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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교도관입니다만? 1권

2019.07.22 조회 1,758 추천 15


 전설적인 교도관입니다만? 1권
 
 
 목차
 
 프롤로그
 Chapter 1
 Chapter 2
 Chapter 3
 Chapte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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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수진이 알려준 곳은 청담역 2번 출구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럽게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힐끗 본 주차장에는 고가의 외제차가 즐비했다.
 시현은 자신의 허름한 옷차림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이내 입술을 꾹 깨물고 입구로 들어갔다.
 인테리어는 더욱 깔끔했다.
 비싸게 보이는 엔틱한 느낌의 가구들이 편안한 느낌을 주며 배치되어 있었다. 벽도 세련된 소품들로 장식했고, 음식점 특유의 거슬리는 냄새도 나지 않았다.
 홀 지배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예약되어 있으신 분의 성함을 말씀하시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레스토랑은 완전 예약제로 운영한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실제로도 그런 모양이었다.
 “수진이요, 김수진.”
 “김수진님이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 네, 확인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지배인을 따라 들어간 곳은 조명이 살짝 어두운 창가 쪽의 테이블이었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김수진.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지배인이 인사를 마치고 나가자 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네가 어떤 연락도 안 받고 피해 다녔기 때문이지.”
 “그래. 그게 뭐?”
 “······.”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시현은 자리에 앉았다.
 흥분하면 안 된다.
 먼저 흥분하면 더 비참해질 뿐이다.
 잠시 적막이 흐르는 동안 웨이터가 물수건과 메뉴판을 들고 들어왔다.
 “죄송한데 주문은 좀 이따가 하겠습니다.”
 시현이 그렇게 말하자 웨이터가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시현은 수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마음에 받은 충격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녀의 눈에는 불과 한 달여 전까지만 해도 늘 있었던 친밀감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니?”
 시현이 신음하듯 말을 내뱉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내뱉기가 너무 힘들었다.
 “왜 이렇게 어이없는 소리를 해? 연애하다 헤어질 수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을. 이 시간에도 깨지는 커플이 얼마나 많을까.”
 수진이 가는 냉소를 흘렸다.
 이시현과 김수진.
 그들은 5년 전 노량진에서 만난 공시생 커플이었다.
 노량진 생활에 둘 다 외로움을 느꼈기에 더 쉽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는지 모른다.
 먼저 합격한 것은 시현이었다.
 노량진 2년 차에 준비하던 교정직에 합격한 것이다.
 노량진 커플에서 한 명만 합격하면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시현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수진을 만나고 계속되는 불합격에 날카로워진 기분을 맞춰주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2년, 3년이 지나도 수진은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도 시현은 계속 도전하려는 수진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이 한 달 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합격하면 결혼하자고 했잖아. 그거 거짓말이었니?”
 “아니, 진심이었어.”
 “그런데 왜?”
 “그런데 말이야. 상황이 변하면 사람도 변하는 거거든?”
 수진이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너 이런 인간이었니?”
 시현이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빠야말로 이렇게 구차했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 안 했는데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어?”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지금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모르는 모양이네. 지금의 내가 간수 따위하고 결혼하면 쪽팔려서 고개도 못 들고 다녀.”
 “뭐?!”
 “격이 다르다고, 격이.”
 수진이 코웃음을 치며 지니고 있던 지갑과 핸드백, 시계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거 에르메스 지갑인데 500만 원, 이 핸드백도 에르메스 건데 3,000만 원이야. 그리고 이 시계, 바쉐론 콘스탄틴인데 7,000만 원 넘어.”
 그녀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걸로 부족해? 나 차 롤스로이스고 강남에 아파트도 한 채 샀어. 오빠 연봉? 한 3,500만 원쯤 되던가? 내 연봉이 110억이거든. 110억. 나 이제 금수저야.”
 “······.”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변하게 했을까.
 돈이란 것이, 힘이란 것이······ 그렇게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원래 이런 여자였던가.
 “A급 각성자란 거 참 좋더라. 웬만한 사람들은 다 웃으면서 굽실굽실대는 거 있지? 길드에서도 국가에서도 특별 관리한다고 하더라? 하긴 요즘 각성자가 얼마나 중요한 국력의 척도인데······ 그것도 각성자 중에 1%도 안 되는 A급 각성자인데, 그치?”
 “······네가 출세해서 어떻게 돈을 쓰고 다니든 내가 알 바 아닌데 남의 소중한 직업 비하한 거는 꼭 사과를 들어야겠다.”
 시현이 싸늘한 눈으로 수진을 응시했다.
 “아아, 간수 따위라고 한 거? 미안해. 평생 범죄자들이랑 부대끼면서 감방에서 잘 근무해, 오빠.”
 “······.”
 시현이 피가 날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가 딱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다, 오늘 만나줘서. 덕분에 미련 하나도 없이 헤어질 수 있겠다.”
 “진작 이렇게 나왔으면 좀 좋아. 다시 연락하지 마, 오빠.”
 수진이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 * *
 
 어떤 정신으로 집에 도착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손에 든 비닐봉지에는 소주 세 병이 들어 있었다.
 안주도 없이 벌컥벌컥 마셨다.
 주량의 2배가 넘게 마시고 지독하게 취해서 정신을 잃기 전 시현의 눈앞에 무언가가 보였다.
 
 [당신은 이계의 능력을 각성했다.]
 
 
 Chapter 1
 
 
 “······네, 네,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웬만하면 근무를 하는데 너무 아파서······ 네, 네, 그렇게 처리해 주십시오. 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근무하겠습니다. 네, 그럼 수고하십쇼.”
 자신이 근무하는 교도소에 새벽부터 연락한 시현은 그제야 숨을 돌렸다.
 숙취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리는데다가 어제 너무 엄청난 일들이 연속해서 벌어져서 정신이 없었다.
 그는 우선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었다.
 “각성이라······.”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각성한 연인에게 매정하게 차인 날, 바로 각성하다니.
 그것도 운명의 장난을 또 한 번 느끼게 하는 종류의 각성이었다.
 시현은 소파에 앉아 상태창을 열었다.
 
 [우울한 간수]
 이름: 포아힘
 성별: 남
 직업: 간수(메인), 사형 집행인(서브)
 유명도: 매우 유명
 <위명>
 1)철혈의 간수
 -포아힘은 레이테르 대륙에서 모든 죄수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어떤 극악무도한 죄수일지라도 그의 앞에서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죄수들을 상대할 때 모든 스탯이 1,000% 증가한다.
 -죄수들이 당신을 보면 두려움과 공포로 얼어붙는다. 공황 상태에 빠짐.
 2)광적인 사형 집행인
 -타고난 간수인 포아힘은 또한 유능한 사형 집행인이기도 했다. 그가 평생 집행한 사형수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그는 사형을 즐겼다.
 -사형수들을 상대할 때 모든 스탯이 500% 증가한다.
 -사형수들이 당신을 보면 두려움과 공포로 얼어붙는다. 공황 상태에 빠짐.
 <스탯>
 근력 1 (E)
 민첩 1 (E)
 지혜 1 (E)
 체력 1 (E)
 정신력 1 (E)
 마력 1 (E)
 <저항력>
 물리저항 0.05%
 마법저항 0.05%
 독저항 0%
 화염저항 0%
 <스킬>
 패시브: ???(비활성)
 액티브: ???(비활성), ???(비활성)
 
 확실히 각성을 하긴 했다.
 했는데.
 간수란다, 간수.
 요즘 말론 교도관, 영어로는 Prison Officer······.
 아무래도 그걸 말하는 것 같았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게다가 수식어가 ‘우울한’이다.
 한눈에 보아도 괴상하기 짝이 없는 수식어다.
 우울한이라······.
 각성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론이나 인터넷 같은데서 들은 바는 좀 있다.
 각성하면 상태창에서 가장 간략하면서도 한눈에 각성자의 능력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수식어였다.
 에를 들면 A급 각성자의 수식어는 ‘대단한, 훌륭한, 뛰어난’ 같은 몹시 긍정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그 수식어가 이를 테면 대단한 기사, 훌륭한 마법사, 뛰어난 성직자 같은 식으로 붙는 것이다.
 반대로 E급 각성자의 수식어는 ‘어설픈, 미숙한, 서투른’이었다.
 이것도 어설픈 기사, 미숙한 마법사, 서투른 성직자라는 식으로 붙었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지금 자신에게 붙은 ‘우울한’이라는 수식어는 성격 자체가 아예 달랐다.
 이건 말 그대로 감정이나 기분 상태를 나타나는 말이 아닌가?
 이걸로 능력을 어떻게 파악하지?
 아니, 애초에 각성자에게 이런 수식어가 있다는 것도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처음 듣는 직업에 처음 듣는 수식어라.
 갈수록 아리송하기만 하다.
 그리고 유명도.
 ‘매우 유명?’
 매우 유명하다는 말은 이 각성의 힘의 원주인이 그쪽 세계에서 아주 유명하다는 의미였다.
 허명만 높은 자도 존재했지만, 명성이란 것이 대부분 실력을 따라가게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높은 등급일 가능성도 있긴 했다.
 다음은 위명.
 철혈의 간수와 광적인 사형 집행인이라.
 이름은 섬뜩하면서도 무시무시했지만 정작 효과는 물음표를 붙이기에 충분했다.
 1,000%, 500%인 수치는 엄청 높아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대가 죄수와 사형수로 제한되었다.
 정작 중요한 게이트의 몬스터들에게는 아무 쓸모없다는 말이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표현에 딱 어울렸다.
 아마 다른 이들에게 상태창을 보여준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임에 틀림없다.
 그 밑의 스탯.
 최악 중의 최악.
 스탯은 죄다 E라는 글자가 놀리듯이 붙어 있었다.
 1이라는 숫자의 나열은 각성자라는 말조차 아까울 정도였다.
 시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마지막으로 스킬은.”
 뭔가 있긴 있는 건 확실한데 죄다 ‘???’이라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비활성이라 쓰여 있는 걸 보니 사용할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숫자도 꼴랑 3개.
 E급에나 어울리는 너무 적은 숫자였다.
 A급 같은 경우 스킬이 두 자리 수를 가볍게 넘어간다고 들었다.
 기껏 각성했는데 이 모양인가.
 E급인가? 정말 E급인가?
 수진에게 들은 ‘간수 따위가’라는 말이 쓰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비웃음 소리가 앞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이 세계나 저 세계나 간수는 안 된다는 거야?
 간수가 뭐가 어때서?
 판타지의 주인공은 기사나 마법사라는 건가?
 간수가 주인공이 되면 안 돼?
 “후우.”
 잠시 심호흡을 하며 기분을 진정시킨 시현이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았다.
 다시 한 번 각성자에 관해 좀 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인터넷은 제대로 활용만 한다면 정보의 보고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각성자같이 관심지수가 아주 높은 대상인 부류는 쓸 만해 보이는 수많은 정보가 있었다.
 시현은 각성자에 대해 잘 정리된 파워블로거의 글을 찾아 처음부터 정독했다.
 서문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십 년 전, 전 세계적으로 다른 차원의 게이트가 열려 발생한 끔찍한 참극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게이트에서는 정체불명의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몬스터들은 피에 굶주린 것처럼 사람들을 학살했다.
 몬스터들을 막으려 급히 군대가 동원됐지만 터무니없게도 현대의 어떤 무기도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혼란에 빠진 인류는 속수무책이었고 첫날에만 수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대로라면 인류의 멸망만 남은 상황.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그때 이능의 힘을 각성한 인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라는 수단을 통해 검과 마법이라는 생소한 힘을 사용하는 소위 각성자라고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새로운 힘은 몬스터에게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각성자들의 힘으로 세계는 간신히 위기를 넘겼고, 그들은 게이트의 몬스터로부터 인류를 수호하는 방패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각성자란 대부분의 사람이 경외하고 동경하는 존재였다.
 시현은 계속해서 각성자의 스탯에 대해 서술한 문단을 읽었다.
 “음······ 보통 D급 각성자의 기본 스탯이 100이라. C급이 300, B급이 500, A급이 700? 200씩 올라가는구나. 그리고 100미만이 E군.”
 기본 스탯이란 어디까지나 주요 스탯을 말했다.
 기사라면 근력과 민첩, 마법사나 성직자라면 지혜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기사는 지혜가 낮아도 등급의 설정에는 하등 상관없었다.
 물론 공통적인 주요 스탯은 있었다. 바로 마력.
 마력이 있어야지만 액티브 스킬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위력이 강한 스킬은 그만큼 더 많은 마력을 필요로 했다.
 실상 마력의 양이 등급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마력만이 오직 마정석으로 된 마력 측정기를 사용해 겉으로 측정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스탯은 본인이 밝히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밝히길 원하는 각성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현대의 개인 정보 같은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상태창이다. 좀 나아가면 목숨이 달린 정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마력으로 등급을 매겨도 문제가 없는 것이, 마력이 많으면 그만큼 스탯도 높고 위명이나 스킬도 훌륭했다.
 즉, 거의 법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마력의 양은 등급에 비례했다.
 “그런데 마력이 1······.”
 지금 시현의 마력은 1이었다.
 이대로 헌터협회에 가서 헌터 라이센스를 취득하려고 하면 무조건 E등급이다.
 E급은 평생 길드의 가장 밑바닥, 즉 공격대의 뒤치다꺼리밖에는 못 할 운명이었다.
 씁쓸한 미소를 띤 시현이 이번에는 위명에 대해 쓰인 문단을 읽었다.
 위명도 스탯이나 스킬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뻔한 말과 함께 E등급부터 B등급까지 몇 가지 위명 예시가 있었다.
 시현은 자신의 위명과 비교해 보면서 읽어 내려갔다.
 
 등급: E급
 위명: 마법 아카데미의 낙제생
 -000는 리온 마법 아카데미의 낙제생이다. 그는 전교생의 웃음거리였다.
 -마법을 캐스팅할 때 드는 시간이 100% 증가한다.
 -마법 주문의 위력이 70% 감소한다.
 
 “와······ 이건 뭐 개그도 아니고. 진짜 세상 살기 싫겠다. 국가에서 정신적으로 케어해 줘야 돼.”
 위명이 위력이 있는 명성이라는 뜻이던데 이게 위력 있는 명성? 명성은 명성이겠지만······.
 
 등급: D급
 위명: 분노조절잘해 기사
 -000는 동료들 사이에서 분노 조절을 잘하는 기사로 정평이 나 있다.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는 광전사가 되지만,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강한 이에게는 귀신같이 세상에 둘도 없는 평화주의자가 된다.
 -자신보다 약한 적을 상대할 때 모든 스탯이 50% 증가하고 의기양양해진다.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할 때 모슨 스탯이 50% 감소하고 비굴해진다.
 
 “야, 이것도 좀······. 뭐······ 잡몹 처리는 잘하겠네.”
 뭔가 좀 제대로 된 건 없나?
 시현이 이번에는 C급을 읽어보았다.
 
 등급: C급
 위명: 코볼트 학살자
 -000는 분노에 찬 코볼트 사냥꾼이다. 그의 아버지가 코볼트에게 목숨을 잃은 후 그는 평생 코볼트를 사냥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코볼트의 시체로 산을 쌓아올렸다.
 -코볼트를 상대할 때 모든 스탯이 100% 증가하고, 모든 스킬의 효율이 60% 증가한다.
 -코볼트들이 당신을 보면 겁에 질려 도망가려 한다. 궤주 상태에 빠짐.
 
 드디어 마이너스가 없는 위명이 나왔다.
 역시 뭔가 C급은 되어야 쓸 만한 각성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근데 학살자 정도 되는데 100%?”
 100%가 적은 건 아니다. C급 스탯이 300이라면 100% 증가하면 600이 돼버려서, 코볼트를 상대할 때는 B급을 능가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만약 700짜리 A급이 100%만 증가되어도 1,400이라는 얘기?
 “같은 퍼센트라도 상위 등급은 스탯이 엄청나게 올라가는구나. 괴물이네, 괴물······.”
 C급도 이 정도인데 B급이나 A급의 위명이 이것보다 수치가 더 낮을 리가 없지 않나?
 시현이 서둘러 B급 위명을 살폈다.
 
 등급: B급
 위명: 엘라슨의 신동
 -000는 어렸을 때부터 그의 고향 엘라슨에서 신동으로 유명한 마법사였다. 비록 수도에 와서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가 영특한 상위 클래스의 마법사인 것만은 모두들 인정하는 바다.
 -고속 캐스팅(中) 가능. 마법을 캐스팅하는 데 드는 시간이 30% 감소한다,
 -마법 증폭(中) 가능. 마법 주문의 위력이 35% 증가한다.
 
 “어?”
 오히려 B급의 수치가 더 낮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시현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약이 없다.
 수치가 낮은 대신 제약 없이 어떤 상황에서든 모두 도움이 되는 위명이었다.
 게이트를 공략할 때 평생 코볼트만 때려잡을 것도 아니고, 엘라슨의 신동이 훨씬 유용도가 높은 상위의 위명인 것이다.
 “그렇군, 제약이 있으면 수치가 높아지는구나. 그래서 그런 엄청난 제약이······.”
 오직 죄수에게만 1,000%.
 오직 사형수에게만 500%.
 정작 게이트에 나오는 몬스터에게는 전혀 쓸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위명의 수치가 1,000%, 500%인 것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인터넷에서 ‘각성자 스킬 비활성’이라는 키워드로 30분이 넘게 검색해 봤지만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에라이.”
 지친 시현은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벌렁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연인에게 차이고,
 각성자가 되고,
 그리고 그 각성 능력은 의문투성이고.
 “온라인 게임처럼 튜토리얼이나 퀘스트 같은 거 없나? 그러면 뭔가 풀릴 텐데.”
 그렇게 혼자 무심코 중얼거렸을 때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포아힘은 가장 소중한 친우의 사형을 직접 집행한 후, 엄청난 충격을 받고 몹시 우울한 상태로 대륙의 가장 북쪽, 숨결조차 얼어붙는 곳에 홀로 틀어박혔다. 게다가 그는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한 영향으로 빈사지경에 이르렀다. 빨리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긴급 퀘스트: 최대한 빨리 음식물을 섭취하라.]
 
 시현에게 새로운 길이 열렸다.
 음식물?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에 멈칫하며 생각을 굴리는데 이번에는 시야에 신기루처럼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남자의 형상이다.
 아니, 그걸 남자라고 할 수 있을까.
 피골이 극도로 상접한 몰골은 해골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팔도 다리도 극도로 야위었고 갈비뼈가 앙상하게 다 드러나 보였다.
 ‘설마?’
 이 힘의 원래 주인?
 그런 추측을 하고 있는데 돌연 극심한 목마름이 몰려왔다.
 마치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마라톤을 뛴 듯한 갈증이었다.
 시현은 몸을 날리듯이 냉장고 문을 열어젖히고 생수병을 꺼내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허억······ 허억······.”
 미친 듯이 생수병 하나를 비우고서야 갈증이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지독한 허기가 몰려들었다.
 시현은 전기밥솥에서 밥을 퍼 큰 공기에 꽉꽉 눌러 채우고 고추장과 나물 몇 가지를 비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밥알 하나 안 남기고 비우고 나자 허기가 좀 가셨다. 평소라면 배가 터질 정도의 양이었지만 배가 부르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허······ 이게 뭐야? 이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거 맞지?”
 그것 말고 다른 쪽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저쪽에 있는 남자가 굶주리자 자신이 허기에 시달렸다.
 그리고 빨리 음식물을 먹으라는 메시지.
 그건 자신이 음식을 먹으면 저쪽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새로운 알림이 떴다.
 
 [포아힘의 미약한 생명의 등불에 약간의 불을 지폈다. 하지만 앞으로도 꾸준한 식사가 필요하다.]
 [근력+1, 체력+1 회복]
 
 ‘회복?’
 시현은 재빨리 스탯창에 변화가 있는지 살폈다.
 
 <스탯>
 근력 2 (E)
 민첩 1 (E)
 지혜 1 (E)
 체력 2 (E)
 정신력 1 (E)
 마력 1 (E)
 
 ‘진짜 올랐다.’
 근력과 체력이 실제로 상승했다.
 물론 아직은 정말 미미한 정도였다.
 하지만.
 ‘올라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절망적인 1의 스탯의 나열에는 희망조차 없었다.
 근데 희망이 생겼다.
 그 스탯은 힘의 원래 주인의 병자나 다름없는 몸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했다.
 몸만 제대로 회복이 된다면?
 설마 능력을 다 회복해도 E급인데 이런 퀘스트 같은 것을 주지는 않으리라.
 그렇다면 D? 아니, C?
 B만 되면 진짜 좋을 텐데.
 그러면 연봉이 도대체? 어우······.
 내심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현은 그렇게 즐거운 상상을 했다. 이제야 좀 각성자라는 실감이 났다.
 한동안 상념에 잠겨 있던 시현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컴퓨터를 켜고 평소 활동하던 커뮤니티 엠파크 ‘불타는 게시판’에 접속했다.
 시현의 손이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제목: 저 각성한 것 같네요.
 -내용: 어제 소주 세 병 빨고 지금 일어났는데 갑자기 느낌이 오네요. 대박 느낌이. 이대로 인생역전해서 흙수저 탈출하면 줄 서신 분 중에 열 분 골라서 치킨 쏩니다.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었다.
 흘리기.
 여자 자랑, 학력 자랑, 직업 자랑 등등의 가증스러운 흘리기에 얼마나 내상을 입었던가.
 역시 사람이 많은 커뮤니티 사이트라 그런지 댓글이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줄 서봅니다.
 -네, 다음 중2병.
 -네, 다음 판타지작가.
 -일단 줄.
 -줄.
 -어글어글.
 -다음 어그로 나오세요.
 -지난 글 보기.
 -어? 이분 어그로 유저 아닌데. 가끔 ‘오늘의 혼술 안주’ 올리시는 분 아님?
 -진짜 각성하신 거 아닌가요?
 
 자신의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며 시현이 픽 웃었다.
 어느 커뮤니티에나 상주하는 흔한 어그로로 몰아붙이는 댓글부터 줄 선다는 댓글까지.
 평소라면 어그로로 몰아붙이는 댓글에 감정이 상할 법도 했지만 지금의 시현에게는 귀엽게만 느껴졌다.
 그의 손이 빠르게 다음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제목: 워······ 상태창이 보이네요.
 -내용: 아직 내용은 확인 안 해봤는데 개떨리네요. 대박은 바라지도 않고 중박만 돼도 좋겠네요.
 
 댓글이 아까보다도 더 무서운 속도로 달렸다.
 
 -헐!
 -와, 진짜 각성? 대박!
 -아 씨, 개부럽다. 내 인생엔 각성 안 터지나?
 -거짓말 같은데?
 -삐빅, 서투른 마법사입니다.
 -빼박 미숙한 기사.
 -어그로라니까.
 -부럽다고 악플은 자제합시다.
 -축하.
 -우리 불타는 게시판에도 소드마스터 터지는 거 아닌감? 소드마스터 터지면 피자 1,000판 쏘삼.
 -우선 각성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제부터 각성자로서 보내시는 하루하루들이 무척 행복하시겠죠. 저희 00은행에서 신입 각성자분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부모님 선물을 하시겠다는 분, 고생한 자신을 위하여 해외여행을 준비하시는 분, 주택 문제를 해결하시겠다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희 00은행 각성자 특임팀의 연락처는 010-xxx······.
 
 게시판에서 처음 받아보는 질투 어린 댓글들이 시현의 맘을 기분 좋게 했다.
 “뭐? 서투른 마법사? 미숙한 기사? 아주 E급을 기원들 하시는구만.”
 역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만고의 진리다.
 시현이 웃으며 다음 글을 작성했다.
 
 -제목: 긁어봤습니다.
 -내용: 우울한 간수 당첨이네요. 좋은지 나쁜지는 솔직히 모르겠네요.
 곧 날카로운 댓글이 연이어 달리기 시작했다.
 
 -아놔, 아침부터 어그로 제대로 맞았네.
 -간수? 각성자에 간수가 어딨음?
 -내가 어그로라니까.
 -벌레들은 이른 시간부터 왕성하게 활동하는구만.
 -신고했습니다.
 -치료가 필요하신 분.
 -어그로 끌려면 좀 알고 끌던가. 웬 간수?
 
 응, 나 간수 맞아.
 때로는 거짓말이 아닌 것이 더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실대로 한번 써봤는데 반응은 역시나였다.
 시현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밥을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배가 굶주렸다. 하긴 아까 그렇게 먹었는데도 포만감 비스무리 한 것도 없긴 했다.
 자신의 평소 식사량은 절대 저 정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쪽의 남자의 식사량이라는 것.
 아마 100%는 아니라도 상당한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 것 같았다.
 100%였으면 자신은 이미 응급실에 실려가 중환자실에 있을 테니까.
 시현이 다시 밥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가려 할 때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이어서 추위를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알림창이 떴다.
 
 [포아힘의 체온이 너무 떨어졌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체온을 올리자.]
 [긴급 퀘스트: 최대한 빨리 체온을 올려라.]
 
 “허, 새 퀘스트네.”
 그러고 보니 아까 본 포아힘이 앉아 있는 창 너머로 펑펑 내리는 흰 눈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방 안에는 그 흔한 장작도 없었다.
 어쨌든 나쁠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퀘스트가 자주 뜰수록 힘을 더 빨리 회복할 것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춥다.”
 갑자기 겨울 한복판 거리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시현은 옷장을 열고 두꺼운 티와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 위에 스웨터와 겨울 점퍼를 걸쳤다. 그러고는 전기장판을 팍 틀었다.
 두꺼운 이불을 가져다 전기장판 위에 놓고 그 안에 쏙 들어갔다.
 “허우······ 이제 좀 따뜻하네.”
 그렇게 한동안 몸을 지지고 있는데 알림창이 다시 떴다.
 
 [포아힘이 조금 따스함을 느낀다.]
 [민첩+1, 체력+1 회복]
 [포아힘의 몸은 약간의 생기를 되찾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상태다. 그의 마음을 어떻게든 녹여야 한다.]
 [퀘스트: 그에게 평생 친숙한 감옥의 냄새로 그의 마음에 조금의 위안을 주자.]
 
 * * *
 
 “시현아, 뭐 안 좋은 일 있니?”
 다음 날 사동에 들어가기 전, 휴게실에서 멍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안경을 낀 중키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는 시현의 동기이자 다섯 살 형인 정준철이었다.
 “어, 준철이 형? 오늘 3부 주간이에요?”
 교정직 공무원의 대다수가 근무하는 보안과의 야근부는 4부제로 운영된다.
 주야비윤, 주야비휴.
 즉 주간, 야간, 비번, 윤번, 주간, 야간, 비번, 휴무 이렇게 계속 돌아가는 것이다.
 그에 비해 시현이 맡고 있는 일근부는 다른 일반적인 공무원처럼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주간에만 근무하는 것이었다.
 물론 명목상만 그럴 뿐 야근부는 윤번휴무를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일근부도 주말 근무가 많았다.
 이게 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 때문이었다.
 “그래.”
 “그랬구나. 별일은요. 별일 없어요.”
 “정말? 열라 넋 나간 표정 짓고 있더만.”
 “아니에요. 제 표정이 원래 그렇죠, 뭐.”
 “그래? 그럼 됐고.”
 시현의 옆에 준철이 앉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근데 얘기 들었냐? 어제 난리 났다.”
 “무슨 난리요?”
 “어젯밤에 그 새끼 자해했잖아. 만덕이.”
 “아, 그 인간 또 자해했어요? 진짜 징한 놈이네.”
 김만덕.
 사기범이자 상습 자해자로 요주의 인물 중의 하나였다.
 자살만큼은 아니지만 자해도 교도관에게는 골 때리는 일이었다.
 자칫 대처를 잘못했다가는 징계를 먹을 수도 있다.
 혹여 죽기라도 한다면 유가족에게 고소까지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바로 응급실 갔지. 한 2, 3주 입원할 것 같다더라.”
 “아이고, 주말 근무 또 금방 돌아오겠네.”
 수용자가 병원에 입원한다고 끝이 아니다. 교도관들이 교대로 계호해야 한다. 그만큼 인력이 빠져나가면 다른 사람이 그 빠져나간 만큼 주말 근무를 대체해야 했다.
 “그것도 그런데 만덕이 폭탄 돌리기 순번이 아무래도 네 사동 같다. 너 5층 2사잖아.”
 시현이 근무하는 대한교도소는 기결수 1,200여 명, 미결수 800여 명을 수용하고 있는 빌딩형 교도소였다.
 모두 15층 규모로 된 빌딩형 구조로 한 층마다 2개의 사동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현이 주간 부담당으로 근무하는 곳이 바로 5층의 2사였다.
 “······허어, 순번이 언제 그렇게 됐어요?”
 폭탄 돌리기란 감당하기 힘든 문제 수용자들을 번갈아가면서 수용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근무하는 사동에 문제 수용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근무 안 해 본 사람은 모르리라.
 그렇다고 밖으로 내쫓을 수도 없는 일이니, 어떻게든 서로 고통을 분담하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네가 담당할 동안 별일 없기를 빈다.”
 
