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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어 키운 사매들 1-1권

2019.06.27 조회 4,944 추천 37


 # 업키사#01
 
 ‘드디어······.’
 
 인고의 세월.
 그 기다림의 끝에 얻은 결실이 눈을 뜨면 펼쳐질 것이었다.
 먼저 황금이 깔린 길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지나면 대리석으로 지은 순백의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을 것이고 말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는 금은보석으로 치장되어 있겠지?
 아! 이제 그만 눈을 뜨자.
 더는 참을 수 없을 지경.
 무행은 일부러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데······.
 
 ‘뭐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황금이 깔린 길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물도 아니었다.
 우중충하기만 한 실내.
 더구나 금은보석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때가 꼬질꼬질한 탁자,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낡은 목검 한 자루가 전부.
 
 ‘이럴 리가 없는데?’
 
 눈을 다시 감았다 뜨기도 하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무행은 삐거덕거리는 나무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냄새가 더럭더럭 나는 목침을 베고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당황하여 몸을 일으켜야 했다.
 
 “으윽!”
 
 등줄기를 타고 묘한 통증이 밀려들자 입에서는 저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머리는 깨어질 것처럼 아팠다.
 육신의 고통이 느껴지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몸도 마음도 잊은 것이 언제인데 아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무행은 황급히 문을 찾아 나섰다.
 거적때기로 가려진 출구를 보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밖으로 나가자 숲으로 에워싸인 아주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맞은편으로는 비슷한 크기의 움막 하나가 더 보일 뿐······.
 예정(?)대로라면 눈조차 뜰 수 없을 지경이어야 한다.
 보석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 사이로, 기린과 사자가 뛰놀고, 서조(瑞鳥)가 날아다니고 있어야 하니까······.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다시 둘러봐도 산중의 평범한 움막.
 
 ‘이곳이 옥경일 리는 없지. 어떻게 된 일일까?’
 
 무엇이 잘못되어 이런 곳에 있게 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은 고통이 느껴지는 몸으로 향했다.
 팔, 다리가 달려 있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배까지 불룩 나왔다.
 몸이라고 해도 자신의 몸일 리는 없었다.
 이렇게 넉넉한 몸을 가져 본 적은 없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건 분명한 것은 그 몸이 인간의 몸이고 자신의 통제하에 있다는 것.
 다시 인간이 된 것이다.
 등선을 했어야 하는데 어찌 인간이 된 것일까?
 
 ‘환생? 빙의? 아니면 누군가의 술수?’
 
 허탈감은 사부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반드시 때를 맞춰 옥경으로 오라더니······.
 
 ‘때를 기다린 대가가 배 나온 인간이란 말인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엄한 법.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은 없었다.
 곧바로 자살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그간 저승차사 놈들과 쌓아 온 돈독한 우정(?)으로 볼 때, 결코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할 것이 확실했다.
 물론 놈들을 안 만날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러려면 원귀가 되어 구천을 떠돌아야 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인간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몸의 상태로 볼 때 오래 살아야 20년.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지나갈 시간이란 생각이 들자 그나마 진정이 됐다.
 적당히 먹고 놀며 즐긴 후, 때를 봐서 다시 옥경으로 가면 될 것.
 이미 했던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니 어려울 것은 없었다.
 
 ‘따질 것은 그때 가서 따지기로 하고······.’
 
 결심을 하고 나자 비로소 막연했던 현실이 간신히 받아들여졌다.
 
 ‘그나저나 돈은 좀 있나?’
 
 # 업키사#02
 
 인간에게 돈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세상에 나갔을 때 뼈저리게 얻은 교훈이다.
 하지만 집구석 꼬락서니로 볼 때 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호구지책으로 돈벌이에 나서야 한다면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좀 곤란한데······.’
 
 무행은 다시 움막 안으로 들어와 실내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나무침상, 목침, 탁자, 목검 한 자루······.
 모두 낡았다는 공통점을 가진 것 외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
 돈 될 만한 것도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자고로 인간들이란 소중한 것은 은밀한 곳에 숨겨 놓는 법.
 무행은 얼른 침상 밑을 뒤졌다.
 있다.
 은밀하게 숨겨진 나무궤짝 하나.
 그러나 궤짝 안에서 나온 것은 낡은 옷가지 몇 점과 서찰 몇 통이 전부였다.
 
 ‘진짜 가난한 모양이로군.’
 
 앞길이 구만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행은 서찰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 없었다.
 
 <무행아! 이 어미는 네가 대 무당파의 속가 제자가 되어······.>
 <무당산에도 눈이 많이··· 이 어미는 네가 금의환향······.>
 <내 아들 무행아! 수련생으로··· 사매들도 무운을······.>
 
 어미가 보낸 서찰임이 분명하다.
 아홉 통의 내용은 모두 대동소이했다.
 마지막 한 통의 서체가 바뀐 것 외에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미가 집 떠난 아들을 걱정하는 내용.
 그러나 지금의 무행에게 서찰은 아주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먼저 이곳이 여전히 무당산이란 것.
 이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원래도 무당산 풍뢰벽 아래의 작은 동굴에서 살았으니 말이다.
 그다음으로는 무당파. 역시 처음 들어본다.
 이 또한 색다를 것은 없었다.
 무당산이니 무당파가 있는 것이라고 무행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무행이 놀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전서에 적힌 이름 때문이었다.
 
 이무행.
 
 이것이 몸의 주인, 그러니까 지금 현재 자신의 이름인 것이다.
 서찰의 앞에 적힌 수신인과 내용에 나온 이름은 확실히 무행.
 
 ‘우연일까?’
 
 환생을 했는데 전생과 이름까지 같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참 묘한 일이로군. 하기야······.’
 
 하지만 무행이란 이름이 꼭 자신의 이름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사부는 이름도 없었다.
 그러니 제자인 무행 역시 이름이 있을 리 없었다.
 ‘사부님!’ 요렇게 부르면 ‘왜 그러느냐? 제자야!’라고 대답했었다.
 그게 전부였다.
 심지어 배우는 공부에도 이름은 없었다.
 그랬던 무행에게 이름이 생긴 것은 사부가 시킨 일을 하러 세상에 나갔을 때였다.
 만나는 자들마저 이름이 뭐냐고 물어대는 통에 하나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지은 이름이 바로 무행(無行).
 행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사부가 떠올라 지은 것이었다.
 성도 이가는 아니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이름이 같다고 볼 수도 없었다.
 어쨌든 간에 무행은 서찰의 내용들을 종합해서 지금의 현실을 정리했다.
 
 첫째, 나는 이무행이다.
 둘째, 이곳은 무당산이다.
 셋째, 내 신분은 무당파 수련생?
 넷째, 사매가 있다?
 
 사매?
 한 사부를 모신 계집 사형제를 일컫는 말.
 무당파 수련생이란 것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이놈도 뭔가 하는 일이 있었을 것이니······.
 그러나 사매가 있다는 것에는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아야 했다.
 무행은 사형제가 없다.
 그래서 어릴 때는 늘 사람이 고팠었다. 함께 배우는 사형이나 사매가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부의 공부가 일인전승이었기 때문.
 돌이켜 보건대 외롭고 슬픈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사형제가 생겼다.
 더구나 사제도, 사형도 아닌 사매들······.
 가슴속에서 묘한 감정이 저절로 꿈틀거리기 시작하며 이내 뜨거워져 왔다.
 어떤 아이들일까?
 예쁠까?
 귀여울까?
 혹시 괴물처럼 생기진 않았겠지?
 만나면 날 사형이라고 부를까?
 온갖 상상들이 순식간에 뇌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장 달려 나가 불러낸 후, 이리도 뒤집어 보고, 저리도 뒤집어 보고 싶은 심정.
 그러나 무행은 본능적으로 호흡을 다스려야 했다.
 
 ‘어차피 만나게 될 것이니 몸부터 추스르자.’
 
 무행은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청정에 들어갔다.
 
 ***
 
 코에서 뿌옇고 탁한 기류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부의 불순물들이 기화되어 배출되는 것.
 그러나 무행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몸이 그야말로 천근만근이었다.
 내공은 모기 오줌 지린 것만큼 쌓여 있었고, 전신혈맥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막혀 있는 상태.
 불순물들을 빼냈지만 얻은 것은 기감과 텅 빈 단전이 전부였다.
 아직 날이 새기 전.
 사매들을 만나 좋은 인상을 심어 주려면 아직 멀었다 싶었다.
 그때 밖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맞은 편 움막에서 누군가 나오는 것이 확실했다.
 
 ‘이만하면 외기를 모아 쓸 수는 있을 것이니······.’
 
 무행은 엉덩이가 들썩거려 더는 참지 못하고 곧바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사형! 어찌 더 주무시지 않고······.”
 ‘사형이래···. 큭!’
 
 무행은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상대를 관찰했다.
 키가 커 얼핏 봐서는 스물도 넘어 보인다. 하지만 얼굴은 동안이라 대략 열대여섯 정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는 올빼미 같은 눈이 인상적이었다.
 자다가 일어나 나왔을 것인데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것이 없고, 비록 여기저기 기웠지만 옷매무새도 단정했다.
 
 “더 자지 않고 왜 나왔느냐?”
 
 무행은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일상적인 말을 해냈다.
 
 “설란이 저러니 잠이 더 오겠습니까?”
 ‘설란?’
 
 무행은 사매가 분명한 여인에게서 나온 또 다른 이름을 되새겨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설란이 왜?”
 “벌써 검술연습을 하러 나갔습니다.”
 “왜?”
 “사형도 참! 오늘이 수행평가 아닙니까?”
 “······.”
 
 계속 왜냐고 물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터.
 수행평가?
 게다가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무행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만히 귀 기울여보니 어디선가 신음 소리에 가까운 기합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청정에 빠져 듣지 못한 것이다.
 
 ‘흠! 저 가냘픈 목소리도 사매로군.’
 
 무행은 그래도 한번 확인해 보기로 했다.
 
 “저기 저 소리가 내 사매 설란이 내는 소리라고?”
 “풋! 사형도 참! 그럼 설란이지 누구겠어요?”
 “그렇지. 설란 사매가 맞지.”
 
 사매가 맞다.
 아기자기한 기합 소리로 볼 때 설란도 예쁠 것 같았다.
 
 ‘이 아이도 예쁘고.’
 
 무행은 내심 흡족한 마음에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옥궁에 들지 못하고 인간으로 환생한 것이 아쉽긴 하다.
 그러나 이제 인간으로 살되 더 이상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모든 상황들이 기꺼웠다.
 무행이 기쁨에 들뜬 사이 사매는 목검을 들더니 나선다.
 
 “무얼 하려는 것이냐?”
 “예?”
 “그러니까 내 말은···. 아니다.”
 
 무행의 말에 사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지요. 그게 키워 주신 사형에 대한 도리 아니겠어요?”
 “··· 내가 널 키웠다고?”
 
 키워줬다는 말에 무행은 다시 물어야 했다.
 그러자 사매의 눈에 곧바로 습기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암이요.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씻겨 주고 심지어 가르쳐 주셨잖아요.”
 “내가··· 그랬나?”
 
 무행의 질문 아닌 질문에 말에 사매의 눈매가 촉촉이 젖어 든다.
 신기하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이 비설은 설사 무당의 속가 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사형의 은혜만큼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
 “그리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무행은 방금 들은 말을 선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처음 만난 사매의 이름이 비설(飛雪)이란 것만은 확실했다.
 
 ‘비설이라······.’
 
 생긴 것만큼 아름다운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무행은 무심코 비설이 사라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움막 뒤였다.
 그곳에는 표적으로 세워 놓은 것 같은 통나무들이 보였고 비설은 목검을 겨누고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숨을 고르는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보는 것 같았다.
 검을 움직이면 곧바로 대기가 요동치며 통나무들이 셀 수 없이 갈라질 것 같은 분위기.
 그러나.
 
 “얍!”
 
 딱!
 
 “야합!”
 
 따닥!
 
 “이얏!”
 
 따다닥!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오자 갑자기 선녀는 사라지고 살풀이를 하는 무녀만이 남았다.
 
 ‘어찌 저런?’
 
 팔다리가 따로 논다.
 무행은 비설이 혹시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잠깐 의심할 뻔했다.
 어디 그뿐인가?
 검로(劍路)라는 것이 없다.
 그냥 베고 막고 찌르는 시늉을 하는 것이 전부.
 잠시 멍했다가 곧바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자 무행은 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절대 웃을 수도 없었다.
 비설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사부가 누구기에 저리 가르친 것일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무행은 신(?)들린 듯 연습에 몰입한 비설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그냥 있다가는 웃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무행은 곧바로 설란이란 사매를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겨야 했다.
 
 ***
 
 높이 솟은 나무숲.
 그 사이로 비치는 달빛 아래 설란이란 이름의 사매가 미친년처럼 목검을 휘둘러 대고 있었다.
 여기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는 기세만큼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아귀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이는데도 멈추지 않는다.
 
