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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더엠퍼러 1-1권

2019.03.14 조회 1,268 추천 6


 제1장. 절대자의 최후
 
 
 
 
 
 
 하늘에 떠 있는 양떼구름이 마치 농장을 방불케 하는 계절 가을이 돌아왔다. 풍성한 수확의 계절에 걸맞게 마을마다 축제가 벌어지고 집집마다 웃음꽃이 가득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베이트나 영지의 영주인 아크 타르아킨 백작은 오늘도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나이가 사십이 되었는데도 아직 2세가 없기 때문이다. 절친한 친구들의 자식들은 어엿한 청년이 되거나 시집갈 나이의 딸이 있었지만 타르아킨 백작에게는 가문을 이어갈 핏줄조차 아직 없었다.
 이런 타르아킨 백작을 위해 영지민들은 해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영주에게 2세가 생기기를 신께 간절하게 빌었지만 그 또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영지민들이 자발적으로 영주를 위해 신께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영지민들에게 타르아킨 백작은 근엄한 영주라기보다는 이웃집 어른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신관이.
 때로는 마법사들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결국 타르아킨 백작은 가문을 이어갈 양아들을 두려고 했지만 베이트나 영지에는 그의 눈에 차는 아이가 없었다.
 결국 타르아킨 백작은 가문을 이을 재목을 찾아 왕국은 물론이고 제국까지 사람들을 보내 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로 마땅한 인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양자를 얻는 일이라면 이토록 힘들지 않을 터이지만 전통적으로 기사 가문인 타르아킨가를 이어야할 재목을 찾는 것이기에 더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한해가 가고······.
 올해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올해 가을은 풍년이었다.
 풍년도 그냥 풍년이 아니라 대풍이었다.
 흥에 겨운 영지민들에게 타르아킨 백작은 세금을 10퍼센트 낮추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워낙 대풍이라 10퍼센트의 세금을 낮추어 주었음에도 거두어들인 세금은 평년에 비해 월등하게 많았다. 이렇듯 영지민들을 어여삐 여기는 타르아킨 백작에게 큰 기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렇게 학수고대 했던 2세가 생긴 것이었다.
 영주의 아내가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영지민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와 축하를 해주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선물로 창고가 가득해지자 타르아킨 백작은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창고를 활짝 열었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기쁨이 겹치자 베이트나 영지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베이트나 영지에 불운이 찾아왔다.
 대풍 때문에 재정이 넉넉해진 탓에 타르아킨 백작은 영지의 기사단의 규모를 조금 늘렸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타르아킨 백작의 정적들은 타르아킨 백작이 역모를 품고 기사단의 규모를 늘리고 있다고 뒤집어 씌웠다. 타르아킨 백작이 강력하게 부인을 했지만 이미 대세는 음모를 꾸민 자들에게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역모에 관련된 자들은 참수에 처해지고 그의 가솔들은 노예가 되는 것이 전례였지만 국왕은 그동안 타르아킨 백작이 세운 공을 인정해 왕국 최북단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척박한 곳의 영주로 부임시키고 베이트나 영지를 자신의 영지로 귀속시켜 버렸다.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척박한 땅 메르세아 영지에 도착한 타르아킨 일행은 너무나도 황폐한 광경을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체적인 면적은 베이트나 영지보다 훨씬 넓었지만 워낙 척박한 곳이다 보니 사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200여 가구 남짓한 사람들이 영지민의 전부인 터라 이곳이 과연 영지일까 싶을 정도였다. 영지민들의 주 수입원은 사냥을 통해 얻은 가죽을 내다 파는 것뿐이었기에 살림은 팍팍할 수밖에 없었다.
 타르아킨 백작은 궁여지책으로 30명의 기사단원들은 물론이고 가솔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귀향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영지 한켠에 움막을 짓고 기존의 영지민들과 같이 사냥으로 연명해 나갔다. 비록 30명뿐인 기사단이지만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타르아킨 백작은 부하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누명을 벗고 베이트나 영지를 되찾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부모가 누군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모른다.
 오직 살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남에게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무려 15년.
 어느새 연무는 무림의 절대자가 되었다.
 낭인왕.
 모든 낭인들의 지존이자 사신(死神)이 바로 연무였다. 그에게는 낭인왕이라는 신분 말고도 또 하나의 신분이 있었으니 고금제일의 살수(殺手)라고 일컬어지는 살수제왕이었다.
 연무의 독문무공인 탈명추혼검법(奪命墜魂劍法)에 이슬로 사라져간 무림고수들이 일천(一千)하고도 오백(五百)이 넘었다.
 만상조화심법을 바탕으로 펼치는 탈명추혼검법은 방어보다는 일격필살(一擊必殺)의 공격으로 상대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극 쾌검이었다.
 때로는 암살로.
 때로는 정정당당하게 수많은 무림인들을 상대했지만 그 누구도 탈명추혼검법을 받아내지 못했다. 추혼검법은 모두 다섯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마지막 초식인 탈명섬(奪命嬐)은 자신이 왜 죽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쾌검(快劍)의 정화였다.
 섬광이 번쩍이는 순간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는데 어찌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겠는가.
 오늘 날에 이르러 연무는 무림제일인(武林第一人)이 되었고 정사를 막론하고 낭인왕 연무가 무림제일인이라는 사실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혹자는 낭인왕이 무림제일인이 아니라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라고도 불렀다.
 
 우르릉, 콰앙.
 낙뢰(落雷)가 거대한 바위를 강타했다.
 팟팟팟팟.
 산산조각이 난 바위의 파편이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내리는 폭우를 뚫고 사방으로 비상했다.
 “낭인왕 연무, 그대는 본가(本家)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살수를 펼쳤는가.”
 사혈공자(死血公子) 마굉(魔宏).
 사파(邪派)의 떠오르는 신성(新星)이었다.
 정파(正派)에 의해 지리멸렬한 사파를 일으킬 기대주로 촉망받고 있는 자로 사파의 후지기수(後知起首)들 단연 으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독문무공인 적혈패왕신공(赤血覇王神功)은 무림일절로 정평이 나 있었다. 정파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마굉을 절규하게 만든 것은 낭인왕 연무였다.
 “후후후, 사혈공자 마굉, 그대와 원한은 없다. 단지 난 살수제왕으로서 의뢰받은 일을 처리했을 뿐이다.”
 낭인왕 연무의 메마른 음성이 사혈공자 마굉의 귓전을 때리자 사혈공자 마굉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도 무림인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한가.”
 “으드득.”
 사혈공자 마굉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출수(出手)를 하지 못했다.
 “원한을 갚고 싶은가? 그럼 강해져라. 그대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마.”
 자신감인가?
 아니면 자만인가.
 사파의 후지기수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사혈공자 마굉을 앞에 두고 낭인왕 연무가 등을 보였다.
 ‘지금, 지금이 기회다.’
 마음은 그렇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마굉, 죽음을 재촉하지 마라.”
 그 순간.
 “연무··· 으아아, 적혈장.”
 사혈공자 마굉이 언제 이 같은 수모를 당해보았던가.
 없었다.
 사파인들은 물론이고 정파인들도 감히 사혈공자 마굉을 상대로 수작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거대문파의 지존들뿐이었다.
 콰르르릉.
 적혈장이 만들어낸 뇌성(雷聲)이 울리는 가운데 붉은 장영이 허공에 가득해졌다. 삼십육방위를 차단하며 짓이겨 들어오는 장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낭인왕 연무의 입에서 낭랑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천괴칠성연환미리보.”
 탈명추혼검법과 더불어 오늘날의 낭인왕이자 살수제왕 연무를 있게 만든 보법이 펼쳐졌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환청인가?
 아니면 사신을 부르는 소리인가.
 청아한 방울소리가 폭우를 뚫고 장원 전체로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낭인왕 연무의 몸이 꺼지듯 사라져 버렸고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가 만들어졌다.
 퍼엉.
 “이 쥐새끼 같은 놈, 마혈장.”
 사혈공자 마굉이 고함을 지르며 적혈패왕장의 제이초식을 펼쳤다. 허공 가득히 수놓아진 장영이 거대한 혈마(血馬)의 형상으로 변하는 순간 또 다시 청아한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이쪽이다. 오늘로서 낭인왕의 전설은 끝이다.”
 콰앙.
 거대한 혈마가 폭죽처럼 터졌다.
 “흐흐흐, 성공이다.”
 사혈공자 마굉이 득의의 미소를 짓는 순간 그의 등 뒤로 낭인왕 연무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이에 섬뜩함을 느낀 사혈공자 마굉이 몸을 돌리며 장을 뿌리는 순간 낭인왕 연무의 입에서 싸늘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사혈공자 마굉, 끝이다. 탈명섬.”
 번쩍.
 태양이 폭발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 엄청난 폭우 속에서도 화려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탈명섬.
 탈명추혼검법의 마지막 초식인 만들어낸 빛의 폭발에 사혈공자 마굉은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서걱.
 “커어억.”
 잘게 부서진 빛 중 하나가 목 언저리를 스치는 순간 사혈공자 마굉의 입에서 단발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사혈공자 마굉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철퍼덕.
 불신의 눈빛으로 낭인왕 연무를 노려보던 사혈공자 마굉이 꼬꾸라지며 땅에 고인 빗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네 운명이 이런 것을······.”
 철컥.
 애검을 회수한 낭인왕 연무가 장내를 쓸어보았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폭우 속으로 사라져갔다.
 
 ***
 
 -사혈공자 마굉이 살해당했다.
 그 같은 소문이 퍼지자 무림 전체가 들끓었다.
 “누구냐. 누가 사파의 신성인 사혈공자 마굉을 살해한 것이냐.”
 들고 일어난 사파가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사혈공자 마굉을 살해한 자를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인데 그 때문에 정파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탱초, 사혈공자 마굉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낭인왕뿐이다.”
 “아미타불.”
 무림 최대방파인 개방의 방주 소화자가 안광을 번뜩이며 말하자 소림장문인인 무허대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불호를 외웠다.
 “고개를 가로젓는 이유가 뭐냐. 혹시 낭인왕 연무가 두려운 것이냐.”
 소화자가 까칠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사실 정파인들은 오래 전부터 낭인왕 연무를 제거하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사파의 세가 커지기 시작하자 낭인왕 연무를 제거하는 일을 뒤로 미루었었다.
 “아미타불, 그렇게 간단한 일만은 아니외다.”
 소림칠십이종절예를 완벽하게 익혔다고 알려진 무허대사는 소림사를 창건한 달마선사 이후 가장 강력한 소림제자로 평가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정파인들 중에서 무허대사와 견줄만한 인물은 무당파의 현 장문인인 태허자가 유일했다. 태극검혜를 극성까지 익혔다고 알려져 있는 태허자는 무허대사와 함께 정파인들의 구심점이 되는 존재였다.
 “땡초,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봐라. 사파에서 낭인왕 연무에게 우리를 주살하라고 의뢰를 한다면······.”
 차마 낭인왕 연무를 어떻게 막을 것이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소화자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파의 한 축인 개방의 방주로서는 당연한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무량수불, 빈도의 생각도 소화자 시주와 같소이다.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낭인왕 연무는 언젠가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자외다.”
 태허자가 소화자를 거들고 나섰다. 그러자 소화자가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말코화상, 이제야 네가 내 진가를 알아주는구나.”
 “무량수불.”
 수도를 곧게 편 채 도호를 외워 화답한 태허자가 다시 무허대사에게로 시선을 주며 말을 이어갔다.
 “사혈공자 마굉을 죽인 자가 낭인왕 연무가 맞는다면 이는 명백한 혈겁이외다. 물론 낭인왕 연무를 사주한 자도 반드시 찾아내 제거해야 할 것이오.”
 “맞아맞아, 사파가 겁나는 것은 아니지만 낭인왕 연무를 제거해 사파의 분노를 누그러트릴 필요가 있어.”
 소화자가 맞장구를 치자 태허자가 좌중을 쓸어보았다. 이에 각 문파의 지존들은 고개를 끄덕여 태허자의 말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말코도사, 얼마 후면 화산 장문인의 회갑연이 아니냐. 그것을 이용해 보는 것은 어떠냐.”
 “함정을 파자는 말이오?”
 “오늘 따라 대가리가 빨리 돌아가는 것 같구나. 낭인왕에게 화산파 장문인을 제거해 달라고 의뢰를 하는 거야. 만약 낭인왕 연무가 그 같은 의뢰를 받아들인다면······.”
 소화자가 말을 멈추고 수도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자 무허대사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시주, 명색이 명문정파의 지존이 어떻게 그런 치졸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오이까. 빈승은 시주의 생각에 반대외다.”
 “빈니 역시 소림과 뜻을 같이 하겠어요. 우리가 치졸한 방법으로 함정을 판다면 사파와 다를 것이 뭐가 있나요. 차라리 사파와 일전를 벌이는 것이 낫겠어요.”
 아미파의 불영사태도 소화자의 제안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그 바람에 의견이 분분해지고 토의는 고착상태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개방 방주의 의견대로 하는 것이 좋겠소.”
 소화자가 제안한 방법의 당사자인 검왕(劍王) 곽진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러자 무허대사가 다시 제동을 걸고 나섰다.
 “아미타불, 소림의 입장은 분명하게 밝혔소이다.”
 “빠질 사람은 빠지면 되는 것이외다. 어차피 낭인왕 연무는 제거되어야 할 자요. 물론 치졸한 방법이라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낭인왕 연무를 제거할 수 있겠소.”
 “······.”
 곽진의 말에 무허대사가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단! 사파도 낭인왕 연무를 제거하는 일에 힘을 보내게 만들어야 하오. 사혈공자 마굉을 죽인 자가 낭인왕 연무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사파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오.”
 낭인왕 연무가 사혈공자 마굉을 죽였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검왕 곽진은 낭인왕 연무를 살인자라로 몰아가고 있었다.
 “사파도 힘을 보태게 만든다고?”
 소화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낭인왕 연무가 사혈공자 마굉을 죽였다고 한다면 사파도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오.”
 검왕 곽진이 결심한 듯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쯤 되자 장내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해버렸다. 소림사와 아미파를 보듯이 이곳에 모인 문파들 전부가 낭인왕 연무를 제거하는데 찬성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파라는 굴레 때문에 누군가 시작을 하게 되면 결국 동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파인들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낭인왕 연무를 제거하는데 실패한다면 모든 비난은 동참하지 않은 문파에게 돌려질 터였다.
 “무량수불, 곽 시주의 뜻이 확고부동한 것 같으니 우리 무당은 곽 시주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이외다.”
 태허자가 검왕 곽진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무당파가 동참함으로서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소림사와 아미파는 곤란한 지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논의가 길어질수록 검왕 곽진의 계획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결국 무허대사와 불영사태도 낭인왕 연무를 주살한 뒤 사파를 쓸어버리자는 조건으로 동참하면서 낭인왕 연무를 주살하는 계획이 일단락되었다.
 
 사혈공자 마굉을 비롯해 그의 가솔들을 죽인 낭인왕 연무는 객잔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쯤 사파에서는 나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겠지.’
 스슥.
 한줄기 미풍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황의 무복을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주군, 돌아가는 정황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낭인왕 연무가 황의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낭인왕 연무는 모든 낭인무사들의 지존이자 친구이며 동지였다. 또한 살수제왕이라는 별호가 말해주듯이 살수들의 하늘이기도 했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주군께서 잠시 활동을 중지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활동을 중지하라······.”
 술잔을 들며 황의인이 한 말을 곱씹어보던 낭인왕 연무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사실 사혈공자 마굉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
 사혈공자 마굉의 가솔들을 주살하라는 의뢰를 받아 그대로 행했을 뿐이었다. 단지 그 자리에 사혈공자 마굉이 있었고 그가 덤비는 바람에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낭인왕 연무의 입장에서 본다면 억울할 수밖에 없는 일인데 그는 억울함을 토로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할 일이기에 피할 마음도 없었다.
 사파의 떠오르는 신성이 죽음으로서 사파가 들고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사혈공자 마굉의 가솔들을 죽여 달라고 의뢰한 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같은 의뢰를 했느냐였다.
 “어쩌면 정사(正邪)가 손을 잡고 주군을 제거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야. 그들이 무서웠다면 애초에 무림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낭인왕 연무가 황의인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그의 말마따나 보복이 두려웠다면 자객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자네들은 당분간 내 주위에서 떨어져 있게.”
 “주, 주군, 그, 그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에 황의인이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내 곁에 있으면 위험해. 나 혼자라면 어떤 위험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어.”
 낭인왕 연무의 말인 즉,
 자신이 함정에 빠진다 해도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주군······.”
 수하들을 배려하는 말에 황의인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의 표정에서는 투지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내 뜻대로 해.”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는 황의인의 의도를 파악한 낭인왕 연무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황의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낭인왕 연무의 입에서 결정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난 친구들을 사지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아.”
 “······.”
 친구.
 이 얼마나 위대한 단어란 말인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것이 사내였다.
 그것이 장부의 기개이며 장부들의 세계였다.
 “돌아가서 동료들에게 나의 명을 전하게.”
 말을 마친 낭인왕 연무가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신형을 일으켰다.
 “어디를 가십니까.”
 “가볼 곳이 있어. 그러니 따라오지 말게.”
 낭인왕 연무가 황의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지그시 눌렀다. 이에 황의인이 자리에 앉자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객잔을 나섰다.
 
