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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관중 시점 1권 (1)

2019.04.29 조회 3,517 추천 28


 # 프롤로그
 
 
 “넌··· 누구야??”
 혁민은 분명히 경기장에 있었다.
 그의 소속팀 노팅엄 포레스트(Nottingham forest)의 홈구장인 시티 그라운드 (City Ground)에.
 그러나 한순간,
 전방의 시야가 새카맣게 물들며 모든 것이 암흑으로 뒤덮여 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오는 한 남자.
 주변이 어두워서일까.
 타오르는 그의 적안(赤眼)이 무척이나 강렬하고,
 위험하게 보였다.
 “너희들은 우리를 ‘신’이라 부르더군.”
 적안(赤眼)을 지닌 남자는 입도 열지 않은 채,
 혁민에게 울림으로 말을 걸었다.
 “여긴 어디지?”
 “네가 항상 지쳐서 쓰러지던 홈 경기장이다.”
 “······.”
 혁민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삼키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 암흑천지가 시티 그라운드라고?
 혁민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았으나,
 가장 핵심적인 질문 하나를 던졌다.
 “내 앞에 나타난 이유가 뭐야??”
 “너의 후원자가 되어주고 싶다.”
 “후원자??”
 “그래··· 타고난 재능은 발휘하지도 못한 채 밑바닥에서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장점은 땅에 파묻어버리고 말이야.”
 “네가 뭘 알아··· 네가 날 위해 뭘 할 수 있다고!!”
 치부를 건드려서일까.
 아니면 이 비현실적인 공간이 감정의 절제를 허물어버렸기 때문일까.
 혁민은 적안의 남자에게 절규하듯 따져 물었다.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혀온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처럼 전신이 욱신거렸다.
 “별다르게 해주는 것은 없어··· 그저 내 눈알 한쪽을 떼어줄 뿐이지.”
 “뭐, 뭘 떼준다고??”
 “흐흐흐흐··· 이것으로 너와 나는 당분간 하나다.”
 
 샤아아아악!!
 “······!!”
 와아아아아!!
 
 “잘 좀 해라!! 이 병신같은 놈들아!!”
 “홈에서 몇 골을 처먹히는 거야!!”
 
 ‘꿈이었나···.’
 잠에서 깬 혁민의 눈앞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수세에 몰리고 있는 자신의 팀, 노팅엄의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
 그리고 뒤이어 호세 미구엘 코치의 따가운 시선이 혁민에게 날아와 꽂혔다.
 ‘경기 중에 벤치에서 졸고 있는 게 말이나 되냐’는 눈빛.
 혁민은 머쓱하게 양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비볐다.
 ‘나도 미쳤지. 시합 중에 잠이 들다니.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그런데,
 얼굴을 비비던 혁민의 오른쪽 눈에서 화끈한 감각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응??’
 연신 눈을 깜빡여 보지만, 그 이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맙소사···.”
 벤치의 투명한 플라스틱 벽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혁민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거울 앞에 선 익숙한 얼굴의 남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드 아이.
 왼쪽은 원래 그렇듯 갈색 눈동자였지만,
 오른쪽은 아까 ‘그 녀석’의 눈동자와 똑같은 적갈색 빛의,
 아니 타오르는 듯한 적안(赤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
 ‘꿈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혁민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시선을 전방 경기장으로 향했다.
 ‘응?’
 그리고 축구를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선’과 마주했다.
 ‘저게 뭐야···??’
 혁민은 눈을 부릅뜨고 눈앞의 경기와 그 선의 연관성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혁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후방 포백 라인의 최후방을 기점으로 수시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하는 붉은 선.
 그 선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오프사이드(Off-side) 라인···!!’
 붉은 선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오프사이드’를 판정하는 마지노선이었다.
 「마음에 드냐??」
 두근두근 세차게 뛰며 고양하는 심장 소리에 한편에,
 녀석의 ‘울림’이 들려왔다.
 
 
 # 유희의 신 루디케(Ludice)
 
 
 유희의 신 루디케(Ludice).
 관장하는 분야가 분야인 만큼,
 루디케는 인간 세상의 골치 아픈 정치판이나 쩐의 전쟁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루디케가 오직 관심에 두는 분야는 스포츠.
 그중에서도 루디케는 축구를 가장 좋아했다.
 몸과 몸이 부딪치는 격렬함,
 그러면서도 치열한 지략 대결과 심리전이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축구란 종목에
 그는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그동안 루디케가 눈여겨 봤던 수많은 축구 스타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화려한 ‘드리블’의 소유자라는 점이었다.
 
 수비 진형을 무너뜨리다 못해 아예 파괴해 버리는 브라질의 레전드 호나우두.
 과연 볼을 빼앗는 것이 가능한지 의심스러울 만큼 볼 키핑의 달인 지네딘 지단.
 그리고 ‘외계인’이라 불리며 현란한 테크닉의 극치를 보여 주던 호나우지뉴까지.
 
 무료함이 일상인 루디케에게 그들이 펼치는 기예는 그 자신이 관장하는 ‘유희’ 그 자체였다.
 그리고 때는 2018년.
 루디케는 늘 그랬듯 화려한 드리블러들의 플레이에 심취해 있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수비수를 따돌리는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비롯해 드리블이 뛰어난 선수들은 대부분 루디케를 만족시켰다.
 단 한 명.
 강혁민을 제외하고 말이다.
 혁민의 드리블 재능은 전설로 칭하는 그들과 견주어 모자람이 없었다.
 아니, 드리블 하나만 놓고 따지면 그들이 가진 잠재력보다 한 차원 위라고 느낄 정도였다.
 유소년 시절부터 화려한 발재간을 기반으로 ‘차세대 판타지 스타’라고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혁민.
 그러나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입성한 프리미어리그에서 ‘커다란 벽’을 경험하게 되고,
 3년이 지난 지금 프리미어리그는커녕 2부리그의 후보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혁민이 마주한 최대의 ‘벽’은 바로,
 ‘시야’였다.
 혁민은 눈앞의 공과 수비수 이외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온 더 볼 상황만 되면 이른바 ‘터널 시야’ 상태가 되는 것.
 그러나 유소년 시절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단 한 명을 제쳐 두기만 하면 한동안은 패스하든 드리블을 하든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럽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인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수비수 한 명을 벗겨낸다 해도 이전처럼 빈 공간이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프리미어리그의 팀들은 대부분 포백 라인을 기반으로 한 수비 시스템을 즐겨 쓰면서 ‘사람’이 아닌 ‘공간’에 대한 수비에 가치를 두었다.
 그리고 그 견고한 수비는 시야가 좁은 혁민에게 특히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미드필드의 위치에서 어정쩡한 상태로 볼을 질질 끌던 혁민은 팀의 공격 흐름을 까먹기 일쑤였고,
 장점인 드리블은 오히려 공격 템포를 저해하는 요소처럼 보였다.
 혁민이 프리미어리그에서 적응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피지컬’이었다.
 ‘드리블을 잘한다’라는 말을 들으려면 크게 두 가지를 잘 해내야 한다.
 수비수를 제칠 수 있는 돌파력.
 그리고 좀처럼 볼을 빼앗기지 않는 볼 키핑.
 몸싸움이 심하기로 유명한 프리미어리그에서,
 발재간이 뛰어난 혁민을 가만히 내버려 둘리 없었다.
 퍽!!
 “크윽!!”
 “오케이, 여기야!!”
 “이봐 심판!! 지금은 완벽히 파울이잖아!!”
 위험 지역이 아닌 경우,
 수비수들은 대부분 파울의 경계를 넘나드는 차징과 태클로 혁민을 상대했다.
 그들은 혁민이 드리블을 시도할 새도 없이 밀착 마크하며 괴롭혔고,
 여차하면 파울이 불리더라도 그만이라는 각오로 들이댔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몸싸움을 이겨내면서 공을 소유하기엔 혁민의 피지컬이 너무 약했다.
 
 185cm의 신장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75kg이 채 넘지 않는 그의 체격은 탄탄한 몸을 가진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떡대들이 들러붙어 거친 수비를 전개하기 시작하자,
 혁민은 드리블의 한쪽 날개인 ‘볼 키핑’을 잃어버렸다.
 가뜩이나 시야가 좁은 선수가 볼 키핑마저 안 되니,
 혁민은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무조건 밀착 마크한 수비수를 벗겨내야 한다는 압박감.
 그것은 혁민의 재기 발랄한 발끝마저 무디게 만들었다.
 
