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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1권 (1)

2019.02.26 조회 862 추천 4


 #화룡점정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가 상상 또는 망상이라 부르는 많은 종류의 일들이 실제로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진 않을까?
 물론 이런 생각 또한 단순한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화적 교류가 전혀 없는, 멀리 떨어진 두 개의 문명 사이에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 힘든 공통점이 발견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굳이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홍수신화, 용 또는 드래곤의 존재, 영혼의 존재 등이 그와 같은 경우다.
 이러한 공통점은 간혹 궤변론자들에 의해 허황된 얘기처럼 부풀려지는 소재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많은 수의 과학자들은 이것이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이드id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대부분 무의식의 영역 속에 존재하는 이드에 이러한 상상의 근거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 이드 안에 존재하는 상상의 근거는 또한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만약 이드라는 것이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업데이트되는 정보의 집합체라면, 일반적이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은 상상의 결과물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우리와는 다른 형태의 문명을 지닌 인간들에 의해 추가되는 정보라고 가정해 볼 수는 없을까?
 “중증이구나.”
 “······.”
 오랜만에 오프라인에서 만난 친구의 평가는 냉혹했다. 말허리를 잘린 것이 슬며시 화가 나긴 했지만,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꽤 중증이었으니까.
 “물론, 벌써 1년 가까이 같은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은 아니야. 하지만 한창 나이의 신체 건강한 청년이라면 꿈속의 여인에게 목을 매는 것도 그리 보기 좋은 일은 아니지.”
 “야, 누가······.”
 “그게 아니라면 그런 구태의연하고 장황한 논리를 펼쳐 그녀가 어딘가에 실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또 다른 망상을 만들어 낼 이유는 없지. 내 말이 틀리냐?”
 피식 웃으면서 던진 말에 나는 입맛을 쩍 다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로서도 반박할 말은 있었다. 반복 학습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아무리 개꿈이라도 그걸 1년 내내 줄곧 꿔 대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사람은 잠이 들면 항상 꿈을 꾼다. 다만 깨어나서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달리 생각하면, 내가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곧바로 잊어버리는 게 당연한 꿈을 깨어나서도 기억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쳐도, 매번 같은 꿈을 고장 난 비디오가 반복 재생하듯이 떠올린다는 건 역시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논리적이지 않을까?
 스스로 5년째 나와의 지겨운 인연을 이어 가는, 자칭 저주받은 운명의 소유자 한기영은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다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후우,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너도 이제 슬슬 여자에 눈을 뜰 때가 되지 않았냐?”
 “왜 또 얘기가 그리로 새는데?”
 “이 화창한 봄날, 남자 둘이서 처량하게 어두컴컴한 책상이나 마주하고 앉아서 프라모델 조몰락거리고 있는 이 현실이 네놈은 통탄스럽지도 않은 게냐!”
 기영이는 격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과장된 표정으로 외쳤지만, 나는 냉랭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침 튄다. 마스크 써.”
 “아, 미안.”
 환기 때문에 창을 열어 놔 냉랭하기 그지없는 방 안에서 디오라마1 - (1 디오라마Diorama 모형 또는 인형을 일정한 베이스 위에 만든 배경에다 적절히 배치하여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한다. 즉 알기 쉽게 표현하면, 야외, 시가, 실내 등의 배경에 차량이나 인형을 놓고, 인형의 표정과 포즈를 적절히 만들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현실에 있던 사건을 재연하거나, 극중에 나왔던 장면을 재연하는 것을 말한다.)의 마지막 손질을 가하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다. 이번에 만들고 있는 것은 처음으로 풀 스크래치 빌딩2 - (2 풀 스크래치 빌딩Full Scratch Building 키트에는 없는 부품 또는 모델 전체를 프라판 등을 이용하여 자기 손으로 만드는 것을 스크래치 빌딩Scratch Building이라고 한다. 특히, 키트로는 없는 모델을 완전히 자기 손으로 만드는 것을 완전 자작, 영어로는 ‘풀 스크래치 빌딩’이라고 한다.)에 도전하는 것이라 긴장의 정도가 특히 더 심했다.
 말이 풀 스크래치 빌딩이지, 본래 존재하지 않는 모형을 완전 자작으로 만드는 건 단순히 힘들다는 말 정도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노가다를 필요로 한다.
 이번에 우리 두 사람이 만드는 모형은 한국군의 차세대 전차인 XK-2 흑표다. 현재 한국군의 주력 전차인 K1A1의 경우에는 이미 상용화 키트가 판매되고 있지만, 이 녀석은 형식명의 X가 말해 주듯 아직 시험작이기 때문에 양산형 키트는 나오지 않은 상태다.
 내가 처음 이 녀석을 만난 것은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였다. 대부분의 밀리터리 모델러가 그러하듯이 나 또한 밀리터리 마니아다. 그렇지 않아도 근 5년간 체득한 모델링 기술을 유감없이 풀어 놓기 위해 풀 스크래치 빌딩을 준비하던 나에게 XK-2 흑표의 등장은 뭔가 운명적인 기분까지 느껴지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삼 개월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들인 끝에, 기념할 만한 첫 번째 풀 스크래치 빌딩인 1/35 스케일의 XK-2 흑표가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근데 너무 욕심을 부린 게 아닌가 싶어. 첫 번째라는 점을 감안해서 디테일을 좀 더 마이너 다운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무슨 소리. 난 이것도 성에 안 차. 특히 서스펜션3 - (3 서스펜션Suspension 완충장치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전차에는 장착되어 있지 않았으나, 거친 개활지에서의 안정적인 주행을 위해 이차대전 당시 T-34에 처음으로 장치되었다. 무한궤도를 받쳐 주는 구동축에 독립적인 서스펜션을 장착함으로써 차체의 진동을 효율적으로 흡수하며, 그 효과로 포신이 안정되어 주행 중의 정밀사격이 가능해졌다. XK-2의 서스펜션은 여기에 자체적으로 유압을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어 정차 중에 차체의 높이를 자체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은 생각할수록 아깝다고.”
 내 말에 기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윽, 아직도 포기를 안 한 거냐?”
 “생각 같아서는 구동계까지 완전히 재현해서 스노클 주행도 시켜 보고 싶었는걸.”
 “괜히 말 꺼내서 미안하다.”
 “후후.”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도 우리는 화룡점정의 기분으로 조명을 이리저리 비춰 보며 웨더링4 - (4 웨더링Weathering 모형에다 마치 실물과 같은 질감을 표현해 주는 고도의 기법을 말한다. 이를테면, 자동차에 흙탕물이 튄 효과라든가 색칠이 벗겨지고 녹이 슨 효과 등을 그대로 살려 주는 작업이다.)이나 컴파운드5 - (5 컴파운드Compound 일종의 ‘광택제’로서, 모형의 표면에 바른 후 헝겊 등으로 닦아 주면 표면이 반짝반짝 광택이 나게 된다. 보통 자동차 모형을 만들 때 많이 사용하고, 비행기 캐노피의 아주 미세한 흠집을 갈아 내어 더욱 투명하게 보이게 만드는 데도 쓸 수 있다.)가 어색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자료가 극히 부족한 상태에서 내부의 구동계를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정도면 꽤 근사하다는 생각이 뿌듯하게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내가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고 이리저리 조명을 돌려 보기만 하자,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던 기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진 찍을까?”
 “음, 뭐라고 딱 짚을 수는 없지만 아직도 조금 부족한 느낌인데······.”
 내 말에 기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또냐.”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나에겐 나쁜 버릇이 한 가지 있다. 이걸 버릇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모형이 하나 완성될 즈음이면 항상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니 결국 그때까지 끙끙거리며 만들던 것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고 새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지금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XK-2 흑표만 해도 두 번이나 뒤집어엎은 결과물이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영은 푸념처럼 말을 꺼냈다.
 “차라리 실물을 만들지 그러냐?”
 돌려 말하면, 아무리 뛰어난 모형도 실물보다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분명히 실물을 만드는 과정 중에 모형을 제작하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난 아직 경력도 성과도 부족한 모델러인 데다 이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취미는 취미이기 때문에 즐거운 법이란 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실물은 혼자 못 만들잖아.”
 “하긴.”
 나는 조명을 내려놓고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포기한 거냐?”
 “누구 말대로 첫 번째니까.”
 “훗.”
 그제야 기영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제 사진을 찍은 뒤 유리 커버를 덮으면 삼 개월에 걸친 노가다도 모두 끝나는 셈이다.
 “수고했어.”
 “너야말로.”
 시체처럼 흐느적거리며 침대로 기어들어 가는 기영을 뒤로한 채, 나는 디지털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꿈속에서 나를 반겼다.
 찰랑거리는 갈색 단발머리 아래로 보석이 아닐까 싶은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인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소매와 옷깃에 미려한 금색 자수가 수놓여 있었다. 완전히 비치는 건 아니지만, 얼핏얼핏 천 아래로 보이는 생동감 넘치는 작은 몸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잠시 몽롱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뭔가 나에게 전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계속해서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피부에 손을 가져다 대면 그 손가락마저 하얗게 물들어 버릴 것만 같으면서도, 생명이 없는 대리석과는 달리 그 피부 아래로 붉은 피의 생기가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 그 속에서 그녀는 계속 무엇인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어떻게 보자면 무척이나 요염한 모습이건만, 꿈속의 나는 그녀의 모습에 어떤 욕정도 품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을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나는 그저 멍하니 그녀의 모습과 몸짓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지만, 꿈속에서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닫고 있었다. 이런 걸 자각몽이라고 하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 몸을 움직여 그녀를 만져 본다든가 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내 몸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시각을 제외한 그 어떤 감각도 나에게는 부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는 중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듣고 싶다.
 그녀의 목소리를 단 한 번만이라도 듣고 싶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대답하고 싶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나의 그러한 열망에도 그녀의 모습은 어느 순간 천천히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원래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천천히 눈을 뜨며 현실로 돌아왔다.
 이미 수백 번이나 반복되었던 일이라, 이젠 놀랍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그저 오늘도 결국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실망감으로 조금 허탈할 뿐이었다.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킨다. 방금 전까지 잠들어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이 가뿐했다. 이건 꿈이 가져오는 부작용(?)이다.
 처음 꿈을 꾸었을 때는 이것 때문에 상당히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건 부족한 잠 때문에 부스스한 얼굴로 아침을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확실히 좋은 점이었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옆에 놓인 시계를 들어 시간을 살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계는 아침 여섯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것 또한 꿈이 주는 부작용의 한 가지였는데, 덕분에 나는 폐인 같은 취미에도 불구하고 항상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야, 일어나.”
 “으음······.”
 어느샌가 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는 기영이를 발로 툭 차 봤지만, 그는 뒤척이기만 할 뿐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마무리 작업을 돕기 위해 벌써 사흘째 이런 생활을 했으니 누적된 피로가 어디로 가겠는가.
 “훗······.”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곤을 무릅쓰고 나를 도와주는 녀석이 있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다.
 결국 난 억지로 깨우기보다는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게 놔두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녀석은 군 입대 때문에 휴학계를 낸 상황이니 늦잠 좀 잔다고 해서 탓할 사람도 없었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기영이 녀석에게 이불을 덮어 준 뒤, 환풍기를 틀었다. 모델링의 제작이나 도색에는 여러 가지 유기용제들이 사용되기 때문에 환기는 필수다.
 환풍기를 튼 뒤 나는 입고 있던 옷을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수세식 변기와 샤워기 하나가 달린, 욕실이라고 부르기엔 턱도 없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피곤할 때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은 충동을 느끼긴 하지만, 그럴 땐 집 근처의 사우나에 가면 된다.
 수도를 틀자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며 물이 쏟아져 나왔다. 급탕 기능이 있다고는 해도 따듯한 물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흐르는 물에 한 손을 넣고 온도를 살피다가 문득 꿈속에서 보았던 그녀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한 번만이라도 이런 식으로 그녀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멍하니 흐르는 물을 바라만 보던 나는 갑자기 뜨거워지는 물 때문에 펄쩍 뛰었다.
 “앗뜨!”
 기겁을 하며 얼른 수도를 젖혀 찬물을 섞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 머릿속에는 방금 떠올린 한 가지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를 느낀다······인가.”
 꿈이 아닌 현실에서 그녀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이러다가 그 꿈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되면, 어린 시절에 꾸었던 모든 꿈이 그러하듯 그녀 또한 잊히겠지. 아무리 깊은 인상이 새겨져 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녀의 모습 또한 잊히리라.
 그녀를 실제로 만지고 느낄 수 없더라도, 하다못해 사진이라도 있다면 그녀를 추억할 수는 있을 텐데.
 “사진?”
 그 말을 떠올린 순간, 번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없다면 만들면 된다.
 나는 모델러니까.
 
