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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 - [1]

2013.12.21 조회 39,444 추천 488


 청년의 얼굴은 여드름투성이였다. 눈곱이 가득 낀 눈은 실핏줄 때문에 흰자위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 심각한 충혈은 눈병 탓이 아니었다. 남자는 게임을 해왔다. 롤플레잉 게임을. 어제도, 오늘 새벽에도, 점심에도, 지금도 계속....
  그 때문에 생긴 충혈, 눈곱, 여드름이다. 곧 죽어도 남 탓 할 수는 없다. 여드름이야 게임 삼매경 이전에도 수두룩했지만,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었으니까. 자기관리를 전혀 하지 않고서 그는 며칠 밤낮을 PC 앞에 달라붙었다.
  만약 그가 하고 있는 게임이 온라인 게임이었다면 조금이나마 이해는 갈 것이다. 다른 유저들에게 뒤처지기 싫은 마음이 있을 테니. 그러나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게임은 오프라인 전용이다.
  워록 사가(Warlock Saga).
  이 게임 소프트웨어 한 장의 세상에는 경쟁자 따윈 없다. 언제나 변함없는 NPC와 사이버괴수들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청년은 게임을 하지 않으면 죽을 듯이 매달려있었다.
  화면에서 청년의 캐릭터는 검은 법복을 입은 채 숲속을 걸어나갔다. 잠시 후 필드이벤트가 발생했다. 게임용어로는 랜덤 인카운터, 즉 무작위로 생겨나는 특정 NPC와의 만남이다. 이번 경우에는 전투 랜덤 인카운터였다. 나무 뒤에서 회색 법복을 입은 노인 NPC가 나타나더니 게임로그에 새로운 대사가 기록되었다.
 
  [LV 29 성왕국 사제] : (외침) 종말을 맞이하라! 학살자여!
 
  지팡이를 움켜쥔 놈의 머리 위에서 캐스팅 바가 빛난다.
 
  [파이어볼] : (0.2/4.0)
 
  4초 후면 피해량 48의 공격마법이 날아올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캐릭터라면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릴 테지만....
  캐스팅이 끝난 파이어볼이 날아와 명중, 시뻘건 폭발이 모니터 화면을 꽉 채운 뒤 드러난 남자의 캐릭터는 온전했다. HP조차 148/148. 1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병신! 병신, 병신!”
  청년은 웃으면서 키보드 자판을 꾹 눌렀다. 청년의 캐릭터, 흑마법사 ‘샤’는 손을 조금 흔들었다.
 
  [흑마염동 사출-흑탄] : (0.0/0.0)
 
  캐스팅 바는 생기다가 만다. 캐스팅 속도를 극한까지 올린 덕분이다.
  곧바로 검은색 빛줄기가 뿜어져 나와 사제에게 명중했다. 그 깡마른 가슴팍에 붉은 구멍이 생겨났다.
 
  [LV 29 성왕국 사제 : (비명) 크아아악! 데드라여, 당신 곁으로...
 
  마법의 효과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제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온 몸에 불이 붙었다. 사제는 죽어가면서도 발악하다가 마침내 배가 완전히 타버려 그 안에서 창자를 흘렸다. 결국 놈은 기괴한 숯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충분히 잔인한 시체였다. 그러나 청년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판을 다시 눌렀다.
 
  [흑마염동 사출-절단] : (0.0/0.0)
 
  자판을 누른 즉시 시커먼 칼날이 생겨나 시체를 두 동강 냈다. 청년은 같은 자판을 다시 한 번 눌렀다.
 
  [흑마염동 사출-절단] : (0.0/0.0)
 
  이번에는 대각선으로 나간 칼날이 이미 두 토막 난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특별히 목적이 있는 시체훼손은 아니었다. 그저 가학심의 충족일 뿐. 청년은 그 짓을 다섯 번 정도 하고서야 캐릭터를 다시 움직였다.
  숲속 배경이 완전히 걷혀지고, 컴퓨터 화면에서 초가집과 판잣집으로 가득한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입구에 서있던 NPC들은 캐릭터 샤를 보곤 도망치기 시작했다.
 
  [LV 0 여성주민] : (비명) 마왕이다! 살려줘!
  [LV 0 남성주민] : (비명) 도망쳐!
  [LV 0 남성주민] : (비명) 데드라여! 왜 이런 시련을?
 
  샤의 안면 폴리곤은 변화 없이 무표정했지만, 그걸 조종하는 청년은 웃었다.
 
  [미티어] : (0.0/0.0)
 
