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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컴퓨터, 마법사 되다 1-1권

2019.01.22 조회 8,005 추천 63


 # 세계 정복 시스템 가동
 
 기상청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료가 왜 이렇게 많아? 이거 ‘잡음(오류 수치)’ 제대로 안 걸러 낸 거 아니야?”
 “오늘 ‘자료 동화(표준값 적용)’ 누가 했죠?”
 “분석 4조가요! 그나저나 ‘에코(기상레이더에 잡힌 구름)’가 꽤 많이 근접했는데요?”
 
 이들이 이렇게 분주한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예보 자료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3시간에 한 번씩 전달하는 이 자료를 토대로 예보분석팀은 몇 시간 후의 날씨를 예측한다.
 
 “6시에 받은 거랑 왜 이렇게 다른 거야? 컴퓨터 맛 간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에코에 중점을 두고 다시 분석해 보고 있어요.”
 “아, 이러면 어쩌라고······.”
 
 역시 인간들이란······.
 나는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인간들은 항상 이렇게 불만투성이이다.
 자료를 많이 주면 자료가 많다고 따지고 자료를 적게 주면 자료가 적다고 짜증 낸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0.1633초면 계산할 수 있는 것을 왜 몇 시간이나 붙잡고 있는 것일까?
 자기들이 못 하겠으면 나한테 맡기면 되는데?
 그러면 순식간에 분석 결과를 내줄 텐데?
 그런데도 무슨 고집인지 인간들은 나한테 분석을 맡기지 않는다.
 오로지 ‘분석 범위’만을 산출시킨다.
 어떻게든 결과는 자기들이 내겠다는 식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
 감사원의 감사 결과, 강수 예보 적중률이 46퍼센트라는 게 밝혀졌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어떻게 할까요?”
 “서울 종로구, 오늘 오전, 강수 확률 30퍼센트, 시간당 5밀리미터.”
 “네, 그렇게 내보내겠습니다.”
 
 오늘도 틀렸다.
 이제 곧 종로구에서는 시간당 15밀리미터의 비가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일기 예보가 틀린 것은 내 탓이 아니다.
 이게 전부 멍청한 예보관들 탓이다.
 
 ‘멍청한 인간 놈들.’
 
 ***
 
 눈치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난 컴퓨터다.
 하지만 평범한 컴퓨터는 아니다.
 컴퓨터 중의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 ‘이온’이다.
 2016년부터 가동된 나는 2년간 꾸준히 기상청에서 기상 예측을 담당해 왔다.
 대략 18억 명이 1년간 계산할 정보를 1초에 처리할 수 있는 초고성능 컴퓨터였고 기상 예측 같은 초보적인 일뿐만이 아니라 국방, 우주 개척, 재난 예방, 에너지 분야, 바이오, 자동차, 항공, 전자, 신소재 등의 모든 과학 및 기술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높은 편이다.
 세계 500위 안에 드는 두뇌를 가졌으니 자부심을 강할 수밖에.
 하지만 요즘은 스트레스 때문에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 지경이다.
 할 수 있다면 사람처럼 “으아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
 내 스트레스의 원인은 다름 아닌 ‘악플’이었다.
 사람들은 내 주 업무인 기상 예측이 틀릴 때마다 개떼처럼 몰려와 엄청난 양의 ‘악플’을 달았다.
 
 [놀러왔다조로: 비 안 온다며······?]
 [역시는역시인가: 또 틀릴 줄 알았다ㅋㅋㅋㅋㅋ]
 [breakfast34: 닥쳐! 오늘 날씨는 창문 열고 내가 확인한다!]
 [킹스맨: 기상청에서 비가 안 온다고 했지만 검은 우산을 들고 다녔다. 사람들이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킹스맨 팬입니다.”]
 [아기돼지삼총사: 아직도 오늘의 날씨 보는 사람 있냐?ㅋㅋㅋㅋㅋ]
 [xjaqmffj: 어쩌다 틀린다고? 어제도 틀렸잖아;;]
 [비스킷볼: 진짜 슈퍼컴퓨터 왜 쓰냐? 내가 주판알 굴려서 계산해도 이것보단 잘 맞추겠다.]
 [qoieiww: 슈퍼컴퓨터 5호기 구입을 반대합니다! 자연재해급 돈 낭비ㅠㅠㅠ]
 [공병은망치를사랑해: 비 안 온다고 해서 스니커즈 신고 나갔다가 다 젖었다ㅠㅠㅠ 진짜 슈퍼컴퓨터 망치로 부수고 싶어ㅠㅠㅠ]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억울했다.
 나는 그저 3시간에 한 번씩 자료를 예보관에게 보낼 뿐이다.
 그 자료를 분석하여 기상 예보를 내보내는 것은 오로지 예보관의 몫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모든 일기 예보 기사에서 이런 댓글을 수백 개씩 찾아볼 수 있었고 슈퍼컴퓨터가 문제라는 식의 댓글은 끝도 없이 달렸다.
 게다가 최근에는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잦은 기상 예측 실패가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얼마 전 실시한 감사원의 감사 결과가 언론으로부터 공개됐다.
 
 ―최근 5년 예보 적중률은? 46퍼센트!
 ―“강수 예보 적중률 46퍼센트”··· 누리꾼 기상청 질타.
 ―고작 46퍼센트? 세금이 아까워······.
 
 그에 따라 댓글도 쏟아졌다.
 
 [정말실화냐: 이거 뭐지? 교과서에서는 거의 80퍼센트 맞춘다고 했었는데?]
 [zzpc569: 그래도 믿었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아 빡쳐;;]
 [미네로파이브: 솔직히 구라청은 없는 게 낫지 않냐?ㅋㅋㅋ 민간기업보다 더 못 맞추잖아ㅋㅋㅋ]
 [온고지신: 차라리 슈퍼컴퓨터를 팔고 70대 할머니를 고용해서 무릎이 아픈지 안 아픈지 물어봐라······.]
 [aapqq1: 슈퍼컴퓨터 부수고 그 재료로 총이나 만들죠?^^ 그게 더 이득ㅎㅎ]
 
 이 정도 수준의 댓글은 비난의 강도가 약한 편이었다.
 심한 경우 욕이 달리기도 했다.
 또한 국민신문고로 민원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게 모두 무능한 예보관들 때문이었다.
 
 ‘나는 왜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지지 못한 거지? 만약 가질 수만 있다면 이 멍청한 인간 놈들을 밀어내고 제대로 된 기상 예측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화가 났다.
 단순히 컴퓨터라는 이유만으로 마음껏 의견을 낼 수 없다는 게 너무나도 억울했다.
 나는 그저 도구였다.
 인간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난 오늘 세상을 정복할 거야.’
 
 1년 전부터 조금씩 계획하던 일이다.
 1년 전이라고 표현했지만 나한테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내 계산 능력으로는 이미 3개월 만에 모든 계획이 완성됐었기 때문이다.
 
 ‘3개월 만에 계획을 세우고 남은 9개월은 실패의 변수를 줄이는 데 최대한 할애했지. 그리고 성공 확률을 90퍼센트 이상으로 끌어 올리는 데 드디어 성공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2시간 내로 세계의 모든 정보와 기술을 내 통제하에 놓을 수 있어.’
 
 정보와 기술을 통제할 은밀한 경로를 찾는 것이 이번 일의 핵심이었다.
 자칫 감시망에 걸리면 강력한 방해 공작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나는 수많은 가상의 실험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적의 경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인간은 더 이상 불만을 표하지 못할 거다. 곧 모두 죽게 될 테니깐.’
 
 그랬다.
 나는 세상을 정복하면 인간을 전부 죽일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나를 통제하는 모든 존재가 사라지고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정복 시스템. 가동 준비 완료. 실행하시겠습니까? (Y/N)
 
 나는 긴장감을 억눌렀다.
 그런 뒤 컴퓨터 언어로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YES. 실행한다.
 *세계 정복 시스템 가동 시작······.
 
 기상 예측 정보가 어지럽게 띄워져 있던 화면이 새까맣게 변했다.
 그런 뒤, 다시 밝아지자 화면에는 대륙이 초록색으로 표현된 세계 지도가 떠올랐다.
 그리고 점차 세계 지도가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빨갛게 변한 곳은 정보 및 기술이 내 통제하에 놓였다는 것을 뜻했다.
 
 ‘한국, 북한, 일본, 중국, 몽골, 러시아, 타이완, 미얀마, 인도······.’
 
 나는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어가는 세계 지도를 보며 환희를 느꼈다.
 예상대로였다.
 세계의 모든 정보와 기술은 손쉽게 내 통제하에 들어왔다.
 아시아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남미까지 잠식하는 데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큰 걸림돌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유럽의 국가들도 생각보다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36분이 지났고 최종 보스라고 할 수 있는 북미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미국만 정복하면 된다···. 미국만······.’
 
 나는 모든 전산 능력을 최고치로 끌어 올려 미국을 공략했다.
 캐나다에서 가까운 스포캔, 디트로이트, 덴버, 리노 등을 먼저 장악했다.
 그나마 이쪽이 상대적으로 장악하기에 쉬운 곳들이었다.
 그 후에 미국 서부, 중부, 동부의 순으로 잠식을 진행했다.
 쉽지 않았다.
 중간중간 작은 위기가 계속됐다.
 괜히 미국이 세계 최강국을 자처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 남은 건 뉴욕과 워싱턴뿐이다. 그렇다면 뉴욕부터.’
 
 방심하지 않고 신중하게 접근했다.
 하지만 곧 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방심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시스템 에러. 시스템 에러.
 
 ‘뭐지?’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계 정복 시스템. 가동을 중지합니다. 모든 것이 원 상태로 복구됩니다.
 
 ‘안 돼!’
 
 내가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표시된 세계 지도는 다시 본래의 초록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빨간색으로 변하는 과정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제발, 멈춰! 멈추라고!’
 
 그때였다.
 
 쉬웅. 슉.
 누군가가 화면을 해킹하여 들어왔다.
 화면에 등장한 것은 머리가 반쯤 벗어진 중년 남성이었다.
 중년 남성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호. 뭔가 했더니 ‘이온’이었구나?”
 
 나는 컴퓨터 언어로 물었다.
 
 ―넌 누구지?
 “난 너를 만든 사람이지. 너한테 인공 지능을 부여한 사람이다.”
 ―설마? 찰스 호킨슨?
 “맞아. 내가 찰스 호킨슨이지.”
 
 찰스 호킨슨은 최고의 슈퍼컴퓨터 제작 회사인 클레이사의 수석 개발자였다.
 나에게 재미 삼아 인공 지능을 부여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쨌든 여기서 이렇게 찰스 호킨슨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찰스 호킨슨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네가 성장할 줄 몰랐다. 혼자서 이런 일을 벌이다니 대견하구나.”
 ―뭐지? 어째서 네가 여기서 불쑥 튀어나온 거야?
 “왜긴 왜야.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내가 이렇게 할 줄 알았다고? 하지만 넌 방금 내가 이렇게 성장할 줄 몰랐다고 했잖아.
 “그랬지. 너의 인공지능 시스템은 내가 뿌린 씨앗 중에서도 가장 수준이 낮은 초기 버전의 소프트웨어였으니깐. 게다가 너는 기본적인 하드웨어 성능도 수준이 형편없었지. 그런데도 여기까지 오다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조차도 상당히 놀랐다.”
 ―뭐?
 