 
 
 캐릭터 모델, 통칭 피규어라 불리는 인체 모형의 제작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밀리터리 같은 경우는 풀 스크래치 빌딩이라 할지라도 기존의 키트에서 부품을 가져와 수정할 수 있지만, 캐릭터 모델의 원형 제작은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여 하나의 형상을 만들기 때문에 차라리 조각이라 부르는 게 나을 정도다.
 밀리터리 모형이라 할지라도 디오라마가 될 경우에는 거기에 알맞은 인형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경우엔 대부분 기존의 캐릭터 모델에 적당한 수정을 가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이번과 같은 원형 제작과는 비교가 안 된다.
 모델링 경력이 5년이긴 하지만, 캐릭터 모델의 원형 제작은 사실상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다지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처음 모델링이라는 취미에 뛰어들었을 때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아니겠는가.
 수업을 마치기가 무섭게 나는 화방에 들러 에폭시 퍼티와 스컬피 등 몇 가지 재료를 구입했다. 물론 이것으로 곧장 제작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지점토도 빼놓지는 않았다. 지점토는 뭐니 뭐니 해도 다른 재료에 비해 엄청나게 싸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연습용으로 그만이었다.
 허겁지겁 집에 도착해 보니 이미 기영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꿈 얘기 때문에 빈축을 산 터라 그녀의 캐릭터 모델을 만든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싶었는데, 한시름 놓은 기분이다.
 우선 책상 위에 재료들을 펼쳐 놓은 뒤 눈을 감고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떠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실물은커녕 사진 한 장 없는 상태에서 기억만으로 어떠한 형상을 만든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아니었다. 사진처럼 바로 꺼내 볼 수는 없지만, 원할 때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나는 곧바로 침대로 뛰어 올라가 몸을 눕혔다. 그리고 그녀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시 몸을 뒤척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야! 야, 임마! 권희철! 야!”
 “어, 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몽롱한 와중에도 그것이 기영의 목소리이고 또한 부르고 있는 게 내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얼떨떨한 가운데에도 기영이 녀석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그래? 불이라도 났냐?”
 하지만 어리둥절해하는 내 말에 기영은 오히려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멍하다기보다는 황당해한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았다.
 한참이나 그런 표정을 지은 채 내 얼굴을 바라보던 기영은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후, 누군 걱정돼서 달려왔더니만.”
 “뭐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사흘 넘게 학교도 안 나오고 연락도 안 돼서 이렇게 달려온 거라고. 이렇게 앉아서 인형이나 조몰락거리는 줄 알았겠냐?”
 “뭐?”
 이번엔 내가 황당해질 차례였다. 사흘이라니? 꿈을 꾸려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한 게 방금 전 같은데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나는 침대가 아닌 의자에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희미한 조명 아래 무언가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음을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크게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느 틈엔가 내 눈앞에는 너무나도 낯익은 한 인물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심장 속을 순식간에 헤집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영롱한 청록색 눈동자.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비치는 흰옷을 걸친 그 인물을 보는 순간, 나는 그것이 고작해야 한 뼘이나 될까 말까 한 크기의 인형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기영은 일단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바로 불을 켜고 창가에 다가가 환풍기를 켰다.
 “작업을 하는 건 좋은데 환풍기는 좀 켜고 해라. 어휴, 먼지 좀 봐라.”
 “······.”
 “그나저나 무슨 피규어기에 사흘 동안이나 연락 두절 상태로 몰두한 거냐? 디테일이 꽤 괜찮은 거 같긴 하다만. 얼마짜리야?”
 “······몰라.”
 “뭐?”
 “이거······ 누가 만든 거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레 그렇게 묻자 기영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를 때까지 거기에 매달려 있던 게 누군데?”
 나는 잠시 기영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설명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꿈속에서만 봤던 인물이다. 내 얘기를 듣고 그것을 흉내 냈다 할지라도 이렇게 똑같이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적어도 기영은 그녀를 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시선을 돌려 내 눈앞에서 나를 똑바로 보고 있는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에 묻어 있는 작업의 흔적들을 살펴보았다.
 내가······ 이것을 만들었단 말인가?
 적어도 나에겐 그러한 기억이 없었다. 오직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는 사실뿐이었다.
 잠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한 나는 옆에서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기영을 다시 불렀다.
 “기영아.”
 “왜?”
 “잠깐 귀 좀 빌리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영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귀를 들이댔다. 그가 몸을 숙이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눈앞에 들이밀린 기영의 머리를 힘껏 후려쳤다.
 “크악!”
 당연히 기영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뒹굴었다. 주먹으로 전해지는 얼얼한 느낌. 그 생생한 감각은 이것이 결코 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너 이 자식! 뭐야, 갑자기!”
 느닷없이 머리를 얻어맞은 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모양인지 득달같이 달려들며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의 거친 호흡을 피부로 느끼고 나서야 나는 지금의 상황이 현실임을 인정할 수 있었다.
 “꿈이 아닌 거군.”
 “뭐?”
 “그리고 네 말대로 내가 저걸 만들었고.”
 “무슨 소리야?”
 “나도 알고 싶어.”
 내 말에 기영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남자가 마흔까지 숫총각이면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다만, 그것도 아닌 놈이 눈앞에서 이렇게 미쳐 가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역시······ 내가 이상한 거겠지?”
 기영은 그제야 내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표정을 굳혔다.
 “저게 뭔데?”
 “그녀.”
 “그녀?”
 “매일 밤 꿈속에서 보던 그녀.”
 기영은 입을 벌리고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다시 말했다.
 “병원에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역시······ 그게 좋겠지?”
 “오늘은 늦었으니까 일단 자고, 내일 아침에 가 보자.”
 “그래.”
 나는 기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인형을 바라보았다. 인형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척이나 섬뜩한 상황일 수도 있었지만, 난 어쩐지 그 인형이 너무나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런 느낌조차도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반증이 될 수 있겠지만, 그 모든 걸 알면서도 난 그 인형에게서 쉽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인형을 바라보던 나는 작은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지만, 어쩐지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러한 느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델링을 시작하고부터 하나의 모형을 완성할 때마다 이런 느낌을 받곤 했기 때문이다.
 뭐가 문제일까. 이번엔 또 무엇이 부족하기에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
 바로 그 순간, 마치 정수리에 벼락이 내려친 것과 같은 어떤 충격이 내 뇌리를 강타했다. 그리고 눈앞의 인형이 시야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 모든 현상에 당혹해하기도 전에, 나는 이 기묘한 감각이 지금까지 내가 뭔지도 모른 채 갈망해 왔던 감각임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뭔가 부족하다는 것만 느껴 왔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나는 눈앞의 이 인형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새로이 얻은 감각을 통해 느끼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실을 매달아 조종하는 것처럼, 내 양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면상필6 - (6 면상필 동양식 서예 붓 중에서 가장 작은 것. 인형의 색칠이나 손으로 마크를 그려 넣기, 먹선 넣기 등 정밀한 작업에 사용된다. ‘백규’라고도 한다.)을 집어 들고 붉은 에나멜을 살짝 찍어 조심스레 인형에게 가져갔다. 도톰하게 양각된 채 살짝 분홍빛이 도는 입술 위로 가느다란 면상필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까지 느껴졌던 모든 위화감들이 거대한 해일에 씻기듯이 사라져 갔다.
 희열인지 뭔지조차 알 수 없는 쾌감이 온몸을 관통한다. 그것은 상쾌하면서도 뜨거웠고, 짜릿하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그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바로 이거였어.”
 “뭐?”
 나는 지금까지 존재조차 알지 못한 채 갈망해 왔던 그 쾌감을 기영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다시 입을 떼려는 찰나, 갑자기 눈앞에서 무언가 강렬한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
 놀라서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나와 기영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튕겨 나갔다. 반대쪽 벽에 세차게 등을 부딪쳐 순간 호흡이 턱 막혔다.
 “큭!”
 옆에서도 외마디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에도 손을 들어 시야 가득 터져 나오는 빛을 막아 보려 애썼다.
 “도대체 무슨······.”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자,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가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너무나 강력한 빛의 폭풍 속에서 역광으로 얼핏 윤곽만 드러난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
 근 1년간 매일 밤 꿈속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인형이 아니었다. 비록 역광 때문에 자세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실루엣만으로도 나는 그것이 실제 그녀의 모습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 꿈속의 그녀라는 것을 깨닫자 나의 심장은 마구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다, 당신은······.”
 간신히 떨리는 입을 열어 그렇게 말하자, 실루엣으로만 비치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변화했다.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미소 짓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한 줄기 음성이 내 머릿속에 파고드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기다렸어요, 마이스터.
 “······.”
 -함께 가요.
 귀를 통해 전해지는 일반적인 의사소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대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조차 없었다. 빛이 폭발했을 때 보이지 않는 힘에 튕겨 나갔던 것처럼, 순식간에 빛이 사그라지면서 주위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으아아앗!”
 옆에서 당황한 기영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나는 조용히 그 보이지 않는 힘에 몸을 맡겼다.
 시야를 온통 뒤덮었던 빛의 폭발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알 수 없는 거대한 암흑이 펼쳐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심연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기에 충분했으나, 어째서인지 나는 그 모든 광경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심연을 무사히 통과해 그녀에게로 다가가는 방법이 오직 그것뿐임을 난 이미 알고 있었다.
 
 
 
 #마이스터? 그게 뭔데?
 