 ‘거의 싸움닭 수준이로군.’
 
 무행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면 됐다.”
 “누구냐?”
 “나다.”
 
 혹시 못 알아보면 어쩔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설란이란 아이도 곧바로 무행을 알아봤다.
 
 “사, 사형!”
 “손에서 피가 나지 않느냐?”
 “괜찮습니다.”
 
 무행은 괜찮다고 말하는 설란의 외모를 눈여겨 살폈다.
 비설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미모였다.
 초승달처럼 아름다운 눈썹, 그리고 가늘고 긴 눈매에서는 단호한 성격이 엿보인다.
 체구는 비설보다 작았고, 나이도 어려 보였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더 주무시지 않고요?”
 
 무행이 입을 다물자 설란이 물어왔다.
 
 “비설이 걱정을 하더구나.”
 “그럴 리가요. 언니야 늘 천하태평인 것을요.”
 “한데 손아귀에 피가 나도록 연습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무행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설란의 안색이 굳어지더니 결의에 찬 말이 흘러나왔다.
 
 “제가 오늘은 기필코 제갈성진 그놈을 때려눕히고 말 것입니다.”
 “제갈성진?”
 “제갈가의 망나니 말입니다. 그놈이 지난번 수행평가 때 언니를 가지고 놀지 않았습니까?”
 “그, 그랬느냐?”
 
 전혀 기억에 없는 말이 나오니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여기도 수행평가 이야기다.
 
 “그놈이 언니와 절 번갈아 가며 지명하는 것은 다 황보경 그년의 농간 때문입니다.”
 “··· 음! 일단은 돌아가자. 더 무리를 하면 그럴 기회조차 없을 것 같구나.”
 
 험한 말이 나왔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쯤에서 말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냥 두면 손아귀가 찢어져 목검조차 쥐지 못할 것 같았다.
 
 “어서 가자는데도?”
 “··· 예, 사형!”
 ‘히히!’
 
 무행의 완곡한 말에 얌전히 고개를 숙이는 설란.
 곧 일정 거리를 둔 채 무행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업키사#03
 
 설란을 데리고 돌아오자 비설도 살풀이(?)를 끝낸 모양이었다.
 아침 준비를 하려는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비설을 발견하고는 설란도 곧바로 합류했다.
 무행이 서서 지켜보자 비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형! 들어가 좀 더 쉬세요.”
 “괜찮다.”
 “그러세요. 아침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비설에 이어 설란까지 나서 들어가 쉬라고 하는 통에 무행은 반강제로 움막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냥 보고 싶은데······.’
 
 무행은 아쉽기만 했다.
 어쨌든 새 삶의 출발은 괜찮아 보였다.
 어여쁜 사매 둘이 한꺼번에 생겼으니 말이다.
 
 ‘뭘 해 줄까?’
 
 가장 먼저 그 생각부터 들었다.
 일단 목검으로 수련을 하는 것으로 보아 무당파란 곳은 검을 쓰는 무파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방금 만난 사매들의 목이 적의 칼날에 잘려 나가는 상상이 떠올랐다.
 무행은 식겁해 정신을 차려야 했다.
 사매들을 보호하려면 일단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맺은 사형제의 인연일 터.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일단 내 능력부터 회복하자.’
 
 결심을 굳힌 무행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탁자 위의 목검을 노려봤다.
 그리고 의지에 힘을 실었다.
 
 ‘오라! 나에게로!’
 
 꿈틀!
 목검은 약간 움직이긴 했지만 여전히 그 자리였다.
 그건 무행에게 놀라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의지만으로도 마땅히 이미 손에 잡혀 있어야 하거늘.
 어쩔 수 없이 무행은 일어나 목검을 가져와야 했다.
 상태로 보아 연습은 많이 한 모양.
 그러나 여기저기 난 흠집을 보니 이무행이란 자의 무위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기를 제대로 다스렸다면 목검에 흠집이 날 리가 없었을 것.
 
 ‘어찌 이 상태로 저 어여쁜 사매들을······.’
 
 무행은 스스로를 욕하며 목검을 내려놓고 덜 뚫린 기혈을 뚫어 나가기 시작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다다다다.
 어디선가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무행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곧바로 거적때기가 젖혀지며 무언가가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작고 옴팡지다.
 눈을 비비며 맹렬히 달려온다.
 
 ‘요괴인가?’
 
 무행은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요괴일 리가 없다. 요괴라면 죽고 싶지 않고서야 어찌 자신에게 달려든단 말인가?
 
 ‘뭐, 뭐지?’
 
 정체를 파악하려는 순간 달려오던 것은 이미 무행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슴에 비비며 칭얼거렸다.
 
 “따··· 형! 나 꿈꿨어. 무떠운 꿈꿨어!”
 
 인간이다. 그것도 작은 인간.
 그제야 무행은 이 아이 역시 자신의 사매임을 깨달았다.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다른 두 사매를 만났을 때와는 감정 자체가 아예 달랐다.
 품에 안긴 채 얼굴을 비벼대는 열 살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
 요괴처럼 귀엽다.
 하지만 유아어를 남발할 나이는 지나 보였다.
 확실히는 몰라도 오냐오냐하면서 가르친 것이 분명했다.
 대체 이 녀석들 사부는 어떤 놈이기에 이리도 기강이 해이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무행은 아이를 떼어 놓을 수 없었다.
 
 “저승차사라도 꿈에 나온 것이냐?”
 
 무행이 묻자 별빛 같은 눈망울을 한 아이가 대답을 해 왔다.
 보고 또 봐도 귀엽다 못해 깨물어 주고 싶은 용모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설지는 저승차사 안 무서워.”
 “그래? 다행이구나. 이 사형도 저승차사 놈들은······.”
 
 여기까지만 하자.
 이름이 설지인 모양이었다.
 대답을 한 설지는 다시 얼굴을 무행의 가슴에 파묻었다.
 순간 속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가만 생각해 보니 사매들까지는 다 좋은데 사부도 생길 판.
 어쩌면 사형이나 사제도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도리가 없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흠! 그럼 저승차사도 아니고 무슨 꿈을 꾸었을까?”
 “제갈 망나니, 그 나쁜 놈이 설지도 괴롭혔쪄.”
 
 무행은 좀 전에 설란에게서 들은 제갈 뭐시기인가 하는 놈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제갈 망나니라고 부르는 걸 보니 그놈이 확실했다.
 사매들이 이구동성으로 욕을 하는 것을 보니 나쁜 놈이 분명하다.
 자초지종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아! 그놈이 네 사저들을 괴롭혔다며?”
 “응! 근데 꿈에서 나도 괴롭혔어.”
 “망할 놈이로구나. 근데 어찌 괴롭혔느냐?”
 “오늘 수행평가 하는데 그놈이 날 지명했쪄!”
 
 제갈성진이란 놈.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가만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당장 수행평가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근데 이 사형은 수행평가가 뭔지 통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사형 바보야?”
 “크흠! 그러게 말이다. 한데 설지는 똑똑해서 수행평가가 뭔지 아는 모양이구나. 어디 들어볼까?”
 “당연하지. 수행평가는······.”
 
 역시 어려서인지 유도신문이 곧바로 통했다. 설지란 아이가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수행평가는 비무를 말하는 것이었다.
 여섯 달마다 열리며, 개인별로 10회 이상의 승리를 거두면 통과 요건이 충족된다.
 패하는 횟수는 상관하지 않는다.
 도전도 가능하고 지명도 가능하니, 능력만 된다면 한 번에도 끝낼 수 있는 것이 수행평가.
 총 20차 중 오늘이 19차라는 것을 보면 이무행은 이곳에서 9년을 산 것이 틀림없었다.
 무당파의 속가 제자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한참을 조잘거리는 설지란 아이가 갑자기 또 울기 시작했다.
 
 “오늘 제갈성진 그놈이 분명히 날 지명할 거야. 흐흐흑!”
 
 무행은 일단 어린 사매를 달래기로 했다.
 
 “걱정 말아라. 그러기 전에 내가 그놈을 혼내 줄 것이니!”
 “따형! 그게 정말이야?”
 “그럼! 언제 이 사형이 거짓말한 적 있느냐?”
 
 무행은 연신 옆구리를 꼬집기도 하고 심지어 가슴을 더듬는 꼬맹이를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어 나온 설지의 말에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사형도 지금까지 딱 한 번밖에 못 이겼잖아?”
 “내가?”
 “그럼! 우리 넷 합쳐서 총 2승!”
 “쿨럭!”
 
 지금 설지란 아이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거의 동네북 수준이 아닐 수 없었다.
 넷이 합쳐 무려 9년 동안 2승이라니?
 설마 그렇게들 수련생들의 무위가 높을까?
 그러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까 연습하는 모양새로 볼 때 사매들의 실력이 워낙에 형편없어서 빚어진 참극임이 분명했다.
 
 “울지 말거라. 이젠 이 사형이 다 알아서 해 줄 것이니······.”
 
 무행의 한마디에 설지는 금방 밝은 표정을 되찾고는 헤 하고 웃어 대기 시작했다.
 
 ‘허! 그야말로 성정이 밝고도 밝구나.’
 
 무행이 설지의 성정에 감탄할 때 밖에서 비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지야! 사형 움막에는 왜 또 간 것이냐?”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설지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무행의 옆구리를 꼬집어 왔다.
 
 “말하지 말라고?”
 
 고개를 아래위로 흔든다. 그러나 무행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
 상황을 빨리 파악할수록 사는 것이 쉬워질 것이었다.
 무행이 일어나자 설지란 아이가 뒤로 숨더니 조막만 한 손으로 엉덩이를 꼬집으며 따라붙었다.
 무행은 그런 설지를 덥석 안아 들고 밖으로 나섰다.
 
 ***
 
 밝은 햇살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비설이 손에 무언가를 받쳐 든 채 밖에서 기다리다가 설지를 노려본다.
 
 “설지 너?”
 
 눈총을 받은 설지가 그대로 품에서 뛰어내리더니 혀를 널름 내밀고는 도망쳐 버렸다.
 그제야 무행은 비설의 손에 든 것을 살폈다.
 
 “오늘 입고 가실 무복입니다. 갈아입고 나오셔요.”
 “······.”
 
 무행은 묵묵히 옷을 받아들었다.
 검은색 무복은 아마도 수행평가 때 입고갈 옷인 모양이었다.
 낡았지만 세탁을 해서 보관해 둔 것이 분명했다.
 무행은 안으로 들어와 무복을 펼쳤다.
 몇 번 기운 태가 나는 무복에는 엉성한 태극문양과 함께 여섯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수련생(修鍊生) 이무행(李無行).
 
 무행은 그 글자를 읽으며 다시 한번 자신의 현실과 신분을 되새길 수 있었다.
 무복을 갈아입고 나서자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져 왔다.
 설지가 달려와 일러바친다.
 
 “사형! 오늘 특식이야! 고기!”
 “특식?”
 
 궁금해 묻자 비설이 대신 답을 했다.
 
 “막내 사가에서 수행평가 때마다 음식을 보내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고맙게도 인삼과 닭을 보내 왔습니다.”
 
 청동 솥 안에서는 닭과 인삼이 뒤섞여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다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서 앉으세요. 사매들도 어서 와.”
 
 탕이 다 완성되었는지 비설이 나머지 둘을 불러 모았다.
 무행이 긴 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자 모두 자리를 찾아 앉는다.
 무행의 시선은 무복으로 갈아입은 사매들의 가슴께로 향했다.
 
 ‘가장 큰 아이는 옥비설, 둘째는 송설란, 꼬맹이는 은설지로군.’
 
 무행은 그렇게 셋의 성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사형! 얼른 먹자.”
 
 그러는 사이 꼬맹이 은설지가 재촉을 하자 무행은 엉겁결에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일제히 젓가락을 드는 사매들.
 모두 무행이 젓가락을 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것마저도 기꺼웠다.
 옥비설이 닭다리를 하나 자르더니 무행 앞에 놓인 그릇에 올려놓았다.
 그사이 송설란은 닭 뼈를 발라낸 살점을 호호 불어가며 은설지의 그릇에 담기 시작했다.
 하는 행동들이 그저 예쁘기만 할 따름.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사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형제들도 없고 말이다.
 참다못한 무행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크흠! 비설아!”
 “예. 사형!”
 “그런데···, 사부님은······.”
 
 무행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답은 꼬맹이에게서 나왔다.
 우걱우걱.
 닭고기를 입안으로 욱여넣으며 하는 말은 황당했다.
 
 “사형 바보야? 우리 사부 없잖아.”
 “설지야. 음식 먹으면서 말하지 말랬지? 다 먹고 나서 천천히 말하라고 몇 번을 말하니?”
 
 그때 송설란이 묻는다.
 
