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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불광도 - 1화

2019.01.15 조회 670 추천 4


 취불광도 - 1화
 
 
 
 
 
 
 
 
 
 
 
 
 
 
 취불광도(醉佛狂道) 1
 서 새로운 시대
 
 
 20년 전, 무림의 명숙 백여 명이 모여 <그>를 지저갱(地底坑)에 가둠으로써 강호는 가까스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평화와 안정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강호를 종횡하면서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기간은 불과 3년이었지만, 강호는 그야말로 수십 년간의 전쟁을 겪은 것처럼 피폐해져 있었다.
 <그>의 무분별한 살육에 의해 희생당한 문파는 수십 곳이 넘었고 <그>의 무자비한 손속에 살해당한 고수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로 많았다.
 구파일방(九派一幇)을 비롯한 무림의 명숙들은 연맹을 맺었고 그들을 주축으로 전 무림은 하나가 되어 강호의 재건에 나섰다. 그렇게 10년이 흐르자 강호는 슬슬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20년이 지나자 강호는 다시 평화로워졌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옛 고수들은 은거하거나 혹은 금분세수(金盆洗手)를 하거나 혹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새로운 신진 고수들이 장강의 뒷 물결처럼 노고수들을 밀어내며 두각을 나타냈다.
 해가 뜨면 달이 지듯이, 꽃이 피었다가 시들 듯이, 그렇게 세월은 흘렀으며 사람들은 변했다. 산과 들과 강은 옛 모습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은 그 시절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제 20년 전의 옛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때 죽음을 각오하고 <그>와 맞서 싸웠던 108인(人)의 무용담은 술자리에서나 떠도는 전설에 지나지 않았다. 또 <그>가 일으켰던 잔인하고도 무시무시한 피바람 역시 신기루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흩어졌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제1화 나정, 신주오괴를 만나다
 
