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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 1

2019.06.20 조회 2,370 추천 14


 사가 1
 
 1.
 
 
 고독의 계절, 겨울.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모든 것이 새하얀 눈으로 물들어 그 어떤 더러움도 찾을 수 없는 완벽함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경치라면 그러했겠지만 유성의 시야에 들어오는 겨울의 경치는 그저 황량하게 메마르고 서러움의 결정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온다고 좋아하는 것은 어린아이들과 지나가던 동네 똥개 정도밖에 없는, 세상에서 무조건적으로 지워져야 할 목록 중 무려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악마의 계절이 바로 유성이 생각하고 있는 겨울이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자 입에서 담배 연기처럼 흘러나온 입김이 금방 허공으로 녹아 사라진다. 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손을 움직이자 약간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500원짜리 손난로이다.
 벌써 재사용만 몇 번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이제는 손난로에서 열이 나오는 게 아니라 그의 체온이 난로를 데우는 격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림 같던 경치를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 한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눈에 들어오는 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하나의 묘지였다.
 제초를 비롯한 대부분의 관리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아 흙이 파여 있거나 무성한 마른 풀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여기가 묘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단순히 흙이 쌓여 있는 언덕 정도로 착각을 할 정도였다.
 “아버지, 춥죠?”
 그 흔한 묘비 하나도 없는 정말 무성의한 묘지였다. 그날따라 바람이 어찌나 차갑고 칼 같이 불어오던지 금방이라도 귀와 코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온몸이 떨려왔지만 유성은 낡아빠진 재킷을 제외한 일체의 방한 용품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꿋꿋하게 서서 눈앞의 초라한 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무표정으로 무덤을 바라보던 유성은 손에 들려 있던 비닐봉지를 꺼내서 내용물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황태포와 사과, 그리고 배가 2개씩 들어 있었고 마지막으로 소주 한 병이 나왔다. 그릇도 없어서 다른 몇 개의 비닐봉지를 꺼내서 그 위에다 올려두고 조촐한 상을 차렸다.
 “가져온 것은 별로 없어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불평하지 말고 드세요. 불평하신다고 해도 들어줄 생각도 없으니까.”
 두 번째 문안 인사다. 너무 초라해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부끄럽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고 여유도 없었다. 작은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무덤에 뿌리면서 유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주 안 온다고도 불평하지 말아요. 이제부터는 자주 올 수 있을 테니까.”
 항상 이곳에 올 때마다 저 차가운 땅 속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가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유성의 눈가에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술을 다 뿌리고 나서 유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 한 장을 꺼내서 무덤 앞에 가져가 자랑하듯 내보였다.
 
 「보증 이행 완료 확인.
 아래의 보증에 대한 보증 이행이 완료되어 보증 책임이 전부 또는 일부 소멸하였음을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2억이라는 보증을 모두 청산하였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확인서였다. 이것을 받기 위해 3년간 피눈물을 흘려가며 살아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못난 부친이 자신에게 남겨두고 떠난 유일한 ‘보증’이라는 가장 역겹기 짝이 없는 인연을 드디어 끊게 된 것이다.
 “이제 끝입니다. 끝! 아버지, 당신이 얼마나 그 사람을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아직도 남을 신뢰한다는 것을 모르겠습니다. 아마 여기에 계셨더라면 솔직히 주먹으로 한 대 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성이 종이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잘 했다고······ 한 마디만 해 주세요······.”
 당연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에게는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
 
 탈레스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이야기했다.
 보증, 그 곁에는 재앙만이 있다고.
 유성은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편도 아니었고 철학자니 뭐니 하는 사람들의 직업도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 대사 하나만을 통하여 이들이 굉장히 현명한 사람들이란 점은 깨달았다.
 그 철학자의 말을 그의 아버지, 김수원이 알았다면. 아니, 유성이 알아서 옆에서 말리기라도 했다면 그의 젊은 시절, 행복한 가정은 17살 때 박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유성에게 아버지란 매우 유능하고 상냥하며 언제나 가족을 생각하던 남자였다.
 그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따스한 마음이 있었고 어려운 이들을 보면 팔 걷고 나서서 도와주는 상냥함, 그리고 동료들을 생각하는 의리도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한 생활을 만들어 주었고 친구처럼 지냈으며 그의 아내에게는 사랑을 주었다.
 여기까지라면 그는 누구보다 훌륭한 아버지였고 하나의 사람으로서도 무엇 하나 부족한 점이 없었다. 다만 중요함의 우선이라는 것을 몰랐고 모두에게 평등한 인정을 베풀었다.
 언젠가 한 남성이 유성의 가족을 찾아왔다. 50대 후반으로 머리는 반짝이게 벗겨지고 주름살이 늘어진 데다 여름이라 그런지 땀으로 셔츠를 푹 적신 그는 그리 썩 호감을 주기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유성의 부모님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머니 김현화의 오빠, 즉 유성에게는 외삼촌 되는 사람이었다.
 유성은 외삼촌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사촌끼리 친한 것도 아니었고 항상 무언가 작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대며 남의 눈치를 보는 듯한 외삼촌의 모습이 어린 그때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유성은 평생 동안 저주하고 증오하게 된다.
 그가 찾아왔던 목적은 이러했다. 자신이 매우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예전에 있는 빚 때문에 큰 곤란을 겪고 있는 상태이다. 이번 사업은 무조건적으로 성공이 보장된 거나 다름없다고 열심히 입을 놀려댄 외삼촌이라는 사람은 주야장천 시작도 하지 않은 사업 자랑으로 2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될 부탁을 시작했다.
 
 -내가 언제 너네한테 무리한 거 하나 요구해보았냐? 평생 단 한 번의 부탁이니 보증 좀 서줘라.
 
 머리카락이라고는 몇 가닥 정도 휘날리며 땀으로 반짝이는 유리구슬 같은 느낌의 정수리가 훤히 보일 정도로 머리를 숙인 외삼촌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당시 17살의 유성은 어른들의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감도 잡지 못했기에 한가롭게 과일을 씹으면서 그 대머리를 한 번 손바닥으로 찰싹 때려보고 싶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이후에 이때의 자신을 얼마나 목 졸라 죽이고 싶었던지, 유성으로서는 타임머신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뼈저리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김수원은 처음에는 어렵게 거절했다. 그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보증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김현화 또한 제아무리 오빠라지만 너무 당당하게 찾아와 보증을 요구하는 모습에 기가 찼을 터였다.
 그렇지만 외삼촌은 계속해서 찾아왔다. 먹을 것도 가져와서 구슬려 보고 돈이 없다면서도 유성에게 10만 원, 15만 원이나 되는 돈도 쥐여 주었다. 이야기를 하자며 다가오고 전화로 울기도 하고 화도 내는 등 갖가지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가히 정신적 장애가 있는 게 아닐까 심히 의심될 정도였다.
 나중에는 유성에게까지 찾아와 부모를 설득해 보라고 말할 정도가 되니 두 사람은 결국 수락을 하게 되었다. 이미 함께 갚아줄 사람도 4명이나 더 있으니 조금만 보태달라는 악독한 요구를.
 두 사람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완고하고 모질지 못했다. 좋게 말하면 상냥한 인물, 나쁘게 말하면 말 그대로 호구였다.
 
 그때부터 김유성과 그의 가족이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일까, 외삼촌은 4억의 빚을 남기고 절대적으로 성공한다는 사업은커녕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고 피가 말리는 빚 독촉만이 계속해서 따라왔다.
 연대 보증을 서고 나서 돈을 갚아야 하는 건 김수원이 되어버렸고 나눠 갚는다는 이상은 그저 러시안룰렛처럼 한 명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웠다.
 김수원은 썩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대로 열심히 하던 건축 디자인 사업의 모든 것을 폐기하고서 간신히 빚을 2억까지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나머지 2억의 빚이 남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스트레스로 인한 병으로 누워버렸고 아버지는 계속해서 갖가지 일을 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일을 하고 돈을 모았다. 매일 같이 일을 했지만 들어오는 돈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몸살이 나서 누워도 다음 날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배달을 하고 디자인 일을 도와주고 건물 청소를 했다. 모두 정신과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일들만이 있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다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김수원은 멀리 화물 운전을 갔다가, 다음 날 바로 일을 하기 위해서 급히 되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커피를 계속 마신다 하더라도 몰려오는 수마(睡魔)를 그는 쫓아낼 수 없었고 결국 졸음운전을 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졸면서 시속 100km가 넘는 속도로 달리던 차가 어떻게 되겠는가? 차는 그대로 터널로 진입 중 벽을 들이 박았고 김수원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늦은 밤이었기에 아무도 없었지만 결국 그의 사고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발견되었고 그렇게 김유성은 가장 사랑하던 이를 잃게 되었다. 유성의 나이가 18살이 되던 때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유성은 그저 망연자실했다. 어렸을 때부터 종교는 믿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 군것질거리에 낚여 끌려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적어도 김유성은 신을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신이고 나발이고 누구든 자신에게 이건 꿈이라고 알려주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현실은 냉정했고 당시 내리던 눈처럼 차가웠다.
 차라리 김수원의 이름으로 연대 보증을 들었다면 또 몰라도 어머니 김현화의 이름으로 계약이 되어버린 상태이다 보니 그 후로 남은 1억 9천의 빚도 계속해서 갚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18살이 된 유성도 차라리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렇다면 도저히 억울해서 죽더라도 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의 행복한 가정에 들어와서 모든 걸 훼방 놓고 결국 사람의 목숨까지 잃게 만든 외삼촌이라는 작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은 봐야 할 것만 같았다.
 유성은 악독해졌다. 이를 악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러던 와중 아버지의 친한 친구인 신석호라는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 예전에 아버지에게 진 빚이 있으니 그걸로 대신하겠다, 라는 식으로 무려 8천만 원의 돈을 대신 내준 것이다.
 그에게도 한계가 있었으니 그 정도밖에 주지 못하지만 유성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그의 앞에서 울면서 무릎까지 꿇었다.
 학교도 그만두고 아픈 어머니를 책임지며 그는 계속해서 싸웠다. 하루 1, 2시간 정도를 자며 계속해서 일을 했고 신석호의 도움으로 최대한 편의를 받으며 돈을 벌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더욱 날카로워졌고 모든 이들을 불신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허리를 졸라매고 시작된 그의 1억 1천의 마라톤은 21살이 되는 3년 후, 마침내 모두 갚게 되었다.
 
 ***
 
 빚이란 정말 가까우면서도 먼 그런 개념이었다. TV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는 숨을 쉬는 것보다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빚이었고 그걸 갚으면서 여러 기연을 만나는 것이 보통의 흔한 클리셰였다.
 다만 정작 본인이 그런 주인공이 되었을 때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냥 지금까지의 미디어 매체 속의 주인공들은 고생이라고는 쥐털 만큼도 해본 적이 없으면서 입만 털어대는 위선자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끝인가.”
 오늘 아침 마지막 돈을 지불하고 나서 바로 아버지의 묘를 찾아왔다. 긴 시간 동안 찾아오지 못했던 것과 동시에 초라하지만 상이라도 차려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막상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니 후련한 감도 있지만 그냥 공허했다.
 끝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로 돌아온 것이다. 그들이 전혀 갚지 않아도 될 빚을 갚고 나서 간신히 나락에서 보통의 지상으로 기어 올라온 셈이다. 젊었을 때는 고생도 사서하고 힘든 고난은 사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준다고 누군가 이야기했다.
 ‘개소리.’
 그건 단순히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논리일 뿐이라고 유성은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 그의 앞에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 어금니 3개를 한 주먹에 뽑아 줄 수 있을 거라 단언했다.
 뜨거운 물을 마시자 추위에 조금 굳어 있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워낙 돈을 쓰는 데 인색해지고 어지간한 자린고비도 혀를 내두를 정도가 되어 있는 유성인지라 커피를 마시는 것조차 아까워서 그냥 뜨거운 물을 마시는 걸로 대신했다. 빚을 청산했다고 그의 짠돌이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나중에 또 올게요. 지금은 추우니까 날씨가 풀리면 그때쯤에 생각해볼게요.”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쓰레기를 치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통장에 남은 돈도 얼마 없었고 어머니의 건강도 걱정이다. 돈을 갚지 못하면 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간다 해도 빚이 더욱 늘어날 뿐 제자리걸음만도 못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입원은 꿈도 꾸지 못했다.
 유성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녀가 완곡하게 거절하였기에 그는 빚을 갚는 데만 전념했다.
 그때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말 다른 기능을 제외하고서 오직 통화, 문자 정도만이 가능한 옛 전화다. 이제는 트럭으로 가져다줘도 돈을 주고서 처리해야 할 정도의 낡은 기종. 유성은 문자를 확인했다.
 「어디냐? - 신석호 : 오후 15시 37분」
 석호의 문자였다. 유성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산에 갔다 지금 내려왔어요.」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답장이 왔다.
 「밥이나 먹자. 항상 가던 가게로 와라. - 신석호 : 오후 15시 39분」
 그 문자를 보자 배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자기주장을 열심히 어필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도 배는 고프구나.”
 작게 웃음을 터트린 유성은 곧바로 신석호가 말한 장소로 발길을 옮겼다.
 
 
 2.
 
