “그래, 보아하니 저렙 같은데 말이야.”
 “그렇기는 한데, 누구세요?”
 “아, 내 소개를 하지. 난 테인 길드의 사이린이라고 하네. 재무 담당이지.”
 ‘테인 길드면 중소 길드인데 무슨 일이지? 아, 그러고 보니 이 도시가 테인 길드 소속이었지.’
 테인 길드는 원래 가족형 길드에서 시작했다가 급성장한 케이스였다. 그러고 보니 사이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중년은 되어 보였다. 말투도 점잖았다.
 “전 저렙이라서 용병으로 참가는 못 하는데요?”
 “아니, 용병이 아니라 말일세······. 혹시 붕대 좀 만들어 줄 수 있나?”
 그러고 보니 자신과 비슷하거나 또는 자신보다 약간 레벨이 높은 유저들 몇 명이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열심히 붕대를 만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줄리엔은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돈이 부족하구나.’
 이곳이 테인 길드의 도시라면 방어적 입장일 것이다. 그런데 공성전이 닥쳐온 지금 상황에서 이렇게 급하게 붕대를 조달하는 것은 분명 자금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물약은 즉효성인 데다 대기 시간도 1분 정도로 짧다. 그에 비해 붕대는 대기 시간이 5분이나 걸린다. 그만큼 값도 싸고 효과도 별로 없어서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붕대를 구입할 정도면 물약을 살 만큼의 자금력이 안 된다는 소리다.
 ‘나쁘지 않겠는데.’
 어차피 본캐릭터의 도움 없이 느긋하게 키우기로 한 부캐다. 그러니 굳이 급하게 키울 필요는 없었다.
 “뭐,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가 봐야 사냥도 못 하는데 뭉그적거리면 뭐하나.
 푼돈이라도 있으면 캐릭터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그런 생각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유저들이 더 돈을 많이 주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저는 천이 없는데요?”
 “천은 내가 주도록 하지. 단, 나중에 붕대 값에서 천 값은 빼겠네.”
 ‘쳇! 짠돌이 아저씨네.’
 줄리엔은 내심 투덜거리면서 천을 받아 붕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 붕대지 기존의 천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정도가 다였다. 그게 스킬이라는 것이 더 웃긴 일이지만.
 그때 의외의 일이 생겼다.
 -압박붕대가 만들어졌습니다. 바느질의 영향으로 붕대의 생명력 재생 효과가 100% 상승합니다.
 “응?”
 붕대 하나를 만든 순간 눈앞에 창이 뜨는 바람에 그는 뭔가 하고 보았다. 멀쩡해 보이는 붕대였다. 그런데 재생 효과가 상승했다니?
 
 
 압박붕대
 꼼꼼한 수제 붕대. 기존의 헝겊 쪼가리가 아니라 실용적인 형태로 제작하여 상처 부위를 더욱 효과적으로 압박한다.
 효과 : 에너지 회복량 1,800, 출혈 효과 제거
 
 
 “압박붕대? 출혈 효과 제거? 음, 바느질 효과인가?”
 기존의 붕대는 사실 붕대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천을 찢은 정도? 하지만 이번 것은 제대로 된 형태의 붕대였다. 거기다 회복량 1,800이면 기존 붕대의 두 배다.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레벨이 높아질수록 좋은 붕대를 쓴다. 하지만 그만큼 천 가격이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싸구려 천으로 1,800의 회복량이라니.
 “생각보다 쓸 만하네.”
 바느질 스킬은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쓸 만하다는 사실을 안 이상 그냥 쓰기로 했다. 붕대에서 이러니 혹시나 재봉술과 함께 사용하면 더욱 좋은 효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신기한 마음에 열심히 만들다 보니 어느새 그 많은 천이 거의 다 사라졌다. 그만큼 붕대도 가득했다.
 “끝난 거 같군.”
 “네?”
 줄리엔은 사이린의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원래 목적은 내다 팔 붕대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더 좋은 붕대를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에 내다 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엄청나게 만들었네.’
 인벤토리에 가득한 붕대를 보니 어지간히 열심히 만들기는 한 모양이다.
 “붕대 만드느라 수고했네. 여기,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쓰도록 하게나. 저렙이니 열심히 키우게. 나중에 길드에 가입할 생각 있으면 나를 부르고 말이야.”
 반짝이는 금화 두 개를 건네는 사이린.
 줄리엔은 그 돈을 냉큼 받았다.
 “아, 네. 감사합니다.”
 아르바이트로 나흘간 일해서 벌 돈을 몇 시간 꿈지럭거려서 벌었다. 그는 충분히 만족했다. 경매장에서 적절한 아이템을 사서 사냥한다면 캐릭터를 키우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내심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가 떠올라 흐뭇하기도 했다.
 줄리엔이 그러든 말든 사이린은 붕대를 들고 본진으로 갔다. 얼마 후면 대륙전기의 3대길드 중 하나인 오캄 길드에서 공격해 올 것이다.
 그렇게 걸어가면서 손에 들린 붕대를 점검하던 중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모양이 약간 다른데.”
 그는 줄리엔이 만든 붕대가 여느 붕대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 것은 말 그대로 천을 찢은 수준인데 이건 중간이 약간 볼록한 형태.
 ‘붕대가 아니라 다른 건가?’
 하루 종일 붕대만 사서 이제는 붕대에 대해서 논문을 써도 될 정도로 달인이 된 그는 혹시나 사기가 아닌가 하고 그중 하나를 들었다. 사실 붕대는 사기 칠 가치도 없는 물건이지만.
 “헉!”
 감정해서 그 성능을 확인한 사이린은 깜짝 놀라서 몇 번이나 살펴봤다. 확실히 효과가 좋은 물건이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붕대를 만들던 사람을 향해 서둘러 뛰어갔다.
 다행히 줄리엔은 아직 그곳에서 남아 있는 천으로 붕대를 만들고 있었다. 사이린이 가져간 붕대가 많기는 하지만 몇 장의 천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양은 얼마 안 되기에 그건 팔지 않고 자신이 쓸 생각이었다.
 “이봐.”
 “네?”
 “이거 자네가 만든 거 맞나?”
 “아까 사 가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자네가 만든 게 맞냐고.”
 “그런데요. 무슨 문제라도······?”
 “아니, 성능이 좋아서 말이야. 무슨 비법이라도 있나?”
 “다른 스킬하고 연계가 돼서 그렇습니다. 바느질이라고.”
 “바느질?”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효과가 좋다는 점이다. 붕대도 역시 사용에 제약 조건이 있다. 가령 한 번 사용하면 이후 5분간은 재사용하지 못한다. 그러니 에너지를 채울 수 있다면 한 번에 가능한 한 많이 채워야 한다. 치열한 전투 상황에서 에너지 1~2 차이가 생사를 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금 부족으로 물약을 충분히 구입할 수 없는 그들로서는 더욱 그랬다.
 “이 붕대 더 만들 수 있나?”
 “그럴 수야 있지만 지금은 천이 없어서······.”
 남아 있는 천으로는 잘해야 열 개쯤 만들 수 있을 듯했다.
 그러자 사이린이 다른 조건을 내걸었다.
 “그럼 우리 길드에서 천을 지원해 줄 테니 붕대 좀 만들어 주게.”
 “저기, 용병은 안 뛸 건데요?”
 “용병이 아니라 그냥 붕대만 만들어 주면 되네.”
 “음······.”
 줄리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전투에 참가하지 않을 거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었다. 그는 그저 따뜻한 햇볕 아래서 즐기면 되고, 붕대는 그러면서도 만들 수 있는 물건.
 “그러죠.”
 그 말에 사이린이 잠시 귓속말을 하더니 이윽고 저쪽에서 사람들이 힘겹게 오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행동은 서둘러 오는 듯한데 움직임이 영 느렸다.
 “도대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도착한 사람들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살다 살다 천으로 무게치 채워서 감속되기는 처음이네. 도대체 천은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 거예요?”
 “맞아요. 지금 성에서는 사람들이 붕대 만드느라 정신없구먼.”
 “이분이 붕대를 만들어 주실 거다. 넘겨 드려.”
 두 사람은 인벤토리를 열어서 천을 몽땅 꺼냈다. 그것은 그대로 줄리엔의 인벤토리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커허헉.”
 처음 느껴 보는 엄청난 무게감.
 -무게치가 80%를 넘었습니다. 움직임이 느려집니다.
 무게치가 90%를 넘었습니다. 움직임이 극도로 느려집니다. 체력 및 마력 회복 속도가 10% 감소합니다.
 무게치 99%가 넘었습니다.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체력 및 마력 회복 속도가 20% 감소합니다.
 천이 쌓이면 쌓일수록 무게치는 엄청나게 늘어나고 종국에는 이동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에게는 아직도 천이 남아 있었다.
 “설마 이걸 다 붕대로?”
 “부탁하네. 대신에 알바비는 섭섭지 않게 주지.”
 “끄으응.”
 이미 한다고 말했고 재료까지 지원해 줬기에 만들기는 해야 했다. 사실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칠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로그아웃해도 되지만 그러면 그는 도둑놈이 될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최대 길드의 길드장이 쪼잔하게······. 도둑질을 하려면 크게 하지 천 도둑질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없군.”
 줄리엔은 마지못해 다시 붕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압박붕대를 만듭니다······.
 그날 밤 평소보다 대륙전기를 오랜 시간 해야만 했던 줄리엔은 꿈속에서마저 붕대와 천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렸다.
 
