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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칼든 자들의 도시 [E](종료230728)

칼든 자들의 도시 1-1권

2019.02.22 조회 7,091 추천 69


 #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온 무인
 
 “의사 선생님 계신가요? 의사분!”
 승객이 발작을 일으키자 승무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의사를 찾는 동안 다른 승무원이 매뉴얼대로 응급처치를 했지만, 남자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숨이 가빠지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때 심폐소생술을 하던 고참 승무원이 퍼스트클래스의 손님을 생각해냈다.
 ‘아! 어쩌면.’
 그녀가 환자를 후배에게 맡긴 후 앞쪽으로 달려갔다. 비즈니스석을 지나 퍼스트클래스로 들어선 그녀가 한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죄송합니다만, 위급한 상황이라서요.”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장천이 승무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끼고 있던 헤드셋을 빼자 승무원이 빠르게 물었다.
 “무림인이시죠?”
 과연 장천의 옆에는 한 자루의 검이 세워져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장천은 부드럽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응급환자가 있어서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일단 가면서 얘기합시다.”
 장천이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상당히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 거기에 지성미 가득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무림인이라기보다는 젊고 잘생긴 교수 이미지였다.
 “감사합니다.”
 승무원이 장천의 뒤를 따르며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승객의 상태를 설명했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남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창백한 얼굴에 이미 의식을 잃었고 숨소리도 미약했다.
 장천이 침착하게 남자 손목의 맥을 잡아보더니, 빠르게 몇 군데 혈도를 눌렀다.
 죽음으로 내달린 것도 순식간이었지만, 돌아오는 것도 그만큼 빨랐다.
 “후아아아.”
 남자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자 그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승객들도 깜짝 놀랐다. 정말이지 두 사람이 짜고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거짓말같은 회복이었다.
 “응급처치만 했으니 공항에 의사를 대기시키세요.”
 “브라보!”
 외국인 승객 하나가 소리치는 것을 시작으로 모두들 박수를 쳤다.
 장천이 배우가 무대인사를 하듯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숙인 후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유를 되찾은 승무원이 승객들에게 말했다.
 “보셨다시피 우리 비행기에는 무림고수분이 타고 계십니다. 혹시라도 하이재킹을 생각하신 분이 계신다면 오늘은 포기해 주세요.”
 “하하하.”
 그녀의 농담에 승객들이 기분 좋게 웃었다.
 승무원이 장천의 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감사했어요.”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어요.”
 승무원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장천을 바라보았다. 처음 그가 탔을 때, 모든 승무원들의 관심을 받았다. 바로 장천 옆에 세워진 검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검을 향하자 장천이 웃으며 물었다.
 “유난스럽죠?”
 비행기에 무림인이 탄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비행기 표를 두 자리를 끊어서 나머지 자리에 자신의 칼을 세워둔 사람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 비싼 일등석에 말이다.
 “무림인분들은 검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다고 들었어요.”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음, 친구 정도가 적당하겠네요.”
 “친구를 바닥에 내려두고 갈 수는 없죠.”
 승무원이 검을 자세히 보았다. 검집에는 수많은 흠집이 나 있었고 손잡이는 닳아 있었다. 그 세월에 밴 피 냄새까진 맡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이 검이 단지 장식용 검이 아니라 진짜 사람을 베는 검임을 알 수 있었다.
 “오래 사귄 친구인가요?”
 “꽤 오래 사귀었죠.”
 검을 바라보는 장천의 눈빛에 신뢰가 깃들었다.
 “지금까진 이렇게 귀하게 대하지 못했습니다. 고생 많이 시켰거든요. 오늘만큼은 제대로 데려가고 싶어서요.”
 “특별한 날인가 봐요?”
 “아주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무림인이라고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고, 쓸데없이 재력을 과시한다고 생각했다. 그 돈 있으면 나나 주지, 그런 농담을 동료들과 주고받았다.
 그래서 첫인상이 썩 좋지 못했는데, 장천이 승객을 구하고 젠틀한 모습을 보이자 이젠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미안했다.
 “오늘 너무 감사했어요.”
 장천이 미소를 지으며 헤드셋을 꼈다.
 돌아서려던 승무원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아까부터 듣고 계시던데, 무슨 음악을 듣고 계시나요?”
 “음악이 아니라 무공구결입니다. 가끔 이렇게 MP3에 담아서 듣곤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편히 쉬세요.”
 승무원이 환하게 웃어준 후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가 후배 승무원에게 말했다.
 “저분, 왜 일등석에 타셨는지 알 것 같아.”
 “왜죠?”
 “다른 승객들이 저 검을 보고 위화감을 느끼고 겁낼까 봐 이곳에 탄 것 같아.”
 “아깐 돈지랄이라고 하셨잖아요?”
 “마이 미스테이크.”
 “칼 든 남자에게 이렇게 쉽게 빠져들다니. 언니, 조심해요.”
 “멋있잖아?”
 승무원이 커튼 사이로 객실 내부를 바라보았다.
 장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의 그 모습 그대로 손바닥만 한 창 너머로 광활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
 
 삐.
 장천이 허리에 검을 찬 채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자 경고음이 울렸다.
 옆 라인을 지나던 사람들이 장천을 쳐다보았다. 여러 감정이 깃든 눈빛이었다. 호기심, 동경, 두려움. 보통 사람이 무림인을 바라보는 감정 그대로였다.
 무림인이라고 모두 다 입출국 시 무기 소지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국내무림연맹의 허가를 받으면 국내에서만, 대륙무림연맹의 허가를 받으면 그 대륙에서만, 세계무림연맹의 허가를 받으면 세계 어느 나라를 들어가더라도 무기 소지가 허용된다.
 장천은 흔하지 않은 세계무림연맹의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물론 무기 소지가 자유롭다고 입출국 심사마저 생략되진 않았다. 무기 반입이 자유롭기에 일반인들보다 더 엄격하게 심사했다.
 장천이 입국 심사관에게 여권을 내밀었다.
 신분증과 마찬가지로 여권도 일반인들의 것과 달랐다. 여권 중앙에 무(武)라는 붉은 직인이 찍혀 있었다.
 장천의 여권을 기계에 통과시키자 위조 신분증이 아니라는 표시로 녹색불이 들어왔다.
 “어디 소속이십니까?”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프리랜서시고.”
 심사관 앞에 놓인 작은 스크린에 장천의 정보가 떠 있었다.
 “14년 만의 귀국인 데다가 이전 환승지가 블라리 공화국이었군요.”
 심사관이 예리한 눈빛으로 장천을 쳐다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블라리 공화국에서는 내전이 한창이었다. 하루에도 수천 명씩 사상자가 생겼던,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무슨 일로 그곳은 가셨습니까?”
 “사업차 갔다가 발이 묶였습니다.”
 “한국에 입국하는 이유는요?”
 “역시 비즈니스 때문입니다.”
 심사관의 시선이 다시 화면을 향했다. 그때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하나의 숫자.
 그가 은밀히 벨을 누르자 뒤쪽 대기실에 있던 무장경찰들이 쏟아져 나왔다.
 경찰 책임자가 심사관과 대화를 나누더니 장천에게 다가왔다.
 “잠시 이쪽으로 오시죠.”
 “네, 그러죠.”
 장천은 순순히 경찰의 지시에 따랐다. 무림인이 경찰 지시에 불응하면 가중처벌을 받는다. 특히 공항의 무장경찰이라면 더욱 신중히 행동해야 한다.
 사방의 총구가 장천을 따라 움직였다. 무장경찰들은 기관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음에도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무림의 고수들은 총으로도 상대할 수 없었다. 반사신경이나 움직임이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림고수가 단 몇 초 만에 중무장한 병력 수십 명을 몰살시킨 사건도 있었다.
 “신분증에 문제가 있어요. 여기 보시면 무림인 등록일자가 26년 전으로 나옵니다만?”
 “네, 그런데요?”
 “한데 장천 씨의 현재 나이는 34세.”
 사실 장천은 많아 봐야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외모였다. 물론 믿기 어려울 정도의 동안이라서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럼 여덟 살에 BST에 패스했다는 겁니까?”
 BST(Blade Spirit Test)는 정식 무림인이 되는 시험이었다. 무림인이 되면 의무와 책임도 커지지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다양했다. 많은 곳에서 무림인들을 고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림연맹에서 제공하는 혜택과 지원 역시 무시하지 못할 만큼 컸다.
 그래서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응시하지만, 합격률은 굉장히 낮았다.
 “그렇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는지 장천은 차분하게 대처했다.
 경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통상적으로 BST 시험은 아무리 빨라도 스무 살은 넘어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죄송하지만 무림연맹에 연락해서 신분이 확인될 때까진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장천이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짓던 바로 그때였다.
 “잠시만요.”
 돌아보니 늘씬하고 뽀얀 피부의 단발 미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늘씬하면서도 볼륨감 있는 몸매에 순수함이 물씬 느껴지는 얼굴, 강단 있는 눈빛에 깃든 냉소적인 느낌이 부드러운 미소와 합쳐지면서, 그녀를 단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독특한 매력의 미녀로 만들어주었다.
 사방에서 겨눠진 무장경찰의 총구마저 그녀의 미모에 분위기를 더하는 소품이 되었다.
 “HT그룹 본사에서 나온 보안3팀의 이연이에요.”
 HT그룹이란 말에 경찰 책임자가 흠칫 놀랐다. HT그룹은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이었다. 전국 곳곳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녀가 내민 신분증을 휴대용 기계로 확인한 경찰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먼저 확인부터 할게요.”
 이연이 장천에게 다가갔다.
 “장천 씨?”
 “네. 접니다.”
 “일정에 차질이 생겨서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초대장은 받으셨지요?”
 “여기.”
 장천이 초대장을 건넸다. 이연이 휴대용 기계로 초대장을 스캔하자, 삐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색 불빛이 들어왔다.
 “결례를 용서하세요. 가끔 가짜를 가지고 참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양해를 구한 후 이연이 경찰에게 돌아섰다.
 “여기 이분은 본사의 연말파티에 초대되신 귀빈이에요.”
 “아! 그러시군요.”
 경찰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장천을 쳐다보았다. HT그룹의 연말파티에 초대받는 이들은 정계, 재계, 문화예술계의 유명인사들이었다. 초대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잘나가는 사람이란 것을 입증했다.
 “이분 신원은 저희가 보장하죠. 이후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본사가 책임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모시고 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이연이 장천과 함께 그곳을 나왔다.
 공항 앞에 엄청난 덩치의 대형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장천이 뒷자리에 탔고, 비행기에서처럼 검을 옆자리에 세웠다.
 “출발하겠습니다.”
 이연의 태도는 정중했다. 회사의 VIP인 데다가 무림인이었다.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무림인과 관련된 소문들은 대부분 무서운 것들이었으니까.
 “이 차는 VIP용 방탄차로 로켓포와 대전차 지뢰의 공격까지 버티도록 설계되었어요.”
 조수석에 앉은 이연의 설명에 장천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자리에 자주 타십니까?”
 “가끔 탑니다만.”
 “그럼 조심하십시오. 조수석 쪽 방탄유리에 결함이 있습니다. 최근에 결함이 고쳐졌지만, 이 차는 고쳐지지 않은 것 같군요.”
 “어떻게 아시죠?”
 “창문에서 잡음이 들리네요. 초기 버전의 현상이죠.”
 “잡음이 들린다고요?”
 그녀가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보자 장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틴팅도 예전 것 그대로고요.”
 “아!”
 새로운 창문으로 교체되었다면 틴팅도 최신 제품으로 바뀌었을 것이란 뜻이었다
 물론 이 역시 그녀는 예전 제품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없었다.
 장천이 했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한국에는 오랜만에 돌아오셨다고 들었어요.”
 “14년 만입니다.”
 “와! 그러시면 감회가 정말 새롭겠어요.”
 과연 창밖을 바라보는 장천의 눈빛에 알지 못할 회한이 스쳤다.
 그때 이연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가 속한 3팀 팀장 권혁수의 전화였다.
 “네, 팀장님. 지금 가고 있어요. 네, 네. 걱정 마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오랜 시간 비행에 피곤하실 텐데, 잠시 쉬세요. 도착할 때까지 한 시간쯤 걸릴 거예요.”
 “네.”
 장천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다. 이연은 창문에 비친 그의 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무덤덤한 표정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서 다음 일정을 확인하는 사이 안락하고 힘 좋은 차는 저 멀리 화려한 빌딩 숲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
 
