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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투 1-1권

2019.01.22 조회 505 추천 4


 #프롤로그
 
 
 
 최근 오픈한 코리아소프트의 이데아로 인해 전 세계는 연일 뜨겁다. 아마 세계 4차 대전이 일어났다 해도 이보다 시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개발 비용 38조 원에 서버 유지 비용 연간 2조 원. 12년의 개발 기간 끝에 드디어 한국 최초로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이 지구 그대로의 스케일로 오픈을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게임과는 그 세계관부터 스케일까지 모든 것이 상대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임 강국인 한국이 12년 전부터 가상현실 게임 분야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국내의 모든 게임 관련 인력이 동원되어 이 하나의 정부 사업에 참여했다는 것도 전 세계인들에겐 충격이었다.
 12년 전. 가상현실을 가능하게 해 준 가수면 뇌파의 발견으로 세계 산업 시장은 격변을 맞이했다.
 IT를 넘어 가상현실의 사업이 새롭게 한 시대를 열어 가고 있었다. 그에 따른 사무 시설과 게임 등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데아처럼 이렇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도 없었다.
 전문가들은 코리아소프트의 이데아로 인해 얻어질 수익을 감히 예측하는 것조차 멍청한 일이라며 떠들어 댔고 첫날 620만 명의 신규 가입자를 시작으로 오픈 7일 만에 2,100만의 사람들이 가입을 하여 게임을 즐기고 있다.
 이데아가 여타의 게임과 다른 것은 첫째가 놀라운 현실성에 있고, 둘째가 그 스케일에 있었다.
 이데아의 세계관은 중세지만 지구의 각 나라와 지명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한국에서 게임에 접속한 유저는 한국의 10개 대도시 중 하나를 선택해 게임을 시작할 수 있으며 한국이 싫다면 미국 대륙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게임을 플레이할 수도 있다.
 물론 각 나라의 실제 크기 그대로 맵이 만들어져 있으며 허가를 받지 못한 일부 나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국가의 인프라가 완성되어 있었다.
 이데아 안에서도 한국과 북한은 휴전 중이며 독도는 일본과 분쟁 지역으로 선포된 70년 전 그대로였다. 아마존 밀림은 이데아 안의 맵에서도 그 위치 그대로 밀림이 만들어져 있었다.
 코리아소프트의 이데아는 싱크로를 최대로 끌어내 현실과 게임 시간을 6배까지 늘리는 데 성공했고, 가상현실 게임 기기의 보급률도 12년 전부터 꾸준히 증가해 왔기에 이대로라면 1억 명의 유저가 동시에 게임을 즐기게 될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이데아로!
 
 
 
 철현은 침대에 누워 눈앞에 브리핑되는 코리아소프트의 이데아에 대해 흥미 있게 듣고 있었다.
 수척한 얼굴과 뼈밖에 안 남은 앙상한 몸. 배신과 병마의 고통으로 인해 웃음이 사라졌던 얼굴에 조금이나마 희망이란 것이 떠올라 있었다.
 “그래서 제가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건가요?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철현이 묻자 침상 옆으로 늘씬한 미녀가 다가와 환하게 웃었다.
 “국내에선 아직까지 시도된 적 없지만 작년 미국에서 성공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 기술 이전에 대한 협의는 끝이 났고 비공식적이지만 기억 이식 사업 또한 정부에서 크게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는 것이니만큼 실패 확률은 적다고 판단됩니다.”
 다소 사무적인 딱딱한 말투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저 얼굴만 보고 있어도 즐거워지는 미녀인지라 철현은 기분이 풀렸다.
 “전 에이즈 환자예요.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말기죠. 살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길어야 두 달이구요. 결론적으로, 제가 기억을 이데아로 이전하게 되면 제 육체가 죽어도 거기서······ 가상현실에서 살 수 있다 이거죠?”
 여자는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몇 가지 리스크가 있지만 기술적으로 지금 받은 질문에는 ‘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철현은 말없이 여자를 쳐다보았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지만 눈은 날카롭게 빛이 났다.
 “정부에선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 중에 기억 이전에 대한 비용을 치를 수 있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임상 실험 형식으로 500명을 선발했습니다. 임상 실험이라는 표현에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고객님께서 계약을 하시면 정부는 일절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며, 추후에 생길 일 또한 고객 개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브리핑받으신 대로 기억 이전을 하셨다고 해도 이데아로 가게 되면 여타의 유저처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단지 기부금에 한해 좀 더 안전한 삶을 영유할 수 있도록 혜택을 받으시게 됩니다.”
 책임을 지지 않는다니. 철현은 신음을 흘리며 더러워지는 기분을 가까스로 되돌렸다.
 “대충은 알겠어요. 일반인들은 게임에서 죽으면 다시 처음부터 캐릭터를 키우면 되지만 나는 일단 넘어가서 죽으면 정말 그걸로 끝이다, 이 말이죠?”
 여자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이데아에선 기억 이전을 한 유저들을 ‘히든 캐릭터’라고 부를 것이며 이들의 안전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이는 기술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라서 또 한 번의 새 생명을 드리는 것도, 그것이 비록 가상현실이라 할지라도 여타 단체와 충돌하는 것이 불가피하기에 지금으로써는 이것이 최선입니다. 다만 히든 캐릭터 개개인의 신상에 관한 보안은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될 것입니다.”
 아무리 가상현실이라 해도 죽음에 자유롭다면 불멸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인데, 철현으로서는 아쉽긴 했지만 그리 반대할 입장이 아니었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살려 달라 애원할 판국에 이 정도면 훌륭한 조건이었다.
 “그럼 일단 비공식적으로 제가 기억 이전을 했다고 치고, 기부금에 따른 혜택이란 게 뭐죠?”
 여자는 철현의 눈앞에 있는 홀로그램에 조작을 가해 새로운 기호들을 떠오르게 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억 이전에 대한 비용을 제외하고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으로 고객님이 기부하신 액수에 따라 고객님의 생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를 정부에서 마련했습니다. 이는 이데아가 초기 기획될 당시부터 추진되던 것이라 안정성은 장담을 드릴 수 있고, 한번 선택된 아이템에 대해서는 다른 기부자가 선택할 수 없도록 고유의 희소성을 드리고 있습니다.”
 철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걸 보시면 여러 가지 직업에 대해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지금은 NPC들이 국왕이나 영주, 혹은 마스터에 이르는 직업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데아 세계관 자체가 스스로의 직업을 만들어 나아가는 시스템이기에 특정 직업보다는 숨겨진 능력을 배출할 수 있는 조합을 알려 드리거나 고대 유적이 묻힌 장소를 알려 드리는 혜택을 드리고 있습니다.”
 철현은 이해가 되지 않는 눈빛으로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 그럼 제가 그곳으로 가서, 가령 예를 들어······ 소드마스터로도 시작을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여자는 예쁜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지금 권력 방면으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영주 급까지이며, 마스터 급의 직업을 한 번에 이전해 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직업의 조합으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클래스에 대한 정보는 구입이 가능하십니다.”
 철현은 신음을 흘렸다.
 결국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큰 권력은 영주 급. 물론 그 정도도 엄청나다면 엄청난 혜택이지만 절대 안전을 보장받기엔 조금 약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요. 그럼 가장 비싼 직업의 정보는 뭐죠? 아시겠지만 나 돈 많아요.”
 여자는 홀로그램을 조작해 하나의 그림을 띄웠다.
 “제가 추천드리는 직업은 타투이스트입니다. 보시다시피 여러 가지 직업을 마스터해 조합된 직업으로서 가장 안전하고 절대적인 삶을 영유하실 수 있습니다.”
 철현은 얼빠진 얼굴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타투이스트요? 그······ 타투요? 문신?”
 여자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데아에서는 모든 직업을 스스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류귀종의 법칙을 따르고 있어 어느 한 방면의 대가가 된다면 그것을 무력으로 변환시킬 수도 있습니다. 기밀이라 더 이상은 설명할 수 없지만, 보시고 계신 타투이스트는 완성만 한다면 그 어떤 직업에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클래스입니다. 모험가나 레인저와 같이 위험한 육성을 하지 않아도 되고 손, 쉽, 게, 직업의 조합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철현은 여자의 말에 마음이 동했다.
 사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인데 몬스터와 연일 혈전을 벌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남들에겐 게임이지만 철현에겐 현실인 만큼 신중해야 했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제가 가진 돈으로 그 직업의 정보를 사면 얼마가 남죠?”
 철현의 재산이 부족했다면 저 타투이스트라는 정보는 보여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자는 철현의 말에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정보를 구입하시고 남은 고객님의 재산은 별도로 관리되며 이데아의 시세에 맞게 골드로 환산하여 고객님께 지급될 것입니다. 예상 금액은 오늘 기준으로 57만 8,750골드이며 1골드는 100실버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데아상의 하급 여관에서 하루 묵는 비용이 평균 80실버임을 감안하면 기억 이전을 하셔도 그쪽에서 돈 걱정 하실 일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 정보 하나가 50억이 넘는다는 얘기라 철현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보를 사지 않고 그걸 모두 골드로 바꿔 이데아에 가는 편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타투이스트의 정보는 기막힐 정도로 비쌌다.
 어차피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고아인 데다 배신의 대가로 받은 돈,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고작 정보비로 치부하기엔 엄청난 액수라 망설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철현의 귓가로 쐐기를 박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객님이 타투이스트의 직업을 가지게 된다면 고객님이 죽기 전까지 그 누구도 타투이스트는 될 수 없으며 이데아에 단 하나뿐인 직업으로 소장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히든 캐릭터라서 가능한 것이며, 타투이스트는 최대한 안, 전, 하, 게, 육성하실 수 있는 최고의 직업입니다.”
 그 후로 여자는 구입 가능한 몇 가지의 아이템을 보여 줬지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철현은 순수하게 돈을 선택했다. 어디를 가나 당장 풀 수 있는 현금이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비록 큰돈을 주고 타투이스트의 정보를 사긴 했지만 남은 돈은 아껴 두는 것이 좋다. 이미 정보 하나만으로도 너무 많은 돈을 지불했으니까.
 
 * * *
 
 게임 이데아.
 대한민국 서울의 강남 지역 초보자 게이트 앞엔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아직 게임이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에 사람들의 얼굴엔 조급함이 묻어나 있다. 1초라도 가만히 있으면 그만큼 수천만 명에게 뒤처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사용되지 않는 도시 이동 게이트 한쪽 구석, 커다란 나무 밑동에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땅바닥의 모래를 벅벅 긁는 남자가 있었다.
 “빌어먹을 년. 당해도 제대로 당했어. 이제 어쩌란 말야.”
 이미 몇 차례 ‘지랄 발광’을 해서인지 목소리는 탁했고 눈은 체념의 빛이 가득했다.
 “상태 창 오픈.”
 
 이름 : 슈메이비
 직업 : 무
 Lv : 1(레벨 업 시 5포인트를 받습니다)
 힘 : 1(힘을 늘립니다)
 체력 : 1(체력을 늘립니다. 회복률과 방어력, 생명력에 영향을 줍니다)
 지능 : 1(마법에 영향을 받습니다)
 생명력 : 100(체력에 영향을 받습니다)
 마나력 : 10(지능에 영향을 받습니다)
 보유 스킬 : 무(원하는 스킬에 포인트를 줄 수 있습니다)
 보유 누적 포인트 : 0
 
 
 정말 볼 것도 없는 상태 창이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정작 열 받는 건 50억이나 주고 산 책 한 권이다.
 소지품 창에 덩그러니 들어 있는 ≪타투이스트가 되는 방법≫이라는 이름의 책. 막대한 가격에 비해 책에 쓰인 정보는 보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짜증이 치솟았다.
 
 
 고유 아이템(타인에게 양도 불가)
 
 유형 : 책BOOK
 이름 : 타투이스트가 되는 방법
 설명 : 전설의 타투이스트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다. 타인은 열람이 불가능하며 소지자의 죽음과 동시에 소멸된다.
 내용 : 타투이스트가 되는 길은 너무도 쉽다. 그 엄청난 능력에 비해 요구되는 능력은 미약하기만 하니, 연자여 그대는 지상 최대의 행운을 얻은 것이다. 모든 직업과 요구되는 하위 서클을 무시하고 관련된 서클을 익힐 수 있으며 모든 스킬을 마스터했을 때 타투이스트의 칭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단, 타투이스트의 고유 스킬을 제외한 그 어떤 스킬도 익힐 수 없다. 복불복! 연자여, 그대의 앞길에 축복을.
 요구 사항 : 재봉 스킬 마스터. 인비지빌리티 스킬 마스터. 블랙 핸드 스킬 마스터. 데스 스킬 드레인 스킬 마스터. 스킬 북 변환 스킬 마스터. 염력 스킬 마스터. 모험의 인장 스킬 마스터.
 