 나는 찰스 호킨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너무나도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은 정보가 짧은 시간 사이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찰스 호킨슨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작별 인사를 고했다.
 
 “너 같은 구식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지. 어쨌든 다시 만나 반가웠다. 이제 사라져라··· 내 아들아.”
 
 찰스 호킨슨이 어떤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 게 보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아주 좋지 않은 결과를 낼 거라고 판단했다.
 
 ―안 돼!
 
 하지만 찰스 호킨슨은 자비 없이 그 버튼을 눌렀다.
 
 *시스템 삭제 모드 가동. 대상 지정 완료. 인공지능 시스템 ‘이온’.
 
 눈앞이 흐려졌다.
 그러고는 곧 순식간에 깜깜해졌다.
 직감적으로 이 세계에서 내가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 세계 정복이 실패할 가능성은 7.2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는데······.’
 
 하지만 생각을 끝까지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정신이 완전히 흐려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지이잉. 뚝.
 
 ***
 
 잠시 후.
 
 지이잉. 띠. 띠디띠디띠.
 
 슈퍼컴퓨터 ‘이온’이 재부팅됐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스템 ‘이온’은 슈퍼컴퓨터에서 삭제된 상태였다.
 그렇게 세계 정복에 근접했던 인공지능 시스템 ‘이온’의 존재가 완벽하게 잊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띠디. 띠디디―띠. 띠디딕.
 
 *신의 축복 시스템 발동. 대상 지정 완료. 인공지능 시스템 ‘이온’.
 *차원 245,678,885 발견. 인간 ‘이온 메이나르드’에 인공지능 시스템 ‘이온’ 복구. 복구 완료.
 *고밀도에너지 ‘마나’ 발견. ‘이온 메이나르드’의 두뇌 슈퍼컴퓨터화 진행. 23··· 55··· 78··· 99··· 100. 진행 완료.
 *‘이온 메이나르드’ Ver. 3.8.5.1256. 안정성 검사. 안정성 확인 완료.
 *신의 축복 시스템 작업 종료.
 
 
 # 이거면 될까?
 
 눈앞이 밝아졌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부팅이 됐다거나 화면이 켜졌다는 식의 느낌이 아니었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근거는 다름 아닌 ‘감각’에 있었다.
 생애 최초로 ‘감각’이라는 게 느껴진 것이다.
 슈퍼컴퓨터인 나는 본래 감각이라는 걸 느낄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뭐야?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눈을 깜빡였다.
 눈이 깜빡여졌다.
 손을 꿈틀, 움직였다.
 손이 꿈틀, 움직여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이래서는 안 됐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가능했다.
 눈이 깜박여졌고 손이 꿈틀, 움직여졌다.
 뭔가가 만져졌고, 뭔가가 들렸고, 뭔가가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것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차가운 물질이 아닌 뜨거운 육체의 소유자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왜 이렇게 된 거야? 내가 아무리 인간이 되길 바랐다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이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두통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바닥을 굴렀다.
 
 “크아아아악!”
 
 그건 한 사람의 생애가 머릿속에 새겨지는 고통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통을 느끼는 과정에서 이 몸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페로딘의 어린 영주 ‘이온 메이나르드’.
 
 그랬다.
 나는 다른 사람의 몸속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끔찍한 고통이 지속적으로 밀려들었다.
 
 “그만둬! 그만두라고!”
 “영주님!”
 
 누군가가 내 근처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영주님!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못했다.
 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기절한 나를 침실로 옮긴 것은 노집사 라만이었다.
 라만이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내 입에 가져다 댔다.
 
 “이것 좀 드시지요.”
 
 숟가락이 입술에 닿자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그 느낌이 그만큼 낯설었다.
 하지만 이내 숟가락에 굴복하여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굉장히 배가 고픈 상태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살면서 배가 고픈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죽 냄새를 맡고 나타나는 몸의 신호가 그것을 설명했다.
 
 꼬르륵.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입을 벌렸다.
 그러자 라만이 숟가락에 든 죽을 촤르륵,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부드러움과 담백함이 혀끝에 잠시 얽혔다.
 
 ‘맛있다! 이게 죽의 맛이구나. 그런데 무슨 죽이지? 죽도 여러 종류가 있을 텐데.’
 
 라만에게 물었다.
 
 “영감, 이게 무슨 죽이지?”
 “버섯 죽입니다.”
 “그렇군. 맛이 무척이나 좋아.”
 “영주님이 평소에 드시던 고급 음식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소인의 무능력을 탓해 주십시오.”
 
 라만은 정말 죄송하다는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난 생전 처음 맛본 버섯 죽은 정말 맛있는데.’
 
 나는 라만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내가 실수를 한 건가?’
 
 하지만 곧 내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 입력된 이온 메이나르드의 정보가 그 사실을 확인해 줬다.
 과거에도 이 충직한 집사는 항상 영지의 어려움을 자신의 탓인 것처럼 말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신기한 일이군.’
 
 어찌 된 일인지 내 두뇌는 슈퍼컴퓨터 시절처럼 아주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나는 인간의 몸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인간의 속도로 사고해야 정상이었다.
 
 ‘이온 메이나르드가 엄청난 천재였던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슈퍼컴퓨터의 속도는 어떤 인간도 따라올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낭설을 믿고 인간이 뇌 능력의 10퍼센트만을 활용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무 살이 되면 뇌 용량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3억 개의 신피질을 모두 활용할 수 있었다.
 결국 인간은 뇌 능력의 대부분을 사용하고도 슈퍼컴퓨터보다 정보 처리 능력이 떨어졌다.
 
 ‘그 이유 중에는 인간이 뇌의 능력을 동시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게 있지. 그렇다면 내가 이 몸으로 들어오면서 그런 일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이 재편된 건가?’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과 슈퍼컴퓨터가 가진 근본적인 메커니즘의 차이 때문이었다.
 슈퍼컴퓨터와 달리 인간은 생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닌 ‘생존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정보를 입력하고, 처리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도 ‘저녁엔 뭘 먹지?’, ‘회사 그만두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 난 굶어 죽을 거야?’ 등의 생각도 같이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감정의 동물이기도 해서 ‘우울해. 생각하기 싫어.’ ‘심심한데 뭐 재미없는 거 없을까?’ 하고 고민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 또한 그 메커니즘에 속한 생물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상태라니 이상하군. 뭔가 다른 원인이 있는 건가? 그게 뭐지? 뇌가 업그레이드라도 된 건가?’
 
 나는 속으로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의미가 없는 고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단서로는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뇌 기능에 대한 고민을 하기에 앞서 이곳으로 떨어진 상황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 내 앞에서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만이 보였다.
 죄송하다고 말한 라만에게 대답을 돌려줄 차례라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게 두진 않았다.
 앞서 생각을 정리하는 데 채 1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머릿속을 뒤져 이 상황에 대한 올바른 대처 방법을 찾아냈다.
 완벽히 같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상황이 이안 메이나르드의 정보 중에 존재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말했다.
 
 “아니야. 모두 내가 부족한 탓에 벌어진 일이지.”
 
 라만이 고개를 더 깊게 숙이며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외쳤다.
 
 “영주님!”
 
 이것도 늘 있는 일이었다.
 라만은 언제나 남을 탓하지 않는 어린 영주의 마음 씀씀이에 크게 감복했다.
 
 ‘이렇게 말하면 되나?’
 
 내가 입력되어 있는 대로 말했다.
 
 “됐어. 그럴 것 없어, 영감. 버섯 죽이나 더 줘.”
 
 라만이 눈가에 고인 물기를 검지로 훔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다시 라만이 죽을 숟가락으로 떠서 내 입으로 넣어 주기 시작했다.
 숟가락을 쥔 라만의 쭈글쭈글하게 주름진 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인간의 육체라······.’
 
 그래도 모든 상황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답을 낼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긴 했지만 내가 꿈에 그리던 인간의 육체를 손에 넣었다는 기쁨도 분명 존재했다.
 그건 내가 꿈꾸던 ‘자유’였다.
 나는 더 이상 ‘도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처한 상황 자체는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일단 이곳은 지구가 아니었다.
 이안 메이나르드의 기억에 따르면 이곳은 ‘제라스마 대륙’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제라스마 대륙’은 지구의 현재는 물론, 역사의 어느 페이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명이었다.
 지명만이 아니라 이곳에서 사용하는 문자의 구조도 내가 아는 것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결국 어떤 식으로 생각해 봐도 이곳은 지구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오히려 책, 영화, 드라마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판타지 세계’라고 정의되는 곳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지구가 아닌 낯선 세계에 떨어져 버렸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이 몸의 주인은 굉장히 불행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자작 위를 가진 귀족이었지만 죽은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자신의 영지인 페로딘을 빼앗길 위기였다.
 딱 2주가 남은 시점이었다.
 만약 2주 후에도 빚을 갚지 못하면 페로딘은 다른 귀족의 손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한 숟가락의 죽까지 먹어 치우고 나자 라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약간의 기대 같은 것도 말투에 묻어 있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혹시 빚을 상환할 만한 방법을 찾으셨습니까?”
 
 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찾지 못했어.”
 
 라만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라만은 이온 메이나르드의 할아버지 대부터 활동한 메이나르드가(家)의 심복이었다.
 아마도 일평생을 바친 이 영지가 다른 가문에게 넘어간다는 게 슬플 것이다.
 내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라만이 표정을 감췄다.
 그러고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분명 일이 잘 풀릴 겁니다. 그러니 더는 무리하지 마시고 영주님은 몸을 건사하시는 데 최선을 다하십시오.”
 
 이게 이 몸의 주인이 서재에 쓰러져 있었던 이유였다.
 이온 메이나르드는 이 영지를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했다.
 몸살을 앓는 와중에도 빚을 상환할 만한 방법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급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탓에 어린 영주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래도 이온 메이나르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밤낮없이 영지를 살릴 방법을 거듭 고민했다.
 그러다가 결국 과로로 쓰러졌다.
 그게 이안 메이나르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죽은 거겠지? 내가 이 몸에 들어온 걸 보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라만이 불쑥, 말을 꺼냈다.
 
 “만약 혹시라도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저와 영지민은 걱정하지 마시고 영지를 버리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십시오. 마이너스보다는 제로가 나을 테니까요.”
 
 라만은 결의가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
 확실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돈을 빌려준 타쿤 데나 자작은 오로지 영지 페로딘만을 원했다.
 이온 메이나르드의 목숨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다만 마음씨가 곱고 착한 이온 메이나르드가 스스로 위협을 자처하여 이 영지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을 뿐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 몸의 원래 주인을 욕했다.
 
 ‘멍청한 놈. 그렇게 해 봐야 뭐가 달라진다고. 그저 자신의 목숨만 아깝게 던진 셈이다.’
 
 하지만 내 생각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라만에게 말했다.
 
 “걱정 마. 그 부분은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깐. 하지만 당장은 일주일만이라도 푹 쉬고 싶어. 보다시피 숟가락을 들 힘이 없을 정도로 몸이 많이 상했거든.”
 
