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9서클 영주님 [E](종료230804)

9서클 영주님 1권 (1)

2019.02.08 조회 16,215 추천 103


 #프롤로그
 
 
 
 
 
 평원의 중심에 한 노인이 서 있다.
 흰 수염을 길렀고, 장포로 몸을 둘렀으며 한 손에는 마력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있다.
 노인은 하늘을 올려봤다.
 세월을 간직한 깊은 눈빛이 회한을 담고 있었다.
 노인이 바라보는 하늘은 비라도 쏟아낼 것처럼 어두웠다.
 콰르르릉!
 번개가 동북부에서 나타났다.
 세상을 환히 비춘 섬광은 몰려오는 기사들을 비추었다.
 콰르릉!
 이번에 내리친 번개는 남서 방향을 비췄는데, 노인과 같이 장포를 두른 마법사들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평원의 중앙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위협적이고 살기등등한 모습이었으니 좋은 뜻으로 나타난 건 아닌 듯 했다.
 허나 노인은 편안한 모습이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이구나.”
 지긋지긋한 전쟁도 이제 마지막이다.
 한 평생 굴렀고,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굴레에서 해방된다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그사이 접근한 기사들이 순식간에 노인을 에워쌌다.
 살기등등한 분위기 속에 중장갑을 두른 은기사가 나와 외쳤다.
 “마법사 알센 래터번! 구스트 황제 폐하를 시해한 죄명으로 즉결 처형을 내리겠노라!”
 외치는 그와 에워싼 기사들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사이 마법사들도 도착했다.
 그들 중 한 늙수그레한 노인이 앞으로 나와 고함을 질렀다.
 “알센! 이 미친 자식! 팔레온 마도사님을 죽이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더냐! 죽인다! 죽여버리겠다!”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말에서 내린 마법사들이 즉각 마법진을 그렸다.
 검을 뽑은 기사들의 검신에는 오러가 일렁였고, 주변은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변모했다.
 포위당한 노인. 알센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를 향해 외쳤던 마법사가 이를 갈았다.
 위기 속에서도 태평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곧 죽을 마당에 웃음이 나오나?”
 “나올 수밖에. 드디어 내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이다.
 위화감을 느낀 기사가 인상을 그리며 물었다.
 “퍼즐? 그게 무슨 소리냐?”
 알센이 나직이 말했다.
 “사는 게 지겨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자니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한 가지 계획을 세웠지.”
 계획이란 말에 포위한 사람들이 흠칫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8서클 마도사 알센 래터번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심상찮음을 느낀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다.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계획이라는 게 무엇이냐?”
 “피와 비명으로 점철된 전쟁에서 물러나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자연을 관찰하고 세상을 연구하며 조용히 지내려 했다. 그러자니 나와 얽힌 인연과 숙명이 가만히 놔주질 않더군. 그래서 궁리했지. 어떻게 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방법은 뻔하지 않은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모든 인연을 끊어 내야지.”
 알센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알아냈다. 과거로 돌아갈 방법을 말이다.”
 쿵!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기분이다.
 모두가 입을 벌렸다.
 마법사가 말을 더듬었다.
 “과, 과거로 돌아간다고? 그게 가능한가?”
 “이론은 가능하다. 막대한 마력을 응축하여 폭발시킨다면 시간과 공간이 일그러져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그 균열을 지나친다면 시간을 가로지를 수 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알센은 기사와 마법사 무리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문제는 이 이론을 실현시키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한 번에 뽑아내야 했지. 구스트와 팔레온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소드마스터와 8서클 마도사의 에너지라면 충분하니까. 그래서 죽였다.”
 듣다 못한 기사가 고함을 질렀다.
 “이 미친놈! 그깟 목적을 위해 제국의 황제 폐하를 죽인 것이냐?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 거냐?”
 “잘 안다. 구스트는 배부를 줄 모르는 돼지였어. 세상을 끝없이 먹어치우려고 했지. 가만히 두었다면 대륙 전체를 피로 물들였을 것이다. 팔레온도 마찬가지다. 욕심이 많은데 세력도 강하고 힘도 있다. 그 두 놈은 죽는 게 세상을 위한 길이야.”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저지른 결과에 확신이 있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뿐더러, 어차피 할 생각도 없었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눈을 맞췄다.
 한때는 적이었으나 이제 공동의 적을 막기 위해 힘을 합쳐야 했다.
 마법사가 으르렁거렸다.
 “네놈의 정신 나간 이론은 여기서 끝날 것이다.”
 “죽어라! 미친 마법사!”
 기사들이 진형을 펼치고 서서히 포위망을 좁혔다.
 마법사들은 일제히 캐스팅을 일으켰다.
 알센은 그런 그들을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너희들이 마지막 퍼즐이다.”
 그는 바닥을 향해 지팡이를 때렸다.
 쿠궁!
 갑자기 평원에 지진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흠칫하는 사이, 바닥에 붉은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닥을 둘러보던 한 마법사가 비명을 질렀다.
 “마법진이다!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어!”
 “빨리 놈을 죽여!”
 기사들이 오러를 뿌리고 마법사들의 다채로운 마법이 쏟아졌다.
 콰아아앙!
 오러가 알센의 몸을 때렸고, 마법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됐다!”
 외친 기사의 얼굴이 이내 일그러졌다.
 알센은 멀쩡했다.
 은은한 붉은 기류가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알센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을 재물로 나는 다시 태어나리라.”
 심상찮음을 느낀 사람들이 물러서려 할 때, 갑자기 온몸에 힘이 쑥 빠졌다.
 마법사가 외쳤다.
 “에너지 드레인이다!”
 8서클 마법. 에너지 드레인.
 피어 오른 노란 아지랑이가 사람들을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체력과 마력이 쏜살같이 빨리기 시작하자 모두가 마법진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 신세다.
 드드드드!
 지면에서 거대한 마력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법진에 새겨진 룬어 위에 오롯이 선 반투명한 마력석이 새하얀 빛을 토하자 사람들의 몸이 점점 미라처럼 말라갔다.
 “살려줘!”
 “으아악!”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알센은 지팡이를 역수로 쥔 뒤, 마력석을 스스로의 심장에 박았다.
 힘을 머금은 마력석은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심장은 마법사에게 아주 중요한 신체 부위다.
 기사들이 배꼽 아래에 뱀이 똬리를 틀 듯 마나를 모은다면, 마법사의 마나는 심장을 기점으로 고리를 이룬다.
 심장이 으스러졌으니, 고리가 붕괴를 일으켰다.
 폭주한 마법진이 폭발하며 그 위에 오롯이 선 마력석도 하나둘씩 깨졌다.
 콰아아앙!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그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
 알센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실패해도 좋고, 성공해도 좋다.’
 피비린내 나는 인생을 마감할 수 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모든 것을 끝마친 알센은 죽어가는 가운데 미소를 띠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의 시작은 죽음이었다.
 
 
 
 #1. 과거 그리고 현재
 
 
 
 
 
 잿빛 하늘에 까마귀 무리가 하늘을 맴돌며 운다.
 까악! 까악!
 까마귀가 내려다보는 지상은 먹이 천지였다.
 낮은 언덕이 겹겹이 펼쳐진 가운데 시체들이 누워 있다.
 부러진 깃발, 여기저기 널브러진 무기와 장비.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살아 숨 쉬는 생명체는 없었다.
 배회하던 까마귀가 마침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종종걸음으로 시체들 사이를 지나던 까마귀는 마침내 마음에 드는 먹이를 발견하고 부리로 툭툭 건드렸다.
 그러나 까마귀는 먹잇감을 잘못 선택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시체의 손이 벼락같이 움직여 까마귀의 목을 움켜쥐었다.
 까악! 까악!
 놀란 까마귀가 열심히 날갯짓을 했지만 손아귀는 요지부동이다.
 투둑!
 힘 준 손은 기어이 까마귀의 목을 부러트렸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알센은 까마귀를 죽인 채,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가 굳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까마귀의 목을 부러트린 자신의 손.
 숯 검댕에 오물이 묻어 더러웠지만, 주름은커녕 탱탱했다.
 알센은 까마귀를 내려놓고 얼굴을 더듬었다.
 확연하게 느껴지는 젊은 피부.
 그의 눈에 희열이 감돌았다.
 ‘해냈다! 해냈어!’
 돌아왔다.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밀어붙인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성공하고 말았다.
 알센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토록 열망했던 순간이 현실이 되자 마음이 울컥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익숙한 냄새가 알센의 코끝을 자극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겹겹이 쓰러진 시체들과 피 웅덩이.
 고약한 냄새들을 맡자니 감격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왔어도 여전히 전쟁터군.’
 알센은 정신을 일깨웠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만약 돌아오게 된다면 실행하자고 마음먹었던 계획을 이제 실천할 때이다.
 알센은 누운 채, 동태를 살폈다.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제외하곤 사방이 고요했다.
 전투가 끝난 지 조금 되었는지, 시체들은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부서진 깃발의 문양을 유심히 살피며 기억을 더듬었다.
 ‘알리고레 남작과 테페스 자작의 영지전이군.’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여전히 생생했다.
 처음 치른 전쟁으로 어찌나 치열했던지 생존자가 자신 혼자였다.
 알센은 눈을 빛냈다.
 ‘지금부터 내 인생을 바꾸자.’
 이골 난 전쟁에서 드디어 빠질 기회를 얻었다.
 몸을 일으킨 알센은 바닥에 놓인 마나 지팡이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마법사에게 마나 지팡이는 신분증이나 다름없다.
 그는 지팡이를 쥔 채, 적당한 시체를 물색했다.
 마침내 찾은 것은 젊은 청년 시체였다.
 연령대와 신체 조건이 비슷해 딱 자신이 찾아 헤매던 대상이다.
 알센은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시체의 옷과 바꿔치기를 한 뒤, 지팡이를 쥐여 주고 얼굴을 훼손했다.
 ‘베르뉴 마탑의 알센 래터번은 여기서 죽었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마법사의 신분증인 마나 지팡이를 쥐고 있으니 지레 짐작하고 속아 넘어 갈 것이다.
 알센은 죽은 시체의 옷을 갈무리하다 바닥에 툭 떨어진 물건을 들어 올렸다.
 ‘C급 용병 루터.’
 죽은 시체의 신분증이다.
 ‘이름이 마음에 드는군.’
 자신은 죽은 걸로 처리했으니, 이름을 그대로 쓸 수 없는 노릇이다.
 ‘네 이름은 잘 쓰도록 하마.’
 알센이 아닌 루터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긴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녹슨 철검을 들고 그대로 전장을 떠났다.
 
