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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끓는 산하 1-1권

2019.01.17 조회 3,432 추천 18


 프롤로그
 
 
 
 
 
 
 신상진.
 대한민국이 배출한 최고의 천재이자 한민족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과학자. 하지만 가진 바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비운의 사나이이기도 했다.
 1980년의 대한민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정국은 시위와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그럴 즈음 학계는 신상진이 발표한 논문 때문에 충격에 휩싸였다.
 그가 발표한 논문은 소립자에 관한 것이었는데, 소립자를 구성하는 원자가 따로 있으며 생명체처럼 복사와 소멸을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핵무기는 원시적인 무기에 불과하며 소립자를 구성하는 원자의 정의를 밝혀낼 때, 비로소 인류는 지옥과 천당을 보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이지만 그 말의 여파는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학계에서는 그를 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리고······.
 정권의 홍보에 이끌려 다니던 신상진이 회의를 느끼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학계는 신상진의 말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제1장. 미래를 위한 선택
 
 
 
 
 
 
 1990년 서울.
 삼복더위의 찌는 듯한 무더위도 참기 힘든데, 계란이 삶아질 정도로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제대로 숨을 내쉬지 못할 정도였다.
 “우아! 완전히 가마솥이구만, 가마솥.”
 “그러게 말이야. 이놈의 노가다를 빨리 때려치우던가 해야 하는데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고······.”
 “이 씨,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법이야.”
 푸념을 털어놓던 이 씨가 인상을 찌푸리며 십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콘크리트 벽에서 전해지는 서늘함을 맛보고 있는 사내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이! 상진이, 자네는 통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데. 그러면 자네만 힘들어져.”
 이 씨의 말에 사내가 씨익 웃어 보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신상진,
 그가 막노동판을 전전한 지 8년이 지났다.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고 홀연히 잠적했던 그는 2년 동안 사찰을 돌아다니며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사회에 다시 나온 곳은 경주.
 이미 오래전에 통장을 절에 공양한 탓에 그는 무일푼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막노동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전국을 떠돌게 되었다.
 그가 가지 않은 곳은 해외, 신분증이 필요한 곳만 빼고는 거의 다 가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세월이 막노동을 한 시간과 합쳐 10년이나 되었다.
 “사람하고는······.”
 신상진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이 씨가 툴툴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하루하루가 힘든 사람들이다. 하지만 저들의 얼굴에서 절망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저들은 또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뭔가.’
 수없이 반복되는 똑같은 물음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대답 없는 질문에 불과했다.
 “자자자! 쉴 만큼 쉬었으니 또 일해야지.”
 “에이! 더러운 세상, 이 지긋지긋한 고생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간식시간이 끝나자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일어섰고, 신상진도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연장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태양 속으로 들어가 비지땀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노가다의 하루는 새벽 별을 보면서 출근해, 달이 뜰 때 퇴근하는 북한의 천리마 운동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오늘도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온 신상진은 일기를 써내려갔다. 하루를 마감하는 이 순간은 그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탁!
 일기를 다 쓴 신상진이 일기장을 가방에 갈무리하고 TV를 켰다. 마침 동독에 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동독은 얼마 못가고 무너질 것 같군. 그런데 호네커 서기장이 순순히 권좌에서 물러날까.’
 그런 생각이 들자 신상진의 머릿속에 김일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독과 북한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소련의 영향력 아래 군사력을 키워온 북한과 동독은 무시하지 못할 전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특히 북한의 경우는 다량의 생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동북아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만들 수 있었다.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괜히 답답해진 신상진이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학생들의 과격시위 현장이 방영되고 있었다.
 “자식들, 시위할 시간이 있으면 책이라도 한 권 더 보거라.”
 TV를 끈 그가 천장을 보고 누웠다.
 ‘내 나이 벌써 37살.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아들딸을 낳아 아옹다옹하며 잘 살고 있었겠지. 후우!’
 그런 생각이 들자 자연스레 부모님과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할 때, 좋아하던 부모님의 모습, 그리고 재잘거리며 잘 따르던 귀여운 동생의 모습이 그를 미치게 했다.
 ‘먼발치에서라도 한 번 보고오자.’
 벌떡 일어난 신상진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그러다가 돌연 힘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아니다. 이미 난 모든 것을 버렸다. 그때 가족도 버렸는데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얼굴을 본단 말인가.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지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신상진은 없다. 지금의 나는 과학자 신상진이 아니라 목수 신상진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진 그가 냉장고를 열고 소주를 꺼내 벌컥벌컥 병나발을 불었다. 그렇게 소주를 한 병 다 마시고 나니 피로와 겹쳐 온몸이 나른해졌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신상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 일과를 끝내고 일기를 쓴 이후, TV를 켰다. 그러자 뉴스에서 그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검거된 살인범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강도짓을 일삼은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경찰은 신림동에 거주하는 신동성 씨 일가를 살해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 맙소사!”
 후다닥!
 신상진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뇌리에는 온갖 잡생각이 다 떠올랐다.
 뉴스에서 언급한 신동성은 아버지의 이름이었고, 그의 집이 바로 신림동이었던 것이다. 헐레벌떡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간 신상진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띠~ 띠~.
 전화벨 소리는 계속 가는데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아닐 거야. 그럴리가 없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신상진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공중전화 부수에서 나온 그는 대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택시!”
 건너편으로 지나쳐가던 빈 택시가 돌아와 신상진 앞에 멈추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신림동 갑시다. 요금은 충분히 드릴 테니 빨리, 최대한 빨리 갑시다.”
 “네네, 걱정 붙들어 놓으십시오.”
 사정을 모르는 택시기사가 호탕하게 대답하며 차를 몰아갔다.
 ‘아버지, 어머니. 제발 무사하셔야 합니다.’
 뉴스에서 나온 사람이 동명이인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부우웅!
 신상진을 태운 택시가 한강변을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이윽고 집 근처에서 내린 그는 집을 향해 달려갔고, 옐로우라인을 보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 수가······.”
 그렇게 간절히 빌었건만. 동명이인일 것이라고, 아니 그렇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건만 신은 매정하게도 신상진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시간은 겨우 10분여에 불과했다. 하지만 신상진에게는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
 
 찌는 듯한 불볕더위는 어느새 성큼 다가온 풍요로운 가을에 밀려 기세를 잃어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가을걷이가 한창이겠지만 지금은 하우스 재배를 많이 하기 때문에 사시사철 채소 재배가 가능했다. 그런 까닭에 예전과 같은 풍요로움은 많이 퇴색되었다. 하지만 넉넉함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신상진의 마음은 메마른 사막처럼 황량하기만 했다.
 ‘한 줌도 안 되는 내 지식이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이었다. 나는 그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부와 명예를 잃었다. 그리고 가족까지도······.’
 벌컥벌컥, 벌컥벌컥!
 세차게 고개를 흔든 신상진이 병나발을 불었다.
 지금 마시고 있는 이 쓰디 쓴 소주가 모든 것을 다 쓸어가기를 바랐지만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생생하게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
 사내는 자고로 군대에 다녀와야 제 구실을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휴학계를 내고 군에 입대할 때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지자 가슴이 아련해졌다.
 그때였다.
 밖에서 주인아주머니와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방문이 덜컥 열렸다.
 “어휴, 술 냄새! 자네 지금 뭐하는 거야!”
 문을 연 사람은 목수 오야지였다.
 가족이 비명에 간 이후, 신상진은 일을 나가지 않았다.
 한참 일손이 모자랄 때라 목수 오야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신상진의 집을 들렀는데, 오늘은 손에 술병을 든 것을 보니 작정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방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술병과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신상진을 보고 기가 차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나 혼자 있고 싶습니다.”
 “성실하던 자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만 제발 정신 좀 차리게.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어.”
 “후후후! 큰일이요? 큰일은 벌써 났지요.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신상진이 자조 섞인 투로 웃으며 말하자 목수 오야지가 방안으로 들어오려고 했고 이에 신상진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혼자 있고 싶다고요. 그러니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 둬!”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살기, 그리고 무시무시한 눈길에 목수 오야지가 당황했다. 이에 벌떡 일어난 신상진이 그를 밀치고 방문을 거칠게 닫아 버렸다.
 쾅!
 “빌어먹을! 엿 같은 놈의 세상!”
 신상진이 거칠게 투덜거리며 방바닥에 벌렁 누었다.
 그의 말마따나 정말로 엿 같은 세상이었다.
 그가 학계에 던진 파문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다.
 그러나 만약 정부의 지나친 간섭과 쿠데타로 잡은 정권이었기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홍보의 도구로서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신상진은 아마도 노벨상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도 명목성이 강한 평화상이 아닌 과학부문에서 말이다.
 ‘어쩌면 우리 가족을 죽인 자는 나를 이끌어내기 위해 미국, 혹은 주변국에서 사주한 자일 수도 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부가 자신의 부모를 죽인 자의 정체를 밝혀냈으면서도 일반적인 사건으로 발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신상진을 과격하게 만들었다.
 ‘니미럴. 그냥 세상을 확 뒤집어버려?’
 핵무기가 원시적인 무기로 전락해버릴 정도로 신상진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이 엄청나기 때문에 세상을 뒤엎은 일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다. 그리고 세상을 뒤덮겠다는 생각이 점차 그를 잠식해 들어갔다.
 
 따르릉, 따르릉!
 이른 새벽.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 시간에 도대체 누구야!’
 전자공학을 전공한 박성화는 신상진의 절친한 친구이자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위서 논란이 한창인 한단고기를 믿고 언젠가는 고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외치던 그는 지금 오성전자에 스카우트되어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그의 목소리에 짜증스러움이 그대로 녹아나 있었다.
 [박성화, 나 상진이야.]
 “뭐라고!”
 상진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고함치는 바람에 그의 아내도 잠에서 깨어났다.
 “여보, 누구에요?”
 “잠깐만······.”
 아내의 입을 막은 박성화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잠기운을 쫓아낸 뒤, 다시 수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정말 신상진이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고 있지?]
 “지금 거기 어디야?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박성화의 목소리 톤이 더욱 높아졌다.
 [조용히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우리 멤버들이 자주 가던 곳, 그곳에서 기다리겠다.]
 뚜~ 뚜~.
 “여보세요! 상진아, 상진아!”
 박성화가 그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수화기에서는 통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이에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성화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보, 신상진씨라면 당신이 말한 그 사람이 아니에요?”
 “맞아!”
 딸칵, 치이익!
 터보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인 박성화가 돌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어 다이얼을 누르다가 신상진의 목소리를 떠올리고는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휴우!”
 “이 새벽에 웬일이래요.”
 “나도 모르지. 좌우간 살아 있다니 다행이야.”
 박성화가 담배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뿜었다.
 사실 그는 물론이고 친구들 모두는 신상진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상진은 요주인물이다. 미국을 비롯해 각국의 정보부에서 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신상진이 홀연히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도 분분했었지만 대체적으로 CIA(미 중앙정보국)가 개입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급작스럽게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박성화가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갔다. 이에 그의 아내도 가운을 걸치고 주방으로 가 커피포트를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불을 붙였다.
 