  * * *
 
 날 좋은 일요일 아침, 다른 사람이라면 늦잠을 자든가 아니면 벌써 여행이라도 떠났을 시간이건만 현필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시원하게 물을 들이켰다.
 “캬.”
 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그는 물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고 리모컨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이 하는 짓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어느새 손에는 행주가 잡혀 있고 그것으로 붕대를 만들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증이군.”
 금요일과 토요일, 접속할 때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장미 길드의 사람들에게 잡혀서 계속 붕대만 만들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로미오로 접속해 장미 길드와 상대 길드 간의 전력 차를 보고는 차마 안쓰러워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공격 측은 장미 길드와 거의 동급인 3대길드 중 하나다. 그런데 방어하는 길드인 테인 길드는 가족형 길드다. 그 세력이나 전력 면에서의 차이가 확연했다. 그게 안쓰러워서 붕대를 만들어 주기는 했는데 그러다 보니 이제는 천 쪼가리만 보면 조건반사였다.
 “아으.”
 물론 그 바람에 이틀에 걸쳐 40골드나 벌었다. 레벨 10에 이 정도 돈이면 충분하다 못해 펑펑 쓰고 다녀도 되는 양이었다. 하지만 대신 붕대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혜원이는 학교 갔나?”
 고 2짜리 불쌍한 그의 여동생에게 묵념하는 현필. 약속대로 피에르 가루탱 가방을 사 주려고 했으나 고 2에게는 그런 것을 살 시간이 없었다. 주말인데도 학교로 가 버린 불쌍한 여동생이었다.
 잠깐의 묵념으로 그를 달달 볶았던 동생에게 애도를 표한 후 현필은 어제 먹다 만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애청 프로그램이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대륙찬가의 이미영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영준입니다.
 두 사회자가 밝은 모습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대륙찬가는 이제 방송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이야깃거리였다. 그래서 과거에 스타크래프트가 그랬듯이 정규 프로그램이 편성될 정도였다.
 대륙전기는 또 다른 세상 혹은 또 다른 지구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이용자가 많고 또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었다. 모험과 환상, 낭만이 살아 있는 세계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였다. 더군다나 사회를 맡은 여자의 미모도 프로그램의 인기에 한몫했다.
 무엇보다 이 프로가 가장 인기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 정보가 많이 공개된다는 것이었다. 대륙전기의 개발사 대지 소프트는 그 안의 콘텐츠를 공개하지 않는다. 물론 필수적인 것은 공개하지만 대부분은 비공개를 원칙으로 한다. 왜냐하면 그 많은 콘텐츠들을 유저들 스스로가 찾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게임 서비스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 새로운 것을 발견하곤 했다. 그러한 소식을 가장 먼저 이야기해 주는 곳이 바로 이 방송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 내용과는 조금 달랐다.
 -오늘은 특별 손님으로 대륙전기를 개발한 대지 소프트의 이나영 팀장님이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안녕하세요, 대지 소프트의 이나영이라고 합니다.
 긴장한 듯 뻣뻣하게 굳은 정장 차림의 여자가 카메라를 보면서 힘겹게 미소 지었다.
 “대지 소프트에서 웬일이래? 그나저나 이름이 한 글자 차이네. 크크, 자매인가?”
 현필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나 방송 처음 출연해요.’ 하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이나영이라는 여자를 보고 웃었다. 왠지 모르게 관심이 갔다.
 대지 소프트는 베일에 가려진 회사다. 실시간 감각접속이라는 획기적인 방식을 만들어 낸 것도 대단하지만 거의 역사나 마찬가지인 대륙전기에 오류가 없다는 사실도 그랬다.
 게다가 언론 플레이를 극도로 꺼리는 회사 중 하나였다. 그런 회사에서 누군가를 방송에 내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방송사에서도 궁금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대지 소프트는 비밀리에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방송에까지 나오시다니 대단하시네요.
 -호호, 비밀을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니랍니다. 유저들이 찾아가는 즐거움을 망치고 싶지 않을 뿐이지요. 대륙전기의 목적이 모험과 낭만이잖아요. 다 알고 찾아가면 모험의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개발자님이 이렇게 미녀인 줄 몰랐는데요.
 미영의 말에 나영은 씨익 웃었다.
 -전 개발자라기보다는······ 그래요, 스토리 팀에 있습니다. 팀원만 백 명이나 되죠. 여러분이 플레이하는 대륙전기는 저희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방송에 출연하신 이유가 뭔지 참 궁금하네요. 게다가 먼저 출연 제의까지 하시다니, 호호호. 그날 PD 얼굴을 보셨어야 했는데 말이죠. 뭐, 오늘은 다른 의미에서 얼굴이 밝네요. 호호, 미녀가 더 늘어서 그런 것 같은데요. 자, 그럼 왜 나오셨는지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사전에 이야기가 되지 않은 듯 미영 역시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이 프로를 진행하는 만큼 그녀도 게임의 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미영의 장난 어린 말에 그제야 조금 긴장이 풀리는지 나영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이건 여기서 처음 공개하는 건데, 저희 대지 소프트에서 이번에 대륙전기 시즌 2를 오픈하기로 했답니다.
 -시즌 2요?
 -예, 쉽게 말해서 확장 팩이라고 할까요? 여느 게임처럼 사냥터만 늘리는 게 아닙니다. 기본적인 시스템도 많이 바뀔 거고 중계 시스템을 도입해 게임상에서 직접 방송도 할 수 있게 만들 예정입니다.
 피자를 한 입 베어 물고 콜라를 머금었던 현필은 그대로 멈췄다. 다음 순간 콜라가 그의 입과 코에서 뿜어져 나왔다.
 “캑캑! 시즌 2······?”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라고 표현되는 대륙전기다. 그 게임이 시즌 2에 들어간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걸 플레이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천지개벽하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너무 갑작스럽네요, 시즌 2라니······. 언제부터 시작될 예정이죠?
 -사실 시즌 2는 이미 시작되었답니다. 기본 바탕에 들어갈 시스템이 잠수함 패치(유저들 몰래 하는 패치)로 깔린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시즌 2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건가요?
 -물론 아니죠. 베이스는 패치가 되었지만 새로운 대륙과 새로운 인던 퀘스트, 그 외에 여러 가지 부분이 들어가야 하니까요. 그래서 내일 저녁부터 사흘간 서버가 닫힐 예정입니다.
 -사흘이나요?
 의외였다. 대부분의 경우 패치는 하루면 끝난다. 그런데 사흘이라니. 물론 대륙전기가 다른 게임보다 훨씬 용량이 크긴 하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사흘은 긴 시간이었다.
 -패치되는 양은 기존 대륙전기의 세 배에 달하니까요.
 -그럼 이번 패치에서는 대륙전기 자체를 대대적으로 바꾼다는 거죠?
 바뀌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무엇이 바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사회자인 미영 역시 그렇게 묻긴 했지만 비밀주의를 표방하는 대지 소프트이기에 대답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순순히 대답하는 나영.
 -기존의 대륙전기와는 많이 다릅니다. 사실 저희는 이번 시즌 2가 새로운 시즌이라기보다는 시즌 3의 사전 패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와우! 대단하군요. 그럼 어떤 점이 바뀌는 건지······?
 -일단 다른 세력의 등장이랄까요?
 -다른 세력?
 “다른 세력이라고?”
 두 사회자와 현필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세력이라는 말은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금도 길드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세력 구도를 만들고 있는데 다른 세력이라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대륙전기는 유저들을 중심으로 인간들이 하나의 세력을 완성하고, 몬스터들이 하나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콘텐츠는 유저들이 그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정도에 그쳤는데, 이번에 두 개의 세력이 더 등장합니다.
 -그럼 신종족이라는 건가요?
 신종족이라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키우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아니었다.
 -신종족은 아니고 신세력이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겠죠. 물론 신종족도 등장합니다.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즌 1에서 대륙의 패자라는 퀘스트가 있었답니다.
 “암, 잘 알지.”
 현필은 그 이름만 듣고도 혀를 내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현필 같은 소위 말하는 개폐인조차 질리게 만드는 극악의 퀘스트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퀘스트와 노가다를 했지만 현필, 아니 로미오마저 포기할 뻔했을 정도로 200연퀘라는 말도 안 되는 과정을 요구하는 퀘스트였다.
 더군다나 난이도가 높아서 시작은 레벨 50인데 완료는 만렙이라고 칭해진 레벨 400에야 끝나는 지옥 같은 과정, 전 대륙을 뛰어다녀야 하는 고단함, 그 오랜 시간에 비해 수입은 적은 진짜 독한 인간들이 아니면 하지 않았던 퀘스트였다.
 -그 퀘스트의 연퀘인 건가요?
 “연퀘?”
 현필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이백 번의 연퀘도 토 나오게 힘들었는데 또 연퀘란다. 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좀 다릅니다. 그 퀘스트를 했던 유저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와중에 암흑 기사단이라는 존재가 나오는데, 그들이 이번에 신세력으로 등장합니다. 정확하게는 그들이 속한 세력이 등장하는 거지요. 물론 그들은 몬스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군도 아니지요. 말하자면 시즌 3을 위한 포석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시즌 3의 사전 포석이라고 말씀드린 거고요.
 “암흑 기사단?”
 현필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 퀘스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자면 과거 종교전쟁에 관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와중에 암흑 기사단이라는 현 종교와 다른 신을 믿는, 쉽게 말하면 이교도 단체가 등장해 그들과 싸우기도 한다. 한때 파티가 몇 번이나 전멸했을 정도로 강한 몬스터라고 기억한다.
 -자세한 것은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제가 여기서 유저 분들에게 알려 드리고 싶은 점은 이제 퀘스트는 퀘스트라는 의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기존에 부여된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퀘스트로 인해 대륙전기의 시즌 3이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는 거죠. 저희들은 퀘스트를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가 일반 퀘스트. 보통 유저들이 하는 퀘스트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죠. 기존에 서비스하던 퀘스트처럼 일반적으로 게임에서 지원하는 겁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어렵지도 않지요. 두 번째가 지원 퀘스트. 이건 일종의 특수 퀘스트인데, 특정 퀘스트를 하는 유저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가령 특정 퀘스트를 하는 사람들이 몬스터의 숲을 지나갈 때 이 지원 퀘스트가 선행되면 좀 더 쉽게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지요.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못하지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죠. 그 지역의 몬스터가 줄어든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쉽게 말해서 퀘스트를 도와주기 위한 퀘스트입니다. 마지막으로 역사 퀘스트. 단 한 번 그리고 단 한 명만 받을 수 있는 퀘스트죠. 영웅주의라는 시스템에 들어간 이 퀘스트는 성패에 따라 대륙전기의 역사가 바뀝니다. 즉, 성공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의 두 가지 시나리오가 존재하고, 그 결과에 따라 다음 패치 내용이 바뀌는 거지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시즌 3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시즌 2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시즌 2는 시즌 3을 위한 사전 포석이죠.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시즌 3의 역사가 바뀔 겁니다.
 -진짜인가요?
 미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라니.
 유저는 그저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말 그대로 역사의 한 축이 된다는 뜻이다. 물론 유저에게 영웅이니 하는 거창한 호칭을 달아 준 게임은 많았지만 결국에는 회사 측에서 제공한 콘텐츠의 일부였다.
 한데 이번 시즌의 결과에 따라 유저들은 다음 시즌을 선택할 수 있는 엄청난 선택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럼 세력이 두 개라는 것은······?
 -좀 전에 말씀드린 암흑 기사단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알 교단이죠. 그들은 여러분들의 선택에 따라서 다음 시즌에 적이 될 수도 아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언데드 군단이 새로 등장합니다. 이름이 좀 진부하죠? 그들은 제로 교단이랍니다. 호호. 언데드 군단은 암흑 기사단과 유저들에게 모두 적대적인 자들이죠. 즉, 이제부터 대륙전기에서는 유저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 군단과 기존의 몬스터로 대표되는 악마 군단, 암흑 군단 그리고 언데드 군단이 역사를 이루어 갈 겁니다. 물론 그 선택은 여러분에게 달렸지요. 참고로 역사 퀘스트는 한 개가 아니고, 그걸 찾아내서 클리어하는 것 역시 여러분들의 손에 달렸습니다.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시즌 3은 열리지 않는 거지요.
 그녀의 말에 어이없어하는 사회자들과 현필.
 현필은 가슴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역사 퀘스트라······.”
 지존이라는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남은 것은 없었다. 물론 엄청난 돈이 들어왔고 게임상에서 권력도 대단했다. 그가 죽이고자 하면 누구든지 게임을 접어야 할 판국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현필이 원하는 명예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뭔가 다른 형태의 명예가 필요했다.
 그때 현필의 귀에 쐬기를 박는 목소리.
 -아, 그리고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는데요.
 -중요한 거요?
 -시즌 3에서 나오는 직업 역시 여러분들이 찾아야 한답니다.
 -그게 무슨······.
 직업까지 찾아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쉽게 말해서 이거죠. 역사 퀘스트는 몇 개의 직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일 하나의 역사 퀘스트를 시작했고 그 직업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면 시즌 3에 선택 가능한 직업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역사 퀘스트를 하면서 찾아내지 못하면 등장하지 않죠. 그건 신종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역시 여러분의 선택이랄까요? 참고로 역사 퀘스트를 하는 분에 한해서는 그 직업을 시즌 2에서도 고수할 수 있게 했답니다. 음, 한정된 히든 클래스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많은 직업을 찾아낼수록 많은 능력을 가지는 셈이지요.
 그 말을 들고 현필은 입을 쩍 벌렸다.
 히든 클래스라니······!
 “그건 사기잖아!”
 