 유소년 시절부터 강혁민이라는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보았던 루디케(Ludice).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의 플레이를 감상하던 루디케의 ‘울림’은 날이 갈수록 점점 포악해지기 시작했다.
 ‘저저저 멍청한!!’
 ‘무슨 탱탱볼처럼 튕겨 나가네. 어휴!’
 ‘거기서 패스를 해야지 왜 공을 가지고 있냐!!’
 그리고 혁민에게 쏟아지는 탄식은 비단 루디케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큰 기대를 품고 혁민을 응원하던 팬들은 예상치 못했던 그의 부진을 질타하기 시작했고,
 나이가 어린 혁민은 점점 위축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드리블에 자신을 잃은 혁민은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한 지 2년 만에 계약을 해지하기에 이른다.
 말이 좋아 상호 협의에 따른 계약 해지지,
 방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후 혁민은 2부리그인 노팅엄 포레스트(Nottingham Forest FC)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2부 리그라고 해서 지역 특유의 거친 플레이 스타일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노팅엄의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시즌 초반 혁민을 중용했으나, 얼마 안 가 그를 스타팅 라인업에서 제외해 버렸다.
 혁민을 활용할 방법을 궁리하던 카랑카 감독은 급기야 혁민에게 포지션 변경을 명령했다.
 왕성한 활동량을 눈여겨본 감독이 그에게 볼란테(Volante,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부여한 것.
 혁민은 감독의 의중대로 필드를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그저 열심히 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중앙 미드필더와 달리 볼란테가 볼을 잡았을 때의 위치는 대부분 자기 팀 진영 쪽이었고,
 이런 위치에서 드리블 돌파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시야가 좋았다면 천천히 빌드업을 진행하거나 사비 알론소처럼 대륙 횡단 패스를 시도해 보았겠지만,
 혁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대부분 수비수에게 백 패스를 하는 것뿐이었다.
 전문적으로 볼란테 자리에서 훈련한 게 아니었으니 수비 실력이 좋을 리 만무.
 결국, 혁민은 노팅엄 포레스트에서도 벤치 워머가 되고 말았다.
 ‘차세대 판타지 스타’로 기대받던 선수가 3년 만에 무색무취의 2부 리그 후보 선수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도저히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직접 내려왔지.」
 「‘······.’」
 루디케의 ‘울림’은 잠에서 깨어났는데도 똑똑히 들려왔다.
 혁민은 루디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 ‘울림’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루디케가 히죽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혁민은 아직도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으나,
 지금도 화끈거리는 오른쪽 눈이 똑똑히 전하고 있었다.
 이건, 실화라고.
 「“이 눈. 정말 내게 준거야?”」
 오른쪽 눈에 대해 혁민이 물었다.
 「그래. 정확히 말하면 ‘일부만’ 준 것이지.」
 「“일부라··· 언젠가는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인가?”」
 「그런 것도 있지만··· 이곳 세계에도 법칙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야. 모든 능력을 부여하기에는 ‘간섭력(干涉力)’이 모자라거든.」
 「“간섭력(干涉力)??”」
 「흐흐흐흐.」
 섬뜩한 ‘울림’에 혁민의 관자놀이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신과 비슷한 존재라더니. 웃음소리는 악마가 따로 없군.’
 「그런 말 많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울림’에 혁민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젠장. 생각하는 게 전부 너에게 들리는 건가?”」
 「내가 귀를 기울이는 동안에는.」
 혁민은 루디케가 자기 생각을 엿본다는 게 내심 불쾌했지만,
 그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붉은 선에 더 신경이 쓰였다.
 「“간섭력(干涉力)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겠어??”」
 「글자 그대로다. 인간들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이 땅에서 간섭력을 발휘하는 건 처음이니 영광인 줄 알아. 호나우두의 무릎이 번번이 고장 났을 때에도 허벅지를 꼬집어 가면서 참아왔었지.」
 「“신도 그런 방식으로 인내심을 발휘하나?”」
 「··· 표현이 그렇다는 거다. 그나저나 말투가 은근히 거슬리는데. 방금 초월적인 현상을 경험하고도 이 몸이 두렵지 않나?」
 루디케의 ‘울림’이 점점 위협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눈을 바꿔치기할 정도의 능력, 아니 간섭력이라면, 사람의 목숨 또한 장담하기 어려울 터.
 하지만 혁민의 표정은 태연자약했고,
 그는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으니까.”」
 그 순간만큼은 루디케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인간들 기준으로도 아직 애송이 나이일 뿐인데,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이군.」
 혁민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은 루디케로서도 처음이었다.
 깡따구(?)가 쎄다는 것 정도는 루디케도 익히 짐작한 바였으나,
 혁민의 덤덤한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상실감의 무게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하긴. 날카로운 무기를 가지고도 휘둘러보질 못하니 죽는 게 더 낫겠다 싶겠지. 너에겐 축구가 전부이니까 말이야.」
 「“······.”」
 「그런 마음가짐이면 안심할 수 있겠어. ‘다음 단계’도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을 테고 말이야.」
 「“다음 단계라니??”」
 「아까 말했듯 지금 나의 간섭력(干涉力)으로는 ‘레벨 원’이 한계다. 그다음부터는 네가 활약하기에 달렸어. 네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간섭력을 뜯어내야 하거든.」
 「“뜯어낸다라······.”」
 「흐흐흐흐. 내가 괜히 후원자라고 이야기했겠나. 축구에 관심 없는 다른 신들에게 네 활약상을 보여줄 생각이다. 굳이 축구가 아니더라도 순수한 열정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신들은 널렸어. 그들에게 간섭력을 뜯어내서 널 다음 단계로 올려다 줄 계획이지.」
 「“이를테면, 앵벌이를 하러 다닌다는 거군.”」
 「··· 표현에 주의하도록 해. 앵벌이를 하는 신 따윈 없으니까.」
 혁민은 뭐가 다르냐고 묻고 싶었지만, 생각의 흐름을 멈춰 세웠다.
 자신을 위해 신이 발 벗고 나서준다는데 마다할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고맙긴 한데···.”」
 「뭐지?」
 「“왜 하필 나지? 축구에 대한 열정이 뛰어난 선수들은 이곳 영국만 해도 쌓여있는데 말이야.”」
 혁민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눈을 하나 내어주면서까지,
 그리고 앵벌이(?)를 하면서까지 자신을 도와주는 이유를.
 「흐흐흐흐.」
 이전과 다르게 기분 좋은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순수한 ‘울림’을 전한 루디케가 말을 이었다.
 「나는 축구 테크닉 중에서 드리블이 가장 좋다.
 축구공을 처음 접한 아이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뭘까? 슛? 패스? 아니지, 바로 드리블이야! 공을 통통 차면서 서툴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행동. 세상에 접해보지 못한 둥근 것을 가지고 노는 첫 번째 유희. 나는 그래서 드리블을 사랑한다.」
 「“그런 건가.”」
 혁민은 루디케가 자신과 꽤나 닮은 구석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 역시 축구를, 그리고 드리블을 미친 듯이 좋아했었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나 외에 드리블을 좋아하고 잘하는 축구 선수들은 널렸는데.”」
 「흐흐흐흐. 그 말도 맞지. 하지만 너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선수는 단연코 없다.」
 「“······!!”」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가진 재능을 그따위로 썩히는 선수는 더더욱 없지.」
 혁민은 가슴 한편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굳이 루이케가 팩트를 짚어주지 않아도,
 자신 스스로가 가진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할 수 있다.
 하고 싶다.
 그런데 할 수가 없다.
 드리블을 마음껏 펼치기엔,
 다른 요소들이 충족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되지?? 다른 신들의 후원을 받기 위해서는···!!’
 의식을 전했을 뿐인데도 혁민의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서 루디케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나에 대한 의심을 이미 집어삼켰다. 역시 난 사람을 잘 고른단 말이지.’
 「그건 말이야···.」
 루디케는 혁민의 질문에 바로 답을 주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혁민을 부르는 두 가지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필드에서 설명해주지.」
 “혁!! 곧 투입되니까 몸 풀고 있어!!”
 혁민에게 출격 명령이 내려왔다.
 
 
 # 변화의 시작
 
 
 노팅엄 포레스트의 감독 아이토르 카랑카.
 올해부터 그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된 마크 워버트의 후임으로 노팅엄을 이끌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들 과거의 전성기를 뜻하는 말로 ‘리즈 시절’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찬란했던 전성기를 생각하면 ‘노팅엄 시절’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유러피언컵(European Cup)
 지금은 챔피언스리그(UEFA Champions League)로 불리는 이 영광스러운 대회에 2년 연속 우승 기록을 가진 팀이 노팅엄이었으니까.
 챔피언스리그를 연속으로 제패한 팀은 모든 역사를 통틀어 10팀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러피언컵 우승 이후 꾸준히 내리막길을 걷던 노팅엄은 2부 리그도 모자라 3부 리그인 리그 원까지 추락했고,
 비록 챔피언십 리그에 복귀했으나 과거의 명성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행보를 걷고 있었다.
 노팅엄 포레스트의 수뇌부가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에게 요구하는 것은 간단명료했다.
 프리미어리그 재입성.
 옛 영광의 재현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보드진은 같은 챔피언십 팀이었던 미들즈브러를 승격시킨 전례가 있는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시즌의 절반 정도가 지난 현재 노팅엄 포레스트의 순위는 12위.
 프리미어리그 직행 티켓이 주어지는 1, 2위는커녕 플레이오프 진출조차 요원해 보이는 성적이었다.
 애당초 노팅엄 포레스트는 빅 마켓과는
 거리가 먼 구단이었고,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의 영입요구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염병할. 손에 무기를 쥐여 줘야 싸우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미들즈브러의 보드진과도 대차게 한판 했던 카랑카 감독이었기에,
 그는 펍에서 술을 마실 때 종종 거칠게 불만을 터트렸다.
 처음에 구단과 계약을 했을 때 했던 영입 보장과는 완전히 다르게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었고,
 불평불만을 계속하기보다 어떻게든 제한적인 선수층에서 최고의 효율을 뽑아낼 선수를 찾아 나섰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강혁민이었다.
 혁민의 최근 스토리는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한 한국 선수를 모르는 감독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러나 수많은 선수들이 모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부진한 선수를 잊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2년은커녕 반년 만에 혁민의 존재감은 땅에 떨어졌고, 사람들은 그를 ‘프리미어리그 부적응자, 몸싸움이 안 되는 선수’로 기억할 뿐이었다.
 드리블에 심취한 겉멋뿐인 선수.
 아이토르 카랑카 역시 혁민을 만나기 전에는 그런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카랑카 감독은 혁민과 함께 훈련을 거듭하면서 자기 생각을 고쳐야만 했다.
 훈련장에 제일 처음 나타나 가장 늦게 떠나는 혁민.
 누구보다 열심히 뛰고 절박한 눈빛으로 훈련에 임하는 혁민은,
 ‘겉멋’이라던가 ‘나약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충분히 좌절할 법한 상황임에도 굴복하지 않는 혁민의 정신력을 높이 샀다.
 그런 성실한 모습과 활발한 활동량이 마음에 든 카랑카는 시즌 초반 혁민을 전방 미드필더 자리에 배치했으나, 불행하게도 혁민은 지난 2년간의 슬럼프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노팅엄 포레스트가 초반에 치고 나가지 못한 이유에는 혁민이 차지하는 지분이 꽤 컸다고 볼 수 있었다.
 주전 미드필드 자리에서 혁민을 빼낸 이후에도 카랑카 감독은 그의 활용법을 고심했고,
 결국, 수비형 미드필더를 지칭하는 ‘볼란테(Volante)’로 보직을 변경했다.
 볼란테 자리에서도 활동량이 뻔히 보이는 게 애석할 뿐이지만.
 그라운드 주위를 천천히 돌며 몸을 푸는 혁민.
 그를 바라보는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의 눈에는 시름이 묻어나 있었다.
 이미 3:0으로 패배가 확실시되는 상황.
 지금 상황에서 공격수가 아니라 볼란테인 혁민을 기용한다는 것은 극적인 반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전 볼란테인 벤 오스본의 체력 안배를 위한 교체.
 지금 혁민의 위치는 딱 그 정도일 뿐이었다.
 ‘혁, 예전의 그 화려함이 아닌 다른 무기를 찾아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네가 뛰는 무대는 계속 이런 죽은 게임뿐일 테니까.’
 “후우-”
 적당히 몸을 푼 혁민은 손등으로 땀을 닦으며 숨을 골랐다.
 벤치에서 조는 모습을 확인했던 호세 미구엘 코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교체 내용을 전달하는 모습이 보인다.
 혁민은 조금 무안했지만,
 그보다는 루디케와의 대화가 먼저였다.
 「내 말이 맞지?」
 즐거운 기분이 담긴 루디케의 ‘울림’에 혁민이 속으로 답했다.
 ‘그렇군. 확실히 눈으로 보지 않아도 라인이 느껴져. 희미한 기분이긴 하지만 이건 흡사···.’
 「관중석에서 보는 기분이지.」
 ‘맞아. 바로 그거야.’
 그라운드에서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붉은색 선.
 그 자체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놀랍게도 혁민은 그 방향을 주시하지 않아도 선의 위치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관중석의 맨 꼭대기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혁민의 의식 속에 오프사이드 라인이 투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멋진 플레이로 후원을 받아낸다면, 그 기운은 더욱 또렷하게 느껴질 거야. 언젠가는 ‘레벨 원’을 넘어설 수 있겠지.」
 「“아까도 이야기하던데 그 ‘레벨 원’이라는 게 뭐야?”」
 「너에게 주는 내 선물이지. ‘레벨 원’에서는 총 세 가지 간섭력이 작용해.」
 루디케의 ‘울림’이 끝나자마자 혁민의 정신에 세 가지 항목이 전달되었다.
 