 
 1장 기이한 사람들
 
 1
 
 봄이다.
 그러나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아침저녁 나절에는 차가운 냉기가 도는 3월이었다. 게다가 이조암(二祖庵)은 산세 험준하기로 유명한 기산(基山)에 위치하고 있어, 아직도 피부로 느껴지는 날씨는 한겨울인 듯 했다.
 그런 까닭에 나정(懶丁)은 두툼한 삼베옷을 입고서도 잔뜩 추운 표정을 지은 채 마당으로 나왔다.
 이른 새벽이라 날씨는 더욱 싸늘해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담배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방과 바깥 온도의 차이가 심한 탓에 저도 모르게 한 차례 온몸을 부르르 떤 나정은 곧 바로 마당을 가로질러 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 예불을 올린 나정은 다시 불당을 벗어나 뒷마당의 별채로 향했고, 별채 앞에 이른 나정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나정이 아침 문안 인사드립니다.”
 별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노승(老僧)은 아직 곤한 잠에 취해 있는 것이리라.
 나정은 슬그머니 웃으며 그 자리를 물러났다.
 ‘노스님을 보자면, 나이가 들수록 새벽잠이 없어진다고 하는 말은 아무래도 거짓말 같아. 노스님이 갈수록 늦잠꾸러기가 되는 것 보면 말야.’
 나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빗자루를 들고 앞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사위는 어두컴컴했다. 주위는 고요했고 오직 빗자루 쓰는 소리만이 사락사락 들렸다. 산새나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사물이 잠들어 있는데 오로지 나정 혼자만이 깨어 있는 듯 했다.
 한참 빗질을 하던 나정은 문득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빗자루질을 멈췄다. 그리고 빗자루에 손을 얹고 턱을 괸 채로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차츰 동녘 하늘이 밝아오면서 산 아래의 풍광이 옅은 그림자처럼 펼쳐졌다.
 잠시 동쪽 하늘을 바라보던 나정이 갑자기 자세를 곧추 잡더니 빗자루를 봉(棒) 삼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나름대로는 진지하게 빗자루를 휘두르고 힘차게 내질렀다가 빠르게 회전을 시켰지만 자세가 어설프고 중심이 바로 잡혀 있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제대로 배운 무술 솜씨는 아닌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동자승(童子僧)은 이마와 반들거리는 정수리에 땀이 맺힐 정도로 빗자루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갑작스레 들려온 “이 놈, 나정아!”하는 성난 목소리에 놀라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해가 중천에 뜬 게 언젠데 아직도 아침 공양을 하지 않고 있느냐? 이 게으름뱅이[懶丁], 분명 어디서 노닥거리고 있으렷다?”
 노인답지 않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조그만 암자에 울려 퍼졌다. 나정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니 어느새 날이 훤하게 밝은 것이다.
 나정은 ‘이런!’ 하면서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갔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다니······ 밥 짓는 걸 깜빡 잊고 있었구나.’
 “아이구, 배고파 죽겠다! 알고 보니 네 놈이 날 굶겨 죽이려 작정한 게로구나! 그렇게 이 이조암의 주지(主持) 자리가 탐이 나더냐?”
 노스님은 방안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나정은 쌀을 씻고 아궁이에 불을 때느라 허둥거리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노스님께서 늦게 일어나실 것 같아서······”
 “노옴! 어디서 헛소리를 하고 있느냐? 언제 노납(老衲)이 늦잠을 자더냐? 항상 동트기 전에 일어나 명상에 잠기는 노납이다. 그런 노납을 두고 잠꾸러기로 만들다니, 아예 이제는 날 능멸하기까지 하는구나!”
 “죄송합니다, 노스님. 제자가 미련하여 노스님께서 명상에 잠기신 건지 아직 주무시고 계신 것인지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정은 부랴부랴 씻은 쌀을 솥단지에 넣고 뚜껑을 닫으며 소리쳤다. 그가 거듭 잘못을 빌자, 노승의 성난 목소리가 한 풀 꺾여 들려왔다.
 “그렇게 잘못을 인정하니 됐다. 그래, 공양은 언제쯤 올릴 테냐?”
 “아직 뜸이 안 들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나정은 소채(少菜) 몇 가지를 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찬장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냈는데 마개가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짙은 주향(酒香)이 흘러나오는 것이, 꽤나 독한 술이 담겨 있는 듯싶었다.
 “아이구, 아이구, 배고파라. 하나밖에 없는 제자 녀석은 멍청하고 게으르기 이를 데가 없어 제 스승이 굶어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구나!”
 뒷마당 별채에서는 계속해서 노승의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나정의 순박한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어찌 되었건, 이렇게 훌쩍 날 밝을 때까지 아침밥을 짓지 않은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욕을 먹어도 싸고 혼찌검이 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윽고 밥이 다 되자 나정은 무를 숭숭 썰어 넣은 맑은 국과 함께 상을 차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부엌을 나선 후 뒷마당으로 향했다.
 “아침 공양입니다.”
 나정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순은 훌쩍 넘은 듯 하고 일흔 살은 아직 안 된 듯한 노승(老僧)이 두터운 이불로 온몸을 감싼 채 앉아 있었다. 보아 하니 방금 잠에서 깬 듯 아직도 얼굴에는 졸음기가 묻어 있었다.
 “흠, 반찬이 이게 뭐냐?”
 노승은 나정이 차려온 밥상을 보며 불퉁거렸다.
 “벌써 열흘 동안이나 똑같은 반찬이야.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에휴, 누가 게으름뱅이 나정 아니랄까 봐······ 네가 좀 더 부지런하다면 아랫마을에 내려가서 이런저런 반찬을 사왔을 것이야.”
 “죄송합니다. 오늘 아랫마을에 가서 찬거리 좀 사오겠으니, 그만 고정하시고 드세요.”
 노승의 불평에 나정은 연거푸 고개를 조아리며 빌었다.
 이제 15,6세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중의 머리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는 걸 노승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술잔을 집었다. 나정이 얼른 호리병의 술을 따라주었다. 독한 향기가 자그마한 방 가득 퍼졌다. 노승의 주름투성이 얼굴이 그제야 환해졌다.
 “커, 역시 아침에 마시는 곡차(穀茶)의 맛이 최고라니까.”
 공복에 술을 마신 탓인지 금세 노승의 얼굴이 붉어졌다. 노승은 연거푸 석 잔의 술을 들이켰고, 그 탓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싱글거리며 아침 공양을 끝냈다.
 상을 치운 나정은 부엌으로 돌아와서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하지만 그가 채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노승의 호령이 떨어졌다.
 “이 놈, 나정아! 또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게냐? 어서 와서 등 좀 긁어라!”
 나정은 남은 밥을 후다닥 한 입에 해치우고 별채로 달려갔다. 노승은 나정에게 등을 내밀며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더냐?”
 “삼월 초여드레입니다.”
 “이런, 이런······ 벌써 그렇게 되었더냐? 허어, 화살보다 빠른 게 세월이라더니······ 아니, 이쪽 좀 긁어라. 그래, 거기.”
 노승은 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서찰을 써줄 터이니 마을에 내려가는 김에 최 대인에게 보여 주거라. 아, 그리고 오면서 반찬들 말고 몇 가지 더 사가지고 오너라.”
 나정은 노승의 앙상한 어깻죽지 부근을 긁으며 물었다.
 “뭘 사가지고 올까요?”
 “뻔하지 않느냐? 곡차 몇 단지하고 흠흠······ 의란채(倚欄菜) 좀 사오너라.”
 의란채란 소고기를 가리키는 단어로, 스님이 대놓고 소고기 운운하기 힘든 까닭에 그런 은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술을 가리켜 곡차, 혹은 망우물(忘憂物)이라고 하거나 생선을 수사화(水梭花)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나정은 암자 이곳저곳을 청소하고 노스님에게 드릴 점심 공양을 미리 준비하느라고 오전을 보냈다.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때야 할 일을 마친 그는 서둘러 바랑을 챙기고 노스님에게로 달려갔다.
 “쯧쯧, 게으른 녀석하구는······ 아예 해가 진 다음에 출발하지 그러느냐?”
 노승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잔소리를 하며 누런 서찰을 내밀었다.
 “보여주면 답을 줄 것이니 잊지 말고 받아오너라.”
 나정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아, 곡차와 의란채 사오는 거 잊지 말고.”
 “네.”
 