 이연은 HT그룹 본사에서 멀지 않은 곳의 레지던스에 장천을 안내했다.
 이곳은 VIP들이 묵는 곳으로 6성급 호텔에 준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 역시 스위트룸부터 작은 크기의 일반 객실까지 구분되어 있었는데, 장천은 일반 객실에 배정되었다. 이연이 정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정해진 방이었다.
 “아시겠지만 연말파티는 사흘 후에 열립니다. 그때까진 편히 쉬세요.”
 보통 연말파티의 참가자들은 당일 바로 참석한다. 하지만 이렇게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은 며칠씩 일찍 도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혹시 불편한 일이 있으면 제게 연락 주세요. 로비에 있는 보안실 직원에게 말하면 즉시 제게 연락해줄 거예요.”
 “그러지요. 그리고 차를 쓰고 싶어요.”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본사의 기사가 편안히 모실 겁니다.”
 “아뇨, 차만 주세요. 큰 차 말고 평범한 차면 좋겠습니다.”
 “네, 로비에 키 맡겨두죠.”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장천의 방을 나온 이연이 2층에 마련된 3팀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번 연말파티 행사 때문에 보안팀 전원이 비상근무 중이었고 이곳 레지던스에 각 팀별로 임시 사무실이 열렸던 것이다.
 3팀장 권혁수가 그녀에게 말했다.
 “늦었다면서?”
 “네. 박 대표님 쪽 일정이 갑자기 바뀌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공항에서 픽업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 일 없었어? 무림인들은 종잡을 수가 없어서.”
 “아주 젠틀하던데요?”
 “다행이네. 박 대표는?”
 “1시간 후에 도착합니다.”
 권혁수가 목소리를 낮춰서 이연에게만 나직이 말했다.
 “박광철 그 인간 소문 들었지?”
 박광철 그 인간, 이 여섯 글자가 그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었다.
 박광철은 HT그룹 박인환 회장의 막내아들이었다. 박인환에게는 자식이 셋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망나니가 바로 박광철이었다.
 어려서부터 온갖 사고를 쳐대던 박광철은 서른이 넘어서야 그나마 철이 들었고, 몇 년 전에 박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를 차린 후 연예계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그 본성이 어디 가겠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보여주겠다는 듯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여러 여배우들과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의 가장 큰 문제는 그런 난잡한 스캔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점이었다.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이곳 레지던스에는 좀처럼 오지 않았는데, 마침 장천이 도착하는 오늘 이곳에서 엔터 관련 행사가 열렸던 것이다.
 “내키지 않으면 다른 애 보내도 되고.”
 “제 일이니까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박 대표가 치근덕댈 수도 있어.”
 “칭찬이시죠?”
 “그렇게 되나?”
 이연이 싱긋 웃었다.
 “전에 저희들 입사할 때 말씀하셨죠? 뭐든 처음 한 번에 달렸다고요. 한 번 피하고 나면, 이후에는 계속 피하게 된다고. 피하는 것이 당연해지고 그 비겁함에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붙인다고요.”
 “그건 인마. 연설하려고 인터넷에서 찾은 말이고. 다들 요령껏 피하고 산다.”
 “네, 서른까지만 요령 없이 버텨보겠습니다.”
 “넌 좋겠다, 졸라 젊어서.”
 “넵! 졸라 좋습니다!”
 인사를 꾸벅하고 나가려던 이연이 다시 돌아섰다.
 “아, 하나만 더요. 장천 말인데요.”
 “장천은 왜?”
 “젊고, 잘생기고. 혹시 돈까지 많으면 한번 꼬셔보려고요. 어떤 사람이죠?”
 권혁수가 피식 웃었다.
 “우리 이연 신데렐라로 만들어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나도 아는 바가 없다.”
 “팀장님도 모르신다고요?”
 맡은 일이 일인 만큼 이번 연말파티에 초대된 VIP에 대해서는 완전히 꿰고 있는 권혁수였다.
 “그럼 누가 아는데요?”
 “초대한 사람이 알겠지.”
 권혁수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회장님 손님이라고요? 아닌 것 같은데.”
 “왜?”
 “스위트룸이 아니라 일반 객실에 배정받았거든요.”
 초대된 VIP들도 등급이 있었다. 회장 손님, 사장 손님, 임원 손님. 당연히 회장 손님의 파워가 가장 높을 수밖에 없는데, 일반 객실에 배정되었을 리가 없다.
 “이상한데요?”
 “위험한 거지.”
 “네?”
 “내 나이쯤 되면 살면서 겪는 이상한 일들은 위험 카테고리에 넣는다. 못 본 척하란 말이다.”
 “어쩌죠? 제겐 그 자리에 모험 카테고리가 있어요.”
 “어쩌겠나. 호기심에 타 죽는 건 언제나 젊은 것들인 것을.”
 “하하. 불나방은 이만 물러갑니다.”
 그녀가 지나쳐간 한쪽 벽에 TV가 걸려 있었다.
 소리가 줄여진 화면에서는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칼에 잘린 것처럼 반듯하게 절단된 탱크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사람들이 뛰쳐나와 환호성을 지르는 화면 아래로 블라리의 내전이 끝났다는 자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레지던스 앞으로 대형 롤스로이스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박광철이었다.
 “환영합니다, 박 대표님.”
 그를 맞이한 사람은 이연이었다.
 박광철이 다짜고짜 그녀의 위아래를 훑었다. 첫 만남의 매너 따윈 애초에 없는 사람이었다.
 “저는 보안팀의 이연입니다.”
 “예쁘네.”
 대뜸 반말. 그의 무례에도 이연은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마스크 좋고, 비율은 더 좋고. 연예인 돼보고 싶은 생각 없어?”
 “과분한 칭찬 감사드립니다만, 저는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기회가 없었겠지.”
 “그럴지도요.”
 박광철이 양손으로 카메라 프레임을 만들며 다시 한번 이연의 몸매를 훑었다.
 “무림인인가?”
 “아닙니다.”
 “아깝네. 이 피지컬에 무림인이기까지 하면 끝내줄 텐데.”
 “들어가시지요.”
 “가야지. 미인이 가자면 지옥이라도 따라가야지.”
 두 사람과 박광철의 수행원들이 로비로 들어섰을 때, 마침 장천이 안내데스크의 여직원에게 차 키를 받아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며 이연이 말을 걸었다.
 “외출하세요?”
 “잠시 바람 쐬러 갑니다.”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장천이 두 사람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박광철이 저 멀리 걸어 나가는 장천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하여튼 요즘 애새끼들, 개나 소나 칼 차고 다니지.”
 무림인이 아닌데 폼으로 가짜 검을 차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이었다.
 “저분은 진짜 무림인이십니다.”
 “그래? 누군데?”
 “이번 연말파티에 초대되신 VIP십니다.”
 “그러니까 누구?”
 “규정상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저놈에게 관심 있지? 바라보는 눈빛이 그윽한데.”
 가지가지 한다 싶었지만, 이연은 정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관심 없습니다.”
 “그래? 아까 그놈에게 이른다?”
 “상관없습니다.”
 “너무 남자 밝히면 나중에 스캔들 관리하기 곤란한데.”
 마치 이연이 자신의 회사소속이라도 된 듯한 말투였다.
 “가시죠.”
 이연이 재촉했지만 박광철은 멈춰 서서 장천이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뻥쳤네. VIP라면서? 왜 저딴 차를 타?”
 연말파티에 초대받은 사람이 탈 차가 아니라고 확신한 것이다.
 “거짓말 아닙니다.”
 “어떤지는 내가 알아보지.”
 박광철이 수행원 중 한 명에게 눈짓을 보냈다. 명령을 받은 수행원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장천에 대해 조사를 하러 가려는 것이다.
 이연은 그 행동을 막지 않았다. 어차피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었고 괜히 박광철을 자극해봤자, 장천에게 좋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제서야 박광철이 이연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가 물었다.
 “회장님은 잘 계시지?”
 “네, 잘 계십니다.”
 “하긴. 우리 영감이야 너무 정정해서 탈이지. 영계 좆나게 따 먹고 몸에 좋은 것만 먹으니 불로장생도 할 거야.”
 지극히 불쾌한 말이었지만 이연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이 정도에 감정을 드러낼 정도의 아마추어는 아니었으니까.
 이 스트레스를 일종의 직업병이라 생각했다. 허리 아프면 파스 붙여가며 일하듯이, 못 들은 척 참아가면서 사는 거다.
 박광철에게 25층 스위트룸이 제공되었다.
 “미녀들에게 내 방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는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쉬십시오.”
 이연이 정중히 인사한 후 돌아섰다.
 ‘이놈아, 백 년을 기다려봐라.’
 
 ***
 
 “먹고살기 힘들지?”
 권혁수의 말에 멍하게 있던 이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치도 빠르셔라.”
 “자네 약점이기도 하지. 화난 것을 숨기지를 못해.”
 “제가 포커를 아예 손도 대지 않는 이유기도 하죠.”
 “박광철 그 인간, 내놓은 자식이라도 자식은 자식이야. 참아야지. 산다는 것은 고행이여, 고행. 원시인들도 먹고살기 힘들었을 거다.”
 “그럼요, 돌도끼로 맘모스 새끼를 잡을 수는 없죠.”
 “그 아래 당구장 표시하고 적어둬. 잡을 수 있어도 절대 잡아선 안 된다.”
 이연이 피식 웃었다. 권혁수와 이야기를 나누니 기분이 풀어졌다.
 “이거나 받으세요.”
 그녀가 바닥에서 쇼핑백을 들어서 그에게 건넸다. 안에 든 것은 포장된 선물상자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미안하지만 나 유부야. 이십 년 차 프로 유부. 오피스 와이프는 키우지 않아.”
 “프로 유부께서 와이프 생일인데 퇴근도 안 하고 뭐해요?”
 “어? 어떻게 알았어?”
 “언니 가져다드려요. 부담가지지 마세요, 하긴, 제 쥐꼬리만 한 월급 아실 테니 그럴 리는 없겠네요.”
 “난 그 쥐꼬리로 애 둘을 키웠어.”
 “팀장님이 아니라 언니가 키웠겠죠. 가세요, 오늘 작전실 당직은 제가 설 테니까요.”
 “이거 살짝 감동인데?”
 “실패네요. 큰 감동을 주려고 했는데.”
 그녀가 배시시 웃자 권혁수가 피식 웃었다.
 “땡큐.”
 “그 말은 저 말고, 오늘 같은 날도 묵묵히 참아주시는 분께 해주세요.”
 “한두 시간만 있다가 금방 올게.”
 “오늘은 사절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점수 왕창 따세요.”
 “짜식!”
 “짜식 없는 제가 오늘 말뚝 박습니다!”
 권혁수가 방을 나갔고, 이연은 권혁수가 나간 곳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기역자로 꺾인 복도 끝에 보안작전실이 있었다.
 