 알센 래터번. 이제는 루터의 이름으로 살기로 한 그는 인적 없는 숲 속으로 향했다.
 넓은 잎사귀에 담긴 이슬로 목을 축인 뒤,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을 감고 몸 상태를 점검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2서클 중급 마력을 지녔군.’
 3서클 마법도 간간이 쓸 수 있는 실력이다.
 ‘이대로는 부족하다. 원래대로라면 난 마탑으로 귀환했겠지만 새 인생을 선택했으니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의 상태로는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최소 4서클은 되어야 어디든 어깨를 펴고 다닌다.
 루터는 고민했다.
 ‘내가 가진 지식이라면 처음부터 아예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른바 신체의 재구성.
 ‘문제는 마력석이 제법 소모된다는 점인데.’
 현재 상태로 마력석을 구하기가 어렵다.
 ‘조금 뒤로 미루자. 하지만 그건 할 수 있겠군.’
 바닥의 나뭇가지를 들어 올린 루터는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은 마법사의 지식을 나타내는 일종의 지표다.
 어떤 룬어를 주입하느냐에 따라 마법진의 능력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한 가지 룬어를 삽입하면 마법진을 다룰 수 있다 하고, 두 가지는 해박하다 표현하고 세 가지 이상은 천재라고 한다.
 그런데 루터가 새기는 마법진은 최소 10가지 이상의 기능을 담은 룬어가 깃들어 있다.
 오묘하고 복잡한 룬어는 잘못 입력하면 충돌 현상이 일어나 심하면 폭발하거나 마법사를 해칠 수 있다.
 하지만 루터는 8서클 마도사의 지식을 담고 있는 상태다.
 그의 손길은 유려하며 거침이 없었고, 또한 완벽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됐다.”
 마법진을 완성한 루터는 만족스럽게 바닥을 내려다봤다.
 해당 마법진은 마나 수련을 증폭 시켜준다.
 만약 다른 마법사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놀라 까무러쳤을 것이다.
 마나 흡수율을 돋우는 수련 마법진은 아무나 만들 수 없다.
 고위 마법사들도 머리를 끙끙 싸매며 일평생을 연구하는 데 바치는 이 마법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마탑의 흥망성쇠가 갈릴 정도다.
 아무리 유명한 마법사가 마탑을 세워도 수련 마법진이 없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다.
 수련 마법진은 마탑을 이루는 근간이며, 또한 그 어느 누구도 만들지 못하는 보물급 마법진이다.
 그런데 루터는 그 수련 마법진을 눈 깜빡할 새에 그려버렸다.
 마법진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루터는 완성한 마법진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마법진이 하얀 빛을 띠며 일렁였다.
 그 위에 주저앉은 그는 곧장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이 배웠던 베르뉴 마탑의 마나 호흡이 아닌, 우연히 만난 주술사가 가르쳐준 수련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정신을 집중하자 마음이 편안해지고 머릿속이 맑아진다.
 주술사의 말에 따르면 영혼을 맑게 하는 심신수련법으로 단기간에 큰 효과는 보지 못해도 꾸준히 익히다 보면 영혼과 신체가 진정한 하나가 되어 의지만으로 행위가 가능하다 했다.
 그 뜻을 이해 못 했지만 명확한 사실은 이 수련법이 마력을 순도 높은 마력으로 전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오감을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그는 말년에 이 수련법을 얻어 마도사가 되었다.
 ‘지금부터 시작한다면 어쩌면 9서클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대륙 역사상 8서클은 간간이 나왔어도 9서클은 없었다.
 9서클은 드래곤이나 가능할 법한 마도의 궁극이다.
 하지만 루터는 현실적으로 접근했다.
 그는 자신이 도전하기에 9서클은 그리 높은 벽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수련을 끝마친 루터는 즉시 자신의 마력 상태를 점검했다.
 2서클 중급 마력은 미미하게 늘어 나 있었다.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아쉽지도 않았다.
 ‘이만하면 되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어차피 심신수련법은 꾸준히 훈련해야 효과를 본다.
 게다가 애초에 목적이 마나 호흡법이 아니다.
 ‘마나호흡법은 베르뉴가 아닌 내 방식으로 간다.’
 베르뉴 마탑은 원소 계열 마법 중에서도 대지 마법에 특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 외 다른 분야에선 젬병이다.
 루터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마나 호흡법을 만들어 모든 분야에 특화 된 호흡법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신체 재구성 이후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건데.’
 신체 재구성을 하려면 마력석이 필요하다.
 루터는 지금 자신이 마력석을 쉽게 구할 방법을 떠올렸다.
 온갖 방법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루터는 그 중에 하나를 골랐다.
 ‘북쪽으로 가자.’
 북쪽의 올슨 왕국과 바스코 제국의 접경 지역으로 가야한다.
 그곳에 몬스터가 있다.
 그리고 몬스터는 오염된 마력석을 지니고 있다.
 루터는 몬스터 영역에서 새 출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비탈길을 따라 마차 행렬이 지나고 있다.
 마차의 옆에는 걷거나 말에 올라 탄 용병들이 삼엄한 눈빛으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대의 대장인 듀크가 마차를 세웠다.
 마차가 멈추니 풍채 좋은 상인 대표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오?”
 “좁은 산길 지형입니다. 지금부터는 정찰병을 보내 주변 수색을 한 후 지나가야 합니다.”
 “곧 영지에 도착할 텐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오?”
 “테페스 자작령은 가뭄에 기근이 들어 산적과 도적이 횡행하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끄응. 알겠소.”
 마차 행렬이 움직임을 멈추고 정찰병이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수색한 끝에 이상 없다는 신호를 받고서 마차가 출발한다.
 그러나 산길은 길었고, 마차는 수시로 멈추었다.
 참다못한 상인 대표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대로 가다간 날이 지나서야 도착하겠소.”
 “안전이 우선입니다.”
 “납품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온갖 트집을 잡고 대금을 깎을 거요. 그렇게 된다면 당신들과 맞춘 계약금은 맞추지 못할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조금 서두릅시다.”
 듀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면 서두르겠습니다.”
 듀크는 정찰병에게 서두르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정찰병의 수색 반경이 좁아졌고 마차는 속도를 냈다.
 곧 언덕길의 끝이 곧 보였다.
 여기만 넘으면 탁 트인 평야라 크게 주의할 건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파앗!
 “컥!”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정찰병의 목을 관통했다.
 그 모습을 본 듀크가 목소리를 높였다.
 “적이다! 전투 준비!”
 쿠르르릉!
 그의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언덕 끝에서 산적 여럿이 바위를 아래로 밀기 시작했다.
 크지는 않지만 마차 이동하는 상단 행렬의 움직임에 지장을 주기 충분했다.
 “화살을 쏴라! 마차를 옮겨!”
 듀크가 분주히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위협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슈우우욱!
 좌우의 가려진 덤불에서 위협적인 파공성이 들려왔다.
 듀크는 오랜 경험으로 그게 무슨 소린지 정확히 알아차렸다.
 “모두 엎드려!”
 고함을 지른 그가 바싹 몸을 낮추었다.
 콰르르릉!
 거대한 나무 기둥이 좌우에서 튀어나와 상단 행렬을 덮쳤다.
 말의 머리를 부수고 마차를 박살냈다.
 박살난 마차의 파편이 탑승한 상인들의 몸을 찔렀다.
 “으아아악!”
 “살려줘!”
 곳곳에서 비명이 터지고 동시에 비탈길을 따라 바위가 내려왔다.
 굴러떨어지면서 속력이 붙은 바위가 용병을 삼켰다.
 퍼억!
 나무 기둥을 피하느라 엎드렸던 용병의 머리가 곤죽이 되었다.
 바위는 뒤에 있던 용병 둘을 더 저승으로 보낸 뒤 그대로 아래로 내려갔다.
 와아아아!
 숨어 있던 산적이 칼을 쥐고 달려들었다.
 “모두 죽여!”
 “막아라!”
 차차차창!
 산적과 용병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용병은 숙달된 검사였지만, 산적은 서툴렀다.
 그러나 숫자의 차이가 세 배 가까이 되었다.
 스무 명의 용병과 오십이 넘는 산적의 격전이 치열해졌다.
 그때, 마차 행렬 뒤로 한 청년이 달려왔다.
 그는 이제 막 목이 베일 것 같은 용병을 뒤로 잡아당겨 구한 뒤, 검을 휘두르던 산적의 목을 찔렀다.
 산적들이 새로이 나타난 적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바닥이 미끄러웠는지 줄줄이 넘어졌다.
 쓰러진 적을 죽이는 것만큼 쉬운 게 없다.
 청년은 망설임 없이 산적의 몸을 꿰뚫었다.
 후방이 힘을 내자 용병들도 분투하기 시작했다.
 “도망쳐!”
 보다 못한 산적들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용병들은 산적을 쫓지 못했다.
 의뢰인인 상인들 대부분 심한 부상을 입어 그들을 돌봐야 한다.
 “부상자를 치료해라!”
 신음하는 부상자들을 돌보는 사이 듀크가 청년에게 다가갔다.
 “도와주어 고맙네.”
 “같은 용병끼리 돕고 살아야죠.”
 이채를 발한 듀크가 악수를 청했다.
 “코엘로 용병단 소속의 듀크일세.”
 청년은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C급 용병 루터입니다.”
 
 루터는 전쟁에 이골이 났다.
 어느 정도냐면 전쟁에서 겪을 수 있는 무기는 모조리 다룰 줄 알았다.
 마법사가 근거리에 취약하다는 정론은 루터와 같이 전투에 숙달된 자들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경험이 풍부하니 어지간한 무기는 가지고 놀 정도다.
 그런 루터가 산길을, 그것도 전쟁으로 치안이 험악한 영지에 홀로 속 편하게 다닐 리가 없었다.
 산 속만큼 기습에 취약한 곳이 없다.
 은폐, 엄폐는 물론이거니와 함정을 만들기도 쉬웠다.
 그래서 때를 기다렸다.
 누군가 여기를 지나가기를.
 마침 상단 행렬이 나타났고 루터는 그들을 뒤따랐다.
 역시나 산적이 기습했고, 그는 자연스럽게 용병들을 지원했다.
 빚을 졌으니 요구를 하더라도 어려운 부탁이 아닐 것이다.
 루터의 구함에 위기에서 벗어난 상단 행렬은 현장을 지키기로 했다.
 말이 죽었고, 마차가 부서졌다.
 부상자가 생겨났으니 이제 자력으로 산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정찰병이 영지로 향했으니, 내일쯤이면 지원 병력이 도착할 것이다.
 분위기는 우중충했다.
 용병들은 다섯 명의 동료를 잃었고, 상인은 대부분이 부상에 두 사람을 잃었다.
 듀크는 상인 대표를 힐난하고 싶었다.
 그가 서두르자고 재촉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상인 대표에게 화낼 수 없었다.
 그는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은 채, 통곡하고 있었다.
 성급함으로 아들을 잃고 말았으니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었다.
 상인을 일별한 듀크는 루터에게 다가갔다.
 용병이 줄어든 지금 루터의 존재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소속된 용병단이 없으면 우리 쪽으로 오는 게 어떤가? 보수는 섭섭지 않게 해주지.”
 듀크는 전투 중에 루터의 검 다루는 솜씨를 눈여겨봤다.
 단조롭지만 실용적이다.
 소위 말하는 실전용 검술이었다.
 특히나 정확하게 적의 급소만을 노리는 솜씨가 발군이었다.
 그는 루터의 검술을 높이 평가했다.
 루터는 듀크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했다.
 “유감입니다. 목적지가 따로 있습니다.”
 “거기가 어딘가?”
 “올슨 왕국의 북부에 갈 생각입니다.”
 듀크는 그의 목적을 간파했다.
 “몬스터군. 맞나?”
 “맞습니다.”
 “돈이 목적이면 몬스터는 차선책이네. 자네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쟁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어. 지방 영주는 병력을 모으려 앞 다투어 용병들과 계약하고 있고 상인들도 물자를 옮기느라 바빠지지. 상인을 호위하는 일만 해도 몬스터를 통해 버는 것보단 훨씬 사정이 나을 걸세.”
 몬스터 사냥은 한때 각광받았으나 지금은 소수의 영역이다.
 고블린이나 오크는 돈이 안 될 뿐 더러, 비싼 몬스터는 혼자 잡는 게 불가능하다.
 대부분 대규모 토벌 작전에 참가하는 게 전부였으니 활약을 해도 상단 호위보다 보수가 적다.
 그러니 용병들은 몬스터에 관심이 드물었다.
 듀크의 조언은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루터의 처지를 몰랐다.
 루터는 전쟁 소리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지겨웠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몬스터를 잡으며 조용히 지내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그러니 듀크의 조언은 그에게 와 닿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좋은 경험 하는 셈 치지요.”
 듀크는 고집을 꺾지 않는 루터가 못내 아쉬웠다.
 “젊은 친구니 뭐든 겪어보는 게 좋긴 하지. 아쉽군. 자네 같은 인재는 구하기 힘든데 말이야.”
 듀크는 침착하고 차분한 루터가 계속 마음에 들었다.
 한 무리의 대장 직을 맡고 있으니, 사람 보는 눈이 생겼다.
 루터가 동료라면 안심하고 등 뒤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루터는 그의 바람을 뒤로하고 용건을 꺼냈다.
 “테페스 자작령에서 올슨 왕국의 북부로 향하는 상단이 있습니까?”
 “직행은 없지만 근방으로 경유하는 곳은 있네. 원한다면 연결시켜 주지.”
 “고맙습니다.”
 듀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용병끼리 돕고 살아야지.”
 