 [초심자의 행운]
 [신의 피지컬]
 [전지적 30초]
 
 「이것들이 바로 ‘레벨 원’이 제공하는 혜택들이다. 물론 나는 그릇만 제공할 뿐, 네가 간섭력을 후원받지 못한다면 효율의 반에 반도 못 채운 상태로 끝이 날 거야.」
 루디케의 ‘울림’은 계속 이어졌다.
 「‘초심자의 행운’이란 레벨 원 상태에서 얻게 되는 관중 시점. 너도 보았다시피 오프사이드 라인에 관한 시점이다. 너, 프리미어리그에 와서 오프사이드 라인 털어본 적 한 번도 없지??」
 인정하긴 싫지만, 혁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디케의 말대로 혁민은 정교한 프리미어리그의 포백 라인을 한번도 공략해 본 적이 없었다.
 수차례의 패스가 전부 다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거나,
 수비수들에게 차단당하기 일쑤였다.
 「물론 오프사이드 라인을 허물 수 있는 찬스가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니야. 그때까지 볼을 제대로 키핑할 수 있는 것도 힘들 테고. 그래서 네게 ‘신의 피지컬’ 옵션을 주었다.」
 「“신의 피지컬이라··· 금강불괴의 몸을 갖게 되는 건가?”」
 「흐흐흐흐흐. 레벨 원 상태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군.」
 루디케는 혁민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그가 자신을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 ‘울림’에는 즐거운 감정이 묻어났다.
 「이건 은유적인 표현이야.」
 「“은유적?”」
 「잘 한번 생각해 봐. 피지컬과 관련된 축구 선수 중 신이란 별명을 가진 사람을 말이야.」
 혁민은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겼다.
 압도적인 피지컬을 소유한 레전드 중,
 별명에 신이 들어가는 축구 선수.
 혁민은 머지않아 한 명의 남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설마, 드록신?!”」
 「빙고.」
 
 디디에 드록바.
 첼시에서 수많은 커리어를 쌓았던 그는 전 세계적으로 이름난 스타 플레이어였고,
 한국에서도 ‘드록신’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조국 코트디부아르를 사상 첫 월드컵에 진출시킨 드록바가,
 경기 후 내전에 빠진 조국의 전쟁을 멈추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사람들은 전쟁도 멈추게 한 진정한 ‘신’이라며 그를 찬양했고, 드록바 역시 한국에서 지어준 그 별명을 꽤나 만족했었다고 한다.
 애초에 드록바가 드록‘신’이라고 불렸던 이유에는,
 압도적인 피지컬 능력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좀처럼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아니 도리어 상대를 튕겨내 버리는 드록바의 피지컬은 지금도 ‘드록신 몸빵 vs ○○○ 몸빵’ 같은 가상 대결의 단골 소재가 되곤 한다.
 ‘그런 드록신, 아니 드록바의 피지컬을 내가 가지게 된다는 거야?’
 「물론. 단 전제가 있지.」
 「“··· 후원을 받아내야 한다?”」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는군. 지금 보이는 붉은 라인을 완전히 네 것처럼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드록바의 피지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후원을 잔뜩 받아내야만 해.」
 “혁!! 빨리 와!! 볼 아웃이잖아!!”
 혁민은 루디케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교체 시그널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부랴부랴 중앙선 라인에 도착한 혁민.
 그를 향해 호세 미구엘 코치가 한숨을 쉬었다.
 “혁. 오늘 정말 너답지 않아. 벤치에서도 그렇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중력이 흐트러진 거야?”
 “죄송합니다.”
 “저번처럼 벤 오스본 자리에 서게 될 거야. 셰필드 새끼들. 점수 차가 제법 벌어졌는데도 물 만난 고기처럼 우릴 몰아붙이고 있어. 이럴 때 시원한 카운터펀치 먹여주고 와.”
 혁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그와 호세 코치 모두 알고 있었다.
 혁민은 카운터 패스를 날릴 정도로 시야가 넓지 못하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혁민에게 ‘적당히 백패스나 돌리다 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호세미구엘 코치의 지시는 그래서 공허한 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이전 경기까지는.
 “다녀오겠습니다.”
 이런 가비지 타임에 내보낼 때에도 혁민은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역량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는 스코어가 어떻든, 남은 시간이 얼마가 남았든 매번 가진 모든 걸 털어 넣었다.
 그런데 오늘 혁민의 모습은,
 평소보다 조금 달랐다.
 ‘눈빛이, 오늘따라 더욱 살아있어.’
 좀 전까지 집중력을 잃었던 모습도 잠시,
 호세 미구엘 코치는 혁민의 눈빛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이전까지의 경기와는 조금 다른 결의.
 앞서 졸던 모습에 실망하기도 잠시,
 호세 미구엘 코치는 혁민이 무언가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조금 품기 시작했다.
 ‘그런데, 원래부터 혁의 눈동자가 붉은색이었던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는 호세 코치를 뒤로하고,
 혁민이 그라운드로 나섰다.
 웅성웅성 -
 “혁민이라니! 오늘 게임 완전 던졌구만!”
 “10분 남고 3대0인데 당연하지. 주전들 쉬게 해주면서 다음 경기 노리는 게 이득이야.”
 “이봐 혁!! 이왕 이렇게 된 거 크루이프 턴이나 보여줘!!”
 뒤늦게 등장한 혁민을 환대하는 팬들은 드물었다.
 오히려 일부의 악성 팬들은 그저 열심히 뛰어다니기만 할 뿐인,
 무색무취의 벤치 워머를 응원하기보다 조롱했다.
 하지만 혁민에게 이런 조롱은 프리미어리그 시절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그가 원하던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남은 시간 잘 해보자.”
 센터백이자 팀의 주장 만시엔느가 혁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반전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주전의 휴식만을 위해 투입된 혁민.
 그를 바라보는 만시엔느의 기분도 좋지만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추가 실점을 하지 않도록 팀원을 독려하는 것뿐.
 “오른쪽!!”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왼쪽 윙백 닐슨이 오버래핑을 시도한다.
 혁민은 언제나처럼 부지런히 달려 닐슨에게 따라붙었고,
 패스 길목을 차단해 볼을 가로챘다.
 그러자 닐슨이 혁민의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딜!!”
 혁민에 대한 분석은 이곳 챔피언십에서도 진작 끝난 상태였다.
 드리블할 공간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강하게 몸을 압박하는 것이 이젠 정석처럼 자리 잡았다.
 텅!!
 “큭!”
 혁민에게 익숙한 강한 차징.
 강력한 압박을 받은 혁민은 늘 그렇듯 충격을 받은 방향으로 밀려났다.
 심판이 파울 콜을 불지 않으면 위험 지역에서 볼을 빼앗기게 되는 상황.
 ‘오자마자 뻘짓거리를 할 순 없다···!’
 혁민은 젖먹던 힘을 다해 빙글 돌아 볼을 후려갈겼다.
 뻥!
 퍽!!
 “윽···!”
 공은 코앞에서 압박하던 닐슨을 맞고 터치라인 밖으로 벗어났다.
 결과적으로 적의 오버래핑을 차단한 뒤,
 스로인으로 공격권까지 얻어낸 상황이 되었다.
 “어쭈? 오늘은 제법인데?”
 “혁민이 날아가는 모습이 볼거리 중 하나였는데. 오늘은 웬일이지??”
 ‘나도 그게 신기하다. 이 자식들아.’
 심판의 손이 반쯤 들린 것으로 보아 파울을 불 수도 있을 법한 차징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관중들의 말대로 저만치 밀려나겠지만,
 이번엔 어쩐 일인지 밀려나는 와중에도 조금은 저항할 수 있었다.
 ‘확실히, 변화가 일어난 건가.’
 「흐흐흐흐. 그렇고말고.」
 혁민의 생각에 루디케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미 그의 ‘울림’은 잔뜩 고양된 상태였다.
 ‘좋아. 한번 해보자.’
 남은 시간은 9분.
 혁민의 변화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잉글랜드 챔피언십 리그를 중계하는 JTS 스포츠 채널. 비록 벤치워머일 뿐이지만 챔피언십 리그에서 뛰는 대한민국 선수는 강혁민이 유일했기에 JTS 스포츠는 노팅엄 포레스트의 경기를 매번 중계해 주고 있었다.
 방송 캐스터 배승재가 혁민의 투입을 지켜보면서 상기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이 선수를 교체합니다. 벤 오스본이 빠지고 강혁민이 들어오는군요. 모처럼 강혁민 선수를 필드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
 반면 한진희 해설의 목소리에는 담담함이 묻어나왔다.
 “이런 표현은 그렇지만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이 수건을 던진 것으로 봐야겠어요. 강혁민 선수가 공격수나 중앙 미드필더와 교체되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벤 오스본의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 아니겠습니까?? 오늘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맹공을 막느라 분주히 뛰어다닌 벤 오스본의 체력 회복을 위한 교체 전략으로 보입니다.”
 “그렇군요. 확실히 경기당 득점이 1점대에 그치고 있는 노팅엄에 3점이란 점수 차는 크게 느껴집니다. 강혁민 선수는 이번 시즌 대체로 교체선수로 투입돼 수비형 미드필더의 자리에서 뛰고 있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무언가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요.”
 “닐슨의 오버래핑을 조심해야 해요!! 강혁민 따라붙어야 합니다.”
 “네, 여기서 강혁민이 먼저 볼을 따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강력한 몸싸움!! 강혁민이 넘어지면서도 공을 걷어냅니다!!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터치아웃. 공의 소유권이 노팅엄으로 넘어옵니다. 몸싸움이 약한 강혁민을 향해 강력한 차징이 들어왔습니다만 강혁민 선수 투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강혁민 선수. 지금과 같은 모습을 꾸준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몸싸움에서 매번 밀린다면 기껏 열심히 뛰어다니는 보람이 없게 되어버리니까요.”
 “강혁민 선수. 다시 볼을 넘겨받습니다. 이번에는 수비수에게 백 패스하여 넘겨줍니다. 전방을 향해 만시엔느가 롱-패스!! 그러나 쉽게 가로막힙니다.”
 “오른쪽 윙 포지션인 자크 클러프가 열심히 빈 공간을 향해 달려들어 보았습니다만, 패스의 정확도가 부족했어요. 정확히만 갔어도 좋은 찬스를 잡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공을 빼앗은 셰필드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천천히 빌드업을 하며 노팅엄의 진형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경기 내내 계속해서 이런 패턴의 반복인데요. 노팅엄의 역습이 매번 무기력하게 실패하다 보니, 셰필드 유나이티드는 볼 점유율을 높여가며 편한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다.’
 루디케의 눈을 넘겨받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혁민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우선 노팅엄이 볼을 점유하는 시간 자체가 짧았고,
 공격수들이 효과적으로 오프사이드 라인을 파고드는 타이밍이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역습 시에는 ‘그나마’ 시야가 넓은 만시엔느가 롱 킥을 뿌려주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혁민에게 볼이 넘어오지 않고 있었다.
 ‘최소한 중앙 미드필더의 자리였다면······.’
 붉은 선과 공격수들 간의 간격이 좁아지는 타이밍.
 그 타이밍에 오프사이드 라인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으려면 아무래도 거리가 가까운 것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세필드의 파상공세가 이어지는 중이었고, 공격수들은 저 앞에 고립된 위치에 있었다.
 볼란테라고는 하지만 페널티 에어리어에 근접한 지점에서 수비하는 혁민에게 오프사이드 라인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 셰필드가 계속해서 라인을 올리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
 중원을 두껍게 할 목적으로 3-5-2 포메이션을 들고나온 셰필드 유나이티드는 좌·우측의 윙백을 최대한 전진시켜 틈새를 노리고 있었다.
 셰필드의 공격자원들은 경기가 이미 기운 이상, 최대한 많은 스탯을 쌓아보겠다는 의지로 적극적인 공격을 이어나갔다.
 “여기야!!”
 “크윽!!”
 펑!
 페널티 에어리어 박스 안쪽으로 들어온 공을 노팅엄의 수비수 에릭 리하이가 가까스로 쳐냈다.
 팀의 수비수로서 이미 세골이나 먹힌것에 자존심이 상한 에릭 리하이.
 그는 다소 위험한 태클을 무릅쓰고 볼을 골라인 밖으로 보냈다.
 “좀 열심히 움직여, 새끼들아!!”
 터프한 성격의 그는 좌우 윙들에게 1선에서의 강한 압박을 지시했지만,
 경기 후반으로 갈수록 양쪽 윙들의 수비가담은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다.
 계속되는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코너킥.
 스티븐슨이 코너킥을 차기 위해 공을 고정하는 사이,
 혁민은 붉은색의 선, ‘오프사이드 라인’과 오른쪽 윙어 자크 클러프의 위치를 유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가장 주력이 빠른 자크 클러프라면,
 수비수와 동일 선상에서 출발했을 경우 결정적인 찬스를 얻어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뻥!!
 문전을 향해 높이 띄워진 코너킥.
 제공권만큼은 자신이 있던 리하이가 헤더를 따냈다.
 퉁!!
 혁민은 세컨드 볼을 따내기 위해 밀집 지역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에 있었고,
 마침 그의 앞으로 볼이 넘어왔다.
 번뜩!
 그리고 혁민이 새로 얻어낸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코너킥 득점을 위해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센터백들이 페널티 에어리어 박스 안에 투입된 상황.
 수비형 미드필더들이 윙백과 함께 최종 수비 라인을 형성했기 때문에,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라인은 다소 엉성한 상태였다.
 오른쪽 수비 라인에 선 라피르티는 지금,
 오프사이드 라인의 한참 앞에 있었다.
 ‘저기다!!’
 경기가 시작된 지 85분.
 밀집 지역에 있던 셰필드의 선수들은 체력적인 문제로 인해 혁민에게 기민하게 달려들지 못했고,
 혁민은 잠깐 틈을 얻을 수 있었다.
 자크 클러프에게 회심의 패스를 전달할 틈을.
 펑!!
 공수 전환이 이루어지는 타이밍에 후방 침투를 준비하는 것은 윙어들의 기본 덕목이다.
 오른쪽 윙어였던 자크 클러프가 혁민이 공을 잡은 순간 전방으로 달려나가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었다.
 혁민의 롱패스를 기대한다기보다는,
 훈련해 온 패턴과 습관에 의한 움직임.
 그러나 자크 클러프는 만시엔느에게 받을 수 없었던 환상적인 패스를 마주하게 되었다.
 혁민이 시도한 롱패스가 라페르티의 머리를 넘어 정확히 자신의 발 앞으로 날아든 것이다.
 “찬스다!!”
 “와 패스 미쳤는데?!”
 “그래, 한 골이라도 넣어라!!”
 ‘오우···!!’
 볼을 받은 자크 클러프 조차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완벽한 롱패스.
 하지만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그동안 이런 양질의 패스를 받아보지 못한 자크 클러프의 퍼스트 볼 터치가 다소 길게 형성되었다.
 「저런 병신 새끼가!!!」
 그 소리는 패스를 뿌린 당사자 혁민이 아니라,
 잔뜩 기대하고 있던 루디케의 것이었다.
 「“욕할 때는 좀 안 들리게 할 수 없냐.”」
 ‘지금 그런 거 신경 쓰게 생겼어? 볼 앞에 제대로만 놨어도 완벽한 1대1 찬스였는데!!’
 루디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혁민 또한 알고 있었다.
 방금의 찬스에서 자크 클러프의 볼 터치가 사이드 쪽이 아닌 중앙 쪽으로 형성되었다면,
 노팅엄 포레스트는 만회 골을 넣을 수 있었다는걸.
 결국, 자크 클러프는 코너킥을 얻어내는데 만족해야 했고,
 코너킥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셰필드는 다시 천천히 노팅엄의 진영을 잠식해 들어갔다.
 “아쉽다, 좋은 찬스였는데.”
 “자크 새끼 방금 그게 프로의 볼 터치냐?”
 “근데 방금 패스 누구였어? 우리 애들 중에 저런 패스를 할 줄 아는 애도 있었던가?”
 관중들이 감탄한 패스를 감독이라고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패배가 확실한 경기였지만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의 눈빛은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방금은 완벽한 패스였다.’
 패스의 주인공이 만시엔느였다면 카랑카 감독이 이렇게까지 흥분하진 않았을 것이다.
 정확도가 떨어지긴 해도 가끔 좋은 롱패스를 뿌려주었으니까.
 하지만 좀 전 패스의 주인공은 만시엔느가 아니라 혁민이었다.
 터널 시야로 인해 전방 빌드업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바로 그 혁민 말이다.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안그래도 카랑카 감독은 혁민을 투입한 시점부터 자리에 앉아 그의 플레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후반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체력을 평가할 수는 없었으나,
 혁민의 고질적인 약점인 몸싸움에서 약간의 희망을 발견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방금의 패스는,
 그전까지 혁민에게서 볼 수 없었던 양질의 것이었다.
 ‘조금 더 일찍 투입해 볼 걸 그랬군.’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입맛을 다시며 혁민을 계속해서 주시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망을 내려놓지 않은 채.
 「너 근데, 그건 왜 안 쓰냐??」
 90분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면서,
 루디케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뭘 알려줘야 쓰든지 말든지 하지.”」
 「허, 이게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데. 내가 알려 주기 전에 물어봐야 정상 아니냐??」
 루디케는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것’은 아직 혁민이 사용하지 않은 마지막 능력.
 [전지적 30초]였다.
 혁민은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와중에 그에게 대답했다.
 「“지금 너랑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물어볼 시간이 어디 있어? 나는 지금 경기를 뛰는 중이라고.”」
 「흐흐흐. 그럼 친절한 이 몸이 먼저 알려주도록 하지. [전지적 30초]는 네가 사용하기로 마음먹기만 하면 언제든지 발동할 수 있다. 이왕이면 볼을 소유하고 있을 때 사용하는 게 좋을 거야. 이건 정말 끝내주는 능력이거든. 내가 가진 간섭력으로는 불과 30초밖에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루디케의 설명은 혁민으로서도 귀가 솔깃할 만한 것이었다.
 후원이 필요하다곤 하지만 루디케가 전해준 능력들, [초심자의 행운]과 [신의 피지컬]은 이미 혁민의 기량을 꽤나 향상시켰다.
 그런 루디케의 간섭력으로도 얼마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전지적 30초].
 혁민은 안 그래도 이 능력을 추가 시간에 사용해 볼 생각이었다.
 ‘30초. 짧다면 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공을 가진 상태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다.’
 3분의 추가 시간.
 노팅엄 포레스트를 상대로 파상공세를 이어가던 셰필드 유나이티드이었으나 인저리 타임에 와서는 라인을 물리고 수비적인 포메이션을 갖추었다.
 이대로 적당히 걸어 잠그고 경기를 3대0으로 매듭짓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덕분에 전방을 휘젓던 셰필드 공격진의 압박도 느슨해진 상황.
 추가 시간 1분이 지난 시점에서,
 센터라인 근처에서 공을 잡은 혁민은 마침내 마지막 능력을 꺼내 들었다.
 [전지적 30초].
 키이이이잉!!!
 “윽···!!”
 혁민은 일순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충격에 휩싸였다.
 아찔할 정도로 많은 양의 정보가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든 탓.
 그 방대한 양의 정체는 바로,
 그라운드 내 자리 잡은 모든 선수의 위치 정보였다.
 「흐흐흐흐. 짜릿하지?? 첫 경험이 뭐든 그런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과연 루디케의 능력으로도 30초가 한계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혼절할 것 같은 충격 속에서도 혁민은 경기장의 모든 선수의 위치를 똑똑히 파악할 수 있었다.
 관중석의 최고점을 넘어,
 아예 하늘 위에서 게임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혁민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조심해!!”
 만시엔느의 다급한 외침.
 처음으로 [전지적 30초]를 겪은 혁민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그의 앞뒤로 셰필드의 선수들이 달려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몸싸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볼을 쉽게 내어 줄 법한 상황.
 그러나 혁민은 자신에게 대시하는 선수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동안 봉인된 채 잠들고 있던 혁민의 드리블 기술이 잠시나마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스윽!!
 오른발을 들어 발바닥으로 공을 뒤로 빼낸 혁민.
 전방으로 달려드는 셰필드 선수의 차징을 피하면서,
 반쯤 턴한 상태로 이번엔 왼발을 사용해 뒤쪽 압박을 무력화한다.
 “우아!!!!”
 순식간에 두 명의 압박에서 벗어나 사이드로 빠져나온 혁민.
 이것이 바로 그가 유소년 시절 주목받아 왔던 드리블 기술이었다.
 “저건··· 마르세유 턴??”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조차 혁민이 잉글랜드로 넘어오면서 그의 드리블 기술들은 모두 사장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작으로 수비수를 벗겨낸 혁민.
 “달려 혁!!!”
 그는 전방으로 치고 달리면서 모든 선수의 위치 정보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시간은 아직,
 20초나 남아 있었다.
 
