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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다 주운 SSS급 반지 1권 (1)

2019.07.10 조회 4,895 추천 25


 # 굴러 들어온 반지
 
 
 신(神)계.
 모든 신들이 머무는 곳.
 그중에서도 ‘음악의 신’, 아폴론(Apollon)이 관장하는 음악의 성전.
 아주 오래전,
 여신 아프로디테의 저주에 빠져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 운명’에 빠진 ‘새벽의 여신’ 에오스(Eos).
 이번에도 사랑의 저주에서 헤어나지 못한 에오스는 성전 한쪽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다.
 그녀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곳. 거기에는 지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거울, 그중에서도 음악에 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천상경(天上鏡)’이 있었다.
 그녀는 천상경이 비추고 있는 한 청년을 보며 넋이 나가 있다.
 화려한 무대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사내를 보며, 아까부터 손에 꼭 쥐고 있던 반지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한 번은 그 청년에게 ‘황홀하며 수려한 외모’에 축복을 내리라며 조화의 여신을 협박해 기어이 성공하더니, 얼마 전엔 직접 콘서트를 보러 지상으로 내려가겠다고 해서 신들이 뜯어말리고 난리가 났었다.
 어쨌든 그녀만 성전에 나타나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잠잠하다.
 그녀는 꽤 오랜 시간 손에 든 반지를 만지작거리더니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후유. 이제 가시려나 보다.’
 천상경을 지키는 신의 사자가 ‘오늘은 조용히 지나가는 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에오스는 천상경 앞으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다가갔다.
 몇몇 신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주시했고, 그녀는 만지작거리던 반지를 손에 꽉 쥐었다.
 망설이는 듯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서, 설마······.”
 “천상경에서 물러나십시오!”
 “뭐해! 다들 말리세요!”
 “안 됩니다! 에오스 님!”
 신들과 사자들이 달려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럼에도 에오스는 반지를 천상경으로 대차게 던졌다.
 
 == == == == ==
 
 
 
 여의도의 한 방송국 공개홀 앞.
 7월 초이건만, 밤에도 더위가 가시질 않고 후덥지근하다.
 나는 손으로 부채를 만들어 휙휙 내저었다.
 잠깐 바람이 만들어져 얼굴을 간질이기는 했지만, 잠깐이었다.
 “아. 덥고 짜증.”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서 응원 피켓을 들고 있는 초등학생 조카들의 모습이 보인다.
 잠시 후, 인기 그룹 ‘블랙타이거’를 태운 검은색 밴이 방송국 주차장 출구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카들이 어떻게든 가까이서 보려고 아주 지랄 발광을 하고 난리가 났다.
 쯧쯧쯧. 저런 한심한 놈들. 혀가 절로 차진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평소 같으면 친구 놈들과 클럽에 가 있을 시간이다.
 무슨 옷을 그따위로 입느냐고, 아직 군인 티를 못 벗었다고, 구박하는 녀석들 때문에 슬랙스도 하나 샀는데. 제길.
 고개를 돌려 보니 밴은 출구 앞 사거리에서 빨간색 신호에 걸려서 정차해 있고, 팬클럽 아이들도 우르르 몰려간다.
 당장 이리 와라. 오지 않으면 버려 놓고 가겠다.
 순간 눈이 마주친 조카들이 터덜터덜 걸어오는데,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이 영 집에 가기 싫은 표정이다.
 녀석들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서 괜히 길바닥을 찼다.
 신발 앞코에 애꿎은 돌멩이만 채여서 몇 개 날아가다가,
 “어, 어?”
 내 운동화 한 짝도 함께 날아갔다.
 “일진 더럽네.”
 미간을 찌푸리며 운동화 한 짝을 줍고 돌아서는 길.
 반짝!
 전화위복이었을까?
 반지를 하나 주웠다.
 
 * * *
 
 다음 날.
 나는 평상시와 같이 아침 운동을 하러 나왔다.
 군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아직은 아침형 인간이다.
 슬슬 걸어서 아침마다 조깅 하는 코스에 도착했다.
 ‘진짜 많이 좋아졌다.’
 예전엔 황폐한 개천이었다.
 옆 동네에 있는 논밭에 물을 대겠다며 아무렇게나 파놓은 개천들과 풀베기를 하지 않아서 세상 벌레가 다 모여 있는 듯 불쾌한 환경 때문에 일부러 피해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지금은 구역 개발을 하면서 넓은 간선 수로가 생겨나고 각종 운동 기구들까지 갖춰 놔서 조깅 코스로 완벽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태양이 작열해서인지 운동 나온 사람들이 거의 없다.
 뛸까?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 걸었다고 벌써 겨드랑이에 땀이 찬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산책하듯 걸으며 아침의 느긋함을 즐겼다.
 그 여유로움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주머니 속 손끝에 뭔가가 자꾸 거치적거린다.
 어젯밤 방송국 앞에서 주운 반지.
 주웠을 때는 주인을 찾아 주려고 몇 번이나 두리번거렸지만 찾을 수 없었다.
 로즈 골드처럼 은은한 핑크빛이 도는 이 반지는 14k가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걸 팔아 용돈 벌이라도 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지갑 안에 들어있을 교통카드 한 장과 현금 2만 원.
 이것이 전 재산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잃어버렸을 귀금속을 냉큼 집어서 내다 팔 만큼 양심이 없지도 않다.
 그냥 길거리에 다시 버리고 올 수 없어서 내 주머니에 챙겼을 뿐.
 팔아먹을 생각이 없는데 내가 챙겼다는 것은 모순이라면 모순일 테지.
 원래 주웠던 자리에 가져다 놓을까? 애초에 파출소에 맡길 것을 그랬나?
 처음부터 일 처리를 잘못했구나. 내가 여기까지 들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 근처에 있는 분실물 센터에 맡기면 될 것을······ 왜 어제는 이런 생각이 안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아침밥을 먹고 가져가서 맡길까? 푹푹 찌는데 해가 질 때 쯤 가지고 갈까? 이런저런 고민하며 산책을 계속 했다.
 머릿속에 복잡하게 엉켜 있던 상념들이 흩어지자, 햇볕에 눈 녹듯 고민도 사라진다.
 
 * * *
 
 그 시간 신계, 음악의 성전.
 성전의 주인인 아폴론과 ‘행운의 여신’ 티케(Tyche)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다.
 아폴론은 신계의 사고뭉치 안하무인인 에오스를 그나마 제일 이해하고 평소 가깝게 지내는 티케를 불러들였다.
 “아직도 그렇게 철없는 행동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한데? 대형 사고를 치고도 술이 넘어갈까 몰라.”
 티케가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에오스를 째려보며 혼잣말을 했다.
 에오스는 그 말을 다 들었지만,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는 술잔을 채웠다.
 그 행동이 거슬렸는지 티케는 인상을 구겼다.
 아폴론도 짜증이 솟구쳤다.
 자신보다 높은 선대의 신이라고는 하나 터져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에오스의 이번 행동은 신계의 법을 모르는 어린아이들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반지를 왜 지상으로 내리셨습니까? 아폴론의 반지를요.”
 아폴론은 전날 자신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역에 ‘엑스트라 링’을 두었다.
 그 반지는 ‘음악의 성전’의 모든 신들이 투표로 정한 ‘선인’에게 돌아갈 참이었다.
 선인으로 추대된 인간은 살아생전에 반지를 통해 신계의 모든 신들과 교류하다가 죽어서는 신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이 중요한 반지를 에오스가 훔쳤다.
 “그깟 반지! 아폴론 그대의 의지로 다시 만들어내면 그뿐! 왜 나를 나무라는 거지? 이 에오스가 직접 선출한 선인을 신계로 올리겠다는데, 무슨 불만 가득한 표정이야? 설마 그깟 장로들의 결정이 더 중요하다는 건가? 나는 위대한 티탄 신족인 히페리온(Hyperion)과 테이아(Theia)의 딸······ 우웁.”
 신경질 가득한 얼굴로 아폴론에게 따지는 에오스는 끝까지를 말을 잇지 못했다.
 여신 티케가 아폴론의 한껏 짜증 난 표정을 보고는 손으로 에오스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대로 뒀다가는 항상 오만한 저 입에서 아폴론의 화를 부채질할 만한 말들이 튀어나올 것이 뻔했다.
 에오스의 입에서 슬그머니 손을 떼며 티케가 말했다.
 “몰랐어? 여신 에오스가 요즘 지상 세계의 남자에게 또 반해 있다는 거. 아! 저번에 조화의 여신한테 협박해서, ‘외모에 축복을 내려라!’라고 했던. 그 사건 기억해? 동혁이라고 했나? 한국이라는 나라의 가수. 어쨌든 그 인간에게 주려고 했던 것인데 다른 인간이 줍게 된 거지.”
 여신 티케 또한 에오스와 같은 항렬로 아폴론보다 선대의 신이었다.
 아폴론에게 하대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 중의 한 명.
 잠자코 듣고 있던 아폴론이 물었다.
 “티케 님, 반지를 주운 자는 본래 어떻게 살아갈 운명이었습니까?”
 티케는 오른손 바닥을 펼치고 그 위에 아주 작은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구름을 만들었다.
 두둥실 오색찬란한 구름이 허공에 머물다 흩어진다.
 그녀는 저 작은 구름으로 인간의 운명에 행운을 축복해 주기도, 지독한 불행을 선사하기도 했으며 행운의 크기를 점치기도 했다.
 잠시 눈을 감은 티케가 이내 입을 열었다.
 “본래는 평범하게 살 운명이야. 행운이 그리 많이 깃들어 있지도 않군. 그저 일한 만큼 대가를 받고 노력한 만큼 성장하는 평민의 삶을 살다가 죽을 운명이지.”
 명부를 둘러본 그녀는 점차 심각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저 인간이 반지를 끼게 된다면 그 반지는 죽어서도 안 빠질 거야. 반지와 상통한 자는 사후에도 하데스에게 가지 않지. 곧바로······.”
 티케는 손가락으로 서 있는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로 오겠지.”
 말을 마친 티케는 아직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에오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여.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건가?”
 에오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냥 빼앗아 오면 되지 않겠어? 무력으로라도··· ‘전쟁의 신’ 아테나(Athena)에게 신장 몇 명 보내라고 해”
 에오스한테 해결 방안을 들은 티케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어 한숨 섞인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한다.
 “진짜 몰라서 이러는 거야?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반지를 가장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곳이 어딘지 몰라서 이래? 바로 손가락이라고! 무력으로 빼앗으려다가 인간이 손가락에 끼워버리는 날엔 더 큰 사달이 난다는 걸 모르냐?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신이라고 한들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냐? 그 반지는 모든 음악의 신들의 염원을 담아 아폴론의 의지로 만들어낸 반지라고. 답답하군.”
 긴 잔소리를 들은 에오스는 짜증을 뱉어냈다.
 “그러게 왜들 막아선 거지? 잘 던질 수 있었는데, 모두들 내 팔을 잡아끌고 방해하는 바람에 이상한 곳으로 던졌잖아? 허! 이 에오스를 막아서다니 겁도 없는 자들이······.”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그녀의 막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티케가 저지했다.
 “여신 에오스! 그 입 다물고 반지 가져와. 당장!”
 술잔에 남은 한 모금의 술을 마저 마시고 에오스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지금 징계 중인걸? 아직 119년이나 남아 있고.”
 1년 전쯤 성전의 한곳인 ‘천상의 샘’에서 사고를 친 건으로 에오스는 징계 중이다.
 