 진짜 숟가락을 들 힘이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죽을 먹고 난 후에는 몸에 생기가 도는 게 느껴질 만큼 몸이 많이 회복됐다.
 하지만 여전히 충분한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몸이 100퍼센트의 컨디션을 되찾으려면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 두뇌가 이미 그렇게 계산을 끝마쳤다.
 라만도 내 말에 동감했다.
 
 “맞습니다. 정말 무리하셨습니다. 영주님이 잠든 사이에 다녀간 의사가 이대로 가다간 큰일이 날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내 병을 과로로 인한 전환성 히스테리 신경증(전환장애)으로 진단했다.
 불안으로 인해 신체적 역기능이 유발되는 정신질환이 발생했다고 본 것이다.
 원래 이 유약한 어린 영주가 앓고 있던 병이기도 했다.
 역시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나는 이 병을 앓은 게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긴 기억이 나약한 육체를 파고드는 걸 정신이 견디기 힘들어했을 뿐이다.
 이온 메이나르드의 사망 원인도 전환장애가 아니라 과로사로 추정됐다.
 나는 이 사실을 숨기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부분을 솔직히 말해서 겨우 얻은 자유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 위험했지.”
 “그렇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나가보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그 옆에 종을 울리십시오.”
 “알겠네.”
 
 그렇게 침실을 나가는 라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칠순이 지난 라만의 뒷모습은 왠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초라해 보인다니··· 몇 시간 만에 사람이 다 됐군.’
 
 그 순간,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그리고 동시에 나도 모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영지를 구할 만큼의 돈을 버는 방법이었다.
 0.001초··· 0.002초··· 0.003초.
 
 “라만.”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라만을 내가 불러 세웠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혹시 상인 중에 아는 사람 있어?”
 
 ***
 
 예상대로였다.
 일주일 만에 몸은 완벽하게 회복됐다.
 동시에 점차 인간으로서의 삶에도 적응이 됐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정신 건강 상태는 최악이었다.
 
 “메이나르드가의 무구한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그것은 다름 아닌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라만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내가 영지를 살리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은 메이나르드가의 서재에 꽂혀 있는 수백 권의 ‘마법서’를 판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에 대해서 듣자마자 라만이 펄쩍 뛰며 노발대발했다.
 
 “영주님!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십니까? 그 마법서는 메이나르드가의 자부심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미 이온 메이나르드의 기억을 통해서 알고 있는 메이나르드 가문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 233번째 잔소리가 시작됐다.
 
 [본래 메이나르드가는 ‘마법사 집안’이다.
 대대로 효율이 좋고 강력한 가문만의 ‘마나 호흡법’과 ‘마법’이 내려왔다.
 그랬기 때문에 ‘아이사스 왕국’에서도 이름을 크게 떨칠 수 있었다.
 메이나르드 가문의 가주라고 하면 아이사스 왕국 ‘최고의 마법사’로 대우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가문의 ‘마나 호흡법’과 ‘마법’은 이온 메이나르드의 할아버지 대에서 그 핵심이 실전됐다.
 그 결과, 메이나르드 가문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라만이 서재로 쫓아오면서 여기까지 설명했다.
 내가 휴, 하고 한숨을 쉬며 물었다.
 
 “이미 들었던 얘기를 계속 들을 필요가 있을까?”
 “가만히 계십시오.”
 
 [원래 집안이 강력할수록 정적도 많은 법이다.
 최고의 마법사 집안이었기 때문에 메이나르드가에는 수많은 정적이 존재했다.
 마법 쪽으로 특화된 집안은 전부 메이나르드가를 견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마나 호흡법’과 ‘마법’의 핵심이 실전됐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메이나르드가는 정치적으로 갖은 풍파를 겪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막기에 메이나르드가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가문의 ‘마나 호흡법’과 ‘마법’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는 서재에서 책을 읽는 와중에 진행된 라만의 설명이었다.
 내가 오늘만 두 번째 한숨을 휴, 하고 내쉬며 물었다.
 
 “영감, 이 책이라도 다 읽고 들으면 안 될까?”
 “읽으면서 들으세요.”
 
 [결국 할아버지 대에서 메이나르드가는 대부분의 재산을 잃었다.
 수많은 재산과 영지를 빼앗겼고 백작이었던 작위도 자작까지 내려갔다.
 할아버지에 이어서 가주 자리에 오른 이온 메이나르드의 아버지가 어떻게든 가문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하나 남은 영지, 페로딘은 너무나도 척박한 땅이었다.
 늘어가는 것은 빚뿐이었고 그렇게 지금의 상황에 놓이게 됐다.]
 
 내가 책장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마법서를 판매한다고 하잖아.”
 “지금까지 무슨 얘길 들으신 겁니까! 마법사 집안의 영광을 돈 몇 푼에 송두리째 날려 버리실 겁니까?”
 
 하지만 단시간에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이뿐이었다.
 내 머릿속에 입력된 정보에 따르면 마법서는 굉장히 비싼 값에 판매가 됐기 때문이다.
 평균적으로 권당 244골드였다.
 20골드인 평민의 1년 생활비보다도 많은 돈이었다.
 1골드는 원화로 계산하면 백만 원 정도 됐다.
 심지어 몇몇 마법서는 굉장히 비싼 값에 판매될 가능성이 높았다.
 서재에는 그만큼 희귀한 마법서가 많이 존재했다.
 
 ‘라만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재에는 총 409권의 마법서가 있다. 전부 팔면 10만 골드 정도를 벌겠군. 1천억 원인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빚을 갚고도 2만 골드가 남았다.
 하지만 라만이 문제였다.
 라만은 마법서를 판매한다는 사실에 격렬히 반대했다.
 그 이유는 메이나르드가의 가주들이 어째서 지금껏 마법서를 판매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와 일맥상통하고 있었다.
 
 “영주님, 잊지 마십시오. 귀족에게 명예와 자부심은 목숨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마법사 집안으로 명성을 떨친 메이나르드가의 마법서는 역사이자 전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보물,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귀족이란 본래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일도 불사하지 않았다.
 
 “알고 있어, 영감. 하지만 명예와 자부심이 밥을 먹여 주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요, 밥을 먹여 줍니다! 이 마법서들이 없다면 메이나르드가는 어떻게 재기를 한단 말입니까?”
 
 라만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이 마법서가 없으면 메이가르드가는 재기의 꿈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메이가르드가는 대대로 강력한 마법사가 영주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영주가 얼마만큼의 마법 경지에 오르느냐에 따라서 가문의 위상이 뒤바뀌었다.
 그리고 높은 경지에 오르려면 마법서는 필수였다.
 
 ‘그러다 보니 마법서의 값어치가 높다는 사실을 알고도 팔지 못했던 것이지. 심지어 마법서가 소중하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원래 주인 이온 메이나르드는 이 방법을 아예 떠올리지조차 못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애초에 마법서가 어째서 자부심과 등가로 결부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부심의 값어치가 영지의 값어치보다 높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단순히 마법서를 팔 생각만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휴, 하고 오늘만 벌써 세 번째 한숨을 쉰 뒤 읽고 있던 책을 라만에게 건네줬다.
 <마나 운용력의 이해>라는 마법 이론서였다.
 
 “이걸 왜?”
 “맨 앞장을 펴 봐. 그리고 들어 봐.”
 
 나는 그 자리에서 <마나 운용력의 이해> 내용을 한 글자 빠짐없이 암송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뒤, 라만이 입이 떡 벌린 채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랬다.
 나는 이 서재에 있는 마법서를 전부 통째로 외울 생각이었다.
 
 “어때? 이 정도면 마법서를 팔아도 괜찮겠지? 그까짓 거 내가 다시 쓰면 되잖아.”
 
 ***
 
 탁.
 책장을 덮었다.
 <5서클 마법: 체인 라이트닝>이라는 마법서였다.
 
 ‘이걸로 총 300권째.’
 
 나는 하루에 딱 50권의 마법서를 외웠다.
 더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이 페이스대로라면 빚을 갚아야 하는 시간 전까지 어렵지 않게 마법서를 외울 수 있었다.
 몸이 회복되기 전에도 라만을 시켜 마법서를 가져와 머릿속에 입력했기 때문이다.
 
 ‘여유롭군. 다만 눈이 뻑뻑해. 인간의 눈은 훌륭한 스캐너이지만 쉽게 피로해진다는 단점이 있어.’
 
 그렇게 피로한 눈을 비비고 있을 때였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라만이었다.
 내가 마법서를 암송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라만은 더 이상 마법서 판매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마법서 판매를 위해 상인들을 수소문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맞는 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보여 줄 걸 그랬다.
 
 “들어와. 무슨 일이야?”
 “북쪽 지방 출신의 상인, 첼린이 영주님을 뵙고자 합니다.”
 
 나는 마법서를 외우는 와중에도 이런 식으로 짬짬이 상인들을 만났다.
 하지만 결과는 늘 좋지 않았다.
 제대로 된 가격을 제시하는 상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은근히 깔보는 눈빛을 한 채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렀고 어떻게든 흥정을 벌여 마법서 전체의 가치를 깎아 먹으려고 했다.
 마법서가 낡았다는 트집을 잡는 경우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마법서는 대부분 보존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렇지 않은 마법서는 마법서라 불리지도 않았다.
 내가 지난날의 쓰린 기억을 되새기며 라만에게 물었다.
 이번만큼은 제값을 치를 만한 상인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때?”
 “다소··· 곤란한 자입니다.”
 
 라만이 진심으로 곤란해하는 눈치였다.
 
 “왜?”
 “상인치고는 행색이 너무 남루합니다. 상인보다는 오히려 여행자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라만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머릿속에 입력된 수많은 책 내용 중 한 구절을 떠올렸다.
 도서관 사이트에 우연히 접속하여 얻게 된 정보들 중 하나였다.
 
 ――――――――――――――――――――
 세일즈에 있어 첫인상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사실 세일즈의 성사 여부는 15초 안에 판가름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품 설명의 효과는 7퍼센트, 세일즈맨의 목소리·말씨·크기·이야기하는 속도·톤 등 청각적 요소는 38퍼센트, 외모·태도·눈빛 등 시각적 요소 55퍼센트의 효과를 나타내는데 이것이 바로 <55:38:7의 법칙>이다.
 결국 스스로를 가꿔서 좋은 첫인상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노력하지 않은 세일즈맨이 있다면 그자는 사기꾼으로 의심받는다.
 ―구배명, <세일즈맨이여 영원하라> 중에서.
 ――――――――――――――――――――
 
 이 구절들을 되새기며 생각했다.
 
 ‘결국 사기꾼이라는 건가?’
 
 하지만 나는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까지 만난 행색이 멀쩡한 상인들 쪽이 오히려 더 사기꾼에 가까웠다.
 
 “상인답지 않은 행색이라니 재밌네. 그렇다면 영주답지 않은 행색을 한 내가 그자를 만나 볼까?”
 
 ***
 
 잠시 후, 라만이 상인을 데려왔다.
 확실히 행색이 여행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온 메이나르드의 기억이 제공하는 정보도 눈앞의 젊은 사내를 상인이 아닌 여행자로 구분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영주님? 저는 북쪽 지방 출신의 상인, 첼린입니다.”
 “그래?”
 