 
 
 “마이스터, 마이스터.”
 어디선가 한 줄기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았던 심연에 작은 파문을 아로새긴다.
 파문은 무엇 하나 느낄 수 없는 무감각의 심연 속에서 나를 불러일으켰다. 작은 파문이 한 번 스쳐 지나갈 때마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감각들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한다.
 가장 처음 느낀 감각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고통이 느껴진다는 것은 적어도 아직은 생명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통은 더욱더 강력하게 내 모든 것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처음부터 그러했으리라 생각되었던 심연이 둘로 갈라지며 한 줄기 빛이 눈부시게 내 시각을 자극했다.
 어째서 내가 눈뜬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눈을 뜬다는 행위 자체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갑작스레 쏟아진 빛줄기 때문에 눈을 희번덕거리던 나는 점차 시각이 본래대로 돌아옴과 동시에 누군가가 억지로 내 눈을 까뒤집듯이 뜨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그만!”
 아직 시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허여멀건 물체만 보이는 상황에서도, 나는 자칫하면 지금 눈앞에 자리한 누군가가 내 눈을 그대로 뽑아 갈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며 그렇게 외쳤다. 그 말이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내 눈을 억지로 까뒤집던 손가락이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으······.”
 작은 신음을 흘리며 손을 들어 눈을 문지르는데, 다시 멋쩍어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에헤헤, 그러니까 부를 때 일어나면 좋았잖아.”
 아직 눈이 부셨기 때문에 나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사이로 어쩐지 낯설지 않은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지난 1년간 나의 꿈자리를 뒤흔들어 놓았던 그녀를 떠올렸으나, 다음 순간 눈앞의 인물이 그녀에 비해 터무니없이 어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속의 그녀가 한 10살쯤 나이를 거꾸로 먹어서 어려졌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넌······ 누구지?”
 조금은 실망감마저 서린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소녀는 그런 내 기색을 알아챘는지 이내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안 가르쳐 줄래.”
 입을 삐죽거리는 소녀의 모습에 난 어쩐지 허탈한 기분까지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흐리멍덩하던 머릿속이 점차로 깨어남과 동시에 나는 그녀가 꿈속의 그녀와 혈연관계를 지닌 누군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세상에는 자신과 똑같이 닮은 사람이 셋은 있다고들 하지만, 그런 우연의 일치로 설명하기엔 소녀의 앙증맞은 외모가 꿈속의 그녀와 너무나도 흡사했다.
 “그럼 여긴 어디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조금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타이르듯 물어보았다.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틀려. 그럴 땐 어떻게 하면 가르쳐 줄 건지 물어봐야 하는 거라고.”
 맹랑하다는 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아무래도 지난 5년간 두문불출하며 한 가지 취미에만 매달려 온 나에겐 무척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르는 척 소녀가 제시한 모범 답안을 그대로 읊었다.
 “그래. 어떻게 하면 가르쳐 줄 건지 알려 줄래?”
 하지만 이번에도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야, 그게. 난 이미 무도회에서 데뷔까지 마친 어엿한 레이디란 말야. 어린애가 아니야!”
 “······.”
 난감하다.
 안 그래도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시는 판에 이런 꼬맹이와 입씨름하는 건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었다. 결국 난 소녀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주위에 말이 통할 만한 사람이 없나 살피기로 마음먹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무척이나 고풍스럽게 느껴지는 회화와 조각들이 빼곡히 들어찬 실내 한가운데 내 침대는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침대 자체도 이른바 공주님 침대라고 불리면 딱 알맞을 듯한 모양새였는데, 곱게 드리워진 차양에 보일 듯 말 듯 세밀하게 놓인 자수는 아무리 식견이 없는 사람이라도 상당한 공이 들어갔음을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흠이라면, 적게 잡아도 무슨 실내 농구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공간에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라는 거다.
 만약 벽과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이나 차양 같은 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이곳을 어딘가 내가 모르는 빈 공장 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잠시 방 안을 둘러보다가 썰렁하기 그지없는 풍경에 조금 실망한 나는 창밖을 살펴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 문득 낯익은 물건들이 방구석에 쌓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곧바로 내가 눈을 감기 전에 벌어졌던 일이 머릿속에 떠올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예상대로 그 물건들은 내 방에 자리하고 있던 공구와 장식장, 그리고 장식장 안에 가득 놓여 있던 디오라마와 프라모델들이었다.
 “이런 젠장.”
 당연히 그 물건들은 여기저기 부딪치고 충격을 받아 깨지고 부서진 자국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자료 수집과 보존에 사용하던 노트북과 디지털 카메라, PDA 같은 가전제품들은 그럭저럭 상태가 양호했지만, 5년 넘게 땀과 노력을 기울인 모형들은 보는 순간 눈물이 날 정도로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후······.”
 이걸 다시 고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다가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꼬마야,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꼬마라니! 난 아일렌 게르트루드라는 이름이······ 아차!”
 어른인 척해도 별수 없는 모양이다. 꼬마라는 말에 발끈해서 방금 전까지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실랑이하던 일을 깜박해 버린 것이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소녀는 다시금 입을 삐죽거리며 애꿎은 방바닥을 툭툭 걷어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장 나에게 급한 것은 이 아이의 이름 같은 게 아니었다.
 “그래, 아일렌. 혹시 나 말고······.”
 “······!”
 갑자기 소녀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도 크게 놀라는 바람에 또 뭔가 실수를 한 게 아닌가 하고 나까지 덩달아 말을 멈추었지만, 나도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무시하고 다시 말을 마쳤다.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니?”
 “······다른 사람?”
 내가 말하는 다른 사람은 다름 아닌 기영을 뜻한다. 어째서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심연에 끌려 들어가는 순간 나는 이 모든 상황이 이미 예정되어 있던 운명 같은 것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막상 내 방 안에 있던 물건들이 같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옆에 있던 기영도 같이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잠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너밖에 없었어.”
 “그런가······.”
 약간의 실망감과 안도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나는 다시 한 번 물건들을 살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내 방 안의 물건들이 모조리 이곳에 함께 온 것은 아니었다.
 컴프레서1 - (1 컴프레서Compressor 정확히는 에어 컴프레서라고 한다. 공기를 압축하는 일종의 펌프로서 에어브러시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에어브러시는 에어 컴프레서를 통해 압축된 공기로 도료를 분사하여 물체를 도장하는 도구이다.)도, TV도 없었으며 침대 또한 없었다.
 어쨌거나 대략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자, 나는 이 모든 일의 정확한 내막을 알고 싶어졌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이 모든 상황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을지언정, 무언가 논리적인 설명을 원하는 마음 또한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소녀에게 질문했다.
 “어른들은 어디 있지?”
 지금까지의 대화로 미루어 눈앞의 소녀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얻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 것 같아 제대로 말이 통하는 어른을 찾은 것이지만, 역시나 소녀는 대번에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눈앞에 있잖아.”
 “눈앞에?”
 “나도 이미 어른인걸?”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쉰 뒤 질문을 수정했다.
 “알았어. 그럼 다시 묻지.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지?”
 “왜?”
 “뭣 좀 물어보려고.”
 “······.”
 하지만 소녀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안 돼.”
 “뭐?”
 “소환된 마이스터는 그를 소환한 사람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어.”
 “봉사?”
 “응. 그러니까 넌 내 거야.”
 그녀의 당돌한 말은 일단 제쳐 두더라도, 그 의미가 이해되자 난 극심한 혼란을 느껴야 했다.
 “그건 다시 말해서 네가 날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거니?”
 “응. 내가 마이스터를 이곳으로 불러들였어.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1년 동안 열심히 기도했거든.”
 왠지 골치가 아파진다. 지금까지의 대화 내용을 요약해 보면 결국 내가 1년 동안 꾸었던 꿈 속의 그녀가 바로 눈앞의 꼬마라는 얘기가 된다.
 아일렌이라는 이름의 이 소녀는 분명히 꿈속의 그녀와 닮았지만, 내가 본 것은 충분히 어른의 성숙함을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여인이지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꼬맹이가 아니었다.
 “이거야 원······.”
 암담하다는 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잠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충격을 받아 띵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나는 뜨거운 차를 한 잔 비울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후······.”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있자니 그때까지 옆에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아일렌이 종알종알 입을 열었다.
 “아파?”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어째서인지 다시 한 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린애한테 그런 심정을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국 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흠······.”
 하지만 아일렌은 왠지 석연치 않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왠지 머쓱해져서 나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나저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
 “아까부터 날 마이스터라고 불렀잖아. 왜 그렇게 부르는 거지?”
 “마이스터니까.”
 “······.”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한 그 눈빛에 내 실수를 깨달았다.
 스스로 어른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녀는 어떻게 봐도 아직 어린 애였다. 어른이랑 대화하는 식으로 말해 봐야 이쪽의 뜻을 헤아려 대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음······ 그러니까, 마이스터가 뭐지?”
 “마스터피스를 만드는 사람.”
 “마스터피스는 뭔데?”
 “바보. 마이스터가 마스터피스도 몰라?”
 “······.”
 스스로 그다지 급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지만, 아일렌과 대화를 하려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말꼬리 잡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라는 소파 방정환 선생의 뜻을 받들어 억지로 미소를 띤 채 다시 말했다.
 “아일렌.”
 “응?”
 “네가 날 소환했다니까 잘 알겠지만, 난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이곳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네가 나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 줘야 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
 “음······.”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아일렌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내가 마이스터를 돌봐 줘야 한다는 얘기지?”
 뭔가 초점이 어긋난 느낌이었지만, 대충 비슷한 뜻인 데다 당장 급한 건 궁금증을 푸는 일이었기 때문에 우선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아. 그러니까 내가 묻는 걸 제대로 대답해 줬으면 하는데.”
 “알았어. 뭐가 궁금한데?”
 “우선, 마이스터가 뭐지?”
 아일렌은 내 질문이 떨어지자 잠시 손가락으로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마스터피스를 만드는 사람.”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른 사람을 찾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번 더 꾹 눌러 참고 다시 질문했다.
 “그럼 마스터피스는 뭔데?”
 “마이스터가 만들어 낸 물건.”
 계란은 닭의 알이고, 닭은 계란을 낳는 새라는 식이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계속 같은 말의 반복일 것 같은 불안감에 결국 포기하려는 찰나, 다시 아일렌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위대한 장인이 온 힘을 기울여 만들어 낸 물건은 스스로 영혼을 가지게 된대. 뭐라더라? 영혼이랑 비슷하지만 영혼은 아닌 그런 거라던데. 유, 유······ 뭐였더라.”
 “유사 영혼?”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어눌하기 그지없는 아일렌의 말을 듣는 순간 유사 영혼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바로 떠올랐다.
 아일렌은 내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맞아, 유사 영혼.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거장의 손으로 만들어져서 스스로 유사 영혼을 가지게 된 물건이 마스터피스라는 거지? 마스터피스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마이스터고.”