 [향후 120년간 지상으로 내려가는 것을 금한다.]
 
 샘물을 한 바가지 퍼다가 인간에게 선물한 일이었는데, 그 인간은 그때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가 되고, ‘천상의 목소리’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노래하며 평범하게 살다가 소질이 없어서 음악을 관두게 될 운명에 명성과 인기를 주었으니, 300년 정도는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아폴론이 간청하여 그나마 형량이 줄어든 것이다.
 “저의 신력으로 잠시 보내드리지요. 부디 무력보다는 현명한 회유를 하시길······.”
 아폴론까지 합세하여 지상에 보내준다니 ‘졌다’는 표정으로 에오스가 두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회수해 오도록 하지.”
 
 * * *
 
 간선 수로의 곳곳을 잇는 다리.
 사람들 대부분은 반지를 쥐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가락에 껴 보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뭔가에 이끌린 듯 생각 없이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어 두 번째 손가락에 밀어 넣으니 쑥 들어간다.
 검지에 자리 잡은 반지가 손가락에 딱 맞아 들어간다.
 디자인은 엄청 심플하고 두께는 1cm정도에 보석이 두 개 박혀 있다.
 한 개는 루비처럼 보이는 붉은색 보석이고 한 개는 다이아몬드와 흡사해 보인다.
 이게 설마 진짜 다이아몬드는 아니겠지?
 뭐든 상관없다. 어차피 분실물 센터에 맡기기로 결정했으니까.
 손의 앞면, 뒷면을 뒤집으며 반지를 감상하면서 몇 걸음 더 옮기는데 다리 저 끝에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여자가 서 있었다.
 아니, 가까이 가서 보니 실제로 빛이 났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찰랑거리는 핑크 계열 원피스와 빛나는 금발이 마치 인형처럼 잘 어우러진 모습.
 도도하게 하늘을 향해 치켜 있는 턱,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한 눈빛.
 마치 가시 돋친 장미를 연상케 했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옆을 지나치려는데, 가시 돋친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반지 이리 내다오.”
 “······ 네?”
 “네 손에 있는 그 반지. 네가 가지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다. 원래 주인이 그것을 잃고 얼마나 상심에 빠졌을지 생각해 본 적은 있느냐?”
 “이거요?”
 내가 손을 펴 검지에 낀 반지를 보여주자 눈앞의 여자가 ‘헉’하고 짧게 숨을 들이쉬다가 내뱉는다.
 가뜩이나 카리스마 넘치던 그녀의 눈썹이 한껏 찌푸려지며 더욱 사나운 표정이 되었다.
 “지금 그것을 손가락에 끼운 것이냐?”
 “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그저 눈만 껌뻑거렸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혹시 이 사람이 이 반지의 주인일까?
 그럴 리가 없다. 줄곧 내 주머니에 있던 반지를, 주인이라 한들 언제 알아봤단 말인가?
 “네가 주인이 아닌데 어찌 그것을 탐한 것이지?”
 여자의 말에 나는 확신했다.
 내 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말 저 여자가 반지 주인인가?
 그럼 도로 빼서 주면 될 일.
 나는 도둑질하다 걸린 것 같은 머쓱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왼손 검지에 있는 반지를 뺐다.
 아니. 빼려고 했는데 빠지질 않았다.
 어째, 끼울 때와는 달리 손가락에 붙어 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 이게 왜 안 빠지지?”
 당황한 나는 반지를 이리저리 돌리며 빼보려고 했다.
 당장 내놓으라고 난리 칠 줄 알았던 여자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엑스트라 링은 원래 한 번 끼우면 절대 빠지질 않지.”
 그녀의 한쪽 눈썹이 한껏 위로 솟아 올라갔다.
 한숨을 내뱉은 그녀는 내게 한두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와서는 내뱉듯 말했다.
 “할 수 없지. 손가락을 잘라 내는 수밖에.”
 “뭐라고요?”
 황당함에 내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내 생각엔 저 여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반지야 어떻게든 빼서 주면 될 일인데 손가락을 자르겠다니······. 정신병자 아닌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자의 표정을 보니 정말 내 손가락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녀는 광기 어린 듯한 표정으로 몇 발자국 더 다가와 그야말로 내 코앞에 섰다.
 영화 속에 나오는 사이코패스를 실제로 보는 듯한 두려움이 솟았다.
 여자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뭐, 뭐야! 이런 미, 미친년.”
 그때, 눈도 뜨지 못할 만큼 강렬한 빛이 번쩍 내리쬐더니, 이내 사라졌다.
 여자도 함께.
 
 * * *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전력질주로 집까지 뛰어온 나는 현관문을 거세게 열며 신발을 벗어 집어 던졌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하고 나서야, 턱선을 타고 떨어지는 땀방울에 정신이 돌아왔다.
 “누나 왔어?”
 엄마와 누나, 조카 둘이 거실에서 과일을 깎아 먹고 있다.
 오래전에 시집간 누나는 집이 가까워서인지, 매형의 출근 시간이 지나면 친정으로 한걸음에 달려온다.
 방학했는지 요즘엔 조카들까지 출석 도장을 찍고 있다.
 누나와 나는 나이 차이가 13살이나 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널 안아 키웠네, 업어 키웠네’ 하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으며 자랐다.
 “이야, 운동 격하게 하고 왔나 보네. 땀이 뚝뚝 떨어진다. 먼저 씻어야겠는데?”
 날 본 누나가 잠시 아는 척을 하더니 다시 과일을 먹는 데 열중한다.
 나는 화장실에서 세수만 간단히 하고 나서,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조금 조용해지니 다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사이코패스인가? 아니면 귀신?’
 여자에게 덥석 붙잡혔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그녀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를 바라보던 차갑고 매정한 눈초리. 손목에 남아 있는 서늘한 감촉.
 대낮에 귀신 봤다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귀신이 그렇게 예쁘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외계인이었을지도······.’
 차라리 그게 더 현실성 있을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도 그렇고 빛이 번쩍하자 눈앞에서 사라진 것도.
 귀신이든 외계인이든 잘릴 뻔한 내 손가락을 보며 어떻게든 반지를 빼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 * *
 
 비슷한 시각. 음악의 성전.
 지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천상경 앞에는 수십 명의 신이 모여 있다.
 그들은 아까부터 천상경에 비쳐진 한 청년과 에오스의 만남을 보고 있었다.
 거울 속의 에오스가 청년에게 반지를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청년이 손바닥을 들어 검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인다.
 ‘이런 미친!’
 에오스의 마음속 ‘울림’이 천상경을 통해 전해져 왔다.
 지켜보던 모든 신들도 거울 속 에오스와 같은 표정들이다.
 아폴론 또한 낭패하여 근심 걱정을 한가득 담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허.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빼서 달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구석에서 꽤 젊어 보이는 신이 말했다.
 모든 신들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말을 꺼낸 신은 하늘의 천운자(天韻子).
 신계에 온 지 100년이 채 안 되는 신인들에게는 대부분 6품 천운자의 품계가 주어졌다.
 “자넨 신계에 언제 왔는가?”
 “60년 전쯤······. 입니다.”
 “역시, 얼마 되지 않았군.”
 아폴론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대략 백 년에 한 번씩 만들어지는 반지이니 자네는 모를 수도 있겠지. 저 반지를 인간의 손에 끼우게 된다면 죽을 때까지 뺄 수가 없다네. 아니, 죽어서도 빠지지 않지.”
 천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고, 신들은 천상경에 다시 집중했다.
 거울 속 청년은 반지를 빼려고 이리저리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에오스는 한쪽 눈썹을 추어올리며 턱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신의 권력을 내세우거나 능력을 보이기 전 그녀가 하는 행동이었다.
 “할 수 없지. 손가락을 잘라가는 수밖에.”
 에오스의 말에 모든 신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헉!”
 “이, 이런···.”
 “아무리 그래도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하시다니요.”
 하지만 다른 사람, 아니 신 한 명만이 다른 반응을 보인다.
 “아하! 손가락을 자르다니,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그 반응에 모든 신이 아까 그 젊은 신, 천운자를 일제히 노려보았다.
 신이 인간 세계에 내려가 그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행위는 금지된 일 중 하나였다. 자칫 그 일로 인해 인간의 운명이 뒤틀려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아폴론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에오스가 말을 실천으로 옮길 요량인지 정말 청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청년의 두려운 표정이 천상경에 고스란히 비치었다.
 ‘저 인간의 손가락을 정말 잘라버리기 전에 소환해야 하나?’
 아폴론의 고민이 깊어지기도 전에 청년은 에오스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미친년······.”]
 그 말을 듣고 광분하는 에오스를 보고 아폴론은 급하게 신계로 소환해 버렸다.
 내버려 두었다가는 저 인간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는다거나 한 줌의 재로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천 년 전쯤에 그녀와 잠깐 사랑에 빠졌던 남자가 술김에 다투다가 ‘귀찮은 년’이라는 말을 내뱉은 일이 있었는데 에오스는 그 자리에서 남자의 혀를 뽑아 버리고는 ‘태초의 신’ 타르타로스(Tartarus) 앞에 남자를 끌고 갔다.
 타르타로스는 그 남자를 세상의 가장 깊은 곳인 지하 세계로 쳐 넣었는데, 이 사건을 기억하는 몇몇의 신들이 에오스의 옆에 다가가 그녀를 달랬다.
 차라리 손가락 한 개가 잘리는 것이 낫지.
 청년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다.
 에오스가 저 청년을 죽여 버리기 전에 지금은 저 반지를 회수해야 할 때다.
 