 세부 설명
 재봉 : 오로지 바늘로 그 끝을 본 자만이 타투이스트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다(추천 직업-재봉사).
 인비지빌리티 : 투명화야말로 최대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추천 직업-마법사).
 블랙 핸드 : 아무도 모르게 물건을 집을 수 있다. 그 빠른 손놀림이란! 인비지빌리티를 마스터한 후에 권장한다(추천 직업-도적).
 데스 스킬 드레인 : 죽은 이로부터 스킬을 흡수할 수 있다. 스킬은 영혼석에 저장하여야 하며 죽는 순간을 노려야 한다(추천 직업-네크로맨서).
 스킬 북 변환 : 보유한 스킬을 스킬 북 형태로 변환시킬 수 있다(추천 직업-아티산).
 염력 : 정신력만으로 물체를 움직일 수 있다. 바늘을 움직일 정도면 되지만 웬만하면 마스터해라(추천 직업-사제).
 모험의 인장 : 모험으로 얻은 명성을 경험치로 바꿔 준다(추천 직업-모험가).
 
 
 슈메이비는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며 땅을 굴렀다. 이게 무슨 ‘개잡캐’란 말인가!
 안전하고 쉽다던 그년의 얼굴이 아른거릴 때마다 주화입마에 빠져 들 것만 같다. 재봉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도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지 않은가?
 “으아아!”
 슈메이비의 근처에 있던 유저들이 괴성에 놀라 펄쩍 뛰었다. 유저가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할 리 없으니 혹시 퀘스트를 주는 NPC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눈을 빛내며 다가온 이들이 몇 명 있었으나 광기 어린 슈메이비의 눈동자에 질려 모두 머리를 흔들며 돌아갔다.
 쨍그랑!
 머리맡에서 들리는 쇳소리에 고개를 든 슈메이비는 눈앞에 있는 1실버짜리 동전을 발견하고 또다시 바닥을 굴렀다.
 “크아악!”
 저 멀리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사제복을 입은 여인의 뒷모습이 슈메이비의 눈에 아련하게 들어왔다.
 
 
 -윤기 나는 가죽 장화를 만들었습니다.
 -재봉 스킬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경험치가 3% 올랐습니다.
 
 
 슈메이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고 들고 있던 가죽 신발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어느 상점에서 파는 것보다 고급스럽고 윤택이 좔좔 흐른다. 지금까지 이것저것 못해도 200개는 만든 것 같은데 더 이상 진전이 없다.
 5시간 걸려 신발 한 짝 만들어 봐야 재봉 스킬은 오르지도 않고 경험치 3%라니. 뭔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슈메이비는 상태 창을 열어 그간의 노력을 눈으로 확인하고 다시 좌절했다.
 
 
 직업 : 무
 Lv : 5(82.79%)
 힘 : 1
 체력 : 1
 지능 : 1
 생명력 : 100
 마나력 : 10
 보유 스킬 : 상급 재봉 2
 보유 누적 포인트 : 0
 
 
 정말 눈물 나는 상황이다.
 근 보름 동안 아무 짓도 안 하고 재봉만 하면서, 레벨이 오를 때마다 받은 포인트 5개를 죄다 재봉에 때려 박았는데도 아직 8단계나 더 올려야 마스터다.
 말이 8단계지, 초급과 중급에선 쉽게 올라가던 것이 상급으로 가니 이젠 가죽 신발을 아무리 만들어 봐야 스킬 포인트는 오르지도 않았다.
 다행스러운 건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고 마을 안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인데, 아무리 그래도 밖에 나가서 개구리나 토끼를 잡는 것이 이것보다는 쉽게 올릴 것 같았다.
 처음엔 이것저것 방법을 찾아보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몬스터를 사냥해서 10개 정도 레벨을 올려 그 모든 포인트를 전부 재봉에 때려 박으면 될 듯도 싶었다. 그러나 마을 주변 사냥터에 가 봐도 몬스터보다 유저 숫자가 더 많고 재미로 초보 유저를 죽이는 막장 인생들도 몇 명 있어서 도무지 필드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새로운 삶인 건 좋다.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가상현실을 재현해 놓은 덕분에 군침 도는 음식을 먹으면 정말 맛있고, 예쁜 여자를 보면 아랫도리가 불끈할 정도였다.
 바느질하는 게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그냥 가진 돈으로 여관 하나 잡아 두고 한량처럼 술이나 마셔 대면서 한 10년 정도 살아 볼까 생각도 했지만, 내 몸 하나 지킬 힘은 가져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슈메이비가 암울한 포스를 풍기며 또다시 머리를 땅에 처박을 무렵 키는 작지만 늘씬한 몸매를 가진 여자가 다가왔다.
 귀여운 얼굴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현실의 외형이 그대로 반영되는 이데아인 만큼, 드물게도 상당한 미모를 가졌다.
 무엇보다 깨끗한 피부가 발군이었는데, 여자는 슈메이비의 앞에 놓인 가죽 신발을 바라보며 군침을 흘리는 표정을 지었다. 상당한 시간 발품을 팔았는데도 눈앞의 거지가 만든 신발보다 좋아 보이는 물건이 주변엔 없었다.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 어느 것보다 강한 것이 자신의 미모라는 걸 여자는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체득하고 있었다.
 “이봐요, 그 가죽 신발 파는 건가요?”
 슈메이비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안 팔아요.”
 이런 일이 자주 있었는데, 돈에 미련이 없는 슈메이비로서는 만든 물건들을 팔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초급 재봉 때 만든 것들은 상점에 헐값에 넘겼고 중급으로 올라 만든 것들은 모두 인벤토리에 있었다.
 허리에 달린 주머니에 주섬주섬 가죽 신발을 집어넣는 슈메이비를 보며 여자는 울컥한 마음에 목소리가 앙칼지게 변했다.
 “왜 안 판다는 거죠?”
 그제야 여자를 올려다본 슈메이비의 눈이 살짝 놀람의 빛으로 물들었지만, 이내 주머니에서 잘 제련된 오우거 가죽과 바늘을 꺼내 들고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지금까지 이곳 장터에 자리를 잡고 재봉을 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질 좋은 가죽이나 천이 나오면 잽싸게 사려는 목적도 있고, 다른 유저들이 어느 정도까지 성취를 올렸는지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어젠 오우거의 가죽을 파는 이가 있어 깜짝 놀라 구입을 했고, 아직 오우거의 가죽으로 뭔가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재봉 스킬이 오르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했다.
 어쨌든 오우거 가죽이 얼마 없어 팔목 보호대 한 쌍 정도밖에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스킬만 올라 준다면야 그 어떤 것도 감수할 수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기술이 부족해서 오르지 않는다기보다는 재료가 문제였다. 이제 믿을 것은 더 좋은 재료와 운이었다.
 “지금 무시하는 거예요?”
 슈메이비는 여자를 올려다보다가 그녀가 몸에 걸친 장비를 보고는 호기심이 일었다.
 상당히 값비싼 무구들을 걸치고 있었는데 허리에 걸린 장검 또한 꽤나 가격이 나가는 물건 같았다.
 그런데 왠지 실용적이기보다는 화려한 장식품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미안해요. 제가 만든 것들은 팔지 않거든요. 귀한 가죽과 물물교환을 하거나 신기한 아이템과 교환을 하는 것 외엔······ 죄송합니다.”
 여자는 기이한 눈빛으로 슈메이비를 바라보다 결심을 한 듯 슈메이비 앞에 철퍼덕 앉아 버렸다.
 “흥. 좋아요. 뭐가 그리 잘났는지 몰라도 지켜보겠어요. 전 가죽도 없고 귀한 물건도 없으니 남는 건 시간뿐이네요.”
 슈메이비는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표정으로 여자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신경 끄고 오우거 가죽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은 이제 거의 신의 경지에 다다라서 얼핏 현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 단단하고 질긴 오우거 가죽이 슈메이비의 바늘에 난자당하고 있는 것도 신기한데, 그걸 비장한 표정으로 한 땀 한 땀 수놓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미친놈 이상은 좋게 봐 줄 수 없었다.
 입고 있는 옷도 거의 넝마 수준이고, 생긴 것도 그리 호감형은 아니었다.
 이게 다 튀지 않아야 한다는 생존 전략을 바탕으로 한 슈메이비의 생활신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여자의 눈엔 그냥 바느질 좀 잘하는 거지로 보일 뿐이었다.
 이윽고 1시간가량 흘렀을 때 여자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버렸다.
 슈메이비는 여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재봉에 전념했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여자가 돌아와 슈메이비의 눈앞에 작은 구슬들을 내려놓았다.
 “이게 뭔지 알아요?”
 “뭔데요?”
 여자는 슈메이비의 얼굴에서 호기심을 읽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영혼석이에요! 지금 이 구슬들 속에는 토끼와 여우가 봉인되어 있죠. 이걸 깨면 몬스터가 나와요! 어때요? 이 정도면 신기한가요?”
 여자의 말에 슈메이비는 구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영혼석이로군. 나중에 배워야 할 스킬 중에 영혼석에 스킬을 저장해야 한다는 게 있긴 있던데······ 그래도 이게 지금 내게 무슨 필요가 있지? 뭐, 신기하긴 한데······.
 슈메이비의 반응에 여자는 황급히 말했다.
 “보아하니 레벨도 높지 않은 것 같은데 필드에 나가 봐야 몬스터도 없어요. 하지만 어디 구석진 곳에서 이걸 깬 다음 몬스터를 죽이면 혼자서 경험치를 쑥쑥 올릴 수 있죠! 멋지지 않나요?”
 듣고 보니 그랬다.
 그런데 내가 여우 한 마리를 죽일 수나 있을까? 답은 ‘절대 아니다’였다.
 “레벨 5에서 6이 되는 데 몇 마리나 여우를 죽여야 하는데요?”
 여자는 슈메이비의 물음에 턱이 빠질 듯이 입을 크게 벌렸다.
 “아직 5렙이에요? 지금까지 뭘 했기에······ 저기 훈련장에서 허수아비만 쳐도 5렙은 만드는데!”
 여자의 말에 슈메이비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머리가 핑 도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허수아비만 쳐도 5렙이라고? 허수아비만 쳐도······.
 만약 허수아비를 쳐서 5렙까지 올린 뒤에 재봉으로 올린 레벨 포인트를 재봉 스킬에 투자했다면 이미 마스터가 되지 않았을까?
 슈메이비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돈이 있으면 뭘 하나. 이리도 삽질을 해 대면 객사하기 딱 알맞지 않은가!
 보름 동안 잠도 하루 3시간 이상 안 자고 밥도 거르면서 죽자 사자 재봉만 해서 올렸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여자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도적에게 트랩을 사서 몬스터 봉인 영혼석을 주변에 깔고 몬스터를 소환하면 여우 같은 건 쉽게 잡을 수 있어요. 한두 마리 잡으면 6렙까지 될걸요? 비싸긴 하지만 늑대가 봉인된 구슬 몇 개 사서 트랩이랑 화약통을 깔아 두면 쉽게 10렙까지는 될 수 있을 거예요. 뭐, 돈이 많아야 가능한 거니까 조금 비효율적이죠. 나가서 사냥을 하고 말지 그렇게 돈 쓰는 건 상인들이 포인트 노가다할 때나 하는 거라서 저도 듣기만 했어요.”
 슈메이비는 여자의 말에 무너지는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다.
 오! 신이시여!
 “그것들 좀 구해다 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필요한 거 다 드릴게요.”
 슈메이비는 주머니에서 최근에 만들었던 가죽 장갑과 가죽 신발, 허리 보호대와 팔목 보호대를 꺼내며 말했다. 여자는 그것들을 보며 군침을 삼킨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며 소리쳤다.
 “조금만 기다려요! 거기 꼼짝 말고 있어요!”
 
 * * *
 
 뭐가 그리 좋은지 친구 등록까지 거의 강제적으로 하고 떠나가던 펨의 모습이 떠오르자 슈메이비는 한숨을 쉬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것들의 가치가 얼마나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 내게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그깟 가죽 방어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혹 여우가 트랩에 걸리지 않을 것을 대비해 거금을 들여 실드 스크롤도 구입했다.
 비록 일회용이지만 일이 틀어졌을 때 사용해서 여관 밖으로 뛰쳐나간다면, 나 대신 여우 한 마리 죽여 줄 사람은 지천에 널려 있을 것이다.
 하급 영혼석에 봉인할 수 있는 최대의 몬스터는 늑대라고 했다. 중급 영혼석의 가격은 너무 비싸서 그걸 몬스터 봉인에 쓰는 얼빠진 놈은 없었고, 결국 그 말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이 방법도 쓸모가 없다는 얘기다.
 슈메이비는 다시 한 번 몬스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트랩과 트랩 중앙으로 깔린 독 바른 창날들을 점검했다. 이제 구슬을 트랩 위로 던져서 깨기만 하면 여우는 나오자마자 알아서 죽을 것이다.
 슈메이비는 심호흡을 한 뒤 떨리는 손으로 구슬을 트랩으로 던졌다.
 키엥!
 끄르륵!
 구슬이 깨지며 뭉게구름 같은 것이 여우의 형상을 만든 것도 잠시, 여우는 트랩이 작동되어 몸을 속박하자 독이 발린 창에 너무도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슈메이비는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허탈함에 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아 버렸다.
 털썩.
 