 
 
 2. 시즌 2, 그 찬란한 시작
 
 
 
 “박살이 났구만, 박살이 났어.”
 처참하게 변해 버린 성안으로 들어온 줄리엔은 여기저기 부서진 건물과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사흘간의 갑작스러운 패치로 미뤄진 공성전은 말 그대로 피 터지게 이루어졌다.
 시즌 2 첫 공성전이라는 기념비적 전투에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건 기적으로 이어졌다. 방관하던 많은 유저들이 참여를 바랐던 것이다. 전력 면에서 패배가 확실했던 테인 길드는 오캄 길드의 공격에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참여를 바라는 사람들이 용병을 구하는 테인 길드와 함께 싸우면서 전황이 바뀐 것이다.
 오캄 길드는 자신들의 세력을 믿고 용병을 구하지 않았다가 뼈저린 패배를 하고 말았다. 거대 길드로서 엄청난 치욕이었다. 하지만 테인 길드라고 해서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게임의 공성전은 한 가지였다. 피해를 감수하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 육박전을 벌이는 것. 하지만 중세를 기반으로 한 대륙전기는 사다리에 줄, 투석기까지 동원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엄청난 공성전이 벌어졌고 성 내부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아침 10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무려 6시간이나 걸렸고, 그사이에 던져진 투석은 장난 아니게 많았다.
 “엄청나네.”
 건물들이 망가진 것은 기본이고 거대한 바위에 맞아 완전히 사라진 곳도 있었다. 결정적인 문제는 다름 아닌 경매장이었다. 날아온 돌덩어리에 맞아 그대로 무너지면서 사용 불가가 된 것이다.
 테인 길드에서는 자원을 투입해서 복구를 서둘렀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단 방어를 위해 엄청나게 많은 자원을 쓴 데다 오캄 길드가 이번 패배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번에 붕대를 제작해서 받은 돈으로 경매장에서 아이템을 좀 사서 본격적으로 레벨 업을 하려고 했던 현필, 아니 줄리엔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의 레벨은 20이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극단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더군다나 아이템도 형편없었다. 보통 유저라면 벌써 버렸을 장비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 상태로 사냥을 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로미오나 키우러 갈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줄리엔. 어차피 시즌 2가 열렸고 또 만렙도 풀렸으니 키우려고 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아직 신대륙으로 가는 길이 발견되지 않아서 그래 봐야 별로 경험치에 도움이 안 된다. 더군다나 로미오를 키우기 시작하면 그는 분명 미친 듯이 거기에 매달릴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여유로움을 잠시 즐겨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어차피 그의 길드에서 정예를 뽑아 다음 대륙으로 넘어가 파티 사냥을 시작하면 렙 업은 금방이다.
 “그나저나 줄리엔을 키우고 싶어도 장비를 살 수가 있어야지. 경매장이 고쳐질 때까지 다른 일이나 해야겠다.”
 결국 줄리엔은 사냥을 포기하고 다시 아르바이트 게시판으로 향했다. 차라리 돈이라도 벌어서 조금이라도 좋은 아이템을 사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아르바이트는 전보다 훨씬 많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대부분이 건축 등 복구에 관한 일이었다.
 “어디 보자······. 다 건축이네. 건축이 아닌 건 하나뿐인가.”
 
 간호사 아르바이트 구함
 이번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현재 마을의 병원은 포화 상태입니다. 도와주실 분을 구합니다.
 하루 55실버.
 하급 이상 붕대 제작자 환영
 
 “이거나 해야겠다.”
 비록 NPC들이라지만 워낙 사실적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보니 사람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잔인성 문제로 잔인한 장면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즐거운 것은 아니다. 거기다 하급 이상의 붕대 제작자란다. 지금 그는 이틀간의 엄청난 노가다로 붕대 제작만은 하급이었다. 그러니 대환영할 대상이었다.
 “그럼 병원으로 가 볼까나.”
 줄리엔은 용병 길드에서 퀘스트를 받고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용병 길드는 멀쩡했다. 사실 기본적인 퀘스트 지급 장소이니 공격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퀘스트를 받고 병원에 갔을 때 다른 곳과 다르게 아직 전쟁이 한창이었다.
 “저기요······.”
 “끄아아악!”
 병원 안은 난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워 있었으며,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환자가 들어왔다.
 “누구야? 바빠 죽겠는데. 잡상인은 딴 데로 가.”
 “그게 아니라 여기서 아르바이트할 사람을 구한다고······.”
 “아르바이트? 아, 도와주러 온 건가? 마침 잘됐군.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했는데. 당장 일 시작하게. 일단 응급 환자를 살리는 게 우선이야.”
 
 
 나이팅게일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마을 사람들이 부상에 신음하고 있다. 그들을 30명 이상 살려라.
 제한 시간 : 1시간
 대상자 : 중상 이상자
 실패 조건 : 대상자 10명 이상 사망
 보상 : 스킬 의료술(발동 조건: 사제)
 