 * * *
 
 사동의 입구에서 시현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퀘스트: 그에게 평생 친숙한 감옥의 냄새로 그의 마음에 조금의 위안을 주자.]
 
 역시 여전히 퀘스트 알림이 떠 있었다.
 감옥.
 간수라는 말에서도 느꼈지만 고풍적인 단어다.
 하긴 검과 마법, 기사라는 말로 짐작하건대 이계는 교화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세계일 테니 교도관이나 교도소보다 간수와 감옥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긴 했다.
 피식 웃으며 시현은 카드키로 사동문을 땄다.
 오직 사동에 들어와 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그 특유의 찝찝한 냄새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아마 아무리 후각이 둔한 사람이라도 이 냄새는 맡을 것이다.
 
 [포아힘이 감옥의 냄새를 맡고 마음이 조금 좋아졌다.]
 [지혜+1, 정신력+2, 마력+1 회복]
 
 “오!”
 사동문을 따고 들어오자마자 퀘스트가 해결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스탯이 회복되었다는 알림까지.
 게다가 새로운 알림창이 떴다.
 
 [마음이 조금 풀린 포아힘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후배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퀘스트: 규율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죄수에게 정당한 지시를 내리자. 0/10]
 
 새 퀘스트!
 하나를 해결하기가 무섭게 바로 다음 퀘스트가 떴다.
 직장에서 일하면서 강해진다니 이것보다 더 좋을 수 있나?
 시현의 표정이 밝았다.
 
 * * *
 
 “거기 이연호 씨, 날 환해진지가 언젠데 모포 깔고 드러눕지 말아요. 여기가 이연호 씨 안방이에요? 당장 모포 개서 치워요.”
 업무를 보는 와중에 감방 안에서 모포를 깔고 뒹굴거리고 있는 수용자를 발견한 시현이 한마디 했다.
 평소에도 자주 발생하는 일이었다.
 한 사동에 보통 20방이 넘고 수용자가 80명 가까이 되는데 낮에 담당하는 교도관은 둘밖에 안 되니 애초에 수용 질서를 완벽히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주 심하게 규율에 어긋난 게 아니면 대충 눈감아주는 것도 일하는 방식 중에 하나였다.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지적하고 입씨름하면 하루에 해야 할 업무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현은 평소에도 꼼꼼하게 지적을 하는 편이었다. 지적을 하면 다음부터 안 해야겠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지만, 아예 안 한다면 마음 편히 같은 짓을 또 저지르기 때문이다.
 “아이 씨, 내가 허리가 아파서 그래요, 허리가 아파서. 거참, 여기도 사람 사는 덴데 이런 건 좀 봐줍시다.”
 역시 대놓고 모포 깔고 드러눕는 수용자가 한 번에 말을 곱게 들어 처먹을 리가 없다.
 “당장 모포 개라고요! 당장!”
 시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교도관을 하면 자연스레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목소리가 작으면 수용자에게 얕잡아 보인다는 이유가 클 것이다.
 “아놔, 진짜. 아침부터 짜증 나게. 이봐요, 부장님! 헉······!!”
 짜증 내며 뒤돌아서 눈을 부라리려고 했던 연호의 표정이 시현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급격하게 변했다.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평소 화난 듯 위로 꿈틀대던 진한 눈썹이 꼬리를 내린 강아지처럼 축 처져 버렸다.
 “네······ 네. 아이고, 죄송합니다, 부장님. 당장 치워야죠, 당장.”
 허리가 아프다던 사람이 부리나케 일어나 허겁지겁 모포를 개기 시작했다.
 “아······ 네, 알았으면 됐어요.”
 뒤돌아서는 시현의 눈도 엄청나게 놀란 눈이었다.
 평소라면 한참을 밍기적밍기적거리면서 치우는 둥 마는 둥 할 인간이 사색이 돼서 모포를 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평소라면.
 ‘설마 이거······.’
 시현이 자신이 가진 위명의 능력을 떠올렸다.
 
 <위명>
 1)철혈의 간수
 -포아힘은 레이테르 대륙에서 모든 죄수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어떤 극악무도한 죄수일지라도 그의 앞에서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죄수들을 상대할 때 모든 스탯이 1,000% 증가한다.
 -죄수들이 당신을 보면 두려움과 공포로 얼어붙는다. 공황 상태에 빠짐.
 
 마지막 부분.
 스탯 증가량에만 신경 쓰고 무심코 지나간 이 부분이 이렇게 엄청난 효과를 가져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대박이다. 이거 진짜 대박이다.”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각성이 이래서 좋다는 거구나.
 각성 정말 좋은 거네.
 
 * * *
 
 시현은 시계를 보았다.
 퇴근까지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저녁 배식까지 다 끝냈기에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는 잠시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 알아낸 것은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아침을 먹을 때도, 점심을 먹을 때도 계속 능력은 올라갔다. 아마 너무 쇠약한 상태라 지금은 끼니만 잘 챙겨 먹어도 능력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근력, 민첩, 체력 같은 신체에 관련된 것이 올랐다.
 반대로 교도관으로 일하는 것은 지혜, 정신력, 마력 같은 정신적인 능력과 관련된 것이 오르는 것 같았다.
 몸과 정신이 다 피폐해져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도움을 주면 그쪽에 관련된 능력이 회복되는 모양이었다.
 또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는 그렇게 어려운 퀘스트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좋아, 이대로만 계속.’
 시계가 5시 25분을 가리켰다.
 빡빡할 때는 정시 퇴근이 아니면 눈치가 보였지만 평소에 5분 정도 일찍 퇴근하는 것은 별문제가 없었다.
 시현은 짐을 싸고 일어났다.
 “거기 화장실 입구 가리지 말아요. 화장실 입구 가리지 말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걸어놓은 옷하고 수건하고 다 치워요, 당장.”
 사동을 막 나오려는 중에 5방에서 화장실을 가리고 있는 옷가지와 수건을 본 시현이 지적했다.
 화장실을 가려놓으면 그 안에서 자살이나 자해가 벌어져도 알 수가 없기에 가려놓는 것은 금지였다.
 그래도 아무래도 프라이버시한 공간이라 그런지 수용자들이 틈나는 대로 수건 같은 걸로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시현과 눈이 마주친 수용자 하나가 움찔하며 뛰듯이 움직이며 재빨리 옷가지와 수건을 치웠다.
 그러자 시야에 메시지가 떴다.
 
 [퀘스트: 규율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죄수에게 정당한 지시를 내리자. 10/10 완료]
 [당신의 열정적인 근무 모습에 포아힘이 만족한다.]
 [지혜+1, 정신력+1 회복]
 [포아힘이 이번에는 밤에도 열심히 일하는 후배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밤에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퀘스트: 야근하자.]
 
 “······.”
 어쨌든 또 한 건 해결이다.
 당장 이번 주말에 잡힌 준철이 형 야근을 밥 한 끼 얻어먹는 대신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마 피로에 찌들 대로 찌든 준철이 형은 만세를 외칠 것이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동료 교도관들에게 인사를 하고 외정문을 나가는데 스마트폰이 진동을 했다.
 번호를 보니 20년 지기 친구 임상규였다.
 “어, 왜?”
 -지금 퇴근?
 “퇴근이니까 전화를 받지.”
 -하하하, 그렇지? 그나저나 너 수진이 만난다면서 어떻게 됐냐?
 “참 일찍도 전화한다.”
 -야, 인마. 나도 바빴어. 요즘 우리 회사 졸라 빡세게 조이는 거 몰라?
 “안다, 알아. 그냥 하는 소리다.”
 -그래서 수진이랑 어떻게 됐어?
 “차였다, 됐냐?”
 -그래? 예상은 했지만. 지금 너 인마 졸라 우울하겠네. 나와라. 술 사줄게.
 “술은 됐고, 저녁이나 먹자.”
 -그래? 그럼 그러지 뭐. 뭐가 땡기는데?
 “정류장 사거리에 보쌈집 알지? 거기서 7시까지 보자.”
 -오케이, 그때 보자.
 전화가 끊겼다.
 시현이 픽 웃었다.
 역시 오래된 친구밖에 없다.
 시현은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보쌈집으로 향했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상규는 벌써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 그래도 얼굴은 좀 괜찮아 보이는데?”
 “정나미가 떨어져서 그래, 정나미 떨어져서.”
 시현이 솔직히 얘기했지만 상규는 반쯤 농담처럼 들은 것 같았다.
 “그렇게 죽고 못 살고 했는데 뭔 정나미가 벌써 떨어져. 괜한 가오 잡지 말고 울고 싶으면 울어라.”
 “자식. 알았다, 알았어.”
 이십여 테이블이 있는 보쌈집은 반쯤 차 있었다.
 시현과 상규는 구석진 데 앉아 보쌈과 사이다를 시켰다. 시현이 다시 한 번 술을 먹기 싫다고 했기 때문이다.
 보쌈이 나오자 상규가 한 젓가락 집어 먹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와서 말인데 너 진짜 잘 헤어졌어. 수진이 걔 싸가지가 좀 남다른 면이 있었어. 인마, 너 때문에 대놓고 얘기는 못 했지만 진짜 좀 그랬다.”
 예전이었다면 친구의 이런 발언에 발끈했을 게 뻔했지만 지금의 시현은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더라. 내가 눈깔이 삐었었나 보다.”
 “와, 우리 시현이. 진짜 정나미 다 떨어졌나 보네? 그런 말도 하고.”
 “그렇다고 했잖아, 자식아.”
 “야아······ 진짜였네.”
 상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돈 자랑을 하더라, 돈 자랑. 핸드백이니 시계니 뭐니······ 몇 천만 원씩 한다고.”
 “나 참, 그랬냐? 하긴 걔랑 우리는 이미 사는 세계가 다르긴 하지. 걔 연봉이 1,000만 달러. 아마 우리 돈으로 110억인가부터 시작할걸?”
 “뭐야, 네가 그걸 어떻게 정확히 아냐?”
 “걔 A급 각성자잖아? 미국에서 A급 각성자 몸값 1,000만 달러부터 시작하거든. 이 바닥 뭐 있냐? 각성자 관리 시스템 최선진국인 천조국이 하면 업계 표준이 되는 거지. 중국이고 한국이고 일본이고 나발이고 걍 천조국 따라가는 거야.”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너 각성자 덕후였던가?”
 그동안 각성자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신경을 안 썼는데, 상규가 회원수가 100만이 넘는 각성자에 관한 커뮤니티 카페의 올드 회원이라고 들은 것 같았다.
 “그래, 인마. 각성자에 대해 궁금한 건 이 형님한테 물어봐라.”
 “호오, 그래? 그럼 물어보자. S급 각성자 몸값은 어떻게 되냐?”
 “S급에 대해서는 워낙 극비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2억 달러는 그냥 넘는다고 추측들을 하는데 거의 정설일 거다, 아마.”
 “2, 2억 달러?”
 푸웁.
 시현이 마시던 사이다를 살짝 뿜어냈다.
 “야, 야, 농담이지? 사람 연봉이 뭔 2억 달러를 넘어?”
 “농담 같냐? 생각을 해봐라. 최강의 전투기라는 F-22 랩터가 대당 2억 달러 넘지? 근데 S급 각성자가 겨우 랩터 1대만 못하겠냐? S급 게이트 터졌을 때 S급 각성자 없으면 나라가 망하는데? 그리고 랩터는 사놓으면 유지비만 겁나게 처먹지만 오히려 S급 각성자는 게이트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 온다?”
 상규가 말을 이었다.
 “각 나라가 S급 각성자들 관리하는 데 예산 엄청나게 쏟아붓고 있는 게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야. 왠지 알아? 최소 2억 달러라도 쥐여 줘야 애국심으로 비비기라도 하지. 안 그러면 미국, 중국 같은 나라한테 죄다 뺏기거든? 그럼 나라 진짜 좆 되는 거야. 지금도 S급 각성자 없어서 뼛속까지 쪽쪽 빨리는, 사실상 속국화 된 나라들 꽤 많다?”
 “야아······ 걸어 다니는 대기업이네. 좀만 모으면 조도 그냥 찍겠다. 그 돈 있으면 뭐 하냐? 궁금하다, 궁금해.”
 “재밌는 거 더 알려줄까? 걔들이 들고 다니는 아이템도 만만치 않게 비싸. 아니, 더 비쌀 수도 있나?”
 “아이템?”
 “뭘 모른다는 표정을 지어. 각성하면 이계에서 온 아이템도 같이 인벤토리로 넘어오잖아. 그렇지 않으면 첫 각성자들이 뭘로 싸웠겠니? 검을 만들어서?”
 “아, 아니. 알고 있었지. 네 말 듣고 갑자기 생각이 나서.”
 시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인벤토리 보는 것을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인벤토리에 아이템이 들어 있을 텐데.
 집에 가서 무조건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현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계속해 봐. 아이템에 대해 궁금하다, 진짜.”
 “야, 이제야 너도 이쪽에 관심이 생겼냐? 이쪽이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핫한 주제긴 하지. 논문도 쏟아져 나오고.”
 시현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상규가 빙글대며 열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노말이나 매직 같은 소위 말해 잡템들은 하급 게이트에서도 몹 잡으면 흔하게 떨어지거든? 이건 그냥 중고 쇠붙이 가격이지. 근데 레어 등급부터는 아니야.”
 “뭐가 다른데?”
 “레어부터는 하급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나 B나 A 같은 상급 게이트의 몹들을 잡아야 얻을 수 있단 말이야. 그것도 확률이 높지도 않아.”
 “그렇군. 오케이, 이해했다.”
 “계속 이어서 설명하자면 유니크부터는 또 급이 달라. 이세계에서도 보물 중의 보물 취급 받는 물건인데다, 유니크 아이템은 최소 A급 각성자는 돼야지 각성할 때 인벤토리에 떴을 텐데, A급이 어디 흔해? 그리고 상급 게이트 보스 몬스터를 잡으면 희박한 확률로 나오긴 하는데, 상급 게이트는 공략하기도 힘들고 나올 확률은 또 희박하고······ 그러니까 부르는 게 값이지.”
 “나도 유니크 아이템이란 게 엄청나다고 듣긴 했다.”
 “근데 유니크도 레전더리에 비하면 장난이란 말이야. 온리 원이야, 온리 원. 진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전설적인 하나의 걸작이자 예술품이지. 재료부터 아만티움이나 오리하르콘처럼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많은데다가 걸린 마법이 차원이 다르다네, 차원이.”
 약을 파는 장사치처럼 상규의 혀 놀림은 매끄럽고 쉼이 없었다.
 “레전더리는 그럼 S급 게이트 보스 잡아야 뜨지? 나도 딴 건 잘 모르지만 S급 게이트는 진짜 장난 아니라는 거 언론에서 하도 떠들어대서 안다.”
 “그렇지, S급 게이트 때문에 각성자고 시민이고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아마 대부분의 레전더리는 S급 각성자가 각성할 때 인벤토리에 뜬 걸 거다.”
 상규가 말을 이었다.
 “레전더리 아이템 중에 정보가 유출된 것 중에 하나가 미국의 S급 각성자 제이콥이 지닌 용아검(龍牙劍)인데 폭풍을 부르는 검이라더라. 말 그대로. 썬더 스톰 마법이 새겨져 있거든.”
 “나 또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되냐?”
 이대로면 연이은 레전더리 찬양으로 넘어갈 것 같아서 시현이 말을 끊었다. 어차피 레전더리는 강남 고급 아파트나 같다. 평생 인연이 닿을 일이 없는 딴 세계 물건인 것이다.
 “뭐든 물어보라니까?”
 “혹시 일반인도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 있어?”
 “절대 안 되지. 일반인이 게이트 들어갔다 잘못되면 그 책임 누가 지려고.”
 “그렇구나.”
 역시 게이트에 대한 건 헌터 라이센스를 받은 이후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E급 게이트도 일반인에게는 지옥이야, 지옥.”
 그 후로도 식사 내내 상규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오랜만에 친구가 각성자에 대한 얘기에 맞장구를 치니 신이 난 것 같았다.
 어쨌든 덕분에 시현은 뜻하지 않게 각성자에 대한 유용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 * *
 
 집에 오자마자 시현은 씻지도 않고 소파에 앉아 인벤토리부터 확인했다.
 인벤토리 안에는 아이템이 2개가 존재했다.
 ‘왜 2개밖에 없지? 보통 방어구하고 무기는 기본이고 다른 액세서리나 장비들도 있어서 4~5개는 된다고 하더니.’
 여기서조차 특이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고 시현은 첫 번째 아이템을 살폈다.
 화면에 뜬 생김새는 나무로 된 뭉툭하게 생긴 평범한 곤봉 같았다.
 
 [포아힘의 간수봉]
 <노말>
 단단함: 35
 예리함: 0
 -포아힘이 젊은 시절 직접 참나무를 깎아 만든 간수봉. 맞으면 제법 아프다.
 
 “허······.”
 이게 뭡니까.
 시현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노말이라니. 내가 가진 아이템이 노말이라니.
 잡템 중의 잡템이라는 노말이라니!
 ······설마 이 아저씨 진짜 E급이야?
 짙은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레이드를 할 때 개인의 능력만큼 중요한 게 장비라고 들었는데 이걸로 몬스터를 어떻게 사냥한단 말인가.
 잠시 돌처럼 굳어 있던 시현이 다음 아이템을 보려고 하다 잠시 멈췄다.
 ‘아니지, 아니지.’
 경건하게 목욕재계하고 마지막 아이템을 살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따뜻한 물로 몸을 빡빡 씻고 나서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진짜 경건한 마음으로.”
 시현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아이템을 확인했다.
 ‘검?’
 검집부터 여러 가지 보석 같은 것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진짜 비싸 보이는 검이었다.
 ‘제발.’
 그가 밑에 쓰인 설명에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아큐어러트스]
 <레전더리>
 단단함: 83
 예리함: 91
 각인된 마법: 헬파이어(쿨타임 24시간)
 -전설의 명공(名工) 요아힘이 아만티움으로 만든 걸작 중의 걸작. 레이테르 대륙 5대 명검 중 하나. 강도와 예리함 어느 것 하나 훌륭하지 않은 것이 없고, 검신에는 대마법사 하이리스가 직접 새긴 헬파이어의 마법이 아름답게 각인되어 있다. 포아힘에게 사형 집행을 당해 죽은 친우가 사용하던 것을 유품으로 포아힘이 보관 중.
 
 “헉······ 뭐, 뭐야, 이거······?!”
 시현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이게 진짭니까? 리얼? 이게 진짜 현실입니까?
 레, 레전더리?
 진짜 레전더리?
 아까 친구 놈이 최소 억 달러 대부터 시작한다는······.
 “······.”
 진짜 한 20분 동안 멍하니 있었던 것 같았다.
 너무 까마득하게 비싸서 현실성이 없는 물건이 인벤토리에 있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거 하나면 집이 몇, 몇 채지······?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집 한 채씩 다 해주고 건물까지 사고도 남는 돈이다.
 ······아니지. 침착하자, 침착해.
 액수에 너무 흥분해서 자신이 각성자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쓰라고 나온 건데 써야지.
 조금이라도 좋은 무기를 써야 그 험한 게이트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 아닌가.
 게다가 생각해 보면 이런 물건은 개인이 쉽사리 처분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게 왜 뜨지?
 S급 각성자에게만 뜬다는 레전더리가 대체 왜?
 위명, 스킬 개수, 스탯 다 바닥인데 인벤토리에 레전더리가 떴다?
 뭐 이런 끔찍한 혼종이 다 있단 말인가.
 아니지, 아니지.
 설마 능력을 다 회복하면 S급?
 놀람과 일말의 기대감 속에서 시현은 아이템의 설명을 다시 찬찬히 읽었다.
 
 -포아힘에게 사형 집행을 당해 죽은 친우가 사용하던 것을 유품으로 포아힘이 보관 중.
 
 ‘······아 씨, 친구 거잖아.’
 좋다 말았다.
 그러고 보니 소중한 친구를 죽여 우울해졌다는 말이 퀘스트가 뜨기 전에 나온 기억이 있었다.
 무척 잘난 친구를 둔 모양이다.
 시현의 얼굴에 약간 실망감이 어렸지만 이내 얼굴을 풀었다.
 어쨌든 레전더리 아이템을 얻은 것만 해도 최고라는 말도 부족한 행운이다.
 ‘아큐어러트스.’
 시현이 아예 현실에 아큐어러트스를 꺼내 들었다.
 자세히 살피니 검집부터 기가 막히다.
 갖은 보석을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붙인 게 아니라, 색상과 공간의 조화에 따라 배치한 것이 더없이 세련됐다.
 스릉.
 그리고 칼날.
 뽑자마자 형광등을 반사하며 아름다운 백광이 산란했다.
 매끈한 검신에는 알 수 없는 글자가 조밀하고 깔끔하게 새겨져 있었다.
 문외한이 보아도 명검 중의 명검이다.
 “야, 이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시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건 나 레전더리라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개눈깔 각성자가 보아도 엄청난 아이템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데서나 꺼냈다간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다.
 몬스터가 아니라 각성자한테.
 “너무 좋아도 문제네, 이거.”
 실력이 있으면 별일 없었을 것이다.
 근데 지금 시현의 스탯은 최하 중의 최하.
 능력 없는 자에게 과분한 보물은 죽음을 재촉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모르겠다, 일단 조심하는 수밖에 없나.”
 시현은 아큐어러트스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아까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11시가 넘었는데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그래서 시현은 아까 상규가 알려준 국내에서 가장 큰 아이템 판매 사이트에 접속했다.
 “흐음······.”
 30분 정도 살핀 시현이 무언가를 알겠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일단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은 없었다.
 아마 유니크부터는 판매 경로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단단함이나 예리함의 수치가 70이 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레어는 70 이하의 수치를 지닌 듯했다.
 또 하나는 투 핸디드 소드같이 중량 있는 도검은 단단함이 높고 예리함이 떨어지고, 반대로 시미터같이 가볍고 날카로운 도검은 예리함이 높지만 단단함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아큐어러트스처럼 단단함과 예리함이 둘 다 높은 도검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헬파이어까지.
 마법에 대해 잘은 몰라도 헬파이어면 대충 상당한 위력의 공격마법이라는 것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게 소위 사기템이라 이건가?”
 각성도 했고, 훌륭하다 못해 넘치는 아이템도 가지고 있다.
 이제 정말 할 수 있는 한 강해지는 일만 남았다.
 ‘일단 퀘스트를 수행해 최대한 힘을 회복한 후, 헌터협회의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쪽으로.’
 그렇게 계획을 세우며 시현은 피식했다.
 생각해 보니 이 이계에서 온 각성의 힘은 그에게 기이할 정도로 딱 맞았다.
 직업부터 퀘스트까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교정 시설이란 곳은 그렇게 아무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운명이 어느 길로 자신을 인도하는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말하며 시현이 침대에 털썩 누웠다.
 졸리진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자야지 내일 또 일할 수 있으니까.
 
 * * *
 
 “요즘 우리 사동 애들 말 잘 듣대?”
 5층 2사의 담당으로, 부담당인 시현과 같이 근무하는 주임 박영환이 말했다.
 “수용 질서가 좀 잡힌 것 같죠?”
 “이게 다 이 교도가 애들 잘 잡아서 그런 것 같은데, 그치?”
 “하하, 뭘요. 저는 그냥 제 할 일만 했을 뿐이죠. 주임님이 사동 분위기 잘 잡으셔서 그런 거 같은데요.”
 시현이 웃으며 겸손하게 말했다.
 “빼기는. 내가 이 바닥을 얼마나 굴렀는데 그걸 모르겠나? 이 교도 다시 봤어, 진짜.”
 교도관도 순환 보직 근무다. 딱 정해진 기간은 없지만 몇 개월에서 길면 년 단위로 보직을 바꿔서 근무하는 것이다.
 시현과 영환도 두 달 전에 보직을 바꿔 5층 2사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었다. 같이 근무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들은 소문으로만 시현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교도소가 교정 시설 중에 꽤나 큰 시설이고 직원이 500명이 넘었지만, 상상외로 소문이 빨리 퍼지는 곳이 바로 교정 시설이란 곳이었다.
 누가 일을 잘하더라, 누가 일을 못하더라는 기본이고 시시콜콜한 개인사까지 다 퍼지는 곳이었다.
 그래서 평소 행실을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는 기본으로 듣고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시현의 평판은 성실하지만 일 처리는 보통이라는 정도였다.
 그래서 영환의 기대치도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웬걸. 직접 같이 일해보니 3년 차 교도가 수용자 다룰 줄을 안다. 풀어줄 때는 풀어주고, 잡을 때는 꽉 잡는 것이 노련하게 수용자를 다루는 기술이었다. 근데 그 타이밍이란 것이 정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경험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경험도 부족한 3년 차가 수용 질서를 너무 잘 잡고 있었다.
 영환으로서는 시현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현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교도관은 얼굴 팔이 장사라고들 얘기한다.
 수용자에게 얼굴을 팔고, 교도관에게도 얼굴을 판다.
 수용자에게 만만한 교도관이라고 찍히면 다른 수용자들에게 소문 퍼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감방에 갇혀 있다? 그런 건 소문을 막을 약간의 장애조차 되지 않았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수용자들은 돌고 돈다. 퇴소하고 다시 죄짓고 들어오는 수용자들도 부지기수다. 그들이 저 교도관은 만만하다고 새로운 수용자들에게 소문을 퍼트린다. 악순환이 계속돼서 교도관이 일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저 인간은 만만치 않은 교도관이라는 소문도 쉽게 퍼진다.
 그 교도관에게 수용자들은 조금이라도 접어준다.
 그만큼 앞으로 일하기가 수월해진다.
 얼굴 팔이의 중요성이 이 정도다.
 교도관 세계도 똑같다.
 성격 똘아이고, 일 못한다고 소문나면 보직 배정할 때 어떻게든 불이익을 받는다. 총무과 같은 곳? 평생 못 간다고 보면 된다.
 반대로 일 잘하고, 사람 좋다는 인상을 주면 보직 배정할 때도, 근평을 매길 때도 이득을 받는다.
 교도관은 근무하면서 다른 부서의 도움을 받을 일이 차고 넘친다.
 평판 좋은 교도관과 평판 안 좋은 교도관이 사동 설비에 문제가 생겨서 똑같이 영선을 부른다고 하자.
 평판 좋은 교도관은 하루 이틀이면 충분하다.
 평판 안 좋은 교도관은? 일주일? 더 넘길 수도 있다.
 이런 얼굴 팔이의 중요성은 시현도 잘 알고 있었다.
 각성을 하고 나서 시현은 수용자에게도, 동료 교도관에게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얼굴을 파는 데 성공했다.
 퀘스트도 수행하고 직장 생활 평판도 좋아지고, 이게 바로 꿩 먹고 알 먹기였다.
 “저기 근데 주임님, 오늘 오후에 김만덕 그 인간 이쪽으로 전방 온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김만덕? 아, 그 꼴통 새끼?”
 상습 자해로 유명한 대표적인 문제 수용자 김만덕.
 자해해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고, 징벌 사동에 조금 있다가 폭탄 돌리기 순번에 따라 오늘 5층 2사로 전방 조치되기로 되어 있었다.
 “어, 그래. 그 꼴통 오늘 오후에 전방 올 거야, 아마.”
 “제가 들은 게 맞군요. 그래서 말인데······ 주임님, 이따가 그 인간 전방 오면 담당실에서 제가 면담 좀 해도 되요?”
 “면담? 이 교도가?”
 보통 전방 온 수용자의 면담은 담당 주임이 맡아서 하는 일이었다.
 “네, 제가 젊은 패기로 그 인간이랑 한번 제대로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영환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 그 꼴통은 보안과장이 떠도 개무시하는 놈인데 이 교도도 잘 알지 않나? 워낙 유명한 놈이라. 그러다 괜히 성질만 들쑤셔 놓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어차피 신경을 쓰나 끄나, 우리 사동에서도 문제 일으킬 확률이 높은 인간 아닙니까. 얘기라도 한번 해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흐음······ 뭐, 알았어, 그렇게 해. 나도 그놈이랑 얘기하는 거 피곤한데 이 교도가 맡아준다니 오히려 고마울 수도 있겠네.”
 “하하, 그렇게 되나요.”
 시현이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다.
 그의 눈이 슬쩍 퀘스트 창을 쳐다보았다.
 