 메트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남산.
 한쪽에서는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이 활짝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선남선녀들이 달콤한 대화를 나누며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다.
 “후우!”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담배를 문 채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 그는 다름 아닌 신상진이었다.
 재학시절은 물론이고 연구에 미쳤을 때도 이따금씩 친구들과 모여 도심을 내려다보며 최고가 되자고 다짐했던 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더니 많이 바뀌었군.’
 마천루들이 하늘을 꿰뚫을 듯 우뚝우뚝 솟아 있는 광경은 10년 전에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매트로 서울은 아예 마천루들로 도심을 가득 채우려는 듯 곳곳에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도심을 구경하던 신상진이 담배를 비벼 끄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진아, 상진이 맞지?”
 “박성화, 오랜만이다.”
 몸을 돌린 신상진이 양팔을 활짝 벌리자 박성화도 양팔을 벌리며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힘껏 안았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는 동안 오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이에 뻘쭘해진 두 사람이 떨어져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네가 죽었는지 알았다.”
 “자식, 죽긴. 내가 왜 죽어!”
 “네가 좀 거물이어야지. 네가 홀연히 사라진 뒤, 친구들 모두에게 어깨들이 찾아왔었다. 나도 물론이고.”
 박성화의 말에 신상진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가 종적을 감추자 정부는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러시아 등 주변국도 마찬가지였다.
 박성화는 신상진이 종적을 감추고 5년 뒤까지 감시를 받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포기를 했는지 감시의 눈이 사라진 것이다.
 “지금은 어때?”
 “지금이야 뭐······.”
 박성화가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친구들과 자주 가는 곳이 있는데, 조용하고 좋아. 그리로 가는 게 좋겠다.”
 그 말에 신상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정부는 물론이고 주변국의 정보요원들이 감시의 눈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을 거야. 거기보다는 시외로 빠지자.”
 “그도 그렇군. 그럼 가자.”
 박성화가 먼저 몸을 돌렸고 곁눈질로 주변을 살핀 신상진이 종종걸음으로 박성화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을 태운 승용차가 남산을 내려와 한강변을 질주했다.
 
 팔당호를 끼고 있는 광주는 인가보다는 매운탕 등을 파는 음식점과 러브호텔들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뉴스와 신문 등 매스컴에서는 연일 수질오염의 가능성이 부각시키는데도 불구하고 음식점과 러브호텔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로 인해 지역주민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지만 지역경제에 이바지하는 바가 큰 터라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금세 사그라지곤 했다.
 쪼르륵!
 쏘가리 매운탕이 보글보글 끓는 가운데 박성화가 신상진의 잔에 술을 채우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다른 친구들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게 좀 아쉽군.”
 “나중에 기회가 되겠지.”
 “한잔 쭉 들자.”
 채앵!
 두 개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술잔을 입술에 대기만 하고 내려놓았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좀 해봐. 어디서 어떻게 살았던 거야? 그리고 감시의 눈은 어떻게 빠져나간 거고!”
 “시간이 많은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한꺼번에 묻는 거야?”
 그렇게 서두를 연 신상진이 종적을 감추었을 때의 심경을 토로했다. 이어 감시의 눈을 피해 종적을 감추고 산 속의 사찰을 돌아다니다가 노가다를 하게 된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박성화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특히 감시의 눈을 피한 부분에서는 탄성을 터트렸고, 노가다로 생활했다는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어떤 살인마에 의해 우리 가족이 비명에 간 뒤, 내 목표의식이 바뀌었다.”
 “가, 가만! 그, 그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사건이 바로······.”
 박성화의 물음에 신상진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숨이 터질 것만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미안하다. 당시 그 사건이 네 가족과 연관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박성화가 사과의 말로 침묵을 깨트렸다.
 “후훗! 다 지난 일이다.”
 신상진이 자조 섞인 투로 말하고는 또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그러고 정색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너도 알다시피 나도 한때는 연구에 미쳐 있었다. 그때는 내가 밝혀낸 이론들, 그것이 세상에 얼마나 큰 파급이 미칠지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자취를 감추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었지.”
 “······.”
 “내가 종적을 감추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족이 그렇게 비명에 갔을까?”
 박성화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가족을 버리고 자취를 감추었던 내가 왜 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까.”
 그는 대답 대신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이에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신상진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난 질서를 다시 세우고 싶다. 주변국에게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지 않는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 도움이 절실하다.”
 “휴우, 그랬군. 하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냐.”
 “내가 아니라 우리다.”
 신상진이 우리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이에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상진이 가진 능력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빌 게 아닌가.’
 박성화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안다. 엄청난 자금이 들어가겠지. 하지만 내게도 생각이 있다.”
 “생각이라니?”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신한다.”
 신상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전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전공인 물리학은 물론이고 수학과 화학, 그리고 전자공학까지 다재다능함을 보여준 그였다. 그래서 아인슈타인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회자되기도 했었다.
 “오성과 미래에 기술을 주고 자금을 확보할 것이다.”
 “어떤 기술을?”
 “오성에는 나노기술을, 미래에는 엔진기술을 줄 생각이다. 그러려면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론적이기는 하지만 나노기술은 전공을 살린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엔진기술인데, 이것은 신상진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흐음!”
 박성화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우리 멤버들만 다 참여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내 할 말은 이제 다 끝났다. 결정은 네가 하는 것이다.”
 쪼르륵.
 말을 마친 신상진이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렇게 소주 한 병이 다 비워질 때까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박성화가 넌지시 물었다.
 “어디까지 갈 셈이냐?”
 “만주벌판까지!”
 신상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고, 또 다시 박성화의 고뇌가 시작되었다.
 학창시절 때부터 주구장창 고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침을 튀어가며 친구들을 설득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지금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그런 마음이 엷어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만주, 만주까지 염두에 두고 있단 말이지? 하지만 군을 움직일 수 없는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멤버들, 즉 절친한 친구들 중에서 군에 종사하는 사람은 해병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진철 대령이 유일했다.
 신상진이 말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면 절대 다수의 군이 꼭 필요한데, 이진철 대령만 가지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박성화의 마음을 읽었는지 신상진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군은 정치인들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계획한 것을 이루려면 최소한 10년, 아니 20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동안 우리 다물회에서는 정치인들과 군인들을 양성하면 돼!”
 꿀꺽!
 박성화가 마른침을 삼켰다.
 다물!
 이 얼마나 위대한 단어란 말인가!
 특히 박성화 같은 민족주의자에게 있어서 ‘되찾다’라는 뜻을 가진 다물이라는 단어는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은 다물이 가진 뜻을 단순히 뭔가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정기, 잃어버렸던 고토를 회복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준비가 끝날 때까지는 나는 잠행을 계속할 것이다. 그동안 네가 다물회 회장을 맡아서 일을 추진해야 돼.”
 “생각할 시간을 좀 줘!”
 “이번 주 안으로 결정을 내려줬으면 좋겠다. 자자! 이제 무거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들자.”
 신상진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웃음을 지어보이며 박성화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무거울 때로 무거워진 분위기는 쉽게 바꿔지지가 않았다.
 
 고심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박성화는 캐묻는 아내를 뒤로하고 서재로 들어가 또 다시 장고에 들어갔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본능이 또 다시 꿈틀거리는구나. 하지만 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다.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가.’
 혼자 몸이라면 이토록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가족들이 자꾸 밟혔다.
 똑똑똑!
 “혼자 있고 싶어!”
 방해를 받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한 말인데 아내는 그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여보, 무슨 고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부부에요. 당신이 고민을 하는데 내가 어찌 모른 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휴우.”
 아내의 말에 박성화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아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당신은 우리 가족의 기둥이에요. 힘내세요.”
 “미안해.”
 “괜찮아요. 어떤 고민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혼자 끙끙 앓는 것을 보니 저도 마음이 심란해지네요.”
 ‘아내에게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은 평범한 주부가 되었지만 아내 역시 학창시절에는 누구 못지않은 민족주의자였다.
 만날 때마다 민족역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레 사랑이 싹트게 되었고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우리는 부부다. 이런 문제는 나 혼자 결정을 내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박성화가 어깨에 얹어진 아내의 손을 잡고 무릎으로 이끌었다.
 “여보!”
 “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힘껏 도울게요.”
 “그 말을 들으니 좀 위안이 되는 것 같아. 그나저나 당신 마음속에는 아직도 만주를 회복해야······.”
 “당신······.”
 아내가 박성화의 말을 잘랐다.
 “그냥 묻는 거야. 그런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거야?”
 “글쎄요.”
 아내가 박성화의 무릎에서 일어나 의자로 옮겨 앉았다.
 “혹시 신상진 씨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아내가 정곡을 찔러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박성화는 지금 이 순간 더 편안함을 느꼈다.
 “맞군요.”
 “상진이 그 친구가 새 질서를 잡겠다고 그러더군.”
 그 말로 서두를 연 박성화는 신상진과 만나 나누었던 대화를 요약해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아내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데 당신 친구가 아닌 당신이 주도적으로 한다면 저는 기꺼운 마음으로 찬성할 거예요.”
 “진심이야?”
 “당신은 우리 가정의 기둥이라고 말했잖아요.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저는 따르겠다고 했어요. 그게 민족역사와 관계가 있는 것이라면 고토를 회복하는 일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어요.”
 만약 누군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미친 부부라고 욕하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민족역사에 미쳐 있었던 부부이기에 진지하기만 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홀가분해지는구려.”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해보는 존대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우리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있다는 사실이 기뻐요.”
 “···여보.”
 “커피 한 잔 타올게요.”
 의자에서 일어난 아내가 박성화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밖으로 나갔다.
 ‘역시 아내에게 털어놓기를 잘했다. 아내의 말대로 딸에게 부끄러움 없는 아빠가 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진 박성화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런 그의 뇌리에는 국강상광개토호경평안호태왕, 즉 광개토대왕이 만주벌판을 질주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또 한 해가 흘러갔다.
 어찌 생각하면 덧없이 흘러간 시간일지 몰라도 신상진 등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절친한 친구들 중에서도 고르고 또 골라 구성한 멤버가 그를 포함해 10명이었다.
 한민족의 기상을 높이 세운 인물들로 암호명이 주어졌는데, 신상진에게는 안파견이라는 암호명이 주어졌고 신시개천을 열었던 한웅천왕은 박성화의 몫이 되었다.
 ♫~♩~♬~♬~♪
 핸드폰 벨이 울리자 박성화가 연구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되었나?]
 수화기에서 신상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투가 예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회장님에게 말씀을 드렸는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더라고.”
 박성화가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제2단계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2단계 방법이 언급되자 박성화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2단계 방법을 사용하기에 너무 이르지 않을까? 자칫 자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네.”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그 사람은 장사꾼이야.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데 함부로 입을 열지는 않을 거야.]
 2단계 방법이란 바로 신상진의 이름을 파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회장이 입을 뻥긋하게 되면 그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당사자는 그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어야겠네. 나중에 다시 통화하세.”
 동료가 다가오는 것을 본 박성화가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누구랑 통화하기에 표정이 그리 어둡습니까?”
 “집안일 때문에 좀 그렇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딸아이가 갑자기 아파서······.”
 박성화가 얼버무리며 말끝을 흐렸고 이에 동료는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독감인가보지요?”
 “내일쯤 결과가 나오니 그때 봐야 알겠지요.”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회사에서 좀 무리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듭니다.”
 “뭐가 말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작년에 겨우 16메가 메모리를 개발했는데 세계최고를 목표로 다그치고 있지 않습니까. 64메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128메가도 아니고 무려 256메가입니다. 256메가! 그런 엄청난 것을 세계최초로 개발하다니요. 그게 말이 됩니까?”
 1990년 8월에 16메가 메모리카드를 개발해 아직 양산체제에 돌입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처지가 그런데도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부으면서 256메가 메모리카드를 세계최초로 개발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정말 웃음이 절로 나올 일이었다. 그 때문에 연구원들만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슈퍼 VHS VTR을 개발해냈지 않습니까. 우리 회사의 역사, 아니 우리나라의 공업화가 선진국에 비해 아직 걸음마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세계가 놀라고도 남을 일이지요.”
 “그렇긴 하지만······.”
 ‘후후후! 조만간 세계 반도체의 중심은 대한민국, 아니 한국이 될 것이다.’
 박성화의 입가에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 미소의 의미를 모르는 동료는 그저 어색하게 따라 웃기만 했다.
 