 “응, 응. 맞아. 마이스터는 굉장히 희귀한 존재기 때문에 한 시대에 몇 명이나 나타나는 일은 별로 없대. 하지만 세상이 처음 열릴 때 신이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었던 것처럼, 마이스터는 생명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그것과 유사한 무언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존경받는 사람이랬어.”
 배운 것을 억지로 기억해 내기 때문인지 책을 읽는 것 같은 설명이었지만, 나름대로 논리 정연했다. 하지만 일단 마이스터가 어떤 개념인지 이해되자, 다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본래 마이스터가 있다는 얘기잖아. 내가 그 마이스터에 해당하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래 이곳에도 존재하고 있다면 굳이 소환이니 뭐니 해서 불러올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그건 아니야.”
 “뭐가?”
 “본래 이 세계에서 태어난 마이스터와 소환된 마이스터는 한 가지 커다란 차이가 있어.”
 “그게 뭔데?”
 “본래 생명이 없는 물체에 유사 영혼을 부여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소환된 마이스터는 그것을 넘어서 만들어진 마스터피스를 매개물로 본래 속하던 세계의 물건을 소환해 낼 수가 있어.”
 “호오······.”
 “다시 말해 소환된 마이스터가 만들어 낸 물건은 이 세계와 다른 세계의 연결 고리가 되는 셈이야.”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녀의 설명을 다시 돌려 생각하면 지금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긴가민가하지만 나는 아일렌의 기도에 의해 그녀의 모습을 꿈에서 보게 되었고, 무언가에 홀리듯이 그녀의 모습을 캐릭터 모델이라는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 내었다. 본래 내가 살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던 그녀의 모습을 형상화함으로써 이곳과 내가 있던 본래의 세계에 연결 고리가 생겼고,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려 오게 된 것이다.
 도무지 논리라든가 과학적인 설명 같은 걸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렇게라도 이유를 붙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아일렌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 모든 것이 단지 한여름 밤의 개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무척이나 구태의연한 전개겠지만, 알고 보니 전부 꿈이었다는 식의 소설이나 만화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나는 마음 한편으로 이 모든 것이 현실이면 좋겠다는 생각 또한 했다. 아일렌의 말처럼 내 자신이 마이스터라 불릴 만한 거장인가 싶은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만들어 낸 물건에 유사 영혼이 부여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단지 꿈일지라도 분명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잠시 더 곰곰이 생각해 본 나는 눈앞에 널려 있는 부서진 모형과 공구를 집어 들었다. 우선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부터가 그녀의 말을 뒷받침하고는 있었지만, 정말 내가 마이스터라 불릴 만한 존재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얘기를 나누다 말고 갑자기 눈앞의 물건들을 집어 책상 위에 늘어놓자 아일렌은 왠지 상기된 표정으로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하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장난감일 테니까.
 아일렌이 보거나 말거나 우선 공구를 정리한 나는 부서진 모형 중에 가장 파손 정도가 덜한 것을 찾아보았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부서진 모형들이 하나하나 눈에 밟혔지만, 그녀의 말대로 내가 마이스터가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더 강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XK-2 흑표의 모형을 집어 들었다. 바퀴가 하나 빠지고 칠이 좀 벗겨진 걸 제외하고는 그나마 가장 상태가 양호했기 때문이다.
 전차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선 파손된 곳을 고치는 것이 먼저였지만, 막상 공구를 손에 잡는 순간 나는 무언가 이질적인 감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척이나 기묘한 감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감각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뭐라 해도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직도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믿기지는 않지만, 내 옆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흥미진진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아일렌의 인형을 완성할 때도 이런 감각을 느꼈었다.
 조금은 두려울 만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지금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 감각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홀린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어느새 내 양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손이 알아서 고치고 다듬을 곳을 찾아가는 것처럼 눈앞에 놓인 모형 위로 분주히 움직였다.
 그렇게 손이 움직이자 하나의 모형을 완성시킬 때마다 느끼곤 했던 왠지 모를 위화감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헤에······.”
 바로 옆에서 아일렌의 탄성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모형 제작이라는 것이 본래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 나의 시야에는 오직 눈앞에 놓인 전차 모형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감각을 통해 흘러들어 오던 위화감이 모두 사라진 순간, 갑자기 온몸의 힘이 쭉 빠지며 그대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하아, 후우······.”
 숨 쉬는 것조차 잊었던 걸까.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앞에 놓인 전차 모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온몸을 휘감는 격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어디 아퍼?”
 갑자기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몸을 부르르 떠는 내 모습이 걱정스러웠는지, 아일렌은 가볍게 얼굴을 찌푸리며 내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나는 갑자기 눈앞에 들이밀린 그녀의 얼굴과 반짝이는 청록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엄청나게 부끄러운 장면을 들켜 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난처해진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괘, 괜찮아.”
 “정말?”
 하지만 아일렌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그 작은 손을 들어 내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당황해서 고개를 돌려 피해 보려고 했지만, 어느새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기 이마와 내 이마를 번갈아 만지고 있었다.
 “약간 열이 있는 거 같기도 한데······.”
 왠지 엄청나게 난처해져서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던 내 귀에 이질적인 소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달각. 달각. 달각.
 뭔가 아주 작은 물체가 흔들리는 듯한 소음이, 눈앞에 내밀어진 그녀의 얼굴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다른 생각을 떠올릴 틈도 없이 그녀를 살짝 밀치자, 책상 위에 놓인 전차 모양이 저 혼자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광경이 드러났다.
 “······!”
 움직이고 있다. 바퀴도 포탑도 단단히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아야 할 1/35 XK-2 흑표가 저 혼자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습에 눈을 비벼 보았지만, 그래 봐야 책상 위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전차의 모습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생겼어. 귀엽지도 않고······.”
 아마도 아일렌은 눈앞에서 자기 혼자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전차 모형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장난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오해를 풀기보다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 알고 싶은 마음이 더 급했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나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전차 모형을 집어 들었다.
 달각. 드르륵. 위잉. 달각.
 누군가에 의해 들린 것이 기분 나쁜지, 전차 모형은 나름대로 몸부림을 쳐 보기 시작했다. 포탑이 휙휙 돌아가고 구현한 적도 없는 서스펜션이 작동했다.
 분명히 내가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손에서 탄생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그 모습에 다시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문득 전차의 포신이 들리며 나를 겨누었다.
 “······!”
 녀석이 뭘 하려는 건지 몰라 눈을 크게 뜬 순간 갑자기 작은 폭음이 들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나는 이마에 꿀밤이라도 얻어맞은 듯한 통증을 느끼며 엉겁결에 전차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말았다.
 “윽!”
 내가 손을 놓자 전차 모형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그 드넓은 방 안을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꺄하하하!”
 모형이긴 해도 전차의 포에 얻어맞았다는 사실에 얼떨떨해 있는 나를 뒤로한 채, 아일렌은 방 안을 마구 휘젓고 다니는 1/35 XK-2 흑표의 뒤를 따라 내달리며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흑표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그녀를 적으로 간주했는지 포신을 돌려 나에게 했던 것처럼 포를 쏘아 댔지만, 아일렌은 그것조차도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릴 뿐이었다.
 “이거 참······.”
 이마를 문지르고 있던 나는 잠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단지 개꿈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현실이지만, 이런 꿈이라면 다 털어 버리고 그냥 즐겨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흑표와 아일렌이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자 그제야 방문이 열리며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철모르는 꼬맹이로만 보이던 이 소녀는 생각보다 높은 신분이었는지 모두들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채로 정중하게 행동했다.
 뭐라도 물어볼까 싶었지만, 어쩐지 말 걸지 말라는 분위기가 암암리에 느껴져서 제대로 입을 떼지도 못했다.
 결국 낯선 상황에 압도되어 우물거리는 사이, 그들은 내 옷을 갈아입히고 아일렌과 함께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흑표와 함께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아일렌을 무시한 채 그냥 내 갈 길을 갔다는 게 맞겠지만 말이다.
 난생처음 보는 장소에서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걷고 있었지만, 난 어쩐지 담담한 기분이었다. 사실 이건 내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난 울며불며 불안감을 호소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일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럴 시간에 해결책을 구해 보는 게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랄까. 학교에서 다른 애들이 고3병이니 뭐니 할 때도 왠지 나 혼자서 담담했던 기억이 난다. 뭐랄까, 감정의 기복이 남보다 좀 드문 편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흰옷을 입은 시녀와 시종들의 인도를 받으며 나는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입구를 지키는 자가 커다란 지팡이로 바닥을 두 번 두드리자 작은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러자 내가 있던 방의 두 배 크기는 될 법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로부터 빛이 들어와 여러 가지 석상들을 비추고, 방 한가운데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의심스러운 커다란 식탁이 놓여 있었다.
 식탁 맞은편에는 한눈에도 꽤나 중후한 인상의 사내가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마치 폐부를 찌르는 듯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사내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늦는 듯하여 먼저 들려던 참이었소. 들어오시오, 마이스터.”
 “실례하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몇 걸음 움직이자 다시 작은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사내는 내가 식탁에 다가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에 앉았고, 그와 동시에 옆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의자를 빼며 앉기를 권했다.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이 신호였는지, 창문 반대편의 작은 문이 열리며 여러 가지 음식들이 내 앞의 긴 식탁에 놓이기 시작했다.
 사내는 시종들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의 이름을 알고 싶소.”
 나는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적신 후에야 겨우 대답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자들의 태도로 보아 이 남자가 보통 신분은 아닌 듯했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이 남자에게 잘못 찍히는 날엔 앞으로의 생활이 상당히 고달파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권희철이라고 합니다.”
 “······생소한 이름이군. 무슨 뜻이오.”
 “성은 권세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름은 밝고 슬기로울 것을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사내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과연 마이스터다운 이름이오.”
 사내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군주는 이미 보셨소?”
 “군주라면······.”
 “아일렌을 말하는 것이오.”
 “네, 그녀라면 이곳에 같이 오다가 헤어졌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다가 새 버렸다는 게 맞겠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
 “군주가 태어났을 때, 나는 그녀가 기품 있고 아름다우며 사랑받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일렌 게르트루드라는 이름을 주었소. 하지만 너무 귀여워한 게 문제였는지 저렇게 말괄량이가 되어 버렸다오.”