 다음날 아침.
 테페스 자작령에서 출발한 병사들이 도착했다.
 부상자와 시신을 옮기고 영지로 향했다.
 듀크는 루터의 사정을 급선무로 해결해주기로 했다.
 루터는 듀크의 생명의 은인이다.
 만사 제치고 팔을 걷어붙이니 일감이 금방 잡혔다.
 “에넥스 상단이 올슨 왕국의 챈들러 영지로 간다고 하네. 챈들러는 남부 지방이지만 경유하는 칸델 영지에 도착한다면 북부 영역까지 단숨에 갈 걸세.”
 “언제 출발합니까?”
 “마침 운이 좋았어.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는군. 자네 자리도 만들어 놨네.”
 듀크는 현 일대의 상단 호위를 맡으며 신용을 쌓았다.
 그의 신용은 곧 보증이 되었다.
 루터는 그를 도와주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신세를 졌군요.”
 “서로 비긴 셈 치지. 만약 몬스터 사냥을 하다 아니다 싶으면 코엘로 용병단을 찾아 내 이름을 대게. 언제든 환영하지.”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듀크는 루터에게 자신의 인상을 좋게 심어 나중에 함께하기를 바랐다.
 
 에넥스 상단을 찾은 루터는 선수금으로 10골드를 받고 여관에 묵었다.
 ‘가급적 마법은 드러내지 말자.’
 괜히 마법을 사용했다간 베르뉴 마탑에 발각될 수 있었다.
 루터에게 베르뉴 마탑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마법을 가르쳐준 곳이지만, 동시에 일평생을 전장으로 떠민 곳이기도 했다.
 베르뉴 마탑이 그에게 지워준 의무는 가혹했다.
 루터는 절대로 마탑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힘 자랑 할 생각도 말고.’
 모난 돌은 주목 받는다.
 괜히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마나 수련을 마친 루터는 방어구 상점으로 향했다.
 검은 쓸 만했지만, 해어진 가죽 장비는 어설펐다.
 내일부터 호위 용병으로 일해야 하는데, 만만하게 보일 생각은 없었다.
 장비를 구매하려 방어구점에 간 루터는 무두질한 가죽 갑옷을 골랐다.
 장거리 여정에 대비해 부츠를 준비하고 건량도 챙겼다.
 그날 밤. 루터는 꿈을 꾸었다.
 맨발로 밭을 걸으며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모습이었다.
 
 다음날 아침.
 목로주점 앞이 오늘따라 분주하다.
 술 취한 사람들이 널브러진 가운데 인부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짐을 싣는다.
 상단의 규모는 컸다.
 마차 2대에 짐수레가 10대였다.
 짐수레에는 가공한 보석과 같은 사치품이 실려 있다고 했다.
 루터는 이번 여정이 순탄치 않을 거라 생각했다.
 ‘누가 봐도 좋은 먹잇감이군.’
 올슨에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다 판단해 상단 행렬에 동참했는데, 의외로 까다로운 여정이 될 듯했다.
 루터는 책임자인 초로의 노인을 마주했다.
 제페토라 소개한 그는 목소리만큼이나 차가운 인상이었다.
 “바레인 용병대에 맞춰 가게. 괜한 분란은 용서하지 않겠네.”
 “협조하며 잘 맞춰가도록 하죠.”
 “듀크의 소개를 받았으니, 그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제페토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홀연히 떠나버렸다.
 그 후로 루터는 바레인 용병대의 대장 바레인과 마주했다.
 바레인은 듀크에게 무슨 소릴 들었는지 루터를 후하게 봐주었다.
 다만 그 역시 루터와 마찬가지로 이번 상행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값어치가 상당한 귀금속이 실려 있으니 제페토 상단주의 신경이 곤두섰어. 그러니 괜히 불안감 일으키지 않게 만전을 기해주게.”
 “그러죠.”
 바레인 이후로 다른 용병과 눈인사를 끝내는 사이 상단이 출발을 알렸다.
 드디어 올슨 왕국으로 향한다.
 루터는 설레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테페스에서 챈들러까지의 거리는 한 달이지만 칸델까지는 보름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루터는 다른 용병들보단 적은 선수금을 받았다.
 선수금 10골드에 무사히 도착하면 5골드를 더 받는다.
 다른 용병들은 선수금 15골드에 완료 시 20골드다.
 두 배나 넘게 차이 나지만 다른 용병들보다 일수가 적은 호위 임무이니 당연했다.
 무사히 도착하면 자신은 15골드. 용병들은 35골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무사히 도착한다는 가정 하에서였다.
 세상은 분란이 끊이지 않고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른다.
 처음 일주일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올슨 왕국의 국경을 통과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테페스 영지가 포함된 할루인 공국은 어수선해도 치안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올슨은 달랐다.
 올슨은 국토 전역이 전쟁으로 달아올랐다.
 이유는 왕권 다툼이었다.
 네 명의 왕자가 공석이 된 왕이 되기 위해 세력을 갈라 치열하게 다투는 중이다.
 이대로라면 나라가 쪼개지는 건 시간문제라 할 정도니 왕국의 치안이 바로 설 리가 없었다.
 루터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뿐더러 미래의 일도 알았다.
 올슨은 결국 일왕자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된다.
 왕자들 중에 가장 여건이 좋았으니 강자가 승자가 되는 건 당연한 순리였다.
 루터는 미래를 알았지만, 그를 이용해서 어떻게 되는 것에는 무덤덤했다.
 누가 이기건 말건 알 바 아니다.
 그저 자신을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혈기 넘치는 청춘은 미래에 쏟아 부었다.
 몸은 젊지만 정신은 곪았다.
 이제 그가 바라는 건 아무 탈 없이 북부에 도착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험악한 올슨의 환경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가 포함된 상단이었다.
 