 ***
 
 “선배, 선배님.”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이연이 잠에서 깼다. 작전실 의자에 앉아서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였다.
 “왜?”
 잠에서 깬 그녀가 습관적으로 한쪽 벽의 화면부터 쳐다보았다.
 수십 개의 화면이 있었는데, 레지던스 인근의 CCTV들이었다. 그런데 외부를 커버하는 몇 개의 화면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꺼져 있었다.
 깜짝 놀란 이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중앙센터에서 껐습니다. 1팀에서 방금 연락 왔고요.”
 “왜?”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지들 마음대로지.”
 보안1팀은 회장을 수행하는 이들이었다. 보안팀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있는 이들이 모인 곳이었고, 당연히 보안팀 중에서도 파워가 가장 셌다.
 어쨌든 1팀이 움직였다면 회장이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카메라를 껐다는 것은 비공식적인 만남을 의미했다.
 ‘누굴 만나러 온 것일까?’
 
 ***
 
 HT그룹 회장 박인환은 장천의 방에 와 있었다.
 그는 작고 왜소한 체구였지만, 눈빛에서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은 강단이 느껴졌다. 그것만이라면 그의 첫인상은 그저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네로 끝나버렸겠지만, 그 강렬함을 포장한 것은 보통 사람에게서 보기 힘든 여유로움이었다.
 가진 자의 여유일 수도, 그것을 가지기까지 버텨온 자에게 주어진 선물과도 같은 여유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첫인상은 ‘작은 거인’이었다. 실제로도 그는 맨몸으로 시작해서 HT그룹을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시대에, 그는 여의주까지 입에 꽉 물고 승천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함께 온 보안실장 홍태식은 커다란 덩치에 단단한 바윗덩어리를 보는 것처럼 누가 봐도 보안실장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블레이튼 회장님이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 겁니다.”
 “나 역시 그 사람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자넬 부르지 않았을 것이네.”
 블레이튼 회장은 지난 10년간 포브스지 5위권을 벗어나지 않았던 대부호이자 세계적인 기업가였다. 박인환과는 오랫동안 거래를 해온 사업적 파트너이자 친구였다.
 “그 친구는 자네를 신처럼 여기더군.”
 “과장을 잘하는 분이잖습니까?”
 “가끔 유머가 지나칠 때가 있지만, 나는 그가 사람을 평가하는 일에서 과장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네.”
 박인환이 처음 장천을 보았을 때, 생각보다 너무 젊어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이 불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블레이튼 회장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소개해 주겠다는 사람이 대체 누군가?
 ―사업가? 해결사? 용병? 위기관리인? 그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무공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비즈니스 무인이라고 할 수 있지. 실제로도 전 세계에 여러 사업체를 가진 걸로 알고 있네.
 ―무림인이 사업까지 하다니. 흔한 경우는 아니군.
 ―아주 독특한 사람이지. 이 세상의 다른 면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할까?
 ―다른 면이라니?
 ―직접 경험해 보면 알게 될 거네. 어쨌든 자네가 보는 것은 그 사람의 빙산의 일각일 거야. 나도 여전히 그 일각만 보고 있지. 한데 그 빙산의 일각이 지금까지 내가 봤던 어떤 대륙보다 넓었다면, 자넨 믿겠나?
 
 블레이튼 회장은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일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장천과는 최근 몇 년 사이 인연을 맺었다는데, 이 짧은 교류에 이런 칭찬이라면, 이건 칭찬이 아니라 찬양이라 할 수 있다.
 “일부러 자네를 연말파티 VIP로 초대했네. 그게 일 처리 하기 나아 보여서.”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지금부터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홍태식이 나섰다.
 “이번 연말파티에서 회장님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란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질 듯 심각하게 말한 홍태식에 비해 장천은 차분했다.
 “어디서 입수한 정보입니까?”
 “본사의 내부 정보망입니다.”
 “정보의 신빙성은요?”
 “상당히 높다고 판단합니다.”
 순순히 대답하고 있었지만 홍태식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에게 위기가 닥쳤는데 보안실장으로서 외부인사를 불러 일을 처리하게 되었으니 자존심이 크게 상한 것이다.
 사실 무림인이라면 자신의 부하들 중에서도 있었다. BST를 패스한 무림인들은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보안요원들의 길을 걷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사인인 데다가 회장이 직접 결정을 내린 일이었기에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배후가 누군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자 박인환이 대신 대답했다.
 “나는 적이 많은 사람이라네.”
 박인환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안을 소홀히 여기지도 않았다. 지금껏 기업을 키워오면서 여러 위기를 겪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살해 위협을 당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연말파티를 취소하거나 참석하지 않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런 협박에 물러설 생각 없네.”
 그럴 것 같았으면 애초에 이런 자리도 없었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이 사실은 누가 알고 있습니까?”
 “정보를 알아낸 정보원과 정보실장, 여기 있는 우리 둘까지 모두 넷이네. 자네까지 이제 다섯이 되겠군.”
 아직 보안팀 내에도 알리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말이 새어나가면 회사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연말파티는 망쳐버리게 될 것이다.
 “잘하셨습니다.”
 장천이 더는 질문을 하지 않고 흔쾌히 말했다.
 “이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고용하는 비용은 전액 선불입니다.”
 “얼마입니까?”
 “천만 달러입니다.”
 질문을 한 홍태식은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천만 원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장천이 말한 액수는 분명 천만 달러였다.
 “천만 불이면 100억이 넘는 금액인데?”
 황당해하는 홍태식과는 달리 박인환 회장은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굉장히 흥미롭다는 눈치였다.
 “착오가 있으신 것 같은데 일 년이 아니라 단지 연말파티까지 단지 사흘만 고용하는 일입니다.”
 홍태식은 1년이라도 터무니없이 많은 액수라고 여겼다.
 “알고 있습니다.”
 경악한 그에 비해 장천은 담담했다.
 “게다가 전액 선불이라고요?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믿고 그 돈을 지급합니까?”
 홍태식의 항의에 장천이 되물었다.
 “그렇게 따지면 저는 어떻게 당신들을 믿고 이 일을 맡습니까?”
 “우리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합니까?”
 발끈한 홍태식 대신 장천이 박인환을 보며 말했다.
 “블레이튼 회장님께 대충 제 몸값에 대해서 들었을 것 같습니다만.”
 장천의 물음에 박인환이 대답했다.
 “아주 비싸다고만 들었네만. 원래 이렇게 비싼가?”
 “경우에 따라서 다릅니다.”
 “블레이튼 그 사람이 자네와 관련한 일화를 하나 들려주더군. 아프리카 원주민의 일을 들어준 적이 있다지? 1,980만 원을 받았고. 한데 그 일을 처리하는 데 4개월이 걸렸다고 들었네. 심지어 비용이 수십억이 넘게 들었고. 의뢰인에게 비용을 청구하지 않았다지?”
 “맞습니다.”
 “왜 그렇게 싸게 받았나?”
 “싸지 않았습니다.”
 “싸지 않았다고?”
 “그 1,980만 원은 의뢰인의 전 재산이었으니까요. 주위 친척과 주민들에게 돈까지 빌렸으니 아직까지 갚고 있겠군요.”
 “그렇다면 아예 그 돈을 받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았나? 자네에게 그 돈은 있으나 마나 한 돈일 텐데.”
 “정말 그랬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박인환은 장천의 물음에 담긴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전 재산을 던지는 사람의 간절함과 절박함에, 1,980만 원쯤은 받지 않겠다는 호의를 보이는 것이 옳은가를 묻고 있었다.
 이윽고 박인환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장사꾼이네.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야지.”
 “저 역시 사업을 하는 사람이지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돈을 지불하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돌아가겠습니다.”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홍태식의 인상이 점점 찌푸려졌다. 그는 다른 쪽으로 생각이 꽂혀 있었다.
 이 일이 HT그룹 회장의 일이 아니라면, 몇억, 아니 몇천만 원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 새끼가! 누굴 호구로 보고!’
 정말이지 박 회장이 아니었으면 욕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홍태식이 격한 감정을 애써 자제했다.
 “실제로 연말파티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그 불안감 때문에 저를 부른 것이고.”
 “사람의 불안과 절박함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먹겠다는 것이군요.”
 장천이 박인환 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작 당사자는 불안해하지도 절박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만.”
 박인환이 피식 실소를 흘렸고 홍태식이 더욱 인상을 굳혔다.
 장천이 차분히 홍태식을 달랬다.
 “지금 암살당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막아내는 비용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정작 봐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니지요.”
 “무슨 뜻입니까?”
 “암살의 시기와 장소.”
 뜻밖의 말에 홍태식은 물론 박인환도 궁금한 기색을 보였다.
 “만약 회장님을 암살하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왜 연말파티에서 암살을 하려는 걸까요? 온갖 VIP들이 모이는 만큼 경계가 철통같을 텐데. 차라리 출퇴근길을 노리거나, 다른 더 쉬운 순간을 노리면 될 텐데.”
 순간 홍태식이 흠칫했다. 미처 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연말파티 참석자 중에 암살자가 있다는 뜻입니까?”
 홍태식의 물음에 장천이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이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고. 한 가지 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연말파티에서 HT그룹 총수를 노리는 자들이라면 업계 최고의 실력자가 동원되었을 겁니다. 한데 정보가 샜다? 아, 물론 HT그룹의 정보력을 무시하려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놈들이 일부러 정보를 흘렸다는 뜻입니까?”
 “그 역시 모를 일이지요.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입니다.”
 사실 박인환은 장천이 얼마를 요구하든 그를 고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고, 또한 블레이튼 회장을 믿고 있었으니까. 특별히 소개를 해줬는데 가격이 맞지 않아 돌려보내는 것은 블레이튼에게도 아주 큰 실례였으니까.
 하지만 잠시 두고 보면서 시간을 끈 것은 장천에 대한 호기심에 더해, 홍태식에게 납득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장천의 지적은 홍태식이 놓치고 있었던 부분들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한발 물러서게 할 명분이 생긴 것이다.
 “앞서의 결례를 용서하고 이번 일을 맡아주게.”
 박인환이 장천에게 부탁한 다음에 홍태식을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박인환을 모셔온 사람인 만큼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번에 알았다.
 그가 장천을 보며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사과했다.
 “무례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장천이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맡죠.”
 “고맙네.”
 장천이 계좌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넸다.
 “마켓을 통해 처리해주십시오. 수수료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마켓(Market).
 아무런 수식어가 붙지 않고 그냥 마켓으로 불리는 곳.
 그들은 의뢰인과 청부자를 이어주는 중개자로 기업 자체가 철저한 비밀에 둘러싸인 다국적 기업이었다. 심지어 마켓의 CEO가 누군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한나절 일해 줄 가정부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을 처리해줄 용병도 구할 수 있는 곳이 마켓이다.
 홍태식이 전화를 걸어 입금을 지시했다.
 잠시 후, 홍태식이 말했다.
 “입금 완료했습니다.”
 장천이 자신의 폰으로 입금내역을 확인했다.
 