 [포아힘은 상습 문제 죄수들을 맡아서 갱생시키는 것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제일의 간수였다. 지금 그는 후배가 상습 문제 죄수를 갱생시키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퀘스트: 상습 문제 죄수를 갱생시키자.]
 
 창에는 그런 글자가 적혀 있었다.
 
 
 Chapter 2
 
 
 점심 식사를 하고 휴게실에서 TV를 보면서 잠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 시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가자, 바깥바람이라도 좀 쐬자.”
 동기인 준철이었다.
 “아, 형. 밖에서 담배 피우는데 왜 자꾸 저를 불러요.”
 “야, 그게 아니지. 여기 공기 쾨쾨하니까 좀 쾌적한 공기도 마셔줘야 돼. 그래야 오후에 또 산뜻하게 일할 수 있다니까?”
 “아, 진짜. 알았어요. 나갈게요, 나갈게.”
 소내에서 흡연을 하려면 흡연실에서 피우거나 아예 정문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근데 또 준철은 흡연실에서 흡연을 하는 것은 싫어해서, 평소에는 혼자 정문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
 그렇지만 때때로 시현과 근무 시간이 겹치면 이렇게 불러내곤 했던 것이다.
 정문 밖으로 나오자 후, 하고 기분 좋게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준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
 “네?”
 시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법무샘 안 들어가 봤어?”
 “어제 들어가고 오늘은 아직.”
 “네가 근무하는 사동, 우리소 이달의 우수 사동 1위 했더라.”
 “아, 그랬어요?”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1위로 선정된 것은 처음이었다.
 크게 영예롭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오히려 사소한 것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어쨌든 위에 좋은 인상을 주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충격이더라.”
 “하하, 뭘 또 충격까지야. 저도 한다면 하는······.”
 “2위가 스티커 발부 5회인데, 1위가 0회야. 이게 말이 되냐? 사동 근무하면서 CRPT(기동순찰팀) 한 번도 안 불렀어? 보안과장이나 교정관 순시하면서 하나도 안 걸렸어? 검방에서도? 너하고 담당 주임님 도대체 어떻게 근무하냐? 내가 아는 사동 근무하고 다른 일 하냐?”
 “헛······ 0회예요? 진짜?”
 시현도 놀란 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달에 수용자가 스티커 발부 받은 기억이 없는 것도 같았다.
 “뭘 지가 그렇게 일해 놓고 놀래? 팩트다, 팩트.”
 “아니, 0회인지는 몰라서······.”
 “너 이대로만 근무하면 근평 위에서 놀겠다? 대단하다, 대단해.”
 사실 근평, 즉 근무평정이라는 것은 참 애매한 것이다.
 교도관들이 어떻게 근무하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수도 없었고, 또 누가 더 우수하게 근무했는지 정확히 측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때문에 웬만하면 연차에 따라 근평이 결정되는 편이었다. 근데 거기서 또 불공평한 것이 사동 일선에서 수용자들과 부딪히며 일하는 교도관보다 사무직으로 일하는 교도관들이 대체로 근평이 좋다는 것이었다.
 계호는 아무나 박아놔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무 일은 몇몇 똘똘한 인력만 시킬 수 있다는 윗선의 생각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성향도 지금의 시현처럼 확실한 실적이 있다면 또 다른 얘기였다.
 눈에 보이는 실적을 무시했다가는 불만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승진 시험 붙겠네.”
 준철이 말했다.
 승진 시험은 근평+필기 점수였다.
 필기점수가 아무리 높아도 근평 때문에 물먹는 교도관도 엄청 많았다. 시현도 2년 차 시험에서 고득점을 맞고도 근평이 낮아서 떨어진 경험이 있었다.
 “이번엔 진짜 붙어야죠. 만약 근평 좋은데 승진 시험 떨어지면 진짜 할 말 없는 거죠.”
 “필기시험도 잘 봐라. 우리소 서울청에서 인기 있는 거 알지? 우리소 TO 사정 알잖아? 그래야 너랑 같이 계속 일하지.”
 “형은 근속하신다고 했죠? 지금도 그 생각 변함없어요?”
 “그래. 나야 이미 결혼했고, 와이프 직장도 여기 있어서 이사 다니기 좀 부담스럽지.”
 준철은 35살로 결혼해서 이미 아이까지 하나 있었다.
 “하긴 그렇긴 하죠.”
 근속 승진은, 승진은 느리지만 6급이 될 때까지는 한 소에서 계속 머무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걸 선호하는 교도관도 꽤 되었다.
 반대로 시험 승진은 시험만 잘 보면 승진은 빠르지만, 급수가 오를 때마다 청 내 이동을 해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서울지방교정청을 예로 들면 의정부에서 졸지에 춘천까지 날아가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사실 정답은 없는 문제였다.
 빠른 승진과 거주지의 안정 중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른 답이 나왔다.
 “어쨌든 난 네가 마음에 든다. 그러니까 너랑 계속 같은 데서 일하면 나야 좋지.”
 “아, 형. 오늘 왜 갑자기 오버해요. 제가 뭐라고.”
 시현이 손사래를 쳤다.
 “너 사람 참 진국이라고, 인마.”
 “아이고, 시간 다 됐네. 형 마음 알았으니까 들어가죠, 들어가.”
 
 * * *
 
 김만덕.
 그는 키는 작았지만 독종 같은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몸은 온통 도화지였다. 문신뿐만이 아니라 하도 자해를 여러 번 감행해서 이곳저곳에 흉터가 많았던 것이다.
 계호하는 교도관의 앞으로 만덕은 너무나 여유롭게 걸어갔다. 어떤 이에게는 교도소가 지옥이겠지만, 그에게는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자해를 하는 것도 가끔 심심해질 때면 하는 놀이나 마찬가지인 행위였다.
 “안녕하십니까, 1명 전방 왔습니다. 여기 목찰입니다.”
 만덕을 계호했던 교도관은 복도에 서 있던 박영환 주임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는 것처럼 빠른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여어, 만덕 씨 왔어?”
 영환이 조금도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박 주임님이시네. 어서 내 방에 좀 들어갑시다. 짐 놓고 쉬고 싶어서.”
 “그 전에 여기 짐 내려놓고 담당실로 들어가 봐.”
 “또 무슨 일이쇼?”
 “우리 이 부장님이 만덕 씨한테 할 말이 있으시대. 그러니까 들어가서 면담 좀 해봐.”
 문제 수용자 앞이기에 영환은 시현을 높여줬다. 그런 인간들 앞에서 부하 직원을 막 대하면, 그들도 그 부하 직원을 핫바리로 보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런 교도관도 많았지만 영환은 그런 것은 확실하게 하는 성격이었다.
 “이 부장님? 어떤 이 부장?”
 “이시현 부장님 몰라?”
 “잘 모르겠는데. 짜증 나게 뭔 면담? 그냥 들어가게 해주쇼.”
 “그러지 말고 들어가. 짐 이리 내.”
 영환이 만덕의 짐을 억지로 빼앗았다.
 주임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강경하게 나오자 만덕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툴툴대며 담당실에 들어갔다.
 담당실에는 시현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만덕 씨? 거기 앉아요.”
 “거참, 빨리하고 끝냅시다.”
 만덕이 의자 위에 거칠게 앉았다.
 “나 알죠?”
 “모르는데? 내가 교도관 얼굴 일일이 다 알아야 하나?”
 말이 대놓고 짧아진다.
 어리고 만만해 보였기에 그런 것이다.
 물론 만덕은 나이가 많다고 정중하게 대할 인간은 절대 아니었다.
 “이제 알게 될걸요?”
 “뭔 개소리만 하고 있······”
 “기억하라고, 이 새끼야.”
 시현이 갑자기 험악하게 말했다.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절했다.
 기분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잡지는 않았다. 밖에서 영환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지금 뭐?! 이 미친 쌍놈의 개새끼가! 이 개······.”
 순간 시현이 철혈의 간수의 기세를 방출했다. 그동안 다른 수용자들에게 많은 연습을 한 결과로 이제 운용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러자 머리끝까지 성질나서 욕질을 하던 만덕의 얼굴이 순식간에 놀랄 정도로 변화했다.
 “개······ 개······ 아······ 오늘 저녁에······ 개고기도 나오나요? 헤헤······.”
 “교도소에서 개고기가 왜 나와, 이 멍청한 새끼야.”
 “아······ 그렇죠, 참? 아이고······ 제가 진짜 멍청한 새끼라서 헤헤헤······.”
 만덕이 만면에 비굴한 웃음을 띠었다.
 평생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전신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이유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무서웠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도 않았고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야, 내 말 잘 들어봐.”
 “네, 넵! 잘 듭지요. 듣고말고요. 계속 말씀하세요.”
 “내가 웬만하면 수용자한테 반말 안 해. 지킬 건 지키거든?”
 원래 수용자에게 욕은커녕 반말도 안 하는 스타일이었다.
 근데 이번에는 욕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만덕이 사기 친 피해자들은 돈도 제대로 돌려받지 못했다. 생활고와 극심한 스트레스로 목숨을 끊은 피해자도 여럿이었다. 근데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교도소에서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마음 편히, 거기다 교도관들을 엿 먹이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반말하십쇼! 계속하십쇼! 반말이 편합니다!”
 “잠자코 들어.”
 “넵!”
 “죄짓고 들어올 수 있지, 응? 근데 씨발, 그러면 교도소 생활 똑바로 해야지. 그래, 한 번은 그럴 수도 있다 치자. 근데 계속 자해해서 교도관을 엿 먹여? 이, 씨발 놈아, 좆같은 새끼가! 죄 지었으면 속죄하는 마음으로 수감 생활이나 똑바로 해야지 자해를 해? 엉? 말해봐! 이 씹······.”
 “잘못했어요! 진짜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진짭니다!”
 얼굴이 완전 사색이 되어 창백해진 만덕이 몸을 던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진짜지? 또 그러면 뒈진다, 진짜.”
 “아이고, 진짭니다, 진짭니다! 제가 감히 뒈질라고 어느 분 안전에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래, 진짜 한 번만 믿어준다. 나가봐.”
 “네, 네! 감사합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젠 아예 돌아가신 부모님한테도 하지 않았던 큰절까지 올린다.
 그런 괴상한 추태를 저지른 후 부들부들 떨리는 발걸음으로 담당실을 나갔다.
 밖에는 도저히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완전히 얼이 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영환이 있었다. 입이 떡 벌어져 있었다.
 
 [포아힘이 당신의 행동에 상당히 흡족해한다.]
 [지혜+8, 정신력+20 마력+7 회복]
 
 보상도 대박이었다.
 
 * * *
 
 “5층 2사 어제 야근 섰는데 만덕이 완전 조용하더라? 나 운 좋은 거지?”
 “너 얘기 못 들었어?”
 “뭔 얘기?”
 “이시현 부장이 만덕이 쥐 잡듯이 잡았대.”
 “뭐? 만덕이 그 꼴통을 잡아?”
 “그래, 만덕이가 완전 쫄아서 빌빌 긴대.”
 “그럴 리가, 헛소문 아니야?”
 “아니야, 박영환 주임님이 직접 보고 소문 쫙 퍼트렸어.”
 “헐, CRPT도 못 잡는 놈을 어떻게 잡았대? 믿겨지지 않는다. 설마 때렸대?”
 “야, 요즘 세상에 수용자를 어떻게 때려? 큰일 나지. 주임님이 밖에 있어서 잘은 못 들었다는데 여하튼 입으로 조졌다고 하더라.”
 “입으로 그 새끼를 어떻게 조지지? 이시현 부장 그런 성격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교도소에 소문이 도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다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얌전해진 만덕을 보고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여 가혹 행위를 당했다고 고소라도 할까 봐 관구계장이 걱정했으나, 만덕이 누렇게 뜬 얼굴로 독방 벽에 기대 멍하게 천장만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며 돌아갔다.
 시현의 이미지가 180도 바뀌는 사건이었다.
 
 * * *
 
 대한교도소는 일주일에 한 번 수용자들에게 실외 운동을 실시했다. 3개 사동씩 요일별로 돌아가며 실시하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선번, 중번, 후번의 운동 담당 교도관들이 모여서 선번부터 차례대로 운동을 시키는 것이다.
 선번 교도관은 수용자들의 가장 앞에서 인솔하면서 문을 따고, 중번 교도관은 수용자 중간에, 후번 교도관은 가장 끝에서 수용자들을 몰고 계단을 내려간다.
 그리고 대운동장에서 인원 점검을 한 후 운동을 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오늘은 시현이 맡고 있는 5층 2사가 실외 운동을 하는 날이었다. 첫 순번이었다.
 시현은 평소와 다름없이 가장 선두에 서서 수용자들이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이끌었다.
 물론 평소와 다른 것은 있었다.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소름까지 끼치는 그 무엇.
 바로 수용자들이었다.
 “······.”
 후번이라 뒤에서 인솔하고 있던 교도관 최상식이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완전히 놀라 있었다.
 수용자들이 계단을 우측통행으로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칼같이.
 이게 말이 되는가?
 무슨 모범 시민이야?
 평소라면 줄이고 뭐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단을 우왕좌왕 내려갔을 것이다. 서로 잡담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런데 다들 입에 본드라도 붙였는지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섬뜩할 지경이었다.
 시험을 앞둔 독서실도 이 정도로 조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햐아······.”
 대운동장에 내려가니 더 가관이다.
 평소에는 줄 서세요, 하고 소리 지르며 요란을 떨어야 줄 서는 시늉이라도 하는 인간들이었다.
 근데 자기들끼리 척척 8열로 맞춰 선다.
 입도 뻥긋 안 하는 것도 여전하다.
 그 군기 세다는 해병대도 이렇게는 못 하리라.
 “뭐야······ 여기 군대야? 우리 군대 온 거예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지 최상식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신참이지만 그래도 나름 교도소에서 1년을 굴렀는데 이런 광경은 진짜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자자, 인원 체크 좀 합시다. 앉아번호.”
 시현이 그렇게 말하자 수용자들이 목청껏 숫자를 세며 주저앉았다. 눈을 감고 들었다면 군기가 잔뜩 든 군인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하나!”
 “둘!”
 “셋!”
 “열!”
 시현이 인원을 확인하고 TRS로 사동에 있는 박영환 주임에게 연락했다.
 “여기 5층 2사 실외 운동 총인원 80명 맞습니다. 지금부터 운동 실시하겠습니다.”
 삐익.
 FM대로 호루라기를 불었다.
 원래 귀찮아서 잘 사용하지 않는데, 이번 달 보안과장 지침에 실외 운동 시 호루라기를 사용해 지시하라는 지침이 있었던 것이다.
 “자, 운동 시작합시다. 10시 10분까지. 큰 소리 내는 거 금지, 제기차기도 하지 말고. 문 근처로 가지 말고. 그럼 시작해요.”
 시현의 말이 끝나자 수용자들이 운동을 시작했다.
 걷기, 뛰기.
 특이한 것은 관복을 벗는 수용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보통 실외 운동을 할 때 관복을 벗고 뛰는 수용자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교도관도 딱히 터치를 안 하는 부분이었다.
 근데 이 사동은 어떻게 된 게 관복을 벗는 수용자가 한 명도 없었다.
 최상식은 그저 질린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 대체 뭐예요? 수용 질서 어떻게 잡으신 거예요?”
 “그냥 그동안 너무 풀어준 것 같아서 깐깐하게 좀 잡았지.”
 “허······. 잡는다고 잡아지는 게 수용 질서가 아니던데. 진짜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안 나오네요.”
 “하하, 뭘. 그보다 오늘은 FM대로 서 있어야 할걸. 오늘 운동 시간에 보안과장님 뜬다더라.”
 “헉, 그래요? 몰랐으면 깨질 뻔했네요. 그럼 저 저쪽으로 갈게요, 선배님.”
 최상식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하더니 출입구 문 쪽으로 향했다. 다른 교도관은 보안과장이 뜬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지 반대쪽 문에 벌써 서 있었다.
 시현은 대운동장의 가장 중앙에 위치했다.
 수용자들 태도도 완벽하고 이제 지적받을 일은 전혀 없을 터였다.
 ‘그나저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직장 쪽 일은 아니었다.
 직장 쪽은 너무 무난히 잘 풀리고 있어 더할 나위 없었다.
 걸리는 건 각성 쪽 일이었다.
 시현이 스탯창을 열었다.
 
 <스탯>
 근력 101 (D)
 민첩 101 (D)
 지혜 110 (D)
 체력 101 (D)
 정신력 210 (D)
 마력 99 (E)
 
 그동안 퀘스트가 생길 때마다 부지런히 수행해서 스탯은 꽤나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이젠 E보다 D라는 글자가 더 많을 정도로.
 근데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 문제는 아무리 퀘스트를 수행해도 마력이 더 이상 오르지 않는다는 것.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지혜와 정신력은 올라도 마력이 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저 둘과 같이 움직이는 스탯이었는데 1도 오르지 않았다. 이것이 한계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문제는 이대로는 스탯창을 공개할 것이 아니면 별수 없이 등급이 E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현은 헌터협회에 스탯창을 공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이 상당히 특이한 각성자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숨겨진 무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두 번째 문제는 근력, 민첩, 체력과 관련된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별 하는 것도 없이 잘 먹기만 해도 능력이 쑥쑥 올랐는데 100을 넘어 D등급이 된 순간 퀘스트가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것도 완전 황당하게.
 
 [건강이 좀 회복되자 포아힘에게 다시 사형 집행인으로서의 피가 끓어오른다. 그의 끓어오르는 피를 달래주자.]
 [퀘스트: 인간이나 인간형 몬스터를 죽여라. 0/10]
 
 니미.
 이 아저씨는 여기가 사실상 사형 폐지 국가인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는 게 더 이상한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상이 사형수가 아니라 인간이나 인간형 몬스터라는 것이다.
 아마 시스템이 여기 환경에 맞게 변화시킨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인간을 죽인다는 건 말도 안 되고, 이제 정말 게이트에 들어가는 수밖에는 없어 보였다.
 미룰 수가 없었다.
 그러려면 라이센스를 따야 되고, 그러면 E급이고······.
 ‘······뭐, 어쩔 수 없나.’
 시현이 뺨을 긁적였다.
 그리고 이 능력치로 솔로잉은 절대 무리.
 일단 파티에 꼽사리 껴서 사냥하려면 길드에도 가입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길드라도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옛 애인 수진이가 있는 길드만은 절대로 피할 생각이었다.
 끼익.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시현의 상념을 깼다.
 대운동장의 출입문은 오래돼서 그런지 열 때마다 금속음이 났다.
 보안과장이 교정관과 부당직계장과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보안과장 김성한.
 좋게 말하면 규율에 엄격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조그만 것에도 너무 깐깐해서 직원들에게 인기는 별로 없는 보안과장이었다.
 슬쩍 보니 보안과장의 표정이 좋아 보였다.
 하긴 그의 성격이면 수용 질서 꽉 잡힌 대운동장의 모습을 보면서 흡족함을 느꼈으리라.
 “근무 중, 계속 근무!”
 보안과장이 다가오자 시현이 거수경례를 했다.
 “그래, 수고가 많다.”
 그가 웃으며 어깨를 툭툭 쳤다.
 “자네 이름이 이시현 맞지?”
 “네, 맞습니다.”
 “요즘 이 교도 자네 일 잘한다고 소문이 났더라.”
 “아, 그렇습니까? 잘 몰랐습니다.”
 “하하, 원래 자기 소문은 늦게 아는 법이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잘 근무하게.”
 “감사합니다. 계속 열심히 근무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수고.”
 보안과장 일행이 반대쪽 문으로 사라졌다.
 보안과장의 표정을 보고 느낀 것은 이번에 근평이 나쁠 일은 절대 없겠다는 것이었다.
 ‘이러다 성과 상여금 S찍는 거 아니야?’
 S가 기본급의 172.5%, 350만 원이 넘는 돈이다. 항상 C하고 B만 찍었던 시현으로서는 부러워만 했던 등급이었다.
 진짜 S 뜨면 오랜만에 소고기로 포식을 거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나저나 다음 주 월요일 연가 내야지.’
 시현은 사람이 붐빌 게 뻔한 주말보다는 여유 있는 평일에 헌터협회에 방문하려고 마음먹었다.
 
 * * *
 
 헌터협회는 삼성역 근처의 고층 빌딩이 늘어선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시현은 평일 대낮 지하철의 여유로움을 누리며 삼성역에서 내렸다.
 “한국헌터협회라······ 저긴가?”
 워낙 큰 건물이라서 그런지 초행에도 찾기는 쉬웠다.
 헌터협회의 현재 위상을 나타내는 듯 주변 건물보다 더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아웃테리어를 뽐내고 있었다.
 시현은 왠지 정장을 차려입고 왔어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회전문을 지나 1층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더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도 꽤 많았다.
 시현이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입구 쪽에 서 있던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먼저 다가와 싱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헌터 라이센스를 취득하고 싶은데요.”
 “네, 그러시군요. 저쪽 좌측에 1번 창구가 보이십니까? 저쪽 창구에서 헌터 라이센스에 관한 업무를 담당합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시현이 인사를 하고 좌측 창구 쪽으로 향했다.
 과연 새로운 헌터에 관한 것이 최중요 업무라는 것인가.
 아마 그래서 1번 창구에서 담당하는 듯했다.
 번호표를 뽑으니 42번, 순서는 다섯 번째였다.
 평일이고 또 각성자라는 것이 절대 흔한 것이 아닌데 왜 이런 번호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 때 창구에서 옥신각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계가 잘못된 거 아니요?”
 “마력 측정기는 문제없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확인하도록 사내 규정이 정해져 있습니다.”
 “허어, 참내. 그럼 내가 마력이 없다고?”
 “그렇습니다. 혹시 상태창은 보이시나요?”
 “보, 보여! 분명 봤다고! 어젯밤 술 먹고 거실에 누워 있는데 눈앞에 상태창이······.”
 “착각하셨나 보군요.”
 “그럴 리가! 진짜 봤다니까?”
 “네네, 계속 이러시면 저희 쪽에서도 강제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한국헌터협회도 엄연한 국가기관이거든요.”
 이런 일이 꽤나 흔하게 발생하는지 겉으로는 여려 보이는 여직원도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녀가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거구의 두 남자를 시선으로 살짝 가리켰다.
 그제야 아직도 술이 덜 깼는지 붉은 얼굴의 중년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엉거주춤 물러났다.
 ‘아하, 저래서······.’
 시현이 알 듯 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대망상인지 뭔지 몰라도 스스로를 각성자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저렇게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하긴 교도관 생활 하면서도 나는 남들과 다르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부류는 심심치 않게 겪어봤었다.
 두 번째 사람도 엉터리 각성자였다.
 시현은 혀를 차며 창구에 관심을 끊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길드.’
 한쪽에 길드에서 나온 사람들을 위해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시현도 들어봤던 아주 유명한 길드부터 이름도 생소한 중소 길드까지.
 아마 헌터협회를 전담으로 담당하는 담당자들이 파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적게는 한 명에서 많게는 세 명까지.
 문득 길드가 있는 곳이 분주해졌다.
 창구에서 B급 헌터 라이센스를 취득한 사람이 나온 모양이었다.
 아직 얼떨떨한 표정의 20대로 보이는 남성에게 각 길드의 담당자들이 경쟁하듯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선 신규 헌터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희 청성 길드는 대기업 계열사로서 안정적인 지원을······.”
 “저희는 업계 최고의 게이트 공략률을 자랑합니다. 항상 헌터님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중요시하며······.”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어떻습니까? 저희 길드의 간판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영업을 저렇게 하는구만.’
 시현이 부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저 갓 대학교를 졸업한 것 같은 신규 헌터는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아본 경험이 없을 것이다.
 지금 아마 우쭐하면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겠지.
 B급 헌터가 이 정도인데 A급은?
 안 봐도 뻔하다.
 공주님 대우였겠지.
 ‘······수진이 걔가 헌터뽕 맞고 자뻑질 할 만하네.’
 인정.
 시현이 나지막이 실소를 흘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신규 헌터가 길드를 선택했는지 다른 담당자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저 표정들을 보아하니 계약 건당 성과급이 본인들의 수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았다.
 그 신규 헌터는 결국 대기업 산하 길드와의 계약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요즘 같은 때 안정성을 좇는 것이 가장 무난한 선택이긴 했다.
 띵동.
 벨이 울리며 창구에 42번이라는 숫자가 깜빡였다.
 시현이 옷매무시를 한 번 가다듬고 창구 쪽에 가서 앉았다.
 “안녕하세요.”
 여직원이 몸에 배인 친절한 미소를 띠었다.
 “안녕하세요. 헌터 라이센스를 취득하고 싶어서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마력 측정기로 마력을 측정하겠습니다. 혹시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도 있으니 두 번 측정하겠습니다.”
 “그냥 앉아 있으면 되나요?”
 “네, 편하게 앉아계세요.”
 여직원이 스피드건 같이 생긴 기계를 들어 시현 쪽을 향했다. 저 안에 아마 마정석이 들어 있을 것이다.
 삐익.
 여직원이 빨간 버튼을 누르자 모니터에 숫자가 떴다.
 
 -99
 
 “1차 측정 99. 다시 한 번 측정하겠습니다.”
 삐익.
 
 -99
 
 “2차 측정도 99네요. 아, 정말 아쉬우시겠지만 1이 부족하여 E급 헌터의 기준을 충족하시네요.”
 시현은 내심 속이 쓰렸다.
 은연중에 1 정도의 오차가 있어서 100이 나오기를 바랐는데 저놈의 기계는 그런 오차는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한 모양이었다.
 “1차인데 어떻게 D는 안 되나요? 사실 99나 100이나 그렇게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은데요.”
 “죄송하지만 규정은 규정이라서요. 얼핏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그런 부분이 헌터분들에게는 목숨이 달린 문제일 수도 있답니다. 게다가 생각하시는 만큼 그 1 차이가 절대 작은 차이가 아니랍니다.”
 여직원이 미소를 보였다.
 “그런가요?”
 “네, 등급이 한 단계 바뀐다는 것은 차이가 꽤 크답니다. 같은 등급의 100 차이보다 등급을 가르는 1 차이가 더 크다고 얘기하시는 헌터 분들도 계세요. 물론 딱 정해진 수치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크다는 것만큼은 말씀드릴 수 있어요.”
 E에서 D로 올라갈 때 그렇게 큰 뭔가가 증가했던가?
 레이드를 뛴 적이 없어서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일상생활에서는 각성의 힘을 제대로 발산하면서 다닌 적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죠. E급 라이센스라도 발부해 주세요.”
 “네, 당장 발부해 드리겠습니다. 가져오신 반명함판 사진 1장이랑 주민등록증 제출해 주시고요. 여기 이름하고 연락처 적어주시고 체크표시 한 데다가 서명을 해주시면 됩니다.”
 시현이 여직원이 건네준 문서에 서명을 하는 동안, 여직원이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네, 이시현 님, 확인됐고요.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각성 직업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직업은 전산망에 등록이 필요하거든요.”
 직업이라.
 현재 시현은 직업창에 2개가 떠 있었다.
 