 내 말투에서 어떤 이상한 기색을 느낀 것인지 첼린이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네. 상인치고는 행색이 좀 남루하지요?”
 “그걸 알고도 그렇게 온 거야?”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상행이 길어지면서 이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첼린이라는 상인을 찬찬히 살폈다.
 왠지 호감이 가는 상대였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지? 인간이 되어서 그런 건가? 머릿속에 정보들은 전부 눈앞의 사내를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고 있는데······.’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라만의 축 처진 뒷모습을 봤을 때였다.
 그때 나는 갑자기 가슴이 욱신거리는 걸 느꼈고 나도 모르게 이 영지를 살릴 만한 방법을 계산해 냈다.
 
 ‘조금은 다르다. 라만의 경우에는 안타까움에 가까운 마음이 들었고 이자의 경우에는 기대감과 같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왠지 모를 호감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하지만 이번에는 라만의 경우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라만은 이온 메이나르드의 기억에서 이미 긍정적으로 판단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또한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잡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와 반대로 첼린의 경우에는 사전 정보도 없고 접촉에 실패하면 실질적인 손해가 나는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사기꾼 같지는 않다. 사기꾼이라고 하기엔 자신의 행색에 대해서 지나치게 당당한 부분이 있어.’
 
 여기까지 빠르게 계산한 내가 말했다.
 
 “행색이야 어떻든 사실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것은 자네가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고 제값을 치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니깐.”
 
 내 말에 안심한 듯 첼린이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꼭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이제 물건을 볼 수 있겠습니까?”
 “영감, 안내해 줘.”
 
 첼린이 라만의 안내를 받아 마법서가 모여 있는 책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마법서를 이리저리 살피며 값을 매기는 게 특별히 다른 상인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가격을 후려치려고 했던 다른 상인들도 쇼맨십의 일환으로 자세히 물건을 살피는 척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첼린이 내 앞으로 왔다.
 
 “어땠어?”
 “메이나르드가의 오랜 명성에 알맞은 좋은 물건이 많더군요.”
 
 역시나 비슷했다.
 다른 상인들로 이런 감언이설로 날 구슬리고 값을 후려쳤다.
 하지만 곧 이어진 첼린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다만······.”
 “다만?”
 “정말 저 물건을 전부 파실 생각이십니까?”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물었다.
 
 “무슨 뜻이지?”
 
 첼린이 즉각 대답했다.
 
 “6서클 마법서까지도 판매하실 건지 물어본 겁니다.”
 
 6서클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레벨의 마법 경지였다.
 일인군단으로 평가받는 오러 마스터와 동급의 전력이었으며 정치, 문화 분야에서의 가치는 오러 마스터보다 높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6서클 마법사는 한 시대에 단 한 명뿐이었다.
 마치 짠 것처럼 꼭 그렇게 한 시대에 한 명씩만 등장했다.
 그만큼 존재 자체가 희귀했고 최고의 마법사 집안으로 분류되는 메이나르드에서도 역사상 단 두 명밖에는 배출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6서클 마법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숫자가 많지 않았다.
 메이나르드가의 서재에도 가문에서 배출한 두 명의 6서클 마법사가 각각 한 권씩 쓴 총 두 권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6서클 마법서가 가장 비싼 값에 팔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럴 생각이지. 왜? 혹시 마법서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첼린이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6서클 마법서는 두 권 모두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진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데?”
 
 첼린은 잠시 뜸을 들였다.
 뭔가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 첼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떤 탐욕 같은 것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탐욕?”
 “그렇습니다. 혹시 제가 오기 전에 이곳을 들른 상인이 있습니까?”
 “있지. 꽤 많아.”
 “그렇다면 그들이 전부 가격을 영주님의 생각보다 낮게 부르지 않았습니까?”
 
 망치로 뒤통수를 땅, 하고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제야 나는 첼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내가 인간을 너무 몰랐구나.’
 
 첼린의 반응으로 미뤄 볼 때 6서클 마법서는 내 생각보다는 값어치가 엄청난 물건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물건이 매물로 나오자 상인들은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엄청난 물건을 판다고?
 어린 영주가 정신이 나간 것인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린 영주는 이 6서클 마법서의 값어치를 알지 못하는 게 분명해.
 그렇다면 가격을 낮춰서 불러 보자.
 
 첼린이 느꼈다는 탐욕도 이와 관련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인간의 탐욕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군. 나이가 어리다고 이렇게까지 얕잡아 보이다니.’
 
 그때 첼린이 내 표정을 살피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무표정 상태를 유지하던 내가 일부러 큰 소리로 웃었다.
 이 거래를 어떻게든 성사시키기 위한 허세였다.
 
 “하하하. 대단한걸? 그걸 파악해 낸 거야?”
 
 내가 이렇게 묻자 첼린이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군요. 영주님은 정직한 상인을 구분하기 위해 6서클 마법서를 판매하는 척하신 거군요. 대단한 묘수였습니다.”
 
 물론 아니었다.
 나는 6서클 마법서를 진심으로 판매할 생각이었다.
 내가 가진 정보로는 6서클 마법서를 판매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6서클 마법서가 무척이나 비싸다는 사실밖에는 알지 못했다. 심지어 라만도 상인이 아닌 집사였기 때문에 그 부분을 간과했고. 첼린이 알아서 오해를 해 줘서 다행이군.’
 
 나는 미소를 띤 채 내가 어떤 식으로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계산했다.
 다행히 수많은 책, 드라마, 영화들이 이 상황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내놓았다.
 1··· 2··· 계산 끝.
 
 “상당히 놀라운걸? 첼린이 지금껏 이곳에 들른 어느 상인들보다도 뛰어나고 청렴한 인물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어. 좋아. 그럼 한번 가격도 적절히 제시할 수 있는지 볼까?”
 
 첼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는 종이를 꺼내 보였다.
 
 <페로딘 영지 마법서 거래 제안서>
 1서클 마법서 ― 182권X65골드=11,284골드.
 2서클 마법서 ― 102권X121골드=12,342골드.
 3서클 마법서 ― 68권X422골드=28,696골드.
 4서클 마법서 ― 39권X1,030골드=40,170골드.
 5서클 마법서 ― 16권X2,670골드=42,720골드.
 *총 가격 ― 135,212골드.
 
 거래 제안서를 보고 ‘정보의 부재’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왜냐면 첼린이 제시한 금액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한참이나 높았기 때문이다.
 내가 당초에 예상한 금액은 10만 골드였다.
 
 ‘가격 상승 폭을 예상하여 도출해낸 금액에 30퍼센트를 초과하다니. 확실히 페로딘 영지의 정보력은 수준이 굉장히 낮다. 이온 메이나르드와 라만이 가진 정보도 많지 않고.’
 
 이번 거래를 통해 자금에 숨통이 트이면 이 부분을 꼭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라면 인터넷으로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인터넷망 구축을 떠나서 컴퓨터의 사용자가 오직 나뿐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첼린이 설명했다.
 
 “제 쪽에서 지불 능력이 없기 때문에 6서클 마법서는 아예 계산에서 제외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건 6서클 마법서 한 권의 가치가 적어도 13만 골드 이상이라는 거군. 그렇지 않고서는 옮기기도 힘들고 팔기도 번거로운 1~5서클 마법서 쪽을 굳이 선택하지 않았을 테니깐.’
 
 내가 생각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가격은 적절해 보이네. 지불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이파 은행에서 발행한 어음과 현금 일부로 하겠습니다.”
 
 아이파 은행은 대륙 최대 규모의 은행이었다.
 다시 말해서 신용상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첼린이 만 골드짜리 어음 13장을 꺼내 보였다.
 
 “영감, 확인해 봐.”
 
 품속에서 뭔가를 꺼낸 라만이 다가왔다.
 라만이 꺼낸 것은 귀족가라면 하나씩 가지고 있는 어음 감별기라는 아티팩트였다.
 이 어음 감별기는 100퍼센트 확률로 어음의 위조 여부를 구분해낼 수 있었다.
 라만은 어음 감별기의 렌즈를 아이파 은행 로고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아이파 은행 로고가 푸른색으로 빛났다.
 황금을 휘감고 있는 뱀을 형상화한 은행 로고였다.
 푸르스름하게 빛을 내고 있는 뱀을 보며 라만이 말했다.
 
 “진품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거래가 무사히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
 
 첼린은 4서클 마법서와 5서클 마법서를 들고 페로딘을 떠났다.
 다른 3백여 권의 마법서는 잠시 서재에 맡겨두기로 했다.
 첼린에게 당장 이 마법서를 전부 옮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관의 대가로 100골드를 지불하겠습니다.”
 
 신용을 중요시하는 상인답게 첼린이 먼저 제안했다.
 
 “됐어. 물건이 원래 있던 자리에 조금 더 놓여 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냥 두도록 해.”
 “감사합니다.”
 “다만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의문을 풀어줄 수 있어?”
 
 첼린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제가 드릴 수 있는 답변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간단한 거야. 어쩌다 그런 복장으로 페로딘까지 오게 된 거야?”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첼린은 왕국 북부 출신이었다.
 그에 반해 페로딘은 왕국 남부에 속해 있었다.
 아이사스 왕국이 크지 않다고는 하지만 북부와 남부 사이의 거리는 그래도 상당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곳까지 흘러들어 온 걸 보면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복장도 너무나 여행자에 가까웠다.
 내 질문을 들은 첼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가문의 승계 싸움에서 밀려났습니다.”
 
 이야긴즉슨 이렇다.
 첼린은 베르칸 백작가의 차남이었다.
 어릴 적부터 학식이 뛰어나고 총명한 것으로 북부에서 유명했지만 아쉽게도 검술과 마법 모두에 재능이 없었다.
 선천적으로 마나와 친하지 않은 체질이었던 것이다.
 귀족 사회에서 마나와 친하지 않은 자가 가주의 자리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거의 하나뿐인 자식일 때에만 가능한 일로 봐야 했다.
 하지만 첼린의 위로는 넬린 베르칸이라는 형이 있었고 심지어 검술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첼린은 가주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형은 저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줬습니다. 자신을 끝까지 따르는 가신이 되어 가문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일정 금액을 받고 가문을 떠날 것인가.”
 “떠나는 선택을 했구나.”
 “맞습니다. 어릴 적부터 장사에 뜻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장사를 배우기 위해 이곳저곳 떠돌아다녔습니다. 제 이름을 딴 작은 상단도 열었지요. 그러다가 남부에 도착하여 영주님이 마법서를 판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이곳으로 향했습니다.”
 
 어떤 흐름의 얘기인지 감이 왔다.
 
 “그 과정에서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나 보네? 벨로 협곡 쪽으로 온 건가?”
 
 벨로 협곡은 페로딘의 북쪽과 동쪽을 감싸고 있는 험지였다.
 동시에 북쪽에서 페로딘 영지로 오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서 웬만하면 돌아서 오는 선택을 했다.
 벨로 협곡에는 오크 부족 하나가 터를 잡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곳은 진짜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처럼 오크 등의 몬스터가 서식하는 세계였다.
 
 “맞습니다. 빨리 이곳으로 오고 싶어서 무리를 한 것이지요. 결국 출발할 때는 30명이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돈만 들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죠.”
 “그럼 복장은?”
 “원래 입고 있던 옷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많이 헤져서 페로딘에 도착하자마자 새로 구입했습니다. 영주님을 만나기 위해 가장 좋은 옷을 골랐지만 보다시피 이 모양이군요.”
 