 신상진이라는 이름이 주는 파괴력은 과연 대단했다.
 그렇게 설득하고 또 설득해도 꿈쩍도 않던 회장이 즉각 박성화를 호출했고, 박성화도 지체 없이 서울로 차를 몰고 갔다.
 똑똑똑!
 회장실에 도착한 박성화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회장실과 통하는 비서실 문을 노크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박성화 연구원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비서가 웃는 얼굴로 말한 뒤, 회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비서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박성화가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이는 으리으리한 규모에 절로 주눅이 들 정도였다.
 “당신이 박성화 연구원이요?”
 “네, 회장님!”
 “그리 앉으시오.”
 회장이 권하는 자리에 앉아 옷매무새를 추리는 사이 이장휘 회장이 박성화 앞으로 이동해 앉았다.
 “내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신상진 씨와 만났소?”
 “안전합니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답게 이장휘 회장은 그 말뜻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런 걱정은 말고 조금 전에 물음에 대답해보시오. 신상진 씨와 만났소?”
 “네, 회장님.”
 “그를 언급할 정도면 내게 원하는 것이 있을 텐데······.”
 “그것도 맞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내게 줄 것은 또 무엇이오.”
 이장휘 회장의 물음에 박성화는 대답 대신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게 뭐요?”
 “일단 보십시오.”
 군말 없이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 확인한 이장휘 회장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가 번뜩였다.
 “만약 내가 그를 만나지 않겠다면?”
 “아마도 다른 회사와 거래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회사도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박성화가 또박또박하게 대답하자 이장휘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협박인가? 내가 그 정도는 처리할 수 있는 힘은 있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상대는 신상진입니다.”
 그 말이 결정타가 되었는지 이장휘 회장의 안색이 홱 변했다.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그룹의 경영자라고 할지라도 통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신상진도 그 중 하나였다.
 “결정은 회장님 몫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받아주십시오.”
 박성화가 품속에서 봉투를 하나 더 꺼내 건네주었다.
 “이게 뭔가?”
 “제 사표입니다. 이 정도까지 회장님께 무례를 저질렀는데 회사에 더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흐음······.”
 이장휘 회장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박성화의 말을 인정했다.
 “신상진 씨는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음을 인정하지. 좋아. 그를 한 번 만나보겠네. 내일은 어떤가?”
 이제는 하대가 자연스레 나왔다.
 “괜찮습니다. 제가 드린 사표에 보면 약속장소가 기재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이장휘 회장이 고개를 젖히고 미친 듯이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
 “나를 가지고 놀았군.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아. 내일 자네도 나올 텐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나가서 일보게.”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박성화가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회장실을 나섰다. 그리고 건물을 나온 그는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보냈다.
 
 안파견에게 알린다. 2단계 작전이 통했다. 내일 약속된 장소에서 목표물을 접견하라.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남한산성은 지금 역사적 흔적은 수어장대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안은 이미 음식점으로 가득했고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기만 했다.
 부우웅, 끼익!
 검은색 승용차 3대가 줄지어 주차장에 멈추어 섰다. 이어 앞뒤의 승용차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내려 가운데 승용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자네들은 여기서 대기하게.”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디 위험한 곳에 온 것도 아닌데 웬 호들갑이야!”
 사내에게 면박을 준 이장휘 회장이 차에서 내렸다. 이에 먼저 내린 박성화가 반대쪽 식당을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가세.”
 박성화와 이장휘 회장이 나란히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종업원들이 쪼르르 달려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식당을 통째로 예약한 것인지 손님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예약한 손님은 왔습니까?”
 “네. 저쪽입니다.”
 종업원이 박성화 일행을 신상진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이윽고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신상진이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상진입니다.”
 “오랜만이오. 10년 전에 TV에서 많이 봤는데, 실제로 보니 실물이 더 나은 것 같구려.”
 “과찬이십니다. 누추한 이곳까지 오시게 해 송구스럽습니다.”
 “장사꾼이란 돈이 되는 곳은 어디든지 가는 법이니 괘념치 마시오.”
 그렇게 덕담을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한잔 하시겠습니까?”
 “아니오. 지금은 업무시간이라 술은 사양하겠소.”
 이장휘 회장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면서 내뱉은 짧은 한마디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녹아나 있었다.
 ‘역시 대한민국 제일의 그룹의 총수답구나.’
 “돌려서 말하는 것은 서로에게 부담이 될 것 같으니 직설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도 그게 좋소.”
 이장휘 회장도 흔쾌히 신상진의 제안을 수용했다. 이에 잠시 숨을 고른 그의 입에서 이장휘 회장이 혹하고도 남을 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세계제일의 반도체 회사가 되려면 나노기술은 필수입니다. 나노기술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천문학적인 자금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는 자금을 보다 덜 투자하고 인력을 아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신 박사가 그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오?”
 역시 이장휘 회장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현재 40나노기술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조만간 20나노까지 가능합니다.”
 꿀꺽!
 이장휘 회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더라면 미친놈 취급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신상진,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높았던 천재 과학자였다.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오성 반도체는 후발주자입니다. 후발주자가 너무 앞서나간다면 세계굴지의 회사들로부터 견제를 받을 것입니다.”
 “흐음!”
 이장휘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신상진이 말을 이어갔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다른 회사들보다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차이를 두고 앞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회사들도 오성 반도체를 따라잡기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부을 것입니다. 바로 치킨게임의 시작이지요.”
 치킨게임이 시작되면 얼마를 쏟아 부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5조? 10조?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자금이 들어갈 수도 있었다.
 결국 자금력이 딸리는 회사는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고 살아남은 회사가 달콤한 승리의 열매를 따먹게 되는데, 그 열매가 주는 유혹은 엄청나다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오성 반도체는 후발주자로서의 불리함을 만회하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붓고 있는 실정이다 보니 신상진의 말이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았다.
 “치킨게임의 승자는 오성 반도체가 될 것입니다. 회장님께서는 단지 치킨게임의 속도조절만 하시면 될 것입니다.”
 “으음!”
 이장휘 회장의 입에서 또 다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에 주도권을 잡았다고 판단한 신상진이 결정타를 먹었다.
 “조만간 메가바이트는 쓸모가 없게 될 것입니다. 기가바이트 메모리가 쏟아져 나오고 테라바이트가 그 뒤를 이을 것입니다. 회장님께서는 오성 반도체가 기가바이트 메모리 카드를 만들 수 있다고 보십니까?”
 오성 반도체는 이제 막 16메가 메모리카드를 만들어낸 회사였다. 반도체업계로 따진다면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인데, 기가바이트 메모리 카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었다.
 “원하는 것이 뭔가?”
 이장휘 회장의 말투가 바뀌었다. 이는 거리를 두지 않는 사람에게만 하는 행동으로, 그는 이미 신상진의 말에 매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매년 3조원 이상씩 투자해주십시오. 그러면 회장님께서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기술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나노기술도 함께 말입니다.”
 “으음! 3조원이라······.”
 어금니를 꽉 깨문 이장휘 회장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2장. 단군 프로젝트
 
 
 
 
 
 
 지금도 반도체 부분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붓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무려 3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더 투입한다는 것은 회사의 미래를 건 모험이었다.
 하지만 승부사 기질이 특출한 이장휘 회장의 고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여기 256메가바이트 기술과 계약서가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계약서에 서명하시는 순간 256메가바이트 기술은 회장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상진이 계약서와 서류뭉치를 내밀었고, 그것을 건네받는 이장휘 회장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였다.
 “오늘 저와 만난 것은 비밀입니다.”
 “자금은 어떤 방식으로 보내면 되는가?”
 “천안에 대지 10만 평에 연건평 1만6천 평의 건물을 지을 계획입니다. 회장님께서 그것을 맡아주십시오. 그리고 첨부한 서류에 적시한 대로 처리해주십시오.”
 신상진의 말에 이장휘 회장이 서류를 뒤척이다가 신상진이 말한 서류를 찾아냈다. 그곳에는 NBC(화생방)방호로 설계된 지하 6층 지상 3층의 건물을 짓는다는 내용과 필요한 장비 등이 적시되어 있었다.
 “이 건물의 용도는 뭔가?”
 “전자분야의 회사를 차릴 생각입니다. 또한 오성 반도체에 전해질 기술도 연구해야 하고요.”
 그렇게 두루뭉수리하게 넘어갔지만 이장휘 회장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
 
 이장휘 회장과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친 신상진은 미래그룹의 왕회장과도 담판을 지어 협력을 이끌어냈다. 자신만의 철학이 투철한 왕회장과 협력할 수 있었던 것도 신상진이라는 이름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하하! 정말 대단해. 말 몇 마디로 수 조원을 확보할 수 있다니··· 나는 꿈도 꾸지도 못하는 일일세.”
 박성화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다물회가 초기에 확보한 자금은 무려 4조5천억 원!
 굴지의 대기업이 아니라면 꿈도 못 꾸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런 천문학적인 금액을 단숨에 손에 넣었으니 입이 찢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신상진이라는 이름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잖아.”
 “하긴 미영이 말도 일리가 있어. 신상진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더라면 오성그룹과 미래그룹이 그런 엄청난 돈을 투자하기나 하겠어?”
 소서노라는 암호명을 가지고 있는 박미영은 역사학을 전공했다. 학창시절 신상진을 짝사랑하고 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자취를 감추었던 신상진이 다물회를 만들었다는 말에 그녀는 두말하지 않고 다물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다물회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아아! 조용, 조용!”
 정해국이 손을 내저으며 모두의 입을 막았다.
 다물회 멤버들과는 달리 그는 축구선수 출신이었다. 그런 탓에 규율을 담당하며, 강감찬이라는 암호명을 받았다.
 “우리는 친구사이이기 전에 다물회 멤버들입니다. 이곳이 소꿉놀이를 하는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다물회는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러니 반발하는 것은 삼가주십시오. 그리고 이름보다는 암호명을 사용해주기 바랍니다.”
 “나도 강감찬의 말에 동의하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신상진이 정해국의 말을 지지했다. 그러자 박성화도 찬성하고 나섰다.
 “역시 규율을 담당한 사람다운 말이오. 나도 강감찬의 말에 동의하겠소.”
 “뭐, 어색하겠지만 반대할 이유는 없지.”
 그렇게 하나둘씩 정해국의 말에 동의했다. 이에 분위기가 조금은 진중하게 변했다.
 “앞으로 자금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들어오게 될 것이오. 나는 자금관리를 소서노에게 맡기고 싶은데, 여러분들의 의향은 어떻소?”
 신상진이 먼저 서두를 열었다.
 다물회의 회장은 박성화였지만 실질적인 리더는 그였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가게 되는 법!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회의만 주재하는 의장이라는 직책을 만들었는데 신상진이 초대 의장을 맡았다. 그래서 서두도 그가 연 것이었다.
 앞으로 얼마가 더 들어올지 모르는 엄청난 금액을 담당하게 된 박미영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굳은 얼굴로 변하며 신상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맡겨주신다면 열심히, 그리고 투명하게 자금을 관리해보겠어요.”
 “반대하는 사람 있소?”
 한민족의 부흥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쪼들리지 않게 살고 있는 터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천안의 본부가 완공되고 나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것이오. 일부는 연구에 매진하게 될 것이며, 또 일부는 인재들을 찾아야 할 것이오.”
 “의장님, 할 말이 있습니다.”
 선덕여왕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정하나가 손을 번쩍 치켜들어 발언권을 신청했다. 일란성 쌍둥이로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녀 역시 박미영과 마찬가지로 신상진을 짝사랑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뭡니까?”
 “인재를 양성함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디 들어봅시다.”
 신상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숨을 고른 뒤,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인재를 찾아낸다고 해도 교육이 잘못되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직접 교육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해야 된다고 봅니다.”
 정하나가 말한 것은 자칫 흘려버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무리 인재를 찾아내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헛고생만 하게 되는 셈이었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군. 그렇다면 영재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뜻인데······.’
 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확보하는 것이 문제였다. 다물회의 뜻에 부합하는 교사들을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장님, 선덕여왕의 말은 타당성이 있으나 당장 시행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박성화의 의견에 지지를 보내 정하나가 제기한 안건은 상황을 봐가면서 진행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이후로도 여러 가지 안건이 나왔는데 대부분 일반적인 안건들이라 일사천리로 처리가 되었다.
 