 객잔을 빠져나간 낭인왕 연무가 간 곳은 마을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신묘였다. 그가 사신묘 안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오라버니.”
 “형아.”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은 듯 매달리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낭인왕 연무의 표정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천애고아 출신인 낭인왕 연무에게 아이들은 남 같이 않은 존재들이었다.
 사실 아무도 모르는 과거이지만 낭인왕 연무도 이곳에서 자랐다. 돈을 충분히 벌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번듯한 집에서 살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낭인왕 연무는 번듯한 집을 사는 것이 아닌 사신묘에 기관을 설치하는 것을 택했다. 사신묘에 기관을 설치한 사람은 천뇌제갈 제갈랑이었다.
 제갈세가의 의뢰를 처리해주는 대가로 낭인왕 연무는 돈 대시 사신묘에 기관을 설치해주는 것을 요구했고 천뇌제갈 제갈랑이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1년 후······.
 천뇌제갈 제갈랑은 침상에서 목이 잘린 채 발견되었다. 그로 인해 사신묘에 기관이 설치되어 있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갈세가의 식솔들은 천뇌제갈 제갈랑을 살해한 자로 낭인왕 연무를 의심하고 있었지만 물증이 없는 관계로 지금껏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하하, 소소, 그동안 잘 있었느냐.”
 여아를 안아든 낭인왕 연무가 여아의 볼이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여아가 배시시 웃으며 낭인왕 연무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라버니, 이번에는 많이 늦으셨네요.”
 아이들 뒤쪽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리자 낭인왕 연무가 안고 있던 여아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사뿐한 걸음으로 다가선 여인에게 금화가 든 주머니를 쥐어주었다.
 “혜연.”
 낭인왕 연무가 손을 잡자 혜연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속였다.
 “헤헤헤, 누나 얼굴이 빨개졌다.”
 “사과 같아.”
 “하하하하, 헤헤헤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에 낭인왕 연무가 잡고 있던 혜연의 손을 놓아주었다.
 “아무래도 한 동안 오지 못할 것 같아.”
 “오라버니, 이제 그만 조용한 곳으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요. 돈도 많이 모았잖아요.”
 혜연의 말을 들은 낭인왕 연무의 가슴 속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야 당장이라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혜연과 함께 오순도순 살고 싶지만 은퇴를 하려고 해도 과정이 필요했다. 지금 이대로 말없이 사라지게 되면 낭인무사들과 살수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할 터,
 결자해지 차원에서라도 절차를 밟아 은퇴하려면 사혈공자 마굉의 일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알았다. 정확히 1년, 1년만 시간을 다오.”
 “정말이죠?”
 혜연의 청순한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피어났다. 이에 낭인왕 연무도 덩달아 밝게 웃었다.
 낭인왕 연무와 함께 자란 혜연은 낭인왕 연무가 좋지 않은 일을 한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낭인왕 연무가 며칠씩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조마조마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자고 종용했으나 그때마다 낭인왕 연무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흔쾌한 대답을 들은 것이었다.
 “약속하지.”
 낭인왕 연무가 곧추세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에 혜연이 수줍은 듯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낭인왕 연무의 손가락에 걸었다.
 ‘1년, 1년 안에 모든 것을 정리하겠다.’
 그렇게 결심한 낭인왕 연무가 아이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애들아, 그만 들어가자.”
 “와아아아.”
 아이들이 낭인왕 연무의 품에 매달렸다. 그렇게 아이들과 안으로 들어가는 낭인왕 연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혜연은 엄습해 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흐읍, 하아······.”
 늦은 밤.
 낭인왕 연무와 혜연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사신묘 안에는 아이들이 자는 곳과 혜연이 자는 곳이 따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뜨거운 사랑놀이를 시작했지만 혹시라도 아이들이 깰까 조심스러운 혜연은 신음소리도 마음대로 낼 수가 없었다.
 “혜연.”
 낭인왕 연무가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며 혜연의 가슴을 베어 물었다.
 “흐윽.”
 혜연이 비음을 흘리며 고개를 젖혔다. 그러는 바람에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졌다. 촉촉한 혀가 봉우리 끝에 애처롭게 매달린 유실을 때릴 때마다 여체가 작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하아, 오라버니, 미치겠어요.”
 혜연의 입에서 달짝지근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이에 반응한 낭인왕 연무가 유실을 뱉어내고 머리를 여체의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허억.”
 촉촉한 혀가 배꼽을 건드리자 혜연이 다급한 신음을 흘리며 낭인왕 연무의 머리를 잡아끌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폭군으로 변한 낭인왕 연무는 혜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더 낮은 곳으로 미끄러트렸다.
 “하아, 거기는······.”
 물컹한 살덩이가 비지(秘地)로 파고들자 여체가 파르르 떨렸고 흥건히 흘러내리는 감로수와 촉수와의 만남에 옥문(玉門)이 활짝 열렸다. 하지만 이내 조개가 입을 닫듯 스르륵 닫혀 버렸다.
 혜연의 옥문은 명기(名器) 중의 명기였다.
 흔히 명기를 세 종류로 나누는데 그 첫째가 용주(龍珠)라 하며 이런 음호(陰戶)를 가진 여인은 만년설삼(萬年雪蔘)을 보는 것만큼이나 힘들 정도로 희귀했다.
 옥문이 좁고.
 길도 좁으며 자궁의 위치는 깊지 않아 옥문을 지나서 조금 들어가면 자궁이 뾰족하게 나와 있는데 이런 모습이 마치 두 마리의 용이 다투는 것 같아 용주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두 번째가 비룡(飛龍)이니.
 옥문도 좁고 작으며 깊이도 적당하고 신축성도 좋다. 상항의 행위를 하게 되면 속살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니 천하의 정력가라 하더라도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우렁이라는 것으로.
 옥문의 입구는 넓으나 그 속은 좁으며 남근이 들어가게 되면 사정없이 조이는 것이 특징이다. 목을 조르듯 심한 조임은 남자를 실신지경으로 이끄는 우렁이야 말로 명기의 정화였는데 혜연의 옥문이 삼대명기 중 하나인 우렁이었다.
 “우웃.”
 닫혀버린 옥문의 속살이 혀를 사정없이 조여오자 낭인왕 연무가 신음을 흘렸다. 혀에 전해지는 아련한 통증 속에서도 그는 조금이라도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를 썼다.
 “아아··· 연무 오라버니, 더 이상···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요.”
 혜연이 빨리 올라오라고 옥문을 열어주었다. 그제야 비지에서 얼굴을 떼어 낸 낭인왕 연무가 태산(泰山)을 오시하듯 우뚝 솟아 있는 가슴을 깔아뭉개며 여체 위로 올라탔다.
 “흐윽.”
 묵직한 체중이 짓누르자 혜연이 또 다시 비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낭인왕 연무가 왼팔로 상체를 지탱한 채 오른 팔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허리를 지그시 내렸다.
 “어억.”
 “흐윽.”
 두 마디의 다급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매번 관계를 가질 때마다 겪는 것이지만 혜연의 옥문의 조임은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혜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자나 됨직한 우람한 철주(鐵柱)에 꿰뚫리는 느낌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몸이 쪼개질 것 같으면서도 비궁(秘宮)에서부터 시작된 전율적인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으음.”
 묵직한 신음이 꽉 다문 낭인왕 연무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옥문의 거센 조임을 참아낸 낭인왕 연무가 천천히 허리를 일렁였다.
 “허억.”
 지렁이가 기어가듯 비궁에서부터 슬금슬금 시작된 쾌감이 강해지면서 척추를 때렸다. 그러고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척추를 따라 올라가며 후두부를 강타했다.
 “아악.”
 너무나도 짜릿한 쾌감에 혜연이 낭인왕 연무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와 함께 활짝 벌어진 다리도 위에서 찍어 누르는 허리를 감고 옥죄었다.
 지금 이 순간.
 낭인왕 연무는 노련한 사공이었고,
 혜연은 일엽편주였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덩그러이 놓인 일엽편주는 거센 파도에 뒤집어질 듯 위태로웠다.
 노련한 사공은 힘차게 노를 저어 거센 파도를 넘었다. 그러자 더 큰 파도가 밀려왔고 사공은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마침내.
 거대한 파도마저 넘자 평온의 바다가 나타났다.
 지칠 대로 지친 사공은 일엽편주에 몸을 맡긴 채 거칠어진 숨을 몰아 내쉬었다.
 “아아··· 오라버니, 오라버니 사랑해요.”
 쾌락의 여운을 만끽하던 혜연이 갑자기 사지로 몸 위에 있는 낭인왕 연무를 옥죄었다.
 “혜연.”
 낭인왕 연무도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며 혜연의 대담한 행동에 화답했다. 그러면서 사그라지기 시작했던 열락의 폭풍이 다시금 몰아쳐왔다.
 
 ***
 
 의뢰첩을 펼치고 있는 낭인왕 연무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화산파의 장문인 검왕 곽진을 제거해 달라는 의뢰인데 오백만냥이라는 거금이 걸린 의뢰이기 때문에 갈등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은퇴를 하기 전에 수하들이 기반을 잡을 수 있게 해줄 의무가 있는데 오백만냥이라는 거금은 수하들이 기반을 잡게 해줄 수 있을뿐더러 혜연 등과 평생을 부족함이 없이 살 수도 있었다.
 ‘뭔가 있다.’
 본능적으로 함정이라는 사실을 느꼈지만 오백만냥이 주는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었다. 낭인왕 연무가 의뢰를 뿌리치기 힘든 또 하나의 이유는 화산파가 내분이 생겼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의뢰를 해온 자가 화산파의 장로 중 한명인 광검(狂劍) 유청운이었다. 만약 화산파에 내분이 생긴 것이라면 오백만냥이라는 거금이 걸린 의뢰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스슥.
 한줄기 미풍과 함께 황의인이 나타났다. 그는 낭인왕 연무의 특명을 받고 화산파의 정황을 살피러 갔었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었다.
 “주군, 다녀왔습니다.”
 “화산파의 정황은 어떤가.”
 “표면적으로는 조용한 상태이지만 광검 유청운을 지지하는 세력이 장문인을 교체하려는 분위기였습니다.”
 황의인이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빠짐없이 설명했다. 그 누구라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이 같은 계략을 짠 사람은 제갈세가의 현 가주였다.
 천뇌제갈을 암살한 자가 낭인왕 연무일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제갈세가의 가주는 이 기회에 낭인왕 연무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몇날 며칠을 고심한 끝에 제갈공명도 울고 갈 계략을 완성시킨 것이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주군, 의뢰를 맡으실 것입니까.”
 황의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낭인왕 연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군, 속하도 함께 가겠습니다.”
 “전에 한 말을 있었는가.”
 “······.”
 낭인왕 연무의 일갈에 황의인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자중하고 있어.”
 ···라고 말한 낭인왕 연무가 황의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뒤 객잔을 나섰다.
 
 ***
 
 섬서성에는 중원오악(中原五嶽) 중 서악(西嶽)인 화산(華山)이 위치해 있었다. 구파일방의 한 축인 화산파가 있어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산이었다.
 중원오악 중 한곳답게 산은 웅장하기 짝이 없었다.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고 있었고 깎아질 듯 가파른 절벽은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 했다.
 낭인왕 연무가 화산에 도착한 것은 검왕 곽진의 회갑연 전날 석양 무렵이었다.
 산속의 밤은 빨리 찾아오는 법.
 화산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석양이 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화산은 암흑천지로 변해 버렸다.
 아우우우~
 어디선가 들려오는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스산함을 더해주었다. 살수들의 제왕답게 낭인왕 연무는 어둠을 이용해 화산파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대협, 어서 오십시오.”
 검왕 곽진이 직접 찾아온 손님들을 영접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낭인왕 연무는 혈사마교(血邪魔敎)의 교주인 혈사신군(血邪神君) 음현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검왕 곽진의 회갑연에 어찌 혈사신군이······.’
 혈사신군 뿐만이 아니었다.
 독곡(毒谷)을 혈사림(血死林)과 검각(劍閣) 등 사파의 고수들도 배석해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낭인왕 연무는 본능적으로 함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수작을 부리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아직 발각된 것도 아니고 설사 발각된다 하더라도 능히 빠져나갈 자신이 있기에 낭인왕 연무는 이곳에 모인 자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확인하려 했다.
 “하하하, 이제 오실만한 대협들은 다 오신 듯 하오이다.”
 무허대사와 소화자가 도착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손님은 오질 않았다.
 ‘이래서는 저들의 말을 들을 수가 없다.’
 휘익.
 낭인왕 연무가 지붕으로 몸을 날렸다. 유령처럼 날아가 지붕에 착지한 낭인왕 연무가 천이통을 펼쳤다. 그때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더니 이내 폭우로 변했다.
 후두둑, 후두두둑.
 ‘젠장맞을,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저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가 없잖아.’
 상대가 오합지졸이라면 좀 더 바짝 다가설 수 있을 터이지만 상대는 명문정파의 지존들이었다. 따라서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려 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우르릉, 콰앙.
 폭우가 뇌성을 불러왔다.
 하늘이 찢어질 듯 뇌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폭우의 기세는 한층 더 거세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낭인왕 연무가 신형을 일으켰다.
 그 순간.
 번쩍, 콰앙.
 뇌성을 동반한 낙뢰가 번쩍거렸다. 그 바람에 낭인왕 연무의 신형이 화산파 제자들의 눈에 뜨이고 말았다.
 “웬 놈이냐!”
 “아차.”
 “침입자다. 침입자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삐이익.
 종소리와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화산파 제자들이 전각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저 안에 있는 자들이 나오기 전에 빠져나가야한다.’
 휘익.
 낭인왕 연무가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자취가 어둠에 묻혀 사라지는 순간 안에 있던 각 문파의 지존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놈이 어디로 도주한 것이냐.”
 검왕 곽진의 물음에 화산파 제자 한명이 낭인왕 연무가 사라진 곳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쪽입니다.”
 “천라지망을 가동하라.”
 “넷.”
 힘찬 목소리로 대답한 화산파 제자들이 신형을 날렸다. 그런 직후 천라지망 가동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웅~ 두웅~ 두웅~
 
 휙휙휙, 휙휙.
 경공을 사용해 산 아래로 내려가던 낭인왕 연무가 지면에 내려섰다. 천라지망이 펼쳐진 화산 전체가 사지나 다름없었다.
 “천라지망이 펼쳐진 것도 파악하지 못했다니.”
 그때 낭인왕 연무의 전면에 백의인들이 속속 떨어져 내렸다.
 “살수제왕 연무, 명년 오늘에 네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네놈들은 화산의 제자들이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않느냐.”
 “흐흐흐, 곧 죽을 놈이 그런 것을 알아서 무엇 하려느냐.”
 백의인 중에서도 덩치가 가장 큰 자가 괴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설마 백사회?’
 백사회(白死會)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낭인왕 연무도 백사회가 백 년 전 소림사에 의해 멸문당한 배교와 관련이 있다는 정도만 알 뿐이었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 없다. 속전속결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낭인왕 연무가 천괴칠성연환미리보를 펼침과 동시에 탈명추혼검법을 펼쳤다.
 “탈명유성.”
 눈부신 검광이 폭우를 뚫고 비상했다. 그러더니 폭죽처럼 터지면서 백의인들을 향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크아악.”
 “케엑.”
 실로 눈 깜빡 할 사이에 벌어진 기습공격에 백의인들이 피 떡이 되어 쓰러졌다. 그러는 바람에 생로(生路)가 열렸고 낭인왕 연무는 지체 없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잡아라.”
 예상치 못한 기습공격을 당했던 백의인들이 낭인왕 연무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직후 구파일방을 비롯한 각 문파의 지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헉헉, 헉헉헉.”
 화산 전체에 펼쳐져 있는 천라지망은 정말이지 지독했다. 벌써 낭인왕 연무에게 죽은 자들이 천명이 넘었다. 화산파 제자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혈사마교의 괴인들이 낭인왕 연무를 막아서기도 했다.
 무당파의 제자들도 나타나는가 하면 소림사의 십팔나한과 사투를 벌였다. 그러면서 낭인왕 연무의 내공은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체력도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헉헉, 연무야, 이런 치졸한 함정에 빠지다니 네가 과연 낭인들의 제왕이자 살수들의 제왕이 맞더냐.”
 이동을 멈춘 채 숨을 고르던 낭인왕 연무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한탄하더니 다시 신형을 날렸다. 폭우를 뚫고 쏘아가던 그의 앞에 거지 떼가 나타났다.
 “우헤헤헤. 기다리고 있었다.”
 “차앗, 천괴칠성연환미리보. 탈명뢰.”
 내공이 거의 고갈된 상태라 시간을 끌 이유가 없는 터라 낭인왕 연무가 선공을 펼쳤다.
 “크아악.”
 “케엑.”
 탈명뢰가 펼쳐지자 개방의 제자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애초에 그들은 낭인왕 연무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단지 낭인왕 연무의 힘을 빼놓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한 명을 죽이면 두 명이 달라 들었다. 천라지망을 뚫으려는 낭인왕 연무도 필사적이었지만 개방의 제자들도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휙휙휙휙.
 낭인왕 연무가 개방 제자들과 어우러져 격전을 치르고 있는 사이 각 문파의 지존들이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하하하, 살수제왕 연무, 아니 낭인왕이라고 불러야 하나. 오늘로서 네놈도 끝이다.”
 소화자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흐흐흐, 네놈들이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그때.
 위이잉.
 낭인왕 연무를 향해 검기가 폭사되었다. 태허자가 태극검혜를 펼친 것이었다. 그것을 신호로 무허대사는 백보신권을 펼쳤다.
 콰르르릉.
 은은한 뇌성을 동반한 권강이 낭인왕 연무를 향해 쏘아졌다. 그러자 낭인왕 연무가 천괴칠성연환미리보를 밟았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낭인왕 연무의 신형이 사라짐과 동시에 청아한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피, 피해랏.”
 “늦었다. 탈명유성.”
 촤촤촤촤촤.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솟구친 검강이 폭죽처럼 터지더니 이내 쏟아져 내리는 폭우와 뒤섞여 쏟아져 내렸다.
 “취선보.”
 “아미타불, 부디 극락왕생하기를 하시오. 대반야능력.”
 “자하신강.”
 “천둔멸사검.”
 여러 외침이 동시에 터지며 형형색색의 강기들이 낭인왕 연무를 향해 쇄도했다. 이에 어금니를 꽉 깨문 낭인왕 연무가 두 초식을 연거푸 펼쳤다.
 “생사탈, 탈명뢰”
 콰드드드드.
 콰앙.
 “크아악.”
 “케엑.”
 강기들이 부딪치면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이에 공력이 낮은 자들은 엄청난 경력에 의해 피 떡이 되어 날아가 벌였다.
 공력이 완전한 상태라고 해도 무려 16명이나 되는 절대자들의 공격을 받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내공이 거의 바닥이 난 상태라 낭인왕 연무는 망신창이가 된 채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낭인왕 연무만 피해를 본 것이 아니었다.
 소화자는 비명과 함께 꼬꾸라졌고 불영사태 역시 의식을 잃은 채 널브러졌다. 공동파와 곤륜파의 장문인은 목이 분리된 채 저승으로 직행했다.
 “우웩.”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낭인왕 연무가 한 움큼의 선혈을 토해냈다.
 “기회요. 모두 공격하시오. 태극검강.”
 비교적 상태가 온전한 태허자가 재차 검을 뿌렸다. 그러자 무허대사도 다시 한 번 대반야능력을 펼쳤다.
 콰우우우.
 영롱한 검기와 금빛 강기가 낭인왕 연무를 향해 쇄도했고 그 순간 낭인왕 연무가 꼬꾸라졌다. 그 바람에 검기와 금빛 강기가 비켜지나갔다.
 “해, 해치운 건가.”
 태허자와 무허대사가 조심스레 낭인왕 연무에게로 다가섰다. 그들이 다섯 보 앞까지 도착했을 때 낭인왕 연무의 눈이 번쩍 떠졌다.
 “피, 피해랏.”
 기겁을 한 태허자와 무허대사가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탈명추혼검법의 최후 초식이 펼쳐졌다.
 “탈명섬.”
 번쩍.
 태양이 폭발한 것인가.
 엄청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크아악.”
 빛의 폭발 속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만들어졌다.
 쿠웅.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이마에 동전만한 구멍이 뚫린 무허대사가 썩은 짚단처럼 꼬꾸라졌고 그의 몸 위로 탈명검을 쥔 팔이 떨어져 내렸다.
 “크윽.”
 검을 쥔 팔이 잘려나간 낭인왕 연무가 비틀거렸다. 그때 태허자의 검이 또 다시 허공을 갈랐다. 그와 함께 사천당문의 암기들이 낭인왕 연무를 고슴도치로 만들었고 남궁세가의 가주의 검이 양 다리를 잘랐다.
 “백보신권.”
 우르르릉.
 장경각주가 펼친 백보신권이 팔다리가 잘린 낭인왕 연무의 가슴에 정통으로 가격되었다. 피를 뿌리며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간 낭인왕 연무가 새도 오르지 못한다고 알려진 혈사애로 떨어져 내렸다.
 ‘으으으, 쪼, 쫓아가야 한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낭인왕 연무는 희미한 빛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양팔은 물론이고 다리까지 잘려나간 상태였다. 더군다나 혈사애로 떨어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낭인왕 연무의 전신을 감쌌다. 따뜻함과 포근함이 느껴지는 힘이 전신을 감싸는 순간 낭인왕 연무의 의식은 나락의 세계로 떨어져 버렸다.
 