 
 의료술이라는 낯선 말에 줄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의료술이라······. 역시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생긴 건가?’
 시즌 2가 열렸다. 역사 퀘스트를 받기 위해 다들 난리를 피우는 상황이었기에 새로운 스킬이 생겼다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대지 소프트야 원래 비밀주의로 게임을 운영하니까.
 사실 감춰진 퀘스트가 많은데 스킬이라고 그런 것이 없겠는가. 더군다나 그가 사제이니만큼 의료술이라는 것이 쓰레기 스킬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하네. 그사이 난 저쪽에 있는 환자들을 살펴보지. 빌어먹을! 도대체 붕대는 언제 도착하는 거야?”
 의사는 서둘러 다른 환자를 보러 갔다.
 줄리엔은 시간을 보고는 느긋하게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 삼십 명이지 막상 당해 보니 절대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부상자가 계속 들어왔기 때문이다.
 “힐!”
 꼴깍.
 첫 환자는 영창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죽어 버렸다. 퀘스트의 특성상 경상자는 치료를 해 주어도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즉, 중상자 이상만 치료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중상자들은 벌써 많은 수가 죽었다.
 물론 치료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중상자 한 명을 살리는 데 들어가는 마나가 절반이다. 대다수 중상자들은 출혈 효과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완벽하게 치료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사이 야금야금 피를 다 깎아 먹고 죽는다.
 “힐링!”
 시작한 지 5분째, 네 번째 환자를 치료했다. 하지만 남은 환자는 아직도 이십육 명. 그리고 그의 마나는 제로.
 물약을 먹으면서 치료한다고 해도 성공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만만하게 본 것이 화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레벨도 낮은 사제인 데다 장비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힐러의 특성상 다른 직업과 다르게 힐에는 숙련도라는 것이 없지만 말이다.
 “끄어어억! 어머니!”
 처절하게 어머니를 부르며 죽어 가는 한 남자.
 퀘스트의 실패 제한은 열 명의 사망자 발생. 벌써 네 명이나 죽었다. 이대로 나가면 1시간에 삼십 명을 살리기는커녕 다 죽을 것이 뻔했다.
 “크흑.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난생처음 본 스킬이다. 시즌 2에 나온 새로운 스킬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 역사 퀘스트와 관련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
 하지만 마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차려면 시간이 걸린다. 즉효성 마나 재생 물약을 먹는다 해도 사용 제한 쿨타임이 있다.
 그 순간 줄리엔, 아니 현필의 폐인 기질이 터져 나왔다. 남들이 다 안 된다고 했을 때 그는 미친 듯이 달라붙었다. 그리고 이룩해 냈다. 레벨이 높다고 길드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누군가를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 부분에서 현필은 폐인을 넘어 초인이었다.
 “그냥 보낼 수는 없어.”
 “케엑. 나 죽어!”
 “시끄러워! 살리고 볼 일.”
 “아악!”
 “닥쳐!”
 죽어 가는 사람들 그리고 힐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은 다름 아닌 붕대질.
 붕대질이 만능은 아니다. 사실 숙련도가 중급이라 해도 붕대질로 많은 에너지를 채울 수는 없다.
 하지만 마나가 차는 동안 출혈로 인한 사망은 막을 수 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재봉술로 만든 압박붕대가 충분히 있다. 물론 그 붕대질이라는 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날 죽여!”
 “이 악마!”
 꼼꼼하게? 살살? 그런 것 없다. 출혈을 막기 위해서는 그 부위를 붕대로 꽉 졸라매야 한다. 그래야 피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경우 환장하게 아프다는 것이었다.
 “끄어어!”
 고통을 참지 못한 한 남자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줄리엔의 붕대질은 멈추지 않았다. 사실은 그 정도로 꽉 매지 않아도 되지만 사람에 따라 힘의 강도를 조절해 가면서 매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함께 일하던 간호사들은 공포를 느꼈다. 피 묻은 붕대를 휘두르면서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들을 마구 묶어 댄다. 그들이 비명을 지르든 말든 풀지도 못하게 꽉 묶는다. 그 와중에 옷과 얼굴 그리고 머리카락에 피가 튄다. 상처에 올려놓은 약초가 튀어 피와 함께 그로테스크한 얼굴을 만든다.
 간호사들은 그런 줄리엔이 악마처럼 느껴졌다.
 “끄아악!”
 “힐링!”
 마나가 어느 정도 차자 줄리엔은 가장 위중해 보이는 환자에게 힐링을 시전했다. 간신히 그의 치료가 끝났을 때 마나는 또다시 바닥이었다.
 “붕대 더 가져와!”
 ‘차라리 죽고 싶다.’
 호러 영화에 나오는 피 흘리는 괴기스러운 의사들을 본 적이 있는가? 광기에 물들어 피 묻은 붕대를 흔들면서 외치는 모습.
 그런 그에게도 고난의 순간이 닥쳐왔다.
 “붕대가 떨어졌습니다.”
 그 말에 죽어 가는 환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죽을 테지만 품격은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줄리엔은 절대로 그렇게 두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찌익!
 사제를 뜻하는 하얀색 로브의 밑단이 쫙 찢어졌다. 붕대가 없다면 만들면 된다. 그는 천만 있으면 얼마든지 붕대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공포였다.
 “크아악!”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붕대가 없으면 옷으로.
 “아악! 차라리 날 죽여 줘.”
 “웃기지 마!”
 주변은 졸지에 야전병원으로 변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풍경은 없었다. 붕대질과 힐질 그리고 사방에서 날아오는 약초들.
 “붕대가 부족해!”
 로브에서 치맛단과 소매 등등 붕대로 쓸 수 있는 모든 부위는 다 뜯었다. 더 이상 어떻게 하기도 힘든 상황이 왔다.
 “거기 간호사, 치마 좀 찢어 주세요.”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사람 생명이 우선입니다. 찢어요.”
 현실에서라면 경찰이 잡아가기 딱 좋은 소리를 하는 줄리엔.
 간호사는 마지못해 치맛단을 찢었다. 확실히 사람 생명이 우선이었다. 치마가 길게 찢어지면서 붕대로 변했다. 그리고 그 붕대로 상처를 막았다.
 “크허헉.”
 붕대에 묶인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는 사이 미처 보지 못한 사람이 쓰러졌다.
 “한 명이 더 죽었습니다.”
 “후흡.”
 이로써 다섯 명 사망, 남은 시간 30분. 더 이상은 사망자를 만들 수 없다.
 “여유분의 옷감은 다 가져와요. 치맛단도 커튼도 모두요.”
 1시간 후 의사가 다시 응급실로 왔다. 그의 몸이 얼어붙었다. 평생 환자를 보살피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는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피가 흥건한 바닥, 피 묻은 수많은 붕대, 옷이 찢겨 나간 사람들, 저항하는 사람들을 묶고 있는 한 사제 그리고 광기로 가득 찬 그의 눈.
 “이봐 끝났어. 이제 응급 환자는 없다고.”
 의사가 다가와 진정시키자 줄리엔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 꽉 묶은 붕대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죽을 정도로 위험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제가 너무 흥분했네요.”
 “누군가의 목숨을 책임진다는 게 그렇지. 부담감이 장난이 아니니까. 일단 자네가 먼저 좀 쉬어야겠어. 사무실로 가게나.”
 줄리엔은 사무실로 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눈에 보이는 수치들에 기가 막혔다. 이건 NPC들이 아닌 유저들에게만 보인다. 그런데 좀 어이없는 수치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붕대를 만드느라 간호사들의 치마는 졸지에 미니스커트가 되었다. 의식이 돌아온 환자들의 시선이 그곳에 가 닿았다. 그들의 머리 위에 연이어 나타나는 상태 표시들
 
 에너지가 10 회복됩니다.
 에너지가 10 회복됩니다.
 
 ‘도대체 이 게임을 만든 사람은 변태인가?’
 
 사무실은 조용했다.
 “덕분에 한 고비 넘겼네.”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쩐지 시선을 피하는 NPC였다.
 줄리엔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NPC 의사가 여전히 시선을 돌린 채 중얼거렸다.
 “아닐세. 사실 사제들은 이런 의료술을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네는 아니군. 자네도 느꼈을 테지만 힐링은 만능이지만 동시에 만능이 아니야. 치료에는 좋을지 몰라도 사람이 약해지지. 더군다나 마나가 없으면 말 그대로 무용지물. 그에 반해 의료술은 마나가 있건 없건 치료가 가능하지. 물론 상황에 따라서 방식이 변해야 하는 게 문제지만. 하여간 자네같이 열성적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은 처음 봤네.”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그동안 쓴 책이 있다네. 물론 사제이니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자네 같은 사람에게 주고 싶었다네. 받아 주겠나? 의료술은 의사든 사제든 상관없어.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면 되네.”
 책을 주면서도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있는 의사.
 줄리엔이 왜 저러나 하고 생각할 때쯤 드디어 의사가 얼굴을 붉히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일세.”
 “네?”
 “다리는······ 좀 가리는 게······.”
 그 말에 줄리엔은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다리가 뭐 어떻단 말인가? 다리는 그냥 다리다. 물론 게임이다 보니 진짜 다리는 아니었다. 미끈하게 잘빠진 자신의 다리······.
 “하하.”
 재빨리 테이블보로 다리를 가리는 줄리엔이었다.
 ‘맞다. 이거 여자 캐릭터지.’
 여동생 계정이라는 것을 깜빡했다. 사제복에서 거의 미니스커트로 변한 치마가 저 순진한 의사에게는 과도한 자극이었는지 그는 책을 주고는 재빨리 나갔다. 하지만 그는 바깥에 있는 간호사들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의사 선생님!”
 “코피가······!”
 “의사 선생님이 과다 출혈로 돌아가시겠어!”
 간호사들의 외침을 들으면서 줄리엔은 한숨을 쉬고 책장을 펼쳤다.
 “배우기.”
 그리고 떠오르는 스킬 창.
 
 
 의료술(마나가 아닌 기술로 사람을 치료하는 것)
 의료 장비가 필요합니다. 각 마을 의사에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마나와 상관없는 기술이므로 장비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중급 이상이 되면 제약술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약초를 배합하여 전문적으로 약을 만듭니다. 기존 약초술보다 뛰어납니다.
 
 
 줄리엔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로 사냥에서 마나가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파티원이 죽어 나가는 것을 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런 기술이 있다면 사제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더군다나 제약술이라는 하위 기술은 그의 레벨 업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응?”
 그런데 스킬 창에는 그것 말고도 하나의 스킬이 더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운 적이 없는 스킬이었다.
 “스킬 확인.”
 
 
 연계 스킬 발생-수술
 설명 : 여러 개의 스킬이 복합적으로 적용되는 연계 스킬 수술이 발견되었습니다.
 조건 : 힐러에 한함
  깨끗한 장소에서만 사용 가능
 지원 스킬 : 붕대술, 바느질, 의료술 필요
 효과 : 대상을 수술하여 능력치를 영구적 변화. 붕대술과 바느질, 의료술의 숙련치에 따라 성공 확률이 달라짐. 현재 성공 확률 10%
 제한 : 실패 시 랜덤하게 1주일 동안 능력치 대폭 하락. 랜덤하게 사망.
 
 
 로미오는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뭐야?”
 
  * * *
 
 “의료술이라······.”
 현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의자에 앉았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대륙전기의 메인 홈페이지가 떠 있었다. 그 안에는 시즌 2에 대한 최소한 몇 백개가 넘는 글이 가득했다.
 현필은 몇 시간에 걸쳐 그중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모조리 찾아보았다. 여러 가지 내용이 있었지만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없었다.
 “의료술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말이야.”
 그는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검색어를 쳤다.
 
 연계 스킬 수술
 
 하지만 나오는 내용은 간단했다.
 