 회의가 끝난 후, 다른 사람들은 맡은 임무를 처리하기 위해 떠났고, 신상진과 박성화 두 사람만 남았다.
 “오늘은 제법 현실적인 안건이 많이 나온 것 같네.”
 “지금은 처음이니 그렇지. 단군 프로젝트를 완성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것일세.”
 “단군 프로젝트?”
 박성화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단군만큼 뛰어난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에서 단군 프로젝트라고 명명했네.”
 “단군 프로젝트라······.”
 박성화가 단군 프로젝트라는 말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단군!
 한민족에게 있어서 단군은 한웅과 더불어 더없이 위대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런지 박성화의 얼굴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단군이 못 이룬 홍익인간을 우리가 이룬다 이 말이지?”
 “자네답지 않게 왜 그리 흥분을 하고 그러나.”
 다물회 회장의 위신을 지키라는 힐책의 말이었지만 그 말의 의미를 알면서도 박성화는 그저 실실거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줄 수 있겠나?”
 “말해보게.”
 “자네는 역사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일세.”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박성화가 묻고 싶은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신상진은 그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내게는 아주 중요한 일일세.”
 ‘이제 박성화는 발을 뺄 수 없으니 어느 정도는 말해줘도 괜찮겠지.’
 “나는 명분과 응집력이 필요했네. 그래서 자네를 택한 것일세.”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명분과 응집력이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역사학도들, 특히 민족주의자들은 그 누구보다 응집력이 강했다.
 고토회복이라는 명분으로 박성화를 끌어들였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지금의 다물회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박성화의 얼굴근육이 마구 씰룩거렸다. 힐끔 그의 얼굴을 본 신상진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지.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차돌처럼 단단한 응집력이 필요했네. 그래서 자네들이 이 일에 미칠 수 있도록 고토회복이라는 명분을 준 것일세.”
 “자네 생각했던 것보다 무서운 사람이었군.”
 “후훗! 필요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는 단군 프로젝트를 완성시킬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악마가 될 것일세.”
 팟팟팟!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는 가운데 신상진의 눈빛은 더욱 강렬해졌고, 그에 반해 박성화의 시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고토회복은 민족주의자들의 염원이 아닌가. 진실을 떠나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세. 그리고 난 기회의 장을 열어준 것뿐일세. 질문에 대답이 되었는가?”
 신상진의 말이 끝났을 때, 박성화는 그의 가슴팍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에 신상진이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올려진 박성화의 손을 잡으며 힘주어 말했다.
 “이 미친 세상, 제대로 한번 잡아보세. 아니면 더불어 미쳐보든가······.”
 “후후후, 으하하하!”
 박성화가 돌연 고개를 젖히고 미친 듯이 웃었고 이에 신상진도 덩달아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신상진과 박성화가 밖으로 나왔다. 술을 한잔하기로 하고 밖으로 나온 것인데, 저만치서 서성이고 있는 박미영을 발견한 박성화가 신상진의 어깨를 감싸고 그녀를 볼 수 없도록 등을 돌렸다.
 “저기, 술은 다음에 하기로 하지. 그러고 보니 오늘 우리 딸아이의 생일이거든!”
 “오, 그래?”
 “미안하지만 나 먼저 가야겠는데 괜찮겠어?”
 “딸아이 생일이라는데 어쩔 수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신상진의 얼굴에는 어쩐지 서운함이 깃들어 있었다.
 ‘후후후! 나중에 거나하게 한턱내야 할 것이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인 박성화가 신상진의 어깨를 두드려준 후, 어둠 속으로 멀어져갔다. 이에 신상진도 택시를 타려고 도로변으로 붙었고, 그런 그의 귓속으로 낯익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상진 씨!”
 “응? 미영이 목소리잖아?”
 몸을 돌린 신상진의 눈에 두 손을 앞에 가지런히 모은 박미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근처에 볼일이 있었나보지?”
 “그게 아니라······.”
 박미영이 말끝을 흐렸다.
 ‘이상하네.’
 신상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조금 상기된 얼굴의 박미영이 어렵사리 말을 건넸다.
 “배고픈데 저녁 사주세요.”
 ‘그러고 보니 나도 출출하군.’
 “미영이가 뭘 좋아했더라······.”
 “저야 뭐 아무거나 잘 먹어요. 특히 삼겹살에 소주를 좋아 했었잖아요.”
 ‘그랬던가?’
 신상진이 멋쩍게 웃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구이돈’이라는 간판을 발견한 그가 그쪽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지.”
 “저기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혹시 상진 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한적한 곳으로 가요.”
 부끄러운 말도 아닌데 박미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신상진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럼 어디가 좋을까······.”
 “저기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조그만 식당이 하나 있어요. 그리로 가죠.”
 그렇게 말한 박미영이 앞장서 걸어갔고,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신상진이 말없이 뒤를 따랐다.
 그녀가 말한 대로 고향집 식당은 규모가 아주 작은 식당이었다. 70전후로 보이는 두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고향의 푸근함이 물씬 느껴졌다.
 “어서 오세요.”
 할머니가 정겨운 웃음으로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두 분이세요?”
 “네.”
 신상진과 박미영이 구석진 자리에 앉아 삼겹살과 소주를 주문했다.
 잠시 후, 달궈진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지글지글 아우성을 치며 노랗게 익어갔다. 그렇게 고기가 익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았고 그 바람에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해.”
 “아니에요. 상진 씨가 먼저······.”
 “고기가 탈 것 같군. 자, 들지.”
 신상진이 술잔을 내밀자 박미영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런데 그는 술잔을 비우느라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옛날에도 그러더니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녀가 지금껏 연애도 해보지도 못하고 살아온 이유가 바로 신상진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그가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리 빤히 쳐다보는 거야?”
 “아, 아니에요.”
 고개를 가로저은 박미영이 술잔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아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런데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야?”
 “왜··· 결혼을 안했나요?”
 남의 눈을 피해 잠적한 사람에게 물을 말이 아니었다. 원래는 그런 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나온 것이었다.
 “그러는 미영이는 왜 결혼을 안 했지?”
 “······.”
 ‘너 때문에, 너를 기다리느라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지 박미영은 신상진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말 못할 사연이 있는 모양이로군.”
 ‘그래요. 사연이야 많지요. 당신을 기다려온, 아니 지금껏 가슴을 졸이며 살아온 나에요. 그 기나긴 시간동안 겪어야 했던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졌군.”
 어색함을 달래려는 듯 신상진이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술이 몇 순배 돌았고, 빈병이 쌓여갔다.
 “하하하! 그러니까 정하나도 아직 결혼을 안했단 말이야? 무슨 노처녀 친목계라도 하려는 거야 뭐야!”
 취기가 오르면서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목소리 톤도 높아졌다.
 “쳇! 마음에 없는 사람하고 살을 비비며 살 바에는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다고요!”
 “겨울만 되면 옆구리가 시리지 않아? 어? 술병이 비었네. 할머니,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그러는 자기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서······.”
 박미영이 취기로 인해 흐릿해진 눈동자로 신상진을 쳐다보았다.
 “누가 나 같은 놈과 함께 살겠어. 나 좀 구제해줄 여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앞에 있잖아욧!’
 하마터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상진은 염장을 지르는 소리만 해댔다.
 “좌우간 이제라도 미영이가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어.”
 “됐네요.”
 “내일 모래면 40대야. 늦게 결혼하면 애기 낳기 힘들다는 것 몰라?”
 “우리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요.”
 부담스러운 박미영이 술잔을 들어보이자 신상진도 덩달아 술잔을 들었다.
 “위하여!”
 “그런데 무엇을 위한 건배지?”
 “호호호! 그런 것 따져서 뭐해요. 그냥 위하여!”
 챙!
 술잔이 부딪치고 쓰디 쓴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렇게 순배가 더 돌아가면서 두 사람은 점점 취기에 젖어갔고 마침내 술을 이기지 못한 박미영이 의식을 잃어버렸다.
 
 갈증을 느낀 신상진이 번쩍 눈을 떴다. 그런데 천장은 낯익은 천장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눈을 끔뻑이던 그가 팔에 전해지는 묵직함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벌거벗은 채로 곤히 잠들어 있는 박미영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서, 설마······.’
 신상진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조심스레 박미영의 머리에서 팔을 빼내고 일어나 앉아 지난밤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와 함께 자게 되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우웅.”
 뒤척이는 박미영의 팔이 신상진의 허벅지에 걸쳐졌다. 이에 그녀의 팔을 떼어낸 신상진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단숨에 비워버렸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고 한 놈의 의지력이 이토록 약했단 말인가.’
 박미영이 못나서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학창시절부터 박미영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화가 난 이유가 있었다.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복마전과도 같은 험난한 곳들을 돌파해야 한다. 그런데 시작단계에서부터 술에 취해 욕망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신상진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들었다가 박미영을 힐끔 쳐다보고는 담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때, 옆자리가 허전한 것을 느낀 것인지 박미영도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일어났어요?”
 벌거숭이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미영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일어났어. 조금 더 자지 않고······.”
 그 말에 박미영이 몸을 굴려 신상진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상진 씨.”
 “응?”
 “고마워요.”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신상진이 의아한 눈으로 박미영을 내려다보았다.
 “38년을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았어요. 이제야 말하는 것이지만 사실 어제 정신을 잃었던 게 아니에요.”
 여자는 요물이라고 했던가!
 그 말이 과장된 것이 아님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상진 씨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
 “이런 나를 더러운 년이라고 욕해도 좋아요. 당신의 여자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기뻐요. 내 안에 당신의 체취가 있다는 이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려요.”
 기관총처럼 말을 쏟아낸 박미영이 신상진의 복부에 얼굴을 묻었다. 이에 그녀를 일으켜 앉힌 신상진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류가 내린다고 한 말이 있듯이 정말이지 여자의 집념은 무섭기 짝이 없었다.
 모두가 신상진이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어도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랬기에 30대 중반인 나이에도 애인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미치도록 그리워했고 십여 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환호보다는 마음을 졸였던 그녀가 마침내 사랑의 불꽃을 가슴에 품은 것이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다고······.”
 “전부··· 당신의 모든 것이 내게는 더 없이 소중한 것들이에요.”
 그 순간 신상진은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참을 이유가 없었기에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으응.”
 뜨거운 숨결이 다가오자 박미영이 비음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숨결이 점차 뜨겁게 달궈지더니 이내 열락의 폭풍으로 변해 방안을 강타했다.
 