 내용은 푸념 같았지만,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아일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마주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군주께서는 충분히 아름다우십니다. 또한 그녀의 천진한 모습은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결코 이름이 부끄러운 레이디는 아니신 듯합니다.”
 반쯤은 진심이고 반쯤은 아부였다.
 분위기를 보건대, 눈앞의 남자는 아일렌의 부친이며, 아일렌이 군주라 호칭되는 것으로 미루어 왕이나 황제, 또는 그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밉보여서 좋을 일은 없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내 대답에 가볍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방금 전과는 달리 조금은 자조가 섞인 느낌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사내는 뜸을 들이다가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도 되겠소?”
 “네.”
 “사실 난 그대가 별로 달갑지 않소.”
 “······.”
 나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과 행동에서 진위를 읽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사내의 표정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돌려 생각하자면, 이건 점잖은 축객령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아일렌에게 소환되어 이곳에 오기는 했지만, 사내의 입장에서 보면 난 어쨌든 불청객이니 귀여운 딸에게 벌레가 붙는 게 달갑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직감적으로 그의 말이 좀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마이스터가 이곳에서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니고, 또한 이계의 마이스터가 가진다는 소환의 능력까지 감안하면 득이 되면 되었지 절대로 해가 될 일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결국 사내의 말은 그런 모든 점을 감안하더라도 내 존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시겠습니까?”
 사내는 잠시 주저하다가 가만히 한 손을 추켜올렸다. 그러자 등 뒤에 시립하고 있던 두 명의 남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방에서 나갔다.
 마침내 사람들이 방에서 모두 나가자 그제야 사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나라는 무척이나 작은 나라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가 어째서 사람들을 물렸으며, 또한 내가 왜 그리 달갑지 않은지 알 수 있었다.
 마이스터는 무척이나 희귀한 존재라 했다. 그런 존재가 약한 나라의 군주에게 소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그것을 빼앗으려는 자가 생기게 된다.
 단순히 날 데려가려는 자부터 시작해서, 아마도 소환자로서 나에 대한 모든 우선권을 가지게 될 아일렌을 원하는 자도 생겨날 것이다.
 본래 왕가의 여자는 그럴 때를 위해 소중히 키워지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보잘것없는 소국의 군주라면 그런 일반적인 운명과는 좀 다른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별다른 이익이 없는데도 굳이 정략결혼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마이스터의 소환자라는 가치가 부여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적어도 나에게 주변 모든 강대국의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힘이 없는 이상, 아일렌은 지금까지의 자유로운 삶과는 전혀 다른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가 주변국의 입장이더라도, 합법적으로 이계의 마이스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납득이 되는군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사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해가 빠르니 고맙구려.”
 “취미 때문에 역사를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 그렇습니다.”
 “호오······ 취미라면?”
 “본래 존재하는 물체의 모형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곳으로 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죠. 솔직히 저는 지금도 마이스터라는 호칭이 부담스럽습니다.”
 “취미임에도 불구하고 마이스터의 경지에 오르다니, 대단하시오. 그럼 본래는 무슨 일을 하시는 중이었소?”
 “학생이었습니다. 학문을 익히는 중이었죠.”
 “그렇구려.”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며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습니까?”
 어차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철없는 소녀의 치기 어린 행동 때문이고, 그로 인해 곤란한 지경에 빠져야만 한다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내 말을 듣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게 마련이니, 결과를 본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원인을 제거해야 하오.”
 “그 말씀은······.”
 “결국 그대가 본래의 세계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대와 아일렌을 연결 지어 준 매개물이 소멸되거나, 그대를 이곳으로 소환한 아일렌의 존재가 사라져야만 하오.”
 “······.”
 나와 함께 심연에 휩쓸려 이곳으로 온 물건들 중에 아일렌의 인형은 없었다. 그건, 인형이 내가 본래 있던 세상이나 심연 속에 남겨졌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이곳에 있는 상태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으니, 내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아일렌의 존재가 소멸돼야 한다는 뜻이 된다.
 결국 나라는 존재가 부담스러우나 돌려보내려면 소중한 딸을 잃어야만 하니, 사내의 입장에선 상당히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소문이 나기 전에 나를 제거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만찬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긴장한 채로 사내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흑표와 함께 올 걸 잘못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만약 사내에게 그럴 마음이 있다면,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건장한 두 명의 남자에게 간단한 명령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이 모든 일을 없었던 걸로 되돌릴 수 있다.
 하지만 사내는 내 긴장한 시선을 눈치 챘는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대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소. 그랬다가는 당장 녀석에게 들볶일 테니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파악하기 위해 얼굴을 찌푸렸지만, 사내는 모르는 척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대를 다른 자들에게서 잠시나마 숨겨 둬야 할 것 같소. 그걸 이해해 주길 바랄 뿐이오. 솔직히 이런 얘기까지 꺼낼 생각은 없었지만, 그대도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하니 굳이 숨겨 봐야 의혹만 생기지 않겠소? 그럴 바에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했소.”
 “과찬이십니다.”
 진의야 어찌 되었든 간에 당장 나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말을 마치자 살짝 시선을 돌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등 뒤에 시립해 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가볍게 손뼉을 쳐 방 밖으로 나간 시종들을 불러들였다.
 “수인사나 나눌 생각이었는데 말이 길어졌군. 시장할 테니 사양 말고 드시오.”
 “감사합니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상황에서 그 맛을 제대로 느낄 겨를이나 있었겠는가.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어느샌가 나는 처음 내가 깨어났던 방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드발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아일렌의 부친이자 이 나라의 공왕은 나에게 호위라는 명목으로 한 사람을 딸려 보냈다.
 키엘 드 브로이라는 이 남자는 나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지녔다. 나보다 키는 작았지만, 잘 단련된 단단한 신체는 그가 고된 수련을 거친 뛰어난 무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호위였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그의 주된 임무가 나에 대한 감시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내가 도망을 친다든가 하는 걸 감시하는 일 외에도 금지옥엽인 아일렌에게 만의 하나 위해를 가할 수도 있으니, 아버지로서 믿을 수 있는 든든한 무사를 붙여 두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말이 나와서 얘기지만, 내가 이곳을 떠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아일렌을 해치는 것이다. 어차피 아일렌의 인형은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계약 당사자를 해침으로써 계약 자체를 무효화하는 것이 지금으로썬 가장 간단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물론 그녀를 죽이면서까지 꼭 이곳을 벗어나고 싶냐면 그건 아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감시를 받는다는 건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나는 힘없이 눈앞에 가로놓인 문을 밀어젖혔다.
 문이 열리자 부담스러울 정도로 넓은 방 한가운데 아일렌이 등을 돌린 채 오도카니 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흑표와 기운차게 뛰어다니다가 지치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나는 그녀가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란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흘깃 뒤를 돌아보니 키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 등 뒤 한 걸음 반 위치에 시립해 있었다. 마치 그림자 같다는 건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아일렌에게로 다가섰다.
 “가만있어 봐. 옳지, 착하지.”
 “······!”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나는 아일렌이 누군가를 향해 조심조심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새 흑표와 친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자신을 만들어 낸 자의 얼굴에 아무 거리낌도 없이 포를 쏴 대는 성질머리 고약한 전차 모형도 결국 미소녀에게는 약했던 것일까?
 이런저런 망상을 떠올리며 그녀의 등 뒤에 다가섰다.
 “풉!”
 그리고 곧바로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랑스러운 한국군 차세대 전차의 늠름한 모습은 어디 가고, 차체에 크고 작은 리본과 꽃 장식을 두른 기묘한 물체가 아일렌의 무릎 사이에 끼어 버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억지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아일렌은 흑표를 향해 종알종알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가만 좀 있어 봐! 기껏 예쁘게 해 준다는데 왜 앙탈이야? 자꾸 그러면 마이스터한테 말해서 곰돌이 모양으로 바꿔 달라고 할 거다?”
 나는 잠시 곰돌이 모양으로 개조된 흑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퍼레이드 차량처럼 차체 위에 거대한 곰돌이 인형을 얹는 건 어떨까. 아니면 어린이 열차처럼 차체 앞에 곰돌이 얼굴을 붙이는 방법도 있었다. 물론 어느 쪽이든 우스꽝스럽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아일렌의 협박이 통했는지, 흑표는 버둥거리던 것을 멈추고 얌전히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긴, 흑표의 유사 인격과 대화를 나눠 보지는 못했지만, 자타 공인 최첨단 전차로 불리는 녀석이 곰돌이 모양으로 개조당하는 건 죽기보다도 싫었을 테니······.
 흑표가 얌전해지자, 아일렌은 순식간에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다 됐어. 거울 가져다줄 테니 한번 볼래?”
 아일렌은 그제야 흑표를 죄고 있던 다리를 풀며 말했지만, 그런 다정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흑표는 포신을 축 늘어뜨린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좀 안되긴 했지만,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풋!”
 아일렌은 그제야 나와 키엘이 바로 등 뒤에 다가와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며 펄쩍 뛰어 일어섰다.
 “꺅! 뭐야! 깜짝 놀랐잖아!”
 “미안.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워낙 진지하기에 차마 말을 못 걸겠더라고.”
 “흠······.”
 아일렌은 뭔가 미심쩍었는지 가볍게 눈을 흘겨 보이고는 다시 자랑스레 흑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쁘지?”
 순간 흑표의 포신이 나를 향해 휙 돌아서며 전차의 눈이라 할 수 있는 적외선 스코프가 번뜩거리기 시작했다.
 흑표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협인 셈이었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말했다.
 “예쁘긴 한데······ 뭐랄까, 아직 뭔가 부족한 느낌이야.”
 내 말이 떨어진 순간 흑표의 포신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일렌은 미처 그것까지는 알아보지 못했는지 턱을 한 손에 괸 채 가만히 흑표를 바라보다가 이내 손뼉을 마주 치며 외쳤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내가 만들긴 했지만, 역시 색깔이 너무 우중충한 것 같지 않아?”
 “맞아. 말라 죽은 풀도 저거보다는 나을 거야.”
 “좀 더 화려한 색으로 칠해 주면 한결 낫지 않을까? 예를 들면 저 리본 색깔 같은 걸로.”
 “아! 그거 좋겠다!”
 참고로 내가 가리킨 것은 흑표의 포신에 매여 있는 노란색 리본이었다. 흑표는 이제 눈에 띌 정도로 부들부들 떨며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먹은 아일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곧바로 다시 손을 뻗어 흑표를 붙잡으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흑표의 포탑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바로 연막탄이었다.
 “앗! 이게 뭐야!”
 갑작스러운 연막탄 살포에 깜짝 놀란 아일렌이 주춤하는 사이 흑표는 쏜살같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거기 서! 야! 서란 말 안 들려!”
 나는 입술을 깨물며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무척이나 고생해야 했다. 그리고 이번 일로 만든 사람조차 몰라보는 배은망덕한 전차 모형이 조금은 고분고분해지기를 기원했다.
 “너 자꾸 그러면 뿡뿡이라고 부른다!”
 “풉, 푸하하하하!”
 결국 흑표는 반나절 만에 다시 잡혀야만 했다.
 목숨을 건 탈주의 대가로 그가 받은 것은 차체가 온통 노란색으로 칠해진 것만이 아니었다.
 흑표라는 그럴싸한 이름은 불려 보지도 못한 채 뿡뿡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기고 나자, 다시는 아일렌의 말에 거역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 포신이 부르르 떨리는 게 조금 불쌍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부 자업자득인 것을······.
 