 
 
 
 
 
 
 
 제2장. 새로운 삶
 
 
 
 
 
 
 타르아킨 백작이 왕국의 오지인 메르세아 영지로 부임한지 1개월.
 타르아킨 백작에게 있어서 오늘은 매우 뜻 깊은 날이었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2세가 태어나는 날이라 타르아킨 백작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저택 안을 서성거렸다.
 영주의 저택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허름한 이곳은 영지에서 사냥을 하며 살던 이의 입이었다. 그런데 사냥을 하던 도중 사망하는 바람에 그의 가족들이 저택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 빈 집을 타르아킨 백작이 들어와 살고 있는 중이었다.
 “어허, 이거 미치겠군. 왜 이리 나오질 않는 거야.”
 타르아킨 백작이 걸음을 멈추고 아내가 있는 방을 쳐다보며 투덜거렸다. 제아무리 조급증이 인다고 해도 아내가 산고를 치르고 있는 방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허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을 터트린 타르아킨 백작이 또 다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내의 산통이 시작된 지 벌써 5시간이 지났다.
 아이를 낳아 본 경험이 있는 하녀가 나와도 벌써 나왔어야 했다고 말한 것이 타르아킨 백작에게 조급증과 불안감을 동시에 심어주었다.
 “아아악.”
 아내의 비명이 들려올 때마다 타르아킨 백작은 미칠 지경이었다. 초조함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응애, 응애응애.”
 마침내 기다리던 아기의 울음수리가 들려왔고 타르아킨 백작의 입이 함박만하게 벌어졌다.
 “나,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영주님, 축하드립니다. 아드님이에요.”
 산모의 방에서 나온 하녀 에나는 마치 자신이 아이를 낳기라도 한 듯 얼굴이 구슬땀으로 가득했다.
 “아, 아들, 아들이라고 했느냐.”
 되묻는 타르아킨 백작의 눈가에 이슬이 반짝였다.
 그 얼마나 기다렸던 2세던가.
 누차 딸이라고 해도 관계없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가문을 이을 아들을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이제 가문을 이을 수 있다는 생각에 타르아킨 백작의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영주님, 진정하세요. 도련님이 흉보겠어요.”
 에나의 말에 타르아킨 백작이 멋쩍게 웃으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도련님이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지 모르겠어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허리를 꾸뻑 굽혀 보인 에나가 탯줄을 싼 보따리를 들고 촘촘히 멀어져갔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타르아킨 백작이 산고의 고통이 있었던 방으로 다가섰다.
 
 ***
 
 의식이 나락의 세계로 떨어졌던 낭인왕 연무의 의식이 돌아왔다. 팔다리가 잘려나고 전신의 뼈가 으스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일인지 통증이 전혀 없었다.
 ‘결국 저승으로 온 모양이로군.’
 그렇지 않고서야 고통이 없을 까닭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역시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드득, 명문정파라고 자청하는 놈들이 그런 추잡한 함정을 파다니······.’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인 것을.
 불현듯 혜연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혜연, 그리고 애들아, 너희들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구나.’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전해졌다.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었는데 추위가 느껴진 것이었다.
 추위가 느껴진다는 것은 죽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숨이 가빠졌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말들이 들려왔다.
 ‘이, 이게 무슨······.’
 눈이라도 떠져야 어찌된 일인지 알 터인데 눈이 떠지지 않으니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때 그의 몸이 허공으로 들려졌다.
 ‘어어어.’
 “하하하, 요놈 참 귀엽고 또리또리하게 생겼구나.”
 또 다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타르아킨 백작이었다.
 어떤 불가사의한 작용에 의해 저승으로 빨려가던 낭인왕 연무의 영혼이 시공을 초월해 타르아킨 백작의 아들의 몸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이 황당하고도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은 원래 아기의 영혼은 유약하기 짝이 없는 영혼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할 운명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영계로 빨려가는 두 개의 영혼이 겹치는 순간 낭인왕 연무의 영혼이 아이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떤 상황인 거야.”
 낭인왕 연무가 자신도 모르게 짜증스러운 투로 소리쳤다.
 “응애, 응애.”
 ‘허억. 으, 응애라니······.’
 너무나도 황당한 나머지 숨이 턱 막혀버렸다. 그러자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여자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푸후.”
 막혔던 숨이 트여지고 여자의 흐느낌도 멈추었다.
 ‘설마······.’
 낭인왕 연무의 뇌리에 환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정말 환생을 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 생생한 기억들은 뭐지?’
 여기서 또 한 번 막혀버렸다.
 환생을 했다면 의당 전생의 기억이 없어야 옳았다. 정황을 볼 때 환생을 한 것으로 보이긴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태어난 것이었다.
 “허억.”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운기를 해보았지만 한줌의 내공도 없었다. 아니 몸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내공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여보, 아이가 숨이 막히는 모양이오. 아무래도 치료사를 불러야겠소.”
 메르세아 영지는 치료사가 없었다. 아니 치료사가 있을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치료사를 부르려면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영지까지 다녀와야만 했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아내의 말에 타르아킨 백작이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허, 이 녀석이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애태우는구려.”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낭인왕 연무는 하나씩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고는 환생을 한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만상조화심법을 연마하기로 결정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임독이맥이 타동 되어 있기 때문에 나중에 목숨을 건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불순물 자체가 없는 몸이라 전생에서도 이루지 못한 만상조화심법을 대성할 수도 있었다.
 ‘좋아 시작하자.’
 그때 그의 몸이 또 다시 붕 떠올랐다.
 “앗 따가워. 도대체 뭐야.”
 또 다시 소리를 쳐보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아무래도 만상조화심법을 연성할 때 조심해야겠구나.’
 연공을 하고 있을 때 방해를 받는다면 주화입마에 걸리게 되어 죽거나 불구가 되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허허허, 녀석이 배가고픈 모양이오.”
 “그런가 보네요. 이리 주세요.”
 또 다시 몸이 붕 뜬 채로 이동하더니 이내 따뜻하고 포근함이 전해졌다. 그와 함께 입속으로 뭔가가 들어왔는데 아주 낯익은 감촉이었다.
 ‘이, 이것은······.’
 입 안으로 들어온 것이 유두라는 것을 안 낭인왕 연무가 본능적으로 그것을 빨았다. 이에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액체가 쭈욱 빨려나왔다. 그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신기하게도 몸이 나른해지며 졸음이 쏟아졌다.
 “안젤라, 아기가 당신의 젖을 물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소.”
 “고마워요 여보, 그런데 아기가 당신을 꼭 빼닮은 것 같네요.”
 이 정도면 허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찌 갓 태어난 아기가 누구를 닮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이 녀석을 가브리엘이라고 부르겠소.”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타르아킨 백작은 두 개의 이름을 지어놓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가브리엘이고 딸의 이름은 아드리네였다.
 기왕이면 가브리엘이라고 부를 녀석이 태어나길 바랬는데 타르아킨 백작의 바램대로 아들이 태어났다. 안젤라도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이름이네요. 가브리엘, 아빠가 진즉부터 네 이름을 지어놓은 모양이구나.”
 안젤라가 젖을 문채 잠이 들어 있는 낭인왕 연무 아니 가브리엘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안제라, 좀 쉬구려, 사랑하오. 그리고 정말로 고맙소.”
 타르아킨 백작이 안젤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한다는 말에 안젤라의 입에 가볍게 키스를 한 타르아킨 백작이 밖으로 나갔다. 산고의 고통을 겪었던 터라 피곤했던 모양인지 안젤라도 금세 몽환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낭인왕 연무 아니 가브리엘이 이계로 환생한지 10일이 지나갔다. 눈은 뜨였지만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아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희미하게나마 뭔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했다.
 지난 10일 동안 가브리엘은 틈틈이 만상조화심법을 익히면서도 간단한 말을 기억 속에 담아 두었다. 비록 몸은 젖먹이 아니지만 낭인왕 연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터라 간단한 말을 기억에 담아두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 입이 떨어지지 않아 여전히 ‘응애’라는 말만 나오는 것이 답답하기는 했지만 차차 나아질 것이기 때문에 가브리엘은 만상조화심법을 익히는데 집중했다.
 젖 먹을 때와 잘 때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만상조화심법을 연마하는데 주력하고만 있던 탓에 타르아킨 백작과 안젤라에게는 가브리엘이 더 없이 얌전하게 보이기만 했다.
 “여보, 가브리엘이 너무 얌전한 것 같아 걱정이에요.”
 안젤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품 안에 있는 가브리엘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 극성을 피우는 것보다 얌전한 것이 낫지 않겠소? 검술을 배우게 되면 성격도 활발해질 것이오.”
 “그럴까요?”
 “물론이오.”
 가브리엘에게로 다가선 타르아킨 백작이 검지로 만상조화심법을 연마하고 있는 가브리엘의 코를 건드렸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재빨리 심법을 멈추고 눈을 떴다.
 “이 녀석, 아빠 냄새를 맡은 모양이구나. 까꿍.”
 ‘이 단어가 아빠를 지칭하는 것 같고 그렇다면 엄마는······.’
 그동안 확신을 내리지 못했던 엄마와 아빠라는 단어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가브리엘이라는 것 까지도······.
 “까르르르.”
 부모에 대한 보답이라고나 할까.
 이럴 때 한 번 웃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 가브리엘이 동냥하는 셈치고 자지러지게 한번 웃어주었다.
 “어? 여보, 가브리엘이, 가브리엘이 웃었소. 가브리엘이 웃었단 말이오. 하하하, 하하하하.”
 너무나도 앙증맞고 귀여운 나머지 타르아킨 백작이 가브리엘을 번쩍 들어 뺨에 비볐다.
 ‘앗 따가워.’
 하지만 따갑다는 말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
 있다면 오직 하나.
 목청껏 우는 것이었다.
 “으아앙.”
 “호호호, 나도 당신 수염이 따가워서 싫던데 우리 가브리엘도 그 수염이 싫은 모양이네요.”
 울음의 효과는 즉방이었다.
 아빠의 품에서 다시 따뜻하고 포근한 엄마의 품으로 건네지자 가브리엘이 울음을 뚝 그쳤다.
 ‘후후후, 성공이군. 이 방법 자주 써먹어야겠어.’
 그런 가브리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르아킨 백작 부부는 웃음을 섞어가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엄마의 포근한 품에 안기기만 하면 하염없이 졸린 것이었다.
 “하하하, 내 수염이 싫었던 게 아니고 졸렸던 것이로군.”
 쌔근쌔근 잠이 든 가브리엘을 본 타르아킨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가브리엘이 깰 수도 있음을 깨닫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
 
 유수와도 같은 세월은 어느새 8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타르아킨 백작 부부의 우려와는 달리 말이 트인 가브리엘의 성격은 쾌활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어른스러운 행동에 타르아킨 백작 부부에게 또 다른 우려를 심어주었다.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태어난 가브리엘은 조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탓에 또래의 여자아이를 찾아 백방으로 다녔으나 또래는커녕 여자아이를 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물론 여자아이만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만상조화심법을 연마해 이제는 구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제 8살 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가 그 난해하기 짝이 없는 만상조화심법을 구성까지 익혔다니 이는 만상조화심법을 만든 무명자가 알면 거품을 물고 넘어갈 일이었다.
 8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가브리엘이 만상조화심법을 구성까지 익힐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마나라고 불리는 기의 농도가 중원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다.
 만상조화심법만 익힌 것이 아니라 천괴칠성연환미리보도 상당한 수준까지 익혔다. 이 세계의 환경에 맞게 환각보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으며 탈명추혼검법도 섬광검법이라는 기술로 다시 태어났다.
 나이가 어린 탓에 섬광검법을 익히지 않았던 가브리엘이 타르아킨 백작에게 검법을 익히겠다고 졸라 허락을 얻어냈다.
 섬광검법을 비롯해 살수들의 무공을 두루 섭렵했던 가브리엘에게 타르아킨 가문의 검법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수련을 위한 허락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우리 가문의 검법은 중후함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
 “······.”
 오늘을 검법수련을 허락받고 처음 수련을 하는 날이었다. 이미 책으로 타르아킨 가문의 기술을 접한 것이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 탓에 타르아킨 가문의 기술은 가브리엘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이 타르아킨 백작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이유였다.
 “이 녀석,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이냐.”
 가브리엘이라면 죽고 못 사는 타르아킨 백작이었지만 수련에 임함에 있어서는 맹호처럼 사납게 변했다.
 “아빠, 혹시 우리 가문의 기술에 맹점이 있는 것 아세요?”
 타르아킨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런 바보.’
 뒤늦게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타르아킨 백작이 까칠한 투로 물었다.
 “맹점이라고 했느냐.”
 만약 메르세아 영지가 척박한 곳이 아니었다면 가브리엘의 천재성은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인구도 별로 없는 척박한 곳이라 가브리엘의 천재성은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 가문의 기술은 공수전환에 있어서 약점이 있는 것 같았어요. 예를 들면······.”
 가브리엘이 어설픈 동작으로 타르아킨 가문의 기술을 펼쳐 보이며 장단점을 설명했다. 그러자 타르아킨 백작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 아이가 정말······.’
 타르아킨 백작 자신도 가문의 기술에 대해 회의적으로 여겼던 부분을 거침없이 말하는 가브리엘의 천재성에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했다.
 “제가 잘못 안 것인가요?”
 전생의 절대자가 결론을 내린 것이기 때문에 오판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이에 말문이 막혀버린 타르아킨 백작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우리 가문의 기술의 장단점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었느냐.”
 “······.”
 이번에는 가브리엘이 말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지?’
 순간적으로 가브리엘의 머릿속이 무섭게 회전했다.
 ‘그래 그렇게 대답하면 되겠군.’
 대답할 말을 찾아낸 가브리엘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왜 웃는 것이냐?”
 “헤헤헤, 아빠, 제가 남들보다 머리가 좀 좋은 것 아시죠? 지난 1년 동안 우리 가문의 기술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헤헤헤헤.”
 “구체적으로 우리 가문의 기술의 단점을 설명해보거라.”
 타르아킨 백작이 여전히 정색을 하면서 말하자 가브리엘이 탈명추혼검법의 제일초식을 펼쳐보였다.
 ‘헉, 저, 이 무, 무슨······.’
 어설퍼 보이는 동작이지만 가브리엘이 펼친 동작을 본 타르아킨 백작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부릅떠졌다.
 “그, 그것은 우리 가문의 기술이 아니질 않느냐.”
 “아니에요. 조금 변형시켜 보았을 뿐인데 아직은 미완성이에요. 헤헤헤헤.”
 지금으로선 천진난만하게 웃는 것이 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타르아킨 백작은 목검을 늘어트린 채 멍한 표정으로 가브리엘을 쳐다보았다.
 ‘이것을 가문의 축복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비극으로 보아야 하는가.’
 타르아킨 백작의 머릿속은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가브리엘이 아무런 탈 없이 자라만 준다면 가문을 부응시킬 것이다. 반대로 가브리엘의 천재성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 타르아킨 백작의 마음을 읽은 것인가.
 가브리엘이 화사하게 웃으며 타르아킨 백작의 무거워진 마음을 달래주었다.
 “아빠가 허락하지 않은 한 새로운 기술은 연마하지 않을래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브리엘은 탈명추혼검법을 버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네가 지금 한 말 아버지랑 약속할 수 있겠느냐.”
 “당연하죠.”
 흔쾌한 대답에서 타르아킨 백작을 일그러진 표정을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다가는 천추의 한이 될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하는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은 타르아킨 백작으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아빠에게 네가 우리 가문의 장단점을 파악한 기술을 모두 보여 다오.”
 “헤헤헤, 아빠, 그건 아직 무리에요.”
 가브리엘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더 이상 다그칠 수가 없었던 타르아킨 백작은 아들에게 가문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아니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브리엘, 앞으로 우리 가문에 기술에 대해 너와 심도 있게 논의를 해야 할 것 같구나.”
 “헤헤헤헤.”
 가브리엘이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 수련은 그만 두어야하겠구나.”
 타르아킨 배작이 가브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목검을 진열대에 꽂았다.
 “아빠 먼저 들어가세요.”
 “오냐. 너도 빨리 들어오려무나.”
 다시 한 번 가브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타르아킨 백작이 종종걸음으로 수련장을 벗어났다.
 “일단 가문의 기술을 익혀 볼까.”
 가브리엘이 가진 기술들에 대한 오의는 모두 깨우친 상태이기 때문에 몸에 익히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탈명유성검법을 배우는데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좀 시시하기는 하지만 익혀두면 몸을 푸는데 유용하겠어.”
 이 세계의 검법은 중원의 검법에 비한다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타르아킨 가문의 검법이 몸을 푸는 동작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브리엘의 생각일 뿐이었다. 이 세계에도 분명 중원의 검법 못지않은 검법이 있으며 기(氣)처럼 사용되는 마나가 있었다.
 단지 아직 이 세계에 대해 일천한 관계로 이 세계에도 굉장히 강한 자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이 세계에는 마법이라는 특이한 기술이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디보자.”
 가브리엘에 맞게 만든 자그마한 목검을 쥔 가브리엘이 타르아킨 가문의 기술의 동작들을 떠올리며 펼치기 시작했다.
 휙휙, 슈슉,
 동작들이 몸에 익지 않고 기억을 더듬어 가며 펼쳐야 하는 탓에 동작 하나하나가 느리고 어설프게 보이지만 정교함이 돋보였다.
 어린 나이라 금세 지치기 마련이지만 만상조화심법을 구성까지 익힌 터라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한지 1시간이 넘었어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타앗.”
 휙휙휙, 휘익.
 동작들을 여러 번 펼친 탓일까.
 펼치는 동작들이 처음에 비해 제법 매섭고 날카로움이 엿보였다.
 