 
 유성은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몸에도 좋지 않은 것을 마시기 위해 돈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유였지만 지금은 조금 기분 좋게 마실 수 있었다.
 “맛있냐?”
 “예. 간만에 뱃속에 기름칠 좀 하니까 좋네요.”
 불판 위에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갈빗살을 보자 유성의 눈이 뒤집어져 그야말로 며칠 굶은 노숙자처럼 고기들을 흡입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3인분의 갈비가 유성의 배로 사라지자 석호는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뱃속에 난민촌이라도 차렸냐? 천천히 좀 먹어라. 더 시켜 줄 테니까.”
 “역시 아저씨가 짱이에요!”
 “나 짱인 거 이제 알았냐? 킥킥.”
 유성이 엄지를 내세우며 비행기를 태워주자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낮은 웃음을 흘리면서 자신의 잔을 들었다. 유성도 곧바로 잔을 들어 석호의 잔에 부딪혔다.
 “그래, 이제 속 좀 시원하냐?”
 “글쎄요. 시원하달까, 허무하달까. 미묘하죠.”
 “당연한 거다. 원래 너희가 갚지 않아도 될 돈이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냐? 쯧, 그 빌어먹을 새끼는 정말 눈앞에 나타나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거야.”
 툴툴거리면서 잔을 단번에 비워버리는 신석호. 그는 김수원의 오랜 친구이자 형제와도 같은 남자였다.
 예전에는 작은 건축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점차 커져나가더니 이제는 이름을 들으면 어느 정도는 알 법한 유명 건축 사업을 돌리고 있었다.
 40대 후반의 나이답지 않은 우락부락한 몸집과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유성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도와주려 했고 아무도 모른 척할 때 유일하게 선뜻 8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맨발로 달려와 건네줄 만큼의 대인배였다.
 그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빚이 많았기에 유성은 신석호를 평생 동안 모실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돈은 얼마나 있냐?”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당장에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힘들면 언제든지 얘기해라. 네 아비한테는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 내가 도와준다고 민폐라 생각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아저씨. 하지만 저 그렇게 염치없이 낯짝 두꺼운 놈 아니에요.”
 히히, 하고 웃어 보이는 유성. 신석호에게는 더 이상의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빈 소주병이 2개에서 3개로, 다시 4, 5개로 늘어나면서 꽤 후끈하게 취기가 올라올 때 유성이 입을 열었다.
 “정말 기쁜데 전혀 원하지 않았던 기쁨이라서 슬프네요.”
 “사내새끼가 자꾸 약한 소리 할래? 끅! 젊은 놈이 벌써부터 죽는 소리 하면 복 없어진다.”
 “이제까지 저한테 복이란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제까지 없었으니까 앞으로 생기겠지. 어머니는 괜찮으시냐?”
 “앞으로 병원에 모셔가려고요. 상태를 보고 입원을 결정해야 할 것 같아요.”
 “계좌번호 남겨라.”
 “괜찮다니까요. 마련해 주신 집만 해도 얼만데······.”
 “괜찮기는. 그런 것까지 마다하지 마라. 건강은 재산 자체야. 까불지 말고 문자로 번호 보내 놔라. 게다가 요새 혜민이가 너 잘 좀 보살피라고 얼마나 닦달하는지 알아? 자식이, 뒤에서 고생하는 내 생각은 안 하고.”
 “혜민이 누나요? 그러고 보니 누나는 잘 지내요?”
 신석호의 말에 유성은 그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서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잘 지내지. 요새 하도 집적거리는 놈들이 많아서 힘들다던데. 넌 왜 안 집적거리냐?”
 무언가 말이 이상했다. 고개를 갸웃거린 유성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넘겨짚었다.
 “조만간 한번 찾아가서 인사할게요. 보릿고개는 넘었지만 아직 원만한 건 없으니까요.”
 “맘대로 해라. 그래도 혜민이가 널 굉장히 많이 걱정하고 있다.”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누나에게도 신세를 많이 지었으니까요.”
 세상에는 믿을 놈이 없다! 유성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신석호나 그의 딸인 신혜민 같은 사람들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은인이자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시간은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2명만의 조촐한 축하 파티였지만 여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정말 오래 지났다.
 신석호는 대리 기사를 불러 집으로 보내고 유성은 걸어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취기가 바짝 올라서 머리가 빙빙 돌았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실실 웃음이 흘러나오는,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하늘이 어두워졌고 건물과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불빛으로 주변이 환하게 비쳤다. 휘청거리며 걸어가는 동안에 유성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생각했다.
 “가끔씩 우리가 함께 있었던 때를 생각하죠. 너무나도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는 그대 말을 듣고······ 나는 너무나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웠어요.”
 살짝 벌어진 입에서 희미한 노fot소리가 흘러나온다. 명곡 중에 명곡인 ‘그대를 보내고’. 김수원이 가장 좋아하던 노래이자 유성이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였다.
 “사랑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아픔이라는 사실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이 기쁨을 함께 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가 있었더라면 아마 이 찝찝한 기분을 훌훌 털어버리고서 다시 새로운 출발에 밝게 웃었을지도 몰랐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닮고 싶었고, 그대 행복이 되고 싶었지만······ 당신은 거짓말을 남기고 나를 떠나가죠······.”
 그는 떠났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나 기억하고 그리워해도 김수원, 아버지라는 사람은 유성의 마음속에 깊은 공허함을 남기고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유성의 집은 8평의 원룸이었다. 신석호의 연줄로 최대한 싸고 그나마 좋은 장소를 구한 곳이 이곳이었는데 단 두 명의 가족이 살기에는 사실 그렇게까지 나쁘지도 않았다.
 침대 하나에 테이블, 작은 싱크대, 옷장 1개. 그렇게만 들어가니 공간도 생각보다 넉넉하고 빛도 잘 들어오는 곳이었기에 신석호에게는 가면 갈수록 큰 도움을 받았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머니는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침대 옆에 자리 잡은 작은 탁자에는 식은 죽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조용히 신발을 벗고 들어와 옷을 옷장에 걸어둔 유성은 어머니의 옆으로 가서 이마를 짚어 보았다.
 “휴.”
 다행히 열은 오르지 않았다. 옛날부터 몸이 약해서 겨울만 되면 독감에 걸리던 어머니였다. 식사도, 수면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는 그녀의 핼쑥한 얼굴을 보면 울컥하고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유성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조만간 꼭 병원에 모셔다드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현재 버는 돈이 너무 적어. 게다가 이제 슬슬 내 건강도 좀 챙길 때인데.’
 거울 앞에 서자 단단하게 근육이 굳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택배에서부터 신석호의 건축 회사 일, 목욕탕 청소 등 온갖 힘쓰는 노동은 모조리 해왔다. 육체적으로는 어지간한 헬스 트레이너보다 튼튼할 수도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꽤나 몰려 있는 상태이다.
 오랜 시간 동안 쌓이고 축적된 스트레스와 피로가 언제 터져서 그 또한 병이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머니를 돌볼 수 있는 건 자신뿐인데 스스로마저도 병이 나버린다면 정말 답이 없는 상황이 된다.
 ‘아저씨한테도 더 이상의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이제부터는 정말 스스로가 해결을 하고 싶었다. 한숨을 푹 내쉰 유성은 작은 밥상에 놓인 노트북을 실행시켰다.
 털털 거리며 전원이 들어오는 이 낡아빠진 노트북은 누군가가 버린 것을 가져다가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통해 수리한 걸 사용하는 것이었다. 액정도 지저분하고 성능도 떨어지지만 고작 며칠 만지작거린 걸로 노트북을 얻었으니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덜덜거리며 켜진 화면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던 유성은 인터넷을 실행시켰다. 다른 집의 비밀번호가 걸리지 않은 무선 네트워크를 끌어다 쓰는 거라 속도가 조금 느렸다. 유성이 가장 유명한 동영상 방송 사이트로 들어가서 한 게시물을 클릭했다.
 챙캉!
 어디선가 느닷없이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수십 명의 은빛 갑옷을 착용한 기사들이 검과 방패를 들고 앞으로 뛰어나가며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형형색색의 모자와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도 기사들의 뒤에서 불꽃과 번개, 그리고 얼음의 폭풍을 만들어서 상대의 진영을 마구 휩쓸었다.
 그 외에도 멀리서 기사를 저격하는 궁병들이나 어둠 속을 통해 적을 암살하는 암살자와 같은 다른 직업군의 병사들도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이들이 이루어 내는, 긴박하다 못해 화려하기까지 한 전장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비춰 주며 ‘에픽 라이프’라는 로고가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검은 화면이 지나가며 새로운 목소리와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에픽 라이프의 신길호입니다!]
 [안녕하세요. 이혜진입니다.]
 활기찬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두 명의 유명한 연예인들이 마주 앉아 서로에게, 그리고 방송을 보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밝은 인사를 건네었다.
 [혜진 씨, 그 소식 들으셨나요?]
 [어머, 잠깐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저번 주에 붉은 칼날 길드에서 천둥의 망치 길드에 선전포고를 했었잖아요? 그런데 오늘에서야 겨우 길었던 싸움이 끝이 났습니다.]
 [정말요? 어느 쪽을 편들 생각은 없지만 붉은 칼날 길드는 현재 주가가 매우 상승하는 길드 아닌가요? 반면에 천둥의 망치 길드는 고레벨 유저가 많기는 해도 최근 많은 물자난에 시달리고 있다 들었는데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원인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천둥의 망치 길드가 붉은 칼날 길드에 패배하고서 성을 내주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붉은 칼날 길드의 랭킹이 더욱 상승하겠군요.]
 “오오.”
 멍하게 영상을 바라보던 유성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돈을 벌면서 유성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취미를 버렸다. 게임이든, 독서든, 음악 감상이든 모든 시간은 돈을 벌기 위해서 투자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아주 잠깐이라면 쉴 시간이 필요했다.
 남은 시간의 80%는 잠을 자는 데 사용했고 나머지 20%의 시간은 ‘에픽(Epic)’ 관련 방송을 보는 데 사용했다. 아무리 유성이라 해도 그는 20살의 놀고 싶은 욕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1년하고도 6개월 전에 혜성처럼 나타난 가상현실 게임이 있었다. 세계적인 기업에서 제작하고 서비스를 시작한 ‘에픽’은 누구라도 영웅이 될 수 있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완벽한 게임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가상현실이라고는 하지만 무한 반복적인 노가다에 질려있던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어모았다.
 한국은 물론이요, 세계 게이머들의 최소 8할이 에픽이 나오자마자 폭발적인 관심을 쏟았고 게임 시장 점유율만 무려 85%라는 경악할 만한 수치를 보여주었다.
 시간이 갈수록 유저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났고 이미 근대 사회의 역사는 에픽이 나오기 전과 후로 나눌 정도로 현재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에픽을 모르는 사람은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 여행을 했다는 말이 하나의 속담이 될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는 게임, 그것이 바로 ‘에픽’이었다.
 “재미있겠다.”
 유성에게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에픽은 분명히 엄청난 게임이고 한때는 밤을 새가며 캐릭터 레벨을 올리는데 주력했던, 골수 게이머였던 유성 또한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이런 것만 하는 게 내 한계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영상을 보고 상상하고 꿈꾼다. 그래서 얻는 대리 만족감이 그가 스스로와 타협해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현실의 걱정을 잊고 원하는 대로 모험을 즐기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 간다. 엄청난 자유도와 수만 가지의 직업, 종족, 그리고 마법과 기술들. 수십 권의 책으로 써도 모자랄 만큼의 방대한 규모로 사람이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는 마법 같은 게임, 에픽.
 갤럭시에서 만든 접속 캡슐은 현재는 대중화되어 기기 값은 대략 250만 원 정도 하고 한 달 이용비는 5만 원이다.
 접속 캡슐은 단순히 게임 접속만이 아닌 다방면에서 사용되는 만큼 그 가치와 효율을 생각하면 250만 원도 크게 비싼 편이 아니었고 한 달 5만 원의 비용도 이전에 나왔던 게임들의 정액제 비용과 비교해도 높은 편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그 돈도 너무 아까울 따름이었다.
 현실에 회의감을 느끼던 와중 화면 속의 신길호가 즐겁게 입을 열었다.
 [최근에 갤럭시가 에픽에 대해서 큰 이벤트를 열었죠?]
 [무슨 이벤트인데요, 길호 씨?]
 [바로 6개월간 신규 유저들의 이용비를 무려 월 2만 원으로 한다는 파격적인 이벤트입니다! 한 달 5만 원이었던 비용이 무려 60%나 떨어진 셈이죠. 그 때문에 새로운 유저들이 또다시 대거 들어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와, 정말 할인마라는 말이 맞을 정도네요.]
 [이러니까 갤럭시의 게임이라고 할 만하네요.]
 “아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2만 원? 60%의 세일? 다 좋다. 그런데 그놈의 접속 캡슐이 너무 비싸다는 말이다. 혹하는 내용이었지만 이용비만 내리면 어쩌겠다는 건지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곧 그는 어깨에서 힘이 푹 빠졌다.
 “그게 지들 돈벌이니까 당연하지······.”
 유성은 툴툴거리면서 방송을 껐다. 그리고 이번에는 에픽의 공식 사이트로 접속하여 아이템 경매장으로 들어갔다.
 
 「황혼의 전투 장갑 팝니다! 기본금 60만 원입니다!」
 「남국 전투 무희 복장 세트 팔아요. 전 세트 모두 사시면 10% 할인하여 100만 원에 드립니다. 따로 사시면 할인 없습니다.」
 「제네토스의 방패 파시는 분 없나요? 110만 원으로 구해봅니다.」
 「재료 아이템 대거 구합니다. 레벨 112 드워프 장인, ‘조투나’에게 메일 주세요.」
 
 하루에도 수천, 수만 건의 게시물이 올라오는 거래장이다. 자신이 방금 전에 올린 게시물을 확인하려면 고작 1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수 개의 페이지를 넘어가야 할 정도이다.
 이미 에픽은 이 세상에서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이용하는 게임이다.
 사람들은 몰리는데 그들이 필요로 하는 아이템의 수량은 적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격은 올라가고 아이템 하나에 기본 수십에서 최대 수백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가격을 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레어이거나 희귀함을 가져야겠지만 말이다.
 일전에는 한 레어 던전에서 4만 분의 1 확률로 드랍이 된다는 검이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그 검을 차지하기 위하여 5개의 상위 랭킹 길드가 경매 전쟁을 벌였고 이후에는 무려 1억 2천이라는 가격에 낙찰이 된 적이 있었다. 무려 검 하나에 1억 2천이었다. 유성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가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아르바이트했던 가게에서 자신의 아이템이 150만 원에 팔렸다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지.’
 그런 게시물을 보면서 유성은 과거 기억을 되살렸다. 자신이 하루에 20시간이 넘도록 일을 하고서 빠듯한 돈으로 쪼개고 쪼개며 살고 있을 무렵에 다른 이들은 게임을 즐기며 얻은 아이템으로 스스로가 얻은 노력의 산물을 가뿐히 넘는 돈을 번다. 참 억울해서 쓸개가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에픽을 해본 적은 없지만 다년간 인터넷을 뒤져가며 열심히 찾아본 정보만으로는 유성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있었다. 종족의 종류는 기본이고 특성과 지역의 이름을 비롯하여 세세한 설정까지 꽤 깊숙하게 도달해 있었다.
 다만 서울 안 가본 놈이 서울을 더 잘 안다고 그는 정말 말뿐인 고수였다.
 “그냥 자자. 어휴, 빌어먹을.”
 몇 페이지를 더 훑어본 유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노트북을 종료했다. 잠깐 스트레스를 풀 목적으로 본 방송인데 어째 더 스트레스가 쌓인 느낌이다.
 