 “갑자기 사부님은 왜요? 전 이제 얼굴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 어째서?”
 “제가 이곳에 온 지 100일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잖아요. 이후론 제겐 사형이 사부님이셨어요.”
 “쩝쩝! 그건 그래. 사형이 사부해라.”
 “설지야! 또?”
 
 으음.
 이건 다 무슨 소리인지.
 정리하자면 무당파에서 사부를 배정했는데 100일 만에 죽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이후 다시 누군가 사부가 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럼 9년 동안 내가?
 
 “막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지?”
 “사형 정말 바보구나? 나 빵 살에 왔잖아.”
 “설지야! 다 씹고 말하랬지. 사형도 참, 새삼스럽게 그런 건 왜 물으시고······.”
 “큰 언니는 여덟, 둘째 언니는 여섯, 난 빵 살!”
 “설지야!”
 
 먹으면서 말하는 은설지를 옥비설이 계속 막는데도 무행은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럼 난?”
 “사형은 약관을 막 앞두고 계셨고요. 사형, 오늘따라 좀 이상하세요.”
 
 이어진 송설란의 대답에 무행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신의 나이는 이제 스물여덟.
 그렇다면 옥비설은 열일곱이고, 송설란은 열다섯, 은설지는 열 살인 것이다.
 생각보다 모두 나이가 어렸다.
 그리고 사부가 없다는 것도 일단 마음에 들었다.
 이 와중에 사부가 있어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면 돌아 버릴 것 같았으니까.
 다른 사형제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설지야. 그러다 체한다. 천천히 먹으래도?”
 “천천히 먹어도 체할걸? 이게 얼마 만에 먹어 보는 고긴데······.”
 “호호호! 그렇긴 하지. 다 네 부모님 덕분이다.”
 “헤! 쩝쩝! 사형도 먹어 봐. 맛있어.”
 
 은설지가 저 혼자 먹는 것이 무안했는지 무행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먹음직스러워 보이긴 하는데 손이 가질 않았다.
 화식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 몸은 계속 화식을 했을 터.
 먹어도 되려나?
 
 “사형! 드세요.”
 
 무행은 옥비설까지 나서서 권하자 어쩔 수 없이 닭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쫄깃한 식감과 함께 육 향이 입안에 가득 퍼져나갔다.
 
 ‘맛있다.’
 
 무행은 체면 불고하고 닭다리를 집어 뜯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매들 역시 먹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한참 먹다 보니 싸한 느낌이 들었다.
 서로 대화를 나눌 때는 정이 철철 넘쳐흐르는데 입을 다물면 분위기는 사정없이 가라앉는다.
 아마도 수행평가란 것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가장 먼저 송설란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연이어 옥비설이 내려놓는다.
 무행은 더 먹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젓가락을 놓아야 했다.
 
 # 업키사#04
 
 끝까지 버티던 은설지도 결국 얼마 못 가 눈치를 보다가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그러자 곧바로 설거지가 시작되었다.
 각자 맡은 것이 정해져 있는지 자동으로 척척 움직였다.
 막내 은설지도 한몫 거들고 나섰다.
 그릇을 걷어 제 사저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무행은 가만히 움막 앞에 앉아 사매들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어찌 저리도 고울까?’
 
 보고만 있어도 그저 좋다. 심지어 고맙기까지 하다.
 오랜 세월 홀로 살아왔던 때문일까?
 정리를 하며 무행을 힐끗거리는 사매들. 제 사형이 좀 이상하다 여기는 모양새였다.
 무행은 얼른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워야 했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수행평가라는 것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몸 상태로 볼 때 혹여 내공 때문에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비설은 10회, 송설란은 9회, 은설지는 10회의 비무 승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물론 무행도 아홉 번 더 이겨야 한다.
 
 ‘그게 가능하긴 한 것일까?’
 
 체계를 모르니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앉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도 안 되면?
 
 ‘정 안 되면 무당파 놈들을 족쳐서··· 쩝!’
 
 무행이 최후의 방법을 모색할 때,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는지 옥비설이 다가왔다.
 
 “사형! 언제 출발할까요?
 “비무는 언제 열리느냐?”
 “그야 오시 초가 아닙니까? 아직 시간은 있습니다. 수련을 좀 더 하고 갈까요?”
 “아니다. 일찍 가자.”
 
 수련을 더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팔다리가 따로 노는 괴상망측한 옥비설의 검법 연습을 또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사매들이 속한 무당파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급선무.
 무행의 말에 옥비설이 나머지 둘을 불렀다.
 은설지는 다가오더니 폴짝 뛰어 무행의 어깨부터 두드렸다.
 목말을 태워 달란 소리.
 무행은 기꺼운 마음에 은설지를 얼른 들어 태웠다.
 
 “사형! 사형이 그러니 설지가······!”
 “출발하자.”
 
 무행은 옥비설의 참견을 서둘러 막았다.
 
 ‘이 기쁨을 놓칠 수 없지.’
 
 이제 막 사매가 된 셋과 함께 무행은 수행평가를 받으러 출발했다.
 옥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
 
 무행과 사매들이 지내는 움막은 경내에 있긴 했지만 가장 외곽에 있는 듯했다.
 지나가면서 많은 초옥들이 보였고 수련생들도 보였다.
 얼핏 봐도 사매들보다 형편이 나아 보였다. 아마 사부가 일찍 죽어 버려 사는 게 그리된 것 같았다.
 마음이 짠해졌다.
 
 “오늘 비무에 나가게 되면 무엇으로 싸울 생각이냐?”
 
 분위기도 바꿀 겸 무행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역시 은설지가 머리 위에서 가장 먼저 반응해 왔다.
 
 “삼재검법하고 태극권, 그리고 호종보잖아. 사형 바보야?”
 “설지야! 사형께 그리 말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하니?”
 
 옥비설이 은설지를 나무라는 사이 송설란이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뗐다.
 
 “무당파에서는 정말 해도 너무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말이냐?”
 “불공평합니다.”
 “그러니까 뭐가?”
 
 무행은 어두운 신색으로 말하는 송설란에게 계속해서 물어야 했다.
 
 “구결을 전한 것이 전부 아닙니까?”
 “그랬느냐?”
 
 무행의 넉넉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송설란은 계속 울분을 토했다.
 
 “그나마 받은 무공까지 최하위인데 어찌 우리가 비무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가만두면 송설란은 울 것 같았다.
 억울해하고 있었다. 그러자 옥비설이 나섰다.
 
 “이제 와서 그런 걸 탓하면 뭘 하겠니?”
 “언니는 분하지도 않아?”
 “그래도 아직 일 년이 남았으니 최선을 다해야지.”
 
 큰 언니다운 옥비설의 태도.
 휘적휘적 걷다 보니 대화는 저절로 나왔고 상황파악도 빨라졌다.
 무행은 곧 자신이 세 사매를 업어 키웠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가르쳤다.
 심지어 막내를 위해 산 아래로 매일 내려가 젖동냥까지 해야 했다.
 수련도 모자라 육아까지 도맡아야 했던 것이다.
 사부로 배정되었던 정우 도사가 노환으로 죽으면서 벌어진 일.
 무당파는 이후 이들을 거의 방치했다.
 사부를 재배정하지 않은 채, 한 달에 한 번 이대 제자를 보내 가르쳤다.
 
 ‘하루 종일 붙어 가르쳐도 모자랄 판에······.’
 
 무행은 출장강습 이야기가 나오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결국 무당파에서 해 준 것은 식량과 옷을 제공한 것과 경내에서 머물도록 허락한 것이 전부였다.
 은 100냥씩을 받아 처먹고 말이다.
 사실 은 100냥이라는 돈의 무게가 무행은 쉽게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옥비설이나 송설란의 말을 들어 볼 때 큰돈인 것만은 분명했다.
 비참하다 못해 처절했던 자신과 사매들의 이야기를 듣던 중.
 무행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대체 무당파 속가 제자가 뭐라고 그런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견딘 것일까?
 그에 대한 답도 바로 나왔다.
 모두가 얻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배경이었다.
 덤으로 무공도 얻으면 좋을 것이고.
 그조차 힘들면 도사들에게 눈도장이라도 받아 인맥이라도 만들어 두자는 것이 사매들의 현 상황.
 사매들이 원했다기보다 그녀들의 사가에서 원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무행 스스로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버티고 또 버텨 온 것이었다.
 
 ‘썩을 도사 놈들!’
 
 과거에도 도사들을 본 적이 있었다.
 몇몇은 무행이 수행하던 동굴에 얼씬거리다가 경을 치고 내뺀 적도 있었다.
 
 ‘무당삼선이라 그랬던가?’
 
 언제 적 일인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놈들이 속한 곳이 무당파고 사매들은 달랑 그놈들에게 속가 제자로 인정받기 위해 9년을 보낸 것.
 도사 놈들도 미웠지만 은설지의 부모가 가장 미웠다.
 아니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산중에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분노는 잠시였고 이내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이런 감정은 대체 뭘까?
 
 ‘어찌 되었든 사매들이 원하는 것은 무당파의 속가 제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행은 은설지의 손을 꼭 끌어 잡고 있었다.
 
 “사형이 그러시니 설지가 버릇이 없는 겁니다.”
 “나 버릇 많아?”
 
 은설지의 대답에 무행도, 옥비설과 송설란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걱정들 말아라. 이 사형이 다 책임질 것이니······.”
 
 스스로도 생각하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심코 흘러나온 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눈빛은 한없는 믿음을 보낸다.
 돌덩이를 황금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사매들의 눈빛들은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이놈은 대체 어찌했기에?’
 
 무행이 넉넉한 원래 몸의 주인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이.
 어느새 도관들이 운집한 지역에 도착해 있었다.
 
 “허!”
 
 무행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옥비설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소궁에만 방이 2천 개라니···. 매번 보는데도 놀랍지 않습니까?”
 
 무행은 당연히 놀라웠다.
 자소궁이란 곳도 놀라웠지만 도사들 때문에 더 놀랐다.
 온통 도사들 천지.
 그 수는 무행이 평생 본 인간들 숫자보다 더 많은 듯했다.
 
 “어찌 도사들이?”
 “도사님들이 왜요, 사형?”
 “참 많구나?”
 “사형도 참! 일부러 그러실 필요 없어요.”
 
 옥비설은 무행이 분위기를 바꾸려 일부러 놀라는 척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행은 정말 놀랐다.
 무당산에 이렇게 많은 도사들이 사는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러나 도사들과 마주치자 곧 번거로워지기 시작했다.
 보는 도사들마다 모두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도사들은 말을 걸어오고, 어떤 도사들은 모르는 척 지나간다.
 하지만 모르는 척하는 도사들도 하나같이 사매들의 용모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풍뢰삼설 아니신가? 수련은 잘 되시고?”
 “아이고 무당산 최고 미인들이 오셨군. 그래 이번에는 한 번 이겨 보려나?”
 “무공만 받쳐 주면 무림삼화 저리 가랄 텐데···. 내 응원함세.”
 
 도사들의 농담 반 진담 반에 옥비설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는 반면, 송설란은 굳은 표정을 감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자 무행이 물었다.
 
 “풍뢰삼설이 무엇이냐?”
 “우리 셋이잖아. 사형 바보야?”
 “설지 너 또?”
 
 무행은 그제야 사매들의 이름에 들어간 눈 설(雪) 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풍뢰벽에 가까이 살고, 이름에 눈 설 자가 들어간 데다, 셋 다 미인이라 붙은 별호 아닌 별명임이 분명했다.
 무행은 거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는 도사도 없었지만 아는 척하는 도사도 없었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냥 힐끗 한번 쳐다보고 만다.
 그럼에도 무행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매들이 미모로라도 관심을 받는 것이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그 때 은설지가 무행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사형! 우리 수련생 장서각 가자.”
 “수련생 장서각?”
 “응! 가서 그림책 보자.”
 
 은설지의 말에 옥비설이 나섰다.
 
 “시간이 넉넉하니 그러세요. 사형! 저희는 미리 가서 대비를 해 놓겠습니다.”
 
 무슨 대비를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무행은 은설지가 잡아끄는 손에 이끌려 장서각으로 향했다.
 입구에는 도사 두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역시 은설지를 한눈에 알아봤다.
 
 “오! 풍뢰삼설의 삼설이 오시었군. 일설과 이설께서는 별래무양하시고?”
 “네. 언니들도 벌레 무양해요. 우리 그림책 보러 왔어요.”
 “하하하! 더 볼 것도 없을 텐데···. 규칙은 알지?”
 “그럼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럼 한번 읊어 볼까?”
 “반출금지 기록금지요.”
 “삼설이 가장 똑똑하다더니 역시?”
 “헤!”
 
 갓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도사들은 은설지를 데리고 놀았다.
 귀여워서 그러는 것이다.
 아무튼 은설지 덕분에 무사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건물로 보였는데 책은 생각보다 많았다.
 
 ‘무엇을 읽을까?’
 
 가져갈 수는 없다 하니 꼭 필요한 것을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은설지는 이미 책을 한 권 골라 가지고 와서 무행에게 내보였다.
 