 슉슉, 파바박.
 타르아킨 가문의 검법을 익히기 시작한지 3년이 지났다. 단점을 보완한 타르아킨 가문의 검법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목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대기가 갈라지는 파열음이 만들어졌다. 찌르는가 싶으면 어느새 횡으로 베어가고 또 횡으로 베는가 싶으면 어느새 다시 찔러갔다.
 지난 3년의 시간동안 가브리엘은 먹고 자는 것 이외에는 공부와 수련에 매달렸다. 만상조화심법은 10성의 경지에 도달했고 환상보법도 완숙의 경지가 되었다.
 한 여름이라 웃통을 벗고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가브리엘이 움직일 때마다 빗살 같은 근육들이 생동감이 넘쳤다. 이제 11살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근육들이 만들어진 것은 그만큼 열심히 수련을 했다는 증거였다.
 짝짝짝짝.
 방해를 하지 않으려고 가브리엘이 수련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타르아킨 백작이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그런데 이미 가브리엘은 타르아킨 백작이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오셨어요?”
 가브리엘이 수련을 멈추고 활짝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웃통을 벗은 전신이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호흡은 전혀 거칠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 이런 이상한 상황을 접한 타르아킨 백작은 가브리엘이 몹쓸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많이 했지만 가브리엘이 자신은 추위와 더위를 타지 않는 특이한 체질이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어렸을 적부터 가브리엘이 더위는 물론이고 추위도 타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는 타르아킨 백작은 가브리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거참 희한하단 말이야.’
 “오냐. 그런데 네 검법이 아주 훌륭하구나.”
 속내와는 달리 타르아킨 백작은 가브리엘을 칭찬해주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가브리엘의 검법이 훌륭하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펼쳤을 때보다 빠르고 예리한 것은 물론이고 타르아킨 가문의 검법 특유의 중후함도 더했다.
 “헤헤헤, 그게 다 아빠가 검법의 단점을 보완해준 덕분이에요.”
 가브리엘이 엄지를 치켜 세워보였다.
 ‘후후후, 녀석.’
 타르아킨 백작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피어났다. 사실 타르아킨 가문의 검법을 보완한 사람은 가브리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머리를 맞대고 타르아킨 가문의 검법을 연구하기는 했지만 사실 타르아킨 백작은 그저 가브리엘의 의견에 따라 동작들을 수정했을 뿐이었다.
 “예끼 이 녀석, 이제는 아부도 할 줄 아는구나.”
 “아부가 아니라 사실이잖아요.”
 가브리엘이 목검을 진열대에 꽂고 돌아섰다.
 “오늘 수련은 끝난 것이냐.”
 가브리엘은 검법만 수련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즉에 글을 다 깨우쳤음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은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공부를 하는데 오늘이 바로 공부를 하는 날이었다.
 “아이참 아빠도, 오늘 공부하는 날이잖아요.”
 “이런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그러고 보니 오늘 공부하는 날이로구나.”
 “헤헤헤, 오늘은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해볼까 해요.”
 가브리엘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에 타르아킨 백작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났다.
 채근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검법도 열심히 수련하고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 아들을 보고 흐뭇해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오늘 아빠의 표정이 무지 밝아 보여요.”
 “그렇게 보이느냐?”
 타르아킨 백작이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네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어쩌면 네게 친구가 생길 것 같구나.”
 “친구라뇨?”
 밑도 끝도 없는 말에 가브리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앙증맞고 귀엽던지 타르아킨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가브리엘을 덥석 끌어안았다.
 “억, 이건 반칙이라고요. 반칙!”
 엉큼하게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가브리엘은 타르아킨 백작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허허허, 녀석 하고는······.”
 타르아킨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가브리엘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두 부자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그런데 아빠, 친구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타르아킨 백작의 품안에서 빠져나온 가브리엘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었다.
 “예전이 나와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이 있는데 그가 이곳으로 이주한다더구나.”
 “엥? 그게 내게 친구가 생기는 것 하고 무슨 관계에요?”
 “그에게는 10 살배기 딸이 있단다.”
 “와아~ 그렇구나.”
 가브리엘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에둘러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친구도 없이 홀로 수련과 공부에만 매진하다 보니 외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여자라고 하지 않은가.
 육체는 아니더라도 이미 여체를 알고 있는 가브리엘이었다. 그런 그에게 여자 친구라는 단어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여체를 떠올리게 했다.
 ‘으흐흐흐.’
 여자 친구가 생긴다는 사실에 가브리엘이 자신도 모르게 쾌재를 부르며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좋으냐?”
 “네? 아 네네. 당연하죠. 아빠 최고.”
 가브리엘이 다시 한 번 엄지를 치켜세워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요 녀석 보게.’
 가브리엘의 맹랑한 행동에 어이가 없어진 타르아킨 백작이 가브리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라면 아빠 친구겠네요.”
 ‘아무렴 가브리엘의 나이 이제 11살인데······.’
 생각을 고쳐먹은 타르아킨 백작에 가브리엘의 애간장을 태우려는 것인지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잉~”
 앙탈을 부리는 가브리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타르아킨 백작이 가브리엘과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그렇게 궁금하니?”
 “당연하죠.”
 “흐음, 좋다. 말해주마.”
 가브리엘의 귀염을 떠는 행동에 넘어간 타르아킨 백작이 이 척박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이주를 해온다는 사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보어 프리모스.
 그가 바로 타르아킨 백작과 친분이 두텁다고 한 사람이었다. 아니 타르아킨 백작을 존경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기사 지망생이었던 프리모스가 타르아킨 백작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년 전이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 백방으로 떠돌아다녔지만 인맥이 없었던 그는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쳐줄 사람을 찾지 못했다.
 뜻을 이루지 못해 좌절에 빠져 있던 프리모스에게 타르아킨 백작에 대한 소문은 가뭄에 단 비나 마찬가지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타르아킨 백작을 찾은 프리모스는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그런데 의외로 타르아킨 백작이 프리모스를 흔쾌히 받아준 것이었다. 타르아킨 백작가에 머물면서 타르아킨 백작의 지도를 받으며 이를 악물고 수련했다.
 물론 타르아킨 가문의 검법을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체계적인 검법은 아니었지만 프리모스도 기사 지망생임으로 어느 정도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타르아킨 백작은 엉성한 자세를 교정시켜 준 것 뿐이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피나는 수련을 거듭한 끝에 프리모스는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당히 기사가 된 것이었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프리모스는 타르아킨 백작이 척박하기 짝이 없는 메르세아 영지로 부임했다는 소문을 듣고 기꺼운 마음으로 메르세아 영지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한 사람의 영지민도 아쉬운 상태고 또 영지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라도 프리모스 같은 사람이 많이 이주해 와야 하는 터라 타르아킨 백작도 프리모스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와아, 그럼 프리모스라는 사람은 아빠의 제자나 다름없네요.”
 타르아킨 백작의 길고 긴 설명이 끝나자 가브리엘이 토끼눈을 뜨며 탄성을 터트렸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럼 프리모스 아저씨는 이곳에 살면서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글쎄다. 아직은 정해진 것이 없구나.”
 명색이 기사인데 하인 부리듯 할 수는 없는 법,
 번듯한 영지라면 기사단장이 제격이지만 말만 영주일 뿐이지 가진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터라 타르아킨 백작도 프리모스에게 어떤 직책을 주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아항, 그렇구나.”
 “프리모스의 딸 캐롤라인이 아주 예쁘다고 하니 잘 사귀어 보거라.”
 “헤헤헤헤.”
 캐롤라인이 예쁘다는 말에 가브리엘이 환하게 웃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못생긴 여자보다는 예쁜 여자와 친구가 되는 것이 낫기 때문에 가브리엘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빠는 그만 가서 일을 해야겠구나.”
 가브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타르아킨 백작이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쪼르르 달려가 타르아킨 백작의 앞을 막았다.
 “아빠에게 할 말이 있는 것이냐?”
 “제가 생각한 기술들을 익혀도 되나요?”
 타르아킨 백작의 허락 없이는 가문의 검법 이외의 다른 기술들을 익히지 않겠다고 약속한 터라 미리 약속을 받아내고 싶었다.
 물론 만상조화심법이나 환상보법처럼 아무도 모르게 무공을 연마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브리엘은 타르아킨 백작의 허락을 받고 무공을 연마하고 싶었다.
 “알겠다. 하지만 가문의 기술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약속할 수 있느냐.”
 가브리엘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타르아킨 백작은 가브리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흔쾌히 승낙했다.
 ‘후후후, 됐다.’
 가브리엘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타르아킨 백작의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에 섬광검법은 물론이고 온갖 살인기술 등 가브리엘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무공들을 연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오랜만에 섬광검법을 펼쳐볼까.’
 타르아킨 백작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가브리엘이 섬광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조금 있으면 공부를 해야 할 시간이지만 가브리엘은 단 한 번만이라도 섬광검법의 초식을 펼치고 싶었다.
 “타앗.”
 맑은 기합성과 함께 타르아킨 백작가의 검법 수련을 처음 시작할 때처럼 기억을 더듬어가며 동작들을 펼쳐 나갔다.
 
 
 
 
 
 
 
 
 
 
 
 제3장. 때 이른 사춘기
 
 
 
 
 
 
 우르릉, 콰앙.
 번쩍.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3일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아직 우기가 된 것은 아닌데 이토록 많은 비가 쏟아지는 것은 드문 현상이었다.
 “이 빌어먹을 폭우 때문에 캐롤라인을 보는 것이 늦어지잖아.”
 수련에 임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방안에 틀어박혀 있자니 캐롤라인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하더니 폭우가 3일 동안 이어지자 괜히 심통이 난 가브리엘이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덜컹.
 짜증스러운 나머지 가브리엘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람에 비를 흠뻑 뒤집어썼다.
 “에이, 짜증나.”
 쾅.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닫은 가브리엘이 젖은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비를 맞은 탓에 몸이 끈적거리는 바람에 다시 옷을 벗고 젖은 옷으로 갈아입은 가브리엘이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쏴아아아아.
 한치 앞이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폭우를 맞으며 수련장으로 이동한 가브리엘은 목검을 쥐었다. 그러고는 타르아킨 가문의 검법을 시작으로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동작들을 펼쳐나갔다.
 내공은 운용하지 않은 탓에 빗물을 흠뻑 빨아들인 젖은 옷은 체력을 빠르게 고갈시켰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타앗.”
 휙휙휙, 휙휙휙.
 제법 매섭고 날카로웠던 동작들은 시간이 갈수록 무뎌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은 미친 듯이 목검을 휘둘렀다.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의 수련은 수련의 성과가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가브리엘이 이토록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은 기억은 어른이지만 그 자신도 모르게 어린아이의 행동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헉헉헉, 헉헉헉.”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비에 흠뻑 젖은 옷의 무게가 천근만근처럼 느껴짐에도 가브리엘은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가브리엘, 지금 뭐하는 것이냐.”
 타르아킨 백작의 외침이 들리자 그제야 비로소 가브리엘의 동작이 멈추어졌다. 하지만 목까지 차오른 거칠어진 숨 때문에 어깨를 들썩이며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헉헉헉, 헉헉헉.”
 “가브리엘, 지금 제정신이냐? 이 폭우 속에서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타르아킨 백작의 호통에도 양손으로 목검을 움켜진 가브리엘은 허공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이에 타르아킨 백작의 호통이 이어졌다.
 “가브리엘, 아빠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후욱후욱, 아빠, 빗속에서의 수련은 수련의 효과를 극대화시켜주잖아요. 이런 빗속에서 수련을 해보고 싶었어요.”
 가브리엘의 입에서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물론 가브리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의 수련은 분명 필요한 것이고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표정이 예전과 같이 않은 것 때문에 타르아킨 백작의 호통이 이어졌다.
 “이 녀석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빠한테 이야기는 하고 수련을 했어야지. 감기라도 걸린다면 아빠와 엄마는······.”
 감정이 격해진 탓인지 타르아킨 백작이 말을 잇지 못했다.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 타르아킨 백작이 역정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빠, 저는 병에 걸리지 않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평소 같았으면 어리광을 부리거나 할 터인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것이 타르아킨 백작을 더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는 것이냐.”
 “아니에요. 아니란 말이에요.”
 빽 소리를 지른 가브리엘이 목검을 버리고 달려갔다. 그런 돌발적인 행동에 타르아킨 백작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 애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혹시 사춘기가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가브리엘의 나이 이제 고작 11살인지라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태어난 가브리엘이 조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춘기도 일찍 찾아온 것인데 그것을 까맣게 모르는 타르아킨 백작은 하나뿐인 아들이 삐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저 녀석이 고민이 있는 것이 뭔지 알아야 도와줄 것이 아닌가.”
 한숨을 내쉬며 가브리엘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타르아킨 백작이 발걸음을 옮겼다.
 
 촤아악, 촤악.
 욕실로 들어온 가브리엘이 찬물을 마구 끼얹었다. 그럼에도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자 아예 물통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차가운 물이 가득한 물통 속에 있노라니 서늘한 기운이 슬슬 체내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혼탁해진 마음을 추스른 가브리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여자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지다니 네가 그러고도 무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인간은 사춘기를 반드시 겪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무인(武人)이라고 해서 결코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가브리엘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터라 사춘기가 주는 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가브리엘이 지금 겪고 있는 사춘기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휴우.”
 자신이 사춘기를 겪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가브리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물통에서 나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만상조화심법이 최고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가브리엘이 만상조화심법을 끌어올렸다.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진기(眞氣)가 사지백해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무아경(無我境)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지긋지긋하게 쏟아지던 폭우가 멈춘 지 3일이 지났다. 오늘도 가브리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련에 임하고 있었지만 정신은 다른데 가 있는지라 수련의 효과는 거의 없었다.
 정신이 다른데 가 있다 보니 진즉부터 타르아킨 백작이 가브리엘을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요즘 들어 말수도 적어졌고 행동도 이상한 것을 보니 사춘기가 분명하다. 이제 가브리엘의 나이 고작 11살인데 사춘기라니 어이가 없군.’
 뒤늦게나마 가브리엘이 사춘기를 겪고 있음을 파악하기는 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저 황당하기만 했다.
 “영주님.”
 등 뒤에서 에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이라는 말에 타르아킨 백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 척박한 곳에 온 손님이라면 이곳에 정착해 살기로 한 프리모스뿐이었다.
 “알았으니 가서 일 보거라.”
 “네 영주님.”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에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타르아킨 백작이 가브리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프리모스의 딸 캐롤라인이라면 사춘기를 겪고 있는 가브리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정말이지 십년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후훗, 캐롤라인이 왔다고 하면 가브리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군.’
 타르아킨 백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가브리엘에게 다가갔다. 그런데도 가브리엘은 여전히 타르아킨 백작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브리엘.”
 타르아킨 백작의 목소리를 들은 가브리엘이 수련을 멈추고 가빠진 숨을 몰아 내쉬었다.
 “가브리엘, 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더구나.”
 “그게 무슨 소리에요?”
 “네가 기다리던 사람이 캐롤라인 아니더냐.”
 정곡을 찔린 가브리엘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는 사춘기를 겪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타르아킨 백작에게 절로 미소를 짓게 했다.
 “가서 땀을 닦아내고 오너라. 손님에게 땀 냄새를 풀풀 풍길 수는 없지 않겠느냐.”
 “네압.”
 가브리엘의 입에서 이상야릇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목검을 진열대에 꽂지도 않은 채 달려가는 가브리엘의 모습에 타르아킨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너무나 조숙해서 걱정이었는데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였구나.”
 가브리엘 때문에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져서 그런지 발걸음을 떼어놓는 타르아킨 백작의 발걸음이 더 없이 가벼워보였다.
 