 * * *
 
 한편, 신계로 올라온 에오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자신에게 이년, 저년 할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있었던가?
 당연히 없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말리는 신들을 제쳐두고 아폴론에게 다가가 따져 물었다.
 “왜 그때 소환한 거지? 내 다시 가서 저 인간의 혀를 뽑아 버릴거야. 죽여서라도 가져오면 되지 않냐는 말이다!”
 아폴론이 성난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달랬다.
 “에오스 님,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진정하시지요. 저 인간을 죽인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여타 신들이 쌍수 들고 말리는 것보다 아폴론의 한마디가 그녀를 진정하는 데 더 큰 효과를 발휘했다. 역시 ‘지배자’ 제우스(Zeus)의 아들이다.
 입을 다문 에오스를 보고 아폴론이 말을 이었다.
 “먼저 운명의 여신 티케 님이 아주 곤란하실 겁니다. 한 인간의 생사가 뒤틀려 버리는 일입니다. ‘죽음의 신’ 모로스(Moros) 님도 귀찮아지시겠지요. 무엇보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님께서는 저 청년이 정해진 운명을 다하지 못하고 에오스님의 손에 죽는다면······.”
 에오스가 침을 꼴깍 삼켰다.
 “공식적으로 신계에 에오스 님의 징계를 제기할겁니다.”
 아폴론의 설득은 끝났다.
 이로써 에오스가 인간의 죽음을 저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현재 그녀는 지상 세계로 강림하지 못하는 벌을 받고 있다.
 아프로디테에게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 운명’이란 저주를 받은 에오스는 그 어떤 형벌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지만,
 인간을 만나러 지상에 내려가는 걸 금하는 형벌만큼은 너무나 힘들어하였다.
 그걸 잘 아는 제우스 휘하 장로들은 에오스가 징계를 받을 때만큼은 지상 세계 강림을 금지하는 형벌을 내리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징계라는 단어를 가장 끔찍해 했다.
 이번에 징계를 한 번 더 받게 되면 형량이 119년에서 1119년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신들에게 천 년은 눈 깜짝할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어디 정말 눈 깜짝할 시간이겠는가?
 잠잠해진 에오스를 보며 아폴론이 입을 열었다.
 “여덟 주신의 의견을 들어봐야겠군요.
 
 * * *
 
 똑. 똑.
 노크 소리와 동시에 방문이 열리더니 누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묻는다.
 “들어가도 돼?”
 이미 들어와서는 뭔 질문인지 모르겠다.
 누나가 내 방 침대에 걸터앉으며 나이도 어린 게 벌써 홀아비 냄새가 난다며 핀잔을 준다.
 이제 곧 방 청소 좀 하고 살라며 잔소리할 것이고, 그 잔소리는 취업으로 이어질 것이 뻔했다.
 “아······. 좀! 용건만.”
 잔소리는 그만 끝내고 본론을 말하라고 재촉하는 내 말에 누나가 얘기를 꺼냈다.
 “내 친구 철용이 알지? 권철용. 걔가 너 알바 시켜준대.”
 “그래? 뭐 하는 덴데?”
 “할 거야? 할 거면 전화해서 한다고 하게.”
 “아니 무슨 일이냐고. 뭔지 알아야 할 거 아냐?”
 “너 잘하는 거. 철용이가 이벤트 회사 차렸다고 얘기했었잖아. 내일 행사하는 곳에 무대 진행자가 필요하대.”
 언뜻 누나에게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소규모 이벤트 기획사를 차린 친구가 있다고.
 그게 철용이 형이었었나?
 “아, MC 보는 거야? 페이는?”
 “많이 주라고 할게. 일당으로.”
 “오케이.”
 누나가 많이 달라고 하면 정말 많이 줄지도 모른다.
 누나의 남.사.친이자 20년 넘게 한동네에서 살아온 동네 형.
 나이 차가 커서 나와 말을 섞어 본 적도 거의 없고 내겐 좀 어려운 사람이다.
 마주치면 고개만 꾸벅 숙이고 지나가는 정도?
 나랑 친분이 없지만, 누나가 하는 부탁이라면 아주 껌뻑 죽는다.
 갑자기 알바를 시켜준다는 말에 나는 피식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딱 봐도 누나가 부탁한 자리일 것이다.
 뭐 우리 누나는 부탁이 아니라 협박하는 스타일이지만······.
 어쨌든 내일은 할 일도 없고, 사실 무조건 집 밖으로 피신해야 했다.
 아버지가 집에서 쉬시는 날이라 일요일에 집에 있으면 잔소리가 3배가 되어, 위험하니까.
 무엇보다 누나의 협박이라면 많은 일당을 주게 되겠지?
 누나가 방에서 나간 후, 내일 입고 갈 옷을 미리 챙겨놓으려고 내 방 옷장 문을 열었다.
 네이비 컬러 슬랙스와 화이트 헨리 넥 셔츠.
 친구 놈들과 클럽에 가게 되면 입으려고 전에 사 둔 옷이었다.
 어제 클럽에 다녀온 친구 광택이 놈은 진정한 소울 메이트를 만났다며, 얼굴까지 예쁘다고 전화로 한참을 자랑질했다.
 나도 갔었어야 했는데, 쩝.
 쓴 입맛만 다셨다.
 ‘아 맞다. 반지.’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비누칠도 해보고 식용유도 부어봤지만 빠질 기미가 없다.
 인터넷을 뒤져 ‘안 빠지는 반지 빼는 방법’을 다 해봤으나 소용이 없다.
 생각난 김에 다시 한번 빼보았지만 역시나.
 정 안 되면 니퍼로 잘라야겠지. 반지가 반 토막이 나겠지만···.
 귀신이든 외계인이든 비과학, 비현실, 미확인 생명체이든 간에 반지를 또 찾으러 온다면 냉큼 던져 주고는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며 굿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빛과 함께 사라진 것처럼 빛과 함께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은가.
 영영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다시 마주친다고 생각하니 벌써 소름이 돋는다.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빼야만 한다.
 
 * * *
 
 다음 날.
 누나가 미리 얘기해 둔 건지, 오전 10시가 되자 권철용이 집 앞에 도착했다.
 행사하는 곳이 수원이라 교통편이 마땅치 않았는데, 역시 누나의 협박은 대단했다.
 한때 동네에 그가 누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잠깐 돌았었기에, 오늘따라 머리에 정성스레 힘을 준 권철용을 보고는 누나를 의식한 듯 보여서 속으로 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부녀에 애 둘 딸린 엄만데, 그만 잊으시지.
 자가용으로 데리러 온 터라 편안한 맘으로 승차했다.
 권철용이 시동을 걸며 내게 말을 붙여온다.
 “시후 제대하고 처음 보네? 잘 지냈지?”
 “네. 대표님.”
 사람 좋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웃는다.
 “예전엔 안 친했어도 마주치면 형이라고 그러더니 군대 가고 몇 년 못 봤다고 이제 대표님이냐?”
 “아······. 그때는 제가 어렸고, 형이라기엔 너무 삼촌뻘이셔서. 형님이면 모를까.”
 “하하하. 그래. 형님이라고 해, 그러면.”
 “다음번에 그렇게 할게요. 오늘은 일하러 가는 거니까요. 대표님. 그런데 저 MC 본다고요?”
 “응. 군대에 있을 때 행사 MC를 도맡아 했다며? 누나가 그러던데?”
 “아, 네······. 어쩌다 보니 그쪽으로 빠져서요.”
 권철용은 대화하는 족족 친근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나도 아까보다는 어색함이 줄었고.
 그러다 보니 편안하게 말이 술술 나오며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표님, 요즘엔 알바 안 하시죠? 예전엔 엄청 많이 하셨다고 하던데. 동네에서 대표님 별명이 알바의 제왕이었대요. 점포마다 모르는 사장님이 있어야 말이죠.”
 이정표를 보더니 ‘외곽 순환 고속도로’ 쪽으로 차선 변경을 마친 권철용이 나를 살짝 돌아본다.
 “흠흠?? 그 덕분에 지금 회사도 차리고, 시후 네가 내 밑에서 알바라도 하게 된 거 아니겠니??”
 권철용은 굉장히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아련한 눈빛을 보내온다.
 누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근검절약의 정신으로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웬만하면 쓰지도 않았다.
 버느라 쓸 시간도 없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IN 컴퍼니’라는 이벤트 기획사 하나를 차렸다.
 무대를 연출하고 감독하고, 진행하는 것. 이것이 본인의 꿈이라고 했단다.
 산전수전 다 겪어보고 안 해본 일이 없어서 나오는 노하우인지, 그는 사람을 상대하는 말솜씨가 엄청 뛰어나다고 한다.
 그리고 ‘철용이가 천성이 성실하고 부지런하여 회사 사정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으니, 이번 알바를 계기로 눌러 붙어있어!’라며 누나가 어제 나에게 말했다.
 “거의 다 왔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수다로 지루하지 않게 도착한 경기도 수원.
 산업 공장 단지가 밀집한 지역이라 도시 전체가 회색 빌딩 숲으로 보일 정도다.
 그중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높은 건물들이 밀집한 이곳은 우리나라 대표 전자기업 ‘Q전자’의 사옥이다.
 권철용이 차를 몰아 정문에 들어서니, 입구에 걸어놓은 현수막이 보인다.
 [Q전자의 제32회 창립 기념일을 축하합니다!]
 Q전자 창립 기념식에 온 것이다.
 본사이니만큼 많은 건물과 주차장이 있었지만, 헤매지 않고 대강당이 있는 레크레이션 동에 차를 대고 내렸는데 옆 봉고차에서 사람들이 다가온다.
 봉고차 옆구리에 ‘IN 컴퍼니’라는 랩핑이 되어있는 것을 보니 회사 차인가 보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3명의 남자가 권철용에게 인사한다.
 그 뒤에 서 있는 나는 엉겁결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저 친구는 누구예요?”
 3명의 남자 중 가장 어려 보이는 남자가 물어본 뒤 권철용을 쳐다본다.
 “안녕하세요. 오늘 온 새로운 알바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각성
 