 ***
 
 2011년 7월의 찌는 듯한 여름.
 다물회가 만들어진 지 20년이 지나갔다.
 신상진이 호언장담한 대로 오성 반도체는 세계최초로 256메가바이트 메모리 램의 개발을 시작으로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반도체 회사들의 치킨게임이 시작되었다. 독일과 일본, 그리고 대만의 반도체 회사들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오성 반도체가 투자하는 자금은 그들 회사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성 반도체는 단 한 번도 선두를 내주지 않은 채, 기술을 선도해 나갔다.
 2000년대 후반에 들지 세계 굴지의 회사들이 하나둘씩 나가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종내에는 모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에 오성 반도체는 치킨게임의 승리라는 달콤한 열매를 따먹기 시작하면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해 나갔다.
 2000년대 대한민국이 괄목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단군 프로젝트가 있었다. 반도체를 비롯해 조선 등 몇몇 분야에서는 세계 1위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되었고 자동차도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20년 동안 다물회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총 두 번의 위기를 겪었는데, 각각 금융실명제와 미래그룹의 왕회장이 사망했을 때였다.
 특히 금융실명제 때는 다물회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큰 위기를 맞았었다.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고토를 회복한다는 계획이 차질을 빚은 것도 금융실명제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2000년대는 격동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큼지막한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9.11테러를 시작으로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북한의 핵실험도 강행되었다.
 그리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촉발된 금융대란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그런 대형 사건들이 잇달아 터진 탓에 다물회도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금융실명제 때, 신성투자회사의 자회사로 편입된 버금전자는 오성그룹과 미래그룹 이외에도 국내 굴지의 그룹들을 파트너로 삼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신성투자회사는 13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다물회는 이러한 투자회사를 무려 5개나 보유하고 있었다.
 5개의 투자회사들이 보유한 유동성 자금은 무려 80조 원!
 무려 7백억 달러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이중 절반이 넘는 50조 원을 달러와 유로 등 기축 통화와 미국 등 선진국의 국채로 분산 투자되어 있는 상태였다.
 
 버금전자 건물 지하 5층!
 외견상으로는 중견기업의 본사지만 이곳이 바로 다물회의 심장이며 뇌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지하 1층부터 3층까지는 버금전자의 연구실과 생산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지만 4층부터는 버금전자가 아닌 다물회 본부로 쓰이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지하 4층부터는 몇 단계의 보안 시스템을 통과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음성과 지문, 그리고 각막을 인식시켜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찌잉!
 야릇한 소리와 함께 자동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녀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다름 아닌 다물회의 수뇌들이었다.
 “의장님께서 많이 기다리시겠습니다.”
 “하하하! 그 양반이야 연구에 미쳐 기다림과는 거리가 먼 사람 아니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노트북과 시름을 하고 있을 것이오.”
 신상진을 비롯해 과학자들의 이런 열성이 있었기 때문에 다물회는 몇몇 분야에서는 감히 다른 국가들이 넘볼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를 수 있었다. 특히 물리학과 전자공학 부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버금전자 건물 지하 4층부터는 완전 자동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이 지하 6층에 설치된 슈퍼컴퓨터가 맡고 있었다.
 다물회의 이름을 그대로 따와 이름을 붙인 슈퍼컴퓨터 다물은 세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미국 에너지 성(省)의 ASCI White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다.
 다물의 메모리 램의 용량은 무려 500테라바이트나 되고, 연산능력은 20테라플롭스(초당 20조회의 연산)를 자랑한다.
 이러한 슈퍼컴퓨터를 보유할 수 있었던 것도 신상진의 소립자 이론이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후에 길종선 수석연구원의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비룡시스템이 완성이 된 것이오?”
 “글쎄요.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니 잘 모르겠소.”
 박성화가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대답하자 지천명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회장님께서 모르신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다물회가 만들어진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박성화는 신상진과 마찬가지로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세월 동안 다물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중이었다.
 “허허허! 계백께서는 내가 무슨 다물인줄 아는가본데 나는 사람이오, 사람!”
 박성화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걸음걸이를 빨리했다. 이에 다른 사람들도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고 이내 대회의실에 도착했다.
 똑똑똑!
 박성화의 말대로 신상진은 노트북을 열어놓고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세월의 여파를 피해가지 못한 그의 얼굴은 탄력을 잃었고, 머리카락도 희끗희끗하게 변해버렸다.
 덜컹!
 문이 열리고 박성화 등이 우르르 들어서자 일손을 멈춘 신상진이 노트북을 끄고 옆으로 밀어놓았다.
 “내가 뭐라고 했소. 의장께서는 노트북과 씨름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박성화가 지천명에게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어서들 오시오.”
 “의장께서는 일이 지겹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지겹기는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박성화가 신상진 옆에 앉는 가운데 정하나가 커피를 뽑아 돌리고 난 뒤, 제자리에 앉았다.
 “오후에 길종선 수석연구원의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라더군요. 혹시 내용을 알고 계십니까?”
 “비룡시스템에 관한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럼 비룡시스템의 개발이 끝난 것입니까?”
 박성화를 비롯해 모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비룡시스템은 미사일 발사 시스템으로, VLS(수직발사시스템)와 궤도차량에서 운용할 수 있다.
 VLS(수직발사시스템)은 비룡시스템A이며 궤도차량에서 운용하는 시스템은 비룡시스템B로 명명되었는데, 비룡시스템 안에는 홍상어 대잠로켓을 비롯해 천룡 순항미사일, 그리고 대함미사일, 철매 등 대공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는 다목적 발사 시스템이었다.
 “그럼 이제 천리안시스템만 남은 셈이로군요.”
 “상진늄 폭탄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상진늄 폭탄이라는 말에 신상진이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눈을 비볐다.
 상진늄은 신상진이 개발한 원자를 말하는 것으로, 소립자의 원자를 추출해 다른 원자와 합성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상진의 이름을 따 상진늄이라고 불렸다.
 방사능이 전혀 없는 상진늄은 98퍼센트 이상의 순도로 정제할 경우, 수소폭탄의 1천 배가 넘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물질폭탄이라고도 불리는데, 정제 방법이 문제였다.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소.”
 “그런데 의장님, 지하 6층에 쌓아놓은 것들은 언제 처리할 생각입니까?”
 박성화가 말한 것은 정제하지 않은 상진늄을 바탕으로 만든 폭약의 원료였다.
 폭약으로 만들 경우, 무려 10만 톤을 만들 수 있었다. 기존의 폭약보다 10배 이상의 파괴력을 가진 것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었다.
 “단군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을 때, 사용하게 될 것이오. 그런데 그것을 왜 묻는 것이오?”
 “양이 워낙 많기 때문에 혹시 문제가 될지 몰라서 한 말이었습니다.”
 소량만 유출되어도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폭약으로 만드는 방법은 우리 이외에는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냥 노파심에서 한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윤새롬 검사에게서 이메일이 왔는데 검찰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고 합니다.”
 정하나의 말에 분위기가 일쑨 바뀌어버렸다.
 윤새롬 검사는 다물회가 키워낸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 젊은 사람답지 않게 결단력이 강한 여자로 정평이 나 있었다. 또한 몇 년 후, 검찰총장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재작년 말부터 시작한 군 비리에 대한 수사가 물의를 빚으면서 젊은 검사들 사이에 불만이 팽배해지고 있다더군요.”
 “미친놈들 같으니······.”
 신상진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가 욕한 대상은 검사들이 아닌 정부였다. 글로벌 경제가 되살아난 지금 국방비를 쏟아 부어 북한의 핵무기에 대응할 채비를 갖추지 못할망정 군의 사기를 꺾은 일만 해대고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도 재정수지가 예상보다 빨리 균형을 잡아가고 있는 게 다행입니다.”
 만약 재정수지 균형이 엉망인 상태라면 국방비는 더 깎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나마 올해는 전년대비 4.2퍼센트가 상승한 것도 정부 재정수지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2010년도의 3.8퍼센트에 비해 다소 늘어난 상태이기는 하지만 물가 등을 감안하면 거의 동결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어느 정도 준비는 끝났다. 천리안시스템의 개발을 끝내고 생산에 들어가는 순간 단군 프로젝트는 종료되고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될 것이다.’
 
 ***
 
 버금전자 건물 지하 4층의 브리핑 룸은 관계자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찼다.
 맨 앞줄에는 다물회의 핵심 멤버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고 그 뒤에는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들, 그들 뒷자리에는 각 분야의 연구원들이 긴장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비룡시스템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브리핑에 앞서 질문을 생략한다는 점, 인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찌잉!
 길종선 수석연구원이 버튼을 누르자 미등만 남기고 불이 꺼지며 슬라이더가 켜졌다.
 “보시는 화면이 바로 비룡시스템입니다. 비룡시스템은 가로 0.8미터, 세로 1.2미터의 직사각형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함정에서는 수직발사기로 사용할 수 있고 개량형인 B형은 궤도차량에서 운용할 수 있습니다.”
 길종선 수석연구원이 비룡시스템의 제원을 자세히 설명해 나갔다.
 구축함 등 함정에서 사용하는 수직발사기를 궤도차량에서 운용한다는 발상 자체도 놀라운데, 비룡시스템 하나만으로 대함미사일과 대공미사일, 그리고 대잠미사일과 순항미사일도 함께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비룡시스템은 광학기술과 레이더기술이 혼합된 천리안시스템과 연동되며 별도의 일루미네이터를 설치하지 않아도 교전할 수 있습니다. 또한 1500킬로미터의 탐지범위를 가지며, 1100개의 목표를 탐지 추적할 수 있고 이중 최대 36개의 목표와 동시에 교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룡시스템과 천리안시스템을 탑재한 구축함은 더 스텔시하게 건조할 수 있으며 보다 많은 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장점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길종선 수석연구원이 버튼을 누르자 비룡시스템의 단면도가 나타났다. 이에 간략하게 설명을 한 그가 다시 한 번 버튼을 누르자 비룡시스템을 통해 발사되는 미사일의 CG가 나타났다.
 “보시는 바와 같이 미국의 수직발사 시스템 중 하나인 MK41과 크기만 조금 다를 뿐, 외견상으로 거의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기존 함정의 창정비 때, 비룡시스템으로 교체가 가능합니다. 물론 우리가 직접 교체해야 한다는 전재를 두고 한 말입니다.”
 브리핑이 이어지면서 길종선 수석연구원의 목소리 톤이 조금씩 높아졌다.
 그리고 6척의 이순신급 구축함에 설치된 비룡시스템에서 미사일들이 일제히 솟구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슬라이더는 넘어가지 않았다.
 “현재 비룡시스템의 개발은 끝난 상태며, 허상과 마찬가지로 어느 때라도 즉시 양산체제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출 것입니다.”
 짝짝짝!
 마지막으로 길종선 수석연구원이 허리를 굽혀 보이자 신상진이 박수를 쳤고, 이내 모두들 비룡시스템을 개발한 연구원들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브리핑이 끝나고 신상진은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들을 회의실로 초대했다.
 “김민수 대령, 어떻게 보았는가?”
 그렇다.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들은 바로 다물회에서 키운 장교들이었다.
 해병대에 근무했던 이진철이 준장이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되면서 합동참모본부의 작전본부장이 되었는데 알게 모르게 그의 입김이 작용해 다물회에서 키운 장교들은 중요한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비룡시스템으로 무장한다면 전투력은 배가 될 것입니다.”
 “B형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3개 대대 정도만 배치해도 수도권은 물론이고 한반도 전역을 커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학수 소령이 김민수 대령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역시 다물회에서 키운 인재로 특전사령부에 근무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개발해낸 무기들이 실제로 배치되려면 자네들의 힘이 필요해.”
 “옳은 말씀입니다. 비룡시스템처럼 뛰어난 무기체계를 썩힌다는 것은 그야말로 국가적 손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물회에서 키운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비룡시스템을 보았다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획기적인 무기체계였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의 핵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 지금, 비룡시스템이야말로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무기체계였기 때문에 장교들 입장으로서는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군에서 지금의 방공 시스템보다 뛰어난 무기체계의 소요를 제기해준다면 이강호 의원이 적극적으로 밀어줄 것일세.”
 초선인 이강호 의원은 정치적 수완이 매우 뛰어난 인물로, 30여 명에 이르는 계파를 이끌고 있다.
 국방위에 소속되어 있는 이강호 의원 역시 다물회가 키워낸 인물이며 다물회가 키워낸 사람들 중, 유일하게 암호명을 받을 정도로 다물회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 의원님께서는 허상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민수 대령이 말한 허상은 대어뢰무기를 일컫는 것이었다.
 태호정밀이 개발한 허상은 국방부와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는데, 이강호 의원 주도 하에 밀고 당기기가 한창이었다.
 “그 문제는 이강호 의원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자네들은 이강호 의원을 측면에서 지원하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두면 의심을 받을 테니 그만 돌아들 가게.”
 “네, 의장님!”
 김민수 대령 등이 일어나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에 신상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회의실을 나갔다.
 