 9,000,000$
 
 마켓의 중개수수료는 10%.
 마켓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다 동원해서 당사자들 사이의 거래를 성사시켜주었다. 그리고 그 어떤 거래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 형성된 그들의 막강한 인프라와 자본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의 100억에 달하는 거금이 입금되었어도 장천은 무덤덤했다.
 홍태식은 끝내 한마디를 참지 못했다.
 “만약 이번 파티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장천 씨도 무사하진 못할 겁니다.”
 박인환은 홍태식을 야단치는 대신 장천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는 장천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였다.
 장천이 그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제가 일을 맡았는데도 회장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번 일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복수는 제가 아니라, 그 일을 꾸민 자에게 해야겠지요.”
 “자신감 한번 대단하군요.”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지 말란 말입니다.”
 홍태식이 코웃음을 쳤지만 어떤 면에서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마땅히 복수의 상대는 그 일을 꾸민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왠지 모르게 밀리는 기분이 들어 홍태식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부하들 중에 무림인들이 있었지만, 정작 그는 무림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HT그룹 회장의 경호를 책임지는 사람이니, 대단한 배짱과 사격술을 지니고 있었다.
 상대가 무림인이라고는 하나 눈으로 보기에는 20대의 새파란 애송이처럼 보였다. 정말이지 총 한 방이면 그대로 이마에 구멍을 뚫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깬 사람은 박인환이었다.
 “우린 이만 가세. 먼 길 오신 손님인데 이만 쉬게 해드려야지.”
 홍태식의 투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쨌든 회장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박인환과 홍태식이 방을 나가자, 장천이 한옆 테이블에 세팅된 위스키를 한 잔 따라서 창가로 걸어갔다.
 화려한 야경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새벽녘 도시의 잿빛 차가움만이 가득했다.
 
 ***
 
 CCTV 화면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중앙센터의 카메라 통제는 끝이 났다.
 이연의 시선이 장천이 묵는 객실의 복도를 비추는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부른 손님이니 회장이 그를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만났으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는가?
 어차피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인데.
 권혁수의 말이 맞다. 괜한 호기심은 화를 부를 뿐이다.
 그때 화면에 움직임이 있었다.
 박광철이 있는 객실의 복도였다. 밍크를 걸친 여자가 그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얼핏 낯이 익어서 자세히 보니, 그녀도 알고 있는 연예인이었다.
 이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시간에 들어간다면, 뻔한 관계였다.
 ‘저렇게 문을 두드리는 여자들이 있으니, 그렇게 기고만장한 것이겠지.’
 
 방에 들어온 여인이 코트를 벗자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났다.
 “어쩐 일로 나를 부르셨을까?”
 “연말에는 우리 화란이와 함께 보내야지.”
 “웃기시네. 시상식이다 뭐다 다들 연말에 바빠서 못 왔겠지.”
 “눈치 한번 기가 막히지. 이래서 널 버릴 수 없다니까.”
 “제발 좀 버려. 넌 내가 질리지도 않니?”
 그녀는 박 엔터 소속의 배우 화란이었다. 걸그룹으로 시작해서 아주 잠시 섹시퀸과 CF퀸 소리도 들었고, 이후 배우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한물갔고, 좋게 보자면 그녀는 30대에 어울리는 원숙한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녀는 한 방에 수행원이 있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아저씨는 살이 더 빠졌네. 하긴. 놀부 사장 등쌀에 어디 살찔 틈이 있겠어? 새벽부터 일시키고, 야밤에 불러내서 성질부리고. 안 봐도 비디오지.”
 “아닙니다.”
 정곡을 찔린 수행원이 당황하자 박광철이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야, 그렇게 당황하니까 진짜 같잖아?”
 “죄송합니다.”
 “됐고. 어서 하려던 보고나 해. 그래서? 정말 연말파티에 초대받은 것 맞아?”
 “맞습니다.”
 “새파란 놈이던데? 뭔데 초대받았지?”
 “초대 자격까지는 아직······.”
 “진짜 무림인이야?”
 “네. 진짭니다. 그것도 아주 어려서 BST를 패스한 모양입니다.”
 “싸움 좀 한다 이거지?”
 “이름은 장천, 나이 34세.”
 “서른넷? 그 새끼, 보기보다 많이 처먹었네.”
 화란이 끼어들며 물었다.
 “어떤 년 따먹으려 이렇게 열공 중이실까?”
 “년 아니고 놈.”
 “그년 지키는 놈이겠지. 누군데?”
 “됐어. 넌 몰라도 돼. 자, 다음!”
 수행원의 보고가 이어졌다.
 “줄곧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이번에 블라리 공화국에서 귀국했습니다.”
 “블라리? 거기 난리 난 곳이잖아?”
 “내전이 벌어졌는데 엊그제 끝이 났습니다.”
 “어? 그랬어? 너도 알고 있었나?”
 박광철이 화란을 돌아보며 물었다.
 “블라리? 뭔데? 새로 나온 신상이야?”
 “우리 화란이. 매력 터진다니깐.”
 박광철이 화란을 잡아당겨 키스했고, 그녀가 몸을 빼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휴, 술 냄새. 꺼져.”
 “계속해.”
 “이전에도 수십 개국을 돌아다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새끼, 마일리지는 겁나게 쌓였겠네. 또?”
 수행원이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그자에 대한 정보는 여기까지입니다.”
 “여기까지라니? 외국 좆나게 다닌 무림인이다? 이 시발아, 공항에 전화 한 통 하면 나도 알아내겠다.”
 “그게······ 더 이상은 알아볼 수 없게 정보에 락이 걸려 있었습니다.”
 “풀어! 내가 책임진다. 좆같은 사생활보호법, 꺼지라고 해.”
 박광철의 목청이 높아졌지만 수행원은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그게······ 저희 권한으로는 풀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꺼 말고. 그러니까 그룹 정보실을 이용하라고!”
 “이미 했습니다.”
 “그런데도 못 풀었어?”
 “네.”
 “왜?”
 “못 푼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정보실에서 우리 까는 것은 아니고? 정보실장, 둘째 형 라인이잖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박광철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것 봐라. 꼴에 무림인이랍시고 뭐가 있는 놈이다 이거지?”
 화란이 웃으며 박광철을 놀렸다.
 “어쩌나? 우리 박 대표님, 좆대가리 싸움에서 지고는 못 사시는데.”
 “당연하지.”
 박광철이 전화기를 꺼내서 누군가의 번호를 찾았다.
 “미쳤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몇 시면? 전화 안 받을 거면, 돈도 안 받아 드셔야지.”
 화란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고, 박광철은 기어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접니다, 박 엔터.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네, 잘 지내셨죠? 부탁이 있어서 말입니다. 사람 하나만 조회해 주세요. 이쪽에서 풀 수 없는 락이 걸려 있어서요. 이름 장천, 나이는 34세, 어제 블라리 공화국에서 입국했습니다. 아, 요즘 좀 바빴습니다. 하하, 조만간에 한잔해야지요. 전에 아드님이 잇걸스 좋아한다고 하셨죠? 그럼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데리고 나오세요, 잇걸스 애들이랑 식사나 한번 하게. 하하하, 그럼요. 제가 사야죠.”
 호기롭게 인맥을 과시하던 박광철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 거기서도 신원조회가 안된다고요? 아뇨,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뇨, 별일 아닙니다. 네, 네. 제가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박광철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화란이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첩은 목욕재계하고 오겠나이다.”
 하거나 말거나, 이미 그녀는 박광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후였다.
 “이 새끼 뭐야?”
 이연에 대한 호감 반, 놈에 대한 질투심 반으로 장난스럽게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러면 장난 아닌데?”
 
 ***
 
 다음 날 아침, 작전실로 들어서는 권혁수의 기분은 아주 좋아 보였다.
 “미션 클리어하셨네요.”
 권혁수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덕분에. 마누라도 마누라지만, 애들이 너무 좋아하더라.”
 “유능한 부하라면 상사의 가화만사성까지 지켜내야 하는 법이죠.”
 “하하하.”
 그때 상황이 발생했다.
 삐― 삐―
 경고음에 두 사람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소리를 낸 화면을 향했다.
 차량 한 대가 레지던스 앞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옆 화면에 차량의 번호판 화면이 떠 있었다.
 “정보국 차량입니다.”
 “뭐?”
 부하의 보고에 권혁수가 깜짝 놀랐다. 정보국은 대한민국 공권력의 핵심에 있는 조직이었다.
 “쟤들이 왜 왔지?”
 권혁수가 이연을 바라보고 물었지만 그녀라고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레지던스 앞에 멈춰선 차량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계속 다른 각도의 CCTV가 차에서 내린 남자를 비췄다.
 “안면인식장치 작동하겠습니다.”
 그러자 권혁수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아는 사람이다.”
 이연이 그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정보국장 정영기다.”
 “네? 정보국장이라고요?”
 그녀가 깜짝 놀라 다시 화면을 쳐다보았다.
 정보국장 정영기는 그가 지닌 권력에 비해 너무나 후덕한 인상이었는데 동네 빵집 주인에 더 어울리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정영기는 로비에 마련된 작은 카페로 들어가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바로 장천이었다.
 장천이 정영기와 합석하는 화면을 보며 이연이 말했다.
 “정보국이 왜 장천과 접촉하는 거죠? 그것도 우리 회장님도 얼굴 보기 힘들다는 정보국장이 직접 와서 말이죠.”
 이연의 물음에 권혁수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권혁수가 이연에게 말했다.
 “달달한 동화의 대부분은 알고 보면 잔혹한 이야기라는 것 알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담긴 뜻은 진지한 것이었다.
 이연이 화면 속 장천을 응시하며 말했다.
 “여자들은 이래서 문제라니까요. 위험한 사람이라 생각하니까 더 섹시해 보이잖아요?”
 
 ***
 
 “정 요원님.”
 장천의 말에 정보국장 정영기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날 기억하는구나.”
 “전 한 번 본 사람은 잊지 않습니다.”
 “맞아, 그랬지. 아, 나 이제 국장이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이제 옷 벗을 일만 남았는데. 우리 13년 만인가?”
 “14년입니다.”
 “세월 참 금방이지. 근데 넌 무슨 젊어지는 약이라도 먹었나? 그때 그대로야.”
 정영기가 차분히 장천을 살폈다. 외모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소식이 없기에 네가 죽은 줄 알았다.”
 “그럴 뻔도 했죠.”
 “왜 돌아왔나?”
 “그 질문은 제가 드려야죠. 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너 왔는데 오랜만에 얼굴은 한번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요.”
 정영기가 자신의 본심을 밝혔다.
 “경고를 해주려고 왔다. 조심해라. 이 땅에는 예전의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그들은 나조차 어쩌지 못하는 힘을 지니고 있어.”
 잠시 사이를 두고 장천이 물었다.
 “지난 14년간 제가 어떻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알 수 없는 장천의 미묘한 표정이 정영기를 불안하게 했다.
 “너, 설마?”
 장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뵈니 좋네요. 바쁘실 텐데 이만 돌아가십시오.”
 “안 돼! 만약 그 일 때문에 돌아온 것이라면, 그냥 돌아가! 또다시 많은 사람이 다치게 될 거다.”
 장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복수도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걱정 마세요, 일 때문에 온 겁니다.”
 “정말이지?”
 장천은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정영기는 그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장천아.”
 장천이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정영기는 뜨거웠고, 장천은 차가웠다.
 “다음에 뵈었을 때는 술 한잔하시죠.”
 장천이 그에게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섰다.
 그때 정영기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 건방진 놈 대체 뭡니까? 우선 감시부터 붙여두겠습니다.
 정보국 수석요원 S였다.
 ―너 돈키호테냐? 분위기 파악이 그렇게 안 돼?
 ―네?
 ―태풍 분다고 방패 들고 나가서 막을 거냐고?
 ―허리케인도 탈탈 털 수 있는 게 우리 아닙니까?
 ―너, 우리가 항공모함 같지? 태풍 따윈 아랑곳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아뇨, 우린 항공모함이 아니라 섬이죠.
 정영기가 피식 웃었다. 자조의 웃음이었다.
 ―아서라. 착각이다. 저긴 잘못 건드렸다간 그 섬, 뿌리째 뽑힌다. 정말 다 뒈지는 수가 있다.
 ―국장님이 이런 말씀 하시니 이상합니다. 대체 14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죽은 줄 아셨다면서 왜 아직도 장천의 입국이 정보국 최우선 보고 사항에 있는 겁니까?
 정영기는 대답 대신 카페 창문을 통해 저 멀리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장천을 쳐다보았다.
 ‘그때도 돌풍이었는데······.’
 이제 그 돌풍은 14년이란 세월 동안 커지고 또 커져서 이제 그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토네이도가 되어 돌아왔다.
 정영기가 남은 커피를 쭉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할 것 없다. 나도 사람이다. 큰 태풍이 불어오면 문 걸어 잠그고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야지.
 