 
 권철용 대신 내가 대답했다.
 그리곤 또 한 번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했다.
 ‘예의 바르게 본인을 어필하는 것과 우렁찬 목소리, 적극적인 태도야말로 사회 초년생의 자세다!’라고 군대에 있을 때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제목이 ‘직장에서 안 찍히고 살아남는 법’이었던가?
 어쨌든 적극적인 내 태도가 좋았는지 IN 컴퍼니 직원들은 나를 우호적으로 반겨주었다.
 Q전자의 본사는 엄청나게 크고 넓었으며 부서별로 많은 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레크레이션 동 대강당도 엄청나게 컸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잠실에 있는 올림픽 주경기장만큼 넓었다.
 강당은 4층으로 되어있는데 높은 곳에서도 잘 볼 수 있게 지어놓았고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엔 층마다 VIP석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마치 오페라하우스를 연상하게 했다.
 강당에 도착하니 이미 무대 세팅이 거의 끝나 있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조명 체크를 하는지 조명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실장님, 저분들도 회사 직원 분들이에요?”
 주차장에서부터 함께 짐을 들고 온 회사 직원에게 물었다.
 강민수.
 올해 나이가 33살로 권철용이 창립한 회사 ‘IN 컴퍼니’의 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처음 주차장에서 만났을 땐 키는 작지만 마르고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강인한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몇 마디 나눠보니 성품이 서글서글하고 사람이 좋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강민수는 권철용의 고등학교 후배라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십 년이면, 친했던 학우들도 대부분 연락을 끊고 사는 게 보통이다.
 이후에 만나는 대학교 동창들, 군대 동기들, 사회 친구들까지 새로운 사람과 인연을 맺고 관리하기에도 힘든데.
 고등학교 동창도 아니고, 후배라니··· 권철용의 인맥 관리가 대단했다.
 강당 무대 뒤쪽 대기실에 짐을 잔뜩 내려놓고 나서 땀을 훔친 강민수가 대답했다.
 “행사장에 나와 있는 직원이 지금 5명인가? 한 명은 저쪽에 무대 조명 체크 하고 있고, 음향 쪽에 한 명 가있고, 현장 담당자는 안전 점검 중이고······.”
 굳이 손가락을 꼽으며 인원 파악을 해주던 강민수가 마침 옆을 바쁘게 지나가는 여자를 붙잡는다.
 “은영 씨, 이 친구가 오늘 무대 진행할 거예요. 이따가 장비 좀 채워주세요.”
 강민수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양은영에게 소개한다.
 그녀가 나에게 싱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가자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친구는 양은영. 현장 진행 보조를 맡고 있어. 잠깐만, 몇 명이었지? 대표님이랑 나랑 시후 씨까지 하면 7명이네. 우리 7명 제외하고는 전부 외주야. 저런 전문 분야에서 직원들 채용하면 월급 감당 안 돼. 그리고 원래 Q전자 같은 데서 우리처럼 작은 회사에는 행사 안 맡기거든. 이번엔 운이 좋았지. 대표님 인맥이 원래 좋기도 하고.”
 무대 한쪽에서 음향 점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권철용도 백 트러스 앞에 서서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음향 세팅 부스에 합류했다.
 무대 규모가 정말 크긴 하다.
 며칠 전 조카들을 데리고 여의도 공개 홀에서 열린 가요 프로그램에 방청 갔을 때 처음으로 무대를 보며 크다고 느꼈던 것보다 3배는 더 큰 듯했다.
 행사 무대 점검을 마치고 스태프들은 모두 무전기를 들고 인이어를 꽂았다.
 맡은 자리로 모두 이동하고 무대가 비워진 후에야 백 트러스에 조명이 켜지며 행사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제32회 창립 기념행사 : 가족과 함께하는 밤]
 무대 뒤편.
 권철용이 직접 만들어온 큐시트를 내게 건네준다.
 내가 오늘 이곳에서 할 일은 큐시트에 적힌 대로 글을 읽는 것과, 초청 가수가 무대에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관객에게 박수를 유도하는 것.
 큐시트를 보고 읽을 눈과 무대에서 떨지 않을 약간의 담력만 있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군대에 있을 때 크고 작은 부대 행사의 진행을 맡아서 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권철용이 믿고 맡긴 부분이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 일당 받기에 미안하지 않을 것 같다.
 많이 받을 건데······.
 큐시트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던 나는 내심 놀랐다.
 1, 2부로 나눠서 진행하는데, 2부 순서에는 거의 초청 연예인의 축하 공연이 대부분이었다.
 가족과 함께 하는 행사여서 그런지 중간에 인기 개그맨들의 개그 공연도 끼어있고, 초청 가수들도 청중의 연령대를 고려한 다양한 계층을 섭외했다.
 살펴보니 한 명, 한 명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 정도 섭외하려면 돈이 문제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며 Q전자의 위용을 새삼 다시 느꼈다.
 특히, 2부 끝 순서에 나올 아이돌 그룹이 ‘블랙 타이거’였는데, 조카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따라오겠다고 울고불고 떼를 썼을 것이다.
 공연 시작 시각이 4시부터였는데 살짝 시계를 보니 3시 30분이었다.
 그런데 강당에는 사람들이 벌써 들어오기 시작했다.
 밀려 들어오는 인파를 눈으로 확인하니 벌써 심장이 쿵쾅거린다.
 보고 읽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이러지?
 이보다 더 많은 국군 장병들 앞에서도 유들유들하게 진행을 보던 나인데.
 청심환이라도 하나 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큐시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반복 학습만이 살길인 것 같았다.
 4시 정각이 되자, 강당 객석 부분 조명이 천천히 페이드 아웃 되고 무대 조명이 서서히 밝아졌다.
 “진행자. 무대 위로 올라가세요.”
 인이어로 나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 * *
 
 Q전자 창립 기념행사의 1부 순서는 회사의 연혁, 기업 정보, 비전, 계열사 소개, 표창장 수여식으로 진행되었다.
 많은 직원들 특히나 그들의 가족들은 지루한지 무대 위에서도 그들의 엉덩이가 들썩 거리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회사의 경영진들은 이 뜻깊은 행사의 밤을 전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취지로 기념식을 일요일 오후로 결정한 모양이다.
 하지만 가족들을 대동한 직원들이나 따라온 가족들이나 ‘이 황금 같은 휴일에 왜 출근하라는 거냐’ 하는 못마땅한 표정들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최대한 빨리 1부 순서를 마치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6시에 끝내야 할 1부 순서를 15분이나 단축해서 끝내버린 나는 위풍당당하게 무대에서 내려갔다.
 덕분에 Q전자의 모든 사람들은 저녁 식사 시간을 15분이나 더 가지게 되었다.
 관람석 조명이 환하게 밝혀지자 자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각자 저녁 식사를 하러 강당을 잠시 떠났다.
 “어, 시후. 수고했다.”
 무대 뒤편 대기실로 내려오는 나를 권철용이 잠시 돌아보고는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말 걸기가 미안하게 바쁜 권철용을 두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른 직원을 찾았다.
 행사의 밤 2부가 시작되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마침 저쪽에서 양은영이 손에 뭘 가득 들고 내 쪽으로 온다.
 “시후 씨, 수고했어요. 잘하던데요? 아, 이건 도시락. 아무 데서나 편하게 먹어요. 두 개 줄까?”
 괜찮다는데도 양은영은 한참 많이 먹을 나이가 아니냐며 굳이 도시락 두 개를 주고는 바삐 떠났다.
 내가 자리 잡고 도시락 두 개를 다 먹는 동안에도 대부분 스태프들은 도시락에 손도 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음향 장비 부스가 어수선하고, IN 컴퍼니의 모든 직원들이 그쪽에 몰려서 분주하다.
 밥심으로 일하라는 말도 있는데, 식사라도 하고 일하시지 하는 생각에 다가가 보니 음향 장비가 약간 말썽인가보다.
 “시후야, 밥 다 먹었니?”
 “네? 네.”
 “그럼 무대에 잠깐 올라가 봐.”
 권철용의 요청에 나는 한달음에 무대에 올라갔다.
 다들 바쁜데 혼자 먹고 온 것이 괜스레 미안해지는 나였다.
 “무대 딱 가운데 서서 마이크 잡고 테스트해 봐 시후야.”
 “아아-아아-아.”
 “대표님 아까 앰프에서 하울링 나던데, 그건 좀 잡은 것 같아요.”
 음향 지원 부스에서 이 정도면 되었다고 사인을 보내온다.
 권철용은 그제야 이마를 쓸어 올리며 한시름 놨다는 표정이다.
 오늘 2부의 마지막 순서, 인기 아이돌 그룹 블랙 타이거.
 리더와 메인보컬을 맡은 최동혁이란 놈이 그렇게 무대에 한해서는 깐깐하고 완벽함을 원한단다.
 “시후씨, 블랙 타이거 노래 알아요?”
 음향 지원 부스에서 질문이 날아온다.
 “어떤 거요? ‘달에서 온 너’라면 알고 있어요.”
 이게 다 조카들 때문이다.
 요즘 조카들이 방학이라 매일 집에 와서 사는데, 이 녀석들이 블랙 타이거의 이번 타이틀 곡이라며 매일 지겹도록 무한 반복 재생 중이다.
 “어, 오늘 블랙 타이거가 그 곡 할 거예요. 틀어줄 테니까 잠깐만 불러 봐요. 체크하려고 하는 거니까. 은영 씨! 시후 씨한테 핀 마이크 무선으로 네 개 달아주세요.”
 