 직업: 간수(메인), 사형 집행인(서브)
 
 물론 2개 중에 어느 것도 솔직히 얘기할 생각은 없었다.
 “근데 말이죠.”
 “네.”
 “만약에 직업이 2개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걸 말해야 되나요?”
 모니터를 보고 있던 여직원이 티가 날정도로 움찔했다.
 “네? 지금 뭐라고······? 직업이 2개라고요? 멀티 직업이요?”
 창구 뒤쪽에서 일하고 있던 헌터협회의 직원들도 대놓고 뚫어져라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옆을 슬쩍 살피니 길드의 담당자들이 있는 곳은 별 반응이 없었다.
 분명히 들렸을 텐데.
 ‘허, 이것 봐라?’
 시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길드는 모르는데 헌터협회의 직원들만 아는 정보라.
 국가에서 관리하는 극비 정보일지도 몰랐다.
 멀티 직업이란 게 그 정돈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각성자들의 상태창을 볼 수 없으니, 시현은 직업이 2개인 각성자도 제법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반응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저건 뭔가 희귀한 보호종이라도 본 표정이다.
 “하하, 제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요. 그냥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하나 그게 궁금하더라고요.”
 시현이 그렇게 말을 꺼내자 주변 분위기는 순식간에 하긴 E급 주제에 그러면 그렇지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네에······ 글쎄요. 제가 알기로 각성자분들은 직업이 모두 하나라고 알고 있거든요. 제가 일해본 바로는 실제로도 그렇고요.”
 여직원이 얼버무렸다.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아, 제 직업 말씀드려야 된다고 했죠?”
 “네.”
 “용병입니다.”
 시현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직업을 말했다.
 힐러나 버퍼 쪽은 죽어도 안 될 것이고 딜러 중에서 용병이 제일 만만한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 용병이시군요. 알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헌터 라이센스를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한 3, 4분 정도 기다렸을까.
 여직원이 막 나온 헌터 라이센스를 시현에게 건네주었다.
 헌터협회······ 일 처리 하나는 빠릿빠릿해서 맘에 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았다.
 대체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길드에도 그런 정보가 새지 않을까.
 “정식으로 헌터 되신 거 축하드려요. 한국헌터협회 홈페이지에 라이센스 번호로 가입하시고 필수 사이버교육 12시간 이수 꼭 하시고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여직원에게 답례의 인사를 하고 시현이 돌아섰다.
 그리고 길드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B급 헌터에게 열렬하게 영업을 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담당자들은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다.
 꼭 시현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처럼.
 ‘E급은 길드가 갑이라는 거지? 헌터가 을이고.’
 저건 먼저 찾아가서 계약을 구걸하라는 암묵적인 표시나 다름없었다.
 퀘스트를 위해 자존심을 꺾고 그래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다행히 한 길드의 담당자가 시현 쪽으로 다가왔다.
 수염을 다듬지 않아 다소 지저분한 얼굴에 다림질을 제대로 하지 않아 구겨진 옷차림의 남자였다.
 나이는 대략 50쯤 되어 보였다.
 그가 악수를 청했다.
 “축하드립니다. 은혜 길드의 임상혁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시현입니다.”
 “길드 가입에 관심 있으시면 저쪽에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임상혁이 2층을 가리켰다.
 헌터협회 건물 안에 입점해 있는 카페 체인점이었다.
 “네, 뭐. 좋습니다.”
 시현이 흔쾌히 승낙했다.
 카페로 자리를 옮겨 앉은 그들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다시 얘기를 나눴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네?”
 “길드들의 반응이 너무 냉랭해서 혹시 기분 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대충 예상해서 괜찮습니다.”
 상혁이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중, 대형 길드들은 이미 E급 헌터의 자리는 꽉 찬 지 오랩니다. 하기야 어차피 그런데 가봐야 E급은 짐꾼 역할밖에 못하지요.”
 “짐꾼이라는 것이 정확히 뭘 하는 겁니까?”
 “뒤에 물러나 있다가 상위 헌터들이 사냥을 다 해놓으면 몬스터들이 드랍한 마정석이나 아이템을 무게 감소 마법이 걸린 커다란 자루에 넣고, 게이트를 클리어할 때까지 계속 따라다니는 역할입니다.”
 “하긴 상위 헌터들이 일일이 아이템을 줍고 다니는 것도 모양이 좀 우습긴 하군요.”
 “예, 뭐 납득 가는 역할 분배기는 한데 아무래도 짐꾼 역할을 맡아야 할 헌터들은 썩 기분이 좋지는 않지요.”
 시현이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아마 은혜 길드라고 했나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은혜는 제 딸 이름입니다.”
 “······그런가요? 그러면 혹시 길드장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은혜 길드의 장을 맡고 있습니다.”
 시현이 약간 놀란 눈을 했다.
 남루한 옷차림을 보고 영세한 길드라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길드장이 직접 헌터협회에 영업을 하러 나왔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음······ 네. 어쨌든 은혜 길드는 좀 다릅니까? E급 헌터의 역할이요.”
 “역할 말입니까.”
 임상혁이 서류 가방에서 이면지 한 장과 펜을 꺼냈다.
 그러고는 원을 두 개 크게 그렸다. 왼쪽 원에는 A, B, C라고 썼고 오른쪽 원에는 D, E라고 적었다.
 “상, 중급 게이트에서 E급 헌터는 딱히 할 일이 없어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짐꾼 역할밖에 못 하죠.”
 상혁이 펜 끝으로 왼쪽 원을 톡톡 두드렸다.
 그가 이번에는 오른쪽 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하급 게이트에서는 E급 헌터도 사냥에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저희 길드는 오직 하급 게이트만 맡아서 일을 합니다.”
 “음, 그러니까 은혜 길드에 들어가면 사냥도 할 수 있다?”
 시현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E급 헌터 입장에서는 편하게 돈 버는 게 더 낫지 않나요?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을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우선 이미 중, 대형 길드의 E급 헌터의 자리는 다 차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요. 특별한 이유라······ 수입이겠죠, 역시?”
 “수입이요?”
 “짐꾼은 그냥 공략한 게이트 등급에 따라 정해진 보수만 받습니다. 근데 사냥을 하면 본인의 정당한 몫을 분배받을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저희 길드는 그날 레이드의 모든 수입물을 우선 공격대 멤버의 수로 나눕니다. 100이 수입이고 공격대 멤버가 4명이라면 25씩 먼저 분배받는 셈이지요. 마지막으로 길드와 수입을 나눕니다. E급 헌터는 4:6, D급은 5:5 이런 식으로요. 그러니까 E급 헌터는 10의 최종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셈이죠. 길드마다 배분 방법이 다 다릅니다만 어쨌든 저희 길드는 이렇게 합니다. 어떤가요, 이해가 좀 가십니까?”
 “아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시현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시현은 퀘스트 해결을 위해서 사냥이 필요했다.
 사냥만 할 수 있다면 영세한 길드든 뭐든 딱히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중, 대형 길드에 가면 짐꾼 역할밖에 못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래저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혹시 계약금은 있습니까?”
 “씁쓸하시겠지만 E급 헌터의 계약금을 주는 곳은 어떤 곳도 없습니다.”
 “그렇군요······ 아, 맞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표정으로 시현이 말을 꺼냈다.
 “말씀하시죠.”
 “제가 평일에는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주말에만 길드 일을 할 수 있나요?”
 “실례지만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교도관입니다.”
 “교도관이라······ 그럼 공무원 아닙니까?”
 “맞습니다.”
 “공무원은 겸직이 불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상혁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원칙적으로는 맞습니다. 공무 외의 영리 업무를 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 알게 모르게 부업을 하시는 분들도 은근히 있습니다. 술집에서 일하시는 분, 대리 기사 하시는 분, 세탁소에서 일하시는 분, 신문배달 하시는 분······ 뭐, 다양하지요. 주로 부인 명의로 사업을 하시거나 4대 보험 안 되는 알바 같은 걸 많이들 하시죠.”
 “그러니까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그렇지요.”
 “그럼 길드원에 정식으로 등록하지 않고 주말 시간제 알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보수는 현찰로 드리면 안 걸리죠?”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드리죠. 그런 사정이라면 주말에만 나오세요. 그리고 사실 E급 헌터분 중에는 투잡 뛰시는 분이 꽤 됩니다.”
 “그런가요?”
 “벌이가 애매해서요. 맞벌이면 모르는데 외벌이라면 애 하나 키우기도 빠듯하지요. 그러니까 투잡들 뛰시는 거고.”
 “그 말을 들으니까 좀 안심이 되는군요. 너무 민폐가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하하, 별말씀을. 그리고 원래 저희 길드는 주로 주말에 일한답니다. 길드에 대학생이나 직장인이 많아서요. 그럼 이제 계약서 좀 보시겠습니까?”
 “네.”
 상혁이 계약서를 꺼내 시현에게 건넸다.
 “찬찬히 읽어보세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질문 주시고요.”
 시현이 천천히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계약서라는 것은 왜 이리 복잡한지 모르겠다. 더 간단하면 좋을 텐데.
 처음에는 진지하게 읽던 시현도 나중에는 그냥 대충 읽어 넘겼다.
 어차피 악성 계약서로 헌터들을 등쳐먹었다가는 이 바닥에서 장사 오래 못 할 테니 사기 칠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읽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계약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네, 계약하겠습니다.”
 이미 마음을 결정했기에 딱히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하하, 잘 결정하셨습니다. 앞으로 잘 해봅시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시현은 헌터로서의 첫걸음을 밟았다.
 
 * * *
 
 “저 건물인가?”
 월요일에 계약을 맺은 후, 그 주의 토요일에 시현은 은혜 길드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위성 지도 앱이 켜진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금천구 시흥동 로얄빌딩.
 맞다.
 그런데 이름은 로얄인데 정말 낡아빠진 5층짜리 건물이었다. 검은 때가 덕지덕지 낀 것이 외벽에 페인트칠도 안 하는 모양이었다. 곳곳에 가는 금도 가 있다. 진지하게 안전이 조금 걱정될 정도였다.
 ‘엘리베이터도 없고.’
 건물 안으로 들어온 시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은 실로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하긴 이런 낡아빠진 건물에 엘리베이터까지 기대한 것이 잘못이지.
 하필 은혜 길드는 5층이었다.
 시현은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올랐다.
 다행히 높은 계단은 아니라 생각보다는 빨리 5층에 도착했다.
 ‘당기시오’라는 문구가 붙여진 유리문 위에 <은혜 길드>라는 글자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여기까지 올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도착하니 작은 떨림이 일었다.
 마치 첫 출근을 앞두었을 때의 떨림과도 같았다.
 시현은 잠시 멈춰 호흡을 가다듬은 후 유리문을 열었다.
 안에는 길드장인 임상혁과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눈이 가늘게 찢어지고 콧날이 날카로운 남자였다.
 나이 대는 대충 서른 안팎 정도로 되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시현이 먼저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시현 씨, 여기 앉으세요.”
 상혁이 응접 테이블 옆의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시현이 채 앉기도 전에 눈이 가는 남자가 짐작할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와, 신참이에요?”
 “그렇습니다.”
 “야아, 우리 길드장님 드디어 한 분 낚으셨네.”
 “거참 민준 씨, 초면부터 무슨 실례되는 말을 해.”
 “에이, 사실이잖아요. 어쨌든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민준입니다. D급 헌터이자 기사고 우리 길드의 메인 딜러이자 메인 탱커라는 복잡한 역할을 맡고 있죠.”
 “저도 반갑습니다. 이시현입니다. E급 헌터고 용병입니다.”
 민준은 E급 헌터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상대를 경시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것이 시현의 민준에 대한 첫인상을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저는 서른입니다.”
 “저랑 동갑이시네요. 저도 서른입니다.”
 “생각보다 동안이네요. 저보다 어린 줄 알았는데. 우리 편하게 말 놓읍시다.”
 민준이 바로 말을 놓자고 말했다.
 상당히 스스럼없는 성격인 듯했다.
 “그러죠.”
 “좋네. 이래야 서로 편하지, 안 그래, 시현아?”
 “민준 씨, 초면부터 너무 조심성 없는 거 아니야?”
 “아이, 뭐 어때요. 우리 길드는 진짜 가족이잖아요, 가족. 가족적인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여기서 뼈를 묻으려고 했는데.”
 “민준이 말이 맞습니다. 나이도 훨씬 많으신데 편하게 말씀 놓으시죠. 불편합니다.”
 시현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이고, 그렇게까지 얘기하면 그럼 그렇게 할게. 시현 씨.”
 상혁이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친해지기 전에는 쉽게 편하게 대하는 것이 어려운 성격인 것 같았다.
 “환영한다, 다섯 번째 가족.”
 어느새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 한 컵을 따른 민준이 시현의 앞에 놓으며 입을 열었다.
 “다섯 번째?”
 시현은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길드의 구성원은 원래 4명이었고, 시현이 네가 들어와서 5명이 되었다는 뜻이야.”
 “뭐?”
 아무리 영세하다고 하지만 길드원이 겨우 5명? 아니, 자신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4명?
 납득이 안 가는 숫자였다.
 “하하, 믿어지지 않는가 본데 사실이야. 우리 길드장님 보증 한 번 잘못섰다가 쫄딱 말아먹고, 요즘 간신히 일어나 보려는 판국이거든. 빈곤 길드로 소문 다 났는데 누가 들어오겠어.”
 “거참 민준 씨, 나쁜 일은 왜 또 끄집어내나?”
 상혁이 아픈 곳을 찔린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아니, 길드장님이 그런 말씀 하실 입장이에요? 분명 이런 사실 하나도 말 안 하고 시현이 낚았을 텐데.”
 민준이 빙글거렸다.
 “그게······ 내 꼬락서니만 딱 봐도 우리 길드 가난한 건 다 안다고. 에고, 그래. 이런 얘기 미리 안 해서 미안하네, 시현 씨.”
 상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길드원 수가 적어서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만······ 저는 사냥만 할 수 있으면 별 상관 없습니다.”
 “그래, 그래. 잘 들어온 거야. 여기는 빈곤하지만 가족적인 정이 있거든. 이런 화목한 분위기의 길드 또 없다, 시현아.”
 시현이 민준이 따라준 냉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또 다른 두 분은?”
 “그 두 명은······ 어? 마침 오나 보다.”
 유리문이 열리며 한 인영이 들어왔다.
 “우리 길드명 아가씨 오셨네.”
 들어온 사람은 딱 달라붙는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은 갸름한 얼굴의 여성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지적인 느낌을 가진 미인이다.
 단화를 신었는데도 키가 170센티는 넘어 보였다.
 “은혜야, 새 가족님 들어오셨다.”
 시현의 시선이 저절로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모델처럼 늘씬하고 피부가 하얀 미녀를 보면 누구라도 눈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독특한 지성미까지 있는 얼굴이다.
 ‘리얼 톱급이네······.’
 시현이 활동하는 엠파크 불타는 게시판에는 예쁜 여자의 사진을 올려놓고 ‘이 정도면 과탑 가능한가요?’ 하는 글이 하루에 몇 번씩 올라온다.
 그러면 ‘과탑 가능’, ‘이 정도는 동네에 널린 얼굴이죠’, ‘조별 과제에서는 가능’, ‘저 정도면 캠퍼스 톱이죠’라는 식으로 댓글을 달며 노는 것이었다.
 시현도 댓글은 달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남자인지라 글을 클릭하여 종종 눈 정화를 하곤 했던 것이다.
 근데 온라인이 아닌 현실에서 그런 미인을 보게 된 것이다.
 저도 모르게 저런 여자와 사귀면 길거리 남자들이 부러움에 눈 돌아가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늘 친절한 모습이던 상혁이 평소와는 다르게 꺼림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제야 초면부터 말없이 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실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지한 시현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죄송합니다.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이시현이라고 합니다. E급 헌터로 이번에 이 길드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D급 헌터, 임은혜라고 해요.”
 목소리도 듣기 좋은 톤에 깨끗한 소리였다.
 매력도가 하나 상승했다.
 거기다 D급 헌터라.
 부녀지간에 모두 각성자인 흔치 않은 집안인 모양이었다.
 “어때? 우리 길드 들어오길 잘했지 않아?”
 민준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끼어들었다.
 “얼굴도 끝내주게 예쁘지, 몸매도 완전 모델 몸매지, 그런데다 서울대 경제학부 재학 중인 재원이시거든? 거기다 각성자. 이런 희귀종은 우리 길드에서밖에 못 만나요.”
 뭐라? 갓울대?
 시현은 서울대에는 미녀가 없을 것이다, 라는 편견을 급히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매력도가 또 하나 상승했다.
 “무슨 소리야. 나야 원래 잘 들어왔다고 생각했지. 나 사람 많은 거 진짜 싫어해. 이런 분위기 너무 좋다.”
 시현이 은혜를 바라보면서 다소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온통 남탕인 직장에서 일해본 남자들은 알 것이다.
 그 특유의 칙칙한 분위기를.
 하물며 교도소는 매일 거의 100% 남자만 보며 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직한 게 아니라 교도소가 첫 직장이라서 시현은 늘 그런 분위기에서만 근무해 본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섞인 직장은 어떤 분위기일지 가끔 궁금하기도 했다. 뭔가 화기애애함이 섞여서 근무 환경이 좀 부드럽지 않을까 하는.
 그런 이유로 주말이라도 남탕이 아닌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 것은 본능적인 희망이었다.
 “민준 오빠랑 서로 말 놓은 거 보니까 동갑이신 것 같네요?”
 은혜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그럼 저한테도 편하게 말 놓으세요. 저는 시현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이거 그건가.
 설마 성격까지 좋은 건가.
 그러면 진짜 완전첸데······.
 시현이 조금 어색한 얼굴을 했다.
 “네에······ 그럼 그렇게 할까요. ······아니, 그렇게 할게.”
 “반가워요, 시현 오빠. 우리 길드에 들어오셔서 진짜 고마워요. 한 분 한 분이 너무 소중하거든요.”
 표정을 보니 예의로 하는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길드 상황이 열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다섯 명만 더 모으면 우리도 D급 게이트 되네요.”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덧붙인다.
 D급 게이트는 공략률이 100%나 다름없을 정도로 너무 쉬워서 아무에게나 허가를 내주는 E급 게이트와는 달랐다.
 헌터협회에서도 나름 꼼꼼하게 공략률을 따져봐서 허가를 내주는 것이다.
 보통 D급 게이트의 허가를 얻으려면, 헌터의 등급에 따라 물론 차이가 있지만 C급 헌터 한두 명, D급 헌터 여러 명을 포함한 열 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했다.
 은혜 길드는 물론 그 인원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다른 소형 길드와의 합동 공략으로 게이트의 공략을 신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합동 공략 신청은 어디까지나 차순위였다.
 헌터협회는 일단 한 길드로 된 공격대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팀워크나 이런저런 면에서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 길드는 D급은 가뭄에 콩 나듯이 따내고, 보통은 E급 게이트만 주야장천으로 돌고 있는 판이었다.
 “에이, 길드원 모이는 속도가 이 정도면 몇 년은 걸리겠다.”
 민준이 말했다.
 “아녜요. 숫자가 늘어날수록 점점 빨리 모일 거예요. 그게 세상의 이치예요.”
 “그래, 좋게 좋게 생각하라고. 근데 재민이는 왜 안 오지? 빨리 오는 게 그 녀석의 유일한 장점인데.”
 “아, 연락 받았는데 재민이는 몸살에 걸려서 오늘 못 온대요.”
 “야아, 근데 그걸 은혜 너한테만 연락해? 길드장님한테도 연락 안 하고? 개념 상실이네. 어린놈이 벌써부터 예쁜 누나만 밝히는구만.”
 “오빠는 말을 뭐 그렇게 해요. 그럴 수도 있죠.”
 “너무 그렇게 받아주면 응석만 부려서 사회성 떨어져. 안 그래도 올해 대학 들어간 애가 벌써부터 대학에서 아싸라고 울상이더만.”
 “그건 재민이 잘못이 아니죠. 성격이 원래 내성적인 걸 어떻게 해요? 주변에서 어느 정도 이해해 줘야죠.”
 “자자, 그럼 모일 멤버도 다 모였는데 이제 그만 레이드 얘기 해야지.”
 상혁이 주의를 환기시키며 분위기를 바꿨다.
 그러면서 화이트보드를 응접 테이블 정면에 끌고 왔다.
 “시현 씨는 신참이라 레이드에 대해 아직 막연하고 잘 모를 거야. 내 찬찬히 설명해줄 테니까 잘 듣게.”
 상혁이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포지션.
 은혜 길드는 꽤 특이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길드장 임상혁이 C급 성직자로 역할은 힐러.
 임은혜가 D급 마법사로 역할은 원거리 딜러 겸 커맨더.
 강민준이 D급 기사로 역할은 메인 딜러 겸 메인 탱커.
 이 자리에 없는 고재민이 E급 궁수로 역할은 원거리 딜러.
 근접 딜러 한 명으로 공격대를 꾸려 나갔다는 게 황당했다. 그것도 탱커를 겸하고 있다니.
 사실상 E급 게이트만 공략하는 길드이기에 가능한 구성이었다.
 그나마 이번에 시현이 들어오면서 포지션의 균형이 좀 맞았다. 앞에서 탱킹하면서 어그로를 끌어줄 인원이 한 명 늘었으니.
 그리고 다음으로 길드에서 꼭 지켜야 할 규칙들을 설명했다.
 첫째, 함부로 독단적인 행동은 절대 금물. 돌발 상황 시에는 커맨더의 지시에 따를 것.
 “근접해서 전투하는 분들은 눈앞의 적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솔직히 정신이 없어요.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제가 전황을 파악해서 중요한 상황에 지시를 내려 드리는 거죠.”
 “레이드는 어디까지나 팀플레이야. 개인만 생각하면 그 팀은 오합지졸이 되지. 그런 공격대는 머지않아 몬스터의 한 끼 식사가 되기 딱 좋지. 항상 팀원을 자신의 몸처럼 생각해.”
 은혜와 민준이 추가로 설명했다.
 둘째, 장비에는 절대 돈 아끼지 마라.
 “왜 그거 있잖아. 대형차 타면 살 수 있는 사곤데 경차면 그냥 죽는 거. 레이드도 똑같아. 레어 방어구면 살 수 있는데 돈 아낀다고 매직방어구 쓰다가 아차 하는 사이에 골로 가는 거지. 이거 저항력은 있어도, HP 있는 게임 아니다. 아무리 하찮은 게이트라도 급소를 당하면 힐도 못 받고 죽을 수도 있다. 꼭 명심.”
 “무기와 방어구가 제일 중요하지만 되도록 다른 장비도 레어 이상으로 맞추길 권해 드려요. 이상이라고는 말했지만 유니크는 워낙 비싸니······ 사실 의미 없지만요.”
 이번에도 민준과 은혜가 설명을 덧붙였다.
 셋째, 한국헌터협회의 공식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몬스터에 관한 정보를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숙지할 것.
 “손자병법의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구절, 너무 유명하니까 아시죠? 모르는 적을 상대할 때하고 아는 적을 상대할 때하고는 삶과 죽음을 가를 만한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A급 게이트 같은 데서 예상치 못한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나면 적지 않은 헌터들이 목숨을 잃는 거고요.”
 “몬스터의 공격 방식이나 약점은 필히 숙지해야 돼. 물론 새로운 몬스터가 뜨면 소용없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직장 일 때문에 바쁜 건 알겠지만 꼭 시간 내서 공부하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시현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다 중요하고 납득이 가는 규칙이었다.
 우선 이른 시일 안에 적금을 깨서라도 장비부터 맞춰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오늘 레이드를 직접 경험해 보도록 할까? 경험보다 최고의 스승은 없지.”
 “네? 오늘 바로요?”
 시현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냥 맨몸으로 오라고 하길래 오늘은 레이드 같은 것은 없을 줄 알았던 것이다.
 “왜, 걱정되나? 누구나 다 처음에는 미숙하게 마련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팀원들이 열심히 받쳐주겠네.”
 “아까 멤버 한 명 몸살로 안 왔다고······.”
 “재민이? 걔 도움 하나도 안 돼. 어설픈 궁수라서 밀집한 적 아니면 제대로 맞추지도 못한다니까?”
 민준이 말했다.
 “아니, 솔직히 저도 너무 가고 싶습니다. 근데 장비가······.”
 “장비가 왜?”
 “장비가 딱히 없어서.”
 “각성할 때 따라온 장비 있을 것 아닌가? 내가 미리 얘기 안 한 것도 있으니 오늘 하루는 그 장비로 레이드에 참가하게나.”
 “저기 길드장님······ 거짓말이 아니라 인벤토리에 진짜 무기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노말.”
 물론 레전더리도 있었지만 그건······.
 시현이 시선을 슬쩍 돌렸다.
 “허, 무기밖에? 그것도 노말?”
 “네.”
 “그런 일이 있구만. 이것 참. 게이트에서 사냥하다 떨어진 아이템 주워다 써야 하나?”
 “아버지, 그건 좀 그런데요.”
 은혜가 손을 들어 반대했다.
 “길드원의 안전이 가장 중요한데 그렇게 어설프게 게이트에 들어가지는 말죠. 이번에 따낸 게이트, 내일 공략해도 되는 거 맞죠?”
 “그래.”
 “그럼 오늘은 시현 오빠 장비 맞추고, 내일 공략하는 걸로 하죠. 시현 오빠도 괜찮죠?”
 “나야 그게 좋지.”
 시현이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다들 동의하세요?”
 “찬성.”
 “그렇게 하자.”
 민준과 상혁이 동의했다.
 “시현 오빠, 헌터 아이템 판매점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아니, 잘 모르는데.”
 “한국헌터협회 건물 뒤편에 있어요.”
 “그렇구나, 고마워.”
 “뭘요. 주말에도 저녁 6시까지 영업하니까 지금 출발하시면 괜찮으실 거예요.”
 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그럼 내일도 이 시간에?”
 “그렇게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죠.”
 