 잠시 후.
 타르아킨 백작이 응접실에 도착하자 커다란 덩치의 텁석부리가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영주님께 예를 올립니다.”
 “핫핫핫, 프리모스, 이게 얼마 만인가.”
 커다란 덩치의 정체는 타르아킨 백작으로 인해 뜻을 이루었던 프리모스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시카라고 합니다.”
 프리모스의 아내 제시카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제 아내입니다.”
 “오, 그렇구려. 앞으로 잘 부탁하겠소.”
 제시카에게 눈인사를 한 타르아킨 백작이 제시카 옆에 서 있는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은 커다란 눈과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망울이 그렇지 않아도 귀엽고 앙증맞은 소녀를 더 깜찍스럽게 해주었다.
 “캐롤라인, 영주님께 인사해야지.”
 프리모스가 캐롤라인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자 캐롤라인이 수줍은 듯 허리를 꾸뻑 굽혔다.
 “안녕하세요.”
 “허허허, 오냐. 귀엽게 생겼구나.”
 너무 앞서간 면이 없지 않지만 훗날 며느리가 될 수도 있기에 타르아킨 백작은 캐롤라인의 귀엽고 깜찍한 용모에 흐뭇해질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께서 늦둥이를 보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곧 올 것일세.”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타르아킨 백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브리엘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아빠.”
 “어서 오너라. 그렇지 않아도 가브리엘 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단다.”
 타르아킨 백작 곁으로 다가온 가브리엘의 시선은 캐롤라인에게 꽂혀 있었다.
 ‘우와, 예쁘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예쁜 캐롤라인의 모습.
 가브리엘의 눈에는 캐롤라인은 천사였다.
 속된 말로 캐롤라인에게 제대로 꽂혀버린 가브리엘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가브리엘, 인사해야지. 아빠가 누누이 말했던 프리모스란다.”
 “······.”
 캐롤라인에게 꽂혀버린 가브리엘의 귀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캐롤라인이 사고가 멈추어진 상태의 가브리엘을 향해 캐롤라인이 환하게 웃었다.
 찌리릿.
 알 수 없는 짜릿함.
 전혀 낯선 느낌이 아니었다.
 전생에 혜연에게서 느꼈던 그 짜릿함과 궤를 같이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가브리엘.”
 타르아킨 백작이 캐롤라인에게 꽂혀 사고가 마비되어 버린 가브리엘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제정신을 찾은 가브리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서도 캐롤라인을 힐끔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녀석아, 손님 앞에서 이 무슨 행동이냐.”
 그제야 어떤 상황인지 파악한 가브리엘이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하하하, 또래가 없어서 그런지 캐롤라인이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예가 아닐세. 가브리엘, 인사하거라. 누누이 말했던 프리모스다.”
 “안녕하세요.”
 가브리엘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러자 프리모스가 손을 내저었다.
 “소영주님, 저는 이제 이곳 메르세아 영지의 식솔입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프리모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자네가 평민도 아닌데 어찌 어린아이에게 존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타르아킨 백작이 펄쩍 뛰었다. 그의 말대로 프리모스는 평민이 아니었다. 따라서 가브리엘에게 존대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영주님, 저는 그게 편합니다. 제 의견을 존중해주십시오.”
 프리모스가 강한 톤으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프리모스 백작이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쯧쯧쯧,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말게.”
 “물론입니다. 하하하하.”
 프리모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어 캐롤라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캐롤라인, 소영주님께 인사를 해야지.”
 “안녕, 나 캐롤라인이야.”
 프리모스와 달리 캐롤라인은 가브리엘을 친구처럼 대했다. 아마도 프리모스에게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데 캐롤라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브리엘은 또 다시 짜릿함을 맛보았다.
 ‘넌 이제 내 거야.’
 11살의 어린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가브리엘은 캐롤라인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캐롤라인의 인사에 화답했다.
 “안녕.”
 가브리엘의 화답에 캐롤라인이 또 다시 환하게 웃었다.
 “영주님,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 잔 하셔야죠.”
 “허허허, 그러세. 그런데 생활이 궁핍한 탓에 대접할 것이 많지 않네.”
 타르아킨 백작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런 처지에도 자존심을 내세웠을 터였다. 하지만 타르아킨 백작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을뿐더러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런 행동들 때문에 이 척박한 영지의 영지민들도 타르아킨 백작을 존경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던 영지민들이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기 시작한 것도 타르아킨 백작의 사람 됨됨을 알고 난 뒤부터였다.
 “가브리엘, 캐롤라인에게 저택 구경 좀 시켜주려무나.”
 “네 아빠.”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힘찬 목소리로 대답한 가브리엘이 캐롤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캐롤라인, 가자. 내가 집 구경 시켜줄게.”
 “으응. 고마워.”
 가브리엘과 캐롤라인이 손을 잡고 나가는 모습을 본 타르아킨 백작의 입가에 또 다시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영주님,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허허허, 자네도 그렇게 보았는가.”
 타르아킨 백작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늦게 손님이 온 것을 듣고 부랴부랴 단장을 하던 안젤라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캐롤라인과 함께 밖으로 나온 가브리엘은 캐롤라인을 수련장으로 데리고 갔다. 딴에는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캐롤라인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으응. 그렇구나.”
 지금 캐롤라인의 나이 10살.
 강한 남자에게 끌릴 나이가 아니었다.
 캐롤라인의 나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맛난 음식과 예쁜 꽃 등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브리엘의 말 자체를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다.
 ‘무슨 애가 이래. 지 자랑만 하고 정말 못났다.’
 지금이라도 캐롤라인이 관심을 가질만한 곳으로 안내를 해야 하건만 연애 경험이 없는 가브리엘은 여전히 수련이 어쩌고 하는 말만 늘어놓았다.
 전생에 혜연과 맺은 인연은 연애를 한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탓에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이지 가브리엘이 데시를 해서 얻어진 사랑이 아니었다.
 ‘캐롤라인이 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거지?’
 아직도 캐롤라인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한 가브리엘은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은 구경할 데가 없나보지?”
 급기야 듣다 못한 캐롤라인이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곳? 구경할 만한 곳이 별로 없는데······.”
 구경할 곳이 없는 것은 가브리엘 그 자신의 입장 일뿐이었다. 비록 메르세아 영지가 척박한 땅이라고는 하지만 풍경 자체는 꽤 괜찮은 면도 있었다. 따라서 캐롤라인이 좋아할 만한 곳은 널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이, 그럼 나 갈래.”
 “가, 간다고?”
 “재미도 없잖아. 난 또 구경할 곳이 많은 줄 알았지 뭐야. 흥!”
 캐롤라인이 콧방귀를 끼며 몸을 홱 돌렸다. 다급해진 가브리엘이 캐롤라인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캐롤라인은 가브리엘의 손을 뿌리친 뒤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망부석이라도 된 듯 충격을 받은 가브리엘은 캐롤라인이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는 캐롤라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무려 30분 동안이나 고민을 해보았지만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기다림이 컸기에 그만큼 충격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캐롤라인에게 왜 화가 났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에나에게 물어볼까.”
 결국 자신 혼자서는 해결할 수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가브리엘은 결국 남의 도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가브리엘에게 또 다른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에나보다는 엄마가 낫지 않을까.”
 예전의 가솔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지금 영지의 가장자리에 보금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현재 영주의 저택에 있는 여자라고는 엄마인 안젤라와 하녀 에나뿐이었다.
 ‘일단 내일 다시 캐롤라인을 만나본 뒤 결정하자.’
 엄마와 하녀 사이에서 고민을 하던 가브리엘이 결론을 내리고는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다음날 아침.
 아침을 대충 해결한 가브리엘은 캐롤라인의 집으로 향했다. 영주의 저택이 넓지 않은 터라 캐롤라인의 집은 영주의 저택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빈집에 거처를 정했다.
 “캐롤라인, 캐롤라인.”
 가브리엘이 목소리를 높여 캐롤라인을 불렀지만 캐롤라인은 고개조차 내밀지 않았다.
 “캐롤라인, 나야 가브리엘. 캐롤라인!”
 다시 한 번 캐롤라인을 부르자 프리모스가 나왔다.
 “소영주님 오셨군요.”
 프리모스가 깍듯이 예를 올렸다.
 “캐롤라인은요?”
 “어제 먹은 음식 때문에 속이 좋지 않은 모양이네요. 이따가 나아지면 데리고 갈 터이니 그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캐롤라인이 체했다고요?”
 체한 것이라면 단박에 고칠 수 있기 때문에 되물은 것인데 프리모스가 검지를 흔들었다.
 “돌아가 ‘여자의 마음은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라는 말에 대해 고민을 해보십시오.”
 “네에?”
 뜬금없는 말에 가브리엘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러자 프리모스는 고개만 흔들 뿐 대답을 해주질 않았다.
 사실 프리모스는 지난밤 캐롤라인의 말을 듣고 대충이나마 상황을 파악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가브리엘을 직접적으로 돕지 못하는 것은 남녀관계는 본인들이 풀어가야 나중에 탈이 없기 때문이다.
 “하던 일이 있는지라 저는 그만 들어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가브리엘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프리모스가 했던 말을 고민해보았지만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가브리엘, 아침 일찍 어디를 다녀오는 게냐.”
 수련장에 갔다가 가브리엘이 없는 것을 보고 가브리엘의 방으로 향하던 타르아킨 백작이 출입문으로 들어서는 가브리엘을 보고 넌지시 물었다.
 “그냥 여기저기요.”
 짧게 대답한 가브리엘이 자신의 방이 있는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침 일찍부터 수련하던 저 녀석이 왜··· 아하.”
 뒤늦게야 가브리엘이 풀이 죽어 있는 이유를 짐작한 타르아킨 백작이 이마를 올려쳤다. 그러다가 문득 가브리엘이 또래의 아이들과 같이 자라지 못한 사실을 떠올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게 다 내 잘못이다. 지금이라도 또래의 아이들 아니 굳이 또래가 아니더라도 사람들과 뒤섞여 살게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걱정이로군.”
 그러면서 자연스레 어제 프리모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직도 허름한 저택에서 살고 있는 이유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프리모스가 술자리에서 자신이 돈을 댈 터이니 번듯한 저택을 짓자고 한 것을 타르아킨 백작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번듯한 저택만 있다면 예전의 가솔들을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에 외로움을 덜 타게 될 것이고 가브리엘의 수련에도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에게 이유 없는 도움을 받지 않는 성격이라 프리모스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인데 가브리엘을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가브리엘과 대화를 하다 보면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결론을 내린 타르아킨 백작이 가브리엘의 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되돌아온 가브리엘은 프리모스가 했던 말을 두고 깊은 고심에 빠졌다. 전생의 기억을 뒤져가며 프리모스가 한 말에 대한 의미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이 세계에 적응하면서 사느라 전생의 기억들이 지워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무공을 비롯해 혜연 등 지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생의 기억이 거의 다 지워진 상태인 탓에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가브리엘은 포기하지 않고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갔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렵사리 공자(孔子)를 비롯해 노자(老자) 등 전생의 성현(聖賢)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성현 말씀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니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도 같다는 말이 나왔다.
 ‘그래 바로 이거야.’
 쾌재를 부른 가브리엘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 이유는 여자의 마음이 갈대와도 같다는 말에 대한 주서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듯 여자의 마음은 변화무쌍하다는 원론적인 말만 거론했기 때문이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전생의 기억이 거의 대부분 지워진 터라 여자의 마음이 변화무쌍하다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여자의 마음이 변화무쌍하다는 것과 캐롤라인과 무슨 관계라는 거야.”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도 해답을 얻지 못한 가브리엘이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사실 뇌리에 각인 되어 있는 무공 중에는 불영소(佛影笑)라는 무공이 있는데 부처의 온화한 미소의 그림자가 녹아나 있는 이 미소를 대성하게 되면 이 미소를 접한 여자들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상사병에 걸리게 된다.
 ‘색음마환대법(色淫魔歡大法)’이라는 색공도 있었는데 색음마환대법에 걸린 상태에서 관계를 가질 경우 극한의 쾌락에 빠져들게 된다.
 그런 까닭에 색음마환대법을 펼친 자 이외에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질 때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며 대성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도 여자에게 극쾌의 쾌감을 안겨주어 그 남자만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무공이 바로 색음마환대법이었다.
 문제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색공(色功)들을 많이 기억하고만 있지만 색공들을 익힐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익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불영소만 익혔어도 지금처럼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색공이라도 익혀 둘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익혔던 무공들이라 넉넉잡고 1년이면 대성은 아니더라도 여자들을 홀딱 반하게 만들 정도의 수준까지는 익힐 수 있었다.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훗날을 기약한다면 만사일통인데도 가브리엘의 머릿속에는 지금 당장 캐롤라인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가브리엘, 안에 있느냐.”
 타르아킨 백작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가브리엘이 자신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만졌다.
 덜컹.
 문이 열리고 의미심장한 얼굴의 타르아킨 백작이 들어섰다. 이어 가브리엘 맞은편에 앉은 타르아킨 백작이 넌지시 물었다.
 “오늘은 어째서 수련을 하지 않는 것이냐.”
 “수련을 하면 뭐해요? 되는 것도 없는데······.”
 아마도 가브리엘의 마음이 어떤 상황인지 몰랐더라면 충격을 받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이미 가브리엘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에 타르아킨 백작은 오히려 투정을 부리는 아들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가브리엘, 오늘 아빠는 네게 여자의 마음에 대해 가르칠 생각이다. 원래는 네가 15살쯤 되면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되물었던 가브리엘이 타르아킨 백작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제자리에 앉았다.
 “가브리엘, 여자는 말이다.”
 ···라고 시작된 타르아킨 백작의 일장연설이 시작되었다. 이에 가브리엘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타르아킨 백작의 말을 경청했다.
 ‘아하, 그래서 여자의 마음이 변화무쌍하다는 것이구나.’
 아버지의 가르침 속에서 오묘한 진리(?)를 깨우친 가브리엘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허허허, 녀석, 이제 뭔가를 깨달은 모양이로구나.’
 타르아킨 백작이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가브리엘을 쳐다보았다.
 “아빠, 그럼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 그게 말이다.”
 이 당돌한 질문에는 타르아킨 백작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니 어린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은 많다.
 돈으로 사로잡을 수도 있고 멋있는 행동으로 호감을 가지게 만들 수 있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는 격언대로 저돌적인 행동으로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방법들은 어른들에게 통용되는 것이지 이제 10 살배기 아이에게 통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어린애들의 관점에서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이런 경우는 타르아킨 백작도 처음이기 때문에 말문이 막히는 것은 당연했다.
 “에이, 아빠도 모르는구나.”
 가브리엘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래도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여자의 마음이 변화무쌍하다는 의미를 안 것만으로도 가브리엘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남자의 조급해 하는 행동은 여자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이 말이지.’
 가브리엘은 타르아킨 백작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름 계획을 세웠다.
 ‘방법은 캐롤라인이 혹할 정도로 근사한 선물을 준비하거나 캐롤라인을 조바심 나게 만들면 된다.’
 캐롤라인이 어떤 선물을 좋아할지 모르는 터라 가브리엘은 캐롤라인이 스스로 찾아오게 만드는 방법을 선택했다. 가브리엘이 이런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캐롤라인 또래가 자신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불영소를 틈틈이 익혀야겠어. 그리고 캐롤라인이 제 발로 찾아오면 준비해둔 근사한 선물을 준다면··· 캬아.’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던 문제의 해답을 찾은 가브리엘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후훗, 녀석, 방법을 찾은 모양이로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가브리엘을 쳐다보던 타르아킨 백작이 몸을 일으켰다.
 “가시려고요?”
 “오냐, 프리모스에게 할 말이 있단다.”
 “알겠어요. 그럼 저는 수련이나 할래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캐롤라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캐롤라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에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답답함이 가신 터라 수련에 매진할 수 있는 것이 그나마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타르아킨 백작과 입을 맞춘 프리모스는 캐롤라인에게 이곳은 인적이 드물어 몬스터도 종종 나타난다고 겁을 주면서 혼자서는 절대로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함께 놀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혼자 돌아다닐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 캐롤라인은 가브리엘이 와주기를 기다렸지만 가브리엘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외로움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아이, 속상해라.”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지만 캐롤라인의 외로움은 친구가 없다는 것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방안에 가득한 인형들은 캐롤라인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가 없었다.
 캐롤라인을 더 속상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을 대하는 엄마 아빠의 행동이었다. 캐롤라인이 대화를 하려고 하면 바쁘다는 핑계로 회피하기 일쑤여서 대화 상대가 아예 없다시피 했다.
 “가브리엘에게 가 볼까.”
 가브리엘을 떠올렸던 캐롤라인이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브리엘을 찾아간다면 이 외로움은 해소될 터이지만 자존심을 접어야 하는 터라 쉽게 결정을 하지 못했다.
 “캐롤라인, 캐롤라인.”
 엄마가 부른 소리에 캐롤라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엄마, 나 여기 있어.”
 캐롤라인이 목청껏 소리치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려갔다.
 “엄마.”
 엄마의 모습이 보이자 캐롤라인이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거기에 있었구나. 캐롤라인, 아빠하고 엄마 영주님 댁에 가려고 하는데 너도 갈래?”
 “응.”
 혼자 가브리엘에게 가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부모님과 함께 간다면 자존심이 상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가브리엘과 소원했던 관계를 풀 수도 있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어서 준비하고 오너라.”
 “응, 알겠어.”
 환한 얼굴로 대답한 캐롤라인이 자신의 방을 향해 폴짝폴짝 뛰어갔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제시카는 터져 나오려는 간신히 참았다.
 ‘어린애들이 정말 웃겨.’
 
 잠시 후.
 최대한 예쁘게 차려입고 엄마 아빠와 함께 영주의 저택에 도착한 캐롤라인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캐롤라인, 왜 그리 두리번거리는 거니?”
 캐롤라인이 두리번거리고 있는 이유를 뻔히 알면서도 제시카는 내색하지 않고 넌지시 물었다.
 “내가 뭘.”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잖아.”
 “엥? 내가 그랬어?”
 캐롤라인이 시치미를 뚝 떼며 되물었다. 그때 타르아킨 백작 부부가 밖으로 나왔다.
 “오, 캐롤라인 왔구나. 우리 꼬맹이 숙녀 분께서 더 예뻐지셨네.”
 꼬맹이라는 말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캐롤라인이었다. 그런데 꼬맹이라는 단어 뒤에 붙은 두 마디 때문인지 캐롤라인이 몸을 꼬며 배시시 웃었다.
 “으히히히.”
 “어허, 캐롤라인, 영주님 앞에서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이냐.”
 프리모스가 짐짓 눈을 부라리며 야단치자 머쓱해진 캐롤라인이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했다. 그러자 타르아킨 백작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캐롤라인을 두둔해주었다.
 “허허허, 이 친구야, 꼬맹이 숙녀 분께서 잘 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러는가.”
 “그렇죠? 맞죠? 나 잘못한 거 없죠?”
 구원자가 나타나자 캐롤라인의 입에서 속사포를 방불케 하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앙증맞고 귀여운지 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오냐, 네 말이 맞다. 허허허허.”
 “그런데 영주님, 가브리엘은 어째서 보이질 않는 거죠?”
 이 당돌한 물음에 프리모스 부부가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에 반해 타르아킨 백작은 흐뭇한 마음으로 캐롤라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
 “가브리엘은 지금 수련장에 있을 거야.”
 “수련장이라면 저 쪽에 있는 공터를 말하는 거죠?”
 캐롤라인이 가브리엘이 데리고 갔던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냐, 거기에 있을 거야. 어서 가 보렴.”
 타르아킨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잠지 머뭇거리던 캐롤라인이 수련장을 향해 폴짝거리는 걸음으로 뛰어갔다. 타르아킨 백작가에 도착하는 순간 캐롤라인의 뇌리에는 자존심이라는 단어는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슈슉, 파바바박.
 캐롤라인이 온 것을 까맣게 모른 채 가브리엘은 웃통을 벗은 채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타앗.”
 힘찬 기압성과 함께 가브리엘의 동작이 더욱 빨라졌다. 이에 움직일 때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빗살 같은 근육들도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마구 꿈틀거렸다.
 “휴우.”
 타르아킨 가문의 검술 동작을 모두 펼친 가브리엘이 심호흡을 한 뒤 섬광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가브리엘.”
 막 섬광검법의 제일초식을 펼치려던 가브리엘이 캐롤라인의 목소리에 멈칫거렸다.
 ‘와, 왔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던가.
 그 얼마다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단 말인가.
 생각 같아서는 목검을 집어 던지고 반갑게 맞아주고 싶었지만 가브리엘은 애써 눌러 참았다. 이 순간 그동안 가브리엘을 힘들게 했던 사춘기의 고통은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제4장. 음흉한 계획
 
 
 
 
 