 * * *
 
 양은영이 곧 가수들이 공연할 때 쓰는 무선 소형 마이크 4개를 손에 쥐여 주었다.
 “시후 씨는 그거 네 개 다 들고 테스트해 주시면 돼요.”
 앰프를 통해 바로 MR이 흘러나왔다.
 음악이 강당으로 퍼져 나가며 내 몸에도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테스트 때문에 섰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노래하러 무대에 선 것이다.
 큐시트를 읽어 내릴 때와 서 있는 것 자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처음엔 노래방에 왔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불러볼 생각으로 가볍게 올라왔다.
 하지만 막상 서고 보니 그동안 접어 두었던 가수의 피가 끓었다.
 노래를 시작하자 아주 지겹도록 들어서인지 세뇌당한 것을 읊는 것처럼 랩 부분까지도 막힘이 없었다.
 그런데 노래하며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가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놈이었던가?
 음정, 박자가 모두 정확하고 특히 고음 부분은 막힘없이 쭉쭉 올라간다.
 모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인상 깊게 마음에 새겼던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말이 바로 이게 아닌가 싶었다.
 호흡이 안정되니 4인조 그룹의 노래를 혼자 부르는데도 힘들지 않았다.
 랩 파트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내가 부르는 발음인데도 내 귀에 꽂힐 만큼 딕션이 정확하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도 평상시와는 다르다.
 분명 내가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
 변성기를 잘못 보내 약간의 탁성이 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청아하고 맑다.
 왜 그런 걸까. 앰프가 좋아서? 이퀄라이저와 믹서의 환상의 밸런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을 거다.
 노래가 끝나자, 권철용이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나도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동안에도 권철용 이하 모든 스태프들이 일제히 나만 보고 있었다.
 “시후, 너 그렇게 노래 잘하는 애였냐?”
 눈을 동그랗게 뜬 권철용의 질문이 날 향했다.
 너무 잘해서 놀랍기는 나도 마찬가지.
 생각지도 않았던 칭찬에 기분까지 좋아진 나는 권철용을 향해 웃어 보였다.
 “난 클래식만 듣는 사람이라 요즘 노래 잘 모르는데, 진짜 듣기 좋았어요. 저 친구 진짜 노래 잘하네.”
 피아노를 조율하고 있던 어느 조율사가 내 쪽을 보며 칭찬해온다.
 무대 한쪽 위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는데, 2부 공연 때 천재 피아니스트 ‘루치오 정’이 쓸 피아노였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어제 조율을 하긴 했는데, 어제 조명 탓인지 줄이 조금 느슨해져 있는 것 같네요. 아, 그런데 자네 혹시 피아노 칠 줄 아나?”
 “네?”
 “아니, 하도 피아노를 뚫어지라고 쳐다보기에,”
 당연히 모른다. 배운 적이 없으니.
 그런데 입 밖으로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괜찮다면 쳐 봐도 되어요?”
 말하고도 내가 놀랐다. 피아노는 어려서부터 가까이 한 적도, 쳐본 적도 없다. 결단코.
 “뭐, 괜찮다면 조금 정도야.”
 조율사는 내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마음속으로는 절대 피아노 앞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 조율사의 손짓이 마치 저승사자의 손짓처럼 보였으나 마음과는 달리 자석처럼 몸이 따라간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피아노 의자에 앉은 나는 호흡을 길게 들이쉰 다음 내뱉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피아노는 한 번도 쳐 본적도 배운 적도 없다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의자에 앉자마자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샘솟는다.
 왠지 될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이미 머릿속에는 수많은 피아노 곡이 실타래 엉키듯 떠올라서 머리가 아파왔고, 눈앞에는 허공에 악보가 떠있는 듯 눈을 괴롭혔다.
 “피아노를 아주 잘 치나 보군. 피아노 앞에 앉은 것이 편안해 보이니 말야. 그래, 어떤 곡을 칠 텐가? 어서 한번 쳐 봐. 조율이 잘되었는지 들어보게.”
 조율사가 재촉해 온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격정적으로 떠오르는 모든 근심과 걱정들이 차분히 내려앉고, 머릿속에 어떤 곡 하나가 거짓말처럼 떠올랐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입술을 축이고, 느릿하게 입술을 벌렸다.
 “좀 전에 제가 불렀던 ‘달에서 온 너’를 쳐 보겠습니다.
 
 * * *
 
 강소미는 Q전자 ‘모바일 IT 부분 경영 전략부’에 있는 강 이사의 딸이다.
 그녀는 이번 기업 행사에 블랙 타이거가 출연한다는 정보를 듣고 부모님과 함께 왔다.
 평상시 같았으면 절대 부모님 손을 붙잡고 따분한 이런 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강소미는 블랙 타이거의 팬클럽인 '블랙 클라우드'의 회원인데, 팬클럽 애들과 학교 친구들이 데리고 가달라고 난리도 아니었다.
 고3인데, 아이돌 따라다니는 걸 싫어하시는 아버지의 눈치가 보여 데리고 오지 못했지만.
 1부 순서에는 거의 졸았다.
 꾸벅거리다가 엄마의 팔꿈치 어택에 정신을 차린 것이 몇 번인지 모른다.
 기업의 창립··· 어쩌구. 기업 포부··· 저쩌구. 우수사원 표창장 수여식 기타 등등.
 옆자리에 보니 다섯 살 아래인 여동생도 고개를 꾸벅거린다.
 인내와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부모님은 동생을 데리고 간단히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가자고 했고, 강소미는 속이 좋지 않다며 그냥 여기 있겠노라 했다.
 가족들을 보낸 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
 SNS 메신저와 팬클럽 카페에 글이 쇄도한다.
 ‘오늘 옵하들이 설 무대, 기대하고 이써용♡’라며 무대 배경으로 셀카 한 장을 찍어서 올려놓은 후폭풍이다.
 - 오빠들 언제 옴?
 - 언니~ 직캠 올리실거죠? 기다리고 이써용~^^
 - 얌 나 떼 놓구 가니깐 좋냐?ㅋㅋㅋㅋㅋ
 - 청담동에서 오빠들 화보 촬영 끝나고 지금 출발!
 - 아까 샵 앞에서 동혁 오빠한테 눈도장 찍었다는. 오늘 개간지 쩔었음.
 - 타이거 오빠들 출발. 지금 수원으로 가는 중.
 난리 났네. 알았다, 이것들아. 곧 오빠들 공연 직캠을 하사하마.
 팬 카페에 블랙 타이거의 거취가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다.
 팬클럽 회의를 통해 사생 팬은 엄격히 금지했는데, 조용히 따라다니는 애들은 어쩔 수 없다.
 강소미는 배터리가 53%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산 지 3년이 다 되어가는 휴대폰.
 약정 기간도 훨씬 전에 끝났지만, 고장난 곳이 없으면 그냥 쓰라며 엄마가 사주질 않는다.
 다른 부분은 괜찮은데, 요즘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아서 짜증이 났다.
 특히 오늘처럼 블랙타이거의 직캠을 촬영해야 하는 날엔 더욱더.
 “하아암.”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기지개를 켰다.
 1부 순서가 많이 지루했고 블랙 타이거의 무대는 2부 제일 끝이지만, 강소미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사실 팬클럽이라고는 하나 임원도 아닌 그녀는 블랙 타이거를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많지가 않으니까.
 아버지의 ‘이사님’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2층,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VIP석에서 오빠들을 볼 수 있으니, 낳아 주신 은혜 키워 주신 은혜보다 새삼 더 큰 은혜를 느끼는 그녀였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올까?’
 강당 출구 쪽으로 걸어 나가다가 1층 무대 쪽에서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본 강소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1부 순서에 무대에서 MC를 보던 남자가 손에 마이크를 잔뜩 들고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뭘 하려나 본데?
 갑자기 강당 스피커에서 블랙타이거의 ‘달에서 온 너’가 흘러나온다.
 처음 시작하는 도입부는 언제 들어도 흥겨웠다.
 이번 타이틀 곡을 너무 잘 뽑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설마?
 “아직도 나는 가끔 그때 꿈을 꿔. 달이 빛나던 그날 밤의 꿈을~.”
 무대 위의 남자가 노래 부른다.
 강소미의 눈이 별안간 동그랗게 커졌다.
 “에엑? 우리, 오빠들 노래 아니야?”
 스스로 느끼기에도 목소리 데시벨이 너무 높았는지 강소미는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저 노래 어렵다고 오빠들이 방송에서 이야기했는데······.”
 ‘하우스의 일종으로 보면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탄력적으로 불러야 해서 너무 힘든 곡이에요. 고음도 너무 높고 많아서 녹음하다가 목이 쉴 지경이었죠. 안무를 짜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요. 하지만, 템포가 느리기 때문에 리드미컬한 보컬을 잘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녀는 얼마 전 ‘뮤직 토크’ 프로에서 블랙 타이거가 이번 타이틀 곡을 부르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고충을 늘어놓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당연히 평범한 사람은 잘할 수 없는 노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 * *
 