 * * *
 
 “달려, 혁!!”
 “한 골만이라도 넣어 보자!!”
 형편없는 경기력에 실망한 노팅엄의 팬들.
 추가 시간이 주어졌지만,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출구로 걸어 나가던 관중들이 걸음을 멈추고 함성을 외치기 시작했다.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진영을 빠르게 질주하는 혁민.
 더블 팀을 형성한 전후 압박에서 빠져나오자 그에게 텅 빈 공간이 열렸다.
 「좋았어!! 바로 그거야!!」
 루디케의 흥에 겨운 ‘울림’이 혁민의 정신에서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혁민은 루디케의 환호를 무시한 채 선수들의 위치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전후좌우.
 혁민의 드리블에 반응하는 선수들의 위치가 [전지적 30초]를 통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있었다.
 시점(視點)의 시(視) 또한 인간의 감각 중 하나일 뿐.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전지적 30초]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욱 또렷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최전방 브레레턴에게 줄까? 아니면 메티 캐쉬?’
 혁민이 중원을 치고 나오자 전방 공격수들의 움직임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직이다.’
 
 “강혁민 선수 계속해서 치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혁민은 드리블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수비진은 딜레마에 빠졌다.
 이대로 다가오는 혁민을 가만 놔두자니 직접 슈팅을 때릴 위치까지 허용하게 될것 같았고,
 그렇다고 앞에 가서 막자니 공격수들의 마크가 허술해질 게 뻔했기 때문.
 하지만 셰필드 수비진의 인내심은 곧 바닥이 나고 말았다.
 센터백을 보고 있던 오코넬이 혁민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 것.
 혁민의 시야가 넓지 못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파악을 해 둔 상태였으니,
 패스보다는 직접 슛을 때릴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재롱은 거기까지다!!”
 오코넬의 판단은 꽤 정확했다.
 단, ‘어제까지의 강혁민’이라는 가정하에 말이다.
 처억!
 오코넬의 예상대로 혁민은 슛 모습을 취했고,
 그의 자세를 보고 슛을 확신한 오코넬은 다리를 뻗어 태클을 날렸다.
 촤아아아악!!
 펑!
 혁민의 킥이 힘없이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 향한다.
 그쪽은 브레레턴도, 캐쉬도 없는 곳이었다.
 ‘실축인가. 그럼 그렇지’
 오코넬은 힘없이 날아가는 공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나 곧 그의 시야에 볼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흑인 청년이 들어오면서 미소는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반대편에서 자크 선수가 달려듭니다!!”
 