 
 3.
 
 
 “이 빌어먹을 나라!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자꾸 물가만 올라가는 거야!”
 유성은 기분이 정말로 좋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6000원 하던 약값이 6500원으로 상승하였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찾아오던 감기의 기운이 보였기에 약을 사러 갔다 온 유성은 옷을 갈아입으며 연신 짜증을 부렸다. 이제는 어지간한 공포 영화보다 물가 상승이 더 두려웠다.
 “바쁘니까 더 짜증 나네.”
 유성은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고는 옷을 대충 갈아입었다.
 “어머니,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오늘도 늦게 오니?”
 “아뇨, 금방 올게요.”
 “너한테 너무 무리만 시키는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별거 아니에요.”
 침대에 누워 자신에게 안쓰러운 미소로 말하는 어머니를 보며 유성도 쓰게 웃어 보였다.
 
 밖으로 나온 유성이 향한 곳은 자신이 일을 하던 중고 전자 상가였다. 오고 가면서 무거운 짐을 들고 옮겨주는 것만으로도 수고비를 주는 고마운 주인이었다. 가끔 먹을 것도 챙겨주는 시장 인심이 가득한 사람이었기에 유성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매우 유익한 단백질원, 아니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제 빚을 다 갚았기도 하고 과도하게 많았던 일들을 그만두면서 신세 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오, 유성이 아니냐.”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낡은 뿔테 안경을 착용한 노인이 유성을 반갑게 맞이했다. 주변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많았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최근에 허리 아프신 건 좀 어떠세요?”
 “그냥 뭐 그렇지. 나쁘지는 않지만 썩 좋지도 않구나.”
 “겨울인데 몸 좀 살피세요. 오는 길에 샀는데 좀 드세요.”
 유성이 손에 들린 봉지에서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붕어빵 봉지를 내밀었다. 노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봉지를 받았다.
 “웬일이냐 네가? 내일은 해가 서쪽도 아니고 남쪽에서 뜨겠구나.”
 “저도 쓸 때는 씁니다, 영감님. 이제 짐이 가벼워져서 홀가분해진 기념이에요.”
 “그런가. 그랬지, 그랬어. 고생했구나, 허허.”
 작게 웃음을 터트린 그가 머그잔에 커피를 따라주면서 말했다.
 “이제는 얼굴 보기가 힘들겠구나.”
 “힘들긴요. 어려운 일 있으면 부담 가지시지 말고 불러주세요. 도와드릴 테니까.”
 “그런 말해도 괜찮은 게냐? 정말 막 부려먹을 텐데?”
 “돈은 주셔야 합니다, 하하.”
 두 사람은 유성이 사온 붕어빵과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동안 담담한 대화를 나누었다.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제 슬슬 가보아야 할 것 같네요.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전화하세요.”
 “끌끌, 알겠다니까 그러네. 어서 가 봐.”
 “그럼.”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유성은 기분 좋게 가게를 나오기 위해 문 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노인이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자, 잠깐. 유성아.”
 “네?”
 “그러고 보니 너 그 뭐시냐, 접속 캡슈르? 아무튼 개러신가 먼가에서 만든 기계 알고 있냐?”
 “접속 캡슐요? 예. 물론 알고 있죠.”
 “너도 하나 가지고 있니?”
 “아뇨, 저는 없어요.”
 “그래? 잘됐네. 이리 좀 와 보거라.”
 노인이 빠르게 손짓하며 그를 부르자 유성은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따라갔다. 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킬 일이 있나 싶었기에 일단은 조용히 뒤를 쫓았다.
 노인이 유성을 데리고 간 곳은 가게의 뒤편의 작은 창고였다. 허공에 먼지가 날아다니는 걸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열지 않은 듯했다.
 “여기 이거 말이야.”
 노인이 유성의 시선을 모아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접속 캡슐이었다. 최근에 나오고 있는 3세대 캡슐이 아닌 전 모델인 2세대의 물건이었다.
 “아저씨, 게임하세요?”
 “게임? 아니. 나 같은 늙은이가 그런 걸 어떻게 하나.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에 내 알던 친구 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 녀석이 저번 주에 외국으로 이사를 갔거든. 그런데 이걸 처분하려고 하니 시간이 촉박하고 이전 기종이니 쓸 만하다고 나한테 떠넘기듯이 놓고 간 거란 말이지.”
 캡슐을 힐끗 쳐다본 노인이 말을 이었다.
 “일단 받아서 창고에다 뒀는데 내가 쓰지도 않고 요새 저 기종이 그렇게 많이 찾는 물건도 아니라고 해서 애물단지였거든. 그래서 그런데 네가 필요하면 가져가지 않겠어?”
 “저, 정말로요?”
 “내 선물이라고 생각해둬. 그냥 내가 버리는 물건 가져다 쓴다고 생각하게. 필요도 없는 거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가져가는 게 낫지.”
 노인의 말에 유성은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유성이 알고 있는 2세대의 접속 캡슐은 조금 경량화 되어 있고 딱 한 사람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침대 정도 크기의 물건이었다.
 갤럭시에서 1세대처럼 딱딱한 게임용 같은 느낌이 아니라 편하게 누워서 사용할 수 있는 가구 같은 느낌으로도 사용이 가능하도록 만든 물건이었는데 경량화가 되어 있다 보니 그만큼의 몇 가지 기능이 빠져 있었다.
 그래도 일반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물건이었고 중고 가격도 100만 원 후반 대로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그걸 공짜로 준다고?’
 눈이 당장에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의 머리가 미친 듯이 회전하며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비록 예전 모델이지만 무려 공짜 캡슐에 현재 갤럭시에는 에픽의 이용료 대폭 할인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픽에서의 아이템은 엄청난 고가에 거래된다.
 여러 가지가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손발이 덜덜 떨려올 정도였다. 매사에 신중하게 결정하자, 라는 것이 유성이 가진 3가지 신념 중 하나였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었다. 신념은 멀고 캡슐은 가까웠다.
 “주세요! 당장에 가져갈게요!”
 인내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던가. 원하지 않았던 인내였지만 유성은 작은 보답을 받게 되었다.
 
 그날 바로 신이 나서 가게의 수레까지 빌려서 캡슐을 집까지 가져온 유성은 너무나 들뜬 나머지 어머니의 앞에서 입이 귀에 찢어져라 웃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투덜대며 짜증을 벅벅 내던 아들이 이상한 기계를 가져오면서 미친놈처럼 실실 웃는 모습을 본 현화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니? 그건 무슨 기계니?”
 “별건 아닌데요, 예전에 알던 분께 얻었어요.”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가 간만에 웃는 걸 보니 나도 좋구나.”
 헤실헤실 웃으면서 유성은 캡슐의 설치를 끝마쳤다. 다행히도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았기에 구석에 잘 신줏단지 모시듯 자리를 잡자 1인용 간이침대를 둔 느낌이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이 진행되는데.’
 참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한창 이벤트가 진행될 때 고가의 물건을 공짜로 넘겨받았다. 일단 받아와서 설치를 했지만 막상 눈앞의 캡슐을 보니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다.
 자리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고 고른 숨을 쉬는 어머니를 보니 마음이 미어졌다. 아버지도 없는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유성뿐이었고 유성에게도 남은 가족은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 남게 되어 아들에게 모든 걸 떠넘겨야 했던 탓에 미칠 듯이 괴로울 터인데 더 이상 괴롭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모든 자존심을 버려서라도 그녀만은 행복해야 했다.
 ‘현재 통장에는 900만 원이 있다. 집세는 걱정 없고 전기세와 수도세도 사실상 없다 해도 무방할 정도. 남은 것은 병원비지만 이제부터는 돈을 더 모아서 더 큰 집으로도 이사를 가야 할 텐데.’
 게임을 통해서 돈을 번다? 꿈같은 이야기다. 누구나 시도할 수 있지만 돈을 버는 인원은 사실 그렇게 많지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피가 나도록 게임에 몰두하여서 레벨을 올리고 장비를 모아서 팔아야 했다. 분명 유성과 같은 입장으로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도 엄청날 테고 그들은 유성의 경쟁자이자 모토였다.
 확률은 낮았지만 유성은 이미 18살 때부터 혼자의 몸으로 1억 1천이라는 빚을 갚은 사내였다. 하루 1시간 새우잠을 자며 버텼고 그가 하지 않았던 일이 없었다 해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그는 도전을 알았고 위험을 과감히 무릅쓸 용기도 있었다.
 지난 3년간의 지옥 같은 생활을 떠올리자 방금 전만 해도 떨려오던 손이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는 이미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결정했다. 게임이야 몇 알바를 병행하면서 시작해도 된다. 900의 돈도 있으니 현재로서는 큰 걱정이 없었기에 김유성은 자신감을 얻었다.
 “해보겠어.”
 그의 눈동자에 3년 전의 투지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3일 후, 계정을 등록하고 모든 사전 준비를 마친 유성은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다.
 
 ***
 
 [캡슐이 처음으로 기동되었습니다. 계정을 생성하기 위해 필요한 홍채와 지문 스캔을 시작합니다.]
 ‘홍채와 지문이라······. 이렇게 되면 남의 아이디를 훔치고 싶어도 못 하겠군. 괜히 세계 최고의 보안이라고 자랑했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 그만큼의 규모를 자랑하는 갤럭시라면 이 정도야 당연한 수준이겠지.’
 [홍채와 지문 스캔 결과, 아직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새로운 계정을 생성하시겠습니까?]
 처음에 하얀 빛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계속해서 그에게 친절한 안내를 해주었다. 혹시 몰라 주위를 둘러보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찾을 수는 없었다.
 목소리는 유성에게 신규 계정에 대해 질문했고 유성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생성한다.”
 그러자 동시에 유성의 앞에 액체처럼 일렁이는 특이한 거울이 생성되어 유성의 모습을 비추었다.
 [현재 사용자의 모습을 스캔한 디폴트(Default) 모델입니다. 앞의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바꾸고 꾸며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 각도와 줌, 아웃을 통하여 세밀한 조정도 가능합니다. 첫 계정을 생성하면 다른 계정을 다시 생성할 수 없고 캐릭터 또한 한 계정에 하나의 생성만이 가능하기에 신중하게 선택해서 최고의 캐릭터를 꾸며보십시오.]
 “흐음······.”
 이제까지 찾아본 온라인의 설명서나 이야기들에 따르면 타 가상현실 게임과는 달리 에픽에서 생성 가능한 캐릭터는 한 계정당 오직 하나였다.
 계정을 지우려 한다면 본사에 찾아가 꽤나 복잡한 절차를 걸쳐야만 겨우 지울 수가 있었는데 몇 사람의 경험담을 들어보니 렙업을 상당히 할 수 있는 시간을 계정 삭제에 투자해 손해를 보았다고 했다.
 보통 컴퓨터로 하던 온라인 게임들처럼 캐릭터를 여러 개 만들거나 부 캐릭터를 만드는 것을 할 수가 없었는데 갤럭시의 말에 따르자면 이건 게임에 대한 몰입도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유성은 솔직히 자신을 꾸미는 것에는 별다른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지금 이 모습 그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있는 시스템을 이용하지 않는 것도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 유성의 머릿속에 어떤 모습이 떠올랐다. 에픽의 트레일러에서 모습을 보였던 은발의 기사가 생각난 것이다. 자신도 그 캐릭터를 보고서 에픽에 대한 꿈을 불태우기도 했었으니 어떻게 보면 자신의 롤모델이었다.
 “머리를 하얀색으로. 그리고 다음.”
 그 외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외모에 비례하여 스탯이 바뀌기라도 했으면 정말 열심히 공들여서 외모를 바꾸었을 텐데 말이다.
 [외모가 변경되었습니다.]
 [종족을 선택해주십시오. 에픽엔 34가지의 종족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종족은 현재 15가지가 가능하며 이후로는 플레이어들의 진행에 따라 새롭게 개방이 됩니다. 현재 가능한 종족은 인간, 엘프, 다크엘프, 드워프······.]
 “인간으로.”
 대부분의 이 종족들은 한쪽으로 치우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드워프는 힘과 기술이 높고 엘프는 민첩과 마력이 높은데 그중에서 인간은 밸런스 중심으로 맞추어져 있기에 다방면으로 성장하기가 좋았다. 성장의 폭은 넓지만 그만큼 속도가 낮다는 단점이 있다.
 [종족이 선택되었습니다.]
 [계정이 생성되었습니다. 캐릭터의 이름을 정해주십시오.]
 “사가(Saga).”
 ‘대서사시’라는 뜻을 가진 북유럽의 단어이다. 에픽이라는 게임 제목을 듣고서 자연스럽게 생각난 이름이었는데 에픽과 사가, 두 단어 모두 거대한 이야기를 상징하는 것인 만큼 매우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유성은 생각했다.
 언뜻 보면 약간 유치한 면도 있고 바보 같아 보였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앞으로 당신이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장소를 선택하여 주십시오. 종족 ‘인간’으로 시작이 가능한 장소는 3가지 국가가 있습니다. 각 국가를 선택하면 다시 선택이 가능한 도시들이 나타납니다.]
 “브리튼 왕국, 에르비아 성.”
 [모든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에픽을 시작합니다.]
 
