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나는 왕이로소이다

Prologue

2018.12.26 조회 293 추천 3


 피를 묻힌 몸에.
 피가 물든 옷을 입고.
 피로 젖은 바닥을 걸어가옵니다.
 
 그러한 저의 얼굴은 주신께서 보시기에 성군의 모습이옵니까?
 아니면 가식적인 가면 뒤로 미쳐버린 폭군의 모습이옵니까?
 아무리 거울을 봐도 이 무능한 머리는 판단이 서지 않아 청하오니.
 미천한 저를 과분한 옥좌 위에 올려놓으신 주신이시여.
 
 부디······.
 
 저의 아둔한 머리를 일깨워주소서.
 
 ***
 
 솨아아아!
 하늘이 무너진 듯 거센 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레틴 제국 황비궁 안에선 기나긴 산고 끝에 사내아이를 순산시킨 로에린 황비가 고통스런 얼굴로 통곡하고 있었다.
 그 곁엔 아그리스 교단 소속 라세티 신녀(神女)가 통탄이 깃든 표정을 후드 깊이 숨겨놓은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사산을 예상했을 만큼 가여운 모습.
 그러나 로에린 황비가 낳은 아이는 실로 건강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사산되기는커녕 우렁찬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것이 그 어떤 잔병 하나조차 깃들어 있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아이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로에린 황비의 입에선 더욱 서글픈 울음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절대로 태어나선 안 될 아이를 낳아버린 사람처럼.
 실낱같은 희망마저 산산이 조각나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그녀는 양수와 피로 범벅이 된 육신을 눈물로써 씻으며 세상에 대한 원망만을 끊임없이 게워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다 못한 라세티 신녀가 결국엔 기나긴 침묵을 깨곤 입술을 열었다.
 “꼭, 꼭 이리하셔야 하옵니까?”
 “흐흑! 흐흐으윽!”
 “차라리 지금이라도, 폐하께 모든 것을 고하심이.”
 “끄흡! 아, 안 돼애애!”
 라세티 신녀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로에린 황비가 자신의 울음을 단박에 끊어놓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발작까지 보일 만큼 기겁하는 모습에 어렵사리 떼어졌던 라세티의 입술은 다시금 깨물어졌다.
 그 순간 기를 쓰며 입을 연 로에린 황비가 울음으로 가득 찬 음성을 토해내듯 뱉어냈다.
 “어, 어, 어서······.”
 “······.”
 “어서어어!”
 끄득!
 최후의 발악과도 같은 처절한 울음에 라세티 신녀의 이가 기어이 입술을 파고들어 붉고 진한 피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도 현 상황이 여유롭지 못함을 알고 있던 것일까.
 끝내 무언가 결단을 내린 듯 핏대가 돋은 눈을 힘겹게 떠올린 라세티 신녀가 즉각 왼손에 안아 들고 있던 작디작은 아이에게 오른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아기자기한 이마 위에 성호를 그어 축복하곤, 꾸역꾸역 게워낸 듯한 힘겨운 목소리로 기도문과 같은 주문을 조용히 읊조렸다.
 “사일런스.”
 주신 아그리스 교단 소속 사제들과 신녀들이 묵언 수행을 위해 배운다는 고요한 침묵의 마법, 사일런스.
 그것이 발현된 라세티의 손이 아이의 입술을 툭 하니 건드리자 울고 있던 아이는 금세 입술만을 뻐끔거리며 조용해졌다.
 “이제 되었다. 하니 어서!”
 소리가 사라진 로에린 황비의 아이를 곱디고운 천으로 감싸 시녀의 품에 안겨준 라세티 신녀가 다급히 독촉했다.
 그녀의 뜻을 단박에 알아차린 시녀는 즉각 아이를 안아 들곤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에린 황비의 입에서 다시금 오열이 쏟아져 나옴에도 시녀들은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분주히 움직이기만 했다.
 탁!
 잠시 후 결국 통곡하다 쓰러진 로에린 황비의 다리 밑으로 한 시녀가 두툼한 강보 하나를 가져다 놓았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떨고 있는 손을 어렵사리 움직여 방금 출산을 끝낸 터라 피들이 흥건한 침소 위에 황급히 풀어헤쳤다.
 그것이 막 끝나는 순간.
 콰앙!
 로에린 황비의 지아비이자 대레틴 제국 황제 글리보트와 그의 정실(正室) 에일라 황후가 처소 안으로 들이닥쳤다.
 “하아! 하아! 어, 어찌 되었소?”
 글리보트 황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로에린에게 물었다.
 하지만 로에린은 계속 눈물만을 흘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그 안쓰러운 모습을 보곤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것일까.
 잠시 눈을 불안히 흔들거리며 우왕좌왕하던 글리보트 황제가 주변에 있던 라세티를 향해서 현 상황에 대해 물으려 할 때였다.
 라세티 신녀가 먼저 머뭇거리던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폐하. 정녕 송구스럽기 그지없사오나.”
 “······?”
 “마마께옵선 사산하셨사옵니다.”
 “뭐, 뭐라!”
 누구도 아닌 정인의 몸에서 처음 잉태된 아이였던 터라 그 성별에 상관없이 무사히 태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랬던 아이가 제대로 태어나지도 못한 채 죽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자 글리보트 황제는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라세티의 멱살을 움켜잡곤 거친 음성을 터트려버렸다.