 “자크?!”
 ‘이번에야말로···!!’
 자크 클러프는 이를 악물고 자신에게 향하는 볼을 향해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직전 찬스를 놓쳐 혁민과 팀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자크.
 그는 남은 시간 혁민의 패스가 온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를 품고 있었다.
 촤아악!!
 자크 클러프가 몸 앞으로 날아드는 공을 향해 다리를 쭉 뻗었다.
 ‘제발 닿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크 클러프는 한순간 혁민의 패스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드리블을 치고 나오면서 슛 자세를 취하는 내내,
 혁민이 자신을 단 한 순간도 쳐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능한 패서들은 곁눈질을 통해 선수들의 위치를 파악한다고 하지만,
 방금의 혁민에게서는 그런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거기에 슛 모션을 페이크로 해서 노룩 패스를 본인에게 날렸으니,
 조금 전 자크 본인이 했던 각오가 아니었다면 자신조차 속아서 한 걸음도 반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닿아!!”
 뻥!!!
 자크 클러프의 간절함이 통했던 것인지,
 다소 멀어 보이는 위치였지만 자크의 발이 공을 직격했다.
 논스톱 발리슛.
 날아오는 패스를 그대로 슛한 것이었기 때문에 셰필드의 골키퍼는 선 채로 굳어 버렸고,
 공은 골대의 반대편 모서리를 향해 뻗어 나갔다.
 “들어가라!!”
 터엉!!
 그러나 야속하게도 자크 클러프가 날린 회심의 슛은 크로스바를 강타하고 골라인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아아!!’
 “뿨킹!! 운이 없으려니까 골대를 다 처맞네!!”
 “패스가 조금 멀었어. 그래서 정확한 임팩이 들어가지 못한 거야!!”
 ‘아니. 패스는 완벽했다.’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전율을 느꼈다.
 방금은 자크 클러프의 반응이 조금 느렸던 것뿐,
 혁민이 찔러준 패스는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드리블부터 마지막 로빙 패스까지. 모든 것이 뛰어났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남자가 정말 혁민이 맞는 건가?’
 삐삐익!!
 하지만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이 확인하고 싶었던 혁민의 모습은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얼마안되는 추가시간이 끝이나버렸기 때문.
 이로써 오늘 경기는 3대0으로 셰필드 유나이티드가 원정승을 가져가게 되었다.
 관중들은 아쉬운 마음을 품은 채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선수들은 상대와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방금 그거, 처음부터 노린 패스였나?”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수비수 오코넬.
 그가 혁민에게 악수를 권하며 물었다.
 혁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스티븐 제라드도 아니고, 거기서 슛을 쏴 봐야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하하, 보기 좋게 한 방 먹었군.”
 오코넬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그 당시 장면을 언급했다.
 “결과적으로 태클한 게 도와준 꼴이 되었어. 가만히 서 있었다면 로빙 패스를 할 때 방해라도 되었을 텐데 말이야.”
 오코넬은 사실,
 방금의 패스가 우연이 아니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만약 혁민이 처음부터 슛할 작정이었다면,
 공을 차고 난 뒤 골문을 향해 쇄도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중거리 슛을 차고 득달같이 골대를 향해 침투하는 선수는 보기 드물다.
 혁민의 대답과 정황을 종합해보면,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준 것도 모자라 혹시라도 있을 크로스나 세컨드 볼에 대비한 것으로 봐야 했다.
 ‘골을 향한 집념이 어마어마하군. 이런 친구를 왜 후반에, 그것도 볼란테 위치에서 썩히고 있는 거지?’
 비록 10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상대 수비수 오코넬이 의아해할 정도로 혁민의 플레이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혁민은 오코넬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과 인사을 마친 채 담담히 라커룸으로 이동했다.
 “혁!! 마지막 찬스에서는 날 줬어야지!! 날 마크하던 오코넬이 달려드는 거 안 보였어?!”
 라커룸에 오자마자 혁민을 거칠게 몰아붙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노팅엄 포레스트의 최전방 공격수 브레레턴.
 그는 마지막 주어진 황금 찬스가 당연히 본인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 보였다.
 “내가 봤을때 너보단 자크쪽이 확률이 높았다.”
 “뭐야?? 하!! 누가 터널 시야의 소유자 아니랄까 봐. 마크맨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내 쪽이 프리지. 안 그래 자크??”
 “······.”
 자크 클러프는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브레레턴이 윽박지르는 모습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팀에서 그나마 간간히 골을 기록하던 브레레턴.
 한번 화나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성향을 지녔기에 자크 클러프는 그저 이 소동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것 봐!! 저 자식, 아무 말도 못 하잖아. 다음부터는 그런 찬스가 나면 무조건 내게로 줘. 수비가 있건 말건 말이야. 후보인 네놈이 언제 그라운드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자크 클러프의 침묵이 무언의 동의라 생각한 브레레턴.
 그는 자신의 턱수염을 쓸어 만지며 의기양양하게 혁민을 쏘아보았다.
 「설마, 이대로 가만있지는 않겠지??」
 공격성이 다분한 ‘울림’을 전하는 루디케.
 하지만 혁민은 굳이 루디케의 말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연패에 빠진 팀은 라커룸 분위기도 콩가루(mess)라던데. 네가 딱 그 모양이야.”
 “뭐야?!”
 조금 풀어지려고 했던 브레레턴의 표정이 다시 험학하게 변했다.
 앞으로 패스를 잘 보내겠다 따위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던 그로서는 한 방 먹은 기분이 되고 만 것이다.
 “리하이가 전방에서 압박 좀 하라고 할 때도 어슬렁거리기만 하던데. 골을 못 넣었으면 열심히 뛰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이 자식이 그냥!!”
 「옳지, 드루와.」
 “그만해!!”
 그 순간,
 혁민에게 들린 것은 루디케의 알 수 없는 울림과 자크 클러프의 외침이었다.
 “혁의 말이 옳아.”
 “뭐야? 자크 너도 돌았냐!”
 “난 측면에 있었기 때문에 전부 볼 수 있었어. 오코넬이 혁을 향해 달려갈 때 내 쪽에 있던 수비수가 네 쪽으로 커버를 들어갔지. 결과적으로 내 쪽이 완전한 프리가 되었고 말이야.”
 정확한 설명이었지만 브레레턴은 화를 거두는 대신 화살을 다시 엉뚱한 방향으로 돌렸다.
 “하!! 그래?? 만에 하나 그랬다고 치자. 그러면 패스를 잘 줘서 기회를 살렸어야 할 거 아냐. 네가 억지로 논스톱 슛을 갈길 정도로 멀었던 패스 아니었나?”
 “그건···.”
 “패스는 완벽했다. 자크의 대처가 늦었을 뿐.”
 ‘감독님···?’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이 라커룸으로 들어와 자크 클러프의 이야기를 대신 받았다.
 “분위기가 처져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활기찬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는군. 안 그런가 브레레턴??”
 “······!!”
 누가 봐도 명백히 비꼬는 말에 브레레턴은 붉게 상기된 얼굴을 숙였다.
 “공격수들은 패스 하나 하나를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안 그래도 오늘처럼 점유율이 떨어지는 경기에서는 더더욱 말이야. 힘들겠지만 전방 압박도 꾸준히 뛰어줘야 수비수들이 대처하기 편하다.”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패배에 대한 질책 대신 몇 가지 당부의 말만을 전한 채 라커룸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플레이는, 그야말로 월드 클래스(World Class)였다.’
 라커룸에서는 그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경기가 끝난뒤 계속해서 마지막 혁민의 플레이를 되뇌고 있었다.
 중원 지역에서의 현란한 탈압박은 물론이요,
 슛을 가장한 노룩 패스까지.
 지금까지 보아온 혁민의 플레이를 생각하면 완전히 환골탈태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몸싸움은 조금 버거워 보이지만, 출장 시간을 조금 늘려봐도 좋겠어.’
 주전들의 대거 부상으로 팀 전력 누수가 심했던 노팅엄.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새롭게 생겨난 혁민이라는 희망의 싹을 조금씩 틔워나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
 ‘분명, 그땐 모든 것이 다 보였다.’
 선수와 관중들이 모두 다 빠져나간 경기장.
 혁민은 그곳을 다시 방문해 좀 전 경기의 상황을 복기하고 있었다.
 처음 겪어 보는 충격에 잠시 비틀거렸지만,
 혁민은 [전지적 30초] 동안 그라운드의 신이 된 기분이었다.
 지금은 전혀 느낄 수 없는,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능력.
 ‘만에 하나, 이 능력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다면······.’
 반드시 넣어야 하는 상황은 경기마다 매번 나오기 마련이다.
 골을 넣는다면 승부의 추가 완전히 넘어갈 수 있는 상황.
 루디케가 전해준 [전지적 30초]의 시간이 충분히 늘어난다면,
 매번 결정적인 상황마다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혁, 여기서 뭐 해??”
 루디케가 전해준 능력에 관해 골몰하고 있을 무렵,
 혁민을 부르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까만 피부에 삭발한 머리.
 조그만 체형이지만 다부진 몸을 갖춘 노팅엄의 윙어.
 혁민을 부른 것은 자크 클러프였다.
 “너야말로 집에 안 가고 뭐 하고 있어?”
 “아무래도 아까 브레레턴 때문에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그때 내가 제대로만 이야기했어도···.”
 “네가 무슨 말을 하건 나는 녀석에게 한마디 할 생각이었어.”
 “그, 그래···.”
 자크에게 안심시켜주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혁민이 가끔 브레레턴이 싫은 소리를 해도 가만히 있었던 건,
 정말로 그의 속이 좁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브레레턴 역시 항상 옳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혁민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장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때는 모든 상황이 명명백백해서 그랬을 뿐이야. 다행히 네가 거들어줘서 녀석도 한 수 접던데?”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오늘 네게 큰 빚을 졌어. 앞으로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네가 패스를 보내준다고 생각하면서 뛸게.”
 자크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혁민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라커룸 방향으로 향했다.
 ‘매번 보내준다고 생각하면 금방 후회할 텐데.’
 혁민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크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아직 자신은 주전도, 그렇다고 능력을 완전히 얻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지.’
 혁민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과거는 몰라도, 지금은 이 상황을 타개할 힘이 있지 않은가.
 ‘앞으로 오늘같은 활약을 이어갈 수만 있다면, 기회는 충분히 온다.’
 「흐흐흐흐. 물론이다.」
 다음 경기를 향한 혁민의 다짐에,
 루디케가 기분 좋은 울림을 보내왔다.
 
 
 # 두 장의 조커 카드
 
 
 혁민이 경기 마지막에 반짝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그것만으로 희망을 품기에는 노팅엄이 처한 현실은 상당히 암울했다.
 개막 초반 상위권을 유지하던 노팅엄 포레스트는 최근 4연패의 늪에 빠지며 중위권으로 추락해버렸기 때문이다.
 
 - 꿈도 희망도 없다. 노팅엄은 이제 끝났어.
 - 이러다가 리그 원으로 강등당할지도 모르겠는데. 아이토르 카랑카는 대체 어떻게 미들즈브러를 승격시킨 거야??
 - 영입은 안 해 주고, 주전 공격수와 미드필더가 나자빠졌는데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서 이 팀을 승격시키겠어??
 - 그나마 정신승리 할 거라곤 혁민의 플레이 하나뿐이었어. 그때 보여준 마르세유 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 공격하다 지친 셰필드 녀석들 상대로 재롱잔치 한 게 무슨 대수야?? 자크 클러프를 선택한 건 좋았지만, 패스 정확도가 그래서야 골을 기대할 수 없다고.
 