 “무엇이냐?”
 “정천사전록!”
 “그게 뭔데?”
 “정천사들이 막 싸우는 그림책.”
 “그래. 재미있게 읽어라.”
 
 무행은 은설지를 내버려 두고 읽을 만한 책을 찾기 시작했다.
 겨우 고른 것은‘무당연기록’과 ‘무당요람’이란 책이었다.
 일종의 안내서로 무당파에 대한 대외홍보물 성격의 서책으로 보였다.
 무행은 은설지 곁으로 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은설지가 연신 옆에서 키득거리다가 탄성을 질러 댔지만 방해는커녕 그저 기껍기만 했다.
 서책은 정말 도움이 되었다.
 ‘무당연기록’을 통해 무당파의 역사를, ‘무당요람’으로는 무당파의 조직과 체계 같은 걸 알 수 있었다.
 
 <천년 도가 무당은 천하를 오시하는 무맹과 십정회의 핵심이다.>
 
 ‘지랄들 하고 있네.’
 
 서책을 다 읽은 무행의 소감은 그랬다.
 강호에서 무당파는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사매들이 그 배경을 얻으려 그리 애쓰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기감을 되찾아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으니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당파에 대해 알았으니 더 볼 필요도, 알 필요도 없었다.
 
 ***
 
 대략 반 시진 남짓.
 책을 놓지 않고 버티는 은설지를 데리고 무행은 소연무장으로 향했다.
 오늘 수행평가 비무가 열리는 곳.
 입구에는 옥비설과 송설란이 도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옥비설의 표정은 밝았지만 송설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무행은 소연무장 앞에 붙은 방문을 읽어 내려갔다.
 
 一, 초식으로만 겨룬다.
 二, 징이 울리면 시작하고 멈춘다.
 三, 모든 것은 이곳에서 끝낸다.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며, 승패는 징으로 알린다는 것, 그리고 이후 사적인 감정을 갖지 말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사형! 사매들도 어서!”
 
 옥비설이 무행을 발견하더니 송설란과 은설지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구석으로 끌고 간다.
 무행도 엉겁결에 끌려가 얼굴을 맞대야 했다.
 옥비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직 등록한 사람이 없어요. 원안대로 가죠.”
 “큼! 워, 원안?”
 
 넷이 머리를 맞대고 있으니 기분이 요상해진 무행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사형이 짜신 계획이잖아요. 1승씩이라도 올리자고 하셔 놓고······.”
 “··· 내가?”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
 
 “이후에야 어찌 되던 선공으로 나가죠.”
 “예. 이후엔 설지를 지명하지 말아 달라고 다른 수련생들에게 제가 부탁해 볼게요.”
 
 무행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같은 사형제들 간에 지명을 해도 되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비무는 요식행위에 불과해 보였다.
 서로 짜고 이기고 질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사매들의 역적모의가 이어진다.
 
 “누가 먼저 할까?”
 “나하고 설지하고 먼저 하면 어때?”
 “그게 좋겠네요. 설지는 먼저 1승 챙긴 후 사형 지목하고···. 괜찮네?”
 “아싸! 그럼 나 오늘 2승이나 올리는 거야?”
 “푸흐흡!”
 
 사매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무행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포복절도를 할 뻔했다.
 그러자 옥비설이 물어왔다.
 
 “사형 왜 그러세요?”
 “크흐흡! 그럴 필요 없다.”
 “왜요?”
 “난 오늘 먼저 지명할 놈이 있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은 계획대로 하자.”
 “그게 누군데요?”
 
 세 사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동시에 물어왔다.
 
 “제갈성진이란 놈!”
 # 업키사#05
 
 “안 됩니다. 사형!”
 “그렇습니다. 제가 어제 드린 말씀 때문이라면 거두어 주세요. 제가 분기를 참지 못해서······.”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두 사매가 곧바로 반대하며 나섰다.
 
 “그 때문이 아니다.”
 “사형! 그자는 제갈세가의 다섯째 공자예요.”
 “그게 왜?”
 
 무행은 사매들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러나 사매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자 사부는 운허자 장로님이세요. 사형도 아시잖아요.”
 “예. 게다가 칠성검(七星劍)에다 유운신법(流雲身法)까지 익혔어요.”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사매들.
 무행은 격장지계로 맞섰다.
 
 “내가 그놈보다 못한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그자가 전에 어린 모용 공자에게까지 내력을 사용하는 걸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설사 사형이 당해 내신다 해도 놈은 또 몰래 그리 할 겁니다.”
 
 그래도 제 사형이 질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사매들.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된다.
 제 사형이 다칠까 염려하는 것이다.
 무행은 행복했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보통 야비한 놈이 아니다.
 그렇다면 더 그냥 두어서는 안 될 놈.
 그때 가만히 있던 은설지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맞아. 사형! 제갈 망나니는 도사님들도 함부로 못 해.”
 
 그 말은 무행에게 결정타였다.
 
 ‘이 아이들에게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무행은 그렇게 판단했다.
 지나치게 주눅이 들어 있다.
 무공은 앞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감은 스스로 가져야 한다.
 오늘 제갈성진이란 놈을 꺾으면 사매들은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무행이 이기면 자신들도 할 수 있을 거라 여길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있겠는가?
 팔까지 잡으며 말리는 사매들을 뿌리치고 무행은 곧바로 접수대로 향했다.
 
 “사, 사형!”
 
 뒤에서 간절한 합창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도사가 물어왔다.
 
 “접수하려는가?”
 “예.”
 “이름은?”
 “이무행입니다.”
 “상대는?”
 “제갈성진입니다.”
 “제갈 공자님을?”
 
 도사는 수련생을 공자님이라 높여 부르더니 바로 기록하지 않았다.
 무행이 물었다.
 
 “안 됩니까?”
 “자네 실력으로는 안 될 텐데?”
 “칼은 맞대 봐야지요.”
 
 무행의 말에 피식 웃은 도사가 한마디 하며 이내 이름을 적었다.
 
 “나중에 후회는 하지 말게.”
 
 一, 제갈성진 대 이무행
 
 무행은 자신의 이름이 가장 먼저 올라가는 걸 확인하고는 물러났다.
 모두들 표정이 굳어 있었다.
 무행은 은설지를 안아 들고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한데 내가 이긴 후 지명을 하면 저 대진표가 더는 쓸모없지 않느냐?”
 “그, 그렇지요. 더 이상 지명이나 도전이 없다면······.”
 
 가만 보니 사실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것이 대진표였다.
 
 “그럼 내가 마지막에 설지를 지명하마. 그때부터 원안대로 가자.”
 
 무행은 연신 웃으며 불안해하는 사매들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사매들의 표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련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옷차림만 봐도 형편이 좋은 자와 아닌 자가 구별될 정도다.
 어떤 자는 가죽으로 된 무복을 입었고, 어떤 자는 무복 위에 털조끼까지 걸친 자도 있었다.
 입춘을 지나 햇볕은 따스해도 공기는 차갑다.
 그런데 사매들은 밖에서 식사를 하고 변변한 털옷 하나 없다.
 
 ‘흠! 이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로군.’
 
 무행은 여기저기 기운 무복을 입은 사매들이 안쓰러웠다.
 돌아가면 어디 어슬렁거리는 대호(大虎)라도 잡아 가죽을 벗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은설지가 무행의 손을 놓더니 누군가에게 달려가며 이름을 불렀다.
 
 “용후야!”
 
 딱 봐도 은설지 또래다.
 잘 차려입은 어린 사내아이였다.
 
 “용후야! 오늘 우리 사형이 제갈성진을 혼내 준대.”
 “거 잘됐소. 그런데 내 이름은 용후가 아니라 후요. 모용후!”
 “난 용후가 더 좋던데? 아무튼 전에 제갈 망나니에게 맞은 곳은 다 나았니?”
 “큼! 이보시오. 낭자! 어찌 사내의 아픈 상처를···. 다 나았소. 그리고 맞지 않았소. 게다가 내 이름은······.”
 “나도 낭자가 아니라 설지야. 은설지!”
 “쿨럭! 말을 맙시다.”
 
 성이 모용이고 이름은 후인 모양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은설지는 용후라고 불러 대며 떠들어 댔다.
 
 “저 아이가 제갈성진을 상대했다고?”
 “예. 초식으론 거의 이겼지요.”
 “한데?”
 “제갈성진이 내공을 사용해서 부상을 입혔습니다.”
 “저 어린 것한테? 도사들은?”
 
 무행은 묻고 또 물었다
 대답은 대부분 옥비설이 했다.
 
 “당연히 모르는 척했지요.”
 “왜?”
 “제갈세가는 오가회(五家會)의 일원이지만 모용세가는 아니니까요.”
 
 옥비설이 고개를 떨군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잘못된 것만은 분명했다.
 
 “정말 개새끼로구나. 오늘 반드시 버릇을 고쳐 놔야겠다.”
 “사형!”
 
 두 사매가 다시 간절히 무행을 불렀다.
 지금이라도 지명을 포기하라는 뜻.
 그러나 무행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것보다 모용후란 아이에게 관심이 갔다.
 딱 은설지만 한데 옥비설이나 송설란도 두려워하는 제갈성진을 궁지로 몬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분개한 망나니 놈이 내공을 사용했을 것이고.
 어린 나이임에도 배움이 그만큼 깊다는 뜻일 게다.
 
 ‘이래서들 가문을 툭하면 들먹거리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행은 점점 더 사매들이 애처롭기만 했다.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느라 바쁜 옥비설.
 가만히 서서 여자 수련생에게만 눈인사를 하는 송설란.
 천방지축인 은설지.
 셋 다 색깔은 다르지만 충분한 무재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배경이 없는 탓에 배우지 못하여 실력이 없는 것이다.
 무행은 자신이 사매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는 사이 징 소리가 들리더니 7명의 도사들이 입장하는 것이 보였다.
 젊은 도사 세 명이 단상 위에 올라가 앉았고, 나머지는 비무대를 포위하듯 사방에 섰다.
 단상에 선 젊은 도사가 목청을 높였다.
 
 “19차 수행평가 비무를 감독할 유도라 하오.”
 
 곁으로 온 은설지가 옆구리를 찌르며 소곤거렸다.
 
 “유도 도사님, 차기 무당제일검이래.”
 “그래?”
 
 차기 무당제일검이란 말에 무행의 관심도 유도라는 도사에게 쏠렸다.
 그러나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유도란 도사가 좌중을 훑어보더니 다시 입을 연다.
 
 “초식으로만 승부하고, 징을 치면 시작하고 또 멈춰야 하오.”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잘 듣는 척하는 수련생들.
 
 “그리고 비무의 결과에 승복해야 하오. 다들 규칙은 알 것이니 바로 시작하겠소.”
 
 목소리에서는 짜증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맡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대진표를 확인하더니 표정이 바뀌었다.
 흥미롭다는 표정.
 수련생들이 착석하자 곧바로 유도 도사가 입을 열었다.
 
 “제갈성진 대 이무행, 비무대로 나오시오.”
 
 무행은 사매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비무대로 올라갔다.
 그러자 한 놈이 제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며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놈이 제갈성진이로군. 참 싸가지 없게 생겼다.’
 
 대진표도 확인하지 않은 모양이다.
 가죽 경장을 입고 실실 웃으며 올라오는 놈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사이 무행은 비무대의 크기를 가늠했다.
 이십 보를 움직여야 끝에서 끝.
 크기를 확인한 무행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자네 진심인가? 실수로 잘못 적은 것이라면 내 이제라도 빼 주지.”
 
 둘이 인사를 하자마자 유도 도사가 무행에게 묻는다.
 정말 제갈성진과 겨루겠냐는 뜻.
 
 “잘못 적은 게 아닙니다.”
 
 무행은 짧게 대답했다.
 
 “하기야 패하는 것도 배우는 것이지.”
 
 비무를 하기도 전에 유도는 무행의 패배를 단정 짓더니 징채를 들었다.
 
 지이잉!
 
 징은 울렸지만 무행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갈성진이 다가오며 주절거려 왔다.
 
 “의외로군.”
 “뭐가?”
 “자넨 비설낭자의 사형 아닌가?”
 “그런데?”
 “우리 사이에 이럴 필요가 있나?”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인데?”
 
 짧은 대화가 이어진 후 곧바로 제갈성진이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거려 왔다.
 
 “장차 동서가 될지도 모르는 사이잖은가?”
 “동서?”
 
 무행은 말뜻을 헤아려야 했다.
 그러나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때 놈이 비무대를 천천히 돌며 다시 이죽거렸다.
 
 “구멍동서 말이네. 맛은 괜찮던가?”
 
 그제야 놈의 음담패설을 알아들은 무행.
 몇 대 쥐어박고 말려 했는데 순식간에 마음이 바뀌었다.
 무행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감돌았다.
 
 “어디 자격은 되나 볼까?”
 