 탁 트인 황무지에 두 무리가 대치하고 있다.
 하나는 루터가 속한 에넥스 상단이었고, 반대편은 기마로 구성된 백여 명의 도적들이었다.
 대장으로 보이는 텁석부리 장한이 앞으로 나와 고함을 질렀다.
 “좋게 말할 때 물건을 놓고 가라!”
 제페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망할 탈영병 새끼들!”
 그의 말대로 도적들은 군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한 나라에 소속된 병사가 타국 상단을 건드리는 건 모든 나라에서 금하는 일이다.
 허나 저들은 아랑곳 않는 걸 보니 국가의 손이 미치지 않는 도적이 된 듯했다.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
 사납게 중얼거린 그가 바레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참인가?”
 “협상을 해야 합니다.”
 바레인은 도적들이 꺼림칙했다.
 상대가 보통내기로 보이지 않았다.
 일단 기마병에 폴암을 지니고 있다.
 폴암은 긴 장대 끝에 대형 날을 박은 고급 무기였다.
 다루기가 까다로울 뿐이지, 사용 만 잘하면 전장을 활보할 수 있는 무기였다.
 두고 볼 것도 없다.
 바레인이 단호히 말했다.
 “적당히 양보하는 수준에서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제페토가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지금 우리가 싣고 있는 게 뭔지 알고 하는 소린가? 보석을 저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넘기자는 건가?”
 “양보하지 않으면 모두 죽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저런 놈들에게 양보할 생각은 결코 없네!”
 제페토는 단호했다.
 둘의 대화를 주시하던 루터는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냥 물러나지.’
 그는 바레인의 말에 공감했다.
 폴암을 다룰 줄 안다면 정규군 출신에 전쟁 밥 좀 먹어봤다는 얘기다.
 오합지졸도 아닌 데다 숫자도 우세인 저들과 싸운다면 승패는 뻔하다.
 제페토와 바레인의 언쟁이 점점 길어졌다.
 그런데 도적들은 참을성이 없었다.
 “이 새끼들이 기껏 살려주겠다는데, 그걸 뿌리치는구나! 저 놈들을 다 죽이자!”
 “와아아아!”
 수염 대장의 명령에 도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질주했다.
 수레를 일렬로 세워 엄폐하던 바레인은 상황이 틀어지자 즉각 명령을 내렸다.
 “시위를 당기고 전투 준비를 하라!”
 용병들이 지참한 석궁을 준비했다.
 석궁은 거리가 가까울수록 효과가 극대화 된다.
 상대는 폴암을 갖춘 기마병들이지만 용병들도 만만찮았다.
 적들이 몰려온다.
 상인들은 수레 바닥 밑에 숨어 벌벌 떨었고, 용병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스윽! 스윽!
 석궁이 없던 루터는 홀로 검을 꺼내 날을 갈기 시작했다.
 ‘몇 명을 죽일까?’
 몇 놈을 죽여야 적당하다 소리가 나올까.
 폴암을 장착한 기마병의 기세는 무시무시했지만, 루터는 느긋하다 못해 무료한 모습이다.
 저런 기백으론 자신을 제압하지 못한다.
 그는 미래에 소드마스터 둘에게 둘러싸여 죽어라고 오러받이가 된 적이 있었다.
 그때에 비하면 이 도적들은 애교 수준이다.
 긴장한 얼굴로 용병들을 둘러보던 바레인이 루터를 발견했다.
 그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내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은 한눈팔 때가 아니다.
 바레인은 적들이 코앞에 다가오자 명령을 내렸다.
 “사격 개시!”
 타타타탕!
 단단히 시위가 당겨진 석궁이 전방을 향해 쏟아졌다.
 끼히히힝!
 화살에 맞은 도적들이 차례차례 쓰러진다.
 그러나 그들은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접근하자마자 사방으로 산개하던 기마병들이 빙 돌아 수레의 후방을 점했다.
 “한 번 더!”
 타타타탕!
 석궁의 장전은 두 번이 한계였다.
 너무 빨리 접근한 탓에 시위를 당길 겨를이 없었다.
 바레인이 검을 뽑았다.
 “놈들을 죽여라!”
 “와아아아!”
 용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도적들에 맞서기 시작했다.
 허나 거리를 조절하며 폴암을 휘두르는 도적들을 상대하기란 까다로웠다.
 반대로 도적들은 사거리가 긴 폴암을 이용해 용병들을 유린했다.
 거기에 숫자도 많았으니 이대로라면 몰살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루터는 심히 불쾌했다.
 눈앞의 도적이 혀를 내밀며 그를 희롱했다.
 “흐흐. 귀엽게 생겼구나. 엉덩이 맛 좀 보자.”
 미래에선 감히 상상도 못 할 상황이었다.
 그는 전장의 화신이었고, 죽음의 인도자였다.
 헌데 도적 나부랭이 따위가 감히 자신에게 껄렁이고 있다.
 루터는 응징을 시작했다.
 스트렝스와 헤이스트를 건 뒤, 검을 휘둘렀다.
 검은 정확히 말의 앞다리를 잘랐다.
 끼히히힝!
 울부짖는 말이 주저앉자 균형을 잃은 도적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루터는 끙끙대는 도적에게 다가가 검을 그의 항문에 쑤셔 넣었다.
 “끄아아아악!”
 도적의 비명이 황무지를 뒤흔들었다.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도적들이 분노했다.
 “이 개자식! 죽여버리겠다!”
 루터는 그런 도적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루터는 죽은 도적의 항문에 박힌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떨어진 폴암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허공에 한 바퀴 돌렸다.
 선두에서 다가오던 도적은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폴암은 장대처럼 긴 무기인 데다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당연히 균형을 유지하며 허공에 돌리기가 쉽지 않다.
 숙련된 폴암 병사도 어려워하는 데 저 어린 녀석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돌린다.
 폴암이라는 무기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다룰 줄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적은 고삐를 잡아당겼다.
 폴암은 사용 수준에 따라서 애송이가 될 수 있고, 재앙이 될 수 있다.
 거리 조절을 잘 하면 그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극강의 무기이기도 했다.
 그러니 거리를 벌리고 상대를 가늠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너무 때늦은 뒤였다.
 어느새 날카로운 파공성이 그의 목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어?”
 짧은 유언과 함께 몸에서 분리된 도적의 머리가 허공에 붕 떠올랐다.
 루터는 휘두른 폴암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갔다.
 몸을 한 바퀴 회전한 그는 다시 전방을 향해 창대를 휘둘렀다.
 두 번째 머리가 허공에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폴암은 장대가 길어 제동을 걸면 힘이 부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힘을 그대로 따라가되, 몸을 움직이며 방향만 살짝 조절하는 게 효과적이다.
 전진하며 폴암을 풍차처럼 휘두르니, 지나칠 때마다 도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분수를 뿌렸다.
 루터가 도적들을 해치우기 시작하자 용병들은 슬금슬금 움직여 그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어느새 전투는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선두에 루터가 있었고, 도적들은 뒤로 밀렸다.
 한 용병의 머리를 쪼갠 텁석부리 대장이 그 모습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네놈은 누구냐!”
 루터는 그제야 폴암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그럴 만도 했다.
 루터는 눈 깜빡할 새에 열 명이 넘는 도적을 순식간에 양단해버렸다.
 압도당한 도적들은 위축되었고, 용병들은 루터의 무위에 홀려 넋을 놓고 있었다.
 분위기를 감지한 루터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평정심이 흐트러졌다.’
 도적이 이죽거리지만 않았더라도 이럴 일이 없었는데, 순간 욱하고 말았다.
 ‘수행 부족이야. 수행 부족.’
 몬스터 영역에 도착하면 심신수련에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도적 대장이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네놈의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루터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멍하니 입 벌리고 있는 바레인이 눈에 들어왔다.
 “뭐 하고 있습니까?”
 “어, 엉?”
 “빨리 저들을 포위하세요. 한 명도 살려 보내선 안 됩니다.”
 루터의 지시에 바레인이 흠칫했다.
 “포위? 그게 무슨 소린가?”
 “저들은 정규군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살려 보내면 소속 세력에서 보복을 할 겁니다. 그러니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바레인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제페토는 저들을 탈영병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고 단지 일탈을 일삼는 거라면 문제가 커진다.
 “알겠네.”
 바레인이 용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놈들을 살려 보내면 안 된다. 포위하자.”
 숫자는 훨씬 불리했지만 그들에겐 루터가 있다.
 그를 믿고 용병들이 움직이는 사이 도적 대장이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시뻘게진 얼굴에서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루터에 대한 분노가 느껴졌다.
 “죽어라!”
 대장이 대장인 이유가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폴암을 휘두르며 다가오니 성난 곰이 따로 없었다.
 루터는 무심한 얼굴을 바라보다 조용히 마법을 펼쳤다.
 ‘그리스.’
 바닥이 미끄러지자 말이 무너져 내렸다.
 “으악!”
 대장이 바닥을 굴렀다.
 루터는 그를 향해 폴암을 들어 올렸다.
 누운 대장이 손을 뻗으며 간절하게 외쳤다.
 “자, 잠깐만!”
 전투에 잠깐은 없었다.
 루터는 끝까지 그를 무시하며 폴암을 내리찍었다.
 콰직!
 대장의 얼굴이 반으로 쪼개졌다.
 그 모습을 본 도적들의 기세가 팍 죽어버렸다.
 “도, 도망가자!”
 전의를 상실한 그들은 퇴각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주위를 에워싼 용병들이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바레인이 외쳤다.
 “말을 쏴라!”
 일단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타타타탕!
 화살이 꽂히고 말이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제페토가 외쳤다.
 “말은 죽이지 말게!”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말에 욕심이 있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본 루터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은 글렀다.’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은 위인이었다.
 루터는 바닥에 쓰러지는 도적들을 폴암으로 찍었다.
 이미 싸움은 끝났다.
 반 수 이상이 죽은 도적들이 겁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하, 항복하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어요!”
 벌벌 떨며 눈물을 쏟아내며 살려 달라 하니 마음이 흔들린다.
 바레인은 저도 모르게 루터를 바라봤다.
 그는 상단 호위의 책임자였지만, 어느새 판단을 루터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루터와 눈이 마주친 바레인은 신음을 흘렸다.
 애원하고 울부짖는 도적을 보고도 그의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루터의 뜻은 명확했다.
 바레인은 용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죽여라.”
 흠칫한 용병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를 쥔 그들은 항복한 도적들을 향해 다가갔다.
 잠시 후, 황무지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장을 벗어나야 한다.
 에넥스 상단은 죽은 상인과 용병의 시체를 수습하여 서둘러 이동했다.
 괜히 이들을 죽인 사실이 알려지는 날에는 귀찮은 일이 생긴다.
 거리를 벌리고 날이 어두워지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야영을 준비하며 수거한 시체를 묻고 뒤늦은 슬픔을 맞이했다.
 용병의 삶은 낭떠러지 위의 줄타기라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동료의 죽음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침체 된 분위기 속에 바레인은 제페토와 독대했다.
 그는 제페토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다시는 제 판단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까?”
 제페토는 차갑게 반응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협상하자는 자신의 제안을 완강히 거절하는 바람에 전투가 벌어져 일행이 죽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바레인이 조목조목 지적했다.
 “조금만 양보했으면, 최소한 대화라도 했더라면 이런 희생이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흥! 만약 우리가 양보했더라도 그들이 우릴 살려줬을까? 이보게, 바레인. 어쩌면 이게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네. 놈들이 전혀 양보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은가? 어차피 결과는 같았을 수도 있었네.”
 나란히 평행선을 달리는 둘의 의견은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다.
 바레인이 경고했다.
 “앞으로 또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 모두 위험해질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대체 저자는 어떻게 된 건가?”
 제페토가 턱짓으로 루터를 가리켰다.
 “내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르던데 정말 C급 용병이 맞나?”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듀크는 분명히 C급 용병이라고 소개했는데, 오늘 본 전투는 A급이더군요.”
 “칸델까지 계약을 맺었는데, 더 연장할 수 없을까?”
 “그러지 말고 같이 가서 설득하죠.”
 “그게 좋겠군.”
 두 사람은 루터에게 다가갔다.
 루터는 상념에 빠져 있었다.
 과거로 돌아왔어도 손에 피 마를 날이 없었다.
 ‘달라진 게 없군.’
 그는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다.
 인생을 바꾸겠노라고 다짐한 지금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엔 어느 누구도 내 의지에 간섭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꼭두각시처럼 살던 미래의 자신은 이제 없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전투를 강요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희망적으로 생각하는 그에게 두 사람이 다가왔다.
 제페토와 바레인의 입가에 호의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활약이 대단했네.”
 “자네 덕에 살았어.”
 루터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
 지나간 전투가 떠올라서인지 제페토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바레인이 말했다.
 “C급 용병이라고 했는데, 실력은 A급 이상이더군. 대체 자네의 정체가 뭔가?”
 루터의 정체는 미래에서 돌아온 8서클 마도사였다.
 바레인은 그 사실을 영원히 모를 것이다.
 루터의 표정이 뚱해졌다.
 보통 상대에게 바라는 게 있을 때 친절한 미소와 과한 칭찬으로 말문을 연다.
 루터는 이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게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대뜸 직설적으로 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바레인은 움찔했으나 제페토는 즉각 반응했다.
 “챈들러까지 동행해주게. 보수는 섭섭지 않게 해주지.”
 “거절합니다.”
 생각할 것도 없는 제안이었다.
 제페토는 루터의 단호한 거절에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째선가?”
 “북부로 가야 합니다.”
 어째 올슨 북부라 하면 모두가 몬스터를 떠올린다.
 바레인은 듀크가 그랬던 것처럼 루터를 설득했다.
 “몬스터 때문인가? 혹시 돈을 바라고 있다면 관두는 게 좋네. 위험은 전쟁에 비견되면서 보수는 형편없어. 몬스터는 돈이 안 되네. 하루 종일 잡아도 겨우······.”
 바레인은 몬스터 사냥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열변을 토하려 했다.
 루터는 그런 그의 말을 잘랐다.
 “고급 몬스터는 돈이 됩니다.”
 “그, 그렇기는 하네만······.”
 돈이 되는 정도가 아니다.
 일확천금이었다.
 오우거의 가죽이나 트롤의 피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특히나 요즘같이 전쟁이 늘어나 장비와 포션의 수요가 급등하는 이때에는 더욱 그랬다.
 바레인의 입이 뻐꾸기처럼 열렸다 닫혔다.
 생각해보니 루터 같은 실력자라면 고급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백번 낫겠다 싶었다.
 자신이라도 루터처럼 강하다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반면, 제페토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보수를 열 배로 늘려주겠네.”
 루터는 제페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사람보다 재물이 먼저였다.
 물욕에 눈이 멀어 앞뒤 분간을 못 하니 계속 동행하다간 위험을 면치 못하리라.
 “호위는 칸델까집니다.”
 약속은 약속이니 칸델까지는 호위 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없다.
 루터는 제페토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그의 욕심은 주변을 파국으로 몰고 갈 위험한 성질이다.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생이니 애초에 서로 갈 길이 달랐다.
 그러니 그와의 인연은 칸델까지였다.
 
 칸델까지 오는 동안 상단 사람들은 루터와 친목을 다지려고 애썼다.
 전란의 시대에 강자는 대우받기 마련이다.
 강자와 친해져서 나쁠 건 없으니 모두가 살가웠다.
 유독 한 사람. 제페토만이 퉁명스럽게 루터를 대할 뿐이다.
 아무래도 호위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앙금이 된 모양이다.
 그러나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칸델에 도착하고 헤어질 때 한 번 더 붙잡았다.
 “만약 상단 호위에 관심이 가거든 찾아와주게.”
 그는 몬스터로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냐는 눈치였다.
 루터는 그의 태도에 일절 관심 없었다.
 어차피 안 볼 사이니, 헤어지면 그만이다.
 반면, 바레인 용병대는 루터와의 이별을 유독 아쉬워했다.
 용병들에겐 습성이 있다.
 도적과의 전투 때에 그 성향이 잘 드러났는데, 강한 사람을 따라 뭉친다는 점이다.
 대장인 바레인조차 루터의 뒤에 슬그머니 달라붙었다.
 전투 당시에 바레인 용병대의 대장은 루터였다.
 바레인은 검신이 매끄러운 장검을 선물하며 신신당부했다.
 “혹시나 해서 말일세. 용병 일에 관심이 생기면 반드시 내게 먼저 찾아와주게. 자네가 원한다면 용병대 이름도 루터 용병대로 바꾸겠네.”
 바레인의 말은 진담이었다.
 알량한 자존심이 목숨보다 귀하지 않다.
 강한 대장은 용병대를 튼튼하게 만든다.
 바레인은 루터의 그릇을 알아봤다.
 그는 일개 용병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될 만한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루터에게 매달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루터는 바레인의 진심을 알았다.
 그래서 덕담을 남겼다.
 “제페토를 멀리하세요.”
 그는 위험하다.
 재물에 눈이 멀어 일의 경중을 분간 못 하면 전란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
 바레인의 눈이 깊어졌다.
 “명심하지.”
 그 역시 이번 일로 제페토의 이기심을 엿봤다.
 만약 그와 계속 동행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바레인 역시 이번 임무 이후로 에넥스 상단과의 인연을 끊을 생각이었다.
 