 
 # 연말파티 (1)
 
 보안실장 홍태식은 정영기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컴퓨터 화면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방문은 당연히 보안실장인 홍태식에게 보고되었다.
 ‘정보국장이 직접 찾아왔단 말이지?’
 과연 장천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마우스를 클릭했다.
 장천의 정보가 화면에 떠올랐다. 하지만 볼 수 있는 것은 나이와 이름 따위의 기본 정보 1페이지뿐이었다.
 2, 3, 4, 5, 6, 7페이지를 볼 수 있는 버튼은 활성화되지 않았다. 락이 걸려 있다는 뜻, 게다가 보통 사람의 정보는 2페이지, 많으면 3페이지인데 이 장천은 무려 7페이지였다.
 ‘이놈, 대체 어떤 놈이기에?’
 보안실에 근무하는 무인들을 불러서 장천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장천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천을 알아보기 위해 마구잡이로 들쑤시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가 이번 암살에 대한 정보가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테니까 말이다.
 그때 스피커폰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권혁수 팀장과 이연 요원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리며 권혁수와 이연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연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보안실 요원들에게는 회장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바로 보안실장 홍태식이었다. 보통 팀장인 권혁수만 부르는데 오늘 자신까지 부른 것이다.
 “권 팀장, VIP 장천 알지?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다 들어주도록.”
 “어느 선까지 말씀이십니까?”
 “이번 연말파티와 관련된 내용에 한해서는 다 들어줘.”
 “VIP 관련 자료를 요구해도요?”
 “그래, 그것도 줘.”
 “알겠습니다.”
 권혁수는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연말파티와 관련해서 보안에 문제가 생겼음을. 권혁수는 상사가 말해주지 않는 일을 굳이 캐묻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홍태식의 시선이 이번에는 이연을 향했다.
 “자네가 장천 담당이라고?”
 “네!”
 “그를 데려오면서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나?”
 “어떤 점 말씀이신지요?”
 “눈여겨볼 만한 일이라든지. 누구와 통화를 했다든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자넨 장천을 전담해서 도우면서 연말파티가 끝날 때까지 장천의 일거수일투족을 내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나가 봐.”
 권혁수와 이연이 홍태식의 집무실을 나왔다.
 로비로 나온 이연이 긴장해서 물었다.
 “무슨 일 생긴 거죠?”
 “내가 말했지? 모른 척. 현명한 직장 생활.”
 “넵, 모른 척. 비겁한 처세술.”
 “폭풍 속으로 뛰어들지 마. 멋은 없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잖아?”
 “죽지는 않겠지만 보물섬을 찾을 수도 없겠지요.”
 “이 세상에 보물섬 같은 거 없다. 식량 한 톨 없는 무인도만 잔뜩 있지. 이연아, 우리 오래 보자.”
 “그래야죠, 막내 내년에 대학 들어갑니다.”
 “네 동생? 그 코 찔찔 흘리던 그 녀석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이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신데렐라는 고사하고 스파이가 되어야 하네요.”
 이연은 권혁수가 자리를 비웠던 그날 밤, 회장이 만난 사람이 장천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저 멀리 로비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장천이 걸어 나왔다.
 권혁수가 진담 반, 농담처럼 말했다.
 “저 봐라. 이 타이밍에 호랑이처럼 딱 나타나는 것 좀 봐.”
 “전 호랑이에게 물리러 가요.”
 “정신만 차리면 산다.”
 “그래요! 신데렐라가 못 되면 사육사라도 되어야죠.”
 그때 저 멀리 서 있던 장천이 마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라도 한 듯 피식 웃었다.
 이연이 활짝 웃으며 장천 쪽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장천도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장천은 할 말만 딱딱 하는 타입이라서 편하게 말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차라리 박광철처럼 쉴 새 없이 껄떡댄다면 감시하기가 쉬울 텐데.
 “실장님께 따로 명령을 받았어요. 필요한 것 있으면 뭐든 말씀만 하세요.”
 “초대받은 VIP, 보안실 직원을 포함해서 파티에 참가하는 전원의 신상명세가 필요합니다.”
 “네, 준비하죠.”
 그녀가 돌아서려고 할 때 장천이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적인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뭐죠?”
 “혹시 BST를 보셨습니까?”
 생각지 못한 말에 이연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죠?”
 “오늘도 저를 보면서 제 검부터 보셨죠?”
 “아, 제가 그랬나요?”
 “왜 검부터 보셨죠?”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갔어요.”
 “처음 만난 날도 저보다 제 검부터 보셨습니다.”
 “아, 그랬군요. 혹시 언짢으셨다면 죄송해요. 잘 보셨어요. 저, BST에 두 번이나 떨어졌어요. 제 흑역사죠. 아마 미련이 많이 남아서 저도 모르게 검부터 쳐다본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무림인이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 직장에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금 장천에게 말한 것이 남에게는 처음 말한 셈이다.
 사람보다 먼저 검부터 봤다고 하는 바람에 당황한 것이다. 정말 검부터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련이 많이 남았으니까.
 BST 시험에서 떨어지던 날을 떠올렸다.
 경험 삼아 쳤던 첫 시험보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더 형편없는 결과가 나왔다.
 분명 훨씬 더 노력했었는데,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이다.
 집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컨디션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시험장에 도착해서 시험을 치는데 기운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운도 실력이지.’
 어쨌든 BST 준비하느라 열심히 운동하고 훈련한 덕분에 이렇게 대기업 보안실 직원이 될 수 있었다.
 그때 장천이 불쑥 말했다.
 “세 번은 어때요?”
 “네?”
 “보통 중요한 일은 삼세번이잖아요?”
 BST를 다시 칠 생각은 해보지 않았기에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오, 이게 누구신가?”
 돌아보니 박광철과 화란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장천과 이연이 또다시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박광철의 표정에 못마땅함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그가 넉살을 부렸다.
 “우리 검소하신 VIP분이시군요.”
 장천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박광철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어제 우연히 봤소. VIP치고는 소박한 차를 타시길래.”
 “그러셨군요.”
 “나 박광철이오.”
 “장천입니다.”
 두 사람이 악수를 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같이 밥이나 먹읍시다.”
 “나중에요, 지금은 선약이 있어서요.”
 장천이 작별을 고한 후 그곳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박광철이 말했다.
 “스탄데? 아주 바쁘셔.”
 그러면서 이연을 쳐다보았다.
 “우리 예비 배우님도 이렇게 겸손하게 계신데. 함께 밥 먹지?”
 “죄송하지만 저도 스타 기질이 있나 보네요. 일이 있어서요. 나중에 봬요.”
 이연도 미소로 인사를 한 후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박광철이 화란에게 말했다.
 “지들 인생 바쁘다는데 왜 내 기분이 더러울까?”
 “그야 욕심 때문이지.”
 “욕심?”
 “저 여자애는 먹고 싶고. 드실 때 저놈 반찬 삼으면 더 맛있겠고. 근데 차고 다니는 칼 보면 겁나서 쉽사리 식탁에 올릴 수는 없고.”
 “정답 같아서 기분 더 더럽네.”
 “밥이나 먹어요. 나 배고파.”
 “그렇게 돼지처럼 처먹기만 하니까 퇴물 소리를 듣는 거야.”
 화란이 발걸음을 멈추며 노려보자 박광철이 더 짜증을 냈다.
 “뭐? 어쩌라고?”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어. 성질은 당신만 있어?”
 “쪽팔리게 여기서 이럴래?”
 “개새끼.”
 “뭐? 이게 확!”
 박광철이 손을 번쩍 들었지만 화란은 눈도 깜짝 안 했다.
 “애들 장난감에도 사용설명서가 있어. 사람 대할 때는 없겠니? 내가 말했지? 기본을 모르는 것들이 양아치라고. 당신, 적어도 양아친 아니잖아?”
 “망할 년이 어디서 평가질이야.”
 박광철은 차마 화란을 때리진 못했다. 그가 들어 올린 팔을 내리며 차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화란의 눈빛에 복잡한 심경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르르 따라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
 “서방님, 배고파요. 맛있는 것 사 줘요!”
 “미친년, 발랑 까져 가지고.”
 하지만 박광철은 그녀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차에 올라탔다.
 
 이연과 권혁수가 로비 기둥 뒤에서 두 사람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의 싸이코들인데요.”
 이연의 말에 권혁수가 물었다.
 “이래도 쟤들을 너의 그 모험 카테고리에 넣고 싶어?”
 이연은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우선 기타란에 넣어두죠.”
 
 ***
 
 그날 저녁 이연이 장천의 방을 찾았다.
 “혹시 일하시는 데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요.”
 “아뇨, 그냥 쉬고 있었습니다.”
 방으로 들어온 이연의 눈에 가장 먼저 침대 옆에 세워진 검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BST 떨어진 것에 미련이 많이 남아 있나?’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내시는 데 불편하신 점은 없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여기 말씀하신 명단이에요.”
 이연이 USB 메모리 카드를 내밀었다.
 “출력은 불가하고, 일이 끝나면 돌려주셔야 해요. 또한 외부에 유출하시면 본사 법무팀에서 책임을 물을 겁니다.”
 공적인 말을 끝낸 후 이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이 자료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이연은 이 자료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초대된 손님에 보안실 직원들까지 모두 수백 명인데 연말파티는 불과 이틀 후잖아요?”
 “네, 저는 다 조사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결국은 다 조사할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아니라 이런 일의 전문가가 조사를 할 테니까요. 이틀 안에 이 일을 해낼 전문 인력을 갖춘 팀이 처리할 겁니다.”
 “아! 한데 자료를 외부에 유출하시면 안 되는데요?”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보유출로 인한 책임은 제가 지죠.”
 그녀는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마음에 걸리시면 상부에 보고하셔도 됩니다. 이런 일들을 처리하라고 법무팀을 고용하는 것이니까요. 제 법무팀과 상의해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우선은 권혁수와 의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사람, 무림인인데 자기 법무팀도 있어?’
 돌아서려는 그녀에게 장천이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고 계십니까?”
 “아뇨.”
 “그런데도 묻지 않네요?”
 “팀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위험한 일은 못 본 척하라고. 분하지만 그 조언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현명하신 팀장이시군요.”
 물론 굳이 묻지 않아도 초대받은 VIP의 명단을 체크하는 것만 봐도, 보안상의 문제가 생겼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네.”
 “아까 낮에 왜 제게 BST를 보라고 하셨죠?”
 그러자 장천에게서 생각지 못한 대답이 나왔다.
 “검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이런 이유일 것이라곤 생각지 못해서 이연은 내심 당황했다. 박광철이 말했다면 수작이라 여겼겠지만, 장천은 진심처럼 보였다.
 “전 한 번도 검을 차 본 적이 없어요.”
 “검이 두렵게 느껴집니까?”
 “아뇨.”
 “BST, 꼭 다시 보세요. 때를 놓치면 미련이 많이 남을 겁니다.”
 “네, 생각해 볼게요.”
 “제가 주제넘었죠? 죄송합니다.”
 “아뇨, 아니에요. 제가 감사하죠.”
 “자료 감사했어요.”
 “네, 쉬세요.”
 이연이 인사를 한 후에 방을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는 그녀의 마음에 하나의 단어만이 떠올랐다.
 ‘BST.’
 하지만 고개를 내저으며 애써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지금 그녀에게 BST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고 사치에 불과했으니까.
 