 
 캐롤라인이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든 가브리엘은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다. 마음이 즐겁다보니 수련도 잘 되고 공부도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잠자리에 들기 전 1시간 동안 유용하게 쓰일 색공이나 마공을 익혔고 자고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방안에서 섬광검법을 수련하는 것이었다.
 “휴우.”
 섬광검법 수련을 마친 가브리엘이 길게 심호흡했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랫도리를 훌렁 까 내렸다.
 “이게 될까.”
 이제 11살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크기의 음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디 한 번 세워나 보자.”
 천장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음경을 잡은 손에 힘을 가하려는 순간 밖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브리엘, 가브리엘 안에 있니?”
 “으헉.”
 깜짝 놀란 가브리엘이 후다닥 바지를 올렸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 여기 있어요. 왜요?”
 “일어났으면 밥 먹으렴.”
 “네.”
 아마도 엄마가 방문을 열었더라면 당황했을 터인데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휴우, 큰일 날 뻔했다. 아무래도 실험은 밤에 해야겠구나.”
 원래 그런 실험은 밤에 그것도 이불 속에서 몰래 해야 제격이었다. 지금처럼 위험한(?) 순간이 닥치지도 않을 것이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가만, 설사 이게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어디에다 써먹지?”
 그러다가 캐롤라인을 떠올린 가브리엘이 이마를 올려쳤다.
 “캐롤라인, 캐롤라인이 있었잖아. 으히히히.”
 캐롤라인을 상대로 그 짓을 하기로 결심한 가브리엘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그러다가 이내 웃음을 뚝 그치고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투지를 불태웠다.
 “기다려라 캐롤라인,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곧 네 신랑이 될 사람의 음경 맛을 보게 될 것이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밖에서 가브리엘이 음흉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 대상자인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콱 눌러버려?”
 그랬다가 잘못되면 영지 전체가 발칵 뒤집어질 터,
 그렇게 되면 그 화살이 가브리엘 그 자신이 아닌 아버지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타르아킨 가문에게 씌워진 멍에를 벗을 기회도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캐롤라인이 내게 꽂힌 이상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지그시 눌러주자. 기왕이면 쾌활림을 사용하면 캐롤라인도 뿅 갈 것이다.”
 거창하고 복잡한 이름보다는 간결한 것이 낫다고 판단한 가브리엘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의 이름을 바꾸었다. 그가 언급한 쾌활림이란 바로 색음마환대법을 말하는 것이었다.
 쾌락만이 가득한 숲.
 색음마환대법의 이름을 쾌활림이라고 바꾼 가브리엘의 세계관이 녹아나 있다고 보아야 옳았다.
 전생에서 그는 여자를 밝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태어나는 바람에 11년 동안 욕망을 억누르며 살다가 때 이른 사춘기를 겪는 과정에서 성격이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가브리엘.”
 또 다시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나간다.”
 가브리엘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양 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캐롤라인이 입술을 삐쭉거리며 투덜거렸다.
 “씨이, 뭐야.”
 “미안, 방안을 정리 좀 하고 있었어.”
 방안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으면서도 가브리엘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웬 일이야?”
 “씨이, 몰라. 말 안 해.”
 캐롤라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캐롤라인에게 다가간 가브리엘이 슬쩍 캐롤라인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았다. 그 순간.
 찌리릿.
 이 형용할 수 없는 느낌.
 그렇다.
 바로 이 느낌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웠었다.
 이 느낌 때문에 남녀가 결혼을 하고 2세라는 결실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후우.’
 아주 익숙하면서고 강렬한 느낌에 가브리엘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맛보았다.
 “뭐, 뭐야.”
 깜짝 놀란 캐롤라인이 가브리엘의 팔을 뿌리쳤다. 그런데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세게 뿌리치다가 그만 가브리엘의 뺨을 때려버리고 말았다.
 짜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가브리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억.”
 “허억.”
 두 마디 외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뺨을 맞은 가브리엘은 아파서 비명을 지른 것이 아니라 뺨을 맞았다는 것 자체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캐롤라인 역시 자신이 때려 놓고도 놀라 비명을 터트리고 말았다.
 “······.”
 가브리엘을 쳐다보는 캐롤라인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마침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으앙.”
 이런 상황이라면 대승적인 차원에서라도 울고 있는 캐롤라인을 달래주어야 옳았다. 그런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가브리엘은 울고 있는 캐롤라인을 놔두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야, 가브리엘.”
 울음을 뚝 그친 캐롤라인이 벌떡 일어나 가브리엘의 뒤를 쫓았다.
 ‘후후후, 내 그럴 줄 알았지.’
 가브리엘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피어났다. 아마도 캐롤라인을 달래려고 했었다면 캐롤라인은 더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터였다. 그렇기에 강하게 행동했던 것인데 이런 음흉함에 캐롤라인이 걸려들고 만 것이었다.
 ‘이미 너는 내 손아귀에 들어온 거야. 큭큭큭큭.’
 “가브리엘. 거기 좀 서봐.”
 앞서 걷고 있던 가브리엘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어떤 것이든지 지나치면 화근이 되는 법,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않으면 오히려 캐롤라인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기에 가브리엘이었기에 이쯤에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해주는 모양새를 취하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헐레벌떡 뒤쫓아 온 캐롤라인이 얼굴을 붉히며 사과했다.
 “가브리엘,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괜찮아. 내가 어깨에 팔을 얹은 것이 불쾌했다면 내가 사과할게.”
 속내는 어떨지언정 지금의 모습만 놓고 본다면 가브리엘은 대범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캐롤라인도 홀딱 반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야. 어깨에 팔을 올려도 괜찮아. 그냥 아까는 너무나 놀란 바람에······.”
 캐롤라인의 입에서 가브리엘이 원하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나이스.’
 이제 언제 어디서든 마음대로 캐롤라인의 어깨에 팔을 얹을 수 있게 된 가브리엘이 쾌재를 불렀다.
 ‘큭큭큭,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 아니다. 급하게 먹으려 하다가는 체할 수도 있다.’
 “캐롤라인.”
 “으응.”
 캐롤라인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얼마 전부터 익히기 시작한 천상의미소라고 이름을 고친 불영소를 펼쳐보였다.
 ‘어머, 어머어머 세상에······.’
 천상의미소를 접하는 순간 캐롤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찔끔거리고 말았다. 아직 천상의미소를 완숙하게 익힌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수준만으로 캐롤라인을 사로잡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
 
 땅땅, 땅땅땅.
 힘찬 망치소리가 이른 아침부터 가브리엘의 단잠을 깨웠다. 망치소리의 정체는 영주의 저택을 짓는 공사현장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프리모스의 끈질김에 타르아킨 백작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고 프리모스는 예전의 타르아킨 가문의 가솔들을 불러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함.”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내려온 가브리엘이 길게 기지개를 폈다. 그런데 가브리엘의 아랫도리가 말뚝을 박아놓은 것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어젯밤에 달래 주었으면 되었지 아침부터 이 자식이 왜 화를 내고 그러는 거야.”
 가브리엘이 불룩해진 아랫도리를 툭툭 내리치며 중얼거렸다. 캐롤라인을 마음대로 안을 수 있게 된 그날 밤 가브리엘은 이불 속에서 아주 흥겨운 실험을 했었다.
 운우지락(雲雨之樂) 즉 여자와 관계를 가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가브리엘은 그날 밤 몇 차례나 천당과 쾌락의 세계를 오갔다. 그 뒤로부터 그는 밤마다 이불 속에서 팔운동을 해댔다.
 “오수(五手)가 중풍(中風)이니 무골(無骨)이 유골(有骨)이요. 백수(白水)가 낙(落)하니 심심(心心)이 쾌(快)하도다. 이 얼마나 오묘한 말이더냐. 크크크크.”
 아침부터 요상한 말로 중얼거린 가브리엘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한 여름이라서 그런지 이른 아침임에도 시원함이라고는 쥐뿔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올해는 유난히 더운 것 같네.”
 ···라고 중얼거린 가브리엘이 창문을 닫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고는 천상의미소 구결을 읊으며 진기를 끌어올렸다.
 가브리엘의 하루는 언제나 천상의미소를 연마하는 것으로 시작해 오전에는 무공을 연마하고 오후에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캐롤라인을 데리고 가 마음껏 캐롤라인의 체취를 마셨다.
 캐롤라인에게 도장을 콱 찍으려고 할 때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훼방꾼이 나타나는 바람에 아직까지 뜻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저녁에는 공부를 하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며 손장난을 치곤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일은 반드시 캐롤라인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 것이라 굳게 결심하고 다짐하곤 했다.
 시끄러운 망치소리 때문에 쉽사리 무아경에 빠져들지 못했던 가브리엘이 마침내 무아경에 빠져들었다. 이렇듯 시끄러움 속에서 내공을 이용한 무공을 연마하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내공을 연마하고 있을 때 누군가에게 방해를 받게 된다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이 시끄러움 속에서 내공을 수련하는 것은 집중력을 높여주는 효과도 있었다.
 “후우.”
 마침내 수련을 끝낸 가브리엘이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러고는 입술을 묘한 각도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어둑했던 방안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후후후, 천상의미소를 삼성(三成)까지 익혔군. 이 정도면 써먹을 데가 많을 거야. 올해 안으로 쾌활림도 대성을 이루자.”
 자리를 털고 일어난 가브리엘이 옷을 갈아입으려는 순간 밖에서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브리엘.”
 “으잉? 캐롤라인이 이 시간에 웬일이지?”
 가브리엘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매일의 오후는 캐롤라인과 보내기 시작한 뒤로부터는 캐롤라인이 아침에 찾아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의아한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 나가.”
 재빨리 옷을 갈아입은 가브리엘이 밖으로 나갔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히히히, 그냥. 심심해서.”
 캐롤라인이 몸을 꼬며 배시시 웃었다.
 ‘히야, 요것 봐라. 어제 그 일 때문인가 보네.’
 캐롤라인이 몸을 비비꼬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가브리엘이 눈빛을 번뜩였다.
 언제부터인가 가브리엘과 캐롤라인은 그 둘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는데 가브리엘이 이런저런 술수를 부리며 캐롤라인의 전신을 더듬는 것이었다.
 비록 어제도 결정적인 순간에 훼방꾼이 나타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어제 처음으로 가브리엘은 캐롤라인과 산책을 하다가 쉬는 도중 분위기를 잡으며 치마를 들치고 허벅지를 만졌었다.
 그때의 짜릿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당시 캐롤라인도 야시시함 속에 뒤섞여 있는 느낌을 맛보았다. 캐롤라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것을 본 가브리엘이 본격적인 작업(?)을 시도하려다가 훼방꾼이 나타나는 바람에 산을 내려온 것이었다.
 “오늘도 산책하러 갈래?”
 “응.”
 캐롤라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야호, 오늘 드디어 깃발을 꽂게 되는구나.’
 캐롤라인이 스스로 이렇게 말한 이상 깃발을 꽂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장소를 찾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 척박한 영지에는 사람이 없는 곳은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오늘은 아예 인적이 없는 곳을 찾으리라 굳게 다짐한 순간 전혀 예상치 못했던 훼방꾼이 나타났다.
 “가브리엘.”
 가브리엘과 캐롤라인이 거의 동시에 타르아킨 백작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오, 캐롤라인 왔구나. 그래 이 시간에 웬일이냐.”
 “그냥 놀러왔어요.”
 “그렇구나.”
 이 꼬맹이들의 엉큼한 생각을 전혀 모르고 있는 타르아킨 백작은 캐롤라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그런데 아빠는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에요?”
 “오늘 너와 함께 갈 데가 있단다.”
 “에엑? 오, 오늘이요?”
 가브리엘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것이냐.”
 “아, 아니에요. 그런데 어디를 가는데요?”
 가브리엘이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
 “네게 검을 하나 사주려고 한다. 베이트나 영지까지 다녀오려면 족히 며칠은 걸릴 것이다.”
 베이트나 영지는 국왕에게 귀속된 곳으로 타르아킨 백작이 누명을 쓰기 전 영주로 있던 곳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브리엘은 하늘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오늘에야 말로 캐롤라인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포부가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캐롤라인이 스스로 원하고 있는 이상 오늘이 아니라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아버지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내일··· 가면 안 될까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은 것인데 돌아온 대답은 실망 그 자체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그 검을 팔고 있는 상인이 떠날 수도 있다.”
 그 말에 가브리엘의 고개가 캐롤라인에게로 돌려졌다. 그런데 캐롤라인도 가브리엘과 마찬가지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어서 준비하고 나오너라. 그리고 캐롤라인 너도 집으로 돌아가고.”
 “···네.”
 캐롤라인이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발길을 돌렸다. 멀어지는 캐롤라인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가브리엘의 얼굴에는 간절함으로 가득했다.
 
 ***
 
 따각따각, 따각따각.
 타르아킨 백작이 가브리엘에게 선물한 검은 미스릴재질로 만든 것으로 희대의 명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토록 좋은 검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쉽게 살 수 없는데 운 좋게도 타르아킨 백작은 헐값이나 다름없는 가격에 검을 구입할 수 있었다.
 “가브리엘, 왜 그리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게냐. 혹시 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검을 보는 눈 만큼은 누구 못지않은 가브리엘이었다. 검을 쥔 사람으로서 좋은 검을 얻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가브리엘은 시종일관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마음에 들어요.”
 미스릴재질이라는 사실은 차제하더라도 검 자체의 제련도 훌륭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목소리가 영 마음에 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타르아킨 백작이 집요하게 물어오자 가브리엘이 아예 입을 꾹 닫아 버렸고 이에 타르아킨 백작의 입에서 가브리엘을 움찔하게 만드는 말이 흘러나왔다.
 “혹시 캐롤라인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그, 그게 아니라······.”
 당황한 가브리엘이 말을 더듬었다.
 “녀석아, 캐롤라인이 어디로 떠날 사람도 아닌데 뭘 그리도 보채는 것이냐. 여자란 자고로 시간을 가지고 은근하게 접근해야 그 깊이를 알게 되는 것··· 이, 이런, 지금 내가 어린 네게 무슨 추태를······.”
 타르아킨 백작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상대가 사춘기에 접어든 사람일수록 말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자칫 한 순간에 삐뚤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춘기의 나이일 때는 참된 교훈이 중요한 것이었다.
 “아빠.”
 “오냐.”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를 해주세요. 그때는 어떤 기분이었나요.”
 이 당돌한 물음에 타르아킨 백작이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어 세우고 가브리엘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가브리엘도 덩달아 말머리를 돌린 뒤 말을 멈추어 세웠다.
 “워워.”
 “그게 네게 도움이 될 것 같니?”
 “네 그럴 것 같아요.”
 “알았다. 오, 마침 저기 나무가 있구나. 저기서 잠시 쉬도록 하자꾸나.”
 나뭇가지가 무성한 아름드리나무를 발견한 타르아킨 백작이 그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이에 가브리엘도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워워워.”
 말을 멈추어 세운 타르아킨 백작이 말에서 내려 물주머니와 먹을 것을 챙겨들고 아름드리나무가 만들어낸 시원한 그늘 아래로 이동했다.
 “마셔라.”
 타르아킨 백작이 물주머니를 건네주었으나 고개를 가로저은 가브리엘이 나무에 등지고 앉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할까······.”
 “엄마하고 처음 만났을 때요.”
 “그래 그러니까 안젤라를 만났을 때가······.”
 타르아킨 백작이 추억을 회상하며 안젤라를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설명해나갔다. 당시 타르아킨 백작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 중에 단연 으뜸이었다.
 비적들을 토벌할 때도 항상 선두에서 싸웠으며 몬스터를 토벌할 때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면서도 우쭐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르아킨 백작을 마뜩치 않게 여기는 무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타르아킨 백작이 지금의 아내 안젤라를 만난 것은 30살 때였다. 친구들은 모두 장가를 가서 2세를 낳았지만 타르아킨 백작은 그때까지도 제 짝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안젤라를 만난 것이었다.
 안젤라를 처음 만났을 때 당시 타르아킨 백작은 새로운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운명.
 타르아킨 백작에게 안젤라는 삶의 운명이었다.
 안젤라를 향한 저돌적인 구애는 당연한 것이었고 결국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 아내를 처음 만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젤라를 향한 타르아킨 백작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상당한 권력을 쥘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영주를 자청한 것도 안젤라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의 정치판에 있다 보면 언젠가 사단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지방행을 택한 것인데 정적들은 타르아킨 백작을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휴우,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으로 들어가 내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운 자들에게 응징하고 싶지만······.”
 “드르렁, 쿠울.”
 코고는 소리에 말을 멈춘 타르아킨 백작이 가브리엘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어이없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녀석 하고는······.”
 물주머니를 들어 목마름을 해소한 타르아킨 백작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또 다시 추억을 회상했다.
 