 무행은 목검을 천천히 제갈성진의 목젖을 향해 밀어 넣었다.
 스르륵!
 
 “헛!”
 
 곧바로 제갈성진의 입에서 당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부드럽게 미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는데 검봉(劍鋒)은 목젖을 한 치 앞두고 멈춰 있었다.
 힘만 주면 목이 꿰뚫릴 상황.
 그러나 놈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아니 반응하지 못한 것이다.
 수련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비무는 끝난 것.
 정작 당황한 것은 무행이었다.
 
 ‘어라? 이러면 곤란한데?’
 
 설마 이 정도로 약할 줄은 생각도 못한 것이다.
 데리고 놀다가 두들겨 패 주려고 했는데 싱겁게 끝나 버리다니?
 그러나 다행인지 징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슬쩍 유도 도사를 바라보니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무행에게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좋지.’
 
 무행은 곧바로 목검을 회수한 후 입을 열었다.
 
 “방심했구나?”
 “··· 그, 그렇다. 방심한 사이에 들어오다니······.”
 
 무행은 히죽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러면···, 방심을 하지 말아 봐.”
 “이놈!”
 
 그래도 놀리는 것은 알아듣는다.
 잔뜩 표정을 일그러뜨린 제갈성진이 목검을 맹렬하게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휘익! 쉬익! 쉬익!
 
 제 깐에는 기세가 대단하다 싶었겠지만 무행에게는 허우적대는 것으로 보였다.
 
 다다다닥.
 
 비틀거리는 척 물러나던 무행은 비무대 맨 끝에서 몸을 돌려 빠져나왔다.
 하지만 제갈성진은 그렇지 못했다.
 달려오던 힘을 제어하지 못한 것이다.
 놈이 비무대에서 떨어지려는 찰나.
 타닥!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제갈성진이 다시 비무대 중앙으로 튕겨져 들어갔다.
 무행이 목검으로 허벅지 바깥쪽을 후려쳐 밀어 넣은 것.
 
 “크으윽!”
 “이번에도 방심했구나?”
 “이··· 이 개자식이?”
 
 제갈성진은 분기를 주체하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허벅지 살이 터져 버렸을 것.
 놈이 신은 가죽신 위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를 악문 놈이 다시 유도 도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유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제갈성진이 작정한 듯 자세를 바로잡는다.
 내공을 끌어 올리는 것이다.
 
 ‘그놈 참!’
 
 무행은 어이가 없었다.
 그냥 좀 얻어맞는 게 어때서 목숨을 걸려는 것일까?
 그때 제갈성진이 검을 하늘로 곧추세웠다.
 
 “칠성검이다.”
 
 순간 비무대 아래서 누군가가 제갈성진의 검법을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무행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사매들에게로 향했다.
 두 손을 꼭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옥비설과 송설란.
 은설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언니들 뒤에 숨어 있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 눈동자는 굴러다닌다. 잔뜩 겁먹은 눈동자가.
 
 ‘흐흐! 귀엽기도 해라.’
 
 그 순간 제갈성진이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다.
 
 “이 개새끼! 넌 오늘 죽었다. 칠성초현!”
 
 무행은 달려오는 제갈성진을 응시했다.
 초식 이름까지 외친다.
 그러나 검에는 아무런 힘이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검을 들지 않은 좌수에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응집해 있었다.
 
 ‘이놈 봐라?’
 
 마냥 한심한 놈이라고 여겼는데 교활하기까지 한 것이다.
 검에 집중하는 순간 좌수에 실린 공력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무행의 눈빛이 더 차가워졌다.
 이런 식으로 다른 수련생들을 지금까지 괴롭혀 왔을 것이 확실했다.
 그중에는 금쪽같은 사매들도 있었고.
 검봉이 몸에 닿으려는 순간 무행은 놈의 오른쪽으로 바짝 붙었다.
 그리고 놈의 좌수를 한 손으로 맞잡았다.
 
 “뜨겁지?”
 “으으으!”
 
 무행은 놈의 좌수에 응집된 기운을 그대로 가둬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두 곳을 점혈했다.
 이어 우측으로 빠져나가며 놈의 엉덩이를 뒤에서 걷어차 버렸다.
 
 “혓바닥 잘못 놀린 죄다.”
 
 퍽!
 털썩.
 비명도 없었다.
 단지 제갈성진이 비무대 아래 바닥에 엎드리듯 처박히는 소리만 들렸다.
 소연무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누구도 전모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
 그때 어디선가 괴이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헤헤헤! 히히히!”
 
 제갈성진.
 놈이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히히히히! 헤헤!
 
 뭐가 저리도 좋아 웃는 것일까?
 분노를 못 이겨 실성한 것일까?
 수련생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
 그러나 무행은 알고 있었다.
 웃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다는 것을.
 # 업키사#06
 
 “사숙!”
 “으음···. 끝난 것이냐?”
 
 유도는 안 그래도 눈을 뜰 참이었다.
 틀림없는 제갈성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예. 한데 제갈 공자가?”
 “안다. 알아.”
 
 유도는 결과를 안다고 말하며 징채를 잡고는 비무대를 살폈다.
 그러나 발견한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제갈성진이었다.
 
 “헤헤헤! 히히!”
 
 나가 자빠진 것이 분명한데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유도는 황급히 몸을 날려 제갈성진의 상세를 살폈다.
 
 “어, 어찌 된 일이냐?”
 “저희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이런···! 혈도를 다쳤구나. 어서 약당으로 옮겨라.”
 
 유도의 말에 이대 제자 둘이 제갈성진을 들쳐 업고 달려기 시작했다.
 그제야 몸을 돌린 유도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비무대 위로 올라오더니 곧바로 무행의 완맥을 잡아채며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무행은 저항하지 않고 그냥 있었다.
 손목을 잡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유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찌 그러십니까, 도사님?”
 
 무행이 능청을 떨자 유도는 손을 놓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때 이대 제자 하나가 다가와 유도에게 물었다.
 
 “사숙! 어찌할까요?”
 “네, 네가 진행을 맡아라. 난 약당에 가 볼 것이니······.”
 
 무행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유도가 약당으로 향하고 나서야 이대 제자가 징을 쳤다.
 
 “이무행 승!”
 “와아!”
 
 사매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매들뿐만이 아니다.
 거의 모두가 기뻐한다.
 무행은 기뻐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
 그때 진행을 맡은 이대 제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자! 수행평가 비무는 유도 사숙 대신 내가 맡게 되었소. 정명이라 하오.”
 
 정명이 자신을 소개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자 정명이 무행에게 물었다.
 
 “자네 지명할 텐가?”
 “예.”
 
 무행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누구로 할 텐가?”
 “저자로 하겠습니다.”
 
 무행은 곧바로 자신의 승리를 기뻐하지 않은 한 놈을 골라냈다.
 제갈성진과 함께 있던 놈이다.
 도사가 이름을 확인하고는 외쳤다.
 
 “이무행 대 유씨세가 유환 공자!”
 
 다시 비무가 속개되었다.
 그리고 비무는 정말 싱겁게 끝났다.
 시작하자마자 무행의 목검이 유환이란 자의 가슴에 닿은 것이다.
 유환은 무행을 지그시 노려본 후 말없이 비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6승을 올린 무행은 원안(?)대로 은설지를 지명해 패배한 후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
 
 “사형은 6승, 나는 3승!”
 
 활짝 웃는 은설지의 새까만 눈동자.
 그 속에 무행이 그림자가 되어 스며들어 있었다.
 
 “큰언니는 2승, 둘째 언니는 3승! 큰언니가 꼴찌야!”
 “그러네. 이 큰언니 체면이 말이 아닌걸? 호호호!”
 
 옥비설은 꼴찌라는데 바보처럼 웃는다.
 
 “다음에는 나머지 승수를 전부 채울 수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무행은 가장 승수가 적은 옥비설을 달래려 그렇게 말했다.
 수행평가를 마치고 내려가는 길은 봄날의 나들이 길 같았다.
 
 “제 걱정일랑 마세요. 오늘은 정말 통쾌했습니다. 한데 제갈성진 그놈은 어찌 된 걸까요?”
 “글쎄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무행은 옥비설의 질문에 시치미를 뗐다.
 제갈성진은 독비혈과 기호혈을 점혈 당했다.
 독비혈은 하반신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기호혈은 웃게 만든다.
 더는 사매들에게 다가서지 말고, 더는 비웃지 말라고 그리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점혈을 푸는 자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기도 했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사매들을 가르치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야만 험난한 강호에서 사매들은 목숨을 부지할 것이었다.
 무행은 웃고 떠드는 사매들의 앞날을 설계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은설지가 누군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곰 세 마리다.”
 
 옥비설이 황급히 은설지의 입을 틀어막더니 웃으며 말했다.
 
 “천대협! 이 아이가 아직 어려서······!”
 “괜찮습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닌걸요. 저희가 산동삼웅 아닙니까?”
 
 거구의 사내 한 명이 사매들을 향해 싱글거리고 있었다.
 무행은 무심코 물어야 했다.
 
 “넌 누구냐?”
 “쿨럭! 이 친구 제갈 망나니를 꺾더니 벗도 모른 체하는가?”
 
 벗?
 상대를 모르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난 자네가 언젠가 칼을 뽑아 들을 줄 알았네.”
 “크흠! 그게 뭔 소리인가?”
 “허 이 사람! 그 개자식이 그간 자네 사매들을 얼마나 희롱했나? 자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내가 나서려고 했네.”
 
 그럼 진즉에 그럴 것이지.
 뭘 알고는 떠드는 것일까?
 무행은 거구 사내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아무튼 오늘 9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갔네. 언제 우리 숙소에 들리게. 축하주라도 한잔해야지.”
 
 장한은 무행이 대답을 하든 말든 제 할 말을 했다.
 그리곤 사매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갈 길을 간다.
 곁에는 두 명의 비슷한 체구의 사내들이 따르는데 생김새가 거기서 거기였다.
 쿡.
 무행은 은설지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킥! 왜, 사형?”
 “저 곰 같은 놈은 누구냐?”
 “······?”
 
 무행의 질문에 모두 의아해하는 눈빛이었다.
 
 “곰 세 마리잖아. 사형 어디 아파?”
 “곰 세 마리인 건 알겠는데 이름이 통 생각이 안 나는구나.”
 
 무행의 말에 옥비설이 의아해하며 나섰다.
 
 “왜 그러세요, 사형! 사형의 동향 벗이잖아요.”
 “쩝!”
 “산동 태음 천씨 삼 형제! 모두 10승씩 채웠어.”
 “그렇구나.”
 
 나머지 대답은 옥비설이 아닌 은설지가 했다.
 아마도 이무행과 동향이라 이곳에 와서 벗이 된 모양이었다.
 그래서인가?
 방금 전 하는 말에는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나마 괜찮은 놈일세.’
 
 무행의 눈길은 다시 곰 같은 자와 그 아우들에게로 향했다.
 아무튼 동향이라고 하니 나중에라도 이무행의 어머니나 사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은 천가고 이름은?”
 “천 일, 이, 삼이잖아. 우린 몰래 곰 세 마리라고 불러. 히히!”
 
 무행은 은설지 덕분에 이름을 알아내고는 눈치를 살피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젠 몰래도 아니게 되었구나. 아무튼 내가 요즘 깜박깜박한다니까?”
 
 무행의 말에 사매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움막으로 돌아오는 길은 다시 즐거워졌다.
 화제는 다시 제갈성진.
 씹고 또 씹어도 사매들은 여전히 달착지근한 모양이었다.
 
 ***
 
 무당장문 청허자가 사제인 계율원주 청경을 맞은 것은 이른 아침.
 
 “어서 오시게. 사제!”
 “가 보셔야겠습니다. 장문 사형!”
 
 청허는 의아한 표정으로 사제를 응시했다. 그러나 묻지는 않았다.
 계율원주인 그가 가 봐야 한다면 꼭 가 봐야 할 만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곧바로 따라나서 도착한 곳은 자소궁내의 한 방 앞.
 약당주 청진과 일대 제자 유도가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장문 사형을 뵙습니다.”
 “장문사숙을 뵈옵니다.”
 
 인사를 하자마자 청진이 바로 방문을 열었다.
 일단 보라는 뜻이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장로이자 사숙인 운허자까지 보였다.
 그러나 청허는 인사 대신 침상을 응시해야 했다.
 상체를 세운 채 다리를 뻗고 침상 위에 앉아 있는 자.
 바로 제갈성진이었다.
 한데 상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헤헤헤! 헤헤!”
 “키킥! 캬악!”
 
 장문을 발견하고 일어서지도 않는다.
 그도 모자라 해괴하게 웃기까지 하니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곧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인가?”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청허는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어찌 된 일이냐니까?”
 “혈도가 봉쇄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좌수는 면장을 사용하려다 발출을 못해 기운이 뭉친 것으로······.”
 