 ***
 
 이연이 나가자 장천은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유쾌하고 밝은 목소리의 젊은 남자였다.
 ―보스!
 ―비숍(Bishop)!
 ―오랜만에 고향에 가셨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벌써 돌아가고 싶다.
 ―하하. 역시 제가 없으니 쓸쓸하죠?
 장천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번 일 맡기로 했다.
 ―네, 폰(Pawn)에게 연락해두겠습니다.
 ―오케이. 관련 자료 업로드할 테니까 조사 맡기고. 또 마켓에 등록된 청부업자들 중 최근에 한국에 입국한 자가 있는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보스. 참, S―BLOCK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년 한 해 동안 보스와 전속계약을 맺고 싶어 합니다.
 ―전속을?
 ―네. 사업적인 부분은 일절 배제하고, 무림과 관련된 일 처리만 맡기겠답니다.
 ―얼마로?
 ―3억 달러입니다. 금액은 마켓을 통해 깨끗하게 처리해주겠답니다. 수수료도 자신들이 부담하고요.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
 ―그래도 거절하셨으면 합니다.
 ―왜?
 ―오랜만에 고국에 가셨으니까요. 아, 물론 거기가 애증의 장소인 것은 압니다.
 ―오해다.
 ―그럼 왜 한국에만 우리 지부가 없을까요? 아프리카에도 우리 지부가 있는데요.
 장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한동안은 푹 쉬십시오. 오래전부터 가고 싶어 하셨다는 것 압니다.
 장천이 피식 웃었다.
 ―네가 쉬고 싶은 것은 아니고?
 ―하하, 들켰습니까? BLOCK 쪽에는 생각해 보겠다고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한국 지부 설립도 생각해 보시고요. 때가 되었습니다.
 ―오케이.
 전화를 끊은 장천이 USB를 핸드폰에 연결했다.
 비숍이 직접 만든 보안 프로그램을 거친 후 USB의 자료가 업로드되기 시작했다.
 
 ***
 
 작전실로 돌아온 이연이 컴퓨터로 뭔가를 검색했다.
 내년 BST 일정이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다시 시험일정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했다.
 “뭐 해?”
 권혁수가 컴퓨터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이야.”
 “죄지은 사람처럼 왜 이렇게 놀라?”
 “인기척 좀 하고 다니세요!”
 “했어. 뭘 본다고 이렇게 정신을 팔아?”
 “어디 돈 더 준다는데 없나 검색 중임다.”
 “어디, 어디? 나도 가자!”
 권혁수가 머리를 내밀어 화면을 보려 할 때, 이연이 재빨리 화면을 꺼버렸다.
 “한 명만 뽑는데요. 경쟁자는 훠이 훠이.”
 “매정하네.”
 “먹고사는 일, 태초부터 어려웠다면서요?”
 “암. 앞으로도 쭉 어려울 거다. 우주여행 하면서도 창밖 보면서 한숨 쉴 거야. 인생은 고역이여.”
 자기 자리에 앉는 권혁수를 보며 이연이 물었다.
 “팀장님은 다른 일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있지.”
 “어떤 일요?”
 “테이크아웃 위주의 작은 커피숍. 몇 달 고민하다 살포시 접었지.”
 “왜요?”
 “불안해서.”
 “하긴. 애들이 있으니까.”
 “사실은 마누라 때문이야. 내가 망하면 마누라 그 억척이 돈 벌겠다고 온갖 일 다 할 텐데. 싸나이 자존심이 있지, 그 꼴 어찌 보나?”
 “프로 유부 인정해요.”
 눈치 빠른 권혁수가 넌지시 물었다.
 “왜? 때려치우고 싶어?”
 “아뇨. 그냥요. 저야 커피숍 차릴 돈도 아직 없잖아요?”
 “번 돈 다 어쨌어?”
 “빽 사고, 구두 사고, 남자랑 여행가고. 신나는 인생입죠.”
 “본 적 없는데?”
 “공부랑 연애, 쇼핑은 안 보는 데서 하는 법이죠.”
 “하하하.”
 권혁수는 알고 있었다. 이연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병든 부모 봉양에, 동생들 뒷바라지까지 한다고 옷 한 벌 제대로 사지 못한다는 것을.
 “구찌 요원, 힘내!”
 “넵! 샤넬 요원으로 진급하는 날까지 힘내겠습니다.”
 권혁수가 밖으로 나갔다.
 이연의 시선이 작전실의 화면을 향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수십 개의 화면 중에 장천의 모습이 보이는지를 찾았다.
 장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행사를 준비 중인 HT그룹의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룹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였기 때문에 조금의 실수라도 있어선 안 되었다.
 이연은 로비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낭군님은 어딜 가셨을까?”
 이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참자, 참아. 이연, 잘리면 안 돼!’
 이연이 표정을 바꿔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안녕하세요.”
 뒤에 박광철이 서 있었다. 화란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눈인사를 보냈다.
 연예인이 이렇게 대놓고 남자와 붙어 다녀도 되는 걸까? 왜 스캔들도 나지 않는 걸까?
 이게 다 HT그룹의 힘이겠지.
 이놈의 연예부 기자들, 아이돌 꽁무니만 따라다니지 말고 이런 것을 내라고!
 “낭군님은?”
 “누구 말씀이시죠?”
 이연이 모른 척 시치미를 뗐지만 그냥 물러날 박광철이 아니었다.
 “이연 씨가 좋아하는 그 가난한 VIP 말이야.”
 주위에 있던 보안실 직원들이 다 듣게 큰소리를 냈다.
 ‘어휴, 정말 확 패버릴까 보다.’
 태권도 공인 5단에 검도 2단인 그녀다. 비실비실한 박광철 정도는 10초면 KO 시킬 자신이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장천, 그 신비고수인 척 쩌는 칼잡이 말이야!”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 칼잡이, 여깁니다.”
 박광철이 깜짝 놀라 돌아서니 어느새 장천이 와 있었다.
 “아니, 뭔 사람이 이렇게 기척도 없이.”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는지요?”
 “뭐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너스레를 떨려고 했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져서 볼 때는 몰랐는데, 단칼에 두 동강 날 사정거리에 서 있으니 검이 무섭게 느껴진 것이다.
 장천이 이연에게 말했다.
 “잠시 저와 갈 곳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운전 좀 해주실래요?”
 “네, 물론이죠.”
 정말이지 구세주라도 만난 기쁜 얼굴로 이연이 장천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광철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화란이 와서 넌지시 말했다.
 “0:2, 애초에 불리한 싸움이야.”
 “왜?”
 “저 남자 잘생겼잖아. 거기다 무림인이고. 칼 찬 미남과 싸움이 돼?”
 “대신 난 돈이 많잖아.”
 “저 사람도 없어 보이진 않는데. 작은 차 부끄러워 않는 것 보면 자존감도 높을 것 같고.”
 “거기까지.”
 “네, 서방님.”
 박광철이 돌아서 걸어가며 말했다.
 “경기는 이제 시작이야.”
 화란이 뒤따라 걸어가며 말했다.
 “파이팅! 제발 이겨서 데리고 다니는 여자부터 갈아치우길!”
 
 ***
 
 이연은 장천을 태우고 HT그룹 본사에 도착했다.
 “본사에는 왜 왔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정보실장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요. 신비스러운 분이시죠.”
 하지만 실제로 만난 정보실장은 신비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전형적인 관료 스타일. 소문과 실제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조경택입니다.”
 “장천입니다.”
 “저는 보안3팀 이연입니다. 장천 씨를 돕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자, 이리 앉으시죠. 회장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습니다. 도울 수 있는 것은 다 도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천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바쁘실 테니 간단히 본론만 묻겠습니다. 이번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습니까?”
 “정보원을 통해서요.”
 “그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회장님이 협조를 하라고 했을 텐데요.”
 “적어도 이 일만큼은 안 됩니다. 정보원 보호는 우리 정보실의 절대원칙입니다. 회장님이 직접 오셔도 절대 정보원의 신원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물론 회장의 얼굴 앞에서 직접 저 말을 하진 못할 것이다.
 “한 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리죠. 그는 안전한 곳에 우리가 잘 데리고 있어요. 또한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알겠습니다.”
 장천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물을 나와서 차로 걸어가면서 이연이 장천에게 물었다.
 “이젠 어쩌죠? 회장님의 허락을 받으러 가는 건가요?”
 직접적으로 듣진 않았지만 분위기 파악은 하고 있는 그였다. 앞서 언급된 정보원의 정보 때문에 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뇨.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허락을 받고 왔죠.”
 “거절할 것을 예상하셨나요?”
 “네.”
 “그걸 알면서도 왜 온 거죠?”
 “정보원을 어떻게 다루는지, 정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반응을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요? 설마 상대의 반응으로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가끔 틀릴 때도 있어요.”
 “그래서 실장님은요?”
 “애매하네요.”
 “어쩌죠?”
 “그래서 실장 방에 도청장치를 하고 왔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연이 깜짝 놀랐다.
 “무슨 농담을 그리 살벌하게 하세요?”
 “농담 아닌데.”
 “정말 했어요? 어디에요?”
 “티 테이블 아래쪽 모서리에.”
 “왜요?”
 “확실히 하고 싶어서요.”
 “도청한 것이 걸리면요? 장천 씨야 외부인사라 괜찮을 수 있겠지만 저는 잘릴 수도 있어요. 아니, 감옥에 갈 수도 있어요.”
 “이연 씨 잘리면 제가 고용하죠. 감옥 가면 변호사도 고용하고 사식도 넣어드리고.”
 “하나도 안 재밌거든요? 저, 이거 보고해야 해요.”
 “네, 하셔도 됩니다.”
 이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해도 된다지만, 도청에 대해 보고를 해서 그 일이 정보실장에게 전해진다면, 애써 도청한 일이 허사가 될 것이다.
 장난으로나마 묻고 싶었다. 정말 자기 고용해 줄 것인지. 하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다.
 