 
 4.
 
 
 잠시 유성의 눈앞이 어둠에 휩싸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환한 빛이 터져 나와 어둠을 밝히고 어느 정도 시야가 회복되자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브리튼 왕국의 에르비아 성이었다.
 게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중세 시대의 건물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한순간이지만 자신이 게임에 접속했다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였다.
 “대단하다······.”
 사가는 놀라서 넋을 잃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과 멀리 보이는 산, 그리고 바로 눈앞의 수많은 집들. 모두 현실과 다를 게 없었다.
 “이게 정말로 게임이란 말인가.”
 사가는 천천히 발을 움직여 보았다. 앞으로 나가는 발을 보고 사가는 캡슐 속 자신도 발을 뻗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까지 내가 한 게임들은 가상현실도 아니었구나.”
 어째서 에픽이 그렇게 각광받는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해왔던 것과 직접 경험하는 에픽은 정말 터무니없이 차이가 났다.
 ‘일단 몸을 좀 움직여 볼까. 왠지 모르게 머리가 간질거리는 것 같지만 신경 쓰지 말자.’
 우선 이 느낌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움직인다고 해도 대단한 것은 아니고 천천히 걷는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이런 대단한 게임을 하고 있다. 무려 몇 천만 명이! 다 나와 같은 목적은 아니겠지만 내 라이벌이나 마찬가지다.’
 시작하기 전에 찾아본 다른 플레이어들의 경험담이나 노하우를 알아보니 브리튼 왕국의 에르비아 성이 초보자들이 시작하기에는 가장 조건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사가 말고도 새롭게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도 많았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지?”
 별다른 정보도 없고 인맥도 없다. 그러니 도저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결국은 게임이니 퀘스트를 받아야 되나?’
 “스탯 창!”
 띠링-.
 
 「이름 : 사가 성향 : 새로운 바람
 
 레벨 : 1 직업 : 모험가
 칭호 : 없음 명성 : 0
 생명력 : 400 마나 : 100
 힘 : 15 민첩 : 15
 체력 : 20 지력 : 10
 마력 : 10 내구력 : 10
 행운 : 4
 공격력 : 5~10 방어력 : 5
 마법 저항력 : 무 (無) 속성 : 무 (無)」
 
 사가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하나 생겨났다. 그것을 자세히 살펴본 사가는 중얼거렸다.
 “빈약하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캐릭터니까 당연했지만 너무나 빈약한 스탯에 한숨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난 이 캐릭터를 최고로 키워야 해.”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처음 시작할 때는 마을의 NPC들에게 의뢰를 구해서 돈을 얻고 명성을 쌓는 게 좋다고 했다. 레벨 1엔 혼자서 여우 한 마리도 잡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토끼한테 단체로 린치를 당해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질 만큼 사냥은 처음엔 피하는 게 좋다고 쓰여 있었다.
 잠시 이전에 읽었던 정보들을 떠올린 사가는 자신의 다음 목표를 정했다.
 “그렇다면 나도 퀘스트를 받아야겠군. 괜히 나섰다가 죽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게다가 돈을 벌려면 역시 일을 해야지.”
 어느 곳에서나 변하지 않는 규칙 하나.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고 돈을 벌고 싶으면 일을 하라!
 게다가 유성은 이미 많은 정보를 찾아보았고 생각해 둔 또 다른 계획이 있었다.
 “후후후. 이제부터 게임 재벌이 되어주마.
 사가의 입에서 비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 물건이 쌉니다! 세렌 강에서 직접 잡은 붕장어! 잉어도 있습니다! 요리 스킬을 높이시고 싶으시면 지금 당장 최고급 식재료 사 가세요!”
 “싸게 무기에 속성 마법 걸어드려요! 빙(氷), 뇌(雷) 속성 부여 마법 초급 6레벨입니다! 효과 좋아요!”
 “무기 수리해드립니다! 볼르톤 왕국의 드워프입니다! 수리 스킬 초급 8레벨입니다! 거의 중급에 달한 만큼 실력도 있으니 이참에 무기 싸게 수리하세요!”
 성의 광장에는 수많은 유저들이 자리를 펴고 물건을 팔거나 사고 있었다.
 간혹 중간에 NPC들도 보였지만 언뜻 봐서는 유저와 NPC들의 차이를 구별하기 힘들었다. 워낙에 세밀한 그래픽과 엄청난 인공지능이 있어 실제 사람과 같이 말하고 움직였다.
 사가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광장을 걸어 다녔다.
 ‘사람들이 많네. 나도 얼른 무언가를 확실히 해야 할 텐데 말이야.’
 이제 막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매우 안달 나게 만들었다. 잠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을 그때 사가의 귀에 한 유저의 말이 들어왔다.
 “그런데 나 직업은 어떻게 하지?”
 “너 분명 전투형 직업으로 키운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당연히 체력과 힘, 그리고 민첩 등을 위주로 올려야 해. 마법사로 전직하고 싶다면 마력과 지력 위주로 올려야 하는데 말이야. 물론 같은 전투형 직업이라도 창술사와 검사는 또다시 성장 방식이 달라지니까 고려할 게 많아.”
 “그런가. 하지만 돈도 많이 들어가는 데다가 전직 퀘스트도 힘들다고 하던데······.”
 “직업마다는 다르지. 그리고 전투형 직업들이 생산형 직업들에 비해 사람들의 숫자도 많고 퀘스트가 어려운 건 당연해. 생산직은 사실 노가다에다가 성취도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 단계의 실력도 키워야 하지.”
 “레벨 10이 되어야지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니······. 결국 그때까지는 계속해서 사냥이나 퀘스트를 하라는 거잖아. 귀찮게······.”
 “너 바보냐? 그때 좀 노가다를 하면서 돈을 바짝 모아두는 게 좋아. 조금이라도 모아야지 나중에 쓸 만한 장비라도 구할 수 있다고. 그리고 레벨 10까지 키우는 것은 잠깐의 준비 단계나 마찬가지라고. 나중에 하다 보면 10이 아니고 20도 짧게 느껴질걸?”
 “그렇구나. 그럼 좀 더 사냥하고 나서 직업소개소나 가볼까?”
 사가는 시끌벅적한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아주 세심하게 들었다.
 
 에픽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직업들이 있었다. 현실처럼 추세에 따라 새로운 직업도 나타나고 사라지기도 한다. 에픽의 기본적인 설정은 판타지이기 때문에 기사, 마법사와 같은 정말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겉멋이 나는 직업들이 매우 인기가 많다.
 기본적으로 알려진 직업들이 전투형 직업들이 존재한다.
 흔히 전사형 직업이라고 알려진 전투의 중심으로 존재하는 검사, 기사, 워리어나 바바리안 같은 직업들을 필두로 빠른 속도와 정확성을 무기로 삼아 멀리서 상대를 저격하는 궁수, 헌터, 그리고 레인저들. 어둠 속에서 빈틈을 찾아 기습하는 암살자들이나 도적들.
 마지막으로 전장의 꽃으로 무엇보다도 화려하게 전투를 장식하는 마법사들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전사 계열이라고 해도 공격형, 방어형, 탱커형 등의 여러 가지로 나뉘고 마법사도 키우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법사들 또한 한 가지 속성으로 집중해서 성장시키는 게 보통이었다. 불의 플레임 위자드나, 얼음의 프로스트 메이지 같은 마법사들이 대표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전투형과 다른, 생산형 직업들이 있었다. 광부가 되어 광물을 캐고 그것들을 이용해서 무기나 방어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들, 화려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나 아름다운 조각을 만드는 조각사들,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요리사들, 심지어는 농부나 목사, 청소부도 있었다.
 사람의 취향에 따라 고르는 직업들이 제각각 달랐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투형 직업에 매달렸다. 전투를 즐기고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넘어 험난한 모험의 세계로 발을 디뎠을 때의 그 쾌감! 사람들 모두 그 누구보다 에픽에 대해 알아내고 이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고 싶어 했다.
 
 사가는 잠시 고민했다. 직업은 앞으로의 플레이에서 매우, 무척, 엄청나게, 정말 빠질 수 없이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멋있는 직업을 원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돈이 될 법한 아이템과 밀접한 직업만이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었다.
 ‘아이템! 그리고 돈!’
 아이템을 많이 끌어모을 수 있고 돈과 가까운, 그런 꿈과 같은 직업을 잠시 고민하던 사가는 좀 더 정보를 모아보자고 생각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이 말했던 대로 퀘스트를 찾아봐야겠군.”
 사가는 일단 그 북적거리는 광장에서 벗어났다.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커다란 성문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는 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가죽 옷을 입고 밀짚모자를 착용한 채로 주변에 지나가는 플레이어들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기에 사가는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안녕하신가. 모습을 보아하니 새롭게 진입한 ‘천인(天人)’인 모양이군.”
 “예, 맞습니다. 제 이름은 사가입니다.”
 “반갑네. 내 이름은 빈슨일세. 별거 없는 노인이지만 자네 같은 몇 신출내기 모함가들을 많이 보았지. 내게 온 걸 보면 필요한 게 있는 모양인데 궁금한 것이라도 있나?”
 “정확합니다. 보시는 바처럼 저는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초보 모험가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다른 모험가들은 처음에 어떤 일을 하는지 아십니까?”
 사가의 물음에 빈슨은 잠시 자신의 회색 턱수염을 긁적였다.
 “모든 이들이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주변에서 내가 보아왔던 모험가들은 대부분 3가지 일을 하더군. 첫 번째는 성 주변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것이네. 이 근처는 그렇게 치안이 나쁘지 않아서 엄청난 몬스터가 나타나지는 않기에 능력을 키우기에는 적당하겠지. 두 번째는 일거리를 찾는다네. 이런저런 가게에서 일을 하거나 아니면 용병 조합, 혹은 광장에 설치된 의뢰 안내판에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의뢰를 찾아서 해결하는 거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장사야.”
 “장사요?”
 “그렇다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돈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바깥에서 얻은 여러 물품을 가공해서 좀 더 비싼 가격에 되팔거나 아니면 타인에게 필요한 물건을 듣고서 제작해주는 거지. 물론 어느 정도의 운과 실력이 따라주어야만 가능한 방법이지만 말이야.”
 장사라는 말에 사가는 순간 머리에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사!
 큰돈이 몰리는 곳에는 역시나 큰 거래가 오고 가기 마련이다. 스스로의 비즈니스를 찾아서 그것을 성공시킨다면 분명 목돈을 만지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군. 분명히 직업 중에 상인도 있지 아마?’
 
 상인.
 꽤나 복잡하면서도 간단한 직업이 바로 상인이다.
 물건을 사고팔면서 이윤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상인들은 생각보다 인기가 좋은 직업인데 일반적인 RPG 게임에서의 거래 창을 띄워두고 대충 정한 시세에 맞추어서 파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에픽’은 왕국마다, 그리고 그 왕국의 각 도시마다 물건들의 시세가 정해져 있다. 어떤 도시는 쌀이 비싸지만 어떤 도시는 쌀이 차고 넘치는 실정이라, 그것을 가지고 저울질하면서 이득이 되는 장소에 팔아야 한다.
 또한 몬스터의 침공이나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물가가 폭락하거나 폭등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단순히 유저들의 시세만을 고려해서 장사를 시작했다가는 바로 쪽박을 차는 경우가 많았다.
 몇몇 회사에서는 에픽에서 상인으로 전직, 그리고 얼마의 이윤을 남기는가가 입사 시험이라는 소문도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까다로운 직업인지 불 보듯 뻔했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모양이로군.”
 “예. 그런데 장사라는 말이 매우 끌리는군요.”
 사가의 말에 빈슨은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껄껄 웃었다.
 “오호라. 돈이 좀 필요한 모양이군 그래. 이전에 나도 상인으로 활동하던 때가 있었지. 당시에는 돈 좀 만지는 유명인이었는데 이제는 젊은이들의 기술에 따라가질 못하겠어. 하지만 만약 자네만 좋다면 내가 상인의 기술을 알려주도록 하지.”
 “아니, 정말입니까?”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는데 누가 거절하겠는가? 그것도 공짜로! 하지만 싱글벙글하던 사가는 노인의 말에 곧 얼굴을 구겼다.
 “대신 내 부탁을 들어주게나.”
 “네? 부탁요? 이거 공짜로 알려주시는 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
 그러면 그렇지. 워낙 돈에 민감한 사가이다 보니 제멋대로 공짜라 판단했었다. 약간 머리를 굴린 후 너무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각오가 된 사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무엇이죠?”
 “현재 나는 가죽을 가공해서 파는 가공업을 하고 있지. 그런데 최근에 이 주변에서 고블린과 코볼트 무리가 함께 나타났다는 소문과 함께 동물들이 잘 안 보이지 뭐야. 조금 더 깊숙한 숲으로 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그럴 힘도 없지 않겠나.”
 “그래서요?”
 “토끼와 사슴, 그리고 늑대 가죽을 20장씩만 모아다 주면 좋겠어. 그러면 내 약간의 수고료와 함께 내가 가진 상인의 기술을 전수하지.”
 띠링!
 