 관련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연계 스킬이라는 것도 생소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수술이라는 스킬이었다. 영구적으로 상대의 스펙을 바꿔 버리는 기술이라니.
 “대지 소프트가 미친 건가?”
 게임에는 밸런스라는 것이 있다. 각 캐릭터들은 특정한 상황을 제외하면 무적이 아니다. 방어력이 강한 전사와 발이 빠른 도적과 사냥꾼 그리고 데미지가 강한 마법사 등 각자 직업에 대한 상태라고 해야 하나.
 가령 전사의 경우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무거운 갑주를 입는다. 그리고 그 갑주로 적의 공격을 버티면서 싸움의 최선봉에 선다. 물론 힘이 센 덕분에 데미지가 높기는 하지만 속력은 느리다.
 반면 도적은 빠른 속도로 치고 빠지는 것이 주요 공격 방법이다. 마법사는 장거리에서 강력한 데미지를 입히고, 그 외에도 많은 캐릭터들이 각자 직업에 맞는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한데 수술은 그 밸런스 자체를 붕괴시키는 기술이다. 물론 수술로 마법사나 도적보다 빠른 전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로또보다 운이 좋아야 한다.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능력치가 높아질수록 실패 확률도 높아지니까.
 사실 그것을 수술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은 캐릭터를 그만큼 강화시킨다는 이야기다.
 “흠. 뭐, 나쁘지는 않은 거 같은데. 문제는 어떻게 올리느냐인데.”
 현필은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졌다. 슬슬 자신의 본캐릭터인 로미오를 키울 시기였다. 하지만 수술이라는 스킬을 가진 줄리엔을 이제 와서 봉인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더군다나 그가 처음으로 찾아낸 스킬이다. 그동안 게임을 하면서 대륙전기에서 처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인던을 발견한 파티는 그것을 공개하지 않고 몇 주간 거기서 죽치고 말 그대로 폭렙을 한다. 자신도 그랬다. 처음 기술을 발견한 사람도 마찬가지. 그 기술을 마스터해서 엄청난 이점을 누린다.
 “으음, 역시 당분간은 줄리엔을 키워야 하나?”
 로미오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줄리엔을 키우기로 마음을 굳히는 그였다.
 
  * * *
 
 “홀리······라······이······.”
 캑!
 “홀리······.”
 캐액!
 “홀······.”
 캑!
 캬악!
 줄리엔은 바닥에 주저앉아 절망했다. 그의 직업은 사제.
 이 게임에서 가장 부족한 직업을 뽑으라면 단연 사제다. 어느 게임에서나 밀리 계열, 정확하게는 전투 계열만 키워 본 그였기에 새로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사제였다.
 사실 사제는 키우기가 상당히 어려운 직업이다. 일단 솔로잉이 힘들다. 마법사처럼 한방 데미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사처럼 튼튼한 것도 아니고, 사냥꾼처럼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다. 물론 회복에 특화되어 있지만 성기사처럼 튼튼하지 않기에 자신이 회복되기도 전에 죽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제는 타인과 파티를 해서 사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줄리엔의 경우, 정확하게 그 캐릭터로 플레이하는 현필은 조용하게 게임을 즐기고 싶었기에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로 이동한 상태였다.
 거대 도시 주변은 사람이 많다. 그런데 워낙 사제가 귀하다 보니 파티 요청이 쇄도했다. 그것을 거절하느라 사냥을 못 할 지경이었다. 문제는 이곳에 사람이 없으면서도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참자, 참자.”
 그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번 주문을 영창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 스킬 홀리 라이트. 사제의 최초 공격 스킬이자 주요 공격 스킬이었다. 하지만······.
 “홀리······.”
 칵!
 주문 영창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사람에게 맞아 죽고 마는 표적 몬스터.
 당연히 그로 인해 그의 영창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이 게임은 영창하다 실패하면 주문 마나의 20%가 증발한다. 물론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그렇게 야금야금 잃어버린 마나량이 너무 많았다.
 “이봐요!”
 모습이 여자라곤 해도 그는 엄연히 남자였다. 그리고 성기사만 주야장천 해 왔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여기는 이제 레벨 20대의 초보들이 다니는 최고 저렙존. 잘해야 레벨 15~23의 유저들이 사냥하는 곳이다. 더군다나 사람이 거의 없는 외곽이라 사냥하기가 더욱 한가로워야 한다. 하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레벨 40대의 전사는 그의 말을 상큼하게 무시하고, 보이는 족족 몬스터들을 잡아 죽였다. 한데 그런 작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너무한 거 아닙니까? 사람이 잡는 걸 뻔히 보고서.”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은커녕 줄리엔을 철저하게 무시한 채 저렙의 몬스터들을 학살할 뿐이었다.
 “이봐요.”
 “······.”
 “당신, 내 말 안 들려요?”
 “······.”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이 그런 식으로 무시하며 저렙 지역에 있는 몬스터를 싹 쓸어 가니 정작 사냥을 해야 하는 줄리엔은 몇 시간 동안 잡은 것이 고작 열 마리의 고블린이 전부였다.
 예전 같으면 채 1분도 안 걸릴 테지만 저렙에 긴 영창 시간에 싹쓸이해 가는 고렙들까지.
 “못 해 먹겠다, 진짜.”
 줄리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로그아웃했다.
 그리고 본캐릭터인 로미오로 다시 로그인했다. 아무리 그래도 길드장이니만큼 가끔 들어와서 이것저것 해결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형님 늦으셨네요.”
 “어. 일이 좀 있었다. 레이드는 잘 끝났냐?”
 “뭐, 길드원들 두둑하게 챙겨 줄 정도는 나왔습니다. 형님 입장에서는 잡템 수준이지만요.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로미오의 눈치를 보면서 세턴이 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미오가 아무나 죽이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평소에 화내지 않는 사람이 한번 화나면 어떻게 변하는지 잘 알기에 세턴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 한창 장미 길드가 성장할 때 타 길드와 충돌한 적이 있었다. 사냥할 공간이 충분한 사냥터임에도 자신의 구역이라고 선포한 타 길드가 그곳을 사용하려는 유저들을 죽인 사건이었다. 물론 장미 길드도 피해를 봤다. 전쟁을 선포해서 싸울 수도 있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상대방이 워낙 큰 길드였기에 다들 모른 척했다.
 그렇게 모두 쉬쉬하고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다름 아닌 로미오였다. 어차피 세력으로 봐서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대신 로미오는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그와 동료들을 완전 무방비 상태로 만든 것이다.
 장비와 무기를 해제하고 그들이 사냥하는 사냥터로 갔다. 그러고는 상대방이 기술을 쓰는 데 맞춰서 그걸 몸으로 막았다. 어느 정도 경험치 하락을 각오한 작전이었다.
 아무리 튼튼한 전사나 성기사라 해도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그걸 맞았으니 일격필살이었고, 그대로 죽으면서 경험치가 하락했다.
 아이템은 해제했으니 잃어버릴 것은 없었다.
 문제는 대륙전기가 PK에 대한 처벌이 강하다는 것이다. 물론 게임상에서의 살인이니 진짜로 경찰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독립된 하나의 세상이기에 살인자는 처벌도 있고 페널티도 있다.
 살인범 상태에서는 사망 시 무조건 1레벨 하락. 아이템 드롭률 80% 상승, 경험치 획득량 50% 하락, 체포당할 시 게임 시간으로 보름간의 감금 및 성내 출입 금지, NPC와의 대화 불가능, 퀘스트를 통해서 현상 수배되며 퀘스트 몹처럼 취급받는 등 재미 삼아서 하기에는 페널티가 극심했다.
 PK를 많이 하는 유저들이 항의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게임 개발사 측은 이건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하나의 세상이기에 그에 맞는 처벌을 할 뿐이라며 대응했고, 대륙전기의 사실적인 시스템을 우려하던 사회단체들도 그 결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줄리엔 일행이 그런 식으로 뛰어들어 자살해 버리니 상대방 모두 졸지에 살인자가 되었다.
 그걸 풀기 위해서는 장시간 사냥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줄리엔을 비롯한 장미 길드원들의 자살 작전으로 그 길드는 악명만 더 높아졌다. 종국에는 악명이 20,000이 넘는 길드원이 90% 이상이 됨으로써 게임상의 국가들과 단체들이 그들을 악의 집단 또는 반역 집단으로 규정, 본격적인 토벌 및 추적에 나섰다. 그로써 그 길드는 사실상 전멸해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그 규정에 대한 부작용을 알아챈 개발사 측에서 부랴부랴 규정을 바꿔 자살을 이용한 고의적 살인범 만들기를 막기 위해 유저 간의 싸움에는 사전에 용병 길드에 선전포고문을 내야 한다고 했지만 벌써 장미 길드의 명성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고, 그때부터 크게 확장되었다.
 그때 그 사건 말고는 로미오가 딱히 화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화난 표정이라니, 이건 작은 일이 아니었다.
 “글쎄 말이다······.”
 줄리엔은 부캐를 키우면서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이야기 했다. 물론 조용히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아는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들은 세턴이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네요.”
 “별거 아니긴! 이건 조직적인 사냥 방해라고! 예전에 그 길드 녀석들처럼 어떤 길드에서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는 거 아냐?”
 “사냥 방해는 아니고, 그거 작업장이에요.”
 “작업장?”
 “보통 짱깨라고 하는데 중국 놈들이 그렇게 현질해서 파는 거죠. 사실 고렙을 잡기 위해서는 캐릭터 레벨이 높아야 하는데 그건 힘드니 차라리 그쪽에서 주야장천 저렙 몹들만 잡는 거죠. 경험치도 거의 안 주지만 돈은 나오니까. 그마저도 요즘은 오토라고요. 사람도 없이 혼자서 하는 것. 하여간 이것도 오토가 있다니, 거참.”
 그러고 보니 그들이 줄리엔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중국 사람들이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걸 그냥 둬?”
 “막을 수가 없는걸요. 회사 측에서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는데 어디서 계정을 구하는지 주야장천 들어오니······. 그리고 법도 바뀌어서 현질도 법적으로 인정되는데 중국인들을 단속하자니 인권 단체에서 거품 물고 지랄하지, 죽여 버리자니 아시다시피 살인자 페널티가 장난 아니지. 그렇다고 옛날처럼 자살 작전 쓰자니 그건 이제 먹히지도 않고요. 그래서 대부분 손 놓고 구경만 하는 상태예요.”
 즉, 딱히 제재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두고 있다는 소리였다.
 로미오는 광분했다. 그들이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신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냥터를 점거하고 싹쓸이하는 통에 정당한 사용권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한고 있다.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과거에 그가 쓸어버린 악질 길드가 하는 짓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걸 콱!”
 “참으세요. 길드장이 살인자 되면 길드 분위기 안 좋아집니다.”
 세턴의 말에 로미오는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들을 죽인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다. 저들을 죽여서 살인자가 되면 손해 보는 것은 결국 그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겠군.”
 