 ***
 
 “장천의 동태는?”
 홍태식의 물음에 이연이 솔직히 대답했다.
 “아까 본사 작전실을 다녀왔습니다.”
 “작전실을? 왜?”
 이연이 작전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솔직하게 보고했다.
 “정보원을 만나고 싶어 한다? 만나서 어쩌려고?”
 따지듯 물었지만 이연이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이건 우리 정보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거다.”
 이연은 아무 의견도 밝히지 않았다. 홍태식 같은 상관에게는 그냥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또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알았어, 나가 봐.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보고하고.”
 “네.”
 집무실을 나서는 이연의 마음이 무거웠다.
 대화 내용은 솔직히 보고했지만 결국 도청장치를 단 사실은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솔직히 다 말해야 할지 수십 번이나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말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먹은 것이다.
 모두 장천을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 봤자 어차피 그는 이번 파티가 끝나면 떠나버릴 사람인데.
 홍태식의 방을 나서자 후회가 차가운 바닷물처럼 밀려들었다. 폭풍 속으로 뛰어들지 말라는 권혁수의 말이 떠올랐다.
 ‘아, 망했어.’
 이게 다 BST 보라는 말에 현혹되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녀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미 저지른 일!’
 이 결정이 인생의 분기점이 될까 봐 두려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
 
 박인환 회장이 창가에 서서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세운 제국의 꼭대기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그는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연말파티를 하루 앞둔 오늘, 성취감 대신 불안감이 들었다.
 “평생을 겁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겁이 나는군.”
 “그런 말씀 마십시오.”
 뒤에 서 있던 홍태식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비서실장은 업무에 따라 왔다 갔다 했지만, 보안실장인 그는 한순간도 박인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 여러모로 섭섭했지?”
 “아닙니다.”
 “내가 어찌 자네 마음을 모르겠나? 다만 이번 일은 장천 그 친구만의 문제가 아니라네.”
 “무슨 뜻입니까?”
 “블레이튼 그 사람과도 연관된 문제란 뜻이지. 단지 장천을 고용하는 비용이 비싸다고 거절하는 것은 블레이튼 그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네. 돈 때문에 친구의 믿음을 버리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지.”
 “아,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니 그이의 몸값이 너무 비싸다 생각지 말게.”
 “네, 회장님.”
 “항상 자네가 있어 든든하다네.”
 “앞으로도 충심으로 보필하겠습니다.”
 “장천은?”
 “정보실장을 만났고, 지금은 파티장을 둘러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홍태식의 표정에 드러난 속마음은 이러했다. 그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일을 맡은 후 장천은 뭐 하나 특별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박인환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어디 한번 믿어보자고. 일당 33억짜리 눈에는 다른 것이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
 
 ***
 
 이연이 장천에게 파티장을 안내하고 있었다.
 “해마다 연말파티는 이곳 그랜드 불룸에서 열렸어요.”
 회장의 연설을 비출 대형 스크린, 잘 꾸며진 단상, 화려한 샹들리에와 하얀 천이 씌워진 수십 개의 원형 탁자들, 최고 실력의 셰프들이 만든 요리가 놓일 기다란 테이블, 이름난 뮤지션들이 공연할 무대, 귀빈들이 춤을 출 수 있는 공간까지. 완벽한 파티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 중이었다.
 “메인 홀의 출입구는 모두 셋으로 두 개의 정식 문과 무대 뒤쪽에 스텝들이 출입하는 작은 문이 있어요.”
 내부를 둘러본 장천이 복도를 살폈다.
 “보안실 1팀 직원들이 이 복도에만 열 명이 배치될 거예요. 1층 출입구에서는 초대장 확인은 물론이고 안면인식장치와 행동분석장치까지 동원해서 본인 확인을 해요. 행동분석장치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네. 걸음걸이나 몸의 움직임으로 그 사람의 특징을 잡아내는 장치죠.”
 “알고 계시네요. 초대받은 사람들의 행동들을 모두 등록해 두었기 때문에 절대 다른 사람이 신분을 속이고 들어올 수 없어요.”
 “절대라는 말은 함부로 쓰시면 안 됩니다.”
 “네?”
 “행동분석장치를 속일 수 있는 이들이 있으니까요.”
 “설마요? 아무리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려 해도 절대 숨길 수 없는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 움직임을 숨기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천이 더는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자, 이번에는 스텝들 문을 보죠.”
 “이리로요.”
 이연이 뒤쪽 문으로 안내했다. 문은 뒤쪽 주방으로 이어져 있었고, 다시 그 뒤쪽에 통로가 있었다.
 “이 복도로 올라오는 통로는 저쪽 계단과 엘리베이터 두 군데에요. 파티 당일에는 양쪽 모두 저희 보안실 직원들이 확실하게 지킬 거예요. 각 층 복도와 계단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는 모두 여섯, 사각지대는 전혀 없도록 배치되어 있어요.”
 “카메라 해킹의 위험성은요?”
 “전 HT그룹의 인재발탁 능력을 믿어요.”
 이연이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저를 뽑은 것처럼, 가끔 실패도 있지만요.”
 장천이 웃으며 농담을 받아주었다.
 “이연 씨를 발탁했으니 저도 HT그룹의 인재발탁 능력을 믿어보죠.”
 “하하, 말씀만으로도 기분이 좋네요. 아, 이쪽 방에서 저쪽 방까지는 완전 폐쇄할 예정이에요.”
 다음으로 두 사람은 천장과 벽의 환기 통로를 살폈다.
 “배기관과 환기관은 모두 이중 삼중으로 감시장치를 달아두어서 그곳으로 침투하는 것은 절대······ 아, 절대란 말 쓰지 말라고 하셨죠? 침투는 거의 불가능해요.”
 두 사람이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장천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창가로 걸어갔다. 연회장은 69층, 정말이지 전망이 시원했다.
 장천이 유리를 손가락으로 튕겨보며 물었다.
 “방탄인가요?”
 “네. 일반 방탄이 아니라 특수 방탄유리에요.”
 장천이 저 멀리 떨어진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격이 가능한 높이의 건물이었는데, 굉장히 멀리 있었다.
 “보안실장님이 언젠가 말씀하셨어요. 어떤 실력 있는 스나이퍼도 이 거리에서는 저격이 불가능하다고.”
 그녀는 의식적으로 절대란 말을 피했다.
 “설마 이 거리에서 저격이 가능한 스나이퍼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단호한 장천의 대답에 이연이 살짝 당황했다. 이번만큼은 없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만약 그런 스나이퍼가 있다 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이 방탄유리는 특별하게 제작되어서 개인화기로는 절대 뚫을 수 없다고 들었어요. 아, 죄송해요. 또 절대란 말을 썼군요.”
 “아뇨, 이번에는 맞습니다. 총기류로는 이 유리를 못 뚫습니다.”
 방탄유리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 대답했다. 문득 이연은 처음 만난 날, 차의 방탄유리에 대해 조심하라고 말해준 것이 생각났다.
 “이런 쪽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군요.”
 “어쩌다 보니.”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을 바라보는 장천의 모습에 이연이 물었다.
 “그래도 걱정되시나요?”
 “아뇨, 제가 걱정하는 것은 저격이 아닙니다. 사람이 직접 뚫고 들어오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여긴 69층이에요.”
 “누군가 옥상에서 뛰어내려 이 창문을 부수고 침입한다면요?”
 이연이 깜짝 놀랐다.
 “그게 가능한가요?”
 장천이 가만히 창문에 손바닥을 대며 말했다.
 “그들이 누굴 고용했는가에 따라 다르겠죠.”
 
 ***
 
 이연이 작전실로 돌아왔을 때 권혁수가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 잘 됐다. 법무팀에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이연이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오! 나의 왕이시여, 진정 감사드리나이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장천이 정보를 외부에 맡기는 부분에 대해 권혁수와 의논했고, 권혁수는 법무팀에 보고하는 것을 권했던 것이다. 갈까 말까 고민하는 그녀 대신 직접 가서 보고를 해준 것이다.
 “이런 일은 미루면 안 돼. 언제나 미뤄서 문제가 생기지.”
 “알죠. 그런데 괜히 껄끄러워요. 법무팀, 감사팀, 회계팀, 듣기만 해도 움찔하네요.”
 “죄지은 것도 없고, 돈 삥땅친 적도 없는데 왜 겁을 내?”
 “괜히 찝찝하잖아요?”
 “진짜 겁내야 할 사람들은 코웃음 치고 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겁먹고. 이거 잘못됐다고!”
 흥분한 권혁수의 모습을 보며 이연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일을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일이 힘들었으니까.
 당장 선배들만 봐도 그렇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여자 선배를 찾기 어렵다. 일의 성격 때문인지 여자들은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다. 자신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그나저나 장천과 일은 잘 되고 있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연말파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아직 모르겠고. 그렇다고 자세히 묻기도 그렇고.”
 “묻지 마! 절대 묻지 마. 알면 책임져야 해.”
 “분명 누군가의 침입을 걱정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태평스럽고.”
 장천과 함께 있으면 왠지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위기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장천 역시 그다지 불안해하거나 일을 서두르지도 않았고.
 “대체 연말파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요?”
 “그냥 끝까지 모르는 것이 좋을 수도 있어.”
 “그렇겠죠?”
 “암.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녀가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기왕 가는 거면 좀 빨리 지나가기를!”
 
 ***
 
 허름한 소줏집에서 한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마른 체구에 날카롭게 찢어진 눈빛,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더없이 날카로운 남자였다.
 식은 어묵탕이 안주의 전부였지만, 남자는 세 병째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앞으로 또 다른 남자가 앉았다. 처음 남자와는 상반되는 덩치가 큰 남자였다.
 “대표님.”
 “왔나?”
 “안주가 부실하면 속 다 버립니다.”
 새로 온 남자가 주인장에게 새로운 안주를 하나 시켰다. 겉으로 봐선 영락없는 샐러리맨들이었다.
 두어 잔 술이 오간 후에 덩치 사내가 물었다.
 “이번 일 정말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래.”
 “후폭풍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이 나라가 발칵 뒤집어질 겁니다.”
 “그렇겠지.”
 대표라 불린 사내가 술잔을 비우자 덩치 사내가 술잔을 채워주었다.
 “아무리 은밀히 처리해도 언젠가는 우리가 했다는 것이 밝혀질 겁니다. 이 바닥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잘 아시잖습니까?”
 “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생각보다 빨리 밝혀질 겁니다. 그럼 우린 끝장입니다.”
 “우린 괜찮을 거다.”
 “그들의 약속을 믿습니까? 놈들은 믿을 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 그런 놈들이지.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그들이 왜 그를 죽이려 하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
 대표라 불린 사내가 잔을 채워주었다. 덩치가 공손히 술을 받았다.
 “이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래서 누굴 보내실 겁니까? 아무래도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은 신인을 보내야겠군요. 신인이지만 이번 일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로······ 그런 자라면?”
 덩치 사내가 누군가를 떠올렸다. 대표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자를 보낼 생각이다.”
 덩치 사내가 긴장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죽일 작정이시군요.”
 이런 날을 대비해서 조직에서 키워온 비밀 병기가 있었다.
 “죽여야 우리가 산다.”
 술잔을 비우는 그들의 머리 위 낡은 TV에서는 내일 있을 HT그룹의 연말파티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장천은 방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운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의 몸 주위에 일렁이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몸 주위를 휘감던 기운이 장천의 코와 입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장천이 눈을 떴다. 맑고 깊은 눈빛이 반짝이다가 이내 정상적인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때 그의 전화기가 울렸다.
 
 ―보스!
 ―비숍.
 ―조사를 맡았던 럭스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초대받은 VIP와 수행원들은 특별히 수상한 점이 없다고 알려 왔습니다. HT그룹 정보실장을 도청한 결과 역시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케이.
 ―마켓 쪽에 떠도는 소문들을 수집해봤지만 HT그룹과 관련한 것은 없었답니다. 1년 내에 한국으로 들어간 자도 없고요. 아마도 한국 내 청부업자를 고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선을 다해 알아보겠지만 내일 연말파티 전까지 청부자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보스께서 현장에서 막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케이.
 ―참, 그리고 럭스 대표가 안부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친한 척 말고 비용이나 깎아달라고 전해.
 ―하하. 꼭 전하죠.
 