 칸델은 올슨의 중부지역에 위치한 모든 관도의 중심지였다.
 칸델에서 출발하면 북부를 지나 몬스터 영역까지 금방이다.
 이동이 수월하니 상인과 용병들도 칸델에 모여 들었다.
 인파가 넘치는 거리에는 활력이 가득했고, 쉼 없는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루터는 수중의 금액을 확인했다.
 선수금으로 받은 10골드는 대부분 소진했고, 이제 남은 것은 5골드가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다.
 또 다시 용병 일을 해야 할까.
 아니면 혼자 떠날까.
 만약 용병 일이라면 상단이나 귀족 호위다.
 그는 이번 호위 임무에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용병들은 별 도움이 안 된다.’
 바레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은 수준이 낮았다.
 이유가 있었다.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귀족들이 마구잡이로 용병을 쓸어 담아서 실력 있는 자들은 귀족과 계약을 맺어버렸다.
 그러니 그 외 용병들은 실력이 변변찮았다.
 ‘편하자고 동행한 용병들이 짐 덩이었어.’
 루터는 자리를 털고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넘어지면 코 닿을 데다. 천천히 가자.’
 급할 건 없다.
 그는 창창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 살 날 많은 그가 조급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관도를 따라 거니는 루터의 표정이 부드럽다.
 그는 길가의 돌멩이를 관찰했고,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봤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모든 게 새롭고 흥미로웠다.
 꽃을 보면 싱숭생숭했고, 산들바람이 지나면 기분이 좋았다.
 그런 그의 여유는 칸델을 떠난 지 반나절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채채채챙!
 전방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터는 걸음을 멈췄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화를 불러일으키지.’
 때로는 모르는 게 좋을 때가 있다.
 그는 번거로운 전투에 휘말리기 싫어 방향을 틀어 돌아갔다.
 헌데,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피 칠갑을 한 남자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좋지 않은데.’
 저자와 꼬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좋지 않은 예감은 언제나 맞았다.
 푸른색의 마법이 포물선을 그리더니 말의 엉덩이에 꽂혔다.
 말이 넘어지며 튕겨나간 남자가 바닥을 굴러 그의 앞에 다다랐다.
 루터는 쓰러진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 봤다.
 “쿨럭! 쿨럭! 도, 도와주게!”
 피를 게워낸 그가 간절한 눈으로 루터를 바라봤다.
 허나 루터의 시선은 무심했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지는 것과 같다.
 누군가를 구하면 누군가의 적이 된다.
 인연은 복수로 이어져 처절한 사투를 일으킨다.
 루터는 그의 요청을 외면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허나 쓰러진 남자의 적은 그를 얌전히 보내주지 않았다.
 쾅!
 화염구가 날아와 루터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거리를 벌린 루터가 몸을 틀었다.
 어느새 도착한 두 중년인이 말에서 내리며 다가왔다.
 하나는 마나 지팡이를 든 마법사였고, 다른 하나는 검사였다.
 송충이 눈썹을 한 검사가 이죽거렸다.
 “어디 가려고?”
 루터는 양손을 들어 싸우기 싫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남의 싸움에 참견하고 싶지 않으니 이대로 못 본 척 보내주시오.”
 이번엔 빼빼 마른 마법사가 비웃었다.
 “목격자는 모두 죽어야 해. 네놈을 살려줄 수 없다.”
 “······.”
 루터는 할 말을 잃었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딱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듯싶었다.
 조용히 지내고 싶은데 바람 잘 날 없다.
 루터는 짜증을 삼키고 몸을 풀었다.
 “하는 수 없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하며 바레인에게 선물 받은 장검을 뽑았다.
 검사가 들소처럼 달려들었다.
 동시에 마법사가 마법을 뿌렸다.
 “디그!”
 루터가 선 땅이 흔들리고 갈라졌다.
 구덩이가 생길 듯하자 루터는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티 스펠.”
 마법 무효화. 바닥의 진동이 멈추자 그는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득달같이 달려오는 검사를 향해 마법을 걸었다.
 “그리스.”
 검사는 루터를 흔한 용병으로 착각했다.
 단순히 보이는 외관이 그랬으니 오해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 마법을 쓸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으리라.
 목숨을 건 전투에서 방심은 죽음으로 직결된다.
 “으악!”
 넘어진 검사가 썰매 타듯 루터의 앞으로 미끄러져 왔다.
 장검을 역수로 쥔 루터는 바닥을 내리찍었다.
 장검이 검사의 사타구니에 박혔다.
 콰직!
 “끄아아악!”
 루터는 목청껏 비명을 지르는 검사의 목을 자른 뒤, 전방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안티 스펠.”
 붉은 화염구가 공중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법사가 눈을 부릅떴다.
 볼 것 없는 용병인 줄 알았더니 마법사였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안티 스펠 마법을 캐스팅 없이 바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마나 지팡이가 없으니 메모라이즈도 아닐 것이다.
 마법사는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너, 너는 누구냐?”
 루터는 장검에 묻은 피를 털며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당황한 마법사가 마법을 캐스팅하려 했다.
 루터는 마법사에게 여력을 주지 않았다.
 “디그.”
 “으악!”
 갑자기 한쪽 발이 꺼지자 놀란 마법사가 허둥대며 바닥에 쓰러졌다.
 어느새 다가온 루터가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마법사가 다급하게 팔을 흔들었다.
 “자, 잠깐만!”
 죽은 도적 대장도 그러더니, 이놈도 어떻게든 살려는 생각에 말도 안 되는 소릴 한다.
 루터는 무심히 검을 내리쳤다.
 부드럽게 궤적을 그린 검이 마법사의 목을 깔끔하게 지나갔다.
 루터는 마법사의 마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횡재했군.’
 마력석이 필요했는데 마침 잘되었다.
 마나 지팡이를 챙긴 루터는 현장에 서성이는 말 두 필을 바라봤다.
 전쟁이 일어나면 당나귀도 10골드를 넘게 부른다.
 귀한 이동 수단인데, 이 녀석들은 마력석도 주고 말도 남겼다.
 루터는 죽은 둘의 신분을 격상시켰다.
 부나방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고마운 친구들이네.’
 죽은 이들이 들으면 환장할 소리였다.
 루터는 말에게 다가갔다.
 사람을 원래 잘 따르는 건지 아니면 공용 말이라 따로 훈련을 받은 건지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몇 차례 쓰다듬은 뒤 올라탄 그는 관도가 아닌 샛길 방향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멍한 얼굴로 루터의 전투를 지켜보던 남자가 외쳤다.
 “자,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싫어.’
 괜히 붙들려 하소연에 시달리다가 결국 도와주는 일은 과거에도 지긋지긋하게 반복했다.
 이제는 원치 않는 인연에 얽히지 않으리라.
 그는 애타게 부르짖는 남자를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말 두 필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남자는 홀연히 떠난 청년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법이다! 분명 마법을 사용했어!’
 너무 놀라 다친 부위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마법을 사용하는데, 마나 지팡이가 없는 용병 차림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흐르고 말 여러 필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아군이었다.
 선두에 나타난 중년인이 그를 보며 외쳤다.
 “왕자님!”
 코스트너와 그의 휘하 기사들이었다.
 올슨 왕국의 이왕자 델프스는 달려오는 아군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괜찮다.”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졌고, 옆구리 통증이 있었지만 그래도 죽지 않았다.
 다가온 코스트너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마차가 불타고 시체가 널렸다.
 느낌이 좋지 않아 미리 마중 나갔더니 이 꼴이다.
 이왕자 델프스가 탄식했다.
 “파비앙 후작이 배신했네.”
 코스트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 쥐새끼가 기어이 사고를 쳤군요.”
 이를 갈던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 둘을 바라봤다.
 “왕자님이 해치우신 겁니까?”
 “다른 사람일세. 그가 날 살렸어.”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델프스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냥 떠나버렸네.”
 “허어. 잡아두시지 그랬습니까?”
 “처음부터 관여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자였어. 그런데 적들이 그를 건드려 죽임을 당했네. 내게는 천운이지.”
 “정말 다행입니다. 왕자님을 구했으니 감사의 표시를 할 겸 수소문 해 찾아보겠습니다.”
 “꼭 찾아야 하네.”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평범한 용병인 줄 알았는데 마법을 다룬다.
 심지어 4서클 마법사와 익스퍼트 검사를 손쉽게 요리했다.
 델프스는 전투 장면을 회상하며 반드시 그 청년을 포섭하겠노라고 다짐했다.
 
 
 
 #2화 실력 행사 (1)
 
 
 
 
 
 루터는 관도를 포기했다.
 낮에 벌어졌던 일처럼 쓸데없는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혼자 가는 게 아니었는데.’
 뒷간 갈 때와 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
 짐만 되는 용병들이 번거로워 혼자 다녔더니 이제는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해야 했다.
 ‘사람을 만나면 안 되겠어.’
 마주치면 칼부림이니 아무래도 업보를 타고난 것 같다.
 ‘일단 도착하는 게 우선이다.’
 지도를 사두긴 했는데, 지형이 다 틀려 없는 것만도 못했다.
 태양을 보고 별 무리를 관찰하며 북쪽으로 가니 트인 평야 너머로 로크 산맥이 드러났다.
 험준한 로크 산맥은 몬스터 영역과 인간 영역을 나누는 분계선이다.
 루터의 시선이 봉우리를 가린 구름에 닿았다 아래로 향했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첨탑처럼 솟은 성이 있었다.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말빈 성이었다.
 루터는 감회에 젖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말빈 성은 몬스터 영역으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다.
 저곳을 지나야 몬스터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
 오만 감정이 물결처럼 밀려왔고, 자신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렸을 때부터 몬스터에 관심이 많았고 연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부질없는 사명감에 매여 있었고, 전쟁이라는 참혹한 족쇄에 묶여 몬스터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루터의 눈이 뜨겁게 타올랐다.
 ‘저곳에 내 꿈이 있다.’
 세상과의 인연을 뒤로한 채, 몬스터를 연구하며 유유자적 살리라.
 루터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말빈으로 향했다.
 