 ***
 
 비룡시스템의 개발 완료는 천리안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는 연구원들을 자극했다. 특히 연구원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홍연 수석연구원은 식음을 전폐하다 시피 연구에 매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 소자들의 단점은 쉽게 과열된다는 것이다.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김홍연 수석연구원이 천리안시스템에 사용될 소자를 내려다보며 깊은 고심에 빠졌다.
 무려 10년여에 걸쳐 연구한 끝에 개발해낸 소자는 미세한 부분까지도 감지해낼 수 있었는데, 기존의 레이더에 사용하는 소자보다 50배나 뛰어났다.
 연구원들은 이 엄청난 것을 개발해냈다는 사실에 환호를 질렀다. 하지만 그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소자들을 멀리 떼어놓으면 괜찮은데 병렬로 배치해 놓으면 쉽게 과열해버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어째서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지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지만 답보상태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었다.
 광학부분 등 다른 문제들은 이미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소자 문제만 해결되면 천리안시스템의 개발이 끝나게 되는 것인데, 잡힐 듯하면서도 멀어지는 터라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찌잉!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에 김홍연 수석연구원이 소자를 내려놓으며 돌아앉았다.
 “어떻게 됐어?”
 “보시다시피······.”
 김태하 연구원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그와 김홍연 수석연구원은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김태하 연구원이 김홍연 수석연구원보다 3살이 적은 35살이었다.
 “그쪽에서도 원인을 모른단 말인가.”
 “네, 형님. 아무래도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김홍연 연구원이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응!”
 [자기야, 오늘 바빠?]
 핸드폰에서 옥구슬이 굴러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오늘 아빠 생신이잖아. 그래서 바쁘지 않으면 같이 갔으면 해서······.]
 ‘이런! 그러고 보니 오늘 새롬이 아버님 생신이었구나.’
 윤새롬 검사와 사귄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양가에서는 빨리 결혼식을 올리라고 성화였지만, 두 사람 모두 결혼식보다는 일에 더 몰두하고 있는 터라 부모님들은 속앓이만 할 뿐이었다.
 “이거 어쩌지······.”
 윤새롬 검사의 부모님 생신 때마다 참석했던 그였으나 지금은 사정이 좋지 못했다.
 [그렇게 바빠?]
 “사정이 좀 그래.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어쩔 수 없지.]
 목소리에 서운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김홍연 수석연구원이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형님이 오늘 하루 빠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 없잖아요. 그냥 다녀오세요.”
 “천리안시스템이 완성돼야 단군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것인데 개인적인 일로 이런 큰일을 미룰 수는 없어.”
 김태하 연구원이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딴에는 선배를 생각한 마음에서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핀잔 아닌 핀잔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단군 프로젝트는 김홍연 수석연구원의 투지를 발판으로 화룡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제3장. 폭풍전야
 
 
 
 
 
 
 휘이잉!
 겨울을 재촉하는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남은 달력도 달랑 한 장뿐이었다.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새해가 밝아온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밤의 네온사인이 더 화려해졌다.
 “어떻게 되었소?”
 강남역 뒤편에 위치한 XX룸살롱.
 이곳은 유력 정치인이나 재벌 2세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금융한파 때에도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꽉 들어차는 곳이었다.
 “이강호 의원의 뒤를 캐고 있는데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순간 국정원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초선임에도 불구하고 급격하게 세를 불려나가고 있는 이강호 의원을 견제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비리 혐의를 찾아내지 못했다.
 털어서 먼지가 나오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국정원을 동원해보았지만, 다물회에서 운영하는 회사들의 정치 후원금 빼고는 꼬투리 잡힐 만한 것이 없었다.
 “신성투자회사를 조사해보는 것은 어떻겠소?”
 “외국인들도 신성투자회사에 투자를 많이 한 상태입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된서리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거야 원!”
 “이강호 의원과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뒷조사도 병행하고 있으니 뭔가 나오겠지요.”
 “알겠소. 이강호 의원 측에서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주시오.”
 “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국정원장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다가 돌연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팽개쳤다.
 “빌어먹을! 그 자식, 뭔가 있긴 한데 도무지 빈틈이 없으니 미치고 환장하겠구먼!”
 감으로는 이강호 의원을 옭아맬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유력 정치인으로 급성장한 사람을 감만으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것이 국정원장으로 하여금 스트레스를 받게 했다.
 
 ***
 
 버금전자의 두뇌이자 심장부인 다물이 위치한 지하 5층!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흥분으로 가득했다.
 김홍연 수석연구원은 기어코 천리안시스템을 완성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다물을 통해 시뮬레이션을 하는 날이었다.
 이 과정을 통과한다면 길고 길었던 단군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들뜰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신상진과 박미영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복도를 오가는 연구원들이 살갑게 인사했다.
 박미영이 소서노라는 암호명을 가지고 있으며 천문학적인 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연구원들은 그저 그녀를 신상진의 아내로만 여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낯설기만 하네요.”
 “시스템들이 많이 바뀌었으니 당연하지. 저쪽으로 갑시다.”
 신상진과 박미영이 데이터실로 들어섰으나 누구 하나 그들을 맞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데이터실에는 다물회의 핵심 멤버들은 물론이고 단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 모여 있었는데, 하나 같이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어쩐지 쇳소리가 가미된 것 같은 컴퓨터 특유의 음성이 만들어졌고, 24개의 멀티화면에서는 제각기 다른 동영상이 비쳐지고 있었다.
 [천리안시스템 가동!]
 멀티화면의 영상이 바뀌는 가운데 다물의 음성이 계속 흘러나왔다.
 [화기제어 시스템과 연동합니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화기제어 시스템과 연동 완료. 비룡시스템과 연동을 시작합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화기제어 시스템과 연동이 되었지만 비룡시스템과 연동되지 못한다면 실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김홍연 수석연구원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비룡시스템과 성공적으로 연동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상목표물 발사합니다.]
 멀티화면 한 곳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화면에 표기된 거리는 무려 1200킬로미터였다.
 미사일이 시뻘건 화염을 뿜어내며 하늘로 솟구치는 가운데 천리안시스템이 작동하며 비룡시스템에 미사일에 대한 자료를 송출했고, 그것을 받은 비룡시스템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시뻘건 불꽃 두 개가 충돌하며 폭발했다.
 콰앙!
 [목표물 요격 성공!]
 “와아아아.”
 모두가 환호성을 터트렸다.
 쇳소리가 섞인 듯한 컴퓨터 특유의 목소리가 지금처럼 정겨울 수가 없었다. 특히 천리안시스템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김홍연 수석연구원의 눈가에는 물기가 맺혔다.
 촤르르르.
 다물이 미사일요격에 대한 데이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연구원들은 행여 잘못될세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브리핑룸에 모인 모두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단군 프로젝트의 핵심 중 하나인 천리안시스템의 개발이 완료됨으로서 단군 프로젝트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천리안시스템이 중요한 것은 천리안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발전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데 있었다.
 위성뿐만 아니라 전투기와 방공망 등에 사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민수부분까지 감안한다면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의장님, 브리핑에 앞서 한 말씀하시지요.”
 “허허허! 가장 기쁜 사람은 김홍연 수석연구원인데 내가 초를 칠 수야 없지 않소.”
 신상진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박성화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긴 그렇군. 그나저나 상진늄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신상진은 넉넉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대답을 회피했다. 이에 박성화도 더 이상 묻지를 않았고 브리핑 준비가 끝나자 김홍연 수석연구원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짝짝짝!
 신상진이 먼저 박수를 치자 모두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에 허리를 굽혀 답례한 김홍연 수석연구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먼저 천리안시스템 개발팀을 대표해 천리안시스템이 완성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신 의장님 이하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짝짝짝, 짝짝짝!
 또 다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상진을 비롯한 모두에게 감사한다는 말로 서두를 연 그는 천리안시스템의 개발과정에서 겪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진즉에 티타늄을 떠올려보지 그랬습니까?”
 경청하던 누군가가 묻자 김홍연 수석연구원이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라는 말이 정말로 가슴에 와 닿는 질문이로군요.”
 “와하하하.”
 김홍연 수석연구원의 볼멘 대답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브리핑이 계속되었다.
 
 ***
 
 매스컴에서는 연일 지금까지 발생한 사건사고들을 나열하면서 연일 군 비리 척결을 주장하는 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런 가운데 군 곳곳에서 반발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쾅!
 “우리가 무슨 동네북이야 뭐야!”
 “그러게 말이야. 처먹기는 지들이 다 처먹고 놓고 군을 싸잡아 비난하다니. 이게 말이나 돼?”
 이학수 소령이 맞장구를 치며 동기들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분위기에서 명령만 떨어지면······.’
 그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실질적으로 군을 움직이는 영관급 장교들의 불만이 이 정도라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군의 이런 불만은 천안함이 침몰했을 때, 정부의 미흡적인 대응으로부터 불거지기 시작하면서 강도를 더해가는 정부의 비리척결 수사와 맞물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국방부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차라리 천안함 사건을 다 까발려버리는 것은 어때?”
 “이제 와서 까발려보았자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그 말에 모두들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에 와서 당시의 일을 들춰내 이로울 것은 없었다.
 천안함 일로 인해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예전 일을 다시 들춰낸다면 여론의 뭇매를 맞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때 전쟁이 확 터졌어야 했어!”
 “차라리 확 뒤엎어버릴까?”
 최 소령이 얼굴을 드밀며 은근한 투로 말했다.
 “최 소령, 목소리를 낮춰!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까짓것 들으라지. 문제가 되면 옷을 벗으면 그만이지······.”
 “맞아, 맞아! 이 X같은 놈의 세상 답이 없어, 답이······.”
 이학수 소령이 또 다시 동기들을 자극했고, 그의 의도를 모르고 있는 장교들이 쌍욕을 섞어가며 정부를 성토했다.
 ‘이제 반발심을 폭발시킬 사건이 터진다면······.’
 사건이야 얼마든지 터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상부에서 어떤 명령이 하달된 것도 아니고 또한 섣불리 행동하다가는 뒷덜미가 잡힐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참! 그리고 글로벌호크가 이번에도 채택되지 않을 것 같던 분위기던데?”
 한껏 분위기를 띠웠던 이학수 소령이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글로벌호크는 중고도 무인정찰기로, 전시작전통제권 단독행사를 앞두고 정보자산이 부족한 군에 꼭 필요한 장비였다.
 그런데도 정부는 갖은 핑계를 대며 도입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윗대가리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지들 해외여행에 들어가는 돈만 조금 아껴도 글로벌호크 1기는 나올걸!”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개의원이라만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잖아. 그렇게 정쟁을 일삼으면서도 지들 보좌관 늘리자니까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거 잊었나?”
 이학수 소령이 또 다시 장교들을 자극했다.
 사실 국회의원 보좌관을 늘리는 법안이 통과될 때, 정쟁이 최고조로 높아질 때였다.
 국회는 오가는 언쟁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는데, 보좌관을 늘리는 일에는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국민들 대다수가 그 일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는 아직 북한과 전쟁이 아주 끝난 것이 아닐세. 도대체 정치인들 뇌는 어떻게 생겼는지 쪼개보고 싶다는 생각이 한두 번 든 것이 아닐세.”
 “누가 아니래? 나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야.”
 모두가 이학수 소령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오늘은 이 정도 선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군.’
 “자자자! 남들의 이목이 있으니 이만 헤어지는 것이 좋겠네.”
 “그러는 것이 좋겠군. 그럼 나 먼저 일어나겠네.”
 최 소령이 먼저 자리를 떴다. 이에 이학수 소령도 약속을 핑계로 먼저 일어섰다.
 