 「이런 존만 한 X문가 새끼가 뭘 안다고!!」
 “부탁인데 소리를 지를 때는 내게 안 들리게 할 수 없나??”
 단출하게 꾸며진 혁민의 집 안에서,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스포츠 기사와 댓글을 읽던 중,
 그와 '눈'을 공유한 루디케의 울림에 귀가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럴 수야 없지. 너와 난 지금 서로의 눈을 하나씩 공유한 상태니까.」
 “메신저였다면 차단 기능이라도 활용해볼 텐데. 아무래도 적응하는 수밖에 없나.”
 「아니, 넌 지금 이 X문가 새끼들의 댓글을 보고도 차단 소리가 나와?? 당사자인 자크 놈마저 본인의 준비가 늦었다고 이야기한 마당에.」
 “그런 건 아무의미 없어. 내가 뭘 했냐보다 어떻게 보였느냐가 때론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니까.”
 「이런 애늙은이 같은 놈.」
 루디케는 기사와 댓글을 보고 잔뜩 분노했지만, 혁민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혁민은 본인의 플레이 스타일로 인해 것멑이 잔뜩 들었다는 오해가 늘 따라붙었고,
 팀 내에서 매번 가장 많은 거리를 뛰었음에도 ‘귀공자식 축구’를 한다는 질타를 받아왔다.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언제나 평균 이상의 활동량을 보여주었던 잉글랜드의 전설 데이비드 베컴.
 그 역시 화려한 킥과 외모 때문에 활동량이 가려진 전형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두 명 사이에는 엄청난 커리어의 차이가 있지만 말이야.」
 혁민의 생각을 읽은 루디케는 조롱의 의미가 다분히 담긴 그에게 전했다.
 “눈까지 내어줄 정도로 후원자를 자청하더니 이럴 때는 악플러가 따로 없네.”
 「크크. 너야말로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군. 단편적인 시선으로 타인을 평가하려고 하는 모습이 말이야.」
 “말장난할 시간에 대안부터 찾는 게 어때.”
 「응?? 대안??」
 소파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으며 혁민이 대답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이야기하려니 아무래도 미친놈 같아서 말이야. 내 생각을 읽고 있다는 건 알지만, 아무래도 나는 직접 말로 하는 방식이 편하거든.”
 「뭐야. 그런 거였나. 하긴 너에겐 이런 의사 전달 방식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잠깐 정적이 흘렀고,
 혁민은 뜻하지 않던 소리와 마주하게 되었다.
 “냐옹!”
 “냐옹이라니??”
 혁민은 자기도 모르게 똑같은 소리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반려동물을 키워 본 적이 없는 혁민.
 이 집 안에서는 들릴 일이 없는 고양이 소리가 지척 거리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냐옹!”
 “이게 어디서 나타난···.”
 혁민의 눈앞에 나타난 흑묘 한 마리.
 크기가 꽤 작았지만, 몸매는 매끈하게 잘 빠졌고, 요망스럽게 빛나는 오드 아이가 무척이나 귀엽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냐옹!”
 혁민은 이 고양이가 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리고 왜 자신을 불러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흑묘의 오드 아이를 유심히 관찰한 혁민은,
 그제야 정황을 알아챘다.
 “너였냐.”
 “(냐옹!) 그럼 나 말고 누가 있겠냐?”
 눈앞의 흑묘는 이전과 똑같이 ‘냐옹’거릴 뿐이었지만,
 그 고양이가 루디케라는 것을 알게 되자 혁민은 목소리의 의미를 전부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미친놈처럼 보이진 않겠지. 인간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동물에게 말을 걸곤 하니까 말이야.”
 흑묘는 마치 자신의 모습을 자랑이라도 하듯 몸을 이리저리 돌려댔고,
 그 장면을 본 혁민은 덤덤히 감상평을 내놓았다.
 “털 날리는 건 질색인데.”
 “이 자식이 날 뭘로 보고!! 네 집에서 눈곱만큼도 흔적을 남기는 일은 없을 거다!!”
 사납게 ‘야옹!!’리는 루디케를 보니,
 고양이로 있을지언정 드러운 성격은 여전한 듯 보였다.
 ‘울림이 아닌 목소리로 대화를 할 수 있다라. 그렇다면······.’
 혁민은 한 가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목소리로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는 지금이라면,
 적어도 이때만큼은 내 생각을 읽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야 이 XXXXXXXXXXXXXX한 새꺄.’
 혁민은 루디케를 응시하며 지금까지 알고 있는 욕 중에 가장 험한 말을 떠올렸다.
 ‘만약 이전처럼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내 얼굴을 할퀴어 대겠지.’
 이윽고,
 루디케가 입을 열었다.
 “냐옹!! (실망인데.)”
 혁민은 순간적으로 너무 위험한 도박을 한 것이 아닌가 후회스러웠지만,
 짐짓 태연하게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이 아름다운 생명체를 응시하고도 아무런 감탄이 나오지 않는다니······. 네 미적 수준이 얼마나 바닥인지 새삼 실감이 난다.”
 루디케는 마치 인간의 얼굴처럼 낙담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 상황에서는 내 생각을 읽지 못하는군.’
 경기장에서는 몰라도 일상생활 중에도 모든 생각을 공유한다는 건 꽤나 불쾌한 일.
 혁민은 지금의 환경이 대단히 만족스러워졌다.
 “아주 만족스러워.”
 “그렇지?? 이제야 제대로 알아보는군. 처음에 날 봤을 때부터 느꼈겠지만 내 미적 센스는······.”
 유희의 신이기 때문인지 루디케는 미의 감각에 꽤 집착하는 듯 보였다.
 혁민은 그저 씨익 웃으며 루디케에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마음속에 방금 했던 어마무시한 욕을 한 번 더 떠올린 채로.
 
 * * *
 
 “다음 경기는 절대로 놓쳐선 안 되는 경기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감독실에서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과 호세 미구엘 수석 코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상태는 어때??”
 “풀타임은 무리겠지만 후반 조커로는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메디컬 파트로부터 확인한 내용입니다.”
 “그래···.”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란 노팅엄의 공격수 대릴 머피를 지칭한 것이었다.
 1부 리그인 뉴캐슬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보였던 대릴 머피는 1년 전부터 노팅엄의 전방 라인을 책임지고 있었다.
 191cm의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센터포워드로서 역할도 곧잘 수행했지만, 30을 훌쩍 넘긴 나이 탓에 대릴 머피는 자잘한 부상을 달고 살았다.
 시즌 초반 노팅엄이 반짝 활약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대릴 머피의 활약이 큰 역할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의 부상으로 브레레턴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노팅엄의 공격진은 이전만큼의 화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노팅엄 포레스트가 상대하는 다음 팀은 볼턴 원더러스.
 볼턴의 순위가 강등권이었던 데다가,
 이번 경기 역시 시티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홈경기인 탓에 그 여느 때보다 승리가 필요한 대결이었다.
 “볼턴 원더러스는 여차하면 비기기 전략으로 나올 확률이 높습니다. 원정 경기인 데다 그다음 상대가 같은 강등권인 레딩과의 승부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아무래도 포지션에 변경을 줘야겠어.”
 카랑카 감독과 호세 미구엘 코치는 다음 경기에서 4-3-3이 아닌 4-5-1 전략을 쓰기로 정했다.
 좌우 윙을 활용한 역습 패턴이 아닌,
 원톱을 두고 많은 선수를 미드필드 지역에 투입해 중원을 장악하려는 의도.
 어차피 적이 공세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공격 횟수를 최대한 끌어올려 슈팅 시도를 늘려가는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었다.
 ‘그래도 쉽지 않을 거야. 현재 노팅엄 공격진들의 골 결정력은 참담한 수준이니까.’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호세 미구엘 코치를 보내고 나서도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4-5-1 포메이션을 생각한 또 하나의 이유. 두 명의 조커들이 제대로 활약만 해 준다면···.’
 카랑카 감독은 두 명의 선수를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백전노장의 공격수 한 명과,
 환상적인 패스를 선보였던 볼란테 한 명을.
 
 * * *
 
 최근 들어 인기를 끌고 있는 축구 전문 블로그가 있었다.
 <털보 아저씨의 사커 월드>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블로그 이름이었지만 내용의 수준은 여느 축구 전문 기자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도리어 기자의 칼럼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게시물을 올려 온라인에서 설전을 벌인 끝에 결국 기자의 정정 보도를 하게 하는 반전을 끌어내기도 했다.
 비전문 칼럼니스트가 전문 기자와 설전을 벌이는 과정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세간의 흥미를 이끌었고,
 급기야 온갖 데이터와 축구 논문(!!)까지 총동원해 다윗이 승리를 거두자 이를 지켜본 축구 마니아들은 순식간에 털보 아저씨의 추종자가 되었다.
 ‘털보 아저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는 말은 축구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었고,
 그의 블로거 페이지는 유명 팝스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많은 방문 횟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가 준비하는 칼럼의 대상은 라리가와 프리미어리그는 물론, 2부 리그까지 총망라한 방대한 것이었고 사람들은 ‘털보 아저씨의 일과 중 90%는 축구 시청일 것’이라며 놀라워했다.
 그리고 촉이 좋은 ‘털보 아저씨’의 레이더망에,
 혁민이 잡혔다.
 
 [··· 그렇게 해서 노팅엄은 셰필드 유나이티드에 단 한 골도 기록하지 못한 채 패퇴했다. 그러나 노팅엄에서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록 교체 시간일 뿐이었으나 혁민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원래부터 혁민은 드리블 스킬과 킥 능력이 뛰어나 중원에 배치되었지만 거친 프리미어 리그에 적응하지 못한 채 2부리그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보여준 퍼포먼스를 꾸준히 보여줄수만 있다면 후반기 노팅엄의 대약진은 혁민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2부 리그 선수인 혁민의 스토리를 줄줄 꿰고 있는 ‘털보 아저씨’의 정보력에 감탄하는 반면, 고작 10분을 뛴 선수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하는 의외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 칭찬에 인색한 털보 아저씨가 얼마 뛰지도 않은 선수를 보고 높이 평가를 하다니. 정말 의외인걸.
 - 우리한테 안 보이는 게 보이나 보지. 털보 아저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잖아??
 - 시간이 되면 챙겨 봐야겠는데. 혁민이라는 친구가 얼마나 될성부른 떡잎인지 말이야.
 - 나도 가입했다.
 