 * * *
 
 “눈물 나네.”
 장비를 맞추고 집에 돌아온 시현이 중얼거렸다.
 공무원 월급이 세간의 인식만큼 박봉은 아니라지만 그래봤자 월급쟁이의 사정이야 뻔하다.
 근무를 시작한 이후 과한 지출을 한 적이 없었다.
 월 100만 원씩 꼬박꼬박 저축했다.
 빡세게 모아 전세라도 구해서 결혼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3천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모았다.
 근데.
 ‘싼 게 몇 백만 원?’
 비싼 것은 몇 천만 원 대에 더 비싼 것은 억대도 있었다.
 전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확인했을 때는 구입할 마음이 없었기에 와 닿지 않았는데 직접 사려니 손이 덜덜 떨렸다.
 급한 대로 일단 방어구와 무기만 레어로 구입했는데도 모아둔 돈의 절반가량이 증발되었다.
 ‘······모으는 건 힘들어도 쓰는 건 한순간이라더니.’
 그렇다고 영구적인 것도 아니다.
 무상 AS가 되는 것도 아니다.
 부서지고 망가지면 또 비싼 돈을 주고 새로운 장비로 바꿔야 했다.
 ‘열심히 벌어야지, 뭐.’
 당장 내일부터 힘내서 레이드를.
 시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다음 날 길드에 도착하자 시현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이미 모여 있었다. 아프다는 고재민만 제외하고.
 “자자, 빨리 출발합시다. 저는 일 빨리 끝내고 저녁에 한잔할랍니다.”
 민준이 일행을 재촉했다.
 1층 주차장 구석에 낡은 승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지금은 단종된 구식이다.
 설마 했는데 길드장 상혁이 운전석을 열었다.
 어지간히 영세하긴 한 모양이다.
 민준이 빈곤 길드라고 한 게 과장이 없는 것 같았다.
 “어디예요?”
 “아마 하남시 창우동이던가?”
 상혁이 핸드폰으로 주소를 다시 확인하고 내비를 찍었다.
 시동을 켜자 거친 엔진 소리가 힘겨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서울이 아니네요?”
 “우리처럼 서울에 있는 길드는 수도권이 담당 영역이네.”
 시현이 묻자 상혁이 대답했다.
 거리는 가까웠다.
 차 안에서 나름대로 레이드에 관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거의 도착했다고 상혁이 말했다.
 게이트의 장소는 도심 속의 공원인 것 같았다.
 평소에는 산책을 하는 사람들로 제법 붐볐겠지만, 헌터협회에서 진입로에 바리케이드를 쳐서 통행을 금지한 상태였다.
 상혁의 승합차가 공원 주차장 가까이 진입하자 헌터협회 직원으로 보이는 키 크고 마른 남자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은혜 길드에서 왔습니다.”
 “잠시 확인 좀 하겠습니다. 헌터 라이센스 제출해 주시죠.”
 “네, 여기.”
 상혁이 라이센스를 보여주자 남자가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차 세우시고 들어가시죠. 게이트는 저쪽 철봉 근처에 있습니다. 수고하십쇼.”
 남자가 손으로 게이트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시현 일행이 차에서 내렸다.
 개인의 장비는 모두 인벤토리에 들어 있으니, 들고 갈 것은 마정석과 아이템을 담을 큰 자루면 충분했다.
 시현이 자청해서 자루를 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신입으로서 절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다.
 “······저게 게이트.”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봤지만 눈앞에서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게이트가 푸른 빛깔로 빛나고 있다.
 하급 게이트는 푸른빛, 상급 게이트는 회색빛을 띤다고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마력 측정기로 정확한 측정을 못 하더라도 대충 눈어림으로 게이트의 등급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게이트의 오픈 데이는 2주~3주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라, 범세계적으로 면밀한 조사 끝에 내려진 결론이라 거의 확실했다.
 그 전에 게이트를 공략해야 했다.
 게이트가 열리면 그 주변 시민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게이트에 돌입할 수는 없었다.
 한번 들어가면 통로가 봉쇄되어 그 게이트의 보스를 공략하기 전까지는 나올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헌터협회에서는 그 게이트를 공략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때 게이트의 공략권을 허가했다.
 “먼저 장비부터.”
 초심자인 시현이 있기에 민준이 친절히 설명했다.
 시현이 인벤토리에서 장비를 꺼내 입기 시작했다.
 갑옷과 투구는 오크 가죽으로 만든 경갑.
 원래 오우거나 트롤의 가죽으로 된 것을 사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 구입하게 된 것이다.
 중갑은 비싸고 답답한 느낌이 들어 선택에서 제외했다.
 무기는 평범한 롱소드.
 단단함이나 예리함이 레어의 평균 정도 되는 무기였다.
 좋게 말하면 균형 잡힌 거고 나쁘게 말하면 무색무취의 무기였다.
 “경갑?”
 민준이 물었다.
 그는 나름 튼튼하게 보이고 손질이 잘 된 중갑을 입고 있었다. 하긴 그동안 파티에서 혼자 탱킹을 했었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리라.
 “중갑은 비싸고 답답해서.”
 “잘 피할 수 있으면 그것도 괜찮지.”
 “그건 뭐야?”
 시현이 민준의 무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1m가 훌쩍 넘어 보이는 길고 큰 검이었다.
 “클레이모어. 내가 힘이 좀 세.”
 민준이 피식 웃었다.
 클레이모어는 양손으로 사용하는 대검의 대표 격인 무기였다.
 “자루는 나에게 주게.”
 상혁이 말했다.
 힐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이었지만 파티원이 다치지만 않으면 크게 할 일이 없었다.
 특히 가장 간단한 E급의 게이트만 공략했던 은혜 길드에서는 힐러인 상혁이 짐꾼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슬슬 들어가죠.”
 흰색 로브와 나무 지팡이를 든 은혜가 입을 열었다.
 
 * * *
 
 게이트의 안은 어두침침한 동굴이었다.
 다행히 높이는 낮지 않아서 성인 남성이 서서 걸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더 낮았다면 몸을 놀리는 것이 영 불편했을 것이다.
 은혜가 라이트 마법으로 불을 밝혔다.
 시야가 환해졌다.
 “모든 E급 게이트가 다 이런 구조인가요?”
 “아니, 다양하다네.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도 그 게이트가 어떤 구조인지 모르지.”
 시현의 물음에 상혁이 대답했다.
 “이거 박쥐 아니면 거미 아닌가? 동굴에 사는 E급 몬스터라면 딱히 생각나는 게 그것밖에 없네.”
 민준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삭삭 소리가 났다.
 거미가 동굴을 기는 소리였다.
 “저게 거미야?”
 시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무슨 놈의 거미가 성인 남자의 허벅지까지 올라올 정도로 크다니.
 아직 몬스터에 대해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던 그로서는 몹시 생소하고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젠장, 화염거미네.”
 민준이 혀를 낮게 찼다.
 그러고 보니 거미의 몸통과 다리가 불처럼 붉었다.
 “그게 왜? 힘든 몬스터야?”
 “은혜가 불쪽에 치중한 마법사거든. 근데 쟤네들 화염 저항력이 높아. 화력 지원은 기대 안 하는 게 좋겠다.”
 “뭐?”
 “우리끼리 뭐 빠지게 굴러야 된다는 뜻이지.”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은혜가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 약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쾅.
 그래도 일단 다가오는 십여 마리의 화염거미에게 은혜가 파이어 볼을 캐스팅하여 날렸지만 소리만 요란할 뿐 별 대미지를 주지 못한 것 같았다.
 민준이 천천히 클레이모어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너 오른손잡이 맞지?”
 “응.”
 “난 왼손잡이니까 내가 왼쪽이다. 시현이 네가 오른쪽.”
 “알았어.”
 “하하, 너무 긴장하지 마라. E급이야, E급. 그동안 난 혼자서 근접 딜링, 탱킹 다 했다. 거미와의 접촉만 좀 조심하라고.”
 민준이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시현의 어깨를 툭 한 번 두드리고는 말을 이었다.
 “셋 하면 간다. 하나, 둘, 셋!”
 시현과 민준이 거의 동시에 화염거미 무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시현이 롱소드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어설픈 동작이었다.
 하긴 일반인이 검도를 배운 것이 아니라면 검을 쥐어볼 일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동작과는 다르게 위력만은 확실했다.
 그것이 각성자의 힘이었다.
 끼억!
 화염거미가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녀석의 몸통이 세로로 베어지며 불쾌한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
 시현이 놀란 눈으로 롱소드를 쥔 손을 응시했다. 첫 공격부터 너무 깨끗하게 들어가서 의외였던 것이다.
 운이 좋았나 싶어 이번에는 횡으로 다가오는 화염거미를 향해 롱소드를 휘둘렀다.
 챠악!
 끼으억! 이번에도 롱소드는 깨끗하게 화염거미의 몸통을 갈랐다.
 ‘뭐 이렇게 쉬워?’
 처음에 긴장했던 것이 어이없을 정도였다.
 오른쪽을 흘끔 보니 민준은 벌써 다섯 마리의 화염거미를 도륙하고 있었다.
 “시현 오빠, 이제 네 마리 남았네요. 조금만 더 파이팅이요.”
 은혜가 응원했다.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E급 게이트······.
 주말의 꿀알반데?
 
 
 Chapter 3
 
 
 “하암······.”
 야근 순번이 돌아와 사동에서 근무하고 있던 시현이 졸린 듯 하품을 했다.
 공무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인터넷 게시판에서 공시생들이 그렇게 얘기하곤 한다.
 자기가 들었는데 교도관 야근이 진짜 꿀 중의 꿀이라고.
 1시간마다 순찰 한 번 돌아주고 책 봐도 된다고.
 거기다 교대로 4시간 재워준다고.
 현실은?
 ······확실히 별로 할 일은 없었다.
 응급 환자 등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골치 아파지지만 그런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물론 야간 근무 자체가 수명을 갉아먹는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시현은 순찰을 한 번 돌고 제시간에 TRS로 보고한 후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서 멍 때리는 중이었다.
 “왜 이렇게 안 나와.”
 졸음도 좀 쫓아낼 겸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 달 조금 넘게 주말마다 레이드를 다녔지만 인간형 몬스터는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E급이라 그런지 레이드 자체는 생각보다 너무 쉬워서 부담은 없었다.
 돈도 나름 짭짤하게 벌리고.
 다만 인간형 몬스터가 안 나와서 조금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지혜와 정신력, 마력에 관련되어 있다고 짐작하고 있는 교도소 쪽 퀘스트가 새로 떴다.
 물론 마력의 증가가 멈춘 지는 좀 되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이번에는 증가할까? 하는 기대는 품게 되는 것이다.
 
 [죄수들의 성욕은 고래(古來)부터 감옥에 존재하는 문제 중 하나였다. 포아힘은 성욕이 쌓일 대로 쌓인 남자와 여자 죄수들을 골라서 주기적으로 한 곳에 가둠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포아힘이 당신이 죄수들의 성욕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퀘스트: 죄수들의 성욕을 해소해 주어라. 0/30]
 
 ······무서운 얘기였다.
 가끔씩 성욕을 해소하라고 한곳에 가둔다니.
 이게 뭡니까, 포아힘 아저씨.
 아니······ 거기는 인권도 없습니까?
 물론 그것이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신참 때 같이 일했던 주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젊은 여자들은 참관하러 좀 안 와야 돼.’
 ‘그런가요?’
 ‘애들이 젊은 여자 보면 그날 하루 동안 미친다, 미쳐.’
 ‘미쳐요?’
 ‘여자 생각에 열나게 괴로운 거지. 화장실 가도 쉽게 해소 안 된다, 그거.’
 
 그때는 그냥 막연한 얘기처럼 들렸는데, 근무하면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라는 기독교의 성인(聖人)도 성욕을 참지 못해 장미 덩굴을 고통스럽게 굴렀다는데, 수용자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나저나 이게 왜 뜬지는 대충 알겠다.”
 시현이 다시 홀로 중얼거렸다.
 아마 지금의 교도소 상황과 묘하게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지난 주 검방에서, 수용자가 향정신약 숨긴 것이 2개 사동에서 3건이나 걸린 것으로 보안과장이 소위 빡쳤던 것이다.
 향정신약은 많이 먹으면 죽을 수도 있기에 요주의 관리 대상이었다. 보통 마약범들이 모아서 가루로 만들었는데, 마약 같은 환각 효과를 노리고 저지르는 짓이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교도관이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어도, 손가락 사이에 교묘하게 숨기거나 발밑으로 흘리면 놓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시현도 한 번 당해서 경위서를 쓴 적이 있었는데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마술 같은 솜씨였다. 손가락 사이에서 약 알이 자취를 감추는 것이 순식간이었다.
 어쨌든 가뜩이나 엄하기로 소문난 보안과장인데 1건도 아니고 3건이니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담당 교도관들이 경위서를 제출한 것은 당연하고, 기강을 잡는다고 수용자들 전수 검방을 빡세게 했다.
 그 탓에 수용자들이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는 야시시한 여자 사진마저 죄다 폐기 처분했던 것이다. 감방문 안쪽에 붙여진 속옷만 입고 있는 여자 사진들도 모두 뜯어버렸다.
 원래는 눈감아주는 물건이었는데 보안과장 지시라 어쩔 수 없었다.
 이번 기회에 단단히 본보기를 보이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덕택에 수용 질서가 완전 우수한 시현의 사동도 단체 질서를 위해 야한 여자 사진을 다 폐기 처분한 것이다.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슬슬 풀어줄 때가 됐는데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런데 퀘스트가 뜬 것이다.
 너무 쌓였다 이건가.
 아무래도 은밀하게 무언가를 공급해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보안과장 지시에는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딱히 켕김 같은 것은 없었다.
 시현의 사동은 수용 질서가 꽉 잡혀서 수용자들이 찍소리도 못 하긴 했지만, 다른 사동에선 너무 심한 거 아니냐며 불만의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
 그래, 인간적으로 너무 심했다.
 교도소도 사람 사는 데다, 진짜.
 
 * * *
 
 시현은 집에 가기 전, 야근을 해 피곤한 눈으로 서점에 들렀다.
 그의 손이 잡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빨간색으로 성인 등급으로 표시되어 있는 잡지였다.
 밀봉되어서 내용을 볼 수 없었기에 하나 샀다.
 걸으면서 뜯어 훑어보니 역시 한국 잡지라 그런지 너무 약한 감이 있었다.
 이왕 풀어주는 거 쌔끈한 퀄리티의 사진으로 제대로 풀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시현이 친구인 상규에게 전화했다.
 -뭐야, 웬일로 아침부터.
 “출근길이냐?”
 -아니, 회사 도착해서 잠깐 담배 한 대 피우고 있다.
 “너 야한 잡지 좀 있지?”
 -갑자기 뭔 소리야.
 상규가 뜬금없다는 목소리를 냈다.
 “장난 아니고. 내가 필요해서 그런데 야한 잡지 있어?”
 -나 참, 그래, 있다.
 “외국 걸로. 일본 것도 괜찮고 서양 것도 괜찮고.”
 -아예 둘 다 줄게. 너 인마, 수진이랑 헤어지고 외로워서 밤에 잠 잘 못 자냐?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라. 근무 잘 하고, 이따 저녁에 내가 집 찾아간다. 고마움의 의미로 먹을 거 사 갈게.”
 
 * * *
 
 ‘역시 외국 게 진짜라니까.’
 사동 들어갈 때 항상 가지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 어제 오려둔 사진을 넣어 왔다.
 퀘스트 숫자가 30명이니까 소방은 무시하고 중방이나 대방 몇 곳에다 돌릴 작정이었다.
 그래서 한 5장 정도의 수위 높은 사진을 엄선해서 오려 왔던 것이다. 물론 오리면서 겸사겸사 눈요기도······.
 “주임님, 이제 점심 드시러 가셔야죠.”
 손목시계를 슬쩍 본 시현이 박영환 주임에게 말했다.
 사동을 비우면 안 되기에 담당과 부담당은 45분씩 교대로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시현이 생각한 최적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은 사동 안에서 자신을 터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럼 나 식사하러 갈 테니까 수고 좀 해.”
 영환이 그렇게 말하고 터벅터벅 걸어가 사동을 나갔다.
 그가 완전히 나가자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45분이면 충분하지, 뭐.
 ‘CCTV 각 아니까.’
 CCTV가 많이 있긴 했지만 중앙통제실에서 모든 감방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보인다 해도 교도관이 창가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알아채기도 힘들었다.
 잘 안 보이는 곳의 중, 대방에 사진만 뿌리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수용자들이 입만 다물고, 증거 사진만 없어지면 이건 절대 안 걸린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보다 시현이 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대방 4.
 중방 1.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시현은 우선 16방부터 들렀다.
 그가 창가 근처를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잠깐, 나 좀 봅시다.”
 “헉······ 왜, 왜 그러세요?”
 슬쩍 시선만 마주쳤는데 창가 옆의 수용자가 기겁을 했다. 눈을 맞추기 싫은지 옆으로 이상한 데를 응시하고 있다.
 “다들 주목 좀 해줘요.”
 “헛······ 네, 부장님!”
 수용자들이 점검을 받을 때처럼 갑자기 열을 맞춰 앉기 시작했다.
 “그렇게들 딱딱하게 긴장하지 말고요. 좋은 거 줄려고 하는데.”
 “······.”
 더 긴장한다.
 시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했다.
 품에서 오려낸 야시시한 사진을 창문 틈으로 쓱 내밀었다.
 “헛!”
 “헉!”
 수용자들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크게 떴다.
 폐기 처분된 후 오매불망하던 것이 눈앞에 있었다.
 상대가 공포의 대상인 시현만 아니었다면 달려들어 낚아챘을지도 모른다.
 “특별히 챙겨주는 거니까 알아서들 잘 사용하시고. 아, 다 사용하면 그거 찢어서······ 먹으세요.”
 그게 가장 확실한 처리 방법이었다.
 “먹,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아니, 맛있게 먹을 필요는······.
 시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다음 방으로 향했다.
 
 [퀘스트: 죄수들의 성욕을 해소해 주어라. 14/30]
 
 ‘순조롭구만.’
 시현은 돌리려던 방에 모두 사진을 돌린 후 담당실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퀘스트의 숫자는 빠른 속도로 올랐다. 벌써 거의 반에 가까운 숫자가 올라갔다.
 동시에 여러 방에서 진행되니 그런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점심 먹고 돌아올 때쯤이면 해결될 것 같았다.
 “이 교도, 어서 점심 먹으러 가라고.”
 돌아온 박영환 주임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수용자들이 눈치껏 잘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현은 속으로 싱긋 웃고는 사동을 나왔다.
 점심을 먹고 여느 때처럼 휴게실에 앉았다. 손에는 휴대폰 보관함에서 꺼낸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원래 정문 안으로는 휴대폰을 반입하는 것이 절대 금지였다.
 때문에 애로 사항이 상당히 많았다.
 젊은 교도관들은 여자 친구랑 관계가 끊긴다고 하소연했고, 가정을 이룬 교도관들도 최소한의 인간관계마저 유지하기 힘들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그런 교도관들의 원성이 쌓이고 쌓이자 결국 교정 본부에서도 손을 들었다.
 그래서 몇 해 전 휴게실 안에서라도 휴대폰 사용을 허가해 줬던 것이다.
 ‘부재중 전화?’
 번호를 보니 은혜의 번호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 시현이 전화를 걸었다.
 -네, 오빠.
 다이얼이 몇 번 울리자 은혜가 받았다.
 “응, 은혜야. 전화했더라?”
 -아, 그거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 주 토요일에 D급 게이트 합동 공략 일정이 잡혔거든요. 그쪽 길드가 8명, 우리 쪽은 민준 오빠랑 저랑.
 “그래?”
 -네, 근데 말이죠. 민준 오빠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요. 어머니께서 집에서 쓰러지셨다고······.
 “저런······.”
 -다행히 큰 병은 아니라고 하시는데,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레이드 뛰는 거 많이 그렇잖아요.
 “당연하지.”
 -그래서 대체 인원이 필요한데, 그쪽에서 원하는 역할이 근접해서 전투나 어그로를 끌어줄 수 있는 역할이거든요. 민준 오빠 아니면 우리 길드에서 시현 오빠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연락드린 거예요.
 “음, 그렇구나. 내가 대체 뛸게.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합동공략에서 갑자기 펑크 내면 그쪽에서도 안 좋게 생각할 테니까.”
 -진짜 고마워요, 오빠. 톡으로 지도 보내 드릴게요.
 “별것도 아닌데 뭘. 좋은 하루 보내길.”
 -네, 오빠도 좋은 하루 되시고 그날 뵐게요.
 통화를 끊고 시현은 어떤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민준의 일이 남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강원도 영월에 계신 부모님을 이번 명절에는 꼭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신 후, 두 분이 시골에 내려가 작은 농사나 짓고 계신데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찾아뵌 지도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앉아 있는 사이에 시간이 되었다.
 사동으로 들어가는 길에 메시지가 떴다.
 
 [퀘스트: 죄수들의 성욕을 해소해 주어라. 30/30 완료]
 [당신이 죄수들의 성욕을 빠르게 해소해 준 것에 대해 포아힘이 진심으로 만족한다.]
 [지혜+50, 정신력+90 회복]
 [정신력이 일정치를 넘어서 패시브 스킬 ‘노련한 간수의 통찰’이 활성화되었다.]
 
 마력은 역시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알림 하나가 시현을 놀라게 했다.
 “응?”
 스킬?
 드디어 스킬을?
 겨우 3개밖에 없는 스킬이 죄다 비활성화라 사실상 무스킬 헌터로 지내온 게 꽤 오래였다.
 근데 드디어 그놈의 스킬이 뜬 것이다.
 너무 궁금해서 시현은 걸음마저 멈추고 상태창을 열었다.
 
 <스탯>
 근력 101 (D)
 민첩 101 (D)
 지혜 160 (D)
 체력 101 (D)
 정신력 300 (C)
 마력 99 (E)
 <저항력>
 물리저항 5.05%
 마법저항 15%
 독저항 0%
 화염저항 0%
 <스킬>
 패시브: 노련한 간수의 통찰
 액티브: ???(비활성), ???(비활성)
 
 진짜 스킬창에 스킬 이름 하나가 반갑게 떠 있었다.
 아마 정신력이 300으로 올라 C급이 되자, 조건이 충족되어 활성화된 모양이었다.
 도대체 이게 뭔 스킬인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시현은 당장 자세한 설명을 불러왔다.
 
 <노련한 간수의 통찰>
 -레이테르 대륙에서 악명이 높은 인물들을 감지하고 정보를 읽어낼 수 있다.
 
 “······.”
 이게 대체 뭐야?
 무슨 의민지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겠고.
 물음표 그 자체였다.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물론 알 수가 없었다.
 능력치나 저항력을 올려주는 패시브 스킬도 제법 있다는데, 차라리 그런 건 직관적이라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시현이 다시 한 번 찬찬히 설명을 읽었다.
 일단 레이테르 대륙이라면 아마 이세계······?
 그러니까 이세계에서 악명 높은 인간들을 감지하고 정보를 읽어낼 수 있다는 건가?
 대충은 알겠는데 이걸 어떤 용도로 사용해야 할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이 스킬도 몬스터한테는 못 쓴다는 거.
 시현이 허탈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이 아저씨의 힘은 게이트 공략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각성인 것 같았다.
 
 * * *
 
 “각방 차렷! 5층 2사 점검 준비 끝!”
 오후 점검이 시작되었다.
 머리가 벗겨진 관구계장이 1방부터 차례로 점검을 시작했다.
 “1방!”
 박영환 주임이 큰 소리로 방 이름을 부르자 숫자를 세기 쉽게 열을 맞춰 앉은 수용자들이 크게 소리쳤다.
 “차렷, 경례! 안녕하십니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번호 끝!”
 보통 이렇게 우렁차게 하는 사동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관구계장은 5층 2사를 점검할 때마다 마음이 흡족했다.
 점검은 물 흐르듯이 진행되어 어느새 14방의 차례가 되었다.
 거기서 관구계장이 잠시 멈췄다.
 “허어, 여기는 왜 이렇게 표정이 좋아요?”
 정년퇴직을 앞둔 노련한 교도관의 눈썰미로 수용자들의 표정에서 뭔가 만족감을 읽어낸 것이다.
 “아닙니다!”
 수용자들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걸리면 뒈진다!’
 수용자들이 교도소 돌아가는 거에 대한 건 어떤 면에선 교도관보다 더 빠삭했다.
 보안과장이 어떤 지시를 내렸고, 또 그걸 어기고 시현이 야한 사진을 건네주었다는 사정 같은 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물론 사진은 다 찢어 나누어 먹어서 걸릴 일은 없었지만, 인간인 이상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걸려서 시현이 경위서라도 쓰는 날엔 그 이후를 상상하기도 싫었다.
 ‘씨불······ 밤꽃 냄새 나는 거 아니야?’
 수용자들이 잔뜩 긴장했지만 다행히 관구계장은 허허, 웃으며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15방.
 여기는 완전 분위기가 달랐다.
 옆방의 소리를 듣고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여기는 다들 부모님 돌아가셨어?”
 관구계장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방 하나를 사이에 두고 표정이 극과 극이다.
 “아닙니다!”
 “보는 사람 불안하니까 편하게 있어요, 편하게.”
 관구계장이 그렇게 말하고 지나갔다.
 원래 점검 때 거실 상태를 보고, 마음에 안 드는 곳을 지적하고 넘어가는 법인데 5층 2사는 그럴 일이 없었다.
 그래서 딱히 점검 때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점검은 그 이후로도 평탄하게 끝났다.
 마지막으로 총인원을 확인하고 관구계장이 말했다.
 “오늘 다들 오지?”
 “아이고, 그럼요, 계장님.”
 오늘이 정년퇴직이 한 달도 안남은 관구계장을 위해 관구 회식을 하기로 한 날이었던 것이다.
 “이 교도도?”
 “이 교도 안가면 제가 끌고라도 갑니다. 걱정 놓으시죠.”
 “허허, 그래. 이따 보자고.”
 관구계장이 사람 좋게 웃으며 반대 사동으로 나갔다.
 “무슨 얘기 하셨어요?”
 점검 동안 담당실 앞에서 자리 잡고 서 있었던 시현이 물었다.
 “자네 회식 꼭 데려오라고.”
 “어휴, 제가 아무리 술 때문에 회식 자리 별로 안 좋아해도 이번엔 무조건 가야죠.”
 2년을 한 교도소에서 일했는데 안 간다는 건 말도 안 되었다.
 “아, 근데 장소가 어디라고 했죠?”
 “접때 회식했던 오리집.”
 
 * * *
 
 회식 자리는 조촐했다.
 관구라는 것이 소마다 조금 다르지만, 대한교도소의 경우 2개 층 4개 사동을 하나의 관구로 묶었다.
 그러니 각 사동별 담당, 부담당 합쳐도 8명에 관구계장까지 9명이었다.
 테이블 하나를 이어 붙인 걸로 충분했다.
 “오늘은 좀 말자.”
 이웃 사동인 5층 1사의 정용진 주임이 시현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이며 말했다.
 사실 대한교도소의 회식은 아예 술을 안 권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강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워낙 술 좋아하는 관구계장이니만큼 오늘만은 분위기 좀 맞춰달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아휴, 빨리 말아서 한잔하겠습니다.”
 시현이 웃으며 소주와 맥주를 섞었다.
 관구계장이 기분 좋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즘 가장 잘나가는 이 교도부터 순서대로 건배사 한번 할까?”
 “아이고, 왜 그러십니까. 9급 말단이 뭐가 잘나간다고요.”
 “허허, 아니야. 내가 사람 보는 눈 좀 있다는 소리 많이 들었는데, 요즘 자네 보면 적어도 5급까지는 올라갈 사람처럼 보여.”
 “요즘이면 예전에는 안 그랬단 말씀입니까?”
 박영환 주임이 물었다.
 “그게 예전에는 6급에서 끝날 사람 같았는데, 요즘은 달라졌단 말이야.”
 “영광입니다.”
 시현이 칭찬을 미소로 받으며 일어났다.
 “그럼 제가 먼저 건배사 하겠습니다. 계장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계속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라겠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차례로 관구계장과 한 잔 하면서 덕담을 주고받는 가운데 시현의 차례가 왔다.
 시현이 옆에 앉자 관구계장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며 악수했다.
 “요즘 이 교도 보면 그 얘기가 생각난단 말이야.”
 “무슨 얘긴지······.”
 “왜 교도관들 많이 하는 얘기 있잖아. 교화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라는 거.”
 “아아.”
 시현도 일하면서 선배한테 들어본 적 있는 얘기였다.
 
 ‘쟤들은 부모도 포기한 놈들이야.’
 ‘네에······.’
 ‘그런데 뭐? 얼어 죽을 교화? 부모도 못 한 걸 남들이 어떻게 해? 이런 교환가 뭔가 하는 헛소리하는 시스템 버리고 그냥 벌이나 똑바로 줘야 돼.’
 