 「마을의 노인, 빈슨의 부탁.
 빈슨은 최근 물량이 부족한 가죽 공급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그가 원하는 수량의 가죽을 가져다준다면 알고 싶어 하는 상인의 기술을 알려준다고 하였다.
 난이도 : E
 보상 : 빈슨의 상인 기술, 5 골드 주화.
 퀘스트 제한 : 질이 나쁜 가죽을 가져다줄 시 호감도가 크게 하락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퀘스틀 완료할 시에 추가로 받는 금화가 높아집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오오!”
 사가의 입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게임을 시작하고서 받는 기념비적인 첫 퀘스트였다. 게다가 보상까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60장이나 되는 가죽들을 모아오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지만 사가에게 있어서 귀찮은 일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약속된 3골드 외에도 빠르게 완료하면 추가적인 보상이 존재한다니 그의 도전 정신을 더욱 부채질했다.
 에픽에는 구리로 만든 동화, 은으로 만은 은화, 금으로 만든 금화가 기본적인 3가지 화폐이다. 보통은 쿠퍼, 실버, 골드라고 한다. 1실버가 100쿠퍼이며 다시 이 실버가 100개가 모이면 1골드가 된다.
 5골드는 초반에 시작하는 돈 치고는 꽤나 큰 금액이었다. 10레벨에 마을 대장간에서 파는 적당한 롱소드가 2골드가 조금 되는 걸 보면 10 이하 장비는 2개에서 3개 정도 살 수 있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보면 작은 돈이었지만 생각보다 굉장한 이득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사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 퀘스트를 진행하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빠르게 가죽을 모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네. 이쪽 남서쪽 그레린 거리로 가면 빈슨의 가공소라는 팻말이 보일 걸세. 나중에 보세나.”
 
 
 5.
 
 
 빈슨은 다시 자신의 의자에 앉아 손을 흔들었고 사가는 얼른 로그아웃을 했다.
 캡슐에서 나온 유성은 노트북을 켜고 상인에 대해 찾아보았다.
 “상인이라······.”
 인터넷에는 수많은 포털 사이트가 상인에 대해 소개해 주고 있었고 자신들만의 요령도 알려주고 있었다. 상인으로 전직하려면 성에 있는 상인 길드로 찾아가면 되는데 꽤나 귀찮은 퀘스트를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3골드를 가지고 여우 가죽 40장을 사 오는 것인데 여우 가죽은 한 장이 50실버가 넘는 가격이다.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고 상인으로서의 기술을 발휘하는 게 퀘스트의 목적이라는데 성공적으로 완수를 하면 결과에 따라 스킬이나 많은 보상을 준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가죽들은 그리 큰 가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 장소마다 시세라는 것도 있어서 가격이 다 달랐다. 몇 사람들은 사냥을 해서 구했다고 하지만 이건 그냥 비추천이라고 못이 박혀 있었는데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는 데다 이 많은 동물들을 사냥하기에는 캐릭터의 레벨이 터무니없이 낮다.
 몇 사람은 아이템을 살 돈이 없어서 노가다를 뛰고서 물건을 사서 팔아 성공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아득바득 성공담을 읽을 때마다 유성의 가슴속에서 벅차오르는 감동이 있었다.
 “노가다란 인생의 진정한 목표이면서 진리지. 암.”
 유성이 뭔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알람이 울렸다.
 “아차. 어머니 약 드릴 시간이군.”
 자리에서 일어난 유성은 방을 나가 어머니에게 드릴 약을 준비했다.
 
 ***
 
 “인벤토리!”
 띠링!
 사가의 목소리와 함께 작은 반투명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초보자를 위한 옥수수 식빵 x 10EA」
 「양철로 만든 가벼운 수통 1EA」
 「초보자 용 철심을 박은 목검」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본적인 물품들이었다. 수통은 언제라도 마을이나 냇가에서 물을 받을 때 사용할 수 있고 식빵은 하나를 소모해서 최소 이틀은 버틸 수 있다고 알고 있었다.
 “나쁘지 않군.”
 그렇게 중얼거린 사가가 목검에 손을 가져다 대니 단단하고 매끈하면서도 묵직한 느낌의 목검이 잡혀 나왔다.
 “아이템 정보.”
 띠링!
 
 「초보자용 철심을 박은 목검
 내구력 : 20/20
 공격력 : 8~10
 초보 검사들이나 모험가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나무로 만들어진 검이다. 매끈한 느낌이 들지만 그리 좋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다.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무게 : 7」
 
 천천히 목검의 정보를 읽은 사가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기라고는 일단 이 허접한 목검이 전부이다. 하지만 공격력이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고 내구력도 낮다. 게다가 아이템 설명의 마지막 문장을 읽은 사가는 눈썹을 씰룩거렸다.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빌어먹을, 그렇다면 좋은 검을 하나 주든가 이게 뭐야?”
 인터넷에서 찾아본 정보로 노가다를 시작하기로 한 사가는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손에 들려 있는 목검을 보며 욕을 했다.
 “젠장. 그렇다면 천천히 사냥을 해야겠군.”
 자신이 입고 있는 옷도 아주 후진, 노멀 등급에서도 가장 낮은 가죽옷. 최대 방어력이 고작 4밖에 되지 않는 대단한 가죽옷이다. 아쉬운 대로 입은 것이지만 이것밖에 없으니 선택지조차 없었다. 다시 채비를 마친 사가는 발걸음을 옮겨 성 밖으로 향했다.
 
 성 밖은 녹색으로 뒤덮인 드넓은 초원이었다. 에르비아 성의 남쪽 성문은 초원을 사이에 두고 우거진 산림과 3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성문 주변에는 좌판을 깔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삼삼오오 모여서 산림 구역으로 사냥을 떠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빠! 거기 여우 잡아!”
 “앗! 체력이 부족하다! 빨리 회복 물약을!”
 수 명의 파티원들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면서 사냥을 하는 참 즐거운 모습들이다. 하지만 사가는 그들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팀원은 필요 없지. 적어도 나에게는.’
 그의 기억 속에 친구란 집이 망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온갖 멸시와 모욕의 언사를 내뱉던 자들이다. 과거를 떠올리자 괜히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빌어먹을 토끼 자식들. 너네는 다 죽었어.”
 사가는 수풀 사이에서 가만히 앉아 풀을 뜯어먹던 토끼를 향해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이제 너희는 다 내 꺼야. 흐흐흐!”
 비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범죄자와 같은 얼굴로 웃음을 흘리는 사가를 보자 하얀 토끼는 겁에 질려서 더더욱 하얗게 질려버렸다. 참으로 귀여운 토끼였지만 사가는 망설이지 않고 토끼에게 덤벼들었다.
 “그래보았자 지금은 내 가죽 공급원이지, 하압!”
 커다란 기합을 지르며 토끼를 향해 휘두른 목검!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히 시원한 타격감이 터져 나와야 할 텐데 그저 허공을 베어버린 것이다. 잘 보니 토끼는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검을 가볍게 피해버린 뒤였다.
 ‘어라, 이게 아닌데?’
 사가는 다시 한 번 더 목검을 휘둘렀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빠른 공격이었지만 토끼는 방금 전과 같이 가볍게 목검을 피해버렸다.
 “얼씨구?”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사가는 정신을 차리고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토끼는 순간 붉은 눈을 반짝이더니 사가에게 뛰어올라 발을 휘둘렀다.
 “커헉!”
 
 「토끼에게 공격을 당해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체력이 5 감소합니다.」
 
 분명히 포식자가 되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가볍게 처리하기는커녕 오히려 맞고 있었다.
 분명 다른 게임이나 현실로 보아도 아주 온순하고 겁이 많으며 약해서 목검으로 툭 치기만 하면 죽을 그런 토끼일 텐데 이 녀석은 달랐다. 움직이는 속도가 장난이 아닌 데다가 이상하게 토끼한테 맞은 배가 아파왔다.
 사가는 토끼한테 맞았다는 수치심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런 망할 토끼 자식!”
 사가는 이제 무작정 토끼에게 검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맞을 것 같으면서도 슬쩍슬쩍 스치기만 하는 공격!
 어느새 사가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왔다. 하지만 토끼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그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게다가 이미 몇 번 공격을 먹었기에 사가의 생명력은 50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토끼 한 마리에게 생명력이 반이나 줄어들다니······.’
 이러다가는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오히려 맞아죽은 놈이 될 것이 뻔했다.
 그것도 첫 사냥감에게 말이다.
 사가의 눈에는 더 이상 토끼라는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얀색 깜찍한 얼굴을 한 괴물로 보일 뿐. 이제 여유 따윌 보일 수는 없다. 사가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유심히 토끼를 바라보았다.
 ‘분명 녀석은 내가 공격하려고 할 때의 틈을 찾아 나를 공격한다. 토끼 주제에 카운터라니······ 나 참, 어이가 없군. 즉 내가 공격해야 녀석의 공격을 끌어낼 수 있다는 건데. 그렇다면······.’
 약간 머리를 굴린 사가는 다시 한 번 크게 검을 휘두르는 척을 했다.
 “죽어라!”
 그러자 토끼는 예상한 대로 곧바로 사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때를 노린 사가는 목검을 살짝 비틀어 휘둘렀다.
 퍼억!
 드디어 손끝에 전해져 오는 시원하면서도 말랑말랑한 타격감!
 토끼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바닥에 엎어졌다. 토끼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바닥에 엎어져 부들부들 몸을 떨다 축 늘어져 버렸다.
 “죽어! 죽어!”
 퍼억! 퍼억!
 시원한 타격음이 숲에서 울려 퍼졌다. 방금 전의 한을 풀듯이 사가는 데들리 상태가 되어 회색이 되어버린 토끼를 무차별적으로 때려잡기 시작했다. 결국 토끼인지 피를 닦은 걸레인지 모를 물체가 떨어졌다.
 
 「토끼를 죽였습니다. 경험치 5를 얻었습니다.」
 
 “흐음······. 이제 가죽을 채취해볼까. 루루루, 가죽을 보자.”
 한숨 내쉰 사가는 휘파람까지 흥얼거리며 토끼의 시체를 뒤적거렸다. 토끼한테서 떨어진 5센트를 줍고 토끼의 가죽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부욱!
 
 「서투른 해체 작업으로 가죽을 손상시켰습니다. 0%로 질이 완전히 하락한 가죽은 사라집니다.」
 
 “어?”
 분명히 요령 있게 잘한 것 같은데 안내와 함께 가죽이 그저 털 뭉치처럼 구겨지더니 쓰레기로 변해서 없어졌다.
 “이게 스킬 때문인가 보군.”
 사가는 답답한 듯 중얼거렸다.
 실제로도 무언가에 익숙하면 간단히 할 수 있는 일도 초보자들은 어려운 법이다. 결국 사가는 엉터리 실력으로 괜히 해체를 하려다가 오히려 망쳐버린 것이다.
 만약 도축 스킬이 있었다면 아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야 사냥을 시작한 사가에게 그런 스킬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겨우 사냥했는데 가죽은 사라졌군.”
 보통 사람이라면 짜증을 내며 그만뒀을 게 뻔했지만 사가는 달랐다. 오히려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
 
 그 뒤로 사가는 점차 요령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언제 검을 휘둘러야 더욱더 효과적으로 데미지를 줄 수 있는가 말이다.
 한 번에 세 마리를 맞닥뜨리기도 했는데 단숨에 처리하려고 했던 사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녀석들은 쏜살같이 달려들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충 토끼들의 움직임이 눈에 익은 사가는 빠르게 피하며 검을 휘둘렀고 타격음과 함께 녀석들은 바닥에 엎어졌다. 가끔씩 기습 공격도 하는 토끼들도 있어서 난감한 적도 적잖이 있었다.
 토끼와의 사투가 시작된 지 장장 5시간이 흘렀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킬, ‘검술’을 배우셨습니다.」
 「스킬, ‘가죽 채취’를 배우셨습니다.」
 
 “어라?”
 벌써 60마리가 넘는 토끼를 잡았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레벨이 올라갔는데 사가는 그것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열중해서 사냥을 계속했다. 하지만 새로운 두 가지 스킬에 대한 정보창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벌써 레벨이 올라가나? 스탯창!”
 띠링!
 
 「이름 : 사가 성향 : 휘몰아치는 돌풍
 
 레벨 : 3 직업 : 모험가
 칭호 : 없음 명성 : 0
 생명력 : 440 마나 : 100
 힘 : 17 민첩 : 18
 체력 : 22 지력 : 10
 마력 : 10 내구력 : 14
 행운 : 4
 공격력 : 6~11 방어력 : 7
 마법 저항력 : 무 (無) 속성 : 무 (無)
 
 * 각 레벨업 시 보너스 스탯이 10씩 추가됩니다.
 * 보너스 스탯이 아니더라도 일정 조건이나 행동을 만족, 취하게 될 시에 스탯이 향상됩니다.
 * 남은 보너스 스탯 : 20」
 
 레벨 업이 된 것은 물론 기뻤다. 하지만 스탯을 어떻게 올려야 할지 난감했다.
 스탯의 효과는 다음과 같이 나뉘게 된다.
 
 「1. 힘(Str) : 근력이 상승할수록 몸을 이용한 대부분의 행동이 더 적은 힘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또한 장비를 착용하는 데 있어서 제한이 줄어들게 됩니다.
 2. 체력(HP) : 당신의 목숨을 나타냅니다. 높은 체력은 당신의 생존율을 극대화합니다.
 3. 내구(End) : 에너지의 소모율이 줄어들며 더욱 튼튼한 신체를 갖게 됩니다. 신체의 내구력, 즉 물리적 방어력과 질병에 대한 저항력 등이 상승하게 됩니다.
 4. 민첩(Agi) : 신체를 이용한 행동의 속도와 명중률, 그리고 성공률이 증가하게 됩니다. 몸의 제어력과 타인의 움직임에 대한 반응이 빨라지게 됩니다. 또한 신체를 이용한 갖가지 재주에 능숙하게 됩니다. 무언가를 만들거나 하는 손재주를 비롯하여 익히고 배우는 행위에 성취력이 높아지게 됩니다. ‘손재주’와 같은 패시브 스킬과 큰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5. 지력(Int) : 높은 마법적 지식으로 인해 마나에 대한 친화율이 높아지게 됩니다. 지력이 높아지면 타인의 마법에 대한 항마력(抗魔力)이 상승하며 자신의 마법의 효과도 높아집니다.
 6. 마력(MP) : 당신의 마법 혹은 여러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이능의 힘입니다. 높은 마력은 당신의 비장의 수를 더 많이, 그리고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합니다.
 7. 행운(Luk) : 당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능력입니다. 행운은 자신이 직접 상승시킬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행동이나 물건을 통해 포인트를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잠재력의 발생을 높이고 행운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러한 스탯 시스템은 여타 RPG 게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민을 하던 것도 잠시 잘 생각해보니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전투형 직업의 스탯을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았기에 사가는 스탯을 힘과 민첩에 적절히 분배해서 올렸다.
 “스킬 창.”
 잠시 자신의 스탯창을 바라보던 사가는 그것을 닫더니 스킬 창을 열었다. 처음과는 달리 검 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스킬 하나가 보였다.
 