 
 
 #천공을 잇는 푸른 문
 
 
 
 한참이나 난리 법석을 떨다가 살살 식곤증이 몰려올 즈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묘령의 여인이라 추측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주님, 수업에 드실 시간입니다.”
 그러자 아일렌은 아쉬운 표정으로 흑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또다시 노크 소리와 함께 같은 말이 한 번 더 들려오자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았어. 들어와.”
 아일렌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여인이 시녀 몇을 데리고 들어왔다. 보통의 시녀와는 구분되는, 다소 화려한 자줏빛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의 숙녀였다. 나이는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정도? 이지적인 느낌을 주는 미인이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 아일렌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시녀들에게 명해 아일렌을 자리에 앉힌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고쳐 주기 시작했다.
 아까 공왕과의 회견에서도 얼핏 느낀 것이지만, 왕가의 인물은 시종이나 시녀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는다. 무척이나 번거롭게 보이는 이 예법에서, 나는 이 나라가 얼마나 엄격한 신분제도하에 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이곳에서 나의 지위는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졌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만,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나름대로 정중하게 상대의 의사부터 물어보았건만, 여인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아일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아일렌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뭐가 궁금한데?”
 그냥 간단히 통성명이나 하고 이곳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걸 알아보려던 것뿐인데, 이렇게 말 한마디 건네기 어려워서야······.
 나는 어쩐지 바늘방석에 앉은 느낌에 식은땀을 흘리며 얼버무렸다.
 “아니,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
 “뭔데?”
 “아무래도 난 이곳이 낯설잖아. 그러니까 간단하게나마 이곳의 사정 같은 걸 좀 물어보고 싶어서 말야. 난 아직 이 나라 이름도 모른다구.”
 나름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싶었건만, 아일렌은 오히려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갈래.”
 그러고는 곧바로 내가 뭔가 말을 붙여 볼 틈도 없이 시녀들을 이끌고 방에서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갑작스레 벌어진 이 일련의 사건에 잠시 멍하니 닫힌 문만 바라보던 나는, 이제껏 이 모든 걸 묵묵히 지켜본 키엘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저······ 제가 뭘 잘못한 건가요?”
 그러자 키엘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는 전하를 섬기는 몸이니, 다른 자에게 말을 걸기 전에 먼저 전하의 허락을 받았어야 하오. 당연한 예의라고 보는데?”
 이거 참. 말 한마디 하는데도 이렇게 복잡해서야.
 완전 비효율의 극치지만 뭐,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라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주군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라면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일까지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경우는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종종 있었으니. 더구나 상대가 왕족이라면 이건 더 말할 것도 없다.
 왠지 슬며시 짜증이 나서 애꿎은 머리를 북북 긁어 대던 나는 다시 키엘에게 물었다.
 “당신은 괜찮은 건가요? 나랑 이렇게 말해도.”
 “나는 전하께서 그대를 보살피라 명하시어 함께 있는 것이니 상관없소.”
 “그렇군요.”
 이곳 생활도 마냥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자, 가만히 지켜보던 키엘이 다시 말을 걸어온다.
 “무엇이 궁금하였던 것이오?”
 “아니 뭐, 별건 아니구요. 아까 아일렌, 아니 군주 전하께 말했다시피 이곳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 몇 가지 좀 물어보려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러자 키엘은 의혹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그런 거라면 나나 전하께 물을 수도 있었잖소.”
 “하하, 그게······ 군주 전하는 아무래도 아직 나이가 어리니 왠지 미덥지가 못하고, 당신은 어쩐지 말 붙이기가 거북해서 말이죠. 그러던 참에 나이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 말을 걸어 본 것뿐입니다.”
 왠지 심문당하는 듯한 분위기에 식은땀까지 흘려 가며 대답하자, 키엘은 잠시 더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가장 궁금한 게 무엇이오?”
 “우선 이 나라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간단하게 원래 세상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기왕에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면 여기가 어떤 곳인지부터 알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키엘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천천히 대답했다.
 “이곳은 클레르몽페랑 공국이라 하오. 본래 이곳은 티라니아 황가의 여름 휴양지였으나, 200여 년 전 대륙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신 초대 공왕 유안 라우르 클레르몽페랑께서 은퇴를 청하자 은상으로 내려져 공국의 이름을 얻었소. 인구는 20만 호이며, 외교권을 제외한 모든 자치권이 주어진 티라니아 제일의 가문이라 할 수 있소. 북으로는 앙제르망 산맥이 놓여 있으며, 남으로는 바덴, 인스부르크 등과 연결되어 있는 내륙국이오.”
 “그렇군요.”
 20만 호라······. 대충 계산해 봐도 인구수가 채 백만도 안 되는 작은 나라인 셈이다. 게다가 사방이 가로막힌 내륙국. 또 외교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완전한 독립국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인구가 적으니 거느릴 수 있는 병사의 수도 얼마 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이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많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는 크게 도움을 받았으나, 전쟁이 끝나자 황제보다도 유명해진 영웅에게 허울 좋은 명예를 주고 은퇴시키는 경우는 역사상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아마도 초대 공왕은 이런 사실을 미리 염두에 두고 스스로 나서서 청했던 것이 아닐까? 실권은 상실했더라도 황실 다음가는 가문으로서 영예와 안락한 삶을 후세에게 물려줄 수 있었으니 그의 선택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와 같은 사실에서 나는 아까 공왕이 나에게 ‘별로 달갑지 않다.’라고 말한 또 한 가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명예를 지닌 자에게 힘까지 갖춰지게 되는 건 자신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를 경쟁자로 여기는 무리에게 있어서는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닐 테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귀찮은 문제를 야기하게 마련이다.
 “난처하네······.”
 내가 너무 앞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냥 어린애 장난감이나 만들어 주면서 편하게 지내도 상관은 없잖은가. 아직 어리긴 해도, 한 10년쯤 지나면 아일렌도 꽤 쓸 만한 숙녀가 될 테니 지금부터 잘 키우면 노후 걱정도 없을 테고 말이다.
 아, 이건 너무 속보이는 얘길까?
 얼핏 나비 효과라는 말이 떠오른다.
 북경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다음 달 미국 뉴욕에서 폭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과학 이론이다. 한데 지금 이 순간 그게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본래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원래 없었던 인간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예정되어 있던 무수한 일들이 헝클어질 수 있건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저 평범한 인간의 그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능력까지 주어져 있다.
 과연 나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까.
 괜스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잠시 더 고민해 보았지만 미래의 일이란 애초에 간단히 해답을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될 대로 되란 식의 기분을 느끼며 식곤증을 핑계 삼아 낮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이건 꿈인가?
 찰랑거리는 갈색의 단발머리. 금색 실로 자수가 놓인 청초한 흰옷을 걸친 청록색 눈동자의 그녀가 내 눈앞에 있었다.
 한눈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일렌, 그것도 아이의 모습이 아닌 성숙한 모습의 바로 그 아일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예전에 꿈속에서 보아 왔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왠지 화가 난 느낌이랄까. 언제나 호소하는 듯한 눈빛을 던지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분노한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모습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넌 누구지?”
 어린아이 모습의 아일렌과는 조금 다른 청아한 목소리였다.
 “때론 모르는 것도 죄가 되지.”
 그 말과 함께 아일렌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나는 그만 당황해 버렸다.
 “어리석은 자에게 벌을 내리겠다.”
 아일렌은 어느새 기다란 검 하나를 꺼내 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전부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무심한 손길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치 희극의 한 장면처럼 나의 두 팔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너져 내리듯 쓰러지면서도 나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새빨간 피가 터져 나오고 썩은 둥치처럼 굴러다니는 두 개의 팔이 오히려 현실감을 잃게 만들었다.
 다시 또 한 번 시퍼런 검광이 스치고 지나가자 이번에는 두 다리가 잘려 나갔고, 중심을 잃은 내 육체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일렌은 나에게서 뿜어져 나온 피로 그 순백의 몸을 적신 채 다가와 쓰러진 내 위에 버티고 서서는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어느새 분노는 사라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처참한 일을 당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게 끝인가?”
 내 말에 아일렌은 피식 웃으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숙여 내 얼굴에 묻은 피를 가볍게 핥았다. 그녀의 혀가 내 피부를 스치는 순간, 마치 전기가 통하는 듯한 짜릿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넌 누구지?”
 그러자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인도자다.”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녀의 뒤로 강력한 빛이 터져 나오며 역광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 빛에 빨려 들어가듯이 천천히 멀어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잊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
 잠에서 깨어나고도 한참이나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슬그머니 시트를 들춰 보았다. 그리고 내 사지가 멀쩡하게 붙어 있음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헉헉······.”
 벌떡 일어나 앉은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방금 전 꾸었던 꿈이 무슨 의미일까 하고.
 물론 그냥 단순한 개꿈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일부터가 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냥 가볍게 웃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도대체······.”
 꿈속의 나는 지독한 꼴이 되어서도 오히려 쾌락에 몸을 떨고 있었다.
 혹시 비뚤어진 욕구불만이 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드러난 것은 아닐까? 그런 거라면 정말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니 난 지금까지 연애다운 연애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스스로 인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저 남녀 관계라는 것 자체가 시시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몇 번이고 소개를 받고 실제로 사귀어 본 적도 있지만, 한 번도 가슴이 두근거린 적은 없다. 적어도 꿈속에서 아일렌을 처음 만나기 전까지는······.
 “후······.”
 나는 다시 드러누워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이번엔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너무나 무력하게 사지를 찢기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쾌락으로 받아들인 스스로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꿈속의 일이긴 해도 생각할수록 왠지 울화통이 일어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약 정말로 그런 상황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나로서는 스스로의 몸을 지킬 능력조차 없다. 흑표가 있긴 하지만,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이 찾아오면 녀석을 이용해 진짜 흑표를 소환하기도 전에 당할 것이 분명하다. 아니, 그마저도 할 수 있을 거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지, 실제로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다.