 약당주 청진이 내용을 설명하자 청허의 시선은 제갈성진의 좌수로 향했다.
 누군가를 무당면장으로 공격하려 하다가 오히려 화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청허의 눈이 다시 계율원주 청경에게로 향했다.
 
 “어제 속가 수련생들의 수행평가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리되었습니다.”
 “어제 다쳤다고? 한데 여태 해혈을 안 하고 무얼 한 게냐?”
 
 장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다시 약당주 청진이 대답했다.
 
 “해혈이 되질 않습니다.”
 “아니 되다니?”
 “그것이 참···. 독비혈과 기해혈을 봉쇄당한 것이 분명한데 온갖 방법을 써 봐도 해혈이 되지 않습니다.”
 “어찌······.”
 
 약당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수련생이긴 하지만 침상에 있는 자는 제갈세가주의 다섯째 아들.
 아무리 집안에서 내놓은 망나니 놈이라고는 해도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다던가?
 당장 제갈세가의 가주가 자신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를 지경이었다.
 그때 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운허자가 나섰다.
 
 “청진도 나도 해 보았소. 한데 점혈이 풀리지 않소.”
 “사숙께서도 계셨군요.”
 
 운허자는 청허의 뒤늦은 인사가 내심 괘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색할 수가 없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제갈성진을 수련생으로 받은 것은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면목이 없소.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운허자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청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는 청경에게 물었다.
 
 “어제 수련생 수행평가를 감독한 자가 누구냐?”
 “유도입니다! 유도는 들라.”
 
 유도가 밖에서 대기하다가 뛰어들어 와서는 무릎을 꿇었다.
 
 “네 이놈! 대체 감독을 어찌하였기에?”
 “소, 송구합니다. 장문 사숙!”
 
 청허의 호통에 유도가 납작 엎드렸다.
 
 “면장이라니? 수련생 수행평가에서 내공을 사용할 수 없음도 몰랐더냐?”
 “그, 그것이······!”
 “도대체 누가 속가 수련생에게 면장까지 가르친 게냐?
 
 유도는 입을 다물고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장문의 호통이 자신이 아닌 운허자를 향하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운허자가 청허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난처하게 되었소.”
 “······.”
 
 난처한 정도가 아니었다.
 구파일방이 십정회를, 오대세가가 오가회를 만든 후 하나로 다시 뭉쳤다.
 그것이 바로 무맹.
 당대 무맹의 군사가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천기다.
 애초부터 수련생으로 받아서는 아니 되는 자였다.
 운허자가 사정하길 제갈세가에서 인간 좀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하여 허락한 일이다.
 애초부터 싹이 노란 놈이었다.
 툭하면 패악질이었다.
 그래도 제 아비를 봐서 기간만 채우면 청강검 한 자루 쥐어 내보내려 했건만······.
 남도 모자라 이제는 자신까지 해친 것이다.
 
 “우헤헤! 헤헤. 꾸르륵!”
 
 기괴한 제갈성진의 웃음소리에 청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무당의 체면은 땅바닥에 내팽개쳐질 것이 분명했다.
 
 “점혈한 자는?”
 “점혈을 한 자는 없습니다.”
 
 이 무슨 또 해괴한 소리인가?
 
 “그게 무슨 말인가? 혈도가 두 군데나 봉쇄되었는데 점혈을 한 자가 없다니? 유도 네 놈이 말해 보거라.”
 
 청허의 호통에 유도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비무 상대자는 저리 점혈을 할 정도의 무위가 아니었습니다.”
 “네가 어찌 아느냐?”
 “그자의 내공이 일천한지라······.”
 
 청허는 유도의 대답을 듣다 말고 계율원주 청경을 응시했다.
 
 “방사(方士)였던 이대 제자 정우의 문하로 이무행이란 자입니다.”
 “정우는 뭐라 하던가?”
 “이미 9년 전에 죽었습니다.”
 “뭐라? 하면 이후에 누군가는 맡았을 것 아닌가?”
 “그게···. 이후에 배정이 없었던 것으로······.”
 
 청경의 말에 청허는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련생에게 사부를 배정하지 않았다니?
 
 “어째서?”
 “아무도 정우가 받았던 제자를 들이려 하지 않는지라······.”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어찌 가르치는 자 없이 수련생을 방치했다는 것인지?
 
 “원시천존! 본 파의 행사가 어찌 이리도 무도했단 말인가?”
 
 장문의 입에서 도호까지 나오자 모두는 그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잠시 후 청허의 입이 열렸다.
 
 “계율원주는 들으라.”
 “예. 장문 사형!”
 “이는 수련생들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 못 한 내 잘못이다.”
 “자, 장문 사형?”
 
 청허는 일단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운허자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이 일이 수습되는 대로 정우가 맡았던 수련생들을 찾아가 사죄하겠다.”
 “예. 장문 사형! 예에?”
 
 듣고 있던 모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당 장문이 어떤 신분인가?
 무맹주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는 일은 없다.
 그런데 한낱 수련생에게 사죄라니?
 운허자가 나섰다.
 
 “어, 어찌 장문께서 친히 그런 미천한 자들에게 고개를 숙인단 말씀이오.”
 “사숙께서는 자중하시지요. 그리고 그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할 것이니 그리 알라.”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건지고 물러나는 운허자.
 청허는 장문답게 빠른 결단을 내렸다.
 해혈이 되지 않는 이유를 운허자도 모르고 약당주도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계율원주인 청경도 확인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문제라면 그 사람이 지금 경내에 없다는 것.
 
 “계율원주!”
 
 청허는 계율원주 청경을 다시 불렀다.
 
 “예. 장문 사형!”
 “청요 사제를 들어오시라 하게.”
 “처, 청요 사형을요?”
 
 청허의 말에 입 다물고 있던 운허자가 또 황급히 나섰다.
 
 “이만한 일로 무당제일검을 불러들이다니요?”
 “하면요?”
 “그리하면 무맹에서 본 파의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음입니다.”
 “그럼 이대로 저 아이를 제갈세가로 돌려보낼까요?”
 
 다시 되로 주려다 말로 받은 운허자.
 그러나 이번에는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그건 불가하오.”
 
 분위기가 살벌해지고 있었다.
 그것을 감지한 계율원주 청경이 얼른 소리 높여 외쳤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장문 사형!”
 
 청허의 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수련생들의 명부를 가져와라. 내 하나씩 다 들여다볼 것이야.”
 “예. 장문 사형!”
 
 청허의 명령은 계속되었다.
 
 “이제부터 점호와 수행평가는 계율원주가 직접 관장하도록 하라.”
 “예. 장문 사형!”
 “약당주는 청요가 올 때까지 저 녀석의 상세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보살피라.”
 “예. 장문 사형!”
 
 # 업키사#07
 
 무행은 이틀을 잠을 잤다.
 어찌 된 영문인지 잠이 쏟아졌다.
 몸을 바꾸며 일어나는 일시적 부조화 같았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잠을 자고 나면 개운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대호가 웅크린다. 얏!”
 “얏!”
 “대호가 일어선다. 핫!”
 “욧! 제갈 망나니 받아라.”
 
 새벽 무렵.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목소리는 옥비설과 은설지의 음성이었다.
 
 “설지야! 무공은 장난이 아니에요?”
 “헤! 그래도 난 신나는데?”
 
 무행은 거적을 슬쩍 걷어 밖을 살폈다.
 
 ‘으흠······!’
 
 옥비설과 은설지가 이른 새벽부터 무공연습을 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송설란도 보인다.
 19차 수행평가가 끝나자마자 무행은 은설지에게 네 가지 무공의 구결을 외우게 했다.
 무당파로부터 배정받은 기본토납법과 삼재검법, 태극권, 그리고 호종보라는 보법.
 둘은 지금 그중 호종보를 연마하는 것.
 송설란은 은설지가 방해가 되는지 멀리 떨어져 목검을 겨눈 채 묵상(?) 중이었다.
 자세로만 보면 검신이 따로 없다.
 움직이지 않으면 그렇다.
 아무튼 사매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만은 분명했다.
 이 긍정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승화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에헤이······!’
 
 옥비설의 중심이 흐트러져 사지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은설지는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비틀거린다.
 송설란은 곧 투계로 변할 것이 확실했다.
 
 “난 풍뢰삼설 중 삼설 은설지다.”
 “설지야!”
 “제갈 망나니는 내 권법을 받아라. 아앗!”
 “수련 중에는 그러는 거 아니래도?”
 
 연신 제갈 망나니를 들먹이는 은설지.
 속이 시원했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전부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무행은 일단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얼마 후.
 호종보 연습이 끝나자 목검을 들더니 삼재검법을 수련한다.
 
 ‘허! 거의 검신합일이로다.’
 
 은설지는 제 키만 한 목검을 휘둘러대는데 검에 몸이 딸려 다닌다.
 그간 수행평가의 결과는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행이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은설지가 움막을 염탐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매들도 힐끗거리긴 마찬가지.
 무행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은설지가 냉큼 달려와 안겨들었다.
 옥비설과 송설란도 기다렸다는 듯이 하던 짓을 멈췄다.
 
 “사형! 사형 어디 아파?”
 “그럴 리가?”
 “난 또! 사형은 무공 안 해?”
 
 무행은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옥비설의 황당한 말이 흘러나왔다.
 
 “사형은 우리 중 가장 고수잖아. 그러니 쉬셔도 돼.”
 “맞다. 제갈 망나니도 뻗었잖아.”
 “쿨럭! 커험!”
 
 고수인 건 또 어찌 알았을 고?
 이대로 내버려 두면 당장 죽어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가르칠 생각은 없었다.
 그마저도 사매들과 벽이 될까 두렵다.
 돕고 싶을 뿐이다.
 모든 걸 다 주어서라도.
 하지만 사부의 공부는 출신(出身)을 시작으로 한다.
 태어나서부터 화식을 금한다.
 단전을 만들거나 내공을 쌓지도 않는다.
 몸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먼저.
 사매들은 이미 단전이란 것을 만들었다.
 단지 쌓인 것이 없을 뿐.
 그러니 사부의 공부는 맞지 않았다.
 맞는다 해도 시간이 너무 걸린다.
 아마 머리 허연 노파가 될 때까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매들은 단기간에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지금 무행의 목표였다.
 
 “너희들에겐 검이 맞지 않는다.”
 
 무행은 세 사매를 바라보며 그렇게 운을 뗐다.
 
 “어째서요?”
 “난 검 안 좋아해?”
 
 가장 먼저 송설란이 물어왔고 은설지도 반응했다.
 그러나 무행은 옥비설을 먼저 지적했다.
 
 “비설은 남을 먼저 공격할 성정이 아니지.”
 “······.”
 
 옥비설은 무행의 지적을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적이 접근하게 두면 큰 키의 장점을 살리지 못할 게다.”
 “그럼 저는요?”
 
 송설란이 서둘러 물어왔다.
 
 “설란은 성격이 과감하니 적과 맞붙으면 물러서려 들지 않을 것이다.”
 “맞아. 둘째 언니는 성질나면 아무도 못 건드려.”
 “설지야!”
 
 송설란은 은설지에게만 애써 부인했다.
 
 “무위가 비슷한 적을 만나면 늘 부상을 입게 될 것이다.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
 “그럼 난! 난난난?”
 
 송설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설지가 자신은 어떠냐며 재촉했다.
 
 “우리 설지는 성격이 쾌활하고 몸이 유연하다. 그러니 권이 제격이지.”
 “헤헤헤! 맞아. 설지는 권왕이다. 얍!”
 
 은설지는 그저 좋아 죽는 표정이었다. 그때 옥비설이 물어왔다.
 
 “사형! 어찌 그런 생각들을······?”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했다.
 송설란도 보태고 나섰다.
 
 “매일 약초만 캐러 다니셔서 걱정했는데 이번에 사형을 보고 놀랐습니다.”
 
 무행은 속으로 뜨끔했다.
 아마도 이무행은 매일 약초나 캐러 돌아다닌 모양이다.
 제 사매들을 먹이려고 말이다.
 무행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작은 깨달음이 있었다.”
 “깨달음이요?”
 “다 돌아가신 사부님이 우릴 가엽게 여기셔서 돌보신 게지.”
 
 무행이 뜬금없이 정우 도사를 입에 담았지만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눈치.
 하지만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은 믿는 것이 분명했다.
 사매들의 무행에 대한 신뢰는 아주 견고했다.
 
 “사형!”
 “왜?”
 “그럼 나도 깨달을래.”
 “하하하! 우리 설지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무행은 그렇게 말한 후 사매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깨달음을 너희에게 아낌없이 줄 것이다. 지금까지의 배움은 다 잊자.”
 “그럼 이제 어찌할까요?”
 “일단은 내가 토납법을 하나 가르쳐 줄 것이다. 잘 듣도록 해라.”
 
 무행은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눈을 감았다.
 무당파에서 준 기본 토납법의 구결을 바꾼 것이다.
 그 후 사부가 가르쳐 준 네 가지 개념을 접목했다.
 내공심법 하나를 새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공겁(空劫).
 