  * * *
 
 다음 날 줄리엔으로 로그인한 현필은 그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확실히 레벨이 레벨인지라 그 지역을 싹 쓸어버리고 있었다.
 물론 그는 다른 지역에 가서 사냥해도 된다. 하지만 그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딱히 착하게 살아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게임상에서는 나름대로 지존이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플레이했는데 그걸 꺾을 수는 없었다.
 “저걸 그냥······.”
 사실 살인자를 각오하고 덤빈다 해도 이길 가능성은 요원해 보였다. 도리어 기계들에게 당하는 몬스터들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누구도 떠올리지 못한 해결책.
 몬스터나 유저나 베이스는 같다. 다만 몬스터는 사냥감, 유저는 사냥꾼일 뿐이다. 하지만 꼭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이거나 먹어라!”
 줄리엔은 상대방 오토와 싸우는 몬스터를 조준했다. 그리고 공격이 아닌 힐을 넣었다.
 이 게임을 하면서 유저나 NPC가 아닌 몬스터에게 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 힐이 들어갔다. 그것도 제대로.
 ‘경험치도 주네.’
 힐러의 경우 파티 사냥이 아니면 경험치를 분배받기 힘들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 힐을 하는 경우에는 소량의 경험치가 지급된다. 즉, 상대방이 몬스터라 해도 그건 가능한 것이다.
 “으흐흐, 죽어 봐라.”
 일단 오토로 잡히는 몬스터 중에서 강한 놈을 하나 골랐다. 그리고 피가 빠질 때마다 힐로 피를 다시 꽉꽉 채워 주었다. 아무리 레벨이 차이 난다 해도 하나는 피가 주기적으로 차고 하나는 그렇지 않다. 더군다나 한 마리를 잡는 데도 줄리엔의 힐로 인해 시간을 엄청 잡아먹고 결국 잡지 못한 사이 몬스터들이 리젠되면서 오토 사냥하던 프로그램은 포위당하고 말았다. 그다음은 뻔했다. 만고불변의 진리, 다굴에 장사 없다.
 “크아악!”
 허망하게 쓰러지는 오토 그리고 그제야 전투를 풀고 흩어지는 몬스터들.
 힐은 공격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공격당한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것뿐 아니라 줄리엔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무언가도 있었다.
 ‘아이템’.
 방금 죽은 오토 프로그램이 떨어트린 아이템.
 그의 레벨의 두 배가 넘는 아이템을 떨어트려 준 고마운 오토.
 사실 이런 푼돈은 그에게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차근히 게임을 즐기고 싶었다. 그런 생각에는 당연히 근검절약, 아이템 절약, 보이는 건 다 내 거 등의 구호가 있었다.
 “홀리 라이트!”
 병주고 약 준다고 하던가. 방금 전만 해도 힐을 해 주던 몬스터에게 줄리엔은 마법을 날렸다.
 
 “힐링, 힐링, 힐링.”
 “크아악!”
 또 한 명의 오토가 나가떨어졌다.
 힐링을 시전하던 줄리엔은 피가 거의 빠진 몬스터에게 다가가 한 방에 죽여 버림으로써 경험치를 비롯한 아이템을 그대로 꿀꺽했다.
 “고마운 것들, 흐흐흐.”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게임의 즐거움을 되찾았다. 그저 의무적으로 사냥을 다니고 장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여유를 부려 가면서 하는 것이다.
 그간 능숙해진 힐과 공격의 절묘한 조화로, 이제는 몬스터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만 힐을 주었다.
 그리고 오토가 죽으면 그대로 가서 몬스터를 한 방에 죽여 버리고 오토가 떨어트린 아이템과 몬스터가 떨어트린 아이템을 챙겼다. 당연하게도 그 덕분에 레벨과 숙련도는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으윽, 무겁다.”
 오토가 떨어트린 마지막 장비를 챙긴 줄리엔은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사제라는 캐릭터 특성상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짐을 챙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요 며칠간 죽어 나간 오토들의 장비를 챙기느라 빈칸이 없을 정도였다.
 ‘짭짤하구나.’
 장비들은 줄리엔의 마음에 쏙 들었다. 물론 몬스터들이 떨어트린 장비는 그리 좋지 않았다. 레벨도 레벨이고 소위 말하는 잡템 수준의 장비들. 그에 반해 오토들이 쓰던 장비들은 모두 다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여기도 끝이구나.”
 드디어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사냥한 덕분에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는 레벨이 되었다.
 그 와중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간혹 오토를 돌리던 주인들이 나타나서 꼬장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딱히 뾰족한 제재 방법이 없었기에 그가 나타나면 오토를 꺼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죽일 수야 있지만 살인자 페널티가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아저씨, 이거 사 주세요.”
 “오! 줄리엔 아닌가? 오늘도 수입이 짭짤한걸. 이렇게 벌면 부자 되겠어.”
 “헤헤.”
 가져온 잡템들을 내놓자 상점의 NPC가 반색하면서 그 물건들을 받았다. 가죽과 발톱 등 그저 장신구용으로 쓸 수 있는 물건들도 있었지만 녹슨 갑옷이나 무뎌진 칼날 같은, 녹이면 충분히 그 효용을 발휘하는 철갑류도 있었다. 이곳에는 광산이 없기에 이런 물건들은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나저나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면서?”
 “어느 정도 성장했으니 나가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야지요.”
 “암, 그렇지. 사람이란 새로운 것을 만나야 성장하는 법이니까. 그래, 준비는 다 끝났나?”
 “당연하지요.”
 새로운 세상, 새로운 모험, 새로운 동료.
 말 그대로 판타지의 로망이 녹아 있는 세상. 드디어 그곳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럼 조심해서 가게.”
 “아저씨도 건강하세요.”
 줄리엔은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나왔다. 이제 조금 더 큰 도시로 나갈 때였다.
 그를 기다리는 수많은 퀘스트들.
 사실 그가 지존이라곤 해도 그 많은 퀘스틀 다 클리어한 것은 아니었다.
 퀘스트는 그 수가 무척 많고 일부는 특정 직업을 요구한다. 더군다나 여기는 그의 주요 근원지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기에 저렙용 퀘스트는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내심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전직이었다. 지금 줄리엔의 신분은 수련 신관으로, 초보 사제에게 맨 처음 부여되는 직업이었다.
 레벨이 30이 된 지금 일반 신관으로 전직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전직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대신전에 가서 정해진 질문에 정해진 대답만 하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일반 신관으로 전직해야 쓸 수 있는 스킬도 있기에 줄리엔은 대신전으로 향했다.
 웹 게이트가 비싸기는 하지만 붕대 제작 알바와 오토가 떨어트린 장비를 판 돈으로 저렙치고는 돈이 넉넉하니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줄리엔은 터덜터덜 걸어 신전으로 향했다.
 현재 신전의 주신은 마스였다.
 다른 신도 있긴 하지만 과거의 종교전쟁으로 사라졌다.
 선한 신 마스와 마알 그리고 악신 아로와 제로. 신의 말을 곡해한 마스 교단이 마알 교단과 싸우고 난 후 마알 교단은 사라졌다. 그리고 현재 몬스터들은 대부분이 악신 아로의 수하라는 설정이었다.
 “저기, 전직하러 왔습니다만.”
 평소와 달리 어수선해 보이는 신전 안으로 들어선 줄리엔은 눈치를 살폈다. 보통 신전은 조용하고 정갈한 느낌이 난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산만하고 사제들의 시선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고위 사제님들이 회의에 들어가셔서 말입니다.”
 ‘회의? 그런 것도 있나?’
 줄리엔은 별생각 없이 의자에 앉아서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 시간, 신전의 내부에서는 심각한 내용의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암흑 기사단과는 이야기가 어떻게 되어 갑니까?”
 “우리의 어떤 행동에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과거에 한 잘못이 있으니 대답할 리가 없지요.”
 그 말에 대신관은 눈을 감았다. 얼마 전부터 나타난 암흑 기사단, 다시 나타난 마알의 기사들. 그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 못하게 잘 감춰 왔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과거의 실수가 지금에 와서야······.”
 암흑 기사단은 한때 그들과 같은 성기사단이었다.
 이 세계에는 두 명의 주신이 있다.
 자애와 평화의 신 마스 그리고 경쟁과 승리의 신 마알.
 문제는 이 두 명의 주신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스 교단이 교만에 사로잡혀 마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래전 두 종파 간의 종교 전쟁에서 마알이 패배하면서 마스만이 전 대륙에 퍼졌다.
 그리고 다시금 나타난 마알의 암흑 기사단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북방에 나타난 언데드 군단은 급속도로 그 수를 불려 갔다.
 언데드 군단은 기존의 악마 군단과는 달랐다. 악마 군단의 목적은 세계 정복이지만 언데드 군단은 세계 멸망 후의 새로운 질서 확립이다.
 선한 신인 마스와 마알 그리고 악신인 제로와 아로, 이들의 추종자가 한꺼번에 대륙에 나타나다니.
 “다시 한 번 그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입니다.”
 “하지만 아직 마알의 사도들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다른 적들도 나타나는 판국에.”
 현재 인간, 아니 마스 교단은 악마 군단인 아로의 부하들과 전쟁 중이었다. 지금까지야 어떻게든 평수를 이루었지만 제로의 부하들이 나타난 것은 그 평수를 깨트리기에 충분했다.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도움을 청하는 사절을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하지만 신관들에게는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단 심판관을 보내는 것이······.”
 “이단 심판관요? 그들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단 심판관은 지난번 전쟁에서 사라진 직업이었다.
 이단 심판관.
 보통 신전의 무력 하면 성기사를 뜻한다. 하지만 성기사 말고도 존재하는 무력이 바로 이단 심판관이다. 신성력을 쓰는 기사와 달리 이단 심판관은 사제 출신으로 적들과 싸운다. 그래서 성기사와 다르게 이단, 즉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과 접촉이 잦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주 임무는 이단을 조사하는 것. 그것은 이단의 종교를 배운다는 뜻이기도 하다.
 얼핏 들으면 이단 심판관은 광신으로 물들어서 자신이 믿는 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든 죽일 듯하다. 그러나 실제 이단 심판관은 좀 달랐다. 다른 종교와 접하고 싸우기 위해서 그들의 종교를 많이 공부한다. 그 덕에 타 종교를 가장 많이 이해하는 것도 그들이었다.
 지난번 종교전쟁을 극렬하게 반대한 것도 이단 심판관들이었다. 물론 결정된 후 선봉에서 싸우긴 했다. 어쨌든 그들의 일은 이단 심판이니까.
 하지만 애초에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승리한 뒤 이단 심판관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단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후 이단의 종교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이단 심판관이라는 어이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암흑 기사단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밖에 없었다.
 “방법이 없습니다. 알다시피 아로의 악마 군단은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든 견제할 수 있었지만 제로의 언데드 군단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겨 내기 힘듭니다. 마알의 암흑 기사단의 도움이 없으면······.”
 이방인들이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언데드 군단이 나타난 이상 그들만 가지고는 싸울 수 없다. 더 큰 도움이 필요했다.
 “신관님.”
 “무슨 일이냐!”
 한창 회의 중에 들어온 하급 신관의 말에 대신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중요한 회의인 것을 뻔히 알면서 들어오다니······.
 “아까부터 수련 신관이 전직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수련 신관? 그거야 나를 대신해서 아무나 가서 해 주면 될 것을.”
 “하지만······.”
 하급 신관은 대신관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 대신관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한참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절묘한 타이밍이랄까?
 “신의 이끄심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대신관은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 대기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신관들이 황망하게 그를 따라갔다.
 “헉!”
 순식간에 신관들에게 포위당한 줄리엔.
 그런데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신관들은 죄다 얼굴이 굳었고,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자네가 전직하러 온 수련 신관인가?”
 “그렇습니다만······.”
 ‘뭐야? 시즌 2가 되어서 전직하는 방법도 바뀐 건가?’
 전에는 그저 문답만으로 끝났는데, 우르르 몰려온 신관 무리라니······.
 상대가 아무리 NPC라도 줄리엔으로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대신관은 멍하니 줄리엔을 바라보았다.
 “저기, 제가 무슨 실수라도······?”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새로운 신의 지팡이가 어쩌고 하면서 퀘스트를 줘야 하는데 대신관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자네, 이교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교도? 음, 역시 시즌 2가 열리면서 전직 퀘스트가 바뀐 건가? 아, 진짜 아는 거 없는데. 뭐, 대충 대답하면 되겠지.’
 이교도라니, 영 껄끄러운 문제였다.
 종교라는 것이 어떤 영향력을 가졌는지 현실에서 종교전쟁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설마 게임상에서 종교 전쟁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물론 설정상 몬스터들은 악신을 섬기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나름 종교전쟁 중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결국 줄리엔은 소신껏 대답하기로 했다. 어차피 실패하면 1주일 후에 다시 하면 된다.
 “따로 이교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께서는 모든 인간을 평안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신전은 그 뜻에 따라왔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평안케 하는 것입니다. 설령 그 인간이 우리의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이교도라는 이유로 박해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이교도는 인간의 삶을 괴롭히는 자들일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드디어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사제로서의 자질이 부족해 보이는군.”
 ‘컥! 역시나 이교도를 싹 죽여야 한다고 했어야 했나?’
 졸지에 퀘스트를 받지 못하게 된 줄리엔은 세상이 노랗게 변하는 듯했다.
 “자네는 사제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게 나을 듯해.”
 “네?”
 “자네의 그 확고한 신념은 우리 교단에 꼭 필요하네. 우리 교단의 주요 신념이 사랑이라지만 모든 것을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 자네의 생각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군. 신보다 인간이 우선이라······. 맞는 말이야. 아이가 커서 부모의 품을 떠나듯이 인간도 언젠가는 신의 품을 떠나야 하는 시대가 올 걸세. 그때는 자네 같은 신념을 가진 자가 필요하지. 그러니 자네에게 신관이 아닌 다른 직업을 주도록 하지. 물론 강제는 아닐세.”
 “대신관님!”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이런 자가 나타난 것은 신이 우리를 이끄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이끌림대로 가 봅시다.”
 대신관의 말에 줄리엔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눈앞에 뜨는 창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새로운 직업을 발견하였습니다. 역사 퀘스트에 따라 다음 시즌부터 일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단 심판관
 설명 : 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처벌하여 신의 이름을 드높여야 합니다.
 제한 : 힐의 효율이 20% 저하됩니다.
  힐 이외의 다른 사제 스킬은 배울 수 없습니다.
 조건 : 1차 전직 전의 수련 신관.
 악행도 : 200 이상
 