 「“뭘?”」
 「털보 아저씨의 블로그 말이야.」
 「“등록 번호도 없는 네가 무슨 수로? 신에게는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나?”」
 「무슨 소리야. 당연히 네 계정으로 했지. 고양이로 있는 동안.」
 「“이런 미친.”」
 루디케는 그렇게 어마무시한 욕을 뒤집어쓴 복수(?)를 의도치 않게 해내고 말았다.
 「틀린 말 하나도 없던데. 노팅엄의 반격은 혁민, 네게 달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혁민은 능글거리는 루디케의 울림을 무시한 채 버스에서 내렸다.
 「“그래, 나 역시 그러길 바라.”」
 평소보다 조금 더 관심이 몰린 볼턴 원더러스와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대결.
 그 대결이 곧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똑똑!
 “부르셨습니까?”
 “어, 이리와 앉지.”
 경기 시작 전 이례적으로 혁민을 따로 부른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
 그는 의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혁민을 맞았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셰필드전 때의 활약 말인데. 단순히 상대방의 체력이 다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스스로 무언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선수에게 불필요한 질문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가 직접 혁민을 불러 질문을 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실제로 혁민의 기량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혁민의 각오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훈련과정에서 유심히 지켜본 혁민은 평소 때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대인 마크 연습을 할 때 몸싸움을 버거워한다거나,
 5대5 미니 게임을 할 때 패스 루트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모습은 여느 때의 혁민 그대로였다.
 그래서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혼란스러웠다.
 셰필드 유나이티드 경기에서 보여 주었던 막판의 활약을 플루크(Fluke)라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멋진 플레이였기 때문이다.
 도저히 운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볼 수 없는 환상적인 퍼포먼스.
 때문에 카랑카 감독은 혁민을 경기 직전에 직접 불러낸 것이다.
 “제 생각에는······.”
 카랑카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혁민의 대답에 오늘의 전술이 크게 바뀔지도 모르는 상황.
 혁민은 담담하게 카랑카 감독에게 대답했다.
 “둘 다인 것 같습니다.”
 “둘 다라?”
 “네. 셰필드 녀석들이 주야장천 공격 일변도로 나와 힘이 다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비교적 몸싸움을 견딜 수 있었죠. 풀 컨디션이었다면 아마 버텨내기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으음···.”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짧게 침을 삼켰다.
 선수 본인이 순순히 시인하는 만큼 피지컬 부분에서는 앞으로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옳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카랑카 감독은 혁민의 다음 말에 조금이나마 표정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야가 조금 넓어진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직 빌드업이나 이런 건 여전히 서투르지만, 가끔 상대 수비들의 최후방 라인을 무너트릴 타이밍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자크 클러프에게 두 번의 패스를 전달해 줬을 때처럼 말인가??”
 “그렇습니다.”
 혁민과 대화를 마친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의 얼굴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약간의 확신이 묻어나 있었다.
 “좋아. 그렇다면 자네에게 플랜 B를 맡기도록 하지.”
 그게 무엇인지 알 길이 없는 혁민은 묵묵히 듣기만 했고,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이 설명을 이었다.
 “오늘 우리 팀의 포메이션은 사전에 알린 대로 4-5-1을 사용하게 될 거야. 최대한 많은 미드필더 숫자를 동원해 중원을 완전히 장악해 버릴 생각이지.”
 혁민 역시 볼턴 원더러스를 맞아 노팅엄이 공세적인 전략을 갖출 것으로 생각하던 차였다.
 “하지만 상대가 작정하고 수비만 신경 쓴다면 현재 우리 팀의 공격력으로는 뚫기가 어려워. 양쪽 윙어들을 비롯해 선수들은 대부분 4-3-3 포지션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플랜 B를 준비한 거야. 전방에서 활발히 공을 돌리며 수비진의 체력을 빼낸 뒤 자네와 대릴 머피를 동시에 투입할 생각이네. 어떻게 보면 선발 라인업은 플랜 B를 위한 미끼라고 볼 수도 있겠지.”
 자신의 전략을 이야기하는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의 목소리는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하는 지략가의 순수하고 열정 있는 표정.
 혁민은 ‘저 얼굴이야말로 미들즈브러를 승격시킨 맹장의 참모습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직이 웃었다.
 “반드시 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말만이라도 고맙군.”
 그렇게 혁민과 카랑카 감독의 짧은 면담은 종료가 되었다.
 「그냥 선발로 출격시켜 달라고 하지 그랬어. 볼턴 원더러스를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했어야지!」
 「“스타팅 라인업은 이미 제출되었을지도 몰라. 카랑카 감독은 내게 질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플랜 B를 준비한 이유를 알려주기 위해서 날 부른 거겠지.”」
 투덜대는 루디케를 달래주는(?) 사이 혁민은 노팅엄 포레스트의 라커룸에 도착했다.
 일반적으로 유니폼이 선수의 로커 문에 걸려있으면 스타팅 멤버, 그렇지 않고 위쪽 수납함에 올려져 있으면 후보가 된다.
 카랑카 감독이 일러준 대로 오늘 혁민의 유니폼은 또다시 수납함에 곱게 놓여 있었다.
 「“내 말 맞지?”」
 「이런 염병할···.」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멋진 활약을 보여주셨던 ‘후보’ 혁이잖아.”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직후 라커룸에서 망신을 당한 브레레턴이 혁민을 보자마자 이죽거렸다.
 거들먹거리는 브레레턴을 향해 한마디 되받아치고 싶었으나,
 경기 전부터 팀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기에 혁민은 잠자코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시건방은 그쯤에서 그만두지?? 상황 파악도 못 하는 게.”
 “뭐야??”
 오히려 혁민을 두둔하는 말은 전혀 의외의 곳에서 튀어나왔다.
 부상 치료 후 오랜만에 라커룸에 등장한 대릴 머피.
 대릴 머피는 브레레턴보다 한참 큰 키를 앞세워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뭐, 불만 있어?? 애당초 내 부상 땜빵으로 선발 라인업에 든 놈이 후보 운운하는 게 꼴 같지도 않군. 앞으로 혁민이든 누구든 라커룸 분위기를 흐리는 놈은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쳇.”
 「나 저 자식 유니폼 사고 싶어.」
 「“가만있어.”」
 루디케를 진정시킨 혁민이었지만,
 그 역시 대릴 머피의 행동에 적잖이 고마워하고 있었다.
 「“1부 리그에서 활약하다 왔기 때문인지 팀 캐미를 상당히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군.”」
 「너도 프리미어리그에서 왔으면서.」
 “자 가자!! 벤치에서 나설 일이 없게 잘 부탁한다!!”
 대릴 머피는 카리스마 있게 분위기를 휘어잡으며 노팅엄 선수들에게 전의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의 행동이 팀원들을 조금 감화시킨 것일까,
 초반부터 노팅엄 포레스트의 선수들이 볼턴을 상대로 맹공을 퍼부었다.
 
 “자크 클러프 터닝슛!! 크로스바를 빗겨 나갑니다!”
 “브레레턴 선수. 지금은 옆으로 내줬어야죠. 이 슈팅은 조금 아쉬운데요.”
 “코너킥 상황에서 리하이의 헤더!! 골키퍼 정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점점 깨닫기 시작했다.
 지금의 선전이 자신들의 투지라기보다는,
 볼턴이 작정하고 라인을 내리며 수비에만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노팅엄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전반 10개의 슈팅.
 그러나 골로 연결된 것은 하나도 없었고 유효 슈팅의 수마저 두 개에 불과했다.
 그리고 후반 15분.
 “부우우울쉐에에엣(bullshit)!!”
 파악!!
 삐삐익!!!
 초조함이 극에 달한 브레레턴이 수비수를 등진 상태에서 턴을 하다 공을 뺏겼고,
 그는 억지로 볼을 되찾으려다 깊은 태클을 날려 옐로카드를 받고 말았다.
 노팅엄의 관중들은 성난 들소처럼 그라운드를 향해 욕지거리를 뱉었다.
 옐로카드을 준 심판이 아니라,
 브레레턴을 향해서.
 “야 이 멍청한 등신 새끼야!! 흐름 좀 그만 끊어 먹어라!!”
 “팀 슈팅의 절반을 때려놓고 유효 슈팅 하나 없는 무쓸모 새끼!”
 ‘지금인가.’
 그리고,
 때맞추어 카랑카 감독이 두 장의 교체 카드를 꺼내 들었다.
 강혁민과 대릴 머피.
 이른바 플랜 B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체다. 브레레턴이 나가는데??”
 “진작 바꿨어야 했어.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놈.”
 “한 번에 두 명을 교체하잖아?? 혁과 대릴 머피야!!”
 “뭔가 하나 해줘 봐, 친구들!!”
 간판 공격수 대릴 머피의 복귀와,
 깜짝 활약을 보여주었던 혁민의 등장에 관중들은
 두 명의 조커를 격하게 환영했다.
 같은 교체 출전이지만 이번 투입은 셰필드 유나이티드전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경기가 기운 시점에서 벤 오스본 대신 투입되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벤 오스본의 옆자리에서,
 조커의 사명을 띠고 경기에 참전한 것이다.
 “수고하슈.”
 브레레턴이 못마땅한 듯 대릴 머피와 손을 마주치며 퇴장했다.
 자신의 경기력이 형편없다는 걸 인지해서인지,
 그는 혁민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후반 시작하자마자 교체될 줄 알았는데. 에잉!」
 「“아니, 냉정하게 말하면 지금도 조금 빨라.”」
 혁민은 루디케에게 대답하며 교체되자마자 부지런히 전장을 누볐다.
 처음부터 활동량은 혁민의 또 다른 재산이기 때문에,
 후반에 교체된 그는 중원 지역을 휩쓸다시피 하며 누비고 다녔다.
 “좋아, 혁!! 교체로 들어가서 그런지 아주 씽씽한데!!”
 “저번처럼 환상적인 패스 보여줘!!”
 더 이상 누구도 과거처럼 혁민을 조롱하거나 하지 않았다.
 팀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는 혁민의 모습에 관중들도 적극적으로 응원을 해 주기 시작했다.
 [“보였다!!”」
 텅!!
 “큭!!”
 순간적으로 좌측에서 돌아 들어가는 캐쉬를 확인한 혁민.
 붉은색 오프사이드 라인을 교묘히 파고들어 가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혁민이 패스를 뿌렸지만,
 수비수가 거칠게 몸을 부딪치는 바람에 디딤발이 조금 흔들렸다.
 슈웅!
 “아오!! 아깝다!!”
 트래핑만 되었더라면 결정적인 찬스가 나왔을 법한 상황.
 그러나 아쉽게도 혁민의 패스는 캐쉬의 머리 위를 살짝 넘어가 버렸다.
 “괜찮아, 혁. 좋은 타이밍이었어.”
 매티 캐쉬가 혁민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공격수인 그로서도 지금의 타이밍이 좋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을 터.
 노팅엄의 공격진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혁민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공간이 필요해. 몸싸움에 구애받지 않고 패스를 보내줄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붉은색 오프사이드 라인이 지난 경기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느껴졌다.
 전방에서는 자크 클러프와 캐쉬는 물론,
 부상 후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릴 머피마저 분주하게 기회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문제는 버스를 세워 둔 것처럼 촘촘하게 11자 대형을 유지한 볼턴 원더러스의 수비진이었다.
 그들은 후반이 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라인을 내리고 있었고,
 노팅엄의 관중들은 점점 분개하고 있었다.
 “저런 졸렬한 새끼들!! 이것도 축구냐!!!”
 “버스를 무너트려 버려!!!”
 「저런 씹어먹을 놈들!!」
 [“너까지 욕을 거들 필요 없다.”」
 남은 시간은 10분.
 점점 볼턴의 수비 간격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전반부터 수비진의 체력을 빼앗기 위해 패스 숫자를 늘려갔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의 노림수대로 경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결실을 보는 것뿐.
 
 “강혁민 선수, 엄청난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홍길동 같은 모습이군요.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하고 있어요!!”
 
 혁민은 한 번의 타이밍을 찾기 위해 애썼고,
 그라운드를 달리고 또 달렸다.
 어찌나 부지런히 공간을 찾아 달렸던지 전반부터 뛴 사람만큼 체력이 소진될 정도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혁민은 부지런히 뛰어다닌 끝에 마침내 기회를 얻었다.
 라인을 한계까지 끌어내린 볼턴의 수비 포메이션 때문에 더블 볼란테였던 벤 오스본과 혁민도 제법 공격적인 위치에서 볼을 돌리고 있었고,
 퍼엉!!
 퉁!!
 벤 오스본이 수비를 뚫지 못해 택한 중거리 슛이 수비수를 맞고 혁민에게 흘러나왔다.
 “찬스다!!”
 “혁!! 한방 갈겨버려!!”
 슛이 수비수를 맞아 집중력이 흐트러진 사이,
 혁민에게 어느 정도 공간이 열리게 되었다.
 “···!!!”
 그때,
 혁민의 눈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더 이상 붉은색 오프사이드 라인이 아니었다.
 오프사이드 라인은 루디케가 전달해 준 ‘시점’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혁민은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대릴 머피와 눈을 마주친 것이다.
 툭!!
 혁민은 감각적인 로빙 패스를 대릴 머피에게 전달했다.
 중거리 슛으로 일순간 흐트러진 포백 라인.
 대릴 머피는 누구보다도 빨리 전방으로 움직여 혁민의 볼을 받았다.
 퍼엉!!!
 그리고 전광석화 같은 슈팅.
 영원히 뚤릴 것 같지 않던 볼턴의 골문이,
 그제야 활짝 열렸다.
 출렁!
 “고오오오오오올!!”
 「호우!!!」
 “됐다!!”
 혁민과 루디케가 동시에 포효했다.
 잉글랜드 무대에 입성한 지 처음으로,
 혁민이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 * *
 
 “골!!! 골입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졌던 볼턴 원더러스의 골 라인을 드디어 노팅엄이 뚫어냈습니다!! 득점의 주인공은 대릴 머피!! 부상에서 돌아오자마자 화려한 복귀 골을 신고합니다!! 대릴 머피가 손가락으로 한 선수를 지목하는데요, 바로 이 골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강혁민 선수입니다!!”
 “대릴 머피 선수도 알고 있는 거죠. 방금 패스는 그야말로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 얹는 수준이었다는 것을요. 대릴 머피의 깔끔한 마무리도 돋보였지만 완벽한 일대일 찬스를 만들어 낸 강혁민 선수의 패스도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지난 셰필드 유나이티드전에서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강혁민 선수!! 그 모습이 우연이 아님을 이번 경기에서 확실히 증명합니다!!”
 “노팅엄으로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입니다. 부상에서 돌아온 간판 공격수가 건재한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그동안 패싱 능력이 부족했던 강혁민 선수가 마치 개안이라도 한 듯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주고 있거든요. 이 두 선수의 활약이 앞으로 남은 시즌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 같습니다.”
 