 무대 위의 남자가 부르는 노래에 점점 빠져들어 간다.
 노래 장르에 맞게 목소리가 맑고 시원했다.
 귀가 맑아지고 머리까지 청량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음정, 박자는 말할 것도 없이 정확하고, 랩도 기가 막히게 해 버린다.
 특히 고음 부분은 막힘없이 쭉 내뱉는 게 사이다 마신 듯 톡톡 쏜다.
 묵은 체증이 절로 가라앉는 기분.
 노래가 끝나기가 무섭게 무대 아래에서 스태프들과 소수의 관객이 박수갈채와 함께 환호성을 보내 준다.
 강소미는 저도 모르게 함께 손뼉 칠 뻔했다.
 노래를 불렀던 남자가 무대에서 내려오더니 다시금 무대 위로 올라간다. 그러더니 한쪽에 있는 피아노로 다가간다.
 이건 또 무슨 상황? 피아노도 치는 건가?
 앞서 부른 노래의 감동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또 내심 기대를 했다.
 남자는 피아노 앞에 앉더니 곧 연주를 시작했다.
 “어, 어? 이 노래는 방금 그 노래 아냐?”
 조금 전 무대에서 불렀던 노래. 남자는 그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쳤다.
 잘한다는 말밖에 생각 나지 않는 표현력이 아쉽다.
 그저 피아노 하나만으로 연주했을 뿐인데, 아리아를 맑게 부르는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감미롭고 투명하다.
 그러더니 왼손과 오른손이 건반 위에서 춤추듯 서로 오가며 연주가 풍요로워진다.
 서로 다른 악기가 8개쯤 들어가 합주하는 오케스트라 같은 느낌이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강소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 무대 위에서 MC를 보던 그 남자가 맞나?
 아름다운 선율이 귀를 간질이다가 성난 파도처럼 다가오더니, 이제는 천둥 소리가 되어 고막을 때린다.
 정신 줄을 놓고 있던 강소미는 급하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이건······. 소장각이다.
 
 * * *
 
 8시가 가까워지자 관객석에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밀려들었다.
 초청 연예인을 볼 차례라서 그런가?
 시간이 되자 객석 조명이 페이드 아웃 되고 나는 다시 무대로 올라갔다.
 “오랜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창립 기념 행사의 밤’ 2부 순서에는 이 밤을 열정적으로 빛내 주실 많은 분의 무대가 준비되어 있는데요. Q전자 가족 여러분들께서도 열정적으로 즐겨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큐시트에 적힌 대로 열심히 읽어 내리고 첫 번째 무대 소개까지 마친 나는 잠시 무대 뒤편으로 내려와서는 공연을 지켜보려고 했다.
 무대 위에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인간문화재 ‘장소희’ 선생의 판소리로 2부가 시작되었다.
 처음 보는 국악 공연에 넋을 잃고 있는데 옆에서 자꾸 집중력을 흐트러뜨린다.
 권철용이 아까부터 무대 뒤편 구석에서 전화를 하고 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더니 곧 주변의 시선을 인지했는지 주위를 힐끗거린다.
 “글쎄, 본인에게 물어보고 나서 연락드린다니까요.”
 나도 모르게 엿듣게 되었다.
 “네, 네. 지금은 행사 중이라 곤란합니다. 내일 중으로 다시 통화하죠.”
 통화를 마친 권철용이 나에게 다가왔다.
 내 어깨에 손을 얹고 크게 한숨을 쉬더니 이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귀찮게 된 것 같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통 모를 소리만 하고는 부가 설명 없이 그냥 가버린다.
 관객들은 2부 첫 공연부터 매우 흡족했는지 대체로 호응도가 좋았고, 무대는 평탄하게 흘러갔다.
 트로트의 여왕 설운정을 무대에 소개하고 무대 뒤로 내려오는데, 어느새 도착한 아이돌 그룹 블랙 타이거가 인이어를 귀에 붙여 테이핑 하고 있다.
 그중 리더 최동혁과 내 눈이 마주쳤다.
 며칠 전 공개홀에 조카들과 갔을 때 한번 봤는데 멀리서 봐도 잘생김이 보일 정도였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가 저렇게 맑고 깨끗한 피부도 부러운데, 거기에 아름다움까지 묻어 있다.
 그런 동혁은 나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저 손가락의 의미는 무엇인가? 진행을 잘하고 있다는 뜻인가?
 “자,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지금 곧 블랙 타이거의 무대가······.”
 내가 마지막 공연으로 블랙 타이거를 소개하자 그들이 무대로 오르는 계단에 서서 대기하며 나를 힐끔거린다.
 “동혁이 형, 저 MC. 아까 그 사람 맞죠?”
 블랙 타이거에서 랩 포지션을 맡고 있는 태곤이 속닥거렸다.
 “지금은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무대 먼저 끝내자. 놀 준비 됐지? 자, 올라가자”
 리더의 말에 블랙 타이거 전원이 무대로 향했다.
 
 * * *
 
 Q전자의 창립 기념행사 진행을 무사히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굉장히 피곤함을 느꼈다. 그야말로 몸이 천근만근이다. 긴장이 풀어져서인가?
 사실 긴장할 것도 없었다. 미리 만들어진 큐시트 대로 읽기만 하면 되는 알바였으니.
 그렇다고 신체적으로 체력을 소모한 것도 아니다.
 편하게 권철용의 차를 타고 왕복했으며, 행사장에서도 크게 짐을 나르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눈꺼풀이 절로 감긴다.
 그러다가 불현듯이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분명 나였다. 피아노를 연주한 자는.
 그런데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내 몸을 조종하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방향을 보고,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걸 보면 내 의지대로 행동하는 게 맞았다.
 정신도 맑았다. 피아노에 앉은 순간부터 마치 몇십 년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편안했다.
 대체 무슨 느낌이었을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
 몇 분을 그렇게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을까?
 스태프들의 박수갈채에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끝내 버린 피아노 연주에 정신이 얼떨떨했다.
 내가 뭘 한 거지?
 내가 언제 피아노를 쳐 본 적이 있었던가?
 노래를 잘 부르게 된 것은 기술적인 측면으로 설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피아노 연주는 정말 설명이 불가능하다.
 어제는 외계인을 보더니만···. 진짜 귀신에게 홀렸나? 아님 외계인에게 홀렸나?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다가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눈이 감기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 * *
 
 오늘은 월요일이라 아버지가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 날이다.
 눈치 볼 사람도 없고 친구들과 저녁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빼놓곤 집 밖에 나갈 일이 없다.
 밤새 잠도 설쳐서 오늘만큼은 죽도록 늦잠을 자리라 다짐했건만 아침 댓바람부터 누나가 깨워 댄다.
 “시후야, 아직 자? 좀 일어나 봐.”
 내 방문을 열어젖힌 누나가 날 대차게 흔들어 깨운다.
 눈도 제대로 못 뜬 내게 누나의 휴대폰을 건네준다.
 “철용이 전화야. 받아 봐. 너 핸드폰 안 보냐?”
 누나가 방문을 닫고 나간 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워 침대에 걸터앉았다.
 가느다랗게 뜬 실눈 사이로 시계를 보니 이제 고작 오전 11시다.
 마른기침을 하고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네, 대표님.”
 “시후, 여태 잤냐? 네 핸드폰으로 몇 번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말이야. 메신저로 톡도 보냈는데 아직 안 봤지?”
 “지금 일어났어요. 근데,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녀석. 형이라고 하라니까. 혹시 저녁에 시간 되니? 할 얘기가 있는데······.”
 저녁에는 친구 녀석들과 미리 잡아 놓은 약속이 있다며 점심 때 시간이 난다고 얘기했지만, 그때는 권철용이 스케줄이 있는 터라 약속을 내일로 잡았다.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서 일어나자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던 휴대폰이 눈에 들어온다.
 
 [부재중 전화 33통. 메신저 톡 안 읽음 217개.]
 