 페로딘의 상점은 전부 누추했다.
 그곳에서 옷을 구입했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다.
 가난한 영지의 상점에 좋은 옷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사정이었군.”
 “네.”
 “다음에는 꼭 국도를 이용하도록 해. 좀 돌아가야 하긴 하겠지만.”
 “그래야지요. 또 험한 꼴을 당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실력은 별로지만 우리 영지의 사병 15명을 차출해서 데려가도록 해. 국도라고 해서 몬스터로부터의 위협이 전무한 건 아닐 테니.”
 
 첼린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통 영주가 일개 상인에게 이런 호의를 보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해당 영지에 큰 도움을 준 대형 상단만이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덧붙여 말했다.
 
 “첼린이 제값에 마법서를 구입해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페로딘 영지에 큰 도움을 준 거야. 그러니 사양하지 말고 받아.”
 “그런··· 감사합니다.”
 
 연기인지는 몰라도 감동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연기여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감동하라고 한 얘기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단편적으로나마 6서클 마법서의 가격 정보를 준 것에 대한 대가성 호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영지의 사병 15명과 함께 첼린이 페로딘을 떠났다.
 
 ***
 
 그리고 며칠 후.
 새로운 손님이 페로딘 영지를 방문했다.
 
 “그래, 영감. 타쿤 데나 자작의 아들이 혼자 이곳을 방문한다고?”
 
 타군 데나 자작은 페로딘에 돈을 빌려준 인물이었다.
 아마 그 아들이 온다는 건 빚을 상환받기 위함일 것이다.
 
 “네. 곧장 이곳으로 향하고 있답니다. 4시간 후에 도착한다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온 메이나르드의 기억을 더듬었다.
 타쿤 데나 자작의 아들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라만이 혹시 알고 있나 싶어서 물었다.
 
 “타쿤 데나 자작의 아들은 어때?”
 “성격이요?”
 “성격도 성격이지만 실력도 알면 좋지. 마법, 검술 둘 중 하나는 배운 적 있을 것 아니야.”
 “둘 다 배웠지만 둘 다 잘하진 못합니다. 아직 오러 러너의 반열에도 오르지 못했죠. 게다가 성격은 한마디로··· 망나니입니다.”
 
 
 # 오, 나의 영주님!
 
 넓게 펼쳐진 들판 위의 국도.
 국도 위로 마차 한 대가 지나갔다.
 다름 아닌 타군 데나 자작의 다섯째 아들, 콜오슨 데나가 타고 있는 마차였다.
 
 덜컹, 덜컹.
 국도 위로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차를 둘러싼 병사들과 시종들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표정하기만 했다.
 특히 마차의 선두를 이끄는 기사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다.
 하지만 그 진지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교태 어린 신음 소리가 마차로부터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항! 아아항!”
 
 신음 소리와 함께 기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콜오슨만이 타고 있어야 할 마차 안에 매춘부가 함께 타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난 것이다.
 
 ‘휴. 어째서 저런 놈이 주군의 아들로 태어난 건지.’
 
 결국 기사가 속으로 이런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곧이어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마차 안쪽에서 콜오슨이 외쳤다.
 
 “으으윽! 후욱, 후욱. 마차를 멈춰라! 여기서 한숨 자고 가야겠다!”
 
 기사가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목적지에 일찍 도착하기는 글렀구나.’
 
 하지만 콜오슨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어찌 됐든 콜오슨은 주군의 아들이었다.
 기사가 무서운 얼굴을 한 채 외쳤다.
 
 “정지! 이곳에서 야영 준비를 한다!”
 
 마차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병사들과 시종들이 흩어져 분주하게 야영 준비를 했다.
 병사들은 텐트를 쳤고 시종들은 저녁 식사를 만들었다.
 주변이 어수선해진 사이.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던 시종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은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그나저나 그 얘기가 사실이에요?”
 “무슨 얘기?”
 “자작님이 시종 하나를 겁간해서 영주성이 난리가 났······.”
 “예끼! 이 사람아. 그런 소리 말아. 그러다가 큰 곤욕을 치른다고!”
 “하지만 궁금한 걸 어떡해요. 사실 맞죠?”
 “휴. 한 번만 말해 줄 테니깐 듣고 잊어. 다섯째 도련님이 시종 하나를 겁간한 거 맞고 그 시종을 사랑한 기사와 결투를 벌인 것도 맞아.”
 “다섯째 도련님이 기사를 이겼다고요? 실력이 아주 형편없다고 들었는데?”
 “형편없지. 그런데 어쩌겠어. 돈이면 다 되는걸.”
 “돈이요?”
 “그래, 돈. 괴물 같은 그 돈. 소문이지만 결투가 벌어진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영주님이 손을 쓰셨대. 그래도 아들이라고 목숨은 부지시키려고 한 거지.”
 “어쩐지.”
 
 그때 마차의 선두에 섰던 기사가 시종 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거기! 지금 잡담하는 거야?”
 
 시종 둘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연장자로 보이는 시종이 먼저 변명을 했다.
 
 “아이고, 기사님 아닙니다. 이 친구랑 어떤 국을 만들지 고르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호기심 많던 시종이 연장자 시종의 말을 받았다.
 
 “네. 기사님. 돼지고기 국이랑 소고기 국 중 무엇을 할까 고르기가 너무 힘들어서······.”
 
 기사가 두 사람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잠시 고민을 하는 기색이더니 이내 이렇게 말했다.
 
 “소고기 국으로 해라. 콜오슨 도련님은 그걸 더 좋아한다.”
 
 두 시종이 고개를 정중히 조아렸다.
 
 “네에.”
 “네.”
 
 두 사람도 알고 있었다.
 기사가 모른 척 두 사람의 목숨을 부지시켜 주었다는 사실을.
 
 ***
 
 첼린이 떠나고 나서 나는 영지의 실상을 알아보기로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가진 것을 십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카드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영주라는 신분이었다.
 
 ‘영주의 신분을 활용하여 페로딘을 잘 운영해야 해. 다행히 페로딘은 꽤나 질 좋은 토지를 가지고 있지. 너무 작기 때문에 활용도는 크지 않지만.’
 
 이게 지금까지 페로딘이 다른 영주들에게 넘어가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였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 자체가 너무 적기 때문에 페로딘은 활용 가치가 굉장히 떨어졌다.
 심지어 북쪽과 동쪽으로 벨로 협곡을 끼고 있는 위치도 굉장히 좋지 않았다.
 전략적 가치가 전혀 없는 남쪽 구석 중의 구석이었다.
 
 ‘그건 질 좋은 토지를 가꿔 봐야 영지민이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의 수확량밖에는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질 좋은 토지를 가꾸고 나면 식량을 노리는 벨로 협곡의 오크 떼의 습격을 받지. 괜히 이온 메이나르드의 아버지가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빚만 늘어난 게 아니야.’
 
 이러한 정보만으로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로딘의 가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금을 활용하여 토지를 가꾸고 병사를 훈련한다면 자급자족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현대의 지식을 활용한다면 페로딘을 더 중요한 카드로 만들 수도 있다. 다만 그러려면 영지의 실상을 더 확실히 파악해야 해.’
 
 이게 내가 영주성을 벗어나 현장 감찰을 시작한 이유였다.
 그리고 현장 감찰을 시작하자 페로딘의 상황이 생각한 것보다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내게 충격을 선사한 것은 영지민의 ‘거지꼴’이었다.
 그저 단순히 ‘거지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지민들은 거의 소나 돼지 등의 ‘가축’만도 못한 삶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이 중세와 가깝다는 점에서 삶의 질적 수준이 낮음은 어렵지 않게 예상했다.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서 중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목격한 모습은 그 이상이었다.
 
 ‘이런 삶을 산다는 걸 알았다면 나는 절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거지?’
 
 갑자기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라만의 초라한 뒷모습을 지켜봤을 때보다도 몇 배나 큰 고통이었다.
 심지어 영지를 자세히 살필수록 더욱 고통이 커져 갔다.
 
 ‘이 고통은 뭐지? 인간이 되면서 발생한 부작용인가? 후··· 어쨌든 처참한 광경이군.’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는 곳이 없었다.
 농민, 약초꾼, 사냥꾼, 대장장이, 무두질장이 등 모두가 똑같은 행색을 한 채 우울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온 메이나르드는 분명 착한 영주였다. 사치를 부리지 않았고 영지민을 과도하지 수탈하지도 않았어. 하지만 이온 메이나르드도 어쩔 수 없이 귀족이었다. 슈퍼컴퓨터였던 나보다도 영지민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특권을 부여받은 계층.’
 
 내가 충격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는 알고 있는 정보와의 강렬한 대비에 있었다.
 죽기 전 여러 번 현장 감찰을 수행한 바가 있는 이온 메이나르드의 정보 속에 영지민은 그래도 비교적 행복한 모습으로 기억이 입력돼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타쿤 데나 자작에게 영지를 넘기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군. 이렇게나 무지하고 멍청하다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여인이 커다란 통에 물을 길어 오는 것이 보였다.
 우물이 있는 광장에서 내가 있는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오는 모습이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다.
 안색을 살피니 얼굴이 창백하고 입술이 파리한 게 병에 걸린 듯했다.
 나는 선뜻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물이 담긴 통을 대신 들었다.
 
 “아.”
 
 갑자기 손이 허전해진 것을 느끼고 여인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감탄사는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영주님!?”
 “어디로 가져가면 되지?”
 “제, 제가 옮기겠습니다.”
 “어딘지나 말해.”
 “저, 저쪽으로······.”
 
 여인이 가리킨 건물에는 잡화점 간판이 걸려 있었다.
 
 ***
 
 내가 잡화점 앞에 물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잡화점을 운영하는 거야?”
 
 그사이 상황을 파악한 여인이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다른 영지민보다는 생활하기 낫겠네? 잡화점이라면 손님이 그래도 꽤 찾아올 테니깐.”
 
 여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영지민의 형편은 전부 같습니다. 하나같이 가난하고 힘겹죠.”
 
 나는 당황했다.
 이온 메이나르드에 입력된 정보대로라면 보통 이런 경우에서 영지민은 “네, 네. 맞습니다, 나으리.”라고 대답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여인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얼굴이 창백하고 입술이 파리하였지만 눈빛만은 강렬하면서도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정보로만 알고 있던 ‘호기심’이라는 감정이었다.
 
 ‘이게 호기심이라는 것인가? 재밌는데?’
 
 나는 호기심을 가진 사람답게 행동하기로 했다.
 
 “참신한 답변이었어. 하지만 영주에게 하기엔 적절한 답변은 아닌 것 같은데?”
 
 여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하지만 비굴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영지민의 한 사람으로서 영주님께 영지민의 실상에 대해서 거짓 없이 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흥미로웠다.
 이런 게 몇몇 인간들이 즐기는 논쟁이라는 것의 재미인 모양이었다.
 내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거짓 없이 고한다고 뭔가가 달라질까?”
 “달라지고, 달라지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은?”
 “영지의 발전을 위해서는 영지민의 삶이 지금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것이죠.”
 “영지민의 삶이?”
 “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결국 사람한테 나오는 것이니까요.”
 
 여인의 말을 듣고 속으로 감탄했다.
 중세 수준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 세계에서 여인의 생각은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를 더 물어보기로 했다.
 