 “멋진 패스였어, 혁!!”
 공을 넣자마자 혁민을 지목한 대릴 머피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짝!!
 똑같이 손을 들어 화답한 혁민은 실로 오랜만에 전율을 느꼈다.
 팀이 간절히 원하던 순간에 골에 기여한 것이 대체 얼마 만이던가.
 적어도 그가 영국으로 날아온 3년간은 없었던 일이었다.
 “끝내줬어, 혁. 요즘 정말 장난 아닌데??”
 “대릴 머피 쪽을 정말 잘 찔렀어!!”
 자크 클러프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도 혁민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칭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기량 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인성은 흠잡을 데가 없었던 혁민.
 동료들이 혁민의 활약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딱 한 명.
 벤치에서 찌그러져 있는 브레레턴을 제외하면 말이다.
 「너에게 ‘벤치 시점’을 줄 수 없다는 게 아쉬운걸.」
 「“그게 무슨 말이야??”」
 「브레레턴의 똥 씹은 표정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그런 거 신경 쓸 시간 없어.”」
 삐삑!!!
 천신만고 끝에 선취골을 얻어냈지만, 시간은 꽤 많이 남아 있는 상황.
 경기 내내 수세적인 포메이션으로 일관했던 볼턴 원더러스가 선수를 하나둘 교체하기 시작했다.
 동점 골을 넣어 비길 수가 없다면,
 볼턴으로서는 한 점으로 지나 두 점으로 지나 별다른 차이가 없는 상황.
 볼턴 원더러스는 4-1-4-1의 포메이션으로 노팅엄의 전략에 맞불을 놓았다.
 “물러서지 마!!”
 “압박해, 압박!!”
 양 팀 다 중원의 숫자를 극단적으로 늘린 탓에 치열한 점유율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기 진행이 끝으로 흘러가면서 선수들은 꽤 지쳤고,
 벤 오스본이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는 사이 볼턴의 미드필더 벨라가 페널티 에어리어 박스 안쪽을 향해 맹렬히 치고 들어왔다.
 
 “벨라, 찬스를 잡습니다. 위협적인 드리블로 노팅엄의 진형을 파고듭니다.”
 “백업 들어와야죠. 그렇죠!”
 
 촤아아악!
 퍽!
 “데밋!!”
 하지만 벨라의 볼을 가로채는 날카로운 태클이 들어왔다.
 태클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혁민.
 대인 마크 몸싸움에서 언제나 열세였던 혁민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태클 기술을 부단히 연마했고,
 그 결과 짧은 연습 결과치고 준수한 태클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이스, 혁!!”
 정신없이 돌파해 들어갔던 벨라는 귀신같이 백업을 들어온 혁민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후반에 교체되었어도 그렇지. 한순간도 쉬질 않는 건가, 저 자식은···!!’
 태클을 날렸던 혁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전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아찔할 정도의 활동량.
 이것이 바로 화려한 드리블 스킬에 가려진 혁민의 또 다른 재능이었다.
 「안 힘드냐??」
 「“안 그래도 뒈질거 같다.”」
 「‘그건’ 언제 쓰려고?? 내가 제일 기대하는 시간인데.」
 「“아무 때나 쓸 순 없지. 고작 30초뿐인데.”」
 혁민에게 [전지적 30초]를 권하는 루디케의 울림에는 기대감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중원에서는 치열한 점유율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촘촘히 밀집된 상황에서 [전지적 30초]를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는 없었다.
 삐삑!!
 
 “볼턴 원더러스. 코너킥을 얻습니다.”
 “90분이 다가오니까 노팅엄이 골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군요. 중원 장악이 수월해진 볼턴이 코너킥을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어요.”
 
 리하이를 비롯한 노팅엄의 수비진들은 볼턴의 공격수들에 비해 제공권이 좋은 편이었고,
 혁민은 세컨드 볼을 따낼 수 있는 장소에 자리 잡은 뒤 동료 공격수들의 위치를 살폈다.
 ‘전부 들어왔구나.’
 카랑카 감독의 지시 때문인지 대릴 머피를 비롯한 모든 공격수들이 코너킥 수비에 가담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패스를 찔러줄 만한 타겟이 없다고 봐야 할 터.
 ‘아무래도 오늘은 [전지적 30초]를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겠는데······.’
 「뭐?? 그건 안돼!!」
 루디케가 낙담하는 사이 볼턴 원더러스의 코너킥이 시작되었다.
 뻥!!
 “막아!!”
 “비켜!!”
 노팅엄의 공격진들까지 공중 볼을 두고 경합하다 보니 페널티 박스 안쪽은 엄청나게 혼잡한 상황이었다.
 누가 헤더를 따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선수들이 뛰어올랐고,
 공은 반대편 코너를 향해 흘러갔다.
 
 “벨라가 세컨드 볼을 잡습니다. 다시 한번 크로스를 시도할까요?”
 “아, 하지만 무리한 돌파 시도로 인해 도리어 자크 클러프에게 볼을 빼앗기고 마는군요.”
 
 ‘어??’
 혁민은 지금의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볼턴의 장신 수비수들이 아직 노팅엄의 페널티 에어리어 내에 머물러 있는 상황.
 다시 말해 역습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뛰어야겠는데?!」
 「“당연하지!!”」
 세컨드 볼 위치에 있느라 상대적으로 앞에 있었던 혁민.
 비어있는 앞쪽 공간을 향해 냅다 달렸다.
 현재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역습 쇄도를 할 체력과 주력을 갖춘 선수는 다른 누구도 아닌 혁민 자신이었다.
 “자크!!!”
 자크 클러프는 볼을 빼앗은 뒤 단순하게 공을 먼 쪽으로 걷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먼발치에서 들려온 혁민의 외침에,
 그는 디딤발의 궤도를 수정했다.
 퍼엉!!!
 크로스를 올리듯 반대편으로 길게 넘긴 자크의 패스.
 혁민은 전력 질주를 하는 와중에 루디케가 고대하던 ‘그 능력’을 꺼냈다.
 ‘[전지적 30초]’
 키이이이잉 -
 “윽···!!”
 처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충격이 혁민의 머리를 강타했다.
 혁민은 비틀거리면서도 치고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나,
 날아오는 공에 타이밍을 조금 잃고 말았다.
 자크가 크로스처럼 올린 롱패스의 궤적은,
 혁민이 생각했던 거보다 조금 더 휘어져 자신의 등 뒤쪽으로 형성된 것이다.
 “아아!!”
 “조금 빨랐어!!”
 관중석에서 안타까운 소리가 들려왔다.
 공이 휘는 방향으로 보건대 혁민이 질주를 완전히 멈추지 않는다면,
 받아내기 어려운 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민은 속도를 조금 줄였으되 멈추어서진 않았다.
 여기서 멈춘다면 득달같이 복귀하는 수비진들에게 따라잡히고 만다는 것을,
 [전지적 30초]가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스윽!!
 이때,
 혁민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전지적 30초]가 제공하는 시점은,
 비단 ‘선수’뿐만 아니라 ‘볼’의 위치까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혁민은 달리는 와중에 오른발을 뒤쪽으로 크게 차올렸다.
 그러자 그의 발뒤꿈치에,
 자크가 패스해준 볼이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퉁!!
 “아니!!”
 혁민이 뒤꿈치로 찬 공은 크게 튀어 혁민의 앞쪽으로 형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속도를 그다지 늦추지 않고 트래핑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크레이지!!”
 “내가 지금 뭘 본거지!!!”
 정작 응원하는 노팅엄의 관중들마저 머리를 감싸 쥘 정도의 슈퍼 플레이.
 그것이 지금 혁민의 발뒤꿈치에서 발현되었다.
 
 “강혁민 선수의 환상적인 트래핑! 달리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뒷발로 날아오는 공을 깔끔하게 자신의 발 앞에 가져다 놓습니다!!”
 “힐 킥은 종종 보아왔습니다만 힐 트래핑은 저도 중계하면서 처음 보는군요. 이렇게 되면 수비진을 계속해서 따돌릴 수가 있겠어요.”
 
 와아아아아아우!!
 환희에 찬 루디케의 울림을 느끼며 혁민은 빠르게 치고 나갔다.
 페널티 에어리어 박스 안에 위치한 수비수는 두 명.
 혁민은 두 명을 모두 제쳐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전지적 30초]의 감각은 이를 만류했다.
 그들을 상대하는 데 시간을 소비하기에는,
 득달같이 복귀하는 수비수들이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렇다면···!!’
 페널티 에어리어 박스 왼쪽으로 치고 들어간 혁민은 두 명의 수비진이 경로를 막는 사이 돌연 볼을 멈춰 세웠다.
 “···!!!”
 수비진들이 관성에 의해 속도를 채 줄이지 못한 상황.
 그는 짧게나마 열린 공간을 향해 강력한 인프런트 킥을 날렸다.
 
 “공간이 열렸습니다!!”
 “강혁민 선수 강력한 슈우우웃!!”
 
 “으압!!”
 퍼엉!!!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혁민에게서 먼 쪽의 골대,
 즉 파 포스트(far post)를 향해 슈팅하기 마련.
 하지만 혁민은 그런 예상을 역으로 찔러 가까운 골대 쪽으로 슛을 했다.
 역동작이 걸린 골키퍼가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한 회심의 일격.
 출렁!!
 
 “고오!!!....??”
 
 그러나 아쉽게도,
 혁민의 슛은 골대의 바로 옆 그물망을 곧바로 쳤다.
 “아오!!”
 “아깝다!!!”
 노팅엄의 팬들은 다시 한번 머리를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이 슈팅이 골로 기록되었더라면,
 ‘이달의 골’은 떼어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이고···.”
 좀처럼 아쉬움을 표하지 않는 혁민조차 입술을 깨물며 아쉬워했고,
 루디케는 아예 절규하고 있었다.
 삐삐익!!
 “이겼다!!”
 혁민이 펼친 슈퍼 플레이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경기가 종료되었다.
 1대0 노팅엄 포레스트의 승리.
 연패의 늪에 빠졌던 노팅엄은 그렇게 강등권 볼턴을 잡아내며 기사회생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두 명의 조커들이었다.
 ‘이제, 네 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조금 알겠어.’
 「그래??」
 혁민은 선수들과 악수를 한 뒤 라커룸으로 돌아가며 루디케에게 전했다.
 「“어차피 눈으로 보지 않아도 오프사이드 라인은 자연스럽게 느껴져. 붉은 선에 집착하지 않고 앞에 선 공격수의 위치에 더 신경 쓴다면 좀 더 좋은 플레이가 가능할 것 같아.”」
 「좋은 생각이야.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척척 응용하는 단계에까지 올라왔군.」
 비록 골을 넣지는 못했지만, 혁민의 어시스트와 힐 트래핑(?)을 목격한 루디케의 울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만족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노팅엄의 선수들은 라커룸 안에서도 승리의 기운에 한동안 취해 있었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던 브레레턴은 혼자 샤워실로 이동해버렸다.
 “단단하게 잠근 골문을 억지로 열어내는 것만큼 어려운 시합도 없다. 오늘 경기를 계획했던 대로 수행해 준 여러분들에게 고맙다.”
 아이토르 카랑카 감독은 자신의 큰 콧대를 매만지며 선수들에게 짧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저 양반. 재료만 좋았어도 지금보다 훨씬 유능한 평가를 받고 있을 거야.」
 「“내 생각도 그래. 새로운 영입이 거의 없는 팀 전력을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일이지.”」
 「하지만 네 쪽의 ‘재료’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어.」
 「“내 쪽의 재료라니?”」
 루디케는 득의양양한 느낌의 울림을 혁민에게 전했다.
 「벌써 잊었어?? 내가 네 녀석의 후원자라는걸. 오늘 경기를 보건대 이번에는 기대해도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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