 교도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저렇게 생각할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여러 이론을 주도하며 교화 시스템의 선진국이라 자부하던 미국도 낮아지지 않는 재범률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는데 답이 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말하는데 교도관하면서 퇴직할 때까지 한 명, 단 한 명만 제대로 교화시켜도 그건 대단한 교도관이다. 한 명이라니까 장난 같지? 이 생활 몇 년만 하면 뼈저리게 느낄 거다.’
 
 시현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데 관구계장의 말이 들려왔다.
 “나도 그 얘기에 동감하는 편이었거든. 부끄러운 얘기지만 36년을 근무하면서도 내가 교화시켰다고 생각하는 수용자는 한 5, 6명밖에 안 되거든.”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전 그 정도면 충분히 많이 시키셨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말이야. 내가 요즘 자네 보면서 생각이 조금 변했단 말이야.”
 “네?”
 “난 처음에 자네가 단지 엄하게 수용자들을 다뤄서 수용자들이 자네 지시를 잘 따른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러면 어떻게든 몇몇에게서 불만은 터져 나오게 마련이거든?”
 “아, 네.”
 “그런데 요 몇 달간 자네 사동에 관구계장 면담 신청하는 수용자가 단 한 명도 없더라. 그리고 수용자들 얼굴 보니까 딱히 불만도 없어 보이는 눈치고.”
 관구계장이 술 한 잔을 쭉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자네라면 진정 교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
 “아고, 진짜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네요.”
 “내가 한마디만 더 하자면, 자네는 보안과 떠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시현은 순번으로 보면 이제 슬슬 민원과나 출정과로 이동할 차례였다. 그리고 민원과나 출정과 일이 보안과보다 조금이라도 용이하다고 여겨지기에 순번이 되면 대부분 그리로 이동했다.
 시현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때 관구계장이 틀림없다는 표정으로 단언했다.
 “자네는 진짜 타고난 보안과 체질이야.”
 
 * * *
 
 “끄응.”
 아무래도 어제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았다.
 오늘 근무 중에도 숙취 때문에 고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시현이 달력을 확인했다.
 오늘은 시현의 여동생 이하영의 첫 사인회가 있는 날이었다.
 웹툰 작가를 하겠다고 다니던 멀쩡한 대학을 때려치운 것이 몇 년 전이었다. 그동안 동인지 같은 것도 그리고, 메이저 사이트에 데뷔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도 해본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로맨스 독자층을 노리고 로맨스물을 대대적으로 런칭하는 한 신생 사이트에 컨택되어 데뷔에 성공했다.
 종이책도 냈고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반응도 꽤나 괜찮은 것 같았다.
 10위권 안을 꾸준히 유지했다.
 그 정도면 인기 작가라고 동생이 설명했다.
 시현도 읽어봤는데 여성향 로맨스 만화라 그런지 취향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꾸준히 이름을 알리더니, 그 사이트에서 인기 있는 작가들이 같이 서울의 한 대형 서점에서 사인회를 연다고 했다.
 그것이 오늘이었다.
 전화라도 한 통 해줄까 생각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링.
 화면을 보니 마침맞게 하영이었다.
 “어, 하영아.”
 -오빠,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알지.”
 -나 진짜 떨려······ 어떡해.
 “어차피 독자들 거의 다 여자일 거 아니야. 마음 편히 먹어.”
 -······알았어.
 “하영아, 파이팅이다. 난 내 동생이 인기 작가라서 자랑스럽다.”
 -헤헤, 그렇긴 하지?
 “그래, 그러니까 힘내서 사인회 잘 하고 와.”
 -알았어!
 
 * * *
 
 ‘어떡하지······.’
 떨린다기보다는 민망했다.
 아무래도 자신 쪽이 가장 적은 사람들이 방문한 느낌이었다.
 서점이 마련해 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하영이 초조한 눈으로 시계를 보았다.
 이제 사인회 시간이 3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야, 저 사람 1,000권 샀대.”
 “진짜······? 그만큼 재고도 없잖아?”
 “지금 재고 없어도 상관없다고 그냥 결제해 버렸나 봐.”
 “와······ 진짜 개갑분가 보다.”
 “······쩐다, 쩔어.”
 헉, 누가 만화책을 한 번에 1,000권을 샀다고?
 아 씨······ 누군지 몰라도 그 작가 너무 부럽다.
 하영이 부러움을 못 참고 있을 때 한 사람이 그녀에게 걸어왔다.
 비율 좋은 몸매에 고양이 같은 눈매를 지닌 미녀였다.
 짧은 타이트스커트와 하얀 블라우스 차림에 왼손에 백을 들었다.
 ‘헐, 에르메스 백.’
 평소 백에 관심 많은 하영이 한눈에 알아봤다. 그것도 그 비싸다는 다이아몬드 박힌 악어가죽처럼 보였다.
 “이하영 작가님?”
 하영은 필명 대신에 실명으로 연재했다.
 “아, 네.”
 “진짜 너무너무 팬인데 반가워요. 사인 좀 부탁드려요.”
 여자가 하영이 그린 만화책 ‘얼음 같은 사랑’을 앞에 놓았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 낀 영수증을 슬쩍 내밀었다.
 “우리 작가님, 기운 좀 내시라고 선물을 준비했어요.”
 “네? 어······ 헉?!”
 영수증을 보니 자그마치 ‘얼음 같은 사랑’ 1,000권이 결제된 영수증이었다.
 어안이 벙벙해 주변을 잠시 둘러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 네! 정말 감사드려요!”
 “뭘요, 더 좋은 작품 많이 내시라고 하는 작은 선물이에요.”
 여자가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인해 주세요, 작가님.”
 “아, 네. 물론이죠! 성함이?”
 “린슈에예요.”
 “혹시 중국분이세요?”
 “그렇답니다.”
 “와아······ 한국말 진짜 잘하시네요.”
 “후후, 제가 말을 좀 빨리 배우는 편이라서요.”
 “대단하세요. 아, 제가 중국어를 몰라서 그러는데 성함을 한국어로 적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하영이 기쁜 손길로 만화책 앞장에 ‘린슈에’라고 예쁜 글씨체로 적고 옆에 사인을 했다.
 “진짜 영원히 기억할게요, 린슈에 독자님.”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뵈어요, 작가님.”
 
 * * *
 
 린슈에가 출입문을 나오자마자 삭발을 한 검은 정장의 남자가 수행하듯 다가갔다.
 그가 주차되어 있는 리무진 쪽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왜 그러셨습니까, 린슈에 님.”
 “뭐가 어때서. 좋아하는 작가님 선물 좀 해드린 건데.”
 “너무 눈에 띄신 것 아닙니까?”
 “그게 문제야?”
 “국정원에서 냄새를 맡았을지 모릅니다.”
 “한국 정보기관이 그렇게 유능해? 내 정체까지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그리고 뭐 알았다고 해도 어쩔 건데. 놀러 온 건데.”
 “그렇긴······ 합니다만.”
 “내 걱정은 할 거 없어. 그 미친놈 걱정이나 해야지. 그놈은 대체 왜 따라와 가지고 신경 쓰이게 만들어.”
 “그분은······.”
 “그 자식 또 어디 갔지? 당장 찾······ 아니, 내가 직접 찾아야겠다.”
 린슈에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어느새 토요일이 왔다.
 어제는 여동생 하영에게 1,000권을 산 독자에 대한 얘기를 하도 들어서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실실 웃으면서 계속 자랑했다.
 도대체 누굴까 궁금했다.
 중국인이라는 걸 보니 중국 거부의 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현은 늦지 않도록 여유 있게 게이트로 출발했다.
 주중에 새로 생긴 스킬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해 봤지만 딱히 뭔가를 알아낸 건 아니었다.
 일단 스킬이 발동이 되어야 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현 오빠.”
 게이트에 도착하자 은혜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같이할 길드는 아직 안 왔어?”
 “우리가 너무 일찍 왔죠. 늦지 않게 올 거예요.”
 게이트 근처에 앉아 은혜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으려니 승합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흑호 길드’라고 쓰인 문이 열리며 헌터로 보이는 남자들이 내렸다. 이쪽과는 달리 여자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 자식 왜 아직 안 와?”
 “저도 모르겠습니다. 연락을 안 받네요.”
 “나 참······. 신참 새끼가 빠져 가지고.”
 “그래도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길드장으로 보이는 남자와 몸이 다부진 남자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길드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표정을 보니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은혜 씨, 미안한데 길드원 한 명이 아직 안 와서 그런데 좀만 기다려도 될까?”
 “괜찮아요, 길드장님. 아직 시간 된 것도 아닌데요.”
 얘기를 하고 돌아간 흑호 길드장이 다시 길드원에게 연락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기색을 보니 연결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자 공략하기로 한 시간이 되었다.
 “허 참, 이런 개념 없는 신참은 난생처음이네.”
 흑호 길드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열 받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리 얘기해야 대체 인력이라도 구하지. 씨벌, 지금 이러면 대체 어쩌라고?”
 10명으로 게이트 공략을 허가를 받았는데 이러면 9명이 된다. E급 게이트야 인원 체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지만, D급부터는 헌터협회 직원도 인원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지금도 게이트 앞에서 인원수를 확인하고 들여보내려고 협회 직원이 서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던 직원이 입을 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아니. 딱히 큰 문제는 아니에요. 한 명이 안 와서요. 금방 내가 아는 친구들한테 전화 좀 돌릴 테니까요. 오늘 꼭 공략합니다.”
 흑호 길드장이 휴대폰을 들어 아는 헌터들한테 전화를 거는 모양이었다.
 근데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골치 아픈 듯 뒷머리를 연신 긁적거린다.
 시간이 30분이 지났는데도 별 성과가 없어 보였다.
 그때, 한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창백한 피부의 남자였다.
 “야, 이 새끼야!”
 길드장이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 욕부터 바로 날렸다.
 시현은 그 심정을 백분 이해했다.
 “정신머리를 어디에 두고 있는 거야, 이 새끼야! 첫 레이드에서 지각? 씨펄, 연락도 안 되고 뭐 하는 거야! 이 개념 없는 새끼!”
 “진짜 죄송합니다!”
 창백한 남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다른 길드원과 시현과 은혜에게도 계속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에이 씨······ 일단 들어가자. 은혜 씨, 진짜 미안해. 이번 일 잊지 않고 다음에 꼭 갚을게. 그리고 그쪽 분한테도 진짜 미안해요. 할 말이 없습니다.”
 더 이상 늦어질 수 없다는 듯 흑호 길드장이 그렇게 말하고 게이트로 앞장서서 걸어갔다.
 다른 길드원들과 창백한 남자가 그 뒤를 따랐다.
 “우리도 들어가요.”
 은혜가 말했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게이트 안에 들어서자 낡은 건물의 냄새가 났다.
 10층 쯤 되어 보이는 오래된 탑이 보였다.
 저 탑이 이번 게이트의 공략 대상인 것 같았다.
 탑의 문 앞에는 조금 앞서간 흑호 길드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시현과 은혜가 오면 같이 진입하려는 것이다.
 “탑은 그냥 쭉 오르기만 하면 되니까 편하지.”
 흑호 길드장은 이번 게이트가 맘에 든 것 같았다.
 “그럼 들어가자고.”
 그렇게 얘기한 순간.
 
 [경고: 주변에서 제법 악명 높은 인물을 감지했다.]
 
 “응?”
 갑자기 ‘노련한 간수의 통찰’이 발동했다.
 ······제법 악명 높은 인물?
 갑자기 왜 이런 경고창이 뜬 걸까?
 시현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경고: 그 인물의 정보 확인을 권고.]
 
 시스템이 두 번이나 경고했다는 것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시현이 즉시 정보를 확인했다.
 
 [능숙한 기술자]
 이름: 바얀
 성별: 남
 직업: 면구 기술자
 유명도: 유명
 <위명>
 데할로스의 인간 가죽 벗기는 노인
 -바얀은 데할로스에서 평생 가면만을 만들던 기술자였다. 어떻게 하면 더 실제와 흡사한 가면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는 살인을 저질러 인간의 얼굴 가죽을 도려내어 가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후로 그는 수많은 인간을 죽인 뒤 그들의 얼굴 가죽을 벗겨 능숙한 인피면구(人皮面具) 기술자로 거듭났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이용하여 그 사람의 얼굴로 변할 수 있다.
 <스탯>
 근력 501 (B)
 민첩 508 (B)
 지혜 504 (B)
 체력 506 (B)
 정신력 511 (B)
 마력 520 (B)
 <저항력>
 물리저항 25.3%
 마법저항 25.55%
 독저항 0%
 화염저항 0%
 <스킬>
 패시브: 손재주, 양손잡이, 섬세한 작업, 기술자의 끈기
 액티브: 능숙한 목 베기, 능숙한 심장 찌르기, 능숙한 눈알 도려내기, 능숙한 얼굴 가죽 벗기기, 성대모사
 
 “······.”
 아니, 뭐야 이거?
 사람들을 죽여 얼굴 가죽을 벗겨?
 뭐 이런 미친 새끼가······.
 시현의 얼굴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직업에 기술자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인간 가죽을 벗기는 기술자가 있다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각성자 중에 이런 악독한 부류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언론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설마 일부러 감춘 건가?
 각성자들은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대상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극악한 부류의 각성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 꺼림칙함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면 각성자 본인들이 필사적으로 감추는 것일 수도 있다.
 하긴 누가 이런 것이 알려지길 원하겠는가.
 시현이 다시 정보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수식어가 ‘능숙한’이다.
 B급의 수식어다.
 스탯도 그가 B급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저 인간이········.’
 시현의 시선이 정보창이 가리켜 주는 쪽을 향했다.
 지각해서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던 창백한 인상의 남자.
 그가 B급 각성자였다.
 왜 게이트에 와서야 발동했나 생각해 보니 이유가 한 가지 떠올랐다.
 거리.
 밖에 있을 때보다 창백한 남자와 조금 더 가까운 거리로 다가가자 ‘노련한 간수의 통찰’이 발동한 것이다.
 ‘어쩌지.’
 본능적으로 시현은 게이트를 슬쩍 돌아보았다.
 하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이제 보스를 잡을 때까지 나가지 못한다.
 시현이 고민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나친 기우였으면 좋겠다.
 오버였으면 좋겠다.
 각성의 힘의 원주인이 미친 살인자라고 해서 현실의 각성자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근데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무엇보다 시스템이 두 번이나 경고하는 것이 마음을 꺼림하게 했다.
 몇 가지 의문도 들었다.
 B급 각성자가 이런 길드에 가입하여 D급 게이트 공략을 한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무언가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 그 목적이 최악의 예상과 부합한다면?
 그리고 또 한 가지.
 저 얼굴이 과연 본인의 진짜 얼굴일까?
 능숙한 인피면구 기술자.
 액티브 스킬 성대모사.
 한동안 연락 두절.
 지각.
 키워드들의 나열은 어떤 한 가능성을 높은 확률로 가리키고 있었다.
 “오빠, 안 들어가세요?”
 시현이 잠시 생각에 잠겨 가만히 서 있자 은혜가 의문 어린 눈으로 말했다.
 “······아, 응. 가야지.”
 시현이 짧은 순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흑호 길드원 사람들은 자신이 경고해 봤자 쉽게 믿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인피면구 기술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거기다 성대모사까지. 게다가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은혜라면.
 시현이 앞서가는 흑호 길드원들을 설핏 응시하더니, 은혜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답하지 말고 들어. 오늘 지각한 놈 조심해. 살인을 많이 저지른 놈 같아.”
 “······.”
 “절대 내색하지 말고. 휴식 때 내 옆으로 와.”
 영특하고 눈치 빠른 그녀답게, 은혜는 시현의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속은 갑작스런 경고에 긴장했으리라.
 “자, 들어가자.”
 시현은 태연을 가장하며 탑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사냥을 하는 내내 녀석이 신경 쓰였다.
 평소처럼 몬스터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수비적으로 임하며 탱킹 정도의 역할을 하며 녀석을 슬쩍슬쩍 살폈다.
 녀석은 가장 우측 끝에서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몬스터를 도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딱 D급의 움직임만을 보이고 있다.
 무기도 절대 비싸 보이지 않는 평범한 검이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영락없이 D급 헌터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다.
 능숙한 위장이었다.
 그것이 수상한 냄새를 더 진하게 풍겼다.
 “자, 짐꾼. 아이템이랑 마정석 수거하고, 그동안 잠깐 휴식.”
 5층까지 별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올라와서 그런지 흑호 길드장의 표정은 좋았다.
 나름 잘 짜인 구성원이라 탑의 몬스터인 하급 악마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현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은 더욱 은근하게 녀석의 동정을 살폈다. 눈치채이지 않게 최대한 조심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끊임없는 생각을 했다.
 만약 녀석이 마각을 드러내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하고.
 녀석을 제외하고 C급 2명에 D급 4명, E급 3명인 인원으로 녀석을 상대할 수 있을까. 아니, 자신은 사실상 D급이니 5명인가.
 어쨌든 B급이 어떤 수준인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해서 정확히 짐작할 수 없었다.
 “오빠, 다친 데 없으세요?”
 은혜가 몸 상태를 물으며 다가왔다.
 같은 길드원으로서 자연스런 행동처럼 보였다.
 시현이 저번 휴식 시간에 몰래 적어놓았던 쪽지를 은혜의 등 뒤에 은밀히 내려놓았다.
 쪽지에는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바로 마법을 사용해’라고 적혀 있었다.
 
 * * *
 
 ‘진짜 기우인가?’
 시현이 의문 어린 눈을 했다.
 뭔가 일을 벌인다면 지금까지 벌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근데 녀석은 순순히 보스방까지 들어왔다.
 설마 하니 우려하던 일 없이 레이드가 끝날 수도 있는 건가?
 그렇다면 그거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헬하운드군.”
 길드원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지옥견이자 지옥의 입구를 지키는 파수꾼.
 그것이 이 게이트의 보스였다.
 헬하운드는 머리가 많을수록 강하다.
 다행히 이번 헬하운드는 머리가 1개에 불과했다.
 “어?”
 그때 의문 어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녀석이 혼자서 천천히 헬하운드한테 걸어갔기 때문이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아무리 싱글 헤드라지만 헬하운드는 D급 헌터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보스가 아니었다.
 헌터들은 놀란 눈으로 녀석이 순식간에 물어뜯겨 걸레 조각이 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데.
 “끼잉, 끼잉.”
 갑자기 헬하운드가 겁먹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꼬리도 바닥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짐승의 본능으로 자신보다 강자를 알아본 듯한 행동이었다.
 “아이고, 킥킥. 귀여운 개새끼, 주제를 아는구나.”
 어느새 벽에 몰린 헬하운드에게 다가간 녀석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꼭 동네 강아지를 다루는 듯한 어이없는 광경이었다.
 “뭐, 뭐야?!”
 “저게 대체······.”
 헌터들이 경악한 눈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답례로 먹이 줄게, 응?”
 녀석, 바얀이 드디어 숨은 독니를 드러냈다.
 “자, 물어!”
 바얀이 헬하운드를 집어 들어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세게 던지려고 할 때, 은혜의 파이어 볼이 먼저 날아왔다.
 “어쭈?”
 바얀이 입가를 비틀며 뒤로 슬쩍 뛰어 파이어 볼을 피해냈다.
 콰앙!
 파이어 볼이 크게 터지는 굉음에 흑호 길드장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크게 소리쳤다.
 “저······ 저 육시랄 놈의 새끼가! 모두 정신 차리고 진형 갖춰!”
 시현도 흑호 길드의 진형에 합류했다.
 홀로 무모하게 뛰어나가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적이 아니었다.
 ‘젠장, 이럴 줄은 몰랐다.’
 혼자서 행동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보스 몬스터를 이용할 줄은.
 “어떤 짓을 하든 너희는 오늘 여기서 다 죽는다.”
 바얀이 잔인한 미소를 띠었다.
 그의 양손에는 어느새 예리한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냥 달려가서 물어, 이 멍청한 개새끼야!”
 바얀이 헬하운드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러자 헬하운드가 헌터들이 갖춘 진형을 향해 꼬리에 불이 붙은 개처럼 뛰어가기 시작했다.
 “공격하지 마! 은호야, 네가 가서 어그로만 끌어. 힐러 수시로 체크해. 위험해지면 힐 주고.”
 노련한 C급 헌터인 흑호 길드장이 빠르게 전황을 파악하고 지시를 내렸다.
 헬하운드보다 저 배신자가 훨씬 위험한 상대라는 것을 파악한 그는 대다수의 인원을 바얀에게 붙이기로 결심했다.
 괜히 헬하운드를 공격했다가 다른 헌터에게 어그로가 튀면 혼란만 가중된다.
 여기서는 오직 C급 탱커인 은호의 빠른 발과 민첩성을 믿을 뿐이다.
 자신을 포함한 2명뿐인 C급 헌터 중 한 명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D급을 붙였다가는 시간도 제대로 끌지 못하고 당해 버릴 것이기에.
 “다들 아이템 아끼지 마! 저 새끼 존나게 강하니까! 괜히 아끼다 똥 된다.”
 게이트를 다니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상 헌터들은 구명을 위한 아이템 한두 개쯤은 지니고 있었다.
 치료 포션이나 마법 스크롤 같은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길드장 자신도 스트렝스 마법과 헤이스트 마법이 담긴 스크롤 2개를 꺼내 망설임 없이 찢어버렸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적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다른 헌터들도 보조 마법이 걸린 스크롤을 찢거나 근력이나 민첩성 강화의 포션을 꺼내 마셨다.
 “큭큭, 마음껏 발악해 보라고. 그래야 죽이는 재미도 더 있으니까.”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얀이 헌터들에게 다가갔다.
 오히려 긴장한 것은 다수인 헌터들이었다.
 시현도 굳은 얼굴로 롱소드를 힘껏 움켜쥐었다. 혹시나 해서 아까 스탯을 확인해 봤지만 녀석은 죄수가 아닌지 변동은 전혀 없었다.
 레전더리인 아큐어러트스를 꺼낼까 하는 고민도 했었지만 일단은 그만두기로 했다.
 아큐어러트스를 꺼낸다고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고, 그런 티 나게 좋은 검을 꺼냈다가는 최우선 경계 대상이나 공격 대상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랬다가는 도저히 감당 불가였다.
 아주 위험한 순간까지는 감추어야 할 비장의 최후 수단으로 남겨놓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오빠, 조심하세요.”
 은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감에 젖은 목소리는 듣는 상대도 긴장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 은혜 너도.”
 시현도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이스 볼트!”
 “파이어 애로우!”
 흑호 길드의 마법사 헌터가 먼저 캐스팅해 날카로운 얼음덩어리를 날렸다.
 은혜도 파이어 애로우를 빠르게 캐스팅해 발사했다.
 동시에 도적 헌터가 비도를 날렸다.
 “애쓴다.”
 바얀은 장난치듯 건성건성한 몸짓으로 공격을 피해냈다.
 “온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바얀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빨라진 것을 포착한 것이다.
 흑호 길드장이 검을 들고 앞장서서 바얀의 공격에 부딪혀 갔다.
 아군에서 가장 강한 자신이 먼저 적의 예봉을 막아야 사기가 흐트러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까앙!
 “크윽······.”
 무기가 서로 부딪치자 흑호 길드장이 신음을 흘렸다.
 너무나 무겁고 빠른 공격이었다.
 스트렝스와 헤이스트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다면 받아내지 못했을 것 같았다.
 다른 헌터들이 바얀의 움직임이 잠시 멈춘 틈을 타서 양옆으로 동시에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바얀의 신형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어느새 훌쩍 뛰어올라 흑호 길드장의 뒷목을 노리고 단검을 휘둘렀다.
 깡!
 목이 거의 베이려던 찰나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얀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시현이 롱소드로 가까스로 막아낸 것이다.
 “모두 목이랑 심장, 그리고 눈을 조심하세요!”
 공격형 액티브 스킬인 능숙한 목 베기, 능숙한 심장 찌르기, 능숙한 눈알 도려내기.
 상대의 정보창에서 스킬을 모두 읽어냈었던 시현이 경고했다.
 “허?”
 뒤로 물러난 바얀의 눈이 처음으로 이채를 띠었다.
 뭔가 안이 읽혔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렇지만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곧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럴 리가 없지.’
 자신이 알기로 상대의 정보창을 읽어낼 수 있는 각성자는 세계에서도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게다가 그들은 전투 능력이 없어서 그들의 신변 사항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자신도 상당한 고위층 인사와의 연이 없었다면 그런 각성자가 있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엄청나게 희박하고 귀한 각성자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다.
 아마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각성자와 싸워본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한 번 부딪치더니 꼬리 만 개새끼가 됐나?”
 마법의 지속 시간이 다하기 전에 어떻게든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흑호 길드장이 도발했다.
 다행히 상대는 도발에 순순히 응해주었다.
 “나 원······ 큭큭큭큭.”
 가소롭다는 듯이 웃더니 더 강렬한 기세로 돌진해 들어갔다.
 카아앙!
 이번에도 흑호 길드장이 공격을 받아냈다.
 하지만 동시에 바얀의 왼손에 들린 단검도 움직였다.
 “헛!”
 촤앙!
 옆에 있던 D급 헌터가 경악성을 흘리며 간신히 공격을 막아냈다. 조금만 늦었어도 심장이 뚫릴 뻔했다.
 심장을 주의하라는 시현의 경고가 도움이 된 것이다.
 “저 새끼, 양손잡이 같아요!”
 시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패시브 스킬 양손잡이.
 그것도 이미 읽어냈었다.
 “맞는 것 같습니다, 길드장님! 왼쪽도 공격이 엄청나게 날카로워요.”
 죽을 뻔한 D급 헌터가 맞장구를 쳤다.
 쌍검을 쓴다고 해도 주손이 아닌 반대 손은 위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거의 별 차이도 없다는 것은 양손잡이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흥.”
 바얀이 알아도 별 상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가 왼쪽과 오른쪽을 빠르게 번갈아가면서 헌터들의 진형을 두들겼다.
 헌터들은 막아내는 데만도 급급했다.
 현격한 능력치의 차이에 양손잡이라는 것이 더 까다롭게 했다.
 그렇게 두들기다가 이윽고 약한 부분을 파악했다는 듯 한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E급 헌터가 있는 곳이었다.
 진형을 세울 때 그곳을 커버한다고 길드장이 자신의 옆에 붙였는데도 세기가 부족했다.
 “어어억?”
 “실드!“
 E급 헌터가 공격을 막지 못해 거의 죽기 직전에 뒤에 있던 마법사가 실드를 구사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노림수라는 듯 바얀이 낮고 빠르게 뛰어올라 그대로 E급 헌터를 넘어버렸다.
 그리고 벼락같이 실드를 구사했던 마법사를 향해 쇄도했다.
 다시 실드를 구사할 때까지의 쿨타임이 있는 그 순간을 노린 것이다.
 “헉!”
 마법사가 놀란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긴급한 상황에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근처에 마법사와 힐러를 보호하기 위한 탱커와 도적이 있었지만, 그들도 이번 공격의 속도를 예측하지 못한 듯 반응이 한 박자 늦어버렸다.
 “실드!”
 은혜가 간신히 늦지 않게 실드를 캐스팅했다.
 카앙!
 마법사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엔 바얀이 방향을 바꿔 은혜 쪽으로 칼날을 돌렸다.
 하지만 이번엔 그의 움직임을 미리 읽은 시현이 버티고 있었다.
 촤앙! 창!
 칼날이 두 번 부딪혔다.
 ‘젠장맞을······.’
 시현은 엄청난 압력에 손아귀에서 롱소드를 거의 놓칠 뻔했다.
 꽉 쥐고 있었는데도 이 모양이다.
 ······이것이 등급의 차이란 말인가.
 시현이 이를 악물었다.
 “캭캭.”
 회심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는데도 바얀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광소를 터트렸다.
 그는 단 한시도 제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헌터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제길, 이건······.’
 흑호 길드장이 암담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다들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정도로 버티는 것만도 기적이라는 것을.
 버프의 효과가 있는 스크롤과 포션을 사용해서 평소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벌써 몇 명은 죽어 나자빠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버프의 효과도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결국 버프의 효과가 사라지자마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커어억!”
 헌터 하나가 피가 분수처럼 뿜어 나오는 목을 감싸 쥐며 쓰러졌다.
 “힐러! 힐 빨리!”
 “이미 늦었어! 신경 쓰지 말고 전투에나 집중해!”
 흑호 길드장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진형은 흐트러졌다.
 “크억!”
 챙그랑!
 또 한 명의 헌터가 손목이 잘려 병기를 땅에 떨어트렸다.
 ‘씨발, 꺼낼 수밖에 없나.’
 시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헬파이어가 빗나가면 뒈진다.
 근데 등신이 아닌 이상 글자가 새겨진 검신만 봐도, 마법이 각인된 무기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을 안 순간 맞출 확률은 엄청나게 떨어질 것이다.
 적을 당황하게 할 뭔가 최적의 타이밍이 있을 텐데, 지금은 그것을 재기도 힘들 만큼 위험한 상황이다.
 그래, 이제는 꺼내는 수밖에 없다.
 ‘아큐어······.’
 시현이 어쩔 수 없이 아큐어러트스를 꺼내려고 할 때였다.
 “이 미친놈아! 여기서 뭔 짓거리야!”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덜컥.
 몸을 누가 갑자기 잡아당긴 것처럼 바얀의 움직임이 멈췄다.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린슈······ 아, 아니 네임리스?!”
 본명을 말하려던 바얀이 움찔하며 코드네임을 말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고양이 가면을 쓴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하이힐에 미니스커트 차림이라 게이트에 전혀 어울리는 차림이 아니었다.
 헌터들은 이 뜻밖의 돌연한 사태에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위기의 상황에 전투가 중단되어 간신히 한숨은 돌렸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흑호 길드장이 경험이 많은 헌터답게 급히 이성적인 지시를 내렸다.
 “힐러는 부상자 빨리 치료하고, 나머지는 헬하운드부터 빨리 해치운다.”
 이 기회에 성가신 헬하운드를 처치해 놓겠다는 계산이었다.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말아요.”
 네임리스라고 불린 고양이 가면의 여인이 낮게 경고하며 왼손을 까딱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순간 땅이 갈라지며 엄청난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높게 솟구쳤다.
 “끼이이이이잉!”
 불기둥에 휩쓸린 헬하운드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뼈조차 남지 않고 재가 되어버렸다.
 “흐어어어어억!”
 근처에 있던 헌터 하나가 혼이 빠진 표정으로 경악성을 질러댔다. 하마터면 자신도 저런 끔찍한 꼴이 될 뻔한 것이다.
 다른 헌터들도 너무 놀라 소리도 못 내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화염저항력이 극도로 높은 헬하운드를 불마법으로 흔적도 안 남기고 태워 버린다?
 지나가는 개도 웃을 말이었다.
 시현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경악스러운 마법의 위력 외에도 또 한 가지 사실에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지금 캐스팅 안 하지 않았나?’
 주문이 아닌 다른 말을 하고 있었는데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어, 어떻게 여길?”
 바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뭘 그렇게 놀래. 네가 죽인 이강진 씨 시체를 발견해서 여기까지 추적해 온 거지.”
 “그럴 리가······ 시체를 토막 내서 묻어버리고 소지품도 다 내가 가지고 있는데······.”
 “아하, 그래? 그 정도면 내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구나? 완전 병신 취급받은 기분이네? 근데 말이야, 시체의 기억을 읽는 마법도 있다는 거 알아?”
 네임리스가 가면 안에서 싸늘하게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라고······? 그런 것이 정말······ 아니, 설령 그렇다 해도 게이트의 문은 아까까지 닫혀 있었을 텐데 말도 안 되는······.”
 “닫혀 있었지. 근데 뭐. 닫혀 있으면 못 들어와?”
 게이트에 대한 상식을 완전히 깨트리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며 네임리스가 말을 이었다.
 “넌 자신이 뭔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걸로 착각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생각이야, 그거. 넌 자격이 전혀 없어.”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가볍게 움직이자 허공에서 무수한 얼음 화살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허억······!”
 “세상에······!”
 헌터들이 경악에 찬 눈을 부릅떴다.
 ······저건 뭐지?
 형태는 1클래스 마법인 아이스 애로우와 흡사했다.
 겉만 보면 중첩 스킬을 가진 마법사가 아이스 애로우를 중첩해서 구사한 것 같았다.
 근데 그 개수가 차원이 달랐다.
 ······60중첩? 아니, 70중첩?
 빠르게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숫자의 아이스 애로우였다.
 “내가 경고했지? 남의 나라까지 와서 개짓거리하지 말라고, 이 미친놈아.”
 네임리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얼음 화살이 무서운 폭우가 되어 맹렬하게 바얀을 향해 쏟아졌다.
 “멈춰! 잠, 잠깐만! 네임리스!”
 바얀이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지만 얼음의 비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몸을 날려봤지만 허공에 가득 찬 얼음 비 앞에서는 헛수고였다.
 “크어억!”
 바얀의 몸이 뒤로 날아가 벽에 세게 부딪혔다.
 두 팔과 두 다리는 예리한 얼음 조각이 수도 없이 못처럼 박혀 피투성이가 된 그의 신체를 옭아매고 있었다.
 “크윽······ 아, 아버지가 이것을 알면 네 입장도······.”
 “흥, 네놈의 아버지 얼굴 봐서 한 번 살려주는 거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녀석이 순식간에 제압되는 모습을 헌터들은 복잡한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 가면의 여인의 능력이 저항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건 눈이 붙어 있는 이상 모를 수가 없다.
 이대로 칼자루를 이쪽으로 돌리면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시현도 마른침을 삼키며 상황을 주시했다.
 혹여나 제거하려고 한다면 헬파이어를 쏘는 발악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돌연 알림창이 떴다.
 완전 뜬금없는 상황이었기에 시현의 표정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상대가 사용하는 마법을 보고 포아힘이 정체를 알아냈다.]
 