 「검술 (초급 1레벨, 패시브)
 : 검을 쥐고서 전투에 임하는 당신은 이제 검사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검 계열의 무기를 사용하여 공격을 할 시에 공격력이 10% 상승하고 적중도가 5% 상승됩니다. 당신의 검술이 점점 더 강해지고 나아질수록 스킬의 레벨이 오르게 됩니다. 스킬의 레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효과가 더욱더 향상됩니다.
 
 가죽 채취 (초급 1레벨, 액티브)
 : 가죽을 채취할 수 있습니다. 스킬 레벨에 따라 성공률이 달라지고 채취한 후의 가죽 상태가 달라집니다. 현재 스킬 레벨에 의해 소형 동물들의 가죽만 채취할 수 있습니다.」
 
 “크흐흐흐흐.”
 스킬의 효과를 살펴본 사가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노가다를 해야 뭔가 얻을 수 있군. 고작 토끼 몇 십 마리 좀 잡았다고 해서 검술과 가죽 채취를 배우다니 말이야.”
 보통 검술은 검을 사용하는 유저라면 누구나 곧바로 얻을 수 있는 기초적인 스킬이었다. 많은 초보 유저들의 첫 무기가 사가의 목검과 같은 물건이다 보니 설령 전투 직업이 아니더라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런데 검술과는 달리 가죽 채취 스킬은 어지간한 노가다와 노력으로는 스스로 배우기 힘든 스킬이다. 시스템의 도움 없이 자신만의 손재주를 이용하여 수십 번은 족히 넘는 연습을 통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그런 악독한 스킬인 것이다.
 스킬까지 배우고 나자 사가는 풀밭에 앉아 인벤토리에서 식빵과 수통을 꺼냈다.
 우물우물.
 입에 빵을 한가득 물고 입을 요란하게 움직이던 사가는 자신의 옆에 쌓여 있는 토끼 가죽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퀘스트 제한 중에서 질이 낮은 가죽을 가져갈 시에는 호감도가 하락한다고 하였으니 이걸 그대로 가져갈 생각은 없었지만 처음에는 이것도 감지덕지일 만큼 쓰레기 가죽이 나왔었다.
 어림잡아도 200마리 정도는 잡은 것에 비해 그의 옆에 있는 가죽은 많아야 30장 정도였다. 그것도 하급 중에서도 최하급으로. 그렇지만 사가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좀 더 사냥 속도를 올려야겠군.”
 사가는 가죽을 가방에 잘 구겨 넣고 손의 빵을 입에다 욱여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6.
 
 
 같은 노가다 사냥이라 하더라도 에픽의 사냥은 일반적인 다른 게임들과는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토끼들을 찾을 때마다 아이템이 떨어지고 그것을 줍는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했던 것이다.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사가는 인벤토리에 늘어가는 가죽의 양을 보고서 황홀한 비명을 질렀다. 가죽을 모으고 그것을 묶음으로 모아 가방에 넣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사가의 검술 실력이 월등히 높아졌고 게다가 토끼나 사슴을 쫓을 때는 달리거나 구르는 등 온갖 짓을 해가며 잡았다.
 
 「적을 훌륭하게 처리하였습니다. 힘이 1 상승합니다.」
 「계속된 빠른 움직임으로 민첩이 2 상승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전투를 지속하였습니다. 체력이 2 상승합니다.」
 
 사가를 더욱 사냥에 미치게 만든 또 다른 이유! 바로 반복 행동을 통한 스탯의 향상이었다.
 ‘스탯도 상승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이런 것이었군.’
 인터넷에서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였다. 초반의 레벨 10아래에서는 스탯 상승이 꽤나 자주 나온다고 들었다. 자신이 직접 고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원하는 스탯 상승을 유도할 수는 있었다.
 그의 레벨은 아직까지 9에 머물렀지만 레벨 업을 통한 보너스 스탯을 제외하고도 반복 행동 보너스 스탯으로 사가는 동일한 9 레벨의 유저들보다 약간 우위에 있었다.
 “후. 잠시 쉬도록 할까.”
 땀을 닦아내면서 사가는 근처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앉았다. 이제 웬만한 토끼들은 사가만 나타나면 꼬리가 빠지게 도망치기 바빴다.
 
 「토끼 가죽 10개 묶음 10개를 하나로 합쳐 토끼 가죽 100개 묶음 1개로 만들었습니다.」
 
 “후후후. 돈이 굴러 들어오는 소리가 아주 찰지게 들리는구나!”
 게임을 시작한 지 현실 시간으로 3일 정도가 되어가고 어느새 토끼를 무자비로 잡다 보니 가죽 100개를 거뜬하게 모아버린 것이다.
 ‘토끼 가죽은 상당히 모았군. 가장 좋은 것만 남겨두고서 팔거나 해야 되겠어.’
 사가가 이렇게 가죽을 모으는 이유는 자금의 확보 때문이었다. 돈이 있어야 장비도 맞추고 식량을 사서 사냥을 할 수 있다. 질 좋은 장비가 있어야 더 강한 사냥감을 쫓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조금 사치를 부려서 옥수수 빵을 사볼까.’
 입안에 가득 식빵을 베어 물면서 사가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조금 귀찮은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시작할 때는 바짝 사냥을 해서 충분한 수의 가죽을 모으고, 자신이 사용할 가죽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팔아버리기 위해 잘 정리하여서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게임이란 게 이렇게 즐거울 줄 몰랐는걸.”
 이게 바로 천직이라고 하는 걸지도 몰랐다. 잠시 휴식을 취한 사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포에 떨며 바르르 떨고 있는 토끼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안녕, 얘들아? 너희들의 가죽이 매우 탐스럽구나.”
 
 ***
 
 “얘, 너 그거 들었어? 지금 성 밖에 토끼랑 사슴을 아주 도살하고 있는 유저가 있다던데?”
 “현실에서 도살장에서 일하는데 그 광기를 못 참아서 여리고 착한 토끼나 사슴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있다는데?”
 “무섭다, 진짜.”
 세 명의 여성 유저들이 길을 걸어가면서 알 수 없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순한 동물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있다는 소문!
 사실 이 소문은 벌써 에르비아 성에 꽤나 알려졌다. 때가 낄 때로 끼고 넝마가 된 가죽옷을 입고 목검인지 나뭇가지인지 모를 것을 들고 동물 사냥을 하고 있다는 남자.
 어느새 몇몇의 유저들은 그 남자를 찾으러 숲으로 들어갔었고 돌아올 때 이렇게 말했다.
 “미쳤어.”
 “제대로 정신이 나간 거 같아.”
 “분명히 게임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하나같이 남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하얀 머리색에 동물들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몰라.”
 “닉네임을 숨겨놔서 모르겠지만. 생긴 건 멀쩡한데 말이야.”
 
 ***
 
 “헉헉······ 더럽게 빠른 사슴들이네.”
 더러운 옷차림에 때가 낀 숏소드를 오른손에 들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던 백색 머리의 남자는 바로 사가였다. 사슴이 무리 지어 뛰어간 곳으로 무작정 쫓아가며 사냥을 하고 있던 참이다.
 “민첩이 늘어도 달리는 데에는 도저히 도움이 되지 않는군.”
 요 며칠 동안 스탯이 상당히 늘었다. 가장 많이 상승한 스탯은 민첩과 체력으로 그 상승폭은 초보자 치고는 상당하게 올랐고 전체적으로 전투 계열 직업에 어울리는 몸이 되었다.
 처음에는 무작정 사냥을 위해서 움직였지만 이제는 스탯을 올리는 게 주된 목적이 될 정도였다. 레벨도 4가 더 올라 레벨이 13이 된 상태였다.
 그런데 초반에는 스탯이 그럭저럭 오르는 것 같았지만 이제는 아예 오를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동일한 행동으로 올릴 수 있는 스탯은 한계가 있다는 건가.’
 움직임이 현저히 빨라지고 들고 있는 검이 가벼워졌다. 그건 그냥 느낌상 그런 것이 아니고 스탯의 성장의 덕을 톡톡히 본 덕분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스킬의 효과도 상상 이상으로 컸다.
 “스킬 창!”
 띠링!
 
 「검술 (초급 5레벨, 패시브)
 : 당신의 검에 대한 이해가 늘고 있습니다.
 아직 이렇다 할 실력은 아니지만 꾸준히 가꾸는 그 실력은 보석의 원석과 같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깎이는 고통에도 이를 물고 훈련을 하다 보면 언젠가 검의 극치를 달리게 될 것입니다.
 검을 사용하여 공격을 할 시에 공격력이 30% 상승하고 적중도가 18%가 상승됩니다.
 당신의 검술이 점점 더 강해지고 나아질수록 스킬의 레벨이 오르게 됩니다.
 스킬의 레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효과가 더욱더 향상됩니다.
 
 가죽 채취 (초급 7레벨, 액티브)
 : 가죽을 채취할 수 있습니다. 스킬 레벨에 따라 성공률이 달라지고 채취한 후의 가죽 상태가 달라집니다. 현재 스킬 레벨에 의해 소형 동물들의 가죽만 채취할 수 있습니다.」
 
 “후후후. 검의 이해가 늘고 있다라. 나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것 같군. 이런 재밌는 노가다를 왜 사람들은 싫어하는 줄 모르겠군.”
 사가는 일단 자신의 짐을 챙기고 성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성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북적였다.
 성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서성이며 사냥도 하고 있었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사람들이 자신만 보면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는 것이 아닌가?
 “저 사람이 그 소문의 미친 사냥꾼이야.”
 “생긴 대로 노는구나.”
 “눈에 광기가 담긴 게 아주 버서커네, 버서커.”
 “······.”
 그들이 하는 말을 잘 들을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좋은 말을 하지 않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사가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좀 더럽기는 하지만 뭐 어떻게 하든 내 맘이지.’
 마을의 안쪽으로 걸어가 한 상점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사가 아닌가? 자네 또 사슴 쫓아다녔나?”
 “아 예. 이번에도 부탁드립니다. 좋은 것들 구해왔어요.”
 안경을 쓴 한 노인이 사가를 반갑게 맞이했고 사가는 웃으며 자신의 가방에서 사슴 가죽 묶음을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들어온 곳은 가죽옷을 전문으로 팔고 수선하는 옷 가게였다.
 아무리 사가가 좋게 사냥감에게서 가죽을 분리한다 해도 그대로 팔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다. 수선을 하면 더 좋은 재료 아이템으로 취급이 되어서 높은 값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인데 그러던 찰나 찾은 가게가 이곳이었다.
 주인은 이렇게 많은 양의 가죽을 가져온 사람은 처음이라며 선심을 쓰며 싼 가격에 좋은 품질로 수선해주었다. 덕분에 돈도 아끼고 인맥도 늘린 사가는 가죽을 얻으면 이곳으로 수선을 맡기러 오고 있었다.
 “이건 저번의 사슴 가죽들이네. 정말 자네처럼 매번 한가득 가죽을 가져오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다 제 인생을 위해서입니다. 언제 보아도 한스 아저씨의 수선 솜씨는 일품이군요. 그저 축축하고 늘어져 있던 사슴 가죽이 마치 밍크의 털과 같이 매끄럽게 변해버렸으니 말이에요.”
 사가는 한스에게서 받아든 가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러자 한스는 슬쩍 머리를 긁적이며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그게 다 경험의 차이지!”
 “그런데 오늘 제가 돈이 부족해서······ 어떻게 좀 안 될까요?”
 “하하하! 까짓것 좀 깎아주도록 하지!”
 “헤헤헤, 감사합니다.”
 ‘됐군.’
 싱글벙글 웃던 사가의 표정이 사악하게 변했다.
 한슨, 이 불쌍한 NPC는 눈앞의 유저가 그저 수선하는 몇 센트의 돈이 아까워서 입에 발린 소리를 지껄이는 줄도 모르고 좋아하며 가죽을 수선하고 있었다.
 
 「잘 정리된 사슴가죽(재료)
 : 솜씨 좋은 장인이 수선한 사슴 가죽이다. 상처도 없고 매끄러운 느낌의 가죽. 옷을 만든다면 웬만한 추위는 모두 이겨낼 따뜻한 코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옷이라, 이건 꽤 쓸 만하겠는데?”
 절대로 재봉 스킬을 올리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지만 옷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에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이대로 사슴 가죽을 끌어모아서 몽땅 옷으로 만들어 팔아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사가의 수중에 있는 돈은 4골드 정도 했다. 토끼나 사슴들에게서 나온 돈들을 틈틈이 모아서 겨우 모은 돈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부자가 되는 기본 중의 기본이지.’
 “그럼 전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래, 알았네. 나중에 보지.”
 사가는 꾸벅 고개를 숙여 한스에게 인사를 한 후 가게에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무기도 그렇고 옷도 온통 걸레가 돼 버려서 새로 장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옷인지 그냥 길에서 굴러다니는 천 쪼가리인지 구별이 안 가는 가죽옷과 더 이상 목검이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는 막대기 하나.
 이제 와서 생각한 것이지만 스스로가 너무나 처참했다.
 “일단 무기점에 가야겠네. 하다못해 단검이라도 사든가 해야지 원.”
 아깝지만 가지고 있는 돈으로 무기를 사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사냥해서 얻은 돈이다. 처음에는 그의 자린고비 정신이 무기가 없다면 주먹으로라도 싸우라고 속삭였지만 그건 상식적으로 무리인 데다 언젠가는 써야 할 돈이기에 아낌없이 투자하기로 했다.
 