 겁은 긴 시간이나 어디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궤를 달리한다.
 그것이 무행이 사부에게 배운 기반.
 이어 삼청, 삼원, 묘일로 나아간다.
 어렵다.
 골치 아프다.
 게다가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다는 엄명도 받았다.
 그러나 슬쩍 바꾸는 거야 무슨 상관이랴?
 아무튼 성겁은 일정 기간 이루어짐을 말한다.
 주겁은 일정 기간 유지함을 말하고, 괴겁은 일정 기간 무너져 내림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공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우주의 흥망성쇠.
 인간의 생로병사.
 이 모든 것들이 겁으로 설명된다.
 인간 또한 소우주.
 사매들 역시 하나의 우주나 다름없다.
 무행은 성겁의 묘리를 토납법에 담았다.
 구결은 기운을 불러올 것이고 사매들은 그 기운들을 받아 축기를 하게 될 것이었다.
 그거면 원하는 바는 이룰 수 있을 것.
 부족하면 더 보태고 남는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복.
 무행이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사매들은 귀를 기울인 채 눈을 감았다.
 은설지도 이럴 때는 꽤나 진지하다.
 뜻은 이해되지 않아도 좋았다.
 이미 구결은 의지를 심고 있었다.
 낭송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이 전부다. 자, 비설부터 외워 보자.”
 
 구결을 한 번 읊은 무행은 곧바로 외워 보라며 옥비설을 지목했다.
 모두 당황한 눈치가 역력했다.
 그러나 옥비설이 구결을 외우기 시작하더니 끝을 맺는다.
 스스로도 의아해하는 눈치다.
 이어 송설란과 은설지도 구결을 전부 외웠다.
 모두 어리둥절했다.
 그 긴 걸 한 번 듣고 외우다니?
 무행은 더 의구심을 품지 못하도록 결론을 내렸다.
 
 “당분간은 구결대로 토납법만 익혀야 한다. 집안일은 모두 내가 하마.”
 “사형?”
 “너희는 모두 수련에만 전념해라. 그게 날 위하는 일이다.”
 
 사매들에게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적당히 긴장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행은 따로 익히는 것도 불허했다.
 하나보다는 둘이 덜 외로울 것이고, 셋이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
 
 사매들은 곧 맹렬해지기 시작했다.
 은설지는 과묵해졌다.
 정작 답답해진 것은 무행이었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며칠이 더 지난 오후에서야 옥비설이 무행을 찾았다.
 
 “사형! 오늘 수련생 장서각 앞에서 보급품을 받아와야 하는데······.”
 “그래? 내가 가마.”
 
 무행은 옥비설의 말에 바로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제갈성진의 점혈이 풀렸는지가 궁금했던 차였다.
 
 “그럼 부탁드려요.”
 
 옥비설은 사양하지 않고 무행에게 일을 떠맡겼다.
 찬바람이 쌩하고 지나간 느낌.
 
 ‘흠! 뒤도 안 돌아보는군. 하기야······.’
 
 은설지가 안 나오는데 옥비설이야······.
 가만히 있어 봐야 할 일은 없었다.
 곧바로 수련생 장서각 앞으로 향한 무행은 도사들에게서 심상치 않은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분명 뭔 이야기들이 돌긴 한 것 같은데 물어볼 수도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줄을 서 기다리다가 무행의 차례가 오자 중년의 도사가 무행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네가 이무행이군.”
 “예. 도사님!”
 “난 계율원주 청경이라 하네.”
 “아, 처음 뵙습니다.”
 
 무당파의 체계에 대해 읽은 적이 있어 계율원주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련생들에게 보급품을 나눠 주는 일은 그가 할 일이 아니었다.
 
 “사부도 없이 고생이 많았다 들었네.”
 “예? 아, 예.”
 
 사매들이 들으면 감격할 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무행의 대답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곧 장문께서 그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하실 것이니 너무 서운해하진 말게.”
 “예.”
 
 무행은 간단히 대답하고 의복과 식량을 수령했다.
 지금 한 말이 사실이라면 사매들은 크게 기뻐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고 나니 좀 의아했다.
 다른 도사들은 지나칠 때마다 모두 소 닭 보듯 하는데 청경이란 도사는 사과를 하며 친근하게 군다.
 무당파가 어찌 돌아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누굴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
 결국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움막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한 반쯤 왔을 때 누군가 뒤를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도사 한 명이 몸을 숨긴 채 무행을 향해 손짓을 한다.
 처음 보는 자다.
 소매의 띠가 세 개이니 삼대 제자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삼대 제자라 해도 수련생으로서는 넘볼 수 없는 신분.
 
 “저 말씀이십니까?”
 “쉿! 이리로···. 어서!”
 
 삼대 제자는 무행을 아는 듯 소리를 죽여 불렀다.
 무행은 어쩔 수 없이 도사를 따라갔다.
 숲속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피는 도사를 향해 무행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무슨 일로······?”
 “쉿! 조용히 하게.”
 
 한마디 했는데 달려들어 손으로 입까지 막으려 든다.
 무행은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나무 뒤로 더 끌려 들어가야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고급정보일세.”
 “고급정보요?”
 “그렇다네. 들을 텐가?”
 
 무행은 그제야 이 도사를 이무행이 여러 번 만났다는 걸 간파할 수 있었다.
 일종의 정보원인 것이다.
 그러니 고급정보 운운할 테고 말이다.
 
 “예. 듣지요.”
 “그럼 이번에는 조금만 더 올라가세.”
 “어디를요?”
 “지난번 버선은 실망이었네.”
 “예?”
 “세탁을 한 것이더군. 설란 낭자의 그 작고 아리따운 발 향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이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도사의 황당한 말에 무행은 입까지 벌려야 했다.
 
 “그게 무슨······?”
 “내 분명 설란 낭자의 체취가 가득한 신던 것으로 부탁했건만······.”
 
 아니 그런데 이 새끼가?
 무행은 분기가 치솟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야 했다.
 거래는 그런 것이었다.
 이 도사는 송설란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무당파 내부의 정보를 제공해 주고 송설란이 신던 버선을 요구했던 것.
 
 ‘뭐 이런 변태 자식이 다 있냐?’
 
 생각은 그랬지만 궁금한 것이 있었기에 간신히 참아야 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좀 많이 올라가세.”
 “어디를··· 올라가는지?”
 “너무 깊은 골짜기는 피해 아득한 곳······.”
 
 염병!
 이 자식이 미쳤나?
 
 “뭡니까?”
 “설란 낭자의 아담한 산봉우리를 담던 가슴가리개로 하세.”
 “끄응!”
 
 아, 빌어먹을 놈!
 무행은 앓는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곰도 재주를 부린다더니 그래도 이무행이 할 건 다 했던 것이 분명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니 빨아서 널어놓은 걸 몰래 가져다주는 수밖에.
 무행이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이번에는 무세탁을 꼭 지켜 주게.”
 ‘끄응!’
 
 무행은 인내심이 임계점에 도달하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사가 주변을 다시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 이번에 사고 제대로 쳤더군. 덕분에 우린 고생문이 열렸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행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자네 덕분에 계율원주께서 모든 일을 다 챙기고 계셔서 죽을 맛이네.”
 “제가 뭘 했다고요?”
 “제갈 공자 말일세. 자네와 비무를 했다지? 아무튼 아직도 인사불성이네.”
 
 이건 아주 바람직한 정보였다.
 제갈성진의 혈도를 아무도 풀지 못한 것이다.
 
 “그게 답니까?”
 
 무행은 그게 다면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고 생각하며 되물었다.
 그런데 더 있었다.
 
 “그래서 장문께서 그분을 불러들이셨네.”
 “그분이라니요?”
 “무당제일검 청요 사조.”
 
 무당제일검?
 이건 뜻밖의 정보였다.
 무당제일검의 이름은 청요.
 무행은 그 이름을 가슴에 새겼다.
 
 “또 있네. 더 들을 텐가?”
 “끄응!”
 
 말하란 말이야. 이 변태 새끼야!
 소리를 지르고 싶다.
 아니면 잡아다가 고문을 할까?
 무행은 도사가 다시 거래를 제안하자 심지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말이나 행동거지는 지저분한데 읽히는 기운은 맑기만 하다.
 나이도 어리니 여인을 마음에 두는 건 당연한 일.
 도사로 오래가기는 힘들 것으로 보였다.
 
 “또 뭡니까?”
 “내 동기 중에 비설 낭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 벗이 있네.”
 
 이번에는 옥비설을 거론한다.
 그나마 은설지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을 정도.
 무행은 거래조건을 완화시킬 겸 한마디 해야 했다.
 
 “도사님들이 이러시는 걸 다른 높은 분들이 아시면······?”
 “난 설란 낭자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당장 무당산을 내려갈 수도 있네.”
 
 아! 이 목표 뚜렷한 놈.
 절대 위협은 통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분은 뭘 원하시는지요?”
 “그게···, 나보다 좀 아래일세.”
 “아래라면?”
 “큼! 고의 말일세. 입던 것으로······.”
 “커흠!”
 
 무행은 도사의 말에 헛기침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좋습니다. 뭡니까?”
 “약속 꼭 지키게. 입던 것으로!”
 “알았다니까요?”
 
 무행이 성질이 나서 소리를 지르자 도사가 다시 입을 막으려 들며 말했다.
 
 “유도가 자넬 벼르고 있다네.”
 “예?”
 “지난번 비무 일로 장문진인께서 호되게 야단을 치신 모양이네.
 “그랬습니까?”
 
 고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무당파의 장문이란 자는 괜찮은 놈인가 싶기도 했다.
 
 “원래 유도 그자가 뒤끝이 무량한 인간이니 분명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네.”
 ‘가만있지 않으면?’
 
 무행은 속으로 콧방귀를 뀔 수밖에 없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옥비설의 속곳까지 훔쳐야 하는 것이 더 억울했다.
 하지만 유도 도사가 아래 항렬의 도사들에게도 인기가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뒤끝이 무량하다와 그자라는 표현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
 정보는 더 나왔다.
 
 “지난번 일로 곤란해진 사람이 셋이라네.”
 “누굽니까?”
 “운허 장로님, 유도, 그리고 제갈 공자지.”
 “운허 장로님은 왜요?”
 “그야 제갈 공자의 사부 아닌가? 아마 제갈 세가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걸세.”
 
 가만히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제갈세가는 오대세가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러니 무당파에 항의할 수도 있을 것.
 그러나 무행은 개의치 않았다.
 
 ‘사매들을 건드리면 그게 누구든······.’
 
 무행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도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데 도사님 도호가······?”
 “나? 우리가 한두 번 거래한 것도 아닌데 기억 못 하다니 정말 섭섭하군.”
 “하하하! 그게 갑자기 생각이 나질 않아서······?”
 “나 명우일세. 수련생들에게 꼭 필요하고 엄선된 정보만 제공하며, 그 대가라고는 고작······.”
 “아! 명우 도사님. 더 없습니까?”
 
 말이 길어지자 무행이 막았다.
 그러자 명우 도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아쉽지만 그게 전부일세. 꼭 입던 것으로 부탁함세.”
 “쿨럭! 아, 예.”
 
 # 업키사#08
 
 명우 도사가 돌아간 후.
 무행은 허탈했다.
 그리고 가슴이 저려 왔다.
 이제 자신은 이무행이다.
 다시 생각할 것도 없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득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명우라는 도사는 아마도 처음에는 돈을 요구했을 것이다.
 형편이 어려운 무행은 약초를 캐다가 팔아 필요한 정보들을 얻었을 것이고.
 사부가 없었으니 다른 길은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곤궁했으면 사매의 버선까지?
 숨 돌릴 틈도 없이 살아왔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도 자신과 사매들이 무당파의 속가 제자가 될 길을 열고 싶었을 것이다.
 고개 숙이고 납작 엎드린 채 말이다.
 무행의 발걸음은 저절로 더뎌졌다.
 처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이무행의 지난 감정들이 묘하게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터벅터벅.
 움막에 돌아왔을 때는 옥비설과 송설란이 나와 있었다.
 
 “어찌 나온 것이냐, 막내는?”
 
 무행은 애잔한 마음을 감추며 물었다.
 
 “막내는 얼굴과 몸에 붉은 건양(乾瘍:버짐)이 피어올라······.”
 “사형이 보면 미워할 것이라 아니 나오겠답니다.”
 
 무행은 막내가 병이 생겼다는 데도 반색을 했다.
 
 “오! 그러냐?”
 “괜찮을까요?”
 “괜찮다. 막내의 공부가 가장 빠른 까닭이다. 너희도 곧 그리될 것이다.”
 
 무행의 대답에 송설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찌 설지가 그러합니까?”
 “체내의 불순물이 빠져나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산 날이 가장 적으니 쌓인 것도 가장 적은 게지.”
 