  모니터 화면이 붉게 물들었다.
  청년은 마우스를 움직여 시점을 전환했다. 캐릭터 샤가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구름 저편에서 붉은 무언가가 일렁였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커져갔다.
  하늘에서 붉고 거대한 암석덩어리가 내려오고 있었다.
  미티어, 운석을 낙하시키는 샤의 최고위계 마법이다. 데미지는 운석에 적중하면 1278, 화염폭풍 404에 절삭풍 941라는 것을 NPC들은 모를 것이다. 데이터니까. 따라서 그들은 저 하늘 위의 마법에 실체적인 공포를 느낄 리가 없지만, 그래도 화면상으로는 충분히 겁에 질린 모습으로 우왕좌왕하며 서로를 밀치고 도망치려 애썼다.
  마침내 운석이 마을 회관을 명중했다. 스피커에서 콰아아앙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운석충돌 후 화염폭풍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린 뒤 드러난 마을에는 거대한 크레이터 하나와 새까만 재, 그리고 시체들만 남았다. 이 게임에서 건물은 파괴불가 오브젝트가 아니기에 마을건물들조차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히, 후, 하.”
  괴이하게 웃으며 청년은 이동키를 눌렀다. 흑마법사 샤는 마을의 폐허를 가로질렀다.
  까맣게 구워진 시체, 온 몸이 짓눌러져 말 그대로 고기반죽이 된 시체, 절삭풍에 몸이 잘린 시체 등 가지각색의 시체들이 흉측하게 화면을 가득 채웠다. 오직 어린애 시체만 없다. 가뜩이나 잔인한 게임에 아동살해까지 넣기는 곤란했을 테니까.
  청년은 이런 파괴를 수십 번 이상 해왔다. 왕국의 수도, 자유도시, 마을 등 모든 곳이 샤의 흑마법이 박살낸 제물이었다. 그런들 별다른 보상은 없는데도 그래온 이유야 단순했다. 이미 대부분의 퀘스트를 완료하고 모든 기술과 마법을 극한까지 배운 최고레벨이라 할 것도 없으니, 이 강력하다 못해 초월적인 캐릭터로 자극적인 장면이나 연출하자는 심보였다.
  숯이 된 고목을 지나, 마을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산골짜기 필드가 펼쳐졌다. 그리고 또 다른 마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청년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모든 퀘스트를 완료한 지금 청년의 목표는 게임 내 모든 NPC를 잔인하게 죽인 뒤 게임 자체를 그만두는 것이었다. 지금은 90% 이상 죽인 것 같다. 그런데 인터넷 요금을 미납하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게임의 월드맵을 볼 수가 없게 된 지금, 그는 부술 곳을 찾는 데 애먹고 있었는데 마침 마을이 나타나준 것이다.
  흑마법사 샤는 그 마을로 향했다.
 
  [LV 0 노인주민] : (비명) 마왕이다! 살려줘!
  [LV 0 남성주민]: (비명) 도망쳐!
 
  NPC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한 놈도 놓치기 싫으니 얼른 다 죽여야 했다. 청년은 강력하고 근사한 고위마법을 쓰기 위해 키보드에 손을 가져가다가, 멈췄다.
  시퍼런 복장의 노인이 공중에 뜬 채 샤를 노려보고 있었다.
 
  [LV 255 대마법사 하지] : (분노) 같잖은 놈이.
 
  청년은 히죽 웃었다.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여 ‘대마법사 하지’를 클릭했다. 상태표시 창에 떠오른 하지의 상세 전투력은 숫자로 표시돼있지 않았다. 그저 물음표 하나뿐, 즉 상대불가능 수준의 보스라는 뜻이다.
  하지의 출현 조건은 딱 하나, 카르마 1000 이상의 최악(最惡) 성향 캐릭터가 게임시간으로 일주일 내에 백 명 이상의 중립 성향 존재들을 살해했을 때다.
  “죽어!”
  청년이 숫자 버튼을 누르자 본드래곤(bone dragon) 두 마리가 등장했다. 소환과 동시에 이 흉측한 언데드 용들이 울부짖는데, 놈들의 포효만으로도 웬만한 사이버괴수들은 ‘공포’ 상태이상에 걸려 무력화된다. 그러나 하지의 경우엔 아니었다.
  하지의 머리 위에서 캐스팅 바가 번뜩였다. 섬광처럼.
 
  [심상감옥] : (0.0/0.0)
 
  스피커가 진동했고 화면이 파랗게 물들었다. 모니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지어 운석이 떨어질 때보다도 밝게 빛났다. 그 현란한 빛에 가뜩이나 상태가 좋지 않은 눈이 자극받았다. 청년은 눈을 잠시간 감았다가 다시 뜬 뒤 화면을 바라보곤 소리 질렀다.
  “이게 뭐야!”
 
  [GAME OVER]
 
  단 한 방이었다. 그것만으로 끝. 허무해진 청년은 컴퓨터 앞에 엎어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질 못했다.
  한 달 동안이나 햇볕 한 줄기 쬐지 않고 게임에 매달린 까닭일까? 아니면 한 달 동안 컵라면만 먹었기에 속이 말이 아닌 까닭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는 이유로 청년은 컴퓨터 앞에서 숨이 멎었다.
  그때, 차라리 모기라도 잡아먹으라는 식으로 방치해둔 거미줄 사이에서 회색연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연기 사이에서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있어, 방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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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5)

[탈퇴계정]    
우와! 돌아오셨군요!!
2013.12.21 02:37
검미성    
다 뜯어고치고 60화 분량 비축분을 확보해두었습니다 헤헤....
2013.12.21 02:38
Ucandoit    
정말 오랜만이네요
2013.12.21 09:44
무무무뭉    
재건축의 달인 칼맛별님 돌아오셨군요..
2013.12.21 09:58
즐기는사람    
환영해요!
2013.12.21 10:51
알건다알아    
저번보다 살짝 바뀐거 같은데 착각인가요?
2013.12.21 15:14
떵바람    
오덕후에 내성적인데다 사이코패스적인 주인공이 왠지 인간적?이랄까. ㅋ 한때 저의 모습같아 재미잇게 느꼇습니다.
2013.12.26 14:50
    
비밀글입니다.
2013.12.26 14:56
(카인)    
재미있어보이네요
2013.12.26 16:09
갈치대왕님    
히히 이글은 내꺼야!
2013.12.2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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