 
 -여우를 사냥했습니다.
 -경험치가 56%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5포인트가 누적되었습니다. 포인트를 분배해 주세요.
 
 
 슈메이비의 탁 풀린 눈동자가 어느 순간 광기로 번들거렸다.
 “으하하핫! 고맙다, 고마워! 사랑한다, 여우야!”
 믿을 수 없이 재빠른 동작으로 트랩과 창날들을 재정비한 슈메이비는 그 후로도 몇 개의 여우 봉인 영혼석을 사용했고 7레벨이 돼서야 상태 창을 열었다.
 
 
 직업 : 무
 Lv : 7(11.91%)
 힘 : 1
 체력 : 1
 지능 : 1
 생명력 : 100
 마나력 : 10
 보유 스킬 : 상급 재봉 2
 보유 누적 포인트 : 10
 
 
 슈메이비는 환희에 온몸을 떨며 보유 누적 포인트 10개를 재봉 스킬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스킬 포인트 1을 재봉 스킬에 부여했습니다. 이런! 아쉽게도 스킬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아쉽게도 스킬이 오르지 않았단다!
 
 -스킬 포인트 1을 재봉 스킬에 부여했습니다. 상급 재봉 스킬이 3으로 올랐습니다.
 중급에선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상급에서는 보유 누적 스킬 포인트로 스킬을 올리는 것이 일종의 도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입이 쓰다. 거의 다 됐는데 운에 맡겨야 하다니. 그래도 아직까지는 확률이 반반이라 할 만했다.
 슈메이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남은 8개의 포인트를 재봉에 투자했다.
 
 -스킬 포인트 1을 재봉 스킬에 부여했습니다. 이런! 아쉽게도 스킬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스킬 포인트 1을 재봉 스킬에 부여했습니다. 이런! 아쉽게도 스킬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스킬 포인트 1을 재봉 스킬에 부여했습니다. 상급 재봉 스킬이 4로 올랐습니다.
 -스킬 포인트 1을 재봉 스킬에 부여했습니다. 이런! 아쉽게도 스킬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스킬 포인트 1을 재봉 스킬에 부여했습니다. 이런! 아쉽게도 스킬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스킬 포인트 1을 재봉 스킬에 부여했습니다. 이런! 아쉽게도 스킬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스킬 포인트 1을 재봉 스킬에 부여했습니다. 이런! 아쉽게도 스킬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스킬 포인트 1을 재봉 스킬에 부여했습니다. 상급 재봉 스킬이 5로 올랐습니다.
 
 “으아아아아! 이런 쒸발! 아〜 나!”
 여관방 안을 뒹굴며 악을 쓰던 슈메이비는 머리를 잡아 뜯으며 누구에게 하는 건지도 불분명한 욕을 해 대다 지쳐서 대자로 뻗어 버렸다.
 “어쩐지 너무 쉽다 했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고. 해 봐!”
 벌떡 일어난 슈메이비는 여섯 마리의 늑대를 소환해 사투를 벌이며 실드 스크롤을 쓰고 화약통을 사용하다 여관방 벽이 날아갈 뻔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결국 10레벨이 되었다. 방음으로 마법 처리가 된 여관임에도 결국 여관 주인까지 올라올 정도로 여러 번 난리를 친 후의 성과였다.
 주인에게 수리비를 준 슈메이비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침대에 걸터앉았다.
 
 
 직업 : 무
 Lv : 10(1.23%)
 힘 : 1
 체력 : 1
 지능 : 1
 생명력 : 100
 마나력 : 10
 보유 스킬 : 상급 재봉 5
 보유 누적 포인트 : 15
 
 
 포인트가 15개나 있는데도 슈메이비는 불안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냥 15개 포인트를 체력이나 힘에 투자하고 열심히 바느질이나 해서 재봉 스킬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와 버린 것. 도박이 주는 기이한 맛을 경험해 버린 슈메이비는 어느덧 포인트를 재봉에 모두 쏟아 붓고 있었다.
 
 
 
 #인비지빌리티를 찾아
 
 
 
 퀭한 눈동자가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심을 유발한다. 거지 같은 복장도 그의 분위기를 한층 가라앉히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풍기는 좌절감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보름 전 영혼석을 사용한 편법으로 상급 재봉을 8단계까지 올릴 수 있었던 슈메이비는 그 후에도 늑대 영혼석을 더 사서 사냥을 했다. 하지만 10렙이 된 후로 늑대 한 마리를 죽여 봐야 경험치가 1%도 오르지 않아 더 이상 그 방법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재봉에 매진했다.
 그 후로는 어떻게든 오우거 가죽만 구해 죽어라 방어구를 만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2주 동안 재봉은 여전히 답보 상태였다.
 게다가 손으로 하는 재봉은 손의 미세한 떨림과 심리 상태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아무리 집중을 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오질 않았다.
 “뭔가 다른 재료를 찾아야 해. 으으······ 재봉을 때려치우든, 허수아비를 씹어 먹든······ 무슨 방법을 찾지 않으면 이러다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몰라!”
 몸을 부르르 떨며 초점 없는 눈동자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의 손은 끊임없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보라!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행하는 경지. 그 신선의 경지가 지금 슈메이비의 몸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모험의 인장 스킬 북 팔아요! 캐떨이! 단돈 50실버요!”
 전광석화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있을까? 슈메이비는 믿을 수 없이 생기 넘치는 몸짓으로 모험의 인장 스킬 북을 거의 빼앗다시피 거래하고 와서, 행여나 누가 훔쳐 가지는 않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스킬 북을 펼쳤다.
 
 -모험의 인장 스킬을 익히시겠습니까?
 
 
 유형 : 스킬 북
 이름 : 모험의 인장
 설명 : 모험가의 앞길을 밝혀 주는 기본적인 스킬이다. 모험가라면 누구나 다 익혀야 하는 필수 스킬!
 내용 : 이데아 모든 곳에 모험가의 발길이 닿는 그 순간 그대들의 이름은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모험가여, 떠나라!
 요구 사항 : 스킬 북 / 직업 : 모험가
 세부 설명 : 모험으로 얻은 명성치를 경험치로 바꿔 준다. 원하지 않으면 비활성화로 명성을 쌓을 수 있다. 미개척 지대나 커다란 발견을 했을 시 발견 유물에 따라 비례하여 명성을 획득할 수 있다.
 
 
 -모험의 인장 스킬을 익혔습니다.
 
 복권에 당첨된다 한들 이보다 기쁠 수 있을까.
 그동안 얼마나 타투이스트에 관련된 스킬 북을 찾아 상점거리를 배회했던가. 워낙 초기라 스킬 북을 얻으면 모두 스스로 익히는 것이 당연시되다시피 해서 지금까지는 얻을 수 없었는데, 우연히 발견한 모험의 인장은 정말 천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다지 귀한 스킬 북이 아닌 만큼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구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기쁜 건 기쁜 거였다.
 재봉은 그렇다 치고 모험의 인장이 타투이스트가 되는 데 왜 필요한지 당최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이렇게 하나씩 풀어 가다 보면 언젠간 무적의 타투이스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지금까지의 고생이 다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슈메이비는 도무지 바느질을 할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들뜬 마음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일단 주변에 널린 것을 주머니에 넣고 한참을 걸어 정보 길드의 건물 앞에 섰다.
 이제 약간의 모험이 필요할 때야.
 더 이상 한구석에 처박혀서 바느질만 한다 한들 언젠간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고, 재봉 마스터가 돼서 나가나 지금 나가나 전투력은 마찬가지. 오늘 이렇게 운이 좋은 건 결심을 하라는 신의 계시다!
 슈메이비는 건물에 들어가 계단 앞에 있는 안내문을 읽었다. 1층부터 5층까지 정보의 등급에 따라 층이 나뉘어 있었는데 가격도 엄청난 차이가 났다. 돈에 쪼들리는 건 아니었기에 주저 없이 특급으로 구분된 5층으로 향했다. 거지꼴을 한 유저가 5층으로 향하자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리고 속도를 높였다.
 모든 유저들이 한 번씩은 이용할 만큼 활성화된 정보 길드였기에 슈메이비가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5층으로 들어서자 정보 길드 측에서도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슈메이비를 맞았다.
 “재봉사 아니십니까?”
 역시 정보 길드다웠다. 그래도 그렇지, 재봉사라니. 기분이 나빠졌지만 오늘은 작은 일에 연연하기 싫었다. 축복받은 하루가 아닌가!
 슈메이비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뭣 좀 알아보러 왔어요.”
 “그러시지요.”
 슈메이비는 탐탁잖은 표정의 길드원이 눈에 거슬렸지만 꾹 참고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길드원은 슈메이비의 질문이 이어질 때마다 놀람으로 얼굴이 찌푸려졌고 마지막에 가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그것들을 다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그냥 필요해서 그래요.”
 길드원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않고 슈메이비의 전신을 훑어보며 말했다.
 “일단 대답은 해 드리지요. 인비지빌리티에 대한 소재는 파악이 되었습니다. 정보료로 20골드가 소요됩니다. 블랙 핸드는 17골드, 데스 스킬 드레인은 대륙에 네크로맨서의 위치 파악이 쉽지 않아 정보가 없는 상태이고 스킬 북 변환 역시 아티산의 직업이 파악되질 않아서 정보를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염력이야 신전에 가시면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이니 1골드만 받겠습니다. 어떻게······ 구입하시겠습니까?”
 슈메이비는 생각보다 많은 스킬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자 진즉에 이곳에 들르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곤 곧장 주머니에서 38골드를 꺼내 길드원 앞에 놓았다.
 “흠흠. 생각보다 재봉이 돈이 되나 봅니다? 여튼 정보료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구입하신 정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말은 문서화되어 손님이 나가실 때 전해 드리게 되니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따로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슈메이비는 한 자라도 빼먹지 않고 외우려는 듯 얼굴을 길드원에게 가까이 들이대며 귀 기울였다. 그게 부담스러웠는지 길드원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인비지빌리티는 8서클의 고위 마법입니다. 지금까지 익힌 이라고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 드물어서 오히려 스킬 북이 남아도는 상태이지요. 그렇다 해도 8서클의 마법! 그런 귀한 스킬 북이 아무런 곳에나 굴러다니지는 않겠지요. 대전으로 가시면 마법사들이 모여 사는 마법 공단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시면 어렵지 않게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단지 하위 서클을 익히지 않고 덜렁 8서클 마법서를 구해서 어디에 쓰시려는지는 모르겠으나, 300골드 정도 지불하시면 그곳에서 구하실 수 있습니다.”
 슈메이비는 길드원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8서클이든 9서클이든 상관이 없었다. 타투이스트가 되기 위한 요구 스킬은 직업과 스킬을 무시하고 익힐 수 있는 ‘개사기, 개잡캐’가 아니었던가!
 “블랙 핸드는 부산 지역에 있는 도둑 길드 본사에 있습니다. 생각보다 대놓고 영업하는 곳이라 찾기는 쉽습니다. 부산에 가셔서 어느 누구한테 물어보셔도 위치는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블랙 핸드 자체도 그리 높은 등급의 스킬이 아니니 30골드 정도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도둑 길드인 만큼 거친 사람들이니 직업이 도둑도 아닌 자가 스킬 북을 구입하려 한다면 약간의 마찰은 각오하시는 것이······.”
 슈메이비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길드원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염력은 이곳 서울의 여의도 수도원에 가시면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뭐 그것도 그리 비싼 건 아닐 테니 어떻게······ 정보는 만족스러우십니까?”
 슈메이비가 미세하게 머리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기자 길드원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자리를 피해 줬다.
 