 하지만 그 거칠었던 손은 얼마 못 가 맥없이 풀려버렸다.
 뒤늦게 머릿속으로 떠오른 라세티라는 여인의 존재.
 그녀는 비록 교단에서 지닌 직책이 미미하다고는 하지만 지금껏 로에린 황비의 고해성사를 치러주었던 여인으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을 말하지 않겠음을 서약한 신녀였다.
 그런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응당 거짓일 리가 없을 터.
 글리보트 황제는 애처로이 몸을 떨어대다 정인의 얼굴만을 마지막 희망처럼 바라보았다.
 “흐흡! 흐흐흡!”
 “······.”
 기껏 돌아본 눈에 들어온 것은 서글피 울고 있는 정인.
 그 모습이 글리보트 황제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거기다 그녀의 여린 몸 밑에 붉은 피들과 뒤엉켜 있는 아이의 시신이 그가 품고 있던 마지막 희망까지 송두리째 부숴놓았다.
 파르르!
 “괘, 괜찮소. 그리고 애 많이 썼소.”
 천천히 정인의 곁으로 다가가 떨고 있는 입술을 힘겹게 연 글리보트 황제가 로에린 황비의 손을 자상스럽게 쓰다듬으며 그녀를 달래주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로에린 황비의 울음은 쉽사리 그치지 않아 글리보트 황제의 가슴만 더욱 고통스럽게 찢어놓았다.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애꿎은 시녀들에게나 입을 열었다.
 “너희는 황비가 속히 쾌차할 수 있게 곁에서 잘 보살피도록 하고, 사산된 아이는······ 이 황실에서 가장 좋은 천으로 덮어 잠시 데리고 있어라. 짐이 곧 좋은 날을 잡아 장례를 치러줄 것이니.”
 글리보트 황제가 어렵게 입을 떼어 그리 명하니 주변에 있던 모든 시녀가 그 자리에 부복하여 황명을 받들었다.
 그것을 끝으로 비통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글리보트 황제는 밖으로 나갔다.
 어째서인지 그의 뒤를 따라나서는 에일라 황후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슬그머니 그려지고 있었다.
 쿠쿠쿵!
 이후, 문이 닫혔다.
 좁아지는 문틈 사이로 지아비의 축 처진 어깨가 눈에 들어오자 로에린 황비의 억장이 또다시 거세게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야속하기 그지없는 문은 오늘 따라 닫히는 속도가 왜 이리 빠른지 두 사람의 마지막 연결마저 금세 끊어놓았다.
 다시금 오열을 쏟아내는 로에린 황비의 곁으로 라세티 신녀가 황급히 다가와 이제 더는 시간이 없음을 고해왔다.
 “제가 시전해놓은 마법의 유효 시간은 고작 반나절. 그 안에 최소한 수도 밖까지는 빠져나가야 하옵니다!”
 “내, 내 아이가, 살아갈 곳은?”
 “대륙 중부 카르셀 왕국에 집 한 채를 구해놓았사옵니다. 또한 앞으로 저하를 보살필 유모 역시 마차에서 대기 중이옵니다.”
 카르셀 왕국.
 그곳은 지형 자체가 산맥이 거의 없고 비옥한 토지가 많아 예로부터 식량이 가장 풍부한 농업 국가로 손꼽혀온 나라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토지에서 농작을 하고 있어 그다지 화려하거나 발전된 나라는 아니었다.
 그것을 알고 있던 로에린 황비의 얼굴에 일순간 노기가 서려졌다.
 “지, 지금 내 아이를 농민으로 만들겠단 말이오!”
 “마마. 현재 전 대륙 내에서 신분을 조작하여 숨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오직 카르셀밖에 없사옵니다.”
 농업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인력. 때문에 카르셀 왕국은 예로부터 망명해 오는 자들 대부분을 과거에 상관없이 농민의 신분으로 받아줘 왔다.
 게다가 황후로부터 극심한 위협을 받고 있는 로에린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그 아픈 곳을 찔러 상기시키니 로에린은 다시 한이 서린 울음만을 터트려댔다.
 “부디, 부디 무탈하시옵소서, 마마.”
 그녀의 마음이 변할 것을 우려한 것일까.
 라세티 신녀가 서둘러 예의를 갖추곤 물러나려 했다.
 그때 갑자기 거짓말처럼 울음을 멈춘 로에린 황비가 그녀를 불러 세우더니 강력한 의지가 담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루이.”
 “······?”
 “루이라 지어주시오. 내 아이의 이름.”
 품에 제대로 안아보지도, 젖 한 번 물려보지도 못한 소중한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싶은 어미가 과연 누가 있을까.
 자신의 아이가 살아 있음에도 남들에겐 사산하였다 밝히고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어미는 또 누가 있을까.
 그러나 시녀 출신에 그 어떤 비호 세력 하나 없이, 악독한 황후로부터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받고 있던 로에린에게 있어 자식의 목숨이나마 살릴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 비참한 현실이 비수처럼 날아와 그녀의 가슴을 찔러댔다.
 하지만 아무리 못난 어미라 해도 자식의 이름만큼은 손수 지어주고 싶었는지 그녀는 힘겹게 입술을 떼어 그리 말했다.
 그 안타까운 모습에 울컥 울음이 솟구친 라세티 신녀가 짤막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이후 그녀의 모습은 황실 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을 끝으로 마지막 버팀목조차 잃어버린 로에린 황비는······
 스륵!
 “마, 마마!”
 결국 혼절해버리고야 말았다.
 