 안파견이 전 요원에게 알린다. 단군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완료되었다. 이에 ‘작전명 북풍’을 명령한다.
 
 다물회 멤버들에게 안파견의 이름으로 새로운 작전명이 하달되었다. 이에 요원들은 자신들이 관리하고 있는 조직원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전달했다.
 도시 전체가 흥청거렸던 성탄절과 연말이 지나갔다.
 나라 안 곳곳에서 2012년을 맞이하는 행사가 벌어지는 가운데 사격장에서 차세대 자주포에 탑재될 155밀리 포의 시험사격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락대 사격장은 워낙 사고가 잦은 곳으로 온갖 지탄을 받고 있었다. 지금은 안전설비가 많이 보강되었지만 대형사고가 빈번한 곳이라 새로운 무기의 시험사격이 있는 날은 장교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단결!”
 군단장 등 군의 고위 간부들이 들어서자 포병대대장인 박민 중령이 부동자세를 취하며 경례했다.
 “준비 상황은 좀 어떻소?”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박민 대령의 대답에 군단장 등 고위 간부들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시험발사 시간은 언제쯤이오?”
 “15시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15시라면 브리핑을 들은 뒤, 곧바로 이동해야겠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박민 중령이 군단장 등을 브리핑실로 안내하려는 순간, 굉음이 들리면서 불길이 솟구쳤다.
 콰아-앙!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맙소사!”
 후다닥!
 박민 중령이 불길이 치솟는 곳으로 달려갔다.
 ‘제발, 제발 인명피해는 없어야 할 텐데······.’
 간절한 마음을 안고 불길이 치솟는 곳에 도착한 그는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에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인명피해가 없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신은 그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수라장 속에 나뒹굴고 있는 시체들 전부가 사지가 떨어져 나가 흩어져 있었고, 폭발이 일어났을 것으로 의심되는 곳은 커다란 구덩이가 패여 있는 상태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바로 그때, 박민 중령이 참혹한 광경을 보고 충격에 빠져 있는 동안 사고소식을 보고 받은 군단장 등이 달려왔다.
 “이게 도대체 뭐야!”
 “······.”
 군단장의 노기어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입단속 시키고 어서 사고부터 수습해!”
 군단장의 고함에 장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시신들을 수습하기 시작했고, 군단장이 박민 중령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퍼억!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지만 그는 어금니만 꽉 깨물고 있을 뿐, 부동자세를 풀지 못했다.
 “이 새끼야, 너 누구 엿 먹이려고 이런 짓을 한 거야? 네가 계획적으로 꾸민 일이지?”
 이 사고가 언론에 공개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군복을 벗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불명예제대를 해야 하는 상황까지 올 수 있는 일이기에 길길이 날뛰는 것은 당연했다.
 “군단장님, 진정하십시오. 지금은 뒷수습이 중요합니다.”
 “좌우간 이 일의 수습이 끝난 뒤, 네놈은 영창으로 보내주겠다.”
 군단장이 씩씩거리며 사고현장에서 내려갔다. 이에 사단장 한 사람을 남기고 모두가 군단장을 뒤따랐다.
 [긴급속보가 들어왔습니다. 조금 전, 13시 정각에 다락대 사격장에서 원인 모를 폭발사고가 일어났으며, 사고현장에 있던 장병 모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방송3사가 새해 특집방송을 중단한 채, 긴급속보를 내보냈지만 국민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이미 천안함 사고로 인해 군은 국민에게 신뢰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것도 모자라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사고가 잇따라 이제는 관심거리조차 되질 못했다.
 청와대의 특별지시로 군 특별조사반이 편성되었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장병들이 모두 숨진 탓에 1개월이 넘도록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원인규명에 실패했다.
 이에 검찰은 자신들이 이 사건을 맡아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고, 일부 여당의원과 야당의원 등 정치인들도 기강이 해이해진 군을 비난하며 검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검찰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차후에 이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원인규명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려 6명이나 되는 장병들이 죽었어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입니까? 정부에서 이런 사고가 터질 때마다 뜨뜻미지근하게 처리하니 계속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비공개로 열린 국방위 상임위에서 야당의원이 원인규명이 먼저라는 정부 측 입장을 대변하자 야당의원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거, 말씀이 지나친 것 같습니다. 제정신이라니요. 말씀 좀 가려서 해주십시오.”
 “내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뭐야!”
 언성이 오가는 가운데 곳곳에서 쌍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결국 드잡이가 시작되었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하자 위원장이 휴회를 선언하고 상임위실을 나가버렸다.
 “지금 어딜 도망가려고 그러는 거야!”
 “돌아오지 못해!”
 남은 야당의원들이 삿대질을 해가며 거칠게 항의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이 출입 기자들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
 
 대검찰청 대회의실!
 검찰차장과 고검장급 검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이윤탁 검찰총장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립!”
 문이 열리고 검찰총장이 들어서자 ‘기립’이라는 외침과 함께 모두 일어났다. 이에 손을 들어 화답한 검찰총장이 지정된 좌석에 앉았고 다른 사람들도 제자리에 착석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정치권에서는 이번 다락대 사고를 이슈화시켜 자신들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고 있소. 이럴 때일수록 우리 검찰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절대 중립을 지켜야 하는 사법부가 정치권의 영향을 받으면서 떡검, 혹은 검새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던 검찰이었다. 현 검찰총장이 부임한 뒤, 정치권과 거리를 두려 하고 있지만 제도와 관습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는 상태였다.
 “총장님, 그럼 다락대 사건을 우리 검찰이 맡게 되는 것입니까.”
 “아직 확정된 것은 없소. 지금 그 일로 정부와 여당, 그리고 야당들이 진흙탕 같은 정쟁을 벌이고 있지 않소? 금번 사고도 인재로 인한 사고일 가능성이 높소. 따라서 우리 검찰이 수사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오.”
 검찰총장의 대답에 이호성 중수부장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역시 다물회에서 키운 인재로, 다물회의 지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는 군에서 증거들을 없앨 수 있다.’
 “총장님, 제게 그 사건을 맡겨주십시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소?”
 “법 위에 정치권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검찰이 이렇게 정치권의 눈치를 보니까 국민들이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웠던 회의실 분위기가 이호성 중수부장의 발언으로 인해 빠르게 냉각되어갔다.
 회의실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으나 그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중수부장, 도가 지나칩니다.”
 “저는 검찰이 해야 할 일을 말했을 뿐입니다.”
 “뭐요!”
 삽시간에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했다. 이에 검찰총장이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나섰다.
 “아아! 그만, 그만들 하시오.”
 “총장님!”
 “중수부장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요.”
 의외로 검찰총장이 이호성 중수부장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어 좌중을 쓰윽 둘러보는 표정이 점차 투지에 불타올랐다.
 “중수부장!”
 이호성 중수부장에게서 시선을 멈춘 검찰총장이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네, 총장님!”
 “일이 잘못될 경우, 옷을 벗을 각오가 되어 있소?”
 검찰총장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오자 즉시 반발이 일어났다.
 “총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설마 중수부장에게 다락대 사건을 맡기시려는 것입니까? 저는 반대입니다.”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요?”
 “그, 그것은······.”
 검찰총장의 물음에 이호성 중수부장에게 다락대 사건을 맡기려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던 검찰차장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중수부장의 말대로 떡검이나 검새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그만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오.”
 “······.”
 “중수부장,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다 지원해줄 테니 책임지고 다락대 사건에 대한 원인규명을 해 주시오.”
 그 말은 일이 잘못되면 자신도 옷을 벗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투가 너무나도 완강한지라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반론을 펼치지 않았다.
 “윤새롬 검사를 지원해주십시오.”
 “윤새롬 검사를요?”
 “네, 총장님. 윤새롬 검사는 비록 여성이지만 청렴하고 강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따라서 그녀와 함께 다락대 사건의 전말을 밝혀낸다면 검찰을 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달라질 것입니다.”
 정치권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윤새롬 검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녀는 유일하게 국민들에게 욕을 먹지 않는 검사였다.
 “알겠소. 특별수사팀을 구성해서 내게 직접 보고하시오. 이만 회의를 마칩시다.”
 다락대 사건을 수사하기로 결정한 이상 더 이상의 토론은 시간만 낭비할 뿐이라 종회를 선언한 것인데 무슨 불만이 그리도 많은지 검찰차장이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부우우-웅!
 검찰차장을 태운 승용차가 대검찰청을 빠져나와 도심 속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차가 유난히 붐비는 탓에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우회해서 가는 길은 없나?”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그래도 한번 가봐!”
 “네, 차장님!”
 그렇게 지시한 검찰차장이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따르릉!
 신호는 가는데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에 폴더를 닫으려는 순간 굵직하면서도 위엄이 깃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김 의원님, 이상숩니다.”
 김철 의원!
 그는 6선의 의원으로 막후에서 의원들을 조종하고 있으며 현 여당이 다시 집권할 경우, 국회의장으로 유력시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답게 각계각층에 자신의 사람들을 배치해놓았는데, 이상수 검찰차창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요?]
 “다락대 사건 말입니다.”
 [그 사건은 일단 군에 맡기기로 결론이 난 상태요. 그런데 문제라도 생겼소?]
 “저도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검찰총장이 그 사건을 수사하기로 결정하고 중수부장에게 그 사건을 일임한 상태입니다.”
 [검찰총장이 미쳤군. 사사건건 정치권에 도전을 하더니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로구만. 이제 그만 갈아치워야겠어. 조치를 취해놓을 테니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시오.]
 김철 의원의 힘이라면 검찰총장을 갈아치우는 문제는 일도 아니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특별수사팀을 구성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상태인데, 윤새롬 검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충격을 받은 것일까!
 수화기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아무리 김철 의원이라고 해도 일선검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윤새롬 검사를 이유도 없이 내치려 하다가는 자칫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의원님!”
 [일단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딸칵!
 상대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자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상수 차장이 곧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
 