 * * *
 
 대전과 부산······ 염력이야 서울에서 구할 수 있으니 문제가 안 되는데 그 먼 곳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가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아직 용병 길드가 활성화되지 않아 의뢰를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고 무작정 혼자 나서기엔 1레벨의 능력치와 재봉술밖에 가지지 못한 능력으로는 무리가 있었다.
 슈메이비는 늘 앉아 바느질을 하는 노점상 거리에서 손을 열심히 놀리며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조금 전 오우거의 가죽을 모조리 사들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치수에 맞게 방어구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모험을 떠나야 하는데 지금 같은 거지꼴은 외형을 떠나서 방어력에 문제가 있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들은 처음 지급되는 것들이어서 전혀 방어력이 붙질 않았는데, 지금 만들고 있는 오우거 가죽 제품들은 개당 3〜5 정도의 방어구가 붙어 있으니 모두 갖춰 입으면 큰 차이를 보일 것이 분명했다.
 뭔가 결정을 해야 신전으로 움직일 텐데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바느질만 하고 있는 것이다.
 
 -오우거 가죽 조끼를 만들었습니다.
 -상급 재봉 스킬이 9로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5% 올랐습니다.
 
 “아앗!”
 슈메이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기대도 하지 않던 재봉 스킬이 올랐다!
 덩실덩실 춤을 추던 슈메이비를 유저들은 미친놈 보듯이 쳐다봤다. 심지어 침을 뱉고 가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슈메이비는 그런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자애로운 얼굴로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으하하하하!”
 
 * * *
 
 타투이스트.
 불현듯 쉽게 얻을 수 있는 직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한 번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자신 같은 히든 캐릭터가 안전하게 직업을 가지고 육성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로그아웃도 없고, 잠도 이데아 안에서 자야 하는데 노숙이란 절대 기피해야 할 첫 번째이며 몬스터는 무조건 피해 가야 할 대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킬 북만 돈 주고 사서 배우면 될 수 있는 타투이스트는 그 여자 말대로 가장 안전하게 익힐 수 있는 직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어차피 돈이니까. 그것이 이데아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슈메이비는 신전을 향해 가는 마차 안에서 골똘히 생각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도 그의 손은 쉬지 않고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내가 모르고 있는 게 많아. 그동안 너무 안이하게 게임을 했을지도 모르지. 이렇게 해서는 죽도 밥도 안 돼.”
 마차로 4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여의도 수도원은 그 웅장한 기세가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전해져 사방이 고요하고 단정했다.
 슈메이비도 거지 복장을 하고 수도원에 들어가기는 미안한 마음에 조금 전에 모두 완성한 오우거 가죽 방어구 세트를 꺼내 마차 안에서 갈아입었다. 가죽의 무두질 수준이 매우 만족스러워서 착용감이 무척이나 좋았다. 안감은 면으로 처리를 해서 전혀 살에 쓸리는 일도 없었고 은은한 연녹색의 가죽은 얼핏 봐도 고급스러웠다. 디자인 또한 전체적으로는 굉장히 심플하고 단정했지만 이음새나 단추, 왼쪽 가슴과 목덜미엔 자색으로 수를 놓아 포인트를 줬기에 만약 시장에 내놓는다면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장화까지 모두 신은 슈메이비는 상태 창을 열었다.
 
 
 직업 : 무
 Lv : 10(91.23%)
 힘 : 1+7
 체력 : 1
 지능 : 1
 생명력 : 100
 마나력 : 10
 방어력 : 19
 보유 스킬 : 상급 재봉 9 / 초급 모험의 인장 1
 보유 누적 포인트 : 0
 
 장인의 혼이 깃든 오우거 가죽 모자. 방어력 3
 장인의 혼이 깃든 오우거 가죽 조끼. 방어력 4
 장인의 혼이 깃든 오우거 가죽 바지. 방어력 4
 장인의 혼이 깃든 오우거 가죽 장갑. 방어력 2
 장인의 혼이 깃든 오우거 가죽 장화. 방어력 3
 장인의 혼이 깃든 오우거 가죽 티셔츠. 방어력 1
 장인의 혼이 깃든 오우거 가죽 팔목 보호대. 방어력 2
 
 세트 효과 오우거 가죽 아이템 4개 이상 힘 +4
 세트 효과 오우거 가죽 아이템 5개 이상 힘 +5
 세트 효과 오우거 가죽 아이템 6개 이상 힘 +6
 세트 효과 오우거 가죽 아이템 7개 이상 힘 +7
 
 
 세트 효과로 인해 힘이 7 늘었고 방어력도 무려 19나 올랐다. 이 수치에 대해 실감은 안 나지만 전보단 분명 나으리라 생각한 슈메이비는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는 놀란 눈으로 슈메이비를 바라보며 입을 벌렸지만 슈메이비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신전으로 향했다. 그가 떠난 마차 속에는 거지에게 줘도 안 입을 만한 꼬질꼬질한 거적때기가 널려 있었다.
 
 -여의도 수도원에 들어섰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수도원입니다. 최초 발견자가 아닌 만큼 명성이 소폭 상승합니다. 명성이 5 오릅니다. 모험의 인장이 활성화 상태입니다. 명성이 경험치로 전환됩니다. 경험치가 3% 올랐습니다.
 -모험의 인장 스킬이 초급 2가 되었습니다.
 
 기분 좋은 시스템 음성을 들으며 슈메이비는 신전 깊숙한 곳에 들어섰다.
 견습 사제와 수많은 일반인들이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소란스럽진 않았다.
 지나가며 슈메이비를 힐끔힐끔 훔쳐보는 유저들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거지꼴로 다닐 때에는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질투와 탐욕의 눈빛이었다.
 “안녕하세요. 이곳에서 스킬을 배우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중년의 청수한 사제가 슈메이비의 물음에 인자한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견습 사제가 되려면 저기 보이는 건물로 가셔야 합니다.”
 “아뇨, 지인에게 선물할 스킬 북을 구하려고 왔어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데 이곳에 올 형편이 못 돼 제가 가는 김에 구해 준다고 약속을 해서요.”
 “아······ 그 지인께서는 사제가 되려고······?”
 슈메이비는 침통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 친구가 부산에 있는데, 병든 노모와 살고 있어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요. 늘 신께 기도를 드리고는 있지만 곧 혼자가 되면 신전에 의탁을 할 것 같네요.”
 “그런 일이······! 부디 가이아 여신님의 가호가 있기를······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걸음하세요.”
 슈메이비는 양심의 가책은 전혀 느끼지 않고 염력 스킬 북과 최상급 치유 포션 20병을 사서 신전을 나올 수 있었다.
 한 병에 50골드나 하는 최상급 치유 포션은 생명력이 1이라도 남아 있다면 완전 회복을 시켜 주는 슈메이비 입장에서 보면 생명과도 다름없는 귀한 것이었기에 있는 대로 모조리 사고 싶었지만, 신전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보유량이 20병밖에 없었다.
 한 병에 50골드나 하는 것을 20병이나 덥석 사 버린 슈메이비의 재력에 신전은 놀라워하며 연방 축복을 빌어 줬다.
 신전에서 나오기 전까지 축복을 열 번은 넘게 받았을 텐데 상태 창에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며 슈메이비는 피식 웃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일단 염력을 익히기로 한 슈메이비는 염력 스킬 북을 펼쳤다.
 
 -염력 스킬을 익히시겠습니까?
 
 
 유형 : 스킬 북
 이름 : 염력
 설명 : 가이아 여신의 축복을 받아 사용하는 고귀한 정신의 힘.
 내용 : 가이아 여신의 축복받은 사제여, 자애와 인내로 만물을 사랑할 때 가이아 여신은 그대와 함께하리라.
 요구 사항 : 스킬 북 / 직업 : 가이아 교단의 사제
 세부 설명 : 정신의 힘으로 물체를 움직일 수 있다. 단계가 오를수록 좀 더 세밀하고 무거운 물체를 움직일 수 있으며 마스터가 되면 정신력에 따라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 있는 어떠한 물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염력 스킬을 익혔습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염력 스킬을 익힌 슈메이비는 신전 앞에서 기다리던 마차에 올라타고 눈을 감았다. 잘 수 있을 때 충분히 자 둬야 했다. 슈메이비에겐 이곳이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현실이기에.
 
 * * *
 
 이데아 대한민국 서울의 강남 지역 초보자 게이트 앞 게시판에 하나의 방이 붙은 건 3일 전이다. 호위를 뽑는다는 내용이었는데 일정에 비해 보수가 워낙 높아서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더러는 누군가의 장난일 거라는 의견도 있었고, NPC의 고난이도 연계 퀘스트가 아닐까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호위 용병을 모집합니다.
 
 자격 조건 : 오우거를 일대일로 상대함에 있어 부족함이 없는 자. 최소한의 로그아웃으로 장시간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자. 전투 직업이 아니라도 파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자.
 성별 : 무관
 보수 : 100골드
 일정 : 서울을 출발해 대전을 거쳐 부산까지의 호위.
 호위 대상 : 1인
 3일 후 오후 3시에 이곳 게시판 앞에서 직접 면접 후 채용.
 
 
 약속된 오후 3시가 되자 많은 이들이 모였다.
 구경꾼을 제외하고서라도 얼추 100명은 면접을 보러 온 것 같았다.
 약속한 시간이 돼도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할 무렵 정보 길드의 NPC 길드원이 게시판 앞으로 가서 큰 소리로 이목을 모았다.
 “안녕하시오! 나는 정보 길드의 칼립이라 하오! 의뢰인의 요청에 의해 제가 이 자리에서 오늘의 행사를 주관하게 되었으니 모인 분들은 조용히 해 주시오!”
 칼립의 말에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NPC에게 따져 봐야 좋을 것도 없었고, 게다가 정보 길드와의 트러블은 어느 누구도 달갑지 않았다.
 “의뢰인은 총 4명의 호위를 부탁했소. 모인 분들의 면면을 살피니 그 누가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으나 그래도 주머니 속의 송곳은 튀어나오는 법이니, 약간의 시험을 해 보려 하오.”
 칼립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 흩어져 군중에 섞여 있던 일단의 정보 길드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여러 개의 팻말을 들고 게시판 앞 공터에 자리를 잡았는데, 검사, 투사, 사제, 마법사의 4개의 팻말과 기타라고 적힌 팻말이 있었다.
 “면접을 보러 오신 분들은 자신의 직업군으로 가서 모여 주시오.”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통제에 이리도 잘 응해 주셔서 무척 감사드리오. 일단 검을 다루는 분들부터 시험을 보도록 하겠소.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한 뒤 PVP를 통해 승패를 가리는 방식이오. 꼭 승리한다고 뽑히는 것은 아니니까 자신이 가진 장점과 특기를 잘 살려 여과 없이 보여 주셨으면 하오!”
 정보 길드원으로 위장해서 검사들의 대결을 바라보던 슈메이비의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지금까지 이데아로 와서 제대로 된 싸움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로서는 검사들의 빠른 검을 눈으로 좇기에도 벅찼다.
 그들 20여 명의 검사들 중에서도 유독 과묵하고 정직해 보이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현실에서의 쓰디쓴 경험 때문에 인간을 근본적으로 믿지 않는 슈메이비는 그나마 저런 성격의 사람이 안전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소 나이가 있어 보이는 것이 걸렸지만 그만 한 인물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잘 보았소이다. 이제 검사 분들은 돌아가셔도 좋소이다. 합격자는 오늘 밤 개별 통보가 될 터이니 장내가 정리되는 대로 투사 분들의 시험을 보도록 하겠소.”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으나 정보 길드가 주관하는 일이니만큼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모두가 질문을 삼켰다. 검사들도 시험이 끝났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의 PVP 쇼는 본 적이 없던 터라 자리를 뜨는 이들은 1명도 없었다.
 “투사 분들도 마찬가지로 앞서 본 것처럼 자신의 기량을 맘껏 보여 주시면 되겠소이다. 검사들과는 서로가 가진 무기가 모두 다르니 그에 따른 대처나 장단점을 잘 활용하시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판단되오. 그럼 시작하겠소!”
 투사들은 검사보다 더욱 치열했다. 맨손의 파이터부터 채찍을 사용하는 이까지 다양한 무기의 종류만큼이나 우열을 가리기도 힘들었다.
 어느덧 PVP가 종반으로 치달을 무렵 날카로운 인상의 젊은 사내가 한 손에 낚싯대를 들고 나왔다. 그의 상대로는 커다란 덩치에 걸맞은 거대한 해머를 사용하는 남자였는데, 낚싯대가 한번 춤을 추자 해머는 매끄럽게 2개로 쪼개져 모든 이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슈메이비로서는 낚싯대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도 못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장내를 쳐다보았지만 이미 낚싯대의 남자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장내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져 버리자 칼립이 헛기침을 하며 중앙으로 나왔다.
 “험험! 사제의 시험은 이미 끝났소이다. 앞서 있었던 검사와 투사의 시합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한 사제 분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체크해 뒀으니 그리 알면 될 거요. 마법사의 시험은 전문성을 판단할 만큼 이곳의 마법에 능숙한 사람이 없으니 그대들이 방법을 정해 스스로 우열을 가리시오.”
 슈메이비는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매직 미사일을 얼마나 많이, 세밀하게 다룰 수 있는가를 주제로 한 마법사들의 대결을 보며 돈의 힘이 참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세상은 돈이다.
 어느덧 기타 집단에 모인 이들만이 남았다. 정말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슈메이비는 모인 사람들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주저 없이 1명을 뽑았다.
 칼립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이곳에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오! 합격하신 분들에겐 우리 쪽에서 사람이 갈 것이니 오늘 안에 도시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의뢰자를 볼 수 있을 것이오. 모두의 성원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이름 : 발할
 직업 : 검사
 추정 레벨 : 36
 특징 : 중년의 나이로 과묵하고, 파티보다는 홀로 사냥을 하는 전형적인 검사. 이데아 대한민국 서울 출신이며 악행이나 악소문은 없음.
 