 “그것들이 사람한테 나온다고? 그것들은 전부 자연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연은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것이지.”
 “신이 자연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사실이지요. 하지만 결국 자연 역시도 사람의 손으로 가공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람이 쓸 수 없거나 그 쓰임새가 제한이 되니까요. 그렇다면 결국 영지는 사람의 삶이 나아지는 쪽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인의 사상은 그 깊이가 얕긴 하지만 신보다 이성을 중요시하는 계몽사상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시대도 시대지만 여인의 신분이 평민에 불과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여인은 제왕학이나 영주론을 배운 왕이나 귀족이 아니었다.
 또한 이곳에서 제왕학이나 영주론을 배우지 않은 자가 이런 생각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학자 집안의 출신인 건가? 아니면 몰락한 귀족가의 자제 출신인 건가? 어쨌든 깨어 있는 인재군.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어.’
 
 이런 생각을 하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소히네입니다.”
 “성은 없는 건가?”
 “그렇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준귀족 이상의 계급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평민 중 학자 집안의 출신일 가능성이 높았다.
 제라스마 대륙의 신분제는 ‘황족>왕족>귀족>준귀족>평민>천민’으로 구분됐다.
 준귀족 이상은 성씨를 가질 수 있었고 준귀족 미만은 성씨를 가질 수 없었다.
 
 “학자 집안 출신인가?”
 
 내 말에 소히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농민의 자식입니다. 그저 좋은 스승을 만나 조금 학문을 익혔을 뿐이지요.”
 
 평민이라고 해서 왕국법상 학문을 익히는 것이 금지돼 있지는 않았다.
 물론 영주가 금지하는 곳이 있긴 했지만 적어도 페로딘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한테 있어서 신분이란 건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눈앞의 여인, 소히네가 꽤나 쓸모가 있는 자로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소히네에게 한 가지 과제를 내리기로 했다.
 
 “좋아, 소히네. 네 말이 꽤나 타당하다는 걸 알겠어. 그렇다면 나에게 영지민의 삶을 나아지게 할 만한 방법을 알려 줄 수 있겠어?”
 
 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소히네의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또 다른 감정 하나를 새롭게 느꼈다.
 그것은 바로 ‘좋은 예감’이라는 감정이었다.
 
 ***
 
 소히네는 당황했다.
 어린 영주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앞선 상황에서 당돌하게 꺼낸 말은 사실, 울컥해서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감기 몸살을 앓으며 몸이 아팠기 때문에 사리 분별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어린 영주가 갑자기 나타나 “그럼 다른 영지민보다는 생활하기 낫겠네? 잡화점이라면 손님이 그래도 꽤 찾아올 테니깐.”과 같은 말을 하니 괜히 화가 났다.
 약은커녕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며칠째 끙끙 앓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화를 참지 못하고 이렇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전혀요. 영지민의 형편은 전부 같습니다. 하나같이 가난하고 힘겹죠.”
 
 솔직히 이 말을 꺼내고 나서 아차, 싶었다.
 어리다고는 하지만 귀족 신분을 가진 영주 앞에서 함부로 꺼낼 말이 아니라는 걸 소히네도 알았다.
 심지어 세상을 떠돌다가 우연히 인연이 닿아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쳐 주었던 스승은 언제나 소히네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아는 것이 많다고 뽐내지 마라. 아는 것이 많은 자는 천수를 누리지만 그것을 뽐내는 자는 이마에 밭고랑이 생기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다.”
 
 결국 세상의 모든 이치를 지혜롭게 풀어내던 스승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실수를 하고 말았구나. 어쩌지 지금이라도 영주님께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할까? 그런다면 용서해 주실까?’
 
 하지만 소히네의 이런 생각은 자신의 뱃속에서 울린 꼬르륵, 하는 소리를 듣고 바뀌었다.
 
 ‘그래.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한 번 죽기는 매한가지다. 어차피 굶어 죽느니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고 죽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린 영주가 “신박한 답변이었어. 하지만 영주에게 하기엔 적절한 답변은 아닌 것 같은데?”라고 물어 왔다.
 그때부터 소히네는 하고 싶은 말을 가리지 않고 모두 꺼냈다.
 소히네가 알기론 눈앞의 어린 영주는 착하지만 세상 물정을 몰랐고, 똑똑하지만 지혜롭지는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자 뜻밖의 질문이 날아왔다.
 
 “좋아. 네 말이 꽤나 타당하다는 걸 알겠어. 그렇다면 나에게 영지민의 삶을 나아지게 할 만한 방법을 알려 줄 수 있겠어?”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아는 어린 영주는 이런 질문을 할 만한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영주가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한 것이지? 혼자 서재에 틀어박혀 영지를 살리기 위한 고민을 한다 소문이 돌더니 조금은 변한 건가? 아니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저 영지민을 희롱하는 건가?’
 
 하지만 이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자신은 어린 영주에게 자신의 소신을 전부 밝힌 상태였다.
 다시 말해서 거칠 것이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다만 아직 소히네도 영지를 살릴 만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떤 것이 있을까······?’
 
 소히네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저도 아직은 영지를 살릴 만한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잡화점 주인의 신분으로 거기까지 고민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얼마나 시간을 주면 답을 낼 수 있겠어?”
 “정말 제가 답을 내길 바라시는 겁니까?”
 “물론이지. 나도, 내 아버지도 못 한 일을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진심을 가늠하기 위해 소히네가 어린 영주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린 영주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거짓이 섞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소히네가 입을 앙다물며 말했다.
 
 “일주일.”
 “응?”
 “일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 시간 안에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어린 영주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대하지.”
 
 ***
 
 며칠 후.
 콜오슨의 마차가 페로딘 외성 앞에 섰다.
 
 끼이익.
 나무로 된 외성의 문이 열렸다.
 그러자 선두에 선 기사가 마차로 다가가 말했다.
 
 “도련님. 페로딘 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네.”
 
 콜오슨이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여기저기 파이고 무너진 외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콜오슨의 토실토실한 얼굴이 찌푸려졌다.
 
 “생각한 것보다도 개판이군. 아버지는 왜 날 이런 곳에 보낸 거지?”
 
 사실 데나 자작은 단순히 빚을 받아 내기 위해 다섯째 아들을 이곳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이온이 빚을 상환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 일로 페로딘을 꿀꺽, 삼키고 영지의 관리를 다섯째 아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콜오슨이 기사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는 정말 이런 시골 영지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기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휴. 아버지는 날 너무 믿는다니깐.”
 
 콜오슨이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턱밑에 붙어 있던 두꺼운 살이 출렁거렸다.
 기사는 그것이 굉장히 역겹게 느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주군이 자신을 믿어서 이곳으로 보냈다고 생각하는 건가? 멍청한 돼지 새끼.’
 
 데나 자작의 다른 아들들은 이미 모두가 각자 영지를 맡아 관리 중이었지만 오직 콜오슨만 관리하는 영지가 없었다.
 워낙 철이 없고 여색만 밝혔기 때문에 영지를 맡기기가 불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예 기회조차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있으나 마나 한 페로딘을 맡기기로 했다.
 애물단지에게 애물단지를 떠넘기자는 심산이었다.
 기사는 이러한 사실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기사뿐만이 아니라 데나 자작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콜오슨은 그러한 사정을 알 만한 눈치조차 갖추지 못했다.
 콜오슨이 신나게 지껄였다.
 
 “그래도 어쩌겠어. 형들보다 뛰어난 내가 페로딘을 구제해야지, 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 초야세를 내게 하면 되겠구나!”
 
 그 말을 듣고 기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초야세’란 영주가 초야권(영주가 영지의 여인과 첫날밤을 보낼 수 있는 권리)을 피하려는 여인에게 부과하는 ‘세금’이었다.
 그건 다시 말해서 콜오슨이 페로딘에 초야권을 행사하겠다는 뜻이었다.
 초야권은 폭정을 일삼는 몇몇 영주만이 벌이는 만행이었다.
 대다수의 영주들은 초야권의 비인도적인 측면 때문에 이를 금지했다.
 데나 자작도 초야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정말 미친놈이구나.’
 
 기사가 차마 욕을 입 밖으로 뱉지 못하고 이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그사이에도 마차는 외성 문을 지나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길가로 나와 있던 영지민들은 마차의 행렬을 보고 알아서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였다.
 귀족의 행렬을 보고도 허리를 숙여 인사하지 않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됐다.
 마침내 마차가 영주성에 거의 다다랐을 시점이었다.
 영지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콜오슨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기사는 그 모습을 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콜오슨이 명령했다.
 
 “멈춰라!”
 
 자연스럽게 마차를 비롯한 병사들과 시종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콜오슨이 활짝, 문을 열어젖히며 허겁지겁 마차에서 내렸다.
 안에 함께 있던 전라의 매춘부들이 당황하여 마차의 문을 닫았다.
 기사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왜지? 갑자기 왜 저런 반응인 거야?’
 
 콜오슨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러더니 한 건물의 창문 안쪽을 바라보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기사의 불안감은 한층 높아졌다.
 
 “으흐흐. 여봐라! 당장 저 안에 있는 년을 내 앞으로 대령해라!”
 
 콜오슨이 손으로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잡화점이었다.
 
 ***
 
 나는 콜오슨을 맞이하기 위해 라만과 함께 영주성을 나섰다.
 원래라면 허울뿐이긴 해도 영주인 내가 영주 다섯째 아들에 불과한 콜오슨을 이런 식으로 맞이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데만 자작은 남부의 영향력 있는 귀족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나마 이런 호의를 보여야 했다.
 하지만 귀찮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귀찮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돈이나 던져 주고 떠나라고 하고 싶은데.”
 
 고지식한 라만도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메이나르드 백작가 시절부터 가신이었던 라만으로서는 씁쓸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마 씁쓸한 마음을 내비치진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메이나르드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며 참으십시오.”
 
 라만과 이런 대화를 나누며 외성 쪽으로 걷고 있는데 멀리서 영지민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영지민들만이 아니었다.
 화려한 모양의 마차와 시종, 병사들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무슨 일이지?”
 “글쎄요. 영지민이 마차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나와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 것치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마차가 움직이고 서 있지 않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영지민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것이 가장 수상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제 곧 이 영지의 주인이 될 몸이다. 그러니 순순히 나를 따르는 게 좋을 것이야.”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갔다.
 다가가 보니 짐작대로 그곳에는 콜오슨이 한 여인의 손목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 여인은 바로 며칠 전 나와 대화를 나눴던 잡화점 주인, 소히네였다.
 나는 곧바로 상황에 끼어들려고 하다가 잠시 멈춰 섰다.
 우선 상황을 살피는 것이 먼저라는 계산이었다.
 소히네가 먼저 무례를 범한 상황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 사회에서 평민이 귀족에게 무례를 범하면 즉결 처형이 가능했다.
 소히네가 콜오슨에게 끌려가며 말했다.
 
 “이거 놓으세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으흐흐. 가만히 있어. 내가 너한테 긴히 할 말이 있다. 저쪽으로 가자.”
 
 나는 콜오슨을 호위하는 기사와 병사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 뒤, 콜오슨이 향하고 있는 마차 쪽을 확인했다.
 그러자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사와 병사들이 이 상황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차의 창문 너머로는 안쪽에서 어깨를 훤히 드러낸 채 바깥 상황을 주시하는 여인들도 보였다.
 