 암흑 변환술
 설명 : 모든 이에게 사랑을 주시는 신이지만 그 적에게는 철퇴를 가합니다.
 효과 : 사용 시 치유 능력을 공격 능력으로 변환합니다.
  마법 저항력이 100% 상승합니다.
 제한 : 사용 중에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를 치료할 수 없습니다.
 
 속죄
 설명 : 일정 시간 몬스터를 속죄시켜 아군으로 만듭니다.
 제한 : 최대 두 마리만 가능합니다.
  통제 불가능
 추후 참회로 변환
 
 참회
 설명 : 몬스터를 상대로 사용 시 레벨에 따라 일정 시간 아군이 됩니다. 유저에게 사용 시 아군에 어떤 스킬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통제가 가능합니다.
 제한 : 최대 두 마리만 가능
  평타만 가능
 추후 개종으로 변환
 
 개종
 설명 : 상대방을 영구적으로 강제 개종시킵니다. 개종된 몬스터는 아군이 되며 성향이 빛으로 바뀌고 기타 스킬이 변환됩니다.
 제한 : 최대 두 마리까지 유지되며 사망 시 부활시킬 수 없습니다.
 효과 : 유저에게 사용 시 상대방의 공격은 아군에 치료 효과를 부여합니다.
 
 심판
 설명 : 상대방의 죄를 심판합니다. 상대방의 악행에 따라 데미지가 변환됩니다.
 추후 즉결심판으로 변환
 
 즉결심판
 설명 : 상대방의 죄를 심판합니다. 대상과 대상 주변의 적 또는 파티에 심판을 내립니다.
 효과 : 광역 공격
 추후 이단 심판으로 변환
 
 이단 심판
 설명 : 상대방을 이단으로 심판해서 대륙의 공적으로 등록합니다. 상대는 일정 시간 아군 진영의 최우선 표적이 되며 아군에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이단 심판을 받은 자는 아군에 공식적으로 몬스터로 취급받습니다. 그 기간 동안 아군 소속의 어떤 성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죽어도 풀리지 않으며 일정 시간이 지나거나 또는 10회 이상 아군에 죽어야 해제됩니다.
 제한 : 사용 시 레벨 1 하락
 
 처분
 설명 : 상대방에 신성 피해를 입힙니다.
 추후 처형으로 변환
 
 처형
 설명 : 상대방에 상당량의 신성 피해를 입힙니다.
 추후 처단으로 변환
 
 처단
 설명 : 상대방에 큰 신성 피해를 입힙니다.
 
 천사 강림
 설명 : 자신의 몸에 천사를 강림시킵니다.
 필요 조건 : 레벨 200 이상, 천사의 눈물
 제한 : 사용 시 3레벨 하락
 효과 : 천사는 그 자체로도 강력하지만 강림한 상태에서 아군은 전투 중 회복 속도 5배, 마나 회복 속도 5배, 방어력 3배 상승
 
 
 “커헉! 이건······.”
 난데없이 나타난 역사 퀘스트.
 줄리엔은 그저 저렙의 사제일 뿐이다. 그런데 역사 퀘스트라니.
 그는 황급히 상태 창을 열었다.
 “상태 창 오픈!”
 
 
 이름 : 줄리엔
 직업 : 수행 사제
 레벨 : 30
 :
 :
 
 
 그 외에 줄줄이 나오는 상태 창의 내용을 살피던 그는 맨 아래에 있는 악행도를 발견했다.
 “악행도라······.”
 그것은 나쁜 짓을 하는 유저에게 부여되는 일종의 벌점이다. 이 점수가 높으면 대륙전기에서 가끔 퀘스트 표적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유저들은 반가워하지 않을뿐더러 악행도를 올리지도 않는다.
 그런데 줄리엔은 악행도가 200을 넘은 상태였다.
 ‘어째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오토와의 싸움.
 오토와 몬스터가 싸울 때 몬스터에게 힐을 준 것이 기억난 것이다.
 “설마 그게 악행도를 올린 건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이 악행도를 올린 모양이었다.
 “어떤가? 받아들이겠는가?”
 대신관의 말에 줄리엔은 그를 보았다. 사제는 다른 직업들과 다르게 공격력이 무척이나 약하다. 물론 힐에 특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전투에 특화된 이단 심판관이라니. 더군다나 자신이 목표로 삼았던 역사 퀘스트까지.
 “하겠습니다.”
 줄리엔의 말에 대신관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어렵고 힘든 길이네. 하지만 자네를 보는 순간 알았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걸 말이야. 사실 이단 심판관은 어찌 보면 신의 뜻을 객관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자네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일세. 이게 바로 신의 이끌림이라는 것이겠지.”
 “하하하.”
 줄리엔은 멋쩍게 웃었다. 역사 퀘스트를 찾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번 경우를 봤을 때 그들에게 부여된 역사 퀘스트는 유저들의 예상과 다르게 레벨이 무시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유저들의 대부분이 역사 퀘스트는 어느 정도 이상의 레벨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다. 보통은 그게 당연하다. 1차 전직도 하지 않은 사제에게 역사 퀘스트를 준다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더군다나 악행도라니. 유저들은 악행도가 오르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극단적으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대륙의 공적이 되기도 하지만 악행도가 높으면 물건을 살 때 가격이 높아지거나 NPC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아서 퀘스트를 진행하기가 까다롭다.
 그러니 저렙의 사제는 줄리엔 같은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악행도가 제로다. 그리고 전직하는 순간 역사 퀘스트를 받을 자격이 없어지니 사실상 찾는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다른 역사 퀘스트도 이 정도로 감춰 뒀으면 찾기 힘들겠는걸.’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대신관이 줄리엔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내밀었다.
 “이건······?”
 “편지일세.”
 “편지요?”
 “그렇네. 아직 정식으로 공표하지 않았지만 지금 인간들에게는 큰 시련이 닥쳐오고 있네. 악신 제로의 언데드 군단이 북방에 나타났고, 아로의 악마 군단 역시 그 세를 불리고 있지. 우리의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한계가 있네.”
 “그렇습니까?”
 “더군다나 한때 우리의 형제였던 마알의 암흑 기사단이 다시 등장했네. 악신의 무리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네. 물론 우리가 과거에 잘못을 하기는 했지만 이제 남은 것은 그걸 참회하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수뿐이네. 자네가 이 편지를 암흑 기사단에 가져다주게나.”
 역사 퀘스트 ‘암흑 기사단의 진실’이 발견되었습니다. 대신관 바론이 화해의 메시지를 암흑 기사단에 넘겨주기를 바랍니다. 시작하시겠습니까?
 흔히 나오는 보상도 없다. 그리고 내용도 단 한 줄.
 예전 같으면 가차 없이 버릴 그런 퀘스트지만 지금은 달랐다.
 “하겠습니다.”
 줄리엔은 본격적인 시즌 2의 시작을 위해 그 퀘스트를 받아들였다.
 