 2
 
 최가촌(崔家寸)은 겨우 50여 가호가 모여 만들어진 작은 마을이다. 최가촌이라고 해서 최씨 사람들이 모인 집성촌인 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최대인이라 불리는 부자의 논밭을 빌어먹고 산다고 해서, 어느 때인가부터 고유의 마을 이름대신 최가촌이라 불리는 것뿐이었다.
 햇살이 노곤해진 오후 무렵, 최가촌에 당도한 나정은 우선 마을 중앙에 위치한 최대인의 저택을 찾았다. 버드나무 양쪽으로 늘어선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이런 시골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장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정은 대문을 두드렸고, 잠시 후 거만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몇 번 얼굴을 본, 이곳 최대인 집의 집사였다.
 “안녕하세요. 노스님께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이리 줘.”
 사내는 문도 열지 않은 채 손만 내밀었다. 그는 나정이 꺼낸 서찰을 낚아채듯 빼앗더니 세차게 문을 닫았다. 마치 너 같은 녀석 따위는 집안에 한 걸음도 들여놓을 수 없다는 듯이.
 잠시 후 다시 문이 반쯤 열리고 예의 그 집사가 얼굴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우리 대인께서 마음씨가 좋으니까 이런 구걸을 받아들이는 거지, 나 같으면 어림도 없어. 뭐 하여튼 이걸로 올해는 끝이니까. 옛다!”
 하면서 그가 준 것은 조그만 금낭(錦囊)이었다. 나정이 받아들 때 절그렁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마도 은자가 들어 있는 금낭인 듯 했다.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정이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었다. 말 그대로 문전박대였지만, 나정은 닫힌 문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불호를 외웠다.
 최대인 집을 나선 나정은 다시 마을 어귀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기산을 넘는 여행객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객잔이 하나 있었는데, 의외로 장사가 제법 되어 늘 신선한 고기와 채소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정이 최가객잔(崔家客棧)의 입구에 들어설 때였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점소이가 반사적으로 “죄송합니다! 오늘은,”하면서 인사하다서 상대가 나정임을 확인한 점소이는 피식 웃었다.
 “또 술이 떨어졌구나.”
 나정이 반장(半掌)하며 인사하려는데 점소이는 나정의 소매를 잡아끌며 객잔 뒤쪽으로 이끌었다.
 “미안, 미안. 오늘은 객잔이 통째로 빌려져서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군. 그래, 필요한 게 뭐지? 내가 주방에 가서 가져오지.”
 “곡차하고 의란채, 그리고 몇 가지 반찬을 사러 왔습니다.”
 나정은 소매에서 은자를 꺼내 점소이에게 건넸다. 점소이는 객잔 뒷문을 통해 주방으로 들어갔다가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 한 보따리 짐을 들고 나왔다.
 “여기 있어.”
 나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점소이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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