 검문을 통과하고 여관을 찾았다.
 식사를 마친 뒤, 방을 잡은 루터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제 계획을 짤 차례다.
 루터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꾸준히 심신수련법과 마나 연공을 거듭해 현재 그의 마력은 4서클 중반 수준이었다.
 ‘최우선 과제는 신체 재구성이다.’
 몬스터 영역에 도착했지만 이제 시작이다.
 ‘일단 마나석부터 모으자.’
 신체를 재구성한 뒤, 자신이 창안 한 마나 연공을 익혀야 한다.
 베르뉴 마탑의 마나 연공은 아무리 대성해도 6서클이 한계다.
 루터가 8서클 마도사가 될 수 있었던 건, 생사를 오간 풍부한 경험과 주술사의 심신수련법으로 제련 된 마력 덕분이다.
 ‘돈을 벌어야겠지.’
 몬스터에게서 얻을 수 있는 오염된 마력석뿐만 아니라 시중에서 거래하는 마력석도 필요했다.
 ‘최소한 상급 마력석 10개분은 있어야 한다.’
 상급 마력석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마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수집하기 때문이다.
 상급 마력석은 체내의 마력을 늘리기 위해 흡수하는 용도이다.
 고리 하나를 더 늘리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그들이 상급 마력석을 순순히 내줄 리가 없다.
 당연히 마력석 때문에 마법사 간의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러니 흡수해도 별로 쓸모없는 하급 마력석이나 거래가 이루어진다.
 손톱보다 겨우 큰 수준이지만, 그래도 마력석이라고 천 골드는 우습게 넘어갔다.
 루터는 계획을 세웠다.
 ‘하급 마력석은 오염된 마력석을 정화하는 마법진을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지금 중요한 건 고급 몬스터 사냥이다.’
 몬스터도 등급에 따라 오염된 마력석의 크기가 다르다.
 루터는 당연히 오우거나 트롤급 몬스터를 잡을 생각이었다.
 ‘문제는 혼자 잡는 게 수월하겠냐는 건데.’
 마력을 장시간 운용하면 체력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아직 자신이 추구하는 마나 연공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고급 몬스터를 혼자서 오랫동안 잡을 수 있냐가 문제였다.
 ‘결국 답은 용병이지.’
 루터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제 마법사로 활동할 시간이군.’
 더 이상 C급 용병 검사 행세는 할 수 없다.
 루터는 자신이 직접 용병들을 고용해 몬스터 사냥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옷가게에서 펑퍼짐한 로브를 구매했다.
 후드를 걸쳐 얼굴을 가린 뒤, 마나 지팡이를 들고 거리를 나가니 사람들이 흘깃거렸다.
 마법사는 어디든 주목 받는다.
 호기심과 선망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용병길드를 찾았다.
 카운터를 지키는 거한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루터는 일부러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병을 고용하러 왔다.”
 세간의 마법사에 대한 인식은 두 가지다.
 오만하거나 혹은 과묵하거나.
 자신이 있으니 오만하고 생각이 많으니 과묵하다.
 겸손하면 자신감이 없는 마법사였고, 자신감이 없으면 실력이 없는 마법사다.
 그러니 보란 듯이 당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루터의 태도는 효과를 톡톡히 보았는지, 거한은 공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자리로 안내한 거한이 헐레벌떡 위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길드의 지부장이 나와 루터를 맞이했다.
 “무슨 일을 하시려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고급 몬스터를 사냥할 거요. 길잡이 하나, 칼잡이 둘, 그리고 발 빠른 자를 구해주시오.”
 “알겠습니다.”
 네 명으로 고급 몬스터를 잡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마법사가 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용병 길드가 바빠졌다.
 루터가 지정한 특징에 맞는 용병을 찾았고, 금세 모여들었다.
 마법사가 고용한다고 하니, 서로 내가 하겠다고 경쟁이 붙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모인 네 명의 용병은 남자 셋, 여자 한 명이었다.
 루터는 그들과 한 자리에 모였다.
 밤톨 머리를 한 연장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C급 용병 케인입니다. 4년 동안 몬스터 영역의 길잡이였습니다.”
 루터는 적잖이 감탄했다.
 “용케 살아남았군.”
 “몬스터의 습성을 아니 죽을 자리는 피하게 되더군요.”
 4년이나 길잡이로 버텨왔으면 실력은 볼 것도 없었다.
 ‘이자가 제일 중요해.’
 전투적인 부분은 상관없었다.
 몬스터의 영역은 자신에게 미지의 세계다.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줄 사람이 필요한데, 케인의 경력은 신뢰해도 될 만한 수준이었다.
 ‘그 다음은 이 여자인데.’
 루터는 여자를 쳐다봤다.
 피처럼 붉은 곱슬머리에 몸이 늘씬했다.
 케인의 소개가 끝나자 여자가 다음 차례를 이었다.
 “C급 용병 엘레나예요. 달리기 하난 자신 있어요. 몬스터를 유인하는 거라면 제가 적격이라는 걸 현장에서 증명해드릴게요.”
 자신의 역할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감은 보기 좋군.’
 엘레나는 파티 중에서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고 있다.
 몬스터를 유인해야 하니 한눈팔다간 목숨 잃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겁먹지 않고 당당한 걸 보니 말대로 달리기는 자신이 있는 듯했다.
 엘레나의 소개에 두 사람이 반응했다.
 돌 같은 몸을 자랑하는 A급 용병 돌켄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멋진 여자군!”
 장발의 피에르가 노골적인 추파를 던졌다.
 “혹시 밤일에도 자신 있나? 그 끝내주는 엉덩이를 흔들어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엘레나의 얼굴이 수치로 붉어졌다.
 달아오른 피에르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이번 파티는 정말 마음에 드는 군. 낮이건 밤이건 즐길 수 있을 테니까.”
 루터가 그를 쳐다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피에르가 윙크하며 엘레나를 가리키며 입을 열려 했다.
 “먼저 점찍었으니 넘보지 마시······.”
 콰아앙!
 루터는 말을 잇는 피에르의 머리카락을 잡아 탁자에 내리꽂았다.
 탁자가 부서지고 피에르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라 세 사람은 놀랄 틈도 없었다.
 이마에 피 흘리고 엉덩이를 세운 채 기절한 피에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루터는 쥐어뜯은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충격에 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리는 셋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4서클 마법사. 이름은 알 필요 없다. 너희들의 임무는 간단하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여 고급 몬스터를 사냥한다. 한두 마리로 끝낼 생각이 없으니 최선을 다해라. 분배는 내가 6, 너희들이 각자 1이다. 빠지고 싶으면 지금 말해.”
 일방적인 제안이지만 좋은 조건이었다.
 케인과 엘레나는 고급 몬스터 사냥에 분배 조건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기절한 피에르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동안 등급이 낮다며 하는 일에 비해 낮은 보수를 받은 두 사람에겐 더없이 최상의 조건이다.
 케인이 먼저 루터의 제안을 물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엘레나도 뒤따랐다.
 “최선을 다할게요.”
 반면, 돌켄은 석상처럼 얼어붙었다.
 시선들이 향하자 돌켄의 눈이 심각해졌다.
 “어떻게 했습니까?”
 조건은 아무래도 좋았다.
 마법사가 피에르를 제압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가 본 건 한순간에 폭발하듯 부서진 탁자였다.
 지근거리에, 맞은편의 코앞에 있었는데도 눈이 따라가지 못했다.
 만약 실전 전투였다면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돌켄이 심각하게 묻는 이유는, 루터의 비정상적인 빠르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그의 질문에 답해주지 않았다.
 자리에 모인 이후로 그랬듯 일방적인 통보가 이어졌다.
 “대장은 나다. 모두 내 명령에 따라라. 그리고 이 녀석처럼 동료를 경시하고 임무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보일 시 즉각 쫓아내겠다. 보다시피 참을성이 많지 않아서 행동거지에 주의하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너. 할 테냐, 말 테냐. 빨리 결정해라.”
 지목당한 돌켄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지금부터 지시를 내리겠다. 돌켄. 믿음직한 칼잡이 한 명을 구해 와라. 케인. 사냥에 필요한 물품을 구비해 와. 그리고 엘레나. 길드 지부장을 데려와라. 칼잡이를 데려오라 했더니 주둥이만 산 놈을 소개했어. 날 무시한 처사니 놈에게 경고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어야겠다.”
 세 사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새 고용주는 철두철미한 데다 자비도 없어 보였다.
 루터는 책잡힐까 서둘러 사라지는 세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무섭겠지만,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쳐다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든 마법사도 있었다. 단지 심심풀이라며 길 가던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생체 실험은 기본이며, 목적을 위해서라면 부모자식도 서슴지 않고 죽인다.
 루터는 마법사에 대해 정의하라면 ‘존경받는 미치광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인격이 결여된 자들이 수두룩하다.
 ‘이 참에 마법사들이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지 깨닫는 것도 좋겠지.’
 냉혹하게 보여도 어쩌면 저들에겐 좋은 교훈일 수도 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정상이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이마를 박살내버렸지만, 루터는 스스로가 굉장히 신사적인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몬스터 영역으로 떠나기로 한 당일 아침.
 루터는 여관 2층 방에 머무르며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부터 지켜본 말빈의 거리는 허무함 그 자체였다.
 술에 취한 사람들과 그런 그들을 유혹하는 사창가.
 붉은 불야성 속에 고성방가와 싸움이 일어난다.
 인사불성에 쓰러진 자들은 좀도둑의 먹잇감이 되었고 재수 없이 걸리면 칼침을 맞았다.
 시체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조용히 치웠고 아침이 되면 그 모든 게 꿈인 것처럼 깔끔하게 사라졌다.
 루터는 그 모든 과정을 감흥 없이 바라봤다.
 ‘여기나 전쟁터나 거기서 거기군.’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과 여자에 의지하는 건 흔하게 보던 모습이다.
 죽음을 곁에 두는 건,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들다.
 결국 무언가에 의지해야 한다.
 자신은 직면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희망을 단단히 쥐었지만 저들은 외면하고 쾌락을 선택했다.
 갈린 갈림길의 끝이 지금의 결과다.
 ‘결국 의지의 차이겠지.’
 루터는 단 한 번도 희망의 끈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부숴버렸다.
 끈질긴 의지와 간절한 희망 끝에 이룬 결실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똑똑똑!
 “마법사님. 케인입니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곧 가겠다.”
 루터는 조용한 거리를 바라본 뒤, 마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이제 시작이군.’
 두 번째 인생의 서막이 드디어 열리려 하고 있었다.
 
 루터는 말 두 필을 팔았다.
 말은 기동력에 도움이 되지만 힘은 부족했다.
 몬스터의 시체를 실어야 하는 수레는 황소가 아니면 끌 수 없었다.
 대체 불가능한 동물이기에 말보다 비쌌지만 용병 길드가 해결했다.
 지부장은 루터에게 허리가 닳도록 고개를 숙였다.
 용병 하나 잘못 소개시키는 바람에 거래를 틀 수 있는 마법사와 갈등을 빚었다.
 말빈의 용병 길드는 상회처럼 몬스터도 다룬다.
 마법사가 사냥한 몬스터를 다른 상회나 길드에 팔아버리면 책임의 소재는 모두 지부장에게 있다.
 그는 심기 불편한 루터를 달래고자 물심양면으로 사냥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황소를 사고 대형 수레를 제공했다.
 출혈은 있지만, 고급 몬스터 가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부장이 사과한 후에는 돌켄이 새 용병을 소개했다.
 대머리에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딱딱한 인상의 사내였다.
 “A급 용병 자크입니다.”
 자기소개는 그걸로 끝이었다.
 과묵하다 생각하는데 돌켄이 옆에서 대신 소개했다.
 “말빈에서 가장 힘 좋은 친굽니다. 책임감도 강하고 말썽도 일으킨 적이 없어 임무 수행에 도움이 될 겁니다.”
 “고용하지.”
 루터는 선뜻 그를 받아들였다.
 경박하고 입 싼 피에르를 겪은지라 과묵한 자크는 합격이었다.
 준비를 마친 뒤, 몬스터 영역으로 출발했다.
 관문을 지나니 끝없는 수림이 루터를 반겼다.
 ‘내가 몬스터 영역에 서 있다니.’
 이 순간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감상도 잠시였다.
 “여기는 초입이고 오우거와 같은 고급 몬스터의 영역은 일주일이 걸릴 겁니다.”
 케인의 설명에 루터는 마음을 다 잡았다.
 그는 마음 편히 놀자고 몬스터 영역에 온 게 아니었다.
 “부지런히 가야겠군.”
 방심하지 말고 집중하자.
 마음을 조인 루터는 일행과 함께 숲으로 들어갔다.
 
 케인을 고용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는 몬스터를 피해가는 방법을 알았다.
 고블린의 영역에선 오우거의 똥을 이용했고, 오크의 영역에선 그들이 싫어하는 약초의 향을 사용했다.
 고블린은 오우거 냄새만 맡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예민해서 얼씬도 안 했다.
 반면 오크는 오우거도 피하지 않는 호전적인 몬스터지만, 약향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덕분에 일행은 고급 몬스터의 영역까지 순탄하게 이동했다.
 일주일이 되자 마침내 오우거의 영역에 다다랐다.
 케인은 무력 충돌 없이 몬스터 영역을 가로지르는 건 여기까지라고 선언했다.
 “후각이 발달한 데다 한 번 포착한 먹잇감은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고블린처럼 교활하고 오크처럼 호전적입니다. 놈들을 잡으려면 정면 대결밖에 없습니다.”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케인의 안내를 받아 몬스터를 피했지만, 싸우기 싫어 피한 게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 고급 몬스터.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기에 한달음에 그들의 영역까지 도달했다.
 “지금부터 사냥 개시다.”
 루터는 일행을 모아 계획을 설명했다.
 “마법진을 이용해 덫을 만들 것이다. 케인. 오우거의 흔적을 추적해라. 엘레나. 오우거를 발견하면 마법진이 있는 곳까지 유인해라. 돌켄과 자크는 덫에 걸린 오우거를 마무리한다. 질문 있나?”
 일행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주어진 임무는 알겠는데 계획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돌켄이 손을 들었다.
 “마법진으로 덫을 만드는 게 가능합니까?”
 루터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마법사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지만 마법진으로 덫을 만든다는 얘기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다.
 루터는 설명해봤자 알아들을 이들이 아니라 간단하게 마무리 지었다.
 “실전에서 겪어보면 알게 될 거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
 루터는 의문을 품은 일행과 함께 사냥 준비를 시작했다.
 