 부우우-웅!
 검은색 승용차 3대가 다락대 사격장을 향해 다가오자 군기가 바짝 들어간 위병들이 승용차를 멈추어 세웠다.
 “정지!”
 승용차들이 위병소 앞에서 줄줄이 멈추어 섰다.
 “실례지만, 어디서 오는 누구십니까.”
 “검찰청에서 나왔습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윤새롬 검사였다. 사건만 맡게 되면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냉철해진다는 윤새롬 검사 특유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검찰청에서 사람이 나온다는 지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사건현장에 검사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무슨 일이야!”
 위병소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소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나왔다.
 “단결!”
 “그 사람들 누구야?”
 “그 사람들이라니 말조심 하십시오. 중수부에서 나왔습니다.”
 또박또박하면서도 힘이 들어간 목소리에 소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시가 있을 때까지 언론 등을 들여보내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지만 상대는 검사, 그것도 위세가 대단한 중수부에서 나온 검사였다.
 “여기 수색영장입니다.”
 윤새롬 검사가 영장을 보여주었다.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보안통화를 하는지 위병소로 들어간 소위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윤 검사, 들여보내주겠습니까?”
 특별수사팀의 일원인 박동학 검사가 넌지시 물었다.
 “그야 저도 모르죠. 그래서 언론을 대동한 것이 아닌가요.”
 윤새롬 검사가 고개를 힐끔 뒤돌았다. 그녀 등이 타고 온 승용차를 뒤따라온 승용차에는 각 언론사 기자들이 탑승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군이 수사를 하러 온 검사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모습이 공개된다면 그 파장은 엄청날 것이다. 동행한 기사들에게는 수사가 종결될 때까지 엠바고를 걸어놓은 상태였다.
 “일단 차에서 내립시다.”
 박동학 검사가 먼저 승용차에서 내리자 윤새롬 검사도 차에서 내려 뒤에 멈추어 서 있는 승용차에 아직 내리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 가운데 위병소로 들어갔던 소위가 나왔다.
 “이거 어떻게 하지요? 들어가는 것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아까 영장을 보지 못했습니까? 강제로 집행할 수도 있습니다.”
 윤새롬 검사가 강하게 맞받아쳤다. 이어 기자들이 타고 있는 승용차를 향해 신호를 보내자 탑승하고 있던 기자들이 우르르 내렸다.
 “당신들 뭐야!”
 위병들이 반사적으로 총을 들이댔고 그 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며 번쩍거렸다.
 “군인들이 사고를 조사하러 온 검사들에게 총을 들이대는 모습이 공개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 새끼들아, 총 치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소위가 욕설을 터트렸다. 이에 위병들이 총을 세웠다.
 지금 이 모습이 카메라에 그대로 담겼기 때문에 언론에 공개될 경우, 진급에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아니, 자칫 옷을 벗어야 하는 상황까지 올 수도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소위가 다시 위병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잘하면 들어갈 수 있겠는데요.”
 “영장이 있는데 못 들어간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아참! 그리고 기자 분들께서는 엠바고를 필히 지켜주셔야 합니다.”
 윤새롬 검사가 기자들에게 재차 다짐을 받았다. 그렇게 20여 분이 다시 지나자 헬기의 로터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타타타타타!
 “결정권자 중 한 사람이 오는 모양이네요.”
 그들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헬기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사고 당시 다락대 사격장에 있었던 사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고하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중수부에서 나온 박동학 검사입니다”
 “윤새롬 검사입니다.”
 윤새롬 검사라는 말에 사단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만큼 군 입장으로서는 그녀가 껄끄럽기만 한 존재였다.
 “장군님, 수사에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합시다.”
 사단장이 안으로 팔을 뻗자 윤새롬 검사가 기자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자 기사들이 승용차에 올라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사단장은 직접 사고가 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준비해온 서류를 들었다.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사단장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사고가 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나갔다.
 당시 그가 사고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윤새롬 검사나 박동학 검사 두 사람 모두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사단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군에서는 금번 사고를 외부요인으로 보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검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나라를 뒤엎으려는 좌익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습니다.”
 “요점이 빗나간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젠장맞을! 소문대로 깐깐하기 짝이 없군. 그러니 그 나이가 되도록 시집을 못 갔지.’
 본격적인 수사가 들어가기 전에 사건개요를 듣는 것에 불과한데도 도무지 틈을 주지 않자 사단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군님?”
 “알기 쉽게, 간첩 등 테러범의 소행일 가능성도 열어두고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도 테러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을 빌리자면 아직 확실한 물증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군 당국에서는 금번 사고를 테러로 몰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말에 사단장은 하마터면 욕지걸이가 터져 나올 뻔했다. 그것을 참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윤새롬 검사가 다시 한 번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수사는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검찰이 수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아직 군 당국의 입장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금니를 꽉 깨문 사단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마치 독기가 잔뜩 오른 짐승의 으르렁거림과 비슷했다.
 ‘장군이라는 사람이 이토록 쉽게 흥분하다니 자격미달이네.’
 윤새롬 검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박동학 검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그도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쾅!
 쨍그랑!
 윤새롬 검사에게 사고 당시 초동대응을 어렵사리 이해시키고 돌려보낸 사단장이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 바람에 테이블 위에 있던 물 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진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던 장교가 재빨리 다른 물 잔을 건네주고 유리조각들을 치웠다.
 “새파랗게 젊은 년이 감히 누구에게······.”
 사단장의 말처럼 윤새롬 검사는 새파랗게 젊은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보다 어린사람에게 굽실거릴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화가 났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진동으로 해놓고 바지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의 떨림이 전해졌다.
 “젠장, 또 누구야!”
 투덜거리며 전화번호를 확인한 사단장이 재빨리 핸드폰의 폴더를 열고 귀에 갖다 댔다.
 “단결!”
 [나요, 최 장군. 어떻게 되었소?]
 전화를 건 사람은 사고 당시 다락대 사격장에 와 있었던 군단장이었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검찰에서 개입한 이상 옷을 벗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해 방어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만약 사고의 진상이 밝혀질 경우 국방부 장관은 물론이고 별이 최소한 20개 정도 날아가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대쪽이라고 소문난 윤새롬 검사가 개입했기 때문에 2개월 넘게 사건을 질질 끌어온 군 당국으로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장관께서 정부와 절충을 벌이고 있으니 일단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시오.]
 “알겠습니다만 장담은 못합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란 말 아니오.]
 군단장의 목소리는 역정이 난 듯 딱딱했다.
 ‘니미! 그럼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짜증이 쓰나미가 되어 전신을 강타하고 있던 상태인데 군단장에게도 이런 말을 들으니 눈이 홱 돌아버렸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는 일!
 분을 삭인 사단장이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통화를 마무리했다.
 “씨발! 더러워서······.”
 쾅!
 사단장이 또 다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러는 바람에 잔뜩 긴장한 상태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장교만 죽을 맛이었다.
 
 ***
 
 중수부 특별수사팀이 군 당국과 신경전을 벌인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 정부와 여당은 군 당국을 감싸기 위해 몸부림쳤고, 일부 여당의원들과 야당은 군 흠집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의장님, 군 당국이 워낙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바람에 윤새롬 검사가 고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 사건을 파헤치는 게 목적이 아니니 일단 지켜보도록 합시다.”
 그랬다. 중수부장을 통해 특별수사팀에 윤새롬 검사가 가세하게 하기는 했지만 목적은 다락대 사건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곳에 있었다.
 “괜히 그러다가 일이 꼬일 수 있습니다. 이호성 중수부장에게는 어느 정도 내용을 알려줄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의장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성화가 넌지시 물었으나 신상진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니요. 하부조직이 상부조직에 대해 알아서 좋을 것은 없소. 그저 그들의 역할은 군심을 요동케 하는 것이오.”
 “그럼 북풍이라는 작전명은······.”
 신상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이어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럴 때, 북한에서 뭔가를 터트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다물회 하부조직원들이 정치권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포진되어 있었고, 군 요소요소에도 배치되어 있는 터라 분위기는 무르익은 상태였다.
 이제 남은 것은 명분!
 군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때마침 터진 다락대 사건만으로 너무도 미약했다.
 “의장님, 북의 행동을 기다리기보다는 공작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다물회의 기강을 담당하는 사람답게 강경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강감찬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물회가 만들어진 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평소의 정하나답지 않게 정해국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고토회복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모인 다물회의 행동이 지지부진했던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 일은 모두 모인 후에 다시 논의해보도록 합시다. 그나저나 계백이 좀 늦어지는군.”
 신상진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30분이 지났는데 걱정이 되는군요.”
 지난 20년 동안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근래 들어 감시의 눈길이 포착되었기 때문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한번 연락을 해볼까요?”
 “차가 밀려 늦을 수도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천안 톨게이트에서 도심으로 들어오는 교차로는 차가 밀리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버금전자가 도심외곽인 공단에 위치해 있지만 차가 많이 밀릴 경우, 공단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가량 걸릴 때도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찌잉!
 자동문이 열리면서 발생하는 특유의 음향이 들리는가 싶더니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지천명이 들어섰다. 이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어서 오시오. 그렇지 않아도 걱정들을 많이 했습니다.”
 “오늘따라 차가 유난히 많이 밀리는 바람에······.”
 지천명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표정이······.”
 “망할 놈의 XX신문에서 엠바고를 깨트렸습니다.”
 “엠바고를 깨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TV 좀 켜 보십시오.”
 지천명의 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하나가 TV전원을 켰는데 위병소 장병들이 윤새롬 검사 등을 향해 총을 겨눈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저런!”
 “그렇지 않아도 XX신문은 소설을 쓰기로 유명한 언론인데 그곳의 기자를 데리고 가다니······.”
 모두가 한마디씩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어 온갖 자극적인 멘트를 사용해 가며 사건을 부풀리는 속보를 잠시 지켜보다가 TV 전원을 껐다.
 “며칠 있으면 XX노트가 또 국민들을 상대로 대사기극을 펼치겠군.”
 ‘흐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지금 이 순간 신상진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XX신문이 엠바고를 깼으니 이제 곧 윤새롬 검사와 동행했던 기자들이 앞 다투어 기사를 실을 것이며 내일 신문은 온통 자극적인 문구와 함께 이 사건으로 도배될 것이다. 이로 인해 군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게 분명했다.
 어쩌면 지금이 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신상진의 대뇌를 자극했다.
 “의장님, 어째서 아무런 말씀이 없는 것입니까?”
 박성화의 목소리에 술렁이던 실내가 조용해졌다.
 “혹시 의장께서는 지금이 계획을 실행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고 계시는 것입니까?”
 신상진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재차 물었다. 이에 상념에서 깨어난 신상진이 미안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 생각이 맞군요.”
 “그럼 이제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된 것입니까?”
 모두의 목소리에 흥분이 깃들어 있었다.
 다물회의 자금력과 기술력이라면 계획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 시발점은 대한민국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혁명!
 ‘작전명 북풍’은 혁명으로 가기 위한 명분을 얻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신상진의 입에서는 모두를 실망시키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직은 때가 아니오. 군이 폭발직전이 되어야 반발하는 장병이 없을 것이오.”
 “그럼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나도 장담할 수 없소.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은 확실하오. 아직은······.”
 결론은 이르다는 것이었다.
 최종 결정권자가 그렇게 말하는데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단지 기회를 또 놓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과 아쉬움만 남았다.
 
 하루 일과를 마친 신상진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일손을 놓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예외였다.
 맥주 몇 병을 사들고 온 그는 소파에 앉아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맥주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당신,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맥주잔을 비운 박미영이 넌지시 물었다.
 “일은 무슨 일! 그냥 당신과 술 한 잔 마시고 싶었을 뿐이오.”
 “호호호! 별일이네.”
 박미영이 교소를 터트렸다.
 “승원이는 오늘도 늦는군.”
 “당신 닮아서 그런지 책을 떼지 않고 살아요. 아마도 지금쯤 어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겠죠.”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승원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1등을 놓치지 않은 수재 중의 수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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