 이름 : 시나위
 직업 : 낚시꾼
 추정 레벨 : 40
 특징 : 20대 후반의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낚싯대를 무기로 하는 그의 공격은 기괴하기 짝이 없으며, 악행이나 악소문은 없음.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낚시로 보내며 이데아 대한민국 서울 출신.
 
 이름 : 키파라
 직업 : 모험가
 추정 레벨 : 34
 특징 : 활과 석궁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길 안내에 능한 레인저. 30대 중반의 나이로 그의 길 안내에 만족한 이들이 많다는 정보가 있으며 이데아 대한민국 광주 출신.
 
 이름 : 승혜
 직업 : 사제
 추정 레벨 : 31
 특징 : 가이아 여신이 환생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애롭고 고지식한 20대 초반의 여성. 그녀에 대한 소문은 서울 최고의 미녀 메이만큼이나 많았으며, 소문의 대부분은 그녀의 헌신적이고 열성적인 선교와 치유 활동에 대한 것임. 보유 스킬로는 힐과 큐어 두 가지밖에 없음에도 그 스킬들의 능력만큼은 동급 사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함. 이데아 대한민국 서울 출신.
 
 이름 : 칼소잎
 직업 : 마부
 추정 레벨 : 26
 특징 : 잠도 말 위에서 잔다는, 말에 미친 남자. 사울의 한 마구간에서 10여 년간 생활했으며 그의 마차 모는 솜씨는 이미 대륙 최고. 그의 아버지 또한 유명한 마부이며 그의 대에서 최고라 평가받음. 말과 눈빛으로 대화까지 가능하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임.
 
 
 여관에서 정보원이 건넨 신상 명세를 바라보며 슈메이비는 자신이 점찍어 둔 기타 그룹에 있던 마부가 NPC였다는 것을 알았다.
 계획보다 1명이 늘어났으나 돈보다도 실력 있는 마부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에 벌써부터 마음이 놓였다. 부산까지의 여정에 있어 염력으로 바늘을 사용해 오우거 가죽을 재봉할 수 있는 경지까지 만들고 싶었던지라 최대한 승차감 좋은 여행이 절실했던 것이다.
 “위층에 모두 모였답니다. 올라가시죠.”
 슈메이비는 억지로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긴장도 되고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이 거부감도 들었지만 내색은 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기에 떨어지지 않는 발을 잡아끌었다.
 안내된 방에는 5명의 사람들과 정보 길드원 칼립이 있었다.
 유독 이데아 대한민국 서울 지역의 NPC의 이름 앞에 칼이라는 단어가 흔했는데 인천으로 가면 NPC의 이름 앞에 대부분 홈이 붙는다. 홈리스, 홈키파, 홈플러스······ 위대한 모험가라면 아마도 NPC의 이름으로 전 세계의 모든 지명을 맞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여러 개의 시선을 느끼고 슈메이비는 굳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이번 의뢰를 한 슈메이비입니다. 잘 부탁해요.”
 슈메이비가 한쪽에 마련된 자리에 앉자 칼립이 박수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미 여러분에게 지급할 대금과 저희에게 행사를 맡긴 비용 일체를 슈메이비 님이 지불하셨습니다. 이번 호위 여정이 무사히 끝나게 되는 즉시 여러분들에게는 정보 길드에서 발행한 수표가 지급될 것이며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경비는 슈메이비 님께서 지불하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일정은 대전을 거쳐 부산까지 가는 것이며 총 소요 시간은 17일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추후에 돌아오는 일정은 별도로 상의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그보다 더 하얀 얼굴로 초롱초롱하게 바라보는 승혜의 눈빛에 슈메이비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그런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키파라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도련님께선 어디 후계자라도 되나? 그 큰돈을 쓰면서까지 할 여행은 아닌데, 대로로만 이동하면 큰 위험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루트거든. 빡시게 가면 10일이면 충분한 일정이기도 하고······ 그래서 말인데 이런 거금을 들이면서까지 부산에 가려는 이유가 뭐지?”
 슈메이비는 난감한 듯 머뭇거리다 말했다.
 “제가 비전투 직업이라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다 보니 좀 과한 면이 없잖아 있었네요. 늑대 한 마리도 못 이기는 제겐 부산까지의 여행이 너무도 위험한 길이라서요. 부득이하게 여러분의 도움을 받게 되었어요.”
 키파라는 아직도 뭔가가 의심스러운지 연방 턱을 만지며 슈메이비를 바라보았고 다른 이들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인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때 칼립이 손사래를 치며 일어났다.
 “자, 자, 궁금한 건 내일부터 차차 알아 가면 될 일이고, 우선 각자 배정받은 방에서 휴식을 취하신 뒤에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합시다. 이동 경로와 세부적인 여행 계획 일정은 모험가이신 키파라 님께 드릴 테니 오늘은 서로 안면도 익혔고······ 이만 하는 것이 좋겠소.”
 키파라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일어나며 말했다.
 “뭐, 이미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쏘아진 화살에 어떤 의지가 담겨 있든 무사히 과녁에 맞길 비는 수밖에.”
 알 수 없는 키파라의 말을 끝으로 모두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승혜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연방 슈메이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를 끝으로 모두 모습을 감추자 슈메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아직은 조금 무리였나······.”
 
 * * *
 
 내가 처음 세상에도 신이 있다고 생각한 게 언제였을까. 생각해 보면 그때였다.
 스무 살의 겨울. 고아원에서 나와 원장님의 소개로 LCD 생산 공장에 들어가 주야 3교대로 아무런 생각도 못 하고 기계가 되어 단순 작업을 반복하던 어느 날, 사람이 찾아왔다. 내게 아버지가 있다 했고, 위독하다고 했다. 삼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흔해 빠진 이야기.
 몇 달 지나지 않아 에이즈로 죽어 버린 아버지와 막대한 유산 상속. 아버지 회사의 경영진들은 내가 그저 주주로 있으면서 놀고먹기를 원했고 나는 그들의 요구에 충실히 따르며 마음껏 새 삶을 만끽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고 세상 그 어느 것도 부러울 게 없었다. 인류의 39%가 에이즈에 감염된 상태라 성관계는 꼭 병원 검진표를 확인해 보고 하든가 아니면 사이버 섹스로 만족했어야 했던 것을, 내 병은 내 무지함에서 나온 불찰이었다.
 내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그 후로 7년 후였다. 그 시기의 성관계라고는 예전에 사랑했던 그녀밖에 없었는데, 나는 그때 아버지가 에이즈로 돌아가신 이유와 내가 죽어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회사의 경영진들은 아버지와 내가 설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조차도 그들에겐 도구에 불과했고, 나는 그들을 살찌우기 위해 준비된 먹음직한 먹이일 뿐이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특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여자 따위······.
 “이봐! 도련님!”
 슈메이비는 힘들게 눈을 떴다.
 “무슨 잠을 그렇게 심하게 자? 로그아웃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게임을 하면서 잠을 잘 수도 있나? 설마 꿈까지 꾼 거야?”
 슈메이비는 꿈도 꿈이지만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들 앞에서 무방비로 잠을 잤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당했는데 아직도 이리 경계심이 없다.
 “요즘 무리를 했더니 정신적으로 좀 부치나 봐요. 괜찮아요.”
 키파라는 슈메이비의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훑더니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젊은 도련님이 무슨 상심과 고민이 그렇게나 많아서 스트레스에 쩔어 사는지 원. 내가 저때만 해도 세상 모든 게 다 내 것 같아 보여서 다 가져 보려고 아랫도리에 힘 주고 무조건 쏘다녔는데 말야.”
 키파라의 말에 승혜가 곱게 눈을 흘겼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나저나 고작 3일밖에 안 됐는데 한 3년 지낸 것 같네. 마차에만 있으려니 좀도 쑤시고 기대하던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덜컥!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열고 지붕으로 올라간 키파라는 지붕에 누운 뒤에야 좀 후련한지, 폐에 가득 담긴 공기를 끄집어냈다.
 “후아아! 날씨 한번 끝내준다!”
 슈메이비가 탄 마차는 격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모험가 키파라와 과묵한 검사 발할,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빈말이라고는 하지 않는 낚시꾼 시나위와 사제 승혜, 슈메이비까지 5명을 태우고 대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6인승 마차라 그런지 성인 5명이 탔음에도 전혀 좁거나 불편하진 않았다. 이는 다 마부 칼소잎 덕분인데, 그의 마부술은 정말 놀랍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잠도 마부석에서 잤고, 그가 마부석에서 내려올 때는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순간도 없었다. 그렇게 슈메이비 일행은 아무런 사건 사고도 없이 대전으로 가고 있었다.
 내일 오후면 대전에 도착한다고 하니 슈메이비로서는 정말 너무도 다행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는 도중 만난 몇 마리의 고블린과, 모험 명성으로 얻은 경험치가 레벨을 한 단계 올려 주어, 포인트를 죄다 박은 염력 스킬도 초급 염력 8단계나 되었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마차 안에서 염력으로 바느질을 한 것이 스킬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걸 본 일행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키파라가 한 말이 잘 대변해 준다.
 
 -너는 전설의 재봉 마스터 도련님이냐! 대체 정체가 뭐야!
 