 가까운 곳에 대장간이 하나 있었다. 무기는 보통 대장간과 무기점에서 살 수 있는데 같은 무기라도 대장간이 더 싼 편이다.
 대장장이들이 자신이 만든 무기를 팔아서 명성 획득을 노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더 싼 가격에 제공한다. 다른 이들은 잘 모르는 사가만이 깨달은 사실이었다.
 평소에 지나가면서 자주 보던 대장간에 사가가 천천히 문을 열며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세······ 아니, 무슨 일로 왔나.”
 사가의 옷차림을 보고 하던 인사까지 끊어가며 말투를 바꿔대는 주인! 순간 사가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내려왔다.
 “무기를 좀 보고 싶은데요.”
 “저쪽에 있네. 뭐, 자네의 몰골로 봐서는 단검 하나 살 것 같지는 않지만.”
 아주 무시를 당해도 제대로 당하고 있었다.
 고작 옷이 넝마가 되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대놓고 무시하는 녀석을 처음 보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나빴다.
 사가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쌍욕을 겨우 참아가며 주인이 턱으로 슬쩍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철 단검 : 1골드 80실버」
 「묵직한 철검 : 4골드」
 「날카로운 대도 : 4골드 99실버」
 「비늘창 : 7골드」
 
 무기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검에서부터 창, 도끼, 심지어는 사시미와 낫도 있었다. 사가는 유심히 무기들을 보았다.
 “일단 검술을 익히고 있으니 역시 검을 골라야겠군. 목검을 사용했으니 단검은 손에 익지 않을 거야. 거리감만 잃어버릴 거라고. 그럼 철검이나 하나 사는 게 좋겠네.”
 자신의 상태를 꼼꼼히 살펴가며 물건을 집었다. 그래봤자 검사들이 사용하는 평범한 철검이었다. 사가는 철검을 들고 주인에게 걸어갔다.
 “3골드에 해줘요.”
 “3······3골드?! 아니, 네 녀석 지금 장난하고 있나? 딱 여기 쓰여 있잖아! 4골드!”
 “그런데 품질도 낮은 데다 자세히 보니 좀 쓴 흔적이 딱 보이는데 그냥 3골드에 해달라니까요.”
 “안 돼! 4골드 내 놔!”
 “여기 봐요, 좀. 여기 커다란 상처도 나있고 말이야. 어차피 생길 상처이긴 하지만 물건을 사는 손님으로서 깨끗한 물건을 원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
 사가의 말에 주인은 유심히 검을 살펴보았다. 사가가 말한 대로 검의 날에는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주인은 약간 무언가 찔린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3골드 90실버.”
 “3골드 10실버.”
 “3골드 80실버.”
 “3골드 15실버.”
 “3골드 70실버. 벌써 30실버나 깎아줬잖아.”
 “3골드 20실버. 아 여기 왠지 휘어진 것 같은데?”
 “그래 알았어! 3골드 50실버! 됐냐? 이 아래로는 절대 안 돼!”
 “여기 있네요. 수고하세요.”
 주인이 애꿎은 탁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치자 사가는 냉큼 돈을 건네주고 도망치듯 가게에서 뛰쳐나왔다.
 “50실버 벌었군.”
 사가는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무언가를 쓱쓱 써 내려갔다.
 
 「호른의 무기상점.
 주인이 멍청하다. 50실버나 깎아먹음. 나중에 올 때에는 변장하고 올 것.」
 
 어떤 의미로는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을 하고 있는 사가였다.
 
 
 7.
 
 
 사가는 의류 공방에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죽으로 만들었기에 인건비만 제외하면 가격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 새로 옷과 무기를 갖춘 사가는 다시 성 밖을 향해 걸어갔다.
 “후후후. 이래서 사람들이 신상을 찾는 거로군.”
 모든 것이 너무나도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가는 기분이 좋아서 연신 히죽거리면서 새로 산 철검을 풍차처럼 붕붕 휘두르며 어딘가로 발길을 옮겼다.
 “오늘도 많이 붙어있네.”
 그가 항상 사냥을 떠나는 남쪽 성문의 앞에 세워진 나무로 된 커다란 게시판이 있었다.
 이곳은 의뢰 게시판이라고 하며 NPC들이 자신들의 의뢰를 적고 보수와 위치, 해당 퀘스트 내용 등을 적어서 게시를 한다. 이후에 지나다니는 유저들이 이것을 보고 원하는 퀘스트의 게시물을 가져가서 의뢰를 완수하고 보상을 받는다, 라는 게 이 게시판의 취지이다.
 굳이 NPC들을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었기에 서로 시간이 크게 단축되어서 여러 성에서도 많이 애용하는 방식이다.
 십 수 장의 종이가 나풀거리는 게시판의 앞에 많은 사람들이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요새 무슨 일이기에 늑대들이 그렇게 많지?”
 “그러게 말이야. 어휴, 늑대 잡기 힘든데.”
 “늑대들 특성 때문에 무리 짓는 놈들이 많아서 어지간하면 파티를 만들어야 해. 게다가 그보다 약한 몹들은 최근 웬 이상한 백발 학살자가 쓸어버리고 있으니.”
 뒤에서 게시판을 바라보고 있던 사가는 그런 말에 몸을 살짝 떨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던가! 잠시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사가도 잠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서 고심을 했다.
 ‘그렇지만 늑대라. 늑대 가죽도 모아야 하는데 정말 골치 아프군.’
 늑대 자체는 사실 그렇게 강한 몬스터가 아니다. 다만 늑대는 무리 지어 다니는 특성이 있기에 늑대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파티 사냥이 필수적이었다. 지금까지 솔로 플레이를 하는 사가에게는 그야말로 천적이었다.
 ‘게다가 의뢰는 죄다 늑대 관련 의뢰네.’
 눈에 들어오는 게시판의 의뢰 종이들은 대략적으로 이러했다.
 
 「늑대 소탕 의뢰
 : 성문 밖 숲에서 살고 있는 숲지기입니다. 최근 늑대들의 움직임이 많아서 관리에 큰 위험이 따르고 있습니다. 제 일터의 늑대 30마리를 처리해주십시오.」
 「늑대 무리
 : 최근 늑대들의 출몰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호랑이 같은 먹이 사슬 최상의 포식자들 또한 늑대들의 강세에 밀려서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늑대 무리의 움직임을 찾아서 보고해주십시오.
 보수 : 7골드」
 「약초 수집 의뢰
 : 에르비아 성의 관할구역의 끝에 살고 있는 약초쟁이이외다. 최근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약초를 모으는 데 어려움이 있으니 종류 불문하고 약초 300뿌리를 뽑아다 주지 않겠습니까. 사례는 제가 최대한의 선에서 지불하겠소.
 보수 : 4골드」
 
 “······.”
 이 정도면 아예 늑대를 잡으라고 협박을 하는 수준!
 돈은 어느 정도 있지만 그렇다고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가죽을 돈 주고 사라는 말은 사가에게 자살하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고심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누군가가 사가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실례합니다.”
 사가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제법 잘생긴 얼굴의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등에 커다란 대검을 매고 꽤 좋아 보이는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었다.
 “무슨 일로?”
 사가는 짧게 대답했다.
 “저번부터 봐 왔지만 사냥 솜씨가 대단하시더군요. 찍은 사냥감을 끝까지 쫓아서 도살······ 아니, 처단하는 사냥꾼이시더라고요.”
 ‘뭔 헛소리야?’
 “그런데요?”
 “사실 같이 사냥을 갈 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쪽의 사냥 솜씨를 보고 감탄을 했습니다. 제가 다른 동료와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사냥하시지 않으시겠어요?”
 사가가 남자의 뒤를 슬쩍 보니 마법사로 보이는 여자 한 명과 궁수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파티 권유인가. 난 별로 파티 같은 거 맺고 싶지 않은데.’
 지금까지 솔로 플레이를 해왔고 혼자서 사냥하는 게 더 편하게 느껴졌다.
 괜히 동료랍시고 엉겨 붙거나 하면 귀찮아질 것 같았다.
 “전 별로······.”
 막 거절을 하려고 할 때 말을 걸어왔던 남자가 말했다.
 “사실 같이 사냥을 갈 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쪽의 사냥 솜씨를 보고 감탄을 했습니다. 제가 다른 동료와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사냥하시지 않으시겠어요? 보아하니 의뢰를 받으시려고 하는데 대부분이 저런 상태이니 만큼 동료가 필요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 사가가 상대의 뒤를 슬쩍 보니 후드를 푹 눌러 쓰고 있는 마법사 여자 한 명과 궁수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파티 권유인가. 제기랄, 정말 선택지가 없잖아.’
 사가는 사람이 싫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에서는 타인의 도움이 필수불가결이었고 혼자서 늑대를 사냥하는 것은 정말 압도적인 레벨 차이가 아닌 이상은 불가했다.
 노가다를 통해서 레벨을 50까지 올릴 자신도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는가?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것도 찰나 사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마음을 정한 사가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제 이름은 라트입니다. 레벨 19의 워리어입니다. 대검을 주로 쓰고 있죠.”
 “저는 마법사, 레벨은 17. 이름은 사렌이에요. 얼음 계열 마법을 주로 쓰고 있어요.”
 “안녕하세요. 레벨 18 궁수 발론입니다. 보시는 대로 활을 다루고 있죠.”
 차례대로 소개하는 그들을 보며 역시나 레벨이 좀 된다고 생각했다.
 “사가입니다. 레벨은 16. 무직입니다.”
 “무직요? 아직도 직업을 가지지 않으셨어요?”
 “할 일이 있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무직에 레벨도 저희보다는 낮으셨군요. 그렇다면 저희가 잘 보조해드리도록 하죠.”
 사가는 약간 의아했다. 보통 무직인데다 레벨도 자신들보다 낮다면 깔보거나 바로 파티를 해체하고 자리를 피하는 게 정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반가워하고 있었다.
 “좋았어. 이번에도 잘 될 듯하군.”
 “그럼 갈까요? 사가 님.”
 “아, 예.”
 사렌이라고 했던 마법사가 슬쩍 눈웃음을 치며 사가에게 말했고 라트는 몇 개의 의뢰 전단지를 뜯어내었다.
 “아무래도 늑대를 잡는 게 가장 낫겠죠? 뭐라 해도 늑대밖에 없지만요.”
 그 말에 사가도 동의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이참에 가죽이나 모아야겠군.’
 토끼와 사슴 가죽도 잔뜩 모아두고 잘 손질하여 가방에 넣어둔 상태였다. 그것도 무려 5골드를 써서 만든 가죽 보관함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시 고급의 품질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철저히 이용해서 가죽만 빠르게 모아주마.’
 