 케인은 덫을 놓기 좋은 장소를 물색했다.
 마침 괜찮은 지형이 있었다.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옹달샘이었는데, 습기 먹은 척척한 바닥에 오우거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케인이 장소를 지정하자 루터는 마법진을 그렸다.
 일행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루터가 하는 양을 관찰했다.
 마법사가 마법진을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들이 보는 루터의 모습은 화가 같았다.
 원을 그리고 기이한 도형과 처음 보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어찌나 빼곡하게 그리던지 돌켄은 저도 모르게 멀미가 날 정도였다.
 마법진을 완성한 루터가 엘레나를 쳐다봤다.
 오기만을 기다릴 순 없으니, 유인해야 한다.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렸던 엘레나는 드디어 때가 되자 비장한 표정으로 각오를 다졌다.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그녀가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돌켄과 케인은 초조한 얼굴로 엘레나를 기다렸다.
 조용하던 와중에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케인이 힘주어 말했다.
 “오우겁니다!”
 루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쾅! 쾅! 쾅!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쿵쾅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수풀을 헤치고 엘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나타남과 동시에 마법진이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쾅!
 그런 그녀의 뒤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루터는 실제로 오우거를 본 적이 없었다.
 나타난 오우거는 3미터 크기에 회백색의 피부였으며, 정수리에 뾰족한 뿔이 자랐다.
 사람의 체형이되 몸집은 육중했고, 손에는 나무 기둥을 쥐고 있었다.
 ‘정말 크군.’
 루터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오우거를 관찰했다.
 마주친 붉은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쫓기는 엘레나가 이를 악물고 달려왔다.
 케인과 돌켄이 그녀를 향해 부르짖었다.
 “다 왔어! 조금만 힘내!”
 “엘레나! 뛰어!”
 응원에 힘이 생겼는지 악착같이 달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옆으로 세차게 밀렸다.
 손을 뻗어 그녀를 쥐려던 오우거는 실패하자 더욱 더 흉포해졌다.
 마법진에 다다른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힘차게 바닥을 찼다.
 쾅!
 그녀가 뛴 자리를 나무 기둥으로 내려 친 오우거가 포효했다.
 크아아앙!
 성난 분노에 초목이 흔들렸다.
 마법진을 지난 그녀의 앞에 루터가 섰다.
 “수고했다.”
 그는 달려오는 오우거를 향해 마법을 전개했다.
 “그리스.”
 마찰 계수가 0이 되며 바닥이 매끄러워진다.
 달리는 힘을 이기지 못한 오우거가 바닥을 굴렀다.
 “윈드 웨이브.”
 바람이 넘실거리며 오우거를 밀어냈다.
 구르던 오우거는 정확히 마법진 위에서 멈추었다.
 루터는 마법진에 마나를 주입했다.
 쾅!
 성난 오우거가 일어서려다 말고 머리를 흔들었다.
 크아아앙!
 그리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포효하더니, 갑자기 기절하듯 쓰러졌다.
 붉은 광채가 일렁이던 눈동자가 풀어지며 눈꺼풀이 닫혔다.
 루터는 아연한 얼굴로 구경하던 돌켄과 자크에게 오우거를 가리켰다.
 “죽여라.”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죽어 있는 상태나 다름없으니 확실하게 끝내라.”
 루터는 무기를 뽑고 오우거를 향해 다가가는 두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몬스터도 별것 없군.’
 사람처럼 마법에 당하는 건 똑같다.
 심지어 정신계 마법진이었다.
 그는 마법진에 환각을 일으키는 룬어를 새겼다.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환영과 환청으로 정신을 흔든 뒤, 충격을 가해 일시적 가사 상태로 만드는 마법진이다.
 주로 상대를 고문하거나 고통을 줄 때 사용하는 방법인데 몬스터에게 쓸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
 게다가 잘 통할까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주춤거리며 쓰러진 오우거에게 다가선 돌켄과 자크는 각자 양날 도끼와 대검을 들어 올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들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있는 힘껏 목을 내리쳤다.
 퍼억!
 세게 후려쳤는지 오우거의 몸이 움찔한다.
 그래도 눈꺼풀은 열리지 않았다.
 안심이 되니 그 뒤론 수월했다.
 나무꾼 장작 패듯 부지런히 오우거의 목을 쳤다.
 한참을 치니 결국 목이 잘렸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죽이고도 기가 막히는지 한동안 멍했다.
 지켜보던 케인과 엘레나도 아연한 표정이다.
 오우거를 사냥하려면 최소한 A급 용병 30명이 필요하다.
 그것도 최상급 무기와 투망 등으로 공략하여 체력을 빼야 하는데, 실수 한 번이면 전멸을 면치 못한다.
 그런 오우거를 너무나 쉽게 공략 해버렸다.
 일행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루터는 오우거의 죽음을 확인하고 엘레나를 쳐다봤다.
 “다시 유인할 수 있겠나?”
 그의 질문에 정신을 수습한 그녀는 즉시 몸 상태를 점검했다.
 다리가 풀렸는지 힘이 하나도 없었다.
 “다리에 힘이 전혀 없어 당장은 무리예요.”
 루터는 못마땅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바로 일을 시킬까 걱정되어 가슴 졸이는데, 루터가 입을 열었다.
 “엘레나. 바지 벗어라.”
 엘레나는 순간 자신이 너무 지쳐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옆에 있던 케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상황에 갑자기 바지를 벗으라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린가.
 무슨 의도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해는 금방 풀렸다.
 “하체에 마법진을 새기겠다.”
 루터의 말에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몸에 마법진을요?”
 “그래. 힘이 늘어나고 회복을 도울 거다. 사냥 개시 첫날인데 한 마리에 만족할 수 없지.”
 엘레나와 케인의 입이 벌어졌다.
 마법진을 새기는 것만으로도 신체 능력이 증가한다니 신기할 노릇이다.
 그사이 돌켄과 자크가 다가왔다.
 “확실하게 죽였습니다.”
 자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켄이 물었다.
 “마법사님. 대체 오우거를 어떻게 하신 겁니까?”
 “환각을 일으키는 마법진이다. 마법진에 갇힌 몬스터는 무기력해지니 방금처럼만 작업하면 된다.”
 돌켄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그게 가능한 겁니까?”
 루터는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해가 중천이니 시간은 많았다.
 “궁금증은 여기까지다. 앞으로 잡을 몬스터가 많으니 서두르자.”
 일단 오우거를 잡았으니 해체 작업을 하고, 다시 유인해야 한다.
 루터는 무언의 시선으로 엘레나를 재촉했다.
 엘레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 뒤돌아.”
 돌켄이 어리둥절했다.
 “왜?”
 “하자는 대로 해. 마법사님이 엘레나의 몸에 마법진을 새길 건데, 조금 은밀한 부분이다.”
 케인의 설명에 돌켄은 깜짝 놀랐다.
 “사람 몸에 마법진을 새긴다고? 아니, 그게 어떻게?”
 루터는 슬슬 돌켄이 짜증났다.
 그를 보는 루터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너는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구나.”
 살벌한 시선에 돌켄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세 사람이 몸을 돌리고 엘레나는 바지를 벗었다.
 루터는 그녀의 속옷에 눈을 두지 않고 그을린 허벅지와 종아리에 마법진을 새겨 넣었다.
 지켜보는 엘레나의 눈에 탄성이 떠올랐다.
 손가락으로 슥슥 그릴 뿐인데, 문신처럼 새하얀 원과 글자가 나타났다.
 “됐다. 입어라.”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요?”
 “가만히 있으면 된다.”
 루터는 다시 바지를 착용한 그녀의 다리를 향해 마나를 주입했다.
 체력 회복과 신체 강화가 섞인 마법진이 제 역할을 시작했다.
 “어머!”
 엘레나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뒤돌아 있던 세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엘레나. 왜 그래?”
 “몸이. 몸이.”
 “몸? 왜? 몸에 이상이 생겼어?”
 “너, 너무 가벼워.”
 떨리는 목소리를 보니 농담 같지 않았다.
 엘레나는 선 자리에서 껑충 뛰었다.
 그녀의 몸이 1미터 가량 떠올랐다.
 “헉!”
 돌켄의 억눌린 신음이 터지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자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터는 폴짝 뛰는 그녀에게 말했다.
 “적응이 되면 바로 유인해라. 해 지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숫자의 몬스터를 잡아야 한다.”
 케인은 몬스터 영역에서 밤에 활보하는 것은 위험한 짓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니 해가 지면 야영을 준비해야 한다.
 “다녀올게요.”
 적응을 마친 엘레나가 전방을 향해 달렸다.
 쏜살같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케인이 중얼거렸다.
 “마법이란 엄청나군.”
 그는 새삼 마법사의 위대함에 감탄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사람의 몸에 마법진을, 그것도 한 가지 이상의 능력을 새기는 것은 마법진에 대한 이해력이 높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정도의 이해력을 갖춘 마법사는 마도사밖에 없었다.
 
 오우거는 끌려오는 족족 사냥감이 되었다.
 루터의 마법진은 마나가 주입되는 이상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고, 유인하는 엘레나는 늘어난 신체 능력에 신이 나 보이는 족족 몬스터를 끌고 왔다.
 덕분에 땅거미가 질 무렵에 죽은 오우거의 시체가 아홉 마리나 되었다.
 시간을 좀 더 할애하면 이상의 몫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어차피 오늘만 사냥하는 건 아니라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케인은 야영 장소를 정했다.
 평평한 구덩이에서 조금 낮은 지형이었다.
 게다가 주변이 갈대밭이라 은신하기도 좋았다.
 자리를 잡고 네 방위에 모닥불을 피웠다.
 죽은 오우거의 내장을 태워 일행의 냄새를 지웠고, 말뚝처럼 세운 막대기에 끈을 묶어 정찰을 나갔다.
 중앙에 피운 모닥불에 세 사람이 앉아 있다.
 그들은 대화를 하는 와중에 오우거 시체를 쳐다봤다.
 간간이 보는 시선이 제법 흐뭇했다.
 돌켄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얼마나 할까?”
 엘레나가 대답했다.
 “적어도 2천 골드는 하겠지.”
 “엘레나. 농담해? 저걸 보라고. 가죽에 생채기 하나 없어. 그런데도 고작 2천 골드?”
 “그러면?”
 “최소 3천 골드부터 시작할 거야. 길드에서 경매를 붙일 테니, 그 이상도 족히 나올 테고. 벌써부터 눈에 아른거리지 않냐? 상인들이 기를 쓰고 입찰 경쟁을 하는 모습을 말이야. 흐흐흐.”
 상상만 해도 좋은지 돌켄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는 옆에 앉은 자크의 옆구리를 찔렀다.
 “자크. 술 한 잔 거하게 사라.”
 자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일에 비해 막대한 재화를 얻으니 돌켄에게 신세진 것이나 다름없다.
 엘레나는 바지를 걷어붙였다.
 종아리에 새겨진 마법진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마법진 말이야. 문신처럼 오래가진 않나 봐.”
 “어째 목소리가 실망스럽네. 아쉬운가 보지?”
 “당연한 거 아냐? 너희들도 봤잖아. 내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내일도 마법사님이 해주실까?”
 그녀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돌켄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날아다니는 네 모습을 봤는데, 안 해줄 이유가 없지. 그나저나 엄청나더군. 사람들이 괜히 마법사를 경원시하는 게 아니더군. 솔직히 말해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야.”
 대규모 토벌 사냥을 하루 종일 해도 오우거를 이렇게까지 잡지 못한다.
 감탄하던 그가 고개를 힐끗 돌렸다.
 모닥불에서 거리를 둔 마법사는 검은 로브에 파묻은 채, 미동도 없었다.
 “나도 해달라고 부탁해볼까?”
 “무슨 부탁?”
 “몸에 새기는 마법진 말이야. C급인 너도 종횡무진 하는데, 나는 어떻겠어? 솔직히 네가 부러울 정도야. 분위기도 좋은데, 마법사님이 들어주시지 않을까?”
 묵묵히 듣던 자크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
 자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엘레나가 대신 대답했다.
 “아까 네가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마법사님의 심기가 안 좋았던 거 기억 못 해?”
 “너무 궁금한 걸 어떻게 해.”
 “그래도 입 닫는 게 좋을 거야. 솔직히 말해서 이번 파티는 인원이 너무 많아. 길잡이 케인만 있어도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가만히 입 닫고 있어. 괜히 마법사님 심기 거스르지 말고.”
 엘레나의 경고는 효과적이었다.
 돌켄은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말대로 마법사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건 없다.
 루터는 바닥에 놓인 오염된 마력석을 바라봤다.
 ‘크기는 중급 마력석 정도 되는 군.’
 중급 마력석은 상급 마력석의 백분지 일이다.
 그가 원하는 수량을 채우려면 잡아야 할 몬스터의 숫자가 여전히 부족했다.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봐야겠어.’
 몬스터 영역은 넓다.
 그는 오우거 이상의 몬스터를 잡을 생각이었다.
 ‘이번 기회에 사전 조사도 충분히 해보고.’
 몬스터 영역을 터전으로 삼기로 한 이상 이것저것 경험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케인이 나타났다.
 은밀한 암살자처럼 조용히 등장한 그는 루터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근처에 헌터들이 있습니다.”
 루터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케인이 경고했다.
 “그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왜?”
 “놈들은 몬스터를 노리는 게 아닙니다.”
 루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몬스터 영역은 치외법권이다.
 사실상 무법지대라는 말인데, 그런 영역에서 오우거 아홉 마리를 사냥한 일행들을 다른 헌터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지금 이 일대를 수색 중입니다. 야간 사냥은 자살 행위나 다를 바 없으니 목적은 아마 다른 데에 있겠죠.”
 “다른 목적?”
 “다른 파티를 습격하려는 겁니다.”
 케인은 몬스터 영역 길잡이로 4년 간 활동했다.
 그의 오랜 경험이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루터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숫자는?”
 “스무 명 가량 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답은 뻔하지 않나?”
 일어선 루터가 싸늘히 대꾸했다.
 “전부 죽여야지.”
 그는 케인과 함께 일행에게 향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화기애애하던 세 사람이 루터를 쳐다봤다.
 루터는 여상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적이 나타났다. 죽이러 가자.”
 듣던 그들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무기를 챙기고 분분히 일어선 가운데, 자크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사람입니까?”
 “그래. 전부 팔 걷어붙여라. 마법진을 새겨주마.”
 돌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가장 먼저 앞으로 다가온 그가 팔을 내밀었다.
 돌켄을 시작으로 케인까지 근력 증강 마법진을 새긴 루터가 단검을 뽑았다.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은 돌켄이 물었다.
 “마법사님. 마나 지팡이 안 쓰십니까?”
 루터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명령했다.
 “다른 사람 방해 않게 조용히 죽여. 그리고 길 잃어버리지 마라.”
 케인이 조언했다.
 “낮은 지형으로 갈수록 우리 야영지고 알아 볼 수 있게 갈대를 꺾으며 움직이면 헤맬 일은 없을 거다.”
 두 사람씩 짝을 맺었다.
 케인과 엘레나. 돌켄과 자크. 루터는 당연히 혼자였다.
 “가자.”
 루터가 먼저 갈대밭으로 몸을 넣었다.
 일행이 뒤따르고 갈라졌다.
 조용히 움직이던 루터는 인기척에 그대로 멈췄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자들이 있었다.
 “분명히 이 근처에 연기가 피어올랐어.”
 “멍청한 놈들. 죽음을 자초하는 군.”
 “잡은 몬스터 좀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두 명이었다.
 접근한 루터가 조용히 뒤를 잡았다.
 “하암. 밤중에 움직이니 피곤하네.”
 “조금만 참어. 곧 끝날 테니까.”
 동료의 조언은 현실이 되었다.
 일어선 루터가 하품하던 자에게 접근한 뒤, 단검을 찔렀다.
 단검이 뒷목을 찔러 목울대를 관통했다.
 “커커컥!”
 목을 부여잡는 동료를 보던 장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입이 경고를 외치기 직전에 스트렝스 마법이 걸린 손아귀가 목을 틀어쥐었다.
 “커헉!”
 목 잡힌 장한이 주먹을 휘둘렀으나 힘이 없었다.
 수영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던 장한의 눈이 점점 죽어갔다.
 루터의 손속은 자비가 없었다.
 목이 단검에 관통당한 자는 짚단처럼 쓰러졌고, 목줄기를 잡힌 자는 그 상태로 절명했다.
 루터는 죽은 이들을 내려다보다 다시 몸을 낮추고 갈대밭을 이동했다.
 