 옥비설과 송설란의 안색이 그제야 가벼워졌다.
 무행이 다시 물었다.
 
 “다른 증험은 없고?”
 “있습니다. 단전에 실타래처럼 기운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느껴집니다.”
 
 무행은 다시 반색을 했다.
 
 “바로 그거다. 그게 자리를 잡으면 불순물을 밖으로 내보내게 된다.”
 
 무행의 설명에 옥비설과 송설란이 마주 보며 웃었다.
 
 “한데 너희들은 왜 나와 있고?”
 
 반가우면서도 무행은 다시 물었다.
 옥비설이 대답했다.
 
 “운허자 장로님과 유도 도사님이 다녀가셨습니다.”
 “그래?”
 
 이렇게 빨리 무당파에서 행동에 나설 줄은 몰랐다.
 
 “장문진인께서 저희 사정을 알고 돌보시라 하셨다 하면서······.”
 “움막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인도 아니고······.”
 
 옥비설은 감격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송설란은 불만이 가득했다.
 
 “사매! 그건 우리 사정을 알아보시기 위함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리 뒤지는 것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꺼림칙했다.
 분명 계율원주라는 도사는 장문진인이 곧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만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있을 때 운허자란 장로와 유도 도사가 다녀간 것이다.
 조합도 맞지 않는다.
 장로원의 장로가 일대 제자를 한 명 데리고 수련생을 직접 살핀다?
 명우는 분명 계율원주가 모든 것을 챙긴다며 불만을 토로했었다.
 또 유도 도사가 자신을 노린다고도 했다.
 그러나 무행은 곧바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그렇지 않아도 오늘 계율원주를 만났다. 뒤늦게나마 우리 형편을 안 모양이더라.”
 “그랬습니까? 다행입니다.”
 
 무행의 말에 옥비설은 아예 눈물까지 주르륵 흘렸다.
 송설란 역시 설움을 감추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분한 모양이었다.
 
 “9년이나 그리도 청하였는데 일언반구도 없다가 이제 와서······.”
 “이제라도 다행이지 사매! 그건 우리가 속가 제자가 되는 일에 한 발 더 다가섰다는 의미잖아.”
 
 옥비설의 말에 송설란이 눈물을 훔치며 흐느꼈다.
 
 “그게 어디 무당파에서 해 준 거예요? 다 사형 덕분이지요.”
 “그건 그래. 그래도 아무튼 나아진 것만은 사실이잖아.”
 
 두 사매는 성격이 달라도 너무도 달랐다.
 옥비설은 모든 것을 좋게만 바라보는 데 반해 송설란은 반드시 따질 것은 따진다.
 무행은 같되 다르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지 몰랐었다.
 
 “아마 우리가 고생한 것을 장문진인이 그간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되었지.”
 
 무행은 넉넉하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매듭을 지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사매들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으허헝! 어어엉!”
 “흐흐흑!”
 
 결국 설움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내색을 안 하려 애를 썼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참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무행은 그래서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울음은 잦아들었다.
 무행은 작심하고 오던 길에 만난 도사 이야기를 꺼냈다.
 
 “오는 길에 명우라는 도사를 만났다.”
 “네? 키킥!”
 
 무행이 입을 열자마자 옥비설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송설란도 눈물을 닦다 말고 얼굴을 돌리며 웃는다.
 
 “이번에는 설란의 무엇이 필요하답니까?”
 “다 알고 있었더냐?”
 
 무행은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옥비설이 대답했다.
 
 “사형도 참 새삼스럽게···. 명우 도사라도 있었기에 망정이지요.”
 “그래요. 사형! 그자가 저라도 좋아했으니 망정이지···. 아니 그랬다면 무당에서 우릴 아예 잊어버렸을 거예요.”
 
 무행의 난감함을 눈치챈 송설란도 거들고 나섰다.
 단순한 정보만을 제공해 준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사매들에겐 굴욕적인 일이었을 터.
 두 사매가 여인으로 성장해 간다는 것을 이무행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무행은 예전 이무행은 아니었으니까.
 
 “아니다. 더는 너희를 두고 입에 올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사형이 약속하마.”
 “사형!”
 
 무행의 말에 사매들의 눈이 다시 촉촉해진다.
 눈물 흘릴 일이 많고도 많았나 보다.
 한참 후에야 옥비설이 물었다.
 
 “명우 도사가 무슨 정보를 주던가요?”
 “그게··· 큼! 제갈성진의 점혈을 풀지 못해 무당제일검을 불렀다더구나.”
 “예?”
 
 송설란이 화들짝 놀란다.
 
 “청요라던가?”
 “맞아요. 무맹에 정천사(正天使)로 나가 계시지요.”
 “정천사?”
 
 무행은 정천사란 말에 은설지가 수련생 장서각에서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정천사전록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이번에도 더 물을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어야 할 것을 계속 묻게 될 것이 빤했다.
 대화가 끊기자 분위기는 서먹해졌다. 명우 도사 일 때문인가?
 때마침 움막 안에서 은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빼고 맛있는 거 먹는 거 아니지? 그럼 나 뿔따구 난다.”
 
 셋은 재빨리 일어나 각자 해야 할 일을 찾아가야 했다,
 
 “울 설지를 빼고 그럴 리가?”
 “큼! 어서 들어가 수련들 해야지.”
 
 ***
 
 다음 날부터 무행은 할 일이 많아졌다.
 예상보다 은설지의 성취가 빠르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무행은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아다가 가죽을 벗겼다.
 사매들이 몸속의 불순물을 빼내고 순정지기를 쌓기 시작하니 원기가 부족할 터.
 뼈는 고아서 먹이고, 고기는 육포를 만들 생각이었다.
 
 ‘가죽은 설지가 깔고 자면 되겠군.’
 
 무행은 설지가 좋아할 것을 상상하며 부지런히 손질을 했다.
 푹신한 깔개가 만들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은 가죽으로 작은 수투(手套)를 만들었다.
 크기가 아기자기하기까지 하다.
 이어 수투에 호랑이 발톱을 다듬어 손가락 마디마다 붙였다.
 무행은 만족한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막내 것은 되었고 다음은···. 자! 그럼 이제······.’
 
 무행이 다음 일을 찾아 일어서려 할 때 인기척이 감지되어 왔다.
 나타난 자는 유도 도사였다.
 
 “유도 도사님 아니십니까? 다녀가셨다 들었습니다.”
 “그걸 알면서 며칠이 지나도록 여기서 놀고 있었군. 네 사매들은?”
 
 유도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사매들의 행방을 물어왔다.
 
 “사매들은 안에서 연공 중인데······.”
 “연공은 개뿔···. 운허자 장로님께서 널 찾으신다.”
 
 사매들의 연공을 폄하하는 유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도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대충 예상한 일이라 곧바로 손을 놓고 따라나섰다.
 유도는 무행이 따라오는지를 가끔 감시하며 본산 건물 쪽이 아닌 숲속을 향했다.
 무행이 넌지시 물었다.
 
 “어딜 가시는지요?”
 “장로님께서 너희 고충을 헤아리시고 상을 내리시기로 하셨다. 그러니 입 닥치고 따라오너라.”
 
 상을 내리는데 숲속?
 게다가 입까지 닥쳐야 하다니.
 뭔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행은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뒤를 따랐다.
 풍뢰벽이 가까워진 곳에서야 유도의 걸음은 멈춰졌다.
 뒷짐을 진 채 등을 보이고 있는 노도사가 눈에 들어왔다.
 
 “데리고 왔습니다. 사조!”
 “오! 왔느냐? 네가 이무행이로구나.”
 
 무행은 돌아서는 운허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 들었다.”
 “어인 말씀을요. 이제라도 살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행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도 주절거렸다.
 다 사매들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니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래서 너에게 상을 내리고자 한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무행은 무조건 받겠다고 했다.
 그러자 운허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유도에게 눈짓을 했다.
 유도가 무행에게 내민 것은 서책 한 권이었다.
 서책은 고색창연해 버텨 온 세월을 짐작케 하고도 남았다.
 
 ‘귀령비요(龜齡秘要)?’
 
 무행은 어렵지 않게 책 표지에 쓰여 있는 제목을 읽어 냈다.
 
 “귀령비요라는 책이다. 네 사부인 정우가 가져다 네게 준 것이다.”
 ‘네게? 내게가 아니고?’
 
 무행이 눈빛을 빛낼 때 다시 운허자의 입이 열렸다.
 
 “귀령비요는 금서로 분류되어 금정(金頂)에 봉인되어 있던 책이다. 그걸 정우가 가져갔고 네게 전한 것이다. 이해가 되느냐?”
 “그럼 9년 전이겠군요?”
 
 금정이라면 무당산에서 가장 높은 천주봉 꼭대기.
 그곳에 깊숙이 숨겨져 있던 책을 가져왔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맞다. 그리고 그걸 네가 익혔구나.”
 “제가 이 서책에 나온 무공을 9년간 몰래 익혔단 말씀이로군요.”
 
 무행은 어이가 없어 그렇게 대답해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도가 나선다.
 
 “그것도 모자라 넌 귀령비요를 계집 셋에게까지 가르쳤더구나.”
 ‘계집? 이 자식이!’
 
 이들은 지금 상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귀령비요라는 금서를 정우가 준 것이 아닌 훔친 것으로 꾸미려는 것.
 그렇다면 다음은 어찌 될까?
 
 “감사합니다. 덕분에 신공을 익혔습니다.”
 
 무행은 어이없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운허자가 제법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놈 이해가 빠르구나. 신공이 아니고 마공이다.”
 “신공이면 어떻고 마공이면 어떻습니까, 익히면 그만이지요.”
 
 챙!
 
 무행의 말에 유도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운허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기왕 이리된 마당에 알 건 알고 가야 원통함이 덜하지 않겠느냐?”
 “예. 사조!”
 
 유도가 물러나자 운허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귀령비요를 9년간 익혀 그것으로 제갈성진의 혈도를 제압했다.”
 “아, 예.”
 
 무행의 건조한 대답에 운허자의 눈빛이 살짝 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혈도를 풀기가 어려웠던 것이지.”
 “그럼 그걸 간파하신 장로님께서 절 제압하고 되찾아가시겠군요?”
 
 무행의 말에 운허자는 갑자기 대소를 터트렸다.
 
 “우하하하! 하하하! 너 같은 놈을 보게 될 줄이야. 우리가 진즉에 만났다면 좋았을 것을···. 제압이 아니고 죽이고라고 말하면 놀랄 것이냐?”
 “아! 그래서 절 일부러 여기까지 끌고 오신 거로군요?”
 
 무행이 다시 물었다.
 
 “맞다. 네 시신에는 귀령비요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전 죽어서 시신도 못 찾게 되는 건가요?”
 “장문은 몰라도 청요, 그 아이는 귀령비요를 익혔는지 아닌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안타깝구나.”
 
 무행은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적아를 분명하게 골라낼 수 있었다.
 적어도 장문진인이나 무당제일검 청요가 이 일에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궁금한 것은 남았다.
 
 “그리하시면 뭘 얻으실 수 있으십니까?”
 “이 일에는 두 가지 이득이 있다.”
 
 받아들인다고 생각한 것일까?
 운허자는 비교적 온화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하나는 그 아이의 혈도를 풀지 못해도 제갈세가와의 관계가 나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공을 훔쳐 익힌 너에게 당한 것이니······.”
 “꽤나 설득력이 있군요. 다른 하나는요?”
 “마공을 몰래 익힌 마인이자 반도인 널 색출하여 제거한 것이니 장문진인도 더는 날 걸고넘어지지 못할 것이다.”
 
 무행은 웃어야 했다.
 딱 봐도 그동안 많이 써먹어 온 술수가 분명해 보였다.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
 그리고 입을 막는 것.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무당파의 장로다.
 죽이는 것까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너는 대 무당파에 큰 공을 세우고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 알고 가면 저승길이 서럽지는 않을 것이다.”
 “잠깐만요.”
 
 무행은 유도가 검을 들고 다가서려 하자 입으로 막았다.
 
 “할 말이 더 있는 게냐?”
 “그럼 제 사매들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대답은 유도에게서 나왔다.
 
 “한심한 놈! 마공을 익힌 자를 어찌 다스리는지도 모르느냐?”
 “어찌 다스리는데요?”
 “단전을 폐하고 파문하는 것이 계율이다. 그 계집들은 그리될 것이다.”
 “······.”
 
 죽일 생각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속가 제자가 될 입장에서 문파의 어른이니 살려는 주려 했는데······.
 무행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 사매들은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업어 키운 사매들』 1-2권에 계속>

댓글(3)

듀랜    
사매들을 건들면 아주 주옥되는것이여
2019.07.16 02:30
ci***    
ㅋ 기대안하고 봤는데 재밌네요
2020.04.05 14:45
너솔    
전권 대여하고 중도포기 최초작 개한심한 작품이다 보지마세요. 네버
2020.05.0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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