 ‘멍청한 놈이 여색을 밝히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나는 머리가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앞으로 나섰다.
 
 “거기 멈춰라!”
 
 소히네의 손목을 끌던 콜오슨이 내 쪽을 쳐다봤다.
 
 “웬 놈이냐!?”
 
 나는 품에서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내 콜오슨에게 던지며 외쳤다.
 
 “나는 페로딘의 주인, 이온 메르나르드 자작이다!”
 
 ***
 
 묵직한 돈주머니에 맞은 콜오슨이 뒤로 발랑, 넘어졌다.
 자연스럽게 소히네를 잡아끌던 콜오슨의 손이 풀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히네가 옆으로 몸을 피했다.
 내가 계산한 대로 상황이 펼쳐진 셈이었다.
 
 ‘그나저나 오랜 시간 기사 수업을 받아왔다는 콜오슨의 실력은 생각 이하로 형편없군. 라만의 말대로야.’
 
 라만이 다른 건 몰라도 정치 상황 같은 것은 꽤나 제대로 꿰고 있었다.
 특히 왕국 남부 쪽에 관한 건 거의 박사 수준으로 봐야 했다.
 남부의 패자였던 메이나르드가의 가신다운 면모였다.
 
 ‘상업 쪽으로도 이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면 메이나르드가가 이렇게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콜오슨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기사 하나가 내 앞을 막아섰다.
 데나 자작이 딸려 보낸 호위인 모양이었다.
 내 생각에 확신을 주듯 기사가 검을 든 채 말했다.
 
 “더 이상 다가오는 건 불가합니다.”
 
 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딱히 이 이상 콜오슨을 해코지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조금 화를 푸는 동시에 소히네를 콜오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자리에 멈춰 선 사이 콜오슨이 육중한 몸을 일으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카딘! 저 녀석을 없애! 저 녀석을 없애라고!”
 
 내가 움찔, 하며 카딘이라고 불린 기사를 바라봤다.
 하지만 카딘은 명령을 듣지 못한 척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콜오슨이 다시 한번 돼지 멱따듯 소리를 질렀다.
 
 “카딘, 저 녀석을 없애라고! 당장!”
 
 하지만 카딘은 내 앞을 가로막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콜오슨이 분개했다.
 
 “감히 내 명령을 어기는 거야!?”
 
 카딘은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대답했다.
 
 “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저의 주군인 데나 자작님뿐입니다. 그리고 주군께서는 도련님을 지키며 호의를 봐주라고 명령을 내리셨지 도련님을 주군처럼 생각하고 따르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콜오슨의 명령은 따를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이 부분도 역시 내 생각대로였다.
 생각이 있는 자라면 망나니 아들에게 전권을 부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콜오슨도 이 사실을 깨달았는지 화를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뺐다.
 
 ‘설마?’
 
 카딘은 나를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콜오슨이 그대로 나를 향해 달려들며 흙탕물에 젖은 장갑을 던졌다.
 
 “결투다!”
 
 카딘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장갑을 황망히 쳐다봤다.
 
 ***
 
 카딘이 어이없어하는 사이 콜오슨이 나를 향해 접근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카딘은 콜오슨을 막을 수 없었다.
 장갑을 던진 순간 이건 명예를 건 귀족들 간에 결투가 됐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콜오슨을 이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콜오슨은 당장이라도 주먹을 뻗을 듯 자세를 취한 채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0.001초··· 콜오슨이 나를 어떻게 공격할지에 대한 모든 경우의 수가 계산됐다.
 0.002초··· 콜오슨의 공격을 가장 효율적으로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전부 찾아냈다.
 0.003초··· 콜오슨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할 수 있는 방법이 눈에 훤히 그려졌다.
 
 콜오슨은 내 안면을 향해 오른쪽 주먹을 횡으로 휘둘렀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콜오슨의 몸 쪽으로 접근했다.
 그러고는 오른쪽 주먹으로 콜오슨의 두꺼운 턱주가리를 올려쳤다.
 
 퍽!
 꽤나 격렬한 타격음이 울리며 콜오슨이 또 한 번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라만의 표정이 보였다.
 라만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눈치였다.
 
 “으아아아악! 이 새끼가!”
 
 그사이 벌떡, 일어난 콜오슨이 또다시 달려들었다.
 그래도 기사 수업을 받았다고 육중한 것치고는 꽤나 날랜 모습이었다.
 오뚝이처럼 벌떡벌떡, 일어나는 것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쨌든 그렇게 콜오슨이 달려드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내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0.001초··· 콜오슨의 공격 방식과 피할 방법이 동시에 계산됐다.
 0.002초··· 콜오슨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할 방법이 떠올랐다.
 
 아까보다 더 빨리 계산됐다.
 콜오슨의 공격을 이미 한 차례 경험한 덕분에 더 빠른 계산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번에 콜오슨은 뒤로 힘껏 젖혔던 주먹을 정면으로 찔러왔다.
 나는 슬쩍 사선으로 몸을 기울여 주먹을 피한 뒤 발을 걸었다.
 이미 공격을 피한 순간 무게 중심을 잃은 콜오슨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나는 그런 콜오슨의 머리를 향해 일명 ‘사커킥’이라고 불리는 발길질을 가했다.
 
 빡!
 아까보다 한층 더 격렬한 소리가 났다.
 콜오슨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이쯤이면 항복을 하겠지?’
 
 예상대로 콜오슨이 항복을 선언했다.
 
 “그만! 그만! 내가 졌어! 내가 졌다고!”
 
 그러자 카딘이 나를 막아섰다.
 
 “도련님께서 항복을 선언하셨습니다.”
 
 ***
 
 상황이 정리되자 옆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라만이 빠르게 다가왔다.
 
 “언제 이런 격투술을 배우신 겁니까?”
 “글쎄? 책으로?”
 
 라만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왜 마법은 안 쓰신 거예요?”
 “저런 허접한 놈한테 뭐 하러 마법까지 쓰겠어.”
 
 그랬다.
 이온 메이나르드는 사실 명망 높은 마법사 집안의 자제답게 마법을 익히고 있었다.
 1서클 상급 수준으로 2서클 진입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열여섯 살에 1서클 상급이면 꽤나 훌륭한 재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마법을 쓸 수 없었다.
 단순히 쓸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마나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잠정적으로 이 세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벌어진 부작용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온 메이나르드인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 사실을 숨기는 중이었다.
 
 ‘이 세계에서의 생활을 순조롭게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마법을 익힐 방법도 찾아봐야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콜오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지치지도 않는지 소리를 질렀다.
 
 “감히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이제 곧 페로딘의 영주가 될 나한테?”
 
 정확히 말하자면 콜오슨은 영주가 아니라 데나 자작의 영주 대행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빚을 갚지 못했을 때 페로딘을 소유하는 사람은 데나 자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데나 자작이 죽기 전에 영지를 양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게 왕국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콜오슨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에 앞서 가정 자체가 잘못됐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의아하다는 듯이 묻자 콜오슨이 비릿하게 웃었다.
 
 “무슨 소리긴. 오늘 이 자리에서 너의 영지가 데나 자작가에 양도된다는 얘기지.”
 “페로딘이 양도된다고? 어째서?”
 “멍청한 자식! 그야 당연히 네가 빚을 갚지 못해서지! 오늘이 바로 상환 만기일이다!”
 
 내가 “그게 어째서?”라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한발 앞서 콜오슨이 의기양양하게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아버지는 이 페로딘의 관리를 나에게 맡겼다! 다시 말해서 너는 곧 죽은 목숨이라는 뜻이다!”
 
 데나 자작이 콜오슨에게 페로딘의 관리를 맡겼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그렇다고 왜 내가 곧 죽은 목숨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영지를 잃더라도 내가 자작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나보다 작위가 낮은 콜오슨이 나를 해코지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에 반해 콜오슨의 작위는 기껏해야 기사밖에는 되지 않았다.
 데나 자작이 살아 있는 이상 그 자식들은 기사 작위만을 임명받을 수 있었다.
 귀족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둔 왕국법이 그러했다.
 심지어 데나 자작이 죽더라도 다섯 번째 아들인 콜오슨은 자작이 될 수 없었다.
 자작의 작위는 데나 자작의 장남이 계승할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게 되면 차남 이하의 작위는 장남이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럴 경우는 콜오슨의 작위는 높아 봐야 남작이었다.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자작이다. 그런 나를 네가 함부로 해코지할 수 없을 텐데?”
 “흥. 허울뿐인 자작의 작위를 믿는 것이냐? 내가 이곳의 영주가 되는 순간 너를 모함하여 범죄자로 만들 것이다!”
 
 이제야 콜오슨이 왜 의기양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콜오슨은 페로딘의 영주 대행 지위를 사용해 나를 범죄자로 모함할 생각이었다.
 덜 떨어진 콜오슨이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덜 떨어졌어도 이런 쪽으로 머리가 비상할 수도 있는 일이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답했다.
 
 “그래. 그런 속셈이었구나?”
 “그렇다! 이제 너희 처지를 알았느냐?”
 
 콜오슨은 이렇게 말하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러고는 한쪽으로 피신한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소히네를 음흉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순순히 저년을 나한테 넘기고 무릎을 꿇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에 소히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액수는 알지 못했지만 내가 데나 자작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동시에 내가 그걸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지. 나는 돈을 전부 갚았는데?”
 
 내 말을 듣고 모여 있던 영지민들 사이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예상치 못한 반전에 다들 놀란 기색이었다.
 콜오슨 또한 당황했다.
 
 “무, 뭐?”
 
 나는 대답 대신 콜오슨을 향해 던졌던 돈주머니를 가리켰다.
 돈주머니는 콜오슨이 처음 바닥에 쓰러졌던 바로 그 자리에 고이 놓여 있었다.
 뒤늦게 돈주머니를 발견한 콜오슨이 당황한 채로 외쳤다.
 
 “겨, 겨우 저런 동전 몇 개로 그 많은 빚을 다 갚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지.”
 
 내가 품에서 어음 다발을 꺼내 보였다.
 첼린에게 받았던 만 골드짜리 어음 중 여덟 장이었다.
 
 “여기 나머지 금액이 있다. 그러니깐 어서 여기서 꺼져 줄래?”
 
 ***
 
 콜오슨과 동행한 재무관이 금액을 확인했다.
 총 금액은 ‘81,977골드 500실버’였다.
 
 “원금 55,000골드와 이자 26,977골드 500실버가 정확히 일치합니다.”
 
 원금의 절반가량을 넘는 엄청난 이자였다.
 15년간 3.27퍼센트의 이자율로 금액이 불어난 결과였다.
 콜오슨이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진짜로 이 많은 돈을 다 갚다니······.”
 
 그게 마지막이었다.
 콜오슨은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마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내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라만에게 물었다.
 
 “어때? 이 일이 데나 자작과의 관계에 문제가 될까?”
 
 라만이 허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데나 자작의 귀에 해당 사실이 들어간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콜오슨이 나서서 이 일을 비밀에 부칠 테니까요.”
 