 내가 잠든 사이에 아주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새벽 3시 즈음에 세계적인 동영상 웹 사이트 ‘아웃튜브’에 동영상 하나가 올라왔다고 친구 놈한테 전화 받았던 기억이 얼핏 떠올랐다.
 무슨 내용인지 몰랐으나 동영상이 어쩌고 저쩌고 했던 듯했다.
 매일 수천 개 동영상이 그 웹 사이트에 올라와 게시되는데 딸랑 영상 하나 업로드된 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새벽 내내 울려 대던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바꿨다. 액정 불빛이 번쩍번쩍하는 바람에 신경이 쓰여서 결국 뒤집어 놓고 나서야 다시 잠에 들었다.
 지금에 와서 상황을 확인해 보니 동영상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더니 동영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많이도 퍼졌다.
 지금도 전화 한 통이 걸려 오고 있다.
 누군지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니 ‘군대 선임’이다.
 사회로 나와서 서로 전화 한 통도 한 적 없는데, 동영상 보고 전화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많은 부재중 전화 수와 메신저 톡의 수가 이해된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부팅했다.
 그 동영상이 궁금해 빨리 확인하고 싶어 마음이 초조해져 온다.
 오늘따라 부팅이 왜 이렇게 느리게 느껴지는지······.
 오른손에 쥐어진 애꿎은 마우스만 빙빙 돌렸다.
 부팅이 완료된 후 나는 아웃튜브 ‘지금 뜨는 동영상’ 탭에서 쉽게 동영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블랙 타이거 「달에서 온 너」 : 클래식스러운 피아노 연주 버전 – 영상 강소미]
 
 조회 수가 벌써 30만 가까이 되었다.
 실시간 인기 탭에 올라가 있어서 앞으로 조회 수는 더 늘어날 것이고 이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라 나는 점점 두려워졌다.
 긴장하며 PLAY(▶) 버튼에 마우스 포인트를 가져다 댔다.
 
 
 # 신을 만나다
 
 
 촬영자가 중간부터 촬영해서인지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음악에 취해 연주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헉!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내뱉는 것도 잊었다.
 이게 나라고?
 내가 치는 거라고?
 일단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배운 적도 없고, 쳐본 적도 없으니까.
 혹시 배우지 않아도 천재성만 있다면 누구나 이만큼 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주 잠시나마 내 안의 잠재력을 의심해 보았으나,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어제 행사장에서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일어났을 때 그 연주를 들은 권철용과 스태프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연주는 범인이 하기 힘든 연주였으리라.
 특히 피아노 조율사는 손에 들고 있던 공구가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고 했다.
 ‘이렇게 피아노 치는 사람은 실제로 처음 본다.’라고 했던 어제의 그 말들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아마 그들의 표정과 지금 내 표정이 같지 않을까?
 동영상 재생이 끝나고 나서도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요를 즉석에서 편곡해서 이렇게 피아노로 칠 수 있나?
 분명 뭔가에 홀린 것이 아니라면,
 “내가 미친 거지.”
 “그래. 너 좀 미친 것 같다. 뭐야? 저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뒤를 돌아보니 누나가 모니터를 보며 멍하니 서 있다.
 “아! 깜짝이야! 누나 언제 들어왔어? 인기척을 내야 할 거 아냐?”
 “얘 봐라? 방에 들어와서 몇 번을 불렀는데. 근데 너 피아노 배웠어? 언제?”
 누나의 질문에 숨이 턱 막혔다.
 이런 질문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1, 2년 배워서는 저 정도 연주가 어림없다는 건, 어린 애도 알겠다.
 웬만한 거짓말로는 이 상황을 모면하기 힘들 것이다.
 “어?··· 고딩 때 나 알바 많이 했잖아. 그게 다 피아노 배우려고 한 거지.”
 “아 그래? 그랬구나. 엄마랑 나는 네가 알바비 벌어서 PC 방에 다 갖다 바치는 줄 알았지.”
 심하게 정곡이 찔렸다.
 하지만 누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다만 그 학원 어디냐? 개인 레슨이냐? 네 조카들 보내게 알려줘 봐’라는 둥 귀찮게 했다.
 누나가 방에 들어온 목적인 누나의 휴대폰을 손에 쥐여 주고 방 밖으로 내보냈다.
 진짜 어떻게 된 걸까?
 휴대폰을 보니 아직도 틈틈이 전화가 오고, 통장에 이자 붙듯 읽지 않은 메신저 톡도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난리 났구나.’
 하지만, 진짜 난리는 신계에서 났다.
 
 * * *
 
 신계에는 8개의 성전이 있는데, 각 성전을 관장하는 신들은 총 8명으로 이들을 주신(主神)이라 부른다.
 또한 신계에는 품계가 있지만 제왕 제우스를 비롯한 8명의 주신, 그 외 태초의 신들과 티탄 신들의 직계까진 신족이라 부르며 품계가 없다.
 신계의 품계를 만든 신족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신계의 지배자였다.
 
 음악의 성전.
 신탁에 둘러앉은 주신들과 몇몇 신족은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들이다.
 “······ 사태가 이러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아폴론이 먼저 입을 뗐다.
 “저 인간을 죽여 버리면 안 된다고 하니, 그럼 손가락만 잘라 오면 되겠군.”
 에오스의 대답에 신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잠자코 있던 ‘태초의 성전’을 관장하는 ‘물의 여신’ 테티스(Tethys)가 에오스에게 쏘아붙였다.
 “경거망동 말거라, 에오스. 내가 지금 네 어머니를 보아 참고 있으니 말이다.”
 그 말에 에오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딱 붙이며 자숙하는 자세를 취했다.
 에오스에게 주의를 준 테티스는 곧이어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며 모든 신을 둘러보았다.
 “아폴론의 성전에서 벌어진 일이니 그곳에서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하지만 소속을 따지자면 에오스는 우리 태초의 성전에 속한 신이니 대책을 함께 강구할 것이다. 반지가 음악의 성전의 것이기는 하나, 각인되면 모든 성전에 영향을 미칠 터. 방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니 여덟 주신은 모두 협조하게.”
 테티스의 말에 성전에 모인 모든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누구이던가, 티탄 12신의 본체이며, 태초에서 탄생한 위대한 신.
 인간계의 항렬로 따지자면 제왕 제우스의 이모 혹은 고모뻘이 된다.
 아폴론의 주도로 회의는 계속되었다.
 테티스가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니 다른 신들도 적극적이었다.
 “원래 선인에게 돌아갈 반지였으니, 그를 ‘선인’으로 추대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재물의 성전’을 관장하는 ‘풍요의 신’ 플루토스(Plutus)가 신들에게 물었고, 이 질문이 시발점이 되어 토론이 활발해 졌다.
 “하지만 엑스트라 링은 인간세계에서 추앙받는 이들 중에서도 선발된 선인에게 내려지는 것입니다. 반지를 가진 그자가 그만한 그릇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씀이 옳습니다. 선인이 될 만한 그릇도 못 되는 자가 사후 신계에 올라온다면 모든 신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후에 신계에 올라올 만한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 인간을 선인의 재목으로 만들자는 것입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그릇이 될 만한 인간으로 만들어야겠군요. 선인의 충족 요건은 채워야 하니까요.”
 “먼저 인간계에서 뛰어난 존재로 탈바꿈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신들의 얘기를 듣는 아폴론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한다.
 본래 엑스트라 링은 선인에게 돌아갈 반지.
 선인은 성전의 모든 신의 투표를 거쳐 선발해야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반지의 주인을 선인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계획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아폴론의 입이 열렸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정해졌군요.”
 모든 신의 머릿속엔 한 단어가 떠올랐다.
 뒤치다꺼리.
 
 * * *
 
 오후 7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질 생각을 안 한다.
 확실히 여름이라 무덥고 해가 길지만 오랜만에 나온 ‘한강시민공원’에 강바람이 불어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친구 놈들이 악기 세팅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
 친구 놈들이 난데없이 한강시민공원에서 버스킹을 하겠다며 준비해 온 터다.
 하긴, 영 뜬금포는 아니다.
 고등학교 동창인 이놈들은 나와 함께 가수라는 꿈을 쫒던 놈들이다.
 어려서부터 기타를 쳐 왔던 정근이는 대학교에 진학해 현재 실용음악과에서 기타를 전공 중이고, 키보드를 들고 온 광택이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피아노를 기가 막히게 친다.
 보컬인 병준이는 대형 기획사는 아니지만 어쨌든 기획사의 연습생이다.
 22살의 나이에 아직도 7년 차 연습생인 것이 함정이지만.
 나만 제외하고는 아직도 나름대로 음악을 하고 있는 녀석들인 것이다.
 어쨌든 나는 초·중·고·대학교의 방학 시즌이라 그런지 이번 주 내내 한강시민공원에서 야시장이 열린다고 하여 오랜만에 포식하려고 따라온 참이다.
 “야! 공연하려면 사람 많은 데다가 판을 깔아야 할 거 아냐?”
 악기가 세팅된 맞은편 관람석에서 자리 깔고 앉아 있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내가 물었다.
 멀지 않은 곳에 많은 사람이 텐트를 치거나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스팟이 보인다.
 벌써 두 곡이나 불렀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이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진득하게 듣고 있는 사람도 나 혼자라는 뜻이다.
 “푸드 트럭 앞쪽에는 8시부터 다른 팀이 버스킹 할 거라 안 돼. 이게 또 나름 룰이 있거든.”
 병준이의 말이다.
 어려서부터 노래 좀 한다는 소리를 듣더니 이내 작은 기획사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학창 시절엔 키도 182cm나 되고 춤도 꽤 잘 추는 편이라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많았었다.
 그런데 변성기를 잘 못 보낸 후유증으로 보컬에게 제일 중요한 목소리가 망한 놈이다.
 곽병준이 주위를 한번 ‘휙’하고 둘러보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시간엔 원래 저녁 식사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어. 좀 있으면 많아질 테니까 기다려 봐.”
 하지만 그 뒤로 3곡이나 더 불렀음에도 관객은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친구 놈들은 평일이라서 그럴 것이라며 자기들끼리 위로했지만, 그중에 이 그룹의 실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광택은 생각이 달랐다.
 ‘니들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안드냐?’라는 표정이다.
 키보드를 맡고 있던 이광택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관객석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왔다.
 “야, 주시후. 네가 한 곡 해라. 터치감이 틀리겠지만 그래도 비싼 키보드라 소리는 괜찮을 거야.”
 새벽부터 아웃튜브에 내 동영상이 올라왔다고 처음 전화해 준 놈이다.
 한강 시민 공원에 오는 내내 언제 그렇게 피아노를 배웠냐고 꼬치꼬치 물어봐서 나를 진땀 빼게 하더니 이번엔 연주하라고 진땀 빼게 한다.
 나는 광택이에게 등이 떠밀리다시피 키보드 앞에 끌려와 의자에 앉혀졌다.
 