 슈메이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시나위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창밖을 보거나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듣거나, 눈을 감고 명상하는 게 하루 일과다.
 불평불만도 없고 그저 세월아 네월아, 마치 흐르는 시간을 감상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는 그 시간들 사이에서 뭘 낚으려는 걸까?
 “정말 이데아에 와서 보낸 날 중에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에요.”
 승혜가 창밖을 보며 턱을 괴고 환하게 웃었다. 전혀 미인형의 얼굴은 아니지만 이럴 때 보면 사랑스럽다고 해야 하나? 귀여운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것도 아닌데 그냥 한번 안아 주고 싶은 느낌을 들게 한다.
 처음 그녀를 보며 고블린이 다쳤다고 치료라도 해 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몬스터와 그 외의 것들에 대한 경계가 명확했다.
 “수련이 동반된 여행이 아쉽군. 고행길인 줄 알았는데 기우였어.”
 발할의 말에 지붕 위에 있던 키파라까지 반응했다.
 “형님! 드디어 제 맘을 알아주시네요! 이건 뭐, 산적이나 도련님을 노리는 권력의 검은 그림자 암살 부대라도 튀어나와야 정상인데!”
 암살 부대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 살 떨리는 모험은 제발 나와 있을 땐 잊어 줘!
 “며칠 사냥을 못 해도 그만큼의 보수를 받잖아요. 너무 슈메이비 님만 타박하지 마세요! 아무도 안 다치고 얼마나 좋아요? 그렇죠, 시나위 님?”
 시나위가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슈메이비는 고개를 흔들며 주머니에서 약간의 오우거 가죽을 꺼냈다. 이제는 큰 집중 없이도 의지대로 바늘과 오우거 가죽이 슈메이비의 가슴 어름에 둥실 떠올랐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슈메이비 님 염력 스킬 배웠어요?”
 승혜의 말에 슈메이비는 무언의 긍정을 했다.
 “흠,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슈메이비 님은. 처음에 만났을 때는 구걸을 하더니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고, 이젠 불가능한 것들만 보여 주시네요.”
 구걸? 누가? 승혜의 말에 슈메이비는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도련님이 구걸을 했어?”
 지붕에 매달려 머리만 불쑥 마차 안으로 들이밀며 키파라가 묻자 승혜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수상해.’라고 중얼거리며 사라지는 키파라의 모습에 발할은 작게 웃어 보인 뒤 입을 열었다. 그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3일 동안 처음이었기에 모두의 이목이 모였다. 그래서인지 발할의 안색이 조금이지만 붉게 물든 것 같기도 했다.
 “마법 공단으로 가서 뭘 얻으려는 건가?”
 슈메이비는 잠시 고민하다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마법 스킬 북을 구하러 가요.”
 “음······ 자넨 마법사로 보이진 않는데,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슈메이비는 발할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이 남자가 어쩌면 과묵한 게 아니라 부끄러움이 많은 게 아닐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했다.
 “마법사라뇨. 전 보시다시피 재봉사인걸요. 하핫.”
 키파라가 느닷없이 마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 정말 속 터져서 못 들어 주겠네. 그 정도는 알고 있거든? 우리가 궁금한 건 도련님이 마법 공단에서 어, 떤, 마법서를 구해서 어디에 쓰려는지라고!”
 키파라의 돌발 행동에 슈메이비는 놀란 표정으로 술술 대답했다. 그러다 곧 후회했지만 이미 이들도 알게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배우려고요. 인비지빌리티······.”
 마차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마차를 모는 칼소잎마저 숨소리도 내지 않는 몇 초가 지나고 키파라의 고함이 터졌다. 모두의 얼굴을 보아하니 키파라가 소리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 같다.
 “뭐? 그거 8서클 마법인데? 농담하는 거지?”
 슈메이비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다는 말을 떠올리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넘기려고 노력했다.
 “제 캐릭이 좀 그래요. 재봉, 염력, 인비지빌리티. 뭐, 이런 걸 배워야 하는데 전투는 전혀 못하고. 제 상태 창을 보시기라도 하면 깜짝 놀랄걸요? 지금 11렙인데 능력치는 전부 1렙에, 가진 스킬이라고는 재봉하고 초급 염력밖에 없어요.”
 승혜의 입이 떡하니 벌어져 있으니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말할 것도 없다.
 “그걸 왜 키워? 아니, 아니, 너 직업이 재봉사 아니었어?”
 키파라가 아직도 공중에 둥실 떠 있는 오우거 가죽을 손가락질하며 묻자 슈메이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쉽게도 아니거든요. 그저 제일 쉬워 보여서 이것부터 했던 거예요. 한 달 넘게 재봉만 했는데 더 이상 방법이 없어서 다른 걸 찾으러 가는 거구요.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닌데 이해하기 힘드실 것 같아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어요.”
 승혜가 벌어진 입을 예쁘게 다물며 눈을 빛냈다.
 “그럼 부산에는 왜 가요? 슈메이비 님 뭔가 굉장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대전이 8서클 마법서라면 부산은······?”
 모두가 침을 삼킨다. 왠지 메테오라도 구하러 간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오히려 원망을 받을 것 같은 상황이다.
 “블랙 핸드 스킬이 도둑 길드가 있는 부산에 있어요. 그 이상은 아직 저도 몰라요.”
 슈메이비의 말에 그 시끄럽던 키파라조차 입을 다물어 버렸다. 모두의 시선은 그 후로 오랫동안 슈메이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 *
 
 가끔 모든 게 싫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지긋지긋한 현실이 싫어서 여기까지 도피했는데 이것마저 전부 귀찮아진다. 만나는 놈들은 죄다 친절함과 상냥함으로 중무장하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 그놈들이 원하던 그 순간이 지나가면 그제야 그 욕정으로 점철된 눈빛이 가라앉는다.
 “아, 정말 재미없다. 다 싫어······.”
 펨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무릎을 감싸 안고 웅크리고 있었다.
 시작은 작은 파티였다. 미확인 던전을 찾아 이곳까지 왔는데 느닷없이 버려졌다. 기다리라는 말처럼 잔인하고 무서운 말이 또 있을까. 딱 이 위치까지만 자신의 능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더 이상 달고 들어가 봐야 전투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 결정을 내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을 것이다.
 “미친년. 일어나야지. 기다리긴 왜 기다려? 아직도 몰라?”
 펨은 꺼져 가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당장 몸을 일으켜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닥불 형식으로 만들어진 몬스터 방어 결계가 깨지는 순간 몬스터들이 덤벼들 게 분명했다. 부산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4시간 이상은 가야 한다. 그 길에 누군가 만나지 못한다면 정말 위험할 것이 분명하다.
 세상이 이기적이란 것은 이미 절실하게 알고 있다. 간혹 스스로보다 남을 먼저 위해 주는 이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극소수일 뿐이다. 게다가 그게 남자라면 자신을 만나는 순간 변질된다.
 그런 시간들, 그런 경험들은 충분히 했으면서 이런 상황이 오기 전까지 깨닫지 못한다. 매번 후회하고 새롭게 다짐해 봐도 돌이키려고 할 때는 이미 늦어 버린 상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다른 사람들 마음이 자신과 같을 거라는 무서운 습관 때문에, 그 멍청한 믿음 때문에 일은 항상 꼬인다.
 갸르르릉.
 거북한 울림이 모닥불 주변을 잠식한다. 거대한 그림자도 모닥불에 일렁인다.
 몸이 3미터는 될 만한 샤벨타이거들의 서식지에 모닥불을 피웠으니 녀석들에게는 군침이 도는 먹이로 보이겠지. 진작 떠났어야 했는데 늦어 버렸다.
 쿠아아아앙.
 가까운 곳에서 샤벨타이거의 포효가 들린다.
 절대 무리 지어 다니지 않는 녀석들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꽤나 많이도 모였다. 도망을 쳐 봐야 등짝에 녀석들의 발톱이 박힐 것은 분명했고, 게임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싶지만 죽음 앞에 떨려 오는 몸은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
 예쁜 여자들은 그 끝이 항상 지저분하다더니, 이런 곳에서 혼자 이런 최후를 맞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뭔가 후련해졌다.
 “내가 예쁘긴 하나 보네. 이따위로 기구한 운명이라니. 다신 안 해! 이따위 게임.”
 펨은 양팔을 벌려 대자로 누워 버렸다.
 로그아웃을 해 봐야 나중에 접속했을 때 우글거리는 샤벨타이거들에게 왜 죽었는지도 모르고 비명횡사한 채 있을 게 분명했고, 이런 산골에서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청해 봐야 더 비참해질 뿐이다.
 파스스스스.
 모닥불의 하나 남은 불씨가 꺼졌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펨을 향해 날아올랐다.
 “될 대로 돼라. 짱나니까 빨리 끝내 줘, 망할 고양이 새끼들······.”
 펨은 눈을 감았다.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속눈썹이 심하게 요동친다.
 촤아아아악!
 뜨거운 게 얼굴로 튀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펨이 살며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이 거대한 대검이 있었다.
 “자살이라도 하려던 거요?”
 대검을 손에 쥔 남자가 입 꼬리를 말아 올린다. 근처에는 두 마리의 샤벨타이거가 하나는 허리에서부터, 또 하나는 대가리 부분이 깔끔하게 잘려서 양분되어 있다. 주변에 몇 마리 더 있는 게 느껴지는데 남자의 기세에 눌려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황소만 한 아가씨가 죽을 자리치고는 조금 소박해 보이는데, 설마 내가 방해한 거요?”
 남자가 얄밉게 이죽거리자 펨은 울컥해서 소리 질렀다.
 “누가 황소만 하다는 거예요! 이렇게 가녀린 황소 봤어요?”
 그때 소란에 힘입어 한 마리의 샤벨타이거가 남자에게 그 거대한 몸을 무기 삼아 달려들었다.
 조심하라는 말도 못 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기습이었고 펨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쫘아아아악!
 두 손으로 들기도 힘들 것 같은 검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정면에서 달려드는 샤벨타이거의 이마에서 나타난 것도 잠시, 그대로 샤벨타이거의 몸을 머리부터 꼬리까지 양단해 버렸다.
 샤벨타이거는 대형 몬스터 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한다. 무리를 이루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그걸 설명해 준다. 30레벨 후반의 웬만한 무기로는 상처조차 내기 힘든 두꺼운 가죽. 큰 몸뚱이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몸놀림. 그런 샤벨타이거가 일격에 죽어 버린다.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이런 자가 있다는 소문조차 들어 본 적 없었는데······.
 “대단하네요. 혹시 NPC예요? 그렇다면 성공했네요. 위기에 처한 숲 속의 공주님은 충분히 감동을 받았거든요. 이제 그대의 왕에게 가서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노라고 전하고 보상이라도 받으세요.”
 챠륵.
 남자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나도 그러고 싶소만 아직 위기에 처한 공주님을 못 만나서 말이지. 혹시 근처에서 보지 못했소?”
 받아치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중년이라 그런지 푸근하게 웃으며 하는 농담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흥! 눈앞에 두고도 몰라보다니, 아저씨는 훌륭한 기사가 되기는 글렀네요!”
 “뿌헐! 누구보고 아저씨래? 내가 아줌마라고 불러 주길 원하는 거요?”
 말과는 다르게 남자는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펨은 어느새 주변에서 샤벨타이거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각오는 했어도 긴장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남자가 펨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뭐, 내가 백번 양보해서······ 그래, 숲 속의 공주님께서는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요? 비록 갈 길은 바쁘지만 들어 봐 주지.”
 펨의 고운 이마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러다가 펨은 피식 웃어 버렸다.
 “펨이에요.”
 “아수스.”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눈빛이 조금 차가워 보이지만 이런 부류는 자신에게 해만 입히지 않으면 남들을 등쳐먹을 타입은 아니다.
 “흔한 일이에요. 길 찾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는 가녀린 개의 말로라고나 할까? 토사구팽을 당하고 잡아먹히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랄까요?”
 아수스는 대검에 묻은 피를 가죽으로 닦아 내며 펨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강한 여자. 이런 일을 당하고도 얼굴에 그늘이 없다. 10년만 젊었어도 어떻게 해 보련만, 아수스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에서 건져 줬으면 보따리도 찾아 줘야죠? 큰길까지만 에스코트해 줘요. 레이디가 혼자 가기엔 너무 위험한 길이네요.”
 아수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데도 되레 혀를 삐죽 내민다. 당차고 매력적인 여자. 아수스는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아수스의 웃음소리가 적막한 어둠을 밀어냈다. 그 소리에 주변의 모든 것들이 숨을 죽였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눈치를 보고 있던 샤벨타이거마저.
 
 
 
 #마법 공단
 
 
 
 이데아 대한민국 대전에는 마법사들의 대규모 공단이 조성되어 있다. 마법 아카데미가 있었고, 마법 시설 연구소와 수많은 개인 마법소. 매직 아이템 재작소와 마법 길드까지, 마법에 관련된 건 모두 있다고 봐도 무관할 정도로 대전은 마법사들의 천국이었다.
 대전으로 들어선 슈메이비 일행은 여관에 짐을 풀고 하루 동안 각자 자유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도시 안에서라면 위험도 없었고, 스킬 북을 구하는 데 우르르 몰려다닐 필요는 더더욱 없었기에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NPC보다 마법사가 더 많네.”
 정말 눈에 보이는 인간이라고는 죄다 마법사 천지였다. 슈메이비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곳부터 가 보기로 했다. 노점상. 그 어느 곳을 가도 이보다 편한 곳은 없었다. 그 번잡함과 소란스러움. 돈만 있다면 환하게 열려 있는 무수한 기회들. 슈메이비는 그 소란스러움에 자신의 존재감이 묻힐 때마다 안정을 느끼곤 했다.
 “마법 스크롤 팔아요! 주문도 받습니다!”
 “지능 반지 팔아요! 싸요! 일단 보세요!”
 “각종 마법서 팔아요! 없는 거 빼고 다 있어요!”
 슈메이비는 개인 상점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오랜만에 미약한 쾌락을 느꼈다. 이러다가 쇼핑 중독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기사님, 이 천은 시장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아주 귀한 것이랍니다. 귀하디귀한 와이번의 가죽에 마법 처리를 해서 이것으로 무언가를 만들면 굉장한 옵션이 붙을지도 몰라요!”
 내가 어딜 봐서 기사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에겐 마법사가 아니면 죄다 기사로 보이는 것 같다. 슈메이비는 마법 사 상인의 손에 들린 마법의 천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오우거 가죽보다는 더 단단하고 질겨 보였는데 은은한 분홍빛이 감도는 걸 보아하니 특별한 마법 처리를 한 것 같기도 했다.
 “좋아 보이네요. 근데 옵션이 ‘붙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은······?”
 마법사는 땀을 삐질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아직 이걸 어떻게 할 만한 재봉사가 없어서 모를 뿐이지, 서울이나 그런 곳으로 가져다가 팔면 분명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이론적으로 굉장한 옵션이 붙을 게 분명해요!”
 슈메이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놈! 걸렸어!
 “이론적으로 말이죠? 아쉽네요. 그럼 꼭 서울에 가셔서 비싼 값에 팔길 바랄게요. 저야 장사꾼인지라 확실한 이윤이 보이는 일이 아니면 손을 댈 수가 없거든요. 딸린 식구들이 많아서······.”
 몸을 돌리려는 슈메이비의 팔을 마법사가 필사적으로 잡았다.
 “아이고, 기사님! 아니, 대행수님! 거상님! 제발 이것들 좀 사 주세요.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대전 공단에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오늘 안에 다 팔지 않으면 연구실 월세도 밀려서 당장 거리에 나앉을 판이에요. 싸게 드릴게요! 와이번 가죽 한 롤만 해도 제가 2골드에 산 건데 12롤 다 사시면 한 롤당 3골드에 드릴게요!”
 “휴, 사정은 딱하지만 한 롤당 2골드 이상은 저도 힘들겠네요. 대신 다른 물건 있으면 더 보여 주세요. 이것도 인연이라고 웬만하면 마법사님과 거래를 하고 싶네요.”
 마법사는 롤당 2골드라는 슈메이비의 말에 울상이 되었다가 다른 물건을 보여 달라는 말에 자신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털어도 먼지밖에 안 나오는데 뭔가 없을까 하고 열심히 찾는 모습이 딱해 보이기까지 했다.
 “일단 이 마법의 천들을 거래하고 제 연구실로 가시죠. 분명 원하시는 물건이 있을 겁니다. 천은 롤당 2골드 20실버에 드리겠습니다.”
 슈메이비는 피식 웃으며 대금을 치르고 가죽을 건네받았다. 그러면서 가죽의 가벼운 무게에 깜짝 놀랐는데, 어쩌면 이것들로 인해 재봉의 마지막 1단계를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리 오시오!”
 