 투투투투!
 그로부터 얼마 후, 따갑도록 쏟아지는 장대비를 뚫으며 무척이나 초라해 보이는 육두마차 한 대가 황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위험천만한 빗길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마차.
 그 모습이란 마귀의 손길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처절한 발악처럼 절실해 보였고, 그 속도는 누구도 가히 멈추지 못할 만큼 매우 빨랐다.
 하지만 그때.
 “어? 어어어! 비, 비키시오!”
 갑자기 한 사내가 마차 길 앞으로 난데없이 나타났다.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인지 그는 인간의 육신쯤은 간단히 짓이길 법한 마차를 당당히 막아섰고, 마부의 기겁한 음성에도 꿈쩍하지 않은 채 자신의 허리춤으로 오른손을 가져갔다.
 스팟!
 일순간 사내로부터 푸르스름한 빛이 쏘아져 나왔다.
 번개처럼 빠르고 매섭게 쏘아져 온 그것은 마차를 끌고 있던 말들의 다리를 섬뜩하게 엄습했다.
 그 순간 실로 끔찍한 사고가 사내의 두 눈 앞으로 펼쳐졌다.
 콰콰콰쾅!
 한순간에 다리가 잘린 여섯의 말이 하나같이 그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 목뼈가 부러진 채 즉사해버린 것이다.
 때문에 속도를 이기지 못한 마차가 말들의 사체를 미처 피하지 못한 채 허공으로 튕겨져 올랐고, 그대로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성한 곳 하나 없이 풍비박산 나버렸다.
 “쿱! 쿠후욱!”
 얼마 후 처참히 부서지고 뭉개져버린 마차 안에서 피로 범벅이 된 라세티 신녀가 기를 쓰며 기어 나왔다.
 다행히 목숨은 건진 것 같았으나 떨어질 때 받은 충격에 내상을 입은 듯 붉고 진한 피가 그녀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토해져 나왔고, 한쪽 눈은 파편에 찔렸는지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왼팔은 뒤로 꺾인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은 처참한 모습.
 그러나 라세티 신녀는 대체 무슨 고집인지 기를 쓰며 움직였고 자신에게 걸어오는 사내를 향해서 당당히 일어서 보였다.
 마치 지금과 같은 상황을 미리 예상했던 사람처럼, 이까짓 일쯤은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그녀는 신녀로선 품어선 안 될 독기를 거세게 뿜으며 사내를 노려보았고, 이내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를 향해 싸늘히 물었다.
 “쿠훕! 화, 황후가 보냈느냐?”
 “······.”
 “훗. 후후훗! 쿱! 쿨럭!”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을 선택한 사내가 우스웠던 것일까.
 그녀는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듯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도 끊임없이 웃어대며 사내를 조롱했다.
 하지만 사내는 그녀의 말들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은 채 다가와 피로 막힌 목젖에 검을 겨눌 뿐이었다.
 라세티 신녀의 독기 서린 입술이 다시금 열림과 동시에.
 “주신께선 너희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서억!
 그녀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아이가 없다?”
 제법 긴 시간을 소파에 앉아 포도주를 들고 있던 에일라 황후가 방금 앞쪽에서 들린 누군가의 말을 듣곤 그리 되물었다.
 그녀의 앞엔 제법 멋스러운 갑주를 착용한 기사 한 명이 정중히 무릎을 꿇은 채 부복하고 있었다.
 얼마 전 라세티 신녀를 잔혹하게 살해했던 바로 그 살인범이었다.
 에일라 황후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면 그년의 사산은 사실인가 보구나?”