 다음날 오후.
 가브리엘과 타르아킨 백작이 도착한 것은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반갑게 맞아주는 엄마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한 가브리엘은 검을 방에 두고 캐롤라인의 집으로 달려갔다.
 “캐롤라인, 캐롤라인.”
 가브리엘이 목청껏 캐롤라인을 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캐롤라인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근심이 가득한 얼굴의 제시카가 밖으로 나왔다.
 “소영주님 오셨네요.”
 “캐롤라인은 어디 갔나요?”
 그 말에 제시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에 가브리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제시카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며칠 전부터 시름시름 앓고 있어요. 의식도 가물가물하고 헛소리까지··· 이,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소영주님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제시카가 서둘러 말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이미 하고자 했던 말은 다 하고 난 뒤였다.
 “내가 한 번 봐도 돼요?”
 가브리엘이 알고 있는 무공 중에는 의술로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 있었다. 따라서 진맥으로 캐롤라인의 상태를 확인해 보려는 것인데 그런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제시카는 한 마디로 가브리엘의 말을 잘라버렸다.
 “안 돼요. 나중에 다시 오세요.”
 “아주머니.”
 “죄송해요. 이만 들어가 볼게요.”
 가브리엘의 말을 일축해버린 제시카가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가브리엘은 멍한 얼굴로 캐롤라인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캐롤라인, 갑자기 왜 아픈 거야.”
 그것은 오직 신만이 아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우격다짐을 해서라도 집안으로 들어가 캐롤라인의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렇게 된 이상 밤에 잠입을 하는 수밖에······.”
 가브리엘에게는 아무도 모르게 잠입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단지 그렇게 되면 소란이 일 수도 있기 때문에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을 택한 것이었다.
 “죽을병이 아니라면 반드시 고쳐줄 것이다.”
 의술을 기반으로 둔 무공이 아니더라도 만상조화심법이라면 죽을병아 아닌 이상 웬만한 병은 다 고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따가 보자.”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캐롤라인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던 가브리엘이 발길을 돌렸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아우우우~
 밤이 깊어지자 늑대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달도 뜨지 않아 세상은 암흑천지였다. 그런데 그런 암흑 속을 뚫고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으니 그 물체의 정체는 바로 가브리엘이었다.
 “어디보자.”
 혹시라도 캐롤라인 방에 프리모스나 제시카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가브리엘은 우선 귀를 기울여 캐롤라인의 방의 정황을 살폈다.
 “아무소리도 나질 않는 것을 보니 모두 잠든 모양이로군.”
 그렇게 결론을 내린 가브리엘이 지면을 박차고 올랐다.
 휘익.
 새처럼 날아가 캐롤라인 방의 창문에 달라붙은 가브리엘이 안력을 돋우어 방안을 살폈다.
 ‘이런 빌어먹을.’
 방안에는 캐롤라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시카도 캐롤라인이 누워있는 침대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캐롤라인의 상태만 확인해 보고 돌아가야겠군.”
 조심스럽게 창문을 연 가브리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에 손끝에 모아진 무형의 경력이 날아가 제시카의 수혈(睡血)을 때렸다. 그러자 제시카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줌마, 미안해요. 내일 아침까지 푹 자세요.’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잠입한 가브리엘이 제시카를 방바닥에 뉘였다. 그러고는 제시카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이불 속에서 캐롤라인의 팔을 꺼내 맥을 짚었다.
 ‘이상하네. 맥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고개를 갸우뚱거린 가브리엘이 만상조화심공을 끌어올려 캐롤라인의 체내로 흘려보내 조심스럽게 일주천(一週天)시켰다.
 ‘그렇군. 혈맥이 막혀 있었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으나 혈맥 중 한 곳이 거의 막혀버린 상태였다. 따라서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만약 가브리엘이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큰일 날 뻔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가브리엘이 캐롤라인의 막힌 혈맥을 뚫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혈맥을 뚫는 과정에서 충격이 전해진다면 캐롤라인이 죽을 수도 있기에 무척이나 난해한 작업이었다.
 어느덧 가브리엘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고 죽은 듯 반듯이 누워있던 캐롤라인의 몸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혈맥이 뚫려감에 따라 캐롤라인의 움직임이 확연해졌고 창백했던 안색도 혈색이 돌았다. 그와는 반대로 가브리엘의 전신은 땀으로 후줄근해졌다.
 “됐다.”
 캐롤라인의 몸에서 손을 떼어 낸 가브리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매로 이마에 가득한 땀을 닦아냈다.
 “···으음.”
 죽은 듯 누워 있던 캐롤라인이 신음을 흘리며 뒤척였다. 이에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가브리엘이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아직 신체가 내공에 적응하지 못한 걸까.”
 캐롤라인을 치료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공을 과다하게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아직 신체가 내공의 사용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종종 내공을 사용해 신체가 적응하게 만들어야겠어.”
 현기증이 가시자 의자에서 일어난 가브리엘이 바닥에 눕혀 놓았던 제시카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캐롤라인이 눈을 떴다. 비몽사몽간의 캐롤라인의 눈에 가브리엘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가브리엘?”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것을 듣지 못할 가브리엘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가브리엘은 창문 아래로 몸을 날렸다.
 “내가 헛것을 보았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캐롤라인이 다시 눈을 스르륵 감았다. 그러고는 몽환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오후.
 오전 수련을 마친 가브리엘은 점심을 거른 채 캐롤라인의 집으로 향했다. 캐롤라인의 집에 도착한 가브리엘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캐롤라인을 불렀다.
 “캐롤라인, 캐롤라인.”
 덜컹.
 문이 열리고 환한 표정의 제시카가 나왔다.
 “어머, 소영주님 오셨네. 어서 와요.”
 “캐롤라인은 좀 어때요?”
 그 말에 제시카가 빙그레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는데 그녀의 뒤에는 핼쑥한 얼굴의 캐롤라인이 서 있었다.
 “안녕.”
 캐롤라인이 손을 흔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좋아 보이네.”
 “응. 어제 네 꿈을 꾸었어. 그래서 병이 나은 것 같아.”
 ‘쿡쿡쿡, 그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 바보야.’
 그런 속내와는 달리 가브리엘이 제시카를 향해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아주머니, 배고파요. 밥 좀 얻어먹을 수 있죠?”
 “호호호, 물론이죠. 어서 들어와요. 마침 캐롤라인도 점심식사 전이에요.”
 캐롤라인이 손짓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집안으로 들어섰다.
 “와아.”
 캐롤라인의 집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외동딸 밖에 없는 집이라서 그런지 온갖 예쁜 것들로 장식되어 있어 가브리엘의 눈을 즐겁게 했다.
 “프리모스 아저씨는 공사장에 갔나 보네요.”
 “응. 오늘은 바쁘다고 그랬어. 주방으로 가자.”
 캐롤라인이 스스럼없이 가브리엘의 손을 잡아 주방으로 이끌었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제시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주머니, 오늘 메뉴는 뭐예요?”
 캐롤라인과 나란히 앉은 가브리엘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사과 파이에요. 우리 소영주님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으헤헤헤, 나 사과 파이 엄청 좋아하는데······.”
 가브리엘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캐롤라인이 포크를 가브리엘 앞에 놓아주었다.
 ‘흠흠흠, 그래도 서방님이 하늘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군.’
 흡족한 표정으로 캐롤라인을 힐끔거리던 가브리엘이 제시카가 등을 보이고 있을 때 캐롤라인에게 윙크를 보내자 캐롤라인도 환한 얼굴로 화답했다.
 ‘좋았어, 내일 콱 도장을 찍어버리자.’
 아무리 캐롤라인을 자신의 여자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막 병석에서 일어난 캐롤라인이었다. 따라서 오늘 일을 도모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지라 다음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와아, 냄새 죽인다.”
 맛난 냄새가 풍기자 가브리엘이 탄성을 터트렸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끈한 수프와 사과 파이가 식탁 위에 올려졌다.
 “맛있게 드세요.”
 “네엡, 고마워요.”
 가브리엘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하자 캐롤라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제시카가 슬쩍 자리를 피해주었다.
 “먹자.”
 가브리엘의 말에 캐롤라인이 사과 파이를 한 조각 떼어 가브리엘 접시에 담아주었다. 그러고는 배시시 눈웃음을 지었다.
 ‘큭큭큭, 보채지 마라. 그렇지 않아도 내일 도장을 찍기로 결정했다.’
 그런 속내와는 달리 가브리엘이 사과 파이를 떼어 내 입으로 가져갔다.
 “와우, 살살 녹는다. 녹아.”
 가브리엘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고는 부지런히 포크를 놀려 사과 파이를 입으로 우겨넣었다. 그러는 사이 수프가 적당하게 식자 수프가 담긴 접시 채로 입으로 가져가 후르륵 마셔버렸다.
 “커억.”
 캐롤라인과 나란히 앉아서 먹어서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가브리엘이 사과 파이와 수프를 깨끗하게 비우는 동안 캐롤라인은 사과 파이 반쪽도 먹질 못했다.
 “그런데 캐롤라인, 어제 내 꿈 꿨다며?”
 “응, 그랬어.”
 캐롤라인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떤 꿈인데?”
 “웅··· 내가 많이 아팠었는데 네가 신이 되어 나타나 나를 치료해주고 창문을 통해 나갔어.”
 ‘그거 꿈이 아니고 실제야.’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그런데 캐롤라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가 가브리엘을 멍하게 만들었다.
 “꿈에 나타난 네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어.”
 “커억, 내가 언제?”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아차 싶어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을 되 담을 수는 없었다.
 “······.”
 다행스럽게도 캐롤라인은 다그쳐 묻지 않고 가브리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물 잔을 집어 들고는 윙크를 해보였다.
 “곧 나를 데리러 온다고 말하고 창문으로 나갔어.”
 ‘정말 꿈을 꾼 거야 뭐야.’
 해골이 복잡해진 가브리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캐롤라인의 종알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에이, 복잡해. 꿈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렇게 결론을 내린 가브리엘이 검지로 망치소리가 나는 곳을 가리켰다.
 “공사장에 한 번 가보지 않을래?”
 “응, 알겠어. 나 옷 갈아입고 올게.”
 “알았어. 그럼 나 밖에서 기다릴게.”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시카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소영주님, 사과 파이 괜찮았어요?”
 “네. 아주 최고였어요. 자주 얻어 먹으로 와도 되죠?”
 “호호호, 물론이에요.”
 “그럼 나 갈게요.”
 고개를 숙여 인사한 가브리엘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핑크빛 화사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캐롤라인이 밖으로 나왔다. 너무나도 깜찍하고 앙증맞은 모습에 가브리엘이 멍한 눈으로 캐롤라인을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응? 아, 예뻐서. 그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린다.”
 “정말?”
 캐롤라인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고 그 순간 가브리엘은 캐롤라인을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주먹을 꼭 쥐며 참아냈다.
 
 
 
 
 
 
 
 제5장. 색기폭발
 
 
 
 
 
 
 드디어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오전 수련을 일찍 끝낸 가브리엘은 목욕재개를 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쿡쿡쿡, 이 녀석아, 오늘 네 소원을 풀어주마.’
 가브리엘이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며 불룩하게 솟은 곳을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캐롤라인을 어디로 데리고 갈까.’
 어디 동굴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동굴을 발견해 놓지 못했다. 따라서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기 마땅한 곳을 정해 놓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강 보다는 산이 낫겠지?”
 강은 모래사장이 있다는 이점은 있지만 무더운 여름이라 사람들의 눈에 뜨일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은밀하게 일(?)을 치르려면 인적이 없는 곳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나가보자.”
 밖으로 나선 가브리엘은 콧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나가다가 저만치서 다가오는 타르아킨 백작을 보고 몸을 홱 돌렸다.
 ‘제발, 그냥 지나가 주세요. 오늘은 저에게 관심을 갖지 말라고요.’
 하지만 그런 바램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가브리엘.”
 ‘윽.’
 가브리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어디 가려는 것이냐.”
 “헤헤헤, 바람 좀 쏘이려고요.”
 웃고는 있으나 억지로 웃는 것이기 때문에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오후에 아버지랑 함께 수련할 생각 없느냐.”
 공사장에 있어야 할 타르아킨 백작이 일찍 들어온 것은 아마도 가브리엘과 한번 겨루어보기 위해서 온 모양인데 가브리엘은 아버지와 겨룰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오늘 수련은 끝났어요.”
 “허허허, 그래? 알았다. 일찍 들어오너라.”
 다행히 타르아킨 백작은 가브리엘이 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이에 가브리엘은 혹시라도 타르아킨의 마음이 변할세라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편 타르아킨 백작과 마찬가지로 일찍 집으로 되돌아온 프리모스는 캐롤라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아내에게 물었다.
 “캐롤라인은 어째서 보이질 않는 것이오?”
 병석에서 일어난 지 고작 하루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로서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글쎄요. 소영주님과 놀고 있겠지요.”
 “당신도 참, 캐롤라인이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밖에 내보내는 것이오.”
 프리모스가 까칠한 반응을 보이자 제시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녀도 캐롤라인이 밖에 나가는 것 만류했다. 하지만 캐롤라인이 몰래 집을 빠져나간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캐롤라인이 소영주님과 노는 것도 좋지만 이제 그 아이도 10살이 되었으니 공부를 가르쳐야 할 것 아니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프리모스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닌지라 제시카가 군소리 없이 대답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저택 공사는 언제쯤 끝나게 되나요.”
 영주의 저택이 완공되면 프리모스 일가도 저택 안에서 살게 되는 터라 제시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휴우, 일손이 모자라기 때문에 아마 내년 여름쯤이나 되어야 끝날 것 같소.”
 “영지민들이 적어서 그런가요? 아니면 돈이······.”
 프리모스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본 제시카가 실언을 깨닫고 재빨리 입을 닫았다. 그녀의 친정은 상단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다면 공사도 올해 안에 끝낼 수도 있었다.
 이유 없는 도움을 받지 않는 타르아킨 백작의 영향을 듯 프리모스는 지금껏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처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돈 이야기를 했으니 역정을 내려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됐소. 그리고 없는 돈을 끌어 모아 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은 충분하오. 그러니 걱정하지 말구려. 피곤하니 좀 쉬어야겠소.”
 자리에서 일어난 프리모스가 방으로 들어갔다. 지난 며칠 동안 저택의 기초를 닦느라 새벽 별보고 나가서 저녁달이 뜰 때까지 일을 하다 보니 피곤이 누적된 상태였다.
 프리모스의 몸 상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제시카는 말없이 남편을 따라 들어가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의 전신을 안마하기 시작했다.
 