  * * *
 
 “오늘 실적이 왜 이래?”
 중국에 있는 음침한 빌딩 안.
 한 사내가 눈을 부라리면서, 고개 숙인 젊은 남자의 싸대기를 날렸다.
 “죽고 싶냐?”
 “그,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게 아니면? 장난해? 너, 나 몰래 삥땅치는 거지?”
 사내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이 버러지 같은 중국 녀석들이 고용해 준 것을 고마워하기는커녕 그의 돈을 삥땅친단 의심이 들자 성격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한때 조직폭력배였다. 물론 조직이 경찰에게 완전히 작살나고 중국으로 건너와 지금은 이렇게 현질 공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 그가 성격이 좋을 리 없었다.
 “네가 지금 내 손에 뒤지고 싶구나.”
 사내의 손이 올라가는 것을 본 남자가 온몸을 움츠렸다. 실적이 저조하면 맞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워낙 발전한 오토 감시 프로그램 때문에 매 시간 신경을 써 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 튕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다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이런 식으로 맞아야 했다. 물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중국이라도 박봉에다가 맞고 살아야 하고, 쉬는 시간도 주지 않는 이런 아이템 작업 공장에 다니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저 사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는 중국 공안을 적절한 뇌물로 구워삶아서 자신이 신고해도 먹히지 않는 데다 여기를 그만두면 마땅히 취직할 곳도 없었다.
 “형님, 그만두시죠.”
 사내가 작은 체구의 남자를 때리기 직전 바짝 마른 또 다른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사내를 말렸다.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뭐?”
 “누가 자꾸 오토를 죽여서 그래요.”
 “오토를? 어떤 새끼야? 그걸 그냥 둔단 말이야?”
 기가 막힌다는 표정의 사내.
 살인자에 대한 대륙전기의 강력한 제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오토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큰 피해를 각오하고 살인자 노릇을 한다?
 “보시면 압니다. 저도 기가 막힌다니까요.”
 안경 사내가 화면을 녹화한 작은 DVD를 가져와서 돌렸다. 화면에는 줄리엔이 몬스터를 이용해 오토를 잡는 모습이 비쳤다. 오토는 저항도 못 하고 픽픽 쓰러졌다. 멀리서 다른 캐릭터로 그 장면을 찍은 모양이었다.
 그걸 본 사내는 혈압이 머리끝까지 올랐다.
 “뭐야, 저 새끼는?”
 “보시다시피 힐러인 모양인데요.”
 “그런데 저딴 걸로 우리 애들을 잡는단 말이야?”
 “그렇죠.”
 “가서 조져 버려.”
 가끔가다 살인자 페널티를 각오하고 오토를 잡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그럴 때면 이들은 미리 사 둔 계정으로 그들을 처리하곤 했다.
 “그게 말이죠, 저곳을 벌써 떴더라고요.”
 “떠?”
 그 말에 눈을 찌푸리는 사내.
 물론 그렇다면 별문제는 없다. 사냥꾼은 떠났고 자신들은 다시 오토를 돌리면 된다. 하지만 저자는 기존에 있던 살인자형 방해꾼과는 달랐다.
 “저걸 그냥 두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내가 바보냐?”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방법이 주변에 알려지면 자신은 더 이상 작업질 못 하게 되는 셈이었다.
 “애들 풀자.”
 “애들을 풀어요?”
 “그래. 저 새끼 게임 접게 만들어야 할 것 아냐. 아니면 이 돈 되는 장사를 접을래?”
 이 사업은 여러모로 돈이 된다. 회사가 중국에 있어서 세금도 안 내고 그렇다고 불법도 아니다. 더군다나 자본금은 조금 들고 나오는 돈은 많다. 그러니 이대로 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줄리엔과 이들의 악연의 시작이었다.
 
 
 
 3. 암흑 기사단의 발호
 
 
 
 “날 죽여 줘.”
 피골이 상접했다는 말이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살가죽과 뼈가 붙을 정도로 말랐다는 소리다.
 지금 이곳에 그 피골이 상접한 사람, 아니 사람들이 무더기로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허연 입김을 뿜어내면서 탁자에 누워 있었다.
 “죽을 거 같아.”
 이들이야말로 대륙전기의 핵심이자 중심 그리고 모든 대륙전기를 통괄하는 개발 팀이었다.
 게임을 만드는 데 중요한 부서가 네 개 있다. 첫째는 모든 유저들을 상대하고 게임 내 소소한 문제나 분쟁을 해결하는 관리자, 속칭 게임 마스터 GM팀, 둘째는 운영 정책을 관리하는 게임 운영 팀, 셋째는 게임의 중요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시나리오 팀, 마지막으로 넷째는 최고의 노가다와 고생을 자랑하는 게임개발 팀.
 물론 다들 고생은 한다. GM 팀도 운영 팀도 나름 고충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고충은 지금 이들만큼은 아니었다.
 게임을 만들고 그걸 유지하는 데는 이들이 필수적이니까.
 “제발······ 1시간만 쉬자.”
 닷새간 머리를 감지 않은 남자, 아니 좀비가 허연 김을 내뿜으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대륙전기가 오픈한 지 벌써 5년. 오래될 대로 오래된 게임이다. 물론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실시간 감각접속이라는 강점으로 지금까지 최고라는 자리에서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5년간 몇 번의 소소한 업데이트는 있었지만 거의 모든 콘텐츠가 드러났기에 사람들이 슬슬 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개발 팀에 떨어진 특명, 대규모 패치.
 그로 인해 사람들은 지난 1년간 반쯤 죽어 나갔다. 그리고 며칠 전 그걸 끝내고 이제는 마지막 정리 작업 중이었다.
 “상필 씨, 지금 잘 시간 없다니까!”
 “잘 시간이 아니라 기절할 시간이겠지. 어제 마지막 패치 올렸단 말이다. 좀 쉬게 해 줘.”
 죽어 가는 상필에게 매달린 나영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상필은 죽어도 움직이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몰라. 배 째. 오늘이 우리가 만난 지 천 일이 아니라 천만 일이라도 잘 거야.”
 “우리 만난 지 천 일은커녕 아직 1년도 안 지났거든.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누가 역사 퀘스트를 시작했어.”
 “뭐!”
 “뭐라고요!”
 “말도 안 돼!”
 가만히 듣고 있던 개발 팀원들이 절규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지막 패치를 하고 난 후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누군가 역사 퀘스트를 찾아내다니.
 역사 퀘스트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걸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퀘스트를 찾아낸 인간이 있단 말인가?
 “시즌 2가 열린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를 못 참고 시작했단 말이야?”
 상필은 황급히 모니터를 확인했다. 그 안에서는 지금 수행 중인 퀘스트의 목록이 쫙 나왔다. 하지만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가장 위에 있는 딱 한 줄의 퀘스트에만 집중했다.
 
 역사 퀘스트 ‘이단 심판관’ 실행 중
 
 “끄응, 이단 심판관이면 다음 시즌 직업이잖아. 쳇.”
 공개되지 않았지만 다음 시즌에서는 몇 가지 직업이 추가될 것이다. 선행 조건은 바로 유저들이 그 직업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 물론 찾아낸 유저에게는 그만한 혜택이 돌아간다. 숨겨진 직업을 찾아낸 만큼 그 능력을 가지게 되니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할까?
 그리고 이단 심판관의 경우 역사 퀘스트 중에서도 중요한 퀘스트였다.
 “아, 머리가 안 돌아가서 그러는데 이단 심판관이 뭐였더라?”
 잠을 못 잔 탓에 상필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더군다나 저 사악한 마녀이자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여자 친구가 스토리 팀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진짜······.’
 시즌 2와 시즌 3에 연결된 거대한 세계관과 스토리를 받았을 때 진짜로 농담이 아니라 상필은 이별까지 생각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다니. 쓰는 건 자유지만 만드는 건 그가 아닌가? 더 웃긴 건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허가한 상부였다.
 “이단 심판관이면······ 암흑 기사단 쪽이랑 연관된 걸 거야. 아마 다음 시즌에 적이냐 아군이냐 하는 퀘스트 중 하나일걸.”
 “끄응, 또 찾아낸 사람은 없고?”
 “일단은 그렇네.”
 상필은 자리에 앉아 한숨을 쉬면서 담배를 꼬나물었다. 물론 건물 안에서는 금연이다. 하지만 개발 팀의 지옥 같은 스트레스 때문에 담배를 끊을 수가 없었고 상부에서도 그걸 알기에 암묵적으로 모른 척해 주었다.
 “역사 퀘스트가 시작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시즌 2가 시작된 거지.”
 “아, 휴가 가고 싶었는데······. 그럼 언제가 공격이야?”
 “한 달 안에.”
 뿌연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올라가다가 천장에 막혀서 뱅글뱅글 돌았다. 그걸 본 팀원들 역시 담배를 꺼내 물고는 연기를 피워 올렸다.
 “휴가까지는 생각도 못 하겠군. 일단 내일까지 휴식.”
 상필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역사 퀘스트는 어렵다. 유저들에게뿐만 아니라 이들에게도.
 하나의 퀘스트를 위해서 시스템을 다 바꿀 수는 없기에 유저의 움직임에 맞춰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퀘스트 진행 한 달 후부터는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즉, 휴식을 취할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실망감에 휩싸인 상필의 눈에서 한 가닥 열의가 피어올랐다. 그와 팀원들이 함께 만든 역작, 말 그대로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게임이 어떻게 펼쳐질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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