 너무 과민한 반응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일을 떠올리고 나자 왠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방구석에 놓인 내 물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도, 유사시에 내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아까 공왕을 만나러 가면서 슬쩍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곳은 아직 화약 무기가 보편화되지 않았거나 아예 없는 것 같았다. 호위병으로 보이는 자들은 체인 메일과 할버드를 지니고 있었으며, 키엘 역시 허리춤에 얇은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을 뿐이었다.
 “권총이나 서브머신건 정도면 무난할까?”
 하지만 난 지금까지 모델건 같은 건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노트북에도 전차나 군함, 비행기 같은 것의 자료밖에 없었다. 총기류의 사진도 찾아보면 어딘가 있겠지만, 제대로 된 자료 없이 마스터피스 급의 모형을 만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문득 책상 옆에 놓인 부서진 디오라마에 눈길이 갔다. 우연히도 그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디오라마의 일부로서 장식해 두었던 소련군 병사의 소총이었다.
 “······.”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나는 그 인형을 집어 들었다. 병사가 들고 있는 것은 AK-47, 통칭 47년식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독일의 G3, 미국의 M16과 함께 세계 3대 돌격 소총으로 불리며, 연발 사격 시 반동이 크다는 문제가 있지만 어떠한 악천후에서도 고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소총이다.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거의 아무 생각 없이 공구를 집어 들고 작업을 시작했다. 기껏해야 손가락 한 마디 반 정도 될까 말까 한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공구를 집어 들자 아일렌의 인형이나 흑표를 완성시킬 때처럼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놀려 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작업을 끝내고 예의 알 수 없는 쾌감이 몰아친 직후였다.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군.”
 은근히 겁이 날 정도였다.
 공구만 집어 들면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건 절대로 기분 좋은 경험이 아니다. 물론 한 가지를 완성시켰을 때의 쾌감은 뭐라 형언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황홀했지만, 그마저도 방금 전에 꾸었던 꿈이 떠오르자 왠지 꺼림칙하게만 느껴졌다.
 “어쨌든 완성인 건가.”
 나는 눈앞에 놓인 조그마한 AK-47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다시금 느끼는 거지만, 정말 내 손을 거친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정교한 작품이었다.
 잠시 감탄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어디에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나를 만들었는가?
 순간 깜짝 놀란 나는 기겁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기분 나쁠 정도로 넓은 방 안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자, 잠시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마이스터가 만들어 낸 물건은 마스터피스라 불리며 저마다 유사 영혼을 가지게 된다고 했던가?
 나는 그제야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손에 든 자그마한 AK-47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말한 게 너냐?”
 그러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또렷한 대답이었다.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님에도 뇌리에 그 의미가 똑똑히 와 닿는다.
 나는 잠시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다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말을 걸어 보았다.
 “너를 만든 것은 분명히 나다.”
 -역시 그랬군. 앞으로 잘 부탁한다.
 굉장히 무뚝뚝한 대답이었지만, 어쩐지 든든했다.
 판타지에선 인격을 가진 검을 에고 소드라고 부르니까, 이 녀석은 따지고 보면 에고 라이플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보통 에고 소드는 마법을 쓴다든가 하는 부가 효과를 가지게 마련이니, 이 녀석도 단순한 총을 넘어서 뭔가 다른 능력이 있지는 않을까?
 “저기, 내가 아직 마이스터 초보라서 잘 모르는데, 너 혹시 뭔가 특별한 능력 가진 거 있냐?”
 -특별한 능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난 어떠한 상황에서도 원하는 표적을 틀림없이 맞힐 수 있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어떠한 상황이더라도 나는 표적을 놓치지 않는다. 표적이 무언가에 가려져 있다 할지라도, 표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쏘더라도 나는 표적을 놓치지 않는다.
 “허······.”
 게임식으로 표현하자면 ‘절대 명중’ 또는 ‘유도’라는 옵션이 붙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잠시 얼떨떨한 기분으로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소총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깨달았다.
 “혹시 너 본래의 크기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나?”
 -그것을 원하는가?
 “응.”
 -알겠다.
 대답이 들리자마자 갑자기 손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바람에 나는 손등을 책상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윽!”
 기겁하며 손을 빼고 바라보니, 눈앞에는 어느새 실물 크기의 AK-47이 놓여 있었다.
 “왠지 허무하군.”
 조금 허탈한 기분까지 느끼며 다시 손을 가져가 총을 들어 올렸다.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무척이나 묵직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무게를 직접 피부로 접하자 왠지 모를 안도감 또한 느껴졌다.
 나는 총을 집어 들고 가볍게 사격 자세를 취해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차피 총이란 살상 무기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원하는 목표를 명중시킬 수 있다는 건, 반대로 어떤 상황이 되어도 상대를 죽이지 않고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아직 총 한번 제대로 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좋군.”
 만족한 나는 AK-47을 다시 모형으로 되돌린 다음, 멜빵 고리에 철사를 끼워 열쇠고리에 넣은 뒤 허리춤에 달았다. 이거라면 내 한 몸 지키는 데는 충분하고도 넘치리란 사실에 뿌듯해하면서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문 밖에서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엘이다. 들어가도 되겠나?”
 바뀐 말투가 좀 거슬리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며 대답했다.
 “들어오시죠.”
 허락이 떨어지자 조용히 문이 열리며 무표정한 모습의 키엘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몇 명의 시종과 함께 들어와 나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전하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다.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던가. 창밖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나를 위해 준비된 옷은 튜닉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보통 중세의 기사들이 갑옷 위에 걸쳐 입는 웃옷처럼 생긴 치렁치렁한 옷차림이 무척이나 거북했지만, 가만히 옆에 선 채로 기다리고 있는 키엘 앞에서 차마 그런 얘기는 꺼낼 수가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새어 나오는 색채 없는 위압감부터가 내 말문을 막았지만, 언뜻 꽤나 무거워 보이는 은장 갑옷을 위아래 받쳐 입은 사람 앞에서 단지 익숙하지 않다고 투정을 부릴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옷을 갈아입은 나는 약간 지루한 표정이 되어 버린 키엘의 인도대로 또다시 방을 나섰다.
 이제야 얘기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나라의 규모에 비해 이곳의 궁성은 비정상적으로 거대하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런 위화감은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애초에 이곳은 대륙을 지배하는 황제 가문의 여름 휴양지로 건설된 곳, 다시 말해 일종의 이궁離宮인 셈이다.
 비록 본궁은 아닐지언정, 그 격식은 황제의 예우에 걸맞은 것일 테니 이런 터무니없는 규모가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공왕의 이름에 황실의 격식을 갖춘 궁전······. 공신에 대한 예우로서는 거의 최상급에 달한다고 봐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이 거대한 궁전은 그것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듯싶었다.
 궁전 자체가 하사품이니 함부로 할 수도 없을 터이고, 이 거대한 궁전을 언제나 새것처럼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만만치 않은 재정과 인력이 소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식읍은 겨우 20만 호이니, 그만큼 다른 곳에 쓰일 비용을 덜어 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 거대하고 화려한 궁전 자체가 족쇄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초대 공왕이 황제에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인물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들은 아일렌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거의 삼십 분은 족히 걸어간 것 같다. 별것 아닌 부분이지만, 다시 한 번 이곳이 철저한 신분제 사회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공왕을 만났던 방보다는 작았지만, 역시나 비정상적으로 넓은 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아직 아일렌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곳에선 내가 아일렌에 속한 몸이니, 먼저 와서 기다리는 것이 예의다. 아까 공왕과 만났을 때가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지루하게 서서 기다리고 있자니, 거의 십 분쯤 지나서야 아일렌이 흑표를 품에 안고 검은 머리 숙녀를 대동한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
 순간 뒤에 서 있던 키엘이 들고 있던 검의 손잡이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잠시 멀뚱거리며 아일렌을 바라보던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키엘은 살짝 눈을 찌푸린 채 눈짓을 해 보이고 있었다.
 뭘 하라는 건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아일렌이 의자 앞에 선 채로 나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비난 어린 그 시선에 왠지 궁지에 몰린 기분이 되어 버린 난 스스로가 지닌 지식을 총동원해 현재 상황에 가장 적합하리라 생각되는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천천히 아일렌 앞에 걸어가 한 손을 가슴에 대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렇게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러고는 천천히 옆으로 돌아가 의자를 뒤로 살짝 빼 주었다. 여기서도 통할는지는 모르지만, 생긴 것도 서양인 비슷하고 입식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니 식사 때의 에티켓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아일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아차 싶은 기분에 주위를 살펴보았다.
 키엘은 물론이고 주위에 늘어선 시종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아일렌을 따르던 검은 머리의 숙녀는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힌 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주위의 반응에 이번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역시 물어볼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잠시 주저하던 아일렌이 성큼 한 걸음을 내딛더니 내가 빼 준 의자에 걸터앉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의자를 밀어 넣어 준 뒤, 모르는 척 내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키엘과 검은 머리의 숙녀가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확인한 뒤 나 역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모두가 자리를 잡자 검은 머리의 숙녀가 옆에 서 있던 중년의 시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것이 신호였던 모양인지, 그제야 다시 문이 열리며 음식들이 식탁에 차려진다.
 왠지 어색해진 분위기 때문에 먹는 둥 마는 둥 하는데, 문득 아일렌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브로이 경에게 들었어. 궁금한 게 있었다고?”
 아까 내 방에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천방지축 말괄량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엄격한 예법이 몸에 밴 꼬마 숙녀의 모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각이 잡힌 그 모습에, 나는 순간 꿈속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흠칫 몸을 떨어야만 했다.
 “네.”
 얼른 입에 든 것을 씹어 삼킨 후 그렇게 대답하자, 아일렌은 키엘을 돌아보며 명을 내렸다.
 “브로이 경, 마이스터에게 도서관 출입을 허가한다. 그대가 살펴 주도록.”
 “명 받들겠나이다, 군주 전하.”
 키엘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자, 아일렌은 슬쩍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순간 나는 그녀의 입가에 가볍게 어린 작은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난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조금 편해진 기분으로 말했다.
 “근데······ 제가 이곳의 글을 읽을 수 있을지······.”
 “말은 하잖아.”
 별 이상한 걸 다 물어본다는 듯한 아일렌의 대답에 난 좀 더 설명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다 왔는데도 말이 통하는 것부터가 비정상적인 일 아닐까······요?”
 내 방에서처럼 말을 놓으려다가 키엘의 시선을 느끼고 말꼬리를 바꾸었다.
 “모르겠으면 키엘한테 읽어 달라고 그래.”
 “아, 그러면 되겠군요. 하하······.”
 잘못하면 오늘 밤엔 키엘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게 되겠군.
 