 ***
 
 가브리엘에게 칭찬을 들었던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나온 캐롤라인은 계곡을 끼고 올라가는 내내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그러면서도 두렵거나 하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앙큼하게도 캐롤라인은 일전에 가브리엘이 허벅지를 만질 때 느껴졌던 그 아스라하면서도 야시시한 기분을 맛보고 싶었던 터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크크크, 예쁜 것.’
 가브리엘의 머릿속에는 오직 캐롤라인의 나체로 가득했다. 그런 그의 귀에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가브리엘, 어디까지 올라가려고? 나 다리 아파.”
 캐롤라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은 어린아이들이 올라갈 수 없는 가파른 비탈길이 펼쳐져 있어 더 올라가고 싶어도 올라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산 아래에서부터 고작 30여 미터 밖에 올라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곤란한데······.’
 덩달아 걸음을 멈춘 가브리엘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우측 커다란 바위 아래 움푹 들어간 곳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저곳이 딱이다.’
 그런 속내와는 달리 가브리엘이 은근한 투로 물었다.
 “다리가 아파?”
 “웅.”
 “저기 보이지. 저기까지 엎어줄게. 업혀.”
 가브리엘이 등을 내밀자 잠시 머뭇거리던 캐롤라인이 가브리엘의 등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팔로 가브리엘의 목을 감았다.
 “읏샤.”
 캐롤라인을 업은 가브리엘이 일어섰다. 그러면서 그의 손바닥은 자연스레 캐롤라인의 엉덩이를 받쳤다.
 어린나이임에도 짜릿함을 느낀 것일까.
 가브리엘의 손바닥에 엉덩이에 닿는 순간 캐롤라인의 몸이 움찔거렸다.
 “헤헤헤, 캐롤라인 너 무지 가볍다.”
 “그, 그래?”
 엉덩이에서 전해지는 손길에 부끄러운지 캐롤라인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뒤 가브리엘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큭큭큭, 그래 바로 이 느낌이었어. 이 말랑말랑하고 탱탱한 느낌을 원했던 거야.”
 가브리엘은 바위 밑 움푹 파인 곳으로 가면서 캐롤라인의 탱탱한 엉덩이를 마음껏 주물렀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기분 좋은 감촉과 등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숨결로 인해 가브리엘의 아랫도리가 불룩해지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가브리엘의 손길이 거세질수록 캐롤라인이 내뿜는 열기도 강해졌고 그 뜨거운 입김이 가브리엘의 욕망의 불길에 부채질 하고 있었다.
 “캐롤라인, 다 왔어.”
 엉덩이에서 전해지는 이상한 느낌에 정신이 빼앗긴 캐롤라인은 가브리엘이 걸음을 멈춘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 그래······.”
 잠시 후에 벌어질 일을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가브리엘의 등에서 내린 캐롤라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만 기다려.”
 웃옷을 벗은 가브리엘이 바닥에 깔았다.
 “예쁜 옷이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 헤헤헤.”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가 천상의미소를 접한 캐롤라인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좋았어. 이제 도장을 쾅 하고 찍는 일만 남았다.’
 캐롤라인의 상태를 확인한 가브리엘이 쾌재를 불렀다. 그러고는 캐롤라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캐롤라인, 앉아.”
 이에 캐롤라인이 말없이 가브리엘이 벗어 놓은 웃옷 위에 앉았다. 그러자 캐롤라인 옆에 바짝 붙어 앉은 가브리엘이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캐롤라인.”
 “웅.”
 “일전에 내가 네 허벅지 만졌을 때 느낌 어땠어?”
 “······.”
 캐롤라인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에 가브리엘이 캐롤라인 귀로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싫었어? 아니면 좋았어? 느낌이 어땠어?”
 뜨거운 입김이 3연타로 귀속으로 파고들자 캐롤라인이 목을 움츠렸다.
 “어서 말해봐.”
 “그, 그게······.”
 나쁜 느낌은 아니었지만 어린아이 입장에서는 꼭 좋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또 다시 느껴보고 싶은 그런 느낌이기도 했다.
 “싫으면 다시는 만지지 않을게.”
 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한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계획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어떤 말을 해야 캐롤라인이 스스로 무너질지 수도 없이 연구도 했고 또한 만약을 위해 천상의미소도 익혀두었기 때문에 가브리엘은 거사(?)가 꼭 성공하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아, 아니야. 조, 좋았어.”
 이 말은 허벅지를 또 만져도 좋다는 허락과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먹이를 덥석 물지 않고 뜸을 들였다.
 “캐롤라인, 나를 좀 봐.”
 이에 캐롤라인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런 캐롤라인의 눈에 혼을 쏙 빼놓는 미소가 들어왔다.
 “나 좋아?”
 “······.”
 어린아이답지 않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캐롤라인의 모습이 가브리엘의 마음을 더욱 즐겁게 해주었다.
 “싫어?”
 “아니··· 좋아.”
 캐롤라인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야 가브리엘이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드레스 위로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움찔거림.
 이미 아랫도리는 불끈하게 치솟아 올라 있는 상태지만 가브리엘은 어린아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서두르지 않았다.
 “괜찮아?”
 “으응.”
 캐롤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가브리엘의 손바닥이 살살 움직였다.
 때로는 비궁(秘宮) 쪽으로.
 때로는 좌우로 움직이기도 했고 원을 그리기도 했다.
 “하아.”
 캐롤라인이 어깨를 끄게 들썩이며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캐롤라인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기분이 어때?”
 “···좋아.”
 그 말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브리엘의 혀가 캐롤라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억.”
 캐롤라인의 입에서 단발마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간지러우면서도 전신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이 굉장한 느낌은 캐롤라인의 사고를 정지시켜 버렸다.
 “가, 간지러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지 캐롤라인이 가브리엘의 머리를 떼어 놓으려고 했다. 그 순간 가브리엘의 손이 드레스를 들추고 들어오자 캐롤라인의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가만히, 가만히 있어. 기분 좋게 해줄게.”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로 올라오는 짜릿함.
 일전에 가브리엘이 허벅지를 만질 때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그와 함께 귀에서 전해지는 이상한 느낌에 캐롤라인 전신의 맥이 탁 풀어졌다.
 “좋아?”
 가브리엘이 또 다시 부끄러운 질문을 해왔다. 정말이지 이 정도면 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으응.”
 “너 이제 내 여자지?”
 ‘너는 이제 내 여자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캐롤라인의 몸이 오그라들었다.
 “말해봐. 너는 누구 거야.”
 “가브리엘, 네 여자야.”
 그때 가브리엘의 손이 비궁을 와락 움켜쥐었다.
 “어억.”
 허벅지를 만질 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느낌에 캐롤라인이 단발마의 비명을 터트렸다.
 “이건? 이건 누구 거야.”
 “······.”
 정신이 몽롱해진 나머지 캐롤라인은 가브리엘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그런데도 가브리엘은 집요할 정도로 질문을 던졌다.
 “이건 누구 거야?”
 “가브리엘 네 것.”
 마침내 가브리엘이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내 거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
 “······.”
 또 다시 말문이 막혀버린 캐롤라인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드레스에서 손을 빼낸 가브리엘이 캐롤라인의 얼굴을 잡아 자신에게 돌렸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 속에 녹아나 있는 마력에 캐롤라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흐흐흐, 성공이다. 이제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쾌재를 부른 가브리엘의 손이 다시 드레스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또 다시 캐롤라인의 귀속으로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물었다.
 “남자 것 본 적 있어?”
 “아니······.”
 캐롤라인이 여전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가브리엘은 집요할 정도로 요상한 것만 물었다.
 “그럼 남자하고 여자 그것이 다른 것도 모르겠네.”
 “으응.”
 캐롤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드레스에서 손을 빼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은 가브리엘이 잔뜩 화가 나 있는 음경으로 이끌었다.
 “어머, 이, 이게 뭐야?”
 깜짝 놀란 캐롤라인이 토끼눈을 뜨며 물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몽둥이를 왜 바지에 넣고 다녀?”
 “이건 몽둥이가 아니라 남자 그것이야.”
 그 말에 캐롤라인이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자의 그것이 여자와 다르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구멍이 있잖아.”
 “응, 맞아.”
 “남자의 그것은 그 구멍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진 거야.”
 “누가 만들었는데?”
 “그거야 신이 만들었지.”
 신이 만들어졌다는 말에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캐롤라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너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안 거야?”
 엉뚱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가브리엘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시간을 끌면 안 되겠다.’
 일단은 콱 눌러 놓은 뒤 대충 얼버무리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가브리엘이 대답 대신 드레스로 손을 넣어 비궁을 움켜잡았다.
 “자, 잠깐만.”
 가브리엘의 손길을 제지하려고 했던 캐롤라인은 또 다시 환상의미소를 보고야 말았다. 그 미소를 접하는 순간 몸이 나른해지고 힘이 쭉 빠져나갔다.
 속옷 위로 살살 비궁을 문지르던 손길이 마침내 속옷 안까지 파고들었다. 그 순간 캐롤라인이 본능적으로 허벅지를 붙였다.
 “괜찮아. 그리고 이건 내 거잖아.”
 그 말에 최면에 걸린 듯 바짝 붙였던 허벅지가 살며시 벌어졌다. 그러자 가브리엘의 손길이 털 하나 없는 매끈한 비궁으로 파고들었다.
 “으음.”
 옷 위로 만지는 느낌과는 또 다른 느낌이 전해지자 캐롤라인이 신음을 흘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캐롤라인을 천천히 눕히고는 입술을 부딪쳐갔다.
 “흐읍.”
 가브리엘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캐롤라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러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고 물컹한 살덩이가 입안으로 침입했다.
 “뭐 으읍.”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가브리엘은 캐롤라인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입안으로 침입한 혀에 강렬하게 저항을 했지만 혀가 뒤엉키는 순간 전율적인 느낌이 전해지자 캐롤라인은 저항을 멈추었다.
 “읍읍읍, 읍읍.”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캐롤라인은 자신의 혀로 입안에서 노니는 가브리엘의 혀를 휘감고 강하게 빨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더럽게만 여겼던 타인의 침이 벌꿀보다도 달다는 것이었다.
 마치 젖먹이 아이가 엄마 젖을 빨듯 캐롤라인은 가브리엘의 혀를 휘감고 빨아 당겼다. 이런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란 사람은 오히려 가브리엘이었다.
 ‘설마 캐롤라인이······.’
 불현듯 가브리엘의 뇌리에 선천성 색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캐롤라인이 보이고 있는 지금의 행동 그것은 선천적 색녀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지금은 다른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가브리엘이 캐롤라인의 입술에서 떼어 낸 입술을 아래로 가져갔다. 턱 선을 따라 목까지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던 혀가 더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면서도 비궁을 장악한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기분이 이상해······.”
 “이상한 게 아니라 좋은 거야.”
 여체에서 입술을 떼어 내고 대답한 가브리엘이 드레스의 어깨 끈을 밑으로 내렸다. 그러고는 어깨 끈을 통해 캐롤라인의 팔을 빼냈다.
 “뭐 하려고······.”
 “내 맘이야. 너는 내 것이니까.”
 야릇한 말로 대답한 가브리엘이 다시 캐롤라인의 목으로 입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잠시 멈추었던 혀의 여행을 이어갔다.
 “흐윽.”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혀가 방긋해지기 시작한 가슴으로 잇대지자 캐롤라인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가브리엘, 나 이상해. 미치겠어······.”
 캐롤라인의 후끈 달아오른 목소리는 가브리엘을 더욱 집요하게 만들었다. 봉긋하게 자라나기 시작한 봉우리에서 겨드랑이로 겨드랑이에서 다시 밑으로 여행해 나가는 혀는 나체로 변해가는 캐롤라인의 전신을 적시었다.
 그리고 마침내.
 10살 여아의 육체가 벌거숭이로 변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전율적인 쾌감에 가녀린 육체는 바들바들 떨었다.
 “어억.”
 뜨거운 입김에 비궁을 달구자 가녀린 여체가 작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흐읍.”
 얼마 만에 맡아보는 비궁의 냄새인가.
 얼마 만에 접해보는 비궁의 신비함이란 말인가.
 가브리엘은 매끈한 비궁을 정신없이 유린했다. 아니 가브리엘의 자아(自我)가 오랜만에 접한 비궁에 흡입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가브리엘의 자아를 흡수하고 있는 비궁의 주인인 캐롤라인도 제정신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다.
 촉촉한 살덩이가 비궁을 때릴 때마다 구름 위를 노니는 느낌이었고 이따금씩 느껴지는 강렬한 쾌감에 엔돌핀이 마구 솟구쳤다. 그 바람에 어린나이임에도 캐롤라인은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가브리엘, 나 좀 어떻게 해줘.”
 그런 애원에도 불구하고 게걸스럽게 변한 가브리엘의 입은 집요할 정도로 비궁을 유린했다. 이에 바들바들 떨고만 있던 캐롤라인이 벌떡 일어나 불가사의한 힘으로 가브리엘의 머리를 떼어 냈다.
 “나도 해볼래.”
 그 말에 가브리엘이 일어나 똑바로 서서 바지를 까 내렸다.
 태앵.
 자유를 되찾은 음경이 힘찬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음경은 캐롤라인의 입안으로 다시 구속되고 말았다.
 “읍읍읍.”
 가브리엘이 캐롤라인의 머리를 잡고 허리를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에 음경이 목젖을 때리자 캐롤라인이 적지 않게 놀랐다. 하지만 머리를 잡힌 터라 입안에 든 것을 뱉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음경을 머금었을 때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질 못했고 음경이 목젖을 때릴 때마다 불쾌감마저 전해졌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목젖을 때리는 충격이 좋은 느낌으로 변했다. 또한 입안을 채우기 시작한 애액도 감미롭게만 느껴졌다.
 “어억, 나, 나온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지 못했던 캐롤라인은 비릿한 향을 풍기는 액체가 입안을 가득 채우자 고개를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우악스러운 힘으로 캐롤라인의 머리를 자신의 사타구니 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입안에 든 것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꿀꺽꿀꺽.
 비릿한 향을 풍기는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구역질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끝 맛이 그 어떤 음식보다도 더 맛있게 느껴졌다.
 “크크크, 좋아, 너무 좋아.”
 가브리엘이 캐롤라인의 얼굴로 사타구니를 밀어 붙이며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누워봐.”
 캐롤라인의 입에서 음경을 빼낸 가브리엘이 양 검지로 캐롤라인의 어깨를 살며시 밀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힘차게 껄떡거리고 있는 음경을 캐롤라인의 입에 물려주고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비궁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이 냄새 이 맛 너무 좋아.’
 내면에 잠자고 있던 색기가 폭발한 것인가.
 캐롤라인이 일렁이고 있는 가브리엘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아래로 내릴 때는 강하게 끌어당기며 머리를 들어 올렸고 허리가 올라갈 때는 머리를 내리며 강하게 빨아 당겼다.
 “어억.”
 사정으로 인해 민감해진 음경에 강한 자극이 전해지자 가브리엘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복수라도 하려는 양 번들거리는 비궁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을 강하게 흡입했다.
 “가브리엘, 나 미치겠어. 막 부서지고 싶어.”
 결코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어른이라고 해도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만 보더라도 캐롤라인은 가브리엘이 예상한 것처럼 선천성 색녀가 맞는 모양이었다.
 “후욱.”
 캐롤라인의 입에서 음경을 뽑아 낸 가브리엘이 자세를 바꾸었다. 그러고는 빨갛게 달아오른 캐롤라인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여체 위로 자신의 체중을 실었다.
 “흐음.”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가브리엘이 몸 위로 올라오자 캐롤라인의 다리가 활짝 벌렸다. 또한 가브리엘의 목을 팔로 휘감으며 비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조금 아플 거야. 참을 수 있지?”
 “응, 참을 수 있어. 아니 아무리 아파도 참아내고 말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가브리엘은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그런 탓에 파르르 떨고 있는 캐롤라인을 힘껏 끌어안고만 있었다.
 “한개도 안 아픈데?”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플 리가 없었다. 가브리엘에게 어떻게 하는지 대충 듣기는 했지만 그 말은 야릇함의 쓰나미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이제 시작할 거야.”
 상체를 들어 올려 대답한 가브리엘이 허리를 비틀었다. 그러자 캐롤라인의 다리가 더욱 벌어졌다.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 기억은 있지만 실전경험은 없는 터라 쉽게 결합이 되질 않았다.
 가브리엘의 허리가 이리저리 뒤틀리는 가운데 캐롤라인은 비궁에서 전해지는 야릇한 느낌에 쌕쌕거리며 고개를 가만히 젖혔다.
 그 순간.
 비궁이 달구어진 꼬챙이에 꿰뚫리는 통증이 전해졌다.
 “아악.”
 얼얼하기는 했지만 참지 못할 만큼 지독한 고통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비명을 지른 것은 뭔가가 자신의 몸속으로 꿰뚫고 들어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이상해. 계속 들어오고 있어.”
 아직 완전히 결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질감이 계속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푸욱.
 마침내.
 두 육체가 완벽하게 하나로 결합되었다.
 “하아······.”
 비궁에서 전해지는 아련한 통증 이런 느낌 정말이지 굉장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 느낌이 캐롤라인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색기(色氣)를 일깨우고 있었다.
 이제 10살의 어린나이에 어른의 그것처럼 커다란 음경에 꿰뚫리게 되면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캐롤라인에게는 아련한 통증마저 황홀하게 느껴졌다.
 “어억.”
 좁디좁은 비궁의 근육들이 마구 꿈틀거리며 침입자를 밀어내려하고 있는 그 느낌이란 가히 환상 그 자체였다. 가브리엘이 헛바람을 들이키는 이유였다.
 “가브리엘, 이게 한 거야?”
 “아니. 이제 시작이야.”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음경에서 전해지는 황홀함을 견뎌내던 가브리엘이 천천히 허리를 일렁이며 대답했다.
 “어어, 움직이니까 기분이 이, 이상해.”
 몸속으로 꿰뚫고 들어온 무언가가 천천히 들락거리자 캐롤라인이 가브리엘의 목을 힘껏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뭐랄까.
 벌레가 피부 위를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부드러운 솜으로 간질이는 느낌이랄까.
 그와 비슷한 느낌이 비궁 속에서부터 전해지는 기분이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이글거리는 태양열에 달구어진 대지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비궁에서 시작된 야릇한 기분은 척추를 타고 올라가 대뇌를 강타하면서 엔돌핀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 강렬한 쾌감은 캐롤라인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색기를 폭발시켜 버렸다.
 “가브리엘, 나 미치겠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캐롤라인의 몸속에서 뜨거운 분출이 일어났다. 강한 분출은 자궁을 강하게 때렸고 그 느낌이 캐롤라인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엄마, 어, 엄마, 나, 난 몰라······.”
 무엇을 모르겠다는 것인지.
 가브리엘의 목을 꽉 끌어안은 캐롤라인이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헉헉헉, 헉헉헉.”
 나른해진 육체를 캐롤라인의 몸에 의지한 채 거친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가브리엘은 ‘이게 아닌데’라는 아쉬움에 휩싸였다.
 결합한지 불과 1분여.
 쾌활림을 펼칠 시간도 없이 끝나 버렸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남자로서 이런 싱거운 결말은 쪽팔림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 찰나에 불과한 시간임에도 캐롤라인도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끝난 거야?”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캐롤라인은 축 쳐져 가쁜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가브리엘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응.”
 “와아, 이게 어른들이 하는 그것이란 말이지? 정말 굉장했어. 이런 느낌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이 순간.
 가브리엘은 캐롤라인이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캐롤라인이 자신을 위로하는 것으로 여겼다.
 “미안해······.”
 “뭐가?”
 “처음이라 너무 빨리 끝났어.”
 그 말에 캐롤라인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럼 더 오래 할 수 있는 거야?”
 “응, 자주 하다보면 30분 이상 아니 1시간 정도는 할 수 있을······.”
 가브리엘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음경을 감싸고 있는 비궁의 근육들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선천적 색녀란 말인가.’
 “그럼 한 번 더 해봐.”
 가브리엘의 생각을 확인이라도 시켜주 듯 캐롤라인의 입에서 야릇한 말이 흘러나왔다.
 “괜찮겠어?”
 아직도 음경이 단단해져 있는 상태라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었다. 단지 캐롤라인이 걱정 되서 물은 것이었다.
 “한개도 아프지 않았어. 오히려 기분이 좋던걸. 이런 느낌이라면 매일 해도 괜찮을 것 같아.”
 의도적인 것인지 몰라도 대답을 하는 가운데 음경을 조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정말 아프지 않았어?”
 “응.”
 ‘설마 캐롤라인이 그 전설적인 옥문을 가진 체질이란 말인가.’
 전설적인 옥문이란 바로 옥문이 크고 널찍하지만 자궁도 얕고 애액도 넘칠 정도로 많으며 조이는 힘도 강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런 옥문을 가진 여자는 나이에 관계없이 처음 관계를 가질 때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며 쉽게 절정에 오른다는 것이다.
 이 전설적인 옥문을 가진 여자는 천년 혹은 만년마다 1명씩 태어난다는 전설이 있다. 이런 옥문을 가진 여자와 관계를 가져도 남자는 체력이 쉬 고갈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전설의 옥문을 가진 여자와 인연을 맺은 남자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캐롤라인의 나이가 어리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전설의 옥문을 가진 여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결론에 이르자 캐롤라인이 억지로 고통을 참았을 것이라는 죄책감이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이런 여자는 확실하게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쾌활림을 펼친 상태에서 한 번 더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럼 한 번 더 한다.”
 “응, 이왕이면 오래오래 해줘.”
 그 말에 가브리엘이 쾌활림의 구결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그의 전신이 불처럼 달아올랐고 음경은 더욱 단단하고 커졌다. 그와 함께 음경에서 쾌활림을 운용한 진기가 캐롤라인의 체내로 흘러 들어갔다.
 “하아, 너무 좋아······.”
 비궁을 통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기운에 캐롤라인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조금 전 관계를 가졌을 때와는 달리 가브리엘의 동작이 리드미컬하게 변했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또 때로는 허리를 빙빙 돌려가기를 반복했다.
 “데, 가브리엘, 나, 나, 나······.”
 너무나도 강렬한 쾌감에 캐롤라인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절대쾌감이 전해지는 쾌활림이 더해진 행위에 어찌 미치지 않겠는가.
 지금 이 순간.
 캐롤라인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오직 욕망의 화신에 길들여진 색기에 가득한 여자였다.
 입술 사이로 비집고 흘러나오는 비음은 그 어떤 여자들이 흘리는 비음보다도 더 달짝지근했고 위에서 찍어 누르는 폭군의 움직임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행동은 창녀보다도 더 음란했다.
 “하아앙. 더 세게··· 좀 더 강하게······.”
 하지만 가브리엘의 행위는 다시 시작할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리드미컬했다.
 “여, 여보······.”
 혹시라도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 것일까.
 어린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라고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런 비음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가브리엘의 움직임이 처음과는 달리 격렬하고 거칠게 변했다. 그리고 빠르기까지 했다.
 “헉헉헉, 헉헉헉.”
 가브리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이 캐롤라인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아앙, 나 또 기분이 이상해지려고 해.”
 어수룩하기는 하지만 캐롤라인의 허리가 가브리엘의 움직임에 맞추어 상하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캐롤라인의 그런 행동이 가브리엘의 거친 움직임을 불러왔다.
 쾅쾅쾅.
 바위라도 부셔버리려는 것일까.
 그러나 캐롤라인의 육체는 이미 대지의 여신처럼 강해진 상태였다.
 산을 무너트릴 기세로 찍어 누르는 격렬한 허리 놀림에도 캐롤라인의 육체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브리엘의 움직임이 격렬해질수록 캐롤라인의 움직임도 덩달아 격렬하게 변했다.
 “헉헉헉, 헉헉헉.”
 이번에도 가브리엘이 먼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쾌활림을 펼치고 있음에도 가브리엘이 먼저 절정에 도달한다는 것은 캐롤라인이 전설의 옥문을 가진 체질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우우우, 캐롤라인.”
 가브리엘의 입에서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이에 캐롤라인이 사지로 가브리엘의 전신을 옥죄었고 그 순간 가브리엘의 전신이 빳빳하게 굳어갔다.
 “커어억.”
 “나 구름 위를 날고 있어.”
 이번에도 가브리엘과 캐롤라인은 동시에 절정에 올랐다. 나른해질 대로 나른해진 가브리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런 그와는 달리 가브리엘의 전신을 옥죄고 있는 캐롤라인의 사지는 쉼 없이 꿈틀거렸다.
 “뭐야. 1시간 이상 한다며?”
 그 말에 가브리엘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전설의 옥문을 가지고 태어난 캐롤라인.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캐롤라인의 주체할 수 없는 색기폭발은 쾌활림도 소용이 없었다. 의기양양하게 도장을 콱 찍겠다는 계획은 도리어 전설의 옥문을 가지고 태어난 캐롤라인의 색기를 폭발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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