 전화를 끊은 장천이 소파에 기댄 채 헤드셋을 썼다. MP3에서 나오는 무공구결을 들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
 
 연말파티 날이 밝았다.
 모두들 분주히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이연은 컴퓨터로 대한무림연맹 홈페이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유리창을 깨고 침입할 수 있는 무림인에 대해 알아볼까 해서 들어갔는데, 접속한 지 5분도 안 돼서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식으로 등록된 문파가 이백 개가 넘었다. 거기에 외국 문파의 지부들까지 있었다.
 홈페이지를 닫으려던 그녀가 문득 손길을 멈췄다.
 그녀가 위쪽에 붙어 있는 검색창에 장천이란 이름을 넣었다.
 기사가 하나 링크되어 있었다.
 8살 소년이 BST에 합격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BST가 생긴 이래 최연소 합격이란 내용과 함께 사진이 한 장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소년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권혁수의 한마디.
 “어려서 얼굴 그대로네. 수술은 안 했네.”
 “그러게요. 귀엽네요.”
 자신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짓는 이연을 보며 권혁수가 물었다.
 “우리 여심강탈자 분은 어디에 계신가?”
 “보시다시피 휴양 중이십니다.”
 CCTV 화면에 장천이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옥상이야?”
 “네.”
 “한겨울에 옥상에서 뭔 짓이야?”
 “안 추운가 보죠.”
 “하긴. 무림인들은 내공이 있어서 추위나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하더라.”
 “감기약값은 아낄 수 있겠네요.”
 권혁수가 진지하게 말했다.
 “암튼 오늘 조심해.”
 “네, 팀장님도요.”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
 “느낌이 안 좋아. 보안과 관련해서 외부에서 사람을 불러온 것도 그렇고. 홍 실장 성격에 그대로 받아주는 것도 그렇고.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일 수 있어.”
 그때 이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저 장천입니다.”
 장천이란 말에 그녀가 깜짝 놀랐다. 화면을 보니 정말 장천이 전화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제 번호를?”
 “보안실 직원 명단도 주셨잖아요.”
 “아, 그랬죠. 한데 어쩐 일로?”
 “혹시 작전실입니까?”
 “네.”
 “여기 저 잘 보입니까?”
 “네, 보여요.”
 장천이 자리를 옮겼다.
 “여기는요?”
 “거기도 보여요.”
 “여기는요?”
 다시 장천이 자리를 옮기자 감시카메라 시야에서 벗어났다.
 “거긴 안 보이네요.”
 “네, 알겠습니다. 끊습니다.”
 “아니, 잠시만······.”
 하지만 전화는 이미 끊긴 후였다.
 “뭐야, 이 사람.”
 이연이 권혁수를 쳐다보았다.
 “저기 사각지대가 있는 것 아셨어요?”
 “몰랐지. 옥상까지 다 커버할 필요는 없잖아? 옥상까지 올라가려면 우릴 통과해야 하고, 나중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문도 잠가버릴 텐데.”
 “그런데 저 사람, 옥상에서 뭘 하는 걸까요? 제가 올라가 봐야겠어요.”
 “그래, 다녀와. 그걸 알아내는 것이 마타하리의 임무겠지.”
 “맙소사! 니키타도 아니고 마타하리라니! 어르신, 저 다녀와요!”
 이연이 작전실을 나가자 권혁수가 다른 직원들에게 말했다.
 “여자 스파이 하면 마타하리지. 안 그래?”
 직원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흰 블랙 위도우, 솔트 세대입니다.”
 “그게 뭔데? 검은 소금이야?”
 “헐.”
 직원들이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권혁수의 시선을 외면했다.
 “이 자식들아, 농담한 거잖아? 각박한 것들, 썰렁한 농담도 좀 받아주고 사는 거지.”
 구시렁거리던 권혁수가 뒤늦게 깨달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연! 너도 마타하리 안다는 거잖아?”
 이미 이연은 옥상을 비추는 화면에 등장하고 있었다.
 
 ***
 
 “무림인은 고소공포증도 없나 봐요.”
 이연의 말에 장천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대부분 훈련으로 극복하죠.”
 장천은 옥상 끝 난간 위에 서 있었다.
 “사실 저 고소공포증이 있어요.”
 그녀가 장천의 옆까지 다가갔다. 난간이 있었음에도, 아래를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났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훈련으로 극복이 안 될 것 같아요.”
 “됩니다. 해보시면 우리 신체가 얼마나 놀라운지 경험하게 될 겁니다.”
 “정중히 사양합니다!”
 이연은 장천이 난간에 서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했다.
 “겁 안 나세요? 그러다 갑자기 바람이라도 불면요? 갑자기 현기증이라도 나면요?”
 “갑자기가 갑자기가 아닐 때 더 오래 살 수 있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적의 기습도 갑자기 날아드니까요. 죽음 역시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고.”
 “아!”
 이연은 장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이해를 하면서도 반대로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일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면, 사는 것이 재미없지 않나요?”
 그녀의 삶에 장천이 나타난 것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렇겠네요.”
 장천이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은 후에 다시 원래대로 시선을 돌렸다. 이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장천을 따랐다. 저 멀리 있는 건물을 바라보며 이연이 물었다.
 “한데 옥상에는 왜 올라오신 거죠?”
 “건물을 모두 둘러본 결과 침입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이곳 옥상입니다.”
 어제 장천이 말했다. 옥상에서 뛰어내려 창으로 침입할 수도 있다고.
 ‘정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안실에서는 가장 침입 확률이 낮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 곳이 이곳 옥상인데요.”
 “잠시 이리 와 보세요.”
 난간에서 내려온 장천이 옥상 한옆의 건물로 그녀를 데려갔다.
 “저 위로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냥은 힘들 것 같아요.”
 “제 손을 지지대로 도약하세요.”
 “네.”
 괜히 미안했지만 올라가려면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장천의 손바닥을 밟으며 힘차게 뛰어올랐다.
 휘리릭.
 그녀가 날렵하게 건물 지붕에 올라섰다. 장천이 살짝 튕겨 올려 주는 덕분에 쉽게 올라올 수 있었다.
 뒤따라 장천이 훌쩍 뛰어올랐다. 바람 소리 하나 나지 않고 가볍게 올라왔다. 마치 무협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여길 보세요.”
 장천이 가리킨 곳은 옥상에 설치된 CCTV였다.
 “어? 긁힌 자국이 있네요.”
 “네. 최근에 누군가 강제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저쪽에 사각지대가 생겼죠.”
 “확실히 수상하네요. 한데 여기까진 어떻게 오죠? 낙하산이라도 타고 내려오나요?”
 “도심에서 비행이 불가능할 테니 그럴 수는 없을 테고. 행글라이더 같은 것을 타고 올 수는 있겠죠.”
 “저기 저 사각지대에 정확히 내려야 하잖아요? 그게 가능할까요? 설사 성공하더라도 행글라이더 부피가 커서 사각지대 밖으로 노출될 거예요.”
 “좋은 지적입니다. 이리로.”
 장천이 훌쩍 뛰어내렸고 이연이 뒤따라 뛰어내렸다.
 장천이 사각지대로 가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굳이 이쪽에 사각지대를 만들었다면, 이 벽을 타고 올라올 겁니다.”
 이연은 장천이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나서 그녀가 잠시 하늘을 쳐다보며 숨을 골랐다.
 “암살자가 무림인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셨군요.”
 “무림인 중에서도 상당한 고수가 아니라면 오늘 파티에서 박 회장님을 죽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만약 장천 씨라면 어떻게 침입하실 건가요?”
 “저라면······.”
 말을 하던 장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말씀드려도 믿지 못하실 겁니다.”
 궁금한 마음이 들었지만, 무공 실력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었기에 집요하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좋아요, 그렇다고 쳐요. 그럼 정말 여기서 저쪽으로 뛰어내려 창을 부수고 들어간다고요? 그럼 방탄유리는요?”
 장천이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한 번 툭 건드렸다.
 “검으로 잘라낸다고요? 총알도 뚫지 못하는 유리창을요?”
 장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무림인이라는 것이, 무림의 고수들이란 것이 이런 존재들일까?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무림인들을 보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세상에 매일 불이 나고 싸움이 나지만 실제로 보는 일이 드문 것과 비슷했다. 게다가 무림인들은 일반인들 앞에서 싸우거나 무공을 드러내는 일을 극도로 삼갔으니까.
 어쨌든 믿기진 않았지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선 사각지대에 카메라부터 설치할게요.”
 “아뇨. 그냥 두죠. 만약 제 예상대로라면 우린 적의 침입로를 아는 셈이니까요. 굳이 이쪽에서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릴 필요는 없겠죠.”
 “네.”
 이연이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아찔했다.
 
 ***
 
 파티가 시작되고 VIP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초대받은 이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그들에게는 HT그룹의 연말파티 초대장이 지난 한 해 자신이 잘 살았다는 증거였다.
 유명한 MC가 사회를 봤고, 인기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성악과 피아노 연주도 이어졌다.
 그 파티 가장자리에 장천과 이연이 서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장천과 이연을 힐끗거렸지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무림인과 미녀, 두 사람을 초대받은 VIP가 아니라 일종의 파티에 동원된 퍼포먼스라 여겼던 것이다.
 그렇든 말든 이연은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저는 이런 대단한 파티 처음 참석해 봐요.”
 “해마다 열렸잖아요?”
 “그때마다 밖에서 대기했었죠. 회장님 경호는 1팀 담당이니까요. 안에 들어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한데 장천 씨는 여기 있어도 되나요?”
 “그럼 어디에 있어요?”
 “회장님과 함께 있어야죠.”
 “거긴 지금 철통같은 보안이 펼쳐지고 있을 테니 전 여기 있어도 될 것 같아요.”
 장천은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 연말파티장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파티를 즐기세요.”
 “좋아요. 렛츠 고 파티입니다.”
 하지만 이연은 안다. 이 파티는 자신의 파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곳에 초대받은 VIP들은 일개 보안팀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려 들지 않을 테니까. 만약 누군가 호감을 보인다면 그것은 이연이란 사람이 아닌, 자신의 외모에 반한 것이리라.
 오늘까지도 치근덕대는 이 박광철이처럼 말이다.
 “박 엔터의 미래를 짊어질 우리 스타님이 여기 계셨네.”
 “안녕하세요.”
 이연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우리 언제 밥 먹나?”
 “정말 집요하시네요.”
 “내가 한번 파면 땅끝까지 파거든.”
 “죄송하지만 제 사주에 물이 많다네요. 흙 많은 여자를 찾아보세요.”
 뒤에 있던 장천이 피식 웃었다.
 자연스럽게 박광철의 시선이 장천에게 향했다.
 “뭐 하나 물어봅시다.”
 박광철이 장천의 허리에 찬 검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혹시 분노조절 장애 같은 것 있으신가? 내가 사람을 잘 열 받게 하는 타입이라서.”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인내심이 큰 편이라.”
 “다행이네. 암튼 내가 망나니긴 하지만 이 그룹 회장의 핏줄이란 사실을 꼭 상기하시고. 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 듣자니 아버지가 일 때문에 큰돈을 주고 불렀다는데, 무슨 일인지 살짝 귀띔 좀 해주시지.”
 “안 됩니다.”
 “어따, 단호하시구먼.”
 “사전에 비밀을 누설했다간 위약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사는 게 다 비즈니스지. 그 위약금 내가 내주면 되겠네. 얼마?”
 “못 내줄 겁니다.”
 “대체 얼만데 이러시나?”
 지켜보던 이연은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단한 재벌의 자식으로 고작 저렇게밖에 살지 못할까?
 그때 한옆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인환 회장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파티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칼든 자들의 도시』 1-2권에 계속>

댓글(5)

골드충전중    
헉 무플이다 이럼 어찌 판단하리
2020.10.20 14:06
yr****    
믿고보는 작가님 완결까지 달립니다. 추천~
2020.10.21 01:47
말해뭐해    
현대 무협으로 꽤나 재밌게 봤던 작품입니다. 이.작품 이후로 이 작가님걸 몇개 찾아봤지만 이 작품이 개인적으로 제일 재밌었습니다.
2020.10.23 02:34
춤추는사과    
독특한 세계관에 재미져서 쭉쭉 읽었네요
2020.10.23 10:07
kps    
재밌게 봤습니다. 킬링타임용으로 읽을 만합니다. 대여일때 읽어보세요.
2020.11.06 11:42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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