 뭐지, 이게?
 그러니까 포아힘이 상대의 정체를 파악해서 시스템을 통해 알려주고 있는 건가, 지금?
 
 [그녀는 무언(無言)의 대마법사 하이리스다.]
 
 무언?
 그 단어를 보자 짧은 순간에 시현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까 주문의 영창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이거? 그래서 아까······.
 시현이 별다른 캐스팅 없이 마법을 쓰던 네임리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보통의 마법사의 수준은 아득하게 초월한 존재다. 규격 외의 정신 나간 수준의 마법사인 것이다.
 ‘그리고 하이리스?’
 그 이름을 어디서 본 기억이 났다.
 설핏 기억을 곱씹어보는데 한 가지가 떠올랐다.
 ‘아.’
 기억이 났다.
 아큐어러트스의 설명에서 본 기억이.
 
 -전설의 명공(名工) 요아힘이 아만티움으로 만든 걸작 중의 걸작. 레이테르 대륙 5대 명검 중 하나. 강도와 예리함 어느 것 하나 훌륭하지 않은 것이 없고, 검신에는 대마법사 하이리스가 직접 새긴 헬파이어의 마법이 아름답게 각인되어 있다. 포아힘에게 사형 집행을 당해 죽은 친우가 사용하던 것을 유품으로 포아힘이 보관 중.
 
 헬파이어의 마법을 새긴 대마법사와 이름이 같았다. 이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동명이인일 리는 없고 그 장본인일 것이다.
 시현은 놀람 속에서도 뭔가 전설 속의 존재가 눈앞에 튀어나온 것 같아서 신기함을 느꼈다.
 
 [포아힘은 그녀에게 큰 원망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는 이해하기 힘든 어른의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포아힘이 당신에게 뭔가 퀘스트를 주고 싶어 하지만, 당신의 안전을 위해 포기한다. 그녀는 레이테르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로, 그녀와 적대했다가는 지금의 당신으로서는 전혀 뒷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시현이 황당 그 자체라는 표정을 지었다.
 퀘스트는 무슨 얼어 죽을 퀘스트.
 레이테르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그러면 S급 중에서도 S급이라는 소리다.
 누구 젊은 나이에 죽일 일 있나.
 
 [포아힘이 정체를 숨기기를 강력하게 권고한다. 포아힘의 간수봉이나 아큐어러트스를 그녀 앞에서 절대 꺼내지 마라.]
 
 당연히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포아힘과 하이리스가 사이가 별로 안 좋다는 것은 시스템의 문구로 짐작할 수 있었다.
 시현은 아까 아큐어러트스를 꺼낼 뻔한 순간을 생각하며 조금 등골이 서늘해졌다.
 “······.”
 아무도 함부로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하이리스의 각성자, 린슈에의 행동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문득 말했다.
 “2명 죽었네요?”
 “네? 아······ 네.”
 전투에서는 1명이 죽었지만 신참이 먼저 끔찍하게 죽었다는 것을 인지한 흑호 길드장이 대답했다.
 “1명은 부상이고······ 복수하고 싶어요?”
 “······.”
 헌터들이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 느껴졌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반응을 보니 잘 알고 있네요. 복수도 힘이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러면 돈이라도 받고 끝내는 게 어때요?”
 “······알겠습니다.”
 흑호 길드장이 입술을 꾹 깨물며 대답했다.
 저 여자의 말대로 돈이라도 받아야 유가족들에게 조의를 표하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
 “길드 이름이 흑호 길드 맞죠?”
 어떻게 아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체의 기억을 읽어냈다는 말이 생각났다.
 “맞습니다.”
 “1주일 안에 어떤 방식으로든 돈이 갈 거니까 마음 놓아요. 넉넉하게 넣어드리죠.”
 “네.”
 여기서는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무리하고 린슈에는 순간이동을 하듯 순식간에 바얀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는 듯 헌터들이 숨을 크게 내쉬며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욕 나오네······.”
 “죽겠다······ 진짜······. S급이잖아, 저거? 아까 그 여자가 남의 나라라고 했지? 그 연놈들 어느 나라 사람이야, 도대체.”
 “둘 다 한국말 졸라 유창한 거 보니까 통역마법 아이템 맞지?”
 “궁금해하지 마, 멍청한 녀석들아. 얼굴 못 봤으니까 살려준 거야.”
 흑호 길드장이 쓰게 내뱉었다.
 무고한 국민 둘이 죽었다. 어느 나라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외교적 마찰이 일어날 수도 있는 숫자다.
 하지만 상대의 본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이제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다행이었다.
 나머지 인원이라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니.
 “오빠, 괜찮으세요?”
 은혜가 기진맥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럴 만한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너는?”
 “저도요.”
 “그래.”
 시현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대답은 괜찮다고 했지만 내내 긴장을 유지하며 강한 힘을 사용했더니 온몸이 뻐근했던 것이다.
 위기의 상황이 지나가니 뒤늦게 뭔가 실감이 났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자신에게는 그것을 넘길 만한 힘이 없었다.
 약하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교도관 일은 딱히 강함이 없어도 가능한 일이다.
 E급 게이트를 돌 때도 능력이 달린다는 생각은 없었다.
 근데 B급이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우물 안을 넘는 존재를 만나자마자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오늘은 그저 기적이나 다름없는 누군가의 도움 때문에 간신히 살아났지만 그건 그냥 요행일 뿐이다.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죽을 것이다.
 강해져야 한다.
 돈도 좋고, 명성도 좋다.
 근데 결국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밖의 일상적인 사회와는 다르다.
 강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세상인 것이다, 여기는.
 “······내가 어떻게든 강해지고 만다.”
 시현이 의지를 담아 중얼거렸다.
 
 
 Chapter 4
 
 
 한국헌터협회 건물의 10층.
 평범한 헌터라면 이곳에 방문할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0층에는 한국헌터협회 감찰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드나 헌터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신고가 들어오거나 사건이 발생하면 조사를 하는 부서가 바로 감찰국이었다.
 때문에 감찰국의 직원들은 능력 있는 헌터거나 혹은 헌터가 아니더라도 다른 부분에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금 이곳에 흑호 길드원과 시현과 은혜가 불려와 조사를 받고 있었다.
 헌터가 둘이나 죽은 사건이었고 그것도 일반적인 살인 사건이 아니었다.
 목격자로서 조사를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나눈 얘기는 밖에서 함부로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찰국의 이미지와는 달리 편안한 인상의 남자 직원이 조사실에 들어와 먼저 그렇게 얘기했다.
 조사실에는 시현 혼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조사실에서 따로 조사를 받는 것 같았다.
 남자가 맞은편에 앉았다.
 앞에는 노트북을 올려놓았다. 그것으로 조서를 작성하는 것 같았다.
 “이시현 헌터님 맞으시죠? 오늘 길드원분의 대타로 레이드 뛰게 되셨다고.”
 “네.”
 “직업이 교도관이시네요?”
 “······그렇습니다.”
 시현의 입가가 불편한 듯 미묘하게 비틀렸다.
 투잡 뛰는 것이 알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감봉 정도의 징계였지만 기껏 쌓은 근평이나 승진 계획도 다 날아간다는 것이 문제였다.
 남자가 시현의 표정을 보더니 웃으며 이해한다는 어조로 말했다.
 “아이고, 걱정 마세요. 저도 공직에 있는데 말단 공무원 봉급 뻔하죠, 뭐. 여기도 주말에 투잡 뛰시는 분 있어요. 신고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조사에만 충실히 임해주세요.”
 물론 같은 공직에 있다고 비슷할 리 없다는 건 시현도 잘 알고 있었다.
 길드 소속이 아닌 헌터협회의 직원이라도 특별 채용된 실력 있는 헌터들은 길드보다는 적어도 큰돈을 받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인재들을 모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고마운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시현의 안색이 다시 풀어졌다.
 “일단 목격하신 것을 차근차근 말씀해 주시죠.”
 “네.”
 시현이 게이트에서 벌어졌던 일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스킬이나 포아힘의 도움으로 알아낸 사실 같은 것은 모두 뺐다. 오직 눈으로만 본 광경만 얘기했다.
 남자가 설명을 진중하게 들으며 노트북의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시현의 얘기가 다 끝나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대충 어떤 흐름인지 알겠습니다.”
 밖에서 다른 사람의 진술을 체크하고 들어왔는데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모두가 비슷한 광경을 목격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남자는 형식상 질문을 던졌다.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네.”
 “그 고양이 가면의 여자가 보스 몬스터를 잡기 전에 게이트 안에 나타난 것이 확실합니까?”
 “그 여자가 직접 게이트의 보스를 잡았으니 절대 착각할 수가 없습니다.”
 시현이 단호하게 대답하더니 이번에는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닫힌 게이트 안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이 가능한 겁니까?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전혀 없어서요. 당시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크게 신경 쓰지 못했는데 지나고 생각해 보니 참 황당하더라고요.”
 “음.”
 남자가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약간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설명해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우선 여기에 서명하고 지장을 좀 찍어주시겠습니까?”
 남자가 조사실 한쪽에 놓인 선반의 서류 봉투에서 문서를 꺼내 시현의 앞에 놓았다.
 “이건?”
 “읽어보시죠.”
 시현이 시선을 문서로 돌렸다.
 내용을 훑어보니 비밀엄수각서였다.
 절대 외부에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되고, 그럴 경우에 큰 불이익이 가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허, 살면서 이런 건 처음 보네요. 좀 무섭군요.”
 “하하, 그래요? 잘은 모르겠는데 교도소도 비밀 엄수의 의무 같은 거 있지 않나요? 교도소 안의 일을 밖에 함부로 내뱉고 다니면 안 된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만.”
 “그런 게 있다고 들은 것은 같은데······ 그거랑은 무게감이 다른데요, 완전.”
 “아무래도 이쪽 보안이 좀 중요해서요. 헌터님도 들어서 알고 계시죠? 종종 발생하는 각성자 테러 사건.”
 “네, 압니다. 얼마 전에도 프랑스에서······.”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안다.
 이제 폭탄이나 총기만으로 테러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몇 달 전에도 아랍의 각성자가 선지자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을 올린 프랑스의 한 신문사의 직원들을 상대로 살인을 자행한 큰 사건이 있었다. 10명이 넘게 죽고, 2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했다.
 대부분 이슬람 원리주의와 관련되어서 사건이 발생해, 이슬람에 대한 외국의 시선이 나빠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같은 각성자라도 서구와 중동 쪽은 대중의 시선이 확연히 달랐다.
 “근데 말이죠. 이번에 헌터님들이 보신 그 네임리스라는 여자는 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네?”
 “맘만 먹으면 청와대고 국회의사당이고 그냥 다 날려 버릴 수 있어요. 한 나라의 시스템이 그냥 붕괴되어 버린다고요. 미사일은 어디서 날아와도 알 수 있잖아요? 근데 이런 테러는 어느 나라가 한 건지도 모를 가능성이 높은 거죠. 이제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겠죠?”
 “아······ 네.”
 그렇게 설명을 하니 S급 각성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새삼 실감이 났다.
 괜히 대부분의 나라에서 S급만은 길드 소속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특별히 국가에서만 관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전술핵무기 취급인 것이다.
 “그래서 국정원과 헌터협회 정보국이 협력하여 타국의 알려진 S급 각성자가 입국하면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관찰합니다. 그런데 이 네임리스라는 여자는 명단에 없어요. 반년 동안 여성 S급 각성자가 입국한 사실 자체가 없습니다. 있으면 바로 통보가 왔겠죠.”
 “그렇군요.”
 다른 나라에서 은밀히 숨겨둔 S급 각성자라는 의미였다.
 모르긴 몰라도 S급 각성자를 둘러싼 국가 간의 정보전도 치열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설마 그 여자가 그 정도 수준······.”
 그녀가 무언의 대마법사 하이리스라는 것을 뻔히 아는 데도 시현이 슬며시 운을 떼었다.
 남자가 씁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여자가 어떻게 닫힌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는지 아십니까?”
 “네? 알고 계세요? 그런데 왜 아까 닫힌 게이트 안으로 들어온 것이 확실하냐는 질문을······.”
 “그것은 그냥 형식적으로 드린 질문이고요. 사실 게이트 입구에 헌터협회 직원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직원이 그녀를 처음 목격하고 신고한 거라서요. 그 직원이 말하길 닫힌 게이트를 그냥 무식하게 힘으로 뚫어버렸답니다. 아, 힘이 아니라 마법으로.”
 “······뭐라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시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간 맞아?
 그 여자 사람이 아니라 드래곤 뭐 그런 거 아니야?
 “그래서 말인데 꼭 좀 비밀 엄수 좀 해주십쇼. 이쪽도 갑자기 나타난 괴물 때문에 정신없어 죽겠거든요. 각서를 어길 시 엄청나게 큰 불이익이 갈 거라는 것을 아무쪼록 명심하시길.”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목을 살짝 그어 보였다.
 장난이 아닌 것 같아서 시현은 농담으로 받지 못했다.
 
 * * *
 
 “아들 교육 좀 똑바로 시키세요.”
 린슈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방금 샤워를 끝마쳤는지 몸에 타월만을 두르고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반대 손으로는 멘톨향의 하얗고 가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
 그녀가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었다.
 -할 말이 없군. 내 분명 단단히 당부했네만 설마 거기까지 가서 그런 짓을 할 줄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고 너무 물렁하게 대하시나 보네. 죽여 버리려다 말았는데 아들 오래 보고 싶으시면 교육 좀 잘 시키셔야겠어.”
 -······.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거 저 안 해요. 제가 여기 놀러 온 거라고 했죠?”
 사내의 지시를, 그것도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거부할 수 있을 만한 존재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린슈에는 그 거의 없는 존재 중의 하나였다.
 “류건우를 죽이라니······ 외교적으로 트러블 생겼으면 그냥 평소 하던 대로 국가가 주도해서 불매운동이나 열심히 하세요. 대국, 대국 노래 부르면서 졸라게 쪼잔해 보이지만.”
 류건우는 S급 각성자이자 한국의 헌터협회장이기도 했다.
 -으음.
 사내는 심기가 불편했지만 꾸욱 눌러 참았다.
 평범한 S급이라면 이 정도로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S급이라고 다 같은 S급이 아니었다.
 8클래스의 마법사만 해도 S급인데 그녀는 9클래스였다.
 도저히 권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아들놈 내일 바로 귀국시킬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전 몰디브에서 휴양 좀 하고 들어갈 테니까 찾지 마시고.”
 
 * * *
 
 조사까지 모두 마친 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시현은 메모지 한 장을 꺼냈다.
 교도관은 일하면서 뻔질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내용을 적어두어야 하고, 수용자들의 컴플레인도 바로바로 적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일을 하다 보니까 평소에도 필기구와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었던 것이다.
 
 -죄수의 개념?
 
 시현은 그렇게 적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현실 세계의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는 위명에 나와 있는 죄수라는 개념에 부합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직접 겪어봤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저쪽 세계에서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는?
 
 이건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추측밖에는 할 수 없다.
 근데 이 부류도 죄수의 개념에 부합한다는 강한 추측은 가능했다. 죄를 범해 수용 시설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 즉 말 그대로 죄수의 전형적인 개념이니까.
 시현이 이번에는 오늘 알아낸 사실을 적었다.
 
 -범죄자, 살인자=죄수, 사형수(X)
 
 오늘 겪은 바얀은 지독한 범죄자이자 살인자였다.
 근데 죄수도 아니었고 사형수도 아니었다.
 그건 저쪽 세계에서 감옥에 갇혀서 구금된 적이 없다는 뜻이리라.
 의문은 또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범죄자가 형기를 마치고 나온 상태라면?
 한 번이라도 감옥에 갇혀 죄수 생활을 했던 인간들에게는 다 적용될까?
 중요한 문제였지만 지금은 알 수 없었다.
 “아!”
 갑자기 시현이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는 표정을 했다.
 이쪽 세계에서 실험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출소한 수용자를 찾아가 보는 것이다.
 보통 교도관이 굳이 출소한 수용자를 찾아가는 것은 민폐 중의 민폐였다. 서로 껄끄럽기만 한 일인 것이다.
 수용자들은 교도소의 일은 교도소의 일로 끝나기를 원한다.
 사회에 나와서까지 엮이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
 때문에 같은 수용자끼리 본인의 신변에 관해서 거짓말을 태연히 주고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완전 민폐긴 한데······.’
 시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담당하는 수용자에게 실거주지를 물어보면 솔직하게 대답해 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생각한 실험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망설임이 들었다.
 지킬 건 지키는 교도관이 되자고 마음먹고 일해왔는데 이건 좀.
 한동안 고민의 눈빛이던 시현이 결정이 선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번만.
 
 * * *
 
 집에 돌아와서 그냥 집안에 굴러다니는 라면을 끓여 저녁을 때웠다. 반찬을 차려 먹기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끼니를 해결하자마자 양치질과 간단한 세면만 하고 바로 침대에 벌렁 누워 버렸다.
 몸과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이 많아서 그런지 그냥 드러누워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근데 또 막상 드러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평소 즐겨보는 커뮤니티 엠파크의 지난 글을 둘러보는데 눈에 띄는 게시글이 있었다.
 
 -제목: [정보]교도소 다큐 찍는다네요.
 -내용: 지인이 NBS 방송국에서 일하는데 이번에 00교도소에서 다큐 촬영한대요. 개인적으로 이런 거 왜 찍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평범한 정보글이라 그런지 댓글은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교도소 수용자를 향한 대중의 시선을 어느 정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교도소에 갇힌 범죄자 놈들 다큐는 왜 보여주는 건가요? 저번에 소년교도소 찍은 다큐 완전 소름 끼치던데. 죄 없는 사람 둘이나 죽여서 들어가 놓고, 반성했다 이제 달라졌다는 뻔한 인터뷰 따내면서, 밥 잘 처먹으면서 자격증 같은 거 따는 모습 보여주는데 피해자 가족이 이런 다큐 보면 진짜 분하고 원통해서 잠도 안 올 것 같더라고요.
 -그러게요. 이런 다큐 목적이 뭔가요? 뭐 불쌍히 여겨 동정이라도 하라는 건가?
 -수신료로 개 뻘짓 하는 거죠.
 
 “흐음.”
 시현이 댓글을 읽으며 알 만하다는 얼굴을 했다.
 대충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3년 전에 방영했었던 소년교도소 다큐가 인터넷에서 꽤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15년 형을 받은 한 수용자의 인터뷰가 문제였다.
 밝은 표정으로 사회에 나가서 연애를 하고 싶다는 내용의 인터뷰였다.
 모자이크를 하고 가명을 썼지만 나이가 나왔고, 15년 형은 미성년자가 받을 수 있는 법정 최고형이다. 살인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는 받을 수 없는 형인 것이다.
 다큐의 인터뷰 부분을 보고 열이 받은 네티즌들이 집요하게 사건을 찾았고, 결국 그 수용자의 정체와 사건을 낱낱이 인터넷에 공개했다.
 돈을 훔치기 위해 침입했다가 그 자리에 있던 부자를 끔찍하게 살해한 사건으로 범인은 16살의 소년이었다.
 피해자의 유가족에게 결코 지울 수 없는 크나큰 상처를 준 당사자가 태연하게 인터뷰하는 모습이 공분을 불러왔다.
 각 커뮤니티마다 댓글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사형이 답이죠. 저런 놈들은 바뀌지 않습니다.
 -저런 방송에 나오는 게 아니라 사형당해서 이 세상에 없어졌어야 할 존재인데.
 -이런 범죄자들 미화 방송은 접어야죠.
 -저런 애들은 눈곱만큼도 가엾다거나 그런 느낌은 없네요.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 사람들은 어떤 처지일지 참 안타깝다는 생각만 드네요.
 -그래도 기회는 줘야죠. 법치주의 국가 아닌가요?
 -교화와 교육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요? 다만 방송은 좀 안 찍었으면 좋겠군요.
 -인권주의자들 납셨네. 걸레는 빨아도 걸레. 저런 애들은 갱생 절대 안 되고 또 범죄 저질러서 이번엔 성인 교도소 들락거림.
 
 시현도 네티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살인은 절대로 원상회복이 안 되는 최악의 범죄다.
 그런데 가해자의 입장만을 내보내는 방송을 했으니 사람들이 분노할 만도 했다.
 시현도 개인적으로 이런 다큐를 딱히 찍을 필요가 없다는 데 공감했다.
 교도관으로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수용자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만 높아질 우려가 있었다.
 죄지은 사람들이 교도소에서 생각보다 편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사회가 올바르지 못하다고 느끼고 화가 나는 것이다.
 ‘근데 이 00교도소가 어디지?’
 대한교도소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촬영은 번거롭기만 했다.
 
 * * *
 
 월요일 아침, 시현은 휴게실에서 점검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아침 직원들이 사동에 들어가기 전에 출석 체크를 하고, 소장이나 보안과장의 지시 사항이나 필요한 공지 같은 것을 전달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평소는 주임급의 직원이 진행하는데 오늘은 부당직계장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자, 우선 출석 체크할게요.”
 부당직계장이 나온 인원이 맞는지 확인했다.
 인원을 다 확인하자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소장님 지시 사항인데 전 직원 절대 음주 운전하지 마세요. 어제 우리 직원 한 명 음주 운전하다 걸린 거 들은 직원분도 계시죠? 그 직원 징계 먹고 춘천으로 날아갈 겁니다. 다른 분들도 조심들 하세요.”
 “알겠습니다.”
 직원들이 대답했다.
 시대가 어느 시댄데 공무원이 음주 운전을 해,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안과장님 지시 사항은 규정 외의 관복이 절대 수용자에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정해진 수량의 관복만이 수용자에게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그 이상 있으면 다 수거해서 창고에 집어넣으세요. 걸리면 한 소리 들으실 겁니다.”
 “네.”
 참 나, 귀찮게. 이번에는 아주 작은 목소리라 앞에 있는 부당직계장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NBS ‘다큐 72시간’ 들어본 분들 있으시죠?”
 ‘다큐 72시간’은 말 그대로 72시간 동안 한곳을 촬영하여 방영하는 다큐였다.
 부당직계장이 말을 이었다.
 “NBS에서 얼마 전 촬영 협조를 교정 본부에 요청했고, 교정 본부에서는 교도관의 생활이나 교도소의 모습을 방송에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허가를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장소는 우리 대한교도소가 될 예정이고요.”
 ‘허······.’
 시현이 혀를 찼다.
 설마 했는데 귀찮은 일은 왜 비켜 가지 않는가.
 “촬영은 전체적으로 다 할 거지만 사동은 주로 5층 2사에서 촬영하기로 조율했습니다. 아무래도 거기가 가장 모범 사동이라 시청자들이 보기에도 수용 질서가 제대로 잡힌 교도소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면이 있겠죠?”
 ······뭐, 5층 2사?
 시현의 사동이었다.
 ‘어?’
 그리고 돌연 알림창이 뜨기 시작했다.
 