 몸을 낮춘 돌켄이 적을 향해 다가간다.
 그가 쥔 양날 도끼는 충분히 살상력이 있었고,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넌 뒤졌어.’
 그는 이름 모를 대상을 향해 사납게 웃었다.
 어깨와 팔목에 새겨진 마법진에서 일어나는 힘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이 힘이라면 어느 누구든 죽일 자신이 있었다.
 몸을 낮추며 접근하던 돌켄은 적이 사정권에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 양날 도끼를 휘둘렀다.
 부우웅!
 사선을 가르는 양날 도끼가 바람을 일으켰다.
 “헉!”
 갑작스러운 돌켄의 등장에 헛바람을 삼킨 적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돌켄은 의기양양했다.
 ‘크크크. 아무나 걸려봐라. 대가리를 쪼개주지.’
 다른 대상을 물색하려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덥석 쥐었다.
 고개를 돌리니 자크가 무표정한 얼굴로 속삭였다.
 “조심해라.”
 적을 죽인 건 좋았으나 정면에서 필요 이상으로 움직였다.
 암습의 기본은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배후에서 은밀히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데 돌켄은 힘을 믿고 정면에서 찍어 누르려 한다.
 상대가 강하면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의 경고에 돌켄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걱정 마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테니까.”
 들뜬 돌켄은 자크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결국 그 방만한 자신감이 사달을 일으켰다.
 다시 한 번 매복한 돌켄이 앞으로 다가오는 적을 향해 몸을 불쑥 일으켰다.
 ‘뒤져!’
 이번에 휘두른 양날 도끼는 종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상대가 검을 휘둘렀다.
 깡!
 양날 도끼와 장검이 중간에서 부딪혔다.
 돌켄은 순간 무기를 놓칠 뻔했다.
 상대의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사이 뒤로 이동한 자크가 대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부아아앙!
 거친 풍압이 돌켄을 막아낸 상대의 배후에 불어 닥쳤다.
 콰아아앙!
 무기가 부딪히고 자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둘의 합격을 모조리 막아낸 사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것들 봐라? 치사하게 두 명이서 공격을 하네?”
 사내의 뺨에 새겨진 뱀 문신이 안면 근육을 따라 움직였다.
 “게다가 쥐새끼처럼 숨어 공격하다니, 아주 음흉해.”
 사내를 훑던 자크가 돌켄을 잡아 당겼다.
 “우리 상대가 아니야. 피하자.”
 씩씩거리던 돌켄은 자크의 조언에 기막힌 듯이 물었다.
 “제대로 붙어보지도 않고 도망치자고? 자크, 너 돌았냐?”
 “상대의 검을 봐라.”
 돌켄은 그의 말을 따라 검을 살피곤 흠칫했다.
 검신에 붉은 빛이 일렁였다.
 체내의 마나를 검에 두를 정도라면 최소 익스퍼트 중급 이상이란 얘기다.
 “도망쳐야 한다.”
 자크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마법사의 근력 증강 마법진을 새겼어도 익스퍼트 중급의 상대가 될 순 없다.
 분한 듯 돌켄이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이 피할 기미를 보이자 뱀 문신이 능글맞게 웃었다.
 “찔러보고 안 되니 달아나시겠다? 이거 참 웃기는 새끼들이네. 좀 전의 투지는 어따 팽개쳐두고 꼬리말은 개새끼같이 도망치게? 무기를 뽑았으면 최소한 반항이라도 해야지. 그래야 죽일 맛이 날 거 아니냐? 날 좀 더 즐겁게 해봐.”
 뱀 문신의 조롱에도 자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켄은 달랐다.
 시뻘게진 얼굴로 콧김을 내뿜던 그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피하기는 이미 늦었다. 차라리 맞서 싸우자.”
 “무조건 질 거다. 아니, 죽을 거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똑같아! 그럴 거면 최소한 싸워보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외친 돌켄이 무기를 거머쥐며 투지를 일으켰다.
 자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때마침 구름이 달을 가려 사방은 깜깜했다.
 어둠을 이용해 갈라져 달아난다면 적어도 한 명은 살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돌켄의 기세를 보니 도망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크는 익스퍼트 검사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그들의 검은 상대의 무기를 잘라버린다.
 체내에서 일으키는 마나의 힘을 이용해 강화한 검과 신체 능력은 투지를 잃게 만든다.
 자크는 자신의 대검을 내려다봤다.
 겨우 한 번 부딪혔는데, 검신에 균열이 생겼다.
 ‘이곳이 내 무덤이군.’
 죽을 줄 알았지만, 동료를 버리고 도망갈 순 없었다.
 무기를 고쳐 쥔 자크와 돌켄이 뱀 문신을 노려봤다.
 뱀 문신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럼 그래야지. 자, 그러면 한 번 즐겨 볼까?”
 이번에는 뱀 문신이 다가가는데, 움직임이 눈으로 따라가는 것보다 더 빨랐다.
 “흡!”
 헛바람을 삼킨 돌켄이 있는 힘껏 양날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상대의 움직임을 놓친 시점에서 이미 승부는 갈려 있었다.
 순식간에 접근한 뱀 문신의 장검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츄악!
 “크아아악!”
 팔이 잘린 돌켄의 비명이 조용한 갈대밭에 울려 퍼졌다.
 자크는 이를 악물고 수직으로 뱀 문신을 향해 내리쳤다.
 “힘 하난 좋구나!”
 벼락같이 떨어지는 대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그의 장검이 다시 흔들렸다.
 피슛! 피슛!
 쾌속 찌르기가 자크의 왼쪽 어깨와 양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크윽!”
 신음을 흘린 자크가 대검을 떨어트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너는 위험하니 죽여야겠다.”
 뱀 문신이 그의 머리를 쪼개려다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호오! 이게 뭐야?”
 그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리고는 자리를 도약해 갈대밭으로 뛰어들었다.
 “크아악!”
 갈대밭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자크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잠시 후, 복부에 검상을 입은 케인과 제압당한 엘레나가 줄줄이 끌려왔다.
 뱀 문신이 케인을 집어 던졌다.
 철푸덕!
 바닥을 구른 케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흐흐흐. 계집이라니. 이게 웬 횡재냐?”
 뱀 문신이 침을 흘리며 엘레나를 끌어안았다.
 하체를 엉덩이에 바싹 붙이고, 온 몸을 주물렀다.
 “더러운 새끼! 이거 놔!”
 엘레나는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상대는 익스퍼트 검사였다.
 뱀 문신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네놈들 덕분에 내가 오늘 몸보신 하는 구나! 거기서 지켜보아라. 오늘부터 너희 계집은 내가 접수하마.”
 신난 뱀 문신이 바지를 내리려다 움찔했다.
 갑자기 몸 돌린 뱀 문신이 검을 엘레나의 목에 가져갔다.
 그리곤 깜깜한 갈대밭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좋게 말할 때, 나와라.”
 부스럭!
 말하기가 무섭게 갈대밭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뱀 문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펑퍼짐한 로브에 후드까지 써서 제법 음산해 보였다.
 뱀 문신의 눈이 깊어졌다.
 “넌 뭐냐?”
 루터는 주위를 둘러봤다.
 돌켄은 팔이 잘린 채 울부짖고 있었고, 자크와 케인도 부상을 입었다.
 누가 그랬는지 뻔히 보였다.
 침묵하던 루터가 말문을 열었다.
 “인질을 놔주고 물러나면 살려주겠다.”
 뱀 문신이 싸늘하게 웃었다.
 “이 새끼가 정신이 나갔나. 바닥에 널브린 새끼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물러나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히는 개수작이야?”
 “그럼 인질을 놔두고 직접 붙지 그러나?”
 “흐흐흐. 그러고 싶지만 보다시피 아리따운 여인이 내 품에 있거든. 품에 든 레이디를 내팽개치는 건 기사도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지.”
 음흉한 말과 달리 뱀 문신은 루터를 경계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의 예상 거리와 달리 상당히 가까이에 와 있었다.
 순간 계집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으면 당했으리라.
 뱀 문신은 엘레나의 뒤에 착 달라붙은 채, 루터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대가리가 있으면 협상의 기본은 알겠지? 나는 네 동료를 인질로 잡고 있어. 누가 우선권이 있는지 알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서?”
 “무기를 멀리 던져라.”
 루터는 잠자코 그가 하자는 대로 무기를 버렸다.

댓글(9)

거누라    
추천하기 애매함.
2020.08.26 18:15
je******    
초반에는 그나마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이야기의 구성이지만, 하.... 중반으로 넘어가면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엄청나게 뻥튀겨집니다. 구매하여 다 읽은 내가 바보였습니다. 추천하지 않아요.
2020.08.29 22:03
jo****    
구매는 비추지만 대여는 가성비로 따지면 저렴하게 킬링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은거 같네요. ⭐️⭐️⭐️별점으로 따지면 3개정도 같습니다.
2020.08.31 12:09
야옹고    
과거 가고싶어서 다 죽인거네 그냥 오래살고싶은 노인네 비추소설이네
2021.02.01 14:23
랜덤없냐    
근접 호위가 싸다니 ㅋㅋㅋㅋ 탈무드 같은 책도 좀 읽고하세요. 생각의 폭을 넓히셔
2021.02.24 13:19
[탈퇴계정]    
주인공이 엄청나게 먼치킨인데 뒤로 갈수록 계속 강해짐 뭔가 먼치킨의 일상같은 느낌인데 그냥 저냥 술술 읽히긴 함 추천하긴 좀 그런데 그렇다고 쓰레기급은 아닌거같고 그냥 그럼 뭐가 됐든 먼치킨 사이다 원하면 괜찮을거같음
2021.04.05 17:39
나이트워크    
절대 대여금지 3권까지 보다가 포기
2022.03.28 15:22
ds****    
3권까지 읽었습니다. 재미 있었지만 갑자기 드래곤볼 읽는 기분이 들어 포기했습니다. 다만 현재 이벤트 대여 책중에서는 볼만한 편입니다.
2022.03.29 16:27
야간비행1    
3
2023.01.21 18:25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