 * * *
 
 친구들이 든든한 아군이 생긴 것처럼 휘파람을 불어 대고 난리다.
 보는 사람도 몇 명 없는데,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는 것이 창피하다.
 내버려 두면 춤판이라도 벌일 기세들이다.
 신난 친구 놈들의 얼굴과는 상반되게 내 얼굴은 점점 흙빛으로 물들어갔다.
 그걸 연주한 건 내가 아니었다고! 이놈들아!
 그나마 학창 시절에 음악 한답시고 기타도 조금 치다 말았으나 코드를 잡는 법은 알고 있었다.
 그것도 기타에 한해서였지, 피아노 코드는 완전 기초적인 것밖에 모른다.
 그런데 어쩌라고······.
 못하겠다고 그냥 일어설까? 왜 나를 끌어들이냐며 화를 내?
 그 순간,
 키보드 건반 위에 펼쳐진 악보가 눈에 들어온다.
 이광택이 준비해 온 혼성 듀오 'Pie’ 「러브 레터」의 악보이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악보를 넘기며 훑어보았다.
 여태 22년을 악보 까막눈으로 살았는데 그 시절이 무색하게 악보가 한눈에 들어온다.
 악보를 다 암보한 다음 숨을 한번 고르고는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어제 고가의 그랜드 피아노를 칠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먼저 살살 두드리듯 손가락으로 건반을 터치했다.
 그리고 이끌리듯 설치된 마이크 앞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너에게 보내는 사랑의 세레나데, 나에게 응답하는 너의 환한 미소.”
 그것을 보고 있던 관객 중 한 명이 조용히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동영상 버튼을 눌러 촬영을 시작했다.
 
 * * *
 
 꽤 많은 관객 몰이에 성공한 나는 그 뒤로도 두 곡이나 더 연주하고 나서야 키보드 앞을 떠날 수 있었다.
 지금은 내 연주에 뒤를 이어 버스킹 하는 친구들을 보며 앉아서 음악을 감상 중이다.
 정확히는 귀로 흘려들으며, 머릿속으로는 딴생각 중이다.
 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걸까.
 내게 왜 이런 능력들이······. 아니, 내 능력이 맞기는 맞는 걸까?
 “그래, 이제는 너의 능력이지.”
 “네?”
 옆을 돌아보니 웬 남자가 내 옆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
 갈색의 짧은 머리카락과 구레나룻, 날카로운 턱선이 인상 깊은 중년 사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능력들이 이제 온전히 네 것이 되었다고 말했다.”
 데자뷰인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투.
 턱을 치켜든 자세와 카리스마 있는 표정에 왠지 모를 후광까지.
 며칠 전 만났던 미친 여자의 눈길이 연상되는 남자의 눈길에 나도 모르게 반지를 낀 왼손을 뒤로 숨겼다.
 중년 사내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미간을 잔뜩 찌푸린 표정이 되어 내게 시선을 고정한다.
 수축된 검은 동공 아래로 위축된 내 모습이 보인다.
 그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처럼 거대해진 그가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음악의 신 ‘아폴론’이다.”
 
 * * *
 
 “넌 아까부터 뭘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냐?”
 이광택이 와서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버스킹이 끝났는지 세팅했던 악기를 해체하고 있는 친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니까 계속 혼잣말하고 앉아 있더만.”
 “어?”
 내 동공이 지진 나는 듯 흔들렸다.
 아무래도 스스로 아폴론이라 밝힌 사내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는 모양이다.
 난 긴장을 풀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외계인인 줄 알았더니, 신이라고?
 나는 조금 전 내 앞에 나타났던 신이 내게 해준 말들이 떠올랐다.
 신의 존재는 아직도 믿기 어렵고 황당무계했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니 며칠 동안 내게 벌어졌던 일이 적어도 납득은 되었다.
 “장비나 싸자. 시원한 맥주가 땡긴다.”
 나는 흘리듯 말을 하고 친구들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친구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비단 나 혼자는 아니었다.
 악기를 정리하고 있는 우리 틈으로 댄디한 정장을 입은 처음 보는 사내가 비집고 들어섰다.
 나이는 서른 살 정도 되었을까?
 “저,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경계심을 가지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나와 친구들에게 사내는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주었다.
 그 명함을 광택이 놈이 받아들려고 했으나 사내는 방향을 바꾸어 굳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B&M 엔터테인먼트 아트 개발실 팀장 김남규]
 
 명함에 적혀있는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B&M 엔터테인먼트라는 글씨는 아주 크게 보였다.
 친구들도 내 손에 들린 명함을 보더니 같은 표정이다.
 연예 기획사에서 도대체 왜?
 “아, 저는 B&M 엔터에서 일하고 있어요. 주로 캐스팅과 인재 양성을 하는 부서에 근무하고 있죠. 아까 노래하신 여기 이분한테 명함을 꼭 드리고 싶은데, 혹시 연습생이세요? 아니면 어디 계약된 곳이라도 있으신지?”
 김남규라는 사내는 나를 콕 집어 지목하고는 물끄러미 쳐다본다.
 “혹시 지금 연예 기획사 말씀하시는 건가요? 연습생이나 계약 뭐 이런 거요.”
 내 질문에 김남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없어요.”
 안심했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는 명함을 건넨 이유를 설명하였다.
 “저는 이번에 저희 기획사의 이름을 걸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인재를 찾고 있어요. 혹시 가수 쪽으로 생각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겠어요? 노래를 너무 잘하시던데,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희 회사에서 최고의 서포트를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 네.”
 “그럼 꼭 연락 주셨으면 좋겠네요. 노래 잘 들었어요.”
 김남규가 시야에서 점차 멀어지자 곽병준이 한껏 들떠서는 내 손에 있던 명함을 가로채 간다.
 “야! 대박! 뭐야 지금? B&M이야, B&M 엔터. 뭘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있냐? 무조건 내일 전화해. 와······. 진짜 말도 안 된다. 그런 대형 기획사에서 길거리 캐스팅도 하는구나. 자체 오디션만 보는 줄 알았더니.”
 “그래. 남들은 가지 못해서 안달인 B&M인데. 한다고 해. 너 싫다면 내가 전화하고. 나를 데려가긴 하려나?”
 기타를 만지작거리며 최정근이 말을 보탰다.
 “너 고딩 때부터 가수 하고 싶다고 했었잖아.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나 싶다. 그런데 설마 연습생으로 데려가려는 건 아니겠지? 왜 연습생만 잔뜩 데려다 놓고 데뷔 안 시키는 기획사들도 있잖아. 이를테면······.”
 말을 마친 이광택이 곽병준을 힐끗 쳐다본다.
 “야! 왜 나를 쳐다봐? 너 지금 내가 연습생 7년 차라고 무시하냐?”
 티격태격하는 친구 놈들 사이에서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명함을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다.
 가뜩이나 조금 전에 아폴론이라는 신을 만나서 혼이 쏙 빠져있는 중이었다.
 “야! 빨리 짐 싸서 가자. 맥주 마시고 싶다니까.”
 오늘 하루 많은 일을 겪고 나자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 * *
 
 [올림포스 12신 중 한 명인 아폴론.
 제우스와 티탄 신족인 레토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태양, 음악, 시, 예언, 의술, 궁술을 관장하는 신이다······. 아폴론은 의술을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며······.]
 
 하암··· 하품이 나온다.
 나는 아까부터 인터넷 창에 ‘아폴론’을 검색 중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친구 놈들과 술도 한잔했고 잘 시간이긴 하지만 꼭 그래서 하품이 나오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사이트에서나 똑같이 서술해 놓은 ‘위대한 아폴론’에 대해 1시간째 보고 있으니 슬슬 지겨워져서였다.
 어딜 뒤져 봐도 대단한 신으로 설명된 아폴론.
 그런데 이런 위대한 신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을 지금 믿으라는 건가.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왼쪽 검지에 끼워져서 빠지지 않는 반지가 이를 증명하는 듯 유독 반짝거린다.
 나는 반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무슨 수를 써도 꿈적도 안 하던 반지는 아폴론이라는 신의 말대로 변화를 겪었다.
 박혀있는 두 개의 보석 중 한 개가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하급 각성 단계에 이른 반지라는 뜻이다.
 그 신의 말이 사실이다.
 엑스트라 링.
 아폴론은 이 반지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것이 내 손에 끼워지게 된 사연은 참으로 기니 자세한 것은 반지를 통해 알아보라는 말도 해주었다.
 ‘의지로 대화하라고 했던가? 반지를 통해 영적 울림이 신계에 닿을 거라고 했는데······.’
 나는 알라딘이 램프를 다루듯 연신 반지를 문지르며 말했다.
 “저, 혹시 들리세요?”
 ······.
 “아무도 안 계세요? 누구 없어요?”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이 어이없는 상황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누가 대답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때.
 허공에 울리는 것인지······. 고막을 때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인지.
 어디선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시죠?”
 “네?”
 “선인께서 저를 찾지 않으셨습니까?”
 30, 40대 중년 남성의 목소리.
 굉장한 중저음이다.
 갑작스러운 울림에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나를 선인이라 일컫는 사내의 말을 들어보니 분명 신계와 관련된 인물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가 더는 무섭다거나 신기하지는 않았다.
 신이 눈앞에 ‘짜잔!’ 하고 나타났었는데 그보다 더 황당무계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주인공이 죽어서 회귀한다거나, 특별한 능력이 생기는 소재의 소설을 읽었을 때는,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두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갑자기 내게 생긴 비현실적인 상황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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