 [포아힘은 당신의 너무 낮은 직위와 명성에 안타까워한다. 앞으로 더 높은 직위와 명성을 얻을 때마다 그의 기분이 많이 좋아져 생각지도 못한 보상이 주어질지도 모른다.]
 <현재 당신의 상태>
 유명도: 철저한 무명
 직위: 9급 교도
 
 ‘이거 다른 퀘스트랑 좀 달라 보이는데?’
 시현이 지금까지 여러 퀘스트를 수행해 왔던 경험으로 뭔가 차이를 감지했다.
 한창 포아힘이 기아 상태에 있을 때 반복적으로 먹기만 해도 능력이 올랐던 퀘스트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다 일시적인 퀘스트였다.
 일시적인 퀘스트는 그것을 수행하기만 하면 일정한 능력을 회복하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음 퀘스트가 뜨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퀘스트는 ‘높은 직위와 명성을 얻을 때마다’라고 적혀 있었다.
 반복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승진할수록 강해져.
 유명해질수록 강해져.
 이런 느낌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현재 당신의 상태>라고 적힌 창이 상태창 오른쪽 최상단에 가서 박혔다. 상태창 화면에 프로필이라도 박힌 기분이었다.
 근데 그것이 하필 ‘철저한 무명’에 ‘9급 교도’라 당신 지금 밑바닥이야, 라고 강조해서 얘기하는 것 같았다.
 신경 쓰이면 퀘스트 수행에 힘써라 이건가.
 그런데 이거 완전 장기 프로젝튼데.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보상이 크다는 건가.
 시현이 그렇게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누가 어깨를 흔들었다.
 “이시현 부장님, 불렀는데 왜 대답을 안 합니까?”
 부당직계장의 목소리였다.
 헉.
 딴생각에 빠져 부르는 걸 못 들으니 뒤에서 다른 교도관이 어깨를 흔들어 알려준 모양이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시현이 사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젊은 사람이 아침부터 넋을 빼놓고 있으면 되나요? 뭐, 그건 그렇고 이따 보안과장님 출근하시면 연락이 갈 거예요. 담당 주임님한테 미리 잘 말씀드리고, 연락 오면 보안과장님 뵈러 보안과 사무실로 내려와요.”
 “네에······ 알겠습니다.”
 시현이 의아한 눈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보안과장이 웬 호출?
 혹시 이번에 촬영한다는 다큐 때문인가?
 하필 주 촬영지가 5층 2사라니 더 부담스러웠다.
 “그럼 다들 오늘 하루도 수고하세요.”
 점검이 끝났다.
 
 * * *
 
 따르릉.
 “네, 감사합니다. 5층 2사, 교도 이시현입니다.”
 “네, 보안과 부서무 박태종인데요. 이시현 부장님 지금 바로 보안과로 내려오세요. 보안과장님이 찾으십니다.”
 “네, 지금 당장 내려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시현이 근무모를 반듯하게 썼다.
 근무복의 상태도 한 번 살폈다.
 “보안과에서 연락 왔어?”
 박영환 주임이 물었다.
 “네, 거참 보안과장님이랑 개인 면담하는 거 처음인데 엄청 뻘쭘할 것 같은데요.”
 “하하, 어차피 몇 마디 안 하고 끝날 테니까 맘 편히 갔다 오라고.”
 “그래야겠죠?”
 시현이 픽 웃으며 사동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보안과 사무실로 내려가 보안과장실로 바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시현이 거수경례를 했다.
 “아아, 이 교도 왔어?”
 보안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소파에 앉으라고 하지 않는걸 보니 다행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소에서 다큐 찍는 거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사동은 주로 5층 2사에서 찍기로 한 것도?”
 “네.”
 “근데 말이야, 이건 내가 요청하고 소장님이 허락하신 건데······.”
 보안과장이 묘한 미소를 띠며 앞에 높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시현은 궁금한 눈으로 보안과장의 뒷말을 기다렸다.
 “촬영하는 기간 동안 이 교도 자네 임시로 CRPT로 근무 좀 해줘야겠어.”
 “네?”
 시현은 완전 뜬금없는 소리에 놀란 표정이었다.
 임시라지만 갑자기 보직을, 그것도 CRPT로 변경하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CRPT는 수용자의 난동 등 비상 상황 발생 시 출동하여 진압하는 일을 하는 등 규율을 잡는 부서였다.
 “왜? 5층 2사 수용 질서 잘 잡혀서 얼마 동안은 이 교도 없어도 잘 돌아가지 않아?”
 “그거야 그렇긴 합니다만······ 갑자기 왜 보직을?”
 당연한 의문이었다.
 “내가 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촬영하는 기간에도 난동 피우는 새끼들은 난동 피우잖아? 걔네들이 뭐 촬영한다고 자제할 놈들도 아니고.”
 “네에.”
 “그러면 촬영팀에서는 옳다구나 하고 신나서 그 장면을 찍겠지?”
 “네.”
 일단은 방송에 나갈 만한 그림이 되니까 열 올려서 찍긴 할 것 같았다.
 “그럴 때 말이야. 소란 피우는 수용자 놈들 쉽게 못 잡는 모습이 방송으로 나가면 어디 교도관들 면목이 서겠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교도관들이 국민 세금은 처먹고 죄수 새끼들한테 쩔쩔맨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겠지. 그래서 말이야.”
 보안과장이 기대에 찬 시선을 시현에게 던졌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이 교도가 난동 피우는 수용자 놈들을 강하게 휘어잡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꽤 멋진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국민들의 교도관에 대한 이미지도 좋아질 것 같은데.”
 “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네요.”
 시현이 이제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난동을 피우는 수용자 중에는 제아무리 CRPT라도 쉽게 진정시킬 수 없는 수용자들도 있었다.
 대개는 쉽게 화를 내고 조절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성격의 수용자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수용자들을 확 휘어잡아서 방송에서 교도관의 위신을 좀 세워달라는 얘기였다.
 “하하, 그래.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지? 수요일부터 CRPT 사무실로 출근하면 돼. 잘 좀 부탁하네.”
 보안과장은 자신이 진짜 기막힌 생각을 했다는 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 * *
 
 “CRPT?”
 “네, 촬영 기간 동안 거기 가서 근무 좀 해달라네요.”
 “야아, 촬영 동안 말썽 피우는 애들 기강 좀 잡아달라는 거네? 이 교도 위에서 인정 많이 받나 보다.”
 “아이고, 뭘요. 그보다 CRPT에서 갑자기 이상한 애 왔다고 눈치 주는 거 아니죠?”
 보안과장의 지시였다고 해도 신경 쓰이는 건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영환이 괜한 걱정을 한다는 듯 웃었다.
 “전혀 걱정하지 마. CRPT 팀장이 내 동기인데 이 교도 자네 어떻게든 CRPT로 뽑아 가고 싶다고 노래 부르고 다닌다니까?”
 “허, 그래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CRPT 팀장에게 수용자들을 잘 다루려면 운동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충고를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격세지감이었다.
 아무래도 요 몇 달 동안의 활약이 CRPT에서도 꽤 인정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니까. 그렇다고 확 넘어가 버리지는 말고.”
 “주임님도 전혀 걱정하지 마세요.”
 시현이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CRPT 사무실로 출근하기 전에 사동에서 한 가지 할 일이 있었다.
 아주 중요한 일이.
 
 * * *
 
 다음 날, 박영환 주임보다 30분 일찍 출근한 시현이 모든 방을 선택한 후 인터폰을 눌렀다.
 이제 모든 방의 수용자에게 방송이 들릴 터였다.
 “아, 아. 잘 들리죠? 간밤에 잘들 잤어요? 오늘 하루도 활기차게 시작해 봅시다.”
 일단 인사로 방송을 시작한 시현이 말을 이었다.
 “우선 한 가지 공지할게 있습니다. 내일부터 우리 5층 2사에서 다큐 촬영이 있어요. 카메라 너무 의식하지 마시고 평소처럼 행동하세요. 더도 말고 평소처럼만 하면 됩니다. 평소에 잘 해왔으니 특별히 걱정 안 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었다.
 카메라가 있다고 수용 질서가 흐트러질 거라는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 사동에도 살인범이 있었고, 여러 가지 중범죄를 저지른 수용자들이 있었다.
 촬영팀에서 분명히 이들의 인터뷰를 딸 것이다.
 피해자가 그 방송을 안 보길 원했지만, 혹시라도 보게 되더라도 최대한 상처를 덜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수용자들의 인터뷰를 보고 분노를 느끼는 일 역시 최대한 없기를 바랐다.
 중범죄자의 뻔뻔하게 느껴지는 태연자약한 인터뷰, 그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리고 또 한 가지 강력하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마 몇몇은 촬영팀에 인터뷰 요청을 받을 거예요. 당연한 거죠. 만약 인터뷰를 하게 되면 그때 꼭 명심해야 할 게 있어요. 그것은······.”
 시현이 생각해 두었던 말을 강하게 전달했다.
 
 * * *
 
 “와, 생각보다 카메라 꽤 많다?”
 시현의 동기 정준철이 창가에서 ‘다큐 72시간’을 찍으러 온 다큐팀 일행을 구경하듯 보며 말했다.
 “우리 소가 좀 크잖아요? 동시에 여러 군데 찍으려면 저 정도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시현도 자판기 캔 커피를 뽑아 마시며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새벽이었지만 다큐팀이나 교도소 측이나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미 여러 가지로 서로 조율을 마쳤지만, 오늘은 실질적으로 촬영 환경을 세팅하기 위하여 분주한 것이다. 교도소 측도 다큐팀을 전담할 직원들을 조출시켜 안내와 설명을 담당하게 하고 있었다.
 “막 나 인터뷰하고 그런 거 아니겠지? 요즘 피로에 찌들어서 피부가 영 말이 아닌데.”
 준철이 뾰루지가 난 피부를 만지며 호들갑을 떨었다.
 “에이, 우리 소 직원이 몇백 명인데 화면에 나오면 얼마나 나오겠어요. 거기다 수용자들하고 분산될 텐데. 걱정 붙들어 매요, 형.”
 “그런가? 하하. 근데 너는 나올 것 같다, 진짜.”
 준철이 시현을 바라보며 웃었다.
 시현은 평소의 근무복이 아닌 기동복에 팔각기동모, 기동화 차림이었다.
 CRPT가 근무할 때 입는 옷으로 온통 검은색이라 ‘까마귀’라는 별명이 붙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무조건 나오겠죠. 난동 피우는 애들 제대로 잡는 모습 보여주라고 보안과장이 호출까지 해서 보직까지 임시로 변경했는데. 벌써 조율 끝났을 걸요? 그래서 이것도 쓰려고요.”
 시현이 주머니에서 검은색 마스크를 꺼냈다.
 교도관이 일할 때 쓰라고 사무실에 비치되어 있는 마스크였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만 깊게 눌러써도 평소와는 이미지가 많이 달라 보인다.
 지금은 은혜 길드와 주로 레이드를 해서 괜찮지만 혹시 모를 나중을 생각해서 얼굴을 좀 가려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 시현이 너 정도면 얼굴 반반한 편인데 뭘 가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얼굴 노출돼서 좋을 것 없어요. 뉴스에 잠깐 나온 사람도 웃기게 나오면 짤방 돼서 돌아다닌다니까요?”
 “그래? 그게 걱정되면 아예 모자이크해 달라고 하지. 저번에 72시간 다큐 보니까 뭔 군인은 모자이크해서 나왔더만.”
 “모자이크는 좀 그렇죠. 수용자도 아니고 교도관이 뭐가 구려서 모자이크를 해달라고 해요. 시청자들도 이상하게 생각할걸요.”
 시현이 그렇게 대답하며 다 마신 캔 커피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럼 전 CRPT 사무실로 내려갈게요. 형, 수고하세요.”
 
 * * *
 
 “야아, 우리 이 교도 왔어? 에이스 왔네, 에이스 왔어.”
 CRPT 김 팀장이 약간 과장되어 보일 정도로 시현을 환영했다.
 김 팀장은 전직 유도선수 출신으로 나이는 50대 초반이었지만 아직도 당당한 체구와 우람한 팔뚝을 자랑했다.
 머리가 벗어지자 아예 삭발을 하고 다니는데 날카로운 인상이 더 날카로워졌다고들 주변에서 얘기했다.
 그는 수용자들도 웬만하면 접어주는 대한교도소의 유명 인사였다.
 “아니, 다른 분들도 다 계신데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시현이 민망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직 3년 차인데 훨씬 고참들도 많은 장소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 난감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못하겠지만 속으로는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던 것이다.
 “아냐, 아냐. 다른 CRPT 애들도 다 인정한다니까? 나도 못 잡는 만덕이 잡았지, 몇 달 동안 CRPT 호출 제로지. 자네 사동 뽕쟁이들이나 조폭 애들 완전 잠잠하잖아. 우리들도 완전 신기해한다고. 자, 다들 뭐 해. 박수 좀 쳐.”
 짝짝!
 CRPT 직원들이 웃는 낯으로 박수를 쳤다.
 시현이 예의적인 미소로 받았다.
 임시 직원을 과하게 띄워주는 데도 다행히 분위기는 괜찮은 것 같았다.
 박수가 멈추자 김 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이라서 어떻게 근무하는지 잘 모를 거야. 근데 자네라면 딱히 어렵진 않을 거야. 이 TRS 받고 저기 소파에 가서 편하게 앉아 있어. 호출 오면 출동하면 되는 거야. 일 터지면 일단 자네 먼저 보낼 거니까 그렇게 알아. 보안과장님 지시도 있고 직원 한 명 늘었는데 제대로 써먹어야지. 그렇지? 하하하.”
 
 * * *
 
 “하루에 접견이 이렇게 많아요?”
 접견 대기실에 있던 다큐팀 신입 PD 한이설이 의외라는 눈으로 말했다. 그녀는 교정 시설에 들어와 보는 것이 처음인 듯 약간 긴장해 있었지만,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수용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접견 대기실은 수용자들로 거의 꽉 차 있었다.
 안내하는 교도관들도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변호인 접견과 일반 접견 인원이 한 장소에서 대기하니 더 그러한 것 같았다.
 “여기 꽤 큰 소라서 미결수도 상당히 많잖아. 그래서 그렇지.”
 옆에 있던 선임 PD가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짧은 치마를 입은 예쁘장한 변호사를 좇고 있었다.
 본능적인 것도 있었지만 몇 달 전에 시사 기사에 나왔었던 집사 변호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요즘 변호사가 하도 넘치다 보니까 수입을 위해 집사 변호사라는 것도 생겼다고 한다. 법률 자문 대신 의뢰인이 변접실에서 시간을 때울 수 있게 말동무나 해주는 것이다. 그중에는 의뢰인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짙은 화장을 하거나 짧은 스커트를 입는 여변호사들도 있다고 했다.
 선임 PD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이, 시사 고발 프로그램도 아니고 쓸데없는 생각을.’
 그가 다시 수용자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소란이 터졌다.
 “에이, 씨팔! 조용히 했잖아! 조용히 했는데 왜 지랄이야!”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수용자가 욕설과 함께 고함을 질렀다.
 “조용히 했어요? 조용히 했다고요?”
 접견 대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수용자들을 정숙시키는 일을 했던 젊은 교도관도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래, 씨발! 넌 귀가 삐었냐? 나 조용히 있었다니까?”
 “반말하지 마세요!”
 교도관과 수용자의 다툼에 카메라가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험악한 분위기에 수용 시설이 처음인 스태프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야야, 둘 다 조용히 해! 조용히 안 해?”
 접견 대기실을 책임지고 있는 뚱뚱한 고참 주임이 크게 소리쳤다.
 너무 큰 목소리에 놀란 스태프들도 있었다.
 이렇게 크게 소리 지르지 않으면 소란 피우는 수용자가 들어먹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런 것이었다.
 “아이 씨! 조용히 있었다니까 뭘 또 조용히 하래? 개 짜증 나네, 진짜!”
 교도관은 상사의 지시에 억지로 참고 조용히 했지만, 수용자는 계속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러댔다.
 “조용히 안 해? 조용히 안 하면 CRPT 부른다?”
 “불러! 그 새끼들이 오면 팰 거야, 뭐 할 거야?”
 “야, 당장 CRPT 불러!”
 고참 주임이 험악한 얼굴로 옆의 부하 교도관에게 소리쳤다.
 
 * * *
 
 ‘너무 할 일 없다.’
 오전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이상하게 호출이 없었다.
 소파에 빈둥거리며 앉아 있는데 눈치가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 보안과 공통망으로 TRS가 울렸다.
 -여기 접견 대기실입니다. 수용자 1인 난동이 있습니다. CRPT 출동 바랍니다.
 호출이 이렇게 반가운지 몰랐다.
 시현이 좀이 쑤셨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지했습니다. CRPT 2인 즉시 출동하겠습니다.
 김 팀장이 응답을 보냈다.
 그러고는 시현을 정확히 가리키며 말했다.
 “이 교도하고 형성이 둘이 갔다 와.”
 
 * * *
 
 “야! 저 인간 신경 쓰지 말고 일해!”
 고참 주임이 카메라 앞이라 차마 수용자에게 욕을 못 하고 순화해서 말했다.
 가뜩이나 빡빡하게 접견이 진행되는데 이번 일로 차질이 생겨 버린 것이다.
 수용자의 난동은 CRPT한테 맡기고 접견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야! 이 씨발 놈들아! 나 무시해? 응?”
 수용자가 욕을 하며 주먹으로 벽을 내려쳤다.
 욕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까지 분출했다. 이대로라면 난동이 더 커질 우려가 있었다.
 다행히 그때 CRPT가 도착했다.
 시현이 장내의 개판이 된 분위기를 보고 혀를 찼다.
 교도관 생활을 하다 보면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아무래도 카메라가 있다 보니 신경이 쓰였다.
 다큐팀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현 쪽으로 향했다.
 이 난동을 해결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왜소한데······ 저 사람이 잘 해결할 수 있을까?’
 한이설이 생각했다.
 근육이 우락부락한 CRPT는 뒤에서 구경하듯 잠자코 있고, 오히려 보통 체구의 CRPT가 나서는 모양새가 이상했다.
 시현은 난동을 피우는 수용자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보세요. 조용히 하세요.”
 처음에는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씨팔, 넌 뭐야? 아, CRPT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거구의 수용자가 얼굴을 가까이 대며 꼬나보았다.
 ‘역시 말 안 먹힐 것 같더니······.’
 이설이 실망했다는 얼굴을 할 때 시현이 묘한 미소를 띠는 것을 발견했다.
 ‘응? 웃어?’
 “조용히 해요! 조용히 안 해요?”
 이번에는 소리를 크게 높였다.
 동시에 철혈의 간수의 기세를 제대로 방출했다.
 “허억······?! 으어어어억!”
 돌연 수용자가 엄청나게 놀란 표정으로 기겁을 했다.
 “조용히 하라니까, 왜 또 시끄럽게 소리 질러요?”
 “조, 조, 조용히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수용자가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연신 사과했다.
 눈을 의심할 정도의 갑작스런 상황 변화였다.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주변의 표정은 아연실색 그 자체였다.
 
 * * *
 
 이틀도 채 안 되어 시현은 다큐팀에게도 유명 인사가 되었다.
 수용자들이 난동을 피울 때마다 출동해서 단숨에 상황을 종결시키는 CRPT팀의 해결사.
 시뻘게진 얼굴로 분노를 터트리던 수용자가 순식간에 순한 양이 되는 모습을 볼 때면, 서로 짜고 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 모습이 시청자들의 큰 흥미를 끌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큐팀의 메인 PD가 신입 PD인 한이설에게 시현을 전담으로 담당하라는 지시마저 내렸다.
 덕택에 이설은 시현을 전담 마크하는 카메라까지 준비하고 아침부터 시현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다 담고 있었다.
 그리고 틈틈이 질문을 던졌다.
 “교도관이라는 직업을 어떤 계기로 선택하게 되신 거죠?”
 “그냥 점수 따라 대학이랑 학과를 선택했는데 그게 경기대 교정보호학과였죠. 막상 대학 다니다 보니까 전공을 살리고 싶어서 교도관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보다 보니까 마스크를 쓰고 근무하시는 교도관분들도 꽤 되던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아, 그건 여기가 빌딩형 교도소라서 환기가 잘 안 되다 보니까 먼지가 엄청 많습니다.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요. 그래서 여기서 오래 근무하신 분 중엔 호흡기에 병 있으신 분도 여럿 계십니다. 일종의 직업병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마스크라도 써서 먼지를 좀 차단하는 거죠.”
 “교도관님은 난동을 피우는 수용자들을 아주 쉽게 진정시키시던데 특별한 노하우라고 있으신가요?”
 “하하, 죄송하지만 그건 저만의 영업 비밀이라서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점심시간입니다, 한 PD님. 조금 쉬었다 가시죠.”
 뒤에서 조연출이 말했다.
 
 * * *
 
 “이봐, 한 PD. 들었어? 수용자 인터뷰 쪽 난리 났다더라.”
 교도소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선임 PD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한이설이 수저를 놓고 선임 PD를 바라보았다.
 “왜요? 수용자들이 협조 잘 안 해준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다들 울고 난리 났대.”
 “네? 그게 문제가 되나요?”
 이설도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교정 시설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을 몇 번이고 봤었다.
 수용자 중에는 인터뷰를 하다가 어떤 이유로든 감정이 북받쳐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도 흔했다.
 물론 피해자에 대한 속죄인 경우도 있었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해서 이런 곳에 젊음을 썩히면서 갇히게 됐나 하는 한탄의 경우가 더 많은 것같이 느껴졌다.
 어쨌든 수용자들이 운다고 해서 딱히 문제는 없다는 것이었다. 근데 왜 난리가 났다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이따가 영상 직접 보면 알 거라는데 나도 아직 못 봐서. 어쨌든 메인 PD님이 그것 때문에 고민 좀 하고 있으신가 봐. 뭔가 이거다, 라는 필은 꽂히는데 수용자 반응이 다 똑같아서 짠 거 아니냐는 소리 들을까 봐.”
 “그래요? 어떻게 찍혔는지 진짜 궁금하네요.”
 이설이 무척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용자들이 무슨 복제 인간들도 아니고 반응이 똑같을 수가 있나? 살아온 인생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죄다 다른 사람들인데.
 “그래. 오늘 촬영 마치고 꼭 보자고.”
 
 * * *
 
 “허어······.”
 수용자 인터뷰 영상을 본 이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안경을 추켜올렸다.
 지금까지 다큐멘터리에서는 보지 못했던 장면이 화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감 생활은 좀 어떠신가요?
 
 그런 평범한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더니 깊게 반성하는 표정을 지었다. 곧 눈시울이 붉어지며 떨리는가 싶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울음 때문에 목이 메는지 더듬더듬 대답했다.
 
 -지은 죄에 비해 너무 편하게 지내서······ 흑흑······ 죄, 죄송합니다. 피해자분들께 정말 죄송합니다······ 남은 수감 기간 동안에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흐어어엉······.
 
 험악한 인상의 수용자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영상으로 보면 진짜로 절절이 죄를 뉘우치는 듯한 기색이었다. 만약 저것이 연기면 당장 연기자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 수용자 한 명이 아니었다.
 
 -출소하시면 특별히 뭔가 하고 싶으신 일이 있으신가요?
 
 이번에도 그냥 평범한 질문이었다.
 
 -하아······ 피해자분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사죄드리고 싶지만 나쁜 기억을 떠올려 드릴까 봐 감히 그러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다만······ 돈을······ 흐윽······.
 
 거기서 수용자가 줄줄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역시 진심으로 참회하는 표정이다.
 
 -죄, 죄송합니다······ 흐으윽······ 돈, 돈을 열심히 벌어서 꼭 피해를 입혀 드린 금액을 조금이나마 갚아드리며 살고 싶습니다······.
 
 다른 수용자들의 영상도 마찬가지였다.
 이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예요? 여기 교도소 뭔 세뇌 교육해요?”
 ······두세 명이면 몰라도 죄다 저런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두들겨 패도 저렇게까지는 안 되겠다.”
 선임 PD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했다.
 “그렇지? 말도 안 되지? 이게 가능해? 막 이런 생각이 들지? 근데 진짜야. 리얼이라고.”
 메인 PD는 흥분한 기색이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이거 예고편 잘 짜서 인터넷에 뿌리고, 언론 통해 미리 홍보만 하면 시청률 8%? 9%? 아니, 10% 넘게도 찍을 수 있겠다.”
 ‘다큐 72시간’은 보통 5, 6%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흥미를 끄는 소재를 다룬 편은 10%가 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최고 시청률은 자사의 개그 프로그램을 소재로 다뤘을 때 기록한 14%였다.
 “근데 이거 너무 조작 같은데요?”
 선임 PD가 말했다.
 이설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이었어. 근데 상식적으로 수용자들하고 뭔가 짠다는 게 말이 되나? 수용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시청자들도 뻔히 알 텐데. 그 사람들이 어디 호락호락하게 말을 듣는 사람들이야? 시청 촬영할 때 세상에 뭐 저런 악성 민원인들이 다 있지? 하고 기가 질렸잖아. 근데 그 악성 민원인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가 여기라고.”
 이것 때문에 고민했다던 메인 PD는 그냥 가는 쪽으로 마음을 결정한 것 같았다.
 “아니, 근데요.”
 이설이 손을 들었다.
 “이거 하나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근데 이시현 교도관이 수용자들 단숨에 제압하고 다니는 모습하고 같이 나오면······ 하나도 뭔가 현실감이 떨어지는데 둘이······.”
 “에이, 몰라! 그냥 강행한다. 우리 프로그램이 언제 조작 방송 한 적 있어? 그동안 쌓은 시청자들의 신뢰도 있고 그냥 믿고 가봐. 대한교도소 편 대박 느낌난다. 이런 영상은 어디서도 못 구해. 내가 수감시설 다룬 외국 다큐도 거의 다 봤는데 이런 건 없었어. 방영되고 나서 화제성 대박일 거다, 아마.”
 높은 시청률이 눈앞에 그려진다는 듯 메인 PD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아, 그리고 이번엔 예고편 조연출 시키지 말고 한 PD 자네가 직접 하라고.”
 
 * * *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이설이 시현에게 인사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담당이라 계속 붙어 있으면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눠서 그런지 생각보다 정이 쌓였다.
 길게 안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괜찮아 보였다.
 일적으로는 맡은 업무를 처리하는 게 완벽이나 다름없는 것이 진짜 타고난 교도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PD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현이 악수를 청했다.
 나이도 자신 또래라는데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를 통과하고 공중파 PD로 일한다니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설이 웃으며 악수를 받았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연락처 좀 교환할 수 있을까요?”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남자, 지금은 9급이지만 이쪽 분야에서 상상 그 이상의 큰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야아, 감사합니다. 여자분한테 연락처 교환하자는 소리는 진짜 오랜만에 들은 것 같네요.”
 시현이 너스레를 떨며 이설과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방송 꼭 보세요. 이시현 교도관님 진짜 많이 나올 거예요.”
 “방영이 언제죠?”
 “3주 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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