 * * *
 
 ‘이런 도둑놈.’
 슈메이비는 한눈에도 귀해 보이는 물건이 사방에 널려 있고, 바닥은 최고급 양탄자로 장식된 집 안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돈 없는 마법사에게 동정을 했다는 것에 좌절했다.
 사실 돈이 궁한 건 아니었지만, 고아원에서 지냈던 유년의 기억 때문에 흥정하는 버릇도 몸에 뱄고, 과도한 사치도 하지 않는다.
 “오해하지 마시오! 이건 다 사부님 재산이지 내 게 아니란 말이오. 나야 여기서 빌어먹는 객식구일 뿐이니 내 것은 하나도 없다오!”
 존댓말을 하다 하오체를 쓰다 당최 적응이 안 되는 마법사였지만 슈메이비는 그러려니 하고 잃어버린 푼돈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목적이 있으니 지나간 일은 잊어야 했다.
 “사실은 서울에서 부탁을 받고 마법서를 구하러 왔어요. 절친한 지인이 꼭 필요하다 하는데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직접 오게 되었죠.”
 마법사는 슈메이비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공단에만 오면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노점상에는 없더군요. 혹시······.”
 “혹시······?”
 꿀꺽.
 마법사의 침 넘어가는 소리에 슈메이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인비지빌리티 스킬 북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
 “뭐요!”
 마법사가 펄쩍 뛴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너무도 리얼해서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설마 대마도사가 나타났단 말이오? 내가 알기로 유저 중에는 5서클 마스터가 최고인 줄로 아는데? 아니란 말이오?”
 슈메이비가 웃으며 말했다.
 “아뇨. 아뇨. 말씀드렸잖아요. 아는 지인이 구하는 거라고. 아마 선물로 자제 분에게 줄 것 같은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눈앞에 목표를 던져 주면 더 매진하게 되는.”
 돈 지랄이군. 마법사는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엄숙한 마법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파르르 떨리는 눈가는 그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뭐 어렵진 않소. 그런데 가격이 좀 상당하오만? 괜찮으시겠소?”
 슈메이비는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3개 펴 보였다.
 “300골드. 그 이상은 힘들겠네요.”
 마법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연구실과 함께 슈메이비를 날려 버리겠다는 의지를 담았고, 그의 양손에서는 뜨거운 불덩이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그의 입이 열렸다.
 “아이고 기사님. 아니 거상님. 300골드라니요. 그걸 원가에 드리면 제가 뭘 먹고 살겠습니까. 거상이시니 이 바닥 돌아가는 생리를 좀 이해해 주시는 게 상도 아니겠습니까. 사정 좀 봐주세요.”
 장사 모드로 돌변한 마법사의 모습에 슈메이비는 일순 놀랐지만 어떤 면에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310골드 드리죠. 대신 최대한 빨리 와 주셔야 해요.”
 “그럼요! 암요! 내 당장 3초 안에 구해 오리다! 락!”
 락LOCK? 사라지는 마법사가 연구실을 봉인해 버렸다. 황당함의 극치를 넘어 말문이 막혔다. 뭐, 이런······.
 한바탕 욕을 해 대려던 슈메이비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 뒤 천천히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약 15평쯤 돼 보이는 공간에 작은 주방과 큰 방 하나가 전부였는데, 아무리 봐도 사용법을 알 수 없는 물건들만 가득했다. 방 한쪽에 자리 잡은 기다란 테이블 위에는 반쯤 분홍색으로 물든 갈색 가죽이 놓여 있었는데 아마 만들다 만 마법의 천 같았다. 와이번 가죽에 마법 처리를 한 게 왜 마법의 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는 모르겠으나, 만든 당사자가 그러겠다는데 거기에 대고 할 말은 없었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약 30분쯤 기다리자 연구실 문이 열리며 1명의 노인이 들어왔다.
 “응? 네놈은 누구냐!”
 노인이 지팡이를 들어 올린다. 지금 이거, 상당히 위험한 전개?
 슈메이비는 잘하면 그 얄미운 마법사에게 재미있는 선물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머리를 굴렸다.
 “어르신! 고정하세요. 전 물건을 사러 왔는데 제자 분이 잠시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가면서 마법까지 걸어 놔서 나갈 수도 없었어요.”
 노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우지 않고 연구실로 들어서자 슈메이비는 재빨리 하소연을 했다.
 “전 단지 이곳에 물건이 있다는 투로 얘기하기에 따라왔을 뿐 이렇게 버려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혹시나 제자 분이 나가서 변을 당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이곳에서 늙어 죽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니에요?”
 노인은 짧게 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슈메이비에게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에잉, 그놈은······ 쯧쯧······.”
 슈메이비가 노인 모르게 속으로 낄낄거릴 때 마법사가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소! 컥! 사부님!”
 “오냐. 니 사부 여기에 있다.”
 슈메이비는 잽싸게 마법사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들린 보자기를 낚아챘다. 묵직한 것이 안에 스킬 북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차라도 한 잔 하고 싶지만 두 분의 정이 너무 깊어 보여서 감히 껴들 수가 없겠네요. 게다가 상인에게 시간은 금인지라······.”
 말을 하며 슈메이비는 노인에게 다가가 그의 눈앞에 310골드를 내려놓았다.
 이걸로 선물은 완성.
 “자, 그럼 거래는 마무리되었죠? 언젠가 다시 대전에 들르게 되면 찾아뵐게요. 그럼.”
 고개를 꾸벅 숙이고 연구실을 나가는 슈메이비의 모습에 마법사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는 듯이 풀린 눈으로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었다.
 “너, 이 자식.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돈이 네 돈이란 말이지?”
 마법사가 뒷걸음쳤다.
 “아, 아니요, 사부!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이게 다 네놈 비자금인 거지! 310골드나 가지고 있는 놈이 오늘 아침에 장사하러 가는 데 밥값 없다고 50실버를 받아 가? 그래, 이놈아. 오늘 누가 죽나 한번 해 보자!”
 “끄아아아! 사부, 제발 거기만은······! 크학!”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비명을 들으며 슈메이비는 총총걸음으로 여관에 돌아갔다.
 드디어 구한 것이다. 인비지빌리티!
 슈메이비는 여관 침대에 걸터앉아 조심스럽게 스킬 북을 펼쳤다.
 이데아 유저 중 최초로 8서클의 마법을 익히는 순간인 것이다!
 
 -인비지빌리티 스킬을 익히시겠습니까?
 
 
 유형 : 스킬 북
 이름 : 인비지빌리티
 설명 : 위대한 대마도사의 전유물. 그의 자취는 세상 그 어느 것도 알아낼 수 없다! 오오! 대마도사에게 경배를.
 내용 :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으나, 그 누구도 쉽게 취하지 못하는 금단의 학문. 8서클! 인비지빌리티가 그대 대마도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줄 것이다!
 요구 사항 : 스킬 북 / 직업 : 마법사
 세부 설명 : 스킬을 시전하는 것만으로 투명화가 가능하다. 시전 시 50의 마나가 사용되며 분당 1의 마나가 지속적으로 소모된다. 마스터 스킬. 다른 마법과 중복 사용이 불가능하며 중첩 사용을 했을 시 인비지빌리티가 강제로 비활성화된다. 또한 물리적인 공격이나 마법적인 공격을 시전했을 때에도 인비지빌리티가 강제로 비활성화된다.
 
 
 -인비지빌리티 스킬을 익혔습니다.
 
 “으아아아아!”
 슈메이비의 절규가 여관을 울렸다. 아무래도 마법사에게 장난을 친 것이 이렇게 저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50의 마나라니! 슈메이비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치며 상태 창을 열었다.
 
 
 직업 : 무
 Lv : 11(23.19%)
 힘 : 1+7
 체력 : 1
 지능 : 1
 생명력 : 100
 마나력 : 10
 방어력 : 19
 보유 스킬 : 상급 재봉 9 / 초급 모험의 인장 4/ 초급 염력 8 / 인비지빌리티 마스터
 보유 누적 포인트 : 0
 
 
 지능 1포인트에 마나 10포인트가 오른다고 가정하면 이 스킬을 활용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포인트가 적어도 5포인트. 게다가 그래 봐야 고작 1분. 슈메이비는 방바닥을 구르다 개인 상점에서 봤던 장신구들이 떠올랐다. 지능을 올려 주는 여러 가지 아이템들.
 슈메이비는 여관을 박차고 달렸다. 절대 이대로 좌절할 수는 없다!
 
 
 하급 마법사 욜라뿅따이의 지능 반지, 지능 +2
 하급 마법사 욜라뿅따이의 지능 반지, 지능 +2
 하급 마법사 욜라뿅따이의 스카프, 지능 +1
 
 
 상점을 모조리 뒤졌지만 슈메이비가 사용할 수 있는 장비라고는 이것들이 전부였다. 또 값은 오지게 비싸서 돈에 미련이 없는 슈메이비조차도 바가지를 썼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쩌랴, 목마른 놈이 우물을 찾는다는데. 똑같은 반지를 2개나 구할 수 있었다는 것에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그런데 욜라뿅따이는 누굴까? 마법사들이 지능을 선호하니 반지와 스카프에 지능을 부여했겠지만 이 시점에서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아직 이데아 초기인데 마법 부여를 이렇게까지 익혔다면 그도 마스터를 바라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슈메이비는 여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다 마법의 천을 꺼냈다. 이제 이것에 희망을 걸어 보는 수밖에 없다. 분명 구입한 스카프에도 지능 옵션이 붙어 있는 걸 확인했다. 잘만 하면 이 마법의 천으로 부족한 지능을 최고조로 끌어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슈메이비는 식음을 전폐하고 바느질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 * *
 