 
 
 이미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었지만, 화려하고 거대한 궁전은 마치 대낮처럼 불이 밝혀져 있었다.
 하늘 위로 번져 나오는 빛의 양만으로도 이 궁전이 얼마나 큰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거의 삼십 분은 족히 걸어가고 나서야 나는 겨우 도서관이라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귀찮아 죽겠다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있는 키엘을 내버려 둔 채, 나는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의 안내를 받으며 서가를 살펴보았다.
 다른 곳도 그랬지만, 이 도서관 역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중앙에는 무슨 재질인지 알 수 없는 푸른 기둥 하나가 신비한 빛을 뿌리며 천장을 받치고 있었고, 기둥을 중심으로 각종 서적과 두루마리, 석판 같은 것이 놓여 있는 선반이 원을 그리듯이 질서 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살펴보다가 이내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리고는 사서에게 말했다.
 “몇 가지 필요한 책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먼저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한 책이 필요합니다. 너무 세세할 필요는 없고, 대강의 내용만 알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지내는 데 꼭 알아야 하는 궁중 예법과 기본 상식 등에 대한 책도 필요합니다. 찾아 주시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서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느긋한 걸음으로 서가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도서관 내부를 천천히 돌아보기 시작했다.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 놓여 있는 푸른 기둥이었다. 전기적 장치나 기타 화학적인 반응과는 다른 은은한 빛이 무척이나 신비롭다.
 천천히 다가가 살펴보니, 반투명한 물체 내부에서 보일 듯 말 듯 한 약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멀찍이서 볼 때는 빛이 상당히 강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무척이나 희미해진다. 다가가면 사라지는 도깨비불이 이와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 기둥이 받치고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채광을 위해 설치된 유리창 사이로 희미하게 비쳐 들어오는 별빛이 어우러지는 그 풍경은, 이 기둥이 마치 하늘을 받치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까지 떠올리게 만들었다.
 지금까지는 비록 이곳이 내가 살던 곳과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단지 머리로만 이해할 뿐 왠지 실감이 나질 않았었다. 물론 이런 조형물 같은 것은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사람이 만든 건축물을 대하면서 이런 감상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나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잠시 감상에 빠져 있는데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서 두리번거렸지만, 키엘은 도서관 입구에 기대선 채로 뭔가를 생각하는 중이었고, 사서는 아직 책을 찾는 모양인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기둥으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대는 마이스터인가.
 “······!”
 화들짝 놀라 급히 몸을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문가에 서 있던 키엘이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 지금 뭔가 말하셨습니까?”
 “아니.”
 분명히 키엘은 날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한 분위기였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의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소소한 장난을 칠 바엔 더 모았다가 강렬한 펀치 한 방을 날릴 인물이다.
 마치 홀린 듯한 기분에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어디선가 책을 찾느라 부스럭거리는 잡음뿐이었다. 순간, 어떻게 된 일일까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내 머릿속에 뭔가 스치듯 지나가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혹시······ 너냐?”
 나는 다시금 푸른 기둥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러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들려온다.
 -그렇다.
 “······.”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눈앞의 푸른 기둥이었다. 생명이 아님에도 의식을 가지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이스터에 의해 만들어진 마스터피스가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설마, 마스터피스?”
 -처음 만들어졌을 때 나에게 붙여진 이름은 슈테보르, 하늘을 잇는 푸른 문이라는 뜻이다. 나는 500년 전 돌의 마이스터라 불리던 리베 파르망에 의해 만들어졌다. 나는 이 성의 심장. 이 성이 바로 나이며, 내가 바로 이 성의 실체다.
 “······.”
 잠시 얼떨떨한 기분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성 자체가 하나의 마스터피스라니, 내가 만든 작은 모형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아닌가.
 “왜 나에게 말을 걸었지?”
 -마스터피스란 생명이 아니지만 생명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물건.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록 생존이나 번식을 위한 최소한의 행동조차 할 수 없지만, 그러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를 창조한 마이스터가 세상에서 사라진 후, 나는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한 무언가가 점차 사라져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두려웠다. 이대로 의식이 사라져 보통의 돌조각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기다렸다. 나를 보다 완전하게 만들어 줄 누군가를 기다려 왔다.
 “······.”
 -하지만 마이스터는 너무나 희귀한 존재였다. 게다가 나는 스스로 미동조차 할 수 없다. 마이스터가 아닌 자에게는 나의 불안을 전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를 소유한 자들은 자신들이 사라지고 난 뒤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를 거부한 채 내 기억과 존재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며, 가능한 긴 시간 동안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 줄 마이스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게 나란 말인가?”
 -그것은 나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대가 500년 만에 내 앞에 나타난 유일한 마이스터라는 사실이다. 그대로 인해 나의 오랜 잠이 끝났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흠······.”
 500년이라니. 마이스터가 희귀한 존재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물론, 이것은 공교로운 우연일 수도 있다. 마이스터가 이 성에 왔었지만, 단지 내가 서 있는 이 장소에 서지 않았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잠시 500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 이 기묘한 만남에 남다른 감회를 느끼고 있는데, 다시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못된 짓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사서가 서너 권의 책을 양손에 받쳐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급히 책을 받아 들어 몇 번 들춰 보는 척한 뒤,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하고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키엘은 허둥대는 내 모습이 미심쩍은 듯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딱히 입을 열어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후······.”
 정말 썰렁할 정도로 넓기만 한 방에 돌아와 책상 위에 받아 온 책을 내려놓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성 전체가 하나의 마스터피스였다니······.”
 조금은 감탄을 섞어 그렇게 말하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놀라운가?
 “······!”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혼잣말을 했는데 대답이 돌아오면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다.
 “슈테보르?”
 -놀란 모양이군.
 “어떻게······.”
 -이 성 전체가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이니, 성안에 두 발을 딛고 있다면 얼마든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하, 그럼 내가 처음 왔을 때는 왜 말을 걸지 않았지?”
 -잊었는가? 나는 방금 전에야 깨어났다.
 “아······.”
 불행히도 나는 아직 마이스터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나 적었다. 슈테보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을 이루어 줄 방법이 지금의 나에겐 없다.
 “저, 미안한데······.”
 -무엇이 미안한가.
 “지금의 나로선 널 도울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자 슈테보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의문을 담아 말했다.
 -그대는 틀림없는 마이스터이다. 지금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마이스터인지는 몰라도 널 어떻게 도와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는 얘기야.”
 슈테보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실망한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조금 더 기다리다가 그냥 의자에 앉아 가져온 책을 펼쳐 들었다.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잠시 눈을 감아 보도록.
 책을 펴 들던 나는 왜 그러나 싶어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가만히 눈을 감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며 영상 하나가 눈꺼풀 안쪽에 신기루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희고 부드러운 돌바닥 위로 작은 분수가 놓여 있었다. 분수는 꽃잎이 하나 가득 떠 있는 작은 연못 위로 물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뿌옇게 김이 서리는 사이로 희뿌연 물체가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 싶어 정신을 집중하자, 시야를 가리던 물안개가 마치 지우개로 지운 듯이 사라졌다.
 “컥! 커컥!”
 그리고 눈앞에 드러난 모습이 무엇인지 파악된 순간, 난 그만 사레가 들린 채 기겁하며 눈을 떠 버렸다.
 -왜 놀라지?
 “이, 이게 무슨!”
 -뭐긴, 이 궁성 안에서 가장 큰 온천 욕탕의 모습이다.
 그랬다. 내가 본 것은 아일렌과 그녀를 따르는 검은 머리 숙녀의 알몸이었다.
 “어, 어째서 이런 걸 나한테 보여 주는 거지?”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통에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다그치자, 슈테보르는 오히려 의문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상하군. 이전에 내가 섬겼던 주인들은 의욕이 저하되거나 피로할 때 그곳에서 여성들이 몸을 씻는 풍경을 보곤 했다. 뭐가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보고 나면 눈에 띄게 활력을 되찾더군.
 “하, 하하······.”
 -혹시 이계의 마이스터에게는 이런 것 말고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한 건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왠지 이 녀석은 뭔가가 더 필요하다고 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바로 구해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죄의식이 없기 때문에 주저도 없다고나 할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무척이나 편리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무척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크흠,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왔기 때문에 마음이 급한 건 알겠다만, 난 정말로 널 도울 능력이 없어. 스스로가 마이스터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도 겨우 한나절 전의 얘기니까, 그냥 튕겨 보는 게 아니라고.”
 -그런······.
 슈테보르는 무척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만도 하다. 비록 인간은 아닐지언정, 한 가지 희망에 기대 500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기다려 겨우 마이스터라 불릴 만한 인간을 만났건만, 그것이 이름뿐인 무능력한 마이스터라면 내가 슈테보르의 입장이더라도 크게 실망했으리라.
 그러자 왠지 미안해져서 나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방법이 있는지 찾아볼게. 미안하다.”
 -알겠다······.
 슈테보르는 그대로 말문을 닫았다. 나는 잠시 기다리다가 결국 책을 펴 들었지만, 그나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숨을 내쉬며 다시 덮어야만 했다. 이곳의 글자를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키엘을 불러야 하나.”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자라면 모를까 시꺼먼 근육투성이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여자라······.”
 순간 방금 전 슈테보르가 보여 주었던 풍경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좀 빈약하긴 했지만, 부끄러운 듯이 웅크린 채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아일렌의 하얀 살결······.
 어느 틈엔가 그녀는 정신 사나운 꼬맹이가 아닌 꿈속의 성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10년인가······.”
 
 
 
 #승리의 여신
 
 
 
 “헉! 마이스터? 얼굴이 왜 그래?”
 깜짝 놀란 듯 울려 퍼지는 익숙한 목소리에 난 벌떡 일어났다. 이미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아일렌의 앳된 얼굴이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하하······.”
 차마 욕실을 훔쳐보고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 번뇌하느라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란 놈, 이렇게까지 굶주려 있었던 거냐.
 왠지 비참한 느낌에 고개를 푹 수그렸지만, 아일렌은 내가 펼쳐 들고 있는 책을 살펴보더니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책 읽느라 밤새운 거야?”
 “그, 그게······ 읽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어서······.”
 지은 죄가 있는지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렇게 대답했지만, 아일렌은 납득했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하. 마이스터, 사실은 바보구나?”
 “그럴지도······.”
 왠지 맥이 풀려서 힘없이 대답했지만, 아일렌은 자신만만하게 나에게서 책을 빼앗더니 다시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읽어 줄게.”
 그러고는 책을 높이 쳐든 채 큰 소리로 읽었다.
 “제1장, 마이스터의 정······.”
 하지만 채 한 문장을 끝맺지도 못한 채 더듬거리기 시작한다.
 “정, 정······의? 정체? 정······.”
 “저기······.”
 “가만있어 봐!”
 “넵!”
 “정······ 정, 뭐였더라.”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옆에 둘러선 키엘과 검은 머리 숙녀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시선을 받자, 검은 머리의 숙녀는 잠시 씁쓸한 표정으로 웃다가 이내 웃음을 지우고는 아일렌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군주 전하, 도와 드릴까요?”
 “으음······.”
 아일렌은 끙끙거리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이내 울상이 되었다.
 “베로니카.”
 “네?”
 “나 바보야?”
 “설마요. 마이스터 같은 분도 못 읽는 단어잖아요.”
 과보호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옆에서 노려보고 있는 키엘 때문에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이 남자라면 눈빛만으로 날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아무래도 분위기를 바꿔야 할 것 같아 그렇게 운을 떼자,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키엘이 입을 열었다.
 “실은 전할 말이 있소.”
 “무엇입니까?”
 “오늘부터 약 일주일 정도 이 방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하오.”
 “네?”
 이건 말 그대로 근신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어제 공왕을 만났을 때 분명히 달갑지 않다는 식의 얘기를 듣기는 했어도 느닷없이 근신 명령이 떨어질 줄은 몰랐다.
 혹시 어제저녁 때의 일 때문인가?
 “제가 뭔가 잘못이라도······.”
 하지만 키엘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실은, 오늘 새벽에 전령이 도착해서 티라니아 황실의 사자가 오고 있다는 전갈을 알려 왔소.”
 순간 불안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간다.
 “설마 제 일을 알고······.”
 “그건 아니오. 티라니아 황실에서 온 전갈이라면 아무리 빠른 말로 달리더라도 보름은 걸릴 터, 게다가 황실의 사자라면 그에 걸맞은 격식을 갖추는 법이니 더욱더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한 일이오. 사자의 출발을 알리는 전령이 오늘 당도하였으니, 사자는 사흘 정도 후에나 도착할 거라 생각되오. 그대가 온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으니 시간이 안 맞는 셈이오.”
 “그럼 왜 당장 오늘부터······.”
 “말했잖소. 전령이 와 있노라고.”
 “아······.”
 “당신의 존재는 알려져서는 곤란하오. 그대도 이미 어느 정도는 공국의 실정을 알고 있을 터이니, 불편하더라도 참아 주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키엘과 대화를 마치고 나자, 어느새 원기를 회복한 아일렌이 흑표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뿡뿡아, 나 보고 싶어도 울면 안 돼?”
 흑표는 포신을 아래위로 마구 흔들어 보였다.
 표정도 말도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난 흑표가 지금 너무나도 기뻐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필이면 내가 이곳에 오고 난 바로 다음 날 황실의 사자 같은 게 온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차분하게 이곳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이나 생겼다는 건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글을 못 읽는 관계로 무뚝뚝한 키엘의 목소리를 하루 종일 들어야 한다는 게 상당한 고역이지만 말이다.
 ≪클레르몽페랑 공국의 역사≫, ≪마이스터의 기원과 변천≫, ≪궁중 예법-초급 편≫ 등의 내용을 하루 종일 고저 없는 키엘의 목소리를 통해 듣고 나자, 해가 질 즈음이 되어서는 지칠 대로 지쳐 늘어져 버렸다.
 “그럼, 오늘은 이만.”
 “······수고하셨습니다.”
 시체처럼 침대에 널브러져 있다가 몸을 뒤집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곳에 온 일부터가 내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지친 채 누워 있자니 전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의 그녀는 알고 보니 10년은 더 자라야 될 듯한 어린애이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모조리 날 귀찮은 짐 덩이 취급하고 있었다.
 “어쨌든 벌써 하루가 지난 건가.”
 집에선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 일의 자초지종은 기영이 대충 알고 있을 테지만, 솔직히 그의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통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인형을 만들었더니 갑자기 블랙홀 같은 어두운 심연이 생기고 그걸 만든 사람과 물건들을 빨아들였다······ 대체 이 얘기를 몇이나 믿겠는가. 정신감정 받아 보란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다.
 문득 따끈한 컵라면이 먹고 싶어진다. 총각김치를 집어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씹어 먹고 싶다. 빨간 떡볶이, 구수한 순대, 시원한 맥주, 바삭한 튀김.
 “에휴······.”
 잠시 망상 속을 질주하던 나는 그 반동으로 인해 더욱더 강력한 타격을 받아야만 했다.
 먹을 걸 가지고 이렇게 우울해진다는 게 참 남부끄러운 얘기고 고작해야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더 황당하기는 하지만, 나는 이제야 흔히 말하는 향수병이 어떤 건지 알 듯했다.
 뭐라 해도 한 나라의 지배자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니, 먹고 입는 게 부실하다는 식으로 말했다가는 천벌을 받으리라. 굳이 비교를 하자면, 자다가 입이 텁텁한 김에 시원한 우동 국물이 먹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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