 전투 지역인 숲으로 진입하여 어느 정도 안으로 들어가니 늑대 무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사가는 일단은 뒤에서 대기하며 적당하게 투입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그들이 레벨도 높으니 어떤 식으로 전투를 치르는지 연구하려는 의도였다.
 “더블 블레이드!”
 “사렌!”
 “차가운 기운의 날카로운 힘! 프리징 샷!”
 전반적으로 워리어인 라트가 검을 들고 앞에 나섰다.
 늑대들이 오면 라트는 자신의 넘치는 방어력과 생명력을 내세워 탱커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궁수인 발론은 옆에서 빠른 활 공격으로 옆의 늑대들을 견제하며 라트가 늑대들에게 포위되지 않도록 하였다.
 마법사인 사렌은 결정적인 순간에 커다란 마법으로 단숨에 빈사 상태의 늑대들을 쓸어버렸다. 그렇다고 엄청난 마법은 아니었지만 빙계 마법 특유의 냉동 효과로 스턴 효과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꽤나 팀워크가 좋군.’
 그들은 확실히 좋은 팀이었다. 그리고 늑대들 또한 상당히 강력한 팀워크를 발휘했다. 한 마리가 물면 한 마리는 뒤를 공격하는 식으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사슴이나 토끼들은 공격을 해도 아주 단조로운 공격밖에 하지 않았는데 여우나 늑대들은 빠른 몸놀림을 이용하여 할퀴고 무는 공격을 했다.
 체력 높은 워리어에다 궁수의 견제 그리고 마법사의 보조가 있다고 해도 단번에 3, 4마리의 여우들을 라트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벅찼다. 게다가 이 그룹에는 성직자나 신관 같은 치료 계열의 직업이 없었기에 매번 라트의 체력을 채우기 위해서 사냥이 중간중간에 끊겼다.
 사가는 이게 사냥의 흐름을 끊는 것 같아 아주 귀찮게 여겼다.
 ‘멍청하게 신관도 한 명 포섭하지 못하다니!’
 “이제 저도 라트 님과 앞으로 나서서 여우들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뒤에만 있자니 죄송하군요.”
 “아뇨. 조금 더 구경하셔도 되는데.”
 “괜찮습니다. 그럼 계속 사냥할까요?”
 사가는 자신도 직접 사냥에 참가하기로 마음먹고 철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라트의 눈이 순간 반짝하고 빛이 났다.
 “그럼 좀 더 많은 수의 늑대를 끌어와도 될 듯하군요. 발론, 늑대들 좀 끌어와 봐.”
 라트의 말에 발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숲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잠시 뒤 발론이 사라졌던 풀숲이 들썩이는 것과 동시에 발론과 늑대들이 뛰쳐나왔다.
 “사가 님! 오른쪽 녀석을 맡아주십시오! 헤비 어택!”
 라트가 자신의 대검을 꺼내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 말에 사가는 철검을 들고 오른쪽 늑대를 노려보았다.
 ‘분명 변칙적인 공격 방식이지만 충분히 보았고 지금 내가 상대를 하는 건 오직 한 마리뿐이니 가능하다!’
 늑대가 사나운 눈으로 사가를 노려보았다.
 크르릉!
 그러자 사가의 철검이 빠른 속력을 내며 늑대가 있는 곳을 화려한 소리와 함께 그어 내렸다. 그런데 늑대는 쉽사리 맞지 않았다. 공격을 피한 늑대가 막 다시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써걱!
 공격을 하려고 준비하던 늑대를 사가의 철검이 다시 내려친 것이다.
 “캐캥!”
 늑대의 몸이 회색으로 변하며 금세 데들리 상태로 들어갔다. 체력이 10% 이하로 내려가면 회색으로 변하며 데들리, 즉 빈사 상태가 되는데 그 기회를 놓칠 사가가 아니었다.
 금세 검은 물 흐르듯이 늑대의 목을 내리쳤고 마지막 일격을 맞은 늑대는 금방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대단한데?”
 “사가 님, 대단해요. 어떻게 그 늑대를 금세 저렇게······.”
 “검이 좋은 건가?”
 다른 세 명이 사가가 빠른 속도로 늑대 가죽을 뜯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마 자신보다 레벨이 낮다고 얕잡아 보았는데 실상 그게 아니어서 놀란 모양이다.
 현재 사가의 스탯은 레벨을 올리면서 얻은 보너스 스탯과 동시에 멈추지 않는 힘겨운 사냥을 통해서 얻은 체득 스탯으로 굉장히 상승한 상태였다. 그래서 힘이 60이 조금 넘고 민첩만 해도 벌써 80이 넘었다.
 체력도 1300이 넘는 경악할 정도의 스탯!
 일단 빠르고 수월한 사냥을 위해 힘과 민첩 그리고 체력을 중심적으로 올린 결과였다.
 보통의 공격으로도 강력한 공격을 낼 수 있는데 초급 레벨 8의 검술로 인해 검의 추가 공격력이 무려 90%, 그리고 치명타 확률이 12%로 상승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여 보니 늑대가 몇 번 맞지도 않고 금세 죽어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를수록 사가의 검술이 실제로 좋아지고 있었다. 언제 때려야 급소를 칠 수 있는가와 틈을 노려서 빠른 공격을 할 수 있는 기술 등 벌써 여러 가지 검의 대한 이해가 몸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된다면 좀 더 강한 곳으로 가도 되겠군. 이러다가 끝이 없겠어. 늑대 정도라면 쉽게 끝낼 줄 알았는데······.”
 라트가 사가를 보며 낮은 신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발론을 보며 눈치를 보냈다. 그것을 눈치챈 발론이 말했다.
 “그럼 전 다른 늑대 무리들을 끌어모아 오겠습니다.”
 발론은 활을 들고 또다시 숲 속으로 들어갔고 사가와 라트들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라트가 물었다.
 “사가 님은 직업을 무엇으로 하시려고 하죠?”
 “아직 확실하게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상인으로 생각 중입니다만.”
 “그런 좋은 전투 능력이 있는데 상인이라뇨. 차라리 저와 같은 검사나 기사 같은 직업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냥 상인이 좋습니다.”
 사가는 무정하게 대답했다. 별로 친한 사람도 아닌데 집안 사정을 늘어놓기도 싫었고 괜히 귀찮기도 해서였다.
 “으아악!”
 그때 발론이 커다란 고함을 지르며 도망을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검은 늑대 3마리가 시끄러운 소리와 침을 질질 흘려대며 쫓아오고 있었다.
 “다, 다크 울프! 엘리트 몹이다!”
 “위험해!”
 사렌과 라트가 경악성을 터트렸다.
 다크 울프는 일반 늑대들과는 달리 거대하면서 강력한 발톱으로 나무까지 산산조각 내는 상당한 녀석들이었다. 사가는 검을 바로잡으면서 소리쳤다.
 “한 마리씩 유인해서 잡도록 하죠!”
 강력한 놈들이지만 무작정 도망가면 더 자극받아서 전멸할 수도 있었다. 차라리 한 마리씩 어떻게든 끌어내서 처리하는 식이 나아 보였다.
 그런데 사가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사렌이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네?”
 그때 무언가가 사가의 몸에 부딪혔고 산산조각 부서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의 정체는 반짝이는 유리 조각이었는데 부딪힌 몸에는 진득한 액체가 흩뿌려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무언가를 담았던 병 같았다. 멍청한 눈빛으로 사렌을 보자 그녀가 씨익 웃었다.
 “당신이 먹이니까.”
 띠링!
 
 「몬스터 유인을 위한 향에 적중했습니다. 주변의 적들이 90% 확률로 당신을 공격하게 됩니다!」
 
 크르르르!
 크아아왕!
 사가의 눈앞에 그런 정보창이 떠오르자 다크 울프들이 순간 코를 벌름거리더니 광폭하게 울부짖으며 냄새의 근원을 향해 눈을 돌렸다.
 ‘위험하다.’
 사가의 뺨을 타고서 식은땀이 흘렀다.
 “빌어먹을 자식들! 어째서?!”
 당황한 나머지 눈도 돌리지 않고서 소리쳤지만 등 뒤로 차가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럼 우리 대신 고생 좀 해줘. 호호.”
 “미안하군요, 사가 님.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마지막으로 한탕 하고 떠나려고 했는데 속은 놈이 병신이지.”
 촤악!
 “크윽!”
 늑대의 발톱이 사가의 가슴을 찢어버렸다. 그러자 생명력이 단숨에 쭉쭉 빨려나갔다.
 
 「큰 상처로 인해 출혈 상태에 빠집니다. 붕대나 약초 등을 이용해서 치료해야 출혈이 멈춥니다. 초당 5의 생명력이 30초 동안 하락합니다.」
 
 “빌어먹을!”
 아무리 체력이 넘친다고 하여도 이런 출혈 상태에 빠져서 생명력이 지속적으로 빠져나간다면 그건 너무나 크나큰 페널티였다. 사가가 잠시 뒤를 돌아보자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개새끼들!”
 영혼부터 온갖 분노와 욕설이 치밀어 올랐다. 첫 파티였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그것도 아주 후련하게.
 “크악!”
 늑대들의 공격은 멈출 줄 몰랐다. 계속해서 공격당하자 체력은 멈출 줄 모르고 금세 바닥을 기었다. 이제 남은 체력은 고작해야 150 정도.
 그나마 사가 정도의 스탯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비슷한 레벨의 유저였다면 한두 번의 공격으로 벌써 저세상으로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이제 1분도 못 버텨! 얼른 성으로 돌아가야 경비병들이 도와줄 텐데!’
 이대로 가다가는 확실하게 죽는다. 에픽에서 죽었을 시의 페널티는 꽤나 컸다.
 일단 12시간 동안 접속이 불가능해진다. 삶의 중요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현실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커다란 페널티였다.
 그리고 레벨이 하락하고 스탯 또한 내려간다. 스킬들의 포인트가 내려가는 것도 물론이요, 가지고 있는 아이템도 랜덤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하필 사가의 인벤토리에 있는 아이템은 지금까지 모아둔 가죽이 몽땅 들어있는 가죽 전용 보관 케이스였던 것이다!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아이템까지 생각이 미치자 라트 일행의 진짜 목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PVP를 통해 같은 유저를 죽이게 된다면 업보가 쌓여 성향이 떨어지게 된다. 일정 수준 이하로 성향이 떨어진다면 살인자, 즉 머더러가 되어 다른 NPC들이나 유저들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 같은 비슷한 성향의 NPC들이라면 크게 상관하지 않지만 머더러가 되어 악명이 계속 쌓이면 현상수배까지 걸리게 된다.
 하지만 몬스터를 이용하여 다른 이를 죽인다면 전혀 피해가 가지 않기에 지금과 같이 몬스터를 끌어들여 약한 유저를 처리하고 떨어진 아이템을 가져간다. 그런 수법인 셈이다.
 이들이 아마 사가에게 접근한 이유는 그의 광적인 사냥과 더불어 꽤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돈을 벌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냥 대충 찍었을 수도 있지만 라트가 사가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면 전자가 훨씬 가능성이 높았다.
 
 도망가는 사가의 눈에 피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여기서 죽는다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서 상대를 쫓아가 죽일지도 몰랐다.
 현실시간으로 며칠 동안을 밤새도록 노가다를 했다. 에픽은 현실보다 시간이 4배가 빠르다. 그러니 게임상으로는 무려 2주일을 죽어라 뛰어다닌 셈이다. 그런데 죽어버린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고생이 단숨에 먼지로 되어 사라져버리고 남은 것은 공허함 뿐.
 체력은 계속해서 떨어져가고 있었고 사가는 죽을힘을 다해서 성이 있던 곳을 향해서 뛰어갔다.
 ‘개자식들, 나 같은 초보에게 쉽사리 다가온 것부터가 이상하잖아!’
 그런 생각이 드니 순간이라도 사람을 믿었던 자신이 한심하고 멍청하게 느껴졌다. 열심히 발을 놀렸지만 부상당한 인간이 네발짐승에게서 도망을 가보아야 얼마나 가겠는가? 결국 그의 등을 향해 세 마리의 늑대들이 번개처럼 뛰어들었다.
 “빌어먹을!”
 촤악!
 
 「체력이 0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로그아웃 됩니다.」
 
 게임에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죽음의 안내문과 함께 사가의 눈은 서서히 감겼다.
 
 
 8.
 
 
 “······.”
 좁은 방은 차가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유성이었다. 바깥에 내리는 하얀 눈과 같이 하얗게 질려 있는 유성의 얼굴!
 “내, 내 며칠간의 노력이······.”
 캡슐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유성이 한 일은 화장실로 달려가 수건을 입에 물고 소리를 죽이고 마음속으로 고함을 질러대는 일이었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은 분노에 머리를 싸매 쥐고 바닥을 구르고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때려 부수고 싶었지만 곤히 주무시는 어머니가 잠에서 깰 우려가 있어서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무슨 아픈 강아지 마냥 끙끙대는 모습!
 ‘하아. 돌아버리겠다.’
 앞으로 12시간 동안 접속 불가인 데다 분명 레벨도 하락했을 터. 그것도 부족해서 스킬의 숙련도와 스탯도 깎여나갔을 게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스킬은 고작 검술과 가죽 채취 스킬 밖에 없었다. 레벨에 비해서 스탯, 스킬 모두 높아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이템이다.
 “어떻게 모은 가죽들, 게다가 모두 수선하고 깨끗하게 상품 처리까지 한 물건들인데!”
 유성도 게임을 좀 해보았기에 스탯, 레벨, 그리고 스킬의 숙련도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청난 노가다를 통해 얻은 아이템을 잃어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은 곧 분노로 바뀌고 덕분에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물론 그가 들고 있던 철검이나 가죽옷들이 떨어질 확률도 있지만 직접 착용하던 장비보다 가방 안의 물건이 떨어질 확률이 더 높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가방 안 물건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포만감을 없앨 식빵이나 수통뿐. 다른 것은 고급 가죽 보관 케이스였다.
 ‘녀석들이 처음에 살살거리며 말을 걸었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게다가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결국은 처음 본 유저들이잖아. 그런데 미친놈처럼 아이템에 눈이 멀어 그대로 좋다고 따라가다니! 빌어먹을.’
 간단히 밥을 먹거나 어머니의 약, 식사를 챙겨드리는 것 빼고는 대부분 게임 속에 있었다.
 사용료도 내는데 게임을 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돈 낭비, 시간 낭비였으니 되도록 게임에 접속해있었는데 그간의 노력이 인어 공주의 마지막 마냥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아니, 아직은 확실하지 않았지만 불안감에 온몸이 떨렸다. 머리끝에서 화산이라도 폭발한 느낌이다.
 ‘사냥을 하던 도중 서로에게 눈치를 주면서 좀 더 깊은 숲으로 유인한 건 다 이것을 위해서였어. 발론 녀석은 분명히 일부러 다크 울프들을 끌고 왔던 거야. 그런데 선심 쓰듯 보호해주는 척을 하다니.’
 유성은 하루 종일 불안한 마음을 품은 채 빈둥빈둥하게 시간을 보냈다. 너무 화가 났지만 잠시 있자니 자신에게 한심한 생각만이 나돌았다.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시며 유성은 생각했다.
 ‘내가 에픽을 너무 우습게 봤어. 좀 더 확실한 정보와 가상현실에 대한 지식이 있었어야 했는데. 아니, 희망을 갖자. 분명 빵이 떨어졌겠지.’
 유성은 오랫동안 지옥 같은 삶을 살면서 지금처럼 불안과 짜증에 찌들어 있다가는 금방 심신이 지쳐버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어렵사리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불안감을 떨쳐냈다.
 조용히 라면을 하나 끓이면서 유성은 평소에는 믿지도 않았던 온갖 종교를 생각하며 빌고 빌었다. 가죽 보관 케이스 대신 식빵이나 떨어졌기를 말이다.
 그리고 12시간 뒤, 유성은 곧바로 게임에 접속하였다.
 
 ***
 
 빛나는 빛과 함께 사가는 에르비아 성에서 부활했다.
 “인벤토리!”
 허둥지둥 가방을 확인한 사가는 얼굴이 허옇게 질려버렸다. 마치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얼굴!
 “으아아악!”
 
 「식빵
 수통」
 
 가방 안의 물건은 고작 식빵과 수통밖에 없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가죽 케이스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사가는 허탈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어서 다시 시작할 시, 성 안의 광장에서 새롭게 리스폰이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많은 시선들이 자신에게 박히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사가는 이를 갈아대며 라트 일행을 찾아다녔다. 아직은 성 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성 안의 유저들이나 NPC들에게 그들의 인상착의를 대며 물어보고 다녔다.
 하지만 접속을 끊어 놨는지 이미 다른 성이나 마을로 향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현실 시간으로 12시간이라면 에픽으로는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나 지났으니 그 자리에 못 박고 서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던 와중 한 유저에게 어떠한 말을 들었다.
 “혹시 님도 당하셨나요? 그 녀석들 여기서 엄청 유명해요. 초보자들을 상대로 어려운 사냥터로 향한 뒤 단숨에 아이템들을 털어버리는 녀석들이라니까요. 저도 그래서 겨우 얻었던 가고일 소드를 뺏겼어요.”

댓글(3)

wt*****    
혹시 조아라에서 글쓰셨던 그 작가님이신가요...?
2019.07.01 13:19
狂學者    
힘이 60이고 민첩이 80인데 어찌 체력이 1300..
2019.09.26 02:35
백만둥이    
안산다 자꾸 사가라고 허지마라
2021.02.07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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