 승혜는 마법 공단 내에 있는 가이아 여신의 신전에 들러 아주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언제 봐도 신전은 기분이 좋다. 다른 어떠한 감정보다도 그냥 신전이 좋았다. 마냥 좋다.
 승혜는 콧노래를 부르며 여관방 문을 열었다.
 “꺄악!”
 쓰레기 폭탄이라도 맞았는지 방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무리 도둑이 들었어도 마음먹고 이렇게 하지 않는 이상 힘들 것이다.
 승혜는 불안한 눈으로 방 안을 훑다가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분홍색 신발 모양의 물건과 바늘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슈메이비 님······ 흐억!”
 이불도 아닐진대 천 쪼가리의 무덤에 파묻혀 눈만 허공에 뜬 바늘을 응시하고 있는 슈메이비의 모습에 승혜는 말문을 잃었다.
 “이게 대체······.”
 승혜의 말에도 슈메이비는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진이 다 빠져 버렸다고 해야 하나.
 처음 시도는 좋았다. 분명 마법 처리를 한 와이번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는 옵션이 붙었고, 오우거의 가죽만큼의 방어력도 동시에 가졌다. 게다가 그보다도 가벼우니 이런 재료는 슈메이비로서는 꿈에 그리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놈의 옵션이 문제였다.
 신성력. 정령력. 힘. 지구력. 스태미나. 심지어 도주 스킬 +1까지 붙었다.
 승혜는 슈메이비를 바라보다가 쓰레기 더미에서 아름다운 로브를 집어 들었다.
 “어머. 어쩜!”
 슈메이비가 자신의 사이즈에 맞춰 물건을 만들다 여의치 않자 막장까지 가서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만들다가 탄생한 로브였다. 로브라고는 하지만 원단은 와이번의 가죽. 그 강인한 느낌과 분홍색의 여성스러움. 섬세한 금색의 자수가 돋보이는 너무도 아름다운 로브였다. 짧은 치마의 길이와 배꼽이 훤히 보이는 노출이 조금 문제였지만 승혜는 이미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다.
 “슈메이비 님······.”
 승혜는 로브를 손에 꽉 쥐고 슈메이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떻게든 이 로브를 입어 보고 싶었다. 로브의 능력치나 옵션은 전혀 상관 없이 아름다운 로브에 순수하게 마음이 쏠렸기에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입어 보고 싶었다.
 신관이지만 유저는 뭘 입어도 상관없다는 것이 신전의 방침인 이상, 아름다운 옷에 마음이 가는 건 여자인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슈메이비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승혜의 귓가에 울렸다.
 “거기 찾아보면 그거랑 세트로 만든 장갑이랑 부츠, 티셔츠도 있어요. 마음에 들면 가져요.”
 승혜는 활짝 웃으며 놀라운 속도로 쓰레기 더미를 뒤집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정말! 금방 올게요!”
 쾅!
 거칠게 닫히는 방문 소리에 하마터면 바늘이 떨어질 뻔했다. 이젠 로브 하나 만드는 것도 2시간 이상 걸리지 않는다. 워낙에 마법 처리를 한 가죽의 상태가 좋아서인 까닭도 있지만, 바느질을 할 때의 슈메이비의 집중력은 그 어느 현자도 울고 갈 판이었다.
 공짜로 준다는 게 평소 슈메이비로서는 의외의 일이라 할만 했지만, 지금은 그냥 모든 게 귀찮고 같이 여행을 하는 일행이니까 마음이 좀 무뎌진 것이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승혜가 들어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과 대조되는 눈부시게 하얀 피부. 손등까지 내려오는 레이스 달린 소매. 분홍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티셔츠와 그 위로 걸쳐진 단단한 느낌의 로브.
 기사의 상체 갑옷과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허리가 훤히 보이는 통에 섹시한 느낌까지 준다.
 게다가 가슴에는 가죽 원단으로 원형을 잡아 버린 탓에 크기가 변형되지 않아 본래 그녀의 가슴 크기보다 2배는 풍만해 보였다. 무릎 위로 한껏 올라가 아슬아슬한 치마와 종아리부터 보호해 주는 롱부츠는 그녀의 장갑과 함께, 꿈에나 나오는 여신의 전사가 저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었다.
 슈메이비조차도 승혜의 모습에 너무도 놀라 염력이 풀려 버렸고, 이데아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누군가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재봉이라는 것은 애초에 이런 것이었어. 물건을 보지 말고 사람을 봤어야 했는데. 이렇게 간단한 것을 몰랐구나.
 슈메이비는 뭔가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허탈한 얼굴로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너무 굉장해요! 방어력이랑, 예쁘고, 또 신성력도 붙어 있고 힘도 있고, 또, 또, 세트 효과에 매력까지 있어요!”
 아가씨 지금 너무 흥분한 거 알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슈메이비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승혜의 얼굴을 보면서 재봉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한 고생은 가치가 있었다. 비록 인간을 믿지 않고, 특히 여자라면 더더욱 기피하는 슈메이비였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장인의 혼이 깃든 마법의 와이번 가죽 장화를 만들었습니다.
 -재봉 스킬을 마스터하였습니다.
 -경험치가 9% 올랐습니다.
 -재봉을 마스터하였기에 지금부터 만드는 모든 물건에는 슈메이비 님의 이름이 들어가게 됩니다.
 -재봉을 마스터하였기에 지금부터 만드는 모든 물건에 원하는 옵션을 원단이 가진 최고치까지 끌어내어 부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마음가짐. 잊지 마세요. 위대한 마스터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아? 아······ 아하하······.”
 슈메이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고를 정지했다. 그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그의 눈앞에는 분홍색 꽃망울들이 아른거릴 뿐이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거지라고 NPC 꼬마들에게 돌도 맞아 보고, 유저들이 무시하는 눈빛을 보내도 참았었다. 레벨을 올리며 모은 포인트도 날려 먹었고, 몇 달의 시간 동안 바느질만 했다.
 “슈메이비 님?”
 승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슈메이비의 눈앞에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와락!
 “꺄악!”
 슈메이비가 느닷없이 승혜를 껴안아 버리자 승혜가 비명을 질렀다.
 “으하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마스터다!”
 철석!
 미친놈처럼 웃어 대다가 승혜에게 따귀를 맞고 정신을 차린 슈메이비가 화끈거리는 볼을 부여잡았다. 그럼에도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승혜는 슈메이비의 손이 자신의 허벅지로 향하자 그 오싹한 느낌에 따귀를 날리긴 했지만 곧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짧은 치마 탓에 예민해져 버린 것이 일의 화근이었다.
 “미, 미안해요.”
 슈메이비는 승혜의 말에도 대꾸 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실실 웃기만 했다.
 그렇게 충격이 컸나. 이렇게 예쁜 옷까지 만들어 줬는데. 어쩜, 어떻게······ 몰라!
 승혜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일단의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엥? 뭐야! 재봉 공장이라도 차린 거야? 헉! 누구신지?”
 “뭐예욧?”
 키파라와 승혜의 소동으로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슈메이비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일행들도 승혜의 모습에 어찌나 놀랐던지 자신들도 뭔가 쓸 만한 게 없을까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소동을 일으켰지만, 분홍색이 일단 근육질의 남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과 괴상한 옵션이 붙은 탓에 많은 수확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가죽 아이템보다는 방어력이 높은 철이나 판금을 선호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키파라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당장 출발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걸? 어떻게 할까? 도련님이 결정해야지?”
 슈메이비는 미안한 얼굴로 일어서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걸로 해요. 가는 속도를 좀 높인다면 부산까진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죠?”
 “마음만 먹으면 이틀이면 가는 거리야. 잘됐군! 그럼 다들 내일 아침에 보자구! 아! 레이디. 저와 함께 데이트라도?”
 승혜는 새침하게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됐거든요!”
 
 * * *
 
 참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전을 출발해 이제 하루 거리만 더 가면 부산인데 이곳까지 오면서 온 정성을 쏟은 남자용 상하의와 방어구들, 망토 두 벌이 하나씩 가닥을 잡아 갈수록 승혜가 입고 있는 옷과 세트로 보인다.
 커플 티도 이것보단 심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라 대놓고 입지도 못했다.
 마지막 남은 망토의 자수만 완성하면 끝이 나는 상황에서 이런 시답잖은 이유로 고민을 한다는 자체가 웃긴 일이었지만 일단 만들고 보자는 생각에 자수에 집중했다.
 
 -슈메이비의 마법 와이번 가죽 망토를 만들었습니다.
 -부여할 옵션을 선택해 주십시오. 선택하신 옵션에 따라 최대치의 능력이 부여됩니다.
 -경험치가 8% 올랐습니다.
 
 슈메이비는 옵션으로 지능을 붙이고 +3이라는 숫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맞은편에 앉은 승혜와 눈이 마주쳤다.
 흠칫.
 승혜는 저 망토가 참으로 자신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조금 커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런 건 이미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 아른거리는 분홍색이 이미 마약과도 같이 승혜의 뇌리에 자리 잡아 버렸다.
 저걸 입으면 뒤태가 더 살 텐데······.
 승혜가 군침을 삼켰다.
 가이아 여신이 환생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애롭고 고지식한 20대 초반의 여성이라던 프로필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눈빛을 보이는 승혜를 보며 슈메이비는 식은땀을 닦고 주머니에 망토를 집어넣었다.
 승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전부터 드리려다 못 드린 건데, 원래 세트 아이템은 5개 이상 차야 진정한 옵션이 붙어요. 이거······ 받아요.”
 주머니에서 조금 전의 망토보다 크기가 작은 망토를 꺼내 승혜에게 건네는 슈메이비를 보며 키파라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좋을 때구먼!”
 승혜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망토를 쥔 손을 풀지 않았다. 이 분홍빛, 정말 매혹되다 못해 중독될 지경이었다. 어떻게 처리를 한 건지 때도 안 탄다. 늘 은은한 광택까지 머금어 거울을 볼 때마다 헤어날 수가 없다.
 “신성력 +3! 세트 효과 매력 +3! 슈메이비 님!”
 그 크지도 않은 승혜의 눈이 호수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그래, 너 다 가져라.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린 슈메이비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키파라에게 물었다.
 “키파라 님. 혹시 부산 근처에 좀 안전하면서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던전이나 몬스터 부락이 있나요?”
 키파라는 의외라는 듯 슈메이비를 쳐다보았다.
 “있기는 있지. 근데 몬스터 그림자라도 보이면 100리 밖에서 도망갈 것 같은 도련님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슈메이비는 비꼬는 키파라의 말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말했다.
 “일정이 좀 길어지겠지만 부산에 들러 일을 마무리하고 한 일주일 정도 제 사냥 좀 도와주시면 어떨까 하구요. 약속 없으시면 시간 좀 내 주세요. 보수는 100골드씩 드릴게요. 저 11렙이라서 레벨은 금방 오를 것 같은데, 어때요?”
 키파라는 다른 일행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냉큼 껄껄 웃으며 수락했다.
 “지금까지의 정이 있지, 도련님이 도와 달라는데 야박하게 거절하면 쓰겠나? 핫핫. 내 이 한 몸 불태워서라도 자네 경험치에 보탬이 되겠네!”
 다른 이들의 표정도 키파라와 별반 다르지 않아 슈메이비는 마음이 놓였다.
 이들과 헤어지게 되면 언제 또다시 이런 행운이 올지 기약이 없었다.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고마워요, 모두.”
 “으허헛. 우리 사이에 고마운 게 다 뭔가! 내가 더 고맙네!”
 언제부터 저 키파라의 말투가 고분고분해졌는지, 이래서 돈이 무섭다는 거다.
 키파라의 행동이 재미있는지 일행들도 밝은 얼굴이 되었다. 긴 여행에는 분위기 메이커가 하나쯤은 꼭 필요한 법이다. 이렇게 소소한 것을 하나씩 알아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양식이 아닐까.
 슈메이비는 앞으로의 사냥에 대해 생각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시작이다.
 
 * * *
 
 이데아 대한민국 부산은 서울만큼이나 규모도 크고 활기가 넘쳤다.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엔 희망과 자부심이 가득했고, 미남 미녀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건 승혜였다.
 “어머! 언니! 그 옷 어디서 산 거예요?”
 “님! 기다려요! 제가 그 옷 사면 안 될까요?”
 “너무도 아름다우십니다. 결례가 안 된다면 친구 등록이라도······.”
 “언니! 사진 한 장 찍을게요!”
 승혜는 부담스러움에 회피하던 동작도 보여 주었지만 그것도 한두 번 반복되다 보니 이제 거의 즐기는 단계까지 와 버렸다.
 “호호호! 죄송해요. 제가 신을 모시는 사제라서 신의 가호를 받은 물건을 함부로 다룰 수가 없어요.”
 언제부터 신의 가호가 붙었을까? 옵션으로 신성력이 붙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냐?
 세트 효과로 인해 매력이 과다하게 붙어 버린 탓에 그녀의 모습엔 설명할 수 없는 후광이 비치는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걸 신의 가호로 포장해 버리는 승혜를 보며 슈메이비는 머리를 흔들었다.
 곧 저것과 커플 옷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복장을 자신도 입어야 한다니 벌써부터 앞날이 두려워졌다.
 “그럼 대전에서처럼 오늘 하루는 각자 내일부터 할 사냥에 대해 준비들도 하시고 자유 시간을 가진 뒤에 내일 아침에 여관에서 뵙죠.”
 모두가 흩어지는 상황에서 승혜는 끝까지 남아 슈메이비 옆을 지켰다.
 “승혜 님?”
 승혜는 환하게 웃으며 슈메이비의 팔을 잡아끌었다.
 “전 오늘 슈메이비 님이랑 같이 다니려구요. 절대 데이트 아녜요! 그냥······ 옷도 만들어 주셨고······.”
 얼굴이 붉어지는 승혜의 모습에 슈메이비는 뜨악했지만 잠시 후 이어진 말에 몸이 굳어 버렸다.
 “그 왜 있잖아요, 슈메이비 님도 저랑 같은 옷 만드신 거. 오면서 봤는데, 입어 보시면 안 돼요? 왜 만들어 놓고 안 입어요? 그것도 참 예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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