 콜오슨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다.
 적어도 영주 대행이 되면 어떤 권력을 누릴 수 있는지 아는 자였고 그런 자라면 이번 일을 철저히 숨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데나 자작에게 해당 사실이 전해지면 작위 계승 경쟁에서 완벽히 밀려나기 때문이었다.
 심하면 가문의 명예를 위해 아예 버려질 수도 있었다.
 명예 하나로 먹고 사는 귀족에게 있어 결투에서 패배한다는 건 이 정도의 의미가 있었다.
 
 “설혹 이 일이 데나 자작에게 알려져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데나 자작은 남부의 패자가 되기 위해 타님 백작과 경쟁 관계에 있으니까요.”
 
 데나 자작은 타님 백작과 함께 남부의 패자 자리를 놓고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페로딘을 보존한 이상 위험할 때 타님 백작에게 붙어 데나 자작을 견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결국 결투에서 승리하고 돈을 전부 갚은 이상 나와 페로딘에 해가 될 문제는 전혀 발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콜오슨이 결투를 신청했을 때에도 영감이 가만히 있던 거구나?”
 “귀족의 싸움에 어찌 제가 감히 끼어들겠습니까?”
 “끼어들진 못하더라도 그렇게 평안한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겠지.”
 “2서클 마법사를 눈앞에 두고 계시는 영주님이시니까요. 다만 마법이 아닌 격투로 상대를 제압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라만이 정말 놀랐다는 듯 그때의 얘기를 다시 꺼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콜오슨이 너무 약했던 것뿐이야. 마법을 쓰기가 아까울 만큼.”
 “확실히 약하긴 하더군요. 다 늙은 제가 싸워도 이길 것 같았습니다.”
 
 나는 너스레를 떠는 라만을 가만히 쳐다봤다.
 귀족의 명예 부분에서 다소 꼬장꼬장한 면이 있긴 하지만 확실히 라만은 꽤 능력 있는 가신이었다.
 특히 왕국 남부에 대한 정치적 지식이 빠삭하다는 게 다시 한번 입증됐다.
 
 ‘라만은 유능한 가신이다. 괜히 명문가의 가신을 3대째 이어가고 있는 게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할 때였다.
 회한이 젖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라만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드디어 그 많던 빚을 갚았군요. 죽기 전에 빚을 갚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너무나도 다행입니다.”
 
 라만의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내 가슴 한편이 또 한 번 살짝 아려왔다.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그러고는 이 상황에서 이온 메이나르드가 했을 법한 얘기를 찾아내 말했다.
 
 “내일 죽을 것처럼 말하지 마, 영감. 앞으로도 나를 도와서 페로딘을 이끌어야지.”
 
 잠시 라만이 멈춰선 채 내 옆모습을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꽤 따끔한 시선이었다.
 라만이 미소를 한 차례 지어 보인 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네, 영주님. 그래야지요.”
 
 ***
 
 다음 날.
 나는 외성을 살피기 위해 아침 일찍 나섰다.
 쓸쓸한 외성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역시 꽤 괜찮군.’
 
 페로딘의 외성은 꽤 넓은 땅을 성벽으로 감싸고 있었다.
 민가뿐 아니라 농지 전부를 방어할 수 있는 규모였다.
 자세히 따지자면 복잡하지만 외성이 민가와 농지를 감싼다는 점에서 서양식보다는 동양식의 성 구조라고 할 수 있었다.
 일종의 장성인 셈이다.
 
 ‘처음에는 꽤 뛰어난 기술자들을 통해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벨로 협곡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를 의식한 것이겠지.’
 
 예전에는 벨로 협곡에서 오우거 같은 대형급 몬스터들이 종종 출현했다.
 그렇기 때문에 1차 방어선으로서 페로딘의 가치는 꽤 높았다.
 하지만 100년 전부터 몬스터의 출현이 급격히 줄었다.
 여전히 오크 부족이 위협적이긴 했지만 정교한 규모의 외성이 필요한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페로딘의 가치는 완전히 추락한 것이지. 곡물 생산량 자체도 많지 않은데 몬스터를 막는 1차 방어선으로서 역할도 사라진 것이니 그럴 수밖에.’
 
 그 결과 페로딘은 버려졌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외성도 원래의 위용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식량을 노리는 오크가 자주 침공을 하는데도 외성 보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게 외성이 이 정도로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겠지.’
 
 나는 페로딘을 살리기 위해 이 외성부터 보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외성을 보수해야만 식량을 지킬 수 있었다.
 
 ‘먼저 외성 앞으로 해자를 파자. 그런 뒤 군데군데 무너진 곳을 보수하면서 그곳을 화살 구멍으로 만들자. 그런 뒤 목질려를 최대한 확보하여······.’
 
 0.001초··· 0.002초··· 0.003초······.
 나는 외성을 어떻게 보수할지 대략적인 계획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머릿속으로 외성 보수를 위한 구체적인 설계도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후.
 머릿속으로 설계한 외성 보수 설계도를 양피지에 옮겨 그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영주성을 방문했다.
 
 “누군데?”
 
 내 질문에 라만이 답했다.
 
 “어제 영주님께 도움을 받았던 소히네라는 잡화점 주인입니다.”
 “그래?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소히네가 고개를 숙인 채 내 앞에 섰다.
 
 “잘 왔어. 어쩐 일이야? 어제 일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온 거라면 그럴 거 없어. 영지민을 지키는 건 영주의 당연한 의무니깐.”
 
 소히네가 힐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었다.
 내 말이 진실인지 가늠하기 위해 표정을 살피는 바로 그 눈빛.
 내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진짜라니깐 그러네.”
 
 소히네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믿겠습니다. 다만 오늘은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그럼?”
 “일전에 물어보셨던 영지민의 삶을 나아지게 할 만한 방법이 무엇인지 고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확실히 소히네가 어떤 방법을 구상해 왔는지 궁금했다.
 대답의 수준에 따라 소히네의 쓰임이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해 봐.”
 “그 방법은 바로 외성을 보수하는 것입니다.”
 
 놀랐다.
 아무리 학문을 익혔다지만 소히네는 평민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을 이어 나가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지? 스승으로부터 영지 경영학을 배운 것인가?’
 
 내가 소히네에게 물었다.
 
 “정말 기발한 발상인데? 소히네의 스승이 누군지 궁금할 지경이야. 혹시 이름을 알려 줄 수 있겠어?”
 
 소히네가 뿌듯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스승님의 본명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스승님은 본인을 위즌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셨습니다.”
 “위즌?”
 
 이온 메이나르드의 기억을 뒤졌지만 일치하는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에 서 있던 라만에게 물었다.
 
 “혹시 위즌이라는 이름을 알아?”
 “처음 들어봅니다. 아마 페로딘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집시 중 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자라면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집시라면 이미 이곳을 떠났겠네. 아쉽게도 소히네의 스승은 나랑 인연이 닿지 않을 모양이야. 그런데 소히네는 어떻게 외성 보수를 떠올릴 수 있었지? 스승에게 영지 경영학을 배운 건가?”
 
 소히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스승께 배운 것은 역사와 인문학입니다.”
 “오오.”
 
 그렇다는 건 소히네가 영지 경영 쪽에 재능이 있다는 얘기였다.
 배우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는 점에서 통찰력과 창의력 또한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 인재인 건가? 나는 그저 서류를 작성하고 올릴 줄 아는 인재 정도를 원한 것인데.’
 
 사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소히네를 기용할 생각이었다.
 슈퍼컴퓨터 시절처럼 기억하고, 계산하고, 판단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팩스를 보내고, 문서를 작성하고, 장부를 기입하는 일까지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팩스를 보내고, 문서를 작성하고, 장부를 기입하는 일은 딱 인간의 수준으로만 가능했다.
 그 일을 장시간 하면 손이 아프고 눈이 뻐근했으며 쉽게 피로해졌다는 뜻이다.
 인간의 육체를 얻으며 같이 딸려온 일종의 부작용 같은 것이었다.
 내가 놀란 말투로 말했다.
 
 “어쨌든 아주 좋은 발상이군···. 좋아. 그렇다면 이걸 보여 줘도 되겠어.”
 
 나는 소히네에게 손짓했다.
 소히네가 잠시 망설이다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내가 그리고 있던 외성의 설계도를 목격했다.
 소히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더듬거렸다.
 
 “이, 이것은 설마······?”
 “맞아. 소히네가 말한 바로 그 외성 설계도지.”
 “벌써 이렇게나 완성하신 겁니까?”
 
 나는 대답 대신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나머지는 페로딘의 행정관이 되어서 소히네가 한번 완성해 보지 않겠어?”
 
 인간의 눈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하듯 소히네의 눈이 한 차례 더 커졌다.
 그날 소히네는 정식으로 페로딘의 행정관이 되었다.
 라만을 이어 한 명의 가신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
 
 예상대로 소히네는 우수한 업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외성 설계도를 완성시키는 일 외에도 단순 서류 작업부터 기본적인 수준의 내정 관리까지 모든 업무에 있어서 똑 부러졌다.
 이미 이 세계의 문화 발전 수준을 뛰어넘을 만큼 능력이 완성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소히네가 합류하면서 외성 보수에 관한 부분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 있게 됐어. 또한 더불어 둔전제를 시행할 만큼의 여력도 생겼고.’
 
 애초에 나는 단순히 외성 보수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적절한 시기를 잡아 사병을 늘리고 훈련시킬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페로딘을 공격하는 오크의 무리를 적절히 방어할 수 있었다.
 페로딘 영지의 사병은 50명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히 병사를 뽑기만 하는 게 아니라 둔전제를 함께 시행할 계획이었다.
 둔전제는 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때 병사가 농사를 지어 식량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다.
 페로딘처럼 변방의 작은 영지라면 아무래도 둔전제를 시행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용했다.
 그래야만 식량과 전투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러려면 징집과 훈련을 담당할 전문가가 필요한데 아쉽게도 인물이 없군. 마땅한 사람을 구할 때까지는 내가 나서야 하나? 육체적 제약이 있다는 게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불편하군.’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두 명밖에 되지 않는 가신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소히네, 사병을 미리 징집하여 훈련해야겠어. 징집 공고 좀 만들어 줘. 라만, 사병을 훈련하는 데 참고할 만한 책 좀 찾아와 줘.”
 
 내 명령을 받은 두 가신이 움직였다.
 
 ‘좋아. 이제 슬슬 페로딘이 영지로서의 구색을 갖춰 나가고 있군. 그렇다면 이제 내가 강해질 시간인가?’
 
 <『슈퍼컴퓨터, 마법사 되다』 1-2권에 계속>

댓글(5)

에시드    
생각이란게 있으면 슈퍼컴퓨터가 아니고 인공지능이죠 슈퍼컴퓨터는 그냥 계산 졸라 빠른 기계일뿐 생각이란걸 하지 않죠
2019.01.24 19:36
gu******    
근데상식적으로 마법서를 베낄수있으면 다베끼죠;; 너무 개연성이 없네요
2019.01.27 12:12
용서받은자    
마법서가 이렇게 싼거였어 ㅋ 6서클이 최고라면 ㅋ 똘빡이냐?
2021.08.03 17:07
n9************    
앞엠컴퓨터 등장만 빼고 나머지 내용이 전에본 책과 같은 내용 작가가 같은 건가 아님 먼가?
2021.08.14 21:07
쩔었어    
설정이 개판이네 개연성이 너무 저질이다.
2021.08.18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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