 “예.”
 “후훗. 그래. 수고 많았다. 이만 물러가거라.”
 궁금했던 것을 모두 들어 사내를 물리려던 에일라 황후였다.
 하지만 사내는 왠지 곤란한 기색을 보이며 물러가지 않았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그녀가 다시금 사내를 향해서 물었다.
 “왜? 내게 더 보고할 것이 남아 있느냐?”
 “저, 그런 것은 아니오나.”
 “하면?”
 “소신이 알아보니 라세티 블힘버그 신녀는 금일에 있던 황비마마의 출산 이후, 즉시 아그리스 교국으로 복귀하는 것이 이미 상부에 보고되어 있었사옵니다. 한데도 그녀가 본국의 수도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사실이 황실에 알려지게 되면.”
 “차후 법무부 측에서 수사관을 파견할 테지.”
 “예. 그리고 수사가 진행되면 저 또한.”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려무나.”
 “아, 정녕 감읍하옵······.”
 “신녀를 죽인 자만 사라지면 되지 않누?”
 흠칫!
 “······예?”
 쿠쿠쿠쿵!
 갑자기 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러고는 사내가 당황해할 새도 없이 시퍼런 검기를 겨누었다.
 그에 기겁한 사내를 향해서 에일라 황후가 농을 치듯 말했다.
 “사냥이 끝난 개새끼는 구워삶아야지요.”
 “어, 어찌 제게 이러실 수!”
 “네 상관이 내게 해준 말이란다.”
 푹! 푸푸푸푹!
 여러 개의 검이 사내의 목줄기를 동시에 꿰뚫었다.
 사내의 머리가 잘리고 주변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에일라 황후는 그저 포도주를 다시 들어 목구멍에 부으며 간단한 손짓 몇 번으로 시신을 처리하라 명할 뿐이었다.
 얼마 후 분주히 움직이는 시녀들과 몸종들에 의해서 그녀의 처소는 시신은커녕 핏방울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해졌다.
 그로부터 좀 더 시간이 흐르자 홀로 창가 앞을 서성이고 있던 에일라 황후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제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처리는 잘 끝났습니까?”
 “예. 신과 입을 맞춘 집행관들을 그쪽으로 보내놓았사오니, 이번 라세티 신녀 살해 사건은 한 기사의 지나친 연모로 인한 치정 살인으로 처리될 것이옵니다.”
 에일라 황후를 찾아온 사람은 제국의 모든 국법을 수호하고 있는 법무부의 수장, 법무대신.
 이미 오래전부터 황후파 세력에 몸을 담가 지금은 그녀의 든든한 뒷받침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지나친 연모로 인한 치정 살인이라니? 어머. 망측해라.”
 말은 그리했지만 흡족한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던 에일라 황후가 이내 잔 하나를 더 집곤 법무대신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서로 축배를 들며 기쁨을 나누었다.
 비워지는 술잔처럼 2황자와 얽힌 모든 진실 역시 비밀로써 지워졌다.
 이후 16년이라는 세월이 거침없이 흘러 나갔다.

댓글(2)

보드기    
제가 2014년에 문피아에 비평글 쓰신거에 댓글 달아서 저도 동감합니다 추강 그래서 2부 쓰려고요 하셨던 기억이 나서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완결을 내셨었네요
2020.10.14 22:48
보드기    
아직 안읽어서 재미는 모르겠습니다만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에 감동받아 전편 결재하고 갑니다 약속 어기고 먹튀하는 작가가 많은데 백화요란님은 약속을 지키셨네요 다시 글을 쓰실지는 모르겠지만 제 마음속에는 훌륭하신 작가님으로 기억하겠습니다
2020.10.1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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